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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임마누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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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4T22:04:18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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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은행잎 지는 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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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빛과소금</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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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4T22:04:18Z</updated>
	    <published>2009-11-24T22:04:1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은행잎이 지고 있다. 연한 새 순으로 돋은 것이 바로 엊그제 같고, 푸른 녹음을 자랑하던 것이 어제 같은데, 오늘은 가을 하늘 한 구석으로 노랗게 낙옆지고 있다. 나무줄기를 단단히 부여잡고 삼복의 내리 쬐는 폭양을 거뜬히 이겨낸 나뭇잎도 절로 가는 세월만큼은 어쩔수가 없나보다.&lt;BR&gt;&amp;nbsp;오늘은 풍요해 보이는 가을나무도 몇날이 못 되어 나목이 되고, 벌거벗은 나무는 또 겨울 삭풍을 담담히 이겨내고는 내년 이른 봄에 다시 연두 빛 투명한 봄눈을 틔울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착각하지 말 것은 매년 가을에 속절없이 떨어지는 이 나뭇잎은 다시는 그 나무에 매달릴 수 없다는 것이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그 나뭇잎은 그 한 계절 동안만 나무에 매달리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렇게 떨어져 결국 하릴없이 잊혀지고 마는 것이다.&lt;BR&gt;&amp;nbsp;인생도 다르지 않다. 강건하면 70~80년을, 어떤 사람은 몇 년을 더 살 수도 있겠지만 영원한 시간에 비하면 인생 백년은 낙옆이 나무에 머무는 시간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 좋은 시절도 지나고 모진 바람이 불 때 우리는 안타까운 손을 놓아야 한다. 그때 우리는 지구상의 모든 나뭇잎이 추상같은 조물주의 명령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쓸쓸히 추락하듯, 인생 역시 모든 조상이 간 그 길을 똑같이 갈 수 밖에 없다.&lt;BR&gt;&amp;nbsp;은행잎이 지는 날, 우리도 마침내 떨어질 날을 다시금 기억하며 천하의 영광을 거머쥐었던 지혜의 왕 솔로몬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는 것도 의미 있으리다. &lt;BR&gt;&amp;nbsp;&quot;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quot; &lt;仁&gt;&lt;/P&gt;
&lt;P&gt;&lt;BR&gt;-출처 : 예수내구주&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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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에 나오는 이름 8 - 여호수아(호세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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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24T21:48:13Z</updated>
	    <published>2009-11-24T21:48:1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성경에는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를 나타낸 이름이 있다. 그 이름은 바로 '여호수아'와 '호세아'이다. 이 이름은 '구원하다'라는 히브리어 동사 '야사'에서 비롯되었다. 여호수아의 원래 이름은 호세아였다. 하지만 모세가 '예호슈아(구원의 하나님)'라는 명사형으로 불렀다(민 13:16). 이는 애굽에서 인도하신 구원의 하나님을 의지해야함을 알려준 것이다. 호세아는 '구원'이라는 명사형이나 현재형 동사로는 죄를 서슴없이 행하는 이스라엘을 지금도 구원하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준다. 실제로 호세아는 음행을 행하는 고멜을 아내로 삼아 끊임없이 품으려 하여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을 삶을 통해 보여주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독생자 '예수'를 세상에 보내심으로 완성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quot;(마 1:21)&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출처 : 예수내구주&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다단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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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24T21:40:17Z</updated>
	    <published>2009-11-24T21:40:1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RONG&gt;&lt;FONT face=굴림체 color=#171557&gt;다단계.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lt;/FONT&gt;&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FONT face=굴림체 color=#171557&gt;&lt;/FONT&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Q : 안녕하세요. 40대의 가정주부입니다.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다가 졸업 후 연락이 끊겼던 동창생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20여년 만에 연락을 준 친구가 너무나 고맙고 반가워 약속을 정하고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보다 살은 좀 쪘지만 세련되어진 친구는 한사코 과분한 점심까지 샀습니다. 그 친구도 교회 다닌 지 10년이 된다면서 앞으로 자주 만나자고 했습니다. 그 후 다시 만났을 때부터 그 친구는 제게 다단계를 소개했습니다. 하지만 다단계에 대한 피해사례를 교회에서 많이 들어 보았기 때문에 ‘이건 아니다’란 생각에 친구와의 관계를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집요하게 집까지 찾아와 저를 다단계로 끌어들이려고 합니다. 이젠 전화받기도 두렵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lt;BR&gt;&lt;BR&gt;A : 고등학교 때의 친한 친구와 20여년 만에 재회하게 되어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우정을 이어가고 싶으셨을텐데요. 우정은커녕 오히려 친구를 이용하려고 하는 동창생의 행동에 허탈함까지 느끼셨으리라 짐작됩니다. 그 친구는 정말 다단계에 깊이 빠져서 우정도 뒷전이고, 교회에는 다닌다지만 신앙생활도 뒷전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사연을 읽으면서 우리가 무엇에 가치를 두고 사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보다 더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며, 우리의 삶을 저주로 이끌어 가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다른 어떤 것이 아닌 예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느낍니다. &lt;BR&gt;이스라엘 백성이 광야를 지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 약속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는 신명기를 보면 계속 반복되는 단어가 있습니다. “잊지 마라, 기억하라, 생각하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잊어버리기 쉬운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임을 잊지 말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친구처럼 아무리 교회에 다닌다 할지라도 세상에 가치를 두면 세상에 집착하게 되어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게 됩니다.&lt;BR&gt;그러므로 한 단계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친구를 바라보시길 권해 드립니다. 그 친구를 고등학교 동창으로 바라보기 이전에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지 못한 불쌍한 영혼으로 바라보시면 좋겠습니다. 우선은 친구 분에게 지금의 부담스러운 마음을 솔직하게 전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당장은 감정이 상할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친구를 판단하고 비난하는 말은 삼가고 불편한 심정을 가급적 솔직하게 ‘나 전달’방법으로 이야기하신다면 그 친구 분도 이해할 것입니다. &lt;BR&gt;친구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기다리다가 친구 분이 다단계보다 더 중요하고 귀한 것이 있음을 깨닫고 돌아 올 때 가장 가치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무쪼록 다단계로는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의 원천 되시는 예수님을 그 친구 분이 만날 수 있도록 돕는 복된 중재자가 되시기를 기도합니다.&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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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령의 증거를 받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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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24T21:37:26Z</updated>
