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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미술의 빅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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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ights>이진숙</ri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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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6) 대항해시대 네덜란드…‘중국 가면 부자 된다’ 대항해시대 시작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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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CDATA[2013-04-21T20:23:26Z]]></updated>
		    <published><![CDATA[2013-04-21T20:23:2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17세기 네덜란드 작가 얀 베르메르의 풍속화(그림 ➊)는 ‘19금’의 묘한 장면을 담고 있다. 남자는 거듭 여자에게 와인을 권한다. 여자는 관람객을 바라보면서 웃고 있다. 자기가 이 잔을 거부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양해해 달라는 듯한 표정이다. 그림 구석에서 얼굴에 손을 괸 남자는 딴청을 하는 척하지만 바싹바싹 속이 탄다. 와인은 사랑의 술이며, 유혹의 술이다. 어서 여인이 이 유혹을 받아들여주길. 신사 체면에 함부로 나설 수는 없어서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대신 두 사람을 중재하는 남자가 넉살 좋게 여인에게 술을 권하는 중이다. 이 그림에는 진짜 중요한 남자가 한 명 더 있다. 바로 액자 속에 초상화로 그려진 남자, 술잔을 받아 든 여인의 남편이다. 남편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테이블 위의 청화백자와 와인을 담은 흰색 도자기가 답이다. &lt;br&gt;&lt;br&gt;&lt;/p&gt;&lt;div style=&quot;width: 450px;&quot; class=&quot;center_image&quot; originw=&quot;450&quot;&gt;&lt;img border=&quot;0&quot; hspace=&quot;0&quot; alt=&quot; 기사의 0번째 이미지&quot; vspace=&quot;0&quot;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13/04/image_readtop_2013_286565_1365984819889601.jpg&quot; width=&quot;450&quot;&gt;&lt;p style=&quot;margin-top: 5px;&quot;&gt;&lt;span class=&quot;image_small&quot;&gt;그림 ➊ 얀 베르메르, ‘여인과 두 남자’, 1659~1660년. &lt;/span&gt;&lt;/p&gt;&lt;/div&gt;&lt;div class=&quot;read_txt&quot;&gt;&lt;/div&gt;&lt;div style=&quot;width: 450px;&quot; class=&quot;center_image&quot; originw=&quot;450&quot;&gt;&lt;img border=&quot;0&quot; hspace=&quot;0&quot; alt=&quot; 기사의 1번째 이미지&quot; vspace=&quot;0&quot;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13/04/image_readmed_2013_286565_1365984819889602.jpg&quot; width=&quot;450&quot;&gt;&lt;p style=&quot;margin-top: 5px;&quot;&gt;&lt;span class=&quot;image_small&quot;&gt;그림 ➋ 얀 베르메르, ‘지리학자’, 1668~1669년.&lt;/span&gt;&lt;/p&gt;&lt;/div&gt;&lt;div class=&quot;read_txt&quot;&gt;&lt;b&gt;100만 네덜란드인, 일확천금 위해 아시아로 떠나&lt;/b&gt;&lt;br&gt;&lt;br&gt; 당시 유럽에는 이렇게 아름다운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었다. 모두 중국에서 건너온 물건들이다. 도자기는 향신료, 직물과 더불어 동양에서 들여오는 최고의 수익을 내는 교역품이었다. &lt;br&gt;&lt;br&gt;사실 중국의 최고급 도자기는 내륙에서 제조돼 상류층이 주로 사용하고 수출은 2등급 제품만 했다. 그러나 투명하고 단단한 중국 자기는 2등급 제품도 모든 유럽인에게 선망의 대상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7세기 전반기를 지나면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 선박들은 총 300만점이 넘는 자기를 유럽으로 들여왔다. 1650년대에는 중국 자기가 네덜란드의 일상생활을 그린 그림에도 자연스럽게 등장하게 된다. &lt;br&gt;&lt;br&gt;대항해시대를 연 콜럼버스의 손에 들려 있던 것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었다. 여행가 특유의 허풍과 사실이 뒤섞인 이 책은 당대의 베스트셀러였다. 인쇄술이 발전하기 이전인데도 10개가 넘는 나라의 말로 번역돼 널리 읽혔다. 이후 중국에 가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이 전 유럽을 들뜨게 했다. 대략 1500~1700년경 이 환상을 좇은 유럽인들이 ‘대이동’한 시대를 대항해시대라고 부른다. 포르투갈, 스페인, 영국, 네덜란드 등이 해상무역권을 두고 치열한 각축전을 벌였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권을 획득한 네덜란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맞서던 영국과 우호적 관계에 있었으며, 영국의 동인도 회사를 모방해 1602년에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만들고 치밀하게 해상무역권을 획득해나간다. &lt;br&gt;&lt;br&gt;액자 속 남편 역시 중국 접시뿐 아니라 여러 물품들의 해상무역을 위해 집을 비웠다. 통계에 따르면 대항해시대 기간인 1595~1795년까지 200년간 총 100만명에 가까운 네덜란드 사람들이 아시아로 가는 배를 타고 떠났다. 1653년 우리나라에 왔던 하멜이 네덜란드인이었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14년간 표류를 했다고는 하지만 하멜은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으니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떠난 사람 셋 중 둘은 돌아오지 않았다. 항해는 평균 6개월에서 1년이 걸렸다.  &lt;br&gt;&lt;br&gt;동서양의 교역은 삶의 디테일도 바꿔 놓았다. 남편의 긴 부재는 가정 내에서 여권을 신장시켰다. 부인은 남편이 없는 기간 동안 가정뿐 아니라 회사의 주요 업무를 돌봤다. 이 시기 부부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부부 초상화는 비교적 여권이 신장됐던 네덜란드에서만 등장한다. &lt;br&gt;&lt;br&gt;그러나 긍정적인 효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남편이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아내는 이렇게 향기로운 와인의 유혹에 처하게 된다. 자, 아슬아슬한 이 이야기는 어떻게 결말이 날까? 답은 다시 중국 접시 위에 있다. 접시 위에 노란 레몬이 보인다. 껍질이 ‘벗겨진’ 레몬은 색다른 의미를 갖는다. 여인 역시 레몬처럼 됐다는 의미다. 여인은 유혹에 넘어갔고 신사는 목적을 이뤘다.  &lt;br&gt;&lt;br&gt;베르메르가 그린 ‘지리학자(그림 ➋)’와 ‘천문학자’도 변화하는 세상에 대한 강소국 네덜란드인들의 진취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 &lt;br&gt;&lt;br&gt;지리학과 천문학은 17세기 과학의 총아였다. 창 아래에는 송아지 가죽으로 만든 종이에 그려진 해도(海圖)가, 뒤쪽 바닥에는 말려 있는 해도 두 개가, 벽에는 유럽 해안의 해도가 걸려 있다. 지리학자가 여러 해도들을 놓고 진지하게 세계를 탐구하고 있다. 지도는 대항해시대에 가장 친숙한 물건이자 당대 최고의 지식의 보고였다. 또 이 시대는 세계지도가 완성되고, 세계에 대한 표상이 바뀌는 시대이기도 했다.  &lt;br&gt;&lt;br&gt;세상에 대한 관념이 바뀌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약간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이탈리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1616년 종교 재판에 회부돼 지동설 포기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주장을 포기하지 않고 학술적인 저술을 계속해 나갔다는 이유로 1633년에는 결국 투옥되고 만다. 낡은 관념에 묶인 사람들은 지구의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겠지만, 지구는 움직였다. 특히 네덜란드의 지구는 활발하게 움직였다.  &lt;br&gt;&lt;br&gt;강력한 절대군주가 통치하고 있는 다른 나라들과 달리 네덜란드는 발달한 해상무역을 바탕으로 시민들의 자율적인 권한이 충분히 존중되던 사회였다. 군주의 선택에 의해 나라의 종교가 결정되던 ‘1국가 1종교’의 원칙에서 벗어나 종교 선택의 자유가 보장되는 거의 유일한 나라였다.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갈릴레이가 마지막 저술을 출판했던 곳도 네덜란드이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주장해서 무신론자 혐의를 받은 데카르트가 망명한 나라도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서 과학은 더 이상 종교와 싸울 필요가 없었다. 실용이 낡은 관념을 이겼다. &lt;br&gt;&lt;br&gt;‘지리학자’ 그림의 모델은 안토니 반 레벤후크라는 사람이다. 그는 베르메르와 동시대인이었고 유명한 무역업자이자 과학자였다. 독창적인 방법으로 현미경을 개발한 그는 미생물학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무역업자와 과학자라는 직업을 동시에 가질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이 시대의 특징이다. 지식은 유용해야 했다. 레벤후크가 추구했던 지식은 해상무역에 도움이 되는 실용적인 것이었다. 지리학자의 머리 위에 있는 지구의는 헨드리크 혼디우스가 제작한 것이다. 1600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가 18년 뒤에 다시 제작됐다. 이 증보판에는 1610년경에 개척된 인도양의 새 항로가 포함돼 있다. 이 항로의 개척으로 동남아시아까지 가는 길은 몇 달이 단축됐다. 과학의 발전은 부의 증대로 직접 연결됐다. 사람들은 모험을 통해서 세계의 모습을 과학적이고 실증적으로 그려나갔다. 당시 천문학과 지리학은 부단히 완성돼 가던 학문이었다.  &lt;br&gt;&lt;br&gt;그러나 화승총으로 무장한 유럽의 모험가들은 동양 입장에서 보면 전혀 반갑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소위 신대륙에서는 잔혹한 살육을 행하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세계 전역을 돌아다녔고, 이들에 의해 각 지역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속속 알려졌다. 지식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혼디우스는 자신의 지구의에 오류가 있을 가능성을 인정했고, 부단한 수정을 허용했다. &lt;br&gt;&lt;br&gt;새로운 정보에 대한 개방적 자세. 그게 바로 작지만 강한 나라 네덜란드의 기틀을 만드는 힘이 됐다. 열린 사회의 긍정적인 힘이다.&lt;br&gt;&lt;br&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하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하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베르메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베르메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17세기 네덜란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17세기 네덜란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혼디우스&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혼디우스&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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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lt;1&gt; 왜 18세기 조선을 배워야 하나</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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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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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CDATA[2013-04-21T20:20:58Z]]></updated>
		    <published><![CDATA[2013-04-21T20:20:5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h3 class=&quot;aTit&quot;&gt;왕이 마음 여니, 백성이 깨어나고, 문화가 꽃피다&lt;/h3&gt;&lt;p&gt;
&lt;/p&gt;&lt;h4 class=&quot;aTit2&quot;&gt;중앙 SUNDAY·아트센터 나비 공동 창작포럼 '향연' &amp;lt;1&amp;gt; 왜 18세기 조선을 배워야 하나&lt;/h4&gt;&lt;p&gt;
&lt;/p&gt;&lt;div class=&quot;aWriter&quot;&gt;정리=이진숙 미술평론가 kmedichi@hanmail.net&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 
|&lt;/span&gt; 제319호 &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 &lt;/span&gt;20130421 입력 &lt;span id=&quot;reporteraa&quot;&gt;&lt;/span&gt;&lt;iframe height=&quot;0&quot; marginHeight=&quot;0&quot; src=&quot;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quot; frameBorder=&quot;0&quot; width=&quot;0&quot; marginWidth=&quot;0&quot; scrolling=&quot;no&quot;&gt;
&lt;/iframe&gt;&lt;/div&gt;&lt;p&gt;
&lt;/p&gt;&lt;div class=&quot;aSummary&quot;&gt;21세기 한국이 배워야 할 것은 무엇인가? 바로 한국 자신이다. 한국 경제 성장의 원동력 중 하나는 학습의 
힘이다. 그동안 우리는 여러 분야에서 서구를 따라잡으려고 노력해 왔다. 1990년대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 폭발적으로 늘어난 유학 인구는 지식의 
글로벌화를 가속화했다. 21세기 동아시아 대세론이 대두되는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한국에 대한 지식이다.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는 그 획일성으로 말미암아 한계효용에 부딪히고 있다. 진정한 다양성의 추구는 외부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간과하고 있던 한국을 
재발견하는 데 있다. 중앙SUNDAY는 아트센터 나비와 공동으로 창작포럼 ‘향연’을 시작한다. 르네상스라 불리는 18세기 조선에서 발아한 우리의 
창조 DNA를 새롭게 추출해보자는 시도다. 첫 회로 성균관대 안대회 교수가 왜 18세기가 중요한지 개괄했다. 영·정조의 치세 속에 가장 높은 
수준의 문화에 도달했던 ‘좋았던 시대’에 대한 연구는 혼돈의 21세기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좋은 자극이 될 것이다. 안 교수의 강의를 
재정리했다. &amp;lt;편집자&amp;gt; &lt;/div&gt;&lt;p&gt;
&lt;/p&gt;&lt;div style=&quot;line-height: 23px; font-size: 16px;&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Body&quot;&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4/21005628.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학문을 숭상한 정조는 특히 책가도(冊架圖·서가 안에 책을 비롯해 도자기·문방구·향로 등을 진열해 놓은 
모습을 그린 그림)를 좋아했다. 정조가 사랑한 것은 책 자체의 그림이었으나, 18세기 상류층 취향은 책과 더불어 외국에서 들여온 진귀한 기물들을 
병치하는 그림을 선호했다. 그림은 장한종의 ‘책가도 병풍’(18세기 말~19세기 초), 종이에 채색, 195x361㎝, 경기도 미술관 소장.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18세기는 한·중·일 동아시아 삼국 모두에 평화의 시대였다. 삼국 간 교역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조선은 중·일 간의 중계무역으로 큰 이득을 보고 있었다. 국제적 평화라는 외적 조건을 바탕으로 영·정조의 태평성대가 찾아온다. 치세를 
이끈 두 임금 영조와 정조는 모두 콤플렉스가 있었다. 영조의 어머니는 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고, 정조의 아버지는 비운의 사도세자였다. 이들은 
탁월한 업적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극복했다. 오히려 콤플렉스를 당시 사회를 옥죄고 있던 신분이라는 고정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삼았다. 당파와 관계없이 인재를 등용하는 탕평책, 서얼 차별 금지 등 두 임금의 열린 리더십은 17세기 교조적 성리학의 지배하에서 경직됐던 
사회에 숨통을 틔웠다.&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float: right;&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 float: right;&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4/21005746.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두 
임금은 국민과의 관계를 열어놓았다. 영조는 궁궐 밖을 나와 한양 곳곳을 다녔다. 또 여러 궁에 현판을 남겨 유적지로 만들었다. 일종의 관광코스를 
개발한 셈이다. 이런 영조의 행보는 파격적인 것이었다. 인조, 효종, 숙종 등 윗대의 왕들은 이반된 민심이 두려워 거리에 나다니지 못했다. 
하지만 영조는 백성들에게 직접 얼굴을 내비쳤다. 통치자는 구중궁궐 속 외경의 대상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lt;br&gt;&lt;br&gt;&lt;b&gt;의례 주인공 돼 백성 마음 파고든 정조&lt;/b&gt;&lt;br&gt;국왕의 자신감 있는 드러냄은 정조의 수원 화성 행차에서 정점을 
이룬다. 『의궤』에 수록된 그림은 행차 구경을 위해 모여든 다양한 계층의 사람을 보여준다. 어린아이, 여염집 아낙네, 엿장수, 떡장수까지 
구경꾼의 면면을 상세히 그렸는데 이는 기층 민중에 대한 정조의 애정을 보여준다. 기층 민중에게 왕의 행차는 평생 잊지 못할 대단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스스로 의례의 주인공이 되어 백성들의 마음속으로 들어갔다.&lt;br&gt;&lt;br&gt;　정조는 건릉성제(健陵盛際)의 치세를 이끌었다. 이것은 
단순한 운이 아니었다. 그는 48세라는 아까운 나이에 ‘과로사’한 워커홀릭이었다. 그는 이례적으로 문사가 대필하던 연설문조차 손수 작성했으며 
당대 최고의 지식인인 다산 정약용을 능가하는 박식한 인물이었다.&lt;br&gt;&lt;br&gt;　정조의 진정한 위대함은 다양성을 인정한 데 있었다. 정조는 두려움 
없이 열린 비판에 자신을 맡겼다. 심환지나 김종수 같은 반대파 인사를 기꺼이 등용해 정책에 다양한 의견이 반영되도록 했다. 서양문물에 대해서도 
유연한 태도를 취했다. “탄압으로 학문은 무너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학문과 종교를 분리하는 실용적인 태도를 취했다. 이런 태도는 18세기 
학문의 르네상스로 자연스레 연결됐다.&lt;br&gt;&lt;br&gt;　덕분에 학구열은 궁궐 밖으로도 퍼져나갔다. 전국적으로 서당의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합격률은 
낮았지만 과거시험은 평민에게도 열려 있었다. “한 가지라도 잘하면 나를 등용할 것”이라는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조 때에는 20만 
명이 과거 시험을 보러 한양으로 모여드는 대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인구가 80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세계사적으로 놀라운 
응시율이다.&lt;br&gt;&lt;br&gt;　영조 시대의 이단전은 천민 출신이었는데, 탁월한 한시로 이름이 높았다. 사람이 신분 때문에 무시당하는 것이 아니라 
재능으로 인정받을 수 있던 좋은 시대였다. 영·정조의 열린 태도는 모두에게 기회와 가능성을 주는 발랄한 사회 분위기를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lt;br&gt;&lt;br&gt;&lt;b&gt;인간적인 것, 삶의 디테일에 눈길 준 시대&lt;/b&gt;&lt;br&gt;열린 자세는 학문적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18세기에는 17세기의 
교조적 성리학에서 실증의 학문으로, 즉 의리와 윤리의 학문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만물에 대한 학문으로 대 전환이 이뤄졌다. 이전에 잡학이라 
배척받던 실증적인 학풍이 되살아나기 시작한다. 세상 모든 것을 연구 대상으로 삼는 계몽주의의 백과전서파에 비견될 만한 학문 태도가 대두됐다. 또 
그간 중국 중심의 획일화된 지식에서 벗어나 다양한 소스의 지식을 수용한다. 특히 서양 과학기술은 신선한 지적 충격이었다. 이덕무, 정약용, 
박제가 등 당대 내로라하는 젊은 지식인들은 모두 서양의 신지식에 열광했다.&lt;br&gt;&lt;br&gt;　이와 더불어 중국 중심적 지식체계에서 벗어나 중국의 
시선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조선의 역사와 현재를 바라보게 됐다. 이 같은 다양성의 허용은 주체성의 강화로 귀결됐다. 자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여 다산 정약용은 교과목을 재편성해서 『삼국사기』와 『동국통감』 등을 포함시킬 것을 주장했다. 고조선부터 고려 말을 다룬 안정복의 
『동사강목』(1778년, 정조 2년), 발해의 역사를 다른 유득공의 『발해고』(1784, 정조 8년)가 쓰인 것도 이때다.&lt;br&gt;&lt;br&gt;　안대회 
교수는 18세기가 ‘기록의 시대’였다는 것을 특히 강조한다. 정조 스스로가 역대 통치자 중 가장 글을 많이 쓴 왕이었으며, 무수히 많은 기록을 
남겼다. 기록 열풍은 서민 계층으로까지 퍼져나갔다. 삶의 모든 것이 기록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간주됐다. 담뱃불을 붙이는 방법, 비둘기 사육법, 
날마다 바뀌는 병영의 암구호까지, 이전에는 ‘있어야 할 것’에 대한 기록에서 ‘있는 것’에 대한 기록으로 넘어갔다. 이 시기에 쓰인 『추재기이』 
『초사담헌』 같은 책은 공식적인 역사에서 누락된 비천한 계층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시장의 떠돌이 공연예술가, 광대, 바둑 기사 등을 우호적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데, 인간에 대한 따뜻한 연민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인간적인 것, 삶의 디테일에 대한 우호적 관심의 증대는 좋은 
시대의 징표다.&lt;br&gt;&lt;br&gt;　학문적 태도의 전환과 삶의 디테일에 대한 사랑은 다양성에 대한 요구로 표현된다. 27세에 요절한 역관 출신의 천재 
이언진은 이런 시를 남겼다. “노자와 묵자, 법가와 명가가 일가를 이루듯/ 가을 단풍이 봄꽃에 양보할 필요가 있으랴?/ 승려와 도사에게 선비 
옷을 입게 하면/ 성머리의 만 마리 까마귀가 될 뿐이지.” 만 마리 까마귀가 아니라 다양한 깃털을 허용하라는 요구는 지식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개인의 삶의 다양한 방면에서 표현됐다.&lt;br&gt;&lt;br&gt;&lt;b&gt;장서·문방구로 호사 부리는 게 ‘멋진 인생’&lt;/b&gt;&lt;br&gt;세속적 삶에 대한 관심이 커진 
건 안정적인 경제를 배경으로 한다. 성리학에서는 성욕 같은 육체적인 욕구뿐 아니라 상업적 이익의 추구도 멸시받았었다. 18세기에는 안빈낙도와 
청렴결백의 선비를 대체하는 새로운 인물상이 등장한다. 연암 박지원의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이 그런 사람이다. 매점매석으로 큰돈을 번 허생을 
비난하면서도 사람들은 부러워한다. 허생은 그렇게 번 큰돈을 모두 뿌리치고 다시 가난한 집으로 돌아간다. 사회에 내재된 이익 추구의 욕망을 한바탕 
드러내놓고 유유히 무대를 내려간 것이다.&lt;br&gt;&lt;br&gt;　교역을 통해 외국에서 들어온 새로운 물건들은 다양한 소비문화를 발전시켰다. 안경, 시계 
등 다양한 개인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물건들이 사랑받았다. 이 무렵 갓 쓰고 선글라스를 멋지게 쓴 퓨전 패션의 인물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멋진 인생’을 만들었다. “푸른 휘장을 쳐서 창문을 아득하게 만드는 것, 예스러운 솥에 향을 피우는 것, 유리 등잔에 촛불을 
켜 어둠을 몰아내는 것…서화를 품평하는 것”이라고 나열한 유만주가 묘사한 ‘멋진 인생’은 지금 들어봐도 그럴듯한데, ‘향’ ‘유리 등잔’ 등은 
모두 외국에서 들여온 수입품들이다.&lt;br&gt;&lt;br&gt;　‘멋진 인생’의 뺄 수 없는 필수품은 장서의 수장과 문방구 사치다. 안대회 교수는 이 시대가 
문화적으로 훌륭한 시대라는 직접적인 지표로 책과 종이를 꼽는다. “종이의 질과 장정만 보더라도 문화의 수준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18세기에 
만들어진 책들은 300년이 지났는데도 얼마 전 찍은 책처럼 새롭고 종이 질도 최고다. 사회 전체에 배어 있는 살아 있는 지식의 활기가 책에 대한 
애정으로 이어진 것이다. 18세기 책거리 그림의 대대적인 유행은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다.&lt;br&gt;&lt;br&gt;　그러나 다양성을 추구하는 개방적 
분위기는 정조 사후 급격하게 단절된다. 정조가 죽은 바로 다음 해인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나 외래적인 것의 배척과 엄격한 사상적 통제가 
시작된다. 열린 사회에서 닫힌 사회로, 번영과 안정의 18세기에서 불안과 혼란의 19세기로의 전환이다. 19세기로의 전환은 ‘전통의 끝이자 
근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18세기는 소위 ‘한국적인 것의 고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의 원형이 마련된 시대였으며 한국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멋진 
인터페이스가 되는 시대였다.&lt;br&gt;&lt;br&gt;※다음 회부터는 S매거진으로 옮겨 격주로 연재합니다. &lt;br&gt;&lt;br&gt;
&lt;hr&gt;
&lt;br&gt;안대회 성균관대 한문학과 교수로 한국 고전문학계의 소문난 글쟁이다. 18~19세기 문인들의 시와 산문을 쉽고 아름답게 소개해 우리 
고전문학이 낡고 고루한 게 아니라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줬다. 『고전산문산책』 『선비답게 산다는 것』 『정조의 비밀편지』 『18세기 한국한시사 
연구』 등을 썼다.&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정약용&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정약용&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정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정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영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영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안대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안대회&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18세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18세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건릉성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건릉성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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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화가 문성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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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CDATA[이진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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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CDATA[2013-04-08T14:40:18Z]]></updated>
