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천부인권 2018. 9. 25. 12:56



2016.10.30 용지역사공원 비림의 박위장군 신도비


의창구 용호동 3에 위치한 용지역사공원에는 26기의 비석이 남북방향으로 도열하여 비림을 형성하고 있다. 이 비들은 창원공단의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놓인 것을 경남대학에서 보관해 오다가 지금의 자리에 옮겨둔 것들이다. 대부분 부사와 관찰사 등의 선정비 이지만 마지막 최 북쪽에 위치한 비석이 “고려충의백정국군밀성박공신도비(高麗忠義伯靖國君密城朴公神道碑)”이다. 이 비는 고려 말기~조선 초기의 인물 박위는 아홉 공신 가운데 한 사람이며, 경상도 순문사로서 왜구 토벌에 대한 공을 서술하는 등 박위 장군의 업적을 기린 신도비이다. 비신의 재질은 화강암이며 높이는 198㎝, 너비 69㎝, 두께 33㎝이다. 지붕돌은 가로 134㎝, 세로 96㎝이다. 1922년 박위의 후손 박지홍이 세운 비이다.


충의군(忠義君) 박위(朴葳 ?~1398년) 장군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밀양(密陽). 우달치(迂達赤: 왕을 호위하던 숙위병)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냈다.
1389년(창왕 1)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 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뒤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昌王)을 폐하고 공양왕(恭讓王)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豐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 조선 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 때 밀성(密城: 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원문


高麗 忠義伯 靖國君 密城 朴公神道碑

高麗恭讓王之踐寶位也 有九功臣第一我 高皇帝其次沈德符池湧奇 鄭夢周朴葳偰長壽 成石璘趙俊鄭道傳也 明年錄回軍功沈 公德符朴公葳等 四十五人與焉及 高皇帝受命諸功臣列 于朝惟鄭先生已立節 于善竹橋朴公自豐川配所因從便 于外方而終焉於是 而見朴公所以盡 心於恭讓之立周旋於遼軍之回者 斷是發假立眞安社靖國 而知其心者 惟鄭先生金海山城記曰 與朴侯比肩 事先王十斷有餘年 固已服其才焉 又曰 金海陷且殘雖之者 難爲治聞朴侯爲守謂其 有以處此侯矣 則忠愛之志自慮不謀而相符也 朴公其麗氏之義臣乎 朴氏新羅王之後也 景明王子諱彦忱食采 于密城因以爲貫 公於恭愍朝登第王南巡 公祗候于尙州時 鄭先生以翰林扈從 公始相識 禑六年乙卯倭陷金海 朝廷擇公爲府使 旬月之間 閣閭之煨燼缺毀 者次第葺完而民 得以回甦因 大修山城有事 則使民收妻孥以入 未幾賊至黃山江 公率擊之斬二十九級賊 又以五十艘至南浦 將直擣密城 公偵知之設 伏兩岸將舟師 三十艘以待之 賊果入江口伏發 公亦突至遮擊 賊自刃投水死殆盡 捷奏蒙褒賞厚 甚自是連爲州郡 在昌原績最著 後爲慶尙道都巡問使 