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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주가 좋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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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름다운 사랑이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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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
	    	&lt;CENTER&gt;
&lt;TABLE border=5 cellSpacing=2 borderColor=#9730db width=600 bgColor=black cellspadding=&quot;10&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
&lt;CENTER&gt;&lt;IMG src=&quot;http://data.positive.co.kr/user/community/20091114/result_142229_790477931.JPEG&quot; width=550&gt; &lt;br&gt;&lt;br&gt;
&lt;CENTER&gt;&lt;FONT color=white&gt;&lt;FONT size=2&gt;&lt;STRONG&gt;아름다운 사랑이란&lt;/STRONG&gt;&lt;BR&gt;&lt;BR&gt;&lt;BR&gt;누구나 사랑을 시작하고&lt;BR&gt;사랑에 빠지게 되면&lt;BR&gt;세상의 온갖 만물이 다&lt;BR&gt;아름답게 느껴지고 가슴은 환희로 가득하다.&lt;BR&gt;&lt;BR&gt;그러므로 타인의 눈에&lt;BR&gt;커다랗게 보이는 상대의 결점까지도&lt;BR&gt;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며&lt;BR&gt;세상의 만물을 바라보는 눈이&lt;BR&gt;확 달라 지는 것이다.&lt;BR&gt;&lt;BR&gt;이세상에서&lt;BR&gt;자기 연인만이 가장 멋지고, &lt;BR&gt;매력적이라고 믿으며 행복해 한다.&lt;BR&gt;&lt;BR&gt;이처럼 사랑에 빠지게 되면&lt;BR&gt;알 듯 모를 듯한 신비감이&lt;BR&gt;상대의 결점이나 부족한 부분을 감싸주는&lt;BR&gt;방패의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다.&lt;BR&gt;&lt;BR&gt;우리는 주위에서&lt;BR&gt;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커플이&lt;BR&gt;아주 다정한 모습으로&lt;BR&gt;거리를 활보하는 아름다운 장면을&lt;BR&gt;심심치 않게 보기도 한다.&lt;BR&gt;&lt;BR&gt;다른 사람이 보기에는&lt;BR&gt;별로 인데도 최면에 빠진 듯이&lt;BR&gt;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lt;BR&gt;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믿는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data.positive.co.kr/user/community/20091114/result_142221_926571071.JPEG&quot; width=550&gt;&lt;br&gt;&lt;br&gt; 괴롭고 쓸쓸할 때면&lt;BR&gt;곧 상대방의 모습이 떠오르고&lt;BR&gt;언제나 함께 였으면 하고&lt;BR&gt;그리워 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이 사랑의 힘이다.&lt;BR&gt;&lt;BR&gt;그러나 이러한 연애의 감정은&lt;BR&gt;아주 변화가 심해서&lt;BR&gt;만남이 잦아지고 상대가 내 사람이라는&lt;BR&gt;확신을 갖게 되면&lt;BR&gt;그 동안 보이지 않던 상대방의 결점도&lt;BR&gt;서서히 보이게 된다.&lt;BR&gt;&lt;BR&gt;그러면서&lt;BR&gt;그저 신비롭기만 하던&lt;BR&gt;상대에 대한 느낌도&lt;BR&gt;점차 신비감이 사라 지며&lt;BR&gt;매력이 덜해지기 시작 한다.&lt;BR&gt;&lt;BR&gt;그 동안에는&lt;BR&gt;강력한 사랑의 감정 때문에&lt;BR&gt;상대의 결점을 보지 못했을 경우도 있고,&lt;BR&gt;&lt;BR&gt;상대가 스스로&lt;BR&gt;자신의 결점을 조심해서 보이지 않게&lt;BR&gt;했을수도 있다.&lt;BR&gt;&lt;BR&gt;그러면서&lt;BR&gt;잠시 한눈을 팔기도 하고&lt;BR&gt;마음의 갈등을 겪기도 한다.&lt;BR&gt;&lt;BR&gt;언제까지나&lt;BR&gt;꿀 맛 같기만 하던 사랑의 감정도&lt;BR&gt;어느 순간에는 씁쓸할 수도 있는 것이&lt;BR&gt;연애의 감정이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data.positive.co.kr/user/community/20091114/result_142216_596706569.JPEG&quot; width=550&gt;&lt;br&gt;&lt;br&gt;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lt;BR&gt;마음 속에 새겨진 상대에 대한&lt;BR&gt;아름다운 환상의 본 질을 바꿀 수는 없다. &lt;BR&gt;바꾸어서도 곤란하다.&lt;BR&gt;&lt;BR&gt;이러한&lt;BR&gt;마음의 동요를 극복할 때&lt;BR&gt;사랑은 더욱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lt;BR&gt;&lt;BR&gt;그리고 상대의 단점까지도&lt;BR&gt;사랑하려는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lt;BR&gt;상대가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 사랑이다.&lt;BR&gt;&lt;BR&gt;상대방의 아픔이&lt;BR&gt;자신의 아픔이 되고&lt;BR&gt;상대방의 기쁨이 자신의 기쁨이 된다.&lt;BR&gt;&lt;BR&gt;서로가 모든 것을 드러내 놓고&lt;BR&gt;인생의 긴 여정을 함께 공유하려고 하는 것이&lt;BR&gt;진정한 사랑인 것이다.&lt;BR&gt;&lt;BR&gt;처음에 가졌던&lt;BR&gt;상대방에 대한 아름다운 환상...&lt;BR&gt;그 환상을 소중히 간직하려고 할 때&lt;BR&gt;사랑은 더욱더 아름다워 지는 것이다.&lt;BR&gt;&lt;BR&gt;- 좋은 글 중에서 -&lt;BR&gt;&lt;IMG src=&quot;http://data.positive.co.kr/user/community/20091114/result_142210_4940211.JPEG&quot; width=550&gt;&lt;br&gt;&lt;br&gt; &lt;EMBED type=application/download hidden=true src=http://pds36.cafe.daum.net/original/44/cafe/2007/10/10/00/28/470b9e2d1d2bc&amp;.wma volume=&quot;0&quot; loop=&quot;-1&quot; autostart=&quot;true&quot;&gt; &lt;/FONT&gt;&lt;/FONT&gt;&lt;/CENTER&gt;&lt;/CENTER&gt;&lt;/TR&gt;&lt;/TBODY&gt;&lt;/TABLE&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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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다리는 마음/김선숙</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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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6T22:36:14Z</updated>
	    <published>2009-11-26T22:36:1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CENTER&gt;&lt;EMBED height=40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0 src=http://cfile234.uf.daum.net/original/172433164B0E82C7289941 scale=&quot;exactfit&quot; wmode=&quot;transparent&quot;&gt;&lt;/EMBED&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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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한벽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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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5T20:05:58Z</updated>
