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19. 2. 12. 07:34



2019.2.2. 진주강씨 은열공파 창원 입향조 모은재




2019.2.2. 진주강씨 은열공파 창원 입향조를 기리는 모은재


북면 내곡리 송촌마을은 최윤덕의 유허지 문제로 잘 알려진 곳이기도 하지만 진주강씨의 모은재(慕隱齋)와 밀양박씨의 모본재(慕本齋)가 있는 두 성씨의 집성촌이다. 특히 창원시 의창구 북면 내곡리 1036-2번지는 진주강씨 은열공파의 창원 입향조가 뿌리를 내린 곳으로 『창원 성씨의 역사』에 “창원의 입향지는 북면 내곡에 모은재가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어 찾게 된 경우이다. 모은재는 「진주강씨 은열공파 초당공 괴산파 내곡종중」의 파조인 강석문(姜錫文)의 묘표가 있는 곳이다.




모은재 외삼문에 붙어 있는 내은문 편액



모은재 전경




모은재 다섯 기둥 주련은 함안향교 전교를 지냈던 안명수가 지었고 모은재(慕隱齋), 내은문(乃隱門) 현판과 주련의 글씨는 석계(石溪) 허경무(許慶武)가 썼으며 서각은 부산 범일동 반야원 중(僧) 도안이 했다.

주련의 내용은 이러하다.


鳥革翬飛改築成  새가 날개를 펴나는 듯 장엄한 재실이 신축되었도다.
更看洞壑倍光生  우러러 보니 문중과 마을이 복되고 성스러운 빛으로 가득하구나.
千秋俎豆焚香處  긴 세월 세세손손 추모의 향불 피우는 곳.
百世羹墻獻酒觥  지난 일을 회상하며 조상을 영원히 기리고 존경하는 마음을 담아 음식과 맑은술을 따르니
崇祖尙門工役畢  조상을 숭배하고 문중을 번창케 하는 대역사를 이루었도다.





慕隱齋記
武陵山分一支 爲國士峯復南北圍 而屛列爲雙川 瀉出于兩山 環廻洞府而東流 川之上下村落相望總名曰乃谷 其點據最上 松籬竹簷隱映於雲林之際者 姜氏之世庄也 土腴泉洌 人淳俗厖 允合遯世子之棲息也 粤在 明陵之末 處士姜公諱錫文 自金官轉徙合浦 隱居行義于此間 自號曰 乃隱 耕樵爲樂 不求知於世 沒而衣履之藏 亦在 是鳥雲仍歲虔 香火無替 惟勤復就村 後之爽塏處 剏建五楹四架瓦 以乘之扁曰 慕隱齋盖寓慕乃隱之義也 胄孫東永君 以其諸父兄之命 謁余仧以記之 余曰 祖先者 子孫之本 而不可忘者也 人孰無祖能實心慕之者 盖尠矣 彼煥然之貞珉 翼然之棟宇 不過是外飾也 曷足 爲慕之實哉 惟其慕效祖先之德業名行 聿修而無忝 爲賢子孫之慕也 余聞姜氏之中葉 有草堂先生諱景叙 從學于佔畢齋金先生 爲一時推重 再傳 而松月堂諱暹際遇 聖明位至 六卿 其餘有 潛德趾美者 不可勝記 而蔚然 爲南鄕明族矣 乃隱公生于是家於 進取不無攀援之梯  而視軒冕 如浮雲 翩然遐遯 偃仰盤旋於泉聲嶽色之間 守分聽天 老死旡憫 其高尙之志 可與當世之役 役紅塵昏夜乞哀者同日 而語哉居是齋者湏仰體 乃祖之志孝友作家範書農爲世業 不馳念於浮名虛榮則是爲修齊之道 而處亂立命之方 亦不外 此乃隱公躬行 是道於當日 而貽于後昆 可不念哉 如使是齋 只作歲時齊宿之耶 而止 則實非所以盡命名之義也 諸君子勉之哉
丁未重陽月上旬 廣州 安鍾禧記
                       晉陽 姜錫殷書


丁未(1967) 광주(廣州) 안종희(安鍾禧 1896~1985) 찬(撰)






창원 내곡 입향조 내은 강석문의 묘포가 모은재에서 서쪽 직선거리로 약 230m에 위치하는데 비문의 전면에는 ‘내은처사진주강공지묘(乃隱處士晋州姜公之墓)’라 새기고 내용은 이렇게 기록했다.


乃隱處士晋州姜公之墓
公諱錫文字君擧號乃隱 姜氏系出晋陽高麗太師殷烈公民瞻其上祖也 屢傳至諱元佑牧使三傳 至諱景敘從佔畢齋金先生學 戊午禍流會寧 中宗改玉拜大司諫 贈禮曹參判時稱草堂先生再傳至 諱暹號松月堂行刑戶二曹判書是生 諱義虎文科佐郞 贈兵曹判書 封箐川君於公間 六世高祖 諱喜載號松軒贈參判 曾祖諱鐫祖諱晋雄諱寅俱潛德不仕 妣平壤趙氏輔女兵使伯連曾孫 公生顯廟壬午 卒甲午亨年六十三墓在昌原北面乃谷國士峯負辛之原 配靈山辛氏泰榮女柎公墓下生 一男始齋二女仁川李載玉玄風郭來儀之妻也 始齋生二男長旭次暎 女適昌寧曺喜鐸仁同張之泰 李載玉男東濱  公生簪纓古家泊然無進取意 自金海移禹合浦之大川 晩又愛乃谷園林泉石之美 遂隱居囂囂然樂於畎畝而 以沒世豈非古 所謂遯世無悶之君子歟 後孫世其志出而耕於野入 而孝於親蔚然樹立門戶 而見數於鄕中士族之列 莫非公遺模餘陰也 後孫方竪碣于羨道而 遣七世孫禎洙請 不侫以銘之辭不獲銘曰 維乃之谷泉甘土沃 碩人嘉遯永矢不告藝植陰德培壅來福于 以食報錫類昌熾載鏕貞珉我銘昭視
檀紀四千二百九十年丁酉三月 廣陵 安鍾禧 撰
                                           順興 安鼎元 書
八世孫 東洙 竪


