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xml-stylesheet href="http://pimg.daum-img.net/whsnake/css/atom.css?ver=1.0" type="text/css"?>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version="1.0" >
  <title>山寺愛人</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blog.daum.net/xml/atom/dwban22"/>
  <rights>山寺愛人</rights>
  <author>
    <name>山寺愛人</name>
    <uri>http://blog.daum.net/dwban22</uri>
  </author>
  <generator uri="http://blog.daum.net" version="1.0">Daum blog (blogmaster@daum.net)</generator>
  <id>tag:blog.daum.net,2009:dwban22</id>
  <updated>2009-11-24T15:52:10Z</updated>

  		<entry>
	    <title>고현동 향약</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10"/>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10</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5:52:10Z</updated>
	    <published>2009-11-24T15:52:1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7.uf.daum.net/image/171717034B0B7DD011576E&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고현동향약안(보물 제1181호)&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고현동 향약안은 당시 태인 현감 서유응이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려는 정조의 뜻에 따라 향약을 진흥시키려 하였다. 이 향약은 수령의 서명과 관인이 찍혀 있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전의 향약과 성격이 다소 다르다.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9.uf.daum.net/image/191717034B0B7DD11243FC&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고현동 향약 동계좌목&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이 책에는 숙종 24년과 숙종 27년에 다시 만들어진 동안, 그리고 숙종 30년에 만들어진 고현 동계 좌목이 수록되어 있다. 특히 [고현동계좌목]에는 양반으로 구성된 상계와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하계의 명단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시기부터 일반 백성들이 향약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문의 오른쪽에는 양반으로 구성된 상계의 명단으로 이름 뿐아니라 그 사람의 자와 출생년을 알 수 있는 간지가 기록되어 있다. 본문 왼쪽에는 일반 백성으로 구성된 하계의 명단으로 이 명단에는 이두로 된 이름이 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1.uf.daum.net/image/201717034B0B7DD1135941&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고현동약좌목&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이 책에는 향약 참여자의 명단인 좌목, 정극인, 송세림의 서문과 발문이 실려 있으며, 20개의 향약 규정이 적혀 있다. 이 규약에 의하면, 양반이 아닌 중서층(중인 또는 서얼)이 향약에 들어가기 시작하고 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STRONG&gt;*&lt;U&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조선시대 향약의 시행과 그 변화&lt;/SPAN&gt;&lt;/U&gt;&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조선의 건국 세력은 유교적인 이상에 맞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신념을 갖고 건국하였다. 이런 노력의 하나로 향약을 시행하였다. 조선 초기에 개별적으로 향약을 시행하는 곳이 있기도 하였으나 본격적으로 향약 보급 운동이 일어난 것은 중종대의 사림파에 의해서였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그러나 이 운동은 사림파의 정치적 몰락과 함께 좌절되었다. 그뒤 향약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나 선조대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시행되었다. 한편 조선 후기에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향약을 이용하고자 하였다. 실학자들은 사회 개혁의 한 방법으로 향약을 이용하려고 하였다. 또 천주교가 유행하기 시작한 정조대에는 향약을 통해 사회 질서를 회복하고자 하였으며,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난 뒤에도 향약을 시행하였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STRONG&gt;&lt;U&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quot;&gt;*고현동 향약&lt;/SPAN&gt;&lt;/U&gt;&lt;/STRONG&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성종 6년(1475) 정극인은 고현동 양반간의 화목과 질서 유지를 위해 향약과 향음주례를 시행하였다. 이 때 그는 동회 활동을 규정하는 규약과 동원의 명단을 만들고 동회를 조직하였다. 또한 정극인은 학당을 세워 마을 자제들을 교육하는 등 마을의 풍속을 바꾸어 유교적인 사회를 만들려고 하였다. 이런 노력을 중종 5년(1510) 같은 마을의 송세림 등이 계승하였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17세기 초까지 향약은 양반만 참여하는 모임의 성격이 강하였다. 특히 김대립, 김응빈 등 고현동의 유력한 양반들이 향약 모임을 주도하였다. 17세기 중반 이후, 양반뿐 아니라 서얼까지 향약의 구성으로 참여하였다. 구성원 간의 혼례, 장례를 서로 돕고, 일반 백성들도 향약의 제재를 받게 되었다. 이 시기의 향약은 양반만이 참여하는 모임의 성격을 넘어 참여하는 범위가 넓어졌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18세기 초 향약에는 양반과 일반 백성들이 상, 하계의 형태로 함께 명단에 기록되기도 하였다. 또 향약을 통해 마련된 동의 공동 재산을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에게 경제적으로 지원하였다. 이런 성격의 향약은 18세기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이후 향약은 규약이 간소화되거나 생략하는 등 다소 위축되었다. 그래서 19세기 향약은 고현동 내 학당 또는 동각을 유지 운영하려는 성격이 강하였고, 향약 구성원의 일상 생활을 규제하기 보다 동각의 교육 기능이 중시되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글자료 : 국립중앙박물관)&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호우총 호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9"/>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9</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2:10:33Z</updated>