		    <published><![CDATA[2013-04-08T14:40:1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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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class=&quot;title2&quot;&gt;&lt;b&gt;일상을 잘 살아내면서 예술을 건져 올리는 게 꿈&lt;/b&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소제목 테이블 끝--&gt;&lt;!-- 기사요약 시작 --&gt;&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bgColor=&quot;#f2f2f2&quot;&gt;&lt;tbody&gt;&lt;tr&gt;&lt;td height=&quot;10&quot;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1.gif&quot;&gt;&lt;/td&gt;&lt;td height=&quot;10&quot;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5.gif&quot;&gt;&lt;/td&gt;&lt;td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2.gif&quot; width=&quot;10&quot; height=&quot;10&quot;&gt;&lt;/td&gt;&lt;/tr&gt;&lt;tr&gt;&lt;td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6.gif&quot; width=&quot;10&quot;&gt;&lt;/td&gt;&lt;td style=&quot;padding: 8px;&quot; bgColor=&quot;#ffffff&quot; width=&quot;58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3pt;&quot;&gt;&lt;font color=&quot;#000ca3&quot;&gt;문성식&lt;/font&gt;&lt;br&gt;980년 경북 김천 출생. 2005년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조형예술과를 졸업한 후, 2008년 동 대학교 전문사 과정을 마쳤다. 그는 2005년 베니스 비엔날레 한국관의 최연소 작가로 참여하면서 미술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2006년 키미아트에서 첫 개인전, 2011년 국제갤러리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가졌다. Biennale Giovani Monza, 원&amp;제이 갤러리, 보훔미술관, 교토아트센터, 프라하비엔날레 4, 소마미술관 등의 주요 전시에 참여했다. 몽인아트스페이스 (2010~2011)와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미술창작스튜디오(2007~2008)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현재 서울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중이다. &lt;br&gt;www.moonsungsic.co.kr&lt;/font&gt;&lt;/td&gt;&lt;td vAlign=&quot;top&quot;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7.gif&quot; width=&quot;10&quot;&gt;&lt;/td&gt;&lt;/tr&gt;&lt;tr&gt;&lt;td height=&quot;10&quot;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3.gif&quot;&gt;&lt;/td&gt;&lt;td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8.gif&quot;&gt;&lt;/td&gt;&lt;td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4.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기사요약 끝 --&gt;&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width=&quot;495&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color=&quot;#0066cc&quot;&gt;이진숙&lt;/font&gt;  미술평론가&lt;/td&gt;&lt;td style=&quot;padding-bottom: 5px;&quot; vAlign=&quot;bottom&quot; width=&quot;105&quot; align=&quot;right&quot;&gt;&lt;a href=&quot;http://topclass.chosun.com/board/otherLst.asp?writername=이진숙&quot;&gt;&lt;img alt=&quot;필자의 다른기사&quot;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tn_other.gif&quot;&gt;&lt;/a&gt;&lt;/td&gt;&lt;/tr&gt;&lt;tr&gt;&lt;td height=&quot;25&quot; vAlign=&quot;top&quot; colSpan=&quot;2&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ignews_line.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본문내용시작 --&gt;&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vAlign=&quot;top&quot;&gt;&lt;div style=&quot;font-size: 10pt;&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rticle_body&quot;&gt;&lt;table style=&quot;margin-top: 4px; margin-bottom: 15px; margin-left: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align=&quot;right&quot;&gt;&lt;tbody&gt;&lt;tr&gt;&lt;td&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3/1303_060.jpg&quot; width=&quot;250&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9;&#9;&#9;&#9;&#9;                    그해에도 마당엔 철마다 꽃이 피고 졌고, 6월에는 뻐꾸기가 울었다. 마당에 키우던 공작새들은 우아하게 날아다니다가 지붕 위에 앉았다. 할머니는 나물을 말리고, 어머니는 빨래를 널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기력회복을 위해 수돗가에서 닭을 잡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유일한 ‘옥의 티’가 할아버지의 암이었다. 그것은 아름답고 행복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풍경에 처음으로 끼어든 불순한 것이었다. 화가 문성식은 작품 〈6월의 뻐꾸기&amp;gt;에 관해 조근조근 말을 이어갔다. &lt;br&gt; &lt;br&gt; “그런 게 삶이더라고요. 온전하지 못한 것들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삶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 거더라고요.” &lt;br&gt; &lt;br&gt; 그렇게 삶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 소년은 어른이 되어갔다. 문성식은 시인의 감수성을 가진 화가다. 경북 김천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풍요로웠고, 그는 유달리 예민한 아이였다. 남다르게 느끼고 남다르게 기억한다. 또 다른 기억이 그림으로 남아 있다. 할아버지는 병마로 야위어만 가셨다. 더 마르기 전에 모습을 남겨놓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주장으로 형은 배경막이 되는 천을 들고 서 있고, 사진에 나오는 상의만 갖춰 입고 할어버지는 카메라 앞에 서셨다. 그 사진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모두 알고 있으면서 애써 모르는 척 할머니의 잔소리에 따라 묵묵히 그 일을 했을 뿐이다. 아주 화창하고 쓸쓸했던 어느 봄날의 기억은 작품   &amp;lt;봄날은 간다&amp;gt;에 담겨 있다. &lt;br&gt; &lt;br&gt;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에 대한 관심이 가장 크죠. 인간과 인간의 삶, 세계의 알 수 없음, 자연과 우주의 섭리는 늘 신비하게 느껴지죠. 인간의 가장 큰일은 죽는 것이죠. 그것이 영원한 주제일 수밖에 없어요. 그것을 빼고 도대체 무엇에 관해서 노래를 할 수 있겠어요? 제 그림은 제가 보고 경험한 세상의 기록입니다. 그 시대의 공기와 감성, 다양한 인간사의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것이 제 회화의 가장 큰 과제입니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45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3/1303_060_1.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봄날은 간다_ 종이에 연필, 27×18cm, 200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하루의 생존에 급급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도, 거대 담론을 이야기하기 좋아하는 현대미술에서도 사라진 것을 그는 말하고 있다. 삶에 대한 경외감과 신비감을 느끼고 경탄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어쩌면 누구나 보고 누구나 경험하는 바로 그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아니면 안 되는 방식으로 그려지고 있다. 사사로운 삶을 관통하는 어떤 원리를 그는 잘 알고 있다. 삶에 대한 그의 관조는 늘 따뜻하고 애잔하다. “그냥 늙은 사람이 노래하는” 장면을 그린 &amp;lt;노래&amp;gt;라는 작품에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부르는 노래는 기쁜 노래인지 슬픈 노래인지 알 수가 없다. 그의 말대로 인간이 시간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시간과 노동이 인간의 얼굴을 훑고 지나가면서 볼품없게 만든다. 그러나 문성식은 삶을 견디어낸 사람만이 부를 수 있는 어떤 노래에 귀를 기울인다. 삶은 그저 슬픈 것도, 그저 기쁜 것도 아니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3/1303_060_2.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6월의 뻐꾸기_ 종이에 연필, 53×38cm, 200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amp;lt;별과 소쩍새 그리고 내 할머니&amp;gt;에서는 장례식 풍경이, &amp;lt;청춘을 돌려다오&amp;gt;에선 결혼식 뒤풀이 풍경이 펼쳐진다. 흥에 취한 사람들이 까맣고 동그랗게 칠해진 입으로 하늘을 보고 탄원하듯이 “청춘을 돌려달라”고 합창한다. 신랑신부와 아무 상관없는 노래다. 슬픈 장례식이건, 기쁜 결혼이건 누군가에게는 그저 먹고 마시는 떠들썩한 이벤트일 뿐이다. 슬픔과 평온함, 찬란함과 허약함, 아름다움과 우스꽝스러움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헛웃음을 웃게 하는 “인간이라는 동족”에 대한 헛웃음과 연민이 진하게 배어 있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16세기 네덜란드 대가 피터 브뤼겔의 그림을 닮아 있기도 하다. &lt;br&gt; &lt;br&gt; 사용하는 재료에 제한을 두려고 하지는 않지만, 그의 그림은 대부분 연필로 그린 드로잉이다. 미술계 안팎으로는 연필 그림과 유화의 차별이 알게 모르게 존재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재료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미지의 새로움이다. 작가가 얼마나 새롭고 울림을 줄 수 있는 이미지를 창조하는가가 가장 중요하다. 이 점에서 문성식은 성공하고 있다. “미술은 솔직히 하는 것”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 것인 척하는 태도,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허세를 거두어내고 “살아 있는 현실에서 느꼈던, 마음의 파장을 건드렸던 것들을 오염 없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법으로 기록하기로 결심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드로잉이라는 가장 소박하고 가장 원초적인 장르였다. 한국예술종합대학을 다니던 당시 미디어아트를 새로운 경향이라고 모두 생각할 때, 일종의 역선택이었던 셈이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3/1303_060_3.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노래_ 천 위에 젯소 연필, 33.5×24.5cm, 2009&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는 2005년 25세의 나이로 베니스비엔날레에 우리나라 최연소 작가로 참여했다. 아직 학생일 때였다. 학교에서 드로잉 전시를 했는데 그 작품들을 많은 사람이 좋아해서 당시 베니스비엔날레 커미셔너였던 김선정 큐레이터에게 추천이 되어 국제적인 행사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후 독일의 보훔미술관, 교토아트센터, 프라하비엔날레 4 등 다양한 국제적인 미술행사에 참여했다. 그리고 2011년에는 국내 최대 갤러리인 국제갤러리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했다. 올해는 두산 레지던시 작가로 선정되어 6월에 뉴욕으로 떠날 예정이다. 서른 셋 작가의 꽉 찬 커리어다. 그만큼 속도가 빨랐으니, 현기증이 날 법도 하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3/1303_060_4.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무심한 교차_ 장지에아크릴릭, 76×430cm, 2008~2010&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사실 그를 유명하게 만든 그림은 정원의 초록색 나무를 그린 그림들이었다. 정원은 자연을 인간의 틀로 제한한 것으로, 자연과 인간의 불편한 만남을 떠올리게 한다. 대학 4학년 때부터 3~4년간 이 시리즈를 그려왔다. 그 자체로 매력적인 그림이었지만, 정해진 틀을 반복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족쇄를 채우는, 어리석은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작품 주문이 밀려 들어오는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심이었지만, 과감하게 이 시리즈를 접고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2011년 국제갤러리 개인전에서는 전혀 다른 그림들을 들고 나타났다. 전시 제목은 &amp;lt;풍경의 초상&amp;gt;이었다. 초상화를 그리듯 풍경을 앉혀놓고 면밀히 들여다보겠다는 생각이었다. 당시 그의 관심사는 질감이었다. 고향에서 서울을 오가면서 본 세종시나 경기도의 파헤쳐진 땅을 보면서 영감을 얻었다. 땅을 무너뜨렸는데 거기에 시간이 쌓였다. “땅이 회화다. 노인의 피부는 너무 아름다운 회화다”라는 생각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 &amp;lt;무심한 교차&amp;gt;다. 1년 반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그림은 회화적으로도 무거워지고 풍부해졌다. 더불어 그를 가두던 이론의 틀을 벗어 던지고 그는 다시 자연과 인간, 그리고 숲으로 돌아왔다. 사실 지금 한국에서 서른 먹은 화가라는 사람이 어떤 그림을 그릴 것인가에 대한 답이 쉽게 떠오르는 것은 아니란다. 그럴 때마다 그는 원론적인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lt;br&gt; &lt;br&gt; “외국을 다녀오고 나면 우리 풍경이 볼품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죠. 하지만 있는 그대로 우리 자연의 리얼리티를 받아들여야 하죠. 식물이 자기가 뿌리내린 곳에서 양분을 빨아들이고 성장해야지 링거를 맞으면서 자라는 것은 아니잖아요. 내가 한국 사람이고, 된장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정서, 한국에서만 느낄 수 있는 땅의 질감이 반드시 있을 거예요. 이게 제 작품의 시작점입니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3/1303_060_5.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after lunch_캔버스에 아크릴릭, 60×131cm, 2007&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그는 현실에 관심이 많기 때문에 삶을 잘사는 게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고 한다. 그림을 그리기 위한 삶보다 그는 그냥 삶을 선택했다. 세상 사는 이웃들의 삶을 더 들여다보면서 천천히 걷는, 제대로 된 길을 택하겠다는 말이다. 사실 너무 바쁘고 혹독한 시간들을 따라가다 보니 신체의 리듬도 깨졌다. 최근까지도 그는 스트레스로 인한 귓속의 전정기관 이상으로 고생을 했다. 예민한 감수성은 그를 특별한 예술가로 만들기도 하고, 그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lt;br&gt; &lt;br&gt; “좋은 생활 패턴, 그림을 그려내는 좋은 일상을 가지는 것. 이게 내가 가장 바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 살아 있고, 이 시간들을 잘 쓰고 알차게 사는 것, 좋은 일상에서 예술을 건져 올리는 것을 꿈꿉니다.” &lt;br&gt; &lt;br&gt; 평온하고 단단한 어조로 젊은 화가는 말을 이어 나갔다. 그는 섬세하고 표현력이 풍부한 단어들을 구사했다. 그의 홈페이지를 방문하면 시적인 감수성이 넘치는 그의 에세이를 볼 수 있다. 그를 통해서 좋은 감수성이 한국미술에 수혈될 것 같은 좋은 예감이 느껴졌다&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문성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문성식&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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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봉선, 소나무를 그리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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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CDATA[tag:blog.daum.net,2013:kmedichi.198]]></id>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4-08T14:39:08Z]]></updated>
		    <published><![CDATA[2013-04-08T14:39:0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class=&quot;title2&quot;&gt;&lt;b&gt;한 호흡에 그리는 소나무의 기상&lt;/b&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소제목 테이블 끝--&gt;&lt;!-- 기사요약 시작 --&gt;&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bgColor=&quot;#f2f2f2&quot;&gt;&lt;tbody&gt;&lt;tr&gt;&lt;td height=&quot;10&quot;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1.gif&quot;&gt;&lt;/td&gt;&lt;td height=&quot;10&quot;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5.gif&quot;&gt;&lt;/td&gt;&lt;td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2.gif&quot; width=&quot;10&quot; height=&quot;10&quot;&gt;&lt;/td&gt;&lt;/tr&gt;&lt;tr&gt;&lt;td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6.gif&quot; width=&quot;10&quot;&gt;&lt;/td&gt;&lt;td style=&quot;padding: 8px;&quot; bgColor=&quot;#ffffff&quot; width=&quot;58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3pt;&quot;&gt;“곧으면 곧은 대로 구부러지면 구부러진 대로, 우리나라 소나무만큼 아름다운 곡선, 형태를 가진 소나무가 없다. 누구 하나 돌보지 않아도 온갖 풍상을 겪으며 말없이 서 있는 노송은 우리를 숙연하게 만든다. 어쩌면 소나무야말로 우리나라의 풍토와 기후가 만들어낸 비대칭, 비정형, 비상식, 비표준 그리고 겸손, 인내, 당당함 등을 두루 겸비한 진정한 목신(木神)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lt;br&gt;&lt;br&gt;&lt;font color=&quot;#000ca3&quot;&gt;문봉선&lt;/font&gt;&lt;br&gt;1961년 제주도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을 졸업했다. 중국 난징예술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18회의 개인전과 &amp;lt;매화꽃이 있는 정원&amp;gt;(2012, 환기미술관), &amp;lt;한라산과 일출봉&amp;gt;(2012, 제주도립미술관), &amp;lt;금강미술대전 초대작가전&amp;gt;(2011, 대전MBC) 등 다수의 단체전에 참가했다. 1986년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회화 부문을 수상하고, 1987년 중앙미술대전 대상, 같은 해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또한 1987년 동아미술제 동아미술상 문인화 부문, 2002년 제16회 선미술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새로 그린 매란국죽》(2006, 전2권, 학고재), 《문봉선》(2010, 열화당) 등 다수가 있다.&lt;/font&gt;&lt;/td&gt;&lt;td vAlign=&quot;top&quot;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7.gif&quot; width=&quot;10&quot;&gt;&lt;/td&gt;&lt;/tr&gt;&lt;tr&gt;&lt;td height=&quot;10&quot;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3.gif&quot;&gt;&lt;/td&gt;&lt;td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8.gif&quot;&gt;&lt;/td&gt;&lt;td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4.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기사요약 끝 --&gt;&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width=&quot;495&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color=&quot;#0066cc&quot;&gt;이진숙&lt;/font&gt;  미술평론가&lt;/td&gt;&lt;td style=&quot;padding-bottom: 5px;&quot; vAlign=&quot;bottom&quot; width=&quot;105&quot; align=&quot;right&quot;&gt;&lt;a href=&quot;http://topclass.chosun.com/board/otherLst.asp?writername=이진숙&quot;&gt;&lt;img alt=&quot;필자의 다른기사&quot;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tn_other.gif&quot;&gt;&lt;/a&gt;&lt;/td&gt;&lt;/tr&gt;&lt;tr&gt;&lt;td height=&quot;25&quot; vAlign=&quot;top&quot; colSpan=&quot;2&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ignews_line.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본문내용시작 --&gt;&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vAlign=&quot;top&quot;&gt;&lt;div style=&quot;font-size: 10pt;&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rticle_body&quot;&gt;&lt;table style=&quot;margin-top: 4px; margin-right: 15px; 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align=&quot;left&quot;&gt;&lt;tbody&gt;&lt;tr&gt;&lt;td&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2/1302_034.jpg&quot; width=&quot;250&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9;&#9;&#9;&#9;&#9;                    2013년 2월 17일까지 부암동 서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하고 있는 문봉선 화백의 말이다. 소나무를 주제로 한 이 전시는 〈송운(松韻)〉이라는 작품으로 시작된다. 아침 안개처럼 솔향이 화면 가득 퍼져나간다. 가까이서 보면 메마른 붓질의 중첩이다. 한 걸음 떨어져서 보면 비로소 군집한 소나무들이 보인다. 소나무를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떠오른다. 그것은 나무의 생김새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나무의 힘과 그 솔향을 함께 보는 것이다. 10m나 되는 다른 대형 화폭에는 쭉쭉 뻗은 소나무들이 기운차게 뻗어 하늘에 닿아 있다. 드라마틱한 소나무들의 모습은 잠시 이 그림이 흑백의 수묵화라는 것을 잊게 한다. 치솟은 소나무들의 강렬한 힘과 생동감 때문이다. 작품 제목에는 거창 수송대, 경주 오름, 양산 통도사, 경주 삼릉, 충북 보은, 경주 남산, 제주 대정향교의 해송, 석파정의 천세송 등 소나무를 사생한 장소가 표기되어 있다. &lt;br&gt; &lt;br&gt; 문봉선이 처음 소나무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주 오래전 일이다. 고등학생 때 강요배 선생에게 데생을 배웠는데, 그때 소나무의 ‘진(眞)’이라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고향인 제주 산천단의 수령 500살이 넘은 천연기념물 곰솔을 그리고 또 그렸다. 1987년 소나무 그림으로 동아미술상을 탔으니 그와 소나무의 인연은 깊다고 할 수밖에. 또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지금 마침내 ‘문봉선의 소나무’들이 탄생했다. 당나라 때 이사훈의 〈강상누각도〉 이래 1000년이 넘게 소나무는 껍질은 거칠게, 솔방울은 삐죽삐죽하게 그리는 같은 방식으로 그려져왔다. 그러나 그가 그린 소나무는 달랐다. 큰 붓을 이용해서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강인함과 기상을 표현했다. 진한 먹의 느낌이 살아 있는 농묵으로 굵은 줄기를 그리고 마른 갈필로 솔잎을 그렸다. 마침내 “전통 내부의 혁신”을 해낸 것이다. &lt;br&gt; &lt;br&gt; “소나무의 진(眞)은 바로 즉 기운생동(氣韻生動)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오랜 지필묵 수련도 필요할 뿐만 아니라 소나무가 가지고 있는 목신(木神)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2/1302_034_1.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소나무-경주 삼릉 송림(松林)_ 화선지에 수묵, 245×1000cm, 201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작업 과정 자체가 감동적이다. 우선 큰 화선지를 꼼꼼히 이어 붙이는 데 2~3일이 걸린다. 그리고 그 다음날은 하루 종일 먹을 갈면서 머릿속에서 구상이 이루어진다. 오랫동안 꼼꼼히 사생해온 것을 바탕으로 하되 그것에 얽매이지 않는다. 소나무가 그의 내면으로 들어와서 느낌으로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당일 아침 시작해서 하루에 8시간을 넘게 집중해서 그린다. ‘일단일도’라고 두 장 그리지는 않겠다는 마음으로 한 호흡에 그린다. 밑그림도 없고 수정도 불가능하다. 한 호흡으로 하루 만에 그리는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오랜 수련 기간이 필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우선 지필묵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정선・ 이인상 등 대가들의 그림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림 자체가 글씨를 쓰는 것과 같이 일필휘지로 그려진 것은 그가 서예인 초서를 능히 다룰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서화일체의 문인화를 할 수 있는, 요즘 보기 드문 화가다. “소나무는 기상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한데 그 기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소나무를 한 필로 그려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림에 초서가 가미되니 화면에 공간미・조형미 같은 것이 표현되어 전통화지만 현대화 같은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는 15년 동안 전각을 배웠다. 