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xml-stylesheet href="http://pimg.daum-img.net/whsnake/css/atom.css?ver=1.0" type="text/css"?>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version="1.0" >
  <title>세상보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blog.daum.net/xml/atom/cthwn"/>
  <rights>證人</rights>
  <author>
    <name>證人</name>
    <uri>http://blog.daum.net/cthwn</uri>
  </author>
  <generator uri="http://blog.daum.net" version="1.0">Daum blog (blogmaster@daum.net)</generator>
  <id>tag:blog.daum.net,2009:cthwn</id>
  <updated>2009-11-08T08:25:37Z</updated>

  		<entry>
	    <title>깽판 치는 정치인만 사라지면 선진국 된다</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402"/>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402</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8T08:25:37Z</updated>
	    <published>2009-11-08T08:25:3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lt;FONT size=3&gt;&lt;STRONG&gt;&lt;/STRONG&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지난해 12월 국회에서 발생한 폭력사태로 기소된 민주당 문학진 의원과 민주노동당 이정희 의원에게 벌금형이 구형됐다. 서울남부지검 형사6부(배성범 부장검사)는 4일 남부지법 형사9단독 김태광 판사 심리로 열린 결심공판에서 공용물건 손상 등의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文의원에게 벌금 300만원을 구형했다고 5일 밝혔다. 검찰은 또 같은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李의원에게는 벌금 100만원을 구형했다.&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전형적인 솜방망이 처벌이다. 23일 열릴 선고공판에서 이 구형(求刑)대로 형(刑)이 확정돼도 두 의원의 의원직엔 영향이 없다. 法을 만들고 지켜야 할 의원들이 해머와 전기톱으로 국회 출입문과 명패를 때려 부숴도, 벌금 얼마면 그걸로 끝이다. 정치적 득실(得失)을 함께 따지면, 국회폭력은 「남는 게 많은 장사」일 지 모른다. 불법, 폭력, 무질서가 갈수록 심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입법부가 앞장서 사고치고 사법부는 눈치보고 대통령도 관심이 없다. 언론마저 방조한다. 말 그대로 엉망진창이다.&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대한민국이 선진국(先進國)이 되지 않는 첫 번째 이유는 국회에서 깽판 치는 국회의원들에게 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미국의 리스크 분석기관인 정치위기관리그룹(PRS그룹)이 작성한 전(全)세계 113개국의 1991년부터 2000년까지의 평균 「법·질서 지수」에 따르면, 한국의 법·질서 지수는 4.4로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평균 법·질서 지수인 5.5보다 한참이나 낮다. 순위로 따지면, OECD 30개국 중 28위로 최하위권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07년 1월 펴 낸 「법·질서 준수가 경제 성장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이 1991~2000년 동안 법·질서 지수가 한 단위(1) 높아졌을 때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0.99%포인트 올라갈 수 있었던 것』으로 나온다. 이는 한국이 OECD 평균정도만 법을 지켰을 경우 매년 1%씩 경제성장을 더 했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결국 법을 안 지켜 선진국이 못 됐고, 무례(無禮)-무법(無法)-깽판 치는 정치인만 사라지면 선진국이 될 수 있다는 말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아래는 문학진 의원과 이정희 의원의 맹렬한(?) 의정활동을 정리한 자료이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FONT&gt;&lt;FONT color=navy&gt;&lt;FONT size=3&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문학진&gt;&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민주당 문학진 의원은 한미FTA 비준안 상정일인 2008년 12월18일 외교통상통일위원회 위원장실 문을 해머로 때려 부쉈다. 이날 외교통상통일위 한나라당 소속 의원들은 한미FTA 비준동의안을 단독 상정하기 위해 야당 의원들의 회의장 진입을 막았다. 文의원은 회의장 문을 부수고 들어와 민노당 이정희 의원 등과 함께 한나라당 의원들의 명패를 부수기도 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국회 윤리특별위원회는 3월2일 연말·연초 여야 입법대치 과정에서 물리력을 행사한 이유로 文의원과 함께 민노당 강기갑 의원에 대해 국회의 모든 회의에 30일간 참석하지 못하도록 하는 「출석정지」 조치를 결정했다. 당시 조치는 윤리위 징계소위에서 결정된 처분 가운데 가장 강력한 것이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文의원은 고려대 운동권 출신으로서 학내 反유신투쟁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월간조선(83~88)과 한겨레신문(88~95) 기자를 지냈었다. 그는 전국택견연합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이정희&gt;&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민노당 이정희 의원은 「투사(鬪士)」다. 그러나 李의원이 싸우는 대상은 대체로 대한민국의 공권력(公權力)이다. 그는 각종 불법·폭력시위 현장에서 소동을 부리다가 절규하거나 실신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2008년 미국산쇠고기수입반대 촛불집회 당시에도 李의원의 모습은 두드러졌다. 예컨대 그는 6월25일 서울 자하문 길 앞에서 불법시위를 벌이던 시위대를 연행하는 경찰버스를 막아선 채 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다 연행됐다. 이날 언론은 울부짖는 李의원의 모습을 비중 있게 보도했다. 불법집회 시위대를 비호하는 행위이자, 공무집행 방해였지만 상당수 언론은 경찰의 소위 과잉진압을 비판하는 논조를 보였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같은 해 12월12일 밤 이정희 의원은 감세법안 처리를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장 의장석을 점거했다 여당 의원들에게 끌려 내려왔다. 이날도 李의원은 본회의장실 바닥에 누워 울부짖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같은 달 18일 이정희 의원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의 한미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상정 과정에서 외통위 박진 위원장이 질서유지권을 발동해 회의장 출입을 막자 출입문(出入門)과 집기(什器)를 부쉈다. 그녀는 한나라당 의원들의 명패까지 던져 부숴 이날 공용물건손상 혐의로 민주당 문학진 의원과 함께 고발당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李의원은 이후 『국회 파행과 폭력의 근본 원인이 한나라당에 있다』며 『잘못한 게 없기 때문에 수사기관의 어떤 조사에도 응하지 않을 계획』이라고 밝혀왔다. 그녀는 문학진 의원과 함께 6월16일 불구속 기소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1월5일 李의원은 또 다시 「울부짖는다.」 민노당은 당시 한나라당의 쟁점법안 처리에 반대하며 국회 본회의장 앞에서 현수막을 설치한 채 연좌농성을 벌였다. 5일 밤 국회경위들이 불법으로 설치된 현수막을 떼 내려 하자 『너희들이 국회의원 때려 패는 사람들이야』라고 울부짖으며 경렬하게 항의했다. 그러나 막상 당시 동영상을 보면 경위가 의원을 때려 패는 장면은 없다. 반대로 강기갑 의원이 경위들에게 발길질을 하는 모습은 담겨 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같은 날 동아일보는 이렇게 보도했다. 《이날 오후 8시경 경위 30여 명은 불법 부착물을 떼는 과정에서 『천천히 해. 의원님이 다쳐. 조심조심』 등을 연발했다. 반면 민노당 측은 경위들을 향해 『×××들아』라고 욕설을 퍼붓는 등 거칠게 저지했다. 이 동영상에는 이정희 의원이 플래카드를 끝까지 잡고 늘어지는 모습도 찍혀 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6월10일 서울광장에 이른바 6.10범국민대회 개최를 위해 행사 장비를 실은 트럭 7대가 진입하자, 경찰은 견인차를 이용해 차량을 끌어냈다. 허가받지 않은 불법집회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이 경찰의 공무집행을 저지하며 30분가량 몸싸움을 벌였다. 민주당 강기정 의원은 견인차 앞 유리창에 매달린 뒤 전경들에게 끌려 나가 체포됐다 풀려났고, 이정희 의원은 견인차 앞에서 소동을 부리다 실신해 병원에 실려 갔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정희 의원은 7월22일 국회 본회의에서 이윤성 국회 부의장이 김형오 의장 대신 미디어 관련 3법을 통과시키려하자 여야 여성의원들과 뒤섞여 난투극을 벌였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정희 의원은 쌍용차 파업 당시 강기갑 의원 등과 함께 노조의 불법폭동을 비호하는데 앞장섰다. 7월28일, 29일 기자회견에 이어 8월3일에는 불법집회 참가자 및 보좌관이 연행되자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경찰버스에 올라가 소동을 피웠다.&lt;/SPAN&gt;&lt;/FONT&gt;&lt;/FONT&g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P&gt;&lt;/TABLE&gt;
&lt;P&gt;[&lt;FONT color=#0066cc&gt;金成昱&lt;/FONT&gt;&amp;nbsp;/ 프리랜서 기자 / &lt;A href=&quot;http://www.chogabje.com/&quot; target=_blank&gt;http://www.chogabje.com/&lt;/A&gt;]&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빈칸 메우기 게임의 승자는 누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401"/>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401</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8T07:42:56Z</updated>
	    <published>2009-11-08T07:42:5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H3&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지도 위에 신도시, 신공단,신공항을 그리기 전에,&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정치 신뢰와 합의를 앞세우기 전에,&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정치 지도자라면 경제성장과 출생률부터 따져봐야 한다&lt;/SPAN&gt;&lt;/H3&gt;
&lt;P&gt;김제공항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시기는 김대중 정권 때다. &quot;전국 10대 권역 중 오로지 군산-장항권역에만 공항이 없다.&quot; 지역 소외감이 엄지손가락으로 꼽히는 낙점 재료였다. 지금 그곳은 채소밭으로 변했다. 귀신 승객만 들락거릴지 모른다는 감사원 지적에 2년 전 공사를 중단했다. 토지 수용에 들어간 500억원은 배추·무 뿌리 아래 묻혔다.&lt;BR&gt;&lt;BR&gt;피 같은 세금이 썩는 줄 알면서도 공항 유치 1등공신이라며 표를 훑어간 정치인 중 누구도 반성이나 사과는 하지 않는다. '그래도 채소 풍년을 달성, 농가소득 올리는 데 기여했다'고 치적 홍보 내용을 바꾸면 그만일 것이다.&lt;BR&gt;&lt;BR&gt;이쯤 해서 포기하면 한국 정치인으로서 자격 미달이다. 보다 담대한 꿈을 유권자에게 팔아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새만금을 두바이처럼 만들려면 김제나 군산에 국제공항이 절실하다' '공항 부지를 몇 배 늘려 산업단지로 전환하겠다'는 주장이 쏟아졌다.&lt;BR&gt;&lt;BR&gt;'빈칸은 나 몰라라'하며 유유자적하는 악취미 정치인이 의외로 많다. 표만 챙기고 개발 계획이 어떻게 가든 무책임하다. 공터를 보면서도 세금이 얼마 들어가도 쾌감을 느끼는 변태성 정치 엔터테인먼트만 고속 성장해왔다.&lt;BR&gt;&lt;BR&gt;외국 기업을 유치하겠다고 아우성이어서 경제특구(경제자유지역)로 지정해주고 나면 공장 아닌 잡초를 키운다. 기업도시를 지정해 주었더니 성급하게 들어선 미분양 아파트엔 거미줄만 얽힌다.&lt;BR&gt;&lt;BR&gt;경제가 고속 성장 궤도에서 벗어난 지 벌써 20여년이다. 지방에 만들어진 공항이나 공단, 신도시 중 알차게 꼭 채워진 곳은 없다. 외국인 전용공단엔 빈 공간이 더 넓고, 한산한 11개 지방공항은 만년 적자다.&lt;BR&gt;&lt;BR&gt;송도국제도시가 그래도 성공했다는 주장이 있다. 아파트 값이 뛴다고 법석이고 투자 가이드가 요란하다. 잭 니클라우스가 직접 설계했다는 골프장의 간판과 국제학교 건물이 조금은 이채롭다.&lt;BR&gt;&lt;BR&gt;하지만 상하이 푸둥처럼 '국제'라는 수식어를 송도에 보태려면 큰 용기가 필요하다. 글로벌 기업의 간판이나 이국인을 마주치기란 힘들다. 외국인에게 1000여 아파트를 특별 분양하겠다며 온갖 특혜를 받아갔지만, 고작 6채 팔렸다고 들린다.&lt;BR&gt;&lt;BR&gt;분당 일산과 마찬가지로 송도도 같은 방식으로 빈 공간을 채웠다. 아파트 오피스텔 투자에 앞장선 아줌마 세력이 송도를 메워준 금메달급 공로자다. 자산의 8할을 부동산에 집어넣는 개미 세력이 없다면 어떤 신도시나 어떤 단지도 채워지지 않는 게 한국 경제의 오늘이다.&lt;BR&gt;&lt;BR&gt;송도가 아파트 분양가 상한제를 폐지해달라고 끈질기게 요구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오로지 버블만이 철부지 정치인들이 제멋대로 선을 그은 곳에서 빈칸을 채울 수 있을 뿐, 몇개 정부 부처나 재벌 기업, SKY대학이 빈 공간을 메워줄 수 있는 경제가 아니다.&lt;BR&gt;&lt;BR&gt;세종시 논쟁에서 빠진 것은 이것이다. 정부 부처를 보내고, 기업을 보내고, 대학을 보내겠다고 큰소리치는 정치인이 널려 있다. 분당, 일산, 송도 때도 내걸었다 결코 이룰 수 없었던 자족(自足)도시 구상도 빠지지 않는다.&lt;BR&gt;&lt;BR&gt;하지만 정부 부처는 꽁무니 빼고, 후보 기업들은 '그 비싼 땅에 무슨 공장인가. 아예 수백억원을 지역 발전기금으로 던지는 편이 낫겠다'고 뾰로통하다. 대학은 '정부가 땅을 무상 제공하고 강의실 건축비를 대주겠다면'이라는 조건을 붙인다.&lt;BR&gt;&lt;BR&gt;채워지지 않을 빈칸 메우기 게임에서 주전 선수들이 발을 빼는 현실을 제쳐 놓은 채, 정치인들은 정치 신의(信義)와 신뢰를 앞세우고 여야 합의를 말한다. 지역 소외감이라는 김제공항식 정서(情緖)도 빠지지 않는 양념이다.&lt;BR&gt;&lt;BR&gt;그렇다면 양양국제공항은 정치 신뢰와 합의를 깡그리 저버렸다가 국제노선 하나 없는 공항으로 전락했을까. 18인승 꼬마 비행기가 매일 한두 번 뜨는 그곳에서는 여전히 4차선 진입 도로 공사가 진행 중이다. 하루 평균 2000만원꼴의 헌금성 세금을 적자 막음 용도로 다른 지역 주민들이 꼬박꼬박 입금해주고 있다.&lt;BR&gt;&lt;BR&gt;전문가들은 잠재 성장률이 3%대로 떨어졌다고 말한다. 아무리 한국 정부가 유능하고 한국 기업이 경쟁력을 높여 봤자, 신도시와 공단을 채워주던 고속 성장은 미신이요 망상이라는 말이다.&lt;BR&gt;&lt;BR&gt;저성장과 함께 인구도 문제다. 한때는 해마다 대구시가 하나씩 탄생했었다. 그런 인구 폭발이 값싼 공장 근로자와 번잡한 이동 인구를 공급해주던 시절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lt;BR&gt;&lt;BR&gt;기업과 사람이 펑펑 늘면서 '형님 좋고 동생 좋던' 경제판이 아니다. 줄어든 피자 조각을 저 동네가 챙겨가 버리면 이쪽은 황폐해지고 만다. 구미시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면 그때마다 김천 인구는 300명, 500명씩 줄어들고, 광양만 개발에 사람을 빼앗기는 구례군은 더 황량해지고 있다. 세종시 주변에서 벌어질 증상도 뻔하다.&lt;BR&gt;&lt;BR&gt;지도 위에 신도시, 신공단, 신공항 따위를 그리기 전에, 그리고 정치 신뢰와 합의를 앞세우기 전에, 정치 지도자라면 경제 성장 속도와 출생률부터 봐야 한다. 나뭇가지 위의 참새를 유혹할 기술이라도 있다면 중국 동남아로 눈이 완전히 돌아가 버린 기업인 마음부터 되돌려 놓고 볼 일이다. '나부터 자녀 하나 더 낳겠다'는 정치인이 나오면 더 반갑겠고.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송희영 / 언론인]&lt;/P&gt;
