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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혼사랑 갈렙처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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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7T16:15:09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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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종플루 치사율, 독감보다 낮지만… &quot;방심 안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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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7T16:15:09Z</updated>
	    <published>2009-11-27T16:15:0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H2 id=title_text&gt;[NEWS &amp; VIEW] 신종플루 치사율, 독감보다 낮지만… &quot;방심 안돼&quot;&lt;/H2&gt;
&lt;DIV class=article id=article style=&quot;FONT-SIZE: 14px; LINE-HEIGHT: 23px&quot;&gt;
&lt;DL class=left_img style=&quot;WIDTH: 240px&quot;&gt;
&lt;DD&gt;&lt;IMG id=artImg0 height=448 alt=&quot;&quot; src=&quot;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910/28/2009102800110_0.jpg&quot; width=240&gt; &lt;/DD&gt;&lt;/DL&gt;
&lt;H3&gt;독감 사망률 0.1~0.2%… 신종플루는 0.03% 수준&lt;BR&gt;독감보다 합병증 확률 높아… &lt;BR&gt;의심 증세 땐 빨리 병원에… &lt;BR&gt;어제 4명 추가 사망자 발생&lt;/H3&gt;&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issue/issueView.jsp?id=276&quot; target=_blank name=focus_link&gt;&lt;U&gt;&lt;FONT color=#0000ff&gt;신종플루&lt;/FONT&gt;&lt;/U&gt;&lt;/A&gt; 감염자가 매일 4200여명씩 발생하면서 공포감도 빠르게 퍼지고 있다. 26일 5명이 사망한 데 이어 27일 4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 이틀 사이 9명의 희생자가 나오자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lt;BR&gt;&lt;BR&gt;특히 이날 사망한 4명엔 '고위험군'이 아닌 26세 여성이 포함돼 신종플루가 갑자기 독해진 게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이날 신종플루 감염으로 사망한 43세 여성도 역학조사가 진행 중이지만 비교적 건강한 것으로 알려져 고위험군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lt;BR&gt;&lt;BR&gt;'빠른 발(강한 감염력)'은 있지만 '독한 놈(낮은 치사율)'은 아니라는 평가를 받던 신종플루의 성향이 바뀌고 있는 것일까. &quot;그렇지는 않다&quot;는 것이 전문가들 대답이다. 최근의 사망 사례 증가는 감염자 폭증에 따른 부수적 현상일 뿐이라는 것이다.&lt;BR&gt;&lt;BR&gt;한달 전인 9월 중순 국내 신종플루 감염자는 1만명 수준이고 사망자는 8명이었다. 치사율은 0.08%다. 지금은 사망자 29명에, 감염자는 최소 6만에서 최대 10만명으로 늘었다. 치사율이 0.03~0.05% 수준인 것이다. 수치상으로는 오히려 줄었다. 이는 전 세계적인 신종플루의 치사율 0.1~0.2%보다도 밑이다.&lt;BR&gt;&lt;BR&gt;물론 전 세계 평균은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nation/nationView.jsp?id=45&quot; target=_blank name=focus_link&gt;&lt;U&gt;&lt;FONT color=#0000ff&gt;멕시코&lt;/FONT&gt;&lt;/U&gt;&lt;/A&gt; 등 초기 대응에 실패한 국가에서 사망자가 많이 나오면서 올라간 측면도 있다. 그래도 국내에서 신종플루 시작 단계나 지금이나 치사율은 악화되지 않았다. 사망자가 늘어난 것은 전체 감염자가 급증한 데 따른 착시(錯視) 현상일 뿐이라고 정희진 고려대 구로병원 감염내과 교수는 말했다.&lt;BR&gt;&lt;BR&gt;
&lt;DIV class=center_img&gt;
&lt;DL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DD&gt;&lt;IMG id=artImg1 height=203 alt=&quot;&quot; src=&quot;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910/28/2009102800110_1.jpg&quot; width=480&gt; 
&lt;DT&gt;&lt;SPAN&gt;▲&lt;/SPAN&gt; 신종플루 백신 접종 시작 27일 신종플루 담당 의료진·방역요원 등을 시작으로 신종플루 예방 백신 접종이 시작됐다. 정부 계획에 따라, 내년 1월까지 단계적으로 1716만명의‘국가예방접종대상자’가 접종을 마치면 신종플루 확산은 제동이 걸릴 것으로 기대된다. 이날 서울 고려대 구로병원의 의료진들이 백신을 맞으려 줄을 섰다./오종찬기자 ojc1979@chosun.com &lt;/DT&gt;&lt;/DL&gt;&lt;/DIV&gt;신종플루의 독성은 매년 겪는 겨울철 독감과 비슷하거나 오히려 더 약성(弱性)으로 분석된다.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org/orgView.jsp?id=341&quot; target=_blank name=focus_link&gt;&lt;U&gt;&lt;FONT color=#0000ff&gt;통계청&lt;/FONT&gt;&lt;/U&gt;&lt;/A&gt; 자료에 따르면, 1996~2008년의 13년 동안 933명이 독감으로 사망한 것으로 집계됐다. 매년 평균 72명이 겨울 독감으로 사망한 셈이다.&lt;BR&gt;&lt;BR&gt;전병율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org/orgView.jsp?id=734&quot; target=_blank name=focus_link&gt;&lt;U&gt;&lt;FONT color=#0000ff&gt;질병관리본부&lt;/FONT&gt;&lt;/U&gt;&lt;/A&gt; 전염병대응센터장은 &quot;통상 겨울 독감의 사망률은 0.1~0.2% 정도로 보면 된다&quot;고 말했다. 신종플루의 치사율이 겨울 독감에 못 미친다는 얘기다. 신종플루에서 비(非)고위험군 사망자가 5명 나왔듯이, 계절독감 역시 비고위험군이 감염돼 폐렴 등으로 사망하는 사례가 있다.&lt;BR&gt;&lt;BR&gt;박승철 삼성서울병원 건강의학과 교수는 &quot;계절 독감도 매년 인구의 10%는 걸리고 사망자는 꾸준히 발생했다&quot;며 &quot;신종플루 감염자가 많아서 그렇지 희생자는 계절 독감 수준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다&quot;고 말했다. &lt;BR&gt;&lt;BR&gt;하지만 신종플루 사망자의 17%(29명 중 5명)가 고령자나 당뇨병·심장병 등 고위험 요인이 없는 일반인이었다는 점은 신종플루가 치사율이 낮아도 방심해선 안 됨을 의미한다고 보건당국은 지적했다. 정희진 교수는 “신종플루가 독감에 비해 일반인에게 폐렴 등 합병증을 유발할 확률이 높은 측면이 있다”면서 “하지만 이는 신종플루가 10~30대의 젊은 층을 많이 감염시키기 때문으로도 해석된다”고 말했다.&lt;BR&gt;&lt;BR&gt;통상적으로 만성질환을 겪을 확률이 높은 고령층은 같은 겨울 독감 인플루엔자에 면역력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아 이와 유사한 바이러스 구조를 가지고 있는 신종플루에 덜 감염된다. 반면 상대적으로 젊은 층은 면역 백지상태로 신종플루에 더 많이 감염된다.&lt;BR&gt;&lt;BR&gt;따라서 고위험 요인이 없는 감염자가 많다 보니, 이들 중에 사망자가 종종 생길 수 있다는 계산이다. 정희진 교수는 “비위험군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해서 신종플루 자체의 독성이 강해진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권준욱 질병관리본부 질병대책과장도 “외국의 사망사례 가운데 20~50%가 건강한 사람인 데 반해 우리나라는 비율이 17%로, 적은 편”이라고 말했다.&lt;BR&gt;&lt;BR&gt;감염자 수가 계속 증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발열 등 감염 증세를 보일 때 초기대응이다. 박승철 교수는 신종플루와의 전쟁은 ‘속도전’이라며 “고위험 그룹이건 아니건 발열 증세가 있을 때 48시간 내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하면 합병증 발생을 최소화하고 조기에 회복될 수 있다”고 말했다.&lt;BR&gt;&lt;/DIV&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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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종 플루 패닉 관리법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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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8282</name>
	    </author>
	    <updated>2009-11-27T15:35:38Z</updated>
	    <published>2009-11-27T15:35:3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뉴스속보입니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뉴저지주의 글로버즈밀에서 1500명이 사망했습니다. 적들은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며 레이저 광선을 쏘고 있습니다. 화성인이 침공한 것 같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1938년 10월 30일. 영화 ‘&lt;STRONG&gt;&lt;U&gt;시민 케인’ &lt;/U&gt;&lt;/STRONG&gt;의 감독 겸 배우로 유명한 오슨 웰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CBS 라디오 전파를 탔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핼러윈 특집으로 마련한 드라마 ‘우주전쟁’에서다. 당장 큰 혼란이 왔다.&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패닉에 빠진 이들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방송 전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수백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집단 패닉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오기도 한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패닉의 주무대는 예나 지금이나 &lt;STRONG&gt;&lt;U&gt;전쟁·기아·질병이다&lt;/U&gt;&lt;/STRONG&gt;.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근세 이후에는 금융시장에도 자주 출몰했다. 출몰이 잦은 데다 패턴이 비슷하다 보니 경제 쪽에서는 원인 분석은 물론 다양한 치료법이 개발됐다. 결론은 대개 패닉을 잘 버티면 큰 이득이 온다는 것이다. 패닉을 집중 분석한 월가의 투자가 짐 크레이머는 “패닉은 투매의 (시작이나 중간이 아니라) 끝에서 온다”며 “시장의 공포지수가 최고점에 달했을 때가 바로 주식을 살 때”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을 실천해 큰돈을 번 이도 수두룩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투자의 귀신 워런 버핏이 대표적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물론 배짱 좋게 &lt;FONT color=#e31600&gt;&lt;U&gt;버티는 게 &lt;/U&gt;&lt;/FONT&gt;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뱅크런(예금 인출 사태)은 반대다. (경제위기 등으로)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찾으려고 몰리면 은행은 헐값에라도 가진 자산을 팔아 돈을 내줘야 한다. 결국 파산에 몰리게 된다. 이럴 때는 패닉을 버텨낸 예금자들이 패닉에 휩쓸린 이들보다 더 큰 피해를 보게 된다. (폴 크루그먼 『불황의 경제학』)&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경제 쪽과 달리 질병 쪽의 패닉은 좀 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혼란과 비이성적 행동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휩쓸리는 게 좋을지, 버티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요즘 대유행에 들어선 신종 플루가 딱 그렇다. 벌써 보건복지가족부나 질병관리본부에는 백신을 먼저 맞게 해 달라는 요청이 몰린다고 한다. 이유도 갖가지다. 해외 출장을 앞두고 있다, 수험생을 돌봐야 한다, 접객 업소 종사자다 등등. 아직은 읍소형이 대부분이라지만 힘센 기관의 청탁도 꽤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 “순서대로 맞겠다”고 솔선수범했지만 약발이 안 듣는 셈이다. 하기야 패닉에 휩쓸린 이들이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은 없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버티는 쪽도 만만찮다. 어린 자녀를 둔 주부들 사이엔 요즘 백신 기피증이 퍼지고 있다. 압구정동의 한 주부는 “중국산 백신이 섞여 있고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내 아이에겐 접종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감보다 치명적이지 않은 신종 플루를 예방하려다 잘못되는 게 더 두렵다”고 덧붙였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뿐 아니다. 지난달 말 분당의 A초등학교는 휴업했다. 하지만 같은 날 길 건너편 B중학교는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휴업의 재량권을 가진 학교장의 판단이 제각각이어서다. 심지어 같은 학교에서도 다르다. 1, 2학년만 휴업한 D고등학교의 3학년 이모양은 “요즘처럼 동생이 부러울 때가 없다”며 “입시생이라고 차별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같은 학교 1학년인 동생은 사흘째 휴업 중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런 혼란은 신종 플루에 대한 시각차이에서 생긴다. 독감보다 치명적이지 않다는 쪽과 전염력이 폭발적이니 더 조심해야 한다는 쪽이 맞선다. 정부 안에서도 부처별로 이견이 많아 조율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대책이 한발 늦거나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정책 담당자가 먼저 패닉에 빠져 제때 제대로 된 대책을 못 내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어찌 보면 플루보다 무서운 게 패닉이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앨프리드 마셜은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붐비는 극장에 성냥불 하나가 떨어지면, 화재보다 공포가 참사를 낳는다”고 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패닉의 처방전은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 첫째도 신뢰요,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 둘째도 신뢰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 땅에서 패닉은 주로 정부 발표와 대책을 못 믿고, 안 믿을 때 커지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광우병 사태 때 질리도록 배운 교훈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중앙SUNDAY 경제에디터&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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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종 플루 패닉 관리법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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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updated>2009-11-27T15:35:38Z</updated>
	    <published>2009-11-27T15:35:3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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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뉴스속보입니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뉴저지주의 글로버즈밀에서 1500명이 사망했습니다. 적들은 하늘에서 폭탄을 떨어뜨리며 레이저 광선을 쏘고 있습니다. 화성인이 침공한 것 같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1938년 10월 30일. 영화 ‘&lt;STRONG&gt;&lt;U&gt;시민 케인’ &lt;/U&gt;&lt;/STRONG&gt;의 감독 겸 배우로 유명한 오슨 웰스의 다급한 목소리가 CBS 라디오 전파를 탔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핼러윈 특집으로 마련한 드라마 ‘우주전쟁’에서다. 당장 큰 혼란이 왔다.&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패닉에 빠진 이들은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방송 전에 ‘사실이 아니다’라고 밝혔지만 소용없었다. 수백만 명이 피난길에 올랐다. 집단 패닉은 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오기도 한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패닉의 주무대는 예나 지금이나 &lt;STRONG&gt;&lt;U&gt;전쟁·기아·질병이다&lt;/U&gt;&lt;/STRONG&gt;.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근세 이후에는 금융시장에도 자주 출몰했다. 출몰이 잦은 데다 패턴이 비슷하다 보니 경제 쪽에서는 원인 분석은 물론 다양한 치료법이 개발됐다. 결론은 대개 패닉을 잘 버티면 큰 이득이 온다는 것이다. 패닉을 집중 분석한 월가의 투자가 짐 크레이머는 “패닉은 투매의 (시작이나 중간이 아니라) 끝에서 온다”며 “시장의 공포지수가 최고점에 달했을 때가 바로 주식을 살 때”라고 주장했다. 이런 이론을 실천해 큰돈을 번 이도 수두룩하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투자의 귀신 워런 버핏이 대표적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물론 배짱 좋게 &lt;FONT color=#e31600&gt;&lt;U&gt;버티는 게 &lt;/U&gt;&lt;/FONT&gt;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뱅크런(예금 인출 사태)은 반대다. (경제위기 등으로) 예금자들이 한꺼번에 예금을 찾으려고 몰리면 은행은 헐값에라도 가진 자산을 팔아 돈을 내줘야 한다. 결국 파산에 몰리게 된다. 이럴 때는 패닉을 버텨낸 예금자들이 패닉에 휩쓸린 이들보다 더 큰 피해를 보게 된다. (폴 크루그먼 『불황의 경제학』)&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경제 쪽과 달리 질병 쪽의 패닉은 좀 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혼란과 비이성적 행동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그러다 보니 휩쓸리는 게 좋을지, 버티는 게 좋을지 판단하기 어렵다. 요즘 대유행에 들어선 신종 플루가 딱 그렇다. 벌써 보건복지가족부나 질병관리본부에는 백신을 먼저 맞게 해 달라는 요청이 몰린다고 한다. 이유도 갖가지다. 해외 출장을 앞두고 있다, 수험생을 돌봐야 한다, 접객 업소 종사자다 등등. 아직은 읍소형이 대부분이라지만 힘센 기관의 청탁도 꽤 있다고 한다. 대통령이 “순서대로 맞겠다”고 솔선수범했지만 약발이 안 듣는 셈이다. 하기야 패닉에 휩쓸린 이들이 이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 적은 없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버티는 쪽도 만만찮다. 어린 자녀를 둔 주부들 사이엔 요즘 백신 기피증이 퍼지고 있다. 압구정동의 한 주부는 “중국산 백신이 섞여 있고 부작용이 우려된다”며 “내 아이에겐 접종하지 않을 생각”이라고 말했다. 그는 “독감보다 치명적이지 않은 신종 플루를 예방하려다 잘못되는 게 더 두렵다”고 덧붙였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뿐 아니다. 지난달 말 분당의 A초등학교는 휴업했다. 하지만 같은 날 길 건너편 B중학교는 운동회가 한창이었다. 휴업의 재량권을 가진 학교장의 판단이 제각각이어서다. 심지어 같은 학교에서도 다르다. 1, 2학년만 휴업한 D고등학교의 3학년 이모양은 “요즘처럼 동생이 부러울 때가 없다”며 “입시생이라고 차별받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같은 학교 1학년인 동생은 사흘째 휴업 중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런 혼란은 신종 플루에 대한 시각차이에서 생긴다. 독감보다 치명적이지 않다는 쪽과 전염력이 폭발적이니 더 조심해야 한다는 쪽이 맞선다. 정부 안에서도 부처별로 이견이 많아 조율이 쉽지 않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대책이 한발 늦거나 우왕좌왕하기 일쑤다. 정책 담당자가 먼저 패닉에 빠져 제때 제대로 된 대책을 못 내는 건 아닌가 걱정스러울 정도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어찌 보면 플루보다 무서운 게 패닉이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앨프리드 마셜은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붐비는 극장에 성냥불 하나가 떨어지면, 화재보다 공포가 참사를 낳는다”고 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패닉의 처방전은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 첫째도 신뢰요,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 둘째도 신뢰다.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size=2&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 땅에서 패닉은 주로 정부 발표와 대책을 못 믿고, 안 믿을 때 커지기 때문이다. 이미 지난해 광우병 사태 때 질리도록 배운 교훈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중앙SUNDAY 경제에디터&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lt;/SPAN&gt;&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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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생애의 빛” 선교센터 강병국 목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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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8282</name>
