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과 평론방

又泉 김금자 2017. 11. 22. 22:39

  북간도에서 읽은 윤동주의 「새로운 길」

  이동순(시인,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밤, 마당에 자리를 깔고 누워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일생을 詩人的 고독과 서러움, 그리고 찬란한 슬픔 속에서 살다간 윤동주의 생애가 떠오른다.

 

  밤하늘에는 참으로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마음이 섬약하던 소년 시절, 그 많은 별들의 은하를 따라 시선을 천천히 옮겨 가노라면 왠지 까닭 모를 쓸쓸함이나 적막함, 광대무변한 허허벌판에 나 혼자 팽개쳐져 있는 듯한 아득함을 느끼며 어느 틈에 내 눈가에는 눈물이 고였다.

 

  사람이 죽어서 그의 영혼이 새처럼 폴폴 날아 저 높은 하늘을 헤매게 된다면, 나는 과연 어느 별자리 어느 성군(星群)의 틈새를 비집고 혼자 떠돌아다니게 될 것인가. 그리고 사랑하는 벗들과 부모형제들로부터 떨어져서 나는 얼마나 지독히도 외로울 것인가. 밤은 점점 깊어가고 나는 그 엄청난 우주적 적막감에 가위눌려서, 그날 밤은 기어이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거리다가 꼬박 날을 밝히고 마는 것이었다.

 

  이런 어느 가을 저녁, 나는 카바이드 불빛이 깜빡이고 있는 장터 부근의 노천(露天) 서점에서 한 권의 시집을 발견하였다. 그것은 바로 하늘빛 표지도 선명한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였다. 말이 서점이지 그 노천 책가게는 고학으로 학비를 버는 가난한 대학생이 싸구려 덤핑 책들을 짐수레에다 몇 박스 싣고 와서 길가에 천막 천을 펼쳐놓고 그 위에다 무슨 허섭스레기들처럼 책을 와르르 쏟아 부어 놓은 바로 그런 곳이었다.

 

  모래밭에서 금싸라기를 찾으려는 심정으로 나는 그 노천 서점 앞에 쪼그려 앉아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렸고, 또 그것은 고교시절 나의 유일한 즐거움이었다. 어쩌다 호주머니에 약간의 용돈이 고이면 한두 권씩 문학서적을 사와서 책꽂이에 꽂아두고 즐거워하던 그런 소박한 기쁨의 시간이 나에게 있었다.

 

  그때 그렇게 사 모은 책들 중에는 박목월의 『문장독본』, 유치환의 시집 『청령일기』, 장만영의 『토요일의 밤하늘』 등 가끔씩은 괜찮은 책들이 발견될 때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서 나는 윤동주란 이름과 처음으로 대면했던 것이다.

 

  윤동주의 시집을 사온 날은 초저녁에 가랑비가 뿌렸다. 경부선 철도 연변의 한옥집 뒤란, 비좁은 공터에 제비집처럼 달아 붙여서 지은 나의 작은 방에도 가랑비 소리가 들렸다. 고교 시절까지 내 방도 따로 없이 부모님과 줄곧 같은 방을 쓰다가, 드디어 나는 주거의 독립을 요청하였고 이를 위한 단식투쟁에 돌입했던 것이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아버님은 결국 내 뜻을 받아들이셨고, 이렇게 해서 확보하게 된 내 영역은 왜 그다지도 아늑하고 행복하기만 했던지. 함석으로 씌운 양철지붕이라 비만 오면 지붕에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무엇보다도 듣기에 좋았고, 참새 한 마리가 지붕에 내려앉아도 그 사릉거리는 발소리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말하자면 그 방은 문학소년으로서의 내가 우주와의 교감을 곧바로 해내는 연습을 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창문도 하나 없어서 낮에도 불을 켜야 했던 그 컴컴한 소굴에서 나는 나의 문학적 시간을 꿈꾸고 가꾸어 갈 수 있었다. 연탄을 때서 아랫목이 따끈따끈한 저녁나절에 나는 윤동주의 시집을 읽고 너무도 애처롭고, 쓸쓸하고 애잔한 마음이 들어 시집을 가슴에 껴안고 혼자 눈물까지 흘렸다. 세상에 이런 시인이 있었던가? 이다지도 나이 어린 시인이 무엇 때문에 그리도 커다란 슬픔의 무게를 혼자서 온몸으로 떠받치고 살다가 서러운 최후를 마쳐야만 했던가? 그 무렵 윤동주의 시작품은 어려서 엄마를 잃었던 내 서러운 감정의 여과지로써 시집의 종잇장이 해지도록 뒤적거렸던 몰두의 세계였다.

 

  멀고 멀었던 연변 가는 길

 

  「별 헤는 밤」에서의 별 헤는 소년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환상을 갖기도 했고, 그 작품에 등장하는 패, 경, 옥이라는 이국 소녀들의 귀여운 이름을 한없이 사랑하면서 만나고 싶은 충동에 젖기도 했다.

