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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생각나누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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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5T23:03:5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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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주말 나들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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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들꽃</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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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5T23:03:54Z</updated>
	    <published>2009-11-05T23:03:5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지난 주 일요일에 딸들이랑 운문사에 다녀왔다.&lt;/P&gt;
&lt;P&gt;1시간 거리에다 가는 길목도 단풍으로 예쁠 것 같아 선택했다.&lt;/P&gt;
&lt;P&gt;회사에서 팔공산으로 오전 아웃팅을 가서 본 멋진 단풍길로&lt;/P&gt;
&lt;P&gt;데려갈까 했지만, 주말엔&amp;nbsp;상춘객들이 밀려 주차할 곳도 마땅치 않을 것 같아 포기.&lt;/P&gt;
&lt;P&gt;그리고 또,대구 시내로 들어가고 싶지도 않았다.&lt;/P&gt;
&lt;P&gt;한주내내 복잡한 시내, 복잡한 골목을 운전해야하기에 &lt;/P&gt;
&lt;P&gt;휴일하루만은 피하고 싶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운문사도&amp;nbsp; 진입로로 접어들었을 땐 차가 멈춘 듯,&lt;/P&gt;
&lt;P&gt;엑셀을 밟을 일이 없었다. 겨우 주차해놓고&amp;nbsp; 산책로를 걸었다.&lt;/P&gt;
&lt;P&gt;운문사 앞에서 뽑은 자판기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lt;/P&gt;
&lt;P&gt;사람들의 모습은 하나같이 밝아보여 좋았다.&lt;/P&gt;
&lt;P&gt;란이 민이도 밝아서 행복했다.&lt;/P&gt;
&lt;P&gt;운문사 곁으로 흐르는 냇가에 내려가보니&amp;nbsp; 깨끗한 돌과 물고기들이&lt;/P&gt;
&lt;P&gt;맑은 물의 친구가 되어주고 있었다.&lt;/P&gt;
&lt;P&gt;다슬기도 보인다. 애들이랑 하나 둘 잡는 재미에 더 오래 머물렀다.&lt;/P&gt;
&lt;P&gt;드문 드문 있어서 처음엔 그냥 잡는 재미만 맛보고 놓아두려했는데 &lt;/P&gt;
&lt;P&gt;잡다보니 한 주먹넘게 잡았다. &lt;/P&gt;
&lt;P&gt;&quot; 오늘 진짜 잘 온 것 같아요.&quot;&lt;/P&gt;
&lt;P&gt;민이가&amp;nbsp; 좋아라 하며 활짝 웃는다.&lt;/P&gt;
&lt;P&gt;돌아오는 길에 근처에서 콩잎 삭힌 것을 사서 오자마자 콩잎무침을 했다.&lt;/P&gt;
&lt;P&gt;민이가 먹고 싶어했었는데 해줄 수 있어서 좋았다.&lt;/P&gt;
&lt;P&gt;피곤할 줄 알았는데&amp;nbsp; 머리가 맑아져서 더 개운했다.&lt;/P&gt;
&lt;P&gt;다음에는 은해사를 가볼까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진은 란이가 내일 올려준단다. &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자신에게 작은 투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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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10-30T00:37:54Z</updated>
	    <published>2009-10-30T00:37:5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출근하지않는 유일한 목요일,&amp;nbsp; 회관에 들렀다가 점심을 먹고 &lt;/P&gt;
&lt;P&gt;식당에 설거지는 많이 쌓여있는데 설거지할 사람이 없는 것을 보니&lt;/P&gt;
&lt;P&gt;그냥 나올 수가 없어 모처럼 내게 설거지할 기회가 왔나 싶은 맘에&lt;/P&gt;
&lt;P&gt;담당 선사를 도와 설거지를 하고 나니 맘은 개운했다.&lt;/P&gt;
&lt;P&gt;차량유대가 많이 들어가서 반야월에 차를 세워두고 회관까진&lt;/P&gt;
&lt;P&gt;지하철을 탔는데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폰을 찾으니 &lt;/P&gt;
&lt;P&gt;폰이 없었다. 아차~~ 신문 본다고 옆에 뒀다가 그냥 두고 내린 것이다.&lt;/P&gt;
&lt;P&gt;종점인 안심까지는 2코스밖에 되지 않아 그나마 얼마나 다행인지...&lt;/P&gt;
&lt;P&gt;어휴~~ 기름값 아끼려다 시간은 더 걸린셈이 돼버렸네.ㅎㅎ&lt;/P&gt;
&lt;P&gt;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가서 할 일은 많은데 오늘은 기분이 그랬다.&lt;/P&gt;
&lt;P&gt;없는 살림에다&amp;nbsp; 워낙 아끼고 사는 알뜰함까지 몸에 배여&lt;/P&gt;
&lt;P&gt;절약하고 살지만 그래도 문득 문득 이런 생활이 불만족으로&lt;/P&gt;
&lt;P&gt;치밀어오를 때가 있다.&lt;/P&gt;
&lt;P&gt;바로 오늘이 그랬다.&lt;/P&gt;
&lt;P&gt;훌쩍 커버린 민이가 바지가 맞는게 없다는 걸 아침에야 알았다.&lt;/P&gt;
&lt;P&gt;마른편이라 품은 맞는데 소매며 길이가 짧았다.&lt;/P&gt;
&lt;P&gt;추석무렵 정가는 비싸서 사지 않았던 바지가 반값이었다.&lt;/P&gt;
&lt;P&gt;청바지와 후드집업을 사오면서도 약간 우울함이 계속 감돌았다.&lt;/P&gt;
&lt;P&gt;그래도 민이가 오면 기분좋으라고 옷을 쇼파에 펼쳐놓았다.&lt;/P&gt;
&lt;P&gt;역시나 수업을 하고 오니 민이 기분이 만땅에 차 있다.&lt;/P&gt;
&lt;P&gt;새 옷을 사서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디자인이 제 맘에 꼭 든다고 했다.&lt;/P&gt;
&lt;P&gt;새끼가 좋아하니 애미맘은 더 좋다.&lt;/P&gt;
&lt;P&gt;란이옷도 사줘야 하는데 마땅한 게 보이지않아 옥션에 들어가서 고르게 했다.&lt;/P&gt;
&lt;P&gt;공부하다 달려와 신나게 고르고&amp;nbsp; 나도 정장 한벌과 가방하나를 적당한 가격에&lt;/P&gt;
&lt;P&gt;낙찰했다. 방문교사다보니 단정한 옷차림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lt;/P&gt;
&lt;P&gt;비싼 옷 보다는 늘 아주 저렴하면서도 그리 처져보이지않는 옷을 택하는 것이&lt;/P&gt;
&lt;P&gt;내 스타일이다.&amp;nbsp; 그렇게 입어도 비싼 옷처럼 봐줄 때가 많으니 다행이지만.. ㅎ&lt;/P&gt;
&lt;P&gt;쓸려고 계획하지않아서 비상금을 털었다.&lt;/P&gt;
&lt;P&gt;망설였지만 나를 위해 이 정도의 투자는 해도 되지않을까 자위하며 오늘 하루를 접는다.&lt;/P&gt;
&lt;P&gt;가을에 가을을 그렇게 느껴보는거지뭐...&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발음 연습문장</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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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10-08T22:40:43Z</updated>
	    <published>2009-10-08T22:40:4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발음 연습문장 &lt;BR&gt;&lt;BR&gt;1.들의 콩깍지는 깐 콩깍지인가 안깐 콩깍지인가. 깐 콩깍지면&lt;BR&gt;어떻고 안 깐 콩깍지면 어떠냐. 깐 콩까지나 안 깐 콩깍지나&lt;BR&gt;콩깍지는 다 콩깍지인데&lt;BR&gt;&lt;BR&gt;2.간장 공장 공장장은&amp;nbsp;간 공장장이고. 된장 공장 공장장은 된&lt;BR&gt;공장장이다.&lt;BR&gt;&lt;BR&gt;3.작년에 온 솥장수는&amp;nbsp;헌 솥장수이고, 금년에 온 솥장수는&amp;nbsp;새 솥&lt;BR&gt;장수이다.&lt;BR&gt;&lt;BR&gt;4.상표 붙인 큰 깡통은 깐 깡통인가?안깐 깡통인가?&lt;BR&gt;&lt;BR&gt;5.신진 샹송가수의 신춘 샹송쇼&lt;BR&gt;&lt;BR&gt;6.서울특별시 특허허가과 허가 과장&amp;nbsp; 허 과장&lt;BR&gt;&lt;BR&gt;7.저기 저 뜀틀이 내가 뛸 뜀틀인가 내가 안 뛸 뜀틀인가&lt;BR&gt;&lt;BR&gt;8.앞집 팥죽은 붉은 팥 풋팥죽이고, 뒷집 콩죽은 해콩단콩 콩죽,&lt;BR&gt;우리집 깨죽은 검은깨 깨죽인데 사람들은 해콩 단콩 콩죽&lt;BR&gt;깨죽 죽먹기를 싫어하더라.&lt;BR&gt;&lt;BR&gt;9.우리집 옆집 앞집 뒤창살은 홑겹창살이고, 우리집 뒷집 앞집&lt;BR&gt;옆창살은 겹홑창살이다.&lt;BR&gt;&lt;BR&gt;10.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긴 기린 그림이고 니가 그린 기린&lt;BR&gt;그림은 안 긴 기린 그림이다.&lt;BR&gt;&lt;BR&gt;11.저기 계신 저 분이 박 법학박사이시고, 여기 계신 이분이 백 &lt;BR&gt;법학 박사이시다.&lt;BR&gt;&lt;BR&gt;12.저기 가는 저 상장사가 새 상 상장사냐 헌 상 상장사냐.&lt;BR&gt;&lt;BR&gt;13.중앙청 창살은 쌍창살이고, 시청의 창살은 외창살이다.&lt;BR&gt;&lt;BR&gt;14.멍멍이네 꿀꿀이는 멍멍해도 꿀꿀하고, 꿀꿀이네&lt;BR&gt;멍멍이는 꿀꿀해도 멍멍하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5.시골찹쌀 촌찹쌀&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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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프루스트클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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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10-04T16:41:52Z</updated>
	    <published>2009-10-04T16:41:5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수개월동안&amp;nbsp; 역사나 단편 문학 명작 등에 무게를 실어 책을 읽으면서 가볍게 읽히는 책은 &lt;/P&gt;
&lt;P&gt;옆으로 비켜놓았었다. 시간이 없기도 했고 또 왠지 마음의 끌림이 없어서였다.&lt;/P&gt;
&lt;P&gt;요즘은 다시 휴식하는 기분으로 창작들을 읽고 싶어져서 처져있는&amp;nbsp; 내 심리도 끌어올릴겸 읽기 시작했다.&lt;/P&gt;
&lt;P&gt;그 중에 하나 '프루스트 클럽'&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 줄거리&lt;/P&gt;
&lt;P&gt;'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카페 이름을 보며 윤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amp;nbsp;저서를 생각한다.&lt;/P&gt;
&lt;P&gt;도서관에서 그 책을 찾던 중, 마침 그 책을 읽어볼까 생각했다던 나원이를 처음 만난다. &lt;/P&gt;
&lt;P&gt;윤오와 나원이는 아주 대조적인 성격이다. 윤오는 세상과 단절돼 있는 듯 마음을 닫고 고뇌하지만&lt;/P&gt;
&lt;P&gt;나원이는&amp;nbsp;그 답답함을 나름대로 분출하고&amp;nbsp; 주변의 막을 걷어내가며 자기 시간을 다듬어가는 아이다.&lt;/P&gt;
&lt;P&gt;틀에 매인 교육이 맞지않아 자퇴를 하고&amp;nbsp; 알바를 하며 책도 읽고 나름 공부를 해나간다. &lt;/P&gt;
&lt;P&gt;마음에서 모든 것과 단절시켜버린 윤오는 그런 나원이가 낯설면서도 이끌린다.&lt;/P&gt;
&lt;P&gt;둘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카페에 들러고 카페 주인인 오데뜨와 알바생 제영군과 만난다.&lt;/P&gt;
&lt;P&gt;오데뜨는&amp;nbsp;윤오와 나원이를 가족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며 둘은 매일같이 카페를 드나든다.&lt;/P&gt;
&lt;P&gt;둘은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amp;nbsp; 함께 읽자는 약속을 하며 프루스트클럽이라는 &lt;/P&gt;
&lt;P&gt;독서클럽을 만든다. 오데뜨는 카페구석에 공간을 만들어 주며&amp;nbsp; 창고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찾아 윤오에게&lt;/P&gt;
&lt;P&gt;준다.&amp;nbsp; 둘은 책이 어렵다 하면서도&amp;nbsp; 이야기나누며 읽어나간다.&lt;/P&gt;
&lt;P&gt;전학 온 학교에서 윤오는 왕따나 마찬가지다. 그 테두리를 친 건 윤오가 먼저였다.&lt;/P&gt;
&lt;P&gt;학교 도서실에서 야자를 하던 어느 날 부반장 효은이가 말을 건다. 학교안에서 철저히 혼자이며 딱히 그런 것에 신경도&lt;/P&gt;
&lt;P&gt;쓰고 싶지않은 윤오. 효은이도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는 그런 윤오에게 관심을 가지며 책에 관련된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lt;/P&gt;
&lt;P&gt;웃으며 거부감없이 윤오의 영토안으로 성큼 들어오는 효은이를 윤오도 자연스레 받아들인다.&lt;/P&gt;
&lt;P&gt;효은이는 공부 잘하고 얼굴도 예쁘고 노래도 잘하는, 많은 것들을 가진 아이다.&lt;/P&gt;
&lt;P&gt;효은이도 프루스트클럽 회원이 되어 이젠 셋이 모인다.&lt;/P&gt;
&lt;P&gt;카페에서 늘 숫기없이 할 일만 하는 제영군이 비보이라는 사실에 다들 놀라고 얼마 후 대회 때&amp;nbsp;오데뜨와 셋은 제영군을 응원하러 간다.&lt;/P&gt;
&lt;P&gt;윤오는&amp;nbsp; 마르고 조그만 몸에서 마구 뿜어져나오는 제영군의 몸짓에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람으로, 어떤 사람인지를 느꼈다. &lt;/P&gt;
&lt;P&gt;제영군의 모습도 윤오에게 특별한&amp;nbsp; 자극이 된다.&lt;/P&gt;
&lt;P&gt;평소 자신을 많이 드러내지 않던 윤오는 어렵게 전학오기 전의 이야기를 꺼낸다. 자신을 귀찮게 하던 아이를 의자로 때려서 죽일 뻔&lt;/P&gt;
&lt;P&gt;했던 일을 꺼내고 오데뜨의 충고로 그 아이를 찾아가 사과를 한다.&lt;/P&gt;
&lt;P&gt;많은 것을 가진 효은이는 아버지한테 맞고 사는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겉으로는 모든 것을 가진 삶이지만 그 안에서&lt;/P&gt;
&lt;P&gt;곪아가는 것조차 감추려는 효은엄마의 답답한 삶이 들여다보인다.&lt;/P&gt;
&lt;P&gt;송년파티를 끝내고 새해를 맞은 후, 그들에게 아무말도 남기지 않은채 카페가 문을 닫아버린다.&lt;/P&gt;
&lt;P&gt;나원이는 캐나다에 있는 외삼촌이 불러서 유학을 가게 된다.&amp;nbsp;&amp;nbsp;&amp;nbsp; 나원이의 떠남이 윤오에게 커다란 충격이 된다. &lt;/P&gt;
&lt;P&gt;이학년이 되어 다른 반이 된&amp;nbsp; 효은이가 자살했다는 소리를 듣는다.&amp;nbsp; &lt;/P&gt;
&lt;P&gt;겨우 열게된 윤오의 마음은&amp;nbsp;&amp;nbsp;다시 혼자 남아&amp;nbsp; 혼란스러움으로 문을 닫으려 한다.&lt;/P&gt;
&lt;P&gt;미술관에서 고호의 그림을 발견하고 친구들과 맞췄던 퍼즐을 떠올리며 깨어졌으니 버리려고 했었던 추억들을&amp;nbsp; 다시 기억하고&lt;/P&gt;
&lt;P&gt;깨졌다 다시 맞춰진 흔적이 남아 더욱 아름답게 뭔가가 쌓여갈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p39&amp;nbsp;나원이의 특별함&lt;/P&gt;
&lt;P&gt;p42 쌀죽&amp;nbsp;&amp;nbsp;&amp;nbsp; 꾸미지 않고 더하지 않은 이게 좋아. 거창한 식사를 할 때도 가끔 쌀죽이 생각나. 내가 원하는 건 그것뿐인데, 넘치게 받는 것도 싫은 일이구나...&lt;/P&gt;
&lt;P&gt;p77&amp;nbsp; ' 왜 내가 여기에 이러고 있어야 하지?&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왜 내가 평온을 가장하고 이렇게 시들어 가야하지?&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해결책은 없다. 벗어날 구멍은 없다. 빛도 없다.&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초라한 상상력을 두르고 추위에 떨면서 나아가라.&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한없이 가난하고 한없이&amp;nbsp; 얄팍한 이 생.&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분노를 잠재우는 것은 포기뿐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혐오를 가라앉히는 것은 도피뿐인가.&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모든 것이 너무나 뻔해서&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가치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별할 수 없어서&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그만둬 버린다.&lt;/P&gt;
&lt;P&gt;p80&amp;nbsp;&amp;nbsp;&amp;nbsp;&quot; 테두리를 정하고 그리고 안을 잘 채우기. 테두리 밖의 퍼즐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될까?&quot;&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테두리 밖에도 퍼즐조각들이 있다고&amp;nbsp; 생각해?&quot;&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quot;나는 늘 그런 기분이야.&quot;&lt;/P&gt;
&lt;P&gt;p86&amp;nbsp;&amp;nbsp; 사람의 열등감과 우월감은 시계추의 폭처럼 양쪽으로 똑같이 오간다고 한 적이 있다. 우월감이 높을 수록 열등감도 깊은 것이라고.&lt;/P&gt;
&lt;P&gt;p125&amp;nbsp; 그 생기가 나에게까지 전해져 왔다. 보는 사람들도 앉아서 보고만 있지 않는다. 손뼉을 치고 환호성을 지르고 마구 웃어댄다, 감탄한다.&lt;/P&gt;
&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어느 틈엔가 나도 그러고 있었다.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고 손이 아프도록 박수를 치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았다. 더 이상 위화감도 없었다. 나는 사회자의 농담에 따라 웃고 소리 지르고 아쉬워했다. 다른 모두와 함께 거기엔 그런 일체감이 있었다. 전혀 다른 아이들을 하나로 묶어 놓는 것. 학교에서처럼 똑같은 옷을 입히고 종을 울려 불러 모으지않아도 이렇게 즐거워하며 함께 반응할 수도 있었다.&amp;nbsp; 나는 살아 있다.&lt;/P&gt;
&lt;P&gt;p172&quot; 안정된 원소는 분열하지도 않으니까. 뭔가 만들어지려면 괴롭고 슬프고, 그런 게 필요하거든.&quot;&lt;/P&gt;
&lt;P&gt;p197 &quot;네가 그렇게 자신을 내보였는데 내가 맞게 행동하지 못하면 어쩌나 두려웠어.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할까 봐 겁이 났어. 하지만 그러다가 맞는 말을 하지 못해서 네가 말한 것을 후회하게 만든다면 어쩌지, 무서웠어. 말을 하는 것도 하지 않는 것도 어려웠어.&quot;&lt;/P&gt;
&lt;P&gt;p258 부서진다. 깨진다. 끝나긴 했어도 남아 있었는데. 아프긴 했어도 언젠가는 웃으며 그때를 이야기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lt;/P&gt;
&lt;P&gt;p260 나는 문을 닫기로 했다. 깨진 조각들을 그 안에 남기고서. 그 문은 내가 원하지 않았을 때에, 생각도 못했을 때에 닫혔던 것이지만 사실 내 안에서는 열려 있었던 것을 이제 나는 정말로 닫는 것을 택했다.&lt;/P&gt;
&lt;P&gt;p263 책을 마저 읽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읽다 멈추고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amp;nbsp;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겠지만, 읽다 멈추고 다시 시작하고&amp;nbsp; 그렇게 반복하게 될지도 모르지만 나는 책을 읽을 것이다. 다원이에게 편지를 쓸 것이다.&lt;/P&gt;
&lt;P&gt;왜 부서져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잊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lt;/P&gt;
&lt;P&gt;내게 남은 것은 기억. 흉터가 되어 가는 상처. 하지만 흉터라도 있는 게 나으니까. 내 밋밋한 얼굴을 그 길고 깊은 흉터를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되어 갈거야. 나만의 얼굴이 되어 갈거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심생각&amp;nbsp;&amp;nbsp; 부서져도 아름다울 수 있다. 안정된 원소는 분열하지 않는다. 창조에는 괴로움 슬픔이 따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지도방향제시&amp;nbsp;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상처들은 성장해나가기 위한 발판임을 스스로 깨닫고 상처를 껴안아가기.&lt;/P&gt;
&lt;P&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읽기 전 발문&amp;nbsp;&amp;nbsp; &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 제목만 봤을 때 이 책은 어떤 내용일 것 같애?&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읽기 후 발문&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 p39 윤오가 생각한 나원이의 특별함이란 어떤 것일까?&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p77 나원이의 낙서를 읽으며 내가 느낀 생각은?&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p80&amp;nbsp;&amp;nbsp;&amp;nbsp;&quot; 테두리를 정하고 그리고 안을 잘 채우기. 테두리 밖의 퍼즐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어떻게 될까?&quo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테두리 밖에도 퍼즐조각들이 있다고&amp;nbsp; 생각해?&quot;&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quot;나는 늘 그런 기분이야.&quot;&amp;nbsp;&amp;nbsp; 윤오가 생각하는 테두리 밖의 퍼즐조각은 어떤 것일까?&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p86 우월감이 높을 수록 열등감도 깊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 윤오가 제영군의 춤을 보며 느낀 생동감, 예전에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댄스 축제에서의 함께 어우러짐의 감동을 보며 우리가 &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amp;nbsp;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p172&quot; 안정된 원소는 분열하지도 않으니까. 뭔가 만들어지려면 괴롭고 슬프고, 그런 게 필요하거든.&quot; 이 말의 의미는?&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효은이의 자살에 대한 생각은?&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p263 '왜 부서져도 아름다운 것이라고, 잊을 수 없는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내게 남은 것은 기억. 흉터가 되어 가는 상처. 하지만 흉터라도 있는 게 나으니까. 내 밋밋한 얼굴을 그 길고 깊은 흉터를 &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되어 갈거야. 나만의 얼굴이 되어 갈거야.'&amp;nbsp;윤오의 마지막 독백을 읽고 나의 길을 한번 생각해보고&lt;/P&gt;