	    </author>
	    <updated>2009-11-22T20:48:16Z</updated>
	    <published>2009-11-22T20:48:1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5 width=62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height=25&gt;&lt;FONT class=t01&gt;2009년 08월 03일 (월) 17:44&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gt;&lt;FONT style=&quot;FONT-SIZE: 18pt; LINE-HEIGHT: 24px&quot; color=#212163&gt;'생애의빛' 종교개혁은 끝나지 않았다&lt;/FONT&gt;&lt;BR&gt;&lt;BR&gt;&lt;B&gt;&lt;/B&gt;&lt;/TD&gt;&lt;/TR&gt;
&lt;TR&gt;
&lt;TD&gt;&amp;nbsp;&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STRONG&gt;&lt;IMG height=353 src=&quot;http://dhns.co.kr/upload/userfiles/1443.jpg&quot; width=295 align=left&gt;요즘 기독교는 많은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어가고 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마저 오늘날 교회의 행태에 지쳐가고 있는 실정이고, 신앙을 빙자하여 가정과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이상한 가르침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타협되지 않은 순결한 신앙으로의 회복을 외치며 21세기 종교개혁운동을 하고 있는 “생애의 빛” 선교센터 강병국 목사&lt;사진&gt;를 만나 보았다.&lt;/STRONG&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Georgia Hartwell에 위치한 생애의 빛은 미국에서 TV와 라디오 방송선교를 하고 있는 초교파 선교센터로서 종교개혁을 완성하자는 운동으로 1989년에 시작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생애의 빛 홈페이지(www.sostv.net)에는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고 종교개혁자들이 목숨 걸고 지켰던 그 순결한 복음이 잘 소개 되어 있으며, 값싼 복음과 세속의 물결이 교회 안에 밀려들어오는 이 시대에 신앙의 순수성을 보존하고 있는 곳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매월 50,000부 이상 발행되는 월간지 &lt;Survivors 살아남는 이들&gt;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신앙 전문지로서 신앙에 큰 활력소가 되고 있다. 이 월간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진리에 목마른 사람들이 영적 해갈을 경험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세계 각처에 지부가 있고 세미나와 성경통신학교를 통해 참된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교역자들을 위한 세미나가 수십여 차례 있었고 금년 9월에도 초교파 교역자 세미나가 예정되어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생애의 빛 강병국 목사는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최초와 최후의 지침입니다.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종교개혁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성경, 오직 성경으로 돌아가자(Sola Scriptura)’는 것입니다. 인간의 전통으로 섞어놓은 모든 것을 제하고 순수한 말씀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종교개혁입니다” 며 “루터, 칼뱅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를 적그리스도, 바벨론 이라고 선언하며 목숨을 걸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개신교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개신교라는 이름 자체가 Protestant(대항자)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개신교는 그 이름을 잃어 버렸습니다. 뼈저린 희생을 치루며 지켜온 개혁 신앙의 귀중함을 망각하고, 성서적으로 명백한 오류임을 깨닫고도 개혁의지를 상실한 채 신앙적 양심에 아무 부담도 느끼지 않고, 개혁을 위한 어떠한 희생도 원치 않는 오늘날 대부분의 개신교인들은 진정한 종교개혁의 후예들입니까? 누가 과연 지금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진리의 맥을 이어 가기 위해 일어설 것입니까?” 라고 말했다. 이어 종교개혁에 대해 “현 기독교 안에는 많은 교파들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어떤 한 교리만 중요시하여 그 교리에 맞는 종파를 만들어 놓고 그 교파에 안주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종교개혁은 현재 진행형입니다. 루터 때에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진리의 빛은 종교개혁을 통해 앞으로 더 계속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우리가 듣고 보는 모든 것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판단해 보아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고 밝혔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생애의 빛 선교센터 원장인 강병국 목사는 특정교파에 소속되지 않고 미국 TV 방송목사로 활동하면서 성경대로 믿는 참된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미국과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 남미, 중국, 아프리카 등 여러 나라들을 순회하며 참된 구원의 복음을 강의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IMG src=&quot;http://dhns.co.kr/upload/userfiles/11252.jpg&quot; align=baseline&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교보문고에서 판매되고 있는 그의 세 가지 저서는 매우 흥미로운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요한계시록 강해(지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서를 통해, 위기 가운데 있는 인류의 역사가 어떻게 끝마쳐질 것인지 성경의 계시를 통해 밝히 드러내고 있으며, 위태로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다. 종말로 치닫고 있는 지구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과연 이 지구는 자멸할 것인가? 그때 나는 어디에 있을 것인가? 이 두렵고 심각한 질문에 독자는 명쾌한 해답을 얻게 될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다니엘서 강해(지구의 운명을 지배하는 손)는 인류역사의 발전과 제국들의 흥망이 마치 사람의 의지나 군사력에 좌우되어 온 것처럼 보이지만, 그 모든 것이 성경예언의 정확한 성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다니엘서는 지구 종말의 때에 일어날 사건들을 알리기 위해 계시되었다. 그 예언들을 살펴보면 마치 다음 주일의 뉴스처럼 분초를 다투는 최첨단 소식들이다. 이 위기의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언을 정확히 앎으로써 세상을 미혹하는 어둠의 세력에 아무도 속임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신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성소 강해(복음의 유일한 청사진)서를 보면, 성소는 인간의 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주는 청사진인데, 복음이란 그저 구원의 복된 소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를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이 책은 하늘에 소망을 둔 그리스도인이 깨달아야 할 구원의 경험에 대해서 분명하게 제시해 주고 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에게 많은 도움을 줄 것으로 보인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인류 역사의 종착역이 가까워 오고 있는데도, 그리스도인이라 칭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세상과 자아를 사랑하며 살고 있기 때문에 생애의 빛의 선교사명은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양육하는 데 있다고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3px; FONT-FAMILY: &quot; 굴림?;=&quot;&quot; text-align:=&quot;&quot; justify?=&quot;&quot; letter-spacing:=&quot;&quot; 0px;=&quot;&quot;&gt;생애의 빛은 새로운 교단이나 교파를 형성하려는 의향이 없기 때문에, 구원되시는 예수그리스도를 발견한 사람들이 “내가 어찌할꼬” 물으면 진리를 전하는 가까운 교회에 출석하도록 권유하고 있으며, 개인형편상 가정에서 예배드리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었으면 하고 밝히고 있다.&lt;/SPAN&gt; &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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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74 제4장 복음의 진리 위에 섬(갈라디아서 강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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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0T23:36:56Z</updated>
	    <published>2009-11-20T23:36:5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복음의 진리 위에 섬&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본문: 갈라디아서 2장 11-21절&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설교: 여주봉목사&amp;nbsp;&amp;nbsp; 정리: 조정열목사&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라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4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lt;/FONT&gt;&lt;/STRONG&gt;&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lt;/FONT&gt;&lt;/STRONG&gt;&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갈라디아서 2장 20절&lt;/FONT&gt;은 우리가 잘 아는 구절입니다. “&lt;FONT color=#e31600&gt;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lt;/FONT&gt;”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 예수님이 우리 안에서 사시는 삶, 믿음의 의한 삶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제가 지난 주간에 아가페 신학원에 가서 강의를 했습니다. 제가 어디를 가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제일 먼저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전하는데 거기 가서도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전했습니다. 그리고 참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참고로 거기는 전부가 다 돈 주고 온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사모하는지요. 그것도 그동안 그런 부분에서 나름대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고, 한편으로는 목회자들이고 평신도들 중에서는 지도자들이고, 그러기 때문에 그 상황에 맞는 말씀을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또 거기서는 우리 집회처럼 설교하고 사역하고 쉬었다하지 않고 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만 빼놓고 거의 쉬는 시간도 없이 이어서 했습니다. 기도사역도 첫날 끝나는 시점에 잠깐 했고, 둘째 날도 한 30분정도 하고 계속 이어서 설교를 했습니다. 그런 특별한 상황인지는 몰라도 십자가의 복음에 대해서 더 선명하게 조명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강의 한 것을 녹음도 하고 비디오로도 녹화하서 내가 강사로 갔으니까 그분들에게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하나 달라고 했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원하시면 빌려다 보셔도 됩니다. 보시면 이 부분에서 더 선명하게 확실히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지만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리고 또 전반적으로 그러한 부분에 있어서 아직 확실하게 어떤 전체적인 부분들이 아직 보이지 않은 이 부분들에 있어서도 매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십자가의 복음’ 그러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예수님을 처음 믿을 때 듣는, 주님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구원 얻는 그 단편적인 것을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말하는 십자가의 복음은 그렇게 단편적인 것이 아닙니다.&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오늘 본문을 보면 선명하게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먼저 16절입니다. “&lt;FONT color=#e31600&gt;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lt;/FONT&gt;우리가 만약에 이 구절만 가지고 십자가의 복음을 이해한다면 이 구절은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에 행위로써 의롭게 되어지는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절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을 앞뒤로 문맥을 살펴보시면 지금 누구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냐면 베드로의 어떤 사건을 두고 얘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사도 바울이 베드로의 어떤 행동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것을 보아도 성경이 말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십자가의 복음이 단순히 처음 예수 믿을 때, 그것만을 말하는 게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것을 보더라도 십자가의 복음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이 부분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제가 좀 더 기도해보면서 다음 주에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가지고 다시 한 번 전반적으로 살펴볼지는 모르겠는데, 오늘은 그 부분보다는 오늘 읽은 11-20절까지 나오는 말씀 중에서 &lt;FONT color=#e31600&gt;&lt;U&gt;사도 바울이 여기에서 지금 무엇을 말하려고 있는가?&lt;/U&gt;&lt;/FONT&gt; (참고로 믿음에 의한 삶, 오직 은혜에 의한 삶, 주님이 내주하시는 삶은 2장 20절에 나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임을 하나의 poker point라고 그럴까요.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 이 초점과 대조해서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문제점, 특별히 &lt;FONT color=#e31600&gt;율법주의 &lt;/FONT&gt;신앙의 한 부분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이 이 경우에는 베드로의 삶에 나타났습니다. 베드로뿐만 아니라 바나바까지 오염되는 그러한 신앙이 잘못된 부분을 얘기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아닌 오직 믿음으로라고 지금 바울이 이 얘기하고 있는데,)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특별히 성령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오늘 본문에서 배울 부분이 뭔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기 원합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첫째,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려면 &lt;U&gt;&lt;STRONG&gt;&lt;FONT color=#e31600&gt;담대함이 매우 필요합니다&lt;/FONT&gt;&lt;/STRONG&gt;&lt;/U&gt;.&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복음의 진리 위에 굳게 서려면 담대함이 매우 필요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이 사건의 발단은 &lt;U&gt;그 당시 유대인들은 종교적인 이유로 인해서&lt;/U&gt; 이방인들과는 상종을 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이방인과 상종하는 것은 자신들을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과는 절대로 함께 식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 보시면 우리는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라고 그랬는데, 영어성경에 보면 ‘&lt;FONT color=#e31600&gt;이방 죄인’이라는 &lt;/FONT&gt;말이 “”표로 써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그 당시 그들의 관점에서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율법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행하지 않는 개 같은 죄인이라는 말입니다. 낙인처럼 타이틀이 ‘이방인은 죄인’이라고, 이 말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이 윤리적으로 매우 큰 죄 가운데 살았다 이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당연히 하나님 앞에서 죄 가운데 살았지만, ‘이방인’ 그러면 하나님의 법도도 모르는 육신의 정욕대로 살아가는 죄인들, 이 말은 그들의 인식이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우리는 유대인이고 이방 죄인이 아니라 그 말입니다. 그래서 “”표가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이방인의 여인이 아기를 낳다가 지금 죽어가도 유대인들이 그것을 보고도 절대로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그냥 지나쳤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초대교회인 예루살렘교회는 대부분의 구성원들이 유대교를 믿다가 개종한 유대인들 중심이었기 때문에&lt;FONT color=#e31600&gt;&lt;U&gt; 예루살렘교회는 &lt;/U&gt;&lt;/FONT&gt;유대교의 전통적인 배경이 그 속에 깔려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대교에서 개종한 성도들마저도 이방인들의 집에 들어가지 않았고 또 이방인들과 식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 그런데 특별히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좀 특이한 것은 다른 교회들은 사도들이 직접 가서 교회를 세우거나 아니면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한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습니다. 그런데 이 &lt;U&gt;안디옥교회는 평신도들이 가서 세운 교회입니다&lt;/U&gt;. 그것도 &lt;U&gt;이방인들을 중심으로 세워졌습니다&lt;/U&gt;. 그리고 &lt;U&gt;그 안디옥교회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계 선교사역을 이루셨습니다&lt;/U&gt;.