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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대림 제1주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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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서공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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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3T16:12:37Z</updated>
	    <published>2009-11-23T16:12:3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대림 제1주일&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2009년 11월 29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루가 21, 25-28. 34-36.&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겨울의 문턱에서 우리는 대림(待臨)시기를 맞이합니다. 오늘은 그 첫 주일입니다. 교회 전례의 새 주기(週期)를 시작하는 날입니다. 낮의 길이도 많이 짧아졌고, 대자연도 푸른 생명의 빛을 잃어 가면서 죽음의 겨울을 맞이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전례의 새 주년(週年)을 시작하면서 우리도 우리의 삶에 종말이 있다는 사실을 다시 기억하고 삶의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발생시킨 이야기입니다. 해와 달과 별 등 천체가 흔들리고, 사람들은 불안과 공포에 떨며, 기절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볼 것’이라고도 말하였습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구약성서의 유대교 묵시문학의 표현들(하깨 2,6; 요엘 4,16; 집회 16,18; 다니 7,13-14 참조)을 빌려서 세상의 종말에 대해 상상하였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가 말한 종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취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친숙한 그 문서들을 이용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창조와 세상 종말에 대한 구약과 신약성서의 이야기들은 인류의 기원(起源)이나 역사의 종말에 대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 아닙니다. 창조가 어떤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는지, 또 세상 종말에 어떤 현상이 일어날 것인지를 알려 주는 이야기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것들은 그것을 기록한 공동체가 하느님, 혹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또 세상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믿고 있던 바를 구약성서의 언어를 빌려 표현하여 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런 이야기들 안에서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세상 종말과 삶에 대한 그들의 믿음입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알아들어야 하는 것은 우리 삶의 최종적 가치 기준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실 것이라고 말한 다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세상의 일에 얽매이지 말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삶 안에 영접하라는 말입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면, 그분이 하신 자비와 사랑의 실천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이어서 복음은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은 방탕하거나 만취하는 일이 없고, 일상의 근심에 얽매여 허송세월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일들을 삶 안에서 만난다는 것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은 자기 한 사람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삶 안에 숨겨진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사셨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이었습니다. 인간의 자유는 ‘먹고 마시는’ 일을 위해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려면, 우리가 얻은 이 세상의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느님은 높으신 분, 우리가 그분의 법을 잘 지키고 그분에게 잘 바쳐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잘 먹고 잘 살며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우리의 편견입니다. 과거 세상에는 높은 사람들이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의 법을 지키고, 그들에게 바쳐서, 그들로부터 혜택을 받아 잘 살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하느님에게 연장 적용하여 하느님을 상상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 세상의 관행에서 발생한 편견입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이라 고백한 것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참으로 알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사람들에게 율법과 제물봉헌을 강요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구약성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종살이에서 해방시키셨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람이 자유롭게 살 것을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서 그 최후를 마친 것은 유대교 지도자들이 율법과 성전의례를 강요하면서 가르친 하느님을 거부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율법과 성전의례에 예속되어 비굴하게 살 것을 요구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여 그분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으셨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 안에 나타난 하느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그것을 영접하여 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소외시킨 이들과 어울리셨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병자와 장애인은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았다고 가르쳤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고쳐주어, 하느님이 벌하시기 위해 그런 불행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분입니다. 아버지는 연민으로 자녀들을 대하고 그들과 함께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녀를 버리거나 그들에게 보복하지 않습니다. 그 시대 유대교 지도자들이 믿던 하느님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에 대해 자기들과 달리 믿고 있는 예수님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제거하였습니다.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구축하는 세상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민은 우리의 마음 안에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합니다. 연민은 강자에게 어울리지 않고, 또 연민이 우리 안에서 발동하면 우리가 손해를 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이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살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목숨까지 바치며 실천하신 그 연민을 우리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한 해가 또 가고 있습니다. 열 두 장이었던 달력의 남은 한 장이 우리의 아쉬움을 대변합니다. 우리의 삶에 이웃을 향한 연민의 순간들은 많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계셨던 순간들이 많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땅에 굴러다니는 낙엽을 밟으면서 생각합니다. ‘먹고 마시는 일과 쓸데없는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겨서’ 살다가 낙엽으로 지는 인생이 되지는 말아야 하겠습니다. 대림절은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시도록, 오늘 복음이 말하듯이,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고...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절입니다. 세월도 가고 우리도 갑니다. 하느님의 연민이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그것이 우리의 몸짓으로 나타나도록 예수님을 바라보며 대림시기를 시작합시다. ◆&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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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title>그리스도 왕 대축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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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9-11-16T16:41:26Z</updated>
	    <published>2009-11-16T16:41:2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왕 대축일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 2009년 11월 22일&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요한 18, 33-37&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을 심문한 내용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 ‘당신이 유대인들의 임금이오?’ 하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이 유대인들이 당신을 고발한 죄명이라고 지적하십니다. 빌라도는 유대아를 통치하는 로마제국의 총독입니다. 그는 유대인들의 종교 문제에는 흥미가 전혀 없습니다. 그는 오로지 유대아를 무사히 통치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고발하는 유대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의 시선을 끌기 위해 그분을 로마 통치에 저항하는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제국의 통치에 반발하는 식민지 주민들을 처형하는 수단이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처형한 후 십자가 위에 ‘유대인의 왕 예수’라는 죄목을 써 붙였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빌라도의 법정에서 정치범으로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로마법에는 식민지에서 사형 언도와 집행은 총독의 권한에 속하는 일이었습니다. 따라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제거하는 데는 빌라도의 동의와 협조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들은 동족인 예수님을 없애기 위해 그들이 증오하던 총독에게 그를 정치범으로 만들어 고발하였습니다. 그분을 죽이기 위한 편법이었습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고 빌라도에게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당신의 부하들이 당신을 위해 싸워주지 않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의 왕국에서는 부하들이 싸우고, 빼앗고, 점령하여 왕을 옹립하고 보호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향하는 나라는 그렇게 싸우고 빼앗고 점령하여 권력자를 옹립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진리를 증언하려고 이 세상에 왔으며, 진리에 속한 사람은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진리가 이 세상에 나타났고, 예수님은 그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들의 나라를 통치하는 왕이라는 말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는 먼저 왕이라는 단어를 이해해야 합니다. 일본과 영국을 비롯한 몇몇 나라에 아직도 왕이 있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왕이 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그 단어를 잘못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세상에 왕은 인류 역사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그리스도 왕 축일은 사라져가는 그런 왕으로 그리스도를 기억하자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 시대 유대인들에게 왕은 메시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백성에게 먹을 것을 주고, 이스라엘을 강대국으로 만들어 “땅 끝에서 땅 끝까지”(시편 2,8) 다스리게 해주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초기 교회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은 그분의 십자가 죽음 이후입니다. 우리가 살아야 하는 진리를 보여주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은 오늘 빌라도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러 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가 무엇인지 복음서에 물어 보아야 합니다. 요한복음서 8장에는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러 하고,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그 여인을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당신을 단죄하지 않습니다.”(8,11).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8,40)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해준다(8,32)고도 말씀하십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이 증언하신 하느님의 진리는 사람을 용서하고 살리는 데에 있습니다. 권력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짓밟는 일과, 미움으로 사람을 버리고 죽이는 일은 하느님의 일이 아니라, 인간 안에 자리 잡은 동물적 지배욕과 미움을 배설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는 용서하고 살리는 일이었습니다. 용서하고 살리는 것이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자유라는 말씀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을 메시아 혹은 왕이라고 고백하는 신앙인은 예수님이 증언하신 진리를 실천합니다. 예수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을 읽어내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생명이 하는 일이 우리를 위한 진리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십니다. 우리가 배워서 실천해야 하는 진리입니다. ‘내 나라는 이 세상 것이 아니다.’는 예수님의 오늘 말씀은 그분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나라는 힘으로 혹은 권력으로 군림하고, 판단하고, 억압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진리를 배우는 신앙인이 따라야 하는 왕이십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주일 미사에 빠지지 않고, 고해성사에도 한 번씩 참여한다고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남부럽지 않게 살고, 주변 사람들이 괜찮은 사람이라고 알아주니까 나는 괜찮은 사람이라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 괜찮은 사람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진리와는 아무 관계없는, 이 세상의 괜찮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남이 보아서 괜찮고, 내가 보아서 훌륭하면,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증언하신 진리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있어야 합니다. 용서하고 살리시는 하느님이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은 인간의 죄에 대해 보복하고, 인간이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친 그만큼 하느님은 용서하고 구원하신다고 유대교는 가르쳤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이 그들에게 큰 권한을 주셨다고 주장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율법의 이름으로 죄인을 만들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장애인, 병든 이, 가난한 이, 실패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이 버린 죄인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가르침을 비판하셨습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는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 진리를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하들을 희생시키며, 자기는 명예롭게 군림하는 이 세상의 높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 스스로를 내어 주고 쏟아서, 인류 역사 안에 ‘내어 주고 쏟는’ 삶의 진리를 발생시켰습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나라의 일을 배우는 사람에게 왕입니다. 그 나라에는 인과응보가 아니라 우리의 헌신과 봉사로써 실천되는 자유를 근본 질서로 하고 있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그리스도 왕 축일은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진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그 진리는 지배와 억압이라는 이 세상의 악순환에서 우리를 해방시키고, 하느님의 참다운 자유를 살게 해 줍니다. ‘내어 주고 쏟으신’ 예수님을 성찬에서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면서 하느님의 자유를 삽니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으로 나타낸 하느님 나라의 진리라는 것을 압니다. ◆&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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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중 제33주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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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9-11-09T16:40:21Z</updated>
	    <published>2009-11-09T16:40:2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중33주일&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2009년 11월 15일&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르 13, 24-32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 전례의 1년 주기는 12월초, 대림 첫 주일에 시작하여 11월 말, 그리스도 왕 축일로 끝납니다. 전례주년이 끝나는 시기의 미사에서 우리는 복음서가 전하는 세상 종말 이야기들을 듣습니다. 신약성서를 기록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그들이 세상 종말에 대해 생각할 때는 당연히 유대교 묵시문학의 언어를 상기하였습니다. 묵시문학은 기원 전 2세기에 유대인들이 세상의 종말을 상상하며 남긴 문헌들입니다.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그 문헌들에 익숙하였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세상의 종말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을 때, 그들은 그 문헌들의 언어를 빌려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이 세상 종말에 큰 재난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묵시문학에서 가져온 내용입니다. 성전의 파괴, 전쟁과 반란, 기근, 전염병, 하늘의 징조, 박해 등이 모두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언급된 주제들입니다. 하느님의 미래가 온다는 사실을 말하는 언어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은 죽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느님의 일을 봅니다. 신앙은 세상의 미래에 대해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도 세상 종말의 ‘시와 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마르 13,32). 기원 후 66년, 유대인들은 로마를 거슬려 전쟁을 일으켰고, 그 전쟁은 70년, 유대아의 완전 패배로 끝나면서 수도 예루살렘은 말할 것도 없고 성전까지 처참하게 파괴되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박해를 받던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은 이스라엘의 패전과 예루살렘 및 성전의 파괴를 겪으면서 그것이 세상의 종말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하느님이 주시는 새로운 미래를 보자고 말합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는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고자 합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미래를 위해 저축하고, 건강한 미래를 위해 운동하며, 건강식품과 보약을 먹습니다. 사람들로부터 대우받는 미래를 얻기 위해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합니다. 사람은 모두 자기의 지혜와 노력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합니다.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우리는 슬기로운 사람,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은 하느님의 미래를 살자는 운동입니다.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만이 참다운 우리의 미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힘으로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신양명(立身揚名)하여 재물과 권력을 얻어 당신의 미래를 보장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죽음 앞에서도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라고 기도하면서, 하느님이 원하시는 미래가 당신 안에 이루어질 것을 빌었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은 우리에게 초능력을 주기 위해 계시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열려라 참깨!’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의 불행을 퇴치하고 인간생명을 소중히 생각하는 우리의 실천 안에 살아 계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하느님의 일만 실천하며 살았던 생명이 겪는 종말이었습니다. 자기의 지상적 미래를 보장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사람을 이 세상은 오래 살려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하셨다는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의 참다운 미래는 하느님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의 일만이 세상과 시간을 넘어 존속할 것입니다. 푸르던 대자연에 아름다운 단풍이 들더니 어느덧 낙엽 되어 떨어지고, 이제 우리의 발에 밟힙니다. 우리의 삶도 늘 푸르지만 않습니다. 단풍도 들고 낙엽으로 떨어지기도 합니다. 소중하다고 생각하였던 우리의 자존심, 명예, 지위, 재물도 우리의 미래를 보장하지 못하는 잠시의 푸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알지만, 그런 것에서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삽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자리 잡으신 그만큼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 자신을 지키고, 우리를 명예롭게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최대 과업과 보람일 수는 없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셔서 비로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조금 더 선한 시선과 몸짓, 조금 더 관대하고 자비롭고, 사람을 살리는 몸짓이 자유로운 인간의 모습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는 하느님을 볼 수도 없고, 하느님에 대해 논할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관찰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가 관찰 하고 논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변한 우리의 삶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가르치신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날 때,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나만을 위해 사는 나의 나라에 하느님은 계시지 않습니다. 내가 구상하고 내가 실현하는, 나의 미래만이 내 인생의 최대 보람이라면,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는 나에게 오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계획하고 실현하는 나의 미래를 보며 축복이나 하고 계시라고 하느님에게 요구할 수는 없습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가 만드는 우리의 미래를 안전하게 보장하는 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우리의 미래를 우리의 힘으로 보장하겠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느님이 주시는 하느님의 미래를 찾아 나서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나 한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고, 나 한 사람을 치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삶에는 예행연습이 없습니다. 한 번 주어진 삶입니다. 한 번 하는 모험입니다. 남녀가 만나서 부부가 되는 것도,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도 모두 예행연습이 없는 모험입니다. 인간이 하는 소중한 일들은 모두 이렇게 연습도 없이, 준비된 대사도 없이, 보장도 없이 감행해야 하는 모험들입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자기 자신만을 소중히 생각하며, 자신만을 위해 살면, 반드시 실패하는 모험입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사는 일도 하나의 모험, 하느님과 함께 하는 모험입니다. 예수님이 살아서, 또 죽음을 앞두고 이미 하신 모험입니다. 그리고 부활은 그 모험의 결말이 어떤 것인지를 말해 줍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이 주실 미래를 택하는 사람은 하느님이 현재 자기 안에 살아 계시게 합니다. 하느님의 현재를 사는 사람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시선으로 자기 주변을 봅니다. 그리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이 하실 선한 일을 실천합니다. 신앙인은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 질 것’을 빌며, 이루어야 할 것이 우리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이신 하느님의 뜻이기에 우리에게는 어려움, 곧 십자가가 있다는 사실도 압니다. 그것이 자녀인 우리가 하느님의 자유를 사는 길이고, 또한 하느님의 미래를 우리 안에 영접하는 길이기도 합니다. ◆&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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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중 제32주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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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9-11-02T16:32:29Z</updated>
