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들

후박나무 2019. 5. 26. 16:55

한국불교가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들 (기고)

 

1. 초발심자경문의 문제점

 

대저 처음 마음을 낸 초발심자는(夫初心之人) 모름지기 악한 벗을 멀리여의고(須遠離惡友) 현명하고 어진 벗을 가까이 하여(親近賢善) 오계 십계 등 계를 받아서(受五戒十戒等), 무엇이 지키는 것이고 무엇이 범하는 것이고, 무엇이 여는 것이고 무엇이 닫는 것임을 잘 알아야 하느니라.(善知持犯開遮)”

 

이 구절은 출가자라면 누구나 배워야 했던 보조스님의 계초심학인문(誡初心學人文) 첫 구절입니다. 이 첫 구절은 보조스님의 창작물이 아니라 지계제일 이었던 우빨리존자의 가르침입니다. 장로게(hag3.11)에서 나타나는 우빨리존자의 게송과 계초심학인문의 첫구절을 대비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갓 출가한 초심자는, 성실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선량한 벗하고만 사귀어야 한다.(夫初心之人 須遠離惡友 親近賢善)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갓 출가한 초심자 비구는 승가에 머무르며 부처님의 율을 배워야한다.(受五戒十戒等)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갓 출가한 초심자는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명심하여 흔들림없이 실천해야한다.(善知持犯開遮)

 

연달아서 반복되는 신심으로 세속을 여의고 갓 출가한 초심자라는 문장을 보조스님은 부초심지인(夫初心之人)으로 간략하게 정리하였습니다. ‘성실하고 청정한 삶을 살아가는 선량한 벗하고만 사귀어야 한다2번째 게송은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 친근현선(親近賢善)으로 자세하게 해석했습니다.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잘 살펴서 마음의 흔들림 없이 실천하라는 문장도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로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우빨리존자가 해야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구분해서 행동하라는 것을 무엇이 지키는 것이고(), 무엇이 어기는 것이며(), 무엇이 허용되고(), 무엇이 금지되는 것()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라고 해석한 것은 보조스님이 학습계율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조계종에서는 전통적으로 우빨리존자의 3번게송을 다음과 같이 비장하게 번역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신심(信心)으로써 욕락(欲樂)을 버리고 일찍이 발심(發心)한 젊은 출가자(出家者)들은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똑똑히 분간하면서 걸어가야 할 길만을 고고(孤高)하게 걸어서 가라.”

 

제가 입산하여 행자생활을 할 때 이 구절을 유독 좋아하는 행자가 있었습니다. 이 구절 하나만 읽어도 신심이 솟아오르는지 큰 소리로 자주 읊조렸습니다. 그런데 이 멋지고 비장한 게송은 위에서 보조스님이 설명한 것처럼 사실은 초심자에게 주는 생활규칙이었습니다. 멋지게 그러나 왜곡되게 해석한 이유는 이 게송이 3개의 게송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며, 초심자들에게 주는 가르침이라는 것을 망각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문법적으로는 깝빠(kappa)를 겁()으로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율장에서는 어떠한 행위가 율에 맞으면 정법(kappati, suitable)이고 율에 맞지 않으면 부정법(nakappati, not suitable)이라고 판단합니다. 금은을 받는 것은 허용된다(kappati)는 웨살리비구들과 금은을 받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nakappati)는 야사비구 측이 대중공사를 벌인 것을 우리는 2차결집이라 부릅니다. 합당하다는 동사 까빠띠(kappati)의 명사형이 합당함 이라는 깝빠(kappa)인데 이 단어가 공교롭게도 겁(,kappa)이라는 단어와 같다보니 혼란이 생긴 것입니다. 그런데 겁(kappa)이라는 것도 210겁등으로 나누어질 수 있는 단위이기에 영원으로 번역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으로 해석하면 마치 불교가 영원한 무엇을 찾는 종교로 인식하게 됩니다. ‘영원한 것과 영원하지 않은 것을 분간하면서 고고하게 걸어가라는 문장이 실제로는 선지지범개차(善知持犯開遮)하라는 의미였다는 것을 안다면 그 행자는 실망하게 될까? 아니면 이제라도 영원한 것을 찾는게 망상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안도의 숨을 쉴까?

