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역사

대빵 2014. 12. 29. 14:20

대한민국은 세계 4대문명의 '원천국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조선의 제후국이다"
 
ㅔ계계4대문명원천국박병역 칼럼니스트
 
한국인은 물론 세계 각국의 모든 사람들은 여호와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조상신으로 인식하거나 혹은 서양신으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느님은 신앙적 절대자이기 전에 지상에서의 행적이 분명한 역사적 인물입니다.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고증서와 유적물이 중국의 각 석굴과 사당에 안치한 영정(影幀)과 석각화상(石刻畵像)을 쉽게 만나 볼 수 있습니다.  

본 연재는 반드시 “열린 마음”으로 탐독해야 인류 기원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연재는 고증서에 의한 역사적 진실을 입증하여 논쟁 할 비판서가 아니며, 그릇된 역사관과 종교관을 불식시키고 오히려 태호복희 황제와 여호와 하느님이 인류에게 베푸신 한없는 은덕(恩德)을 확인하고 더욱 돈독한 신앙심이 일어날 것입니다.

▲   지상의 낙원 에덴 동산 우전국  © 박병역 칼럼니스트
마고는 궁희와 소희의 두 딸을 낳았다. 궁희씨는 황궁씨와 청궁씨를 낳고, 소희씨는 백소씨와 흑소씨를 낳았다. 네 천녀가 각각 3남 3여를 낳아 몇 대를 지나는 사이에, 족속들이 크게 늘어나 제 부족회의에서 각 3천명의 권속을 이끌고 4방으로 나누어살기로 결정했다.  

청궁씨는 마고성(麻姑城) 동문으로 나가 운해주(雲海洲)로 가고, 백소씨는 서쪽의 월식주(月息洲)로 가고, 흑소씨는 남문으로 나가 성생주(星生洲)로 가고, 황궁씨는 북문으로 나가 천산주(天山洲)로 갔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이르기를 천산의 옛 이름은 겨울, 여름에도 눈이 쌓여있기 때문에 白山(백산), 또한 雪山(설산)이라 했다.

천산 남쪽을 南山(남산) 혹은 곤륜산(崑崙山)이라 불렀다. 즉 마고성의 위치는 천산 남쪽의 곤륜산(崑崙山)이 된다. 곤륜산은 서쪽으로 파미르 고원에서 시작하여 동쪽으로 청해성[淸海省]에서 사천성[四川省] 서북부를 거쳐 신강[新疆]과 티베트를 관통하는 산이다.  

고대의 신화전설에 따르면 곤륜산에는 요지[瑤池]와 낭원 등의 선경[仙境]이 있었다고 한다. 곤륜산은 이전(伊甸), 우전(于闐, 于甸)이며, 優塡國(우전국),천제울국(天帝菀國)이라 하였다. 중국 사람들은 이전원(伊甸園)을 이덴원(에덴동산)이라 불렀다. 또한 桓國(환국)의 天符都(천부도)이며, 神市(신시)로서 곧 지상낙원의 도시이며 성경상 에덴동산이었다.


      ◆ 주목왕과 서왕모의 요지(搖池)연못
    ▲   요지연도(瑤池宴圖)    © 박병역 칼럼니스트
 
 
 요지연도는 주나라 목왕(穆王)이 西域國(서역국)의 곤륜산을 구경하고 서왕모가 살고 있는 엄자산으로 가서 서왕모로부터 갖가지 옥과 비단을 받았다. 이튿날 서왕모는 목왕을 위해 요지연못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목왕과 서왕모(西王母)와 함께 요지에서 연회를 베풀었다는 전설의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현재 충남 보은의 에밀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목천자전 穆天子傳》에 의하면, 목왕이 요지에서 서왕모를 만나 술잔을 건네면서 연회를 즐겼다고 하였다. 앞서 목왕은 이 여덟 마리의 준마를 조보(造父)로 하여금 몰게하여 천하를 두루 돌고, 이윽고 곤륜산 요지까지 가서 서왕모를 만났다고 한다. 그 후 목왕은 복숭아 숲 속에 말을 풀었는데, 이로부터 말이 번식하게 되었다고 한다. 

곤륜산에는 천체楴(天梯)를 타고 하늘나라에 올라갈 수 있었다. 한다. 곤륜산의 천체 높이가 2천  5백여리였다. 특히 곤륜산을 둘라 싸고 있는 약수(弱水)의 깊은 강물이 흐르고, 다시 그 밖으로는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곤륜산의 천체를 타고 하늘에 오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동이(東夷)의 신인(神人), 선인(仙人), 무사(巫師)들 뿐이었다.

또한 서남쪽에 도광(都廣)이라는 들판에 높이 솟아오른 건목(建木)이라는 신목(神木)이 있었다. 이 도광의 들판에 오곡이 풍성하게 자라고, 난조(鸞鳥), 봉황(鳳凰)등이 날고, 겨울에도 꽃이 만발하는 지상 낙원(樂園)이었다. 에덴동산의 建木(건목)이라는 천제(天梯)는 하늘과 땅의 정 중앙에 위치해서 정오가 되면 태양이 건목의 바로 꼭대기에 빛을 비추기 때문에 건목은 그림자가 전혀 생기지 않았다. 그곳에서 크게 외치면 소리는 곧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메아리도 없는 곳이다.

건목이라는 천제(天梯)는 본시 중앙의 천제(天帝) 황제(皇帝)님이 무궁한 신통력으로 만들었다. 사방의 천제(天帝) 들은 모두 이 천제(天梯)를 통하여 하늘과 땅을 왕래하였다. 建木(건목)의 형상은 기다란 나무줄기가 구름을 꿰뚫고 높이 치솟아 있는데 곁가지는 전혀 없고 다만 맨 꼭대기에 이르러 꾸불꾸불한 곁가지가 마치 우산처럼 휘감겨 있었다. 또한 그 나무의 줄기를 잡아당기면 꺾어지지도 아니하고 부드럽게 껍질이 벗겨지는데 흡사 뱀가죽과 같았다. 이 나무껍질로 모자를 고정하는 끈을 만들었다. 고 한다.  

註說=>西域(서역)을 우리는 현재의 印度(인도)로 알고 있으나 西域(서역)은 東土(동토)에서 보아 西方(서방) 지역으로서 중앙 아시아 뿐만 아니라 폐르샤 에집트와 현재 이란. 파키스탄. 인도까지 포함하며 돈황의 서쪽과 동파키스탄의 여러 나라를 말하며, 동파키스탄, 이란 서쪽은 파밀 고원 남쪽은 곤륜 산맥 북쪽은 천산 산맥에 둘러싸인 타림 분지를 말한다. 라고 불교 사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상기의 西域(서역)은 桓國(환국) 시대의 12국 중에 일부에 속한 나라입니다.


 ◆ 마고와 여호와 하느님은 같은 삼신이 아니겠는가?

