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런 저런

한암 2013. 8. 14. 00:33

                                    

◇ 화살이 빗발치듯 쏟아져도 칼을 휘두르며 말을 타고

내달리는 사무라이는 일본 전국시대의 상징적 존재였다

 

일본의 활약이 뛰어났던 사무라이 3인

일본 봉건시대의 무사(武士)를 사무라이[侍]라고 한다. 가까이에서 모신다는 뜻에서 나온 말로, 본래 귀인(貴人)을 가까이에서 모시며 이를 경호하는 사람을 일컬었다. 헤이안시대[平安時代] 이후 무사계급이 발달하여 셋칸케[攝關家: 섭정과 관백벼슬을 하는 가문]와 잉[院] 등에서 경호를 위해 무사를 채용하게 되자, 점차 사무라이의 명칭이 무사 일반을 가리키게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법[鎌倉幕府法]에서는 낭당(郞黨)을 거느리고 기승(騎乘)의 자격이 있는 무사를 일컬었고, 형벌도 낭당과 일반서민과는 구별되었다. 무로마치[室町]시대에 있어서도 대체로 상급무사를 지칭하였는데, 에도[江戶]시대에는 사농공상(士農工商)의 네 신분이 고정되어, 그 가운데 사(士)에 속하는 자를 일반적으로 이렇게 칭하였다.

 

그러나 무가사회 내부에서는 보다 엄격하게 이 명칭을 사용하였는데, 막신(幕臣) 중에서는 하타모토(旗本: 에도시대 將軍家 직속으로 만석 이하의 무사)를 가리켰으며, 가치[徒]와 주겐[中間: 무가의 고용인] 등의 하급무사와는 구별하였고, 제번(諸藩)의 가신 중에서도 주고쇼[中小姓: 무사 직위의 하나] 이상의 무사를 이렇게 간주하는 등, 무사 중에서도 비교적 상층계급을 사무라이라고 하였다. 또한 무가(武家)를 주군(主君)으로 섬기지 않는 특수한 사무라이로 궁가(宮家)에 봉사하는 미야사무라이[宮侍], 몬제키[門跡: 격이 높은 사원]에 봉사하는 데라사무라이[寺侍] 등이 있었다.

 

활약이 뛰어났던 사무라이로는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

 

 

1549년 아버지 노부히데[信秀]의 뒤를 이어 오와리국[尾張國: 愛知縣]의 태수가 되고, 이웃의 여러 제후를 평정하여 무명(武名)을 떨쳤다. 1562년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동맹을 맺고, 1568년에는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가 막부(幕府)의 회복을 청해 왔으므로 이를 기회로 삼아 교토[京都]를 진정하고 막부를 재건해 실권을 장악하였다.

 

1573년에는 아시카가를 교토에서 추방함으로써 무로마치 막부[室町幕府]를 단절시켰다. 그동안 여러 곳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평정하였으나 혼노사[本能寺]에서 부하인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 ·습격을 받고 자살하였다.

 

그는 장기간에 걸친 전국전란의 시대에 통일의 서광을 비추어 준 전제무장(專制武將)으로 주목할 만한 여러 정책을 과감하게 실시하였다. 구체제 ·구관습의 타파, 새 인물의 등용, 금은 광산의 경영, 화폐의 주조, 도로 ·교량의 정비, 관소(關所: 검문소)의 폐지 등 혁신적인 정책으로 새 시대의 도래에 대응하였다. 이것을 기반으로 한 천하통일의 위업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와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게 계승되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출생.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 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豊臣]라는 성(姓)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웅지(雄志)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名古屋]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로 하여금 1만 8,000명을 거느리고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한 관군과 의병 및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었음은 물론이거니와, 노략질 당했고, 조선의 도공(陶工)을 납치한 일본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2~1616

 

 

아명 다케치요[竹千代]. 미카와[三河]의 오카자키[岡崎] 성주 마쓰다이라 히로타다[松平廣忠]의 장남.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 동맹을 맺고 그의 힘을 빌려 스루가[駿河] ·도토미[遠江] ·미카와를 영유함으로써 동해 지방에 일대세력을 구축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1603년 세키가하라[關ケ原]전투에서 그의 지지 e세력을 제거하고 지방 제후를 압도하여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같은 해 정이대장군(征夷大將軍)이 되고 에도에 막부를 개설, 패자(覇者)로서의 지위를 합법화하였다.

 

1614∼1615년 두 차례에 걸쳐 오사카[大阪]전투를 일으켜 히데요시의 아들 히데요리[秀賴]를 중심으로 한 도요토미의 잔당을 완전히 멸망시켜 대망의 천하통일을 완성하였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뒤를 이어 여러 가지 정책을 수행하여 일본 근세 봉건제사회를 확립하였다.

 

김영택 화백의 펜화 / 일본나고야(名古屋) 이누야마성(犬山城)

나고야(名古屋)는노부나가,히데요시,이에야스를 배출한 곳이다

 

두견새 비유 / 두견새가 울지 않으면...

어느날 일본의 실력자들인 오다 노부나가, 도요도미 히데요시, 그리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한자리에 모였다. 마침 그 자리에 새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새는 영 노래를 하려 하지 않았다.

 

노부나가가 냅다 말했다,『정말로 노래를 하지 않으면, 내 저 놈을 죽여 버리겠다』히데요시가 말을 받았다.『저는 저 새가 저를 위해 노래하도록 만들겠습니다』그러자 이에야스가 말했다,『저는 저 새가 노래할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일본에 널리 알려진 위의 민담은 아마도 후세에 꾸며진 얘기일 것이다. 그러나 그 얘기는 중세 일본에서 한세기 동안 계속된 분열과 혼란을 끝내고 안정된 사회를 이루는데 공헌한 3인의 인품을 잘 그려냈다. 노부나가는 충동적이었고 히데요시는 임기응변을 잘했고 이에야스는 참을성이 많았다는 것이 선명하게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