 

) 신발 싣는 계율의 지범개차법(持犯開遮)

 

제정된 이유: 발바닥이 부드러운 소나 꼴리위사 비구에게 한겹의 안창을 댄 신발을 허락()하고 여러겹 안창을 댄 신발을 못신게 하였다.() 그런데 육군비구들이 다양한 신발을 싣자 다양한 색깔 장식을 한 신발을 못 싣게하고() 다시 아프거나 대변 보거나등의 특별한 용무에는 허용()하였다. 이렇듯 지범개차법(持犯開遮)를 한다는 것은 율이 제정되어 변화해온 전반적인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처럼 율을 가르치지도 않은채 지범개차하라는 것은 각자가 알아서 지범개차하는 일이 발생하여 위험하고 혼란스런 상황이 연출된다.

 

1.수행승들이여한 겹의 안창을 댄 신발을 허용한다.

수행승들이여두겹의 안창을 댄 선발을 선어서도 안 되고세 겹의 안창을 댄 신발도 신어서도 안 되고여러 겹의 안창을 댄 신발도 신어서도 안 된다.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2.수행승들이여푸른 색 신발, 노란 색 신발, 붉은 색 신발, 진홍색 신발, 홍람 색 신발, 낙엽 색 신발을 신지 말라.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3. 수행승들이여푸른 색 테두리, 노란 색 테두리, 붉은 색 테두리, 진홍 색 테두리, 홍람 색 테두리, 낙엽 색 테두리 신발을 신지 말라.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4.수행승들이여무릎까지 덮는 신발을 신지 말라. 정강이까지 덮는 신발을 신지 말라. 면으로 채운 신발을 신지 말라. 자고새의 날개와 같은 선발을 신지 말라.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5. 수행승들이여양의 뿔로 첨단을 장식한 신발, 산양의 뿔로 첨단을 장식한 신발, 전갈의 꼬리로 꾸민 신발, 공작새 꼬리의 깃틸로 엮은 신발, 알록달록한 신발을 신지 말라. 신는다

악작죄가 된다.

 

6. 수행승들이여사자 가죽으로 장식한 선발, 호랑이 가죽으로 장식한 신발, 표범 가죽으로 장식한 신발, 영양 가죽으로 장식한 신발, 수달 가죽으로 장식한 신발, 고양이 가죽으로 장식한 신발,다람쥐 가죽으로 장식한 선발, 올빼미 가죽으로 장식한 선발을 신지말라.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7.수행승들이여여러 겹으로 안창을 깐 헌 신발은 신는 것을 허용한다.

그러나 여러 겹으로 안칭을 깐 새 신발은 신어서는 안 된다.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8.수행승들이여궤범사나 궤범사와 같은 자나 친교사나 친교사와 같은 자가 신발도 없이 경행할 때에 신발을 신고 경행 해서는 안 된다. 경행하면악작죄가 된다.

승원 안에서 신발을 신는다면 안 된다.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9. 수행승들이여발이 아프고발이 다치고발 굳은살 병이 있는 자는 승원에서 신발을 신는 것을 허용한다.

 

10. 수행승들이여승원 안에서 신발을 신고 햇불·등불·지팡이를 지니는 것을 허용한다.

 

11. 수행승들이여나무 신발을 신어서는 안 된다.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12. 수행승들이여야자수나뭇잎으로 만든 신발을 신지 말라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13. 수행승들이여대나뭇잎으로 만든 신발을 신지 말라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14. 수행승들이여풀 신발을 신지 말라. 문자풀 신발, 밥바자풀 신발, 힌딸라풀 신발,까말라풀 신발, 양모 신발, 금 신발, 은 신발, 진주 신발, 묘안석 신발, 수정 신발, 청동 신발, 유리 신발, 주석 신발, 납 선발, 구리 신발을 신지 말라.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어떠한 신발도 전해 받으면신어서는 안 된다. 신는다면악작죄가 된다.

 

15. 수행승들이여고정되어 전용할 수 없는 세 가지 신발대변용 선발소변용 신발세정용 신발을 허용한다.

