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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국,북경,장안가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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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7T14:11:0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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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희제와 강남여자매매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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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07T14:11:04Z</updated>
	    <published>2009-11-07T14:11:0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호충량(胡忠良)&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강남은 자고이래로 미녀가 많이 나왔다. 청나라의 태평성대인 강희(康熙) 연간에, 강남여자의 매매사건은 중앙의 최고지도자까지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강희46년(1707년) 정월 이십이일, 강희제는 제6차남순(南巡)을 떠나 소주(蘇州)에 도착했다. 그는 돌연 수행하던 공부상서 왕홍서(王鴻緖)에게 밀명을 내린다: &quot;지난 해에 남순할 때, 많은 불초한 자들이 소주여인을 속여서 매매했다. 짐은 집에 돌아간 후에야 알게 되었다. 금년에도 이런 짓을 하는 자가 있을지 모르니, 네가 자세히 알아보거라...&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왕홍서는 당시에 강희황제에게 비밀리에 글을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던 &quot;대내밀탐(大內密探)&quot;중 한 명이었다. 밀명을 받은 후, 그는 비밀리에 조사를 시작한다. 조사를 통해, 왕홍서는 당시 강남여자매매의 내막을 파헤친다. 먼저, 당시 여자매매는 아주 유행했다. 규모가 적지 않았을 뿐아니라, 일정한 시장의 관행까지도 형성되어 있었다. 매입자들은 모두 '성명을 날조하고, 허위로 속여서 거래를 한다. 딸을 파는 부모가 딸을 데려가는 사람에서 돈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사간 사람이 누군지를 알지 못했다.&quot; 매매되는 여자는 모두 16세에서 18세의 젊고 예쁜 여자들이었다. 심지어 더 어린 경우도 있었다. 매매가격은 시장가격에 따랐다. 예쁘고, 재능이 있으면 가장 비싸게 받았다. 여자매매에 참여하는 자들은 대부분이 상인이나 관리였다. 동기도 각양각색이다. 자신의 첩으로 삼으려는 경우도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보내려는 경우가 더 많았다. 특히 관리들에게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시장이 활발해져서, '팔 여자'가 부족하여, 양가집 여자들로 모자라게 되면, 기녀들을 데려다 팔기도 했다. 더욱 기괴한 것은 사내아이(&#23372;童)도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남자는 '소수(小手)'라고 불렀고, 여자는 '왕용(王&#34553;)'이라고 불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왕홍서는 비밀보고서에서 아주 주의를 기울여야할 한 무리의 집단을 거론한다. 바로 북경에서 황제를 따라온 수행관리들과 지방에서 황제를 맞이하는 관리였다. 강희제 신변의 몇몇 시위들 위에 후보첨사(侯補僉事) 범부(范溥)는 행적이 아주 궤이하였다. 이 자는 황제의 행렬을 맞이하면서, 강희제에게 꽃을 바쳐서 황제로부터 어전(御箭)을 받은 바 있다. 그리하여 이 어전을 가지고 바깥을 다니면서 자랑을 했다. 범부는 평민여자를 강제로 매입하면서, 모두 어전인물들을 핑계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아무도 그의 배후인물을 캐려고 하지 못했다. 만일 여자의 부모가 동의하지 않으면, 범부는 바로 지방의 공문서를 내놓고 강제로 사들였다. 이 범부는 확실히 여자를 많이 매입한 사람이다. 한꺼번에 13,4세의 여자아이를 8명이나 매입한 적도 있다. 여자외에 연동, 기녀도 강제매입했다. 그리고 그가 누구에게 팔아치웠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사를 하다보니, 왕홍서까지도 걱정이 들었다. 범부와 관련이 있는 중앙정부의 사람들을 찾아보니, '평소에 그와 알고 지내던 시위와 각 왕부의 하인들이 아주 많았다' 왕홍서마저도 그의 발이 넓음에 나중에 보복을 당하지 않을까 우려했을 정도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비밀조사건에 대하여, 나중에 아무런 결과도 나오지 않는다. 강희제가 입건하지도 않았고, 누군가 처벌받지도 않았다. 범부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고 지나간다. 그러므로, 강희제가 이 비밀조사를 하게 한 목적은 지금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실제로 사학자들이 연구를 해서 밝혀낸 바에 따르면, 강희제가 왕홍서를 시켜 소주여자매매사건을 조사하게 한 일은 강희제의 당시 심정을 드러낸다. 일종의 초조하고 불안한 상태를 나타낸다. 아마도, 왕홍서의 이번 소주지방관리의 여자매매사건을 조사하게 한 배경은 어떻게 진상을 밝혀내고, 어떻게 위법한 일을 저지른 관리를 처벌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강희제가 이번 조사를 통하여 자신의 신변에 있는 사람들이 중앙에서 지방까지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알아보려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사결과 강희제는 자신의 신변에 '누군가'가 암중에 활동하고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왕홍서는 비밀보고서에서 한가지 내용을 담았다: 범부는 한 친척에게 황제의 행렬을 맞이하러가고 싶지 않다고 밝힌 적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한족관리가 그를 좋게 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아주 득의만면하여 말했다고 한다: '환관이 아니라 어전 제1등인이 나와 서신을 주고 받는다' 그 '어전제1등인'이 도대체 누구인지에 대하여는 때려죽인다고 해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 사람은 보통사람이 아니다. 나는 죽어도 말할 수가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료의 기재에 따르면, 강희제의 이번 남순에 수행했던 황자(皇子)가 모두 5명이다: 각각 황태자 윤잉, 황장자 윤시, 그리고 황십삼자, 황십오자, 황십육자등이다. 앞의 두 황자는 이때 이미 강희제의 골치거리가 되어 있었다. 특히 황태자는 아마도 '어전제1등인'일 가능성이 높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시, 강희제와 황태자간의 갈등은 이미 천하에서 논의될 정도였다. 강희14년(1676년), 역대이래로 적장자를 후계자로 삼는 황위계승의 전통에 따라, 두 살도 되지 않은 적장자 윤잉을 황태자로 세운다. 그리고 그를 위하여 성대한 책봉전례를 행한다. 태자를 훌륭한 후계자로 키우기 위하여, 강희제는 큰 기대를 걸고, 마음을 많이 썼다. 그는 친히 태자에게 사서오경을 가르쳤을 뿐아니라, 장영, 이광지, 탕빈, 웅사리등 명신들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아주었다. 서법, 만주어, 말타기, 활쏘기등 수업을 받는 외에, 그는 특별히 태자에게 여러 차례의 단련기회를 부여했다. 그러나, 일은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었다. 태자가 어려서부터 받은 교육은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훈도였다. 그의 곁에는 아부하는 자들이 가득했고, 교만함과 발호하는 성격이 자연스럽게 배양되었다. 그의 주위에는 점차 무형의 '태자당'이 형성되었다. 이는 아직 황제위에 있던 강희에게 잠재적인 위협이 된다. 태자의 외조부, 대학사, 영시위내대신인 소어투(索額圖)는 태자당의 핵심인물이 되어, 태자를 위하여 각종 활동을 한다. 강희제는 이미 태자의 야심과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강희42년(1703년) 오월, 강희제는 기회를 잡아서 결단을 내린다: &quot;국사를 의론하는데, 당파를 만들고 함부로 행동한다&quot;는 죄명으로 소어투를 종인부에 구금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를 죽여버린다. 이를 통하여 태자의 당파에 타격을 가하고 태자당의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때, 강희제는 어려서부터 책립해서 정성껏 키워온 태자에 대하여 아직은 완전히 신뢰를 잃지 않았었다. 여전히 태자가 잘못을 깨닫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태자는 전혀 고치지 않았을 뿐아니라, 부친에 대한 불만을 날로 키워갔다. 강희제의 마음 속은 갈등이 소용돌이쳤다. 그를 골치아프게 하는 일은 이 뿐만이 아니었다. 강희와 황태자간의 갈등을 다른 사람들이 눈치챈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장성하여 왕의 작위를 받은 황자들도 활동을 개시했다. 그리고 각자의 세력범위를 형성한다. 이때의 강희제는 이미 강렬하게 주위에 여러 황자들이 형성한 관계네트워크가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각 황자의 귀와 눈이 되어 수시로 노황제의 언행을 관찰하고 몰래 바깥에 전달했다. 그리고 지방관리들도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남순의 기회를 잡아서, 황자들과 결탁하고, 잘보이려했다. 강희제는 자신이 아주 고독하게 되었다고 느꼈다. 어디를 가든 배후에는 자신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고 느꼈다. 왕홍서는 비밀보고서에서 강희제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quot;그러나 요즘은 시절이 다릅니다. 그중에서 지존의 동정을 몰래 살피는 자들이 있으니, 엎드려 바라옵건데, 황상께서 확실하게 대비하시옵소서&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년후, 강희제는 태자 윤잉을 축출한다. 그 죄명중 하나는 바로 윤잉이 강희제의 출순시에 강희가 거주하는 장막에 몰래 가까이 가서 구멍을 뚫고 안을 들여다보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강희제가 두려움에 불안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quot;짐은 오늘 독약을 먹을지, 내일 해를 당할지 알지 못하여 밤낮으로 경계하고 조심하며 편안한 적이 없다&quot; 이를 보면 강희는 동행하는 태자를 경계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에, 강희제가 공개적으로 이 일을 추궁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 스스로도 꺼리끼는 점이 있어서일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 자신이 강남여자를 가장 많이 사들인 매입자중 하나라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강희제때 강남여자들이 매매되어 북경으로 오는 것은 유행처럼 되어 있었다. 이를 시작한 것은 다름아닌 강희제 자신이다. 강희제는 한족문화를 숭배했고, 한족여자를 특히 좋아했다. 그리고 한족여자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다. 순치연간에는 자금성 신무문에 효장황태후의 이런 말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quot;전족한 여자가 궁에 들어오면 참형에 처한다&quo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양전도사 마국현(馬國賢)의 &lt;&lt;경정십이년&gt;&gt;에서 강희제때 한족비빈들의 생활상황을 언급한 적이 있다. 열하 피서산장에서 그는 가까운 거리에서 강희제의 전족한 한족비빈들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아주 흥미있어하며 이렇게 썼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어떤 때에는 폐하가 높은 자리에 보좌처럼 생긴 자리에 앉아서, 그가 좋아하는 유희를 구경하곤 했다. 몇몇 환관이 옆에 시립해있고, 보좌의 앞에 있는 카페트에는 비빈들이 가득 모여있다. 돌연, 폐하가 가짜 뱀, 두꺼비등 사람들이 싫어하는 작은 동물을 비빈들의 중간에 던진다. 그녀들은 재빠르게 피한다. 폐하는 이를 보며 아주 즐거워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그리고 또 어떤 때에는, 폐하가 일부러 나무위에서 자라는 과일을 먹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비빈들에게 부근의 작은 산에 올라가서 따오라고 시킨다. 그가 재촉하자, 가련한 절름발이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소리치며 산으로 달려간다. 그러다가 어떤 여인은 넘어지기도 한다. 그러면 강희제는 가가대소를 한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소위 '절름발이' 비빈은 바로 전족을 한 한족여자를 말한다. 만주여자들은 전족을 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들 전족한 한족비빈들은 강희제의 총애를 받았다. 왜냐하면, &lt;&lt;경정십이년&gt;&gt;에 이런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quot;어떤 때는 강희제가 이들 '절름발이' 비빈들과 과일을 따러가기도 하는데, 가는 돌연 어떤 한족후궁이 생각나서 그녀를 쫓아갔다. 그 한족후궁은 한편으로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한편으로 '절름발이'발로 도망을 갔다. 그러다가 강희에게게 붙잡혔다. 그후에 강희제는 가가대소를 하며, 놀이의 즐거움을 만끽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번에 강희제를 수행한 다섯명의 황자들 중에서 15세의 황십오자 윤우와 13세의 황십육자 윤록이 황제를 따라올 수 있었던 것은 주로 그들의 생모 왕씨(王氏) 덕분이다. 왕씨는 비빈으로 봉해진 여인들 중에서 황자를 여럿 낳은 유일한 한족여자이다. 그녀는 어려서 소주에서 자랐다. 즉, 윤우, 윤록, 여기에 윤개(6살이 되지 않았으므로, 강희를 따라 남순하지 못했다)는 모친때문에, 모두 강남한족의 혈통을 지니고 있었다. 자료상 왕씨가 황제의 이번 남순에 따라갔는지여부는 불분명하다. 아마도 그녀가 낳은 황자들과 함께 금의환향하였을 것이다. &lt;&lt;홍루몽&gt;&gt;에 나오는 '원비성친(元妃省親)&quot;은 아마도 여기서 따온 이야기일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궁중의 한족비빈들 외에, 강희제의 곁에는 오락성 일에 종사하는 한족여자들이 많았다. 그 중에는 한족 사내아이도 있었다. 이들 여자들은 대부분 내무부가 강소절강에서 사온 것이다. 비밀성이 강했으므로 소수인만이 참여했다. 강남의 삼직조(三織造, 강녕, 소주 및 항주)가 가장 주요한 집행자이다. 예를 들어, 강희32년 십이월에 소주직조 이후(李煦)는 이렇게 비밀보고를 올린 일이 있다: &quot;....이번에 몇몇 여자아이를 구해서, 희극을 가르켜서 보내드리오니, 황상께서 한번 보고 웃어주시면 합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기서 몇몇 여자아이를 구했다는 것은 결국 사들였다는 말이다. 내무부의 용어로 하면, &quot;채매(采買)&quot;이다. 어떻게 사왔는지는 아마도 왕홍서의 비밀보고서에 나온 범부 및 어전시위들이 한 것과 같을 것이다. 당연히 이 모든 일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고홍명(辜鴻銘): 청나라의 마지막 유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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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06T18:04:07Z</updated>
