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기록/비판.정려각.마애비

천부인권 2020. 11. 21. 12:21

2020.11.17. 고성군 대가면 금산리 가동마을의 제말 장군 충효각


고성군 대가면 금산리 가동마을 입구인 대가면 금산리 676-10번지에는 정려각旌閭閣이 있는데 문에는 쌍정문雙旌門이라 편액했고 정려각旌閭閣의 정면에는 충효각忠孝閣이라 편액했다. 이곳을 위치기반고도계는 해발 63m라 기록하고 위도 35°01'51"N 경도 128°18'29"E를 가리킨다.
정려각은 맞배지붕 와가로 세 개의 기둥을 세우고 두 개의 실室로 구분하여 좌측 실室은 제말장군諸沫將軍¹⁾의 충절을 기리는 곳으로 하고 우측 방은 그의 증손인 제명철諸命喆의 효행정절孝行貞節을 기리는 방으로 했다. 따라서 문의 이름을 두 개의 정려旌閭를 받은 곳이라는 이름의 쌍정문雙旌門이라 편액한 것으로 보인다. 

【주석】
제말장군諸沫將軍¹⁾ : 제말 장군의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제조 겸. 어머니는 공주 황씨로 1567년 고성에서 출생했다. 장성하여 무과에 급제 무인전통의 가문을 이어 총부수문장을 역임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동지 67인과 같이 의병을 모집하고 가산을 털어 병력을 모아 웅천, 김해, 정암 등지에서 크게 승리했다. 
왜군들은 제말 장군이 신장 8척에 몸무게 400근(240kg)의 거구로 하루에 수백리 길을 달려 적을 쳤기에 “비호장군”이라 하면서 장군을 피하였다고 전한다. 그의 공이 곽재우장군과 함께 조정에 알려져 성주 목사에 임명 된다. 계사년 1593년 4월 말에 왜적이 처들어 오자 소수의 군사들과 부족한 군량에 원군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그는 죽기로 싸웠으나 불가항력임을 자각하고 임금이 계신 북쪽을 향해 “외로운 성을 지키지 못하고 소신은 이곳에서 죽음을 따릅니다.”하고 통곡한 후 싸우다가 마침내 적의 총탄에 맞아 장열하게 전사했다.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에 의하면 남구만이 어사로서 성주를 순시할 때 선생안을 열람했는데 제말이 만력계사(1593) 정월 모일에 부임하여 4월 모일에 파직하여 돌아갔다는 기록을 보았다고 했다. 이는 1593년 1월 성주성을 탈환하자 성주목사인 제말이 입성하여 4월까지 사무를 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조카 홍록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진주성에서 전사했다. 
임진왜란 후 제말 장군의 공정이 밝혀지지 않았으나 200년이 지난 정조 16년(1792)에 여러 기록을 다시 조사하여 왕이 하교하시기를 “제말은 곽재우와 같은 때에 왜적을 치고 순국하였으나 곽재우는 이미 포상이 되어도 제말은 그렇지 못하다. 그가 고성과 성주에서 싸운 공이 이충무공의 노량 싸움에 뒤지겠는가. 이에 정승의 벼슬과 시호를 내린다.”하여 정조 16년(1792)에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충장공의 시호를 내려 쌍충사적에 기록케 했으며 그의 조카 홍록과 함께 나라에 충성했음을 가상히 여겨 서유린에게 명하여 쌍충비문을 짓고 병조판서 이병모가 글씨를 쓰고, 호조참판 조윤형이 전서한 후에 성주와 진주에 각각 쌍충각을 세웠다. 순조 12년(1812)에 장군의 충의에 비해 훈작이 미흡함을 애석히 여겨 충의공이란 시호를 다시 내렸다. 현재 성주 충절사와 고성 운곡서원에서 향사하고 있다. 제말 장군의 묘는 진동면 다구리 산 66번지 옥녀봉 아래에 있다. 묘소 앞에 있던 재실은 지금 없다.

 


좌측 실室의 정면에 『忠臣 贈効忠仗義宜武功臣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使訓鍊院事行通
                         『충신 증효충장의의무공신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훈연원사행통
訓大夫星州牧使星州鎭 兵馬僉節制使 諡忠壯加 諡忠毅公漆原諸沫之閭 命旌 哲廟五年甲寅三月
훈대부성주목사성주진 병마첨절제사 시충장가 시충의공칠원제말지려 명정 철묘오년갑인삼월
三日』
삼일』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또한 『제충의공정려각기 諸忠毅公旌閭閣記』가 걸려 있어 아래에 원문과 해문을 기록해 둔다.

