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ml version="1.0" encoding="UTF-8"?>
<?xml-stylesheet href="http://pimg.daum-img.net/whsnake/css/atom.css?ver=1.0" type="text/css"?>
<feed xmlns="http://www.w3.org/2005/Atom" version="1.0" >
  <title>매한불매향</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
  <link rel="self" type="application/atom+xml" href="http://blog.daum.net/xml/atom/kkk3ys"/>
  <rights>외감</rights>
  <author>
    <name>외감</name>
    <uri>http://blog.daum.net/kkk3ys</uri>
  </author>
  <generator uri="http://blog.daum.net" version="1.0">Daum blog (blogmaster@daum.net)</generator>
  <id>tag:blog.daum.net,2009:kkk3ys</id>
  <updated>2009-08-26T09:22:23Z</updated>

  		<entry>
	    <title>[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9) 고려풍 · 몽골풍</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33"/>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33</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26T09:22:23Z</updated>
	    <published>2009-08-26T09:22:2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TRONG&gt;ㆍ고려의 바람, &lt;/STRONG&gt;&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8%F9%B0%F1&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TRONG&gt;몽골&lt;/STRONG&gt;&lt;/SPAN&gt;&lt;/FONT&gt;&lt;/A&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에 닿고 몽골의 바람, 고려에 부니 &lt;/SPAN&gt;&lt;BR&gt;&lt;BR&gt;&lt;/STRONG&gt;
&lt;TABLE width=369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quot; style=&quot;MARGIN: 5px; 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40/20090825/2009082517481381040_175613_0.jpg&quot; vspace=1&gt;&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 color=#616588&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 알타이의 서북단에 자리한 고원 도시 바얀올기에서 선참으로 찾아간 곳은 바얀올기 박물관이다. 지난해 개관 60돌을 맞았다고 한다. 지역 박물관치고는 내용이 꽤 알차다. 3층짜리 건물의 1층은 선사시대부터 남겨 놓은 역사유물과 각종 동식물의 박제품이 전시되어 있다. 2층은 이곳 사람들의 처절한 반청(反淸)독립 투쟁사를 한눈에 알아 볼 수 있도록 생생한 유품들과 사진으로 꾸며졌다. 3층은 생활관인데 바위 그림과 적석목곽분, 돌사람과 오보, 쟁기와 맷돌, 곰방대와 안장, 먹을거리 등에 이르기까지 우리네 것과 유사한 용품들이 눈에 띄어 우리의 특별한 관심을 끌었다. &lt;/SPAN&gt;&lt;BR&gt;&lt;BR&gt;
&lt;TABLE width=350 align=righ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quot; style=&quot;MARGIN: 5px; 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40/20090825/2009082517481381040_175613_1.jpg&quot; vspace=1&gt;&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 color=#616588&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낫. 얼개미 등 각종 농기구(바얀올기 발물관 소장)&lt;/SPAN&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러한 유사품들은 여기 말고도 홉드 향토박물관이나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F%EF%B6%F5%B9%D9%C5%E4%B8%A3&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울란바토르&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민족사박물관에서도 적잖게 발견된다. 사실 몽골을 여행하다 보면 체형이나 인성에서부터 세세한 생활 습속이나 용기에 이르기까지 우리와 닮은꼴이 많아서 의아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여행자들은 물론 연구자들마저도 이러한 유사성에 관해 종종 대서특필한다. 심지어 정치판에서는 이러한 유사성을 앞세워 두 나라 간의 ‘국가연합’ 같은 엉뚱한 호기를 부리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역사성은 무시한 채 유사성만 강조한 나머지 우리 문화의 원형(뿌리)을 몽골에서 찾는다든가, 몽골에 대한 ‘문화적 향수’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유사성을 과장하는 경향은 경계해야 한다는 이론(異論)도 일고 있어 주목된다. 그러니 지금 시점에서 이 문제에 관해 한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문제에 관해선 적어도 두 가지 맥락에서 접근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역사적 맥락이고, 다른 하나는 현실적 맥락이다. 역사적 맥락은 다시 두 차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하나는 고대의 역사적 및 문화적 공통 뿌리(원류)이고, 다른 하나는 중세의 고려-원 시대에 일어났던 이른바 ‘고려풍’과 ‘몽골풍’ 및 그 여파이다. &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두 나라는 혈통적·언어적으로 동군·동족&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인과 한국인이 역사적 및 문화적 공통 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다같이 인류의 3대 인종군 가운데 몽골로이드, 그것도 친연성이 한 층 더 강한 북방 몽골로이드에 속한다. 그래서 황갈색 피부, 검고 곧은 모발, 적은 체모, 중·단두형 머리, 작은 키, 평평하고 광대뼈가 두드러진 얼굴, 검은 눈, 미간의 낫 모양 주름(몽골주름), 엉덩이의 몽골반점 등 형질학적 특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인종군과 더불어 3대 어족(語族) 가운데서 한국어와 몽골어는 다같이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이를테면 두 나라는 혈통적으로나 언어적으로 동군(同群)·동족(同族)으로서 그 시원은 선사시대의 70만~80만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생인류로서 현재를 사는 두 인종의 직접적 조상은 역사시대의 동호(東胡)나 흉노(匈奴)로 헤아려 진다. 그런데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단군 국조로부터 치면 4000여년이 되지만, 몽골족은 1200여년밖에 안 된다. 오늘날의 몽골족은 기원후 8세기쯤 헤이룽강(黑龍江) 상류인 에르군네 강 유역에 살던 몽올실위(蒙兀室韋)란 이름으로 세상에 첫선을 보인다. 그러다가 서천해 11~12세기에 몽골의 오논 강 일대까지 진출해 주변의 여러 부족들을 병합한 뒤 칭기즈칸에 의해 1206년 몽골제국이 세워진다. 그 과정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일족으로서 변신하는 과정이며, 우리 한민족과 부단하게 교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공녀 징집으로 원나라에 고려식 옷·음식 유행&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BR&gt;&lt;BR&gt;
&lt;TABLE width=350 align=righ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quot; style=&quot;MARGIN: 5px; 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40/20090825/2009082517481381040_175613_2.jpg&quot; vspace=1&gt;&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 color=#616588&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 여인들의 외출 용 모자 ‘고고’&lt;/SPAN&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두 나라 간의 유사성은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더불어 반드시 현실적 맥락에서도 짚어봐야 한다. 현실적 맥락이란 이렇게 두 나라 간에는 역사적으로 유사성이 형성될 수 있었지만 오랜 역사 과정에서 변화를 거듭함으로써 현실적으론 유사성(공통성)과 함께 차이점(개별성)도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문명(문화) 간에 일어나는 유형(類型, type)과 양식(樣式,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style&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style&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상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다. 유형은 문명 간의 공통되는 형태이고, 양식은 드러나는 표현 방식이다. 비유하면 숲과 나무와의 관계이다. 유형만 보고 양식을 무시한다든가, 반면에 양식만 보고 유형을 무시해서도 안 된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과 현실적 맥락을 이어준 징검다리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고려-원 시대에 일어났던 이른바 ‘고려풍’과 ‘몽골풍’이다. 고려는 후반 30년간(1231~1259년) 몽골의 일곱 차례 내침을 막아내고 근 100년간(1259~1351년)의 간섭을 슬기롭게 타개함으로써 당시 몽골 중심의 천하에서 자주권을 지켜낸 유일한 나라이다. 그리고 원종은 태자의 신분으로 원 세조 쿠빌라이를 찾아가 원이 고려의 풍속을 고치도록 강요하지 않겠다는 이른바 ‘불개토풍’(不改土風)이라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렇지만 막강한 원의 끈질긴 간섭과 강요,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불가피한 문화적 접변(接變)으로 인해 이러한 ‘불개토풍’ 약속은 사실상 유명무실되고 말았다. &lt;/SPAN&gt;&lt;BR&gt;&lt;BR&gt;
&lt;TABLE width=350 align=righ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quot; style=&quot;MARGIN: 5px; 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40/20090825/2009082517481381040_175613_3.jpg&quot; vspace=1&gt;&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 color=#616588&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카자흐인이 만든 과자에 찍힌 ‘고려풍’ 무늬&lt;/SPAN&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원은 고려로부터 인삼을 비롯한 특수약재와 청자. 비단. 담비가죽. 사냥매 등 진귀품을 조공의 이름으로 요구하고 해마다 양곡을 징발해 갔다. 그런가 하면 고려의 세자들을 인질로 잡아놓고 세뇌교육을 시킬 뿐만 아니라 원 세조의 딸을 비롯해 황실의 공주들을 고려왕의 왕후(모두 7명)로 삼게 하며 왕들까지도 몽골식 이름을 강요했다. 관직 이름에서도 부대를 ‘애마’(愛馬, 아이막), 역체관을 ‘탈탈화손’(脫脫禾孫, 톡토하순), 상관을 ‘나연’(那演, 나잔)이라고 하는 따위의 몽골식 직명이 난무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양국 간의 인적 교류에서 특기할 것은 고려 여자를 진공하는 이른바 ‘공녀’(貢女)이다. 쿠빌라이는 충렬왕에게 보내는 조서에서 고려와 원은 이제 한집안이 되었으니 서로 통혼해야 한다고 강변하면서 양국 간의 통혼과 공녀를 종용했다. 간섭기 80년 동안 ‘처녀진공사신’이 50여차례나 고려에 와서 해마다 약 150명의 여자들을 징집해 갔다. 그밖에 수시로 뽑아간 여자는 부지기수다. 원에 끌려간 공녀는 대개 황제나 황후, 황족의 궁인이나 시녀가 되었다. 원 말엽에 궁중의 급사나 시녀는 그 태반이 고려 여성으로 채워졌으며, 지방관까지도 고려 여성을 처첩으로 거느렸다. 그러나 모든 공녀가 이러한 비운에 빠진 것만은 아니었다. 개중에는 순제의 정비가 된 기황후(奇皇后)처럼 일세를 풍미한 여걸도 있었다. 그래서 원나라 천지에 고려식 복식과 음식, 기물이 유행하게 되었는데, 이를 두고 ‘고려양’(高麗樣), 즉 ‘고려풍’이라고 일컬었다. 이때부터 어갱(魚羹, 생선국)과 계육(鷄肉, 닭고기), 송자(松子, 잣), 송골병(松骨餠),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CE%BB%EF%C1%D6&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삼주&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같은 고려 음식이 원에 유행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몽골의 유제품이나 과자에 찍혀 있는 문양은 이때에 받아드린 것이라고 한다. &lt;/SPAN&gt;&lt;BR&gt;&lt;BR&gt;
&lt;TABLE width=350 align=righ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quot; style=&quot;MARGIN: 5px; 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40/20090825/2009082517481381040_175613_4.jpg&quot; vspace=1&gt;&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 color=#616588&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고려 때 몽골에서 전래된 한국의 족두리&lt;/SPAN&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물론 공녀들이 ‘고려풍’을 일으키는 데 한몫한 것은 사실이지만, 원에 유입된 선진 고려문물도 그 선양에 중요한 일익을 담당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원 세조는 고작 세금이나 거두고 시구나 읊조리는 한인(중국인)들보다 고려인들이 기술면에서 나을 뿐만 아니라 유학경서에도 능통하다고 찬사를 보내면서 ‘고려국유학제학사’(高麗國留學提學司)를 설치해 고려 유학(儒學)을 전문 연구토록 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고려 충선왕은 원나라 수도 연경에 ‘만권당’(萬卷堂)이란 학당을 열어 두 나라의 석학들이 만나 학문을 교류하는 장으로 만들었다. 원에 고려의 뛰어난 불교경전 사경본이 수출되고 고려의 명의 설경성(薛景成)이 원 세조와 성종의 병을 고쳐주었으며, 고려 바둑고수들이 초빙된 사실들은 선진 고려 문물의 유입을 말해준다. &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조 때 몽골 소와 담배 교환… 한우의 조상&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우리는 몽골의 어느 박물관에서나 빠짐없이 우리네 것을 빼닮은 연죽(담뱃대)과 담배통을 발견하게 된다. 알고 보니 ‘고려풍’을 타고 들어간 ‘조선풍’이다. 조선 땅에 1636~1637년 심한 우질(牛疾, 소 전염병)이 돌아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되자 인조는 성익(成)을 몽골에 보내 담배와 소를 바꿔오게 한다. 성익은 몽골의 여러 기(旗)를 돌아다니면서 담배가 추위와 정신 집중에 유효하다는 설득으로 몽골 소와 담배를 교환하는 데 성공한다. 이 몽골 소가 오늘날 한우의 조상인 것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를 계기로 17세기 중엽부터 몽골에는 담배가 퍼지기 시작한다. 그런데 라마교의 나라 몽골에서 승려는 흡연이 불허되기 때문에 돌로 만든 작은 통에다가 담뱃가루와 향료를 섞어 코로 빠는 이른바 ‘코담배’라는 독특한 흡연법이 발생한다. 그러자 귀족들과 일반 목민들까지도 따라함으로써 하나의 사회풍조로 번지고 말았다. 이때부터 만날 때 코담배를 교환하는 인사법이 생겨났다고 한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의 ‘고려풍’과 때를 같이해 일어난 것이 고려의 ‘몽골풍’이다. 이 ‘몽골풍’은 주로 복식과 음식, 언어 등 생활문화 영역에서 일어났으며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남아 있다. 원래 고려인들은 윗옷과 아랫도리를 하나로 잇고 소매가 헐렁한 포를 입었는데 이때부터 윗옷과 아랫도리를 따로 재단해 이어 붙이고 아랫도리에 주름을 잡아 활동에 편한 몽골식 칠릭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도 예모로 남아 있는 여성들의 족두리는 원래 ‘고고’라는 몽골 여성들의 외출 용 모자였던 것이 들어와서는 예모로 변신한다. 신부의 뺨에 연지를 찍는 화장도 ‘몽골풍’이다. 상투 대신 정수리부터 이마까지 머리를 깎고 가운데 머리카락은 뒤로 땋아 내리는 이색적인 몽골식 개체변발(開剃髮)도 한때 유행했다. &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마누라’ ‘수라’ 등 다수 낱말 몽골어에 기원&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BR&gt;&lt;BR&gt;
&lt;TABLE width=50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quot; style=&quot;MARGIN: 5px 0px; CURSOR: hand&quot;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40/20090825/2009082517481381040_175613_5.jpg&quot; vspace=1&gt;&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gt;&lt;FONT style=&quot;FONT-SIZE: 100%; LINE-HEIGHT: 150%&quot; color=#616588&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의 쟁기(민족사박물관 소장)&lt;/SPAN&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음식문화에서도 일부 ‘몽골풍’은 여전히 남아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3대 토주의 하나인 소주는 원류를 따져 보면 토착주가 아니라 몽골을 통해 들어온 교류주다. 증류주인 소주는 원래 기원전 3000년쯤에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에서 처음 만들어져 전승되어 왔다. 1258년 몽골군이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CC%B6%F3%C5%A9&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라크&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를 공략할 때 그 양조법을 배워 와서는 일본 원정을 위해 한반도에 진출했을 때 개성과 안동, 제주도 등 주둔지에서 처음 빚기 시작했다. 고려인들이 그것을 따라 배워 빚어낸 것이 바로 고려 소주(아락주)이다. 그리고 고려는 불교국가라서 육식을 꺼려왔으나 몽골인들이 들어오는 바람에 고기소를 넣은 만두 같은 육류식품을 접하게 되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오늘도 즐겨 먹는 설렁탕도 양을 잡아 대강 삶아 먹는 몽골의 ‘슐루’라는 음식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제주도를 통해 조랑말이 들어온 것도 이때부터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밖에 우리말로 굳어진 낱말들에서 몽골어의 잔재를 찾아 볼 수 있다. 왕과 왕비에 붙이는 ‘마마’, 세자와 세자빈을 가리키는 ‘마누라’(마노라), 임금의 음식인 ‘수라’ 등 주로 몽골 출신 공주들의 활무대였던 궁중에서 쓰는 이러한 호칭들은 몽골어에 그 어원을 두고 있다. ‘벼슬아치’나 ‘장사치’에서 어미격인 ‘치’는 ‘다루가치’(관직)나 ‘조리치’(청소부), ‘시파치’(매사냥꾼) 같은 직업을 나타내는 몽골어의 어미 ‘치’자를 취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풍’과 ‘몽골풍’으로 대변되는 고려와 몽골 간의 교류에서 우리는 비록 이질 문명이지만 생산적인 융합이 이루어질 때 문명 본연의 상보적(相補的) 교류가 실현 가능하게 되며, 문명은 모방성이란 근본속성으로 인해 ‘불개토풍’이란 인위적인 제어도 불구하고 전파되고 필요에 따라 선택적으로 수용된다는 등 문명교류의 유의미한 원리들을 터득하게 된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gt;&lt;/SPAN&gt;&lt;BR&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고려풍&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고려풍&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몽골풍&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몽골풍&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역사성과 유사성&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역사성과 유사성&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김기협의 '페리스코프'] &quot;민족주의는 '반역'이 아니다&quot;</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32"/>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32</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25T15:22:39Z</updated>
	    <published>2009-08-25T15:22:3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TRONG&gt;10년 전으로 : 민족주의 후진국&lt;/STRONG&gt;&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
&lt;TABLE style=&quot;BORDER-LEFT-COLOR: #cbd4e9; BORDER-BOTTOM-COLOR: #cbd4e9; MARGIN: 0px auto; BORDER-TOP-COLOR: #cbd4e9; BACKGROUND-COLOR: #eaeef7; TEXT-ALIGN: justify; BORDER-RIGHT-COLOR: #cbd4e9&quot;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5%&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RIGHT: 10px; PADDING-LEFT: 10px; FONT-SIZE: 14px; PADDING-BOTTOM: 10px; LINE-HEIGHT: 23px; PADDING-TOP: 10px&quot;&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민족주의 후진국&lt;/SPAN&gt;&lt;/B&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지난 가을 경쟁적 핵실험으로 세계를 불안하게 한 인도와 파키스탄이 이번에는 미사일 경쟁에 다시 열을 올리고 있다. 국민소득이 몇 백 달러 수준인 이 나라들이 이처럼 과도한 군비 지출을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도사 연구자 이옥순 씨의 &lt;여성적인 동양이 남성적인 서양을 만났을 때&gt;는 식민지 시대의 역사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명을 이끌어내 주는 책이다. 서양 정복 세력의 공격성 앞에서 동양의 피정복자들이 느낀 열등의식을 남성의 지배에 복종하는 여성의 체념적 굴욕감에 비유한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조직력과 용맹, 근면을 자랑하는 영국인은 이런 특성을 보이지 않는 인도인을 '인간 이하의 존재'로 보았다. 인도인 엘리트계층은 이들에게 교육받으며 이 관점을 그대로 배워 민족주의 운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대규모 조직 없이 다양한 형태로 펼쳐져 있던 민간신앙을 묶어 민족종교 힌두교를 만들어낸 것이 인도 민족주의 운동의 주류가 됐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힌두교로 뭉친 인도인에게 경쟁의 대상자는 무슬림이었다. 무슬림은 13세기부터 인도에 진출, 유럽인이 올 때까지 지배자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인도 민족주의자들은 찬란하던 인도 문명이 무슬림 지배 때문에 타락했다고 주장하며 무슬림에 대한 적개심을 통해 인도인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려 들었다. 영국인들이 종교적 조직성을 가진 무슬림을 비(非)무슬림보다 높이 평가하고 등용한 것도 질투심을 촉발하는 이유가 됐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유럽인의 남성적 공격성을 무슬림보다 더 많이 닮겠다는 것이 결국 힌두 민족주의 운동의 큰 목표가 됐다. '싸우면서 닮아간다'는 말대로다. 마하트마 간디의 평화주의는 시대적 투쟁 정신을 벗어나 인도 문명의 본질을 되찾으려는 노력이었지만 시대의 흐름에 밀려나고 말았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도와 파키스탄은 그래서 분리 독립을 했다. 백여만 코소보인의 강제 이주 정책이 얼마나 참혹한 것인지 우리는 발칸에서 보고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 당시에는 수천만 명이 종교적 대립 의식 때문에 삶의 근거를 옮겨야 했다. 이 대립 의식은 아직도 군비 경쟁으로 이어지고 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배타적 민족주의는 16세기 이래 유럽이 근대로 이행하는 흐름에서 하나의 큰 줄기였다. 19세기 유럽인의 세계 정복을 계기로 이 민족주의는 온 세계에 수출됐다. 원래의 민족주의 주역들이 유럽 통합의 흐름 속에 민족주의의 배타성을 극복해 가고 있는 지금 늦게 배운 나라들이 배타적 민족주의의 폐단에 빠져 날 새는 줄 모르고 있다. 가장 가까운 나라를 가장 격렬히 미워하는 것이 민족주의 후진성의 첫 번째 증상 같다. (1999년 5월)&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TABLE style=&quot;BORDER-RIGHT: #ccc 1px solid; BORDER-TOP: #ccc 1px solid; BACKGROUND: #ffffff; MARGIN: 5px auto 10px; BORDER-LEFT: #ccc 1px solid; BORDER-BOTTOM: #ccc 1px solid&quot;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