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lt;/FONT&gt;”[행11:22] 처음 안디옥교회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가 갔을 때, 하나님의 은혜가 교회 가운데 함께하시는 것을 보고, 바나바가 바울을 초청하게 되고, 바나바와 바울이 함께 1년 동안 같이 성도들을 가르치는 중에 교회가 든든히 세워지게 되고, 저들이 기도하는 중에 성령께서 말씀하시기를 바울과 바나바를 따로 세우라고 했을 때 순종했더니 바울을 통해 세계 선교가 이루어지게 된 겁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예루살렘교회와는 매우 분위가가 달랐습니다. 처음부터 신앙의 이해도 많이 달랐고, 그들의 행실에 있어서도 매우 달랐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베드로가 그 안디옥교회에 있을 때는 이방인 성도들과 함께 교제하고 식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습니다.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그런데 어떤 문제가 생겼냐면&amp;nbsp;&amp;nbsp;어느 날 안디옥교회 성도들과 함께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는데 예루살렘교회에서(야고보에게서 사람이 왔다는 얘기는 예루살렘교회의 담임목사가 야고보였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교회의 구성원들은 유대인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바리세파였던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사람들이 왔다고 하니까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앉아서 식사를 하다가 슬그머니 엉덩이를 들고 자리를 떠서 따로 앉았습니다. 그러니까 남은 유대인 신자들도 같이 자리를 옮겨 이방인과 따로 앉았습니다. 힘지어 바나바까지 외식에 동참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을 두고 사도 바울이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정색을 하고 일어나서 베드로를 똑바로 보면서 책망한 겁니다. ‘&lt;FONT color=#e31600&gt;네가 유대인으로써 이방을 좇고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이방인으로 유대인처럼 살게 하려 하느냐?&lt;/FONT&gt;’ 그러면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했던 사건입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런데 여기에 책망한 것이 단순히 어떠한 문화적이 차이에서 오는 책망이 아닌 걸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 ‘너희가 왜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치 아니하느냐? 왜 외식하느냐?’ 이렇게 말함으로써 지금 베드로의 행동이 복음에 합당한 행동이 아니기 때문에 책망한 겁니다. 그러면 어떤 의미에서 복음에 합당한 행동이 아니었는가? 물론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 하나는 거룩함에 대한 의미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거룩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방인들과 같이 상종하지 않는 거였습니다. 특별히 먹는 음식으로 인하여 오염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거룩함의 진정한 의미가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유대교에서 개종한 신자들은 그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당시 그러한 이해의 편견을 백부장의 사건을 계기로 내려놓았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같이 식사하는 것이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예루살렘교회로부터 내려온 사람들로부터 받을 질책과 따돌림과 또 그들 앞에서 이상한 눈으로 비춰지는 것이 두려워서 후퇴하게 됐는데, 이 후퇴한 행동이 단순한 하나의 문화적인 행동이 아니라, 예를 들면 거룩함이면 거룩함에 대한, 복음이면 복음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왜곡시키는 행동이었다는 겁니다. 복음만 하더라도 성경은 분명히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합하여 한 새 이스라엘을 만드셨기 때문에 복음 안에서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구별이 없다는 것이 분명한 하나님의 말씀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배경과 이해와 특별히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들 앞에서의 자기 행동의 처신을 위하여 복음에 반하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바울이 정색을 하고 베드로의 얼굴을 똑바로 대면하고 그 행동 뒤에 있는 베드로의 자세를 질책하고 있는 겁니다. 이 하나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십자가의 복음은 단순한 단편적인 것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 베드로가 복음이 무엇인지를 몰라서 이렇게 행동한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얼마나 중요했으면 사도 바울의 그 책망으로 끝나지 않고, 그렇지 않아도 베드로가 그 망신을 당했는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셔서 성경을 보는 사람들마다 경계를 삼도록 하신 것을 보면 바울의 행동은 단순한 개인의 차원에서 한 행동이 아닌 교회를 향한, 교회의 오염을 막기 위한 하나님의 질투로 한 행동이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베드로가 거룩함에 대한 올바른 의미를 몰라서 한 행동이 아니지요. 앎에도 불구하고 &lt;FONT color=#e31600&gt;사람들 앞에 비춰지는 자신의 모습&lt;/FONT&gt;과 &lt;FONT color=#e31600&gt;자기 동료들 앞에서의 평가와 사람이 &lt;/FONT&gt;두려워서 한 발작 후퇴한 겁니다. 이 하나의 사건만 보아도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복음의 진리 위에 선다는 것은 대단한 담다함이 필요합니다.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예를 들면 오늘날 우리나라 가운데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예배가 회복되기를 원하고, 또 하나님의 인도를 우리가 순종하기 원함에 있어서 항상 하나님의 역사는 그래왔듯이(성령의 역사는 과거에도) 기존적인 이해에 있어서는 성령께서 매우 소중히 여기면서 인도하시는 것일수록 그 하나하나가 부닥치게 되어있습니다.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찬양과 경배만 하더라도 그렀습니다. 찬양과 경배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춰볼 때 예배의 핵심 중에 핵심입니다. 또 성경에 보면 어떠한 자세와 어떠한 태도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해야 될 것을 명백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예배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전통적인 이해와 개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올바른 말씀이고 인도하심을 확신함에도 불구하고 주저하는 경우가 많고 뒤로 빼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실재로 예배의 모양에 있어서도 그렇고, 순서에 있어서도 그렇고 사역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순종해감에 있어서 많은 반대에 부딪치기도 합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제가 언젠가 말씀드린 것 같은데, 제가 어떤 때는 주일 날 양복을 의도적으로 안입습니다.&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제가 양복을 의도적으로 안입는 이유가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lt;/SPAN&gt;&lt;/DIV&gt;
&lt;DIV class=ggambo_memo style=&quot;FONT-SIZE: 9pt; LINE-HEIGHT: 18pt; FONT-FAMILY: Verdana; TEXT-ALIGN: lef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 중에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한번은 어떤 목사님께서 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분께서 모 교단의 어떤 단체를 거론하면서 다른 목사님들은 그 단체가 그렇게 하는 것에 대해 안좋게 말하고 그러는데 나를 어는 정도 인정할 수 있다 그러면서 뭐라고 그러냐면 그런데 내가 직접 가봤는데 나는 그것만은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겠더라. 그래서 뭐를 인정하지 못하냐고 물었더니 그분이 하는 얘기가 어떻게 목사가 주일 날 그것도 대 예배시간에 양복을 안입고 강단에 서느냐? 그러면서 나는 도저히 그것만은 이해가 안된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양복을 안입는 이유 중에 하나가 뭐냐면 정확하게 그 개념을 깨뜨리기 위해서 안입습니다. 양복을 안입는 것이 옳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함은 어떠한 종류의 옷을 입는데 있지 않습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목회자에게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함은 어떠한 종류의 옷을 입는데 있지 않습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이 양복입고 다니셨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옷을 난잡하게 아무렇게 입어도 된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단정하게 입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옷에 경건함이나 의로움이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복을 입어도 좋고 안입어도 좋은데, 문제는 뭐냐면 어떠한 특정한 종류의 옷을 입어야 그것이 경건함이라고 말한다면 그 자체가 경건함에 대한 이해를 왜곡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건함에 대한 이해를 표면적인 것으로 외부적인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경건함은 외부적인 모양과는 전혀 상관없는 그 마음의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초점이 마음의 상태에 맞춰지기보다 외부적인 모양을 갖춰지게 함으로써 오히려 진정한 경건함을 방해하고 진정한 경건함이 이루어지는 것을 대적하는 그 이해이기 때문에, 저는 그것이 깨뜨려져야 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그렇게 합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또 한 가지 이유는 목회자가 옷을 깨끗하게 입고 오면 성도들이 다 깨끗하게 입고 옵니다. 목회자가 좋은 옷을 입으면 성도들이 다 좋은 옷을 입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좋은 옷을 입고 오면 가난한 사람들은 누가 아무 말 안해도 소외감을 갖게 됩니다. 제가 언젠가도 말씀드렸지만 제가 미국의 메츠롤교회가서 참 감사한 게 있습니다. 거기는 목회자가 심방을 왔는데 양말을 짝짝이 양말을 싣고 왔더래나 빵구난 양말을 싣고 왔더래라 뭐 짝짝이나 빵구 난 양말을 싣고 온 것이 자랑은 아니겠지만 무슨 얘기냐면, 그 지역은 중부지방으로 백인들이 주로 많습니다. 주민의 90% 이상이 백인들인데, 그런 상황에서 흑인들이 백인들 교회가 가는 것은 거의 찾아보기 힘듭니다. 왜냐면 소외감을 느끼기 때문에 갈수가 없습니다. 특별히 중부지방은 더 그렀습니다. 왜냐면 서부나 동부 같은 경우에는 그나마 흑인들이 많지만 거기는 중부기 때문에 흑인들이 더 없습니다. 그런대도 불구하고 메츠롤교회안에는 흑인들도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고리가 3개씩에 코고리까지 건 사람들도 있고, 그냥 노숙자 잠바 같은 것을 입고 온 사람도 있고, 그런데 제가 그걸 보면서 뭐를 느꼈느냐면 만약에 온 교인들이 목회자부터 시작해서 주일날은 반드시 양복을 다려 입고 넥타이를 단정하게 매고 나오는 것을 경건함의 자세로 이해한다면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교회에 올 수가 없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 자리에 옵니까. 오라고 해도 못 들어오게 되는 거지요. 그런데 그들이 그러한 모양으로 올지는 몰라도 그 중심은 진실로 주님을 사랑합니다. 설령 사랑하지 않는 자들이라도 와서 다니면서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경배하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배우게 되면서 저들이 변하게 되는 거지요. 이러한 이유 등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양복을 안입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제가 찬양과 경배든지 예배의 모양이든지 어떠한 사역이든지 이 한 부분 한 부분을 말씀드리는데, 우리가 우선 어떠한 한 부분을 내세우면서 그것을 사람을 모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면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거지요.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해서 성령의 인도하시는 대로 철저하게 따라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하나, 다시 말해서 이 모든 것들이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해 그 하나하나의 일들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며, 추구하고 나감에 있어서도 그 하나하나에 대한 반대가 매우 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복음 위에 철저하게 선다는 것은 대단한 담대함을 요구합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여러분, 이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성경에 보면 이방인에게 가장 먼저 복음을 전한 사람이 베드로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의 집에 다른 사람들은 전혀 들어가지 않을 때, 이방의 집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했던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고 이 베드로입니다. 그 베드로가 맨 처음에 고넬료의 집에 갔습니다. 그 고넬료의 집에 갈 때, 성령님의 분명한 인도를 받아 갔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비판과 많은 사람들의 질책과 대적을 충분히 감수하고 갔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0장에서 그렇게 갔고, 11장에서 그가 예루살렘교회 앞에서 자기 행동을 설명하면서 그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복음이 이방인에게도 전하도록 계획하셨던 것을 구약성경을 통해서 발견했습니다. 이렇게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해 쓰임 받았던 그 베드로일지라고 오늘 이 순간에 보면 넘어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 위에 선다는 것은 얼마나 큰 담대함이 필요한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사람 두려워하는 것은 율법주의로 우리를 빠뜨릴 수 있습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리고 오늘 여기서 볼 수 있는 한 가지는 사람 두려워하는 것은 율법주의로 우리를 빠뜨릴 수 있다는 겁니다. 요즘은 그런 일이 없지만 교회개척 초기에는 찬양과 경배를 우리끼리 잘하다가도 방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찬양과 경배가 안됩니다. 왜냐면 성도들이 방문한 사람이 신경이 쓰이니까요. 저 사람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할까 해서..... 그러면 오늘 베드로의 입장을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둘째, 하나님은 우리를 모양대로 사용하십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하나님은 우리를 모양대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바나바의 여기 이 모습을 보면서 참 그렇다. 하나님은 사람을 쓰시되 모양대로 쓰신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 보면 바나바는 매우 귀한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상대방을 이해하는 자입니다. 바나바는 위로하는 자입니다. 바나바는 자기 자신도 하나님 앞에 세움을 입기를 힘쓰지만 자기 자신보다 먼저 다른 사람을 세우려고 하는 자입니다. 아주 귀한 자입니다. 예를 들면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였습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회개하고 돌아온 후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주님 앞에서 기다린 후에 예루살렘교회에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바울을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아직도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에 사도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바울에 대해서 변호해준 자가 누구냐면 바로 바나바입니다. 뿐만 아니라 안디옥교회의 소문이 예루살렘교회까지 들리게 되자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람을 파송했는데, 그때 파송 받아 간사람 중에 한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가 가서 보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고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하고 계시다고 말하면서 “너희가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그러면서 그때에 바나바가 누구를 기억했느냐면 사울(바울)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고향에 가서 바울을 데려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바울이 드디어 하나님의 역사 가운데 등장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는 그렇게 놀라웁게 예수님을 만났고, 아라비아광야에 가서 삼층 천까지 갔다 오는 그런 경험을 했고, 그 수많은 하나님의 비밀과 그 자기 자신에 대해서 하나님이 소명을 그렇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로 돌아와서 7년 동안 소위 말하면 썩어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받은 후 그가 10년이 되도록 그는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고향에서도 물론 주의 사역을 했겠지만 성경에 별로 기록되지 않은 것을 보면 그의 사역이 별로 들어날 것이 아닌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한 바울은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현장가운데 이끌어 낸 사건이 뭐냐면 바로 바나바가 가서 바울을 데려온 겁니다. 물론 여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겠지요. 그렇게 해서 아까도 말씀드린 것처럼 거기서 함께 1년 동안 가르치면서 교회가 놀라웁게 세워지기 시작하고 저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에 성령께서 바나바를 따로 세우고, 이 사건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제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그 놀라운 역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하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보면 바나바야말로 가서 바울을 세운자입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첫 번째 전도여행은 둘이 같이 갔습니다. 여러 명의 동역자 중에 바나바의 생질인 마가도 데리고 갔는데, 가는 중도에 힘들다고 마가는 그냥 돌아 가버렸습니다.(행13:13) 그랬더니 두 번째 여행 때는 그것이 계기가 되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아서 둘이 다투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바울은 실라를 데리고 따로 가게 됩니다. “35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며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36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 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행15장] 이것을 보면 바나바는 이렇게 상대방을 포용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자기보다 상대방을 세워서 하나님의 일을 잘할 수 있도록 세워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바나바입니다. 그러니까 한편으로는 매우 귀합니다. 한편으로는 바나바가 없었다면 사도 바울도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그 바나바도 오늘 여기 보니까 베드로가 넘어졌을 때, 사람들의 평가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의 자신의 체면과 질책과 따돌림이 두려워서 뒤로 물러서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모든 면에서 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물론 그렇다고 해서 바울의 마음이 전혀 차갑지 않습니다. 