	    <published>2009-11-06T18:04:0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홍촉(洪燭)&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대청제국은 1912년에 와해되고 붕괴되었다. 그저 우충(愚忠)한 유민(遺民)들의 변밞머리만 남아있게 되었다. 그들은 마지막 깃발을 지키는 것처럼 자신의 변발을 지켰다. 이를 통하여 몰락한 왕조의 시신을 지킨 것이다. 왕국유와 마찬가지로 변발을 유지한 사람으로 고홍명이 있다. 고홍명은 '과피소모(瓜皮小帽)와 그 아래의 변발을 가지고 하느님을 만나러 갔다&quot;(장중행의 말). 그는 고희의 나이로 아무런 병도 없이 죽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홍명은 장지동(張之洞)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리하여 장지동의 양광총독서와 호광총독서에서 막료를 지낸다. 그리고는 다시 외무부로 가서 원외랑에서 랑중으로 승진하고 나중에 좌승(左丞)에까지 이르니, 관운이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있다. 대청제국이 망하였지만, 그는 의관을 바꾸지 않았고, 예전처럼 변발을 길렀고, 홍정과피소모를 썼으며, 비단장포마괘를 입었다. 그리고 공개적으로 청나라황실에 대한 충성을 표시했고, 황제제도의 복벽을 주장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왕국유와 고홍명은 모두 문화 '변발파'에 속한다.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변발을 정치태도에 대한 부호로 삼았다. 새로운 시대에 그들은 서로 다른 저항방식을 채택한다. 왕국유는 죽음을, 고홍명은 삶을 선택한다. 그러나 고홍명이 전투력은 왕국유에 못지 않았다. 장훈의 복벽시에 고홍명은 이를 고무시킨다. 그리하여 외교부차장에 이름이 오른다. &lt;&lt;청사고&gt;&gt;에서는 &quot;변론을 좋아하고, 세상을 욕하기를 즐겼다. 나라에 변고가 생긴 후로는 더욱 비분강개했다&quot;고 적었다. 이를 보면 그는 욕을 함으로써 싸웠다. 그는 쉽게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약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변발머리를 하고 시내를 당당하게 돌아다녔다. 그리고 청나라의 이미지를 대변하는 모델역할을 했다. 이것이 아마도 그가 장수한 원인일 것이다(72세). 고홍명과 백중을 이루는 사람으로는 임서(林紓), 엄복(嚴復)이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채원배는 손중산의 명을 받아 북경대학을 접수했고, 이대쇠(李大釗), 진독수, 노신등 급진혁명파를 영입했다. 정치적으로 보수적이지만 학술적으로 실력있는 구식학자들도 빼놓지 않았다. 고홍명을 북경대학에서 영문학과 라틴어교수로 모셔갔다. 호적이 이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한 바 있었다. 채원배는 그러나 고홍명을 위해서 변명해주었다: &quot;우리가 존중하는 것은 고홍명의 변발이 아니다. 그의 학문이다.&quot; 이렇게 청나라의 유민이라 하더라도 그 쓸모를 다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고홍명은 친히 나서서 여러 사람의 편견을 반박한 적이 있다: &quot;머리 뒤를 박박밀은 소위 혁명가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사상적인 변발은 여전히 고집스럽다.&quot; 그는 자신의 물질적인 변발을 그다지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같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떤 사람은 고홍명이 그저 표면적인 청나라유민이라고 말한다. 뼛속은 여전히 반역적이라고 한다. &quot;그는 천성적은 반역인물일 뿐이다. 그가 변발을 남긴 것은 일부러 그렇게 한 것이다. 이를 가지고 그의 전체적인 표지로 삼았다. 그는 아주 성격이 괴퍅하다. 다른 사람과 반대편에 서는 것을 즐겼다. 다른 사람이 모두 받아들이면 그는 반대한다. 모두사 숭배하면 그는 멸시한다. 그가 득의양양한 이유는 바로 다른 사람과 다르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적으로 변발을 잘라버렸기 때문에, 그는 일부러 변발을 남긴 것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변발을 길렀다면, 나는 고홍명이 제일 먼저 변발을 잘라버렸을 것이라고 보증할 수 있다. 그의 군주주의도 마찬가지이다. 그에 대하여, 이것은 원칙문제가 아니다. 그저 마음 속으로 특별한 것을 항상 생각했다...군주주의를 고취시키는 반동파이고, 공자를 인생철학으로 삼은 낭만파이며, 자신의 노예표지(변발)을 자랑으로 여겼던 독재자이다. 이렇게 스스로 모순되는 것때문에 고홍명은 현대중국에서 가장 흥미있는 인물중 하나가 된 것이다'(온원녕의 말). 이는 고홍명의 성격에서의 패러독스를 잘 분석했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고홍명을 잘 드러내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홍명은 왕국유보다 강인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끈질긴 전투를 선택했다. 그는 방약무인하게 새로운 사조가 풍미하던 북대의 캠퍼스를 누볐다. 그는 살아있는 골동품이었다. 그는 신문화운동을 한푼의 가치도 없다고 폄하했다. 심지어 '끈질긴 투쟁'의 모범인 노신마저도 격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둘은 말싸움을 벌이게 된다: &quot;분명히 현대인이고, 현대의 공기를 마시면서, 썩어빠진 명교 죽어버린 언어를 고집하고 있다. 현재를 능멸하고 있다 이는 바로 현재의 도살자이다. 현재를 죽이면 장래도 죽는다. 장래는 자손의 시대이다&quot; 노신은 고홍명이 자손들을 잘못 이끈다고 비난했다. 그는 문화'변발파'들이 일찌감치 후대가 끊어지기를 바랐을 것이다. 이는 너죽고나살기식의 투쟁이었다. 그는 변발 하나를 가지고 신청년들의 길을 가로막았다. 그러다보니 그를 없애지 못하는 것은 한으로 삼은 사람들이 많았다. 노신은 바로 이 변발(봉건예교와 국민의 비열한 근성)과 싸우면서 유명해졌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홍명은 세상사람들에게 수구적인 유민으로 보여졌는데, 그 이유는 변발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여자들이 전족을 해야하나고 주장했고, 남자들이 첩을 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어떤 서양여성이 그의 일부다처의 견해에 반박했다. 그러면서 일처다부제를 시행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러자 고홍명은 여유만만하게 유명한 '차주전자이론(茶壺理論) 내세운다. 차주전자 1개에 찻잔 4개는 있을 수 있지만, 찻잔 1개에 차주전자 4개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의 관념은 봉건사회의 대지주와 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서양에 유학을 한 바 있고, 서양학문에 정통하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그가 유가적인 전통의 훈도를 완전히 받은 것도 아니다. 그는 공자가 들으면 땀을 흘릴 이야기도 많이 했다. 예를 들어, 영국의 친구에게는 기녀의 품격에 대하여 대거 찬양하는 말을 하기도 했다: &quot;한 사람이 진정으로 중국문화의 정수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팔대후통에 가서 친히 그곳 기녀들의 우아함, 은근함 및 아름다움과 그러면서도 존엄을 잃지 않는 풍모를 보아야 한다. 그녀들이게 지저분한 얘기를 하면 바로 그녀들은 얼굴이 발그레질 것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자유사회에서 온 서양인들 마저도 구중국유민의 사상에 있어서의 개방성과 신조류에는 감탄해마지 않았다. 학술괴걸이라는 별호가 붙은 고홍명은 청나라유민중에서는 특수한 경우이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어느 정도 '포스트모더니즘'이 느껴지기도 한다. 유민이라고 해서 다 무시해서는 안되는 것같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홍명은 철두철미한 보황파(保皇派)이다. 그러나 왕국유처럼 순국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그는 살아서 상대방들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것을 즐겼다. 그는 어떤 기회에 군주에 충성해야한다는 사상을 대거 선전했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수준이었다. 예를 들어, 5.4운동때 채원배 총장이 사의를 표명한 적이 있다. 북대교수들이 회의를 열어서 사퇴를 만류했다. 고홍명의 발언차례가 되자 그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가장 특이한 주장을 내놓았다: &quot;총장은 학교의 황제이다. 그러므로 만류하지 않으면 안된다!&quot; 다른 교수들은 그의 말을 듣고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해도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교육과 황제제도가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고홍명은 연결을 시켰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홍명은 황제제도를 구해내지 못했다. 그저 힘들게 자신의 변발을 지켜냈을 뿐이다. 1921년 일본작가 아쿠다가와 류노스케(芥川龍之介)가 중국을 방문했다. 국제통신사의 존스가 그의 가이드가 되었다. 북경에 와서 자금성은 보지 않아도 되지만 고홍명을 보지 않으면 안된다. 아쿠다가와가 고홍명의 집을 찾아갔을 때, 마침 그가 중국식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고홍명에게 좋은 인상을 남긴다. &quot;네가 서양옷을 입지 않다니, 드문 경우이다&quot;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아쉽게도 한 가지가 빠졌다 그래서 고홍명은 유감스럽게 말한다: &quot;아쉽게도 변발을 하지 않았다&quot; 그리하여 일본손님이 웃지도 울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아쿠다가와는 뒷머리를 만지면서 말했다: &quot;역시 존스가 헛소리한 것은 아니었다. 이 분은 정말 인물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홍명은 문화괴물이다. 고홍명의 삶은 왕국유의 죽음고 비교하여 기적에 가깝다. 그것은 모두 변발로 인하여생긴 것이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왕국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왕국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고홍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고홍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변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변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보황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보황파&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아쿠다가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아쿠다가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차주전자이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차주전자이론&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문혁기간중의 10대 무투(武鬪) 사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935"/>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35</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02T20:40:33Z</updated>
	    <published>2009-11-02T20:40:33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이회지(李悔之)&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문혁'이 끝난 후에 성립된&amp;nbsp;'중공중앙문화대혁명무투사건조사조'는 1978년 6월부터 1979년 8월까지, 당사자들로부터 상황을 파악하고 관련자료를 정리한 후 심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통계를 내놓았다: 1966년부터 1975년까지의 사이에 현지 혁명위원회, 정법부문, 군관회(조)에 신고, 비안된 건수를 보면, 사상 10명이상인 무투사건이 57,227건, 사상 100명이상인 무투사건이 9790건, 지방주재군이 명을 받아서 개입한 사건이 2,355건; 친척실종으로 보고된 건이 227,300여명에 이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래는 그중 사상자가 많고, 참혹했던 10대무투사건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째, 1967년 칭하이(靑海) 시닝(西寧)의 &quot;2.26&quot;사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7년 2월 26일, 칭하이 시닝의 무투는 성위, 성정부, 군민용비행장까지 확대되었다. 성공안청, 시닝시공안국이 점거되고, 3개의 대학, 12개의 전문학교,직업학교, 35개의 군공기업직공이 참가했다. 2월 26일부터 3월 5일까지 무투는 지속되었고, 'T55&quot;탱크등 중무장한 부대가 출동하기도 했다. 2,177명의 사상자를 냈는데, 사망자가 822명에 이르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둘째 1967년 7-8월의 헤이룽장(黑龍江) 이춘(伊春) 무투사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7년 7-8월, 헤이롱장성 이춘시 임업국주비혁명위원회는 대립하는 두 개의 파에 대하여 '혁명조반파' '모택동사상한위자'로 자처하며, 15일간의 협상을 거쳤으나, 다른 두 파가 자리를 타협하지 않자, 재정권한을 둘러싸고 갈등이 격화되어 충돌이 발생한다. 시재정국, 은행등을 약탈하기 시작한다. 지방주재군이 참가하면서 무장대치가 이루어진다. 8월 2일-8월 25일 무투로 승급된다. 37개의 정부건축물이 훼손되고, 2곳의 군사기지가 포탄공격을 받으며, 230여명의 관병이 사상당한다. 무장충돌과정에서 3,750명이 사상당하고, 기록에 남은 사망자만 1,944명에 이른다. 그중 많은 사람은 임장(林場)직공과 가족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셋째, 1967년 8월-11월 후난(湖南) 화이화(懷化) 무투사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7년 8월-11월, 후난성 화이화시 직공홍위병조반파는 화이화노동개조농장, 노동개조공장을 점거하고 접수한다. 군대는 명을 받고 진주하려했으나, 무력으로 저지당한다. 노동개조농장, 노동개조공장의 수감자들은 무장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군대를 공격했다. 군대는 명을 받아 반혁명무장반란으로 진압한다. 그리하여, 37,7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그중 13,300여명이 사망한다. 군인은 430명이 사상당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넷째, 1967년 6월-1968년 3월의 쓰촨(四川) 이빈(宜賓) 대무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7년 6월-68년 3월, 쓰촨 이빈지구의 두개파의 군중조직은 '유결정, 장서정은 모택동사령부전사인가 아니면 유등사령부의 흑간장인가?&quot;를 놓고 격렬한 투쟁을 벌인다. 중앙문혁은 1968년 1월에 &quot;유, 장은 모택동사령부의 전사이며, 장기간 유등의 사천의 대리인 이정천, 요지고같은 인물의 박해를 받아왔다&quot;고 의사표시한다. 현지 주둔군은 즉시 그 의견에 따라, 다른 일파의 군중조직에 대하여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실시한다. 그리고 격렬한 무투를 벌인다. 무투에 동원된 사람이 17만여명에 이르고, 2개 병단이 개입하여, 43,8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21,100여명이 사망한다. 군대는 이빈지구에 15개월에 걸치는 계엄을 실시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섯째, 1967년 10월-69년 5월 내몽고 내인당(內人黨)사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7년 10월 20일-69년 5월말까지, 내몽고에는'내인당' 사건이 발생한다. 중공당원, 간부, 지식인, 농민,목민, 지식청년(주로, 베이징, 허베이, 산동에서 온 66학번, 67학번, 68학번의 대전졸업생) 56,200여명이 살해되고, 377,000명이 감금된다. 억울하게 박해를 받은 사람만 355만명에 달한다. 이는 당시 내몽고자치구 총인구의 1/4에 달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섯째, 1968년 5월 - 9월의 안휘 방부(蚌埠), 화이난(淮南) 무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8년 5월 - 9월, 안휘성 방부, 화이난의 85개 기업단위의 직공이 제2차조반을 일으킨다. '이보화는 안휘의 대리인'이라고 솎아내고자 한다. 두 곳의 혁명위원회를 포위하고, 철로, 도로를 12일간이나 점거한다. 중앙문혁은 조사조를 파견하여, 모택동은 왕동흥을 보내어 상황을 파악하게 한다. 중앙문혁은 사건을 '반혁명사건'으로 규정짓는다. 허페이(合肥)에서 5만의 무장민병을 조직하고, 주둔군과 연합하여 기한을 정해서 무기를 자진하여 내놓게 명령한다. 기한이 지나자, 진공과 체포를 감행한다. 35일간의 소탕작전에서 73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3,433명이 사망한다. 군대, 민병에서 사상자 525명이 나오고, 827개의 건축이 훼손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일곱째, 1968년 12월 - 69년 2월 산시(陝西) 바오지(寶鷄) 무투&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8년125월 - 69년 2월, 산시성 바오지지구의 8개의 병공장에서 '계급대오정리'의 정치운동을 벌인다. 7만명의 직공중 45,400여명이 계급적대분자, 역사반혁명분자, 현행반혁명분자로 규정된다. 