&lt;P&gt;&amp;nbsp;&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100年 前의 美國 시골마을 風景.</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400"/>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400</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7T08:04:47Z</updated>
	    <published>2009-11-07T08:04:4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img src=&quot;http://cfile227.uf.daum.net/image/184DD7254AF4A87C21C854&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7월4일 獨立記念日에 잘 차려입고 나온 女人들&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3.uf.daum.net/image/124DD7254AF4A87D2456B4&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食品가게 ( 오렌지 1 센트,&amp;nbsp;그레입후룻 5센트, 감자&amp;nbsp;6파운드에 23 센트, 사과 4파운드에 25 센트...&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7.uf.daum.net/image/174DD7254AF4A87C20FD79&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戰爭놀이 하다 쉬고있는 어린이들&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2.uf.daum.net/image/154DD7254AF4A87D2747C5&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길거리 風景&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2.uf.daum.net/image/184DD7254AF4A87E2C39D0&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학교 敎室에서 소년들&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9.uf.daum.net/image/204DD7254AF4A87D22F161&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農夫 부부&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9.uf.daum.net/image/114DD7254AF4A87D238E4A&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農家의 뒷뜰&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9.uf.daum.net/image/164DD7254AF4A87E2A4430&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말이 끄는 쟁기로 밭을 가는 광경&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4.uf.daum.net/image/134DD7254AF4A87D25BCEF&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馬車로 외출&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7.uf.daum.net/image/144DD7254AF4A87D26ADF5&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45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45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개척되지 않은 荒無地&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2.uf.daum.net/image/174DD7254AF4A87E2892CA&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2.uf.daum.net/image/184DD7254AF4A87E2923BB&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6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6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낚시&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5.uf.daum.net/image/174DD7254AF4A87E2BC966&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4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4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사진출처 : &lt;A href=&quot;http://www.chogabje.com/&quot; target=_blank&gt;http://www.chogabje.com/&lt;/A&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진화하게 하라</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9"/>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9</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5T07:30:29Z</updated>
	    <published>2009-11-05T07:30:2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0px&quot;&gt;&lt;!-- 기사 사진 시작--&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RIGHT: 15px&quot;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 align=left border=1&gt;
&lt;TBODY&gt;
&lt;TR&gt;
&lt;TD&gt;
&lt;P&gt;&lt;img src=&quot;http://cfile215.uf.daum.net/image/16320B014AF2004E3025E1&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112&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112&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P&gt;외고는 뛰어난 종류의 학교다. 외고 졸업생들은 다른 고등학교 졸업생들보다 성적이 훨씬 좋다. 따라서 외고는 지금 중등교육 생태계에서 지배적 종(種)이라 할 수 있다. &lt;BR&gt;&lt;BR&gt;외고는 1984년에 미천하게 삶을 시작했다. 정식 고등학교가 아니라 직업학교로 분류되는 ‘각종(各種)학교’에 속했다. 이런 학교가 스물 몇 해 뒤에 지배적 종의 자리를 차지하리라고 예측한 사람은 물론 없었다. 그런 성공은 우리 사회 환경에 잘 적응한 데서 나왔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외고가 널리 퍼지도록 하는 것이다. 외고를 더 많이 세우든지, 만일 그것이 비현실적이라면, 다른 고등학교들이 외고의 장점들을 본받도록 해야 한다.&lt;BR&gt;&lt;BR&gt;그것이 진화의 과정이다. 변이들(variations) 사이의 경쟁은 환경에 가장 잘 적응한 것이 선택되도록 한다. 그렇게 선택된 변이는 실패한 변이들이 차지했던 틈새들로 퍼진다. 그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생태계는 환경에 보다 잘 적응하게 된다. 이렇게 보면, 외고를 변화시킬 이유가 전혀 없다. 그런 변화는 스물 몇 해 동안 이어진 진화의 결과를 부정하는 것이다. &lt;BR&gt;&lt;BR&gt;설령 외고에 바람직하지 못한 특질이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그런 부정적 측면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정 고치고 싶다면, 진화의 최종적 산물인 외고 자체보다는 그것의 부정적 특질을 낳은 것으로 추측되는 환경의 특정 조건들을 바꾸는 것이 논리적이다.&lt;BR&gt;&lt;BR&gt;문제는 우리가 뛰어난 것들을 용인하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마음은 수십만 년 이어진 원시 사회에서 진화했다. 그때 인류는 겨우 생존할 식량만을 지녔고 작은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그것을 균등하게 나누어 가졌다. 즉 평등한 가난이 기본 조건이었다.&lt;BR&gt;&lt;BR&gt;지금부터 1만여 년 전에 문명이 갑자기 발전하면서, 사회가 부쩍 커지고 큰 재산을 모은 사람들이 나타났다. 그런 현상은 자연스럽지만, 평등한 가난 속에 진화한 우리 마음은 재산에서의 격차를 좋지 않게 여긴다. 그래서 ‘악플’이나 ‘안티 사이트’가 드러내듯, 크게 성공한 사람들은 별다른 까닭 없이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다.&lt;BR&gt;&lt;BR&gt;이런 경향은 경쟁이 자유롭고 진화가 빠른 시장에서 특히 뚜렷하다. 우리 시장에서 지배적 종은 재벌이다. 가장 큰 미움을 받는 존재도 재벌이다. 그러나 지배적 종을 함부로 건드리는 것이 위험하고 어리석다는 얘기는 재벌의 경우에서도 뚜렷이 드러난다.&lt;BR&gt;&lt;BR&gt;1961년 6월 부정축재자로 몰린 이병철 삼성물산 사장은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에게 재계 사정을 설명했다. 당시 세법은 수익을 넘는 세금을 거둘 수 있는 전시 체계여서, 세금을 제대로 납부한 기업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11위 안에 드는 큰 기업들의 총수들만 부정축재자로 구속하는 것은 비합리적이었다. 12위 아래 기업가들도 똑같이 행동했으나, 역량이나 노력이 부족해서 11위 안에 들지 못한 것이었다. 자원을 잘 운용하여 기업을 키운 기업가들을 벌하고 원조금이나 은행 융자를 낭비한 사람들을 무죄로 판정하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lt;BR&gt;&lt;BR&gt;이 회장의 이런 설명을 박 부의장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한강의 기적’의 두 축인 정치 지도자와 기업가의 의기가 투합하는 순간이었다. 만일 그때 박 부의장이 통념대로 재벌들을 억압했다면, 거의 틀림없이 우리 경제는 실제보다 덜 성장했을 터이고, 지금 우리 사회를 받쳐주는 삼성이나 LG 같은 세계적 기업들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lt;BR&gt;&lt;BR&gt;진화의 결과가 우리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함부로 고치려 드는 일은 본질적으로 성공을 벌하는 일이다. 평등과 같은 매력적 구호를 내걸더라도, 그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우리는 큰 성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우리의 본능을 이성으로 제어해야 한다. 걱정스럽게도, 근년에 우리 사회엔 성공을 벌하는 풍조가 거세졌다. 성공한 사람들을 ‘강남’이라 부르며 다수의 적의를 부추겨서 정치적 이득을 얻으려 한 노무현 정권을 거치면서, 특히 거세졌다.&lt;BR&gt;&lt;BR&gt;1758년 9월 프랑스 경제학자 뱅상 드 구르네는 “막지 말고 내버려 둬라. 세상은 알아서 굴러갈 것이다(Laissez faire, laissez passer, le monde va de lui m&lt;00EA&gt;me)”고 외쳤다. 이 힘찬 구호는 억압적 중세 질서를 대신할 자유로운 시장경제의 도래를 알렸다. 당시 진화라는 개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정신은 진화의 존중이었다. 만일 지금 살아 있다면, 구르네는 외칠 것이다, “진화하게 하라(Laissez evoluer).”&lt;BR&gt;&lt;BR&gt;[조인스닷컴 / 복거일.&amp;nbsp;소설가]&lt;/P&gt;
&lt;P&gt;&amp;nbsp;&lt;/P&gt;&lt;/TR&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대재앙의 서막 - 지구 온난화 현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8"/>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8</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5T06:50:00Z</updated>
	    <published>2009-11-05T06:50:0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9.uf.daum.net/image/162A4C1C4AF1F44B1247E9&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2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2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20 border=0&gt;
&lt;P&gt;▲ &lt;STRONG&gt;8년새 줄어든 만년설… &quot;20년 후 완전히 사라질 듯&quot;&lt;/STRONG&gt; 문호(文豪) 어니스트 헤밍웨이(Hemingway)의 소설 '킬리만자로의 눈'에 나오는 만년설(萬年雪)은 머지않아 기억속에만 남을 것 같다. 오하이오 주립대 로니 톰슨(Thompson) 박사 등으로 구성된 연구진은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의 정상(해발5893m·탄자니아)을 촬영한 과거 지상·위성사진들을 분석한 결과 이곳의 눈이 앞으로 20년 내에 완전히 녹아 사라질 것이라는 결론을 얻었다고 3일 미 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발표했다. 위 위성사진은 2001년 6월(왼쪽)과 올 7월에 촬영된 것으로 8년새 만년설이 현저히 줄어든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닷컴 / 2009.11.4]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3.uf.daum.net/image/151BE41E4AF1F4F3324ECF&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2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2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20 border=0&gt;▲ 노르웨이 스발바르제도의 스피츠베르겐 섬에 있는 가로 37m, 세로 28m의 하트 모양의 호수. 지구 온난화로 이 지역을 덮고 있던 빙하가 녹아 땅이 드러나고 그 위에 눈 녹은 물이 고이면서 만들어졌다. [데일리메일(영국) / 2009.4.30]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3.uf.daum.net/image/1444261D4AF1F5D827A312&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2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2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2.uf.daum.net/image/1544261D4AF1F5D828C1F7&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2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2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1.uf.daum.net/image/1744261D4AF1F5D929130B&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2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2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20 border=0&gt;▲ 아르헨티나 남부 파타고니아 산타크루즈의 페리토 모레노 빙하의 일부인 60m 높이의 얼음터널 지붕이 9일 무너져 붕괴, 아후 터널의 지분 부분은 아예 사라졌다. 빙하의 얼음 조각들은 주로 남반구의 여름철인 9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 갈라져 아르헨티나 호수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데, 남반구의 겨울철인 7월에 빙하가 무너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과학자들은 지구 온난화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조사 중이다. [AP 연합 / 2008.7.11]