斬賊十四級 戊辰禑政遼 公以全羅元帥行贊 高皇帝回軍 又拜慶尙道都巡問使 與安東元師崔鄲擊賊 于商州中牟縣破之追 至高靈縣斬三十五級 又擊對馬島燒 賊船二百艘 及傍岸廬舍 搜還本國男婦百餘人 尋改都節制使 捕賊船三十二艘 上遣門下評理徐均衡 衣領鞍馬銀釘等物 凡三持節 而輒住昌原 原民優被惠澤 己巳從高皇帝 及圃隱先生義立 定昌君爲王從恭愍定妃命也 拜慈惠府事 封忠義伯 賜田一百結 奴婢十餘口 圖形于閣勒功于石 及至回軍功之錄也 加封爲靖國君 賜廏馬白金絹帛 恭讓卽位之夕 有謂王曰 諸將相立殿下 者只欲免己禍 愼勿親信 九功臣聞其言 請罪讒人王黙然 未幾有尹彛李初之獄 九功臣上踈辭職 豐川之譴在是時仍 蒙外方從便之命 自是不復應命 蓋公以自請也 噫城盆山 而民有所依將 舟師而賊自投水 回遼軍而國王免犯 上之科廢僞主 而宗社有再造之愛 公之所以盡忠於王氏者如此 而竟不令麗兆靈長者天也 公於天無奈然折節以事異姓非素志也 是以韜晦田里聲徵湮沈惟麗王二敎書載之史乘足令公不朽也 有曰我朝昇平日久 武備稍弛肆致島 賊恣爲寇掠迄 今四紀擾 我三韓國家 惟務守禦將帥 尙稽徂征而卿發憤于懷仗義 而徃凌不測之鯨波覆積年之蟻 穴室廬船艦盡爲煨燼 俘虜人民得還鄕里 足以雪國家之恥 足以復臣民之讐 僞朝所以獎公破倭也 有曰卿以寬弘之度 豁達之姿逢時展才委身 鞅掌處事之敏 衛上之忠玄陵稱之才 迢耿賈之儔 勇在關張之右 城于州而金湯之利 始驗劍其船 而海島之警悉除載 惟對馬之役 有光辛巳之征 撫軍則有拊循之效 臨陣則有敵愾之功 自玄陵賓天姦猾用事 禑昌父子寅縁竊位 濁亂紀綱傷敗彛倫九廟震驚 卿與侍中李[高皇帝 舊諱]奮不顧身決議 定策其視平勃之安 劉狄張之復 李唐爲有光焉 恭讓所以獎公回軍也 多士之所崇奉者 則密州之莘南書院也 後承之不墜家聲者 則吏參公諱耆從享莘南 吏參有弟曰龍 贈參判其後 又有節制使大生 佐理功臣賢生 司直孝生 護軍碩孫 兵馬使林蕃 戶義應奎 縣監希益 防禦使秀憲 宣傳順生 參議宗章 戶議愼吉 校尉守判尹 彩雲正郎孝源 獻納東俊 參奉基聖 營將免升郡守文琥 或壬亂效忠 或莅民推誠 其餘煩不殫記 公之墓所或曰在長湍 或曰在昌原 俱未詳然湍遠而原邇 原又三鎭之鄕 乃就後孫 故參奉志弘所居上德里樹碑 爲壇擬行一祭 將以貞敬夫人坡平尹氏[判書 莅女] 祔享文琥子前校理海徹 與其族人參奉準龜與進圭 奉盧斯文相稷所爲遺事 再至漢山愀然語泳奎曰 壇吾祖神道憑依之地 願爲銘使吾祖勳業之盛 節義之炳垂式于後人也 余瘁朽慵鈍無以爲文 然顧甞忝居首揆 而不與國偕亡苟延視食十三年矣 涙積風泉代異懷同安得辭銘曰
憲憲靖國王氏藎臣 回軍安社建議立眞 圖形勤功一體九人 神龍御天衆皆攀鱗 失警橋血終作流民 忠悃有素久愈不湮 多士尸祝維密之莘 亜銓紹休侑事惟均 念玆合浦大0三臻 輿地昭載怳如隔晨 惟其冡域眞疑咨訽 縱欠深目盍玆迎神 就裔孫居樂石磨磷 仍設壇壝視同窀穸 神道有依永享精禋 檜水泱泱檜岳嶙嶙 貞珉煌煌千禩彌新


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議政 兼 慶筵參贊官 弘文館提學 奎章閣檢校 驪興人閔泳奎
崇祿大夫 吏曹判書 弘文館大提學 海平人尹用九 隸書
資憲大夫 行宮內府特進官 潘南人朴箕陽 篆書
通政大夫 行祕書院丞奎章院 左校書 漢陽人趙漢元 正書
承訓郎 行崇德殿參奉 竹山人朴銓弼




해문


고려 충의백 정국군 밀성박공 신도비명
고려조의 공민왕(恭讓王)께서 보위에 오르셨을 때 아홉 공신이 있었으니 그 첫 번째가 우리 고황제(高皇帝)¹⁾이시고 그 다음이 심덕부(沈德符), 지용기(池湧奇), 정몽주(鄭夢周), 박위(朴葳), 설장수(偰長壽), 성석린(成石璘), 조준(趙俊), 정도전(鄭道傳)이다.
