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19. 12. 15. 20:41


2019.12.13 창원시 사파정동 추원재 전경


성산구 사파동 111-7번지는 소산 김기호(小山 金琦浩;1822~1902)를 모시는 추원재(追遠齋)가 있다. 소산의 자(字)는 문범(文範)이고 김녕인(金寧人)으로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의 13세손이다. 백촌이 정변을 당함에 아들 인석(仁錫)이 아들 덕지(德知)와 군위(軍威)에 피신해 살았는데 덕지의 아들 정무(鼎武)가 창원에 와서 정착함으로써 그 후손들이 창원에서 세거(世居)하게 되었다. 소산의 아버지는 성철(聖哲)이고 어머니는 김해김씨 하윤(夏潤)의 따님으로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는데 소산은 둘째이다.
손자 용복(溶馥;1859~1932)이 지은 가장(家狀)에 소산은 팔세에 사파정리에 살았던 박정홍(朴定弘)에게 효경과 소학을 배웠고 자라서 정재 주희경(靜齋 周熙敬)을 찾아가 학문을 물었다. 부친의 명으로 과거공부에 힘을 써서 과장(科場)에서 명성을 떨쳤으나 부모의 상을 당한 후 과거에 뜻을 접고 학문에 전념했다. 40대 전후로 요천시사(樂川詩社)를 결성 했으며 소산재(小山齋)를 지어 문인을 가르쳤다. 그러던 중 44세에 김해부사로 부임한 성재(性齋)선생을 찾아  뵙고 그 문하에 집지(執贄)함으로써 성재문도가 되었다. 소산재(小山齋)를 중심으로 강학하다가 여든 한 살의 일기로 세상을 마쳤다.
추원재(追遠齋)은 솟을대문인 진덕문(進德門)과 본당인 추원재(追遠齋)를 비롯하여 뒤편에 관리사가 있으며 대문 앞에는 ‘소산 김선생 유허비’가 있다.



2019.12.13 추원재 대문 진덕문 전경



진덕문(進德門) 편액


솟을대문인 진덕문(進德門)은 ‘덕(德)으로 나아가는 문’이라는 뜻으로 편액의 글은 소암 현중화(素菴 玄中和;1907~1997)가 쓴 것이다.




사파정동 추원재 전경



추원재 追遠齋 편액


본당인 추원재(追遠齋) 편액은 <논어(論語) 학이(學而)>에 “증자가 말하길 부모의 상에 슬픔을 다하고 조상의 제사를 정성스럽게 모시면 사람들의 덕성이 한결 후해질 것이다.[曾子曰, 愼終追遠, 民德歸厚矣]”라고 한 것에서 따온 것이다.
추원재(追遠齋) 편액의 글씨는 제주도 서귀포 출신의 소암 현중화(素菴 玄中和;1907~1997)가 쓴 것으로 서예와 시화로 이름을 남겼으며 초서에 업적을 남겼다. 조범산방주인(眺帆山房主人)으로 지방 서예의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로 1969년 제주도문화상, 1991년 서귀포시민상(예술부문), 1997년 광주광역시 주관의 의재 허백련 미술상을 수상했다.




추원재(追遠齋)의 주련에는 이처럼 글귀가 걸려 있다.


造往知禮 爲學日益  예를 알고 나아가 예를 행하니 학문이 날로 더 해지네
樂天安命 于人無求  천명을 따라 편안히 즐기니 남에게 구할 바가 없구나.
遊觀文史 大義克明  두루 문과 사를 살피니 대의가 극명 하네
一德東風 敎行天下  덕이 성현의 풍류와 같으니 가르침이 온 세상에 행해지네.
秉禮受福 及于子孫  예를 지켜 복을 받으니 자손에 미치도다.




