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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국,북경,장안가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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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2T01:08:2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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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960년 &quot;5.9 광산폭발사고&quot;: 세계최대의 광산사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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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22T01:08:24Z</updated>
	    <published>2009-11-22T01:08:2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장위(張&lt;SPAN style=&quot;FONT-SIZE: 9pt; COLOR: black; FONT-FAMILY: 굴림; mso-bidi-font-family: 굴림; mso-font-kerning: 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29010;&lt;/SPAN&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대약진시대에 세계광산사고역사상 가장 비참한 석탄광산폭발사고가 최대의 석탄생산기지인 대동광무국(大同鑛務局)에서 발생한다. 이 사고고 677명이 사망하고, 구출되었던 228명중에서 다시 5명이 사망하여, 모두 682명이 사망했다. 지금까지 세계역사상 가장 비참한 광산사고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0년 5월 9일 13시 45분, 대지가 갑자기 흔들리고, 노백동광(老白洞鑛) 15호 광구에서 강렬한 화염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위력은 12급태풍에 못지 않았다. 곧 16호 광구에서도 짙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거대한 바람은 타종공과 근차공까지도 넘어져서 중상을 입게 만들었다. 광구에 위치한 건물은 쓰러졌고, 지면배전소도 기능이 정지되었다; 광산의 모든 전원이 중단되고, 전화교환지시등도 함께 깜박인 후 모조리 전원이 끊어졌다. 이때는 마침 광산교차작업시간이었다. 작업을 마친 직공은 아직 광산을 빠져나오지 못했고, 작업에 투입된 직공은 이미 광산으로 들어가 있었다. 두개반의 간부 노동자들이 모조리 광산내에 있었던 것이다. 905명의 노동자가 생사불명이 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폭발은 중남해까지도 깜짝 놀라게 만든다. 사고발생 당일, 모주석은 보고를 들었다. 그날 밤 11시경, 주은래 총리는 구조팀에게 어떤 댓가를 치르더라도 사람을 구하라고 지시한다. 중국인민해방군의 각 부대는 모두 1096명의 군인을 현장에 파견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5월 17일까지, 모두 62회차의 비행기, 십여회차의 전용기차, 214대의 자동차가 대량의 구호물자를 운송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30년이 지난 후, 사건발생당시 광당위 부서기를 맡고 있던 이계무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그는 단위서기 후고산과 서대항에서 전화를 하고 있었다. 돌연 날아온 연기에 목이 막혔다. 이계무는 일어나서 다시 전화를 하려고 했지만, 전화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조명도 모두 꺼졌따. 바깥 상황을 전혀 알 수 없었던 그는 지붕이 무너졌다고 생각했다. 기어올라가서 밖으로 나갔다. 길은 갈수록 걷기가 어려웠고, 상황은 갈수록 심각해졌다. 골목은 아주 혼란스러웠고, 어떤 사람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떤 사람은 대성통곡을 하고, 어떤 사람은 사방으로 뛰어다녔다. 굴진단 당위서기인 두배당이 10여명의 사람을 이끌고 일터에서 달려나왔다. 그는 달려가면서 소리쳤다: &quot;이서기. 빨리 밖으로 도망가!&quot; 이계무는 급히 앞으로 나가서 그들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들에게 상황도 모르면서 아무데로나 뛰어다니면 더욱 위험하다고 말했다. 그들은 듣지 않았다. 달려가면서 10여명의 광부들은 하나 하나 쓰러졌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떡해야한단 말인가? 누군가는 계속 물러나자고 했고, 어떤 사람은 뚫고 나가자고 했다. 이계무는 상황이 불명확하고,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었으므로 반드시 사람을 조직해야한다고 생각해서, 급히 임시당지부를 조직했다. 사람들도 호응했다. 이계무는 임시당지부서기가 된다. 그는 사람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분필로 담장이나 광차(鑛車)에 &quot;안에 사람이 있으니, 빨리 구해달라&quot;고 썼다. 그들이 구회풍항의 교차로까지 물러났을 때, 다시 몇 사람이 독연기에 쓰러졌다. 이계무도 점점 더 버티기 힘들어져서, 물구덩이 근처에서 쓰러졌다. 그는 힘을 다해 일어섰고, 사람들을 데리고 사굴진구항으로 데리고 갔다. 풍부한 광산경험으로 이계무는 모두 엎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안전등을 켜고, 광등은 껐다. 그리고 모두 바람막이로 밀폐하도록 하고는 구원을 기다렸다. 그들은 구호인원이 오기를 기다린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5.9&quot;석탄광산폭발사고가 일어난 1960년은 '좌경모험주의'의 광기가 풍미하던 시기였다. 그리하여 생산계획이 점차 늘어나서, 아래를 압박했다. 당시, 대동광무국 노백동의 생산량은 152만톤까지 늘어났는데, 설계능력인 90만톤보다 52%나 늘어난 수치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주관적인 감정을 중시하고, 과학을 존중하지 않았다. 엄격한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고, 그저 맹목적으로 추진했다. 누구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골목내에 모여있던 석탄먼지가 모여서, 부족한 안전관념으로 인하여 사고의 위험이 엄청나게 커져 있었다는 것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상황하에서 사고가 나는 것은 이상할 것도 없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적 상황하에서 사람들은 사고가 나면 적을 찾아낸다는 일부 사람의 선동하에 적을 찾는 운동이 전개된다. 그들은 광산에 투입되었어야 하는데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 사고를 주관한 엔지니어, 통풍, 전기공급, 운수에 종사하는 기술인원이 모조리 여기에 끌려들어간다. 사고후에 고향으로 돌아간 광부들까지도 주요의심대상이 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비록 1961년 사고종결보고서에서: &quot;반혁명자가 직접 점화했다는 단서는 지금까지 발견하지 못했다.&quot;고 하였지만, 사고처리후, 이로 인하여 비판받고 투쟁대상이 된 사람이 709명에 달했다. 간부 398명이 교체되고, '불순'인원 462명은 쫓겨났다. 이것도 또 다른 재난이었다.&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주덕(朱德)은 어떤 직위들을 맡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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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22T00:21:22Z</updated>
	    <published>2009-11-22T00:21:2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조건리(趙建利)&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덕은 중국인민해방군의 주요창시자의 하나이다. 중국혁명과 건설의 서로 다른 시기에 그는 홍군총사령(紅軍總司令), 팔로군총사령, 해방군총사령을 맡았다. 주총사령(朱總司令)은 인민대중들이 그를 친근하게 부르는 칭호였다. 이 칭호는 홍군시기부터 그의 혁명생애동안 계속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주덕이 홍군에서 총사령을 가장 처음 맡은 때는 1930년 8월이다. 당시 홍1군단(紅一軍團)과 홍3군단(紅三軍團)을 합하여 홍1방면군(紅一方面軍)을 만들었는데, 주덕이 총사령을 맡았다. 이는 인민군대내에서 처음으로 '총사령'이라는 직위가 시작된 것이다. 1933년 5월, 중국공농홍군총사령부(中國工農紅軍總司令部)가 설립되고, 주덕이 홍군총사령을 맡는다. 1936년 10월, 홍1, 홍2, 홍4의 3개 방면군이 성공적으로 회합한다. 12월, 중혁군위 주석단은 주덕을 '중국홍군총사령'에 임명한다. 1937년 7월 전면적인 항전이 발발하자 제2차국공합작이 이루어지고, 홍군은 국민혁명군제8로군(國民革命軍第八路軍)으로 개편되고, 주덕이 총지휘(總指揮)를 맡는다. 그후 팔로군은 국민혁명군제18집단군으로 변경되고, 주덕은 그 집단군총사령이 된다. 이렇게 하여 주덕은 팔로군총사령이 되고, 제18집단군총사령이 된다. 이 직위는 대일항전승리시까지 계속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항일전쟁후기에 주덕은 &quot;연안총부총사령(延安總部總司令)&quot;, &quot;중국해방구항일군총사령&quot;등의 명의를 사용하여, 인민군대로 하여금 투항을 접수하는 업무를 수행하게 하고, 친일군의 투항을 명령하기도 했으며, 미영소등 국가에 중국공산당과 인민군대의 원칙적인 입장을 설명하기도 했따. 항전승리후의 1년여 기간동안,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인민군대는 대외적으로 팔로군, 신사군(新四軍)이라는 명칭을 그대로 쓴다. 주덕도 팔로군총사령, 제18집단군총사령의 명의로 관련업무를 수행한다. 1946년 6월 내전이 전면적으로 발발하자, 인민군대는 인민해방군(人民解放軍)이라는 칭호를 쓴다. 팔로군, 신사군의 칭호는 점점 해방군으로 대체된다. 주덕도 점차 &quot;인민해방군총사령&quot;으로 불리게 된다. 1946년 11월 28일, 중공중앙은 주덕의 60세 축사에서 공개적으로 그를 인민해방군총사령이라고 부른다. 12월 1일, 진기노예변구 &lt;&lt;인민일보&gt;&gt;는 중공진기노예중앙국, 변구정부, 변구참의회등의 명의로 주덕에게 축전을 보내는데, 축전에서는 주덕을 &quot;인민해방군총사령&quot;이라고 불렀다. 이를 보면, 이때 주덕은 이미 인민해방군총사령으로 널리 불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명의로 대외업무를 수행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47년 2월 10일, 주덕은 인민해방군총사령의 명의로, 중공중앙군위주석 모택동과 공동으로 인민해방군섬감녕야전집단군을 조직하는 명령을 하달한다. 10월 10일, 그는 인민해방군총사령의 명의로 부총사령 팽덕회와 공동으로 &lt;&lt;중국인민해방군선언&gt;&gt;을 발표한다. 해방전쟁시기에 주덕이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을 맡았다는 것은 중앙문건이나 명령으로 정식확인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팔로군, 신사군이라는 칭호가 해방군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주덕의 직위와 칭호도 자연스럽게 변한 것으로 보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다. 중앙인민정부 제1차회의는 주덕을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으로 임명한다. 주덕은 자주 이 명의로 대외군사교류를 진행하고, 열병등 관련명령을 내렸다. 1954년 9월, 제1기 전인대 제1차회의에서 &lt;&lt;중화인민공화국헌법&gt;&gt;을 통과시킨다. 국방지휘체계가 조정되는데,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이라는 지위가 없어진다. 주덕은 이때부터 다시는 중국인민해방군총사령이 아니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그를 &quot;총사령&quot;이라고 불렀다. 아마도 이 칭호가 중국인민들의 마음 속에 영원히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롱커도(隆科多): 강희제 유조의 유일한 목격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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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20T18:31:46Z</updated>
	    <published>2009-11-20T18:31:4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서항걸(徐杭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강희제 말년에 후계자싸움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여러 황자(皇子)들은 형제의 정은 일찌감치 잊어버렸고, 독랄한 수단을 속속 사용했다. 강희제가 유조(遺詔)를 남겼는가 아닌가? 그는 정말 황사자(皇四子)에게 황위를 넘겨주었는가? 유조는 고쳐진 적은 없는가? 강희제처럼 영명한 군주도 전혀 생각지 못했다. 자금성내에서 이 모든 것을 목격한 사람은 오직 대신 1명뿐일 줄은. 그에게는 의문점과 수수께끼가 가득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선교가 엄가락(嚴嘉樂, Karl Slavicek)의 서신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윤진(胤&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31131;&lt;/FONT&gt;&lt;/SPAN&gt;, 황4자)이 등극한 후, 황14자(允&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31157;&lt;/FONT&gt;&lt;/SPAN&gt;)는 명을 받아 북경으로 들어왔다. &quot;먼저 선제의 유조를 보여달라고 하면서, 황4자의 통치권을 박탈하고자 하였다. 그는 구문제독(롱커도)를 엄히 질책했다. 왜냐하면 이 자가 선제(강희제)의 유조의 '유일하면서 의심스러운 목격증인'이기 때문이다. 만일 황태후(황4자와 황14자의 생모)가 나서서 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는 구문제독을 죽여버리고, 자신도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황태후는 다음해 6월(옹정2년 오월)에 사망한다.&quot; 이 서신은 중국에 머물고 있던 일부 선교사들 특히 청나라조정에서 일하던 일부 선교사들의 옹정승계에 대한 생각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서신에서 롱커도는 선제유조의 '유일하면서 의심스러운 목격증인'이라고 했다. 그리고 7명의 황자가 함께 유조를 받았다는 설을 부인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황14자 윤제가 북경으로 돌아온 후, 강희제의 유조에 관한 사실을 먼저 윤지(允祉), 윤사(允&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31145;&lt;/FONT&gt;&lt;/SPAN&gt;)등 일곱 황자에게 물어야지, 롱커도를 붙잡고 따질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를 보면, 당시 사람들은 강희옹정교체기의 황위계승과정에서 보군통령 롱커도가 핵심인물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청회전&gt;&gt;의 기록에 따르면, 보군통령은 구문의 열쇠를 관장하고, 팔기보군, 경영마보병을 통솔하며, 금령을 반포하고, 황제의 가마의 앞길을 열며, 황제의 재궁을 지키고, 부근성내의 숙직을 통할한다. 익위 1인, 협위, 부위 각 2인이 있고, 단내에서 숙직한다.&quot; 강희제는 창춘원에서 재계할 때, 롱커도 본인이 주변을 지키는 외에, 주위에서 경비를 담당하는 자들은 모두 롱커도의 부하들인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강희61년(1722년) 십일월 십삼일 술각, 강희제는 심혈관병이 돌연 발병하여 급사한다. 임종전에 말을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많다. 문저 근시태감의 보고를 받은 자는 분명히 보군통령 롱커도일 것이다. 강희제는 정양중이고 재계중이었으므로, 거의 외부와 격리된 상황하에서 사망한 것이다. 후계자는 아직 공포되지 않았다. 윤제는 천리 멀리 떨어진 감주에 있다. 이는 아주 특수한 상황이다. 롱커도가 역사무대의 중심으로 끌려나왔다. 그는 왕조의 운명을 결정하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그는 강희제가 급사한 소식을 어느 황자에게 먼저 전하느냐에 따라, 그 황자는 그 순간 곧 사라져버릴&amp;nbsp;호기를 잡게 되는 것이다. 전위유조를 허위로 만들면 황권의 계승자가 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태발전으로 분석하면, 롱커도는 태감의 비밀보고를 받은 후, 이 소식을 엄밀히 봉쇄하는 동시에, 즉시 황4자 윤진에게 통보했다. 윤진은 즉시 결단을 내려, 강희제가 황휘후계자를 시종 공표하지 않은 사실을 이용하여, 롱커도가 이미 전위유조를 받았다고 얘기하면서, 여러 황자들에게 창춘원으로 신속히 모이라고 통지한다. 그리고 그들에게 강희제가 이미 죽었다고 알리고, 롱커도가 소위 전위유조를 발표한다. 비밀입저계획은 이것으로 물거품이 된다. 윤진이 기선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둔 것이다. 롱커도는 무장병력을 가지고 황위계승을 도왔다. 강희제가 심혈을 기울여 배양한 후계자인 윤제는 졸지에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어버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롱커도가 강희제가 급사하고, 황위가 비어있는 천균일발의 순간에, 윤진에게 기울어진 것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윤사, 윤지등의 지지자들의 실력이 너무나 두터웠다는 것도 있다. 그들의 관직은 롱커도보다 높은 자가 아주 많았다. 그가 윤지, 윤사를 도와서 황위를 얻게 해준다고 하더라도, 이로 인하여 그들 이익집단에서 첫손꼽는 인물이 되기는 어려웠다. 하물며 태자가 폐위된 후 그는 반태자당과는 갈수록 소원해졌었다. 심지어 나중에는 반태자당이 멸시하고 미워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와 반대로, 윤진집단은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했다. 두드러진 인물이 많지 않았다. 만일 윤진을 도와서 황위를 계승하게 한다면, 신황제의 총애를 받을 수 있다. 롱커도의 이러한 목적은 옹정제의 즉위초기에는 확실히 실현되었다. 그러나 상당히 짧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옹정원년(1723년) 정월 초이틀, 천섬총독 연갱요는 &lt;&lt;회진군무사정청선구고밀정절&gt;&gt;을 올린다. 옹정제가 주비(朱批)한 글을 보면 마지막에 이런 말이 나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다음으로, 외숙 롱커도, 이 자는 짐과 네가 이전에는 깊이 알지 못했었는데, 정말 잘못이었다. 이 자는 진정 성조황고의 충신이고, 짐의 공신이며, 국가의 양신이다. 진정으로 당대 최고로 뛰어난 보기드문 대신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때는 강희제가 죽은 때로부터 불과 두 달이 지나지 않았을 때이다. 이 기간동안 롱커도가 도대체 무슨 일을 했기에,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을 수 있었을까? 