이듬해 회군한 공훈을 녹훈할 때 심덕부 공과 박위 공 등 45인이 그 명단에 들어갔다.
고황제께서 천명을 받아 등극(登極)하였을 때 여러 공신들이 조정에 늘어섰지만 오직 정몽주 선생만은 이미 선죽교에서 절개를 세웠다. 박공은 풍주(豐川)²⁾의 배소에서 ‘외방에서 편리한 대로 지내라.’는 명으로 인하여 외방에서 생을 마쳤다. 여기에서 박공이 공양왕의 즉위에 [??]³⁾을 다하고 요동(遼東)에서의 회군에 주선(周旋)을 한 것은 전적으로 가짜 임금을 폐위하고 진짜 임금을 세운 것이요 사직을 편안히 하고 국가를 안정시킨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의 마음을 알아준 사람은 오직 정선생⁴⁾이었다. 정선생의 「김해산성기(金海山城記)」에 이르기를 ‘박후와 함께 선왕을 섬긴지가 10여 년인데 참으로 그의 재주에 탄복한다.’하였고 또 이르기를 ‘김해는 함락되고 또 잔폐해 졌으니 비록 지혜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스리기가 어렵다. 그런데 듣자니 박후가 수령이 되었다하니 이는 그가 그 곳을 잘 다스릴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하였다. 임금에게 충성을 받치고 백성들에게 사랑을 베푸는 두 분의 뜻이 스스로 호응하여 서로 의논하지 않았지만 서로 마음이 들어맞았던 것이다. 박공은 아마도 고려조의 의(義)로운 신하인가 보다.
박씨는 신라 왕실의 후예이다. 경명왕(景明王)의 왕자 언침(彦忱)이 밀성(密城)⁵⁾을 식읍으로 받았으므로 그 일로 인하여 밀성을 본관으로 삼는다.
공은 공민왕(恭愍王) 때 과거(科擧)에 급제 하였다. 공민왕⁶⁾이 남쪽으로 순수(巡狩)하였을 때⁷⁾ 공은 상주(尙州)에서 지후(祗候)로 있었는데 그 당시 정선생이 한림(翰林)으로서 왕을 호종(扈從)하니 공이 비로소 함께 호위(護衛??)하였다.
우왕(禑王) 1년⁸⁾ 을묘년(1375)에 왜구(倭寇)가 김해를 함락하자 조정에서 공을 선임하여 김해 부사로 삼으니 한 달도 채 아니 되어 불타고 무너진 일반 민가(民家)가 차례차례 완전히 복구 되었으며 백성들도 소생(蘇生)할 수 있었다. 또 산성(山城)을 대대적으로 수리(修理)하고는 전쟁이 일어났을 때 백성들로 하여금 처자(妻子)를 데리고 들어가서 살게 하였는데 얼마 아니 되어 왜적(倭賊)이 황산강(黃山江)에 이르자 공은 중민(衆民)을 이끌고 적을 물리쳤으며 적의 수급(首級)⁹⁾ 29개를 베었다. 적이 또 배 50척을 가지고 남포(南浦)에 이르러서는 장차 곧장 밀성(密城)을 쳐부수려 하였다. 공은 정탐하여 그 사실을 알아내고는 의논 하였으되 강 양안(兩岸)에 복병(伏兵)을 숨겨 둔 채 배 30척을 거느리고 적을 기다리기로 하였다. 적이 과연 강어귀에 들어왔으므로 복병이 일어나 공격하였고 공도 또한 돌진하여 적선을 가로막고 공격하니 적들은 스스로 칼로 목을 찌르고 강물에 뛰어 들어 거의 다 죽었다. 조정에 승전을 보고하고 매우 후한 포상(褒賞)을 받았다. 그 때부터 연이어 주군(州郡)의 수령(守令)이 되었는데 창원(昌原)에 있을 때는 근무 성적이 가장 우수 하였다. 그 뒤 경상도(慶尙道)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으며 적의 수급 14개를 베었다.