	    <published>2009-11-24T21:37:2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color=#666666 size=3&gt;&lt;STRONG&gt;성령의 증거를 받음&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로마서 8:12-17]&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amp;nbsp;&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하나님은&lt;BR&gt;참되시다&lt;BR&gt;그가&lt;BR&gt;아들을 인하여 구원받은 자들을 사랑하시되&lt;BR&gt;끝까지 사랑하시니(요 13:1)&lt;BR&gt;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lt;BR&gt;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자들을 자녀라 하시고&lt;BR&gt;자녀들로 영광을 받게 하셨으니(엡 1:3-5)&lt;BR&gt;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후사되게 하심이다(롬 8:16)&lt;BR&gt;하나님의 자녀는 거룩한 자들이니&lt;BR&gt;첫째는 죄 없이 함을 받아야 하고(행 2:38)&lt;BR&gt;그 다음은&lt;BR&gt;성령을 받아야 하고(행 19:1-7)&lt;BR&gt;침례로써 옛 신분을 단절해야 한다(마 28:19)&lt;BR&gt;하나님께서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lt;BR&gt;성령을 주신 일이 없으시다(갈 3:5)&lt;BR&gt;성령은&lt;BR&gt;예수의 사람들이&lt;BR&gt;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하신다(롬 8:16=17)&lt;BR&gt;성령의 증거를 받은&lt;BR&gt;예수의 사람은 그의 고난에도 함께 참여한다&lt;BR&gt;○우리는&lt;BR&gt;육체를 자랑치 말고&lt;BR&gt;성령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lt;BR&gt;○우리는&lt;BR&gt;종교인이 되어 외식하지 말고&lt;BR&gt;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lt;BR&gt;○우리는&lt;BR&gt;믿음을 관념으로 여기지 말고&lt;BR&gt;성령의 은사로써 실상을 알아야 한다&lt;BR&gt;※성령의 증거를 받자&lt;BR&gt;성령이 허락하시는 것이면&lt;BR&gt;무엇이나 순종하자&lt;/FONT&gt;&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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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비주의·선(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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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19T21:59:20Z</updated>
	    <published>2009-11-19T21:59:2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RONG&gt;신비주의&lt;BR&gt;&lt;/STRONG&gt;&lt;BR&gt;&lt;BR&gt;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다. 이는 말씀이 미리 있고 그 말씀이 보이는 육신으로 현현하셨다는 것이다. 곧 예수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으로, 말씀은 미리 오신 선지자요 육신으로 오신 이는 현현하신 말씀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때도, 먼저 선지자들의 예언과 약속의 말씀이 있었고, 그는 그 말씀을 따라 오셔서 그 말씀을 모두 성취하신 분이다. 이처럼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다. &lt;BR&gt;신비주의란 이러한 선지자 없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의 주장이나 체험을 토대로 교리를 형성하는 것이다. 곧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신비주의 종교가 된다. 어떤 한 개인의 깨달음이나 체험이 보편화되지 못하면 미신으로 끝나버리지만, 그것이 제자들에 의해 체계화되면 종교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세상 종교는 어떠한 약속이나 계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교주의 철학과 사상을 토대로 인간의 지성과 감정에 의존하는 것이다. &lt;BR&gt;&lt;BR&gt;계시를 떠나 신념을 따르는 것&lt;BR&gt;신비주의는 하나님의 계시 없이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은 자신의 신념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신앙은 자신의 신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다. &lt;BR&gt;사람은 누구나 종교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러나 사람의 심령은 밭과 같아서 말씀의 씨를 뿌리지 않으면 잡풀이 우거지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심령은 미신적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서 자기 속에서 우러나오는 종교성만을 의지하고 따라가다 보면 잡초와 같은 신비주의에 빠질 우려가 크다. &lt;BR&gt;미신은 어떤 계시나 약속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정성을 다하는 것이다. 곧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식으로 자신의 행위나 의로써 소원하는 바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 하면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의지하는 믿음이 아닌 미신적인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것이 신비주의다. &lt;BR&gt;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오기 전,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대로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춤추고 뛰놀았던 것과 같은 것이 신비주의다. 곧 하나님의 계시는 제쳐 놓고 자기 심령에서 나오는 대로 하나님을 형상화하고,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따라 자기 감정을 충족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lt;BR&gt;&lt;BR&gt;신비 체험에 착념하는 것&lt;BR&gt;기독교 신앙은 그 자체가 신비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따르는 분명한 체험과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비주의란 예수로 말미암는 구원은 무시한 채 오직 이적만을 경험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초월한 체험 중심의 신앙이 바로 신비주의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 아닌 자신의 만족과 기쁨을 따르는 자기 중심적 신앙에서 비롯된다. &lt;BR&gt;아무리 훌륭한 체험을 했거나 예수께서 주신 은사라고 주장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면 이는 미신적인 현상에 불과하고 신비주의가 된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의 신비주의란 이러한 다른 영들에 의한 체험이나 능력을 자기의 신앙심과 연결해 가려고 하는 것의 결국이다. &lt;BR&gt;이처럼 신비주의란 하나님의 계시를 떠나 자신의 신념을 따르거나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신비 체험에 착념하는 것을 말한다. 곧 성경의 말씀을 떠나서 하나님을 믿거나 예수를 믿는다면 이는 신비주의가 된다. &lt;BR&gt;&lt;BR&gt;&lt;BR&gt;&lt;STRONG&gt;선(善)&lt;BR&gt;&lt;/STRONG&gt;&lt;BR&gt;&lt;BR&gt;‘선’(good)의 사전적 의미는 가치 있고 올바르며 좋은 것을 뜻하는 말로 악과 반대되는 개념이다. 철학에서 선은 도덕적 생활의 최고 이상으로, 진정한 의미의 선한 것은 오직 하나, 선을 지향하는 선 의지(善 意志)뿐이라고 한다. &lt;BR&gt;성경에서 선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토브’()는 ‘아름다운, 옳은, 좋은’ 등의 뜻을 의미한다. 이는 ‘옳다’는 의미에서 ‘의’(義)와 같고, 어떤 대상에 대한 평가를 담은 용어로서, 악과 반대되는 용어이다. 