&lt;TD width=5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class=resize3 height=317 alt=&quot;&quot; hspace=0 src=&quot;http://pic.pressian.com/images/2009/08/16/60090816175535.JPG&quot; width=500 border=1 name=img_resize&gt;&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11px; COLOR: #777; 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quot; width=5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뉴라이트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추수 세력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 사회의 21세기를 열어가는 작업에 민족주의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없다면 크나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다. ⓒ연합뉴스&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오랫동안 나는 과잉민족주의(hyper-nationalism)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에서 한국 민족주의가 지나치게 배타적이고 호전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돌이켜보면 이것은 현대 유럽 지식층의 사고방식을 표준으로 한 생각이었다. 나는 모든 학업을 국내에서 이수한 사람이지만 독서를 통해, 그리고 1985년에서 1991년 사이 몇 차례 유럽 체류와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여행&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을 통해 유럽 지식층의 사고방식에 많은 공감을 키워 왔다. &quot;민족주의는 반역&quot;이라 외친 임지현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양&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대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교수&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도 이 배경을 공유하는 것이라 생각한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과잉민족주의를 벗어나는 역사관을 시도한 것이 작년 봄 낸 &lt;밖에서 본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국사&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gt;(돌베개 펴냄)였다. 그 책을 위해 민족주의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면서 나는 임 교수의 &quot;국사 해체&quot; 주장과 다른 길을 찾았다. 과잉민족주의는 극복되어야 하지만, 민족주의 자체는 지킬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었다. 진부한 표현으로, 목욕통의 물을 버리면서 목욕시킨 아기까지 한꺼번에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quot;국사의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구조조정&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quot;을 주장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 후 &lt;뉴라이트 비판&gt;(돌베개 펴냄) 작업을 하면서 민족주의를 과장하는 풍조보다 무시하는 풍조를 더 경계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민족주의가 정의로운 것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민족주의는 우리 사회에 엄존하는 하나의 구성 요소이며, 가까운 장래에 사라질 존재도 아니다. 국가의 대외 정책이나 남북 정책만이 아니라 일반인의 생활 태도에서도 이 엄연한 존재가 무시될 경우, 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정치학에서 고찰하는 민족주의는 유럽 식 '근대 민족주의'다. 유럽은 원래 민족의식의 발달이 늦은 곳이었다. 근세 초까지 유럽인들에게 가장 일반적인 정체성의 기준은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기독교&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이었다. 지역과 종족에 대한 소속감은 강력한 표준적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국가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도 &quot;같은 기독교인 사이에&quot;라는 명분에 쉽게 억눌리곤 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6세기 종교개혁의 진행에 따라 '기독교인' 사이의 투쟁이 일상화됨에 따라 민족의식이 자라나기 시작했고, 성서 번역으로 시작된 '국어 운동'은 민족의식의 대표적 표현이었다. 중상주의 시대와 산업혁명을 거치며 국가 간 경쟁이 격화됨에 따라 민족의식이 정치적 중요성을 키우면서 근대 민족주의가 모습을 나타냈다. 유럽에서 근대 민족주의의 확산은 산업화의 뒤를 따라 일어난 현상이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서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화와 민족주의가 19세기 후반 중부 유럽까지 확산되면서 산업화의 모순과 민족주의 모순이 함께 한계점에 도달했다. 식민지 쟁탈전은 두 모순이 결합해 나타난 결과였다. 그리고 제1차 세계&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대전&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과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러시아&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공산혁명은 이 모순들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데서 온 파탄이었다. 이 파탄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한 결과가 또한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졌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0세기 초반의 세계적 비극과 파탄은 산업혁명이 가져온 산업화와 자본주의의 모순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이 파국의 진행 과정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맡은 것이 민족주의 모순이었다. 그래서 유럽 지식인들은 민족주의를 죄악시하게 되었고, 이후 유럽 정치계에서 민족주의는 극우세력의 독점물이 되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러나 19세기에 유럽인의 침략을 받으면서 민족주의를 배운 세계 각지의 인민은 유럽인을 따라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위 글에 보이는 인도인처럼 독립국이 된 새로운 상황에서 민족 정체성을 강화하는 노력을 계속한 것은 과거의 모든 식민지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 온 현상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과거의 피침략 지역 중 동아시아 지역은 안정된 국가체제를 수백 년 이상 누려 왔다는 점에서 특이성을 가진 곳이었다. 중국의 경우는 1000년 이상 다민족국가로 존재해 왔다는 점에서 그중에서도 특수한 경우고, 한국, 일본,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베트남&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등은 '민족국가'라 할 수 있는 국가로 오랫동안 존재해 온 나라들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중 민족국가의 전통이 가장 오랜 한국의 경우, 적어도 고려 초기 이후로는 하나의 국가체제 아래 통합된 언어와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문자&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를 가지고 1000년 가까이 민족으로 존재해 왔다. 그러면서도 근대 민족주의와 같은 민족주의를 빚어내지 않고 있었던 것은 중국 중심의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천하&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체제 속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동아시아 천하체제는 19세기 중엽 유럽인이 도입한 만국공법 체제의 도전 앞에 무너졌다. 만국공법이 구성원들의 배타적 독립성을 바탕으로 원자론적 구조를 제창한 것과 달리 천하체제는 구성원 간의 위계적 상호관계를 강조하는 &lt;/SPAN&gt;&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81617553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유기&lt;/SPAN&gt;&lt;/FONT&gt;&lt;/U&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론적 구조였다. 근대 민족주의는 구성원 간의 경쟁관계를 앞세우는 만국공법 체제와 맞물려 나타난 것이었다. 개항기 이전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넓은 의미의 민족주의 개념에 넣어서 본다면, 경쟁보다 협력의 측면을 강조하는 '화이부동' 원리에 따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유럽에서는 동아시아 지역에 비해 민족국가의 전통이 얕은 만큼 역사적 현상으로서 민족주의가 가지는 의미도 좁다. 산업혁명의 진원지라는 이유 때문에 근대 민족주의를 빠른 시간 내에 고도로 발전시켰지만, 그 한계도 금세 닥쳐왔다. 반면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민족주의가 더 강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유럽인에 의해 주어진 근대 민족주의의 모델을 벗어나더라도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발전시킬 여지가 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1세기는 세계화의 시대라고 한다. 국가의 의미와 역할이 축소되는 세계화의 시대에는 민족주의가 극복의 대상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오랜 역사와 전통 속에 이뤄진 인민의 정체성과 소속감이 수십 년간의 세계화 과정을 통해 해소될 것을 상상하기 힘들다. 19세기 유럽의 민족국가 시대가 근대 민족주의를 빚어낸 것처럼 21세기 세계화 시대가 다른 형태의 민족주의를 빚어낼 전망이 더 그럴싸하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민족주의를 '민족의식의 정치적 발현'이라 정의한다면 근대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의 상황에 따라 아주 특이한 형태로 나타난 민족주의였다. 무엇보다 뚜렷한 특이성이 그 철저한 배타성이다. 19세기 유럽 민족국가들의 경쟁 대상은 같은 유럽의 민족국가들이었다. 그래서 타자를 소외시키는 편협성이 근대 민족주의의 기조가 된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뉴라이트를 비롯한 신자유주의 추수 세력이 민족주의를 부정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통찰도 인간에 대한 이해도 없이 정략적 목적을 위해 취하는 태도일 뿐이다. 이 사회의 21세기를 열어가는 작업에 민족주의에 대한 충분한 배려가 없다면 크나큰 혼란과 손해를 피할 수 없다. 민족주의를 놓고도 '제3의 길'이 모색될 필요가 있다.&lt;/SPAN&gt;&lt;!--/DCM_BOD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 class=author&gt;&amp;nbsp;&lt;/P&gt;
&lt;P class=autho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기협 역사학자&lt;/SPAN&gt;&lt;/P&gt;&lt;!--/DCM_TITLE--&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민족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민족주의&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민주’와 ‘화해’, 시대 가치로 이어져야 / 김삼웅</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31"/>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31</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25T15:11:39Z</updated>
	    <published>2009-08-25T15:11:3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겨레]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1%E8%B4%EB%C1%DF+%C0%FC+%B4%EB%C5%EB%B7%C9&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대중 전 대통령&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국장이 끝났다. 그는 이제 파란곡절의 삶을 접고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1%B9%B8%B3%BC%AD%BF%EF%C7%F6%C3%E6%BF%F8&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국립서울현충원&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에 안장되었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끌었던 두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FC%C1%F7+%B4%EB%C5%EB%B7%C9&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전직 대통령&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나란히 국장을 거쳐 같은 곳에 잠든 것은 운명의 불가측성과는 별개로, 우리 현대사의 갈등과 대립의 변증법적 마무리로 보아도 될 듯싶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고인은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남은 것은 그의 업적과 정책을 공정하게 평가하고 유지를 잇는 일이다. 그동안 왜곡된 자료와 근거 없는 내용으로 폄훼해온 사람들도 선하게 태어난 인간 본성으로 돌아갔으면 싶다. 고인은 자신을 수장하려던 사람, 밧줄에 목을 걸려던 사람, 붉은 색깔을 칠하고 저주의 필탄을 퍼붓던 사람들을 모두 용서하고 갔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가 추구한 가치를 요약하면 민주주의와 화해였다.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9%DA%C1%A4%C8%F1&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박정희&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암살 소식을 듣고 “그런 식으로 민주화를 이루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뒷날 그의 묘소에 참배했다.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FC%B5%CE%C8%AF&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전두환&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사형선고에 “내 죽음을 마지막으로 절대 정치보복을 말라”고 최후진술을 남기고 실천했다.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그들을 풀어주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화해와 용서는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3%B2%BA%CF%B0%FC%B0%E8&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남북관계&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에서도 나타났다. 외세가 가른 남북이 언제까지나 적대하면서 민족의 에너지를 낭비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6·25 전란을 지켜보며 정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정치에 입문할 때부터 그는 전쟁의 참화와 화해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70년대 초부터 가다듬어온 4대국 보장론, 3단계 3원칙 통일론은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7%DE%BA%B5%C1%A4%C3%A5&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햇볕정책&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으로 발현되고 금강산 뱃길과 개성의 육로를 열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나는 &lt;김대중 평전&gt;을 집필하면서 그가 무명시절인 1950년대 &lt;인물계&gt;, &lt;신태양&gt;, &lt;사상계&gt; 등에 쓴 글을 적잖이 발굴했다. ‘좌경’의 흔적과 젊은 날 사유의 편린을 찾기 위해서다. 놀랄 정도로 그는 반공주의자였다. 공산당을 이기기 위해서는 민주주의와 노동자들의 복지가 중요하다는 논지를 폈다. 정보정치의 소산이긴 하지만, 언론·지식인들의 책임이 크다. 정치지도자의 사상적 궤적을 알려면 무명시절의 행적을 찾는 것이 중요한데도 그런 수고는 하지 않고 정보기관 자료에만 의존해온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미국 망명시절 일부의 망명정부 수립 제안을 배격한 것이나 한민통 창립 무렵 ‘선민주 후통일’ 원칙을 제시하고 이를 반대한 인사들을 단호히 배제했던 기록들을 보면서, 어떻게 저런 사람에게 용공의 너울을 씌울 수 있는가, 우리 정치·지성풍토의 천박성을 보게 되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지역주의의 ‘생산자이며 수혜자’란 허물도 벗겨야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주의는 인구가 많은 지역 정치인이 표를 결속하기 위해 조장한다. 71년 대선 과정만 살펴봐도 알 수 있다.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는데도 그 사람은 잘못된 사법제도의 피해자인 동시에 수혜자라고 말하겠는가?”(&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0%AD%C1%D8%B8%B8&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강준만&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교수)&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고인은 유고가 된 미발표 연설문에서 “북은 핵을 완전히 포기하고 미국은 관계정상화를 통해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한국 정부엔 화해협력의 정신으로 북과 대화할 것을 촉구했다. 그의 죽음으로 북한의 고위급 ‘특사 조의 방문단’이 영결식에 참석하고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CC%B8%ED%B9%DA+%B4%EB%C5%EB%B7%C9&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명박 대통령&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도 만났다. ‘조문외교’를 통해 얽힌 외교관계를 푼 사례도 적지 않다. 6·15, 10·4 선언 정신을 살려 전쟁의 참화를 막고 평화통일의 길을 터야한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민주주의와 인권은 고인이 생명을 걸고 지키려 했던 제일의적 가치였다. 고인은 이명박 정부가 민주의 가치를 훼손하고 공화제를 짓밟은 ‘역주행’이 도를 넘었다고 분개하고, 서민의 삶이 무너지고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정부의 정책 전환이 요구된다. 고인의 유지인 ‘민주’와 ‘화해’ 정신이 시대 가치로 이어지기를 기대한다.&lt;/SPAN&gt;&lt;BR&gt;&lt;BR&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1%E8%BB%EF%BF%F5&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삼웅&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전 독립기념관장&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lt;한겨레&gt;&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협력&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협력&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화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화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통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통일&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 (14) 긴급조치 9호 하의 재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26"/>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26</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19T15:47:28Z</updated>
	    <published>2009-08-19T15:47:2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CENTER style=&quot;PADDING-BOTTOM: 20px&quot;&gt;&lt;IMG title=&quot;클릭하시면 원본크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quot; style=&quot;MARGIN: 5px 0px; CURSOR: hand&quot; hspace=10 src=&quot;http://l.yimg.com/go/news/picture/2009/23/20090817/2009081721225537223_215017_0.jpg&quot; width=500 name=mainimg&gt;&lt;/CENTER&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겨레] &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변호사들 ‘법관기피신청’ 속출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75년 구속영장 발부율 93%&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법원, 검찰 꼭두각시 노릇 &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형집행 221명 중 무죄 단 한명&lt;/SPAN&gt;&lt;/B&gt;&lt;/P&gt;
&lt;P&gt;&lt;STRONG&gt;&lt;/STRONG&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판결문에 남은 이름 감추고 싶어라&lt;/SPAN&gt;&lt;BR&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975년 4월 9일의 인혁당 재건위 사건 피의자들에 대한 사형집행 이후 정세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4월 30일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B%E7%C0%CC%B0%F8&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사이공&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함락되어 북베트남 주도의 베트남 통일이 이루어지자, 도미노현상을 우려한 한국의 위기의식은 엄청나게 고조되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9%DA%C1%A4%C8%F1&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박정희&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는 5월 13일 긴급조치 9호를 선포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그동안 선포된 긴급조치 1호, 4호, 7호의 종합판으로서 유신헌법에 대한 부정, 반대, 왜곡, 비방, 개정 및 폐기를 청원, 선동,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하는 것이었다. 긴급조치 9호 역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금, 압수 또는 수색이 가능하게끔 되어 있었지만, 제10항은 “이 조치 위반의 죄는 일반법원에서 심판한다”라고 규정하였다. 이제 더 이상 군법회의를 설치하지 않고 긴급조치 위반 사건을 일반법원에서 다룬다는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3%BB%BF%CD%B4%EB&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청와대&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나 중앙정보부의 입장에서는 법원을 한 식구로 믿어 준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법원으로서는 긴급조치 위반 사건 관할권이 비상군법회의에서 일반법원으로 이관되어 온 것이 꼭 반가운 일만은 아니었다. 긴급조치 사건을 일반법원이 처리한다는 것은 법관들이 유신체제 유지의 일선에 배치되어 손에 피를 묻히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는 법관들 사이에서 ‘중앙정보부원’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일부 출세에 눈 먼 법관들에게는 승진의 기회였지만, 대다수 판사들에게는 큰 부담이 되는 문제였다. 2006년 말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긴급조치 위반 사건 판결문에 대한 검토보고서를 낼 때, 법조계 일각에서 판사 이름을 절대로 공개해서는 안 된다고 아우성을 친 것은 참으로 씁쓸한 문제였다. 이 시절 법원 주변에서는 장차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4%EB%B9%FD%BF%F8&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대법원&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장감으로 거론되는 인재들의 경력관리를 위해 일부러 서울형사지법에 보내지 않는다는 말이 돌기도 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법관기피신청 사태&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긴급조치 위반 사건의 관할권이 일반법원으로 돌아온 이후, 법관들이 직면한 사태는 ‘법관기피신청’이었다. 법관기피신청이 인권변호사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은 1975년 5월 시인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1%E8%C1%F6%C7%CF&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지하&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피고인이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CE%C7%F5%B4%E7+%BB%E7%B0%C7&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혁당 사건&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조작이라는 내용의 수기를 신문에 발표했다가 기소된 사건에서부터였다. 이 사건의 재판장을 맡은 권종근 판사는 과거 군법회의에서 인혁당 사건을 맡은 사람인지라, 변호인들은 “인혁당 문제가 공소사실의 하나로 되어있는 이 사건에서 공정한 재판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이유”로 재판부 기피를 신청한 것이다. 이때는 하도 살벌한 시기여서 김지하가 사형당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현실적인 우려로 제기되었다. 변호인들은 일단 시간을 벌기 위해 법관기피신청을 내기로 했으나, 인권변호사들도 위축되어 막상 자신들의 이름으로 기피신청을 내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8%AB%BC%BA%BF%EC&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홍성우&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변호사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솔직히 변호사인 내 이름으로 기피신청을 내는 것이 두려웠어요. 다음날 법정에 들어가려는데 다른 분이 아직 안 와서 혼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 두려움이란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겪어보지 못할 정도로 컸어요. 김지하는 그 뒤에 어느 글에선가 그 법정의 모양을 ‘법정에 칼이 서 있더라’라고 표현했었지요.”&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어 1975년 8월에는 ‘어떤 조사’라는 수필에서 사형이 집행된 간첩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했다는 혐의로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한승헌 변호사의 변호인들이 이영범 판사 기피신청을 제출했다. 다음달에는 선거법 위반 사건으로 기소된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1%E8%B4%EB%C1%DF&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대중&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씨가 재판장인 황석연 판사에 대하여, 피고인 쪽이 신청한 증인을 소환하지 않고 서증 제출 기회를 봉쇄하였다는 이유로 기피신청을 제출했다. 녹음 검증을 하고 있는 판사실에 중앙정보부원이 들어와 있는데도 내보내지 않는 등 재판이 공정성을 상실했다고 보았던 것도 한 이유였다. 대법원은 김지하, 한승헌, 김대중 재판 과정에서 제기된 기피신청을 모두 기각했고, 이해 말 법원장 회의에서 대법원장 민복기는 법관들에게 추호도 위축됨이 없이 재판에 임하라고 독려했다.&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등신이라 불린 사법부 &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민복기는 1974년 말의 법원장 회의에서 유신체제는 가장 좋은 제도이며 법관들은 재판을 할 때 국가관에 입각해서 하라는 훈시를 하여 국회에서 비난을 받았다. 이 발언에 대해 “당치 않은 망측한 소리”라며 문제를 제기한 의원은 판사 출신으로 박정희 욕을 많이 하다 좌천된 후 법복을 벗은 김인기였다. 김인기는 5·16군사반란 후 박정희가 법관이 아닌 전우영 대령을 법원행정처장으로 임명하자 일부러 그의 비위를 건드리는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군인들은 법원 복도에도 중앙선을 그어놓고 좌측통행을 강제하였는데, 김인기 부장판사는 일부러 우측통행을 했고, 전우영 대령을 복도에서 만나면 인사하기는커녕 째려보고 걸어서 전우영 대령이 멀리서 김 부장이 보이면 피해갔다고 한다. 김인기는 국가를 상대로 한 배상사건에서 유신 전에는 국가의 승소율이 10~20%에 불과하던 것이 갑자기 80%를 넘어서게 된 것은 법관들이 법률과 양심 이외에 국가관이라는 새로운 재판기준에 의해 재판한 결과라고 꼬집었다. 그는 일제 강점기에도 검사들이 의견을 진술하거나 구형할 때에는 일어서서 했는데, 유신 후에는 “버젓이 뒤로 나가자빠진 태도로 구형”을 하는데 “이러한 불순오만한 법정태도를 보고 판사가 꼼짝을 못하고” 있는 현실을 개탄했다. 이것은 사법부의 독립 이전에 위신 문제였다. 현실이 이런데도 대법원장은 사법부의 독립에 대한 아무런 언급 없이 판사들에게는 “바둑을 두지 마라, 도시락을 가져와라” 등의 지엽말단적 지시만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긴급조치 위반사건 같은 것은 보석이 없고, 집행유예가 없고, 무죄가 없다”면서 “아무리 무고하고 억울한 사람이라도 검사가 기소할 때에 우선 긴급조치라는 죄명의 굴레얼갈이만 가지고 있으면 이것은 다시 헤어날 길도 없다”고 개탄했다. 김인기는 대법원이 제출한 자료를 인용하면서 1975년의 구속영장 발부율이 93.3%나 되고 일부 지원은 100%까지 발부한 데가 있다면서 “법원은 도대체 수사기관 검찰이 하라는 대로 끌려다녀요. 