 

  당시 우리 집 마당에는 더운 여름날 수박을 한 통 사다가 두레박 끈에 매달아 드리워 놓는 깊은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윤동주의 시 「자화상」을 읽고 나서는 일부러 그 우물 앞에 가서 내 얼굴을 비치어보며 소리를 질러보기도 했다. 때로는 윤동주 시에 나오는 시적 화자의 행동을 따라 해보기도 했다. 윤동주의 시작품에는 이처럼 소년적 센티멘털의 정감이 아름답고도 슬픈 느낌으로 바탕에 은은히 깔려 있어서 가슴에 슬픔 많았던 전국의 모든 청소년들의 깊은 사랑을 한 몸에 받게 되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에 끔찍이도 좋아했던 윤동주를 내가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1990년대 초반의 어느 봄이었다. 신경림 시인, 이시영 시인 등과 함께 중국의 연길에서 열리는 국제 민족학 학술대회에 한국대표로 초청을 받게 된 적이 있다. 당시만 해도 북경이나 연길로 바로 날아가는 항로가 열리지 않아 제주도 상공을 날아 동지나해를 건너 남쪽의 상해를 휘돌아 북경까지 가는 야릇한 항로였다. 북경에서 다시 중국 국내 항공편으로 瀋陽(심양)을 거쳐 長春(장춘)까지 가서 열차편으로 연길까지 가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밤차를 타고 침대칸에서 선잠이 들었다가 차창이 훠언히 밝아 오는데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커튼을 여니 창밖으로는 눈물겨운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초가집과 지붕의 뒤웅박, 돌담, 여물을 씹고 있는 소, 지게를 지고 가는 노인 등 한국에서는 거의 사라지고 없는 민속적 풍경이 꿈결처럼 전개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연길의 이런 정황에 대해서는 이미 수차례 들어온 바이지만 막상 내 눈으로 직접 그 진경을 보고 있노라니 가슴속에서는 말할 수 없는 감개가 끓어올랐다.

 

  아침 연길역에 내리니 여기저기서 귀에 익은 북관(北關) 지역의 억센 말씨가 들려오고, 우리 동포들의 얼굴이 반갑게 다가왔다. 연길역 건물 위에 써놓은 ‘연길에 오시니 반가워요’라는 글씨도 새삼 정겹게 느껴졌다.

 

  일행들과 더불어 백두산 밑의 백호산장에서 어마어마한 별떨기를 보며 놀란 적이 있고, 도문(圖們)에서는 북한의 남양 땅을 바라보며 비감한 정서에 잠기기도 했다. 댐으로 바뀐 봉오동전투의 현장에서 홍범도 장군의 우렁찬 군령을 바람결에 느끼기도 했고, 연길의 시인 작가 비평가들과 만나서 감격적인 마음의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며칠을 함께 다니다가 두 시인은 집안(集安) 땅으로 고구려 유적을 보러 떠나고 나는 혼자 연길에 남아서 주변의 이곳저곳을 돌아보기로 했다. 그때 내가 가장 먼저 선택한 것이 윤동주의 묘소와 시인의 고향 용정(龍井)을 다녀오는 일이었다. 연길 시청의 전임기사로 있다는 한(韓)이라는 청년은 훤칠한 용모에 서글서글한 성격으로 나의 의욕적인 요청을 조금도 마다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연길에서 용정으로 가는 길은 키 큰 가로수들이 길가에 줄지어 서 있었고, 과수밭에는 배처럼 보이는 과일들이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용정이 가까워 오자 해란강(海蘭江)의 강줄기가 보이기 시작했고, 해란강 다리를 건너서 용정 시가가 펼쳐져 있었다. 별로 크지 않은 아담한 시가에는 일제 때의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어둡고 우울한 건물들이 더러 눈에 띄었다. 느낌 그대로 일본 영사관 건물이었다고 한다.

 

  용정 공동묘지에서 만난 윤동주

 

  용정 시내의 한 식당에 들어가서 냉면을 시켜 먹었는데, 동포가 경영하는 그 식당의 이름은 ‘고향랭면집’이었다. 용정의 민속박물관은 초라하고 보잘 것이 없었으나 우리 민족의 고생살이 흔적만큼은 뚜렷하게 느껴볼 수 있었다. 그 박물관 뒤로 난 길은 비가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심한 진창길이었다. 자동차가 기우뚱거리며 바퀴가 빠지기도 하다가 겨우 헤쳐서 나오니 거기가 바로 용정 공동묘지였다. 집도 절도 하나 없이 스산한 바람이 불어 가는 낮은 구릉에 수천 개의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멀리서 보면 꼭 무슨 버섯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 무덤들이 모두 우리 동포들의 무덤이 아닌가?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잘 살아보려고 온갖 발버둥질을 치다가 드디어 한줌 손에 쥔 것도 없이 다만 빈손으로 차디찬 북만주 벌판에 뼈를 묻고 말았구나. 그렇게도 꿈에 그리던 고향에도 못 가보고, 이 낯선 땅에 어찌 편한 잠을 이루리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무덤들 사이를 바쁘게 뛰어다니던 韓기사가 저쪽에서 손짓을 하며 부른다. 허겁지겁 뛰어갔더니 그곳이 바로 윤동주 시인의 무덤이다. 흙이 무너지지 않도록 시멘트로 봉분을 둘러싼 것 외에는 참으로 보잘것없는 시인의 무덤에는 시에서 스스로 예언했던 것처럼 정말로 풀이 돋아나 있질 않았다. 얼마나 가슴에 한이 맺혔으면 민머리 같은 무덤을 그대로 이승에 재현하고 말았을까. 무덤 앞의 비석도 시멘트를 비벼서 만든 초라한 것이었다.