	    <published>2009-11-24T12:10:3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3.uf.daum.net/image/1459750F4B0B4E2B572A4B&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호우총 호우 &lt;/P&gt;
&lt;P&gt;1946년 발굴된 경주 노서동 140호분에서 청동합이 발견되었는데 바닥에 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홍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라는 글자가 광개토대왕능비와 같은 글자체로 새겨져 있다.. 이때부터 이 무덤을 호우총이락 부르게 되었는데, 호우란 고구려에서 그릇을 의미한다. &lt;/P&gt;
&lt;DIV&gt;이 청동합은 장수왕 3년(415) 광개토대왕의 제사에 참석한 신라의 사신이 경주로 가지고 온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밀접했던 관계를 보여주는 자료이다. 높이는 19.4cm이다.&lt;/DIV&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3.uf.daum.net/image/1559750F4B0B4E2B58C2E9&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을묘년국강상광개토지홍태왕호우십(乙卯年國罡上廣開土地好太王壺杅十)&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9.uf.daum.net/image/1659750F4B0B4E2B59087D&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호우 뚜껑&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은제도금연화형주전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8"/>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8</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2:01:50Z</updated>
	    <published>2009-11-24T12:01:5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흔히 고려 공예를 조선시대와 비교하면서 화려함이 강조된 귀족적인 면모를 특징으로 꼽는다. 정교하고도 세련된 고려 금속공예의 정수라 할 만한 것이 바로 이 은제주전자이다.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이 작품을 소장하게 된 경위는 분명치 않다. 미술관 홈페이지를 보면 1935년 한 개인 펀드를 통해 들어온 것으로 돼 있는데, 아마 그 이전에 미국으로 건너갔을 것으로 보인다.&lt;BR&gt;&lt;BR&gt;높이 34.3㎝의 이 주전자는 은을 주재료로 만들고 부분부분 금도금을 해 장식했기 때문에 은제도금(銀製鍍金) 주전자로 불린다. 긴 주구(注口)가 달린 반구형(半球形)의 몸체와 여러 겹으로 중첩된 연화(蓮花) 뚜껑, 그리고 연화 받침과 봉황으로 장식한 뉴(紐·뚜껑 꼭지 부분에 붙어있는 손잡이)로 구성되어 있다. 몸체 아래에는 주전자를 받치는 화형(花形)의 승반(承盤)까지 완벽하게 남아있어 그 가치를 더해준다.&lt;BR&gt;&lt;BR&gt;이 주전자가 다른 작품들에 비해 더 돋보이는 것은 몸체의 외면을 24줄로 이루어진 대나무 줄기 형태로 만든 참신한 조형감에 있다. 외면 줄기마다 연화 당초문을 정교하게 음각했고 그 위·아래 단에도 당초문(唐草文)을 새겨 넣은 뒤 바로 이 부분에 도금을 첨가함으로써 화려함을 더했다.&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667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9/07/2009090700366_1.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1&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미국 보스턴미술관에 소장된 은제도금연화형주전자(높이 34.3㎝). 긴 주구가 달린 반구형 몸체에 연꽃 무늬 뚜껑이 올려져 있고, 뚜껑 꼭대기에는 날개를 접은 봉황이 솟아있다. 몸체 아래에는 꽃 모양의 받침(승반)을 갖추고 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P&gt;몸체 중앙으로 높게 솟은 구연(口緣) 위를 연꽃 뚜껑이 덮고, 이 뚜껑 위로 또 하나의 뚜껑이 올려져 있다. 이 뚜껑들은 아래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두 갈래 못을 통해 내부와 연결되도록 만들었다. 윗뚜껑의 상부에는 날개를 접고 꼬리가 높이 솟은 봉황이 솟아있다.&lt;BR&gt;&lt;BR&gt;몸체의 앞쪽에는 대나무 죽순을 형상화한 주구(注口)가 길게 솟아있으며, 반대쪽에는 목부터 몸체 상부에 연결되도록 네 줄로 구성된 손잡이가 유려하게 부착되었다. 아래쪽 승반의 외형은 몸체와 유사한 대나무 줄기 모양이지만 보다 굴곡지게 처리함으로써 마치 연꽃이 핀 듯 화려하다.&lt;BR&gt;&lt;BR&gt;12세기 전반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하는 이 주전자는 중국 사천성(四川省) 팽주(彭州)에서 출토된 남송(南宋)의 은제주자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중국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주전자는 중국 주전자에 비해 조형성이 탁월하고 문양 표현에 자신감이 넘치는 등 모든 면에서 훨씬 탁월하다. 타출문(打出文·안에서 밖으로 두들겨 솟게 한 무늬) 공예의 장식성이 한껏 발휘된 화려한 연꽃과 봉황, 음각과 양각을 적절히 이용한 아로새김[彫金], 세부의 강조가 돋보이는 도금 등 금속공예 기술이 집약돼 있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주전자라고 하여도 반론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lt;BR&gt;&lt;BR&gt;이 은제주전자의 보험가액은 400만달러(50억원)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얼마의 가격으로 미국에 건너갔을까. 고국을 떠나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처음으로 한국에서 전시되는 이 은제주전자는 한번 우리 손을 떠난 문화재가 얼마나 돌아오기 어려운지, 또 얼마나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교훈처럼 말해 준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0px 5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2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7"/>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7</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1:59:52Z</updated>