성경에 보면 그는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졌고, 그리스도의 열정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음에 있어서는 일말의 타협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울은 바울대로 사용하십니다. 그런데 반면에 또 뭐가 있냐면? 한편으로는 그러한 성품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쓰실 수 있습니다. 그런 성품 때문에 사람들의 오해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그 뒤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주의 복음에 있어서는 조금도 타협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수고했다고 말한 것처럼 그는 온 삶을 드려 주님의 교회를 섬기되, 나는 그리스도의 종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의 종이 되었다고 말할 만큼 섬기며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자기가 세운 대부분의 교회에서 쫓겨났습니다. 일시적이었지만 대부분의 교회에서 배척을 당했고, 비방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을 가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저는 고린도후서 12장 7절에 ‘가시’라는 말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것을 두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실재로 그렇게 이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거기에 가시는 육체의 병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헬라어로 번역된 구약성경 70인 역에도 보면 그 가시라는 단어가 그런 의미입니다.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는’ 그런데 그 뒤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를 더 겸손케 하는, 더 주님 앞에 엎드리게 하는.........&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러니까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의 성격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은 여러분대로 사용하십니다. 바울이 절대로 바나바처럼 못됩니다. 반면에 바나바가 절대로 바울처럼 못됩니다. 만일 바울이 바나바처럼 되려고 했다면 하나님이 주신 소명 못 이뤘을 겁니다. 반면에 바나바가 바울처럼 되려고 했다면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여러분 한분 한분을 만드심이 다릅니다. 우리를 다르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절대로 낙심해서는 안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실망하고 좌절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다른 사람을 쓰시는 것을 보고 나도 따라서 쓰임 받으려고 노력하지 마세요. 그것은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것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는 나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이해하고 감사하면서 우리가 행할 것은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진흙처럼 하나님 안에서 더 만져지고 빚어지고 주님의 올바른 말씀 위에 서고,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서고, 또한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그것을 우리가 힘서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 각자를 다르게 사용하십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저도 한때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을 부러워했습니다. 아 저런 사람은 얼마나 좋을까 왜 나는 저런 사람처럼 못 되나 그러면서 한 때는 많이 부러워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어느 순간에 그걸 포기 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대로 나는 나로써 하나님 앞에서 빚어지고 만져지고 주님의 마음을 더 갖기를 주님 앞에서 기도하고 애통하고 주님께 순종하기를 바나바 같은 사람이건 베드로 같은 사람이건 바울 같은 사람이건 누구든지 다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입니다. 제가 바나바 흉내를 낼 수 없는 것이고, 그러면 또 일이 잘되어지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잘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느 순간부터 하나님 앞에서 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기로 했습니다. ‘나는 나야!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어,’ 여러분도 받아드리고 안받아드리고는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저는 받아드리겠습니다. 여러분도 있는 그대로 여러분의 사실을 받아드리셔야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은 꾸준히 어느 위치든 닮아가되 그러나 여러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세요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각자를 각자의 모양을 따라 사용하신다는 것도 기억하시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귀하게 쓰임 받는 축복이 있을 줄로 믿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아까 바울 얘기하면서 그는 가는 곳마다 배척을 받았다. 그게 가시였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뭐하기 위해서 그랬나요. 오직 주님만 의지하라고, 더 겸손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하나님 일은 다 이루어졌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묘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으로 인해서 바울은 여러 가지 아픔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겸손하게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자신에게 유익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게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대로 다 이루시고 자신은 달려갈 길을 다 달려가도록 믿음을 지켰다고 스스로 고백할 만큼 믿음을 지킬 수 있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은혜입니까? 그보다 더 큰 은혜가 있겠습니까? 사람 앞에 칭찬 좀 받고나서 나중에 달려갈 길 못 달려간 것보다 훨씬 축복이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각자에게 맞도록 놀라운 은혜를 주셨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멘&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셋째, 철저한 복음의 삶의 중요성&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여러분들도 성경을 읽을 때, 왜 이 구절이 여기에 기록되었을까를 한번쯤 생각해 보시나요. 그럼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왜 이 사건이 여기에 기록돼 있다가? 그걸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베드로가 넘어졌던 이 사건이 왜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물론 성령의 감동으로 되어졌습니다. 그럼 왜 성령님께서 이것을 여기에 기록하게 하셨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바울이 베드로를 흠잡기 위해서 기록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 별거 아냐. 지금 이 말하려고 한 게 아닙니다. 오늘 날처럼 타락한 시대에는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와 바울이 마치 라이벌 관계라서 바울이 베드로를 어떻게 하든지 사람들 앞에서 좀 깎아내리고 자신이 좀 우월하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베드로 별거 않냐, 내가 한 번 사람들 앞에서 그때 단단히 창피를 줬지, 이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전혀 그런 차원에서 얘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둘은 전혀 라이벌 관계에 있지 않습니다. 그럼 왜 여기에 이게 기록돼 있다고 생각하세요. 왜, 이 사건이, 무엇 때문에, 이 자리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하세요. 저는 이게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건 첫 번째 말씀드린 부분과도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게 이 본문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여기에 이 사건이 기록되었을까?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앞뒤를 보시면 충분히 동의하시리라 믿는데, 그게 뭐냐면 철저한 복음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습니다. 철저한 복음의 삶의 중요성,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참 신앙과 거짓복음의 특징들을 참조할 것’) 그런데 참 신앙은 철저하게 십자가의 복음에 기초한 것이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고 오직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이 그걸 말해주고 있고, 이 전체가 그걸 말해주고 있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가 의롭게 된 것은 믿음으로 된 것이다. 오늘 본문 내에서도 보면 그걸 지금 집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16절부터 보면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보세요. 현재형입니다.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지금 이게 처음 구원받는 사건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 대해서 예를 들면서 현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것이다.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서 20절에 보아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이렇게 말함으로써 참다운 신앙에 대해서 분명하게 하나하나를 말하고 있습니다. 자 그러면 왜 이 부분을 강조하고 있는가? 이게 참다운 신앙인데요.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율법적인 삶에 빠지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되고 참다운 복음에서 벗어나기 때문에 지금 사도 바울이 철저하게 경고하고 있는 겁니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도 아닌 사도입니다. 그 당시 누구보다도 가장 먼저 이방인에게 먼저 복음을 전한 장본인입니다. 그 장본인이 예루살렘교회에서 사람들이 오니까 이방인과 함께 식사하다가 그들이 두려워서 자리를 피해가지고 따로 앉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 라고 충분히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걸 대수롭지 않게 문제를 삼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것을 이토록 강력하게 문제를 삼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분적으로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서 왜곡되어지게 되면,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기 때문에 강력하게 문제 삼고 있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주된 내용입니다. 그게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질 수도 있는 사건일지 몰라도, 오직 십자가의 복음,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인 하나님의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이 용납되어지면 하나님의 복음에서 왜곡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강력하게 말하고 있고,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는 게 오늘 본문의 냉용입니다. 바로 그게 본문의 핵심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느냐면 여기에서 지금 사도 바울이 그토록 강조하고 이것을 기록하고 있는 내용이 바로 철저한 복음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얼마나 강조하고 있는가를 보셔야만 합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그런데 여러분 베드로가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고 가르쳤다고 생각하세요? 그것은 어림도 없는 얘기지요. 베드로가 사람들에게 행함으로 구원 얻는다고, 혹은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그럴 리가 없죠. 어디 감히 그런 가르침을 가르칠 수 있겠어요. 그런데 보세요. 당연히 그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을지 모르지만 사람의 평가가 두려워서 복음의 길에 담대하게 서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작은 행동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이 행동이 결국은 행함으로 의롭게 되어진다는 그 가치관을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절대로 용납되어서는 안된다는 겁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래서 복음에 반대되는, 특별히 율법주의적인 가치관과 사고, 그것이 사람들 눈에 보기에는 매우 작은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그것을 부분적으로라도 받아드리면 절대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믿음에 의한, 십자가의 복음에 의한, 온전한 삶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처럼 매우 강력하게 책망하고 있고, 그 당시에 그것을 대적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을 성경에 기록하게 하셔서 우리를 경고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그러면 이것이 아까 첫 번째 말씀드렸던 부분과 연결됩니다. 우리가 주님의 복음 위에 선다는 것은 담대함이 필요하다고 그랬는데, 이러한 담대함을 가지고 서야 됩니다. 교회 가운데 그렇게 서야 되고, 여러분 자신의 삶 가운데 서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조금이라도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어지는 것을 사람들의 평가도 한편으로도 중요하지만 그러나 그것 때문에 만약에 그 뒤에 있는 가치관이 이와 같이 반 복음적인 가치관 행동에 해당하는 일들을 하게 되면 타협하기 시작하는 것이고, 그 상태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복음 위에 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오늘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강력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서에 나오는 특징 전체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위에 굳게 서십시오. 굳게 서셔야 됩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부분에 있어서 십자가의 복음 위에 어떠한 타협의 여지도 없이 서야 됩니다. 십자가의 복음 위에 서려는 것은 타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상대방을 배려 안하는 게 아닙니다. 복음에는 타협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거하느냐, 율법주의의 억압가운데 속하느냐의 선택 중에 하나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아까도 말씀드린 대로 베드로가 율법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쳤다고 생각하세요. 그건 상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사람들 앞에서 이방인들을 떠나서 유대인들과 함께 함으로써 그건 사람들이 볼 때 너무나 당연한 것처럼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 뒤에 있는 배경에 대한 이해가 바로 거룩함을 이와 같이 외부적인 규칙을 행하고 안행하는 것에 대한 그런 이해를 받아드리는 것이고, 어떠한 의식을 행하고 안행하는 것을 거룩함으로 이해하는 이 가치관이야말로 정확하게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반영하는 그 가치관이라 그 얘기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사도 바울은 지금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자는 아무 육체도 없다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그 사건을 두고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가치관 뒤에 부분적으로도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그 가치관이 숨어있기 때문에, 당연히 베드로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쳤을지 모르지만 그 행동은 곧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대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토록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편으로 말은 그렇게 하기 쉽지만은 우리 행동 하나하나의 부분에서, 우리 예배의 하나하나의 부분에서, 우리의 사역의 하나하나의 부분에서, 우리의 삶의 하나하나의 부분에서 이 가치관을 반영할 수 있도록 담대하게 서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복음에 의한 삶임을 오늘 성경을 통해서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복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는 타협할 여지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이해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이 사건을 통해서 복음에 서는 것이 얼마나 참 담대함을 요구하는가, 얼마나 철저하게 복음위에 서야 되는가 하는 것을 보개 됩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포도나무교회 가운데 하나님께서 많은 은혜로 함께하고 계십니다. 제가 여기저기 집회를 다녀보아도 우리 가운데 함께하고 계신 그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소중하고 아름다운가 하는 것을 보면 볼수록 참 귀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자만할 게 아닙니다. 제가 자만할 것도 아닙니다. 왜냐면 여러분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고 저 때문에 그런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지요. 성도들의 삶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놀라운가? 그래서 요즘은 제가 집회 가면서도 그런 부분을 가끔 나눕니다. 사람들이 들으면서 많이 감격하고 기뻐하고 부러워하지요. 다시 말씀드리면 그것은 여러분 때문도 아니고 저 때문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그런데 이 얘기를 잘 들으세요. 우리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다른 사람들 앞에서의 평가나 그 사람들에게서 인정받기 위해서 혹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서 십자가의 복음위에 전적으로 서는 그 가치관에서 말 정도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서 오직 십자가의 복음,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믿음을 반영하지 않는 그 반대가 반영되어지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우리 가운데 나타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든지 걷힐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됩니다. 왜냐면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쭉 읽어가면서 점점 확실하게 나옵니다마는 우리가 부분적으로라도 자기 의를 의지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게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관이 없게 되고 우리는 주님에게서 떨어진 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가운데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든지 걷힐 수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는 은혜는 절대로 여러분 때문에 혹은 저 때문에 임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 자만을 멀리 버려야 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사랑이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은혜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교회들을 위해서 예비하고 계신 은혜입니다. 