또한 헬라어는 ‘아가도스’()와 ‘칼로스’()가 사용되는데, 특히 칼로스는 성경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상하며 진선미를 모두 함의(含意)한 단어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대로 나타내준다.&lt;BR&gt;이처럼 성경에서 말하는 선은 ‘옳다’ 또는 ‘착하다’를 의미하는 단순한 용어가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며, 선하신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 것을 선하다고 일컫는다. 그러므로 선은 생명을 아는 지혜가 된다. &lt;BR&gt;&lt;BR&gt;하나님의 속성인 선(善)&lt;BR&gt;천상천하에 선한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마 19:17). 곧 선하심은 그의 영원한 속성이다. 흔히 ‘하나님은 선하시다.’라고 하면 ‘하나님이 착하시다.’라는 말로 오해하기 쉬운데, 성경이 말하는 선은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의 모든 것 곧 그의 사랑, 자비, 생명, 능력, 행복, 영광 등이 선에 속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은 선하심으로 완전하고 생명이 충만하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선하신 뜻대로 역사하시고 성취하신다. &lt;BR&gt;하나님은 인간에게 먼저 이러한 선을 알게 하셨고, 그 안에 거할 수 있도록 선악과 계명을 주셨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하나님의 선 안에 거할 수 있는 한계선과 같은 것으로 선을 벗어나면 악만이 존재하게 된다. &lt;BR&gt;아담이 마귀에게 속아 선을 초월했을 때 인류는 영원한 저주와 사망에 처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가 다시금 하나님의 선하심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을 허락하셨다.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선의 극치는 생명이고, 악의 극치는 사망이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없는 것은 선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인류에게는 생명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lt;BR&gt;또한 하나님은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들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곧 선하다고 말씀하셨다(창 1:4, 10, 12, 18, 21, 25). 하나님은 그가 말씀하신, 선하신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기뻐하신다.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은 선하게 여기신다. &lt;BR&gt;&lt;BR&gt;선한 목자이신 예수&lt;BR&gt;하나님은 선하신 분이시다. 선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이다. 하나님은 공의와 선을 함께 가지신 분으로, 공의로 심판하시기 전에 선을 베푸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다. 예수는 이 땅에 오실 때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을 온전히 가지고 오신 분으로, ‘나는 선한 목자’(요 10:11)라고 자신을 소개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성품을 가진 목자라는 뜻으로, 예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세상에 나타내 주신 분이다. &lt;BR&gt;그는 선한 목자로 오셔서 자기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 주셨는데, 이는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하심이다(요 10:10). 예수 그리스도는 이를 위해 피 흘리셨고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사망권세자 마귀를 심판하셨다. 이를 통해 마귀에게 속아 악에 속해 있던 영혼들이 다시금 선으로 들어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신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하신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선하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된다. &lt;BR&gt;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선을 떠나 악만이 존재하는 세상에 선한 목자로 오셔서 잃어버린 양을 다시금 의의 길로 인도하셨다. 곧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을 통해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함으로써 이 세상에 선을 이루신 분이시다. 우리는 그가 이루신 선을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 수 있다. &lt;BR&gt;&lt;BR&gt;하나님의 선을 이루어야 할 성도&lt;BR&gt;하나님은 이 땅에 선을 이루기 원하신다. 예수는 이 땅에서 아버지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행하셨고(요 10:32, 행 10:38), 성도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해 부름 받은 자들이며(엡 2:10, 딛 2:14), 선한 일에 힘쓰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되기를 원하신다(고후 9:8, 갈 6:9-10, 엡 2:10, 골 1:10, 딤전 6:18, 딤후 2:21, 3:17, 딛 3:1, 8, 히 13:16, 벧전 2:15). &lt;BR&gt;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선한 일은 세상에서 말하는 구제나 빈민 사역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예수께서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9) 하신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해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히 13:21)라고 말씀한다. 이를 통해 선한 일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을 행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lt;BR&gt;하나님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것이다(요 6:40). 예수는 이 뜻을 이루기 위해 보냄을 받았고(요 6:38-39), 성도가 감당해야 할 선한 일도 이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선행은 영혼을 살리는 일이며, 구제나 빈민 사역까지도 영혼을 살리는 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한다. &lt;BR&gt;예수께서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던 것처럼, 성도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함으로 선한 일을 감당할 수 있다(벧후 1:4). 성령은 신의 성품을 가지고 우리에게 오신 하나님이시며, 성도는 성령의 감화를 받을 때 비로소 신의 성품을 드러낼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의 감동하심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이룰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성령 충만하여 성령의 열매를 맺음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어 갈 수 있다. 하나님의 선한 뜻은 우리의 영혼이 예수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도록 자라가는 것이며, 자신 뿐 아니라 이웃의 영혼을 구령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데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출처 : 한국신학&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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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신학생인 형제, 결혼해도 될까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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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19T21:54:38Z</updated>
	    <published>2009-11-19T21:54:3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Q : 교회에서 만난 형제와 교제를 시작한 지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형제는 목회에 뜻을 두고 현재 신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나 그 형제 집안이나 형편이 넉넉지를 못한 상태인데, 고생길이 뻔한 목회에 뜻을 둔 형제와 함께 할 자신이 없습니다. 주변에서는 그만큼 믿음 좋은 형제 만나기 힘들다면서 저의 약한 믿음을 나무라는 분위기입니다. 이런 것으로 고민하는 연약한 저의 믿음도 싫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그 형제와 결혼을 해도 될까요? &lt;BR&gt;&lt;/P&gt;