황궁씨는 권속 3천을 이끌고 麻姑城(마고성) 북쪽 문으로 나가 천산(天山)으로 갔기 때문에 마고성은 천산 남쪽 남산이 곧 곤륜산이 된다. 그리고 당(唐) 나라 때 이용(李冗)의 독이지(獨異志)에 [태호복희와 여호와]의 오누이 결혼에 대한 내용에서 하늘과 땅이 처음 열렸을 때 태호복희와 여와의 오누이는 곤륜산에서 살았다. 또한 주목왕이 천하를 순시하면서 곤륜산을 찾아가 하백의 딸을 만나고, 황제헌원의 궁전을 구경하였다. 즉 麻姑(마고)산은 곧 昆崙山(곤륜산)이며, 마고와 여호와 상제는 곤륜산에 있었다.

산해경과 수메르신화를 살펴보면 환단고기와 삼국유사에 등재된 환인, 환웅보다도 훨씬 이전에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은 지상에 생존하고 있었다. 즉 바람, 벼락, 비를 관장하는 뇌신(雷神) 풍뢰우(風雷雨)와 극락세계에 살고 있던 화서고낭(華胥姑娘)과 혼인하여 하남성 완구(宛丘/지금의 회양/淮陽)에서 살았다.

뇌신 풍뇌우와 화서고낭이 혼인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이름을 태호복희라 하였다. 또 3년 후에는 딸을 낳았는데, 이름하여 여왜(女媧=야훼=여호와)라고 하였다. 또한 설화는 극락세계의 선녀 화서씨(華胥氏)는 어느 날 중국 동쪽의「뇌택(雷澤」호수 가에 찍혀있는 뇌신(雷神)의 큰 발자국을 밟자 이상한 기운에 잉태하여 아들 「태호복희」를 낳고 3년 후 여왜(女媧)를 낳았다. 곧 지상의 첫 신인(神人)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탄생되었습니다.

즉 뇌신(雷神) 풍뢰우와 화서씨(華胥氏)로부터 태호복희와 여호와 두 남매가 지상에 태어났다. 여호와 하느님이 지상의 만물을 창조하고 찢어진 하늘을 보수(補修)한 이 때는 지금부터 몇 십 만년 전 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산해경에 기록된 것과 같이 뇌신(雷神) 풍뢰우(風雷雨)가 일으킨 대홍수로 인하여 지상의 인간은 거의 멸종되고 오직 태호복희와 여호와 두 남매만 살아남았다는 기록은 “역사적 진실”이라 사료된다. 따라서 현생 인류는 모두 다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의 자손들이 분명하다. 그리고 마고(麻姑)와 여왜(女媧:야훼:여호와)는 신모(神母)이며, 인간들의 수복(壽福)을 관장하는 같은 삼신(三神)이라 사료된다. 


 [1]. 여호와 상제는 찢어진 하늘을 보수(補修) 했다.

수신(水神) 공공은 본래 염제의 후손인 화신(火神) 축융의 아들이다. 황제와 염제 신농의 전쟁에서도 공공은 물을 이용해 염제를 많이 도와주었다. 한때 공공과 전욱의 싸움에서 양쪽 군대가 승부를 가리다가 공공이 승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참을 수 없는 화가 치밀어 하늘을 떠받고 있던 부주산을 머리로 힘껏 들이받아 서북쪽 하늘이 기울어졌다.

여호와 상제는 공공이 훼손한 부주산을 큰 거북이 다리를 잘라 대지의 사방에 세워 하늘을 떠받히는 기둥으로 삼았다. 이는 마치 큰 천막을 치고 네 귀퉁이를 기둥으로 떠 받혀 놓은 모습과 같았다.  또한 여호와 상제는 강가의 오색 돌을 주워 모아 불 속에 오색 돌을 녹여서 만든 아교로 뚫어진 하늘의 구멍들을 메꿨다. 한다. 이와 같이 “여호와 상제”가 하늘을 보수한 것을 후세의 사람들은 여와보천(女媧補天)이라 기록하였다.

대황(大荒)의 서쪽에는 율광(栗廣) 이라는 넓은 들판에 10명의 신들이 살고 있었는데 여와의 창자로 만든 신이라 하여 이 신들의 이름을 <여와의 장(腸)>이라 부르고 있다. 이 신들은 길을 가로지르며 한 줄로 늘어서서 이 들판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 하느님은 자신이 창조한 인간을 위하여 생황(笙篁) 이라는 악기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이 악기는 조롱박(葫蘆) 13개의 관을 꽂아 만들었는데 마치 봉황의 꼬리처럼 생겼다. 이 악기의 음은 너무도 청아하고 아름다운 소리로 멀리 까지 들렸다고 하였다.

여호와 하느님이 처음 창안했던 슬(瑟)은 50개 줄이었으나 손녀를 위하여 25현(絃)으로 줄여서 손녀 소녀(素女)가 이 낙원에서 연주케 했다. 특히 복희가 작곡한 가변(駕辯)이라는 악곡을 연주하면 온갖 신들과 사람, 짐승들이 찾아와 마음을 감동시켰다. 한다. 여호와 상제가 만든 악기로 인하여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즐거운 나날로 행복하게 살았다.


[2]. “여호와 상제“는 六書(6서)를 만들었다.

大辯經(대변경)에서 말하기를 태호복희는 배달국의 신시에서 나와 雨師(우사)가 되어 신룡(하백)의 변화를 보고 팔괘를 만들었다. 그 당시 신시에서 癸亥曆(계해력)을 사용했으나 복희가 60 甲子(갑자)로 歲首(세수)로 고쳤다. 여호와는 “혼인 예법”을 만들고 朱襄(주양)은 복희의 제도를 계승하고 옛 문자를 인용하여 인류 최초로 六書(육서)를 만들에 후세에 전하였다. 태호복희는 부인이 세 사람이고 아들이 다섯이고 딸이 하나있었다. 복비라는 딸은 아버지가 돌아가자 너무도 슬퍼하며 섬서성 洛川(낙천)의 강물에 빠져죽고 다섯 명의 아들은 섬서, 호북성, 沔陽一山(면양일산)에 숨어버렸다.

태호복희가 만든 龍馬河圖(용마하도)를 景龍書(경용서)라 하고 一書(일서)에 九曲(구곡)이기 때문에 九龍篆(구룡자)라고 한다. 綱監金丹(강감금단) 권2 五帝紀(오제기)에서 “여호와”께서 전래한 六書(6서)는 문자의 근본이며 만세 문자의 시조라 하였다. 복희가 만든 천지 변화의 용마하도와 여호와 황제께서 만든 6서를 인용하여 蒼頡(창힐)은 漢文(한문) 자를 더욱 발전된 문자를 만들게 된다.

註 : 六書(육서) : 漢文(한문) 글자의 구성에 관한 여섯 가지의 종류를 말한다. 1,象形(상형), 2,假借(가차), 3,諧聲(해성:소리글자),4, 轉注(전주), 5, 會意(회의), 6. 指事(지사)이다. 2, 한문 글자의 여섯 가지 서체. 大篆(대전), 小篆(소전), 隸書(예서), 八分(팔분), 草書(초서), 行書(행서)이다.