그중 297명은 현지 군관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즉시 집행된다. 다음 날, 전지구에서 동란이 발생하고, 주둔군은 반혁명동란이&amp;nbsp;일어났다고 보고하고, 추격을 전개한다. 그리하여 추격과 반추격의 무장투쟁이 벌어진다. 탱크, 장갑차, 대포, 화염방사기가 동원된다. 48,3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13,300명이 사망한다. 사망자중에는 군관조 조장, 정위, 바오지시 혁명위원회 군대표가 포함되어 있다. 바오지 주둔군의 군영도 포격을 받아 2곳이 파괴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덟째, 1968년 4월 - 7월&amp;nbsp;광시(廣西) 난닝(南寧) &quot;4.22&quot;참안&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68년 4월-7월, 광시 난닝지구의두 개파 군중이 130여만명이 무장투쟁에 돌입한다. 군구의 5개의 무기고의 총과 탄약이 탈취된다. 월남전쟁에 수송되던&amp;nbsp;무기마저도 철로노선에서&amp;nbsp;탈취된다. 4개월여간, 22건의 대규모 충돌이 일어나고, 175,0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101,000여명이 사망하며, 33,115명이 실종된다.&amp;nbsp;저우언라이 총리가 보낸 조사조중에서도 3명이&amp;nbsp;총살당한다. 광시 난닝의 무투는 문혁기간중에 사상자가 가장 많이 나온 무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홉째, 1975년 5월 신장(新疆)생산병단 '쿠데타' 진압&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75년 5월, 신강생산병단 석하자, 규돈량지구의 생산건설병단에서 소위 '집단쿠데타'가 일어나서, 소련에 투항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군대가 출동하고, 건설병단에 대한 숙청을 진행한다. 그리하여 무장투쟁이 벌어지고, 격전이 일어난다. 석하자지구에서 7,33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2,170명이 사망한다. 두 지역에서 실종자가 8.170명에 이른다. 무장진압하는 과정에서 헬리콥터까지 동원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열째, 1975년 윈난(雲南) 회민(回民) 사건&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75년 4월, 윈난성 스덴(施甸)의 '이슬람공화국&quot;사건이 벌어진다. 이로 인하여 3700여명이 사상당하고, 그중 회족이 1,220명 사망한다. 스덴지구의 정부건축물이 파괴된다. 이는 인위적으로 일어난 정치적인 억울한 사건이다. 그해 중앙정부는 2000여만위안의 구휼굼을 내려보내어 이 민심을 안정시킨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문혁&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문혁&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무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무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226사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226사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내인당사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내인당사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422참안&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422참안&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이슬람공화국사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이슬람공화국사건&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당문종(唐文宗)때의 황당한 가짜 국구(國舅) 사건</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934"/>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34</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1-01T13:22:40Z</updated>
	    <published>2009-11-01T13:22:4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불감왕언(不敢枉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군대(裙帶)'라는 단어의 의미는 처, 딸, 자매의 친척을 의미한다. 서로간에 얽혀있는 부녀의 인척관계이다. 군대관계는 고대 중국에서 첫손으로 꼽는 관계이다. 소위 &quot;한 사람이 득도하면, 닭이나 개까지도 하늘로 오른다(一人得道, 鷄犬昇天)&quot;는 것은 바로 이런 관계를 잘 표현하는 말이다. 그 당시 황제의 인척이 된다는 것은 영화부귀를 한없이 누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문종때, 3명이나 죽음을 무릅쓰고 황제의 외삼촌을 사칭한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문종 이앙(李昻)이 황제가 되자, 그의 모친인 소후(蕭后)는 마침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그녀는 고향의 동생을 그리워하며, 가슴아파했다. 소태후는 어려서 부모가 모두 죽고 남동생과 둘이서 서로 의지하며 살았다. 전쟁통에, 누나와 남동생은 병란을 피해서 도망치다가 서로 헤어지고 만다. 이제 누나는 황태후가 되었다. 저녁이면 잃어버린 남동생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모후의 바램을 이뤄주고, 자신의 효심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문종은 민월일대의 지방관리들에게 잘 조사해서, 자신의 오래 전에 잃어버린 외삼촌을 찾아보라고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 호부(戶部)에서 '차강역인(茶綱役人)'으로 있는 자가 나타났다. 그의 이름은 소홍(蕭洪)이었다. 그는 자신이 소태후의 남동생이라고 밝힌다. 당문종은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를 장안으로 데려와서 모후와 만나게 한다. 두 사람이 만났을 때, 서로 머리를 끌어안고 통곡을 했고, 눈물 콧물로 주변을 흠뻑 적셨다. '오열하며 말을 잇기 힘들 정도가 되어' 주변사람들이 모두 감동했다. 당문종은 외삼촌을 찾아서 아주 기뻐했고, 대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었고, 여러 날을 즐겼다. 그리고 외삼촌에게 금오장군(金吾將軍), 검교호부상서, 하양,회절도사, 천검교좌복야, 낭방절도사등의 중요관직을 내린다. 그는 당시 가장 잘나가는 사람이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좋은 시절이 오래 가지는 못했다. 소홍이 절도사로 있을 때, 너무 오만하고, 예의에 소홀히하다가 당시 권력이 가장 세던 환관 구사량(仇士良)과 원한을 맺는다. 구사량은 일찌감치 소홍이 가짜라는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는 소본(蕭本)이라는 복건사람을 데려와서, 소본이 원래 황제의 친외삼촌이라고 말한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는 화를 가누지 못한다. 즉시 소홍을 붙잡아와서 어사로 하여금 심문하게 한다. 소홍은 원래 가짜였다. 금방 본모습이 드러나고, 변방에 유배당하고, 이어서 '죽음을 받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당문종의 논리로는 소홍이 가짜이면, 소본은 진짜였다. 그는 이것 저것 따지지 않고, 바로 소본을 찬선대부, 위위소경, 좌금오장군의 직을 내린다. 소본의 이미 죽은 증조부, 조부, 부친도 각각 태보, 태부, 태사의 관직을 추증한다. 이외에 거액의 돈과 보석을 내린다. 깃발이 난무하고 축포를 쏘는 등 아주 요란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소홍(蕭弘)이라는 자가 나타난다. 그는 스스로 자신이 소태후의 친동생이라고 밝히고, 소본은 가짜라고 말한다. 당문종은 그 말을 듣고 다시 멍청해졌다. 어째서 외삼촌이 또 하나 나타난단 말인가? 그러나 바보도 바보의 방법이 있다. 그는 소본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조리 인정하지 않는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조정신하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앞다투어 상소를 울려, 소홍이 진정한 국구라고 말한 것이다. 소의절도사 유종간은 상소를 올려, &quot;만일 일시의 오점을 남긴다면, 천고의 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quot;라고 한다. 마치 의협심에 넘치고 충성심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당문종은 어쩔 수 없이, 원래의 지시를 취소한다. 그러나, 그는 앞의 두번의 교훈을 받아들여, 즉시 소홍에게 관직이나 재물을 내리지 않고, 문저 어사중신, 형부시랑과 대리사경등으로 하여금 연합조사를 벌이게 한다. 그 결과가 나오고나서 다시 논의하겠다고 한다. 삼당의 공동심리를 거쳐 진상이 드러난다. 원래, 소홍(蕭弘)은 소홍(蕭洪), 소본과 마찬가지로, 모두 가짜 국구였던 것이다. 진상을 알고난 후에, 당문종은 분노가 극에 달한다. 즉시 소홍을 유배보내고, 조서를 내린다: &quot;소홍의 악적(惡迹)이 멀지도 않은데, 소본의 전철을 다시 밟으려 하다니, 홍(弘)의 본말은 더욱 괴이하다&quot; 결국 두 사기꾼들은 모두 법의처벌을 받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진강현지&gt;&gt;에는 이에 대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quot;소비촌(蕭妃村)...은 당문종의 모친 정헌태후의 고향이다. 태후는 전란으로 고햐을 떠날 때, 부모는 이미 돌아가시고, 동생 하나가 있었다. 왕부에 들어가면서, 가족들과의 연락이 끊겼다. 당문종은 모친의 친척이 많지 않아, 친히 고향으로 태후의 남동생을 찾았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당시 소홍, 소본, 소굉(蕭宏, 宏과 弘은 서로 대체해서 쓰기도 함)은 지방의 무뢰배였는데, 선후하여 소태후의 남동생을 사칭하다가, 유배당하여 먼 곳에서 죽었다. 태후가 살아있을 때, 친동생을 만나지 못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을 '소비촌'이라고 하였는데, 와전되어 '소회촌(燒灰村)'이 된다. 현재 소회촌은 용호진이 통할하는 하나의 행정촌이다.&quot;&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군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군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당문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당문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소태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소태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금오장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금오장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소홍&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소홍&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소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소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소비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소비촌&lt;/a&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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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상해의 권력허영: 잠옷을 입고는 외출을 금지한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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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30T20:11:09Z</updated>
	    <published>2009-10-30T20:11:0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왕석천(王石川)&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quot;잠옷을 입고는 외출을 금지한다.&quot; 이는 2010년 상해가 엑스포를 개최하기 전에, 시정부가 주민들에게 내린 명령이다. 이는 큰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있다. 7월하순부터, 거민위원회 주임 심국방의 업무내용은 하나가 늘었다: 관할지구 거민들에게 잠옷을 입고 외출하지 말도록 지도하는 것이다. 심주임은 상해 포동신구 창리동로 제팔소구의 작은 마을을 관리한다. &quot;잠옷을 입고 외출하지 않는 엑스포의 문명인이 되자&quot;는 것이 그의 업무내용중 하나이다. 엑스포 부지로부터 두 세 정거장 떨어진 제팔소구는 포동이 관할하는 모든 엑스포구역과 마찬가지로, 현대문명의 시험대에 올랐다&lt;/STRONG&gt;(성도일보. 2009년 10월 29일)&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잠옥을 입고 외출하지 말라&quot;. 듣기에 가소롭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무엇을 입고 외출하든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시정부에서 금지령까지 내려야할 일인가? 이것은 행정자원을 과도하게 사용하거나 낭비하는 것이 아닌가? 다시 말해서, 잠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보기에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게으르고 제맘대로인 생활습관이 상해사람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공권력은 무엇을 하는 것인가? 가장 주요한 것은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다. 공공책임을 부담하는 것이다. 개인의 사생활영역은 가능한한 개입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잠옷을 입고 말고는 개인의 프라이버시영역이다. 잠옷을 입고 외출하는 것이 시의 면모에 해가 되는지 아닌지는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다. 반드시 그것을 문명적이 아니라고 규정을 해버린다면 그것은 너무 심한 것이 아닌가. 어느 학자가 말한 것처럼, 이것은 도덕문제라고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상해사람들의 문화소양문제로까지 끌어올릴 필요도 없다. 거민위원회에서 잠옷을 입고 거리를 나다니지 말자고 계몽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을 금지할 권한은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므로 '잠옷을 입고 외출할 수 없다&quot;는 것은 실로 자잘한 일을 너무 크게 벌인다고 생각한다. 이치는 아주 분명하다. 권력의 촉각이 길면 길수록 무엇이든 모두 간섭한다는 것이다. 공민의 사생활영역이 너무나 쉽게 침범당한다. 이렇게 되면 사생활영역이 안전하지 않다. 만일 권력이 잠옷을 입느냐 마느냐까지 간섭한다면, 또 뭘 못하고, 뭘 안하고, 뭘 개입하지 않겠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특히 음미할만한 점은 상해의 관련부문에서 이 규정을 내놓은 것이 바로 엑스포가 상해에서 열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이유는 정말 경박하다. 만일 잠옷을 입고 다니는 것이 정말 우아하지 못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왜 하필 이때인가? 엑스포를 개최하지 않는다면, 잠옷입고 외출해도 된다는 말인가? 이 금지령은 도대체 누구를 보라고 하는 것인가? 더 나아가서, 오늘날 관련부문에서 '엑스포문화인이 되자'는 명목으로 시민들이 잠옷입고 외출하지 못하게 막았는데, 내일은 또 무슨 이상한 명목을 붙여서 공민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할지 모르는 일이다. 일단 이런 권력논리가 통하게 되면 공민의 사생활영역은 어디에 남아있을 것인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한마디로 말하면, &quot;잠옷외출금지&quot;는 비겁한 권력허영이다. 권력기관의 시비판단의 기준은 정부이미지를 해치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지방의 존엄을 해하느냐 아니냐는 것이다. 이것은 가소로운 기준이다. 모두 알다시피, 3년전에 상해를 배경으로 하여 널리 관심을 끌었던 미션임파서블3은 대륙에서 볼 수 없었다. 왜냐하면 상해를 추화(醜化)했다는 혐의를 받은 것이다. 