	    <published>2009-11-02T16:32:2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중 제32주일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 2009년 11월 8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르 12, 38-44.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율사와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을 대조해 보입니다. 율사는 거짓 신앙인의 표본이고 과부는 참 신앙인의 귀감입니다. 율사는 남과 다른 복장을 하고,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모임에서는 윗자리를 차지합니다. 그들은 과부, 곧 약자들의 가산을 등쳐먹고,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길게 기도합니다. 한 마디로 율사는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자기 재물을 늘리는 그 시대의 기득권자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주목하신 가난한 과부는 렙톤 두 닢, 곧 그 시대 통용되던 화폐의 최소 단위 동전 두 닢을 헌금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저 가난한 과부가...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많이 넣었다...궁핍한 가운데에서 가진 것을, 곧 생활비를 모두 넣었다.’ 그 시대 과부는 노동력을 지닌 남편이 없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열악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과부는 하느님을 생각하며 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습니다. 그가 믿는 하느님은 관대하시기에 자기도 관대하게 행동하였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율사는 하느님을 찾고, 하느님에 대해 가르치는 사람이지만, 실제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가 대우받아야 하고, 자기가 많이 가져야 합니다. 율사는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기 위해 행동합니다. 입으로는 하느님을 말하지만, 그 마음은 인간의 욕망을 넘어서지 못하였습니다. 오늘의 과부는 받을 존경도, 가진 재물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경지를 넘었습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고 관대하신 분이라, 자기 스스로도 은혜롭게 또 관대하게 처신하였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은 계시고, 우리의 생애가 끝나면, 우리의 삶에 대해 그분과 정산을 하게 되리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느님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전부라면, 하느님은 현재 우리의 삶에는 계시지 않습니다. 그 하느님은 우리가 죽어, 저승에 가서나 만날 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재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나라를 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히브리서는 “현재 보이지 않는 분을 보고 있는 듯이”(11,27) 사는 것이 신앙이라고 설명합니다. 하느님은 보이지 않으시지만, 우리 삶의 원천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생명을 배워 실천하며 그분의 자녀 되어 삽니다. 그분은 자비롭고 사랑하시는 분이시기에, 그 자비와 사랑을 우리가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생명의 원천으로 또 우리 생존의 원리로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가진 것을 모두 헌금함에 넣었다는 오늘 과부에 대한 이야기를 교회에 헌금 많이 바치라는 뜻으로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유대교 회당의 헌금수입에 관심을 갖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유대교 당국이 성전이나 회당에서 헌금을 강요하는 것을 비판하셨습니다. 사람은 재물을 모아서 자기 힘으로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며 삽니다. 현대인은 그것을 위해 저축도 하고 보험에도 가입합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칭찬하신 것은 자기가 가진 돈으로 자기 미래를 보장하려 들지 않고, 하느님을 생각하며 자기 손안에 있는 것마저 선뜻 내어놓는 관대한 그 여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관대한 마음에 하느님의 일을 보았습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인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자기의 생계를 위해 노력하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로 사도는 서간에서 이렇게 권고합니다. “제 할 일을 하는 것 그리고 제 손으로 일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시오.”(1데살 4,10-11). “누구든지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마시오.”(2데살 3,10). 하느님을 믿는다고, 자기할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 대한 경고입니다. 신앙인은 생활인으로 자기가 할 일을 당연히 다 합니다. 신앙인은 자기가 처한 여건에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또 자기와 이웃의 생활 여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신앙인은 하느님만 생각하고 자기 할 일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더 나은 세상과 더 나은 생활 여건을 위한 우리의 노력은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느님이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창조하셨다.”(1,27)고 말합니다. 인간은 자기의 창의력을 살려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일하도록 창조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그런 노력은 인류와 이웃을 위한 사랑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우리의 욕망에만 집착하면, 자신을 벗어나지 못하는 소인(小人)이 됩니다. 대의(大義)를 살려 일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에게 도움이 되게 노력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비난하시는 율사는 자기만 생각하는 소인입니다. 그는 하느님과 인류를 보지 못하고 자기가 누리는 것에만 골몰합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돈과 명예가 나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런 것에 대한 인간의 집착은 자유를 잃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런 집착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자유를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실천하는 자유입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한 여인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율법의 이름으로 그 여인을 돌로 치려하는 유대인들의 무자비한 손아귀에서 그 여인을 구출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32). 이웃을 살리고 돕는 마음에 진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이 참다운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을 삶의 원천으로 삼아 그분의 진리를 배우겠다는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사랑하십니다. 그것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비와 사랑을 사셨습니다. 병든 이를 고쳐주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면서, 예수님은 사람을 살리는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셨습니다. 그 실천 때문에 그분은 그 시대 종교 기득권자들로부터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에 예수님은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습니다. 그 여인의 작은 실천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읽으셨습니다. 그 여인은 베푸시는 하느님을 자기의 대의로 삼아 그분의 관대하심을 실천하였습니다. 하느님이 관대하셔서 예수님도 관대하게 행동하셨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을 빙자하여 사람들로부터 대우받고 치부하며 사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가르친다면서 인간이 행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소인배들이 꿈꾸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을 찾고 배우는 사람은 그런 소인배가 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자유로운 마음 안에 그 자유의 원천으로 살아 계십니다. ◆&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모든 성인 대축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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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kosesye.16847373</id>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9-10-26T16:58:41Z</updated>
	    <published>2009-10-26T16:58:4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모든 성인 대축일&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 2009년 11월 1일.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태 5, 1-12.&amp;nbsp; 1요한 3, 1-3.&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은 역사 안에 이름도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나가신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성인에 대한 공경은 예수님 시대 유대교에도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 밖의 키드론 골짜기에 예언자들의 무덤이 단장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율사와 바리사이들을 비난하면서 “너희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소를 꾸미면서”(마태 23,29)라고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성인이라고 기억한 분들은 먼저 박해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순교를 하지 않았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신뢰를 간직하고 죽어간 모든 이들도 성인으로 불렀습니다. 신앙인들은 그들의 무덤에 꽃과 향료를 가져가 고인을 기리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은 4세기 말 안티오키아 교회의 달력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때도 날자는 11월 1일입니다. 그렇게 보면 오늘의 축일은 4세기부터 기념해온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늘과 같이 성인으로 선포하는 복잡한 시복(諡福)과 시성(諡聖)의 절차가 생긴 것은 1917년 교회법전을 편찬하면서 된 일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축일에 우리는 하느님을 희망하며 이 세상을 살다 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합니다. 세상은 그들을 기억에서 지워버렸지만, 그들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시고, 또 우리의 가슴 안에 살아계십니다. 이 축일을 11월 2일 ‘위령의 날’과 분리한 것은 12세기에 된 것입니다. 12세기에 연옥에 관한 교리가 보급되면서 천당에 간 성인과 연옥에 간 영혼을 별도로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탈리아 시인 단테가 지옥, 연옥, 천국에 대해 상상한 시(詩)들을 신곡(神曲)이라는 책으로 남긴 것도 14세기 초였습니다. 우리는 오늘과 내일 이틀 동안 우리 곁을 떠나가신 모든 분들을 기억하며 기도할 것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가 기억할 분들은 우리를 사랑하셨고 또 우리도 사랑하였던 분들입니다. 우리와 함께 인생의 행로(行路)를 가다가 침묵의 세계로 사라져 가신 분들입니다. 그분들은 현재 침묵으로 일관하고 계십니다. 그분들의 침묵은 그분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느님도 침묵하며 계십니다. 그분들은 하느님 안에 살아계십니다. 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한계 없는 사랑 안에 살아계십니다. 루가복음서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십니다. 실상 하느님께는 모두가 살아 있습니다.”(20,38).&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우리는 복음으로 마태오복음서가 전하는 행복선언을 들었습니다.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의로움에 굶주려서 스스로를 희생시키면서 정의를 찾는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이런 사람 모두를 복음서는 행복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이 세상의 통념에서는 모두 불행해야 하는 이들입니다. 자기 한 사람의 행복을 최대의 목표로 삼지 않은 이들입니다. 그들은 더 큰 가치를 위해 어려움을 감수한 이들입니다. 그들이 행복하다고 복음서가 선언하는 것은 그들은 하느님의 세계를 향해 근본적 선택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를 지배하는 통념들이 있습니다. ‘재물과 사회적 지위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고, 권력을 가진 사람이 대우를 받는다.’ ‘남에게 준만큼은 받아내어야 하고, 받은 만큼 주어야 한다.’ ‘사람은 잘못한 만큼 벌을 받아야 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은 나도 당연히 미워한다.’ ‘성공하면 칭찬을 받지만 실패하면 수모를 받는다.’ ‘승리는 자랑스럽고 패배는 부끄럽다.’ 이런 것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통념들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은 하느님을 향해 가는 사람이 어떤 가치를 좇아 살아야 하는 지를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욕심내는 것보다 더 소중한 것이 감춰져 있는 인생이라고 예수님은 믿으셨습니다. 하느님은 베풀고 사랑하고 용서하시는 분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제2독서에서 요한사도는 말합니다.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랑을 주시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리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까닭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 신앙인을 외면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행보가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말입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행보에는 갈등도 있고 불편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찾아 나선 사람들과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자유롭게 당신에게로 나올 것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은 자유를 지닌 인간으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느님의 모상대로 만드셨다는 창세기의 말씀이 의미하는 바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압도하면서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 곁을 떠나가신 분들이 침묵 가운데 계시듯이, 하느님도 계시지 않는 듯이 침묵 가운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하며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의 일, 곧 그분의 사랑과 용서와 보살핌을 실천할 때, 그분은 우리 안에 확인됩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해결사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울부짖기도 하고 절망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미숙한 인간으로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런 고뇌를 넘어 그분의 사랑과 용서와 섬김을 실천하면서, 우리는 인간의 삶이 주는 희열과 감동을 맛보기도 합니다. 우리와 함께 살다 먼저 가신 분들이 가난해도, 슬퍼도, 의로움을 찾고 자비를 실천하며 사셨듯이, 우리도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행보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더불어 참으로 자유롭고 성숙한 인생을 만들어 나가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을 아버지라 부릅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나 자신을 위한 욕심에서 한발 물러서서 우리의 삶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베풀어서 꾸며주시는 삶입니다. 은혜로운 우리의 삶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누리는 것을 그분과 더불어 쳐다봅시다. 하느님이 베푸신 우리의 생존이고 우리 주변의 고마운 분들입니다. 십자가도 분명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그 십자가를 가난, 슬픔, 목마름 등으로 표현하면서 그런 것이 있어도 행복하다고 선언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십자가로 기진하면서도 아버지의 뜻이 이루질 것을 비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와 더불어 살다 가신, 사랑하는 분들을 오늘 기억하면서, 그분들도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사셨지만, 은혜로운 하느님 안에서 그들은 지금 행복하시다는 사실을 우리는 고백합니다. ◆&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연중 제30주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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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kosesye.16847372</id>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9-10-19T16:12:15Z</updated>
	    <published>2009-10-19T16:12:1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중 30주일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 2009년 10월 25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르 10, 46-52&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리고에서 소경 한 사람을 눈뜨게 하신 이야기입니다. 복음서들이 기적 이야기들을 하는 것은 우리도 기적을 찾아 나서라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신앙인들이 기적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복음서에 기록으로 남긴 것은 그들이 예수님 안에 놀라운 은혜로움을 체험하였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면서 그 회상을 이야기로 만들어 기록하였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예리고에서 소경 한 사람을 고치신 이야기를 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그 이야기 안에 예수님이 그들에게 어떤 분이며, 어떤 실천이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인지를 담았습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우리가 존경하던 분이 세상을 떠나면, 우리는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일을 회상합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억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분이 남긴 말씀과 하신 일에 감동하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그분의 정신을 이어서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다짐을 합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 회상하는 것은 부모나 선생님에 대해 우리가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제자들은 그분이 살아 계실 때 하신 말씀과 행위들이 하느님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고 깨달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하느님의 생명으로 사는 하느님의 자녀 되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은 초기 신앙인들이 믿던 바와 그들이 하던 실천을 기록하면서 그것을 읽는 독자도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살라고 권합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이야기의 주인공, 바르티메오라는 눈먼 걸인은 예수님이 지나가신다는 것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이라는 말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부르던 호칭입니다.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라는 걸인의 말은 초기 신앙인들이 바치던 기도이기도 합니다. 루가복음서는 “바리사이와 세리가 성전에서 기도한”(18,9-14) 이야기를 하면서 바리사이는 기도에서 자기가 지키고 바친 일들을 나열하였지만, 세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빌었다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는 세리의 기도가 참된 것이었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끝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에게 자비를 비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유대인들은 율법 준수가 하느님 앞에 인간이 할 일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의 자비가 자기 안에 흘러들도록 기도합니다. 오늘 복음은 말합니다.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모르고, 자비를 비는 그리스도인들을 꾸짖지만,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자비를 큰 소리로 외친다는 것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소경에게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 너의 간청이 간절하기에 고쳐 준다는 말이 아닙니다. ‘너의 믿음이 너를 구하였다.’는 말은 예수님이 자주 사용하신 표현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하느님이 자비롭고, 고치고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는 데에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잘 바쳐서 하느님의 축복을 얻어 잘 사는 데에 신앙이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자비롭고, 고치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이 자기 안에 일하시게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가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게 한다는 말입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는 우리의 삶에 장애가 생겼을 때, 그것을 치워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운동 경기에서 이기게 해 주고, 수험생을 입학시켜 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돌을 빵으로 바꾸어주고, 높은 데서 뛰어내려도 다치지 않는 초능력을 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인간이면 모두가 겪는 한계를 넘어서게 해주는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우리는 내세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하느님을 기대합니다. 결국 우리가 기대하는 것은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 주고, 미래를 위한 불안을 해소해 주는 하느님입니다. 인류역사가 끊임없이 상상한 하느님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이 가르치신 신앙은 하느님께 빌어서 우리의 염원을 이루는 길이 아닙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셔서 그분의 일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게 하는 신앙입니다. 하느님은 현세에도, 내세에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자기 한 사람만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 한 사람만이 소중한 나머지 하느님이 함께 계셔서 우리 앞에 열리는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소경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넓은 세상을 봅니다. 예수님이 하신 말씀과 실천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알아듣고 배워서, 하느님으로 열리는 넓은 세상에서 그 자비를 실천하며 살겠다는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입니다. 오늘 복음 이야기의 소경은 예수님에게 자비를 간청하였더니 시력을 회복하였습니다. 그 자비를 바탕으로 넓은 새로운 삶의 지평이 그 앞에 열렸다는 말입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자비의 눈으로 주변을 보고 행동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비는 하느님의 것입니다. 자비롭지 못한 인간입니다. 오늘의 소경은 사람들의 제지에도 불구하고 큰 소리로 자비를 외쳤습니다. 우리에게도 제지하는 목소리는 많이 있습니다. 우리 안에서, 혹은 우리 밖에서 들립니다. “자비는 소용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따끔한 본&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을 보여 주어야 한다.” “자비를 실천하면 손해만 본다.” 우리가 자비롭지 못하도록 단속하는 소리들입니다. 신앙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을 믿는 데에 있습니다. 그 자비가 우리 안에 흘러들어서 우리도 하느님의 은혜로우심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 인간은 모든 이에게 또 언제나 자비로울 수 없습니다. 자비의 지평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신 자비가 우리 안에 살아 움직이면,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우리의 지평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비는 우리에게 힘든 일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의 주인공 소경과 같이 많은 저항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야 합니다. 그 자비를 부르고 외치면서 ‘너의 믿음이 너를 살렸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우리도 듣게 될 것입니다. ◆&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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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중 제29주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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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9-10-12T15:56:49Z</updated>