&lt;P&gt;A : 목회의 길을 가려고 준비하는 형제의 훌륭한 믿음은 마음에 들고, 3년간 교제하면서 정도 많이 들었는데, 막상 그 형제와 결혼하면 닥치게 될 경제적인 문제 때문에 갈등하는 자매님의 답답한 심정 충분히 이해됩니다. 게다가 이런 고민을 하는 자체가 믿음이 연약하기 때문이라는 주위 분들의 시선도 자책감을 갖게 만드는 한 원인이 될 것이라 생각되어져 안타깝습니다. &lt;BR&gt;경제적인 문제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 반드시 믿음 없는 자세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매일 살아 가면서 맞닥뜨려질 일인데 왜 고민이 안되겠습니까? 기본적인 생활이 안되어 경제적으로 쪼달리다 보면 부부간에 불평과 원망이 쌓이면서 불화의 불씨가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누구나 경제적으로 여유있고 편안한 삶을 살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공부도, 일도 열심히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자매님이 물질에만 가치를 두고, 돈에 욕심이 있었다면 이런 고민도 할 필요 없이 벌써 그 형제와 헤어졌을 것입니다. &lt;BR&gt;&lt;BR&gt;제 생각에는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을 하기에 앞서 더 근본적인 문제 두 가지가 해결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첫째는 자매님이 사모로 부름받은 확실한 소명 의식이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목회자에게만 소명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모에게도 소명 의식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자매님을 사모의 길로 부르셨다는 소명 의식이 확실하다면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소명 의식이 없으면 작은 환란에도 견디지 못하고 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선 이 문제를 놓고 진지하게 기도해 보시기 바랍니다. &lt;BR&gt;두 번째로 점검해야 할 것은 두 사람의 사랑입니다. 결혼은 단순히 좋다는 감정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상대방과의 다른 환경과 차이까지도 모두 수용하고, 인내하고, 존중할 수 있을지를 점검해 봐야 합니다. 시무언도 ‘사랑은 담당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상대방의 약점까지도 담당할 만큼 사랑하지만 혹시 서로간의 가치관과 경제관이 다르다면 이런 문제는 형제와 솔직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조율해 나가시길 바랍니다. &lt;BR&gt;혹시 믿음의 연약함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까지 미리 염려하는 부분이 있다면 이는 형제분과 함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시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을 것입니다.&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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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제사장은 주의 뜻대로 순종하여 섬기는 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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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19T21:47:46Z</updated>
	    <published>2009-11-19T21:47:4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gt;&lt;FONT size=3&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lt;STRONG&gt;성소와 지성소는 죄인과 하나님이 화목하게 되는 곳&lt;/STRONG&gt;&lt;/SPAN&gt;&lt;/FONT&gt;&lt;/SPAN&gt;&lt;/P&gt;
&lt;P&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quot;&gt;&lt;FONT face=굴림&gt;속죄는 단 한번에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가능&lt;/FONT&gt;&lt;/SPAN&gt;&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 성소는 금, 은, 놋, 나무, 천 등으로 만들어졌다. 성소는 뜰에서 사용되는 모든 재료를 사용하고 있다. 성소는 거룩한 곳이요, 영광스러운 곳인데 왜 뜰에 사용된 재료를 사용하셨을까? 의문이 생긴다. 뜰의 기능은 죄를 고백하고 죄 사함을 받기 위한 곳으로써의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다. 그러기에 나무, 놋, 은, 천을 사용한다. &lt;BR&gt;&amp;nbsp; 나무는 고난당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또한 연약한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놋은 심판을 상징하는데 여기서 심판은 세 가지를 말한다. 첫째는 죄인 된 아담(인류)을 위하여 죽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두 번째는 하늘에서 범죄한 사단을 정죄하는 심판을 의미하고, 세 번째는 아담 안에서 심판 받은 인류를 의미하고 있다. &lt;BR&gt;&amp;nbsp; 은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미한다. 모든 것이 다 있어도 은혜가 없으면 의미가 없기에 뜰에 사용한 것이다. 어디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제한없이 주어진다는 의미다. 그 은혜를 알리기 위해 놋기둥 꼭대기에도 사용됨을 알 수 있다. 성소에 은을 받침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렇다. 놋 기둥에 있는 은이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기능이라면 성소의 은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위에서만 성전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성소는 은혜 위에서만 모든 사역이 이루어진다고 이해하면 된다.&lt;BR&gt;&amp;nbsp; 뜰에 사용된 천도 성소와는 다른 의미로 쓰였다. 뜰을 두르고 있는 흰 세마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움을 의미하고, 성도의 옳은 행실을 의미한다. 성소의 천은 규제를 의미한다. 성막의 문은 규제가 없이 누구나 들어 올 수 있는 열린 문이지만 성소의 문은 열린 문이 아니라 제한의 문이다. 성막 안에서 사용 된 재료는 같지만 쓰이는 장소에 따라서 영적인 의미는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lt;BR&gt;&amp;nbsp; 성소는 금을 주재료로 사용하고 있다. 금은 영광을 의미하고, 또는 신성을 의미한다. 성소의 바닥은 모래다. 즉 이 땅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성막의 성소는 신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성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말해주고 있다. 성소는 두 개의 문으로 되어 있다. 첫 번째 문은 성소에 들어가는 문이다. 이 문은 다섯 개의 기두응로 된 문이다. 이 문의 특징은 놋 받침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성소에 놋이 사용 되었다는 사실에 상당한 의문을 가질 것이다. 놋은 분명히 심판을 의미한다고 했는데 왜 성소에 놋이 사용 됐을까? 하는 질문을 할 것이다. 죄의 문제는 번제단에서 다 해결된 걸로 알고 있는데 또 무슨 죄가 있다는 말인가?&lt;BR&gt;&amp;nbsp; 성소의 놋 받침은 원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범죄를 의미한다. 즉 성소에 들어갈 떄 물두멍에서 손과 발을 씻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제사장이라도 죄 있을 시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 들어가면 죽음을 피하지 못하고 죽는 것이다. 성막의 문은 죄인의 문으로 모든 죄인이 들어올 수 있었지만 성소의 문은 죄인이 들어올 수 없는 문이다. 왜냐하면 번제단과 물두멍에서 충분히 죄 사함을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을 무시하고 들어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무시하는 처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회개는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최고의 선물임을 알고 늘 회개하여 자신을 꺠끗이 해야 한다. &lt;BR&gt;&amp;nbsp; 성소의 문을 통과 하여 들어가면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성물들이 있다. 성소 안에서 제사장들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24반차(주기)로 돌아가며 하나님을 섬겼다. 그리고 4번은 모든 제사장이 모여서 하나님을 섬겼다. 총 6번을 성소(성막) 안에서 일하게 된다. 성소를 지나 지성소로 가려면 휘장이 가로 막고 있다. 이 휘장은 죄로 인하여 닫힌 문이다 .이 휘장에 수를 놓았는데 그 모양이 천사의 모습이다. 성막은 세 개의 문이 있는데 유일하게도 지성소로 가는 휘장만 천사의 모습을 수놓았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이렇다.&lt;BR&gt;&amp;nbsp;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여 쫓겨 날 때 하나님께서는 천사들을 통하여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게 하셨다. 