	    <published>2009-11-24T11:59:5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일제가 조선을 강점한 직후인 1912년 강원도&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region/regionView.jsp?id=282&quot; name=focus_link&gt;&lt;U&gt;&lt;FONT color=#0000ff&gt; &lt;/FONT&gt;&lt;/U&gt;&lt;/A&gt;강릉 한송사(寒松寺) 절터에서 두 구의 석조보살상(石造菩薩像)이 발견됐다. 하나는 상태가 온전했으나 다른 하나는 머리와 오른팔이 없었다. 온전한 불상은 그해 일본으로 반출됐다가 1965년 한일협정에 따라 되돌려받았고, 1967년 국보 제124호로 지정됐다. 1963년 보물 제81호로 지정된 다른 하나는 강릉시청 캐비닛에 보관되어 있다가 1992년 강릉시립박물관으로 옮겨졌다.&lt;BR&gt;&lt;BR&gt;고려 말에 이곡(李穀)의 《동유기(東遊記)》에 &quot;(한송사) 절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의 두 석상이 땅에서 솟아나왔다&quot;고 썼고, 《동국여지승람》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한송사 절터에 본존불 석대좌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두 불상은 아마도 비로자나삼존불의 좌우 협시(脇侍)보살상(본존을 옆에서 모시고 있는 불상)인 것으로 생각된다.&lt;BR&gt;&lt;BR&gt;국보 124호인 이 보살상은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다. 한국&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nation/nationView.jsp?id=21&quot; name=focus_link&gt;&lt;U&gt;&lt;FONT color=#0000ff&gt; &lt;/FONT&gt;&lt;/U&gt;&lt;/A&gt;석불상의 재료가 거의 화강암인 데 비하면 매우 특이하다. 얼굴은 길고 통통하고 복스러운데 눈초리가 올라가 눈썹과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입은 유난히 작고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코는 끝이 통통한 매부리코로 얼굴에 비해서 짧은 편이다. 특히 뺨과 긴 턱이 둥글둥글하여 올라간 눈초리·입꼬리와 함께 만면한 미소를 띠고 있다. 삼불(三佛) 김원룡(金元龍·1922~1993) 선생은 이런 모습의 보살상을 '자연주의 불상'이라고 불렀다.&lt;BR&gt;&lt;BR&gt;이 불상은 또 지나치게 좁은 이마에 유난히 큼직한 백호공(白毫孔)이 눈에 띈다. 여기에 끼웠던 백호(白毫·두 눈썹 사이의 빛나는 터럭)는 얼굴에 비해 지나칠 정도로 컸을 것이다. 이런 특징은 9세기 말~10세기 초 후삼국시대 불상에서 유행했다.&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515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8/31/2009083100409_1.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1&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국보 제124호). 흰 대리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머리에는 매우 높은 원통형의 보관을 썼고 통통한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져 있다. 조각 기법뿐 아니라 재료에서 오는 질감이 우아하고 온화한 기품을 느끼게 해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P&gt;&lt;BR&gt;얼굴과 함께 시선을 끄는 것은 머리의 보관(寶冠)이다. 얼굴보다 긴 둥글고 높은 고관(高冠)은 단순한 듯하면서도 세 겹의 관 하단이나 귀 좌우의 장식, 뒷머리에서 늘어져 어깨를 덮은 머리 스카프 등에서 아름다운 장식성을 느낄 수 있다. 원통형의 보관이나 풍만한 얼굴, 입가의 미소 등은 강릉 신복사지 석불좌상(보물 제84호)이나 오대산 월정사 석조보살좌상(보물 제139호)에서도 공통적으로 보이는 특징이다.&lt;BR&gt;&lt;BR&gt;목에는 굵은 3줄의 삼도(三道)가 그어져 있고, 3줄의 목걸이가 가슴까지 내려와 있다.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에는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옷 주름이 새겨져 있다. 유연하게 굴곡진 부피감과 왼발을 무릎 위로 올리지 않고 앞으로 내린 유희좌(遊戱座)의 독특한 자세는 형식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스러운 조형의지를 보여주고 있다.&lt;BR&gt;&lt;BR&gt;꽃송이를 든 오른손을 배에서 ㄱ자로 꺾으면서 검지손가락을 펴 아래를 가리키고, 왼손을 무릎 위에 올려 검지손가락만을 뻗은 자세는 문수보살의 예리한 지혜를 나타내려는 의지의 표현이다. 고려 초인 10세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보살상은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는 걸작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0px 5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2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lt;/SPAN&gt; &lt;/P&gt;
&lt;P&gt;&lt;BR&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공주 수촌리 금동관 금동신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6"/>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6</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1:47:31Z</updated>
	    <published>2009-11-24T11:47:3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위대한 발견은 때가 있는 모양이다. 한국의 대표적 청동유물은 1960~1970년대에 집중적으로 발견됐다.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 신라고분 조사의 전성기는 1970년대이고 가야고분 조사는 1980년대에 활발했다.&lt;BR&gt;&lt;BR&gt;1990년대 이후에는 백제 지역에서 놀라운 발견이 이어지고 있다. 1993년 부여 능산리 절터에서 금동대향로가 발견되더니, 2년 뒤에는 같은 장소에서 창왕(위덕왕)의 이름이 새겨진 석제 사리감이 발견됐다. 이후 서울에서는 풍납토성, 나주에서는 복암리고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사되면서 백제고고학의 전성기를 예고했다. 하지만 백제고분에는 많은 양의 부장품이 묻혀 있는 경우가 드물다. 신라처럼 금관이나 목걸이·허리띠·신발 등 귀금속제 장신구가 나오는 경우는 더 드물다.&lt;BR&gt;&lt;BR&gt;이런 아쉬움은 2003년 공주 수촌리에서 5기의 무덤이 발견되면서 사라졌다. 이 유적은 백제 왕실이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 공주 지역에 미리 터전을 잡고 있던 지방세력가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그중 1호 무덤(덧널무덤)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3호 무덤(돌덧널무덤)에서 금동신발이, 4호 무덤(굴식 돌방무덤)에서 금동관과 금동신발이 각각 발견됐다. 이렇듯 여러 짝의 귀금속 장신구가 한꺼번에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무령왕릉 이후 최고의 발견'이란 찬사가 나온 것은 당연했다.&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696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8/26/2009082600574_1.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1&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공주 수촌리 4호 무덤에서 출토된 금동신발(위)과 금동관. 금동신발은 길이29.5㎝로 정교하게 새긴 무늬에서 백제 예술혼의 정수를 느낄 수 있다. 금동관은 높이 22.3㎝로 용과 봉황 무늬가 금동 관 앞 육각형 판에 장식돼 있다. 용은 여의주를 물었고, 봉황은 날개를 활짝 펴고 있다./국립공주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P&gt;금동관은 구리판에 금을 도금한 것인데 옆에서 보았을 때 반원형에 가까운 고깔 모양이다. 1호 무덤 출토품과 4호 무덤 출토품이 약간 다른데, 머리에 눌러쓰는 것이 아니라 정수리 부분에 얹고 끈으로 고정하는 형태란 점은 동일하다. 두 점 모두 용과 봉황을 기본 소재로 투조(透彫·맞새김), 조금(彫金·끌을 이용해 금속에 무늬를 새김), 타출(打出·동판에 문양을 대고 두드려 새기는 기법) 등 고난도의 기술이 마음껏 발휘되어 있다. 