	    <published>2009-10-12T15:56:4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중 제29주일&amp;nbsp;&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 2009년 10월 18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르 10,35-45&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인간의 가치관과 하느님의 가치관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줍니다. 예수의 제자 중 두 사람이 그들의 소원을 예수님에게 말씀드립니다, 복음서는 그 제자들이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예수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 곧 메시아로 이 세상에 나타나서 통치하실 때,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 편에, 또 하나는 왼편에 앉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영광스런 메시아의 나라에서 두 형제가 모두 높은 자리에 앉아 세도를 부리게 해달라는 청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은 당신이 마실 잔을 제자들도 마시고, 당신이 받을 세례를 제자들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잔을 마신다, 혹은 세례를 받는다는 말은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진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의 통치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세도를 부리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는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는 말씀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자 두 사람이 예수님에게 청한 것은 예수님이 왕으로 군림하고, 자기들은 예수님 덕으로 입신양명(立身揚名)하여, 사람들을 다스리고 세도 부리는 특권을 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염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십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입신출세 하는 길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녀로서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실천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가치관에서 으뜸 되는 것은 종과 같이 사람들을 섬기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은 더 설명하십니다. 첫째가 되는 길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 섬김을 실천하는 것이며, 예수님 자신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기 전날,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시면서 유언으로 성찬을 남기셨습니다. 그 성찬의 중심을 이루는 말씀은 “너희를 위해 내어주는 몸.” “너희를 위해 쏟는 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요약하는 말씀입니다. 스스로를 내어주고 쏟아서 섬기신 삶이었습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흔히 우리는 하느님을 믿어서 그분으로부터 축복을 받아 나 한 사람 혹은 내 가족이 잘되도록 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옛날 정화수를 떠놓고 소원성취를 빌던 그 마음을 연장하여 그리스도 신앙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두 제자가 예수님에게 청한 것도 그런 맥락 안에서 된 일입니다. 우리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그리스도 신앙이라면, 하느님은 우리의 민원(民願)을 해결해 주는 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그분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비는 것은 다른 의도가 있어 하는 일입니다. 그 호칭에는 얄팍한 이해타산이 숨겨져 있습니다. 하느님을 그렇게 불러서 기쁘게 해드리고, 우리가 원하는 것을 이루겠다는 것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은 당신의 죽음을 앞두고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하실 수 있사오니,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하느님의 호감을 얻어 자기의 소원을 이루려는 수작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생존이 위협받는 순간에도 하느님의 가치관을 따라 살겠다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내어주고, 피를 쏟아서 죽기까지 하면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셨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는 나 한 사람을 대단히 소중히 생각하며 삽니다. 그것이 이 세상에서 현명하게 사는 길이라고 배웠습니다. 내가 입신양명해야 하고, 내가 부귀영화를 누려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목적에 손상을 주는 일은 피하고, 우리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 하며 삽니다. 우리는 이웃을 위해 하는 것도 대부분 어떤 대가를 얻기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삽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기초로 교회 안에 봉사직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봉사직무는 교계제도의 틀 안에 있습니다. 봉사직무가 교계제도라는 신분계급으로 포장된 것은 교회가 로마제국과 중세 봉건사회를 거치면서 그 사회에서 얻은 유산입니다. 로마제국과 봉건 사회는 철저한 신분 사회였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낮은 사람들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녔습니다. 신분이 높은 사람이 그 사회를 위해 더 많이 기여를 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리스도 교회는 그런 사회에서 섬김을 위한 봉사직무들을 만들면서 교계제도라는 신분서열을 그 시대 사회에서 배워 채용하였습니다. 섬김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한 그 시대의 선택이었습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신분 서열이 없습니다. 인간의 실효성도 신분과 비례하지 않습니다. 오늘과 같이 평등한 사회에서는 인간 각자가 하는 실천이 중요합니다. 신분이 무엇이냐를 묻지 않고, 각자가 하는 실천을 보는 세상입니다. 이런 현대 세계에서 신분 서열화 된 현재의 교계제도는 섬김을 은폐합니다. 그것은 서품(敍品)으로 신분 상승이 있다고 사람들을 착각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메시아로 군림하지도 않았는데, 메시아의 오른 편과 왼편에 앉아서 세도를 부리겠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을 만듭니다. 신분의 차이를 강조하는 집단은 오늘의 세상에서 실효성을 상실합니다. 오늘 인간의 효율성은 신분에서 나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사람을 존중하고 겸손하게 남의 말을 듣고 솔직히 토의하는 사람이 실효성을 지닙니다. 로마제국도 사라지고 중세봉건사회도 없어졌습니다. 섬김을 위한 봉사직무라면, 섬김이 돋보이게 재편(再編)되어야 합니다. 섬김이라는 하느님 아버지의 가치관과 그분의 뜻이 실현되도록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의 주변에는 베풂과 섬김이 많이 있습니다. 어떤 시인은 이렇게 노래하였습니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 한 송이의 국화꽃도 우연한 것이 아니라, 섬김이 있어 피었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생존을 위해 많은 베풂과 섬김의 손길들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그 안에 하느님의 일하심을 보고 자기도 그 섬김에 합류합니다. ◆&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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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연중 제28주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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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9-10-05T10:14:41Z</updated>
	    <published>2009-10-05T10:14:4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연중 제28주일&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3pt; COLOR: #000000; LINE-HEIGHT: 26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 2009년 10월 11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르 10, 17-30.&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복음서는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에 대해 기억하는 것과 그 기억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믿고 실천하던 것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이야기들은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이,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후, 그분에 대해 회상하면서 사람들과 함께 나눈 이야기들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의 기억과 믿음과 실천입니다. 그것들은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새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서를 읽는 것은 그 이야기들 안에서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믿고 실천한 바를 알아듣고, 우리도 우리 삶의 여건에서 올바로 믿고 실천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기 위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처한 여건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의 것과 다르기에 우리는 그들의 믿음과 실천을 반복만 할 수는 없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가죽부대에 담듯이” 시대가 다르면 신앙인의 믿음과 삶의 방식도 달라야 합니다. 신앙과 관련된 것만은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할 수는 없습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부자 청년과 예수님이 나눈 대화를 먼저 소개합니다. 예수님에게 접근한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 청년은 유대인으로서 어려서부터 율법을 잘 지켜왔다고 말씀드립니다. 예수님은 ‘그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는 예수님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시대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한 선택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따르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장래가 촉망되던 바리사이파 율사로 활동하다가 그리스도 신앙으로 전향한 바울로 사도는 후에 필립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회상합니다. “내 주님이신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고귀한 인식 때문에...모든 것을 잃었으며 쓰레기로 여겼습니다.”(3,8).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그 청년이 부자였다는 사실을 들어서 재물이 신앙에 큰 장애가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고 예수님을 따르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하신 명령이 아닙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다.’는 오늘의 복음에서 베드로가 할 고백을 예고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오늘의 청년과 같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사람도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과 같이 모든 것을 희생하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도 있었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복음서들 안에 재물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은 많이 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말씀의 씨가 뿌려져도 “재물의 유혹과...욕심이 밀고 들어오면 말씀이 숨이 막혀 열매를 맺지 못한다.”(4,19)고 말합니다. 마태오복음서는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6,24)고 말합니다. 재물에 대한 우리의 애착은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하는 경지로 우리를 쉽게 몰고 갑니다. 진지한 모든 종교가 어느 수준의 무소유(無所有)를 권장합니다. 재물이 발산하는 현란한 빛은 인간을 쉽게 무분별하게 만듭니다. 가진 것이 적으면 사람이 돋보이는데, 많은 것, 특히 값비싼 명품으로 스스로를 치장한 사람들은 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기도 합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이에게 가진 것 모두를 버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부자는 ‘바늘귀를 빠져나가지 못하는’ 낙타와 같이 구원 받을 수 없고, 어느 수준 이하의 재물을 가진 사람은 구원 받는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가졌거나 가지지 않았거나, 재물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복음은 권합니다. 자유로운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쉽게 나누어 줍니다. 가진 것을 나누는 데에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로 사도는 필립비인들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어떤 처지에서도 자족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궁핍하게 살줄도 알고 풍족하게 살줄도 압니다.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하거나 어떤 일,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비결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에게 힘을 주시는 분을 통해 나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습니다”(4,11-13).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자유를 누린다는 말씀입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우리도 우리에게 힘을 주는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물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재물이 나에게 힘을 주는지, 혹은 바울로의 말씀과 같이 하느님이 힘을 주시는지 물어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은 하느님을 택한다고 약속한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때때로 하느님 앞에 눈감고 앉아서 반성해 보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이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동기가 되도록 삶의 궤도를 수정합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의 복음에서 우리를 움직이는 하느님이 어떤 분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청년은 예수님에게 ‘선하신 스승님’이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즉시 그 말을 고치십니다.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하느냐?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다.’ 예수님은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의식하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이 선하십니다. 우리 안에도 선한 것이 보이고, 선하기 위한 우리의 노력이 있다면,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하느님이십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재물을 많이 가진 자들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는 참으로 어렵다.’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이 놀랐다고 복음서는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제자들이 서로 묻습니다. 예수님이 대답하십니다.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것이 예수님이 믿고 계신 하느님이고, 당신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아라,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말하는 길거리 선교사들이 알리는 하느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과 사람이 하는 일의 차이는 여기에 있습니다. 선하신 하느님은 선한 일을 하십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우리는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말도 선하지 않게 합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복음은 율법을 충실히 지키면서 재물과 명예를 얻기 위해 살기보다는 많은 것을 버리고 잃는 아픔을 겪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되라고 권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그분이 보여주신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목마른 사람에게 마실 것을 주고, 병든 이를 찾아보는 선한 실천입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의 좋은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여러분의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시오.”(마태 5,16).라는 예수님의 분부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선한 실천을 한다는 말씀입니다.◆&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그리스도 신앙언어 발생의 문화적 배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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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kosesye.11621950</id>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7-07-25T17:29:01Z</updated>
	    <published>2007-07-25T17:29:01Z</published>
	    <content type="html">
	    	&amp;nbsp;&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9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9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언어 발생의 문화적 배경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믿음과 해석 제3장&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들어가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대인은 모두 신(神)이 없는 듯이 살고 있다. 신앙인이든 비 신앙인이든 현대인은 신이 없는 듯이 산다. 근대 과학기술 및 산업 사회를 거치면서 신에 대한 언어의 필요성은 사라졌다. 과거에는 신이라는 단어가 명백한 의미를 지니고 인간의 삶 안에 살아있었다. 신은 삶의 종말에 대면해야 할 존재, 선하게 살 것을 요구하는 존재 등,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이 많은 단어였다. 그러나 오늘은 지극히 제한된 종교 영역에서만 사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과거에는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면 신의 문제가 자동적으로 제기되었고, 신에 대해 이야기하면 인간의 문제가 또한 제기되었다. 그러나 현대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과거 사회에서 신은 우주와 인간의 최종 원리와 목적으로 자명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현대 사회 안에서 신은 우리의 사고(思考)와 언어 안에 자리를 잃었다. 이제 인간만이 인간사고의 유일한 참조 사항이 되었다. 인간은 자기가 만든 제품들의 홍수 안에 살면서 오로지 인간만을 보게 되었다. 병고와 천재지변 등 과거에는 신의 조화로 생각되었던 것들이 속속 과학적 정복의 대상이 되었다. 오늘 현대인은 자연 과학에 의해서 성립된 새로운 정신적 상황에서 살고 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의 문제는 과거 사회에서도 자명한 것은 아니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神學大全)에서 신 존재 증명을 위한 다섯 가지 길을 소개하기 전에 “이 세상에 악(惡)이 있는 것은 신이 없다는 사실을 의미한다.”(I,q2,art.3,1)는 신 존재에 대한 그 시대의 반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신의 문제는 인간이 진지하게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하면 만날 수 있는 문제였다. 따라서 신에 대한 이야기는 인간의 삶과 결부된 실제적인 것이었다. 인간은 불의(不義), 증오, 폭력 등을 체험하면서 그런 것이 세상의 마지막 말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도 삶의 의미를 묻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신의 문제를 외면하지 못한다. 성공, 행복, 사랑은 베풀어졌다는 체험을 일으킨다. 무상성(無償性)에 대한 체험이다. 새로 태어난 생명 앞에서 혹은 사랑하는 사람을 발견하였을 때, 인간은 그것이 베풀어졌다는 무상성을 체험한다. 인간은 그런 체험 앞에서 그것이 자기 자신만이 원인이 되어 주어졌다고 느끼지 않는다. 이 느낌은 대단히 인간적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인간은 무의미를 극복하려 노력한다. 무의미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있었기에 인간은 배우고, 창의력을 동원하여 일하고, 사랑하였다. 그런 노력들 안에서 인류역사는 존속하고 발전하였다. 인간은 자기 삶 안에 거듭되는 부정적 체험에도 불구하고 새로 출발하는 용기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거듭되는 좌절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지니고 산다. 우리는 인간 안에 나타나는 그런 긍정과 희망 안에 세계와 인류 전체를 포괄하는 어떤 근원, 어떤 무상성을 체험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무상으로 베푸신 하느님을 말한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 실존에 내재(內在)하는 근원인 신에 대해 사람들이 체험하게 한다. 인간은 무상성 안에서 태어나고 그 안에서 산다. 인간은 주어진 자기 생명에 대해 자기 스스로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 신앙언어는 이 사실을 인간으로 하여금 제대로 감지하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 무상성과 연결하여 인간의 사랑 및 자기 개방에 대해서도 생각하도록 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여기서 우리는 과거 신앙언어가 발생한 문화권의 사고방식을 생각해 본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체험이 신앙언어를 발생시키는 과정에 개입한 문화적 ‘인식의 망’을 보려는 것이다. 각 문화에는 인류 안에 흐르고 있는 긍정과 희망 그리고 무상성에 대한 체험을 언어화하는 고유한 방식이 있다. 그 방식 안에서 수용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체험들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발생한 문화적 배경을 봄으로써 그것이 신앙언어에 미친 영향을 우리가 보게 될 것이다. 로마제국과 유럽 중세봉건사회를 구분하여 신앙언어 발생의 문화적 배경을 간단히 살펴본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 로마제국&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티나의 유대교 문화권 안에서 발생하였다. 신앙은 급속도로 전파되었다. 유대교 당국과 로마제국의 박해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신앙은 3세기 중반에는 이미 지중해 연안을 석권하였다. 그리스 문화, 특히 그리스의 철학을 수용한 로마제국내의 지식인들이었다. 2세기부터는 그들이 신앙인이 되어 그리스도 신학의 언어들을 발생시켰다. 로마의 유스티누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를 비롯하여 3-4세기에 신앙언어를 발생시킨 교부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거나, 적어도 그 시대 문화인으로서 그리스 철학적 사고를 하던 분들이다. 따라서 그들이 발생시킨 신앙언어는 플라톤의 우주관이 중심이 된 그리스 철학적인 것이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관념론(觀念論)&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 철학은 이원론적(二元論的) 관념론이다. 보이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세계 앞에서 보이지 않는 영원한 관념의 세계를 긍정하는 사고이다. 현세적인 것은 물질적이며 변하고 썩어 없어질 것인 반면, 관념의 세계는 불변하며 영원한 것이라고 전제한 사고방식이다. 보이는 물질보다는 보이지 않는 관념을 더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이원론이다. 이 세상의 사물들 안에는 인식의 대상인 관념들이 있다. 관념은 연원한 관념의 세계에 속한다. 여기에 대입된 영혼과 육신에 대한 신앙언어이다. 인간의 육신이 변하고 썩어 없어질 운명인 반면, 영혼은 영원하며 관념의 세계, 곧 하느님의 세계로 회기(回歸)하기를 원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관념의 세계, 곧 하느님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가게 하는 문화적 배경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세기 어느 무명 교부가 남긴 편지는 다음과 같이 영혼과 육신이라는 이원론을 빌려서 이 세상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설명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9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영혼이 육신 안에 있듯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세상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세상의 모든 도시에 흩어져 살고 있듯이, 영혼도 육신의 모든 부분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 세상 안에 있으면서 세상에 속하지 않듯이 영혼도 육신 안에 있으면서 육신에 속하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영혼이 보이는 육신 안에 갇혀 있듯이, 그리스도 신앙인이 세상 안에 사는 것을 볼 수는 있으나 그들이 하느님께 바치는 예배는 보이지 않습니다. 육신이 자기를 해하지 않는 영혼을 미워하고 싸움을 거는 것은 영혼이 육신의 쾌락 추구에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아무런 해를 주지 않는 그리스도 신앙인들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이 쾌락을 추구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이 자기를 미워하는 육신과 그 지체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 신앙인이 자기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것과 같습니다. 영혼이 육신 안에 갇혀 있으면서 육신을 살려 주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도 세상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세상에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불사불멸의 영혼이 죽을 운명의 천막(天幕)안에 살고 있듯이, 그리스도 신앙인들 역시 하늘나라의 불멸의 운명을 기다리면서 썩어 없어질 세상 안에 살고 있습니다. 영혼이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극기(克己)하여 진보하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 신앙인은 박해를 당할 때 계속해서 증가합니다. 하느님이 그들에게 주신 지위는 그렇게 고매한 것이기에 그들은 그것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디오그네토스에게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장)&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사회체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정치 사회 구조도 이 관념론의 틀을 유지한다. 쉽게 볼 수 없는 황제를 정점으로 사회는 조직되어 있다. 황제의 권한은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고, 그 권한은 제국의 어느 곳에든 다 미친다. 보이지 않는 황제의 뜻은 쉽게 보이는 신하들에 의해서 백성들에게 전달된다. 제국 안의 실효성 있는 모든 일은 황제를 정점으로 한 수직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순종은 열등한 아래 사람이 우월한 윗사람으로부터 은혜를 입어 자기의 효율성을 격상시키고 보장하는 수단이었다. 통치자의 수직적 베풂의 혜택 안에 있는 인간이고 그 베풂에 대한 보답으로 통치자가 정한 법을 지키고 세금을 바쳐야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0px 0px 17px; COLOR: #000000; TEXT-INDENT: -17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size=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과거의 모든 개국신화(開國神話)들이 국가와 민족의 기원이 신 안에 있다고 말한다. 단군(檀君)신화도 단군의 아버지 환웅(桓雄)의 기원이 하늘에 있음을 말한다. 신을 정점으로 한 수직적 사고의 산물이다. 황제 혹은 왕의 대관식들이 신전(神殿) 혹은 후에는 성당에서 거행되는 이유도 수직적 정통성을 긍정하고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lt;/SPAN&gt; &lt;/FONT&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중재자인 예수 그리스도&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초기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이런 사고방식을 요람으로 발생하였다. 하느님을 황제 위에 군림하는 분으로 생각하면, 하느님은 대자연과 이 세상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위이며 무상성이다. 하느님의 섭리는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인간의 운명이 하느님 안에 있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하느님은 초월적 존재이기에 세상과 인류를 위한 중재자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예수 그리스도를 인류와 세상을 위한 중재자로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분이 주신 계명은 지켜야 한다. 이런 수직적 사고에는 인간 예수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에 대한 진지한 역사적 고찰은 필요 없었다.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이고 그분이 하신 기적 특히 부활은 그분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수직적으로 입증하는 것으로 충분하였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수난의 고통을 겪은 것이다. 성은(聖恩)이 망극한 일이다. 그리스도 신앙은 그런 은혜로우신 하느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전달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데에 있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구원의 혜택을 주는 교회&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구원의 공동체이다. 황제를 중심으로 한 로마 제국이고, 그 문명은 제국의 주변에 산재(散在)하던 야만족들의 것에 비하여 월등하게 우세하였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상에서 대리하는 로마의 주교인 교황을 중심으로 교계제도적으로 조직된 단체이다. 로마의 신민(臣民)이 황제와 그 대리자에게 순종하면서 로마제국 안에 살아서 그 문명의 혜택을 받듯이, 신앙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 대리자들인 교황, 주교들과 신부들에게 순종하며 교회 안에 살아서 구원이라는 혜택을 받는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것은 그분을 파견한 하느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구원의 신비인 성사들&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사(聖事)들은 예수가 세워서 교회의 교계제도에 맡긴 신비스런 구원의 수단이다. 