내은처사진주강공지묘

공의 휘(諱)¹⁾는 석문(錫文)이고 자는 군거(君擧)이며 호는 내은(乃隱)이다. 진양강씨로 고려 태사 은열공 민첨이 중시조이다. 대를 이어 원우(元佑)는 정3품 문관이며 3대손 경서는 점필재 김종직선생에게 수학하였다. 무오사화에 연류 되어 회령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중종이 등극하자 풀려나와 대사간(大司諫)²⁾에 올랐고, 사후에는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증직되셨으며 세상은 초당선생(草堂先生)³⁾이라 칭했다.
섬(暹)의 호는 송월당(松月堂)이고 형조(刑曹)와 호조(戶曹)의 두 판서를 지냈다. 의호(義虎)는 문과좌랑이었고 사후 병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정천군(箐川君)에 봉해졌다. 공(公)과는 6세간이다. 고조인 희재(喜載)의 호는 송헌(松軒)으로 참판에 증직되었다. 증조(曾祖-아버지의 할아버지)이신 전조(鐫祖)·진웅(晋雄)·인구(寅俱)는 덕행을 가진 숨은 군자로 벼슬은 하지 않았다. 비(妣-돌아가신 어머니)는 평양조씨 병사 백련(伯連)의 증손 보(輔)의 딸이다. 공(公)이 현종 임오년(1642)에 출생하여 향년 63세인 갑오년(1705)에 돌아가셨다. 묘(墓)는 창원군 북면 내곡의 국사봉 아래 신좌(辛坐)이다. 배우자는 영산신씨 태영(泰榮)의 딸로서 공의 묘아래 묻히고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은 시재(始齋)요 딸은 인천 이재옥(李載玉) 현풍 곽래의(郭來儀)에게 출가했다. 시재(始齋)의 장남은 욱(旭)이고 차남은 영(暎)이며 딸은 창녕 조희탁(曺喜鐸) 인동 장지태(張之泰)의 처이다. 이재옥(李載玉)의 아들은 동빈(東濱)이다. 공(公)은 고관대작이 많이 배출되는 명가에서 자랐는데 성품이 정적이며 사색(思索)적이었다. 김해에 정착해 살다가 스스로 합포 대천(大川)으로 옮겼으며 늦게 산수를 좋아해 수목이 울창하고 미려한 내곡으로 다시 옮겨와 세상과 은거해 전답을 경작하면서 즐기면서 살았다. 어찌 평생 소망하던 예사로움이 아니겠는가. 시끄러운 세상을 피해 번민 없이 사는 군자의 일상이었다. 후손들은 대를 이어 그 뜻을 받들어 주경 야독하며 자손들이 효도 하는 번성한 집성촌의 문호를 이루고 있으며 고을에서 양반의 반열에 올랐다. 이는 공이 남긴 본보기의 공덕이다. 후손들이 묘비를 세우며 7세손 정수(禎洙)를 나에게 보내어 비문을 청하는데 부족한 글이라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비문을 작성 하게 되었다. 내곡의 샘물은 맛이 달고 땅은 기름져 큰 덕이 있는 사람이 세상을 피해 살면서 남에게 알려지지 않는 덕행(德行)을 기리고 베풀며 문예(文藝)를 뿌리 내리니 복과 재물이 늘어 날 소식이 오도다. 이 보답으로써 번창하고 성하여 왁자시껄 하게 실은 정민(貞珉)⁴⁾에 내가 새겨 분명히 밝혀 둔다.

단기 4290년 정유(1957) 3월 광릉 안종희(安鍾禧)가 글을 짓고
                                      순흥 안정원(安鼎元)이 글씨를 썼다.
8세손 동수(東洙)가 세우다.


【주석】
휘(諱)¹⁾ : 돌아가신 분의 이름을 높여 부르는 말.
대사간(大司諫)²⁾ : 조선시대 왕에 대한 간쟁을 맡은 사간원의 장관으로 정3품 당상관직.  대간(大諫) 또는 간장(諫長)이라고도 하였다. 국왕에 대한 간쟁(諫諍)을 맡은 사간원은 사헌부와 더불어 양사(兩司)라 불리는 언론기관이다. 여기에 속한 관원은 문과출신의 명망 있는 인물이 아니면 임명될 수 없었다.
초당선생(草堂先生)³⁾ : 선생의 불려 진 이름에 연유하여 초당공파(草堂公派)의 파조가 된다.
정민(貞珉)⁴⁾ : 아름답고 단단한 돌을 뜻하지만 음덕을 새긴 비석을 의미한다.


출처 및 참조
창원 성씨의 역사-성균관유도회창원지부/금창인쇄사(2009.3)
근파문집-안종희

사업자 정보 표시
| | | 사업자 등록번호 : -- | TEL : -- | 사이버몰의 이용약관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