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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진홍 목사의 아침묵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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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복(福)있는 사람 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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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R&gt;
&lt;TD style=&quot;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LEFT: 30px; PADDING-RIGHT: 30px;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복(福)있는 사람 ②&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에베소서 1장 3절)&lt;BR&gt;&lt;BR&gt;복(福)에는 두가지가 있다. 땅에 속한 복과 하늘에 속한 복이다. 우리들 크리스천들은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땅에 속한 복을 찾고 하늘에 속한 사람들은 하늘에 속한 복을 찾는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께서 정치가 니고데모를 만났을 때에 다음의 대화를 나누었다.&lt;BR&gt;&lt;BR&gt;“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요한복음 3장3절,6절)&lt;BR&gt;&lt;BR&gt;크리스천은 영으로 거듭난 사람들이다. 거듭난 사람은 영의 사람들이다. 영의 사람이 받는 복은 하늘에 속한 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들이 땅에 속한 복을 찾아 누리려고 든다면 그는 성숙되지 못한 크리스천이다. 이점에 한국교회의 문제가 있다.&lt;BR&gt;&lt;BR&gt;겉보기로는 모든 조건을 갖춘 크리스천 같이 보이면서도 속사람은 땅에 속한 복(福)만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이외로 많다. 교회생활에서 잘못 가르치고 잘못 배운 탓이다. 크리스천이라면 마땅히 땅에 속한 복을 떠나 하늘에 속한 복을 추구하는 가치관을 지녀야 한다. 그렇다면 하늘에 속한 복은 어떤 내용일까?&lt;BR&gt;&lt;BR&gt;마태복음 5장에서부터 시작되는 산상수훈 첫머리에서 예수께서 하늘에 속한 복을 여덟가지로 가르치셨다. “복이 있도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이여...”로 시작되는 8복(八福)의 가르침에 성경적인 축복관의 진수가 담겨있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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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복(福)있는 사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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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LEFT: 30px; PADDING-RIGHT: 30px;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복(福)있는 사람&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복 있는 사람은...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시편 1편 1~3절)&lt;BR&gt;&amp;nbsp;&lt;BR&gt;시편은 구약시대의 찬송가에 해당한다. 전체 150편으로 이루어진 시편들 중에서 제 1편이 전체의 서론에 해당하는 동시에 시편 전체를 요약하는 내용이기도 하다. 1편의 주제는 ‘복 있는 사람’이다. 복 있는 삶은 어떤 사람인지를 2절에서 일러준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라 한다.&amp;nbsp; 이 점이 우리들이 흔히 생각하고 있는 복과는 질적으로 다르다.&lt;BR&gt;&amp;nbsp;&lt;BR&gt;우리는 부귀장수(富貴長壽)를 복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시편에서 일러주는 복은 그런 차원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사람이 복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3절에서는 복 있는 사람이 받게 되는 복의 내용을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은 복’이라 일러 준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물 근원이 가깝기에 심한 가뭄에도 잎이 푸르고 열매를 맺게 된다. 진정으로 복 있는 삶은 그런 복을 받아 누린다.&lt;BR&gt;&lt;BR&gt;성경에서 ‘물’이라면 성령을 상징한다.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는 가뭄에도 물을 공급 받아 늘 잎이 푸르른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늘 묵상하는 사람은 성령님과의 교통이 끊이지 아니함으로 그 삶이 늘 싱싱하게 생명력이 넘치며 때를 따라 열매를 맺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amp;nbsp;그리하여 그가 경영하는 바가 막힘이 없이 형통케 된다.