보이는 물질 안에 보이지 않는 관념이 존재하듯이, 보이는 의례(儀禮)를 통해서 보이지 않는 은총이 전달된다. 인간은 신앙을 고백하고 물로 씻는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지위를 얻으며, 빵과 포도주가 변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는 성체성사로 하느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와 신비롭게 일치하여 구원을 보장받는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나의 진리에 하나의 교회&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사물들 안에 있는 관념이 그 사물의 진리이고, 하나의 사물 안에 하나의 관념이 있다. 인간 사회, 곧 로마제국을 지배하는 권력도 하나이다. 하느님도 한 분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도 하나이다. 따라서 그리스도 신앙 외의 모든 종교는 미신(迷信)에 불과하다. 교부들은 그리스도 신앙 외의 모든 종교와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 신앙이 나타나기까지 준비하는 과정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리스도 신앙만이 유일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중세 봉건사회로 넘어가는 단계에서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격언은 당연한 진리였다. 따라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미신인 타종교는 박멸의 대상이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 유럽중세 봉건(封建)사회&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봉건사회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5세기말부터 로마제국 주변에 있던 게르만족이라 불리는 많은 부족들이 라인 강과 다뉴브 강을 넘어 제국내로 대거 이주(移住)하여 정착(定着)하게 되었다. 서양사가 게르만족의 이동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그들의 이주와 정착으로 말미암아 로마제국의 통치조직은 그 실효성을 잃고 대단히 혼란스런 유럽 사회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8세기부터 유럽은 봉건사회라는 새로운 정치 질서 안에 정착하여 안정을 되찾는다. 그리고 10세기에는 유럽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경제적 발전도 이룬다. 그러면서 유럽 전역에 대성당들이 건립되기 시작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유럽 중세 봉건사회는 영주(領主)들을 중심으로 소규모의 제국주의 체제를 지속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로마제국과 비교하여 근본적 사고방식의 변화는 없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가 중심인 사회&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세기 말부터 로마제국의 국교였던 그리스도 교회는 게르만족의 이동, 정착 및 봉건사회라는 새로운 체제의 출현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따라서 유럽 중세 봉건사회는 그리스도 신앙을 근본으로 하고 있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사회를 피라미드 두 개가 겹쳐진 사회라고 표현할 수 있다. 황제가 정점에 있는 피라미드 하나가 있고, 로마 교황이 중심에 있는 피라미드 조직인 교회가 있다. 각 지방에는 영주들이 있고 주교들이 있다. 한 동네에도 그 동네를 지배하는 성주(城主)가 있고 주민의 영적 상황을 장악한 본당 신부가 있다. 민생은 영주 혹은 성주와 관련되어 있고, 출생, 결혼, 죽음은 본당 신부가 관장한 부분이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스콜라 신학의 발생&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봉건 사회가 정착한 후, 신학은 플라톤의 철학 체계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체계로 옮겨갔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수용하여 신학대전(神學大全)을 집필하였다. 그 철학은 광활한 관념 세계를 긍정하는 플라톤의 사상과는 달리, 각 사물에 내재(內在)하는 실체(實體) 혹은 형상(形相)을 논한다. 인간 감각의 대상인 사물의 우연(偶然)이 그 사물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연이란 그 사물의 질(質), 양(量), 위치(位置), 시간(時間), 상태(狀態) 등을 의미한다. 모든 사물에는 우리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순수 인식의 원리인 실체(實體)가 있고 그것이 그 사물의 정체성이다. 플라톤의 관념이 각 사물 안에 있는 실체로 표현되었다고 하겠다. 사물은 그 실체인 형상(形相)과 물질인 질료(質料)로 구성되어 있고, 그 사물의 정체성(正體性)은 보이지 않는 원리인 실체 혹은 형상에 있다. 감각의 대상이 아니고 인식의 원리를 그 사물의 실체라고 보았다는 점에서 또 우열이 있는 이원론이라는 점에서는 플라톤의 철학과 다르지 않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사(聖事)에 대한 이해&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시기에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어는 교부 시대의 것을 계승하였다. 그러나 성사론은 사람을 변화시켜 영적 세계로 나가게 하는 신비라는 교부시대의 관점을 넘어, 각 성사 안에서 형상과 질료를 찾아 성사의 유효성을 설명하려 하였다. 이 유효성에 대한 집착은 정확한 의례(儀禮) 준수와 성사의 실효성에 대한 기적적 상상만 하게 만들었다. 성사로 말미암아 인간의 삶 안에 일어나야 하는 변화는 소홀히 취급되었다. 인간의 삶 자체는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는 시대였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를 들어, 성체성사에 있어서 실체적 변화만 강조하였지, 예수의 몸과 피라는 언어의 상징성(象徵性)을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빵은 축성되면서 그 질료(質料)는 그대로 있어도 형상(形相)이 예수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는 축성되면서 그 형상이 예수의 피로 변한다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축성된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은 예수의 살과 피를 참으로 먹고 마신다는 사실에 시선을 집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살과 피의 상징성으로 말미암은 우리 삶의 변화는 소홀히 되었다. 유대인들에게 살은 인간관계,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단어들이 지닌 상징성을 살린다면, 성체성사는 우리 안에 예수의 삶과 생명을 실현시키는 실천을 촉구하는 성사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형상의 변화를 의미하는 성사의 유효성에 시선을 집중시킨 그 시대 신앙언어는 인간의 삶 안에 일어나는 변화라는 성사의 상징성을 희석하고 말았다. 보이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시대였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고해성사는 고백(질료)과 사죄(형상)라는 형식 충족만을 강조하였다. 그런 강조는 성사의 사효성(事效性, ex opere operato)이라는 표현으로 발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징표들을 충실히 수행하면 성사는 유효하며, 보이지 않는 초자연적 은총은 보장된다고 믿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는 모든 신자들은 1년에 한 번 본당 신부에게 고해할 것을 의무로 정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수도생활&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세기 후반 이집트의 사막에서 발생한 은수생활에 기원을 둔 수도생활은 유럽중세 봉건 사회에서 꽃을 피웠다. 게르만족이 대거 이주하여 발생한 유럽중세 사회는 난폭하고 무식하였다. 그런 사회 안에 인간적이고 문화적인 것은 오로지 수도원 안에서만 볼 수 있었다. 평민 출신으로 수도자가 된다는 것은 신분의 상승이었고 또한 문맹을 벗어난다는 것을 뜻하였다.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수도자들은 성서와 전례서들을 필사(筆寫)하여 보급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초대교회 교부들의 문헌이 발굴 보존된 것도 그들의 공헌이 있었기 때문이다. 수도원을 중심으로 문화적 삶과 영성 생활이 있었고, 교육과 의료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존속하고 발전하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여기에도 이원론적 양자택일의 논리가 작용하였다. 플라톤에 있어서 관상(觀想)은 관념의 세계를 보고 그 진리에 입각하여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럽 중세 사회에서 관상은 사랑의 실천과 대립되는 정(靜)적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신은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고 남을 움직이는 자’이다.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움직이지 않는 것보다 하위에 있다고 생각되는 시기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수도자들은 세속을 버리고 하느님을 택한 이들이다. 움직이고 변하는 세속을 외면하고, 변하지도 움직이지도 않는 하느님을 관상하면 할수록, 수도자로서의 성취는 큰 것으로 생각되었다. 이런 감수성을 배경으로 시작된 소위 봉쇄수도회에 대한 높은 평가였다. 봉쇄수도자들은 움직이지 않는 하느님을 관상하기 위해 세상을 외면하고 좁은 봉쇄 구역 안에서 일생을 보낸다. 이 봉쇄 규정은 여성 수도자들을 위해 특히 엄격하였다. 봉쇄수도생활은 영성적이고 문화적인 것을 수도원 밖에서는 기대할 것이 전혀 없던 유럽 중세사회의 산물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나오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언어는 로마제국과 유럽중세 봉건사회의 문화를 배경으로 발생하였다. 수직적 사고가 지배하던 시대였다. 하느님의 무상성은 플라톤의 철학이 말하는 지고(至高)하신 제1원인이라는 개념으로 표현되었다. 제1원인인 하느님이 베풀어서 모든 피조물이 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철저하게 수직적 질서를 존중한 로마제국이고 유럽중세 봉건사회였다. 그런 문화권에서 발생한 신앙언어이기에 하느님을 정점으로 수직적 사고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그 시대 신분 서열은 인간의 실효성을 말하는 서열이었다. 상위자의 뜻에 순종하는 것은 몽매한 하위자의 실효성을 제고(提高)하는 일이었다. 상위자는 하위자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졌기에 하느님의 뜻은 상위자를 통하여 전달된다는 것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사회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런 단순하고 수직적인 문화를 배경으로 발생한 순종을 오늘과 같은 복합적이고 횡적인 문화권에서도 강요하면 현대인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적 순종은 하느님에게 하는 것이지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니다. 상위에 있는 인간에게 순종할 것을 요구하면 인간의 실효성을 떨어트리는 순종이라는 점에서 현대인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실효성 없는 사람이 실효성을 지닌 사람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비극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오늘과 같은 복합 사회에서는 상위자가 정보를 독점하고 있지도 않고, 신분 서열 따라 실효성이 정해지지도 않는다. 오늘의 교회와 수도회 안에서 요구되는 순종은 그 집단의 실효성을 떨어트리고 있다. 순종이 인간의 창의력과 자율성을 저하시키고, 교회 안에 인권의 사각지대(死角地帶)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도 정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과거의 신앙언어 안에 있는 순종이라서 그것을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인 양 휘두르면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는 사실을 확인해 주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는 구원을 주는 공동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따라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겠다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이라고 표현하였다. 함께 하느님을 찾아 길을 가는 백성인 교회라는 말이다. 그 안에서 서로가 하는 역할은 다르지만 같은 하느님의 백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함께 배워서 하느님의 숨결이 살아계시게 하면서 아버지를 향해 함께 길을 가는 백성이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나는 그대들을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종은 주인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대들을 벗이라고 불렀습니다.”(15,15).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향해 함께 길을 가는 벗이고 형제들인 사람들의 모임인 교회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한국교회는 성서 필사운동을 하고 있다. 성서 필사가 대단한 신심 행위로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신앙의 역사 안에 신심행위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인쇄술이 없던 시대에 성서와 전례서들을 보급하는 대단히 실천적 동기에서 발생한 것이었다. 모두가 문맹인 시대에 문자를 터득한 수도자들이 성서와 전례서들을 필사하여 보급함으로써 교회에 크게 공헌한 일이었다. 필사는 어려운 작업이었고 수도자들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하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영성적 의미를 부여하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과 같이 인쇄술이 발달하고 도서 구입이 어렵지 않은 시기에 신자들에게 권장할 것은 성서 필사가 아니라 성서를 읽어서 그리스도 신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일이다. 성서를 읽고 배우고 복음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대신 필사나 하고 앉아 있으라는 것은 머리는 쓰지 말고 신앙생활 하라는 것으로 들린다. 그렇게 많은 노력과 시간을 바쳐서 필사한 성서는 아무 데도 기여하지 못하고 필사한 사람에게 어떤 성취감을 주는 것으로 끝난다. 성서 경전(經典)이 있는 것은 그것을 필사하라는 것이 아니라, 읽고 알아들어서 신앙의 잣대로 삼으라는 것이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무식하고 난폭한 중세 유럽 사회에서 수도자가 되는 것은 평민에게 신분의 상승이고 문자 터득을 비롯한 문화적 혜택을 받는 것이었다. 과거 사회는 신분 따라 복장을 달리하던 시대였다. 복장을 보면 귀족인지, 수도자인지 또 평민인지를 즉시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의 사회에서는 신분 따라 복장을 달리하지 않는다. 기능에 따라 복장을 달리한다. 작업할 때 작업복, 수영할 때 수영복, 등산할 때 등산복 등 하는 일이 요구하는 실효성을 위해 복장을 달리한다. 복장으로 다른 사람들과 자기 신분이 다르다는 사실만 과시하면 그 신분의 차이로 말미암아 누리는 혜택도 있겠지만, 사람들로부터 중요한 정보가 흘러들지 않는다. 복장으로 신분의 차이를 과시하는 사람들에게 현대인은 거부감을 느끼고 그것은 삶에서의 소외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 소외는 곧 인간 실효성의 저하로 연결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이 계시는 성역이 따로 있지 않다. 세상을 버리고 하느님에게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의 자녀로 사는 것이다. 형제를 외면하면 하느님을 외면하는 것이다. 인간 수양의 도장으로서 고요한 시간과 공간은 필요하고 좋은 것이지만, 수도원의 봉쇄구역이 하느님의 성역인 양 포장하지는 말아야 한다. 하느님은 아니 계시는 곳 없이 다 계신다. 착각하지 말아야 한다. ◆&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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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title>신앙언어의 위기</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osesye/11457853"/>
		<id>tag:blog.daum.net,2009:kosesye.11457853</id>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7-07-14T17:39:08Z</updated>
	    <published>2007-07-14T17:39:08Z</published>
	    <content type="html">
	    	&amp;nbsp;&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언어의 위기,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믿음과 해석 제2장&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들어가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신앙언어는 현대인들에게 그리스도적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동안 하나의 종교 집단으로서 교회가 여러 문화와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습득한 언어와 삶의 방식들이 있다. 특히 유럽 중세 사회에서 교회는 그 사회의 기득권 집단이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교회는 중세 10세기 동안 경쟁 상대 없이 유럽대륙을 지배하였다. 오늘도 바티칸 방송이 상징 음악으로 사용하고 있는, ‘그리스도 승리하고, 그리스도 다스리고, 그리스도 명령한다.’는 노래의 가사가 그 시대 교회가 누렸던 영화(榮華)의 흔적을 말하고 있다. 교회의 언어에는 지금도 그 시대의 유적들이 청산되지 않고 남아 있다. 교회 봉사 직무자들에 대한 위계(位階)질서 신분 개념을 비롯해서 그들에 대한 중세적 존칭들과 그들의 복장이 그 흔적으로 남아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6세기 개신교가 분리된 이후 가톨릭교회는 개신교가 주장하는 바를 거슬려 말하다가 그 언어가 교회의 전통적 신앙언어와 같이 자리 잡은 것들도 있다. 초기 개신교회는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대립시켜놓고, 마리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택하였고, 말씀과 전통을 대립시켜놓고, 전통을 버리고 말씀을 택하였으며, 믿음과 공로를 대립시켜놓고, 공로를 버리고 믿음을 택하였다. 그러자 가톨릭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고, 전통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말씀을 소홀히 하고 성사(聖事) 위주의 신앙생활이 되게 하였다. 성사의 사효성(事效性)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을 외면하고 성사의 효과 혹은 공로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신앙언어에 길들여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기쁘지도 않고, 해방적 체험을 주지도 않는다. 양식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다소 불편을 느끼게 하는 언어가 되어버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경직된 유럽 중세적 조직과 제도를 고수하는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창조적 노력을 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위계질서에 대한 교회의 집착은 교회공동체 구성원들 간에 정보의 흐름을 차단하여 결정권자가 정보를 받지 못하게 만들었다. 정보가 부족하여 현실을 파악하지 못한 결정권자들이 직권을 행사하여 비효율적인 신앙공동체가 되어가고 있다. 위계질서의 하부 구조에 속한 사람들은 순종이 강요된 나머지 무기력하고 창의성이 없으며, 공동체의 일을 방관하는 실효성 없는 무리가 되어가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아직도 교회공동체의 하부 구조인 본당들이 건재하고, 신축되는 성당들이 있으며, 새롭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고, 교무금과 헌금이 들어온다고 위기의식을 전혀 갖지 못한다면, 황폐화된 오늘 유럽 교회들의 현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지 못하는 어리석은 종교 집단이라 할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들이 오늘 사용하는 신앙언어가 기복(祈福)적이고, 사람들을 어떤 신비와 권위로써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앙언어로서는 그 핵심이 훼손된 것이다. 인류가 지닌 종교적 염원들을 충족시켜 주는 언어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 언어는 먼저 현대의 지성인들과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실태와 원인에 대해 간단히 짚어 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리언어&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과학적 객관성에 익숙한 현대인은 과거 신앙언어가 사용한 이원론(二元論)적 형이상학의 언어를 수용하지 못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초엽까지 인류 역사를 지배해온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이제 무너졌다. 자연과 초자연, 현세와 내세, 육신과 영혼, 우연(偶然)과 실체(實體), 물질과 관념(觀念)을 대립시켜 이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느님은 순수한 관념 혹은 정신이고, 제1원인이며 지고(至高)하신 분이라는 플라톤의 철학에 기반을 둔 교리언어는 현대인에게 신체험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교리언어는 2세기 플라톤 사상에 젖은 교부(敎父)들이 그것을 수용한 후부터 그리스도 교리언어로 교회 안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20세기 들어오면서 그 언어는 과거 한 시대의 사고방식, 곧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시대적 산물인 언어&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인간은 언어 안에 태어나고 그것과 더불어 살지만, 언어는 또한 시대적 산물이다. 시대가 지나면 그 언어는 한계를 드러낸다. 대부분의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들은 아직도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된 과거의 교리언어들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실체, 위격, 본성 등을 비롯한 과거 철학에서 유입된 형이상학적 언어들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현대인의 것이 아니기에 교리언어는 그것이 담고 있는 신앙 체험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과거의 문화에서 얻은 형이상학적 언어들과 성서들이 사용한 신화(神話)적 표현들은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20세기 중반부터 현대 역사비평학이 보편화되면서 성서를 비롯한 신앙언어 전반에 대한 해석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제 믿음은 과거의 신앙언어들을 반복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려 노력하는 데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 언어들이 담고 있는 체험에 접근하여, 오늘의 사람들을 위하여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새로운 언어로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새로운 해석은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해서 새롭게 이해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것은 그 시대를 위해 새로운 실천의 길을 열어 주는 창조적인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상하(上下)와 우열(優劣)의 위계서열이 뚜렷한 수직적 사회가 아니다. 평등 사회이고 인간의 실효성은 수평적으로 원활히 흐르는 정보가 보장한다. 따라서 과거의 수직적 사회에서 통용되던 권위주의는 오늘의 사회에서 그 실효성을 잃었다. 권위주의는 과거 중세 사회의 유산이지 그리스도적인 것은 아니다. 신앙의 명제(命題)들은 신앙 체험을 전달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것이다. 따라서 한 시대의 교리언어 자체가 초월성(超越性)이나 절대성(絶對性)을 지닌 것 같이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 신약성서 안에 보존된 그리스도에 대한 초기교회의 체험을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하여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이 같은 체험에 참여하여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살게 해야 한다. 기복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기적과 신비와 권위에 호소하여 무늬만 그리스도인이고 실제로는 흔하디흔한 종교인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역사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계시는 하느님의 영원한 진리가 시간 안에 수직적으로 주어졌다는 말이 아니다. 계시가 완료된 양식으로 주어졌다는 과거의 교리도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에서는 생소하다. 하느님은 한 시대의 하느님이 아니다. 인류역사 안에 살아계시며 그 역사 안에 일하시는 하느님이다. 현대인에게 역사는 중요하고 세상이 미완성으로 있으며 발전한다는 사실도 기본적 통념이 되었다. 과학적 사고를 하는 현대인은 역사의 어느 시점에 초자연적이고 외적인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을 수용하지 못한다. 검증도 확인도 되지 않는 것을 계시된 진리라고 말하면, 현대인은 그 말에 동의하지 못한다. ‘말할 수 없는 것은 말하지 말라.’는 현대의 교훈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의 조직과 제도&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의 교리언어가 과거 한 시대의 문화로부터 받은 형이상학적 표상으로 장식되어 있듯이, 현재 교회의 조직과 제도도 과거 유럽의 제국주의와 봉건주의 사회에서 발생하여 정착한 것이다. 교회 봉사직무자의 선택 방식이 수직적이고, 직무를 신분 혹은 품위와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이 다분히 제국주의적이거나 봉건주의적 유산이다. 그리고 임기가 없는 종신 직무 개념도 직무와 신분의 품위를 혼동하던 과거 수직적 사회 문화의 유산이다. 직무에 임하는 사람의 실효성을 외면하고 신분을 더 소중히 생각하는 과거의 제도와 관행이다. 오늘의 교회가 그 제도와 관행을 고집하면서 교회 구성원들의 참여는 차단되었다. 오늘과 같은 다원(多元)사회 안에서는 수직적 관계를 절대시하는 집단의 실효성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size=3&gt;수직적 조직에서는 명령과 복종이 그 조직을 움직인다. 현대는 많은 정보들이 수평적으로 흐르는 사회이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정보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그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고 구성원들의 실효성도 높인다. 오늘의 기업들은 정보의 수평적 흐름을 원활히 하여 그 실효성을 높이고 있다. 그 구성원들 모두가 정보를 효과적으로 받고 각자가 다양한 능력을 활용하여 참여하며 기여하도록 조직되어 있다. 기업들은 그 구성원 모두가 충분히 기여함으로써 보람을 느껴야 할 뿐 아니라, 생산품의 소비자까지 만족시켜 기업에 기여하도록 한다. 이제는 제품 판매만이 아니라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마케팅이 중요한 시대이다. 소비자가 제공하는 정보도 외면하지 않는 기업들의 풍토이다. &lt;/FON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size=4&gt;&lt;SPAN style=&quot;FONT-SIZE: 1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size=3&gt;신앙공동체도 교회 직무에 임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자들에게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신앙언어를 고수하지 말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가 지닌 능력과 정보로써 기여하고 모두가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미국의 가톨릭 신자들이 하는 말이다. “신자는 순종하고 돈 내고 기도만 하기 위해(only to obey, to pay, and to pray) 있다.” 이런 공동체는 오늘의 사회에서 실효성이 없어지고 그 구성원들의 수준도 저하될 것이다. 그것은 자유롭고 창의력을 지닌 인간의 집단이 아니라, 행렬하는 오리들의 집단과 같다. 지각 있는 현대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창의력과 자발성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되는 이유이다&lt;/FON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lt;/SPAN&gt;&lt;/FONT&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공감대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 안에서 가지는 공감대 사이에 큰 괴리가 있다. 교회가 아직도 고수하는 유럽 중세적 의사소통 방식과 조직의 구조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현대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언어의 보존과 전파라는 본연의 사명을 다 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실천들은 과거 어느 한 시기에 실효성 있는 것들이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주일미사 의무, 금육일과 금식일의 관행, 고해성사 의무, 하객들 혹은 문상객들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길게 거행되는 혼배미사와 장례미사, 쉬고 있는 신자들에 대한 냉담자 처리와 그들에 대한 대책, 혼배조당의 문제 등을 들 수 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이런 것은 그 지역 주민 모두가 그리스도 신앙인이고 그들이 받은 교육 수준이 낮아서, 삶에 대한 정보가 보잘것없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의미를 지닌 관행들이다. 과거 그리스도 문화권에서 발생한 이런 언어와 실천들은 새로워져야 한다. 