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봉수대

천부인권 2018. 12. 28. 07:53



2018.12.27. 서쪽 신기마을 입구에서 바라 본 안점봉수


2018년 12월 중 가장 추운 날이라는 기상청의 발표도 있었고 실제로도 손이 얼 정도로 차가운 날씨지만 먼 거리를 목격할 수 있는 맑은 날씨라 사천시 용현면 안점봉수대길 246(약수암)에 네비를 입력하고 사천 안점봉수(鞍岾烽燧)를 찾아 나섰다. 안점봉수는 1997년 12월 31일 경상남도 기념물 제175호로 지정된 문화재이다.
사천시 용현면 신복리 산 5에 위치한 안점봉수는 봉대산(烽臺山)의 정상부에 있으며 면적은 1,141㎡이다. 봉수대는 위도 35°02′22″N 경도 128°04′54″E에 위치하며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258m를 기록하고 GPS고도계는 283m라 기록 했다. 또한 이곳에는 두 개의 해발 고도를 적은 작은 안내판이 있는데 「그곳에 오르고 싶은 산, 준·희」는 281.4m라 기록하고 있고 「서울청산수 산악회」 역시 281.4m라 기록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경남지역봉수Ⅱ」에는 302m로 해발고도를 기록하고 있다.





2018.12.27. 약수암 전경


안점봉수대의 출발지는 약수암 입구에서 우측으로 등산로가 나있다. 등산로 입구에는 와룡산등산안내판과 흙털이 에어펌프가 있는 것으로 볼 때 등산객이 많은 곳으로 짐작된다. 목적지인 안점봉수는 이곳에서 직선거리로 500m정도 이며 높이는 수직으로 200m정도 된다. 약 100m정도 오를 때까지는 그리 가파르지 않았고 갈림길에 문인섭씨가 쓴 “하늘먼당”이라는 시가 한편 적혀 있다. 이곳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400m 오르면 봉대산의 정상이면서 안점봉수대가 위치한 곳이다.
안점봉수에서 남쪽으로 10.87km거리에 사천 각산봉수가 위치하고, 북쪽 진주방향으로 15.29km에 진주 망진산봉수가 위치하며, 서쪽으로 10.68km에 곤양 우산봉수가 위치한다. 연변봉수(沿邊烽燧)로는 마지막 지점으로 사천 각산봉수의 신호를 받아 내지봉수(內地烽燧)의 시작인 진주 망진산봉수에 응한다. 정상부의 주위에 나무들이 길게 자라 다른 곳의 봉수를 조망할 수는 없다.




약수암 옆 등산로 입구 풍경



등산로 100m 위 하늘먼당 비갈과 갈림길 표식



봉대산 정상부의 이름 없는 정자와 안점봉수대의 모습


조선 世宗 1년에 연변봉수(沿邊烽燧)와 내지봉수(內地烽燧)의 거화법(擧火法)이 오거법(五炬法)으로 세분됨으로써 조선시대 봉수 거화의 기준이 마련되었다. 5거법의 거화제도에 대해서는 『경국대전(經國大典)』과 『만기요람(萬機要覽)』 등에서도 일관된 내용을 유지하고 있다.
『世宗實錄』卷4 1年 5月 庚午條
「兵曹啓 前日各道烽火 今無事卽一擧 有事卽再擧 乞自今 倭賊在海中卽再擧 近境卽三擧 兵船與戰卽四擧 下陸卽五擧 與陸地賊變 在境外則再擧 近境則三擧 犯境則四擧 與戰則五擧 晝則代以煙氣 其不用心 觀望烽火干及所在官司 依律科罪上王從之」


같은 왕 4년에는 봉수가 있는 곳에 의거할 수 있는 보벽(堡壁)이 없어 적에게 약탈을 당하게 되므로 연대를 높이 쌓고 궁가(弓家)를 설치하여 화포(火砲)와 병기(兵器)를 두어 적변(賊變)을 간망(看望)할 것을 건의 하여 제도에 명하여 연대를 개축토록 했다.
『世宗實錄』卷17 4年 8月 癸卯條
「慶尙道水軍道安撫處置使啓 烽燧之處 無堡壁可據因此或爲賊所掠 法令雖嚴 人皆疑畏 不肯用心瞭望 請高 築煙臺 上設弓家 置火砲兵器 晝夜常在其上 看望賊變 從之 命諸道改築煙臺」

