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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서양의 유구한 정치역사가 현대 한국사회에 주는 지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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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09-11-25T04:49:1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table&gt;&lt;td style='width:75px;'&gt;&lt;a href='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0137384'&gt;&lt;img src='http://photo-book.daum-img.net/images/nbook/medium/384/m9788970137384.jpg' /&gt;&lt;/a&gt;&lt;/td&gt;&lt;td&gt;&lt;h4&gt;&lt;a href='http://book.daum.net/detail/book.do?bookid=KOR9788970137384'&gt;공화주의&lt;/a&gt;&lt;/h4&gt;&lt;table&gt;&lt;tr&gt;&lt;td&gt;&lt;font color='#ADADAD'&gt;저자&amp;nbsp;&lt;/font&gt;김경희&amp;nbsp;&amp;nbsp;&lt;/td&gt;&lt;/tr&gt;&lt;tr&gt;&lt;td&gt;&lt;font color='#ADADAD'&gt;출판사&amp;nbsp;&lt;/font&gt;책세상&amp;nbsp;&lt;font color='#ADADAD'&gt;&amp;nbsp;&amp;nbsp;발간일&amp;nbsp;&lt;/font&gt;2009.10.05&lt;/td&gt;&lt;tr&gt;&lt;tr&gt;&lt;td&gt;&lt;font color='#ADADAD'&gt;책소개&amp;nbsp;&lt;/font&gt;한국 사회와 현대 세계를 이해하는 데 열쇠가 되는 개념들을 뽑아 그 의미와 역사, 실천적 함의를 해...&lt;/td&gt;&lt;tr&gt;&lt;/table&gt;&lt;/td&gt;&lt;/tr&gt;&lt;/table&gt;&lt;br&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공화주의자였던 마키아벨리가 본 것은 권력은 소유하지 않고 나누어 줄 때 커진다는 것이었다. -98p&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조국은 땅이 아니다. 땅은 그 토대에 불과하다. 조국은 이 토대 위에 건립한 이념이다. 그것은 사랑에 대한 사상이며, 그 땅의 자식들을 하나로 엮어내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이다. 당신의 형제 중 어느 하나라도 투표권이 없이 나라 일에 자신의 의사를 전혀 반영할 수 없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교육받은 자들 사이에서 교육받지 못한 채 고통받고 있는 한, 그리고 어느 한 사람이라도 일할 수 있고 또한 일하고자 하는데도 일자리가 없어 가난 속에서 하는 일 없이 지내야 하는 한, 당신에게 당신이 가져야만 하는 그러한 조국은 없다. 모두의 그리고 모두를 위한 바로 그 조국을 당신은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이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P&gt;&lt;P&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Guiseppe Mazzini(1805~1872)&amp;nbsp; -100p&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lt;/P&gt;&lt;P&gt;책 한 권이 인생을 바꾼다고 했을 때 그 책이란게 반드시 두꺼울 필요는 없으리라. 이 책이 바로 그러한 경우에 딱 들어맞는 케이스다. 140 페이지 정도로 무척 얇은 포켓북 스타일이어서&amp;nbsp;갖고 다니기는 좋으나 정치경제적 기초지식이 없이는 많은 것을 얻어내기 힘들 뿐더러 오히려 그 내용과 사상의 중요성을 간과하기 쉽게 쓰여있다. 그만큼 두께에 비해 상당히 많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는 뜻이다. 초보의 눈에는 초보로 보이겠으나 고수의 눈에는 고수로 보일 수 있는 그런 책이 아닌가 싶다.&amp;nbsp;나 개인적으로는 초중급이라고 생각되어 체계적이고 엄밀하게 비판하긴 힘들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amp;nbsp;최소한 정치체제문제에 관해서는 머리가&amp;nbsp;확~~ 트이는 엄청난 경험을 했기에 하나에서 열을 알아내려는 심정으로 독후감을 써보고자 한다.&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 대한민국에서 권위주의와 민주주의, 좌파와 우파, 보수와 진보, 엘리트와 민중 등등의 대립항이 양립할 수 없는 이유는? 동양문명이 서양문명에 뒤쳐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세계적 수준의 한국 민주주의가 그 실행에서&amp;nbsp;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이유는? 박정희 신드롬에서 보듯 민주주의가 권위주의를 그리워 할 수 밖에 없다면 한국에 민주주의가 유일한 체제로서 존재할 가치가 있는가? 민주주의 선진국인 유럽의 여러 나라들에서 입헌군주와 귀족이 일반 국민들과 공존하는 이유는? 미국, 영국, 일본을 비롯한 여러 선진국들이 양원제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는? 결론적으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amp;nbsp;얻은 가장 큰 수확을 말하자면 이 책을 읽기 전에&amp;nbsp;평소 지녀왔던 위와 같은&amp;nbsp;자질구레한 문제의식들이 일거에 해소되었다는 것이다.&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우선 저자의 약력이 이채롭다. 미국물 먹은 지식인 일색인 출판시장에서 유럽 박사학위를 가지고 서양정치사상과 국가론을 연구하고 있다. 대학강의과목은 '사고의 기초', 정치학자 답지 않은 강의내용이다. 특히나 마키아벨리 전문가인데 '군주론'으로 우리에겐 부정적으로만 알려진 마키아벨리를 집중연구했다는 것이 흥미롭다. 서점에서 이 책을 처음 봤을 때 가장 눈길을 끈 부분 중에 하나였다.&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본론으로 들어가보면, 책은 크게 네 파트로 나뉘어 있다. 1장에서는 공화주의의 대략적 개념과 민주주의와의 필연적 상관관계를, 2장에서는 &amp;nbsp;그리스문명의 초기 단계부터 현대 한나 아렌트의 공화주의 개념까지&amp;nbsp;아우르는 공화주의의 역사를, 3장은 공화주의의 핵심이념인 자유, 법치, 공공선과 시민적 덕성, 혼합정이념을, 4장은 공화주의가 오늘날 대한민국에 주는 시사점과 자유주의의 맹점을 다루고 있다. 그럼 지금부터 책 전체의 세부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해보자.&lt;/P&gt;&lt;P&gt;&amp;nbsp;&lt;/P&gt;&lt;P&gt;&amp;nbsp;1장에서 저자는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과 2항을 분석하면서 공화주의의 특징과 개념을 풀어나간다. 공화국의&amp;nbsp;&amp;nbsp;국민인 '인민'은 주종적 예속관계가 없는 자유인이어야 하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법치가 필요하고, 또 법치를 한다 해도 제도란 것은 결국 사람이 운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부작용을 막기 위해서는 시민적 덕성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늘날 왜 하필 공화주의인가? 그 이유는 군주제이건 자유민주주의체제이건 간에 역사적으로 어떠한 체제적 모순도 공화주의 없이는&amp;nbsp;제거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공화주의 없이는 민주주의의 확산과 공고화가 불가능하며, 민주주의란 물고기는 공화주의라는 물 속에서만 놀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유러피언 드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의 약화를 초래할 수 밖에 없는데, 이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자유주의와 개인주의의 확산으로 인해 권위주의화, 전체주의화&amp;nbsp;되어가는 한국의 민주주의에 공화주의가 오늘날 주는 시사점은 위와 같은 관점에서 볼 때 무척 크다 하겠다. 또한 민주화투쟁 이후의 한국사회는 민주주의에 미숙해서,&amp;nbsp;소모적 갈등구조만을 양산하는 정치과잉과&amp;nbsp;경제위기로 인한 정치적 무관심 사이에서 방황을 하고 있는데, 저자는 이 역시 공화주의만을 통해 해소될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공화주의가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공공선이나 시민적 덕성을 강조하다보니 전체주의로 흐를 위험성이 있다. 그렇다면 공화주의가 이런 함정에 빠지지 않을 방법은? 바로 &quot;혼합정&quot;이 되겠다. 혼합정의 개념은 로마시대의 정치가이자 철학자인 키케로가 처음 제시했는데,&amp;nbsp;&quot;순수 정체&quot;에 대비되는 개념이다. 순수 정체에서는 어느 한 계층만이 지배권을 행사한다. 하나의 왕이 지배하는 군주정, 귀족정, 민중이 지배하는 민주정이 대표적인 예인데, 이런 체제들은 처음에는 잘 나가다가 시간이 흐르면서&amp;nbsp;인민 전체를 위한 정치가 아닌 지배계층만의 이익을 위한 배타적 정치로 부패하기 십상이다. 따라서&amp;nbsp;서로의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배제나 차별 혹은 획일화를 가져오는 주종적 예속관계는 혼합정의 적이다.&amp;nbsp;그렇다면 주종적 예속관계를 만드는 순수 정체를 타파하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정치 참여가 법적으로 보장되어야 가능하다. 따라서 혼합정 이론에서는 법치와 참여가 필수적이 되겠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공화주의는 이념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세력균형을 위한 '운동'의 성격이 짙다.&amp;nbsp;실제로, 서양역사상 어떤 귀족이든 대중이든 생존투쟁에서 세력의 균형이라는 목적을 위해 그리스-로마시대의 공화주의 이념을&amp;nbsp; 되풀이하여 써먹곤 했음이 이를 반증한다. &lt;/P&gt;&lt;P&gt;&amp;nbsp;&lt;/P&gt;&lt;P&gt;2장에서 저자는 이런&amp;nbsp;혼합정 이념이 처음 나타난 그리스 아테네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 발전을 분석한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amp;nbsp;&quot;아테네 민주정의 급진화와 그에 따른 정치적 혼란&quot;이라는 역사적 경험이&amp;nbsp;아테네 혼합정 이념의 발생배경이 되겠다.&amp;nbsp; 그 구체적 역사를 살펴볼 때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솔론'으로 아테네 민주정 발전에 초석을 놓은 인물이다. 아테네 대부분의 토지를 소유한 소수의 부자들이 대다수의 빈자들을 노예로 예속시키며&amp;nbsp;폭정을 휘두르자 부자와 빈자간의 반목이 심해졌고 이런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비상대권을 부여받은 행정장관(Archon)으로 솔론이 뽑힌다. 우선 솔론은 부채탕감과 부채노예의 해방이라는 개혁조치로 부자와 귀족세력을 제어한다. 또한 인민들이 혈연이나 가문 등 귀족적 특권으로 정치에 참여하기보다는 개인의 노력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재산소유에 따른 계층의 차등화조치를 단행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솔론은 사적 권력을 제어하고 공적 권력을 확립해간다. 그러나, 솔론은 가난한 인민들의 과도한 요구 역시 냉정하게 거절하여 민중들의 평등한 토지 재분배 요구를 거부한다. 그는 중재자의 태도를 유지하며 그 어느 누구에게도 독점적 지배권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당화가 끊이질 않자 '클레이스테네스'가 나타나 '행정구역개편'이라는 개혁조치를 단행한다. 혈연과 지연에 기반을 둔 부족중심의 행정구역을 공적인 '500인 협의회'로 재구성하면서 시민들은 폴리스와 연계될 수 있었고 시민으로서 강한 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이에 시민들은 힘을 결집하여 '도편추방제도'를 창설하여 독재자의 출현을 방지한다.&amp;nbsp; 이런 정치체제를 당대 인민들은 isonomia로 불렀다. 이처럼 이소노미아는 전체 인민, 즉 Demos를 위한 정치체제였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아테네가 해상제국으로 발전하였고 이 과정에서 민중의 정치경제적 힘이 거세지면서 Demos는 일부 분파만의 이익을 위해 정치를 하는 대중이라는 뜻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Demokratia, 즉 중우정이라는 용어가 탄생한다. 그 배경을 살펴보자면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강성해진 보병이 마라톤 전투에서 페르시아 군대를 물리쳤고 이 뒤를 이어 살라미스 해전에서 또 한 번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치면서 아테네가 그리스의 맹주로 자리를 잡게 되는데 이 때 아테네는 다른 도시국가들과 델로스 동맹을 맺고 이로 인해 동맹국들의 지원금을 받은 아테네의 해군력은 급속히 증강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해군의 기초적 업무에 복무하게 된 테테스라는 계층의 힘이 커지게 된다.&amp;nbsp;결과적으로 민주화의 바람이 불게 되는데, 이의 영향으로 '에피알테스'란 인물이 개혁을 단행하여 귀족회의인 아레오파고스 회의의 권한이 제한되었다. 귀족들은 아르콘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amp;nbsp;이는 민회와 500인회의의 권한이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으며 테테스 계층은 적극적인 정치참여의 혜택을 누리게 된다. &amp;nbsp;에피알테스 암살 6년 후엔 최상위 계층만 지원할 수 있었던 아르콘 후보에 중간계층도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민주화의 바람은 페리클레스 시기에 절정에 이른다. 페리클레스는 무엇보다 재판에 참여하는 배심원들에게 수당을 지급하여, 특별한 재산이 없는 테테스 계층으로 하여금&amp;nbsp;민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테네는 스파르타와의 전쟁에서 지게 되는데, 이는 민회와 재판소를 장악한 테테스 중심의 데모스가 과도하게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패전의 원인인 시칠리아 원정을 결정하는데 있어 원정을 반대하는 귀족파와 정복을 통해 들어올 공세 수입에 눈이 멀어 원정을 찬성하는 민중파 간의&amp;nbsp;갈등을 그려내고 있다. 아테네의 귀족들은 친스파르타정책을 취했었으나 전쟁이 있어야 먹고 살 수 밖에 없었던 테테스 위주의 민주정은 반스파르타정책을 취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어쨌든 시칠리아 원정 실패로 아테네는 몰락하였고 후대의 많은 사상가들은 그 원인을 민주정과 과두정의 파벌대립으로 보고 해법으로 '혼합 정체론'을 제시한다. 이를 구체적으로 제시한 사람은&amp;nbsp;'아리스토텔레스'이다.&amp;nbsp;행정관 임용에 있어 선출과 추첨의 혼합, 민회나 재판정에 배심원으로 참석할 때 수당과 궐석벌금의 혼합 등은 귀족제와 민주제의 요소를 혼합하려는 시도였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귀족과 민중의 대립에서 균형추 역할을 할 수 있는 중산층의 역할에 주목했다. 귀족과 부자들은 틈만 나면&amp;nbsp;빈자들을 예속하려했고 민중들은 조그만 이익에 눈이 멀어 귀족들에게 쉽게&amp;nbsp;굴종하거나 개혁조치에 흠뻑 젖어 도를 넘는 요구를 하기도 했는데 이러한 양 계층의 과도한 경향을 제어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중산층이었다.&amp;nbsp;&amp;nbsp;이처럼 순수 정체의 폐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연구하는 것이 아테네 사상가들의 과제였다면 거꾸로 이제 막 세계로 진출하는 로마의 사상가들은 현실의 뛰어난 체제를 무엇으로 설명해야 할 지를 고민하게 되는데 그리스 출신의 역사가 '폴리비오스'는 저서 '역사'에서 사상가로서 최초로 로마의 성공요인을 '순환론'과&amp;nbsp; '혼합정론'으로 설명했다. 예를 들어 군주제는 시간이 흐르면서 그 기백을 잃고 참주제로 타락한다. 이를 타파하기 위해 귀족정이 반란을 일으키나 이것도 세월이 흐르면서 과두정으로 전락한다. 결국 다수의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민주정을 세우게 되나, 이것도 시간이 흐르면서 폭민정으로 부패한다. 이처럼 단일 계층이 정권을 독점하면 필연적으로 부패의 악순환이 발생하므로 혼합정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폴리비오스의 관점에서는 로마가 단기간에 도시 국가에서 지중해 제국으로 성장한 것은 군주제, 귀족제, 민주제가 혼합된 정체였기에 가능했다. 집정관, 원로원, 민회 이 세 가지 기구가 서로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는 혼합정은 국내적으로&amp;nbsp;어느 한 기구의 권력독점에서 발생하는 부패와 분열을 사전에 방지했으며 국제적으로는 위기의 시기에 협력과 조화를 통해 인민의 힘을 모아내는 제도로서 기능했다. 이렇게 로마 공화정을 혼합정으로 규정하는 논리는 훗날 키케로의 '국가론'으로 이어진다. 키케로는 민주제, 귀족제, 군주제 각각의 장점을 조합하면서 동시에&amp;nbsp;각각의 단점을 보완할 수 있는 제도로 혼합정을 꼽았다. 민주제에서는 인민의 자유를, 귀족제에서는 명문가의 지혜를, 군주제에서는 군주의 대승적 사랑에 기반한 신속한 정책결정력을 가져와서 혼합정을 통해 결합하면 단순 정체의 불안정성이 극복될&amp;nbsp;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혼합정 이념이 민주정의 폐단을 극복하기 위해 귀족정의 요소를 첨가하는 완화된 민주주의에&amp;nbsp;초점이 맞춰져 있다면, 수월성을 중시하는&amp;nbsp;로마의 공화정 이념은 '지배'가 없는&amp;nbsp;체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따라서 로마의 공화정은 혼합정과는 달리 처음부터 귀족과 민중을 뚜렷이 나누어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에서 권력의 독점화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는? 상호 견제와 균형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행정관은 한 명이 아니라 두 명이 선출되어 서로 비토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서로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의 임기 역시 1년으로 짧게 하여 장기 집권에 따른 부패현상을 방지하도록 하였다. &amp;nbsp;마찬가지로 민회에서 선출된 호민관 역시 원로원과 행정관의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존할 수 있었던 것은 공동선에 대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지배하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공공의 이익담보가 핵심 문제의식이었던 것이다. 키케로가 말하는 공화국은 인민의 일이다. 그리고 이 인민은 아무렇게나 모인 사람들이 아니라 정의와 공동의 이익을 인정하고 동의한 사람들의 모임이다. 다시 말해 공화국은 인민의 공동선을 달성하는 것을 최고 목표로 삼았다. 누가 지배자가 되느냐는 주체의 문제보다는 공화국 자체가 담보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했다. 따라서 인민의 이익을 그리고 공동의 정의와 법을 담보해낼 수 있다면 군주정도 귀족정도, 나아가 민주정도 공화정이 될 수 있는 것인데, 순수 정체들은 불안하므로 혼합정이 가장 좋은 정체라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민주정'과 '공화정'의 문제의식은 뚜렷이 구별된다. 민주정은 민중의 '지배'를 추구하나 공화정은 지배의 부재를 추구한다. 이처럼 로마 혼합정은 권력을 사사화하지 않고 공공화 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고대의 공화주의를 생존의 갈림길에 처한 르네상스 피렌체에서 계승한 사람이 있었으니 니꼴로 마키아벨리가 되겠다. 그는 당시의 도시국가의 정치 상황을 반영해 독특한 공화주의 이론을 발전시킨다. 특히 공동체 내부의 '갈등'을 인정함으로써 통합과 조화만을 강조했던 그 전의 이론들과 차별화를 시도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마키아벨리의 공화주의는 갈등의 최적화를 통해 인민의 힘을 최대로 모아내고자 하는 활력의 공화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마키아벨리는 정치 공동체의 쇠퇴와 몰락이 일어나는 원인이 바로 부패에 있다고 보았고 다시 부패의 원인은 불평등에 있다고 보았다. 불평등한 권력의 소유로 인해 타인을 지배하는 현상이 나타나게 되고, 그것이 정치와 사회를 부패시켜 결국은 공동체의 활력을 빼앗아 고사시킨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외세의 힘에 쉽게 굴복할 정도로 약체가 된 피렌체의 문제를 정치 세력 간의 파벌 투쟁에서 찾았다. 마키아벨리에 따르면 모든 정치 공동체는 귀족과&amp;nbsp;민중 두 계층으로 구성된다. 귀족은 지배욕을 가진 자들이고 민중들은 자유롭게 살고자 하는 자들이다. 따라서 이들간의 갈등관리를 잘 하는 것이 정치의 핵심이 된다. 그리고 이들의 관계 속에서 군주정, 공화정, 무정부 상태의 정치 체제가 성립된다. 군주정은 귀족과 민중의 갈등이 첨예화되어 양 세력 가운데 어느 한 세력이 지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뛰어난 한 사람에게 권력을 위임하는 것이다. 반면 공화정은 집단 지도 체제라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귀족이 주도권을 잡고 민중을 배제하는 '저변이 좁은 정체'와 민중이 주도권을 잡고 귀족을 참여시키는 '저변이 넓은 정체로 나뉜다. 마지막으로 무정부 상태는 귀족과 민중의 대립과 갈등이 첨예화, 극단화될 때 나타난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저변이 넓은 정체가'가 가장 좋은 정체임을 설파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국내정치적으로는 긴장관계 조절로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힘을 잘 모아내고 국제적으로는 언제 있을지 모르는 외세의 침략에 대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면, 마키아벨리는 역사상 존재했던 공화정을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인민을 기반으로 하는 로마이고, 다른 하나는 귀족에 의지한 스파르타와 베네치아이다. 물론 마키아벨리의 인민에 기반한 공화정은 민중을 지배자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민중을 참여시킴으로써, 지배욕을 표출하는 귀족층을 제어하는 체제이다. 반면 스파르타, 베네치아는 민중에게 정치 참여의 문호를 개방하지 않았다. 이처럼 권력을 소수의 사람들에게 제한하기 위해서는 스파르타처럼 외국인들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거나, 베네치아처럼 전쟁에 인민을 동원하지 않아야 했다. 이렇게 되면 귀족에 기반한 공화정은 한 국가가 당면하게 되는 필연적 팽창에는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필연적 팽창에 유연하게 대처하고 특정 세력의 권력 독점에서 나타날 수 있는 국내 정치의 부패를 막는 일석이조의 체제는 인민에 기반한 공화정이라고 설파한다. 그리고 이의 중심에는 자유가 놓여 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 공화정이 자유를 구현할 수 있었던 이유는 호민관 제도와 법 제도를 완비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민을 대변하고 원로원을 견제하기 위한 호민관 제도와 귀족으로부터 인민을 보호하는 법 제도는 사적 폭력에 의지해 갈등을 해결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도 했다. 그런데 이러한 자유 정체에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원칙이 필요하다. 그래서 가문이나 재산같은 사적 기준이 정치 영역에서는 통용되지 않으며, 정치 영역에서의 충원과 등용은 오로지 능력에만 의지해야 한다. 그런데 마키아벨리는 이러한 법 제도만 만들면 모든 것이 저절로 다 잘 되리라는 낙관론자는 아니었다. 그래서 제도가 잘 운용되기 위해서는 시민 의식 혹은 덕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시민 의식은 공정한 정치와 사회분위기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공적인 길이 공평하게 열려 있는 사회에서 시민들은 정치적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러한 자유가 보장된 공동체 속에서 시민들은 사익 보다는 공공선에 복무하려 할 것이고 이렇게 능력만 있으면 명예와 성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 정체에는 많은 인구가 유입될 것이다. 이러한 인구증가는 다산을 통해 배가되고 시민군의 증가로 이어진다. 다시 이러한 군대는 자신들에게 자유의 장을 마련해준 공동체를 위해 기꺼이 복무할 것이다. 로마의&amp;nbsp; 자유 정체는 각 정치 세력들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공적으로 해결하도록 하는 법 제도, 나아가 혈연이나 재산이 아닌 객관적 능력을 통한 정치참여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제도, 더 나아가 이런 제도들을 통해 정치 체제가 공공선을 위해 기능한다는 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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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정희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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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paparazzi</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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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31T09:21:14Z</updated>
	    <published>2009-10-31T09:21:1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워낙에 논란거리인 박정희에 대해 독후감을 쓴다는 것이 또 다른&amp;nbsp;논란을 불러일으킨 것 같아 착잡하기 그지 없습니다. 그마만큼 우리의 의식 속에 하나로 통합되기 힘든 일면들을 가지고 있는 다면적인 박정희이기에 그 동안 읽은 자료들을 토대로 박정희에 대해 개인적으로 그의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통합을 한 번 해보고자 합니다.&amp;nbsp;이는&amp;nbsp;제 자신에게도 매우 의미있는 작업이 될 것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뭐니뭐니 해도 최대의 논란거리는 공작정치, 조작정치가 될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quot;박정희 평전&quot;을 쓴 전인권의 해설이 적절한데요, 박정희는 유교적 윤리주의통치자라는 것입니다. 또한, 박정희는 민주주의가 정치의 본질은 아니다라고 파악하고 있던 사람입니다. 물론 관동군&amp;nbsp;체험이 그런 의식을 심어주었을 것입니다. 황량한 만주벌판에서 군의 주도로 엄청난 개발과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았었겠지만, 박정희는 그러면서도 언젠가는 민주주의를 하기는 해야 한다고&amp;nbsp;말하기는 했습니다.&amp;nbsp;그리고 주변으로부터 유신을 건의받았을 때도 정치적 반발을 예상하여 처음에는 주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도 그토록 반민주적인 비밀정치를 한 이유는? 다만, 박정희는 &lt;STRONG&gt;윤리가 바탕이 되지 않는 민주주의가 발전은 커녕 혼란만을 부추길 수 있다고 &lt;/STRONG&gt;생각한 것입니다. 그건 뭐 오늘날 민주주의 한국의 혼란상과도 맥이 닿아있으니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또한 민주주의를 하기 위해선 성숙한 시민의식이 필수라는 상식을 떠올려본다면&amp;nbsp;어렵지 않은 얘기일 것입니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4년 한일회담 반대 극렬시위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박정희는 공석과 사석을 가리지 않고 이런 풍토에서 민주주의가 힘들다고 자주 말하곤 했으며 언론에 대해서도 신문부수 늘리려고 인기에 영합한다고 강도높게 비판했으며 결국 언론과의 실랑이 속에 언론윤리위원회법을 만듭니다. 언론자유에 앞서 사회-국가에 대한&amp;nbsp;책무를 한 번 더 생각해보자는 것이지요. 한편, 최고회의 시절에도 최고인민회의보에 &quot;행동하는 지식인&quot;이란 글을 실었는데 그 내용인 즉슨 한국에서 인텔리란 사람들이 사사건건 냉소적인 논지로만 일관하고 국민들에게 이유없는 반감만을 양성케 하며 일제의 폭정에 대한 기억때문에 '이유없는 반항'을 신조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일제이후의 지사정신, 저항정신이 무조건적 언론자유 수호로 나타나는 현실에 대한 개탄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막무가네 언론자유가 집권 중기가 아닌 초기, 그것도 출범도 하기 전부터 극심했었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나름 국민의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권한을 부여받고 시작한 정권인데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무조건적 반대만을 일삼는다면 어떤 대통령이라고 심기가 불편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생각해보며 비근한 예로 노무현 대통령의 기자실 통폐합에서도 볼 수 있었듯이 이는 한국 언론과 지식인 사회의 고질적 병폐인 것으로 생각됩니다. 민주화 된 최근까지도 여간해선 사그라질 줄 모르는 것을 보면 참 뿌리가 깊은 것 같습니다. 따지고 보면 권력에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것이 지사적이라는 태도는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것이니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문제는, 박정희 본인의 윤리주의가 윤리지도로서 공감을 얻기 위해선 무척 공정하고 인권적이어야 하는데&amp;nbsp;공작정치를 하면서&amp;nbsp;그런 부분이 변질되었다는 것과 또 그런 반인권적인 부분이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같은 하부조직의 폭력도 어느 정도까지는 용인하는 그런 것도 있었습니다. 김형욱에 대한 토사구팽이나 1975년 신민당전당대회 폭력사태는 현대사의 가장 어두운 부분 중 하나일 것입니다.&amp;nbsp;하지만, 주변 인물들의 증언을 들어 볼 때에, 부하들의 과잉충성이 그런 폭력성을 부추겼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듭니다. 특히 당시 유신의 대변인이었던 김성진(올해 9월달 작고)은 회고록에서 박정희 부하들의 충성경쟁에 대해 강도높은 비판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amp;nbsp;경쟁없는 조직이 없음을 감안하면 그만큼 적당히 폭력을 구사하기가 힘들었다는 뜻도 될 것입니다. 또한 사회문제 중에&amp;nbsp;법으로 해결하기가 힘든 부분들이 많다는 것 또한 감안한다면 박정희 역시 폭력에의 유혹을 떨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법이 얼마나 불완전한 것인지는 이미 다들 잘 아시리라 생각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면을 종합해 볼 때, 박정희의 공작정치는 박정희 본인의 책임도 크겠지만, 이를 유도한 한국의 지식인-학생-언론-정치인의 태도에도 책임이 무척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한마디로 유교적 윤리정치의 부작용으로 누구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누구도 어쩌지 못한 현대사의 비극으로 파악하고 싶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월남 파병 문제가 있겠는데 이는 박정희 조차도 명분이 전혀 없는 전쟁이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실리를 챙기도록 지시했었고 결국 월남파병은 대일 청구자금에 이어 우리 경제 발전에 결정적인 종자돈을 안겨주게 됩니다. 이런 것은 박정희가 나쁘다 아니다를 떠나서 참 서글픈 얘기입니다. 지금은 이런 상황을 꿈도 못꾸지만 바로 수 십년 전에 우리 부모세대들은 이런 설움을 감내해야 했다는 것을 생각하니 뭐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대일 청구자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시 증언들 들어보면 박정희라고 더 받아내고 싶은 욕심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박정희는 이승만 정권 시절처럼 시간을 끌기가 힘들다고 판단했으며 돈의 액수보다는 지금 당장 그 돈을 가지고 어떻게 활용하느냐를 더욱 중시했습니다.&amp;nbsp;당시로서는 최선의 판단이었다는 것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유신헌법의 문제에 대해서는, 처음에 비상계엄을 선포하며 시작했다는 것에 큰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당시 정황으로 봤을 때 국회가 어지러운 것도 아니고 북한에서 특별한 움직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고 별다른 공청회도 없이 갑자기 헌법을 바꾸는 국민투표를 공고해 버렸으니 당시에는 박정희가 독재를 한다고 말이 많았습니다. 5.16혁명에 이은 또 하나의 쿠데타인 것이지요.&amp;nbsp;그러나, 계엄 선포 후 1주일 후의 대통령담화문에 하는 얘기에 많은 뜻이 함축되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국론분열상으로는 민족의 역량을 최대한 집결하기가 힘들며 외국식의 민주주의로는&amp;nbsp;이런 정치상황을 타개하기 힘들다, 그래서 한국적 민주주의로 이런 상황을 타개하겠다는 취지입니다. 그리고 4공화국 헌법을 국민표결에 부치는데 이게 찬성이 나와버렸으니 참......&amp;nbsp;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는 어떻게 어떻게 이심전심인데, 대통령과 지식인-언론-학생 사이는 그렇고 그렇다는...... 그야말로 현대사의 비극입니다. 대통령과 지식인 그룹 사이에 엄청난 불신이 있었던 것이 원인으로 생각됩니다. 어차피 공청에 붙여봤자 말만 많아질테고 그러니 그냥 밀어붙이자, 뭐 이런 것일 것입니다. 하지만, 유신이 있었기에 실제로 당시 정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게 됨으로써 고도의 경제성장을 단시일 내에 이루게 된 것만은 사실입니다. 다만, 그런 숭고한 뜻이 엄청난 불신과 오해 사이에서 원활하게 작동되기는 커녕 엄청난 극한대립만을 가져왔다는 것이 비극일 것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외에도 인혁당 사건같은 논란거리는 많겠지만 대충의 큰 흐름을 개인적으로 통합을 해본 결과는 이렇습니다. 말 그대로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많은 지적 바랍니다.&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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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정희 독트린(doctrine)의 회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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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10-30T17:23:15Z</updated>
	    <published>2009-10-30T17:23:1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9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대제목 테이블 시작--&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height=29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6%&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lass=title&gt;&lt;B&gt;박대통령의 업적&lt;/B&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5&gt;&lt;/TD&gt;&lt;/TR&gt;
&lt;TR&gt;
&lt;TD background=/images/news_title_bg.gif&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title_bg.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대제목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gt;&amp;nbsp;&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중제목 테이블 시작--&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6%&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4pt; FONT-SIZE: 13pt&quot; color=#1b3c9f&gt;&lt;B&gt;박정희 독트린(doctrine)의 회고&lt;/B&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중제목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요점 테이블 시작--&gt;&lt;!--요점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
&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9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 최각규(崔珏圭)│전 경제부총리 ]&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20&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line.gif&quot; width=590 height=2&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 본문 시작 --&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lt;!-- &lt;tr&gt;
                &lt;td align=&quot;right&quot;&gt;&lt;FONT SIZE=&quot;2&quot; COLOR=&quot;&quot;&gt;&lt;/FONT&gt;&amp;nbsp;&amp;nbsp;&amp;nbsp;&lt;br&gt;&lt;p&gt;&lt;/td&gt;
              &lt;/tr&gt;--&gt;
&lt;TBODY&gt;
&lt;TR&gt;
&lt;TD vAlign=to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lt;/TD&gt;
&lt;TD width=500&gt;&lt;IMG class=border border=1 align=lef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42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4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3 width=502&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olor=#3a7fbf&gt;&lt;인천 경인에너지 전경(1972.11.8)&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5&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FONT class=view&gt;&lt;IMG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LEFT: 15px&quot; class=border align=righ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42_2.jpg&quot;&gt;&lt;BR&gt;&amp;nbsp; 이제 「10.26」 30주기를 맞게 되었으니,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러갔다. 지금 40대 이하의 젊은이에게 「한강의 기적」은 옛날이야기로 들리고, “초근목피로 연명하였다는데 그때는 라면도 없었나.”, 또 나이든 분들은 사정이 어려우면 “박 대통령 때가 좋았는데. 그 분이면 잘 하셨을 터인데...” 이것이 요즘 시민들 사이에 회자되는 대화의 한 토막이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정희 대통령 시대(1961-1979)는 오랜 동안 숙명으로 여긴 빈곤과 정체의 악순환을 단절하고, 개발과 발전의 새 시대를 개막하는 역사적 전환기였다. 돌이켜 보면, 「한강의 기적」은 경제발전이 통일의 지름길이고, 민주주의 토대이고, 선진화의 길이라는 박대통령의 선견지명과 이를 실현하겠다는 불굴의 집념으로 요약되는 「박정희 독트린」의 소산이었으며,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경제 제1주의」의 성과이며, “하면 된다”는 한국인의 자부심의 증표이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경제 제1주의&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5.16 혁명은 기실 “도탄에 빠진 민생을 구한다”는 혁명구호가 말하듯이 「경제 제1주의」의 출발 신호였다. 당시 우리나라는 6.25 동란의 상처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민생은 실의와 가난에 쪼들리고, 나라경제는 외국원조에 의지하는 원조의존경제였으며, 빈곤이 악순환하는 전통적 후진사회였다. 따라서 5.16 혁명정부의 최우선 정책과제는 “민생문제의 시급한 해결”과 “자립경제의 기반 구축”이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군사정부는 우선 먼저 경제부처의 조직부터 개편하였다. 「경제기획원」을 창설하고,「건설부」를 개편·신설하였으며, 아울러 각 부처의 기획, 관리기능을 강화하였다. 이와 동시에 중소기업은행을 신설하여 영세·중소기업을 위한 전담 국책은행을 설립하였으며, 농업은행을 농업협동조합에 통합하여 농업 발전을 위한 종합지원조직으로 개편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경제기획원 창설&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5.16 직후 창설된 「경제기획원」은 정부의 장기경제개발계획의 수립, 정부예산의 편성, 부족한 투자재원 조달을 위한 외자도입, 물가정책의 운용, 국세조사와 경제통계 작성의 고유기능과 함께 정부의 경제정책을 통괄, 조정하는 경제개발정책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경제기획원 장관은 내각의 부총리로서 경제 총수로 불리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후 대내외적으로 E.P.B.(Economic Planning Board)로 불리어지며, 외국 원조기관과 국제통화기금(IMF) 및 세계은행(IBRD)과의 협조 창구가 되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수립&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1962년에 착수한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1962-1966)」은 제2차계획(1967-1971), 제3차계획(1972-1976), 제4차계획(1977-1981)으로 이어졌다. 단계별 계획의 중점은 계획기간의 여건에 따라, 농업 근대화, 식량의 자급, 사회간접자본의 확충, 중화학 공업의 육성, 과학 기술의 혁신 등 우선순위를 달리하였으나, 일관하여 추구한 기본목표는 고도성장에 의한 경제의 선진화였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5개년경제개발계획」은 농업근대화 및 식량자급계획, 전기, 석유, 석탄 등 에너지계획, 석유화학, 철강, 기계, 자동차, 조선 등 공업부문별 계획, 과학·기술 혁신계획, 사회간접자원 확충계획 등 분야별 실행계획으로 구체화되었으며, 매년 경제기획원이 편성하는 정부예산을 통하여 조정·시행 되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정부 계획의 집행실적은 국무총리실 산하의「기획조정실」이 분기별 심사·분석하였으며, 특히 각 분야의 학자들로 구성된 「평가교수단」은 객관적 입장에서 정부의 계획을 분석·평가하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전문학자의 이러한 기회는 정부의 요직에 등용되는 계기가 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월례경제동향보고&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매월 경제기획원 회의실에서 박대통령 주관 하에 열리는 「경제동향보고회의」는 정부의 관련부처 장관과 민간경제단체와 금융기관의 대표들이 함께 참가하여 매월 통화, 금융, 물가, 생산, 국제수지, 도시가계 및 농가수지 등의 주요경제지표와 관계부처의 경제시책의 진행 상황을 점검하는 자리이다. 참석한 민간 대표들이 산업현장과 시장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즉석에서 제기하고 대책을 건의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특히 새마을 지도자의 성공사례 보고를 통해 이제까지 가난에 지치고 실의와 정체에 빠져 잠자던 농촌의 마을주민들이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 정신으로 함께 뭉쳐 스스로 마을을 가꾸고 소득을 늘려,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새마을 운동」의 생생한 실례를 참석자들이 듣고 영상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와 같이 「월례경제동향보고」회의는 통계지표를 통하여 경제동항을 점검한 데 그치지 않고, 정부와 민간업계 그리고 농민이 함께 경제발전의 보람을 나누고 어려움을 공감하는 자리였으며, 박대통령의 경제운용의 리더십이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수출 제1주의&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수출 제1주의」는 박대통령의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이었으며, 수출만이 살 길이라는 수출입국의 결의인 것이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상공부는 박대통령의 수출입국의 강한 의지와 관련부처의 수출사업에 대한 세제, 금융, 외환 등의 과감한 지원시책이 있었기 때문에 수출목표 달성을 위하여 수출업계를 독려할 수 있었으며, 업계는 정부의 지원책을 믿고 수출전선에 나설 수 있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우리 경제가 수출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박대통령이 앞에 서서 수출지원 대책을 마련하지 않았다면 결코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수출지원체제의 확립&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정부는 수출입국을 목표로 수출지원을 위하여 총력을 경주하였다. 세제면에서 수출소득에 대한 소득세와 법인세의 전액 감면, 수출시설에 대한 특별상각제의 실시, 수출용 원자재와 시설의 도입에 대한 관세를 전액 면제하였으며, 금융면에서 수출금융의 자동화, 수출대출의 우대금리 적용, 수출용 시설의 도입을 위한 외화대출제를 실시하였다. 이밖에 해외시장 개척을 지원하는「한국무역진흥공사(KOTRA)」, 연불수출을 지원하는「수출입은행」을 각각 설립하였으며, 또한 수출보험제를 도입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수출진흥확대회의&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수출진흥확대회의」는 박대통령의 직접 주관 하에 수출지원 부처의 장관과 민간경제단체의 대표와 한은총재를 비롯한 금융기관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확대회의이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동회의는 상공부가 수출계획과 실적을 품목별, 대상국별로 상세하게 보고함과 동시에 수출업계의 애로사항과 이에 대한 대책을 토의하는 관·민 협조의 현장이었으며 「수출 제1주의」를 실현하는 산실이었다.&lt;/FONT&gt;&lt;BR&gt;&lt;BR&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파일2번 내용################################################################################################--&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align=left&gt;&lt;FONT class=s_title&gt;&lt;B&gt;박대통령의 불굴의 집념&lt;/B&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8&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to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lt;/TD&gt;