금동신발은 1호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T자 모양의 무늬를 연속 투조하여 단순하면서도 세련된 멋을 풍기는 반면, 4호 무덤에서 나온 것은 비늘까지 생생하게 표현된 여러 마리의 용이 뒤엉켜 있는 모습을 꼼꼼하게 표현했다.&lt;BR&gt;&lt;BR&gt;이 유적에서는 이 밖에 5점의 중국 도자기가 출토되었는데 이를 근거로 이 무덤의 연대가 4세기 후반에서 5세기 중반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그동안 자료의 공백 상태에 놓여 있던 한성백제 금속공예술의 실상, 일본 규슈의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고분과 합천지역 가야고분에서 출토되는 금동관의 계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발견이었다.&lt;BR&gt;&lt;BR&gt;공주 수촌리 유적에서 출토된 금동관의 보존 작업이 한창이던 2005년 바로 그 발굴팀에 의해 서산 부장리에서 금동관과 금동신이 발견됐다. 이듬해에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전남 고흥 길두리에서 또다시 백제 금동관과 금동신이 출토됐다. 봇물 터진 백제 보물의 발견은 2007년 부여 왕흥사, 2009년 익산 미륵사로 옮겨가면서 계속되고 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0px 5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2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백자철화포도문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5"/>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5</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1:45:05Z</updated>
	    <published>2009-11-24T11:45:0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18세기는 조선시대 후기문화의 전성기였다. 농업 생산력은 급속히 성장했고, 상품·화폐 경제도 눈부시게 발전했다. 시조와 판소리, 진경산수화(眞景山水��)와 풍속화의 유행 등으로 문화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조선백자 가운데 고전적인 유백색(乳白色)의 백자와 간결한 청화백자(靑畵白磁)가 만들어진 것도 이때였다. 경기도 광주(廣州)의 금사리요(金沙里窯)와 분원리요(分院里窯)가 그 산실이었다.&lt;BR&gt;&lt;BR&gt;백자철화포도문(白磁鐵畵葡萄文)항아리는 18세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오랫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곧게 솟은 넓은 입과 곡선을 이루며 풍만하게 벌어져 내려갔다 좁아지는 몸체는 당당하면서도 긴장감이 있다. 53.8㎝나 되는 장신의 항아리가 보여주는 풍만함과 의젓함에 놀라움을 느낀다.&lt;BR&gt;&lt;BR&gt;영조는 1750년 《조선왕조실록》에서 &quot;옛날에는 도자기의 그림을 석간주(철사)로 그렸다 하는데, 요즈음 들으니 청료(靑料)로 그린다고 하니 매우 사치스러운 풍조이다. 그런즉 이후에는 용항아리 외에는 일체 엄금한다&quot;고 썼다. 값비싼 청화(靑畵) 안료로 그림을 그리기보다 철화(鐵畵)로 그릴 것을 명했는데, 백자철화포도문호(壺)도 이 시기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502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8/10/2009081000363_1.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1&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국보 제107호 백자철화포도문호. 높이 53.8㎝의 풍만한 몸체 위에 검은색 안료를 사 용해 포도넝쿨 무늬를 그렸다. 농담과 강약의 적절한 구사에서 18세기 백자의 높은 회화성을 볼 수 있다./이화여대 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P&gt;철화(鐵畵)백자란 그릇 위에 산화철 안료로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백자 유약을 입혀 구운 것으로, 철색(鐵色)과 흑갈색의 그림이 나타나는 백자이다. 이 항아리의 포도 무늬는 잘 익은 포도알과 크고 짙푸른 잎에는 안료를 많이 섞어 어둡게 표현했고, 작은 포도알과 어린 잎은 안료를 적게 사용하여 옅게 보이도록 했다. 농담(濃淡)을 적절히 활용한 덕분에 포도는 더욱 사실적으로 보인다. 그릇 전체를 한 폭의 화선지 삼아 그린 널찍한 잎들과 그 사이로 뻗어 내린 포도 넝쿨의 붓 그림은 자유롭다. 포도그림은 예로부터 장수와 풍요·생명력의 상징으로 널리 사랑받아 왔다. 이 항아리는 장수를 상징하는 연회에 쓰이는 술 등을 담아 왕실 잔치에 사용됐다가 요행 잘 남은 것으로 보인다.&lt;BR&gt;&lt;BR&gt;《신증동국여지승람》은 &quot;해마다 사옹원(司饔院·왕실의 음식 및 그릇을 담당한 관청) 관리가 화원(畵員·도화서의 직업화가)을 이끌고 왕실에서 쓸 그릇을 감독하여 만든다&quot;고 기록했다. 왕실 연회 등 잔치에 쓸 항아리 제작을 위해 전문직 화원이 참가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lt;BR&gt;&lt;BR&gt;이 백자철화포도문항아리는 주인이 여러 차례 바뀌었다. 일제시대 조선철도㈜의 전무였던 시미즈 고지(淸水幸次)가 소장하다가 1945년 해방을 맞자 집안일을 돌봐주던 김모씨에게 잘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후 고미술상을 거쳐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1893~1969)씨의 소유가 됐는데, 장씨는 1965년 재정 문제로 이 항아리를 처분했다. 그래서 이화여대박물관 소장품 구입을 도왔던 장규서씨를 통해 김활란 총장에게 넘어갔고, 이듬해 바로 국보 제107호로 지정됐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0px 5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2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강세황의 송도기행첩</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4"/>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4</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1:37:09Z</updated>
	    <published>2009-11-24T11:37:0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1971년 사업가이면서 문화재 수집에 평생 열정을 쏟았던 동원 이홍근 선생(1900~1980)의 소장품을 조사하던 최순우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표암선생유적(豹庵先生遺蹟)》이라는 화첩을 본 순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신선한 근대감각이 느껴지는 혁명적인 표현법으로 송도의 명승을 그린 16장의 진경(眞景)산수화가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lt;BR&gt;&lt;BR&gt;최 관장은 이 화첩을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이라는 이름으로 학계에 소개하고, 1973년 《한국미술이천년전》을 통해 처음 일반에 공개했다. 그중 영통동 입구의 거대한 바위들을 그린 〈영통동구(靈通洞口)〉는 서양화법을 구사한 대표적인 그림으로 국사교과서에 실리며 조선후기 '실학'을 상징하는 명화로 유명해졌다. 