과거 교회의 관행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봉인하지 말아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도권(敎導權)&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약성서를 비롯해서 초기 교회가 교회 안의 직무를 지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것은 ‘봉사직무’(ministerium)라는 단어였다. 그러나 16세기 개신교와의 분열 이후 교회는 ‘교도권’(magisterium)이라는 단어를 집중적으로 사용한다. ‘봉사직무’가 섬기는 작은 자(mini)의 직무를 의미하는 반면, 교도권은 가르치는 권한을 가진 큰 인물(magis)의 직무를 뜻한다. 현재 신앙 언어가 위기를 겪는 것은 바로 이 교도권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사목지침을 내리려 하는 데에도 그 책임이 있다. 제도교회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목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 실존의 여건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여건에서 발생하는 현대인의 ‘인식의 망’이다. 교회는 그 ‘인식의 망’에서 이해되는 언어와 실천을 제시해야 한다. 역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목은 시대적 감수성(感受性)과 염원을 읽어내어 과거의 신앙언어들을 해석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 안의 기득권자들은 신앙 언어가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여건과는 무관하다고 흔히 생각한다. 신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보편성(普遍性)을 지니지만, 한 시대의 교회가 만들어서 사용하던 언어들, 곧 교리, 교회의 조직, 및 실천들 그 자체를 보편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강요하는 것은 신앙언어의 역사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영원한 신앙이지만 신앙언어는 인간의 것이기에 시대에 따라 다른 언어로 표현된다. 영원한 신앙은 역사성을 지닌 언어로 표현되고 전달된다. 바로 이 언어의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가 오늘 교회 기득권자들의 말을 여러 차원에서 독백(獨白)으로 만들고 있다. 이런 잘못된 확신이 신앙언어가 겪는 위기의 원인이다.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 안에 나타나는 논리, 표상, 신화, 개념 등은 모두 과거 어느 한 시대의 사회에서 통용되던 것들이다. 그런 언어들과 그리스도 신앙을 혼동하여 그 언어들만이 그리스도 신앙이라고 확신하는 그들이다. 시대를 착각하여 신앙 언어를 사용하면 사람들은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는 종교 현상에서 그 의미를 찾을 것이다. 결국 신앙 공동체는 내세(來世)와 현세를 위한 기복적 종교 집단이 되고 하느님을 후광으로 한 하나의 권력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새로워져야 하는 신앙 언어&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과거 한 사회를 지배하던 철학과 그 관념들로 만들어진 교리와 복음 선포의 언어는 항상 새로워져야 한다. 신앙언어들이 발생한 과거의 문화적 여건을 평가하여 그 시대의 ‘인식의 망’을 통해 표현된 신앙 언어가 전달하고자 하는 체험이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그 체험을 외면하고, 그 언어만을 반복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도교회가 만들어 내는 신앙의 표현들은 그 시기의 사회에 통용되는 개념들을 사용하여 신앙의 언어를 체계화한다. 이 체계화는 그 시대 사회를 지배하는 언어로 신앙언어를 새롭게 표현하는 것이다. 과거 새로운 신앙언어가 탄생한 예들을 보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과 다를 수 있다는 주장 앞에, 니체아공의회(325년)는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 아버지와 그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적으로 동일하다.”는 새로운 언어를 만들었다. 여기서 실체라는 말은 사물 안에 있는 인식의 원리이다. 예수 안에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은 실제 하느님이라는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령은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니까 피조물이라는 주장 앞에 콘스탄티노풀공의회(381년)는 “성령도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흠숭 받으신다.”고 표현하였다.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출생할 때는 하나의 인간이었지만, 그 생애 어느 시기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그 주장은 예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을 보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에페소공의회(431년)는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언어를 만들었다. 이 말은 예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긍정하는 말이지 마리아를 격상시키는 것이 아니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은 특정 사회의 특정 문화와 필수적으로 밀접히 관련되어 있지 않다. 신앙의 진리는 성서와 교부(敎父)들의 저서에서만 얻어 지는 것이 아니다. 신앙 언어들은 현대인을 위해서는 현대적 언어로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아직 많은 사람들은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의 권위는 성서와 교부들의 것과 동일함에서 온다고 착각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우리 사회는 권위와 순종을 기본으로 수직적으로 조직되어 있지 않다. 우리는 오늘 단일성과 불가시적(不可視的)인 것을 정점(頂點)에 두고 복합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하위에 둔 그리스 철학적 범주 체계를 빌려서 사고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평등을 기본으로 하고 자유를 존중하며 공동체와 사회를 위한 기여를 보람으로 생각하는 공감대 안에서 살고 있다. 과학적 감수성을 지닌 현대인은 관찰할 수 있는 것을 소중히 생각한다. 역사학에서도 관찰하고 고증(考證)할 수 있는 역사의 확실한 과정(過程)을 찾는다. 현대인은 다원(多元)성을 존중하고 섬김과 봉사를 인류애의 지고한 형태라고 공감한다. 현대인의 이런 ‘인식의 망’을 존중하면서 신앙언어를 새롭게 찾아야 한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대 사회는 과거 유럽 중세 사회의 이념과 언어를 탈피하였다. 그 사회를 지배하던 언어는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섭리였다. 높은 사람들은 특정 지역의 특정 역할을 위해 대리자를 두고 있었다. 따라서 하느님의 대리자라는 말도 당연한 것으로 통용되었다. 인간과 인류의 미래는 초자연 안에 있다고 모두가 공감하던 시대였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교회와 밀접한 관계 안에 살고 있었다. 그런 사회 안에서 통용되던 언어를 새롭게 해석하지 않고 오늘의 신앙인들에게 사용할 수는 없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세상을 들어야 하는 교회&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도 교회는 전통적 신앙언어와 새로운 시대의 종교적 감수성 사이를 조정(調整)하여 새로운 언어를 만든다. 과거에 통용되던 언어와 새로운 시대의 감수성 사이에는 여러 형태의 마찰이 있게 마련이다. 교회도 인간의 집단이기에 제도 자체가 지닌 역기능으로 나타나는 마찰이 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다른 사람 앞에서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횡포 한다. 교회 안의 기득권층이 된 사람들은 복음서들이 말하는 섬김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반성하고 과거의 언어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감수성에 맞게 그 섬김을 새롭게 표현하고 실천해야 한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은 모든 사람이 신속하게 다양한 정보를 얻어 공유하는 세상이다. 많은 비밀을 간직하고 강압적으로 군림하는 권위주의는 설 땅을 잃었다. 과거 무식한 일반 대중을 유식한 성직자들이 대하던 관행은 교회 안에 아직도 남아 있어, 일부 교직자들은 신자들을 미성년자 대하듯이 하고 있다. 이런 현상에 대한 절망감으로 지식인들과 젊은이를 비롯한 일부 신앙인들이 교회를 외면한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인간이 하느님에게 접근하는 양식, 역사 안에 하느님이 개입하시는 양식, 교회의 선교 사명 등에 대한 언어들은 교회가 살고 있는 그 사회가 지닌 ‘인식의 망’에서 이해되는 것이라야 한다. 교회가 그 사회에서 외면당한다면, 신앙 언어의 시대적 체계화와 조정이라는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지 못한 것이다. 현재 교회의 교리와 복음 선포 언어가 겪고 있는 위기는 교회가 그 사회에서 일탈(逸脫)해 버린 데서 오는 증세로 보인다. 세상을 외면하면 할수록 하느님에게 가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없는 하느님을 상상하지 말아야 하고 그 인간은 역사 안에 살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인간과 세상을 외면한 생활 형태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람 노릇을 못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우리는 종교집단들 안에서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나오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 언어는 하늘에서 주어지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또 신앙의 전승 안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신앙의 응답은 현대 인간이 지닌 ‘인식의 망’에서도 구원으로 이해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 언어는 인간으로서 각자가 이미 터득한 인생의 의미를 더 일관성 있게, 또 더 풍요롭게 이해하게 하는 것이라야 한다.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적 삶의 영역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믿음은 이론이 아니라 실천을 동반하는 해석이고 체험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의 이름으로 현세적 문화를 거부하는 것은 과거의 언어에 머물겠다는 근본주의적 발상이다. 과거의 신학이 그 시대 문화가 제공하는 ‘인식의 망’을 통해서 사고하였듯이, 오늘의 신학은 인간적인 모든 연구에 참여하도록 노력한다. 현세적 문화가 창출하는 다양한 인간적 계획과 업적들에 대해 주의를 기우려서 오늘의 신앙언어가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에서도 기쁜 소식이 되에 해야 한다. 그리스도 신앙이 말하는 구원은 인류 역사 안에 나타난 여러 형태의 인간 해방 운동의 어느 것과도 동일하지 않지만, 그 해방 운동들과 밀접한 관계 안에 있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재 교회가 겪고 있는 위기는 교회 언어의 성역화에서 온다.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실존에 대한 표현들은 현대인에게 통용되지 않는 것들이다. 가령 예를&amp;nbsp; 하나 들면,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요사이 성당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이면 기도하고 흩어지면 선교하자.”는 표어가 있다. 모여서는 말하지 말고 기도나 하고, 나가서는 교회의 교세확장을 위해 각자 매진하라는 말이다. 제도교회는 신자들로부터 들을 것이 없다는 말 같이 들린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구성원들 모두가 자유롭게 기여할 수 있는 교회라야 한다. 제도 교회가 사회를 보는 눈은 아직도 유럽 중세적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순종이 가장 중요한 그리스도적 덕목인 양 제시된 나머지, 그리스도 신앙의 메시지가 인간 각자에게 요구하는 자유롭고, 다양한 응답과 공동체를 위한 기여라는 풍요로움은 사라지고, 지극히 따분한 신앙 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성서는 인간에게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간곡히 말씀하셨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0px 5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0px 5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마르 10,42-45).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순종을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이고 전통적인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유럽 중세적 ‘인식의 망’에 갇혀 있는 것이다. 유럽 중세에서 삶의 지혜였던 것을 그리스도 신앙의 핵심적인 덕목이라고 착각하는 것이다. 그런 시대착오적 자세가 교회 안에 우민정책(愚民政策)을 장려하고 있다. 20세기 후반부터 유럽에서 대중이 교회를 외면하고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를 이탈한 것은 인간 자유에 대한 인식이 보편되면서 일어난 현상이다.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과거 유럽 중세 사회를 지배하던 이념을 아직도 지속하고 있기에 현대 그리스도 교회의 교리와 복음 선포가 위기를 겪고 있다. 교회의 언어가 현대인에게는 생소한 것이 되고 신앙 체험보다는 유럽 중세적 삶의 지혜로 사람을 인도하고 있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의 미래가 교회의 미래이다. ◆&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신앙언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osesye/11442719"/>
		<id>tag:blog.daum.net,2009:kosesye.11442719</id>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7-07-13T16:45:53Z</updated>
	    <published>2007-07-13T16:45:5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언어,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size=3&gt;믿음과 해석 제1장&lt;/FON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들어가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인간의 의식(意識)과 실천(實踐)이기에 신앙언어도 인간의 문화적 여건을 벗어나지 못한다. 신앙을 전달하고 각성시키는 언어도 시대적 성격을 지니며 시대적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복음도 항상 그 시대의 언어로 선포되었다. 여기서 신앙언어라 함은 하나의 종교가 가진 경전(經典), 의례(儀禮) 및 공동체의 제도와 법을 총망라하여 일컫는 말이다. 그 종교가 지닌 신앙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수단을 의미한다. 종교적 언어를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언어는 문화와 밀접한 관계 안에 있다. 과거의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신앙언어에는 하늘과 지옥이 있고 하느님이 창조하여 하느님 안에서 끝나는 우주가 있었다. 그런 표상(表象)들은 과거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오늘 현대인에게는 다분히 신화(神話)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의 신앙언어를 해석하여 오늘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고 그 언어를 반복만 하면,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그 언어가 지닌 원초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서 경전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 혹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들은 그 말씀과 행적을 녹음 혹은 녹화하여 전달하듯이, 그대로 우리에게 전하는 문서가 아니다. 하느님에 대한 어떤 체험, 혹은 예수에 대한 어떤 체험이 사람들에게 있었고, 그것을 그 시대의 신앙공동체가 언어로 표현하고 기록으로 남겨 우리에게 전달한 것들이다. 사람은 체험한 바를 해석하여 언어로 표현한다. 체험한 바를 자기가 속하는 문화가 제공하는 언어 체계를 참조하여 표현한다는 말이다. 해석되어 언어화된 체험만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 언어는 문자로 기록될 때, 한 번 더 해석된다. 그리고 그 해석은 그 시대 문화가 제공한 언어 체계를 존중하여 이루어진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따라서 해석되어 언어화 된 체험들은 문화적으로 채색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이 오랜 역사 안에 하느님과 관련되어 체험한 바를 그 시대의 문화적 체계와 제약(制約) 안에서 여러 가지 문학유형(文學類型)으로 기록한 것이다.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서 해석된다는 것은 어떤 제약을 받는다는 말이다. 신약성서도 예수가 돌아가시고 초기교회 공동체가 예수로 말미암아 체험한 바를 다양한 형태의 문서로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도 예수에 대해 또 예수가 믿던 하느님에 대해 초기교회가 해석한 바를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의 의례 혹은 전례(典禮)도 신앙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공동체가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도 발생할 당시의 문화적 체계와 제약 안에서 표현된 것이다. 오늘에 비하여 단순하고 한가하며 볼거리가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발생한 전례들이다. 오늘 현대인은 복잡한 세상에서 바쁘게 살고 있다. 현대인은 통신매체의 발달로 볼거리가 많고, 각자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받아 자기 개발을 최대한 이루며 살고 있다. 전례가 신앙의 핵심적인 것을 신선하게 전달하여 깊이 있는 신앙 체험을 유발하지 못하고, 과거의 관행을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면, 오늘 현대인에게는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는 혼배미사와 장례미사 전례는 전통적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결혼생활과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간결한 의례로 거듭 나야 할 것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믿음의 두 가지 원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믿음에 대한 반성은 두 가지를 원천으로 이루어진다. 계시(啓示)에서 비롯되었다는 과거의 그리스도 신앙언어 전승(傳承)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각 시대의 인간 체험(體驗)이다. 그 두 개를 연결하는 것이 해석이다. 해석에는 입으로 표현하는 언어도 있고, 몸으로 하는 언어인 실천(實踐)도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체험하고 배우면서 산다. 그 체험들은 사람 각자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網)’을 형성한다. 그 망은 물론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으로 채색되어 있다. 인간은 체험한 것을 자기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하면서 인식하고 언어화한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비롯되어 신학의 격언이 된 말, 곧 ‘인간은 무엇이든 수용할 때 자기 방식대로 수용한다.’는 말이 의미하는 바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대인에게는 그들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이 있다. 신앙공동체가 전달하는 과거의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공유(共有)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창조적 노력이며 또한 역사 안에 주님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에게 충실한 신앙 행위이기도 하다. 새롭게 해석되지 않고 전달된 과거의 언어는 사람들의 이해를 외면한,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 독백이 되고 말 것이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믿음과 체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언어도 각 시대가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해서 이해된다. 따라서 전달된 신앙언어를 접하는 사람이 그 시대가 제공한 ‘인식의 망’을 통하여 그 언어를 먼저 해석하면서 믿음이 발생한다. 신앙의 원초에도 어떤 체험에 대한 해석이 먼저 있었고 그 해석이 언어로 정착하였다. 이스라엘 신앙의 초기에 모세는 자기의 체험을 그 시대가 제공한 ‘인식의 망’을 통해 해석하여 표현하였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었다(출애 3,12 참조).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을 확인하는 장소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다(출애 33,18-23 참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도 그 시대가 제공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신앙의 언어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 언어들을 자기들이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하고 실천하면서 새롭게 체험하고, 그 체험한 바를 새롭게 해석하여 자기들에게 고유한 새로운 언어로 정착시켰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 삶의 기원이고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분이며,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배우고 살아서 비로소 주어진 생명의 의미를 살려서 사는 하느님의 자녀인 사람이 된다는 뜻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모세의 언어가 기원이 되어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안에 발생한 언어들을 모아서 구약성경이라는 경전(經典)이 되었다.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체험이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언어로 정착하여 완성된 경전이 신약성경이다. 경전은 그 신앙의 잣대가 되는 문서를 말하며, 역사 안에서 경전을 읽는 신앙인도 자기가 지닌 문화적 ‘인식의 망’을 통해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실천하면서 신앙인으로 산다. 따라서 신앙의 전승(傳承)은 시대적 해석의 전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믿음은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고 그 체험한 바를 해석하며 발생시킨 언어를 다시 해석하여 새로운 체험을 하는 데에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믿음은 경전이 전하는 언어만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인이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이미 체험한 바를 전승된 신앙언어에 비추어 새롭게 체험하는 행위이기도 하다. 원초에 하나의 교리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정확한 체험이 있었고, 그 체험으로 말미암은 사고와 실천을 동반하는 언어가 있었다. 그 언어는 다른 문화권을 만나면서 다른 언어들을 발생시킨다. 신앙언어가 전승된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 안에서 새로운 체험들과 새로운 삶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 믿음은 전승된 신앙언어로 말미암아 사람이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새로운 체험을 하면서 체험들의 전승, 곧 신앙의 역사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행위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약성서의 기원에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이 있었다. 예수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구원에 대해 새롭게 체험하였다. 그들은 그 체험을 그들이 지닌 ‘인식의 망’, 곧 구약성서 언어와 그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화적 언어로 해석하며 문자로 정착시켰다. 신약성서가 담고 있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체험한 바를 해석한 언어이다. 그것은 메시지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인간의 삶과 세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구원을 체험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체험과 계시(啓示)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계시는 어떤 교리(敎理)가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 안에 당신 스스로를 전달하시는 하느님의 자유스런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개입하신 사실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체험하게 하였고, 그 체험들은 해석되어 메시지 형태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집트 탈출과 같은 사건의 구원도 있고, 자비, 나눔, 용서의 실천과 같은 구원도 있다. 그 메시지에는 교리가 내포되어 있지만, 교리가 일차적 요소도 목적도 아니다. 메시지의 일차적 요소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은혜로운 인간 구원의 체험이다. 교리는 기원에 있었던 체험들이 언어로 정착한 다음, 그 내용을 인간이 반성하고 숙고하여 그 시대의 합리적 언어로 정리하여 다시 표현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 체험의 역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성경, 교리 및 전례가 모두 전달하는 메시지를 지녔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은혜로운 구원의 언어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무조건 믿는 데에 있지 않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고, 세 분인데 한 분인 하느님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해되지 않는 말을 신비라고 생각하면서 무조건 수용하는 데에 신앙이 있지 않다. 그런 언어들은 그것이 발생한 문화적 배경에서 이해되고 새롭게 해석될 때 의미를 지닌다.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긴 언어들이다. 신앙의 언어는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에서도 구원적인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새로운 해석 세 가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앞에서 언급된 세 개의 언어를 우리가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해서 어떻게 해석하는 지를 보자.&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 동정녀 잉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루가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예고(1,26-38)에서 구약성서에 나오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 수태한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거기 나오는 표현들을 가져다 사용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는 인사, “은총을 입은 이여”라는 말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예언자 엘리와 나눈 대화(1사무 1,17-18)에 있는 인사이다. 마리아가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이의를 제기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 천사는 수태하지 못하던 여인으로 알려진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고 말한다. 이것은 수태치 못하던 여인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잉태할 것이라고 말하는 천사의 말이다(창세 18,14). 한나, 사라, 엘리사벳, 이 세 사람은 모두 수태치 못하는 여인들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수태하여 구원역사에 중요한 인물을 낳은 여인들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리아를 처녀라고 말하면서 루가복음서는 바로 이런 수태치 못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암시하여 ‘처녀’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려 준다. 구원은 인간의 생산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하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처녀’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다. 마리아도 처녀로서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예수라는 인물을 낳았다는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알게 된 구원은 하느님을 기원(起源)으로 한다는 뜻이다. 성서는 신앙언어를 담은 문서이지 생리학적 정보를 제공하는 책이 아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 삼위일체 교리&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예수와 성령도 모두 하느님에 대해 알리는 이름들이라는 뜻으로 과거 교부(敎父)들이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고, 그 하느님을 믿는다. 예수의 삶에서 배워 그것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 수 있고,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은 참으로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초기교회 교부들이 만든 ‘삼위일체’라는 단어이다. 하느님은 우리와 이렇게 밀접한 관계 안에 계신다는 것을 말하는 단어이지,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모순된 사실을 믿으라는 단어가 아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는 순수한 사람이었는데 그분 생애의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5세기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에페소공의회(431년)가 사용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단어이다. 