&lt;TD&gt;&lt;IMG class=border border=1 align=lef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45_1-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4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3 width=580&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olor=#3a7fbf&gt;&lt;제2회 수출의 날 기념식(1965.11.30)&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0&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space.gif&quot; width=1 height=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DIV id=articleBody2 class=subArtcl2&gt;&lt;FONT class=view&gt;그 동안 박대통령은 국내의 민주화 우선의 정치적 요구, 정부주도의 경제운용에 대한 반발, 경쟁국의 등장을 우려하는 외국의 견제 등 대내의 비판과 저항에 불구하고, 경제발전이 통일의 지름길이고 민주화의 토대이며 선진화의 길이라는 신념으로 「경제 제1주의」를 관철하였다. 이하에서 그 실례를 들어본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울산 정유공장 건설&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당시 국내는 정유시설이 전혀 없고 필요한 석유류는 미국의 직접원조에 의하여 공급되고 있는 실정이었다. 정부는 5,16 직후 울산만이 정유시설의 적지라는 건의에 따라 겁도 없이 정유공장의 건설에 착수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당시 세계의 석유시장은 구미 선진국의 「오일 메이저」가 전적으로 지배하고 있어,「오일 메이저」와 연관 없이 한국이 정유공장을 건설한다는 것은 적어도 석유전문가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으며 특히 원유부존자원이 없을 뿐 아니라 원유정제 시설과 원유정제의 경험이 없는 한국의 정유공장의 건설계획 자체를 의심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정부는「대한석유공사」를 설립, 미국 석유회사인「걸프사」의 25%의 주식 참여를 용인하고,「울산공업단지」에 울산정유공장을 완공하고 정유공장을 모체로 석유화학 계열공장을 건설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다목적 수력 댐 건설&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수자원 개발의 일환인 춘천, 섬진강, 남강, 소양강 등의 다목적 댐은 미원조당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원조자금의 지원 없이 국내재원과 국내기술로 건설하였다. 이들 댐건설을 통해 발전, 홍수조절, 농업, 공업 및 생활용수의 활용과, 공해 없는 값싼 전력을 생산하게 된 것이다.&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RIGHT: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46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개통 기념탑(1971.1.17)&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amp;nbsp; &lt;B&gt;-경부고속도로 건설&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은 예산 낭비이며, 시기상조라는 근시안적 반대에 불구하고, 박대통령은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를 착공, 헬기에 탑승하여 상공에서 건설상황과 예정노선을 직접 점검, 화인하는 등 건설을 직접 독려하여, 2년 6개월 만에 전장 417km, 왕복 4차선의 고속도로가 완공·개통되었다. 당시의 기준으로 경부고속도로는 가장 단기의 건설기간과 가장 저렴한 건설비로 완공된 것이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후 경부고속도로는 왕복 8차선으로 개량되고 여타 고속도로와 연결되어 전국의 주요도시가 박대통령의 말씀대로 하루 생활권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포항종합제철소 건설&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종합제철소의 건설은 제1차 5개년계획부터 시도하였으나 선진국의 외면으로 조선소 건설자금의 조달과 기술도입에 실패하였다. 특히 세계은행은 인도, 터키 등 일부 개발도상국이 야심사업으로 건설한 제철소가 결국 부실화된 전례를 감안하여, 한국의 제철산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인정하지 않고 정부의 차관신청을 거절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박대통령은 포기하지 않고, 1969년의 한·일 각료회의에 참석하는 김학열 부총리에게 제철소건설의 자금지원에 대하여 일본정부와 합의한 후 귀국하라고 특별히 지시하였다. 한·일 각료회의에서 일본정부는 한국 제철사업의 타당성 검토를 위한 사절단 파견에 합의하고, 동사절단은 포항제철사업의 경제적 타당성을 인정하여 한·일 양국 정부는 대일청구권의 경제협력자금의 사용과 기술지원에 대한 기본합의를 이루게 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포항제철은 1970년에 착공, 1973년에 대망의 완공을 보게 되었다, 이후 포철은 단계적으로 생산능력을 증대하여 생산능력이 910만 톤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제2제철은 현대그룹의 참여 의사도 있었으나 박대통령의 결단으로 포철의 제2고장으로 낙착, 광양제철소가 건설됨으로써 포항제철은 제1, 제2 공장을 합쳐 조광 기준 2.150만 톤의 국제규모의 생산능력과 최강의 국제경쟁력을 갖춘 한국의 대표기업이 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울산조선소 건설&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중화학공업의 주요업종인 조선사업 건설은「현대건설」에게 지명되었다. 「현대건설」은 건설자금의 조달과 조선기술의 도입을 위하여 선진조선국과 협의하였으나 실적이 없는 건설전문업체라는 이유로 「현대건설」의 지원요청은 번번이 거절되어 조선업 진출을 포기 않을 수 없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현대건설」의 정주영회장으로부터 외국과의 교섭 결과를 보고 받은 박대통령은 조선사업에 대한 확고한 방침을 재표명하면서 외국과의 재교섭을 종용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대통령의 재지시에 따라 「현대건설」은, 회사의 사운을 걸고 조선기술 도입과 건설자금의 차관 교섭을 재개하여, 마침내 스코틀랜드의 조선회사와 기술이전계약을 체결하고, 국제차관단과 차관계약을 타결하게 되었으며, 그리스 선주로부터 26만 톤급의 대형유조선(VLCC) 2척을 수주 받아, 조선소 건설과 선박 건조를 함께 진행하는 행운을 얻게 되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1972년 3월 미포만에서 50만 톤급 조선능력의 조선소 기공식이 거행되고, 1974년 6월에 완공되었다. 동년 말 현대조선이 건조한 2척의 유조선이 진수되었다. 이후 현대조선은 70만 톤 2기의 조선소로 확대되고, 옥포조선소, 삼성조선소 등이 연이어 건설되어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갖춘 조선강국이 되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산업단지 조성&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앞서 설명한 「울산공업단지」를 효시로 「구로수출공단」, 「구미전자공업단지」, 「창원기계공업단지」, 「여천석유화학단지」, 「이리정밀공업단지」, 「반월중소기업단지」, 「대덕기술연구단지」 등과 아울러 주요도시 주변에 지방공업단지를 조성하여, 기업의 산업입지 문제를 해결하였다. 오늘 우리가 보는 이러한 산업단지들은 우리나라 경제개발의 요람이며, 박대통령의 지울 수 없는 발자취이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쌀 자급 실현&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일제 때 우리나라는 일본의 쌀 공급지였으나, 해방 후 우리의 식량사정은 미국의 잉여농산물법에 의한 소맥수입으로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고 있었다. 특히 잉여농산물 처리의 대상이 아닌 쌀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하여 일본의 한 해를 묵힌 고고미(古古米)를 수입하는 수모도 겪었다. 따라서 쌀만은 반드시 자급하여야겠다는 것이 박대통령의 집념이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정부는 식량증산 10개년 계획을 수립해 관개, 수리, 경지정리 등 농업기반의 확충, 비료, 농약, 농기계 등 농업자재의 원활한 공급과 영농지도의 확충, 저금리 영농자금의 지원 등 식량증산시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러한 식량증산 시책과 더불어 특히 쌀의 다수확 품종의 육종에 힘쓴 결과, 종전보다 25%-30% 증산이 가능한 신품종인 기적의 볍씨 「통일벼」의 육종에 성공하였다. 정부는 다수확 신품종을 전국 농촌에 보급하고 재배를 적극 권장함으로써, 마침내 1976년 4.000만 석의 쌀 생산목표를 달성, 대망의 쌀 자급을 실현하였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당초 다수확품종인 통일벼는 미질이 우리 입맛에 맞지 않는 결점이 있어, 농민들이 재배를 꺼리는 경향이 있었으나 정부는 신품종의 수확 전량을 수매하여 생산의욕을 고취하는 한편 소비자의 입맛에 맞도록 꾸준히 미질을 개선하여, 약점을 완전히 해소하였다. 이로써 이제 우리나라는 쌀이 남아도는 여유를 갖게 되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새마을운동 전개&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당시 우리 농촌의 풍경인 초가지붕의 농가, 지게를 진 농부, 소가 쟁기를 끌고 밭을 가는 모습은 옛날부터 이어온 가난의 실상이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새마을운동」은 가난의 유산을 청산하고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자」는 박대통령의 발상으로 시작되어 전국 농촌으로 파급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하였듯이, 「새마을운동」은 “새벽종이 울렸네, 우리 모두 일어나 초가집을 고치고 마을길을 넓히고 새마을을 만들자....”는 이른바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을 근간으로 한 농민운동이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전국 농촌에서 꾸준히 전개된 「새마을운동」으로 초가지붕이 사라지고, 마을길도 넓혀져 경운기, 이양기, 수확기, 트랙터를 이용해 영농하고, 천수답은 수리안전답이 되어, 농촌은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 「새마을」이 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중화학공업 육성&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우리는 비교우위에서 경제개발의 초기단계에 있었으며 부존자원이 없는 여건 때문에 풍부하고 질 높은 인적자원을 활용하는 노동집약적인 경공업제품을 위주로 세계시장에 진입하였다.「Made in Korea」상품이 선진국 시장에 넘치고 있었다. 외국의 상가와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우리 상품을 보고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늦게 출발한 멕시코, 말레이시아, 태국, 중국 등 후발 수출국이 그들의 값싼 임금의 이점을 이용하여 세계시장에 진출하여 우리의 수출시장을 침식하게 되었다. 후발 수출국이 우리를 급하게 쫓아오고 있어, 계속 앞서 가려면 수출산업구조를 노동집약적 경공업에서 기술집약적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러한 대내외적 여건의 변화에 대응하여 1973년 1월 박대통령의 「중화학공업 선언」으로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이 수립되었다. 「중화학공업 선언」은 철강, 기계, 자동차, 조선, 발전, 전자, 석유화학 등의 생산시설을 갖추어 공업구조를 고도화하고, 선진경제로 진입하려는 것이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정부는 먼저 중화학공업의 육성계획과 원활한 지원을 위하여 국무총리를 의장으로 하는 추진위원회를 신설하고 청와대 내에 기획단을 설치· 운영하였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렇게 시작한 중화학공업계획에 따라, 기존의 포항종합제철 및 울산공업단지의 석유화학공장들의 생산능력의 확대, 자동차공장의 본격적 가동, 울산조선의 조선능력 확대, 옥포조선소의 신설 등과 함께 새로 창원에 대규모의 「기계공업단지」를 조성하여 발전설비, 건설장비의 제작, 기계공업 등 중공업공장을 건설하고, 여천에 제2석유화학단지를 조성하여 석유화학제품의 생산능력을 배가하는 등 중화학공업 육성계획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다. 또한 이들 중공업시설과 축적된 기술은 자주국방을 위한 방위산업의 모체가 되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러한 중화학공장의 건설은 그 중도에 제2석유파동을 맞으면서 한때 과잉, 중복투자의 비판의 소리도 있었으나, 이후 이들 중화학 공장은 우리나라 공업의 고도화와 선진화를 이끄는 원동력이 되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국책기관의 설치&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여기서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경제개발의 주역은 정부와 더불어 외곽에서 개발사업을 수행한 국책기관이었다. 먼저 학계의 전문학자로 구성되는 연구기관으로 경제개발계획의 수립과 경제정책의 두뇌집단인 「한국개발연구원(KDI)」, 과학진흥과 기술혁신을 위한 「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 고유문화의 진흥을 위한 「정신문화연구소(현 세종연구소)」를 설립하였으며, 국영기업으로 대규모 농업기반 조성을 위한 「농촌진흥공사」, 농산물 가격안정과 유통을 위한 「농어촌 개발공사」, 수자원의 개발과 관리를 위한 「수자원공사」, 중소기업의 자금 및 기술지원을 위한「중소기업진흥공단」, 전력의 발전과 배전을 위한「한국전력회사」, 원유정제를 위한 「대한석유공사」, 국토의 개발과 효율적 이용을 위한 「토지개발공사」, 서민주택의 원활한 공급을 위한 「주택공사」, 고속도로의 건설과 관리를 위한 「한국도로공사」 등은 정부의 외곽에서 시장기능에 맡길 수 없는 역할을 수행한 개발의 역군이었으며. 또한 국책은행으로 「한국산업은행」을 존속시키는 한편 기존의 농업은행을 농업협동조합과 통합하였고, 중소기업의 지원을 전담하는「중소기업은행」, 서민주택을 위한 「주택은행」, 연불수출을 지원하는 「수출입은행」, 영세중소기업의 신용대출을 위한 「신용보증기금」을 신설하였다.&lt;/FONT&gt;&lt;/DIV&gt;&lt;BR&gt;&lt;BR&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파일3번 내용################################################################################################--&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align=left&gt;&lt;FONT class=s_title&gt;&lt;B&gt;박정희 대통령의 참 모습&lt;/B&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8&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top&gt;
&lt;DIV id=articleBody3 class=subArtcl3&gt;&lt;FONT class=view&gt;박대통령의 생애는 「혁명가」였을 뿐 아니라 박정희 독트린의 「실천가」였다. 그 분은 5.16 군사혁명을 주도하였고, 10.26참변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혁명가의 생애를 마쳤을 뿐 아니라, 「우리도 한번 잘 살아 보자」는 확고한 신념과, 「우리도 할 수 있고, 하면 된다」는 굳은 집념으로 경제개발의 기적을 성취하여, 근대화의 새로운 장을 개막한 실천가이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대통령의 통치는 권력에 의하여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리더쉽의 발휘」였다. 그 분은 권력으로 군림하고 지배하기보다는 학자, 전문가, 관련업계의 의견을 경청하고 건의를 수용하고 협조를 구하는 데 인색하지 않았다. 때문에 정부의 계획과 정책은 국민이 공감하고, 산업계가 믿고 따를 수 있는 경영지침이 되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대통령은 농어민과 서민에게는 인자한 어머니였고, 기업에게는 엄한 아버지였으며, 국민들에게는 어려운 나라 살림을 돌보는 믿음직한 가장이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역사는 흐르고 주변의 사정은 변하고 있다. 우리는 「박정희 독트린」의 한 개발연대를 지나, 이제 조국의 민주화, 선진화를 도모하고, 나아가 통일을 기약해야 하는 제2의 도약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벌써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을 새삼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후세의 역사는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을 “조국 근대화의 창시자”이며, “민족중흥의 시조”로 기록할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lt;BR&gt;&amp;nbsp; 
&lt;HR&gt;
&lt;BR&gt;&amp;nbsp; &lt;B&gt;필자약력&lt;/B&gt;&lt;BR&gt;&amp;nbsp; 서울문리대 정치과 졸&lt;BR&gt;&amp;nbsp; 미 하버드 대학원 수학 &lt;BR&gt;&amp;nbsp; 경제학박사(강릉대)&lt;BR&gt;&amp;nbsp; 경제기획원 차관 &lt;BR&gt;&amp;nbsp; 상공부 장관 &lt;BR&gt;&amp;nbsp; 13대 국회의원&lt;BR&gt;&amp;nbsp;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lt;BR&gt;&amp;nbsp; 강원도지사&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수상&lt;/B&gt;&lt;BR&gt;&amp;nbsp; 녹조근정훈장&lt;BR&gt;&amp;nbsp; 청조근정훈장&lt;/FONT&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글쓴이 시작--&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민족중흥의 아버지, 박정희 ‘업적에 기초한 정통성’ 입증</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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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10-30T17:19:20Z</updated>
	    <published>2009-10-30T17:19:2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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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BODY&gt;
&lt;TR&gt;
&lt;TD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height=29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6%&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lass=title&gt;&lt;B&gt;민족중흥의 아버지, 박정희&lt;/B&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5&gt;&lt;/TD&gt;&lt;/TR&gt;
&lt;TR&gt;
&lt;TD background=/images/news_title_bg.gif&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title_bg.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대제목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gt;&amp;nbsp;&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중제목 테이블 시작--&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6%&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4pt; FONT-SIZE: 13pt&quot; color=#1b3c9f&gt;&lt;B&gt;‘업적에 기초한 정통성’ 입증(Performance Legitimacy) &lt;/B&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중제목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요점 테이블 시작--&gt;
&lt;TABLE style=&quot;MARGIN-TOP: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49&gt;
&lt;TBODY&gt;
&lt;TR&gt;
&lt;TD height=13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1.gif&quot; width=12 height=13&gt;&lt;/TD&gt;
&lt;TD height=13 background=/images/news_box05.gif&gt;&lt;/TD&gt;
&lt;TD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2.gif&quot; width=12 height=13&gt;&lt;/TD&gt;&lt;/TR&gt;
&lt;TR&gt;
&lt;TD background=/images/news_box08.gif width=12&gt;&amp;nbsp;&lt;/TD&gt;
&lt;TD&gt;&lt;FONT color=#000000&gt;(필자는 이 글을 쓴 직후 9월 17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그는 청와대 대변인답게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박정희 시대의 “입”으로서의 사명을 다했다 - 편집자)&lt;/FONT&gt;&lt;/TD&gt;
&lt;TD vAlign=top background=/images/news_box06.gif width=12&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1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3.gif&quot; width=12 height=11&gt;&lt;/TD&gt;
&lt;TD background=/images/news_box07.gif&gt;&lt;/TD&gt;
&lt;TD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4.gif&quot; width=12 height=11&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요점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
&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9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 故 김성진(金聖鎭)│前 문화공보부장관 ]&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20&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line.gif&quot; width=590 height=2&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 본문 시작 --&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lt;!-- &lt;tr&gt;
                &lt;td align=&quot;right&quot;&gt;&lt;FONT SIZE=&quot;2&quot; COLOR=&quot;&quot;&gt;&lt;/FONT&gt;&amp;nbsp;&amp;nbsp;&amp;nbsp;&lt;br&gt;&lt;p&gt;&lt;/td&gt;
              &lt;/tr&gt;--&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align=left&gt;&lt;FONT class=s_title&gt;&lt;B&gt;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다&lt;/B&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8&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to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lt;/TD&gt;
&lt;TD&gt;&lt;IMG class=border border=1 align=lef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38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4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3 width=580&gt;
&lt;TBODY&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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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FONT color=#3a7fbf&gt;&lt;박정희 대통령 포항종합제철(1972.2.6)&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5&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FONT class=view&gt;&lt;IMG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LEFT: 15px&quot; class=border align=righ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38_2.jpg&quot;&gt;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어난 수많은 신생독립국가들 중에서 정치 불안과 내전(內戰·Civil War)을 겪지 않은 나라가 거의 없었으며 심지어 그것 때문에 망한 나라도 여럿이 된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우리도 불행히 6·25전쟁을 치렀다. 북쪽으로부터 침공을 당한 것이었지만 그 근본원인은 『해방정국』의 극심했던 정치 불안 내지는 사회분열 때문이었다. 그 원인은 첫째, 민주주의에 대한 올바른 이해의 부족 둘째, 이상(理想)과 현실 사이의 괴리를 메울 수 있는 국민의 교육과 문화 수준의 저차원(低次元)에 있었다. 그래서 공동체의식이 함양되지 못했었다. 그러면 공동체란 무엇인가?&lt;BR&gt;&amp;nbsp; &lt;BR&gt;&amp;nbsp; 듣기에는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것 같지만 실천하려면 제법 어려운 말이 된다. 공동체란 물질적 부(富)와 정신적 가치(價値)를 서로가 공유(共有)하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의 집단(集團)을 가리키는 말이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우리의 경우 공유하고자 약속한 정신적 가치는 자유민주주의였으며 물질적 부는 어디까지나 사유재산제도에 의해 보호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며 그 길은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를 갖춘 독립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오늘의 대한민국이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런데 그 과정이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연속이었다. 백성들의 굶주림은 해결되지 못했고 공산주의를 민주주의라 속이는 무리들의 난동은 그치지 않았다. 이처럼 안팎으로 모진 고생을 겪고 있는 우리들에게 어느 외국정치인은 “저 나라에서 민주주의가 싹트기를 기대하는 것은 마치 쓰레기통에서 장미꽃이 피어나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극언을 하기까지 했다. 여기에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북쪽의 정치 사기꾼들이 무장을 하고 선전포고도 하지 않은 채 남침해 왔으니 우리들의 희망은 산산조각이 날 뻔했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 참상을 외국의 정치학자들은 이렇게 보고 있었다. &lt;개발도상국에서의 유격전 또는 내전(內戰·Civil War)은 궁극적으로 정통성(legitimacy)의 문제이다. 이것은 정치제도(political institution 주:그들이 말하는 민주제도의 뜻)를 제아무리 공들여 정교롭게 운영한다 하더라도 도저히 해결 불가능한 딜레마를 만들어 놓을 뿐이다&gt;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민주적 정치제도를 갖고 있는 나라에서는 정통성을 무력 즉 전쟁으로 해결할 필요가 애당초 없었으며 개발도상국에는 민주정치제도라는 이름의 완제품이 처음부터 없었다. 만들어 나가는 도중에 있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런데 저들 학자님들은 그 과정을 이렇게 분석했다. &lt;정통성은 안전보장(Security) 없이는 성취될 수 없으며 안전보장은 권력 또는 권위(Authority) 없이는 확보될 수 없다. 그렇더라도 정통성을 계속 유지하려면 궁극적으로 국민의 민주적 방식에 의한 동의를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여기에 소요되는 시일(時日)은 안전보장을 확보하는데 필요한 시일보다 훨씬 더 오랜 시일이 필요하게 된다. 여기에 불가피하게 갭(gap)이 발생하는데 이것은 정치제도 속에 생긴 딜레마로서 지금까지 해결 불가능한 숙제이다&gt; 이것은 전쟁을 치르면서 그나마도 민주주의를 해보려고 피땀 흘려 노력하고 있는 개발도상국의 지도자와 국민들에게는 턱도 없는 야속한 잔소리일 따름이다.&lt;/FONT&gt;&lt;BR&gt;&lt;BR&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파일2번 내용################################################################################################--&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align=left&gt;&lt;FONT class=s_title&gt;&lt;B&gt;필생즉사(必生則死), 필사즉생(必死則生)을 실천한 민족중흥의 아버지&lt;/B&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8&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to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lt;/TD&gt;
&lt;TD&gt;&lt;IMG class=border border=1 align=lef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41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4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3 width=580&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olor=#3a7fbf&gt;&lt;진해의 이순신 장군 동상(1964.4.11)&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0&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space.gif&quot; width=1 height=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DIV id=articleBody2 class=subArtcl2&gt;&lt;FONT class=view&gt;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꾹 참고 이 숙제를 해결해냈다. 그는 어느 외신기자와의 단독회견에서 “어떤 것이 민주주의의 모델이냐 하는 것은 충분히 상상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에 도달하는 과정은 모든 나라가 똑같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실패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특수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이다. 우리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민주주의를 확실히 성장시키고 있다. 우리의 고충을 이해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박대통령이 언급한 고충이란 다름 아니라 서구 리버럴리스트들이 지적한 정치제도로는 해결 못하는 ‘딜레마’를 뜻한 것이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그는 자기 목숨을 걸고 기적처럼 이 딜레마를 해결했다. 국민들의 굶주림을 경제개발계획과 새마을운동의 성공으로 깨끗이 몰아냈다. 그뿐 아니었다. 가난했던 농경사회를 일약 중화학공업사회로 탈바꿈시켜 놓았다. 5·16혁명으로 불붙기 시작한 산업혁명을 10여년 만에 산업혁명의 최종단계를 훌쩍 뛰어넘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 굳이 통계숫자를 끌어댈 필요조차 없다. 풍요로운 농촌풍경과 초현대식 생산시설, 그리고 농촌과 도시를 전국적으로 연결시킨 고속도로망 등 이 모든 것이 그것을 입증하고 있다. 굳이 통계숫자를 하나 인용한다면 5·16혁명 당시의 남북한 국민 소득을 비교한 세계은행의 통계이다. 우리는 그때 겨우 82달러로써 조사대상국 125개국 중 101번째였는데 북쪽은 320달러로 50번째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의 위정자들은 껍데기 민주주의를 한답시고 백성들의 생활을 거들떠 볼 여유가 없었던 것이었을까? 또한 중화학공업정책은 자주국방정책과 동전의 앞뒤처럼 하나가 되어 유기적으로 운용되었기 때문에 그 효과는 상승효과를 나타내어 국가의 안전보장을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대통령은 이러한 업적을 배경 삼아 북한 측에게 남북 그 어느 쪽이 백성들을 더 잘 살 수 있게 하는지 선의(善意)의 체제경쟁을 해보자고 제의하기까지 했다. 왜냐? 북한당국이 70년대 안에 한반도 전체를 마르크스·레닌주의와 김일성을 우상 숭배하는 주체사상으로 통일하겠다고 장담하면서 북한을 ‘혁명기지’라 자칭하고 나선 데 대한 대답이었다. 박대통령은 그 ‘혁명기지’를 완전히 제압할 수 있는 ‘민주기지’를 구축해 놓았다고 자신하고 있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외국의 미디어와 지식층에서는 비로소 ‘한강변의 기적’이라는 덕담을 ‘업적에 기초한 정통성’(Performance Legitimacy)을 박대통령이 확보했다고 평가하기에 이르렀다. 이와 함께 국내의 인식도 달라졌다. 세월의 풍화작용은 이렇게 정직한 것이다. 건국50주년 국민여론조사(조선일보)와 건국60주년 국민여론조사(KBS)는 한결같이 우리 국민들이 박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에 기초한 정통성’에 대해 추인(追認)하고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만시지탄(晩時之歎)이 없지 않으나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박대통령은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비상조치로 사수 계승했을 뿐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분단된 조국의 민족사적 정통성이 우리 대한민국에 있다는 역사적 사실을 내외에 확고히 천명했다. 이 역사적 사실을 우리와 우리 후대들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대통령은 개혁자의 한평생을 살아오면서 본인이 사숙해마지 않았던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활신조를 충실히 실천했다. 그것은 필생즉사(必生則死)요,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는 것이다. 전쟁터에서 살고자 애쓰면 죽게 마련이고 죽을 각오로 싸우면 살게 된다는 뜻이다. 박대통령은 이 나라를 막강한 ‘민주기지’로 만들어 놓기 위해 일대 개혁 작업에 착수했었다. 대부분 성공했다. 그러나 정치 분야는 아직도 숙제로 남아있다. 그렇더라도 나는 감히 박정희 대통령을 머지않아 ‘민족중흥의 아버지’라 부를 날이 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lt;BR&gt;&amp;nbsp; 
&lt;HR&gt;
&lt;BR&gt;&amp;nbsp; &lt;B&gt;필자약력&lt;/B&gt;&lt;BR&gt;&amp;nbsp; 고려대 경제학과 졸&lt;BR&gt;&amp;nbsp; 미국 루이스클락대 명예문학박사&lt;BR&gt;&amp;nbsp; 청와대 대변인&lt;BR&gt;&amp;nbsp; 문화공보부장관&lt;BR&gt;&amp;nbsp; 동양통신, 연합통신 사장 &lt;BR&gt;&amp;nbsp; 서울언론재단이사장&lt;BR&gt;&amp;nbsp; 싱가포르 대사&lt;BR&gt;&amp;nbsp; (주)대우 부회장&lt;BR&gt;&amp;nbsp; 대우경제연구소 회장&lt;BR&gt;&amp;nbsp; 성곡언론재단 이사(현)&lt;BR&gt;&amp;nbsp; ‘한국정치 100년을 말한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저서&lt;/B&gt;&lt;BR&gt;&amp;nbsp; ‘평화의 허상’ &lt;BR&gt;&amp;nbsp; ‘박정희 시대’ &lt;BR&gt;&amp;nbsp; ‘박정희를 말하다’ 등 다수&lt;/FONT&gt;&lt;/DIV&gt;&lt;BR&gt;&lt;BR&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파일3번 내용################################################################################################--&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
&lt;TBODY&gt;
&lt;TR&gt;
&lt;TD vAlign=top&gt;
&lt;DIV id=articleBody3 class=subArtcl3&gt;&lt;FONT class=view&gt;&lt;/FONT&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글쓴이 시작--&gt;
&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 MARGIN-LEFT: 17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7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 &lt;FONT class=font9 color=#5a5d5a&gt;2009-10-07&lt;/FONT&gt; ]&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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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정희시대 좌담 : ‘지도자’를 대망하는 시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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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10-30T17:07:01Z</updated>
	    <published>2009-10-30T17:07:0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9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100%&quot;&gt;
&lt;TBODY&gt;
&lt;TR&gt;
&lt;TD height=29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6%&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lass=title&gt;&lt;B&gt;박정희시대 좌담&lt;/B&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5&gt;&lt;/TD&gt;&lt;/TR&gt;
&lt;TR&gt;
&lt;TD background=/images/news_title_bg.gif&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title_bg.gif&quo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대제목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gt;&amp;nbsp;&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중제목 테이블 시작--&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6%&quot;&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4pt; FONT-SIZE: 13pt&quot; color=#1b3c9f&gt;&lt;B&gt;‘지도자’를 대망하는 시점 &lt;/B&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중제목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lt;!--요점 테이블 시작--&gt;
&lt;TABLE style=&quot;MARGIN-TOP: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49&gt;
&lt;TBODY&gt;
&lt;TR&gt;
&lt;TD height=13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1.gif&quot; width=12 height=13&gt;&lt;/TD&gt;
&lt;TD height=13 background=/images/news_box05.gif&gt;&lt;/TD&gt;
&lt;TD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2.gif&quot; width=12 height=13&gt;&lt;/TD&gt;&lt;/TR&gt;
&lt;TR&gt;
&lt;TD background=/images/news_box08.gif width=12&gt;&amp;nbsp;&lt;/TD&gt;
&lt;TD&gt;&lt;FONT color=#000000&gt;김성진 전 문공부장관, 김정렴 전 대통령비서실장, 남덕우 전 국무총리, 박진환 전 청와대경제특보, 최형섭 전 과기처장관(가나다순)&lt;BR&gt;&lt;BR&gt;금년은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오늘날 이 나라는 이념갈등, 북한 핵위협, 경제위기, 청년실업, 안보불안, 사회분열 등으로 미래를 낙관할 수 없는 전환기적 시점에 와 있다. &lt;BR&gt;김성진 전 문공부장관은 보수 인터넷신문 “뉴스앤뉴스” 편집인으로 있던 시절인 1994년 5월 2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박정희시대를 총체적으로 분석하는 좌담회를 주재했다. 이 좌담회에는 김정렴 전 비서실장, 남덕우 전 총리, 박진환 전 경제특보, ,최형섭 전 과기처장관이 참석했다. 이 좌담은 비록 15년 전에 개최된 것이었으나 그 내용과 시각은 시간을 초월하여 한국 근대사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종합적인 분석으로 평가되고 있다. &lt;BR&gt;박정희대통령 서거 30주년 특집으로 이 좌담내용을 게재한다. &lt;BR&gt;
&lt;DIV align=right&gt;- 편집자 주&lt;/DIV&gt;&lt;/FONT&gt;&lt;/TD&gt;
&lt;TD vAlign=top background=/images/news_box06.gif width=12&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1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3.gif&quot; width=12 height=11&gt;&lt;/TD&gt;
&lt;TD background=/images/news_box07.gif&gt;&lt;/TD&gt;
&lt;TD width=12&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box04.gif&quot; width=12 height=11&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요점 테이블 끝--&gt;&lt;/TD&gt;&lt;/TR&gt;
&lt;TR&gt;
&lt;TD align=middle&gt;
&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9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 김성진 외 ]&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20&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news_line.gif&quot; width=590 height=2&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 본문 시작 --&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lt;!-- &lt;tr&gt;
                &lt;td align=&quot;right&quot;&gt;&amp;nbsp;&amp;nbsp;&amp;nbsp;&lt;br&gt;&lt;p&gt;&lt;/td&gt;
              &lt;/tr&gt;--&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align=left&gt;&lt;FONT class=s_title&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1&lt;BR&gt;우선순위 첫째 경제, 둘째 반공&lt;/B&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8&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to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lt;/TD&gt;