유일하게 신황제 승계문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고서는, 롱커도가 돌연, 신황제에 의하여, &quot;충신&quot; &quot;공신&quot; &quot;양신&quot; &quot;당대최고로 뛰어난 보기드문 대신&quot;으로 불릴 리는 없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옹정5년(1727년) 십월, 조정은 롱커도가 41가지 중죄를 저질렀다고 공포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quot;망녕되게 제갈량에 비교하여, 백제성에서 명을 받은 날이 바로 죽음이 도래한 때이다라고 말하였다.&quot;는 것이 있다. 이는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강희제가 임종전에 윤진에게 황위를 넘겨주는 일은 아마도 윤진과 롱커도가 함께 날조한 것일 것이다. 소위 '유조'는 롱커도가 공포한 것이다. 자연히 이렇게 한다는 것은 죽음을 무릅쓰고 멸족의 위험을 안는 일이다. 윤진이 즉위한 후, 한때 큰 총애를 받았던 롱커도가 공로를 내세워 건방지고 교만해졌다. 권력남용도 심했다. 그리하여 점차 윤진의 반감과 경계를 산다. 옹정2년(1724년), 3년(1725년)의 사이에, 롱커도는 군신관계의 변화를 깨닫는다. 옹정3년(1725년) 정월, 롱커도는 보군통령의 직위에서 해임당한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윤진이 윤사, 윤당(允&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31135;&lt;/FONT&gt;&lt;/SPAN&gt;)집단을 타격하는 각종 조치가 계속 강화되는 것을 목격한다. 윤진의 마음이 악랄하고 수법이 악독하며, 각박하고 은혜를 베푸는데 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윤진에 대하여 새롭게 인식하게 된다. 윤사등의 처지를 보고 자신의 미래도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려움과 걱정도 있고, 불만도 컸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명을 받은 날이 바로 죽음이 도래한 날이라고 말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억울함과 불만을 간접적으로 토로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만일 롱커도가 7명의 황자들과 같이 강희제의 전위유조를 받았다면, 여러 황자들에 비하여 그는 덜 중요한 역할이었을 것이다. 이런 상황하에서 어찌 이로 인하여 죽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까? 하물며 윤진은 이미 즉위하였고 대권을 장악하였는데, 롱커도가 무슨 리스크를 더 부담해야한단 말인가?&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벽계원(碧桂園): 최대의 장점이 최대의 단점으로....</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954"/>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54</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9T18:21:23Z</updated>
	    <published>2009-11-19T18:21:2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용비(龍飛)&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벽계원의 주강삼각주지역에서의 개발능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벽계원 발행채권의 평가등급을 계속 낮추고 있는 스탠다드 푸어스조차도 &quot;벽계원의 업무모델은 이미 광동성에서 성공을 거두었다&quot;고 인정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벽계원은 다시 새로운 개발모델을 발전시키기로 결정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09년 10월의 마지막 날, 벽계원과 야거러(雅居樂)는 광주 나강구 주택용지를 둘러싸고 전투를 벌였다. 비록 벽계원이 패배하기는 하였지만, 벽계원은 이 토지에 43.38억위안을 제시했다. 이는 건축부지가격이 7000위안/평방미터에 달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벽계원이 토지를 확보하던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무슨 이유로 고집스러운 벽계원 동사장 양국강(楊國强)이 원래의 발전리듬을 바꾸었을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09년 벽계원의 광동성내에서의 실적은 아주 눈부시다. 그러나, 성외의 프로젝트는 형편없다. 성외의 반벽강산은 그룹에 겨우 25%의 공헌만을 했을 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앞서나가던 도시지역개발모델도 병목현상에 시달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실 2006년 연말부터, 만과(萬科)의 동사장인 왕석(王石)은 양국강에게 귀뜸해주였다. 벽계원의 모델은 성밖으로 확장할 때 많은 문제를 일으킬 것이라고. 그중 하나의 제약요소는 바로 공급선이 제대로 받쳐주지 못하는 것이다. 제조업이 구매하는 것은 원재료이지만, 부동산이 구매하는 것은 용역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부동산개발의 공급선은 전체과정에서 금융기관, 시장조사기관, 기획기구, 초기외주업체, 설계업체, 건축도급상, 설비공급상, 마케팅대리상, 건물관리회사등 여러 군데가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벽계원은 국내에서 가장 특징있는 개발상중 하나이다. 양국강은 거의 모든 단계를 스스로 하고 있다. 프로젝트설계, 건축, 인테리어, 판매에서 건물관리까지 모두 스스로 한다. &quot;잔디밭은 내 원림회사가 만들고, 인테리어도&amp;nbsp;내 공사팀에서 하며, 심지어 오성급호텔의 경영도 내가 한다.&quot; 양국강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벽계원의 내부직원은 일찌기 웃으면서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만일 국가에서 제한만 하지 않는다면,벽계원금융회사가 일찌감치 탄생했을 것이라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설계의 장점중 하나는 규모의 장점을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개발원가를 낮출 수 있다. 건축자재를 예로 들염, 그의 산하에는 홍업관장공장이 있는데 이미 업계의 3위내에 든다. 연간생산량이 500만평방미터에 달한다. 일부 자체개발생산하는 건재이외에도, 다른 부분은 모두 월마트식으로 집중구매하는 체제를 가지고 있다. 계속하여 단일공급상으로부터 구매하는 비율을 낮춘다. 과거 3년간, 이 비율은 6.8%에서 3.8%까지 낮추었다. 5위이내의 최대공급상이 구매총액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30%가 되지 않는다. 경쟁으로 공급상의 이윤율을 끌어내린다. 바로 이러하기 때문에, 벽계원의 건축원가는 일반적으로 경쟁상대방보다 낮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입찰, 경매등의 절차를 거치지 않기 때문에, 벽계원의 개발속도도 아주 빠르다. 만과의 연구보고서에 따르면, 벽계원의 일반프로젝트는 개념설계를 하루만에 완성한다. 여러 프로젝트가 토지사용권을 획득한 후 며칠이면 착공을 한다. 이것들은 모두 벽계원의 또 다른 수법 즉 규모화복제에 있다. 벽계원은 지금까지 수백개의 성숙한 모델을 보유하고 있다. 타운하우스의 모델만 100여개에 달한다. 서로 다른 지방, 서로 다른 사람들의 수요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설계가 나무쌓기처럼 되어, 환경계획설계가 끝나면 바로 블럭쌓기처럼 한장의 설계도에 완성을 시키고, 약간만 조정하거나 심지어 전혀 변경시키지 않고 바로 시공절차에 들어갈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문제는 이런 장점이 있는 모델을 전국으로 확대하면, 여러가지 신토불이의 문제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quot;벽계원은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다. 반드시 대도시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안휘와 같은 곳에서 3개의 벽계원을 만들 필요가 있을까?&quot; 왕석은 일찌기 직접적으로 벽계원의 문제점을 지적한 바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이것은 분명히 초기시장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quot; 아은투자의 수석애널리스트인 이대위는 통상적으로 대형개발상은 새로운 지역에 진입할 때, 조사연구기관에 위탁하여 소비능력, 브랜드인지도등을 연구한다. 벽계원이 광동성내에서 프로젝트를 개발할 때는 양국강등 고위경영진들이 현지에서 자란 광동사람들이므로, 시장에대한 파악이 거의 본능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전국을 범위로 진출할 때는, 조사연구가 없는 의사결정은 헛점이 많기 마련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07년 벽계원은 황급히 내몽고 통료지구로 들어갔다. &quot;북경에서 비행기를 타고 1시간이면 도착한다. 심양과 동급인 지급시이고, 최근들어 석탄자원개발이 이루어져서, 현지에 실력을 갖춘 상당한 소비층이 형성되어 있다&quot; 이는 벽계원이 통료에 진입할 당시 연구보고서의 주요 입장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벽계원을 이미 떠난 직원 조효(가명)는 &quot;이 보고서는 비과학적이다&quot;라고 말한다. 먼저 통료는 매년 GDP가 20%씩 상승하고 있지만, 이것은 지방경제의 기반이 두텁지 못하기 때문이고, 2000년이전에 이곳의 경제주체는 전통농목축업이었다. 일반 노동자의 평균급여는 천위안가량이다. 벽계원이 부동산시장에 진입하기 전에&amp;nbsp;계속하여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는 형국이었다. 데이타에 따르면, 2008년 통료 전체 시의 공급이 약 180만평방미터에 달하지만, 실제 거래량은 겨우 80만평방미터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시장환경하에서, 벽계원의 통료프로젝트는 건축면적이 설계상 160만평방미터였고, 판매가격이 3000위안-4000위안/평방미터였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벽계원의 규모화복제도 신토불이의 문제점이 나타난다. 원래 남방에서 사방이 탁트인 모델은 통료에서 적용될 수가 없다. 조효에 따르면, 남방에서는 수납실이 필요없지만, 이곳에서는 필수품이다. 반응이 빠른 벽계원도 이 문제에서는 반응이 느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마찬가지로 건축에서도 벽계원이 신속히 확장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광동성내에서 벽계원의 프로젝트는 통상적으로 그 산하의 등약건축이 책임진다. 양국강은 이전에 건축팀을 가지고 성공한 사람이다. 그는 등약에 대하여 엄격하게 통제한다. 2007년이전까지 벽계원의 건물품질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는 적었다. 그러나, 2008년이 되어,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폭발한다. 삽시간에 벽계원은 &quot;물건은 좋고 값은 싸다&quot;는 평판에서 멀어지기 시작했다. &quot;주로 프로젝트를 한꺼번에 너무 많이 벌였다. 제대로 따라갈 수가 없었다. 성내외의 적지 않은 프로젝트는 외주를 주게 되었다.&quot; 조효의 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실 업계에서 통용되는 외주방식이 왜 벽계원의 경우에만 문제를 많이 드러낼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들 문제는 벽계원이 채택한 관리방식과 관련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09년이전에, 벽계원이 건립한 것은 본사중심의 관리체계이다. 즉 직능부문이 종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본부가 크고 지방은 작은 관리체계이다. 직능부문이 직접 모든 프로젝트의 관련분야를 관리한다. 다시 프로젝트소조를 만들어, 같은 성의 몇개 프로젝트를 1-2명의 대프로젝트매니저가 조정한다. 양국강 본인은 직접 건축설계원과 투자탁전부를 관장한다. 나머지 부문은 고위경영진에서 관리한다. 이런 관리방식은 자원낭비를 막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나 문제는 이중감독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건축현장의 크고 작은 문제들이 모조리 양국강에게 모여든다. 벽계원의 복잡하기 그지없는 내부업무, 예를 들어, 건축, 인테리어, 정원공사등의 분야는 관련회사와 협조하여야 하는데, 양국강만이 효과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5만명의 직원이 모두 오너 한 사람을 바라본다. 그가 삼두육비라고 하더라도 조정이 불가능하다.&quot; 벽계원의 한 고위경영진이 개인적으로 한 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09년부터, 양국강은 아픔을 참고 대거 개혁을 단행한다. 2월부터 벽계원은 &quot;프로젝트관리개혁발기회의&quot;를 개최했다. 여기서 권한위임을 결정한다. 전국에 12개 지역본부를 두고, 그룹본부는 더 이상 직접 개별 프로젝트를 관리하지 않고, 단지 지역을 관리할 뿐이다. 내부인사에 따르면, 실제처리단계에서는 그룹본부가 주로 광동성내의 프로젝트를 관장하고, 성외 프로젝트는 지역총경리가 책임지는 구조라고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만 이런 설계도 마찬가지의 문제를 안고 있다. 먼저 벽계원의 원가절약의 '자체공급선'모델이 성외에는 복제될 수 없는 것이다. 벽계원 산하의 많은 회사들이 모두 양국강이 창업할 때의 노신들이 이끄는데, 양국강 산하의 회사를 외부인이 통제하는 것은 아주 어렵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예를 들어, 양이주(楊二珠)가 등약건축을 장악하고, 부동산개발프로젝트의 설계 및 인테리어의 관리를 맡고 있다. 명목적으로는 실권을 장악한 지역총경리라 하더라도, 등약건축을 쉽게 움직일 수가 없다. 그들은 그저 다른 건축회사에 입찰, 조달받는 수밖에 없다. 실제로 공급선의 모든 단계를 통제하는 벽계원모델은 광동성밖에서는 복제될 수가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이것은 현실과의 타협이다&quot; 이대위의 말이다. 한 회사가 두 개의 모델을 채택하는 것이 성공하지 못한 사례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양국강은 자신이 발전한 모델의 확대에 아주 자신감이 넘친다는 것이다. 그는 벽계원모델을 전국으로 확대시키는 것만이, 품질좋고 값싼 벽계원제품을 나오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리하여 2009년 4월 11일, 소수의 고위경영진회의에서, 양국강은 과거 2년동안의 전국전략을 얘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quot;전국에서 광동의 현재 프로젝트를 보급하자. 이것은 그룹실적과 캐시플로우를 보장하는 것이다. 2009년에는 10개의 신규프로젝트가 착공하는데, 가급적이면 광동에 집중하여 개발하자.&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벽계원의 투자자관계부의 주관 유가의는 재삼 강조한다: &quot;외지시장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quot; 그러나, 벽계원의 광동중심화는 이미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영락제(永樂帝)의 모친은 조선인인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953"/>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53</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9T16:26:56Z</updated>
	    <published>2009-11-19T16:26:5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문재봉(文裁縫)&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명성조(明成祖) 영락제(永樂帝) 주체(朱&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바탕; ;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bid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26851;&lt;/FONT&gt;&lt;/SPAN&gt;)는 역사상 복잡한 논쟁거리가 많은 인물이다. 그는 일찌기 막북(漠北)을 다섯번이나 정벌했고, 안남(安南)을 세번이나 토벌했고, 신강, 티벳, 해남등의 지역을 평정했다. &lt;&lt;영락대전&gt;&gt;을 편찬하게 하였으며, 정화를 일곱번이나 동남아와 인도양으로 보내어 해외여러나라들과의 교류를 강화했다; 동시에 그는 흉포하고 잔혹했으며,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였다. 일찌기 3천궁녀는 잔인하게 학살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산 적도 있다. 그러나 그에 관한 논쟁에서 촛점이 되는 것이 또 하나 있다. 바로 그의 생모가 누구냐는 것이다. 그의 생모가 조선인이라는 견해가 널리 퍼져 있는데, 사실이 그러할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실, 명성조(영락제)의 생모가 누구냐는 문제는 그가 등극할 때부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당시는 이러한 논쟁이 그저 민간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을 뿐이다. 그러나 수백년후까지도 이 문제는 여전히 결론을 보지 못했다. 오히여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뭐가뭔지 모르는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수백년의 논의와 고증을 거쳐, 명성조 주체의 생모가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대체로 4가지 견해로 압축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1설: 자효고황후(慈孝高皇后), 즉 마황후 마수영(馬秀英)이라는 설이다. 마수영은 주원장의 본부인이다. 이 주장은 기본적으로 정부의 공식적인 기록에 의한 것이다. 명나라의 사서인 &lt;&lt;태조실록&gt;&gt;, &lt;&lt;태종실록&gt;&gt;, &lt;&lt;정난사적&gt;&gt;등은 모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lt;&lt;정난사적&gt;&gt;의 기록을 예로 들면, &quot;고황후는 다섯 아들을 낳았다. 장남이 의문황태자이고, 그 다음이 진민왕 상이며, 그 다음이 진공왕 동이고, 그 다음이 상(上)이며, 그 다음이 주정왕이다.&quot; 여기서 말하는 상(上)이 바로 영락제 주체이다. 그는 바로 고황후의 넷째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영락제 스스로도 여러번 친히 &quot;짐은 고황후의 넷째아들이다&quot;라고 말하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청나라때에 만사동(萬斯同)이 편찬한 &lt;&lt;명사.성조본기&gt;&gt;에서도 주체는 &quot;모친이 효자고황후이며, 흥종효강황제(즉, 태자 주표)와 같은 모친이다&quot;라고 하였고, 주호양이 편찬한 &lt;&lt;역대능침비고&gt;&gt;에서도: '황후는 의문태자, 진왕 상, 진왕 동, 성조, 주왕을 낳았다&quot;고 하였다. 