&lt;BR&gt;&amp;nbsp;&lt;BR&gt;우리들 크리스천들은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는 것을 생활화, 습관화하여 복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겠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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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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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2T08:33:48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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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LEFT: 30px; PADDING-RIGHT: 30px;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②&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마태복음 5장 9절)&lt;BR&gt;&amp;nbsp;&lt;BR&gt;화평케 하는 자란 말은 평화를 만드는 자 곧 Peace -maker임을 어제 글에서 쓴 바이다.&amp;nbsp; 화평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샬롬, Shalom’인데 이 말에는 ‘완전한 복지와 행복’이란 의미와 ‘바른 관계’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오늘은 두번째 의미인 ‘바른 관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lt;BR&gt;&amp;nbsp;&lt;BR&gt;샬롬이란 말이 품고 있는 의미로서의 ‘바른 관계’는&amp;nbsp; 4가지 관계가 포함된다.&lt;BR&gt;&amp;nbsp;&lt;BR&gt;첫째는 하나님과 나와의 바른 관계이다.&lt;BR&gt;둘째는 이웃과 나와의 바른 관계이다.&lt;BR&gt;셋째는 나 자신과 나와의 바른 관계이다.&lt;BR&gt;넷째는 온갖 사물, 환경, 자연등을 포함한 주변과의 바른 관계이다.&lt;BR&gt;&amp;nbsp;&lt;BR&gt;이들 4가지 관계가 바로 세워져 있을 때가 진정한 평화, 샬롬의 상태이다. 그래서 누구도 자기 혼자서는 평화를 누릴 수 없다.&lt;BR&gt;&lt;BR&gt;한 영혼이 평화를 누린다는 것은 그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고 이웃과의 바른 관계에서 평화를 누린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긍정적이고 올곧은 관계에서 평화를 누리고 나아가 자연이나 돈, 주변의 온갖 물질들과의 바른 관계에서 평화를 누린다. 그럴 때에 그가 평화의 사람이고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을 받게 된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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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화를 만드는 사람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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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1T09:25:02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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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평화를 만드는 사람들&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마태복음 5장 9절)&lt;BR&gt;&amp;nbsp;&lt;BR&gt;신약성경의 첫번째 책인 마태복음에서 5장에서 7장까지를 산상수훈(山上垂訓)이라 일컫는다. 산상수훈은 성경 전체의 핵심이자 기독교 진리의 진수(眞髓)이다. 그리고 산상수훈 중에서 알맹이가 첫 부분에 나오는 8복(八福)이다.&amp;nbsp; 8복이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누리는 여덟가지의 복이다. 이들 중 일곱번째 복이 화평케 하는 자의 복이다. 화평(和平)이란 말이 헬라어로는 Eirene이고 히브리어로는 Shalom이다. 히브리어에서 샬롬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lt;BR&gt;&amp;nbsp;&lt;BR&gt;첫째는 완전한 복지와 행복을 뜻한다.&lt;BR&gt;두번째는 바른 인간관계를 뜻한다.&lt;BR&gt;&amp;nbsp;&lt;BR&gt;화평케 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이 복은 평화를 누리는 사람들의 복이 아니다.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Peace Makers)의 복이다. 평화를 누리는 삶들은 자신은 평화를 누리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평화를 위하여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런 삶들은 평화 애호가라 불려질 수는 있으나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Peace-Maker)은 아니다.&lt;BR&gt;&amp;nbsp;&lt;BR&gt;피스-메이커는 다른 사람들의 평화를 위하여 자신은 희생하고 고난을 감수하는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여 자신의 손해를 기꺼이 감수하는 삶들이다.&amp;nbsp; 그리고 이들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들이 진정한 크리스천들이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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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폰지 목회 ③</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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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0T09:06:51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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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LEFT: 30px; PADDING-RIGHT: 30px;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스폰지 목회 ③&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나는 목회관(牧會觀)이 간단하다.