追遠齋創建記
昌原之 東南方 有村曰 沙巴丁 有飛音靈岳 雄鎭于東 長福一支 蟠踞于南 眼界夾然 使人散慮怡神 可謂名區之址也 此則 金寧金氏之世莊而 皆是通德郞 諱鼎武公之後也 其先系 出新羅大輔公諱閼智而 傳于三十五世 文烈公諱時興 高麗仁宗朝以平章事 封金寧君 後孫仍爲貫焉 歷世軒冕不絶子孫蕃衍 遂爲我邦名族矣 傳至九世忠毅公白村諱文起 殉于莊陵士禍與死六臣忠節赫世而 公之曾孫諱鼎武公 自慶北慈仁移于昌原 是爲入鄕之祖也.
再傳諱進淡 贈嘉善大夫 則爲沙巴丁金寧金氏之派祖也 傳至八世農菴公諱琦澤 以孝友推于鄕 其弟小山公諱琦浩受學于文憲公許性齋門 文行鳴世 公年不惑辛酉築小山齋 而敎誨鄕俊就徒甚衆矣. 詩文遺著傳於世 今當新構齋舍之由則 小山公之歿後四十年壬午其從孫諱溶球曾孫諱載根 兩公合謀 毁舊齋而 里之上麓更規重建而 改編曰小山書堂 東齋曰文獻巖 西齋曰地山 門曰進德 始十有一年告落焉 至往年庚寅 公之玄孫德齋公諱烔滿 繼襲于先旨 而創建南中學校 蒙後生修者萬餘 庭竪頌德碑 而以遺後矣 往在丁卯以唐市宅地造成令 是當及先塋墓域若近萬坪沒入市用地 故不得已毁堂而以補償金 移建于此而 更爲改編曰追遠 仍移先塋 其餘資設于獎學 會及養老福祉事業等 皆啓後厚老之旨也 於戱其裔不賢則 能若是乎 是役則 營始于壬申春 而工訖於癸酉之夏 可謂不日成之也 正堂四間文廟三間 其制足以爲歲薦齋明會族敦睦之兩所 扁曰追遠齋門曰進德 盖取慕先修德之義也 近世時流 難爲墓祭故 世皆設齋薦享不可謂害義矣 今金氏之斯齋 亦自鼎武公以下累世先祖之時祭薦于此齋 言豈不宜乎 時者也哉 必也 先靈洋洋如陟降于斯矣 日其後孫烔甲甫知舊之緣訪余請記 余以不文辭而 不獲矣 竊惟水無源則流長 木無根則無葉茂 是天道之常也 記曰先有美而不知不明也 知而不傳不仁也 公之後孫可謂盡明仁之孝誠也 今金氏之區役實爲報本穆宗之美也 爲其子孫者益可勉勵不墜遺規則 顯額益光而 祖先之靈亦不悅豫乎 是役也主幹者烔守烔甲 董役者尙圭成圭是爲之記
歲檀紀四三二七年 甲戌 立夏節
金海 許宗業 謹記