1980년 동원 선생의 유지(遺志)에 따라 5000여점의 유물이 &lt;A href=&quot;http://focus.chosun.com/org/orgView.jsp?id=380&quot; name=focus_link&gt;&lt;U&gt;&lt;FONT color=#0000ff&gt;국립중앙박물관&lt;/FONT&gt;&lt;/U&gt;&lt;/A&gt;에 기증되자 이 그림들은 영원히 국민의 것이 되었다.&lt;BR&gt;&lt;BR&gt;이 화첩은 표암 강세황(姜世晃·1713~1791)이 개성유수 오수채의 초청으로 1757년 송도를 유람할 때 선물로 그려주어 해주 오씨 집안에서 전해져왔다. 표암의 절친한 벗인 허필에 의하면, 당시는 《무서첩(無暑帖·더위를 없애는 화첩)》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7월의 무더위를 피해 송도 부근의 산과 계곡을 유람하며 시원한 명승을 상쾌한 필치로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298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8/03/2009080300364_1.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1&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표암 강세황의《송도기행첩》중〈영통동구(靈通洞口)〉. 집채만한 바위들을 서양화풍으로 묘사한 혁신적 작품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P&gt;유람 순으로 그려나간 화첩은 〈송도전경(全景)〉이 맨 앞에 나온다. 남문 누각에서 조망한 송악산과 시가지를 한눈에 잡아냈다. 대로가 점점 좁아지는 초점 투시법을 구사해 더욱 현장감이 느껴진다. 7면의 〈영통동구〉는 오관산의 영통동 계곡에 들어서는 순간 사람을 압도하는 장관을 서양화풍의 명암법을 활용해 그린 것이다. 표암은 당시의 놀라운 감동까지 생생하게 써놓았다. &quot;영통동 입구에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바위들은 크고 웅장해 크기가 집채만 하고 푸른 이끼가 덮여 있어 보자마자 놀라 눈이 휘둥그레진다.&quot; 화첩은 성거산의 〈박연폭포〉를 지나 천마산의 〈태안창〉 일대에서 끝나는데, 참신한 발상과 신선한 감각은 물론 혁신적인 서양화법이 넘쳐나서 회화사적으로 매우 주목되는 작품이다.&lt;BR&gt;&lt;BR&gt;표암은 어떻게 250년 전에 이렇게 서양화풍이 구사된 참신한 진경산수화를 그릴 수 있었을까?&lt;BR&gt;&lt;BR&gt;18세기는 겸재 정선의 진경산수화와 단원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보듯 자존적인 주체의식이 강했고, 중국과 서양까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국제적인 개방성으로 인해 수준 높은 고유문화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당시는 웬만한 대갓집 대청마다 으레 서양화가 걸려 있었을 정도로 국제적인 분위기가 강했기 때문에 《송도기행첩》에 서양화법이 구사된 것은 놀랄만한 일도 아니었다.&lt;BR&gt;&lt;BR&gt;표암은 겸재의 창조적 성과를 이론화하고 국제화시켜 단원에게 가르쳐주고 스스로 혁신적인 진경 풍속을 많이 남긴 18세기의 대표적인 문인화가이자 예원(藝苑)의 총수였다. &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295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8/03/2009080300364_2.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2&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송도기행첩》첫 장면인‘송도전경(全景)’/국립중앙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0px 5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20%; FONT-FAMILY: '굴림';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x; FONT-FAMILY: '굴림';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상암동 금동관음보살입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3"/>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3</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1:34:00Z</updated>
	    <published>2009-11-24T11:34:0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1967년 1월 서울 삼양동 산 중턱에서 하수도 작업 중 괭이에 맞아 금동보살입상(金銅菩薩立像·국보 127호)이 발견됐다. 아마 그때 다리 부분에 약간 균열이 갔는지 모르지만 다행히 부러지지는 않았다. 1976년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처리실이 처음 생기자 첫 작업 대상이 바로 이 불상이었다. 보존처리실 학예연구원(이오희 현 한국전통문화학교 초빙교수)이 이쑤시개로 불상에 덧낀 이물질을 제거했다. 보존기구가 변변치 않던 시절이라 유물에 상처를 주지 않는 안전한 도구로 이쑤시개가 선택됐다고 한다.&lt;BR&gt;&lt;BR&gt;높이 20.7㎝의 이 불상은 정병(淨甁·세계를 정화시키는 맑은 물을 담는 물병)을 들고 있고 천관(天冠·부처가 쓴 보관) 앞에 화불(化佛·홀연히 나타나는 부처)이 있어서 석가여래의 자비심을 형상화한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천관의 화불은 매우 흥미롭게 묘사돼 있다. 화불의 광배(光背·몸 뒤에 빛이 발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가 붕긋붕긋하게 되어 있는데 이런 형태는 신령스러운 기운을 표현한 영기문(靈氣紋)의 속성이다. 바로 그 가운데서 나타나는 화불은 완전히 추상적으로 표현했다. 즉 얼굴은 둥근 원으로, 팔은 조금 긴 타원형으로, 결가부좌한 다리는 긴 타원형으로 나타냈다.&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653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7/30/2009073000338_1.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1&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국보 127호인 삼양동 금동관음보살입상(높이 20.7㎝). 머리에는 삼각형의 관을 쓰고 있고, 얼굴은 살이 올라 통통해 보이며 입가에 엷은 미소를 짓고 있다. 배를 앞으로 내밀고 있어 옆에서 보면 활처럼 휘어진 모습이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P&gt;얼굴과 가슴 등 팽만감이 있는 불상은 몸에 영기를 불어넣은 것으로 중국 북제(北齊)와 수(隋)의 불상에 그런 예가 많다. 천의(天衣)는 평행을 이루고 있으나 뜻밖에도 그 자락이 매우 짧다. 그것은 그 이전에 천의를 가능한 한 길게 드리우면서 영기를 화려하게 표현한 북위(北魏) 양식을 벗어난 것이며, 대신 신체에 영기를 불어넣어 팽만감을 느끼게 하는 수나라 양식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다. 두 손가락도 미묘한 움직임을 보여주어서 각 손가락의 방향이 모두 다르다.&lt;BR&gt;&lt;BR&gt;대좌(臺座)는 매우 특이하여 그 당시 유행하던 연꽃잎이 아니다. 넓고 끝이 뾰족한 형태로 꽃잎이 한 방향으로 겹치며 돌아가고 있다. 이런 예는 보기 어려운데 왜 이렇게 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이 역시 회전하는 양상을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전하는 조형 역시 영기문의 속성으로 회전하는 형태로 만듦으로써 그 영기문에서 씨방(식물의 씨앗이 들어있는 주머니)이 나오고 그 위에 관음이 화생(化生)하는 형상을 강력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lt;BR&gt;&lt;BR&gt;불상을 도금한 금 색깔은 매우 밝고 찬란해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이런 생생한 금빛 도금은 고구려 불상의 특징이다. 백제 불상의 도금은 적갈색, 신라 불상의 도금은 흰색을 띤다. 옷이 아닌 신체를 강조하는 양식으로 볼 때 이 불상은 서기 600년 전후의 작품이다. 당시 서울은 삼국의 각축장이어서 이 불상이 어느 나라의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밝고 생생한 도금색이라든가 뚜렷한 생동감이 있는 조형 등으로 보아 고구려에서 만든 걸작으로 생각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lt;/STRONG&gt;&lt;BR&gt;&lt;/P&gt;