&lt;P&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P&gt;
&lt;TBODY&gt;&lt;/TBODY&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막걸리 인기에 '박정희 향수' 솔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7"/>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7</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5T06:21:52Z</updated>
	    <published>2009-11-05T06:21:5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H3&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474747&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생전에 즐겼던 병·안주도 각광&lt;/SPAN&gt;&lt;/FONT&gt;&lt;/SPAN&gt;&lt;/P&gt;
&lt;P&gt;&lt;A href=&quot;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9/11/04/2009110401908.html?Dep0=chosunmain&amp;Dep1=news&amp;Dep2=headline1&amp;Dep3=h1_08&quot;&gt;&lt;FONT color=#474747&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김정일도 박정희 대통령 마셨던 '막걸리' 부탁&lt;/SPAN&gt;&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FONT color=#474747&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 &lt;/SPAN&gt;&lt;/FONT&gt;&lt;/SPAN&gt;&lt;/P&gt;&lt;/H3&gt;
&lt;P&gt;경기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에 자리 잡은 막걸리 박물관인 '배다리 박물관'. 막걸리 관련 자료를 전시하는 이곳의 2층 전시실 한쪽에는 선글라스를 낀 박정희 전 대통령이 탁자 앞에 앉아 있다. 탁자 위에는 막걸리와 북어·된장이 놓여 있다. 물론 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진짜가 아닌 실물 크기의 인형.&lt;BR&gt;&lt;BR&gt;이 박물관을 지어 운영하는 '배다리주가(酒家)' 박관원(78) 대표는 &quot;박 대통령은 1966년 한 식당에서 우리 막걸리를 맛보신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우리 막걸리를 청와대로 가져다 드셨는데, 안주로는 꼭 경상도 식으로 된장 바른 북어만 찾았다&quot;고 말했다. &quot;왜 박정희 대통령상(像)을 가져다 놨느냐&quot;는 질문에 &quot;'막걸리 사랑' 하면 박 대통령 아니냐&quot;고 말했다.&lt;BR&gt;&lt;BR&gt;&lt;/P&gt;
&lt;DIV class=center_img&gt;
&lt;DL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DD&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7.uf.daum.net/image/182A471C4AF1EF7A17BECA&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48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48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DD&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SPAN&gt;▲&lt;/SPAN&gt; 평소 막걸리를 즐겼던 고 박정희 전대통령의 밀랍인형이 막걸리, 북어안주와 함께 경기도 고양시의‘배다리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장상진 기자 &lt;/P&gt;&lt;/DD&gt;&lt;/DL&gt;&lt;/DIV&gt;
&lt;P&gt;막걸리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는 가운데, 평소 막걸리를 즐겼던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鄕愁)가 관련 업계를 중심으로 확산되고 있다. 한국도자기는 최근 박정희 대통령 서거 30주년을 맞아 박 전 대통령이 사용했던 것과 같은 막걸리 병과 안주 접시를 공개했고, 배다리주가는 막걸리 병에 '박정희 대통령이 14년간 마셨던 막걸리'라고 표기하고 있다.&lt;BR&gt;&lt;BR&gt;박 전 대통령은 집권 기간에 쌀로 술 담그는 것을 금지하는 정책을 폈다. 국순당 배중호 사장은 &quot;박 대통령 집권기는 일본 강점기와 더불어 전통 술의 명맥이 끊어졌던 기간&quot;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작 그 시기를 겪은 막걸리업체 사장들은 대부분 그를 옹호했다.&lt;BR&gt;&lt;BR&gt;서울탁주 이동수 회장은 &quot;먹을 쌀도 없었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박 대통령의 조치는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라고 봐야 한다&quot;며 &quot;오히려 그 시절은 언제 어디서나 막걸리를 찾았던 박 대통령의 영향으로 국민들도 막걸리를 친근하게 여겼던 시기&quot;라고 말했다.&lt;BR&gt;&lt;BR&gt;배다리주가 박관원 대표는 한 술 더 떴다. &quot;쌀 막걸리가 금지되고 나서는 주로 강냉이로 막걸리를 만들었어. 하지만 대통령 드실 것까지 그렇게 만들 수는 없어서 내가 몰래 쌀로 만들어서 보냈지. 아마 박 대통령이 알았으면 펄쩍 뛰었을걸? 허허허….&quot; 부산에서 전통 방식의 누룩을 사용해 산성막걸리를 만드는 전남선씨는 &quot;박정희 대통령은 은인&quot;이라고 말했다.&lt;BR&gt;&lt;BR&gt;신세계백화점 김은구 주류담당바이어는 &quot;1999년 현대그룹 고 정주영 회장이 북한에 갔을 때 김정일 위원장으로부터 '박 대통령이 마셨던 막걸리를 가져다 달라'는 부탁을 받자, 각 회사들이 박 대통령이 자사의 막걸리를 마셨다고 주장해 이듬해 6월 10종의 막걸리가 동시에 북으로 건너갔다&quot;고 말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조선닷컴 / 장상진 기자]&lt;/P&gt;
&lt;P&gt;&amp;nbsp;&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당신들이 정의(?)를 구현한다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6"/>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6</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4T07:16:42Z</updated>
	    <published>2009-11-04T07:16:4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TOP: 5px&quot; vAlign=top width=18&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IMG src=&quot;http://www.chogabje.com/images/ball_news.gif&quot; align=absMiddle&gt;&lt;/SPAN&gt;&lt;/TD&gt;
&lt;TD class=title2&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거짓과 선동을 앞세워 불법과 폭력을 비호해 온 사제들 &lt;/SPAN&gt;&lt;/B&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중제목 끝--&gt;&lt;!-- 기사요약 시작--&gt;&lt;!-- 기사요약 끝--&gt;&lt;!-- 글쓴이 시작--&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px&quot;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lt;FONT color=#0066cc&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金成昱&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amp;nbsp;&amp;nbsp;&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글쓴이 끝--&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3px&quot;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IMG src=&quot;http://www.chogabje.com/images/bignews_line.gif&quot;&gt;&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소제목 시작--&gt;&lt;!-- 소제목 끝--&gt;&lt;!-- 기사내용 시작--&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0px; PADDING-BOTTOM: 0px; WORD-BREAK: break-all; PADDING-TOP: 0px&quot;&gt;&lt;!-- 기사 사진 시작--&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RIGHT: 15px&quot;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
&lt;P&gt;&lt;img src=&quot;http://cfile236.uf.daum.net/image/122AD51A4AF0AB11383F97&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300&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300&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기사 사진 끝--&gt;&lt;SPAN class=subArtcl id=articleBody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이 또 다시 나섰다. 사제단 신부 등 7백여 명은 2일 오후 8시 35분 서울광장에서 「죽은 자들과 죽어가는 뭇 생명들을 위한 위령미사」를 주최, 용산방화(放火)사건 판결을 비난했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7부(재판장 한양석)는 28일 용산방화사건 관련자 9명에게 징역 6년형 등을 선고했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2일 집회에서 시국선언문을 발표, 『가해자인 국가권력이 반성은커녕 피해자 국민들을 단죄해버렸으니 이토록 가혹하고 불합리한 형벌권 행사를 그냥 두고만 볼 것인가』라며 『국민을 괴롭히고 특정 권력을 위해서만 복무하는 국가형벌권이라면 그 위임을 철회하는 수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주장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이명박 정부에 대해서는 『민주주의 발전에 백해무익한 정치집단』 『도저히 정부라고 볼 수 없고 차라리 강도 집단』이라며 『바야흐로 신앙과 양심의 이름으로 국민 불복종을 선언할 결정적인 때가 닥친 것이다...정부의 탈선과 광기를 잠재우고 새로운 국가 공동체를 준비하는 일에 다 같이 신명을 내자』고 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이날 집회에는 송영길 민주당 최고위원, 강기갑 민주노동당 대표, 홍희덕.곽정숙 민주노동당 의원,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 등 정치권 인사들도 참가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건물을 점거한 채 사람이 다니는 거리에 수백 개의 화염병, 염산병, 신나까지 집어 던져 불을 지른 죄에 대한 중형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경찰은 18차례나 농성해산을 설득했지만 농성자들은 신나를 통째로 부어대며 격렬하게 저항하다 경찰관 21명을 죽거나 다치게 만들었다. 농성자 5명의 죽음은 안타까운 일이나, 도심테러를 저지른 불법에 대한 응징은 국가의 자위책(自慰策)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최소한의 법집행에 대해 『반성은 하지 않고 가혹하고 불합리한 형벌권을 행사』했다며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민주적 절차로 선출된 정부에 대해선 『백해무익한 정치집단』 『강도 집단』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반(反)국가-반(反)국민 발언이다. 『새로운 국가 공동체를 준비하자』는 주장은 사제단이 대한민국을 부정하는 세력임을 자처하는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주한미군철수-국가보안법폐지-연방제통일이라는 북한의 대남적화전략을 답습해왔다. 일상화된 깽판과 불법과 폭력의 열기가 식어질 무렵엔 어김없이 나타나 광대처럼 분위기를 띄워왔다. 2008년 촛불난동은 500명 넘는 경찰을 다치게 만들고 180대에 달하는 경찰버스를 불태운 폭동이었지만, 사제단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다(6월30일 성명)』며 적반하장에 나섰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 신부들은 노무현 자살 이후 그를 『예수』에 비유하며 『부엉이바위는 부활과 승천의 자리였다(5월28일 김영식 신부 봉하마을 위령미사)』,『예수를 처형한 장소에 로마가 경비병을 세웠듯이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조문 온 시민들을 전경으로 둘러쌌다...李明博 대통령이 기획수사를 통해 盧 前대통령을 죽였다는 사실 역시 몇 백 년 동안 기억될 것(같은 날 사제단 고문 김병상 신부 명동 미사)』이라는 해괴한 선동에 나섰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거짓과 선동을 앞세워 불법과 폭력을 비호해왔다. 비극은 이런 사악한 연극에 상당수 국민이 속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을 알리고 사실을 전달할 수단이 너무나 제한적이다. 이 21세기에.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FONT color=navy&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1974년 결성된 정의구현사제단(사제단)은 87년 이후 주한미군철수, 국보법폐지, 연방제통일 등 북한의 對南노선을 공개적으로 주장해왔다. 사제단은 △국가보안법폐지국민연대 참여단체이며, △2003년 「이라크파병반대행동」, △2005년 「평택범대위」, △2008년「광우병국민대책회의」에 참여했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이미 1989년 6월6일 「민족통일을 향한 우리의 기도와 선언」에서 『민족의 삶에 배치되는 군사동맹 해체』와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주장했었다. 2000년 8월2일 「불평등한 SOFA전면개정과 매향리 폭격장 폐쇄촉구 서명」에서는 『미군이 물러가는 진정한 민족통일의 그 날까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의와 평화로 결단한다.』고 주장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이후에도 사제단은 2002년 미선이·효순이 사건을 비롯해 매향리·직도·평택 등 전국 각지에서 벌어진 反美집회에서 「미군철수」를 주장해왔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고려연방제 연구하고 논의하라』촉구&gt;&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2002년 2월18일 「한(조선)반도 평화선언」을 통해 『6·15선언이 한(조선)반도에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최선의 현실적 방안임을 인정한다』며 『北의 고려연방제와 南의 국가연합제(남북연합제) 통일방안에 대해 깊이 연구하고, 대중적 논의를 통해 한(조선)반도에 필요한 방안을 마련할 것』을 촉구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친북인사, 친북단체 비호에도 앞장섰다. 