1, 象形(상형):물건의 형상. 2,假借(가차): 음이 같은 다른 글자를 빌어 씀 3, 諧聲(해성: 形聲(형성):한자를 만드는 법. 글자의 반은 뜻을 반은 음을 나타내는 일, 柯(가)의 木(목)은 나무를 나타내고 可(가)는 음을 나타내는 따위. 4, 轉注(전주):소리 관계상 지금까지의 글자가 적당하지 못할 때 같은 부류 안에서 새로 만들어 내는 일. 5. 會意:漢字(한자)에 있어서 둘 이상의 글자를 합하여 한 개의 자형을 만들어 새로 한 글자를 만드는 일, 또는 그 글자. 6,指事(지사): 추상적 관념을 부호로 나타내는 방법, 一, 二, 三. 上, 下 따위이다.

[산해경]의 의하면 동방의 靑帝(청제) 태호복희는 木神(목신) 句芒(구망)을 보좌관으로 삼고 동방 1만 2천리를 다스리고, 남방의 炎帝(염제) 신농(神農)은 火神(화신) 祝融(축융:공공 아버지)과 함께 남방 1만 2천리를 다스리고, 金神(금신) 白帝(백제) 소호는 蓐收(욕수)를 보좌관으로 삼아 서방을 1만 2천리를 다스리고, 水神(수신) 顓頊(전욱)은 黑帝(흑제)로서 玄冥(현명)과 風神(풍신) 禺强(우강)을 보좌관으로 삼아 북방 1만 2천리를 다스리고, 土神(토신) 헌원은 黃帝(황제)로서  后土(후토)를 보좌관으로 삼아 중앙을 다스리고, 神母(신모)“여호와 상제”는 태호복희씨가 보좌하고 3황 5제를 다스렸다. 

[3]. 여호와 상제는 3황5제를 다스렸다.

[역사 진단 제8편]배달국의 제 5대 태호복희(태우의) 황제는 神市(신시:천산:에덴동산:천부도)에서 태어나 雨師(우사)의 직책을 맡았다. 후에 有巢(유소)씨, 燧人(수인)씨와 함께 西土(서토:천산 신시)에서 청구, 낙랑을 거쳐서 하남성 회양현 陳(진:엄택곡부)으로 도읍지를 옮기고 경인(BC 3511년)에 震旦國(진단국)을 개국하고 동방의 상제에 올랐다. 

성산(聖山) 엄택곡부(奄宅曲阜:중국 하남성)는 [인류의 시조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이 처음 진단국(震旦國:조선)을 개국한 땅이다. 하느님이 수시로 내려와 지상의 인간들을 도리로 교화하고 歸依(귀의)하신 땅이다. 그 때 신옥(神屋)에서 거처 하실 때의 춘절에는 각 가정마다 만복이 충만하여 영화롭고 부귀를 누리며 살았다.
◈ 震旦國(진단국)은 곧 조선이다. 단군왕검의 신하 神誌(신지)가 지은 책을 神誌秘史(신지비사)라 한다. 신지비사의 震檀九變圖國(진단9변도국)은 신지가 지은 圖讖(도참:장차 길흉을 예견하여 기록한 책)이다. 신지가 지은 震檀九變圖國(진단9변도국)이란 우리나라의 여러 임금들의 서울(도읍)이 아홉번 변하게 된다는 것을 예견하여 기록한 책이다. 이씨 조선의 도읍도 이 <9변지도국>에 의하여 세워졌다 하였다. 또한 大東韻玉(대동운옥)이란 책에서 말하기를 신지는 단군시대의 사람으로 스스로 神仙(신선)이라 하였고 또 書雲觀秘記(서운관비기)에서 九變震檀圖(9변진단도)가 있는데 朝鮮(조선)을 곧 震檀(진단)이라 하였다.

태호복희와 여호와 상제는 세계 인류의 시조(하느님)이다. 또한 태호복희는 四象八卦(4상팔괘)와 숫자를 만들고 여호와 상제는 혼인법과 문자를 만들고 처음으로 三神敎(삼신교:종교)를 만들어 천지인 일체법(無爲法(무위법)을 설법하여 중생을 구제했습니다. 진실로 태호복희와 여호와 상제는 인류문명의 시조이며 인류의 공동조상이 된다.


    ◉ 태호복희 황제는 인류 문명의 시조이다

 태호복희씨와 여호와의 아버지는 뇌신(雷神) 풍뢰우(風雷雨)의 아들이기 때문에 태호복희와 여왜의 성(姓)씨 또한 風(풍)씨라 했다. 복희씨의 이름은 方牙(방아)이며, 혹은 蒼牙(창아)이고 이를 蒼精(창정)이라 하고 호를 春皇(춘황), 또한 號(호)는 皇雄(황웅)이다. 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의 자손들은 후세에 풍씨 성이 나누어져 佩(패), 觀(관), 任(임), 己(기), 庖(포), 理(리), 姒(사), 彭(팽)씨의 여덟 성씨로 나누어졌다. 지금 산서성의 濟水(제수)에 그들이 세웠던 任(임), 宿(숙), 須(수), 句(구), 須臾(수유)족 등의 나라들이 있었다.

복희씨와 그의 여동생 여와씨 이후에 공공씨(共工氏), 태정시(太庭氏), 백황씨(柏皇氏), 중앙씨(中央氏), 역륙씨(歷陸氏), 여련씨(驪連氏), 혁서씨(赫胥氏), 존로씨(尊盧氏),혼돈씨(混沌氏), 호영씨(昊英氏), 주양씨(朱襄氏), 갈천씨(葛天氏), 음강씨(陰康氏), 무회씨(無懷氏)가 대를 이어, 진단국 풍성은 15대를 계승하였다.(18사략)

『열자』에 의하면 태호복희는 글자(書契)을 만들고, 천리(天理:河圖(하도: 4상8괘, 음양5행)를 창제하셨으며, 결승(結繩) 문자를 만들고, 어망을 만들어 물고기를 잡는 기술과 그물로 새를 잡는 법도 가르쳤다. 태호복희 황제는 인류 문명의 시조이며, 그의 여동생 여와(女媧)는 중매의 여신이며. 남녀 사이의 혼인예법을 정했다.