 

2020.11.17. 고성군 대가면 금산리 가동마을의 쌍정려

 

쌍정려 편액

 

2020.11.17. 고성군 대가면 금산리 가동마을의 충효각
충효각 편액

 

 『忠臣 贈効忠仗義宜武功臣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使訓鍊院事行通 
『충신 증효충장의의무공신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훈연원사행통 
訓大夫星州牧使星州鎭 兵馬僉節制使 諡忠壯加 諡忠毅公漆原諸沫之閭 命旌 哲廟五年甲寅三月 
훈대부성주목사성주진 병마첨절제사 시충장가 시충의공칠원제말지려 명정 철묘오년갑인삼월 
三日』

삼일

 


諸忠毅公旌閭閣記
固城諸君東炯 以其先祖忠毅公旌閭閣 新建事求記于余 余嘗爲公記其墓室 曰景忠齋者 有以詳公之事實 焉今無庸復贅 則第綴其大畧 而書之曰公諱沫 字成汝 自號柯溪 漢丞相諸葛 忠武候之裔 而居固城者 己數世矣 公生長于 琴山里之可洞 當臨津島夷之亂 以白衣倡義轉戰 固城晉州星州高靈之野 斬殺過當聲名 爲諸部最用 其功特拜星牧聚兵 守城猝遇大敵城竟陷 而死之繼 而子孫零替無 以闡楊事蹟隨 而湮晦者二百年至 正廟壬子 上得野史小錄 而覽之大加歎惜 卽贈兵曹判書 書賜諡忠壯 遣官致祭 因命立碑于 星晋兩州洎 純廟壬申 改諡忠毅 又命腏亨于 星之忠烈祠 盖公爲國敵愾屢立奇功卒 以身殉之 而事出蒼黃 掩翳不章含 冤抱屈於冥 冥之中或至 發現光怪使人驚動 此野史所以卒獲上聞 而朝家所 以厚加褒恤者也 哲廟甲寅復有旌閭之命 而雲仍力屈未 卽擧行留其缺憾 以待來者 此今玆之所 以有是役也 始公之曾孫命喆 以孝贈掌令 有綽楔在閭至 是以公加設于其右 煌煌雙旌照耀鄕里矣 嗚呼 人生世間頂天踵地 誰無君父 誰非臣子 誰不有秉彛 好德之心哉 惟忠與孝人道之本 思之斯得 得行之斯至 非祖獨能 而孫不可能者也 非彼獨能 而我不可能者也 吾知斯閭之殷 不第爲慈孫念修之地 其於人心世道亦當不無所勤云
戊申 仲秋節 道州 金在華 記