그 이후로 아담은 에덴동산에 한 번도 들어간 적이 없다. 들어가고 싶어도 천사가 화염검으로 지키고 있기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들어갔다가는 화염검으로 죽을 수도 있다. 죄가 있는 자는 에덴동산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처럼 지성소에도 죄가 있을 시는 들어갈 수 없다. 번제단과 물두멍에서의 죄사함은 영원한 사함이 아닌 한시적 사함이다. 즉 그 죄에 대해서만 한시적 사함이다. 한시적인 사함도 죄가 사라지는 사함이 아닌 미래적 사함을 약속으로 받는 것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해결해야 만이 사해지는 죄를 의미한다.&lt;BR&gt;&amp;nbsp; 그러면 휘장을 열고 들어가는 때는 언제인가, 대속죄 날이다. 이날만 한시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이날에만 대제사장이 피를 가지고 들어간다. 왜 휘장의 문은 일 년에 한 번만 열리는 것일까? 그 이유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실 사역에 대해서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한 번에 들어가심으로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한다는 뜻이다. 두 번, 세 번이 필요 없이 한 번에 이루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휘장을 걸고 있는 기둥은 금 기둥에 은 받침을 하고 있다. 성소의 기둥은 놋 받침으로 되어 있는데 휘장의 받침은 은으로 되어 있다. 휘장은 사람으로서는 들어갈 수 없는 거룩한 곳이다. 휘장을 걸고 있는 기둥의 받침이 은인 것은 은혜(살려 주기 위해)를 의미한다. 들어가는 자와 나오는 자를 살려주기 위해서 은으로 되어있다. &lt;BR&gt;&amp;nbsp; 만약에 놋으로 되어 있다면 들어가자마자 죽었을 것이고 산다고 해도 살아서는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죄인 된 사람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없는데 일 년에 한 번이라도 나올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 은으로 해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순종하여 행할 수 있는 부분은 행하게 하시고 행할 수 없는 부분은 은혜로 행할 수 있도록 하셨다. 이것이 놋 받침과 은받침의 차이다.&lt;BR&gt;&amp;nbsp; 성소는 세 개의 성물이 있는데 이 세개의 성물은 하나님을 섬기는 방법이다. 성소는 창문이 없고 의자도 없다. 창문과 의자가 없는 이유는 이렇다. 창문은 다른 고소가 통하는 연결 고리라고 생각해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 허술한 섬김이 될 것이다. 이것을 방지하기 위해 창문이 없는 것이다. 오로지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최선을 다해 섬기라는 것이다. 오늘 날 신앙인들을 보면 세상에 마음을 뺏기고 있는 모습들을 발견하게 된다. 하나님을 잘 섬기다가도 세상에 대한 유혹이 다가오면 거절하지 못하고 함께 빠져가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lt;BR&gt;&amp;nbsp; 의자가 없는 이유는 쉬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쉬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영적으로 쉬고자 하는 분들이 있는데 이때 쉼을 가지면 다시 영적인 일을 회복하여 지속하지 못하고 주저앉는 분들을 만나게 된다. 육체는 쉬어야 하지만 영적인 일은 쉬어서는 안 된다. 성소는 세상 빛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 오직 금등대의 불빛으로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한다. 금등대의 불이 흐리거나 꺼지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할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처럼 성령 충만하지 않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없다. 성령없이 일한다고 해도 이는 불법을 행하고 있는 자다. 금등대의 불을 끄고 성소 앞에 있는 휘장을 들어서 세상 빛을 들어오게 한다면 이는 죽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교회 안에도 세상(성령을 무시하고) 방법을 따라서 운영하려는 분들이 있는데 이는 옳은 방법이 아니다.&lt;BR&gt;&amp;nbsp; 진설병도 하나님을 섬기는 거룩한 예물이다. 진설상과 진설병은 그 의미가 다르다. 진설상을 믿음이라고 보면 진설병은 신앙의 표현이라고 봐도 무리는 없다. 떡상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믿음과 우리의 신앙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다. 믿음은 있는데 섬김이 없다면 반쪽짜리 기독교인이다. 향단은 아침에 향을 피우고 저녁에 향을 피운다. 예수께서도 새벽기도와 저녁기도를 하시는 것을 성경을 통하여 읽었을 것이다. 예수의 기도는 향단의 향을 피우는 방법대로 기도하심을 알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대로 행하심을 알 수 있다. &lt;BR&gt;&amp;nbsp; 지성소에는 법궤가 있다. 법궤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신 곳이요,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곳이다. 성소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나가는 모습이라면 지성소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다가오시는 모습이라고 보면 된다. 하나님께서 죄인 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곳이 성소다. 성소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다가가면 하나님은 그 다가간 자들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는 곳이 지성소다. 성소와 지성소는 화목케 하는 장소라고 보면 된다. 이 화목의 장소로 이끄시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이 이끄심에 나오는 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죄 사함 받아 외롭게 된 의인들이 들어가 아버지를 섬기는 곳이 성소요, 성소와 지성소 사이의 휘장이 열리므로 지성소에서 베푸시는 아버지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그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시므로 우리는 영원한 속죄를 받았고 이제는 누구든지 예수의 피를 의지하기만 한다면 언제든지 지성소인 하늘 보좌에서 베푸시는 은혜를 받을 수 있다.&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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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무엘하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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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19T21:46:00Z</updated>
	    <published>2009-11-19T21:46:0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face=굴림 size=4&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FONT-FAMILY: Batang&quot;&gt;하나님은 다윗의 권력으로 건축되는 성전 원치 않아&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4&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lt;STRONG&gt;다윗을 도운 충직한 군인 같은 일꾼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lt;/STRONG&gt;&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size=4&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quot;&gt;&lt;STRONG&gt;&lt;/STRONG&gt;&lt;/SPAN&gt;&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 &lt;BR&gt;&amp;nbsp; 다윗이 신앙에서뿐 아니라 그의 정치세계에서도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것은 이미 불법과 불신앙이 일상사가 되어버렸던 사사시대에서 신앙을 배우고 자랐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이 조금도 시대에 물들이 않았다는 데 있다. 그리고 그의 주위에는 변함없이 충성된 다윗의 사람들이 있었다.&lt;BR&gt;&amp;nbsp; 요즘 선덕여왕이라는 드라마가 소위 '대박' 드라마로 인기절정을 구가하고 있는데 그 중심에 미실이라는 여인이 있다. 물론 드라마의 성공이 미실의 뛰어난 연기 탓도 있지만 극 초반부에 미실이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라고 한 명대사도 세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며 많은 사람들 사이에 회자 되었다&lt;BR&gt;&amp;nbsp; 그렇다. 다윗에게도 '사람이 있었다' 다윗을 도와 그의 왕정을 든든히 세운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단연 돋보이는 세 사람만 꼽으라면 우리아와 나단과 브나냐를 들 수 있다. 다윗에게 있어서 가장 충직한 사람은 우리아가 아니었을까? 