무진(戊辰,1388)¹⁰⁾년에 우왕(禑王)이 정권을 반환(返還)¹¹⁾하였는데 공은 전라원수(全羅元帥)로서 고황제의 회군(回軍)에 협찬(協贊)¹²⁾하였다.  다시 경상도 도순문사가 되어 안동원수(安東元帥) 최단(崔鄲)과 함께 상주(商州)의 중모현(中牟縣)에서 적과 싸워 격파하였으며 남은 적을 고령현(高靈縣)에까지 추격하여 수급 15개를 베었다. 또 대마도(對馬島)를 공격하여 적선 200척과 연안(沿岸)의 허사(虛舍)를 불태우고 우리나라의 남녀¹³⁾ 100여 인을 찾아내어 돌아 왔다. 곧 도절제사(都節制使)가 되어 적선 32척을 나포(拿捕)하였으므로 임금이 문하평리(門下評理) 서균형(徐均衡)을 보내어 의령(衣領)·안마(鞍馬)·은정(銀釘) 등의 물건을 하사 하였다. 무릇 세 번 부절(符節)을 쥐었고 그 때마다 창원으로 가서 진수(鎭守)하였는데 창원의 백성들이 공의 혜택을 듬뿍 입었다.
기사년(1289)에는 고황제 및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의 의견을 따라 정창군(定昌君)을 세워 왕¹⁴⁾으로 삼았는데 그것은 공민왕(恭愍王)의 비(妃)인 정비(定妃)의 명을 따른 것이다. 그리하여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¹⁵⁾에 임명되고 충의백(忠義伯)에 봉해졌으며 전(田) 100결(結) 및 노비 10여구(口)를 하사 하셨다. 또 공신각(功臣閣)에 초상화가 그려졌고 기공비(紀功碑)에 공적이 새겨졌다.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回軍)한 공로를 녹훈(錄勳)항 때 정국군(靖國軍)의 봉호(封號)가 더 보태어졌고 내구마(內廏馬)·백금(白金)·견백(絹帛) 등을 하사 받았다.
공양왕이 즉위한 날 밤에 어떤 사람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여러 장수(將帥) 및 재상(宰相)들이 전하(殿下)를 옹립(擁立)한 것은 단지 자신들의 화를 면하기 위해서이니¹⁶⁾ 삼가 그들을 친신(親信)하지 마소서.”라고 하였다. 아홉 공신들이 그 말을 듣고 ‘다른 사람의 참소(讒訴)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은 묵묵히 침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윤이(尹彛)와 이초(李初)의 옥사(獄事)가 일어나자 아홉 공신들이 상소하여 사직(辭職)하였다. 공의 풍주(豐州) 유배는 그 때에 있었던 일인데 이어서 ‘외방(外方)에서 편리한 대로 지내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그때부터 공은 다시 명을 받들고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으니 그것은 공이 스스로 자정(自靖)¹⁷⁾¹⁸⁾한 것이었다.