환국 神市(신시) 시대의 雨師(우사) “복희씨”는 하루에 열두 번 변하는 神龍(신용:河伯(하백)을 보고 河圖(하도)와 落書(낙서)로 桓易(환역)을 만들었다. 神龍(신용)이 水神(수신)이며 곧 河伯(하백)이다.  또한 그 당시 신시에서 癸亥曆(계해역)을 사용했으나 그 해의 歲首(세수)를 갑자로 역법을 고쳤다. 60갑자는 10개의 天干(천간)과 12개의 地支(지지)를 陽干(양간)과 陽支(양지)와 陰干(음간)과 陰支(음지)로 짝을 지어 나가면 60개의 干支(간지)가 나오게 된다. 즉 무려 5500여 년 전에 고친 역법을 오늘날까지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천체들이 일정한 궤도에 따라 운행되는 모습은 아득히 멀어 우리 인간의 눈으로는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또한 하늘은 광대 무변하고 형체도 없이 空虛寂(공허적)한 그 氣運(기운)을 사람의 눈으로 보고자 하여도 볼 수가 없으며 만물은 끊임없이 생성소멸 되고 있으나 그 神妙(신묘)한 원리를 어리석은 사람들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     © 박병역 칼럼니스트

영국의 물리학자 호킹 박사는 200억년전 작은 공간에 모든 물질이 응집되어 초고밀도, 초고온의 에너지 덩어리 곧 우주알이 찰라에 대폭발하여 끝없는 우주가 펼쳐졌으며 지금도 팽창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학설은 이미 5600여년 전 세계 인류의 어버이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은 우주의 창조는 물론 일체 모든 만물의 생성소멸(生成消滅)되는 천리(天理)의 하도(河圖),낙서(落書)를 창제하여 후세의 자손들에게 규범으로 삼게 하셨습니다.

무려 5천여 년 전의 태호복희 황제께서 그 형상의 모습을 신묘한 符效(부효)로 방위와 數(수)를 정함으로서 그 상에 준거하여 일월과 五星(5성)이 운행되는 “巨示(거시)의 세계”와 “微示(미시)의 세계”까지도 미루어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신묘한 점부호를 “한겨레의 후손”에게 의표를 세워 규범이 되게 하였던 것이다.

이 점 부호로 규범을 정한 후로 출생 후의 길흉은 물론 행동 할 시는 득실을 미리 살펴 볼 수 있었다. 또한 河圖文(하도문)으로 形而上界(형이상계)와 천체를 관찰 할 수 있었고 形而下界(형이하계)의 지리와 만물에 대한 형상의 흐름을 관찰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天地(천지) 중의 사람은 언제 어느 때가 어떠한가를 그 움직임을 符圖(부도:六爻)로서 미리 마음을 헤아려 점을 칠 수 있었던 것이다. 천지 만물이 변화하는 원리는 목, 화, 토, 금, 수의 “음양 오행의 법칙”에 의거하여 사계절이 질서 있게 순환되고 있는 것이다.

천지를 乾坤(건곤)에 적용한 四象八卦(사상팔괘)와 河圖(하도) 洛書(낙서)는 우주의 탄생과 자신의 출생은 물론 본성을 밝혀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를 명확히 깨달을 수 있는 성인(聖人) 학문이다. 하도,낙서가 나온 후에 천문, 지리, 인사(人事)의 三才之道(삼재지도)를 점 부호로 한대 묶어 음양 오행의 법칙에 의거하여 해설하였으나 그 뜻이 서로 상통하여 결점이나 어긋나거나 한치의 오차도 없다. 의학, 침술, 병법, 농법, 심지어 제왕들의 통치에도 적용하였던 것이다. 곧 오늘날 교과서(敎科書)의 모태인 것이다.

태호복희 황제는 만고에 불변하는 진리의 정법을 창제하고 여호와 하느님은 혼인 예법을 창제함으로 말미암아 인류의 문명이 시작되고 그의 자손들이 전 세계에 널리 퍼져서 온갖 농기구와 음악을 만들어 인류의 문명이 동시에 발달하게 되었던 것이다.

태호복희 성인이 말씀하시기를 천리의 이치에 순응하라고 하시며 天道(천도)로 음양을 정립하고, 地道(지도)로 유강(柔剛)을 세우고 인의(仁義)를 人道(인도)로 가르쳤던 것이다. 성경 또한 도로서 의리를 강조했습니다.

[성경 이사야 편 41:2]  동방(조선국)의 누가 사람의 [도(道)]로 의(義)를 세웠으며 열국의 여러 왕들도 누가 그의 발 앞에 굴복시켰으며 그로 하여금 왕들이 도리(道理:태호복희의 천리)로 다스리게 하였으며, 그들로 그의 칼에 티끌 같게, 그의 활에 불리는 초개(草芥)같게 하매. [41:4] 이 일을 그 누가 행하였겠느냐? 누가 이루었겠느냐 누가 태초부터 만대의 인간들에게 생명을 정(定)하였겠느냐? 나 여호와 이니라 태초에도 나요 나중 있을 자에게도 내가 곧 그니라 라고 성경에서 하느님은 도리를 말씀하셨습니다.


               ◆ 인류의 4대 문명은 3황5제의 자손들이다

   1, 곤륜산(에덴동산)은 인류의 시원지이다

▲    인류의 4대문명 발상지 ©박병역 칼럼니스트
환국의 환인(BC 7199년)은 인류최초로 천산 밑에 환국을 개국하였다. 곤륜산은 대한민족의 始源地(시원지)이며, 인류 문명의 시원지이다. 세계사의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살펴보면 북쪽에서 이주해온 히타이트 족이 철기를 가지고 와서 메소포타미아를 멸망시키었다. 또 인도의 인더스 문명은 서북쪽에서 나타난 아리안 족에 의해 정복된다.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 또한 북쪽(곤륜산)에서 내려온 아리안(환국족) 족에 의해 정복된다. 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상기 세계사의 본문을 종합하면 그리스의 북쪽, 메소포타미아의 북쪽, 인더스 문명의 서북쪽은 지도상 곤륜산이 된다. 

서방의 수메르 문명과 동방의 조선 문명은 동시에 일어나 발전되었는데 동서양의 학자들은 어찌하여 동서의 문명이 동시에 발전되었는지 그 해답을 오늘날까지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있다. 고대는 서양의 역사를 동방에서 알 수 없었고 동양의 역사를 서방에서 알 수 없었으나 현세는 세계의 모든 문화가 개방된 문명 시대에 동서양의 고대사를 비교 탐구한다면 어찌 동서양이 동시에 발전된 경로를 깨닫지 못 하겠는가?

대개 세계의 각국의 모든 사람들은 수메르(sumeru)가 인류문명의 발상지로 인식하고 있습니다. 또한 한국의 대다수 사람은 4대문명 중 [황하유역]을 중국의 영토로 인식하고 있으나, 황하 유역은 배달국 제5세 태호복희(B.C 3512~3419)황제가 다스린 진단국이며 또한 단군왕검이 친히 다스린 고조선 삼한의 진한(辰韓)지역입니다. 그리고 지상의 3대홍수 이후에 인류의 문명이 급속히 발달하게 되었기 때문에 중국의 황하문명이 아니고. [고조선 삼한의 황하 문명]이라 칭해야 명확한 정답입니다. 

 배달국 시대 제5세 태우의환웅과 다의발환웅(여호와 하느님)의 神政(신정)시대에 거느린 자손들은 一切智(일체지)에 형통하여 자유자재한 불멸의 不死(불사) 神聖(신성)이시다. 전 세계는 조선의 一家(일가)로서 태호복희와 여호와 옥황상제의 자손들이 전 세계의 각 나라 천왕에 임명되어 세계의 인류 문명을 동시에 발달 시켰던 것이다. 