그 휘하에 우리아만큼 충직한 장군이 있을까? 우리아는 이스라엘 사람도 아니고 헷사람, 즉 힛타이트 족속이다. 전투 중에 급히 다윗에게로 불려와 아내에게 내려가 쉬라는 특명을 받지만 전쟁 중인 전우들을 생각해 거절한다(11:11). 다급해진 다윗은 술을 먹여서라도 아내 곁으로 보내려 했지만 (11:13) 이 계락으로도 우라이의 충정을 바꾸지는 못했다. 왠만큼 술이 들어가면 전우애고 충성이고 모두 희미해지기 십상인데 이 사람은 암만 술이 들어가도 그 충직함과 신실함이 변함없는 사람이었다(11:6~11). 결국 다윗은 충신 우리아를 맹렬한 전투의 선두에 세워 맞아 죽게 (11:15~17) 함으로 그 아내 밧세바 임신에 대한 완전범죄를 꾀하며 자신의 죄를 묻으려 했다. 이 사건을 현대판으로 옮겨보자. 온 세상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실력자가 자신과 함께 동역하는, 누구보다 충성된 그 동역자를 일터로 보낸 뒤 그 아내를 유혹해 임신시키고는 그 일이 탄로 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청부살인하고 그 아내를 자신이 차지한 것이다. 지금 내가 섬기고 있는 사람이 그 사람이라면, 지금 내가 믿고 따르는 사람이 바로 그 사람이라면, 우리는 과연 그 사실을 일평생 마음에 묻고 여일하게 그 사람을 섬기고 믿고 따를 수 있을까? 참으로 보기 드문 충신 우리아의 애통한 죽음이다.&lt;BR&gt;&amp;nbsp; 나단 선지자는 밧세바 사건의 전후 사정을 환히 꿰고 있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죄는 개인의 죄고 공적인 나라의 문제는 또 나라의 문제이니 국가안녕을 위해서 한 개인의 사적인 문제는 묻어두고 전과 조금도 다름없이 다윗을 정중히 모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어려운 일이다. 사람이 그 정도로 치명적인 죄와 허물을 가진 사람을 어떻게 존경하면서 평생 모실 수 있겠는가? 그래서 나단 선지자는 참 놀라운 사람이 아닐 수 없다.&lt;BR&gt;&amp;nbsp; 210년 역사에 아홉 번의 역성혁명이 일어나는 이스라엘에서나, 천년 로마사에서도 가장 흔한 역성혁명은 바로 측근들에 의한 황제피살이었다. 전제군주 체제하에서 정권교체란 필연적으로 황제의 죽음이 요구되니 측근에 의한 황제피살은 그러므로 어떤 황제도 결코 피할 수 없는 위험부담을 늘 껴안아야 했다. 이런 의미로 보면 다윗이 그의 치세동안 걱정없이 안정적으로 국정운영을 가능케 했던 것은 바로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냐의 공로가 아닐까? 브나냐란 인물에 밑줄 쫙 긋고 싶다. 다윗의 이전실장, 경호실장 격인 브나냐는 말 그대로 다윗의 목을 지키는 자이다. 충직하고 우직하여 그 어떠한 사회변화가 오고 현실적으로 사회가 어떻게 기울어져도 다윗에 대한 충정이 절대 변치 않는 사람이었다. 사람으로도 돈으로도 권력으로도 감히 수작을 걸 수 없는 사람이었다. 다윗은 일생동안 많은 사람에게 배신당한다. 심지어 다윗의 외조카 되는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까지 그에게서 등을 돌린다. 요압과 아비아달까지 합류한 아도니야 반란이 성공되면 숙청 일순위가 명백한데도 끝까지 꿋꿋이 다윗 곁을 지켜 낸건 브나냐와 나단 선지자였다. 브나냐! 성경에 수 많은 인물이 있지만 유난히 마음에 오랫동안 강한 여운을 남기는 인물이다.&lt;BR&gt;&amp;nbsp;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는 소물을 듣고 블레셋(가나안 해변지역이며 바벨론과는 전혀 다른 나라다. 다윗 때는 아직 바벨론이 나타나지 않는다. 성경이 어려운 이유가 바로 이방나라들의 이름이 다 그게 그것 같아서이다. 그래서 그냥 이스라엘은 좋은 나라 나머지는 다 나쁜 나라 이렇게 넘어간다. 그러면 성경이 재미가 하나도 없고 지루하다. 자주 나오는 나라는 지리공부 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이 르바임 골짜기에 편만하게 진을 치지만(5:18)) 하나님께서 친히 군사전략을 지시하셔서(5:23~24) 블레셋 사람을 쳐 게바에서 게셀까지 이른다.&lt;BR&gt;&amp;nbsp; 정국이 안정적으로 정리되자 다윗은 늘 마음에 걸려있던 법궤를 삼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열정적으로 옮기고(6장), 이제는 성전을 건축하고자 하나님께 소원을 둔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통해 '네 집과 네 나라가 내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7:16) 약속하신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계약하셨듯이 지금 다윗에게도 똑같은 언약을 하신다. 이 약속으로 인하여 북방 이스라엘 왕조는 아홉 번의 역성혁명이 일어나지만 유대는 역대 왕들의 많은 실수와 범죄 함에도 불구하고 왕조는 바뀌지 않고 쭉~ 다윗의 자손으로만 이어졌다. 이 약속은 놀랍게도 신약의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까지 이어지는 영원한 약속이 된다.&lt;BR&gt;&amp;nbsp; 그러나 다윗의 간절한 성전건축의 꿈은 '다윗은 피를 많이 흘려' 다시 말하면 '전쟁을 많이 해서'라는 이유로 허락지 않으시는데,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께서 전쟁에 능한 다윗을 다만 전쟁을 많이 한 탓에 성전건축을 허치 않으신 것인가? 더구나 그 전쟁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전쟁들이었다.&lt;BR&gt;&amp;nbsp; 다윗은 자신의 당대에 그 동안 남겨두었던(사사시대에 점령하라고 주신 가나안땅이지만 사사시대 불신앙으로 점령하지 못한 땅) 블레셋 해안땅, 남동쪽의 에돔땅, 모압땅, 그 위의 암몬, 갈릴리 바다 옆에 동그랗게 붙어있던 그술 땅부터 그 위 북쪽의 넓은 땅 아람, 시리아까지 다 차지한다(슬쩍 지도 한번 보면 성경이 쑥쑥 머리에 들어온다.) 사사시대 가나안 정복기에 비해 약 3배에 해당하는 넓은 지역이다. 이제 누구도 넘보지 못하게 다윗의 힘은 국내외로 막강해졌다.&lt;BR&gt;&amp;nbsp; 성전건축은 믿음과 감사와 지원함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데, 막강한 힘을 가진 실력자가 건축을 명하면 순결해야 할 건축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우기 십상이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 실력자의 일해재단설립은 모든 기업의 막대한 헌납으로 이루어졌는데, 그 헌납이 모두 순수하고 자발적인 것이라 보기 어렵듯이, 다윗시대에 성전이 건축되면 억지나 두려움으로 인한 헌납이 없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솔로몬에게 성전건축의 바통을 넘기신 것이다. &lt;BR&gt;&amp;nbsp; 이렇게 밖으로는 군사적인 승리로 왕국이 확장되는 한편, 나라 안에서도 다윗은 선정을 베풀며 안정되어 갔다. 두발이 다 절뚝이(9:13)인 다윗의 절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찾아내여 왕과 한상에서 밥을 먹게 하는 은혜도 이때 베푼다. 이렇게 안팎으로 나라가 평안하고 느긋해지자 다윗은 돌이킬 수 없는 범죄의 덫에 걸리는 데, 바로 밧세바 사건이다. &lt;BR&gt;&amp;nbsp; 13장은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로 시작된다. 무슨 후? 밧세바 사건 후, 우리아가 억울하게 죽은 후, 다윗은 혹독한 대가를 치른다. '그 일이 선하면 이 일도 선하고, 그 일이 악하면 이 일도 악하다' '화평케 하는 자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고 악을 심은 자는 악한 열매를 거둔다' 우리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법칙이다.&lt;BR&gt;&amp;nbsp; 나단을 통해 다윗 왕을 통렬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자!! '네가 여호와의 말씀을 업신여기고 나보기에 악을 행하여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아를 죽이고 그 처를 빼앗아 네 처를 삼았도다 ~ 칼이 네 집에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리라 ~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네 처들을 다른 사람이 백주에 동침하리라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12:7~12) 다윗이 용서받은 것은 그의 목숨뿐이다(12:13)&lt;BR&gt;&amp;nbsp; 결국 그때 잉태되어 태어난 왕자는 왕의 간구와 금식과 철야기도에도 불구하고 이레 만에 죽었고(12:18), 다윗의 장남 암논이 배다른 공주 다말을 연애하여 강간하고(13:1~19), 이로 인해 다말의 오라비 압살롬이 암논을 살해하고(13:28~29), 압살롬은 다윗을 두려워하여 외가로 망명하고(13:37), 망명에서 돌아온 압살롬은 쿠데타를 일으켜 왕궁에 남겨진 그 부친의 후궁들로 온 이스라엘 무리 눈앞에서 동침하는 사건이 일어났다(16:22). 하나님의 선포대로 다윗의 집안에 칼이 영영히 떠나지 아니하고 백주에 다윗의 후궁들이 압살롬에게 짓밟힌다. 죽음만 겨우 면한 다윗의 참혹하고 처절한 현실이다.&lt;BR&gt;&amp;nbsp; 암논을 살해한 후 외갓집으로 피신했던 압살롬이 요압의 중재로 3년 만에 아버지를 만나 입을 맞추며(14:33) 인사하나 아버지의 사랑은 느껴지지가 않았고, 이 몇 년간 겪은 일로 용맹스럽던 예전의 아비 다윗은 이제 힘없는 늙은이에 불과했다. 이에 압살롬은 반역을 꿈꾸며 4년간(15:7)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차근차근 왕위 찬탈을 준비한다. 재판받으러 오는 사람을 가로막으며 왕은 이런 시시한 사건에 관심 없으니 자신이 성실히 봐 주겠다며 사람들에게 입을 맞추고 친절을 베풀면서 '사람 마음을 도적질'(15:1~6) 하였다. 드디어 D-day! 압살롬은 다윗의 모사 아히도벨까지 끌어들인 후 많은&amp;nbsp; 사람을 이끌고 헤브론으로 제사하러 가겠다며 왕궁을 떠났다. &lt;BR&gt;&amp;nbsp; 압살롬의 반역소식을 듣자 즉시 왕궁을 빠져나오는 다윗은 '급히 도망가자 그렇치 아니하면 우리 한 사람도 압살롬에게서 피하지 못하리라' 한다. 암논을 살해하고, 아비와 자신의 중재에 더디다고 요압의 밭에 불을 놓아버리는 과격한 아들의 성격을 아는 다윗은 다급히 살길을 찾아 맨발에 머리를 풀고 울며 도망간다. '사람을 얻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 했던가! 