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누각.정자.재실

천부인권 2020. 7. 17. 06:00

2020.7.11. 진주 대곡면 가정리 중촌 진주강씨 오산재梧山齋 전경


진주시 대곡면 가정리 산 62(진의로754번길 17-10)에는 진주강씨晉州姜氏 박사공博士公 후에 14세손 동호東湖 강기룡姜起龍을 향사하는 오산재梧山齋가 있다. 이곳의 위치를 위치기반 고도계는 해발 42m를 알리고 「위도35°14'36"N 경도128°11'41"E」라 표시한다.
오산재梧山齋가 위치한 가정리 중촌마을에서 친절한 주민분의 도움으로 오산재梧山齋로 가는 길도 알게 됐고 오산재梧山齋를 관리하는 분의 소개로 열쇠를 가진 분과 연락이 되어 오산재 내부를 보게 됐다. 오산재梧山齋의 열쇠를 가진 분은 진주시의원을 지낸 분이다. 이번에 국회의원에 당선된 강민국씨가 이 집안 출신이라 당선 펼침막이 이 마을에 걸려 있었다 한다.

 

2020.7.11. 진주 대곡면 가정리 중촌 진주강씨 오산재梧山齋 대문
진주강씨 오산재梧山齋 편액
2020.7.11. 진주 대곡면 가정리 중촌 진주강씨 오산재梧山齋
진주강씨 오산재梧山齋 편액
진주강씨 오산재梧山齋 주련

梧山齋珠聯詩 오산재의 옥 같은 주련 시
憶昔龍蛇搶攘日 오래전 일어난 임진난으로 어수선한 때에도
丹心一片向終南 일편단심으로 종남을 향하네
誰識蒼黃臨命席 누가 알겠나! 위급한 상황에 자리하고 죽음을 맞이하니
東湖忠節振三南 동호공의 충절은 삼남지역에 떨쳤네.

 


梧山齋記
昭敬王 壬辰癸巳 兩年 我東之 一大厄亂也 方冠聚于驅也 鶴峯金文忠公 爲招諭使 激勵林下 讀書之士 挺身 舊義冒白仞 視死 與敀者 所在成市 而東湖姜公 諱起龍一也 公從堂叔忠烈公 諱壽男 世兄草亭公 諱彦龍 一室三忠以死 自誓 忠烈公則 赴沈忠壯營 殉節朔寧 草亭公 從郭忠翼陣 贊劃樹勳功則 入晉陽城 與湖南三節士 金千鎰 黃進 崔慶會連日夜 幷心戮力 及當城陷 顧謂左右曰生當盡忠 死當孝義 乃北向 跪曰 臣力 竭矣 無以報國 因以殉節于 矗石樓上 時癸巳 六月晦日也 收葬于 晉州梧谷子坐原 哲宗辛酉 命旌其閭特 曾吏曹參議文獻公判書姜時永 作閭閣記 張四未先生 福樞 銘其墓 今年丙寅春 後孫信德信圭二君 訪余鳳林室 示公實記一券曰 先祖之忠賢 有如是而 朝家之 恩典雖洽士林之 寓慕無所 此孱孫之過也 頃年丙辰 諸後孫 合謀建一舍于 公幽堂之同岡 梧谷下佳亭里 名曰梧山齋 以諸宗之命 敢請 吾丈一言之記于扁楣 余敬諾而書之曰窃惟 吾邦龍蛇之亂 忠義之士 無慮千百 是皆 不受君命而 自進殉國 擧天下 通古今 寧有是耶 此則異日 修萬國史者 宜有公論 吾獨於公 別有所感省方 殉節之時北向跪曰 臣命盡矣 無以報國 此一言 足以墮千古志士之淚 古人云 勇決於一死 亦臨難 從容就義 難盖平日 義理之素定於胸中者 臨難從容 自不覺其然而有如是 世之論公者 亦不可不知也 旌閭記云 公之祖進仕 慕菴公 諱瑀 從祖梅谷公 諱瑞 兄弟 俱以孝 旌公與其從叔忠烈公 俱以忠旌世禰姜氏 一室 兩孝雙忠 古語云 求忠臣於孝子之門 誠哉幷書之 使登是亭者 讀斯扁而 有所感發而 興起焉
歲 丙寅 淸明節 盆城 許泂 記

 