 (1) 조선국의 황하문명은 B.C 3500년경 일어나고, (2).메소포타미의 수메르 문명은 B.C 3200년경 알루바이드, 우르크 지역을 중심으로 발달했다. 국왕은 신의 대리자로서 하느님을 숭배하는 최고의 사제가 되었으며, 신권 정치가 실시되었다. 지구라트(Ziggurat)라는 큰 탑을 쌓고 신전이 국가의 중심이 되었다.
세계 최고의 성문법인 수메르 법이 1947년부터 발굴되었다. 그리고 1976년 에블라(Ebla)에서 발견된 약 16,000여개의 토판문서는 당시 시대의 법률, 종교, 교역 등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3),이집트 문명은 함족(Ham:염제신농)이 40여 개의 도시 국가를 세웠다가 B.C 3500년경에는 상, 하 두 왕국으로 통합되고, B.C 3000년경에는 통일 왕국이 성립되었다. 이집트의 국왕은 파라오(Pharaoh:바라오)는 태양신으로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했다. 

 (4). 인도의 인더스 문명은 아리안 족에 의해 B.C 3000년 중엽부터 약 1000년 동안 인더스 강 유역에서 청동기를 바탕으로 번영한 고대 문명이다. 인더스 문명의 대표적인 유적은 당시 2대 도시였던 하라파와 모헨조다로이다. 도시의 특징은 건물의 대부분이 구워서 만든 벽돌로 지어졌다. 또한 정교한 도로망과 하수도 시설, 목욕탕․ 집회소․ 곡물 창고 등이 발굴되었다. 정교한 청동기와 칠무늬 토기를 만들었으며, 저울을 사용하였고, 상형 문자를 새긴 인장이 출토 되었다. 

   2. 수메르어는 한글로 씌어졌다

수메르어는 진흙으로 빚은 점토판에 뾰쪽하게 깎은 대나무로 눌러서 쓴 쐐기문자이며 중국에서 발견된 쐐기문자와 꼭 같은 우리나라의 옛 문자이다. 우리글의 한자는 道(도)라 쓰고 길 도라 읽고 신(神)은 sin(신)이라 읽었다. 수신(水神)과 비씬(雨神(비신), gir(길)은 우리말의 길이고 bad(밭)은 한자로 田(전)이라 쓰고 밭전이라 읽는다. 또한 수메르어 압바=ABBA, 엄마=UMMA, 달(月)=DAL,nim(님)은 우리말의 하나님 할 때의 경칭어 인 것이다.

수메르의 문장 구조는 한국어와 같은 주어-목적어-동사의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노아, 아누가 태호복희 황제이며, 그의 부인이며, 지혜의 수신(水神) 엔키와 여호와 상제가 같은 인물이라면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3. 구약성서는 수메르신화에서 비릇 되었다

기원전 3,100여 년 전 수메르 시대에 쐐기 문자를 사용하여 神王(신왕)에 대한 찬양시, 영웅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서사시, 사회의 기준을 확립한 법전, 마귀를 쫓는 주문, 신과 神殿(신전)을 찬양하는 詩(시), 아버지가 아들에게 가르친 箴言(잠언), 각 도시들 사이에 국경 분쟁으로 생긴 전쟁사 등의 신화(신들에 대한 이야기)를 쐐기 문자로 기록된 토판과 석상과 浮像(부상), 원통형 印章(인장)등 많은 유물이 근세의 150여 년 전에 발견되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과 티그리스강 사이에 각 도시 국가를 형성하여 문자를 사용한 민족을 소위 “수메르 문명“ 이라 한다. 즉 수메르는 기원전 2,335년에 셈족(염제신농 자손)인 싸르곤 왕이 북쪽의 메소포타미아에 아카드 라는 도시를 세워 왕조를 창건하고 셈족어인 아카드어를 모국어로 사용한 사람들이 수메르(sumeru)라고 불러 지금도 그렇게 부르고 있다. 기원전 약 2,150년경 메소포타미아 동쪽 자그로그 산맥을 넘어온 부족들이 도시 국가 아카드 왕국을 침략하여 멸망시키게 된다. 그 후 약 40년 뒤에 남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강 하류에 도시 국가 <우르>를 중심으로 수메르 연맹체를 형성하여 모든 국정 문서를 다시 수메르어로 기록하였던 것이다.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세상의 운명은 일곱 신(북두칠성 신)들이 결정하는데 최초 왕조 시대의 도시 <우루크>에 안(an:안파견)이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 하늘로 올라 간 후 나머지 여섯 신들이 수메르의 도시를 통치하였다. 수메르의 중앙에 위치한 도시 <니푸르>는 風神(풍신) <엔릴>이 다스리고 북쪽의 작은 도시 <키쉬>는 <닌후르쌍> 여신이 다스리고 있다. 

 지혜의 水神(수신) <엔키>는 유프테스강 하류의 바닷물이 섞이는 삼각주의 늪이 많은 지역에 위치한 <에리두>의 도시를 다스리고, 달신 <난나>는 에리두에서 남쪽에 위치한 <우르>의 도시를 다스리고, 정의의 태양신 <우투>는 해가 뜨는 동쪽에 위치한 <라르싸>의 도시를 다스리고, 금성을 상징하며 질투의 여신 <인안나>는 서쪽에 위치한 <우루크>의 도시를 다스리고 있었다. 수메르의 일곱 신들이 자리 잡은 위치는 상중하 동서남북으로 나뉘어져 북두칠성의 위치와 흡사하다.

<토판에 기록된 수메르 신화>에 의하면 북두칠성의 일곱 신들이 사람을 창조하고 세상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북쪽은 슈부르이고 동쪽은 하마지이며 남쪽은 수메르이고 중앙에 아카드 왕국이 있고 서쪽은 마르두(에모리)의 부족들이 살고 있었는데 모두 같은 언어를 사용하며 기도문이나 주문을 읽으며 평화롭게 살았다. 

세월이 흐르자 여러 도시 국가들이 생겨나 서로 승부를 겨루는 투쟁의 시대가 되자 지혜의 신 엔키(여호와)는 그들을 서로 나누어 다른 언어를 사용하도록 하여 서로 사이를 멀어 지게 하였다. 이후부터 지상은 혼돈의 시대가 시작된다. 수메르의 조상들은 동방에서 들어 왔다. 라고 <바벨탑>에 기록되어 있다. 수메르 사람들은 하느님은 동방에서 왔다는 것은 일반적 관념으로 자연히 믿고 있다. 왜냐 하면 태양은 언제나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기울며 정의의 태양신은 동쪽에서 정의의 신이 왔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메르 신화시대에 메소포타미아의 5도시를 서로 장악하여 통일 왕국을 이룩하기 위한 투쟁사를 기록한 고대 역사가 수메르 신화이고 유태인 역사이며 또한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가 곧 오늘날 “구약성서”인 것이다. 즉 구약성서는 “수메르 신화와 이스라엘의 고대 역사”를 인용하여 종교 경전으로 聖化(성화) 시킨 것이 오늘날 기독교의 <구약성서>란 사실은 세계의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사료된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아담은 기원전 3,100년경 유프라데스, 티그리스강 상류의 구스,하월나 지방에서 에덴 동산을 건설하고 아브라함은 아담의 제 20대 자손이다. 이스라엘 제국을 건설한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27 代祖(대조)이고 수메르 제 3왕조의 <우르> 지방에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아브라함의 제 14대 자손이다. 메소포타미아 상부에 살고 있던 악카드족은 아담이 건설한 에덴 동산을 침략하여 쟁취하고 그 후 풍백(엔릴) 영웅은 악카드족을 침략하여 제거하고 메소포타미아에 五都市(오도시) 왕국을 건설하여 <지우싸트라 왕:태호복희> 연대까지 이르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 나온 아담의 자손들은 티그리스 강 동쪽 아르메니아 고원지대에서 부족장 시대를 거쳐 노아(복희) 연대까지 이르고 있다.

