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20. 6. 21. 06:37

2018.3.16. 성균관 향관청享官廳을 남쪽에서 본 모습


향관청享官廳은 1474년 대사성 성현(成俔)이 경연 때 임금께 아뢰어 창건한 건물로 문묘(文廟) 향사(享祀) 때 헌관(獻官) 및 제집사(諸執事)들이 거처하며 심신을 청재(淸齋)하는 장소이다. 당시 뜰 아래에 동서월랑(東西月廊)이 있었으며, 그 아래로 포주(庖廚)가 있었다. 1966년에 파괴된 동서월랑과 포주는 1986년 문화재관리국의 보조로 동서월랑만 중건되어 전한다.

 

2018.3.16. 성균관 향관청享官廳 본청

享官廳記-洪貴達
成均館。古無有享官廳。前大司成成公俔。爲特進官。嘗於經筵啓曰。國朝禮先聖先師。歲用春秋之仲月。用朔望享祀惟謹。顧惟獻官諸執事淸齋之無其所也。當祭時。率假寓於東西齋。其齋之學生亦執事者。面無所容。乃移寓於館奴之家。有乖潔淨禋祀之義。乞於隙地。別構一廳。以爲享官齋所。上曰可。其與繕工提調。相地經營之。於是繕工提調臣韓致亨鄭文炯,同知館事廣川君李克增曁臣成俔。乃相正錄廳之北尊經閣東北隅之間地曰。是可著一廳事而有餘矣。厥旣得地。又定其制。則南面四間之巍然高大而前後有退。東西有房者。獻官廳也。東西廊之各六間皆有退。不高不低。便於寢食者。監察執事廳也。虛其中。夷而庭之。垣以繚其外。門於東西南。以通出入。東廊之東。又有五間低。且小者。其庖廚也。乃圖其間架制度而上之。且啓曰。顧材之難得。乞用館奴婢身貢買辦。若夫工匠也。器物也。蓋瓦也。與夫供役軍夫。督役使令。宜令該司。各量其所需。以備應用。兼使本館司成。曰安彭命,朴衡文。直講。曰權俱,金係行。正錄。曰金鏗壽,尹金孫董其役。敎曰。惟所啓。旣役數月。而功已訖。凡措置規模。啓稟節目。督勵成就之功。皆廣川爲之也。若貴達。雖備員館職。顧袖手而傍觀耳。猶且樂其成也。乃復於廣川曰。三代禮樂。至周而備。而周家制度。復大成於周公之手。吾東方。號稱海外鄒魯之邦。而三國以至高麗。其禮樂文物。蓋有所不暇也。至我朝。始大備焉。而今上卽位。心周孔顏孟之學。講求墜典而歷擧之。又有同心一德之臣。相與左右輔翼之。故典禮文物。至聖朝復大備焉。若躬釋奠。給學田。樽罍之賜。米布之齎。大酺師生。則僅聞於往昔。未遑於近代。而乃出自宸衷創行之。苟不固聰明聖知卓千古者。其孰能之。若乃文廟有典祀廳。則高靈申相國實唱之。館中有尊經閣。則上黨韓相公實創焉。至於五聖十哲之祭有饌卓。座有交倚。位板有匱。享官有廳。則非公立志之篤。其誰宜爲。是不可泯沒其迹。眯後人之目。盍倩大手而文之。公曰。吾何敢當子之云耶。雖然。無已而必記之。則子其無讓。乃退而書其言。以爲記。

 