같은 해 12월에는 중국의 법전인 『당율(唐律)』과 『대명율(大明律)』 및 조선 전기의 법전인 『경제육전(經濟六典)』,『속육전(續六典)』등을 참조하여 조선 최초의 봉수제를 제정하였다.
『世宗實錄』 卷18 世宗 4年 潤12月 癸酉
 
동왕(同王) 29년(1447년)에 이르러 봉수대(烽燧臺) 축조규정이 정립되면서 조선 봉수제도의 확립을 보게 되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연변 봉대에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해 연대를 높이 쌓게 하였는데, 그 높이는 25척(7.5m), 둘레 70척(21m), 대 아래 쪽 사면을 각 30척(9m)으로 하였다. 그 외곽에 참호를 구축하였으며, 봉대의 상부에 가옥(仮屋)을 축조하여 병기(兵器)와 용수(用手), 화기(火器) 등을 보관하였다. 봉군의 상벌에 대한 규정이 있으며, 내지봉수는 연변 연대와 비할 바가 못 되므로 대를 구축하지 말고 전에 배설된 봉두에 연조만을 구축케 하였는데 위가 뾰족하고 아래가 큰데 그 형태는 모나거나 둥글다. 높이는 열자에 지나지 않으나, 담장을 둘러 악수(惡獸)를 피하게 하였다.
『世宗實錄』卷115, 29年 3月 丙寅條
「議政府據兵曹呈啓 沿邊煙臺造築之式 腹裏烽火排設之制及監考軍人勸勵完護之條 參酌廢鍊後錄 一.沿邊各 處煙臺造築 高二十五尺 圍七十尺臺下四面三十尺 外掘塹深廣十尺 又於坑塹外面 設木找長三拓 削皮銳上植 地廣十尺 臺上造仮屋藏兵器及朝夕供用手火器皿等物 看望人十日相遞守之 新舊間絶糧時 所在官及監司節制 使隨宜補乏 一. 監考勤謹者 每六年一次散官職除授 烽火海望人能告事變捕賊者 依續兵典叙用行賞 其餘各人 依船軍例計其到宿 差海1職 一ㅁ. 腹裏烽火非沿邊煙臺之比 勿築臺. 於在前排設峰頭 除地築煙竈 上尖下大 或方或圓 高不過十尺且繚以壇墻 以避惡獸 … 從之」




안점봉수의 방호벽과 혼축 기단시설 모습


안점봉수는 봉대산 정상부를 삭평하여 평편하게 고른 후 방호벽을 쌓았다. 둘레는 약 80.2m, 높이 1.3m, 폭 1m로 돌담장을 쌓았으며 봉두산에서 내려오는 동남쪽인 능선방향으로 약 70cm 정도의 입구를 만들었다. 비슷한 크기의 5개 연통은 서북방향으로 둥글게 배치하고 높이는 160cm 정도이다. 방호벽 내부에는 연통 외는 다른 시설이 존재하지 않는다. 방호벽 아래에는 0.3m의 토석 혼축 기단시설이 있는데 방호벽으로부터 2m 돌출되어 있으며 경사는 약 30°정도 이다. 동남쪽에는 계단 시설이 되어 있다.




동남쪽 능선부에서 본 안점봉수 출입문


세종실록 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나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의 기록을 보면 침지봉수(針枝烽燧)와 성황당봉수(城隍堂烽燧)의 기록이 등장한다. 이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을 보면 안점봉수(鞍岾烽燧)의 기록만 나온다. 이를 볼 때 사천현의 봉수들은 세종 때 봉수망의 정비를 할 때 두 개의 봉수는 폐기하고 안점봉수(鞍岾烽燧)로 합친 것으로 추정된다. 1872년 지방도에는 각산봉수와 안점봉수만 기록되어 있다.