한편 악카드족은 유프라데스강의 상류 지방에서 정권을 수립하여 우트나피시팀 시대에 이르고 기원전 2,350년경에 이른바 <노아의 홍수>를 겪게된다. 또한 악카드족은 엔릴의 정권을 물리치고 메소포타미아 상부지방에 악카드 왕국을 건설하자 수메르족과 악카드족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마침내 수메르는 패망하게 된다. 

서기전 1,880년경 <아브라함>은 지중해 가나안의 동쪽으로 이주하고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동쪽지방에 이주한지 200년에 흉년을 만나 그의 자손 야곱(이스라엘)이 열두 아들을 거느리고 애굽에 들어가 혹독한 종살이를 하게 된다. 이스라엘 민족은 에굽에 들어가 종살이 215년 간에 자손이 크게 불어나 70만 명으로 번창하자 애굽왕 바로는 왕권에 위협을 느껴 이스라엘 자손들이 더 이상 번성하지 못하도록 멸종 정책을 실시하는 시대에 이스라엘의 영웅 <모세>가 출생한다.

<모세>는 애굽왕 바로의 딸 할셈슈트의 아들이 되어 궁중에서 40년 간 生母(생모)와 함께 생활하면서 그는 아담과 이브의 에덴 동산 건설에서 우르 제 3왕조에 이르기까지 무려 2,000여 년에 걸쳐 동족들이 걸어온 비참한 수난의 역정을 뼈저리게 통감하고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하겠다는 결심으로 동족을 규합하여 義兵(의병)을 결성하게 된다. 드디어 거사 날에 애굽의 도시를 습격하여 애굽왕 바로의 맏아들과 여러 신하를 무참히 참살하고 수많은 주민을 살상하여 금은 패물과 의복을 강탈하여 애굽의 수도 전체를 피바다로 물들게 하여 슬픔의 통곡 소리가 가득히 울려 퍼졌다. 

 모세는 70만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고 시내산에 들어와 천막 국가를 건설하고 천막 교회를 세워 오직 <여호와 일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창설하게 된다. 즉 <모세>는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로 결속시켜 애굽을 침략할 목적으로 여러 신을 숭배하고 있던 이스라엘 민족에게 <고대 수메르 신화>를 인용하여 아담과 이브(전 3,100년경)를 元祖(원조)로 삼고 <조선국의 여호와 하느님>을 오직 이스라엘 민족만을 수호하는 유일신으로 받드는 종교를 창설했다. 

 소위 수메르문명시대 당시 태호복희와 여호와 하느님의 자손들은 종교 도시 국가를 건설하여 군신(君臣)은 없고 오직 부자(父子)관계를 형성하여 태호복희(아누)를 하느님으로 받들어 숭배했던 것이다. 그 후 그의 자손들 日(태양신), 月(달신), 木(동방신), 火(남방신), 土(지신), 金(서방신), 水(북방신),의 일곱 신을 숭배하는 종교 도시 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BC 1279년 조선국 여호와 상제는 당시 에집트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겠다는 계약을 모세와 맺고 이스라엘은 여호와 1신을 숭배하게 되었다. 즉 이스라엘 민족은 당시 대조선국의 여호와 상제와 조선 백성으로 계약을 맺고 제후국이었던 것입니다.

고대는 城(성)을 중심으로 나라를 개국하여 도시 국가로 발전되면서 서로 영토 점령을 위한 전투가 벌어진다. 예나 지금이나 공동체 구성원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방편은 종교만큼 좋은 방법은 아직 까지 찾아 볼 수 없다. 모세는 이스라엘민족을 결속시켜 국가를 보존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스라엘의 70만 전 민족을 일사불란한 군대화로 무장했다.

모세가 만든 전 국민 병력 의무의 軍兵制度(군병제도)는 오늘 날 까지 이스라엘에서 시행되어 성년이 된 남자는 2년 반 여자는 2년 동안의 의무적으로 군대에서  복무해야할 병력의 의무가 실시되고 있다. 중동지역은 오늘날도 항상 전운이 감돌고 있다. 전쟁이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는 근본적 원인은 인류의 부모를 올바로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4. 이스라엘은 선민이 아니고 조선의 제후국이다

태호복희와 여호와(BC 3528-3407) 상제(하느님)는 우리나라의 진단국(고조선국)에서 3황5제를 다스리고 BC 1279년 이스라엘의 모세와 계약을 맺게 된다. 고대 수메르에 도시 국가가 형성된 것은 기원전 3200년경부터 약 400여년동안 수메르왕조가 시작되고 유프라데스강 하류 지역의 강 사이에 크고 작은 도시 국가들이 성장하였던 것이다. 상기의 도표와 같이 태호복희와 여호와 상제와 그의 자손들이 “수메르의 문명”을 발달시켰던 것입니다.

그리고 고대 메소포타미아 국가의 변천사를 기록한 “ 슈메르 왕 계보”의 첫 행에 하늘(천제:하느님)로부터 에리두에게 첫 왕권이 내려졌다. 라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엔릴 영웅은 “왕위가 하늘나라에서 내려온 후에 승화된 敎權(교권)과 王權(왕권)이 하늘나라에서 부여된 연후에”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부여된 연후에는 잘못된 번역입니다.

즉 고대 우리나라의 환인의 환국, 환웅의 배달국은 천제(天帝)가 다스린 나라이며 우리나라의 천제가 곧 왕권의 상징으로 천부경(天符經)을 새긴 거울을 주어 왕권을 부여하고 제후국으로 다스렸던 것입니다. 즉 동방의 조선국 천제가 세계 각국의 왕권을 부여했던 것입니다.  고조선국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여호와 삼신 하느님을 숭배하고 있었습니다. 

 고조선(진단국)의 여호와 상제(하느님)은 무려 2200년 후에 이스라엘 민족의 영웅 모세(BC1,360~1,240)와 朝鮮(조선) 백성으로 계약을 맺었으므로 고대 이스라엘 민족은 노예에서 해방되었던 것입니다. 여호와 상제와 모세와의 계약을 후세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선민(選民)이라 부르며 마치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이라고 믿고 있으나 여호와 상제는 “이스라엘 민족을 조선의 후국(侯國)으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조선의 선민(選民)으로 선택 받은 이스라엘 민족은 반드시 제천단(참성단)을 쌓고 제사를 올리며, 여호와 하느님 일신을 숭배하며, 특별한 보호를 받았던 것입니다.