왜냐면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에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 예비하고 계신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말씀을 볼 때에 얼마나 더욱 더 우리가 타협함이 없이 말로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행실로, 우리의 사역의 방법으로, 가치관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복음 위에 타협 없이 서야 될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될 줄로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더 덧붙이자면 사도 베드로가 이 사건이 자기 의와 관련된 것을 알았더라면, 이 행동이 행함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반영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더라면 감히 이렇게 했겠느냐 그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사건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행했을 것입니다. 우선 사람들 앞에 평가가 중요하니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분별과 지혜가 필요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분별할 수 없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럼 우리도 말은 당연히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말하고 당연히 가르칠지 모르지만 우리의 행동은 그 반대를 반영하는 행동을 하면서도 그래서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어지고 믿음에서 떨어진, 그래서 열매 맺는 삶이 불가능하게 되어진 가운데 행하면서도 그렇게 하는지도 모르는 가운데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복음과 율법의 전쟁이 그토록 치열하고 가장 큰 전쟁 중에 하나고, 그래서 초대교회 모든 교회들이 그 싸움을 싸웠고, 특별히 갈라디아서에서는 그것을 매우 우리에게 강력하게 경고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 구절을 보면서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깨어서 담대함을 가지고, 참 어떻게 보면 생명 건다하는 자세를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 위에 서기를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될 때에 교회 가운데 함께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날로 증가될 것이고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가, 더 능력이, 하나님의 기름부음이 함께하게 될 것이고, 또한 교회를 통해서 선교회를 통해서 더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변화 받게 될 것이고 더 많은 교회들이 십자가의 복음으로 회복되어지게 될 것이고 세워지는 되는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그렇게 타협 없이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 위에 서서 나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lt;/SPAN&gt;&lt;BR&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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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72 제3장 부르심과 자라남(갈라디아서 강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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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9T20:17:57Z</updated>
	    <published>2009-11-19T20:17:57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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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제3장&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부르심과 자라남&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본문: &lt;FONT color=#e31600&gt;갈라디아서 2장 1-10절&lt;/FONT&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설교: 여주봉 목사&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정리: 조정열 목사&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노니 2 계시를 인하여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저희에게 제출하되 유명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라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우리가 일시라도 복종치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너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나와 바나바에게 교제의 악수를 하였으니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lt;/FONT&gt;”&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 부분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공회 가운데서 서로 변론한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학자들 간에 약간의 다른 의견들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도행전 15장에 나오는 내용을 복음에 관해서 논한 사건을 언급한다고 이해하고 있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3절에 보면 할례에 대한 문제도 나오는데, 바울은 디도는 이방인인데도 할례를 억지로 받지 않게 하였다. 왜냐면 저들은 복음을 왜곡시키기 위하여 할례를 받게 하는데, 그것은 예수 안에서 가진 너희의 자유를 엿보고 너희를 다시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함이라. 그러면서 나는 이러한 일에는 일시라도 절대로 복종할 수 없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로 우리 가운데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앞으로 자세히 살펴 볼 것이고,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바는 뭐냐면 그 당시 갈라디아 교회에 이단적인 가르침을 가르치는 거짓 사도들이 들어와서 교회를 어지럽게 했는데, 내가 받은 복음은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다. 내가 받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내게 계시해주신 것으로써 내가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그가 누구이든지 저주를 받을 것이다. 이렇게 복음의 근원이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매우 강력하게 말하고 있고, 이 복음을 가지고 이제 하나하나 그 당시 가르침들을 직면해나갑니다. 그리고 9절에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담임 목사라고 볼 수 있는 야고보와 사도인 게바와 요한이 교제의 악수를 했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과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이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라고 인정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은 복음은 예수님께서 직접 계시해주신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야고보 목사도 사도들도 인정한 것이므로 내가 전한 복음은 옳다. 그러면서 이 복음을 갖고 잘못된 부분들을 하나하나 직면에 나가는 것이 나오게 됩니다. 그래서 할례문제라든가 자유함의 문제라든가.....,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 시간은 본문 말씀 가운데서 두 가지를 살펴보기 원합니다. 그 중에 하나는 8절에 있는 부분인데, 우리에게 맡겨주신 소명을 잘 분별하는 겁니다. 7절부터 봅니다. “7 도리어 내가 무할례자(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함을 맡기를 베드로가 할례자(유대인들)에게 맡음과 같이 한 것을 보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베드로도 사도고 바울도 사도입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세우심이 다르고 바울을 세우심이 다릅니다. 같은 사도들인데,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고,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의 세우심이 서로 다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1. 나를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소명)은 무엇인가?&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귀하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시는 세우심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됩니다. 제가 이번에 미국에 콜라라도 스프링스에 다녀왔습니다. 그 콜라라도 스프링스는 해발 2,000m 위에 있습니다. 그래서 햇볕이 따갑습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라산 꼭대기에 도시가 있는 거와 같습니다. 저희가 가기 불과 일주일 전에도 눈이 왔었습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산꼭대기에는 여름인대도 하얀 눈이 덮인 게 보였는데, 그런데 도시는 참 깨끗합니다. 그리고 스프링스는 그렇게 큰 도시는 아닌데도 그 도시 내에 미국 전역에 걸치는 사역을 감당하는 기독교 사역이 110개 본부가 있다고 합니다.(미국 전역이면 매우 큽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에서 홍콩이 상당히 먼데 미국으로 치면 한국과 홍콩이 한 나라 안에 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얼마나 참 귀한 도시인지, 어떤 분은 말하기를 그 도시가 영적으로 깨끗한 도시 중에 하나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같던 세미나 장소는 요즘 사도교회라고 하는 그러한 면에서 하나님께서 매우 귀하게 쓰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거기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걸어가도 될 정도의 거리에 제임스 답슨이라고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가정사역에 전문가인데, 어떤 분이 얘기하는데, 안믿는 사람들 중에서도 클린턴 못지않게 제임스 답슨이 인기가 많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미국의 많은 일반 신문들마다 그분의 칼럼이 실리는데, 그만큼 그분이 가정문제에 대해서는 아주 권위자입니다. 이처럼 가까이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걸어서도 갈 수 있는 곳에 두 분이 있는 겁니다. 둘 다 하나님의 귀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두 사람을 쓰시는 사역이 매우 다릅니다.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만약에 제임스 답슨이 사도교회 슝내를 냈다가는 전혀 사역이 안이루어질 것입니다. 반대로 사도교회 담임 목사님이 제임스 답슨 슝내를 냈다가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똑같은 사도고, 똑같은 하나님의 종이지만 복음사역을 위해서 하나님이 부르시는 부르심이 다르다는 것이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부르심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게 매우 중요하다는 겁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에베소서 4장에 보면 교회에 직분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 외에도 많은 직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같은 사도일지라도 부르심을 보면 서로 다릅니다. 한 사람은 유대인을 향한 사도고, 한 사람은 이방인을 향한 사도인데, 똑같이 하나님이 함께하고 계십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두 사람을 부르셨습니다. 똑같이 하나님이 뒷받침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부르심이 다릅니다. 한 예로 어떤 한분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너무나 놀라웁게 하나님께서 쓰시던 분이었습니다. 많은 표적과 기사가 그분의 집회에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가정사역을 한다고 그러면서 그 표적과 기사를 행하는 그러한 사역을 접고 가정사역을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거의 어떠한 열매도 없이 그 사역은 완전히 죽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이 그분을 부르신 것은 가정사역으로 부른게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또 예를 들면 저 같은 경우에 개인적으로 복음을 전할 때, 십자가의 복음에 맞추지는 이 토대를 기초로 한 오늘날의 교회가 회복되어지는 교회회복과 관련된 부분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께서 매우 강력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것을 떠나서 외출하는 것처럼 다른 부분의 말씀을 전하면 하나님의 기름부음은 거의 뒷받침되지 않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뭐냐면, 이것은 목회자건 성도건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똑같은 목회자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우리를 부르시는 그 부르심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그 사역에 강력하게 뒷받침하십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지역적인 면에서도 잘 깨닫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어떤 때는 지역적인 면에도 하나님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데 ‘당신을 향하신 지역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분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어느 지역으로 부르셨나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요소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익산에 있는 포도나무교회(장로교)를 섬기는 정석동 목사님은 군산에서 목회하다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익산으로 와서 교회를 다시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익산으로 오게 된 동기는 기도하는 가운데, 또 새물결선교회를 통해서 하시는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아시는 대로 군산에서 익산은 거리가 얼마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군산에 있을 때는 거의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치유가 일어나도 부분적인 치유가 일어나고 교회가 아주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익산으로 오자마자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놀라운 일들을 하셨습니다. 특별히 치유를 많이 일으키시고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을 경험하고, 그러면서 사람들이 더해지고, 삶이 변화되기도 하고 많은 역사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서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구체적인 소명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아는 것이 매우중요하고, 그 다음에 지역적인 면에서도 잘 깨닫는 것도 매우 중요합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2.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성장의 필요성)&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사도 바울도 믿음 안에서 자라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문 6절입니다. “유명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영어 N.I.V 성경입니다. “6 As for those who seemed to be important-- 중요한 것처럼 보이는 그러한 자들에 관하여는 whatever they were 그들이 무엇이든지 makes no difference to me; 나는 어떠한 상관도 없다. God does not judge by external appearance-- 하나님은 외부적인 모양을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 those men added nothing to my message. 그러한 사람들은 내 메시지에 어떠한 것도 더해준 적이 없다. 그들이 별거냐?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뭐 그들보다 못한 게 있느냐? 이런 식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 중에 학자들마다 연대를 측정하는 방법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데살로니가전서후서를 제일 먼저 썼다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갈라디아서를 제일 먼저 썼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데살로니가전후서를 제일 먼저 썼다고 해도 그 다음에 바로 쓰여진 서신이 갈라디아서입니다. 고린도전서는 갈라디아서보다 이삼년 후에 보내졌습니다. 그런데 그 서신서에 보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7-8절입니다. “7 그 후에 야고보에게 보이셨으며 그 후에 모든 사도에게와 8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9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갈라디아서에서는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이렇게 말했던 그가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그로부터 상당한 기간이 지난 다음에 보내졌습니다. 왜냐하면 에베소서는 로마 옥중에서 쓴 옥중서신이기 때문입니다. 그 옥중서신인 에베소서 3장 7-8절입니다. “7 이 복음을 위하여 그의 능력이 역사하시는 대로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일꾼이 되었노라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앞에서 ‘저 유명한 이들은 내게 더하여 준 것이 없고’,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그런데 여기서는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중에 가장 나중에 기록되었습니다. 특별히 디모데후서는 사도 바울이 순교하기 바로 직전에 썼던 서신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봅니다. 로마 옥중에 갇혔다가 잠시 풀려난 이후에 그가 스페인에게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내로 황제 때에 붙잡혀서 순교를 당하게 되는데, 순교당하기 직전에 두 번째 로마 옥중에 갇혔을 때, 쓴 서신이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 세권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쓴 서신중에 가장 나중에 쓴 서신입니다. 그런데 그 디모데 전서 1장 15절에서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면 자기는 ‘내가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 ‘저는 죄인입니다. 저는 할 수 없어요. 저는 못났어요.’ 이러한 상투적인 말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거짓 겸손입니다. 그것은 전혀 겸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이 말은 그러한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이 말은 뭘 말하느냐? 예를 들면 여기에 불빛이 있습니다. 사람이 빛에서 멀리 있을 때는 희미하고 그림자가 작습니다. 그런데 빛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온 몸이 더 밝아지는 동시에 그림자도 커지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가까이 갈수록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여러분들도 다 경험하셨을 겁니다. 