아, 분산(盆山)에 성을 쌓자 백성들이 의지할 곳을 가지게 되었고 수군(水軍)을 거느리자 적(賊)이 스스로 강물에 뛰어들었다. 요동(遼東)에서 회군하니 국왕이 천자에게 대드는 죄를 면하게 되었고 가짜 임금을 폐위하니 종묘와 사직(社稷)¹⁹⁾이 다시 만들어지는 경사(慶事)가 있게 되었다. 공이 고려조에 충성을 받친 데는 이와 같은 점이 있었으나 결국 고려왕조와 함께 길이 운명을 같이하지 못한 것은 하늘의 운수 때문이니 공이 하늘의 운수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절개를 굽혀가며 이씨(李氏) 왕조를 섬기는 것은 평소의 뜻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전리(田里)에 숨어 살면서 아름다운 명성을 인몰(湮沒)시켰으니 오직 고려조 임금의 두 교서(敎書)만이 역사책에 실려 있어서 공을 불후의 인물로 만들고 있다. 그 중에 이르기를
“우리나라가 오랜 세월 동안 태평을 누리다 보니 무비(武備)가 조금 해이해져서 섬나라의 도적들이 지금까지 수 십 년 동안 마구²⁰⁾ 노략질을 하면서 온 나라를 불안하게 하였다. 이에 국가는 오로지 방비에 힘쓰는데 반해 장수들은 아직까지 출정(出征)을 늦추고 있다. 그런데 경(卿)이 마음에 분(憤)을 발하고 의(義)에 입각하여 달려가서는 헤아릴 수 없이 높은 파도를 넘고 여러 해 동안 구축한 적의 소굴을 뒤엎어 버렸으며 가옥과 배를 잿더미로 만들었고²¹⁾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하였으니 국가의 수치를 충분히 씻었고 신민(臣民)의 원수를 충분히 갚았다.”
하였으니 이는 가짜의 왕씨(王氏) 나라에서 공이 왜적을 격파한 일을 추장(推獎)²²⁾한 것이다. 또 이르기를
“경은 넓은도랑과 활달(豁達)한 자질로 때를 만나 재능을 펼쳤고 위난(危難)한 일에 몸을 바쳤다. 일을 처리하는 민첩함과 임금을 호위하는 충성심은 현릉(玄陵)²³⁾께서 칭찬하셨는데 재주는 경엄(耿弇)과 가복(賈復)²⁴⁾의 무리보다 뛰어나고 용기는 관우(關羽)와 장비(張飛)보다 뛰어 나구나. 고을에 성을 쌓자 금성탕지(金城湯池)의 유리함을 비로소 볼 수 있고 배에 칼을 꽂자 바다와 섬의 경보(警報)가 모두 제거 되었다. 생각건대 대마도(對馬島)의 전투는 신사년(辛巳年)의 정벌보다 더 빛이 나는 구나. 군사들을 어루만지면 복종하는 효험이 있고 전진(戰陣)에 임하면 적개(敵愾)의 공훈을 세웠도다. 현릉(玄陵)께서 붕어(崩御)하신 뒤로 간사하고 교활한 자들이 국정을 요리하였으니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부자가 그들에게 빌붙어서 왕위를 훔쳤다. 그리하여 기강을 문란 시키고 인륜을 망가뜨렸으므로 구묘(九廟)가 놀라게 되었다. 그러자 경과 이시중(李侍中) [고황제의 구휘(舊諱) 이성계(李成桂)를 이른다.] 이 발분(發奮)하여 몸을 돌보지 않은 채 결의하여 계책을 결정하였으니 이 일은 한(漢)나라 초기의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 한(漢)나라 황실을 안정시킨 일에 비교하고 당(唐)나라 때 적인걸(狄仁傑)과 장간지(張柬之)가 중종(中宗)을 복위(復位)시킨 일에 비교하더라도 광채가 난다 하겠다.”
하였으니 이는 공양왕이 공의 위화도 회군을 칭찬한 것이다.