모세(BC1,360~1,240)시대의 우리나라는 조선국 삼한시대이며 제천단을 만들고 제사를 드리는 종교행사는 이미 “여호와 삼신을 하느님”으로 숭배하고 있었던 시대입니다. 조선국의 단군왕검(BC2333-2240)은 조선국 삼한의 영토를 관리하고, 각 제후국의 왕을 임명하는 권한을 갖는 제사장이었습니다. 

 일본국 이와사끼 다미해이(Tamihei Iwasaki)와 기와무라 유지로(Uwjiro Kawamura)가 공저한 [New English Japanese Dicionary]는 선민(選民)을 cho'sen The Chosen people(조선의 백성)이라 헸고 우리나라 이종수, 피천득(李鍾洙. 皮千得)이 공저한 콘사이스 영한사전(英韓辭典)은 소위 선민(選民)을 “Cho'sen people(조선 민족)”이라하였으며 기타 많은 사전들도 選民(선민)을 조선 백성(Cho'sen people)이라 기록돼 있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 아니라 조선의 제후국으로 입증되었습니다. 끝.


저서(著書)
1. 통한의 한국역사(소송진행문)
2. 세계적 대국 고조선
3. 3황5제의 역사적 진실
4. 석가모니의 역사적 진실
5. 인류의 기원역사
6. 1만년 한국사 절요(切要)
7. 격암유록의 해설
 
본 이미지는 링크 URL이 잘못 지정되어 표시되지 않습니다.
2008/07/06 [11:07] ⓒ pluskorea

결국 인간의 시조(시초)는 <한곳>에서 발생한 <한분>이겠지요.
그렇게 보면 지구인들은 모두 <한 종족>이지요.
그러나 <한 민족>은 아니지요.
<우리 민족>이 桓檀族? 朝鮮族?
어디를 역사의 시발점으로 하는냐에 따라 다르지요.
단군조선(朝鮮族)부터 라고보면,
위 주장에는 무리가 있다고 하겠고,
환인,환웅시대(桓檀族)부터 라고보면 ,
위 주장에 타당성이 있다고 봅니다.

 
 
 

진짜역사

대빵 2014. 12. 24. 21:34

사실 고비사막 간쑤성에 로마군 패잔병이 산다는 것은 기록에 관해서라면 최고라고 할 수 있는 중국 고전에도 언급돼 있다.

중국의 최고의 고대역사로 꼽히는 후한서 등에 따르면 한나라 원제의 명령으로 서역 지방 개척에 나섰던 서역 부도호 천탕

(陳湯)이 기원전 36년 골칫거리이던 흉노를 대파시키는 가운데 머리가 노랗고, 코가 우뚝한 이상한 모습의 병사 1천여 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흉노와는 전혀 달랐다.



흉노족 밑에서 용병으로 살아

 

 

자신들을 로마인의 후예라고 주장해 온 리첸 농민들이

로마군사 복장을 한 채 관광객을 맞이 하고 있다

후한서는 광무제(光武帝, 재위 25~57)부터 헌제(献帝, 재위 189~220)까지 후한(後漢)의 13대(代) 196년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중국 역대 왕조의 정사 ‘25사(史)’ 가운데에서 사마천의 (司馬遷)의 <사기(史記)>,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진수

(陳壽)의 <삼국지(三國志)>와 함께 ‘4사(四史)’로 꼽히는 역사서다. 또한 한반도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역사서다.

천탕 장군은 집단부락을 만들어 이들이 생활할 수 있도록 배려했고, 이름을 중국어로 로마를 뜻하는‘리첸(驪 革+干, 영어로는

 Liquian)’현이라고 붙였다. 이곳 거주민들은 파르티아 왕국의 포위망을 뚫었으나 다시는 서쪽 로마로 가지 못하고 추적을

피해 계속 동쪽으로 이동해 중앙아시아 초원 지대로 옮겨왔다. 결국 이들이 흉노에 의지하면서 용병생활을 해온 로마의 후손

들임이 판명된 셈이다. 그들은 흉노들에게 세계 최고의 군대로 자처했던 로마군대의 전쟁방식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들의 행방에 대해서는 1940년대부터 영국 학자들의 관심이 돼 계속 추적 대상이 됐다. 그러다가 최근 중국 서북민족대학

관이취안(關意權) 교수와 호주 애들레이드대학 데이비드 해리스 연구원 등은 파르티아와 벌인 ‘카래(Carre, 오늘날 Harran)

전투’에서 로마군단이 사라진 뒤 20년이 지나 리첸이라는 마을 이름이 나타났다는 데 착안해 연구를 본격화했다.

1955년 옥스퍼드 대학교 호머 H 더브스 교수는 기원전 36년 로마사절단이 중국 한나라에서 갖고 온 문서에서 기원전 53년 로마와

파르티아와의 전투에서 도망간 로마 군사들이 중국 변방에서 훈족의 용병으로 일하고 있다는 추측이 가능한 문서를 찾아냈다.
더브스 교수는 이러한 이론을 정리해 <고대 중국의 로마인 도시>라는 논문을 발표했으나 학계에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와 작가들이 고대 중국의 로마인도시 리지엔을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리첸’은 로마의 중국식 옛날 지명

중국과학원 유전자 및 발육생물 연구소 소속 학자들과 공동으로 이들은 최근 지난 리첸현 주민들을 대상으로 DNA검사를 벌였

으며 이 일대에서 유럽인의 체형 특징이 완연한 99개의 시신을 발굴해 이들이 로마 군단의 후예임을 확인했다고 문회보는 전했다.

이 지역의 주민들은 그 동안 중국인들과 비교해 피부 색깔이 붉고, 키가 크고, 코가 우뚝 솟고 갈색 머리여서 인간적인 대접을

받지 못한 채 차별을 받아왔다. 그러다 이번 학자들의 발견으로 자신들이 로마 집정관의 후예임이 밝혀지자 마을 전체는 경사

분위기다.

 

융창현은 이에 따라 최근 리첸연구회와 로마군단 후예 전문 연구팀을 구성해 이 일대를 관광명소로 만드는 방안에 착수했다.
간쑤(甘肅)성 융창(永昌)현의 한 마을에 사는 400여 명의 유럽인을 닮은 농민들은 파르티아 왕국(오늘날의 이란과 이라크)과의

전투 이후 행방이 끊어진 로마 집정관 크라수스의 아들을 비롯한 로마인의 후예들이다. 크라수스(기원전 115~53년)는 제1차

삼두(三頭)정치 당시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함께 집정관을 맡았던 로마의 정치인.