이것은 모두 명나라때 관방사서의 주장을 답습한 것이다. 즉 주체는 마황후의 넷째아들이라는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를 보면, 명성조의 모친은 마황후라는 것이 정사에서는 일관되게 내려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민간의 전설에 따르면, 마황후는 자식을 낳지 못했다고 한다. 태자인 주표와 연왕인 넷째 주체도 모두 그녀가 낳은 자식이 아니고, 다른 후궁이 낳았는데, 그녀가 빼앗아서 자신의 자식으로 삼은 것이라고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2설: &quot;공비(&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30909;&lt;/FONT&gt;&lt;/SPAN&gt;妃)&quot; 이씨(李氏)라는 설이다. 공비는 고려(高麗)의 미녀로 화용월태를 지녔다고 한다. 그리하여 주원장이 아주 총애했다고 한다. 그녀가 명성조 영락제의 생모라는 근거는 &lt;&lt;남경태상시지(南京太常寺誌)&gt;&gt;이다. 태상시는 명나라에서 제사와 예악을 주관하던 기구이다. 황실종묘의 제사는 모두 그들이 책임졌다. &lt;&lt;태상시지&gt;&gt;의 기록에 따르면, &quot;효릉에는 태조고황제, 고황후 마씨를 모시고 있다. 왼쪽 첫번째는 숙비 이씨로, 의문태자, 진민왕, 진공왕을 낳았다; 왼쪽 두번째는 황비로 초왕, 노왕, 대왕, 영왕, 제왕, 촉왕, 곡왕, 강왕, 이왕, 담왕을 낳았다; 왼쪽 세번째는 황귀비로 상헌왕, 숙왕, 한왕, 심왕을 낳았다; 왼쪽 네번째는 황귀비로 요왕을 낳았다. 왼쪽 다섯째는 황인으로 녕왕, 안왕을 낳았다; 오른쪽 첫번째는 공비로 성조문황제를 낳았다.&quot; 이 책은 황실종묘의 제사를 관장하는 중요한 문헌이다. 활실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으므로, 그 기록은 상당한 신뢰성이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외에 명나라의 심현화(沈玄華)가 쓴 &lt;&lt;경례남도봉선전기사십사운&gt;&gt;에는 &quot;여러 비빈들이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한 비(妃)만이 서쪽에 있다. 성조를 낳았기 때문에, 다른 비빈들이 감히 나란히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quot; 그 뜻은 공비의 위패가 혼자서 서쪽에 놓여진 이유는 그녀가 명성조 영락제의 친생모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조가 그녀의 위치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하여 다른 비빈들과 함께 놓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견해는 후세 많은 학자들의 찬동을 받는다. 부사년, 오함 등의 역사학자들은 연구와 고증을 거쳐 모두 영락제의 생모는 석비 이씨라고 주장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3설: 원순제(元順帝, 원나라 마지막 황제)의 비인 홍지라(洪吉喇)씨라는 설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주원장이 대도를 함락시켰을 때, 원순제는 황급히 도망쳤다. 주원장은 원순제의 후궁으로 갔는데, 용모가 뛰어난 미녀를 발견한다. 주원장은 기뻐하며 그녀를 후궁으로 삼는다. 그런데, 이 미녀는 바로 원순제의 세번째 부인인 홍지라씨고 태사 홍지라 투크투의 딸이었다. 이때 홍지라씨는 이미 임신중이었는데, 나중에 그녀가 낳은 자식을 주원장이 받아들인다. 그가 바로 명성조 영락제 주체이다. 이렇게 보자면 명성조 영락제는 고황후의 소생이 아닐 뿐아니라, 주원장의 친아들도 아니라는 말이다. 원순제의 유복자라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원대도가 함락된 것은 지정28년, 즉 1368년이다. 그런데, 명성조 주체는 지정20년, 즉 1360년에 태어난다. 중간에 팔년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이 주장은 헛점이 너무나 많다. 그저 민간에서 전해지는 유언비어라고 할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4설: 몽고여인 옹씨(瓮氏)라는 설이다. 청나라때의 &lt;&lt;광양잡기&gt;&gt;에 따르면 이런 기록이 있다: &quot;명성조는 마황후의 아들이 아니다. 그의 모친은 옹씨로 몽골인이다. 그녀는 원순제의 비였으므로, 이 사실을 고의로 감춘 것이다. 궁중에 별도의 사당(廟)을 만들어, 신주를 감추고 대대로 제사지냈다. 어떤 사례태감이 팽공암에게 말해준 것이다. 내가 어려서, 북경의 노인들이 이런 말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제 이를 믿을 수 있겠다.&quot; 그 뜻은 명성조는 마황후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 몽골여인 옹씨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옹씨는 원순제의 비였으므로, 사서에서는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lt;&lt;광양잡기&gt;&gt; 자체가 항간의 소문을 집대성한 것이고, 작자인 유헌정도 그저 노인들이 말하는 것을 들었다는 수준이지, 확실한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아마도 홍지라씨라는 설의 변형된 버전인 것같다. 그러므로 신뢰성이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렇게 보면, 명성조 영락제의 친생모친은 마황후와 공비에게 집중된다. 이것이 바로 현재 논의되는 촛점이다. 도대체 누가 진짜 생모인가? 비록 제1설이 &lt;&lt;태조실록&gt;&gt;, &lt;&lt;태종실록&gt;&gt;, &lt;&lt;명사&gt;&gt;등의 정사에 실려있지만, 대다수의 학자들은 믿기 어렵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영락제가 국사를 수정하도록 명령을 내린 바 있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는 영락제가 조카인 건문제 주윤문의 손에서 천하를 빼앗아왔기 때문이다. 당시 건문제가 그의 번왕을 폐지하려고 하자, '청군측(淸君側, 황제 측근의 간악한 무리를 제거한다)&quot;의 명분을 가지고 북평(북경)에서 반란을 일으켜, 건문제를 토벌하기 시작하고, 4년후에 남경을 함락시키고, 황제위에 오른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정난지역이라고 부른다. 황제에 오른 후, 영락제는 자신이 황제가 되는 것이 당연한 귀결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하여, 재삼 자신이 마황후의 친아들이며, 주원장의 넷째아들이라고 주장했다. 동시에 두번이나 명을 내려 &lt;&lt;태조실록&gt;&gt;을 수정하도록 했고,&amp;nbsp;&lt;&lt;정난사적&gt;&gt;, &lt;&lt;옥첩&gt;&gt;은 영락제의 뜻에 따라 저술된 것이다. 청나라때의 &lt;&lt;명사&gt;&gt;도 이런 기록을 그대로 답습하여, 명성조 영락제의 모친은 마황후라고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명성제의 명령이 아무리 대단하더라도, 외국의 기록까지 제한할 수는 없었다. 홍무22년, 조선사신 권근(權近)은 북경에서 연왕 주체를 배알한다. 나중에 권근이 쓴 &lt;&lt;봉사록(奉使錄)&gt;&gt;에 이 일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는 명성조 생모의 기일이 칠월십오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마황후의 기일은 팔월십일이다. 이를 가지고 추단하면, 영락제의 모친은 확실히 마황후가 아니다. 그외에 영락제는 즉위후 남경에 대보은사를 지었는데, 이것은 마황후의 양육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절의 정전(正殿)은 잠궈져 있었고, 외인들이 안을 들여다볼 수 없었다. 전해지는 바로는 실제 공비 이씨를 모셨다고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렇게 보자면, 영락제의 모친은 조선여인 공비 이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도 이 견해를 취한다.&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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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병마용을 발견하기 이전에 있었던 &quot;요괴(妖怪)&quot; 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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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9T12:50:53Z</updated>
	    <published>2009-11-19T12:50:5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악남(岳南)&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74년 봄, 진시황릉의 아래에 위치한 섬서성 임동현 서양촌의 야외에서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도기무더기를 발견한다. 나중에 국가문물국의 고고학 전문가가 감정한 결과 진시황릉에 배장(陪葬)된 병마용 군진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해 7월 15일 오후, 섬서성 고고학전문가인 항덕주(杭德洲), 원중일(袁仲一)등 일행은 도구를 가지고 서양촌의 큰 나무 아래에 텐트를 치고, 농민들이 우물을 파던 곳으로 조사를 하러 갔다. 현지 농민이 판 것은 약 4.5미터 깊이의 네모난 갱이었다. 단면으로 봐서 농경층 아래에는 홍소토(紅燒土), 회신(灰燼), 도편(陶片)과 병용(陶俑)의 머리, 팔, 다리가 있었다. 도용은 비록 부서져있었지만 개략적인 크기는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같은 규격의 도용(陶俑)을 보고는 고고학 전문가들은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 속으로 감탄했다: &quot;이는 기적이다. 기적.&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동안 감탄하다가 고고학 전문가들은 발굴절차에 따라 작업을 시작했다. 현지의 지리환경을 확인한 후, 다시 일련의 사진촬영, 문자기록, 측량등 고고학자에 있어서 빠트릴 수 없는 작업들을 진행했다. 그 다음에 일제조사를 실시한다. 문헌을 찾고,현지군중을 방문하였는데, 역대왕조가 편찬한 사서에는 병마용에 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을 노인의 입에서 진시황릉 주변의 황탄(荒灘)에서 자주 &quot;요괴&quot;가 출현했다는 말을 들었다. 현지 농민들은 복인지 화인지 알 수 없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어떤 &quot;요괴&quot;는 출토되기도 했고, 현지에 문자기록으로 남겨져 있기도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번째 이야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명나라 숭정17년(1644년), 이자성이 서안에 건국한 후, 친히 대군을 이끌고 동쪽으로 황하를 건너 북경으로 진격한다. 도르곤은 수십만의 만주병사를 이끌고 산해관 동쪽의 망망한 설원에 주둔하며, 호시탐탐 중원을 노렸다. 대명제국은 이미 운세가 다하였고, 역사의 사해로 가라앉는 중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전쟁이 계속되면서 여산의 자락에는 난민들이 모여들었다. 서양촌은 졸지에 난민촌이 되어버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전히 봄에는 가뭄이 들고 비가 오지 않았다. 마을에 하나밖에 없는 우물로는 더 이상 사람들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리하여 난민들은 사람을 조직하여 마을 남쪽의 황탄, 즉 진시황릉에서 약 3리 떨어진 저지대에서 물을 긷기 시작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모든 것은 아주 순조로웠다. 삼일만에, 우물의 바닥에서 맑은 물이 솟아났다. 그러나, 하룻밤만에 우물물은 다시 사라지고 물통에 담아서 길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모두 기이하게 생각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 청년이 나중에 허리에 밧줄을 묶고 우물 아래로 내려가서 조사를 해보았다. 우물위의 사람들이 무슨 이유에서인이 궁금해하고 이을 때, 우물 아래에서는 비명소리가 들리더니 다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모두 황급히 그 청년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그 청년은 이미 입가에 거품을 물고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모두 놀라서 청년을 안고 마을로 돌아갔다. 생강탕을 먹이고 나서야 깨어났는데, 청년이 손짓발짓을 섞어가면서 뭐라뭐라고 얘기했지만 마음 사람들은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간이 큰 사내 한 명이 칼을 지니고 다시 우물을 내려갔다. 도대체 무슨 일인지 알려고 한 것이다. 우물 아래는 어두워서 처음에는 적응이 되지 않았다. 사내는 손으로 벽을 더듬으며 사방을 관찰했다. 그런데, 우물의 벽이 이미 물에 의해 무너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바로 이때 등 뒤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다. 사내는 놀라서 얼른 몸을 돌렸는데, 우물 벽이 무너지는 것이었다. 그 다음에 시커먼 구멍이 나타났다. 구멍입구에는 이빨을 드러내고 손가락을 펼친 요괴가 서 있었다. 금방 그에게 달려들 것같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내는 본능적으로 칼을 들어 요괴를 내리쳤다. 그리고 우물 위로 살려달라고 소리쳤다. 그가 우물 위로 끌려올라왔을 때는 얼굴색이 흙색이 되어 있었고, 바닥에 쓰러져 혼절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소식이 전해지자, 아무도 우물 아래로 내려가서 알아보려고 하지 않았다. 서양촌의 한 나이든 수재 한 명은&amp;nbsp;여러 자료를 찾은 후에 &quot;땅을 파면 안된다(不宜動土)&quot;는 근거를 찾아냈다. 그리하여 수수께끼같은 우물은 다시 메워졌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노수재는 후인들이 '땅을 파면 안된다&quot;는 이유를 알게 하기 위하여 '필기'의 형식으로 이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대명 숭정 17년 3월 초칠일, 백성들이 마을 밖에서 우물을 팠다. 삼일만에 물이 나왔다. 그날 밤에, 물이 사라지고 물통에 담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기이하다고 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한 젊은이가 몸을 묶고 우물 아래로 내려갔다. 곧 놀라서 소리치며 혼절했다. 생강탕을 먹였다. 젊은이는 우물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또 다른 장사가 칼을 들고 우물로 내려갔다. 벽이 무너지고, 괴물이 나타났는데 사람과 같았다.&amp;nbsp;하나하나 모두 사람의 모습이었다. 장사는 아주 놀라서 칼을 들어 내리쳤다. 괴물은 쓰러지지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장사가 소리치는 것을 듣고 꺼냈는데, 장사는 혼절하여 깨어나지 못했다. 나는 이를 듣고, 땅을 파면 안되는 곳이라고 알려주고 다시 묻으라고 했다. 오호라, 나라가 망할 지경이 되니 반드시 요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기록하니, 후세인들은 경계로 삼으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노수재의 이 &quot;불의동토&quot;이론은 비록 후세인들에게 경각심을 주지도 못했고, 이곳에서 발굴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지만, 이 &quot;필기&quot;는 진시황릉 병마용에 관련된 최초의 기록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번째 이야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청나라&amp;nbsp;선통연간, 여산의 자락아래에 있는 하화촌에 있는 화흥도(和興道)라는 노인이 돌연 병사했다. 가족들은 비통한&amp;nbsp;가운데 죽은 자를 위하여 무덤을 만들었다. 한 풍수선생이 골라주어서, 묘지는 서양촌 남쪽의 황탄 위로 정했다. 풍수선생은 &quot;이 땅은 여산을 등지고, 서쪽으로 진릉에 가까우며, 동쪽으로 소화산의 수려한 봉우리가 있으며, 위하의 물을 앞에 두고 있으니, 얻기 힘든 풍수길지이다. 이 곳에 장사지내면 집안이 흥성할 것이다&quot;라고 하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화씨가족은 풍수선생이 골라준 위치를 파기 시작했따. 묘지가 거의 완공될 즈음, 공포스러운 사건이 벌어진다. 보기에 사납게 생긴 얼굴의 &quot;요괴&quot;(실제는 도용)가 지면에 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놀란 와중에, 화씨들은 집안의 어른을 모셔서 살펴보았다. 오랫동안 생각한 끝에, 어른은 탄식하며 말했다: &quot;이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우리가 풍수선생에게 속았다. 그는 우리 후손을 끊으려고 했나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일이 복잡해졌다. 현지 풍속에 따르면, 사람이 죽은 다음에 묘지는 1곳만 선택해야 한다. 묘의 위치가 정해지고, 일단 땅을 파기 시작했으면, 무슨 일이 발생하더라도, 죽은 자를 그 곳에 묻어야 한다. 만일 묘지를 바꾸게 되면, 집안에서 누군가가 또 죽는다고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물러날 길이 없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명백하게 불길한 징조가 나타난 땅이니, 어떻게 해야할까. 비분하고 침통한&amp;nbsp;화씨가족은 &quot;풍수선생을 붙잡아 물어보자&quot;고 결정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돈을 받고 집에서 여유있게 술을 마시고 있던 풍수선생은 돌연 쳐들어온 4명의 사나이들에게 뺨을 몇 대 맞고, 술상을 뒤엎었다. 풍수선생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4명의 사나이들은 그를 묘지로 끌고갔다. 이때 도용은 이미 화씨가족들에 의하여 파내어져 있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풍수선생은 땅바닥에 누워있는 사람모양의 '괴물'을 보고는 먼저 깜짝 놀란다. 이어서 이마에서는 땀이 비오듯 흘렀다. 점점 그는 정신을 차렸다. 그의 수십년 풍수선생 생애에서 이런 경우는 만난 적이 없었다. 정말 세상 일은 알 수가 없고, 온갖 기이한 일이 다 벌어지는 법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사납게 생긴 '괴물'과 화씨가족의 비분강개를 앞에 두고, 풍수선생은 강호를 굴러온 노련함을 드러냈다. 그는 먼저 얼굴을 굳히고, 화씨자족의 어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큰 소리로 물었다: &quot;너희는 왜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느냐. 도대체 무슨 생각이냐?&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봐라. 이게 뭐냐?&quot; 어른은 하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도용을 가리켰다: &quot;너는 조상을 요괴와 함께 살라는 것이냐. 이게 후손을 끊겠다는게 아니면 무엇이냐?&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풍수선생은 교활하게 웃었다: &quot;원래 그래서였구나. 