 

* 이 밖에 극심한 기근이 들어 도저히 걸식을 할 수 없을 때 비구들이 손수 끓여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하고 상황이 좋아지면 다시 금지하는 특별한 개차법도 있었음

 

 

 

계초심학인문에는 고행을 강조하는 듯한 문장도 등장합니다. 부처님의 율대로 하루한끼만 먹는 것을 지키라고 가르치면 될 것을 절하는 무릎이 얼음처럼 차갑더라도 불을 그리워 말고(拜膝如氷無戀火心) 주린 창자가 끊어질 것 같더라도 밥을 구하는 생각이 없어야 한다(餓腸如切無求食念)는 구절은 마치 고행을 장려하는 듯 합니다. 이런 가르침보다도 수행자는 일종식을 잘 지켜서 시장기를 친구삼아 지내는 것이 수행하는데 이롭다고 가르치는 것이 부처님 가르침에 더 가깝습니다. 일종식이나 오후불식을 하는 것이 수행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이롭구나하는 것을 알게하면 누구나가 지키려고 할텐데 마치 이런 계목이 수행자를 구속하는 것처럼 여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극단적인 고행을 강조하는 듯하게 가르치니 초심자들이 이 글을보고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라고 바로 팽개치는 일이 발생하는 것 같습니다. 지키지도 못할 것을 가르쳐서 가르침을 경시하게 만든다면 서로에게 큰 손해가 될 것입니다.

 

음식과 술을 먹어 망령되이 무애행을 하지말라(非時酒食妄作無碍之行)구절도 있지만 거의 모든 출가자가 저녁을 먹고 지내는 것을 보면 그냥 권고사항에 지나지 않는 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오후불식을 엄중하게 지키면 수행자들이 저녁에 모여 회식을 하는 일도 줄어들고 회식에 따라붙는 음주도 피하게되어 다른 계율을 파하는 일도 없게 될 것입니다. 사문과경의 설명처럼 초심자가 감각기능들의 문을 보호하고 마음챙김과 알아차리고[正念正知] 얻은 필수품으로 만족하는 생활을 하게되면계율이라는 것이 나를 구속하는 것이 아니라 수행을 도와주는 친구라는 것을 알게 되어 계율을 지키는 일에서 즐거움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객을 대해서 이야기 할 때 집안의 추한 것을 드날리지 말라’(對客言談不得揚於家醜)는 구절도 잘못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을 이용하여 승가안에서 잘못이 있는데도 그것을 지적하지 못하게하는 방패로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승가안에서 구성원들이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중공사를 통해 여법하게 해결할 수 있다면 누가 밖에다 집안의 허물을 떠들어 대겠습니까? 아무리 문제제기를 해도 승가안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고 해종훼불세력이라고 매도한다면 무조건 집안의 추한 것을 드날리지 말라는 말은 독재자들의 발언이 됩니다. 율장에서는 오히려 스승이라도 잘못된 생각이나 언행을 한다면 충고를 하여 바로잡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것도 율을 가르치지 않고 초발심만 가르쳐서 나타난 폐단입니다.

 

 

'소위사음수(所謂蛇飮水)면 성독(成毒)하고 우음수(牛飮水)하면 성유(成乳)하니 지학(知學)은 성보리(成菩堤)하고 우학(愚學)은 성생사(成生死)라하니 시야(是也)니라'는 비유가 적절치 않습니다. 뱀으로 태어나면 독을 만들고 소로 태어나면 우유를 생산하는 것은 각 동물의 정체성이요 운명입니다. 그러기에 아무리 착한 뱀이라도 우유를 만들수 없고 나쁜 소라도 독을 만들수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내가 어떤 의도를 내서 어느 길을 가느냐하는 배움과 수행의 문제를 이렇게 비유하는 것으로는 타당치 않습니다.