&lt;P class=바탕글 style=&quot;MARGIN-BOTTOM: 1.6pt&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내 미래지도를 그려가 보자.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독서퀴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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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dandyyoon7.17445936</id>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09-23T10:23:36Z</updated>
	    <published>2009-09-23T10:23:3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하늘 말나리야 독서퀴즈&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작가는&lt;/P&gt;
&lt;P&gt;주인공들의 이름은&lt;/P&gt;
&lt;P&gt;미르 엄마의 직업은&lt;/P&gt;
&lt;P&gt;바우가 앓고 있는 병은&lt;/P&gt;
&lt;P&gt;소희는 누구와 사나&lt;/P&gt;
&lt;P&gt;바우가 슬플 때 가는&amp;nbsp; 곳은&lt;/P&gt;
&lt;P&gt;소희가 작은집에 가는 이유는&lt;/P&gt;
&lt;P&gt;바우와 미르는 소희가 떠나기전 무엇을 주었나&lt;/P&gt;
&lt;P&gt;바우가 소희에게 하늘 말나리와 닮았다고 한 이유는&lt;/P&gt;
&lt;P&gt;주인공들 각각의 장래희망은&lt;/P&gt;
&lt;P&gt;느티나무의 수령은&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내 삶의 계단이 하나 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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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08-19T21:07:12Z</updated>
	    <published>2009-08-19T21:07:1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내 정신을&amp;nbsp; 숨돌릴틈없이 긴장시켰던 7,8월&lt;/P&gt;
&lt;P&gt;그래도 한가지 좋았던 것은 잡념에서 벗어났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휴가때 시간없어 망설이다&amp;nbsp; 건강이 그래도 가장 소중하다 싶어&lt;/P&gt;
&lt;P&gt;병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았다.&lt;/P&gt;
&lt;P&gt;결과엔&amp;nbsp; 모두가 '인체운동부족'이며 계속 이 상태로 갈 경우,&lt;/P&gt;
&lt;P&gt;심근경색, 치매 등 아주 끔찍한&amp;nbsp; 손님이 찾아 올거라 했다.&lt;/P&gt;
&lt;P&gt;바쁘다고,&amp;nbsp; 잠깐 운동할 시간도 아깝다고 , 나중에 열심히 하지뭐, 하며 미뤘던 운동&lt;/P&gt;
&lt;P&gt;이젠 더는 미룰 순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lt;/P&gt;
&lt;P&gt;운동하기 싫어하는 란이도 엄마의 결과표를 보고선 등산을 하겠노라고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지난 일요일에 갖바위 뒷길을 다녀왔다.&lt;/P&gt;
&lt;P&gt;올라갈 땐 힘이 들어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올라가더니&lt;/P&gt;
&lt;P&gt;내려올 땐 밝은 표정이 되어 맛있는 떡도 사먹으며 내려왔다.&lt;/P&gt;
&lt;P&gt;다음에도 오자니까 싫다고는 하지않았다.&lt;/P&gt;
&lt;P&gt;작은 시작이고 아주 평범한거지만&amp;nbsp; 참 소중한 시작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lt;/P&gt;
&lt;P&gt;비록 낮은 산행이지만 산을 오른다는 것은 참 많은&amp;nbsp; 것을 얻는다는 생각도 하고...&lt;/P&gt;
&lt;P&gt;산을 오르는 동안 우린 삶의 인내도 함께 배우니 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요즘은 마음이 부쩍 바빠진다.&lt;/P&gt;
&lt;P&gt;아이들과 좀더 많이 시간을 나누고 싶어서다.&lt;/P&gt;
&lt;P&gt;아이들과 산행을 함께 하는 것은&amp;nbsp;아이들에게 건전한 사고와 정신도 함께&amp;nbsp; 선물하는 것이리라.&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겨울방학 땐 본격적인 여행계획을 세워 문화유적탐사를 꼭 해야겠다.&lt;/P&gt;
&lt;P&gt;이젠 막연한&amp;nbsp;바람으로만 여기지않고&amp;nbsp; 실현해나갈 수 있을 것 같다.&lt;/P&gt;
&lt;P&gt;내 보물들이 더 자라기전에......&lt;/P&gt;
&lt;P&gt;지금보다 훨씬 많이 어렸을 적에, 엄마의 손길이 많이 필요했던 진짜 그때에&lt;/P&gt;
&lt;P&gt;너무 외롭게 놔두었던 시간들이 많이 미안한 엄마다.&lt;/P&gt;
&lt;P&gt;내 삶의 계단에 조심스럽게 조금은 안정된 발걸음을 올려놓은 느낌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배우 정진영의 멋진 한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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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dandyyoon7.17445931</id>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08-13T18:52:18Z</updated>
	    <published>2009-08-13T18:52:1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전여옥 의원님께.&lt;BR&gt;&lt;BR&gt;저는 배우 일을 하는 정진영이라고 합니다. 전 의원님과 일면식도 없습니다. 의원님의 지역구에 살지도 않고, 여러 사회적 사건에 있어 의원님과 미주알고주알 의견을 주고받을 일도 없습니다. 의원님도 아시다시피 국회의원과 배우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가 있고, 서로 무릎을 맞대고 국정을 논하거나 시나리오 회의를 할 일이 없으니까요. &lt;BR&gt;&lt;BR&gt;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 글을 올리는 것은, 최근 인터넷에 보도된 바 있는 배우 김민선씨에 대한 전 의원님의 글 때문입니다. 물론 전 의원님의 개인 홈페이지에 게재된 글이고 제게 개인적으로 의견을 표명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제가 글을 올리는 것이 온당치 않을지도 모릅니다. &lt;BR&gt;&lt;BR&gt;허나 1년 전 자신의 홈페이지에 미 쇠고기 수입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올린 글 때문에 이틀에 걸쳐 쇠고기 수입업체로부터 피소당하고 전 의원님으로부터 행동의 지적을 받은 동료 배우 김민선씨의 현재 상황을 생각해보면, 그리고 아무 대응도 못하고 그저 웅크리고 있는 그의 속 타는 심정을 헤아린다면 누군가 그녀의 마음을 대신 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이 글을 올립니다.&lt;BR&gt;&lt;BR&gt;모든 시민은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리가 있습니다 &lt;BR&gt;&lt;BR&gt;아시다시피 김민선씨는 배우입니다. 그는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이 사회의 한 구성원입니다. 의원님이 글에서 &quot;배우, 가수, 탤런트, 개그맨--저는 그들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존중합니다&quot;라고 말씀하셨다시피, 한 사회의 구성원은 사회 현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표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직업이 무엇이든지 말이죠. &lt;BR&gt;&lt;BR&gt;의원님은 &quot;영향력이 남다르기 때문에 공인인 연예인들은 '자신의 한마디'에 늘 '사실'에 기초하는가?라는 매우 기본적이고 기초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quot; 라고 쓰셨습니다. 차분한 어조셨고, 정치인으로서 충분히 자신의 홈페이지에 올릴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lt;BR&gt;&lt;BR&gt;허나 의원님의 말씀에는 상당한 논리적 비약이 있으며 결과적으로 온당치 못한 결론이 내려졌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lt;BR&gt;&lt;BR&gt;모든 시민은 자신의 견해를 밝힐 권리가 있습니다. 물론 연예인도 마찬가지이구요. 김민선씨가 광우병 정국의 초입에 대중의 관심을 끄는 발언을 한 것도 사실입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홈페이지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우려를 표현한 문장이, 선동적인 문구로 언론에 보도된 것이지요. &lt;BR&gt;&lt;BR&gt;김민선씨는 쇠고기 수입에 대한 시민으로서의 견해를 밝혔습니다. 하지만 쇠고기 수입업체는 그녀가 허위사실을 유포했다고 몰아붙이고 있고, 의원님 또한 사실에 기초했는지 신중했어야 한다고 충고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일이지요. 김민선씨가 도대체 어떤 허위사실을 말했다는 것이죠? &lt;BR&gt;&lt;BR&gt;일 년 전 많은 시민들은 광우병 소가 수입될 수 도 있다는 우려를 표했고, 그 우려는 시민이 가질 수 있는 정당한 우려입니다. 자신이 먹을 것이 위험할까 걱정된다는 것이 허위사실 유포인가요? 사실에 기초하지 않은 견해인가요? 그렇다면 도대체 사실에 기초한 것은 무엇인가요? &lt;BR&gt;&lt;BR&gt;이미 일 년이 지난 일이고, 대개의 '사실'들이 밝혀졌습니다. 정부에서 쇠고기 수입과정에서 주무부서의 실수를 인정했고, 성급한 협상에 대한 시민들의 항의를 받아들여, 이런저런 행정상의 추가 보완조치도 취했습니다. &lt;BR&gt;&lt;BR&gt;의원님께서도 이른바 공인에 대한 상반된 개념정의를 거론하셨듯이, 배우 등 연예인이 과연 공인인가 아닌가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의원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예인의 한마디 한마디가 '공적신호'로 '코드화'되고 사회적인 영향력이 막강하므로 공인으로 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lt;BR&gt;&lt;BR&gt;영향력이 막강하므로 연예인을 공인으로 봐야한다는 의원님의 논리를 차용하자면, 정부가 실수를 인정하고 추가 보완조치를 취했음으로 시민의 우려가 사실이었다라고 봐도 무방하지 않나요? &lt;BR&gt;&lt;BR&gt;그 말은 그만해야겠습니다. 이제 제가 진짜로 드리고 싶은 말씀을 드려야겠네요.&lt;BR&gt;&lt;BR&gt;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우려가 정치적 견해인가요. &lt;BR&gt;&lt;BR&gt;어떤 연예인이 선거 국면에 있어 특정후보를 지지하고 선거운동을 한다면 그것은 이른바 정치적 견해 내지 정치행위라고 봐도 무방하겠지요. 의원님께서는 이른바 연예인의 다양한 정치적 견해를 존중한다 하셨습니다. 내편이든 아니든 상관 않고 말입니다. &lt;BR&gt;&lt;BR&gt;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 어째서 정치적 견해가 되는 것일까요? 연예인이 공인이라는 논리에 저는 동의하지 않지만, 백번 양보하여 그렇다 하더라도 공인인 연예인이 한 말은 모두 정치적 견해입니까? 자기가 먹을 것이 위험하다 우려해도 정치적 견해인가요? 사회현안에 대해 이야기 했다면 그것은 모두 정치적인 것인가요? &lt;BR&gt;&lt;BR&gt;정치행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권력획득이라고 저는 알고 있습니다. 권력획득의 주체가 정당으로 현실화되고, 그 정당은 자신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해 권력을 쟁취하려 하는 것이 곧 정치행위가 되겠죠. 또 한편으로 정치의 기본은 '편가름'이라고 저는 봅니다. 정당은 그 편가름의 현실적 실체이구요. &lt;BR&gt;&lt;BR&gt;시민으로서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여러 현안에 관심을 갖고 의견을 표명하는 것은 권력을 쟁취하려는 정치행위가 아니라, 시민으로서의 기본권리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은 편 가름에 기초한 행위가 아니라 네편 내편을 넘어선 것입니다. 상대방은 무조건 보수꼴통이고 좌빨이라는, 무지막지한 편가름을 저는 경멸합니다. &lt;BR&gt;&lt;BR&gt;의원님께서는 공인인 연예인은 자신의 한마디가 사실에 기초해 있는가를 먼저 알아보아야 한다고 하셨는데, 그것은 연예인만이 아니라, 더 나아가 공인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그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의무를 왜 굳이 '대중에 대한 영향력이 막강한 연예인'에게만 요구하시나요? 연예인을 넘어 공인을 넘어 모든 인간은 사실에 기초한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그리고 누가 뭐래도 공인인 정치인은 더욱 그래야겠지요. &lt;BR&gt;&lt;BR&gt;자신의 말이 사실에 기초한 것인지를 확인하라는 말도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이란 게 대체 뭘까요? 진실의 다른 이름인가요? 저는 이 세상에서 진실이 항상 대접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절대적인 진리란 말도 좀 반대하는 편이구요.&lt;BR&gt;&lt;BR&gt;특히 정치적인 논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논리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흔히 말하는 정치적 전략과 전술은 진리를 구현하는 방법론이 아니라, 다만 이기기 위한 것일 뿐이지요. 이기면 반칙도 합리화되고, 거짓말도 합리화 되는 것이 정치의 세계이지요. 진실이든 아니든 사실이든 아니든 다중에게 호소하여 표를 얻는 행위가 정치행위이지요? 그렇게 얻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정치행위이지요? 제가 너무 냉소적인가요? 예, 저는 최소한 현실 정당과 정치인에 대해서는 냉소적입니다. &lt;BR&gt;&lt;BR&gt;하지만 저도 선거 때마다 투표를 합니다. 그것은 시민으로서의 저의 정치행위이지요. 하지만 누구를 찍겠다고 공개적으로 표명하거나 선거운동에 나선 적은 없습니다. 그게 저의 정치행위의 스타일이니까요. 다른 연예인이 선거운동에 나선다고 해서 비난한 적도 없고, 비난할 이유도 없습니다. 그것은 그의 정치행위 스타일이니까요. &lt;BR&gt;&lt;BR&gt;하지만 시민운동은 현실 정당 정치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시민운동은 권력쟁취 운동이 아니라 권력 감시 운동이니까요. 물론 좌든 우든 진보든 보수든 현실정당과 시민단체가 이념적인 협력전선을 형성하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야말로 협력일 뿐이지요. 시민운동은 권력을 얻으려 해서도 안되고, 권력을 얻는 순간 그 집단은 정당이 되어야 하며, 진정한 시민운동세력은 그 정당을 빠져나와 다시 권력 감시와 비판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lt;BR&gt;&lt;BR&gt;김민선씨 이야기를 하다가 왜 시민운동 이야기를 하는지 궁금하시겠지요. 김민선씨는 정치권력획득을 위해 견해를 표명한 것이 아니라, 시민으로서 자신의 견해를 표명한 것뿐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자 함입니다. 정치적 견해를 이야기해도 괜찮다면서 시민으로서의 견해 표명이 문제가 될 수 있나요? 그녀가 선거 때 어느 당에 표를 던졌는지는 모르지만,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한 적도 없고, 더 나아가 권력을 쟁취하려고 쇠고기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권력을 쟁취하려고 유권자를 미혹시킨 것이 아니고, 다만 먹을거리가 위험하다는 견해를 표했을 뿐이란 말입니다. 그게 그리도 잘못인가요?&lt;BR&gt;&lt;BR&gt;잘 알지 못하면 잠자코 있어라? &lt;BR&gt;&lt;BR&gt;인간은 누구나 사실을 이야기하고 싶어 합니다.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으면 거짓말쟁이가 되니까요. 거짓말쟁이는 나쁘다는 말을 우린 어릴적부터 숱하게 들어왔으니까요. 혹 의도치 않게 사실이 아닌 것을 옮길 때도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으니 옮기는 것이겠지요. &lt;BR&gt;&lt;BR&gt;사기꾼에게 당하지 않으려고, 거짓말쟁이에서 속아 넘어가지 않으려고 우린 애를 씁니다. 그래도 간혹 당합니다. 이른바 '사실' 이란 것도 그렇습니다. 광우병 쇠고기에 대해서 작년에 많은 전문가들의 논란이 있었습니다. 과학적 사실이란 것은 항상 논란거리입니다. 접근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가질 수 있는 것이 과학이거든요. 믿을 수 있는 과학자를 판별할 능력을 우린 갖고 있지 않고, 누구의 말이 맞는지 판별할 과학적 지식을 일반인은 갖고 있지 못합니다. &lt;BR&gt;&lt;BR&gt;시민에게 사실의 기초를 확인하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시민에게 사실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공인의 의무가 아닐까요? 김민선이라는 시민에게 사실의 기초를 확인하라고 충고할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실을 알 수 있도록 미리 알려주어야 합니다. 정치적 논리가 아닌 진짜 사실을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진짜 공인인 의원님의 의무라고 생각합니다. &lt;BR&gt;&lt;BR&gt;11일 김민선씨의 피소 뉴스를 접했고, 그때는 '참 너무들 하는군'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아는 법 상식으로는 혐의가 성립되지 않을 텐데 라는 한가한 생각도 했구요. 그러다 12일 의원님의 글을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접했습니다. 혹 전체 맥락을 오해할까봐 홈페이지를 방문해 전문을 읽었구요. 부분을 침소봉대해 전체를 비난하는 오류를 범하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그런다 해도 의원님의 의견에 동의가 안 되더군요. &lt;BR&gt;&lt;BR&gt;이 글을 쓰기 전에 김민선씨와 통화를 했습니다. 괴롭겠다며 위로를 했습니다. &quot;뭐 어쩌겠어요 가만히 있어야지요&quot;라는 말을 하더군요.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할 수 없는 어린 후배였습니다.&lt;BR&gt;&lt;BR&gt;그래서 저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글을 정치적 견해 표명으로 오해하시지 말기를 바랍니다. 이 글은 문화적 견해 표명입니다. 의원님의 말씀이 '잘 알지 못하면 잠자코 있어라'라는 말로 들려 그것은 참으로 문제가 있는 논리라는 생각이 들어 쓰는 글입니다. &lt;BR&gt;&lt;BR&gt;잘 알지 못하면 알려고 노력을 해야 하고, 최소한 자기가 아는 만큼의 발언을 할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사회는 그런 발언을 묵살하거나 무시할 것이 아니라, 혹 잘 모르고 있다면 설명을 해야 하며, 설득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것이 우리가 진정으로 추구해야할 합리적 사회의 문화적인 건강성 아닌가요? 전문가가 아니면 말하지 말라. 잘 모르면 가만히 있어라 라는 말은 소통을 근본적으로 차단하려는 병들고 시들어가는 반문화적인 언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lt;BR&gt;&lt;BR&gt;시민의 말을,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다르다고 하여 막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의원님의 견해를 많은 사람이 적극 지지하고 따른다면 좋겠지요. 하지만 정치인은 반대론자의 의견도 경청하고 설득해야 하는 것 아닌가요. 그러려고 노력한다 하시니 다행입니다. &lt;BR&gt;&lt;BR&gt;하지만 지금 제 머리 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오갑니다. 혹 의원님께서는 최소한의 자기방어에도 미숙한, 직업이 배우인 한 시민에게, 그녀가 최근에 겪고 있을 심리적 공황을 고려하지 아니하고, 너무 엄혹한 충고를 주시는 게 아닌가라는 야속함이 듭니다. &lt;BR&gt;&lt;BR&gt;그런 충고는 한 여배우에게 주시지 마시고, 남의 이야기는 절대 듣지 않으려하는, 자기 이야기만 하려고 하는 진짜 공인들에게 주시기 바랍니다. &lt;BR&gt;&lt;BR&gt;혹 '사실도 잘 모르는' 연예인들 입조심하라는 섬뜩한 경고로 들려 마음이 영 개운치 않습니다. &lt;BR&gt;&lt;BR&gt;2009년 8월 12일 &lt;BR&gt;정진영 올림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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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7세기 세계4대제국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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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들꽃</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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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8-04T11:25:46Z</updated>
	    <published>2009-08-04T11:25:4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id=user_contents style=&quot;DISPLAY: block; WIDTH: 100%&quot; name=&quot;user_contents&quot;&gt;&lt;!-- clix_content 이 안에 본문 내용 외에 다른 내용을 절대 넣지 말 것  --&gt;