이 단체는 2003년 8월 송두율 입국을 위해 결성된 「해외민주인사 명예회복과 귀국보장을 위한 범국민 추진위원회」를 주도했고, 한국에 온 송두율이 구속되자 「宋교수 석방과 학문·양심의 자유를 위한 대책위원회」에 참여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2004년 3월25일에는 사제단 함세웅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안중근의사기념사업회」는 당시 구속수감 중인 송두율에 대해 제3회 안중근평화상을 수상했다. 기념사업회는『송두율 선생이 안중근 의사의 애국애족과 동북아시아의 진정한 평화정신을 체현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밝혔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기념사업회는 또 『부디, 시대성숙에 힘입어서, 우리 민족문화와 사상의 한 횃불이자 민족의 갈림을 잇는 데 기여할 한 「진정한 접점」으로서 송두율 선생이 우리의 역사를 자유롭게 견인할 그 날이 하루속히 올 수 있기를 기원한다』고 덧붙였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2002년 7월18일과 2003년 4월8일에는 각각 「한총련의 합법적 활동 보장을 위한 종교인 선언」과 「양심수와 정치수배 전면해제 촉구선언」에 사제단 소속 신부들이 대거 참여, 한총련 합법화와 수배해체를 주장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 홈페이지 메인화면에는 2006년 6월 작성된 「金大中 방북과 연방제 통일」이라는 제목의 글이 2년 이상 걸려 있었다. 「이재봉」이라는 이가 쓴 이 글은 『주체사상(主體思想)은 말 그대로 주체적이고 자주적으로 살자는 훌륭한 내용을 많이 담고 있지만 불온한 사상으로만 들어왔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KAL기 폭파 사건에 대해 「조작 의혹」을 제기해왔다. 이후 국가정보원 과거사위에 의해 KAL기 폭파 사건이 「북한 정권의 계획적 테러」로 밝혀졌지만, 사제단은 끝내 사과(謝過)하지 않았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진다?』&gt;&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2008년 촛불집회가 폭동으로 번지며 여론이 나빠지자, 촛불난동(亂動) 구원투수(?)로 나섰다. 예컨대 사제단은 2008년 7월2일 서울 시청 앞 서울광장에서 「국민주권을 선언하고 교만한 대통령의 회개를 촉구하는 비상 시국회의 및 미사」라는 이름의 시국미사를 가졌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6월30일 작성한 성명을 통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상이 벌어지고 있다.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오늘의 폭력상과 거짓...몽둥이와 방패로 시민들을 패고 내려찍으며 무참히 폭력을 행사했다』며 촛불폭도에 대한 정부의 경찰권 행사를 「국민을 상대로 마구 저지르는 폭력」으로 비난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또 『국민이 그토록 간절하게 호소했건만 정부가 미국의 압박에 자진 굴복하여 문제의 쇠고기와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전면 허용해버렸기 때문...』, 『그저 미국에 충성하려드는 맹목적 사대주의』 운운하며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미국에 굴복한 위험해 위험한 부속물 수입을 한 것」이라는 선동에 나섰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우리 사제들은 무장경찰들의 폭력에 숭고한 촛불의 뜻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드리고자 한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하는 사제의 양심에 따라 오늘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심각한 위기를 맞고 있다』며 불법적(不法的) 폭동은 숨기고 경찰의 정당(正當)한 법집행을 비난하는 이중적 태도를 보였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심지어 『정부는 원천봉쇄와 강경진압 그리고 오늘 아침에 벌어진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압수수색과 체포 따위로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겠지만 국민이 받은 상처와 모욕은 더욱 깊어만 갈 것』이라며 각종 反美폭동을 주도해 온 단체들에 대한 법집행을 「진실을 어둠에 가두려고 하는 것」이라고 비방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상임대표 문규현 신부는 89년 임수경 방북사건에 동행, 국보법위반으로 징역5년형을 선고받았고, 98년 평양통일대축전에 참가해 金日成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 궁전 방명록에 『金주석의 영생(永生)을 빈다』는 글을 남겼다. 그는 2005년 5월 군산 앞바다 직도(直島)사격장 폐쇄를 위해 「군산 직도 폭격장 폐쇄를 위한 全國시민사회단체대책위원회(직도대책위)」를 결성했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盧武鉉을 예수에 비유&gt;&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 신부들과 盧武鉉 前대통령의 인연은 각별하다. 함세웅 신부는 盧 前대통령 탄핵파동 직후인 2004년 6월 청와대 초청 오찬에서 『노 대통령이 지난번 외교사절단 모임에서 부활했다고 했는데, 그러면 우리의 주님으로 모셔야 되는 것 아니냐』고 말했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사제단은 2009년 5월28일 盧 前대통령이 자살 이후 서울 명동성당에서 추도미사를 올렸다. 사제단 고문 김병상 신부는 『예수를 처형한 장소에 로마가 경비병을 세웠듯이 노 전 대통령 분향소에 조문 온 시민들을 전경으로 둘러쌌다』며 『수구 기득권 세력의 공포를 보여주고 있다』고 강변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金신부는 이어 『20억 명 크리스천들의 기도문에는 예수를 죽인 로마인 정치가가 나온다. 인류 역사가 끝날 때까지 그 이름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李明博 대통령이 기획수사를 통해 盧 前대통령을 죽였다는 사실 역시 몇 백 년 동안 기억될 것』이라고 주장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같은 날 역시 사제단 소속의 김영식 신부도 김해 봉해마을 위령미사에서 예수의 부활과 盧 前대통령의 죽음을 연결시켰다. 金신부는 『부엉이바위는 부활과 승천의 자리였다』고 주장했다. 뒤이어 발언한 김인국 신부는 『(盧 前대통령을 사인(死因)은 자살이지만) 사회적 타살이라는 점을 고려해야 하므로 구원의 여지가 열려있다고 본다』고 거들었다. &lt;/SPAN&gt;&lt;/FONT&gt;&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http://www.chogabje.com/]&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메모)
&lt;P&gt;&lt;/P&gt;
&lt;P&gt;국가혼란이나 부추기는 불순한 무리들은 종교인들이라 볼 수가 없다. 현실 정치에 간섭하려면 사제복을 벗고 선거에 나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라. 하느님은 그대들로하여금 국민들에게 영생의 복음을 전하라 했지 선동질을 일삼으라 했는가? 제발 조용히 성당안으로 돌아가주길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주목되는 정치권의 국군포로 송환 요구</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5"/>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5</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4T06:55:56Z</updated>
	    <published>2009-11-04T06:55:5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중국을 방문 중인 한나라당 대표단이 중국에 억류 중인 국군포로 정모(81)씨의 조속한 송환을 어제 중국 공산당 지도부에 요청했다고 한다. 정씨는 8월 두만강을 건너 북한을 탈출했으나 중국 공안에게 붙잡혀 3개월째 옌볜의 한 병원에 구금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씨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된 상태라고 한다. 외교채널을 통한 정부의 송환 노력에 성과가 없자 정치권이 나선 셈이다. 당이 정부보다 우위에 있는 중국의 특수한 정치 구조를 감안할 때 의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lt;BR&gt;&lt;BR&gt;20대 초반의 나이에 전쟁포로가 된 정씨는 팔순을 넘긴 나이에 또다시 포로 아닌 포로 신세가 돼 언제 북송될지 모르는 처지에 있다. 정씨의 송환은 국가가 나서서 반드시 성사시켜야 할 과제다. 정씨에게 참전을 요구한 국가가 무사히 본국으로 송환시킬 책임도 져야 마땅한 것이다. 정부는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지만 우리가 보기엔 미덥지 못하다. 탈북한 국군포로나 그 가족이 현지 공관의 미온적 대처 탓에 중국 공안에 체포돼 강제 북송된 사례도 있기 때문이다. &lt;BR&gt;&lt;BR&gt;중국 정부의 협조와 이해 없이 이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중국은 북한과의 관계 때문에 탈북자를 ‘불법 월경(越境)’ 문제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본질은 인도주의적 문제다. 애써 이를 외면하고 툭하면 탈북자를 잡아들여 북한에 넘기는 중국은 국제사회로부터 비난받아 마땅하다. 우리 정부 또한 국제법상 인도주의 원칙에 입각해 당당하게 대응해야 함에도 중국 핑계만 대며 속수무책으로 있는 것은 부끄럽고 무책임한 노릇이다. 적어도 국군포로나 납북자 출신 탈북자 문제만큼은 정부가 책임지고 해결한다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lt;BR&gt;&lt;BR&gt;북한에는 아직 560명의 국군포로와 494명의 납북자가 생존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의 조속한 귀환은 국가의 존재 이유와 직결된 문제다. 이 점에서 안상수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어제 국회 대표연설에서 ‘한국판 프라이카우프(Freikauf)’를 제안한 것은 눈길을 끈다. 통일 전 서독 정부는 1963년부터 89년까지 ‘자유를 산다’는 뜻의 ‘프라이카우프’ 프로그램을 통해 34억4000만 마르크 상당의 현금 또는 현물을 주고, 3만3755명의 동독 정치범을 서독으로 데려왔다. 안 대표의 제안은 돈을 주고서라도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내용이다. &lt;BR&gt;&lt;BR&gt;정부 대신 민간을 앞세우고, 현금보다 현물 지원에 중점을 뒀던 옛 서독의 사례를 잘 참고해 인도주의적 상호주의 차원에서 국군포로·납북자 문제 해결과 대북 식량 및 비료 지원을 연계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진작 이런 방식을 택했더라면 퍼주기 논란에 따른 남남갈등을 피하면서 국군포로와 납북자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제안이 구체화되길 기대하며 우선 중국에 억류 중인 정씨부터 기필코 남쪽 송환이 이뤄지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총력을 기울이길 당부한다. 
&lt;P&gt;&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lt;P&gt;[중앙 社說]&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quot;많이 배웠다&quot; 신세계 임원들, 함평 공무원에 큰절</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4"/>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4</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4T06:53:32Z</updated>
	    <published>2009-11-04T06:53:3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H3&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함평 나비’서 창조경영 배웠어요&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나비·국화축제 참고하자” 신세계 임원 73명 현장견학&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새 고객 확보 힌트 얻었다” 마케팅 도사들, 감사의 큰절&lt;/SPAN&gt;&lt;/P&gt;&lt;/H3&gt;&lt;!--img_tag_s--&gt;
&lt;P&gt;&lt;BR&gt;&lt;!--replace1--&gt;&lt;!--replace2--&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공부 참 많이 했습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마케팅 도사’들이 전남 함평의 공무원들에게 큰절을 올렸다. 3일 국화축제가 열리고 있는 함평군 함평엑스포공원. ㈜신세계의 구학서 부회장을 비롯한 임원 73명은 이석형 함평군수와 공무원·주민들에게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관광 자원 하나 없는 작은 지방자치단체에서 나비축제로 연간 300만 명의 관광객을 불러모은 ‘창조경영’의 현장을 둘러본 감동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구 부회장과 석강 백화점부문 대표, 이경상 이마트부문 대표 등 임원들은 이날 오전 3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함평에 도착했다. 구 부회장은 “기업은 차별화 전략을 짜기 위해 늘 고민한다. 함평군은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차별화하고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 현장에서 이런 것들을 더 많이 배울 수 있을 것 같아 방문했다”고 말했다. 이석형 군수는 “조그만 지방자치단체도 노력하면 글로벌 리더 기업도 찾아오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화답했다. 그는 “자치단체와 기업, 농촌과 도시가 소통하고 도전한다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며 “함평의 ‘나비’ ‘국화’ ‘신지애’ 같은 최고의 상품을 함께 만들어 나가자”고 강조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이번 방문은 함평 나비축제의 성공 과정을 담은 책 『나비의 꿈』을 구 부회장이 접하고 7월 이 군수를 서울 본사로 초청해 전 임원을 대상으로 특강을 진행한 게 계기가 됐다. 이 군수가 ‘블루오션과 창조경영’이란 주제로 평범한 농촌을 축제의 고장으로 바꾼 과정을 소개하자 구 부회장이 그 자리에서 현장견학을 제안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꿈과 열정의 현장”=이날 임원들은 159만㎡에 펼쳐진 국향대전과 황금박쥐 생태관 등을 돌아보며 안내 공무원들에게 질문을 쏟아냈다. 황철구 백화점 상품본부 상무는 “함평의 특산물도 아니고 특별한 관련도 없는 나비를 주제로 축제를 기획한 것은 기존 고정관념을 깬 새로운 시도로 마케팅 역사에 남을 만하다”고 감탄했다. 그는 “국내 패션의 경우도 단순히 서양의 패션을 답습하는 것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차별성이 있어야 가능하다”고 말했다. 박건현 센텀시티점 부사장은 “나비축제에 머물지 않고 나비곤충엑스포, 국향대전, 황금박쥐 전시관, 생태공원으로 늘 화제를 모은 사실이 이채롭다”고 말했다. 그는 “나비축제 하나만 계속 했다면 식상했을지도 모른다”며 “기존 고객의 틀을 깨고 어떻게 새로운 고객을 확보할 것인가가 늘 숙제인데 하나의 힌트를 얻었다”고 말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조인스닷컴 / 함평=천창환 기자]&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나랏돈 더럽게 횡령한 민간단체 명단 공개하라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3"/>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3</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3T08:23:26Z</updated>