봐라. 이게 뭐냐.&quot; 그는 어른의 시선을 멀지 않은 황탄의 들판을 가리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황탄에는 십여개의 언덕이 있었다. 어른은 그것을 보고도 무슨 뜻인지 몰랐다. &quot;모르겠느냐.&quot; 풍수선생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quot;내가 말해줄테니 잘 들어라. 그 언덕 아래에 묻힌 것은 모두 옛날 사람들이다. 이들의 후손들은 모두 잘 살고 있다.&quot; 풍수선생은 화씨가족을 언덕으로 데리고 가서는 하나하나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quot;이곳은 삼국시대 오관중랑장 조세제(趙世濟)의 부친 묘지이다; 이것은 명나라 가정연간 예부상서 왕전승의 모친 묘지이다; 이것은 청나라 강희4년에 장원급제한 양무완의 부친 묘지이다; 그리고 이 몇개도 모두 역대 유명한 인물들의 조상이 묻힌 곳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풍수선생이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 백발의 어른에게 말했다: &quot;그들의 후손이 그렇게 잘나가고 있고, 사람위의 사람이 되어 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무슨 이유로?&quot; 이때 화씨가족은 이미 풍수선생의 말에 미혹되었다. 그의 말에 정신이 없어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화를 누르고 반문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풍수선생은 화씨가족이 이미 자신의 페이스에 말려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대담하게 사기술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는 도용의 앞으로 와서 손가락 하나로 가리켰다: '이것이 원인이다. 모두 이것의 공로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화씨가족은 더더욱 무슨 말인지 몰랐다. 할 수 없이 풍수선생의 교묘한 말솜씨에 끌려들어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선친이 임종할 때, 나를 그의 앞으로 불러서 몰래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내가 평생 풍수를 봐와서 이곳저곳 모두 손바닥을 들여다보듯이 잘 안다. 그러나 마을 동남쪽의 그 황탄은 도저히 알지를 못하겠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땅인데, 어떻게 그곳에 묻힌 사람의 후손들은 하나같이 성공하는지. 나는 감히 평생 한 사람도 그곳에 묻으라고 말하지 못했다. 너도 아무나 그곳에 묻도록 하지 말라. 언젠가 네가 확실히 알 수 있게 되면 그때 시행해라.' 그렇게 말을 마치고 선친은 눈을 감으셨다.&quot; 풍수선생이 여기까지 말하였다. 시장에서 재주를 보이거나 이야기를 해주는 전문가들처럼 고의로 끝부분을 남겨놓고 사람들의 흥미를 북돋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그리고는?&quot; 마침내 누군가가 함정에 걸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나는 선친의 유훈을 기억하고 있다. 그래서 이 곳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30년동안 아무 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나중에 나는 황고묘에 향을 피우고 기도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신선의 가르침을 받았다. 원래 이들의 묘에는 모두 보배가 하나씩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고서에서 말하는 천신(天神)이다. 그것이 보우해서 묻힌자들의 후손이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정말이냐?&quot; 화씨가족은 완전히 제압당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내가 보기에 너희 화씨가족은 후덕하고 충성스러웠다. 우리 집안은 너희집안과 교분이 깊다. 그래서 이 곳을 정해준 것이다. 내가 비밀을 하나 말해주고 싶지만, 천기는 누설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저 자연스럽게 따르면 된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렇게 무례할 줄은 몰랐다. 그래서 천기를 누설하게 되어, 너희 화씨가족의 백년조화는 물거품이 되었다. 정말 안타깝다. 안타깝다.&quot; 풍수선생은 말을 마치고, 땅바닥에 주저앉아서 아주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회씨가족은 마침내 슬픔에서 벗어나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백발의 어른은 부끄럽기도 하고 민망하기도 하여, 얼굴이 벌개 가지고 사죄를 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풍수선생의 집에 술과 고기를 가져다 주게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금방의 치욕을 씻기 위하여 풍수선생은 술을 먹으면서 마음 속으로 계책을 생각해내서 화씨가족을 속여먹으려고 했다. 술과 고기를 싫컷먹은 후에 그는 방법을 백발 어른에게 알려주고 다시 돈을 받고는 떠났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밤중에, 화씨가족은 &quot;요괴&quot;를 집안으로 들고 온다. 그리고 밧줄로 묶어서 시신의 앞에 둔다. 죽은 자의 아들이 손가락을 찔러서 피를 내어 도용의 머리에 흘린다. 그후에 복숭아나무로 도용을 때린다. 새벽에 닭이 세번 울때까지 그렇게 했다. 이렇게 연속 3일을 하고나서 화씨가족은 밤에 사람이 없는 틈을 타서, &quot;괴물&quot;을 묘지로 옮겨서 묻어버린다. 이것은 풍수선생의 화씨가족에 대한 보복이었다. 그러나 화씨가족은 그가 시키는대로 열심히 했고, 그렇게 해야 후손이 흥성하고 집안이 발전한다고 믿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전설적인 이야기는 나중에 고고학자들이 주변의 농촌을 조사하다가 듣게 된다. 이야기해준 사람은 바로 그 풍수선생의 아들이었다. 그도 이미 팔순이 넘었고, 백발이 성성했다. 그도 일찌감치 조상대대로 내려온 풍수를 가지고 먹고 살았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었는데, 그 목적은 임기응변이 필요하고, 높은 산을 만나도 평탄한 도로로 만들고, 칼창을 비단으로 바꾸어야 하는 능력이 있어야 생각지도 못했던 위험한 순간을 넘길 수 있다고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야기에는 허구의 내용이 섞여들어간 것같지만 기본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왜냐하며 나중에 대규모발굴이 이러어지면서 확실히 십여개의 묘가 이미 병마용갱에 뚫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는 한나라때의 것이고, 두 개는 명청시대의 묘장이었다. 주의의 도용이 옮겨진 흔적이 분명히 있었다. 아쉽게도 이 이야기는 더 널리 퍼지지는 않고, 그냥 묻어버리고 말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세번째 이야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32년 봄, 진시황릉 내성 서쪽벽에서 20미터쯤 떨어진 곳에, 현지 농민이 땅을 파다가, 1미터 깊이의 지하에서 무릎을 꿇고 앉은 모양의 진흙으로 된 &quot;요괴&quot;(실제는 도용)를 발굴한다. 이때는 관중이 군벌혼전을 벌이는 때였고, 사방에서 전쟁의 포성이 있었다. 이 도용은 금방 행방불명되는데, 추측에 따르면, 이 &quot;요괴&quot;는 아마도 나중에 대만으로 도망친 국민당군대가 가져갔을 것이라고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48년 가을, 진시황릉 동쪽의 초가촌 부근에서, 농민이 다시 2개의 진흙 &quot;요괴&quot;를 발굴한다. 모두 앉은 자세였고, 몸에는 소매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머리 뒤에는 원형으로 머리를 묶었다. 하나는 임동현문화관이 수장하고 있고, 다른 하나는 중국역사박물관이 수장하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비록 이 3개의 &quot;요괴&quot;는 이미 운좋게 사람들에게 되돌아왔지만, 사람들이 그것을 발견했을 때는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다. 현지인들은 신원불명의 &quot;요괴&quot;로 취급했고, 문화재종사자들도 그 자체의 가치를 중시하여 '진나라 전성시대의 위대한 예술적 창작&quot;이라고 결론을 내렸을 뿐이다. 더 이상 상세한 연구는 하지 않았다. 일대명가 정진탁이든, 중국역사박물관의 연구원인 전문가들도 모두 그 남성이 꿇어앉아 있는 도용의 모습을 모두 '여성'으로 오인했다. 겉으로만 보면, 그 도용은 분명히 얌전한 부인처럼 보이기는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네번째 이야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4년 9월 15일, &lt;&lt;섬서일보&gt;&gt;에는 그다지 잘 보이지 않는 위치에 아래와 같은 뉴스가 실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임동에서 진나라때 도용이 출토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최근 임동 진시황릉 부근에서 다시 진나라때 도용 1개가 발견되었다. 이는 초가촌 서남쪽 약 150미터 지점이다. 금년 4월, 군중은 면화재배지를 정리할 때, 지면에서 약 1미터 깊이에서 발견한다. 꿇어앉은 여자도용이다. 이 도용은 해방전에 발견된 두 개의 도용보다 더욱 완벽하다. 의복의 무늬도 분명히 보이고, 자태도 조용하며 대범하여, 살아있는 것같다. 현재 문화재는 임동현문화관내에 보존하고 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는 진용이 매장된 후 20세기가 지나서 처음으로 공식문자로 보도된 내용이다. 그러나 이 소식은 더 이상 관심을 끌지 못한다. 8000여개의 복병이 암흑에서 다시 광명을 맞이하려면 아직도 10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와룡(臥龍)과 봉추(鳳雛)의 관계는?</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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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8T20:35:28Z</updated>
	    <published>2009-11-18T20:35:2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불감왕언(不敢枉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와룡은 제갈량(諸葛亮)이고, 봉추는 방통(龐統)이다. 와룡, 봉추는 모두 유비의 군사로서 한명은 내부를 한명은 외부를 담당했다. 그들은 서로간에 보완작용을 했으니, 한나라의 소하,장량에 비견할만하다. 그들은 같은 왕조에서 같은 임금을 섬겼는데, 동료관계이외에 그들은 더욱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우선 그들의 아호(雅號)부터 얘기해보자. &lt;&lt;삼국지. 방통전&gt;&gt;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lt;&lt;양양기(襄陽記)&gt;&gt;에 따르면, 당시에 와룡, 봉추와 나란히 이름을 날린 사람으로 수경선생(水鏡先生)이 있다. 그의 이름은 사마휘(司馬徽)이다. 이 세 사람의 아호는 모두 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인데, 그는 바로 방덕공(龐德公)이다. 방덕공은 어떤 사람인가? 방덕공은 와룡, 봉추, 수경과 어떤 관계인가? 아래에서 하나하나 알아보기로 하자.&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째, 방덕공과 수경의 관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덕조(德操, 사마휘)는 나이가 (방)덕공보다 10살 어려서,&amp;nbsp;그를 형으로 모셨고, &quot;방공(龐公)&quot;이라고 불렀다.&lt;/STRONG&gt; 이는 &lt;&lt;양양기&gt;&gt;에 기록된 내용이다. &lt;&lt;양양기&gt;&gt;를 통해서 분석해보면, 사마휘는 방덕공보다 10살이 어리고, 자주 함께 천하형세를 논했다. 그들은 서로 같은 뜻을 지녔을 뿐아니라, 서로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상호 칭송해서, 방덕공은 사마휘를 '수경'으로 부르고, 사마휘는 방덕공을 '방공'이라고 불렀다. 두 사람은 모두 한운야학과 같이 산림에 은거하여 지내는 생활을 즐겼고, 속세에 발을 들여놓으려 하지 않았으니 세외고인이라고 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삼국지. 유비전&gt;&gt;에는 이런 말이 있다:&lt;STRONG&gt;&amp;nbsp;유비가 사마덕조를 만나서 세상일을 물으러 갔다. 덕조는 &quot;유생속사가 어찌 세상일을 알겠습니까. 시무를 아는 자가 준걸인데, 그 중에는 복룡, 봉추가 있습니다&quot; 그러자, 유비가 누구인지 물었더니, &quot;제갈공명, 방사원(龐士元)입니다&quot;라고 답했다.&lt;/STRONG&gt; 이를 보면 수경은 인재를 잘 알아보았던 사람이다. &lt;&lt;세설신어&gt;&gt;에 따르면, 사마휘는 대지약우(大智若愚)의 '호호선생(好好先生)'이라고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둘째, 방덕공과 와룡의 관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삼국지&gt;&gt;에 따르면 이런 말이 있다: &lt;STRONG&gt;공명은 매번 그 집에 오면, 혼자서 상(床) 아래에서 절을 했다. 덕공은 처음에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다.&lt;/STRONG&gt; 이 기록을 보면, 제갈량은 방덕공을 자신의 어른 또는 스승으로 모셨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그가 제갈량의 스승중 한 명이라고 추단한다. 어찌되었건, 방덕공과 제갈량은 개략 스승제자관계였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들은 또 다른 관계도 있었다. &quot;&lt;STRONG&gt;덕공의 아들 산민은...제갈공명은 작은 누나를 부인으로 맞이했고, 위나라 황문이부랑을 지냈는데, 일찍 죽었다.&quot; &lt;/STRONG&gt;즉, 방덕공은 제갈량의 막내누나의 시아버지가 된다는 말이다. 방덕공과 제갈량의 장인인 황승언(黃承彦)도 보통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승제자관계이면서 친척관계이기도 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셋째, 방덕공과 봉추의 관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uot;(방)통은 덕공의 종자(從子)이다. 어려서는 알아보는 자가 없었으나, 오직 덕공만이 중시했다. 나이 열여덟이 되자, 덕조를 찾아가도록 했다&quot; &lt;/STRONG&gt;&lt;&lt;양양기&gt;&gt;의 이 기록은 일목요연하다. 방통은 방덕공의 조카인 동시에 그가 비교적 중시했던 제자였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넷째, 와룡과 봉추의 관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상의 기록을 보자면, 쉽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제갈량과 방통은 동문관계이면서 친척관계에 있다. 유비진영에 가담한 후에 그들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우는 동료였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섯째, 제갈량과 방통의 연령&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방덕공과 사마휘의 생졸년은 고증할 수가 없다. 그러나, 제갈량과 방통의 생졸년은 완전히 추단이 가능하다. &lt;&lt;삼국지. 방통전&gt;&gt;의 기록에 따르면, &quot;&lt;STRONG&gt;추현을 포위공격하면서 방통은 무리를 이끌고 공성했다. 그러나, 흐르는 화살에 맞아서, 죽으니, 나이 서른여섯이다&lt;/STRONG&gt;&quot; &lt;&lt;삼국지.유비전&gt;&gt;을 보면 추현을 포위공격한 것은 건안19년이다. 그러므로, 방통은 178년에 태어나서, 214년에 죽었다고 볼 수 있다. 제갈량은 180년에 태어나서 234년에 죽었다. 향년 54세였다. 이를 보면, 방통이 제갈량보다 2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비슷한 연령이고, 같은 뜻을 지닌 좋은 짝이었다. 아쉽게도 방통이 젊어서 죽어서 두 사람의 이상과 포부는 실현되지 못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섯째, 방통은 낙봉파에서 죽지 않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삼국연의&gt;&gt;에서는 방통이 낙봉파(落鳳坡)에서 죽었다고 썼다. 그러나 이는 맞지 않다. &lt;&lt;삼국지.방통전&gt;&gt;에서는 그가 추현을 포위공격하면서 공성하는 과정에서 죽었다고 되어 있다. 낙봉파는 아마도 후세인들의 날조이거나 아니면 방통의 묘소가 있는 곳일 것이다. 방통이 '낙봉파'에서 죽었다고 한다면 전설적으로 느껴질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일 것이다. 당시에 '와룡, 봉추중 한 사람만 얻으면 천하를 얻을 수 있다'고 했는데, 유비는 두 사람을 다 얻었음에도 삼분천하밖에는 얻지 못했다. 이는 아마도 방통이 젊어서 요절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이리두(二里頭)가 중국최초의 문명인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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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8T19:39:13Z</updated>