&lt;P class=HStyle0&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lt;FONT size=3&gt;17세기 세계 4대 제국들&lt;/FONT&gt;&lt;/SPAN&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BR&gt;&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amp;nbsp;육상 세력이 해상 세력에 밀려나는 17세기의 세계 지도를 들어다 보자. 당시 세계 4대 제국은 누구인가? 하는 질문을 하면 자연스럽게 당시 세계사의 흐름이 이해 될 것이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SPAN style=&quot;TEXT-DECORATION: underline&quot;&gt;&amp;nbsp;17세기의 세계 4대 제국은 유럽의 합스브르크가의 신성로마제국, 중동의 오스만 터키 제국, 인도의 무굴 제국, 그리고 중국의 淸제국으로 꼽고 있다.&lt;/SPAN&gt; 이들 4대 제국의 특성을 분석해 보면 신성로마 제국을 제외한 나머지&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 세 제국은 몽골리안 제국&lt;/SPAN&gt;이라는 공통점을 발견하게 된다. 이는 우연인가? 필연일까? 이 문제를 풀어 보면 전체의 흐름이 보이지 않겠는가?&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amp;nbsp;10세기이후의 中近東 지역의 패권은 몽골리안 국가들에 이관되었다. 우리 역사에 돌궐로 나타나는 투르크 계통의 국가는 셀주크 터키를 시작으로 술탄 지위을 이어받아 이집트의 아유브왕조, 몽골의 불패 기마군단을 격파한 맘루크 왕조, 中近東을 재통일한 오스만 터키에 이르기 까지 이집트, 시리아, 터키, 이란등 중동 일대를 지배해 왔다. 오스만 터키의 부는 지금도 토카피 궁전의 보물을 팔면 터키 국민들이 수 십 년은 살수 있다고 할 정도로 막대하였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전성기 오스만 궁정은 베네치아, 제노바등 유럽 무역도시의 대사들이 이권 획득을 위하여 각축했던 곳이다. 지금도 터키국민들은 우리 한국인을 “ 칸 카르데쉬-피를 나눈 혈맹”이라 부른다. 스스로의 역사에서 바이칼 호수를 끼고 이웃했던 한국인으로 이해하기에 우리를 대하는 마음은 진실로 애틋하다. 참고로 터키의 대통령은 수차례 한국을 방문하였고 그중에는 취임 후 첫 방문지일 정도로 한국에 대하여 각별히 생각하고 있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amp;nbsp;인도의 무굴 제국이 몽골리안 제국이라는 사실은 이름으로부터 자명하다. 무굴은 바로 무굴 제국을 건설한 바부르 대제가 인도를 정복하고 그의 할아버지이자 티무르 제국을 창건한 티무르의 유언에 따라 “ 몽골 제국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붙인 이름인 것이다.&amp;nbsp; 그러나, 인도는 이미 10 세기이후에는 간헐적인 예외를 제외하고는 아프카니스탄을 중심으로 하는 투르크계 이슬람 왕조의 지배를 받아 왔다. 그러하기에 델리를 중심으로 하는 지배 계층의 문화는 오히려 고구려의 그 것과도 유사한 점에 많이 있다는 것이 그다지 놀라운 것은 아닐 것이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amp;nbsp;淸 제국은 몽골리안 국가 중에서도 우리 한민족과 가장 가까운 국가이다. 淸나라를 건립한 만주족의 역사서 金史에서는 만주족의 시조를 新羅 왕족 출신인 김 함보 어른으로 기술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김 운회님에 따르면 누루하치의 성, 愛新覺羅는 , 신라를 사랑하고 깨달으라는 뜻이라고 한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만주족의 聖山은 백두산이요, 그들의 신화는 선녀와 나무꾼이다. 일설에 따르면 女眞은 JUCHEN의 한자 표현인데, 이는 肅愼, 珠申, 朝鮮등과 음운을 같이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淸나라 건국 5백전에 그들의 선조 아골타는&amp;nbsp; 金國을 건설하였으며, 이러한 大國의 운영 경험이 있는 그들을 단순한 미개인으로 간주하는 중국 중심의 사관은 대단히 부자연스럽지 않은가?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격론을 벌일 동북 공정의 핵심은 기실 만주족의 이해에 달려 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amp;nbsp;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여하튼 중국 역시 10세기 이후에 중국 민족 자체의 왕조는 실제로 明나라 하나뿐인 것이 역사의 엄연한 사실적 해석이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宋 나라의 경우에는 성립부터 遼나라에 복속하였으며, 불과 60년만에 강남으로 축소)&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amp;nbsp;그러면 결국 17세기는 유럽 제국의 大 航海 팽창 시대였으나,&amp;nbsp; 세계의 패권은 아직은 몽골리안 국가에 귀속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우연이 아니라 아프리카의 이집트에서 중앙유라시아와 동 아시아에 이르기까지 10세기 이후의 일반적인 흐름이었다는 것이다. 불과 300년전 까지는 몽골리안의 전성시대였던 것이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이러한 몽골리안 국가들의 세계 제패가 10세기에서 17세기까지 지속된 동인은 무엇인가?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이에 대하여 인도, 중국의 역사 기록은 말의 경쟁력에 있다는 점은 지적하고 있다. 이는 단순하나, 매우 중요한 진실일 것이다. 말은 전투 수단인 동시에 부의 창출을 위한 무역의 기반이다. 유목민(NOMAD)으로서 몽골리안은 말의 운용에 있어서 압도적인 비교 우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전투의 양식이 대포와 개인 소총을 중심으로 변화할 때까지는 세계의 패권이 몽골리안에 있었던 것이다. &lt;/FONT&gt;&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lt;/FONT&gt;&amp;nbsp;&lt;/P&gt;
&lt;P class=HStyle0&gt;&lt;FONT size=3&gt;또한 인도, 중국등의 일반 국민의 입장에서는 몽골리안의 지배 시대에 각종 조세 부담이 경감되므로 민중의 저항은 거의 없었던 것으로 해석된다.&amp;nbsp; 조세 경감의 이유는 국방비용의 지출이 경감되는 효과와 실크로드의 무역 수입으로 토지세의 부담이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lt;/FONT&gt;&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휴일의 일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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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07-26T23:30:58Z</updated>
	    <published>2009-07-26T23:30:5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하루가 너무나 짧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일주일도 너무나 짧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하루하루 &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때론 뒤죽박죽 &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그래도 애들땜에 함박웃고&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그래도 이 일 안하면 &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너무 허전해서 못살것같다면서도&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너무 정신없이 돌아가는 게 숨막혀&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휴일을 기다리며 일주일을 보내는 건&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이 무슨 아이러니&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휴가도 그리 편한 휴식은 못될 것 같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한국사 3권 교재 만들어야지&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세계사 공부해야지&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대청소해야지&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오늘도 일요일이지만 보강을 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물론 우리 애들이랑 함께 잘 아는 지인이라&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편하다. 피곤이 누적된 탓에 아침에도 끙끙 앓으면서&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못 일어나서 10시에나 일어나 준비해서 11시수업을 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갈 땐 김밥을 좀 사서 가고&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마치고는 거기서 김치찌개랑 맛나게 두 그릇을 먹었다. ㅎ&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바로 옆에 냇물이 흘러서 휴가 때 엄마랑 조카들 왔을 때&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놀 곳을 답사하러 갔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아직 우리 동네처럼 공원으로 꾸미진 않아 자연돌들이 그대로 있어&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진짜 시골 냇가같았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애들이랑 돌수제비를 뜨고&amp;nbsp; 특이하게 생긴 돌을 찾으며 잠시 놀다 왔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팔공산으로 계획을 잡고있는데 그늘이 없다는 단점은 있으나 가깝고 넓으니&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아마 가까운 이곳을 정할 것 같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돌아와 보니 4시가 가까워오고&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애들은 영어 애니메이션을 보고 난 잠시 눈을 부쳤다가&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냉장고 청소, 쓰레기 정리를 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가득찬 설거지를 하고나니 하루는 다 가버렸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오늘은 책 한페이지도 못봤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늘 마음이 쫓긴다. 부족함이 날 끊임없이 긴장시킨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수업하는 내 아이들 사진을 올리고 싶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짧든 길든 우리 애들과의 인연을 예쁘게 내 안에 담아 두고 싶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밤이 깊어가고 다시 한주가 날 기다린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잠들기전 내 예쁜 아이들을 위해 책 한줄 더 읽는 것으로 오늘을&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정리한다.^^*&lt;/STRONG&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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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피곤... 그래도 즐거움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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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들꽃</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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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7-19T23:15:15Z</updated>
	    <published>2009-07-19T23:15:1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방학특강용 한국사 초등교재를 만드는 중인데&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3권 교재 만들기 앞에서 잠시 주춤하고 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중3 고등부는 세계사특강 들어가기때문에 공부해야하니까.&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지난 금요일엔 선생님들께 한국사 교재교육을 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1시간 교육하고난 후부터&amp;nbsp;온 몸에서 수분이 다 빠져나간 듯 목이 말라왔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물을 들이켜도 계속 밑빠진 독에 물 붓는 마냥 갈증이 왔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머리는 비어진 듯 하더니&amp;nbsp; 오후엔 아파왔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수업도 방학 전 시간정리가 안돼 이리저리 왔다갔다하다보니&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뭐 하나 먹을 시간도 없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11시 다돼 돌아와 머리가 계속 아파와서 물 한잔 마시고 잤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아침이면 괜찮을 줄 알았는데&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뒷머리가 아팠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어지럽고... 토욜수업은 모두 중3이상이라 해야 할 것도 더 많은데&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걱정하면서도 좀 쉬고팠다. 너무 과로한 것 같았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계속 일요일도 집에서 쉬지 못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진통제라도 먹어야겠다 싶어 가서 물어보니&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철분이 부족해서그렇다고 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그러고 보니 한두달사이 내 얼굴이 많이 삭았다는 생각만했는데&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그리고 계속 피곤하다해도 그냥 몸이 원래 부실하니 그러면서&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나는 내 정신으로 밀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엄마가 보내주신 칼슘제도 오메가 3도 홍삼원액도 마늘엑기스도&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사실 보면서도 제대로 먹지 않고 있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건강이 염려되면서도&amp;nbsp;머리는 아침부터 밤까지 쉴새없이 쉬지않는데도&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보살피지않고 지나쳐왔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지금은 입안도 헐어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열심히 잘 챙겨먹어야겠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그래도 일은 해야하니 말이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난 어쩔 수 없이 계속 날 학대하나보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제자리에 머무는게 내 적성에 맞지않나보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계속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덤비는 것 같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중고등부 세계사에 도전하는 이도 회사에서 아직 나밖에 없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이미 한국사는 문학이나 교과수업하면서 곁들여서 많이 해줬기때문에 &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따로 해줄 필요가 없을 것 같아서 아이들을 위해 도전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물론 나도 덕분에 공부를 하고 싶은 것이 진짜 욕심이기도 하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한국사는 초등 중1,2하면서 공부해나가고&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세계사는 많이 해야한다.&amp;nbsp; 중국사는 어느정도 자신있는데 &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서양사는 잘 모른다. 특히 르네상스이전은 재미도 없다. ㅎㅎ&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겨울방학 때는 철학사를 해주리라 계획하고 있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힘들지만 그래도 신나는 일이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아기를 낳는 산모가 된 심정으로 공부하고 도전한다.&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고통은 따르겠지만 벅찬 희열이 날 반겨줄테니까.&lt;/STRONG&gt;&lt;/P&gt;
&lt;P&gt;&lt;STRONG&gt;힘내자. 아자 !!&lt;/STRONG&gt;&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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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IT 예산중 보안분야 투자비중 미국 10% 한국 1%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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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dandyyoon7.17445924</id>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07-18T12:58:55Z</updated>
	    <published>2009-07-18T12:58:5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40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vAlign=top&gt;&lt;FONT class=headtitle id=newsTitleTag color=#000063&gt;&lt;B&gt;[Leaders] 한국 보안산업의 개척자 안철수&lt;/B&gt;&lt;/FONT&gt; &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5&gt;&lt;SPACER type=&quot;block&quot; height=&quot;5&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center&gt;&lt;B class=title&gt;&lt;B&gt;바이러스 경고해도 듣는둥 마는둥&lt;BR&gt;10년전 보안사고 되풀이될 수 밖에…&lt;BR&gt;최근 DDoS나 99년 CIH바이러스나 같은 실수 반복&lt;BR&gt;IT 예산중 보안분야 투자비중 미국 10% 한국 1%뿐&lt;BR&gt;공익ㆍ이윤추구 가능한 기업가정신 가르쳐주고 싶어&lt;/FONT&gt; 
&lt;P&gt;&lt;/P&gt;&lt;/B&gt;&lt;/B&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5&gt;&lt;SPACER type=&quot;block&quot; height=&quot;5&quot;&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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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FONT-SIZE: 12pt; WORD-BREAK: break-all; LINE-HEIGHT: 150%&quot; vAlign=top align=left&gt;
&lt;DIV id=artText style=&quot;FONT-SIZE: 12pt; LINE-HEIGHT: 150%&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50 align=right border=0&gt;
&lt;TBODY&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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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
&lt;P style=&quot;MARGIN-RIGHT: 7px&quot;&gt;
&lt;TABLE cellSpacing=1 cellPadding=5 bgColor=#dddddd border=0&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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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R&gt;
&lt;TD bgColor=#ffffff&gt;&lt;IMG style=&quot;BORDER-LEFT-COLOR: black; BORDER-BOTTOM-COLOR: black; BORDER-TOP-COLOR: black; BORDER-RIGHT-COLOR: black&quot; hspace=0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09/07/image_readtop_2009_389778_1247879046178392.jpg&quot; width=150 border=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TD&gt;
&lt;TD width=7&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2 height=5&gt;&lt;/TD&gt;&lt;/TR&gt;
&lt;TR&gt;
&lt;TD&gt;&lt;B&gt;&lt;FONT color=#000063&gt;&lt;/FONT&gt;&lt;/B&gt;&lt;/TD&gt;
&lt;TD&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2 height=1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quot;CIH 바이러스로 수십만 대나 되는 PC가 고장났을 때도, 1ㆍ25 인터넷대란 때도 같은 지적이 있었습니다. 보안사고로 가장 큰 피해를 당하는 나라가 되었지만 눈에 띄는 조치가 취해진 적은 없습니다.&quot; 한국 보안산업의 개척자인 안철수 KAIST 석좌교수(47ㆍ&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 이사회 의장)는 이번 분산서비스거부(DDoS) 사이버테러가 일어났을 당시 방학을 맞아 미국에 있었다. 2005년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 최고경영자(CEO)직에서 물러나면서 보안 문제에 대해서는 되도록 말을 아꼈지만 또다시 터진 대형 보안사고에 안 교수도 안타까움이 앞섰다. &quot;이번 사태는 우리 사회에 경종을 울린 좋은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매번 대형 보안사고가 터질 때마다 보안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지만 아직까지도 보안에 투자하는 비율은 IT예산의 1%에 불과합니다.&quot; &lt;BR&gt;&lt;BR&gt;안철수 교수는 미국과 같은 선진국에서는 보안분야에 IT 예산의 10%를 투자하는데 IT 강국을 자부하는 한국에서는 여전히 1%에 불과한 예산으로 국가의 사이버 안보를 운영해야 하는 현실을 강하게 비판했다. 안 교수가 현업에 있었을 때와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한국에서 일어난 대형 보안사고로는 1999년 CIH 바이러스 사태와 2003년 1ㆍ25 인터넷대란이 꼽힌다. 안 교수는 한국의 대표 보안기업 CEO로 두 사건의 현장에서 사후 수습을 진두지휘했다. &lt;BR&gt;&lt;BR&gt;&quot;CIH 바이러스가 국내에 처음 소개된 것은 1998년입니다. 하지만 별다른 피해는 없었어요. 1999년 미국에서 엄청난 피해를 주었던 멜리사 바이러스도 우리에게는 큰 타격 없이 지나갔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방심했고 그 피해는 참혹했습니다.&quot; &lt;BR&gt;&lt;BR&gt;1999년 4월 26일 활동을 시작한 CIH 바이러스는 국내 PC 30만대를 감염시키면서 보안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국가적인 문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lt;BR&gt;&lt;BR&gt;&quot;바이러스가 활동하기 직전에 최신 백신으로 업데이트하라는 보도자료를 냈습니다. 그런데 이를 비중 있게 다룬 매체는 거의 없었습니다. 언론에서도 큰 문제 없이 넘어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quot; &lt;BR&gt;&lt;BR&gt;아이러니하게도 전 국민의 보안의식 부재로 인해 큰 피해가 발생하면서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는 성장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정부와 기업, 개인들이 비로소 보안에 대해 투자를 시작한 것이다. &lt;BR&gt;&lt;BR&gt;하지만 2003년 1월 25일 또다시 대규모 보안사태가 터졌다. 웜 바이러스에 감염된 PC가 대량의 신호를 무차별적으로 전송하면서 네트워크 전체가 마비됐다. &lt;BR&gt;&lt;BR&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30 align=lef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