&lt;BR&gt;“예수 믿어 행복하여 지자”&lt;BR&gt;“예배당에&amp;nbsp; 다녀서&amp;nbsp; 행복하여 지자”&lt;BR&gt;“두레교회 교인들이 두레교회에 다니는 것이 행복하고 보람있게 목회하자”는 것이다. 교인들이 그렇게 행복해지려면 목사인 나부터&amp;nbsp;먼저 행복하고 보람이 있어야 한다. 감사하게도 그 점에서 나는 성공한 목사이다. 목사직 자체가 최상으로 보람되고 행복스럽다.&lt;BR&gt;&amp;nbsp;&lt;BR&gt;지난 40여년에 걸친 목회생활 중에서&amp;nbsp;목회생활 10년이 지나니까 목사가 된 것이 최상의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더니 20년이 지나니 “목사직이 나에게 꼭 맞는 천직(天職)이로구나”하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30년이 지나니까 교인들이 그렇게 소중하게 여겨지고&amp;nbsp;교회에 열심히 나와주는 것이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lt;BR&gt;&amp;nbsp;&lt;BR&gt;그래서 때로는 예의에 어긋난 짓을 하여도 이해하고 품어 줄려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교회생활에서 상식에 어긋난 행동을&amp;nbsp;하면 ‘세상살이에 오죽이나 각박하고 힘들었으면 교회에 와서 저러겠나’ ‘교회에서 만큼은 있는 모습 그대로 스트레스를 풀고 지날 수 있도록 받아들여 주어야지’하는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근년에 들어 교인들을 대할 때에 내가 취하는 3가지가 있다. 40년의 목회 경험에서 체득(體得)된 내용이다.&lt;BR&gt;&amp;nbsp;&lt;BR&gt;첫째는 모르는 척한다.&lt;BR&gt;교회생활에서 실수를 하거나 허물이 있어도 모르는 척한다. 내가 모르는 척하니까 별 문제가 되지 않고 넘어가게 된다. 대신에 잘하는 일이 있으면 기회가 닿는 대로 크게 칭찬을 해준다.&lt;BR&gt;&lt;BR&gt;둘째는 교인들이나 교회 일꾼들 사이에 편을 가르지 않는다.&lt;BR&gt;흔히 들리는 말에 의하면 목사들 중에는 교인들 중에 자신을 지지하는 편과 그렇지 않는 편을 편가름하는 경우가 있다는 소문을 듣는다. 참으로 삼가하여야 할 일이다.&lt;BR&gt;&lt;BR&gt;셋째는 교인들을 상대로 수단을 부리거나 요령을 부리지 않는다.&lt;BR&gt;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교인들을 상대로 정치를 하지 않는다고 표현할 수도 있다. 교회에서 만큼은 서로를 순수함으로 대하고, 있는 모습 그대로 진솔하게 대할 때에 우리들의 마음이 쉼을 누리게 된다는 생각이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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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폰지 목회 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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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9T09:11:38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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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스폰지 목회 ②&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한국교회에는 7만을 넘어 8만에 가까운 목사들이 있다. 나는 가끔 생각한다. 이렇게 많은 목사들이 왜 있어야 할까? 목사들이 노동하는 것도 아니고 물건을 생산하여 수출하는 것도 아니다. 거기에다 세금까지 내지 않는다. 아니할말로 전국의 목사들을 한 곳에 모아 물건을 생산하여 수출을 한다면 엄청난 수출을 늘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목사가 이렇게 많이 있어야 할 이유가 무엇일까?&lt;BR&gt;&amp;nbsp;&lt;BR&gt;내 생각으로는 목사가 존재하여야 할 이유가 크게 두 가지라 생각된다.&lt;BR&gt;첫째는 성경이 일러주는 말씀을 따라 정직하게 사는 삶을 살아 교인들에게와 국민들에게 보여 주는 일이다. 교인들은 물론이려니와 국민들조차 목사가 사는 모습을 보고 “아 사람은 저렇게 살아야 하는구나!&amp;nbsp; 나도 저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힘 써 보아야지!”하고 &amp;nbsp;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역할이다.&lt;BR&gt;&amp;nbsp;&lt;BR&gt;둘째는 세상살이에서 상처 받고 지치고 낙심하여 있는 교인들을 위로하고 치유하고 새롭게 수 있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일이다. 그리고 세상에서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교회 와서 악쓰고 깡을 부리는 교인들을 품에 품어 주는 일이다. 마치 스폰지가 물을 품고 있듯이 교인들의 투정과 응어리를 교회에 와서는 마음껏 풀어볼 수 있도록 마음을 활짝 받아들여 주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교회에 와서는 고달픈 인생살이에서 쌓인 한과 눈물이 시원스레 카타르시스될 수 있도록 받아들여 주는 일이다.&lt;BR&gt;&amp;nbsp;&lt;BR&gt;물론 목사가 감당하여야 할 일들이 이외에도 많은 것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위에 적은 두 가지가 목사가 있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라 여겨진다. 