그 시대를 지배하던 사상으로는 출생 때부터 예수가 하느님이 아니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다운 하느님의 생명을 보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언어이다. 5세기 네스토리우스의 주장 앞에서 발생한 언어를,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이 없는 오늘,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지도 않고, 그대로 반복 사용하면 하느님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엉뚱하고 무의미한 말이 되고 만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권위와 신비에 매료되지 않는 현대인&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대인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몸담고 있는 제도와 그 제도가 부여하는 권위를 보고 그 사람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 말이 수용할만한 것이라고 그들 스스로가 해석하고 판단할 때 수용한다. 믿음은 이 세상을 넘어서는 초월(超越)적 체험을 신비롭게 얻는 데에 있지 않다. 신앙 체험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하는 다른 체험들 안에서 구원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증오와 복수에 비하여 사랑과 용서가 구원이며, 인간을 참으로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그와 같이 믿음은 인간적이며 현세적 체험들을 지닌 인간 각자가 전승된 신앙 언어를 접하면서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며 갖는 확신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언어의 교육적 제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언어 전승이 전하는 메시지에는 새로운 체험을 발생시키는 교육적 제안이 내포되어 있다. 이 교육적 제안은 초현세적 체험으로 사람을 인도하지 않는다. 기적적인 것을 찾게 하고 그것을 주는 신앙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 교육은 인간이 이미 한 체험들을 하느님에게 근거가 있는 언어로 새롭게 해석하게 하고, 인간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게 한다. 인간은 살면서 끊임없이 배운다. 인간은 두려움과 후회와 싸우며, 의미와 사랑과 용기를 추구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傷處) 받고,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상실(喪失)을 겪으며, 자기가 아끼던 것을 잃으면서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재물, 지위, 안전한 직업 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메시지는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인생의 의미에 하느님이 동기가 되어 발생하는 해방적 성격을 지닌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학의 역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학은 전승된 신앙의 언어와 그 시대 인간 ‘인식의 망’ 사이에 교류가 가능하도록 하는 사명을 지닌 학문이다. 그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신학은 경전의 언어를 발생시킨 원초의 체험과 신앙의 역사 안에 나타난 언어들의 전승을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과 연결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그런 해석을 하지 못하면, 신학은 과거 언어만을 반복 주입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신앙인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신학은 그 시대가 지닌 ‘인식의 망’에서도 신앙언어를 구원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게 하는 창조적 학문이 되어야 한다.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거 한 시대의 해석에 안주하여, 같은 언어만 반복하면서 순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자세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일방적 언어는 종교 집단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종교 집단도 인간의 집단이기에 무지(無知)로 말미암은 횡포들은 있게 마련이다. 인간은 인간에 늑대라는 격언이 있다. 권위주의적 언어는 종교라는 인간 집단의 언어일 수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전달하는 그리스도적 신앙언어일 수는 없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나오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대 신앙의 위기는 전승된 신앙언어를 새롭게 해석하지 않고, 그것을 반복만 하면서, 하느님을 배경으로 한 권위에만 호소하는 현상에 그 원인이 있다. 사람들이 지닌 ‘인식의 망’은 과거와 달라졌는데 신앙 공동체들은 과거의 언어를 그대로 반복하며 그것을 고수하는 데에만 급급하다. 그러면서 기적과 신비와 권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간다.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에는 과거와 같이 기적과 신비와 권위가 곧 구원이라는 등식(等式)이 없다. 그 ‘인식의 망’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인간 삶에 대한 근본적 신뢰, 타인을 위한 투신(投身), 선을 행하고 악을 거슬려 싸워야 하는 마음 등이며, 이런 것과 연결된 언어는 구원으로 쉽게 이해된다. 현대인의 생활 여건은 과거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수직적인 것이 퇴색하고 수평적인 것을 중요하게 보는 현대인이다. 현대인을 위한 신앙언어는 그들이 체험하는 구원에 열려있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의 신앙언어가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주는 것인 양 말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은 신앙이 마치 인간 삶에서 발생한 원리들을 하느님을 동원하여 성취하는 수단으로 제시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당신의 전능한 힘으로 성취하신다고 생각하는 것, 우리의 힘으로 이루지 못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하느님이 기적적으로 실현하시는 것 같이 말하는 것 등이다. 흔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면 입신양명(立身揚名)과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언어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기본 원리들, 곧 하느님 나라를 위한 원리들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을 매개로 인과응보를 주장하던 유대교의 가르침에 맞서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가르쳤다. 예수는 입신양명을 지향할 것이 아니라 섬김을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당신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루가 22,27). 부귀영화를 주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버려진 이들과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가르쳤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가 가르친 기본적인 것, 곧 하느님의 나라에 손상을 주는 교회들의 복음 설교라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앙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빙자한 종교집단이 있을 뿐이다. 인류역사와 더불어 종교는 항상 있어왔다. 교회가 전달하는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자기 ‘인식의 망’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그들이 자기의 이기심을 극복하고 생명과 삶의 신비에 접근하여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오늘의 신앙언어가 되어야 한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인간에게 요구된 자기 극복과 생명의 신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정적으로 주어졌다. “그분 말고 다른 어느 누구한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받아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 없습니다.”(사도 4,12). 베드로가 유대교 최고의회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타종교를 거부하기 위한 배타적인 뜻으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말씀이다. 예수를 죽이면서 거부한 유대교 당국에게 초기교회 신앙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역사의 어느 시기에도 우리에게 생명과 삶의 신비를 알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초기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 언어는 현대인의 체험을 조명하면서 그들에게 전달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지녀야 한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신앙언어는 과거의 언어를 반복하는 독백이 되거나, 일반 종교적 염원을 담은 기복(祈福)적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 언어가 현대인의 체험을 조명하고 그 체험에 전달하는 바가 있기 위해서는 신학이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참조하여 신앙언어를 새롭게 해야 한다. 신앙의 응답을 오늘의 인간 체험 안에 나타나는 인간적 문제들과 연결시켜서 표현할 줄 알아야 한다. 인간은 각자 세상과 자기의 인생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응답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보는 의미와 그들이 하는 응답에 해방적 성격을 부여하여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보게 해야 한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이미 터득한 의미와 응답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해석되어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가치로 살아있게 도와야 한다. 인간이 하는 부분적 응답을 완성시키는 신앙언어가 되어야 한다. ◆&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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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삼위일체 교리의 이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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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7-03-07T12:09:32Z</updated>
	    <published>2007-03-07T12:09:3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PAN class=d_12_6D6765&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FONT face=돋움 color=#013add size=2&gt;이 글의 원본(HWP)은 &lt;/FONT&gt;&lt;A href=&quot;http://blog.naver.com/kosesye&quot; target=_blank&gt;&lt;FONT face=돋움 color=#013add size=2&gt;http://blog.naver.com/kosesye&lt;/FONT&gt;&lt;/A&gt;&lt;FONT face=돋움 color=#013add size=2&gt; 에 게재되어 있습니다.&lt;/FONT&gt;&lt;/SPAN&gt;&amp;nbsp;&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일체이신 하느님&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4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8pt; COLOR: #000000; LINE-HEIGHT: 16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들어가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성서에 없다. 성서에는 하느님 아버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 성령을 함께 언급하는 구절들은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대들은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시기를 빕니다.”(2고린 13,13).&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내 이름으로 아버지께서 보내실 협조자 성령께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내가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한 14,26).&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13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내가 아버지로부터 보낼 협조자, 곧 아버지로부터 나오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이 나에 관해 증언 하실 것입니다.”(요한 15,26).&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러나 성서는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모른다. 삼위를 언급하는 성서의 구절들이 모두 우리의 구원을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인식하고 하느님에 대해서 밝히 말하는 언어가 아니다. 하느님에 대해 논하는 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우리의 구원이 모두 하느님의 일임을 방어하기 위한 삼위일체라는 단어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느님의 말씀이 주어졌다는 사실과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 신앙인들 안에 일어나는 변화가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한 단어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 삼위일체 교리의 발생&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일체 교리는 예수 안에 우리가 발견하는 생명이 참으로 하느님의 것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은 참으로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라는 사실을 긍정하기 위해 발생하였다. 니체아공의회(325년)에 모인 교부들은 하느님은 창조주이고 예수 그리스도는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Arius)를 반박하기 위해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실체적(實體的)으로 동일하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Editor.do?blogid=0C9Vs&amp;mode=NM#FOOTNOTE1&quot;&gt;&lt;SUP&gt;&lt;FONT color=#0000ff&gt;1)&lt;/FONT&gt;&lt;/SUP&gt;&lt;/A&gt;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참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 시대의 사상으로는 하느님과 예수가 같은 하느님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예수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한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Editor.do?blogid=0C9Vs&amp;mode=NM#FOOTNOTE2&quot;&gt;&lt;SUP&gt;&lt;FONT color=#0000ff&gt;2)&lt;/FONT&gt;&lt;/SUP&gt;&lt;/A&gt;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콘스탄티노풀공의회(381년)에 모인 교부들은 성령도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주님이시며...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고 성부와 성자와 더불어 영광과 흠숭을 받으신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고 결의한다. 성령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거슬려 공의회가 채택한 것이다. 그 시대의 사고로 성령도 하느님이 아니면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발생하는 삶이 하느님과 무관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서열이 낮은 것은 그 위의 서열인 존재와 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되는 시대였다. 따라서 예수와 성령을 한 분이신 하느님의 서열에 올려놓지 않으면, 예수와 성령으로 말미암은 우리의 변화는 하느님과 무관한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되면 예수는 하느님의 말씀일 수 없고, 성령은 하느님의 숨결일 수 없는 것이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우리에게는 그런 철학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위(位)로는 세 분이시고 본체(本體)로서는 하나이시며, 먼저 계심도 후에 계심도 없고, 높고 낮음도 없으시며 세 분이 온전히 같다.’라는 삼위일체 교리에 대한 과거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4세기에 필요하여서 발생한 삼위일체 교리이고, 그 교리를 발생시킨 이설(異說)이 없는 오늘이기에, 우리가 그 교리를 오늘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없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시대가 흐르면서 계속되는 논쟁에 대처하고 깊이 있는 신앙의 인식을 위해 하느님의 삼위(三位)적 형상에 대한 표현들은 점점 더 추상화되고 결국 전문가들만을 위한 지식이 되고 말았다. 세 분에 대한 언어가 추상화되면서 삼위에 대한 사고는 하느님 안에 내재(內在)하는 생명에 대한 추리로 발전하였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에 대한 신학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단순한 성서의 언어 대신에 산출(産出), 출생(出生), 진출(進出), 관계(關係), 실체, 개념, 순서 등 인간의 신앙 실천과 관련 없는 언어로 건너가 버렸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Editor.do?blogid=0C9Vs&amp;mode=NM#FOOTNOTE3&quot;&gt;&lt;SUP&gt;&lt;FONT color=#0000ff&gt;3)&lt;/FONT&gt;&lt;/SUP&gt;&lt;/A&gt; 이런 추상화는 그 시대 잘못된 이론들 앞에는 필요한 것이었지만, 오늘의 신앙인을 위해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만든다. 따라서 과거 철학에 익숙하지 못한 현대인들에게, 삼위일체에 대한 과거의 전통적 교리를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 오늘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사용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형상(形象)의 상징성(象徵性)&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 1. 상징성&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인은 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세 개의 형상을 사용하여 하느님을 고백한다. 이 형상들은 상징성을 지닌다. 상징은 그것이 통용되는 하나의 세계를 열어준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Editor.do?blogid=0C9Vs&amp;mode=NM#FOOTNOTE4&quot;&gt;&lt;SUP&gt;&lt;FONT color=#0000ff&gt;4)&lt;/FONT&gt;&lt;/SUP&gt;&lt;/A&gt;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 하나의 세계가 열린다. 인간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 무상으로 우리의 생명을 주신 하느님, 자녀의 행복을 원하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세계가 열린다. 그 상징성 안에서 우리는 성숙한 하느님의 자녀로 산다. 자녀는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같은 실천을 하면서 사람으로 산다. 그러나 가상적으로 아버지 하느님에게 접근하면 하느님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이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이고 미성숙한 인간의 자세가 나타난다. 기복(祈福)적 신앙이 아버지이신 하느님에 대한 가상적 접근에서 나타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령을 하느님의 숨결이라고 말할 때, 그 상징성을 살리면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실천 안에 하느님이 그 실천의 생명과 숨결로 살아 계시다는 말이다. 예수 안에 하느님 자녀의 삶을 발견하고 그 삶을 우리가 실천할 때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는 말이다. 그러나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가상적으로 접근하면,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위상(位相)이나 능력이 격상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 바울로 사도의 말씀을 빌리면 자기 자신을 ‘세우는’(1고린 14,4)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은 그 발생 초기부터 예수가 가르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그 삶을 배워 실천할 때 ‘성령이 우리 안에 일하신다.’고 믿었다. 원시교회는 성령이 신앙인들 안에 일하신다는 사실을 강하게 믿었다. 초기 교회는 예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 있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생명을 산다고 믿던 시대이다. 루가복음서는 이렇게 말한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명이 나서 말씀하셨다...‘아버지께서 제게 모든 것을 넘겨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말고는 아무도 아들이 누구인지, 또 아들과 아들이 계시해 주려는 사람 말고는 아무도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알지 못합니다.’”(10,21-22). 성령이 예수 안에 일하셨다는 사실을 믿는 초기 신앙인들이 기록한 말씀이다. 그들은 예수에게서 배우는 사람들이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가 되고, 예수로 말미암아 하느님 생명의 숨결이신 성령이 그들 안에 살아계신다고 믿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 2. 상징성을 잃은 철학적 언어&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아버지, 아들, 성령이라는 형상들은 우리와 하느님의 관계에 계속 작용한다. 4세기 신학 논쟁에서 플라톤에서 유래한 철학적 사고가 원인인 이설(異說) 앞에 교부들은 같은 철학적 언어로 답하여야만 했다. 그러나 그 시대 이후 철학적 언어가 신학의 유일한 언어로 통용되면서 하느님을 철학적 사고로 합리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것으로 삼위적 형상들이 지닌 모호함은 사라졌지만, 그 형상들의 성서적 기반과 그 상징성이 동시에 사라졌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 시대에 ‘로고스’라는 개념이 ‘아들’이라는 형상을 추방했다. 신학자들은 이 개념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론을 구축한다고 생각하였지만, 아들이라는 형상이 지닌 상징성을 외면하여, 아들이라는 형상의 의미를 약화시켜버렸다. 이 철학적 이론화는 삼위일체 신학을 인간 삶을 움직이지 못하는, 창백한 이론으로 만들었다. 우리가 삼위일체에 대한 과거 전통적 신학 언어를 사용하지 않으려는 것은 삼위일체의 가치를 부인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늘의 문화 안에서 그 형상들이 지닌 상징성을 살리려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 아버지와 아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 1. ‘아버지’ 형상이 지닌 문제점&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일체를 말할 때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형상이다. 이 형상이 지닌 인간 정서적 기능을 평가하지 않으면 환상으로 빠질 위험이 다분히 있다. 현대 정신분석학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사람을 아들로 말하는 ‘아버지와 아들’ 형상을 심히 비판한다. 인간 욕구 충족을 위한 투사(投射)로서의 ‘아버지와 아들’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은 자녀가 어렸을 때 받았던 아버지의 보호에 대한 욕구가 잠재의식 안에 작용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삼위일체에서 언급되는 ‘아버지’는 인간 욕구를 투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신앙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말할 때는 미성숙한 아들의 부족, 연약함, 죽음 등 아들 앞에 닥친 장애와 한계를 극복하게 해주는 환상적 존재로서의 아버지를 의미하지 않는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 2. 아버지의 베푸심을 실천하는 아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인간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스스로를 완성시키지 않는다. 인간은 자기 앞에 주어진 어려움을 극복하는 각고(刻苦)의 과정을 거치면서 스스로를 성취한다. 그 각고는 때때로 죽음과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인간이 어느 수준의 자율성에 도달하는 것은 결별을 겪고 상처 받는 과정을 거쳐서 되는 일이다. 어머니의 품속과 결별하고, 부모의 사랑을 다른 형제자매들과 공유해야 하는 상처를 입고, 포기의 과정을 체험하고, 아버지 혹은 어머니의 전능함에 대한 환상을 버리면서, 인간은 어느 수준의 자율성에 도달한다. 타인은 지나친 나의 욕구를 버리도록 강요하는 존재이다. 따라서 타인은 상처로 다가온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자기 생명을 잃을 것에 동의하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고, 다른 사람과 함께 사는 생명을 얻는 사람이다. 십자가에 임하는 예수의 자세에서 우리를 위한 하느님 아버지의 의미를 알아들어야 한다. 하느님이 아버지이신 것은 우리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데 필요한 미봉책(彌縫策)이기 때문이 아니다. 자녀는 아버지가 준 생명을 산다. 아버지는 베푸는 존재이다. 그렇다면 자녀도 형제들에게 베풀고 나누면서 아버지의 생명을 제대로 산다고 말하겠다. 아들이 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버지의 생명을 살기 때문이다. 복음서는 탈란트의 비유(마태 25,14-30)에서 말한다. 다섯 탈란트와 두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각각 그것을 베풀어서 활용하였다. 그들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받은 것을 간직하지 않았다. 그러나 한 탈란트를 받은 사람은 자기의 미래를 위해 안전하게 보존하려고 땅을 파고 그것을 묻었다. 그것은 탈란트를 베푸신 분의 생명을 사는 길이 아니었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Editor.do?blogid=0C9Vs&amp;mode=NM#FOOTNOTE5&quot;&gt;&lt;SUP&gt;&lt;FONT color=#0000ff&gt;5)&lt;/FONT&gt;&lt;/SUP&gt;&lt;/A&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 3. 아버지 행세를 하지 않는 아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는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 주는 분이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14,9). 그러나 예수는 자기 스스로 아버지 행세를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아버지의 뜻이 소중하였다. 그래서 그는 끝까지 아들이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의 입을 빌려 성령을 “다른 협조자”(14,16)라고 말한다. 예수도 성령도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게 하는 협조자라는 말이다. 예수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섬기는 자”(마르 10,45)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사람들 앞에 스스로를 높이거나 하느님을 후광으로 삼아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스스로를 사람들 앞에 높이는 호칭이나 사람들이 자기를 우러러 보게 하는 복장을 할 수 없다. 그것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인간의 자세가 아니다. 섬기는 사람은 아버지 행세를 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 살아 있는 순종이라는 단어는 흔히 아버지 자리를 찬탈하여 스스로 아버지 행세를 하는 사람들을 양산하고 있다. ‘랍비’, ‘아버지’, ‘스승’이라는 호칭도 쓰지 말라고 마태오복음서(23,8-10)는 말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 성령&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 1. 아버지의 생명을 확산시키는 성령&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령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있는 회로(回路)를 숨결 또는 영(靈)이라는 형상으로 깨어서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을 확산한다. 성서가 사용하는 영이라는 단어는 바람 혹은 숨결을 의미한다. 