&lt;P&gt;&lt;BR&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청자사자유개향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2"/>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2</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1:29:59Z</updated>
	    <published>2009-11-24T11:29:5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사자 한 마리가 향로 뚜껑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입을 벌린 채 한쪽 무릎을 구부리고 앞을 보고 있는데, 목 뒤쪽과 엉덩이 부분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털이 표현돼 있고 꼬리를 위로 치켜들어 등에 붙이고 있다. 부리부리한 눈과 억센 주둥이, 더부룩한 갈기, 떡 벌어진 어깨, 강한 발톱은 실제보다 크게 강조돼 있고, 몸통은 작게 축소시켰다. 왜곡된 비례 때문에 사자는 작은 크기에도 매우 힘 있고 위엄 있게 느껴진다.&lt;BR&gt;&lt;BR&gt;높이 21.3㎝, 지름 16.3㎝의 이 청자사자유개향로(靑磁獅子�M蓋香爐)는 고려청자의 전성기인 12세기에 만들어졌다. 향을 피우는 부분인 몸체와 사자 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돼 있고, 몸체는 3개의 짐승 모양을 한 다리가 떠받치고 있다. 유약은 엷은 녹색을 띠며 맑고 투명하고 광택이 은은하다. 향로의 뚜껑 위에는 원앙새·오리 같은 현실세계의 동물이나 용·기린 같은 상상 속 동물이 앉는 경우가 많지만, 이처럼 주변을 압도하는 당당한 모습의 사자와는 비교할 수 없다.&lt;BR&gt;&lt;BR&gt;이 청자향로는 원래 국립박물관 개성분관에 있던 것이다. 1946년 개성시립박물관을 국립박물관에 흡수통합해 문을 연 개성분관은 진홍섭 관장이 이곳을 고려문화의 정수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특화시키면서 고려청자를 대거 소장하게 됐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직전, 개성분관이 위태로워지면서 고려청자와 주요 유물을 황급히 서울로 옮겼고 개성분관은 문을 닫았다.&lt;BR&gt;&lt;BR&gt;&lt;/P&gt;
&lt;DIV id=article_img_center style=&quot;WIDTH: 480px&quot;&gt;
&lt;UL&gt;
&lt;LI&gt;&lt;IMG height=530 src=&quot;http://playculture.chosun.com/site/data/img_dir/2009/07/20/2009072000399_1.jpg&quot; width=480 align=absMiddle border=0 name=artImg1&gt; &lt;/LI&gt;&lt;/UL&gt;
&lt;DL&gt;
&lt;DD class=desc_11&gt;▲ 국보 60호‘청자사자유개향로’. 투명하고 광택이 은은한 녹색 유약을 입은 사자는 갈기와 근육이 생생하게 살아 있어 곧 땅을 박차고 뛰어오를 듯하다. 원래 국립박물 관 개성분관에 있던 것을 6·25전쟁 발발 직전 황급히 서울로 옮겨 왔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lt;/DD&gt;&lt;/DL&gt;&lt;/DIV&gt;
&lt;P&gt;고려의 사자향로는 1123년 북송(北宋) 황제의 사신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의 눈에도 아주 특별해 보였다. 그는 '출장 보고서'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사자향로를 직접 보고 느낀 감동, 중국청자와 비교한 평가를 적었다. &quot;사자향로[�s猊出香] 역시 비색(翡色)인데, 위에 엎드린 짐승이 있고 그 아래 연꽃이 받치고 있다. 여러 그릇 가운데 이것이 가장 뛰어나며, 나머지는 월주고비색(越州古秘色)과 여주신요기(汝州新窯器)와 대체로 유사하다.&quot; 높은 감식안을 가진 서긍이 사자향로를 중국 최고의 청자인 월주(越州)·여주(汝州) 자기보다 앞세우며 극찬을 보낸 것이다. 또 송나라 학자 태평노인이 쓴 《수중금(袖中錦)》은 &quot;백자는 중국 정주(定州)백자가 천하제일이지만, 청자는 고려비색(秘色)이 천하제일(天下第一)&quot;이라며 &quot;그런 천하제일품을 다른 곳에서도 만들려 했지만 끝내 이르지 못했다[他處雖效之終不及]&quot;고 적었다.&lt;BR&gt;&lt;BR&gt;최근 서긍이 그려 간 사자향로의 연꽃받침을 연상시키는 유물이 중국 하남성 청량사 여요(汝窯)에서 발견되었다. 이 연꽃받침은 2005년 경기도자박물관의 《한국·중국 청자 비교전》에 출품되었는데, 색상과 질감 및 세련도에서 고려 것의 품위가 단연 높다는 쪽으로 한·중·일 전문가들의 의견이 일치했었다.&lt;BR&gt;&lt;BR&gt;국보 60호인 이 '사자향로'가 서긍이 봤던 그 사자향로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고려의 비색청자로서 당대 최고 수준의 기법으로 만든 유물인 것은 틀림없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국립중앙박물관·조선일보 공동기획 [한국문화, 그 찬란한 기억]&lt;/STRONG&gt;&lt;BR&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경주 사천왕사 터 출토 사천왕상 전돌</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1"/>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1</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11:06:49Z</updated>
	    <published>2009-11-24T11:06:4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경주의 사천왕사 터에서 출토된 사천왕상으로 사천왕사 목탑의 기단에 붙인 것으로&amp;nbsp;신라 최고의 조각가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천왕은 불교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을 사방에서 호위하며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장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3.uf.daum.net/image/1469F4284B0B3F9A2E2D65&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경주 사천왕사 터 출토 사천왕상 전돌&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9.uf.daum.net/image/1569F4284B0B3F9A2F8C9A&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경주 사천왕사 터 출토 사천왕상 전돌&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경주 담엄사 터 출토 팔부중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4000"/>
		<id>tag:blog.daum.net,2009:dwban22.4000</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4T09:40:49Z</updated>
