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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시사논객의 토론자료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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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북한 지령으로 제작된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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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EMBED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jqGcrIOyIN0&amp;hl=en&amp;fs=1&amp;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1979년 12월 18일 보통 군법회의에서 비공개로 행한 김재규의 최후진술에서 10.26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범 김재규는 &quot;5.16도 10월 유신도 범법이 아니라면 자연히 10.26의 혁명도 범법이 아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투쟁을 이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지 않으면 10.26 혁명이라고 하는 것은 의미 없는 혁명이 되고 맙니다&quot;라고 말하였음을 위의 1996년 9월 18일자 MBC 뉴스동영상은 보여준다. 이때 김연석 기자의 멘트 &quot;김재규는 이 최후진술에서 이른바 서울의 봄과 광주시민항쟁을 예고해서 관심을 끌고 있습니다&quot;가 들린다.&quot;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16_6172.html ) 도대체 이 말이 무슨 말인가? 이 말은 김재규가 예언을 했다는 말이 아니라, 운동권 변호사들이 시키는대로 말했음을 반영한다. 김재규의 최후진술 직전 면회한 운동권은 그렇게 말해야 그도 운동권도 혁명의 명분을 얻게 된다며 그를 설득했다는 말이 전해진다.&lt;BR&gt;&lt;BR&gt;자, 김재규의 부하 정승화가 참모총장이었던 1979년 김영삼씨는 군인이 정치하면 안된다고 말했고, 정승화는 김영삼이 대통령이 되면 안된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1987년 12월 김영삼씨가 말을 싹 바꾸어 정승화를 신민당 고문으로 추대하며 정승화의 신민당 입당 환영행사를 성대하게 치루었다. 그로부터 8년후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은 위헌을 해가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너뜨리며 12.12특별법을 제정케 하여 1996년 12.12-5.18 재판이 마무리될 무렵 월간지 신동아 10월호가 김재규의 최후진술 녹음 테이프를 공개하고, MBC가 방송했다. 즉, 운동권의 어거지 역사 논리의 승리를 자축한 것이다.&lt;BR&gt;&lt;BR&gt;무엇이 김재규와 그의 부하 정승화의 손을 들어준 12.12-5.18 재판의 잘못된 역사 논리였던가? 12.12사태는 정승화에게 김재규 공범의 의혹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김재규의 쿠데타를 완성시키려 한데서 비롯되었다. 김재규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었을 때 정승화는 대통령의 권한을 침범하여 합수부장을 해임시키고, 보안사령관을 동해경비사로 좌천시키려 했다. 합수부장 해임을 합수부의 사실상의 해체를 의미하며, 김재규를 수사하던 수사기관의 해체는 김재규의 사면복권을 의미하였다. 그러기에 김재규를 소리없이 도왔던 정승화의 손을 들어준 판결은 가히 운동권이 김재규를 10.26혁명 열사로 미화시키는 작업이 가능케 하는 판결이었다. 이 판결로 이제 김재규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lt;BR&gt;&lt;BR&gt;무엇이 12.12-5.18 재판의 역사논리였던가? 박정희 대통령 시해범을 체포하였으며, 수사한 것은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의 유신정권에 반기를 든 행위였다는 것이요, 광주시민들이 박정희-최규하 대통령의 유신정권을 수호하기 위해 광주사태를 일으켰다는 논리였다. 쉬운 예로, 정몽주는 고려왕조의 반역자요, 이성계는 고려왕조의 충신이었다는 어거지 주장에 비유될 수 있는 논리였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1980년 5월의 전민봉기 논리였던가? 북한군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5월 21일자의 아래 대자보를 보라.&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daejabo/5-21.jpg&quot;&gt;&lt;BR&gt;&lt;BR&gt;5월 21일 아침 발행된 위 대자보는 &quot;저 악랄한 유신독재자 박정희놈의 하수인 최규하, 신현확, 전두환놈의 악랄한 만행을 보라&quot;는 문구로 시작된다. 이 문구는 전혀 박정희-최규하의 4공화국 헌정을 수호하려는 의도로 해석될 수 없다. 도대체 일국의 대통령을 최규하놈이라고 부르는 말투는 어느 나라 말투인가? &lt;BR&gt;&lt;BR&gt;무슨 이유에선지 전남대 5.18연구소는 이 대자보 발행인 명칭을 &quot;전·조대학생혁명 위원회&quot;로 수정하였다. 자, 여기서 혁명위원회라는 명칭이 무엇을 시사하는지 위의 김재규의 발언에서 분명해진다. 그리고 김재규의 최후진술은 박정희 대통령만 희생시키면 된다는 주징임에 비해, 이 혁명위원회는 국가 전복을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저런 혁명위원회가 전남대에 존재하지 않았었다. 5.18연구소도 너무 이상했던지 발행인 명의를 &quot;전·조대학생혁명 위원회&quot;로 바꾸어 놓았지만 이것은 또 하나의 유령단체일 뿐이다. 대자보 원문에서는 그 명의가 &quot;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quot;인데, 아마도 이것은 북한군이 실수로 북한식 표현을 쓴 듯하다. 광주사태 때 비협조적 광주시민들에게 화를 내면서 북한군 입에서 북한 말씨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정체가 노출될까 하여 광주시민들을 살해하였다고 한다. 광주에 해방구는 설치할 수 있었으되, 이처럼 아직 노골적으로 그들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이다.&lt;BR&gt;&lt;BR&gt;1980년 봄의 거의 모든 대자보 문안들은 힉생들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 배후 세력이 작성한 것이었다. &quot;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 오후 3시부터 도청으로 진격하라! 등의 표현은 군대식 명령이지, 전남대 학생들의 표현이 아니었다. 전남대 학생들이 부모뻘, 혹은 조부모뻘 어른들에게 &quot;각 동별로 동사무소 장악, 동별로 집합!&quot; 지시를 내린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군대 명령이었다. 그런데 어느 나라식 군대 명령이었던가1 그 단서가 발행인 명칭에 있다: &quot;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quot; 남한말에 아직 서툴렀던 간첩은 &quot;전국대학생혁명위원회&quot;라는 의미의 명칭을 사용하려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조선 대학생이란 표현은 북조선 대학생과 남조선대학생 전체를 포함하는 의미를 함축한다. &lt;BR&gt;&lt;BR&gt;자, &quot;광주는 부른다&quot;라는 글귀가 보이는 아래 포스터는 광주사태 당시 북한의 포스터이다. 이 포스터는 남조선 학생들이 광주에서 북조선 학생들을 부르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한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nk/movie-poster.jpg&quot;&gt;&lt;BR&gt;&lt;BR&gt;그리고 아래 동영상 4:30 에서부터 북한에서 광주사태를 생중계하는 장면이 나온다. 광주사태와 때를 같이하여 북한 말로 북조선 학생들이 광주인민봉기를 지지하는 궐기대회를 진행하고 있다.&lt;BR&gt;&lt;BR&gt;&lt;EMBED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2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jwmpjvgNH9o$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BR&gt;&lt;BR&gt;자, 위의 대자보를 하루 전인 20일의 대자보와 비교해 보자. 20일에는 그 명의가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가 아니라 학생혁명위원회였다. 왜 이렇게 작성자 명의가 자주 바뀌었는가? 이것은 그 명의가 얼굴 없는 명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요, 남한에 그 실체가 없는 명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만약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 혹은 학생혁명위원회 등의 단체들이 실재했다면 이것은 김대중 홍위병들의 내란 음모가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그러나 전남대에 전조선대학생혁명위원회가 있었는가? 광주 학생들이 부모뻘 시민들에게 &quot;무기를 제작하라!...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우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quot; 등의 군대식 명령을 내렸는가? &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daejabo/5-20.jpg&quot;&gt;&lt;BR&gt;&lt;BR&gt;시민군 대장이 그런 군대식 명령을 광주 시민들에게 내렸는가? 아니다. 박남선씨가 정체불명의 인물들로부터 시민군 대장으로 지명받은 때는 위의 두 대자보가 유포된지 훨씬 후였다. 학생 혁명군은 시민군 대장조차 모르는 군대이다. 전남대 학생은 그 누구도 학생 혁명군이란 명칭을 사용한 적이 없다. 학생 혁명군이란 명칭은 하나의 군대 조직을 지칭한다. 그리고 모든 군사 조직은 군사 지휘관이 있을 때에만 통솔과 운용이 가능하다. 자, 시민군 대장조차 누가 무기 탈취를 지휘했는지 알지 못한다. 당시 정비공이었던 박남선씨는 무기고가 어디 있는지조차 몰랐다. 따라서 시민군 배후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만이 설명해 줄 수 있느 사건들이 있다.&lt;BR&gt;&lt;BR&gt;광주사태라는 명칭이 어디서 왔는가? 북한은 5월 18일 광주사태가 일어날 것을 정확하게 예측하고 생방송 중계를 준비하고 있다가 그날 오후 7시부터 모든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매일 광주사태를 생방송 중계하였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그 누구도 광주사태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몰랐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사람들이 6월 24일에 드디어 내일 6.25 전쟁이 터진다는 정보를 알고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다. 6.25라는 명칭은 훨씬 나중에 붙은 것이고, 그 당시에는 북한군이 휴전선을 침범하는 일이 늘상 있었기 때문에 국방장관조차도 그날의 전투가 전면전의 시직인 줄 알지 못했었다. &lt;BR&gt;&lt;BR&gt;광주사태 초기에도 그 누구도 그것이 광주사태인 줄 알지 못했다. 5월 18일 오후 1시 반경 김대중 조직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퍼뜨리면서 이것이 광주사태의 서막이라고 광고했던 것이 아니다. 유언비어에 속은 수백 명의 시위대가 두어시간후 순경 45명을 납치하였을 때 이것이 광주사태의 서막이라고 광고했던 것도 아니다. 그보다 사흘 전 서울에서는 십만 명이 운집한 시위가 있었으며, 유시민 시위대가 시민버스 탈취하여 순경들을 깔아죽였는데, 그와 비슷한 사건은 광주에서 5월 20일 밤에야 일어났다. 그러나 여전히 광주사태라는 단어도 개념도 없었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은 5월 22일 목포의 북한군이 처음으로 사용하였으며, 이어 서울의 김대중 홍위병들이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를 발행하였고, 언론이 그 대자보 명칭대로 광주사태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23일 이후였다.&lt;BR&gt;&lt;BR&gt;신군부라는 용어도 김일성이 처음 지어낸 용어였듯이, 광주사태라는 말도 북한군이 처음 사용하였다. 광주사태의 어원은 5월 22일 목포의 북한군이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한데서 비롯된다. 무엇이 목포사태였던가? 목포 주재 박홍서 조선일보 기자조차도 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같이 본사로 송고하였을 뿐이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image/news/mokpo21-22.jpg&quot;&gt;&lt;BR&gt;&lt;BR&gt;그리고 아래 기사에서 보듯 5월 23일자 조선일보 7면 왼편에서 목포에 복면부대가 등장하여 총쏘며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보도한다. &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image/news/chosun5_23mokpo.jpg&quot;&gt;&lt;BR&gt;&lt;BR&gt;그런데 위의 기사가 실리기도 하루 전에 목포에서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대자보가 등장한다. 이 대자보에서 광주·목포사태라는 용어가 두번 사용되고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한번 사용된다.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용되는 순간이다. 자, 5월 21일 전남도청 등 주요관공서들이 시민군에 함락됨으로 그날 오후부터 경찰이 시민군 지휘 하에 들어가는 해방구가 설치되었다. 그리고 목포의 대자보가 경찰들을 사형에 처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누가 누구에게 군대식 언어로 명령을 하달하는 것인가?&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daejabo/5-22mokpo.jpg&quot;&gt;&lt;BR&gt;&lt;BR&gt;&quot;군과 경찰은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당장 색출하여 가차없이 처형하라&quot; -- 복면무장단체가 이렇게 지시한 것인가? 목포의 모든 파출소들과 주요 관공서들을 파괴하고 쑥대밭으로 만든 범죄자들이 누구를 대상으로 이런 지시를 하는 것인가? 이런 고압적인 지령은 전혀 민주적 의사전달 방식이 아니다. 그리고 학생혁명위원회 명의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들과 그 작성자가 동일인이었음의 관찰되는 목포의 이 대자보는 목포가 북한군이 북한의 지령을 받아 광주사태를 선동하는 아지트였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자료 중 하나이다. 동일 배후세력이 광주에 뿌린 삐라에서는 목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으니 싸우다 죽으라고 선동하고, 목포에서는 광주에서 죽은 사람들이 있으니 순경들을 즉결 사형에 처하라고 선동한다. 즉, 국가전복의 수순으로서 광주에서 유혈무장폭동을 선동했던 것이다.&lt;BR&gt;&lt;BR&gt;사실 우리는 목포사태라는 말을 이제껏 들어보지 못했으나, 목포에 광주사태 선동을 위한 북한군 아지트가 있었다는 탈북여성의 증언을 읽고 남한 자료를 찾아보니, 실제로 목포사태라는 것이 있었으며, 광주사태의 전개과정에 대한 중요 단서들이 목포사태에 있었다. 탈북자들의 5.18증언록 &quot;화려한 사기극의 실체&quot;에서 그녀는 부마사태, 목포사태, 광주사태 배후에 동일 북한군 조직이 있었음을 이렇게 기술한다:&lt;BR&gt;&lt;BR&gt;&lt;&lt;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79쪽).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81쪽).&gt;&gt; &lt;BR&gt;&lt;BR&gt;그리고, 부마사태가 10.26 대통령 시해사건으로 이어졌으며 부마사태와 광주·목포사태 사이에 세개의 김재규 사건이 있었다. 김재규의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가 첫번째 사건이었으며, 김재규 부하들과 합수부간의 충돌로 야기된 12.12사태가 두번째 사건이었으며, 5월 하순으로 예정된 김재규 사형 집행이 그 세번째 사건이었다. 1995년 5월1일 서울지방검찰청 공안 1부 장윤석 부장검사가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보낸 서면질의에 대한 소견과 논평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당시 전두환 중앙정보부장 서리가 5월 하순의 김재규 처형 예정일에 맞춘 남한의 대규모 시위와 더불어 북한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했었음을 이렇게 기술한다:&lt;BR&gt;&lt;BR&gt;&lt;&lt;▲1980년 5월 10일 전두환 당시 중앙정보부장서리는 김영선 중앙정보부 2차장으로부터 일본 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남침첩보에 대한 보고를 받았음.&lt;BR&gt;&lt;BR&gt;▲당시 중앙정보부가 일본내각조사실로부터 입수한 북한 남침제보의 내용은,북한은 한국정부가 80년 4월 중순경에 김재규를 처형할 것으로 예상하고, 김재규 처형시에는 항의 데모사태가 발생하여 남침을 위한 결정적 시기가 조성될 것으로 판단하여 남침시기를 4월 중순경으로 예정하였으나 김재규의 처형이 지연됨에 따라 이를 연기하여 오던 중, 80년 5월 들어 학생과 노동자의 소요사태가 격화됨에 따라 한국 내 소요사태가 최고조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80년 5월15일에서 5월20일어간에 남침을 감행하기로 결정하였다는 것이었음 (&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document/president_reply.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www.study21.org/518/document/president_reply.htm&lt;/FONT&gt;&lt;/U&gt;&lt;/A&gt; ).&gt;&gt;&lt;BR&gt;&lt;BR&gt;그런데, 이 남한 자료가 탈북 여성이 전해주는 북한 자료와 놀랍게도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사북탄광사태 배후에도 동일한 북한군 조직이 있었음을 밝히는 이 여성은 그 사실을 이렇게 기술한다:&lt;BR&gt;&lt;BR&gt;&lt;&lt;1980년 3월로 계획되어있던 광주폭동이 5월로 늦어진 것은 1980년 4월말에 일어났던 강원도의 사북탄광사태와의 밀접한 연관 때문이었다. 사북탄광에서의 폭동조짐을 첩보망을 통해서 사전부터 구체적으로 감지하고 있던 북한은 3월로 예정되었던 광주폭동을 4월말로 연기하라는 지령을 내려 보냈고 득보다 실이 많은 산발적인 소요보다는 전국각지에서 일시에 동시다발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전국규모의 항쟁이 성격으로 보나 위력으로 보나 훨씬 효율적이라는 것을 계산하였다 (78쪽). 북한쪽의 입장에서 사북탄광사태는 치명적인 실패작이었고 그것이 무산됨으로써 광주폭동은 부득이하게 5월 중순을 넘기게 된 것이었다 (79쪽).&gt;&gt;&lt;BR&gt;&lt;BR&gt;그녀의 증언을 더욱 확증해 주는 북한 자료 중에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교시가 있다:&lt;BR&gt;&lt;BR&gt;&lt;&lt;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 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gt;&gt;&lt;BR&gt;&lt;BR&gt;1980년 5월 광주사태 직전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는 왜 북한군이 작성한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들에서는 &quot;학생 혁명군&quot; &quot;학생혁명위원회&quot; 등의 명의가 들어있었는지를 시사한다:&lt;BR&gt;&lt;BR&gt;&lt;&lt;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gt;&gt; (&lt;A href=&quot;http://kforum.co.kr/bbs/view.php?id=all&amp;page=10&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518&quot;&gt;&lt;BR&gt;&lt;U&gt;&lt;FONT color=#0066cc&gt;한국논단 2007년 2월호&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여러 탈북자들의 증언들을 종합해 보면 광주사태 전에 이미 여러 달 체류하며 무기탈취 준비 등 간첩 역할을 한 북한군 특수부대가 있었다. 그런데, 5월 18일경 잠수함을 타고 남한에 침투해 봉기군과 합세하다가 25일 경 갑자기 북상복귀한 300 명씩 두 떼거리의 북한군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증언은 1995년부터 시작된 탈북자들의 일치된 증언이기에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2005년 5월 17일 기자 출신 한영진 등 세 명의 탈북인이 쓴 기사에서 &quot;북한의 특수부대 한 개 여단이 잠수함을 타고 서해로 들어가 무장 봉기군과 합세했다&quot;는 말이 광주사태 당시 북한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음을 증언한다. (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1300&amp;num=5488)&lt;BR&gt;&lt;BR&gt;맨위의 1996년 9월 18일자 뉴스에서 우리는 성경섭 기자의 이런 멘트를 듣는다. &quot;또 오후 6시 45분쯤에는 잔당으로 추정되는 거동 수상자 2명이 캐피탈 승용차를 타고 대관령 방향으로 달아났다는 신고도 들어와 있습니다. 이들이 타고 간 차량은 캐피탈 승용차 강원 2다의 4440호입니다. 혹시 이 차량을 발견하거나 거동수상자를 대관령 부근 지역에서 발견한 주민들은 즉각 인근 군부대나 경찰로 신고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17_6172.html ). 아마 과민한 반응에 의한 신고였을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보고 거동이 수상하다고 하는가? 무장간첩 잔당 두 명에 대해서도 이처럼 온 국민이 불안해 했다. 그러나 (탈북자들의 증언이 사실일 경우) 1996년 9월 침투한북한군의 수는 1980년 봄에 광주 등에 침투해 있던 북한군의 수에 비해 지극히 적은 것이다. 그럴진대 확인이 필요하지 않은가. &lt;BR&gt;&lt;BR&gt;본래 광주시민군의 숫자는 많지 않았다. 당시 전남대생들에게 물어보라. 모두 무기 반납을 원했다. 운동권 학생들조차 무장봉기에 반대했으니, 시민군 수는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21일 저녁~22일 새벽부터 복면무장단체가 등장하면서 갑자기 과격파 시민군이 등장한다. 그리고, 5월 26일 갑자기 시민군 수가 확 줄었다. 남한 자료만으로는 풀지지 않는 이런 의문의 수수께끼의 퍼즐 맞추기를 탈북자들이 전해주는 북한 자료가 해주지 아니하는가!&lt;BR&gt;&lt;BR&gt;전옥주는 누군가가 (간첩이) 주는대로 쪽지를 받아 선무방송을 했지만 300명씩 두 떼거리의 연고생이 광주시민군 합세하기 위해 광주로 오고 있다는 말을 자신도 믿을 수 없다. 더구나 한 떼거리의 연고생 300명은 목포쪽에서 온다고 하니 그때는 그렇게 방송했지만, 속은 느낌이라고 훗날 증언했던 것이다. 만약 연고생 300명이 위장용어였다면 북한 자료가 맞는 것이다. 예를 들어, &quot;나머지 300명은 북한 동해안 신포지역의 馬養島(마양도)에서 출발해 잠수함을 타고 전남 지역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찰국 5부장이 공해상에서 대기 중인 배에 타고 현장을 지휘했다고 한다&quot;는 북한 자료와 맞아떨어지는 것이다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nk300.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study21.org/518/discuss/nk300.htm&lt;/FONT&gt;&lt;/U&gt;&lt;/A&gt; ) 백 명 단위의 복면무장단체가 목포에 출현한 것을 박홍서 기자가 먼저 확인하였고, 이어 그들이 광주에도 등장한 것을 김영택 기자가 확인하였다. 날자와 장소 및 사건 등의 정황이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목포의 북한군 아지트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였으며, 몇몇 광주사태 선동 삐라 및 무기탈취 등의 사건 배후에 목포 아지트가 있었던 것이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IMG border=0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gt;&lt;BR&gt;&lt;BR&gt;&lt;FONT color=#0066cc&gt;&lt;U&gt;☞ &lt;/U&gt;&lt;/FONT&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evidence02.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evidence.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icide.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evidence03.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북한 지령으로 제작된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books.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록 구입 안내 및 관련 도서&lt;/FONT&gt;&lt;/U&gt;&lt;/A&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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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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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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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30T12:08:52Z</updated>
	    <published>2009-10-30T12:08:5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탈북자들이 남한에 처음 와서 적응하는데 가장 어려움을 겪는 문제가 바로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라 부르는 광주사태가 도대체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 하는 문제이다. 2008년 11월 조갑제 기자가 &lt;&quot;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quot; 주장은 믿을 수 없다!&gt;는 제목의 글을 쓴 것이 탈북자들에게는 상당히 의외로 받아들여진다. 5.18은 북한에서는 매년 성대한 광주인민봉기 기념 행사일이다. 5.18은 북한 주민에게 반미, 자주, 통일을 향한 광주인민봉기요, 그러기에 광주인민봉기는 이미 북한사의 일부로서 자리매김한지 오래다. 이것은 단지 동일한 사건에 대한 관점의 차이만은 아니다. 북한에는 남한 사람들이 모르는 5.18 정보, 즉 북한이 5.18에 개입했었다는 명백한 증거들이 있다. 아래 사진을 보라.&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image/nk/518ho.jpg&quot;&gt;&lt;BR&gt;&lt;BR&gt;조갑제 기자는 문제의 그의 글에서 광주사태 당시 &quot;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었고 공중감시도 정밀했다&quot;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사실, 1996년 9월 18일 당시 국민회의의 정동영 대변인이 &quot;북한 무장간첩 침투는 용서할 수 없는 도발행위라고 규탄하고 잠수정이 민간인에게 먼저 발견된 사실은 막대한 방위비를 쓰는 군의 해상방위 감지능력에 구멍이 뚫린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quot;한 사실이 있다 ( &lt;A href=&quo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9_6172.html&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9_6172.html&lt;/FONT&gt;&lt;/U&gt;&lt;/A&gt;: 사실 광주사태야말로 대규모 무장간첩 침투 사건이었음을 감안할 때 정동영의 이 날의 주장은 광주사태에 대한 그의 평소의 주장과 엇갈림). &lt;BR&gt;&lt;BR&gt;동일한 대상에 대하여 우리는 무장간첩 혹은 무장공비라고 부르고 탈북자들을 북한에서 쓰던 표현대로 북한군 특수부대라고 부르는 것이다. 자, 1996년 9월 18일의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9.18 강릉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잠시 아래 두 장의 사진을 보자. &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gun/strange-gun.jpg&quot;&gt;&lt;BR&gt;&lt;BR&gt;광주시민군 배후에 북한군이 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별도로 하더라도 남한 자료로도 그런 추정은 이미 충분히 가능하였다. 광주사태 당시 유언비어를 퍼뜨렸던 자들은 전두환이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사실조차 몰라 공수부대 대장이라고 했었는데, 또 하나의 대장이 있었으니 시민군 대장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박남선 씨를 시민군 대장으로 임명하지 않고 어떤 배후 인물들이 지명했는데, 그 인물들은 박남선 자신도 누군지 모르는 인물들이었다. (시민군 대장은 전남대생이 아니었다. 막상 광주사태가 시작되자 전남대 운동권은 무기 탈취에 반대했으며, 무기를 회수하여 반납하려고 노력했는데, 이는 광주에 침투해 있었던 북한군인들의 증언과 일치한다.) 사실 전두환은 공수부대 대장도 아니었고, 공수부대 대장이라는 것도 없었다. 유언비어를 퍼뜨린 쪽에서 공수부대 대장 대 시민군 대장간의 싸움판을 만들어 놓았고, 많은 시민들이 그 유언비어 최면에 걸려있는 것이다.&lt;BR&gt;&lt;BR&gt;2007년의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가 그 유언비어의 연속판이었다. 여전히 청중에게 전두환이 공수부대 대장이었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하고 있고, 중학교 중퇴자였던 시민군 대장을 육사 출신 예비역 장성으로 등장시켜 공수부대 대장 대 시민군 대장간의 싸움판으로 인식되게 최면을 걸었으며, 대다수 국민이 또 그 최면에 걸려들었다. 1996년 9월 강릉 무장공비 침투사건 첫날 방송사들은 전혀 다른 방향에서 과민하였다. 무장공비가 승용차를 탈취해 도주한 것으로 파악되니 시민들은 신고해 달라는 방송을 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남한 시민과 동일한 복장을 하고 활보할 때는 그 누구도 육안으로 누가 북한군인지 식별할 수 없다. 그러나 식별이 불가능하니 무장간첩은 없었다는 논리가 가능하겠는가?&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gun/machine-gun.jpg&quot;&gt;&lt;BR&gt;&lt;BR&gt;여기 어설프게 전경 복장을 한 시민군이 시민군 차량 위에 기관총을 설치해 놓았다. 여태까지는 이런 무장폭도들을 민주화운동가와 동일시하는 주장이 지배해 왔었다. 그러나 탈북자들은 북한군이 이런 복장으로 위장하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자, 전경 복장을 하고 군사장비로 무장한 이 폭도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이 침투해 있었느냐 아니냐의 문제이다.&lt;BR&gt;&lt;BR&gt;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했느냐 안했느냐의 문제는 사실 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이냐 북한의 5.18이냐의 문제와 맞물려 있다. 광주사태는 과연 언제 시작되었는가? 학생 운동권이 제작하여 1980년 5월 22일 대학가에 붙은 광주사태 속보 대자보는 전남대 총학생회장 &quot;박관현 사망설&quot;이 유포된 시점인 5월 18일을 광주사태의 시작으로 간주하였으며, 5.18이란 명칭은 이 유언비어에서 유래한다. &quot;박관현 사망설&quot; 유언비어란 5월 18일 박관현이 여수로 떠난 직후 김대중 조직이 &quot;광주경찰이 박관현을죽였다&quot;고 퍼뜨린 유언비어를 말한다. 이 유언비어가 퍼지자 경찷서들이 파괴되고 순경 45명이 납치되는 사건이 일어났으며, 광주경찰서로부터 치안유지 지원요청을 받은 광주향토사단이 7공수 2개 대대를 보내 시위 진압을 지원한 것이 광주사태 전개의 서막이었다. 김대중의 국민연합은 본래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일을 5월 22일로 잡았었음에도 김대중 내란과 5.18이 동의어가 된 까닭은 &quot;박관현 사망설&quot; 유언비어가 유포된 시점을 광주사태의 시작으로 &quot;광주사태 속보 대자보&quot;가 간주했기 때문이었다. 그 시작은 수치스러운 거짓말이었다. 그럼에도 서록 적국 관계인 남한과 북한 양국에서 5.18이 성스러운 날이 되었다. 탈북자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양립이 불가능한 명제이다. 5.18은 도대체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lt;BR&gt;&lt;BR&gt;금년 9월 하순에 발간된 탈북자들의 5.18 증언록 &quot;화려한 사기극의실체&quot; 증언 1은 광주시민군을 배후에서 조종한 북한군 지휘관 중에 534부대 타격대의 안창식 대위가 있었다는 사실을 공개한다. 과연 조갑제 기자 등이 주장하는 것처럼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어서 북한군 침투가 불가능했었는가? 안창식 대위의 내연의 처였던 탈북여성은 광주사태를 지휘한 아지트는 목포에 있었으며, 목포에 침투해 있었던 북한군은 북한의 지령을 받아 시민군을 조종했다고 증언한다: &lt;BR&gt;&lt;BR&gt;&lt;&lt;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76쪽),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본인의 말에 의하면 그들이 목포에서 만난 7명의 북한요원들은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에 부산과 마산에서 일어났던 대학생들의 반정부폭동을 배후조종하기 위해서 파견된 사람들이었고 북한은 부산, 마산 폭동을 5.18광주사태와 마찬가지로 전국으로 확대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77쪽).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78쪽).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81쪽).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87쪽).&gt;&gt;&lt;BR&gt;&lt;BR&gt;만약 조갑제 기자 등이 주장하듯 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다면 북한군이 목포에 침투하여 있었다는 위의 증언은 부정될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목포 주재 박홍서 조선일보 기자는 목포가 광주사태의 아지트였다는 탈북여성 증언과 상당히 일치하는 기사를 송고하였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image/news/mokpo21-22.jpg&quot;&gt;&lt;BR&gt;&lt;BR&gt;목포가 철저히 봉쇄되어 있었기는커녕 경찰과 군인의 그림자도 안보였다. 목포사태가 아니었음에도 광주보다 더 난장판이었다. 22일 새벽 2시에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등이 파괴되었다. 새벽 3시에는 무장복면부대 백 명이 아무데나 총 쏘며 다녔다. 기자조차 무장복면부대 백 명이 갑자기 어디서 출현했는지 알지 못한다. 이런 상황은 조갑제 가지 등이 &quot;해안과 항만은 철저히 봉쇄되어&quot; 있었다고 주장하는 상황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어 보인다. &lt;BR&gt;&lt;BR&gt;1996년 9월 18일 목포처럼 항만 도시였던 강릉에서 일어난 사건을 보도한 아래 뉴스 동영상과 비교해 보라. 그때는 북한잠수함이 암초에 걸려 있어고, 택시 운전사의 신고가 있어 군의 신속한 대응이 가능했음에도 언론과 여야 정치권이 한 목소리로 안보에 구멍이 뚤려 있음을 질타하지 않았는가!&lt;BR&gt;&lt;BR&gt;&lt;EMBED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Wm74GGi1nhE&amp;hl=en&amp;fs=1&amp;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BR&gt;&lt;BR&gt;&lt;&lt;오늘 새벽 1시 35분 택시기사 이진규氏의 신고를 받은 강릉시 강동파출소 경찰관은 이氏와 함께 현장을 확인하고 인근 軍초소에 신고했습니다. 그러나 軍초소에서는 관할구역이 아니라며 신고접수를 거부했습니다.&lt;BR&gt;&lt;BR&gt;● 이진규氏(최초 신고자): 순경이 軍초소에다가 전화를 하니까 여기 관할이 아니고 이 관할은 저기 경포 관할이라 이러면서...&lt;BR&gt;&lt;BR&gt;● 기자: 할수없이 파출소 경찰관은 신고자 이진규氏를 데리고 바로 이곳 軍초소로 달려왔습니다.&lt;BR&gt;&lt;BR&gt;이때 軍초소 병력은 취침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찰관과 이氏는 10분 이상 군장을 갖추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gt;&gt;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4_6172.html )&lt;BR&gt;&lt;BR&gt;&lt;&lt;● 앵커: 식량사정이 극도로 나빠지는 등 체제붕괴 위기에도 불구하고 일으킨 이번 북한의 도발은 북한 스스로가 긴장을 자초했다고 하는 점에서 바로 그 점이 나름대로 노렸던 목적이 아니었던가 하는 분석이 나오고 있습니다.&gt;&gt;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5_6172.html )&lt;BR&gt;&lt;BR&gt;&lt;&lt;● 기자: 북한 남포에서 합영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대우그룹 북한관계 사무실에서는 오늘 어두운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북한에 파견돼 있는 직원들의 신변이 걱정되기 때문입니다.&gt;&g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6_6172.html) &lt;BR&gt;&lt;BR&gt;&lt;&lt;● 앵커: 정부는 오늘 오후 권오기 통일 부총리 주재로 통일 안보정책조정회의를 갖고 북한 무장간첩의 침투가 국내의 정국 혼란을 유도하기위한 것으로 보고, 도주한 간첩을 철저히 색출할 것과 이 같은 침투기도에 대해 단호히 대응하기로 했습니다.&gt;&gt;&lt;BR&g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7_6172.html )&lt;BR&gt;&lt;BR&gt;&lt;&lt;● 기자: 의원들은 또 대간첩 작전이 주임무인 해안부대가 초기에 잠수함 식별을 하지 못해 그만큼 대처가 늦어졌다고 지적하면서 유기적인작전 지휘 체계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따졌습니다.&gt;&gt;&lt;BR&g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8_6172.html )&lt;BR&gt;&lt;BR&gt;&lt;&lt;● 앵커: 신한국당의 김 철 대변인은 오늘 성명을 통해 무장간첩이 침투하고 친북한 조직이 활보하는 안보상황에서 정치권의 각성이 절실히 요구되며 일부 정치세력의 환상적인 오판은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lt;BR&gt;&lt;BR&gt;국민회의의 정동영 대변인은 북한 무장간첩 침투는 용서할 수 없는 도발행위라고 규탄하고 잠수정이 민간인에게 먼저 발견된 사실은막대한 방위비를 쓰는 군의 해상방위 감지능력에 구멍이 뚫린 것을 의미한다고 지적했습니다.&lt;BR&gt;&lt;BR&gt;자민련의 안택수 대변인은 무장간첩 침투는 북한의 대남 적화통일 야욕이 변함 없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며, 평소 안보태세를 소홀히 한정부의 안이한 대북자세를 규탄하지 않을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gt;&g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9_6172.html )&lt;BR&gt;&lt;BR&gt;&lt;&lt;● 앵커: 로이터와 AP통신 그리고 CNN과 NHK 방송 등 세계주요 언론사들은 오늘 잠수함을 이용해서 우리나라 강릉 앞바다로 침투한 북한의 무장간첩단 도발사건을 신속히 보도했습니다.&gt;&gt;&lt;BR&g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00_6172.html )&lt;BR&gt;&lt;BR&gt;&lt;&lt;● 김상균(통일외교부장): 지난 68년 이른바 청와대를 부수기 위해 남파됐다는 김신조 일당은 당시 우연히 마주쳤던 2명의 나무꾼 신고로 대부분 사살되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근 30여년이 지난 오늘 다시 잠수함을 타고 남파됐던 북한 무장간첩들의 비극적인 상황 이면에는 역시 한 택시기사의 재빠른 신고와 군경 합동작전요원들의 노고가 함께 어우려져 있습니다.&gt;&gt;&lt;BR&gt;(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101_6172.html )&lt;BR&gt;&lt;BR&gt;그런데, 광주사태 당시에는 세계주요 언론사들이 광주사태 뉴스를 더욱 긴박하게 보도했었다. 그러면 미국 3대 방송사 ABC, CBS, NBC의 방송을 다시 시청해 보자. &lt;BR&gt;&lt;BR&gt;&lt;EMBED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0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PWOYtgifxQs$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BR&gt;&lt;BR&gt;동영상 시작후 3분 3초부터 3분 10초에서 NBC 기자는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으로 죽임을 당한 시민 사망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못박아 말한다. 그리고 이 동영상 끝무렵에서 원래 시위를 주도하였던 운동권 학생들은 총기 무장을 거부하였고, 그들이 누군지 알지 못하는 과격파가 등장해 무장봉기를 주도하였다는 멘트가 나온다. 이 두가지 멘트 모두 광주에 침투해 있었던 북한군 증언과 일치한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IMG border=0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gt;&lt;BR&gt;&lt;BR&gt;&lt;FONT color=#0066cc&gt;&lt;U&gt;☞ &lt;/U&gt;&lt;/FONT&gt;&lt;/A&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evidence.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icide.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mokpo.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북한군 일부 목포 경유 광주 침투&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evidence02.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광주사태는 남한의 5.18인가 북한의 5.18인가?&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books.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록 구입 안내 및 관련 도서&lt;/FONT&gt;&lt;/U&gt;&lt;/A&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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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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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28T05:47:42Z</updated>