신약성서는 하느님의 뜻에 인간 욕구를 개방하는 것을 성령이 하시는 일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자기중심의 가상(假想)적 자세를 버리고 하느님의 베푸심을 실천하는 상징적 구조로 이동할 때, 성령이 일하신다는 뜻이다. “그대들이 악해도 자녀에게 좋은 선물을 줄 줄 알진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청하는 이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습니까!”(루가 11,13). 신약성서는 성령을 힘, 자유, 사랑 혹은 친교라고 말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 2. 차이를 만들어 친교를 이루는 성령&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바울로는 신령한 언어에 심취한 고린토교회의 사람들에게 만일 그 모임에 그 언어를 해석하거나 통역할 사람이 없으면, 이상한 언어로 말하지 말라고 충고한다(1고린 14,1-20).&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Editor.do?blogid=0C9Vs&amp;mode=NM#FOOTNOTE6&quot;&gt;&lt;SUP&gt;&lt;FONT color=#0000ff&gt;6)&lt;/FONT&gt;&lt;/SUP&gt;&lt;/A&gt; “예언하는 이는 세우고 타이르고 격려하는 말을 합니다.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 이는 자신을 세우지만 예언하는 이는 교회를 세웁니다.”(14,3-4). “집회에서는 신령한 언어로 만 마디 말을 하느니 다섯 마디라도 내 정신으로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14,19). “신령한 언어는 믿는 이들을 위한 표징이 아니라 안 믿는 이들을 위한 표징입니다.”(14,22).&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령을 기원으로 한 말은 친교를 이룬다. 성령은 인간이 자기 안에 폐쇄되고 배타적이 되게 하지 않는다. 인간은 서로 다르다. 그래서 인간 상호간에는 의사소통의 풍요로움이 있다. 서로의 차이가 없으면 의사소통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 모두 같은 키를 가졌다고 상상해 보자. ‘키가 크다’ 혹은 ‘키가 작다’는 메시지는 발생하지 않는다. 성령은 의사소통의 근거가 되는 차이들을 만들고 그 차이를 풍요로움으로 보게 하면서 사랑으로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 3. 실재(實在)를 보게 하시는 성령&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령은 또한 기쁨의 원천이시다. 아버지에 대해 가상적 인식에 머무는 사람은 자기 자신만이 소중하기에 세상과 이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이런 사람에게 세상과 이웃은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가상적 욕구를 벗어나지 못하고 그 안에 머무는 사람은 계속 불만하고 낙담하면서 산다. 성령은 타인과 세상을 있는 그대로 그 상징성 안에서 보게 해 주기에 기쁨의 원천이다. 성령은 세상과 타인을 그 차이와 아름다움 안에, 그 한계와 불행을 지니고 우리 앞에 자유롭게 있도록 하신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실재를 보게 하신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 4. 자녀의 자세를 갖게 하는 성령&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는 예언자적 사명을 받아들여 하느님에 대해 말하며 투쟁하였지만, 죽음에 이르기까지 반대를 당한 아들이었다. 예수는 그런 현실을 거부하지도 않았고, 자기가 한 선택의 결과를 피하기 위해 기적으로 구해달라고 아버지에게 요구하지도 않았다. 바울로가 채집한 초기교회의 노래는 예수가 하느님과의 관계를 하나의 노획물로 삼지 않았다고 말한다. 아버지 앞에 가상적 자세를 갖지 않았다는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8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8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노획물로 여기지 않으시고, 도리어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으니, 사람들과 비슷하게 되시어, 여느 사람처럼 드러나셨도다.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까지, 십자가의 죽음에까지 순종하셨도다.”(필립 2,6-8).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는 자기 자신과 뜻을 달리하는 아버지를 받아들였다. 예수는 자기의 욕구가 지닌 논리를 아버지에게 강요하지 않고, 자기 존재가 내포한 연약함과 죽음까지도 수용하였다.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36). “내가 말한 모든 것을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 주실”(요한 14,26) 협조자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이런 자녀 된 자세를 갖게 하신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나오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일체라는 단어가 먼저 있었던 것이 아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고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라는 세 개의 형상이 있으면서 그 형상들에 대한 합리성의 추구가 삼위일체라는 단어를 발생시켰다. 따라서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사실에 마음을 빼앗길 것이 아니라, 세 분으로 거명되지만, 아버지이신 하느님이고, 그 하느님의 생명을 살아보여 주신 예수님이며,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시는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라는 사실을 설명해야 할 것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하느님이 아버지로 불리는 것은 그분은 그냥 계시는 분이 아니라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베푸는 분으로 계신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그분의 생명을 실천하며 살겠다는 고백이기도 하다. 하느님의 완전하심은 하느님이 자기도취적이거나 자족(自足)적 성격의 소유자라는 말이 아니다. 성령이라는 형상은 하느님이 당신 자신과 다른 것과도 친교 하신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령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성령은 하느님이 당신 피조물인 타(他)를 향해 하시는 탈아(脫我 extasis)를 지칭하는 형상이다. 예수가 성령으로 잉태되고(루가 1,35), 세례에서 성령을 받으시고(3,22), 성령으로 가득 차서 공생활을 시작하는 것(4,1)은 예수 안에 하느님이 충만히 현존하셨다는 사실을 말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적 상징 구조는 하느님이 개방이고, 의사전달이며, 생명과 나눔의 원천이라는 것을 말한다. 하느님은 무엇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 스스로 친교이기에 당신과 상이한 것들을 발생시킨다. 따라서 창조, 강생, 성령강림 등, 하느님이 우리 역사 안에 하신 일들은 하느님이 어떤 베푸심이고 어떤 사랑이신지를 말한다. 하느님은 친교 안에서 다른 것이 되어주는 생명이다. 하느님은 당신과 다른 피조물들을 창조하고 그것들 안에 계신다. 그 현상을 우리는 성령이라 부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삼위일체를 믿는 교회라면 아버지이신 하느님 앞에 섬기는 자녀로 살아야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 안에서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알아듣고 그 자녀 되는 길을 배우며, 그 자녀의 실천 안에 하느님의 숨결이신 성령이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존중하며 신앙인들 안에 자녀의 다양한 삶이 발생하게 도울 것이다. ◆&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amp;nbsp;그 시대 지성인들은 플라톤 사상으로 사고하였다. 그 사상에 의하면 실체는 우연(偶然)에 대립되는 순수 인식의 원리이다. 우연은 그 사물의 질, 형태, 양, 장소, 시간, 능동, 수동 등을 의미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amp;nbsp;그 시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에서 플라톤의 철학을 가르치던 플로티누스(Plotinus, 203-270)는 중기 플라톤 철학자로서 유출(emanatio)에 의한 창조를&amp;nbsp;가르쳤다. 순수 정신인 제일자(第一者)에서 모든 사물이 유출(流出)되었다는 것이다. 그 설에 의하면 유출은 곧 격하(格下)를 의미한다. 따라서 유출된 것은 유출하는 존재를 반영하지 못한다. 하느님에서 유출된 아들인 예수는 하느님을 반영&amp;nbsp;하지 못한다. 따라서 아버지 다르고 아들 다르다는 아리우스의 이 설(異說)이 발생한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amp;nbsp;&#65378;가톨릭 교회 교리서&#65379;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94, 제1편 94-105 참조.&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윤형중, &#65378;상해 천주교 요리&#65379;(상), 가톨릭출판사 1990, 80-94 참조.&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amp;nbsp;상징성을 살린다는 것은 상징이 열어주는 세계에 들어가서 그 세계가 가진 질서를 살려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 때 주고받은 반지는 상징성을 지닌다. 그 반지를 보면 그 반지를 교환하면서 약속한 결혼이라는 세계가 열린다. 그러나 그&amp;nbsp;상징이 열어주는 세계를 보지 못하고 이기적으로 접근할 수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가상적(假想的) 접근이라 부른다. 결혼반지의 예에서 그 반지가 상기시키는&amp;nbsp;약속을 생각하지 않고 그 반지의 금전적 가치만 생각하는 접근을 의미한다. 상징성을 살리면 주인공은 수고를 하지만 그 상징이 열어주는 풍요로운 세상에서 살고 가상성만 살리면 주인공은 수고를 하지 않지만 인간 삶의 고귀한 부분을 잃는다.&amp;nbsp;&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5)&amp;nbsp;마태오복음 25장이 ‘탈란트의 비유’ 다음에 계속하여 ‘최후심판의 비유’를 이야기 하는 저의를 알아들어야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000000; LINE-HEIGHT: 1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amp;nbsp;심령기도를 하는 성령운동은 1920년대에 미국 개신교 일각에서 발생한 신심행위이다. 사도행전(2,4-11)에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자기들 언어로 말을 하고 듣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고장의 언어로 알아들었다는 것은 문화와 언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은 심령기도를 말하지 않는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9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3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lt;/P&gt;&lt;/SPAN&gt;
	    </content>
	    	</entry>
    	<entry>
	    <title>교회가 설립 경영하는 교육기관의 정체성</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kosesye/5148667"/>
		<id>tag:blog.daum.net,2009:kosesye.5148667</id>
	    <author>
		    <name>서공석</name>
	    </author>
	    <updated>2006-08-31T11:16:01Z</updated>
	    <published>2006-08-31T11:16:0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 &lt;/P&gt;
&lt;P&gt;&amp;nbsp;&lt;FONT color=#013add&gt;이 글의 원본(HWP)은 &lt;/FONT&gt;&lt;A href=&quot;http://blog.naver.com/kosesye&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13add&gt;http://blog.naver.com/kosesye&lt;/FONT&gt;&lt;/A&gt;&lt;FONT color=#013add&gt; 에 게재되어 있습니다.&lt;/FONT&gt;&lt;/P&gt;
&lt;P&gt;&lt;FONT color=#d15502&gt;&amp;nbsp;&lt;/FONT&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8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교육기관의 정체성&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徐&amp;nbsp; 公&amp;nbsp; 錫&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0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들어가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한국에서는 종교단체들이 사학재단을 설립하여 교육 기관들을 운영하고 있다. 정부의 교육 평준화 시책에 따라 그 교육기관들의 정체성은 희석되었고, 그 설립 이념마저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고 있다. 교육 이념이 있어서 설립된 사립학교들이 공립학교에 준한 것이 되었다. 교육부는 사학 교육 기관들의 특징을 살려서 교육의 다양성을 추구하지 못하고, 교육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소신도 없이 통제만 하고 있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1&quot;&gt;&lt;SUP&gt;1)&lt;/SUP&gt;&lt;/A&gt; 따라서 우리나라 사립 교육기관들은 그 설립 이념마저 정립할 필요성을 자각하지 못한다. 교육 평준화 정책 이전에도 문제들은 있었다. 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교육기관들이 그 교회의 교세 확장 내지 과시를 위한 것인 양 운영되었다. 그리고 교단 혹은 재단 사람들의 개입과 그들이 발생시키는 불협화음과 부정(不正)으로 그 기관의 질서와 자율성이 훼손되어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사례도 왕왕 있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 교회들이 설립 운영하는 교육 기관들의 정체성과 그 이념 그리고 그 교육기관들 안에서 실제 교육에 임하는 교육자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들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 종교와 신앙&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종교와 신앙은 흔히 동의어로도 사용되지만, 오늘 우리는 편의상 구별하여 사용한다. 종교라는 단어로 우리는 하나의 신앙을 위하여 발생하여 그 신앙을 시공(時空) 안에 지속시키는 역할을 하는 공동체와 그것이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요구하는 모든 언어&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2&quot;&gt;&lt;SUP&gt;2)&lt;/SUP&gt;&lt;/A&gt;를 의미한다. 종교에는 다음 세 가지의 구성 요소가 있다. 경전(經典)과 의례(儀禮)와 공동체(共同體)이다. 경전은 그 특정 신앙을 위해 잣대가 되는 신앙체험들을 수록한 문서들이다. 의례는 신앙체험을 발생시키는 다양한 예배 행위들을 의미한다. 공동체는 그 종교 구성원들의 조직체를 뜻한다. 조직체이기에 거기에는 법과 제도가 있고 구성원들 간의 역할 분담이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신앙이라는 단어로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그 신앙 창시자의 깨달음과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류역사 안에 발생한 구원에 대한 자각과 실천이다. 구원은 신앙의 창시자가 더 큰 생명과 더 큰 자유를 위한 도약의 수단으로 인류에게 신앙을 제시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구원은 인간 생명을 긍정하면서 인류에게 개방적이고 희망적인 체험을 발생시키는 현상을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모세가 한 체험이고, 불교의 창시자 고타마 싯달다가 한 체험이며, 그리스도 신앙을 발생시킨 예수의 체험이다. 모세의 체험을 역사 안에 보존하고 전달하기 위해 발생한 유대교라는 종교였고, 고타마 싯달다가 깨달은 바를 역사 안에 존속시키는 것이 불교이며, 예수의 가르침과 실천을 시간과 공간 안에 전달하기 위해 있는 그리스도교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 창시자의 체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그들이 그 체험을 기록하여 경전으로 남겼다. 공동체는 같은 체험을 사람들 안에 재현시키는 의례를 만들어 실행한다. 종교들은 이렇게 발생하였다. 종교는 시간과 공간 안에서 신앙을 보급 존속시킨다. 종교는 그 안에 담겨있는 신앙 혹은 구원의 언어를 그것이 발생한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사람들에게 전달한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3&quot;&gt;&lt;SUP&gt;3)&lt;/SUP&gt;&lt;/A&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종교는 인간 공동체가 만든 것이기에, 시대적, 문화적 한계를 지녔다. 종교가 그 한계를 무시하고 과거 한 시대의 것을 절대화하여 강요하면, 그 종교는 근본주의에 빠지고 신앙은 왜곡된다. 종교가 문화적 한계를 외면하고 과거 한 시대, 한 지역의 문화에서 얻은 것을 절대화하면, 그 종교는 식민주의적 독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종교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문화를 만나면서, 그 본연의 사명, 곧 신앙 언어로 말미암은 구원의 체험을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야 한다. 교황 요한 23세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4)를 소집하면서 교회의 급선무는 aggionamento 라고 말하였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1. 종교의 역기능(逆機能)&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종교는 인간의 공동체를 구성요소로 하고 있기에, 인류역사가 소중히 생각하는 원리와 질서가 그 안에서도 작동한다. 따라서 종교는 신앙이 마치 그런 원리와 인류의 염원을 달성하기 위해 있는 듯이, 신앙 언어 자체를 왜곡할 수 있다. 종교가 많은 사람의 호응을 얻기 위해 흔히 하는 일이다. 종교들의 기복(祈福)적 위장(僞裝)이며, 아세곡학(阿世曲學)의 현상이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4&quot;&gt;&lt;SUP&gt;4)&lt;/SUP&gt;&lt;/A&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인류역사 안에 당연시 되는 원리들과 그것들이 만드는 질서를 의미하는 언어들을 예로 들어보자. 인과응보(因果應報), 사필귀정(事必歸正), 명철보신(明哲保身), 입신양명(立身揚名), 부귀영화(富貴榮華), 다다익선(多多益善), 약육강식(弱肉强食) 등을 나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신앙 언어는 그런 인간의 염원을 담은 원리와 질서에서 인간이 자유로워질 것을 가르친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가 구원으로 제시하는 것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자각과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겠다는 마음이다. 이 자각과 마음가짐은 자비, 헌신, 섬김, 청빈, 연민, 배려 및 사랑, 스스로 작은 자가 되는 것, 등의 실천으로 나타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종교가 신앙 언어를 반영하지 못하면, 하느님의 뜻을 인과응보 혹은 사필귀정의 실현에 있는 것으로 왜곡 제시할 수 있다. 인류가 만든 원리들과 질서를 성취해 주는 하느님이라고 왜곡하는 것이다. 실제로는 종교 공동체 안에서 명철보신과 입신양명을 추구하면서, 그것을 헌신과 섬김이라고 위장할 수도 있다. 하느님께 기도를 잘 하면, 얻을 수 있는 입신양명이고 재물인 양, 사람들을 오도할 수도 있다.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약육강식이 자행되고, 인간 안에 내재하는 미움과 복수심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포장하여 실천하는 현상을 종교 공동체들 안에서 우리는 본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2. 유대교와 예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는 유대교 문화권에서 태어났고 그 풍토에서 살았다. 그러나 예수는 유대교의 관행을 비판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예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면서 하느님은 그 함께 계심에서 인간을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그것이 그의 설교 주제인 하느님의 나라이다. 그는 유대교가 하느님이 버렸다고 가르치던 사람들, 곧 죄인들, 세리들, 병자들과 어울렸다. 예수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어울려 음식을 먹는 사람”(마르 2,16), “정신 나간 사람”(마르 3,21)이며,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마태 11,19)라고 유대교 기득권자들로부터 평가받았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5&quot;&gt;&lt;SUP&gt;5)&lt;/SUP&gt;&lt;/A&gt; 예수는 하느님의 사랑은 아무도 제외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수는 병 고침과 구마(驅魔)로써 하느님이 사람을 벌하시지 않는다고 가르쳤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6&quot;&gt;&lt;SUP&gt;6)&lt;/SUP&gt;&lt;/A&gt; 이것은 유대교의 가르침에 반대되는 입장이다. 하느님이 죄인들을 버린다고 믿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세 가지 비유 이야기를 하였다고 루가복음서(15장)는 전한다. 이 비유들 안에 나타나는 ‘한 마리의 양도 잃지 않으려는 목자’, ‘은전 한 푼을 잃고 기어이 그것을 찾아내는 여인’, 및 ‘자기를 버리고 집을 떠나가 탕아가 되어, 배가 고파서 아버지의 집을 찾아오는 아들을 맞이하여 포옹하며 기뻐하는 아버지’는 사람과 함께 계시고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표현한다. 예수는 유대교를 비난하였다. “너희의 아버지는 시초부터 살인자다.”(요한 8,43). 하느님의 이름으로 사람을 죽이는 종교라는 말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유대교가 절대적인 것으로 내세우는 안식일과 율법을 예수는 자주 범한 것으로 보인다. 예수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생겼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생기지 않았다.”(마르 2,27)고 말한다. 안식일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체험하기 위해 유보된 날이다. 그러나 유대교는 그것을 하느님이 인간을 미워하고 보복하는 기회로 만들었다. 유대교에 대한 예수의 비판은 유대교가 그 창시자인 모세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 언어를 전달하지 못하고, 인간의 복수심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실현하는 기회로 삼았다는 데에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수는 금욕, 고행, 은둔, 출가 등 종교들이 흔히 권장하는 바를 따르지 않았고 사람들과 어울려서 함께 살았다. 그는 세상에 대해 개방적이었다. 그는 유대인들이 경멸하던 사마리아 사람과 이교도들에 대해서도 배타적이 아니었다. 예수는 정통 신앙을 정확하게 고백하기 위해 노력도 하지 않았고, 의례에 참여하고 종교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예수는 여인들에 대해서도 그 시대 사람들과 달리 개방적이었다(루가 8,2-3 참조). 예수는 병자와 죄인들도 하느님이 버리지 않으신다고 가르쳤고, 변두리 인생들과 함께 어울렸지만, 부자들이나 권력자들을 미워한 흔적도 없다. 예수는 어떤 조직적 계획이나 전략에 따라 활동하지도 않았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고, 그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하기 위해 헌신하며, 자기 스스로 작은 자, 곧 섬기는 자로 살았다(마르 10,45 참조). 그는 어떤 깨달음이 있을 때마다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고증되는 예수의 모습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 과거의 세상&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 언어가 발생한 것은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팔레스티나에서였다. 종교 공동체로 발족한 교회는 2세기부터 그리스 철학의 언어를 빌려 신앙을 표현한다. 교부시대(敎父時代)라고 불리는 시기에 일어난 일이다. 로마제국을 계승한 중세 유럽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근본으로 한 사회였다. 교부시대의 철학 언어들이 그대로 통용되던 사회였다. 물리학(physica) 위에 형이상학(metaphysica)인 철학이 있고, 그 철학 위에 신학이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이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侍女)였다. 세상 위에 종교가 있다는 사실이 당연시되던 시대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교회는 유럽 중세 사회의 형성과 조직 및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교회와 사회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았고, 하나의 종교인 그리스도교와 그리스도 신앙을 구별하여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구원의 유일한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있고, 박멸의 대상인 미신(迷信)들이 있을 뿐이었다. 신앙은 그리스도교에 입문하는 것이고, 구원은 그 입문의 결과로 얻어지는 것이었다. 물론 구원에 대한 이해는 시대에 따라 달랐다. 게르만족의 유럽 내 이주와 정착의 혼란 시기를 겪으면서 그 사회 안에서 문화적 수준을 지니고 조직의 힘을 발휘하는 집단은 오로지 교회밖에 없었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7&quot;&gt;&lt;SUP&gt;7)&lt;/SUP&gt;&lt;/A&gt; 유럽 중세 사회에서 종교와 신앙은 당연히 하나로 밀착되어 보였다. ‘교회 밖에 구원 없다’는 격언은 교조(敎條)적인 표현이 아니라, 초기 유럽 중세 사람들의 실제적 체험이기도 하였다. 교회 밖에는 문화적인 것이 전혀 없는 유럽 중세 사회였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 오늘의 세상&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0세기 후반에 들어오면서 종교 언어의 쇄신이 문제로 떠올랐다. 18세기부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류는 합리주의적 사고를 알게 되었다.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실존주의와 더불어 그리스 철학적 사고를 탈피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과학은 자연 현상의 과정(過程)을 관찰하고 그 관찰의 결과를 응용하여 인류가 당면한 문제들을 해결한다. 그런 자연과학적 사고가 일반화되면서 인문과학은 과정, 곧 역사를 소중히 생각하는 풍토가 되었다. 역사 비평적 풍토이다. 역사를 무시한 언어는 통용되지 않는 세상이다. 종교가 역사 안에 발생시킨 명제(命題)들도 역사 비평적 과정을 거쳐야 하는 오늘의 세상이다. 현대인은 그 명제가 발생한 과정을 이해하지 못하면, 그것을 믿지 않는다. 이제는 하나의 명제가 발생하여 종교적 언어가 된 과정을 제시하고, 그것이 어떤 신앙 체험을 담고 있는 종교 언어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를 믿으라고 말해서 신앙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런 언어를 교회가 택하여 사용하게 된 과정을 설명하면서 그 언어가 신앙 체험의 어떤 왜곡을 차단하고, 어떤 체험을 보호하기 위해 사용되었는지를 제시해야 한다.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도 그 언어가 발생한 역사적 과정을 설명해야 한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불렀지만, 유대인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라고 생각하던 유대교 문화권이었다. 예수는 하느님에 대해 자기가 가르친 대로 실천하였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예수가 하느님의 생명을 살았다는 뜻으로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렀다. 다른 사람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하느님의 생명을 철저하게 실천하며 살았다는 의미에서 예수를 하느님의 유일한 아들이라 불렀다. 마태오복음서(16,18)를 근거로 예수가 직접 세운 교회라고 과거에는 말하였지만, 오늘은 “역사적으로 볼 때 평소에 예수께서 교회 설립 계획을 세우신 바 없다는 것이 신약학계의 통설이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8&quot;&gt;&lt;SUP&gt;8)&lt;/SUP&gt;&lt;/A&gt; 다른 복음서들은 예수가 교회를 설립하였다는 사실에 대해 침묵 지킨다. 교회 설립과 같이 중요한 사건을 복음서들이 언급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마태오복음서는 시리아 공동체에서 기록된 것이고 그 공동체는 베드로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보인다.(예를 들면, 마태 14,28-32 // 마르 6,45-52 // 요한 6,16-21 참조). 따라서 마태오복음서 공동체에 베드로는 사도들을 대신하는 이름이다. 사도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교회라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대인은 민주적 사고를 한다. 사람들이 같은 집단 안에서 각자가 하는 역할은 달라도, 인간의 존엄성에 있어서는 동등하다는 사실을 공감하는 현대인이다. 이제는 하느님의 뜻을 끌어들여 인간의 우열을 말하지 못한다. 더구나 다른 사람들과 복장까지 달리하여 자기 신분의 우월성을 나타내겠다는 것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이다. 민주적 사고가 추구하고 긍정하는 바는 인간의 자유이다. 인간은 자유롭게 그 사회에 기여하면서 자기 품위를 유지한다. 따라서 그리스도교가 과거에 만들었던 인간 품위의 서열은 그 권위를 잃었다. 과거 유럽 중세에서는 기도하는 계층, 전투하는 계층, 그리고 노동하는 계층의 구별과 차별이 뚜렷하였다. 같은 계층 안에서도 여러 서열이 있었고 그것은 당연히 복장으로 표현되었다. 그 시대에 복장은 인간의 신분적 품위와 실효성을 나타내는 수단이었다. 오늘은 신분을 내세워 남의 자유를 제한하면서, 그것이 그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순종(順從)이라는 단어를 아직도 남용하는 교회 공동체들 안에서 인간 자유의 존엄성은 훼손되고, 구성원들의 실효성과 공동체의 수준은 저하되어 간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끝으로 현대 정보매체의 발달이 갖다 준 사고방식의 변화를 고려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정보의 수신(受信)자이면서 동시에 발신(發信)자이다. IT 산업이 없던 과거 사회에서 상상하지 못하던 일이다. 우리는 타인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신속하게 받고 또한 많은 정보를 타인에게 전달하면서 산다. 따라서 정보 앞에 독선적 자세를 취하는 권위는 그 인간의 실효성을 떨어트리고 결국은 인간을 자멸하게 한다. 