	    <published>2009-11-18T19:39:1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장강단적(長江短笛)&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화문명5천년이라는 말은 외국사학계에서 인정하지 않을 뿐아니라, 우리 자신도 계속 자신이 없어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실제로 상주(商周)이후의 4천년의 문명사에 대한 고고학적 증명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최초의 문명은 상(商)문명이다. 기원전1500년경부터 시작하였으니, 지금으로부터 3500년전의 일이다. 장소는 현재의 하남(河南)성 안양(安陽)일대이다. 중국의 문명근원탐색작업은 중화문명이 어디 때부터 시작했는지를 찾는 동시에, 어느 곳에서 기원했는지, 그리고 그 모습은 어떠했는지를 찾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금년 8월 21일에 출판된 미국 &lt;&lt;사이언서&gt;&gt;지는 표지에서 소개하면서, 중화문명의 기원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보도했다. 수출에서 내수로 전환한 이 제품으로 인하여, 중국인들의 민족자부심, 문화우월감과 역사유구감이 다시 한번 얘기거리가 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국인들은 문명사에 있어서 혼자서 좋아하고, 혼자서 즐기는 경향이 있다. 중국사학자들은 모두 큰 공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고, 짝사랑을 하며, 역사학에서의 '대약진'을 노렸다. 그러나 한 마디 말은 나로 하여금 5천년 중화문명에 대한&amp;nbsp;회의적인 입장이 동요하게 만들었다. 중국 고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제(李濟)는 이렇게 말했다: &quot;은허(殷墟)의 갑골문(甲骨文)은 아주 성숙되었다. 문자형성기에서 문자성숙기로 접어들려면 적어도 천년의 시간은 필요할 것이다. 은허의 정교한 청동기제작기업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상나라를 중화문명의 기원이라고 얘기한다면, 그것은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흰수염을 가진 노인이라고 하는 것과 같다.&quot; 이 말은 생각해보면 당연한 말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상나라의 이전에 분명히 더 조기의 문명이 있을 것이다. 8년간의 탐색을 거쳐 하남성 언사(偃師)의 이리두라는 중원의 요지 낙양평원에 있는 보통마을의 이름인데, 보리밭으로 덮여앴는 땅 아래에 최초의 '중국'이 숨겨져 있었다. 이리두문화(二里頭文化)는 더욱 조기의 문명이다. 최초의 중국의 원형이다. 이곳에서 두 개의 비슷한 단어가 나와서, 우리의 눈을 어지럽힌다. 바로 문화와 문명이다. 문명은 분명히 문화이지만, 문화는 반드시 문명이 아니다. 문화(culture)는 석기시대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석기시대 특히 신석기시대(금석병용기시대를 포함)의 원시부락인류유적을 말한다. 그러나 문명(civilization)은 청동기시대범주에 속하는 개념이다. 인류문명이 청동기시대에 들어간 이후의 국가단계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문명형성의 표지는 고금중외에서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는다. 물질형태의 표지로는 도시, 문자, 청동기 및 예기(禮器)이다. 사회형태의 측면에서는 사회분업, 계급분화와 국가, 왕조가 포함된다. 이리두는 어느 각도에서 보더라도 성숙한 문명을 보여준다. 그곳은 최소한 5개의 최초기록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지금까지 확인된 중국최초의 왕조도성유적지이고, 중국최초의 대형궁전군이며, 최초의 '자금성'이고, 최초의 청동예기군과 청동기작업방이 있고, 최초의 도시주간선도로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왕조문화가 이미 형성되어 있음을 보여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각종 유가예제에 관하여 이리두에서 모두 그 근원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리두에서 출토된 삼족주작(三足酒爵)은 상나라때 출토된 주작의 모양과 대체로 일치한다. 귀족묘장에서 출토된 청동기, 악기, 옥예기는 독특한 예악문명을 구성하고 있다. 바로 화하초기문명의 특징이 나타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문자는 인류가 문명시대에 진입하였다는 중요한 표지이다. 그러나, 이이두에서 문자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인정될 수 있는 부호는 그저 도기와 골기에서 나타날 뿐이다. 그들이 문자인지 아닌지에 대하여는 아직까지 정설이 없다. 지금까지 갑골문과 같이 고고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자료는 없다. 이리두의 왕조를 어디로 귀속시킬지는 아직도 미해결의 문제이다. 과거에 문자로 실증되지 아니하였던 하나라가 바로 문자가 없기 때문에 결론이 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리두는 실증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추론은 나왔다. 고고학계에서, 가장 보수적인 사람도, 이리두문화시기에 중국은 이미 문명시대에 돌입했다고 인정한다. 다만, 이리두에서 드러난것은 상당히 성숙한 문명(아쉽게도 문자는 증명되지 않았지만)이다. 분명히 상당히 긴 발전과정을 거쳐서 도달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최초의 중국이전에는 또 어떤 상태였을까? 고고학자들은 기대하고 있다. 하나 또 하나의 중대한 발견, 한번 또 한번의 증명으로 이리두문화보다 더욱 오래되고 더욱 발달된 문명형태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번 미국 &lt;&lt;사이언스&gt;&gt;지에서 공개된 자료를 보면 한가지 중요한 돌파구가 마련되었다.&amp;nbsp;고대의 중화문명은 &quot;만천성두(滿天星斗)&quot;이고, 유일하게 '황하요람'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00여년전의 요서 능원, 객좌, 건평의 세 도시접경지역에는 대형 제단, 여신묘와 적석총 군락이 있다. 이는 중화5천년문명의 서광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몽고자치구 적봉시에는 8천여년의 역사를 지닌 오한기흥륭와유적지가 있다; 하남성 무양현 북무도진 서남에는 가호라는 수역이 있는데, 이곳에서 9천년된&amp;nbsp;2공골적(二孔骨笛)을 발굴했다; 더욱 영향이 큰 것은 지금으로부터 4000년 내지 5300년간의 양저문화이다. 아쉽게도, 이들 발견은 문화유적의 특징을 보유하고 있을 뿐, 문명유적으로 확인되지는 않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떤 역사학자는 강조한다. 우리가 현재 생각하는 국가, 문명, 사유제등등의 개념은 모두 외국에서 수입된 것이라고. 그것은 역사연구 특히 사회진화방면의 연구에서 비교하는데에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는 일부 고유의 개념이 있었다. 예를 들어, 방(邦), 성(城), 국(國), 씨(氏), 성(姓)등등이 그것이다. 문명기원의 토론과 표현에서 아마도 이런 것들을 사용하는 것이 더욱 유리할 것이다. 문명근원탐색작업은 아마도 중국학자들에게 중국특색을 지닌 문명에 관한 표현체계를 형성하게 해준다면, 이것은 세계문명기원연구에 커다란 공헌이 될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국내에는 일찌기 어떤 학자가 &quot;이리두&quot;가 중국에서 지금까지 발굴된 최초의 문명이라는 견해를 완전히 부정하였다. 이리두 도시유적복원도는 원래 몇 개의 풀로 만든 집에 불과하다. 표준적인 원시촌락을 위대한 하왕조의 도성으로 포장했다는 것이다. 고고현장에서 파낸 몇 개의 갱은 '궁전기초'라고 말하지만, 실제로는 현장에서 기와 한장 발견되지 않았다. 고고현장에서 발견된 몇 개의 진흙을 쌓은 것은 원시부락이 주거를 만들 때 쓰는 원시기술로 속칭 &quot;간타루(幹打壘)&quot;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구리지꺼기, 대량의 석기, 골기! 이것은 신석시시대 씨족부락의 유적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떤 학자는 문제는 '하왕조'가 존재하였다는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처럼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오히려 대량의 증거는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한다는 것이다. 전형적인 증거라면, 시간적으로 '하왕조'를 바로 이어서 나타난 상왕조의 갑골문과 청동기명문에서 전왕조에 대한 어떤 기록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의 정부문건이나 기록에 그들의 전왕조에 관한 여하한 상황도 기록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상왕조와 같은 최초문명에서 이런 상황이 나타났다는 것은 결국 그 앞에는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후자라면 민족자괴감이고 전자라면 민족자부심인가? 왜&amp;nbsp;긍정적인 관점의 자료가 외국의 잡지에 실리고 난 다음에야 비로소 &lt;&lt;인민일보&gt;&gt;에 소개되는가? 관방의 외국숭배인가, 민간의 외국선호인가? 원래 우리 본국인들이 우리 본국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외국인들과 동일한 액세스권을 가져야 하지 않는가? 왜 부정적인 관점의 글은 인터넷에서만 전파될 수 있는가? 역사연구에서 주관적인 색채를 띄거나 역사허무주의의 색채를 띄면 안되는 것인가?&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당소의(唐紹儀)의 부침</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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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8T17:59:52Z</updated>
	    <published>2009-11-18T17:59:5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설이(雪珥)&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당승(唐僧)&quot;은 채식을 하지 않는다. 이것은 청나라의 관료라면 다 아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모르는 자가 있다면 그는 정치적 기본지식이 너무나 모자란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당승&quot;의 이름은 &quot;당소의(唐紹儀)&quot;이다. 그는 청나라의 장관급 고위관료이고, 나중에 중화민국의 초대 총리를 맡는다. 당시 사람들은 일기나, 서신에서 그를 &quot;삼장(三藏)&quot;이라고 지칭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소의는 당승처럼 외모가 아주 단정했다. 그리고 전해지는 바로는 키가 180센티미터나 되었다고 한다. 이런 걸출한 외모를 가지고 중국의 외교부장 내지 총리를 지내면서, 나라의 체면을 드높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삼장&quot;은 채식을 하지 않았고, 잡식이었고, 뭐든지 다 먹었다. 미국 컬럼비아대학의 졸업생인 그는 그가 잘 알고 있는 미국식의 정치 '양식'인 민주, 문명을 항상 입에 달고 있었다. 그리하여 미국인들이 그를 아주 좋아했다. &lt;&lt;뉴욕타임즈&gt;&gt;등 유명한 신문에서도 그에 대한 보도를 수시로 내보냈다. &quot;양식&quot;이외에 당소의는 중국특색의 요리도 아주 잘했다. 굽고, 삶고, 지지고, 볶으면서, 항상 빠져나갈 구멍을 마련해두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국역사 특히 근현대사에서 &quot;풍파(風派, 바람부는대로 흔들리는 사람)&quot;인물이 적지 않은데, &quot;풍파&quot; 인물들 중에서 진정으로 수준있고, 고급이며 규모를 갖춘 사람은 당소의를 꼽지 않을 수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09년은 당소의에 있어서, 좋지 않은 해였다. 바람의 방향을 가늠하기 어려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연초에 그는 미국에서 외교일로 바빴다. 하나는 동북의 개발에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독일황제의 요청에 따라 중국,미국,독일의 삼국동맹을 체결하는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일은 모두 전세계에서 주목하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당소의가 1908년 가을에 대표단을 이끌고 미국에 도착한 후, 미국신문은 그를 추적보도했다. &lt;&lt;뉴욕타임즈&gt;&gt;는 심지어 2면에 걸친 장문의 보도를 내놓고, 당소의의 사진에 지면을 크게 할애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승이 서천(西天)에 도달하니, 마치 자기 집에 돌아온 것같았다. 그러나 그는 아무 글자가 없는 불경밖에 가져올 수가 없었다: 대청국의 개혁개방의 기수인 원세개가 돌연히 그리고 기이하게 '건강원인'을 들어 2선으로 물러났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주일후(1월 8일), 북경은 당소의를 소환한다. 다음 날, &lt;&lt;뉴욕타임즈&gt;&gt;, &lt;&lt;로스앤젤레스타임즈&gt;&gt;등을 포함한 미국의 유명신문들은 동시에 이 소식을 실었다. 그리고 당소의가 소환된 것은 원세개사건에 연루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같은 날의 &lt;&lt;크리스쳔사이언스모니터&gt;&gt;는 1면을 할애하여, &lt;&lt;근대중국은 젊은 미국에 큰 기회를 제공한다(Modern China Offers Great Opportunities to the Young American&gt;&gt;는 글을 실었다. 당소의의 사진은 섭정왕 재풍의 사진과 나란히 실렸다. 그리고 큰 글자체로 이렇게 밝혔다: &quot;원세개의 운명은 중국의 외교정책과 중미관계의 발전에 관계된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원파(袁派)인물들 중에서 당소의는 원세개를 따라 가장 먼저 물러난 인물이었다. 그후 민정부시랑 조병균(趙秉鈞), 우전부상서 진벽(陳璧), 동삼성총독 서세창(徐世昌)등이 차례로 뒤를 따랐다. 혹은 건강문제로 혹은 부패문제로 혹은 업무상 필요에 따라 겉으로는 승진했지만&amp;nbsp;속으로는 배제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물갈이가 시작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소의와 원세개가 한편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고전영웅주의의&amp;nbsp;미담이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소의는 광동사람이다. 부친인 당거천(唐巨川)은 차상인으로 대외무역을 했다. 아주 평범했는데, 그에게는 비범한 숙부가 있었다. 이름은 당정추(唐廷樞)이다. 당정추는 청나라의 첫번째 외자기업의 '수석대표'였고, 저명한 Jardine Matheson&amp;nbsp;&amp; Co(怡和洋行)의 매판(買辦)이었다. 나중에 이홍장이 경제개혁을 할 때 그의 심복이&amp;nbsp;되어 윤선초상국, 개평광무국의 설립을 주재하고 참여하고한다. &amp;nbsp;관료사회와 상인사회, 국내기업과 외국기업, 민영기업과 국영기업의 사이를 오가면서 모조리 다 섭렵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개혁개방덕분에, 대청국은 내우외환의 와중에 시대를 따라서 집권기반을 확대했다. 당씨집안과 같은 '신흥계층'은 금방 대청국 조직인사부서의 핵심배양대상으로 떠오른다. 당소의는 12살이 되던 해(1874년), 국비유학생으로 선발되어, 미국으로 간다. 그곳에서 7년간이나 생활했다. 나중에 당소의의 행동을 보면, 이 기간동안 그는 유려한 영어실력을 닦았을 뿐아니라, 정치를 쇼처럼 생각하는 미국식 품격도 배워온다. 칭찬할만한 일이라면, &quot;양복을 걸치지만, 나의 마음은 여전히 중국의 마음이다&quot;. 당소의는 겉은 노랗고 속은 하야면서 중국실정에 맞지 않는 바나나식 인물로 바뀌지 않았고, 중국과 서양을 잘 융합하여, 다문화소양을 기초로 미국식 정치쇼의 무기를 가지고, 신속하게 청나라의 관료사회에서 두각을 드러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881년, 나이 겨우 19살의 당소의는 조국으로 돌아온다. 그는 정부에서 전문성과 충성심을 인정받은 차세대 주자로서, 조선에 파견된다. 그리하여 조선의 해관방판인 독일인 P.G. von Mullendorff의 비서가 된다. 광활한 대지에서 그는 능력을 마음껏 발휘한다. 중일이 각축하는 조선은 당소의에게 무대를 제공해주었다.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발생한다. 22세의 당소의는 이로 인하여 26세의 원세개와 만난다. 당시 조선의 친중국고관들은 친일파에 쫓겨서 해관공서로 피신와 있었는데, 원세개가 이들을 보러 찾아왔다. 이때 당소의가 친히 총을 들고, 문입구를 지켰다. 그의 영준한 모습은 원세개에게 깊은 인상을 남긴다. 그때부터 두 사람은 막역지교가 된다. 원세개는 이때부터 당소의의 정치적 발전을 많이 도와주고 적극적으로 이끌어준다. 더욱 고전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10년후, 청일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정보에 따르면 일본인들이 항일에서 가장 강력한 원세개를 암살하려한다는 것이었다. 원세개를 피난하게 하기 위하여 당소의는 친히 두 자루의 총, 두 자루의 칼, 두 필의 말을 가지고 밤을 세워 원세개를 영국군함까지 호송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바로 원세개의 적극적인 도움에다가 원래 이홍장과의 특수한 관계까지 덧붙여져서, 당소의는 청일전쟁이후, 중국의 초대 조선총영사가 된다. 당시 그의 나이 33세였다. 그후 다시 양광총독으로 가게 된 이홍장을 따라 고향으로 가서 광동에서 관직을 지낸다. 원세개가 산동순무로 나갈 때는, 그가 원세개를 도와서 가장 난감하고 미묘한 외교사무를 처리해주었다. 원세개가 1900년 봄여름교체기의 의화단의 난과 팔국연합군의 화를 잘 벗어날 수 있도록 많은 공로를 세운다. 1901년, 원세개가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이 되어 조정의 중신중 하나가 된다. 당소의는 천진해관도로 임명되는데, 이는 청나라에서 유명한 떡고물이 많이 떨어지는 요직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04년, 영국인들이 티벳으로 쳐들어왔다. 중앙정부는 당소의에게 대표간을 이끌고 인도로 가서 영국과 담판을 하도록 결정한다. 이때부터 42세의 당소의는 홀로 나르기 시작한다. 당연히 관료사회의 잠규칙에 따르면, 그는 원세개파의 인물이다. 협상이 아주 성공적이었다. 당소의의 외교재능이 조야의 주목을 받는다. 그리고 신속히 발탁되어 외교, 국세, 교통등의 분야을 맡게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소의의 업무스타일은 시원시원했고, 다른 사람의 체면을 고려해주지 않는 것이어서 상당히 미국식이었다. 그리하여 적이 적지 않았다. 그는 개인생활도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lt;&lt;신보&gt;&gt;는 이렇게 보도한 바 있다. 당소의가 차관을 맡고 있을 때, 급여가 낮아서, &quot;들어오는 돈이 쓰는 것을 맞출 수가 없었다&quot; 그리하여 그는 원세개에게 도와달라고 한다. 원세개는 그를 광동으로 가서 월한(광동-무한)철도를 담당하고록 하려 하나, 중앙정부에서 거절당한다. &lt;&lt;신보&gt;&gt;의 당소의에 대한 평가는 &quot;배금주의자이다&quot;라는 것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림원시독 마길장의 탄핵내용을 보면, 당소의가 우전부 부부장을 맡고 있을 때, '그가 쓰는 사람은 모조리 고향의 친척이고, 뇌물을 받았다. 부하들중 많은 사람은 뇌물을 주어서 관직을 맡은 것이었다'고 한다. 비록 사료에서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증거를 찾아볼 수는 없지만, 당소의가 1910년 우전부장을 맡은 후 한 행동을 보면 탄핵내용이 전혀 근거없는 것만은 아닌 것같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민립보&gt;&gt;의 보도에 따르면, 당소의가 우전부장이 된 후, &quot;매일 백금을 들여서 먹지 않으면 좋아하지 않았다. 모든 거동은 서양을 본받아 호화스러웠다. 중국의 왕공대신이 따를 수 없을 정도였다. 오직 우전부내의 부하들에게는 각박했다. 듣기로 최근들어 다시 인원을 줄인다고 한다. 우전부의 관원들중에서 그를 원망하는 것을 드러내지 않는 자가 없었다. &quot; 당시 사람의 기록에 따르면, 당소의는 &quot;널리 교유하고, 돈을 잘 쓰며, 하루에 4끼를 먹는데, 매 끼니마다 10금씩 쓰지 않으면, 젓가락을 대지 않았다&quot;고 한다. 일본인 사토(佐藤)의 기록에서는 아예 &quot;당은 원래 교사음일(驕奢淫佚)하며, 이익이 없으면 하지 않는다&quot;고 했다.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약간 광오하고, 그다지 스스로의 규율에 엄격하지 않았던 당소의는 동료관계 및 '부하관계'가 그다지 원만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lt;&lt;민립보&gt;&gt;에서는 &quot;당소의의 사람됨은 북경의 관리들 중에서 배척하는 자가 많았다&quot; 그러나 당소의는 개인업무능력이 뛰어났고 원세개가 돌봐주었다. 그리하여 그의 관직은 반석처럼 단단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공금으로 먹고마시는데 능한 당소의는 정치적인 능력도 괜찮았다. 