&lt;P style=&quot;MARGIN-RIGHT: 7px&quot;&gt;
&lt;TABLE cellSpacing=1 cellPadding=5 bgColor=#dddddd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bgColor=#ffffff&gt;&lt;IMG style=&quot;BORDER-LEFT-COLOR: black; BORDER-BOTTOM-COLOR: black; BORDER-TOP-COLOR: black; BORDER-RIGHT-COLOR: black&quot; hspace=0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09/07/image_readmed_2009_389778_1247879046178393.jpg&quot; width=230 border=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TD&gt;
&lt;TD width=7&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2 height=5&gt;&lt;/TD&gt;&lt;/TR&gt;
&lt;TR&gt;
&lt;TD&gt;&lt;B&gt;&lt;FONT color=#000063&gt;&lt;/FONT&gt;&lt;/B&gt;&lt;/TD&gt;
&lt;TD&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2 height=1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quot;이번 7ㆍ7 사이버테러와 1ㆍ25 인터넷대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바이러스에 감염된 PC가 인터넷망을 마비시키는 데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17')&quot; onmouseout=pointOut()&gt;동원&lt;/SPAN&gt;됐고 7ㆍ7 사이버테러에서도 악성코드에 감염된 PC가 DDoS 공격에 악용됐습니다. 피해자가 가해자로 둔갑한 것이죠. 1ㆍ25 인터넷대란 이후 달라진 것이 있느냐고 한 기자가 물었습니다. 그때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 있다고 답했습니다.&quot; &lt;BR&gt;&lt;BR&gt;2003년에 꺼지지 않은 불씨가 2009년에 다시 살아나 한국의 주요 사이트를 덮친 셈이다. 역시 이번에도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가 든든한 소방수 구실을 했다. &lt;BR&gt;&lt;BR&gt;&quot;앞으로 이런 일이 재발하지 않기 위해서는 전 네티즌의 협조가 필수적입니다. 과거 해킹은 대형 컴퓨터의 정보를 빼내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일반 사용자의 PC에는 돈이 될 만한 정보가 없었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아무리 전문가가 많아도 한 사람만 방심하면 모두의 인터넷이 위협받는 보안 하향평준화 시대인 셈입니다.&quot; &lt;BR&gt;&lt;BR&gt;안 교수가 처음 바이러스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안 교수의 PC가 브레인이라는 바이러스에 감염돼 모니터에는 `BRAIN`이라는 글자가 떴다. 마침 안 교수는 브레인 바이러스의 프로그램 언어인 기계어를 알고 있었다. &lt;BR&gt;&lt;BR&gt;&quot;바이러스의 작&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17')&quot; onmouseout=pointOut()&gt;동원&lt;/SPAN&gt;리를 이해하게 되니까 이것을 고칠 수 있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PC전문 잡지사에 연락을 했죠.&quot; &lt;BR&gt;&lt;BR&gt;한국을 대표하는 백신 V3는 안 교수의 호기심에 의해 탄생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안 교수 자신도 벤처기업에 뛰어들 것이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88년 당시 안 교수는 서울대 의대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미래가 보장된 청년이었기 때문이다. &lt;BR&gt;&lt;BR&gt;의사와 벤처기업가 길에서 고민하던 안 교수는 이제 가장 성공한, 또 존경받는 벤처기업가로 꼽힌다. 1994년 사무실도 구하지 못해 자신의 집에서 시작한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보안기업으로 자리잡았다. 성장의 원동력에는 정직을 최우선으로 삼는 안철수 교수의 경영철학이 숨어 있다. 1999년 말에 한참 밀레니엄(Y2K) 버그가 이슈가 된 적이 있을 때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만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보안업계에서는 Y2K 버그를 앞세워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있던 때였다. &lt;BR&gt;&lt;BR&gt;&quot;매출을 손쉽게 올릴 수 있는 기회였지만 눈앞의 이익을 좇아 고객을 속이는 일은 할 수 없었습니다.&quot; &lt;BR&gt;&lt;BR&gt;피해를 볼지 모른다고 말하기는 쉬워도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기는 부담스러운 시기였지만 안 교수의 의지는 단호했다. 안 교수는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가 창업 10년을 맞은 2005년 돌연 CEO직에서 물러난다고 발표했다. &lt;BR&gt;&lt;BR&gt;&quot;기업의 목적은 수익 창출이라는 명제에 의문을 품었습니다. 고객에게 가치를 인정받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고 수익은 그 결과여야 합니다. 그런데 수익 창출이 목적이 되다 보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고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됩니다.&quot; &lt;BR&gt;&lt;BR&gt;퇴임사에서 안 교수는 정직하게 사업하더라도 자리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고 공익과 이윤 추구가 양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lt;BR&gt;&lt;BR&gt;퇴임과 함께 유학길에 나선 그는 본격적으로 경영학을 공부한 후 지난해 KAIST 교수로 돌아왔다. &lt;BR&gt;&lt;BR&gt;&quot;돌아온 저는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에서 이사회 의장이라는 직책과 함께 새로운 직책을 만들었습니다. 바로 최고학습책임자 CLO(Chief Learning Officer)입니다.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의 CEO 경험과 유학을 통해 배웠던 내용을 후배 벤처기업가와 예비 벤처기업가들에게 제대로 가르쳐주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quot; &lt;BR&gt;&lt;BR&gt;안 교수가 KAIST에서 학부생들에게 기업가적 사고방식을 가르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lt;BR&gt;&lt;BR&gt;안 교수는 외부 강연 때마다 빠지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quot;한국에서 벤처기업의 뿌리가 말라가고 있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첫째는 경영자와 각 분야 실무자의 자질, 둘째는 대학이나 금융권과 같은 기업을 지원하는 인프라스트럭처, 셋째는 대기업 위주의 산업구조입니다. 이 중 스스로 노력해서 할 수 있는 부분은 벤처기업 종사자의 역량을 키우는 것입니다.&quot; &lt;BR&gt;&lt;BR&gt;그래서 강연을 통해 기업가정신을 고취시키고 IT인재 육성의 중요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안 교수는 나머지 두 가지는 국가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강조한다. &quot;중소벤처기업은 국가 포트폴리오 차원에서 육성해야 합니다. 미국 대기업의 혁신적인 아이디어 중 90%는 중소 협력사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중소벤처기업의 경쟁력이 바로 대기업의 경쟁력입니다.&quot; &lt;BR&gt;&lt;BR&gt;그런 안철수 교수가 생각하는 인재는 A자형 인간이다. &quot;한 분야만 정통한 사람이 I자형 인간이라면 A자형 인간은 전문성과 다른 분야에 대한 포용력, 탁월한 커뮤니케이션 능력이라는 삼박자를 갖춘 사람입니다. 혼자서 모든 것을 다 잘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전문 분야 외에 다른 분야에도 두루 상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인재를 키우는 데 일조하는 것이 제 네 번째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quot; &lt;BR&gt;&lt;BR&gt;◆ 의사→프로그래머→CEO→교수 4번의 결정적 순간 &quot;꿈에 미쳤다&quot; &lt;BR&gt;&lt;BR&gt;= 안철수 교수만큼 많은 직함을 두루 갖춘 사람도 드물다. 의학박사에 잘나가는 프로그래머였고 국내 최대 보안기업 CEO를 거쳐 지금은 KAIST 교수를 하고 있다. &lt;BR&gt;&lt;BR&gt;한 사람이 하나도 하기 힘든 일들을 50도 안된 나이에 해낸 셈이다.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를 창업하기 전 그의 공식 직함은 단국대 의과대학 의예과 학과장이었다. 15년을 거쳐 교수에서 교수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물론 그가 지금 가르치는 것은 의학이 아닌 기업가정신으로 바뀌긴 했다. &lt;BR&gt;&lt;BR&gt;안 교수는 1988년 처음 바이러스와 인연을 맺은 후 상당 기간 낮에는 의사로, 밤에는 컴퓨터 의사로 일해왔다. &lt;BR&gt;&lt;BR&gt;새벽 3시에 일어나 바이러스를 연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날로 늘어나는 바이러스를 혼자 모두 분석하고 백신을 만드는 것이 점차 불가능해지는 시기가 왔다. 결국 그는 해군 군의관 복무를 마친 1994년에 의사의 길을 정리한다. &lt;BR&gt;&lt;BR&gt;안 교수는 &quot;1990년 초반까지만 해도 바이러스는 감염된 플로피디스크로 전염되는 것이었지만 PC통신 발달로 바이러스 종류도 많아지고 전파력도 훨씬 빨라졌다&quot;고 말했다. &lt;BR&gt;&lt;BR&gt;1995년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가 설립됐을 당시 고민은 수익이었다. 무료로 제공하던 V3를 유료화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는 소비자들 마음을 돌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lt;BR&gt;&lt;BR&gt;안 교수는 &quot;그때는 직원들에게 줄 석 달치 월급만 운영자금으로 있었으면 하는 게 소원이었다&quot;고 당시 어려움을 설명했다. 그런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가 1998년 CIH 바이러스 사건으로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lt;BR&gt;&lt;BR&gt;2000년대 들어 인터넷 발달로 인해 보안 위협이 단순한 바이러스에서 네트워크 침해로 정교해지는 추세에 맞춰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도 종합 보안기업으로 변신을 꾀했다. &lt;BR&gt;&lt;BR&gt;사명도 안철수컴퓨터바이러스연구소에서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로 바꿨다. 변신을 알리기 위해 안 교수는 평소 단정하던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염색하며 `안철수가 변했다`고 홍보했다. 2001년에는 코스닥 상장에 성공하면서 안 교수는 잘나가는 프로그래머에서 성공한 경영가로도 인정받게 된다. 안 교수는 2005년 돌연 회사를 떠나 유학길에 오른다. 안 교수는 퇴임사에서 &quot;유학을 마치고 나면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로 돌아올 수도 있고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도 보람이 있을 것&quot;이라고 말했다. &lt;BR&gt;&lt;BR&gt;결국 그는 2008년 5월 서남표 KAIST 총장의 권유로 KAIST에 합류하게 된다. 기업을 떠난 지 오래됐지만 여전히 존경받는 기업인으로 안 교수가 꼽히는 이유는 아무도 가지 않으려 했던 길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lt;BR&gt;&lt;BR&gt;■ He is… &lt;BR&gt;&lt;BR&gt;△ 1980년 부산고 졸업ㆍ서울대 의대 입학 △ 1991년 서울대 의대 의학박사 △ 1995년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 창업 △ 1997년 미국 펜실베이니아공대및 와튼스쿨 기술경영학 석사 △ 2005년 &lt;SPAN onmouseup=pointUp() style=&quot;CURSOR: pointer; COLOR: #0b06a8&quot; onclick=&quot;AllClose('0')&quot; onmouseout=pointOut()&gt;안철수연구소&lt;/SPAN&gt; CEO 퇴임 △ 2008년 와튼스쿨 MBA △ 현재 KAIST 비즈니스 이코노믹스 프로그램 석좌교수, 대통령자문 미래기획위원회 위원, 포스코 사외이사 &lt;BR&gt;&lt;BR&gt;[최광 기자]&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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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인권 존중 사상  (논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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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들꽃</name>
	    </author>
	    <updated>2009-07-07T15:41:26Z</updated>
	    <published>2009-07-07T15:41:2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교과서 읽기 / 논점 1. 인권 존중 사상&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lt;BR&gt;
&lt;P align=justify&gt;&lt;B&gt;인권 존중 사상의 발달 과정&lt;/B&gt; 
&lt;P align=justify&gt;오늘날 대부분의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인간 존중 사상을 헌법의 최고 가치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인간 존중 사상은 훨씬 이전부터 서구에서 사상적인 기초를 닦아 왔다. 14~15세기에 일어난 르네상스에 의해 중세의 신 중심의 사고방식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전환되었다. 그 후, 17세기에는 절대 군주의 강압으로부터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이 차츰 일기 시작하였다. 계몽 사상가들이 천부인권론을 주장하였고, 이것이 사상적인 밑바탕이 되어 프랑스, 미국 등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다. 
&lt;P align=justify&gt;이와 같은 시민혁명을 통해 선언된 인간 존중 사상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나라가 이를 헌법에 명문화하였고, 더 나아가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기 위한 다양한 정치 제도를 발달시키게 되었다. 천부적 인권과 권력 분립을 특징으로 하는 근대 헌법은 1919년 바이마르 헌법에 의해 현대적인 헌법으로 발전하였다. 바이마르 헌법은 자본주의 아래에서 보장받기 어려운 노동자들의 인권을 보호하는 등 복지 국가 헌법의 바탕을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lt;P align=justify&gt;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전쟁 기간 동안의 비인간적인 행위에 대한 반성으로 인권에 대한 관심이 더욱 높아졌다. 국제 연합(UN)은 회원국에게 인권 보장을 준수하도록 의무화하고, 인권 보호와 신장을 위한 여러 가지 조약이 채택됨에 따라 인권 보장은 인류 공동의 문제로 다루어지게 되었다. 오늘날 각 국가들은 헌법에 천부적이고 초국가적인 인간의 권리를 기본권으로 보장하는 규정을 두어 국민의 기본권을 보장하고 있다. &lt;/P&gt;
&lt;P&gt;이와 같이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로 발전되어 온 인간 존중 사상은 오늘날 여성, 어린이, 근로자, 장애인, 난민 등 사회의 약자에 대한 인권 보호로 관심이 확대되고 있다. &lt;/P&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교과 심화&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lt;B&gt;시민혁명의 사상적 배경&lt;/B&gt; 
&lt;P align=justify&gt;인간의 존엄성 및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정립한 계기로서 근대 시민 혁명을 꼽는다. 이러한 시민혁명에 영향을 준 사상으로 천부 인권 사상, 사회 계약설, 계몽 사상 등을 들 수 있다. 
&lt;P align=justify&gt;천부 인권 사상은 모든 사람은 생명 유지, 행복 추구, 평등, 신체의 자유, 신념에 근거한 의사 결정 및 행동의 권리를 타고났으며, 이는 어떤 권력에 의해서도 침해되지 않을 인간의 기본적 권리라는 것이다. 
&lt;P align=justify&gt;사회 계약설에서는 이러한 천부 인권을 확보하기 위해 정부가 조직되었고, 국가 권력의 정당성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비롯한다고 본다. 로크는 &lt;시민정부론&gt;에서 사회 계약에 따라 설립된 정부의 권력이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로 권력분립에 의한 입헌 민주정을 제안했는데, 이 원리는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효력을 발휘하고 있다. 
&lt;P align=justify&gt;계몽 사상은 절대왕정이나 봉건주의 등 전근대적 사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인간에게 이성의 힘으로써 편견이나 무지로부터 벗어나게 해야 한다는 사상이다. 계몽 사상은 자유와 평등을 강조함으로써 민주적 사상을 전파하고, 사회를 민주적인 방향으로 진보시키는데 기여했다.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B&gt;세계인권선언(世界人權宣言, Universal Declaration of Human Rights)&lt;/B&gt; 
&lt;P align=justify&gt;1948년 6월 국제연합(UN) 인권위원회에 의해 완성된 후,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1948년 12월 10일 파리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만장일치(소비에트 진영에 속한 6개국과 사우디아라비아, 남아프리카 연방은 기권)로 채택된 선언이다. 
&lt;P align=justify&gt;이 선언에는 민주적인 헌법이 인정하는 인간의 주요한 시민적·정치적 권리와 몇 개의 소위 경제적·사회적·문화적 권리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가 포함되어 있다. 인간의 시민적·정치적 권리에는 생명·자유 및 신체의 안전에 관한 권리, 즉 임의의 체포, 구금 또는 추방으로부터의 자유, 독립적이고 공평한 재판소에서 공정하고 공개적인 재판을 받을 권리, 사상과 양심 및 종교의 자유, 평화적인 집회·결사의 자유 등이 포함된다. &lt;BR&gt;&lt;B&gt;-브리태니커 백과사전&lt;/B&gt; 
&lt;P align=justify&gt;
&lt;HR&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논제 해결&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size=4&gt;&lt;B&gt;삶을 제한하는 뿌리깊은 차별 관습&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877015&gt;(가), (나)에 나타난 인도의 신분제도를 (다)의 인권 개념을 적용하여 비판하시오. (300자 안팎)&lt;/FONT&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B&gt;(가)&lt;/B&gt; 오늘날 인도인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리아 인은 중앙 아시아의 초원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다가 북인도로 남하하여, 기원전 1500년 경에는 인더스 강 상류의 펀자브 지방에 정착하였다. 그 후, 기원 전 1000년 경에는 동쪽의 갠지스 강 유역으로 진출하였다. 
&lt;P align=justify&gt;갠지스 강 유역은 홍수가 잦고 습지가 많아 살기 어려웠으나, 철기를 이용한 관개로 환경의 열악함을 극복하고 농경 생활을 하며 정착하였다. 그들은 가부장 중심의 대가족제 사회를 이루었으며 소를 신성시하였다. 또한 정복한 원주민 사회를 지배하기 위해 엄격한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를 확립하였다. 지배 계급인 브라만은 자신들의 특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복잡한 종교 의식을 발전시켰다. 이것이 바로 태양, 물, 불과 같은 자연 현상들을 신격화한 브라만 교였다. 카스트의 최상층을 차지한 브라만은 제사 의식을 주관하며 아리아 인 사회를 지배하였다. 
&lt;P align=justify&gt;카스트 제도는 인도의 모든 사람에 대해 세습적·귀속적 지위를 기준으로 등급을 정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카스트를 바꿀 수 없었다. 뿐만 아니라 족내혼이 강요되었고, 접촉하고 식사를 같이 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 또한 제한되었다. 만약 이러한 규범을 위반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는 가혹한 형벌이 내려졌다. 현재 인도에서 카스트 제도는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지만, 관습으로는 여전히 뿌리깊게 남아 있다. 
&lt;P align=justify&gt;-고등학교 &lt;사회·문화&gt;, &lt;세계사&gt;에서 수정 발췌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B&gt;(나)&lt;/B&gt; &lt;A class=popup_link onmouseover=&quot;javascript:KL_show_clk_pop('%BA%AF%C8%A3%BB%E7','3','')&quot; style=&quot;FONT-WEIGHT: 700; COLOR: #173f8d; TEXT-DECORATION: underline&quot; onmouseout=javascript:clear_pop_show_delay() href=&quot;http://sense.contentlink.co.kr/sense/clk_pop.php?afd=hani2_web&amp;is_click=yes&amp;keyword=%BA%AF%C8%A3%BB%E7&quot; target=_blank&gt;변호사&lt;/A&gt;이자 전국달리트인권캠페인 활동가인 우마칸트는 “인도에는 침묵의 음모가 있다. 상위 카스트 출신인 누구에게 물어봐도 ‘인도 사회에선 카스트 차별이 없어졌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러나 카스트는 인도 사회에 너무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어 헌법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사람들의 삶을 제한하고 있다. 기독교나 무슬림도 카스트의 영향을 받을 정도다. 인도 사회에 근대적 평등·인권의 개념이 아직 뿌리내리지 못했다”고 지적한다. 