	    <published>2009-11-24T09:40:4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0.uf.daum.net/image/170412204B0B29282642BE&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경주 담엄사 터 출토 팔부중상 건달바상&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건달바상은 힘차게 움직이는 구름 위에서 머리에 사자 가죽을 뒤집어 쓰고, 갑옷을 입은 채로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4.uf.daum.net/image/180412204B0B2928270C27&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경주 담엄사 터 출토 팔부중상 아수라상&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아수라상은 3면의 얼굴과 8개의 팔을 지닌 형태로 표현되었으며, 갑옷 대신 천의를 두른 채 구름 위에 앉아 있는데, 8개 팔 가운데 위로 치켜든 두 팔은 해와 달을 받쳐들었으며, 나머지 팔은 단검, 줄, 저울 등을 쥐고 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국립중앙박물관 통일신라실에 전시되고 있는 팔부중상으로 이&amp;nbsp;팔부중상은 경주 담엄사 터에서 발굴된 것으로 건달바상과 아수라상이다. 팔부중은 석가모니의 설법 장소에 모여 감화를 받은 여러 무리 가운데 하늘천, 용, 야차, 건달바, 아수라, 가루라, 긴나라, 아후라가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 팔부신장이라고도 한다. 이들은 본래 인간이 아니라 인도의 신화에 등장하는 신적 존재 또는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였는데, 불교가 성립하면서 점차 불법을 지키는 신장으로 발전 변모해 나갔다.&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도성도</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3999"/>
		<id>tag:blog.daum.net,2009:dwban22.3999</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3T22:00:33Z</updated>
	    <published>2009-11-23T22:00:3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2.uf.daum.net/image/2015A20B4B0A8752613ED7&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width=&quot;736&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 WIDTH: 736px&quot; actualwidth=&quot;753&quot; height=&quot;667&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도성도&lt;/P&gt;
&lt;P&gt;조선시대의 서울을 그린 지도이다. 도성, 곧 한성 성곽 내부의 모습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조선 왕조의 권위를 상징하는 궁궐, 종묘, 사직 등이 강조되어&amp;nbsp;있다. 북쪽으로 북한산, 남쪽으로 서빙고, 서쪽으로 불광천, 동쪽으로 청량리까지 포함하고 있다. &lt;/P&gt;
&lt;P&gt;북한산과 남산 등을 회화 기법으로 표현하여 아름다울 뿐 아니라 행정구역과 도로망, 하천과 다리, 관청의 위치 등을 상세히 표기하여 실용성 또한 높다. 한성부를 구성하는 다섯 개의 구역(오부)과 각 부를 구성하는 방들의 영역이&amp;nbsp;표시되어 있다.&amp;nbsp; 지도의 여백에는 한성부, 행정구역의 개요, 도성의&amp;nbsp;여러 성문과 각 궁궐 간의 거리 정보, 범례 등이 기재되어 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글자료 : 국립중앙박물관)&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사신문(四神文)이 새겨진 석관(石棺)</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3998"/>
		<id>tag:blog.daum.net,2009:dwban22.3998</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3T21:43:20Z</updated>
	    <published>2009-11-23T21:43:2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고려시대 석관으로 죽은 이의 유골을 담은 석관 위, 아래, 좌우 판석에 비천과 꽃, 북두칠성, 사신도를 새겨넣었고, 안쪽 면에도 꽃과 꽃병을 선각한 석관이다. 이 석관에 묻힌 이는 사신이 사방을 호위하고 꽃이 흐드러진 석관에 누워 편안한 안식을 누렸을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8.uf.daum.net/image/1519420C4B0A834494C959&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사신도 청룡&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4.uf.daum.net/image/1719420C4B0A834595AB5C&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사신도 현무&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8.uf.daum.net/image/1819420C4B0A8345968D22&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사신도 백호&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8.uf.daum.net/image/2019420C4B0A83469767A7&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사신도 주작&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태인현 성황사 신상</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3997"/>
		<id>tag:blog.daum.net,2009:dwban22.3997</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3T20:49:30Z</updated>
	    <published>2009-11-23T20:49:3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전북 정읍 태인면 사무소에 보관되고 있는 옛 태인현의 성황사에 모셔져 있던 나라의 안녕과 백성의 평안함 그리고 수복(壽福) 등을 기원하였던 성황 신상들이다. 태인현의 성황사 신상은 조선시대 어느 시기부터 태인 현감으로 선정을 펼친 신잠과 그 가족의 상으로 변경되어 신앙 대상이 되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2.uf.daum.net/image/1729550B4B0A75316B298D&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29&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29&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성황사 신상&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성황사의 중심이 되는 성황신상으로 태인에서는 태인 현감으로 선정을 펼친 신잠으로 전해지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3.uf.daum.net/image/1829550B4B0A75316C8039&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12&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12&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위패&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성황사 안에서 국왕과 왕비, 세자의 장수와 평안을 기원하는 내용을 적은 명찰이다. 