	    <published>2009-10-28T05:47:42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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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2008년 11월 조갑제 기자는 &quot;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quot; 주장은 믿을 수 없다!&quot;는 제목의 글을 썼던바, 이 글 제목은 증언과 주장의 혼동을 전제하는 것이었기에 논란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만 명 탈북자들은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는 광주사태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은 광주인민봉기와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북한에서 보고 들은 북한인민봉기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다. 증언은 주장이 아니다. 만약 북한에서도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른다면 탈북자들이 남한에서 혼란을 느낄 이유가 없다. 그런데 동일한 5.18사건에 대하여 남한과 북한이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이 차차 입을 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lt;BR&gt;&lt;BR&gt;김대중, 노무현 좌파정권 시절 탈북자들이 자유롭게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을 하지 못하는 시절이었다. 정권교체후 광주사태의 진실규명이 학수고대되던 때에 문제의 글은 탈북자들은 입을 닫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받아들인 탈북자들이 있다. 조갑제 기자 역시 그 진심은 선의의 의도였겠으나, 탈북자들의 발언권 또한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 진정한 민주주의의 가치일 것이다. 탈북자들이 근래에 광주사태에 대하여 입을 열기 시작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는 당시 서울에서 학생이었던 자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서울의 학생들이 광주사태의 한 당사자였던 것처럼 당시 북한군 역시 광주사태의 한 당사자였다.&lt;BR&gt;&lt;BR&gt;금년 9월 하순에 발간된 탈북자들의 5.18 증언록 &quot;화려한 사기극의실체&quot;에는 탈북자들의 증언과 조갑제 기자의 주장 중 어느 편이 옳으냐를 가름할 몇가지 핵심 내용들이 있는데, 그 중에 네가지를 꼽는다면 (1) 남한에서 민중봉기를 일으킬 게릴라 작전을 위한 북한군 특수부대 중 상당수는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인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4월 사이에 남파되었으며, (2) 광주인민봉기가 전국 규모의 무장봉기로 확대될 때 남침하려 했으며, (3) 그들은 잠수함을 이용하여 침투하였으며, (4) 광주에서 북한군 정체를 알아보는 자들은 모두 죽였으며, 그래도 부상 등으로 북한군 정체가 노출될 위협이 있을 때는 자폭하였다는 것이다.&lt;BR&gt;&lt;BR&gt;위의 핵심증언 (1)과 (2)는 광주사태 당사자들의 범주는 시민군으로 제한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당시 서울에서 학생이었던 자의 입장에서 보아도 광주사태에는 조갑제 기자가 보지 못한 큰 그림이 있다. 조기자에게 당시 서울 대학가에도 민중봉기를 선동할 목적으로 붙었던 대자보들에서 흐르는 논리를 눈여겨 관찰할 기회가 있었는지 궁금하다. 광주사태를 야기한 배후 세력의 본래의 목적(큰 그림)은 전국적 민중봉기였다는 점에서 서울의 운동권도 한 당사자였으며, 남한의 무장봉기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즉시 남침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북한군도 한 당사자였다. &lt;BR&gt;&lt;BR&gt;당시 전국 대학가에 붙었던 대자보들의 첫번째 객관적 사실은 학생이 아니라 배후 세력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것이요, 둘째로 전국적으로 민중봉기를 일으키라는 논리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인민무장봉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 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은 남한 자료들로도 충분히 입증되는 것이다. 그러면 먼저&amp;nbsp;아래 5월 20일자의 대자보를 살펴보자.&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daejabo/5-20.jpg&quot;&gt;&lt;BR&gt;&lt;BR&gt;거듭 못박아 말하자면 &quot;학생 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 &lt;행동강령&gt;무기를 제작하라!...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우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quot; 등의 살벌한 문장들로 가득한 이 대자보는 전남대생들이 제작한 것이 아니다. 전남대에는 학생 혁명군도 없었으며, 전남대생들이 20일 혹은 그 이전에 상무대에서 무기를 탈취한 적도 없다. 시민군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나누어주는 총을 받았지만 시민군들조차도 5월 20일 상무대 무기 탈취 사건을 모르고 있었다. 이것은 실제로 무기 탈취 작전을 주도한 북한군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당시 거의 모든 대자보들은 학생들이 제작한 것이 아니라 배후 세력이 제작한 것들이었는데, 위의 대자보의 경우 김대중 세력이 제작한 것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며, 십중 팔구 간첩으로 남파된 북한군이 작성한 대자보였다.&lt;BR&gt;&lt;BR&gt;그러면 위의 대자보를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발행한 아래의 5월 22일자 대자보와 비교해 보라.&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5_22dajabo.jpg&quot;&gt;&lt;BR&gt;&lt;BR&gt;투사회보라는 이름으로 발행된 22일자의 이 대자보는 &quot;광주시민의 민주. 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 오고 있다. 21일에는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quot; 등의 문장으로 시작된다. 자, 투사회보라는 제목이 어디서 왔겠는가? 그리고, 위 대자보는 전국 규모의 시민군 군사작전 계획이 있었다는 명백한 증거이다. 조갑제 기자는 당시 광주에서 이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 어떻게 기자들도 모르는 정보들을 시민군 지휘부는 알고 있었을까? 더구나 승리를 장담한다. 광주사태가 전국적 무장봉기로 확산만 된다면 승리한다는 것이다. &lt;BR&gt;&lt;BR&gt;당시 전국적 민중봉기를 선동했던 모든 대자보들은 큰 변란이 있을 것을 예고했다. 위의 대자보에서도 &quot;이제 승리의 날이 머지 않았다&quot;는 장담은 광주시민군이 60만 국군을 이길 수 있다는 농담이 아니었다.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진담이었기에 광주사태 문제는 아직 미해결 과제로 남아있다. 5월 27일 새벽의 도청진압작전 때도 윤상원이 자폭을 선택하였기에 광주 시민들이 죽었다. 아직 무기를 반납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선제 발포하였기에 국군 자위권이 발동된 것이었다. 시민군 선제 발포로 인한 교전에서 군인과 시민군 십 수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사건과 전혀 무관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살인마 누명을 씌우기에 앞서 윤상원이 왜 자폭을 선택하였는지를 물어야 한다.&lt;BR&gt;&lt;BR&gt;금년 9월 하순에 출간된 탈북자들의 5.18증언록은 북한에서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는 광주사태의 큰 그림을 제시할 뿐만 아니라, 남한 논객들이 모르고 있던 구체적 사실들을 기술한다. 그 중 하나가 잠수함을 이용한 침투 방법이다.&lt;BR&gt;&lt;BR&gt;&lt;&lt;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평상시 적진에 대한 침투훈련을 할 때마다 잠수함을 이용한 작전훈련을 많이 했던 차라 그들은 일상적인 훈련의 반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을 태운 잠수함은 바다 밑으로 깊숙이 잠수하여 마양도 해군기지를 출발하였다. 잠수함의 항해 방향과 도착지가 어딘지, 목적지에 도착해서 훈련내용은 어떤 것인지 그들은 전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잠수함을 타고 바다 밑으로 들어 온지 3일째 되던 날 안내요원이 나타나서 지금 잠수함의 위치가 남조선 전라도 쪽의 해상이라고 전달해 주었다 (74~75쪽). 안창식은 교전 중에 무릎 바로 아래에 관통상을 입고 광주폭동이 끝나기 2~3일 전쯤 목포의 아지트로 이동해서 치료를 받다가 14명의 대원들과 함께 그해 7월 중순경에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고 북한에서 내려온 잠수함을 타고 철수하였다고 한다 (88쪽). 그들 조는 1980년 3월 말경에 남조선으로 침투할 데에 대한 임무를 받고 한 달 정도의 가상훈련을 집중적으로 받은 다음 1980년 4월 말경에 출발하여 남포항에서 구소련에서 들여온 디젤잠수함에 승선하였고 서울에서 가까운 서해안(어느 지역이라는 것은 말하지 않았음)에 상륙하여 서울시내로 침투하였다 (316쪽).&gt;&gt; &lt;BR&gt;&lt;BR&gt;근 일년 전의 문제의 글에서 조갑제 기자가 제시한 또 하나의 쟁점은 북한군 목격자가 없었다는 것이요, 탈북자들의 증언은 누구든 북한군의 정체를 조금이라도 눈치챈 자는 가차없이 죽였으며, 북한군이 교전 중 입은 부상으로 광주를 빠져나갈 수 없었을 경우 자폭시켜 북한군 개입의 흔적을 전혀 남기지 않았다는 것이다.&lt;BR&gt;&lt;BR&gt;&lt;&lt;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 (76쪽). 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 (82쪽). &lt;BR&gt;&lt;BR&gt;그들이 남조선침투 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자폭훈련이었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 (317쪽). 그는 아마도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상대가 몰랐다고 해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 시퍼렇게 붙어있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하였다 (321쪽). &lt;BR&gt;&lt;BR&gt;밥을 먹던 일행 중의 한사람이 광주인민봉기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묻자 그 친구는 자기도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영웅이 말하는데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전투현장에서 죽은 즉시로 남조선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380쪽). 누구는 죽고 누구는 북한으로 돌아와서 영웅칭호를 받았다는 상세한 내용들과 어떤 사람은 중상을 당해서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 되자 정체가 노출될 것을 염려한 동지들이 그를 사살하고 시체를 불태워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고 하는 등 광주사건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터져 나왔다 (418-419쪽).&gt;&gt;&lt;BR&gt;&lt;BR&gt;과연 잠수함으로 침투한 북한군이 있었으며, 침투한 북한군 중 일부가 자폭한 사실이 있었는가? 만약 &quot;북한특수부대의 광주개입&quot; 주장은 믿을 수 없다!&quot;는 제목의 지난 해 11월의 조갑제 기자의 글의 관점만을 전제로 한다면 이 증언은 허황된 이야기로 부정된다. 그러나, 역으로 &quot;북한군이 잠수함으로 침투한 사실이 없으며, 그 어느 북한군도 남한에서 자폭하지 않았음&quot;을 증명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그런데, 놀랍게도 1996년 9월에도 실제로 북한군이 잠수함으로 침투하여 자폭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아래의 두 뉴스 동영상은 1996년 9월 18일 MBC가 방송했던 영상 뉴스이다. &lt;BR&gt;&lt;BR&gt;&lt;EMBED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KrymWdQ6tHI&amp;hl=en&amp;fs=1&amp;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lt;&lt;오늘새벽 1시를 전후해 이곳 해안으로 침투한 것으로 추정되는 20명 가운데 11명은오후 2시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5km정도 떨어진 강릉시 강동면 청학산 정상부근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고 숨진 채 발견됐습니다. 잔당 가운데 한명인 31살이 강수는 인근 지역에서 생포되고 8명이 현재 계속 군경의 추적을 받고 있습니다. 숨진 채 발견된 11명은 침투조가 아닌 승무원으로 추정되며, 비무장의 광부복장으로 머리에 총살을 입고 있어서 자살했거나 도주한 잔당들에 의해 사살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체발견에 앞서 오전 10시 20분쯤 청학산 부근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려 교전으로 한때 오인이 됐지만 이때 11명이 자살한 것으로 추정됩니다.&gt;&gt;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5_6172.html)&lt;BR&gt;&lt;BR&gt;&lt;&lt;처음엔 무장간첩과 군경의 교전소리로 알려졌던 이 총성은 간첩들이 자살하면서 낸 소리로 밝혀졌습니다.&lt;BR&gt;&lt;BR&gt;● 현장목격 장병: 오전 중에 총성을 들었고 저희들은 교전중인 걸로 알았는데 교전중이 아니라 자살한 것이라는 것을 올라와서 확인했습니다.&lt;BR&gt;&lt;BR&gt;● 기자: 현장에는 수류탄 2발과 권총 1자루가 발견 되었습니다.&lt;BR&gt;&lt;BR&gt;군경은 이들 무장간첩이 궁지에 몰리자 수류탄 자폭과 권총 자살 중 하나를 택할 것을 강요당한 것으로 보고 계속 현장 주변을 위주로 매복과 검문검색을 강화하고 있습니다.&gt;&gt;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6_6172.html)&lt;BR&gt;&lt;BR&gt;● 앵커: 이번 동해안 침투 간첩단 가운데 유일하게 생포된 31살 이강수는 잠수함 승무원이었으며 침투 간첩은 모두 20여명이라고 밝혔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7_6172.html)&lt;BR&gt;&lt;BR&gt;당초 주민들이 신고한 지점들이 말해주듯이 침투한 간첩들은 최초 강동면 임곡 2리를 가운데 두고 양쪽 산등성이를 따라 자살한 잠수정 승무원들과 아직 검거되지 않은 일당, 즉 공작원들 2패로 나뉘어 태백준령으로 도주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8_6172.html) &lt;BR&gt;&lt;BR&gt;&lt;EMBED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gsOpgw-MFnY&amp;hl=en&amp;fs=1&amp;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 신상길 준장(합참 작전차장): 금일 17시경에 육군 68사단 173연대 수색병에 의해 최초 침투지점으로부터 서남방 5km 떨어진 청학산 부근에서 북괴 무장간첩 11명이 자폭한 것을 발견하였으며 또한 1명을 생포, 조사 중이며 우리 軍은 나머지 잔당을 계속 추적 중에 있습니다.&lt;BR&gt;&lt;BR&gt;● 기자: 또 생포된 간첩의 신원은 최종적으로 인민 무력부 정찰부 소속 이강수인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89_6172.html)&lt;BR&gt;&lt;BR&gt;● 앵커: 북한 잠수함이 발견되고 나서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내리기까지 걸린 시간은 3시간 반이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0_6172.html)&lt;BR&gt;&lt;BR&gt;● 기자: 오늘 발견된 잠수함은 북한이 지난 86년 기존의 상어급소형 잠수함을 변경해 자체 개발한 것입니다.&lt;BR&gt;&lt;BR&gt;비정규전이나 특수 공작용으로 만들어진 이 잠수함은 길이가 34m, 폭이 3.8 m이고 물위에서는 7노트, 수중에서 12노트의 속도를 낼 수 있습니다.&lt;BR&gt;&lt;BR&gt;특히 물위에서보다 물속에서 속도가 훨씬 빨라 침투에 용이하다는 것이 이 잠수함의 큰 특징입니다.&lt;BR&gt;&lt;BR&gt;군사 전문가들은 이 잠수함이 원산에서 발진할 경우 강릉까지는 4시간 정도면 도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1_6172.html)&lt;BR&gt;&lt;BR&gt;부산 청사포항 무장간첩선 격침사건 등 7∼80년대에도 무장 공작원의 도발은 계속 이어졌습니다.&lt;BR&gt;&lt;BR&gt;70년 이래 모두 3백여 건의 대남 침투 사례가 있었습니다.&lt;BR&gt;&lt;BR&gt;한해에 10여건 꼴입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3_6172.html)&lt;BR&gt;&lt;BR&gt;● 기자: 새벽 1시 35분 5km가량을 급히 달려 이진규氏는 강동파출소에 도착했고 잠수함의 위치를 경찰에 알렸습니다.&lt;BR&gt;&lt;BR&gt;● 이진규氏(최초 신고자): 신고를 해야 되겠다고 돌고래 같은 물체가 있는걸 보니제가 잠수함은 보지도 못했는데 잠수함이라는 것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http://imnews.imbc.com/20dbnews/history/1996/2006093_6172.html)&lt;BR&gt;&lt;BR&gt;자, 위의 보도대로 1980년대에도 일년에 10 여건 북한군 침투 사실일진대, 광주사태 때만 침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위의 뉴스는 무장간첩단의 침투 저지를 위해 해안경찰서가 얼마나 큰 기여를 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김영택 기자가 광주에서 본 복면부대가 출현하기 전에 먼저 목포에 출현하여 해안경찰서를 파괴한 사건을 광주의 조갑제 기자가 목격할 수 있었는지 묻고 싶다. &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image/news/5-22mokpo.jpg&quot;&gt;&lt;BR&gt;&lt;BR&gt;그 사건을 목포 주재 박홍서 조선일보 기자가 목격하였으며, 바로 위의 문건은 당시 박 기자가 본사에 송고한 취재일지이다. 단 한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던 목포에 백 명 정도의 복면부대가 출현하여 해안경찰서를 파괴할 필요가 무엇이었겠는가? 이처럼 탈북자들이 증언하는 광주사태의 큰 그림에는 잠수함을 이용하여 목포로 침투한 사건도 포함되어 있으며, 조갑제 기자가 그가 목격하지 못한 사건은 없었던 사건이라고 단정지을 때 반론의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lt;BR&gt;&lt;BR&gt;위의 뉴스동영상은 단 몇시간의 사건 진행과정만을 보여주나 51일간의 대간첩작전 전모는 &lt;A href=&quot;http://cafe.daum.net/issue21/5304/11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issue21/5304/110&lt;/FONT&gt;&lt;/U&gt;&lt;/A&gt; 에서 영화로 볼 수 있으며, 아래의 동영상은 위 뉴스 영상물의 북한군 11명 자폭 장면을 후에 보완된 사실을 근거로 영화로 재연한 장면이다. &lt;BR&gt;&lt;BR&gt;&lt;EMBED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2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0eGZmeOSlUc$ bgcolor=&quot;#000000&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gt;&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IMG border=0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gt;&lt;BR&gt;&lt;BR&gt;&lt;FONT color=#0066cc&gt;&lt;U&gt;☞ &lt;/U&gt;&lt;/FONT&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icide.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mokpo.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북한군 일부 목포 경유 광주 침투&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evidence.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의 사실성을 입증하는 증거들(1)&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books.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록 구입 안내 및 관련 도서&lt;/FONT&gt;&lt;/U&gt;&lt;/A&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전두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두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박정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박정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김대중&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김대중&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무장공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무장공비&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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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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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25T16:54:06Z</updated>
	    <published>2009-10-25T16:54:06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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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daejabo/5-20.jpg&quot;&gt;&lt;BR&gt;&lt;BR&gt;&quot;학생 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 &lt;행동강령&gt;무기를 제작하라!...전시민 관공서를 붙태우라...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quot; 등의 살벌한 문장들로 가득한 5월 20일자의 대자보는 북한군 534부대가 제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분명한 사실은 전남대에는 학생 혁명군이라는 것도 학생혁명위원회라는 것도 없었다. &quot;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quot;라는 제목의 위의 대자보와 삐라는 불순세력이 제작한 것이었다. 광주사태에 불순세력의 개입이 있었다. 그러면 그 불순세력의 정체는 무엇이었는가?&lt;BR&gt;&lt;BR&gt;1980년 5월 18일 시작된 광주사태는 김대중의 전국연합 조직이 야기하였으나. 5월 19일부터 무기를 탈취하여 5월 21일 노골화된 무장폭동에 북한군이 개입되어 있었다. 탈북자들이 북한에서 보았던 광주사태의 발단은 1979년 10.26 대통령 시해 사건 직후의 북한의 남침 계획이었다. 무엇이 광주사태였는지 광주사태(광주인민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1979년 11월 중순부터 반년간 했었던 한 특수부대 지휘관의 고백을 통해 들어보자.&lt;BR&gt;&lt;BR&gt;광주사태 때 여러 조의 특수부대들이 광주에 투입되어 있었는데, 그 중 534부대가 주요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 증언의 신빙성을 위해 남한의 독자들은 과연 534부대가 있었는지 궁금해할 것이다. 이 부대 타격대장 안창식 대위와 내연 관계였던 탈북 여성은 이 부대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한다:&lt;BR&gt;&lt;BR&gt;&lt;&lt;일체 외부와는 접촉할 수 없는 무인도에서 11년 동안의 훈련을 마치고 1977년 여름에 새롭게 배치되어간 부대는 함경남도 덕성군의 아찔한 골짜기에 주둔해 있는 534라고 하는 특수부대였다. 대위의 군사칭호를 달고 타격대장으로 임명되어간 그는 날아가는 까마귀도 단도 한번 날려서 떨어뜨린다는 유명한(후에 소문났지만) 부대&gt;&gt;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73쪽)&lt;BR&gt;&lt;BR&gt;광주사태 때 투입되었던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에게는 이토록 뛰어난 투검능력이 있었다는 것은 우리가 처음 듣는 정보이다. 그런데 1996년 5.18재판이 막 마무리되었을 무렵이었던 1996년 9월에도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체포된 북한군 역시 타격대 소속이었다. 아래 동영상 5:25~5:36에서 우리는 이미 그해 1996년 9월에 비슷한 증언이 있었음 확인한다: &quot;10미터 앞에 있는 표적은 백발 백중 제압할 수 있는 투검 능력이 있고.&quot; &lt;BR&gt;&lt;BR&gt;&lt;EMBED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hbGzn7Fr5d4&amp;hl=en&amp;fs=1&amp;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자신의 실명을 밝히는 전 북한군 하사관 빅행운은 534부대와 신천복수여단 등이 광주에 침투하였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 &quot;광주사건에 참가하였던 534부대와 신천복수여단 등 부대들은 그때 당시에 북한군 특수부대들 중에서 가장 악명이 높았고 능력이 신비할 정도로 인정받는 최정예 게릴라 부대이기도 하였다&quot; (210쪽). 전 북한농촌관리위원회 부위원장도 534부대에 대하여 이렇게 언급한다: &quot;동생의 말에 의하면 1970년대 중반에 김정일이 북한 평강도 지구에 비밀리에 조직되어 있는 534특수부대를 방문한 자리에서..&quot; (401쪽). 이처럼 여러 탈북자들이 534부대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은 실제로 그런 특수부대가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lt;BR&gt;&lt;BR&gt;534부대 타격대장 안창식 대위와의 사이에 두 자녀를 낳은 탈북 여성은 전민봉기 노림수로서 광주인민봉기(광주사태) 준비 작업으로서 534부대 2개 조가 1979년 11월 중순에 잠수함을 타고 목포에 침투하였다고 증언한다. 이것은 대다수 남한 독자들에게는 기상 천외한 증언이나, 놀랍게도 당시 조선일보 기사인 &quot;남민전 , 적화되면 게양할『기』까지 제작&quot;이란 제목하의 11월 14일자 기사가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북괴 및 재일조총련의 지령을 받는 남민전이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킨 후 중앙청에 게양할 기까지 제작해 놓았다가 26명이 추가검거되었다. 그러나 잔존세력이 있었으며, 이듬해 2.29복권조치로 사면된 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그들이 광주사태 배후 세력이자 지휘부였던 것이다.&lt;BR&gt;&lt;BR&gt;이 탈북여성은 안창식 대위의 고백을 계속해서 이렇게 전한다:&lt;BR&gt;&lt;BR&gt;&lt;&lt;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 째어있는 북한의 당 조직과도 별로 차이가 나지 않을 정도로 체계적인 조직구성과 집단화된 규율을 가지고 있었고 정신적인 무장상태나 각오정도에서도 북한의 조선노동당원들의 수준 이상이었다고 한다.&gt;&gt; (79쪽)&lt;BR&gt;&lt;BR&gt;그것은 사실이었다. 그 시대 상황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김대중이 정당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착각하기 쉬우나, 김대중에게는 정당이 없었고 남민전 관련자들 등 운동권이 그의 지지기반이었다. 그리고 5.17비상계엄 전국확대 이전에는 지하조직들이 활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북한의 자료는 10.26 대통령 시해사건을 민중봉기로 남한 정부를 전복시킬 기회로 삼으려 했음을 밝힌다. 남한의 자료들 역시 똑같은 사실을 입증한다. 김대중이 그 배후였던 당시 운동권의 모든 대자보들은 10.26사건을 그들이 유신잔당으로 규정한 최규하 대통령 정부 전복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선동하였던 것이다.&lt;BR&gt;&lt;BR&gt;안창식 대위가 고백하는 광주사태의 팩트 중의 하나가 자폭서약 및 자폭이다. 2차 대전 당시 가미가제 특공대라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가미가제 특공대는 자폭서약을 한 일본군 공군을 일컫는다. 우리는 북한군이 남한에 침투하기 이전에 자폭서약을 한다는 것을 몰랐었다. 그러나, 위 동영상이 보여주듯 1996년 5.18재판이 마무리될 무렵에도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으며, 탈북자들이 증언하듯 이것이 광주사태의 한 팩트였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북한군이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맨위의 5월 20일자 선동대자보에서 말하는 특공대 의미가 파악될 것이다. &quot;특공대를 조직 군무기를 탈취하라! 아! 형제여! 싸우다 죽자!&quot; 죽으라고 선동한다. 자폭 정신이 저 대자보에 흐른다. 누가 선동했겠는가? 김대중 그룹이 그렇게 선동했겠는가? 전남대생들이 그렇게 선동했겠는가? 북한군은 자폭서약을 한 후 광주에 침투하였으며, 실제로 자폭한 사건들이 있었다. 물론 당시 여러 대자보들은 김대중 그룹이 제작한 것이었으나, 저 특정 대자보는 그 문구들이 북한군의 자폭서약 및 실천을 연상시킨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police-dress.jpg&quot; width=442 height=401&gt;&lt;BR&gt;&lt;BR&gt;위 사진에서 총을 든채 지프에 올라앉아있는 두 복면 시민군의 손을 눈여겨 보라. 어디 저 손이 전남대 선비의 손인가? 저 손은 여러 해 특수훈련 받은 자의 손이다. 저 자세를 보라. 군기가 들어있는 저 자세가 어디 광주시민의 자세일 수 있겠는가? 주변의 광주시민들이 저 두 무장시민군을 바라보면서 &quot;민주화운동가들이다&quot;라고 말했던가? 아니다. 저 험악한 모습을 차마 눈뜨고 바라볼 수 없었던지 한 시민은 손으로 눈을 가렸으며, 한 시민은 고개를 찌프리며 얼굴을 돌렸다. 그 어느 표정에도 이들을 민주화운동가로 바라보는 표정은 없다. 그리고 저 광주시민들에게 이 무장시민군의 복장을 입혀보라. 절대로 이런 일당 백의 투사의 모습이 되지 못한다. 그러니 복면 시민군은 북한군이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맞다는 심증이 가는 것이다.&lt;BR&gt;&lt;BR&gt;조총련이 데리고 온 것으로 추정되는 힌츠페터는 5월 20일 저녁에 광주에 들어와 만 하루도 채 못된 21일 오후 광주를 떠났는데, 5월 20일 광주로 들어오면서 그는 (광주 외곽에서 무기를 탈취한) 시민군이 군용트럭을 타고 광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으며, 5월 21일 광주를 떠나는 날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공격하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급박한 상황을 조선일보 서청원 기자는 아래와 같이 송고하였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image/news/5-21cityhall.jpg&quot;&gt;&lt;BR&gt;&lt;BR&gt;5월 21일 오전에 공수부대 병력이 전남도청 앞에 배치되었던 이유는 그날 무장시민군이 도청을 점령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한 광주경찰서와 광주시청이 도청 기밀서류를 안전한 곳에 올릴 때까지 지켜달라고 요청하였기 때문이었다. 광주시민들은 도청을 공격하거나 함락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어느 세력이 도청 함락 전략을 세우고 주도하였는가가 의문이다. 아래 힌츠페터의 영상물에서도 관찰되듯이 무장시민군의 도청 함락작전은 하나의 완벽한 군사작전이었다. &lt;BR&gt;&lt;BR&gt;&lt;EMBED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2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hE_PSDfzZFw$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위 영상물 2:26에서 &quot;싸우다 모두 죽자&quot;는 멘트가 들린다. 작전 목적은 도청 함락이면서 그 선동 구호는 &quot;싸우다 모두 죽자&quot;였다. 모두 죽자는 말은 모두 자폭하자는 말이다. 도대체 누가 누구더러 죽으리고 하는 것인가? 전남대생들이 부모뻘 시민들에게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라고 한 것인가? 아니었다. 바로 전날 구호가 전 맨위 대자보에서 보인다. 그 제목은 &quot;결전의 순간이 다가왔다&quot;요, 그 함성은 &quot;싸우다 죽자&quot;였다. 그렇다면 광주시민들이 &quot;싸우다 모두 죽자&quot;고 외쳤던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폭정신무장은 본래 북한군 특수부대의 정신무장이었다. 요컨대, 5월 21일 오전 도청 함락을 목적으로 집결한 무장시민군 사이에 외쳐진 &quot;싸우다 모두 죽자&quot;는 구호는 북한군이 선창한 구호였던 것이다. &quot;싸우다 모두 죽자&quot;는 정신이 바로 저 위 동영상에서 북한군 특수부대원들이 말하는 &quot;총폭탄 정신&quot;이다.&lt;BR&gt;&lt;BR&gt;&quot;싸우다 모두 죽자&quot;는 정신으로 무장된 군대는 최강의 군대이다. 깡패가 무서운 이유는 자기 몸 다치는 것을 겁내지 않고 달겨들기 때문이다. 같은 군인들이라도 행정병보다는 보병이, 보병보다는 공수부대가 그런 패기가 강하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군인들이라도 &quot;싸우다 모두 죽자&quot;고 외치지는 않는다. 서청원 기자가 송고한 위의 기사가 보여주듯 시민군 버스에 순경 4명이 깔려죽은 것을 본 공수부대원들은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lt;BR&gt;&lt;BR&gt;남한에서도 군대갔다온 이들은 6주간의 훈련, 몇달간의 신병 생활, 한주간의 유격훈련 등 군복무 중 있었던 특별한 경험들을 수십 년이 지나서도 이야기한다. 안창식 대위는 광주인민봉기(북한에서 광주사태를 지칭하는 용어)를 일으키기 위해 남한에 8개월간 머물러 있었다. 사회주의혁명을 일으키려 했던 남한 내 좌익세력과 더불어 6개월간 준비했으며, 광주인민봉기가 끝난진 51일후 북상 복귀하였다. 그는 광주에서 자기가 일으킨 교전중 무릎 아래 관통상을 입고 북한에 복귀한지 여러해 후 그 다리를 절단해야 했는데, 연인에게 다리를 절단한 사연을 이야기하느라 광주인민봉기와 얽힌 8개월간의 이야기들을 고백하였던 것이다. 그가 고백한 광주사태의 사실 중에 자폭서약의 사실이 있다.&lt;BR&gt;&lt;BR&gt;&quot;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quot; (76쪽). &quot;소부대작전에서 특이한 것은 죽은 시체도 적에게 내어주지 않는 엄격한 원칙이고 어느 조와 개인을 떠나서 각기 자기 분야에 특수하게 부여된 임무에만 충실 하고 작전내용에 대해서는 마지막까지 비밀을 사수하는 것이 기본적인 룰이고 성질이라는 것이었다&quot; (82쪽) [82쪽 주: 북한군이 광주에서 벌인 작전은 게릴라 작전이었는데, 이것을 소부대작전이라 칭한듯 하다]&lt;BR&gt;&lt;BR&gt;전 보위부 반탐부장은 1980년 4월 김대중이 서울에서 지휘하던 민중시위를 지원하기 위해 서울로 침투했던 조가 자폭훈련을 받았음을 증언한다. &quot;그들이 남조선침투 훈련을 받으면서 가장 집중적으로 받은 훈련은 정신적인 훈련, 다시 말하면 자폭훈련이었다고 한다. 부득이한 경우로 적들에게 잡힐 상황이 조성되었거나 잡히면 신분을 노출시키지 말고 무조건 자폭해서 시체도 남기지 말라는 것이 첫 번째 임무사항이었다고 하였다&quot; (317쪽). 그는 북한군이 실제로 자폭을 실천한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lt;그는 아마도 자기들이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라는 것까지는 상대가 몰랐다고 해도 머리를 기른 사람들이 군복을 입고 시내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여서 공수부대의 공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순간도 지체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의 중상자가 생겨나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해버린 조장이 대원들에게 수류탄을 모두 꺼내서 부상당한 사람의 몸에 전부 매달라고 지시했다고 한다. 조원들은 조장이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고 결심했다는 것을 간파하고 각자가 휴대하고 있던 수류탄을 목숨 시퍼렇게 붙어일는 전우의 몸에 매달아 놓고 현장을 탈출하였다고 하였다.&gt;&gt; (321쪽) &lt;BR&gt;&lt;BR&gt;전 북한 3·13공장 지배인도 북한군 자폭 사실들을 이렇게 증언한다. &quot;밥을 먹던 일행 중의 한사람이 광주인민봉기에 갔다가 죽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지 아느냐고 묻자 그 친구는 자기도 구체적으로는 모르겠지만 공화국영웅이 말하는데 의하면 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시체로 돌아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고 대부분 전투현장에서 죽은 즉시로 남조선사람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처리되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quot; (380쪽).&lt;BR&gt;&lt;BR&gt;한국전쟁 당시 미군은 극도로 위험한 순간에도 전우들의 시체를 수습하였으며, 전쟁이 끝난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껏 참전용사 유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북한군은 부상당한 전우를 자폭시킬 수 있으며, 시체도 남지 않을 정도로 자폭시킬 수 있는가? 그런데, 그런 북한군 자폭 사건이 1996년 9월, 즉 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이 여론몰이로 5.18(인민)재판을 마무리해가던 때에도 있었다. http://cafe.daum.net/issue21/5304/110 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아래의 동영상은 1996년 9월의 강릉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11명의 북한군이 자폭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lt;BR&gt;&lt;BR&gt;&lt;EMBED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2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0eGZmeOSlUc$ bgcolor=&quot;#000000&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gt;&lt;BR&gt;&lt;BR&gt;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은 위헌을 해가며, 삼권분립의 원칙을 무너뜨리면서까지 무리하게 군인들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우는 재판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5.18재판이 막 마무리되었을 무렵 일어났던 또 하나의 북한군 특수부대 침투사건이 5.18사건 때 머리를 기르고 남한군복을 입은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했었다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이처럼 결정적으로 입증하여주는 단서가 되는 것이다.&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IMG border=0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gt;&lt;BR&gt;&lt;BR&gt;&lt;FONT color=#0066cc&gt;&lt;U&gt;☞ &lt;/U&gt;&lt;/FONT&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mokpo.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북한군 일부 목포 경유 광주 침투&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document/5-16.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5월 16일)&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icide.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북한 534부대 지휘관의 5.18사건 고백(1): 자폭서약 &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books.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록 구입 안내 및 관련 도서&lt;/FONT&gt;&lt;/U&gt;&lt;/A&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인민봉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인민봉기&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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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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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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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0-22T12:28:39Z</updated>
	    <published>2009-10-22T12:28:3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지난 해의 광우사태 때 국민 모두가 광우 폭도들을 고운 눈으로 바라보거나, 민주화운동가로 여기지는 않았다. 이점은 광주사태 때도 마찬가지였다. 5.18무장단체를 광주시민들이 민주화운동가로 바라 보았는가? 그때는 그렇지 않았다. 광주사태 때 서울에 올라온 광주시민들은 &quot;강경파 시민군이 온건파에게 총을 쏜다,&quot; &quot;시민군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남자만 보면 시민군으로 징집하였다,&quot; &quot;남자들을 끌고가 사격 연습을 시킨후 군인들을 향해 사격하게 하였다&quot; 등의 말을 하였다. 그런데, 그때는 그런 말들이 도무지 실감이 가지 않았었다. &lt;BR&gt;&lt;BR&gt;2년 전의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는 어떤 정치 프로파겐다의 목적으로 제작되었겠으나, 일면 오히려 5.18측에 치명타를 끼치는 역효과도 있었을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우리는 시민군의 모습을 도저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광주사태를 처음부터 줄곧 TV로 지켜보고 있었던 북한 주민들과 달리 우리에게는 무장시민군의 모습을 사진으로조차 볼 기회가 없었다. 민간인이 총을 든 모습이 어떤 모습인지 전혀 상상힐 수가 없었으므로 광주사태는 모르는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그러기에 계엄군이 가해자라는 5.18측 주장만 먹혀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lt;BR&gt;&lt;BR&gt;그러나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가 5.18무장단체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드러내놓고 말았다. 물론 이 영화는 시민군이라 불리는 이 무장단체를 미화시킬 목적으로 제작되었지만, 이 영화는 시민군의 모습을 천분의 일이나마 공개하고 말았다. 비록 모든 치부를 감추고, 최대로 미화시켜 천분의 일을 공개하였지만, 그 천분의 일은 국민이 전혀 시민군의 모습을 모르고 있었던 때와 전혀 다른 변화를 몰고 왔다. 2003년부터 공개되기 시작한 인터넷 자료들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국민은 시민군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이제 알게 된 것이다.&lt;BR&gt;&lt;BR&gt;광주사태 때 서울에 올라온 광주시민들이 서울의 친구들에게 &quot;시민군이 시민에게 총을 쏜다&quot;는 말을 하였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아마 몇명 안될 것이다. 이것은 비록 널리 퍼진 말은 아니나, 그럼에도 광주사태의 내막을 이해하는데, 몹시 중요한 단서였다. 과연 &quot;시민군이 시민에게 총을 쏘았을까?&quot; 오랫동안 우리는 이것을 과장된 표현이려니 여겼었다. 그러나 시민군 증언록이 펼쳐지는 순간 그 사실이 확인되었다. 1988년 광주사태를 민주화운동으로 격상시킬 목적으로 5.18 단체들이 채증한 증언록에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였다며 그 사실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2006년부터 시작된 탈북군인들의 증언이 그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gun/who-whom.jpg&quot;&gt;&lt;BR&gt;&lt;BR&gt;위 사진을 보라. 바로 이 장면이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가 국민에게 보여주지 않는 시민군의 치부 중의 하나이다. 군복 입은 장발족 광주시민군이 시민들을 향하여 총구를 겨누고 있다. 총의 모양새도 특이하며, 곤봉을 들고 있는 시민군 모습도 보인다. 만약 저 곤봉으로 누군가를 때렸다면 어째서 타박상 입은 시민들이 있었는지 설명된다. 그리고 이마에 흰띠를 둘렀음이 눈에 띈다. 그런데 바로 하루만에 광주에서 시민군이 창군되고, 온갖 군사 장비들로 무장하며, 조직적으로 편성되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순발적인 기동력은 현역에게도 불가능하다. 탈북자들의 5.18증언록 &quot;화려한 사기극의 실체&quot;가 바로 이런 난제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lt;BR&gt;&lt;BR&gt;이 책의 증언1(45~92쪽)에서 전 함경남도 금야군 고등중학교 교원은 10.26 대통령 시해사건 직후인 1979년 11월 중순부터 북한은 광주사태(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준비를 남한 내 좌익세력과 공동으로 진행하였다고 증언한다. 과연 이 핵폭탄적인 증언이 사실일 수 있는가? 그런데, 그녀의 증언 내용의 진실성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다. 그녀는 남한 정보를 몰랐으며, 우리는 북한 정보를 몰랐다. 그럼에도 쌍방간에 역사적, 객관적 사실들이 일치한다면 그 증언의 진실성은 입증된다.&lt;BR&gt;&lt;BR&gt;그녀는 &quot;북한의 계획대로라면 원래 광주폭동이 정상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 날자는 1980년 3월경이었다고 한다&quot;고 증언한다 (77쪽). 이 증언은 3/23 새벽 서울 한강 하류 무장간첩 3명 침투, 3/25 새벽 포항 앞바다 무장간첩 출몰, 27일 새벽 김화지구 간첩침투 등을 보도하는 아래의 뉴스 동영상과 그 사건 전개가 부합한다. &lt;BR&gt;&lt;BR&gt;&lt;EMBED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2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fZeudaKayMU$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아마 그녀의 독자들은 예상을 넘는 그녀의 증언에 조금은 당황해 할 것이다. 북한군 침투설의 난제는 북한군이 어떤 방법으로 침투할 수 있었겠느냐였다. 그리고 북한군이 잠수함 타고 침투하였으리라고는 전혀 우리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었기에 많은 독자들이 반신반의해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명확히 입증해 주는 다큐 영화 동영상이 바로 아래에 있다.&lt;BR&gt;&lt;BR&gt;&lt;EMBED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GVmf28BbQ7Y&amp;hl=en&amp;fs=1&amp;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문민독재자 김영삼 대통령이 1996년 여론몰이로 5.18재판을 진행하기 위함이었는지 국민에게 알리지 않았으나, 그의 간담을 서늘케 한 사건이 있었으니, 바로 무장공비들이 잠수함 타고 침투한 사건이었다. 5.18재판 여론몰이에 묻혀 국민에게는 잘 보도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14명과 싸우기 위해 우리 편에서는 십만 배가 넘는 무려 150만명이 동원되어 장장 51 일간 걸린 대간첩 작전이 있었다. 위 동영상을 보면 북한군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6개월 전 잠수함 타고 목포로 침투하였을 때 (74~75쪽), 그리고 광주사태가 끝난지 두 달 후 강원도 동해안으로 이동하였을 때 (88쪽),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 수 있다.&lt;BR&gt;&lt;BR&gt;탈북여성의 증언의 수확적 정확성은 잠수함 타고 침투한 북한군은 11영씩 한 조였다는 증언으로 확인된다: &quot;조 편성 발표가 끝나고 사복차림의 지휘관은 타격대장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조는 즉시 잠수함에 승선할 것을 지시했고&quot; (74쪽); &quot;다른 때와 같은 가상적인 훈련이 아니라 이번만은 실제적인 상황이라는 현실이 배안에 타고 있던 11명의 전투요원들을 긴장시켰다&quot; (75쪽). &quot;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quot; (76쪽), &quot;미리 침투해있던 7명의 인원들과 합류한 안창식을 비롯한 11명의 인원들은 여러 개의 소조로 분산되어 전라도 현지에서 북한의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조직들이 사전에 확보해놓은 무기고들의 위치를 재확인하는 한편 새로운 무기고들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 3개월여 동안 전라도 전 지역에 대한 정찰을 이 잡듯이 샅샅이 진행하였다고 한다&quot; (81쪽).&lt;BR&gt;&lt;BR&gt;위의 동영상은 1996년 김영상 정부가 한창 5.18(인민)재판을 진행시키던 무렵 일어난 사건을 보여주는데, 잠수함 타고 침투한 무장공비들은 11명씩 한조가 되어 움직였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우리가 광주사태에 대하여 또 하나 전혀 알지 못하고 있던 사실은 광주에 침투하였던 북한군들 중 자폭한 북한군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위의 탈북여성도 &quot;11명의 침투요원들은 잠수함에서 내리기 전에 당과 수령, 조국과 인민을 위해서 최후의 한명이 남을 때까지 목숨을 바치며 적들의 손에 잡히면 무조건 자폭을 한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하였다고 한다&quot; 고 증언했다 (76쪽). 우리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반신반의한다. 그러나, &lt;A href=&quot;http://cafe.daum.net/issue21/5304/11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issue21/5304/110&lt;/FONT&gt;&lt;/U&gt;&lt;/A&gt; 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아래의 동영상은 1996년 9월 17일의 강릉 북한 무장공비 침투사건 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18일 16시30분 청학산에서 11명의 북한군이 자폭하였다. &lt;BR&gt;&lt;BR&gt;&lt;EMBED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502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0eGZmeOSlUc$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광주사태의 불가사의 중 하나가 바로 교도소 습격 사건이었다. 광주사태 사망자 대다수는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하였기 때문에 발생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교도소를 습격하였는지에 대하여 여태껏 5.18단체들이 답변을 못하고 있다. 그 답변은 시민군 편에서 전투에 참가했던 북한군 지휘관 안창식이 말할 수 있는 것이었으며 (83~84쪽), 그 지휘관이 바로 이 증언 수기를 쓴 여성의 두 자녀의 아빠이다. 그녀는 교도소 습격 작전 때 중상 입은 북한전투요원을 시민군이 들것에 실어 병원으로 후송한 사실도 증언하는데, 자신의 두 자녀의 아빠가 인솔한 부하에 대한 증언이기에 정확한 증언인 것이다. 이처럼 탈북자들의 5.18증언록 &quot;화려한 사기극의 실체&quot; 증언1의 모든 내용들이 남한 자료들과 부합하여 그 사실성과 객관성이 입증된다.&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IMG border=0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gt;&lt;BR&gt;&lt;BR&gt;&lt;FONT color=#0066cc&gt;&lt;U&gt;☞ &lt;/U&gt;&lt;/FONT&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mokpo.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북한군 일부 목포 경유 광주 침투&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document/5-16.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5월 16일)&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discuss/nk300.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 명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북한군은 잠수함 타고 광주에 침투하였다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books.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탈북자 5.18 증언록 및 관련 추천도서 정보&lt;/FONT&gt;&lt;/U&gt;&lt;/A&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잠수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잠수함&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와 북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와 북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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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북한군 일부 목포 경유 광주 침투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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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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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9-30T06:02:48Z</updated>