도대체 상해를&amp;nbsp;어떻게 '추화'했다는 것인가? 원래 미션임파서블3에서 상해를 배경으로한 장면에 마작을 하는 모습과 옷을 내걸어 말리는 모습등등이 있었다. 이것은 정말 말도 안되는 지적이다. 미션임파서블3가 어디 상해를 추화했는가? 분명히 권력이 스스로를 추화한 것이다. 이런 장면을 편집해버린다고 해서, 그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란 말인가? 다시 말해서 마작을 하는 것이 추화한 것이라는 말인가?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권력허영이다. 이런 권력허영은 결국 비겁함을 표시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권력은 공공사무를 관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거기에서 정도가 있다. 권력이 공공도덕에 개입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먼저 무엇이 비문명적이고, 무엇이 비도덕적인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이전에 권력의 손은 너무 적게 관여한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관여하였다. 만일 권력이 계속하여 방향을 잡지 못하고 설치면 그것이 진정한 비문명이요 비도덕이다. 이것은 경계해야할 일이다. 사실, 엑스포를 맞이하는 가장 문명적인 방식은 바로 권력이 분수를 지키는 것이며, 아무 짓이나 함부로 하지 않는 것이다. &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엑스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엑스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상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상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잠옷외출금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잠옷외출금지&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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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편전쟁의 또 다른 발발원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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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30T19:17:09Z</updated>
	    <published>2009-10-30T19:17:0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왕위(王偉)&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아편전쟁이 중국에 거대한 재난을 가져왔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는 중국에 있어서 영원히 기억해야할 상처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임칙서(林則徐)가 광주에서 아편금지조치를 지나치게 과격하게 하여, 이 전쟁이 발발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나라사람의 기록을 보면, 이번 전쟁의 발발원인에 대하여 또다른 견해가 있음을 알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청나라사람의 필기인 &lt;&lt;청패쇄철(淸稗&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瑣&lt;/FONT&gt;&lt;/SPAN&gt;綴)&gt;&gt;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지금까지 임칙서가 광주에서 서방상인들의 아편을 소훼하면서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아편전쟁이 발발했다고 생각해왔다. 현재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니, 이번 전쟁의 발발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었다. 서양인들이 광주에 와서 장사를 하던 초기에, 실제로 실행한 것은 찻잎 한 상자와 아편 한 상자를 맞바꾸는 것이었다. 나중에 이들 찻잎을 지방관아에서 일하는 일부 서리(胥吏)들이 통일적으로 구매하였다. 그리고 이들 찻잎에 모래와 돌맹이등을 섞어넣었다. 이들 서방상인은 이런 찻잎을 운송해갔는데, 도저히 팔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비용을 들여 중국으로 다시 운송해와야 했다. 서양상인들은 무고하게 많은 돈을 손해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전쟁의 화근이 심어진 것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또 한가지 일이 있었다. 이것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임칙서가 광주에서 아편을 금지할 때, 오(伍)씨성의 상인이 서양상인들과 밀접하게 왕래했다. 그리하여 그를 여러번 가혹하게 처벌했다. 그로 하여금 합계 군비 수백만냥을 부담하게 했다. 오씨가 매번 임칙서를 만나러 올 때면, 자주 아문의 각 관리들에게 돈을 뜯겼다. 은자 천냥정도를 찔러넣어 주어야 비로소 의자를 내놓고 그를 앉게 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나중에 임칙서가 다시 기용되었으니, 군대에서 병으로 죽었다. 어떤 사람은 말했다: '이것은 오씨가 임칙서의 복귀를 정말 두려워하였고, 스스로 그 압박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암중에 독을 넣어 임칙서를 해친 것이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필기를 보면 아편전쟁이 발발한 한가지 요소는 지금보면 아주 슬픈 일이다.이들 '서리'등 간사한 소인들이 나라를 망치고 백성을 망치는 더할 수 없이 엉망인 지경에 이르게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렇다면 도대체 어떤 자들을 '서리'라고 부르는지 살펴보자.&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리'는 '이서(吏胥)'라고도 한다. &lt;&lt;현대한어사전&gt;&gt;의 해석에 따르면, &quot;구시대의 품급이 없는 하급 공무원&quot;이라고 되어 있다. 이들 하급공무원은 관원의 개인노비 및 각 아문의 공차(公差), 아역(衙役)등등이 포함된다. 이런 사람들은 사회지위가 아주 낮았다. 어떤 신분의 사람이건 이런 일을 하게 되면 바로 &quot;유량입천(由良入賤, 양민에서 천민으로 바뀜)&quot;되는 것이다. 본인뿐아니라, 그 자손들도 다시는 '선비'로 적에 올릴 수가 없게 된다. 바로 족보에서 이름을 지워버리게 되며, 죽어서도 사당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 그렇게 무시를 당하는 무리인 것이다. 다만, 이들은 전형적인 호가호위하는 자들이다. &quot;관리의 발톱이나 이빨이 되어, 하루도 없이는 일이 되지 않고, 한 가지 일도 그들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quot; 이들은 손안에 크고 작은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그들은 이런 권력을 이용하여 아무런 거리낌없이 대담하게 돈을 뜯어내고 협박하며 온갖 나쁜 짓을 다했다. 이들 서리는 비록 신분은 비천하지만, 일은 콩고물이 많은 편이었다. 그들은 안과발모하고, 탐욕에 젖어서 시비곡직을 따지지 않고, 양심이라는 두 글자를 팔아먹었다. 어떤 자료를 보면 그들을 &quot;오늘날의 서리를 보면 모두가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입지 않는 자가 없다. 온 집안이 잘 먹고 처첩이 가득하며, 비단을 손에 쥐고, 세가(世家)보다 더 향유하며 살고 있다&quot;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오늘날 백관의 권한은 모조리 '이서'에게 귀속되었다. 소위 백관은 허명이고, 권한을 쥔 자는 '이서'들 뿐이다&quot; 청나라초의 사상가 고염무는 이렇게 간파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청나라말기의 대신 호림익도 이렇게 말했다: &quot;육부의 서(胥)는 재상의 권한과 다를 바가 없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청나라의 통치에서, '서리들의 권력독단'은 이미 정치를 망치고 백성을 해롭게 하는 심각한 문제로 등장해다. 이미 '조정과 서리가 천하를 함께 다스리는' 국면에 이르렀다. 이런 왕조가 어찌 망하지 않을 리가 있겠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므로 서리는 아편전쟁을 유발한 원흉의 하나라고 보아도 전혀 지나치지 않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서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아편전쟁&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아편전쟁&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임칙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임칙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이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이서&lt;/a&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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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title>소림장군(少林將軍) 허세우(許世友)의 세번의 혼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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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30T17:12:24Z</updated>
	    <published>2009-10-30T17:12:2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소린(小麟)&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허세우 사령관은 문화수준이 높지는 않으나 유명한 무장이다. 그러나 거친 가운세 세심한 점이 있다. 그는 특수한 성격을 지니고, 특수한 경력을 지니고, 특수한 공헌을 한 특수한 인물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는 일생동안 세번 혼인했다. 그의 혼인을 통해서 그의 비범한 일생경력을 엿볼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에게는 별명이 하나 있다. 바로 &quot;소림장군&quot;이다. 그는 실제로 출가해서 중이 된 적은 없다. 수계를 받지 않았다. 허세우가 소림사에 들어간 것은 8살때였다. 허세우의 할머니가 큰 병에 걸렸는데, 오랫동안 치료해도 낫지를 않았다. 그의 부모는 보살이 도와주기를 바랐고, 노인의 병이 좋아지면 손자를 출가시켜 부처님을 모시게 하겠다고 했다. 나중에 노인의 병이 낫자, 허세우는 소림사로 보내어진다. 그는 소림사에서 잡일을 했다. 그가 평소에 하는 업무는 스님들을 위해서 차를 끓이고 물을 떠오고, 침대를 정리하고 이불과 요를 깔며, 땅을 쓸고 탁자를 닦는 일이었다. 소림사에서 8년간 있는동안 그는 체력과 의지를 단련시킨다. 그의 의리있고 호방한 성격과 정의를 추구하는 사상은 이때 다듬어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가 16살이 되어 고향인 호북성 마성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하남성 신현이다. 그는 공산당이 이끄는 농민운동에 가담하면서 향농민의용대 대대장 겸 포대대장을 맡는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모친은 아들이 어른으로 성장한 것을 보자, 허세우를 위하여 주석명(朱錫明)이라는 이웃마을의 여자를 물색했다. 그녀는 마을의 부구회(婦救會) 회원이었다. 허세우는 효자였고, 거기다 부친이 일찍 돌아가셔서 모친의 명이라면 그대로 따랐다. 1924년 봄, 허세우는 꽃가마를 빌리고 나발을 부는 사람들을 모아서, 주석명을 부인으로 맞이한다. 결혼후 두 사람은 금슬이 좋았고,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허세우와 주석명이 결혼한지 3일후에, 작전명령을 받는다. 모친과 신부와 작별하고,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돌입한다. 모친과 주석명은 집에서 군화를 만들어 전선에 보냈고, 어떤 때는 세의대(洗衣隊)를 이끌고 전선으로 위문을 갔다. 그러나 포연이 솟구치는 그 시절에 주석명은 그저 한밤중에나 겨우 남편과 만나볼 수 있었다. 주석명과 허세우는 모두 사내아이를 셋 낳는다. 아명은 모두 '흑아(黑&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伢&lt;/FONT&gt;&lt;/SPAN&gt;)&quot;라고 불렀는데, 앞의 둘은 요절하고, 셋째만 살아남는다. 허세우는 겨우 한번 얼굴을 봤을 뿐이다. 그는 부대를 이끌고 악예환근거지를 떠난다. 국민당군대와 지방무장세력이 미친듯이 보복을 하게 되며, 소비에트지구에 인간성을 잃어버린 살인방화약탈을 자행한다. 주석명은 아이와 허세우의 모친, 허세우의 여동생을 데리고 고향을 떠나 사방을 유랑한다. 그후 소식이 끊긴다. 허세우는 소문으로 처와 아들이 죽었다는 말을 듣는다. 모친은 허세우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기 힘들다고 생각하여, 과감했던 허세우의 모친은 이를 악물고 스스로 나서서, 스스로 며느리를 다른 착실한 농민에게 시집보낸다. 주변사람들이 모두 권하여 주석명도 그 뜻에 따른다. 흑아만 할머니에게 남겨두어 고난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주석명이 개가한 후, 더 이상 아이를 낳지 않았다. 일이 있든 없든 자주 허세우의 모친 곁으로 찾아와서 이야기를 나누고 집안일을 도와주었다. 십여년이 지났다. 흑아는 십여세의 아이로 성장한다. 허세우 모친의 머리카락은 모조리 하얗게 된다. 그녀는 더 이상 아들 허세우가 돌아오는 것을 기대하지 않았고, 그냥 죽었다고 여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52년 허세우는 산동군구 사령관을 맡는다. 그는 휴가를 내서 고향으로 모친을 만나러 간다. 모자 둘은 이미 20년간 만나지 못했었다. 허세우는 말에서 내려 자신의 집문앞을 걸어가는 할머니를 본다. 의복은 남루하고, 회백색의 난발은 마치 잡초더미같았다. 발에는 발가락이 다 나온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고, 등에는 땔감을 매고 있었다. 허세우는 창노한 얼굴에서 20년 전의 기억을 되찾아보려고 했지만, 얼굴은 전혀 다르게 바뀌어 버렷다. 그래도 모친이 아들을 알아보았다. 허세우는 '털썩' 소리를 내며 모친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모자는 서로 끌어안고 통곡을 했다. 허세우는 모친의 눈물을 닦아주고, 몸을 일으켰다. 모친의 작은 어깨에 매어져 있던 땔감인 나뭇가지를 내려주었다. 그는 자신의 나이많은 모친이 지금까지 이렇게 힘들게 살아왔다는 것을 알고는 참담한 생각이 들어, 다시 한번 '털썩' 모친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모자는 다시 머리를 끌어안고 반시간을 통곡했다. 허세우모친은 떨면서 몸을 일으켰다. 집안으로 들어가서 물을 데워서 아들에게 먹인다. 땅위에 꿇어앉은 허세우는 모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대로 무릎을 꿇고 일어나지 않았다. 허세우는 모친을 모시고 제남으로 돌아온다. 모자 두 사람이 함께 생활할 때, 모친은 자주 아들에게 며느리가 얼마나 잘했고, 효성스러운지를 얘기했다. 허세우는 그 말을 듣고는 탄식을 금치 못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허세우의 두번째 결혼은 자유연애결혼이었다. 군이상의 간부는 혁명반려를 찾아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허세우는 연안에 도착한지 얼마되지 않아, 연안으로 온 사천 달현의 열혈여청년 뇌명진(雷明珍)에게 호감을 느낀다. 금방 두 사람은 연안에서 혼례를 올렸다. 결혼후 두 사람은 서로를 아꼈다. 허세우가 홍사방면군의 기병사령관으로 나갈 때, 명을 받아 소와 양을 끌어다가 부대에 식용으로 공급했다. 세심했던 뇌명진은 양털을 모은다. 그리고 시간을 내서 이것을 가지고 양모로 가공한다. 그후 허세우에게 평생 첫번째의 털옷을 만들어준다. 허세우는 홍군대학에 입한한 후, 뇌명진은 중앙조직부에 의하여 연안현에 파견되어 부녀공작을 한다. 이때 장국도의 분열주의를 비판하는 '비장'투쟁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허세우는 위축된다. 정치적으로 성숙하지 못했던 허세우는 이때 부대를 이끌고 사천으로 돌아가서 유격전을 벌일 생각을 하고, 그 준비를 하기에 이른다. 허세우와 홍사방면군의 10여명의 고급장군들이 감금된다. 이것은 그의 일생에서 자유를 상실한 가장 길었던 순간이다. 허세우는 사람을 시켜 처에게 소식을 전한다. 그녀에게 오면서 그 털옷을 가져오라고 한다. 고난의 와중에 허세우는 더욱 자신의 처를 생각했고, 이해와 안위를 원했다. 그러나, 반달이 지나서, 그가 마지막으로 받은 것은 헤어지자는 서신과 털옷의 조각을 담은 소포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때 뇌명진은 이미 연안현의 부녀부장으로 승진해 있었다. 