	    <published>2009-11-25T20:05:5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한벽당은 승암산 기슭인 발산 머리의 절벽을 깍아 세운 누각으로서 옛 사람은 한벽청연이라 하여 전주 팔경의 하나로 꼽았으며, 그 서쪽 일대는 자만동 또는 옥류동이라 불리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한벽당은 우리고장뿐만 아니라, 호남의 명승으로 알려져서 시인 묵객들이 그칠새 없이 찾아든 곳으로 제영한시가 많이 전해오고 호남 읍지에는 이경전, 이경여, 이기발, 김진상등 19명의 저명한 인사들의 시문이 담겨 있어 그 시절의 풍류를 살필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슬치에서 시작된 상관계곡의 물은&amp;nbsp;衣岩, 孔器, 隱石등 크고 작은 많은 골짜기의 물이 합해지면서 만마, 죽림, 신리, 색장등 여러 동네 옆을 거쳐 흐른다. 그리고 계속하여 좁은목을 굽이틀어 한벽당 바윗돌에 부딪쳐 흰 옥처럼 부서지면서 거듭 굽이틀어 남천으로 흘러 갔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옛날에는 조옹들이 낚시대를 들여놓고 한가롭게 정서를 길러낸곳이었으며, 호화스런 오룡교(남천교)를 건너 남원, 구례, 곡성, 순천, 진주로 빠지는 나그네들의 발길을 멈추게 하여 한때 객수를 달랜 곳이기도 하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상관의 깊은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맑은 長風에 가슴속의 속진을 씻어내고 마주치는 남고산성에서 은은히 울려퍼지는 남고모종(전주팔경의 하나)의 소리를 듣고 명상에 잠기기도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한벽당이라 처음 불리게 된 연대는 확실히 밝혀넬수는 없고 월당선생 유허비에는 월당루라 비쳤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당초에는 월당루로 블리운것 같은데 한벽이란 어귀는 碧玉寒流란 글귀에서 따낸것으로 뒷사람이 붙인것으로 추정된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한벽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한벽루&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한벽당&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한벽당&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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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주향교에 대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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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꿈꾸는 사랑</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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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5T19:52:41Z</updated>
	    <published>2009-11-25T19:52:4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주향교는 조선조에 있어서&amp;nbsp;府&amp;nbsp;牧&amp;nbsp;郡 縣 곧 크고 작고간에 지방의 각고을마다 반드시 한곳씩 건립하여 유교에 의한 자제의 교육을 담당하던 기관이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 창건에 관해서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인종 5년에 여러 고을에 영을 내려 학교를 세워 도를 가르치라 한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는 私塾이나 서당 따위와는 달리 官學이라는 성격을 가진것이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조선조의 향교는 반드시 文廟(문선왕조의 약칭)를 중심으로 하는 대성전과 명륜당을 두었는데, 대성전은 공자의 위판을 중앙에 모시고 그 좌우에 사성(현자, 증자, 자은, 맹자)과 十哲 그리고 宋朝 六賢의 위판을 배향하였고, 동서 양무에는 공자의 제자를 비롯한 중국의 유학자 94인과 신라시대 이래의 국내학자 18인 도합112인의 위판을 모신 곳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명륜당은 유학을 강론하는 곳인데, 향교에는 교수, 훈도가 한사람씩 있어 유생의 교육을 담당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주 향교도 그 창건 년대는 명확치 않다. 성종때의 학자인 서거정이 전주향교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그 내용으로서 당시까지의 향교의 변천을 알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동국여지승람&gt;에는 향교는 府西 五里라 하였다. 서거정기에 의하면 전주 향교는 본시 부성 안 남쪽에 자리 했었으나, 1441년(세종23년)에 경기전을 짓고 태조의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러나 향교와 바로 이웃하여 유생들의 글읽는 소리로 시끄러움이 끊기지 않자, 성령을 평안히 모시는 도리에 어긋난다 하여 부서 화산의 동쪽 기슭으로 이전하게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대성전, 강당, 재실, 기타부속건물을 고루 갖추었으나 그곳이 부중에서 너무 동떨어져서 산짐승들의 화를 입을 우려가 있으므로 높은 담장을 둘렀다 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임진, 정유 왜란을 거친 직후인 1603년(선조 36)에는 서거정이 말한것 처럼, 부중에서너무 동떨어져 있고 더우기 좌묘우사, 곧 객관에서 남면하여 좌측에 문묘 우측에 사직단을 배치하는 옛법도에 어긋난다 하여 부성밖 동편인 지금자리로 옮긴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아마도 임진, 정유란때 소실되었던것을 자리를 옮겨 중건한 것으로 짐작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 공사는 당시의 순찰사였던 장만에 의해서 발의 되어 부중의 유생들이 합심하여 감독에 당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대성전에는 공자를 비롯한 5성을 봉안함과 아울러 10철을 종사하고 양무에는 제현을 배향한 내용이 있는데, 모두 성균관의 격식을 그대로 본 딴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명륜당 서편에는 담장을 격하여 啓聖祠가 자리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는 원래 공자와 그제자였던 4성의 선고의 위판을 모시는 곳으로서, 전주 향교내의 계성사는 1741년 (영조17)에 판관 송달보가 창건하였는데 정랑 이기경이 상량문을 썻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1630년(인조8년)당시의 부윤 이상길은 유생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전 현감이던 양극인등에 명하여 각종 금속제의 제기 570여개를 갖추게 하였다. 유생들은 그의 덕을 기리기 위하여 부사 양극에게 부탁하여 향교 이전 이후의 전말을 기록하여 명륜당 벽면에 걸도록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러나 지금 건물은 중건당시의 것은 아니다. 다만 뜰안 양쪽에 서 있는 은행나무만이 그 380년의 연조를 예대로 지키고 있을 뿐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대성전은 중건한지 50년후인 1653년(효종4년)에 부윤 심택과 판관 한진기가 중건하였는데, 이기발이 &lt;중건기&gt;를 남겼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향교 외삼문 밖에는 萬化樓가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명륜당은 다시 1904년(광무8)에 군수였던 권직상이 중건하였는데, 이 공사는 수사인 이상규가 주관하고 정위 김병욱이 감독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문묘 곧 대성전은 그보다도 늦은 1907년(강희원년)에 전 군수였던 이중익이 중수하여 우늘에 이르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주 향교안에 있던 대성전은 지방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 보호를 받고 있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향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향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향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향교&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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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가을이여 안녕/현영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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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BODY&gt;
&lt;TR&gt;
&lt;TD&gt;
&lt;P align=center&gt;&lt;EMBED style=&quot;WIDTH: 599px; HEIGHT: 712px&quot; height=712 type=application/octet-stream width=599 src=http://cafe.joins.com/cafefile/h/y/hyhi/u8(1).swf wmode=&quot;transparent&quot;&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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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style=&quot;Z-INDEX: -1; POSITION: absolute; WIDTH: 540px; HEIGHT: 100px; TOP: -40px; RIGHT: 460px&quot; id=layer1&gt;&lt;PRE&gt;&lt;P align=lef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pt&quot; color=#000000 face=고딕편지지체&gt;&lt;SPAN style=&quot;LINE-HEIGHT: 16px&quot; id=style&gt;
&lt;UL&gt;






&lt;B&gt;가을이여 안녕/ 思 該 현 영진 &lt;/B&gt; 

 

찬바람이 메마른 가슴 파고들 때
문틈 사이로 겨울이 성큼 다가와
이유 없는 슬픔이 가슴을 적십니다. 