	    <published>2009-11-03T08:23:2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lt;FONT color=#474747&gt;감사원이 2006년부터 3년간 문화체육관광부 행정안전부 환경부 등 3개 부처에서 연간 8000만 원 이상 보조금을 받은 543개 민간단체를 대상으로 감사를 벌인 결과 전체 보조금 4637억 원 가운데 500여억 원이 횡령되거나 목적과 달리 사용된 것을 밝혀냈다. 감사원은 이 중 21억여 원을 횡령한 혐의가 짙은 16개 민간단체의 임직원 21명을 검찰에 수사 요청했다. 민간단체의 부패와 도덕적 해이가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lt;BR&gt;&lt;BR&gt;&lt;FONT class=&quot;&quot;&gt;횡령 혐의를 받고 있는 단체에는 국내 최대 민간 예술단체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를 비롯해 좌우파 단체들이 망라돼 있다. 검찰은 어느 쪽 가릴 것 없이 감사원이 고발한 단체들을 철저히 수사해 위법 사실이 있을 경우 엄벌해야 한다. 좌파 단체들이 최근 국고보조금을 받은 민간단체에 대한 감사를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 같은 혹세무민(&lt;/FONT&gt;&lt;SPAN class=hanja&gt;惑&lt;/SPAN&gt;&lt;SPAN class=hanja&gt;世&lt;/SPAN&gt;&lt;SPAN class=hanja&gt;誣&lt;/SPAN&gt;&lt;SPAN class=hanja&gt;民&lt;/SPAN&gt;)에 빌미를 주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부당 집행된 국고 보조금에 대한 환수와 관리 감독을 소홀히 한 관련 공무원에 대한 징계도 필요하다. &lt;BR&gt;&lt;BR&gt;&lt;FONT class=&quot;&quot;&gt;민간단체 임직원들의 횡령 행태는 경제범죄 집단을 방불케 한다. 관련 서류를 위조하는 것은 보통이고 심지어는 컴퓨터 포토샵 프로그램을 이용해 실제 거래가 없었던 계좌이체증을 234장이나 위조한 사례도 있다. 횡령 수법을 일일이 거론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질이 나쁘다. 보조금을 집행한 관련 공무원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따지지 않을 수 없다.&lt;/FONT&gt;&lt;BR&gt;&lt;BR&gt;감사원이 국민 세금으로 보조금을 받는 민간단체들의 심각한 횡령 사고를 적발하고도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는다. 외국의 시민단체들은 국고 보조금은 물론 개인 후원 내용까지 공개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감사원이 명단을 공개하지 않는 것은 특정 단체를 비호한다는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비리를 저지른 민간단체 중에는 시민단체도 들어 있다.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후원금을 내는 회원들에게 판단 자료를 제공하기 위해서도 명단 공개가 있어야 한다. 명단을 감추면 다른 시민단체들까지 불특정(&lt;SPAN class=hanja&gt;不&lt;/SPAN&gt;&lt;SPAN class=hanja&gt;特&lt;/SPAN&gt;&lt;SPAN class=hanja&gt;定&lt;/SPAN&gt;)에 따른 피해를 당할 수 있다. &lt;BR&gt;&lt;BR&gt;&lt;FONT class=&quot;&quot;&gt;정부는 2001년 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을 제정해 국고 보조금을 주기 시작했다. 건전한 시민단체의 활동을 지원하고 공익과 문화 예술 발전에 기여하도록 함이 목적이었다. 국민의 혈세로 지원하는 국고 보조금이 더는 엉뚱한 곳으로 새지 않도록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lt;/FONT&gt;&lt;/FONT&gt;
&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474747&gt;[동아 社說]&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lt;P&gt;&amp;nbsp;&lt;/P&gt;
&lt;P&gt;메모)&lt;/P&gt;
&lt;P&gt;사기깽판 정부가 홍위병 양성을 위해 만든 &quot;비영리민간단체지원법&quot;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lt;/P&gt;
&lt;P&gt;정부든 그 누구든 국민세금 쓰기를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미스터리 사나이 李厚洛 이야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2"/>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2</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2T08:17:09Z</updated>
	    <published>2009-11-02T08:17:0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lt;FONT size=3&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李厚洛 전 정보부장이 오늘 85세로 他界하였다. 박정희 정권下에서 대통령 비서실장, 주일대사, 중앙정보부장으로 근무하면서 10여년 간 權力의 핵심에 있었던 그는 김대중 납치 등 중요한 역사적 사건에 대하여 입을 다물고 무덤까지 그 비밀을 가져갔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1924년 경남 울산에서 대지주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울산농고를 졸업한 뒤 일본 육군 항공기 정비학교의 2년제 하사관 과정에 들어갔다. 그는 2학년 때 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임관되지는 않았다. 1946년 國軍이 창설될 때 李씨는 군사영어학교에 들어가 수개월의 短期교육 뒤 곧 소위로 임관됐다. 이때 익힌 영여실력도 그의 중요한 자산이 된다. 그의 군번은 79번으로서 나이가 일곱 살이나 많은 고 朴正熙대통령(육사2기) 보다도 앞이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미 군정청이 운영한 이 학교의 입교조건은 일제시대 일본육사, 만주군관학교를 나왔든지 장교급에 상응하는 경력을 가진 자라고 정해져 있었는데 李씨가 어떻게 입교할 수 있었는지는 수수께끼다. 李씨가 본격적으로 [정보]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6·25때였다. 1951년 그는 대구에 있던 육군본부 정보국 차장으로 임명됐다. 그때 정보국장은 김종평(金宗平)준장(전 서울신문 감사)이었다. 金씨에 따르면 李厚洛차장은 주로 HID업무, 즉 적정(敵情)탐지의 임무를 총괄했었다고 한다. {그때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이었다}는 게 金씨의 기억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李씨는 51∼52년 사이 미국의 병참학교 고등반에 유학, 최초의 미국 경험을 하게 된다. 52년 여름에 귀국하자마자 그는 육군병참감으로 천거됐다. 그때 육군참모총장은 이종찬(李鍾贊)중장. 당시 총장 비서실장이었던 안광호(安光鎬)씨(전 이태리 대사·무역진흥공사 사장. 예비역준장)에 따르면 李厚洛씨가 병참감으로 발령이 나기 직전 자신이 李총장에게 건의하여 인사기안내용이 뒤바뀌어 병참감에 이호(李澔)준장(전 내무장관·대한적십자사 총재)이 임명됐다고 한다. 서열상 李厚洛씨가 도저히 병참감이 될 수 없었는데도 그런 기안이 올라 와 安실장이 부당함을 진언했었고, 그 뒤로 李씨와의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李씨가 병참감이 된 것은 2년 뒤였고, 그가 병참감에서 미국대사관 무관으로 옮겨 2년간의 미국생활을 체험한 뒤 귀국한 것은 1959년이었다. 일선부대 지휘관 경력이 전혀 없었던 李厚洛준장은 귀국 뒤 보직을 받지 못한 어정쩡한 상태였다. 그렇게 평가가 좋은 편은 아니었던지, 선뜻 그를 데려가려는 선배가 없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李준장은 日軍이나 만주군 인맥에도 끼지 않았고 그렇다고 독자적인 인맥도 형성하지 못했다. 전투병과도 아니라 군의 주류에선 벗어나 있었다. 李준장이 그때 가장 따랐던 이는 유재흥(劉載興)중장(전 국방장관)이었다. 劉중장은 李준장의 보직문제를, 당시 국방장관 김정렬(金貞烈)씨(전 국방장관·공군참모총장)에게 부탁했다. 金장관은 劉장군의 일본육사 선배일 뿐 아니라 양쪽 집안끼리도 아주 가까왔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미 CIA가 정보계에 데뷔시켜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金貞烈장관의 전임인 김용우(金用雨)국방장관 시절 한미 두 나라 국방장관 사이에 비밀협정이 맺어졌다. 양국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를 교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한국 쪽에서 바라던 바였다. 李承晩정부는 해외정보, 특히 공산권 정보에 어두워 고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정보기관은 육해공군에 설치된 방첩대(CIC)등이 전부였다. 이들 부대는 방첩 및 대(對)북한 관계 정보수집만 했고 해외에는 조직을 갖고 있지 못했다. 1959년 어느 날 미국CIA의 중요간부 한 사람이 金貞烈장관을 방문했다. 그 간부는 한국에 CIA지부를 설치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이 지부를 미 8군이나 미 대사관 같은 다른 미국기관과는 독립된 조직으로 운영할 계획이라고 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CIA요원들에게는 외교관에 대한 것과 꼭 같은 치외법권이 보장돼야 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미군이나 대사관을 아주 가볍게 보는 태도였다. 그때 李承晩대통령은 미국 정보기관을 대단히 싫어했다. 1952년 발췌 개헌 파동 때 미군정보기관이 李承晩대통령을 제거하기 위해 한국군을 동원하는 쿠데타 모의를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는 한때 한국에서 활동하는 미국 정보기관원들의 철수를 미국측에 요구한 적도 있었다. 이것을 알고 있었던 金장관은 CIA서울 지부가 독립기관으로 주재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말했다. 그 대신 미국 대사관 안에 적당한 자리를 얻어 활동하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비쳤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렇게 해서 미국 대사관의 고위간부 한 사람이 새로 부임하게 됐는데 그의 이름은 웨인 넬슨이었다. 미남인 넬슨은 물론 CIA 한국 지부장이었다. 넬슨은 부임하자마자 金장관에게 제안을 하나 했다. 한미 국방장관끼리 맺어진 정보 교환 협정을 이행하려면 CIA의 상대역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국의 군 정보기관은 여러 갈래로 되어 있으므로 통합조정기구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金장관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3군에서 요원들을 뽑아 국방부 장관 직속 부대를 만들었다. 金장관이 그 부대장으로 임명한 사람은 다름 아닌 李厚洛준장이었다. 부대 명칭은 중앙정보부. 대외적인 가명으로서 李준장은 [79부대]라 부르도록 했다. 자신의 군번을 딴 것이었다. 자신이 영원히 부대장을 할 것도 아닌데, 그런 식으로 이름을 붙인 점에서 李씨의 강한 [욕망]을 읽을 수 있겠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 [중앙정보부]란 이름은 5·16뒤 새롭게 태어나게 된다. 李厚洛씨가 이 부대의 책임자로 된것은 CIA의 추천이 있어서가 아니라 타이밍이 맞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많다. 정보국 차장, 무관 경력에다가 영어를 잘하고 미국 사정에 밝다는 점에서 李준장의 임명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는 얘기다. 미국CIA와 관계를 트게 된 발단은 우연이었을지 모르지만 일단 깊은 관계가 된 뒤에는 양쪽이 아주 굳게 깍지를 끼게 된다. 이 부대에는 미국 CIA요원도 몇 명이 파견 나와서 초창기 업무를 도왔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李承晩 특명, 라오스 밀행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창설 당시 79부대의 인원은 20여 명이었다. 각 정보부대에서 올라오는 정보를 정리하는 일과 CIA에서 넘겨주는 해외정보를 분류하는 일이 주된 업무였다. CIA에서 건네주는 정보를 1주일만 모으면 캐비넷에 가득 찰 정도였다. 李준장은 CIA정보 가운데 중요한 것은 간추려 매일 국방장관에게 보고했고, 장관은 그 가운데서 더 중요한 것을 추려서 경무대에 보고했다. 國政 통수권자에게 정보보고가 체계적으로 되기 시작한 효시였다. CIA서울 지부와의 접촉창구로서 李厚洛준장이 그들의 마음에 쏙 들게끔 활동했으리라는 것은 그 뒤의 관계로 미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초대 지부장 넬슨은 지부창립 직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가 고용한 한국인 운전사는 결핵을 앓고 있었는데, 넬슨의 어린 아들이 운전사로부터 결핵에 전염돼 폐를 앓는 바람에 한국에 싫증을 느끼고 넬슨이 본국근무를 요망했다고 한다. 넬슨의 후임으로 2대 지부장에 취임한 데 실버씨는 폴란드에서 활동하다가 서울에 왔다. 그는 슬라브족 출신이란 소문도 있었다. 실버씨는 李厚洛준장의 장래 후견인이 될 인물이었다. 실버씨는 부임할 때부터 정치공작 전문가란 악명을 갖고 왔다. 자유당 정부에선 그를 경계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실버씨는 한국에서 4·19, 5·16을 만났고, 그 뒤 월남에 현지책임자로 갔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79부대장 李厚洛씨가 재임 중에 한 일 가운데 아직 알려지지 않은 비화는 [라오스 미션]이다. 당시 라오스에선 파테트라오 군을 중심으로 한 공산계열이 우익 왕당파인 푸미 노사반의 정부군과 대결하고 있을 때였다. 李承晩대통령은 라오스가 적화되면 고딘디엠의 월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가 공산화 될 것이라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 金국방장관을 불러 {라오스의 공산화 방지를 위해 우리가 도와 줄 일이 없을까}하고 의논한 끝에 李厚洛준장을 라오스로 밀파하기로 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당시 주 월남 대사 최덕신(崔德新)의 주선으로 李준장은 라오스로 가서 노사반 장군을 만나고 돌아왔다. 평양밀행(密行)이 李씨의 일생에 있어서 가장 화려한 무대였다면 라오스 밀행은 그에게 도약의 발판이 됐다. 서울로 돌아온 李厚洛준장을 데리고 金장관은 경무대로 들어가 李承晩대통령을 만났다. 李준장이 직접 보고를 하도록 했다. 그는 {노, 노, 노사반 장군이…}식으로 말을 더듬거렸고 얼굴이 벌개지기도 했으나 어쨌든 이것이 李厚洛씨와 李대통령의 첫 만남이 됐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李준장은 노사반 장군이 한국군의 파견을 희망하고 있더라고 전했다. 이 보고에 따라 백선엽(白善燁)합참의장의 산하에 라오스 파병을 연구하는 실무반이 조직됐다. 그러나 미국측의 반대로 이 계획은 계획으로 끝나버렸다. 라오스 미션을 계기로 하여 李厚洛준장은 매주 두번씩 열리던 국무회의에 참석, 15분간씩 국제정세를 브리핑하게 됐다. 이 브리핑은 허정(許政)과도정부 시대를 거쳐 민주당 정권 때까지 계속됐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CIA 추천으로 정보실장 취임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4·19 때 데 실버가 지휘하는 미국CIA 서울지부가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소문이 한때 무성했다. 4·19직전 CIA요원 1백50명이 오산을 거쳐 서울로 숨어 들어왔다느니, CIA가 학생들에게 돈을 뿌리며 시위를 충동질했다느니 하는 루머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이 된 셈이지만 데 실버가 李대통령의 하야를 권고한 미국의 매카나기 대사에게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믿는 이들은 많다. 4·19뒤 민주당 정권 때 李厚洛의 후견인 노릇을 톡톡히 한 것도 데 실버였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4·19를 계기로 한국의 정보기관은 큰 타격을 받았다. 