&lt;TD&gt;&lt;IMG class=border border=1 align=lef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04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4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3 width=580&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olor=#3a7fbf&gt;&lt;박정희 대통령 마산 수출 공단 시찰(1971.4.9)&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5&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FONT class=view&gt;&lt;B&gt;전진하고 발전하려는 70년대 한국의 역사정신과 그 올바른 목표를 달성키 위한 정책은 정확했다&lt;/B&gt;&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LEFT: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right&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06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lt;박정희 대통령 서울-원주 간 영동고속도로 개통식 참석(1971.12.1)&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금년으로 박정희 대통령이 별세한 지 15년이 됩니다. 이제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었고 그간에 ‘역사의 단절이냐 계속이냐’ 하는 논의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박정희 시대는 과연 한국과 한국 사람에 대해서 무엇이었던가를 담담한 마음으로, 양심적으로 공정하게 되돌아보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늘 이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남덕우&lt;/B&gt; : 역사의 단절이냐 계속이냐, 흔히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어떤 이데올로기의 구도가 있어서 거기에 맞지 않는 것은 부정(否定)이고 또 그 구도에 맞는 것과 안 맞는 것을 비교해서 그 중간은 단절, 이렇게 말하는데 역사에는 단절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좋건 나쁘건 역사는 계속되는 것이고 그런 역사의 계속을 통해서 진화가 있고 발전이 있고 혁신이 있다고 생각합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우리나라에서 경제 개발 계획이 시작된 것은 박정희 시대에 들어와서부터인데 그 개발 전략은 중요한 부분에 집중 투자하는, 이른바 개발 투자의 파급 효과가 가장 큰 것부터 중점적으로 개발하는 불균형 성장론(strategic development policy)에 입각했던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개발 계획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늘지고 주름살이 생긴 분야도 있었는데, 이의 시정책이 미흡했지 않았느냐 하는 비판이 있었습니다.&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RIGHT: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06_2.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lt;울산 한국비료 공장(1972.9.30)&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amp;nbsp; &lt;B&gt;남덕우&lt;/B&gt; :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 전략은 요충 공격식이라고 말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거죠. 저는 지도자의 첫째 조건은 우선순위에 대한 투철한 감각이라고 생각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그 우선순위를 확실히 갖고 있었어요. “첫째는 경제이고, 그 다음은 반공(反共)이다.” 이것이 뚜렷했거든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범위를 좁혀서 경제 발전에 국한해 보면 첫째로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려면 사회 간접 자본을 개발해야 한다. 또 둘째 우리가 경제 발전을 하려면 외국에서 물건을 수입해야 하는데, 수입을 하려면 우리가 수출을 해야 한다. 그래서 수출 제일주의에 역점을 둔다. 그리고 셋째로 국제적 환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한다.”&lt;BR&gt;&amp;nbsp; 즉, 60년대 후반에서 70년대 전반까지는 국제적 환경이 아주 유리했는데, 그것을 외향적인 자세로 국제 환경을 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 적극적으로 외자를 도입하고 또 부채 망국론이란 비판을 무릅쓰며 외국 자본을 차관으로 도입해서 경제 발전에 주입했었지요. 그렇게 해서 경제 발전에 시동이 걸렸고, 시동이 걸리면서 곧 모든 것이 고르게 발전하는 것이 불가능하니까 자연히 지역적인 격차와 소득 격차 문제도 생겼던 것입니다.&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LEFT: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right&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07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lt;미국 핵잠수함 친선 방문(1965.6.25)&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amp;nbsp; 이는 당연히 예상되었던 문제고, 그건 다음 단계에서 해결할 문제였지요. 처음부터 균형 발전이다 공동 분배다 해 가지고는 흔히 유행했던 남미 스타일의 개발이 되어 실패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문제가 다양하고 복잡할 때는 순위를 결정해 가지고 우선적인 과제에 대해서 역량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것이 어느 나라의 역사에서도 지도자의 첫째 요건이 되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그러한 우선순위, 다시 말하면 경륜이 뚜렷한 지도자였다고 말하고 싶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솔직히 말해서 대원군 집권이 일본 명치보다도 4년이 앞섰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잘했더라면 우리도 일본처럼 잘살 수 있었을 텐데 그만 잘못해 가지고 식민지가 되어 고생했는데 이것을 따라잡기 위해서 정책적으로 밀고 나갔거든요. 세계은행이 개발도상국을 지원하는 이념하고는 처음부터 안 맞았어요.&lt;BR&gt;&amp;nbsp; 세계은행은 박 대통령이 18년의 집권 기간 동안 수출은 5,400만 달러에서 100억 달러 이상으로 20배, 1인당 국민 소득 또한 82달러에서 1,644달러로 20배 증대시킨 경제 업적을 ‘한국 경제의 기적(Korean Economic Miracle)’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2&lt;BR&gt;경제 발전의 비결은 행정적 안정&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비전과 용기, 자기희생 갖춘 리더십&lt;/B&gt;&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RIGHT: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left&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07_2.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lt;맹호, 청룡부대 환송식(1966.7.22)&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amp;nbsp; &lt;B&gt;최형섭&lt;/B&gt; : 이렇게 해서 70년대 우리의 경제가 상당히 발전했는데, 그 원인으로 나는 세 가지를 들고 싶습니다. 그 하나는 국민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입니다. 경제 발전을 해야 산다는 사실을 언제는 몰랐나요? 다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결국은 리더십인데, 나라에는 나라의 리더십(National leadership)이 있어야 되고, 조직체에는 조직체의 리더십(Organizational leadership)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리더십을 구성하는 내용은 결국 지도자의 앞을 내다보는 비전과 용기, 그리고 자기희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희생 없이는 영도력이 생기지 않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그 당시 로켓 연구 개발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최형섭&lt;/B&gt; : 국방 연구소가 주관했으니 국방 기밀에 속해서 상세한 것까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짐작하건대 제대로 잘 되어 가고 있었다고 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영문인지 국방 연구소에서 추진해 온 로켓 프로젝트가 우리가 개발한 것이 아니라 미국 것을 그대로 쏘아올린 것 같이 와전된 것 같습니다. 이에 직접 관련된 사람의 말에 의하면 그 때에 ‘추진제’만 하더라도 고체 연료를 썼는데 그것은 프랑스 기술로 만든 것이고, 미국 로켓을 그냥 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미국 것에다 고체 연료를 쓰려면 설계를 바꿔야 한답니다. 그 당시 이 프로젝트를 담당한 이경서(李景瑞) 부소장의 말에 의하면 일본은 주로 액체 연료를 쓰는 로켓 개발을 하고 있었기에 고체 연료를 사용하는 로켓은 우리 것이 일본보다 나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설계로 거의 80% 이상 국산화되었고, 그대로 놔뒀으면 일본보다 훨씬 앞섰을 것이라고 합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제가 보충 말씀을 드리죠. 박 대통령께서는 이북이 남쪽으로 프로그 미사일 사격을 하면 오산까지 내려오니 우리에게도 NATO에 있는 랜스를 달라고 미국측에 요청했습니다. 미국측은 우리가 이 랜스를 가지고 있으면 신의주와 두만강까지 쏘게 되어서 쳐올라 간다고 생각했는지 못 주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적어도 평양까지 도달하는 지대지 미사일을 자체 개발해야겠다고 결심하고 KIST에 특명을 내렸습니다. 미국 국방성, 국무성이 모두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하고 교섭해 가지고 연구 개발해서 쏘아 올렸습니다. 평양까지와 같은 거리인 서해안의 군산 앞바다에 표적물을 띄워놓고 쏘았는데 정확히 명중했습니다. 그것은 그 당시 우리나라 종합 과학의 한 결정체였습니다.&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8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08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박정희 대통령 한국과학기술연구소 기공식 참석(1966.10.6)&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북한이 노동 1호, 2호들을 만들었고 또 핵탄두를 바야흐로 부착시켜서 핵미사일로 무장하려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이것을 갖고 사기 공갈 외교를 자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는 국민들은 마음으로 지극히 불안해하는데 우리는 지금 속수무책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젊은 세대의 어떤 정치 평론가는 5공 때 이 유도탄 개발 사업이 폐기 처분된 이유는 미국의 압력에 꼼짝 못하고 굴복했기 때문이며, 이것은 5공 정권이 자신의 정권 안보를 위해 국가의 자주 안보를 미국에 팔아넘긴 것과 다름없다고 보고 있어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설마 그랬겠느냐 싶지만 지금 북한 핵문제로 야기된 국제 정세를 볼 때 미국 정부의 비위를 건드리면서까지 국익 추구를 위해 기울여온 박 대통령의 헌신과 원대한 식견에 비하면 5공 정권의 그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카터가 미군 철수 방침을 밝혔을 때 박 대통령의 심정은 마치 애증의 갈등 속에서 고민하는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우리는 미군이 한국에 계속 주둔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자기의 국내 사정으로 꼭 철수시켜야 한다면 우리는 굳이 이를 말리지 않겠다.”고 하시면서 그대로 받아 적어서 발표하라고 하셨어요. 그 순간 박 대통령의 표정은 표현할 수 없는 착잡하고 비장한 것이었습니다. 마치 믿거라 하고 사랑하던 사람으로부터 일방적으로 배신당했을 때의 심정 그대로였어요. 그래서 나중에는 미국이 두 개의 얼굴을 가진 나라임을 깨달은 것이지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하나의 미국을 사랑했고 좋아했으나 또 다른 미국에 의해 배반당한 것을 못내 서운해 하는 것 같았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 대통령은 월남 파병을 결심할 때 우리가 6·25전쟁 때 입은 미국으로부터의 원조에 보답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리감에 크게 지배받았던 것입니다. 이토록 박 대통령은 미국을 좋아했고 믿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또 다른 미국은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내정 간섭을 해 왔고, 이것을 거부하는 박 대통령에게 비인격적이며 정치적인 제재를 가했습니다. 박 대통령은 여기서 실망하고 고민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lt;/FONT&gt;&lt;BR&gt;&lt;BR&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파일2번 내용################################################################################################--&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align=left&gt;&lt;FONT class=s_title&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3&lt;BR&gt;남북영수회담보다 신뢰 회복에 역점&lt;/B&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8&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to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lt;/TD&gt;
&lt;TD&gt;&lt;IMG class=border border=1 align=lef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10_1-2.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4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3 width=580&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olor=#3a7fbf&gt;&lt;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미국 대통령 26사단 시찰(1966.11.1)&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0&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space.gif&quot; width=1 height=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DIV id=articleBody2 class=subArtcl2&gt;&lt;FONT class=view&gt;&lt;B&gt;전쟁 나면 미군은 서부전선에서 모두 뺀다&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남덕우&lt;/B&gt; : 국방 예산을 보고하러 들어갔는데 그 때 이런 말씀을 했어요. “김일성이가 또 남침을 하면 내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미군을 서부 전선에서 전부 빼는 것이다.” 왜 그렇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그 친구들 뻣뻣이 서서 총 쏘는 자들이야. 다 총에 맞아 쓰러질 텐데 기자들이 사진 찍어 미국 가서 방송을 하면, 이거 무엇 때문에 미국 젊은이가 한국을 위해서 죽어야 하느냐! 하면서 반전론이 일어나 국론이 분열되고 결국 우리는 진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반대로 전쟁이 나자마자 너희들 뒤로 물러서라 하고 우리가 전선을 맡으면 한 1주일 동안은 우리가 밀릴는지 몰라. 그러나 1주일 후에는 우리가 올라간다. 올라가서 평양까지 간다. 그러면 미국의 싱거운 친구들 그 때 되면 한국은 월남과 다르다며 좋아할 것이다. 우리가 미국한테 바라는 것은 공군 지원하고 병참 지원이다. 절대로 육전에 참가시켜서는 안 된다. 미군 사상자를 내서는 안 된다.” 이렇게 대답하더군요. 나, 이 얘기 여러 군데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자력으로 38선을 지킬 각오가 서 있지 않으면 자주 국방은 어려울 것입니다. 한마디로 자주국방이라 함은 유사시에 싸울 태세를 갖추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하고 말로 해 봤자 소용없는 얘기이고 대화라 해도 실력의 배경이 있을 때 얘기이지, 실력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아야 합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북한의 가중되는 침략 위협과는 상관없이 국제 정세는 표면상 계속 데탕트 방향으로 치닫고 있어서 미국은 주한 미군을 철수하려 들었죠. 그 틈바구니에 끼어서 박 대통령은 국가안보에 참으로 노심초사하였습니다. 유비무환이 그분의 좌우명이기도 하였거든요. 따지고 보면 박 대통령은 『손자병법』을 비롯하여 동서고금의 병서에 조예가 깊었어요. 그래서 싸우지 않고 이겨야 한다. 이것이 최선의 병법(兵法)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으니까 군사적 면에서 뿐 아니라 정치 외교적인 면에서도 평화 공존주의자였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 대화의 개시에 더욱 관심이 쏠리게 되는데, 이 남북 대화가 시작되는 경위에 대해서 말씀해 주시지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6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북한이 경제력에서나 군사력에서나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국민들을 강제 동원해서 군비 확장을 위한 중공업 건설에 대단히 힘을 기울였거든요. 그래서 그 당시 영국의 여류 경제학자인 로빈슨 여사가 북한 방문 후 기자 회견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경제적으로 월등히 우위에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것이 6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래서 우리가 필사적 노력을 해서 70년 초에 가서야 겨우 북한의 경제력을 따라잡았습니다. 그러나 군사력은 여전히 북한이 우세했습니다. 그러면서 계속 남한에 대해 무장 간첩단을 내려 보내서 테러·파괴 행동을 자행하고 있었던 것이지요. 여기서 박 대통령은 남북 관계의 기본은 첫째 북한이 남한을 다시는 쳐내려오지 못하도록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렇게 해서 유지되는 평화 속에서 서로 대화를 해 나가야만 한다는 철학을 갖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 영수회담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 먼저 상호 신뢰 회복이 더 중요하다고 보고 있었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래서 첫째는 방위 산업과 중화학 공업을 연계시켜서 민간 경제의 발전이라는 테두리 안으로 군수 공업을 흡수시켜 발전시키려 했고, 둘째는 남북 대화를 추진했던 것입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우리가 막강한 억제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만 합니다. 즉, 힘을 보여 주어야만 그들이 대화에도 할 수 없이 응해 오지 그러지 않으면 북한하고의 대화는, 다시 말해서 힘의 배경이 없는 대화는 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시간과 정력의 낭비일 뿐입니다. 요새 핵문제 가지고 북한이 하는 꼴을 보면 박 대통령이 얼마나 선견지명이 있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본론으로 들어가서 남북 대화인데 우리가 경제 건설과 국방 태세 강화에 고심하고 있을 때 국제정세는 급속히 긴장 완화 쪽으로 변해 가기 시작했지요. SALT(미·소 간 전략무기제한 회담) 협정 체결, 동서독 간의 화해 진전, 미·중간의 핑퐁 외교, 키신저의 중국 비밀 방문 등이 그것입니다만, 국제 경제면에서는 71년 닉슨 대통령의 달러 방위를 위한 긴급 조치로 인해 세계 경제가 커다란 쇼크를 받게 되자 우리나라에서는 기업의 연쇄 부도 현상이 나타나게 되었어요. 이 때 박 대통령은 국내기업을 먼저 방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8·3 긴급 조치를 한 겁니다. 그리고 국제 정세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던 참이에요. 그 때 수요회라는 모임에서 건의가 올라왔습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 모임에는 김성진 씨도 직접 관여하고 있었으니 더 잘 알겠지만, 여기서 우리나라도 국제 정세의 변화에 발맞추어서 남북 간의 평화 공존을 추구해야 할 때라고 하면서 인적 물적 교류를 시작해야 한다는 정책 건의를 해 온 것입니다. 박 대통령께서 이를 받아보신 다음에 이것을 CIA, 통일원, 그리고 외무부에 보내서 검토해 보라는 지시를 내렸고 정부 관계 부처에서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을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어서 그 해 8월 12일 비로소 대한 적십자사 총재 (당시 최두선씨) 명의로 북한에 대해 공식 제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남북 대화를 시작하게 된 최초의 경위이지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그 후 남북 적십자 회담의 진전은 당시의 흥분과 감격에 비해서는 아주 실망적인 진전을 보였는데 그때 상황을 다시 회고해 보는 것도 무의미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lt;/FONT&gt;&lt;/DIV&gt;&lt;BR&gt;&lt;BR&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파일3번 내용################################################################################################--&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quot;98%&quot;&gt;
&lt;TBODY&gt;
&lt;TR vAlign=top&gt;
&lt;TD align=left&gt;&lt;FONT class=s_title&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4&lt;BR&gt;통일 서두르지 않고 평화공존 선언&lt;/B&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18&gt;&lt;/TD&gt;&lt;/TR&gt;
&lt;TR&gt;
&lt;TD vAlign=to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lt;/TD&gt;
&lt;TD&gt;&lt;IMG class=border border=1 align=left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13_1-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colSpan=4 align=midd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3 width=580&gt;
&lt;TBODY&gt;
&lt;TR&gt;
&lt;TD&gt;&lt;FONT color=#3a7fbf&gt;&lt;한국영화 팔도강산 관람객 운집(1971.1.27)&gt;&lt;/FONT&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0&gt;&lt;IMG src=&quot;http://www.parkch.com/images/space.gif&quot; width=1 height=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DIV id=articleBody3 class=subArtcl3&gt;&lt;FONT class=view&gt;&lt;B&gt;北은 보안법 철폐, 미군철수 등 정치선전 일색&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은 셈입니다. 즉, 그 다음해 6월까지 무려 19회나 예비회담을 가졌으나 본회담의 의제조차 합의를 못 봤어요. 72년 5월에 닉슨·주은래 간의 상해 공동성명이 나왔는데 말입니다. 북한은 인도적 문제를 다루는 적십자 회담인데도 반공법과 보안법 철폐를 들고 나온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것이 모든 것에 앞서는 선행 조건이라는 것이지요. 우리들은 그것보다 실천 가능한 것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가면서 상호간의 신뢰를 회복해 나가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믿고 실용적이며 실제적인 접근 방법을 추구했습니다. 아마 동서 냉전 시 모든 분쟁을 해결해 나간 일반적이고 효과적 접근 방식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접근 방법이 얼마나 합리적이며 올바른 방식인가는 대뜸 이해하고 동의할 것입니다. 이처럼 지지부진한 예비회담이 진행되고 있을 때 우리측 실무대표인 정홍진 씨가 북한측 대표 중 실력자로 지목된 김덕현에게 사적으로 비밀리에 남북 간의 문제에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끼리 만나서 얘기해 보자고 제의를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 북한에서도 용의가 있다는 반응을 보였고, 그들은 김일성의 친동생인 김영주가 책임자라고 알려왔던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래서 정홍진 씨가 준비 차 먼저 북한에 들어갔다 오고 그 뒤 이후락 씨가 들어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돌아왔어요. 그 다음에 답방 형식으로 김영주 대신에 박성철(부수상)이 서울에 와서 박 대통령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주머니에서 수첩을 꺼내더니 박 대통령 앞에서 미리 써 온 것을 줄줄 읽어 내려가요. 처음 안부 인사부터 마지막 인사까지 써 온 대로 한 자라도 틀릴세라 조심해 가며 읽어 내려가더군요. 참으로 놀랐습니다. 그렇게 경직되고 교조적인 태도가 유일사상으로 철저히 세뇌되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감시 때문에 그런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만, 거기서 박성철은 다시 반공법과 보안법의 철폐를 거론했어요.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또 남북 정당 사회단체 회의를 개최하고 유엔군 사령부 해체, 미군 철수,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어요. 즉, 적화 통일을 하겠다는 속셈이지요. 아무튼 써 온 것을 한 자도 빠뜨리지 않으려고 열심히 읽어 내려갔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볼 때 북한의 태도에는 추호의 변화도 있을 수 없음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그들하고 만나보지 않고는 도저히 알 수 없을 것입니다. 요새 미국 사람들도 차츰 북한이 얼마나 표리부동하고 음흉한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서 남북 간의 적십자 대표들이 상호 방문을 하고, 7·4 남북 공동 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 MARGIN-LEFT: 15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300 align=right&gt;
&lt;TBODY&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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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14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lt;청룡부대 작전(1971.3.22)&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남북 적십자 회담이 조선호텔에서 열리고 있을 때 일입니다. 대통령께서 TV 생중계로 회담 진행 상황을 보고 계시던 중 북한측 대표의 정치 선동에 가득 찬 독한 연설에 당황한 나머지 우리측 대표단이 회담의 중단을 고려하는 듯한 눈치가 TV 화면을 통해 감지되자 짐짓 긴장하셨어요. 그 때 실장님도 같이 계셨는데 제가 이렇게 말씀드렸지요. “주최측인 우리 쪽에서 먼저 회담을 중단시키는 것은 잘못입니다. 계속 끌고 나가야 합니다.”고 말했더니 대통령께서 즉각 동의하시면서 전화로 현장을 불러 우리 대표단에게 회의를 중단시키지 말고 계속 끌고 나가라고 지시를 하셨어요. 나는 이 때 그분의 결단력에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 때 북쪽 대표의 연설이 중계되고 있었기 때문에 전국의 국민들이 시청하고 있었어요. 북한 대표단의 서울 도착 때 우리 시민들이 대단한 호기심을 갖고 길거리로 몰려나와 이들을 지켜보았고, 어떤 사람들은 순수한 동포 의식에서 태극기까지 들고 나와 환영했던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런데 막상 TV를 통해 그들의 발언을 듣고는 실망과 격분과 배신감에서 재떨이를 내동댕이치는 사람이 없었나, 신문사와 방송국에 불이 나게 전화가 걸려오지 않나……. 그래서 그들을 규탄하는 의견이 줄을 이었답니다. 한마디로 감격과 흥분이 분노와 규탄으로 삽시간에 뒤바뀐 것이지요. 이 때 김옥길 여사의 대표 연설은 참으로 동포애와 이산가족의 피눈물 나는 사연을 간절히 표현한 모성애 넘치는 감동적인 연설이었는데, 북측 대표의 연설은 그야말로 매섭고 냉정한 계급투쟁 의식에 가득 찬 정치 선동 연설이었으니 극단적 대조를 이루었지요. 그래서 더욱 분노를 자아냈던 것으로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여기서 박 대통령의 통일관에 대해서 잠시 언급해 보겠습니다. 제가 박 대통령의 각종 연설문을 써 왔기 때문에 비교적 정확히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박 대통령은 자기 생전에 남북통일을 이루겠다는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민주적 통일의 기초와 토대를 만들어 놓겠다고만 얘기했습니다. 즉, 자기의 역사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물론 본인이 그렇게 비명에 일찍 세상을 뜰 줄은 생각도 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어쨌든 가까운 시일 내에 통일이 될 수는 없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요새 운위되는 분단 고착주의자는 결코 아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환상적이며 감상적인 통일론을 배척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남북이 평화 공존을 먼저 해야만 거기서부터 통일의 계기를 찾게 된다고 믿고 있었던 것이지요.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5&lt;BR&gt;체육관 선거엔 처음부터 반대&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과열·과소비 막고 국론 통일시킬 방법 모색&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그랬어요. 그래서 다시 적십자 회담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회담이 끝난 다음 날 고궁 시찰과 만찬 등의 일정이 있었는데, 공식 만찬이나 비공식 만찬 자리를 가릴 것 없이 북측 대표들은 그 자리에 10명이 있으면 이들 10명이 한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똑같은 소리를 했어요. 사적인 술좌석에서도 그랬답니다. 시작과 끝이 똑같았대요. 그런데 우리 쪽은 어떠했는가 하면, 예를 들어 그들이 보안법을 폐지하라면 이쪽에서는 너희들이 간첩 내려 보내니 그것이 필요하다고 대답하지요. 그러면 저쪽에서는 안 보냈다고 대꾸한답니다. 그러면 보냈다 안 보냈다 하다가 앞으로 안 보내겠다. 그러니 폐지하라 이런 식으로 세뇌공작을 하려 들더란 말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렇게 되면 우리 쪽 인사들은 귀찮아서였는지 어째서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어물어물 넘기면서 줏대 없는 소리나 되풀이하다간 그만 그 장면을 넘겨 버리곤 하더랍니다. 여기에 초대되었던 남쪽 인사들은 정부 기관 인사만이 아니었습니다. 민간 지도급 인사들이었어요. 대학 교수들도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세히 대통령에게 보고가 되었어요. 이를 받아본 대통령은 ‘이것 참 큰일 나겠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지도급 인사들조차 이 모양인데 이러다가는 남북 대화를 하게 될 경우 남쪽에서는 의견 백출, 북한과의 대화는 고사하고 도리어 우리의 국론이 분열될 것은 뻔히 내다보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박 대통령은 국론의 통일 방안이 무엇인가를 비롯해서 정치 안정은 어떻게 해야 가능한가! 선거에 비용이 적게 드는 방법은 없겠는가! 선거 때문에 사회 혼란과 질서가 파괴되지 않도록 하는 방법은 없겠는가! 이것을 골똘하게 생각하기 시작했고, 관계 기관에 연구 검토하라고 지시했던 것입니다. 그 결론으로 나타난 것이 유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유신이야말로 박 대통령에 대한 비판의 초점이 되는 부분인데요, 독재 정치다 영구 집권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얘기였습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그 비판과 비난의 핵심은 선출 방법과 비상대권에 있었다고 보는데, 과연 박 대통령이 그것을 원했습니까?&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박 대통령께서는 체육관에서 추대 받는 식의 대통령 선출 방식은 원하지도 않았고 지시하지도 않으셨습니다. 대통령께서 70년까지 선거를 세 번 했습니다. 그 때마다 군중 동원이 대단했습니다. 여야가 서로 50만 명, 심지어는 100만 명이 동원 되었다고 과장할 정도였습니다. 이 때 공산 분자가 야당 후보를 암살이라도 하고, 그것을 정부가 한 것이라고 모략 선전을 한다면 선거는 고사하고 내란 상태까지는 안 갈지 몰라도 삽시간에 극도의 혼란 상태가 야기될 것이 우려되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니 이러한 위험천만한 원시적 유세보다는 좀 더 질서 있고 평화로운 선거 운동 방법은 없겠느냐 하는 것을 박 대통령은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가 대규모 군중 동원에 의존하는 선거 유세보다는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선거 유세를 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시작했죠. 그럴 경우 유세 없는 선거는 있을 수 없다는 판단 하에, 그렇다면 간접 선거제를 채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사견을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받아 가지고 CIA가 남북 대화의 경험과 간접 선거제의 매력을 가미해서 생각해 낸 것이 통일주체 국민회의를 구성하고, 여기서 대통령을 선출하는 방안이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것을 보고 받으시고 대통령께서는 “이것이 어디 선거냐, 이것은 추대이지.” 그러시면서 반대했습니다. 그런데 북한을 상대해 온 CIA에서는 북한측의 통일 전선 전략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대통령 선거만은 압도적인 절대 다수표로 당선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와 같은 선출 방식을 고집했던 것입니다. 결국 선출 방식이 대통령의 뜻과는 상관없이 추대식으로 되어 버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아도 송구스러울 따름입니다. 정견 발표도 없고 단일 후보에 대해 아무리 간접 선거라 해도 찬반 토론이 없는 선출 방법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또 정당 운영도 그랬습니다. 정치 자금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것을 어디서 조달합니까? 결국 정부가 거들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정치가 행정에 간여하게 되지요.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면 경제적 논리에 어긋나는 결정을 할 경우도 있게 되고, 이렇게 되면 정치가 이권에 개입하게 되니 정치도 안 되고 경제도 안 되고 둘 다 안 되게 마련이죠. 정치 자금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게 당면한 중대 현안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통령께서 결단을 내리신 겁니다. 국회의원의 선출 방식도 하나의 선거구에서 1등과 2등 두 사람을 다함께 당선시키자. 그렇게 하면 선거 운동도 죽자 사자 식으로 백열화되지도 않고 돈도 덜 쓰게 되니 자금도 절약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와 같은 선거 방식이 나온 것입니다. 처음부터 영구 집권이니 총통제를 머릿속에 그려 놓고 시작한 것은 아니었고, 또한 박 대통령 스스로가 그렇게 지시했던 것도 아닙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6&lt;BR&gt;충성심 경쟁이 빚어낸 역기능들&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일성은 1급 전범, 민족반역자란 인식 확고&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그러나 유신은 결과적으로 한국 정치의 정상적 발전에 제동을 걸었으며 부분적 동결을 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어느 특정인의 책임이기보다는 남북 간의 대결구도 속에서 국가적 생존을 위해 우리 정치가 불가피하게 선택하였던 시대적(時代的) 소산물이었다고 봅니다. 대통령의 비상 대권도 그와 같은 차원에서 볼 수 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한편 이철승 씨 집에 대한 방화사건, 김영삼 씨에 대한 약물 투척 테러 사건, 그리고 김대중 씨 납치 사건 등 정치 테러 사건은 굳이 유신과 관련시키지 않더라도 비도덕적인 야만적 작태로서 반성해야 할 것입니다. 이 밖에도 갖가지 인권유린과 언론인에 대한 박해 사례 등은 이 나라 정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대통령 본인의 지시에 의했던 게 아니라 관련 기관원들의 과잉 충성 때문이었다고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김대중 씨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제가 비서질장이었으니까 명백히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때 박 대통령은 그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대변인실에서 보내온 외신을 들고 보고 하러 갔습니다. 대통령께서는 점심 드시러 막 식당으로 가던 참이었어요. 김씨의 납치와 행방불명에 관한 외신 보도를 보고드리자 놀라는 표정으로 보고 자료를 받아들고 식당으로 들어가신 후 다시 서재로 나오셔서 다음 4가지를 긴급히 체크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이 사건이 정보부 소행이냐, 아니면 경호실 소행이냐, 또는 재일 거류민단의 과잉 충성이냐 이 세 가지를 체크하고, 이것이 모두 아니라면 그 다음에는 김대중 씨 계열의 조작극일지도 모르니 이를 신속히 체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후락 정보부장과 박종규 경호실장에게 직접 물어보았으나 모두 자기들 기관은 관여하지 않았다는 대답이었습니다. 민단측에서도 전혀 모른다는 대답이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래서 청와대에서도 스스로의 조작극인 것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미국의 하비브 대사가 저를 찾아왔어요. 대통령께서 네 가지 경우를 상정한 지시에 따라 모두 조사해 본 내용을 그에게 알려주고 앞으로도 서로 정보를 교환하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그 후 며칠 지나 김씨가 서울에 돌아왔다며 이를 알려주는 등 확인하려는 전화가 언론계로부터 대변인한테 계속 들어온다는 얘기였습니다. 깜짝 놀라 즉시 대통령께 보고했더니 대통령께서 다시 한 번 놀라시며 김씨에 대해서는 티끌만큼의 상처나 위해도 가하지 말라는 엄한 지시를 관계 기관에 전하라는 말씀이었어요. 그래서 즉시 복명했죠.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나는 대통령께서 그 사건에 관여했다고는 보지 않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지금도 기억합니다만 박 대통령께서는 돈이 들지 않는 민주주의를 해 보자고 무던히도 노력을 했지요. 경제 발전에 쓸 돈도 모자라는데 그 알량한 ‘정치’ 한답시고 돈 낭비하는 것에 몹시 언짢아하셨거든요. 그리고 71년 선거 때 유세에서 “나의 상대는 북한의 김일성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박 대통령이 김일성을 대단한 경쟁자로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 이유는 간단명료했습니다. 첫째는 우리의 시장 경제체제와 민주적 이념이 정당하고 옳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고, 둘째는 박 대통령 스스로가 도덕적으로 김일성보다 우월하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은 제아무리 과장해서 자기의 항일 투쟁을 내세운다 해도 그가 6·25 전쟁을 야기한 전쟁 범죄자로서의 죄과는 씻을래야 씻을 수 없으며, 따라서 그를 민족 반역자라고 치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박 대통령이 한때 일본 제국의 육군 장교로 있었다는 경력보다는 김일성이 6·25전쟁의 일급 전범(戰犯)이며 동족 살육의 민족 반역자라는 경력이 더욱더 치명적이며 비도덕적이라고 봅니다. 박 대통령은 북한 정권의 실체를 머릿속에 그와 같이 파악하고, 경제력과 국방력을 합친 국력을 북한보다 막강하고 압도적인 우위에 올려놓는 데에 그의 국정 목표를 두었던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래서 정치에 관한 한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모두 자기가 도맡아 껴안고 비난과 비판을 스스로 감수하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이처럼 대통령에게 너무나도 많은 희생을 강요했습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우리들은 보필을 잘못한 것이지요. 죄책감을 느끼며 또 한편으로는 그분의 숭고한 자기희생과 투철한 역사적 사명 의식에 고개 숙여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어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사실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대통령께서는 정치를 참으로 깨끗이 하신 겁니다. 정치 자금에 관해서도요. 제가 72년부터 78년 12월에 그만둘 때까지 연 20억 정도의 정치 자금을 모아서 대통령께 드렸습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전에는 공화당에서 도맡아 했는데 정치가 행정에 관여하게 되어 경제계에서조차 말썽이 없지 않아 있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대통령의 지시로 제가 직접 일반 헌금식으로 받기 시작한 후로는 절대로 불미스런 일이 없었습니다. 대통령 덕분에 경제 발전이 되어서 사업이 잘 되니까 예의상 얼마씩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도 20여 명에게 국한해서 부탁했습니다. 제일 큰 것이 1억 정도였는데 3~4명이었고, 기타는 5,000 또는 3,000 어떤 분은 2,000 정도여서 해마다 20억 원을 도움 받았습니다. 어째서 20억 원이라는 숫자가 나왔느냐 하면 공화당에 매월 1억 원, 유정회에 2~3천만 원, 추석·연말 비용으로 1억 내지 2억 원 정도가 필요하다고 판단되어서 대통령의 승인 하에 그렇게 했던 것이지요.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7&lt;BR&gt;월남패망이 안보에 미칠 영향 우려&lt;/B&gt;&lt;/FONT&gt;&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80 align=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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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lt;월남파병 위문단 일행 귀국 인사차 박정희 대통령 예방(1965.5.31)&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경제·국방력에서 북한 압도가 국정 목표&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그런데 제가 알기로는 박 대통령께서 79년 1월에 중앙정보부장을 마치고 쉬고 있던 신직수 씨를 법률 담당 특별 보좌관이라는 직책을 주어 청와대로 다시 불러들였거든요. 그 때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일반 사법 행정이라면 법무부 장관이 있고 또 부정 부패를 다스리기 위한 것이라면 이미 사정 담당 특별 보좌관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법률 담당 특보냐 하는 데에 관심의 초점이 몰렸습니다. 그 인사 발령은 무엇 때문에 나왔던 겁니까?&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그 점이 바로 유신 헌법의 개정 작업과 직접 관련된 인사 발령이었습니다. 박 대통령께서는 그 때 국정 운영에 관하여 몹시 심각한, 그러나 유연한 구상을 하고 계셨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먼저 배경을 살펴보면 프랑스 파리에서 진행되고 있던 미국과 월맹 간의 평화 협상 경과를 항상 파악하고 있던 박 대통령은 75년에 들어와 월남과 캄보디아의 패망이 임박했음을 간파하고 월남 패망이 몰고 올 우리 안보에 대한 크나큰 위기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에 골몰했습니다. 우선 국론을 재정비하기 위해 75년 2월 유신 헌법에 대한 국민 투표를 실시했지요. 국민의 70.5%가 지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 후 2개월도 안 되어 4월 1일 캄보디아의 론놀 수상이 망명길에 올랐고, 4월 21일에는 월남의 티우 대통령이 사임했으며, 4월 23일에는 미국의 포드 대통령이 월남전의 종결을 선언했고, 4월 30일에는 월남이 무조건 항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한편 인도차이나 반도 사태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가고 있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중국과 동구 각국을 방문하기 위해 4월 18일 평양을 떠났습니다. 무력 통일에 필요한 각종 무기와 유류의 공급 요청, 그리고 무력 남침에 대한 중국의 반응 등을 떠보기 위한 것이 틀림없었다고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월남과 캄보디아의 패망은 우리 국민에게 일대 위협을 주었고 민심의 동요도 컸어요. 그래서 박 대통령은 4월 29일 이례적으로 특별 담화를 통해 ‘서울 사수’를 선언했습니다. 5월 13일에는 ‘국가 안전과 공공질서의 수호를 위한 대통령 긴급 조치’를 선포하고 특별 담화를 통해 “우리 모두 철통같이 단결하여 총력안보 태세로 이 난국을 의연하게 극복합시다.”라고 국민에게 호소하였습니다. &lt;BR&gt;&amp;nbsp; 이어 5월 21일 박 대통령은 야당의 김영삼 총재를 청와대로 초치, 영수회담을 가졌던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우리 안보의 초긴박성에 대하여 미국 정보기관과 우리 국방 당국의 최신 군사 정보를 인용하면서 북의 남침 준비 및 부대의 전진 이동 상황과 김일성의 특이 동향 등을 김 총재에게 설명하고, 만약 북이 남침해 왔을 때는 한·미 양국 대통령이 이미 승인한 바 있는 서울 사수 7일 또는 9일 격퇴 작전의 내용까지도 자세히 설명하였던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면서 월남 내부의 국론 분열이 월남 패망의 최대 이유 중의 하나였던 점을 지적하고 국가적 초당적 총력안보와 총화 단결을 요청하였던 것이지요. 이 때 김 총재는 초당적 안보에 적극적으로 협력할 것을 확약하였지만 신민당의 당론인 조속한 시일 내의 민주 회복 문제에 대해서는 완강한 입장을 취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박 대통령은 두 달 전인 2월 실시된 유신 체제의 존속 여부와 박 대통령의 신임을 묻는 국민 투표 결과를 제시하면서 국민의 절대적 찬성으로 유신 체제의 국민적 정당성이 재확인된 만큼 신민당도 국민 다수의 뜻에 따를 것을 종용하였어요.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김 총재는 계속 조속한 시일 내 민주 회복, 즉 유신 헌법의 개정을 주장하였으며 박 대통령은 “북으로부터의 남침 위협이 현저히 줄어들면 현행 헌법도 개정될 수 있다.” 고 말함으로써 일단 영수회담을 마쳤던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한편 1978년 5월에 제2대 통일주체 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미 앞에서 얘기했습니다만, 1972년 10월 유신 때부터 단일 대통령 후보를 놓고 정견 발표와 찬반 토론 없이 대의원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된다는 것은 일종의 추대와 같다 하여 난색을 표명했던 박 대통령은 이번 선거 때에는 관계법을 고쳐서 복수 대통령 후보가 입후보하여 정견발표를 하며, 대의원들도 어느 대통령 후보를 지지한다는 의사 표시와 찬반 토론을 통해 선출되도록 해야겠다는 의향을 다시 한 번 표시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막상 대통령 선거 관련법을 개정하고자 하니까 헌법 자체의 개정 여부 논의가 필연적으로 제기되었어요. 이에 대한 명백한 정책이나 방침 없이 선거 관계법만을 다룰 수가 없는데다 시간도 없고 해서 부득불 종전대로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1978년 7월 유신 헌법 하에 제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자 박 대통령은 1975년에 이미 김영삼 신민당 총재와 주고받은 바도 있고 해서 은밀히 대통령 선거 방법은 물론 유신 헌법 자체의 개정 작업을 착수시키게 된 것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그만 두고 집에 쉬고 있던 신직수 씨를 법률 담당 특별 보좌관으로 임명하여 다시 청와대로 불러들인 것은 박 대통령의 유신 헌법 개정을 위한 공식적 의사 표시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비서실에서도 아울러 개헌 후의 국정 운영 전반에 대한 연구 지시가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내가 유혁인 씨 (당시 정무수석 비서관)에게 중지를 모아 성안토록 하라고 부탁하였던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8&lt;BR&gt;은밀히 유신헌법 개정작업 지시&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하야 후 국정운영 방안이 주요 과제&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처음 들은 얘기라 놀랍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때 국내 정세가 그처럼 각박하고 경직되어 있었는데 그처럼 유연한 생각을 하고 계셨다는 데에 다시 한 번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 후 개헌 작업은 어떻게, 어느 정도 진척되었는지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신직수 씨의 본심은 처음에는 그 직책을 받으려 하지 않았던 것으로 압니다. 76년 말에 퇴임하면서 다시 공직을 맡지 않으려고 결심했거든요. 아마 교육계에서 새로운 일을 해보려 했을 겁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의 간곡한 요구와 또 그 작업의 중요성, 그리고 무거운 책임감 등이 작용해서 할 수 없이 그 직책을 맡은 것이지요. 그래서 신직수 씨의 검토 작업은 그야말로 개인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법조인의 양심이 명하는 바에 충실하겠다는 결심 하에 이 작업에 임했다고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검토 대상은 자연히 헌법뿐 아니라 대통령 선거법과 국회의원 선거법 등을 일괄해서 다루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검토 지침으로는 헌법의 경우 정치적 자유권의 확대, 국민의 참정권 확대, 그리고 긴급조치권 발동에 대한 제한요건 강화 등이었고, 대통령 선거법에 있어서는 후보의 복수제(단일 후보의 지양), 명실상부한 간접 선거제 실시 그리고 돈을 많이 쓰지 않는 선거운동(국회의원 선거에도 동일) 등으로 설정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박 대통령은 새로 시작한 제9대 대통령 임기가 그 당시 헌법에 따르면 임기 6년으로서 84년에 만료된다는 전제하에서 카터 미국 대통령이 우리에게 통고한 주한 미 지상군의 완전 철수 시한인 82년까지 우리 손으로 만든 무기로 20개 예비사단을 완전 무장시켜 미 지상군 철수에 대비케 한 다음, 즉 임기 만료 1년 전인 83년에 하야하겠다. 이렇게 스스로 본인의 거취 문제를 결심해 놓고 있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따라서 그 후의 정국 운영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였는데 김종필 씨를 후계자로 지명해야겠다는 뜻을 두 차례나 밝히신 바 있었습니다. 대통령의 표현은 “아무래도 김종필을 다시 총리로 기용해서 대통령 권한 대행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임기 1년을 남기고 하야할 경우 그 때 헌법에 의하여 국무총리가 대통령 권한 대행이 되어 대통령직을 수행하도록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한시적 후계자가 된다는 뜻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러나 권한 대행으로 1년을 재직한 뒤 대통령 선거를 새로이 개정된 헌법과 관계 선거법에 따라서 다시 치러야 하기 때문에 대행 체제는 헌법에 규정된 국민의 참정권이나 정치적 선택권의 제한을 초래하지는 않는 것이지요. 