등신이 되고 말았다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긴급조치하에서 사법부의 독립성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했던 김인기는 1978년 4월 11일 변호사법 위반·공갈·탈세 등 혐의로 구속되었다. 처남과의 유산상속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는데 평소 박정희 정권을 비판해온 것이 문제가 되어 구속에까지 이른 것이다. 검찰은 김인기를 기소한 뒤 공소유지에 자신이 없었던 탓인지 기소 일주일 후 귀향보고 당시의 체제비판 발언을 문제 삼아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추가기소했다. 긴급조치 위반 사건에 무죄가 없고, 그 죄명만 덮어씌우면 헤어날 길이 없다고 비판했던 국회의원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기소된 것이다. 그가 ‘등신’이 되었다고 탄식했던 법원은 김인기에게 징역 3년을 선고했다.&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무죄 내리고 법복 벗어&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976년의 경우 긴급조치 9호 위반 사건으로 판결을 받은 피고인은 모두 221명이었다. 그중 무죄가 선고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1976년 11월 8일 서울지방법원 영등포지원의 이영구 재판장은 수업 도중 “후진국일수록 1인 정권이 오래가는데, 우리나라 정권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해 먹는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하여 기소된 고등학교 교사에 대하여, 1인 정권 문제는 역사적, 경험적 사실로 그 자체가 날조된 사실이거나 사실을 왜곡한 것이 아니며,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표현은 비유이지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라며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두 달이 채 안 된 1977년 1월 4일 그는 관례를 깨고 전주지방 법원 부장판사로 전보되었다가, 2월 5일자로 법복을 벗게 된다. 이보다 앞서 이영구 판사는 1976년 2월 군사독재에 저항하여 할복자살한 서울대생 김상진의 49재에 맞춰 교내시위를 벌인 이른바 5·22사건으로 기소된 4명의 학생 중 두 명에게는 징역과 자격정지 1년 6월형을, 다른 두 명에게는 집행유예를 선고한 바 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최근 언론과 행한 인터뷰에서 이영구 변호사는 “지금도 그때 실형을 선고한 학생들에게는 미안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판결은 “당시 정권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관대한 판결”이었다. 이 변호사에 따르면 “그때 서울대 학생들을 집행유예로 풀어주자마자 정부에서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에게 나를 인사조처하라는 압력을 넣었다고 나중에 전해들었다”며 “민 대법원장이 1976년 말 정기인사 때까지 나에 대한 인사를 계속 미뤄줬다”는 것이다. 이 변호사는 “이미 위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대법원장이 힘들게 그 압력을 막아내고 있는 상황인데, 나는 그것도 모른 채 긴급조치 9호와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여고 교사에게 무죄를 선고했다”며 “청와대에서는 약이 올랐을 테고, 대법원장도 상당히 곤란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긴급조치 사건에 대해 하급심에서 거의 유일하게 무죄 판결을 내린 이영구 부장판사가 법복을 벗게 되었다는 것이 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홍구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C%BA%B0%F8%C8%B8%B4%EB&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성공회대&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교수·한국사&lt;/SPAN&gt;&lt;BR&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긴급조치9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긴급조치9호&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곽병찬 칼럼]이제 받아들여야 하는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18"/>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18</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12T10:13:19Z</updated>
	    <published>2009-08-12T10:13:1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얼마만인가. 엊그제 와이에스가 디제이를 병실로 찾아갔다. 거기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화해할 때가 됐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불과 두 달 전 그는 이런 독설을 퍼부었다. 디제이가 독재의 극복을 역설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고 했을 때였다. “디제이가 스스로 입을 닫지 않으면 국민이 그의 입을 막아버릴 것”이라고.&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때 민주화의 쌍두마차였지만, 와이에스는 언젠가부터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그를 매장하려던 이들보다 더 디제이를 미워했다. ‘수구 꼴통’을 그렇게 경멸했던 그가 수구 꼴통과 길을 함께 갔던 것은 그런 미움 때문이었다. 그래서 “세상을 떠나기 전 그가 디제이와 화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들 봤다.&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하지만 그의 변화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 하나를 인정할 때가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로만 받아들여졌다. 이명박 대통령까지 병문안했으니 그 신호는 더 강했다. 상태가 얼마나 위중하면 그들이 화해를 말하고 쾌유를 빌까. 와이에스를 맞던 디제이의 부인 이희호씨는 차가워지는 남편의 손을 걱정하며 벙어리장갑을 짜고 있었다. 이들 모두 다가오는 무언가를 두려움 속에서 보고 있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노르웨이의&amp;nbsp;시인&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군나르 로알드크밤의 시 &lt;마지막 한 방울&gt;이 떠오른 건 이런 까닭이었다. ‘마지막’이란 말의 연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디제이의 노벨상 수상식에서 군나르 베르예 노벨상위원회 위원장이 인용했던 것이 바로 그 시였다. 와이에스를 포함해 민주주의와 인권을 꿈꾸던 이들 모두가 지금쯤 함께 읊조리며 첫 방울의 초심&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을 돌아봐야 할 때라는 생각도 작용했을 게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옛날 옛적&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물 두 방울이 있었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하나는 첫 방울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다른 것은 마지막 방울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첫 방울은&amp;nbsp;가장&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용감했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나는 마지막 방울이 되도록 꿈꾸었지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만사를 뛰어넘어 우리가 우리의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자유를 되찾는 그 방울을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렇다면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누가&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첫 방울이기를 바랄 것인가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베르옌이 인용한 ‘첫 방울은 가장 용감했네’는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 평화와 화해협력을 위해 평생을 바친 디제이에게 주는 가장 적절한 헌사였다. 첫사랑이 그렇듯이 어떤 시작이건 물방울처럼 흔적만 남기고 사라지기 마련. 그러나 바로 그 흔적으로 말미암아, 더 고귀한 가치와 꿈을 향한 행진은 이어지는 법.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사실 6·15 선언도&amp;nbsp;콘크리트&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장벽을 무너뜨리는 마지막 물방울은 아니었다. 그가 시작했던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의 제도화 역시 마찬가지였다. 철옹성 같은 냉전세력의 맹목성, 자본의 탐욕, 언론의 선동 앞에서, 이런 노력은 지금 물방울처럼 연약하기만 하다. 이들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한 노력을 무효화하고 있고, 평화를 위한 화해협력을 냉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나아가 정치보복의 괴물을 부활&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시켜 전직&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 속에서 디제이는 오열하며 자신의 몸이 허물어지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1980년 신군부의 사형선고 앞에서도 ‘결코 정치보복은 하지 말라’고 동지들에게 당부했던 그였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디제이는 두 달 전, 29년 전 대통령후보 수락연설에서 했던 말,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이라는 말을 꺼내면서 민주세력의 단합을 호소&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했다. 그 호소는 하나둘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추모객은 500만에 이르렀다. 첫 방울의 시도는 결코 무모하지 않았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지금 잎새를 흔드는 바람에도 마음은 소스라친다. 운명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 같다. 그러나 이제 받아들여야 한다. 모진 풍상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했던 거목의 품에서 벗어나야 한다. 안주할 순 없다. 그리고 그가 첫 방울이 되어 깨뜨리고자 했던 저 장벽을 넘어 민주주의와 인권, 한반도의 평화와 화해협력을 이루는 마지막 물방울이 되기를 다짐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편집인 곽병찬&amp;nbsp; &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첫 방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첫 방울&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7)바위그림의 보고 알타이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17"/>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17</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12T10:03:48Z</updated>
	    <published>2009-08-12T10:03:4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RONG&gt;&lt;FONT color=#6b6b6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ㆍ원시조형 50만장…수천년 풍상 견뎠구나&lt;/SPAN&gt;&lt;!-- SUB_TITLE_END--&gt;&lt;BR&gt;&lt;BR&gt;&lt;!--imgtbl_start_1--&gt;&lt;/FONT&gt;&lt;/STRONG&gt;&lt;/P&gt;
&lt;DIV class=article_photo_center&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500px&quot;&gt;&lt;STRONG&gt;&lt;FONT color=#6b6b6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11/20090812.01100127000001.01L.jpg&quot;&gt;&lt;/SPAN&gt;&lt;/FONT&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퀴공호라의 암각화를 탐사하는 일행.&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P&gt;&lt;!--imgtbl_end_1--&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홉드에서 만청시대의 산긴 헬렘 성채와 인접한 이슬람 사원을 둘러보고 나니 한나절이 다되었지만, 갈 길이 멀어서 점심식사는 뒤로 미루고 서북쪽으로 210여㎞ 떨어진 바얀올기를 향해 출발했다. 시내를 벗어나면서부터는 알타이 산맥의 여러 지맥 사이사이에 조성된 협곡을 따라 가는데, 밋밋한 초원길과 울퉁불퉁한 돌밭 길이 자주 엇바뀐다. 산기슭에는 돌무덤이 가끔 눈에 띈다. 지세도 초원과 삼림, 초전(草甸, 풀이 무성한 저습지)이 뒤섞여 있으며 자그마한 호수나 물구덩이들이 점점이 널려 있다. 그런가 하면 날씨도 변덕스럽다. 이따금씩 비바람이 확 지나가면 산봉우리들이 금방 구름 위에 두둥실 떠있다가도, 어느새 햇볕이 나면 저 멀리 산허리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서린다. 순간 장관이 연출된다. 우리는 지금 몽골 알타이 동쪽 기슭을 남에서 북으로 누비고 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오후 3시 반이 돼서야 설산이 한눈에 보이는 하샷디다와 평원에서 양고기와 감자를 짓찧은 소를 넣은 넓적한 만두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여기서 두 시간쯤 달리니 갑자기 푸른 톨보 호수가 나타난다. 호숫가에는 이름 모를 키 낮은 야생화가 솔솔바람에 하느작거리며 새하얀 짐승 해골이 얹혀있는 오보가 길손의 안전을 지켜주고 있다. 호수는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다. 다들 동심이 발동돼 물수제비뜨기 시합을 한다. 얇은 돌이 물 위를 연방 담방담방 뛰어가게 팔매치는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러나 젊은 운전&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기사 몽거의 솜씨가 단연 압권이다. 유쾌한 휴식의 한때를 보내고 차는 쏜살같이 달린다. 여기서부터는 지세도 평탄한 데다 포장길이다.&lt;/SPAN&gt;&lt;BR&gt;&lt;BR&gt;&lt;!--imgtbl_start_1--&gt;&lt;/P&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30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11/20090812-27a.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다양한 암채화들 (사진 위부터 점박이 동물, 활 쏘는 사냥꾼과 남녀상, 늑대, 각종 동물).&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
&lt;P&gt;&lt;!--imgtbl_end_1--&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저녁 7시 반경에 드디어 목적지 바얀올기에 도착했다. 어귀에서 눈길을 끄는 것은 울란바토르에 이어 몽골에서 두 번째로 높은 80여m의 수신안테나다. 이곳의 명물이라고 한다. 숙소로 안내된 곳은 하얀 벽체로 빙 둘러싸인 12채의 ‘게르 여관’이다. 지은 지 오래된 허름한 게르다. 해가 떨어지자 기온은 급강하는데 난로는 없고 샤워 시설도 변변찮아 여성분들은 시내의 호텔 두만에 묵기로 했다. 나머지 일행은 새벽녘까지 바깥 벤치에 둘러 앉아 얘기를 나누며 알타이 밤을 즐긴다. 자정이 지나자 다들 풀밭에 누워 저 무한창궁(無限蒼穹)에 억조의 은바늘을 뿌려놓은 것 같은 밤하늘의 총총 별을 쳐다본다. 한 곳에 눈길을 못박아놓으면 놓을수록 별은 자꾸 새끼를 친다. 꼴도 변하고 움직이기도 하는 성싶다. 지구의 몇 안 되는 곳에서만 감상할 수 있는 별의 향연이자 대자연의 신비다. 별이 저토록 촘촘하고, 또렷하게 보이는 것은 아마 오염 없이 청정한 해발 2500m의 높은 곳이라서 그러할 것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바얀올기는 몽골 서북단 알타이 어귀에 자리한 고원도시다. 원래는 행정구역상으로 홉드와 하나의 아이막(군)이었으나 1940년에 두 개의 아이막으로 나뉘었다. 지금은 산하에 12개 솜(읍)을 거느리고 있는데 인구는 약 9만명이다. 그중 절반 이상이 군 소재지인 바얀올기에 모여살고 있다. 건물들은 홉드강 연안에 흩어져 있으며 사위는 바위산으로 에워싸여 있다. 고산준령과 삼림, 푸른 초전과 물이 잘 어우러진 아름다운 산간도시다. 주민의 90%가 돌궐제국의 직계후예라고 자부하는 카자흐족이며 공용어는 카자흐어와 몽골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예부터 여기서 시작해 알타이 깊은 협곡을 뚫고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 중앙아시아 일원으로 이어지는 길, 이를테면 동서교류의 통로 역할을 해온 알타이 초원로가 있었다. 여기가 바로 기원전 8세기쯤부터 펼쳐진 스키타이 동방무역로의 동단이다. 이 길을 통해 스키타이 문화가 몽골과 중국 서북지역으로 전파되었고, 기원후 7~8세기에는 이 길의 연변에 사는 카자흐인들에 의해 돌궐문화가 전파됐으며, 13세기 서정에 나선 칭기즈칸의 기마군단도 이 길 위에 발자국을 남겼다. 오늘도 그 행보는 계속되고 있다. 러시아에서 온 대형 화물&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트럭들이 거리에서 짐을 부리고 싣는다. 이곳 사람들은 너나없이 알타이를 자랑한다. 알타이가 있기에 그들의 오늘이 있다고 한다. 모든 것이 알타이 축복이라고 믿는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알타이, 자고로 동서양 모두에게 동경과 환상을 심어준 대명사다. 알타이는 산이나 산맥의 이름이기도 하고, 주변 지역을 아우르는 이름이기도 하다. 중앙아시아의 내륙 고원지대에 우뚝 솟아 동서로 뻗은 알타이 산맥은 화산 분출로 인해 생긴 습곡융기 지대로서 크게 몽골 알타이와 고비 알타이, 고르노(러시아) 알타이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총 길이는 약 2000㎞에 달하며, 해발 4374m의 후이튼봉(우의봉)을 비롯해 4000m 이상의 봉우리들이 여러 개 있다. 지금 일행은 몽골 알타이 최북단에 와 있다. 희끗희끗한 만년설을 머리에 이고 있는 봉우리들이 즐비하다. 빙하만 해도 1500개나 흘러내리고, 겨울 혹한기의 최저기온은 영하 60도까지 내려간다. 여기는 카자흐인, 몽골인, 야쿠트인, 퉁구스인, 브리야트인, 에벤킨인 등 넓은 의미의 알타이족 요람이다. 지금은 러시아 알타이 쪽에 인구 20여만명이 있는 자치 성격의 알타이 공화국이 있어 마냥 알타이의 상징적 구실을 하고 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알타이는 몽골어나 돌궐어의 ‘알탄’(altan)에서 유래된 ‘황금’이란 뜻이다. 그만큼 알타이 땅 속에는 황금(주로 사금)을 비롯한 철, 은, 아연, 주석 등 귀중한 광물자원이 많이 묻혀있다. 러시아 금의 90%가 고르노 알타이에서 공급될 정도로 금이 풍부하다. 그리하여 역사의 여명기부터 이곳에서는 황금문화가 꽃피기 시작했다. 기원전 5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근 1000년 동안 황금의 성산지 알타이를 중심으로 동서에 기다랗게 황금문화대가 형성되고 있었다. 알타이에서 발생한 황금문화는 스키타이가 개척한 동방무역로를 통해 서방으로는 그리스까지 전해졌으며, 알타이족을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들의 동진에 의해 한반도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영향이 미쳤다기보다는 차라리 그 전성기를 문화대의 동단 신라 땅에서 맞았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문화의 최고 결정체라고 하는 고대 금관&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10기 중 7기(가야 1기, 신라 6기)가 한반도에서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나라를 ‘금관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일찍이 구석기시대부터 이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한 알타이인들은 다양한 문화, 특히 초원로의 유목문화를 개화 발전시켜 인류문명사에 불후의 업적을 남겨놓았다. 그래서 알타이 지역은 굴지의 문화유적지로 평가되고 있다. 여기서 유익한 자양분을 섭취한 나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일찍부터 적잖은 연구가 집적되었고, 또 여기 바얀올기 박물관의 전시품을 통해서도 실증되다시피 알타이와 우리는 특별한 인연을 맺고 있다. 그 인연이란 여러 가지 상관성으로 설명되는데, 이를 입증하는 실례는 여러 분야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언어의 친연성으로부터 시작해 천손강림(天孫降臨)이나 난생(卵生) 신화 같은 시조창조설, 신조(神鳥)와 신수(神樹)사상, 솟대&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와 ‘나뭇꾼과 선녀’ 같은 민속이나 민담 등등 실로 각이한 분야에서 알타이 문화와 우리 문화 간의 친연성 내지 상관성을 엿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역사와 문화의 뿌리를 파내는 데서 원초적 의미를 지닌 중요한 사실(史實)들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밤새 별의 향연에 심취돼 잠을 설쳤지만, 알타이에서의 아침은 피곤을 말끔히 씻어준다. 보기 드문 화창한 날씨다. 일행은 ‘게르 여관’ 주인 에킬한의 안내로 15㎞ 떨어진 퀴공호라 지역으로 바위그림&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탐방에 나섰다. 에킬한은 30여년간 이 지역 바위그림에 관심을 가져오다가 요즘은 석사논문을 쓰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약 두 시간 동안 세 군데를 탐사했다. 다행히 바위들이 높지 않아 그림들을 직접 확인할 수가 있었다. 탑본은 못하고 카메라에만 잔뜩 담았다. 알려진 대로 몽골의 중서부, 특히 알타이 지역은 세계적으로도 명성을 얻고 있는 바위그림의 보고다. 일반적으로 바위그림이라고 하면 바위를 쪼아 새긴 암각화(岩刻畵)와 채색으로 그림을 그린 암채화(岩彩畵) 두 가지가 있다. 몽골의 경우 비중으로 봐서 서쪽 알타이 지역에는 암각화가, 중부와 북부지역에는 암채화가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일행 중 많은 분들은 처음으로 바위그림을 접하다 보니 퍽 신기한 모양이다. 궁금증도 많다. 그래서 그림 바위 앞에 둘러 앉아 바위그림에 관한 개괄강의부터 시작했다.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기까지 길고긴 풍상 속에서도 닳지 않고 살아 숨 쉬는 바위그림, 볼수록 신기하다. 소나 양, 말 같은 가축과 인간의 모습이나 활동상이 비록 원시적이고 소박한 조형이지만, 그토록 오롯이 남아서 당시의 사회상 단면들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알타이 지역 전체에 약 50만장의 이러한 바위그림이 있다고 한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의 바위그림에 대한 조사는 비교적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76년 고비 알타이지역에서 이루어진 러시아 탐험가 포타닌의 암각화 조사를 효시로 주로 러시아 고고학자들에 의해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걸쳐 중요한 몇 건의 조사가 있었다. 그러다가 1950년대 이후에는 지리학자 남난도르지, 고고학자 도르지수렌과 체벤도르지 등 몽골 학자들에 의한 본격적인 조사가 진행되면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달성했다. 호이트 쳉헤르 동굴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이르는 각이한 시대에 조성된 많은 암각화와 암채화가 알려져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선사시대 연구에 결정적 진전을 가져 오게 했다. 그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에 널려있는 바위그림의 연구에도 유용한 실마리들을 제공했다. 최근 연간 ‘한국암각화학회’를 비롯한 관련 연구단체와 학자들이 몽골 바위그림의 현장을 자주 탐방하고 탁본까지 집성한 것은 우리 학계에서 경하할 만한 일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 과학아카데미 고고학연구소장 체벤도르지는 지난 100여년 동안의 몽골 바위그림의 연구 흐름을 세 시기로 구분해 개괄하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1940년대까지의 첫 시기에는 포타닌을 비롯한 외국 탐험가들이 탐사하면서 발견한 바위그림의 소재를 보고하고 출판하는 등 바위그림 연구의 초창기다. 그후 1948년부터 1990년까지의 두 번째 시기에는 몽골 학자들이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 나라 학자들과 공동으로 혹은 독자적으로 탐사하고 연구하는 활동기다. 이 시기의 주요한 연구 성과는 바위그림의 역사시대( ~14세기)를 석기시대와 청동기 및 초기 철기시대, 흉노시대, 돌궐시대, 키르키즈시대, 몽골시대의 여섯 개로 시대구분한 것이다. 마지막 시기는 1990년부터 지금까지인데, 몽골의 체제 변혁을 계기로 한국을 포함해 교류가 없었던 나라들과의 공동연구를 통해 연구의 지평을 넓히며 적잖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이 시기의 주요 연구 업적은 바위그림을 제작방법에 따라 붉은 안료로 그린 그림과 먹으로 그린 그림, 바위 면을 갈아서 새긴 그림, 날카로운 도구를 사용해 점이나 선으로 새긴 그림 등 4가지로, 그리고 묘사 대상에 따라 일상생활을 대상으로 한 그림과 동물을 대상으로 한 그림, 물건이나 주거를 대상으로 한 그림, 묘사 대상이 불분명한 그림 등으로 구분하는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바위그림은 역사의 유형적 증언치고 가장 오래된 증언이다. 그만큼 값어치가 있는 역사의 유물이다. 그것이 저 알타이에 가장 많으니 알타이야말로 바위그림의 보고요, 인류문명의 충실한 전령사다. 바위그림을 적잖게 소장하고 있는 우리 한반도에 알타이 바위그림은 많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gt;&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알타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알타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바위그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바위그림&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사법부 - 회한과 오욕의 역사](13)‘인혁당재건위’ 사건과 사법살인</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16"/>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16</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11T17:31:13Z</updated>