나도 목사들 중의 한 사람으로서 하는 말이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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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스폰지 목회 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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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8T09:26:53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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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스폰지 목회 ①&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스폰지 목회’란 말은 내가 만든 말이다. 필자는 30살에 목회를 시작하여 지금은 39년째 목회를 하고 있다. 지난 목회생활에서 이런 경험 저런 경험 숱한 경험을 하였다. 그런 목회생활에서 체득한 바를 바탕으로 하여 ‘스폰지 목회’란 말을 만들었다. 교회에 오는 교인들 중에는 온갖 사람들이 있다. 좋은 사람, 선한 사람들만 교회로 온다는 생각은 터무니없는 생각이다. 온갖 상처 받은 사람들이 교회로 온다. 그렇게 상처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받은 상처로 인하여 인격이나 성격에 모난 사람들이 많다.&lt;BR&gt;&lt;BR&gt;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상처가 있기에 교회생활에서 모난 행동을 할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교인과 교인 사이에 상처를 주고받고 하는 경우가 흔하다. 그런데 그렇게 상처를 주고받는 경우는 교인들 사이에서만이 아니다. 목회자나 목회자 가족들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들도 있다. 교인들은 교회생활에서 목회자로부터 상처 받은 경우를 말들하지만 사실은 교인들로부터 상처 받아 심신이 지친 목회자들도 많다.&lt;BR&gt;&lt;BR&gt;나도 지난 39년간의 목회생활에서 숱한 상처를 경험하였다. 나의 경우는 유달리 상처 많은 사람들을 찾아다닌 목회였다. 청계천 빈민촌, 옥살이, 남양만 간척지, 두레마을 공동체 생활 등등으로 내가 거친 목회생활이 유난히 상처가 많은 사람들 속에서 목회를 하였다. 물론 어느 경우나 누가 시켜서 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찾아가고 만들어서 한 경우들이다. 그런 경험 속에서 이런저런 스트레스가 쌓이고 상처 많은 사람들에게서 시달리곤 하면서 내린 나름대로의 결론이 ‘스폰지 목회’이다.&lt;BR&gt;&lt;BR&gt;이 말은 마치 스폰지가 물을 빨아들여 그냥 품고 있듯이 목회자는 교인들이 스트레스를 주는 것이나, 예절없이 구는 것이나, 상식에 안맞는 짓을 하는 경우들을 대할 때에 아무런 반응을 하지말고 그냥 받아들여 가만히 있는 것이 목회자의 바람직한 자세란 뜻에서 붙인 말이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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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양대부흥운동 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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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식사하세요</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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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7T09:30:2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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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LEFT: 30px; PADDING-RIGHT: 30px;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평양대부흥운동 ②&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어제 글에서 쓴 바와 같이 1907년 평양에서 일어났던 대부흥운동은 교육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교육운동이 교회 안에서만 머무는 운동이 아니라 겨레 전체의 혼을 깨우고 민족지도자를 기르자는 운동으로 뻗어나갔다. ‘한교회 한학교’운동을 일으켜 전국 각지에서 교회가 세워지는 곳마다 학교를 세우자는 교육운동으로 이어졌다.&lt;BR&gt;&amp;nbsp;&lt;BR&gt;오늘날에도 이런 정신, 이런 목표로 펼치는 교육운동이 꼭 필요하다. 한국교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교육운동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불행 중 다행으로 국가교육 내지 사회교육이 벽에 부딪혀 있다. 그래서 교육황폐니 교실붕괴니 하는 말들이 유행하고 있다. 이럴 때가 교회가 교육운동에 나설 적기이다. 무엇보다 이미 새워져 있는 기독교 학교들이 새로워져야 할 것이다. 작금의 기독교학교들의 실정은 설립되던 때의 기독교적 정체성(正體性, Christian Identity)을 잃어가고 있다.&amp;nbsp; 전국에 흩어져 있는 기독교 학교들의 이사장과 이사들, 교장과 교목, 교사들이 영적으로 새로워지고 기독교 교육에의 사명감을 재인식하여야 한다.&lt;BR&gt;&amp;nbsp;&lt;BR&gt;그리고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새로운 학교들을 교회 단위로,&amp;nbsp;지역 단위로 세워 나가야 한다. 현재의 기독교 학교만으로는 역부족이다. 더 많은 기독교 학교가 세워져 기독교적, 성경적 가치관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실시하여 학생들을 교육하고 그들의 부모들을 깨우쳐야 한다.&lt;BR&gt;100년전 한국교회의 선배들이 필요성을 절감하고 민족을 변화시키는 운동을 교육에서 시작하여 하였던 그때의 정열과 비전을 되찾아야 한다. 선배들의 기도와 용기, 정열과 비전을 배워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런 운동을 일으켜 나갈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공간도 있고 일꾼들도 있다. 