뇌명진은 서신에서: &quot;허세우 나는 네가 밉다. 나는 절대 반혁명분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혁명의 순결성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 둘은 관계를 일도양단하자. 나는 이혼을 결연히 요구한다. 서명해달라.&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나중에 모택동이 친히 간여하여, '비장'확대화는 시정된다. 허세우도 다행히 화를 면했다. 그리고 다시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간다. 뇌명진은 자신의 일시적 충동에 후회막급이었다. 여러번 허세우에게 잘못을 뉘우치며 재혼하자고 한다. 그러나, 허세우는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뇌명진은 나중에 스스로 항일전선에 나가겠다고 요청한다. 태행산에서 진갱, 진석련은 허세우와 뇌명진을 한 방안에 한동안 가두어둔 적도 있다. 그들 둘이 잘 얘기해서, 서로 이해하게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허세우는 문을 깨고 나와서 떠나버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허세우가 산동에 도착하여, 그곳에서 세번째 인연을 만난다. 이는 그의 평생 마지막 결혼이다. 교동(膠東)아가씨의 이름은 전명란(田明蘭)인데, 나중에 전보(田普)로 개명한다. 집안은 가난했다. 부대에서 그녀는 교동군구 물자조달공장에 근무했다. 전방지원업무를 한 것이다. 오래지 않아, 조직에서 전보에게 임무를 부여해서, 허세우의 생활비서를 맡게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전보와 허세우는 결혼후 40여년을 함께 하면서 6명의 자녀를 낳았다. 허세우는 생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quot;전보는 나의 일생에서 충실한 반려이다&quot; 그리고 내세에도 반려로 맞이하고 싶다고 말했다. 해방후, 전보는 남경군구 정치부간부부 부부장등의 직위를 역임했고, 현재는 북경에서 은퇴하여 지내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59년, 허세우가 고향으로 찾아갔는데, 모친은 이미 작고했다. 허세우는 모친의 묘 옆에 꿇어앉아서 말했다: &quot;어머니, 충과 효를 다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어른이 살아계실 때는 제가 모시질 못했으니, 제가 죽은 후에, 반드시 돌아와서 당신의 묘를 지키겠습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등소평은 특례로 허세우는 고향에 매장하도록 허용해주었다. 허세우의 묘는 부모의 묘 바로 곁에 있다. 그리하여 그는 죽어서 효를 다하겠다는 마지막 바램을 이루게 된 것이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등소평&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등소평&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전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허세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허세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소림장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소림장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주석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주석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뇌명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뇌명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전명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전명란&lt;/a&gt;
	    </content>
	    	</entry>
    	<entry>
	    <title>당중종(唐中宗) 이현(李顯) 사망의 수수께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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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30</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9T12:10:19Z</updated>
	    <published>2009-10-29T12:10:1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유계흥(劉繼興)&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무측천의 철혈통치가 끝나고 당현종(唐玄宗)의 개원성세(開元盛世)가 도래하기까지의 8,9년간은 상층통치계급이 흔들리고 동요하던 시기였다. 평범한 황제인 당중종 이현은 전형적인 &quot;현부양부(賢夫良父)&quot;였다. 후궁에서는 위후(韋后)의 권력남용을 종용하고, 딸인 안락공주(安樂公主)가 버릇없이 구는 것도 다 받아주었다. 그는 유명한 &quot;화사황제(和事皇帝, 말썽만 나지 않게 다독거리고 좋은게 좋다는 식의 황제)&quot;였다. 그가 통치할 때의 백성들은 도탄에 빠졌다고 할 수는 도저히 없고, 민란을 일으킬 수준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는 원래 멍청한 천자로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경룡4년 육월, 그는 돌연 급사한다. 항간에는 그가 위후가 사람을 시켜 보낸 떡을 먹은 후 이상하게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는 정말 자신의 조강지처에게 독살당한 것이란 말인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 &lt;&lt;당서&gt;&gt;와&amp;nbsp;&lt;&lt;자치통감&gt;&gt;의 기록을 보면, 당중종 이현은 독살당하여다. &lt;&lt;자치통감&gt;&gt;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quot;산기상시(散騎常侍) 마진객(馬秦客)은 의술로, 광록소경(光祿少卿) 양균(楊均)은 요리를 잘해서, 궁중을 드나들었고, 위후의 총애를 받았는데, 일이 누설되어 주살될 것을 두려워했다; 안락공주는 위후가 임조(臨朝)하고, 자신은 황태녀(皇太女)가 되고 싶어했다; 그래서 서로 공모하여, 떡에 독을 넣었다. 육월, 임오, 중종이 신룡전에서 붕어했다.&quot; 이 내용에 따르면, 위황후의 두 애인인 양균과 마진객은 황후와 사통한 일이 들통날까 두려워했고, 위황후는 황제가 되고 싶었으며, 안락공주는 황태녀가 되고 싶었다. 이 몇 세력은 모두 당중종이 방해된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모두 연합하여 독약이 든 떡을 올린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주장의 합리성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lt;&lt;자치통감&gt;&gt;에는 경룡4년 오월의 일을 일부러 적고 있다. 즉, 당중종이 죽기 1달전의 일이다: &quot;오월, 정묘, 허주사병참군언사 연흠융(燕欽融)이 다시 글을 올려 말했다: '황후는 음란하고, 국정에 간여하니, 일족이 강성하다; 안락공주, 무연수, 종초객은 종사를 위기에 빠트릴 것을 도모하고 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누군가 황제에게 황후가 음란하고, 황후, 부마와 대신이 역모를 꾸미고 있다고 글을 올렸다는 것이다. 중종은 당연히 상소를 올린 연흠융을 찾아서 물어보았다. 연흠융은 대의늠름했다. 사실, 당중종은 처와 딸에 대하여 불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현재 이런 스캔들을 지방의 자잘한 관리까지도 다 알고 있게 되니, 당중종으로서는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아무 말없이 연흠융을 풀어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연흠융은 대전을 나오자마자, 위황후의 심복인 재상 종초객(宗楚客)에게 대전앞에서 살해당한다. 당중종이 그의 책임을 추궁하지는 않았지만, 처음으로 강한 분노를 드러낸다. 위황후와 그녀의 일당들은 그제서야 우려하기 시작했고, 대책을 논의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들은 도대체 무슨 대책을 생각해낸 것일까? 그것은 바로 당중종을 독살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이렇게 진행되었을까? 필자 개인적으로는 당중종이 독살되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왜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번째 이유는 현존하는 사서에서, 처음 당중종 이현이 위황후에게 살해당했다고 언급한 것은 그후 반달가량 지나서 일어난 위황후에 대한 정변에서였다. 이는 당연히 군사동원시 선전용의 색채가 짙다. 당중종이 서거한 후 18일만에, 태평공주와 이융기(李隆基, 후의 당현종)가 정변을 일으킨다. 당시 정변에 참가했던 한 장군이 사병들에게 말한다: &quot;위황후는 선제를 독살했다. 우리는 오늘 위황후를 죽여서 선제의 원수를 갚자!&quot; 확실히 위황후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은 정변의 핑계거리가로는 충분할지 모르지만,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는 부족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번째 이유는 안락공주를 반면교사로 묘사한 &lt;&lt;구당서&gt;&gt;에서도 그녀가 황태녀가 되고 싶었다든지, 정곤지를 만들어 위세를 보여주었다든지 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을 적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내용은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확실히 이렇게 중요한 사실을 누락했다는 것은 &lt;&lt;구당서&gt;&gt;의 작자가 안락공주를 비호했다고 보기 보다는, 그저 당시 사람들도 안락공주가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세번째 이유는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사후에 모두 예에 따라 개장(改葬)되었다는 것이다. 당중종이 죽은 후 반개월여만이 위후와 안락공주는 정변에서 죽었다. 비록 정변의 구호는 두 여인이 당중종을 독살했다는 것이지만, 정변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녀들 둘은 모두 예의에 맞게 개장된다. 만일 그녀들이 당중종을 정말 독살했다면, 어떻게 그녀들의 신분을 유지시키면서 예의에 맞게 개장해줄 수 있었겠는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네번째 이유는 위황후와 안락공주는 당중종을 독살할 현실적인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녀들은 당시에 준비가 불충분했다. 만일 당중종이 살아있으면, 그녀들에게 큰 뒷배경이 되어준다. 그녀들은 그 보호막 아래에서 세력을 키워갈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위후모녀가 다급해져서 황제를 독살했다는 기록은 믿기가 어렵다. 이는 그저 당시 승리자가 만들어낸 거짓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렇다면, 당중종은 왜 그렇게 돌연하게 죽었는가? 여기에는 이현의 가족유전병력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모두 아는 바와 같이, 이당가족은 심뇌혈관의 유전병력이 있다. 당고조, 당태종, 장손황후, 당고종이 모두 &quot;기질(氣疾)&quot;, &quot;풍질(風疾)&quot;을 앓았는데, 이는 고대의 심뇌혈관류의 질병을 의미한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당왕조의 황제들은 장수하지 못했다. 이현이 오십오세에 사망한 것은 정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외에, 심뇌혈관질병을 가진 사람은 발병이 급작스럽고, 사망률이 높다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현은 사전에 아무런 증상도 보이지 않고 돌연히 급사했다. 이것은 심뇌혈관류의 질병의 일반적인 규율에 부합한다. 이렇게 보자면, 위후모녀가 중종을 독살하였다는 것은 천고의 억울한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이것은 그저 필자의 추측일 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다만, 어찌되었건간에, 당중종의 죽음은, 당시 정계에 일대 지진을 몰고 온다. 그리하여 일련의 권력투쟁이 벌어진다. 마지막으로 이융기가 승리하여 정권을 획득한다. 그리고 당왕조는 잠시동안의 안정기에 접어든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자치통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자치통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당현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당현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무측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무측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이융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이융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태평공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태평공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안락공주&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안락공주&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위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위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당중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당중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개원성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개원성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양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양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화사황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화사황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마진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마진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연흠융&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연흠융&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종초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종초객&lt;/a&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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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허선(許仙)과 백낭자(白娘子)의 서호(西湖)는 어디로 갔는가?</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929"/>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29</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8T19:29:12Z</updated>
	    <published>2009-10-28T19:29:1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홍촉(洪燭)&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항주의 먹거리를 논하자면 누외루(樓外樓)를 빼놓을 수 없다. 항주의 풍경을 논하자면 서호(西湖)를 빼놓을 수 없다.&lt;/P&gt;
&lt;P&gt;서호의 가에 있는 누외루는 아름다운 풍경이 맛있는 음식을 받쳐준다. 술기운이 올라서 산책을 하고 싶으면 단교(斷橋)로 걸어가보는 것이 좋다. 백낭자와 같은 미인을 만날지 누가 아는가? 그저 멀리서 한번 바라보기만 해도 충분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호야 서요. 언제나 나는 허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lt;/P&gt;
&lt;P&gt;항주의 아가씨들은 여름에 가급적 흰색 치마를 입지 않는 것이 좋다. 나처럼 멀리서 찾아온 사람들이 딴 생각을 할 지도 모르니까.&lt;/P&gt;