박 대통령은 이와 같은 구상과 지시를 하시면서 “나는 이만하면 나라를 위해 할 만큼은 다 했지 않느냐. 이제는 나도 좀 편히 쉬면서 애들 시집 장가나 보내도록 해야겠다.”는 말씀을 했어요. 참으로 감상적인 순간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박 대통령은 농업 개발과 공업화로 농민과 도시 근로자를 잘살게 했고, 특히 수출 능력을 갖춘 경공업과 중화학 공업 및 방위 산업까지 육성해서 중진국의 선두주자로 우리 경제를 끌어올려 놓았거든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그리고 78년 말 현재 박 대통령에게 남은 최대 현안은 68년부터 심혈을 기울여 오던 안보 문제로서 카터 대통령의 주한 미지상군 완전 철수 시한인 82년 말까지 완벽한 자주 국방의 기반을 다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979년 7월 박 대통령과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갖고 귀국한 지 20일 만에 카터 대통령은 82년 말까지 주한 미 지상군을 완전 철수시킨다는 계획을 중지한다고 발표하였습니다. 참으로 우연한 일치였는지는 몰라도 바로 그 때 우리는 이미 유신 헌법의 개정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을 때였으니까 이것도 역사의 장난이 아닌가 싶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미군 철수와 관련해서 국내 정계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이 나타났던 것을 저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야당 지도자들은 미군 철수 방침에 시종 침묵을 했습니다. 안보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던 거죠. 그러나 이철승 씨만은 이것을 반대했습니다. 이철승 씨는 지금도 그가 ‘사쿠라’라는 비난을 무릅쓰면서까지 자발적으로 미군 철수를 반대하면서 미국 내의 정부, 학계, 언론계를 상대로 정책 철회를 설득하고 다녔던 사실을 떳떳하고 잘한 일이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9&lt;BR&gt;공평 분배냐 우선순위 집중 투자냐&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새마을사업도 잘 하는 마을부터 순차 지원&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화제를 경제 발전과 국민들의 평등 의식에 관한 것으로 옮겨 보겠습니다. 말하자면 집권층의 생각에 대해서 국민들은 어떻게 반응을 했으며 농민 대중과 정치인, 지식인들이 어떤 반응을 보였느냐 하는 것입니다. 같았느냐, 달랐느냐가 상당히 관심거리였다고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박진환&lt;/B&gt; : 우리나라 국민은 서구 사회는 물론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 국민들에 비해 평등의식이 보다 강한 국민인 것으로 보입니다. 모두가 가난하게 살고 있으면 문제가 안 되지만 몇 사람이 잘살게 되면 그것이 대단한 문제라고 생각하는 심정을 지니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후진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등 의식이라고 봅니다. 속담에 사촌이 논을 사면 배 아파한다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평등 의식이 강하다 보니까 “남의 자식 대학 가는데 내 자식도 무조건 보내야 한다.”는 식이 되고 이에 따라 대학이 몇 백 개가 생겨도 모자라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국민들의 지나친 평등 의식은 오히려 경제 개발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후진국일수록 정부의 개발 자원은 한정되어 있는 대신 그것을 달라는 곳은 많습니다. 이 때 두 가지의 배분 기준이 있지요. 그 하나는 골고루 나누어 주는 방법이고, 다른 하나는 능률이 높은 곳에 우선적으로 많이 나누어 주는 방법입니다. 우리나라가 빈곤의 악순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정부의 개발자원은 능률이 높은 곳에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기준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평등사상이 강한 한국에 있어서는 골고루 나누는 정책을 쓰겠다는 정당에 국민들이 더 많은 표를 던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경제 개발의 초기 단계에서는 여당보다도 야당 하기가 쉽다는 이야기가 나오게 된다고 봅니다. 능률을 올리겠다고 하기보다는 당장 골고루 나누어 주겠다고 해야 표도 많이 나오고 정권도 뺏어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표를 얻기 위해 골고루 나누는 정책을 쓰게 되면 국민 경제는 영영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되지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따라서 1960년대 당시의 한국 실정에서는 경제 발전이 정치 발전에 우선할 수밖에 없었다고 봅니다. 박 대통령은 정부의 개발 자원을 배분함에 있어서 능률 기준을 철저하게 지키신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새마을 사업을 위해 마을마다 시멘트 400포대씩을 나누어 줄 때도 집집마다 골고루 나누어 가지는 것은 금지되었지요. 따라서 여러 가지 공동 사업 중에서도 우선순위를 정하고서 집중 투입하게 하였으며, 새마을 사업을 잘 하는 마을부터 지원을 함으로써 개발 자원의 투자 효율을 높이게 한 것은 국민 모두가 잘 아는 일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골고루 나누기를 좋아하거나 인기 위주로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과 능률의 기준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과는 판단 기준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골고루 나누어 가지기를 우선하는 쪽에서는 능률 기준을 고집하는 쪽을 개발 독재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한국의 성공 사례를 경제 개발의 모형으로 삼고 있는 동남아시아의 개발도상국들은 능률 기준에 따라 자원을 배분하고 있으며 또한 장기 집권을 하고 있는 것이 눈에 뜁니다. &lt;BR&gt;&amp;nbsp; 이러한 사실들은 평등 의식이 강한 후진국에서는 1인 1표 주의의 서구식 의회 민주주의는 경제적 근대화를 앞당기는 것과 상충되기 때문에 경제 논리를 우선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고 하겠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최형섭&lt;/B&gt; : 후진국을 많이 돌아다녀 봤는데, 후진국의 정책들이 성공하지 못하는 까닭은 거의 균형 발전이라는 이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인 평등사상 때문인 것 같습니다. 태국의 경우만 보더라도 일본에서 농업 개발을 위하여 5억 엔이라는 막대한 원조를 받았는데 균형 배분이라는 관점에서 4,500만 인구를 대상으로 가구당 똑같이 병아리를 사서 주고, 이것을 키워 가지고 알을 낳게 해서 수익을 올리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농민들이 언제 알 낳기를 기다립니까? 병아리가 크기도 전에 다 잡아먹어 버렸어요. 결국은 돈만 쓰고 아무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후진국에서의 공평 분배의 결과입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균형 배분(equal distribution)’은 좋은데, 뭔가 수입이 있어야 ‘균형 배분’도 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도대체 수입을 뭘로 만들어 내느냐가 문제입니다. 박 선생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우선순위를 정해서 집중 투자하는 수밖에는 없다고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10&lt;BR&gt;빈곤 해방, 공산침략 방어에 공헌&lt;/B&gt;&lt;/FONT&gt;&lt;BR&gt;&amp;nbsp; 
&lt;TABLE style=&quot;MARGIN-BOTTOM: 10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80 align=center&gt;
&lt;TBODY&gt;
&lt;TR&gt;
&lt;TD&gt;&lt;IMG class=border src=&quot;http://www.parkch.com/upload/bulletin/21th_23_1.jpg&quot;&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PADDING-LEFT: 5px; PADDING-RIGHT: 5px; PADDING-TOP: 5px&quot;&gt;&lt;FONT style=&quot;LINE-HEIGHT: 11pt; FONT-SIZE: 9pt&quot; color=#2f73ba&gt;&lt;박정희 대통령 서울지하철 기공식 참석(1971.4.12)&gt;&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gt;실직자에게 일을 주는 것이 후진국 인권보장&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다음에는 인권의 철학적 면에 관해서 얘기를 나누지요. 이 문제는 작금 미국과 중국 간에도 커다란 논쟁거리가 되어 있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경험을 되돌아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남덕우&lt;/B&gt; : 개발도상국에서 가장 우선하는 인권은 실직자에게 일자리를 주는 것입니다. 즉, 취업의 기회를 보장하고 이것을 확대시키는 것이 최선의 인권 보장입니다. 물론 인권의 내용을 본다면 그 핵심이 자유권인데 거기에도 정치적 자유권에서부터 시작하여 경제적 자유권, 사상적 자유권 등 여러 가지가 있지요. 이 자유권이다 인권이다 하는 사상은 그 원천이 자연법 사상에서부터 유래된 것이고, 또 이것이 역사적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화해 온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개발도상국에서의 인권은 취업의 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정당합니다. 선진국의 경우와는 다를 수밖에 없어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전 유엔 사무총장이 그 직을 그만두고 얼마 안 되어서 중국 방문을 하고자 홍콩에 들렀을 때 그 곳 기자들의 중국 인권 상황에 대한 질문에 답변한 것을 보았는데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중국 정부가 그 많은 중국 인구를 굶기지 않고 먹여 살리고 있다는 것은 인권의 기본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서 크게 평가한다는 것이에요. 이렇듯 인권은 역사적 발전 단계에서 그 기준과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우리도 그 당시 이 같은 상황 인식에 좀 더 주체적이었고 또한 그 대책에 신축적이었더라면, 그리고 이것을 정치 투쟁에 덜 이용했더라면 좀 더 순탄하게 인권 문제의 개선이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싶어서 아쉬운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경제발전이 이룩되면 중산층이 늘어나고, 또 중산층이 늘어나면 인권의 내실 있는 개선과 민주주의 기초가 다져진다는 교훈을 우리는 쓰라린 경험을 통해 지금의 중국이나 기타 발전도상국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결론 부분으로 들어가서 과연 박정희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는가? 여기에 대해 의견을 나누어 주시지요.&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남덕우&lt;/B&gt; : 박정희 시대가 우리의 역사상 어느 위치에 있었느냐부터 먼저 생각해 봅시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는 해방 이후 네 가지 민족적 과제를 안고 있었다고 봅니다. 첫째는 이 나라를 자유 민주주의 기초 위에 나라를 세우는 건국, 그래서 우리가 해방 이후에 반탁이다, 찬탁이다, 여러 가지 정치적 격동을 겪었지만, 그러나 이승만 대통령 그분이 그 당시 지도력을 발휘해서 이 나라를 자유 민주주의 국가로 건설해 놨습니다. 만약 이승만 대통령이 아니었다면 솔직히 말해서 지금 우리는 김일성 치하에서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이라는 첫째 과제를 해결하는 데 큰 공로가 있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둘째는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인데 이건 누가 무엇이라 해도 박정희 대통령이 해결했다 이것입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처음부터 정치 이념을 명백히 했어요. “민주주의를 절대로 앞세우지 않고 빵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한다.” 박 대통령이 저한테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어요. 내가 미국에서 공부를 하고 왔으니까, 아마 미국물을 잔뜩 먹었겠지 생각해서 그런 말씀을 했을 거예요. “민주주의가 배를 부르게 해 주더냐, 민주주의를 하려면 민주주의의 경제적 기초부터 만들어야지.” 그래서 정말로 모든 정력과 국가적 에너지를 경제 발전에 집결시켜 가지고 현재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성공했고, 또 그분이 성취한 것 때문에 이승만 박사가 건국한 민주 한국을 끝까지 공산주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온 것입니다. 이것이 박 대통령께서 이룩하신 또 하나의 공적이라고 봅니다. 즉, 빈곤으로부터의 해방과 공산 침략으로부터의 방어, 이 두 가지의 공적을 이룩한 것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셋째는 이 나라의 정치를 근대화하는 일입니다. 우리나라가 해방 이후에 외부로부터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제도를 이식은 했지마는 그것이 잘 될 리가 없었던 것이지요. 그러니까 이제는 근대적 의회 정치를 해 나가야 하는 일이 남았는데, 그것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부여된 역사적 사명이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저는 솔직히 말해서 우리나라 경제는 이만하면 혼자서 굴러간다고 봅니다. 그러니 김영삼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은 그야말로 우리나라의 정치가 생산적이고 능률적인 기초 위에서 민주적 정치를 구현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넷째는 통일의 문제인데 앞으로 누가 해결할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해방 이래 이와 같은 네 가지의 기본적인 민족적 과제를 지니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김영삼 대통령이 하고 있는 정치적 개혁이 성공하기를 비는 겁니다. 그 다음에 통일의 과제는 숙제를 남겨서 누군가가 해결해야 되겠지요. 결국 커다란 역사적 흐름에서 보면 각 지도자의 역사적 사명과 역할이 분명했다고 봅니다.&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11&lt;BR&gt;민족중흥의 터전 굳게 다진 시대&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전쟁 없는 사회에서 잘살아 보자는 소망&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지금 말씀하신 이 나라 여러 지도자의 역사적 사명과 역할이 역사의 계속성을 간단 명료하게 뒷받침하는 것이라 봅니다. 좀 더 부연하는 뜻에서 박정희 시대를 무엇이라고 결론지으시겠습니까.&lt;BR&gt;&amp;nbsp; &lt;B&gt;박진환&lt;/B&gt; : 나는 우리 국민의 한이 있었다면 두 가지였다고 봅니다. 첫째는 가난에서 벗어나고 싶은 한이고, 둘째는 북한의 전쟁 위협에서 살아남으려는 한이었다고 봅니다. 정치하는 사람과 몇몇 지식인들에게는 자유 민주주의를 마음껏 해보지 못한 것이 한이 되었을지는 몰라요. 그러나 일반 국민 대부분은 잘살아 보자는 것과 북한의 침략 위협에서 안전하게 마음 놓고 살아보자는 한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박정희 대통령 시대는 새마을운동으로 우리 농민들과 일반 국민들이 역사상 가장 신바람나게 일한 시절이었다고 말하겠습니다. 풀뿌리 민주주의를 자기들 나름대로 신나게 해 본 시기였다고 봅니다. 그 반면 정치하는 사람들에게는 슬프고 오그라드는 시대였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무튼 나는 민족사상 국민의 가장 신바람나는 시대였다고 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정렴&lt;/B&gt; : 박 대통령은 경제 개발과 자주 국방을 민간 경제의 테두리 안에서 성공적으로 이룩함으로써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 이론에 새로운 모델을 만들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나는 박정희 시대는 민족중흥의 터전을 굳게 다진 시대라고 말하겠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이만큼 정치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도 민주주의의 기초인 경제 발전이 이룩되었기 때문에 가능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그리고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마음 놓고 반정부 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도 북한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부단히 가해 온 공산화 침략 위협을 박 대통령이 막아 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활동을 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lt;BR&gt;&amp;nbsp; 만일 한국이 김일성 치하에 있었다면 정치인과 지식인들이 어떻게 그러한 반정부 활동을 마음 놓고 할 수 있었겠습니까?&lt;BR&gt;&amp;nbsp; &lt;BR&gt;&amp;nbsp; 아마 북한과 공동 보조를 취하고 그들의 지배를 찬성하는 사람들이었다면 그것은 달랐겠지만 북한과 한국은 낮과 밤의 차이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공기 속에서는 공기의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 발전의 성과와 인권 탄압, 그리고 장기 집권 등을 모두 합쳐서 굳이 점수를 매긴다면 제 생각으로는 총점이 85점에서 90점은 된다고 봅니다. 박정희 시대의 발전과 개발 정책은 앞으로 국내의 학계보다는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학계에서 먼저 연구 발전시킬 것으로 믿습니다. 이미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는 여러 권의 저서가 나와 있습니다. 박 대통령은 일부 정치인과 지식인들로부터 인권 탄압이다, 민주주의 말살이라는 비판을 한때 받았지만 그러나 그 때 이룩된 경제 발전과 국가 안보가 토대가 되어 오늘의 민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계속이며, 또 단순한 계속이 아니라 발전의 계속이라고 봅니다. 이런 차원에서 박정희 시대는 정당하게 평가받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마지막 화제로 넘어가겠습니다. 우리는 한때 조국의 근대화와 민족의 중흥을 이룩하기 위해 사명감을 지니고 나섰던 사람들입니다. 그 사명감은 지금도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뜨겁게 맥박치고 있습니다. 나라와 겨레를 위하는 마음은 정권에 몸담고 있을 때나 초야에 묻혀 있을 때나 다를 바 없다고 봅니다. 따라서 앞으로의 국정에 대해 정책적 제언을 할 만한 것이 없겠는지, 또 우리가 미처 다하지 못한 일은 무엇인지 말씀들 하시지요.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FONT color=#0139aa&gt;&lt;B&gt;박정희시대 좌담-그 시대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12&lt;BR&gt;무조건 과거부정은 역사의식없는 독선&lt;/B&gt;&lt;/FONT&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열린 자존 앞세워 강대국 패권주의에 맞서야&lt;/B&gt;&lt;BR&gt;&amp;nbsp; &lt;BR&gt;&amp;nbsp; &lt;B&gt;김성진&lt;/B&gt; : 나는 박정희 시대의 특징은 국난을 겪으면서도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위해 굳건한 경제적 터전을 마련한 시기였다고 봅니다. 기쁨보다는 땀을, 영예보다는 희생을, 그리고 개인보다는 민족 공동체를 앞세우면서 민족중흥의 기원(起源)을 마련한 시기였습니다. 박 대통령은 주변 강대국들로부터의 유형무형의 압력을 물리치면서 밖으로는 민족의 자존을 지켜나갔고, 공산주의 침략 이데올로기를 의연히 격퇴하면서 안으로는 민족 번영의 터전을 만들어 놓은 지도자였다고 봅니다. 이것은 국가 안보의 기본 정신을, 역사상 호국 정신의 귀감이었던 선열들의 유적과 찬란한 민족의 고유문화 유산을 보수·복원하는 일에서 찾았다는 사실만을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김일성은 북한에 공산주의 침략 기지를 마련하려다 실패한 데 반하여 박 대통령은 남한에 민족 번영의 터전을 마련하는 데 성공한 것입니다. &lt;BR&gt;&amp;nbsp; 따라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과 신라의 김유신 장군, 그리고 조선조의 이순신 장군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국난 극복사상 우뚝 솟아 있는 커다란 봉우리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앞으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로운 세계 질서 형성에서 패권주의를 거부하고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지켜나갈 국가의 역량을 계속 길러나가야 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그러려면 경제력만 갖고는 안 됩니다. 지적(知的) 문화적 성숙이 이룩되어야 합니다. 즉, 정신면에서의 성숙과 발전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겨레가 ‘열린 자존’을 앞세우면서 강대국들의 패권주의에 당당히 맞서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남북통일보다도 더욱 시급한 과제라고 나는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후세에 부끄럽지 않은 역사를 남겨 주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우리는 지금까지 역사에 대한 정직하지 못한 태도를 목격하면서 이것을 통탄해 마지않았습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에 의한 역사의 날조와, 이 날조된 거짓 역사의 미화 작업을 이미 오래전부터 보아 왔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 남쪽에서도 전 정권에 대한 부질없는 비난과 비방이 한때 되풀이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서 간 정권을 비난하던 정권이 물러가면 그 다음 들어선 정권이 또 그 정권을 비난하고 그 다음 정권이 또 이것을 되풀이하고, 이렇게 하다 보면 남쪽에 들어섰던 정권은 모두 잘못하고 몹쓸 집권자만 있었던 것이 될 터이니 도리어 날조된 역사 속의 북한 독재 정권만 정당하고 옳은 정권이었던 것으로 묘사되지 않을까 싶어서 한심해질 때가 있습니다. 전 정권과의 차별화는 불가피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차별화도 어디까지나 특징과 장점을 기준으로 하는 차별화이어야지 과거를 무조건 부정내지는 매도하는 식의 차별화는 역사의식이 없는 독단과 독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후세의 사기들은 이 모든 것을 정직하게 공정히 평가 기록할 것으로 믿습니다만…….&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이와 아울러 70년대에 정권에 몸담았던 우리들은 새삼 자성(自省)의 마음가짐을 가다듬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좌담회에서 얘기한 것이 어디까지나 우리들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과 비판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옛날에 “훌륭한 임금일수록 대관식 때 왕관의 무게를 더욱더 무겁게 느낀다.”고 했습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70년대라는 일대 국난(國難)을 겪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크거나 작거나 간에 그 나름의 고난과 희생을 치렀습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모두가 커다란 의미에서는 국난기의 역사적 희생자들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정권에 있었거나 반대 세력에 있었거나를 막론해서 말입니다. 그러나 정부에 몸담았던 우리들은 그 당시 정치적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 권력 기관에 의한 직권 남용의 피해 대상자들, 그리고 각종 억울한 처지에 놓였던 사람들, 이 모두에게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이 곧 우리들 자신의 고통과 슬픔이었다는 마음으로 먼저 반성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뜻에서 저는 이 자리를 빌려 이들에게 진실로 사과의 뜻을 표합니다. 아울러 이분들도 우리의 뜻을 똑같이 열린 마음으로 받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lt;BR&gt;&amp;nbsp; &lt;BR&gt;&amp;nbsp; 일찍이 공자(孔子)께서는 “앞으로 백 년 뒤의 세상이 어떻게 될 것입니까.”하고 묻는 제자에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전해 옵니다. “네가 앞으로 백 년 뒤의 세상이 알고 싶으면 지나온 백년의 역사를 정직하게 올바로 보도록 노력하여라! 그러면 그 속에서 앞으로 백 년 후의 세상이 나타날 것이다.”라고. 잘 음미해 보아야 할 말인 것 같습니다. 여러 선배님들 오랜 시간 참으로 고마웠습니다. 여기서 끝을 맺을까 합니다. &lt;/FONT&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글쓴이 시작--&gt;
&lt;TABLE style=&quot;MARGIN-TOP: 10px; MARGIN-LEFT: 17px&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70&gt;
&lt;TBODY&gt;
&lt;TR&gt;
&lt;TD align=right&gt;[ &lt;FONT class=font9 color=#5a5d5a&gt;2009-10-08&lt;/FONT&gt; ]&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 글쓴이 끝--&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박정희, 그는 왜 1위의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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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10-30T16:50:34Z</updated>
	    <published>2009-10-30T16:50:3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50&gt;
&lt;TBODY&gt;
&lt;TR&gt;
&lt;TD vAlign=top&gt;&lt;BR&gt;
&lt;P class=NEWS-view-title&gt;박정희, 그는 왜 1위의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는가&lt;/P&gt;
&lt;P class=written&gt;written by. 박효종&lt;/P&gt;&lt;B&gt;
&lt;P style=&quot;FONT-SIZE: 16px&quot;&gt;그의 통치가 끝난 지 30년이 지난 현재까지 왜 불멸의 통치자로 마음에 남아있는지 곰곰 생각해봐야 한다.&lt;/P&gt;&lt;/B&gt;
&lt;DIV class=NEWS_view&gt;
&lt;P&gt;&amp;nbsp; 박정희! 그가 떠난 지 어언 30년이 되었는데, 우리는 왜 그를 잊지 못하는가. 그 세월이면 그리스인들이 망각의 강이라고 불렀던 '레테의 강'으로 떠나보낼 법도 한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그동안 많은 지식인과 언론인, 정치인들이 그를 망각의 인물로 만들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럼에도 그는 항상 우리 주위를 맴돌고 있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정치현장에서 사라진 사람을 놓고 투표를 하는 것은 실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론조사나 인기투표가 있을 때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몰표를 던짐으로써 그를 현실로 불러낸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존재다.&lt;/P&gt;
&lt;P&gt;우리 사회는 민주공화국이 된 지 60년이나 되었는데도, 때 아닌 인물난을 겪고 있다. 걸출한 인물들이 차고 넘치는 조선시대와 비교하면 기묘한 대조가 아닐 수 없다. 누가 뭐래도 우리가 자유와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데, 이 자유와 번영을 가져온 사람을 '당신'이라고 지목하고 있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결과 거리의 동상이나 지폐 도안을 만들 때면 항상 조선시대의 인물들 차지다.&lt;/P&gt;
&lt;P&gt;박정희는 영웅인가. 이점에 대해서는 왈가왈부의 격론이 벌어질 것인 만큼 답변을 유보하자. 다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영웅의 시대'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두 나름대로 열정과 헌신으로 가득한 작은 영웅들이었다. 삽질을 할 때도 열정이 넘쳤고 초가집을 기와집으로 바꾸는 데도 사명감이 충만했다. 고속도로를 만들고 배를 만들면서 느꼈던 자부심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어느덧 &quot;우리도 할 수 있다&quot;는 화두는 시대정신이 되었다. 또 &quot;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quot;는 구호는 속물적 냄새가 나는 물질적 욕구의 표현을 넘어 독수리처럼 하늘을 향해 힘차게 비상하고 싶어하는 웅지의 표현이었다.&lt;/P&gt;
&lt;P&gt;그런가 하면 박정희를 반대하고 그의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도 진정성이 있었고 열정이 넘쳤다. 일본과의 수교를 극구 반대한 6·3세대도 민족주의적 자존감을 세우고자 혼신의 힘을 다했다. 유신에 대하여 반대했던 지식인, 학생, 언론인도 민주주의를 되살려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충만했다. 그와 뜻을 같이한 사람들이 산업화에 모든 것을 건 것처럼, 그를 반대한 사람들도 민주화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렇게 해서 산업화의 주역과 민주화의 주역이 일란성 쌍생아처럼 함께 태어났다. 입장과 철학은 달랐지만 진정성과 헌신, 열정과 소명의식으로 무장한 한국인이 출현한 것이다.&lt;/P&gt;
&lt;P&gt;박정희는 이렇게 영웅시대를 연 것이다. 건설을 한 사람이든, 비판을 한 사람이든 자신의 혼과 젊음 및 열정을 불살랐다. 그를 찬성하거나 반대하면서 우리는 스스로 끼가 있고 소명의식을 지니고 있음을 알았다. 그를 통해 우리 안에 '잠자는 사자'가 깨어났고 '한국인다움'이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잊지 못한다.&lt;/P&gt;
&lt;P&gt;어느 정치인인들 공과가 없으랴. 그 점에서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그를 좋아하든 싫어하든 결의에 찼던 그의 모습에서 결의에 찬 우리의 또 다른 모습을 발견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세종대왕을 기리는 것은 그가 한글을 만든 위대한 군주라는 것이 아니다. 한민족이 한글을 만들 수 있는 위대한 기량을 가지고 있음이 그를 통해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도 마찬가지다. 그가 명량해전에서 12척의 배로 왜선 130척을 물리친 것을 통쾌하게 여기는 것은 그를 통해 우리의 결연한 의지를 확인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그의 통치가 끝난 지 30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도 그가 왜 부동의 1위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는지, 왜 불멸의 통치자로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있는지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은 곱씹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단순히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향수나 추억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그의 실상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별 생각없이 설문지에 답하는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이유는 따로 있다. 그의 시대로부터 시작된 '한국인다움'의 구현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lt;/P&gt;
&lt;P&gt;민주화 이후 대통령이 된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그와 비교한다. 그의 장점과 비교하기도 하고, 그의 단점에 비하여 자신의 장점은 무엇인지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긍정과 부정을 막론하고 그는 한국의 정치인에게 있어 요지부동의 잣대와 준거점이 되었다. 정치인이 성공을 꿈꾼다면 누구나 그와 키를 재보고 싶어한다. 정치인들이여! 지금이야말로 그를 기리는 변변한 동상도 없고 기념관도 없는 그가 민심을 사로잡고 또 정치인들의 잣대가 되고 있는 이 불가사의한 이유에 대해 차분히 생각해야 할 때가 아닐까.(konas) &lt;/P&gt;
&lt;P&gt;박효종(서울대교수·윤리교육과)&lt;/P&gt;&lt;/DIV&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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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YS 단독인터뷰 “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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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30T16:36:41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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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SPAN class=read_title&gt;YS 단독인터뷰&lt;BR&gt;“DJ가 1년6개월 동안 내 뒷조사해, 그러나 용서…”&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 height=5&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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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SPAN class=read_subtitle&gt;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바로볼 수 없어&lt;BR&gt;노무현은 의리없어 평가 가치 없다&lt;/SPAN&gt;&lt;/TD&gt;&lt;/TR&gt;
&lt;TR&gt;
&lt;TD&gt;2009/01/24&amp;nbsp;&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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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
&lt;DIV class=writer align=right&gt;정세운 기자 &lt;A class=writer onmousedown=&quot;MM_openBrWindow('./newnews/formmail.php?email=c2VzZUBzaXNhb24uY28ua3I=&amp;name=정세운 기자','','status=yes,width=500,height=410')&quot; href=&quot;javascript:;&quot;&gt;&lt;IMG border=0 src=&quot;http://www.sisaon.co.kr/img/skin1/icon_mail.gif&quot;&gt;&lt;U&gt;&lt;FONT color=#0000ff&gt; &lt;/FONT&gt;&lt;/U&gt;&lt;/DIV&gt;&lt;/A&gt;&lt;/TD&gt;&lt;/TR&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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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U&gt;&lt;/U&gt;&lt;/TD&gt;&lt;/TR&gt;
&lt;TR&gt;
&lt;TD class=read_body&gt;(시사오늘=정세운 기자) &lt;FONT color=blue&gt;김영삼(YS) 전 대통령은 지난 15일 본지와 가진 단독인터뷰에서 &quot;DJ가 1년6개월동안 내 뒷조사를 했다. 나를 모욕주기위해 청문회에 불러내려 했다&quot;고 전제한 뒤 &quot;하지만 지금은 용서했고, 모든 것을 화해했다&quot;고 밝혔다.&lt;/FONT&gt;&lt;BR&gt;&amp;nbsp;&lt;BR&gt;&lt;FONT color=blue&gt;YS는 또 노무현 전 대통령과 관련해서는 &quot;의리가 없다. 평가가치가 없다&quot;고 잘라서 평가했다.&lt;/FONT&gt;&lt;BR&gt;&amp;nbsp;&lt;BR&gt;&lt;FONT color=blue&gt;그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quot;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은 바로볼 수 없다&quot;며 &quot;지금 박정희에 대한 미화가 너무심하다&quot;고 공과를 따져야 한다고 말했다.&lt;편집자&gt;&lt;/FONT&gt;&lt;BR&gt;&amp;nbsp;&lt;BR&gt;&lt;FONT color=blue&gt;다음은 인터뷰 전문&lt;/FONT&gt;&lt;BR&gt;&amp;nbsp;&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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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bgColor=#ffffff&gt;&lt;IMG border=0 src=&quot;http://www.sisaon.co.kr/imgdata/sisaon_co_kr/200910/2009102446532816.jpg&quot; width=50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2 width=&quot;1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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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LINE-HEIGHT: 12pt; FONT-FAMILY: verdana,굴림; LETTER-SPACING: -1px; COLOR: #ffffff; FONT-SIZE: 9pt&quot; bgColor=#999999&gt;▲ YS는 고령이라고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amp;nbsp; &amp;nbsp; © 시사오늘 권희정&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김영삼(YS) 전 대통령(82)은 ‘현대정치사’라고 해도 무방하다. 김 전 대통령은 이승만에서부터 윤보선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에 이르기까지, 대통령을 역임한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정치를 해왔다. &lt;BR&gt;한마디로 살아있는 정치사다. 김 전 대통령은 이들(역대 대통령)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이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 만남을 요청했고 지난 15일 상도동 자택에서 인터뷰가 이뤄졌다.&lt;BR&gt;&lt;BR&gt;김 전 대통령은 생각보다 건강했다. 김 전 대통령은 고령이 믿겨지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기억력과 또렷한 발음으로 논리 정연한 답변을 들려줬다. &lt;BR&gt;&lt;BR&gt;사실 ‘상도동계’는 우리 현대 정치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바로 대통령을 탄생시킨 첫 정치적 인맥이기 때문이다. &lt;BR&gt;&lt;BR&gt;이들을 상도동계라고 부른 건 김 전 대통령의 자택이 상도동에 있었던 데서 유래됐다. &lt;BR&gt;인터뷰를 위해 상도동 자택을 찾아가며 문뜩 예전이 떠올랐다. &lt;BR&gt;&lt;BR&gt;필자는 사실 YS가 대통령이 되기 전 상도동을 몇 번 방문한 적이 있다. 그때 거실 한가운데 김구 선생이 쓴 ‘철혈남아(鐵血男兒)’란 글귀가 걸려있던 게 생각났다. 공간은 새롭게 바뀐 게 없었다. 다만 김구 선생의 글이 걸려있던 자리에 YS 자신이 쓴 ‘호연지기(浩然之氣)’란 글로 대체돼 있었다.&lt;BR&gt;&lt;BR&gt;&lt;FONT color=#333399&gt;“이승만은 건국의 주역, 다만 3선개헌 아쉬워”&lt;/FONT&gt;&lt;BR&gt;&amp;nbsp;&lt;BR&gt;-얼마 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용서했다고 밝혔습니다.&lt;BR&gt;&lt;BR&gt;“그런 말 한 적 없어요. 김대중 전 대통령과 화해했다고 말을 했지요. 박정희는 나를 제명해서 죽은 겁니다. 내가 박 정권으로부터 제명당하고 했던 말이 있지요.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lt;BR&gt;&lt;BR&gt;최근 김 전 대통령은 한 월간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 “멀쩡한 총재를 총재가 아니라고 해서 내쫒고, 나를 죽이려 백주 대낮에 염산으로 테러를 가하고 내 측근들을 연행해 얼마나 탄압하고 죽이지 못해 온갖 짓을 다하고 했다. 하지만 박 전 대통령이 죽기 전에 ‘당신이 나를 그렇게 미워했지만 너무 미안해하지 말라. 나는 이미 다 풀었다’고 그런 말을 해주지 못한 게 아쉽다”고 밝혔다. &lt;BR&gt;&amp;nbsp;&lt;BR&gt;때문에 필자는 김 전 대통령이 박 전 대통령을 ‘용서’한 것으로 오인했다.&lt;BR&gt;&lt;BR&gt;-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에 대한 평가를 부탁드립니다.&lt;BR&gt;&lt;BR&gt;김 전 대통령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미루더니 10.28 재보선 얘기를 꺼냈다.&lt;BR&gt;&lt;BR&gt;“박희태 대표가 전화를 걸어와 좀처럼 끊지 않아서 참…, 박 대표가 문민정부시절 초대 법무부 장관을 지냈고 지난 거제 기념관 개관식(4월)에도 참석해 양산에 내려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김기수 비서실장을 바라보며)다음주 화요일(20일) 비행기 편으로 부산으로 내려가 양산에 들른 후 일본으로 나가야겠어요.”&lt;BR&gt;&lt;BR&gt;김 전 대통령은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54년 만의 정권교체를 진심으로 축하합니다’라는 주제로 특강하기 위해 26일부터 다음 달 2일까지 7박8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다. 방문에 앞서 양산에 들러 박희태 한나라당 후보를 지원유세할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지워유세 계획은 지켜지지 못했다. &lt;BR&gt;&lt;BR&gt;김기수 비서실장은 이와 관련해 “김 전 대통령이 아침 운동이 끝나고 샤워를 하던 중 갑작스레 (박 후보의)전화를 받았다”고 당시 사정을 밝히며 “지난 1일 부산, 거제에 이미 내려간 일이 있어 지방에 너무 자주 내려가는 것 같아 박 후보 지원 계획을 취소하게 됐다”고 밝혔다.&lt;BR&gt;&lt;BR&gt;김 실장은 김 전 대통령의 지원유세 철회와 관련해 “여러 사정이 있다”고도 말했는데 전직 대통령이 특정 후보를 지지하게 됐을 때 받을 정치적 부담을 염두에 둔 표현으로 짐작된다.&lt;BR&gt;&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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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bgColor=#ffffff&gt;&lt;IMG border=0 src=&quot;http://www.sisaon.co.kr/imgdata/sisaon_co_kr/200910/2009102459413242.jpg&quot; width=50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2 width=&quot;1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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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LINE-HEIGHT: 12pt; FONT-FAMILY: verdana,굴림; LETTER-SPACING: -1px; COLOR: #ffffff; FONT-SIZE: 9pt&quot; bgColor=#999999&gt;▲ YS는 이승만은 건국의 주역이라며 높은 평가를 내릴만 하지만 3선개헌이 아쉽다고 토로했다 &amp;nbsp; &amp;nbsp; © 시사오늘 권희정&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이승만 대통령은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내가 만25세(정확히는 만26세가 맞음-편집자 주)에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어느 날 이기붕이 오후 3~4시 경에 청와대로 ‘이 박사’를 만나러 가자는 겁니다. 자유당 정권 때죠. &lt;BR&gt;&lt;BR&gt;나는 미국식 민주주의와 정당정치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야당으로 한민당이 있었는데 마음이 가지 않아서 자유당을 택했어요. 그날 다른 세 사람과 같이 청와대에 들어갔는데 김철환이라는 경북 지역 여 의원과 유도 선수였던 김상도 의원은 이름이 기억나는데 다른 한 사람은 기억이 안 나네요. 그 때 청와대는 일제시대 총독 관저였습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뜯었지요. 그 때 이름이 뭐였더라, 경무대라고 했습니다. &lt;BR&gt;&lt;BR&gt;넓지 않은 응접실 뒷문으로 이 박사가 들어왔습니다. 그 시절에는 이 대통령을 ‘이 박사’라 불렀어요. ‘3선 개헌’소식이 신문에 솔솔 보도되던 무렵입니다. 이 박사에게 했던 말을 전부 다 할 수는 없지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했습니다.&lt;BR&gt;이 박사가 80대였는데 손을 떨더라고요. 그러더니 별 말 없이 뒷 문으로 나가버렸어요. 화가 난 것 같았습니다. 이 박사가 나가고 이기붕이 화를 내며 ‘왜 쓸데없는 말을 해서 노인을 화나게 하느냐’고 나무랬어요.”&lt;BR&gt;&lt;BR&gt;김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이승만에 대해서는 ‘건국의 주역’이라며 높은 평가를 내렸다. 다만 3선 개헌이 강행된 후의 사정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하며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아쉬움을 피력했다. &lt;BR&gt;&lt;BR&gt;“(이승만 전 대통령을 면담한 후에도) 자유당을 탈당하지 않았습니다. 3선 개헌안이 토요일에 부결처리 됐는데 일요일이 지나고 월요일에 최순주 국회 부의장이 ‘사사오입’ 원칙을 내세워 개헌안을 다시 가결된 것으로 통과시켰어요. ‘이 당은 안 되겠다’ 결심하고 동지들을 모아 10명이 함께 탈당했습니다. 이 박사가 너무 노인이었고 기억력이 약했던 것 같아요. 밑에 사람들이 보좌를 잘 못했고 이기붕이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었는데도 대통령 욕심이 있었습니다.”&lt;BR&gt;&lt;BR&gt;자유당이 3선개헌을 추진하자 김영삼 의원은 대학동문인 현석호, 한동석 의원 등과 개헌반대 투쟁에 나섰다.&lt;BR&gt;&lt;BR&gt;1954년 11월 27일 ‘초대 대통령 연임 제한 철폐’를 골자로 한 개헌안이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개표 결과는 재적 2백3명 가운데 찬성 1백35표, 반대 60표로 부결이었다.&lt;BR&gt;&lt;BR&gt;당시 자유당은 원내 개헌선을 확보하고 있는데다가 무소속 의원도 10여명 정도 포섭해 놓아, 통과를 낙관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1표 모자라서 부결됐다. 임흥순 의원 등 무소속 의원 10명은 찬성표를 던졌지만 김영삼을 비롯한 현석호 민관식 이태용 황남팔 김두관 등 12명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에 부결됐다.&lt;BR&gt;&lt;BR&gt;그런데 다음날, 최순주 부의장은 사사오입을 적용, 전날 부결로 선포한 개헌안이 통과시킨 것. 그 내용인 즉 203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사사오입에 따라서 이것은 통과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이다. &lt;BR&gt;&lt;BR&gt;&lt;FONT color=blue&gt;“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바로 볼 수 없어”&lt;/FONT&gt;&lt;BR&gt;&amp;nbsp;&lt;BR&gt;김 전 대통령은 ‘다음 대통령이 누구지’라고 물었고 ‘윤보선’이라고 답하자, “윤보선은 힘이 없었어요. 내각제에서는 총리가 실권을 갖고 있잖아요. 장면은 무능력자였습니다. 쿠데타를 당한다는 건 말이 안 됩니다. 평가할 가치가 없습니다”라고 잘라 말했다. &lt;BR&gt;&lt;BR&gt;-박정희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십니까.&lt;BR&gt;&lt;BR&gt;“쿠데타로 집권한 사람을 바로 볼 수는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중정(중앙정보부)을 앞세워 바로 살자고 하는 사람들을 숨 못 쉬게 했어요. 이 사실을 국민들이 잘 모릅니다. 미화가 심해요. 공과를 따져야 합니다.”&lt;BR&gt;&lt;BR&gt;-전두환과 노태우에 대한 평가도 부탁드립니다. &lt;BR&gt;&lt;BR&gt;“전두환은 반역자입니다. 선거를 치르지 않고 대통령에 올랐다는 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노태우는 선거를 치렀다는 점에서는 인정해야할 부분이 있긴 하지요. 하지만 부정축재가 너무 심해서 내가 대통령이 되고 감옥에 넣었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감옥에 넣은 게 아닙니다. 기업인들로부터 수천 억 원의 부정한 재산을 모았고 무능과 부정의 극치입니다.”&lt;BR&gt;&lt;BR&gt;김대중 전 대통령의 순서가 이어지자 김 전 대통령은 그동안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lt;BR&gt;&lt;BR&gt;“김대중은 독재자입니다. 대통령이 된 후 1년 6개월 동안 내 뒷조사를 했어요. 하지만 나온 게 없었지 않습니까. 청문회에 나오라고 하는데 나를 모욕 주려는 자리에 왜 나갑니까. 안 나갔지요. 김대중이 내 뒷조사를 했던 건 용서합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고 나서 김대중의 뒷조사를 했다면 아마 (비리가) 많이 나왔을 겁니다. 나는 안 했습니다. 김대중이 무서워서 영국으로 도망쳤지요. 그리고는 6개월 만에 돌아와서는 정계은퇴를 번복한 것인데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lt;BR&gt;&lt;BR&gt;-그렇다면 아직 화해를 안한 겁니까.&lt;BR&gt;&lt;BR&gt;“아, 화해는 분명 한 겁니다.”&lt;BR&gt;&lt;BR&gt;지난 8월10일 DJ의 건강에 적신호가 들어오자 평생 정치적 라이벌이자 동지였던 YS는 DJ가 입원한 세브란스 병원에 찾아가 “DJ와 나는 가장 오랜 경쟁관계이자 애증관계다.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관계”라고 밝혔다.&lt;BR&gt;&lt;BR&gt;YS는 이어 기자들이 ‘두 분이 화해한 것으로 봐도 되냐’는 질문에 “이제 그렇게 봐도 좋다. 그럴 때가 됐다”고 술회했다.&lt;BR&gt;&lt;BR&gt;&lt;BR&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3 width=500 align=cente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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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bgColor=#ffffff&gt;&lt;IMG border=0 src=&quot;http://www.sisaon.co.kr/imgdata/sisaon_co_kr/200910/2009102400513518.jpg&quot; width=500&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