여러 선비들이 공을 받들어 제사지내는 곳으로 밀주(密州)의 신남서원(莘南書院)이 있다. 후손으로서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은 사람으로는 이참공(吏參公) 기(耆)인데 신남서원에 종향(宗享)되었다. 이참공에게 아우가 있었으니 이름이 룡(龍)인데 증참판(贈參判)이다. 그 후손 중에 또 절제사(節制使) 대생(大生) 좌리공신(佐理功臣) 현생(賢生), 사직(司直) 효생(孝生), 호군(護軍) 석손(碩孫), 병마사(兵馬使) 임번(林蕃), 호조참의 응규(應奎), 현감 희익(希益), 방어사(防禦使) 수헌(秀憲), 선전관(宣傳官) 순생(順生), 참의(參議) 종장(宗章), 호의(戶議) 신길(愼吉), 교위(校尉) 수판윤(守判尹) 채운(彩雲), 정랑(正郎) 효원(孝源). 헌납(獻納) 동준(東俊), 면승 군수(免升郡守) 문호(文琥) 등이 있는데 혹은 임란(壬亂)에 임하여 충성을 받치기도 하였고 혹은 목민관(牧民官)이 되어 성심을 확충하기도 하였다. 그 밖의 인물들은 번거로워서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의 묘소는 혹 장단(長湍)에 있다고도 하고 혹 창원에 있다고도 하는데 모두 불확실하다. 그러나 장단은 멀고 창원은 가깝다. 또 창원은 공께서 세 번이나 진수(鎭守)한 고을이니, 이에 후손인 고 참봉 지홍(志弘)이 사는 상덕리(上德里)²⁵⁾에 비석을 세우고 제단(祭壇)을 설치한 다음 해마다 한 번씩 제사를 지내려 한다.
장차 판서 윤리(尹莅)의 따님이신 정경부인 파평윤씨(坡平尹氏)를 부향(祔享)하려 함에 문호(文琥)의 아들인 교리(校理) 해철(海徹)과 그의 족인(族人)인 참봉 준귀(準龜) 및 진규(進圭)가 사문(斯文) 노상직(盧相稷)이 지은 유사(遺事)를 받들고 재차 한산(漢山)으로 찾아와서 쓸쓸한 표정으로 나 민영규(閔泳奎)에게 말하기를
“그 자리는 우리 할아버지의 신령(神靈)이 의지해 있는 곳입니다. 원컨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어주셔서 우리 할아버지의 성대(盛大)한 훈업(勳業)과 빛나는 절의(節義)가 후세 사람들에게 모범으로 전해지도록 해주십시오.”
하였다. 나는 병든 몸에 개으르고 우둔하여 글을 지을 수가 없다. 그러나 생각건대²⁶⁾ 내가 일찍이 외람되어 수상(首相)의 직임에 있으면서도 나라의 멸망과 함께 죽지 못한 채 구차스럽게 목숨을 연장시켜 온 지가 13년이나 되었다. 풍천(風泉)²⁷⁾의 비통함에 눈물이 쌓임은 공이나 나나 그 회포가 동일하다 하겠으니 어찌 이 글 짓는 일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이에 다음과 같이 명(銘)한다.
성대(盛大)하게도 나라를 안정시켰으니
고려 왕실의 충신이로다.
회군하여 사직(社稷)을 편안히 하였고
초상화(肖像畵)가 그려지고 공적비(功績碑)가 세워졌으니
한 덩어리 같은 아홉 공신이 되었다.
새 나라에 새 임금이 등극하자
모든 사람들이 새 조정에서 공명(功名)을 이루었지만
포은(圃隱) 선생의 절의를 다짐하면서²⁸⁾
끝내 유민이 되었도다.
공의 충성심은 평소에 수양(修養)한 결과이니
오래 되면 될수록 사라지지 않는 도다.
여러 선비들이 공의 제사를 받드니
그곳은 밀주의 신남서원이라네.