경찰서의 사찰과 직원들은 부정선거 앞잡이라 하여 공민권이 제한돼 공직에서 추방됐고 군 정보기관 요원들도 자유당 권력층과 가깝다하여 눈총을 받고 사기가 떨어져 있었다. 민주당은 일단 정권을 잡자 와해 직전인 정보기관의 기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됐다. 1950년대에는 張勉총리의 비서실장을 지냈고, 당시엔 조폐공사 사장으로 있으면서 張총리의 측근 참모 역할을 하고 있었던 선우종원(鮮于宗源)씨(전 국회사무총장)는 이렇게 증언한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데 실버가 張총리한테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기관을 만들도록 건의를 했습니다. 요원의 훈련, 조직 및 운영예산지원 등 여러가지 도움도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건을 달았습니다. 李厚洛씨를 그 기관장으로 임명해야 한다는 것 이었습니다. 張총리는 언짢게 생각하는 듯 했습니다. 李厚洛이를 위해 정보기관을 만드느냐고 말입니다. 총리께서는 나를 보고 李厚洛씨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보라고 했어요. 알아보았죠. 그에 대한 평판은 좋다는 쪽과 나쁘다는 쪽으로 딱 갈라져 있더군요.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참모총장을 지낸 어떤 분은 아주 좋지 않게 말하더군요. 저는 여러 얘기를 종합한 끝에 李厚洛씨를 쓰지 않는 게 좋겠다고 총리께 보고를 드렸죠. 그러나 데 실버가 얼마나 강력하게 권고를 했던지 李厚洛씨가 책임자로 임명되더군요. 당시 정부예산이 동이 나 김영선(金永善)재무장관이 케네디 대통령을 찾아가 2천만 달러를 급히 얻어와야 할 때였으니 미국측 요구를 거절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렇게 해서 1961년 초에 발족한 것이 총리 직속의 중앙정보위원회였다. 李厚洛씨는 소장으로 예편한 뒤, 위원회 산하의 중앙정보연구실장으로 취임했다. 기관의 이름이나 조직은 79부대를 그대로 옮겨놓은 모양이었다. 이 위원회는 여러 국가정보기관의 업무를 통괄하는 기능을 위임받았다. 자유당 때 미국이 CIA를 본뜬 정보기관을 설치하도록 李承晩대통령에게 요청했을 때, 李대통령은 그 제의를 받아 주는 척 하면서 국방부 산하에 설치함으로써 기능을 격하시켰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미국 CIA는 이것이 못내 불만이었다. 상대국의 정보기관이 강력해야 그 기관을 통한 영향력 행사도 쉬울 것이다. 그래서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자 격상된 중앙정보기관을 만들게 된 것이었다. 李厚洛실장은 차관대우였다. 그러나 이 기관은 제대로 활동을 해보기도 전에 5·16을 맞고 말았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CIA 간청으로 李씨 석방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지난 78년 미국 하원의 국제관계 소위원회로 [한미관계 조사보고서]를 펴냈다. 소위원회는 20명의 조사관을 동원, 11개국에서 관련자들과 연 1천5백63회의 인터뷰를 하는 등 약2천쪽에 달하는 방대한 자료를 종합하여 이 보고서를 만들었다. 朴東宣사건 직후에 나온 보고서이므로 한미 관계의 부정적인 면들이 주로 다루어졌다. 비밀자료들도 많이 소개되어 있다. 이 보고서 23쪽엔 이런 대목이 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5·16뒤) 중앙정보부는 李厚洛소장이 만든 중앙정보위원회를 흡수했다. 金鍾泌 전 중정부장의 보좌관을 지낸 바 있는 모씨는 조사관과의 인터뷰에서 중앙정보위원회가 미국 CIA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5·16이 나자 李厚洛은 부패혐의로 체포됐다. 체포의 진짜 이유는 그가 미국 측과 너무 가깝다는 점이었다. 몇 달 뒤 군사정권과 미국과의 우호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李厚洛을 석방했다. 이 보좌관에 따르면 CIA가 李씨의 석방에 중심적 역할을 했다고 한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李厚洛씨의 석방에 기여를 한 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CIA 한국 지부장 데 실바였다. 실바는 李씨가 구속돼 있을 동안 그의 가족까지도 여러 모로 보살펴 주었고, 金鍾泌 정보부장을 자주 찾아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CIA측에선 金정보부장에게 李씨의 이름은 대지 않고 정보 기관의 운영에 꼭 중요한 한 인물이 갇혀 있다는 식으로 말을 둘러대어 암시를 여러 번 주었다고 한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金부장이 스스로 李씨를 풀어 주고, 李씨로부터 중앙 정보위원회 등 정보기관의 조직과 운영에 대한 자문을 받도록 CIA가 원격조종을 했다는 것이 李씨 측근에서 나온 이야기다. 金鍾泌 부장과 가까운 쪽에선 데 실바가 李씨를 거명하면서 여러 번 석방을 간청했다고 말하고 있다. 미국과 가까운 金貞烈씨도 朴正熙장군을 찾아가 李씨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전달, 석방과 중용을 부탁했다고 한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어쨌든 미국 CIA는 李承晩정권 때는 李厚洛씨가 정보기관장으로 데뷔하도록 했고, 張勉정권 때는 그를 격상시켰으며, 5·16 뒤엔 李씨를 절대 절명의 위기에서 구출해 주었다. 5·16 쿠데타에서 李厚洛씨가 어떤 행동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추측의 영역에 속한다. 그 추측은 쿠데타에 대한 미국의 태도에서 힌트를 얻을 수밖에 없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쿠데타가 나자마자 매그루더 유엔군 사령관은 張勉정부를 지지하는 성명을 발표, 한국군 수뇌부가 빨리 질서를 회복할 것을 촉구했다. 이어서 미국대사관 마샬 그린 대사대리도 같은 취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이런 신속한 반응은 미국 국무성의 허가를 받지 않고 나왔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미국무성은 나중에 이 성명들을 추인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CIA에 反朴正熙 정보 알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서울 주재 미국 당국의 즉각적인 반응은 쿠데타 주모자들의 과거 경력에 대한 미국 정부 당국(필자 주:아마도 CIA)의 보고 때문이었던 것 같다고 미 하원 국제 문제 소위원회 보고서는 지적하고 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 이들 보고에 따르면, 朴正熙장군은 1940년대 중반 육군 장교 시절에 공산주의와 관련되었다. 48년의 여수 반란 사건 때는 정말로 공산주의자였다는 증거도 있었다. 그는 이 혐의로 해서 사형 선고까지 받았다. 그는 약 3백 명에 달하는 공산당 첩자들을 밝혀내는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에 징역 10년형으로 감형됐다. 여기에는 정일권(丁一權) 등 다른 인물들의 도움이 컸다. 金鍾泌은 대학교 재학 때 좌익학생 운동에 관련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5·16 당시) 미국 대사관에서 문화담당 보좌관이었던 그레고리 헨더슨에 따르면 쿠데타 참여자들은 영어를 잘 못했기 때문에 미군과의 접촉에는 제한이 많았다고 한다. 장면(張勉)정부는 미국 대사관 내의 주요 간부들―참사관, 정치 담당 영사, 그리고 헨더슨―로부터 강력한 지지를 받고 있었다. 미국 CIA가 5·16을 지원했다는 일부 주장에 대해 조사했으나 근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CIA도 미국대사관과 같이 쿠데타에 반대하고 있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5·16 주체 세력에선 李厚洛씨가 주체세력의 사상적 배경 등에 대한 정보를 CIA에 알려 주어 미국 당국이 즉각 적으로 쿠데타에 반대하도록 했다는 의심을 가졌고, 그 때문에 그를 체포했다고 한다. 朴正熙장군에 대한 상세한 자료는 미 정보기관이 그 이전에 이미 손에 넣고 있었고 5·16직전에는 張勉정부를 통해 朴소장을 예편시키도록 압력을 넣은 적도 있기 때문에 李씨의 정보만이 그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다만 李씨와 미국CIA서울지부의 친밀한 관계로 미뤄 쿠데타에 관한 정보가 CIA쪽으로 상당히 흘러들어 갔으리란 추측은 너무나 당연하다. 두 나라 국방장관 협정이 정보교환을 약속하고 있었고 중앙정보위원회의 조직목적이 CIA와의 정보교류였으니까.&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容共 쿠데타 아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미국 측에선 쿠데타 주모자들의 사상적 배경 때문에 쿠데타가 성공한 뒤에도 상당 기간 신경을 곤두세웠다. 다른 한국군 부대를 동원하여 쿠데타 군을 진압하려는 매그루더의 계획이 尹潽善 당시 대통령의 거부로 좌절된 직후 미국 대사관은 미 국무성에 보낸 전문에서 {張勉정부의 운명에 대한 한국민들의 냉담과 무관심 때문에 우리의 행동범위는 제한을 받고 있다}고 했다. 쿠데타가 기정사실로 되자 미국은 그들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는 선에서 타협점을 찾으려 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6월 중순 그린 대사대리는 국무성으로 보낸 전문에서 {군사정부 지도자들과의 면담 결과, 그들이 군사통치를 상당히 오랫동안 펼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 6월 하순 미국 대사관측은 군사정부에 대해 다음과 같은 조처가 취해진다면 미국 정부는 우호적으로 협력할 것이며 동결한 2천8백만 달러의 원조자금도 풀겠다고 제의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A, 민주적 정치질서를 회복시키겠다는 정부의 보장&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B, 공무원의 수를 4만 명쯤 줄이고 봉급을 올릴 것&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C, 부정 부패의 발본색원&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D, 군사 정부가 약속한 농촌 고리채 정리와 기타 경제 조치의 실천&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군사 정부는 쿠데타 직후 약 40명의 장성들을 체포, 또는 연금했다. 상당수는 친미적인 사람들이었다. 미국 측은 이들의 석방에 노력했고 그들을 미 국방성의 경비부담으로 미국에 유학 보냈다고 미국측 자료는 밝히고 있다. 7월초 사뮤엘 버거 신임 미국대사가 서울에 왔다. 그가 부여받은 사명 중의 하나는 군사정부 지도자의 방미초청이었다. 버거 대사는 7월15일 미 국무장관에게 군사정부 지도자의 용공성 여부에 대한 보고를 했다. 그 全文은 다음과 같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1, 우리는 이번 군사혁명이 공산주의자에 의해 조종되거나, 그들의 영향을 받았는가의 여부에 대한 첫 평가를 완료했다. 그 결론의 요약은 다음과 같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2, 여러 가지 상황증거들은 압도적으로, 이번 혁명의 주류가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이며, 반공적임을 시사하고 있다.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이 혁명에 참여한 기회주의자들도 있긴 하지만 쿠데타에 참여한 세력의 주된 동기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믿어진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A, 군과 3부(府)와 한국인의 일상생활 전반에 걸쳐 성행하고 있는 부정부패에 대한 혐오감&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B, 정부의 무능력과 정책의 무계획성, 그에 따른 경기 침체, 국민들의 정신적인 방황과 불만&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C, 공산주의자들의 상황 이용&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4, 공산주의자들이 군사혁명 지도자들이나 민간인 보좌관들 속에 침투해 있고, 중요 직위를 차지하고 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일부 지도자들이 공산주의와 관련됐던 전력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그런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朴正熙 장군은 그런 그룹에 속해 있지 않음이 명백하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 결별하고 전향한 사람이기 때문에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으면 희생물 제1호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중장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군사정부안에 있는 몇몇 인물이 공산주의자라고 하는 비난은 신중하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런 혐의는 상황증거에 반영을 둔 것이거나 개인적인 편견, 또는 감정에 기인한 듯하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5, 쿠데타가 능률적으로 추진됐고 정권을 탈취하는 요령에 대한 확고한 지식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공산주의자의 음모가 개재됐다고 유추해서는 안 된다. 구르셀 장군은 터키에서, 아유브칸은 파키스탄에서 똑같은 거사를 했고, 이번 혁명지도자들도 그들로부터 영향을 받은 바 크다. 완벽한 쿠데타 거사를 가능케 한 것은 미국이 한국군에게 그 동안 가르쳐온 군사훈련, 즉 조직·군수·정보에 대한 교육 덕분으로 볼 수도 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6, 소련, 북한, 중공이 이번 혁명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고 나온 것도 이 혁명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조종된 것이 아니라는 보강증거가 된다. 공산주의자들이 무한한 위장전술의 능력을 가기고 있음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혁명에서 드러난 반공적인 증거가 이처럼 많은 것을 볼 때, 공산주의자의 조종에 의한 혁명으로 해석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한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에 앞서 5·16직후 매그루더 사령관을 맨 먼저 만나 朴正熙 장군의 전력을 변호해 준 것은 당시 공직에서 물러나 쉬고 있던 金貞烈씨였다. 朴장군은 일본육사 선배인 金씨를 형님이라 부르며 가깝게 지낸 편이었다. 朴장군이 여순반란 사건 뒤 숙군 때 체포됐을 때도 金貞烈씨는 채병덕, 丁一權씨 등 일·만군 수뇌 인사들과 함께 朴씨의 구명운동을 벌였었다. 金씨는 미군으로부터는 [마이크 킴]이란 애칭으로 불리며 신뢰를 받고 있었다. 金씨는 5·16 다음날 매그루더를 만났고 朴장군을 반공주의자라고 안심시킨 뒤 金鍾泌씨와의 면담을 주선했었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金鍾泌, 李厚洛을 취직시켜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버거 대사의 보고문에서 드러나듯 미국 측은 [일단 안심]은 했기만 경계심은 풀지 않고 있었다. 쿠데타 주체세력이 반공적이란 것도 사실이었지만 그들이 대체로 반미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민족주의적이었음도 부인할 수 없었다. 金鍾泌정보부장은 공공연히 자유당 시절 미국이 취한 경제원조 정책을 비난했다. 朴正熙 장군은 사석에서 꼭 {미국×들}이라고 부를 만큼 생리적으로 미국을 싫어했다. 