&lt;P align=justify&gt;전국달리트인권캠페인은 2004년부터 상위카스트 사람들이 달리트에 대해 잔인한 범죄를 저질러도 처벌받지 않는 문제를 해결하는 ‘비처벌 깨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특히 생계를 위해 일을 하면서 강간과 폭력의 희생자가 되고 있는 달리트 여성들의 인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다. 우마칸트는 이 단체가 조사한 달리트 여성에 대한 폭력 사례들을 보여줬다. “최근 집주인이 강간에 저항하는 달리트 여성과 그 아이의 얼굴에 &lt;A class=popup_link onmouseover=&quot;javascript:KL_show_clk_pop('%BF%B0%BB%EA','4','')&quot; style=&quot;FONT-WEIGHT: 700; COLOR: #173f8d; TEXT-DECORATION: underline&quot; onmouseout=javascript:clear_pop_show_delay() href=&quot;http://sense.contentlink.co.kr/sense/clk_pop.php?afd=hani2_web&amp;is_click=yes&amp;keyword=%BF%B0%BB%EA&quot; target=_blank&gt;염산&lt;/A&gt;을 뿌려버렸고, 강간에 저항하던 한 소녀는 팔을 잘렸다. 펀잡주에서는 달리트인 아버지가 딸을 강간한 사람들을 고발하자 범인의 일족들이 아버지의 팔을 잘랐다. 우리는 조사 보고서를 토대로 정부에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lt;P align=justify&gt;이 단체의 빈센트 마노하란 사무총장은 “독립 이후 일부 달리트들은 수천 년 만에 처음으로 교육을 받았고, 극소수는 교수, 의사, 관리, IT 전문가가 되었다. 그렇지만 인도인의 16%인 달리트 중 전문직에 진출한 이들은 1%도 안 된다”고 말했다. 인도 농촌 문맹률 44.87%에 비해 달리트의 문맹률은 61.5%이며, &lt;A class=popup_link onmouseover=&quot;javascript:KL_show_clk_pop('%C5%E4%C1%F6','1','')&quot; style=&quot;FONT-WEIGHT: 700; COLOR: #173f8d; TEXT-DECORATION: underline&quot; onmouseout=javascript:clear_pop_show_delay() href=&quot;http://sense.contentlink.co.kr/sense/clk_pop.php?afd=hani2_web&amp;is_click=yes&amp;keyword=%C5%E4%C1%F6&quot; target=_blank&gt;토지&lt;/A&gt;개혁에도 불구하고 달리트 농민의 대부분은 땅을 소유하지 못해 일용노동자로 일한다. 
&lt;P align=justify&gt;남부 기독교도 출신인 마노하란 사무총장은 “나는 기독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 변호사가 됐고, 부인도 공무원이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달리트들이 모여 사는 우리 마을 수백 가구 중 처음으로 교육을 받은 이들이다. 뉴델리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는 나는 겉으로 드러나는 심각한 차별을 받지 않지만, 농촌의 고향 마을에 돌아가는 순간 다시 자동적으로 ‘달리트’가 돼 상위 카스트로부터 인간 이하의 차별을 받는다”고 말했다. 
&lt;P align=justify&gt;-박민희 기자, &lt;한겨레&gt; 2006년 5월 31일치 가운데 발췌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B&gt;(다)&lt;/B&gt;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로운 존재이며, 어떠한 권력도 인간의 자연권인 자유를 침해할 수 없다는 자연권 사상은 17세기 영국의 시민혁명을 일으키는 동력이 되었다. (중략) 
&lt;P align=justify&gt;프랑스 인권 선언은 “인간은 권리에 있어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태어나 생존한다.”라는 주장에 기초하고 있다. 즉, 인간은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신념은 근대 민주주의의 기초가 되었다. 이 때 평등은 개개인의 차이를 부정한다는 의미는 아니며, 차이를 인정하되 그것이 차별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다. 
&lt;P align=justify&gt;처음에 평등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신 앞에서의 평등’을 말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더욱 발전하여 인간은 누구나 ‘법 앞에서 평등’해야 한다는 것으로 바뀌었다. 
&lt;P align=justify&gt;-고등학교 &lt;정치&gt; (대한교과서)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abd&gt;&lt;B&gt;◎ 해결 방향&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다)에서 설명하고 있는 자연권 사상과 프랑스 인권 선언 등은 인간 존중 사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근대 민주주의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는 이념에 기초하고 있으며,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보장하고 국민의 인간다운 삶을 실현하기 위한 제도로서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lt;P align=justify&gt;인도 또한 민주주의를 채택한 국가 중 하나지만, 민주주의의 근본 이념에 어긋나는 구습이 남아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카스트제도이다. (가), (나)를 통해 이러한 카스트제도의 특징을 파악하고, 이 제도가 인간 존중 사상의 실현 및 인간의 기본권 보장에 역행하는 부분을 찾아 비판적으로 서술해야 한다.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abd&gt;&lt;B&gt;◎ 자료 검색&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B&gt;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 untouchable)&lt;/B&gt; 
&lt;P align=justify&gt;불가촉천민은 남아시아, 특히 인도의 카스트제도에서 최하층에 속하는 이들을 이르는 말이다. 카스트 제도에서 전 국민은 네 개의 신분으로 구별된다. 가장 상위 계급인 브라만은 사제(승려)에 해당된다. 카스트 제도가 공식적으로 사라진 오늘날에도 전국적으로 약 2000개 이상의 브라만 공동체가 있다. 대표적인 브라만 인물로는 초대 총리였던 네루를 포함하여 노벨상 수상자인 타고르 등이 있다. 
&lt;P align=justify&gt;크샤트리아는 브라만 아래의 제2계급을 일컫는다. ‘무사(武士)’ 또는 ‘영토의 지배자’라 번역되며 군사 및 정치에 종사하는 왕 등의 지배층을 말한다. 최상급 신분인 브라만(사제)과 함께 인도사회를 지배하는 계층이다. 바이샤는 제3계급으로 서민 즉 생산 ·유통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가리켰다. 정복민인 아리아인(人)은 바이샤까지 계급이 구분되었다. 제4계급은 수드라로 노예 계급이다. 이들은 피정복민으로 직물공·하인 등과 같은 육체 노동에 종사했다. 
&lt;P align=justify&gt;불가촉천민은 이 네 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천민으로 카스트제도의 최하층에 해당한다. 이들 대부분은 시체 처리, 가죽 수리, 길거리 청소, 구식 &lt;A class=popup_link onmouseover=&quot;javascript:KL_show_clk_pop('%C8%AD%C0%E5%BD%C7','2','')&quot; style=&quot;FONT-WEIGHT: 700; COLOR: #173f8d; TEXT-DECORATION: underline&quot; onmouseout=javascript:clear_pop_show_delay() href=&quot;http://sense.contentlink.co.kr/sense/clk_pop.php?afd=hani2_web&amp;is_click=yes&amp;keyword=%C8%AD%C0%E5%BD%C7&quot; target=_blank&gt;화장실&lt;/A&gt; 변 처리, 소작농 등 기피업종에 종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힌두어로 불가촉천민을 ‘달리트’라 부르는데, 이는 ‘억압받는 자’, ‘파괴된 자’, ‘억눌린 자’ 등을 뜻한다. 달리트라는 호칭은 1970년대 불가촉천민 운동 조직 달리트표범당(Dalit Panders)이 만들어진 이후 널리 쓰이게 되었다.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abd&gt;&lt;B&gt;◎ 관점 넓히기&lt;/B&gt;&lt;/FONT&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어제는 세계 이주민의 날이다. 1990년 12월18일 ‘이주노동자의 권리협약’을 채택한 것을 기려 유엔이 제정했다. 이 협약은 특히 시민권과 체류 자격에 근거해 권리를 보호하는 다른 인권협약과 달리, 법적 지위와 상관없이 권리를 보호해 줄 것을 강조한다. 성별, 인종, 피부색, 언어 등에 의한 어떠한 구별도 없이 권리를 존중하고 보장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lt;P align=justify&gt;이주노동자 50만, 이주민 100만명 시대를 맞은 우리 사회 이주민들의 현실은 이 협약을 거론하는 것이 부끄러울 정도로 가혹하고 참담하다. 저임금, 장시간 노동, 임금체불 등 갖은 차별을 겪는다. 세계 이주민의 날인 어제도 서울 동대문 등지에서 이른바 불법 체류자에 대한 단속이 이뤄져 몇몇 이주노동자들이 끌려갔다. 단속 행위 자체를 두고 왈가왈부하자는 게 아니다. 단속을 하더라도 최소한의 인권적 절차를 거쳐야 한다. 거주지나 직장에 느닷없이 들이닥쳐 무조건 체포·연행하는 현재의 마구잡이식 단속행위는 ‘이주노동자에게는 인권이 없다’는 것을 정부 스스로 주창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lt;P align=justify&gt;법무부가 지난달 내놓은 출입국관리법 개정안은 이주노동자들의 현실을 더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심각성을 더한다. 개정안은 단속반원들이 때와 곳을 불문하고 의심만으로 외국인들을 검문할 수 있도록 했다. 경찰관직무집행법에는 불심검문도 신분증을 제시하면서 소속을 밝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적어도 검문에 앞서 단속반원의 증표 제시 의무라도 두어야 함이 마땅하다. 국가인권위도 불법 체류에 대한 단속을 벌일 때도 연행의 권한과 요건, 절차를 명확히할 것을 권고했다. 개정안은 또 단속반원이 불법체류자가 머무는 것으로 의심하면 어떤 사무소나 사업장에도 마음껏 들어갈 수 있도록 했다. 정부 개정안은 한마디로 단속행위의 효율성과 편의성만 염두에 뒀지 이주노동자 인권에 대한 고려는 찾아볼 수가 없다. 
&lt;P align=justify&gt;이래선 안 된다. 이주노동자들도 우리 사회 구성원들과 똑같이 보편적 인권을 지닌 주체다. 유엔의 이주노동자 권리협약도 여기서 출발하고 있다. 정부는 더는 그들의 인권을 합법·불법이란 법적 잣대로 나누지 말아야 한다. 왜 세계 38개국이 이주노동자권리협약을 비준했는지, 아직도 이 협약의 비준을 하지 않을 명분이 있는지, 세계 이주민의 날을 맞아 진지하게 살피길 바란다. 
&lt;P align=justify&gt;-&lt;한겨레&gt; 2007년 12월19일, 사설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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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실패한 개혁의 역사 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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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들꽃</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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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7-01T10:43:08Z</updated>
	    <published>2009-07-01T10:43:0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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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class=article_header&gt;
&lt;H3 class=font1 id=articleTitle&gt;실패한 개혁의 역사 1&lt;/H3&gt;
&lt;DIV class=sponsor&gt;&lt;A onclick=&quot;news_nds('news_imglogo');&quot; href=&quot;http://www.ohmynews.com/&quot; target=_blank&gt;&lt;IMG title=오마이뉴스 alt=오마이뉴스 src=&quot;http://imgnews.naver.com/image/news/2009/press/top_047.gif&quot;&gt;&lt;/A&gt; &lt;SPAN class=bar&gt;|&lt;/SPAN&gt; 기사입력 &lt;SPAN class=t11&gt;2003-02-06 09:39&lt;/SPAN&gt; &lt;SPAN class=bar&gt;|&lt;/SPAN&gt; 최종수정 &lt;SPAN class=t11&gt;2003-02-06 09:39&lt;/SPAN&gt; &lt;/DIV&gt;&lt;/DIV&gt;
&lt;DIV class=&quot;article_body font1 size4&quot; id=articleBody&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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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class=box2 width=322 height=20&gt;&lt;연재&gt; 실패한 개혁의 역사&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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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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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class=box1 width==322&gt;&lt;BR&gt;1.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넘지 못한 조광조의 개혁&lt;BR&gt;
&lt;P&gt;&lt;BR&gt;
&lt;P&gt;2. 보수적 개혁 속에서 진보적 개혁을 꿈꿨던 정조&lt;BR&gt;
&lt;P&gt;3. 외세의 위협 속에 이씨왕조의 부활을 추진했던 대원군의 개혁&lt;BR&gt;
&lt;P&gt;4. 공민왕의 대리통치자 신돈의 개혁 / &lt;/P&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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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colSpan=3 height=8&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
&lt;TD width=1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칼국수가 개혁의 상징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김영삼 정권의 문민정부는 청와대에서 칼국수를 먹으며 개혁의 그림을 그렸다. 그때 개혁이 성공했더라면, 아마 지금도 개혁의 상징은 칼국수였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먹는 칼국수의 맛은 옛 맛이 아니다. 
&lt;P&gt;
&lt;P&gt;개혁이라 부르기도 뭐하지만, 문민정부의 개혁은 실패했고 국가적인 재앙만 불러왔다. 물론 금융실명제 실시, 하나회 척결,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같은 성과물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IMF 국기위기를 불러 온 재벌정책과 대통령의 아들 김현철의 부정부패는 모든 개혁의 성과를 덮어버리기에 충분했다. 
&lt;P&gt;
&lt;P&gt;개혁의 흐름이 문민정부의 실패때문에 멈출 수는 없었다. 개혁은 도도한 강물이 되어 흘렀다. 수평적 정권교체와 국난극복의 과제를 떠안은 김대중 정권도 개혁을 외쳤고, '국민이 대통령'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노무현 차기 정권도 개혁을 준비하고 있다. 문민시대부터 외쳐 온 '개혁'이라는 시대적 요청은 화두처럼 한국사회를 아직도 감싸고 있다. 
&lt;P&gt;
&lt;P&gt;개혁은 역사가 평가한다. 역사는 과연 이 시대의 개혁을 어떻게 평가할까? 개혁의 성격은 무엇이고, 교훈은 무엇이며, 실패인지 성공인지 냉정하게 평가할 것이다. 우리시대의 개혁을 성공한 개혁의 역사로 기록하려면 어찌해야 하는가? 
&lt;P&gt;
&lt;P&gt;개혁의 평가는 역사의 몫이지만 개혁의 성격과 역사적 교훈, 성공인지 실패인지는 우리들의 몫이다. 성공한 개혁으로 기록하려면 우선 역사 속의 개혁을 살펴봐야 한다. 역사적 교훈을 밝혀내야 실패의 전철을 밟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중요한 시대적 전환기에 전개된 개혁의 역사를 살펴보고 간략하게나마 평가해보려고 한다. 
&lt;P&gt;
&lt;P&gt;한국사에서 중요한 개혁들을 살펴보면 거의 실패했음을 알 수 있다. 공민왕과 신도의 개혁, 조광조의 개혁, 정조의 개혁, 대원군의 개혁이 그러했다. 시대적 상황도 다르고 개혁의 주체도 달랐지만 이들의 개혁의 실패에는 공통분모가 숨어 있었다. 그것은 전근대적 봉건사회라는 시대적 한계를 뛰어 넘을 수가 없었고, 새로운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들의 개혁을 보면 사회세력간의 투쟁이 아니라 엘리트간의 권력투쟁으로 비쳐진다. 봉건사회라는 한계와 새로운 사회세력이 뒷받침하지 못한 개혁이었기 때문이다. 
&lt;P&gt;
&lt;P&gt;또 한가지 공통분모를 보면 공민왕과 정조, 대원군의 개혁은 군주권(왕권) 강화가 개혁의 목표였기 때문에 근대적 개념의 사회세력을 키워내지 않았다. 
&lt;P&gt;
&lt;P&gt;자! 그럼 소수파 정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실패한 조광조 개혁의 역사를 보자. 조선은 강한 중앙집권적 국가였다. 이런 중앙집권적 국가에서 대안세력들을 견제하고 활용하는 정책은 관료제로 편입이었다. 중앙집권적 관료제로 편입된 대안세력들은 보수세력과 경쟁하면서 서서히 기득권 층으로 탈바꿈해갔다. 
&lt;P&gt;
&lt;P&gt;이런 현실에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소수의 세력이 등장하더라도 새로운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기 때문에 급진적인 정책을 내세우게 되고, 대화와 타협의 정치를 못해 개혁의 실패를 좌초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수파 정권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조광조의 개혁도 마찬가지였다. 
&lt;P&gt;
&lt;P&gt;조광조의 개혁은 어떤 시대적 요청에 따른 것이었나? 
&lt;P&gt;조광조의 개혁이 요청되던 16세기 초반은 조선 전기의 통치시스템이던 &lt;경국대전&gt;체계가 점차 한계와 모순을 드러내던 때였다. 또한 이 시기는 국가주도의 경제에서 민간주도의 경제로 변화하던 때이기도 하다. 
&lt;P&gt;
&lt;P&gt;그런데 건강한 민간주도의 경제시스템이 정착하기도 전에 문제가 발생했다. 훈척세력이라 불리는 기득권 지배세력이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생겨난 사회적 부를 국가 전체에 바람직한 방향으로 활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들은 정치권력을 이용해 사회적 부를 개인이 독점하였다. 
&lt;P&gt;
&lt;P&gt;이런 시기에 등장한 세력이 바로 조광조로 대표되는 사림세력이었다. 이들은 주자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한 재야세력이었다. 이후 주자성리학의 세계관은 조선사회의 지배적인 패러다임이 되었고, 명분과 실천을 중시하는 경향이 조선 성리학의 주요한 특성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lt;P&gt;
&lt;P&gt;조광조의 현실인식은 성리학에서 이상 사회로 여기는 요순 시대의 정치만이 당시 사회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사회·경제개혁보다는 정치·의식개혁을 중심과제로 설정하고 밀어붙였다. 
&lt;P&gt;
&lt;P&gt;조광조와 사림세력은 낭관권, 문묘종사, 향촌사회의 개혁 등 개혁정책을 실천하여 조선시대 통치제도와 이념의 기틀을 잡아갔다. 그중 가장 급진적인 당시 기득권 층을 뿌리째 뽑아내려 한 위훈삭제의 단행 요구였다. 위훈삭제는 중종반정 때 책봉된 정국공신들 가운데 상당수가 거짓 공훈이니, 이들을 골라내어 공신명단에서 삭제할 것을 요구한 혁명적인 개혁조치였다. 이는 곧 훈척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겠다는 급진적인 개혁안이었다. 
&lt;P&gt;
&lt;P&gt;공신에서 삭제되면 그 대가로 받았던 토지와 노비까지 국가에 반납해야 되는데, 당시 기득권을 가졌던 훈척세력이 가만히 있었을까? 당연히 개혁에 대해 거세게 반발했다. 117명의 공신가운데 3/4에 해당하는 76명이 위훈삭제를 당했으니 훈척세력의 분노는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lt;P&gt;
&lt;P&gt;조광조와 사림세력은 위훈삭제 조치가 결정되고 3일만에 일어난 기묘사화로 중앙정치무대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lt;P&gt;
&lt;P&gt;조광조의 개혁은 시대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사회세력의 뒷받침이 없이 중종에게만 의지하여 개혁을 추진하다보니 급진적인 정책을 무리하게 추진하였고, 이 과정에서 많은 적들을 만들고 말았다. 대화와 타협, 설득하는 권력이 아닌 밀어붙이기식의 권력은 실패를 예상할 수밖에 없다. 
&lt;P&gt;
&lt;P&gt;조광조와 사림세력도 개혁이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몰랐을까? 결코 그들은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 즉 큰 화를 입을 수 있다는 것도 미리 알았다. 그런데도 왜 그들은 개혁을 거칠게 밀고 나갔을까? 그들은 주자성리학 패러다임에 근거한 실천이 조선사회의 지배적인 실천이념이 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lt;P&gt;
&lt;P&gt;퇴계 선생은 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을 &quot;조광조가 타고난 기질은 아름다웠으나 학력이 충실하지 못하여 하는 일이 지나침을 면치 못했기 때문에 마침내 실패했다. 만일 학문에 충실하고 덕기(德器)가 이루어진 세상에 나가 이를 담당했더라면 그 성취한 것을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quot;고 평가했다. 