이참공(李參公)이 공의 명성을 잘 이어 받아서
또한 공과 같이 같은 서원에서 제를 받는다네.
생각건대 이 합포(合浦)²⁹⁾ 땅은
공께서 세 번이나 진수(鎭守)하러 온 곳인데
지리지(地理志)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서
흡사 어제의 일과 같이 느껴지도다.
오직 공의 묘역(墓域)만은
참으로 의심스러워 널리 보아야 하지만
그러나 비록 무덤 찾아주는 신인(神人)이 나온다 하더라도
어찌 이곳에서 공의 신령(神靈)을 맞이하지 않으리오.
결국 후손이 사는 상덕리(上德里)에
비석(碑石)을 다듬어 세우고
이어서 제단을 만들었으니
이는 바로 무덤과 다르지 않다네.
이에 공의 신령(神靈)이 의지할 곳을 가져서
영구히 정성스런 제사를 받게 되었도다.
회수(檜水)가 도도(滔滔)히 흐르고
회악(檜岳)이 우뚝하게 솟아 있으니
공의 비석은 찬란한 빛을 발하며
천만년이 지나도록 새로우리라.


대광보국 숭록대부(大匡輔國 崇祿大夫) 의정부 의정(議政府 議政) 겸(兼) 경연 참찬관(慶筵 參贊官) 홍문관 제학(弘文館 提學) 규장각 검교(奎章閣 檢校) 여흥인(驪興人) 민영규(閔泳奎)가 글을 지었다.
숭록대부(崇祿大夫) 전 이조판서(吏曹判書) 홍문관 대제학(弘文館 大提學) 해평인(海平人) 윤용구(尹用九)가 예서(隸書)를 썼고,
자헌대부(資憲大夫) 행 궁내부특진관(行 宮內府特進官) 반남인(潘南人) 박기양(朴箕陽)이 전서(篆書)를 썼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행 비서원승(行 祕書院丞) 규장원 좌교서(奎章院 左校書) 한양인(漢陽人) 조한원(趙漢元)이 정서(正書) 하였고,
승훈랑(承訓郎) 행 숭덕전 참봉(行 崇德殿 參奉) 죽산인(竹山人) 박전필(朴銓弼)이 글씨를 썼음.





1)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지칭하는 말이다.
2) 원문의 ‘풍천(豐川)’은 『고려사(高麗史)』권45 「세가(世家)」 및 같은 책 권116 「바위전(朴葳傳)」 등에 의하면 ‘풍주(豐州)’가 옳다.
3) 글자가 한자 빠진 것으로 추측된다.
4) 정몽주(鄭夢周)를 이르는 말이다.
5) 오늘날 밀양의 옛 이름.
6) 원문의 ‘玉’자는 ‘王’자의 오기로 판단된다. ‘王’은 곧 공민왕으로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7) 공민왕(恭愍王) 10(1361)년 때 제2차 홍건적(紅巾賊)의 침입으로 인해 공민왕이 안동으로 피난간 일을 지칭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8) 원문의 ‘六’자는 ‘一’자의 오기로 판단 된다.
9) 적(賊)의 머리를 이르는 말이다. 적의 머리를 벤 수효에 따라 상으로 품급(品級)을 올려준 데서 나온 말이다.
10) 이 해에 이성계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禑王)을 폐하고 창왕(昌王)을 세웠다.
11) 원문의 ‘禑政遼’에는 오탈자(誤脫字)가 있지 않을까 추측된다.
12) 원문의 ‘行贊’은 의미상 ‘協贊’의 오기가 아닐까 추측된다.
13) 원문의 ‘男娟’은 어떤 글자, 예컨대 ‘男女’ 따위의 오기인 듯하다.
14) ‘왕’ - 곧 공양왕(恭讓王)이다.
15) 원문에서는 ‘慈惠府事’ 앞에 ‘判’자가 빠진 것으로 추측 된다.