옛날에는 내가 뭐 잘못한 게 뭐있어? 나 같이만 살면 세상에 전혀 법 없어도 될텐데, 나 같이만 하면 사람들이 문제가 전혀 없을텐데,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조명해 주시면 내 생각과 내 사고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교만하고 타락한 것인가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오호라 나는 죄인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고 탄식하게 됩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이켜서 어느 정도 된 줄 알았는데, 어느 날 주님이 또 조명해 주시면 또 수많은 죄들과 악함들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멀리 있을 때는 우리 자신을 잘 못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 앞에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 삶속에 있는 어두움들이 들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날이 가면 갈수록 그가 더 겸손해 졌다는 얘기는 그가 진실로 주님 앞에 더 가까이 나아가면서 주님 안에서 그가 주님을 더 알뿐만 아니라 또한 그 자신을 바라보면서 그래서 주님 앞에 실재적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겁니다. 이 하나만 보아도 사도 바울도 자라났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참고: A.D. 1세기말에 살았던 교부 로마의&amp;nbsp;&amp;nbsp;클레멘트(Clement of Rome)가 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The Epistle to the&amp;nbsp;&amp;nbsp;Corinthians)에서 찾아볼 수 있다. 거기에 보면 '바울은 온 세상에 의를 가르쳤으며, 그가 서방의 끝에 도달했을 때 통치자들 앞에서 증거하였으며, 이와 같이 하여&amp;nbsp;&amp;nbsp;이 세상을&amp;nbsp;&amp;nbsp;떠났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여기서 '서방의 끝'은 당시 서바나를 가리키기 때문이다(행&amp;nbsp;&amp;nbsp;19:21, 22). 이러한 클레멘트의 서신 내용을 볼 때 그의 선교 계획이 서바나까지&amp;nbsp;&amp;nbsp;성취되었음을&amp;nbsp;&amp;nbsp;부인할&amp;nbsp;&amp;nbsp;수&amp;nbsp;&amp;nbsp;없는&amp;nbsp;&amp;nbsp;사실이다. (John&amp;nbsp;&amp;nbsp;Murray,&amp;nbsp;&amp;nbsp;C.H.&amp;nbsp;&amp;nbsp;Dodd,&amp;nbsp;&amp;nbsp;E.F.&amp;nbsp;&amp;nbsp;Harrison,&amp;nbsp;&amp;nbsp;J.B. Lightfoot).&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자라지 못하면 영적으로 불구가 됩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사도 바울은 실재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도 자라났습니다. 그의 서신서 중에 특별히 옥중서신에 보면 앞에 보내진 서신서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비밀을 더 깊이 깨달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를 더 깊이 깨달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도 바울은 자라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자라나야 합니다. 우리도 예수님 안에서 자라나야 합니다. 자라지 못하면 영적으로 불구가 되는 겁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히브리서에 있습니다. 히브리서 5장 11-14절입니다. “11 멜기세덱에 관하여는 우리가 할 말이 많으나 너희의 듣는 것(깨닫는 것)이 둔하므로 해석하기 어려우니라 12 때가 오래므로(예수 믿은지 오래됨)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지금쯤은 너희가 선생이 되어서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자들이 되었어야 될텐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지금쯤 선생이 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예수 믿은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마땅히 선생이 되어서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고 저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해야 될텐데 그렇게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다시 교육을 받되 말씀의 초보적인 것을 다시 받아야 될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여기에 젖은 베드로전서 2장에 나오는 젖과는 다릅니다. 거기에 ‘어린아이와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 말은 영적인 양식을 사모하라는 말이고, 여기에서 젖은 똑같은 용어이지만 굳은 음식과 비교해서 한 말입니다. 아기는 젖밖에 못 먹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너희가 예수 믿은지 오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는 선생님이 못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다른 사람에게 지금도 굳은 음식도 아닌 젖이나 얻어먹고 있어야 될 그러한 형편이라 그 말입니다.) 13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자들이니라” 지금쯤은 굳은 하나님의 음식을 먹음으로 하나님의 길에 서서 하나님의 길을 발견하여 하나님의 뜻과 아닌 것을 분별하여 서야할 텐데 예수 믿은지 오래되었으나 아직까지 어린아이에 불과하고 다른 사람에게 배우되 초보적인 것만을 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는 그러한 가운데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성도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생각안하세요? 오늘날 예수 믿은지 1년, 3년, 5년, 10년, 20년, 30년, 40년 50년, 세월은 많이 지났는데, 하나님의 길을 가르쳐서 사람들을 하나님 안에서 세우는 것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굳은 음식도 못 먹어서 가장 기본적인 위로해주는 그저 감정적으로 쓰다듬어주는 메시지만을 소화할 수 있는 정도밖에 안돼서 대부분의 성도들이 오늘날 하나님의 뜻을 전혀 분별하지 못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선과 악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도 없고 무엇이 하나님을 기뻐하시는지 무엇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지 알지도 못하는 그러한 가운데 있습니다. 정확하게 이들처럼......., 사도 바울은 자라났는데, 계속해서 자라났는데 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린도 교회도 그랬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절 “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영적인 자들을 대함과 같이, 다시 말하면 성숙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예수를 믿는데 생각과 사고가 아직도 육신적임)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초보적인 것밖에 못준다는 말입니다)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예수 믿은지 혹은 3년이 가고 5년이 가고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는데 전혀 자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아기를 낳고 세월이 가는데 애가 조금만 더디 자라도 부모들은 신경이 쓰이고 혹시 뭐가 문제가 있는 것 아냐? 그러면서 병원에 가봐야 되는 것 아냐? 혹시 아버지가 문제인가? 엄마가 문제인가? 할머니가 문제인가? 할아버지가 문제인가 그러는데, 아니 예수 믿고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는데도 신앙이 어린아이 상태로 그대로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요? 그런데 우리 신앙이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초대교회가 그랬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를 나무랄 수 없는 것이 오늘날 우리도 그런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자라나야 됩니다. 예수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나야 되고, 열매 맺는 삶에서 자라나야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러 곳에서 자라나야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의 목표는?&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의 목표가 뭔가요? 잘 모르시나요? 초신자 성경공부에 이런 게 있습니다. 제가 지금 초신자 성경공부를 인용해서 설교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고 몇 년이 지나면 자기가 어느 정도 자랐다고 생각해서 더 이상 갈급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정확하게 병들은 겁니다. 왜 어느 정도 자랐다고 생각하냐면 생각하는 관점(이해)이 달라서입니다. 그들의 생각에는 이제 교회 열심히 다니고, 주일 날 빠지지 않고, 십일조하고, 성경 많이 읽고, 기도 많이 하고 그러면 신앙이 자랐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니다 보니까 봉사도 열심히 하고, 이것도 저것도 열심히 잘하거든요. 그러니까 나는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라기 위한 수단은 될지언정 그 자체가 자란 것은 아닙니다. 그것(의식)도 중요합니다. 왜냐면 우리도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게 되니까요. 그래서 그것들은 자라기 위한 수단은 되지만 그 자체가 자라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하면 절대로 그런 자세가 나올 수 없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의 목표가 뭡니까? 에베소서 4장 11-13절을 보세요. “11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아멘 여기 보시면 예수님도 자라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자라났습니다. ‘할렐루야!’ 성경에 보면 “[눅2:52]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적으로 자라나셨고, 지적으로 정서적으로 자라나셨고, 하나님 안에서 자라나셨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서 자라나셨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도 자라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가장 많이 자라나셨을 때, 이게 장성한 분량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우리가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느냐? 예수님이 가장 많이 자라셨을 때, 그 분량의 충만함으로 우리가 자라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면 우리들이 예수님의 가장 성숙한 모습처럼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게 우리의 목표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중에 그 누구도 나는 다 자랐다고 말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겁니다. 예수님의 가장 성숙한 거기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목표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면 그가 자랐을 뿐만 아니고, 그가 어느 단계에 있든지 자기는 뒤엣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그 예수님의 푯대를 향하여 그는 계속해서 달려가는 갈급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더 주님을 알기 원하는, 더 주님의 마음을 같기 원하는, 더 주님의 행하심을 보기 원하는, 더 주님이 계신 곳에 자기도 같이 있기 원하는, 그래서 그 고난에 동참함도 알기 원하는, 더 큰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주님의 사역을 더 감당하기 원하는, 어느 단계에 왔든지 그와 같이 그 주님을 더 알기 원하는 갈급함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잘 아는 빌립보서 3장 7-8절로 보면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이렇게 고백하고 있고, 10절에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그러면서 12절에 보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보세요. 사도 바울도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내가 이정도 이르렀다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을 더 알기 원하고, 주님을 더 보기 원하고, 주님계신 곳에 같이 있기 원하고, 주님의 능력을 더 경험하기 원해서, 주님을 더 소유하기 원해서 그토록 주님을 향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달려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6개월 전과 지금이 성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지금 문제가 있습니다. 1년 전과 비교해서 여러분이 지금 변화되어 있지 않으면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장을 멈추고 있는 겁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한때는 제가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포도나무교회가 세워진 후에 아마 그게 과도기였던 것 같습니다. 앞에서 설교 중에도 어떤 때는 짜증내고 설교할 때가 있었습니다. 말은 짜증이라고 안하지만 짜증 섞인 말을 성도들이 듣고 그런 것을 깨달았는지 모르지만, 왜냐하면 이런 것이 감지되었기 때문에 그랬습니다. 어떤 부분이냐면 예를 들면 예수를 처음 포도나무교회를 통해서 믿는 분들은 그럴 기회가 별로 없지만, 다른 곳에서 오랫동안 신앙생활하다 오신 분들은 처음에 올 때는 야-! 은혜롭다. 참 신선하다. 새롭다 그래서 귀가 솔깃해서 눈이 똥그랗게 앉아 듣습니다. 그런데 이제 몇 달 지나면 자세가 달라집니다. 이제 들을만한 것 다 들은 표정으로 앉아 있습니다. 낮에도 참석하고 저녁에도 참석하다보니까 어느 날부터 가만히 설교를 들어보니까 저건 옛날에 했던 것하고 비슷한 설교를 또 하는 것 같고, 저 설교는 벌써 두 번 세 번 들을 것 같고, 그러니까 이제 마음이 좀 느슨해진 겁니다. 그러니까 그때는 너무나 안타까워요. 왜 안타깝냐면 제가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할 때, 다른 건 여러분이 저보다 훨씬 더 많이 알지만 그 말씀에 대해선 제가 더 많이 알까요? 여러분이 더 많이 알까요? 그 대답은 안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도 하나님을 좇아가느라고 아등바등하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절실하고 절박하고 그런데 여러분들은 다 안다고 앉아있는 것 같으니까 제 마음이 얼마나 안타깝겠어요. 사도 바울과 비교해 보세요? 이건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토록 주님을 많이 안 사람입니다. 우리하고는 비교도 안됩니다. 그는 삼층천까지 갔다 왔고, 부활하신 주님이 사도 바울에게 나타나신 것만 세 번이나 됩니다. 여러분 부활하신 예수님이 육신으로 찾아오셔서 만나신분 한번 손들어보세요. 그 영광가운데 오셔서 만나신분 손들어 보세요. 우리는 평생에 그런 일을 한번만 경험만 해도 그건 잊을 수 없는 경험일텐데, 사도 바울은 성경에 기록된 것만 세 번 이상 됩니다. 또 그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시는 얼마나 놀라우며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는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대도 사도 바울은 아등바등하면서 주님 나는 당신이 더 필요해요. 몰라요. 도와주세요. 주님 알기 원해요. 그러고 있는데 우리는 거기에 비하면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데 나는 다 알아요.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되겠느냐고요. 그럼 성장을 멈추는 겁니다. 전혀 못 보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그래서 항상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제가 임태집 형제에게 직접 듣지는 않았는데, 아니면 아니라고 그러세요. 그게 뭐냐면 태집이 형제가 외국에 나가서 세계적인 찬양 리더들에게 배우기도 하고, 또 같이 찬양 사역하기도 하고 그러다가 왔는데, 그 사람들은 세계적인 찬양 리더들입니다. 달란트 면에서도 아주 뛰어난 분들입니다. 세상에서도 어디에 내놔도 부족함이 없을만한 그런 재능 있는 분들입니다. 그런대도 예배시간 설 때마다 두려운 마음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참 하나님 앞에 영광돌리기를 원해서, 참 하나님을 알기를 원해서,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께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를 위해서 떠는 마음으로 매 시간마다 새롭게 선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약에 예를 들면 우리가 기타 좀 배우고, 드럼도 좀 배우고, 피아노, 오르간 좀 배워가지고 이제 이 정도는 되겠다 이렇게 나가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사도 바울처럼 지속적인 갈급함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성장이 없으면 죽은 겁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러면 성장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이거 같습니다. 지금 말씀드린 것처럼, 내가 지금까지 안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려놔야 됩니다.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릇된 길에서 올바른 길로 돌이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여러분들이 올바른 길에 서서 지금 간다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사도 바울은 올바른 길에 안섰다고 생각하세요. 그토록 주님을 놀라웁게 경험했는데, 그런데 사도 바울은 뭐라고 말하고 있느냐면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3:13-14]” 이 자세가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던지 항상 새로운 마음으로 그걸 다 내려놓는 겁니다. 주님은 어제 우리를 인도하신대로 오늘 인도하지 않으실 수 있습니다. 왜냐? 그분은 새 길로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 우리를 쭉 이렇게 인도하셨다면 오늘부터는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어제까지 이런 메시지를 주셨다면 오늘부터는 전혀 다른 메시지를 주실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상반되게 그러지는 않습니다. 제 얘기는 그 얘기는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식처럼 반복하는 하나님은 아닙니다. 새롭게 살아서 역사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여태까지의 모든 경험과 체험을 다 내려놓고, 날마다 새롭게 하나님 앞에 하나님 도와주세요. 주님 갈급합니다. 주님 어디로 움직이십니까? 어디로 행하십니까? 주님 어디에 계십니까? 라고 사모함으로 주님 앞에 엎드리고, 갈급함으로 그분을 찾아야 우리가 그분을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 갈급함과 사모함을 우리가 잊어버리면 우리는 병들은 겁니다. 그 자세가 항상 우리 가운데 있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한 구절 더 보겠습니다. 디모데전서 4장입니다.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여기에 보면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자라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그 당시 에베소교회 목회자였습니다. 그런대도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라나는 일에 계속해서 자라도록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사도 바울과 같이 다니면서 사도 바울의 제자로 사도 바울을 통한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귀하게 쓰임 받았습니다. 그러한 디모데도 자라나야 한다면 우리 모두가 다 당연히 자라야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고, 성도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래서 우리는 자라나야 합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오늘 두 가지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는 부르심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되고, 그리고 그 가운데 행해야 하나님의 강력한 뒷받침이 있습니다. 둘째는 우리 모두는 자라나야 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도 자라났다면 우리는 더 말할 것도 없이 자라나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아는 것에도 열매 맺는 것에도 자라나고, 또 우리 삶이 변화되는 것에도 자라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우리가 다 이르렀다고 생각하지 말고, 새로운 갈급함으로 여태까지 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더 알기를 갈망하고, 주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을 알기를 힘쓰는 그러한 삶이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부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주님 안에서 자라나기를 축원합니다.&lt;/SPAN&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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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71 제2장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갈라디아서 강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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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9T20:13:26Z</updated>