오산재기 梧山齋記
근세조선 14대 선조대왕 시 임진 계사(1892~1593) 두 해는 우리나라에 크고 큰 위난厄亂이었다. 수많은 왜적들이 사나울 적에 학봉 김문춘공이 초유사로서 격문을 돌리기를 산속에서 글 읽는 선비들에게 난亂 극복에 협력하기를 권하니 죽음을 무릅쓰고 의분에 일어나서 응락應諾하는 자가 저자市場를 이루었다. 박사공博士公 후에 14세손 동호東湖 강공姜公의 이름은 기룡起龍인데 그 한 분과 그의 당숙堂叔 충열공忠烈公 이름 수남壽男과 장형인 초정공草亭公 이름 언룡彦龍과 함께 한 집안에서 3명의 충신이 스스로 죽기를 맹세하니 충열공은 심충장공沈忠壯公 군영에 다다라 삭녕朔寧 땅에서 순절하고 초정공은 곽충익공郭忠翼公의 진陣에서 공훈을 세웠으며 동호공東湖公은 진주성에 들어가 호남삼절사湖南三節士 김천일金千鎰 황진黃進 최경회崔慶會와 더불어 밤낮 합심하여 싸우더니 급기야 성이 함락되자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살아서는 충성을 다하고 죽음은 마땅히 의로워야 한다.’하고 북향하여 엎드려 가로되 ‘신의 힘이 다하여 갚을 길이 없아옵니다.’하고 촉석루 위에서 순절하니 때는 1953년 계사 6월 그믐날이다. 거두어 진주 오곡梧谷¹⁾ 자좌원에 장사葬事지냈다. 철종 신유년에 정려旌閭(의령군 의령읍 동동리 1134-1)를 받고 특히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증직되니 문헌공 강시영姜時永²⁾이 정려의 기문을 짓고 사미헌 장복추張福樞³⁾ 선생이 묘갈명을 썼다.
병인년 봄에 후손 신덕信德 신규信圭 두 분이 나의 봉림서당鳳林書堂에 와서 공의 실기를 보이면서 선조의 충현이 이와 같사와 나라의 은전恩典⁴⁾은 비록 넉넉하지 못했으나 사림이 우모寓慕할 곳이 없음을 우리 자손들의 허물이었기에 수년전에 여러 후손들이 합심하여 공의 묘소 밑 가정리佳亭里 중촌中村에 재실을 세우니 이름 하여 오산재梧山齋라 하고 여러 종친의 명으로 어른께 처마 아래에 붙일 편액의 기문을 청하거니 내 공경히 승낙하고 이 글을 쓴다.
생각건대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 때 충의열사忠義烈士가 무려 천 백명이나 되지만 이 모두가 임금의 명령을 받지 않고 스스로 나아가 목숨을 바쳤으니 천하고금天下古今을 통하여 어찌 이러할 수 있겠는가. 다른 날 만국萬國의 역사를 닦는 자는 마땅히 공론이 있으리라. 내가 공에 대하여 특별히 느끼는 바는 순절당시에 ‘북향하여 무릅 꿇어 신의 명이 다하여 보국치 못하옵니다.’하였으니 이 한 말로써 족히 천고에 뜻이 있는 선비들이 그 위난危難에 눈물을 흘리게 할 것이로다.
전장에서 용감히 싸우다 죽는 것은 쉬우나 위난危難에 다다라서 조용히 자결함은 더욱 어렵다는 옛 사람의 말이 있더니 이는 평상시 그 의리가 가슴 속에 정해진 바이다. 난을 당해 자신의 목숨을 생각하지 아니함이 이와 같으니 세상에 공을 논하는 자 또한 위대함을 알아야 할 것이로다.
정려기에 이르되 공의 조부 진사 모암공慕菴公 이름이 우瑀와 증조부 매곡공梅谷公 이름이 서瑞인 형제께서는 효로서 정려를 받았으며 공은 그 종숙부인 충열공과 함께 충으로서 명정命旌하니 세상에서 강씨 한 집안에 양효쌍충兩孝雙忠이라 일컬어더라.
옛 말에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한다.’하더니 진실하도다. 아울러 기록하노니 이 정자에 오르는 자로 하여금 이 글을 읽으면 그 느낌이 샘솟아 흥기할 진저.
병인丙寅(1986) 청명절 분성 허형許泂 짓다.

 

【주석】
오곡梧谷¹⁾ : 현재 진주시 대곡면 가정리 중촌마을
강시영姜時永²⁾ : 姜時永(1788~미상)-正祖 戊申生 字 汝亮 號 星沙 右議政 士尙의 9世孫이며 承旨浚欽의 子이다. 文科에 올라 禮曹判書를 지내고 고종이 즉위한 뒤 홍문관제학, 의정부우참찬,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시호는 文憲公이다. 강시영은 글씨에 뛰어났다.
장복추張福樞³⁾ : 張福樞(1815 ~ 1900)은 경상북도 예천 출신. 본관은 인동(仁洞). 자는 경하(景遐), 호는 사미헌(四未軒).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8대손이고, 아버지는 장굉(張浤)이며, 3세 때 조부의 명에 따라 큰아버지 장관(張寬)에게 입양되었다. 조부 각헌(覺軒) 장주(張儔)로부터 학업의 기초를 닦았다.
조선후기 「태극도설문답」, 「숙흥야매잠집설」 등을 저술한 학자.
은전恩典⁴⁾ : 나라에서 은혜를 베풀어 내리던 특혜

 

 

梧山齋小識
在昔 宣祖龍蛇之亂 我先祖東湖參議公 同湖南三烈士 殉節于晉陽城涵之日朝家之 贈爵旌閭恩典俱至 而至今四百年 尙無寓慕一所 以是先父老之歷世齎恨久矣 頃年甲寅履霜之節 後孫少長齊會于梧谷墓庭 譹及先事信德 乃敢發言于諸宗曰 吾子姓千餘戶盍各盡心致力以成 先世未終之志乎 僉曰 諾以丙辰秋開會于 宜寧之鼎岡齋監正公 虔齊所別選推進委員 立豫算揔額排定 各派宗員 丁巳春開役做時不似說時 排金之收 未遂如意且所 定金額料 不足於成果 故惣動任員 逐處勤訪懇懇勸誠 竟達所望 乃以乙丑秋竣工 將以丙寅三月十日告成 僉宗命信德 記齋之顚末 信德不敢辭 而盡之如右 自顧不肖無寸誠之可效 而只感諸宗之盡心 殫力右有所難忘者 信圭泳昭二君之一心罄赤也 第有一言不可已于末世者 孝莫大於繼志述事 我先祖以忠孝二字 貽謨爲子孫者 宜念玆在玆無愧乎 是祖之孫可也哉
歲丙寅 淸和節
二十世孫 信德 敬識
      鳥川 鄭直敎 書


출처 및 참조
대곡면지-대곡면지편찬위원회/도서출판 대보사(20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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