이 당시 왕실의 안녕은 곧 나라와 백성의 편안함을 뜻하는 것이었다.&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1.uf.daum.net/image/192AB90B4B0A7640B25B75&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46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46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성황사의 중심이 되는 성황신의 부인상&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8.uf.daum.net/image/202AB90B4B0A7640B3EAE6&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12&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12&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동녀상&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성황신 부부를 모시는 역할을 하는 동녀상으로 언젠가부터 태인에서는 이 동녀상이 신잠의 딸로 전해지고 있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3.uf.daum.net/image/1229550B4B0A75326F1FE1&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512&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512&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동자상&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성황신 부부를 모시는 동자상으로 언젠가부터는 이 동자상이 신잠의 아들로 전해지고 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9.uf.daum.net/image/1129550B4B0A75327070BF&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동자상과 호랑이상&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호랑이는 성황신 부부와 성황사를 지키는 역할을 한다. &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주자소와 조선 후기의 금속활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dwban22/3996"/>
		<id>tag:blog.daum.net,2009:dwban22.3996</id>
	    <author>
		    <name>山寺愛人</name>
	    </author>
	    <updated>2009-11-23T18:36:37Z</updated>
	    <published>2009-11-23T18:36:3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우리나라는 일찍부터 국가에서 여러 출판 기구를 두고 출판을 장려하였다. 고려 숙종 5년(1101)에 처음으로 국자감에 서적포를 두었고, 조선에서는 교서관을 두어 출판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lt;/P&gt;
&lt;P&gt;태종 3년(1403) 교서관과 함께 주자소를 두어 계미자를 제작하였다. 이후 주자소는 교서관에 소속되어 기능이 약화되기도 하였으나, 정조 18년(1794)에 왕의 주관으로 여러 책을 펴내기 위해 주자소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곳에서는 활자와 목판 등을 보관하고 많은 책을 편찬하였다. 철종 8년(1857)에는 창경궁의 화재로 주자소에 보관되어 있던 활자와 책판 등이 불타 버리자 이듬해 정리자, 한구자 약 13만자를 새로 만들었다. 이 때 만든 활자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 활자들이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아 있다. (글자료 : 국립중앙박물관)&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0.uf.daum.net/image/122742204B0A559C185EBE&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철종때 만든 정리자&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조선 철종 9년(1858)에 정리자를 다시 만들었다. 본래 정리자는 정조 19년(1795)에 [정리의궤통편]을 찍기 위해 만든 활자를 일컫는다. 글씨체는 청나라 때 만든 사전인 [강희자전]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하였다. 철종 8년(1857)에 활자를 보관해 두었던 주자소에 불이 나 정리자가 불타버리자 다음 해 두 번째로 정리자를 만들었다. 다른 활자들과 달리 인쇄체로 구한말 각종 교과서, 관보, 법령, 조약문 등의 인쇄에 널리 사용되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1.uf.daum.net/image/132742204B0A559C19B990&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세 번째 만든 한구자&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한구자는 숙종 년간 김석주가 당대 명필 한구가 쓴 글씨체로 만든 활자이다. 숙종 22년(1696) 무렵 국가에서 사들여 사용하다가 정조 6년(1782) 정조의 명으로 다시 주조하였다. 철종 8년에 활자를 보관해 두었던 주자소에 불이 나 두 번째로 만든 한구자가 불타버리자, 다음 해 세 번째로 한구자를 만들었다. 이 활자는 만든 후 사용하지 않은 새 것이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8.uf.daum.net/image/112742204B0A559C1ADA6B&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오주갑인자&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갑인자의 글씨체를 글자본으로 한 금속활자 가운데 다섯 번째로 만든 활자로 오주갑인자라고도 하낟. 1772년 임진년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의주관으로 큰 자와 작은 자 15만 자를 만들어 교서관에 보관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여러 차례 금속활자를 만들었지만 갑인자의 글씨체가 가장 아름다워 여섯 차례에 걸쳐 같은 글씨체의 활자를 만들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4.uf.daum.net/image/132742204B0A559D1B5ADA&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actualwidth=&quot;753&quot; hspace=&quot;1&quot; width=&quot;753&quot; vspace=&quot;1&quot; border=&quot;0&quot; /&g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현종실록을 찍을 때 사용한 활자&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1677년 [현종실록]을 펴낼 때 사용한 활자이다. 지방 문중에서 사용하던 금속활자 35,830자를 왕실에서 구입하고 새로 4만여 자를 만들어 [현종실록]을 찍었다. 글씨체는 세종 때 만든 갑인자와 비슷하며 크기가 약간 작다. 교서관에 보관해 두고 [조선왕조실록], [열성어제] 등 주로 왕실 관련 책을 찍을 때 사용하였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left&quot;&gt;&amp;nbsp;&lt;/P&gt;
	    </content>
	    	</entry>
      </fe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