	    <published>2009-08-11T17:31:1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TRONG&gt;형확정 18시간만에 사형…사법부도 함께 죽었다&lt;/STRONG&gt;&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974년 4월3일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9%DA%C1%A4%C8%F1&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박정희&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는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 아래 ‘인민혁명’을 획책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어 4월25일 중앙정보부장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D%C5%C1%F7%BC%F6&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신직수&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는 민청학련의 배후에 ‘과거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이 있다며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CE%C7%F5%B4%E7+%BB%E7%B0%C7&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혁당 사건&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관련자들을 구속·수사중이라고 발표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975년 4월9일 박정희 정권은 인혁당 관련자 8명의 사형을 집행했다. 이날 대한민국 사법부도 같이 죽었다. 국제법학자협회에서는 이날 4월9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이라고 불렀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혁당 사건이란 1964년 박정희 정권이 한일회담 반대데모로 위기에 처한 상태에서 혁신계 인사들을 반국가단체 조직이라는 어마어마한 죄목으로 기소했던 사건이다. 중정이 사건을 수사하여 검찰로 송치했는데, 서울지검 공안부의 검사들이 도저히 기소할 만한 사건이 아니라며 사표를 던지고 기소를 거부하여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들이 10년 세월이 지나 다시 잡혀 온 것이다. 악연이었다. 1차 사건 당시 부하들의 항명으로 체면을 구긴 검찰총장 신직수는 이제 중앙정보부장이 되어 사건을 총지휘했고, 당시 중정 수사과장이던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CC%BF%EB%C5%C3&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용택&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은 정치적 사건의 처리로 악명 높은 중정 6국 국장으로 수사 책임자가 되었다. 도예종,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C%AD%B5%B5%BF%F8&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서도원&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송상진, 하재완, 여정남,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0%AD%C3%A2%B4%F6&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강창덕&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나경일 등 사형이나 무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 다수는 박정희의 출신지인 대구·경북지역에서 3선개헌 반대와 민주수호국민협의회 활동에 앞장서온 인물들이었다. 박정희가 담화문을 발표한 4월3일은 아직 민청학련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되지도 않았고, 인혁당 관련 인물들은 한 명도 수사선상에 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박정희의 담화문에 인민혁명이란 말과 ‘반국가적 불순세력의 배후조종’이란 말이 들어감으로써 수사의 방향은 이미 결정되었다. 이들에 대한 수사가 본격화된 것은 4월25일 신직수가 민청학련의 배후에 인민혁명당이 있다고 밝힌 다음부터였다. 중형을 선고받은 사람들 대부분은 신직수의 발표를 보고도 멀뚱멀뚱 집에 있다가 잡혀 왔다. 10년 전에도 인혁당은 있지도 않았고, 존재하지도 않았던 조직을 ‘재건’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기에 자신들이 이 엄청난 사건에 연루되리라 짐작도 못했던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사건의 실체&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우리는 흔히 이 사건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부르지만 ‘인혁당 재건위’ 라는 조직은 공소장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공소장에는 경북지도부, 서울지도부, 서울지도부와 같은 조직이라는 세 개의 단체가 나온다. 아무리 조작을 일삼은 중정과 유신 검찰이라 하더라도 혁신계 인사들의 느슨한 만남을 도저히 하나의 조직으로 묶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사건에서 실체가 있는 실정법 위반이라면 하재완이 이북방송을 녹취한 노트를 몇 명이 돌려 본 것뿐이다. 1972년 7·4남북공동선언을 전후한 시기, 혁신계 인사들은 늘 이북의 통일정책을 궁금해했다. 하재완은 군 시절 특무대에서 이북방송을 녹취했는데, 그가 이북방송에서 조선노동당 5차당대회 보고문(1970)을 노트에 받아 적어 주위 사람들과 돌려 본 것이 다였다. 그저 반공법 위반으로 가볍게 처리해도 될 사건을 유신정권은 학생시위의 배후에 공산세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려고 사건을 부풀린 것이다. 6국장 이용택은 1주일에 두 번 박정희에게 직접 수사 상황을 보고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혁당과 민청학련의 연결고리로는 하재완네 아이들 가정교사였던 경북대 출신의 여정남이 지목되었다. 처음 중정은 여정남이 이철, 유인태 등 서울대생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것으로 조서를 작성했다가, 부랴부랴 여정남이 이철과 유인태를 지도한 것으로 조작했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C0%B1%BA%B8%BC%B1+%C0%FC+%B4%EB%C5%EB%B7%C9&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윤보선 전 대통령&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1%E8%C1%F6%C7%CF&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지하&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시인 등 저명인사를 제시하고, 또 일본인 기자를 엮어 넣어 민청학련이 국외 공산계열과도 연결된 것으로 조작했다. 그러나 명망가와 외국인을 엮어 넣자 사람들이 수사의 허점을 파고들어 시끄럽기만 할 뿐 별 효과가 없었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붉은 칠을 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집어넣으면 이런 걱정은 안 해도 되었다. 대구를 중심으로 반독재운동을 해오던 진보적 인사들이 그렇게 희생양이 되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심과 2심은 군법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재판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변호인의 접견도 허락되지 않았고, 가족들의 면회도 금지되었다. 변호인이 요구한 증거는 모두 채택되지 않았고, 검찰 쪽 증인이 증언하던 날 변호인들은 반대신문은커녕 자택에 연금되어 법정에 출두할 수도 없었다. 피고인 임구호는 법정에서 증거가 조작되었다고 주장했다가 검찰관실로 끌려가 폭행을 당하기도 했다. 별을 단 재판장은 피고인들이 검사의 질문에 반박하려 하면 예, 아니오로만 답하라고 답변을 끊었다. 재판은 사실상 비공개로 진행되었다. 국방부 출입기자의 방청은 허락되었으나 아무도 수첩을 꺼내 취재하지 않았고, 외신기자들의 방청은 “재판 내용을 잘못 이해해 보도할 수 있다”는 이유로 제한되었다. 민청학련 사건의 재판에서는 강신옥 변호사가 “직업상 변호인석에 있으나 그렇지 않다면 피고인들과 뜻을 같이해 피고인석에 앉아 있겠다”라고 발언했다가 구속되어 원대로 피고인석에 앉게 되었다.&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공판조서 변조&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렇게 어이없는 재판에서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공판조서가 변조된 것이다. &lt;/SPAN&gt;&lt;A class=lw href=&quot;http://kr.rd.yahoo.com/search/searchify/news/livewords/*http://kr.search.yahoo.com/search?fr=kr-popup_lev_news&amp;cs=bz&amp;p=%B4%EB%B9%FD%BF%F8&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0000&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대법원&lt;/SPAN&gt;&lt;/FONT&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재판은 피고인을 직접 심리하지 않고 기록만으로 사건을 판단하기 때문에 공판조서의 변조는 보통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박정희와 대구사범 동창인 김종길 변호사는 1974년 9월 말 항소이유서를 작성하면서 공판조서 변조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법정에서 분명히 아니라고 부인한 부분이 대부분 공소사실을 시인한 것으로 되어 있었던 것이다. &lt;인혁당사건 공판조서 변조 발설자 조사&gt;라는 중정의 내부 문건에 의하면 김종길 변호사는 1974년 10월 중순 사무실을 찾아온 우홍선과 전창일의 부인에게 “공판조서의 기재 내용이 피고인의 진술 내용을 충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고 설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1975년 2월 초에는 조승각 변호사도 이수병·김용원 등의 공판조서 열람을 대법원에 신청해서 타자로 된 공판조서 등본 1통을 교부받아 검토했다. 조승각 변호사 역시 많은 부분이 자신이 공판정에서 직접 들은 피고인의 진술과 다르게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그는 이수병 진술 중 피고인의 진술과 정반대로 작성된 공판조서 부분에 “---와” “x”로 표시해서 2월 중순 이수병과 김용원의 부인에게 나눠줬다. 김종길, 조승각 두 변호사가 공판조서가 실제 답변과 다르게 작성되었다고 지적한 부분은 “공산주의국가 건설을 목적으로 공산비밀조직을 구성하자는 회합결의를 한 사실” 등 반국가단체 결성과 관련된 부분이다. 8명이 사형을 당한 것도 바로 이 혐의 때문인데, 검찰 쪽이 제시한 유일한 증거는 피고인들의 자백이었다. 피고인들은 법정에서 이를 부인했지만, 군법회의는 공판조서를 허위로 작성했고 대법원은 날조된 공판조서에 의거해서 사형을 확정했다.&lt;/SPAN&gt;&lt;BR&gt;&lt;BR&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사법살인&lt;/SPAN&gt;&lt;/B&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도 처음 군법회의에서 7명이나 사형이 선고되었지만, 1974년 7월20일 여정남을 제외한 대부분이 무기로 감형되었다. 이때 벌써 민청학련은 살리고, 인혁당은 죽인다는 방침이 정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상황은 인혁당 관련자들에게 매우 불리하게 돌아갔다. 8월15일에는 육영수씨가 피격·서거하여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1975년 2월 박정희는 유신헌법에 대한 찬반 국민투표라는 승부수를 던진 뒤 긴급조치 위반자들을 석방하는 유화 조처를 취했다. 그런데 박정희의 기대와는 달리 석방된 사람들은 ‘자숙’하는 대신 개선장군 대접을 받았고, 풀려난 김지하는 &lt;동아일보&gt;에 인혁당 사건이 고문으로 조작되었음을 생생하게 폭로했다. 격분한 박정희는 인혁당이 김일성의 지령으로 간첩에 의해 조직된 것이라며 극형이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 간첩이란 북이 보낸 남파간첩이 아니고, 미군정보기관이 북쪽으로 침투시킨 간첩이었다. 그런데도 박정희 정권은 사이공 함락이 임박하는 등 정세가 악화되자 인혁당 관련자의 사형을 전격 집행했다. 형집행은 대법원 확정판결 18시간 만에 시작되었다. 구속 이래 1년 가까이 면회를 할 수 없었던 가족들은 형이 확정되었으니 면회가 가능하겠지라고 아침 일찍 서대문구치소에 왔다가 사형이 집행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혼절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대법원은 저항권은 인정할 수 없고, 긴급조치는 위헌이 아니라면서, 피고와 변호인들의 고문 주장을 배척했고, 절차상의 위법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다. 공판조서가 변조되었다는 주장도 묵살되었다.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 유신체제는 그로부터 4년 반 더 지속되었는데 박정희는 더는 긴급조치 위반사건을 군법회의에 보내지 않고 일반 법원에서 재판하도록 했다. 인혁당 사법살인으로 대한민국 법원은 사법부를 지독히 불신했던 박정희로부터 신뢰를 획득한 것이다. 그러나 독재자의 신뢰가 깊어질수록 국민들의 마음은 멀어져 갔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세상을 보는 정직한 눈 &lt;한겨레&gt;&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월드컵·여중생· 탄핵·촛불이 만든 소통의 힘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407"/>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407</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10T14:18:59Z</updated>
	    <published>2009-08-10T14:18:5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광장이 없으면 민주주의도 없었다. 물론 독재자도 광장을 필요로 한다. 광장 가득 사람을 채워 놓고 &quot;하일 히틀러&quot;를 외치는 장면은 민주시민들에게는 소름이 끼치지만 독재자 개인에게는 참으로 짜릿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반드시 필요한 곳, 그러나 평시에는 비어 있는 곳, 이것이 광장이다. 사람이 있어야 재미있고, 사람이 많아야 자꾸 가고 싶은 곳, 그곳이 광장이다. 서울의 한복판, 광화문에서 서울역까지는 광장의 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광화문 광장에서부터 청계 광장, 시청 앞의 서울 광장, 남대문 앞 광장, 서울역 광장에 이르기까지 5개의 광장이 연이어 있다. 남대문 앞 광장에서는 특별히 집회를 해 본 경험이 없지만 다른 곳들은 유달리 굴곡진 한국 현대사 덕에 시민단체 활동을 활발히 하는 사람들이라면 다 몇 번 씩은 그곳에서 벌어진 집회에 참석해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오늘은 이들 광장 중 광화문 광장, 청계 광장, 서울 광장을 둘러볼 것이다.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민주주의의 역사는 모두 광장에서 이루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광장은 도시공학자들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만든 공간이었다. 불행하게도 한국의 현대사는 오랫동안 광장을 빼앗겼었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광장은 여의도의 5.16광장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짓밟은 군사 반란의 날짜를 붙인 흉측한 이름처럼, 이 광장은 민주주의가 살아 숨쉬는 곳이 아니라 정권을 찬양하는 자들만이 모이거나, 또는 그들이 소집한 집회나 열리는 곳이 되어 버렸다.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을 보낸 유신시대에는 연례행사처럼 5.16광장에 마포부터 걸어가 김일성 허수아비를 불태우곤 했다. 이 시절 광장은 동원된 사람들이 가던 곳이었다. 언제 무슨 집회가 있는지를 찾아 사람들이 제 발로 가족이나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들던 21세기의 광장과는 그 분위기가 완전 달랐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광장을 빼앗겼던 시대&lt;/SPAN&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DIV align=center&gt;
&lt;DIV align=center&gt;
&lt;SCRIPT type=text/javascript&gt;
	&lt;!--
	 function photoSizeIE001058582() {
	  var tImg =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IE001058582&quot;);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BoxIE001058582&quot;).style.width = tImg.width+&quot;px&quot;;
	 }
	//--&gt;
	&lt;/SCRIPT&gt;

&lt;DIV class=photoCenter id=photoBoxIE001058582 style=&quot;WIDTH: 500px&quot;&gt;
&lt;TABLE class=photoCenter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id=photoIE001058582 src=&quot;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9/0526/IE001058582_STD.jpg&quot; onload=javascript:photoSizeIE001058582(); border=0&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9pt; COLOR: #666666; LINE-HEIGHT: 130%&quot; align=left colSpan=2&gt;&lt;!-- S: Fuction btns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80 align=right border=0 valign=&quot;top&quot;&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lt;A href=&quot;javascript:setRecommendCnt('IE00105858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추천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rcm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ArticleBlogWinOpen('IE00105858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블로그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blog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1058582&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자세히 보기&quot;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detail_s.gif&quot;&gt;&lt;/SPAN&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uction btns --&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6일 낮 서울 덕수궁앞에 마련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에워싸고 있던 경찰버스 '차벽'대신 경찰관들로 폴리스라인이 설치된 가운데 여전히 서울광장은 경찰버스로 봉쇄되어 있다.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class=box_man align=lef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권우성&lt;/SPAN&gt;&lt;/TD&gt;
&lt;TD align=right&gt;&lt;!-- S: first TAG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lass=box_tag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3px; PADDING-TOP: 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icon_tag.gif&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goTagNetwork('서울광장');&quot;&gt;&lt;U&gt;&lt;FONT color=#0000ff&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서울광장&lt;/SPAN&gt;&lt;/FONT&gt;&lt;/U&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irst TAG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DIV&gt;&lt;/DIV&gt;
&lt;P&gt;&lt;U&gt;&lt;FONT color=#0000ff&gt;&lt;/FONT&gt;&lt;/U&gt;&lt;/P&gt;&lt;/DIV&gt;
&lt;P&gt;&lt;U&gt;&lt;FONT color=#0000ff&gt;&lt;/FONT&gt;&lt;/U&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유신시절은 정말 숨이 막혔었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인혁당 가족들이 신문사를 돌아다니며 우표 딱지만하게라도 좋으니 제발 제발 자기네 억울한 사정을 신문에 실어 달라고 부탁을 했건만 어느 신문도 그런 사연을 실어 주지 않았다. 대학 캠퍼스 내에조차 사복 경찰 수백 명이 벤치에 앉아 있고, 로마 병정 같은 진압복을 입은 경찰들도 십여 대씩 차를 대 놓고 있던 실정이었다. 소통은 완벽하게 차단되었다. 학내 시위조차 중형으로 다스려지던 시절, 일부 대학생들은 그럴 바에야 각 대학이 연합해서 광화문에서 데모를 하자고 모의했다. 1978년 6월 26일 광화문에서는 서울시내 대학생들의 연합시위가 개최되었는데, 워낙 경비가 삼엄하여 데모랄 것도 없이 진압되고 말았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때 아스팔트를 밟았던 사람들 중 잡혀간 학생들 20여 명은 1년 내지 2년의 징역을 살아야 했다. 1964년 '6·3사태' 이후 학생 시위대가 광화문까지 진출한 적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에는 개별 학생들이 광화문에 모여 있다가 기습적으로 시위를 단행한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라도 아스팔트를 밟은 것이 죄가 되어 1년 이상 콩밥을 먹어야 했으니, 광화문은 그렇게 엄청난 곳이었고, 유신은 또 그렇게 지독한 독재였다. 그 박정희가 죽고 나서도 학생들이 광화문을 다시 밟은 것은 반년 이상이 흐른 다음이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유신의 긴 겨울이 끝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왔건만, 학생들은 가두 진출을 놓고 오랜 논쟁만을 벌이고 있었다. 학생들이 거리로 나서면 군을 자극하게 될 것이고, 군이 뛰쳐나올 명분을 줄 것이라고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다. 논쟁이 가열되어도 결론은 나지 않던 차에 일부 대학생이 거리로 나섰다. 학생들의 가두 진출이 기정사실화 되고 나서 다음날인 5월 14일에는 서울 시내의 모든 대학에서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서울의 봄'이라는 특수한 상황 탓이었는지, 학생들의 가두 진출을 속으로는 바라고 있던 신군부의 작전 탓이었는지 모르지만, 학생들은 그날 저녁 광화문 일대를 휘저을 수 있었다. 다음날도 학생들은 거리로 진출했다. 이번에는 경찰이 남대문 일대에 저지선을 쳤고 학생들은 서울역 광장을 가득 메웠다. 그리고 이른바 '서울역 회군' 결정이 내려졌고, 이틀 후 신군부는 5.17 비상계엄 전국 확대 조치를 취했다. 그리고 광주를 거쳐 우리는 민주주의와 광장을 같이 잃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987년 6월 항쟁 때 우리는 다시 광장을 밟았었다. 최루탄에 희생된 이한열 군을 떠나보내던 날이었다. 참 악랄했던 군사독재정권은 독재 권력에 항거하다 희생된 분들의 시신을 탈취해가는 일이 종종 있었다. 이한열 군이 숨을 거둔 뒤에는 그런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청년 학생들이 신촌 세브란스병원 부근에서 이틀씩, 사흘씩 밤을 지새웠다. 그 덕에 숙연한 영결식장의 모습과 어울리지 않게 많은 젊은이들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도 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열이의 영정을 앞세운 영구 행렬을 따라 백만 인파가 시청 앞 광장을 가득 메웠다. 6월 항쟁 기간 내내 혹시 한열이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고 학생들은 학생들대로, 군사 정권은 군사 정권대로 마음을 졸였다.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한열이는 직선제를 수용한다는 노태우의 발표, 즉 6.29 선언이 있고 나서야 하늘나라로 갔다. 그 한열이를 보내는 길에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백만 인파가 몰렸다. 그 시절 나는 6월 항쟁의 한 달간 최루가스에 단련될 대로 단련되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백만 인파의 선두가 시청을 지나 광화문에서 전경들과 대치하기 시작하고 얼마쯤이나 지났을까. 경찰이 페퍼포그를 정신없이 쏴 대기 시작했다. 최루탄 중에서 그래도 견딜만 했던 것이 페퍼포그였건만, 며칠 밤을 지새운 지친 몸은 페퍼포그 한방에 속절없이 무너져버렸다. 정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교동 골목으로 도망쳤다가 기운을 추스르고, 혹시 사람들이 다시 모이지 않을까 나와 본 태평로에는 주인 잃은 신발짝만 가득했다. 그 뜨거운 아스팔트 위를 어찌 한쪽 신발만 신고 걸어갔을까? 1987년 이후 뒤뚱거릴 수밖에 없었던 한국 민주주의의 슬픈 걸음걸이가 떠올랐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월드컵과 다시 찾은 광장&lt;/SPAN&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DIV align=center&gt;
&lt;SCRIPT type=text/javascript&gt;
	&lt;!--
	 function photoSizeIA000211972() {
	  var tImg =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IA000211972&quot;);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BoxIA000211972&quot;).style.width = tImg.width+&quot;px&quot;;
	 }
	//--&gt;
	&lt;/SCRIPT&gt;

&lt;DIV class=photoCenter id=photoBoxIA000211972 style=&quot;WIDTH: 400px&quot;&gt;
&lt;TABLE class=photoCenter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id=photoIA000211972 src=&quot;http://ojsfile.ohmynews.com/down/images/1/junolee_154361_32[211972].jpg&quot; onload=javascript:photoSizeIA000211972(); border=0&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9pt; COLOR: #666666; LINE-HEIGHT: 130%&quot; align=left colSpan=2&gt;&lt;!-- S: Fuction btns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80 align=right border=0 valign=&quot;top&quot;&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lt;A href=&quot;javascript:setRecommendCnt('IA00021197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추천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rcm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ArticleBlogWinOpen('IA000211972');&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블로그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blog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A000211972&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자세히 보기&quot;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detail_s.gif&quot;&gt;&lt;/SPAN&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uction btns --&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2002년 6월 25일 한국과 독일 월드컵 4강전 당시 거리 응원 현장&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2002년 6월 25일 한국과 독일 월드컵 4강전 당시 거리 응원 현장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class=box_man align=lef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오마이뉴스 권우성&lt;/SPAN&gt;&lt;/TD&gt;
&lt;TD align=right&gt;&lt;!-- S: first TAG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lass=box_tag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3px; PADDING-TOP: 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icon_tag.gif&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goTagNetwork('');&quot;&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irst TAG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DIV&gt;&lt;/DIV&gt;