	    <published>2009-09-30T06:02:4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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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탈북군인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 최근에 출간되었는바, 광주사태 때 남파되어 무기고 무기 탈취 등을 주도하였던 북한군의 연인이자 사실상의 부부관계였던 여성의 증언도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증언 중 목포를 경유하여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관련 몇가지 핵심 요점을 추리면 아래와 같다:&lt;BR&gt;&lt;BR&gt;『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lt;BR&gt;&lt;BR&gt;『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lt;BR&gt;&lt;BR&gt;『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lt;BR&gt;&lt;BR&gt;『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lt;BR&gt;&lt;BR&gt;『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lt;BR&gt;&lt;BR&gt;『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lt;BR&gt;&lt;BR&gt;『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lt;BR&gt;&lt;BR&gt;『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광주에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전라도 내에 잠재해 있는 지하조직들을 간접적으로 동원해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그들이 사전에 일일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lt;BR&gt;&lt;BR&gt;(* 자세한 증언은 &lt;A href=&quot;http://cafe.daum.net/issue21/3Fdk/4357&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cafe.daum.net/issue21/3Fdk/4357&lt;/FONT&gt;&lt;/U&gt;&lt;/A&gt; 에서 보기.)&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img/line01.gif&quot;&gt;&lt;BR&gt;&lt;B&gt;&lt;FONT color=#990000&gt;위의 탈북여성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남한 자료&lt;/FONT&gt;&lt;/B&gt; &lt;BR&gt;&lt;BR&gt;위 증언의 핵심 요점은 광주사태는 북한과 남한의 친북 세력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위의 증언은 북한자료이다. 그런데, 위의 증언 하나하나가 남한 자료들로 그 사실성이 입증된다.&lt;BR&gt;&lt;BR&gt;&lt;B&gt;『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lt;/B&gt; 이것은 아주 정확한 객관적 사실이다.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은 조총련으로부터 정치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으로서 광주사태를 주동하였던 윤상원은 조총련으로부터 북한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을 전국 운동권에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서적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386 주사파의 함성 &quot;위수김동&quot;(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은 주지의 사실이다.&lt;BR&gt;&lt;BR&gt;&lt;B&gt;『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lt;/B&gt;요컨대 적화통일이 그 첫번째 노림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5월 16일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첫 문장에 바로 그러한 문구, &quot;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을 통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어야 한다&quot;가 들어있으며 &quot;민중의 승리와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quot; 등의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지 아니한가. 만약 원하는 것이 적화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두번째 노림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친북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라 하였다. 실로,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되었으며, 시위 구호 중 하나가 &quot;전남국을 세우자&quot;였다.&lt;BR&gt;&lt;BR&gt;&lt;B&gt;『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lt;/B&gt; 이 사실 역시 전남대 운동권 핵심부의 증언으로 증명된다. 총학생회장 박관현과 총무 그리고 많은 시민군이 광주사태 동안에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lt;BR&gt;&lt;BR&gt;&lt;B&gt;『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lt;/B&gt; 이 북한 자료 역시 5월 19일 나주에서의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 사건의 산증인 김동명 기자의 증언과 짝이 맞는바, 그는 지난 해에 27년간 고이 간직했던 낡은 취재 수첩을 수기 형식으로 공개하면서 북한군 개입 의혹을 5월 19일 당일부터 품었음을 발표하였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5월 20일 찍은 아래 사진은 5월 20일 나주, 화순, 영암 등 광주 외곽 지역에서 광주로 향하고 있었던 5.18무장단체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광주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이미 무장하고 있었다는 김동명 기자의 증언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cap/5-21riot.jpg&quot; width=605 height=449&gt;&lt;BR&gt;&lt;BR&gt;자, 여기 어째서 북한 자료는 목포라는 지명을 언급하는지의 문제가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인데, 목포에서 있었던 사건들, 목포를 경유하여 북한군 부대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 등이 언급되어 있다. 독자들에게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리라. 그러나 남한 자료에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증언들이 있다. 외부 무장단체가(혹은 가짜 연고생 300 명이) 목포를 경유 광주에 침투하여 시민군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선무 방송을 전옥주 본인의 입으로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방송해 놓고도 그녀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황당하게 여기고 있다. 그 스토리는 이러하다.&lt;BR&gt;&lt;BR&gt;탈북군인들이 300 명씩 두 떼로 북한군이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증언하였을 때 일각의 반응은 과연 300 명씩 두 떼거리가 광주로 침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였다. 여기서 300명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5.18측 자료들이 300명씩 두 떼거리의 외부 무장단체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해 준다.&lt;BR&gt;&lt;BR&gt;연고생이 300 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로 침투한다는 소문이 시민군들 사이에 파다했다. 그런데, 그 많은 연고생이 광주시민군에 입대할 목적으로 침투한 사실이 전혀 없다. 즉, 연고생 300 명은 위장명칭이요, 실제로는 외부 불순세력 300 명이었다. 전옥주는 광주사태의 핵심인물이다. 그녀의 선무방송만 없었어도 광주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 하지 않는가. 광주사태 기간 내내 무수한 선무방송을 했던 그녀가 8년후 기억한 것은 연고생 300 명 침투설 뿐이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10.html ). 광주시민들조차 그녀를 간첩으로 의심하여 경찰로 연행하였다. 그녀는 간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쪽지를 준 이들은 간첩들이었다. 즉, 간첩들이 그녀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5.18 단체들에 누가 전옥주에게 쪽지를 주어 목포쪽에서 연고생들이 오고 있다고 방송케 하였느냐고 물으면 그 답이 나온다. 광주시민들 중에는 아무도 그런 쪽지를 전옥주에게 준 이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간첩들이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이 여기서도 입증된다. &quot;담양쪽에 연ㆍ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그 뒤 곧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quot;고 말할 때 그녀가 생각해도 황당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위의 북한자료를 읽는 독자들도 목포사태가 아니라, 광주사태인데 어째서 목포가 자꾸 언급되는지 황당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 자료들로 그 사실이 여실히 입증된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image/news/5-22mokpo.jpg&quot; width=500 height=253&gt;&lt;BR&gt;&lt;BR&gt;위에서 보듯 1985년 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는 광주사태 당시 목포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북한 자료가 사실임을 보여준다. 해안경찰서를 파괴하면 민주화운동이라는 5.18측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 아니다. 해안경찰서를 파괴하는 것은 공산당 군대에 성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꼴이다. 실제로 북한군이 자유로이 목포로 침투하여 활동하였으며, 광주로 침투할 때 광주시민군이 지원하게 하였다. 즉, 광주사태 배후 세력이 북한군에 협조하고 있었던 것이다.&lt;BR&gt;&lt;BR&gt;목포 주재 박홍서 기자는 목포에는 단 한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음을 그 전날인 5월 21일 오후 6시에도 이렇게 보고하였다. &quot;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다.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quot; 그렇다면, 북한군이 목포를 아지트로 삼았다는 북한 자료가 사실임이 입증된다. 북한군이 활동하고 있는 목포에 단 한 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다. 자, 여기서 우리는 5.18측에 단 한 명의 군인도 경관도 없었던 목포에서 왜 백 명 단위의 복면 부대가 발포하였는지 물어보자. 목포에서 시민군이 있었다는 말인가?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목포에 먼저 복면부대가 출현하였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그가 광주에서 본 복면부대는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이었음을 그의 1987년 8월 기사 &lt;「광주사태」그날의 5가지 의문점&gt; 중 네번째 의문점에서 밝힌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lt;BR&gt;&lt;BR&gt;&lt;EMBED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width=425 src=http://www.youtube.com/v/0vnqT1lTBFo&amp;hl=en&amp;fs=1 allowfullscreen=&quot;true&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gt;&lt;BR&gt;&lt;BR&gt;김영택 기자는 시민군 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무장단체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의심을 또박또박 말하였다.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를 보도하는 위의 동영상에서 MBC 김석진 기자는 그 증언을 이렇게 요약한다: &quot;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quot; (3:08-3:27).&lt;BR&gt;&lt;BR&gt;탈북군인들은 300 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말한다. 남한 일부 인사들은 그렇게 많은 떼거리가 외지에서 광주로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300 여명이 실제로 외지에서 침투하였음을 증언하지 아니하는가. 그들은 복면부대였다. 김영택 기자는 광주의 언론인, 대표적 광주인이었다. 그는 목소리만으로도 토박이 광주인과 외지인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위에 언급한 그의 글 &quot;복면부대의 정체&quot; 몇 단락을 인용해 보자:&lt;BR&gt;&lt;BR&gt;&lt;&lt;&lt;&lt;B&gt;[복면부대]의 정체&lt;/B&gt;&gt;&lt;BR&gt;&lt;BR&gt;만약 복면부대가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나중에 검거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18일부터 21일까지는 왜 없었을까. 왜 기자의 카메라조차 학생들로부터 의심받아 셔터를 누르기도 어렵던 22일 이후에 복면을 한 사람이 많았을까.&lt;BR&gt;이들 복면부대는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을 취한데다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과격한 언사를 거침없이 썼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주최하는 도청 앞 광장의 수습회의나 대책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lt;BR&gt;기자는 24일 오후 2시쯤 당시 도청 2층에 있던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 김종배씨(35)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을 때 학생측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위원장대신 부위원장을 만났던 것.&lt;BR&gt;이때 김씨는 {우리는 총을 반납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군이 들어와 질서를 회복하면 맨손으로 금남로에 나가 다시 민주화를 외치겠습니다}며 총을 회수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때만 해도 김씨는 온건파였다. 이로부터 수시간 후 그는 조건부 강경파로 선회하게 되지만, 본심은 어떤 조건만 받아들여지면 총을 반납하겠다는 입장이었다.&lt;BR&gt;&lt;BR&gt;무기 반납 제지한 [복면부대]&lt;BR&gt;&lt;BR&gt;그런데 총을 회수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김씨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납은 안된다는 강경파들이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가로막는 이들 강경파의 거의가 복면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lt;BR&gt;김씨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어쩌지 못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복면의 강경파들은 이렇다 할 수습안을 내놓지도 않았다. 무조건 반대였다. 때문에 이들은 사태를 악화시키려는 [불순세력]이나 [배후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의 광주는 객관적으로 무정부의 상태였다. 이미 정부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엄격하게 [내란]의 상태다. 더구나 시위대는 무장을 했다. 정부가 있을 때 그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는 것과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내란]에 가담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복면을 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차이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수도 있다.&lt;BR&gt;그러나 계엄군의 철수 후 사태의 수습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강경하지 않았다. 무기를 반납하고 시의 외곽을 에워싸고 있는 계엄군과 협상할 것을 시도했다. 복면부대는 이 수습노력을 저지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격렬한 선동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복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만약 [불순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선량한 시민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gt;&gt;&lt;BR&gt;&lt;BR&gt;김영택 기자는 복면부대 등장의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이유는 무정부상태에서 내란에 가담하였을 때는 더 이상 떳떳한 시위가 아니었기에, 둘째 이유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수습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겨두며, 목포에서 먼저 출현한 복면부대도 그 두가지 이유로는 설명이 안된다. 목포에서는 해방구도 설치되지 않았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목포에 먼저 복면부대가 등장하고, 곧 이어 광주에도 등장하였다. 만약 정체를 감추라는 상부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면 목포 내 불순세력이 먼저 지령을 받았다는 것을 시사하며, 또 불순세력이 목포를 경유 광주에 침투한 것이 사실이었음이 확인된다. 전옥주가 황당하게 여겼던 정보, 즉 연고생(가짜 연고생) 300 명이 목포쪽에서 광주로 침투할 것이라는 정보는 사실이었으며, 그러한 남한 자료가 북한 자료로 그 개연성이 한층 많아지는 것이다.&lt;BR&gt;&lt;BR&gt;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의 광주상황은 이러하다. 22일에도 2천여 명의 군중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3백여 명의 극렬시위자는 경찰복과 공수단 복장을 하고 복면을 한 모습으로 40 여대의 군용차량을 몰고 송정역에 집결하여 공포를 쏘면서 시위를 하였고, 관광호텔, 전일빌딩, 전남의대, 유진온천 등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광주에 이르는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였다. 북한자료가 밝히듯이 300 명 단위의 무장단체가 실제로 경찰복과 공수단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복면부대였다. 비록 우리는 김기자처럼 광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래의 복면부대 사진들을 보면 이들이 광주인인지 외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인지 조금은 식별할 수 있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armed_rioters.jpg&quot; width=402 height=464&gt;&lt;BR&gt;&lt;BR&gt;&lt;IMG vspace=5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jeep.jpg&quot; width=400 height=299&gt;&lt;BR&gt;광주사태 당시 대다수 총기 사망자들은 카빈 등 시민군만 갖고 있던 총기에 의해 사망하였다. M-16에 의한 사망자 역시 시민군 총기에 의한 사망자들일 수 있음을 위 사진은 보여준다. 위 사진에서 복면한 시민군(어쩌면 북한군)이 들고 있는 총은 M-16이다.&lt;BR&gt;&lt;BR&gt;&lt;IMG vspace=5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police-dress.jpg&quot; width=500 height=471&gt;&lt;BR&gt;다수의 광주시민들은 이 자들을 군인들로 착각했을 것이다. 물론 북한군도 군인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위장전술에 속아 북한군과 국군을 혼동하는 것은 인식론적 혼동이다. 이들이 군복을 입고 지프를 탔어도 이들은 국군이 아니다. 이들이 북한군이든 시민군이든 이들의 정체성은 5.18무장단체이며, 국군이 아니다. &lt;BR&gt;&lt;BR&gt;많은 광주시민들이 저 5.18무장단체를 군인으로 혼동하고 광주사태에 대하여 군인들에게 누명을 씌웠는가? 1985년 발행된 앞의 &quot;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quot; 22일자 취재 메모에서 기자는 저 복면부대의 정체성을 이렇게 보고한다: &quot;무장한 시위대가 탄 지프·트럭·버스 등은 주택가를 계속 누볐다. 어떤 청년들은 경찰데모진압용 철모에 군복차림이었으나 차량을 운전하는 어떤 청년은 눈만 남긴 채 복면을 하기도 했다. 트럭에 LMG를 장치한 중무장도 보였다. 시민들은 동이 트면서부터 대문 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웅성댔다.&quot;&lt;BR&gt;&lt;BR&gt;&lt;IMG vspace=5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police-dress4.jpg&quot;&gt;&lt;BR&gt;집총 자세의 이들은 누구인가? 전경이 아니었다. 그때는 아직 시위 진압을 전담하는 전경 부대가 없었던 시대였으며, 또 전경이 M-1 총으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이런 5.18무장단체를 군인으로 혼동한 것도 인식론적 혼동이었으며, 저렇게 불순세력이 전경 복장으로 위장한 것을 민주화운동과 동일시한 것도 인식론적 오류였을 것이다.&lt;BR&gt;&lt;IMG vspace=5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rioter-in-mask.jpg&quot; width=280 height=400&gt;&lt;BR&gt;위 사진에서 5.18복면부대는 총으로 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손에 이상한 병을 든 것이 보인다. 무엇에 쓸 어떤 병이었는가? 그 정답이 밑에 있는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에서 보인다. 이 대자보는 &lt;행동강령&gt;을 이렇게 명령한다. &quot;무기를 제작하라! (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quot; 저, 5.18복면부대 손에 들린 병은 폭탄의 용도로 쓰일 병, 관공서를 태우는데 쓰일 병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관공서를 태우라고 명령할 권한이 있으며, 또 시민들에게 그렇게 명령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는 타당한 것인가?&lt;BR&gt;&lt;BR&gt;&lt;IMG border=0 vspace=5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daejabo/5-20.jpg&quot; width=491 height=500&gt;&lt;BR&gt;&lt;BR&gt;그리고 위의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에서 &quot;서울, 대구, 마산, 전주, 군산, 이리, 목포도 봉기!&quot;라는 문구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글 상단에 있는 탈북여성의 증언이 사실이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우리 국민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무수히 들어왔어도 목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었다는 사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탈북자들은 목포에서 동시에 일어난 봉기가 포인트임을 강조한다. 놀랍게도,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역시 그것이 포인트라고 말하지 아니하는가.&lt;BR&gt;&lt;BR&gt;저 위 광주청문회 동영상에서 보듯이 1988~89 광주청문회의 쟁점은 시민군 최초 무장시점이 5월 20일이었느냐 21일이었느냐였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으며, 5월단체들은 5월 21일 오후 한시 반 이후라고 우겼으며, 광주특위는 5.18측 손을 들어 주었다. 12.12-5.18 재판 역시 그런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의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는 &quot;학생 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quot;이라고 증언하지 아니하는가. 대자보 발행일이 5월 20일이었으니 5월 20일 이전 혹은 늦어도 20일 시점에는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자료가 사건의 진행순과 날자까지 아주 정확함이 확인되지 아니하는가!&lt;BR&gt;&lt;BR&gt;여기서 우리가 5월단체들에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도대체 학생 혁명군이라는 것이 있었는가? 학생혁명위원회는 또 무엇이었는가? 정말로 그런 단체들이 있었는가? 만약 아니었다면 북한군이 그 명의를 사용한 것이 사실 아닌가? 김동명 기자가 증언하듯 5월 19일부터 무기 탈취가 시작되었으며, 5월 19일부터 시작된 무기 탈취를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지 아니하는가? 정말로 5월단체들에서 (혹은 광주의 운동권이) &quot;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quot;는 명령을 광주시민들에게 내렸는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하였는가? &lt;BR&gt;&lt;BR&gt;만약 학생 혁명군의 말뜻을 5월단체들이 설명해 주지 아니하면 시민군이란 명칭은 북한군이 붙여준 것이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학생 혁명군은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군대이다. 누가 학생 혁명군을 조직했다는 말인가? 5월단체들이 시민군에 대해 말하지만 그 명칭의 유래를 우리는 모른다. 단지, 5월 20일자 대자보에서 시민군이 5월 20일에는 학생 혁명군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lt;BR&gt;&lt;BR&gt;위의 조선일보 취재일지에서 박홍서 기자는 5월 22일 새벽의 목포 상황을 이렇게 보고한다:&lt;BR&gt;&lt;BR&gt;* 새벽 1시20분 무안동 코롬방다과점, 수퍼마케트 일원 식품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빵, 음료수를 실어가.&lt;BR&gt;* 새벽 2시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lt;BR&gt;* 새벽 3시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불통, 시외·시내 버스 불통. 중·고 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시민호응 안해. 시내상가 모두 철시. 군대는 안보여. &lt;BR&gt;&lt;BR&gt;광주단체들의 소행이었는가? 목포에는 군인도 경관도 없었는데 왜 목포에서 여기저기 불을 지르며 관공서들을 파괴하며, 아무데나 발포하였는가? 광주 운동권의 소행이 아니었을진대, 결국 북한군 개입에 관한 탈북자들의 증언이 사실로 입증되지 아니하는가!&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IMG border=0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gt;&lt;BR&gt;&lt;BR&gt;&lt;FONT color=#800080&gt;&lt;U&gt;☞ &lt;/U&gt;&lt;/FONT&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document/5-16.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5월 16일)&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discuss/uprising1968.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통혁당 민중봉기 아지트였던 목포와 5.18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discuss/nk300.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 명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mokpo.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북한군 일부 목포 경유 광주 침투&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복면 쓴 5.18무장단체 사진전&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와 북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와 북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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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해설(1): 5월 16일 대자보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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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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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9-28T03:20:28Z</updated>
	    <published>2009-09-28T03:20:2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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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민주주의 발전은 사상의 발전이다. 그래서 미국 고전문학에는 민주주의 사상가들의 글들이 상당히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광주사태에 관하여 우리가 가지는 의문점은 이것이다. 만약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면 도대체 5.18 단체들이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들을 꽁꽁 숨겨두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lt;BR&gt;&lt;BR&gt;광주사태 발생원인으로 5.18측이 흔히 하는 주장이 김대중을 석방시키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김대중의 구속된 시점은 광주사태가 끝난 후였으므로 사실 그런 주장은 성립이 불가능하다. 그들은 김대중이 열흘 뒤 구속되었다 하더라도 5월 18일 0시 경에 연행된 것은 사실이 아니냐고 반박할지 모르지만, 그렇다면, 아래의 결사 투쟁 선동 대자보는 김대중이 연행되기 근 이틀 전인 5월 16일 발행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lt;BR&gt;&lt;BR&gt;전두환이 박정희-최규하의 4공화국에 반역했다고 단정하면 그 귀결은 그 반대 선상의 김대중이 4공화국, 즉 유신정권에 충성했다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 논리는 성립이 불가능하므로 1996년 12.12 재판 판결에 논란의 소지가 있으며, 오늘날 역사토론이 과제이다. 분명 광주사태 당시의 운동권의 공격논리는 전두환이 박정희의 양자였다는 것이지, 결코 박정희 정권에 대한 반역자였다는 것이 아니었다. &lt;BR&gt;&lt;BR&gt;12.12사태와 광주사태를 한묶음으로 묶는 주장의 또 하나의 그릇된 관념은 광주시민들이 신군부와 대항하였다는 관념이다. 그러나 그런 사실은커녕 그런 용어조차 없었다. 신군부라는 용어는 1979년 12월 김일성이 김재규 부하들이 아닌 이들을 지칭하여 사용하였다고 하는바, 남한에서는 그로부터 10년이 지나 그 용어가 그대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나, 운동권이 임의로 이 사람 저 사람을 신군부로 분류하였기에 전혀 정확성이 없는 용어이다. 생각해 보라. 만약 1980년 광주사태 당시 신군부라는 것이 있었다면 어찌 운동권이 그 당시에는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유신잔당으로 분류하였겠는가? &lt;BR&gt;&lt;BR&gt;광주사태 선동가는 전두환을 박정희의 양자 혹은 유신잔당으로 불렀다. 광주사태 직전 5월 20일과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의 민중봉기 거사 계획을 지지하는 대자보들이 수십 개 단체명으로 전국에 등장하였는데, 실제 작성자는 동일인물이었다. 예를 들어, 5월 16일자의 아래의 대자보도 민중봉기 선동가가 전남대의 명의를 도용했던 것이지, 전남대생들이 작성한 대자보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광주사태 당시 대자보들은 배후 선동가가 어떻게 시국을 읽고 무슨 논리로 민중봉기를 선동하였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lt;BR&gt;&lt;BR&gt;&lt;IMG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img/518doc.gif&quot;&gt;&lt;BR&gt;&lt;BR&gt;대학의 소리 - 그 첫번째 &lt;BR&gt;&lt;BR&gt;우리는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 &lt;BR&gt;&lt;BR&gt;오늘의 역사적 전환기에 있어서 민족사적인 사명과 당위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각 부분에서 자주, 자율적 민주화를 실현하는 것이며, 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을 통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독재자가 쓰러져간 10.26이후에도 유신잔당의 예비 음모정권은 기생적인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고 민족과 국민앞에 일말의 양심도 없이 또 다시 암흑시대로 복귀하려는 기만적인 정치안정과 민주화를 앞세워 음모와 공포, 권모술수를 남발하고 있지 않은가. 한계에 도달한 국민경제의 도탄에서 신음하고 있는 저 민중의 원성이 들리지 않은가. 모든 힘을 합쳐 불퇴진의 결의로 민족의 활로를 개척해야 할 이 때에 무엇 때문에 진정한 국민적 합의와 총화를 스스로 분열시키고 포기하려 드는가. 왜 그다지 숨겨야 할 것이 그렇게도 많은가. 선량한 국민이 유신잔당의 권력유지를 위한 소모품이며, 매판자본가 독점자본가의 안주꺼리밖에 되지 않는단 말인가. 이 슬픈 현실앞에서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으며 목숨을 걸고 싸워나가 억압된 민중의 승리와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따라서 민족사적 당위를 실현시키기 위한 현실적 과제로서, 첫째 유신잔당(특히 전두환 일당)의 박멸, 둘째 새로운 민주질서의 조속한 확립을 위해 유신잔재 전체와의 싸움에서 불투명한 자세로 일관한 야당세력에 반성을 촉구, 셋째 양심적인 범민주세력의 강력한 결단을 촉구하며, 전국의 노동자·농민과 전국의 지성인, 전국 학생의 결집된 힘으로 싸워나가지 않는다면, 영원히 이 땅의 민주회복은 공염불이 되고 말것이다. &lt;BR&gt;&lt;BR&gt;왜 비상계엄은 해제되고 있지 않으며 우리는 즉각적인 해제를 주장해야 하는가.1 &lt;BR&gt;&lt;BR&gt;장기화된 비상계엄은 언론의 검열·조작·억압을 계속하여 국민을 우롱하고 유신잔당세력을 규합하여, 또다시 잔악한 고문과 실형선고, 검거로 일관한 「改新정권」을 꿈꾸고 있다. 4월 12일 귀국한 사이공억류외교관의 귀환을 4.19에 발표하여 지면을 조작하고, 정보부 재건, 보안대의 활성화, 유정회 부활, 통대조직의 지역별 강화, 노골적인 국회 무시 등 기성 정치인의 고립을 시도하는 저들의 흉계는 무엇인가. ‘대통령유고’의 명분으로 발동한 비상계엄이 특정인의 재판을 위해 존속하게 되어, 그 음모가 백일하에 드러난 지금, 비상계엄은 잔당 세력의 등장을 위한 전초작업이며, 국민여론을 오도·무마하기 위한 강제적이고·임의적인 시한부 기초작업인 것이다. 우리의 민주화는 이 계엄의 즉각적인 해제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며, 해제권자를 제주도를 제외시켜 전국의 계엄이 아닌, 일부지역 계엄으로써 대통령은 허수아비격으로 전권을 계엄사령관 휘하에 두게하였으며, 국회(재적과반수 결의)가 사실상 유명무실한 현 상황하에서, 특히 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라는 위법적인 겸임은 모두 계엄의 소산이며, 이것이 계엄으로 합법화된다면, 현역 군인출신 총리서리, 국무위원서리, 국회의원서리 등이 어찌 나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국회가 열리지 않고 있는 지금 소극적인 공화·신민 두 당의 국회의원의 결단을 촉구하며, 한편 계엄을 즐기고 있을지도 모를 유신체제의 사생아 유정회 의원들의 자세가 불변하면, 국민의 과감한 응징을 면치 못할 것이다. &lt;BR&gt;&lt;BR&gt;구시대적 모순의 청산과 새로운 민주질서를 모색하여, 민주시대를, 그 실현을 갈구한 민족세력을 억압 악이용하고, 개헌논의를 불필요하게 했던 계엄령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학원 자율화와 노동자·농민의 권익옹호운동이 민족사적 소명의식에서 출발한 정통성수호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한 최후의 몸부림이란 사실을 부인하고, 군부세력과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유신잔당의 보복적인 야합을 노리고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 계엄은 즉각 해제되어야 한다. 유신 암흑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는 계엄해제를 최선결 요건으로 삼고, 목숨을 걸고 투쟁할 것이다. &lt;BR&gt;&lt;BR&gt;(※다 보신 다음에 이웃과 친구들에게 돌려가며 읽도록 합시다※) &lt;BR&gt;&lt;BR&gt;최근의 정보 : 日本朝日新聞 5月 5日字 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民主化의 방해인물로 全斗煥을 지적” 「멕시코시티, 4日」 카터미대통령은 日·米수뇌회담에서 박정권 붕괴후의 한국 군부의 동향에 관하여 「한 사람이 軍·情報·保安 각 분야를 한 손에 장악하고 있는 것은 “過行이다”라는 태도를 표명했다. 