 

 

2. 예불문의 문제점

 

조석으로 예불하는데 사용하는 예불문에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목숨 바쳐 귀의합니다.’라고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부처님께 귀의 하는 자세가 아닙니다. 경에서는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이해되어 기쁜 나머지 오늘부터 목숨이 붙어 있는 그날까지 귀의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합니다. ‘목숨 바쳐 귀의합니다.’는 표현은 법에 대한 이해가 결여되어 보이고 기쁨과 환희심에서 나오는 표현과는 멀어보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처럼 용맹스럽게 충성을 맹세하는 듯한 귀의하는게 아니라 법을 이해한 끼뿜과 귀의처를 만난 확신으로 끈기있고 은근하며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변하는 않을 다짐을 하는 것이 바른 귀의입니다.

 

 

3.반야심경의 번역 문제

 

조계종 종단표준 우리말 반야심경은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온갖 고통에서 건너느니라." 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확하게는 오온의 自性(svabhāva)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라고 번역되어야 합니다. 구마라즙과 玄裝(649) 스님은 각각 照見五陰空照見五蘊皆空으로 自性을 빼고 번역하였기에 우리마 번역도 이렇게 번역되었는데 원문에는 自性(svabhāva)이 공하다고 되어있고 法月(738)스님은 照見五蘊自性皆空, 智慧輪(-859)照見五蘊自性皆空, 法成스님은 觀察照見五蘊體性悉皆是空, 施護(982-)스님은 觀見五蘊自性皆空으로 自性(svabhāva)自性, 體性으로 성실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기경전에 누누이 설명되는 오온을 나의 것과 나와 나의자아라고 할 수 없다는 무아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가르침입니다. 적어도 오온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온의 자성이 없는것이라고 가르친다면 청소년들에게 반야심경이 얼마나 쉽게 다가 오겠습니까?

 

 

4. 대승 범망경의 문제

 

사분율과 대승범망경의 불일치 문제도 심각합니다. 종헌 제9조에는 승려는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고 수도 또는 교화에 전력하는 출가 독신자라야 한다.”라며 사분율과 보살계를 수지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범망경으로는 포살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범망경은 " 대승(大乘)의 경(), ()을 잘 알지 못하여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 하고, 이승(二乘)과 성문(聲聞)의 경과 율을 따르지말라"라는 조목이 있는 것처럼 세상에 나올때부터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는 비판을 받았고 "불상·보살상을 지녀야 한다."는 조목처럼 불멸후 500년이 지나서 편집된 것입니다. 육식의 경우만을 보더라도 사분율등에는 3가지 경우를 제외하고 육식을 허용하고 있는 반면 범망경에서는 육식을 하면 한량없는 죄를 짓는 것이니 고기를 먹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범망경 경구죄 제16조에서 "만약 몸이나 팔이나 손가락을 태워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지 아니하면 보살이 아니다"라고 강조하며 소신공양이 장려되지만 중도를 가르친 사분율에는 결코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법사에게 "매일 같이 세 때를 공양하되, 하루에 금 석 냥 값어치의 맛있는 온갖 음식을 차려 공양하고 앉는 상과 먹는 약 등을 법사에게 공양하며, 그밖에 필요한 물건은 무엇이든 다 제공해야 한다"는 표현등은 전혀 불교적이라고 볼 수가 없습니다. 사분율과 대승범망경을 동시에 수지하게 하는 것은 2개의 차별된 헌법을 가진것으로 종단의 커다란 문제거립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지금부터라도 해야합니다.

 

 

 

 

 

 

5. 율장과 종헌종법의 불일치 문제

 