가을은 성큼 뒷걸음치며 달아나고
소리쳐 불러도 목소리는 저 담장 너머
휘날리는 낙엽과 함께 바람 속으로 사라지고 

앙상한 모습 메마른 나무 가지가지마다
계절이 길목에 시린 가슴 풀어놓고
아픈 그리움 구구절절 표현할 수는 없지만
눈물 젖은 낙엽 위에 못다 쓴 편지를 써 봅니다. 

아직도 오색 물결로 일렁이는 낙엽 위로
내 마음속에는 가을이 곁에 있는듯한데
내 발등에 수북이 쌓여 있는 낙엽을 바라보면 
계절은 어느덧 저만치 시간 속으로 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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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UL&gt;&lt;/SPAN&gt;&lt;/FONT&gt;&lt;/PRE&gt;&lt;/DIV&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SPAN&gt;&lt;/FONT&gt;
&lt;P&gt;&lt;/P&gt;&lt;PRE&gt;&lt;/PRE&gt;
&lt;CENTER&gt;&lt;/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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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경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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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4T20:47:10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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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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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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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2.uf.daum.net/image/1374A4134B0BC7762A7739&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actualwidth=&quot;578&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578&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04.uf.daum.net/image/1474A4134B0BC7762BDDB3&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actualwidth=&quot;578&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578&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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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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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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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35.uf.daum.net/image/2074A4134B0BC7782F5AA3&quot; class=&quot;tx-daum-image&quot; style=&quot;FLOAT: none; CLEAR: none&quot; actualwidth=&quot;578&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578&quot; /&gt;&lt;/P&gt;
&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건지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건지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조경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조경단&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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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경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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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꿈꾸는 사랑</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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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4T20:41:46Z</updated>
	    <published>2009-11-24T20:41:4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http://cfs4.flvs.daum.net/files/31/50/47/65/26630818/thumb.jpg.edit&quot; moviekey=&quot;w7bAxsV-jKA$&quot; type=&quot;vi&quot;/&gt;&lt;/P&gt;
&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건지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건지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조경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조경단&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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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경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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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꿈꾸는 사랑</name>
	    </author>
	    <updated>2009-11-24T20:39:36Z</updated>
	    <published>2009-11-24T20:39:3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조경단은 전주덕진에 있는 건지산에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곳은 전주이씨 시조의 묘소로 정해져 1896년(광무3년)5월에 단을 쌓고 조경단이라 부르기로 하고 비를 세운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는 경기전과 그 뒤 영조때에 창건한 조경묘와 함께 전주가 왕조 이씨의 발상지라는 의의를 한층 현실화 하는 조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는 갑오 동학군의 전주부성 점령으로 전주를 성역화 하려는 기운이 팽배해졌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은 조경단을 쌓은 다음해에 오목대, 이목대에도 비를 세워 이 태조의 발자취와 그의 4대조인 목조대왕의 행적을 길이 남기려 했던것과도 연결되어 갔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덕진 건지산 기슭에 시조&lt;신라사공공&gt;의 묘소가 있었다는 언전은 영조때에도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완산지&gt;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quot;신라 사공공의 묘소가 이곳에 있다는 言傳에 따라 영조는 땅을 파서 그 묘역을 찾아보려 하였으나 얻는바가 없었다. 다만 근방의 민묘를 철거케하고 감관을 두고 표시를 하여 산을 지켜옮으로써 받드는 예를 갖추었다.&quot;&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영조 47년에 7도 유생의 상소로 조경묘가 창건 되기 전에 태상정 이정중은 이미 시조의 단을 쌓을것을 건의한 바 있었으나, 너무 중대한 문제라 하여 결정을 내리지 모하고 조경묘를 우선하여 창건 시켰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광무 3년의 설단은 이러한 영조때부터의 시조묘를 찾는 뜻을 실현 시킨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 전해인 광무 2년 9월에 의정부찬성 이종건이 설단에 관한 상소문을 올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종건은 상소문에서 옛날 주공의 후직을 교사함으로써&lt;追遠報本之意&gt;로 치성을 다한 고사를 전제하고, 우리나라에도 시조인 후직과 같은 즉, 이를 숭봉함은 고금에 다를 바 없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따라서 我태조는 일찌기 전주 건지산에 수호군을 두어 초목을 엄금할것을 특명함으로써 숭봉의 뜻을 나타내었고, 역대 왕실에서도 때때로 이를 간수 하는데 힘써 왔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영조 47년에 드디어 조경묘가 세워져 시조를 받는 성전이 베풀어졌다. 