&lt;P&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군사독재 시절 우리는 오랜 기간 광장을 빼앗겼었다. 민주화가 시작되고도 독재정권에 너무 길들여진 탓인지 광장을 되찾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평화박물관 대표인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quot;도심 속에 제대로 된 광장 하나 갖지 못한 시민은 시민이 아니고 주민일 뿐&quot;이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우리는 훌륭한 광장이 여러 개나 있어도 거기 발을 딛을 생각을 못하는 길들여진 주민이었을 뿐이다. 광장은 뜻밖에 우리의 품으로 왔다. 2002년 월드컵이 시작된 것이다. 신경림 선생의 싯구처럼 &quot;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quot;고 축구도 모여서 보면 한층 더 재미있는 모양이다. 광화문 네거리에는 동아일보, 조선일보가 설치한 초대형 스크린이 있어 축구를 즐기기에 너무나 훌륭한 곳이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재미있지 않은가? 서울의 한복판에 앉아서 김밥 먹으며 축구를 본다는 게…. 어, 그런데 우리 선수들이 너무너무 잘하는 것이다. 주최국이니 16강은 가능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했지만 8강에, 4강에 승승장구하니 기쁠 수밖에. 예선에서 탈락했다면 겨우 세 번 모이고 말았을 것을 4강까지 올라가는 바람에 일곱 번이나 광장에 모일 수 있었다. 정부도 시민들이 모여서 즐기는 것을 막을 이유가 없었다. 포르투갈전에서 승리하고 난 뒤에는 자연스럽게 시민들이 밤늦도록 거리를 쏘다녔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사람들은 광화문과 시청을 매운 붉은 물결을 보며 이제 대한민국이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나게 되었다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그 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면 대한민국이 레드 콤플렉스를 벗어난 것 같지는 않다. 다만 시민들, 특히 젊은이들이 광장을 우리 것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광장에 모여 7번이나 웃고 떠들고 노래하고 춤췄던 사람들은 으레 광장은 우리가 모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수십만의 인파가 모여 뜨거운 밤을 보냈어도, 다음날 아침에 보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이 광장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광장을 즐긴 사람들이 뒷마무리도 잘 해 놓은 것이다. 이를 보며 모두들 언제든 우리가 광장을 아무 탈 없이 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졌을 것이다. 월드컵의 경험은 레드 콤플렉스를 몰아내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이제 광장은 바로 우리 자신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여중생 사건과 광장의 부활&lt;/SPAN&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DIV align=center&gt;
&lt;SCRIPT type=text/javascript&gt;
	&lt;!--
	 function photoSizeIB000007127() {
	  var tImg =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IB000007127&quot;);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BoxIB000007127&quot;).style.width = tImg.width+&quot;px&quot;;
	 }
	//--&gt;
	&lt;/SCRIPT&gt;

&lt;DIV class=photoCenter id=photoBoxIB000007127 style=&quot;WIDTH: 328px&quot;&gt;
&lt;TABLE class=photoCenter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id=photoIB000007127 src=&quot;http://ojsfile.ohmynews.com/image_file/8/021231_pys0310_7127.JPG&quot; onload=javascript:photoSizeIB000007127(); border=0&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9pt; COLOR: #666666; LINE-HEIGHT: 130%&quot; align=left colSpan=2&gt;&lt;!-- S: Fuction btns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80 align=right border=0 valign=&quot;top&quot;&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lt;A href=&quot;javascript:setRecommendCnt('IB000007127');&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추천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rcm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ArticleBlogWinOpen('IB000007127');&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블로그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blog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B000007127&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자세히 보기&quot;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detail_s.gif&quot;&gt;&lt;/SPAN&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uction btns --&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002년 마지막 밤 광화문에 미군장갑차에 숨진 효순.미선양을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class=box_man align=lef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권우성&lt;/SPAN&gt;&lt;/TD&gt;
&lt;TD align=right&gt;&lt;!-- S: first TAG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lass=box_tag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3px; PADDING-TOP: 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icon_tag.gif&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goTagNetwork('');&quot;&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irst TAG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DIV&gt;&lt;/DIV&gt;
&lt;P&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광장은 축제의 장이지만, 토론의 장이고 또한 슬픔을 나누는 장이기도 하다. 월드컵이 기쁨을 함께하여 기쁨을 두 배로 만드는 그런 광장을 찾아 주었다면, 그해 11월과 12월에 열린 미군 장갑차에 의해 희생된 두 여중생을 추모하는 촛불집회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서로 위로받고 치유해 주는 공간으로서의 광장을 우리에게 돌려주었다. 우리가 월드컵의 열기에 후끈 달아 있던 6월 13일 경기도 양주에서는 미군 장갑차에 길 가던 여중생 두 명이 치어 목숨을 잃는 불행한 사건이 일어났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사건은 일부 시민운동 단체와 지역의 또래 학생들이 끈질기게 문제 제기를 했지만 전국적인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그러던 차에 재판에 회부된 장갑차 운전 미군 병사들이 11월에 이르러 모두 무죄로 풀려나면서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길 가던 아이들이 둘이나 죽었는데 아무의 잘못도 아니라니, 그럼 그 때 그 길을 지나간 아이들 잘못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현실에 시민들은 할 말을 잃었다. 그때 앙마라는 아이디를 쓰는 청년이 인터넷으로 두 소녀의 넋을 기리는 촛불집회를 열자고 제안했다. 그 제안문에서 앙마는 &quot;우린 광화문을 걸을 자격이 있는 대한민국의 주인들입니다&quot;라고 강조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우리가 광장을 잃어버렸던 동안, 우리에게는 또 다른 광장이 생겨났다. 바로 인터넷이었다. 앙마의 제안은 인터넷을 통해 여기저기 퍼져 나갔다. 네티즌들은 이 글을 자기가 자주 가는 카페, 동호회, 커뮤니티, 클럽 등에 부지런히 퍼 날랐다. 아무런 주최도, 준비 단체도, 사전 계획도 없이 첫 번째 제안이 나온 지 사흘만에 광화문에 1만 개의 촛불이 타올랐다. 생각지 못한 민주주의를 우리는 시청 앞에서 다시 만났다. 한겨레21은 그때의 광경을 이렇게 적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FONT color=#996633&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즉석에서 앰프를 빌리고, 마이크를 빌리고, 사회자를 뽑고, 마치 양촌리 김 회장 잔칫집 풍경이었어. 프로그램이 뭐가 있었겠어. 그저 말하고 싶은 사람 앞으로 나와 &quot;미군 미워여&quot;, &quot;부시 싫어여&quot;, &quot;소파 허접해여&quot; 막 이러구 사람들은 박수치고…. 게다가 &quot;앞으로 일주일에 몇 번 모일까여 다수결로 결정합시다.&quot; 이러니까 사람들이 거수하고 그거 사회자가 카운트하더니 일주일 한번 집회로 쾅쾅 결정 내리고. 이거 진짜 골 때리는 풍경이었어. 근데 이게 진짜 민주주의거덩. 간접민주주의라는 거 투표권 한장이 고무신 하나랑 맞바꿔지는 웃긴 짬뽕인데, 사람들이 너나없이 발언하고 그 발언이 또 정책결정에 반영되고, 이거 진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삼촌 생전, 연애 수만큼 수백번 집회를 들락거려봤지만 이런 대규모 집회에서 이런 정경은 처음이었다. 이제 2500년 전 아크로폴리스가 광화문에 부활했다는 걸 알겠지' (12/5, 한겨레21 437호, &lt;떠나라, 그 감동의 메아리&gt;)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발랄한 응징이 넘치는 광장&lt;/SPAN&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DIV align=center&gt;
&lt;SCRIPT type=text/javascript&gt;
	&lt;!--
	 function photoSizeIA000205880() {
	  var tImg =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IA000205880&quot;);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BoxIA000205880&quot;).style.width = tImg.width+&quot;px&quot;;
	 }
	//--&gt;
	&lt;/SCRIPT&gt;

&lt;DIV class=photoCenter id=photoBoxIA000205880 style=&quot;WIDTH: 500px&quot;&gt;
&lt;TABLE class=photoCenter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id=photoIA000205880 src=&quot;http://ojsfile.ohmynews.com/down/images/1/luna_166909_1[205880].jpg&quot; onload=javascript:photoSizeIA000205880(); border=0&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9pt; COLOR: #666666; LINE-HEIGHT: 130%&quot; align=left colSpan=2&gt;&lt;!-- S: Fuction btns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80 align=right border=0 valign=&quot;top&quot;&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lt;A href=&quot;javascript:setRecommendCnt('IA00020588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추천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rcm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ArticleBlogWinOpen('IA000205880');&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블로그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blog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A00020588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자세히 보기&quot;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detail_s.gif&quot;&gt;&lt;/SPAN&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uction btns --&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탄핵무효 촛불행사' 사상 가장 많은 인파인 22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지난 3월20일 광화문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내려다본 촛불문화제 전경. 광화문-서울시의회-서울시청-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촛불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탄핵무효 촛불행사' 사상 가장 많은 인파인 22만여명의 시민이 모인 지난 3월20일 광화문 서울시청 앞 플라자호텔에서 내려다본 촛불문화제 전경. 광화문-서울시의회-서울시청-덕수궁 대한문 앞까지 촛불의 바다를 이루고 있다.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class=box_man align=lef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오마이뉴스 권우성&lt;/SPAN&gt;&lt;/TD&gt;
&lt;TD align=right&gt;&lt;!-- S: first TAG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lass=box_tag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3px; PADDING-TOP: 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icon_tag.gif&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goTagNetwork('');&quot;&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irst TAG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DIV&gt;&lt;/DIV&gt;
&lt;P&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로 광장을 되찾은 대중들은 1년이 조금 지나 다시 광장에 섰다. 노무현 대통령이 탄핵당한 것이다. 2004년 3월 12일, 탄핵이 가결된 날의 여의도는 절규와 통곡과 몸부림뿐이었다. 1991년 강경대 군이 전경에 맞아 죽고 난 뒤의 분신정국 같은 비극적인 일이 되풀이되는 것이 아닌가하는 걱정이 들 정도였다. 대중들도 분노와 참담함으로 광화문 네거리에 나왔다. 그런데! 먼저 나온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광장의 분위기는 영 딴 판이었다. 흥겨운 춤판이 벌어져 있고, 무대에서는 '부라보, 부라보, 아빠의 청춘' 같은 신나는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002년의 촛불시위 때 더 많은 인파가 모였지만, 이런 분위기는 아니었다. 아무리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지만 미선이·효순이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가 흥겨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러나 탄핵 때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우리가 다시 찾은 광장과 인터넷에서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광장에서는 발랄한 보복과 유쾌한 응징이 넘쳐났다. 탄핵반대 집회는 축제였다. 다가올 총선에서 민주주의의 승리를 확실히 보여줄 수 있다는 자신감은 내 손으로 뽑은 대통령이 탄핵당해 위기에 처해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리기에 충분했다. 경찰과의 긴장도 별로 없었다. 대중들은 승리를 예매해 놓았으니 느긋했고, 경찰에 대한 지휘권은 대중들이 구하려는 참여정부에 있었으니 대중과 경찰이 충돌할 일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대중들은 밤이 되면 다들 집으로 돌아가 느긋하게 잠을 잤다. 아직 광장은 대중들이 밤도 새고 잠도 자는 곳으로까지 진화하지는 못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008년의 촛불집회에서 대중과 광장은 정말 새롭게 거듭났다. 촛불은 처음 광장의 막내인 청계광장에서 시작되었다. 처음 여학생들이 청계광장에서 모이자는 글을 인터넷에 올렸을 때 누구도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그런데 만 명이 모였고, 모임이 발랄하고 재미있다보니 매일매일 모이게 되었고, 모이는 사람의 숫자도 늘어났다. 매일 청계광장에 모이기를 17번, 집회에서 외친 구호마냥 &quot;귓구녕에 공구리를 쳤는지&quot; MB는 소통이 안 되었다고 사과는 해도 대화는 하려하지 않았다. 친한 친구에게도 17번을 얘기했는데 아무 반응이 없으면 그 사이는 깨지기 마련이다. 누군가가 청와대로 가자고 외쳤고, 대열은 자연스럽게 청계광장을 빠져나왔다. 그렇다고 멀리 간 것은 아니었다. 그저 한 블록 옆의 광화문 우체국 앞으로 옮겼을 뿐이다. 경찰이 막아섰는데 대중들은 그것을 돌파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보이지는 않았다. 대신 대중들은 경찰저지선 앞에 주저앉았고, 집에 가려 하지 않았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처음에는 대중들이 시국토론을 벌이더니 한 쪽에서는 노래자랑 모드에 들어가고 다른 쪽에서는 친구들끼리 편의점에서 맥주캔 몇 개 사다가 홀짝이기 시작했다. 도시의 매연도 가라앉은 늦은 봄의 깊은 밤에 광화문 네거리에 주저앉아 맥주를 마시는 상큼함이라니.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 때도, 탄핵반대 집회 때도 이 광장이 우리 것이구나 하는 느낌이 들긴 했지만, 광화문 네거리에 퍼질러 앉아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고 보니 정말 이 광장은 우리의 것이었다. 6월 10일의 촛불집회에는 아마도 광화문 네거리부터 숭례문 광장까지 사람을 가득 채우면 모두 몇 명이나 들어가는지 시험해 보기위해 마련된 집회인 것 같았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어떤 카메라의 어떤 앵글도 그날 모인 사람들을 다 잡아낼 수 없었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 광장이라지만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을까? 통상적인 집회라면 민주노총이니 전교조니 한총련이니 하는 깃발들만 나부꼈겠지만, 이 날은 달랐다. 미선이 효순이 추모집회 당시의 깃발 논쟁이나 촛불집회 초기의 깃발 논쟁은 이미 의미를 잃은 듯싶었다. 정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이름도 생소한 인터넷의 다양한 동호회가 저마다 자기네 깃발을 개성있게 만들어 나왔다. 깃발이라도 없다면 저 엄청난 군중 속에서 자기가 속한 동호회를 어찌 찾을 수 있을까?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시위대가 경복궁 앞까지 진출한 5월 31일 밤은 한국전쟁 때를 제외하고는 아마도 사상최대의 인파가 노숙을 했던 날일 것이다. 광장이 거대한 국민MT장소로 변했다. 이제 사람들은 아예 캠핑준비를 해서 시청 앞 광장을 찾기도 했다. 집회도 하고, 시위도 하고, 토론도 하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공연도 하고, 동영상도 돌리고, 물건도 팔고, 서명도 받고, 술도 마시고, 잠도 자고, 싸돌아다니기도 하고, 광장은 참으로 별의별 사람들이 모여 별의별 짓을 다하는 그런 공간이었다. 그 많은 사람들은 왜 집에 가지 않았을까? 집보다 광장이 더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떤 영화도 흉내 낼 수 없는 극적인 역사가 우리 자신의 손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있었다. 대통령은 잘못 뽑았지만 광장에 발을 딛고 있는 한 우리는 행복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빼앗긴 광장&lt;/SPAN&gt;&lt;/STRONG&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DIV align=center&gt;
&lt;DIV align=center&gt;
&lt;SCRIPT type=text/javascript&gt;
	&lt;!--
	 function photoSizeIE001060659() {
	  var tImg =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IE001060659&quot;);
	  document.getElementById(&quot;photoBoxIE001060659&quot;).style.width = tImg.width+&quot;px&quot;;
	 }
	//--&gt;
	&lt;/SCRIPT&gt;

&lt;DIV class=photoCenter id=photoBoxIE001060659 style=&quot;WIDTH: 500px&quot;&gt;
&lt;TABLE class=photoCenter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id=photoIE001060659 src=&quot;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09/0529/IE001060659_STD.jpg&quot; onload=javascript:photoSizeIE001060659(); border=0&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BOTTOM: 10px; PADDING-TOP: 10px&quot;&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FONT-SIZE: 9pt; COLOR: #666666; LINE-HEIGHT: 130%&quot; align=left colSpan=2&gt;&lt;!-- S: Fuction btns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80 align=right border=0 valign=&quot;top&quot;&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lt;A href=&quot;javascript:setRecommendCnt('IE00106065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추천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rcm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ArticleBlogWinOpen('IE001060659');&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블로그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blog_s.gif&quot;&gt;&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img_pg.aspx?cntn_cd=IE00106065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title=&quot;자세히 보기&quot;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btn_detail_s.gif&quot;&gt;&lt;/SPAN&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uction btns --&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9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노제가 열릴 예정인 서울광장이 노 전 대통령을 추모하며 노란색 모자에 노란색 풍선을 든 시민들로 가득 차 있다.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class=box_man align=lef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남소연&lt;/SPAN&gt;&lt;/TD&gt;
&lt;TD align=right&gt;&lt;!-- S: first TAG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lass=box_tag style=&quot;PADDING-RIGHT: 0px; PADDING-LEFT: 2px; PADDING-BOTTOM: 3px; PADDING-TOP: 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ojsimg.ohmynews.com/images/articleview/icon_tag.gif&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A href=&quot;javascript:goTagNetwork('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quot;&gt;&lt;U&gt;&lt;FONT color=#0000ff&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lt;/SPAN&gt;&lt;/FONT&gt;&lt;/U&gt;&lt;/A&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E: first TAG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DIV&gt;&lt;/DIV&gt;
&lt;P&gt;&lt;U&gt;&lt;FONT color=#0000ff&gt;&lt;/FONT&gt;&lt;/U&gt;&lt;/P&gt;&lt;/DIV&gt;
&lt;P&gt;&lt;U&gt;&lt;FONT color=#0000ff&gt;&lt;/FONT&gt;&lt;/U&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촛불 시위는 비폭력의 힘을 보여주었다. 비폭력이었기에 경찰도 폭력적인 진압을 하기 어려웠고, 경찰의 폭력이 없는 안전한 축제였기에 사람들은 가족과 함께 나오고, 젊은 엄마들은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나왔다. 안전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 놓고 참여했고,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집회는 더 안전해졌다. 이렇게 탄력이 붙어가는 촛불집회를 MB정권은 견딜 수 없었다. 촛불집회에 워낙 많은 사람들이 모이다보니 일부 사람들 중에 경찰과의 저지선에서 약간의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정부와 수구언론은 이를 빌미로 촛불집회에 폭력집회라는 딱지를 붙이려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핑계였지만 5월과 6월 두 달간의 축제는 경찰이 마구잡이 폭력을 행사하면서 끝나기 시작했다. 경찰의 폭력에 밀려 시민들은 광장을 빼앗겼다. 이제 광장에는 보기 흉한 차벽이 세워졌다. 명박산성은 조롱거리였지만 우리의 광장을 뺑 둘러막아선 버스의 차벽은 우리의 가슴에 아픈 상처를 남겼다. 우리는 다시 광장을 빼앗긴 것이다. 광장을 빼앗긴 것은 대중들의 토론을 빼앗긴 것이고, 대중들의 소통을 빼앗긴 것이고, 대중들의 축제를 빼앗긴 것이고, 우리 모두의 민주주의를 빼앗긴 것이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대중들이 이 광장에 다시 선 것은 2009년 5월 29일, 노무현 대통령을 떠나보내기 위해서였다. 기쁨과 발랄함이 넘치던 광장은 눈물의 바다가 되었다. 장례기간 내내 차벽이 쳐있던 광장은 이날 딱 하루 열렸다. 1919년 고종황제가 돌아가셨을 때 슬픈 백성들은 이 광장을 찾았다. 그 흉악한 일제도 나라 잃은 백성들이 통곡할 공간마저 빼앗지는 않았다. 그런데 MB정권은 장례식 딱 하루만 광장을 열었을 뿐이다. 장례가 끝난 다음날인 5월 30일 새벽 경찰은 대한문 앞 빈소를 때려 부셨고, 광장에는 다시 차벽을 쳤다. 국상이 끝난 밤, 나는 광장에서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근 1년 만에 밟아 보는 정든 아스팔트였다. 누군가가 다시 광장에 선 감회가 어떠냐고 물어왔다. 나는 이렇게 답했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FONT color=#996633&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quot;이게 우리 광장인데, 우리 광장에 다시 서기가 이렇게 힘드네요. 노무현 대통령을 바치고서야 우리가 겨우 한번 이 광장을 밟아보네요. 이게 이렇게 비싼 땅이네요.&quot; &lt;/SPAN&gt;&lt;/FONT&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빼앗긴 광장, 빼앗겨서 더 소중한 광장, 텅 빈 광장의 구석에서 나는 다시 찾을 민주주의를 생각해본다. &lt;/SPAN&gt;&lt;/P&gt;
&lt;DIV class=autosourcing-stub&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출처 : &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185174&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김일성 허수아비 태웠던 시절로 가나&lt;BR&gt;광화문 아스팔트, 그렇게 비싼 땅이었나 - 오마이뉴스&lt;/FONT&gt;&lt;/U&gt;&lt;/A&gt;&lt;/DIV&gt;
&lt;DIV&gt;&lt;/DIV&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광장&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장&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곽병찬칼럼] 근원적 처방, 오로지 의(義)뿐</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396"/>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396</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05T14:50:03Z</updated>