추원재창건기(追遠齋創建記)
창원시청 동남쪽에 사파정(沙巴丁)이라는 마을이 있다. 비음산(飛音山,510m) 영봉이 동으로 높이 둘러싸고 장복산(長福山,582m) 지맥이 남쪽으로 도사리고 앉으니 안계가 협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걱정을 들고 심신을 즐겁게 하는 명지라 할만하다. 이곳이 김녕김씨가 대대로 살던 고장이니 모두가 통덕랑 휘 정무공(鼎武公)의 후예이다. 그 선대는 신라 대보공(大輔公) 휘 알지(閼智)요 35세로 전하여 문열공(文烈公) 휘 시흥(時興)은 고려 인종조의 평장사로서 김녕군에 책봉되니 이에 본관을 김녕(金寧, 지금의 김해)이라 하였다. 역대로 높은 벼슬이 부절하고 자손이 번성하니 명족이 되었다. 9세로 내려와 충의공 백촌선생 휘 문기(文起)는 단종사화 때 순절하니 사육신(死六臣)과 더불어 그 충절이 세상에 혁혁하였다. 공의 증손 휘 정무공(鼎武公)께서는 경북 자인(慈仁)에서 이곳 창원(昌原)으로 옮겨오니 이분이 창원 입향조 이시다. 다시 2세로 내려와서 휘 진담(進淡)은 증가선대부하여 즉 사파정 김녕김씨의 파조이시다. 다시 8세로 내려와 농암공 휘 기택(琦澤)은 효(孝)와 우(友)로서 추앙을 받았고 아우 소산공 휘 기호(琦浩)는 문헌공 허성재(許性齋) 문하에서 수학하여 문행이 당세에 드러났다. 공의 나이 40에 소산재(小山齋)를 지어 고을의 준재들을 가르치니 취학자가 매우 많았도다. 시문저서가 오늘날까지 남겨 전해지고 있다. 금에 새로이 재실을 짓게 된 것은 소산공(小山公)께서 돌아가신지 40년에 종손 휘 용구(溶球)와 증손 재근(載根) 양공께서 상의햐여 구재(舊齋)를 헐고 마을 위 산기슭에 그 규모를 크게 하여 다시지어 현판을 소산서당(小山書堂)이라 고처 달고 동에 문헌암(文獻巖), 서에 지산재(地山齋), 문을 진덕문(進德門)이라 하였으니 11년만에 낙성하였다. 지난 경인년에 이르러 공의 현손 덕재공 휘 형만(烔滿)이 소산공의 뜻을 이어 남면중학교를 창설하여 후생을 가르치니 수학한자 만여명이요 교정에 송덕비를 세워 후세에 남겼다. 지난 정묘(1987)년 당시의 택지 조성령으로 서당과 선영의 묘역 만여평이 모두 시용지로 들어감으로 부득이 당을 헐고 그 보상금으로 이 재사를 이곳에 옮겨짓고 재호를 추원(追遠)이라 고쳐 달고 선영도 옮겼다. 그 나머지 자금으로 장학회 및 양로 복지사업 등을 설립하였으니 이 모두가 후손들을 기르고 늙은이를 후하게 받드는 뜻이다. 그 후손들이 현철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있겠는가. 이 역사인즉 1992년 2월 봄에 시작하여 익년 계유(癸酉) 여름에 마쳤으니 가위 불일성지(不日成之)라 하겠도다. 정당이 4칸이요 문량이 3칸이니 그 규모가 제를 드리고 재계하고 종족이 모여 돈목하는 장소로 족할 것이로다. 재를 추원이라 하고 문을 진덕이라 함은 선조를 추모하고 나아가 덕을 닦아라는 뜻을 취한 것이다. 근세의 시류가 모제를 지내기가 어렵게 된 고로 세상이 다 제사를 지어 천향(薦享)을 드리니 가이 의를 해친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김씨들의 재실도 또한 정무공(鼎武公) 이하 누대선조들의 시제를 이 재실에서 모신다고 말하니 어찌 시대에 맞지 않는 일이라 하겠는가. 이러하니 반드시 선령께서 즐거이 이 재실에 오르내릴 것이로다.
지난 어느 날 그 후손인 형갑(佑堂)씨가 지구의 인연으로 나를 찾아와서 기문을 청할 새 내가 그만한 글이 못된다고 사양했으나 끝내 거절치 못하고 붓을 들었다. 생각건대 물은 근원이 없으면 흐름이 길지 못하고 나무는 뿌리가 없으면 잎이 무성하지 못함은 자손의 불인함이라 하였다. 공의 후손들은 가이 명과 인을 다했다 이르리라 오늘 김씨들의 이 큰 역사는 실로 뿌리에 보답하고 종족끼리 화목 하는 아름다운 역사라 하겠도다. 그 자손 된 자는 더욱 힘써서 조상이 남긴 규범을 떨어뜨리지 않았으며 추원재의 현액(顯額)이 더욱 빛날 것이고 조상의 영령이 기쁘하지 않겠는가. 이 역사를 주간한 이는 형수(烔守) 형갑(烔甲)이고 감역한 이는 상규(尙圭) 성규(成圭)라 이로서 기(記)로 한다.
단기 4327년 갑술 입하절 (1994)
김해 허종업(許宗業) 삼가 쓰다.



소산서당 小山書堂 편액


창원 지역의 독립운동가 백당 정기헌(白堂 鄭基憲 : 1886~1956)선생의 글씨이다

소산서당은 1861(辛酉)년에 비음산 아래 창건하여 소산재(小山齎)라 이름 하였으며 1892(壬辰)년에 소산 아래로 이건하였고 소산선생의 사후 1952년 증손 근재께서 10년에 걸쳐 동네 앞에 옮겨 지었다. 그 때 소산서당으로 현판을 고쳤다.