제충의공정려각기 諸忠毅公旌閭閣記
고성의 제동형군諸東炯君이 그 선조이신 충의공忠毅公의 기문記文을 지었음으로 그 기문에 공의 사적事蹟을 자세하게 말하였으니 이제 다시 중복함을 피하고 그 대략을 써서 말함이라. 공의 이름은 말沫이며, 자字는 성여成汝이시고, 스스로 붙인 호는 가계柯溪이시며, 한漢나라 정승이셨던 제갈諸葛 충무후忠武候의 후손으로 고성에 터를 잡아 살아온지 수세년이 지났다. 공은 대가면 금산리琴山里의 가동可洞에서 생장하여 임진왜란을 당함에 백의로써 창의倡義하여 수백명의 의병을 통솔하고 고성·진양·성주·고령 등지에 옮겨다니면서 전쟁을하여 적을 참살 격퇴한 혁혁한 명성이 제부諸部에 최대의 전공으로 알려지자 성주목사星州牧使에 특별히 배치되어 위국충절爲國忠節을 바치면서 병사를 모아 성주성星州城을 사수하다가 대야마大野馬 전투에서 혁혁한 공훈을 남기고 순절하셨다. 뒤를 잇는 자손이 쇠약하고 힘이 없으니 사적을 드러나게 밝힐 수 없었으므로 숨겨진지 이백년이 지난 정묘임자正廟壬子(1792년)에 왕이 야사소록野史小錄을 보시고 크게 탄식하시어 즉시 병조판서로 증제贈際하고 충장忠壯으로 시호諡號를 내리시어 치제관致祭官을 파견하여 성주와 진주의 양군에 어명으로 제씨쌍충사적비諸氏雙忠事蹟碑를 세워 어제문御祭文으로 치제致祭하였으며 순묘임신純廟壬申(1812년)에 다시 시호를 충의忠毅로 고쳐 내리시고 성주 충열사忠烈祠에 향사享祀를 명하셨다. 공이 나라를 위하여 무찌르고 많은 기공奇功을 세우며 순절하신 사적이 묻혀서 드러나지 못한 원한을 안은채 가리워 있던 중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으니 사람들로 하여금 놀라게 하였음은 야사소록野史小錄을 왕께서 어람御覽하시고 후하게 포상을 내리심이리라. 철묘갑인哲廟甲寅(1854년)에 다시 정려旌閭의 명이 있엇으나 후손들의 재력이 부족하여 즉시 이루지 못하고 미루어 온 것을 유한으로 기다려 오다가 이제 이곳에 세우게 됨은 공의 증손曾孫인 명철命喆이 효행으로 증贈 장령掌令이신데 정려旌閭가 있음에 그 여각 오른쪽에 공의 정려旌閭를 세우니 빛나고 빛나는 쌍충효雙忠孝 정려旌閭로 고향마을에 밝게 비추어서 빛나네.
슬프도다 사람이 사는 세상에서 하늘을 머리하고 땅을 밟고 사는 자 뉘라서 군부君父가 없겠으며 누구든 신하가 아니겠으며 떳떳하게 덕행을 기를 마음이 없을 수 있으리오만 오직 충과 효는 인도人道의 본本으로 생각건대 할아버지만 능하고 자손은 능하지 못함이 아니다. 우리들도 능히 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알기로는 이 정려를 세움은 착한 후손들이 조선祖先을 위하는 정성에서 이니 세상 사람들에게 사람의 도리를 행하도록 권하여 말함이라.
무신戊申 중추절仲秋節 도주道州 김재화金在華 짓다.

 


그리고 『방명기 芳名記』도 걸려 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芳名記
此吾先祖 忠毅公 掌令公 兩先生府君之忠孝旌閭也 建時子孫各捐金 而尤其助者書名楣 以示其誠云
諸根祚 可洞 原
戊戌十月二十九日

방명기 芳名記
이에 우리 선조 충의공 장령공 두 선생의 충효정려이다. 건설 때 각자의 자손이 기부금을 내었고, 더욱 그 기부한 사람의 이름을 문미에 걸어 그 정성을 여기에 보인다.
제근조 가동 원
무술년 10월 29일

 


우측 실室의 정면에『孝子 贈朝奉大夫司憲府掌令漆原諸命喆之閭 英廟二十六年 己巳五月六日』
                        『효자 증조봉대부사헌부장령칠원제명철지려 영묘이십육년 기사오월육일』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고, 『제효자정려각중수기 諸孝子旌閭閣重修記』가 있어 그 내용을 원문과 해문을 기록해 둔다.

 

 

諸孝子旌閭閣重修記
故 贈司憲府掌令 孝子諸公旌閭之閣 在固城郡琴山里之可洞 歲久而圯今其後孫 重新之東炯榮根二君奉 其前後事蹟文字來 求余記按 公諱命喆 字君保 自號挹翠軒 生六歲喪父 鞠於偏母旣長修董生之業 以安母心 嘗出遊中酒犯昏 而歸母讓之遂 病自刻責絶不復飮 沒廬墓三年 柴毁骨立 而執禮不懈常 以幼不服父喪爲至 痛年踰五十改葬父 而廬墓追服 其感應之異 淫雨每捲于 祀時華蟲自獻于 祭廚晩歲 患風痺起居須人 而每遇忌日 則命子姪扶跪床下哀痛 以終祭盖庶幾 其終身慕者也 趙晩休師錫謪居固城 公少嘗師之趙公沒 爲之心喪三年 其於國恤 亦然年六十九以 英廟庚申卒 後九年方伯 上其孝蒙贈爵旌閭之命 始公之曾祖 忠毅公沫 伯祖贈兵判公弘祿 俱倡義立 慬于 執徐之難 厚蒙朝家之褒恤 而公又以孝得旌人謂 是祖是孫云 噫今世變岡極倫綱掃地 有志之士 所以隱憂浩歎 而懼人獸之無 別焉矧諸氏一門忠孝 爲其世氈 而仁義出乎 其性者哉 使斯閣而常新焉其起居之相接 精神之相感 所以念爾祖 而修厥德者 自不能己矣 於以父詔 其子兄敎 其弟茹忠被孝 以爲世式將見斯閭之復 有斯閣而益樹 其風聲於鄕邦矣 此又豈非公之所 望於後人者歟
己未 季冬日 道州 金在華 記