 

  나는 무덤 앞에 두 번 절을 드리고, 주변을 잠시 돌아보며 정리했다. 잡초를 뽑아 던지고, 자갈돌을 집어서 멀리 버렸다. 윤동주와 함께 옥사한 친척 송몽규의 무덤도 시인의 무덤에서 왼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쓸쓸하게 있었다. 두 영혼들끼리라도 자주 대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우울하던 기분이 다소 나아졌다. 나는 시인의 무덤 앞에 서서 비석을 쓰다듬으며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시인의 영면을 위하여 묵념을 올렸다.

 

  韓기사는 다시 차를 몰아서 시인의 고향 마을인 명동(明東)촌으로 간다. 묘지에서 무덤까지 약 20여분 달렸을까? 나귀가 끌고 가는 수레가 보였고, 수레에는 한복을 차려입은 한 노인의 모습이 보였다. 꽥꽥거리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려보니 수백 마리의 오리 떼가 뒤뚱거리는 걸음으로 도로를 가로질러 가고 있었다. 우리는 차를 멈추고 오리 떼의 무단 횡단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 앞으로 한가한 농촌 마을 명동촌의 정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서서히 펼쳐졌다. 길가에 차를 세워두고 나는 엄청난 흡인력 같은 것을 온몸으로 느끼며 명동촌으로 걸어 들어갔다.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길가에서 마을까지는 약 400m 가량 될까? 작은 봇도랑이 흐르고 벼를 심어놓은 무논과 밭작물이 보였다. 마을 뒤로는 나지막한 황토빛 언덕이 둘러 있었고, 그 위로는 파아란 하늘에 흰 구름이 유유히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한순간 윤동주 시인의 작품에 나오는 풍경들을 지금 내 눈으로 직접 생생하게 보고 있다는 감격에 젖었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새로운 길」 전문

 

  그야말로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나는 걸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소년 윤동주는 이 길을 걸으며 항상 자신의 새로운 길을 꿈꾸었으리라. 시 「새로운 길」은 매우 평범한 듯 보이지만 윤동주의 시정신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4연 첫행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이라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길은 늘 같은 경로를 되풀이하는 반복형 모델이기 쉬운 것이어서 여기에 곧 염증을 내거나, 자신의 삶을 함부로 방기하는 경우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본다.

 

  그런데 윤동주는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항상 새로운 경험과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해주는 탐구적 열정의 자세로 살아갔다. 그리하여 식민지의 그 험난한 폭풍 전야와도 같은 어둡고 우울한 시간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두렵고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고서 서울의 연희전문을 거쳐 일본 유학의 길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처럼 적극적인 탐구의 정신이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昭東柱]라는 굴욕적인 일본 이름도 참아가면서 유학을 결행한 것이 아니었을까?

 

  담배밭으로 변한 시인의 생가

 

  윤동주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그저 섬세하고 나약한 선병질적 청년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에 도전하고자 하는 그의 과감성, 탐구적 열정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비록 시인의 이러한 열정이 느닷없이 맞닥뜨린 비극적 죽음 앞에서 한 줌 싸늘한 재로 변하고 말았지만, 악조건 속에서 결코 위축되지 아니하고 스스로의 정신세계를 줄기차게 확대시켜 가려했던 시인적 열정을 오늘의 우리 문학사는 겸허한 자세로 배워야만 할 것이다.

 

  넓지 않은 길을 따라서 마을 어귀로 들어서니 나무 조각을 잇대어 거칠게 엮어놓은 울타리 사이로 북간도의 전형적인 허름한 농가들이 보였다. 물코를 흘리는 아이들이 담벼락에 기대어 서 있고, 얼굴빛이 검고 깡마른 노인이 지게를 지고 일터를 향해 나가고 있었다. 윤동주가 어린 시절에 다녔다는 명동소학교의 건물이 반쯤은 무너진 채로 방치되어 있었고, 그것이 독립운동가이자 외숙이었던 김약연(金躍淵) 선생이 설교하던 교회의 건물이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을 촌로에게 물어서 더듬어간 시인의 생가는 무너져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지금은 황량한 담배 밭으로 바뀌어 바람만이 우수수 불어갈 뿐이었다. 나는 혹시라도 무슨 흔적을 찾을 길이 없을까 하고 담배밭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부스러진 기왓장 조각들이 약간 나뒹구는 그곳에는 담배 잎을 스치며 지나가는 내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나는 멀뚱히 서서 북간도의 파아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눈물이 고인 내 눈동자 위로 한 조각 흰 구름이 젖은 솜뭉치처럼 내려앉아 둥실둥실 흘러가고 있었다. 가슴속에 유난히 슬픔도 많았던 나의 소년시절 속으로.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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