&lt;P&gt;
&lt;P&gt;조광조 개혁의 실패 원인을 정리하면, 우선 뒷받침할만한 사회세력이 없었고 △개혁세력이 중종이라는 군주에게 많이 의존했고 △비전은 있었으나 비전을 담을만한 철학이 다듬어지지 못했고 △뒷받침할만한 사회세력이 없다보니 개혁 조급증에 빠져 급진적인 정책만 일관하는 등 정치력의 미숙함을 드러냈다. 이런 한계 때문에 조광조의 개혁도 엘리트들의 정권투쟁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lt;P&gt;
&lt;P&gt;우리시대의 개혁은 어떠한가? 개혁주체는 있는지. 개혁의 사상적 기반은 있는지. 개혁세력을 새로운 사회세력이 뒷받침을 하는지. 개혁의 비전은 있는지. 명확하게 대답하기 어려울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개혁은 흐름일 뿐 구체적인 그 무엇은 아닌 것 같다. 
&lt;P&gt;
&lt;P&gt;조광조의 실패한 개혁의 역사를 교훈 삼아 노무현 당선자에게 몇 가지를 제시해보고자 한다. 우선 소수파 정권임을 인정하고 노무현 당선자의 주장대로 대화와 타협의 정치, 설득하는 권력의 자세를 잃지 말기를 바란다. 그리고 개혁을 담을 철학을 지금부터라도 준비해야 한다. 철학이 없는 개혁은 팥 없는 찐빵일 뿐이다. 철학이 다듬어지지 않으면 개혁 조급증에 빠지더라도 헤어나올 길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lt;P&gt;
&lt;P&gt;또한 든든하고 믿음직한 우군을 만들어야 한다. 국민이 대통령이다. 시민의 정치의식을 믿어야 한다. 즉 시민이 노무현 정권의 정치 파트너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노무현 정권은 건강한 시민사회 육성을 위해 어떠한 지원도 아껴서는 안 된다. 비록 시민사회가 쓴소리를 하고 권력을 견제하더라도 겸손하고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사회의 비판을 외면하거나 강경하게 대응한다면 개혁은 이미 물 건너가게 될 것이다. 
&lt;P&gt;
&lt;P&gt;대원군의 개혁을 다루면서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겠지만, 북·미 사이의 전운이 감도는 현실에서 개혁은 더욱 어려운 문제이다. 이럴수록 국론이 분열돼서는 안 된다. 때문에 개혁조급증을 피해야 한다.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씨처럼 &quot;뭔가, 보여주겠습니다&quot;며 성과 위주의 개혁 정책은 국론을 분열시킬 수 있다. 오히려 개혁의 기초를 닦는데 힘을 기우려야 한다. 어떤 정권이 들어서더라도 개혁의 흐름이 꺾기지 않도록 말이다.&lt;/P&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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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 궁예, 패자(覇者)와 폭군의 갈림길에 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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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6-28T21:52:41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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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H3&gt;잃어버린 또 하나의 역사, 궁예, 패자(覇者)와 폭군의 갈림길에 서다.&lt;/H3&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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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question_contents&gt;
&lt;P&gt;&lt;FONT color=#8e8e8e&gt;&amp;nbsp;“왕공이 이미 의기를 들었다”하니, 나라 사람으로 달려오는 자가 이루 헤아릴 수 없었으며, 먼저 궁문에 이르러 북을 치고 떠들며 기다리는 자도 역시 만여 명이나 되었다.&amp;nbsp;&amp;nbsp; &lt;/FONT&gt;&lt;FONT color=#8e8e8e&gt;궁예는 이 소식을 듣고 어찌 할 바를 모르다가 미복으로 북문을 빠져 나가서 바위 골짜기로 도망하였다가 조금후에 부양 백성에게 살해되었다.&lt;/FONT&gt;&lt;BR&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고려사 절요 권 제 1 태조 신성태왕 -&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수십개의 군웅이 난립하던 시기. 그 혼란을 극복하고 일어선 궁예가 겨우 보리삭을 훔쳐먹다가 부양 백성들에게 살해되었다는 치욕스러운 최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정작 그 민중들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철원에서 아직까지 내려오는 궁예를 기리는 제사인 태봉제가 있다는 것만 보아도, 민중들은 그를 폭군이라 생각하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그리고 설화는 궁예의 최후도 다르게 말하고 있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바로 궁예가 자살했다는 것이다.&amp;nbsp; 궁예와 왕건의 최후 격전지인 보개산성. 그리고 궁예와 그의 부하들이 최후에 통곡했다는 명성산.&amp;nbsp; 그리고 궁예는 결국 자살하거나,&amp;nbsp;혹은 그의 부하들에게 살해되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삼국사기에는 궁예의 두 얼굴을 기록하고 있다.&lt;/P&gt;
&lt;P&gt;하나는 병사들과 동거동락을 같이한 성군의 모습.&amp;nbsp;또 하나는&amp;nbsp;참소를 믿어 마구 사람들을 죽인 폭군. 그리고 부인과 두 아들을 죽인 매정한 아버지의 모습까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퍼온 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성군과 폭군의 엇갈리는 모습. 같은 기록인데도 이렇게 상반된 두 기록이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는 고구려인의 후손이라는 말 부터 시작하여, 헌안왕이나 경문왕의 서손이라 기록하고 있다. 어쨌든 신라 말기, 귀족들의 세력다툼의 희생양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결국 그렇게 서라벌을 떠나왔고, 또 그렇게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lt;/P&gt;
&lt;P&gt;결국 진성여왕 치세. 그 기회가 온 것이다.&amp;nbsp; 처음 죽주의 기훤에게 의탁했다가, 다시 북원의 반란군 양길에게 의탁한다. 양길은 궁예를 892년과 894년에 차례로 신라의 여러 지역을 공격할 것을 명한다. 그리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선종은 건녕 원년(ad 894)에 명주로 들어가 3천5백 명을 모집하여, 이를 14개 대오로 편성하였다. 그는 김대검, 모흔, 장귀평, 장일 등을 사상으로 삼고, 사졸과 고락을 같이하며, 주거나 빼앗는 일에 이르기까지도 공평무사하였다. 이에 따라 여러 사람들이 그를 마음 속으로 두려워하고 사랑하여 장군으로 추대하였다. 이에 저족, 생천, 부약, 금성, 철원 등의 성을 쳐부수니 군사의 성세가 대단하였으며, 패서에 있는 적들이 선종에게 와서 항복하는 자가 많았다. 선종은 내심 무리들이 많으니 나라를 창건하고 스스로 임금이라고 일컬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내외의 관직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삼국사기 권&amp;nbsp;제 50 열전 제 10 궁예전 -&amp;nbsp;&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본래의 병력은 기병 6백이었다. 그것이 불과 2년만에 3500여명으로 불어난 것이다. 이는 세상에 불만을 품은 민중들이었고, 그를 잘 이용한 것이 바로 궁예였다.&amp;nbsp;이런식으로 민심을 얻은 궁예는 드디어 양길의&amp;nbsp;세력에게서 독립, 독자적 세력을 계속 해서&amp;nbsp;만들어 간다.&amp;nbsp;이 때 궁예가 3천 5백여명의 병력을 모집한 곳이 바로 명주. 다시 말해 고려 건국 이후 5년 후 까지 고려에 귀순하지 않은, 명주&amp;nbsp;호족 김순식의 땅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는 이렇게 자신을 신봉하는 친위세력이 많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환선길의 모반사건, 이흔암의 반란 미수 사건 모두 궁예의 친위세력이 일으킨 반란이다. 또한 7월에 있었던 청주인의 반란을 비롯,&amp;nbsp; 백제에 투항한&amp;nbsp;운주 등 10여개 군현 모두 왕건에 반하는 세력, 즉 궁예의 친위세력이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궁예는 매우 현실적인 판단을 하는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래서 사방 곳곳에 자신의 친위 세력을 만들어 놓고, 있을지도 모르는 후세의 위협에 대비하였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쨌든 궁예는 이로부터 나라의 기틀을 확립하고, 신라의 혈연중심 골품제를 업무위주로 고치며 여러 고구려 관련 호족들을 받아들였다.&lt;/P&gt;
&lt;P&gt;그리고 896년.&amp;nbsp;드디어 송악 사찬 왕륭이 궁예에게 귀하했다. 송악. 바닷길을 중심으로한 번화가였으며 궁예에게 귀하한 호족들 중에서도 가장 강성했던 호족이었다. 이런 왕륭의 항복은 궁예에게 아주 기쁜 일이었을 것이다.&amp;nbsp; 그러나 이는 궁예의 파멸을 알리는 전조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왕륭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두 강대한 세력이 부딪히면 결국엔 한쪽이 깨지기 마련이다. 그것이 어느쪽이 되리라고는 예상하기 힘들었다.&amp;nbsp;송악군이 궁예의 세력에 대항하여 이길 수 있을 가능성은&amp;nbsp;50%.&amp;nbsp; 그는 그 50%의 가능성에 기댈 수는 없었다. 게다가 이미 민심을 얻은 궁예를 어찌 상대한단 말인가?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늘에 두 해는 있을 수 없는 법. 이 때 부터&amp;nbsp;송악 세력과 궁예 세력의 충돌은 이미 기정사실이었던 것이다.&amp;nbsp;어쨌든 궁예는 자신에게 투항해 온 강대한 세력을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왕건에게 발어참성을 쌓게하고, 송악태수로 임명하였다. 이 때 왕건의 나이가 불과 20세인데 반해 &quot;성주&quot;라는 관직까지 제수한 것으로 보아&amp;nbsp;궁예가 얼마나 송악 세력을 환대했으며, 송악 세력이 얼마나 강성했는지 짐작 할 수 있는 대목이다.&lt;/P&gt;
&lt;P&gt;아마 이 때. 왕륭이 궁예에게&amp;nbsp;투항 할 때 부터 그는 이미 역심을 품었을 것이다. 그리고 교묘하게 옥좌를 노렸고,&amp;nbsp;뛰어난 정치가였던 궁예가 이를&amp;nbsp;모를 리 만무했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쨌든 궁예는 송악 세력을 등용, 왕건에게&amp;nbsp; 승령, 임강의 두 고을을 치게 한것으로부터 시작하여&amp;nbsp;이듬해에는 송악에 도읍을 정했으며&amp;nbsp;898년.&amp;nbsp;22세 밖에 되지 않았던 왕건에게 &quot;정기대감&quot;을 제수하였다.&amp;nbsp;&lt;/P&gt;
&lt;P&gt;또한 900년.&amp;nbsp;양길의 잔당인 광주, 충주, 청주의 삼주와 당성, 괴회 등의 군현을 공격할 것을 명했다.&amp;nbsp;이것 또한 궁예가 왕건의 능력을 높이 산 것이라기 보다는, 왕건의 세력의 너무가 강대했기 때문에 어린 왕건에게 이런 일을 시켰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왕건의 세력을 견재하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을 것이다.&lt;/P&gt;
&lt;P&gt;그러나 이것 부터가&amp;nbsp;바로 궁예가 범한 실책이었다.&amp;nbsp;놀랍게도 왕건은 모두 이기고&amp;nbsp;개선했던 것이다.&amp;nbsp;엄청난 전공을 세운 송악의 세력이 이제 왕건에게 송악 태수와 정기대감의 관위를 내린 것 만으로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궁예는 아찬의 관위를 내려주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송악에 도읍을 정하고, 왕건에게 발어참성을 쌓게하고, 또한 외직에 나서서 여러 군현을 토벌하게 하고, 정기대감의 관위를 제수한 것 모두 새로이 귀순한 송악세력을 환대하고 그들을 달래면서도, 자신이 그렇게 환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고 했던 것일 것이다.&lt;/P&gt;
&lt;P&gt;그러나 왕건을 아찬으로 임명하면서부터궁예도 또한&amp;nbsp;스스로 위험을 느끼기 시작했다.&amp;nbsp;이듬 해 왕을 칭하기는 했지만 송악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진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더군다나 송악세력의 수장인 왕건의 공이 너무나도 컸다. 즉 이제는 송악 세력을 제거하고 싶어도 제거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이다. 그리고 그가 도읍으로 삼은 곳도 송악이었다. 다시 말해 사방이 다 왕건의 세력 밖에 없었던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제 궁예는 너무 커져버린 송악 토착 세력을 견재하려고 할 수 밖에 없었고,&amp;nbsp; 또한 궁예가 왕건의 세력을 견재하려는 움직임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왕건의 세력이 너무나도 커지게 만들었다.&amp;nbsp;그것은 바로&amp;nbsp;&amp;nbsp;903년. 왕건이 나주를 정벌하고 그 곳 십여군현을 함락시켰고, 이에 궁에는 그를 다시 알찬으로 삼은 일이었다.&lt;/P&gt;
&lt;P&gt;이것은 왕건 세력을 견재하려는 움직임을 하면서&amp;nbsp;왕건 세력의 압박이 가중되는 가운데, 결국 하나의 카드로 왕건에게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으로 보인다.&amp;nbsp; 어쩔 수 없었던 선택이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더 이상 궁예는 송악 세력이 활개치는 송악에 있을 수 없었다.&amp;nbsp;왕건의 공은 너무나 컸고, 그의 관위는 알찬이나 되었다. 또한&amp;nbsp;그가 송악에 있는 동안 왕건의 세력에게서 계속해서 압박을 받았다. 이제 그는 또 다른 방안을 꺼내들었다. 다른 호족을 이용하여&amp;nbsp;왕건 세력을 견재하려&amp;nbsp;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듬해 904년.&amp;nbsp;궁예는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하였다. 그 이전 국호인 후고구려는 순전히 고구려의 후예들을 수용하기 위함이었고, 그 때 까지만 해도 궁예는 고구려의 후예들을 수용하며 적극 정국에 활용했다. 왕건의 세력도 그 중 일파였는데,&amp;nbsp; 이제 왕건의 세력이 너무나 커졌으므로, 더 이상 고구려 출신 호족들만 받아들일 수 없었다.&amp;nbsp;그리고 그도 삼한의 왕이 되고싶은 꿈이 간절했기에, &quot;대동방국&quot;이라는 뜻의 &quot;마진&quot;이라 국호를 개칭했다.&lt;/P&gt;
&lt;P&gt;또한 왕건 세력이 활개치는 송악을 떠나,자신의 친위세력이 있었던 철원으로 되돌아가려는 공사를 시작했다.&amp;nbsp;또한 자신의 친위세력인 청주인을 적극 받아들이고 그들의 세력을 키워주었다. 이렇게 해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고려사에&amp;nbsp;&quot;궁예에게 어진 신하를 참소했다&quot;던&amp;nbsp;청주 호족 아지태였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것은 궁예가 드디어 표면적으로 왕건 세력을 견재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다. 고구려 출신 호족이었던 송악 토착 세력. 그 세력의 수장인 왕건은 이제 그가 위협을 느꼈다. 그 때까지 자신의 세력이 커가는 것만 보아왔지만, 또 궁예가 소극적인 방법으로 왕건 세력을 견재했지만 이제는 궁예가 대놓고 왕건 세력을 견재하기 시작한 것이다.&lt;/P&gt;
&lt;P&gt;이것은 잘못하다간 왕건도 그 스스로&amp;nbsp;목이 날아갈 수 있는 엄청난 일의 발단이었다는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마 송악세력 모두가 위협을 느끼고 궁예에게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때는 달랐다. 청주의 호족들이 급격히 성장하고, 또한 다른 호족들도 성장하면서 이제 송악 세력은 고립되어 버렸다.&amp;nbsp;궁예와 왕건의 첫 대결은&amp;nbsp;궁예의 압승이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이듬해.&amp;nbsp;왕건이 그렇게&amp;nbsp;우려하던 일이 발생했다. 궁예가 철원 천도를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 다음 부터 왕건은 스스로 위협을 느끼고 자중했고, 더 이상 궁에 또한 왕건에게 아무런 일도 맡기지 않았다. 왕건은 자신의 본거지인 송악을 떠나 철원에서는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amp;nbsp;궁예가 승리를 자축하고 있던 그 성책 2년(ad&amp;nbsp; 906).&amp;nbsp;갑자기 상황이 급변했다. 바로 서라벌 출신 호족들이 왕건을 옹호하고 나선것이다. 왕건이 고립된 건 신라 출신 호족과 청주 호족 등이 강성해진 것 덕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신라 출신의 호족이 왕건을 지지했고, 이지 상황이 급변했다. 결국 궁예는 다시 압박에 못이겨 왕건에게 명하여 사화진을 치도록 했다. 다시 공을 세울 기회를 준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더 이상 관위를 올리는 일은 없었다. 이제는 송악에 도읍할 때와 상황이 다른 것이다. 왕건이 신라 출신 호족들이 그를 지지했을 때 그는 매우 고마웠을 것이다.&amp;nbsp;그리고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들 바로 그 무렵에 다시 궁예가 신라 출신 호족들을 공격하고 나섰다.&amp;nbsp;궁예가 송악에 도읍할 때에는 궁예가 사방에 왕건의 세력과 그를 지지하는 세력만 있는, 즉 철저히 고립된 상황이었다.&lt;/P&gt;
&lt;P&gt;그러나 철원은 달랐다. 철원 자체가 왕건이 아닌 궁예의 지지세력이면서, 또한&amp;nbsp;궁예가 등용한&amp;nbsp;청주인도 그를 신봉하는 친위세력이었다. 궁예는 더 이상 고립되있지 않았다. 그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왕건과 궁예의 두번째 싸움도 궁예의 승리였다. 그것이 궁예가 신라 서라벌을 멸도라 부르며&amp;nbsp;신라 출신 호족들은 신라 출신이라는 이유로 그들을 제거하기 시작한 것이다. 기록에는 그가 매우 자만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왕건의 지지세력을 제거하려는 의도였다. 물론 이 때 까지도 민중들은 왕건의 편이 아니라 궁예의 편이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날이 가면 갈 수록 왕건의 지지세력은 하나 둘 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방금 전 까지 왕건을 옹호하던 세력들이 모두 다 &amp;nbsp;목이 달아나 있던 것이다. 정작 그 일에 중심에 서 있던 왕건으로서는 두렵지 않을 수 없었다.&lt;/P&gt;
&lt;P&gt;왕건을 옹호하던 세력은 거의 전멸했다. 신라 출신 호족들도 이 때에 이르러 모두 멸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궁예는 무죄인데도 단지 신라 호족이라는 이유로 죽이지는 않았을 것이다.&amp;nbsp; 아마 이 일은 조선시대 당쟁에서 있었던 일 처럼 진행되었을 것이다.&amp;nbsp;단순한 일을&amp;nbsp;꼬투리 잡아 국문하고,&amp;nbsp;자복하든 하지않든&amp;nbsp;곧 처형했을 것이다. 물론 이 때 처형당한 자들은 모두 왕건의 옹호세력이었다. 다시 왕건이 철저히 고립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다시 의문에 휩쌓인다.&amp;nbsp;왕건이 다시 나주로 간 것이다.&lt;/P&gt;
&lt;P&gt;이는 어찌&amp;nbsp;설명해야 할까?&lt;/P&gt;
&lt;P&gt;그는 성책 2년(ad 906) 부터 왕건을&amp;nbsp;지지하던 세력을 죄를 물어 모두 제거하였다. 다시 살 길이 보였던 왕건이 다시 철저하게 고립되어 버린 것이다. &amp;nbsp;그런데 다시 그런 왕건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었다는 것은 궁예가 정말로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일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D 909년. 나주의 도적 능창이 봉기하였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견훤이 진공한다. 아마 이 때 궁예는 왕건을 보내기 이전 자신의 친위세력의 장수들을 먼저 나주로 보냈을 것이다.&lt;/P&gt;
&lt;P&gt;그러나 다시 문제가 생긴다. &quot;나주&quot;는 철저히 왕건 세력의 땅이었던 것이고, 왕건 세력이 아니라 궁예 친위세력이라는 이유로 그들의 명령에 불복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lt;/P&gt;