삼두정치를 벌인 크라수스의 군대

 

 

로마의 첫 삼두정치를 하게 된 크라수스는 당시

동방의 강국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대패했으며 그로 인해 목숨까지 잃었다

그는 기원전 53년, 3만 명의 보병과 1만 명의 기병 등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파르티아 왕국 원정에 나섰다가 ‘카래의 전투’에서

파르티아 군의 유인 작전에 말려 본인은 전사하고 병사들은 대부분 몰살당하거나 포로로 잡혔다.이때 제1군단장으로 참전했던

크라수스의 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당시 6천 여명의 병력을 이끌고 포위망을 탈출했으나 로마로 귀환하지 않고 사라져,

지금까지 행방이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었다.잠시 그때 로마의 상황을 보자. 당시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던 카이사르는

당선되기 위해 두 가지가 부족했다. 지지자와 선거자금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품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삼두정치를

시도했다. 품페이우스는 동방정벌에 공훈을 세운 부하들에 대한 처우개선을 목적으로 농지분배를 시도하려 했으나 원로원의

반대에 부딪혀 고심 중에 있었다. 또한 로마 제일의 부자인 크라수스는 자신의 최대 채무자인 카이사르를 저버릴 수 없는 처지

였다.카이사르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냈다. 폼페이우스에게는 옛 부하들의 표를 몰아주면 그들에게 농지를 분배해 주겠다며

설득했다. 다시 크라수스에게는 선거자금을 대주면 한자리 주겠다고 약속했다.

크라수스는 이러한 제안이 별로 달갑지 않았다. 성공하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대 채무자인 카이사르가 파산

이라도 하면 곤란해지는 입장에 직면하게 된다. 또한 대단한 군사력을 지니고 있던 품페이우스에게 경쟁의식을 느끼고 있던 관계

로 카이사르의 설득에 넘어가게 된다. 카이사르는 그 후 많은 공을 세웠다. 특히 그 유명한 갈리아 정복에서 수많은 전공을 세워

로마의 최고의 장군으로 존경 받게 된다. 크라수스는 초조했다. 품페이우스는 이미 동방정벌로 많은 명성을 얻었던 상태이고 그

에게 질투를 느끼던 크라수스의 업적이라고는 ‘스파르타쿠스 노예반란’을 진압한 것 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신도 많은 전공을 세워

명성을 얻어야겠다는 압력을 받게 된다. 영화 스파르타쿠스에서 로렌스 올리비에가 크라수스 역을 맡는다.

기원전 56년 삼두정치의 루카회담에서 품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집정관에 취임한다.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던 카이사르는 갈리아

총독으로 유임되며, 품페이우스는 당시 에스파니아, 크라수스는 시리아로 결정되었습니다.



“크라수스, 돈은 많았으나 戰備에는 허술”

 

 

로마군대의 핵은 중무장한 보병이다.

그러나 회전(평야전투)에서는 강하나 다른 지형이나 전투에서는 약점도 많다.

 

각자의 병력은 모두 10개 군단을 소유하기로 결정했다. 당시 1개 군단은 중무장한 6천명의 보병과 약간의 기병으로 각각 6만을

보유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크라수스는 55년 11월 시리아에 도착하여 전임총독 가니비우스에게 2개 군단을 인도받고 스스로

편성한 6개 군단을 합하여 8개 군단을 보유합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로마군단은 보통 600명 정원의 1개 대대(코르호스) 10개가

모여 1개 군단을 이루는데 반해 크라수스의 군단은 8개 대대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8개 대대뿐이어서 8개 군단병력이 정원

4만 8천에 못 미치는 3만 8천명에 남짓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8개 군단이라 하더라도 1만 명이나 모자랐다. 더구나 한심스러웠던 것은 돈이 많아 자비로도 병력이 충실한 10개

군단 6만 명을 편성할 수도 있었지만 군자금 부족을 이유로 포기해 버렸다.하여간 기원전 54년 크라수스는 1개 군단은 본진방어

병력으로 남겨두고 나머지 7개 군단 2만9천600명의 중무장 보병과 경무장 보병 4천 기병 4천을 포함한 4만의 병력을 이끌고

동방의 대국 파르티아 정벌에 나선다. 파르티아는 페르시아 제국의 전신으로 로마와 인접하고 있었으며 카스피해, 흑해, 그리고

지중해를 인접한 강대국이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의 비옥한 땅도 소유하고 있었다. 당시 소위 안식국(安息國)으로 불렸으며

동과 서를 잇는 관문이자 비단길 통로였다.

중무장한 보병의 평야전투가 장기, 그러나 힘을 발휘 못해

현재로 치면 북부이라크 사막지대라고 할 수 있는 파르티아의 사막으로 진격한 크라수스는 수레나스라고 알려진 파르티아의

장수에게 농락을 완전히 당한다. 기록에 따르면 중무장 보병인 로마군단을 상대하기는 벅차다고 생각한 수레나스는 활을 이용한

경기병을 주력으로 계속 유격전을 벌이면서 로마군단을 내륙 깊은 곳까지 유인한다. 유프라테스강을 건넌지 얼마 후 드디어 로마

군대는 그들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중무장을 한 보병을 중심으로 한 평야전투(회전)에 돌입하려고 했지만 수레나스의 기병대는

계속 로마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면서 직접 싸우지는 않고 화살만을 날린다. 로마병사들은 특유의 진형을 유지하고 적의 화살이

다 떨어져 자신들의 공격간격에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수레나스의 기병대의 화살은 멈추지 않았다. 낙타에 화살을 가득

싣고 대기하였다가 화살이 떨어지면 다시 보급을 받아 계속 공격했다. 계속되는 농락에 화가 난 젊은 크라수스는 휘하의 2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적진 깊숙한 곳까지 추격했지만 매복에 걸려 파르티아 1만기의 기병에게 몰살당한다. 젊은 크라수스는 전선을

이탈했지만 포위망을 뚫을 가망성이 없자 사로잡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자결했다고 전한다.



흉노와 싸우다가 결국 흉노에 편입

크라수스는 아들이 죽자 시니카로 피신하여 전열을 재정비 했지만 사기가 떨어진 로마군대로는 더 이상 싸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수레나스와 강화협정을 맺으러 갔다가 도중 수레나스의 배신으로 살해당한다. 시니카에 머물고 있던 로마병사들 중 도망친 일부

를 제외하고는 1만병이 포로로 잡혔다. 기원전 50년경의 이야기다. 아마도 도망친 포로들은 중앙아시아에 강자였던 흉노족과 싸웠

을 것이다. 또 파르티아와도 싸웠다. 그러나 로마병사들 가운데 일부는 다시 흉노에 편입되어 당시 중국의 지배자인 한나라와

싸웠을 것으로 추측된다. 흉노의 용병으로 생활하면서 한나라와 싸웠던 이들이 최종적으로 정착하게 된 곳이 고비사막의 오지

간쑤성이라는 것이다.

이제 사라진 미스터리 로마군단의 후예들이 역사와 DNA 과학을 통해 다시 발견됐다. 그러나 2천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속에서

그들의 피는 계속 중국에 동화됐기 때문에 ‘로마냄새’는 ‘중국냄새’에 거의 가릴 정도다.

김형근 칼럼니스트

출처 : 잃어버린 역사,보이는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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