오늘은 자기 자신과 다른 타인(他人)이 있다는 것은 지배하거나 말살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로부터 얻을 정보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 자신이 살고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타인이다. 이제 타종교에 대한 관용(寬容)을 말할 시기는 지나갔다. 종교 다원(多元) 사회 안에서 타종교를 존중하고 그로부터도 정보를 받아, 자기가 속하는 종교의 언어를 비판하고 신앙과 구원에 대해 더 깊은 이해와 실천을 도모해야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 요구되는 종교 언어의 쇄신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런 시대적 여건에서 종교 언어의 쇄신은 시급한 현안으로 부각되고 있다. 그런 쇄신의 노력은 과거 그리스 철학에 물든 중세 언어를 신앙 언어 그 자체라고 믿는 이들로부터 많은 반발을 받고 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유럽 교회가 황폐화된 현상과 한국 사회에서도 젊은이들과 지성인들이 점차 교회를 이탈하는 현상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종교 언어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 사람은 적다. 많은 사람들에게 종교와 신앙은 아직도 하나로 보인다. 그들은 종교 언어의 변화를 곧 신앙의 왜곡이라 생각하며, 현대인의 “물질주의, 편의주의, 쾌락주의, 배금주의 및 신자들의 선교의식 결여”등만 비난한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9&quot;&gt;&lt;SUP&gt;9)&lt;/SUP&gt;&lt;/A&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오늘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세계를 하나의 촌락과 같이 만들었다. 그리스도 신앙인이라고 해서 타종교를 외면하고 살 수 없는 다종교(多宗敎) 문화권의 세상이다. 이런 사회에서 중세 유럽과 같이 종교와 신앙을 동일시하여, 구원을 특정 종교와 연결하여 주장하면, 그것은 독선이고 그리스도 신앙적 자세도 아니다. 구원은 인류역사 안에 주어진 것이고 그것을 깨달은 신앙의 창시자들이었다. 창시자들의 언어가 서로 다르고, 그 언어를 근거로 발생한 종교 언어들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는 것은 문화권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의 종교가 인간 구원을 독점한 것이 아니다. 인류역사 안에 주어진 구원을 깨닫고, 그것을 언어화한 창시자의 뒤를 이어 새로운 시대와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새로운 언어를 발생시켜야 하는 종교 공동체들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특정의 종교와 구원을 한데 묶어서 종교와 구원을 동일시하면, 비구원적 배타성이 나타난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10&quot;&gt;&lt;SUP&gt;10)&lt;/SUP&gt;&lt;/A&gt; 종교의 경전과 의례는 신앙 체험을 전달하기 위한 시대적 산물이다. 시대성을 외면하면, 종교 언어 안에서 체험할 수 있는 구원은 사라지고 권위주의적이고 기복적인 언어와 의례로 전락한다. 경전을 절대화하면 축자영감(逐字靈感)설과 같은 근본주의가 발생하고, 휴거(携擧)와 같은 비그리스도적 환상이 나나타난다. 초기 교회는 근본주의적이 아니었다. “문자는 죽이지만 영은 살린다.”(2고린 3,6)라고 바울로 사도는 쓰고 있다. 신앙 언어를 전달하지 못하는 종교 언어는 사람을 죽이고 신앙은 살린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성서에 대한 근본주의적 접근은 신앙이 요구하는 인간 자유를 은폐하고 배타성으로 무장한 기복적 신앙인을 양산한다. 비구원적 효과이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11&quot;&gt;&lt;SUP&gt;11)&lt;/SUP&gt;&lt;/A&gt; 종교 의례를 절대화하면 신앙은 일련의 의례에 참여하고 구원을 얻는 데 있는 양, 사람들을 착각하게 하고, 신앙을 일상생활에서 분리하여 자비와 사랑과 같은 신앙의 근본적 실천을 삶에서 추방한다.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었다. 예수는 기복적 신앙을 가르치지도 않았고, 후기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던 묵시문학 전승도 외면하였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12&quot;&gt;&lt;SUP&gt;12)&lt;/SUP&gt;&lt;/A&gt; 종말의 “때가 언제 올지 모른다.”(마르 13,33)고 말하였다. 논어(論語 11,12)의 미지생(未知生) 언지사(焉知死)를 연상케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종교 공동체가 신앙 창시자의 깨달음을 희석하고 인간적 염원을 추구하면, 그 종교는 기복(祈福)적 언어에 호소하고, 기득권층이 행세하고 군림하며 신앙의 해방적 기능은 사라진다. 그들은 구원의 시혜자(施惠者)가 되고 그 종교가 담고 있는 신앙 언어는 사라진다. 현대인은 하느님으로 포장된 신분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람을 차별 하시지 않습니다.”(사도 10,34). 초기 교회의 말이다. 사회적 신분이 인간의 실효성을 보장하지 않는 오늘의 세상이다. 따라서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분과 제도는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그런 종교 공동체에서는 사회에서 통용되지 않는 일이 하느님의 뜻으로 포장되어 버젓이 행세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5. 교회가 설립 경영하는 기관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가 설립 운영하는 기관은 모두 인간 생명을 성장시키고, 고치고 살리는 일터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교육과 의료와 복지 기관들이다. 로마제국에는 국가 주도의 교육 제도가 있었다. 그러나 4세기 이후 게르만족의 유럽 내 이주와 정착 후 교육은 온전히 교회의 몫이 되었다. 유럽 중세 사회에서 성직자라는 단어는 교육을 받아서 문자해독이 가능한 자라는 뜻으로 통용되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육과 의료와 복지 분야에서 교회가 하는 노력은 포교(布敎)를 위한 것이 아니다. 교육 그 자체, 의료와 복지 그 자체가 신앙 언어 안에서는 소중하기 때문이다. 교육, 의료와 복지는 종교라는 매체를 통하지 않고 신앙과 구원의 언어를 발생시키고 실천하는 분야이다. 교육과 의료는 생명을 키우고, 살리고 사랑하여 인간을 자유롭게 만드는 인간의 활동 분야이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신앙 언어 안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지향하는 바이다. 그것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교육자와 의료인은 누구나, 그 사람의 종교와 관계없이, 함께 일할 수 있는 현장이다. 종교가 그 분야에서 실효성을 반드시 높여주지 않는다. 그 분야에 일할 자격증과 능력이 있고, 그 일을 위해 정직하게 헌신하겠다는 사람은 교회가 설립한 기관에서 일할 충분한 자격과 사명감을 지녔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 교사&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13&quot;&gt;&lt;SUP&gt;13)&lt;/SUP&gt;&lt;/A&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라는 단어로 교육기관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 초등, 중등과 고등 교육을 구별하지 않고, 교육 지원부서의 인원까지를 포함하여 편의상 모두를 통칭한다. 새 생명 하나가 태어났다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하나 나타난 것이다. 그 새로운 세계를 위해 일하는 교사들이다. 문화적 변천은 빠르고 전통적 가치들이 퇴색해 가는 오늘의 세상이다. 젊은이들에게 가정의 비중은 낮아지고 교육기관들과 정보매체의 비중은 높아져 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과거에 비해 독립된 세계에서 산다. 그들은 현대 통신 매체에 길들여져 있다. 그들의 의사 전달은 일방적이고 신속하며 상대와의 깊은 감정 교류에는 생소하다. 오늘은 새로운 분야들이 많이 생겼고 그것들은 새로운 지식을 요구한다. 기성세대가 알지 못하는 분야들이 많아지고, 그와 동시에 그들의 권위는 과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저하되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학생을 만나고 그들을 대면한다. 그는 과거와 미래를 만나게 하는 사람이다. 그는 가르치는 사람이기에 과거라는 전통을 위해 일하지만, 교육을 받는 사람들이 새 세대이기에 새로움을 위해서도 일한다. 교사는 학생이 자기 주변과 감정 교류를 하면서 언어로 자기 실존의 의미를 표현하게 한다. 그것이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어느 날 학생은 교사가 바랐던 새로운 언어로 말할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1. 학생을 만나는 사람&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현대 문명의 특성 중 하나는 정보와 문화의 분야에서 인간의 신체적 현존이 감소한 것이다.&lt;A href=&quot;http://blog.daum.net/_blog/ArticleRegisterEnter.do?blogid=0C9Vs&amp;cateID=#FOOTNOTE14&quot;&gt;&lt;SUP&gt;14)&lt;/SUP&gt;&lt;/A&gt; 대중 매체에는 정보를 전달하는 사람은 없고, 화면만 있다. 정보매체에서 정보를 받는 사람은 그것을 제공하는 사람과 대화할 수 없다. 그는 제공된 정보를 수용하면서 그 제공자를 비판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만남도 투신도 없다. 정보를 받는 사람은 방관자가 된다. 만남과 투신이 없으면 자비, 사랑, 용서와 같은,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삶의 이야기들이 발생하지 않는다. 정보는 모두에게 제공된 것이고 화면에 나타난 얼굴은 모두가 볼 수는 있어도, 감정적 교감을 하지 못하는 얼굴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가 제자들과 가지는 관계는 그런 만남이 아니다. 교사는 학생과 대면하는 사람이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에게 사람들 사이에서 투신하며 사는 법을 가르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무시, 경멸, 갈등, 방어 및 이용 등은 있다. 그런 현실 앞에서 위축되고 포기하지 않으면서 투신할 수 있는 인간을 키워야 한다. 자기에게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하면서 그러나 참다운 대화를 시도하는 정직하고 용감한 사람과 충분히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해야 한다. 비굴하게 처신하는 비급한 사람이 더 환영을 받는 세상이다. 교사는 자기 마음에 드는 말보다 정직하고 용감한 말을 높이 평가할 줄 알아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전문 분야의 정보만 제공하는 자로 전락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교사가 자신의 역할을 포기하는 것이다. 포기의 동기는 두려움일 수 있다. 자기의 명예와 권위를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사람들에게 알려진 자기의 가면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자기의 한계와 무능력이 노출될 수 있다는 두려움 등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기의 직업에만 충실할 수 있다. 그러나 교사의 경우에는 다르다. 교사는 인간 생명을 키우는 사람이다. 교사의 실망과 포기는 학생들의 생명 안에 큰 공허를 남긴다. 자기가 죽어서 생명이 자란다. “밀알이 땅에 떨어져...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자기 스스로를 잃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학생들 앞에 자기의 한계를 감추려 하지 않고 겸손하게 그들에게 접근해야 한다. 교사는 자기에게도 한계가 있고, 또 역사 안에 살아가기에 참으로 자유롭기 위해 스스로 죽을 줄 안다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한다. 그는 자기가 교육하는 사람들과 동일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야 한다. 목자나 교사는 사람들의 형제가 되어야 한다. 예수는 사람들의 상대가 된 분이고, 죽음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대화 상대가 된 분이다. 그는 참다운 자유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었다. 종교인이든, 비 종교인이든, 교사는 바로 이 신앙 언어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교사는 학생들이 “허리띠를 매어 주고는 그가 원하지 않는 데로 데려가는”(요한 21,18) 사람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2. 전통을 살면서 새로움을 지향하는 사람&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이다. 그는 정보를 주면서 사람을 키운다. 교사와 학생 사이의 교류는 문화가 변하고 언어가 발전하는 장소이다. 전통과 개혁이 서로 만나는 곳이다. 교사는 가르치기 위해 언어를 사용한다. 교사는 오랫동안 사용된 언어를 반복만 하지 않고, 그 언어 안에 담긴 체험을 전달하는 노력을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자기가 가진 지식을 말하되, 학생들의 수준에 맞게 말하는 수고를 한다. 그것으로 교사는 학생들의 이웃이 된다. 이런 방법으로만 교사가 가진 지식은 오늘의 자기 이웃인 학생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교사는 죽은 언어를 전달하지 말아야 한다. 교사는 자기가 가진 것을 전달할 특권과 기쁨을 가진 사람이다. 그는 자기가 전달하는 것이 어떻게 유익한지를 학생들에게 보여 주면서 자기가 전달하는 언어를 살려낸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교사는 자기가 가진 것에서 “새것과 헌것을”(마태 13,52) 가릴 줄 알게 된다. 학생이라는 대상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학생들을 통해서 자기의 사명을 이해한다. 교사는 강의 준비를 하면서 자기가 사용할 언어를 저울질하고 교실에서 대면할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자기가 할 말을 검토한다. 자기가 담당하는 강의가 자연과학 계열이든 인문과학 계열이든 관계없이, 교사는 학생들과 더불어 삶의 공간을 여행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그는 그들과 더불어 문제 제기를 한다. 교사는 이 과정에서 새로운 것을 배우지는 않지만, 자기가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이해한다. 교사는 새롭게 이해한 것을 학생들에게 전달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새롭게 평가하지 않으면, 자기에게 전달된 지식을 사장(死藏)하는 것이다. 새로운 평가 작업을 하지 않는 교사는 자기 지식을 절대화하고 폭군으로 변한다. 자기의 지식을 절대화하면서 교사는 역사 안의 자기 자리를 잃는다. 이런 자세는 전통의 정신에 접근하지 못하고 전통의 문자에 집착하는 것이다. 개혁과 새로움은 전통이 전하는 정신에서 온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새 세대에게 필요한 것은 문제를 재고(再考)하는 겸손하고 성숙한 힘이다. 교사는 현대 사회가 얻은 전통의 열매를 새 세대에게 제공한다. 과거의 체험은 새로운 체험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선행(先行)한 것은 뒤에 일어나는 반응과 반론 안에 살아 있다. 과거는 현재 안에 말없이 살아있다. 발전의 변증법이다. 과거를 외면하고 새로운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는 사람들이 바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 기억 안에 보존된다. 교사는 생성의 신비스런 법칙은 가변성(可變性)이라는 사실을 학생들이 깨닫도록 해야 한다. 과거를 거부하거나 미래를 두려워하는 행위는 바로 이 가변성을 부인하는 것이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3. 가난한 사람&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자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의식하는 그만큼 착각하기도 쉽다. 교사는 학생을 위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사람이 아니다. 학생은 교사가 원하는 대로 성장하지 않는다. 교사는 자기의 능력과 기능에 따라 자기에게 맡겨진 사람을 위해 “적당한 때에 양식을 나누어주는”(루가 12,42) 사람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사는 다른 사람들과의 협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는 학생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또한 동료 교사들의 말도 들을 줄 안다. 흔히 의사소통에 지장을 주는 것은 열등의식이다. 그것은 일종의 병리 현상이다. 교사는 많은 교사들 중의 한 사람이다. 학생들은 교사 모두에게서 배운다. 교사는 학생들의 언어가 더 다양해지고 더 풍요로워 지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현대는 다원 사회이다. 교사는 다원현상을 높이 평가하고 다양함을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은 세상에 다양함을 뿌렸다. 그것이 어떤 분야이든, 한 사람의 삶을 과대평가하고 그것에 큰 비중을 두지 말아야 한다. 영웅이 없는 오늘의 세상이다. 교사는 할 일을 모두 하고 나서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루가 17,10)고 말하면서 물러나는 사람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나오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리스도 신앙인은 미움, 욕심, 교만 등 생명을 부정하는 힘에서 해방되기 위해 노력하며, 자비, 사랑, 섬김 등 생명을 긍정하고 발전시키는 인간 노력의 역사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본다. 그리고 자기 스스로도 같은 노력을 하여 자기의 삶이 의미를 갖게 한다. 그리스도 신앙 언어는 그것을 하느님의 자녀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앙인은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것을 기도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인류역사는 반목, 투쟁, 분열의 단계를 지나 이해, 사랑, 섬김 등이 돋보이는 더 큰 삶을 향해 흐르고 있다. 일찍이 테이야르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1881-1955)이 가설로 제시한 바가 현대 통신 매체의 놀라운 발전과 더불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더 큰 삶을 향한 해방과 더 큰 생명의 실천을 위한 자유는 종교인과 비종교인이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역사적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인간 모습”(출애 33,19 참조)으로 요약되는 생명 현상이다. 교육, 의료, 복지 등은 바로 그런 인류역사의 흐름 한가운데에 발전의 축(軸)과 같이 존재하는 인간의 활동 분야이다. 이 분야에서 일하는 전문 인력은 종교와 관계없이, 함께 대화하고 일할 수 있다. 결정적인 것은 신에 대한 긍정이나 부정이 아니라, 선(善)과 악(惡) 사이, 이해와 반목 사이, 사랑과 미움 사이, 생명과 죽음 사이에 인간이 어느 편에 가담하느냐의 문제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가 설립한 기관에서 일하는 교사나 의료인은 수준 있는 교육과 의료를 공급하기 위해 자기 전문 분야의 첨단 지식에 대한 연구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몸담고 있는 기관들도 그들이 각자 자기 전문 분야에서 자기 개발을 충분히 하도록 독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회가 설립한 교육과 의료 기관은 포교를 목적으로 할 수 없다. 교육과 의료를 찾아 온 사람들에게 양질의 교육과 의료를 공급하는 데는 소홀히 하고, 해당 종교의 교세 확장이나 꾀한다는 것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망각한, 기만의 행위일 것이다. 그런 기관이 포교를 그 목적으로 삼으면, 포교에 일조를 하지 않고 그 기관을 거쳐 가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패작이 되고 말 것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교육 기관에는 교목실이 있고 의료기관에는 원목실이 있다. 그 부서는 일차적으로 그 기관 안에 일하는 구성원들과 학생 혹은 환자들 중 해당 종교를 찾고 종교 활동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타 종교 또는 타 교파에 속하거나 혹은 종교를 갖지 않은 사람들이 소외감을 느끼게 하는 부서가 되지 말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교목실과 원목실은 종교와 교파를 넘어서 신앙 언어가 실현하는 구원의 인간 모습을 찾고, 그 모습을 그 기관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보여 주어, 모두가 공감하고 보람을 느끼며 함께 일할 수 있는 곳이 되게 해야 할 것이다. 인간이 모여서 함께 일하는 곳이기에 나타날 수 있는 불목과 비리와 무질서를 지양하고 그 원인을 배제하는 것도 구원의 인간 모습을 찾는 노력일 것이다. ◆&amp;nbsp;&amp;nbsp;&amp;nbsp;&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amp;nbsp;&lt;/P&gt;
&lt;P style=&quot;FONT-SIZE: 11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5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1pt; COLOR: #000000; LINE-HEIGHT: 22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SPAN class=d_12_6D6765&gt; &lt;/P&gt;
&lt;P&gt;&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손병두 서강대 총장은 교육기관들에 대한 정부의 규제가 심해서 학교들은 체념상태에 있다고 말한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조선일보&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2006.7.11. A9면 참조.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여기서 언어는 그 종교가 발산하고 표현하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경전을 비롯하여 예배의례와 공동체가 지닌 제도 등 그 종교가 발산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모든 것이다.&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종교가 신앙을 사람들에게 실어 나른다는 의미에서 인공위성을 탑재하여 그 궤도에까지 실어 나르는 미사일에다 종교를 비유할 수 있다. 종교가 인간의 삶 안에 신앙을 가동시킨다는 의미에서 소프트웨어를 가동시키는 하드웨어에다 비유할 수 있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4)&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주님의 기도‘를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TEXT-DECORATION: underline&quot;&gt;종교적 언어&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로 해석하면,&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9.5pt; COLOR: #000000; LINE-HEIGHT: 1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5pt; COLOR: #000000; LINE-HEIGHT: 1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지극히 높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하시어, 저희가 그 이름을 흠숭하며, 지엄하신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어,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서 저희가 행복하게 살게 하소서! 저희는 하느님이 주시지 않으면 먹지 못하는 미물이오니 오늘도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기 위해 노력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가 유혹에 빠져서 헤매는 일이 없도록 보살피시고,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악한 일에서 저희를 구하소서.”&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9.5pt; COLOR: #000000; LINE-HEIGHT: 1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같은 기도를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5pt; COLOR: #000000; LINE-HEIGHT: 1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 TEXT-DECORATION: underline&quot;&gt;신앙 언어&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5pt; COLOR: #000000; LINE-HEIGHT: 1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로 해석하면,&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9.5pt; COLOR: #000000; LINE-HEIGHT: 1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희가 아버지의 생명이 하시는 일을 실천하며 살아서 이 세상에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저희의 삶과 실천이 아버지의 나라가 어떤 것이지를 사람들에게 보이게 하시고,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지듯이 땅에 사는 저희를 통해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저희는 일용할 양식을 보아도, 베푸시는 하느님을 생각하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보아도, 저희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합니다. 저희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이 저희 자신만 생각하며 사는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시고, 선하신 하느님에게 등을 돌리고 악한 일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해 주소서.”&amp;nbsp;&amp;nbsp;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9.5pt; COLOR: #000000; LINE-HEIGHT: 1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5)&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그들의 이 평가는 사실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에게 불명예스런 말을 굳이 만들어서 복음서들 안에 기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6)&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마르코복음서는 예수가 중풍병자에게 “그대의 죄는 용서받았다.”(2,5)고 말한 것을 소개하면서 병은 유대교가 주장하듯이 죄에 대한 인과응보로 주어진 벌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예수의 병 고침을 어떤 시각으로 보아야 하는 지를 알린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7)&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자크 르 고프 지음, 최애리 옮김,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중세의 지식인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동문선(1998) 참조.&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8)&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정양모,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마태오 복음서&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분도출판사(1990). 147쪽&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9)&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가톨릭신문&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1996,10,20, 12면, 전교주일특집/각 교구 사목국장에게 듣는다.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0)&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변선환과 홍정수 두 신학자가 타종교에도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다가 그들이 근무하던 감리교 신학대학에서 한 분은 많은 비난을 받다가 세상을 떠났고 한분은 퇴출당하였다. 최근 이찬수 교수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말하다가 강남대학에서 교수 재임용에서 탈락되었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1)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믿고 세례 받는 이는 구원받겠지만 믿지 않는 이는 단죄 받을 것이다.”(마르 16,16). “성령을 받아라, 누구의 죄든지 그대들이 용서해 주면 용서받을 것이요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요한 20). 위의 말씀들을 그 시대 유대인들의 반어(反語)적 화법에서 발생한 언어라는 사실을 무시하고 배타적 의미로 해석하면, 그것은 인류를 위한 비구원적 언어가 된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2)&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X. L&amp;eacute;on-Dufour, &quot;Apparitions du Christ&quot; in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Vocabulaire de Th&amp;eacute;ologie Biblique&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78.&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3)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이 단원의 내용은 어디까지나 필자의 사견이고 함께 반성하고 토의할 자료를 제공하는 것에&amp;nbsp;&amp;nbsp; 불과하다.&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14)&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Michel de Certeau, &quot;Donner la parole&quot;, &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STYLE: italic;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Christus&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n.44. oct. 1964. 438-456 참조.&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EMBED&gt;&lt;/P&gt;&lt;/SPAN&gt;&lt;/SPAN&gt;&lt;/SPAN&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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