小山書堂重創記
小山先生金公 隱居講學于檜山之陽 其巷西有曰小山齋 以處來學而且以爲晩暮藏修之所者也 齋之南有小岡聳翠 頂平如衡 每起居相對 齋之得明曁 公之所嘗爲號者皆以之也 鄕省知己 如金晩休 許后山 趙一山 諸賢俱爲文 以記之及 公之世遠矣 而墟荒齋廢人文俱非昔日矣 公之曾孫載根 與其再從叔父溶球君 嘗慨然于斯 往在壬午冬 函圖其重新 就西畔數十武相地 與小岡相對則一也 乃拓址董功役未竣 而溶球君不測間經離亂紛 役殆難得 以有終載根又復殫厥誠力 堂室廚庖次第粧繕 可以處主賓 可以資絃誦因署 其東楣曰文軒巖 西楣曰地山齋 門曰進德門 合而名之曰小山書堂 經紀十有一年 始克告成 載根屢造余請記 其事甚勤 以我先君昆季與公有同門講磨之舊也 余惟小山命名之義 諸賢之述備矣 無已則有一說可復者 公以忠信近道之資 親炙於我冷泉先生之門得聞 星湖順庵以來相傳心學之要 以究極乎 退道之正詮 篤信而實踐至 其晩年再登鄕薦然非公所屑止 竟貪賤以終 抑古之君子事有可以曷嘗舍大而取小哉 惟視其義之當否而已 如非其義 雖與之以天下之大必不爲矣 是以退陶夫子以王佐之學 爲吾邦集成之大宗師而一生 恬退安其巖棲之小規 星湖先生以上智之資 有大有 爲之識以終身不仕樂其三豆之小會 以是言之則 公之當日亂邦處 義其貧且賤焉固也 於公何恥之 有今是堂也翬革於頻年 兵燹之餘 可謂幸矣 然管是堂者體公遺志 須大 其志而小其心以俟天下之淸 則安知後日儒運之環復不以是堂之復起 爲之兆也哉 是爲記
壬辰端午日 凝川 朴正善 謹記


소산서당중건기(小山書堂重建記)  
소산선생께서 회산의 남쪽에 은거하시면서 강학하셨는데 그 서쪽에 소산재(小山齋)가 있었다. 이곳에서 배우려는 사람을 맞이하고 만년에 수양 처로 삼았다. 재실의 남쪽에 작은 산이 푸르게 솟아있고 정상은 평평하여 매일 일어나 서로 상대하였다. 재실의 이름을 소산재(小山齋)라 하고 공의 호(號) 또한 소산(小山)이라 불렀다. 같은 고을에 김만휴(金晩休) 허후산(許后山) 조일산(趙一山) 같은 제현들이 이러한 일을 기록하였다. 공이 살던 시대가 멀어져 가니 유허와 재실은 황폐해 지고 인문도 옛날의 모습을 잃어가고 있었다. 공의 증손 재근(載根)과 그의 재종 숙부인 용구(溶球)께서 일찍이 이 일을 개탄하여 임오년(壬午年) 겨울에 새로이 중창할 것을 도모하여 서쪽으로 수십무(數十武)의 터를 잡았는데 이 또한 소산과 마주보는 곳이라 이에 땅을 고루어 공역이 준공되기 전에 용구(溶球)께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어 공역이 어렵게 되었으나 재근(載根)이 성력을 다하여 당실과 부엌을 차례로 꾸미니 주빈(主賓)이 거처할 수 있고 현송(絃誦)¹⁾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쪽 채는 문헌암(文軒巖), 서쪽 채는 지산재(地山齋), 대문은 진덕문(進德門), 합하여 소산서당(小山書堂)이라고 이름 하였다. 11년 만에 일이 이루어짐을 알리며 재근(載根)이 여러 번 나를 찾아와 기문(記文)을 청하였는데 그것은 나의 선군께서 소산공(小山公)과 형 아우 하는 관계이며 또한 동문수학한 구우(舊友)였다. 내가 생각하기로 소산이라 명한 뜻은 이미 제현께서 술한바 있으나 일설을 가함은 공께서 충신하고 또 근도(近道)한 자품(資品)으로 몸소 우리 냉천선생(冷泉先生)의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아 성호 순암 이래로 상전하는 심학의 요체를 배우고 퇴계(退溪)의 정전을 습득 독신하고 실천하였다. 만년에 이르러 두 번 거듭하여 향천(鄕薦)²⁾에 올랐지만 공께서 달가워하는바가 아닌지라 끝내 빈천으로 세상을 마쳤다. 돌이켜 생각건대 재 옛 군자의 일이 일찍이 큰 것을 버리고 작은 것을 취하겠는가. 오직 의(義)이냐 아니냐를 가릴 뿐이며 만일 의가 아니면 천하의 큰 것을 준다하여도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을 가지고 퇴계선생은 왕을 보좌하는 학문으로 집성의 대종사가 되었으나 일생 염퇴(恬退)³⁾하여 은둔생활을 편안히 여겼고 성호선생(星湖先生)은 상지의 자질로서 나라에 쓸 큰 지식을 가지고서도 종신 벼슬을 하지 않았으면서 삼두(三豆)⁴⁾의 훈장직을 즐겼었다. 이것으로 공께서 어려운 시기에 빈천한 것이 당연한 의가 아니겠는가. 어찌 부끄러움이 되겠는가. 이 서당은 많은 변화와 병화에도 잘 보존되어 참으로 다행이다. 그러니 이 당을 관리하는 자는 몸소 공의 유지를 크게 받들어 그 뜻을 겸허히 받아 천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리면 후일 유훈이 되살아날 조짐이 이 집을 지을 때 이미 나타난 것이라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이에 적어 둔다.
임진년(1952) 단오일 응천 박정선(朴正善)⁵⁾ 삼가 쓰다.