즉, 지난 4月 한국중앙정보부(K·C·I·A) 부장대리를 겸임한 전두환 한국군 보안 사령관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으로서는 崔정권 下에서 진행되고 있는 民主化에 군부가 큰 저해요인이 아닌가 하는 점에서 심각한 우려를 표명한 것으로 보여진다. 카터가 일국의 군부지도자를 지칭한 것은 지극히 이례적이라 한다.」 &lt;BR&gt;&lt;BR&gt;※다 읽으신 후, 이웃과 친구에게 돌려가며 읽도록 합시다. &lt;BR&gt;&lt;BR&gt;※이 大學의 소리는 계속 발간되어 질 것입니다 ※ &lt;BR&gt;&lt;BR&gt;1980년 5월 16일 &lt;BR&gt;&lt;BR&gt;전남대학교 자유언론투쟁위원회 &lt;BR&gt;&lt;BR&gt;&lt;IMG border=0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img/line01.gif&quot; width=460 height=10&gt;&lt;BR&gt;&lt;BR&gt;&lt;B&gt;&lt;FONT color=#990000&gt;위의 5월 16일자 광주사태 선동대자보 해설 및 비평&lt;/FONT&gt;&lt;/B&gt; &lt;BR&gt;&lt;BR&gt;김대중의 전국연합 산하 조직들이 대학가 등에 대자보를 붙이던 때에는 운동권이 대학가 여론을 장악하였으며, 비운동권 학생들에게는 아무런 반론의 기회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30 년 전에는 반론의 기회가 없었다 하더라도 이제나마 비평 및 반론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광주사태 30 주년이 임박한 이 시점에서 광주사태는 이미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요, 따라서 당시 자료들이 오늘날 역사 토론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광주사태 선동가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풀고 그의 민중봉기 선동 논리가 정당하거나 합리적이었는지 살피려면 먼저 그가 작성한 대자보들을 읽어보아야 하는 것이다.&lt;BR&gt;&lt;BR&gt;5월 16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제목은 &quot;우리는 무엇과 어떻게 싸울 것인가&quot;이다. 훗날 그들은 김대중 석방을 위해 일어섰다고 주장하였지만, 분명 위의 대자보는 김대중이 연행되기 하루 반 내지 이틀 전에 게시되었다. 이 대자보 제목은 투쟁이 목적이었음을 시사하며, 학생들을 선동하기 위해 대학의 소리라는 이름으로 게시하는 그 첫번째 대자보에서는 투쟁 대상이 무엇이며, 어떻게 싸울 것인가를 제시한다.&lt;BR&gt;&lt;BR&gt;그 첫 문장에 &quot;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을 통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어야 한다&quot;가 들어있다. 주체사상의 색채가 짙은 이 문구는 어쩌면 그다지도 북한 당국자들이 주장하는 광주사태의 의의와 그토록 일치하는가? 도대체 어떤 세력이 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인가? 왜 대표적 시민군 윤기권은 훗날 2억 보상금 수령 후 월북하였으며, 국립묘지 참배를 거부하는 북한 대표들이 스스로 5.18 묘지에 가서 참배하였는가?&lt;BR&gt;&lt;BR&gt;둘째 문장의 &quot;10.26이후에도 유신잔당의 예비 음모정권은&quot;이란 표현에 주목하라. 본래 광주사태는 12.12사태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태였다. 여기서 유신잔당이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 내각을 지칭한다. 오늘날 많은 이들이 광주사태가 직선제를 요구한 투쟁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그 당시 시위 구호는 &quot;최규하 물러가라&quot; &quot;신현확 물러가라&quot; &quot;(직선제) 개헌 반대&quot;였다. &lt;BR&gt;&lt;BR&gt;이 대자보 작성자는 1970년대의 찬란한 산업혁명 시대를 &quot;암흑시대&quot;라 부른다. 그러나 그런 치우친 좌익사관만을 강요한다면 그것은 민주화운동이 될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다양한 사관이 허용되어야 한다. 만약 운동권에 의해 한가지 사관만 강요되는 대학이 있다면 그것은 그 대학의 비극이다. 무엇이 북한의 비극인가? 그것은 오직 한가지 사관만을 인민에게 강요하는 획일주의이다. 만약 광주사태 선동가의 의도가 한국의 산업혁명을 부정하는 사관만을 강요하려는 것이었다면 그것은 그 출발부터 전혀 민주화운동이 아니었다.&lt;BR&gt;&lt;BR&gt;&lt;B&gt;『기만적인 정치안정과 민주화를 앞세워』&lt;/B&gt; 오늘날 전교조의 잘못된 교육으로 1980년 봄이 마치 군사독재 시대였던 것처럼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이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만약 군사독재 시대였다면 어째서 2월 29일 복권조치로 김대중 등 수백 명의 운동권이 3월 1일부로 사면복권될 수 있었겠는가? 최규하 대통령은 선거법을 직선제로 개정하는 개헌안을 내놓으며 야당의 협조를 호소하였으며, 4월 첫 주에 김영삼씨의 신민당 당원들과 김대중의 전국연합 운동권이 각목 들고 싸웠다. 당시 선거법 직선제 개정은 기정사실이었으며, 양김씨 중 누가 대선후보가 될 것이냐를 놓고 양김씨 지지자들간에 한국판 4월 11일자 &quot;뉴스위크&quot;지가 보도하듯 양김씨 중 누가 대선후보가 될 것이냐의 문제로 다투던 양김씨 지지자들간에 인신공격이 난무했으며, 주먹질이 오갔던 것이다. 대자보 작성자가 눈비비고 보아도 전혀 독재시대가 아니었으므 『기만적인 정치안정과 민주화를 앞세워』라는 말로 트집을 잡았던 것이다.&lt;BR&gt;&lt;BR&gt;&lt;B&gt;『이 슬픈 현실앞에서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으며』&lt;/B&gt; 대자보 작성자는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내부의 적으로 간주하였으며, 당시 시위 구호는 &quot;최규하 물러가라&quot; &quot;신현확 물러가라&quot;였다. 광주사태는 5월 18일 시작되었으되, 민중봉기 선동 작업이 진행되던 5월 16일의 시점에서 그 투쟁 대상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였다.&lt;BR&gt;&lt;BR&gt;&lt;IMG title=&quot;신문에 실린 김대중의 편지&quot; border=0 alt=&quot;김대중의 참회의 편지 기사&quot; src=&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image/news/dj-letter1a.jpg&quot; width=500 height=479&gt;&lt;BR&gt;&lt;BR&gt;&lt;B&gt;『목숨을 걸고 싸워나가 억압된 민중의 승리와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lt;/B&gt;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ument/dj-letter.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study21.org/518/document/dj-letter.htm&lt;/FONT&gt;&lt;/U&gt;&lt;/A&gt; 에서 보다 자세히 볼 수 있는 위의 김대중의 편지는 1981년 1월에 처음 쓴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그 이전 해 2월에도 다시는 사회를 혼란케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고, 2.29복권조치로 3월 1일 복권되어 정계에 복귀한 바 있다. 그런데, 복권된지 두 달 만에 민중봉기 일으켜 자기를 사면해준 최규하 대통령을 5월 20~22일경에 퇴진시키겠다고 하니 5월 18일 0시 연행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번에는 김대중이 말을 바꾸지 못하도록 그의 편지를 언론에 공개하였다. 김대중이 그 약속을 지켰는가? 아니다. 지난 해의 광우사태 때도 그는 이명박 대통령 정부를 전북시키려 했다.&lt;BR&gt;&lt;BR&gt;&quot;목숨을 걸고 싸워나가&quot; 이 문구는 유혈투쟁이 이미 예정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quot;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quot; 이 말은 그 투쟁 대상이 최규하 대통령 등 반공 인사들이었음을 시사한다. 러시아와 동구의 공산주의 국가들이 붕괴되기 전 모든 민주주의 국가들은 반공국가들이었다. 미국이 한국전쟁에 참전하였던 것도 반공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광주사태 선동 논리에서는 그 투쟁 대상이 거꾸로 바뀌어 반공인사들이었다. 만약 그 목적이 친공에 의한 민족통일이었다면 어떻게 그것이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이 가능할 수 있겠는가? &lt;BR&gt;&lt;BR&gt;&lt;B&gt;『첫째 유신잔당(특히 전두환 일당)의 박멸』&lt;/B&gt; 이 문구는 전두환이 유신잔당이라고 분명히 못박는다. 유신잔당이란 박정희의 유신정권 충신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따라서, 전두환이 유신정권에 대항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5.18측의 훗날 광주청문회 때와 12.12-5.18 재판 때의 주장은 말바꾸기를 한 것이다. 그들이 신군부라는 용어를 차용한 것도 그들의 말을 바꾸고 광주사태 논리를 바꾸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lt;BR&gt;&lt;BR&gt;&lt;B&gt;『해제권자를 제주도를 제외시켜 전국의 계엄이 아닌, 일부지역 계엄으로써』&lt;/B&gt; 분명 이 말은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작성자의 횡설수설이다. 5.18측에 도대체 이 문구로 주장한 바가 무엇이었느냐고 문의하면 답변해줄 수 있을까? 그러나 이것만은 분명하다. 대자보 작성자는 당시 비상계엄이 물계엄이었음을, 즉 제주도가 제외된 계엄이었음을 트집잡은 것이다. 비상계엄이 전국계엄이 아닌 일부지역 계엄이면 대통령 권한이 약화된다는 대자보 작성자의 주장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 입으로 &quot;최규하 물러가라&quot; 외치면서, 다른 한 입으로 일부지역 계엄, 즉 이른바 물계엄 하에서 대통령 권한이 축소된다고 우기는 것 또한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여하튼,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겠다는 김대중의 위협이 말로만 하는 위협이 아니라, 실지로 민중봉기 거사계획이 진행되고 있음이 5월 16일 확인되자 정부는 그 다음날 5월 17일 자정 김대중을 연행함과 동시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상계엄 전국확대가 쿠데타라는 황당한 주장을 하며, 5월 18일부터 과격시위를 선동하였던 것이다.&lt;BR&gt;&lt;BR&gt;&lt;B&gt;『전두환의 중앙정보부장서리라는 위법적인 겸임은』&lt;/B&gt; 사실, 이것은 전혀 전국적 민중봉기 혹은 광주사태를 일으켜야 할 이유가 되지 못했다. 전두환 보안사령관의 임기는 4월에 끝났으며, 단지 후임자 노태우 장군에게 인수인계하는 절차가 6월에 마무리되었을 뿐이다. 5월에 김재규 재판이 진행되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보안사령관 업무는 끝나있는 때였다. 그 시절 중앙정보부장은 보안사령관직을 거쳐 임명되었으므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유일한 적임자였고, 10.26 사태 이후 6개월이 넘도록 공석이었던 중앙정보부장 자리를 최규하 대통령이 더 이상 비워두실 수 없어서 그를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하셨던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 온당한 처사로 여겨진다. &lt;BR&gt;&lt;BR&gt;&lt;B&gt;『군부세력과 기회주의적이고 반동적인 유신잔당의 보복적인 야합을 노리고 있는 계기를 만들어가고 있는』&lt;/B&gt; 이 표현 또한 대자보 작성자의 횡설수설이다. 뭔가 트집거라를 제시해 봉기를 선동해야겠는데, 분명한 이슈거리가 없자 장황한 말로 횡설수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전두환을 유신잔당에 포함시킨 위의 문구와 달리 여기서는 군부세력과 유신잔당을 구분한다. 결론적으로 이 대자보에서 유신잔당이란 용어는 일차적으로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지칭한다. &lt;BR&gt;&lt;BR&gt;&lt;B&gt;『유신 암흑시대를 청산하기 위해 우리는 계엄해제를 최선결 요건으로 삼고, 목숨을 걸고 투쟁할 것이다』&lt;/B&gt; 이렇듯 광주사태 당시의 모든 대자보들은 일명 유신 시대,즉 1970년대의 산업화 시대에 대한 적개심을 일으킬 목적으로 작성되었다. 따라서, 마치 4공화국의 유신체제를 고수하며 수호할 목적으로 광주시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던 것처럼 해석될 수 있는 12.12 판결문은 그 역사논리 성립이 불가능하다. 보라, 목숨을 걸고 투쟁할 것이다라는 말은 유혈 투쟁을 불사하겠다는 말이요, 만약 전두환이 투쟁 대상에 포함되어 있다면 그는 유신정권 충신으로 간주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지, 결코 12.12 사태를 쿠데타로 여겼기 때문에 일어난 항쟁이 아니었다. &lt;BR&gt;&lt;BR&gt;&lt;B&gt;『최근의 정보 : 日本朝日新聞 5月 5日字 신문에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lt;/B&gt; 전남대생들이 일본 아시히 신문을 본 것이 아니라, 김대중의 전국연합 산하 조직들 중 대자보 작성 담당자가 본 것이었다. 전남대학교 자유언론투쟁위원회 등 수십 개의 단체명들 명의로 대자보가 붙여지고 유인물들이 뿌려졌으나, 그 작성자는 동일인물이었으며, 바로 광주사태의 배후 인물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그가 누구였는지를 물어야 한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IMG border=0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gt;&lt;BR&gt;&lt;BR&gt;&lt;FONT color=#800080&gt;&lt;U&gt;☞ &lt;/U&gt;&lt;/FONT&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discuss/1212fact-n-lie.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12.12에 대한 거짓 주장들&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1212-518.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0066cc&gt;&lt;U&gt;12.12재판 패자 5월단체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korean/12-12/document/5-16.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광주사태 선동 대자보&lt;/FONT&gt;&lt;/U&gt;&lt;/A&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5.18&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5.18&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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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 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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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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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4-14T09:10:35Z</updated>
	    <published>2009-04-14T09:10:3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amp;nbsp; &quot;평양은 망명을 꿈꾼다&quot;라는 제목의 그의 저서에서 강명도는 광주사태 당시까지만 해도 전두환은 전혀 북한에 알려지지 않았던 인물이었음을 이렇게 서술한다:&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gt;&lt;&lt;&quot;광주에서 전쟁이 터졌다&quot;&lt;BR&gt;1980년 5월 18일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 남조선에서 계엄군과 학생 시위대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일본 조총련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확보한 중앙 TV가 매일 그 테이프를 방영한 것이다. (....) 또 복면을 쓴 시민군이 탈취한 계엄군의 지프를 타고 시가지를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노동신문』은 해설을 통해 학생시위가 광주사태의 도화선이 되었으며, 공수부대가 계엄군으로 출동, 엄청난 사태로 확대됐다고 보도했다.&amp;nbsp;&amp;nbsp;그리고 공수부대 투입을 지시한 사람이 전두환이라고 보도했다.&amp;nbsp;&amp;nbsp;내가 점두환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은 순간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amp;nbsp;『노동신문』은 전두환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gt;&gt; (238쪽,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측 및 유언비어에 편승하는 미디어는 마치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유명 인물이었던 것처럼 착각하도록 유도해 왔다.&amp;nbsp;&amp;nbsp;그러나 만약 그가 남한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면 그 누구보다도 고급 정보를 갖고 있었던 강명도가 모를 리 있었을까?&amp;nbsp;&amp;nbsp;정치 시사 분야의 전문가로 명성을 떨치던 김동길 교수조차도 1980년 6월 이전에는 전두환이란 이름 석자를 들어본적이 없다고 했다.&amp;nbsp;&amp;nbsp;그러면 광주사태 당시 광주에 투입되었던 계엄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았을까?&amp;nbsp;&amp;nbsp;그 사실이 궁금하여 역사학도는 2007.07.11 13:05 에 한동석 중위에게 다음과같이 질문하였다:&lt;BR&gt;&lt;BR&gt;&lt;&lt;먼저 광주에서 투사회보라는 이름의 벽보 혹은 삐라들을 통해서 5월 18일부터 전두환이란 이름을 광주시민들이 처음 듣게 되는데요. 사실 그 전에는 대부분의 국민은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극히 소수를 제외하고는 민간인들에게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던 이름이었지요. 한동석님은 당시 소대장의 위치에서 전두환이란 이름을 들어 보셨었는지요.&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이 질문에 대해 2007.07.11 15:47 에 한동석 중위는 이렇게 대답하였다:&lt;BR&gt;&lt;BR&gt;&lt;&lt;전혀 들어보지 못했읍니다. 도청 재탈환(5/27) 된 후에 2-3일 동안 시내 무기회수 작전에 부대의 간부(당시호칭: 하사관과 장교) 1명과 예비군 중대장(사복차림)과 사복 형사 ,3인조로 구성하여 어디인지 지역명은 잘 모르지만 우범지역이었던 것은 확실함. 이미 모두 도주한 상태여서 젊은 남성들은 만나보기 힘들었읍니다. 그리고 시내는 정리정돈이 되어 있는 상태였으나,시내를 조금 벗어난 지역에는 방화된 차량등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처참했던 상황들을 예상할 수가 있었읍니다. &lt;BR&gt;&lt;BR&gt;그리고, 6월 초에 구례에 있는 예비군 관리대에 보직 명령을 받고 전출되어 구례읍내에서 영외거주(하숙) 하면서 하숙집 TV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서리(?) 자격으로 연설하는 모습을 처음으로보았읍니다. 그전에는 전혀 &quot;전두환&quot;이란 세글자를 보지도 못했읍니다.&gt;&gt; (&lt;A href=&quot;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폭동진압작전에 동원되었던 공수부대원들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았는가?&amp;nbsp;&amp;nbsp;하급 장교들에게조차 그 이름은 아직 생소한 이름이었음을 당시 3공수여단 12대대 소속 김치년씨는 이렇게 증언한다:&amp;nbsp;&amp;nbsp;&quot;구호들 가운데 나와 같은 하급장병들에게는 생소한 이름도 있었다. 다름 아닌「전두환」이었다...그가 우리 부대를 지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휘계통상에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진압군인들과 전두환씨와의 관계설정이 현실적으로는 이만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quo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80&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80 )&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광주시민군은 전두환이 누군지 알고 있었는가?&amp;nbsp;&amp;nbsp;아니다.&amp;nbsp;&amp;nbsp;대다수의 시민군은 그가 학생인지 공무원인지 서울 사람인지 광주 사람인지조차 전혀 모르고 있었다.&amp;nbsp;&amp;nbsp;그래서 당시 나이 24세로 대입재수생이었던 시민군 이수범은 &quot;우리는 전두환이 어떻게 생긴 놈인지도 몰랐는데 항쟁이 끝나고 나니 대통령으로 출마를 하네 어쩌네 하면서 난리를 떨었다. 그제야 그놈이 어떤 놈인지 알았다.&quot;고 증언한다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amp;page=7&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369&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시민군 이수범의 증언&lt;/FONT&gt;&lt;/U&gt;&lt;/A&gt; 중 네번째 작은 제목 &quot;진상이 밝혀지기를 간절히 바라&quot; 이하.&lt;BR&gt;&lt;BR&gt;&amp;nbsp;&amp;nbsp; 시민군 최인영도 &quot;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quot; 고 증언한다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510.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510.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세번째 작은 제목 &quot;남평 무기고를 털다&quot;의 끝단락).&lt;BR&gt;&lt;BR&gt;&amp;nbsp;&amp;nbsp; 시민군 김행주도 &quot;5·18 당시도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었다.&quot;고 증언하며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19.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19.html&lt;/FONT&gt;&lt;/U&gt;&lt;/A&gt; , 시민군 김용균도 &quot;특히 수사관들은 '전두환 물러가라'는 구호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나는 오히려 '전두환'이가 누구냐고 되물었다. 사실 나는 전두환이가 누구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수사관은 전두환의 이름 대신에 000으로 표시했다.&quot;라고 증언한다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30&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30&lt;/FONT&gt;&lt;/U&gt;&lt;/A&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HWW36g3kHaI$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quot;활기 되찾은 광주&quot;라는 제목의 위의 영상 뉴스가 제작되었던 6월 1일 공교롭게도 광주사태에 대한 정반대의 시각의 두 문서가 공개되었으니&amp;nbsp;&amp;nbsp;하나는 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ument/mleh-report.pdf&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study21.org/518/document/mleh-report.pdf&lt;/FONT&gt;&lt;/U&gt;&lt;/A&gt; )이요, 다른 하나는 &quot;찢어진 깃발&quot;이란 이름의 유언비어 책자였다.&amp;nbsp;&amp;nbsp;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은 단 한번에 신문에 게재되었던데 비해, &quot;찢어진 깃발&quot;은 천주교 신부들의 주선으로 일본 기독교 신문들에 실리고, 로마 교황청에 보내진 후, 전국과 여러나라로 계속 유포되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건모와 김문 두가지 이름을 사용하며 &quot;찢어진 깃발&quot;이란 유언비어 책자를 제작하여 유포하였던 사기꾼은 광주사람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그는 5월 19일 광주로 들어와 유언비어를 유포하다가 24일 홀연히 광주를 떠났기에 광주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amp;nbsp;&amp;nbsp;5월 19일 광주로 들어온 외부인이 어떻게 5월 18일 사건의 목격자가 될 수 있으며, 어떻게 25일부터 27일까지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증언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그리고 유언비어 퍼뜨리기에도 바빴을 그 며칠간에 어떻게 200쪽이 넘는 책을 집필할 수 있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 어느 사기꾼이 극장에서 &quot;불이야&quot;라고 외쳐 겁에 질린 관객들이 한꺼번에 출구로 몰리다가 넘어져 압사당하는 사고가 발생하였을 때 그 가해자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자이다.&amp;nbsp;&amp;nbsp;광주사태 때 유언비어를 퍼뜨려 폭동을 선동했던 김문은 분명 가해자였다.&amp;nbsp;&amp;nbsp;그런 그가 목격자를 자처하며 &quot;찢어진 깃발&quot;이란 책자를 내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계엄사 발표 『광주사태』 전문은 그 서술의 정확성이 날로 입증되는데 비해, &quot;찢어진 깃발&quot;은 그 거짓이 날로 드러나 이제는 5.18측에서조차 외면하거나 감추는 책자가 되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유언비어를 책자로 퍼뜨린 이는 김문이었으나, 5월 18일부터 전화로 유언비어를 퍼뜨린 인물은 김상집이었다.&amp;nbsp;&amp;nbsp;그는 여전히 이런 주장을 한다: &lt;BR&gt;&lt;BR&gt;&lt;&lt;외신 기자들은 우리에게 20일 첫날에는 열 손가락을 활짝 펴보이며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격려했다. 광주학살로 인해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이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수립되리라는 것이었다. 열 손가락이 하나씩 줄기 시작하여 26일에는 세 손가락만 펴 보이며 '사흘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것' 이라며 격려했다.&gt;&gt; (&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00360&amp;PAGE_CD=N0000&amp;BLCK_NO=3&amp;CMPT_CD=M0009&amp;NEW_GB=&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김상집의 주장을 오마이뉴스에서 더 읽기&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런데, 아래 광주사태 당시 해외 뉴스 동영상이 있는바, 외신 기자들은 전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amp;nbsp;&amp;nbsp;며칠만 더 버티면 광주시민군이 이긴다는 말은 외신 기자들의 말이 아니라, 윤상원의 말이었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PWOYtgifxQs$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우리는 어느 시각에서 광주사태를 바라보아야 하는가?&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김동길 교수의 시각을 관찰해 볼 필요가 있다.&amp;nbsp;&amp;nbsp;여기 단 한번밖에 광주사태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는 인물이 있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여기 그 누구보다도 광주사태에 대한 여론에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 있다.&amp;nbsp;&amp;nbsp;양김씨는 김동길 교수의 지지가 있었기에 정계 거목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amp;nbsp;&amp;nbsp;한민통이란 간첩단 출신의 김대중에게 김동길 교수의 지지는 신원보증수표와 같았다.&amp;nbsp;&amp;nbsp;김대중이 그의 내란 음모를 진행하던 때에 김동길 교수의 이름을 최대한으로 팔았다.&amp;nbsp;&amp;nbsp;김동길 교수는 그런 사실을 모른채 김대중이 자기 이름을 팔도록 내버려 두었다.&amp;nbsp;&amp;nbsp;김대중은 김동길 교수의 이름을 팔며 민주팔이 횡재를 하였고,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피해자는 김동길 교수였다.&amp;nbsp;&amp;nbsp;연세대 총장 후보감이었던 그는 몇년간 강단을 떠나야 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동길 교수가 김대중을 지지하였을 때는 무엇이든 김대중이 하는 일은 민주화운동으로 인식되었다.&amp;nbsp;&amp;nbsp;김문은 유언비어 유포를 김대중 지지 수단으로 삼았다.&amp;nbsp;&amp;nbsp;그리고 김대중 지지에 발벗고 나선 이들은 악성 유언비어에 너그러웠으며, 심지어 목적을 위한 한 수단으로 정당화하였다.&amp;nbsp;&amp;nbsp;1988년 김동길 교수는 여전히 김대중을 지지하였다.&amp;nbsp;&amp;nbsp;그러나, 노태우 대통령이 광주사태를 &quot;광주민주화운동&quot;으로 호칭할 것을 발의하였을 때 유독 반대 의사를 칼럼으로 기고하였던 이가 김동길 교수였다.&amp;nbsp;&amp;nbsp;무장봉기를 민주화운동이라 부르면 역사논리가 잘못되기에 그는 반대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오늘날 그는 김대중은 사기꾼이라고 강연하며, 전두환 전 대통령의 말이 모두 옳았음을 역설한다.&amp;nbsp;&amp;nbsp;사실 광주사태의 피해 당사자였음에도, 역사학자로서 역사의 진실 편에 서기를 선택한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동길 교수는 광주사태에 개입되어 있었는가?&amp;nbsp;&amp;nbsp;김대중이 김동길 교수 이름을 팔기 위해 작성했던 주동자 명단으로는 그러했다.&amp;nbsp;&amp;nbsp;그래서 그런 오해를 살 여지가 있었으나, 그럼에도 한번도 무장봉기를 옹호한 적이 없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이번에는 과연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폭동진압작전에 개입했었는지 물어보자.&amp;nbsp;&amp;nbsp;광주사태 현장에 있었던 김치년씨는 &quot;...그가 우리 부대를 지휘한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더구나 지휘계통상에 있다는 것도 상상할 수 없었다.&quot;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도대체 무엇에 근거하여 5.18측은 &quot;전두환 광주학살 작전&quot;을 주장하였는가?&amp;nbsp;&amp;nbsp;&quot;찢어진 깃발&quot;이란 책자에 담긴 유언비어들을 무조건 맹신하여 달라고 어떤 광주시민들은 요구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유언비어가 객관적 진실을 지배할 수 있는가?&lt;BR&gt;&lt;BR&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ehaRdBAvtpc&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fullscreen=&quot;true&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지금 노무현과 박연차 회장 사이의 수백만 달러의 금전 거래에 대하여는 그 물적 증거와 증언 등이 너무도 명백하다.&amp;nbsp;&amp;nbsp;이것은 이미 객관적으로 입증된 사실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quot;전두환 광주학살작전&quot; 유언비어에 털끝만한 객관성이라도 있는가?&amp;nbsp;&amp;nbsp; 광주청문회 당시 도저히 지휘체계 이원화를 말장난으로라도 입증해 볼 심산으로 &quot;지휘권 지휘권 해서, 의원들이 증인에게 물은 것이 별개의 표 나는 지위소를 설치해서 이원화 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증인의 지휘권은 계엄을 물계엄이라고 일부 장군출신들은 얘기를 합디다만, 사령관께서도 당시에 증인은 사령관으로써 그러한 물렁물렁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이 바로 지휘체계 이원화라고 지적하는 것입니다.&quot;라고 말한다. 그러나, 소준열 장군은 &quot;저는 군생활을 통해서 그와 같이 생활을 안했습니다. 누구한테 지휘권을 침해당하거나, 저의 주어진 임무를 누구에게도 침해 안 당했습니다&quot;라고 시원스러이 대답한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아래 사진에서 보듯 지금으로부터 20 년 전의 광주청문회 때 노무현의 손이 전두환 전 대통령 얼굴에 던질 명패를 집으려 폼잡는 것도 도저히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광주폭동진압작전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었는지 찾을 수도 입증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왜?&amp;nbsp;&amp;nbsp;그것은 &quot;찢어진 깃발&quot;이란 유언비어 책자가 광주사태에 대한 노무현의 지식과 논리의 한계였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 &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clubimgfile.paran.com/historian/pds/2006/0304/1141445452_노무현2.gif&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렇듯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무성하였으되, 5.18측에서는 그 누구도 그런 정보의 출처를 제공하는 이기 없다.&amp;nbsp;&amp;nbsp;그러나 북한이 광주사태에 개입하였다는 사실에 대하여는 김일성의 어록도 있고, 탈북자들과 탈북군인들의 증언은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의 육하원칙에 입각한 서술이 너무도 명확하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먼저 1976년 4월 김일성이 대남 공작원들과 했던 담화 내용을 살펴보자:&lt;BR&gt;&lt;BR&gt;&lt;&lt;노동계에 침투하는 방법도 여러가지가 있습니다.&amp;nbsp;&amp;nbsp;투쟁에서 단련되고 검열된 조직원을 산업현장에 새로 입사시키는 방법과 각 공장 노동자들 속에서 경향성이 좋은 노동자들을 외부에서 몰색하여 포섭하는 방법 등 크게 두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amp;nbsp;&amp;nbsp;전자의 경우에 가장 좋은 방법은 학생운동 출신 핵심당원들을 고졸자로 신분위장하여 취직시키는 방법이고, 후자의 경우는 중요 위장취업 조건이 여의치 않은 공단지역 곳곳에 '노동상담소' '야학방' 같은 것을 차려놓고 노동자들이 몰려오게 하여 자연스러운 대인관겡를 형성해 가지고 물색 포섭하는 방법입니다.&amp;nbsp;&amp;nbsp;지하당 조직들은 현실 실정에 맞게 각 산업현장에 핵심들을 침투시켜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을 의식화, 조직화해야 합니다.&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과연 김일성의 목적이 남한에서의 민주화운동이었겠는가?&amp;nbsp;&amp;nbsp;그리고 이처럼 김일성이 원하는 역할을 윤상원이 그대로 수행하고 있었음이 어찜인가? 들불야학을 통해 청소년들을 의식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졸자 신분을 감추고 노동자로 위장 취직하여 노동자들을 의식화시키고 있었다.&amp;nbsp;&amp;nbsp;광주사태를 점화시킨 이들은 항간에 잘못 알려진 대로 전남대생들이 아니라, 바로 이 들불야학 청소년들과 노동자들이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청진에 소재한 3호청사가 바로 광주사태 때 유언비어 삐라를 살포한 곳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1979년 11월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교시를 살펴보자:&lt;BR&gt;&lt;BR&gt;&lt;&lt;10.26사태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다는 징조입니다.&amp;nbsp;&amp;nbsp;박정희가 정보부장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사실은 권력층 내부의 모순과 갈등이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첨예한 단계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amp;nbsp;&amp;nbsp;적들은 지금 계엄상태를 선포해 놓고 서로 물고 뜯고 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amp;nbsp;&amp;nbsp;연락부에서는 이 사태가 수습되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amp;nbsp;&amp;nbsp;남조선의 모든 혁명 역량을 총동원하여 전민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적극 유도해야 합니다. &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일성은 10.26사태를 적화통일의 결정적 시기를 앞당길 호재로 이용하려 하였으며, 그 방법으로 전민봉기를 선택했다.&amp;nbsp;&amp;nbsp;김대중 역시 그 무렵부터 전민봉기(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킬 준비에 착수하였으며, 광주사태는 그의 전민봉기음모가 광주에 국한되어 일어난 사태를 말한다.&amp;nbsp;&amp;nbsp;남한에서의 전민봉기 음모가 성공했다면 그 다음은 무엇이었는가?&amp;nbsp;&amp;nbsp;전민봉기는 김일성이 이기기 위한 수순이었다.&amp;nbsp;&amp;nbsp;우리는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quot;며칠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quot;라고 한 말의 의미를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북한 사회 안전부 소속 특수부대 군관 출신 탈북자, 특수부대 정치군관 출신으로 임 천용씨와 더불어 자유북한군인연합 공동대표인 최 중현씨는 1980년 5월 광주사태 직전 3호청사 부장회의에서 김일성이 내린 비밀교시를 이렇게 인용한다:&lt;BR&gt;&lt;BR&gt;&lt;&lt;남조선에서 노동자들이 드디어 들고 일어났습니다. 사북 탄광의 유혈사태는 반세기에 걸친 식민지 통치의 필연적 산물이며, 인간 이하의 천대와 멸시 속에서 신음하던 노동자들의 쌓이고 쌓인 울분의 폭발입니다. 남조선 혁명가들과 지하혁명 조직들은 이번 사북 사태가 전국으로 확산 되도록 적극 불을 붙이고 청년학생들과 도시 빈민 등 각계각층 광범한 민중들의 연대투쟁을 조직 전개하여 더 격렬한 전민 항쟁으로 끌어올려야 합니다.&lt;BR&gt;&lt;BR&gt;결정적 시기가 포착되면 지체 없이 총 공격을 개시해야 합니다. 전국적인 총파업과 동시에 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켜, 전신, 전화국, 변전소,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임시 혁명정부의 이름으로 북에 지원을 요청하는 전파를 날려야 합니다. 그래야 남과 북의 전략적 배합으로 혁명적 대 사변을 주동적으로 앞당길 수 있습니다.&gt;&gt; (&lt;A href=&quot;http://kforum.co.kr/bbs/view.php?id=all&amp;page=10&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518&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한국논단 2007년 2월호&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아래의 대자보에서 보듯 5월 22일 윤상원이 광주에 해방구를 설치한 후에 발행한 투사회보를 통해 지시하는 전민 항쟁 전개 수순이 김일성의 비밀교시 내용과 상당히 흡사함에 우리는 놀라지 않을 수 없다.&amp;nbsp;&amp;nbsp;전략적 요충지대 곳곳에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있었으며, 방송국 등 주요 공공시설들을 점거하는 동시에 단전과 함께 통신 교통망을 마비시키고 있었으며, 해방구 본부가 임시 혁명정부의 기능을 가지고 있었다.&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http://study21.org/518/photo/5_22dajabo.jpg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5_22dajabo.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2006년 12월 20일의 기자회견중 “5.18 당시 함경남도에 위치해 있던 저희 부대는 전투동원상태에 진입하라는 상급 참모부의 명령을 받고 완전무장한 상태에서 신발도 못 벗고 24시간 진지를 차지하고는 광주사태의 긴급 속보를 전해 들으면서 20여일 이상을 출전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당시 경험을 전한 최대표는 그 후 7군단 10사단장이었던 여 병남과 참모장 김 두산의 대화를 통해 ‘특수부대 1개 대대가 광주에 투입됐는데 희생이 컸지만 공로도 컸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여기서 북한군 침투설에 대한 흔한 반론이 &quot;1개대대라면 5백명 정도의 인원인데, 이 많은 인원이 광주에 들키지 않고 진입하는게 가능 하였을까?&quot;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이들은 최 대표의 이어지는 증언을 귀담아 듣지 않았거나 아직 광주사태의 분명한 팩트를 보지 못하고 있기에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모든 탈북군인들과 탈북자들의 일치하는 증언은 600명이 동시에 침투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300명씩 두 떼거리로 나뉘어 한 때거리씩 침투하였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최 대표는 4군단 70정찰대대 출신 이 덕선 씨에게 당시 인민 무력부 정찰국 소속 정찰 대대들이 광주에 투입된 정황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들었다고 했다. 이 덕선씨에 따르면 광주에 투입된 인원은 모두 600명. 선봉 부대는 2군단 정찰대대 300여 명이었다. 나머지 300여 명은 인민군 각 군단, 저격여단 등에서 차출한 정예 병력으로 구성했다고 한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대동강 하류에 있는 남포시 인근에서 고깃배로 위장한 대형 공작선에 300명을 태우고 출발, 공해상을 거쳐 북한에서는 백암이라고 알려진 서해상으로 침투했다. 나머지 300명은 북한 동해안 신포지역의 馬養島(마양도)에서 출발해 잠수함을 타고 전남 지역으로 투입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정찰국 5부장이 공해상에서 대기 중인 배에 타고 현장을 지휘했다고 한다.&amp;nbsp;&amp;nbsp;사회 안전부 소속 특수부대에서 수송 장교였던 탈북자도 1980년 5월 당시 ‘머구리(潛り=잠수라는 일본말이 전화됨) 작전’이라는 비밀 임무를 목격했다고 한다. 그는 “이때 8명에서 12명 정도의 사람들이 M-1소총을 들고 남조선 군복을 입고 대동강 하류로 빠져 나가는 것을 봤다”며 북한군에서는 거의 보기 어려운 M-1 소총과 남조선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그렇게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증언했다.&amp;nbsp;&amp;nbsp;뮤지컬 요덕 스토리의 안무가로도 유명한 김영순 씨는 요덕 수용소 생활 후 ‘장진광산’이라는 곳에 있으면서 특수부대 군관 출신들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한다.&amp;nbsp;&amp;nbsp;이때 군관 출신들은 “광주 사건 당시 500~700명 정도 투입되었다&quot;는 말을 들었다고 그녀는 증언한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렇듯 모든 탈북자들의 증언은 300명씩 두 팀이 침투하였다는 사실을 가리키거니와 그 사건 전개 과정에 대해 이어지는 증언을 좀 더 들어보자.&amp;nbsp;&amp;nbsp;1980년 초에 김일성은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 중린을 개별적으로 불러 한국내의 현 정세를 이용하여 비밀공작 조직을 더욱 활발히 움직이는 데 대한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lt;당시 김일성은 한국내의 비밀공작 조직들을 통해 광주에서 대규모 항쟁이 준비되고 있다는 정보를 보고 받고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 중린을 불러 광주항쟁에 대비한 북한군의 지원 작전을 지시하였고 김 중린은 북한 정찰국 및 특전사부대들을 광주봉기에 투입할 것을 당시 북한군 정찰국장으로 있던 장 성우와 정찰국 5부장 이 하일에게 구체적인 지시를 하달하였다. &lt;BR&gt;&lt;BR&gt;1980년 5월 초. 김일성은 루마니아 대통령의 초청으로 루마니아방문이 예정되어 있었고 5월 말까지 루마니아에 이어 구라파 방문일정을 소화하게 되어있었다. 루마니아 방문 출발 직전에 김일성은 김정일과 김 중린을 불러 장차 한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태에 대응할 구체적인 지시를 주었다.(김 중린의 증언을 사적인 자리에서 직접 청취하였음) 김일성은 광주사태로 인한 향후 한반도의 정세변화에 대비하여 5월말까지 예정 되었던 루마니아 방문일정을 단축하고 5월 13일 귀국하였다. &lt;BR&gt;&lt;BR&gt;남포에 집결한 전투인원들을 환송하는 연회장에 김정일을 대동 하여 김 중린. 이 하일이 참가했으며 김정일은 당시 전투원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그들을 고무하였다. 그 자료는 현재 평양시 룡성 구역 룡추2동 대남 사적관 지하전시실 2관에 보관되어있다. 환송회를 마친 남파 인원들은 1척의 대형 공작선에 승선하여 남포항을 출발하였다. 당시부터 남파된 부대의 전체 지휘는 정찰국 5부장 이 하일에 의해서 주도되었다. 