향관청기 享官廳記
옛날에는 성균관에 향관청享官廳이 없었는데 전 대사성 성현成俔¹⁾이 특진관이 되어 일찍이 임금을 모시고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국조에서 선성先聖과 선사先師를 예로 받들어 일년 가운데 춘추의 중월仲月(음력 2월과 8월)을 택하고 매 달을 삭망을 택하여 지극한 정성으로 제사를 받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만 헌관獻官²⁾과 여러 집사執事³⁾가 재계할 장소가 없어서 제사를 지내게 될 때마다 모두 동·서재에 임시로 머무르게 됩니다. 그런데 동·서재의 학생 또한 집사 때문에 마땅히 있을 곳이 없어 이에 관노의 집으로 옮겨 우거寓居하게 되어 정결하게 제사 지내고자 하는 뜻과 어긋남이 있으니 바라건대 빈터를 찾아 따로 한 채의 집을 지어 향관享官이 거처 하는 장소를 삼게 하소서.”
그러자 전하께서는 “옳다. 선공제조繕工提調와 더불어 터를 살펴 건물을 짓도록 하라.”고 하셨다. 이에 선공제조 신 한치향韓致亨 정문형鄭文炯과 동지관사 광천군廣川君 이극중李克增 및 신 성현成俔이 곧바로 정록청正錄廳의 북쪽과 존경각尊經閣의 동북쪽 사이의 땅을 살펴보고서 “이곳이면 한 채의 청사를 짓고도 넉넉하겠다.”하였다. 그리고 터를 정하고 나서 또한 그 청의 규모를 정하였으니 남향의 네 칸은 우뚝 솟아 높고 크며 앞뒤로 퇴退가 있고 동서로 방房이 있는 집이 헌관청獻官廳이고 동·서랑東·西廊의 각 6칸에는 모두 뒤에 퇴가 있으며 높거나 낮지도 아니하면서 먹고 자기에 편한 집이 감찰집사청察執事廳이다. 그 가운데 빈땅을 다듬어 평탄하게하여 뜰을 만들고 담을 쌓아 그 밖을 둘렀으며 동쪽, 서쪽, 남쪽으로 문을 만들어 출입하는데 편하게 하였다. 그리고 동랑東廊의 동쪽에 또 5칸의 낮고 작은 집능 지으니 부엌이다. 이와 같이 건물의 제도를 그려 올리며 아뢰었다.
“자재를 얻기 어려우니 바라건대 관의 노비를 부려 자재를 사들이는 일을 하게 하고 이 밖에 공장·기물·기와와 그리고 공사에 동원할 군부軍夫와 공사를 감독할 사령使令은 마땅히 해당 관사官司에 명하여 각각 그 필요한 바를 헤아려 쓰임에 대비하게 하며 아울러 본관 사성 안팽명安彭命 박행문朴衡文 직강 권구權俱 김계행金係行 정록 김갱수金鏗壽 윤금손尹金孫으로 하여금 공사를 감독하게 하소서.” 이에 전하께서 말한 대로 하라고 하교하셨다.
공사를 시작한지 두어 달 만에 건물을 완성하고 나니 모든 조치의 규모와 아뢰는 절목 그리고 독려하여 성취한 성과는 모두 광천廣川(이극중)이 한 것이고 본인 귀달貴達 같은 사람은 비록 이름은 본관의 직원에 들어 있지만 팔짱을 끼고 옆에서 관람하였을 뿐이다.
그래도 오히려 일을 이룬 것을 기뻐하며 관천에게 이렇게 말했다. “삼대三代의 예악禮樂이 주나라에 이르러 비로소 크게 구비하게 되었지만 주나라의 제도는 주공의 손에서 다시 크게 이루어졌다. 우리 동방은 해외의 추노의 나라로 호칭되고 있으나 삼국으로부터 고려에 이르기 까지는 예악과 문물이 대체로 미비한 바가 있었는데 우리 조선에 이르러서 비로소 크게 구비하게 되었다. 오늘날 임금이 즉위한 후 마음이 공자 안자 맹자 주자의 학문에 두루 미치어 실추한 전법典法을 강구하여 일일이 들어 시행하였고 여기에 또한 마음과 덕을 함께하는 신하가 있어 서로 더불어 좌우에서 보좌하였다. 이러한 연고로 전례典禮와 문물文物이 성조聖朝에 이르러 다시 크게 갖추어지게 되었다. 몸소 석전례釋奠禮를 행하고 학전學田을 공급하며 술과 쌀과 포를 하사하고 학생과 선생을 위하여 크게 잔치를 베푸는 일 등과 같은 지난날에 겨우 들었을 뿐 근래에는 들을 수가 없었던 일들인데, 성상의 애심에서 이러한 뜻이 우러나 실행하게 되었으니 진실로 총명하고 성지聖知함이 천고千古에 탁월한 사람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실행할 수 있겠는가.
문묘에 전사청이 있게 된 것은 고령高靈 신숙주申叔舟가 주창하여 지은 것이고 성균관 안쪽에 존경각이 있게 된 것은 상당上黨 한명회韓明澮가 창안하여 지은 것이다. 그리고 오성五聖과 십철十哲의 제사에 찬탁饌卓이 있고 자리에 교의交椅⁴⁾가 있으며 위판位版에 궤匱가 있고 여기에 또 향관이 거처하는 청사廳舍까지 있게 되었는데 이러한 일들은 공과 같이 뜻을 세움이 돈독한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가 능히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그 사적을 매몰시켜 후인의 눈을 어둡게 할 수 없는 일이 어찌 대가大家의 손을 빌려 글로 남기지 않는가.
공이 이르기를 ”내 어찌 그대가 이르는 말을 당해 낼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어쩔 수 없어서 꼭 기를 만들어야 한다면 그대는 사양하지 말고 글을 짓도록 하게.“하였다. 이에 물러나 그 말을 기록하여 기記로 삼는다.
홍귀달洪貴達 짓다.