&lt;P&gt;파주누외루, 독자막빙란(把酒樓外樓, 獨自莫憑欄, 누외루에서 술잔을 들고 혼자서 난간에 기대있지 말라).&amp;nbsp;멍청하게 보이지 않겠는가?&lt;/P&gt;
&lt;P&gt;항주에 가면,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듯이, 현지의 풍습에 따라야 한다. 가장 좋기로는 황주(黃酒)를 마시는 것이다.&amp;nbsp; 소흥(紹興)에서 난 것이 좋다. 가반(加飯)이나 화조(花雕)같은 것들 말이다. 나는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서 장원홍(狀元紅)은 시키지 않았고, 그저 작은 여아홍(女兒紅)을 시켰다. 이름만 들어서 성적인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가. 이를 보면 내가 강산보다는 미인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고독한 사람도 여아홍을 한 잔 마시면, 더 이상 외롭지 않다.&lt;/P&gt;
&lt;P&gt;금조유주금조취, 막사금준공대월(今朝有酒今朝醉, 莫使金樽空對月, 오늘 아침에 술이 있으면 오늘 아침에 마시고 취한다. 금술통의 술이 헛되이 달이나 마주하게 하지 말라). 누외루는 나의 요재(聊齋)이다. 나는 서호의 가에서 한바탕 취했다. 머리 속에서는 반복하여 옛날 영화 &lt;&lt;백사전(白蛇傳)&gt;&gt;이 돌아가고 있다.&lt;/P&gt;
&lt;P&gt;아. 허선이 백낭자를 만났을 때가 어느 해이던가? 누외루 음식점이 이미 문을 열었을 때인가? 그들을 불러서 함께 앉자. 비도 피하면서, 얘기도 나누자. 무대 아래의 관중들에게 들릴지는 걱정하지 말고, 어이, 사장, 연인세트메뉴는 없나요? 촛불을 밝힌 뭐 그런 것. 기념해줍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뇌봉탑(雷峰塔)은 전체 항주문화의 피뢰침이다. 서호에서 단교를 걸어올라가면, 나는 마치 허선의 화신이 된 것같다. 뇌봉탑을 보자, 무정하게 탄압받던 백낭자가 생각난다. 그녀는 이미 철저히 해탈했을까? 뇌봉탑. 무너지고 다시 지었다. 언젠가 다시 무너질 것이다. 우리는 잠시 안전하게 뇌봉탑의 그림자 아래에 몸을 숨겼고, 전통도덕의 비호를 받으면서, 그래도 호기심은 억누르지 못해서, 세상을 놀랄만하게 하는 애정으로 폭발한 천둥번개소리에 몰래 귀기울인다. 폭풍우는 더 맹렬하게 오라고 해라. 나는 바다제비는 아니다. 그러나 바다제비가 되고 싶어하는 관중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뇌봉탑을 멀리서 바라보면서, 털게(&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바탕;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bid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螃&lt;/FONT&gt;&lt;/SPAN&gt;蟹)를 먹어야 한다. 왜 그러냐고? 전설에 따르면 대화상 법해(法海)는 털게의 껍질 속에 숨어있다고 한다. 털게는 바로 이 가짜도학선생이 밀항하는 잠수함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23년 10월 21일, 서지마(徐志摩)는 호적(胡適)등을 데리고 서호에 놀러왔다. 누외루에서 대갑해(大閘蟹)를 시켰다: &quot;가을날의 갈대를 보면서, 누외루에서 털게를 먹는다. 조여사가 버드나무끝의 달을 보고싶어해서, 우리는 의자를 창앞으로 옮겼다. 그리고는 게다리를 들고 달을 보았다. 석양의 호심정은 좋았다. 달빛 아래의 호심정은 더욱 좋았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지마의 성격으로봐서 그는 분명히 백낭자를 동정했을 것이다. &quot;나는 달빛아래에 뇌봉탑의 고요하기 그지없는 그림자를 보기를 좋아한다. 나는 그것만 보면, 목숨도 필요없다.&quot; 그 본인은 등불에 뛰어드는 불나방처럼 세속을 초월한 사랑을 추구했다. 지마여. 허선보다 용감했던 사랑의 화신이여. 그는 나중에 과연 자신의 백낭자를 만난다; 이미 다른 사람에게 시집가있던 작가 육소만. 그러나,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육소만과 함께 도덕의 질곡을 깨부셨다. 분명히 머리에 피를 철철 흘리면서...&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지마와 소만은 각각 이혼하고, 1926년 10월 3일 결혼에 이른다. 결혼피로연에서, 지마의 스승인 양계초는 전혀 봐주는 것없이 연설을 통해서 이 한쌍의 신혼부부를 비판한다: &quot;젊은이들은 왕왕 자신의 감정에 휘둘린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한다. 전통의 안전보장을 파괴한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 고통받는 함정으로 뛰어든다. 이것은 확실히 불쌍하고 가련하다....&quot; 계몽주의자인 양계초도 아마 의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번에 자신이 어느 정도 '법해'의 역할을 했다는 것을. 나는 영원히 허선과 백낭자의 편이다. 지마와 소만의 편이다. 누외루에서 술을 조금 마시면서 약간의 낭만적인 지난 일들을 술안주삼았다. 창을 열고 바라보니, 서호가 가슴에 들어온다. 소제(蘇堤), 백제(白堤)는 멀리 뻗어있는 젓가락과 같았다. 이번에 이 바다같은 그릇 속에서 무엇을 집을 것인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단교(斷橋)는 끊어져 있지 않았다. 끊임없이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계산할 때 발견했다. 누외루의 음식가격은 다른 곳(예를 들어 慶元樓같은 곳)에 비하여 상당히 높았다. 그냥 음식만 파는 것이 아니라, 풍경까지 파는 것같다. 그러나 그래도 그만한 가치는 있다고 보여진다.&lt;/P&gt;
&lt;P&gt;오로지 이 한 점포 뿐이고, 분점도 없다. 누외루의 밖에는 더 이상 누각도 없다. 남은 것은 그저 넓다란 호수뿐이다. 만일 일렁이는 호숫물 속에서 무엇인가 건물의 화려한 기둥이나 서까래를 발견한다면,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누외루가 비친 풍경일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지마는 &lt;&lt;추서호(醜西湖)&gt;&gt;라는 글에서 자신을 '항주사람이라고 칠 수 있다&quot;고 했다. 서지마의 시대에, 누외루는 도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나는 알고 싶어졌다. &quot;그렇다면 우리 누외루를 가보자. 누가 알았으랴 누외루도 마음을 아프게 할 줄은. 원래 누외루는 단층의 높지 않은 오래된 건물로 호심정과 마주하고 있었다. 몇 개의 오래되어 하얀 빛이 나는 낡은 탁자, 한 두명의 나이든 점원, 살아있는 물고기와 새우, 매끄러운 야채, 차주전자 하나, 소금에 절인 땅콩 한 접시,, 나는 매번 서호에 올때마다 시간을 내어 혼자서 이 고색고향을 맛보러 오곤 했다. 난간에 기대어 제방의 곁에 있는 버드나무 그늘 속으로 잔잔한 호수물빛을 본다. 맑은 날은 맑은 빛, 눈비오는 날을 눈비오는 경치가 있다. 달이 버드나무끝에 걸리는 때면 더욱 의미가 깊다. 다행히 시끄럽지 않아서, 밤에 가면 혼자서 즐길 수 있을 때가 많다. 따뜻한 술을 마시면서, 늙은 점원과 호수의 풍경이나 물고기 새우의 시장가격을 아무렇게나 얘기하면 말로 다할 수 없는 즐거움이 있었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지마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은 원래 시골들판의 정취를 풍기던 누외루가 '인테리어'를 새로 했기 때문이다. &quot;이번에는 누외루가 면모를 모두 바꾸었다. 장소는 이전하지 않았지만, 3층건물에 옥상이 있는 서양식 점포가 되었다. 새로 칠한 페인트가 눈을 찔렀고, 호수에서 바라보니 건물위에는 전기환풍기가 미친듯이 돌고 있었다. 손님들도 가득 차서 비좁고, 점원들도 바뀌었다. 서양식의 긴 옷을 걸치고 있다. 원래의 그 나이든 친구들은 보이질 않았다. 한정일취(閑情逸趣)는 모조리 없어졌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탁자를 옮겨서 아래층의 길가에서 약간의 음식을 먹었다. 과연 요리도 모두 바뀌었다. 정말 가슴이 아프다.&quo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러 해동안 누외루는 계속 바뀌고 있다. 꽃을 조각한 나무창문은 쇠창문으로 바뀌었지 않은가? 파초선은 선풍기로 바뀌더니, 다시 중앙냉방식으로 바뀌었다. 누외루가 계속 이렇게 계속되면 아마도 거의 서양음식을 팔게 되지는 않을까? 왕증기가 누외루에서 더 이상 전통의 초어(醋魚帶&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새굴림; mso-bidi-font-family: 새굴림;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靶&lt;/FONT&gt;&lt;/SPAN&gt;)를 먹을 수 없게 되었다고 탄식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것은 누외루의 잘못이 아니다. 사실 서호도 바뀌고, 항주도 바뀌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허선과 백낭자가 만났던 단교도 일찌감치 바뀌어 버렸다. 나는 개보수하기 전의 단교사진을 보았다. 교신(橋身)은 높이 솟아 있었고, 양측에는 계단이 있었다. 다리의 중앙에는 개선문과 비슷한 석패방(石牌坊)도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여러가지 생각이 떠오르게 생겼다. 그러나, 1923년, 단교는 '대수술'을 받는다: &quot;단교는 백제의 북쪽끝에 있다. 외호(外湖)와 후호(後湖) - 속명은 북리호(北里湖)이며 백제의 서호산 북쪽의 호수-와 연결하는 교통로이다.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로 바꾸었다. 다리를 편평하게 바꾸었다. 그리하여 교신이 아주 낮아졌다. 보통 다리와 차이가 없게 되었다. 단교라는 명칭이 명실상부하지 않게 되었다. 살풍경한 느낌이 든다. 역사상, 문학상 가장 유명한 백제를 자동차도로로 만들다니, 고관, 부상, 거신(巨紳) 및 자제들의 편리를 위해서 많은 속세의 나쁜 기운을 가져왔다...&quot;(왕동령의 말) 또 다른 옛날 사진을 보면, 단교위의 석패방이 이미 철거되었다. 계단도 없애버렸다. 다리난간의 한쪽에는 전봇대를 만들어 백제 전체가 이엊진다. 단교는 자동차도로가 되었으니, 허선이 만일 길가에 서있다고 하더라도, 운명의 여인을 만나기 위하여 기다린다고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한 화이트칼라가 택시를 잡기 위해서 서 있다고 느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언젠가, &lt;&lt;백사전&gt;&gt;의 이야기도 사라지지는 않을까?&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단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단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서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뇌봉탑&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뇌봉탑&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백낭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백낭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허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허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백사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백사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서지마&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지마&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누외루&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누외루&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여아홍&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여아홍&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장원홍&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장원홍&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대갑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대갑해&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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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국의 광산 구조조정</title>
		<link rel="alternate" type="text/html" href="http://blog.daum.net/shanghaicrab/16152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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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8T12:52:06Z</updated>
	    <published>2009-10-28T12:52:0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중국경영보 2009. 10. 28. 인터넷판&lt;/P&gt;
&lt;P&gt;&amp;nbsp;&lt;/P&gt;
&lt;P&gt;2009년 10월 27일, 국토자원부, 공신부(工信部)등 12개 부위는 공동으로 &lt;&lt;광산자원개발통합업무를 진일보 추진하는데 관한 통지&gt;&gt;를 하달하여, 2010년에 광산자원통합업무를 계속하여 진행할 것을 표시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석탄, 철, 구리, 망간등 15종 광산자원은 추가적으로 통합될 것이고, 통합실시방안에 따라 통합업무를 완성하지 못한 지역은 2011년 1월 1일부터 광업권신설이 금지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통지에 따르면, 내년 3월말이전에, 각 성, 자치구, 직할시는 요구사항에 따라 조직편제와 통합심사비준방안을 마련하여 국토부에 비안하여야 한다. 2010년 연말이전에, 비준받은 추가통합추진실시방안에 따라, 통합업무를 완성해야하고, 건전한 광산자원관리관련제도를 건립해야 하며, 초보적으로 광산자원개발이용의 장기적으로 효율적인 매커니즘을 만들어야 한다. 2011년부터, 통합업무는 통상적인 관리로 복귀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정책추진하에, '통합'은 미래 중국광산자원업계의 핵심용어가 될 것이다. 국토자원부 정보센터의 불완전한 통계에 따르면, 2008년이래, 중국의 해외광업인수합병은 60건가량(Minmetals, chinalco등)이다. 인수합병사례의 목표광물종류는 철과 알루미늄을 위주로한 금속자원과 석유를 위주로한 에너지자원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5년전부터 시작한 광산자원통합과 비교하자면, 2010년의 광산자원통합업무는 더욱 주목을 끈다. 5년전의 광산자원제품가격은 비교적 낮았다. 당시에 시작한 통합업무는 안전생산을 위한 것이 주목적이었다. 오늘의 광산자원제품가격에서, 자원통합은 자원의 배치와 관련되고, 국유기업과 중앙기업이 이에 대하여 더욱 활발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연초부터 시작하여, 산서성에서는 사상유례없는 석탄광산자원통합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하여 국유대형광산이 소형석탄광산을 합병하는 구조조정이 이루어지고, 지방의 소규묘석탄광산의 수량을 줄였다. 산서석탄광산의 수량은 1500개이내로 통제할 것이다. 산서에서 추진한 '국유화'의 소규모광산통합모델은 전국범위에서 추진되고 복제될 수 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0월 9일, 내몽고는 석탄광산통합의 통지를 냈다. 이후 석탄자원을 배치할 때, 핵심을 국가와 자치구의 중점석탄전화, 종합이용항목에 기울어질 것이다. 동시에 공개입찰, 공매방식으로 획득한 광산권을 자원배치할 때, 조건을 적절히 완화시키는 동시에 특수하고 희귀한 석탄종류자원을 배치할 때는 프로젝트의 석탄은 현지에서의 전화율이 반드시 60%이상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내몽고에 이러, 하남성등에서도 속속 산서를 본받아서 업무처리하고 있다. 국유기업위주의 중소형석탄광산통합업무를 진행한다. 하남성 부성장 장대위는 10월 26일 방송국전화회의에서 하남성은 소형광산생산안전에 대한 장기적이고 효율적인 매커니즘을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조치중 하나는 산서를 본받아, 핵심기업이 30만톤이하의 생산능력을 가진 소형석탄광산을 합병하는 것을 추진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광산자원의 '대통합' 조치는 업계인사의 논쟁을 불러오고 있다. 어떤 사람은 '자원의 효율적 활용, 안전생산'등의 이유로 이를 지지한다; 어떤 사람은 '국유화와 재산권무시'등의 이유로 이를 반대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산서에서 몇개월동안 이루어진 '대통합'으로 보자면, 산서성의 석탄광산통합의지는 아주 강하다. 그리고 이미 되돌릴 수 없는 상황이다. 산서성의 이런 방식은 확실히 성의 석탄광산의 안전생산수준을 끌어올리는데 도움이 되고, 동시에 자원의 이용률을 끌어올리고, 세수의 유실을 방지하는데 유리하다. 