율장을 가르치지 않는 것도 문제고 종헌종법이 율장과 불일치 되는 것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승려법 제46조에 불계중 4바라이죄를 범하여 실형을 받은 자는 멸빈에 처할 수 있다고 되어있는데 실형을 받은 자부분은 삭제되어야 합니다. 이 조항은 안타깝게도 은처를 두고 살고 있더라도 실형만 받지 않으면 징계받지 않는 현상을 만들어 냈습니다. 승려법의 권리부분에 조계종출가자는 교육받을 권리 연수받을 권리등을 내세우고 있지만 생활에 필요한 가사와 승복값을 개인에게 부담하게하고 교육비 연수비도 개인에게 부담시키고 있어 실제적인 권리는 없고 모두 의무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허울뿐인 승려법은 스님들을 돈 버는 일에 내몰고 있습니다. ‘금과 은을 받지 않고 하인과 하녀를 받지 말라는 계율이 종헌종법에도 사유재산을 금지하는 것으로 나타나있지만 이 조목은 전부 무너져서 조계종승려들은 개인통장, 개인토굴, 개인암자, 자가용등 물질적인 풍요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게다가 율장에 명시되어 있는 탁발도 종법에서는 금지시키고 있고 객실문화도 사라져 승려들간의 빈부의 차이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넘쳐나는 사유재산 문제는 승가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큰 요인으로 승가공동체 구성원들을 각자도생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6. 연기공식의 번역 문제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이것이 없으면 저것이 없고, 이것이 소멸하기 때문에 저것이 소멸한다.”(此有故彼有 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 此滅故彼滅)라는 연기공식이 있습니다. 빠알리 경전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imasmiṃ(이것이) sati(있으면) idaṃ(이것이) hoti.(있다)

Imassa(이것의) uppādā(일어남이) idaṃ(이것이) uppajjati.(일어남이다)

Imasmiṃ(이것이) asati(없으면) idaṃ(이것이) na hoti.(없다)

Imassa(이것의) nirodhā(소멸함이) idaṃ(이것이) nirujjhati(소멸함이다)

 

 

빠알리 원문에서 보이듯이 이것이 있으면 이것이 있고,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이것이 생긴다.”라고 해석해야 합니다. 원전에 충실하게 이것(是事)과 이것(是事)으로 번역해야 하는데 대부분 한문 경전에는 이것(是事)과 저것(彼事)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이것(是事)과 이것(是事)으로 번역하면 동어반복이 되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혼란해 할까봐 이것(是事)과 저것(彼事) 친절하게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친절은 연기법의 내용을 훼손시켜 놓았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은 이것(A)과 저것(B)의 의존관계, 상보관계로 오해하게 되었고, 고통을 소멸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잊게 되었습니다. 한문만 이렇게 번역한 것이 아니라 영어도 thisthat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When this exists, that is; due to the arising of this, that arises. When this doesn’t exist, that is not; due to the cessation of this, that ceases.” (Sujato bhikkhu)

 

“Thus when this exists, that comes to be; with the arising of this, that arises. When this does not exist, that does not come to be; with the cessation of this, that ceases.”(Bodhi bhikkhu)

 

이들뿐만이 아니라 초기불전연구원 각묵스님이나 전재성거사님도 이것과 저것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다 이것이 일어날 때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다. 이것이 소멸할 때 저것이 소멸한다.”(초기불전연구원)

이것이 있을 때 저것이 있게 되며 이것이 생겨남으로써 저것이 생겨난다. 이것이 없을 때 저것이 없어지며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 (전재성)

 

빠알리어를 아시는 분들까지 이렇게 번역하고 있다는 것에 실망감을 느낍니다. 더군다나 원래는 이것과 이것 이었음을 설명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러면 왜 부처님은 혼란스럽게 이것(Imasmiṃ) 과 이것(idaṃ)이라는 지시대명사를 사용하셨을까요? 이것(Imasmiṃ)을 처소격으로 사용하고 절대처소격 동사 sati(있으면)를 사용한 것은 이것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뒤의 이것(ida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무명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형성()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태어남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반대로 무명이 없는 곳에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형성이 없으며 태어남이 없는곳에는 반드시 즉각적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이것(무명)있는 곳에 반드시 발생하고, 즉각적으로 뒤따르는 이것(형성)을 멀리 있고 별개로 보이는 저것(형성)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입니다. 멀리 있고 별개로 떨어져 있어 보여서는 안되기 때문에 연기공식에는 이것(Imasmiṃ) 과 이것(idaṃ)이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연기법을 이것(A)과 저것(B)으로 번역해 놓으니 AB에 아무것이나 대입하여 마치 연기법이 세상만물의 존재원리, 모든 관계의 원리, 상호의존의 원리를 설명하는 것으로 연기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내가있으니 네가있고, 이 있으면 이있고, 슬픔이 있으면 기쁨이 있고, 경찰이 있으면 도둑이 있고, 이 종교가 있으면 저 종교가 있다는 식으로까지 연기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번역해 놓으니 중국이나 우리나라에서 연기를 해석하는 것이 관념적이게 되었고 급기야 조계종이 발표한 아소카선언에서는 종교가 다른 것은 서로의 진리가 달라서가 아니라 진리를 표현하는 언어와 문법이 다를 뿐입니다.”라고 모든 종교통합선언을 하고야 말았습니다