	    <published>2009-08-05T14:50:0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quo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하필왈리(何必曰利)!” 만나자마자 나라를 이롭게 할 방도를 묻는 양혜왕에게 맹자 역시 이렇게 되받는다. ‘왕께서는 어찌 잇속을 말씀하십니까.’ &lt;맹자&gt;의 첫 장 첫머리를 이루는 내용이다. &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왕께서 내 나라의 이익만을 생각한다면, 대부&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들도 마찬가지로 내 영지의 이익만 생각하고, 선비나 서민들도 이익만 생각할 것입니다. 위아래가 서로 다투어 잇속만 추구한다면 나라는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뻘쭘해진 양혜왕을 향한 경고는 계속된다. “만승의 천자를 시해하는 자는 필시 천승의 제후일 것이고, 천승의 제후를 시해하는 자는 백승의 대부일 겁니다, 모두가 더 갖기 위한 것입니다. 의를 경시하고 잇속을 중시한다면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어진 자로서 자기의 부모를 저버린 자가 없고, 의로운 자로서 임금을 무시한 자가 없습니다. 왕께서는 오직 인과 의를 말씀할 일이지 어찌 잇속을 말씀하십니까.”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달이 해를 삼키는 불온한 시대에 인과 의를 말하는 것이 부질없다. 정권은 족벌언론의 하수인이 되어, 족벌언론은 자본의 주구가 되어 제각각 오로지 잇속만 따지는데, 예수와 공맹이 다시 나타나 공의와 인의를 외친들 누가 들을까. 그러나 그 자신이 여당 지도부에 의를 공직의 신조로 제시한 것이 불과 7개월 전이니, 생판 모른 척 외면하지는 못할 것이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뤼순 감옥에서 사형 집행을 기다리던 안중근 의사가 유필로 남긴 &lt;논어&gt; 헌문편의 한 구절이다. 잇속 앞에선 의로움을 생각하고, 국가(혹은 이웃)의 위태로움 앞에선 목숨을 던지라는 것이니, ‘오로지 의’뿐이라는 맹자의 가르침과 정확히 통한다. 평생 잇속을 추구해 성공했고, 잇속의 유혹을 앞세워 최고 권력까지 획득한 그가 이 말을 꺼낸 것이 불가사의했다. 그러나 이 문장만큼 적절했던 충고는 없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명박 정부가 제시하고 추구했던 목표는 잇속이었다. 그래서 요람&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에서 무덤까지, 학교에서 공동체까지 시장경쟁체제로 바꿔왔다. 초등생부터 경쟁을 가르쳐야 한다는 ‘리틀 엠비’ 공정택 서울시교육감의 발언은 그 상징이었다. 그 결과 집권 1년 반 만에 사회&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전쟁 상태가 되어버렸다. 배려와 신뢰, 관용과 존중은 찾아볼 수 없게 됐다. 오로지 잇속을 둘러싼 싸움뿐. 맹자의 경고 그대로였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자본은 수많은 영세 서민을 삶터에서 내쫓았고, 정권은 몸부림치는 이들의 절규를 불태워 버렸으며, 공권력은 그들의 저승 가는 길마저 가로막았다. 눈먼 자본과 무지한 정권의 잘못으로 일터가 파탄났는데도, 그 책임은 온전히 노동자에게 돌아갔고, 그나마 일터를 지키려는 이들과 그 가족은 벼랑 끝으로 떠밀린다. 온갖 방법으로 시민의 입을 틀어막으려 하더니, 이젠 눈과 귀를 가리려는 법안까지 날치기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엊그제 이 대통령은 근원적 처방을 재론했다. 사실 그 처방전이 필요한 사람은 국민이 아니다. 늪 속으로 깊이 빠져드는 그 자신이다. 잇속을 앞세운 만승의 천자는 천승의 제후에게 시해당한다고 맹자는 경고했다. 처방은 멀리 있지 않다. 중도실용이니 서민행보니 말장난이나 겉치레로 호들갑 떨 일이 아니다. 7개월 전 그가 설교한 바로 그 견리사의를 상기하면 된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이란 이웃에 대한 사랑이요, 의란 그 사랑을 사회적으로 확장한 것이다.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해줬다고 하는, 바로 그 가난하고 약한 이들이 존중받으며 안정된 삶을 살도록 부축하는 것이다. 잇속을 위해 날뛰는 족벌언론과 자본의 횡포를 막는 것도 마찬가지다. 헌문편은 이렇게 이어진다. “오래된 약속이라도 잊지 않고, 평생의 말로 여기고 이행하라.”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편집인 곽병찬&lt;/SPAN&gt;&lt;/P&gt;&lt;!--/DCM_TITLE--&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견위수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견위수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연목구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연목구어&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사법부-회한과 오욕의 역사]제12회- 긴급조치 1호ㆍ4호와 사법권 침해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395"/>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395</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05T14:41:22Z</updated>
	    <published>2009-08-05T14:41:2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9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width=15&gt;&lt;!-- Padding - Width --&gt;&lt;/TD&gt;
&lt;TD&gt;&lt;!-- 사진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09/0804/6000283363_20090804.JPG&quot; border=0&gt; &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3&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사진 --&gt;&lt;!-- 사진설명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lass=movie_text style=&quot;WORD-BREAK: break-all&quot; bgColor=#8f8f8f&gt;» 1974년 11월 민청학련 사건 구속자 가족들이 거리시위를 벌이고 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항소를 포기했다. 대법원을 믿지 못했던 것이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47c&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영장없이 체포…법원 뺀채 군사법정으로&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3권이 대통령 손안에 ‘판검사는 들러리’&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학내 집회 금지하고 결석만 해도 ‘중형’&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03명 구속에 징역형량 합치면 1800년 넘어&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긴급조치라는 흉물&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박정희가 종신집권을 꿈꾸던 유신시절은 긴급조치의 시대였다. 유신쿠데타 15개월 후인 1974년 1월 8일 긴급조치 1호가 선포된 이래 박정희가 죽고 1979년 12월 8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기까지 2159일간 국민들은 긴급조치라는 살생흉기에 의해 협박을 받았다. 유신으로 국내의 민주세력을 제압한 박정희는 일본과 미국&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을 오가며 반유신운동을 벌이는 김대중 전 대통령 후보의 입만 막을 수 있다면 유신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를 완전히 재울 수 있다고 생각하고, 1973년 8월 8일 백주대낮에 일본에서 그를 납치하여 왔다. 이 사건은 유신쿠데타 이후 1년 가까이 잠잠하던 국내의 민주화운동에 다시 불을 붙였다. 10월 2일 서울 문리대의 데모를 시발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그런데 정보부의 통제 때문에 당시의 신문방송은 학생시위를 보도하지 못했고, 젊은 기자들의 불만은 고조되었다. 11월 12일 기독교&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방송 기자들의 언론자유수호 결의문 채택에 이어 20일 동아일보 기자들이 모든 언론이 용기와 신념으로 외부압력을 배척하자는 요지의 언론자유수호 선언을 발표했다. 이런 움직임은 한국일보, 조선일보, 중앙일보로 번져갔다. 12월 24일에는 함석헌, 장준하,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등을 중심으로 개헌청원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유신철폐나 독재타도가 아닌 개헌청원서명이라는 너무나 온건한 방식이었지만, 박정희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개헌서명이 급속히 확산되자 박정희는 12월 29일 담화문을 통해 서명운동은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힌 불순분자들의 황당무계한 행동”이라고 비난했다. 해가 바뀌어 1974년 1월 7일 이희승, 이헌구, 김광섭, 안수길, 이호철, 백낙청 등 문인과 지식인 61명은 집단적으로 개헌서명에 동참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박정희가 긴급조치라는 흉기를 선보인 것은 바로 그 다음날인 1월 8일이었다. 긴급조치 1호는 유신헌법을 부정ㆍ반대ㆍ왜곡ㆍ비방하는 일체의 행위, 유신헌법의 개정이나 폐지를 주장, 발의,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한 사람과 긴급조치를 비방한 사람은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 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재판하여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는 내용이었다. 박정희는 같이 발표한 긴급조치 2호에서 긴급조치 위반자의 심판을 위하여 군법회의법에 의한 군법회의와는 별도로 비상보통군법회의와 비상고등군법회의를 설치한다고 규정했다. 비상군법회의의 설치에 따라 특정한 형사사건에 관한 심판권한이 법원의 권한에서 제외된 것이다. 긴급조치로 중앙정보부는 반정부인사를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하여, 구속기간의 제한을 받지 않고 수사하는 것이 가능해졌고, 비상군법회의 관할사건의 정보, 수사 및 보안&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업무를 조정, 감독하는 절대적인 권한을 부여받았다. 긴급조치는 대통령이 자기가 처벌하고 싶은 행위의 구성요건과 형량을 정할 뿐 아니라 재판을 하는 기관까지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그야말로 대통령 1인의 손에 입법, 사법, 행정의 3권 모두 쥐어준 것이었다. 긴급조치의 시대에는 국회도 사법부도 그저 장식물에 불과했다. 헌법의 구성원리를 깡그리 무시한 유신‘헌법’은 긴급조치가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명시하여 위헌시비&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가능성을 차단했다. 박정희는 껄끄러운 판사들은 모두 목을 쳤고, 사법부에 대한 일체의 권한을 틀어쥐었지만 여전히 사법부를 거추장스러워하여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했다. 이제 유신체제 하에서 국민들은 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정보부에 의해 영장 없이 체포되어 법관이 아닌 군인에 의해 군법회의에서 재판받는 것은 ‘합헌’이 되었다. 이것이 유신체제의 본질이었다.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B&gt;&lt;/FONT&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정찰제 판결&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박정희 정권은 긴급조치라는 흉기로 겁만 준 것이 아니라 흉기를 실제로 휘둘렀다. 긴급조치 공포 후에도 개헌서명운동이 중단되지 않자, 정보부는 1974년 1월 15일 서명운동을 주도한 장준하 &lt;사상계&gt; 주간과 백기완 백범사상연구소장을 구속했다. 지금은 한나라당 윤리위원장이 된 인명진 목사와 뉴라이트 전국연합의장을 지낸 김진홍 목사도 이때 구속되었었다. 그리고 헌법개헌지지 성명에 참여한 이호철과 임헌영 등은 1월 26일 문인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긴급조치 위반자에 대한 재판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긴급조치 1호의 첫 번째 위반자인 장준하와 백기완 두 피고에 대한 재판은 기소에서 선고까지 겨우 1주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검찰의 구형 다음날 구형량 그대로 선고가 이루어지는 군법회의를 가리켜 한승헌 변호사&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는 “대한민국의 ‘정찰제’는 백화점의 상관행이 아닌 군법회의 판결에서 최초로 확립되었다”고 야유했다. 삼각지 국방부 청사 부지 내에 설치된 군법회의의 풍경을 &lt;법조야사&gt;는 “당시 군법회의 법정에는 별 셋의 심판관과 영관급 장교인 법무사&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그리고 중앙정보부 요원이나 군재판 관계자, 그리고 계호 및 정리임무를 띤 헌병들이 감시자로 버티고 있어 한 명씩 차출되어 온 판사와 검사는 들러리에 불과했다”고 전했다. 헌법을 고치자고만 해도, 긴급조치를 비판하기만 해도 잡아들이는 악법을 갖고, 군인재판장이 재판하는 법정을 보며 변호인이나 방청객&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들은 “이게 재판이냐, 개판이지”라고 분노를 터뜨리기도 하고 “그러길래 재판이 아니라 ‘회의’일 뿐”이라고 야유를 보내기도 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긴급조치 4호&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긴급조치 1호에도 불구하고 반유신운동의 기세를 꺾이지 않았다. 그러자 박정희는 4월 3일 한층 살벌한 긴급조치 4호를 공포했다. 긴급조치 4호는 이른바 민청학련과 관련된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고, 교내외의 집회ㆍ시위ㆍ성토ㆍ농성 등을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경우, 심지어 학생들이 정당한 이유 없이 출석하지 않거나 수업과 시험을 거부하여도 사형ㆍ무기징역ㆍ5년 이상의 유기&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악법이었다. 긴급조치 4호 역시 1호와 마찬가지로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ㆍ구속하여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하도록 되어 있었다. 박정희 정권은 민청학련이 조총련ㆍ인혁당재건위 등의 배후조종을 받으며 국가변란을 기도하였다고 주장하면서, 1034명을 검거하여 253명을 구속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물고문, 전기고문, 구타 등을 당하며 허위자백을 강요받았다. 심지어 법정에서 공소사실을 부인하면 검찰관이 구치소까지 찾아와 구타하는 일까지 있었다.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들은 재판이 시작될 때까지 전혀 가족들을 면회할 수 없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무장한 헌병이 지키고 서 있는 군법회의장은 삼엄하다 못해 살벌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피고인들은 주눅 들지 않았다. 비상시국에 학생들이 공부는 하지 않고 정치적 주장을 펴면 어떡하냐는 재판부의 말에 학생들은 이 위기상황에 군인들이 나라를 지키지 않고 무슨 재판놀음이냐고 오히려 꾸짖었다. 서울 상대생 김병곤은 사형을 구형받은 뒤 “영광입니다”라고 답하는 기개를 보였고, 나중에 &lt;한겨레&gt; 편집국장이 된 김효순은 사형을 구형받지 못하여 친구들을 보기 민망하다고 말했다. 학생들을 배후조종한 혐의로 구속된 박형규 목사는 “가능하다면 학생들보다 가벼운 벌이 아닌 무거운 벌을 주기 바란다”고 최후진술을 했다. 유신정권은 피고인당 가족 1명의 방청을 허용한다고 했지만 가족에 대해 공판날짜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고, 막상 재판날이 되면 정문에서의 까다로운 신분확인 절차 때문에 방청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재판장은 늘 꽉 찼다. 가족들은 입장을 못해도 정보부원 등 기관원들이 방청석을 가득 메우고 있었던 것이다. 별을 단 재판장은 군사작전마냥 일사천리 식으로 재판을 진행하려 하였지만, 학생들은 애국가를 제창하고 구호를 외치며 재판진행을 방해했다. 재판에서는 자주 피고인 전원&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에 대해 퇴정명령이 내려지고 휴정과 소란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결국 피고인 7명에게 사형, 7명에게 무기징역, 12명에게 징역20년 등 중형이 선고되었다. 김영삼 정권 때 청와대 교문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정남에 따르면 긴급조치 1호와 4호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이 모두 203명인데, 사형과 무기징역은 빼고 유기징역을 선고받은 사람의 형량만 합쳐도 1800년이 넘는다고 한다. 3ㆍ1운동의 주모자였던 손병희가 일제의 법정에서 받은 형량이 징역 3년이었던 것에 비하면 참으로 엄청난 형량이 아닐 수 없다. 군법회의에서 이런 중형을 받고도 피고인들의 절반 가까이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았다. 피고인들이 상고하지 않은 이유는 상고해봤자 소용없다는 불신 때문이었다. 당시 사형판결을 받고도 항소를 포기한 시인 김지하는 “사형선고 받은 놈이 항소 포기하는 것 봤어요? 얼마나 웃기는 판결이라 생각했으면 항소를 포기했겠어요”라고 회고했다. 대법원장 민복&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기는 1975년 신년사에서 지난해 후반에 갑자기 사법부에 대한 불신의 소리가 국민 일부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있었다면서 이러한 불신의 소리는 오로지 사법부의 소임에 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공허한 변명을 했다. 박정희가 군법회의에서 멋대로 한 재판에 대하&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여 그나마 대법원 상고의 길을 열어둔 것은 사법부에 대한 배려였을까, 모욕이었을까? 대법원은 민청학련의 배후로 조작된 인혁당재건위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사법살인으로 박정희의 ‘배려’에 화답했다. 사법부의 회한과 오욕의 역사는 박정희가 제작과 감독을 맡았지만 사법부의 손으로 쓰인 것이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한국사&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유신체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유신체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긴급조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긴급조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군사재판체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군사재판체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개판체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개판체제&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6)흐미의 고향 홉드에서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394"/>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394</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8-05T14:18:11Z</updated>
	    <published>2009-08-05T14:18:1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DIV id=CLtag&gt;&lt;STRONG style=&quot;COLOR: #6b6b6b&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ㆍ유목 애환 풀어내듯 애절한 ‘초원의 선율’&lt;/SPAN&gt;&lt;/STRONG&gt;&lt;!-- SUB_TITLE_END--&gt;&lt;BR&gt;&lt;BR&gt;&lt;!--imgtbl_start_1--&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1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04/20090804000855_r.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현악기&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톱쇼르(좌)와 에킬(우).　&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1--&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 음악하면 그 독특한 발성법으로 널리 알려진 성악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흐미(후미)다. 홉드시에서 동쪽으로 150㎞쯤 가면 해발 3797m의 잘간트하일한산 기슭에 전형적인 초원의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난다. 흐미로 유명한 찬드마니 마을이다. 이 마을은 역대의 유명한 흐미 가수들을 많이 배출했으며, 대대로 가수 전통을 이어온 가족이 있는가 하면 온 가족이 흐미 가수인 경우도 있다. 물론 산과 초원, 물과 바람이란 자연환경이 천부적인 재능을 부여하겠지만, 여기에 더해 마을 사람들은 전통에 대한 크나큰 자부심을 간직하고 내공을 쌓아감으로써 비로소 그토록 어렵다는 성악의 높은 경지를 계승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좁게는 이 마을을, 넓게는 이 성악을 흥행시킨 홉드 일원을 흐미의 고향이라고 한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흔히들 스위스의 알프스 지방에 사는 주민들이 부르는 요들을 독특한 창법의 노래라고 알고 있으며, 요들단의 세계 일주 공연은 일찍부터 명성이 자자했다. 낮은 가슴소리와 높은 가성(팔세토)이 자주 또는 빨리 교체되는 모음창법(母音唱法)이 특징인 이 노래가 보통 창법이 아닌 어렵고 독특한 창법이라는 것은 음악계의 공인된 사실이다. 그러나 흐미는 요들보다도 더 어렵고 미묘한 창법이라는 것도 공인된 사실이다. 흐미는 입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목청과 혀로만 뱃속의 깊은 소리를 끌어내는 창법이다. 창법에는 듣기만 해도 의아스러운 콧소리, 입과 콧소리, 성대소리, 가슴소리, 몸통소리 등 다섯 가지가 있다.&lt;/SPAN&gt;&lt;BR&gt;&lt;BR&gt;&lt;!--imgtbl_start_2--&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1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04/20090804000856_r.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 악기 중 가장 널리 쓰이는 현악기 마두금.　&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2--&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처음 들었을 때는 콧소리가 많아서 콧노래구나 하고 착각했는데, 자주 들어보니 골격음악의 앞뒤에서 그 음을 꾸며주는 장식음인 시기새가 매우 다양해 요들보다 훨씬 감미로운 음악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나라 음성학회를 비롯해 세계 여러 나라 음악계에서는 일찍부터 이 독특한 창법에 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계속하고 있다. 그러나 모창마저도 하기 어렵다고 한다. 동행하는 현지 안내원에게 물어보니, 흐미랍시고 하는 사람은 1000명 중 한명 꼴이지만, 제대로 하는 사람은 몇 안 된다고 한다. 그리고 여기 홉드 지방의 흐미가 가장 전통적인 것이지만, 지방마다 창법이 조금씩 다르다고 한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산 정상의 흐미’ ‘알타이 찬가’ ‘항가이 찬가’ 등이 있다. 그 독특한 발성과 창법으로 하여 흐미야말로 음악에 대한 몽골의 세계사적 기여라고 평가해 마땅할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예로부터 몽골사람들에게 음악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그 자체다. 유목민인 그들은 드넓은 초원에서 유목하면서 살기 때문에 모여 살거나 정착하지 않고 개별적으로 부단히 이동하면서 살아간다. 이런 환경에서 그들은 음악을 언어처럼 서로의 소통을 가능케 하는 하나의 수단으로 사용한다. 또한 그들의 생활은 간단없이 부지런히 일을 해야 살아갈 수 있는 정착민들과는 달리, 일단 목축을 풀밭에 풀어놓고 나면 여유작작한 여가가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여가를 때우는 데는 음악이 그만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음악을 즐기게 될 뿐만 아니라 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기대와 신앙을 갖게 된다.&lt;/SPAN&gt;&lt;BR&gt;&lt;BR&gt;&lt;!--imgtbl_start_3--&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20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04/20090804000857_r.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헨게륵(북).　&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3--&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들은 음악의 선율이야말로 모든 사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독특한 언어라고 인식해 왔다. 유목민들은 새끼를 잃은 어미를 달래 다른 새끼에게 젖을 주게 하려 할 때나, 새끼를 멀리하는 어미로 하여금 자신의 새끼를 받아들이게 하려 할 때 언제나 악기를 타고 그 가락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이처럼 사람의 입, 즉 말로 달래지 못한 것을 음악이라는 또 다른 입, 즉 가락으로 가축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고 움직일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사람의 말을 ‘바가 헬’ 즉 ‘작은 입’이라 하고, 음악의 입(가락)을 ‘이흐 헬(에헬)’ 즉 ‘큰 입’이라고 한다. 정말로 유머적인 유목민다운 삶의 비유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사람들은 음악에 대한 이해가 상당히 다양하고 폭이 넓다. 자연계의 여러 가지 소리들을 음악에 포함시키고 음악으로 승화시킨다. 경전을 낭독하는 콧소리, 축복해주는 외침소리,&amp;nbsp;명상&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중의 중얼거림, 동물의 울음소리를 모방한 소리 등도 죄다 음악에 포함시킨다. 그래서 그들은 새 소리나 말 발굽소리, 물소리 같은 자연계의 소리를 즐겨 흉내낸다. 여기에는 이러한 자연의 모방을 통해 자연과 소통하고 자연에 동화함으로써 자연의 극락으로 갈 수 있다는 신조(神鳥) 신수(神水)의 심오한 철학이 바탕에 깔려있다. 자연현상을 모방한 음악은 초자연적 힘을 발휘하며 새는 하늘 높이 날고 물은 지하세계로 통하는 길을 터주기 때문에 새나 물의 소리를 모방한 음악은 곧 인간의 영혼을 극락세계로 인도한다고 믿는다.&lt;/SPAN&gt;&lt;BR&gt;&lt;BR&gt;&lt;!--imgtbl_start_4--&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1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04/20090804000859_r.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국의 산조 가야고와 비슷한 야탁.　&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의 음악은 성악곡이 주류를 이루며 순수 기악곡은 드물다. 우리나라의 정선아리랑처럼 자유리듬으로 음악적 변화를 즉흥적으로 주기 때문에 선율은 비교적 단순하지만 가락은 여러 가지 장식음으로 꾸며진다. 몽골 음악은 기본적으로 무반음 5음 음계를 바탕으로 하는데, 이 점은 우리나라 음악과 비슷하다. 지역에 따라 유반음 6음 음계나 유반음 5음 음계 또는 7음 음계도 사용하고 있다. 노래는 속요풍(俗謠風)의 노래, 오락의 노래, 의식의 노래 등으로 나뉜다. 속요풍의 노래로는 ‘목양(牧羊)의 노래’ 등이 있고, 오락의 노래로는 나담제에서 부르는 ‘씨름 응원가’가 있으며, ‘성 칭기즈칸 노래’ 같은 것은 의례 때 부르는 의식의 노래에 속한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가요에는 우리나라 판소리와 비슷한 것이 있어 주목을 끈다. 그것이 바로 올린도라고 하는 서사적인 긴 노래다. 이것은 중앙아시아의 영웅 이야기 전통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2만행이 넘는 긴 가사가 있는데, 노래와 노래 사이에는 우리나라 판소리처럼 다른 대목으로 넘어가기 전에 자유리듬으로 사설을 엮는 그러한 아니리 대화체를 삽입하기도 한다. 