근간에 와서 나라의 기강은 헤이되고 민심은 변하여 도벌 암장의 악습을 범하게 되어 온 산은 나날이 황폐해지고 말았으니 지나치는 사람일지라도 참으로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하물며 그 후손된 몸으로써 어찌 이를 보고 통한의 눈물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에 대하여 지난봄에 장례원에서는 그 대책을 세우고자 해당도에 물어온바가 있었으나 도백의 조사보고가 모호함으로써 흐지부지되고 말았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러니 어명으로써 산을 봉하여 투장(몰래 묘를 쓴것)을 파헤치고 경계를 표시하여 예대로 사정함으로써, 옛 법도대로&amp;nbsp; 산을 수호하고 시조를 받드는 절차를 시행하기 바란다고 강조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종건의 상소문을 접한 고종은 10월 6일 이에 답하는 칙서를 내려 이 상소문이 길이 조상을 받들것을 꾀하는 정성이 담긴것이라 하였다. 이러한 실정을 방임한 것은 놀라운 일이므로 도백에게 그 책임을 물어 마땅히 엄히 다스려야 할것이로되, 일이 번지는것을 바라지 않으므로 도백이 직접 이를 조사하고 법도와 절차대로 시행할 것을 종정원에 명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리하여 다음해인 광무 3년에는 &lt;궁내부특진관 이재곤을 (조경단봉심재신)으로 임명, 전주에 파견하여 건지산의 시조묘소의 검분에 담당하게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처음 광무 2년 12월 14일에 칙명을 받았고, 다음해 정월 29일에 재차 부름을 받았으나 신병을 이유로 나가지 않았다. 다시 3월 13일 세번째의 부름에는 어쩔 수 없이 당일로 출발 3월21일에 전주에 도착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다음 당시의 전라도 관찰사인 이완용과 더불어 현장에 나가 설단할 곳을 살펴 본즉 건지산&lt;왕자봉&gt;아래 동쪽에 산을 등진 기슭에서 봉분의 형태를 찾아 내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재곤은 산지기나 주민에게 물어서 옛부터 16,5척을 사이에 두고 상하에 묘가 있어 상묘하묘라고 불리웠다는 것을 알수가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몇일을 두고 둘레를 살폈으나 더이상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으므로 소나무에 새끼줄을 둘러 경계를 표시하고 돌아 왔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결국 그는 읍지나 경기전전의에서 시조묘 소재지가 이곳에 이곳에 있다는 언전이 기록되어 있으나, 선원보(왕실의 계보)에도 묘지에 관한 기록이 보이지않으므로 널리 문헌을 고증할 수도 없다. 거기에다가 천년 이상이 흘러간 지금에 와서 이를 견줄만한 지점을 찾았다는 것은 감명깊은 일이었다고 보고문에서 밝히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어 이재곤은 경기전 조경묘에 봉심하고 발리산 자만동 장군수 호운석 오목대등의 관련된 사적을 열거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에 대하여 고종은 자만동 오목대등의 사적은 그 신빙성이 오래 증명된다고 말하고 전례에 따라 비문을 지어 이곳에 세울것을 밝히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드디어 조경단의 설단 공사는 진행되어 이해 5월에는 고종의 어필로 된 비석 머리글자와, 친히 지은 비문을 새겨 설단한 경내에 세우기에 이르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것이 &lt;대한조경단&gt;비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로써 태조이래 전주를 왕실 발상지로서 중요시하는 사상은 유감없이 실현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조경단의 설단은 &lt;완산지&gt;&lt;경기전전의&gt;등에 보이는 구전에 근거를 두었을 뿐 이러한 구전조차도 &lt;동국여지승람&gt;이나 이경동의&lt;진남루기&gt;등 비교적 오래된 조선조 전기의 문헌에는 그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것은 영원한 의문으로 남게 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태종은 13년(1413)9월부터 10월에 걸쳐 전라도 임실로 사냥길을 나섰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10월 1일에 완산성 동쪽에 있는 성터(견훤의 옛 성터인듯)에 도착하여 다음 날 사람을 보내어 태조 진전과 성황사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그리고 부중과 인근 고을에서 2천명의 몰있군을 동원시켜 건지산에서 일대 사냥을 감행하였으나 겨우 노루 7~8마리를 잡았을&amp;nbsp;뿐이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는 &quot;전주는 고향이다&quot;라고 밝히고 태조의 영정을 모신 진전에 까지 제사를 올릴 정도였다. 그런데 건지산이 당시에 시조의 묘역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찌하여 2천명이나 되는 몰있군을 이끌고 가서 거침없이 짓밟고 사냥을 강행했을 것인가. 이 또한 커더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조경단은 지방기념물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건지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건지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조경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조경단&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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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조경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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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꿈꾸는 사랑</name>
	    </author>
	    <updated>2009-11-24T19:53:02Z</updated>
	    <published>2009-11-24T19:53:0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조경묘는 전주이씨의 시조 이한공과 시조비의 위관을 봉안한곳이다. 1771년(영조47)에 창건된 것인데 현재 경기전 구내 북편에 위치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하는 바로는 전주이씨는 전주에서 발생하였다 하나 당시까지만 해도 시조묘가 없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한공은 벼슬이 신라사공으로 전주동교의 발산아래 자만동에 거주하였다 하는데 이태조의 21세조에 해당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태조의 4대조 이안사가 강원도 삼척을 거쳐 함경도 덕원땅에 옮겨갈때까지 19대를 전주에 世居한셈이 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시조비는 김씨로서 신라의 10세손 군율 김은의의 딸이라 전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문헌비고&gt;에는 조경묘에 관하여 비교적 자세히 그 창건 경위를 밝히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는 이득리등 7도 유생의 상소에 의해서 세워진 것인데 당시 조정에서는 의론이 분분하여 귀결을 짓지 못하자 영조는 &quot;이나라 사대부가 시조를 존경하여 그 예를 갖추는 것은 사람된 도리인데 항차 한나라의 왕조의 시조에 있어서는 더 말할 나위가 없을것이다. 고구려 신라를 돌이켜 보더라도 모두 시조묘가 있는것은 고유한 인습이 아니겠는가.&quot; 하여 경기전의 관례에 따라 제례를 거행토록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7도 유생은 상소문에서 &lt;&quot;만물의 근본은 하늘에 있고 사람의 근본은 조상에 있다. 하여 고대 중국의 나라들이 각기 자기 왕실의 시조를 제사해온 예를 들었다. 그러나 이조의 시조묘만이 아직도 창업을 보지 못한것은 커다란 결례가 아닐수 없다. 