이런 긴박한 상황에서도 다윗에게는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희망이 있고 미래가 있었다. 그 처량하고 초라한 도망 길에서도 그의 신복들은 전적으로 다윗을 신뢰하며 따랐는데(15:15), 신실하고 충성된 용병 가드사람 잇대가 있었고(15:19~22), 언약궤를 메고 따라 나오는 레위사람들이 있었고, 그의 친구이며 모사인 후새가 있었고 그리고 수많은 백성이 머리를 풀고 울며 다윗을 따르고 있었다.&lt;BR&gt;&amp;nbsp; 다윗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처한 이 비현실적인 현실이 바로 '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의 '이 일'에 해당되고 하나님 앞에 은혜를 얻을 때까지(15:25) '이 일'은 계속 될 것이라는 것을!!!!&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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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령이 밝히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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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빛과소금</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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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9T21:42:51Z</updated>
	    <published>2009-11-19T21:42:5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color=#666666 size=3&gt;&lt;STRONG&gt;성령이 밝히심&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디모데전서 4:1-5]&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amp;nbsp;&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하나님은&lt;BR&gt;참되시다&lt;BR&gt;그가&lt;BR&gt;약속하신 것은 진리요&lt;BR&gt;예수 그리스도는 진리와 생명이다(요 14:6)&lt;BR&gt;하나님은&lt;BR&gt;하나님이 온전하심같이&lt;BR&gt;하늘이 온전하고&lt;BR&gt;그의 자녀들이 온전하기를 바라신다(롬 12:1~2)&lt;BR&gt;그러므로&lt;BR&gt;하늘에 있는 것으로써 온전하기를 바라신다(마 5:48)&lt;BR&gt;우리의 믿음은 사람이 만든 의식이나(딤전 4:7)&lt;BR&gt;교리로써 보존되는 것이 아니다&lt;BR&gt;하나님이 주신 말씀과 영원하신 언약인&lt;BR&gt;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의 공로와(요 17:11~12)&lt;BR&gt;성령으로서만 보존할 수가 있다(요 14:16)&lt;BR&gt;성령이 이를 증거하셨으니&lt;BR&gt;증거가 없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요 16:13~15)&lt;BR&gt;성령은&lt;BR&gt;믿음에서 떠난 자들을 밝히실 터인즉&lt;BR&gt;이들은 귀신을 좇는 자들이다&lt;BR&gt;○믿음을 지키자&lt;BR&gt;성령으로만 보존될 수 있으니&lt;BR&gt;성령 충만함을 받자&lt;BR&gt;○믿음을 지키자&lt;BR&gt;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보존될 수 있으니&lt;BR&gt;하나님의 말씀을 받자&lt;BR&gt;○믿음을 지키자&lt;BR&gt;예수 이름으로만 보존될 수 있으니&lt;BR&gt;예수의 이름을 전적으로 의지하자&lt;BR&gt;※믿음에서 떠나 망하지 말고&lt;BR&gt;성령의 증거가 있는 믿음으로&lt;BR&gt;진리를 순종하는 자가 되자&lt;/FONT&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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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놀라운 죽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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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빛과소금</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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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9T23:19:23Z</updated>
	    <published>2009-11-09T23:19:2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결코 사소한 죽음은 있을 수 없다. 당사자에게는 당면한 인생 최대의 문제요 자신의 종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의 기록 중에는 참 생소한 죽음들이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금치 못하게 한다.&lt;/P&gt;
&lt;P&gt;&amp;nbsp;몽뺄리에의 노르만인 의사 필리포 플라커트(Phillipot Placut)는 가시를 뽑다가 손에 생긴 작은 상처 때문에 죽었다. 퀸투스 레피두스(Quintus Lepidus)는 집을 나서다가 커다란 엄지 발가락이 문지방에 부딪히는 바람에 죽었다. 마거트(Margutte)라는 사람은 장화를 신으려고 애를 쓰는 원숭이의 모습을 보고 웃다가 숨을 거두었다. 더 황당한 죽음이 있다. 아이스큘로(Aeschylus)라는 사람은 공중에 날던 독수리가 움켜잡고 있다가 놓친 거북이가 그의 벗겨진 머리 위에 떨어져서 죽었다.&lt;/P&gt;
&lt;P&gt;&amp;nbsp;참으로 생소한 죽음의 원인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생소하고 사소한 죽음이든 그렇지 않든, 죽음은 엄연한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음 앞에서 곧은 목을 꺾고 높아진 마음을 낮추며 흥분된 목소리를 절제한다. 그러는 이유는 그도 그자리에 그렇게 누울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우리는 죽음을 통해 자신의 끝을 보며 큰 교훈을 받는다.&lt;/P&gt;
&lt;P&gt;&amp;nbsp;그러나 교훈 정도에 그치지 않고, 생명을 주는&amp;nbsp; '놀라운 죽음'이 있다. 곧 예수그리스도의 죽음이다. 예수의 죽음은 사소하고 생소한 죽음이 많은 이 세상에서 사망의 권세가 깨어지는 우주 안의 큰일과 영원한 사건이다. 교회가 그의 죽으심을 찬양하는 이유는 그의 죽으심을 통해 우리의 죄가 죽고 죽을 영혼이 살았기 때문이다. &lt;仁&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출처 : 예수내구주&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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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감람나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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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빛과소금</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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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9T23:02:41Z</updated>
	    <published>2009-11-09T23:02:4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참감람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지만 키우기가 아주 어렵다. 반면에 돌감람나무는 아무데서나 잘 자라지만 열매가 형편없다. 그래서 농부들은 돌감람나무에다 참감람나무 가지를 접붙인다. 그러면 생명력이 좋은 돌감람나무 뿌리에서 진액이 올라와 참감람나무 가지를 거치면서 좋은 열매를 맺는다. 그런데 로마서 11장은 하나님께서 아주 납득할 수 없는 일을 행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다 왕성하게 잘 자라지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돌감람나무가지를 가져다가 어렵게 키운 참감람나무에 접을 붙이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이다.하나님도 두 번 다시 키우실 수 없는 고귀한 참감람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 바로 그분에게 접붙인 바 된 쓸모없는 돌감람나무 가지들, 그것이 바로 우리들인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출처 : 예수내구주&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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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경에 나오는 이름 8- 모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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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09T22:57:02Z</updated>