예산도 있고 교육내용도 있다. 다만 뜨거운 가슴이 없고 분명한 푯대가 없을 따름이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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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양대부흥운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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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식사하세요</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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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6T11:35:22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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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RIGHT: 30px; PADDING-LEFT: 30px; 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TEXT-ALIGN: justify&quot;&gt;&lt;STRONG&gt;평양대부흥운동&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 성장에 한 획을 그은 운동이다.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가 오늘날처럼 성장할 수 있었던 토대를 놓은 사건이다. 이 운동은 지금으로부터 102년 전인 1907년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비롯되었다.&lt;BR&gt;이 운동은 그 해 1월 2일에서 15일까지 13일간에 걸쳐 열렸던 겨울 남전도회 사경회(男傳道會&amp;nbsp;査經會)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경회란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일컫는다. 19세기 후반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면서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이 책읽기를 즐겨하고 교육열이 높아 ‘책 중의 책’이랄 수 있는 성경을 크게 환영하는 모습을 접하고 성경공부에 주력하면서 사경회가 발전케 되었다.&lt;BR&gt;&amp;nbsp;&lt;BR&gt;그 해 겨울 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에는 전국 각 지역으로부터 천여명이 모였다. 이 모임에서 회개운동이 일어났고 성경공부운동이 일어났으며 영혼을 구원하는 전도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기독교 교육운동이 일어났다.&amp;nbsp;&lt;BR&gt;교육운동은 두 가지 형태로 일어났다.&lt;BR&gt;첫째는 기존에 세워져 있던 기독교 학교 안에서 일어난 부흥운동이다.&amp;nbsp;장대현교회에서 시작된 한국교회의 영적 각성운동과 회개운동이 기독교 학교들 안으로 번지게 되어 학교들이 다시 한 번 새로워지게 되었다.&lt;BR&gt;&amp;nbsp;&lt;BR&gt;둘째는 각 교회들이 기독교 학교를 세워 민족을 “교육을 통하여 살리자”는 교육입국운동(敎育立國運動)으로 발전하였다.&amp;nbsp; 이 운동은 ‘일교회 일학교’라는 구호를 내걸고 한 교회가 한 학교를 세우는 기독교학교 설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lt;BR&gt;한국교회의 첫번째 교회였던 솔내교회의 경우는 교회 건물을 짓기 전에 학교를 먼저 세우는 데에 헌금을 모았다. 교회들이 그렇게 학교를 세워 교육에 헌신하려는 목적은 민족의 지도자를 길러내려는 교인들의 열정에서 비롯되었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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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교육자 아브라함 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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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식사하세요</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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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5T08:51:27Z</updated>
	    <published>2009-11-15T08:51:27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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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LEFT: 30px; PADDING-RIGHT: 30px;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교육자 아브라함 ②&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아브라함이 자녀들을 교육하고 훈련하던 일이 당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이루어지기를 하나님이 명하셨다. 이렇게 대를 이어가는 교육의 실천에 대하여 요엘서에서 다음같이 일러준다.&lt;BR&gt;&lt;BR&gt;“너희는 이 일을 너희 자녀에게 말하고 너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말하고 그 자녀는 후세에 말할 것이니라.”(요엘 1장 3절)&lt;BR&gt;&lt;BR&gt;이 말씀에서 4대에 걸쳐 이어져 가는 자녀교육을 일러준다. 우리가 자녀에게 하나님을 섬기는 도리를 가르치고 우리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아버지로부터 배운 대로 가르치며 그 자녀는 자기 자녀에게 가르치며 그 자녀는 다시 자기 자녀에게 가르친다.