오는 자는 막지 않았다. 민국시대가 되어, 원세개가 대총통에 올랐다. 당소의는 국무원 총리가 된다. 수십년의 친구는 이때부터 서로 어긋나기 시작한다. 후세사가들은 두 사람의 갈등을 '인치'와 '법치', '독재'와 '민주'의 정치적 견해싸움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사실 당소의는 뼛속부터 위연(魏延)과 같은 인물이었다. 뒷머리에 반골이 있었다. 그와 아주 잘아는 섭공작(葉恭綽)은 만년에 이렇게 회고했다: 당소의는 &quot;자리에서 물러나라고 권하는 습관이 있었다. 정치가가 절망적인 상황에 처하면, 물러나는 것이 다시 앞으로 나갈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하여 청나라 부의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원세개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단기서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손중산에게 물러나라고 권하고, 장개석에게 물러나라고 권했다. 청나라 부의가 강제로 물러난 것을 제외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장개석은 게다가 오해까지 하여 그가 화를 입기도 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뭐든지 먹는 습관이 있는 당소의는 일본이 대거 중국을 침략할 때, 각계의 권고를 듣지 않고, 계속 상해에 남아서, 일본측과 의심스러운 교류를 많이 했다. 그러다가, 결국 중경에서 제거대상으로 올려버린다. 군통특무는 골동상을 위장하여 그의 집으로 들어가, 날카로운 도끼로 그를 죽여버린다. 당소의는 청말민초의 명인들 중에서 가장 처참하게 죽은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강호에는 강호의 도리가 있다. 정치에는 정치의 법도가 있다. 나왔으면 언젠가 들어가야 한다. 당소의의 비극은 정치신용이 너무나 없었고, 바람에 따라 흔들렸다는데 있다. 나름대로 교묘하게 한다고 했을지 몰라도 혐의는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총명하게 한다고 한 것이 오히려 망치게 한 꼴이 되었다. 청나라말기와 중화민국의 비정상적인 시대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 대세였다. 아끼고 보호할만한 동지나 형제도 찾기 어려웠고, 존경하고 인정할만한 적수도 찾기 어려웠다. '잠규칙' 혹은 '무규칙'이 진정한 규칙이 된 시대였다. 약한 자는 강한자를 두려워하고, 강한 자는 횡포한 자를 두려워하고, 횡포한 자는 무뢰한을 두려워한다. 유방같이 전형적인 무원칙의 깡패가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영(英)씨가족 5대의 전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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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8T12:38:10Z</updated>
	    <published>2009-11-18T12:38:1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인물화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1대: 영화(英華): 대공보와 보인대학의 창시자&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화(英華, 英斂之)의 일생은 전설적이다. 그는 처음에 아무 것도 없는 가난한 젊은이였다. 너무나 가난한 집안이어서 성조차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주 뛰어나서, 문무에 모두 능했다. 바로 이런 실력을 바탕으로 그는 애신각라 숙중(愛新覺羅 淑仲)의 가정교사가 된다. 숙중을 가르치다가 두 사람은 눈이 맞고, 결국 생쌀이 익어 밥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된다. 이 숙중이 누구인가? 바로 청나라황족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결혼후에 영화는 무술변법에 참가한다. 그러나 변법은 실패로 끝나서, 그는 지명수배되고 변방으로 도망치게 된다. 1902년 서태후는 영화에 사면령을 내리고, &quot;영(英)&quot;씨성을 하사한다. 이리하여 그는 비로소 성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서태후의 호의를 거절하고, 광서제가 친정해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lt;&lt;대공보(大公報)&gt;&gt;를 창간한다. 그리고 처음부터 서태후를 욕하기 시작한다. 이렇게 하여 &lt;&lt;대공보&gt;&gt;의 '뭐든지 감히 말하는' 전통을 세우게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씨가족의 모든 영광과 꿈은 영화에서 비롯된다. 그는 58세까지밖에 살지 못했지만, 3가지 큰 일을 해낸다. 하나는 대공보를 창간한 것이고, 둘째는 보인대학(輔仁大學)을 창립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향산고아원(香山孤兒院)을 만든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2대: 영기량(英驥良): 언어의 천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기량은 두 살때 글자를 알아보고, 12살때 영국의 캠브리지로 보내어진다. 24살때 런던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다. 그해에 장개석은 영어가 가장 뛰어난 두 명의 통역을 구하는데, 한 사람이 전종서(錢鍾書)이고 다른 한 사람이 바로 영기량이다. 그는 당시 보인대학 비서장 겸 서양어학과 교수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장개석이 영기량을 높이 평가한데는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그는 조국에 충성하는 사람이었따. 죽어도 일본인들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항전이 발발한 후, 주작인(周作人)이 북경대학을 지킨 것과 마찬가지로, 영기량은 보인대학을 지켰다. 그러나 두 사람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두 사람은 모두 국공양당의 항일인사들과 열혈학생을 보호해봤다. 그러나 주작인은 공개적으로 일본에 투항했지만, 영기량은 암중으로 국민당에 가입한다. 그리하여 두 차례나 친일정권에 체포되고, 나중에 15년의 중형을 언도받고, 1년여동안 감옥에서 지내다가 해방을 맞이한다. 그후 국공내전이 발발할 때, 영기량은 북경교육국장, 교육부 사회교육사 사장, 중화교육영화제작창 창장등을 지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49년, 장개석이 대만으로 도망칠 때, 영기량을 데려가는 것을 잊지 않았다. 대만으로 간 후에, 영기량은 대만대학 외국어학과 주임과 대만보인대학 부총장을 맡는다. 1969년에는 간병이 도져서 객지에서 사망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3대: 영약성(英若誠): 문화부부부장&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약성은 영기량의 셋째 아들이다. 그의 일생도 전설에 가깝다. 그는 3년간 감옥에 갇혀 있었고, 3년간 문화부 부부장을 지냈다. 그는 북경인민예술극원의 황금시기에 대들보중 하나였다. 그는 유명한 번역가이면서 &lt;&lt;낙타상자&gt;&gt; &lt;&lt;차관&gt;&gt; &lt;&lt;영업원의 죽음&gt;&gt;등의 극에서 주연을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약성은 정치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일생동안 정치에 연루되었다. 옥에서 나온 이후, 1년간 하방(下放)을 당한다. 그러나 결국 인민예술극원으로 되돌아왔다. 1986년, 영약성은 문화부 부부장에 임명된다. 당시의 문화부 부장은 작가인 왕몽(王蒙)이었다. 2003년 영약성은 병사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외에 영약성의 처인 오세량(吳世良)도 공연예술가이자 번역가였다. 뛰어난 영어실력으로 오여사는 조우(曹&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바탕; ;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bid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31162;&lt;/FONT&gt;&lt;/SPAN&gt;)의 비서 겸 주은래 총리의 통역을 맡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4대: 영문삼걸(英門三傑): 오락계의 거물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달(英達)이 감독한 &lt;&lt;아애아가(我愛我家)&gt;&gt;, &lt;&lt;후차대청(候車大廳)&gt;&gt;, &lt;&lt;한인마대저(閑人馬大姐)&gt;&gt;등의 국내 시트콤 코미디극은 모두 '유명'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 마찬가지로 '유명'한 것은 그와 송단단(宋丹丹)의 결혼이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장(英壯)은 더더국 중국 희극무대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사실 영장은 영달의 친동생은 아니다. 그는 영약성의 넷째동생의 아들이다. 즉, 영달과 당형제간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4대에 또 다른 유명한 인물이 있으니 영녕(英寧)이다. 그는 영약성의 다섯째동생의 아들이다. 영달, 영장이 감독한 TV드라마에서 그는 제작자를 맡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5대: 영여적(英如鏑): 아이스하키계의 야오밍을 꿈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영여적은 3살때부터 아이스하키를 접했다. 2007년초, 그가 속한 북경 호자대(虎仔隊)는 같은 나이대의 아이스하키 세계챔피언에 올랐다. 그리고 NHL&amp;nbsp;보스톤 브루인스의 눈에 들어,&amp;nbsp; 보스턴 브루인스 소년팀에 들어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들 영여적을 기르기 위하여, 영달은 많은 시간과 돈을 들여, 여러번 미국과 중국을 왕복하고 있다. 그는 아들 영여적을 아이스하키계의 야오밍으로 키우고 싶어한다. 아마도 영씨가족의 전설을 또 다시 시작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철광석협상과 중국무역상</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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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47</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7T18:29:01Z</updated>
	    <published>2009-11-17T18:29:01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색한설(索寒雪)&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강협(중국강철협회)의 속셈은 다시 실패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새로운 해의 철광석협상이 다가오는데, 중강협의 생각은 무역상의 수량을 감소시키고, 철광석구매수요를 통일하므로써, 철광석공급상의 '가격결정권'을 빼앗아오고자 하는데, 일부 중국철광석무역회사는 조용히 싱가포르에 회사를 만들어, 철광석가격조작을 준비하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바로 이때, 철광석 판매업체는 벌써 벽을 사이에 두고 운을 띄우기 시작한다: &quot;2010년의 철광석가격은 30% 인상한다&quot; 그런데, 올해의 철광석협상으로부터 얻은 경험과 교훈으로, 중강협은 세계의 절반이상의 철광석수요를 지닌 중국이 가격협상에서 주도권을 행사하지 못하는 이유를 주로 무역상들이 &quot;일치하여 저가로 철광석공급업체를 압박하지 못했기 때문&quot;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나, 현재의 싱가포르는 이미 자격을 취소당한 무역상들이 '새로운 이윤을 찾아서 간 곳'이 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아주 유명한 대형무역상이 이미 생가포르에 회사를 등록했다&quot; 한 소식통의 말이다. &quot;이렇게 하면 싱가포르에서 직접 광물가격을 끌어올린 다음에 거래할 수 있다&quot; 이는 확실히 중강협의 정책에 대비하여 취한 행동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철광석은 BHP Billiton, Rio Tinto 및 VALE이 과점하고 있는데 중국에는 70개의 철강기업과 42개의 수입자격을 가진 무역상들이 있다. 중강협은 철광석 공급업체는 과점되어 있는데, 철광석 수요업체는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철광석가격이 높다고 분석하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현재, 중강협이 극력 추진하고 있는 것은 네 가지 조치이다: 첫째, 수입정보의 등기제이다. 등기허가를 거치지 않은 수입계약은 통관을 허용하지 않는다. 둘째, 광산수입대리제를 전면적으로 실시한다. 셋째, 국내시장의 수입광물가격을 통일한다. 넷째, 철광석수입자격을 새로 심의하여 수입기업수를 감소시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해외로 나가서 등록하는 회사는 이렇게 하여 중강협의 규정을 회피하는 것이다. 싱가포르는 중국의 철광석주요항구인 청도, 상해, 일조에서 거리가 비교적 가깝다. 해운시간도 짧다. 현물철광석을 거래할 수 있는 각종 조건이 갖추어져 있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현재 싱가포르의 철광석무역상은 이미 상호간의 거래를 통하여, 즉, 무역상간의 상호거래를 통하여 철광석의 현물가격을 끌어올리고 있다. 관례에 따르면, 철광석 공급상은 현물시장의 가격을 가지고 장기계약가격을 결정한다. 분명히 드러나는 논리는, 철광석 공급업체의 요구가격이 높으면 높을수록, 협상의 난이도는 증가한다. 소요되는 시간도 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현재, 국제시장에서 철광석가격은 두 가지 체제가 존재한다. 하나는 3대철광석공급상들이 주도하는 철광석협상을 핵심으로 형성된 장기계약가격이고, 다른 하나는 현물가격이다. 최근 들어, 현물 철광석가격은 장기계약가격보다 훨씬 높다. 이것은 또한 3대 철광석공급업체가 장기계약가격을 인상해야한다고 주장하는 논리의 근거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국내철강업체는 '광물이 들어와야 고로를 돌리기&quot; 때문에, 장기계약가격이 오랫동안 결정되지 않으면, 철강회산느 할 수 없이 현물 철광석을 구매해야 한다. 그렇게 하여 철강공장의 정상적인 운영을 기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다보면, 광물의 채널을 보유한 무역상이 현물가격을 끌어올린 다음에 철광석을 철강기업에 판매함으로써 중간마진을 늘일 수 있게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많은 기업이 현물 철광석을 구매할 수 있고, 가격조작이 일어난다. 무역상이 있기 때문에, 현물가격과 장기계약가격의 차이가 더욱 벌어지게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므로, 해외에서 철광석을 수입할 자격을 가진 70개의 철강회사들이 직접 철광석을 해외에서 구매하여 국내로 운송한다면, 중강협의 희망하는 철광석무역상을 감소시킴으로써 가격을 '통일'시키려는 의도는 결국 무산되고 말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 업계인사는 2009년도 철광석협상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내린 바 있다: &quot;두 가지 성과를 거두었다. 하나는 리오틴토간첩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FMG가 공적이 되었다는 것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리오틴토 간첩사건의 영향으로, &quot;철강회사는 오스트레일리아측으로부터 철광석을 감히 구매하려고 하지 못했다&quot; 무역상 상문용은 이럴게 말한다. 상문용은 일찌기 철광석 거래시 주요 대상이 오스트레일리아였다. '품질이 안정적이고, 등급이 높다&quot;는 것이 오스트레일리아철광석의 특징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만, 리오틴토간첩사건이후, 철강회사로부터 철광석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얼마전에, 국무원 부총리 리커창(李克强)이 중국-오스트레일리간에 현존하는 문제를 해소하는 것이 긴급하다고 말한 바 있다. 리커창의 오스트레일라아방문이후, &quot;대형철강회사는 오스트레일리아로부터 철광석을 수입하기 시작했고, 일부 철강회사에서는 철광석이 흘러나와서 현물시장에 공급되고 있다.&quot; 상문용의 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2009년 혜성처럼 등장한 FMG가 금년에도 중국측을 도와줄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이다. 2009년 철광석협상에서, FMG는 저가격과 자금융자를 바꾸는 방식으로, 중국측의 가격요구를 받아들였다. 그후, 내부회의에서, 자신이 제4대철광석공급상이라고 자랑한 FMG는 보강(寶鋼)을 이렇게 안심시켰다: &quot;이후 우리는 철광석협상규칙을 바꿀 것이다. 작은 회사가 일단 규칙을 바꾸면, 큰 회사는 미쳐버릴 것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사태의 진전은 FMG가 말한 것처럼 되지는 않았다. 협의가 진행되는 최후의 기간내에, FMG는 중국인의 돈을 받아들지 못했다. FMG의 CEO는 2010년의 철광석가격에 대하여 &quot;철광석가격은 여전히 강세일 것이다&quot;라고 말하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와 동시에 해운가격도 계속 오르고 있다. 해운가격조작이 다시 나타났다. 데이타에 따르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철광석을 수입하는 운임은 빠른 속도로 오르고 있고, 가격은 이미 8달러/톤에서 20달러/톤까지 인상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국용선회사의 인사에 따르면, &quot;과거 해운선물시장의 규칙에 따르면, 우리는 도대체 누가 해운가격을 끌어올리는지 알 수가 있었다. 당시 주로 활약한 기업은 바로 철광석구매업체이다. 그러나, 현재는 거래규칙이 바뀌어서, 무역상간에만 거래를 안다. 외부에서는 철광석 구매업체의 움직임을 알아내기 힘들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CITI은행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서 내년 국제철광석 장기계약가격은 30%가 오를 것이라고 예측했다. 중강협에서도, 3대철광석공급상들이 손을 잡고 가격을 인상시키는데 대하여 어쩔 도리가 없다고 밝힌 바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외에, 중강협의 내부인사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quot;나도 그들의 말을 듣는다. 달러가치하락은 철광석공급상들에게 영향이 확실히 크다.&quot; 이전에, 2009년 철광석협상에서, 중강협은 일관되게 강조해왔따. 중국은 최대의 구매국이고, 중국의 협상모델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그러나 결국 계약을 체결하지 못했다. 이리하여 철강회사는 현물가격으로 대량의 철광석을 구매할 수밖에 없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확실히 이러한 경험은 현물철광석을 조작할 여지를 남겨두고 있다. 많은 무역상들은 철광석장기협상가격의 전망을 물어본다. &quot;인상폭을 제한하면 성공이다&quot;&amp;nbsp;수강(首鋼)의 인사도 철광석협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중국의 국가이익을 보호하는 것이며 가격인상을 최저로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상해영화계 몰락의 역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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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46</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7T12:16:49Z</updated>