농담의 변화 없이도 공간을 구성하고 배치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전각에 능통하기 때문이다. 전통산수화, 서예, 전각까지 한데 어우러져 농익어 표현된 것이 지금의 문봉선의 소나무들이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35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2/1302_034_2.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소나무-독야청청(獨也靑靑)_ 화선지에 수묵, 245×120cm, 201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그는 지필묵에 익숙한 환경에서 자랐다. 집안 전체가 글과 그림을 숭상했고, 어려서부터 서예와 한자를 배웠다. 남들이 국영수 공부하느라 정신없는 고등학생 때도 소암 현중화 선생에게서 글씨 쓰는 법을 배웠다. 젊은 시절 그의 재능을 알아본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재’라며 아꼈다. 이미 아마추어를 넘어선 솜씨를 가지고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니 막상 학교의 전공수업은 재미가 없었다. 대신 조각・미술사・서양화를 두루 공부했다. 이런 공부들은 모두 전통회화를 다시 생각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그는 교수가 되고 여러 공모전에서 상을 휩쓸면서 유명 작가가 되었지만, 좋은 그림에 대한 목마름은 끝이 없었다. 2002년 그는 중국 난징으로 다시 유학을 가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때 그의 스승은 중국 초서(草書)의 대가인 서리명(徐利明)이었다. 한편으로는 초서를 배우면서 또 한편으로는 중국 석사학생들에게 사군자를 가르치면서 자신감을 얻었다. &lt;br&gt; &lt;br&gt; 21세기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전통에 대한 그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 사실 한국이 세계무대에서 경제적 지위가 상승할수록 그에 걸맞은 문화강국의 면모를 자랑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에게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물었다. &lt;br&gt; &lt;br&gt; “한국적인 아름다움은 곰삭고 오래된 것, 무심결에 나오는 것이다. 돈이나 권력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질서를 저절로 담고 있는 것이다. 억지스러운 완벽이 아니라 그 자체로의 자연스러움을 고졸미라고 일컫는 바로 그것이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2/1302_034_3.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석파정 천세송(石坡亭 千歲松)_ 화선지에 수묵, 145x367cm, 201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創造)한다는 ‘법고창신(法鼓昌信)’의 정신을 강조하는 그는 전통과 전통의 현대화라는 두 가지 과제를 놓치지 않고 작업을 해왔다. 긴 겨울 홀로 외롭지만, 먼 미래를 꿈꾼다는 의미의 전시 제목 〈독야청청 천세를 보다〉는 소나무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문봉선 자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한국미술계에서 전통화의 입지가 크게 줄었지만, 문봉선은 전통화의 방법으로 가장 왕성하게 활동하는 독보적인 화가다. 2012년만 하더라도 세 번의 대형 개인전을 개최했으며 소나무・난초・매화 그림 등 매번 보여주는 그림들도 달랐다. 33세부터 북한산・설악산・지리산・섬진강 등 아름다운 우리 산천을 찾아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풍광을 관찰하며 산수화를 그렸고, 그 과정에서 자연의 생태를 이해하게 되면서 사군자를 더욱 잘 그릴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쭉 살펴보니 매번 다른 주제를 들고 나온 전시들은 커다란 프로그램에 근거한 구체적인 행보들이다. 그의 가장 큰 궁극의 목표는 무엇일까.  &lt;br&gt; &lt;br&gt; “궁극은 바로 우리 자연이다. 고산자 김정호처럼 백두대간 그림을 완성하는 것이다. 백두대간을 답사해서 100m 정도의 두루마리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리고 환갑 전에는 오우가에 나오는 기물들을 모두 그려볼 것이다. 환갑이 넘으면 화려한 색을 사용한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데, 고향 제주도의 자연을 담은 화려하면서도 격조 있는 색, 생명력 있는 색에 도전해보고 싶다. 자연과 사군자를 다 버리고 나면 나는 선禪으로 가고 싶다. 초서의 경지로 가고 싶다는 말이다. 이 경지로 가려면 사람, 자연의 모든 원리를 다 이해해야 한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2/1302_034_4.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소나무-보름달_ 2012, 화선지에 수묵, 145×360cm, 201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앞으로의 계획도 그림에 관한 이야기뿐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는 거의 매일 그림을 그려왔다. 현재도 미래도 그의 삶은 온통 그림에 관한 것뿐이다. “특별한 재주도 없고, 특별한 취미도 없고, 그냥 지필묵하고 사는 그 자체가 늘 행복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의 당호는 독소당(獨笑堂)인데, ‘혼자 미소 짓는 집’이라는 뜻이다.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보는 그 순간이 행복하다는 말이다. 그가 그리고 나서 미소 지은 그림들이 지금 전시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문봉선이 보여준 전통에 대한 깊은 사랑을 우리 모두가 함께하면 더욱 행복하지 않을까.&lt;img align=&quot;absmiddle&quot;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topclass.gif&quot;&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서울미술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울미술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문봉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문봉선&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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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5) 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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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4-08T14:37:11Z]]></updated>
		    <published><![CDATA[2013-04-08T14:37:1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면죄부는 죄를 결코 사해 줄 수 없다. 교황이라고 해도 그런 일은 못 한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lt;br&gt;&lt;br&gt;1517년 독일의 수도사이며 신학교수인 마르틴 루터는 감히 교황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과 바티칸 궁의 개축 재원 마련을 위해 면죄부를 판매하자 그 부당함을 비판하는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포문을 
연 것. 루터는 시작에 불과했다. 츠빙글리, 칼뱅 등 보다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는 흐름들이 뒤를 이었다. &lt;br&gt;&lt;br&gt;서양문화사가 자크 
바전은 “서양인의 삶을 진정 획기적으로 바꿔 놓은 첫 번째 사건은 르네상스가 아니라 종교개혁”이라고 말한다. &lt;br&gt;&lt;br&gt;
&lt;/p&gt;&lt;div style=&quot;width: 550px;&quot; class=&quot;center_image&quot; jQuery17207962322768681423=&quot;1&quot; originw=&quot;550&quot;&gt;&lt;img border=&quot;0&quot; hspace=&quot;0&quot; alt=&quot;245462 기사의  이미지&quot;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13/04/image_readtop_2013_245462_1364775565877193.jpg&quot; width=&quot;550&quot;&gt; 
&lt;p style=&quot;margin-top: 5px;&quot;&gt;&lt;span class=&quot;image_small&quot;&gt;그림 ➊ 피테르 브뤼헐, ‘세례 요한의 설교’, 
1566년.&lt;/span&gt; &lt;/p&gt;&lt;/div&gt;&lt;p&gt;
&lt;/p&gt;&lt;div class=&quot;read_txt&quot;&gt;중세 이후 1000년 동안 유럽은 가톨릭의 날개 아래에서 하나였다. 민족 개념은 아직 미약했고, 유럽의 
왕들은 혼맥으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종교개혁은 구교와 신교라는 두 개의 유럽을 만들었다. 루터 이전에도 위클리프, 얀 후스 등이 
교회혁신운동을 주창했지만 루터와 같은 커다란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루터의 주장이 받아들여진 것은 세속 권력의 증대라는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lt;br&gt;&lt;br&gt;메디치 가문은 바티칸으로 흘러드는 유럽의 모든 헌금을 원활하게 유통시킬 수 있는 글로벌한 금융제도를 
고안해냈기에 번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신교도 국가의 교회 재산들은 로마로 가지 않고 그곳에 남아 있었다. 교황의 일방적인 지배에 반대하는 
세속 군주들은 종교를 ‘선택했다’. &lt;br&gt;&lt;br&gt;일찍이 1533년 영국의 헨리 8세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해 바티칸에 등을 돌리고 영국 
국교회를 창설했다. 북독일의 제후들과 자유 도시를 중심으로 신교도 세력도 확대돼갔다. 군주들에게는 종교 선택의 자유가 있었으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은 군주의 선택을 따라야 했다. 아직은 ‘1국가 1종교’가 지배적인 현상이었다. 이제 정치적 이해가 종교적 이해와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면서 전쟁의 이유도 달라졌다. &lt;br&gt;&lt;br&gt;1566년 피테르 브뤼헐(1525~1569년)이 그린 ‘세례 요한의 설교(그림 ➊)’에도 
종교개혁기의 복잡한 역사가 반영돼 있다. 그림 가운데에 갈색 옷을 입은 인물이 세례 요한이다. 그는 푸른 옷을 입고 두 손을 모으고 있는 예수를 
가리키고 있다. 오래전 예수가 생존해 있던 시절의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림의 실제 상황은 브뤼헐이 살았던 16세기 
네덜란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다. &lt;br&gt;&lt;br&gt;화면 멀리 대규모 건축물과 도시가 보인다. 세례 요한이 설교를 하는 곳은 광야도 아니고, 
발달한 도시의 광장도 아니다. 이곳은 스페인의 감시와 박해를 피해 개신교의 추종자들이 모여들던 성 밖의 숲 속이다. 우리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은 ‘종교개혁 주창자가 설교하는 장면’이다. 이 그림의 중심 인물은 세례 요한도 예수도 아니다. 브뤼헐이 애써 묘사한 것은 그 
집회에 모여든 다양한 종류의 인간 군상. 이곳에는 사제, 귀부인, 가난한 농부, 기적을 바라는 병든 사람, 무기를 든 아시아 사람, 터번을 두른 
터키인 등 16세기 네덜란드에서 브뤼헐이 봤던 모든 사람들이 모여 있다. &lt;br&gt;&lt;br&gt;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네덜란드에는 많은 개신교도가 
있었지만 당시 네덜란드는 전통 가톨릭을 표방하는 스페인 펠리페 2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림이 그려진 다음 해인 1567년 펠리페 2세는 
스페인의 정예군인 6만명을 네덜란드에 투입해 종교를 명분으로 잔혹한 전쟁을 벌였다. 나라 전체가 피비린내에 젖었다. &lt;br&gt;&lt;br&gt;개신교가 
퍼져나가는 것을 바티칸이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았다. 적극적인 반종교개혁 운동으로 반격을 가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1534년 이그나티오스 
로욜라(1491~1556년)가 창설한 예수회다. &lt;br&gt;&lt;br&gt;스페인 귀족 태생 로욜라는 젊은 시절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었다. 이후 
그는 병상에서 ‘그리스도의 진정한 병사가 되겠다’고 다짐하고 ‘영신수련(靈神修鍊)’을 수행지침으로 하는 예수회를 조직한다. 예수회 수사들은 
새롭게 발견된 신대륙에도 가톨릭을 전파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후에 예수회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큰 규모의 수도회로 발전했다. 이번에 
선출된 교황 프란시스코 1세는 소박하고 겸허한 행동으로 존경을 받고 있는데, 그 역시 예수회 출신이다. 예수회의 등장은 동요하던 가톨릭 세력의 
중요한 구심점이 됐다. &lt;br&gt;&lt;br&gt;이처럼 내부 개혁은 물론 아시아와 신대륙으로의 적극적인 선교와 함께 가톨릭은 교회의 영광과 권위를 드높이기 
위해 교회 치장과 재건축 사업에 더욱 열을 올린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빠르게 퍼져나갈 수 있었던 것은 구텐베르크의 활자혁명 덕분이었다. 필사본과 
구전의 오류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던 활자본은 동일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빠르게 만들어냈다. 개신교가 문자를 선택했다면 가톨릭은 미술의 강력한 
힘을 다시 불러냈다. 조각가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성당의 열주를 건설하고 성당 내부의 베드로 무덤에 화려한 덮개를 설치한 것도 이 무렵이다.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운동은 17세기 바로크 미술의 원동력이 됐다. &lt;br&gt;&lt;br&gt;&lt;/div&gt;&lt;p&gt;
&lt;/p&gt;&lt;div style=&quot;width: 550px;&quot; class=&quot;center_image&quot; jQuery17207962322768681423=&quot;2&quot; originw=&quot;550&quot;&gt;&lt;img border=&quot;0&quot; hspace=&quot;0&quot; alt=&quot;245462 기사의  이미지&quot;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13/04/image_readmed_2013_245462_1364775566877195.jpg&quot; width=&quot;550&quot;&gt; 
&lt;p style=&quot;margin-top: 5px;&quot;&gt;&lt;span class=&quot;image_small&quot;&gt;그림 ➋ 안드레아 포초, 성 이그나티오스 교회 
천장화, ‘성 이그나티오스의 영광’, 1685~1694년. &lt;/span&gt;&lt;/p&gt;&lt;/div&gt;&lt;p&gt;
&lt;/p&gt;&lt;div class=&quot;read_txt&quot;&gt;로욜라는 1622년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해 시성(諡聖)돼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1650년 
그에게 헌정된 성 이그나티오스 교회가 로마에서 완공됐다. 안드레아 포초(1642~1709년)는 9년간의 노력 끝에 1694년 바로크풍의 화려한 
교회에 어울리는 천장화(그림 ➋)를 완성했다. 관람자들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황홀한 영광의 장면이 펼쳐진다. 십자가를 든 예수의 영도를 
받으며 하나님을 향해 성 이그나티오스가 구름을 타고 승천하고 있다. &lt;br&gt;&lt;br&gt;실제로는 평평한 천장이지만, 포초는 마치 교회 천장이 열리고 
하늘이 열려 곧바로 천국으로 연결되는 듯한 환영을 창조했다. 하늘의 영광을 드높이기 위해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부산하게 움직인다. 선교의 
불꽃을 전하고, 천사에게 구원을 요청한다. 천사들의 저지로 바닥으로 떨어지는 저주받은 한 무리의 인간들의 절망적인 몸짓은 장면에 긴박성을 
더한다. 마치 지금 우리가 3D 영화를 보는 듯한 생생한 느낌을 당시 사람들이 느꼈으리라. &lt;br&gt;&lt;br&gt;이 그림에는 두 세기에 걸쳐서 이뤄진 
예수회의 신대륙에서의 모험과 종교적인 사명감이 잘 표현돼 있다. 중앙의 빛은 네 가닥으로 퍼져나가 아메리카,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이라고 쓰인 
네 개의 모서리로 흘러 들어간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인 흑인과 인디언도 그려져 있다. 가톨릭의 보편성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장면이다. 이 작품은 
이후에 이탈리아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독일 등 중요한 나라의 예수회 교회 천장화의 모범이 됐다. &lt;br&gt;&lt;br&gt;종교개혁과 반종교개혁은 유럽 
사회에 여러 가지 문제를 가져왔다. 1국가 1종교의 개념은 수없이 행해진 잔혹한 종교 박해의 이유가 됐다. 군주의 종교 선택에 동의하지 않은 
사람들은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고향을 떠나야 했다. ‘자유’ ‘개인’이라는 말의 가치가 커졌다. 하나의 유럽은 사라지고 유럽은 신교도와 
구교도로, 신교도는 다시 루터파, 칼뱅파로 나눠졌다. &lt;br&gt;&lt;br&gt;이제 전쟁은 십자군 전쟁처럼 기독교 세력 대 이교도 세력의 전쟁이 아니라, 
신교도 국가와 구교도 국가 간의 것이 됐다. 겉으로는 종교를 내세웠지만 각국의 영토 확장과 해상권 장악이라는 이권다툼으로 전 유럽은 지리한 
전쟁에 빠져들었다. 유럽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전쟁인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lt;br&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종교개혁&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종교개혁&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브뤼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브뤼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가울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가울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반종교개혁&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반종교개혁&lt;/a&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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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 군주로 돌아온 메디치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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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4-08T14:35:57Z]]></updated>
		    <published><![CDATA[2013-04-08T14:35:5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16세기, 결국 메디치 가문은 돌아왔다. 이번에는 ‘군주’라는 호칭으로. 메디치 가문의 두 교황은 레오 10세와 클레멘스 7세의 간곡한 노력의 
결과였다. 메디치 가문의 방계 친척인 코시모 1세(1519~1574년)는 1538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에게서 공작 작위를 받고 피렌체를 
포함한 토스카나 공국의 군주가 됐다. 이로써 메디치 가문의 부활 시나리오는 완성됐다. 이젠 무역업이나 은행업에 종사하는 신흥 세력이 아니라 
실질적인 귀족이 된 것이다. &lt;br&gt;&lt;br&gt;코시모 1세는 메디치 가문의 방계 혈통으로 15세기 메디치 가문의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위대한 
로렌초’와 먼 친척이다. 그러나 이탈리아 특유의 가족주의는 방계의 먼 친척을 통해서 메디치가의 제2 전성기를 이어갈 수 있게 해줬다. 그는 
방계인 자신이 메디치 가문의 적법한 후계자라는 것, 위대한 메디치 가문의 혈통이 자신에게 면면이 흐르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아낌없이 미술에 
돈을 쏟아부었다. &lt;br&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17.uf.daum.net/image/112757455162571A2CFCC4&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755&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755&quot;  id=&quot;A_112757455162571A2CFCC4&quot;/&gt;&lt;/p&gt;&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Vasari, 코지모 1세의 신격화&lt;/p&gt;&lt;p&gt;&lt;br&gt;1565년 코시모 1세의 아들 프란체스코의 결혼식은 참으로 성대했다. 신부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의 
친척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를 제외하고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 등 전 유럽 땅을 통치하고 있던 최고의 강국이었다. 이 결혼은 메디치가가 
군주로 있는 토스카나 공국의 국제적인 지위를 만방에 알리는 매우 정치적인 자리이기도 했다. 이 결혼을 위해서 어마어마한 환영식이 개최됐다. 당대 
유명 인문학자 보르기니가 기획을, 화가이자 저술가인 바사리가 총감독을 맡고 51명의 화가와 25명의 조각가, 15개소의 목공소가 동원된 대규모 
행사였다. &lt;br&gt;&lt;br&gt;코시모 1세는 300여년을 이어간 메디치 가문 전체에서 가장 적극적인 미술품 주문자였으나, 그 작품들은 이전 선조들의 
후원보다 높이 평가받지 못한다. 그가 주문한 미술품들은 이전보다 훨씬 노골적인 정치 선전의 수단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lt;br&gt;&lt;br&gt;&lt;b&gt;코시모 
1세, 메디치 가문 후계자 알리려 미술 투자&lt;/b&gt; &lt;br&gt;&lt;br&gt;코시모 1세의 손녀인 마리 드 메디치(1573~1642년)의 운명은 이제 
국제사회를 무대로 펼쳐진다. 그녀는 27살이 되던 1600년 프랑스의 왕 앙리 4세와 결혼한다. 재정위기에 처해 있던 앙리 4세는 신부보다 
그녀가 가져올 어마어마한 지참금에 관심이 더 많았다. 결혼은 당연히 행복하지 않았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마리에게 음모와 배신으로 들끓는 
타국의 궁정 생활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는 버텨냈다. 드디어 아들 루이 13세가 태어나고 그 뒤로 다섯 명의 아들이 더 태어났다. 아들들은 
마리의 궁정 생활에서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그러나 권력 앞에서는 부부, 모자, 형제 등 어떤 인간관계도 덧없이 부서질 수 있다는 것을 처절하게 
보여준 것이 그녀의 삶이었다. &lt;br&gt;&lt;br&gt;1610년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화해 정책을 옹호하던 앙리 4세가 광적인 가톨릭 신도에게 
암살당한다. 당시 9살이었던 아들 루이 13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모후인 마리의 섭정이 시작됐다. 교황을 3명이나 배출한 메디치 가문의 딸답게 
그녀는 열렬한 가톨릭 신자였다. 남편인 앙리 4세와는 달리 명백한 친가톨릭적인 정책을 펼쳐나갔기 때문에 남편의 죽음 배후에 그녀가 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그녀의 여러 정책들은 프랑스 귀족들의 호응을 얻지 못했다. 1617년 이제 권력에 눈을 뜬 아들은 어머니 마리를 블루아성에 
유폐한다. 모자간의 권력 다툼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2년 뒤인 1619년에 블루아성에서 탈출한 마리는 루이 13세의 동생인 오를레앙 공, 
가스통과 손잡고 반란을 일으킨다. 어머니가 부추긴 어이없는 형제간 싸움은 곧 끝났다. 루이 13세와 마리 사이의 갈등의 골은 깊어졌지만, 
리슐리외 추기경의 중재로 화해를 하고 마리는 정치적 복권을 이루게 된다. &lt;br&gt;&lt;br&gt;
&lt;/p&gt;&lt;div style=&quot;width: 450px;&quot; class=&quot;center_image&quot; originw=&quot;450&quot; jQuery17209892820237880315=&quot;1&quot;&gt;&lt;img border=&quot;0&quot; hspace=&quot;0&quot; alt=&quot;202616 기사의  이미지&quot;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13/03/image_readtop_2013_202616_1363566052864051.jpg&quot; width=&quot;450&quot;&gt; 
&lt;p style=&quot;margin-top: 5px;&quot;&gt;&lt;span class=&quot;image_small&quot;&gt;그림 ➊ 루벤스,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중 
‘마리의 초상화를 보는 앙리 4세’.&lt;/span&gt; &lt;/p&gt;&lt;/div&gt;&lt;p&gt;
&lt;/p&gt;&lt;div class=&quot;read_txt&quot;&gt;&lt;/div&gt;&lt;p&gt;
&lt;/p&gt;&lt;div style=&quot;width: 450px;&quot; class=&quot;center_image&quot; originw=&quot;450&quot; jQuery17209892820237880315=&quot;2&quot;&gt;&lt;img border=&quot;0&quot; hspace=&quot;0&quot; alt=&quot;202616 기사의  이미지&quot;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13/03/image_readmed_2013_202616_1363566052864054.jpg&quot; width=&quot;450&quot;&gt; 
&lt;p style=&quot;margin-top: 5px;&quot;&gt;&lt;span class=&quot;image_small&quot;&gt;그림 ➋ 루벤스,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중 
‘마르세유항에 도착’.&lt;/span&gt; &lt;/p&gt;&lt;/div&gt;&lt;p&gt;
&lt;/p&gt;&lt;div class=&quot;read_txt&quot;&gt;&lt;b&gt;루벤스, 찬양 갈망하는 군주의 욕망 꿰뚫은 작가&lt;/b&gt; &lt;br&gt;&lt;br&gt;이 무렵인 1621년 마리 드 
메디치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루벤스에게 자신의 일생에 관한 24점의 작품을 의뢰한다. 그 할아버지에 그 손녀였다. 메디치 가문의 DNA로 
전해지는 정치 선전 수단으로서의 이미지에 대한 남다른 이해가 그녀에게도 있었다. 루벤스는 바사리 같은 사람은 넘볼 수 없는 당대 유럽 최고의 
작가였다. 하기야 일개 토스카나 공국의 군주와 프랑스 왕비의 재력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는가. 루벤스는 현실과 신화를 섞어서 그럴듯한 장대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데 천재였다. 루벤스는 영광과 찬양을 갈망하는 군주들의 욕망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었다. 200여명이 넘는 직원을 거느린 
루벤스의 공방은 전 유럽의 주요 궁정에서 쇄도하는 주문으로 늘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lt;br&gt;&lt;br&gt;루벤스의 손에서 태어난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 역시 영광과 환희로 가득 차 있다. 루벤스는 마리의 어린 시절부터 신화와 영광으로 채워 넣었다. 그림 속 소녀 마리 드 메디치의 교육을 
위해서 아폴로, 헤르메스, 삼미신이 총동원됐고 그녀는 지혜의 여신 아테네에게 수업을 받고 있다. 저자 직강보다 더 강력한 신들의 직강이다. 