	    <published>2009-11-19T20:13:26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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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제2장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본문: &lt;FONT color=#e31600&gt;갈라디아서 1장 11-24절&lt;/FONT&gt;&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여 잔해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심방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저와 함께 십오 일을 유할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유대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핍박하던 자가 전에 잔해하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니라&lt;/FONT&gt;”&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갈라디아서 1장 11-24절을 보면, 바울은 무엇보다도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배운 것도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강조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사실 계시의 종교입니다. 우선 복음 그 자체가 그리스도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또한 아울러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감에 있어서도 하나님이 계시가 아니고서는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하나님과 동행할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계시의 종교인 기독교에 대해서 살펴보기 원합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은 예수님의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 그럼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는 어떻게 주어지느냐는 겁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참고로 우선 우리에게 &lt;U&gt;하나님의 계시는 세 단계를 통해서 &lt;/U&gt;옵니다.&amp;nbsp;&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계시의 1단계: &lt;FONT color=#e31600&gt;역사적인 사건&lt;/FONT&gt;(하나님께서 역사에 관여하심)&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역사적인 사건이란 뭔가?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예를 들면,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그때 놀라운 역사들이 많은 있었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또한 마지막 열 번째 재앙 때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 문설주에 바르게 하였고, 장자의 죽임의 재앙이 애굽에 임할 때에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에는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실재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이게 계시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하나님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인류 역사 가운데 놀라운 일을 행해오셨습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시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한 가지는 우리의 신앙이 사람들의 철학이나 혹은 윤리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역사 가운데서 계시하신 사건들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역사적인 사실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다릅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계시의 2단계: &lt;FONT color=#e31600&gt;역사적 의미가 &lt;U&gt;하나님 관점에서 &lt;/U&gt;&lt;/FONT&gt;해석됨(기록된 성경)&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두 번째 계시는 예를 들어 애굽에 재앙이 있어서 장자들이 다 죽었는데, 이스라엘 집에는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 재앙이 넘어갔다. 이것이 역사적인 사건인데, 그 사건에 하나님의 계시(조명)가 필요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가 계시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계시되지 않으면 그것은 사람들마다 다른 해석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적인 사건이 첫 번째 계시고, 두 번째 계시는 그 역사적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에게 비춰주신 게 계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또는 사도들을 통해서 그 역사적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말씀하셨습니다. 그게 기록된 성경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가 믿는 복음을 예로 들자면, 지금부터 이천년 전에 베들레헴에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나사렛이란 마을에서 그 아이가 자랐고 그가 30세쯤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놀라운 일들을 나타내셨습니다. 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을 중심으로 그 당시 종교지도자들이 그분을 시기하여 로마 법정에 고소하게 되었고, 끝내는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계시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 그런데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셔야 압니다. 그 예수님의 사건이 하나님의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속죄의 제사였다는,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가 사함을 받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서 죄의 세력이 우리에게서 끊어졌으며 죽음의 세력이 파해짐을 당했다는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춰주시고 기록한 말씀이 바로 두 번째 계시인 &lt;FONT color=#e31600&gt;성경&lt;/FONT&gt;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처럼 계시는 3단계로 오는데,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첫 번째 단계는 역사 속에 있고,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두 번째 단계는 그것이 하나님의 선지자들, 혹은 사도들을 통해서 그 사건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주시고 그것을 기록하게 하셨는데, 그게 두 번째 계시인 성경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우리가 조금 있으면 &lt;FONT color=#e31600&gt;&lt;U&gt;&lt;STRONG&gt;알파코스&lt;/STRONG&gt;&lt;/U&gt;&lt;/FONT&gt;를 준비해서 시작하려고 합니다. 알파코스는 안믿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는 아주 좋은 프로그램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도 보면 안믿는 사람들에게 처음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얼마나 역사적인 사실인가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역사적인 증거들에 의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복음은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머물면 안되고 한 단계 더 나가야 됩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계시의 3단계: 기록된 말씀이 &lt;FONT color=#e31600&gt;각자에게&lt;/FONT&gt; 비춰짐(성령의 &lt;FONT color=#e31600&gt;조명&lt;/FONT&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 세 번째 단계는 그 역사적인 사건과 그 역사적인 사건이 의미하는 바가 우리에게 비춰져야 됩니다. 특히 우리 각자에게 비춰져야 합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시고 부활하신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성령의 계시로 사도들과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기록되어 우리에게 성경으로 계시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진리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께서 계시해 주셔야만 하나님의 의도를 깨닫게 되고,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드릴 때 이 말씀이 효력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구원받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계시는 이렇게 세 단계를 통해서 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예수님 自身이 먼저 복음의 시작이십니다&lt;/FONT&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계시로 된 것이다. 그랬는데 그 말속에도 이러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 우선 하나는 예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부르시기 이전에 이미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사건은 한편으로는 예수님 때부터 전파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살아계실 때 자신이 오신 목적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예를 들면 &lt;FONT color=#e31600&gt;&lt;U&gt;마가복음 10장 45절에 &lt;/U&gt;&lt;/FONT&gt;직접 말씀하시기를 “&lt;FONT color=#e31600&gt;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lt;/FONT&gt;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기를 자신을 많은 사람의 죄를 위해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학자들 중에 일부는 우리가 믿는 복음이 사도 바울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 그래서 &lt;FONT color=#e31600&gt;고린도전서 15장에 &lt;/FONT&gt;보면 이렇게 얘기하고 있습니다. “&lt;FONT color=#e31600&gt;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3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4 장사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lt;/FONT&gt;” 여기 보시면, ‘내가 받은 것을 전하였다.’ 이 두 단어를 보면 유전(遺傳:앞에서 전해 받은 것을 전달하는)의 의미가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뭐를 알 수가 있느냐면, 복음이 예수님께로부터 시작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자신을 대속물로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예언)에 기초해서 그 의미가 계시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못 박혀 돌아가시고 부활승천 하시고 성령님이 오셔서 그들에게 알려주신 것 중에 하나가 &lt;FONT color=#e31600&gt;&lt;U&gt;이사야서 53장에 예언된 대로 &lt;/U&gt;&lt;/FONT&gt;예수님이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속죄의 제물로 돌아가실, 대속의 종으로 메시야가 오실 것이 조명되었고, 그래서 예수님이 성경대로 오신 것이 밝혀지게 되었고, 예수님이 성경대로 부활하신 것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복음의 비밀들이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이와 같이 증거 되면서 그것이 또한 전달되게 되었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 사도 바울도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받은 것도 아니요’ 그 말은 하나님의 계시가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어 전해온 부분이 있고, 동시에 이 복음에 대해서 사도 바울도 그 당시 사도 중에 한 사람으로써 특별히 예수님의 복음, 하나님의 비밀을 더 깨달음에 있어서 성령의 조명으로 그가 하나님 말씀에 기초해서 하나님의 비밀을 훨씬 더 많이 깨닫게 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어떤 천사에게서 나온 것도 아니고,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근원이 예수님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FONT color=#e31600&gt;&lt;U&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 계시의 기독교와 율법주의 차이점&lt;/SPAN&gt;&lt;BR&gt;&lt;/STRONG&gt;&lt;/U&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 오늘은 계시의 종교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15절을 봅니다. “&lt;FONT color=#e31600&gt;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lt;/FONT&gt;” 사도 바울 같은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사도 바울 속에 계시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특별히 그 당시 사도로써 복음을 더 깨닫고 우리에게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그러므로 우리 신앙은 계시의 종교로써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 있어서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계시의 종교와 율법주의 신앙과의 극명한 차이를 바울의 삶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14절에는 바울에게 예수님이 계시되기 전의 삶을 말합니다. “&lt;FONT color=#e31600&gt;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lt;/FONT&gt;” 바울에게는 매우 열심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열심은 인간적인 종교적인 열심입니다. “&lt;FONT color=#e31600&gt;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lt;/FONT&gt;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전통을 인간적인 열심으로 섬기는 것인데, 그게 율법주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 신앙에서는 전통이 매우 중요시 여겨집니다.&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 (모든 전통이 다 나쁜 것은 아님) 한 가지 예로 &lt;FONT color=#e31600&gt;&lt;STRONG&gt;&lt;U&gt;마태복음 15장 1-8절을 &lt;/U&gt;&lt;/STRONG&gt;&lt;/FONT&gt;봅니다. “&lt;FONT color=#e31600&gt;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2 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lt;/FONT&gt;” 그들은 전통을 자기들의 열심으로 잘 지키는 것을 신앙의 본질로 이해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음식을 먹을 때는 손을 씻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lt;FONT color=#e31600&gt;3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4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5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lt;/FONT&gt;”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을 중요시한 나머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습니다. 십계명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는데, 그들은 전통을 중요시한 나머지 계명을 범했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고, 성경 박사들인데 전통 때문에 안보이는 겁니다. 그리고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 속에는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필요를 체우는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효를 매우 중요시 여기고 많이 강조하는데, 성경적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은 어떻게 가르쳤냐면, 현대인의 성경이 잘 번역해 놨습니다. “&lt;FONT color=#e31600&gt;5 그런데 너희는 누구든지 부모에게 드려야 할 것을 하나님께 드렸다고만 하면 6 부모를 공경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전통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헛되게 하였다&lt;/FONT&gt;”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자들에게 “&lt;FONT color=#e31600&gt;7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8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9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lt;/FONT&gt; 이처럼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형식과 습관과 절차를 잘 지키는 것에는 절대로 그 중심으로부터 하나님을 사랑함이 없습니다. 전통에 초점이 맞춰지면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지만 마음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습니다. 이 구절을 N.I.V 성경에는 “&lt;FONT color=#e31600&gt;&lt;U&gt;9 They worship me in vain; 그들이 나를 헛되이 예배한다. their teachings are but rules taught by men.'&quot; 그들의 가르침은 인간에 의해 가르쳐진 규칙에 불과하다”&lt;/U&gt;&lt;/FONT&gt; 그리고 그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지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들의 종교적인 열심은 하나님의 대한 사랑은 없이 그저 입술에 불과하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유전들을 인간적인 노력으로 열심히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없이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계시해 주심으로 그 의가 박살났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처럼 종교적인 전통을 열심히 지키는 율법주의 신앙이 아니라 계시에 의한 종교입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러면 어떻게 해서 우리의 신앙은 계시의 의한 신앙인가?