제효자정려각중수기 諸孝子旌閭閣重修記
옛 사헌부장령의 벼슬을 하사받은 효자 제공諸公의 정려각旌閭閣이 고성군固城郡 금산리琴山里 가동可洞에 있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허물어져서 이제 그 후손들이 새로이 중수重修를 하고 동형군東炯·영근榮根 두 사람이 그 전후 사적문事蹟文을 받들고 와서 나에게 기문을 청하므로 살펴보니 공의 이름은 명철命喆이요 자字는 군보君保이며, 스스로 지은 호는 읍취헌挹翠軒이다. 6세에 아버지 상을 당하고 홀어머니 시하侍下에서 성장하여 바르게 몸을 닦아 어머니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 했으나 출타 중 술에 취하여 정신없이 돌아와 어머니께 용서를 구하려다 드디어 크게 깨닫고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았다. 어머니가 돌아가시니 삼년 동안 시묘侍墓살이¹⁾에 몸이 바짝 마르고 여위어 뼈만 앙상하여도 상례喪禮 범절에 흐트러짐이 없었다.
항상 아버지 상에 제례祭禮 범절에 따르지 못함을 통탄스럽게 지나오다가 나이 오십이 넘어서 개장改葬²⁾하고 아버지의 시묘살이와 다시 복을 입었으니 그 감응感應함이 다르겠으랴. 장마 비에도 제사 지낼 때는 매양 꿩을 잡아 스스로 올리셨다. 만년晩年에 팔다리의 마비증세로 기거함에 다른 사람과 같지 않았음에도 부모의 기일忌日에는 반드시 자식과 질부姪婦들의 도움으로 제상祭床 아래 엎드려 무릎을 꿇고 애통하며 제사를 지내기를 종신終身토록 하니 향리의 감탄을 받았다. 만휴晩休 조사석趙師錫이 고성에 유배되었을 때 공이 만휴의 문인으로 사사師事하였으며, 조공趙公이 죽자 그 위국爲國의 충정에 마음으로 삼년상三年喪을 입었다. 그리하여 나이 69세 때인 영묘英廟 경신庚申(1740년)에 돌아가셨다. 그 9년 후에 고성현령固城縣令이 그 효행을 찬양하여 조정朝廷에 상정上程하였더니 증작贈爵³⁾과 정려旌閭의 명을 받았다. 공公의 증조曾祖이신 충의공忠毅公의 이름 말沫과 백조伯祖⁴⁾이신 병조판서 이름이 홍록弘祿이신 분이 임진왜란에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우며 순절하여 조정의 포휼褒恤⁵⁾이 후몽厚蒙⁶⁾되었으며 공도 또한 효행으로 정려旌閭를 받았으니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할아버지에 그 손자라하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슬프도다! 지금의 세상은 변하여 망극하게도 륜강倫綱이 땅에 떨어졌으니 뜻있는 선비들은 사람과 짐승의 분별 없음을 근심하고 통탄함이로다. 하물며 제씨일문諸氏一門의 충효는 그 본성에서 나왔음이라.
이 여각閭閣이 항상 새로워질 때 기거起居함에 서로 접하고 정신적으로 서로 느끼는 바가 있으리니, 조상을 생각하여 덕을 닦으므로 능히 이루어질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형은 아우를 가르쳐 충효를 이어 세상에 규범이 되면 이 여각은 더욱 명성이 고을과 나라에 드러날 것이니 이 어찌 공公의 소망이라 후인들이 말하지 않으리요.
기미己未(1979)년 늦겨울 임계일壬癸日 도주道州 김재화金在華 쓰다.

【주석】
시묘侍墓살이¹⁾ : 부모의 상중에 3년간 그 무덤 옆에서 움막을 짓고 사는 일.
개장改葬²⁾ : 한번 장사 지낸 사람의 무덤을 다른 곳으로 옮겨 다시 장사를 지냄.
증작贈爵³⁾ : 죽은 뒤에 작위를 줌
백조伯祖⁴⁾ : 큰할아버지
포휼褒恤⁵⁾ : 공적을 표창하여 구휼하다.
후몽厚蒙⁶⁾ : 지극한 대우를 받다.

출처 및 참조
고성향교지-고성향교지편찬위원회/대보사(2002.11.30.)
나무가 들려주는 고성 이야기-고성문화원/도서출판 경남(202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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