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뿌리가 있는 곳

천부인권 2018. 9. 23. 06:00



해동지도-창원부


창원지역이 대도호부였다는 것은 창원인의 자부심이라 많은 분들의 글에 인용되어 그 내용은 알려져 있지만 그 내용의 기록이 어디에 실려 있는지 밝혀 둔 곳이 없다. 그래서 최초의 기록은 어디에 있는지 찾아보았다.
조선시대 창원도호부(昌原都護府)가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로 되었다는 기록들은 모두가 인용하는 바이나 실재 그 기록이 어디에 있는가는 잘 기록되어 있지 않아 혹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왕조실록 등을 살폈으나 명확한 근거를 찾지 못했다. 여기저기에서 주워들은 이야기 끝에 “교남지(嶠南誌)”에 실려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국근대도지(韓國近代道誌)” 중 교남지권지칠십일(嶠南誌券之七十一)편을 찾아보니 창원부(昌原府)편에 기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창원향교 편액들을 옮겨 적고 해문 하는 과정에서 순조 3년 계해(癸亥 : 1803) 오월 상순에 분성(盆城) 김익룡(金翼龍)이 쓴 육영재기(育英齋記)의 내용에 그 대략이 기록되어 있어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의 기록 근거로 삼는다.



한국근대도지 중 교남지권지칠십일-창원부 내용



교남지권지칠십일(嶠南誌券之七十一)
창원부
연혁, 의창현은 본래 굴자군(屈自郡)인데, 신라 경덕왕이 의안군(義安郡)으로 고쳤다. 회원현(會原縣)은 본래 신라의 골포현(骨浦縣)인데, 경덕왕이 합포(合浦)로 고쳐서 의안군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1018)에 두 현을 모두 금주(金州) 관하 속에 넣었다가 후에 각기 감무(監務)를 두었다. 충렬왕 8년(1282)에 원나라 세조(世祖) 지원(至元) 18년 동정(東征:왜구 정벌) 때에 공억(供億:물자를 공급한 공로)한 노고의 상으로 의안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를 회원(會原)으로 고치고 모두 승격시켜 현령(縣令)을 두었다.
이조(李朝) 태종 8년(1408년)에 두 현을 합하여 부(府)로 승격하는 명을 내렸고, 그 후 도호부라 개칭했다.
회원현(군에서 서쪽으로 20리 거리)은 선조 25년(1592:임진왜란)에 적병이 부성(府城)을 근거지로 해를 거듭하여 주둔했다. 이에 군【軍 : 병사(兵使) 겸 부사인 김응서(金應瑞)】를 따르는 민관군 중 한 사람도 왜적에 항복한 사람이 없었다. 선조 34년(1601)에 체찰사 이원익(李元翼)이 이러한 내용을 보고함으로써 대도호부(大都護府)가 되었다. 또 선조 36년에 판관(判官)을 설치하고 병사(兵使) 이수일(李守一)을 진주 판관으로 혁파하여 옮겨서 운영했다. 광해 13년(1620) 구읍(舊邑)에 부사를 환원했다. 현종 2년(1661) 문묘의 전패(殿牌)를 분실한 사건을 계기로 창원대도호부를 창원현으로 격하했다. 현종 11년(1670)에 창원대도호부로 다시 환원하여 고종 건양 2년(1897)까지 감리를 두어 존속했다.  융희 2년(1908) 웅천과 진해 두 군(郡)과, 김해 대산면(大山面), 진주 양전면(良田面), 칠원 구산면(龜山面)을 합하여 창원군(昌原郡)이 되었다.