선율과 리듬은 이야기 속에서 전개되는 싸움이나 슬픔, 기쁨, 말 타기 같은 장면을 상황에 맞게 즉흥적으로 엮어가면서 연주를 이끌어간다. 악기 반주는 가수에 따라 넣기도 하고 빼기도 한다. 우리나라 판소리는 소리꾼과 고수 두 사람이 엮어가지만, 올린도는 가수가 노래와 말, 악기 반주를 혼자 담당하는 비교적 단출한 편성이다.&amp;nbsp;&lt;/SPAN&gt;&lt;BR&gt;&lt;BR&gt;&lt;!--imgtbl_start_5--&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1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04/20090804000860_r.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현악기 돔브르(좌)와 슈드투르(우).&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5--&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몽골의 악기는 크게 전통악기와 외래악기의 두 종류로 나뉜다. 고유의 전통악기로 호가(胡茄, 피리의 일종)나 호각(胡角, 뿔피리의 일종) 등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서 없으며, 남아 있는 전통악기로는 찰현 악기인 모린쿠르와 발현 악기인 야탁(한국 산조 가야고와 비슷)과 샨드즈(3현), 타현 악기인 요오천(한국의 양금과 같음) 등이 있다. 마두금(馬頭琴, 모린 호르)을 비롯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악기의 대부분은 외부에서 들어온 것이기는 하나 실정에 맞게 개조한 것들이다. 마두금은 아랍의 라바브를 본떠서 만든 것이고, 호궁(胡弓)은 거란의 해금&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奚琴)을 개조한 것이다. 원대에는 멀리 아랍이나 이란·티베트에서, 명대와 청대에는 중국에서 여러 가지 악기가 유입되어 기악합주까지 가능했다. 합주악기로는 12현의 쟁(箏)과 중국의 3현, 운라(雲라), 동각(銅角), 피리, 북, 퉁소, 양금 등이 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외국 악기를 받아들여서 주체적 정서에 맞게 창의적으로 개조함으로써 오랫동안 널리 애용되고 있는 악기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거의 전통화된 마두금이다. 마두금은 사람뿐만 아니라 산과 물, 식물과 동물,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이 모든 것을 일깨우고 번성케 하며 기쁘게 하고 죽음까지도 멀리하게 한다고 믿고 있다. 그래서 마두금 소리가 나지 않는 곳에서는 다툼이 자주 일어나고 어른들은 성미가 급해 모든 것에 신경질적이며 아이들은 겁이 많아 울어대기가 일쑤라고 한다. 가정에서 가축이 죽거나 무슨 자연재해를 입게 되면 ‘천공의 문 닫기’란 곡조를 연주하거나 벽사진경(피邪進慶)의 의례를 거행하기도 한다. 마두금을 연주하는 가정에는 좋은 수말과 수낙타의 축복이 내려진다고도 믿는다. 이런 유의 악기로는 마두금말고도 지공(指空, 구멍)이 세 개 달린 종적(縱笛, 세로 부는 피리)이 있는데, 매해 정월 초하루에서 초사흘까지 사흘 동안 불면 그해의 액운을 몰아낸다고 한다.&lt;/SPAN&gt;&lt;BR&gt;&lt;BR&gt;&lt;!--imgtbl_start_6--&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3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04/20090804000858_r.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마두금과 피리를 연주하는 악사. (샤리브 작 &lt;몽골의 하루&gt; 중, 1911년, 몽골국립자니바자르기념미술관 소장).　&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6--&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마두금은 관련 전설이나 민담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악기임을 알 수 있다. 전설에 의하면 마두금을 만든 사람은 차하르 초원의 어린 목동 쑤허다. 어느 날 귀가하는 길에 버려진 망아지를 발견하자 안고 돌아온다. 정성껏 키운 덕에 망아지는 모두의 부러움을 사는 흰 준마로 자란다. 어느 해 봄 친왕이 개최한 경마대회에서 단연 우승한다. 우승자 쑤허가 가난뱅이 목민인 줄 알고 난 친왕은 당초 우승자에게 딸을 주어 부마로 삼겠다던 언약을 팽개치고 쑤허더러 돈 몇 푼에 백마를 팔라고 강요한다. 거절하자 쑤허는 뭇매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다. 그러던 어느 날 백마는 여러 개의 화살이 꽂힌 채 피땀을 흘리며 쑤허를 찾아온다. 그러나 심한 상처로 다음 날 아침 숨을 거두고 만다. 알고 보니, 사악한 친왕은 빼앗은 백마를 타고 거들먹거리려다 백마에게 내동댕이당하고 만다. 백마는 화살을 맞으며 도망쳐 쑤허를 찾아온 것이다. 애마를 잃고 비통한 나날을 보내던 쑤허가 어느 날 밤 꿈결에 살아있는 백마를 만난다. 백마는 함께 있으려면 자신의 힘줄과 뼈로 거문고를 만들라고 당부하고는 사라진다. 꿈에서 깨어난 쑤허는 백마의 분부대로 힘줄과 뼈, 꼬리로 거문고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초원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는 마두금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마두금에 관한 전설은 여러 개가 있는데, 그 중 하나만 더 소개하면, 옛날 몽골 동쪽에 남질이라는 의적(義賊)이 있었는데 서쪽 변방에서 군 생활을 하다가 그곳 공주와 사랑에 빠진다. 군 생활을 마치고 귀향하는 남질에게 공주는 ‘조논 하르’(검은 준마)라는 겨드랑이에 신비의 날개가 달린 명마를 선물&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다. 남질은 명마를 타고 밤이면 공주를 만나러 다닌다. 이를 시기한 한 모략꾼 여인이 야음을 타 명마의 날개를 가위&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로 싹둑 잘라버린다. 그러자 말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슬픔에 잠긴 남질은 명마의 머리를 본떠 나무로 오늘 우리가 보는 모양의 마두금을 만들었다고 전한다.&lt;/SPAN&gt;&lt;BR&gt;&lt;BR&gt;&lt;!--imgtbl_start_7--&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3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8/04/20090804000861_r.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돔브르를 연주하는 매 사냥꾼 아다이씨.&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7--&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러한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섭리를 간직하고 있는 마두금은 그 전설에서 이미 모양새를 예시하고 있다. 마두금은 현악기로서 나무로 만든 사다리꼴 몸통 양면에는 나무판이나 염소 가죽을 덧붙인다. 몸통 윗부분에 긴 자루가 꽂혀 있고 그 자루 끝에 말머리가 조각되어 있다. 이런 구조 때문에 마두금이라고 부른다. 말머리 바로 아래에는 쐐기 두 개가 양쪽으로 튀어 나왔다. 줄이나 활은 모두 말총으로 만들며 은은하고 부드러운 소리가 나기 때문에 ‘초원의 첼로’라고도 한다. 흘러나오는 소리는 한을 풀어내듯 깊고 애절하다. 마두금에 맞춰 부르는 몽골 민요는 우리나라 정선아리랑처럼 무장단 리듬이 대부분이다. 어미를 잃은 말이 주인이 연주하는 마두금 소리를 들으면 흥분을 가라앉히고 잠이 든다고 한다. 그만큼 마두금은 서정적이고 호소력이 뛰어난 악기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밖에 바람이나 강물 소리, 뻐꾸기나 아이들의 울음소리 등 자연의 소리를 그대로 내는 초르나 서사시 연창에 단골로 등장하는 톱쇼르 같은 가슴을 울리는 악기도 있다. 실로 유목민들은 ‘큰 입’(이흐 헬, 즉 음악)으로 세계를 향해 크게 말하는 통 크고 낭만적이며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정수일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gt;&lt;/SPAN&gt;&lt;!-- BODY END --&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자연의 소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자연의 소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가슴으로 부르는 노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가슴으로 부르는 노래&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십만양병설 허구론’ 이덕일씨 재반론</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393"/>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393</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7-30T13:11:04Z</updated>
	    <published>2009-07-30T13:11:0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FONT color=#1153a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오향녕 박사의 반론&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1153a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A href=&quot;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67319.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67319.html&lt;/A&gt;&lt;/SPAN&gt;&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1153a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gt;&lt;FONT color=#1153a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십만양병설 조작’ 주장은 오류”라는 역사학자 오항녕 박사의 반박(&lt;한겨레&gt; 7월23일치 21면)에 대해 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lt;/SPAN&gt;&lt;/FONT&gt;&lt;/A&gt;&lt;FONT color=#1153a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소장이 재반박의 글을 보내왔다.&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47c&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B&gt;&lt;/FONT&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47c&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송시열 등 후대 창작&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설이 더 개연성&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기축옥사&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는 서인의 정치공작 사건&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서인~노론사상&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옹호는 반시대적 발상&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오항녕 박사는 ‘율곡 이이가 말한 적이 없는 십만양병설은 제자들이 창작했다’는 필자의 주장을 반박했다. 이런 반론을 제기하려면 이이가 생전에 이를 주장했다는 1차 사료&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적 근거를 제시하면 간단한데 서지학자처럼 문정(文靖)이니 문성(文成)이니 하는 판본의 문제를 장황하게 서술해 논점을 흐렸다. 정작 십만양병설의 근거에 대해서는 ‘선조 7년(1574) 이이가 황해감사로 부임해 황해도의 군적(軍籍: 군사 명단)을 전국에서 가장 잘 정비했다는 평을 받았다’면서 “그런 이이가 선조 16년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십만양병’을 주장하는 것이 상식적으로 어색한 일일까요?”라는 것이 전부이다. 황해도의 군적을 잘 정비한 것과 십만양병 주장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일이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이의 제자 김장&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생(1548~1631)을 비롯해 십만양병설을 언급한 서인들이 모두 ‘일찍이(嘗) 경연에서’라고 모호하게 서술한 것이 송시열(1607~1689)의 ‘율곡연보’에서는 ‘계미년(1583: 선조 16년) 4월’의 일로 구체화되었다. 김장생이 ‘일찍이’라고 모호하게 창작한 시기를 정확히 임란 10년 전의 일로 특정해 선견지명이 있는 성인으로 만들려는 의도였다. 송시열은 ‘이이가 10만 군사를 길러 도성에 2만, 각 도에 1만명씩을 배치하되 호역(戶役: 세금&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을 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고 서술했다. 십만양병설을 주장했다는 선조 16년 병조판서 이이는 변방을 공격한 여진족 이탕개를 막을 군사가 부족하자 육진에 3년간 자원 근무하면 서자들은 과거 응시 자격을 주고, 천인들은 양민으로 신분을 상승시켜 군사를 모으자는 방안을 제시했으나 거부당했다. 이런 상황에서 십만양병을 주장하고 호역 면제도 주장했다는 것은 현 국방부 장관이 국세 징수는 20% 이상 삭감하되 군사비는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천% 이상 올려 군사를 600만명으로 늘리자고 주장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amp;nbsp;&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오 박사는 또 기축옥사(정여립 옥사) 때 이발의 노모를 죽인 인물이 유성룡이라는 과거 서인들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러면서 이발의 노모가 죽은 해가 선조 23년(1590: 경인년)이라는 필자의 견해가 틀렸다면서 선조 24년(1591: 신묘년)이라고 주장했다. 이발의 노모가 죽은 해에 대한 각 당파의 서술은 엇갈리는데 광해군 9년(1617) 생원 양몽거(楊夢擧) 등의 상소는 “경인년 5월 13일”이라고 서술하고 있고, 동인 영수였던 ‘아계 이상국(이산해) 연보’ 역시 ‘경인년’이라고 쓰고 있다. 반면 인조반정 후인 효종 8년(1657) 서인들이 편찬한 &lt;선조수정실록&gt;은 신묘년(1591: 선조 24) 5월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수백 년 전에 있었던 이런 사건의 진위 공방을 검토&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사건의 기본&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성격을 파악하는 것이다. 기축옥사는 처음부터 정철을 비롯한 서인들의 정치공작이란 비난이 들끓었다. ‘아계 이상국 연보’는 ‘정철을 위관(委官: 수사 책임자)으로 명하니 그 당시 사대부 중에 정여립과 교유가 있다고 연좌되어 화를 입은 자가 무려 1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했다. 이때 위관 정철이 물증도 없이 이발, 최영경, 정언신 등 당대의 명사들을 죽인 것에 대해 비난이 들끓었다. 훗날 선조가 이 사건으로 자신에게 쏠린 비난을 돌리기 위해 정철을 독철(毒澈: 악독한 정철), 간철(奸澈: 간악한 정철)로 불렀다는 사실이 그 진상을 짐작하게 해준다. ‘아계 이상국 연보’는 “이때 정철이 이 옥사와 연루시켜서 공(이산해)과 유서애(유성룡)에게 전적으로 화를 전가시키고자 했다”고 적고 있다. 김장생은 ‘송강행록’에서 ‘정철이 유성룡에게 왜 이발의 노모와 어린 아들을 죽였느냐’고 비난했다고 썼지만, 이는 광주진압군 사령관이 디제이(DJ)나 와이에스(YS)에게 왜 양민을 죽였느냐고 힐난했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있을 수 없는 상황 조작에 불과하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BR clear=all&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09/0730/1248857790_6000283613_20090730.JPG&quot; align=righ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조선 후기 노론의 문제점을 제기하면 ‘일제 식민사관’으로 매도하는 적반하장이 언제까지 통할 것으로 보는지도 궁금하다. 극도의 사대주의, 주자학 유일사상, 신분제 고착화, 남녀차별 극대화로 요약할 수 있는 노론의 정치행위를 긍정적으로 보자는 주장이야말로 반시대적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굳이 실명을 들지 않더라도 역사학계의 태두로 불렸던 조선사편수회 출신들과 그의 후예 제자들의 과거와 현재의 지위를 살펴보고, 어떤 사관을 갖고 있는지를 알아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 AD kisa banner include 시작--&gt;&lt;BR clear=all&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덕일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십만양병설&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십만양병설&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시론] 조봉암 선생 50주기, 명예회복을 / 김삼웅</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392"/>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392</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7-30T13:00:28Z</updated>
	    <published>2009-07-30T13:00:2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승만 대통령과 친일파들이 죽산 조봉암 선생을 ‘사법살인’한 지 7월31일로 50주년이 된다. 치열한 독립운동가, 평화통일론자를 권력에 중독된 이승만과 친일에서 반공으로 ‘성형수술’한 법조인들이 합작하여 처형한 뒤 반세기가 지났다. 그 억울함과 부당함, 불법과 폭력이 아직까지 신원되지 않고, 재심 조처와 독립유공자&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인정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은 한국 사회의 야만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lt;/SPAN&gt;&lt;/P&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죽산은 일제와 싸우다가 체포되어 손톱&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뽑히는 고문을 당하고, 신의주 감옥에서 7년을 복역하면서 혹독한 추위 속에 동상&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으로 손가락 7개를 잘라내기도 했다. 해방 이듬해 박헌영을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민족진영에 가담하여 제헌의원과 초대 농림부 장관을 맡아 정부수립 과업에 기여했다. 그리고 “평화통일론”과 “고루 잘사는 사회” 건설&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을 내세우며 이승만 정권에 도전했다가 정치보복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승만은 자신의 정적 죽산을 죽이기 위해 국무회의에서 세 차례나 ‘죽산 재판 문제’를 언급하여 사법부에 압력&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을 가하고, 검찰과 법관들은 ‘국부’의 뜻을 받들어 총대를 멨다. 상고심의 재판장 김세완과 주심판사 백한성·변옥주 등은 총독부 판사로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유죄 판결을 선고했고, 사형집행에 서명한 홍진기 법무장관 역시 총독부 판사를 지낸 인물이다. 해방 조국에서 총독부 판사 출신들이 독립운동가에게 애먼 누명을 씌우고 공산주의자로 몰아 처형한 것은 반문명·반이성·반민족의 극치다. 1959년 7월이면 해방 9년이 지난 시점인데, 감옥에 가 있거나 은둔했어야 할 친일파들이 법복을 입고 독립운동가를 처단한 것은 참괴이고, 그런 ‘전통’이 지금까지 사법부에 이어지고 있는 것이 참담하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죽산은 투철한 독립운동가, 진보적인 평화통일론자, 양심적인 개혁정치인이었다. 이승만의 비현실적인 북진통일에 맞서 평화통일론을 제기하고 자유당의 부패한 독재권력에 대항하여 개혁정치를 주창하다가 용공으로 몰려 회갑을 두 달 남겨두고 처형되었다. 6·25전쟁 때는 공산군의 체포령이 내려지고 부인이 납북되는 시련을 겪었다. 제헌의회 헌법기초위원으로 선임되어 국민기본권 신장과 균형 있는 경제 조항을 신설하고, 초대 농림부 장관에 기용되어 농지개혁의 기초를 만들었다. 전쟁 때 농민들이 북한 인민군에 협력하지 않은 것은 죽산의 농지개혁 기초에 힘입은 바 컸다. 제3대 대통령 후보로서 국민의 지지를 받아 “투표에 이기고 개표에 지는” 불운을 겪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 교수대에 서게 되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죽산의 생애에서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진보당의 정강과 정책은 당의 강제해산과 당수의 처형 이후 ‘불온’의 대상이 되고 망각에 묻혔다. 죽산은 유언&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에서 자신은 ‘평화통일의 씨앗&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을 뿌린 것이고 열매는 후대에 맡긴다고 말했지만, 반세기가 지난 오늘 또다른 이 대통령 치하에서 평화통일운동은 용공좌경의 동의어가 되고 다시 북진통일론이 고개를 쳐들고 있으니, 50년대의 트라우마가 반복되는지, 역사가 거꾸로 가는지 개탄스럽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브루노가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할 때 “말뚝에 묶여 있는 나보다 나를 묶고 불을 붙이려는 당신들이 더 공포에 떨고 있을 것이다”라고 했듯이 한 치 앞을 볼 줄 몰랐던 이승만과 수하들은 죽산을 죽인 지 9개월 만에 4월혁명으로 외국으로 도망치거나 투옥되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서 죽산 사건은 정치탄압이므로 명예회복 조처를 취하라고 권고했다. 이제 정부는 선생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하고, 사법부는 재심을 통해 선생의 명예를 회복시켜야 한다. 이것은 50년 묵은 산 자들의 책무이다. 삼가 죽산 선생의 명복을 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 &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조봉암&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조봉암&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죽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죽산&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사법부, 회한과 오욕의 역사] 제11화 선교자금 횡령사건과 중앙정보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391"/>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391</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7-28T22:21:25Z</updated>
	    <published>2009-07-28T22:21:2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90 align=center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width=15&gt;&lt;!-- Padding - Width --&gt;&lt;/TD&gt;
&lt;TD&gt;&lt;!-- 사진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hani.co.kr/imgdb/resize/2009/0728/6000278772_20090728.JPG&quot; border=0&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3&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사진 --&gt;&lt;!-- 사진설명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lass=movie_text style=&quot;WORD-BREAK: break-all&quot; bgColor=#8f8f8f&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1973년 4월 ‘남산 부활절 예배’ 사건의 주모자로 구속돼 재판을 받다가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박형규 목사(오른쪽)가 변호를 맡은 한승헌 &lt;/SPAN&gt;&lt;SPAN id=CLK_POP5 onmouseover=javascript:clear_pop_hidden_delay() style=&quot;Z-INDEX: 999&quot;&gt;&lt;A class=kl_link style=&quot;FONT-WEIGHT: 700; COLOR: #173f8d; FONT-FAMILY: ; TEXT-DECORATION: underline&quot; href=&quot;http://sense.contentlink.co.kr/sense/clk_pop.php?upgrade_kl=yes&amp;status=ing&amp;afd=hani2_web&amp;is_click=yes&amp;keyword=%BA%AF%C8%A3%BB%E7&quot; target=_blank&gt;&lt;SPAN id=CLK_POP5 onmouseover=javascript:clear_pop_hidden_delay() style=&quot;Z-INDEX: 999&quot;&gt;&lt;A class=kl_link style=&quot;FONT-WEIGHT: 700; COLOR: #173f8d; FONT-FAMILY: ; TEXT-DECORATION: underline&quot; href=&quot;http://sense.contentlink.co.kr/sense/clk_pop.php?upgrade_kl=yes&amp;status=ing&amp;afd=hani2_web&amp;is_click=yes&amp;keyword=%BA%AF%C8%A3%BB%E7&quot; target=_blank&gt;변호사&lt;/A&gt;&lt;/SPAN&gt;&lt;/A&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왼쪽), 아내 조정하씨와 함께 밝은 표정으로 법정을 나오고 있다. &lt;한겨레&gt; 자료사진&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noWrap height=3&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사진설명 --&gt;&lt;/TD&gt;
&lt;TD width=15&gt;&lt;!-- Padding - Width --&gt;&lt;/TD&gt;&lt;/TR&gt;
&lt;TR height=15&gt;
&lt;TD noWrap colSpan=3&gt;&lt;!-- Padding - Height --&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 news option END ### --&gt;&lt;!--ⓘ AD kisa top banner include ST --&gt;
&lt;TABLE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210 align=left border=0&gt;
&lt;TBODY&gt;
&lt;TR&gt;
&lt;TD colSpan=2 height=5&gt;&lt;/TD&gt;&lt;/TR&gt;
&lt;TR&gt;
&lt;TD width=200 height=80&gt;&lt;IFRAME marginWidth=0 marginHeight=0 src=&quot;http://www.hani.co.kr/section-adv/09/if/society_200x80_kisaTop.html&quot; frameBorder=0 noResize width=200 scrolling=no height=80&gt;&lt;/IFRAME&gt;&lt;/TD&gt;