비록 사공공의 연대가 오래되고 그 자리가 뚜렷치 않아 시조에 대한 제례를 거행키 어렵다 할망정 이제라도 묘를 건립하여 제사의 법도를 갖추는것이 도리가 아니겠는가&quot;&gt;하여 시조묘의 창건을 바란다는 뜻이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상소문을 접한 영조는 이는 이씨왕가의 후예로서 근거가 확실하고 내용이 뚜렷하다 하여 종신과 원임대신을 입시케하여 왕손까지 한자리에 불러 대책을 강구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영조 47년 10월 5일의 일이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틀 후에는 예당에서 대신을 불러모으고 시조묘의 명칭 위판 제물 묘관에 대한 의논을 한끝에, 묘호는 조경뵤라하고 위판은&lt;시조고신라 사공신위, 시조비경주김씨신위&gt;라 쓰기로&amp;nbsp; 정하고 제믈 뵤관은 경기전의 예에 따라 행하기로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16일에는 영조가 친히 자정전에 나아가 먼저 세손에 명하여 위판의 글을 쓰게하여 자정전에 제사하였고, 19일에는 친필로 위판을 써서 전주로 내려 보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날 영조는 위판을 받들고 떠나는 행차를 배행하여 한강변인 서빙고 나루터까지 나아가 전송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다음달 12일 영조는 &quot;조경묘의 창건은 천여년만의 성사&quot;라고 스스로 감격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조경묘는 1854년(철종5)10월에는 경기전과 함께 보수를 가하였고 1894년(고종31년) 5월 갑오 동학혁명군의 전주부성 점령에 즈음해서는 경기전의 태조 영정과 함께 위봉사의 행궁에 피난시킨 일이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동학군의 전주점령 소식을 들은 고종은 무엇보다도 전주가 이씨 왕조의 발상지요 전 묘(경기전과 조경묘)를 받드는 곳임에 비추어 그 행방 안부를 몰라 전전긍긍하고, 부성을 버리고 도망친 전라감사 김문헌의 무책임을 힐책하여 그의 체포를 명령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후 무사히 위봉산성에 옮겨 안치하였다는 보고를 받자 안도하여 도백에 명하여 위안제를 거행케 하였다. 동학군이 전주성을 철수하자 7월17일 전주로 다시 돌아와 안치 되었다. 이후 지방 유형문화제 제16호로 지정되어 있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경기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경기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조경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조경묘&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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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방기념물 경기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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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꿈꾸는 사랑</name>
	    </author>
	    <updated>2009-11-23T20:34:17Z</updated>
	    <published>2009-11-23T20:34:1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경기전은 조선왕조의 창업주인 이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곳이다. 현 경기전은 옛 전주부성안 동남쪽에 자리하여 넓은 면적을 점유하고 있었으나, 일제시대에 그 서쪽 대지 절반 이상을 학교부지로 쪼개어 부속건물 일체를 허물어 버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주에 태조의 영정을 봉안한 것은 1410년(태종10년)으로서 당시에는 경주 편양과 함께 어용전이라 부르다가 태종 12년 11월부터는 진전이라 개칭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로부터 33년이 지난 1442년(세종24년)에는 당시 의정부의 상계에 따라 고유한 명칭을 각각 붙이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곧 경주는 &lt;집경전&gt;, 평양은&lt;영숭전&gt; 전주는&lt;경기전&gt;이라 붙이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태종조의 어용 봉안에 관해서는 「태종실록」에 그 경위가 보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즉 9년 2월 완산부에서 태조 어용을 봉안할 것을 청해오므로, 경상도 관찰사 이원으로 하여금 계림부에 봉안되었던 영정을 한성으로 호송시켜 모사케하고, 다음 해인 10년 9월 28일에는 평성군 조견으로 하여금 완산부에 봉안케 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서거정의 &lt;전주학기&gt;에는 신유에 봉안하였다. 신유년은 세종 23년으로서 경기전으로 이름을 바꾸기 1년전의 일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따라서 서거정의 기록은 경기전을 지금자리로 세로지어 봉안 했던 것으로 볼수 있다. &lt;동국여지승람&gt;의 전주 향교에 관한 서거정의 기록을 보면 같은해에 부성안 남쪽에 경기전이 들어서게 되어 그 옆에 있던 향교에서 들려오는 유생들의 글읽는 소리가 시끄럽다는 이유로 향교를 화산 기슭으로 옮겨갔다. 따라서 세종 23년 이전의 어용전 또는 진전이라 불렸던 시절에는 다른 장소에 영정을 봉안했던것이 확실하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선조 국난 당시 찬봉 오희길은 테인의 선비 손홀록등이 전주 사고의 전적을 피난 시키는 행렬을 따라 영정을 받들고, 정읍 내장산을 거쳐 아신으로 피난 시켰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로써 다른곳의 영정은 모두 병화에 불타 버렸으나 전주 경기전의 영정만이 화를 모면하여 보전되었던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영정은 강화를 거쳐 선조 30년에는 평안도의 영변 묘향산의 보현사 별전에 안치되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약 22년이 지난 1614년(광해군6년)11월 감사 이경전에 의하여 경기전이 중건되자 조정에서는 승지 이호의, 예조참의 김개등을 파견하여 묘향산으로부터 전주까지 호송하여 봉안케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1636년(인조14년)에는 병자호란을 피하여 무주적산산성에 들어갔다가 돌아온 일이 있다. 1675년(숙종 원년)에는 이러한 쓰라린 경험을 거울삼아 위봉산성을 쌓고 그곳에 행궁을 두어 유사시에 피난을 꾀하였다. 다음해에는 전주사고가 있던 경기전 동편에 별전을 지어 본전을 보수 할때의 임시 봉안소로 정하였으나, 10년후에 이 건물이 화재로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1767년(영조43년)의 이른바 &lt;丁亥大火&gt;에는 시가지의 1천여호를 불태운 불길이 이곳까지 미치자 향교 명륜당에 긴급 피난 시킨 일도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렇듯 전주 경기전의 영정은 선조국란에 보전된 단 한폭이었으므로 1688년(숙종 14년)에는 다시 서울로 옮겨 묘사하여 봉안케하고 이름을 영희전이라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모사가 끝난 경기전의 태조영정은 다시 이곳에 돌아 오게 되었는데, 만약에 그진본이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우리나라 회화사를 장식하는 국보급 문화재가 되었을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러나 1872년(고종9년)에 연조가 오래되어 너무 낡았다는 이유로 새로이 모사케하여 동년 9월20일 바꾸어 봉안케 하고, 여러차례의 국란을 격으면서도 400여년을 보전되여 왔던 유일한 영정을 세초매안洗초埋安(불살라 묻어버림)하여 영영 자취를 찾을 길 없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경기전은 지금 지방 유형문화재 1호로 지정되어 있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영정&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영정&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경기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경기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태조영정&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태조영정&lt;/a&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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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주이씨 고림군파 종중문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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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꿈꾸는 사랑</name>