호진스님도 자신의 책에서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다'라는 연기법으로는 생물과 무생물을 가리지 않고 모든 존재의 발생과 소멸을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불교교리의 사상적 이론적 근거가 된다."('성지에서 쓴 편지'106p)라고 연기공식을 찬탄하고 있다. 이것이 사라짐으로써 저것이 사라진다.이것은 연기공식을 오용한 대표적인 사례인데 그 원인은 옛 선배들이 이것(Imasmiṃ)과 이것(idaṃ)을 이것(是事)과 저것(彼事)으로 친절하게 그러나 바르지 않게 번역하여 놓은 탓입니다. 간혹 한문 경전에도 이것과 이것(是事有故是事有 是事起是事生 (T.2.245b)으로 번역한 곳도 있습니다.

 

 

7.삼귀의 한글화 문제점

 

마지막으로 삼귀의 중에서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의 번역에 대한 문제입니다. 지금의 한글 삼귀의는 1970년에 찬불가 공모전에서 당선된 최영철교사의 작품이라 하는데 불교를 잘 몰랐던 재가자였습니다. 이 분이 만든 삼귀의와 사홍서원을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2013년 종단 의례위원회가 만들어져 승가공동체의 의미를 살린 삼귀의를 만들 수 있었음에도 20166월 중앙종회 제206회에서 지금의 삼귀의와 사홍서원이 통과되었습니다. 이 때 의례위원(2013~2016)은 인묵, 동주, 지현, 지홍, 화암, 일관, 법상, 혜명 원명(2015), 주경(2015)스님등입니다. 이들은 천수경 끝에 나오는 삼귀의를 시방세계 부처님께 귀명합니다. 시방세계 가르침에 귀명합니다. 시방세계 스님들께 귀명합니다로 기존 삼귀의도 다르게 번역했습니다. 조계종에서는 상감 사라남 가차미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율장에서 정의되는 승가의 의미와 경에서 나타나는 승가의 용례에 비추어 보면 여러모로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이미 비구(bhiu)나 비구니(bhikkuni)를 스님 혹은 스님들이라고 번역되고 있습니다. 경에는 비구승가에 귀의 합니다라는 표현이 자주 나타나는데 승가가 스님들이라면 스님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동어반복이 됩니다. ’스님들은 비구(bhiu)나 비구니(bhikkuni)를 번역어이지 상가의 번역어가 될 수 없습니다.

 

둘째 경에서 재가자가 부처님의 가르침을 듣고 귀의할 때는 부처님과 담마와 비구승가에 귀의 합니다라고 자주 나타납니다. 보배경은 사쌍팔배의 칭찬받는 부처님의 제자들은 공양받을 만하며, 그들에게 보시하면 크나큰 과보를 받습니다. 승가안에(sanghe,처소격) 이 훌륭한 보배가 있습니다.”라고 설명합니다. 사쌍팔배의 성인들인 승보(僧寶)는 승가에 포함되어 있기에 승가에 귀의하는 것으로 승보에도 귀의한 것이 됩니다. 한글 삼귀의는 거룩한이라는 형용사 때문에 거룩한 스님들(사쌍팔배)’에게만 귀의하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셋째 스님들이라는 복수는 2인 이상의 스님들을 의미하는데 승가는 최소한 4인 이상이어야 승가라 할 수 있습니다. 2~3의 스님들 모임은 자자포살등 여법한 갈마를 할 수 없기에 승가공동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넷째 우리 선배스님들은 삼귀의를 귀의불양족존(歸依佛兩足尊) 귀의법이욕존(歸依法離欲尊) 귀의승중중존(歸依僧衆中尊)’으로 번역하였습니다. ‘지혜와 실천을 갖추신 존귀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탐욕을 떠난 존귀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일체의 대중() 가운데서 존귀한 공동체(community)에 귀의합니다라고 해석한 것입니다. 승가를 스님들로 번역하는 것은 공동체성을 상실하게 만드는 행위로 선배스님들의 뜻과 어긋나는 행위입니다.