 

【주석】
성현成俔¹⁾ : 조선 전기의 대표적인 관료 문인. 본관은 창녕(昌寧)·자는 경숙(磬叔)·호는 용재(黛齋)·허백당(虛白堂)·시호 문대(文戴)로 『허백당집』, 『악학궤범』, 『용재총화』 등을 저술한 학자이며, 아버지는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성염조(成念祖)이다.
성현은 성종의 명으로 고려가사 중에서 「쌍화점(雙花店)」·「이상곡(履霜曲)」·「북전(北殿)」 등의 표현이 노골적인 음사(淫辭)로 되었다고 하여 고쳐 썼다. 성현은 연산군이 즉위한 후에 한성부판윤을 거쳐서 공조판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뒤에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죽은 뒤에 수 개월 만에 갑자사화가 일어나서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했다. 그러나 그 뒤에 신원되어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헌관獻官²⁾ : 제사 때에 제주祭酒를 올리는 제관으로 초헌, 아헌, 종헌 등 삼헌관三獻官을 말한다.
집사執事³⁾ : 나라의 큰 의식에 일을 맡아 주관하는 임시 관헌.
교의交椅⁴⁾ : 제사 지낼 때 신주나 혼백魂魄 상자 등을 놓아주는 의자. 교상交牀이라고도 함.

 

2018.3.16. 성균관 향관청享官廳 앞 서월랑西月廊


【고전원문-무명자집-無名子集 詩稿 册二 / 泮中雜詠。二百二十首】 에는 아래와 같은 기록이 있다.
奉香廳,俗呼“香大廳”,爲舍菜及焚香時奉香之所。廳之東西有房,爲奉香時香官所住之處,在碧松亭之東、明倫堂之北。廳前東西有享官廳各六間,舍菜時諸執事分住於此,故曰“享官廳”,常時則生進分占。香大廳南向,享官廳東東向,西西向,如東西齋。

 

봉향청(奉香廳)은 세속에서 향대청(香大廳)이라고도 부르는데, 석채(釋菜)와 분향(焚香) 때 향을 모셔두는 곳이다. 봉향청 동ㆍ서에 방이 있으니, 봉향할 때 향관(香官)이 머무는 곳이다. 위치는 벽송정 동쪽, 명륜당 북쪽이다. 봉향청 앞의 동ㆍ서쪽에 향관청(享官廳)이 있는데 각 6칸씩이다. 이는 석채 때 집사들이 나뉘어 머무는 곳이다. 그래서 향관청이라고 한 것인데, 평소에는 생원ㆍ진사가 나뉘어 거처한다. 향대청은 남향이고 향관청은 동재ㆍ서재와 같이 동쪽의 것은 동향이고 서쪽의 것은 서향이다.

 

奉香廳下享官廳 / 봉향청 아래에는 향관청이 있는데
左右成行間小庭 / 작은 뜨락 사이 두고 좌우로 늘어섰네
齋舍不能容衆士 / 재사(齋舍)에 선비들이 넘쳐날 때면
競將鼓篋此居停 / 앞다투어 책 싸들고 여기 와서 머무네

 

2018.3.16. 성균관 향관청享官廳 앞 동월랑東月廊

淸齋不許奕棋遊 / 재사(齋舍)에서는 바둑이나 장기를 둘 수 없으니
只得群居學業修 / 오직 함께 거처하며 학업을 닦을 뿐이네
若欲偸閑消永日 / 한가한 틈을 내어 긴 낮을 보내고 싶을 때면
享官廳或泮村幽 / 향관청(享官廳)이나 후미진 반촌으로 가네

 

출처 및 참조
한국문집총간-허백정집-虛白亭文集卷之二/享官廳記
서울문묘 실측조사 보고서 (상)-문화재청(2006.9.)/아이씽크 커뮤니케이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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