	    </author>
	    <updated>2009-11-23T20:01:02Z</updated>
	    <published>2009-11-23T20:01:0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주이씨 고림군파高林君派 종중문서宗中文書는 보물 718호로서 1502년 6월 4일에 작성된 허여문기許與文記, 1528년 9월 2일의 동복화회문기同復和會文記, 1539년의 동복화회입의同復和會立議, 1593년 12월 6일의 동복화회성문同復和會成文 등 네가지로서 이문서의 글씨는 특언(청백리)의 친필로써 왕손王孫일파의 가족제도와 유산관리제도등을 알 수 있으며 400년전의 이두문吏讀文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許與文記&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조선조 연산군 8년(1502) 이고림(뒤에 군으로 봉직)이 아들 칠산이 36세에 종친 별과시宗親別科試에서 2등으로 합격하자 가문의 영예라 여기고, 또 앞으로의 면학을 격려하는 뜻에서 상을 주었으나, 우선 노비의 자격으로 시상한것이 특징이며, 이것이 바로 당시 유산분급遺産分給의 일환책이였다는 데서 자료의 중요성이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동북화회문기&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1537년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고림군의 장남인 칠산군의 주재하에 동복 9남매가 자리를 함께하여 꾸며진 유산 분제록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동복화회입의&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중종34년(1539) 칠산군의 장례일로부터 만 2년이 경과한 1539년 1월 24일 유자녀와 유족들이 회합한 자리에서 작성된 것으로서, 여기에는 조선조 초기에 있어서 왕손의 노비관리 제도와 분배의 원칙을 알 수 있으며 출가한 딸과 양자된 아들까지도 편균분배한점은 그 당시의 부모유산 상속의 원칙임을 알수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동복화회성문&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선조26년(1593년)에 고림군의 3대손 수언의 동복 6남매가 회합하여 작성된 문서로서 1585년 모친 탈복시에 내외 노비와 형제간에게 전답을 평균 분배 했으나, 선조25년(1592) 임란시에 분급문서가 소실되어, 이미 분급된 口數에 따라 다시 성문시킨것으로 당시의 가족제도와 유산 관리제도 등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문화&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문화&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이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이씨&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유적&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유적&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이씨 고림군파 종중문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이씨 고림군파 종중문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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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전주객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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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꿈꾸는 사랑</name>
	    </author>
	    <updated>2009-11-11T21:07:13Z</updated>
	    <published>2009-11-11T21:07:1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주객사全州客舍는 현재 전주시내 고사동 동서관통도로 북편에 자리하는데 남쪽을 향하여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원래는 전주부성 안에서 가장 적지인 감영(구 도청구내-현재 향교옆에 복원중)의 북쪽에 있는 광대한 대지에 주관과 그좌우에, 양익현을 가진 것이었다.그러나 1914년 북문(역전오거리)에서 남문에 이르는 관통도로의 확장공사로 좌측의 동익이 철거되고 현재는 주관과 서익만 남아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해방이 되자 경찰학교로 쓰이던 서쪽 광장은 서익건물 바짝밑까지 사유지로 매각되어 고층건물이 서있다. 북쪽의 넓은 곹터도 주관 처마밑까지 개인에게 매각되어 체신청 건물이 세워지자, 추녀 끝을 잘라내야 하는 무지의 세월 속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지금은 1975년에 보물 583호로 지정되고 보수 단장 되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현재는 주관과 서익헌만 남아있고 주관 정면에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란 현판이 걸려있다. 이 &lt;풍패&gt;란 한고조의 고향지명으로&amp;nbsp; 그 후 왕조의 본향을 이렇게 부른다. 객사에는 이 밖에도 적지않은 건물들이 있었고 풍아한 조원 시설도 있었으나 지금은 자취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전주박물관 소장 「전주부성도」를 보면 후원에 조산造山이 있고, 정면에는 내삼문 중삼문 외삼문이 겹쳐 있고, 내삼문을 이어 담장을 두르고, 내삼문 동쪽에는 맹청盲廳 서쪽에는 무신사武臣祠가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담장을 따라 서측에는 책판고冊板庫등이 있었다. 담장 밖 서측에는 군기고軍器庫, 화약고火藥庫등이 있고 중삼문 서측에는 아영청亞營廳이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후원에는 조산을 둘러 조경을 하고 중앙에 진남루鎭南樓, 그 동서에 매월당梅月堂 청연당淸연堂등이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객사는 객관客館이라고도 하는데 여러 고을마다 거의 관 건물로 설치하였으며, 그 규모는 대략 중앙에 주건물을 두고 그 좌우에 동서 양익현을 달았다. 대개 양익의 지붕은 주관보다 낮았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객관의 용도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광산현(광주) 객관의 성형 중창기에 잘 나타나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quot;객관은 고을에서 가장 으뜸가는 큰 건물로서 여러 빈객을 접대하고 숙박시키는&amp;nbsp; 곳이며, 동익헌은 귀빈의 숙박소이며 관찰사의 재판장으로도 사용되었다&quot;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그리고 주관 북벽 중앙벽감璧龕에는 &lt;궐패闕牌&gt;를 걸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는 궐자를 크게 써붙인 액자로써 광무년 이전에는 &lt;전패殿牌&gt;라 하였는데, 이를 군왕에 대하여 요배遙拜하는 전당으로 삼아 관찰사가 삭朔 망望(초하루와 보름)이나 국가의 대삿날에는 분향지례를 거행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또 관찰사 부윤 판관등 지방 고관들도 도임할 때에는 먼저 이곳에 들러 배례를 올렸고, 또한 조명을 띄고 내려오는 칙사도 이곳에 머물러 교지를 전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동국여지승람에는 이경동이 지은 객관서헌기가 있는데, 이에 따르면 관찰사 조근이 전주사고를 창건하고 남은 비용으로 동익헌보다 낮은 서익헌을 새로 개건하여 동서익헌을 고르게 갖추었다. 1471년의 일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객사 본관은 여기에서는 대청이라 하였는데 현재의 규모를 보면 동서 17.5m, 남북 12.6m 너비로서 정면 3칸 측면2칸이나 측면의 기둥사이폭은 3.3m인데 비하여 정면의 기둥칸을 중앙이 6.3m, 좌우가 5.6m씩으로 훨씬 넓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본관 대청은&amp;nbsp; 동서 25.0m, 남북 16.6m의 장방형 축대 위에 세워졌는데 양익헌 길이 21.5m, 폭 13.3m 너비의 축대위에 정면 5칸, 측면3칸의 건물을 대청에 접하여 세웠다. 정면 기둥은 대청 귓기둥으로 부터 2.1m 떨어져 4m씩 간격을 두고 세웠고, 측면은 중앙이 3.7m 전후가 2.8m씩의 간격을 띄어 세웠는데, 건물 너비는 정면 길이 19.0m 측면 9.3m이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객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객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객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객사&lt;/a&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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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보물-풍남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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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꿈꾸는 사랑</name>
