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저런

한암 2013. 8. 14. 00:31

             

[그림] 일본인이 그린 명량대첩도의 일부분

 

권력 세습의 빛과 그림자

이른바 ‘조선정벌’이라는 미명아래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장(倭將)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의 어릴 때 이름은 고자루(小猿)였다. 고자루라는 이름은 그의 모습이 원숭이를 닮았다고 해서 그의 아버지 기노시타(木下)가 지어준 것이다. 그러던 그가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던 주군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죽자 그 후광을 업고 부와 권력을 손에 넣는다. 감히 귀족의 성씨인 토요토미(豊臣)로 개명하고 하루아침에 천하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에게는 후사(後嗣)가 없었다. 가문을 이을 자식이 얻지 못했던 것이다.

 

나르는 새도 떨어뜨릴 그는 정실 이외에도 15명의 측실을 뒀으나 누구도 그에게 아들을 안겨주지는 못했다. 결국 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볼까 하던 차에 마지막으로 본 애첩 요도기미(淀君)에게서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얻는다. 물론 뒷얘기도 많다. 15명의 측실을 보고도 생산하지 못한 자식을 요도기미는 어떻게 그리 쉽게 만들었느냐 하는 것이다.

 

나이 60을 넘겨 대를 이을 후손을 얻은 히데요시의 기쁨은 그 무엇에 비기랴. 하지만 기쁨도 잠시, 몸은 늙고 병들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1592년 조선침략에 이어 명나라까지 넘보다가 지치고 병약해진 히데요시는 1598년 5월 죽을병에 걸린다. 그가 죽음의 문턱을 오갈 즈음 조선에서 왜병들이 죽인 혼령들이 나타나 밤마다 그를 괴롭혔다고 한다. 그래서 히데요시는 죽기직전 그 혼령들을 위로하기위해 ‘귀 무덤’을 만든 것이다. 귀 무덤은 히데요시가 일본군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누구든지 조선인의 귀나 코를 베어오면 상을 준다고 해서 수많은 조선인들의 코와 귀가 일본으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것들은 모아 위령탑을 만든 것이다. 눈을 감는 순간까지 늦게 본 아들이 눈에 밟혔다. 임진왜란도 히데요리의 권력기반을 강화하기위해 일으킨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죽기 이태 전 히데요시는 양아들 히데쓰쿠(秀次)를 스스로 할복자살하게 한 뒤 세습기반을 다지고 4살짜리 히데요리를 후계자로 정했다. 그러나 불안했다. 권모술수에 능한 그는 누구보다도 권력의 속성과 비정함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비롯한 경들에게 내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하오. 히데요리에게도 나에게처럼 충성심을 보여주시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는 또 누구인가. 우리나라에도 <대망>이라는 이름의 소설로 일찍이 알려진 무장이다. 호시탐탐 대권을 노리다가 혼란한 일본을 재통일하여 지금도 일본에서는 3대 영웅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에게 아들 히데요리를 부탁했으니 호구(虎口)에게 맡긴 격이다. 당시에도 제2인자였던 도쿠가와는 끝내 히데요리를 배신하고 그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를 통하여 권력을 잡는다. 그리고 다음해 오사카 성을 빼앗자 히데요리는 어머니 요도기미와 함께 자결한다. 그때 그의 나이는 23살.

 

셋째아들 김정운을 후계자로 내정한 북한 김정일은 지금 고심하고 있을 것이다. 올해 26살의 후계자에게 북한의 권부는 자신의 사후에도 변함없이 충성을 다할 것인가. 3대째의 ‘강력한 통치자’ 세습은 그리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후계 구축과정에서 대외 긴장지수를 높이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핵실험과 장거리 미사일 발사 등도 정치적 기반이 취약한 김정운의 업적 쌓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히데요리를 위한 ‘조선정벌’같은 악수(惡手)를 되짚는 것 같아 씁쓸하다.

 

오사카성에는 히데요시의 6살짜리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비석이 쓸쓸이 서 있다. 불쌍해 보였는지 지금도 누군가가 꽃을 놓고 간다.

 

[고양신문] / 정 영 수<편집고문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