&lt;TABLE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2 width=&quot;10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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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style=&quot;LINE-HEIGHT: 12pt; FONT-FAMILY: verdana,굴림; LETTER-SPACING: -1px; COLOR: #ffffff; FONT-SIZE: 9pt&quot; bgColor=#999999&gt;▲ 전두환 전 대통령은 '반역자'라고 YS는 단정지었다 &amp;nbsp; &amp;nbsp; © 시사오늘 권희정&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김영삼 전 대통령이 발탁한 노무현 전 대통령은 어떻게 보십니까.&lt;BR&gt;&lt;BR&gt;“노무현은 내가 픽업했죠. 의리가 없어요. 평가 가치 없습니다.”&lt;BR&gt;&lt;BR&gt;노무현 전 대통령은 김광일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추천을 받아 지난 1988년 YS가 이끄는 통일민주당 간판으로 첫 금배지를 달았다.&lt;BR&gt;&lt;BR&gt;이후 1990년 민정-민주-공화당의 3당 합당이 이뤄지자 노무현은 “반역사적 3당통합에 반대한다”며 당 잔류를 선언, YS와 멀어지게 됐다.&lt;BR&gt;&lt;BR&gt;1995년 노무현은 민주당 간판을 들고 YS의 아성이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시장 선거에 도전장을 냈다. 선거 초반까지는 집권당이던 민자당도 긴장할 정도로 노무현은 선전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선거 중반 DJ가 ‘지역등권론’을 들고 나오자 노무현의 ‘바람’을 꺼져갔고 결국 낙선했다. 노무현은 “DJ의 지역주의를 용서할 수 없다”며 맹비난했다. &lt;BR&gt;&lt;BR&gt;선거 이후 DJ가 민주당을 쪼개 ‘국민회의’를 만들자 노무현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는 반역사적 행위”라고 DJ를 비난하며 또다시 당 잔류를 선언했다.&lt;BR&gt;&lt;BR&gt;그러나 국민회의 후보인 DJ와 한나라당 후보인 이회창이 1997년 대선에서 한판 승부를 벌이자, 노무현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던 DJ를 지지했다.&lt;BR&gt;&lt;BR&gt;이후 노무현은 국민의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거쳐 2003년 제16대 대통령 자리에 올랐다. &lt;BR&gt;&lt;BR&gt;아마도 YS는 이런 노무현의 정치행보를 놓고 ‘의리가 없다’고 말하는 듯싶었다.&lt;BR&gt;&lt;BR&gt;노 전 대통령은 최근 자신의 회고록 ‘성공과 좌절’을 통해 DJ에 대해선 “국보급 대접을 받을 만한 훌륭한 지도자”라고 후하게 평가했고, YS에 대해선 “1987년 이전까지의 정치적 업적은 DJ에 못지않지만 3당 합당으로 모든 것을 망쳐 놨다”고 평가했다. &lt;BR&gt;&amp;nbsp;&lt;BR&gt;&lt;FONT color=blue&gt;“DJ는 독재자, 하지만 화해…노무현은 ‘평가가치 없다”&lt;/FONT&gt;&lt;BR&gt;&amp;nbsp;&lt;BR&gt;-3당 합당을 통해 대통령자리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합당이 위험한 도박에 가까웠습니다.&lt;BR&gt;&lt;BR&gt;“힘들었습니다. 25%(민주계)대 75%(민정계)의 싸움으로 시작했으니 정치 생명이 위험했어요. (합당 당시) 정치 상황이 경상도와 전라도가 완전히 쪼개져 있었고 경상도는 경남과 경북이 갈라져 있어서 (합당을 안 하고는) 군사정권을 못 끝내 군사정권을 업고 정권교체를 하려 했던 겁니다. 노태우는 합당 후 온갖 술수를 써서 내가 대통령이 못 되게 하려 했지만 나는 대도무문(大道無門)의 정신으로 정정당당히 싸웠습니다.”&lt;BR&gt;&lt;BR&gt;3당합당을 놓고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 ‘구국의 결단’이란 평가와 함께 ‘야합’이란 비난이 상존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YS 입장에서 봤을 때 거의 ‘도박’에 가까웠다는 것이다.&lt;BR&gt;배석했던 노병구 전 민주동지회장은 인터뷰 후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lt;BR&gt;&lt;BR&gt;“나도 3당합당에 반대했어. ‘죽으러 가는 길이 뻔한데 어떻게 따라갈 수 있냐’며 대놓고 YS한테 항의했지. 하지만 YS는 ‘군정을 종식시키는 것은 이 길밖에 없다’며 설득했어. 그래도 도저히 ‘같이 가겠다’는 말은 못했지. 그러나 YS 말고 믿고 따를 지도자가 없는 거라. 그래서 결국 함께 했지.”&lt;BR&gt;&lt;BR&gt;-현재의 남북 관계는 어떻게 바라보고 계신지요.&lt;BR&gt;&lt;BR&gt;“공산주의자는 어렵습니다. 아무리 베풀어도 욕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재임 중에 쌀 15만 톤을 달라고 해서 5만 톤을 먼저 보내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보낼 생각이었습니다. 쌀을 실은 배가 원산으로 가는데 선장이 (북한 지역) 사진을 찍었다고 감옥에 보냈어요. 선장이 배에서 사진 좀 찍었다고 무슨 문제가 됩니까. ‘쌀을 안 주겠다’ 했지요. (공산주의자들은) 매달리다가도 금방 변합니다.”&lt;BR&gt;&lt;BR&gt;-김일성과의 정상회담 2주 전에 갑작스레 김일성이 사망한 일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어떻게 회고하시는지요.&lt;BR&gt;&lt;BR&gt;“2주 후 평양행이 예정돼 있었는데 김일성이 그 나이에 죽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됐다면 남북관계가 상당히 진전됐을 겁니다. 당시 미국이 북한을 치려고 하던 상황이어서 북한이 겁을 먹고 카터를 초청했습니다. 카터가 북한에 가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나도 걱정이 돼서 클린턴에게 전화를 해서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클린턴이 미국에서는 전직 대통령 하는 일에 현직이 간섭하지 않는 것이 전통이라며 나더러 이해하라고 하더라고요. &lt;BR&gt;&lt;BR&gt;그런 후에 카터한테서 연락이 왔어요. 평양에서 이틀을 자는데 서울에서 먼저 하루 자고 갈테니 청와대에서 점심을 같이 먹자고 부부가 같이 왔습니다. 청와대에서 카터가 북한에 가면 김일성을 두 번 만날 건데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미국 가기 전에 서울에서 다시 보자고 했어요. &lt;BR&gt;&lt;BR&gt;카터가 북한에 다녀와서 김일성이 북한이 처한 위기에 대해 ‘이 사태를 어쩌나’ 걱정하면서 ‘김영삼만이 해결 가능하다, 김영삼을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습니다. 세계 신문에 톱으로 보도된 후 급속도로 정상회담 날짜가 잡혔어요.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정직하게 회담에 임했을 겁니다. 김일성이 먼저 제의했기 때문에 갖다 주는 것이 없었습니다. 김대중과 노무현은 북한에 돈을 갖다 주고 정상회담을 했잖아요. 안 되는 일입니다.”&lt;BR&gt;&amp;nbsp;&lt;BR&gt;&lt;FONT color=blue&gt;“김일성이 먼저 정상회담 제의해 와”&lt;/FONT&gt;&lt;BR&gt;&lt;BR&gt;-젊은 정치인들에게 정치 원로로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면 들려주십시오.&lt;BR&gt;&lt;BR&gt;“정치는 성실하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정직하고 의리를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lt;BR&gt;&lt;BR&gt;-신진 정치인 중에 눈여겨보고 있거나 잘 하고 있다 싶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 주시죠. &lt;BR&gt;&lt;BR&gt;“그 대답은 안 하겠습니다.”&lt;BR&gt;&lt;BR&gt;원내인사들 중 민주계 인사는 몇 안된다. 김무성 안경률 이성헌 정병국 의원 등이 전부다. YS가 이들 중 한명을 지목할 것이란 예측을 했는데 대답을 하지 않았다.&lt;BR&gt;&lt;BR&gt;김영삼 전 대통령은 인터뷰가 끝내면서 노무현, 김대중 두 전직 대통령의 죽음을 두고 “살아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제 나 하나만 남았다”고 말했다.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도 생전에 있지만 진정한 대통령으로는 자신만이 남았다는 뜻으로 들렸다. &lt;BR&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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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정희는 누구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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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30T16:34:32Z</updated>
	    <published>2009-10-30T16:34:32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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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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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SPAN class=read_title&gt;10.26사건 30년 후에 다시 보는 박정희?&lt;/SPAN&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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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R&gt;
&lt;TD&gt;&lt;SPAN class=read_subtitle&gt;매우 구체적으로 정책을 지시한 박정희의 실용주의&lt;/SPAN&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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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amp;nbsp;&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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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DIV class=writer align=right&gt;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 &lt;A class=writer onmousedown=&quot;MM_openBrWindow('./newnews/formmail.php?email=eW91bmdod2FuY2hvQG5hdmVyLmNvbQ==&amp;name=지만원 시스템클럽 대표','','status=yes,width=500,height=410')&quot; href=&quot;javascript:;&quot;&gt;&lt;IMG border=0 src=&quot;http://www.allinkorea.net/img/skin1/icon_mail.gif&quot;&gt;&lt;U&gt;&lt;FONT color=#0000ff&gt; &lt;/FONT&gt;&lt;/U&gt;&lt;/DIV&gt;&lt;/A&gt;&lt;/TD&gt;&lt;/TR&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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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height=9&gt;&lt;U&gt;&lt;/U&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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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class=read_body&gt;&lt;FONT size=2&gt;&lt;FONT size=3&gt;&amp;nbsp;&lt;B&gt;박정희는 누구인가? &lt;/B&gt;&lt;BR&gt;&lt;BR&gt;필자는 197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 미국 경제교과서에 “한강의 기적”이 가장 훌륭한 경제성장 모델로 예시돼 있었고, 경제학 교수가 한국의 경제성장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때 필자는 한국인임에 대해 자부심을 크게 느꼈고 낯선 이국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랑스럽게 “저는 한국인입니다” 하며 악수를 청했다. 5천년 역사가 흘렀지만 당시 120여 개 나라들 중에서 가장 못살던 나라를 230여 개국 중에서 11위로 잘 사는 국가로 개조해 놓은 지도자는 박정희였고, 그가 만들어 놓은 기반 위에서 세계 최고의 고속 성장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던 지도자는 전두환이었다고 생각한다. &lt;BR&gt;&lt;BR&gt;1974년만 해도 민주주의의 종주국이라는 미국에서도 백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흑인이 갈 수 없었다. 이것이 1970년대의 민주주의 현실이었다. 이런 시절에 한국사회에서 유독 민주화라는 말을 퍼트리고 다닌 세력들이 있었다. 그 중 가장 큰 세력이 간첩과 연계된 좌익들이었다. “선생님, 민주화 하셔야지요.” 간첩들이 한국 사회의 불평-불만분자들을 포섭할 때 사용한 첫마디가 바로 이 말이었다. 5.18 이전에는 민주화가 지하에서만 통용되던 말이었지만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정당화됨에 따라 민주화는 공공연한 지상 용어가 되었고, 이에 따라 지하에서만 은밀히 이루어졌던 좌익활동이 보란 듯이 지상에서 공공연하게 이루어져 왔다. 바로 이런 민주화 세력들이 퍼트린 말에 의해 독재자의 누명을 쓴 박정희, 그의 위업에 대해 우리는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gt;&lt;BR&gt;혁명공간의 한국 경제 &lt;BR&gt;&lt;BR&gt;1960년 12월호 “한은 조사월보”에 따르면 1945년에서 1959년 사이(15년)에 미국으로부터 제공받은 원조액은 26억9,000만 달러, 5.16혁명 전해인 1959년도의 원조액은 2억 달러였다. 이 중 78%는 소비재 원조였고 22%는 생산재 원조였다. 미국이 제공한 원조 물자 중에서 잉여 농산물과 석유 및 유연탄은 시장에 매각하여 세출 예산으로 사용했다. 이는 '대충자금'이라 불렸다. 기업이라고는 별반 없고, 80%의 인구가 피폐한 농촌에서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환경이었으니 세금이 어디에서 걷혔겠는가. 미국으로부터 잉여농산물이 유입됨에 따라 농촌은 더욱 피폐해 졌고, 젊은이들은 너도 나도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렸으며 이로 인해 수백만의 도시 실업자들이 양산됐다.&amp;nbsp;&amp;nbsp;&lt;BR&gt;&lt;BR&gt;보잘 것 없긴 하지만 대기업들이 몇 개 있었다. 이때의 대기업은 위에다 정부예산을 부어넣고 밑에서는 업주와 정치인 및 관리들이 빼가는 돈 통에 불과했다. 밀수품이 범람했다. 정경유착으로 인해 사회는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국가의 운명이 암담하기만 했다. 고관대작들은 축첩과 양주와 춤으로 사치와 방탕에 빠졌고 대부분의 정치꾼들은 깡패들과 연결된 사기꾼들이었다. 1961년, 박대통령은 장충단 공관에서 집필한 메모식 저서 &quot;국가와 혁명과 나&quot;에서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lt;BR&gt;&lt;BR&gt;1956년부터 1962년까지 7개년간의 원조는 연평균 5억 달러였다. 경제원조가 2.8억불, 군사원조가 2.2억불이다. 환언하면 한국경제가 완전히 자립하자면 군사 면을 제외하고도 2.8억불과 무역적자 5천만 불을 합쳐 3.3억 불을 새로이 벌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렇게 된다 해도 이는 현상유지 하는 데 그치는 일이다. 이에 가중되는 연평균 2.88%의 인구 증가, 즉 72만 명의 압력은 어찌할 것인가? 원조를 받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 경제를 운용하는 것은 기적 이외에 바랄 것이 못되지 않는가? 위기를 고하는 수많은 국민의 생활난, 해마다 늘어만 가는 식량부족, 30%의 실업률, 모두가 시급한 해결의 길을 바라고 있는데 반해 해결방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lt;BR&gt;&lt;BR&gt;실업률 30%! 지금의 실업률은 얼마인가? 3.5%. 매년 30만 명의 대학생들이 졸업을 하지만 겨우 5,000명 정도만이 취직을 하는 지금의 실업률이 겨우 3.5%라 하니, 당시의 30% 실업률이 얼마나 살인적인 것이었겠는가! 5.16군사혁명! 미국은 박정희 혁명세력을 인정하지 않았다. 다른 나라들에서도 똑같은 상황이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그래서 미국은 주던 원조를 대폭 삭감해 버렸다. 김대중에 이어 노무현이 사회좌경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인 2003년 11월, 육사 교장 김충배 중장은 생도들에게 지금의 50-60대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리더십 하에서 어떻게 일했는지에 대해 교양강의를 했다. 그 중 일부를 축약하여 소개한다.&amp;nbsp;&amp;nbsp; &lt;BR&gt;&lt;BR&gt;케네디로부터 박대를 받은 박대통령은 서독에 광부를 팔고, 간호원을 팔았다. 고졸 출신 파독 광부 500명을 모집하는 데 4만6천이 몰렸다. 학사 출신도 수두룩했다. 손이 고우면 떨어질까 연탄에 손을 비비며 손을 거칠게 만들었다. 어린 간호사들은 울면서 거즈에 알코올을 묻혀 딱딱하게 굳어버린 시체를 이리저리 굴리며 하루 종일 닦았다. 광부들은 지하 1,000미터 이상의 깊은 땅 속에서 뜨거운 지열을 받으며 열심히 일했다. 하루 8시간 일하는 서독 사람들에 비해 열 몇 시간을 그 깊은 지하에서 석탄을 캤다. 서독 방송, 신문들은 대단한 민족이라며 가난한 한국에서 온 간호사와 광부들에게 찬사를 보냈다. “세상에 어쩌면 저렇게 억척스럽게 일 할 수 있을까?” 이들에 부쳐진 이름이 ‘코리안 엔젤’이었다. 이들을 방문한 박정희! “우리 열심히 일 합시다. 후손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 합시다.” 얼굴이 찌든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그는 이 말만 반복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광부와 간호사들이 몰려나와 육 여사와 박대통령의 옷을 잡고 통곡했다. 광부들이 뤼브케 대통령 앞에 큰 절을 했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한국을 도와주세요. 우리 대통령님을 도와주세요. 우리 모두 열심히 일 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뤼브케 대통령도 울었다. 호텔로 돌아가는 차에서도 박 대통령은 계속 눈물을 흘렸다. 옆에 앉은 뤼브케, 손수건을 주면서 힘주어 말했다. “우리가, 서독 국민들이 도와주겠습니다.” &lt;BR&gt;&lt;BR&gt;서독 국회에서도 연설을 했다. “돈 좀 빌려주세요. 한국에 돈 좀 빌려주세요. 여러분들의 나라처럼 한국은 공산주의와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이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여 이기려면 분명 경제를 일으켜야 합니다. 그 돈은 꼭 갚겠습니다. 저는 거짓말 할 줄 모릅니다.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절대로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을 이길 수 있도록 돈 좀 빌려주세요.” 유엔에 등록된 나라 수는 120여 개국, 당시 필리핀 국민소득 170불, 태국 220불등 이때, 한국은 68 달러였다. 그것도 대부분 원조액이었다. 우리 밑에는 달랑 인도만 있었다. 북한은 우리보다 2배, 필리핀은 3배나 더 잘 살았다. 가발을 만들어 내다 팔았다. 동네마다 엿장수가 다녔다. “머리카락 파세요!” 아낙네들이 머리카락을 잘랐다. 서울 간 아들놈 때문에 잘랐고, 쌀을 사기 위해 잘랐다. 싸구려 플라스틱으로 예쁜 꽃을 만들어 수출을 했다. 곰 인형도 팔았다. 쥐잡기 운동! ‘코리안 밍크’도 만들어 팔았다. 돈 되는 것은 무엇이던지 내다 팔았다. 그 결과 1965년, 수출이 1억 달러가 됐다. &lt;BR&gt;&lt;BR&gt;박정희 대통령이 케네디에 돈을 꾸러 가고, 서독에 가서&amp;nbsp;&amp;nbsp;광부 간호사와 함께 통곡을 하고 있을 때, 김대중-김영삼-문익환 등은 무얼 했는가? 고속도로를 놓을 때에는 “알통 같은 농지를 절단 낸다”며 욕을 했고, 국군을 월남에 보낼 때에는 “젊은이들의 피를 팔아먹는 악마”라며 욕을 해대면서 오직 개인들의 정치적 욕심만 채우고 있었다. 박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담당 군의관이었던 정규형 대위는 시신이 대통령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합수부에 증언했다. &lt;BR&gt;&lt;BR&gt;“당시 박대통령이 차고 있던 시계는 평범한 제품이었고, 넥타이핀은 멕기가 벗겨져 있었으며, 혁대도 헤어져 있어 대통령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lt;BR&gt;&lt;BR&gt;김정렴 비서실장의 증언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청와대에 근무할 때 양주를 마신 적이 한 번도 없고 막걸리를 즐겨했다고 한다. 당시 현장을 검증한 장경삼 검찰관(판사를 지내고 현재 변호사)는 서거 당시 대통령이 마신 술이 시바스리갈이 아니었고 국산양주였는데 이를 주전자에 담아 마셨다고 한다. 아마도 현장접근이 금지됐던 기자들이 현장 사진에 나타난 술병의 모양만 보고 추측성 기사를 쓴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는 국산품 애용시대였고, 양주와 양담배는 사회적 위화감을 조성한다는 이유로 배척됐던 시기였으며, 외화에 대한 통제가 각별했던 시대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박대통령 같은 지도자가 양주를 마셨다는 것은 납득가지 않는 대목이다. 대통령 전속이발사는 대통령이 입은 러닝셔츠에 군데군데 작은 구멍이 나 있었고 물을 아끼려고 화장실 물통에 벽돌을 넣었다고 밝혔다. 그가 가장 아끼던 사람들은 공돌이와 공순이였다. 그는 이들에게 야간학교를 다니도록 해달라며 고용주들에게 절을 하는 자세로 편지를 썼다. 서거한 다음, 그가 단돈 몇 푼이라도 감추어 놓았다는 증거는 아직 없다. &lt;BR&gt;&lt;BR&gt;혁명공간의 한국 안보&lt;BR&gt;&lt;BR&gt;1961년7월, 중공과 북한 간에 혈맹적 동맹조약이 체결됐다. 소련, 중공, 북한이 이루는 북방 삼각세력의 팽창 정책이 공조체제를 가동하기 시작했다. 1962년 12월, 김일성이 &quot;4대 군사노선&quot;을 발표했다. 1964년, 중공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1965년4월, 김일성이 ‘남조선 통일을 위한 3대 혁명론’을 발표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한의 입지는 점점 더 약화되어 갔다. 미국에서는 월남전의 확전으로 인해 남한에 공여하던 원조를 삭감하는 한편 주한미군을 월남에 투입할 수밖에 없다는 정서가 확산됐다. 북한은 공세의 고삐를 바짝 조여가고, 미국은 발을 빼려하고, 그야말로 한국은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공산화 도미노 현상은 매우 위협적이었다. 인도네시아가 공산화되고 월남마저 공산화되면 그 다음 차례는 한국이었다. 한국에 월남전은 제2의 전선이었다. 박정희는 미국 대통령도 생각하지 못한 한국군 파병을 생각해냈고, 미국을 설득시켜 한국군을 파병하여 경제와 안보의 큰 물고를 텄다. &lt;BR&gt;&lt;BR&gt;전 거물간첩 김용규는 그의 저서 ‘소리없는 전쟁’(1999. 원민) 81쪽에서 4.19를 이렇게 회상했다. “4.19 때에도 시위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 이런 구호를 외치며 왁시글거리지 않았습니까? 그 때도 제가 서울에 있으면서 학생시위를 지도했습니다.” 이명영 교수(서울대 졸업,&amp;nbsp;&amp;nbsp;정치학 박사, 중앙일보 본설위원)는 그의 저서 ‘통일의 조건-발상의 전환을 위하여’라는 저서에서 “1972년1월, 간첩 이석과 그의 공작망이 국군보안사령부에 의해 검거되자 그는 수사관 앞에서 담담하게 말했다. &quot;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나입니다.&quot; 이어서 김용규는 이렇게 털어놓았다.&lt;BR&gt;&lt;BR&gt;북한은 4.19 혁명이 실패한 것에 대해 몹시 후회했다. 그리고 그 원인을 진단했다. (1) 남한에 혁명을 수행할 수 있는 정당이 없었고, (2) 명확한 투쟁 강령이 없었고, (3) 노동자-농민의 참가가 없었다. 그래서 1964년 3월15일, 서울에서 발족된 것이 ‘통일혁명당창건준비위원회’였다. 이 준비위원회는 비밀조직으로는 ‘민족해방전선’을 두고, 합법적 조직으로는 학사주점, 새문화연구회, 청맥회, 동학회, 민족주의연구회 등의 서클을 두었고, 당 기관지로는 혁명전선이라는 지하신문을, 합법적 잡지로는 청맥을 발간하여 반미 사상, 반정부 사상을 고취하고, 민족 및 노동자-농민에 대한 계급의식을 확산시켰다. &lt;BR&gt;&lt;BR&gt;1964년의 6.3한일회담반대 투쟁, 1965년8월의 한.일협정비준반대-투쟁, 1969년의 험프리 미부통령 및 일본의 佐藤 수상 내한반대-투쟁, 1969년 7월의 3선개헌반대-투쟁을 선동했다. 그러나 이들은 1968년8월24일 한국정부에 의해 발각되었다(73명을 구속, 85명을 조사 중이라고 발표). 모든 반정부 불만을 소요와 폭동으로 교묘하게 연결시킨 배후에는 반드시 지하당의 선전-선동과 전문적인 연출세력이 개입돼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민주화’는 1960년대부터 북이 남한의 불만세력을 선동하기 위해 사용한 위장용어였고,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북의 지령이었다. 남한에의 민중정부 수립은 김일성의 목표였으며 4.19를 북한에서는 ‘4.19민중항쟁’으로 부르고 실패한 통일 기회로 기억한다. 남한에서 발생한 모든 소요사태의 배후에는 언제나 북한의 개입이 있었다. 한일협정 반대 시위의 배후에도 북이 있었다. 굴욕외교라고 비분강개한 대학생들의 정서를 이용해 뒤에서 불길을 크게 키운 것이 북이었다. 김대중, 김영삼, 문익환, 함석헌, 장준하 들이 그 불길의 중심에 서있었다. &lt;BR&gt;&lt;BR&gt;한일협정과 박정희&lt;BR&gt;&lt;BR&gt;1965년 한일협정에 의한 배상 자금은 얼마였나? 한일회담 14년, 이승만-장면 정권에서 9년간 협상했고, 박정희 정권 5년 만에 타결을 보았다. 타결 액은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 민간상업차관 3억 달러, 총 8억 달러였다. 정부 부문 청구액 5억 달러는 66년부터 75년까지 10년에 걸쳐 나눠 받되, 매년 무상 3,000만 달러, 유상 2,000만 달러 총 5,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국 정부의 협의에 의해 받기로 했다. 유상 2억 달러에 대해서는 산업시설과 기계류 등 공공차관의 형태로 7년 거치 13년 분할 상환하되 금리는 연 3.5%가 적용됐다.&amp;nbsp;&amp;nbsp;&lt;BR&gt;&lt;BR&gt;박정희는 이 돈을 어디에 썼나? 76년 당시 경제기획원 발간 '청구권자금백서'에 따르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55.6%가 포항제철 건설 등 광공업 투자에 쓰였다. 유상 2억 달러는 대부분 포항제철 등 기간산업과 경부고속도로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확충에 사용됐다.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전체 자금의 18%를 투입했다.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2,161만 달러), 경부고속도로 건설(689만 달러), 상수도 확장(409만 달러), 한강철교 복구(89만 달러), 영동화력발전소 건설(178만 달러), 철도시설 개선(2,027만 달러) 등이 이때 이뤄졌다. 상대적으로 농어민에게 돌아간 자금은 많지 않았다. 농림업에 7.8%, 수산업에 5.4% 등 농림어업에 총 13.2%를 배정했다. 이 중 포항종합제철 건설에만 무상자금 3,080만 달러와 유상자금 8,868만 달러 등 총 1억1,948만 달러를 몰아줬다. 전체 청구권 자금의 23.9%에 이른다. 광공업용으로 도입된 원자재 1억3,282만 달러도 대부분 포철을 짓고 공장을 돌리는 데 썼다. 원자재까지 합치면 전체 청구권 자금의 절반 이상을 포철에 투자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다른 나라들은 어떻게 썼나? 일본 정부로부터 대일청구권 자금을 받은 나라는 아시아 5개국. 필리핀, 한국, 인도네시아, 미얀마, 베트남이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이 2,000년에 펴낸 ‘대일 청구권 자금의 활용사례 연구’에서 연세대 경제학과 김정식 교수는 이들 5개국 중에서 한국이 청구자금을 최고로 잘 사용하였다는 결론을 내렸다. 무상자금은 필리핀이 5억5,000만 달러로 제일 많았고, 한국이 3억 달러, 인도네시아 2억2,308만 달러, 미얀마 2억 달러, 베트남 3,900만 달러 순이었다. 일본이 차관 형태로 지원하는 유상자금과 민간이 자금을 지원하는 상업차관을 합칠 경우 한국과 필리핀이 각각 8억 달러로 제일 많았다. 인도네시아는 대통령의 개인별장이 있는 곳에 호텔을 짓고, 부유층을 위한 백화점을 지었다. 청구권 자금의 효율성이 가장 낮은 국가였다. 필리핀은 항만 및 도로건설 등에 사용했지만 당초 댐 건설 및 철도 연장 계획이 계획대로 실시되지 못했다. 대지주와 대자본가 등이 필리핀 정치를 주도하면서 일본의 배상금이 이들의 이권을 채우는 데 활용됐다. 미얀마는 파괴됐던 철도 및 도로 복구 등에 주력하면서도 당시 총리의 ‘복지국가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사회복지 부문에도 상당액의 자금을 투입했다. 베트남은 전체 자금의 50% 이상을 발전소 및 송전시설에 투입했다. &lt;BR&gt;&lt;BR&gt;당시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 박정희 대통령은 자금 유출에 대해 엄청난 단속을 했다. 당시 경부고속도로 건설현장에는 군의 공병대 장교들이 대거 파견되어 날림공사와 자재 유출을 감시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청렴한 집단은 그래도 군인들이었다. 포항제철 공사를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챙기지 않았다면 자금의 수십%가 유출됐을 것이고, 중국의 등소평까지도 그토록 부러워했던 오늘날의 포항제철은 없었을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박태준 씨에게 특별한 마패를 만들어 주었다. 세도가들이 찾아와 여러 가지 압력을 넣거나 회유를 할 때마다 보여주면서 이권과 청탁을 물리치라는 것이었다. 박태준씨는 그 마패를 보여주면서 모든 이권과 청탁을 차단했다. 박정희 집권 초기에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가 한국보다 3배 더 잘 살았지만, 지금은 한국이 이들보다 10-11배나 더 잘 산다. 북한보다는 36배 더 잘 산다. 이는 순전히 박정희가 이룩한 한강의 기적 때문이었다. 이 통계 하나만으로도 오늘의 대한민국은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였다. 아키오모리타와 마츠시타고노스케는 모범을 보인 훌륭한 기업인으로 일본 국민의 신앙이지만 한국의 박정희는 세계적으로는 대한민국의 신화를 창조한 위대한 지도자로 인정받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온갖 욕을 다 먹는다. &lt;BR&gt;&lt;BR&gt;조선과 대한민국&lt;BR&gt;&lt;BR&gt;세계의 유수 열강들은 누가 더 많은 식민지를 보유하느냐에 국가의 프라이드로 여기면서 식민지 쟁탈전에 몰입했다. 그러나 조선만은 이러한 외부 세상에 눈과 귀를 막고 대장금 문화에 빠져 오직 정적을 모함-모략하여 죽이고 귀양 보내는 데만 열중했다. 약육강식 시대에 이러했으니 누구에겐들 먹히지 않았겠는가? 1905년7월29일, 일본 총리 가쓰라 다로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의 특사인 육군장관 W.H. 태프트 사이에 비밀협약이 맺어졌다. 미국이 필리핀을 갖는 대신 일본은 조선을 개화시키라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가쓰라-태프트 밀약이며, 이 밀약에 의해 1910년 을사보호조약이 강요됐다. 러-일 전쟁이 발발 직후 루즈벨트 대통령은 당시 조선을 이렇게 평가했다. “1900년 이래 한국은 자치할 능력이 없으므로 미국은 한국에 대해 책임을 져서는 안 되며,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여 한국인에게 불가능했던 법과 질서를 유지하고 능률 있게 통치한다면 한국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라고 확신한다”. 미국의 원자탄에 의해 한국이 해방됐을 당시에도 미국은 조선에 자치능력이 없다고 생각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5,000년 역사! 9,000여회의 외침을 받아 오면서 지배계급은 언제나 외세에 영합하면서 부를 누렸고, 나라와 백성을 생각하며 목숨을 버린 사람들은 민초들이었다. 그 민초에서 우뚝 선 지도자들이 바로 이순신-안중근-유관순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승만과 박정희 역시 이런 민초들에서 피어난 꽃들이었다. 이순신, 안중근, 유관순은 민초에서 피어난 정신적 지도자들이었지만, 이승만과 박정희는 국가를 위기에서 건져내고, 현대적 민주국가의 틀을 세우고, 세계에서 꼴찌로 못 사는 거지의 나라를 경제 10위권 국가로 우뚝 세울 만큼의 지도능력을 갖춘 민초출신의 위대한 지도자들이었다. 당시 조선 인구의 80%는 농업인구, 85%가 한글마저 배우지 못한 문맹, 그야말로 한심한 국가였다. 이는 훌륭한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형편없던 한국축구가 히딩크라는 축구지도자를 만나 세계 4강으로 뛰어 올랐듯이 거지의 나라 한국도 박정희라는 지도자를 만나 세계적인 경제국가로 올라서게 된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월남 파병의 기적&lt;BR&gt;&lt;BR&gt;1966-1972년간 월남에서만 직접 획득한 외화는 8억7,250만 달러였다. 이중에서 장병 송금액은 1억7,830만 달러로 베트남으로부터의 송금된 전체 외화의 20.4%에 불과했다. 나머지 80%는 베트남으로의 수출, 베트남에의 군납, 파월 기술자 송금, 파월 지원경비, 파월 건설 및 용역에 의한 수입이었다. 미국의 후원과 한국군의 맹활약, 월남특수가 일궈낸 &quot;신인도&quot;(credibility)에 따라 외국자본이 물밀 듯 들어왔다. 원조, 차관, 상품 및 용역 수출의 물꼬가 터졌다. 1965-1972 사이의 외자 도입액은 32억8,820만 달러나 됐다. 대미수출을 보자. 1964년에 3,600만 달러였던 것이 10년 만인 1973년도에는 무려 10억2,120 달러로 28.3배로 도약했다. 주한미군이 한국에 뿌린 돈이 8억 달러, 군원이관 액이 9,300만 달러 등 총체적으로 한국군이 월남특수로부터 거두어들인 경제적 이익은 50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된다. 장병 1인당 17,000 달러씩 국가에 기여한 것이다. 이는 소위봉급 83년 치에 해당하는 돈이다. 이는 1965년 6월 3일에 얻어낸 대일 청구자금 8억 달러에 비하면 엄청난 금액이었다. 외화보유고를 보자. 1964년도 외환보유고는 겨우 1억 2,800만 달러였으나, 1975년에는 15억4,000만 달러, 1978년에는 49억4,000만 달러로 폭증했다. &lt;BR&gt;&lt;BR&gt;한국군은 월남의 8개항만 중 5개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월남의 주요 공사는 한국 기업이 맡았다. 당시 천막회사였던 한진과 현대는 기술도 없이 담요나 모기장 그리고 급수 대책도 없이 무작정 월남 땅으로 상륙했다. 한진은 월남에서 1.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현대는 캄란 부두 공사 500만 달러를 비롯하여 연평균 100만 달러 이상의 계약고를 올렸다. 1974년초 청와대 오원철 경제 수석이 박대통령에게 이런 건의를 올렸다. &quot;중동은 고온에다 모래 바람이 부는 열악한 땅입니다. 금녀, 금주의 땅이라 선진국 근로자는 아무리 돈을 많이 줘도 가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겐 군인 정신으로 무장된 수십만의 제대 장병이 있습니다. 월남 참전 용사들도 많습니다. 여자 근로자가 만든 상경공업 상품을 수출하여 지탱해오던 한국경제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quot; 1965년-73년 9년간 중동건설 수주액은 불과 2,400만 달러였다. 1974년에는 8,900만 달러, 1975년에는 7억5천만 달러, 76년에는 24억3,000만 달러, 77년에는 33억 8,700만 달러, 78년에는 79억 8,200만 달러를 기록했다. &lt;BR&gt;&lt;BR&gt;1960년, 필리핀, 태국, 인도네시아는 우리에게 한참 우러러 보이는 선진국, 모두가 우리보다 3배나 더 잘 살았다. 그러나 지금 현재는 어떠한가? 필리핀은 1인당 국민소득 1,030달러, 우리의 11분의1이다. 인도네시아는 968달러, 태국은 1,940달러, 북한은 580달러, 한국은 20,000달러, 모두가 한국에 비해 새카맣게 뒤떨어졌다. 박정희가 이룩한 신화는 기적 그 자체였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gt;&lt;BR&gt;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lt;BR&gt;&lt;BR&gt;박대통령이 집권하기 이전에 한국엔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의 공식 통계만으로도 실업률은 1963년 29.9%, 1964년에는 29.7%였다. 공장이라고는 겨우 제분, 제당, 제약 회사들과 같은 것뿐이었고, 기계공업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 손톱깎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했다. 강도와 정밀도를 규정하는 스펙이라는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사회 전체가 무력감으로 가득 차 있었고, 청년들에겐 앞길이 막막했다. 박대통령은 월남에서 벌어들인 돈을 가지고 경부선, 댐 공사, 발전소 등 대규모 인프라를 건설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능학교들을 세워 기능공을 대량으로 양성했다. 국제 기능올림픽에서 금메달은 한국이 독차지했다. 한국은 기능공의 나라가 됐다. 공장장이 사장보다 더 높은 월급을 받았다. &quot;대학가야 소용없다, 기술을 배워야 대우 받는다&quot;라는 말이 사회적 유행어가 됐다. 박대통령은 외국에 특사들을 내보내 한국에 값싸고 질 좋은 기능공들이 많으니 들어와 공장을 지어달라고 호소했다. 대통령을 신뢰한 외국기업들이 줄줄이 들어와 공장을 지었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라 중간에서 공무원들이 장난질을 하지 못했다. 한국이 조립을 많이 해서 팔면 그만큼의 부품과 소재들을 앉아서 팔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 공장을 짓는 것은 외국기업에게 또 다른 매력이었다. 한국의 일자리는 이렇게 해서 갑자기 늘어나기 시작했다. 눈물과 한숨의 대명사 &quot;보리 고개&quot;라는 말이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세계인들은 뉴딜 정책이 8백만 일자리를 만들어 낸 것에 대해 두고두고 칭송한다. 하지만 박대통령의 일자리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더 기막히다. 앞이 보이지 않던 그 시대에 어떻게 기능공을 양성해서 일자리를 폭발적으로 만들어 낼 생각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 필자는 지금도 혀를 찰 만큼 감탄하고 있다. &lt;BR&gt;&lt;BR&gt;그는 대규모 공단을 지어 기업인들을 입주시키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 기업들에게 외국에서는 이미 사양화 돼 가는 수많은 제품들에 대한 기술도면을 얻어다 주었다. 그러나 공장에는 외국어로 표기된 기술자료(TDP: Technical Data Package)를 해석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국에 나가있는 과학기술자를 대거 유치하여 기업을 지도하게 했다. 생활필수품마저 고갈됐던 당시엔 한동안 물건이 없어서 못 팔 판이었다. 굶주린 배에 음식이 한없이 들어가듯 만들기만 하면 모두가 팔렸다. 공장을 가진 기업들은 한동안 땅 짚고 헤엄치듯이 돈을 긁어 부자가 됐다. 기업은 날로 번창하고 생산 설비는 더욱 팽창했다. 그만큼 일자리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던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이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과학적인 방법이었다. 그는 여기에 멈추지 않았다. 당장에 일자리를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는 미래에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원동력을 키우는 데에도 착안을 했다. 참고로 그가 얼마나 미래 지향적이었는지는 창원 공단에 나있는 광활한 도로 폭에 잘 나타나 있다. 주위의 의아심을 무릎 쓰고 그는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있는 땅을 그때에 사두었다. 훗날 땅값이 오르면 넓은 도로를 건설할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미래지향적 안목을 가지고 그는 빠듯한 나라 살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의 과학 단지를 만들어 냈다. 과학 단지야말로 미래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핵심적 원동력이기 때문이었다. &lt;BR&gt;&lt;BR&gt;그는 과학자들에게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그들 곁을 자주 찾았다. 대통령을 좋아한 나머지 과학자들 중에는 과로를 반복하다가 순직한 이들도 꽤 있었다. 과학촌 수장들이 박대통령을 만나기 원하면 대통령은 국무회의 중에도 만나주었다. 대통령이 이렇게 하니까 장관들이나 공무원들이 과학자들을 지금처럼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대전에 있는 국방과학연구소에는 그가 며칠씩 머물던 방이 있었다. 그 방은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일선 지휘소였다. 그러나 그가 떠나고 난 지금까지 그 방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가경영능력만을 보면 박대통령은 100년에 나올까 말까한, 사람이라는 걸 필자는 믿고 있다. 외국 지도자들은 그의 국가경영능력을 매우 높게 평가한다. 등소평이 박정희를 숭상한 이래 중국은 지금 박정희를 경제선생님으로 모시고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베트남의 도이모이 역시 그의 성장모델을 따르려고 노력하고 있다. 한국의 누가 뭐래도 박정희는 아시아 10대 인물 중 상석에 속해있다. &lt;BR&gt;&lt;BR&gt;한일협정은 굴욕외교였나?&lt;BR&gt;&lt;BR&gt;“청구자금이 적어도 50억 달러는 돼야 했다”는 근거 없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박정희 죽이기에 나섰다. 한일협정이 체결되던 1965년, 일본의 외화보유고는 겨우 14억 달러, 일본은 한국말고도 미국의 압력에 못 이겨 4개국에 돈을 주었다. 모두 14억 달러가 넘는 돈이었다. 청구권이라는 것은 일본이 지은 죄 값을 의미했다. 얼마를 받느냐는 상대방에 달려 있다.&amp;nbsp;&amp;nbsp;청구자금에 대한 당시 일본인들의 생각은 어떠했는가? &lt;BR&gt;&lt;BR&gt;일본인들은 한국에 많은 투자를 했다고 주장했다. 철로, 도로, 터널, 교량, 항만, 발전소, 비행장 등 산업 인프라를 건설했다고 주장했다. 조선의 위정자들의 능력으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투자를 해놓았다고 주장했다. 한국에서 거둔 자원만을 가지고 건설한 것이 아니라 일본의 유수한 기업들의 자본도 많이 들어갔다고 주장했다. 이들 자산들의 가치가 모두 얼마일 것인가? 36년간&amp;nbsp;&amp;nbsp;피해를 끼친 것은 인정하지만 투자한 것이 많아 배상금은 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일본은 어째서 한국에 배상금을 주었는가? 미국 때문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윽박질렀다. 당시의 8억 달러는 일본의 국력으로서는 상당한 거액이었다. 이로 인해 일본의 대학생과 지식층들이 '굴욕외교'라며 길거리에 나서 일본 정부를 성토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박정희를 성토하고 싶은 사람들은 “일본에서 받은 돈이 적다, 더 받아내자”고 지금도 소리를 높이지만 우리 못지않게 피해를 보고 학살까지 당한 중국은 한때나마 일본에 점령당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돈 달라는 소리를 절대로 하지 않는다. 중국은 앞으로도 배상금을 달라지 않을 것이다. 싱가포르 리콴유 수상도 치사하게 배상금을 달라 하지 않았다. 바로 이게 자존심이다. 우리가 받은 것은 정확히 얼마인가? 무상 3억 달러가 전부인가 아니면 8억 달러가 전부인가? 8억 달러 말고 더 있는가? 국교가 정상화되고, 박대통령의 일자리 불리기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자본과 기술이 물밀듯 몰려들었다. 포항제철에 들어 간 기술 대부분이 일본 기술과 자재였다. 국가 전체에 유입된 일본과 미국의 자본과 기술을 비교해보면 7:3으로 일본이 앞섰다. 박정희를 비하하려는 사람들은 별로 배우질 못해서 지금 이 순간까지도 일본의 기술 및 자본 유입을 경제적 침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박정희를 입에 담을 자격조차 없는 사람들이다.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없었다면 1997년도에 이룩한 1만 달러 시대는 열리지 않았을 것이다.&amp;nbsp;&amp;nbsp; &lt;BR&gt;&lt;BR&gt;필자는 김대중과 노무현이 집권했을 때 이런 큰돈을 받았다면 어떻게 사용했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김정일에 많이 퍼주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1달러를 사용하면 수백 달러를 벌지만 김대중과 노무현이 1달러를 사용하면 국가가 수백 달러 어치 파괴된다고 생각한다. 