&lt;P&gt;고려사에는 &quot;&lt;FONT color=#8e8e8e&gt;궁예가 나주의 일을 근심하다가&lt;/FONT&gt;&quot;라고 하였다. 다시 말해 궁예는 일을 왕건에게 맡기지 않으려 한&amp;nbsp;&amp;nbsp;것이다. 왕건의 세력이 커지면 곧 그것은 자신의 위험으로 닥칠 것이다. 또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궁예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이전 궁예는 북벌을 감행하려는 계획을 꾸몄으나 나주의 일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나주는 왕건 세력의 땅이었다. 이는 왕건에게 둘도 없는 행운인 것이다. 2차 나주 전투의 기록에서 왕건이 얼마나 궁예에게서 위협을 느꼈는지는 다음과 같은 기록에서 알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태조가 말하기를 &quot;삼가하여 게으르게 하지 말고 오직 힘을 다하여 두 마음을 가지지 않으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이 방자하고 잔학하여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가 뜻을 얻게 되어 서로가 참소하고 있다. 이러므로 내직에 있는 사람들은 제 각기 스스로 보전하지 못할 것이니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며 힘을 다하여 왕사에 힘써서 일신을 보전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quot;고 하니 제장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고려사 권 제 1 태조세가 -&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기록은 겉으로 보면 별로 이상하지 않지만 잘 보면 매우 놀라운 기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왕건은 궁예의 부하이고, 궁예는 왕건의 주인이다. 그런데 왕건은 그런 주인에게&lt;/P&gt;
&lt;P&gt;&quot;지금 주상이 방자하고 잔학하여&quot;라는 말을 하였다. 이것은 왕건이 궁예에게 얼마나 위협을 느끼고 있었고, 왕건이&amp;nbsp;이미 역심을 품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나주로 함께 갔던 장수&amp;nbsp;&lt;/P&gt;
&lt;P&gt;김신 등은 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던 것이다. 이 다음 기록 &quot;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quot; 라는 말은 왕건의 지지세력들이 모두 죽어나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왕건이 두려움을 느꼈고, 또 이는 왕건에게는 위험한 일이었다. 따라서 &quot;나를 옹호하던 자들이 다 죽었다&quot;기 보다 &quot;무고한 사람들을 많이 죽이고..&quot;라는 말로 각색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그 말을 듣던 제장들도 모두 왕건의 옹호세력이었다. 이는 다시말해&amp;nbsp;&quot;궁예가&amp;nbsp;자신의 옹호세력들을 제거하는데에&quot; 있어서&amp;nbsp;&quot;살아 남을 길은 오직 외직에 있는 길 뿐&quot; 이라는 뜻이다. 또한 이 다음의 말인 &quot;참소하고 아첨하는 무리&quot;는 물론 궁예의 측근들을 의미한다. 또 그들이 &quot;뜻을 얻게 되어 서로가 참소하고 있다&quot;는 말은 궁예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져서 왕건의 옹호 세력들을 하나 둘 씩 모두 제거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말이고,&amp;nbsp;왕건 또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다.&amp;nbsp;&lt;/P&gt;
&lt;P&gt;이 말을 잘 보면 왕건이 얼마나 두려움을 느꼈는 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물론 궁예는 이 때도, 최후에 죽을 때도 그는 포악한 폭군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부하들을 믿지 못한 것이 아니라, 너무나 커진 왕건의 세력을 견재하기 위해 왕건의 세력을 하나 둘 씩 제거한 것인데, 이는 고려의 관점에서 &quot;참소&quot;라 했던 것이다. 물론 &quot;참소하는 무리&quot; 즉 궁예의 측근들은 왕건 정변 후 가장 먼저 처형당했다는 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 그리고 어진 이(물론 왕건의 세력)를 많이 참소했다는 청주인 아지태가 이에 속할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결국 그들은 궁예에게 충성을 바친 자들이며 너무나 강성해진 왕건의 세력을 궁예의 입장에서 걱정했던 자들이다. 따라서 종간과 은부는 왕건 정변 이후, 가장 먼저 처형당한 것이다. 왕건을 거의 죽음에까지 내몬 이들이었고, 왕건도 그들을 중오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위의 대목은 왕건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 외에 또 다른 사실을 의미한다. 궁예가 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 등 자신의 친위세력을 등용하여 왕건의 세력을 철저히 축출하고 고립시켰지만 결국 2차 나주 전투 이후에&amp;nbsp;왕건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군주정치에서 그 임금을&amp;nbsp;농락하는 것은 가령 농담이라 해도 살아남기 힘든 일이다. &lt;/P&gt;
&lt;P&gt;그런데 왕건은 그런 말을 하고도&amp;nbsp;처형은 커녕&amp;nbsp;아무런 처벌도&amp;nbsp;받지 않았다. 즉 다시 왕건의 세력이 커지고 있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런 점에서 왕건에게 있어서 2차 나주 전투는 엄청난 행운이요, 궁예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위협이었다. 왕건과 궁예의 두번의 대결에서 궁예는 왕건의 세력을 모두 축출하면서 두 차례 모두 승리를 자축했다. 그러나 2차 나주 전투 이후 왕건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졌다. 상황이 급변한 것이다. 이 때 부터 왕건의 역전이 시작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재차 왕건의 세력은 강성해졌지만 더 이상&amp;nbsp;궁예에게 압박을 가할 수는 없었다. 이미 궁예의&amp;nbsp;친위 세력도 매우 커져서 두 세력은 팽팽한 접전을 유지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2차 나주 전투 이후 궁예는 왕건에게 다시는 공을 세울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러나 궁예는 다시 위험해 처한다. 그것은 바로 고구려 출신 호족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이미 신라 출신 호족들이 왕건을 옹호하며 궁예에게 반기를 드니, 궁예는 그들을 모두 축출해 버렸다.&lt;/P&gt;
&lt;P&gt;그런데 이제 궁예의 기반이 되었던 고구려 출신 호족들 마저 반기를 들었다면 궁예는 엄청난 위험해 처했을 것이다. 그들은 후고구려의 국호가 마진으로 바뀌면서부터&amp;nbsp;고구려 호족들에게 소흘히 한다는 인상을 받았을 것이고, 드디어 그런 역심을 가졌다가, 2차 나주 전투 이후엔 폭발했다. 이제&amp;nbsp;궁예가 의지할 세력이라곤 철원, 명주, 청주 등지 밖에 없었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쩔 수 없이 궁예는 새로운 카드를 꺼내들었다.&amp;nbsp;AD&amp;nbsp;&amp;nbsp;911년 연호를 수덕만세, 국호를 태봉이라 고쳤다. 그러나 이 이후, 궁예는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이 되어 버렸다.&amp;nbsp;&amp;nbsp;이것은 자신에게 반기를 든 고구려 출신 호족들을 적대시 하며 그들을 제거할 길을 도모한 것이다. 이 때 부터 태봉국은 드디어 재정일치적 성향을 띄며&amp;nbsp;궁예는&amp;nbsp;머리에 금책을 쓰고 스스로 미륵불이라 지칭했다. 또한 불경 20권을 저술하여 이를 강연, 드디어 고구려 출신 호족들에게 위협을 가했다. 그런데도 고구려 출신 호족들은 계속해서 왕건을 옹호했다. 그것은 중 중에서도 있었는데 바로 석총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결국 왕건의 옹호세력이었던 중 석총.&amp;nbsp;그는 결국 궁예에게&amp;nbsp;반기를 든 죄로 철퇴를 맞고 절명했다.&amp;nbsp;그는 왕건을 변호하려다가 죽은 셈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는 석총을 시작하여 이미&amp;nbsp;신라의 호족들을 모두 전멸시키며&amp;nbsp;끝이 났었던&amp;nbsp;&quot;왕건세력 축출&quot;을&amp;nbsp;재계하고, 이제는 그 칼끝을 고구려 출신 호족들에게 돌렸다. 물론 기록에는&amp;nbsp;&quot;궁예가 참소를 믿어&quot; 한 일이라&amp;nbsp;하였지만, 그는 물론 참소인 것도 알고&amp;nbsp;있었으며 왕건 세력을 축출하는&amp;nbsp;계획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가 세운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911년에서 부터 913년 까지 계속되었다. 그런데도 왕건의 옹호세력을 늘어만 갔고, 궁예는 미륵불을 칭하며 계속해서 그들을 제거하였다. &quot;관심법&quot;도 왕건의 옹호세력을 효과적으로 제거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amp;nbsp; 그러나 2년간 계속된 학살에도 그들은 계속 고개를 들었다. 1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불과 1년 만에 모두 전멸당했지만 2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계속 지속되었다.&amp;nbsp;궁예는 끝이 보이지 않자, 그는 중신들이 모두 죽을 것도 걱정했을 것이다. 그는 그래서 다른 방안을 세우지 않으면 되지 않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것은 바로&amp;nbsp;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의 중심인 왕건을 직접 제거하려 한 것이다.&amp;nbsp;외직에 있어&amp;nbsp;어떻게든&amp;nbsp;살아남을 길을 도모했던 왕건을&amp;nbsp;궁예는 913년 불러들이고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태조가 자주 변공을 세우니 벼슬을 더욱 올려 파진찬 겸시중으로 삼아 불러들이고 수군의 임무는 다 부장 김신 등에게 위임하되 정토의 일은 반드시 태조에게 품의하여서 이를 행하게 하였다. 이에 태조의 지위가 백관중에서 가장 높게 되었다. 그러나 본래의 뜻이 아니었고 또 참소를 두려워 하여 그 지위에 있기를 즐거워 하지 않았다. 매양 공문에 출입하여 국사를 평장함에 오로지 어진 이를 좋아하고 악한 이를 미워 하며 매양 사람이 참소를 당하는 것을 보면 곧 모두 해명하여서 구하여 주었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고려사 권 제 1 태조 세가 -&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려사에서는 &quot;태조가 자주 변공을 세우니...&quot;라고 하였지만 그 뒤 &quot;참소를 두려워 하여 그 지위에 있기를 즐거워 하지 않았다&quot; 라는 기사가 있는 것으로 보아 궁예가 왕건을 제거하기 위해 그를 파진찬 시중으로 불러들인 것이지, 그가 절대로 변공이 높아서 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왕건이 &quot;어진 이를 좋아했다&quot;는 것도 사실 자신의 지지세력과 당연히 가까이 한 것을 의미하고 &quot;악한 이를 미워 하였다&quot;는 것은 궁예의 세력을 중오했다는 뜻이다. 그리고 &quot;참소를 당하는 것을 보면 모두 해명하여서 구하여 주었다&quot;라는 기사 또한 자신의 지지세력을 잃지 않으려 하는 자기 변호에 불과했지, 그가 결코 오지랖이 넓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아래는 그 다음의 기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청주(淸州)인 아지태는 본래 아첨하고 간사하더니 궁예가 참소함을 좋아하는 것을 보고 고을 사람 입전 관서등을 참소하매 유사는 이를 추국하여 수년동안 판결하지 못한 채 있더니 태조가 곧 진위를 가려 내어 지태가 죄에 복하거늘 여러 사람들이 마음에 속 시원하게 여겼다. 이로 말미암아 원문장교 종실훈현 지계유아의 무리가 바람에 쓸리고 그림자 처럼 따르지 아니함이 없었다. 태조가 화가 미칠 것을 두려워 하여 다시 외방일 맡기를 구하였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고려사 권 제 1 태조 세가 -&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미 아지태에 대해서는 위에서 몇번 거론한 적이 있었다. 아지태의 출신인 청주는 궁예가 믿고 의지하는 친위세력이었다. 물론 그가 &quot;아첨하고 간사했다&quot;는 말도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에 동참했다는&amp;nbsp;뜻이며 &quot;궁예가 참소를 좋아했다&quot;는 것도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두고 하는 말이었다. &lt;/P&gt;
&lt;P&gt;또 놀라운 내용이 이 기사에 있다. 바로 청주 호족 아지태가 동향인 입전과 관서를 참소한 것이다. 이것은 궁예가 믿고 의지하던 친위세력인 청주가 꼭 궁예를 지지하다가 갑자기 돌변, 왕건에게 기울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궁예는 다시 고립에 빠졌을 것이다. 이제 믿을 것이라고는 철원의 세력밖에 없었다.&amp;nbsp;따라서 청주 호족 아지태는 그런 궁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청주의 왕건 지지세력의 중심이었던 입전과 관서를 잡아들였고 결국 자신의 지지세력을 잃기 싫었던 왕건의 변호로 인해 살았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는 또 다시 위기에 빠졌다. 청주 호족 아지태를 처벌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이르른 것이다. 아지태도 자신이 참소를 하였다고 죄에 복하였다. 이것은 궁예가 왕건에게 변호를 하라고 한 적도 없었을 터, 이는 정치적 기습이었다.&amp;nbsp;입전과 관서의 판결을 받은 유사는 궁예와 왕건 두 어느 세력에도 가담하지 않은 사람이었거나 왕건의 세력이었을 것이다.&amp;nbsp; 왕건은 그런&amp;nbsp;유사를 이용하여 자신이 먼저 변호, 입전과 관서를 살려주고 그 후&amp;nbsp;판결을 권한이 있는 유사를 이용,&amp;nbsp; 아지태를 먼저 제거했을 것이다. &lt;/P&gt;
&lt;P&gt;물론&amp;nbsp;왕건이 먼저 손을 써서 아지태를 제거했다고 해도, 궁예는&amp;nbsp;뭐라고 할 명분이 부족했다. 게다가 자신이 참소를 했다고 죄에 복한 마당에 이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는&amp;nbsp;청주가 더 이상 궁예의 지지세력이 아닌,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급변했음을 의미한다.&lt;/P&gt;
&lt;P&gt;궁예는 왜 왕건의 지지세력을 입전과 관서의 판결에 이용했을 것일까? 자신의 지지세력을 이용하여 확실히 제거하면 될 일을 왕건의 지지세력에게 맡겨 자신의 총신 마져&amp;nbsp;제거 당하게 만들었다. 이유야 어쨌든 간에 궁예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해 버린 것이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일 이후, 왕건과 궁예 모두 위험을 느꼈을 것이다. 왕건을 제거하려고 불러들인 것인데, 오히려 왕건이 먼저 손을 써서 궁예의 지지세력을 제거한 것이다. 궁예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주 호족 아지태는 이후 기록에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제거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후&amp;nbsp;2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은 위기에 처한다. &lt;/P&gt;
&lt;P&gt;궁예가 당황한 것을 틈타 결국 왕건은 외직에 나서기를 성공했던 것이다. 왕건도&amp;nbsp; 더 이상 그 곳에 있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는 이 일로 한쪽 팔을 잃은 셈이었다. 그러나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는 중요 지지세력을 상실했음에도 불구, &quot;관심법&quot;을 이용하여 왕건의 지지세력을 계속해서 축출해 나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궁예는 이미 철저히 고립무원의 상태였다. 자신이 믿고 의지하던 청주도 이미 일부를 제회하고는 왕건 지지세력으로 바뀌었고, 그가 일어난 기반인 고구려 출신 호족들도 이미 그의 편이 아니었다.&amp;nbsp;궁예 지지세력으로&amp;nbsp;바꾸어 살아남았던 신라 출신&amp;nbsp;호족들 비롯해이제 철원에 까지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들끓었다. 게다가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던 부인&amp;nbsp;강씨 마져도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강씨가 왜 왕건의 지지세력이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이는 궁에가 확실히 고립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부인 강씨가 왕건 지지세력의 중심으로 우뚝서자 결국엔 궁예는&amp;nbsp;다시 직접 왕건을 제거하려 한다. 이는 그 이전 날 왕건이 자신의 지지세력들과 여러가지 논의를 한 다음 날이었고, 아마 이는 궁예가 미리 심어놓은 세작들에 의해 궁예의 귀에 알려졌을 것이다. 이에 궁예는 이를 꼬투리 잡아 왕건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다시 왕건을 불리들인다. 이것이 AD 914년의 일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하루는 급히 태조를 부르므로 관내에 들어가 보니 궁예가 바야흐로 주살한 사람들에게서 몰수한 금은보기와 상장의 기구를 검점하고 있다가 눈을 부릅뜨고 태조를 노려 보며 말하기를 &quot;경은 어제 밤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반역을 모의함은 무엇 때문이냐&quot;고 하니 태조는 안색이 자약하여 태연하게 웃으며 말하기를 &quot;어찌 그런 일이 있었겠습니까&quot;고 하였다. 궁예가 말하기를 &quot;경은 나를 속이지 말라. 나는 관심법으로써 아는 터이니 내가 장차 입정하여 관심하고 그 일을 다 말하리라&quot;고 하며 이에 눈을 감고 뒷짐을 지고는 얼마 동안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었다. 그 때에 장진 최응이 곁에 있다가 일부러 붓을 떨어뜨리며 뜰에 내려와서 이것을 주어 태조의 곁을 지나면서 귓속말로 말하기를 &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quot;불복하면 위태롭습니다.&quot;고 하므로 태조가 이에 깨닫고 말하기를 &quot;신이 진실로 반역을 꾀하였사오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나이다.&quot;라고 하니 궁예가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quot;경은 가히 정직하다 하겠다&quot;고 하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안장과 고삐를 장하고 말하기를 &quot;경은 다시는 나를 속이지 말라&quot;고 하였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고려사 권 제 1 태조 세가 -&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계획은 언뜻 보면 완벽했다. &quot;나는 관심법을 가지고 있다&quot;라고 했을 경우 왕건을 딜레마에 빠질 것이다. 관심법을 가졌으니 죄를 자복하여 &quot;송구하옵니다!&quot;라는 말이 나와도 목이 달아날 것이고, 끝까지 죄를 자복하지 않아도 왕을 농락한 죄로 참수를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기록은 매우 의문에 빠진다. &lt;/P&gt;
&lt;P&gt;도대체 왕건이 자복했는데도 궁예가 왕건을 죽이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이 때 왕건이 죽었다면 궁예는 지금 쯤 삼한을 통일한 인물로 기억 될 지 모른다. 그러나 놀랍게도 궁예는 이 때 왕건을 죽이지 못했다. 그리고 최응이 &quot;불복하면 위태롭다.&quot; 라는 말을 하여, 왕건이 자복, 궁예가 살려 주었다는 말도 안되는 기사가 있다. &lt;/P&gt;