남포루트를 통해 침투되었던 당사자들은 공해상에서 민간인 복장을 하고 남한 서해안의 백암이라는 지명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들어갔다고 증언하였다. 당시 총책 이 하일은 공해상에서 광주현장에 침투된 무장인원들을 지휘하였다. &lt;BR&gt;&lt;BR&gt;현장을 총괄 지휘하던 이하일은 계엄군에 의해서 광주정세가 역전되자 인원들의 철수를 지시했으며 1980년 5월25일. 부상인원을 포함한 약 400명 정도의 남파되었던 인원들이 1차로 남포항으로 도착했고 나머지 인원 70 여명은 광주에서 죽은 40 여명의 시신에서 일부 부위만을 채취하여 중부전선인 강원도 철원군 상요리 일대의 전선을 넘어 귀대하였다. &gt;&gt; (&lt;A href=&quot;http://kforum.co.kr/bbs/view.php?id=all&amp;page=10&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518&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한국논단 2007년 2월호&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런데, 현 북한노동당 비서 김 중린이 광주사태에 깊이 개입하였다는 사실은 강명도의 1995년 저서 &quot;평양은 망명을 꿈꾼다&quot; 238~251쪽으로 입증이 되거니와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lt;/FONT&gt;&lt;/U&gt;&lt;/A&gt; ), 과연 당시 총책 이 하일이 300 명씩 두 떼거리를 광주에 침투시킨 사실이 있는지 남한 기록을 살펴보자.&amp;nbsp;&amp;nbsp;여기서 300명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5.18측 자료들이 300명씩 두 떼거리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해 주고 있지 아니한가!&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police-dress4.jpg&quot; vspace=5 name=zb_target_resize&gt;&lt;BR&gt;&amp;nbsp;&amp;nbsp; 먼저 위 사진을 살펴보자.&amp;nbsp;&amp;nbsp;집총 자세의 이들은 누구인가?&amp;nbsp;&amp;nbsp;전경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그때는 아직 시위 진압을 전담하는 전경 부대가 없었던 시대였으며, 또 전경이 M-1 총으로 무장하지도 않았다.&amp;nbsp;&amp;nbsp;이들은 공수부대원들도 아니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이들은 누구였는가?&amp;nbsp;&amp;nbsp;시민군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문제는 광주사람들로 구성된 시민군이었는지 아니면 외부에서 침투한 시민군이었는지의 문제이다.&amp;nbsp;&amp;nbsp;시민군이 전경 제복을 빼앗아 입을 수는 있어도 군화는 발의 사이즈가 달라 도저히 그렇게 하지 못한다.&amp;nbsp;&amp;nbsp;그런데, 위 사진의 무장단체는 한결같이 같은 모양의 단화를 신고 있다.&amp;nbsp;&amp;nbsp;만약 광주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면 신발 모양이 각각 달랐을 것이다.&amp;nbsp;&amp;nbsp;위 사진은 외부에서 침투한 무장단체가 있었음을 강력히 암시한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탈북자들 및 탈북군인들의 증언들처럼 남한의 기록에서도 300명이란 사람 숫자가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amp;nbsp;&amp;nbsp;5월 22일 계엄군 철수 이후의 광주상황은 이러하다.&amp;nbsp;&amp;nbsp;계엄군이 광주시를 전면 철수한 5월22일에도 2천여 명의 군중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3백여 명의 극렬시위자는 경찰복과 공수단 복장을 하고 복면을 한 모습으로 40 여대의 군용차량을 몰고 송정역에 집결하여 공포를 쏘면서 시위를 하였고, 관광호텔, 전일빌딩, 전남의대, 유진온천 등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광주에 이르는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였다.&amp;nbsp;&amp;nbsp;여기서 경찰복장을 한 3백여 명의 극렬시위자란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저 위 사진을 보면 알 수 있지 아니한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당시 가짜 연고생 300명이 광주에 침투해 있었다는 사실은 시민군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전옥주가 &quot;담양쪽에 연ㆍ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그 뒤 곧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quot;고 말할 때에 그 연ㆍ고대생이란 300명씩 두 떼거리를 말한다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10.html&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10.html&lt;/FONT&gt;&lt;/U&gt;&lt;/A&gt; ).&amp;nbsp;&amp;nbsp;만약 그 두 떼거리가 침투한 것이 사실이라면 600명이 침투한 것이 된다.&amp;nbsp;&amp;nbsp;그리고 한 떼거리는 목포쪽, 즉 서해안으로부터 침투하였다면 탈북자들의 증언이 맞아들어가는 것이다.&amp;nbsp;&amp;nbsp;목포쪽 침투 경로는 1968년 통혁당이란 지하당 창당을 위해 목포로 침투할 때부터 북한에서 침투 경로를 환하게 알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여기서 우리는 두가지 가설을 생각할 수 있다.&amp;nbsp;&amp;nbsp;김 중린이 광주사태 기간 내내 유언비어 삐라를 살포했다는 강명도의 증언을 고려해 본다면 전옥주는 남파공작원이 전해주는 쪽지대로 선무방송을 한 것이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amp;nbsp;&amp;nbsp;선무방송 내용을 전옥주가 창작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계속 쪽지를 건네 주었다.&amp;nbsp;&amp;nbsp;전옥주 본인도 그 쪽지를 건네준 자들의 정체를 전혀 모르고 있었고, 시간이 경과한 후에야 자기가 어떤 세력에 이용당했을 가능성을 표현했던 것이다.&amp;nbsp;&amp;nbsp;두번째 가설은 과연 가짜 연고생 300명(두 떼거리였을 경우 600명)의 정체가 무엇이었느냐에 관한 것이다.&amp;nbsp;&amp;nbsp;당시 시위의 주축은 이해찬, 심재철, 유시민, 한홍구 등 서울대 운동권이었는데, 과연 서울대와 이화여대를 제외시키고 연고대만 광주에 침투하였겠는가?&amp;nbsp;&amp;nbsp;고대생 수백 명이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없었다는 사실의 증인은 당시 고대 총학생회장으로 노무현의 측근인 신계륜 의원이다.&amp;nbsp;&amp;nbsp;그는 그때 도망다니기에 바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연대생 수백 명이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없었음도 훗날 5.18행사 때 &quot;찢어진 깃발&quot;이란 유언비어 책자를 인용하여 대자보를 만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amp;nbsp;&amp;nbsp;그리고 어떻게 그 숫자가 299명도 301명 아니고 300명이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5월 21일 이후 광주사태에 침투하는 것은 국군과의 전투를 위해 침투하는 것을 의미했는데, 과연 사격 훈련조차 받지 않았던 대학생 수백명이 우르르 자원하여 몰려왔을까?&amp;nbsp;&amp;nbsp;만약 왔다면 어째서 서울의 연고생으로 구성된 시민군 중에서는 단 한 명도 사망자나 부상자가 없었던 것일까?&amp;nbsp;&amp;nbsp;그리고 왜 그들 중에 단 한 명의 유공자도 없고, 단 한 명의 증인도 없는 것일까?&amp;nbsp;&amp;nbsp;그래서 가짜 연고생들의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가설이 가능하다.&amp;nbsp;&amp;nbsp;이 가설 외에는 가짜 연고생 300 명의 정체를 설명할 다른 가설이 불가능하다.&amp;nbsp;&amp;nbsp;그렇다면, 북한군은 연고생이란 간판을 걸어 신분을 위장하고 침투하였던 것이었다는 가설이 제기되는 것이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0vnqT1lTBFo&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 동영상인 위 동영상 3:08에서부터 &quot;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quot;라는 멘트가 들린다.&amp;nbsp;&amp;nbsp;외부에서 300 여명이 광주로 침투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들의 등장과 동시에 복면부대가 출현하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 복면부대를 김영택 기자는 외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으로 규정한다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lt;/FONT&gt;&lt;/U&gt;&lt;/A&gt;&lt;/A&gt; ).&amp;nbsp;&amp;nbsp;이 경우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 명의 진짜 정체는 외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amp;nbsp;&amp;nbsp;탈북자들도 북한군 300명이 침투했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그렇다면 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명 사이의 관계는 무엇이냐는 질문은 과연 그들의 정체성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nk-Kang.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에서 민주화운동한 북한세력&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fle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nk300.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 명&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20.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이광재 의원, 그 타박상 사인 가해자는 5.18폭도들이라오&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사태 종합 자료실&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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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에서 민주화운동한 북한세력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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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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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4-12T12:13:32Z</updated>
	    <published>2009-04-12T12:13:3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 최근 북한이 인공위성이라고 주장하는 미사일 발사를 앞두고 미국과 일본 등 동맹국 이지스함들이 한반도 가까이 출동하였을 때 한반도에 군사적 긴장감이 감돌았는데, 이는 여차하면 일본과 미국은 북한의 미사일을 요격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1980년 5월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미국이 항공모함 두 대를 한국에 급파하였을 때, 그 승무원들에게는 그것은 전쟁터로 떠나는 경험이었다.&amp;nbsp;&amp;nbsp;그때는 한미연합군사훈련을 위해서 항공모함 두 대가 한반도로 떠난 것이 아니라, 실전에 동원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출항하였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각종 악성 유언비어들을 제조하여 폭동을 선동했던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심지어 미항공모함 입항이라는 빅 시사뉴스조차도 유언비어의 제조의 재료로 삼아 선동질하였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의 최측근이었던 김상집은 가히 5.18유언비어의 원조라 할 만한 인물이었다.&amp;nbsp;&amp;nbsp;나중에 김문이란 사기꾼이 쓴 &quot;깃발&quot;이란 제목의 유언비어 책자로, 그리고 지명관이란 사기꾼이 TK란 필명으로 그 유언비어 책자가 일본에서 발행되게 함으로 짧은 시간에 5.18유언비어가 전세계로 폭발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지만 (&lt;A href=&quot;http://kforum.co.kr/bbs/view.php?id=all&amp;page=22&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223&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사기꾼 지명관에 대한 기사 참조&lt;/FONT&gt;&lt;/U&gt;&lt;/A&gt; ) 처음 전화를 이용해 유언비어를 전국으로 퍼뜨렸던 인물이 바로 김상집이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당시 김대중의 핵심조직이 광주에서 녹두서점을 운영하면서 조총련으로부터 북한사상서적 등을 보급받아 전국 운동권 서점에 보급하였는데, 그런 좌익 서점들을 김상집은 사회과학 서점이라 부른다.&amp;nbsp;&amp;nbsp;5월 18일 난동자들이 순경 45명을 인질로 납치하자 전북 금마의 7공수 2개 대대가 출동하였을 때 아무도 죽은 사람은 없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김상집은 광주학살 유언비어를 지어내 전화로 전국 운동권 서점에 그 유언비어를 퍼뜨렸던바, 그는 그날의 그의 행동을 이렇게 뽐낸다:&amp;nbsp;&amp;nbsp;&quot;녹두서점에 앉아 광민, 돌베개, 일월서각, 대구양서조합, 부산양서조합 등 책에 적힌 전화번호와 전국 각지에 있는 사회과학 서점에 전화를 걸어 광주의 학살소식을 전달하였다.&quot;&lt;BR&gt;&lt;BR&gt;&amp;nbsp;&amp;nbsp; 2007년 오마이뉴스는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를 지원하기 위해 이 김상집(참여21 대표)이란 인물의 그때의 활동을 특별기획으로 보도하였는데, 미항공모함 두 대가 한반도로 급파된 사건에 대해서 김상집은 이렇게 주장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외신 기자들은 우리에게 20일 첫날에는 열 손가락을 활짝 펴보이며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격려했다. 광주학살로 인해 국제적으로 궁지에 몰린 전두환이 결국 책임을 지고 물러나고, 대통령 선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수립되리라는 것이었다. 열 손가락이 하나씩 줄기 시작하여 26일에는 세 손가락만 펴 보이며 '사흘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길 것' 이라며 격려했다.&gt; (&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800360&amp;PAGE_CD=N0000&amp;BLCK_NO=3&amp;CMPT_CD=M0009&amp;NEW_GB=&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김상집의 주장을 오마이뉴스에서 더 읽기&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5월 20일에는 광주에 아직 미국인 기자는 아무도 없었다.&amp;nbsp;&amp;nbsp;그렇다면 외신 기자들이란 누구를 말하는가?&amp;nbsp;&amp;nbsp;조총련을 의미하는가?&amp;nbsp;&amp;nbsp;사기꾼 김상집이 퍼뜨린 유언비어들을 그대로 따라 제작된 &quot;화려한 휴가&quot;는 한술 더 뜬다.&amp;nbsp;&amp;nbsp;김신부가 뉴스타임즈 신문을 들고와 희망을 주었다.&amp;nbsp;&amp;nbsp;&quot;5일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amp;nbsp;&amp;nbsp;부산에 미항공모함이 입항했다.&quot;&amp;nbsp;&amp;nbsp;그러나 영화 제작자가 생각해도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말은 관객에게 거짓말이 탄로나기 쉽상이었던 모양이다.&amp;nbsp;&amp;nbsp;그래서 영화에서 시민군 대장 박흥수가 &quot;미항공모함은 우리 편이 아니라 군사독재 편&quot;이라고 말한다.&lt;BR&gt;&amp;nbsp;&amp;nbsp; &lt;BR&gt;&amp;nbsp;&amp;nbsp; 자, 가짜 시민군 대장 박흥수가 미항공모함은 우리 편이 아니라 군사독재 편&quot;이라고 말했을 때 그렇게 주장할 근거가 있었는가?&amp;nbsp;&amp;nbsp;그리고 5.18유언비어의 원조 김상집이 &quot;외신 기자들은 우리에게 20일 첫날에는 열 손가락을 활짝 펴보이며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고 격려했다&quot;고 말했을 때 그 말을 입증할 근거가 있는가?&amp;nbsp;&amp;nbsp;5.18측은 영화 속의 시민군 대장 박흥수도 지지하며, 유언비어들을 제조하여 퍼뜨린 실존인물 김상집도 지지한다.&amp;nbsp;&amp;nbsp;그러면 도대체 5.18의 입장은 무엇인가?&amp;nbsp;&amp;nbsp;김상집의 주장대로 미항공모함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입항하였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아니면 영화 속의 시민군 대장 주장대로 군사독재를 지원하기 위해 입항하였다는 말인가?&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YlZ0txWklLQ$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사실 입증은커녕 &quot;언제?&amp;nbsp;&amp;nbsp;어디서?&amp;nbsp;&amp;nbsp;누가?&quot; 등의 기본 서술조차 하지 못한채 유언비어들을 제조했던 5.18사기꾼들과 달리 탈북자들 및 탈북군인들의 증언들은 그 논거가 명확하며 객관성이 입증된다.&amp;nbsp;&amp;nbsp;한국논단 2007년 3월호에서 자유북한 군인연합의 임천용 대표는 5.18단체들에 이렇게 도전한다:&lt;BR&gt;&lt;BR&gt;&quot;㉣ 1980년 5 18당시 북한군 특수부대들이 전투준비 동원령을 받고 각 부대의 임무사항에 따라 실전을 위한 대기상태에 임했던 사실에 대해서 아니라고 반박하라.&lt;BR&gt;㉤ 5 18이후 각 군단, 사 여단 정치부 및 참모부에 발송된 광주사건과 관련된 조선인민군 총 정치국, 총 참모부 기밀문건은 출처가 없는 것이라고 해명하라.&quot; (&lt;A href=&quot;http://kforum.co.kr/bbs/view.php?id=all&amp;page=10&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523&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한국논단 2007년 3월호 기사 &quot;광주대학살의 주범은 전두환 아닌 김정일이다&quot;&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동영상에서 보는 대로 임천용 대표는 다음과 같은 팩트, 객관적 사실들을 제시한다:&lt;BR&gt;&lt;BR&gt;&lt;&lt;“우리는 광주사건에서 많이 얻었지만 놓쳤고 놓쳤지만 내일을 위해서 남겼다. 후속 작전을 위한 성과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1982.2월경, 김선일(김정일의 사촌동생)에게 내부적으로 내려온 인민군총정치국 발 “광주작전 평록”의 마지막 부분에 있는 일부이다.&lt;BR&gt;(1981.6월 하기훈련 직전 평남덕천 교도지도국(한국에서 명명하는 특수8군단) 본부에서 열린 지도국산하 여단장 정치위원 및 대대장, 대대정치지도원을 위한 군사정치일군상학에서 김일성이 발언한 요지일부. 이 내용은 교도지도국 산하 여단, 대대참모부에 군관용기밀문서로 하달 되였으며 일반군단 및 사, 여단에는 배포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음)&lt;BR&gt;(....)&lt;BR&gt;광주봉기에 북한군 570산하 여단들에서 선정된 인원들이 투입됐다는 것은 북한쪽에서 떠도는 출처미상의 유언비어가 아니라 김일성이 직접 발언한 내용이다. 1981.6월, 지도국사령부에서 열린 특전여단 군사정치일군 상학에서 김일성은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너무 쉽게 생각했어. 광주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어,,,’(1981.6월 발 참모부기밀문서 요지)라고 직접 발언했다. 김정일 역시 1982년 1월~3월까지 북한군특전여단(16저격여단. 17여단. 53여단. 43여단. 818여단. 19여단. 59여단.)들이 북부지구에서 벌린 사상최대의 게릴라전 쌍방훈련장소를 극비방문한 자리에서 ‘광주에서 우리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길 수 있었지만 결과는 진압됐다... 땀이 적었고 훈련부족이다. &lt;BR&gt;교도지도국은 남조선해방의 전초병이다. 언제든지 나가라면 (남조선으로)당장 나갈 수 있게 만단의 동원준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군관, 사관용 정치상학요강) 와 같이 광주봉기에 북한군이 개입했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시인하는 발언을 했다. &lt;BR&gt;그 뿐만이 아니다. 김정일은 1981.6.21일 강원도 고성군 온정 리(1군단지구)를 시찰하는 과정에서도 군인들이 옷 단추를 풀어놓고 무질서하게 다니는 현상을 엄하게 비판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평화시기에도 조국을 위해 적들 속에 들어가서(광주봉기를 뜻함) 피를 흘리고 싸우는데 후방에 있는 군인들이 이렇게 해이되면 되겠느냐. 인민군대가 너무 만성적으로 해이되고 있다. 사상투쟁을 진행해서 강한 규율을 세워라’고 발언하는 과정에서도 광주에 북한군특전사요원들이 개입됐음을 분명히 했다. 6.21김정일 발언을 계기로 당시 북한군 전반 부대들에서 몇 개월간 사상투쟁의 돌풍이 일어났고 열물까지 토해내는 ‘장관’이 연출되기도 했다.&lt;BR&gt;북한군 특전사 요원들이 광주봉기에 투입됐던 자료에 어느 정도의 신빙성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김선일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lt;BR&gt;북한군특전사를 대표하는 교도지도국과 일반군단 소속 저격, 경보병 여단에서 복무한 사관급 이상 경력자들은 1980년5월, 산하 부대들에서 특출 된 인원들이 광주봉기에 실제로 참가한 사실과 당시 현장에서 중무기를 비롯한 각종 윤전기재(탱크 등)를 다루며 항쟁을 유도한 사람들이 남쪽의 일반 민간인들이 아니라 대부분 북쪽의 군인들이었다는 것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lt;BR&gt;1982년부터 특전사 내에서 광주봉기 현장에서 있었던 접전 과정에서의 중요한 프로그램들을 대상별로 분리해서 상영하면서 적군전술상학에 도입하였고 시가전시 제기될 수 있는 상황에 자의적인 판단으로 대처할 수 있는 특전방법들을 교육하였다. 그만큼 이일은 북한군 특전부대 내에서 극비에 해당되는 일도 아니다. &lt;BR&gt;광주봉기가 한창이던 1980년 5월, 북한텔레비전은 다른 프로그램을 죽이고 실시간으로 광주상황을 방송했다. 광주봉기 과정을 보면서 북쪽에서 놀란 것은 시위자들이 현장에 투입됐던 군인들의 탱크와 전차를 탈취해서 진압군한테 반격을 가하는 장면이다.&gt;&gt; ((&lt;A href=&quot;http://kforum.co.kr/bbs/view.php?id=all&amp;page=11&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510&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한국논단 2006년 12월호 &quot;북한 特戰部隊 출신자의 생생한 증언&quot;&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jwmpjvgNH9o$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동영상 뉴스 후반부에서 북한이 광주사태를 생중계하면서 광주폭동을 지지하는 군중대회를 하는 장면이 보여진다.&amp;nbsp;&amp;nbsp;탈북자들과 탈북 군인들이 광주사태 당시 보았던 장면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당시 군인들은 남한 침투 대기 명령에 동원되었으며, 주민들은 광주폭동 지지 군중대회에 동원되어 고래고래 소리 질러야 했었기에 그들에게는 광주사태가 기억에 아주 생생한 사건이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탈북하여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르자니 북한에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였다는 의미가 되므로 이상히 여기는 것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강서산 북한 전 총리의 사위로서 평양 권력층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아는 강명도가 1994년 7월 우리나라로 망명하였을 때 바로 이것이 크게 헷갈리는 문제였다.&amp;nbsp;&amp;nbsp;북조선이 남조선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였으며, 북한세력이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분명 그것은 아니었으니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는 주장의 객관성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그는 망명한지 2년도 채안되었으며, 서슬퍼런 김영삼 정권의 5.18 재판 서막이 울리던 1995년 6월 &quot;평양은 망명을 꿈꾼다&quot;라는 제목의 책을 내놓았다.&amp;nbsp;&amp;nbsp;&quot;김일성은 전두환을 두려워했다&quot;&lt;BR&gt;라는 제목 하의 이 책 237쪽부터 251쪽에서 강명도는 그가 북한에서 이해하였던 광주사태에 대한 시각을 토로하는바, 탈북자가 광주사태에 대해 처음으로 언급한 사건이었으므로 그 의의가 아주 크다. &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jeep.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강명도가 광주사태 당시의 북한의 동향을 책으로 저술한지 11년이 지나서 임천용 대표는 1981년 6월 북한군 지도국사령부에서 열린 특전여단 군사정치일군 상학에서 김일성이 ‘지금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세 번 놓쳤는데 그중에 광주가 제일 아까워. 우리준비가 너무 부족했고 태만했어. 너무 쉽게 생각했어. 광주가 좋은 기회였는데 아쉽게 놓쳤어,,,’라고 발언했던 사실을 증언하였다.&amp;nbsp;&amp;nbsp;과연 북한 세력은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였는가?&amp;nbsp;&amp;nbsp;아니면 그 사태를 남침의 기회로 삼으려 했는가?&amp;nbsp;&amp;nbsp;김일성이 광주사태 때 기회를 놓쳤다는 말의 의미가 도대체 무엇인가?&amp;nbsp;&amp;nbsp;1995년의 그의 저서에서 강명도는 바로 그 점에 대하여 다음과같이 증언한다:&lt;BR&gt;&lt;BR&gt;&lt;&lt;&quot;광주에서 전쟁이 터졌다&quot;&lt;BR&gt;1980년 5월 18일 북한 주민들은 깜짝 놀랐다.&amp;nbsp;&amp;nbsp;남조선에서 계엄군과 학생 시위대가 충돌해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일본 조총련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디오 테이프를 확보한 중앙 TV가 매일 그 테이프를 방영한 것이다. (....) 또 복면을 쓴 시민군이 탈취한 계엄군의 지프를 타고 시가지를 달려가는 것도 볼 수 있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남조선에 파견된 간첩을 통해 광주민주화운동의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김중린(金仲麟)은 3호청사의 전부서에 전화를 걸었다.&amp;nbsp;&amp;nbsp;김중린은 당시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대남비서였다.&amp;nbsp;&amp;nbsp;김중린은 남조선에 구축해놓은 정보망을 총가동해 사태 진전에 촉각을 곤두세웠다.&amp;nbsp;&amp;nbsp;그러나 문제는 김중린이 타이밍을 놓쳤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직후 정책 초점을 사태파악 및 분석으로 잡았다.&amp;nbsp;&amp;nbsp;황금같은 초기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amp;nbsp;&amp;nbsp;김중린은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후 5~6일 지난 다음에야 김일성·김정일에게 최종정세 판단 보고서를 올렸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 보고서는 &quot;광주사태의 본질은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 양심적 인텔리 계급과, 매판 자본가들을 등에 업은 군부세력간의 충돌&quot;이라고 정의하고, 따라서 양자간의 갈등 관계를 증폭시킬 경우 이는 공화국에 유리한 국면이 조성될 것&quot;이라고 밝혔다.&amp;nbsp;&amp;nbsp;또 그는 &quot;폭동이 광주에만 국한된 것이 문제&quot;라며, &quot;만일 우리가 폭동을 남조선 전역으로 확산시킬 경우 대남사업의 결정적 기회가 마련될 것&quot;이라고 결론내렸다.&amp;nbsp;&amp;nbsp;김중린은 비교적 사태를 정확히 파악한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나 김중린의 실책은 광주민주화운동 응용·활용보다 사태 파악과 분석에 너무 많은 시간을 들였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광주민주화운동이 발발한 것은 5월 18일이다.&amp;nbsp;&amp;nbsp;그 후 사태는 22일에 최고조에 달했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로부터 불과 5일 뒤인 27일 계엄군의 진압으로 광주민주화운동은 종식됐다.&amp;nbsp;&amp;nbsp;광주민주화운동은 단 9일간 진행된 사건이었다.&amp;nbsp;&amp;nbsp;따라서 김중린이 정세판단서를 김일성에게 올려 수표(재가)를 받았을 때쯤에 이미 광주민주화운동은 진압국면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나는 광주민주화운동 발발 당시 얘기를 당대외연락부 6과 지도원이었던 임만복을 통해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amp;nbsp;&amp;nbsp;그의 말에 따르면, 사태가 터지자 김중린은 모든 대남 공작원들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amp;nbsp;&amp;nbsp;그러나 정작 3호청사 직속 청진 전투연락사무소(일명 121호 연락소)가 상부로부터 대남 침투 명령을 받은 것은 26일이었다.&gt;&gt; (237~240쪽)&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car/jeep.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때 북한주민들도 누가 시민군이고, 누가 북한군이고, 누가 계엄군이었는지 분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amp;nbsp;&amp;nbsp;위 사진에서 철모쓴 시민군과 각목을 든 난동자들이 한 지프에 탑승하여 시가지를 달리고 있다.&amp;nbsp;&amp;nbsp;북한 주민들에게는 계엄군이 시위대를 연행해가는 장면으로 비쳤을지도 모른다.&amp;nbsp;&amp;nbsp;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철모쓴 시민군이 불순세력이었을지언정 결코 계엄군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lt;BR&gt;&amp;nbsp;&amp;nbsp;&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police-dress.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폭도들이 경찰복으로 위장한 모습으로 지프를 타고 있는 위의 사진은 광주시민들에게도 혼동을 주었을만 하다.&amp;nbsp;&amp;nbsp;그러나 경찰이 총을 들고 있었을리 만무하며, 집총자세를 하는 순경은 없다.&amp;nbsp;&amp;nbsp;물론 시민군의 모습이지만 광주시민이라면 지프 위에서도 저렇게 군기가 들어있었을리 없으며, 더구나 시민들만 있는 곳에서 복면을 하고 있었을리 없다는데서 이 복면 무장단체는 불순세력이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는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강명도가 북한 전 지역의 군사동향을 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amp;nbsp;&amp;nbsp;그래서 북한 타 지역에서 이미 소규모로 남한에 침투한 특수부대에 대해서는 그는 모른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가 분명히 아는 것은 5월 26일 북한은 대규모 남침 준비를 완료하고 출동 명령만 기다라고 있었다는 것, 27일은 한반도의 운명의 중대 고비였다는 사실, 그리고 27일 새벽에 광주사태가 진압되었기에 북한은 남침을 위한 절호의 기회를 놓쳤다는 사실이다.&amp;nbsp;&amp;nbsp;그러면 5월 20일 김상집이 '열흘만 투쟁을 계속하면 우리가 이긴다'는 주장을 했으며,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에서 5월 22일경 시민군이 &quot;5일만 더 버티면 우리가 이긴다&quot;고 말하였을 때 누가 어떻게 이긴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당시 시민군 사이에 퍼진 유언비어도 5월 27일의 중대 고비였음을 가리켰으며, 김일성 편에서는 만일 그날 새벽 광주사태가 진압되지 않았더라면 북한군이 남침하여 이길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2006년 임천용 대표가 증언하였고, 1995년의 강명도의 저서로 명백하게 확인되듯이 광주사태 때 북한은 남침 절호의 기회를 아슬아슬하게 놓쳤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광주에서 북한세력이 민주화운동하고 있었다.&amp;nbsp;&amp;nbsp;서슬퍼런 김영삼 정권 하에서 강명도는 광주사태를 광주민주화운동이라 부르며 책을 써야 했다.&amp;nbsp;&amp;nbsp;그러면 무엇이 북한세력이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을 하는 방법이었던가?&amp;nbsp;&amp;nbsp;그것은 유언비어 삐라를 뿌리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여태껏 광주시민들도 전혀 알 수가 없는 것이 유언비어들의 출처였다.&amp;nbsp;&amp;nbsp;도대체 누구의 입에서 &quot;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quot;는 유언비어가 처음 시작되었는가?&amp;nbsp;&amp;nbsp;무릇 노래 한편에도 작가가 있고, 시 한편에도 저자가 있는 법인데, 가히 한 나라를 망하게 할 수 있을 만했던 그 유언비어들의 저작권이 누구에게 있는 것인지 아무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어떻게 토씨 하나 틀리지 않는 똑같은 유언비어가 동시에 전국으로 퍼질 수 있었는가?&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본래 말이란 몇 다리 건너가면 전혀 다른 말이 되는 법이다.&amp;nbsp;&amp;nbsp;&quot;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셨다&quot;는 말도 갑이 을에게 을이 병에게 전하다 보면 몇다리 건너서는 &quot;아버지 가방에 들어가셨다&quot; 등 전혀 다른 말로 전해지곤 한다.&amp;nbsp;&amp;nbsp;그런데 광주사태 유언비어는 사투리가 각기 다른 전국 8도를 돌면서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았다.&amp;nbsp;&amp;nbsp;만약 그 유언비어들이 구전으로만 전해졌다면 그것을 불가능했다.&amp;nbsp;&amp;nbsp;광주사태 유언비어는 주로 삐라로 유포되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남한이 아닌 북한에서광주사태를 겪었던 강명도 역시 그 사실을 알며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lt;&lt;3호청사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놓고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아무 일도 안 한 것은 아니다.&amp;nbsp;&amp;nbsp;당시 나는 3호청사의 움직임을 내 친구 이화섭으로부터 자세히 전해들을 수 있었다.&amp;nbsp;&amp;nbsp;이화섭은 당시 통전부 제1부장이었던 이동호의 아들이다.&amp;nbsp;&amp;nbsp;그는 나와 학교 동기동창으로 그 이전에는 매일 만나다시피하는 사이였는데, 광주민주화운동 이후에는 좀처럼 그를 볼 수가 없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던 어느 날 우연치 않게 이화섭을 만났다.&amp;nbsp;&amp;nbsp;&quot;뭐 하느라고 그렇게 바쁘냐?&quot;고 묻자, 얼굴이 핼쓱해진 이화섭은 &quot;말도 마라.&amp;nbsp;&amp;nbsp;오줌 누고 뭐 볼 시간도 없다.&quot;고 하소연 하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광주민주화운동이 터지자 그는 몇 주간 밤잠도 못 자고 광주민주화운동을 부추기는 삐라를 만들어 살포했던 것이다. &gt;&gt; (241쪽)&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fZeudaKayMU$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강명도의 말은 북한 세력이 삐라 살포에 국한하여서만 광주에서 민주화운동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amp;nbsp;&amp;nbsp;북한의 목적은 남조선 해방이요, 환원하면 적화통일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적화통일 음모=민주화운동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논리가 가능한가?&amp;nbsp;&amp;nbsp;아무리 이해하려 하여도 이것이 강명도에게 헷갈리는 문제였으며, 강명도뿐만 아니라 모든 탈북자들에게 그것은 논리 성립이 불가능한 모순이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위 동영상에서 보듯 광주사태 직전 북한에서 계속 무장공비들을 침투시키고 있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북한이 그들이 남조선이라고 부르는 나라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저렇게 특수부대를 침투시키고 있었다는 말인가?&lt;BR&gt;&lt;BR&gt;&lt;BR&gt;&amp;nbsp;&amp;nbsp; *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study21.org/518/document/nk-kang.htm&lt;/FONT&gt;&lt;/U&gt;&lt;/A&gt; 을 클릭하시면 강명도 저 &quot;평양은 망명을 꿈꾼다&quot; 237~251쪽을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fle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20.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이광재 의원, 그 타박상 사인 가해자는 5.18폭도들이라오&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nk-Kang.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광주에서 민주화운동한 북한세력&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21-bull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사태 종합 자료실&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quot;&lt;--&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와 북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와 북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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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광재, 그 타박상 사인 가해자는 5.18폭도들이라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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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시사논객</name>
	    </author>
	    <updated>2009-04-05T12:09:22Z</updated>