이 두 사람이 국가를 파괴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몇 배 더 잘 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만일 박정희 대통령이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자고 시간을 끌며 떼를 썼다면 한국을 지지했던 미국의 마음이 식상해질 수도 있었을 것이며, 경제부흥이 시급한 시점에서 시간을 허송한다는 것은 더 많은 수확을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으로부터 받은 8억 달러의 가치는 8억 달러만이 아니었다. &lt;BR&gt;&lt;BR&gt;당시 박정희의 선택&lt;BR&gt;&lt;BR&gt;더러는 박정희가 청구권 자금을 유용했거나 편취했다고 근거 없는 비난을 하지만 다른 대통령에게 맡긴 세금은 상당부분 증발됐어도 박대통령에 맡긴 청구자금은 포항제철공장, 소양강 댐, 고속도로 등에 다 들어 차 있다. 그리고 그 투자가 오늘날의 한국을 일으켜 세웠다. &lt;BR&gt;박정희 정부가 받은 청구권 자금에 대해 저들은 뭐라고 비방하는가? 청구권 자금을 103만 피해자들에게 나누어주지 않고 포항제철에 쏟아 부은 것이 잘못이었다는 것이다. 사실 피해자가 103만이라는 것은 일본에게 그냥 해보는 소리였다. 당시 전국을 조사했지만 모든 읍면동에서 나오는 자료는 허무맹랑한 자료이어서 신뢰성이 없었다. 불과 20년 전인 광주사태에서 피해를 본 사람들은 불과 200명 수준, 가까운 역사, 매우 적은 숫자에 대한 증거 자료도 매우 부정확했다. 지금부터 불과 30년 전, 베트남에 참전했던 전우들에 대한 기록도 없다. 개인이 월남전에 참전했는지에 대해 증명할 수 있는 자료는 정부에 없다. 개인이 보관했던 사진과 지휘관들의 증언 같은 것들을 이용해 본인 스스로 증명해야 한다. 그런데 100년 전에 누가 피해를 보았는지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 것인가? .&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gt;&lt;BR&gt;설사 모든 증거자료가 있는 피해자들이 있다고 하자. 그들에게 청구자금을 모두 나누어 주었다면 우리는 지금 매우 가난하게 살았을 것이다. 박정희의 야무진 투자와 경영관리의 덕택으로 대한민국이 잘 살고 있다. 피해를 봤던 사람들도 잘 살고 있다. 그것이 바로 명예로운 보상이 아닌가? 생각할 게 또 있다. 지금 북한에서 김정일의 학정에 시달리는 동포들은 무슨 보상을 받았는가? 남한에서 살아온 일제 피해자들은 박정희의 덕을 보았지만, 북에 있는 동포들은 박정희의 혜택은커녕 김정일 학정 하에서 굶어죽고 맞아 죽고 짐승 같은 노역에 시달리고 있다. 일제 피해자들에 동정심을 표하는 사람들, 필자는 그들의 높은 체 하는 도덕심을 믿지 않는다. 남한에 사는 일제 피해자들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에서 고생하는 북한 인권에 대해 말이 없는 사람들, 아무런 죄 없이 북한에 끌려간 납북자와 그 가족들의 아픔에 대해 말이 없는 사람들, 나라를 지키려다 북에 억류돼 있는 국군포로에 대해는&amp;nbsp;&amp;nbsp;침묵하는 사람들, 툭하면 도덕심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바로 이 나라를 북한에 흡수시키려고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을 온갖 거짓말로 욕하는 좌익들인 것이다.&amp;nbsp;&amp;nbsp; &lt;BR&gt;&lt;BR&gt;박정희의 율곡사업&lt;BR&gt;&lt;BR&gt;1950년대에는 한국군의 봉급까지도 미국 원조에 의존했다. 1970년에 한국의 국방비는 2억 달러에 불과했다. 그러나 1980년의 국방비는 38억 달러나 되었다. 197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는 북한의 연속적인 도발 행위로 긴장이 최고조에 달했다. 1968년 1월 21일에 있었던 김신조 사건과 1월 23일에 있었던 미정보함 프에블로 호의 납치사건은 우리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우리는 ‘영원한 혈맹’ 미국이 북한에 대해 상당한 경고 조치를 취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도와주기는커녕 아시아에서 더 이상의 짐을 지지 않겠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했다. 이는 우리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자 배신 행위였다. 이로부터 박 대통령은 ‘자주 국방’을 기치로 내걸고 전력 증강 사업을 주도하기 시작했다.&lt;BR&gt;&lt;BR&gt;제1차 전력 증강 사업이 1974~1981의 8개년 계획으로 시작됐다. 이때부터 전력 증강 사업은 강병론자의 상징인 율곡 선생의 이름을 따서 율곡 사업으로 명명됐다. 박 대통령은 국방비를 GNP의 4.5퍼센트 수준으로 올릴 것이라는 파격적인 결심을 했다. 이에 따라 8개년 간 총국방비는 88억 달러로 예상됐다. 이러한 국방비 증가는 누구의 눈에나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그런데! 경제 성장 속도는 그 자신도 예측하지 못할 만큼 빨랐다. 88억 달러로 예상했던 8년간의 총국방비가 실제로는 190억3천만 달러나 된 것이다. 경제가 그가 예측한 것보다 2.2배 더 성장한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제1차 율곡 사업 기간인 74년에서 81년까지의 율곡사업비는 국방비의 17%에 해당하는 15.3억 달러로 계획됐었다. 그러나 이 역시 예상 외의 경제 성장으로 인해 60.3억 달러로 늘어났다. 4배인 것이다. 이는 국방비의 32%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군 간부들의 의식과 경영기법을 가지고는 이 큰돈을 제대로 관리할 수 없었다. 많은 낭비가 있었지만 그 때까지 미군이 대주던 물자만 사용해 왔던 군에 갑자기 경영능력이 생길 리 없었다. 제2차 율곡 사업은 82년에서 85년까지의 4개년에 걸쳐 계획되었으며 사업비는 50.3억 달러였다. 그 후 미국 국방성의 새로운 경영기법인 PPBS가 도입되면서부터 율곡 사업 계획은 몇 차 몇 개년 계획 식으로 하지 않고, 소위 PPBS(기획-계획- 예산시스템)주기에 따라 연동제로 계획되어 왔다. 그래도 우리나라에 PPBS라는 최첨단 경영 기법을 도입한 곳은 당시 군뿐이었다. 율곡 사업 예산은 82년도에 10억 달러 규모에서 1985년에는 15억 달러 그리고 93년엔 37억 달러 규모로서 매년 경제 성장 속도만큼 확장돼 왔다.&lt;BR&gt;&lt;BR&gt;1974년에는 1억 달러가 투자되어 소화기, 105밀리 곡사포, 고속정, 해공군 유도탄들이 구입됐다. 1975년에는 3억 달러가 투자되어 나이키, 호크, 대전차 유도탄, 발칸포, 팬텀기들이 구입됐다. 특히 1975년도에는 월남 패망, 김일성 북경 방문, 10월 위기설 등으로 긴장이 가장 고조된 시기였다. 1977년에는 7억 달러가 투자되어 155밀리 개량포, 전차, 방공 자동화 장비, 다연장로켓포들이 구입됐다. 그러나 1978년부터 1981년까지 4년간의 투자는 주로 부대 증창설을 위한 기지건설에 사용됐다. 제대로 된 70만 대군이 형성된 것이다. 1~2차 율곡 사업 기간인 74년부터 85년까지 12년 간 투자된 총 율곡 사업비는 경상가로 110.5억 달러였으며 이는 1985년도 불변가로 148억 달러에 해당했다. 이후 전력 증강비는 1980년대에 연간 평균 15억 달러 그리고 1990년대에 연간 30억 달러 규모로 투자돼 왔다. 1985년까지 12년 간 투자된 전력 증강비는 1985년 불변가로 쳐서 150억 달러였다. 이는 북한 전력비의 두 배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lt;BR&gt;&lt;BR&gt;박대통령은 늘 확실한 지시를 했다. 그는 국방장관과 국방과학연구소장을 청와대에 불러 M-16소총과 81미리 박격포를 내놓고 “이들과 똑같은 것을 만들라” 고 지시했다. 소니의 초대회장 이부카는 미국에서 사온 포켓북을 책상에 내놓고 “바로 요만한 사이즈의 캠코더를 만들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확실한 목표를 주는 지도자는 흔치 않다. 그는 언제나 목표와 청사진을 가지고 국가를 이끌어 갔으며 모든 지시는 구체적으로 했다. 그러나 그의 발등에는 붉은 개미떼들이 집요하게 붙어 있었다.&amp;nbsp;&lt;BR&gt;&lt;/FONT&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FONT&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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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정희 한국의 탄생 - 스펙타클 히스토리 다큐저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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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30T07:26:07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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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 FONT-WEIGHT: bold&quot; class=txc-caption&gt;책소개&lt;/SPAN&gt;&lt;/P&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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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gt;『박정희, 한국의 탄생』의 저자 조우석은 감히 ‘한국의 탄생’은 박정희시대라고 주장한다. 그 6070...&lt;/SPAN&gt;&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UTTO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정말 오랜만에 가뭄끝에 단 비요, 마른 하늘에 핵폭발과 같은 책이 나왔다. 가뭄끝에 단 비라고 표현한 까닭은&amp;nbsp;한국사회의 최대 쟁점이었던 박대통령에 대한 오해를 말끔히 풀 수 있는 계기(완전히 풀리지는 않는 것 같다.)를 전해주기 때문이요, 마른 하늘에 핵폭발과 같다고 표현한 까닭은 동시대 반박정희 진보지식인들의 지적 편향성에 대한 가차없는 비판을 실명을 들어서까지 거론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현대사의 모든 쟁점의 한 가운데 서 있는 박정희를 저자는&amp;nbsp;다양한 분야의 여러&amp;nbsp;레퍼런스를 근거로&amp;nbsp;다소 무디지만 어쨌든&amp;nbsp;날카로운 균형감각을 가지고&amp;nbsp;해부하고자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목에 한국의 탄생이라는 문구를 적어 넣은 이유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물론 건국의 기초를 다진 이승만을 빼놓을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오늘의 근대적 대한민국을 있게 한 이가 박정희인데다가 그가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워낙 크기 때문에 박정희 없이는 현대사 자체를 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오늘의 진보와 보수 담론의 뿌리 모두 박정희 시대에 이루어진 것들이라 박정희가 빠지면 진보니 보수니 성장이니 분배니 하는 모든 현대적 담론들이 올스톱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저자는 박정희를 제대로 해부하고 종합해야만 오늘날 한국 사회의 사상적 내출혈과 역사적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수 있다고&amp;nbsp;말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편, 그 시대를 몸으로 살아본 것은 아니지만 유신체제를 지탱하던 당시 참모들인 김정렴 청와대 비서실장-김성진 문공부 장관 등의 증언(오원철씨의 그것은 아직 못 읽음), 역사학자 전인권의 &quot;박정희 평전&quot; 외 각종 저널을 익히 봐서 당시의 시대상황과 시대의 요구에 대해 좀 아는 나는&amp;nbsp;본 서적의 시각에 대해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것을 읽고 나서도 또 한번 미적지근한 의혹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본론으로 들어가서, 우선 장점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 책은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째, 박정희에 대한 저차원적 이분법을 확실히 뛰어넘고자 했다. 보수-진보, 선-악으로 박정희를 몬도가네 식으로 재단하려는 무지막지한 발상 자체가 없다. 그의 다양한 모습을 모두 포착하면서 그 모두를 끌어 안고자 하는 몸부림이 역력하다. 현실정치를 보지 않고 교과서나 탁상공론을 통해 이분법적이고 교과서적인 잣대로 박정희를 평가하기에는 선악을 떠나 그 인물의 크기가 너무나 크고 시대를 앞서갔다는 얘기이다. 또한 박정희의 과라고 평가받는 공작정치, 정보정치 등에 대해서 저자는&amp;nbsp;당시 학생과 지식인들의&amp;nbsp;무조건적인 박정희 반대가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한다. 이에 대해서는 나도 무척 공감하는 바이다.&amp;nbsp;한편, 저자는&amp;nbsp;학자적 양심으로 박정희에 동조했으나 학생-지식인들의 몬도가네식 이분법에 희생되어 스러져간&amp;nbsp;친박정희 지식인들에 대해서도 소량 지면을&amp;nbsp;할애하고 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지식인 사회의 막무가네 이분법은 명분을 가장한 또 다른 지적 폭력의 하나에 다름아니며 이미 학자적 양심을 상실했다라고 일갈한다. 민족의 안위와 발전보다는&amp;nbsp;명분만을 앞세워&amp;nbsp;주도권 싸움, 파벌싸움에나 목을&amp;nbsp;매고 있는&amp;nbsp;오늘날의 자칭 진보세력들을 볼 때 정말 공감가는 통찰이다. 이미 균형의식이라곤 찾아볼 수 없으나 오늘날 젊은이들 대다수의 문화에 녹아들어 간 소위 민중문화에 대한 칼같은 비판과 걱정도 빼놓질 않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둘째, 박정희에 대한 것만을 기술한 것이 아니라 박정희라는 인물이 가질 수 밖에 없었던 행동과 사상의 시대적, 공간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다큐 형식으로 대부분의 지면에 할애한다. 그래서 이 책에 대한 소감을 스펙타클 히스토리 다큐저널이라고 명명한 것이다. 저자에 의하면 박정희의 사상은 고향인 구미 상모리와 대구사범학교, 그리고 만주 관동군에서의 체험이 8할을 차지한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우선 태어나고 자란 상모리 시절의 찢어지는 가난은 일찌기 그에게 엄청난 수치심과 가난구제에 대한 불타는 투지를&amp;nbsp;심어 주었으며, 대구초등학교와 상모교회는 최초로 근대를 바라보는&amp;nbsp;창 역할을 해주었다. 특히 알렌의 제자가 지었다는 상모교회에서는 오늘날과 다르게 당시의 진보적 기독교 문화로 말미암아 만인평등, 인간존엄의 반봉건적 정신을 이어받는다. 대구사범 시절은 지식인으로서 친일과 반일 사이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 지를 고민하는 지리한 모색의 시기다. 사회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 등등이 섞여 소용돌이 치는 혼란 속에서 동기들의 상당수가 퇴학당하는 것을 목격하고는 일본과 관계된 것이면 무조건 반대하는 지사적 삶을 살 것이냐 아니면 일본에게서도 배울 것은 배울 것이냐를 놓고 갈등하게 되는데 학년이 올라갈 수록 떨어지는 성적표는 이런 고뇌와 갈등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이때 그는 군인의 적성이 있음을 발견한다. 대구사범 4학년때 만주수학여행에서 뻗어나가는 일본제국의 힘에 강렬한 인상을&amp;nbsp; 받게 되고 결정적으로 1년 뒤인 1936년 2월 26일에 일본 동경에서 일어난&amp;nbsp;황도파 청년장교들의 쿠데타사건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비로소 군인의 길을 걷자는 결심과, 이를 통해&amp;nbsp;사회개조와 정치개조를 하자는&amp;nbsp;꿈도 품게 된다. 그리고&amp;nbsp;학교선생으로서의 의무연한 3년이 지난 후인 1940년, 안정된 직장과 어머니의 만류도 무조건 뿌리치고 만주 관동군 사관학교에 입학한다. 이는 봉건사회와의 단절과 근대사회로의 비약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겠다. 이 때부터 박정희는 그 특유의 &quot;단절적 비약&quot;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는데, 사관학교에서는 줄곧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한다.&amp;nbsp;한편, 이 곳 관동군에서&amp;nbsp;그는 나중에 한국의 경제개발을 이끄는데 원동력이 되는 마인드의 기초를 모조리 흡수한다. 당시 만주라는 공간은 무척이나 광활하고 야성적이며&amp;nbsp;&quot;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quot;등등이 모여있는 역동적이고 위험한&amp;nbsp;공간인데도 불구하고&amp;nbsp;이 곳을 열심히 개척해나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패기에 박정희는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amp;nbsp;당시 사회에서 최고 엘리트에 속하는 일본육사출신 장교로 구성된 관동군 지도부는 이 곳에서&amp;nbsp;정치, 사회, 경제의 모든 분야를 장악하고&amp;nbsp;일본 본토의 대본영도 나몰라라 할 정도의&amp;nbsp;막강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관동군의 지도로 항만, 교통, 산업, 도시, 각종 인프라 등등 모든 것이 엄청난 효율로 계획 및 건설되고 운용되었으며 그 스케일은 무척이나 방대하고 조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amp;nbsp;곳에서 박정희는 세계로 뻗어나가는 대일본제국의 기상을 마음껏 느낄 수 있었으며 엘리트 위주의 효율적 성장정책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amp;nbsp;그 다음 성적 우수자를 위한&amp;nbsp;일본육사 위탁교육을 받게&amp;nbsp;되는데&amp;nbsp;여기서도 최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하며&amp;nbsp;제국 운영에 대해&amp;nbsp;많은&amp;nbsp;것을 배운다. 하지만 일본은 패망했고, 조선이 해방이 되고 나서 실업자가 된 박정희는 다시 육사 1기로 입학한다. 이 때 아버지 이상의 존재이자 사회주의자인&amp;nbsp;셋째 형 상희가&amp;nbsp;해방 이후의 혼란한 사회 속에서 우익 시위대의 구타를 받고 숨지는 사태가 발생한다. 장례식장에 나타난 남로당원들을 만나면서 박정희는 잠시 남로당 활동을 하게 되고 이 문제로 나중에 제주도 4.3사건, 여순반란 사태 때 숙군작업의 대상으로 지목되게 된다. 하지만, 군대 내부에서 워낙에 평판이 좋았던 관계로 그는 백선엽 장군을 포함한&amp;nbsp;군 수뇌부 대다수의 적극적 구명운동에 의해&amp;nbsp;감옥에 수감된 지 1달만에&amp;nbsp;민간인 신분으로 업무복귀하게 된다. 미국인 군사고문도 이승만에게 구명을 조언할 정도로 평판이 좋았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극적인 예가 박정희 빼고는 없다는 것이다.&amp;nbsp;그리고 당시 사회적 사상의 흐름이 사회주의는 되도 공산주의는 무조건 안된다였기 때문에 공산당이 아닌 남로당에 가입했던 박정희는 정상참작을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amp;nbsp;물론, 이 이후로 일어난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박정희는 무조건 반공의 마인드를 확실히 굳히게 된다. 곧 이어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박정희는 정보장교로 생활하며&amp;nbsp;평생의 반려자인 근대적 여성 육영수를 만난다. 대구사범시절 부모에 의해 조혼한 전처를 뿌리치고 재혼한 경력에 대해서도 세간에 말들이 많은데 이 책의 저자는 마오쩌둥의 예를 들면서 이를 당시 사회에 팽배했던 전근대적 봉건성을 무조건 벗어나고자 하는&amp;nbsp;그 시대의 젊은이들의 트렌드로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 시대적 배경을 읽지 못하고서는 박정희의 진면목을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전처에게는 평생의 한이 되어버린 박정희는 어쨌든 그 특유의 &quot;단절적 비약&quot;을 결혼문제에서도 발휘할 정도로 상모리로 대표되는 봉건사회를 탈출하고자하는 처절한&amp;nbsp;몸부림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러는 한편, 1952년에 일어난 부산정치파동 때부터 박정희는 슬슬 5.16혁명을 예행연습하는데 그 유명하다는 &quot;육군장병에게 고함&quot;이라는 문서의 초안을 사령관&amp;nbsp;대신 대필하여 이승만의 군대투입에 정면으로 저항한다. 전쟁이 끝나고서는 혁명의 필요성을 공공연히 알리고 다닐 정도로 대담성을 보여주었으며 4.19 때는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 계엄군에게 탄약을 공급하라는 이승만의 지시를 정면으로 거부한다. 4.19가 성공으로 끝나고 장면정부가 들어섰으나 무능과 부패로 얼룩지면서 다시 한번 박정희는 혁명의 당위성을 공공연히 군수뇌부들에게 알리고 다니는 한편 4.19때 계엄군을 투입한 대가로 당시 육군참모총장에게 자퇴를 권유하고 이를 장교서명운동으로 발전시켜 마침내 총장을 퇴진시키는 대담성을 발휘한다. 이처럼 군 내부에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다닌 대가로 4.19가 일어난 지 일년 만에 발생한 5.16은 3,500명의 소수 병력으로 작업했음에도 불구하고 무혈혁명으로&amp;nbsp;성공했고 국민들의 전폭적인 공감을 바탕으로 강력한 국가재건최고위를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준비의 부족으로 경제운용에 있어서는 초보적인 모습을 보여 일시적으로 경제가 마비되는 현상까지 빚게 되고 무언가 성과를 보여야하는 박정희는 점점 초조해진다. 1963년 윤보선과의 대권경쟁에서도 간만의 표차이로 집권한 박정희는 1964년 본격적으로 경제개발에 드라이브를 걸기 시작하는데 경제개발에 필요한 돈을 빌려주겠다 하는 곳이 너무 없어서 울며 겨자먹기로 일본에게 청구권을 협상하게 되고 이 때 지식인-학생과 대대적으로 부딫히게 된다. 저자가 보기에는 당시의&amp;nbsp;지식인-학생들이 박정희에게 너무나 막나가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이제 막 대통령이 된 사람의 정당성을 인정해주지 않고 일본과 손잡았다는 이유만으로 무조건 비난으로 일관하니 정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이후 박정희가 공작정치, 정보정치에 손을 대게 된 결정적 원인의 대부분을 저자는 지식인-학생 그룹의 무조건적 반정부시위에 근거하며 당시 김지하 시인등이 반정부 구호로 내세웠던 글구들을 근거자료로 제시한다. 이어서 월남전 파병을 계기로 경제발전의 토대를 더욱 단단히 다지게 되는데 이 때 박정희는 명분은 없는 전쟁이니만큼 실리를 단단히 챙기자는 지시를 내리고 엄청난 달러를 확보하였다. 이렇게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경제가 눈에 띄게 성공해 나아갔으나, 국민들은 어느 정도 먹고 살만해 지면서 박정희식 통치에 피로를 느끼게 되었다. 하지만, 68년 김신조 일당 남침사건, 땅굴 사건, 푸에블로호 납치사건, 70년&amp;nbsp;EC-121기 격추사건 등등을 계기로 한반도엔 다시 전쟁의 기운이 감돌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닉슨이 1971년 미 제 7사단을 한국에서 강제철군시키면서 박정희의 안보불안은 극에 달해간다. 이대로라면 자주국방 없이는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기 힘든 상황이 들이닥치는데 미국이 준 시간은 달랑 5년 정도밖에 안된다.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30억달러가 필요한데 미국이 제공한 금액은 15억 달러가 전부다. 그러면 마지막 방법은? 중화학공업을 일으켜 자주국방과 경제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한 꺼번에 잡는 대 모험을 감행해야만&amp;nbsp;한다. 물론 외환위기의 가능성도 크다. 60년대에 이미 외환위기를 몇차례 겪었기 때문에 이 모험의 실패확률은 무척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보다 아직은 높은 북한의 GNP와 숙청작업이 모두 끝난 김일성의 선군정치체제를 고려할 때 어떻게든 중화학공업을 통해서 이 모든 위기를 단시간에 극복해야 한다. 하지만, 중화학공업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정치적 불안정이 엄청날 것인데 이를 어떻게든 막아줘야 한다고 당시 경제 2수석 비서였던 오원철이 주장했고 박정희는 이를 적극 받아들여 유신이라는 또 하나의 모험을 감행한다. 이런 과정들을&amp;nbsp;통해 1972년 선언된 중화학공업화는 성공적으로 정착이 되어 오일쇼크등의 엄청난 위기들 속에서 강력한 경제성장을 달성하는 한편 군수물자의 국산화와 미사일 및 핵개발이라는 쾌거까지 이루게 된다. 그런데, 이 유신기간동안 박정희가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한다. 김대중 납치사건인데 당시 중정부장이던 이후락의 과잉충성으로 발생하였으나 이유를 불문하고 일본과의 외교마찰로 비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1974년 불만을 품은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사건이 터진다. 청와대 내의 정보기관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던 육영수가 죽음으로써 박정희는 더욱 고독해지고 유신정권은 이 때부터 폭력적으로 변해간다. 한편, 박정희는 육영수의 빈자리를 비선공작정치로 채우는데, 이 공작정치를 통한 충성경쟁 유도의 부작용으로 김재규와 차지철이 대립하게 되고 박정희 역시 그 영향으로 10.26을 만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셋째, 박정희와 비슷한 유형의 리더쉽을 보여준 싱가폴의 리콴유, 중국의 덩샤오핑,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 터키의 케말파샤,&amp;nbsp;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amp;nbsp;등의 예를 상세하게 들면서 박정희의 정치스타일이 그렇게 이상하거나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었음을 역설하고 있으며, 오히려 그 시대의 필요악이었음을 역설하면서 이제 박정희와 화해할 때가 왔음을 주장하고 있다. 대만의 장개석은 왜 빠졌을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넷째, 각종 경제지표와 수치들을 예로 제시하며 6070세대의 실질적 성과를 논하였고, 마찬가지로 진보학계에서 한때 반박정희를 강하게 외치던 영향력 있는 학자나 정치인, 언론인들의 전향을 예로 들며 박정희 재평가에 대한 구체적 논거를 전개하고 있다. 또한 반박정희 논리의 기반이 되었던 종속이론이나 민족경제론 등의 허구성에 대해서도 여러 논거를 들어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특히 유신 당시에 언론탄압이 심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당시 언론계의 대부의 입을 빌어 당시 언론시장이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세에 있었음을 얘기하면서 언론통제가 일부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탄압까지는 아니었음을 강변하고 있다. 전두환의 언론통폐합, 기업통폐합과 정말 대비되는 대목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섯째, 그냥 지나치기 쉬운 호남에 대한 지역차별, 시바스 리갈로 대표되는 박정희의 위선적 모습, 경제개발과정에서 농민과 노동자의 착취 문제 등 첨예한 이슈들 부터 시시콜콜한 것까지 &amp;nbsp;여지없이 메스를 들고 있다. 아무래도 책의 페이지 수가 수이니 만큼 현대사의 모든 부분을 커버하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섯째, 부수적인 것이지만 책이 무척 잘 읽힌다. 기자출신 다운 언어구사력이 돋보인다. 자칫 민감할 수 있는 문제거리들을 섬세하고 완곡하게 풀어놓고 있다. 책의 완성도를 떠나 문장 자체는 잘 읽힌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일곱째, 책 자체가 독후감 제목 그대로 한 편의 대하사극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이다. 어느 블록버스터 스펙터클 영화 못지않게 재미있는 구조다. 때로는 소설, 때로는 다큐멘터리, 때로는 리포트의 경계를 마구 넘나들면서 이야기의 모자이크를 조금씩 채워나가고 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지만, 단점도 없진 않은데 글쎄..... 저자가 일부러 의도한 건지 아닌지 모를 정도다. 그 많은 레퍼런스를 제시하면서 왜 어떤 부분들은 이렇게 엉성했을까 싶은데 이건 본인이 개인적으로 보고 들은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째, 뭐니뭐니해도 유신을 중화학공업화라는 빅 푸쉬를 위한 필요악이자 부국강병을 위한 민주주의의 한시적 유보라고만 평가하고 그 이면의 이야기들을 자세히 풀어놓지는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는 안나오지만 김정렴에 따르면 사실 유신은 박정희가 혁명을 하며 주창했던 민족적 민주주의의 구현으로서 프랑스 대통령제 비슷한&amp;nbsp;간선제 대통령제로 대통령에게 엄청난 권한을 실어줌과 동시에 간선제를&amp;nbsp;통해 정치비용의 엄청난 절감과&amp;nbsp;정치과정의 강력한 효율화를 실현하겠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amp;nbsp;그 절약된 정치비용을 다시 경제발전에 모조리 재투자하고&amp;nbsp;역시 그 투자로 벌어들인 자금은 다시 경제개발에 쓰이는 무척이나 효율적인 구조로 작동하는 체제로 엄연히 민주주의의 일종인데, 이에 대해 역사적 실례라든가 다른 나라의 사례 등에 대한 풍부한 설명이 빠져있는 것이 안타깝다. 엄연히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도 거친 4공화국이라고까지 언급해놓고도 이에 대한 부연 설명 하나 없이 독재였다고만 말하는 것이 아쉽다. 5.16 혁명의 정당성에 동조했던 장준하가 유신을 적극 반대하게 된 계기에 대해서도 별다른 설명이 없다. 위기의 연속이었던 시대에 박정희가 긴급조치를 구사하면서 유신이 강압적으로 변하긴 했지만&amp;nbsp;이러한 강압행위에도&amp;nbsp;최소한의 법적, 정치적 정당성을 만들려는 노력을 했었으며, 역시&amp;nbsp;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애를 쓴 점에 대해서도 아무 말이 없다. 한편, 박정희는 국무회의같은 국정운영에 있어서도 상당히 민주적이었다고 하는데 이에 대해서도 역시 언급이 없다.&amp;nbsp;그저 박정희란 사람은 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았던 구시대적 인물이라는 식으로 어물쩍 넘어가는데, 이에 대해선 김정렴의 저작들을 참고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물론 김정렴의 증언이 믿을만 하다는 전제 하에서 말이다. 다행히 최근 10.26 30주년을 기념하여 김정렴 인터뷰가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둘째, 박정희의 정보정치, 공작정치의 필연성에 대해 얘기한 것까지는 좋은데 박정희가 그 모든 국가폭력에 대해 어디까지 개입했는지, 어디까지가 부하들 책임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긋지 못한 채 박정희 통치 당시의 국가폭력이 모두 박정희의 책임은 아니라고만 말하고 있다. 이 역시 김정렴과 김성진의 회고록 및 여러 사람의 증언을 참조하시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무래도 책의 초점이 박정희와의 화해를 지향하는 만큼 소상히 다루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셋째, 저자가 말한 것들 말고도 박정희가 대한민국을 위해 해놓은 일들이 무척 많다. 대역사인 새마을운동에 대해서도&amp;nbsp;역시 세세한 언급이 없는데 이런 것들에 대해서도 그 스펙터클함을 만끽하려면 역시 김성진, 오원철, 김정렴 등의 증언을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그럼 이 책을 읽고 나서 개인적 소감은? 한마디로 책을 읽는 내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오로지 조국의 근대화와 부국강병이라는 유토피아만을 바라보며 무한돌진하는 박정희의 꿈과 사랑과 야망과 좌절, 애국심때문에&amp;nbsp;손에 원치 않는 피를 묻힐 수 밖에 없었으면서도 독재자, 권력욕에 눈이 먼 자로 오해받고 지탄받을&amp;nbsp;수 밖에 없었던 기막힌 사연&amp;nbsp;등등이 바로 우리 부모와 할아버지 세대의 역사라고 생각하니 오늘날의 이명박 정권 치하의 비참한 조국의 현실과 대비되면서 슬프기가 이루 말할 수&amp;nbsp;없었다. 질곡과 가난, 그리고 모순으로 점철된 현대사를 정면으로 돌파하려 했던 박정희, 비록 과도 크겠지만 그 공과 애국심만큼은 오늘날 그야말로 정당하게 대접받아 마땅할 것이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마지막으로 박정희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는 저자의 취지에&amp;nbsp;동참하고자 본인도 최근에 공부한 사주명리로 재미삼아 박정희의 성격 및 인생 행로를 분석해보고자 한다. 사주명리학계에선 최신 기법인 지장간 주권신 분석기법을 적용하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박정희는 사주의 구성상 일단 양기가 강해 적극적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걷보기에 내성적이고 차가워보이는 이유는 금체질이기 때문인데&amp;nbsp;정확히는 양의 성질을 띈 금체질이다. 음양오행에서 양금은 원광석이나 무쇠 도끼에 비유될 수 있겠다. 무척이나 크고 투박한 금속이다. 양금의 성질을 지닌 사람은 순도 100%의 혁명가 기질을 타고난다. 의협심이 강하고 불의와 타협을 모르며 맺고 끝음이 확실하고 절도있지만&amp;nbsp;그만큼 순박한 면도 있고 의리때문에 곤경에 처하기도 쉽다. 하지만 이런 성질이 지나치면 잔인해지기 쉽다. 특히 자기와 뜻이 안맞는 사람에 대해서는 절대로 타협을 안하고 잔인해지기 쉬워진다. 그래서 끝내 김재규에게 살해당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군인하기에는 최고 좋은 체질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금을 도와주는 토 성분이 많다. 전문용어로 편인이라고 하는데, 학문, 예술, 권위, 외국 등과 인연이 많다. 그래서인지 박정희는 위 책에도 언급되다시피, 서예, 수채화, 피아노, 서정시 등등에 일가견이 있었다고 한다. 학문에도 인연이 있어 교사생활을 했고 권위와 연관이 있어 군인을 했으며 외국과 연관이 있어 만주, 일본, 미국 등지를 오간 것이다. 또한 편인은 다재다능과 천재적 능력을 뜻한다. 눈치가 빨라지고 머리회전이 비상해진다. 하지만, 이게 많으면 마마보이가 되거나 나르시스트가 되기 십상인데 박정희는 그런 함정에 빠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리고 편인은 나에게 도움을 주는 성분이기 때문에 정치인으로선 좋은 조건인데 그래서인지 5.16혁명도 많은 사람들의 지원 속에 무혈혁명으로 끝을 맺었다. 또한 토는 음양오행에서 신뢰를 뜻하는데 그래서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것이다. 국민들에게 자신의 정책을 설명하면서 늘 구체적 수치를 제시했고 공무원들에게도 항상 무엇인가를 설명할 때 구체적이고 확실한 수치를 제시토록 요구했다고 한다. 이 역시 많을 수록 군인하기에는 좋은 체질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화 성분이 하나 있는데 이것은 토를 도와주는 것으로 여기서는 관직을 뜻한다. 그래서 군인, 대통령 등의 관직에 인연이 있는 것이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역마살이 있어 대통령 재직시에 전국을 쏘다닐 정도로 액티브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까 얘기한 화 성분이 가득한 병오 대운에 혁명에 성공했다.하지만 이런 사주는 음양오행이 주류하지 못하고 심하게 한 쪽으로 편중되어 있는 관계로 대운이 바뀌면 가차없이 추락하게 되는데 경제불황과 오일쇼크, 부마사태 등등의 영향도 있겠지만 79년이 바로 이 대운이 바뀌는 때였다. &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박정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박정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살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살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유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유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근대화&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근대화&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공작정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공작정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조우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조우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박정희 한국의 탄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박정희 한국의 탄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민족적 민주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민족적 민주주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중화학공업화&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중화학공업화&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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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Surrogates : 지능적 스릴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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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paparazzi</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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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30T03:20:26Z</updated>
	    <published>2009-10-30T03:20:2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lt;/P&gt;
&lt;P&gt;&lt;table class=&quot;txc-search txc-search-cinema-detail&quot; key=&quot;48639&quot; category=&quot;cinema_detail&quot; openpost=&quot;false&quot; width=&quot;500&quot; cellpadding=&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border=&quot;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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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 width=&quot;110&quot; valign=&quot;top&quot;&gt;&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48639&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width=&quot;110&quot; height=&quot;160&quot; src=&quot;http://cfile189.uf.daum.net/C110x160/143296274AA75E5F26D333&quot; border=&quot;0&quot;/&gt;&lt;/a&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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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style=&quot;line-height:1.2;overflow-y:hidden;padding:3px 0 6px 0;&quot;&gt;
&lt;span class=&quot;txc-search-title&quot; style=&quot;font-size:16px;font-weight:bold;letter-spacing:-1px;&quot;&gt;&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48639&quot; title=&quot;써로게이트&quot; target=&quot;_blank&quot;&gt;써로게이트&lt;/a&gt;&lt;/span&gt;
&lt;span class=&quot;txc-subdesc&quot; style=&quot;font-size:12px;&quot;&gt;(2009)&lt;/span&gt;
&lt;/p&gt;
&lt;p style=&quot;line-height:1;overflow-y:hidden;&quot;&gt;&lt;span class=&quot;txc-subtitle&quot; style=&quot;font-family:Tahoma; font-size:10px;&quot;&gt;Surrogates&lt;/span&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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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d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quot;&gt;&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2591&quot; target=&quot;_blank&quot;&gt;조나단 모스토우&lt;/a&gt;&lt;/span&gt;&lt;/p&gt;&lt;/td&gt;
&lt;/tr&gt;&lt;tr&gt;
 &lt;td width=&quot;37&quot;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class=&quot;txc-caption&quot; style=&quot;font-size:12px; font-weight:bold;&quot;&gt;출연&lt;/span&gt;&lt;/p&gt;&lt;/td&gt;
 &lt;td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quot;&gt;&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921&quot; target=&quot;_blank&quot;&gt;브루스 윌리스&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2770&quot; target=&quot;_blank&quot;&gt;라다 미첼&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8479&quot; target=&quot;_blank&quot;&gt;로저문드 파이크&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10827&quot; target=&quot;_blank&quot;&gt;빙 라메즈&lt;/a&gt;&lt;/span&gt;&lt;/p&gt;&lt;/td&gt;
&lt;/tr&gt;&lt;tr&gt;
 &lt;td width=&quot;37&quot;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class=&quot;txc-caption&quot; style=&quot;font-size:12px; font-weight:bold;&quot;&gt;개봉&lt;/span&gt;&lt;/p&gt;&lt;/td&gt;
 &lt;td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quot;&gt;미국&amp;nbsp;&lt;span class=&quot;txc-bar&quot;&gt;|&lt;/span&gt;&amp;nbsp;SF, 액션, 스릴러&amp;nbsp;&lt;span class=&quot;txc-bar&quot;&gt;|&lt;/span&gt;&amp;nbsp;2009.10.01 &lt;span class=&quot;txc-bar&quot;&gt; | &lt;/span&gt;  15세이상관람가 &lt;span class=&quot;txc-bar&quot;&gt; | &lt;/span&gt;  88분&lt;/span&gt;&lt;/p&gt;&lt;/td&gt;
&lt;/tr&gt;
&lt;/table&gt;
&lt;/td&gt;&lt;/tr&gt;&lt;/tbody&gt;
&lt;/tabl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올 추석 특선으로 같이 개봉된 &quot;게이머&quot;와 이 작품을 놓고 갈등이 되었다.&amp;nbsp;그래서 두 작품을 모두 다 볼까 하다가 안심이 안되어&amp;nbsp;미디어 리뷰까지 훑어보았는데, 결국 본 작품의 작품성이 우월하다고 판단했다.&amp;nbsp;물론 형사물로 잔뼈가 굵은 브루스 윌리스의 네임벨류와 감독의 경력도 그러한 판단에 한 몫 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스토리 구조가 '아이 로봇'과 유사한 것도&amp;nbsp;좋았는데, '아이 로봇'은 내게 Sci-Fi drama도 얼마든지 명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보여준 최초의 작품이었다. 리뷰만 봤을 때 아마 이 작품도 그렇지 않을까 하는 희미한 기대가 생겼다. 재미있는 것은 '아이 로봇'에서 안드로이드 로봇을 만든 박사와 본 작품에서 써로게이트 로봇을 만든 박사가 동일 배우란 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추석 연휴치고 극장에 사람은 별로 없었다. 덕분에 제일 뒷쪽 로얄석을 차지할 수 있었다.&amp;nbsp;그 후에 표를 끊은 관객들이 내 앞뒤좌우에 자리를 차지했다. 좋은 건 알아가지고...... 휴~~ 쪼금만 더 늦었으면 어떻게 됐을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화에 대한 일반인들의 리뷰들을 보면&amp;nbsp;이런 저런 논란들이 많지만, 어디까지나&amp;nbsp;이 영화는 criminal thriller의 성격이 뚜렷하기에 액션이 적다느니 멜로가 부족하니 이런 부분적이고 말초적인 잣대로 영화의 진정성을 평가하기는 힘들다. 물론 작품성때문에 고른 작품이기에 스토리 구성은 탄탄해야 했는데 그건 만족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요한 건...... 영화가 주는 메시지다. '아이 로봇'이 주는 것과 같은 그런 철학적 메시지만큼은 못하지만 이 영화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교통사고로&amp;nbsp;아들을 잃은 슬픔을 약으로 억누르고 써로게이트를 앞세워 대리인생을 살아가는 메기와 이를 안타깝게 지켜보는 남편 그리어(브루스), 마찬가지로 억울하게 아들을 잃고 써로게이트를 앞세워 살아가는 켄터박사. 스스로부터조차&amp;nbsp;소외된 현대 인간군상이 미래로 투영된 모습들이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이 남긴 상처가 너무 크기 때문에 다시 사랑하기 두려운 사람들..... 그들은 스스로의 인생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써로게이트를 내세운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amp;nbsp;메기는 속으로 점점 더 병들어가고 켄터박사 역시 정신적으로 곪아들어가 급기야 전 인류를 죽음으로 몰아넣기에&amp;nbsp;이르는데 ...... 이렇게 써로게이트가 몰고 온 사회적&amp;nbsp;병리현상들 앞에서 그리어는 영화 막바지에 갈등한다. 그리고 전 지구상의 모든 써로게이트를 영원히 정지시켜 버리는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써로게이트로 인해 엄청난 경제적 발전과 문명의 이기를 누리는 사회에서 그리어는 갈등한다. 대체 인간과 인간이 가슴으로 만나는 사회는 어디로 가버렸냐고...... 글쎄? 정말 써로게이트때문에 인간과 인간이 서로 멀어지고 소외될까? 상처받기 싫어 써로게이트를 내세우는 사회가 무조건 잘못된 사회일까? 바로 이 부분에 본 작품에 대한 나의 모든 문제의식이 녹아있을 것이다. 물론 모든 인간이 하나의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바람에 생기는 엄청난 환경취약성은 경고받아야 마땅한 사안이다. 그러나, 이메일과 휴대폰이 발달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가&amp;nbsp;더욱 멀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그리고, 기계문명, 소비사회가 주는 편리함이 그처럼 쉽게 부정될 수 있을까? 그리어 요원의 행동의 휴머니즘적 특성을 떠나 미래사회를 지탱하는&amp;nbsp;서로게이트를 모두 파괴시켰을 때의 정치경제적 파장은 또 얼마나 클 것인가? 그것은 마치 9.11 같은 테러로 뉴욕 증시가 모두&amp;nbsp;사라지는 것과 같은 파괴력을 지닐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어는 써로게이트의 파괴를 선택하는데...... 써로게이트 뒤로 도피하여 사는 인간군상들의 어두운 모습들을 너무 많이 봐서일까? 혹자들은 이를 서로게이트 중독증이라고 표현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너무 복잡하게 생각하면 복잡하겠고, 그냥 아 저럴 수도 있구나 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본다면 또 가벼울 수도 있겠으나 그래도 결말이 너무나 전지구적인 스케일의 사회적 함의를 담고 있기에 이렇게 길게 리뷰를 끄적여본다. 어쩄든, 본 영화는 올해 최고의 휴먼 싸이파이 드라마로 손색이&amp;nbsp;없을 것같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써로게이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써로게이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써로게이트 중독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써로게이트 중독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criminal thriller&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criminal thriller&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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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포도밭 그 사나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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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9-14T02:17:18Z</updated>