&lt;TD noWrap width=1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AD kisa top banner include END --&gt;&lt;BR&gt;&lt;BR&gt;&lt;BR&gt;&lt;BR&gt;&lt;/P&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47c&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47c&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FONT&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00847c&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긴급조치 위반 구속자 가족에&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세계급식선교회&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원조금 빼돌려”&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중정 ‘무죄 선고 할라’ 판사 압박&lt;/SPAN&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부활절 예배 ‘내란음모죄’ 적용도&lt;/SPAN&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lt;/B&gt;&lt;/FONT&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유신에 맞서는 기독교&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인들&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975년 4월 서울시경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무 김관석 목사, 수도권특수지역선교&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위원회 위원장 박형규 목사와 실무자 권호경 목사,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체 사무총장 조승혁 목사 등 개신교의 민주화운동 핵심인사들을 구속했다. 김관석 목사는 한국 기독교를 대표하는 케이엔시시의 지도자이고, 조승혁 목사는 70년대 노동운동에서 큰 구실을 한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다. 박·권 두 목사는 1973년 남산 부활절 예배 내란예비음모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뒤, 1974년 권 목사는 긴급조치 1호로, 박 목사는 긴급조치 4호로 또 투옥되었다. 두 목사는 1975년 2월15일 풀려났다가 두 달도 안 돼 다시 구속되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내란음모 사건이란 부활절 새벽예배 때 박 목사 등이 유인물을 나눠준 일에 불과하다. 구호를 외치거나 시위를 한 것도 아니고 준비했던 현수막&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도 펼쳐보지 못했지만, 유신정권은 내란예비음모라는 거창한 죄목을 덮어씌웠다. 10만 군중 속에서 유인물을 뿌리고 현수막을 들고 4개 방면으로 군중을 유도해 방송국과 중앙청을 점령하는 내란을 획책했다는 어처구니없는 혐의 때문에 엄숙해야 할 법정은 자주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런데도 서울형사지법 합의7부(재판장 김형기)는 박형규·권호경 목사에게 징역 2년을 때렸다. 이 사건의 재판장은 그 후 서울형사지법 수석부장판사, 동 법원장, 대법원 판사로 승승&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장구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선교자금 횡령사건 &lt;/SPAN&gt;&lt;/B&gt;&lt;/FONT&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유신정권은 반독재운동에 나선 청년학생들을 좌경용공으로 몰았지만, 종교인들마저 빨갱이로 모는 것은 곤란했다. 그래서 유신반대운동의 핵심들에게 횡령죄를 적용하여 파렴치범이라는 낙인을 찍으려 한 것이다. 박세경 변호사의 변론처럼 “90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3·1운동 시기, 신사참배 강요 시기 등에 예수를 믿는 신앙 때문에 옥에 갇히고 순교를 당했던 적은 있으나 4명의 성직자가 파렴치 행위를 한 혐의로 구속”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수도권특수지역선교위원회는 독일&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세계급식선교회(BFW)로부터 빈민지역 선교자금으로 2700만원을 지원받았는데, 검찰은 “피고인들이 비에프더블유로부터 받은 원조자금 중 400여만원을 순수한 선교 목적을 떠나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된 사람들의 가족생계비로 지출한 것은 배임행위”라며 기소했다. &lt;/SPAN&gt;&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사건 수사는 서울시경에서 담당했지만, 배후에는 정보부가 있었다. 조승혁 목사에 따르면 서울지검 공안부 이재권 검사는 수사 초기에 “오늘 조사는 다 끝내고 오늘밤 석방될 것입니다.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라고 인사까지 했는데 그때 “중앙정보부 문호철 검사”가 이 검사의 방에 왔다가 이 말을 듣고 이 검사에게 “당신이 뭐냐, 당신이 정치하는 것이냐, 엔시시 횡령사건을 누가 석방시키라고 그래”라고 거세게 항의해 분위기가 바뀌었다고 한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정보부는 자기네가 손댄 사건은 재판 진행에도 깊이 간여했다. ‘구호금 횡령사건 담당판사 ㄱ 동향보고’라는 1975년 5월22일자 정보부 문서에 따르면 사건 담당 ㅇ검사는 5월21일 오후 2시께 서울형사지법 복도에서 “우연히 ㄱ판사를 만나 처음으로 인사”를 나눴는데, ㄱ판사는 ㅇ검사에게 “엔시시 사건 담당이냐”며 “피의자들을 보석시켜 시간을 가지고 천천히 해결(공판)하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공소장을 보니 무죄가 되기 쉽겠더라는 등의 언동을 하였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는 “ㄱ판사의 언동 내용을 분석컨대 동 사건을 무죄선고할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판단되며 만약 무죄가 될 경우” 사건 관련자들이 “의기양양하여” 이 사건에 대해 “국제기구를 통해 악선전함으로써국위 손상이 우려”되고, “종교 탄압의 인상을 짙게 하며”, “반체제 위해분자(교계) 등의 대정부 비난구호로 삼을 계기가 조성될 우려”가 있다고 예상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중앙정보부의 공판개입&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사건은 변호인들 주장처럼 “검사의 공소장에도 피해자가 나타나 있지 않아 횡령과 배임죄는 성립될 수 없으므로 공소 기각을 해야 마땅”한 사건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 진상조사단의 폰 바이제커 목사도 “어린애라도 30분이면 판결을 내릴 수 있는 사건”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나 정보부가 개입하면서 재판은 자꾸 지연되었다. 정보부 보고서에 따르면 이 사건은 5월6일 “서울형사지법 13부 단독 재판장 ㄱ판사가 지정”되어 첫 공판이 “5월30일 개정(당초 6월3일)될 예정”이었다. 공판기일이 6월3일에서 앞당겨진 것은 “75년 5월28일부터 6월2일까지 동 사건 진상조사차 더블유시시 대표 바이제커 등 4명이 내한”하기 때문에 변호인들이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정보부는 이들이 “체재하는 기간에 동 사건 공판 개정(5월30일)이 우연히 일치됨으로써 담당 변호인 등의 작용으로 동 조사단이 공판 상황을 방청하여&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사건 전모를 파악케 될 것으로 예상됨”이라고 우려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6월3일에서 5월30일로 앞당겨졌던 첫 공판은 정보부의 개입으로 더블유시시 진상조사단이 한국을 떠난 뒤인 6월10일에야 열렸지만, 장내 소란을 이유로 5분 만에 폐정되었다. 7월5일 3회 공판에는 돈을 준 비에프더블유의 사무총장 슈미트 목사가 증인으로 출석하여 그 돈은 원래 인권운동에 쓰라고 준 돈으로 아주 만족스럽게 쓰였다고 결정적인 증언을 했다. 이렇게 되자 정보부가 적극적으로 나섰다. 정보부는 ㄱ판사에게 공판 진행을 늦추도록 압력을 넣으면서 유죄의 증거를 보강하려 했다. 7월25일 5회 공판 때는 피고인과 증인을 호명만 하고 끝냈는데, 기독교계 자료는 “판결공판을 연기하기 위한 재판부의 저의에서 나온 처사”라고 비난했다. 8월2일 6회 공판에서 검찰은 김관석 징역 3년, 박형규 5년, 조승혁 4년, 권호경 5년을 구형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8월16일 7회 공판에서 재판부는 선고 대신 갑자기 직권으로 증인 2명을 채택하면서 변론재개를 선언했다. 구형까지 마친 상태에서 변호인의 요청도 없이 재판장 직권으로 변론재개를 선언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네 명의 성직자를 파렴치범으로 몰기 위해서는 선교자금의 지출 명세(내역)를 기록한 장부가 있어야 했는데, 당시 선교위원회의 회계 실무자가 장부를 갖고 도망쳤기 때문에 검찰은 배임·횡령의 피해자가 누구인지조차 오락가락해 변호인들의 조롱을 받았다. 이에 정보부는 김동완 목사와 허병섭 목사를 연행해, 검찰 쪽이 찾고 있던 회계 실무자의 행방을 추궁했다. 이때 “이들 성직자들은 수차에 걸쳐 심한 구타”를 당했는데, 허병섭 목사는 전치 2주의 상해를 입었다. 8월30일 8회 공판에서는 전과 똑같은 구형이 되풀이되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선고공판은 구속 5개월이 지난 9월6일에야 열렸다. ㄱ판사는 “피고인들에 대한 공소사실 중 업무상 횡령 내지 배임 부분에 있어 인정할 수 없는 부분이 많이 있으나 피고인들이 빈민구호를 구실로 받은 외국원조자금을 국가보위를 해친 긴급조치 위반자들의 뒷바라지로 사용해 긴급조치 위반자를 도운 것은 엄벌해야 한다”면서 박형규 징역 10월, 권호경 징역 8월, 김관석, 조승혁에게는 징역 6월을 선고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
&lt;P align=justify&gt;&lt;FONT color=#a341b1&gt;&lt;B&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ㄱ판사에 대한 뒷조사&lt;/SPAN&gt;&lt;/B&gt;&lt;/FON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ㄱ판사 비위 첩보에 대한 관련자 조사 결과보고’라는 1975년 8월27일자 보고서는 정보부가 ㄱ판사가 이 사건에 무죄를 선고할지 모른다는 첩보를 처음 입수한 후 석 달이 넘게 그의 ‘비리’를 뒷조사했음을 보여준다. ㄱ판사는 7월28일 위증교사&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로 구속된 조 아무개를 보석으로 석방했는데, 정보부는 ㄱ판사가 뇌물을 받고 보석을 허가한 것으로 보았다. 정보부는 조아무개와 사건을 변호사에게 의뢰한 그의 매제뿐 아니라 2년여 전에&amp;nbsp;자갈&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채취 허가 관계로 조 아무개와 접촉했던 인물까지 잡아와 조사했다. 그러나 ㄱ판사와 이들 사이에 보석과 관련한 “금품 부정거래 사실”이 발견되지 않아 이들을 훈방했다는 것이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국정원 과거사위는 ㄱ판사에게 면담을 요청했으나, ㄱ판사는 당시의 일은 “생각만해도 괴롭다”며 면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 조승혁 목사에 의하면 당시 ㄱ판사는 “중앙정보부에 의해서 두 번 가택수사를 당하는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사건의 변호인 홍성우 변호사는 “ㄱ판사의 시골 처가까지 압수수색을 하는 등 압력을 가해서 ㄱ판사가 울기도 참 많이 울었대요. 그때 ㄱ판사는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후에 저에게 말하더군요”라고 회고했다. 홍 변호사는 필자와의 면담에서 ㄱ판사가 당시 외부 압력이 하도 심해 “대법원 앞에 가서 목을 매고 죽을까 하는 생각까지 했다”고 가슴아파했다. 유신시대는 검찰의 구형량이 곧 선고 형량이라 ‘정찰제 재판’이라는 비아냥을 받던 시기였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SPAN&gt;&amp;nbsp;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 사건에서 ㄱ판사가 구형량의 5분의 1도 안 되는 형을 선고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는 아주 낮은 형량이었겠지만, 무죄와 유죄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질질 끄는 공판 진행으로 형기를 거의 다 마친 김관석 목사는 더 이상의 재판이 무의미하다고 항소를 포기해 9월17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구속될 때 “억울합니다”라고 외친 조승혁 목사는 항소했지만, 법원은 “원심&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실형 만기가 훨씬 지난 조 목사가 ‘실형 만기 신청’을 할 수 없도록 재판부 형성을 지연”시켰고, 뒤늦게 사건을 배당&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받은 항소심 재판부도 재판이 진행중이라는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그를 계속 구금하고 있다가 12월13일 원심과 같은 형량을 선고했다. 이 때문에 조 목사는 원심 형량보다 두 달 더 옥살이를 해야 했다. &lt;/SPAN&gt;
&lt;P align=justify&gt;&amp;nbsp;&lt;/P&gt;
&lt;P align=justify&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홍구 성공회대 교수&lt;/SPAN&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선교자금 횡령사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선교자금 횡령사건&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초원 실크로드를 가다](25)몽골은 어떻게 갈라졌는가 </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kk3ys/7892390"/>
		<id>tag:blog.daum.net,2009:kkk3ys.7892390</id>
	    <author>
		    <name>외감</name>
	    </author>
	    <updated>2009-07-28T21:37:56Z</updated>
	    <published>2009-07-28T21:37:5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DIV id=CLtag&gt;&lt;STRONG style=&quot;COLOR: #6b6b6b&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ㆍ강대국 야욕에 둘로 찢어진 ‘800년 제국’&lt;/SPAN&gt;&lt;/STRONG&gt;&lt;!-- SUB_TITLE_END--&gt;&lt;BR&gt;&lt;BR&gt;&lt;!--imgtbl_start_2--&gt;
&lt;DIV class=article_photo_center&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50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7/28/20090729.01100127000001.02L.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홉드에 있는 만청통치 시대의 산긴 헬렘 성채(1762년 축조) 전경.&lt;/SPAN&gt;&lt;/P&gt;&lt;/DIV&gt;&lt;/DIV&gt;&lt;!--imgtbl_end_2--&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어떤 중국 사람들은 자국 지도를 펼쳐놓고는 이런 회심과 걱정을 한다. 원래 중국 지도의 모양새는 온전한 엽상(葉狀, 잎사귀 모양)이었는데, ‘외몽골’이 갈라져 나가면서 등살이 없어진 수탉 모양을 하게 되었고, 이제 티베트가 떨어져 나간다면 통통한 가슴살이 빠져버린 여윈 수탉 꼴이 될 것이며, 여기에 더해 신장마저 잃어버리게 되면 엽상은 아예 일그러져 볼꼴 사납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 지도를 확 바꿔놓는 이런 ‘참변’은 막아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이 이른바 ‘다민족 통일국가론’을 내세우면서 티베트나 신장의 이탈을 막기 위해 전전긍긍하는 것은 혹여 이 때문은 아닌지.&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외몽골’이 떨어져 나갔다는 이른바 ‘수탉론’의 진원은 따지고 보면 수백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수탉’형으로 변하기까지의 과정은 얽히고 설킨 실타래처럼 실로 복잡다단한데, 한마디로 요약하면 우여곡절이 많은 분단 과정이다. 그런 상황은 아직껏 종지부를 찍지 못하고 있다. 그 속에서 많은 진실이 가려지고 호도되어 왔다. 그 결과 몽골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몽골 사람들 자체도 분단의 현실에 대해 적어도 겉으론 통감하는 것 같지 않으니, 남이야 관심 밖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방관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몽골의 분단을 둘러싸고 여러 세력들 간에 해묵은 공방이 계속되고 있으며, 그런 공방은 조만간 그칠 기미&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를 보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사실 필자는 지난 시기 몽골의 분단현실에 관해 상당히 궁금해했다. 궁금할수록 종잡을 수가 없었다. 젊은 시절 듣고 배운 것과 현실 사이에 상당한 괴리가 있는 데다가 이 문제에 대한 각방의 시각이 그토록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수시로 바뀌어 왔다. 여기에 더해 이상하리만큼 이 문제에 관한 연구가 미미하고 애매모호하다. 아마도 껄끄러운 문제라서 그런가 보다. 그리하여 이번 현지답사, 특히 중국 만청 통치의 흔적이 묻어있는 서몽골 일원에 대한 현장 답사를 통해 조금이나마 그런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작심했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2007년 7월4일(수요일) 이른 시간에 홉드 시립박물관을 찾았다. 그러나 수리 중이어서 사진 몇 장만 얻어가지고 발길을 되돌렸다. 이어 1762년에 축조한 만청 시대의 산긴 헬렘 성채를 찾았다. 만청 정부가 이곳을 분할 통치할 때 설치했던 관청과 주택, 사원 등을 에워쌌던 성채다. 부지 면적이 약 4만㎡에 달하는 꽤 넓은 유적지다. 폭 1.5m에 높이 3m로 지은 성벽의 잔해가 약간 남아 있을 뿐, 관리가 허술해 완전히 폐허가 되고 말았다. 미풍에 흐느적거리는 가지를 수북이 드리운 아름드리 고목 몇 그루만이 외로이 남아서 마냥 통탄스러운 그 옛날을 고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홉드는 17세기 전반 청나라 강희제의 네 차례에 걸친 친정(親征)을 계기로 청나라의 통치기구가 자리하고 있던 곳으로서 관련 유물이 그 어느 지역보다도 많이 남아 있다. 그런 유물이 가장 많이 소장되어 있는 곳이 바로 홉드 향토박물관이다. 그래서 수리 중인 박물관 측과 바얀올기에 갔다가 사흘 후 다시 찾기로 약속했다. 약속이 지켜질까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박물관 문을 노크했다. 다행히 박물관 측은 최선을 다해 수리를 끝내고 일행을 맞이한다. 땅 바닥은 새로이 칠하고 몇 군데는 카펫도 깔아놓았으며 유품들도 깔끔히 전시해 놓았다. 안내원의 해설도 친절하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박물관 입구에 놓여있는 개관을 기념해 만들어진 대형 놋쇠 솥에는 ‘대중화민국16년8월 …조(造)’라는 글씨가 음각되어 있어 1927년에 세워진 꽤 오래된 박물관임을 알 수 있다. 중화민국 시절까지도 이곳에 중국의 행정력이 미쳤음을 말해준다. 유물 대부분은 2층에 전시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몽골 사람들의 반청독립운동에 관한 자료들과 유물이 많이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 입구에는 근엄한 모습을 한 운동지도자 도군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만청 통치자들의 잔혹성을 폭로하는 각종 형구(刑具)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건릉오십년오월십삼일’이란 한자가 압인된 끔찍한 대형 참수도(斬首刀, 목 치는 칼)가 눈에 띈다. 보는 순간 소름이 끼친다. 그밖에 지역사와 관련된 볼 만한 유물들도 여러 점 있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 시간 남짓 전시품을 돌아보면서 몽골 분단의 통사(痛史)를 피부&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로 느꼈다. 그러면서 우선 떠오르는 것이 분단의 상징인 호칭부터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이다. 몽골이 이른바 ‘내·외몽골’로 갈라져 불리기 시작한 것은 중국 땅에 이민족의 만청이란 나라가 들어서면서부터다. 그 전대인 명나라 때만 해도 오늘의 몽골 땅 전체를 ‘북원’(北元)이라 부르며 ‘내외’는 없었다. 그러다가 청대에 들어와서 몽골 땅이 청나라 영토의 일부라는 데서 고비사막을 경계로 그 이남은 막남(漠南), 이북은 막북, 이서는 막서의 세 갈래로 찢긴다. 후일 막남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면서 정치적 소원관계에 따라 막남을 ‘내몽골’, 막북과 막서를 통틀어 ‘외몽골’로 칭하게 된다. 이러한 호칭이 오늘날까지 합법인 양 회자되고 있는데, 이것은 몽골을 중국 영토의 일부분으로 보는 데서 나온 부당한 호칭이다.&lt;/SPAN&gt;&lt;BR&gt;&lt;BR&gt;&lt;BR&gt;&lt;!--imgtbl_start_4--&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3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7/28/20090729.01100127000001.04M.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홉드 향토박물관 외경.&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오늘의 상황에서 굳이 구분한다면, 중국 몽골과 독립국 몽골로 대별해야 할 것이다. 역사에서 보면, 원대와 같이 한인 땅이 몽골인들의 예하에 들어간 적은 있어도, 한인들이 몽골 땅 전체를 공식 지배한 경우는 없다.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한때 쿠룬(오늘의 울란바토르)에 대신을 파견하고 청군을 주둔시킨 일은 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이 관행적으로 써오던 기미정책(羈靡政策)적 성격의 간접통치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몽골 땅이 마치 역대의 중국 영지인 양 치부하면서 ‘내외’를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흔히들 몽골 분단의 발단을 만청의 출범으로만 보는데, 사실은 차르 러시아&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의 동방 진출이 그 불씨에 기름을 끼얹었던 것이다. 17세기 차르 러시아의 동방 진출은 필연적으로 만청과의 분쟁을 야기하게 되는데, 그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양자 모두에게 완충지가 필요하다. 그 완충지 희생양이 된 곳이 바로 ‘외몽골’이다. 이때부터 ‘외몽골’을 둘러싼 러시아와 중국 간의 갈등은 줄곧 몽골 분단의 주요한 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한다. 강희제의 치세 연간(1661~1722) 차르 러시아가 천산산맥 이북의 오이라트 부족의 칼단을 사주해 할하(외몽골)를 침공하자 강희제는 세 차례의 친정(親征, 1696~1697)을 단행해 칼단을 패주시키고, 이를 계기로 ‘외몽골’을 자신의 영향권 내에 편입&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시킨다. 잇따라 러시아와는 ‘네르친스크 조약’(1689)과 ‘카흐타 조약’을 체결(1727)해 국경분쟁 문제를 매듭짓고 몽골에 대한 만청의 종주권과 러시아의 시베리아 진출권을 맞바꾼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1911년 만청을 뒤엎은 신해혁명은 몽골 분단의 결정적 계기가 된다. ‘황색 러시아’의 미몽을 버리지 못한 러시아는 절호의 기회로 여기고 몽골의 왕공들과 상층귀족, 활불들과의 비밀거래를 통해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모략한다. 그해 12월 ‘외몽골’의 왕공들과 활불들이 쿠룬에 모여 중화민국 참여를 거부하면서 ‘대몽골국’의 독립을 선포한다. 이것이 이른바 ‘외몽골’의 제1차 독립선언이다. 이 선언으로 성립된 새 정권을 ‘복드 칸 정권’이라고 하는데, 국가수반&lt;/SPAN&gt;&lt;/A&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으로 티베트 출신의 제8대 활불 젭춘담바 쿠툭투를 추대한다. 그러나 러시아에서 시월혁명이 일어나고 중국에서 군벌전쟁이 격화되며 일본이 시베리아 간섭전쟁을 발동하는 등 국제정세가 소용돌이치자 이 정권은 오래 지탱될 수 없었다. 10년 후 ‘외몽골’의 활불과 라마, 왕공들이 러시아 백파군을 불러들여 쿠룬을 함락하고 역시 활불 쿠툭투를 군주로 하는 정부를 선포한다. 비록 단명으로 끝났지만 이것이 제2차 독립선언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편 같은 해에 러시아 시월혁명의 영향을 받은 하급군인들과 지식인들은 민족독립을 기치로 한 인민당을 결성하고 러시아 적군(赤軍)의 지원하에 백파군을 축출하고 역시 같은 활불을 군주로 한 입헌군주제의 인민혁명정부를 수립한다. 이어 1924년에 활불이 사망하자 국호를 공화제의 몽골인민공화국으로 개칭한다. 이것이 ‘외몽골’의 제3차 독립선언이다. 그러다가 제2차 세계대전이 결속되자 ‘외몽골’의 독립여부에 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 결과 투표자의 97.8%가 독립을 찬성, 결국 국민당 남경정부는 독립을 공식 인정하기에 이른다. 이것이 ‘외몽골’의 제4차 독립선언이다. 중국 사람들은 이 선언으로 ‘외몽골’은 영영 ‘조국의 품’에서 떠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 중국 학자들은 몽골인민공화국은 소련의 위성국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독립은 1990년대 초 소련이 무너진 때부터라고 강변하기도 한다. &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한편, 국민정부의 치하에 있는 ‘내몽골’에서도 ‘외몽골’의 독립운동과 때를 같이 해 내몽골 실링고르맹 출신의 약칭 덕왕(德王)이라고 하는 덕목초극동로보(德穆楚克棟魯普) 왕공의 주도 하에 자치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는 장제스(蔣介石)의 국민정부가 실행하는 개간을 비롯한 일련의 한화정책에 불만을 품은 내몽골인들의 정서를 타고 주변의 몇몇 왕공들을 규합해 1933년 바이링묘(百靈廟)에서 제1차 자치회의를 열고 자신을 비서장으로 하는 자치기구인 ‘몽정회’(蒙政會)를 출범시킨다. 중국은 ‘동일국가 동일민족’이란 쑨원(孫文)의 국가이념을 계승한 장제스가 중국에는 ‘다른 민족은 없으며, 있다면 동일민족의 다른 종족뿐’이라고 주장하면서 겉으로는 몽정회를 승인하나 실질적으로는 지방에서 생긴 한 군벌쯤으로 냉대했다. 그리하여 덕왕은 일본의 힘을 빌려 자치를 시도해 봤으나 결국 일본이 조작한 ‘몽강(蒙疆)연합위원회’란 음모에 휘말려 그 환상은 깨지고 만다. 2차 대전 후 국민당의 패색이 짙어져가는 틈을 타 덕왕은 1949년 ‘몽골자치정부’를 선포했으나 중공의 권력 장악으로 그의 ‘경화수월’(鏡花水月, 거울 속의 꽃과 물 속의 달) 같은 자치의 꿈은 산산조각나고 만다. 그 자리를 우란부(烏蘭夫)가 이끄는 내몽고자치구가 메운다. 이렇게 칭기즈칸의 몽골제국으로부터 근 800년을 면면히 이어오던 하나의 몽골은 막북의 몽골인민공화국(지금은 몽골국)과 막남의 내몽고자치주로 양분되고 말았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된 이후 중국과 소련 간에는 ‘외몽골’ 문제를 놓고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져 왔다. 마오쩌둥과 스탈린 회담에서 마오쩌둥이 이 문제를 꺼냈으나 스탈린의 냉대로 논의는 더 이상 진척 없이 그저 양국 동맹조약문에 ‘몽골인민공화국’을 공인한다는 선에서 그치고 만다. 저우언라이와 흐루시초프 간의 회담에서는 이 문제가 아예 언급조차 되지 못했으며, 그후 국경분쟁 등 양국 간의 관계가 긴장됨에 따라 이 문제를 에워싸고 비방전이 벌어졌으며, 여기에 소련 편을 들어준 몽골인민공화국이 가세함으로써 논쟁은 재연되었다. &lt;/SPAN&gt;&lt;BR&gt;&lt;BR&gt;&lt;BR&gt;&lt;!--imgtbl_start_5--&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
&lt;DIV class=article_photo style=&quot;WIDTH: 350px&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IMG src=&quot;http://img.khan.co.kr/news/2009/07/28/20090729.01100127000001.05M.jpg&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 &lt;/SPAN&gt;
&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만청통치 시대에 사용한 대향 참수도(斬首刀, 홉드 향토박물관 소장).&lt;/SPAN&gt;&lt;/P&gt;&lt;/DIV&gt;&lt;/DIV&gt;
&lt;DIV class=article_photo_right&gt;&amp;nbsp;&lt;/DIV&gt;&lt;!--imgtbl_end_5--&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그러다가 실용주의자 덩샤오핑과 고르바초프의 회담(1986)에서 약간의 실마리가 풀려 1992년 소련군이 몽골에서 철수한다. 이를 계기로 몽골문제를 둘러싼 3국 관계는 일시 조정기에 들어서기는 했지만, 또 언제 어떤 문제가 터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가 없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이상에서 보다시피,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끼어 몽골인들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하나의 몽골이 둘로 쪼개진 것만은 분명하다. 언제 다시 하나로 될 것인가의 여부는 민족자결과 자존의 원칙대로 그들 스스로에게 맡겨져야 한다. 몽골의 분단사는 역사의 거울이 될 수 있다. 통절한 교훈은 자기 운명은 자기가 개척해야 한다는 것이다.&lt;/SPAN&gt;&lt;BR&gt;&lt;BR&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quot;&gt;&lt;문명학자 정수일 국문명교류연구소장 www.kice.ac&gt;&lt;/SPAN&gt;&lt;!-- BODY END --&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민족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민족주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몽골분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몽골분단&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JAQN&amp;amp;tagName=민족분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민족분단&lt;/a&gt;
	    </content>
	    	</entry>
      </fee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