【주석】
현송(絃誦)¹⁾ : '거문고를 타면서 시를 읊음'을 뜻하나 여기서는 '곧 학문을 닦음을 이르는 말.'
향천(鄕薦)²⁾ : 고을 선비들이 연명으로 나라에 벼슬자리를 천거하는 일.
염퇴(恬退)³⁾ : 명예(名譽)나 이익(利益)을 좇을 마음이 없어 벼슬을 내놓고 물러남
삼두(三豆)⁴⁾ : 녹두와 팥과 검정콩을 의미하고, 콩 세말을 받는 대우이다.
박정선(朴正善 1879~1956)⁵⁾ : 경남 산청의 유학자. 1919년 3월 곽종석(郭鍾錫)·장석영(張錫英)·김창숙(金昌淑) 등의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巴里講和會議)에 독립을 청원하기 위해 작성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서명 날인하였다. 3·1운동 직후 김창숙은 유림을 중심으로 한 국제활동을 추진하였다. 또한 곽종석 등도 전국적으로 3·1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호응하여 경남·북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 승인 청원서를 보내기로 계획하였다. 제1차 유림단 운동 또는 파리장서 운동으로 불리는 이 운동은 3·1운동 때 민족대표로 동참하지 못했던 유림 137명이 서명함으로써 명실상부한 민족대연합전선을 완성하게 되었다. 또한 국제사회에 한국의 독립 의지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으며, 유림계에도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부에서는 박정선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추원재의 동쪽 방문에 붙은 문암헌 文獻巖 편액은 백당선생의 글이다.




小山齋 原韻
小山山下築吾亭 소산 산 아래 정자를 지은 것은
爲愛文山特地靑 문산을 사랑함과 푸르기 때문이요.
夜靜高開明月戶 고요한 밤 높은 창으로 달빛 들어오고
春來閒掃洛花庭 봄이 오면 정원에 낙화를 쓸어 내내
荒田未學先人稼 선인의 농사를 못 배워 밭은 거칠어졌고
短架空留古聖經 시렁에는 할 일없는 옛 성경이 꽂혀있네.
惟有蒼天頭上在 푸른 하늘이 머리 위에 있으니
一心恒畏自卑聽 항상 두려운 마음으로 스스로 나추세.
小山


*소산선생이 1832년 소산 아래로 소산재를 이건하면서 쓴 시이다.
*원운(原韻) : 처음 쓰는 시(詩)





次小山齋晬宴 並序
人道莫大於孝 親存而善事親 孝之始也 沒而不忘親 孝之終也 孝有終始 可謂能子矣 吾黨有金生琦浩者 天性至孝年及嗜艾誠意如一 當其生歲之回甲不勝哀慕是年壬午九月其先府君之生朝 享用殷奠仍以餕餘饗賓 蓋略倣家禮祭禰之儀 及丘氏 『生旣有慶沒寧敢忘』之祝 云禮所言事死如生者是耳 余聞而有感於心追和其祀饗之詩韻
性齋老人 稿