&lt;P&gt;아마 왕건이 수일간 철저히 국문을 당했을 것이고, 그 동안 최응이 왕건의 지지세력을 이용하여 궁예에게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아무리 전제 군주라고 해도&amp;nbsp;모든 중신이 나서서&amp;nbsp;압박을 가하는데, 어찌 할 것인가? 아마&amp;nbsp;왕건 지지세력이었던 최응이 왕건을 살리기 위해&amp;nbsp;정치적 기습전을 택했고, 궁예가 어쩔 수 없이 뒤를 물러났을 것이다. 또한 이는 왕건의 명예를 손상시킬 우려가 있으므로, 후세에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쨌든 궁예는&amp;nbsp;두차례나 직접 왕건을 제거하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첫번째 일은 일단 왕건을 불러들인 뒤에 생각하자는 것으로 왕건을 파진찬 시중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amp;nbsp;딱히 왕건을 제거할&amp;nbsp;계획이 없었떤 까닭에 오히려 그가 공격을&amp;nbsp;받아 중요 지지세력을&amp;nbsp;상실했다. 그러나 두번째는 달랐다. 이미 확실한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는데도 결국엔 최응의 계략으로 실패하고&amp;nbsp;말았다. 그 최응의 계략이 무엇이었는 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후에 &quot;붓을 떨어트리고 &quot;불복하면 위태롭다&quot;라 하니, 왕건이 자복하였으므로 궁예가 살려주었다&quot;라는 말로 각색될 만큼 왕건의 명예를 손상시킬 말이었을 가능성이 크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결국 다시 왕건 제거에 실패한 궁예는 최후의 발악이라도 해 보기 시작했다.&amp;nbsp;이미 그가 믿고 의지하던 곳은 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돌변했고, 그가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자행했어도 그들은 끈질기게 계속해서 고개를 들었다.&amp;nbsp; 결국 왕건을 직접 제거하려는 두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자 이제 궁예는 절망에 빠진다. 왕건은 이미 아버지 왕륭이 궁예에게 투항하면서 부터 자신이 왕이 될 역심을 품었을 것이다. 궁예도 이미 이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를 적절이 견재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제 상황은 되돌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그와 잠자리를 같이하는 부인 강씨도, 그리고 그의 두 자식 즉 청광과 신광도 모두 그의 편이 아니었다. 어떻게 삼모자가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 들어섰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들이 왕건 지지세력으로 들어섰음은 확실한 사실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따라서 그의 부인 강씨는 궁예의 편을 들어 왕건 제거에 도움은 주기는 커녕 이제&amp;nbsp;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멈추라는 듯한 말을 입 밖에 꺼냇다.&amp;nbsp;궁예로서도 매우 괴로운 일이었을 것이다.&amp;nbsp;만약 그가 왕건 지지세력 축출을 멈추게 된다면 그는 얼마가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옥좌를 노리는&amp;nbsp;사람이 바로 왕건이었다. 그가 왕건 지지세력을 축출한 이유는 그가 옥좌라도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그것을 멈춘다면 바로 태봉 정권이 전복될 것이다.&lt;/P&gt;
&lt;P&gt;즉 부인 강씨가 그에게 이제 그런 일을 그만 두라는 말을 한 것은, 이제 그 &quot;옥좌를 포기하라&quot;는 말과 같았다. 이것은 강력한&amp;nbsp;왕건의 지지세력이&amp;nbsp;아닌 이상, 또 왕건을&amp;nbsp;추종하지 않는 이상 그런 말을 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자신의 목슴을 내던지는 일이기 때문이었다.&amp;nbsp;자신의 부인 마져도 왕건 지지세력이 된 이상 살려 둘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그의 부인 강씨가 왕건의 지지세력인 이상, 왕건의 지지세력을 제거하기란 아주 힘든 일일 것이다.&lt;/P&gt;
&lt;P&gt;결국 그는 세상에 오명을 남기는 길을 택한다. 그로서도 매우 어려운 선택이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전설에는 부인 강씨가 구미호였기 때문에 왕건의 사주를 받아 죽였다는 말과, 왕건과 정을 통했기 때문에 부인 강씨를 죽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이는 다시말해 부인 강씨가 확실한&amp;nbsp;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D 915년. 부인 강씨는 물론, 청광과 신광까지 제거해 버린다.&amp;nbsp;아버지 영조와 정치적 노선이 달랐기 때문에 결국엔 고립되어 뒤주에 가두어 져&amp;nbsp;죽은 사도세자 처럼. 청광과 신광 또한 궁예와 정치적 노선이 달랐다. 그들은 궁예의 편이 아니었고, 결국엔 세상에 오명을 남긴체로 그들을 잔인하게 죽여버린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후 궁예는 정말로 미치고 말았다. 그 결과&amp;nbsp;그가 믿고 의지하던 철원지방 마져도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변하고 말았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그 뒤로 그가 의심이 많고 곧잘 갑자기 성을 내므로,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죄없이 죽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부양과 철원 사람들이 그 해독을 참을 수가 없었다. &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삼국사기 권 제 50 열전 제 10 궁예전 -&lt;/FON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그가 그 뒤로 의심이 많고 곧 잘 갑자기 성을 냈다&quot;라는 대목은 그가 가족들을 죽인 후 얼마나 괴로웠고 죄책감에 시달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가 죽었다는 말은 결국 그들 마져도 왕건 지지세력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가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이유는 왕건의 지지세력이었기에,&amp;nbsp;그들이 살아 있는 한 모두가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변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amp;nbsp;&lt;/P&gt;
&lt;P&gt;그러나 그렇게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했지만 오히려 그것은 철원 전체를 왕건의 지지세력으로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다시말해 전혀 필요 없는 행동이었다는 뜻이다.&lt;/P&gt;
&lt;P&gt;물론 그가 미쳤기 때문에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 철저히 정치적 의도가 개입된 행위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역사에 오명을 남기고 결국엔 자신의 지지세력을 모두 잃어 버리는 결과를 만든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후 왕건은 자신이 구충금탑에 서 있었다는 꿈을 꾸었다는 소문을 퍼트렸다. 이는 자신의 지지세력을 늘리기 위한 수작이었다. 이는 물론 부인 강씨가 제거되기 이전이었지만 그 때만 해도 조정에는&amp;nbsp;일부 궁예의 친위세력을 제회하면&amp;nbsp;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압력을 가면 아무리 수많은 왕건의 지지세력을 몰살시켜 버린 궁예라&amp;nbsp;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구충금탑에 관련한 꿈으로 인해 왕건의 지지세력을 늘어만 갔다. 결국 궁예는 최후의 선택을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상인 왕창근이란 자가 당나라에서 와서 철원 저자에 살았다. 정명 4년 무인(918)에 그가 저자 거리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생김새가 매우 크고 모발이 모두 희었으며, 옛날 의관을 입고 왼 손에는 자기 사발을 들었으며, 오른 손에는 오래된 거울을 들고 있었다. 그가 창근에게 말하기를 &quot;내 거울을 사겠는가?&quot; 하므로, 창근이 곧 쌀을 주고 그것과 바꾸었다. 그 사람이 쌀을 거리에 있는 거지아이들에게 나누어주고 난 후에는 간 곳이 없었다. 창근이 그 거울을 벽에 걸어 두었는데, 해가 거울에 비치자 가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그것을 읽어 보니 옛 시와 같은 것으로서, 내용이 대략 다음과 같았다.&lt;BR&gt;&quot;상제가 아들을 진마에 내려 보내니&lt;BR&gt;먼저 닭을 잡고, 뒤에는 오리를 잡을 것이며,&lt;BR&gt;사(巳)년 중에는 두 마리 용이 나타나는데,&lt;BR&gt;한 마리는 푸른 나무에 몸을 감추고,&lt;BR&gt;한 마리는 검은 쇠 동쪽에 몸을 나타낸다.&quo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8e8e8e&gt;- 삼국사기 권 제 50 열전 제 10 궁예전 -&lt;/P&gt;
&lt;P&gt;&lt;BR&gt;&lt;/P&gt;&lt;/FONT&gt;
&lt;P&gt;바로 위의 기사 즉. &quot;고경&quot;에 관한한 일이었는데, 그 일도 사실 궁예가 꾸민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amp;nbsp;왕창근이라는 상인도 궁예에게 포섭된 인물이었을 터이고, 그가 우연히 발견했다고 하여 조정에 바쳤을 것이다. 그리고 그 조정에 바치는 동안 여러 중신들이 모두&amp;nbsp;이 글을 보게 되는 것이다.&amp;nbsp;그는 고경을 위조해 만든 뒤 송함흥 등에게 이를 해석하게 하였다. 고경의 시문&amp;nbsp;해석에 나선 송함흥, 백탁 ,허원 모두 왕건의 지지세력이었다. 궁예가 알면서도 그들과 함께 왕건을 제거하려고 일부러 그들에게 맡겼는지, 아니면&amp;nbsp;그들이 왕건의&amp;nbsp;지지세력이란 것을 모르고 맡겼는지는 확실치&amp;nbsp;않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그는 왕건이 곧 궁예를 몰락시킨다는 내용의 글로서 해석되기만을 기다렸다. 만약 그런 내용으로 해석이&amp;nbsp;되어 궁예에게 알려졌으면 왕건은 살아남기 어려웠을 것이다.&amp;nbsp;그리고 확실한 왕건의 지지세력들을 모두 제거한 다음, 삼한 통일의 꿈을 꾸었을 것이다. 그리고&amp;nbsp;궁예도 그것을 노리고&amp;nbsp;고경의 일을 꾸몄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끝까지 세상은&amp;nbsp;그의 편이 아니었다. 아니 애초&amp;nbsp;송악 세력과 결판을 보았어야 되었을까. 결국 송함흥 등은 거짓으로 해석하여 궁예에게 바쳤다.&amp;nbsp;그러면 사실 궁예는 어떻게 해야 할 말이 없을 것이다. 해석을 맡긴 자들이 그렇게 해석하였는데 어찌해야 할까?&amp;nbsp;&lt;/P&gt;
&lt;P&gt;송함흥, 백탑 , 허원 세 사람은 왕건의 지지세력이었기에 왕건을 살리기 위하여 거짓으로 해석하여 바쳤다. 궁예는 절망에 빠졌다. 최후의 선택으로 고경의 일을 꾸몄지만 이게 확실히 실패로 돌아간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결국 그는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재계하려고 했지만 이제 그를 지지하는 세력은 얼마 없었다. 결국 이 일로 가장&amp;nbsp;두려움을 느낀&amp;nbsp;것은 바로 왕건이었을 것이다. 궁예는 무려 세차례나 왕건 제거를 하려다 실패하였다.&amp;nbsp; 그리고 그는 궁예의 옥좌를 찬탈하겠다는 야심이 있었고, 그는 기록에 처럼 충성스러운 신하도 아니었다. 오히려 궁예를 견재하면서 자신의 세력을 키워나가려 했으며 때가 되면 정변을 일으켜 왕이 되려 하였다. &lt;/P&gt;
&lt;P&gt;왕건은 누군가 자신에게 정변을 일으키라 권유할 것을 은근히 바랬고, 복지겸, 홍유, 배현경, 신숭겸 네 사람은 왕건의 지지 세력으로서,&amp;nbsp; 그들도 자신들이 제거당할 것을 두려워 했다. 그리고 고경에 관한한 일로, 충분히 궁예가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마 궁예도 그들이 왕건의 세력에 속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고경의 일이 성공하여 왕건을 제거했을 때, 그들도 확실히 제거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의 편이 아니었다. 먼저 손을 쓴 복지겸 등이 왕건에게 정변을 권유한 것이다. 왕건이 정변 권유를 거부한 것은 후세에 자신이 궁예에게 충심을 바쳤다는 것을 보이려 한 것일 것이다. 그래서 계획적으로 거부하다가 결국 마지못해 한다는 듯이 그 일에 동참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왕건이 처음부터 역심을 품지 않았다면 정변 권유를 끝까지 거부했을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궁예가 폭군의 오명을 쓰는 일도 없었을 지 모른다. 그러나 그는 역심이 있었다.&amp;nbsp; 결국 AD 918년 6월.&amp;nbsp;고경 사건이 일단락 된 직후에 반란을 일으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amp;nbsp;궁예는&amp;nbsp; 그 소식을 듣고는&amp;nbsp;철원의 도성에서 도망쳤다. 그 뒤의 행보는 두가지로 엇갈린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가지는 기록에서는 그가 미복의 차림으로 도망하다가 부양에 이르고 부양에서 보리삭을 캐어먹다가 주민들에 의해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 자체는 말이 되지 않는다. 궁예가 겨우 도성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은 곳에 가 있어다는 것도 그렇고, 그가 홀로 도망쳤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그는 철저히 고립무원에 빠졌던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amp;nbsp; 기록에 나오는 &quot;참소하는 무리&quot; (고려에 입장에서) 즉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에 동참했고 왕건을 제거하여 궁예의 옥좌를 보전하려 노력한 세력이 아직은 남아 있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가 그들이다. 그리고 왕건 즉위 5일 만에 반란을 일으킨 환선길과 전선을 내팽겨치고 반란을 일으키려다 미리 발각, 실패한 이흔암 등이 있었다. 그리고 청주에서도 아직까지 그를 반기는 무리가 있었으며 명주 호족 김순식은 충신이었다.&lt;/P&gt;
&lt;P&gt;궁예는 반란이란 말에 도망쳤다. 물론 그의 병사들도 꾀나 있었을 것이다.&amp;nbsp;따라서 기록은 믿을 수 없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와 그의&amp;nbsp;친위세력들은 왕건의 추격을 피해 철원에서 조금&amp;nbsp;떨어진 보개산에 까지 이르렀다. 그 곳에서 성을 쌓고 수일간 항전하였다. 아마 궁예가 죽기 전에 이미 왕건은 고려 개국을 선포했을 것이다.&amp;nbsp;그리고 환선길과 이흔암은 아직 살아있는 궁예와 연계하여 반란을 일으키려 했는지도 모른다.&lt;/P&gt;
&lt;P&gt;어쨌든 궁예는 보개산성에서 최후의 항전을 하였다. 그 동안 환선길과 이흔암이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모두 얼마가지 않아 처형당했다. 그리고&amp;nbsp;그의&amp;nbsp;진정한 충신이었던 소판 종간과 내군장군 은부가 모두 처형당하고, &amp;nbsp;결국 궁예가&amp;nbsp;수일간 항전하다가 드디어 보개산성이 무너졌다. 궁예는 다시 무리를 거느리고&amp;nbsp;철원과 포천의 경계에 있는 산에 들어섰다.&amp;nbsp; 그리고 그 곳 바위에서 축성을 지휘하며 다시 최후의 항전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고, 성을 쌓는다고 해도 과연 적을 맞을 수 있을 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신세에 매우 한탄하던 궁예와 그의 친위 세력은 산이 떠나갈 정도로 망국을 슬퍼하며 울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그의 최후는&amp;nbsp;이 산 다시말해 명성산(울음산)에서 결정된다. 그는 부하에게 피살되었다는 말과 자살했다는 말이 설화에 있다. 그런 것으로 보아 궁예의 뜻에 따라 그의 부하들이 궁예를 죽이고 왕건에게 항복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궁예의 후손까지도 존재했다는 것으로 볼 때, 그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은 아마 그의 의도였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친위세력을 살리기 위함이었을지도 모른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쨌든&amp;nbsp;그는 28년. 재위로는 18년간&amp;nbsp;패자(覇者)와 폭군의 갈림길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와는 반대되는 성군의 기질까지 타고난 인물이었다. 후삼국 시대. 여러가지 군웅이 난립하던 시대를 이기고 왕이&amp;nbsp;되었다는 사실만 가지고 볼 때 그는 폭군은 아니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아직까지 철원에서 행해지는 태봉제와 그가 자살했다는 설화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amp;nbsp;그의 부하들은 그를 버렸어도&amp;nbsp;민중들은 그의 최후까지 그를 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과연&amp;nbsp;그가 폭군이였다면 이런 융성한 대접을 받을 수&amp;nbsp;있었을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는 우리 역사에서 또 하나의 잃어버린 역사이다.&amp;nbsp;그리고 자신에게 반항하던 호족들을 제거하여&amp;nbsp;강력한 전제정권을&amp;nbsp;&amp;nbsp;꿈 꾸었던 궁예. 혈연 중심의 신라 골품제에서&amp;nbsp;업무 위주로 관제로 개편한 것 모두 그가 한 일이었다. 그는 민심을 교묘히 이용할 줄도 알고 있떤, 뛰어난 정치가였다. 그런 그가 기록에서&amp;nbsp;갑자기 폭군으로 돌변하니, 의문을 가질 수 밖에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결국 투항할 때 부터 역심을 품고 있던 부하 왕건에게 정변을 당하고 말았다. 사실 그가 한 모든 행위는 왕건을 견재하기 위함이었고, 결국엔 그것이 실패한 것이었다. &lt;/P&gt;
&lt;P&gt;그가 처음부터 송악과 결판을 보았으면 어떠했을까? 비록 힘들기는 했지만 그가 폭군의 오명을 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두 아들과 부인을 잔인하게 살해하지 않았어도 되었을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그가 범한 실책은 또 하나 있다. 그가 만약 후고구려라는 국호를 유지했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사실 그가 파멸한 것은 고구려 출신 호족들이 그에게 반기를 들어서이며 그것은 그가 마진으로 국호를 바꿀 때 부터 원한을 가진 자들이었을 것이다. &lt;/P&gt;
&lt;P&gt;다시말해 마진이라고 국호를 개칭한 것은 그들에게 자신들에게 대접을 소흘히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일단&amp;nbsp;1차 왕건 지지세력 대학살을 보고는 죽음이 두려워&amp;nbsp;감히 나서지 않았다. 그러다가 2차 나주 전투 이후, 왕건 세력이 다시&amp;nbsp;강성해지기 시작하자 드디어&amp;nbsp;폭발한 것이다.&lt;/P&gt;
&lt;P&gt;그가 만약 자신의 기반이었던 고구려 호족 출신들의 대접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면, 청주와 철원이 그가 망국의 길로 들어설 때 까지 그의 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건을 계속해서 견재하면서 왕건은 옥좌를 꿈도 꾸지 못했을 수도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그는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범해 버렸다. 모든 호족들을 적대시하니, 그 호족들이 그의 적으로 바뀌고, 그는 고립되었고&amp;nbsp;&amp;nbsp;곧 파멸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예는 출생시부터 권력투쟁은 그의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신라 진골귀족의 후예였다. 그러나 신라의 권력투쟁에 희생되고 말았다.&amp;nbsp; 그리고 그가 나라를 창건한 다음, 그는 일국의 통치자가 되었지만 그의 인생에서 권력투쟁은 늘 붙어다녔다. &lt;/P&gt;
&lt;P&gt;왕건 세력과 충돌. 그리고 왕건 세력을 끊임없이 견재하던 궁예. 삼국사기에 기록된 그의 모든 행동은 왕건 세력과의 충돌과 관련있는 행동들이었다. 결국 그는 수차례의 실수를 범했다. 자신의 가족들을 죽인 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였다.&amp;nbsp; 결국 그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는&amp;nbsp;강력한 왕권을 꿈꾸며 호족들이 왕권을 위협할 존재란 것을 금방 알아첼 수 있었던 현실적인 판단력과 뛰어난 정치력이 있었다. 민심을 교묘히 이용할 줄 알았으며 그리고 그래서 일어 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파멸하고 그의 평가는 후세의&amp;nbsp;몫으로 남겨졌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그의 모습이 기록된&amp;nbsp;삼국사기, 고려사 , 고려사 절요 모두 고려측의 일방적인 기록이었다. 그런 일방적 기록에서 궁예의 본모습을 찾기란 힘들다. 어쨌든 궁예는 난세를 타파하고 일어난, 다시말해 범상한 인물은 아니었다.&amp;nbsp;그리고 그는 기록들 속에서 한이 서려 있었다.&amp;nbsp;&lt;/P&gt;
&lt;P&gt;궁예. 강력한 왕권을 꿈꾸며 삼한을 통일하려 했던 패자(覇者)로 보아야 할것인가&lt;/P&gt;
&lt;P&gt;자신의 부인과 자식들까지 죽여버린 폭군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 &lt;/P&gt;
&lt;P&gt;지금도 궁예를 폭군으로 보기 보다는 왕건 세력의 충돌로 인해 파멸한, 비운의 왕으로 재조명 되고 있을 것이다&lt;/P&gt;&lt;/DIV&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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