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문화재 여행

천부인권 2018. 12. 16. 08:45



2018.12.11.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


새벽에 집에서 출발하여 어둠을 뚫고 도착한 곳이 1919년 파리장서운동(巴里長書運動) 일명 독립청원운동(獨立請願運動)을 논의한 거창 심소정(心蘇亭)이었다. 심소정에 도착했을 때 여명은 이미 밝았고 사진을 찍어도 될 정도로 어둠은 사라졌다. 천천히 소심루(小心樓)와 심소정을 둘러보고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을 찾아 나설 때 싸락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거창IC에 내려서 네비가 알려준 길은 황강을 따라 둘러가는 길을 안내하면서 인터넷으로 지도를 보고 익힌 장소로 가는 방향감각을 잃었다. 마찬가지로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으로 가는 길도 대략 익혔는데 네비가 다른 길을 안내하여 빠른 길로 가지 못하고 엉뚱한 곳을 거쳐 빙 둘러 가게 됐다.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지도를 보니 빠른 길을 두고 엉뚱한 곳을 거쳐서 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현재 금용사(金龍寺) 내에 있는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과 조우(遭遇)했다.






어떤 사물의 명칭을 정할 때 그 모습을 보고 작명하는 경우가 많은데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의 이름은 어떻게 붙였는지 생각해 봤다. ‘거창 양평리’는 이 석조여래입상이 위치한 장소를 알려 주기 위함이고, ‘석조(石造)’라 한 것은 돌로 다듬은 조각품을 말하며, ‘여래(如來)’는 부처의 열 가지 이름 가운데 하나로 범어(梵語)로는 타타아가타(tatha-gata)라고 한다. 여래는 ‘여실히 오는 자’, ‘진여(眞如)에서 오는 자’라는 뜻이며, 진여세계에서 와서 진여를 깨치고 여실한 교화활동 등의 생활을 한 뒤에 사라져 가는 이로서, 부처와 같은 뜻을 가진 낱말이다.
① 응공(應供), ② 정변지(正遍知), ③ 명행족(明行足), ④ 선서(善逝), ⑤ 세간해(世間解), ⑥ 무상사(無上士), ⑦ 조어장부(調御丈夫), ⑧ 천인사(天人師), ⑨ 불(佛), ⑩ 세존(世尊)이다. 이와 같은 명호 가운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여래와 불과 세존이며, 응공은 아라한(阿羅漢)을 지칭할 때 많이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입상(立像)’이라 한 것은 서 있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앉아 있으면 좌상(坐像)이라 이름 붙인다.




2018.12.11 머리에 천개(天蓋)를 이고 있으나 머리에는 나발이 있다. 반쯤 뜬 눈은 사유를 알게하고, 목에는 윤회(輪回)의 인과(因果)를 뜻하는 삼도(三道)를 새겼다.



오른손은 밑으로 내려 군의 자락을 쥐고, 왼손은 집게 손가락을 곧게 편 수인이 이체롭다.



여래를 받치는 둥근 대좌에는 연꽃이 두텁게 조각 됬다.




「거창군사(居昌郡史)」에 의하면 보물 제377호인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을 이처럼 기록 했다.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377호
전체 높이 3.7m, 불상 높이 2.75m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479-1
거창읍 양평리의 금용사(金龍寺)에 있는 이 석불은 높이가 4m에 가까운 거상(巨像)으로 원래 이 부근에는 금양사(金陽寺) 또는 노혜사(老惠寺)라는 사찰이 있었다 한다. 석불은 몸의 굴곡이 충실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앞 시기에 비하여 얼굴이 비만해졌고 옷주름 곳곳에 도식화의 경향이 엿보여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계승한 8세기 후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비만해진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새겨졌지만 다소 경직된 표정이며 머리는 나발이 뚜렷하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선명하며 통견(通肩)으로 걸친 대의(大衣)자락은 몸에 밀착되어 가슴과 허리, 양다리의 형체가 풍만하다. 왼손은 인지(人指)만을 곧게 펴 가슴 높이로 들고 오른손은 곧게 내려 엄지와 인지로 옷자락 끝을 살짝 쥔 특징적인 수인(手印)을 맺었다.
대좌는 아래 폭 155cm 크기의 복판복련좌(複瓣覆蓮座)이며, 앞쪽에 폭 135cm, 높이 25cm 크기의 앙련석(仰蓮石)이 놓여져 있다. 석불의 주위에는 구획이 설정되어 있는데 네 모서리에 네모진 기둥받침을 설치하고 그 사이로 긴 장대석으로 연결하였다. 전체적으로 정제된 조형미에서 벗어난 흩어진 조형성을 보이나 통일신라 후반기 양식을 잘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곳 금용사(金龍寺)에 설치한 안내판에는 이렇게 적었다.
거창 양평리 석조여래입상(居昌 陽平里 石造如來立像)
보물 제377호
거창군 거창읍 양평리 479-1
화강암으로 만든 석가여래입상(釋迦如來立像)으로 전체 높이는 3.7m이고, 불상 높이는 2.75cm이다. 몸은 머리에 비해 약간 가늘어 보이지만 늘씬한 체격으로 세련된 조각과 전체적인 조화는 9세기 통일신라(統一新羅時代) 불상조각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둥근 얼굴에 뚜렷한 이목구비, 반쯤 뜬 두 눈과 입가의 미소는 부처의 자비(慈悲)를 느끼게 한다. 짧고 굵은 목에는 윤회(輪回)의 인과(因果)를 뜻하는 삼도(三道)를 선으로 새겼고 머리에 비해 약간 좁은 어깨 양쪽에는 대의(大衣)가 걸쳐 졌다. 대의 아래에 입은 긴 치마모양의 군의(裙衣)는 접힌 것 까지 표현 되었다. 오른손은 밑으로 내려 군의 자락을 쥐고 왼손은 집게 손가락을 곧게 폈다. 여래를 받치는 둥근 대좌에는 연꽃이 두텁게 조각 되었다. 머리 위의 천개(天蓋)는 근년에 올려 진 것이다.
불상 주위에 주춧돌과 기와조각들이 확인 되고 있어, 금양사(金陽寺) 또는 노혜사(老惠寺)가 있었다는 전승을 뒷받침하고 있다.





출처 및 참조
한국민족대백과사전-한국학중앙연구원
거창군사-군사편찬위원회(1997.6)/금창인쇄사
금용사 문화재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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