그러나, 이런 장점을 가지고 이런 '비상적'인 조치가 인정될 수 있을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성대림은 블로그에서 '어떤 것은 계산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글을 통해서 이렇게 지적한다: 첫째, '국유화'문제. 국가의 민영경제에 대한 정책과 비교해보면, 이번 산서성의 조치는 그러한 정책에 위배된다; 둘째, 정부신용문제. 2005년, 산서성은 석탄자원에 대하여 개혁을 실시하면서, '자원은 유상으로, 재산권은 명확하게'라고 하여 많은 투자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런데, 4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판을 짜려고 하고 있다. 이렇게 하면, 정부의 신용은 어디로 가는가? 셋째, 사유재산의 보호문제. 구조조정대상이 된 석탄광산은 대부분 합법적인 것이다. 오너들은 투자, 개조등 여러 측면에서 자신의 합법적인 재산을 투자했다. 그런데, 사영석탄광산을 반드시 국유석탄기업에 매각해야 한다면, 게다가 가격까지도 정부가 정해버린다면, 이것은 '탈취'가 아닌가. 이는 공공연한 '위헌'이 아닌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산서성정부의 이런 조치는 연해지역의 이해관계가 있는 성들로부터 반발을 불러오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온주석탄투기단은 현재 곤경에 처해 있다. 그리하여 절강성정부의 우려를 불러오고 있다. 어떤 보고서에 따르면, 2008년 절강성의 석탄소비량은 1.2억톤인데, 성내에는 캘 수 있는 석탄이 없어, 100% 다른 성이나 나라에 의존한다. 객관적으로 말하자면, 산서의 절강상인들이 판매해주는 석탄이 절강성 소비량의 30%에 달한다. 이를 통하여 절강성은 에너지부족현상을 극복하고 응분의 공헌도 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리고, 현재 절강상인들이 산서에 투자한 석탄기업은 이미 450개가 넘는다. 총투자액은 500억위안이상이다. 절강출신 관련인사들도 1만명이 넘는다. 어떻게 지역이익을 보호하고, 공정경쟁을 유지할 것인가. 절강성정부는 현지기업가와 주민들의 압력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산서성정부에 법에 맞게 처리해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법치의 층면이면서, 지방정부경쟁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여러가지 주장이 난무하지만, 정부로서는 국계민생(國計民生)의 관점에서 각측의 이익과 다원적인 목표를 모두 돌보아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통합과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각종 문제와 은환(隱患)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비로소 국가에도 이롭고 백성에도 이롭게 하겠다는 정책의 원뜻을 살릴 수 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광산구조조정&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산구조조정&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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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title>영련촌(永聯村):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농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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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27</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7T11:58:06Z</updated>
	    <published>2009-10-27T11:58:06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정계진(丁啓陣)&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오늘 오전과 오후, 기본적으로 장가항(張家港)시를 시찰하고 참관했다. 강철공장의 생산라인 한 곳, 부유한 농촌 한 곳, 상업보행가 한 곳 그리고 생태원 한 곳이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압연공장에서 본 생산라인은 세계에서 동일한 생산라인중 가장 선진적인 두 개중 하나라고 한다. 온통 시뻘겋고, 두터운 강철이 회전축으로 달리는 것처럼 빠르게 들어가서, 몇번 정지하고, 몇번 눌리면서, 최종적으로 커다란 장방형의 얊은 강판이 되었다. 전체 과정은 기세가 무지개와 같고, 아주 강한 시청각적 충격을 주었다. 적지 않은 동료들은 감격해서 영혼의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장가항시지역의 상업보행가는 전국제일의 상업보행가라고 한다. 긴 보행가에 건축응 아름답고, 도로는 깨끗하며, 줄줄이 늘어선 점포는 명품브랜드전문점이 적지 않았고, 길거리를 걸어다니는 행인들오 편안하고 즐거워보였다. 생태원은 실제로 인공호수였다. 여러해전에 고속도로를 만들 때 흙을 집중적으로 파내서 만들어진 것이다. 호수의 중앙에는 옥대(玉帶)와 같은 제방이 있고, 호숫가에는 잔디가 심어져 있었다. 멀리서&amp;nbsp;고층건물이 거꾸로 호수에 비치니, 마치 신기루를 보는 것같았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필자가 말하고 싶은 곳은 부유한 농촌 영련촌(永聯村)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틀전에 곤산(昆山)에 갔을 때, 현지 간부가 나에게 이런 말을 해주었다. 영련촌은 그 유명한 화서촌(華西村)보다 부유하다고. 영련촌에 가보니 두 가지 주장을 들을 수 있었다: 하나는 현재 화서촌은 매년 세금과 이익으로 7억위안을 정부에 납부하지만, 영련촌은 14억위안을 납부한다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영련촌의 연간생산총가치는 화서촌의 3배라는 것이다. 두 가지 주장은 각각 장가항시 선전부의 간부와 영련촌 간부의 입에서 나왔다. 나는 어느 것이 더욱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어느 주장에 의하더라도, 한가지 사실은 충분히 설명된다: 영련촌은 아주 부유하다. 이 촌에 인사자료빌딩이 있고, 극장을 갖춘 문화센터가 있고, 문화센터앞에 광장이 있는데 상당히 아름다운 분수가 있는 것으로 봐서는, 두 가지 주장이 어느 정도 신뢰도가 있는 것같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여러가지 전시실을 보고, 촌간부의 상세한 소개를 들은 후에, 우리는 모두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이 촌이 이렇게 부유하게 된 것은 농업, 임업, 목축업, 어업등으로 성공을 이룬 것이 아니라, 그곳에 강철공장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이 마을은 기껏해야 이런 것을 알려줄 수 있을 뿐이다: 농촌이 부유해지려면, 공장을 만들고 도시화를 해야 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경찰차가 앞서고 차량행렬이 촌민들의 주택지구를 지나가면서 정차하지 않았다. 우리는 촌민의 가정에 들어가서, 깊이 살펴볼 수는 없었다. 다만, 참신한 건물을 보면 한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 촌의 촌민은 도시인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구나.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부럽냐고? 확실히 약간은 그렇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더욱 많이 드는 생각은 의문이다. 이런 마을을 농촌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일까?&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곤산, 장가항 내지 전체 소남(蘇南, 강소남부)지구에 부유한 농촌은 기본적으로 모두 농업으로 돈을 번 것이 아니다. 그들의 토지는 원래 희소하다. 거기에 각양각색의 공업단지를 조성해서, 경작가능한 농지는 더더욱 적어졌다. 실제로 농업에 종사하는 인구는 전체 촌민의 아주 일부분이다. 농업수익은 전체생산총가치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형편없이 적다. 보통촌민의 수입은 기본적으로 공장지분으로 이익배당받는 것과 공장에서 일하고 받는 급여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런 마을은 농촌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quot;공촌(工村)&quot;이라고 부르는 것이 나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나는 '공촌'의 치부현상은 특정한 역사시기에 나타나는 일종의 기형현상이라고 본다. 바꾸어 말하자면, '공촌'의 치부 배후에는 여러가지 불안한 요소가 있다. 사용하는 것은 모두 직업기술훈련이 필요없는 '농민노동자'들이다. 일반적으로 생산효율이 낮을 수밖에 없고, 자원이 낭비될 수밖에 없고, 환경이 오염될 수밖에 없고, 제품품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공통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 농민이 농사를 짓지 않고, 강철공장에 출근하는 것은 인재사용의 규율에도 맞지 않는다. 농민이 공장을 여는 것이 돈을 벌 수 있겠지만, 국가산업구조가 불합리하다는 것과도 관련이 된다. 이런 농촌공장이 국제적인 동종의 기업들과 장기적으로 경쟁할 능력을 갖출 것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나는 이렇게 얘기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화서촌과 영련촌. 모두 곡물값이 형편없고 농촌이 피폐한 시대의 졸부들이다. 사람들이 참관할 수 있고, 선망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좋기로는 따라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전세계의 농민들이 농사는 짓지 않고, 공장을 더 많이 짓고, 건물을 더 멋있게 짓고, 1인당 GDP수입이 더 올라가면 결과는 오직 하나이다: 모두 깡그리 굶어죽는다. 인류는 멸종하게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화서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화서촌&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장가항&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장가항&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영련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영련촌&lt;/a&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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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양절(重陽節)과 홀수에 대한 금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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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6T17:40:40Z</updated>
	    <published>2009-10-26T17:40:4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유엽원(劉曄原)&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고대에는 생산력이 낮았고, 사람의 생명력도 아주 취약했으며, 인식능력도 제한적이었다. 그저 편면적이거나 부분적인 경험을 축적한 것이 소위 지식이었다. 만일 어떤 일이 중복된다면, 그것을 규율로 인식하고, 이런 규율은 생활에서 사람들에게 금기 혹은 규범으로 작용하게 된아. 명절의 형성도 이른 금기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 그중의 하나는 바로 홀수에 대한 금기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숫자에 대하여 개략 인식하던 시기에, 사람들은 달의 차고 기우는 변화에 따라 12개월을 1년으로 인식하는 시간개념을 형성한다. 다만, 숫자배열에서, 사람들은 짝수를 좋아하고, 홀수를 싫어했다. 짝수를 좋아하는 것은 먼저 사람들의 자신에 대한 인식이었다. 사람의 손발은 대칭이다. 두 손이 서로 도와가며 일을 해낼 수 있고, 두 다리가 서로 엇갈리면서 앞으로 걸어갈 수 있다. 두 눈으로 사물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손발이 모자라는 것이고, 모자라는 것은 기형이다. 기형의 생활능력은 아주 약화된다. 사람은 가장 본질적인 의미에서 홀수인 사물에 대하여 두려움을 갖게 된 것이다. 그 다음으로 사람들은 생활에서도 대칭을 좋아하게 된다. 젓가락은 두 개가 되어야 음식물을 집을 수가 있다. 나무가 두 개이상 모여야 숲이 되고, 두 사람이 집안을 이룬다. 생활의 필요나 번식의 필요는 모두 짝수이다. 사람들은 자주 말한다. &quot;쌍교호주, 독목난행(雙橋好走, 獨木難行, 두 줄로 놓은 다리는 건너기 좋지만, 외나무다리는 건너기 어렵다)&quot; &quot;고장난명(孤掌難鳴, 손바닥 하나로는 소리를 낼 수 없다)&quot;. 신체와 생활경험에서, 짝수는 길리(吉利), 순창(順暢)과 연계하게 되면서, 짝수는 길수(吉數)라고 부른다. 전통에서 경사스러운 날에 채택하는 숫자는 결혼은 물론이고 선물을 보내는 것까지 모두 짝수이다. 이를 &quot;호사성쌍(好事成雙)&quot;이라고 부른다. 이와 반대로, 홀수는 짝수의 길리와는 정반대로 흉악(凶惡), 감가(坎&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바탕;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bid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坷&lt;/FONT&gt;&lt;/SPAN&gt;)의 대명사이다. 불길한 관념은 감각에서도 온다. 생활하는데 외로움, 기형등이 가져오는 불편함을 종합한 것이다. 수에는 짝수와 홀수가 있고, 짝수는 운수가 좋은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수는 사람의 운명도 대표한다. &quot;이광불봉연수기(李廣不封緣數奇, 이광이 제후에 봉해지지 않은 것은 숫자가 홀수이기 때문이다)&quot;라는 말까지 나온다. 홀수인 수는 바로 운이 좋지 않다는 또 다른 표현이 되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러한 숫자개념은 고대의 기나긴 시간동안 통했다. 사람들은 이것을 1년의 시간을 배열하면서, 아주 재미있는 문화현상으로 나타났다. 한편으로 1년의 12달은 6개의 짝수와 6개의 홀수로 나뉘어지는데, 홀수와 홀수가 만나거나, 짝수와 짝수가 만나면 모두 명절이 된다. 또 다른 한편으로, 중요한 전통명절은 대부분 홀수에 집중되어있다. 그것은 각각 1월 1일, 3월 3일, 5월 5일, 7월 7일, 9월 9일이다. 월과 날이 모두 홀 수로 겹치는 날이다. 1월은 정월이라고도 하는데, 정월은 바로 전통적인 1월 1일이고 5일까지 연속하여 명절이다. 3월 3일은 목욕절이다. 이어지는 것은 청명절이다. 5월 5일은 단오절이다. 7월 7일은 걸교절(乞巧節)이다. 7월 15일은 중원절(中元節), 9월 9일은 중양절(重陽節)이다. 10부터는 다시 반복되는 것이므로 별로 중시되지 않는다. 이를 보면 요란스럽게 지내는 전통명절은 바로 이렇게 불길한 짝수의 날에 지내게 된다. 중국의 전통가운데, &quot;봉흉화길(逢凶化吉, 흉한 일을&amp;nbsp;길한 것으로 바꾼다)&quot;의 사고전환모델이 있다. 우리는 명절의 즐거운 겉모습 뒤에는 홀수달 홀수날의 흉한 것을 길한 것으로 바꾸려는 마음이 들어있고, 일련의 명절활동은 흉기(凶氣)를 진압하고, 흉기와 싸워서 이기는 것을 기초로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홀수는 양수(陽數)로 인식된다. 양수가 둘이 만나면 중양(重陽)이 된다. 9는 숫자중 가장 큰 숫자이다. 그러므로 이 날은 대흉일(大凶日)이 된다. 이 날의 의식활동은 등고(登高, 높은 곳에 오르다), 상국(賞菊, 국화를 감상하다), 음주(飮酒), 흘해(吃蟹, 게를 먹다)가 있다. '등고'는 그 중에서도 본질적인 행사이다. 뒤의 3가지는 부가적인 활동이다. '등고'는 즉 야외로 나가서 산을 오르는 것이다. 이것은 도피이다. 평소 생활하던 환경을 떠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흉한 기운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 날은 온기(瘟氣)가 내려오므로, 사람들은 자신의 집을 떠나야 하고, 가급적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평안하다는 것이다. 도교의 전설에서는 아주 생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도사 비장방(費長房)이 친구에게 9월 9일에는 온 집안 식구를 데리고 높은 데로 올라가라고 한다. 친구는 거기에 따랐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니 돼지와 양이 모두 죽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생동감있게 9월 9일의 흉함을 말해주고 있다. 이날의 또 하나의 의식은 머리에 수유(茱萸)를 꼽는 것이다. 수유는 한약재이다. 애초(艾草, 쑥)과 마찬가지로 소독작용을 한다. 위장하는 의미도 있다. 