16) 원문의 ‘只欲己禍’는 『고려사(高麗史)』 권116 「심덕부전(沈德符傳)」에 의하면 그 사이에 ‘圖免’ 두 글자를 넣어 ‘只欲圖免己禍(지욕도면기화)’가 되어야 옳다.
17) 원문의 ‘自請’은 ‘自靖’의 오기로 판단된다.
18) 자정(自靖)이란 물러나 은거하면서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자중(自重)하는 것을 으른다.
19) 원문의 ‘宗祀’는 ‘宗社’의 착오인 듯하다.
20) 원문 ‘姿爲寇掠’은 ‘恣爲寇掠’의 오기로 보인다.
21) 전후의 대우(對偶) 구조로 볼 때 원문의 ‘爲灰燼’에 글자 한자가 빠졌다.
22) 추장(推獎)은 ‘주장하다’라는 뜻이다.
23) 원래 공민왕이 묻힌 능(陵) 이름이지만 여기에서는 곧 공민왕(恭愍王)을 지칭하는 말이다.
24) 경엄(耿弇)과 가복(賈復)은 모두 동한(東漢) 때의 명신(名臣)이다.
25) 상덕리(上德里)는 웅남면 연덕리에 포함된 마을이다. 연덕리는 1914년 마산부 하남면 상덕리·연변리·와곡리 일부가 창원군 웅남면으로 개편되면서 연변리의 연과 상덕리의 덕이 합성되어 생겨났다. 연덕동에는 소코(속구)·상덕·연덕의 3개 자연마을이 있었다.
26) 원문 ‘願’자는 ‘顧’자의 오기인 듯하다.
27) ‘풍천(風泉)’은 『시경(詩經)』의 「비풍장(匪風章)」과 「하천장(下泉章)」을 합하여 이르는 말로 주(周)나라의 쇠미(衰微)를 슬퍼하고 그 문물을 사모하는 뜻을 붙여 읊은 시이다. 뒤에 이 말은 대게 ‘나라가 멸망한 것과 그 문물이 소멸된 것을 슬퍼한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28) 원문의 ‘失警’은 ‘失誓’의 오기라 생각한다.
29) 창원의 옛 이름이다. 지금은 회원구 합포동 일대에 지명과 성곽이 남아있다.


【민영규(閔泳奎)】
한말 문신으로 매국노(賣國奴)이다. 1846년(헌종 12) 12월 12일에 출생하고 1923년 11월 18일에 사망했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며, 자는 경오(景五), 아버지는 의정부대신 민경호(閔璟鎬)이다.
1875년(고종 12) 별시문과에 급제해 주서(注書)에 임명됐으며, 이후 설서(說書)·전적(典籍)·병조정랑(兵曹正郎)·서학교수(西學敎授)·수찬(修撰)·문겸(文兼)·금위영종사관·헌납(獻納)·장령(掌令)·부교리(副校理)·응교(應敎) 등을 지냈다. 1876년 병조정랑, 1879년 병조참판, 1881년 이조참의, 1882년 형조참판·예조참판을 지냈다. 1885년 외관직으로 경주부윤으로 나갔다. 1888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1890년 예조판서·한성판윤을 역임하였다. 1892년 이조판서가 되었고, 경기관찰사로 외직에 나갔다가 1894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갑오개혁으로 김홍집내각이 들어서자 면직되었다가 1897년 궁내부대신으로 다시 기용되었다. 1906년 의정부 의정대신에 올랐으며, 1908년 대동학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1910년 일제강점 뒤 일본 정부로부터 자작 작위와 사금 5만 원을 받았다. 1905년 훈이등팔괘장(勳二等八卦章), 1906년 훈일등태극장(勳一等太極章), 1907년 대훈이화대수장(大勳李花大綏章)을 받았다.
민영규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7·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5: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92∼603)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


출처 및 참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밀양박씨 족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정수환 해문
디지털창원문화대전-용지공원비석군-배상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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