	    <published>2009-04-05T12:09:2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NwuGg3AA7CQ&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지난 22, 23, 24일자의 위 뉴스 동영상(2009년 3월)은 노무현의 최측근 이광재 의원이 말장난 작전이 박연차 회장 여비서의 수첩의 진실 앞에서는 더 이상 통하지가 않았음을 보여준다.&amp;nbsp;&amp;nbsp;지금 불법정치자금 사건으로 또 다시 매스컴의 각광(?)을 받고 있는 바로 이 이광재가 지난 2006년 5월 18일의 5.18기념행사 때 5.18묘지를 둘러본 후 “올때마다 마음이 무겁다...내 평생 광주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었다”고 말했다 (&lt;A href=&quot;http://polinews.etimes.net/total/news_view1.htm?no=70099&amp;page=27&amp;pkey=20000&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polinews.etimes.net/total/news_view1.htm?no=70099&amp;page=27&amp;pkey=20000&lt;/FONT&gt;&lt;/U&gt;&lt;/A&gt; ).&amp;nbsp;&amp;nbsp;그리고 아래 사진에서 보듯 이광재의 이 광주사태 발언과 동시에 손도끼 ´이광재 패러디´가 큰 인기를 끌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height=420 src=&quot;http://www.dailian.co.kr/data/photo/200505/050520_5602_m.jpg&quot; width=550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 패러디물은 인터넷 홈쇼핑 사이트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미제는 팔지 않는 386쇼핑´에서 &quot;군대가기 겁나시죠?&quot;라는 멘트와 함께 ´병무청 인증 단지용 손도끼 3종 세트´라는 상품을 소개하는 내용이다. 386철강에서 제조한 이 상품에는 &quot;꼭!!! 오른 검지에 사용하세요&quot;라는 설명까지 잊지 않았다.&amp;nbsp;&amp;nbsp;이광재 의원이 뭐라고 변명하든 병역을 기피하기 위해 오른손 검지를 잘랐다는 의혹을 받고 있던 그를 네티즌들은 이런 패러디 표현으로 비꼬았던 것이다.&amp;nbsp;&amp;nbsp;네티즌들은 이런 &quot;이광재의 죄&quot;를 이광죄라 지칭하였다.&amp;nbsp;&amp;nbsp;그런데, 어디 이광죄가 그뿐이었겠는가?&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광재 의원이 5.18묘지에서 “올때마다 마음이 무겁다...내 평생 광주를 잊지 말자고 다짐했었다”고 말한 바로 그때가 또 하나의 이광죄, 즉 러시아의 석유를 개발하겠다던 노무현의 약속을 지킨 죄가 드러나던 때였다.&amp;nbsp;&amp;nbsp;그 악속을 지키는 시늉을 하기 위해 러시아로 6백 20만달러를 송금하여 떼이게 하고, 350억원이 나라돈 350억원이 허공으로 증발하게 하였던바 이를 가리켜 &quot;이광재 게이트&quot;라 한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www.geocities.com/sion_preaching/photo/roh_pro.gif&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광재 의원이 광주사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그가 어떤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한 예가 바로 김대업씨 사건이다.&amp;nbsp;&amp;nbsp;2002년 16대 대선 때 새천년민주당은 희대의 사기꾼 김대업씨를 고용하여 병풍사건을 조작하면서 그를 의인이라 불렀던 노무현 측근들은 지난해 2008월 1일 8일 김대업씨가 폭로 기자회견을 예고하자 말을 바꾸었다.&amp;nbsp;&amp;nbsp;그보다 사흘 앞선 5일 김대업씨가 글을 올려 “대통령을 도구라 부르는 측근들이 결국 대통령을 도구로 전락시켰다”며 노무현 대통령의 386 측근들을 비판하자 이광재 의원은 “김 씨를 만난 적도 없고 할 말도 없다”고 했다 (&lt;A href=&quot;http://www.donga.com/fbin/output?f=nc_&amp;n=200801080110&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www.donga.com/fbin/output?f=nc_&amp;n=200801080110&lt;/FONT&gt;&lt;/U&gt;&lt;/A&gt; ).&amp;nbsp;&amp;nbsp;그런데, 자기가 불리할 때는 사실을 부인하는 이광재의 말은 어디까지 사실인가?&amp;nbsp;&amp;nbsp;지금도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정치자금 받은 사실 없다고 한 거짓말이 탄로나고 있지 아니한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광재가 5.18묘지에 올때마다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amp;nbsp;&amp;nbsp;그리고, 5.18묘지의 상징적인 인물이 박관현이기에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에서도 진우로 등장한다.&amp;nbsp;&amp;nbsp;아래 사진 왼편의 박관현이 바로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 진우의 실제 인물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영화에서처럼 고등학생이 아니라, 나이 29세의 대학생이었다.&amp;nbsp;&amp;nbsp;5.18사기꾼들은 그를 18세의 고교생으로 등장시켰으니 실제인물과는 사제지간이 될 수 있을 만한 연령차였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data/three-wanted.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박관현은 1980년 봄 김대중의 국민연합이 지원하여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되어 김대중의 내란음모에 이용되고 있던 인물이었으나, 영화 속의 진우는 5월 18일 간호사 신애와 함께 극장에 갔다.&amp;nbsp;&amp;nbsp;그러나 실제인물 박관현은 당시 김옥길 내무부장관이 최규하 대통령께 보고하던 시위의 한 주동자였다.&amp;nbsp;&amp;nbsp;5월 18일 하루이틀 전에 급박하게 돌아가던 그 상황을 신현확 당시 총리는 훗날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lt;예를 들면 김옥길씨가 아침에도 점심에도 쫒아와서 “학생들 움직임이 어떻고 어느 학교가 저짜고... 만나기 싫다는 거야. 귀찮은 소리. 위급한 사태에 대한 보고도 귀찮다....그러니까.. 최대통령이 아무런 결정을 안하니까 전부 내 한테 온단 말이야. 정부안에서도 다 알지. 모든 일은 신총리가 다 한다. 이러니까 틀림 없이 신총리가 실권을 잡는다. 모든 결정을 신총리가 하고 있다. 신총리가 독재한다. 이런 식이거든.&lt;BR&gt;&lt;BR&gt;&amp;nbsp;&amp;nbsp;그래가지고 학생들이 데모하면서 서울역 앞에서 5만명이 모였을 때, 그 때 플래카드가 “물러가라 신현확, 불쌍하다 최규하” 이러카고 데모하는 거야. 나한테 그렇게 보고가 올라오는 거야. 그래 내가 뭐를 우째? 나를 물러가라고 하는 거야 미운 놈 물러가라, 그런다고 치자. “불쌍하다 최규하”는 뭐가 불쌍하나.&gt;&g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77&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77&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킬 목적으로 김대중이 일으키려던 전국적 민중봉기를 시위용어상 총궐기대회라 불렀는데, 5월 20일로 예정된 학생 총궐기대회 준비를 위해 5월 16일 이화여대에서 일명 &quot;전국총학생회장 연석회의&quot;가 소집되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김대중이 서울 운동권에 보낸 시위 구호나 광주에 보낸 시위 구호나 동일하였기에 전남대 총학생회장은 서울에 오지 않고 총궐기대회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날 오후 그 내란 음모 주동자 명단이 치안본부로 넘어가자 그 다음날 한 여학생이 전남대로 전화걸어 발각되었으니 빨리 피신하라고 했다.&amp;nbsp;&amp;nbsp;당시 전남대 부총학생회장이었던 이승룡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 &lt;BR&gt;&lt;BR&gt;&lt;&lt;이날 서울에서는 앞으로 상황을 어떻게 대처해 갈 것인지 논의하기 위한 전국대학생대표자회의가 있었다. 아마 우리 학교에서는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에서 저녁 7시경에 전화가 왔다. 연락을 했던 사람이 누구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으나, 다급한 여자의 목소리로 '지금 서울에서는 학생회 간부들이 검거되었으니 빨리 피하라'는 내용이었다. 연락을 받고 관현형 등 몇몇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gt;&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amp;page=6&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402&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내란음모로 둔갑된 평화시위&lt;/FONT&gt;&lt;/U&gt;&lt;/A&gt; 에서 두번째 작은제목 &quot;예비검속에 걸려&quot; 이하)&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래서 진우의 실제인물은 18일 도저히 한가하게 간호사 신애와 함께 극장에 갈 상황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무장시민군의 폭동이 절정에 달했던 21일 상황도 영화에서는 전혀 딴판으로 묘사되는데, 도청광장에서 총맞은 진우가 병원에 오자마자 죽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진우(박관현)는 광주사태 기간 내내 여수에 있었기에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4.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4.html&lt;/FONT&gt;&lt;/U&gt;&lt;/A&gt; ) 광주사태를 보지도 못했고, 광주사태가 어떤 것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사실 광주사태 기폭제는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였다.&amp;nbsp;&amp;nbsp;5월 18일 오후 한시반경 누군가가 &quot;박관현이 죽었다&quot;고 외치자 흥분한 시민들이&amp;nbsp;&amp;nbsp;파출서를 파괴하며 폭동을 일으켰던 것이요, 아무도 죽은 사람 없었는데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가 뻥튀기기되어 &quot;경상도 군인들이 전라도 사람 씨를 말리러 왔다&quot;는 유언비어가 되었으며, 그 유언비어가 또 뻥튀기기되어 &quot;‘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언비어 삐라가 제작되어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amp;nbsp;&amp;nbsp;박관현이 근 3년 후에 병원에서 사망한 이유는 &quot;박관현 사망설&quot; 유언비어 때문이요, 광주사태 때 사람들이 죽은 이유도 그 유언비어에 선동된 무장시민군이 폭동을 일으키며 총기오발사고를 냈기 때문이었다.&amp;nbsp; &lt;BR&gt;&lt;BR&gt;&amp;nbsp;&amp;nbsp; 박관현은 광주사태 때 여수에 있었기 때문에 광주사태 장면들을 상상조차 할 수 없었음에도 여러 해 후 사망한 박관현이 5.18 묘지에 안치되어 있기 때문에 방문자들에게 마치 그가 광주사태 희생자였던 것같은 착각을 준다.&amp;nbsp;&amp;nbsp;엉화 제작자가 진우를 21일 광주의 한 병원에서 죽이는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는 또 하나의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였다.&amp;nbsp;&amp;nbsp;이 유언비어에서 진우를 죽인 것은 제작자이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제작자는 자기가 죽여놓고, 전두환이 죽인 것처럼 착각하게 한다.&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 아이러니하게도 이광재 의원과 더불어 노무현의 또 한 명의 최측근인 신계륜 의원이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는 허위사실 유포였다는 사실의 증인이다.&amp;nbsp;&amp;nbsp;역시 광주 출신으로 당시 고대 학생회장이었던 신계륜은 5월 18일 광주의 박관현에게 몸 숨길 것을 의탁하려 찾아갔더니 박관현 역시 이미 어디론가 잠적해 있었다.&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3409&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23409&lt;/FONT&gt;&lt;/U&gt;&lt;/A&gt; )&amp;nbsp;&amp;nbsp;영화에서 민우는 진우의 복수를 위해 무장폭동을 선동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민우의 실제인물 윤상원은 박관현 사망설 유언비어를 이용하고 있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광재 의원이 5.18묘지에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다고 했다.&amp;nbsp;&amp;nbsp;그런데, 그런데 희생자들 중 태반은 실제로는 타박상에 의한 사망이요, 타박상 사인 대부분이 무장시민군이 낸 교통사고였다.&amp;nbsp;&amp;nbsp;그 외의 타박상 사인은 폭도들에 의한 구타였었다는 증언들만 있을 뿐이다.&amp;nbsp;&amp;nbsp;예를 들어, 5월 20일 광주 고속터미널 앞 광장에서 충정임무를 수행하였던 이상휴 당시 3공수 특전여단 13대대 9지역 대장(대위)의 증언이 있다: &lt;BR&gt;&lt;BR&gt;&lt;&lt;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 광장 중앙에 8t 트럭이 한 대 서 있고 사람이 몰려 웅성거렸다. 알아보니 석축용 경치석이 실려 있었고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이었다. 폭도들이 운전사, 조수를 끌어내려 때리고 발로 차고 밟고 하여 두 사람이 현장에서 죽었다. 갑자기 차에 불이 붙었다. 검은 연기가 하늘을 덮었다. 타이어 터지는 소리에 시민과 폭도들은 괴성을 질렀다. 앙상한 차체만 남았다. 갑자기 시내버스, 택시들이 술래잡기를 하고 어떤 기사는 인접 택시를 발로 차고 버스를 차고 하여 싸움이 붙었다. 자기들과 같이 차량 시위에 동조하지 않는다고 그랬다.&gt;&g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79&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79&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5월 20일 타박상으로 두 명이 죽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이상휴 대위는 폭도들이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 운전사와 조수를 끌어내려 구타하여 현장에서 죽였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만약 실제로 폭도들이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 운전사와 조수를 끌어내려 구타한 사실이 있다면 이 증언이 신빙성이 입증된다.&amp;nbsp;&amp;nbsp;그런데, 그런 사실에 대한 허다한 증언들이 있다.&amp;nbsp;&amp;nbsp;심지어 사건 현장에 있었던 시민군들조차 그런 증언을 하는바, 아래는 시민군 김정기의 증언이다:&lt;BR&gt;&lt;BR&gt;&lt;&lt;17번 버스를 타고 무등경기장쯤 오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곳에서 내려 사람들 틈에 끼었다. 가만히 보니 고가도로 부근에서 많은 사람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막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는데, 조금 떨어진 곳에서 '태워라', '죽여라' 하는 함성이 들려서 그쪽으로 가보니 거기에는 경북 번호를 붙인 트럭이, 유리창이 산산조각 난 상태로 정차해 있었다. 한 대의 운전사는 도망을 쳐버렸고, 다른 차의 운전사는 사람들에 둘러싸여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린다는 공수부대의 얘기에 대한 보복이었다. &gt;&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401.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401.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일곱번째 단락)&lt;BR&gt;&lt;BR&gt;&amp;nbsp;&amp;nbsp; 시민군 김정기가 목격한 사건은 이상휴 대위가 목격한 사건과 다르다.&amp;nbsp;&amp;nbsp;이상휴 대위는 경남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 운전사와 조수를 대상으로 하는 폭행 사건을 목격했고, 시민군 김정기는 경북 번호를 붙인 트럭 운전자에 대한 폭행 사건이었다.&amp;nbsp;&amp;nbsp;무엇이 시위 구호였는가?&amp;nbsp;&amp;nbsp;'태워라', '죽여라'였다.&amp;nbsp;&amp;nbsp;왜 &quot;죽여라&quot;고 함성지르며 폭행하였는가?&amp;nbsp;&amp;nbsp;&quot;그 이유는 간단했다. 경상도 군인이 전라도 사람의 씨를 말린다는&quot; 유언비어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5월 20일 그런 유언비어가 퍼져나가면서 경상도 번호판이 부착된 차량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 행위들이 있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어째서 경상도 번호판을 부착한 차량 운전자들이 백주 대낮에 테러를 당하였는가?&amp;nbsp;&amp;nbsp;사실, 그 사건은 20일의 차량 징발과 관련이 있다.&amp;nbsp;&amp;nbsp;모든 통행 차량이 예외 없이 징발 대상이었다.&amp;nbsp;&amp;nbsp;예를 들면, 시민군 김수영은 &quot;대한통운 앞 도로에 지방에서 올라온 일반 화물트럭이 오자 시민들이 차를 주라고 요구했다. 그들은 모두 쉽게 내주었는데&quo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lt;/FONT&gt;&lt;/U&gt;&lt;/A&gt; )라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그런데, 번호판이 경상도이면 징발 대상이 아니라 테러 대상이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어째서 5.18폭도들이 통행 차량을 징발하였는가?&amp;nbsp;&amp;nbsp;그 목적은 공산주의 혁명이었음을 노동운동가 이정로는 이렇게 기술한다:&lt;BR&gt;&lt;BR&gt;&lt;&lt;노동자와 혁명적 민중은 동운동 고가도로 밑의 주유소에 본부를 정하고, 고속도로 톨게이트를 파괴, 점령하고 고속도로를 차단한 다음 모든 차량을 징발하는 작업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화물트럭과 대형차가 선두와 양 옆을 호위하고 소형택시들이 대오를 이루면서 도청을 향한 '차량돌격대'를 편성하게 된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이 날의 노동자계급의 대진군을 부르주아적 언론은 '차량시위대'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시위대'가 아니라 '전투부대'였고 '돌격대'였다.&gt;&g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72&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72&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21-bull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20.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이광재 의원, 그 타박상 사인 가해자는 5.18폭도들이라오&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fle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bill.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광주사태 종합 자료실&lt;/FONT&gt;&lt;/U&gt;&lt;/A&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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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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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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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3-30T12:51:49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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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
	    	&lt;P&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0vnqT1lTBFo&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의 광주청문회 동영상은 1988년 12월 22일의 박석태 기자의 중간결산보도로 시작한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광주 청문회는 그러나 이 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발포 문제와 지휘 책임 문제, 초기 과잉 진압 문제 등 핵심 문제에 대해 증인들의 증언이 상반되거나 엇갈려 실체규명의 확실한 실마리를 찾지 못해 만족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습니다.&lt;BR&gt;&lt;BR&gt;발포 문제에 대해 최 웅 당시 11공수여단장 등 공수부대 관계자들은 5월 21일 오후 1시 반에 시민군이 먼저 총격을 가해 자위권 행사의 일환으로 발포를 했다고 증언했으나 야당 측과 피해자 측은 그 때는 시민군이 무장을 하기 전이며 공수부대가 발포를 해 시민들이 정당방위로 무장을 하게 됐다고 맞서 진상이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gt;&lt;BR&gt;&lt;BR&gt;&amp;nbsp;&amp;nbsp;1980년 5월 21일 5.18시민군과 공수부대 중 어느 편이 선제 발포하였느냐는 5.18측으로서는 생사가 달린 문제였을 것이다.&amp;nbsp;&amp;nbsp;총성이 올린 때는 정확히 오후 1시경이었고, 5.18측은 불과 30분만인 오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말도 안되는 거짓말을 하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이런 어거지 주장은 한달 후인 1989년 1월 26일 광주청문회 때 놀랍게도 시민군편 증인 김영택 기자의 증언에 의해 와장창 무너졌다.&amp;nbsp;&amp;nbsp;위 동영상 시작후 2분 24초에서 우리는 김석진 기자의 다음과 같은 멘트를 듣는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김영택 씨는 이에 앞서 관광버스가 돌진해오기 직전 시위대가 탄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었으며 이 때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했다고 증언했습니다.&lt;BR&gt;&lt;BR&gt;김영택 씨는 이처럼 낮 12시58분 공수부대가 첫 집단 발포하는 순간 시위대 쪽에서 다른 총 소리가 난 것으로 미루어 시위대도 함께 발포한 것으로 생각하며 이미 오전 중에 시위군중이 카빈총을 들고 간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함으로써 오전 1시 반 이후에 시민이 무장했다는 주장을 반박했습니다.&gt;&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guns-found.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quot;공수부대 집단 발포&quot;라는 말은 국민을 속이기 쉬운 말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 사건의 진실은 5월 21일 전남도청 앞의 공수부대는 총 200발이 실탄을 가지고 있었으며, 시민군은 그보다 천배가 넘는 실탄, 즉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amp;nbsp;&amp;nbsp;위 사진에서 우리는 2005년에 또 발견된 당시 시민군 실탄을 본다.&amp;nbsp;&amp;nbsp;그러면 실탄이 장진된 총을 가지고 온 시민군과 달리 실탄이 없었던 공수부대는 어떻게 그날 오후 1시경 200발이 실탄을 보유하게 된 것이었을까?&amp;nbsp;&amp;nbsp;위 동영상 시작후 3분 27초에서 김석진 기자의 멘트 &quot;두 번째 증인으로 나온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은 5월 21일 오후 도청 앞에서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할 때 실탄 두 상자를 공수부대에 인계했으며&quot;를 듣듯 그 실탄은 공수부대 실탄이 아니라, 보병부대 31사단 실탄이었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31사단이라는 부대명으로 일컬어지는 광주향토사단 96연대 1대대 소대장 중위 한동석이 그 실탄을 전달한 장본인이었다.&amp;nbsp;&amp;nbsp;영화 화려한 휴가는 계엄군 장교=공수부대 장교 이미지를 시청자들에게 심어주나, 한동석 중위는 공수부대 장교도 육사출신 장교도 아니었다.&amp;nbsp;&amp;nbsp;그는 ROTC 출신이었다.&amp;nbsp;&amp;nbsp;무엇이 대학생과 전경의 차이인가?&amp;nbsp;&amp;nbsp;학교 다니다가 전경으로 지원하면 학생신분이 불과 몇달만에 전경신분으로 바뀐다.&amp;nbsp;&amp;nbsp;1980년 5월의 광주에서 한동석 중위가 바로 그런 입장에 있었다.&amp;nbsp;&amp;nbsp;그런 그가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를 보고 울분을 느끼며 2007년 5월부터 역사학도의 블로그 &lt;A href=&quot;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lt;/FONT&gt;&lt;/U&gt;&lt;/A&gt; 를 찾았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900개가 넘는 댓글이 빽빽한 이 블로그 &lt;A href=&quot;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quot; target=_blank&gt;&lt;BR&gt;&lt;A href=&quot;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blog.daum.net/sionvoice/10357845&lt;/FONT&gt;&lt;/U&gt;&lt;/A&gt;&lt;/A&gt; 는 2007년 5월부터 몇달간 두가지 유형의 울분의 전투장이었다 (댓글이 워낙 많아 댓글 페이지 1을 찾아 댓글 입력일 표시가 &lt;한동석 2008.05.08 19:10&gt;로 되어있는 댓글부터 보셔야 함.)&amp;nbsp;&amp;nbsp;그리고 너무 댓글이 많아 지금은 한참 댓글 페이지를 뒤로 돌려야 하는 그 블로그 댓글 토론장이 한동석 중위가 실명으로 역사의 비밀을 증언하는 증언장이었다.&amp;nbsp;&amp;nbsp;한편으로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를 보고 공수부대의 잔인성에 울분을 터뜨리며 그 울분을 거기 터뜨리는 네티즌들이 있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실제 사건의 현장 증인 한동석님은 전혀 다른 종류의 울분, 즉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의 역사왜곡에 울분을 터뜨리며 생생한 증언 보따리를 하나하나 풀었다.&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 무엇이 팩트였는가?&amp;nbsp;&amp;nbsp;21일 도청 앞의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없었다.&amp;nbsp;&amp;nbsp;탄통 3개는 한동석 중위기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인의 판단에 따라 7공수에 전해 주었던 것이요, 심지어 31사단 탄통을 7공수에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조차 없었다.&amp;nbsp; 위 동영상에는 나오지 않으나 &lt;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gt;는 특전사&amp;nbsp;&amp;nbsp; 대대장의 증언이 있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광주청문회 당시에는 그런 진실된 증언은 묵살되었었다.&amp;nbsp;&amp;nbsp;&lt;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gt;는 사실을 과연 무엇으로 입증할 수 있었는가?&amp;nbsp;&amp;nbsp;오직 헬기로 철수하면서 자신의 탄통을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었던 장본인만이 그 사실과 그 상황에 대한 증인이 되어줄 수 있었다.&amp;nbsp;&amp;nbsp;그래서 청문회 당시 국회 청문회장으로 전화를 걸지 못했던 것이 오래오래 한으로 남는 한동석님은 그 심경을 이렇게 토로한다:&lt;BR&gt;&lt;BR&gt;&lt;&lt;저는 5월 21일 오후 2시경까지 도청 광장에 포위되어 있다가 불행 중 다행으로 헬기로 탈출하기 전에 저희들이&amp;nbsp;&amp;nbsp; 휴대 중이던 &lt;국가보안목표 경계근무용&amp;nbsp;&amp;nbsp; M-16 탄&gt;을 제7공수부대&amp;nbsp;&amp;nbsp; *** 대위에게 전달한&amp;nbsp;&amp;nbsp; 장본인입니다.&amp;nbsp;&amp;nbsp; 1988년(?) 청문회 TV생방송 당시, 저의 신분이 신분(해군 군무원)인 지라 오히려 진실를 이야기해도 더욱더 오해가 생길 것 같아서 (?)&amp;nbsp;&amp;nbsp; 뭐라고 표현할 수없는 위압감과 가족들의 안전이 염려되어 ... 전화 다이얼을 돌려서 &quot;특전사&amp;nbsp;&amp;nbsp; 대대장의 말&lt;실탄을 가지고 출동하지 않았다&gt;이 맞고, 31사단 병력 소대장(본인)한테서 받았음.을 증언해야 했었는데.... 하는 아쉬움은&amp;nbsp;&amp;nbsp; 있지만&amp;nbsp;&amp;nbsp;&amp;nbsp;&amp;nbsp; ... 진실은 언제나 하나 밖에 없고 반드시 밝혀지리라는 신념을 믿고 , 눈물을 머금고 인내를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두환 전대통령이 구속되기 직전에 &lt;서울 지검&gt;에 출두하여 위의 소신을 검사 앞에 처음으로 증언 하였던 것입니다.&amp;nbsp;&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에 스토리가 있는가?&amp;nbsp;&amp;nbsp;광주사태의 진정한 스토리 중 하나가 바로 한동석 중위의 스토리였다.&amp;nbsp;&amp;nbsp;그는 20일 밤 MBC방송국이 불타고 있었을 때 부하들과 더불어 그 속에 갇혀 목숨이 위태로왔다.&amp;nbsp;&amp;nbsp;용산참사를 생각해 보면 불타는 건물 속에 갇혀있는 자들의 위기감을 조금이나마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amp;nbsp;&amp;nbsp;이대로 있다가는 부하들과 더불어 모두 타죽는데도 소속 부대로부터 철수 명령이 없었다.&amp;nbsp;&amp;nbsp;철수명령이 없는한 군인은 경계근무지를 이탈하지 못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그는 방송국 옆집 담장을 넘는 방법으로 비상탈출하였다.&amp;nbsp;&amp;nbsp;그러나 이번에는 폭동을 일으키는 난동자들에게 붙들리면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기에 심야에 겨우겨우 부하들을 안전한 곳으로 탈출시키다보니 도청으로 와서 밤을 새게 되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아침에 보니 무장시민군에 겹겹이 포위된 그곳이 또 하나의 사지였다.&amp;nbsp;&amp;nbsp;다행히 31사단이 헬기를 보내 자기 소대 병력을 비상탈출시켜 주었으나, 사지에 공수부대를 남기고 탈출하는 것이 너무도 미안해 탄통을 넘겨주었던 것이었던바, 그 사실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lt;저는 그 당시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의 한동석 중위입니다.80년 5월 20일 밤 9시 30분경에 시위대의&amp;nbsp;&amp;nbsp; 방화로 불타오르고 있는 MBC방송국에서&amp;nbsp;&amp;nbsp;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quot;당시 향토사단 군인 소대장입니다&quot; MBC 방송국에서 우여곡절 끝에&amp;nbsp;&amp;nbsp; 비상 탈출하여, 밤 11시 경부터 다음 날인 5월 21일 &lt;도청 발포사건&gt;직후까지&amp;nbsp;&amp;nbsp; (불행 중 다행으로 도청광에 공수부대와 같이 포위 되어 있었던) 도청광장에 있다가 오후 1시 반경에, UH-H 헬기로&amp;nbsp;&amp;nbsp; 31사단 연병장으로 철수했던 장본인입니다.&amp;nbsp;&amp;nbsp; 헬기로 철수작전하기 전에 , 5월 20일 밤까지 MBC방송국과 기독교방송국,전일방송국(?) 에 배치되어 있었던 3곳의 경계용실탄 3탄통(한 탄통 안에는 M-16소총 20발 짜리 탄창에 15발씩 장전되어 있었음)을 제7공수 *** 대위님께 전달하고&amp;nbsp;&amp;nbsp; 철수했던 바, 도청 광장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직접 경험한 사람으로&amp;nbsp;.... 27년 전에 발생한&amp;nbsp;&amp;nbsp; 그 상황의 진위를 가리는데&amp;nbsp;&amp;nbsp; 한가닥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에서 글을 올렸습니다.&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발포명령은커녕 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도 실탄을 인수인계받으라는 명령도 없었다.&amp;nbsp;&amp;nbsp;단지 그것은 사지를 탈출하는 소대장과 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의 한 장교 사이의 우발적인 행동이었다.&amp;nbsp;&amp;nbsp;사지에 남은 공수부대원들이 살아남으려면 공포탄이라도 가지고 있어야 하겠기에 넘겨주었던 것뿐이었다.&amp;nbsp;&amp;nbsp;너무도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우발적으로 취해진 그 행동에 대해 한동석님은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lt;7공수 외는 저가 잘모르지만 7공수는 실탄이 없었기에&amp;nbsp;&amp;nbsp; 철수하는 저희 병력에게 &lt;실탄 인수인계&gt;를 요구하지 않았겠습니까? 자기도 실탄을 보유하고 있는 데 다른 부대에게 실탄을 요구하는 경우는 어떠한 경우라도 없을 테니깐요. &lt;BR&gt;&lt;실탄 인수인계&gt;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amp;nbsp;&amp;nbsp; 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 &lt;BR&gt;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amp;nbsp;&amp;nbsp; 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amp;nbsp;&amp;nbsp; 했을 것일라&amp;nbsp;&amp;nbsp;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전북 금마에서 온 7공수 병력은 그리 많지 않았으며, 실탄을 보유하지 않고 있었음이 아주 분명하다.&amp;nbsp;&amp;nbsp;그러면, 서울에서 온 11공수 3개 대대 병력에는 실탄이 있었는가?&amp;nbsp;&amp;nbsp;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던바, 그 사실을 1995년 2월13일 국방부 검찰부 고등검찰관실 신문조서에서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은 이렇게 진술한다:&lt;BR&gt;&lt;BR&gt;&lt;&lt;교신이 끝난 뒤 조금 있으니 UH-1H 헬기가 상무관 앞에 착륙하길래 제가 벌써 교대병력이 왔나 하고 살펴보니 상무관 앞 쪽에서 일반 보병부대 전투복을 입은 병사들이 헬기 쪽으로 뛰어 가서 탑승을 했습니다. 제가 주위 병사들을 보고 ‘저 병력은 뭐지?’ 하는 동안 헬기는 이륙했는데, ‘그 병력은 31사단 병력인데 MBC 방송국을 경계했던 병력이랍니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가 혼자 생각하기를 ‘배속받은 병력은 나 몰라라 하고 제 자식만 챙기는 놈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lt;BR&gt;&lt;BR&gt;그렇게 중얼거리고 있는데 ‘대대장님! 병사들이 31사단 병사들로부터 실탄을 얻은 것 같습니다’라고 이야기해 제가 ‘그러면 안되는데, 병사들이 실탄을 가지면 안되고 최소한 중대장급 이상이 휴대해야 한다’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병사들이 진짜 실탄을 얻었는지 확인을 해야 하는데, 당시 저도 너무 피곤해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당시 제가 병사들이 실탄을 얻었는지, 그리고 병사들에게 배분되었는지 여부를 확인하지 않은 것이 실책입니다.&amp;nbsp;&amp;nbsp;당시는 병사들이 31사단 병력으로부터 그렇게 많은 실탄을 얻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31사단 병력이 몇 명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gt;&g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78&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78&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로써 11공수에도 실탄이 없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amp;nbsp;&amp;nbsp;한동석 중위가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준 세 개의 탄통에 들어있던 실탄 수는 총 200 여발이었는데, 7공수가 독차지하지 않고 그 중 일부를 11공수 병사들에게도 나누어주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저 위의 탄통은 시민군 탄통이지만,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amp;nbsp;&amp;nbsp;21일 도청 앞의 시민군은 20만발이 넘는 실탄을 가지고 있었다 (탄약고에서 시민군에게 피탈당한 실탄 수를 근거로).&amp;nbsp;&amp;nbsp;그러나, 근 천 명의 공수부대원들에게는 고작 총 200발의 실탄밖에 없었다.&amp;nbsp;&amp;nbsp;이 숫자대로라면 병사 한 명당 5개 이상의 실탄을 가질 수 없었다.&amp;nbsp;&amp;nbsp;행정병 등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하사관급 이상의 병사와 장교들에게 10발씩 지급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amp;nbsp;&amp;nbsp;그리고, 상부 명령에 의한 지급은커녕, 현장 지휘관의 명령에 의한 지급도 아니었다.&amp;nbsp;&amp;nbsp;31사단 96연대가 철수하면서 우발적으로 넘겨준 실탄이 일부 병사들에게 우발적으로 배분되었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공수부대 집단발포 유언비어의 원인이 되었던 그 200 여발의 실탄을 한동석 중위가 보관하고 있게 된 경위는 무엇이었는가?&amp;nbsp;&amp;nbsp;한동석님이 그 경위를 설명한다:&lt;BR&gt;&lt;BR&gt;&lt;&lt;3탄통의 실탄은 저희 대대(담양)에서 출동할 때(5월 중순경) 소대장 3명과 30여명의 병력이 3곳으로 나누어서 광주 시내에 &lt;국가보안목표경계임무&gt;를 띠고 배치되었던 것입니다. 저는 MBC 방송국, 그리고,전일방송국 &amp; 기독교 방송국에 *중위와 *소위가 배치되면서 경계용실탄 1탄통씩 보유하고 있었지요. 그러니까, 저희병력이 5월 20일 밤 9시 반경에 MBC방송국에서 비상탈출할때 실탄과 소총만 휴대하고, 긴급하게 나와, 우여곡절 끝에 XX경찰서을 잠시 경유한 후에 무등산 방면으로 도주하다가 우연히 도청 광장에서 먼저 철수한 *중위와 *소위를 만나 저희 부대원 전원(장교 3명 &amp; 30여명의 병사)이 합유하게 되어서 각각 보유하고 있던 실탄을 합한 것이 모두 3탄통이 된 것입니다. (그 3탄통의 수량이 약 200 여발 정도 될 겁니다) 그리고, 2 -30 여분 후에 저희 31사단 병력은 UH-1H 헬기로 31사단 연병장까지 철수하게 됐던 것입니다.&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quot;공수부대 집단발포&quot; 유언비어는 공수부대에 살인 목적이 있었다는 거짓 인식을 주기 위해 조작되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실제 사건에서 살인 목적을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다.&amp;nbsp;&amp;nbsp;화염병이 일으킨 용산참사를 생각해 본다면 도청 앞에서 시민군 화염병에 맞아 온몸이 화염에 쌓이거나 시민군 장갑차에 깔려 죽거나 다친 병사들의 입장을 생각해 보라.&amp;nbsp;&amp;nbsp;한동석님은 그 광경을 이렇게 생생하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lt;그 당시(5월 21일)에 계엄군(31사단병력과 공수부대병력)은 도청 분수대를 거점으로&amp;nbsp;&amp;nbsp; 도청 광장에만 남아 있었지요. 그래서 도청 광장에 있는 군인들을 몰아 내기 위하여 도청 건물 뒤 뿐만 아니라 사방 팔방에서 차량, 화염병, 돌멩이 등 등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공격을 했으며, 최후의 저지선만 남아 있다가 금남로 대로 쪽이 먼저 뚤리면서&amp;nbsp;&amp;nbsp; 발포가 났고,후진하던 공수부대 장갑차에의해서 공수부대 요원이 피해를 보았고, 그 직전 까지는&amp;nbsp;&amp;nbsp; 맨몸으로 인간 바리케이트를 치고(대형을 갖추고 버팀) 밀집된 대형의 앞이 보이지 않는 관계(키가 큰 장병이 앞에 선두에 서고 키가 작은 장병은 후미에 섰기 때문에) 후미에 서 있던 공수부대 장병들은 날아오는 화병병을 볼 수 없기에 피하지 못하고 철모에&amp;nbsp;&amp;nbsp; 화염병이 맞아서 순식간에 머리부분 부터 몸 전체로&amp;nbsp;&amp;nbsp; 화염에 쌓이는 처참한 광경도 목격하면서 분개했던 기억도 있었습니다.&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날 저녁부터 퍼진 광주학살 유언비어는 시민군 무장을 정당화시킬 목적으로 조작되었다.&amp;nbsp;&amp;nbsp;사건의 선후에 대해 속이는 이 유언비어와 달리 무장시민군이 계엄군을 공격하는 사건이 먼저 있었다.&amp;nbsp;&amp;nbsp;공격하는 시민군 편에서 계엄군에 대해 정확한 정보를 가지고 있었던 그 실제 상황을 생각해 보라.&amp;nbsp;&amp;nbsp;무장시민군 편에서는 헬기로 철수하는 31사단 병력이 공수부대에 실탄을 넘겨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amp;nbsp;&amp;nbsp;시민군 장갑차가 공수부대를 덮쳤을 때 시민군 편에서는 공수부대에 실탄이 있는 줄 몰랐기에 그렇게 용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 전날 밤 시민군 편의 선무방송이 &quot;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quot;는 식으로 들렸다.&amp;nbsp;&amp;nbsp;만약 당신이 ROTC 출신 장교로서 현장에 있었다면 그 상황을 어떻게 느끼며 받아들였겠는가?&amp;nbsp;&amp;nbsp;한동석님의 다음 증언이 그 상황을 객관전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lt;BR&gt;&lt;BR&gt;&lt;&lt;어떻게 글로 설명하기가 그렇습니다만, 전쟁터라고 생각하시는 게 이해하기가 쉬울 것입니다. 50월 20일 밤 상황은 시민들한 테 잡히면 끝장입니다. 그래서 챙피스러운 이야기지만, 무기로 시민들을 제압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니고, 무작정 돌과 화염병을 맞을 수도 없고, 외부에서 지원병력이 시내로 들어올 수도 없이 고립이 된 상황인데, &lt;귀가&gt;라니요! &lt;야영&gt; 잠을 잘 수가 있나요? 목숨이 촌각에 달려 있는 데... 오죽하면 저가 단독으로 MBC방송국에서&lt;탈출을 결심&gt;하고 무전기 까지 끄고 병력을 인솔하는데 방향만 무등산 쪽으로 향했겠습니까?&amp;nbsp;&amp;nbsp; &lt;BR&gt;&lt;BR&gt;그런데 운 좋게도 광주 경찰서(?) 까지 1차 탈출에 성공하여 잠시 쉬고 있는데, 뒤를 돌아 보니 MBC 방송국 건물과 옆의 병원 옥상까지 불길이 완전히 쌓였던 장면을 볼 수가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무전병이 실수로 무전기를 개방하여 교신하는 과정에서 2소대(분대병력)와 3소대(분대병력) 가 안전한(공수부대가 집결되어있었음) 도청광장으로 먼저 대피를 하게되었고, 저희 병력은 경찰서에서 간편한 복장으로 무기와 실탄만 챙겨서 무등산 방향으로 2차 탈출을 시도하다가 우연히 2,3소대 병력을 만나게 되어서 선임 소대장인 저가 96연대 1대대 소속 3개팀(선임소대장 저를 포함하여 두명의 소대장&lt;중위 &amp; 소위&gt;)을 재편성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때가 자정 무렵(5월 21일 0시) 입니다.&amp;nbsp;&amp;nbsp;그리고, 밤새도록 영화에도 나오는 젊은 여성의 선무방송은 지금도 소름이 끼칠 정도 입니다. (계엄군은 포위가 되었으니 투항하라는 식의 엠프 방송)&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동영상에서 김영택 기자는 12시58분경 시민군 APC 장갑차가 공수부대 대열로 뛰어들어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치어 한 명이 현장에서 사망하는순간 시민군과 공수부대가 동시에 발포하였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총성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전문적인 감각을 가졌던 한동석 중위는 분명히 시민군 총성이 먼저 울렸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quot;저가 주장한 5월 21일 최초 총소리는 금남로 방향의 특전사 인간 바리케이트가&amp;nbsp;&amp;nbsp; &quot;탕 !~ &quot;하는 사제총(?) (M-16소총 소리는 아님)가 나면서 뒤로 밀리면서 양쪽으로&amp;nbsp;&amp;nbsp; 갈라졌던 것입니다.&quot;&lt;BR&gt;&amp;nbsp;&amp;nbsp; &lt;BR&gt;&amp;nbsp;&amp;nbsp; 안부웅 광주사태 당시 11공수특전여단 61대대장 역시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lt;13시경에 이르러 시위대가 장갑차와 차량의 시동을 걸고 ‘부릉부릉’ 거리는 등 살벌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저는 대대병력들에게 방독면을 착용시켰습니다. 그런 뒤 갑자기 장갑차와 빵빵 소리와 함께 시위대로부터 화염병 1개가 날아와 62대대 장갑차 있는 곳에 떨어졌습니다. 우리 장갑차가 화염병을 보고 뒤로 빠졌으며 그와 동시에 시위대 전열에 서 있던 시위대 장갑차와 5t 트럭이 계엄군 쪽을 향해 돌진해 들어왔습니다.&lt;BR&gt;&lt;BR&gt;우리는 그 차량을 막을 재간이 없어 도청을 향해 병력들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만약 시위대 차량이 빠른 속도로 저희 병력을 향해 들어왔더라면 많은 병력이 깔려 죽었을 것입니다. 다행히 장갑차 1대만 빠른 속력으로 도망가는 계엄군을 향해 돌진하여 계엄군 1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그 장갑차는 분수대를 돌아 충장로 쪽으로 갔습니다. 시위대 장갑차가 돌진해 들어옴과 동시에 시위대 쪽에서 총소리가 연발로 났습니다.&gt;&g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78&quot; target=_blank&gt;&lt;BR&gt;&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78&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78&lt;/FONT&gt;&lt;/U&gt;&lt;/A&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안부웅 중령과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이 상황이 바로 한동석 중위가 헬기로 철수하면서 본 상황이었다.&amp;nbsp;&amp;nbsp;실탄을 인수인계하라는 명령을 받은 적도 없었으며, 실탄을 인수인계했다고 보고할 겨를도 없었다.&amp;nbsp;&amp;nbsp;탄통 3개를 7공수 모 대위에게 넘겨주며 30명의 96연대 병력을 헬기에 태우는순간 시민군 편에서 먼저 총성이 울리고 이어 약 1분간의 맞사격이 있었으며, 모든 것이 아주 순식간에 발생하였다.&amp;nbsp;&amp;nbsp;한동석님은 그 순식간에 벌어진 일들은 도저히 보고 절차를 밟은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을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lt;&lt;실탄 인수인계&gt;라는 용어를 저가 표현한 것 뿐입니다..&amp;nbsp;&amp;nbsp;특전사 병력에게 필요하다고 생각되어서 그냥 전달해주었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군요.&lt;BR&gt;아 주 급박한 상황에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들이라&amp;nbsp;&amp;nbsp;그당시에 순간순간 지휘자(본인)의 판단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지 상부에 보고하고 할 겨를도 없었읍니다. 저의 생각으로는 7공수 대대장은 31사단 병력이 헬기로 철수하는 지도 몰랐을 것이며, 특전사 *** 대위도 사후에야 실탄 습득에 대한 보고를&amp;nbsp;&amp;nbsp; 했을 것일라&amp;nbsp;&amp;nbsp; 추측됩니다. 정상적인 보고후 지시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으니까요. (시위대가 순간적인 기습 공격으로 인간 바리케이트 방어대형이 양쪽으로 갈라지면서&amp;nbsp;&amp;nbsp; 대형 트럭의 질주&lt;공격&gt;로 대기 중이던 대형이 각자 흩어져서(도청 정문 을 통해 내부로) 부대를 재정비하는데 지휘자들은 정신이 없는 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읍니다.&amp;nbsp;&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시민군 편에서 선제 발포하였다는 사실은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 시민군 총기오발 사고로 증명된다.&amp;nbsp;&amp;nbsp;최초로 총성이 울리던 순간을 그는 이렇게 증언한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lt;당시 공수부대가 도청 안에 있었는데, 시민들이 계속 밀고 들어와 나와 삼촌은 떼밀리다시피 해 도청 앞까지 가게 됐다. 갑자기 총소리가 났다. &lt;BR&gt;&lt;BR&gt;&quot;공포다.&quot; &lt;BR&gt;&lt;BR&gt;누군가 외쳤다. 까닭을 모르는 뒷시위대열은 자꾸만 앞으로 밀려왔다. 삼촌과 나는 앞사람을 꼭 붙잡고 미문화원 쪽으로 빠지는데 뒤에 따라오던 청년 한 명이 소리쳤다. &lt;BR&gt;&lt;BR&gt;&quot;아저씨 아저씨, 나 총 맞았어요.&quot; &gt;&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801.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네번째 작은 제목 &quot;21일 도청 앞 발포&quot; 이하.)&lt;BR&gt;&lt;BR&gt;&amp;nbsp;&amp;nbsp; 인산인해를 이룬 인파는 무장시민군이 섞인 인파였다.&amp;nbsp;&amp;nbsp;운집한 전체 시민 수는 이십 만이요, 무장시민군 수가 오천이라 했다.&amp;nbsp;&amp;nbsp;총성이 울렸는데도 사람들이 도청 앞쪽으로 밀려왔다.&amp;nbsp;&amp;nbsp;만약 공수부대 집단발포라는 것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밀려올 리가 있겠는가?&amp;nbsp;&amp;nbsp;현장의 시민들은 공포로서 이해했으며, 더구나 총소리 방향을 모르고 있었다.&amp;nbsp;&amp;nbsp;김수영은 공수부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으나, 그가 들은 것은 뒤에 따라오던 청년이 총 맞았다고 소리친 것, 그가 본 것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뿐이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시민군 진영에서 먼저 총성이 울렸음을 한동석 중위와 안부웅 대령이 분몋이 들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시민군 진영에서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로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었음을 시민군 김수영이 분명히 목격하였다:&lt;BR&gt;&amp;nbsp;&amp;nbsp; &lt;BR&gt;&lt;&lt;광주은행 앞에선 총 조작중 오발사고가 나 고등학생 한 명이 어깻죽지에 총을 맞고 죽었다. 이때부터 사람들이 '총구는 하늘로'라는 구호를 외쳤고, 지나가던 지프차 위에서 또 오발사고가 나 차에 탔던 학생이 어깨에 총을 맞았다고 한다. 내가 하늘을 향해 공포 2발을 쏘고 나자 어떤 아저씨가 메가폰을 통해 총을 못 쏘는 사람이나 군대에 갔다 오지 않은 사람은 총을 반납하라고 했다. 그때 나는 총을 반납해 버렸다. 동구청 옆(현재) 야광카바레 부근으로 갔는데 어디서 날아오는지 모르는 총알이 3-5미터 떨어진 곳에 있던 청년의 다리를 맞혔다. 청년이 다리를 잡고 뒹굴었다. 또 한 청년은 복부에 총을 맞고, 임신한 아줌마는 가슴에 총을 맞아 즉사했다.&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시민군 지프차 위에서 오발 사고가 났다고 한다.&amp;nbsp;&amp;nbsp;시민군 지프차가 왕래하고 있었다는 것은 도청을 점거할 목적으로 시민군 작전이 진행되고 있었음을 말한다.&amp;nbsp;&amp;nbsp;시민군 지휘부가 지프차를 타고 금남로 일대를 왕래하며 시민들을 선동하고 있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바로 그 지프차 위에서 총기 오발 사고가 있었다는 것은 시민군 진영에서 계속 발포 사건이 있었음을 의미한다.&amp;nbsp;&amp;nbsp;최초의 총성은 시민군 진영에서 울렸다.&amp;nbsp;&amp;nbsp;즉, 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amp;nbsp;&amp;nbsp;어쩌면, 그것은 시민군 김수영이 서술하듯이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일 수도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김수영이 목격한 잦은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는 탈북군인들이 증언하듯 폭동 선동을 위한 의도적 오발사고였을 수도 있다.&amp;nbsp;&amp;nbsp;그 경우 살인의도를 가진 자들은 시민군 틈에 있었던 것이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car/jeep.jpg&quot; vspace=3 name=zb_target_resize&gt;&lt;BR&gt;이 사진에서 더러는 철모까지 쓴 폭도들이 지프를 타고 다니는 모습이 보인다.&amp;nbsp;&amp;nbsp;&quot;공수부대 집단발포&quot; 유언비어의 진실은 시민군 편에서 총성이 울렸다는 것이며, 그 총성 중에는 시민군 김수영이 증언하는대로 시민군 지프에서 발생한 총기오발 사고도 있었다.&lt;BR&gt;&lt;BR&gt;&lt;BR&gt;(* 상단 동영상은 1988년 12월 22일, 1989년 1월 26, 27일의 광주청문회 영상물을 함친 동영상인데, 세번째 영상물인 27일자 광주청문회 표지 다음에 26일자 동영상이 겹쳤습니다.&amp;nbsp;&amp;nbsp;도청진압작전 사망자 수에 대한 5.18측의 허위 주장이 드러나는 1989년 1월 27일자 광주청문회 영상물은 &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video/auditing_5-27.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_5-27.htm&lt;/FONT&gt;&lt;/U&gt;&lt;/A&gt; 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fle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bill.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21-bull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시민군이 선제 발포하였다&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17.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광주사태 종합 자료실&lt;/FONT&gt;&lt;/U&gt;&lt;/A&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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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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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3-28T13:22:16Z</updated>