어렸을 때부터 미래의 프랑스 왕비이자 프랑스 왕의 어머니로서 부족함이 없는 지혜와 교양을 갖추도록 교육받았다는 내용이다. 또 그림 속에는 결혼 
전 마리의 초상화를 받아든 앙리 4세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탄복하는 장면이 묘사돼 있다(그림 ➊). 마리의 초상화 위에는 제우스와 헤라가 그려져 
있어서 매우 어울리는 부부가 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lt;br&gt;&lt;br&gt;마리 드 메디치가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프랑스의 마르세유 항구에 도착한 
장면(그림 ➋)을 보자. 붉은 알약이 그려진 화려한 메디치 가문의 문장이 달린 황금색 배를 타고 마침내 그녀가 도착했다. 루벤스의 환상은 실로 
막강하다. 그녀의 도착을 알리기 위해 천사는 쌍나팔을 불고 있고 뱃전에는 사람들의 환영식이 벌어진다. 가운데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는 것이 
마리 드 메디치이고 양 옆이 실제 그녀를 수행했다고 알려진 숙모와 언니다. 푸른 망토를 입은 프랑스를 상징하는 인물이 그녀를 팔을 벌려서 
환대하고 있다. 그림의 아랫부분에서 벌거벗고 몸부림을 치는 일군의 인물들이 보인다. 마리 드 메디치가 프랑스까지 안전하게 도착할 수 있도록 
바닷길을 지켜온 이탈리아 쪽 해신들이다. 그들은 이탈리아의 보물을 프랑스에 두고 가는 것을 못내 아쉬워하고, 프랑스 쪽 해신들은 이제 일이 
끝났으니 어서 가라고 재촉하느라 어수선하다. 그러나 잘 알려졌다시피 마리 드 메디치와 앙리 4세는 지참금을 위해 정략결혼을 했다. 현실이 
신화화되면서 진실을 가리는 과정을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현재 남아 있는 21점의 연작은 루브르 박물관의 대형 홀 하나를 가득 채우고 있다. 
&lt;br&gt;&lt;br&gt;그러나 어떤 화해도 마리 드 메디치의 욕망을 통제하지 못했다. 마리는 아들과의 화해를 적극적으로 주선했던 리슐리외 추기경이 루이 
13세의 총애를 받아 훗날 재상의 지위에 오르자 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 음모는 발각됐고, 마리는 1631년 프랑스에서 영구 추방돼 
1642년 죽기까지 여러 나라를 떠돌아다녀야 했다. 현명한 재상 리슐리외는 루이 13세를 충실하게 보필했다. 루이 13세의 아들, 태양왕 루이 
14세가 누릴 치세를 준비해 놓았다. 이제 프랑스는 세계 최고의 강국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것이다. &lt;br&gt;&lt;br&gt;&lt;/div&gt;&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루벤스&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루벤스&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루이 13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루이 13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바사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바사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코지모1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코지모1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마리 드 메디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마리 드 메디치&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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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 교황청의 메디치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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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4-08T14:34:03Z]]></updated>
		    <published><![CDATA[2013-04-08T14:34:03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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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div style=&quot;width: 550px;&quot; class=&quot;center_image&quot; jQuery1720023590694413158364=&quot;1&quot; originw=&quot;550&quot;&gt;&lt;img border=&quot;0&quot; hspace=&quot;0&quot; alt=&quot;160350 기사의  이미지&quot; src=&quot;http://file.mk.co.kr/meet/neds/2013/03/image_readtop_2013_160350_1362376355850675.jpg&quot; width=&quot;550&quot;&gt; &lt;/div&gt;&lt;p&gt;
&lt;/p&gt;&lt;div class=&quot;read_txt&quot;&gt;1494년 피렌체에서 추방된 메디치 가문은 16세기에 다시 부활한다. 이번엔 교황, 군주 같은 더 강력해진 
이름으로 돌아왔다. &lt;br&gt;&lt;br&gt;메디치가의 부활은 위대한 로렌초의 아들과 조카로부터 교황청에서 시작됐다. 가문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위대한 
로렌초’는 아들이 셋 있었다. “내겐 아들이 셋이오. 하나는 바보고, 하나는 똑똑하고, 하나는 사랑스럽지.” 바보는 1494년 피렌체에서 도망친 
첫째 아들 피에로였다. 다른 하나는 정말 똑똑했고, 진정으로 ‘메디치다웠다’. 바로 조반니다. 로렌초는 첫째 아들에게는 정치를, 둘째 아들에게는 
교회를 맡길 생각이었다. 로렌초가 여러 가지로 손을 쓴 결과, 꼬마 조반니는 여덟 살에 수도원의 주교가 되고 열세 살에는 추기경이 된다. 
1513년 37세의 조반니는 마침내 217대 교황(레오 10세, 재위 1513~1521년)이 된다. &lt;br&gt;&lt;br&gt;젊은 작가 라파엘이 그린 
‘레오 10세의 초상화(그림 ➊)’에서 우리는 교황청에 둥지를 틀고 있던 메디치 가문의 자손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 종을 들고 가운데 앉아 있는 
것이 레오 10세다. 성경책의 내용을 모두 알 수는 없으나, 교황의 세속 이름이었던 조반니의 G라는 문자가 크게 보인다. 옆의 종은 메디치 가문 
출신다운 화려하고 세련된 취향을 보여준다. 왼쪽 인물은 훗날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523~1534년)가 되는 추기경 줄리오 데 메디치다. 
그는 ‘위대한 로렌초’의 암살당한 동생 줄리아노의 아들로 레오 10세와는 사촌 간이다. 오른쪽에는 모계 쪽 사촌인 추기경 루이지 데 로시가 서 
있다. 잠시 피렌체의 무대를 떠난 메디치 가문은 이렇게 교황청이라는 온실에서 세력을 키워나갔다. &lt;br&gt;&lt;br&gt;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들은 
변화하는 세계사의 한가운데 있었다. 르네상스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파괴적인 힘을 갖고 서구 사회의 분열을 가져올 물결, 바로 종교개혁의 시작과 
절대왕정체제의 등장이라는 역사의 한가운데 있었던 것. 더욱 강대해지는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사이에서 정치적인 줄타기를 하면서 교황청의 권위를 
유지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lt;br&gt;&lt;br&gt;레오 10세는 철저하게 메디치적인 사람이었다. ‘족벌주의적인 성향이 가장 강한 교황, 전통 
교리에서 가장 벗어난 교황’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인문주의적 교양이 넘치는 집안 출신답게 레오 10세 치하의 교황청은 ‘로마의 지성과 지혜의 
중심지’였으며 음악, 공연, 시 낭독회, 미술품 등으로 둘러싸인 아름답고 세련된 궁정이 됐다. 교황청 업무만이 그의 관심사의 전부가 아니었다. 
그는 사촌인 줄리오 추기경과 함께 피렌체에서의 메디치가의 영광을 부활시키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lt;br&gt;&lt;br&gt;레오 10세는 자신의 
조카(도망친 피에로의 아들)를 우르비노의 공작 자리에 앉히기 위해서 무리한 일을 감행했다. 우르비노의 엄청난 전쟁 비용을 교황청이 담당한 것. 
교황청의 재정은 심각하게 악화돼 갔다. &lt;br&gt;&lt;br&gt;&lt;b&gt;레오 10세, 메디치가 영광 되살리려 면죄부 발행&lt;/b&gt; &lt;br&gt;&lt;br&gt;교황청 재정이 
바닥나자 레오 10세는 공공연히 사제직 매매를 일삼았다. 결정적인 패착은 면죄부 발행이었다. 1517년 성 베드로 대성당의 건립자금 조성을 위한 
면죄부 판매가 시작됐다. 마르틴 루터는 레오 10세를 ‘지옥으로 떨어져야 할 적그리스도’라고 부르면서 면죄부 판매에 대한 95개조의 반박문을 
발표했고, 이에 교황은 1521년 루터를 파문했다. 이 사건은 종교개혁의 발단이 됐다. 레오 10세의 재임 기간 동안 루터주의는 북유럽을 
중심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lt;br&gt;&lt;br&gt;그 후 219대 교황에 오른 클레멘스 7세는 더욱 곤란한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1494년 
프랑스의 피렌체 공격을 시작으로 이탈리아는 유럽 열강의 세력 다툼의 각축장이 됐다. 특히 카를 5세의 통치 아래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은 프랑스와 
영국을 제외한 전 유럽을 호령하고 있었다.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에 위협을 느껴서 1526년 프랑스와 신성 동맹을 체결했으나 프랑스와 적대 
관계에 있던 신성로마제국은 1527년 로마를 침공한다. 카를 5세의 용병들은 아무 죄책감 없이 8일간 로마를 약탈, 유린, 초토화했다. 교황청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lt;br&gt;&lt;br&gt;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로부터 6년 뒤인 1534년 미켈란젤로에게 ‘최후의 심판(그림 ➋)’을 
의뢰한다. 신성로마제국의 로마 침탈로 6개월간 감금돼 있었던 클레멘스 7세는 대부분 개신교도였던 카를 5세(그림 ➌)의 용병들이 영원히 
징벌받기를 원했다. ‘죄에 대한 회개와 도덕의 정화’에 대한 요구는 가톨릭 내부에도 해당됐다. 그래서 이 작품은 쇄신을 요구하는 반종교개혁이 
시작되는 계기를 마련한 작품이기도 하다.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은 교황청의 약화와 세속군주권의 강화, 종교개혁과 가톨릭의 반종교개혁, 
기독교 교리와 르네상스의 이교적인 신화가 공존하면서 만들어낸 대서사시다. &lt;br&gt;&lt;br&gt;&lt;b&gt;교황청의 이교화 보여주는 ‘웅크린 비너스’ 
&lt;/b&gt;&lt;br&gt;&lt;br&gt;화면 가운데서 우리는 단호한 심판의 포즈로 손을 휘두르고 있는 금발의 젊은 예수를 만나게 된다.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가 
주도적으로 조성한 벨데베레 정원에 놓여 있는 아폴로신상을 따와서 예수를 그렸다. 인문주의적 교황들이 연이어 등극하는 교황청에서 이교도 신상들은 
종교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아름다운 고미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고 소장, 전시되고 있었다. 20대 젊은 여인으로 그려진 마리아는 세상의 왕인 예수 
앞에서 묘하게 몸을 꼬고 있는 자세로 등장해서 지나치게 교태를 부리는 모습이라고 비난을 받았는데, 이 또한 ‘웅크린 비너스’라는 그리스 조각의 
모티브에서 따왔다. ‘교황청의 이교화’ 역시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lt;br&gt;&lt;br&gt;작품 하단에 뱀을 온몸에 감고 있는 지옥왕 미노스가 다스리는 
지옥의 모습은 단테의 ‘신곡’의 해석에서 따왔다. 심판의 날, 한 영혼을 놓고 천사와 사탄이 서로 제 편으로 당기는 모습, 천국으로의 상승과 
지옥으로의 하강 사이에서 생각하고 있는 한 사람의 모습 등은 신의 뜻이 아니라 ‘자유 의지’를 가진 인간이라는 르네상스적인 관념이 없으면 
탄생하지 못했을 장면이다. &lt;br&gt;&lt;br&gt;“이성이란 두려움이 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자연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올바른 접근법만 거치면 설명이 
가능했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식의 패기는 새롭게 열린 세상 앞에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계속되는 신대륙 발견은 그들이 알지 못하던 세상이 
지상에 존재한다고 말해줬다.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립은 유럽을 둘로 나눴다. 불안정성의 요소는 점점 강해졌으며, 교황은 통치력을 잃어갔다. 
&lt;br&gt;&lt;br&gt;결국 클레멘스 7세는 1530년 카를 5세와 화해했다. 그 대가로 그는 메디치가의 방계 친척인 코시모 1세를 피렌체의 군주로 
앉히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과의 화의 때문에 교황은 또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했다. &lt;br&gt;&lt;br&gt;영국이 문제였다. 영국의 헨리 
8세는 앤 불린과의 결혼을 위해서 왕비 캐서린과의 이혼을 허용해줄 것을 요구했다. 캐서린 왕비는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친척이었으니, 
클레멘스 7세는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1533년 헨리 8세는 앤 불린과 비밀결혼을 하고 로마 가톨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영국 
성공회가 출범했다. 이제 영국 교회는 교황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이 돼버렸다. &lt;br&gt;&lt;br&gt;유럽 어디에나 존재하던 보편 종교가 이젠 자국의 
이해에 따라 다른 모습을 갖게 됐다. 교권은 계속 위축됐다. 교황의 시대는 저물고 군주의 시대가 온다. 메디치 가문도 이제 ‘군주’라는 이름으로 
꽃피우리라. &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라파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라파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미켈란젤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미켈란젤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티치아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티치아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메디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메디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레오 10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레오 10세&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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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복된 신대륙의 광대함과 위대함 그리고 인간군상-국립중앙박물관 ‘미국 미술 300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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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CDATA[tag:blog.daum.net,2013:kmedichi.194]]></id>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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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CDATA[2013-03-03T13:33:08Z]]></updated>
		    <published><![CDATA[2013-03-03T13:33:0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h3 class=&quot;aTit&quot;&gt;정복된 신대륙의 광대함과 위대함 그리고 인간군상&lt;/h3&gt;&lt;p&gt;
&lt;/p&gt;&lt;h4 class=&quot;aTit2&quot;&gt;국립중앙박물관 ‘미국 미술 300년’&lt;/h4&gt;&lt;p&gt;
&lt;/p&gt;&lt;div class=&quot;aWriter&quot;&gt;글 이진숙 미술평론가 kmedichi@hanmail.net, 사진 국립중앙박물관&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 |&lt;/span&gt; 제312호 &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 &lt;/span&gt;20130303 
입력 &lt;span id=&quot;reporteraa&quot;&gt;&lt;/span&gt;&lt;iframe height=&quot;0&quot; marginHeight=&quot;0&quot; src=&quot;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quot; frameBorder=&quot;0&quot; width=&quot;0&quot; marginWidth=&quot;0&quot; scrolling=&quot;no&quot;&gt;
&lt;/iframe&gt;&lt;/div&gt;&lt;p&gt;
&lt;/p&gt;&lt;div style=&quot;line-height: 23px; font-size: 16px;&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Body&quot;&gt;추상표현주의, 미니멀리즘, 대지미술, 팝아트, 개념미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이같이 다양한 미술 사조를 내세우며 
세계 미술계를 주도했다. 그래서 한때는 미국 미술이 곧 세계 미술이었다. 미술관과 미술시장을 지배하는 공룡급 스타작가들도 다수 배출했다. 
&lt;br&gt;그런데 지금 국립중앙박물관(관장 김영나) 기획전시실에서 열리고 있는 ‘미국 미술 300년’(Art Across America·2월 
5일~5월 19일)전은 “잭슨 폴록과 앤디 워홀이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이번 전시는 양국 간 문화교류와 역사인식 심화 차원에서 기획된 
교환 전시인 만큼 뜨르르한 스타 작가들을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삶과 밀접한 공예작품과 회화를 통해 미국의 역사를 압축하는 방식을 택했다. 