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신학자들도 또 혹은 교회에서 가르칠 때도,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고 그러는데, 어떻게 해서 우리의 신앙은 계시의 종교인가?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하나님을 아는 것도 계시에 의해서만 알게 됩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가 믿는 기독교는 우리의 모든 면에서 계시의 종교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 예를 들면 여러 번 말씀드린 대로 &lt;U&gt;&lt;FONT color=#e31600&gt;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이들은 신앙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했느냐면 &lt;/FONT&gt;&lt;/U&gt;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종교적인 행실을 인간의 노력으로 잘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이처럼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우리 신앙의 본질인데, 그 차이를 보려면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은 다르다는 겁니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아는 것은 교육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거룩한 분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이것은 이론으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능하신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은 계시로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우리의 신앙의 본질인데 성령의 계시가 없이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이 우리에게 하나님 자신을 계시해 주셔야 하나님을 알 수가 있습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lt;U&gt;&lt;STRONG&gt;우리의 성화도 &lt;/STRONG&gt;&lt;/U&gt;&lt;/FONT&gt;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뿐만 아니라 주님은 저들에게 ‘&lt;FONT color=#e31600&gt;너희가 입술로만 나를 사랑하고, 마음은 내게서 멀고, 너희의 예배는 헛된 예배다’라고 &lt;/FONT&gt;그러셨는데,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예를 들면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규례와 규칙을 따라서 우리의 노력으로 잘 지키는데 잊지 않습니다. 그래가지고는 우리의 삶에 전혀 변화가 없습니다. 변화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그 수단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인데,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의 그 신실하심을 깨닫게 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될 때, 우리는 그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의 마음이 열려지게 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도 생기게 됩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됩니다. 그럴 때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중심에서부터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과의 교제 가운데로 인도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의 신앙은 이와 같이 계시에 의한 종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계시가 필요하고,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만큼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lt;U&gt;&lt;STRONG&gt;믿음의 의한 삶도 &lt;/STRONG&gt;&lt;/U&gt;&lt;/FONT&gt;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 이길수 목사님에게서 전화가 왔었습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를 쭉 하다가 그분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성숙한 삶을 살기 위해서 모델을 찾는다면 그것은 &lt;FONT color=#e31600&gt;&lt;U&gt;&lt;STRONG&gt;허드슨 테일러를 &lt;/STRONG&gt;&lt;/U&gt;&lt;/FONT&gt;들을 수 있다. 그게 믿음의 의한 삶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자기의 노력으로 주님을 한시도 잊지 않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봤지만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잊어버리는 자신을 보았습니다. 그는 거룩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더 넘어지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성령께서 조명해 주심을 따라서 자기 스스로 노력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기가 도와주시는 예수님을 신뢰했더니 예수님께서 도와주셔서 그 삶을 살게 해주셨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러면서 또 뭐라고 그러냐면 사역에 있어서의 모델은 &lt;FONT color=#e31600&gt;&lt;U&gt;죠지 뮬러 목사님을 &lt;/U&gt;&lt;/FONT&gt;들 수 있다. 죠지 뮬러 목사님은 고아가 많을 때는 2,000명이 넘는 상황에서도 그 모든 필요를 위해서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구한 적이 없습니다. 그는 필요가 있을 때마다 다만 하나님께 그 필요를 가지고 나가 고아들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이 채워주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모든 필요를 채우셨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그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lt;FONT color=#e31600&gt;&lt;U&gt;&lt;STRONG&gt;요한 웨슬레가 &lt;/STRONG&gt;&lt;/U&gt;&lt;/FONT&gt;모델이더라.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깊은 얘기를 안나눴지만 요한 웨슬레는 공부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경건한 삶을 살았습니다. 얼마만큼이나 규칙적이었던지 사람들이 그들을 가리켜 Methodist 들이라고 별명을 불렀는데, 그게 나중에 감리교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성경을 많이 읽고, 사제가 되고, 미국에 인디언 선교를 갔지만 실패했습니다. 도망하듯이 그가 영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중에 풍랑을 만나 죽음이 두려워서 떨고 있는데, 어디선가 찬송소리가 들려서 가봤더니 모라비안 교도들이 전혀 두려움이 없이 기쁨으로 찬송하는 것을 보고, 저들 속에는 자기에게 없는 무엇인가가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온 뒤에 어느 날 친구의 도움으로 모라비아 교도들의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는 중에 성령님께서 주님을 비춰주시니까 자기의 모든 죄 용서를 위해 주님을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감리교에서는 그 요한 웨슬레의 회심 사건을 기념하여 회심주간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 하나님의 부흥을 보내시고 전 영국을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제가 지금 세 사람의 예를 말했는데 이 세 가지 다 성령님의 비추심, 즉 계시가 필요합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제가 이런 예를 들어서 어떨지 모르겠는데, 그분이 한 얘기니까 괜찮을 것 같습니다. &lt;FONT color=#e31600&gt;기흥중앙교회 이승준 목사님이 &lt;/FONT&gt;선교회 오기 전에도 가정 사역을 했습니다. 참고로 가정 사역만 가지고 안됩니다. 방법가지고 안되니까요. 그런데 그분이 선교회 집회에 오시면서 하나님이 만져 가시면서 변화되는데, 변화되는 하나의 획을 긋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게 뭐였냐면 그때까지만 해도 아내가 자기가 보기에는 너무 부족한 겁니다. 왜 하나님이 자기에게 저런 아내를 주셨는지 모르겠다고 늘 불만이 가득했습니다. 아내는 그야말로 뼈가 빠지게 수고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는 전혀 그게 감사하지 않은 겁니다. 아내로써 그런 수고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고, 아내가 피아노도 좀 잘치고, 노래도 좀 잘하고, 아내가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좀 잘했으면 좋을 텐데 하면서, 자기는 아내 잘못 만나서 목회를 못한다고 늘 불만이었습니다. 목사님 생각에는 아내가 나에게는 너무 모자라고 반대로 나는 아내에게 너무 과분하다고 여겼습니다. 아내가 그토록 수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수고를 전혀 알지 못하는 겁니다. 그런 상황인데 목사님에게 어느 날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런 모습을 비춰주시는데,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더래요. 자기가 너무나 이기적으로 판단했고, 자기 야망 가운데 눈이 가려져서 상대방을 전혀 귀한 줄을 모르고 전혀 배려가 없는, 자기가 얼마나 잘못 되었는가를, 자기에게 아내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인지를 하나님이 어느 날 보여주시는데, 쥐구멍이라도 들어가고 싶더래요. 지금은 아주 사이가 좋습니다. 이게 성령의 조명입니다. 이게 성경이 말하는 계시입니다. 우리가 교훈으로 가르친다고 안됩니다. 그러니까 방법론가지고 사역이 안되잖아요. 성령님께서 비춰주셔야 우리 자신을 볼 수 있고, 성령님께서 하나님을 비춰주셔야 우리가 그분을 신뢰할 수 있고, 우리의 어둠이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져야 우리가 그 어둠을 발견해서 버리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의 신앙인 하나님을 아는 것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는 것도, 주님의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도, 믿음의 의한 삶을 살 수 있는 것도, 모두가 성령의 조명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신앙은 계시의 종교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한 부분만 더 살펴보고 마치겠습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오늘은 설교가 1.2.3으로 하기보다는 우리의 신앙이 얼마나 계시의 종교인가 하는 부분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계시는 세 단계를 통해서 온다고 그랬는데,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첫째는 역사적인 사건을 통해서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두 번째는 그것이 우리에게 성경을 통해서 해석되어짐으로,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세 번째는 이것이 우리에게 각자 비춰져야 되는데,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가 우리에게 비춰지지 않으면 첫 번째와 두 번째를 우리가 아무리 잘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런 효과가 없습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은 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것을 잘 아는 것이 신앙인줄 압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세 번째 부분이 우리에게 반드시 비춰져야 됩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두 번째 부분까지는 잘했는데 세 번째 계시가 비춰지지 않은 대표적인 예가&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amp;nbsp;&lt;FONT color=#e31600&gt;&lt;U&gt;요한복음 5장에 &lt;/U&gt;&lt;/FONT&gt;보면 나옵니다. “&lt;FONT color=#e31600&gt;37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38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 39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41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42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amp;nbsp;&amp;nbsp;“45 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할까 생각지 말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가 있으니 곧 너희의 바라는 자 모세니라 46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47 그러나 그의 글도 믿지 아니하거든 어찌 내 말을 믿겠느냐 하시니라&lt;/FONT&gt;”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말씀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런데 그들은 모두가 인정하는 성경박사들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그렇게 많이 아는 그들에게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날마다 상고하는데, 그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형용을 한 번도 본적이 없고, 그 하나님의 음성을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고, 그 하나님 말씀도 지금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세 번째 계시가 그들에게 비춰지지 않은 겁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여러분들도 성경이 하나님 말씀인 줄 믿습니까? 그러면 다 ‘아멘’ 할 겁니다. 그 당시 바리새인들에게 구약성경을 갔다가주고 이게 하나님의 말씀인 줄로 믿느냐고 물었다면 그들은 입에서 침이 튀기도록 믿는다고 했을 겁니다. 그들은 점하나까지 빼놓지 않고 다 믿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너희는 모세의 글도 믿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의 뜻은 그들은 두 번째까지는 잘 믿는데 세 번째는 경험해 본적이 없다는 겁니다. &lt;FONT color=#e31600&gt;&lt;U&gt;성경 말씀이 자기에게 깨달아지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으로 비춰져야 됩니다&lt;/U&gt;&lt;/FONT&gt;. 그래야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전혀 비춰지지 않았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겁니다. 예수님은 그 말씀을 하고 계신 겁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모든 면에서 계시의 종교입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게 &lt;STRONG&gt;&lt;U&gt;&lt;FONT color=#e31600&gt;마음의 자세 &lt;/FONT&gt;&lt;/U&gt;&lt;/STRONG&gt;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여러분에게 이론적인 지식도 중요합니다. 그러니까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성경의 진리를 잘 아는 게 중요합니다. 왜냐면 이것이 토대가 되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두 번째 단계까지밖에 안간 겁니다. 세 번째 단계가 없으면 두 번째 단계까지는 죽은 지식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세 번째 계시가 없으면 두 번째 단계까지는 죽은 지식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효과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두 번째 단계에서 많이 안다고 해서 자기가 다른 사람보다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면, 이것은 엄청난 가운데서 죽어있는 겁니다. 세 번째 단계까지 가야합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세 번째 단계까지 가는 것이 우리 신앙입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런데 세 번째 계시는&lt;FONT color=#e31600&gt;&lt;U&gt; 하나님이 우리에게 비춰주셔야만 됩니다&lt;/U&gt;&lt;/FONT&gt;.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원해서 뺏을 수 있는 게 아니고, 공부 많이 한다고 되는 게 아니고, 머리 좋다고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에게 비춰주셔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의 자세가 중요합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마음의 자세가 중요합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하나님은 어떠한 자들에게 세 번째 계시를 비춰 주시냐면, &lt;FONT color=#e31600&gt;&lt;U&gt;겸손한 자, 마음이 청결한 자,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 말씀 앞에 떠는 자, 심령에 통회하고 마음이 겸손한 자에게&lt;/U&gt;&lt;/FONT&gt; 비춰주십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마음의 자세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의 자세를 가지고 내 스스로는 설 수 없음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며, 하나님을 알기를 사모하고, 열망함으로 주님 앞에 겸손함으로 나와 주님의 도움과 은혜를 구하며 그분을 향하여 갈급할 때에, 또한 무엇보다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따라 순종하기를 원할 때, 그리고 내가 가지고 있는 과거의 경험과 지식과 생각과 판단과 내 주관과 관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조용히 엎드려 그 말씀이 인도하시는 대로 내가 순종하고자하는 자세를 같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color=#e31600&gt;&lt;STRONG&gt;&lt;U&gt;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lt;/U&gt;&lt;/STRONG&gt;&lt;/FONT&gt;중요합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이와 같이 마음이 중요함과 동시에 매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면 하나님의 손을 구하는 삶을 통해서는 절대로 이 계시가 우리에게 비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고, 겸손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게 될 때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실재를 우리에게 보이시는 겁니다. 우리가 예배도 마찬가지고, 경배도 마찬가지고, 하나님 말씀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고, 기도도 마찬가지고,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순종함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하셔서 하나님을 알게 하심으로 우리가 그만큼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시고, 믿을 수 있도록 도우셔서 우리가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과 은혜와 치유와 권능을 경험하게 되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우리 삶속에 경험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시의 종교입니다. 계시가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세 번째 계시가 없는 2단계까지의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거기에는 생명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에게 지식은 교만하게 하고,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교만하게 지식이 두 번째를 말한 겁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우리의 신앙은 계시의 종교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세 번째 계시가 주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lt;/SPAN&gt;&lt;BR&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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