	    <published>2009-09-14T02:17:1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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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amp;nbsp;&lt;/P&gt;
&lt;P&gt;&lt;table class=&quot;txc-search txc-search-tv-detail&quot; key=&quot;48027&quot; category=&quot;tv_detail&quot; openpost=&quot;false&quot; width=&quot;500&quot; cellpadding=&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border=&quot;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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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span class=&quot;txc-search-title&quot; style=&quot;font-size:16px;font-weight:bold;letter-spacing:-1px;&quot;&gt;&lt;a href=&quot;http://movie.daum.net/tv/detail/main.do?tvProgramId=48027&quot; title=&quot;포도밭 그 사나이&quot; target=&quot;_blank&quot;&gt;포도밭 그 사나이&lt;/a&gt;&lt;/span&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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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d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quot;&gt;KBS2 &lt;span class=&quot;txc-bar&quot;&gt; | &lt;/span&gt; 월,화, 21시 55분 &lt;span class=&quot;txc-bar&quot;&gt; | &lt;/span&gt; --------------------------------------------------------------------------------------------------------------&lt;/span&gt;&lt;/p&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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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d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quot;&gt;&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95613&quot; target=&quot;_blank&quot;&gt;윤은혜&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tv/detail/castcrew.do?tvProgramId=48027#cast28068&quot;&gt;이지현&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13401&quot; target=&quot;_blank&quot;&gt;오만석&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tv/detail/castcrew.do?tvProgramId=48027#cast28069&quot;&gt;장택기&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94778&quot; target=&quot;_blank&quot;&gt;김지석&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tv/detail/castcrew.do?tvProgramId=48027#cast28070&quot;&gt;김경민&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80563&quot; target=&quot;_blank&quot;&gt;정소영&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tv/detail/castcrew.do?tvProgramId=48027#cast28071&quot;&gt;강수진&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88964&quot; target=&quot;_blank&quot;&gt;강은비&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tv/detail/castcrew.do?tvProgramId=48027#cast28072&quot;&gt;박홍이&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person/Summary.do?personId=6849&quot; target=&quot;_blank&quot;&gt;김창완&lt;/a&gt; (&lt;a href=&quot;http://movie.daum.net/tv/detail/castcrew.do?tvProgramId=48027#cast28073&quot;&gt;이형만&lt;/a&gt;)&lt;/span&gt;&lt;/p&gt;&lt;/td&gt;
&lt;/tr&gt;&lt;tr&gt;
 &lt;td width=&quot;70&quot;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class=&quot;txc-caption&quot; style=&quot;font-size:12px; font-weight:bold;&quot;&gt;소개&lt;/span&gt;&lt;/p&gt;&lt;/td&gt;
 &lt;td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quot;&gt;도시처자 농촌 극복 프로젝트
&quot; 도시 밀림 숲 VS 시골 아마존(?) &quot;



농촌 로맨틱 버라이어티 코믹...&lt;/span&gt;&lt;/p&gt;&lt;/td&gt;
&lt;/tr&gt;
&lt;/table&gt;
&lt;/td&gt;&lt;/tr&gt;&lt;/tbody&gt;
&lt;/tabl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윤은혜라는 탤런트에 주목하게 된 계기는 며칠 전 심심풀이로 우연히 보게 된 &quot;아가씨를 부탁해&quot;(수목드라마, KBS2, 2009)가 처음이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발리에서 생긴 일(드라마, SBS, 2004)&quot; 이후로 장르에 관계 없이 제대로 관심가져 본 드라마란&amp;nbsp;것이 &quot;내조의 여왕(MBC, 2009)&quot;, &quot;Burn Notice(USATODAY, 2007 ~ 2009)&quot;, &quot;Royal Pains(USATODAY, 2009)&quot;, &quot;The Mentalist(CBS, 2008)&quot;&amp;nbsp;정도의&amp;nbsp;30대 이상이나 볼 법한 중량감있는 화제작들이 전부였다.&amp;nbsp;그렇지만,&amp;nbsp;윤은혜 하면 그 앳된 이미지때문에 그런지&amp;nbsp;아이돌 스타 출신으로 외모만 괜찮고 연기력은 없을 거란 선입견이 있어서&amp;nbsp;거들떠도 안보았었는데, 이 드라마에서 윤은혜가 연기하는 강혜나의 대사들을 보며 나름 내공이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래서&amp;nbsp;나의 파파라치 근성에 발동을 걸었다.&amp;nbsp;&quot;영화보단 드라마가 별 볼것이 없다.&quot;는 개인적 선입견도 깨보고 싶었기 때문이리라.&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녀의 전작 드라마 중 가장 인기만점은 역시 &quot;커피프린스 1호점(드라마, MBC, 2007)&quot;였는데, 당시에는 무척 유명한건 알았어도 그저&amp;nbsp;그렇고 그런 철없는 트랜디드라마 정도로 생각하고 거들떠도 안보았고 오히려 혀를 끌끌 차며 '된장녀들의 대리충족을 위한 멜로' 정도로 치부했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나, '선입견은 늘 깨지기 마련'이기에 작심하고&amp;nbsp;&amp;nbsp;&quot;커프&quot;를 우선 IPTV로 시청해 보았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결과는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quot;아부해&quot;가 시작 초반이라 윤은혜의 진면목을 알 수 없었기에 충격은 더했다. 비록 팬시한 환타지의 성격이 가미되긴&amp;nbsp;했지만 그&amp;nbsp;작품이 내포하는 인간적 진실이라든가&amp;nbsp;섬세하기 그지없는&amp;nbsp;남녀간의 심리묘사 등등은&amp;nbsp;상당히 중독성이 강했으며 마음속으로 &quot;역시 커프~~!&quot;를 외치기에 충분했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때부터는 배우&amp;nbsp;윤은혜에&amp;nbsp;본격적으로 주목하기 시작했다.&amp;nbsp;왜냐하면, 개인적 경험으로 보았을 때, 아무리 연기력이 좋아도 작품선정을 잘못하여 사장되는 배우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윤은혜의 연기를 보신 분들은 다 알겠지만,&amp;nbsp;배우로서의 특별한 격은 느껴지지는 않다.&amp;nbsp;또한&amp;nbsp;실제로 그녀의 연기에는 이런저런 수 많은 논란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스티그마타가 덮어지는 이유란 무엇인가? 물론 그녀의 연기에 엄연히&amp;nbsp;장점은 있다. 다듬어지지 않은 자연스러움, 강렬한 감정몰입력, 자신만의 캐릭터로 등장인물을 소화해 내는 능력&amp;nbsp;등은 그러한 결점을 덮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은혜가 탤런트로 궁극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최고의 이유는 역시&amp;nbsp;'작품선정하는 능력'이라고 생각했다.&amp;nbsp;그래서, 포그사까지 하향추적을&amp;nbsp;하게 되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드라마 초반에는 시나리오 구성과&amp;nbsp;캐릭터 자체의&amp;nbsp;미숙함,&amp;nbsp;VOD의 저화질, 촬영조명의 부족 등으로 주인공 이지현을 따라가는 것이 참 힘들다. 물론 윤은혜의 자연스러운 연기는 빛을 발한다. 그저 캐릭터의 성격 상 이지현이&amp;nbsp;여러가지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주장을 똑똑하게 펼치지 못하고 징징대기만 한다는 것이&amp;nbsp;드라마의 초반부를 무척 지리하게 만든다. 순진하고 철없지만 야심에 찬&amp;nbsp;처녀를&amp;nbsp;코믹하게 표현한다는 의도에서 본다면 사실감이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한 스토리라도 타이트하게&amp;nbsp;이끌어가는 능력의 부족함은 시나리오 작가가 그 책임을 져야 한다. 이런 판단은 드라마가 6-7회를 거듭하면서 증명된다. 별 생각도 없이 어려운 상황에서 짜증내기에 급급하던 이지현은 점점 성숙해진다.&amp;nbsp;물론 시나리오 구성은 여전히 지리하지만 이지현은 자신만의 페이스를 찾아간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줄거리는 결혼적령기에 처한 26살 이지현이 억대 연봉의 디자이너가 될 꿈을 꾸며 일하다가 거금 350만원을 투자해 디자인한 옷을 직장상사의 하수인들에게 도둑질 당하면서 시작된다. 지하철 역 화장실에서 옷을 빼앗긴 이지현은 화장실로 소변보러 들어온 장택기의 전화통화를 듣고 경찰로 착각하고 옷을 달라고 매달리지만 이를 본 경찰들은 험악한 인상의 장택기를 강간현행범으로 몰아넣으려 하고 경찰의 질문에 어리버리하게 답변하는 이지현을 보면서 장택기는 이지현을 양심에 털난 사람으로 오해하게 된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배달할 포도가 모두 상해버리고 거래처가 거래를 끊어버리자 장택기는 450만원의 손해청구를 이지현에게 하게 되는데...... 이 때 포도농장을 하는 먼 친척 할아버지 이병달(이순재)로부터 이지현은 1년간 포도원에서 농삿일을 하면 10000평의 땅을 물려주겠다는 제안을 받는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땅 주변이 개발계획에 포함된 관계로 이지현과 온 식구들은 그 땅을 통해 벌 돈 20억에 주목하게 되고 이지현은 디자이너의 꿈을 1년만 접기로 하고 이병달에게로 내려간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내려가서도 디자이너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고된 시골생활에 염증을 느끼며 1주일도 안되어 서울로 도망가려던 이지현은 서울서 대학다닐 때 동아리에서 알게된 성형외과 의사 김경민을 기차역에서 우연히&amp;nbsp;마주치는데 경민이&amp;nbsp;포도농장 근처 보건지소에서 공중보건의로 일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미래의 사모님을 꿈꾸며 다시 포도원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막상 김경민이 이지현에게 빠르게 접근하자 이지현은 부담을 느끼게 되고, 포도와 장택기와의 사랑이 자라나면서 이러한 부담은 더 커지게 되는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3회까지는&amp;nbsp;일상적인 포도원의 대소사들과 이지현이 물려받을 포도밭을 개발건축회사에 팔아넘기려는 마을주민들의 음모, 그리고 장택기(오만석)-이지현-강수진(정소영)의 삼각관계, 김경민(김지석)-이지현-장택기의 삼각관계, 할아버지 이병달(이순재)-송여사(선우용녀)-이병달의 친구 박영감(윤문식)의 삼각관계 등등이 주를 이루다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4회쯤 부터 9년 전 아들과 사별한 이병달의&amp;nbsp;며느리 서영란(방은희)가&amp;nbsp;갑자기 가짜 손주를 데리고 들어와 포도밭을 차지하려 하면서 다시 한 번 이야기는 지루해진다. 최종회인 16회까지 2회 정도 남은 상황에서&amp;nbsp;크게 지루할 리는 없겠지만, 이는 작품의 구성도 구성이거니와&amp;nbsp;이병달이란 캐릭터의 인격의 답답함에 책임이 크다 하겠다. 하지만 방은희의 구미호같은 꽃뱀 연기는 정말 일품이다. 보는 내내 혈압이 올랐다. 이 서영란 문제를 속시원하게 해결못하는 이병달의 모습이 답답할 뿐이다. 한편,&amp;nbsp;서영란의 상속방해공작을 통해 고난에 처한 이지현-장택기는 오히려&amp;nbsp;서로 사랑을 더욱 굳히게 된다. 그리고 이지현은 인생의 더 큰 가치를 찾아 커리어우먼이 되기 위해서, 장택기는 마음에 담아두기에도 괴로운 이지현을 잊어버리기 위해 포도원을 떠날 결심을 하게 되는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영란을 계기로 마음을 접기 시작한 장택기는 포도밭을 떠날 채비를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이지현을 잊지 못한다. 포도밭에서 이지현과의 추억을 묻고 가려는 작택기에게 이지현에게 거절당한 김경민이 복수의 주먹을 날리면서 장택기는 소심함을 털어버리고 서울행 기차에 몸담은 이지현을 트럭을 타고 쫓아가서 사랑을 고백한다. 한편 서영란의 음모가 발각되면서 포도밭은 다시 이지현에게 상속되게 되는데.....&amp;nbsp;오로지 포도밭을 팔아 제테크를 할 생각에 몰두해 있던 이지현의 엄마는 딸이 의사와의 결혼을 포기하고 장택기와 결혼한다는 소식을 이병달로부터 듣고 그 날로 포도밭으로 내려오고 여기서 이병달의 본심이 드러난다. 즉, 고아일 때부터 친아들 처럼 데리고 있었던 장택기를 장가보냄과 동시에&amp;nbsp;자식같은 포도밭을 물려줄 핏줄을 찾다가 이지현이 선택되었고 이를 위해 이병달의 상속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었다. 결국 엄마도 딸과 할아버지의 본심에&amp;nbsp;굴복하게 되고 딸의 행복을 빌게 된다. 그럼으로써 서로의 사랑만 존재하던 이지현-장택기 커플은 경제적으로나 심정적으로 결혼에 연착륙할 수 있었고&amp;nbsp;결혼 10년 후를 그리며&amp;nbsp;마지막 16회가 끝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또 하나 중요한 결말은 개발계획으로 삶의 터전을 잃을 뻔한 마을 농민들이 이-장 커플의 결합 및 유산상속을 계기로 더욱 단합하게 되고 또 개중에 못다 이룬 사랑을 이뤄간다는 것이다. 강수진과 김경민 또한 어설프긴 하지만 이- 장의 결혼식을 계기로 인연을 키우게 된다. 이-장의 진실한 결합이 여러모로 해피 엔딩을 불러온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부가적으로 사운드트랙만은 무척 정감있고 귀여워 윤은혜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었다고 생각된다. 오만석의 노래들도 90년대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고 뮤지컬 배우 출신이라 그런지 노래실력이 무척 뛰어나다. 잘 눈에 띄지는 않지만 이지현의 핸드폰 벨소리도 무척 정겨움에 틀림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작품을 통해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amp;nbsp;점은 장택기라는 건실한 농촌총각을 통해 배운 농부의 심성이 이지현의 물질만능주의 가치관을 움직였다는 점인데 이 부분이 좀 더 밀도있고 섬세하게 표현되지 못한 것이 아쉽다.&amp;nbsp;남자 하나만을 바라보며 인생을 거는 신데렐라나 춘향과는 정 반대의 심성을 갖게 된 이지현은 자신의 주장을&amp;nbsp;조용하지만 떳떳하게 내세우게 되는데, 이는&amp;nbsp;이지현이&amp;nbsp;무엇으로 보나 잘나가는&amp;nbsp;성형외과 의사 김경민의 프로포즈를 거절하고 그 앞에서 장택기에 대한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또&amp;nbsp;상속을 포기하고 할아버지를 떠나며 &quot;인내를 통한 성공의 가치를 알았다. 내 힘으로 뭔가를 이뤄보고 싶다. 남자에게 받기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포도농사는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할아버지에게 감사한다. 이 포도밭은 손주에게 모두 물려주라.&quot;고 하는 이지현의 대사에서&amp;nbsp;크라이막스에 달한다. 이런 주제의식은 커피프린스 1호점에서도 비슷하게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윤은혜의 작품선정 과정에서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윤은혜의 세대를 고려하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만 커프와 포도밭이 다른 점은 커프가&amp;nbsp;훨씬 더 섬세하게 심리의 변화를 다뤘다는 점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처럼 탤런트 윤은혜는&amp;nbsp;받는 사랑이 아닌 주는 사랑, 농촌과 농사의 가치,&amp;nbsp;노력과 노동을 통한 성장과 독립의&amp;nbsp;가치&amp;nbsp;등 진지하고 자칫 썰렁할 수 있는 주제들을 그녀만의 캐릭터로 가볍게 터치함과 동시에 본인 말대로 여운이 무척 길게 남는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커프 역시 그 여운이 무척 긴 스토리로서 앳되고&amp;nbsp;귀여운 여동생같기만 한 윤은혜의 외모와 무척 대비된다. 이러한 결과는 이미 언급했다시피 윤은혜의 작품선정능력이 결정적&amp;nbsp;역할을 했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는 윤은혜와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녀는 자기가 잘 할 것같은 작품, 어울리는 옷같은 작품만을 신중히 고른다고 한다. 신참 탤런트라면 주어지는 역할이라면 뭐든지 맡게 마련인데 윤은혜는 이런 함정을 적당히 피하면서도 대중성과 작품성 둘 다를 놓치지 않는 대배우같은 노련함을 보여준다. 이제 &quot;아부해&quot;도 서서히 8회를 넘겼다. 비록 &quot;꽃보다 남자(KBS, 2009)&quot;의 아류작이라는 비판을 받긴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런 비난들에 크게 개의치 않으며 여기서도 배우 윤은혜의 진지한 주제의식이 화려하게 꽃피기를 기대해 본다. &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윤은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윤은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오만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오만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커피프린스&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커피프린스&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이순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이순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포도밭 그 사나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포도밭 그 사나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아가씨를 부탁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아가씨를 부탁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작품선정능력&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작품선정능력&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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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노무현 모델의 붕괴' 이후 - 새로운 진보적 정치전략을 위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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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08-30T19:03:10Z</updated>
	    <published>2009-08-30T19:03:1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DIV id=newsHEAD&gt;
&lt;DIV id=col1&gt;올 5월 30일경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맞이하여 개인적인 논평을 정치/외교/안보 코너에 하나 올린 적이 있었는데, 당시의 거센 추모열기 때문에 엄청나게 감정섞인 쓴소리들을 많이 들어야 했다. 고인을 인간적으로 싫어했다고 그 가치까지 무시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비판적 지지자 행세를 한다는 것이 그만&amp;nbsp;갖은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가령 고인의 부동산정책이라든가 삼불정책 등등은 나도 무척 지지하는 바였지만 이상하게 노무현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반대자로 비치기도 했다.&amp;nbsp;물론 제 뜻의 중심을 보고 지지해주신 분들도 몇 분 계셨으나 워낙에 반대여론이 거세서 그랬는지 몰라도&amp;nbsp;대부분&amp;nbsp;지지의 답글을 도로 철회하셨다.&amp;nbsp;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썼던 글의 논조에 대해서는 지금도 일말의 후회도 없거니와, 학식과 언변의 부족으로 좀 더 글 다운 글을 못썼던 것이 후회라면 후회라 할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처럼 다 지나간 얘기를 구구절절 늘어놓은 이유는 당시 나의 재능의 부족으로 말미암아 속시원히 깔끔하게 풀어놓지 못한 부분을 탁 트이게 풀어놓을 수 있는 좋은 컬럼을 하나 발견했기 때문이다. 아래에 개제를 해놓았는데, 노대통령 검찰소환사태가 있었던 5월 초순에 쓰여진 글이지만 지금 읽어도 무척 시의적절한 부분이 많다고 생각되어,&amp;nbsp;부득이하게 혹여나 못읽으신 분들을 위하여 개제하고 싶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간단히 요약하자면,,,,,,,, 노무현 정치공학 혹은 노무현 정치모델은 노대통령 검찰소환을 통해&amp;nbsp;도덕성 문제로 결국 완전히 무너지게 되는데 그 근본적&amp;nbsp;원인은 바로 노무현 모델 특유의 &quot;반정치의 정치&quot;에 있겠다. 한편, 그 구성요소는 노무현 모델의 3요소에서 찾을 수가 있는데, 노사모, 인터넷, 탈지역주의에 기반한 승부사적 정치공학이 바로 그것이다. 즉, 노무현 모델은&amp;nbsp;노사모, 인터넷을&amp;nbsp;풀뿌리 민주주의의 강화에 썼을지는 몰라도 이를 대의민주주의를 보완하기는 커녕 따돌리기에 급급함으로써 국민의 뜻을 정책과 이념으로 이어가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또한&amp;nbsp;지지기반을 넓히기 위해&amp;nbsp;탈지역주의적 승부수를 많이 두었으나 성공은 커녕 거꾸로&amp;nbsp;지지기반 약화만을&amp;nbsp;불러왔는데 그 결정적 예가, 노무현 대통령의 민주당 탈당, 대연정 등이 되겠다. 어쨌든,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들을 비정치적으로 해결하기에 급급하다 보니 구호만 넘쳐났지 제대로 된 정책이 없었다는 얘기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사실, 이런 '반정치의 정치'의 강력한 원동력은 도덕성에 있었다. 정치가 썩었으니 가슴으로 국민에게 다가가자는 취지는 좋을지 몰라도 현실정치에 그 가슴을 연결시키는 작업은 도덕성만으론 부족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다. 게다가, &amp;nbsp;이를 열정적으로 내세웠던 사람이 비리에 연루되어 버림으로써 그러한 정치공학은 철저히 무너지게 된다. 결국, 노무현식의 도덕정치&amp;nbsp;모델은 대의제의 기반을 상당히 훼손해버리는 결과를 낳아버렸다. 이에 저자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예를 들며, 대통령이 권력의 힘을 의식한 현실적인 정치를 해야, 르윈스키 스캔들같은&amp;nbsp;도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일을 해나갈 수 있음을&amp;nbsp;역설한다. &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런 것들이 원인이 되어 노무현 정치의 최대 비극들이 일어나는데, 그것들이 바로 정책 체제의 보수화와 지지기반 붕괴다.&lt;/DIV&gt;
&lt;DIV&gt;앞서 말한대로, 노무현식 도덕정치공학은 민주주의의 제도적 과정을 무시했고 따라서 참여정부는 필연적으로 정책이란 것이 구현되기 힘든 조건이 되었다. 그러므로, 참여정부는 집권 초기를 정책의 로드맵을 잡는데 대부분을 허비하게 되고, 나중엔&amp;nbsp;급해진 나머지 중산층, 서민을 버리고 삼성경제연구소에서 나올법한 '2만불시대'로 달려간다.&amp;nbsp;또한, 국가보안법 폐지, 언론법, 사학법 등의 &quot;개혁입법&quot;을 강하게 추진하였지만 의회를 통한 입법은 경시하거나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입지만 협소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첫째, 현대정치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정책체제의 강화가 무시되었다. 물론, 그렇게&amp;nbsp;생산된 정책은 둘째, 지지기반의 약화를 불러왔다. 대부분의 정책이 보수지향적이 되고 진보정책이 재생산될 길이 차단되었으니 지지자들이었던 서민, 중산층, 젊은층이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보수진영은 속칭 &quot;씹을게 없어&quot; 대통령의 언행스타일만을 물고 늘어지게 된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에&amp;nbsp;저자는 루즈벨트의 '뉴딜연합'을 역사적 교훈으로 삼을 것을 주문한다. 1930년대의 루즈벨트는 노동조합과 중산층을 기반으로 '뉴딜연합'을&amp;nbsp;이끌어내면서 민주당을 남부를 기반으로 하는&amp;nbsp;지역정당이 아닌 광범위한 계층을 끌어안은 전국적인 정당으로 발전시킨다. 특히 남부에서 세력을 강화하게 된 이유는 첫째, 노동조합과 중산층에 복지국가적 이상을 제시하고 또 실제로 복지국가정책을 펴면서 산업발달이 덜 된 남부에&amp;nbsp;중산층이 되면 이익을 볼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늘어났기 때문이고, 둘째, 남부에서 흑인을 차별하는 짐 크로우 법을 암묵적으로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하지만, 나중에 1964년 린든 존슨의 민권법 서명으로 민주당은 남부의 지지기반을 상실하게 되고 2000년 조지 부시가 집권하는 결정적 단서를 마련해준다. 폴 크루그먼의 &quot;미래를 말하다&quot;와 관련하여 중요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렇게 볼 때, 노무현 정부의 탈지역주의 정책에 있어서의 최대 오류는 한나라당 대연정같은 승부수적 정치공학에 몰두한 나머지 한국정치가 지역이슈에서 계층, 복지 이슈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뉴딜의 예를 보더라도 탈지역주의의 가장 큰 무기는 복지국가이상을 통한 계층간의 대연합이 되어야 한다. 지역주의는 각 지역의 계층이 연합하게 되면 자연적으로 해소될 수 있는 부차적 문제인데, 한나라당 대연정같은 정치적 지역주의 극복노력이 근본적 해결책이 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한국정치에 있어 정말 중요한 문제는&amp;nbsp;지역주의가 아니라, 왜 영남의 노동자들이&amp;nbsp;한나라당을 찍을 수 밖에 없느냐 하는 것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이처럼 노무현 정치가 사라진 현실에서 민주당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하는가? 무엇보다도 철저한 자기반성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2년 영국 노동당의 '사회정의위원회'가 그 좋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둘째, 경제관리에 유능해져야 한다. 이를 위해, 한나라당의 양극화 정책을 비판하고 복지이슈를 앞세워 서민과 중산층을 챙겨야 한다. 셋째, 대의제를 무시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입법자로서의 의회의 역할을 무시해선 안되며, 전당대회같은 상향식 의사결정제도를 활성화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열심히 넓혀놓은 풀뿌리 대중기반이 대안정책으로 구체화되도록 노력해야 지지기반도 더욱 넓어지는 선순환이 일어날 것이다. 넷째,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노사정협약같은 사회협약을 이슈화시켜야 한다. 이 때 논의되는 이슈는&amp;nbsp;임금, 경제&amp;nbsp;뿐만이 아니라 의료,&amp;nbsp;연금, 주택 교육 등의 복지이슈를 모두 포함해야 하며, 그래야 민주주의를 위해 복지가 필수라는 사고를 가진 세력의 광범위한 협조와 공감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이다. &lt;/DIV&gt;
&lt;DIV&gt;&amp;nbsp;&amp;nbsp;&lt;/DIV&gt;
&lt;DIV&gt;이처럼 새로운 진보정치는 무력한 이상주의가 아닌 정책체제의 강화를 추구해야 한다. 이게 저자의 결론이다. 그렇게 되었더라면 노무현 대통령이 스캔들 시비쯤은 거뜬히 피해갈 수 있었을 거라는 안타까움을 더하면서 말이다.&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amp;nbsp;&lt;/DIV&gt;
&lt;DIV&gt;&lt;IMG class=divSEC alt=&quot;&quot; src=&quot;http://www.pressian.com/images/article/ico_section_01.gif&quot; width=49 height=33&gt; &lt;IMG class=divICO alt=&quot;&quot; src=&quot;http://www.pressian.com/images/article/ico_div_column.gif&quot; width=43 height=19&gt; &lt;/DIV&gt;&lt;!--end : #newsHEAD #col1--&gt;
&lt;H3&gt;&lt;!--DCM_TITLE--&gt;'노무현 모델의 붕괴' 이후&lt;!--/DCM_TITLE--&gt;&lt;/H3&gt;
&lt;H4&gt;[의제27 '시선'] 새로운 진보적 정치전략을 위하여&lt;/H4&gt;
&lt;P class=inputdate&gt;기사입력 2009-05-07 오후 12:04:57 &lt;/P&gt;&lt;!--end : #newsHEAD #col2--&gt;&lt;/DIV&gt;&lt;!--end : #newsHEAD--&gt;&lt;!-- 기사 본문 출력 start --&gt;
&lt;DIV class=ad_overT&gt;&lt;!-- ************ overture article top banner ************ --&gt;&lt;!-- ************ overture article top banner ************ --&gt;&lt;/DIV&gt;
&lt;DIV id=newsBODY class=viewstep03&gt;
&lt;DIV style=&quot;FLOAT: right; MARGIN-LEFT: 10px&quot;&gt;&lt;INS style=&quot;POSITION: relative; BORDER-BOTTOM-STYLE: none; PADDING-BOTTOM: 0px; BORDER-RIGHT-STYLE: none; MARGIN: 0px; PADDING-LEFT: 0px; WIDTH: 200px; PADDING-RIGHT: 0px; DISPLAY: inline-table; BORDER-TOP-STYLE: none; HEIGHT: 200px; VISIBILITY: visible; BORDER-LEFT-STYLE: none; PADDING-TOP: 0px&quot;&gt;&lt;/INS&gt;&lt;/DIV&gt;&lt;!-- 본문 우측 광고 끝--&gt;&lt;!--DCM_BODY--&gt;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에 들어서는 모습을 본 사람들은 매우 복잡한 심회를 느꼈을 것이다. 지난 5년간 최고 권력자였던 사람이 범죄수사의 피의자가 된다는 점은 매우 놀랄 일이다. 역대 대통령의 전철을 보는 듯한 집합적 데자뷰는 역사의 판결이 순환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과거의 대통령에 비해 액수가 적다거나, &lt;A class=dklink title=&quot;&quot;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구속&lt;/FONT&gt;&lt;/U&gt;&lt;/A&gt;수사를 해야 하는지에 관한 논쟁은 모두 역사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는 아주 작은 파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lt;BR&gt;&lt;BR&gt;노무현 &lt;A class=dklink title=&quot;&quot;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게이트&lt;/FONT&gt;&lt;/U&gt;&lt;/A&gt;로 도덕성이 무너지면서 우리는 하나의 '역사적 순간'을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목도&lt;/FONT&gt;&lt;/U&gt;&lt;/A&gt;하고 있다. 마치 박정희 대통령의 암살과 전두환 대통령의 구속처럼 한 시대가 막을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소환은 노무현 &lt;A class=dklink title=&quot;&quot;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모델&lt;/FONT&gt;&lt;/U&gt;&lt;/A&gt; 또는 노무현식 정치의 종말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정치권의 비주류이자 아웃사이더에서 출발한 정치인 노무현은 한국 정치사에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7년 대선에 볼 수 있었듯이 노무현 정치는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lt;BR&gt;
&lt;TABLE style=&quot;BORDER-BOTTOM: #ccc 1px solid; BORDER-LEFT: #ccc 1px solid; MARGIN: 5px 15px 10px 0px; BACKGROUND: #ffffff; BORDER-TOP: #ccc 1px solid; BORDER-RIGHT: #ccc 1px solid&quot; cellSpacing=5 cellPadding=5 align=left&gt;
&lt;TBODY&gt;
&lt;TR&gt;
&lt;TD width=255&gt;&lt;IMG class=resize3 border=1 name=img_resize hspace=0 alt=&quot;&quot; src=&quot;http://pic.pressian.com/images/2009/05/07/60090507114629.JPG&quot; width=255 height=350&gt;&lt;/TD&gt;&lt;/TR&gt;
&lt;TR&gt;
&lt;TD style=&quot;LINE-HEIGHT: 15px; LETTER-SPACING: -0.05em; COLOR: #777; FONT-SIZE: 11px&quot; width=255&gt;▲ 검찰에 출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뉴시스&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BR&gt;&lt;B&gt;노무현 모델의 등장과 쇠퇴&lt;/B&gt;&lt;BR&gt;&lt;BR&gt;2003년 노무현 후보가 당선될 당시 많은 사람들은 큰 기대에 휩싸였다. 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대선 직후 노무현 당선자가 대북송금 특검법을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수용&lt;/FONT&gt;&lt;/U&gt;&lt;/A&gt;하고 측근 안희정이 나라종금 비리로 연루되면서 이내 실망감이 커졌다. 당시에 노무현과 386정치인의 등장에 열광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난 그들에게 &quot;지금처럼 계속 간다면 노무현은 진보세력을 망칠 것이고, 안희정은 386세대를 망칠 것이다&quot;라고 말했다. 결국 대북송금 특검은 민주당 분당의 서막이 되었고 나라종금 비리는 수많은 게이트의 시작에 불과했다. 첫 단추부터 잘못 시작한 노무현 정부는 계속 방향감각을 상실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실패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왜 노무현 정부가 실패했는가?&lt;BR&gt;&lt;BR&gt;노무현 모델은 과거의 정치 모델과는 매우 다른 양상을 보여주었다. 노무현 모델의 핵심적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요소&lt;/FONT&gt;&lt;/U&gt;&lt;/A&gt;는 '반(反)정치의 정치'로 볼 수 있다. 정치적 문제를 집요하게 비정치적 방법으로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해체&lt;/FONT&gt;&lt;/U&gt;&lt;/A&gt;하는 정치를 추구했다. 그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여의도&lt;/FONT&gt;&lt;/U&gt;&lt;/A&gt; 정치를 전면적으로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대통령으로 선출한 정당을 버리고 탈당했다. 대의제 정치의 입법보다 인터넷과 거리의 대중정치에 몰두했다. 국민이 요구하는 사회적 형평성의 강화보다 정권이 요구하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탈지&lt;/FONT&gt;&lt;/U&gt;&lt;/A&gt;역주의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다. 그 후 노무현식 정치는 노사모, 인터넷, 그리고 승부사적 정치공학에 몰입했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노무현 모델의 핵심 요소가 되었다.&lt;BR&gt;&lt;BR&gt;먼저, 2002년 노무현 돌풍을 일으킨 노사모는 탈정치의 대중운동을 벌였다. 이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미국&lt;/FONT&gt;&lt;/U&gt;&lt;/A&gt;의 오바마를 지지했던 오바매니아(Obamaina)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왜냐하면 무브온(MoveOn), ACORN, Netroots Nation 등 수많은 오바마 지지자들은 모두 풀뿌리 조직에 참여하는 동시에 민주당의 당원으로 활동했다. 반면에 노사모는 정치조직임에도 불구하고 탈정당, 탈정치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는 정치가 공적 영역을 확대하는 대신 연예인의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팬클럽&lt;/FONT&gt;&lt;/U&gt;&lt;/A&gt;처럼 사적 영역에 머무르게 하는 퇴행적 모습을 연출했다. 결국 노무현 전 대통령이 검찰&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조사&lt;/FONT&gt;&lt;/U&gt;&lt;/A&gt;를 받기 위해 떠나던 날 노사모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노란&lt;/FONT&gt;&lt;/U&gt;&lt;/A&gt;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풍선&lt;/FONT&gt;&lt;/U&gt;&lt;/A&gt;을 들고 다시 나타났다. 이 모습이 마치 재벌 총수의 비리를 엄호하는 직원들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lt;BR&gt;&lt;BR&gt;둘째, 노무현 전 대통령을 인터넷이 선출한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제는 인터넷을 모르고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미 인터넷은 유권자와 정치인을 연결하는 강력한 소통수단이 되었다. 하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터넷이 정당과 의회를 대체하는 정치적 수단으로 과대평가하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경향&lt;/FONT&gt;&lt;/U&gt;&lt;/A&gt;을 보였다. 미국의 대통령처럼 의회의 반대파를 인내심을 갖고 설득하기보다 국회와 정당을 무시한 채 인터넷을 통해 곧 바로 지지자들에게 호소했다. 이러한 대통령의 모습은 대의제에 대한 강한 불신으로 비쳤다. 노무현 모델에서는 국회의 민주당과 민노당 뿐만 아니라 민주노총과 시민&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단체&lt;/FONT&gt;&lt;/U&gt;&lt;/A&gt;도 모두 거추장스러운 반대&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파일&lt;/FONT&gt;&lt;/U&gt;&lt;/A&gt; 뿐이었다.&lt;BR&gt;&lt;BR&gt;셋째, 노무현 모델은 이념과 정책을 중심으로 정치를 펼치기보다 탈지역주의를 위한 정치공학을 통한 승부수를 중시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대북송금 특검을 통해 김대중 정부의 핵심&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인사&lt;/FONT&gt;&lt;/U&gt;&lt;/A&gt;를 제거하고 민주당을 분당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이 호남과 연결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는 영남 민주화세력이 호남에 기대고 있다는 자신만의 콤플렉스와도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하지만 호남에 정치적 기반을 가진 민주당과 결별하면 영남의 지지를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열린우리당의 순진한 계산과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달리&lt;/FONT&gt;&lt;/U&gt;&lt;/A&gt; 노무현 정부의 지지는 전혀 확대되지 않았다.&lt;BR&gt;&lt;BR&gt;급기야 2005년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면서 탈지역주의 정치공학의 계산은 최고 수준에 도달했다. 이러한 반정치적 정치공학은 연정 파트너가 되길 기대했던 한나라당과 아무런 사전교섭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에게도 일언&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반구&lt;/FONT&gt;&lt;/U&gt;&lt;/A&gt; 알리지 않은 '깜짝쇼'로 연출했던 것이다. 사실 깜짝쇼의 원조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조차 '3당합당'을 위해선 치밀한 정치&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협상&lt;/FONT&gt;&lt;/U&gt;&lt;/A&gt;(야합?)의 모습을 보여주었다.&lt;BR&gt;&lt;BR&gt;위와 같은 노무현식 정치모델은 철저하게 민주주의의 제도적 토대를 약화시켰다. 풀뿌리 정치조직과 인터넷은 민주적 시민&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문화&lt;/FONT&gt;&lt;/U&gt;&lt;/A&gt;를 강화할 수 있는 중요한 자원이다. 하지만 이러한 대중적 정치참여는 대의제 민주주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 현실적 힘을 발휘할 수 있다. 어느 나라의 사례를 보아도 참여민주주의란 대의민주주의를 약화시키거나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상호&lt;/FONT&gt;&lt;/U&gt;&lt;/A&gt;보완의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기능&lt;/FONT&gt;&lt;/U&gt;&lt;/A&gt;을 갖는다. 하지만 노무현 모델은 사실상 국회와 정당을 (심지어 여당조차도) 감정적으로 무시하거나 정책결정에서 체계적으로 배제했다.&lt;BR&gt;&lt;BR&gt;이러한 노무현 모델의 가장 강력한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동력&lt;/FONT&gt;&lt;/U&gt;&lt;/A&gt;은 도덕성이었다. 사실 도덕을 정치의 무기로 강조하는 전략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 일찍이 유교정치는 '도덕정치'를 통하여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성장&lt;/FONT&gt;&lt;/U&gt;&lt;/A&gt;했다. 위기지학(爲己之學)과 위인지학(爲人之學)을 강조하던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유학&lt;/FONT&gt;&lt;/U&gt;&lt;/A&gt;은 도덕적 기준을 정치의 핵심적 요소로 보았다. 이 기준에 따라 정통유&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학과&lt;/FONT&gt;&lt;/U&gt;&lt;/A&gt; 사문난적을 구분했다. 모든 세력을 선과 악의 대결로 본다. 하지만 노무현의 도덕정치는 현실정치의 벽에 부딪쳤다. 청문회 스타가 권력의 정점을 지나 부패정치인의 나락으로 떨어지자 노무현 모델도 힘없이 무너졌다.&lt;BR&gt;&lt;BR&gt;도덕정치와 반대로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quot;올바르나 약한 것보다 강하지만 틀린 것이 낫다&quot;고 말했다. 라인홀트 니버의 &lt;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gt;를 읽고 깊은 공감을 가진 클린턴은 도덕의 힘과 함께 권력의 힘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클린턴은 르윈스키 스캔들로 보수파의 맹공격을 받았지만 그의 인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가 현실정치에서 제시한 온건하고 대중적인 정책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보수적 공화당원은 제외하더라도 최소한 민주당원과 중도파 유권자에게는 그들을 위해 일하는 대통령이라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이미지&lt;/FONT&gt;&lt;/U&gt;&lt;/A&gt;를 강하게 심어놓았다.&lt;BR&gt;&lt;BR&gt;&lt;B&gt;정책 레짐의 보수화와 지지층의 붕괴&lt;/B&gt;&lt;BR&gt;&lt;BR&gt;노무현 모델이 만든 가장 큰 비극은 철저하게 &lt;A class=dklink title=&quot;&quot;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현대&lt;/FONT&gt;&lt;/U&gt;&lt;/A&gt; 정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인 정책 체제(policy regime)의 강화를 무시했다는 점이다. 노무현 정부는 집권 수년이 지나도록 로드맵을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만들기&lt;/FONT&gt;&lt;/U&gt;&lt;/A&gt; 위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달리 말하면 집권 직후 당장 무엇을 할 것인지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서민과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중산&lt;/FONT&gt;&lt;/U&gt;&lt;/A&gt;층을 위한다는 민주당을 버리고 달려간 곳은 '2만불 시대'이었다. 삼성경제&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연구소&lt;/FONT&gt;&lt;/U&gt;&lt;/A&gt;의 보고서에서 많이 볼 수 있던 낯익은 구호는 노무현 정부의 새로운 정체성이 되었다. 정말 그들 말대로 외교안보정책은 진보적 기조를 제시하는 반면, 경제정책과 정책은 보수적 기조를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유지&lt;/FONT&gt;&lt;/U&gt;&lt;/A&gt;하기로 의도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결과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예측&lt;/FONT&gt;&lt;/U&gt;&lt;/A&gt;대로 되었다.&lt;BR&gt;&lt;BR&gt;노무현 정부의 정책은 요란한 '진보'의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나팔&lt;/FONT&gt;&lt;/U&gt;&lt;/A&gt;소리와는 달리 별로 진보적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사실 보수세력이 집요하게 노무현 대통령의 언행과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스타일&lt;/FONT&gt;&lt;/U&gt;&lt;/A&gt;을 물고 늘어진 것은 노무현 대통령의 정책에서 별로 급진적인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 법과 질서의 강조, 노사분규의 자율해결 원칙,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아파트&lt;/FONT&gt;&lt;/U&gt;&lt;/A&gt;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원가공개&lt;/FONT&gt;&lt;/U&gt;&lt;/A&gt; 반대,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민간의료보험&lt;/FONT&gt;&lt;/U&gt;&lt;/A&gt;의 활성화 등은 진보세력보다 보수세력에 더 가까운 정책이라고 볼 수 있다. 