 

다섯째 웰라마 경(A9:20)에서 부처님은 같은 공양물이라도 대상에 따라 공양공덕이 달라짐을 설명하면서 승가에 보시하는 것이 아라한이나 부처님께 보시하는 것보다 공덕이 크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장자여, 견해를 구족한 한 사람을 공양한다면, 이것은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견해를 구족한 백 명의 사람들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일래자를 공양한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장자여, 백 명의 일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불환자를 백 명의 불환자를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아라한을백 명의 아라한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벽지불을백 명의 벽지불을 공양하는 것보다 한 사람의 여래ㆍ아라한ㆍ정등각을부처님을 상수로 하는 비구승가를 공양한다면 사방승가를 위하여 승원을 짓는다면 이것이 그것보다 더 큰 결실이 있다.”

 

이 경에서 보듯이 백 명의 일래자, 백 명의 불환자, 백 명의 아라한이 라는 표현이 곧 승가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마치 자동차 부품이 모여있다고 자동차라는 이름을 얻을 수 없듯이 백명이 모여 있다고 해서 승가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방승가나 현전승가처럼 승가는 언제나 공동체성을 의미하는 용어로 사용되었으며 그 공동체성 때문에 아라한이나 벽지불이나 부처님께 공양하는 것보다 승가에 공양하는 공덕이 더 큰 것입니다. 부처님은 불멸후 미래세에 계행이 청정치 못하고 삿된 법을 가진 가짜 수행자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시며 설사 그들에게 보시하더라도 승가라는 이름으로 보시하면 공덕이 헤아릴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사람들이 승가를 위해 그 계행이 청정치 못한 자들에게 보시를 베푼다면 승가를 위한 보시는 그 공덕이 헤아릴 수 없고 잴 수 없다고 말한다.”(M142)

 

여섯째 나무장수 경(A6:59)에서 부처님은 개인비구에게 보시하기보다는 승가에 보시 하도록 권유하고 있습니다. “개인에게 보시했을 경우 혹은 몇몇스님들에게 보시했을 경우 그 비구들이 계율을 잘 지키지 않고 비난받을 짓을 하게 되면 보시한 것을 후회하고 스님들을 원망하게 됩니다. 스님에게 보시하지 말고 승가에 보시하십시요라고 권유합니다. 승가에 보시한다면 그 시주물은 공유물이 되어서 공덕이 큰 것입니다. 승가를 '스님들'로 해석한다면 '스님들'이 병들고 죽으면 승가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승가는 단순히 스님들이라는 복수의 개념이 아니라 자자 포살 갈마등이 이루어지는 수행공동체입니다.

 

일곱째 열반경에서 부처님은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당부합니다.

비구들이여어느 한 비구라도 부처나 법이나 승가나 도나 도닦음에 대해서 의심이 있거나 흔란이 있으면 지금 물어라. 비구들이여그대들은 우리의 스승은 면전에 계셨다. 그러나 우리는 세존의 면전에서 제대로 여쭈어 보지 못했다.’라고 나중에 자책하는 자가 되지 말라"

 