더구나 친미적인 張都暎 세력이 제거된 뒤에는 군사정부 안에서 친미적인 지렛대를 발견할 수가 없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취할 수 있는 대응책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군사정부 안에서 친미세력을 확보하는 것, 또 하나는 군사정부가 추진하고 있었던 경제개발에 미국자본을 대거 끌어들임으로써 경제적인 지렛대를 강화하는 것이었다. 1961년 가을 대한공론사 이사장으로 있던 李厚洛씨가 원충연(元忠淵) 대령의 후임으로 국가 재건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임명된 것은 이런 상황 아래서 였다. 당시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사소한 것 같았던 이 인사는 박정희 정권과 한미 관계 및 60∼70년대의 정치 행태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李厚洛씨의 발탁과정에 대해서 가장 소상하게 알고 있는 사람은 김봉기(金鳳基)씨(전 대한공론사 이사장·유정희의원)일 것이다. 그는 준장급 문관으로 金貞烈 국방장관의 특별보좌관을 지냈다. 혁명주체들 및 李厚洛씨와는 오랜 친분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설명은 이렇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61년6월초로 기억하는데 미도파 건너편 희 다방에서 우연히 金鍾泌 정보부장과 만났어요.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면서 李厚洛씨의 석방을 부탁했지요. 金부장은 며칠 있다가 李씨가 나올 꺼라고 해요. 그리고는, 지금 대한공론사 이사장 자리가 비어 있는데 기자 경력이 있는 당신이 좀 맡아주어야겠다면서 언제까지 나의 이력서를 가지고 오라고 합디다. 그때 대한공론사는 정부투자 기업체로서 코리언 리퍼블릭이란 영자신문을 내고 있었죠.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약속한 날에 지금 국제호텔 자리에 있던 정글 바로 이력서를 가지고 나갔죠. 金부장은 안 보이고 한 구석에 누군가 머리를 푹 숙이고 있는데 李厚洛씨에요. 아주 풀이 죽은 표정이에요. 반갑게 인사를 했지요. 얼마 안 있어 정보부 서울 분실장 李병희씨가 들어왔어요. 조금 있으니 金鍾泌씨가 나타났죠. 두 사람이 나뿐 아니라 李씨와도 만날 약속을 한 것 같았어요. 저는 풀이 죽은 李씨를 보자 순간적으로 생각이 바뀌더군요.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그래서 金부장과 따로 앉은 자리에서 대한공론사 이사장은 미국인들과 친면이 깊은 李씨가 적임자라고 그를 추천했어요. 金부장은 李厚洛씨에게는 [월간 다이제스트]란 잡지를 하나 만들어 맡길 계획이라고 해요.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저는 이런 시대에서는 월간지가 될 일이 아니니 내 생각 하지 말고 李厚洛씨에게 대한공론사를 맡기라고 했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중요한데 신문사 사장이란 직책을 가지면 李씨가 활동하기도 좋을 것 같다고 했지요. 이렇게 해서 李厚洛씨가 며칠 뒤 대한공론사 이사장 겸 코리언 리퍼블릭의 사장이 되고 저는 코리언 리퍼블릭의 주필 겸 부사장이 됐습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언론사 사장이 된 李씨는 정부 홍보만 하면 코리언 리퍼블릭을 신문답게 만들어 한국 거주 외국인들이나 미국 대사관측으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군사정부를 비판도 하고 객관보도에도 힘써 신문의 면모를 일신했다고 한다. 그렇게 되니 이 신문을 이용, 외국인들에게 군사정부의 입장을 설득시키는 데도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대한 공론사의 운영은 金鍾泌부장이 차량, 예산 등 여러 면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사장과 부사장 월급은 정보부로부터 지급받아 예산부족을 카버하기도 했다. 李厚洛씨가 최고회의 공보실장으로 발탁된 데는 이러한 실적이 상당히 기여했으리란 게 중론이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그 자가 美 CIA라면서?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李厚洛씨는 어려운 조건 아래에서 최고회의에 들어갔다. 주체세력도 아니었고, 오히려 反혁명으로 몰린 사람이었다. 反美무드가 강한 최고회의에서 그와 같은 친미주의자는 처신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李厚洛씨는 순식간에 자신의 위치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朴正熙 의장을 홀딱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대변인이란 자리는 최고실력자의 신임정도에 따라 그 비중이 가늠된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당시 최고회의 출입기자들에 따르면 부임직후엔 새까만 군 후배가 되는 주체세력 장교들에게 깎듯이 님자를 붙이던 李厚洛씨는 얼마 안가서 선배대접을 받기 시작하더니 곧 제자리를 찾더란 것이다. 그 비결은 朴의장의 신임이었고 이 신임 덕분에 옛날의 군 선후배 관계를 되찾았다는 얘기다. 李厚洛씨가 자리를 굳히는 데 미국측도 크게 도와주었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李씨의 한 측근은 이렇게 말했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한미 관계에서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李厚洛씨가 나서서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 李씨는 아침에 최고회의(나중에는 청와대)로 출근하기 전에 미국 대사와 아침식사를 같이 하면서 그런 문제의 해결책을 의논하곤 했다. 朴대통령이 물으면 즉시 그의 입에서 대책이 나올 정도였다. 미국 쪽에선 李씨가 끼지 않으면 해결되지 않도록 문제를 만들어놓곤 했다. 그렇게 하여 李씨는 미국과 한국의 접촉점에 서게 됐고 그의 비중은 저절로 높아져갔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李厚洛씨를 서로가 필요로 하는 상황이 됐던 것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물론 미국이 李厚洛씨를 최고회의 안에서 그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인물로 이용했다는 물증은 없다. 적어도 미국 CIA는 그렇게 노골적으로, 촌스럽게 외국정부에 영향을 끼치지는 않는다. CIA의 공작은 미국을 위해 일해달라고 지령이나 부탁을 하는 식이 아니라, 눈치 안 보고 자연스럽게(또는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하도록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미국에 대해 본능적인 거부감을 갖고 있었던 朴대통령의 입장에서도 李厚洛씨와 같은 인물은 대미(對美) 지렛대로서 필요한 존재였다. 朴정권 시절의 모 공보비서관은 朴대통령이 사석에서 우스개처럼 {李厚洛, 그 자가 미 CIA 앞잡이라면서}라고 내뱉는 말을 여러번 들었다고 했다. 그런 朴대통령이 李씨를 12년 동안이나 측근에 둔 것은 이용가치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후락(李厚洛)씨는 미국과 朴정권의 균형점이기도 했다. 그런 줄타기를 하는 데 李씨는 비상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었다&lt;/SPAN&gt;&lt;/FONT&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0066cc&gt;趙甲濟&lt;/FONT&gt;&amp;nbsp;&amp;nbsp;/ 前 월간조선 대표]&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헌재(憲裁)는 왜 혼란을 만드나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1"/>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1</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2T07:57:00Z</updated>
	    <published>2009-11-02T07:57:0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요즘 한국에서 헌법재판관 9인만큼 중요한 이도 드물 것이다. 대법원도 있지만 어느덧 국가 중대사에 대한 최종 심판은 헌법재판소로 되어 있다. 국가가 헌재에 ‘길을 묻고’ 있는 것이다. &lt;BR&gt;&lt;BR&gt;헌재는 1987년 완성된 민주화 체제의 산물이다. 20여 년 동안 헌재는 770여 건에서 위헌이나 권리 침해를 인정했다. 논란의 결정도 있지만 헌재는 대체적으로 헌법과 인권을 수호해왔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헌재가 국가를 방황에서 건져낸 대표적인 경우가 수도 이전 위헌 결정이다. 2004년 10월 헌재는 대한민국의 수도가 서울이라는 건 ‘관습헌법’이므로 수도를 옮기려면 개헌 절차(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고 결정했다. 장삼이사(張三李四)는 생각하지 못한 명쾌한 논리였다.&lt;BR&gt;&lt;BR&gt;그러나 헌법재판소가 항상 명쾌한 건 아니었다. 1년 후 헌재는 7대2로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는 위헌이 아니라는 결정을 내렸다. 대통령과 외교·안보부처 그리고 국회·대법원은 서울에 있으므로 세종시가 건설되더라도 ‘수도 분할’은 아니라고 본 것이다. 수도 분할이 아니므로 개헌이 필요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9인 중 권성·김효종 2인은 세종시를 수도 분할로 보았다. 국무총리와 12부4처(당시)가 이전하므로 세종시가 또 하나의 수도가 된다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2인의 판단이 옳다고 생각한다. 수도의 중심 기능은 입법이나 사법이 아니라 행정이다. 헌법은 “국무총리는 행정에 관하여 대통령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한다”고 되어 있다. 그런 국무총리에다가 17개 부(部)중 12개나 옮겨가는데 어떻게 수도 분할이 아니란 말인가. 헌재가 세종시를 위헌이라고 결정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국가적 혼란과 고뇌는 없을 것이다.&lt;BR&gt;&lt;BR&gt;혹자는 “법원 판결처럼 헌재 결정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물론 결정은 존중된다. 제도적으로 사회는 헌재의 결정에 따라 굴러가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헌재가 비판의 성역으로 남아야 되는 건 아니다. 헌재는 기본적으로 존재 상황이 정치적이다. 9인을 뽑는 사람은 대통령·대법원장·여야 정당이다. 대법원장도 대통령의 선택이니 결국 대법원장이 지명하는 3인을 포함해 헌법재판관들의 성향은 사실상 대통령과 정권의 성향에 많이 좌우된다. 현재의 9인은 모두 노무현 정권 때 재판관이 되었다. 헌재는 구성도 정치적이고 다루는 안건도 정치적 사안이 많다. 정치성은 헌재의 숙명이므로 헌재가 정치적 파장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말하면 그건 거짓말이다. 한국에서 헌재는 정치의 한가운데에 있다. &lt;BR&gt;&lt;BR&gt;정치적인 현명함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번 미디어법 결정은 아쉬운 점이 많다. 방송법 표결 때 재적 과반수가 되지 않아 재투표한 것을 헌재는 ‘일사부재의(一事不再議)’ 위반으로 봤다. 5대4였다. 일사부재의는 국회법 규정(92조)이므로 국회는 버젓이 국회법을 어긴 꼴이 됐다. 사실 국회법은 일종의 절차법이어서 처벌 규정도 없다. 그리고 예산안 통과시한 등 국회가 국회법을 어긴 게 한 둘이 아니다. 그러나 ‘일사부재의’만큼은 어긴 적이 드물어 헌재 결정을 보는 국민은 적잖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lt;BR&gt;&lt;BR&gt;9인 중 4인은 일사부재의 위반이 아니라고 보았다. 재적 과반수가 안 되면 투표를 다시 하면 되는 것이지 이를 부결된 걸로 봐서는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해석이 옳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국회의장은 표결할 때 재적 과반수가 될 때까지 기다리지 그냥 표결하진 않는다. 그리고 2002년 11월 국회는 의결했다가 재적 과반수 미달로 드러난 40여 개 법안을 재의결한 적도 있다. 만약 재판관 5인 중 한 명이라도 이런 해석에 합류했다면 ‘일사부재의’ 혼란은 없을 것이다. 아쉽게도 헌법재판소는 법리적 소신이라는 ‘재판관의 울타리’에 갇혀 자꾸 새로운 혼란을 만들어내고 있다. 국가는 길을 묻는데 헌재는 엉뚱한 답변을 내놓는 것이다. 헌재의 정체성에 대해 헌법소원이라도 내고 싶은 심정이다. &lt;BR&gt;&lt;BR&gt;[중앙일보 / 김진 논설위원·정치전문기자]
&lt;P&gt;&lt;/P&gt;
&lt;P&gt;&amp;nbsp;&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김우중과 안철수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90"/>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90</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1-01T07:45:46Z</updated>
	    <published>2009-11-01T07:45:4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얼마 전 사업을 접었다는 중소기업인을 만났다. 몇 년째 고전하다가 ‘용기’를 내 폐업했다고 했다. 사업을 접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니! 사연인즉 이랬다. 회사가 돈을 빌리면 대표이사도 연대보증하는 구조 때문이란다. 회사가 못 갚으면 고스란히 자기 빚이 되기에 사업을 접는 것도 어렵다는 의미였다. “몇 달 후 돈 갚으라는 통지가 오면 ‘도망자’ 신세가 된다”는 바람에 같이 울 뻔했다.&lt;BR&gt;&lt;BR&gt;어딜 가나 기업가정신 얘기다. ‘기업가정신 국제콘퍼런스’ ‘벤처 코리아 2009’ 같은 행사가 줄을 잇는다. 기업가정신 특강 프로그램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모두 다 기업가정신만이 살 길이라고 한다. 맞는 얘기다. 투자 부진이 장기화되고 있는 데는 기업가정신의 실종 탓이 크다. 과거에도 여건이 불확실하고 경영이 불안했지만 그때는 오히려 과잉투자가 걱정이었으니 말이다. 제시되는 해법도 다양하다. 연대보증제 폐지론도 있다. 앞의 기업인처럼 실패했다고 도망자 신세가 돼야 하는 사회에선 기업가정신을 기대하기 힘들어서다. 대기업의 불공정거래 얘기도 나온다. 될 만한 사업은 대기업들이 다 채가는 사회에서는 누군들 기업 하려 들까라는 의문이다. 전적으로 동의한다. 재기 기회를 줘야 하고, 창업자의 성공 확률도 높여야 한다. 그러나 이게 다일까. 이렇게 하면 기업가정신이 살아날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lt;BR&gt;&lt;BR&gt;이보다는 김우중 전 회장은 실패한 기업인으로 비난받고, 안철수 교수는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평가받는 지금의 사회적 인식을 바꾸는 게 더 효과적인 해법이라고 본다. &lt;BR&gt;&lt;BR&gt;경제학자들은 기업가정신을 야성적 충동이나 이노베이션이라 해석하지만 나는 ‘다 걸기’라 풀이한다. 자신의 인생을 몽땅 다 기업에 거는 정신 말이다. 기업을 살리고 성장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치욕도 감수하는 정신, 하루 24시간을 몽땅 기업에 쏟아붓는 정신, 자신과 가족의 삶까지 팽개치는 정신 말이다. 대우그룹 창업자인 김 전 회장은 평생 ‘일과의 전쟁’을 벌이며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았던 사람이다. 잠을 하루 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고 30분마다 사람을 바꿔 만났으며, 사흘 중 이틀을 해외에서 보냈다. 휴일도 없었고, 가족과 함께 해수욕장을 가본 기억조차 없다.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사업뿐이었다. 매 순간 피말리는 결정을 내리면서도 그는 줄곧 그렇게 살았다. 그때도 사업하다 망하면 가산을 탕진해야 했고 대기업 횡포도 심했지만 그는 다 이겨냈다. 삼성·현대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대기업을 일궈냈고, 32만 개의 일자리도 만들었다. 인생을 몽땅 걸었기에 가능했던 신화였다. &lt;BR&gt;&lt;BR&gt;안철수연구소를 창업했다가 KAIST로 전업한 안 교수는 다르다. 물론 존경받아 마땅한 사람이고, 편안한 의사의 길을 포기하는 등 치열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하지만 기업인으로선 김 전 회장이 더 존경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안 교수가 적어도 자기의 인생을 김 전 회장처럼 몽땅 기업에 걸지는 않은 듯해서 하는 말이다. 일궈낸 기업 규모와 만든 일자리 수도 격차가 있다. 김 전 회장이었다면 한창 나이에 경영 일선에서 은퇴해 교수로 진로를 바꾸지 않았을 것이다. &lt;BR&gt;&lt;BR&gt;우리 사회는 안 교수를 김 전 회장보다 더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평가한다. ‘존경받는 인물’ 순위라면 납득되지만. 이런 평가는 젊은이들일수록 더 하다. 김 전 회장을 모르는 청년도 많다. 안다고 해도 실패한 기업인, 20여조원의 추징금을 내야 할 죄인쯤으로 인식한다. 이런 풍토 속에서 기업가정신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기업을 적당하게 키운 후 다들 교수 하겠다는 그런 사회에선 기업가정신이 충만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김 전 회장은 재평가받아야 한다. 실패했지만 기업가정신은 충만했던, 그래서 존경받아야 할 기업인으로 말이다. 내년 이맘때는 전국을 돌면서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기업가정신을 열강하는 김 전 회장의 모습을 볼 수 있었으면 한다.&lt;BR&gt;&lt;BR&gt;[중앙일보 / 김영욱 기자]