	    <published>2009-11-17T12:16:4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임해용(任海勇)&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제 저녁과 오늘 아침의 상해뉴스에서는 모두 상해의 한 행사를 크게 보도했다. 그것은 바로 상해영화제작창(上海電影製片廠)의 설립60주년기념행사였다. 왜&amp;nbsp;내가&amp;nbsp;이들 뉴스를 보고 들은 이후 왜 뉴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찬탄의 반응이 나오지 않고, 오히려 아주 분명하게 어쩔 수가 없다는 탄식의 소리가 나오게 되었는지를 분명히 설명하기 위하여, 우선 신중국문화건설측면에서의 전체적인 인상을 말해야 할 것같다. 즉, &quot;신중국의 역사상, 문화대혁명은 하나의 운동이며 하나의 현상이다; 운동으로서 그것은 명확한 기한, 10년이 있다; 그러나 현상으로서 그것은 시종일관 존재한다. 이 운동이 정식 시작되기 전이나 아니면 그것이 종료되었다고 선포한 이후이거나.&quot; 나는 상해영화제작차의 이 60년간의 참담한 경영, 몰락의 경력은 바로 위에서 한 말을 가장 잘 설명해주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나는 먼저 하나의 개념에 주의해주기 부탁한다. &quot;상해영화제작창&quot;과 &quot;상해의 영화제작창&quot;을 글자 1자의 차이이지만 혼동하지 말아주기 바란다. 이 이치는 우리가 &quot;상해대학&quot;을 얘기할 때와 같다. 절대 &quot;상해의 대학&quot;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후자는 청나라때 탄생하고 풍부한 문화축적을 이룬 강남최고학부 복단대학을 포함하는 개념이지만, 전자는 그저 삼류대학일 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비유를 하게 된 것은, 바로 내가 오늘 나침에 본 상해문광의 뉴스에서, 아나운서가 상해영화제작창의 휘황한 역사를 이야기 하면서 유명한 이름들을 나열하였기 때문이다: 김염(金焰), 조단(趙丹), 백양(白楊), 왕단봉(王丹鳳), 상관운주(上官雲珠)등등. 중국영화계에서 한때 빛나는 스타였던 이들의 이름을 들으면서 나는 먼저 우리의 뉴스에서 자주 써먹는 이화접목(梨花接木)의 수법을 생각했다; 그 후, 나는 바로 한 마디 명구를 생각해냈다: 언급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말하기 시작하면 눈물이 앞을 가린다. 이들이 &quot;상해영화제작창&quot;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보다는 그들이 &quot;상해의 영화제작창&quot;의 자랑이라고 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다. 그들의 휘황과 자랑은 신중국의 것이 아니라, 그 이전 민국시대의 것이기 때문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나는 여러번 강남의 명성(名城) 남통(南通)에 강의하러 간 적이 있다. 남통의 시끄러운 시장거리에는 남통출신의 스타인 조단의 조각상이 서 있다. 그것은 그의 대표작인 &lt;&lt;십자가두&gt;&gt;의 한 장면을 조각한 것이다. 지금까지 중국영화계에서 가장 재능이 있던 남자스타의 영화생애 자체는 음미할만한 가치가 있는 중국사회의 비극이다. 그의 대표작은 민국시대에 찍은 &lt;&lt;마로천사&gt;&gt;, &lt;&lt;십자가두&gt;&gt;와 &lt;&lt;까마귀와 참새&gt;&gt;등의 영화이다. 그의 유감은 신중국의 초기에 직은 혁명화되고 개념화된 애국주의영화에 있다. 예를 들어, &lt;&lt;섭이&gt;&gt;와 &lt;&lt;열화중의 영생&gt;&gt;등이 그것이다. 더욱 비극적인 것은, 비록 이런 선전영화이지만, 조단에게 기회를 많이 주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민국시대 신강군벌 성세재의 감옥에서 10년의 고귀한 청춘시대를 보내게 되고, 다시 신중국에서 악몽시기의 감옥에서 원래 그의 가장 성숙한 연기를 보여줄 황금시기를 그냥 흘려보내게 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매번 백양을 생각할 때면, 나는 그녀의 대표적인 예술이미지를 떠올린다. 그녀는 민국시대의 대표적 영화인 &lt;&lt;일강춘수향동류&gt;&gt;에서 연기한&amp;nbsp;현숙한 처인 혜분(惠芬)의 이미지이다. 정말 아쉽게도, 그녀가 10년간의 문화대혁명의 재난을 겪고난 후에, 송경령을 표현하는 드라마인 &lt;&lt;쇄향인간도시애(灑向人間都是愛)&gt;&gt;를 보면서 나는 놀라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무정한 문화대혁명의 폭풍은 그녀의 신선한 예술세포를 모조리 말라버리게 만들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른 대스타들은 나도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다. &lt;&lt;일강춘수향동류&gt;&gt;의 하문염(何文艶)등으로 관중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준 상관운주는 문화대혁명의 칠흙같은 밤에 비분강개하여 자신의 창문에서 뛰어내려 꽃같은 목숨을 잃었다. 아릅답고 애교넘치는 왕단봉은 정치적인 유치함으로 마찬가지로 문예분야의 스타인 장애령과 함께 홍콩에서 상해탄으로 되돌아온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녀는 여작가와 같이 금선탈각의 재주가 없었다. 결국 각양각색의 굴욕을 다 받게 된다; 나라의 문을 수십년간 걸어닫았다가 다시 열었을 때,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온 가족과 함께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던 이 땅을 떠났다. 그 후에 대륙에서 영화를 주제로한 어떤 행사를 하더라도, 그녀는 감히 되돌아와서 참가할 엄두를 못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김염을 얘기하자면, 이번 상해영화행사활동의 여주인공인 김염의 처 진이(秦怡)를 함께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일찌기 영화계에서 빛나는 영화황제(影帝)였던 김염은 동북으로 가서 그가 전혀 잘하는 분야가 아닌 혁명을 주제로한 영화를 찍을 때, 엄동한설에 술을 마셔서 위장을 해치게 되고, 그후 병석에 눕게 된다. 그리고 이들 금동옥녀부부의 유일한 아들은 원래 건강하고 활발하며 총명하고 멋진 소년이었는데, 미친듯한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놀라서 폐인이 되어버린다. 진이라는 이 아름답기 그지없는 여인은, 어쩔 수 없이 그녀의 집안의 이 비정상적인 원인으로 비정상적이 되어버린 두 남자를 돌보느라고 그녀의 아름다운 인생의 시절을 다 보내게 된다. 그녀가 연기한 &lt;&lt;여람5호&gt;&gt; &lt;&lt;해외적자&gt;&gt; &lt;&lt;청춘지가&gt;&gt;등 영화에서 설교적인 냄새가 많이나는 인물이미지를 연기했는데, 이는 진이로 하여금 집안 집밖에서 모두 비극적인 여인으로 남게 만들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위에서 언급한 이들 대스타들과 상해의 영화제작창이 세워지기 전에 탄생한 더 많은 대스타들 예를 들어, 호접(蝴蝶), 주선(周璇), 완령옥(阮玲玉)등 그녀들의 전성기와 휘황한 시기는 모두 이 시기에 속하지 않는다. 더더구나 상해영화제작창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상해영화제작창을 얘기하자면, 부득이 상해영화제작창의 저명한 인물인 사진(謝晋)을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의 대표작들 &lt;&lt;홍색낭자군&gt;&gt;, &lt;&lt;목마인&gt;&gt;, &lt;&lt;여람5호&gt;&gt;, &lt;&lt;무대자매&gt;&gt;, &lt;&lt;아편전쟁&gt;&gt;, &lt;&lt;고산하의 화환&gt;&gt;등 정치과목 교재와 마찬가지로 바로 주제로 들어가서 애국주의교육을 하는 외에, 우리에게 예술적인 감동을 얼마나 주었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상해영화제작창이 자랑할만한 영화배우나 영화가 없기 때문에, 어제밤의 상해TV뉴스에서 상해영화를 주제로 한 프로그램에서 상영집단의 총재인 임중륜은 그의 득의의 작품인 연합원선(聯合院線)을 크게 자랑했다. 그는 상영집단의 상업적인 성공을 가지고 예술적인 창백함을 가리려 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떤 사람은 생각할 것이다. 왜 일찌기 휘황찬란했던 상해의 영화업이, 상해영화제작창으로 되면서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고, 열기가 차갑게&amp;nbsp;식어버렸는지. 나는 한가지 원인을 생각했다. 신중국이후, 상해라는 무대는 분명히 변화했다. 이전에는 경제와 문화를 그리는 것이 위주였다. 그런데 갑자기 정치를 주제로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수십년동안, 상해는 중국의 정계의 지도자들을 많이 배출했다. 정치적인 스타는 많이 배출한 것이다. 동시에 상해는 갈수록 중국정치스타의 요람이 되고, 각종 문예의 스타들은 냉대를 받게 된다. 이전에 중국영화계에서 군계일학격이고 유아독존격이었던 상해영화의 지위는 이런 분위기하에서 그 빛을 잃어갔다. 임중륜은 상해연합원선의 수입이 전국영화매표수입의 10분의 1을 차지한다는 것을 가지고 상해영화의 자랑을 삼는 것은 너무 견강부회하다는 느낌이다. 어느 공장의 제품이 상해에서 잘 팔린다고 하여, 그것을 가지고 상해의 공장이 잘 만든다고 할 수는 없고, 상해에 그 제조에 관한 전문가가 많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기껏해야 상해으 소비자들이 소비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해줄 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뉴스에서 상해영화제작창의 출품작중 강해양이 지도한 엉망으로 만든 영화작품 &lt;&lt;고고1977&gt;&gt;이 중국사람들조차 별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몇몇 국내의 영화상을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상해영화제작창의 휘황한 업적으로 얘기하는 것을 보고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앞에서 언급한 그들 민국시대의 영화스타들이 세상을 떠난 것이 그들에게 커다란 불행은 아닐 수 있다고. 만일 그들이 살아있다면, 상해의 영화계가 옛날에 스타들이 운집하여 서로 재능을 뽐내던 시절에서 현재 단조롭고 재미없고 천박하게 바뀐 것을 보게 되면, 아마도 그들 예술가들은 살아서 죽은 것보다 더 힘들지 않았을까?&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당나라 구시원년(700년): 15개월 442일의 가장 길었던 1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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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6T17:38:08Z</updated>
	    <published>2009-11-16T17:38:0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유병광(劉秉光)&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국고대의 역법(曆法)은 하력(夏曆)이든, 은력(殷曆)이든, 주력(周曆)이든, 아니면 한나라의 태초력(太初曆)이든, 모두 1년을 12달로 규정했다. 그리고 윤달을 두는 것으로 규정했다. 즉, 3년에 윤달1달, 5년에 윤달2달, 19년에 윤달7달이 되도록 했다. 이렇게 보면 고대의 1년은 12달이 아니면 13달이었다. 그러나, 당나라 구시원년(久視元年, 서력700년)은 공전절후의 15개월이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무제가 1월을 정월(正月)로 정한 이래로, 대부분의 왕조와 황제는 이를 본떠서 그대로 사용했다. 그러나 왕망, 조예, 무측천과 이형과 같은 예외적인 황제도 나타나게 된다. 예를 들어, 왕망은 &quot;12월삭(朔, 초하루) 계유일을, 건국원년 정월의 삭(朔)으로 삼는다&quot;(한서, 왕망전); 조예는 &quot;건축지월(즉 12월)을 정월로 삼는다&quot;, &quot;경초원년 3월을 4월고 고친다&quot;(삼국지. 위지); 이형은 상원2년 9월에 &quot;11월을 세수(歲首, 새해의 첫달)로 삼고...상원호를 없애고, 원년으로 칭한다.&quot; 7개월후에는 다시 '사월(巳月, 4월)을 4월로 삼는다&quot;(신당서. 숙종본기).&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들은 옛날의 제도로 되돌아가려 하거나, 정통을 차지하려 하거나, 다른 사람을 따라하지 않으려 했다. 왕망, 조예, 이형의 이러한 독특한 행동은 당시에 역법을 비교적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이와 비교하자면, 무측천의 &quot;변법&quot;은 더더욱 어지럽다. 천수원년(690년) 9월, 무측천은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대주(大周)로 고친다. 그리고 구무왕 희발(姬發)을 조상으로 제사지낸다. 그러면서 당나라가 정월을 세수(한해의 첫해)로 삼은 것을 폐지하고, 11월을 세수로 한다고 선포한다. 역사상 단지 주나라만이 11월을 세수로 하였다(사서. 역서). 필자는 이것을 무측천이 당나라를 대신하여 주나라를 세운 후에, 찬위사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통치연원을 조작하는 정치수완이라고 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렇게 하여 원래의 1월, 2월, 3월...11월, 12월의 순서는 11월, 12월, 1월...9월, 10월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10년이 지난 후에, 상황은 또 바뀐다. &lt;&lt;구당서. 측천황후&gt;&gt;의 기록에 따르면, 성력원년(聖曆元年, 700년) 5월, 무측천은 연호를 &quot;구시(久視)&quot;로 바꾸면서, 당나라전기의 &quot;1월, 2월, 3월...11월, 12월&quot;의 순서로 되돌아간다. 역법은 비록 회복시켰지만, &quot;정월은 여전히 11월&quot;이라고 하였고, 이는 바꾸지않았다. 이렇게 하여, 구시원년(700년)은 11월, 12월, 1월...9월, 10월, 11월, 12월&quot;이 된다. 여기에 윤7월까지 끼어들어가서, 모두 15달이 되어버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음력은 매달 29.5일이므로 이에 따라 계산하면, 구시원년은 442일이나 된다. 이는 중국역사상 가장 길었던 한 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역법사상 이 기이한 현상은 무측천이 수시로 연호를 바꾸고,역법을 교체한 결과이다. 이는 완전히 인위적인 요소로 인하여 조성된 것이다. 역법을 고치는 것은 사직의 안정에 관련되는 중요한 일이다. 무측천은 걸출한 정치가인데, 그 이치를 모를 리가 없다. 그렇다면, 일대여황인 무측천은 왜 대주의 역법을 포기했을까? 왜 스스로 주례로 복귀한다는 겉옷을 벗어버린 것일까? 필자의 생각으로, 무측천의 이 조치는 정치적으로 심사숙고한 결과일 뿐아니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무주혁명'을 통하여 67세의 무측천은 그녀의 여황제의 꿈을 실현했다. 그러나 이당왕조의 옛신하들은 불만을 품고 있었고, 태자의 심복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녀는 계속하여 불안하고 두려워했다. 이에 대하여 무측천은 혹리를 기르고, 신하들에게 고압적인 정치를 실행한다. 한편으로는 수시로 연호를 바꾸고, 이를 기화로 천하에 사면령을 내림으로써 인심을 얻으려고 하였다. 그외에 그는 적인걸을 대표로 하는 능신들을 기용해서, 대주를 위하여 일하게 한다. 그러했지만, 여전히 적지 않은 신하들이 겉으로는 그녀를 따르는 척하나 속으로는 그녀를 반대했고, 이당왕조를 회복시키고자 했다. 10년후, 무측천이 나이가 들고 병이 든다. 체력과 정력이 이전같지 않았다. 대주정권은 점점 곤경에 빠져든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구시원년 정월, 무측천은 &quot;장생약&quot;을 복용한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고, 오히려 병이 악화되었다. 병을 치료한 후, 무측천은 천하에 사면령을 내리고, &quot;천책금륜대성의 호&quot;를 취소한다(자치통감). 금륜은 불가용어이다. 천하를 통치한 제일의 성왕이다. 천책금륜은 차안세계와 피안세계의 두 권위를 합친 것이다. 무측천은 스스로 이 존호를 버린다. 이는 정치적인 새로운 깨달음이고 해탈이다. 9월, &quot;당나라의 대들보'이던 적인걸이 병사한다. 무측천은 눈물을 흘리면서 한마디 한다. &quot;조정이 텅 비었다&quot;(자치통감). 이는 일대여황이 자신의 오른팔을 잃은 후의 애상과 무기력을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적인걸이 죽고 얼마되지 않아, 무측천은 '당나라의 정월을 회복한다'고 선언한다. 이것은 그녀가 혼자서 분전하면서 어떻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어떻게 민심을 다시 얻을지 고민하면서 생각해낸 정치적인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이라면 그녀가 대주력을 실행할 때는, 나라를 새로 세워서 정권을 잡았다는 것을 드러낸 고조기라면, 대당력을 회복한 것은 여황의 생애에서 저조기라고 할 수 있다. 5년후, 무측천은 강제로 퇴위당한다. 임종유언에서 &quot;황제호칭을 없애고, 황후로 개칭한다. 건릉에 묻어달라&quot;고 한다. 이 결말은 사실 구시원년에 이미 결정된 것이다. 구시원년(700년)은 중국역사상 가장 길었던 한 해이다. 그리고 무측천의 정치생애가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한 해이다.&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황제의 고독과 비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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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6T15:12:50Z</updated>