&lt;br&gt;거친 신대륙은 어떻게 최대의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되었는가. 유럽 이민자들이 만든 ‘작은 유럽’은 어떻게 독자적인 브랜드를 가진 문화를 
창출해 나갔는가. 이번 작품들은 미국의 300년 역사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잘 모르던 미국 미술의 재발견이다.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float: right;&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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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3/01231839.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lt;b&gt;1&lt;/b&gt; 토머스 모란(1837~1926)의 ‘콜로라도 강의 그랜드캐니언’(1892, 1908년 
재제작), 캔버스에 유채, 134.6×238.8 cm, Image courtesy of Philadelphia Museum of Art 
&lt;b&gt;2&lt;/b&gt; 윌리엄 웬트(1865~1946)의 ‘자연의 신이 이룬 곳’(1925), 캔버스에 유채, 127×153 cm, Photoⓒ2012 
Museum Associates/LACMA &lt;b&gt;3&lt;/b&gt; 윌리엄 키스(1839?~1911)의 ‘요세미티 계곡’(1875), 캔버스에 유채, 
102.9×184.2 cm, Photoⓒ2012 Museum Associates/LACMA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작은 유럽’ 만들던 이민자들의 
흔적 오롯이&lt;/b&gt;&lt;br&gt;전시장에 들어서면 조금은 어눌한 초상화들이 관람객을 맞는다. 나란히 걸려 있는 유럽 이주민들, 흑인 선원,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 인디언 추장의 얼굴들은 미국의 인종적·문화적 다양성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캐드왈라더 가족 초상’과 18세기 화려한 
가구, 공예품들은 신대륙에 ‘작은 유럽’으로서의 미국을 건설하려고 했던 사람들의 흔적이다. 영국, 독일, 아일랜드 등 유럽 각국에서 온 
이민자들의 문화는 아메리카라는 신대륙에서 서로 융합되어 가기 시작했다. &lt;br&gt;1846년 그레이슨은 시에라네바다 산 등정으로 마무리된 긴 여행을 
기념할 그림을 주문했다. 멋진 사슴가죽 코트를 입고 지팡이에 기대어 선 그레이슨의 모습은 17세기 영국 궁정화가 반 다이크가 그린 ‘사냥터의 
찰스 1세’의 포즈를 연상케 한다. 뒤를 이을 어린 아들, 부인을 대동한 그는 새로운 왕국의 새로운 왕족처럼 등장하고 있다. 들짐승들이 평화롭게 
노니는 낙원 같은 이곳은 제목대로 ‘약속의 땅’, 그 이름도 상큼한 캘리포니아, 미국의 서부였다. 미국의 진짜 역사는 서부 개척과 더불어 
시작되었다. 기회의 땅은 아메리칸 드림의 본격적인 배경이 됐다. &lt;p&gt;&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2.uf.daum.net/image/164362405132D2060F673B&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755&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755&quot;  id=&quot;A_164362405132D2060F673B&quot;/&gt;&lt;/p&gt;&lt;p&gt;&amp;nbsp;&lt;/p&gt;&lt;br&gt;개척은 새로운 땅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요세미티 
공원이나 그랜드 캐니언 같은 광대한 자연은 미국적 정체성 형성에 큰 역할을 한다. 19세기 미국 시인 월트 휘트먼이 “본질적으로 미국 자체가 
가장 위대한 시”라고 읊을 수 있었던 것은 광대한 자연과 그 속에서 모든 것의 공존 가능함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높낮이 없이 모든 사물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한 휘트먼의 시는 평등과 민주주의라는 미국적 이상을 노래했다.&lt;p&gt;&amp;nbsp;&lt;/p&gt;&lt;p style=&quot;text-align: center;&quot;&gt;&lt;img src=&quot;http://cfile229.uf.daum.net/image/021DFA3F5132D226161EFB&quot; class=&quot;txc-image&quot; style=&quot;clear: none; float: none;&quot; border=&quot;0&quot; hspace=&quot;1&quot; vspace=&quot;1&quot; width=&quot;755&quot; exif=&quot;{}&quot; actualwidth=&quot;755&quot;  id=&quot;A_021DFA3F5132D226161EFB&quot;/&gt;&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 대형 풍경화들은 작은 사이즈로만 인쇄되던 흑백 사진의 한계를 넘어 
정복된 땅의 광대함과 위대함을 보여준다. &lt;/p&gt;&lt;p&gt;이 멋진 그림들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이 그림들은 해당 지역의 개발을 금지하는 법령 제정의 
기폭제가 되어, 실제 풍경들이 여전히 ‘그림처럼’ 남아 있게 했다. 정복된 사람들, 사라져 가는 인디언들의 모습은 모험의 후일담들처럼 그림 속에 
남아 있다. &lt;br&gt;‘토지를 경작하는 자는 먹을 것이 많으려니와’라는 작자 미상의 소박한 그림은 미국에 와서 내 땅을 가지고 건전하게 일하는 
이민자들의 소망과 이상, 청교도적인 윤리를 보여준다. 19세기 풍속화 중에는 ‘유년기’를 테마로 한 작품이 많았다. 아이들이 살아가면서 배워야 
할 윤리와 쾌락을 가르쳐주는 그림들은 건설기 미국의 낙천적인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 윈슬로 호머의 ‘건전한 만남’은 국가적 차원에서 전개되었던 
금주운동과 관련이 있다. 강렬한 햇빛 아래서 우유 통을 들고 있는 건강한 농민 여성의 팔뚝은 미셸 오바마의 저 유명한 팔뚝의 원조를 보는 것 
같다.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float: right;&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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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3/01231906.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lt;b&gt;4&lt;/b&gt; 미키 하야카와 (1899~1953)의 ‘흑인’ (1926), 캔버스에 유채, 
66.4×50.8cm, Photoⓒ2012 Museum Associates/LACMA &lt;b&gt;5&lt;/b&gt; 앤디 워홀(1928~1987)의 ‘재키(네 
개의 재키)’(1964), 네 개의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을 이용한 실크스크린, 각 패널 50.8×40.6cm, © The Andy Warhol 
Foundation for the Visua Arts, Inc. / SACK, Seoul, 2013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1차대전·대공황에도 붓 놓지 않은 
작가들&lt;/b&gt;&lt;br&gt;19세기 말부터는 존 싱어 사전트, 마리 카사트, 제임스 휘슬러 같은 국제적인 기량을 인정받는 작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인상주의 시기에 파리에서 활동했다. 20세기 초반 당시 유럽의 첨단 사조인 초현실주의, 입체주의, 다양한 추상미술이 미국이라는 문화적 
용광로로 활발하게 흘러 들어왔다. &lt;br&gt;다른 한편 존 슬로안, 조지아 오키프 같은 토종 작가들은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미국적인 삶에 천착해 
나갔다. 조지아 오키프는 미국의 자연을 빌려 죽음과 초월, 삶에 대한 에로스적 열망을 표현했다. 황무지 위에 건설된 유령의 도시 같은 독특한 
미국 풍경을 그린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볼 수 없는 것이 이 전시의 한 가지 아쉬운 점이다. 잭슨 폴록의 스승이었던 토머스 하트 벤턴의 
‘노예들’은 미국 역사의 어두운 측면을 보여준다. &lt;br&gt;유럽이 1차대전의 전화에 휩싸일 때도 미국은 승승장구했다. 영원히 지속할 것 같았던 
미국의 번영은 1929년 대공황으로 중지된다. 일종의 예술가 구호활동이었던 연방예술정책(Federal Art Project) 덕택에 대공황기에도 
예술가들은 붓을 놓지 않을 수 있었다. 혹독한 시기에 젊은 시절을 보낸 작가들은 미국 미술을 세계 미술의 반열에 올려놓는 작가가 되었다. 아돌프 
고틀립, 로버트 마더웰, 마크 로스코, 잭슨 폴록 같은 추상표현주의자들이 그들이다. 낙천적이든 비관적이든 모든 현실의 모습은 추상적인 화면 
속으로 사라졌다.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float: right;&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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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직물에 유채, 168.8×183.3×3.7cm, 테라 미국미술재단, Photography ⓒTerra Foundation for 
American Art, Chicago &lt;b&gt;7&lt;/b&gt; 어니스트 마틴 헤닝스 (1886~1956)의 ‘지나가는 길’(1924년경), 캔버스에 
유채, 111.8×124.5 cm, 휴스턴미술관, Image courtesy of The Museum of Fine Arts, Houston 
&lt;b&gt;8&lt;/b&gt; 조지 드 포레스트 브러시 (1855~1941)의 ‘베 짜는 사람’(1889), 캔버스에 유채, 30.5×38.1 cm, 테라 
미국미술재단, Photography ⓒTerra Foundation for American Art, Chicago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가장 미국적인 작품, 
팝아트&lt;/b&gt;&lt;br&gt;그들의 뒤를 이어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센버그, 앤디 워홀 등 팝아트 작가들이 등장했다. 60~70년대 정점에 오른 소비 
문화를 반영하는 팝아트와 대량으로 생산된 상품을 닮은 미니멀리즘은 가장 자본주의적이며, 가장 미국적인 작품들이다. 플라스틱이라는 신소재를 채택해 
대량으로 제작되었던 임스 부부의 의자는 중산층의 합리적인 기호를 잘 보여준다. 그리고 전시는 이쯤에서 끝난다. &lt;br&gt;앤디 워홀의 ‘재키’는 
대중매체에 돌아다니는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의 사진 4장을 이용해 만든 작품이다. 이 중 하나는 케네디 생전의 젊은 영부인 시절의 행복한 재키의 
모습이고 셋은 케네디의 장례식장에서 찍힌 슬픈 모습이다. 누구보다 그 스스로가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사람이었지만, 앤디 워홀은 미국적 비극을 
작품 속에 담아내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아메리칸 드림은 꿀 때는 달콤하지만, 실행될 때는 꼭 그런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앤디 워홀의 이 
정도 작품이면 몇십억원을 호가한다. 비극조차도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소비할 수 있는 것은 발달한 자본주의의 진정 놀라운 힘이다. &lt;br&gt;전시에 
출품된 168점은 LA카운티미술관, 필라델피아미술관, 휴스턴미술관, 테라 미국미술재단의 소장작품들이다. 2014년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을 
중심으로 한 ‘조선미술대전’이 이들 미술관들을 순회할 예정이다. &lt;/p&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인디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인디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미니멀리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미니멀리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휘트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휘트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국립중앙박물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국립중앙박물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앤디 워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앤디 워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워싱톤&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워싱톤&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추상표현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추상표현주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잭슨 폴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잭슨 폴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미국미술300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미국미술300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요세미티 공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요세미티 공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청교도적 윤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청교도적 윤리&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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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2) 피렌체의 영광과 몰락…동방박사 로렌초(메디치) ‘황금시대’ 꽃피우다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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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2-19T16:42:03Z]]></updated>
		    <published><![CDATA[2013-02-19T16:42:03Z]]></published>
		    <content typ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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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는 않았다. 이 화려한 행렬 속에서 우리는 피렌체 르네상스의 후원자이자 피렌체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메디치 가문 3대의 얼굴을 모두 만나게 
된다. 당시 갓 12살이 된 로렌초 메디치는 동방박사 중 한 명으로, 화려한 황금색 옷에 흰말을 타고 행렬의 선두에 서 있다. 가문의 본격적인 
부흥을 이끈 할아버지 코시모가 갈색 말을 타고, 아버지 피에르는 흰색 말을 타고 뒤를 따른다. &lt;br&gt;&lt;br&gt;이 벽화는 1439년에 있었던 
피렌체 종교회의를 기념하며 20년 뒤에 그려졌다. 동서 교회의 분열, 이슬람 세력의 위협 등 당시의 복잡한 종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이 회의는 
메디치 가문의 후원 아래 진행됐다. 메디치 가문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과시한 사건이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공화주의를 표방한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된다. 코시모는 사후에 피렌체의 ‘국부(國父)’라 불리며 큰 존경을 받았다. &lt;br&gt;&lt;br&gt;
&lt;/p&gt;&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450&quot; align=&quot;center&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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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b&gt;&lt;font color=&quot;#000063&quot;&gt;그림 ➊ 베네초 고촐리, ‘동방박사의 예배’ 中 로렌초 메디치 
부분.&lt;/font&gt;&lt;/b&gt;&lt;/td&gt;
&lt;td&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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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quot; id=&quot;artText&quot;&gt;동방박사로 분한 자손을 내세우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수행원의 모습으로 겸손하게 등장하고 있는 그림(그림 ➊)은 메디치 가문의 앞날을 예언하는 것 같다. 그림처럼 메디치가의 
최고의 영광을 누린 이는 후에 ‘위대한 로렌초’라고 불린 손자였다. 메디치 가문은 영욕의 세월을 겪으며 17세기 말까지 300년 동안 세 명의 
교황과 두 명의 프랑스 왕비를 배출했다. 특히 코시모에서 1492년 로렌초가 죽기까지 100여년간이 피렌체의 가장 역동적이고 찬란한 시대였다. 
아름다운 미술품으로 가득 찬 지금의 피렌체는 메디치 가문의 선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lt;br&gt;&lt;br&gt;&lt;b&gt;‘대부업’ 눈총 무마하려 문화·예술 
적극 후원&lt;/b&gt; &lt;br&gt;&lt;br&gt;귀족적인 화려함을 자랑하는 고촐리의 화풍은 아들인 피에르의 선택이었다. 이는 세습귀족이 아닌 자수성가한 
신흥세력들의 열망을 보여준다. 최고의 갑부였으며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지만, 메디치 가문은 두 가지 약점이 있었다. 평민 출신이라는 점과 
가문의 주요 사업인 금융업에 대한 당시의 곱지 않은 시선이다. 금융업, 즉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챙기는 ‘이자놀이’는 가톨릭 교리에서 축복받지 
못하는 행위였다. 이런 약점들을 보완해준 것이 바로 문학, 철학, 미술이었고 코시모는 이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lt;br&gt;&lt;br&gt;단테, 
페트라르카 등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자들은 고대 사상을 기독교 교리 내에서 포섭하는 지식의 융합을 주장했다. 평민 출신에 기독교 교리와 부딪히지 
않으면서 이자 사업 합리화를 모색하던 메디치 가문이 ‘가치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문화운동을 후원하는 것은 당연했다. 화려하고 장대한 미술 작품은 
메디치 가문의 미화된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했다. 자신의 정치선전을 위해 메디치 가문보다 미술을 잘 활용한 예는 없었다. 
&lt;br&gt;&lt;br&gt;코시모는 기베르티, 도나텔로, 프라 안젤리코, 고촐리, 필리포 리피 등 당대 최고의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피렌체 시민이 그토록 
원하던 산타 마리아 대성당의 돔 공사를 브루넬레스키가 16년 동안 할 수 있었던 것도 코시모의 후원 덕이었다. 이런 후원으로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고, 피렌체 시민의 자부심은 하늘을 찔렀다. 무늬만 공화주의인 피렌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면서 메디치 가문의 사업은 나날이 
발전했다. 메디치 은행은 교황의 주거래 은행이 됐고, 1446년께는 유럽 8개 도시에 지점을 두고 최소 11개 지역에 제휴기관을 둔 초대형 
글로벌 은행으로 성장했다. &lt;br&gt;&lt;br&gt;그러나 2대 피에르는 아버지 코시모가 물려준 막대한 재산과 거대한 은행조직을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가장 큰 업적은 귀족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 ‘위대한 로렌초’를 낳은 것. 최고 교육을 받고 자란 로렌초는 이탈리아 문학사에 중요한 시인이었으며 
동시에 뛰어난 인문학자였다. 할아버지는 평민으로 태어났지만, 그는 ‘교육, 결혼, 돈을 통해서 만들어진’ 신흥귀족이었다. 아버지 피에르가 죽었을 
때, 갓 스무 살의 로렌초에게 피렌체의 권력이 이양됐고, 피렌체는 소위 ‘황금시대’를 맞이한다. 얼핏 보면 고촐리 그림의 환상이 현실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매우 복잡했다. 반대파에 의해 동생인 줄리아노가 암살됐고 로렌초도 신변에 위협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암살자들은 후에 
체포돼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장면을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드로잉이 남아 있다(그림 ➋). &lt;br&gt;&lt;br&gt;
&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301&quot; align=&quot;center&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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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b&gt;&lt;font color=&quot;#000063&quot;&gt;그림 ➋ 레오나르도 다빈치, ‘바론첼리의 교수형’, 1479년.&lt;/font&gt;&lt;/b&gt;&lt;/td&gt;
&lt;td&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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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quot; id=&quot;artText&quot;&gt;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로렌초가 
생각보다 예술 후원에 인색했다’라고 실망 섞인 어조로 말한다. 로렌초 시대에 위대한 예술가가 없었던 것도, 예술에 대한 안목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그에게 없었던 것은 돈이다. 젊은 로렌초는 무모했고, 메디치 은행의 주요 고객인 교황과도 사이가 틀어져 사업 위기를 맞기도 했다. 전 
세계 메디치 은행의 지점들은 방만하게 운영됐다. 교황보다 더 센 자들이 메디치 은행의 고객이 됐다. 전쟁과 허세를 위해 어마어마한 대출금을 
필요로 하지만, 그 돈을 갚아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던 사람들. 바로 유럽 절대 군주들이었다. 이 ‘거부할 수 없는’ 고객들에 대한 부실 
대출로 메디치 은행은 허덕이게 된다. &lt;br&gt;&lt;br&gt;&lt;b&gt;‘대항해 시대’ 적응 못 한 메디치가와 이탈리아&lt;/b&gt; &lt;br&gt;&lt;br&gt;로렌초가 죽기 
5년 전에 메디치 은행은 4개 지점만 남았다. 로렌초 탓만이 아니다. 코시모 시대 때와 달리 이탈리아 전체 경기가 서서히 침몰하고 있었다. 이제 
강력한 군주를 내세운 해상강국들이 등장할 차례였다. 로렌초가 지병으로 죽은 1492년은 세계사적으로 중요한 해다. 이 해에 콜럼버스는 신대륙 
발견을 위한 대항해의 길에 오른다. 더 멀리 가서 더 많이 가져와야 더 큰돈을 벌었다. 더 많은 자본이 투자돼야 했고, 국제무역상의 규제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큰 권력을 배후에 깔아야 했다. 많아야 인구 10만명이 안 되는 도시국가 상태로 남아 있던 이탈리아는 이런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했다. &lt;br&gt;&lt;br&gt;메디치라는 우산이 사라진 피렌체는 스페인과 프랑스라는 초강대국의 침공 앞에서 무기력했다. 1494년 로렌초의 
큰아들은 프랑스군이 침입하자 겁을 먹고 도망쳤고 메디치 궁은 시민들에 의해 약탈당했다. 메디치가의 몰락은 피렌체 시민들에게 다시금 공화제에 대한 
꿈을 꾸게 했다. 피렌체 시위원들은 당시 로마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젊은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시민들의 단결심을 호소할 수 있는 거인상을 
의뢰한다. 길이 4m가 넘는 대형 조각 ‘다비드’상(그림 ➌)이 피렌체 정치 1번지인 시뇨리아 광장에 세워졌다. &lt;br&gt;&lt;br&gt;
&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450&quot; align=&quot;center&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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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b&gt;&lt;font color=&quot;#000063&quot;&gt;그림 ➌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lt;/font&gt;&lt;/b&gt;&lt;/td&gt;
&lt;td&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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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quot; id=&quot;artText&quot;&gt;가장 이상화된 아름다운 남자 누드상이라 
평가받는 다비드상은 기독교의 성인을 가장 그리스 신처럼 표현한 혼성미학의 결정판이다. 성경에는 골리앗을 물리치는 소년 다비드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지만, 미켈란젤로는 다비드를 20대 초반의 진지한 젊은이로 묘사했다. 그는 지금 골리앗을 향해서 거대한 새총을 겨냥하고 있다. 전투에서 ‘두 
번’이라는 것은 없다. 공동체의 영웅이 될 것이냐, 아니면 공동체를 궁지에 빠뜨릴 것이냐의 절체절명의 순간이다. 다비드의 표정에 진한 고독과 
결단의 아름다움이 깃든 이유다. &lt;br&gt;&lt;br&gt;그러나 아직 끝이 아니었다. 그들, ‘메디치들’은 다시 돌아온다. 더 강력해진 이름, 교황과 
군주의 이름으로. 시뇨리아 광장에서 어린 시절 다비드를 보면서 성장한 꼬마가 중년의 나이가 될 때쯤인 30년 정도 후에 말이다. &lt;br&gt;&lt;br&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
&lt;/table&gt;&lt;p&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르네상스&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르네상스&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동방박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동방박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미켈란젤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미켈란젤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메디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메디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로렌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로렌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고촐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고촐리&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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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 중세의 가을’ 부르고뉴 공국 이야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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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CDATA[tag:blog.daum.net,2013:kmedichi.192]]></id>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2-08T23:07:02Z]]></updated>
		    <published><![CDATA[2013-02-08T23:07:0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590&quot; align=&quot;center&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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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lt;td&gt;
&#9;&#9;&lt;font  class=headtitle color=#000063&gt;[이진숙의 `그림, 시대를 말하다`](1) ‘중세의 가을’ 부르고뉴 공국 이야기…패러다임 전환 때마다 그림이 ‘전령’ ‘중세의 종말’ 알린 ‘부르고뉴’ 그림들 &lt;/font&gt;
&#9;&#9;&lt;p style='margin-top:5;'&gt;
&#9;&lt;/td&gt;
&lt;/tr&gt;--&gt;
&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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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height=&quot;5&quot;&gt;&lt;spacer type=&quot;block&quot; height=&quot;5&quot;&gt;&lt;/spacer&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 word-break: break-all;&quot; vAlign=&quot;top&quot; align=&quot;left&quot;&gt;“사고방식, 과학적 패러다임과 정치적 분위기의 변화를 예고하는 징후를 알아채려면 공공정보도서관보다 현대미술관으로 가는 것이 
더 낫다.” &lt;br&gt;&lt;br&gt;‘이미지의 삶과 죽음’의 저자인 레지스 드브레의 주장이다. 화가들은 전혀 박식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들의 예민한 
촉수는 가장 적은 정보로도 시대의 특성과 그 변화의 방향을 감지해낸다는 말이다. 본능적인 직관에 의존하며 때로는 직설화법으로, 때로는 
간접화법으로 그림은 시대를 말한다. &lt;br&gt;&lt;br&gt;역사의 가장 중요한 전환점인 중세에서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에는 많은 그림들이 쏟아져 나왔다. 
흔히 ‘암흑시대’라고 알려져 있지만, 중세의 마지막은 화려했다. 미술 용어로는 국제 고딕 양식이라 불렀고, 네덜란드 역사학자 하위징아는 ‘중세의 
가을’이라는 로맨틱한 말을 만들어 냈다. 우리의 첫 번째 이야기는 15세기 부르고뉴 지방에 관한 것이다. &lt;br&gt;&lt;br&gt;&lt;b&gt;한때 프랑스와 어깨 
겨눴던 부르고뉴&lt;/b&gt; &lt;br&gt;&lt;br&gt;
&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450&quot; align=&quot;center&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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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b&gt;&lt;font color=&quot;#000063&quot;&gt;그림 ➊ 랭부르 형제,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 中 5월, 1413~1416년. 
&lt;/font&gt;&lt;/b&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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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quot; id=&quot;artText&quot;&gt;“파리는 프랑스의 머리요, 샹파뉴는 
심장, 부르고뉴는 위장이다.” &lt;br&gt;&lt;br&gt;멋진 와인과 풍부한 식재료가 공급되는 풍요로운 땅이 바로 부르고뉴라는 말이다. 부르고뉴는 지금은 
프랑스의 일부(위장)지만, 한때 부르고뉴는 프랑스와 어깨를 겨누던, 화려한 문화를 가진 융성한 공국이었다. &lt;br&gt;&lt;br&gt;부르고뉴공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아름다운 예술 작품으로 남아 있다. 프랑스 역사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사랑받는 보석 같은 작품들이다. 
&lt;br&gt;&lt;br&gt;14~15세기 부르고뉴의 전성기를 이끈 발루아 가문의 궁전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으로 유명했다. 랭부르 형제가 그린 ‘베리 공작의 
매우 호화로운 기도서’는 그들의 화려한 궁정 생활을 잘 보여준다. 기도서는 달력과 함께 시간과 계절에 어울리는 기도문들과 화려한 채색 삽화를 
담고 있는 책이다. 그림 ➊은 그중 ‘결혼의 달’ 5월의 장면이다. 신랑, 신부는 사랑의 눈으로 서로를 마주 보고, 발끝의 강아지들도 곧 사랑을 
나눌 태세다. 결혼식 행렬의 차림새와 말의 치장이 예사롭지 않다. &lt;br&gt;&lt;br&gt;랭부르 형제는 세밀한 붓질로 흥겹고 호화로운 장면을 그려냈다. 
발루아 왕조를 연 장 2세의 셋째 아들인 베리 공작은 화가들에게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청금석에서만 얻어지는 가장 값비싼 물감인 울트라마린 
블루를 마음껏 쓸 수 있도록 했다. 덕분에 600년이 지난 지금도 그림의 귀족적인 파랑은 여전히 선명하다. &lt;br&gt;&lt;br&gt;그러나 현실은 그림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프랑스 전체는 영국과 백년전쟁(실제로는 1337년부터 1453년까지 116년 동안 단속적으로 진행됨)을 겪고 있었다. 
1400년 무렵부터 소빙하기가 시작돼 전 유럽이 추위에 떨었다. 유럽을 휩쓴 페스트로 유럽 전체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했다. 인구 감소는 
노동력의 가치를 높였다. 봉건 영지에 귀속돼 있던 농노들은 임금을 받는 자유노동자로 전환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살기 시작했다. 
도시에 모여드는 임금노동자들의 출현은 봉건적 관계를 해체하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였다. &lt;br&gt;&lt;br&gt;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도서에는 농민과 
귀족만이 등장한다. 화가들은 주문자의 뜻에 충실할 수밖에 없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보호하에 있는 선량한 농부와 자신들로만 이뤄진 ‘중세적 삶’을 
사랑했다. 기도서 자체는 중세적인 형식이었지만, 호화로운 세속적인 삶이 크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세속적인 삶의 즐거움과 쾌락의 향취가 
개개인의 삶까지 파고들어올 때 비로소 개인이 탄생하고 중세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게 될 것이다. &lt;br&gt;&lt;br&gt;그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들은 여전히 중세의 한복판에 있었고, 중세적 비극을 누구도 피하지 못했다. 1416년 베리 공작이 먼저, 그리고 몇 달 후 
랭부르가의 재능 많은 세 형제 엘망, 폴, 장도 뒤를 이어 전염병의 희생자가 됐다. &lt;br&gt;&lt;br&gt;&lt;b&gt;아라스조약 이후 부르고뉴 역사 
속으로…&lt;/b&gt; &lt;br&gt;&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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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b&gt;&lt;font color=&quot;#000063&quot;&gt;그림 ➋ 얀 반 에이크, 롤랭 재상과 성모 마리아, 1437년.&lt;/font&gt;&lt;/b&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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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r&gt;
&lt;td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quot;&gt;
&lt;div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quot; id=&quot;artText&quot;&gt;페스트가 지나간 후에도 삶은 계속됐다. 