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이 이를 실천하였기에 아브라함의 신앙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lt;BR&gt;&lt;BR&gt;그런데 지금 한국교회에는 이런 실천이 부족하다. 아버지 어머니는 목사거나 장로거나 권사여서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며 교회를 잘 섬기는데 그 신앙과 열심이 아들 딸 손자 손녀에게는 이어지지를 못한다. 이런 취약점을 극복치 못한다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떻게 하면 우리들의 신앙을 대를 이어가는 신앙으로 전승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여야 한다.&lt;BR&gt;&lt;BR&gt;한국교회가 시작되던 1세기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각 교회들이 전심을 다하여 유년주일학교를 운영하고 각 가정은 날마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자녀들을 신앙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각 곳에 크리스천 학교를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그래서 이 나라의 신교육운동(新敎育運動)을 교회가 주도하였다. 그런데 아쉽게도 초대교회의 그런 교육에서 정열이 제대로 이어져 오지를 못하고 있다. 교회가 세웠던 숱한 학교들이 이제는 자신의 몫을 못하고 있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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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교육자 아브라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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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4T09:38:40Z</updated>
	    <published>2009-11-14T09:38:40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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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BOTTOM: 30px; LINE-HEIGHT: 180%; PADDING-LEFT: 30px; PADDING-RIGHT: 30px; PADDING-TOP: 30px&quot;&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교육자 아브라함&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두레교회의 목회는 교육목회(敎育牧會)이다. 성경에서 교육목회의 시작은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우는 아브라함에서 시작되었다. 하나님께서 무슨 연유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을까?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하신 이유를 일러준다.&lt;BR&gt;&lt;BR&gt;“내가 아브라함을 선택한 것은 그가 자식들과 자손을 잘 가르쳐서, 나에게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라는 뜻에서 한 것이다. 그의 자손이 아브라함에게 배운 대로 하면, 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대로 다 이루어 주겠다.”(표준새번역 성경 창세기 18장 19절)&lt;BR&gt;&lt;BR&gt;위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아브라함이 자녀들과 자손들을 잘 교육하여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고 옳고 바른 일을 하도록 가르치게 하기 위하여 그를 선택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대로 행하고 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신 대로 다 이루어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서 하필이면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이유가 분명하여진다.&lt;BR&gt;&lt;BR&gt;그를 교육자로 선택하신 것이다.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교육하기에 적합한 사람이었기에 그를 선택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 사명을 잘 감당하였다. 자신의 아들 당대에만 제대로 한 것이 아니라 자자손손 대를 이어가며 이 사명을 잘 감당할 수 있도록 기초를 놓았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졌던 교육자로서의 사명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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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업가와 운동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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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식사하세요</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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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3T09:01:05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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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사업가와 운동가&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크리스천들 개개인들에게나 교회들이 직면하게 되는 한 가지 위험이 있다. 