	    <published>2009-11-16T15:12:5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장척곤(庄滌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양결(楊潔)이 주연한 TV 드라마 &lt;&lt;서유기&gt;&gt;는 봤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승은(吳承恩)의 &lt;&lt;서유기&gt;&gt;는 읽어보지 못했을 수 있다. 그리하여 사람들의 당승(唐僧)에 대한 이해는 바로 TV드라마에서의 모습과 같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내가 만일 드라마영화작품중에서 당승이라는 인물의 포지셔닝에 대하여 오승은의 원작에 가장 가까운 것이 주성치(周星馳)의 &lt;&lt;대화서유&gt;&gt;라고 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놀랄지 모르겠다. 최근에 청나라말기의 후궁들의 사진 몇 장을 보았다. 바로 나는 &lt;&lt;대내밀탐영영팔&gt;&gt;에 나오는 후궁들의 '꽃처럼 예쁜 한 무리의 여인'들을 떠올렸다. 진상은 왕왕 민간의 상상을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황제&quot;라는 지위는 건국후에는 제국의 권력을 장악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을 뿐아니라, 제국의 흥망성쇠이든 민단의 착취이든 모두 그 황제와 관계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 소위 황제는 그저 무대위에 올려진 원숭이나 같다. 그의 지고무상의 권력은 실제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권(無權)이다. 그는 뭐든지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뭐든 할 수가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먼저, 황제는 미녀는 몇명 만나지도 못한다. 황자(皇子)로 지내는 동안 이들 제국의 권력의 희생자인 황자들은 권신(權臣)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서, 그들의 사위역할을 하게 된다. 황제위에 오른 후에는 중점감시대상이 되어서, 혹시 황궁내에 굴러들어온 미녀의 손이라도 잡을라치면, 다음 날 그 미녀의 손은 접시에 담겨져서 황제에게 바쳐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황제는 고독하고 적막하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친히 나서서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은 실권이라고는 조금도 없게 된다. 인사관리도 할 수가 없고, 심지어 자기가 마음에 둔 사람을 발탁할 수도 없다. 그리하여 소인들에게 눈이 가린 멍청한 임금이라는 평을 듣게 되는 것이다. 계속되는 아부와 떠받듬 속에서 아무런 진심도 발견할 수 없다; 생사여탈권이 아무런 감독도 받지 않기 때문에, 진정으로 군주에 충성하는 자를 찾아보기 힘들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번째 관문은 바로 황자들간의 투쟁이다. 아무리 해명해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반드시 형제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이 마음대로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귀를 찾아서 자신에게 모여들어 꼬리를 흔드는 사람들을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들 추종자들이 자신의 몸에 황제의 용포를 걸쳐주더라도 이를 통제할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의 '수하'들이 자기의 부친이나 형제를 죽이더라도 이를 저지할 수가 없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모두 그 자신의 명의로 진행된다. 왜냐하면 이런 것들이 그들의 '충성'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난자 1개를 놓고 다투는 정자들처럼, 더욱 적극적으로 부친을 시해하고 형제를 죽이는 사업으로 뛰어들게 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전투과정에서, 그들이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을까? 부친을 의지할 수도 없다. 형제를 의지할 수도 없다. 그저 자신의 부친과 동상이몽인 모친과 처를 의지할 수밖에 없다. 모계와 처계의 실력은 그들이 성공하는 관건이 된다. 소위 &quot;태자&quot;는 그저 허수아비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지혜가 아무리 많더라도, 혼자만의 힘으로는 큰 역량을 발휘할 수 없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제1차전투가 끝난 다음에는 바로 제2차전투에 부닥친다. 그것은 바로 모계와 처계의 결투이다. 만일 업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황제라면, 여기에 자신의 직계인물들까지 가담하여 3자간 전투가 이루어진다. 우리가 중국역사에서 보아온 것은, 아무리 강대한 제왕이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호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들의 모친, 그들의 여인, 그들의 총신, 그들의 자녀들이 왕왕 멸문지화를 당하는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물극필반(物極必反)의 이치라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처음부터 그들은 누구도 보호할 수&amp;nbsp;있는 능력이 없다. 그들은 그저 권력의 무대위에서 공연을 펼치는 원숭이에 불과하기 때문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비록 자신의 직계집단이 황태후와 보정대신에게 승리하여, 황제가 실권을 장악한 것처럼 보이더라도, 그들은 다시 세번째 전투를 치러야 한다. 자신의 아부집단과의 싸움이다. 황제가 존재하여야 하는 필요성은 무엇인가? 국가의 상징 이외에 중재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있는 곳에는 좌파 우파 중간파가 있고, 투쟁이 있다. 한 집단이 승리한 후에는 두 가지 결과가 나타난다. 하나의 결과는 집단내부의 균형을 이루는 정신적이 지도자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천자가 제후들을 부리는 것으로, 실제로는 천자는 문서에 서명하는 기능밖에 없다. 또 다른 결과는 집단의 분열로, 새로운 투쟁에 접어드는 것이다. 황제의 의미는 균형을 맞추는데 있다. 두 개 혹은 수 개의 집단간의 세력균형을 맞춰주는 것이다. 이때, 시비는 문제되지 않고, 잘못 죽이는 일도 일어나기 시작하면, 황제는 타협적이고 멍청하며, 제국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 된다. 그가 무엇을 하더라도, 반드시 악명을 얻게 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어려운 때 함께할 수는 있지만, 복을 같이 누릴 수 있는 자들은 드물다. 반드시 부패하고 반드시 패도적이 된다. 황제로서 수하를 제약하면 망당(亡黨)이 되어, 자기의 손으로 자기가 만든 집단을 없애버리게 된다. 제약하지 않으면 망국(亡國)의 결과가 나타난다. 아무도 최저선이 어디인지를 모른다. 그래서 성공에는 반드시 멸망의 씨가 함께 뿌려지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비록 정치적 권모술수가 뛰어난 황제라고 하더라도 다시 네번째 전투를 맞이하게 된다. 이는 후궁관계를 잘 처리하는 것이다. 다행히 자신의 후대를 둘 수 있게 된 경우에도, 그는 다시 한편으로는 아들들간에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을 목도해야 하고, 자신이 중재자로 역할을 해야 한다. 만일 그중 하나가 승리하는 것을 목도한다면, 다시 자신과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겨뤄야 한다. 새로운 임금의 아부집단은 반드시 옛황제의 직계부대를 제거하게 된다. 이는 어떤 경우에는 옛황제가 스스로 그러기를 원하기도 한다. 오랫동안 마음을 써가면서, 이미 자신의 직계인물들을 다루는데 싫증을 느꼈을 수도 있다. 없앨려면 없애라는 심정이 될 수도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는 사실 황제만의 비애는 아니다. 모든 지도자들이 모두 직면하는 문제이다. 소유한다는 것은 그리하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는 것이다.&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모택동은 왜 화국봉을 후계자로 선택했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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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14T15:06:10Z</updated>
	    <published>2009-11-14T15:06:1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축을(丑乙)&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모택동의 첫번째 후계자는 유소기(劉少奇)였는데, 모택동에게 타도당하고, 옥중에서 죽었다. 두번째 후계자는 임표(林彪)였는데, 역시 모택동에게 타도당하여, 놀라서 도망치다가, 비행기가 추락해서 죽었다. 이것이 &quot;임표반혁명사건&quot;이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임표사건은 모택동에게 회복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더더구나 강청, 강생, 장춘교, 왕홍문등 문혁파에게는 치명적인 타격을 가한다. 실제로 모택동, 임표를 영수로 한 문혁파 내부가 권력과 이익을 위하여 너죽고 나살기식으로 대분열을 일으킴에 따라, 어부지리를 얻은 것은 주은래, 등소평, 섭검영(葉劍英)등 &quot;우파&quot; &quot;주자파&quot;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72년이후의 모택동은 병마에 시달린다. 자신에게 남은 날이 얼마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았다. 자신이 중국의 스탈린이 될까봐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중국의 스탈린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중국현대사상의 폭군으로 기록될 것을 두려워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중국현대사상의 폭군이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일으킨 문화대혁명이 이미 실패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현실을 직면할 용기가 없었고, 실패를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 그는 일지기 간절한 심정으로 유언을 하듯이 &quot;복장(福將)&quot; 섭검영 원수에게 말한 바 있다(섭검영은 황푸군관학교의 초기교관이고 나중에 공산혁명에 투신한다. 많은 전투를 거치면서 전혀 부상을 입지 않았다. 그래서 그를 '복장'으로 부른다. 그는 1985년 북경에서 병사하니, 선종을 맞이한 것이다.): 나는 평생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국민당과 28년동안 싸운 것이며, 장개석 위원장을 작은 섬으로 쫓아버렸다. 다른 하나는 문화대혁명을 일으켜서 수정주의가 나타나고 자본주의가 부활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당의 모든 동지들은 이 두 가지 큰 일을 잊지 말기를 바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는 모택동의 마음 깊이 자리잡은 공포였다. 그리하여 그는 말년에 정신이 흐릿했다. 때로는 계급투쟁의 기치를 높이 들었고, 때로는 자신의 실패를 보완하고자 했다. 그는 모든 정치적 적수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얻은 것은 결국 자신의 최종적인 실패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는 이미 풍운을 질타할 힘이 없었고, 다시 운동을 일으킬 힘이 없었다. 그리하여 정치균형수단을 쓰게 된다. 그는 때로는 좌파를 비판하고, 때로는 우파에 반대한다. 때로는 자신의 사후의 '천하대란'을 비판하고, 때로는 좌파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여 다른 파에 당할까봐 걱정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온 성위서기 화국봉을 자신의 후계자로 삼는다. 그는 화국봉이 좌파와 우파가 모두 받아들일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화국봉을 선정하기 전에, 그는 일찌기 당의 부주석인 왕홍문을 고려한 적이 있다. 그리고 1973년에서 1974년의 상반기까지, 한때 왕홍문이 당중앙, 중앙군위의 일상업무를 처리하게 한 적이 있었다. 그는 일찌기 이런 '최고지시'를 내린 바도 있었다: 왕홍문은 가난한 집안 출신으로 노동일도 하고, 농사도 지었으며, 군대에도 갔다. 상해노동자계급에서 가장 먼저 일어선 혁명좌파이고 후계자의 요건에 부합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때, 사회에는 이런 소문까지 돌았다: 왕홍문은 모택동이 대혁명시기에 잃어버린 아들 모안룡(毛岸龍)이다. 그는 적출(嫡出)의 용종(龍種)인 것이다. 그러나, 용종이든, 사종(蛇種)이든, 충종(蟲種)이든, 왕홍문은 학식도 기술도 없고, 아무런 기반이 없었다. 그저 반년동앙 중공중앙, 중앙군위의 업무를 주재하였지만, 그가 지시한 문건은 자주 앞뒤가 맞지 않았다. 그리고 이미 업무에 복귀한 노간부 예를 들어 등소평등의 견제를 받았고, 더더구나 홍군출신의 중공군대 고위장군들의 소극적인 저항도 있었다. 모택동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잠시 물러나게 한다. 그리고 권력을 등소평에게 넘겨준다. 이것은 문혁파의 '임표사건'이후의 또 한번의 좌절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모택동의 전략배치에서 등소평은 그저 과도기의 인물이었다. 등소평은 일찌기 3번이나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내어, '절대로&amp;nbsp;뒤집지 않겠다'고 보증한다. 그래도 모택동은 키작은 등소평에 대한 의심을 시종 풀지 않는다.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회해전투'에 참가하여 지휘한 바 있는 등소평은 일단 대권을 장악하기만 하면, 어떤 나쁜 일이든 다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유소기에 대하여도 그렇게 했는데, 나중에 약속을 어기고 문혁을 부정해버리면 어떡할 것인가? 왕홍문의 다음으로 모택동이 고려해본 후계자들에는 기등규, 위국청, 오덕, 심지어 자신의 친손자인 모원신등이 있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는 강청, 장춘교, 왕동흥, 요문원등은 고려하지 않았던가? 그는 문혁초기에 자신의 부인 강청을 이용했다. 그러나, 그는 강청의 경박하고 비천한 것과 히스테릭한 것에 질색을 했다; 학술재능이나 이론적 소양으로 따지자면 장춘교가 이상적인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날카로움을 빨리 드러내서, 사방에 적을 만들고, 인간관계가 좋지 못했다. 당시에 섭검영, 서향전, 섭영진, 허세우, 양득지, 왕진등의 노장들과 빙탄불상용으로 원한이 깊었다.; 왕동흥은 충성심은 강하고, 오랫동안 보위업무를 해왔고, 중남해의 경위부대를 지휘했다. 그가 발탁된다면 사람들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요문원은 그저 글쟁이였다. 기껏해야 선전부장, 서기처 서기를 맡길만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결국 최후에 몸집이 크고, 일처리에 무게가 있으며, 재주와 학식은 평범한 화국봉을 골랐다. 모택동의 화국봉에 대한 평가는 4글자로 요약된다고 말한다: &quot;노실(老實), 부준(不蠢)&quot;(성실하고, 멍청하지 않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모택동은 평생동안 '중용의 도'를 따르지 않았는데, 마지막으로는 '중용의 도'를 선택했다. 모택동은 화국봉이 자신을 배반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의 기치를 계속하여 높이 들고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회피하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사후에 스탈린처럼 묘가 파헤쳐지고 시신이 능욕을 당하는 것이었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모택동의 최후 선택은 '문혁파' '주자파'로 하여금 모두 크게 실망하게 하였지만, 또한 크게 위안하게 하였다. 모택동의 최고권력을 상대방에게만 넘겨주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화국봉은 어쨌든 쉽게 장악되고 쉽게 좌우되는 인물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화국봉은 산서성 노성현 사람이다. 항일전쟁시기에 그는 지방유격지대의 정치위원이었다. 1949년에 호남으로 남하해서 악양현위서기를 맡는다. 1956년후에 모택동의 고향인 상담지위 부서기가 된다. 1959년 6월 모택동이 소산으로 돌아갔을 때, 화국봉은 모택동이 거주하는 집 바깥에서 밤새도록 지켰다. 모택동은 주소주로부터 보고를 받고는 화국봉에 호감을 느낀다. 오래지 않아, 화국봉은 호남성위 서기처 서기, 부성장으로 발탁되어 농업을 주관한다. 1964년 소산관구 수리공사를 추진할 때, 화국봉은 공사총지휘관을 맡고 전성의 상업, 문화교륙, 정법을 담당한다. 그는 전형적인 '만금유(萬金油)간부&quot;이다.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지만, 어떤 일이든 그저 시키는대로 지킬 뿐이다. 당에서 무엇을 하라고 하면 그는 그 일을 한다. 전전긍긍하며, 제대로 이행하며 업무에서 뛰어난 실적을 보이지는 않지만, 절대로 어떤 헛점이 나타나지는 않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6년 여름, 위대한 모택동이 돌연 문화대혁명을 시작한다. 사전에 각 성시자치구의 부하들에게 알리지도 않았다. 그저 하룻밤만에, 아래에서 위에서, 홍위병의 조반, 노동자농민의 조반, 기관간부의 조반이 일어나고, 군중조직이 우후죽순처럼 나타난다. 투쟁의 창끝을 각급 당정기관의 &quot;자본주의의 길을 가는 당권파&quot;로 향했다. 화국봉과 호남성위의 다른 지도자들 장평화, 왕연춘, 이서산등은 왜 그러는지도 모르고, 천하가 곧 대란에 휩싸일 것이라고 생각하여,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모르며, 총과 탄약을 챙겨서 '혁명근거지' 평강현 연운산구로 간다. 거기서 다시 전투를 하고, 다시 강산을 차지하기 위한 준비를 했다. 나중에 모택동이 직접 북경에서 지시를 내리고 그들에게 명령한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군중을 믿고 당을 믿어라. 문화대혁명의 과정에서 시험을 받고 단련을 하라. 화국봉과 다른 동료들은 안심해서 장사로 되돌아간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화국봉은 성위 서기중 랭킹 5위였다. 그리하여 문혁초기에 홍위병 조반파로부터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1969년, 성혁명위원회가 성립될 때, 그는 '혁명지도자'의 대표로 부주임을 맡는다. 얼마 안되어 주임으로 승진한다. 1969년 봄, 화국봉은 북경으로 이동한다. 중남해판사조 조장이 된다. 호남을 떠나기 전에, 장사공항에서 '혁명좌파를 견결히 지지한다&quot;는 성명을 발표한다. 1975년부터 공안부 부부장을 겸임한다. 전 부장 사부치가 사망한 후, 공안부장, 국무원 부총리로 승진하여, 중공의 안전보위 대권을 장악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76년 1월 7일 주은래가 사망하고, 등소평은 모택동을 위시한 사인방에게 타도당한다. 그리하여 다시 한번 누구에게나 두들겨맞는 '비맞은 개'꼴이 된다. 화국봉은 승진을 거듭하여, 모택동에 의하여 중공중앙 제1부주석, 국무원총리, 중앙군위 제1부주석이 되어 모택동의 정식후계자가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 때 모택동은 이미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했고, 말도 어눌했고, 두뇌도 맑지 못했다. 그는 손을 떨면서 화국봉에게 연필로 6자를 써준다: &quot;니판사 아방심(&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serif'; ;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20320;&lt;/FONT&gt;&lt;/SPAN&gt;辦事 我放心, 네가 일을 하면 내가 안심하겠다)&quo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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