차소산재수연 병서(次小山齋晬宴 並序)
사람의 길은 효도보다 더 큰 것이 없다. 어버이가 살아 계실 때 잘 섬기는 것이 효의 시작이요 어버이가 죽은 뒤 잊지 않는 것이 효의 끝이다. 이와 같이 효의 시작과 끝이 있으면 자식의 도리를 다하였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당에 김기호(金琦浩)군이 있는데 천성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나이 60이 넘어서도 그 성의가 한결 같았는데 회갑을 당하여 어버이를 사모하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여 이 해 9월에 그의 선고 생신 아침에 은전(殷奠)으로 제사를 지내고 그 남은 음식으로 손님을 대접했다. 대개 주자가례에 계추에 부모에게 제사 지낸다는 의식과 구씨(丘氏)의 『살아계실 때 찬치 날을 돌아가셨다고 어찌 감히 잊겠습니까!』라고 한 축문을 본떠 한 것이라 한다. 여기에 말한바 죽은 이 섬기기를 산 사람처럼 섬긴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느낀바가 있어 그 제사와 향연의 시운에 화답한다.
성재노인(性齋老人) 짓다.


*기애(嗜艾) : 50~60세
*은전(殷奠) : 넉넉한 제물(祭物). 풍부(豐富)한 제물(祭物)
*준여(餕餘) : 제사(祭祀)를 물리고 난 후의 음식(飮食)
*가례(家禮) : 주자가례(朱子家禮)
*제이지의(祭禰之儀) : 주자가례에 계추에 부모에게 제사지내는 의식
*구씨(丘氏) : 명나라 사람
*성재노인(性齋老人) : 허전(許傳;1797~1886) 본관은 양천. 자는 이로, 호는 성재. 아버지는 정언 형(珩)이다. 안정복(安鼎福)에게서 이익(李瀷)의 학문을 사숙한 황덕길의 문인이다.
1835년(헌종 1)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1840년 기린도찰방을 거쳐 전적·지평·정언·이조좌랑 등을 역임했다. 1847년 함평현감으로 나갔다가 1850년(철종 1) 홍문관교리·경연시독관·춘추관기사관이 되었다.
1860년 병조참의가 되었으며, 1862년 삼남을 중심으로 전국적인 농민항쟁이 일어나자 조세 및 토지제도의 전면적 개혁을 통해 농민항쟁을 근본적으로 수습하려는 〈삼정책 三政策〉을 올렸다. 1864년(고종 1) 김해도호부사로 부임하여 향음주례를 행하고 향약을 강론했으며 유림을 모아 직접 교육을 하기도 했다. 그뒤 동지의금부사·한성부좌윤·예문관제학·이조판서 등을 역임하고 판돈녕부사에 이르렀다.




追遠齋告成 原韻
聳立新齋古里天 옛 마을에 새로운 재실이 우뚝 솟으니
增光日月起祥烟 일월도 빛을 더하여 상스러운 기운 일어나네.
敦和後裔論情席 후손을 화목하게 정을 논하는 자리라
崇慕先賢俎豆筵 조상을 숭모하는 제사의 자리이네.
兵嶽精靈溱欖外 정병산 정령은 헌함밖에 모이고
洛江淑氣凝門前 낙동강 맑은 기운 문 앞에 어리었네.
雲仍謹飭修庭訓 여러 자손 삼가고 경계하여 가훈을 닦아
承襲弓裘矢永傳 조상의 세업을 영원토록 전하세.
後孫 石圭 謹稿


*추원재고성(追遠齋告成) : ‘추원재고성 원운’은 후손 석규(石圭)가 추원재를 소산 아래로 이건하면서 쓴 시이다.
*고성(告成) : 성사를 알림
*용립(聳立) : 우뚝 솟은 모양
*조두(俎豆) : 제사에 쓰는 제기
*운잉(雲仍) : 먼 후손
*근칙(謹飭) : 삼가고 경계함.
*정훈(庭訓) : 식구교육
*궁구(弓裘) : 세업(世業)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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