	    <published>2009-03-28T13:22:1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amp;nbsp;&amp;nbsp; 지금 5.18측이 광주사태라는 용어의 유래에 대해서 감추거나 속이고 있지만 광주의 사기꾼들이 1980년 5월 21일 제작하여 22일 전국에 뿌린 삐라, 특히 아래의 사진에서 보이는 그 결론 부분이 5월 22일 광주사태라는 용어가 등장하게 된 유래였다.&amp;nbsp;&amp;nbsp;아래 삐라는 본래 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가 5월 21일 작성한 것인데, 광주사태가 일어나기 전날까지도 김대중은 조선대학교 운동권을 자택으로 불러들이며 지원했던바, 이렇게 조직된 홍위병들이 &quot;조선대학교 민주투쟁위원회&quot;라는 간판을 달았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 삐라를 그대로 삽입하여 일명 &quot;광주사태 속보 대자보&quot;를 제작하는 역할은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하였는데, 서울대 학생총회 역시 김대중이 금품을 뿌려 키운 홍위병들의 아지트였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data/chosun-univ.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라는 용어는 두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amp;nbsp;&amp;nbsp;첫째, 제2의 부마사태를 일으키자는 의미로, 둘째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amp;nbsp;&amp;nbsp;5월 22일에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quot;광주사태&quot;라는 신조어를 제조하여 사용하자 언론이 그대로 따라 사용하여 그 명칭이 굳어지게 되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러면 도대체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것이 있었는가?&amp;nbsp;&amp;nbsp;당시 서울대비상학생총회 미개인들은 조선대 사기꾼들이 전한 유언비어를 그대로 맹신하였다.&amp;nbsp;&amp;nbsp;제목이 거창한 이 삐라에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의 유일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quot;부마사태 때에는 전라도 출신 군인들을 진주시켰고, 금번 광주살육작전에는 경상도 출신의 공수부대를 투입시켜 지역감정을 유발시키고 잔인하게 행동하게 함으로써 그 속셈을 채우려고 하는 전두환 일파&quot;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나 광주의 사기꾼들이 5월 21일 급조한 이 픽션소설과 달리 5월 18일 광주경찰서의 요청으로 광주향토사단이 동원한 7공수는 전북 금마 병력이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7공수가 폭동을 진압하기에는 너무 숫적으로 열세였고, 시위진압 경험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고려하여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부마사태 때 진압해본 경험이 있는 부대를 착출하여 그 다음날 추가동원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물론 광주향토사단 정웅 사단장은 1980년대 중반 이래 확실하게 김대중 일파로 구분되는 인물이다.&amp;nbsp;&amp;nbsp;그러면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전두환 일파였는가?&amp;nbsp;&amp;nbsp;심지어 5.18사기꾼들조차 그런 억지 주장은 할 수 없지 아니한가.&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armed_rioters.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5월 18일 광주경찰서의 요청으로 전북 금마의 7공수가 동원되어야 하게 했던 사건은 순경 45명이 시위대에 납치된 사건이었다.&amp;nbsp;&amp;nbsp;만약 한국 기자들이 한국인들을 납치한 소말리아 무장단체를 학생들이라고 부르면 소말리아 무장단체에 대하여 독자들이 가지는 이미지는 아주 달라진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런 호칭은 소말리아 무장단체가 학생이었을 때 가능하다.&amp;nbsp;&amp;nbsp;폭동선동 선무방송을 하였던 전옥주나 푸른눈의 목격자 힌츠페터는 바로 이점에서 크나큰 과오를 범했다.&amp;nbsp;&amp;nbsp;그들은 5.18무장단체를 학생들이라고 불렀다.&amp;nbsp;&amp;nbsp;자, 윗 사진의 무장폭도가 학생이었는가?&amp;nbsp;&amp;nbsp;정말로 전남대생의 모습이 이런 무장폭도의 모습이었는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5월 21일 광주의 사기꾼들이 가져온 삐라를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그 다음날 일명 &quot;광주사태 속보&quot; 대자보로 재출판하였을 때 몇가지 멘트를 끼워놓으며 편집했는데, 그 골자는 지금 광주시민들이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예를 들어, 이런 멘트가 있다.&amp;nbsp;&amp;nbsp;&quot;미친개 같은 유신잔당의 손에 우리 형제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quot;&amp;nbsp;&amp;nbsp;실로 선동적인 문구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때 99% 이상의 국민이 그런 유언비어에 깜쪽같이 속았으며, 지금껏 광주청문회며, 5.18재판이며, 미디어의 방송들이 그런 거짓말을 맹신하게 하는 방향으로만 진행되어 왔다.&amp;nbsp;&amp;nbsp;그러나 객관적 진실은 엄청나게 사뭇 달랐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서울대비상학생총회가 &quot;미친개 같은 유신잔당의 손에 우리 형제들이 쓰러져 가는 것을 남의 일처럼 지켜보고만 있겠습니까?&quot;를 끼워넣어 전국에 뿌린 날은 5월 22일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실제로는 광주에는 군인은커녕 그림자조차 없었다.&amp;nbsp;&amp;nbsp;5월 20일의 시위 구호는 &quot;전남국을 세우자&quot;였다.&amp;nbsp;&amp;nbsp;5월 21일 시민군이 기관총 등을 발사하자 계엄군은 모두 광주 외곽으로 철수하였으며, 5월 21일 오후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된 이래 광주경찰서는 시민군 명령을 받게 되었다.&amp;nbsp;&amp;nbsp;군인이 있기는커녕 경찰조차 시민군 지배를 받고 있었다.&amp;nbsp;&amp;nbsp;당시 동아일보 광주주재기자였던 김영택 기자는 당연히 광주시민군 옹호 기사를 쓰는 입장이지만 그럼에도 그 상황을 &quot;광주공화국&quot;이라고 부른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gun-at-hall02.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자, 서울대비상학생총회 사기꾼들에게 속은 전국 국민 머리 속에 새겨진 5월 22일~26일의 광주상황은 공수부대가 광주시민들을 죽이는 장면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5월 22일 촬영된 위 사진에서 실제 장면은 얼마나 다른가.&amp;nbsp;&amp;nbsp;그 안에 있었던 김영택 기자가 본 5월 22일~26일의 &quot;광주공화국&quot; 상황은 그가 복면부대라고 부르는 5.18무장단체로부터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었던바, 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서술한다:&lt;BR&gt;&lt;BR&gt;&lt;독자들은 광주사태 당시 복면을 한 이른바 [시민군]들이, 탈취한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는 광경을 텔레비젼 화면이나 신문의 사진에서 본 일이 있을 것이다.&lt;BR&gt;&amp;nbsp;&amp;nbsp;이 [복면부대]는 18일과 19일의 시위, 특히 21일 시위대가 계엄군의 정면에서 대치하고 있을 때만 해도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그들이 등장한 것은 계엄군이 철수하고 도청이 학생들의 수중에 들어가 이른바 [광주공화국]시대가 열리면서부터였다.&lt;BR&gt;&amp;nbsp;&amp;nbsp;이들은 누구였을까? 이들이 과연 [민주화]를 외치는 순수한 시위대원들이었을까. 이것이 기자가 갖는 네 번째 의문이다.&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작은 제목 &lt;[복면부대]의 정체&gt; 이하 세 단락.)&lt;BR&gt;&lt;BR&gt;&amp;nbsp;&amp;nbsp; &quot;광주공화국&quot; 기간 동안에 죽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5.18무장단체의 과실로 발생한 윤화사고로 인한 사망자들 수가 많았다.&amp;nbsp;&amp;nbsp;&quot;광주공화국&quot; 상황의 한 목격자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amp;nbsp;&amp;nbsp;&lt;BR&gt;&lt;BR&gt;『앰뷸런스 소리, 소방차 소리, 불타오르는 건물, 피어오르는 듯한 예광탄 , 클랙션 소리, 그리고 스트레스 해소를 하듯 쏘아 대는 총소리 등등으로 휩싸인 도시를 보았다. 그때 광주 시내에는 계엄군이 한 명도 없었다. 누가 누구에게 쏘는 총성인지 알 길이 없었다. 나중에 사망자를 부검 해보니 군에선 쓰지 않았던 카빈 총상으로 죽은 이들이 많았다. 광주 탈환 뒤 회수된 아세아 자동차의 트럭을 중엔 뒤집어 지고 부딪친 것이 무척 많았다. 이런 교통사고에 의해 숨진 사람들도 많았다고 생각한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당시 자가용운전기사였으며, 훗날 전남대 총무과에 근무했던 오병길씨의 증언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한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여기저기 군용차량이 흩어져 있었다.&amp;nbsp;&amp;nbsp;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빼온 것 같았다. 자동차에 대한 나의 경험으로 미루어보아 차량사고도 많이 발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군용납품차량을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무작정 끌고 다녔기 때문이다. 더욱이 공장에 있었던 납품차량은 시운전도 하기 전의 것으로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다.&gt;&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측은 그들이 차량사고 일으켜 죽게 한 사람들을 가리켜 전두환이 학살한 것이라고 주장한다.&amp;nbsp;&amp;nbsp;우리의 질문은 아직 시운전도 안하고 냉각수도 안 채워져 있던 군용납품차량들을 탈취하여 운전경험이 미숙한 시위대들이 몰고 다니게 한 책임의 소재가 과연 누구에게 있느냐 하는 것이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machine-gun.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5월 21일 오후에 도청광장에서 총성이 울렸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 요란한 총성은 시민군 기관총이 내는 소리였다.&amp;nbsp;&amp;nbsp;그날 시민군이 발사했던 기관총 사진이 위에 있는바, 그 사실을 &quot;1995년 서울지검-국방부 검찰부의 광주사태 조사보고서&quot;는 이렇게 기록한다: &lt;일부 시위대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12층 屋上에서 LMG 2정을 설치하고 전남도청과 軍헬기를 향해 사격을 했다. &lt;BR&gt;&lt;BR&gt;14시 45분경 20사단 61연대장이 11공수여단과 병력을 교대하기 위하여 61항공단 203대대장이 조종하는 UH-1H 헬기를 타고 전 남도청 上空에서 공중 정찰을 하던 중 시위대의 對空 사격으로 6발이 헬기에 맞았다. 15시50분경 광주통합병원 상공에서 宣撫放送 을 하던 같은 機種의 61 항공단 방송용 헬기도 6발의 총격을 받았다. &gt; (&lt;A href=&quot;http://blog.daum.net/sionvoice/11045264&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blog.daum.net/sionvoice/11045264&lt;/FONT&gt;&lt;/U&gt;&lt;/A&gt; ) &lt;BR&gt;&lt;BR&gt;&amp;nbsp;&amp;nbsp; 본래 그날 헬기가 뜬 것은 광주경찰의 요청에 의해서였다.&amp;nbsp;&amp;nbsp;어떤 불순세력이 끼어있는지 모르는 5.18무장단체가 도청을 점거하기 전에 도청기밀서류를 안전한 곳으로 수송하는 작업이 시급했던 것이다.&amp;nbsp;&amp;nbsp;위에 오병길씨는 헬기가 뜬 이유에 대한 이런 증언을 한다:&lt;BR&gt;&lt;BR&gt;&lt;도청 안에서는 군인들이 무엇인가를 들고 나와 대형 군용 헬리콥터에 싣고 있었다. 군인들이 접근을 막아 멀리에서 얼핏 보았는데 전날 저녁에 시위대와 충돌로 인한 사상자들을 실어 나르는 것 같았다. 사상자들은 시민이 아니라 공수부대원이나 경찰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살벌한 분위기로 보아 사상자가 시민이었다면 군인들이 도청 안으로 가져갔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당시 공수부대 초급장교로서 현장에 있었던 채수봉씨 역시 도청 바로 앞에 군 모포에 덮인 4~5구의 시신은 시민군 시신이 아니라, 전경 시신이었다고 증언한다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IEVu/18&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IEVu/18&lt;/FONT&gt;&lt;/U&gt;&lt;/A&gt; ).&amp;nbsp;&amp;nbsp;그 전날밤 시위대가 버스로 깔아죽인 경찰 시신 4구가 어째서 그 다음날 오후까지 병원으로 후송되지 못했는지는 의문이지만, 시민군 편 오병길씨와 계엄군 채수봉씨 두 현장 목격자의 증언이 일치한다.&amp;nbsp;&amp;nbsp;그리고 늦게나마 시신들이 후송되려 할 때 시민군 기관총이 헬기를 향하여 기관총을 쏘아대었으니, 실로 그 얼마나 위험한 상황이었던가!&amp;nbsp;&amp;nbsp;도대체 시민군 기관총 사수는 누구였는가?&amp;nbsp;&amp;nbsp;분명 그는 불순세력이었거나 적어도 국가관이 이상한 인물이었음에 틀림없다.&amp;nbsp;&amp;nbsp;시민군 기관총 사수가 전남대생이었는가?&amp;nbsp;&amp;nbsp;아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무장단체는 군인만 총으로 죽인 것이 아니라, 시민도 총으로 죽였다.&amp;nbsp;&amp;nbsp;탈북군인들은 시민군으로 위장한 북한군이 뒤에서 시민에게 총을 쏘았다고 증언하는바, 시민군 증언 내용들 중에서 그런 증언을 뒷받침하는 사실들이 많이 발견된다.&amp;nbsp;&amp;nbsp;예로써, 시민군 김용균은 &quot;계엄군들은 동신고에 있었는데 어떻게 해서 그 학생이 총을 맞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그렇다면 건물 맞은 편 광주상고나 광주교육대학교 부근에도 계엄군들이 있었던 것이었을까?&amp;nbsp;&amp;nbsp;아직까지도 나에게 있어 풀리지 않는 의문이다.&quot;라고 증언한다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amp;page=4&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428&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화순 동면의 무기고를 부수다&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에서 작은 다섯번째 작은 제목 &quot;도청 사수와 새로운 충돌&quot; 이하.)&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측은 그 누명도 전두환에게 뒤집어 씌우지만, 시민군 김태헌 역시 광주공화국 기간 동안의 사건 현장에서는 계엄군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고, 무장시민군들만 우글거렸음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amp;nbsp;&amp;nbsp;&lt;BR&gt;&lt;BR&gt;계엄군이 완전히 나간 시간은 오후 6시쯤으로, 나는 시민들과 함께 도청에 들어갔다. 그러나 도청에 계속 남아 있기에는 나이도 어리고 아는 사람도 없어서 머무를 수가 없었다. 도청을 나오면서 나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청이 탈환되었으나 계속 투쟁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총을 들고 나왔다. 그러고는 시위대 차량을 타고 어느 사이엔가 헤어진 두암동 친구의 자취방으로 향했다. 두암동에 이르자 교도소가 있는 문화동 쪽에서 치열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친구가 먼저 집에 와 있었다. &lt;BR&gt;&lt;BR&gt;나는 저녁을 먹고 모두들 만류했지만 저녁 10시쯤 혼자서 집을 나왔다. 동신전문대 부근에서 총기를 소지한 20여 명의 시민군을 만났다. 나는 20여 명의 시민군과 함께 근처 독서실이 있는 3층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우리는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려 할 경우를 대비하여 10명씩 교대로 경계근무를 하기로 했다. 일부는 옥상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일부는 독서실 방에서 휴식을 취했다.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01.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01.html&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에서 세번째 작은 제목 &quot;화순 무기고 습격&quot; 마지막 두 단락.) &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청문회 때는 5.18사기꾼들의 발언권만 우대받고, 군인들의 진실한 증언은 발언권이 안주어지거나 묵살되거나 무시되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김일옥(金一玉) 당시 7공수 35대대장은 5.18무장단체가 21일 도청광장에서 뿐만 아니라, 조선대 인근 지역에서도 집단발포하였다는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대대는 일단 조선大에서 철수할 것을 결정하고 차량제대와 육로 철수제대로 구분하여 준비한 후 19시부터 1차 차량제대가 정문을 출발해 화순 방향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 중 2km 지점 건물지역에 무장폭도가 집중 점거하여 차량 대열에 무참히 사격을 가해 대대는 5명이 관통상을 입는 등 부상자가 발생했다.&lt;BR&gt;&lt;BR&gt;폭도의 사격으로 차량 2대 및 운전병이 낙오되어 보급품을 포함해 큰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낙오된 차량 및 보급품은 폭도들에 의해 방화되었으며, 실종되었던 운전병 중 1명은 폭도들에게 잡혀 광주 사직공원에서 온몸이 찢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육로철수제대는 야음을 이용해 야산을 따라 주답마을로 철수하는 도중 폭도들이 사격을 하며 조직적인 철수를 방해하기도 했다.&g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8yGb/70&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cafe.daum.net/518cafe/8yGb/70&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jeep_gun.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자, 5.18무장폭도들의 집단발포로 군인이 죽었다는 이 엄청난 증언은 사실로 입증될 수 있는가?&amp;nbsp;&amp;nbsp;그날의 시민군 집단발포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시민군들의 증언이 한결같이 그 사실을 입증하는바, 시민군 김행주는 그때 시민군이 발사한 총은 LMG 기관총이었으며, LMG 실탄만 해도 1천5백 발을 쏜 집단 발포였음을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그래서 우리는 그쪽으로 가지 않고 시외곽을 돌아보기로 했다. 백운동 철도를 거쳐 화순 가는 길목으로 갔다. 그렇게 차를 타고 다니다가 도청 점거 소식을 들었다. 어둡고 추운 밤이었지만 이 소식은 우리의 사기를 충천시켜 주었고 우리는 모두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했다. &lt;BR&gt;&lt;BR&gt;그때는 너무 컴컴해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학동쯤에서 우리가 타고 있는 차 안에 LMG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차 안에서 누군가가 계엄군이 조선대 뒷산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말해서 그 산에 대고 LMG 1천5백 발을 공포탄으로 쏘았다. 물론 위협사격이었다.&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amp;page=5&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418&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고교생의 무장항쟁&lt;/FONT&gt;&lt;/U&gt;&lt;/A&gt; 에서 다섯번째 작은 제목 &quot;도청 접수 소식에 사기충천&quot; 이하.)&lt;BR&gt;&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이 사건에서도 시민군 기관총 사수의 정체가 의심스럽다.&amp;nbsp;&amp;nbsp;어떻게 시민군 차&amp;nbsp;&amp;nbsp;안에 LMG 및 그 실탄들이 탑재되어 있었으며, 누가 쏘았는가?&amp;nbsp;&amp;nbsp; 우리가 현역 제대해도 대개의 경우 LMG 다루는 법을 모른다.&amp;nbsp;&amp;nbsp;전남대생이 그 LMG를 쏘았는가?&amp;nbsp;&amp;nbsp;아니다.&amp;nbsp;&amp;nbsp;이 고교생도 그의 정체를 모른다.&amp;nbsp;&amp;nbsp;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대한민국 국군을 향하여 LMG를 쏜 자라면 그 정체가 의심스럽거나 국가관이 의심스로운 자임에는 틀림없다.&amp;nbsp;&amp;nbsp;시민군 김여수에 따르면 그 차 안에는 수류탄도 있었다:&lt;BR&gt;&lt;BR&gt;&lt;언젠가 학운동에 있는 배고픈다리에서 계엄군과 격전을 벌였다. 산등성이에서 군인들이 3, 4명씩 넘어가는 것을 보고 우리 쪽에서 먼저 발사를 했다. 우리는 다리 부근의 주택에서 주로 총을 쐈다. 그러나 그쪽에서는 총을 쏘지 않았다. 그들은 우리가 어디에서 총을 쏘는지 모르기도 했고 또 이동하느라 정신이 없기도 했을 것이다. 그들이 반응이 없자 우리는 총 쏘는 것을 중지했다.&gt; (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28.html&quot; target=_blank&gt;&lt;BR&gt;&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28.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628.html&lt;/FONT&gt;&lt;/U&gt;&lt;/A&gt;&lt;/A&gt; 에서 두번째 작은 제목 &quot;특수기동대차에 탑승하여&quot; 이하.)&lt;BR&gt;&lt;BR&gt;&amp;nbsp;&amp;nbsp; 보라!&amp;nbsp;&amp;nbsp;5.18사기꾼들이 그날 작성하여 그 다음날 22일 전국에 뿌린 유언비어 삐라 &quot;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quot;을 읽은 국민은 군인들이 학살하고 시민들이 도망다니는 장면을 상상했으나, 객관적 진실은 정반대였다.&amp;nbsp;&amp;nbsp;5월 21일 오후 군인들은 결사적으로 도망쳤으며, 도망치는 군인들을 향한 시민군 편의 집단 발포가 있었다.&amp;nbsp;&amp;nbsp;위의 김일옥 중령은 &quot;운전병 중 1명은 폭도들에게 잡혀 광주 사직공원에서 온몸이 찢겨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quot;고 증언하는바, 그의 증언이 사실임이 시민군 최인영의 증언으로 확인된다:&lt;BR&gt;&lt;BR&gt;&lt;다음날 아침에는 걸어서 황금동에서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는 커다란 광주리에 밥이 쌓여있었다. 3일간 잠 한숨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도 배부르게 먹어보지 못한 터 라 정신없이 먹어댔다.&lt;BR&gt;&lt;BR&gt;바로 그때 젊은 청년 2명이 군복 입은 사람의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걸어왔다. 자세히 보니 군인으로 보이는 그 사람은 총에 목이 관통되었고 이미 죽어 있었다. 그 광경을 보자 밥이 넘어가지 알았다.&gt; (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zb41pl7/bbs/view.php?id=ja_03&amp;page=4&amp;sn1=&amp;divpage=1&amp;sn=off&amp;ss=on&amp;sc=on&amp;select_arrange=headnum&amp;desc=asc&amp;no=438&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남평 무기고를 털다&lt;/FONT&gt;&lt;/U&gt;&lt;/A&gt; 에서 일곱번째 작은 제목 &quot;군복 입은 시체&quot; 이하.)&lt;BR&gt;&lt;BR&gt;&amp;nbsp;&amp;nbsp; &quot;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quot; 삐라는 전두환이 당시 광주에서 아주 유명한 인물이었던 것같은 착각을 일으킨다.&amp;nbsp;&amp;nbsp;그러나 객관적 사실에서 아직 광주시민 그 누구도 전두환이란 인물의 사진조차 본 적이 없었던 때였으며, 시민군 대다수는 전두환이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amp;nbsp;&amp;nbsp;위의 최인영도 그 사실을 이렇게 시인한다: &quot;우리는 이곳에서 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전두환을 찢어죽이자'는 구호를 외쳤는데, 나는 전두환이 누구인지는 몰랐지만 나름대로 '광주사태'비극을 일으킨 장본인일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목청껏 외쳤다&quot; (위의 같은 글 다섯번째 작은 제목 &quot;남평 무기고를 털다&quot; 마지막 단락.)&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fle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bill.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집단발포를 한쪽은 5.18무장단체였다&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17.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광주사태 연구사료&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leejucheon.com/category/?cid=2102090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역사학도의 영어칼럼&lt;/FONT&gt;&lt;/U&gt;&lt;/A&gt; &lt;BR&g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광주사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주사태&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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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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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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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3-22T12:55:17Z</updated>
	    <published>2009-03-22T12:55:1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EMBED style=&quot;LEFT: 0px; WIDTH: 320px; TOP: 0px; HEIGHT: 285px&quot; src=http://study21.tistory.com/attachment/ok3.wmv width=320 height=285 type=application/x-mplayer2 autostart=&quot;true&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1982년 3월 18일 오후 2시 부산의 미국 문화원 건물에 방화로 인한 화재가 발생했다. 불은 1시간 만에 진화됐지만 그 불로 1층 도서관 열람실에 있던 동아대생 장덕술이 사망하고 김미숙 등 3명이 중경상을 입는 등 피해가 적지 않았다.&amp;nbsp;&amp;nbsp;범인은 광주사태 주동자였던 김현장의 선동을 받은 문부식 등 고신대생 학생들이었다.&amp;nbsp;&amp;nbsp;아래 동영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어 1985년 5월 22일에도 서울의 미국 문화원이 강제 점거된 사건이 있었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1p94SMqEbeQ$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처럼 1980년대에 수차례 있었던 미국문화원 방화 및 점거사건의 동인은 &quot;미국은 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이었는가?&quot; 하는 의문이요, 미국이 5.18광주시민군을 배신하였다는 분노감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미국은 5.18광주시민군과 별 우호적 관계도 적대적 관계도 아니었다.&amp;nbsp;&amp;nbsp;단지, 광주시민들이 5.18사기꾼들에게 속았을 뿐이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 사건의 발단은 1980년 5월 22일경부터 5.18사기꾼들이 유포한 대자보로 거슬러올라간다.&amp;nbsp;&amp;nbsp;미 7함대의 항공모함에 대한 유언비어가 적힌 이 대자보에 대해 이법철 스님은 이렇게 서술한다:&lt;BR&gt;&lt;BR&gt;&lt;광주거리의 도처에는 벽보의 대자보(大字報)가 시민군을 독려하고 있었다. 대자보는 하얀 대형종이에 검은 매직 글씨로 광주시민에게 결사투쟁을 하자는 선동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대자보에 강조되는 부분에는 붉은 매직 글씨로 “미 7함대의 항공모함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부산항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한, 서울과 부산, 대구, 등의 전국의 도시의 시민이 무장봉기하여 광주를 지원하고자 곧 도착할 것이니 조금만 참고 결사투쟁하자는 선동이었다. 도대체 누가, 미국의 항공모함의 병력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고 하며, 전국의 도시에서 무장시민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는 선동을 시작했을까?&amp;nbsp;&amp;nbsp;이제 와서 생각하면 허망한 새빨간 거짓말로 시민군의 결사항전을 독려하는 것이었다.&gt; (&lt;A href=&quot;http://cafe.daum.net/518cafe/IEXM/13&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cafe.daum.net/518cafe/IEXM/13&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측은 여전히 그 5.18사기꾼들의 거짓말을 맹신하면서 소설을 쓰는데, 그 한 예가 박호재의「다시 그 거리에 서면」이란 제목의 서술에서 다음의 단락들이다:&lt;BR&gt;&lt;BR&gt;&lt;&quot;언니, 저 벽보 봐&quot;&lt;BR&gt;&amp;nbsp;&amp;nbsp;순분이가 가리킨 곳에 큰 대자보가 붙어 있었다.&lt;BR&gt;&amp;nbsp;&amp;nbsp;미국 항공모함 부산 앞바다에 정박중.&lt;BR&gt;&lt;BR&gt;&amp;nbsp;&amp;nbsp;우리의 우방인 미국은 민주주의와 인권을 수호하는 나라입니다. 광주의 민주시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금 부산에 미국 항공모함이 정박 중에 있습니다. 더 이상 광주는 피를 흘리지 않을 것입니다. 시민들은 동요하지 마시고 도청에 집결합시다.&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546.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546.html&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의 5.18소설들 중에서 &quot;다시 그 거리에 서면&quot; 6항)&lt;BR&gt;&lt;BR&gt;&amp;nbsp;&amp;nbsp; 부산에 미국 항공모함이 정박 중이었던 것은 사실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 톱뉴스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으며, 서울을 비롯한 타지역의 국민들은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amp;nbsp;&amp;nbsp;인민군 10만이 개성과 해주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에 따라 미 제7함대, 미드웨이호가 요코스카에서 출항한 때는 아직 광주사태가 발발하기 전이었던 5월 17일 아침이었던바, 그날 동경T일보의 기자가 조선일보 일본특파원에게 전한 소식은 이러하다:&lt;BR&gt;&lt;BR&gt;&lt;&lt;[일본 방위청내 통합참모회의실]에 9시쯤 정보확인을 부탁한 후, 특파원은 &quot; 확인된 내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요코스카의 미7함대 사령부 작전처 00대령에 따르면 항모 미드웨이와 기함블루릿지 등이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 17일 04시 요코스카를 출항했다고 합니다.&quot;는 정보의 사실 확인을 한 후 출동목적이 &quot;정보에 따르면 북위 38도, 동경 126도(해주)부근에 병력 10만이 집결해 있으며 지원포와 탱크 등의 배치상태로 미루어 대남공격이 임박했음을 징표하는 것이라 합니다. 미7함대의 출동은 이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만 함대사령부 측은 곧 우리 통합막료회의에 정식 통보할 것이라고 합니다.&quot; &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image.chosun.com/sitedata/image/200903/11/2009031100366_1.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사진에서 보듯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인 존 스테니스호(CVN 74.9만7000t급)가 2009년 3월 11일 오전 해군작전사령부 부산기지 부두에 입항하고 있음을 조선일보는 &lt;A href=&quot;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11/2009031100375.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photo.chosun.com/site/data/html_dir/2009/03/11/2009031100375.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보도한다.&amp;nbsp;&amp;nbsp;그런데, 지금 이 뉴스는 그다지 특종뉴스는 되지 못한다.&amp;nbsp;&amp;nbsp;한미합동훈련 때 항공모함이 입항하는 것은 예사이기 때문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광주사태 때는 그야말로 특종감이었다.&amp;nbsp;&amp;nbsp;한미합동훈련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갑자기 미국이 항공모함 두 대를 급파하였다는 것은 북한의 전쟁도발 징후가 있는 때임을 암시하였기 때문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도형 기자는 특종을 터뜨린다는 흥분에 들떠 있었지만 그 기사는 끝내 보도되지 못하였다.&amp;nbsp;&amp;nbsp;그 이유는 전쟁위기감을 자극할 그 뉴스가 경제에 미칠 파장을 고려한 경제 각료들이 반대하였기 때문인데, 그 과정을 이도형 기자는 이렇게 서술한다:&lt;BR&gt;&lt;BR&gt;&lt;인쇄직전 1면 머리에 대문짝같이 크게 뽑힌 &quot;북괴군 10만 해주부근에 집결•美7함대 출동&quot; 제하의 태장은 검열에서 통과되지 못했던 것이다. &lt;BR&gt;그런데 검열은 그 후 몇 차례나 엎치락뒤치락했다. &quot;괜찮다. 실어라&quot;, &quot;안된다&quot;가 자그마치 7차례나 되풀이 된 것이다. 그 배경은 이러했다. 조선일보의 5월18일자(1980년) 동경특파원발 기사는 한국군당국과 국내 각 정보기관이 수집한 정보와 일치되었다. &lt;BR&gt;&lt;BR&gt;5월 17일 오후 늦게 당시 신현확(申鉉碻)총리 주재하에 긴급각의가 열렸다. 이 자리에서 조선일보 기사는 열띤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申총리를 비롯, 김종환내무, 주영복 국방, 박동진외무 그리고 이희성 중앙정보부장 등, 안보관련 각료들은 조선일보의 동경 발신(이도형 특파원발신)기사가 정보당국의 정보와 일치하며 정확하며, 보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판단, 게재를 주장하였다. &lt;BR&gt;&lt;BR&gt;그러나 이한빈 경제기획원장관, 정재석 상공장관 등 경제관련 각료들은 일제히 안보각료들의 주장에 반대했다. 가뜩이나 민심은 흉흉하고 수출이 위축되고 경제지표는 하락일로인데 아무리 사실이라도 그처럼 위기감을 더해주는 기사가 보도되면 격앙된 민심을 수습할 수 없다는 것이 보도불가의 이유였다. 그러느라고 각의는 춤을 추었고, 검열당국은 그때마다 결심을 뒤집곤 하는 것이었다. (....)&lt;BR&gt;&lt;BR&gt;어쨌든 그 기사는 불발되고 말았다. 안보각료에 대해 경제각료들이 이긴 것이다.&amp;nbsp;&amp;nbsp;왜 그렇게 되었는가?&amp;nbsp;&amp;nbsp; 북괴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각종 첩보와 정보에도 불구하고 한국정부는 위기를 되도록 축소하려고 했기 때문이다.&gt; (한국논단 1996.1호, &quot;1980년 5월 광주·해주 그리고 평양 !!!&quo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미 항공모함 두 대가 왜 입항하였는가?&amp;nbsp;&amp;nbsp;당시 북한은 1980년 5월초 전시사령부를 구성,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사령관으로 임명했다.&amp;nbsp;&amp;nbsp;전시사령부는 남조선의 데모가 확대되고 광주사태가 다른 도시들로 확산될 경우 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원병의 기능을 담당할 참이었다.&amp;nbsp;&amp;nbsp;'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 무력부' 직할 '전시사령부'는 특수게릴라 훈련을 받은 강력한 124군부대 등 10만 명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주력부대가 휴전선과 수도서울에 근접한 황해남도 해주와 개성 부근에 집결했던 것이다.&amp;nbsp;&amp;nbsp;주한미군 정보기관은 바로 이들을 인공위성 사진으로 잡은 것이다. 일본 요꼬스카에 있던 미7함대 항모 미드웨이를 주축으로 한 태스크 포스(함재 폭격기와 함포 및 상륙부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가 구성되어 한반도 해역으로 급파 되었던 것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렇듯 그 특종기사는 보도되지 않았기에 대한민국 국민 그 누구도 북한의 전쟁도발을 억제할 목적으로 미국 항공모함 두 대가 부산과 제주도에 입항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유독 광주는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대자보로 꽉 차 있었다.&amp;nbsp;&amp;nbsp;5.18측은 광주사태 때 광주는 통신이 단절되어 있었다고 주장한다.&amp;nbsp;&amp;nbsp;그러면 어떻게 타 지역 국민들은 전혀 모르고 있던 사실을 알고 있었는가?&amp;nbsp;&amp;nbsp;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총장 윤상원의 아지트가 당시 좌익서점 녹두서점이었으며, 김대중의 심복이 중앙정보부 총무국장 이종찬이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5월 18일 녹두서점 주인 김상윤의 동생 김상집에게 형 친구라면서 괴전화가 걸려와 5월 22일경 미 항공모함이 부산항에 입항할 것임을 알려주었다.&lt;BR&gt;&amp;nbsp;&amp;nbsp; &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어떻게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유언비어가 등장하게 되었을까?&amp;nbsp;&amp;nbsp;미 항공모함 입항 정보에 대한 윤상원의 본래의 반응은 광주에 거주하는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너무 반미하면 광주시민들이 등을 돌릴 거라며 주변에서 만류하니깐 윤상원이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라는 지시를 거두고, 말을 180도 바꾸어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벽보로 붙이게 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 사실을 윤상원 동지로서 전남 사회문제 연구소 연구원인 임낙평은 이렇게 서술한다:&lt;BR&gt;&lt;BR&gt;&lt;이즈음 윤상원을 비롯한 투쟁 지도부는 미국의 개입, 즉 미 항공모함의 내항, 미국의 동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논의했다. 그들은 미국이 전두환의 살육 만행을 묵인 방조하는 제국주의적 속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고 인식하였지만 한편으로 전두환 일파가 군을 장악하지 못했다고 보고 미국이 살인 군부에 지지를 보낼 것인가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lt;BR&gt;&lt;BR&gt;당시의 시민 대중들은 친 미 반공 의식에 젖어 있어 반미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미 항공 모함의 입항을 전두환 군부의 견제로 해석해 대자보나 궐기대회를 통해 발표하였다. 거기에는 미국이 살인 군부의 만행을 저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담겨 있었다. 윤상원 등 일부는 광주 주재 미국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불리한 상황이 전개될 때 그들을 체포해야 한다는 의견이 제기되기도 했다.&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4.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624.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마지막 작은 제목 &quot;윤상원등 지도부의 미국인식정도&quot; 이하 두 단락. )&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유언비어가 퍼져나가는 유형의 특징 중 하나가 소문의 출처가 전혀 없다는 점이다.