	    <published>2009-11-09T22:57:0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창세기를 대표하는 이름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라면, 출애굽기를 대표하는 이름은 '모세'다. 모세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원은 알 수 없다. 단지 구약성경을 기록한 히브리어로 보면 '무쉬트후' 즉, '내가 그를 건졌다'라는 문장에서 그 유래를 찾는다.&amp;nbsp; 하지만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성경의 '애굽') 바로의 딸이 지어주었다. 이는 그 여인이 히브리어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고대 이집트의 기록에 '아모세'나 '투트모세'라는 이름이 있듯이 모세라는 이름은 이집트식이다. 하지만 히브리어를 고려하지 않고 이름을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의 이름이 갖는 의미처럼 출애굽부터 이스라엘을 온갖 위경에서 건지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quot;(출 2:10)&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출처 : 예수내구주&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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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진리의 전통을 지키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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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9T22:45:37Z</updated>
	    <published>2009-11-09T22:45:3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color=#666666 size=3&gt;&lt;STRONG&gt;진리의 전통을 지키라&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데살로니가후서 2:13-15]&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amp;nbsp;&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하나님은&lt;BR&gt;불변하신다&lt;BR&gt;그가&lt;BR&gt;영원전에 작정하신 뜻을 이루시려고&lt;BR&gt;사랑하시는 아들이시라도 십자가에 내주셨으니&lt;BR&gt;진리는 불변한 원칙이다(요 1:14)&lt;BR&gt;하나님의 약속은 영원하여&lt;BR&gt;하나님이 주신 은혜 또한 영원한 선물이다(엡 2:8)&lt;BR&gt;그러므로&lt;BR&gt;하나님이 세상에 주신 말씀과 은혜와&lt;BR&gt;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약속이 영원하다(엡 1:7)&lt;BR&gt;그가&lt;BR&gt;성령을 우리에게 주심은&lt;BR&gt;성령으로 거룩하여지고(요 3:5-)&lt;BR&gt;우리의 믿음이 불변케 하시려는 것이다(계2:4-5)&lt;BR&gt;불변한 믿음이란&lt;BR&gt;성령의 가르침을 좇아 처음 신앙을 지킴이다(살후 2:15)&lt;BR&gt;처음 신앙이란&lt;BR&gt;처음 듣고 거듭난 그 진리의 전통을 말함이다&lt;BR&gt;세상이 변할지라도 세속하지 않고(마 24:35)&lt;BR&gt;성령과 진리를 좇아 성경을 닮아야 한다&lt;BR&gt;○전통이란&lt;BR&gt;교리를 말함이 아니니&lt;BR&gt;교리는 변하여야 할 사람이 만든 것이다&lt;BR&gt;○전통이란&lt;BR&gt;성경의 가르침을 말함이니&lt;BR&gt;천지는 변하여도 변치 아니하는 말씀이다&lt;BR&gt;○교회가 전통을 버렸으므로&lt;BR&gt;교회가 능력이 없는 것이다&lt;BR&gt;신앙의 전통은 성경대로 믿는 것이다&lt;BR&gt;※사도행전은 끝나지 않았다&lt;BR&gt;성령이 복음을 전하여 주신 대로 순종하여&lt;BR&gt;지금도 그 전통을 지켜야 한다&lt;/FONT&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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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령을 소멸치 말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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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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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9T22:43:38Z</updated>
	    <published>2009-11-09T22:43:3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color=#666666 size=3&gt;&lt;STRONG&gt;성령을 소멸치 말라&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데살로니가전서 5:12-22]&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lt;/FONT&gt;&lt;STRONG&gt;&amp;nbsp;&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하나님은&lt;BR&gt;영원하시다&lt;BR&gt;그가&lt;BR&gt;아들과 함께 뜻을 이루시려고&lt;BR&gt;아들을 후사로 세우셨으니 영원한 후사요(히 1:2~3)&lt;BR&gt;아버지의 뜻을 온전히 다 이루신&lt;BR&gt;아들의 지극히 충성하는 마음이 진리이다&lt;BR&gt;그러한 진리로 충만케 하신 영계가 천국이다(요 14:1~6)&lt;BR&gt;그러므로 하늘에서&lt;BR&gt;하나님의 뜻이 다 이루어지셨다(마 6:10)&lt;BR&gt;이와 같이&lt;BR&gt;그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교회를 세우시고(마 16:18)&lt;BR&gt;성령을 주시고 그의 능력들을 주셨다(요 7:38~39)&lt;BR&gt;그러므로&lt;BR&gt;교회가 충성하는 마음이 신앙이요(계 2:10)&lt;BR&gt;이러한 충만만이&lt;BR&gt;하늘에서 이루어진 뜻과 같은 것이다(엡 1:23)&lt;BR&gt;성령은&lt;BR&gt;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려고(행 10:38)&lt;BR&gt;하나님과 교회에 교통하시면서&lt;BR&gt;한없이 역사하신다&lt;BR&gt;○성령을 인정하고&lt;BR&gt;성령의 인도를 받아야&lt;BR&gt;참 신앙이다&lt;BR&gt;○성령을 인정하고&lt;BR&gt;소멸치 말아야&lt;BR&gt;자기의 영광을 지킬 수 있다&lt;BR&gt;○자기의 자랑을 버리고&lt;BR&gt;성령으로 신앙해야&lt;BR&gt;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다&lt;BR&gt;※항상 기뻐하자&lt;BR&gt;쉬지 말고 기도하자&lt;BR&gt;범사에 감사하자&lt;/FONT&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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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성령으로 봉사하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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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빛과소금</name>
	    </author>
	    <updated>2009-11-09T22:41:45Z</updated>
	    <published>2009-11-09T22:41:4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color=#666666 size=3&gt;&lt;STRONG&gt;성령으로 봉사하자&lt;/STRONG&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빌립보서 3:1-14]&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amp;nbsp;&lt;/STRONG&gt;&lt;/P&gt;
&lt;P&gt;&lt;FONT color=#666666&gt;하나님은&lt;BR&gt;영광이시다&lt;BR&gt;그가&lt;BR&gt;하늘에서도 영광을 받으시고&lt;BR&gt;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셨으며&lt;BR&gt;자기의 피로 사신 교회들로 말미암아&lt;BR&gt;영광을 받으시는 이시다(마 6:13)&lt;BR&gt;은혜를 받아 구원을 받고(엡 2:8)&lt;BR&gt;복을 받고 거룩하여진 성도들의 믿음이&lt;BR&gt;하나님께 영광이 되니 그가 기뻐하심이요(요 3:16)&lt;BR&gt;그러므로&lt;BR&gt;아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으로 모두를 사랑하신다&lt;BR&gt;우리의 소망은 세상이 아니요&lt;BR&gt;부활이며(고전 15:12-19)&lt;BR&gt;주 예수께서 예비하신 하늘(영계)이다(살전 4:13-17)&lt;BR&gt;성령이&lt;BR&gt;예수를 몰아내심같이(막 1:12)&lt;BR&gt;예수의 교회를 몰아내시고 독려하신다(행 2:1-4)&lt;BR&gt;교회가 할 일은 봉사뿐이다(빌 3:3)&lt;BR&gt;예배도 봉사요 전도도 봉사요&lt;BR&gt;성도의 헌신이 모두가 봉사이다&lt;BR&gt;○성령으로 봉사하자&lt;BR&gt;임의로 믿음을 갖지 말고&lt;BR&gt;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해야 한다&lt;BR&gt;○소망이 있는 생활은&lt;BR&gt;봉사가 있어야 한다&lt;BR&gt;봉사는 하늘에서 상이 있음이다&lt;BR&gt;○교만한 마음을 버리고&lt;BR&gt;더욱 겸손히&lt;BR&gt;교회에 봉사하는 것이 신앙이다&lt;BR&gt;※봉사하자&lt;BR&gt;봉사만이 자기 영혼을 충만케 한다&lt;BR&gt;하나님의 기쁨으로 충만해야 한다&lt;/FONT&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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