부르고뉴 왕정의 예술 사랑도 계속됐다. 유화 기법을 최초로 사용한 미술가로 잘 알려진 얀 반 에이크는 부르고뉴 왕정으로부터 후원을 받았다. 
1437년 그가 그린 ‘롤랭 재상과 성모 마리아(그림 ➋)’는 부르고뉴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니콜라스 롤랭은 미천한 가문 출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으며,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앞에서 겸손한 자세로 손을 모으고 있지만 재상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한다. 
금실로 수놓은 밍크털이 달린 재상의 코트는 성모 마리아의 붉은색 옷보다 더 화려하다. 그의 성공에는 구설수가 끊이지 않았다. 연대기 작가 
샤틀랭은 “그는 마치 지상의 삶이 영원한 것처럼 재산을 거둬들였다”라고 표현할 정도다. &lt;br&gt;&lt;br&gt;이 그림은 프랑스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인 아라스 조약(1435년)을 체결한 직후에 그려졌다. 1419년 부르고뉴의 군주가 프랑스 왕족에게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을 
계기로 영국과의 백년전쟁 와중에 부르고뉴는 영국의 편을 들게 된다. 프랑스가 프랑스를 배신한 사건인 영국과 부르고뉴의 동맹을 주도한 것도 
롤랭이었다. 사실 영국과의 교역이 중요했던 부르고뉴의 국익을 위한 선택이었다. 16년 뒤 롤랭은 다시 아라스 조약의 체결을 주도한다. 이 
조약으로 부르고뉴는 프랑스와의 봉건적인 관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다. 또 부르고뉴를 자기 편으로 만든 프랑스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lt;br&gt;&lt;br&gt;현실 정치가 롤랭은 이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역사를 한 페이지 또 기록한다. 그림처럼 롤랭은 성모 앞에서 기도하고 참회할 
일이 많았다. 기도하고 있는 저 두 손으로 그는 잔 다르크(1412~1431년)를 영국에 팔아넘겼다. 잔 다르크는 백년전쟁 동안 영국군을 
무찔러서 수세에 몰린 프랑스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다. 그러나 아라스 조약 체결 전, 영국 편을 들고 있었던 부르고뉴는 잔 다르크를 생포해서 
영국군에게 팔아넘긴다. 1431년 마녀로 낙인찍힌 잔 다르크는 19살의 꽃다운 나이에 화형을 당했다. 잔 다르크를 판 대가로 받은 어마어마한 
거액의 일부가 재상의 주머니에 들어갔을 것이라는 소문이 무성했다. 엑스레이 검사를 해보니 반 에이크가 원래는 재상을 손에 커다란 지갑을 든 
모습으로 그리려고 했었던 흔적이 발견됐다. &lt;br&gt;&lt;br&gt;현실적인 잔혹함에 어울리지 않게 롤랭은 선행으로도 유명했다. 롤랭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병원을 설립해서 기증했다. 본(Beaune)에 위치한 병원에는 거대한 포도밭이 딸려 있는데, 오늘날까지도 병원은 이 포도밭에서 수익을 얻고 
있다. 그림 속 재상의 머리 부근 창 밖에 그 포도밭이 보인다. &lt;br&gt;&lt;br&gt;&lt;b&gt;백년전쟁 끝나고 르네상스 시작&lt;/b&gt; &lt;br&gt;&lt;br&gt;
&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450&quot; align=&quot;center&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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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b&gt;&lt;font color=&quot;#000063&quot;&gt;그림 ➌ 장 푸케, 천사들에 둘러싸인 동정녀, 1452년. &lt;/font&gt;&lt;/b&gt;&lt;/td&gt;
&lt;td&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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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style=&quot;line-height: 150%; font-size: 12pt;&quot; id=&quot;artText&quot;&gt;비스마르크에 비견할 만한 최고의 
재상이었지만, 지금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가 죽고 나서 얼마 안 돼 결국 부르고뉴가 프랑스로 합병됐기 때문이다. 그가 체결한 
아라스 조약의 결과였다. 그는 이제 반 에이크의 그림과 본의 병원으로, 그리고 포도주로만 기억된다. &lt;br&gt;&lt;br&gt;아라스 조약으로 부르고뉴를 
다시 프랑스 편으로 만든 샤를 7세는 파죽지세의 기운으로 백년전쟁을 끝맺었다. 혁혁한 공을 세운 왕이었던 그는 미술사에서는 장 푸케가 그린 
‘천사들에 둘러싸인 동정녀(그림 ➌)’로 이름을 남겼다. 잔 다르크 덕분에 왕위에 올랐지만, 샤를 7세는 영국군의 손에서 그녀를 구해내지 
않았다. 푸케의 그림은 이 냉혹한 군주의 슬픈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잘록한 허리의 성모 마리아는 하얀 젖가슴을 드러내고 있고 랭부르 형제의 
그림에서도 나오는, 이마를 훤히 드러낸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다. 중세 말 마리아 숭배는 극에 달해서 마리아는 구원의 여신이자 동경의 여인이 
됐지만, 이 그림은 도가 지나치다. 뒤의 천사들도 붉은 색과 푸른색 두 가지 색으로만 그려져 장식적인 효과에 충실하다. 성과 속이 교차하면서 
묘하게 마음을 설레게 하는 작품이다. &lt;br&gt;&lt;br&gt;이 작품의 모델은 샤를 7세의 애첩인 아그네스 소렐(1422~1450년)이다. 그녀는 역사에 
기록된 최초로 공인된 애첩이었다. 왕은 그녀에게 성(城)을 하사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러나 그녀의 사치스럽고 오만한 성격은 많은 적을 만들었다. 
28세에 넷째 아이를 임신했을 무렵 그녀는 갑자기 죽었다. 이질에 걸렸다고 알려졌지만 많은 사람들이 샤를 7세의 아들(훗날 루이 11세)을 
의심했다. 아버지에게 지나치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소렐을 제거하기 위해 그의 측근이 독약을 투여했을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2005년 남아 
있는 유해에 관한 과학적인 조사를 실시한 결과, 그녀의 사인은 수은 중독임이 밝혀졌는데 이게 타살의 증거가 될 수는 없다. 그림 속의 대리석처럼 
유난히 흰 피부는 그녀가 죽은 여인이라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살아생전의 그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왕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아름다움을 위해 
그녀는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lt;br&gt;&lt;br&gt;이 그림은 그녀가 죽은 지 2년 뒤, 죽은 여인을 그리워하는 왕을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상의 여인이 아닌 천상의 여인으로 아그네스 소렐이 등장하는 이유다. 그림이 완성된 다음 해인 1453년, 샤를 7세는 백년전쟁을 
끝냈다. 전쟁이 끝나고 부르고뉴를 합병한 샤를 7세는 근대국가 체제를 정비했다. &lt;br&gt;&lt;br&gt;중세는 저물어 가고 근대의 여명이 밝아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근대의 해는 프랑스보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떴다. 르네상스가 시작됐다. &lt;br&gt;&lt;br&gt;&lt;u&gt;매경이코노미는 인문학 열풍 시대를 
맞아 미술과 역사를 함께 조망할 수 있는 새 연재물 ‘이진숙의 &amp;lt;그림, 시대를 말하다&amp;gt;’를 선보입니다. 이진숙 평론가는 서울대 
독어독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하고 러시아국립인문대학 미술사학부에서 말레비치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월간에세이 편집장을 거쳐 현재 
미술평론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그림은 직간접적으로 시대의 정신을 예감하고 반영한다’는 기치 아래 중세시대 미술부터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그림 속 시대정신을 소개할 예정입니다.&lt;/u&gt; &lt;br&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부르고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부르고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랭부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랭부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아그네스 소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아그네스 소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룰랭재상&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룰랭재상&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장 푸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장 푸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샤를 7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샤를 7세&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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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화가 김동유 - 구도적인 반복 행위로 탄생하는 이중그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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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tn_other.gif&quot;&gt;&lt;/a&gt;&lt;/td&gt;&lt;/tr&gt;&lt;tr&gt;&lt;td height=&quot;25&quot; vAlign=&quot;top&quot; colSpan=&quot;2&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ignews_line.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본문내용시작 --&gt;&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vAlign=&quot;top&quot;&gt;&lt;div style=&quot;font-size: 10pt;&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rticle_body&quot;&gt;&lt;table style=&quot;margin-top: 4px; margin-bottom: 15px; margin-left: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align=&quot;right&quot;&gt;&lt;tbody&gt;&lt;tr&gt;&lt;td&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1/1301_024.jpg&quot; width=&quot;250&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9;&#9;&#9;&#9;&#9;                    〈이중 얼굴〉 그림으로 김동유는 분명 스타작가가 되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옥션에서 그의 작품 거래 동향은 늘 미술면의 주요 기사였다. 2006년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마를린 먼로 vs 마오 주석〉이 당시 추정가의 25배인 3억2000여만원에 낙찰되면서 지방의 무명작가가 일약 유명작가가 되었다. 이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2012년에는 런던에서 있었던 ‘엘리자베스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전시회’ 에 아시아 작가로는 유일하게 초청을 받아 전시에 참여했다. 그러나 김동유의 경우는 시장의 떠들썩한 반응과 연이은 화젯거리 때문에 사람의 진실이 가려진 경우이기도 했다. 그를 둘러싼 상황이 진정되어야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고, 시간을 기다렸다. 2012년 11월 30일 까지 이어진 갤러리현대(강남)에서의 그의 17번째 개인전이 끝날 무렵 비로소 그를 만났다. 스타작가라고 불리는 기분을 먼저 물었다. &lt;br&gt; &lt;br&gt;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었죠. 그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힘든 일이지만, 계속 관심을 받게 되고 모든 것이 짐스러웠어요. 외형적으로 무언가는 변한 것 같지만 사실 속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요. 어렸을 때의 저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어요.”&lt;br&gt; &lt;br&gt; 어린 시절의 소극적인 성향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지나친 유명세가 하나도 반갑지 않단다. 말이 없던 소년 김동유가 유일하게 좋아한 일은 혼자 조용히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부터 장래 희망은 화가였다. 그는 담담한 어조로 “어렸을 때 꿈이 이루어져서 다행”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누구나 예상하는 것처럼 그 길은 쉽지 않았다. 4년 장학금을 받고 목원대에 입학했지만, 미대 입학이 전부는 아니었다. 2006년 그날이 올 때까지 마흔 살의 가장으로서, 두 아이의 아빠로서의 책임도 미루었다. 축사를 개조한 집에서 가족들이 함께 살면서 오직 그림에만 매달리던 힘든 시절이 있었다. “모두가 포기했을 때, 아무도 하지 않았을 때 끝까지 밀고 가는 힘, 내적인 힘”을 강조하는 그의 말에 강한 힘이 실리는 이유는 어려운 시간의 경험이 녹아 있기 때문이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right: 15px; 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200&quot; align=&quot;left&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1/1301_024_1.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Audrey Hepburn(Audrey Hepburn)_ Oil on Canvas, 227.3×181.8cm, 2008&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이번 17번째 전시에서 보여준 작품들도 그의 저력과 뚝심을 보여주었다. 멀리서 보면 레오나르드 다 빈치의 성모상과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보다 분명한 윤곽을 드러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무수히 많은, 갈라진 자국들이다. 작은 단위들이 모여서 큰 화면을 이루는 이중화를 다른 차원에 적용한 그림이다. &lt;br&gt; &lt;br&gt; “제 작품은 원래 주변에서 소재를 많이 가져오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 키치적인 요소가 많죠. 명화와 관련해서도 주제 같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크랙 같은 주변적인 것을 끌어들인 겁니다. 전에 그린 얼굴 시리즈도 특정인이기도 하지만 미술에서 잘 다루어지지 않던 주변적인 이미지라고 생각해서 그린 거죠.” &lt;br&gt; &lt;br&gt; 아이러니컬하게 그의 그림 덕분에 그 이전에는 유명하지 않았던 이미지들은 유명해졌고, 유명한 이미지들은 더 유명해졌다. 그의 대표작인〈이중 얼굴〉 시리즈에는 마를린 먼로, 케네디, 마오쩌둥, 박정희 대통령, 김일성, 오드리 헵번, 그레이스 켈리, 다이애너비의 얼굴이 등장한다. 이 얼굴들을 들여다보면, 케네디 얼굴은 마를린 먼로의 얼굴로 이루어져 있고, 다이애너비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얼굴로 이루어져 있다. 두 인물간의 관계를 연상하고 해석하는 것은 관람객의 몫이다. &lt;br&gt; &lt;br&gt; “보는 사람에 따라 케네디와 먼로의 염문 같은 것을 연관시키기도 하는데, 저는 그런 부분보다는 형태의 독특성이 더 중요하다고 봐요. ‘케네디의 형태와 먼로의 형태가 합해지면 어떻게 되겠네’ 이런 생각을 하는 거죠.”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1/1301_024_2.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Audrey Hepburn(Gregory Peck)_ Oil on Canvas, 227.3×181.8cm, 2009&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그의 전작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이중화’다. 멀리서 보는 이미지와 가까이서 보는 이미지가 다른 두 개의 이미지로 이루어진 화면이라는 뜻이다. 84학번인 그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 많은 동기들은 회화를 접고 당시 유행하기 시작하던 입체・영상 작업을 시작했다. &lt;br&gt; &lt;br&gt; “유행을 따르는 것은 내 성향을 남에게 맞추는 거죠. 남에게 맞추는 것보다 내가 가진 성향을 끌어내는 게 더 중요해요. 흥미가 없는 것은 요만큼도 그릴 수 없어요. 흥미로운 것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회화가 평면이지만 평면 안에서 입체, 조각, 움직임의 요소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평면 작품이라도 공간 안에 놓이고 거리가 생기고, 멀리서 보았을 때와 가까이서 보는 이미지가 다른, 시각적인 효과를 낼 수 있는 작품들을 그리게 되었죠. 일종의 스테레오적인 회화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시각을 가장 잘 파악할 수 있는 그림이기도 하죠.”&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1/1301_024_3.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Grace Kelly(Clark Gable)_ Oil on Canvas, 194×155cm, 2010&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그래서 등장한 것이 ‘이중화’다. 아름다운 꽃으로 여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꽃과 여인〉(1999)이라는 작품으로 본격화되기 시작한 이중화는 그의 오랜 예술적 탐구의 첫 번째 종착점이자 새로운 작품을 향한 시발점이 되었다. 같은 해에 〈얼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등장한다. 마를린 먼로의 큰 이미지에 박정희의 작은 이미지가 함께 있는 작품이었다. 처음 이 작품을 그릴 때는 4개월이 꼬박 걸렸다. 이번 신작인 〈피에타(180×180cm)〉를 완성하는 데에는 꼬박 1년이 넘는 시간이 들었다. 손으로 하는 작업의 고단함 때문에 전시가 한 번 끝나고 나면 심한 어깨 통증으로 고생을 하기도 한다. 인내력을 요하는 작업, 그리고 가까이 들여다보는 화면에서 꿈틀거리는 손 맛 때문에 성곡미술관 박천남 학예실장은 그의 작품에 관해서 “지독한 그리기”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4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1/1301_024_4.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Flower and Woman_ Acrylic on canvas, 162.2×130.3cm, 2000&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그릴 때는 가까이 다가가서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전체를 조망하는 방식, 무수히 비슷한 흔적들을 화면에 쌓아가는 김동유의 작업방식은 김홍주・박서보 등 여러 한국 작가들에게 공통적으로 보이는 구도적인 반복 행위를 연상시킨다. 이 말에 대해서 그는 흥미로운 대답을 했다. &lt;br&gt; &lt;br&gt; “반복을 의도했다기보다는 흰개미가 몸에 밴 습성대로 움직이는 것처럼 공통적인 한국인의 특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옛날에 줄을 치고 일일이 손으로 모내기를 하던 기억, 낫으로 벼를 일일이 베는 일, 뜨개질이나 돗자리를 짜는 일 같은 일의 속성이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죠. 그림 속에 또 그림이 들어 있는 저의 이중화는 음식문화와 비교해보면 발효음식과 통합니다. 이미 발효된 젓갈로 다시 김치라는 발효음식을 만드는 과정과 비슷하죠. 그런 의미에서 제 작업 방식은 한국적이죠.”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301/1301_024_5.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Pieta_ Oil on Canvas, 180×180cm, 2011&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고도(古都) 공주 출신답게 그는 한국적인 것에 대한 이해가 뛰어났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 있기를 좋아했던 초등학생 김동유는 산들에 널려 있는 깨진 기왓장을 주우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다. 어른들은 쓸모없는 것들을 쌓아놓는다고 역정을 내셨지만, 혼자 소중하게 보관하곤 했었다. 그의 사소한 수집벽은 지금의 작품들을 만드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그때는 기왓장이지만 지금은 이미지다. 우표, 성냥갑의 이미지, 유명인의 얼굴, 잘 알려진 명화 등 그의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언제든지 그의 그림이 될 준비를 하고 있다. 그가 그린 이미지가 서양 유명인들이고 서양명화이기 때문에 더러 오해를 받는다고도 한다. &lt;br&gt; &lt;br&gt; “소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국적인 방법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김치가 한국음식의 상징이지만, 고추가 우리나라에 들어와 지금의 김치가 만들어진 것이 얼마나 되었겠어요? 화가 이동기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어쩌면 서양적인 것과 한국적인 것이 섞여 있는 부대찌개야말로 지금 시대에서는 가장 한국적인 것일 수도 있지요.”&lt;br&gt; &lt;br&gt; 반도국가로서 문화적인 혼성은 한국문화에서의 중요한 테마 중의 하나일 것이다. 백남준이 한민족을 기마민족으로 이해했다면, 김동유가 이해한 한민족은 농경민족이다. 그리고 어떤 규정이건 거부하지 않으면서 다양한 언어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김동유가 한때의 인기작가가 아니라 한국의 대표작가로 계속 남을 수 있는 이유는 이런 심도 있는 이해 덕분일 것이다&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김동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김동유&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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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화가 송명진 - 시각-촉각-시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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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CDATA[이진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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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CDATA[2013-02-05T09:11:53Z]]></updated>