만일 승가가 '스님들'이라면 부처님은 "스님들에 대해서 의심이 있으면 물어라"라고 말한 격이 되는데 이러한 물음은 적절치 않습니다. 부처님이 승가에 대해서 물으라고 한 것은 그동안 부처님이 제정한 승가의 운영방법 즉, 포살, 자자, 수계갈마, 필수품을 구하는 법, 탁발하는 법, 객스님의 권리와 의무, 은사스님을 모시는 법등에 대해서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물으라는 것입니다. 승가는 승가운영에 대한 총체적인 규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비유를 하자면 '학생들''학교'라는 표현의 차이입니다. '학생들'이라는 것은 여행을 다니는 '학생들'일 경우도 있고 식당에서 만난 '학생들'일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학교'라는 말에는 학생들을 포함하여 선생님들, 건물, 운동장, 수업시간표, 생활기록부, 기말고사, 방학, 교훈, 급훈등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덟째 어느날 왕사성에 사는 재가자는 스님들이 밤새도록 수행하다가 아침에 이슬을 맞으며 나무 밑에나 동굴에서 깨어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는 스님들이 이슬을 맞지 않고 안전하게 수행할 수 있도록 60개의 정사(꾸띠)를 지어 스님들께 보시하고자 했습니다. 막상 그 정사를 스님들에게 보시하려고 했을 때 부처님은 60개의 정사는 현재와 미래의 사방승가(四方僧伽)에 보시하십시요라고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이 말씀 이후로 현재까지 모든 승원과 수행처소들은 사방승가에 보시되어 왔습니다. 그 말은 수행자를 위해 지은 정사들은 지금 여기에 스님들뿐아니라 미래에 출가할 수행자들과 다른 지역 다른 나라의 수행자들도 머물고 수행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부처님은 미래의 수행자들과 불자들이 사찰에 와서 불법을 배울 수 있도록 정법이 영원히 유지될 수 있도록 사찰을 공유물로 만드셨습니다. 사찰이 모든 이 들에게 열려 있어야하고 승가가 치지고 힘든 이들에게 안식처가 되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이렇게 승가는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확장되는 공동체(四方僧伽)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에 불교가 전해진지 1700년이 넘었는데도 가장 기초적인 승가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스님들'이라고 번역하는 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불자가 되는 것은 삼귀의를 함으로서 시작되며 스님들은 출가해서 열반할 때까지 삼귀의를 합니다. 스님들도 이미 출가하여 맑고 청정한 대중들 속해 있으면(旣已出家參陪淸衆) 항상 부드럽고 온화하게 대중을 잘 따라(常念柔和善順)야 하건만 한글 삼귀의는 청정한 대중이라는 의미가 사라졌으므로 스님들이 스님들에게 귀의하는 꼴이 되었습니다. ‘청정한 승가대중에 귀의한다는 것은 대중이 다함께 계목을 읽으면서 자신의 잘못을 점검하고(포살), 스스로 알아채지 못한 자신의 허물을 대중스님들께 지적해주길 요청하여 고치고(자자), 대중스님들과 경책과 격려를 주고 받으며(대중갈마), 부처님 법을 토론하며 수행을 점검하며(법담탁마) 살겠다는 다짐입니다. 이렇게 수행자는 대중속에서 성장하고 대중은 수행자를 보호하며 무엇이건 대중이 다함께 결정하고 구성원 누구에게나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가집니다. 독단적으로 사찰을 운영하거나 돈선거로 대중을 기만하거나 종법을 어겨 승가에 손해를 끼쳐도 같은 편이라고 봐주는 것은 진정으로 승가에 귀의한 것이 아닙니다.

 


귀의승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번역하다 보니 재가자들이 스님들을 조금만 비판해도 종단에서는 삼보를 비난하는 것이라는 반응을 보입니다. 감로수 판매수입이 다른곳으로 빠져나가게 한 자승스님을 고발한 조계종노조를 삼보를 비방했고 종단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징계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개인의 비리를 고발하여 승단의 손해를 막아보려는 행위는 칭찬을 들어야 함에도 이들을 징계한 것은 조계종 인사위원회의 스님들이 삼보와 승가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반증입니다.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번역이 스님들 스스를 승보라고 착각하게 만들고 권위적이게 만들고 재가자들의 비판을 용납하지 않게 만들고 있습니다. 청정승가를 복원하는 첫걸음이 귀의승을 바로잡는 일입니다. 저는 법정스님이 일찍이 제안하셨던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위없는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삼귀의를 제안합니다. 종단에서는 공동체의 의미를 없애버린 삼귀의를 만들어 놓았지만 뜻있는 재가단체나 스님들은 이미 법정스님이 제안한 삼귀의를 채택하여 사용하고 있습니다.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삼귀의는 앞으로 종단에 미칠 선()한 영향력은 막대하리라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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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정말 공감되는 내용들입니다 청정한 승가에 귀의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