선교운동이나 교육운동으로 시작하였다가 세월이 흐르게 되면서 선교사업이나 교육사업으로 끝나고 마는 위험이다. 이점은 전도나 목회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교회의 많은 기관들이 그런 위험에 빠져들어 제 몫을 못하고 있다. 지난 백여년간에 한국교회가 세운 많은 학교들 병원들 그리고 선교기관들이 그런 위험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운동에서 벗어나 사업장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lt;BR&gt;&lt;BR&gt;그렇다면 선교사업과 선교운동이 무엇이 다른가? 사업가와 운동가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세 가지 차이점이 있다.&lt;BR&gt;&lt;BR&gt;첫째로 사업은 조직과 기구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나 운동은 사람에 관심을 갖는다.&lt;BR&gt;둘째로 사업은 이권과 이익에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운동은 이념과 의미에 관심을 가진다.&lt;BR&gt;셋째로 사업은 현재에 관심을 집중한다. 그러나 운동은 미래에 관심을 가지고 미래에 투자한다.&lt;BR&gt;&lt;BR&gt;한국교회의 숱한 기관들이 처음에는 복음운동가들의 순수한 동기를 품고 선교운동으로 시작하였다가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 운동가들의 헌신과 희생정신은 사라지고 자리와 이권을 탐하는 사업가들에 의하여 변질되어 왔다. 가장 두드러진 분야가 교육 분야이다.&lt;BR&gt;&lt;BR&gt;한국교회가 선교운동을 시작하던 100여년 전에는 교육운동을 뜨겁게 펼쳤다. 초대교회 시절엔 한 교회 한 학교의 목표를 세우고 많은 기독학교를 세웠다. 이들 학교가 우리나라 신교육운동을 앞장서서 이끌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이들 학교가 기독교적인 교육운동의 정신에서 벗어나 제 몫을 하지 못하고 그냥 교육 사업으로 머물게 되었다.&lt;BR&gt;&lt;BR&gt;이제나마 이점을 돌이켜 반성하고 시작 할때의 초심을 회복한다면 이 나라의 교육 전체가 바뀌어져 가게 될 것이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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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호렙산 반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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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식사하세요</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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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2T08:59:37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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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호렙산 반석&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호렙산은 시내산(Sinai Mountain)의 다른 이름이다. 이 산은 거룩한 산이라 하여 예나 지금이나 성산(聖山)으로 높임 받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 땅에서 4백년이 넘는 동안의 노예살이를 벗어나 해방공동체를 이루어 시내반도 사막 길을 행진하던 때다. 호렙산에서 가까운 르비딤 광야를 지날 때쯤에는 물을 마실 수 없어 백성들의 고통이 극에 달하였다. 끝내는 지도자인 모세를 원망하다가는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 아니 계시는가 하는 절규에까지 이르게 되었다.(출애굽기 17장 1~7절)&lt;BR&gt;&lt;BR&gt;견디다 못한 모세가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다.&lt;BR&gt;“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내가 이 백성에게 어떻게 하리이까? 그들이 조금 있으면 내게 돌을 던지겠나이다.”(출애굽기 17장 4절)&lt;BR&gt;&lt;BR&gt;이러한 모세의 기도에 응답으로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호렙산 기슭에 있는 반석 위에 서서 그 반석을 치라. 반석에서 물이 나리니 백성들이 마시게 하라 이르셨다. 모세가 그렇게 하였더니 반석에서 물이 쏟아져 백성들이 마실 수 있게 되었다&lt;BR&gt;&lt;BR&gt;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이 사건에 영적인, 신학적인 의미가 더하여지게 되었다. 신약시대에 이르러서는 그 반석이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라는 이해를 하게 되었다. 바울 사도의 경우가 대표적인 경우이다.&lt;BR&gt;&lt;BR&gt;“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이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린도전서 10장 1~4절)&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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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태초에 도(道)가 있었다 ②</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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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식사하세요</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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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1T09:23:42Z</updated>