	    </author>
	    <updated>2009-11-09T20:36:41Z</updated>
	    <published>2009-11-09T20:36:4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풍남문豊南門은 전주부성의 남문이다. 이는 한성부의 숭례문(남대문)에 해당한다. 따라서 규모는 작으나 남대문의 짜임새를 그대로 본뜬것으로 보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조 후기 문루건축으로서는 잘 보존되어 보물 308호로 지정 보호 되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도성이나 읍성, 산성을 막론하고 성문이 있고 그위에 문루를 세우는것이 관례이다. 전주 부성도 성곽의 창축과 함께 문루를 세웠을 것이나 기록상으로 확실한 것은 1734년(영조10년)이다. 이때 조현명 관찰사는 부성을 크게 개축하고 4문도 다시 쌓았는데, 이 때 남문에는 3층의 문루를 세워 이를 면견루라 하였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완산지에는 그의 「명견루기」가 실려 있는데, 그는 이해 2월부터 자재를 운반하여 6월까지 성곽을 완성한 다음 7~8월에 걸쳐 &lt;홍예문虹霓門&gt;을 쌓고 그 위에 문루를 세웠다고 되어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lt;홍예문&gt;이란 말은 무지개문이란 뜻으로 석축으로 된 문의 윗쪽을 아취형으로 쌓은것이다. 전주부성의 경우 완산지에 따르면 남문은 안팍을 모두 홍예문으로 하였고 서문은 바깥쪽만 홍예문이었다고 했는데, 현 전주 박물관 소장 「전주부성도」를 보면 북문도 홍예로 되어 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 때 문루는 남문 명견루가 3층이었고 기타 3문은 모두 2층이었으니 그 모습이 얼마나 장관을 이루었을 것인가 짐작이 갈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1767년(영조 4년) 3월 전주에 큰 불이 나서 민가 천 수백호를 태우고 남문과 서문의 문루도 모두 불타 버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 해 9월 관찰사 홍락인은 다시 문루를복구 하였는데 3층이던 명견루는 2층으로 올리고 2층이던 서문은 단층으로 바꾸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리하여 남문은 풍남문, 서문은 패서문沛西門이라 이름까지 고치게 되었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는 왕실의 고향을 풍패(豊沛-원래는 한고조의 고향지명)라 히는것을, 전주가 전주이씨 왕조의 발생지라는 의미에서 각각 머리 글자로 사용하였다는 사연이 홍락인 관찰사의 &lt;상량문&gt;에 보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물론 이때의 재건은 문루로서 현 풍남문의 건물은 그 당시의 수법과 규모를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석문은 영조 10년 조현명 관찰사가 쌓은 것으로, 1979년도 풍남문 보수공사 당시 풍남문 바깥지면을 파헤치다가 거기에 옹성甕城의 흔적이 노출 되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옹성이란것은 성문 바깥쪽에 성문을 감싼 출성出城으로서, 성문의 직접 공격을 막고 또한 성문에 들어서려는 적을 뒷쪽이나 옆쪽에서 쏠 수 있게 하는 장치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완산지」와「문헌비고」에 &quot;옹성은 한곳이 있다&quot;하였는데 이는 북문을 말한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영조 10년에 무지개석문을 쌓을 당시까지는 남문에도 옹성이 이었음을 알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1978년 문루 보수 과정에서 옹성의 기단이 풍남문 홍예문으로부터 12m지점에서 발굴됨에 따라 이 기단대로 연장 97.5m의 여담쌓기와 치석治石 6,856개로서 옹성 1,933㎡를 축조하여 복원했다. 결국 이는 영조 10년 이전의 상태임을 알 수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풍남문의 누대를 겸한 석문은 성벽을 따라 안쪽으로 내밀게 구형으로 쌓고, 이 석축 중앙에 통로를 뚫고 통로 내외면에 무지개꼴 석물을 쌓아 윗면에 문루를 설치한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이 누대의 너비는 동서 23.6m, 남북 10.6m 높이 17.2m에 이른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문루 서편에는 종각이 있고 좌편에는 포루가 있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문루는 2층의 팔각지붕인데, 아랫층은 정면 측면이 모두 3칸이고 윗층은 정면은 3칸이나 측면은 1칸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아랫층 내부에 2열로 4본씩 세운 고주高柱가 그대로 위로 연장되어 윗층의 갓기둥이 되는데, 이러한 문루 건축의 짜임 수법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금산사 3층 미륵전에서 4본의 심기둥이 연장되어 3층의 귓 기둥이 되는것과 상통하는 것이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문루의 규모는 아랫층이 정면 13.0m, 측면 7.64m, 윗층은 정면 9.1m, 측면 4.36m이다. 아랫층은 위에서 말한 윗층까지 뻗은 고주의 둘레에 갓기둥을 세워 그 면적을 넓힌 것이다. &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공포拱包는 주심포(柱心包-기둥위에만 공포를 짜올린것) 양식이나 다포多包집 계통의 수법을 따르고 있다. &lt;쇠서(牛舌)&gt;도 역시 다포집 계통에서 보는 형식이다. 그러나 행공行工 첨차나 그에 병행되는 또하나의 주심포집에서 사용되는 첨차들처럼 아랫쪽 윤곽이 복잡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공포와 공포사이, 곧 기둥사이 중간의 창방 위에는 꽃받침(花盤)을 끼웠는데, 이처럼 장식적인 것이 두드러지는 것은 조선조 후기의 건축일 수록 더욱 심해진다.&lt;/P&gt;
&lt;P style=&quot;TEXT-ALIGN: justify&quot;&gt;어찌 됐든 풍남문은 이조후기의 문루건축으로서는 대표적인것이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전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PwuL&amp;amp;tagName=풍남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풍남문&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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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길을 걷는 이유 - 전성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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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꿈꾸는 사랑</name>
	    </author>
	    <updated>2009-11-07T19:31:59Z</updated>
	    <published>2009-11-07T19:31:5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H2&gt;전성환(전북도 홍보기획과장)&lt;/H2&gt;
&lt;H4&gt;작성 : 2009-11-02 오후 6:08:47 / 수정 : &lt;/H4&gt;
&lt;H5&gt;전북일보(desk@jjan.kr)&lt;/H5&gt;
&lt;P&gt;나는 자동차가 없다. 거창하게 환경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웬만한 거리는 걸어서 다니다보니 굳이 차를 살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의 하루는 천변을 걸으면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호사스러운 출근길을 가진 사람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아름다운 길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자동차 운전대를 잡는 사람과, 강물결과 바람결을 느끼며 시작하는 사람의 하루는 결코 같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lt;/P&gt;