이곳 안내판에는 사천 안점산봉수대(泗川 鞍岾山烽燧臺)의 기록을 이렇게 적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175호
사천시 용현면 신복리 산 5
봉수는 높은 산에 올라가서 밤에는 횃불[烽]로, 낮에는 연기[燧]로 급한 소식을 전하던 전통시대의 통신제도 이다. 이 제도는 외적의 침입을 알리는 군사적 목적에서 실시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기록상으로 고려 중기(12, 3세기)에 나타나지만, 실제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봉수제가 체계적으로 정비된 때는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던 고려 말기와 조선 초기 이후였다. 봉수대는 각각 일정한 거리를 두고 산꼭대기 중에서 시야가 확 트인 곳에 설치하였다. 그리하여 평시에는 하나의 불꽃이나 연기[一炬또는 一煙], 적이 바다에 나타나면 둘, 적이 해안에 근접해 오면 셋, 바다에서 적과 접전이 이루어지면 넷, 적이 육지에 상륙했을 경우에는 다섯 개의 불꽃이나 연기를 피워 올렸다.
고려시대에 설치되어 조선시대까지 사용되었던 이곳 봉수대는 조선시대 다섯 곳의 중심 봉수로 중에서 동래 다대포에서 시작하여 서울에 이르는 제2 봉수로에 속하였다. 지금은 흔적만 남은 이곳 봉수는 남쪽으로 각산 봉수대와 연결되어 있고, 북쪽으로 진주의 망진산 봉수대와 연결 되어 있다.




안점봉수 내부 모습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사천현(泗川縣)에 기록된 봉수는
[鞍岾烽燧 在縣南十五里南應晉州角山北應同州望晉山]
안점봉수는 현 남쪽 15리 지점에 있다. 남쪽으로는 진주 각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같은 주(州) 망진산에 응한다.





세종실록 지리지의 진주목 사천현에 따르면 [태백산사고본 54책 150권 32장 B면]
烽火二處, 針枝在縣南, 【南準晋州 角山鄕主山, 北準縣城隍堂】 城隍堂。 【北準晋州 望津山】
봉화가 2곳이니, 침지(針枝)는 현 남쪽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晉州) 각산향(角山鄕)의 주산(主山)에 응하고, 북쪽으로 본현 성황당(城隍堂)에 응한다.】 성황당(城隍堂) 【북쪽으로 진주(晉州) 망진산(望津山)에 응한다.】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¹⁾ 상주도(尙州道) 진주도(晉州道) 사천현(泗川縣)의 기록에는
針枝烽火在縣南十七里 許南望晋州任內角山鄕主山烽火相去二十六里一百十一步 北望縣城隍堂烽火相去十三里三百五十步 自城隍堂烽火比望晋州也望津山烽火相去十八里五十九步
침지봉화는 현 남쪽 17리에 있고, 남쪽 진주 임내 각산향의 주산봉화와 서로 통하며, 거리는 26리 111보이다. 현의 북쪽으로 성황당봉수와 서로 바라보며 거리는 13리 350보이다. 성황당봉화는 진주의 망진산봉화와 서로 바라보며 거리는 18리 59보이다.


【주석】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¹⁾ : 1425年(世宗 7)에 편찬된 慶尙道의 地理志는 하연(조선) 편[河演(朝鮮) 編]이 엮은 책이다.





곤양 우산봉수 방향


사천읍지(泗川邑誌 1899), 奎 10868,
鞍岾烽燧 在郡南十五里 南應晉州角山烽 北報同州望津烽相距四十里
안점봉수(鞍岾烽燧)는 군 남쪽 15리에 있다. 남쪽으로 진주 각산봉수에 응하고, 북으로 같은 주 망진봉수에 보고하며 서로의 거리는 40리이다




사천 선진리 왜성 모습


남해 납(원)산봉수

남해 설흘(소흘)산봉수

남해 미조 망운산봉수


남해 금산봉수


창선도 대방산봉수


사천 각산봉수


사천 안점산봉수

사천 우산봉수

 ⇔

 진주 망진산봉수



진주 광제산봉수 ⇔ 단성 입암산봉수 ⇔ 삼가 금성산봉수 ⇔ 합천 소현봉수 ⇔ 거창 금귀산봉수 ⇔ 거창 거말흘산봉수 ⇔ 상주 지례현 구산봉수




1872년 지방도


1872년 지방도에는 진주 각산봉수가 기록되어 있고, 안점봉수가 과장될 정도로 표현 하고 있다.


출처 및 참고

1872년 지방도-사천현

경남지역의 봉수Ⅱ-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2013.11.30.)/강순형
국역 신증동국여지승람Ⅳ-고전국역총서43/재단법인 민족문화추진회-32권(1971.2.20.)
조선시대의 연변봉수-김주홍(2010.11.5.)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 地理志)-태백산사고본 54책 150권 32장 B면
경상도지리지(慶尙道地理誌)-1425年(世宗 7)에 편찬된 慶尙道의 地理志는 하연(조선) 편[河演(朝鮮) 編]이 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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