		    <published><![CDATA[2013-02-05T09:11:53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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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class=&quot;title1&quot; vAlign=&quot;bottom&quot; align=&quot;left&quot;&gt;&lt;b&gt;[이진숙이 만난 우리 시대 미술가] 화가 송명진&lt;/b&gt;&lt;/td&gt;&lt;/tr&gt;&lt;tr vAlign=&quot;bottom&quot;&gt;&lt;td height=&quot;6&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ignews_title_bg.gif&quot; width=&quot;600&quot; height=&quot;2&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대제목 테이블 끝--&gt;&lt;!--소제목 테이블 시작--&gt;&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class=&quot;title2&quot;&gt;&lt;b&gt;어떤 트렌드도 따르지 않고, 항상 나만의 도전’을 준비하죠&lt;/b&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소제목 테이블 끝--&gt;&lt;!-- 기사요약 시작 --&gt;&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bgColor=&quot;#f2f2f2&quot;&gt;&lt;tbody&gt;&lt;tr&gt;&lt;td height=&quot;10&quot;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1.gif&quot;&gt;&lt;/td&gt;&lt;td height=&quot;10&quot;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5.gif&quot;&gt;&lt;/td&gt;&lt;td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2.gif&quot; width=&quot;10&quot; height=&quot;10&quot;&gt;&lt;/td&gt;&lt;/tr&gt;&lt;tr&gt;&lt;td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6.gif&quot; width=&quot;10&quot;&gt;&lt;/td&gt;&lt;td style=&quot;padding: 8px;&quot; bgColor=&quot;#ffffff&quot; width=&quot;580&quot; align=&quot;left&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3pt;&quot;&gt;&lt;font color=&quot;#000ca3&quot;&gt;송명진&lt;/font&gt;&lt;br&gt;1973년 생. 홍익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 회화과 졸업. 2001년부터 현재까지 금호미술관, 성곡미술관, 갤러리 아트사이드(북경), Ctrl 갤러리(휴스턴), 인갤러리 등에서 1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N.45 포항시립미술관, 이중섭미술관, 인천국제디지털아트페스티벌, 토탈미술관, 과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사비나미술관, 갤러리 아트사이드 서울, PKM Gallery북경, 대구문화예술회관, 예술의전당 등의 여러 주요 단체전에 참여했다. 1995년 미술세계대상전 특선, 1999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특선과 서울현대미술제에서 특선, 2004년 송은미술대상전 미술상(우수상), 2005년 금호미술관 영아티스트 선정, 2008 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선정, 2010년 The Sam and Adele Golden Foundation Award(USA) 등의 다양한 수상 경력을 가지고 있다.&lt;/font&gt;&lt;/td&gt;&lt;td vAlign=&quot;top&quot;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7.gif&quot; width=&quot;10&quot;&gt;&lt;/td&gt;&lt;/tr&gt;&lt;tr&gt;&lt;td height=&quot;10&quot;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3.gif&quot;&gt;&lt;/td&gt;&lt;td background=&quot;/images/news_box08.gif&quot;&gt;&lt;/td&gt;&lt;td width=&quot;10&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news_box04.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기사요약 끝 --&gt;&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width=&quot;495&quot; align=&quot;right&quot;&gt;&lt;font color=&quot;#0066cc&quot;&gt;이진숙&lt;/font&gt;  미술평론가&lt;/td&gt;&lt;td style=&quot;padding-bottom: 5px;&quot; vAlign=&quot;bottom&quot; width=&quot;105&quot; align=&quot;right&quot;&gt;&lt;a href=&quot;http://topclass.chosun.com/board/otherLst.asp?writername=이진숙&quot;&gt;&lt;img alt=&quot;필자의 다른기사&quot;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tn_other.gif&quot;&gt;&lt;/a&gt;&lt;/td&gt;&lt;/tr&gt;&lt;tr&gt;&lt;td height=&quot;25&quot; vAlign=&quot;top&quot; colSpan=&quot;2&quot;&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images/bignews_line.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본문내용시작 --&gt;&lt;table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gt;&lt;tbody&gt;&lt;tr&gt;&lt;td vAlign=&quot;top&quot;&gt;&lt;div style=&quot;font-size: 10pt;&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rticle_body&quot;&gt;&lt;table style=&quot;margin-top: 4px; margin-bottom: 15px; margin-left: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align=&quot;right&quot;&gt;&lt;tbody&gt;&lt;tr&gt;&lt;td&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212/1212_044.jpg&quot; width=&quot;250&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9;&#9;&#9;&#9;&#9;                    “한 수 물리다.”&lt;br&gt; &lt;br&gt; 화가 송명진이 10번째 개인전을 맞이하여 직접 쓴 글의 제목이다. &lt;br&gt; &lt;br&gt; “이때까지 열심히 그리던 것을 한 걸음 나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제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작업을 하려고요. 나다운 것을 좀 더 수면 위로 이끌어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lt;br&gt; &lt;br&gt; 11월 21일부터 삼청동의 인갤러리에서 열리는 개인전 준비로 그녀는 눈코 뜰 새가 없다고 했다. 특히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들은 색의 이름을 언급하기 어려운 미묘한 색의 작품이어서 도록의 색깔 교정 보는 일이 유난히 까다로웠다며 말을 이어나갔다. 이번 전시는 2009년 성곡미술관 개인전 이후 3년 만의 개인전이라서 반가운 마음이 더욱 컸다. 그사이 베이징 아트사이드 갤러리 전시와 휴스턴의 Ctrl 갤러리 전시, 뉴욕・파리 등지에서의 다양한 해외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초청되면서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해외 관람객의 반응은 어땠을까. &lt;br&gt; &lt;br&gt; “외국 사람들은 자기네들과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 해요.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제 작업은 어디서나 튀더라고요. 한국에서도 트렌드에 속해 있지 않았지만, 거기서도 트렌드는 아니었지요. 트렌드를 따라가는 작품은 아닌 것 같아요. 어쨌거나 제 작품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죠.” &lt;br&gt; &lt;br&gt; 그녀의 그림이 ‘튀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에게 ‘초록작가’라는 별명을 가져다 준 강렬한 초록색 화면이다. “사실 색을 쓰고 싶지 않아서 한 가지 색을 주야장천 쓴 것이 초록색”이었다. 그러나 초록을 선택한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lt;br&gt; &lt;br&gt; “워낙 제가 식물을 좋아해요. 그리고 그림의 소재를 주변에서 찾는 편이죠. 주변의 사물을 다르게 보는 것이 작품의 시작이 아닐까 해요. 집 주변에 불광천이 있어요. 그곳에 다양한 식물이 있어요. 시인 이상은 식물이 초록색 일색인 것을 보고 ‘조물주의 몰취미’라는 표현을 했지만, 저는 초록에만 눈이 가요.”&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212/1212_044_1.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풍경의장&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그녀는 10년 넘게 작업실 근처의 불광천를 산책하며 자연을 관찰해왔다. 식물들이 온순할 것 같지만 한여름에 빨리 생장하는 것을 보면 동물처럼 그악스럽게 느껴졌단다. 이 느낌을 살리기 위해 초록의 다양한 뉘앙스를 살리지 않고 ‘Opaque oxide of chromium’이라는 이름의 밀도 높은 초록색 물감을 골랐다. 자연을 가장 잘 대변하는 것이 초록색인데, 이 초록은 발라놓으면 가장 인공적인 느낌이 나는 역설이 재미있었다고 한다. 2005년도 작품들은 그냥 이 물감의 이름을 따서 제목을 붙이기도 했다. &lt;br&gt; &lt;br&gt; 송명진은 화려한 수상경력을 가지고 있다.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을 다니던 1995년 미술세계대상전에서 특선을 했고, 1999년 대한민국 미술대전과 서울현대미술제에서 특선을 했다.  2004년에는 송은미술대상전에서 우수상을 받았다. 2005년 금호미술관의 ‘금호 영 아티스트’로 선정되었고, 2008년에는 성곡미술관의 ‘내일의 작가’로 선정되면서 개인전을 가졌다. 이 두 전시에 출품된 작품들은 회화의 평면성이라는 주요 담론과 연관이 되면서 송명진이라는 개성 있는 화가의 이름을 미술계에 각인시켰다.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45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212/1212_044_2.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a foolish step 4&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캔버스의 평면성에 대한 의식이 개입되면서 그녀가 그린 불광천의 단조로운 풍경은 흥미진진한 회화가 되었다. 1960년대 미국 추상표현주의와 함께 진행된 회화의 평면성 논의를 그녀는 재치 있게 표현했다. 회화의 평면성론은 회화의 본질을 ‘이야기의 전달’이라고 보는 견해에 반대해서 평평한 캔버스의 속성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비입체적인 회화를 선호하는 이론이었다. 일견 어려워 보이는 이 전문가용 주장을 그녀는 쉽게 표현했다. 그녀가 그린 풀은 풀이지만 머리카락 같기도 하고, 때로는 캔버스를 긁어내서 결이 일어선 것처럼 보인다. 자연에 대한 관찰과 이러한 회화에 대한 사유는 그녀의 작품에 다양한 모습으로 펼쳐졌다. 그녀는 파로 파라다이스를 만들었다. 고양스튜디오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할 당시, 근처에 파밭이 많이 있었다. 그녀가 본 파밭은 마치 종이처럼 펀칭 자국이 있고, 잘린 파의 붉은색은 선연한 핏자국을 떠올리게 한다. 식물적인 요소와 동물적인 요소가 아무렇지도 않게 섞여 들어간 장면이다. 정원수에 핀 화려한 꽃들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피딱지 같은 것이다. &lt;br&gt; &lt;br&gt; “자연을 가져와서 곁에 두는 방식의 정원은 인간 위주의 생각인 것 같아요. 유년기의 인류는 낫으로 벼를 베면 비명소리를 들었다고 해요. 그만큼 자연과 교감했다는 말인데, 요즘은 자연을 자연으로 보지 않고 사물로 대한다는 생각이 들어요.”&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left: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300&quot; align=&quot;right&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212/1212_044_3.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Opaque oxide of chromium 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2007년, 검지와 중지 두 개의 손가락으로 만들어진 ‘손가락 인간’이라는 어눌한 캐릭터가 등장하면서 그림 속에 이야기가 생겼다. 어눌한 손가락 인간들은 자기들처럼 어눌한 풍경을 만들기도 하고, 어리석은 상황을 자초하기도 한다. 〈A Foolish Step 4〉에서 낙하산을 끌고 다니는 손가락 인간은 자기가 애써 만든 포스트잇 산을 올라가면서 다시 망쳐버린다. 만들고 무화시키는 시지프스 신화를 반복하는 중이다. 잔뜩 붙어 있는 포스트잇을 그린 이유는 그것이 상단의 평면과 하단의 입체적인 곡선이 함께 있는 사물로서 평면 위에 3차원의 입체공간을 그리려고 하는 회화와 닮았다고 느꼈단다. 그러니까 저 낙하산을 끌고 다니는 손가락 인간은 예술이라는 답이 없는 질문을 무수히 행하고 실천하는 예술가의 노고를 떠올리게 한다. 송명진의 작품은 회화의 평면성에 대한 이해와 이야기의 전달이라는, 서로 반대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던 두 개의 요소가 통합되면서 한계를 짓는 이론적 틀을 스스로 넘어서기 시작한다. 회화에 관한 어떤 이론보다 예술가의 실천은 절대적으로 우선하는 것이고, 비평가의 입보다 화가의 손이 앞서는 것이다. &lt;br&gt; &lt;br&gt; 그리고 2001년 첫 개인전 이후 11년의 시간이 지난 10번째 개인전에서 그녀는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고 있다.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인 초록색도 손가락 인간도 화면에서 사라졌다. 화면의 이미지들은 전체적으로 단순해졌으며, 마치 “흙의 색 또는 몸의 살색과 같이 도처에서 흔히 발견될 수 있는 색으로, 정색하지 않으면 미처 인식되지 못하는 그런 색감들”로 그린 그림이다. 이번 전시 작품들에서는 그림에 어떤 의미를 담으려고 하지 않았단다. &lt;br&gt; &lt;br&gt; “휴지를 만질 때의 느낌 같은, 촉각적으로 사소한 경험들이 쌓여서 만들어진 작품들이지요. 일상의 흔한 것도 정색하고 낯설게 하면서 예술로 들이밀면 모두가 공감하는 것이 되지 않겠어요?” &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600&quot; align=&quot;center&quot;&gt;&lt;tbody&gt;&lt;tr&gt;&lt;td&gt;&lt;br&gt;&lt;img src=&quot;http://topclass.chosun.com/news_img/1212/1212_044_4.jpg&quot;&gt;&lt;/td&gt;&lt;/tr&gt;&lt;tr&gt;&lt;td style=&quot;padding-top: 5px; padding-right: 5px; padding-left: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quot;#2f73ba&quot;&gt;Objects 2&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 이번 전시에서 그녀가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시각적으로 경험되는 ‘촉각성’이다. 일상에서 경험한 촉각적 경험을 그림으로 표현한 작품들이다. 어떤 사물에서 경험한 촉각적인 기억을 그림에서 발견하면 과거의 경험이 유추되리라는 생각이다. 신작 〈Objects 2〉의 원기둥들은 액체로 채워져 있는데, 갖가지 방식으로 밖으로 흘러나와 결국은 구멍으로 다시 들어간다. 송명진이 이번에 그린 사물들은 모두 원점 회귀적이거나 뜻하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는 위태로운 사물들이다. 어디서 본 듯하지만,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이번 전시에 나오는 작품들은 객관적인 어떤 것을 묘사한 것이라기보다 그녀가 자신의 지금까지의 작업 전체에 대해서, 그리고 회화 전체에 대한 사유를 풀어내는 과정처럼 보인다. 온갖 미디어가 발전하고 있는 이 시대에도 그녀는 화가임을 고집한다. 그림을 그리는 것이 전부인 단조로운 삶, 그러나 그 삶에는 늘 커다란 도전이 숨어 있다. &lt;br&gt; &lt;br&gt; “회화가 가진 한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 어렵겠지요. 소설보다 시가 어려운 것처럼 회화도 좁은 영역에서 제한된 언어로 말해야 하지만 그것을 돌파해냈을 때 그 성취감이 아주 큽니다.”&lt;br&gt; &lt;br&gt; 아마도 우리는 겨울이 온 불광천에서 다음 그림에 대한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고 있는 그녀를 만날 수도 있을 것이다. &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송명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송명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한국 현대 회화&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한국 현대 회화&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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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김아타 &quot;백정의 미학&quot;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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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1-27T14:44:28Z]]></updated>
		    <published><![CDATA[2013-01-27T14:44:2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h3 class=&quot;aTit&quot;&gt;바람과 비와 눈과 시간… 자연의 흔적을 담다&lt;/h3&gt;&lt;p&gt;
&lt;/p&gt;&lt;h4 class=&quot;aTit2&quot;&gt;사진작가 김아타의 ‘프로젝트-드로잉 오브 네이처’&lt;/h4&gt;&lt;p&gt;
&lt;/p&gt;&lt;div class=&quot;aWriter&quot;&gt;파주 글 이진숙 미술평론가,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 © attakim &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lt;/span&gt; 제307호 &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 &lt;/span&gt;20130125 
입력 &lt;span id=&quot;reporteraa&quot;&gt;&lt;/span&gt;&lt;iframe height=&quot;0&quot; marginHeight=&quot;0&quot; src=&quot;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quot; frameBorder=&quot;0&quot; width=&quot;0&quot; marginWidth=&quot;0&quot; scrolling=&quot;no&quot;&gt;
&lt;/iframe&gt;&lt;/div&gt;&lt;p&gt;
&lt;/p&gt;&lt;div style=&quot;line-height: 23px; font-size: 16px;&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Body&quot;&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1/25214021.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1 일본 도쿄에 설치했던 ‘프로젝트-드로잉 오브 네이처’ 작업 ‘N35°42′28″ 
E139°46′48″, 270 x 160 cm 2010년 5월 29일부터 2012년 5월 29일까지 설치했다. &lt;b&gt;2&lt;/b&gt; ‘드로잉 오브 
네이처’ 일본 히로시마 설치 장면 &lt;b&gt;3&lt;/b&gt; ‘드로잉 오브 네이처’ DMZ 향로봉 설치 장면 &lt;b&gt;4&lt;/b&gt; ‘드로잉 오브 네이처’ 인도 
갠지스 강 설치 장면 &lt;b&gt;5&lt;/b&gt; 국내 원시림에 작품을 설치 중인 김아타 작가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김아타(57). 그는 장엄함을 다룰 줄 안다. 광대한 사유의 폭과 깊이, 전지구적인 
행동 반경, 철저한 실행 능력…. 한국 미술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고, 전세계 어느 작가와 비교해도 압도적인 스케일의 작업을 그는 하고 
있다. &lt;br&gt;그는 늘 큰 걸음으로 앞서갔다. 평론가·큐레이터·갤러리스트들이 겨우 따라잡았다 싶으면 그는 벌써 한걸음 앞서 가 있었다. 
2006년 뉴욕 ICP(International Center of Photography) 전시에서 ‘8시간 노출 사진’과 ‘아이스 모놀로그’ 
시리즈로 주목을 받은 그 순간, 화면에서 모든 것이 사라진 ‘인달라 시리즈’를 발표했다. 이 작품들로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 특별전 등 
세계적인 사진 작가로서 본격 궤도에 진입한 순간, 이번에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자연이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프로젝트-드로잉 오브 
네이처(The Project-Drawing of Nature)’를 시작했다. &lt;br&gt;이 프로젝트는 점봉산·향로봉을 비롯해 인도 보드가야, 그리스 
파로스 섬, 중국 허난성, 뉴욕 맨해튼, 인디언 보호구역, 히로시마, 베이징, 베네치아, 시베리아, 티베트 등 전세계 44곳에 대형 캔버스를 
설치하고 자연이 남긴 흔적을 ‘채집’하는 작업이다. 지금도 진행되고 있는데, 이 중 22개가 돌아와 모습을 드러냈다. &lt;br&gt;인제의 자연림에서 
가져온 캔버스를 보자. 곰팡이 꽃, 빗물 자국, 바람의 숨결과 햇빛, 나무 그림자 등 기운 생동한 자연의 은밀한 흔적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땅에 파묻어 수의처럼 썩어 들어갔던 캔버스는 검은 바탕 위에 자개처럼 피어나 죽음을 초월한 처연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거제도 앞바다에 
설치되었던 캔버스는 온갖 바다생물들의 흔적이 가득했다. DMZ 포사격장에 설치되었던 캔버스에는 파편의 흔적이 추상표현주의적인 강렬한 화면으로 
다시 태어났다. &lt;br&gt;서양에서 아트(art)란 자연에 상반되는 인공적인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지금 이 작품들은 김아타가 디렉팅하고 자연이 
협력해서 만든 예술이다. 예술의 개념을 바꾸고 있는 김아타를 15일 오후 경기도 파주 작업실에서 만났다.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1/25214227.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lt;b&gt;6&lt;/b&gt; 땅속에 묻었던 ‘드로잉 오브 네이처’ 작업 ‘N37 68 02 E127 85 
47’(2012), 150 x 190 cm &lt;b&gt;7&lt;/b&gt; 포탄 파편 작업 ‘The Target #09’(2012) 앞에 서 있는 김아타 작가 
&lt;b&gt;8&lt;/b&gt; ‘The Target #03’(2012), 210 x 150 cm &lt;b&gt;9&lt;/b&gt; 소총 사격장에 설치된 ‘The Target 
#013’(2012) 45 x 50 x 96 cm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향로봉·히로시마·티베트 … 
세계 44곳에 2년간 캔버스 설치&lt;br&gt;-해체’에서 ‘뮤지엄 프로젝트’ 다시 ‘온 에어’로, 그리고 이번 ‘드로잉 오브 네이처’까지 작품이 
역동적으로 바뀌어 왔다. &lt;/b&gt;&lt;br&gt;“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사진도 빛이고 캔버스도 빛의 작용이다. 내 책 중에 『물은 
비에 젖지 않는다』는 제목의 책이 있다. 물과 비의 근본은 똑같이 HO인데, 비라고도 하고 물이라고도 한다. 이런 차이와 경계를 넘어서 
무차원의 차원으로 가고 싶다. 10년 전이나 20년 전이나 아타는 달라진 것이 없다. 똑같은 절절함으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lt;br&gt;&lt;b&gt;-자연에 캔버스를 세운다는 아이디어는 어디서 나왔나.&lt;/b&gt;&lt;br&gt;“1995년에 이미 부산 기장에 있던 작업실 근처의 캔버스 
두 개를 야외에 세워둔 적이 있었다. 1년 동안 캔버스가 변하는 것을 보면서 힘든 시간을 버텼다. 그보다 중요한 다른 계기는 뉴욕에서 ‘아티스트 
인달라’ 작업을 할 때였다. 윌리엄 터너의 작업을 보면서 많이 울었다. 터너는 죽을 때까지 그림만 그렸다. 나는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인달라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나는 아티스트로서 너무 많이 찍고 너무 많이 걷고 너무 많이 관계했다. 온 에어 프로젝트의 만 장의 사진을 하나로 
만든 인달라 시리즈는 클라이맥스다. 폭발해 버릴 것 같은 순간도, 지혜를 만지는 순간도 있었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웠고 그것이 이 프로젝트로 
인도했다.&lt;br&gt;이런 계기들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정확하게는 카메라나 현대 미술이 요구하는 차원에서 하차한 것이다. 다시 카메라를 들 수도 
있겠지만, 그건 다른 의미일 것이다.”&lt;br&gt;&lt;b&gt;-이 프로젝트를 시작했을 때 주위 반응은. &lt;/b&gt;&lt;br&gt;“한국에서는 한마디로 시큰둥이었다. 
누구는 실패할 것이라는 말까지 했고, 가까운 사람들도 냉담했다. 그러나 이 프로젝트는 내가 아티스트로 살아온 이유를 알게 해주었다. ‘이 작업을 
위해서 지금까지의 나를 다 버려도 좋다’는 각오로 매진했다. 반대로 외국 친구들은 대부분 환영했다. 산타페·뉴욕 등 허락받기 까다로운 공간을 
섭외하는 데 적극 도와준 친구도 있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lt;br&gt;&lt;b&gt;-주변의 몰이해에도 전진을 계속할 수 있는 동력은 무엇인가. 
&lt;/b&gt;&lt;br&gt;“작가는 고통스럽게 작업하는 것이 아니다. 이중섭이 은박지에 꽃게라도 그리지 않았다면 그는 죽었을 것이다. 가끔 작가가 고통스럽게 
작업한다는 일반적인 통념에 편승하는 작가들이 있는데, 그건 빵을 위해 고통을 위장하는 양아치 근성이다. 나는 그런 태도를 용납하지 못한다. 초기 
작업은 한국에서는 하나도 안 팔렸다. 한국에서 관계들을 생각하면서 작업했으면 이렇게 나가지 못했다. &lt;br&gt;나의 모든 것은 대화였다. 대화의 
본질은 새로움이다. 새로움은 바로 손대기에서 시작한다. 이미지 트레이닝이라는 수행과정에서 나는 사물과, 세계와 대화하는 방법을 꾸준히 연마했다. 
‘장미의 열반’이라는 작업을 할 때였다. 17일 동안 장미가 말라가는 과정을 모두 촬영한 후에 마른 장미를 태우는 순간, 상상하지 못한 감미로운 
향기를 맡았다. 그것은 살아 있는 장미에서는 나지 않는 강렬한 향기였다. 장미에 관한 상식적인 선에서 멈추었던 사유를 다시 깨어나게 했다. 
표피만 보고 무언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때 나는 내가 손대지 않고, 만지지 않은 것은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의 
모든 일은 대화이고 여기서 부가적으로 나오는 것이 작품이다. &lt;br&gt;캔버스에 남겨진 흔적들을 보면서 느끼는 감동의 크기를 확인했다. 지금까지는 
내가 좋아서 한 것이라면 이제는 타인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예술이 세상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lt;br&gt;&lt;b&gt;-히로시마에, 
아우슈비츠에 캔버스를 세우는 것으로 어떻게 인류를 치유할 수 있나. &lt;/b&gt;&lt;br&gt;“상처의 원인을 제거하지 않으면 상처는 치유되지 않는다. 원인 
제거의 가장 좋은 방법은 상처를 불러내어 상처와 대화하는 것이다. 좋은 말로 대화지만,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투쟁을 하지 않으면 소멸되지 
않는다. 대화를 통해 관조의 경계에 도달해야 한다. 대화 속에서 자신을 극한의 한계까지 밀고 가면 어느 순간 대상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순간일 수도 있지만, 하루 혹은 한 달, 일 년, 이 년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 몰입의 과정을 지나야 비로소 해체의 
순간이 온다. 해체는 새로움이고, 과거의 상처 혹은 기존의 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히로시마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세웠던 캔버스가 어떻게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나 스스로도 반복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식적인 의문 때문에 이 프로젝트는 가치가 있다. 그곳에 서 
있던 캔버스는 우리의 기억과 성찰의 매개체가 될 것이다. 이런 간단한 설명이 붙을 것이다. ‘이 캔버스는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철조망 안 
잔디밭에 2년 동안 서 있었다. 나는 하얀 캔버스로 바람과 비와 눈과 시간의 그림자를 닦고 싶다’는.”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1/25214419.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lt;b&gt;10&lt;/b&gt; ON_AIR Modigliani 016 &lt;b&gt;11&lt;/b&gt; ON-AIR the 
series Sex 030 &lt;b&gt;12&lt;/b&gt; ON-AIR the series Monologue of Ice 113 &lt;b&gt;13&lt;/b&gt; ON-AIR 
EIGHTHOURS New York 110-7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b&gt;최고의 美는 살코기 
발라내며 칼날 세우는 ‘백정의 미학’&lt;br&gt;-당신이 생각하는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lt;/b&gt;&lt;br&gt;“인간은 결국 아름답기 위해 사는 것이다. 