노무현에 열광했던 대학생과 청년층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 집권 5년 사이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대학생 등록금&lt;/FONT&gt;&lt;/U&gt;&lt;/A&gt;은 해마다 약 10%씩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인상&lt;/FONT&gt;&lt;/U&gt;&lt;/A&gt;했지만, 정부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보증&lt;/FONT&gt;&lt;/U&gt;&lt;/A&gt;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학자금 대출금리&lt;/FONT&gt;&lt;/U&gt;&lt;/A&gt;는 계속 올라만 갔다. 전체 고용인구 가운데 고용율은 60%를 밑돌고, 비정규직 비율은 27%에서 36%로 급상승했다. 결과적으로 노무현 정부가 등장한 이후 사회적 불평등은 계속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악화&lt;/FONT&gt;&lt;/U&gt;&lt;/A&gt;되었다.&lt;BR&gt;&lt;BR&gt;노무현 모델이 추구한 탈정치화의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의회를 통한 입법 활동의 경시 또는 포기였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탄핵 역풍'으로 다수당이 된 열린우리당은 사학법, 언론법, 국가&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보안&lt;/FONT&gt;&lt;/U&gt;&lt;/A&gt;법 등 소위 '개혁입법'을 강력하게 추진했지만 정치적 기반은 더욱 협소해졌다. 당시 노무현 정부가 민주당의 분당과 한나라당에게 대연정을 제안하는 대신 민주당, 민노당, 시민사회와 함께 사회경제적 민주화를 내세운 광범위한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복지&lt;/FONT&gt;&lt;/U&gt;&lt;/A&gt;연합'을 추구했다면 전국적 차원에서 정치적 기반이 더욱 강화될 수 있었을 것이다.&lt;BR&gt;&lt;BR&gt;1930년대 미국의 루스&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벨트&lt;/FONT&gt;&lt;/U&gt;&lt;/A&gt; 행정부의 경험은 한국 정치에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교훈을 준다. 루스벨트가 중산층과 노동조합을 기반으로 한 '뉴딜연합'을 형성하면서 민주당은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남부&lt;/FONT&gt;&lt;/U&gt;&lt;/A&gt;를 기반으로 하는 지역정당이 아니라 광범위한 계층을 기반으로 한 전국정당으로 발전했다. 루스벨트 정부가 노동조합의 권리를 확대하고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정책을 추진하면서 남부에서도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생각하는 노동자의 비율이 급증했다.&lt;BR&gt;&lt;BR&gt;뉴딜연합이 남부에서 세력을 확대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남부는 산업화가 늦어 북부에 비해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가난&lt;/FONT&gt;&lt;/U&gt;&lt;/A&gt;했기 때문에 복지국가를 통해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둘째, 북부 민주당의 진보주의자들은 남부의 지지를 얻기 위한 대가로 흑인을 차별하는 짐 크로법(Jim Crow Law)을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이 점은 루스벨트가 얼마나 현실주의적 정치인인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1964년 존슨 정부가 흑인의 권리를 확대한 민권법에 서명하자 남부의 백인은 민주당에 등을 돌렸다. 이미 민주당은 흑인 민권운동을 거부할 수 없었지만 남부 백인의 지지를 잃을 것은 불을 보듯이 뻔했다. 존슨 대통령은 민권법은 도덕적으로는 옳은 일이었지만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결국 남부는 점차 공화당에 기울었고 2000년 부시 행정부가 권력을 장악할 때 가장 강력한 기반이 되었다)&lt;BR&gt;&lt;BR&gt;미국의 루스벨트 행정부와 비교해서 한국의 노무현 정부가 경험한 오류는 한국 정치가 지역 이슈에서 계층 또는 복지 이슈로 전환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놓쳤다는 점이다. 이는 무척 뼈아픈 일이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은 한국에서 지역주의 문제는 '호남 문제'가 아니라 왜 영남의 중산층과 노동자들이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이 아니라 한나라당을 지지하는지 질문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lt;BR&gt;&lt;BR&gt;결국 효과적인 탈지역주의 전략은 노무현 모델의 정치공학처럼 위로부터 한나라당과 연합하는 전략이 아니라 아래로부터 영남의 중산층과 노동자와 연대하는 계층연합의 전략이 되어야 했다. 만약 당시 노무현 정부가 남부의 백인 노동자를 지지층으로 확대한 미국의 루스벨트 정부의 사례와 같이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입법을 추진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광범위한 정치적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최근의 검찰 소환도 사실상 정치적으로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무력화&lt;/FONT&gt;&lt;/U&gt;&lt;/A&gt;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lt;BR&gt;&lt;BR&gt;&lt;B&gt;새로운 진보적 정치전략과 한국형 뉴딜연합&lt;/B&gt;&lt;BR&gt;&lt;BR&gt;노무현 모델이 붕괴한다고 해서 우리가 하염없이 슬퍼할 일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의 오류에서 새로운 교훈을 얻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한다. 지금 민주당이 '뉴민주당 플랜'을 마련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국민에게 변화와 쇄신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 없다. 지난 4.29 재보선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에서 선전했지만, 이는 이명박 정부에 대한 국민의 실망과 한나라당 내부의 친이와 친박의 갈등으로 인한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반사&lt;/FONT&gt;&lt;/U&gt;&lt;/A&gt;이익으로 얻은 결과이지 자력으로 이룬 승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민주당이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2010년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지방&lt;/FONT&gt;&lt;/U&gt;&lt;/A&gt;선거의 승리는 물론 다음 대선에서 집권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lt;BR&gt;&lt;BR&gt;그러면 노무현 모델이 사라진 민주당은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모든 새로운 출발은 과거에 대한 냉정한 반성과 평가에서 출발해야 한다. 1992년 4번의 선거에서 패배한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영국&lt;/FONT&gt;&lt;/U&gt;&lt;/A&gt; 노동당은 자신들의 당헌과 선거강령을 재평가하기 위해서 '사회정의위원회'(Social Justice Commission)를 만들었다. 당대의 진보적 학자가 주도한 사회정의위원회는 노동당의 비전과 전략을 새로 수립할 것을 요구했고 과감한 정당개혁을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후 신노동당(New Labour)의 현대화를 통해 전통적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대대적으로 수정했다. 이로써 새로운 수권정당이라는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한국의 민주당은 무엇보다도 지난 10년 동안 민주정부의 공과를 냉정하게 평가해야 한다. 왜 2007년 대선에서 패배했는지 처절한 반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나라당보다 더 잘 국가를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제시해야 한다.&lt;BR&gt;&lt;BR&gt;이제 민주당, 민노당, 진보신당을 포함한 개혁진보세력은 무엇보다도 경제관리에 유능한 세력이라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선거에서 경제 이슈를 뺏겨서는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다. 부자를 위한 감세와 재벌 편향의 한나라당 정책을 비판하고 중소기업, 중산층, 서민을 위한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부유층을 위한 감세 대신 중산층과 서민을 위한 감세를 요구해야한다. 1930년대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의 뉴딜은 댐을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건설&lt;/FONT&gt;&lt;/U&gt;&lt;/A&gt;한 토건사업이 아니라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사회복지&lt;/FONT&gt;&lt;/U&gt;&lt;/A&gt;를 통해 서민층의 소비를 촉진하는 사회정책이 핵심 내용이었다. 이를 위해서 경제정책은 사회정책과 긴밀하게 연결되어야 한다. 고용을 확대하는 동시에 노동력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교육과 훈련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 체계적인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조세&lt;/FONT&gt;&lt;/U&gt;&lt;/A&gt;정책과 교육정책을 제시하지 않는다면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2008년 미국 대선에서 볼 수 있듯이 오바마 대통령은 경제위기에 직면하여 고통을 겪고 있는 &quot;중산층의 즉각적 복원&quot;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 역할과 부자에 대한 증세 법안을 내세워 커다란 지지를 얻었다.&lt;BR&gt;&lt;BR&gt;한국 정치의 새로운 정책 대안은 대의제 정치에서 현실적인 방안으로 만들어질 수 있다. 시민사회는 다양한 사회문제를 제기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지만, 입법자로서 의회의 역할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다른 한편 정당은 시민사회의 새로운 요구에 항상 주목하면서 빠르게 반응해야 한다. 새로운 진보세력은 정당과 시민사회의 풀뿌리 정치에서 출발하여 더 광범위한 대중과 결합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당의 대중적 기반을 확대하는 한편 공직선거 후보선출뿐 아니라 정강정책을 전당대회에서 결정할 수 있는 상향식 의사결정구조를 강화해야 한다. 더 넓은 차원에서 정당이 사회적 합의를 만들기 위한 전략적 방향을 정하고, 이를 토대로 노사정 사이의 합의를 만드는 사회협약을 추진해야 한다. 1990년대 선진산업경제의 다양한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사회적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대화&lt;/FONT&gt;&lt;/U&gt;&lt;/A&gt;는 임금과 경제 문제뿐 아니라 교육, 의료,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주택&lt;/FONT&gt;&lt;/U&gt;&lt;/A&gt;, 연금 등 복지정책을 포함해야 한다. 이를 통해 복지국가의 등장이 민주주의의 강화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믿는 광범위한 사회세력이 참여하는 '한국형 뉴딜연합'을 시급하게 형성해야 한다.&lt;BR&gt;&lt;BR&gt;&lt;B&gt;역사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하여&lt;/B&gt;&lt;BR&gt;&lt;BR&gt;새로운 진보의 길은 무력한 이상주의가 아니라 현실정치의 정책 레짐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이는 20&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세기&lt;/FONT&gt;&lt;/U&gt;&lt;/A&gt; 초반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독일&lt;/FONT&gt;&lt;/U&gt;&lt;/A&gt;의 뛰어난 사상가 막스 베버가 말한 '심정윤리'와 '책임윤리'에 관한 유명한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강연&lt;/FONT&gt;&lt;/U&gt;&lt;/A&gt;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성직자는 행위의 결과에 관계없이 심정윤리를 강조할 수 있지만, 정치인은 철저하게 행위의 결과에 책임을 져야 한다. 결국 정치인은 악마와 손을 잡고서라도 공동체에 이익이 되는 &lt;A class=dklink href=&quot;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90507114629&amp;Section=01&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10081&gt;좋은&lt;/FONT&gt;&lt;/U&gt;&lt;/A&gt;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베버는 책임윤리야말로 진정한 정치가와 아마추어를 구분하는 결정적 기준이라고 보았다. 선과 악의 이분법의 심정윤리에 사로잡힌 노무현 모델은 정치를 공적영역이 아니라 사적영역으로 후퇴시키고 말았다. 이런 점에서 노무현은 철저한 아마추어였고, 너무나 슬프게도 최소한의 도덕성도 지키지 못한 인물이었다.&lt;BR&gt;&lt;BR&gt;이렇게 노무현 모델이 붕괴하는 역사적 시점에 우리는 망연자실한 심정으로 외롭게 서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시선은 역사의 과거가 아니라 미래를 향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새로운 비전과 전략을 가진 386세대가 등장해 앞으로 큰일을 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lt;!--/DCM_BODY--&gt; 
&lt;P class=author&gt;&amp;nbsp;&lt;/P&gt;
&lt;P class=author&gt;/김윤태 고려대 교수(사회학)&amp;nbsp;&lt;A href=&quot;mailto:hilltop@pressian.com&quot;&gt;&lt;/A&gt; &lt;/P&gt;&lt;/DIV&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노무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노무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노사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노사모&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참여정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참여정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복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복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복지국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복지국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대의민주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대의민주주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루즈벨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루즈벨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도덕정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도덕정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빌클린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빌클린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노무현 게이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노무현 게이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2만불시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2만불시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탈지역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탈지역주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뉴딜연합&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뉴딜연합&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정책체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정책체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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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Die Welle</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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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08-24T21:34:58Z</updated>
	    <published>2009-08-24T21:34:5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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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amp;nbsp;&lt;/P&gt;
&lt;P&gt;&lt;table class=&quot;txc-search txc-search-cinema-detail&quot; key=&quot;45054&quot; category=&quot;cinema_detail&quot; openpost=&quot;false&quot; width=&quot;500&quot; cellpadding=&quot;0&quot; cellspacing=&quot;0&quot; border=&quot;0&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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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span class=&quot;txc-search-title&quot; style=&quot;font-size:16px;font-weight:bold;letter-spacing:-1px;&quot;&gt;&lt;a href=&quot;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Main.do?movieId=45054&quot; title=&quot;더 웨이브&quot; target=&quot;_blank&quot;&gt;더 웨이브&lt;/a&gt;&lt;/span&gt;
&lt;span class=&quot;txc-subdesc&quot; style=&quot;font-size:12px;&quot;&gt;(2008)&lt;/span&gt;
&lt;/p&gt;
&lt;p style=&quot;line-height:1;overflow-y:hidden;&quot;&gt;&lt;span class=&quot;txc-subtitle&quot; style=&quot;font-family:Tahoma; font-size:10px;&quot;&gt;The Wave&lt;/span&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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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td align=&quot;left&quot; valign=&quot;top&quot;&gt;&lt;p&gt;&lt;span style=&quot;font-size:12px;&quot;&gt;독일&amp;nbsp;&lt;span class=&quot;txc-bar&quot;&gt;|&lt;/span&gt;&amp;nbsp;드라마&amp;nbsp;&lt;span class=&quot;txc-bar&quot;&gt;|&lt;/span&gt;&amp;nbsp;&lt;/span&gt;&lt;/p&gt;&lt;/td&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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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td&gt;&lt;/tr&gt;&lt;/tbody&gt;
&lt;/tabl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독일 영화를 좀처럼 보기 힘들었는데 때마침 반가웠다. 오락적이고 폭력적인 미국영화 일색인 외화시장에서 그것도 파시즘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알기 쉽게 다뤘다는 것, 또한 유럽인의&amp;nbsp;정신세계가 담겨있다는 것, 무척 최근의 영화라는 것&amp;nbsp;등등에 높은 잠재적 점수를 주고 관람했는데, 끝은 의외로 시시한 참혹함으로 끝나버렸다. 자막번역이 부실해서 그럴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척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데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뚜렷하게 떠오르는 주제의식은 별로 없는 듯 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내용은 무정부주의와 체육수업 전공인 라이너 고등학교 선생이 파시즘 수업에 배정받으며 시작된다. 파시즘에 앞서 공동체의 정의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 라이너 선생은 앞으로 일주일간 하나의 공동체를 이뤄보자며&amp;nbsp;학생들의 의견을 수렴하여&amp;nbsp;유니폼을 입고 공동체(Gemeinschaft)만의 독특한 인사를 주고 받자, 이름은 Die Welle라고 하자는 제안을 한다. 그리고, 이런 지침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은 질문조차 잘 받아주지 않는다. 라이너의 지시와 공동체의 기본 지침을 따르지 않는 학생은 수업에 참석해도 사실상 퇴장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무관심을 받는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라이너의 연출은 어디까지나 체험교육적인 연출이었지만, 유니폼을 입은 학생들은 하나의 배타적인 그룹을 이뤄나간다. 이 수업에서 Die welle의 형식을 따르지 않는 학생들은&amp;nbsp;대부분의 학생들로부터 배척받고 Die Welle는 학교 내에서 세력을 키워나간다. 또한 이들 중의 일부 열성파는 온 도시에 Die Welle의 마크를 불법도배하고 다닐 정도로 열성을 보인다. 점점 수업에 참여하는 학생은 늘고&amp;nbsp;따돌림받은 학생들은 Die Welle가 파시스트집단이라며 항의전단을 뿌리고 서로 마찰을 빚는데......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학부모들은 아이들이 변했다고, 동료교사들은 수업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교장에게 클레임을 걸지만, 교장은 좋은 실험이라며 라이너를 지지한다. 한편&amp;nbsp;한 열성파 학생은 만약의 위험에 대비해 보디가드를 하겠다고 라이너의 집에까지 찾아와 그 앞에서 노숙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amp;nbsp;전번의 마크 도배가 신문에 날 정도로 문제가 커지고,&amp;nbsp;Die Welle파의 학생들과&amp;nbsp;나머지 학생들과의 갈등이 교내 체육대회에서 폭력마찰로까지 부상하며, 라이너가 탄 차가 이동 중에 물감테러까지 당하자&amp;nbsp;라이너의 부인마저(역시 고등학교 선생)도 라이너에게 학생들의 숭배에 집착한다고 비난하며&amp;nbsp;집을 나가버린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라이너는 교장에게 모든 것을 책임지고 끝을 맺겠다며, Die Welle를 대강당으로 소집하는 문자메시지를 보낸다. 강당에서 라이너는 바로 전날에 학생들이 쓴 Die Welle에 대한 일주일간의 소감을 낭독한다. 이 소감들 중&amp;nbsp;어떤 학생은 새 인생을 찾았다고 하고, 인생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가치를 찾았다는 학생도 있었으며, 반항기가 없어지고 사람이 된 것 같다는 학생도 있었다. 낭독 후 라이너는 갑자기 강렬한 어조로 학생들을 선동하기 시작한다. 독일은 미국의 세계화의 피해자다,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지만 정치인들은 기업가들과 유착하여 한통속이다, 우리가 독일의 미래가 되어야 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중에 Die Welle때문에 여자친구와의 사이가 멀어진 한 학생이 라이너를 세뇌선동한다고 몰아붙이고, 라이너는 그를 반역자로 규정하여&amp;nbsp;끌어내라고 지시한다. 여러 명의 Die Welle가 반역자를 무대 위로 끌어 내고 라이너는 학생들에게 반역자를 어떻게 처단할까를 물어본다. 대답을 못하는 학생들에게 라이너는 파시즘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너희들은 너희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을 배척함으로써 상처를 주었다,&amp;nbsp;나는 대립보다 협동으로 더욱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음을 가르치고 싶었다며 Die Welle의 해체를 지시한다. 삶의 방향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학생들은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게 Die Welle 운동이 끝이 날 수 있냐고 반신반의하며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려는 무렵......&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일 전부터 라이너의 보디가드를 자청하던 그 열성파 학생이 권총을 꺼내든다. 그렇잖아도 Die Welle를 괴롭히는 불량학생들에게 맞서 권총을 꺼내들고 그것이 가스총이라고 거짓말을 했던&amp;nbsp;적이 있었던 그 학생은 이번에는&amp;nbsp;라이너를 겨누고 이를 말리려는 동료를 쏴버린다. 라이너는 그에게 내가 Die Welle의 수장인데 내가 헤채하라면 해체해야 하는것 아니냐며 설득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갈등하던 그는 입에 권총을 넣고 자살한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경찰이 출동하여 라이너는 연행되고 이 모든 것에 대해 라이너와 학생, 아내, 학부모들은&amp;nbsp;멍한 시선을 서로 주고 받는다. 경찰차 안에서 라이너는 모든 것을 어떻게 이런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후회와 놀라움의 표정을 지으며 영화는 끝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독일의 문화가&amp;nbsp;상당히 민주적이라 그런지 영화 속의 반파시즘 학생들은 무척 예민하게 반응한다. 학부모, 라이너의 아내도 마찬가지다. 극적인 감정표현을 위해 마치 아주 절제가 안된 감정연기를 억지로 하는 듯 하다. 물론 내가 독일에 살아보지 않았으니 실제는 어떨는지 알 길은 없으나, 모두를 위한 규율보다는 개인의 자율을 중시하는 독일인의 문화는 분명 영화 곳곳에 드러난다. 라이너와 그의 아내와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라이너의 아내는 같은 학교선생이면서도 라이너를 전혀 이해하려 들지 않는다. 학생들을 파시즘으로 몰아간다며 남편을 비난하고, 이에부부싸움으로 가출까지 하기에 이른다. 결정적으로, 라이너의 수업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데, 특히 마지막 부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차분하게 일주일 동안의 활동의 공과 과를 돌아보며 학생들에게 진정한 공동체의 가치를 가르쳤어야 하는데 Die Welle의 모든 활동을 잘못된 것으로 몰아붙이고 새로운 비젼을 제시하지 못한 체 비난적으로 해체를 지시한다. 이에 한 극단열성파 학생이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눈물을 흘리고 동료를 쏘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한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전체적으로 영화가 설익은 풋사과같고 치기가 어린다. 분명&amp;nbsp;Die Welle가 파시즘으로 진화한 것은 사실이겠으나, 학교라는 곳은 버텀-업 방식의 수업도 필요한 곳이겠지만, 탑-다운 방식의 수업도 반드시 필요하다 하겠다.&amp;nbsp;이 말은 즉, Die Welle가 점점 파시즘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라이너는 학생들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 화두를 던져 자발적인 질문과 방향전환을 유도할 수도 있어야 했다는 얘기다. 왜 단일한 유니폼에 단일한 인사방식, 단일한 답변방식이 파시즘으로 발전하는가? 어떻게 대다수의 문화가 소수를 배척하게 되는가? 인간은 어디까지 단합해야 하고 어디까지 자율적이어야 하는가? 기실 이런 질문들은 독일보다는 단일민족주의,군사주의, 권위주의, 주자학 유교&amp;nbsp;문화가 아직도 팽배한 현대 한국사회에 더 어울리는 질문이겠다.&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역사적으로 이러한 갈등들이 가장 섬세하게 조정되는 집단은 전세계적으로 EU가 대표적인데, 이러한 EU도 기실 두 번의 유럽전쟁이라는 쓰라린 경험을 기초로 발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라이너는 아직 고등학생일 뿐인&amp;nbsp;미숙한 Die Welle에게 많은 것을 애시당초 기대하지 말았어야 했다. 내가 독일어를 잘했다면 분명 자막이 놓칠 수도 있었던 부분을 캐치하여 좀 더 체계적인 판단을 내려볼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무척 집중해서 본 관계로 대략의 주요 흐름은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볼 만 한 영화지만 그 주제의 복잡다단한 난해함을 풀어가는데 있어서 무척 거칠고 치기어린 테크닉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조심스럽게 추천해보고 싶다.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영화는 아닌 것 같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공동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공동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파시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파시즘&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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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종태,정성일,장하준의 쾌도난마 한국경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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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08-18T15:06:19Z</updated>
	    <published>2009-08-18T15:06:19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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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TABLE class=&quot;txc-search txc-search-book-detail&quot; border=0 cellSpacing=0 cellPadding=0 width=500 unselectable=&quot;on&quot; openpost=&quot;false&quot; category=&quot;book_detail&quot; key=&quot;KY_KOR9788985989831&quo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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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unselectable=&quot;on&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 unselectable=&quot;on&quot;&gt;장하준 지음&amp;nbsp;&lt;/SPAN&gt;&lt;/P&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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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unselectable=&quot;on&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 unselectable=&quot;on&quot;&gt;부키 펴냄&amp;nbsp;&lt;SPAN class=txc-bar unselectable=&quot;on&quot;&gt;|&lt;/SPAN&gt;&amp;nbsp;2005.07.18 발간&lt;/SPAN&gt;&lt;/P&gt;&lt;/TD&gt;&lt;/T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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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P unselectable=&quot;on&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 FONT-WEIGHT: bold&quot; class=txc-caption unselectable=&quot;on&quot;&gt;책소개&lt;/SPAN&gt;&lt;/P&gt;&lt;/TD&gt;
&lt;TD vAlign=top align=left unselectable=&quot;on&quot;&gt;
&lt;P unselectable=&quot;on&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x&quot; unselectable=&quot;on&quot;&gt;정책위원인 정승일 교수가 난마(亂麻)처럼 꼬인 한국 경제에 대해 속 시원한 진단과 처방을 제시한.....&lt;/SPAN&gt;&lt;/P&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TD&gt;&lt;/TR&gt;&lt;/TBODY&gt;&lt;/TABLE&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뭐 이 저작에 관해서는 어떤 분이나 한 마디씩 하실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질구레한 얘기는 않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기억에 남는 부분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일단은 대담자도 대담자지만 인터뷰어인 이종태 기자의 소통능력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내용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얇은 책으로&amp;nbsp;이끌어가는 능력을 본받고 싶다. 그 외,&lt;/P&gt;
&lt;P&gt;신자유주의의 철저한 실제적 허구성과 그 유치한 이론적 소박함, 영국병과 영국 노동세력에 대한 영국 보수세력의 악질적 언론플레이, 과거&amp;nbsp;운동권에서 유행했던 매판자본론과 중남미에서 수입된 종속이론 등의 허구성&amp;nbsp;등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로 기억에 가장 남는 부분은......... 2가지로 요약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째, 한국의 진보는 성장전략이 없기 때문에 망할 수 밖에 없다는 정성일 교수의 발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둘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하나가 될 수 없는데, 진보조차 그 둘을 하나로 생각하는 데서 진보의 모순이 생겨난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 번째 요점에 대해선....... 정말 탁월하기 그지 없는&amp;nbsp;혜얀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막무가내 노무현 지지자들은 참여정부 시절의 각종 경제지표스펙의 향상을 들면서 속된 말로 '무쟈~껀' 반대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 성장이 분배랑 치밀하게 맞물려서 선순환을 이루고 있는가?'라고 지금 물어본다면...... 누가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이명박 정부들어 서민들의 삶이 힘들어진 것이 정말 급작스레 다 이명박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amp;nbsp;말할 수 있을까? 이명박의 불순함때문에 전 정권의 과오가 가려진 마스크 효과는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물론 노무현 들어 양질의 복지지출이 증가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치밀하게 성장과 연계되고 또 경제선순환에 기여될 수 있도록 세련되게 디자인되기는 커녕, 일회성으로 끝나고 만 정도의 것이라면, 심지어 진보에 제대로 된 분배전략이 있는가 까지도 다시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굳이 통계고 뭐고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제시하려면 얼마든지 찾아 할 수 있겠지만 그럴 필요는 없겠다. 참여정부의 분배는 저소득 취약계층에 치우친&amp;nbsp;지극히 보수적, 극우적&amp;nbsp;분배였을 뿐이다. 저자들이 말한대로의 유럽식의 포괄적이고 성장친화적인 복지는 아니었다. 어찌되었건, 무조건 민중, 민주, 생존권 보호등의 단순분배구호만을 외치며 한국경제의 비전을 제대로 제시하지 못하는 작금의 진보세력은 한국 정치판에서 포괄적 공감을 얻기 힘들다는 것이 대담자들의 요점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 번째 요점에 대해선 본인도 &quot;유러피언 드림&quot; 독후감에 언급했던 것처럼 할 말이 많은 부분이다. 자유주의가 전제통치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건강한 시민사회의식에서 발현되었음은 사실이지만, 그 기반이 사유재산권의 보장이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가져야 시민으로서 자신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류의 것이기에, 그것은 부르쥬아의 이념일 뿐이다. 그래서, 자유주의 발현 초기의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 각국에서는 재산이 있고 재산을 지킬 수 있는 남성에게만 투표권이 주어졌었고, 이는 현대인의 민주주의 의식에 비춰볼 때, 무척 원시적이고 반민주적인 민주주의일 수밖에 없을 것임은 명약관하하다 하겠다. 그런데, 이런 자유주의의 맹점이 한국에선 무시되고 받아들여진다. 극단적 자유주의자들인 극우수구들은 자신들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부르며 언어모순, 언어도단을 스스럼없이 일삼고 있고, 좌파는 좌파대로 재벌을 타파하고&amp;nbsp;제대로 된&amp;nbsp;시장경제를 이룩하자며&amp;nbsp;시장을 극단적 자유주의체제로 몰아가는 기이한 모순들을 범하고 있다. 저자들은 공인으로서 더 이상의 말을 아끼었겠지만, 굳이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을 본인이 이심전심으로 총대를 매자면,,,,,, 극우의 언론플레이, 언어유희에 놀아난 한국의 대다수 진보는 기본적인 사상에도 투철하지 못했다기 보다&amp;nbsp;&quot;빨갱이 컴플렉스&quot;를 아직도 들먹이며 자본과 야합한 세력 밖에 되지 않는다. 정권이 두 번이나 진보의 편이었는데 아직도 &quot;빨갱이&quot; 언론플레이가 통한다는 것이.......변명이 될 것인가? 물론 격조있고 양심있는 진보세력까지 이런 비판을 들을 필요는 없겠다. 단지 결과가 그러하기에 생각 좀 해보자는 취지로 한 얘기일 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상 나름의 판단을 몇 자 끄적여 보았다. 본 소감을 읽는 분들께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셨다면 그것만으로도 보람있을 것이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성장&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성장&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민주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민주주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진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진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자유주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자유주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분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분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장하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장하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정성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정성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이종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이종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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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요새 돌아가는 일이 하도 기가 막히고 답답하여 몇 자 적어봅니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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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paparazzi</name>
	    </author>
	    <updated>2009-08-18T12:51:58Z</updated>
	    <published>2009-08-18T12:51:5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김준규 검찰총장 후보의 매형이 보험사기로 A급 수배를 받았으나,&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잡힌지 40분만에 불구속처리되고, 당시 후보자는 담당검사에게 전화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걸어 확인만 했다고 그러는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검찰조직의 생리를 잘 모르시는 분들이 있는 거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가 검찰에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각종 저널을 통해 검찰이 대충 어떻게 돌아가는지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감은 잡고 있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검사들 끼리는..........&amp;nbsp;&amp;nbsp; 뭐 &quot;그 피의자가 매형이니 봐달라.&quot;고 노골적으로 부탁하지 않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냥&amp;nbsp; &quot;들리는 얘기로 그 피의자가 우리 매형인데 그게 맞느냐?&quot;고 한 마디 하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상대방은 &quot;예&quot; 하고, 더 이상의 대화 없이 암묵적으로 알아서 일을 합니다.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것을 두고 정말로 &quot;이심전심&quot;이라 하는거겠죠. 검사동일체의 원칙이기도 하겠지요.&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후보자 장인의 전과, 무기명 채권 양수, 자녀 위장전입, 요트-승마등의 호화 취미 등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더 거론할 것도 없이 위 대목 하나만 놓고도 후보자는 친인척 수사에 권력개입한 것이 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담이지만, 더 웃기고 미치는 것은 천정배 의원이 법무부 장관 시절 법무부로 파견나왔던&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후보자를 아주 아주 선견지명 있는 사람으로 검찰에 새바람을 일으킬 사람으로 칭송하면서,&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후보자의 전과를 놓고 그 능력에 비하면 사소한 문제라고 일축하는 대목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자기가 무슨 거물 정치인이라도 되는 마냥 당과 목소리도 따로 내더니&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젠 지난 정권에서 신자유주의 첨병 노릇 했던 과거까지 정당화시키는 게 아닌가 우려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게다가,,,,,, 매형의 사기사건에 권력개입한 대목을 두고 전혀 문제될게 없다고 잘라서 말합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저런 사람이 전 정권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냈다니......&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전에 민주화에 얼마나 기여했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장관까지 지냈겠지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지금은 사람이 많이 바뀐거 같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몇 자 적어본다는 것이 하~ 답답해서 길어졌습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가 바라는 것은......혹여나 검찰의 생리를 모르시는 분들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보수 언론과 검찰의 언론플레이에 넘어가지 않으십사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하는 것일 뿐입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냥 담당검사한테 확인전화만 했다구요? ㅎㅎㅎ 그게 실제&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현장에서는 개입입니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천정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천정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무기명 채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무기명 채권&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위장전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위장전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김준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김준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매형&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매형&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McRH&amp;amp;tagName=검찰총장 후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검찰총장 후보&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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