	    <published>2009-11-11T09:23:42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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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태초에 도(道)가 있었다 ②&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어제 글에 이어 도(道)에 대하여 이어서 쓴다.&lt;BR&gt;베드로후서 1장 3절에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고 하였다. 생명을 얻는 것은 “구원 받았다”하는 득도(得道)의 단계이다. 받은 구원을 생활 속에서 가꾸어 나가는 것을 경건의 훈련이라 부르는 수도(修道)의 단계라 하겠다. &lt;BR&gt;&lt;BR&gt;우리에게는 구원을 받은 득도와 아울러 경건의 훈련인 수도가 필요하다. 경건으로 지켜지지 않는 생명은 부패와 타락으로 이르게 되기 싶다. 그 다음 생명을 누리는 낙도(樂道)의 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이 경지가 신앙인이 누리는 복된 삶의 핵심이 된다. 이런 경지를 종교와 철학에서는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라 부른다. 크리스천으로 말하자면 임마누엘 주님을 모시고 복음을 누리며 사는 성령 충만의 삶이다. &lt;BR&gt;여기에 더하여 우리는 도를 전하는 전도(傳道)의 생활로 나가야 한다. 바로 전도자(傳道者)의 삶이다. 성경에서는 전하지 않으면 화가 있다고 하였지만 도를 누리는 사람은 억지로가 아니라 기쁨으로 전하게 된다. 복음을 누리고 사는 자체가 바로 전하는 삶이다. 마치 꽃이 향기를 품듯이, 빛이 어둠을 밝히듯이 득도하여 수도를 거쳐 낙도에 이른 다음에는 자연히 전도의 자리에 이르게 된다. &lt;BR&gt;&lt;BR&gt;지금 나는 어느 자리, 어느 단계에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득도(得道), 수도(修道), 낙도(樂道), 전도(傳道) 중에서 나는 어느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를 자신을 살펴보아 분발 할 때이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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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태초에 도(道)가 있었다 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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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식사하세요</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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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0T09:09:35Z</updated>
	    <published>2009-11-10T09:09:35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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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 LINE-HEIGHT: 160%; TEXT-INDENT: 0px; MARGIN: 0px; FONT-FAMILY: 돋움; LETTER-SPACING: -1px; COLOR: #000000; FONT-SIZE: 10pt&quot;&gt;&lt;STRONG&gt;태초에 도(道)가 있었다 ➀&lt;/STRONG&gt;&lt;BR&gt;&lt;BR&gt;&lt;BR&gt;&lt;/P&gt;
&lt;P&gt;중국에서는 복음을 도(道)라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의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구절을 중국어 성경에서는 태초에 도(道)가 있었다고 번역하고 있다. 도에는 네 가지 의미를 포함한다.&lt;BR&gt;&lt;BR&gt;첫째는 도를 깨닫는 득도(得道)이다.&lt;BR&gt;둘째는 도를 닦아 나가는 수도(修道)이다&lt;BR&gt;셋째는 도를 누리는 낙도(樂道)이다&lt;BR&gt;넷째는 도를 전하는 전도(傳道)이다.&lt;BR&gt;&lt;BR&gt;이들 네 가지 도를 거쳐 누릴 때에 성령 충만한 삶이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숱한 사람들이 도를 깨우치기 위하여 온갖 고생을 다하였다. 더러는 나름대로 도를 깨우친 사람들도 있었으나 헛된 수고로 끝나버린 사람들도 허다하였다. 도를 깨우치려는 노력이 지나쳐 목숨을 잃게 된 사람들까지 있었다.&lt;BR&gt;&lt;BR&gt;노력으로 도를 깨우치고 도에 이르는 길이 쉽지 않기에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도에 이를 수 있는 쉽고도 확실한 길을 마련하였다. 그 길을 복음이라 일컫는다. 바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게 되는 길이다. 이 길을 바르게 따라, 바른 깨우침, 바른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게 된 삶을 득도(得道)한 사람이라 일컫는다.&lt;BR&gt;&lt;BR&gt;그런데 그렇게 득도한 후에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도를 삶에서 이루어 나가는 나날의 삶이 뒷받침 되어야 한다. 바로 ‘수도(修道)하는 삶’이다.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4장에서는 그렇게 도를 닦아 나가는 ‘수도의 삶’을 ‘경건의 훈련’이라 하였다. 경건의 훈련을 쌓아 나가는 생활을 수도라 한다. 우리들 크리스천들에게는 구원을 받은 득도와 아울러 경건의 훈련을 닦는 수도가 필요하다.&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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