&lt;P&gt;&lt;/P&gt;
&lt;P&gt;&amp;nbsp;&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진정한 여성해방운동가는 李承晩, 朴正熙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89"/>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89</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0-30T08:56:18Z</updated>
	    <published>2009-10-30T08:56:1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lt;FONT size=3&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정치, 교육, 경제활동에서 男女차별을 철폐하고 여성들을 새 역사 창조의 主役으로 끌어들인 두 분이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趙甲濟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우리 민족사에서 여성들에게 암흑과 같은 시기가 있었으니 두 번의 朝鮮시대이다. 교조적인 朱子學을 통치이데올로기로 삼은 조선조는 과부의 재혼을 금하는 등 여성들을 극도로 차별하였다. 新羅는 세 사람의 女王을 남겼다. 그만큼 사회가 자유로웠다는 이야기이다. 그런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것은 의미가 있다. 신라는 여성들의 사회참여를 장려하였으니, 動員力이 큰 나라가 된 것이다. 전쟁에선 인구수도 중요하지만 동원력이 큰 나라가 이긴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3代에 걸친 세습을 기도하는 사실상의 金氏조선으로서 여성들을 고생시키고 있다. 형식상은 여성을 평등하게 대우해주는 척하면서 사실에 있어선 조선조의 봉건적 차별을 계속함으로써 여성들이 억압되고 희생되도록 하였다. 식량난의 가장 큰 짐을 지고 굶어죽고 얼어죽어간 이들이 아내, 어머니, 할머니들이었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우리 민족사에서 여성들의 人權을 가장 크게 향상시킨 사람은 두 대통령이다. 李承晩 초대 대통령은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헌법을 만들고 그 위에 대한민국을 세웠다. 여성들에게도 자유와 民主(평등)의 혜택을 주었다. 한국은 建國 때부터 여성들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하는 등 일체의 南女차별을 제도적으로 철폐하였다. 민주주의의 역사가 긴 유럽에서도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준 것은 1920년대 이후였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李 대통령은 초등학교 교육을 국민의 의무로 규정하는 등 남자와 여자를 가리지 않고 학교에 보낼 것을 권장하였다. 아무리 참정권을 여성들에게 주어도 교육의 권리가 보장되지 않으면 진정한 여성해방은 불가능하다. 李 대통령은 이 장벽을 깨부수었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朴正熙 대통령은 정치, 교육의 男女평등을 확장시켜 경제활동에서도 여성人力이 참여하도록 길을 터주었다. 1960년대 여성人力이 공장으로 몰렸다. 女工시대가 열렸다. 봉제공장, 섬유공장, 신발공장 근로자들의 반 이상이 젊고 어린 女工들이었다. 이들이 경제개발의 선봉에 섰다. 여성이 비로소 한국의 새 역사 창조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물론 女工哀史라는 말이 나올 만큼 이들의 근무환경은 고된 것이었다. 이 점을 과장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욕하는 인간들이 많다. 이들은 그 박정희가 산업체에서 일하는 女工들을 위하여 특별학교를 만들어주고 시간만 나면 공장을 찾아가 女工들을 위로하고 1977년 7월1일부터는 의료보험을 시작하여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가 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비극에 종지부를 찍은 사실은 애써 숨긴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박정희 대통령은 시골에서 자라난 때문인지, 부엌일로 여성들이 고생하지 않도록 부엌개량 사업을 추진하였다. 1970년대에 가면 여성들이 부엌에서 서서 일할 수 있게 된다. 꼬부랑 할머니를 보기 어렵게 된 이유중의 하나이다. 딸들과 아내와 어머니들이,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김치국물을 먹고 살아나는 희비극도 도시가스 시대가 열리면서 사라졌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1960년대부터 박정희 정부가 추진한 産兒제한 정책 또한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드높였다. 지금은 그 정책이 너무 성공하여 오히려 多출산 정책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오늘날 눈부신 한국 여성들의 사회진출은 어머니가 아이들을 여섯, 여덟 명씩 낳고는 불가능하였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된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박정희, 이승만은 한번도 자신들이 여성해방운동을 했다고 자랑하지 않았다. 좌파적 관점에서 여성人權 운동을 벌이는 이들에겐 이 두 대통령의 업적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男女평등의 참정권 보장, 男女평등의 교육권 보장, 男女평등의 경제활동 보장, 이것이 여성해방의 기초였고 이 기초를 만든 이가 좌익들이 가장 미워하는 李, 朴 대통령이었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1970년대 농촌지역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새마을 운동은 마을마다 헌신적인 지도자들이 있었기에 성공하였다. 여성들이 새마을 지도자를 맡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들이 남자들을 지휘하여 다리를 놓고, 길을 닦고, 마을을 가꾸었다. 여성 上位 시대의 개막이었다.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두 대통령이 여성人權 향상에 가장 큰 기여를 했다는 의미는 바로 人權향상에 가장 큰 공을 세웠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의 반은 여성이니까. 그렇다면 남자의 人權향상을 별도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한국 역사상 가장 큰 인권伸張者(신장자)는 이승만, 박정희이다. 인간에게 衣食住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최대의 人權향상이다. 두 대통령은 이 일을 해냈다. 그리고 플러서 알파도 해냈다.&amp;nbsp;&lt;/SPAN&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SPAN&gt;&lt;/FONT&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조갑제 / 언론인]&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entry>
	    <title>全斗煥과 盧泰愚를 죄인시하는 연합뉴스의 편견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cthwn/15713388"/>
		<id>tag:blog.daum.net,2009:cthwn.15713388</id>
	    <author>
		    <name>證人</name>
	    </author>
	    <updated>2009-10-30T08:50:37Z</updated>
	    <published>2009-10-30T08:50:3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600 border=0&gt;
&lt;P&gt;&lt;FONT size=3&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지금 한국의 언론은 좌익세력의 선동수단 쯤으로 전락되어 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을 악마시하고, 김대중, 노무현, 김정일을 은근히 미화하는 한국의 주류 언론계는 전반적으로 심각하게 좌익화 되어 있다. 한국언론의 이러한 좌편향적 행각은 10년 동안 좌익정권에 어용짓을 한 못된 언론이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잔재라고 본다. 한국의 언론들은 자신들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친북적, 반미적, 반보수적, 친좌익적 성향의 시각으로 한국의 정치적, 경제적, 외교적, 사회적 사건들을 조명하고 있다. 그 극단적 사례로 작년에 이명박 정권 타도를 위한 광우난동사태에 대한 한국 언론들의 허구성, 선동성, 폭란성, 불법성에 잘 나타난다. 광우난동사태의 선동주범인 한국언론은 최악의 망국노 집단이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철저하게 좌익세력의 반란과 폭동을 편드는 시각을 가진 한국언론은 망국의 핵심적 변수가 될 것이다. 구체적으로 한국언론의 좌편향적 성향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들에 대한 악평에서 잘 나타난다. 대한민국에 반역적인 친북행각을 국정운영을 통해 보여준 김대중-노무현 좌익정권을 한국의 언론은 철저하게 미화하고 비호하고 있다. 한국언론은 특히 전두환 전 대통령을 악마화 하는 데에 모든 정력을 쏟아붇고 있다. 방송의 드라마는 전두환을 독재자로 채색하는 데에 집중된 선동의 수단이다. 지난 10년 동안 한국의 방송과 신문들은 편파적으로 전두환 매도와 김대중 미화에 전심전력을 다했다고 평가된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한국언론계에서 노골적인 좌익선동기관들은 조선일보, 문화일보, 동아일보 정도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방송과 신문들인 것 같다. 특히 아주 은근하고 교묘하고 치밀하게 좌편향적인 연합뉴스는 한국의 정보를 좌편화시키는 데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10월 29일 연합뉴스(대구)는 80을 바라보는 전두환과 노태우 전 대통령들이 졸업하거나 다녔던 대구공업고등학교에서 '모교를 빛낸 동문들'이라는 제목으로 학교 건물에 두 사람의 사진을 게시한 것을 매도하는 네티즌들의 선동을 부각시키며 은근히 논란을 부추겼다. 대구공고의 본관 건물 1층 현관에 '모교를 빛낸 동문' 43명에 전노 두 전직 대통령을 포함시켜서 사진들을 게재한 것을 마치 일어나서는 안된 범죄처럼 다뤘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대구공고 24회로 졸업한 전두환 대통령은 당연히 모교를 빛낸 동문일 것이고, 대구공고의 전신인 대구공업중을 거쳐 경북고교를 졸업했던 노태우 대통령도 당연히 대구공고의 자랑스런 인물일 것이다. 집권 후에 친북좌익행각을 보여주다가 죽은 김대중-노무현에 비해 전두환-노태우는 장기적으로 훨씬 더 애국적으로 평가될 것이다. 이런 전두환-노태우를 자랑스러운 동문으로 학교에 사진을 전시한 것은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니다. 김대중 도서관과 기념관이 곳곳에 있는 것에 비하면, 전두환과 노태우는 양반 중에 양반이다. 단지 민주화의 이름으로 깽판과 난동을 방자하게 즐겼던 민주화세력에게 안보와 법치를 확립했던 전두환과 노태우는 철천지 원수일 뿐이다.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민주화세력에게 원수라고 대한민국에 원수는 아닌데, 연합뉴스(대구)는 전두환-노태우를 찬양받지 못할 인물로 전제한 기사를 내보냈다. 연합뉴스는 &quot;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전.노 전 대통령이 군사반란을 통해 집권했고 재임 중 정치탄압과 함께 천문학적인 금액의 비자금을 받는 등 역사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며 부적절성을 지적했다&quot;고 전하면서 은근히 전두환-노태우를 매도하는 선동을 했다. 이는 좌익단체의 친북좌익선동에 놀아나는 꼴에 불과하다. 연합뉴스가 공정하고 진실한 언론기관이라면, 김대중과 노무현의 정치적 반역행위와 금전적 부패에 대해서 더 파악해서 국민들에게 알려야 할 것이다. 독재보다는 선동이 더 사악하다는 사실을 연합뉴스는 명심하고 뉴스를 생산해야 한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전두환과 노태우는 장기적으로 김대중과 노무현보다 훨씬 더 호평받을 것이다. 연합뉴스가 소개한 &quot;이들의 과오와 더불어 전두환 전 대통령은 5년 단임제를 실천하고 80년대 경제발전을 이끌었고 노태우 전 태통령은 북방외교를 지휘하는 등 역사적 공과(功過)가 병존한다&quot;는 시민의 평가가 더 정상적이고, 장기적으로 더 국민들에게 깊이 수용될 것이다. &quot;전직 대통령 사진은 뚜렷한 족적을 남긴 각계각층의 동문을 선정한 것으로 정치적 해석을 사양한다. 전문계고 위상이 추락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해 취한 조치&quot;라는 입장을 밝힌 대구공고 관계자의 주장이 정상이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전두환-노태우의 사진이 모교인 대구공고에 걸리지 않아야 한다고 전제하는 연합뉴스는 편파적이고 패륜적이지 않는가? 전두환과 노태우를 마치 망국노라도 되는 듯이, 그들의 사진이 모교에 나란히 걸리는 것을 이상하게 보는 언론인들과 좌익운동가들이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시민으로서 무자격자들이다. 지난 10월 19일에는 '평화의 댐'을 방문하고, 25일에는 모교 총동문회 체육대회에 참석하는 등 전두환 전 대통령은 건강을 과시하며 대외활동을 하고 있다. 대한민국에 악업을 많이 쌓고 사라진 김대중과 노무현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나빠질 것이고, 10.26사건 뒤에 안보와 법치를 다잡은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갈수록 더 좋아일 것이다. 전두환을 악마시하는 마녀사냥은 좌익세력의 시대착오적 인민재판이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quot;&gt;&amp;nbsp;연합뉴스는 좌편향적 시각을 바꿔야 한다. 민주화세력의 반란깽판, 친북행각, 반미행각이 군부안보세력의 안보강화, 치안확립, 권위주의보다 더 대한민국의 장래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연합뉴스는 명심하고 기사들을 생산해야 할 것이다. 물론 다른 언론기관의 기자들도 민주화에 홀린 시각을 공정하게 조정해야 할 것이다. 대구공고가 전두환과 노태우의 사진들을 자랑스런 동문으로 게재한 것은 전혀 뉴스거리가 아니다. 연합뉴스가 그런 기사를 쓸 시간을 가진 기자들을 데리고 있으면, 김대중의 비자금, 매국행각, 반역행각, 신동아그룹 약탈, 그리고 광우난동사태 선동을 재조명하기 바란다. 한국 언론인들의 수치를 모르는 선동행각이 안타깝다. &lt;/SPAN&gt;&lt;/FONT&gt;
&lt;P&gt;&amp;nbsp;&lt;/P&gt;
&lt;P&gt;[조영환 / 언론인]&lt;/P&gt;
&lt;P&gt;&amp;nbsp;&lt;/P&gt;&lt;/P&gt;
&lt;TBODY&gt;&lt;/TBODY&gt;&lt;/TABLE&gt;
	    </content>
	    	</entry>
      </fe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