아름다움은 시작과 끝이다. 아타는 살코기를 발라 내면서 칼의 날을 세우는 ‘백정의 미학’을 최고의 미로 본다. 나의 여정은 백정의 미학을 찾기 
위한 긴 과정이었다. 지나치고, 넘치지 않으면 절대 중용의 맛을 알 수 없음을 일찍 체험했기에 자신의 한계를 긋지 않고 끝까지 자신을 투쟁시켜 
온 과정들이다. 어떤 한계치까지 간다는 것은 지독한 외로움과 고독을 대면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순간 이것과 저것을 차별하지 않는 경계지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요하고 평온하다. 그런 과정이 작품에 담겼을 것이고, 그게 아름다움으로 보였을 것이다.” &lt;br&gt;&lt;b&gt;-캔버스를 
설치한 44곳의 장소를 고르는 기준이 있나. &lt;/b&gt;&lt;br&gt;“모든 자연이나 사회나 공간은 나름의 사연과 역사가 있다. 한 장소에 부과된 의미를 
그대로 가지고 가면서 다른 각도에서 한번 보자는 것이 내 생각이다. 2007년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정신적인 리더인 인디언 할머니를 만나 하루 
종일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감동적인 만남이었다. 그곳에 캔버스를 세워보니 그들의 영혼이 맑은 이유를 알겠더라. 이 작업은 이미 역사적으로 
알고 있는 부분을 복기해 나가면서 인간의 역사, 나 개인의 역사를 힐링해 가는 과정이다.” &lt;br&gt;&lt;b&gt;-캔버스가 세워지는 지역 주민들의 
반응은. 어려움은 없었나. &lt;/b&gt;&lt;br&gt;“다들 재미있어 하고 좋아했다. 중국 허난성에서는 노자사상연구회장이라는 사람이 ‘어떻게 동양사상을 
캔버스에 묻혀 갈 것인지 설득해 보라’고 했다. 유엔 중국대표부에서 마련해준 자리인데 성주, 경찰 총장 등 지방 유지들이 모두 모여 있는 가운데 
냅킨에 고량주를 묻혀서 코앞에서 살랑살랑 흔들어 보였더니 이해를 하더라. 물론 허락이 쉽지 않은 곳도 있었다. 양구에서 포 작업을 할 때도 
안전상의 이유로 허락을 받는 데만 3년이 걸렸다. 아우슈비츠는 4년 동안 허가가 나지 않아서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최근에는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캔버스를 땅에 묻었던 홍천군도 적극적으로 요청해온 곳이다. 최근에는 외국에서도 연락이 
온다. 휴스턴의 한 부호는 실크로드를 따라 베이징~파리 사이 한 달간의 자동차 랠리에서 1920년대 전설적인 올드카에 캔버스를 부착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 오대양을 운항하는 배에 캔버스를 설치하자는 선박회사 오너도 있다. 점점 재미있어지고 있다.” &lt;br&gt;&lt;b&gt;-앞으로의 진행은. 
&lt;/b&gt;&lt;br&gt;“전체 1/3은 완성된 것 같다. 올 상반기 중에는 히말라야, 아프리카 지역에 4곳과 폴란드 아우슈비츠 수용소, 파리, 
스칸디나비아 반도 등에 설치하고자 한다. 하반기에는 안데스 산맥, 예루살렘, 팔레스타인의 정치분쟁 지역에 설치하고 싶다. 기회가 되면 북한에도 
설치할 것이다. 사실 어려운 지역만 남아 있는 셈이다. 앞으로도 계속 더 세워나갈 것이고, 자리 잡으면 전세계 모든 도시마다 하나씩 설치해서 
모든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 우주 셔틀에도 설치하고 싶다. 그리고 중간에 미술관 전시도 기획 중이다. &lt;br&gt;인달라를 했을 때도 
‘앞으로 무슨 작업을 더 이어갈 수 있겠느냐’고 걱정하는 사람이 많았다. ‘드로잉 오브 네이처’ 다음엔 무엇을 할지 또 궁금해들 한다. 그러나 
나는 걱정이 없다. 나는 여전히 백정의 미학 속에 있다. 현재에 몰입하고, 언젠가 이 프로젝트가 해체되면 자연스럽게 나는 다른 공간에 가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이치를 알고 있다.” &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김아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김아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인달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인달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백정의 미학&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백정의 미학&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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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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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CDATA[tag:blog.daum.net,2013:kmedichi.188]]></id>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author>
		    <updated><![CDATA[2013-01-22T11:50:51Z]]></updated>
		    <published><![CDATA[2013-01-22T11:50:5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h3 class=&quot;aTit&quot;&gt;기둥 볼록하게 만든 게정말 착시현상 때문일까&lt;/h3&gt;&lt;p&gt;
&lt;/p&gt;&lt;h4 class=&quot;aTit2&quot;&gt;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amp;lt;43&amp;gt;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lt;/h4&gt;&lt;p&gt;
&lt;/p&gt;&lt;div class=&quot;aWriter&quot;&gt;&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lt;/span&gt; 제304호 &lt;span style=&quot;color: rgb(102, 102, 102);&quot;&gt;| &lt;/span&gt;20130104 입력 &lt;span id=&quot;reporteraa&quot;&gt;&lt;/span&gt;&lt;iframe height=&quot;0&quot; marginHeight=&quot;0&quot; src=&quot;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quot; frameBorder=&quot;0&quot; width=&quot;0&quot; marginWidth=&quot;0&quot; scrolling=&quot;no&quot;&gt;
&lt;/iframe&gt;&lt;/div&gt;&lt;p&gt;
&lt;/p&gt;&lt;div style=&quot;line-height: 23px; font-size: 16px;&quot; id=&quot;articleBody&quot; class=&quot;aBody&quot;&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1/04185629.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1 부석사 무량수전의 추녀와 앙곡. 2 무량수전의 포작. 3 배흘림기둥과 이를 받치는 주초.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시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운전대를 잡았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내리 달린 덕분에 
아침보다 먼저 부석사 무량수전에 도착했다. 여전히 어둡고 기온은 영하 17도. 그 옛날 의상 대사에겐 불심이 있었고, 지금 나에겐 무거운 다운 
점퍼가 있다. 산속 추위에 볼은 터져나갈 것 같고 이유 없는 눈물마저 흐른다. 겨우 도착한 법당 안에도 온기는 없다. 삼배를 올리고 앉아 
아미타불을 바라본다. 춥다. 너무 춥다. 그런 추위에도 이곳을 찾은 이유는 너무 궁금했기 때문이다. 다 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효형출판사) 
때문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이야기를 어디 한두 번 들었던가. 최순우의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 김봉렬의 『김봉렬의 한국건축 이야기』 
등등. 그런데 서현이 말하는 무량수전은 좀 달랐다. 도대체 누구 말이 맞는 걸까? 엄동설한에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독대를 하게 된 이유다.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float: right;&quot; border=&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cellPadding=&quot;0&quot; width=&quot;1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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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padding: 9px; border: 1px solid rgb(204, 204, 204);&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3/01/04185834.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현대건축가 
입장에서 뒤집어보기&lt;/b&gt;&lt;br&gt;서현의 『배흘림기둥의 고백』은 『사라진 건축의 그림자』라는 제목으로 처음 세상에 나왔다가, 수정을 거쳐서 
대중서적으로 다시 발간됐다. 새 제목은 ‘고백’이라는 도발적인 단어를 품고 있다. 누구의 ‘고백’인가? 배흘림기둥 자신이다. 거기에 기대어 
감동한 사람들이 아니다. 책의 태도를 구호로 정리하면 이렇다. 구라 금지! 감상 금지! &lt;br&gt;“배경의 산세와 조화를 이루는 우아한 용마루와 
처마 곡선”을 “백자의 허리, 흰 버선코”에 비유하는 기존의 설명은 “메시지 없는 수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백자와 버선은 아무리 잘못 만들어도 
사람의 목숨을 위협하지 않지만 “건물은 잘못 만들면 붕괴”해버리는 위험한 작업이다. 아름다움은 “생존을 위협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서 얻게 된 
우아한 결과물”일 뿐이지 집을 짓는 목수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을 거라는 말이다. &lt;br&gt;전통 건축사가의 입장이 아니라 현대건축가인 저자는 
기꺼이 목수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는 ‘최적화’와 ‘양식화’라는 두 개념으로 전통건축의 발달사를 추적해 나간다. 숲 속의 나무가 
건물이 되기 위해서 가장 적합한 형태로 진화하는 최적화 과정을 거치고 나면 하나의 형식이 완성된다. 완성된 형식이 “이유가 생략된 채 형태가 
반복되어 전승하는” 과정이 양식화다. &lt;br&gt;저자가 주로 주목하는 것은 ‘최적화’ 과정이다. 양식화 과정을 겪으면서도 건물에 남아 있는 여러 
‘흔적기관’들에 대한 분석은 이런 진화론적 추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유물로 남아 있지 않은 진화의 과정을 추론하는 것은 “합리적 상상력, 
선입견 없는 관찰의 경험”인데, 그 기초가 되는 것은 나무라는 재료에 대한 이해다. 민가의 단출한 구조는 대략 열 번 찍어 넘어간 목재의 굵기와 
크기에 적응한 형식이지만 사찰이나 궁전처럼 큰 건물을 짓기 위해서는 이 제한된 재료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술이 창안되어야 한다. 여기서부터 그의 
논의가 본격화된다. &lt;br&gt;건물의 기본은 기둥과 지붕이다. 집안에 빗물이 새어서도 안 되고 밖에 노출된 나무 기둥이 빗물에 썩어서도 안 된다. 
이게 지붕의 진화 방향을 결정짓는 기본이다. 빗물로부터 기둥을 보호하기 위해서 처마는 길어졌고, 햇빛이 드는 날에는 기둥이 빨리 건조될 수 
있도록 그 끝은 들어올려 졌다. “흰 버선코” 같이 살짝 들어 올려진 우아한 처마 곡선은 이를 위해 최적화된 형태들이다. 더 긴 처마가 달린 
지붕에 대한 요구는 지붕을 이고 있는 기둥과 기둥들을 연결하는 보(대들보)의 진화 방향을 결정했다. &lt;br&gt;마침내 고려시대에 “전통 건축사를 
통틀어 최고의 발명”이라고 부를 만한 ‘포작’이 등장했다. 포작으로 기둥과 보는 보다 “합리적으로” 연결됐다. 무량수전의 길고 아름다운 처마선은 
이런 포작의 탄생으로 가능했다. 부석사의 무량수전과 안동의 봉정사 극락전은 하나의 기둥 위에 하나의 포작을 얹는 초기 주심포 양식의 대표적 
건물이다. 이후에는 여러 포작들을 일렬로 배치한 다포식 건물들이 등장하게 된다. 화려한 외관을 자랑하는 다포식 건물은 결국 건물의 생존을 위한 
부단한 진화의 결과였다. &lt;br&gt;장식 없는 포작 아래 가운데 부분이 임산부처럼 볼록한 배흘림기둥이 나란히 서 있다. 그 모양에 관해 교과서는 
“기둥 중간 부분이 가늘어 보이는 착시 현상을 보정하기” 위한 장치라고 설명한다. 이에 반기를 들고 저자가 찾은 답은 주초다. 배흘림기둥은 
조그만 동그라미 모양의 석재 주초 위에 올라서 있다. 기둥의 밑변이 작으면 작은 석재로도 충분하다. 건축을 지배하는 원리는 미의식이 이전에 
합리적인 경제원리였다. &lt;br&gt;&lt;br&gt;&lt;b&gt;건물 생존을 위한 진화의 결과물&lt;/b&gt;&lt;br&gt;문풍지가 희뿌염해지면서 동이 튼다. 법당 문을 나서서 
처마 끝과 기둥 위의 포작의 모양을 유심히 본다. 주춧돌의 둥그런 생김새도 챙겨서 본다. 각 부분의 최적화가 빚어내는 밸런스가 최고다. 
배흘림기둥에 기대어 본다. 첩첩이 쌓인 소백산 산줄기가 여명 속에서 깨어나고 있다.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 안목”에 감탄하던 최순우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lt;br&gt;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일출의 붉은 기가 동쪽 안산 위에 어려 있다. 무량수전과 안양루는 남향인 앞 건물군들과 달리 동쪽으로 30도 
틀어져 있고, 그 안의 아미타불은 완전히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해 앉아 있다. 김봉렬은 이렇게 설명한다. 삼국통일 직후, 나누어졌던 세 나라의 
백성들을 하나로 묶을 새로운 사회사상이 필요하던 시기에 “통일과 융합을 원리로 삼는 화엄사상을 수입함으로써 종교지도자로서뿐 아니라 새로운 
정치세력의 강렬한 자문역”을 하던 의상 대사의 철학이 반영되어 있다고. 양식화 과정에 대한 역사적 설명 및 건물의 역사적 유래가 ‘고백’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lt;br&gt;부석사의 실물을 보고나니 전통건축 전공자가 아닌 내 눈에는 모두 다 맞는 말들처럼 들렸다. 최순우에게서는 아름다움을 
느끼는 법을, 김봉렬에게서는 건축물에 깃든 철학적인 사유를 읽어내는 법을, 서현에게서는 건물의 구조를 보는 법을 배웠다. 일주문을 내려가는 길이 
이제 훤하다. &lt;br&gt;“제시된 대안보다 더 만족스러운 방식이 있을지 모른다고 의심하는 누군가 때문에 세상은 조용할 새가 없다”는 서현의 말은 
자신에게도 해당이 되는 것 같다. 세상은 그래서 움직이고, 살아 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것일 게다. &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서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무량수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무량수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영주 부석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영주 부석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배흘림 기둥&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배흘림 기둥&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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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호크니, 다시 그림이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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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CDATA[이진숙]]></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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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CDATA[2012-12-09T13:14:07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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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P&gt;
&lt;H3 class=aTit&gt;‘눈의 오르가슴’느끼게 한 풍경화의 비밀&lt;/H3&gt;
&lt;H4 class=aTit2&gt;이진숙의 ART BOOK 깊이 읽기 &amp;lt;42&amp;gt; 『호크니, 다시 그림이다』&lt;/H4&gt;
&lt;DIV class=aWriter&gt;이진숙&lt;SPAN style=&quot;COLOR: #666&quot;&gt; |&lt;/SPAN&gt; 제300호 &lt;SPAN style=&quot;COLOR: #666&quot;&gt;| &lt;/SPAN&gt;20121208 입력 &lt;SPAN id=reporteraa&gt;&lt;/SPAN&gt;&lt;IFRAME height=0 marginHeight=0 src=&quot;http://sunday.joins.com/article/findReporterIDnew.asp?reporter=/Article/@reporter&quot; frameBorder=0 width=0 marginWidth=0 scrolling=no&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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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BORDER-BOTTOM: #cccccc 1px solid; BORDER-LEFT: #cccccc 1px solid; PADDING-BOTTOM: 9px; PADDING-LEFT: 9px; PADDING-RIGHT: 9px; BORDER-TOP: #cccccc 1px solid; BORDER-RIGHT: #cccccc 1px solid; PADDING-TOP: 9px&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2/12/08222214.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1.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을 작업 중인 호크니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2009년 10월 런던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 50여 개의 캔버스를 이어 붙인 12m가 넘는 데이비드 호크니의 거대한 풍경화 ‘와터 부근의 큰 나무들(Bigger Trees Near Warter)’ 시리즈를 삼면에서 관람객이 둘러쌌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했던지 “호크니 속에 내가 있다”며 그 자리에서 한국으로 문자를 보내고 호들갑을 떨었다. 좋았으나 당시에는 이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었다. 내가 본 것은 단순히 ‘큰 풍경화’가 아니었던 것이다. ‘눈의 오르가슴’을 느끼게 한 이 멋진 풍경화의 비밀을 알게 된 것은 최근 발간된 호크니와의 대담집 『다시, 그림이다』(디자인 하우스, 2012)를 읽고 나서다. &lt;BR&gt;&lt;BR&gt;이 책은 2006년부터 블룸버그 뉴스의 수석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호크니와 나눈 대화를 쓴 책이다. 연대기가 아니라 주제별로 단락을 정리하고 두 미술 전문가가 나눈 실제 대화에서는 포함되지 않았을 친절한 주석이 포함돼 있는, 대담집과 평론집의 중간 단계에 있는 글이다. 책은 화가 호크니에 대한 이해를 도울 뿐만 아니라 21세기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호모 픽토르(HOMO PICTOR, 그림 그리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해준다. 20세기 중반부터 다양한 종류의 미디어 아트가 등장해 미술계의 우세종을 형성하고 있다. 디지털 혁명으로 이 경향이 더욱 가속화되고 있는 지금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은 존재한다. 왜 여전히 회화는 우리 곁에 있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 이 책은 흥미로운 답을 준다.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gt;
&lt;TBODY&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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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BORDER-BOTTOM: #cccccc 1px solid; BORDER-LEFT: #cccccc 1px solid; PADDING-BOTTOM: 9px; PADDING-LEFT: 9px; PADDING-RIGHT: 9px; BORDER-TOP: #cccccc 1px solid; BORDER-RIGHT: #cccccc 1px solid; PADDING-TOP: 9px&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2/12/08223021.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2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을 보고 있는 호크니와 친구들.2007년 여름 로얄 아카데미 전시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lt;/B&gt;&lt;BR&gt;2012년 런던 로열 아카데미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연 호크니(75)는 생존하는 세계 최고의 화가 중 한 명이다. 오랜 미국 생활을 접고 지금 영국 북부의 시골 마을 브리들링턴에서 프랑스인 애인과 함께 살고 있다. 30대 중반 이후 LA의 밝은 햇빛 아래서 살다가 30여 년 만의 귀향, 그리고 정착이다. 이곳에서 그는 다시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에 매혹됐고, 이것은 최근 작품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더 열심히 자연을 관찰한다. ‘오랫동안 바라보기, 그리고 열심히 바라보기’는 호크니의 삶과 예술의 핵심적인 행위다. 우리도 많은 자연·사물·인물을 보고 느끼고, 그 감동을 기록하고자 한다. 애잔하게 지는 저녁 노을, 여린 들꽃송이를 향해 열심히 셔터를 누르는 것은 매우 본능적인 행동이다. 나의 체험이 투사된 나만의 이미지를 원하기 때문이다. 미술은 이렇게 인간의 눈이 본 그대로를 담아내고자 하는 욕망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그렇게 “본 것을 선과 점, 색 얼룩, 붓 자국 등의 흔적으로 옮기는 것”의 매력이 바로 화가들, 호모 픽토르들이 계속 존재하게 하는 이유고, 또 우리가 그림을 사랑하는 이유다. &lt;BR&gt;&lt;BR&gt;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100&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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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BORDER-BOTTOM: #cccccc 1px solid; BORDER-LEFT: #cccccc 1px solid; PADDING-BOTTOM: 9px; PADDING-LEFT: 9px; PADDING-RIGHT: 9px; BORDER-TOP: #cccccc 1px solid; BORDER-RIGHT: #cccccc 1px solid; PADDING-TOP: 9px&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2/12/08223052.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3 와터 근처의 더 큰 나무들을 작업 중인 호크니 &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한때는 사진이 세상의 모습을 가장 완벽하게 담아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호크니는 인간은 카메라처럼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본다고 말한다. 또 사진을 찍을 때보다 그림을 그릴 때, 사물과 자연을 더 많이 바라보고 이해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회화는 나이 든 사람의 예술’이라는 속담을 즐겨 인용한다. 순간의 시각을 담아내는 사진과 달리 회화는 삶의 경험,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까지 담아낼 수 있다는 뜻이다. “참신한 생각과 계속되는 관찰을 통해 이전의 것들을 조정”해 나가는 과정에서는 새로움에 대한 열린 감각만큼이나 원숙한 나이와 경험도 중요하다. 그래서 화가에겐 정년이 없다. &lt;BR&gt;&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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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BORDER-BOTTOM: #cccccc 1px solid; BORDER-LEFT: #cccccc 1px solid; PADDING-BOTTOM: 9px; PADDING-LEFT: 9px; PADDING-RIGHT: 9px; BORDER-TOP: #cccccc 1px solid; BORDER-RIGHT: #cccccc 1px solid; PADDING-TOP: 9px&quot;&gt;&lt;IMG src=&quot;http://sunday.joins.com/_data/photo/2012/12/08223133.jpg&quot;&gt; &lt;SPAN class=&quot;px11 h16 gray02&quot;&gt;&lt;/SPAN&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세계를 복제하지 말고 해석하라&lt;/B&gt;&lt;BR&gt;로열 아카데미에서 서양화를 배웠던 서양화가 호크니는 다양한 작품을 시도하면서 동양화의 원리인 “눈이 마음의 일부”라는 것을 자연스레 이해하게 되었다. 서구의 선원근법은 인간의 눈의 법칙이 아니라 렌즈 사용에 근거한 광학의 법칙일 뿐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호크니는 1970년대 후반부터 사진 콜라주 작업을 하면서 “서구의 원근법이 제거”된 이미지를 만들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중국 미술에 눈을 뜨게 된다. 서양의 풍경화에서 보는 사람은 늘 그림의 틀 밖에서 그림을 응시하는 구조에 머물러 있다. 호크니는 동양 회화를 통해 인간이 보고 느낀 실제 세계를 체험과 함께 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동양 회화에 등장하는 와유(臥遊)의 개념이 그를 매료시킨 것이다. 풍경을 바깥에서 구경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그곳에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고 싶었기에 그의 그림은 아주 커졌다. &lt;BR&gt;&lt;BR&gt;그래서 2009년 테이트 브리튼 미술관에서 나를 열광시킨 건 호크니의 기적이었다. 물론 이 작품은 우리가 아는 동양 회화가 아니다. 다만 서양미술사를 500여 년 넘게 지배해 온 프레임을 또 다른 방향에서 해체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로운 것이다. 예술에는 늘 정답이 없다. 서양 사람인 호크니가 동양 회화에서 얻은 것을 자기식으로 잘 풀어냈다면 그것 역시 또 하나의 미술사적인 성공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라는 호크니의 말은 우리에게 화가들이 계속 필요한 이유일 터다. 12월, 앙상한 겨울 나무들뿐이지만 지난해와는 또 다르게 느껴지는 것은 호크니가 그린 겨울 나무들 덕분이기도 하다. 나뭇잎으로 몸체를 가린 뚱뚱한 여름 나무들의 풍성함이 아니라 섬세한 줄기들을 그대로 드러낸 겨울 나무들의 잔잔한 아름다움. 박수근을 통해, 또 호크니를 통해 발견한 세상의 아름다움이다.&lt;BR&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풍경화&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풍경화&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원근법&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원근법&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데이비드 호크니&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데이비드 호크니&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VCLb&amp;tagName=로얄 아카데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로얄 아카데미&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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