嶠南誌券之七十一
昌原府
沿革 義昌縣 本新羅屈自郡景德王改義安 會元縣 本新羅骨浦縣 景德王改合浦屬義安君 高麗顯宗以義安合浦俱屬金州 後各置監務 忠烈王以賞 元世祖東征供億之勞 改義安爲義昌 合浦爲會原幷陞縣令 李朝太宗合二縣改 令名陞爲府 後改都護府(屬縣) 會原縣(在郡西二十里)宣祖二十五年敵兵積年屯據于府城 而惟吏民始終從軍 無一人降敵 故三十四年因 觀察使李元翼狀啓陞 爲大都護府 又設判官三十六年 兵使李守一移營晋州革判官 爲府使光海十三年還設舊邑 顯宗二年以殿牌偸失事降 爲縣十一年還陞 爲大都護府 高宗建陽二年置監理署 隆熙二年合熊川鎭海二郡 及金海大山面 晋州良田面 漆原龜山面 爲昌原郡


육영재기-창원향교
재(齋)를 육영이라 이름 한 것은 한 고을의 빼어난 이를 교육한다는 의리이다.[중략]
아! 우리 영남은 본디 추로(鄒魯)의 고장이라 일컬었고 인재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우리 고을을 말한다면 백 년 전에는 소과(小科) 대과(大科)에 서로 우러렀고 특히 그 여사(餘事)로 우뚝한 공훈이 장렬하여 조정에 이름이 새겨지고 역사에 전하여 졌다. 덕업과 행의가 당세에 드러났고 후학들이 아름답게 배출되었으며 또한 용사지란(龍蛇之亂)³❩*을 당하여서는 한 고을 위아래 백성들이 충성을 떨치고 순절하여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함이 없었다. 때문에 지극한 포상이 있어 대도호부(大都護府)의 이름에 올랐으니 선비를 숭상하는 우아함과 고을풍속의 아름다움이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돌아보건대 지금 영남의 웅장한 고을 이름난 마을로 선비를 양성하고 가르침을 진흥하는 곳에 있어 서로 우러름이 있는데 우리 고을에 이 재의 건립이 지금에 이루어졌으니 떳떳하여 훗날에 칭찬이 없지 않을 것이며 또한 시운에 관계된 바가 없다하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이 재에 거하는 자는 효도와 공손과 충성과 믿음의 행실을 우선하고 시서예악의 배움을 다음에 하여 주자(朱子)가 가까이한 녹동서원 제자(諸子)들과 장남헌(張南軒)⁴❩*이 권장한 악록(岳麓)의 배움을 사모할 것이다. 스승에게 나아가 두루 힘써 위기(爲己)⁵❩*의 공부에 종사하고 명리(名利)에 유혹되어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면 그 점차 젖어 드는 효과는 거의 백세토록 쇠퇴함이 없을 것이며 육영재가 비로소 그 이름이 일컬어 질 것이다.
순조 3년 계해(癸亥 : 1803) 오월 상순에 분성(盆城) 김익룡(金翼龍) 쓰다.


育英齋記
齋以育英名考 得一邑英而敎育之義也 [中略]
噫 吾南 素稱鄒魯之鄕 而人材之府庫 以吾鄕言之 百年之前 蓮桂相望 特其餘事 巍勳壯烈 銘彛鼎而垂竹帛 德業行誼 輝當世而牖後學者 彬彬輩出 而且當龍蛇之亂 一邑上下人民 奮忠殉節 無一人降 倭故至有褒陞大都護府之名 則士尙之雅 邑風之美 豈不休哉 顧今環大嶺雄州名邑 養士興學之所 在在相望 而吾鄕斯齋之健 今始得成 則頤不無後時之歎 而亦不無時運之攸關 苟能居於斯齋者 先之以孝悌忠信之行 次之以詩書禮樂之學 而窈慕朱夫子之親鹿洞諸子 張南軒之勸岳麓學者 于以攝齊周旋 從事於爲己工夫 而勿爲名利之所誘奪 則其漸涵浸之效 庶可期百世無贊 而育英齋始可以稱其名矣
上之三年癸亥端陽月上澣 盆城 金翼龍 書


여지도서(輿地圖書) 창원대도호부 건치연혁에 의하면
“선묘조(宣廟朝) 만력 을미년 9월에.......... 대도호부로 승격해서 불렀다.”는 기록이 있다.


輿地圖書 昌原大都護府 建置沿革
宣廟祖萬曆乙未九月........陞號爲大都護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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