&lt;P&gt;걷는다는 아주 단순한 행동 속에는 취미를 넘어 치유의 기능까지도 들어있다. 고깃비늘처럼 윤나던 갈대꽃이 어느 순간 깃털처럼 활짝 펴서 바람에 흩날린다. 철철이 피어나는 꽃과 풀을 보는 재미, 물이 줄거나 불어나는 것을 보는 재미, 바람결에 실려 오는 계절의 냄새를 맡는 재미…… 이런 재미를 어찌 자동차 운전하는 것에 비길 수 있으랴. 자동차로 갈라치면 10분도 안 되는 거리지만, 시나브로 걷다 보면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이 아침시간 때문에 나의 하루에 윤기가 생긴다. 하여 나는 자연스럽게 '걷기 예찬론자'가 되고 말았다.&lt;/P&gt;
&lt;P&gt;그런데 요즘 반가운 소식이 들린다. 전라북도 곳곳에 '걷는 길'이 만들어진다고 한다. 지난 10월 17일에는 변산 마실길이 개통됐다. 이미 오래 전부터 '걷기'에 선견지명이 있었던 신정일 선생을 필두로 '우리땅걷기모임' 회원들이 제안하고 다듬어놓은 길이다. 바다를 따라 걷는 변산 마실길은 제주도 올레길 못지않은 빼어난 길이라고 한다. 아직 걸어보진 못했지만 벌써부터 걷고 싶어 다리가 근질거린다.&lt;/P&gt;
&lt;P&gt;지난 31일에는 전라북도 4대 종교를 아우르는 '아름다운 순례길'이 열렸다. 순례길은 전주, 완주, 익산 지역에 있는 4대 종교의 성지를 연결하는 길이다. 종교순례길이라고 해서 딱딱하고 위엄을 요구하는 길이 아니다. 중간 중간에 가람 이병기 생가, 강암 송성용 기념관, 만경강 갈대밭, 송광사 돌담길, 고산천 오솔길 등이 포함돼 있어 지역의 문화와 역사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길이다. 4대 종교를 아우를 수 있는 곳은 전라북도가 유일하다.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잘 살린다면 산티아고 순례길 부럽지 않은 독보적인 순례길이 만들어질 것이다.&lt;/P&gt;
&lt;P&gt;전라북도는 산업화에 뒤처져있던 탓에 옛 풍경을 고스란히 간직한 아름다운 길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다. 군산에는 '구불길'이 있고, 진안에는 '마실길'이 있고, 고창에는 '질마재길'이 있다. 전라북도는 이 모든 길을 이어서 '예향천리 둘레길'을 조성할 계획이다.&lt;/P&gt;
&lt;P&gt;전라북도만이 아니다. 지금 세계는 걷기 열풍이 불고 있다. 자동화의 편리함, 유비쿼터스의 첨단기술을 선망하던 사람들이 이제 비로소 걷기의 소중함을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 순간의 깨달음만으로는 부족하다. 직접 길을 걸어보지 않는다면 그 길은 결코 자신의 길이 되지 않는다. '길 위의 풍경'의 저자 김병용의 말처럼 &quot;몸을 부리는 것만큼 자신의 상태 앞에 정직한 일도 없다. 마음이 먼저 달려갈 수도 있지만, 몸이 가지 않는 길은 존재하더라도 아직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길&quot;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단풍이 지고 바람이 한결 차가워졌다. 길을 떠나기 좋은 때이다. 길 떠나는 이에게는 세 가지 길잡이가 있다고 한다. 풍문, 충동, 길 그 자체.&lt;/P&gt;
&lt;P&gt;바람이 전하는 말을 듣기 위해 길을 떠나는 이도 있고, 문득 떠나고 싶은 아름다운 충동에 못 이겨 길을 떠나는 이도 있고, 그저 길이 좋아서 탐구하듯 길을 떠나는 이도 있다. 이 가을, 당신은 무엇 때문에 길을 떠나겠는가?&lt;/P&gt;
&lt;P&gt;/전성환(전북도 홍보기획과장)&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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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지역방송이 사라진다면 - 최성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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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꿈꾸는 사랑</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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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7T19:30:51Z</updated>
	    <published>2009-11-07T19:30:5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H1&gt;최성은(전주 시민미디어센터 사무국장)&lt;/H1&gt;
&lt;H4&gt;작성 : 2009-11-03 오후 6:24:04 / 수정 : &lt;/H4&gt;
&lt;H5&gt;전북일보(desk@jjan.kr)&lt;/H5&gt;
&lt;P&gt;최근 미국에서는 국내 흐름과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미디어관련 법안이 있다. 일명 지역공동체라디오 법안(The Local Community Radio Act)이다. 이 법의 요지는 기존의 상업적 라디오 주파수와 인접한 최소거리 주파수 규정을 삭제해 많은 지역에서 공동체라디오를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 법안은 지난 달 미 하원 소위원회를 만장일치로 통과했고 전체회의 통과를 목전에 두고 있다.&lt;/P&gt;
&lt;P&gt;그런데 법안도 법안이지만 이 법안의 배경이 되는 내용에는 최근 국내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디어 관련 논의에 참고할 만한 내용이 담겨져 있다. 바로 미디어 소유권 완화로 인한 미디어 집중에 대한 폐해다.&lt;/P&gt;
&lt;P&gt;미국의 경우 1996년 통신법통과로 미디어 소유 규제가 완화되었고, 이로 인해 거대 미디어 그룹들의 자유로운 인수합병이 가능해졌다. 이후 미국에서는 많은 지역방송들이 거대 주류미디어에 합병되었다. 이러한 통합의 결과 여론의 독과점이 심해졌다. 또 거대 미디어 그룹들은 재정을 줄이기 위해 지역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수 백개의 방송국을 위해 생산된 동일한 프로그램을 방송해왔다. 이로 인해 지역 중심 예술, 뉴스, 문화 등 다양한 지역프로그램이 줄어들었다.&lt;/P&gt;
&lt;P&gt;그리고 이로 인한 폐해는 고스란히 지역민들에게 돌아왔다. 몇 가지 사례를 보자면, 지난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은 유력 정당으로서는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 후보를 선택했지만, 그의 연설을 방송한 것은 CNN등 케이블 방송 뿐 이었다. 지상파 네트워크 방송사들의 경우 오로지 한 방송국만이 14분동안 정규방송을 중단했고 나머지 주요 네트워크 방송사들은 그의 연설을 듣는 대신 네트워크 재방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만을 방영했다. 이처럼 소수 몇몇 언론의 독과점은 여론의 다양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왔다.&lt;/P&gt;
&lt;P&gt;두 번째 사례는 지역민의 생존과 직결된 문제로 나타났다. 2005년 미국에서는 카트리나로 많은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 이 기간 동안 주류 미디어들은 지역 주민들의 생존을 외면했다. 피해지역의 주민들은 생존에 직결된 정보를 얻고자 했으나, 지역 네트워크 방송사들은 음악방송을 보내 등 침묵으로 일관했다. 반면에 지역의 작은 공동체방송국만이 카트리나 기간동안 방송을 유지했고, 대피소의 수천명의 난민들에게 생존에 필요한 음식과 식수에 대한 정보를 제공했다. 그리고 실종자의 행방에 대한 소식을 다루는 등 지역민의 생존을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lt;/P&gt;
&lt;P&gt;위 두 사례는 미디어 소유 집중으로 인해 소수 미디어의 네트워크국으로 전락하고 사실상 편성권을 갖지 못하는 지역방송국들이 지역적 가치보다는 얼마나 정치적, 상업적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있는지, 또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지역민들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사례다.&lt;/P&gt;
&lt;P&gt;이러한 현실은 국내에서도 조만간 일어날 지도 모른다. 며칠전 있었던 헌재의 이상한 논리의 미디어법 유효 판결로 미디어 소유 집중 현상이 가속화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미디어 소유 집중으로 인한 여론 독과점 현상은 이념적 가치를 뛰어넘어 지역 언론 생존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해 지역의 목소리가 사라진다면 그 피해는 우리들 모두에게 돌아올 것이다.&lt;/P&gt;
&lt;P&gt;/최성은(전주 시민미디어센터 사무국장)&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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