&amp;nbsp;&amp;nbsp;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유언비어도 윤상원이 즉흥적으로 지어낸 유언비어였다.&amp;nbsp;&amp;nbsp;윤상원이 그런 주장을 하려면 최소한 친미의 입장에 있어야 했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 유언비어를 지어내기 직전에 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라고 지시했던 행동은 엄연한 반미 행동이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런데,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유언비어가 증폭된 또 하나의 유언비어 &quot;외국 우방들이 광주봉기군을 지원하고 있다&quot;는 유언비어는 실로 괴이하지 아니한가!&amp;nbsp;&amp;nbsp;도대체 광주봉기군을 지원하는 우방이 있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그런데, 만약 그것이 불순세력이 퍼뜨린 유언비어였다면 전혀 근거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amp;nbsp;&amp;nbsp;분명히 북한이 광주봉기군을 지원하려 하였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jwmpjvgNH9o$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때 김정일의 지령으로 조총련이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위 동영상 중반부에서부터 북한의 광주사태 생방송 장면이 잠깐 비쳐진다.&amp;nbsp;&amp;nbsp;북한은 정규 방송을 중단하고 광주사태 생방송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래 사진에서 보듯 광주봉기군을 지지하는 군중대회를 개최하였다.&amp;nbsp;&amp;nbsp;분명 북한의 시각에서 광주봉기군은 그들의 우군이었다.&amp;nbsp;&amp;nbsp;더구나 위 동영상에서 보듯 광주봉기군을 지지하는「방송보도戰」은 金正日이 직접 지휘한 보도전이었다.&amp;nbsp;&amp;nbsp;日本에서 발간되는 朝總聯기관지는&amp;nbsp;&amp;nbsp;金正日의 각종 활동상을 소개하는 「향도의 로정」 기획시리즈에서 金正日이 지난 80년&amp;nbsp;&amp;nbsp;5월 20,21일 양일간 『광주인민봉기자들의 투쟁을 지지하고&amp;nbsp;&amp;nbsp;고무하는&amp;nbsp;&amp;nbsp;방송보도전을 힘있게 벌려나가도록 이끌어 주었다』고 보도했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nk/DNK518.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북한의 장비로서는 초대형 장비에 5.18청년호라는 대형 클자가 새겨져 있음을 보여주는 아래의 북한 사진 역시 북한의 시각에서 광주봉기군은 그들의 우군이었음을 보여준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nk/518young.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아래의 광주봉기군 사진에서 우리는 그들 중에 국적불명의 군복차림을 한 자들이 있었음을 본다.&amp;nbsp;&amp;nbsp;도대체 철모는 어디서 구한 것이었으며, 시민군에게 왜 철모가 필요하였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과연 이 사람들이 광주시민들이었을까?&amp;nbsp;&amp;nbsp;언뜻 보기에 군경과 시민을 복장으로는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철모까지 쓰고 &quot;외국 우방들이 광주봉기군을 지원하고 있다&quot;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것은 대한민국과 전쟁을 하자는 말이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그들이 말하는 외국 우방이란 미국이었는가 북한이었는가?&amp;nbsp;&amp;nbsp;만약 미국이었다면 어째서 대표적 시민군 윤기권을 2억의 보상금을 수령한 직후 월북하였는가?&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nk/strange-uniform.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북한 대표단이 5.18묘지를 공식 참배했음을 보여주는 아래의 신문기사 역시 북한이 광주봉기군을 우군으로 여겨왔다는 사실을 입증하여 준다.&amp;nbsp;&amp;nbsp;비가 내리는 데도 비를 맞으며 참배하였다.&amp;nbsp;&amp;nbsp;(참고로 최미애 주부도 계엄군 총이 아니라 시민군 총에 희생당하였음.)&amp;nbsp;&amp;nbsp;미국의 항공모함의 병력이 광주시민을 구원하고자 출동했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린 5.18사기꾼들의 논리대로라면 광주봉기군을 우군으로 여긴 북한은 미 항공모함의 출동을 대환영하여야 했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미 항공모함의 출동을 북한이 환영하는가? &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nk/nk-518cemetery.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5.18유언비어 나팔수 역할을 했던 김현장이 부추기는 대로 고신대 운동권이 미국문화원에 방화해야 할 이유라도 있었는가?&amp;nbsp;&amp;nbsp;만약 그들이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유언비어에 속은 것이 분했다면 그 책임은 속인 자에게 물어야지 왜 엉뚱하게 미 문화원에 방화하였는가?&amp;nbsp;&amp;nbsp;이제 우리는 5.18측에 그 유언비어 대자보에 대하여 따져 물어야 한다.&amp;nbsp;&amp;nbsp;만약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고 그들이&amp;nbsp;&amp;nbsp;퍼뜨렸던 소문에 애초부터 아무런 근거가 없었던 것이라면 5.18주장과 논리는 처음부터 거짓말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는 또 하나의 증거이기 때문이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BBC International&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rumor/fleet.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광주시민군의 우방은 미국인가 북한인가?&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17.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Chungung-bill.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정웅 사단장은 김대중처럼 얼굴마담이었는가?&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광주사태 연구사료&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leejucheon.com/category/?cid=2102090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역사학도의 영어칼럼&lt;/FONT&gt;&lt;/U&gt;&lt;/A&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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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avekorea/1612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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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시사논객</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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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3-22T12:16:08Z</updated>
	    <published>2009-03-22T12:16:0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pG6hPcYl4xo&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의 평민당이 주도한 광주청문회 중 초기청문회였던 1988년 11월 30일 청문회를 잘 관찰하면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고, 시청자들에게 혼동을 줄 목적으로 편성되었음을 볼 수 있다.&amp;nbsp;&amp;nbsp;도대체 어떻게 12.12사태의 당사자 정승화씨가 광주사태의 증인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이것은 광주사태의 진실을 숨기려는 꼼수였으며, 김대중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단서는 그들의 숨기고 있었던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이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날 평민당이 출석시킨 정기용 씨를 정기용 씨를 김대중 내란 음모 사건 담당 군 검찰관으로 출석시키고 심문함으로써 시청자에게 두가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amp;nbsp;&amp;nbsp;첫째로,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를 주도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둘째로,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오백 만원을 준 혐의로 사형이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으로 착각하게 만든다.&amp;nbsp;&amp;nbsp;이것은 5.18사기꾼들이 연출한 쇼였으며, 진실에 있어서 전두환 장군은 김대중 내란음모 수사에 관여한 적이 없었다.&amp;nbsp;&amp;nbsp;그의 보안사령관 임기는 1980년 4월에 끝났으며, 6월에 후임자 노태우에게 인수인계함으로 완전히 끝났다.&amp;nbsp;&amp;nbsp;그리고 7월 김대중에게 사형이 구형되었던 것은 광주사태 때문이 아니라, 김대중이 한민통이란 반국가단체의 수괴였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지금 미국에서도 테러 단체 등 반국가단체 연루자들에게는 사형이 구형되고 있음을 우리가 보지 아니하는가.&amp;nbsp;&amp;nbsp; &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간 5.18사기꾼들이 어찌나 사기를 쳤던지 5월 17일에 전 장군이 김대중을 연행하였기 때문에 그 다음날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amp;nbsp;&amp;nbsp;그러나, 5월 17일 밤 김대중 연행의 주체는 당시 중장정보부 총무국장으로서 김대중의 심복이었던 이종찬이었다.&amp;nbsp;&amp;nbsp;그는 쿠데타를 일으켜 김대중을 군주로 세울 기회를 노리던 자였는데, 5월 16일 일부 대학생들이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었던 김대중 내란음모 주동자들 명단을 치안본부에 넘기자 김대중 보호작전으로서 김대중을 연행하여 수사정보를 조작하였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 내란음모 담당 수사관은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의 부하 이기동이었다.&amp;nbsp;&amp;nbsp;그는 전남 광양 사람이었는데, 전남에서도 광양, 순천, 광주, 무안, 목포 출신들은 동향 출신이라는 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amp;nbsp;&amp;nbsp;김대중 정부가 엄청난 혈세를 낭비하면서 이용자 없는 무안공항을 지은 것도 바로 그런 지연 때문이 아니었던가?&amp;nbsp;&amp;nbsp;김대중 내란음모 담당 수사관이 바로 이런 지연으로 얽힌 이기동이었으며, 그후 그는 김대중 가문의 가신과도 같은 관계를 유지하였다.&amp;nbsp;&amp;nbsp;이기동씨에게 수사를 맡긴 것이 김대중에게 유리했으니깐 훗날 김대중이 이종찬에게 김대중 후보 선거위 위원장, 김대중 정부 인수위 위원장, 김대중 정부 초대 국정원장 등의 중책을 맡김으로 보은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5월 17일 김대중 연행에 헌병들이 동원되었으나, 그 인솔자는 김대중 보호작전의 특명을 받은 이기동씨였다.&amp;nbsp;&amp;nbsp;그는 김대중 연행과정을 이렇게 진술한다: &lt;BR&gt;&lt;BR&gt;&lt;이날 밤 10시가 조금 지나 진과장과 김수사관, 그리고 나는 승용차 편으로 헌병 1개 분대를 실은 트럭을 인솔하여 동교동으로 향했다. 김대중씨 집 근처에서 대기하던 중 밤 11시30분을 기하여 평소 김대중씨 집을 수시로 방문한 바 있는 김수사관이 초인종을 눌렀다.&lt;BR&gt;&lt;BR&gt;김대중씨의 비서는 김수사관을 확인한 후 자연스럽게 대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헌병 분대 (장교 1명, 사병 18명)를 이끌고 순식간에 대문을 박차고 뜰로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아래채(비서실 겸 숙소)에 있던 김대중씨의 개인비서 10여명이 마당으로 몰려나와 김대중씨를 보호하려 했으나 이미 착검한 헌병들이 본채와 아래채의 중앙을 일렬로 막아 차단했기 때문에 고함소리만 요란할 뿐 본채로 접근하지는 못했다.&gt; (&lt;A href=&quo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작은 제목 &quot;아, 김대중 쪽을 맡는구나&quot; 마지막 두 단락.)&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어 이기동씨는 김대중의 내란음모의 결정적인 증거물이었던 &quot;예비내각명단&quot;을 어떻게 자기 선에서 처리함으로서 김대중을 보호해 주었는지를 이렇게 진술한다:&lt;BR&gt;&lt;BR&gt;&lt;나는 오대위에게 밖에 대기하고 있는 승용차까지 김대중씨를 안내하고 대기중인 수사관에게 김대중씨를 정중히 남산으로 모시라고 지시한 후 이희호씨를 만나기 위해 거실로 올라섰다. 막 거실로 올라서는데 약간 열려 있는 안방 문틈으로 이씨가 화장대 서랍 속에서 무언가 꺼내 황급히 핸드백 속에 넣는 게 보였다.&lt;BR&gt;&lt;BR&gt;핸드백을 들고 태연히 방에서 나온 이씨는 아직도 볼일이 남았느냐며 자신은 잠시 밖에 좀 나갔다 오겠다고 했다. 나는 잠시 자리에 앉으라고 한 후 “이 여사님, 우선 안방에서 핸드백 속에 넣으신 서류를 저에게 건네주셨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희호씨는 “핸드백에 무엇을 넣었다고 그래요? 화장품 좀 챙겼는데…”라며 핸드백 열기를 완강히 거절했다.&lt;BR&gt;&lt;BR&gt;나는 “이 여사님, 제가 직접 보았으니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여기 군인들을 시켜 강제로 회수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않으니 저에게 건네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자 이씨는 체념한 듯 A4용지 두 장을 나에게 건네주었다.&lt;BR&gt;&lt;BR&gt;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서류를 압수하고 이희호씨에게 말했다.&gt; ((&lt;A href=&quo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작은 제목 &quot;이희호씨 핸드백 속의 문건 압수&quot; 일곱째&amp;nbsp;&amp;nbsp;단락부터 네 단락.)&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capture/donga.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런 배경 지식이 없는 시청자들은 군 검찰관 정기용 씨가 정동년씨 건으로 김대중에게 내란 누명을 씌운 장본인이란 착각을 하기 쉽다.&amp;nbsp;&amp;nbsp;그러나, 김대중의 심복 이종찬의 지휘 하의 중앙정보부에서 결정적인 내란 증거물들은 걸러내고 경찰로 수사를 넘겼으며, 경찰은 다시 군 검찰로 넘겼으며, 이 과정에서 예비내각명단 등 결정적인 내란음모 증거물은 감추고, 수사 방향이 정동년씨 사건에 집중되게 함으로서 김대중을 보호해 주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정기용 씨는 이렇게 두 다리 건너 자기에게 넘어온 자료의 범위 내에서 수사하다보니 김대중과 정동년이 만났었는지 여부를 수사하게 되었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오늘날의 이천 오백 만원에 해당하는 오백 만원을 김대중이 정동년에게 주었느냐는 사실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amp;nbsp;&amp;nbsp;그런데, 5월 17일 이휘호 여사의 수중에서 확인된 현찰만 해도 오늘날의 1억 5천만원에 해당하는 3천만원이었다 ((&lt;A href=&quo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lt;/FONT&gt;&lt;/U&gt;&lt;/A&gt; 에서 작은 제목 &quot;이희호씨 핸드백 속의 문건 압수&quot; 끝에서 세번째 단락.).&amp;nbsp;&amp;nbsp;고급요정에 출입하며 딸을 숨겨두는 것 외에는 만년 실업자였던 김대중에게 어떻게 현찰로 그런 거금이 있었는가?&amp;nbsp;&amp;nbsp;여하튼 그런 거액의 현찰이 있었다는 것은 수백 만원 단위로 지출할 용도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만약 광주청문회의 목적이 진실을 밝히는데 있었다면, 정동년 씨의 오백 만원 등 지엽적인 문제가 아니라, 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에 대하여 김대중을 심문하여야 했다.&amp;nbsp;&amp;nbsp;그해 5월11일&amp;nbsp;&amp;nbsp;김대중은 전라도 정읍에서 열린 '동학제'에서 5만 청중에게 동학난을 민주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제2의 동학난이 일어나야 한다며 광주사태(무장봉기)를 선동하였다.&amp;nbsp;&amp;nbsp;그 다음날인 12일 서울 북악 파크호텔 521호에서 김대중은 한승헌,이문영 문익환, 장기표등 이른바 '국민연합'이라는 재야인사들을 불러모아 &quot;민주화운동을 하자는 것은 궁극적으로 반민주 유신세력들의 음모를 분쇄한 다음 민주주의에 역행하여 온 독재정부를 무너뜨려 우리 민주인사들이 참여하는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있다&quot;는 연설을 하였고 장기표, 심재권등 30대 복학생들에게 각대학의 동정을 살필것을 지시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여기서 김대중이 말하는 &quot;반민주 유신세력들&quot;이란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를 말하며, 독재정부란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말한다.&amp;nbsp;&amp;nbsp;따라서, 광주사태 당시 누가 유신정권을 무너뜨리려 하였는가?&amp;nbsp;&amp;nbsp;맨위 동영상에서 보듯 '88년 11월 30일의 청문회 때는 김대중 세력은 유신정권을 지지하였는데, 전두환이 유신정권에 반역하는 쿠데타를 일으켰는 논리를 내세웠던 것이니 이 얼마나 간사한 주장인가?&amp;nbsp;&amp;nbsp;5.18사기꾼들의 주장은 이래서 앞뒤가 맞지 않는다.&amp;nbsp;&amp;nbsp;전국적 민중봉기 선동 논리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의 전복을 겨냥하고 있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5월 11일경 군부쿠데타가 일어났다는 괴전화에 속은 유시민이 그 유언비어를 부풀려 퍼뜨려 일어난 5월 15일의 대규모 시위 도중 시위대 속에서 뛰쳐나온 괴한들이 시내버스를 탈취하여 전경1명을 처참하게 깔아 죽이고,&lt;BR&gt;4명에게는 중상을 입히는 사건이 벌어졌는데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515.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study21.org/518/video/515.htm&lt;/FONT&gt;&lt;/U&gt;&lt;/A&gt; ), 그때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거사 계획을 지원하기 위해 한민통 조직원들이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니, 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amp;nbsp;&amp;nbsp;그리고 한민통 조직원들이 미리 입국하여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연결고리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날 시위대 버스에 순경들이 깔려죽는 사고 발생 직후 김대중은 동교동 자택에서 문익환, 예춘호, 이문영, 서남동, 이해동 등을 불러모아 이른 바 '민주화촉진 국민대회 선언문'을 작성하고 다음날 5월16일 각 언론사와 대학에 배포하였는데 그 내용은 '비상계엄 즉각해제, 신현확 총리의 퇴진, 개헌심의위원회의 해체'등에 대해 19일 오전 10시까지 정부가 명확한 답변을 밝힐 것을 요구하고 받아들이지 않을 시에는 이른바 '국민연합'이 5월 22일부터 국민과 함께 행동에 들어갈 것임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또한 이경우 모든 책임이 정부에게 있음을 경고하면서 '최후통첩'임을 강조하였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바로 이런 일련의 사건들이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의 성격을 규정한다.&amp;nbsp;&amp;nbsp;광주사태 당시 서남부지역 에서 나돌던 유언비어 중 하나가 광주 민중봉기가 성공하면 김대중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시장 군수를 할 수 있다는 유언비어였다.&amp;nbsp;&amp;nbsp;5월 17일 김대중 연행사건 당시 김대중의 경호원이었던 함윤식씨도 광주사태 이전에 이미 감투가 미리 배분되어 있었음을 이렇게 증언하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김대중씨는 80년 5월을 민중운동의 결정적 시기로 보고 조성우, 심재권, 장기표, 이현배씨 등 학생운동 출신자들에게 매달 20만원씩의 활동비를 지급하고 구체적인 임무를 부여한 후 그 결행시기를 5월 중순경으로 결정한 뒤 정부전복 후 과도내각 역할을 맡게될 '한국민주제도연구소' 를 구성한 후 소장에 이문영, 이사장에는 예춘호씨를 임명하고 일부인사들로부터는 서둘러 전문위원 취임승낙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amp;wr_id=924&amp;sca=&amp;sfl=wr_subject||wr_content&amp;stx=함윤식&amp;sop=and&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여기를 클릭하여 출처에서 자세히 읽어보기&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맨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기세 당당한 평민당 조찬영 의원이 정기용 씨에게 &quot;김대중 씨는 지난번 청문회 증언에서 분명히 정동년 씨는 본 일도 없고 만난일도 없고, 군 수사 기관에서 오히려 그 사람이 누구냐? 이렇게 반문하면서 사진 좀 보자, 이렇게 사정을 했다고 합니다.&amp;nbsp;&amp;nbsp;증인 어떻게 생각하세요?&quot; 하고 심문하는 것을 본다.&amp;nbsp;&amp;nbsp;정기용 씨 답변은 &quot;제가 검찰에 송치 되가지고 조사 받으실 적에는 그 점은 순순히 시인하셨기 때문에요&quot;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여기서 김대중과 정기용 둘 중 하나가 위증하고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지금도 조찬영 의원처럼 김대중의 잡아떼기 수법에 속아넘어가는 바보가 있는가?&amp;nbsp;&amp;nbsp;김대중은 도청한적 없다고 잡아떼었으나 거짓말이었다.&amp;nbsp;&amp;nbsp;김대중은 북한에 비밀송금한 적이 없다고 잡아떼었으나 거짓말이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김대중이 자택에서 정동년을 두번 이상 만났었다는 증인은 바로 그때 그의 경호원이었던 함윤식 씨이다.&amp;nbsp;&amp;nbsp;1987년 6월 김대중씨의 전모를 밝힌 베스트셀러 '동교동 24시' 로 유명한 그는 모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증언한다:&amp;nbsp;&amp;nbsp;&lt;BR&gt;&lt;BR&gt;&lt;다만 제 기억으로는 정동년씨는 분명히 5 · 18이 나기 전 동교동을 두 번 다려갔다는 사실입니다. &lt;BR&gt;&lt;BR&gt;그렇지만 정씨와의 만남은 늘 그렇듯이 방안에서 두 사람만 있는 가운데 이루어졌기 때문에 무슨 말들이 오고 갔는지, 또 거사자금이 전달되었는지는 제가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정동년씨 뿐만 아니라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 10여명이 5. 18 직전 두 차례에 걸쳐 동교동을 다녀간 사실도 있습니다.&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amp;wr_id=924&amp;sca=&amp;sfl=wr_subject||wr_content&amp;stx=함윤식&amp;sop=and&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여기를 클릭하여 작은 제목 &quot;5 · 18전 학생대표 등 만난 김대중씨&quot;&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렇듯 함윤식 씨는 광주사태 직전 전남대와 조선대의 학생대표들이 분명히 두 차례에 걸쳐 동교동을 다녀간 사실도 있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의 이러한 증언의 진정성은 광주사태 직전 동교동을 다녀간 전남대생의 증언이 있어야 확증된다.&amp;nbsp;&amp;nbsp;그런 증언이 있는가?&amp;nbsp;&amp;nbsp;광주사태 당시 전남대 운동권으로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을 벌였던 김인원씨가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lt;5월 14일 이전 김대중 씨를 만나러 갈 기회가 생겼다. 자세한 날짜는 기억에 없고 다만 김대중 씨측에서 학생들을 초청하는 형식으로 되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lt;BR&gt;&lt;BR&gt;나는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함께 간 것이었다. 관광버스 한 대를 구하여 약 38명이 함께 올라가게 되었다. 그중에는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에서 활동했던 구교성 씨도 있었고 김대중 씨 비서관들도 몇 명 끼여 있었다....&lt;BR&gt;&lt;BR&gt;회담이 끝난 후 밖으로 나와서 김대중 씨 자택에서 기념으로 사진촬영을 했다.&gt;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22.html&quot; target=_blank&gt;&lt;BR&gt;&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22.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3_722.html&lt;/FONT&gt;&lt;/U&gt;&lt;/A&gt;&lt;/A&gt; 에서 중반의 작은 제목 &quot;김대중 씨를 만나고.&quot;)&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인원씨 증언에서 김인원씨가 보았던 김대중 씨 비서관들 중에 함윤식씨도 있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회담이 끝난 후 기념사진촬영까지 하였다.&amp;nbsp;&amp;nbsp;이로써 함윤식 증언의 진정성은 명확하게 입증되었으며, 따라서 광주청문회에서의 김대중의 위증 또한 명확하게 판명났다.&amp;nbsp;&amp;nbsp;그럴진대, 김대중의 위증에 속은 바보의 관점에서 해석되었던 광주사태는 이제 재해석되어야 한다.&amp;nbsp;&amp;nbsp;평민당이 주도한 광주청문회는 조찬영 의원같은 바보들의 큰 목소리가 이기는 청문회였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런 바보들의 주장이 30년 이상 한국사회를 지배해서야 되겠는가?&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지식 검색&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17.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광주사태 전야의 김대중의 예비내각명단&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88-12-19.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지휘체계 이원화 주장에 대한 소준열 장군의 통쾌한 반박&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Chungung-bill.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정웅 사단장은 김대중처럼 얼굴마담이었는가?&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광주사태 연구사료&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leejucheon.com/category/?cid=2102090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역사학도의 영어칼럼&lt;/FONT&gt;&lt;/U&gt;&lt;/A&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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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웅 사단장은 김대중처럼 얼굴마담이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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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03-15T12:11:32Z</updated>
	    <published>2009-03-15T12:11:32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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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EMBED style=&quot;LEFT: 0px; WIDTH: 320px; TOP: 0px; HEIGHT: 285px&quot; src=http://study21.tistory.com/attachment/ok2.wmv width=320 height=285 type=application/x-mplayer2 autostart=&quot;true&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이 한민통 두목시절 데리고 있던 문세광이 1974년 광복절에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였다가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사건에 대하여 김대중의 책임회피 논리는 자기는 감투만 쓰고 공작금만 받는 얼굴마담이었을 뿐이니깐 문세광이 북한으로부터 지령받고 저지른 사건에 대하여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김대중이 한민통 활동경력을 민주화운동 경력으로 내세울 때는 자신은 꼭둑각시에 불과했다는 논리가 아니지 아니한가!&amp;nbsp;&amp;nbsp;김대중은 1997년에는 기아자동차 노조더러 대통령 되면 보은할테니 장기 파업해 달라고 청하여 IMF환난을 초래해 놓고서 당시 대통령은 김영삼이라며 김영삼씨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웠다.&amp;nbsp;&amp;nbsp;그러나, 국고를 도적질하여 8억 달러를 김정일의 핵무기 개발자금으로 송금한 사건에 대하여는 실무자가 따로 있었다며 박지원씨만 감옥에 가게 하였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런데, 김대중은 광주폭동 진압의 실제 명령자였던 정웅 당시 31사(광주향토사단) 사단장에 대해서도 얼굴마담 논리를 내세웠다.&amp;nbsp;&amp;nbsp;김대중은 정웅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은 얼굴마담이었을 뿐이었기에 진압 책임은 전두환 장군에게 있다는 주장을 해왔다.&amp;nbsp;&amp;nbsp;그런데, 도대체 정웅이 언제부터 얼굴마담이었는가?&amp;nbsp;&amp;nbsp;정웅은 12.12사태 직후였던 1월 1일부로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광주향토사단 사단장으로 임명되었으니, 5.18측 논리대로라면 신군부였다.&amp;nbsp;&amp;nbsp;그런데, 광주사태의 미스테리 중 하나가 폭동진압명령의 실제 장본인이었던 정웅이 불과 8년만인 1988년에 광주 국회의원이 되었다는 사실이다.&amp;nbsp;&amp;nbsp;평민당 국회의원으로 출마하려면 김대중에게 7억원의 공천헌금을 바쳐야 했던 그 시절에 김대중이 정웅을 광주 국회의원으로 밀어주었으니 도대체 둘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었던 것일까? &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연결고리의 산증인 중의 하나가 바로 윤기권이다.&amp;nbsp;&amp;nbsp;5월 18일 윤기권 등 일단의 폭도들이 광주경찰 45명을 인질로 납치하자 안병하 전라남도 경찰국장이 전라남도 계엄분소장인 윤홍정 전교사 사령관에게 계엄군의 출동을 요청한 것이 광주사태의 발단이었다.&amp;nbsp;&amp;nbsp;경찰 45명을 인질로 납치하였던 폭도들 중 유일하게 1989년에 본인 스스로 그 실명을 밝혔던 윤기권이 1991년 3월 2억원의 보상금을 챙기자마자 또 다른 일을 위해 월북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우리는 어떻게 그의 월북이 가능하였는지 모른다.&amp;nbsp;&amp;nbsp;그러나 북한으로 납치된 것이 아니라, 자진 월북한 이가 바로 대표적 광주시민군 윤기권이었던 것이다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518movie06.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study21.org/518/doc/518movie06.htm&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1980년 5월 18일 광주순경 45명을 구출하는 작전이 시급하였던 때에 과연 정웅이 얼굴마담 노릇만 하였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1949년 장교로 임관한 정웅은 전두환 장군보다 장교 군번이 무려 7년이나 빠르다.&amp;nbsp;&amp;nbsp;별들의 세계에서는 상하가 군번순으로 결정되므로 정웅 장군이 전두환 장군의 명령을 받는다는 것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amp;nbsp;&amp;nbsp;이처럼 별들의 세계에서도 어른 격이었던 정웅이 1987년 김대중 수행원 노릇을 하였다.&amp;nbsp;&amp;nbsp;본래 정웅과 김대중은 동창 관계 비슷한 인연이었다.&amp;nbsp;&amp;nbsp;김대중은 목포 상고를 다녔을 무렵 정웅은 순천에서 5년제 중학교를 다녔는데, 본래 목포와 순천은 같은 행정구역이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당시에는 5.18사기꾼들은 전두환 장군이 직접 폭동진압을 하였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amp;nbsp;&amp;nbsp;전두환 장군은 절대로 원거리 작전명령을 내리는 일이 없었다.&amp;nbsp;&amp;nbsp;그가 작전지휘를 할 때는 항상 사병들 선봉에 섰었다.&amp;nbsp;&amp;nbsp;심지어 아침마다 있는 구보훈련에서도 그 분은 항상 사병들 선봉에서 뛰셨던 분이었다.&amp;nbsp;&amp;nbsp; 전두환 장군이 광주사태 때 광주에 온 적이 있었는가?&amp;nbsp;&amp;nbsp;그리고, 광주향토사단의 작전은 광주향토사단의 고유 권한이요 타부대 지휘관이 관여할 수 없었다.&amp;nbsp;&amp;nbsp;위의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 동영상에서 정웅의 직속부하였던 임정복 당시 31사단 보좌관조차 이때까지 작전 지휘권과 시위에 대한 총책임은 31사단에 있었다고 증언했음을 우리는 보며 듣는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면 어째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온갖 누명을 씌우던 김대중이 실제 진압책임자 정웅 장군에 대해서는 자신의 한민통 두목시절처럼 얼굴마담이었다는 논리를 내세웠던 것일까?&amp;nbsp;&amp;nbsp;광주사태후 미국에 간 김대중은 1천회 이상 광주사태 관련 강연, 세미나를 하면서 광주시민 오천명이 죽었다고 사기쳐서 엄청난 금품을 모았다.&amp;nbsp;&amp;nbsp;그러나 단 한푼도 광주사태 희생자에게 전달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용돈으로 쓰라고 기증한 돈일 줄 알았다고 답변했다. 전두환 대통령이 김대중의 미국 체류기간 동안 생활비를 아주 넉넉하게 보내 주었는데도 그토록 비열하였던 김대중이 귀국하였을 때 김대중의 수행원이 된 과정을 정웅 장군은 이렇게 서술한다:&lt;BR&gt;&lt;BR&gt;『김대중 선생이 미국에 있을 때 1천회 이상의 강연, 세미나를 했는데, 그때 나에 대해 얘기를 많이 했다고 합니다. 나는 지난 71년 대통령 선거 때 그분의 연설을 듣고 감명을 받았지만, 직접 만난 적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한번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지난 8월7일 근로 복지 공사를 그만둔 뒤 김대중 선생을 찾아갔습니다. 김대중 선생은 반갑게 맞으며 11대 선거에서 중도 사퇴한 얘기 등 몇 가지 질문을 했습니다.&amp;nbsp;&amp;nbsp;김대중 선생은 모든 오해가 풀렸다. 면서 민추협 부의장 자리를 권하셨습니다』 (&lt;A href=&quo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001.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001.html&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나 정웅 장군이 정말로 31사 얼굴마담이었는가?&amp;nbsp;&amp;nbsp;그리고 얼굴마담에 불과했었기에 평민당 창당후 김대중에게 가장 중요한 광주 국회의원 자리를 정웅에게 선사하였는가?&amp;nbsp;&amp;nbsp;정웅은 5월 19일 무혈 저지 작전을 실시하기로 결심하고 참모들을 불러서 사전에 작전 명령을 한 뒤에 밤 11시에 33, 35 공수대대장, 11공수여단장, 경찰국장, 31사단 이하의 참모 연대장 대대장을 모두 집합시켜놓고 지시하였다고 주장하였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런 말도 안되는 거짓말에 대하여 그의 직속 부하였던 임정복 증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lt;BR&gt;&lt;BR&gt;&lt;5. 19일에 하달한 명령은 제가 직접 쓴 겁니다.&amp;nbsp;&amp;nbsp;그런데 제가 여기서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제가 작성한 명령은 정상적인 충정작전 명령이지 유혈 진압작전 명령은 아니었다.&lt;BR&gt;&lt;BR&gt;그 이유는 만약에 사단장님께서 저한테 유혈 진압작전 명령을 작성하라 하는 지시를 제가 받았다면 이 사항은 상당히 중요한 사항입니다.&amp;nbsp;&amp;nbsp;그러기 때문에 작전 명령을 작성하는 구성요소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지휘관의 작전 개념상의 문제를 집어넣어야 되고....&gt;&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측 주장을 최대로 수용하며 5.18측을 지원하기 위하여 기사를 쓰는 김영택 기자조차도 정웅의 얼굴마담론은 수용하기를 거부한다.&amp;nbsp;&amp;nbsp;그런 거짓말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를 그는 이렇게 토론한다:&lt;BR&gt;&lt;BR&gt;&lt;어떤 형태였든 간에 5월 18일부터 21일 오후 4시까지의 공수부대 제7여단, 33, 35대대에 대한 지휘권은 제31사단장에게 있었다. 그는 제7여단뿐 아니라 19일 새벽에 도착한 제11여단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행사, 금남로에서 제7여단 병력과 교체하도록 잔전명령을 내렸었다....&lt;BR&gt;&lt;BR&gt;33, 35대대장들이 31사단장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amp;nbsp;&amp;nbsp;그 부대를 직접 지휘한 정사단장은 광주민중항쟁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는 ‘과잉진압’에 대한 지휘책임을 면할 길이 없다. 특히 과잉진압 사실을 알게 된 그가 무혈진압명령을 내렸다면, 명령을 받은 지휘관들의 보고 이전에 현장에 나가 직접 확인하지 않은 것은 ‘실수’였다. 그는 확인과정을 외면해버렸던 것이다. 심지어 헬기를 타고 돌아보니 ‘평온했었다’고까지 말했다.&gt; ((출처 : 실록5.18 광주민중항쟁 / 김영택 / 창작시대사 / 1996 )&lt;BR&gt;&lt;BR&gt;&amp;nbsp;&amp;nbsp; 정웅 장군이 무기 및 실탄을 폭도들에게 탈취당한 책임을 주영복 국방장관이 물어 5월 22일부로 직위정지된 후 광주향토사단의 지휘권이 소준열 장군에게로 넘어갔다.&amp;nbsp;&amp;nbsp;아래 두 개의 광주청문회 동영상은 5월 22일부로 정웅 장군으로부터 바톤을 넘겨받으셨던 소준열 장군이 5월 22일부터 27일까지에도 전혀 지휘체계 이원화는 없었으며, 자신은 얼굴마담이 아니었음을 증언하는 모습을 보여준다.&amp;nbsp;&amp;nbsp;이로써 지휘체계 이원화라는 것은 없었음이 다시 한번 명확하게 입증된다.&lt;BR&gt;&lt;BR&gt;&lt;BR&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ehaRdBAvtpc&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wJqHgsUdYa0&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간 5.18사기꾼들이 어찌나 거짓말을 해왔던지 광주사태 당시에 5.18무장단체는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용어를 썼는데, 당시 정부가 광주민주화운동을 폄하하려는 의도로 광주사태라는 용어를 사용했던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amp;nbsp;&amp;nbsp;당시 5월 22일로 예정되어 있던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에 참여한 조직 중에 학생 조직도 있었는데, 서울대 운동권과 전남대 운동권이 그 학생조직 선봉에 있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제2의 부마사태를 일으키자는 의미로 서울대 운동권이 &quot;광주사태 속보&quot; 대자보를 제작하여 5월 22일 전국 대학교 벽보에 붙이자 기자들미 그 용어를 사용한 것이 광주사태라는 용어의 유래였다.&amp;nbsp;&amp;nbsp;아래의 삐라는 그때 서울대 운동권이 &quot;광주사태 속보&quot; 대자보 제작을 위해 사용하였던 5,18유언비어 삐라이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daily/5-21bill.gif&quot; width=637 vspace=5 name=zb_target_resize&gt;&lt;BR&gt;이 5.18삐라를 다운받아 큰 파일로 선명하게 보시려면 &lt;A href=&quot;http://study21.org/518/photo/daily/5-21bill.gif&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여기를 마우스 오른쪽으로 누르세요&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만약 이런 유언비어 삐라 제작이 참으로 민주화운동이었다면 어째서 그 작성자가 누구였는지 밝히지 못하는가?&amp;nbsp;&amp;nbsp;21일 제작되어 하루만에 전국으로 퍼져나갔지만 작성자 성명이 없다면 그 허위사실에 대한 책임을 누가 지는가?&amp;nbsp;&amp;nbsp;만약 침략의 수단으로 북한이 오늘날 불순세력을 이용해 그런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면 또 속을 것인가?&amp;nbsp;&amp;nbsp;그런 유언비어 삐라를 베껴 전국에 확대 유포하였던 당시 서울대 운동권이 바보가 아니라 지성인이었다면 어째서 떳떳하지 못한가?&amp;nbsp;&amp;nbsp;당시 &quot;광주사태 속보&quot; 대자보 작성자가 누구였는지 떳떳하게 공개하여야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었다는 주장에 신뢰성이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사실 위 삐라가 작성되었던 5월 21일까지에는 죽은 사람들은 군인들과 순경들뿐이었다.&amp;nbsp;&amp;nbsp;군인들을 시민군 장갑차 등 각종 차량으로 깔아죽였으며, 5월 20일 저녁에는 순경 4명을 버스로 깔아죽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5월 21일 새벽 폭동선동용으로 5.18불순세력이 살해한 두 명이 있었다.&amp;nbsp;&amp;nbsp;그날 낮 사망한 4명도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이었다.&amp;nbsp;&amp;nbsp;위의 삐라가 5월 21일 저녁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하다가 사망자가 발생하기 전에 작성된 것이라면 이처럼 무장시민군의 범행과 과오로 인한 사망자만 있었을 때 저런 유언비어 삐라가 작성되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더구나, 그 삐라는 작전 지휘권과 시위에 대한 총책임이 31사 정웅 사단장에게 있었던 때 발생한 일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정웅 사단장은 단지 얼굴마담이었다는 김대중의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bookstore21.net/&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지식 검색&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88-12-19.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지휘체계 이원화 주장에 대한 소준열 장군의 통쾌한 반박&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Chungung-bill.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정웅 사단장은 김대중처럼 얼굴마담이었는가?&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auditing89-2-24.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김수환 추기경은 잠재적 5.18폭도였다&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광주사태 연구사료&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www.leejucheon.com/category/?cid=21020900&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역사학도의 영어칼럼&lt;/FONT&gt;&lt;/U&gt;&lt;/A&gt; &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K5&amp;amp;tagName=정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정웅&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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