왕유의 &lt;&lt;구월구일회산동제제&gt;&gt;라는 시에서 &quot;요망형제등고일, 편삽수유소일인(遙望兄弟登高日, 遍揷茱萸少一人, 멀리 형제들이 높은 곳에 오르는 날에, 모두 수유를 꽂았는데 한 사람이 빠졌구나)&quot;라고 하였는데, 바로 온 식구가 등고하는 활동을 보여준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를 보면 홀수와 홀수가 만나는 날을 명절이라고 하여 특수한 의식과 활동을 한 것은 사람들이 생명을 보전하려는 적극적인&amp;nbsp;조치였다. 시대가 발전함에 따라, 사람들은 점차 피흉(避凶)의 금기내용은 약화되고, 형식적인 의의만 남게 되어, 명절은 점차 단순히 경사스러운 날로 바뀌게 된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수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수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고장난명&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고장난명&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중양절&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중양절&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단오절&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단오절&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걸교절&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걸교절&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호사성쌍&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호사성쌍&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독목난행&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독목난행&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비장방&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비장방&lt;/a&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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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중국은 왜 자고이래로 인구가 많았는가?</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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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6T16:24:30Z</updated>
	    <published>2009-10-26T16:24:3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임의부(林毅夫)&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국과 유럽은 면적이 비슷하다. 그러나 2004년의 데이타를 보면, 중국인구는 12.8억이고, 유럽은 7.3억이다. 중국인구는 유럽인구의 거의 2배나 된다. 중국은 인구밀도가 높은데, 이것은 중국만의 특색은 아니고, 동아시아국가의 특색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동아시아지역의 인구수량이 많고, 인구밀도가 높은 원인에 대하여 여러가지 서로 다른 가설이 있다. 하나는 문화차이설이다. 중국인은 &quot;불효에 세 가지가 있는데, 후대를 두지 못하는 것이 가장 크다&quot;는 말이 있듯이, 대를 잇는 것을 중시하고 조혼의 풍습이 있다. 게다가 아들을 낳는 것을 매우 중시하여, 여럿을 낳게 된다. 왜냐하면 아들 하나만 두면 중도에 요절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종교요소설이다. 예를 들어, 동아시아의 종교는 모두 낙태를 제한한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상의 두가지 가설은 문화와 종교의 차이를 가지고 해석한 것이다. 그러나 왜 중국동부의 인구밀도가 중서부의 인구밀도보다 높은지는 설명해주지 못한다. 왜 한족지구의 인구밀도가 소수민족지구의 인구밀도보다 높은지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만일 종교적인 요소라면, 방글라데시와 파키스탄은 모두 같은 종교를 믿고 있으므로, 인구밀도가 비슷해야 한다. 그러나, 세계은행이 공표한 데이타를 보면, 1999년 방글라데시는 평방킬로미터당 981명이 살고 있고, 파키스탄은 겨우 175명이 살고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필자는 서로 다른 지역의 인구밀도차이는 주로 서로 다른 지역의 양육비용(養育費用)과 관련된다고 본다. 양육비용이 낮은 곳은 통상적으로 인구밀도가 높다. 중국의 지리적인 특징은 바로 서부가 높고 동부가 낮다는 것이다. 서부지역의 가장 높은 청장고원은 평균해발이 4000미터이상이다. 동부연해지역의 해발은 수백미터이하이다. 이런 지형조건은 태평양계절풍의 영향을 받아, 중국의 강우가 5월-10월에 집중된다. 농작물의 생장에 필요한 수분과 온도의 두 가지 중요한 조건을 볼 때 중국은 매년 5-10월이 '강우와 고온'이 동시에 존재하는&amp;nbsp;좋은 계절이 된다. 특히 양식 그 중에서도 벼(水稻)의 경작에 유리하다. &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유럽도 인류문명의 발상지이다. 그러나 유럽문명의 기원은 그리스, 로마등지이다. 비는 겨울과 봄의 두 계절에 집중된다. 바로 온도가 비교적 낮은 때이다. 강우와 고온이 서로 같은 시기에 오지 않는다. 그리하여 유럽은 보리(小麥)과 초원목축업이 발달했다. 서로 다른 작물의 단위당생산량은 크게 다르다. 중국의 1952년 농작물의 단위당생산량을 보면, 벼는 1무당 161킬로그램, 보리는 49킬로그램, 옥수수는 90킬로그램이며, 고량(高梁)은 79킬로그램, 조는 78킬로그램, 감자는 126킬로그램이다. 벼의 단위당 생산랴은 보리의 3배가량이나 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중국은 이처럼 벼생산에 적합한 지역이다. 그리하여, 단위면적당 식량생산량이 비교적 많다. 양식을 기준단위로 하여 계산하면 양육비용이 비교적 낮고, 양육가능한 사람수도 비교적 많다. 그리하여 인구밀도가 높아지는 것이다. 유럽은 보리경작에 적합하고, 목축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유리하다. 단위면적당 양식생산량이 비교적 낮다. 양식을 기준단위로 하여 계산하면 양육비용이 비교적 높고, 단위면적당 양육할 수 있는 사람의 수도 비교적 적다. 마찬가지로, 방글라데시는 벼농사에 적합하고, 사람의 생존원가가 비교적 낮다. 인구밀도가 아주 높아진다. 파키스탄은 비교적 건조하고 강수량이 적어서, 보리생산에 적합하고, 인구밀도가 낮아진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마찬가지의 이치로 중국의 인구총량이 왜 명나라이후에 돌연 급팽창했는지도 설명할 수 있다. 수천만에서 급속히 3,4억으로 늘어났는데, 그 원인은 콜롬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옥수수, 감자의 두 가지 신농작물이 중국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옥수수의 단위당생산량은 보리보다 아주 높다. 이상의 데이타에 따르면, 보리의 단위당생산량은 49킬로그램, 옥수수는 90킬로그램이다. 감자는 더더욱 높아서 126킬로그램이다. 그들의 단위당생산량은 모두 벼보다는 낮다. 다만, 감자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심을 수가 있다. 원래 양식을 생산하지 못하던 지역까지 감자는 심을 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기술혁신과 유사하다. 양식의 공급이 증가되면서, 가격이 하락하고, 사람의 생존원가도 하락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구는 계속 증가한 것이다.&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양육비용&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양육비용&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인구밀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인구밀도&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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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title>자치통감의 마지막 이야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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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6T15:58:28Z</updated>
	    <published>2009-10-26T15:58:2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장풍(蔣豊)&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자치통감&gt;&gt;(중화서국 1956년 6월 제1판)의 마지막 권은 294권이다. &lt;&lt;자치통감&gt;&gt;에 기록된 마지막 해는 959년이다. 왜 끝자리를 맞추어 960년까지 쓰지 않았을까? 당연히 당시는 중국이 서력기원을 사용하지 않았고, 사마광(司馬光)은 960년이라는게 있는지도 몰랐다. 다만, 사마광이 더 이상 쓸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이어지는 다음 해 즉 960년에는 &quot;진교병변&quot;이 일어나고 대송왕조가 개국하는 해이기 때문이다. 사마광이 목을 쓰다듬어보면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미 그가 아무렇게나 평론할 수 있는 연대가 아니라는 것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lt;자치통감&gt;&gt;에 기록된 마지막 이야기는 겨우 72자에 불과하다. 그것은 신용을 잃은데 관한 이야기이다. 혹은 하나의 외교에 관한 '관례'를 파괴한 것에 관한 이야기이다. 원문은 아래와 같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STRONG&gt;거란의 군주가 그의 외삼촌을 사신으로 당(唐)에 보냈다. 태주단련사 형한유(荊罕儒)는 그를 죽여버린다. 당나라사람들이 거란의 사신을 위해 청풍역에서 야연(夜宴)을 베풀었다. 술이 거나하게 되고(酒&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바탕;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bid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酣&lt;/FONT&gt;&lt;/SPAN&gt;), 옷을 갈아입으러 갔다(起更衣), 시간이 많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久不還). 가서 보니(視之), 목이 달아나 있었다(失其首矣). 이때로부터 거란은 당과 외교관계를 끊었다. (형)한유는 기주사람이다(冀州人也).&lt;/STRONG&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 내용을 보면 거란의 군주는 진정으로 이웃나라인 후당(後唐)과 사이좋게 지내려고 한 것같다. 그래서 그의 외삼촌을 사신으로 후당에 보낸 것일 것이다. 만일 그런 성의가 없었다면, 혹은 성의가 부족했다면, 거란왕은 굳이 그의 친척 그것도 웃어른을 외교사절로 보낼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냥 대신 한 명을 파견하면 그만이었을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태주단련사 형한우가 왜 거란왕의 외삼촌을 죽였는가? &lt;&lt;자치통감&gt;&gt;에는 그 원인에 대하여 아무 것도 기록하지 않고있다. '애국심' 때문인가? 아니면 중국고대사회에서 그저 '대의(大義)'를 중시하고, '신용''도덕'은 중시하지 않았던 것때문인가? 그리하여 '자고이래로 사신은 죽이지 않는다'는 관례를 깨트린 것인가?&lt;/P&gt;
&lt;P&gt;&amp;nbsp;&lt;/P&gt;
&lt;P&gt;&quot;야연&quot; &quot;주감&quot; &quot;갱의&quot;는 의미심장하다. 모두 음미해볼만한 구절이다. 생각해보라, '밤에 연회를 열다니' 얼마나 분위기가 나겠는가? '술이 거나하게 취하다'니 어떤 장면일지는 상상이 갈 것이다. '옷을 갈아입다'는 것은 그 뒤에 뭔가 준비한 게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목이 달아났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거란은 이로 인하여 후당과 절교한다. 오늘날의 말로 하자면, 외교부가 성명을 발표하여 양국간의 외교관계를 단절했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런데, 이때의 나라는 일찌기 아시아와 세계에 명성이 자자하던 그 이백, 두보, 백거이가 살던 당나라가 아니다. 이 당나라는 그 당나라가 아니었던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야기의 마지막 문구는 형한유가 '기주사람'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자고이래로 연조(燕趙)지역에 강개비분의 지사들이 많이 나왔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을까? 아니면 형한유의 불같은 성격에 대하여 해설하기 위하여 덧붙인 설명일까? 아니면 이 지방무장우두머리인 '단련사'가 '민족영웅'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함일까? 아니면 사람들에게 '풍소소혜역수한'의 그 자객 형가를 연상하도록 하기 위함일까? 형가는 바로 국제테러리즘의 선구자였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렇게 보자면, &lt;&lt;자치통감&gt;&gt;에 쓰여진 마지막 이야기는 양국간의 외교에 관한 일이다. 혹은 '섭외'관련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사마광이 이 이야기를 &lt;&lt;자치통감&gt;&gt;의 마지막 이야기로 삼은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지는 않았을까? 잘 모르겠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잘 추측할 수도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북송과 남송이라는 허리가 잘린 두 왕조는 모두 '외(外)'에 의하여 망하였다는 것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사마광&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사마광&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자치통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자치통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후당&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후당&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959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959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형한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형한유&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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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강유위(康有爲)의 세번의 서태후 암살시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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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shanghaicrab.16152923</id>
	    <author>
		    <name>중은우시</name>
	    </author>
	    <updated>2009-10-26T12:01:09Z</updated>
	    <published>2009-10-26T12:01:0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글: 수은하(水銀河)&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속담에 &quot;수재조반, 십년불성(秀才造反, 十年不成, 수재가 반란을 일으키려면 십년이 지나도 이룰 수 없다)&quot;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강유위에게 쓰면 딱 들어맞는다. 그는 전형적인 서생이다. 강유위는 정의감과 개인적인 호오를 가지고 일을 처리했다. 서태후와 영록등 실권자들을 처음부터 적으로 규정지어버렸다. 그리하여, 처음부터 그들은 변법유신의 반대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서태후는 무술변법후에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quot;강유위가 변법을 하려면 왜 나를 찾지 않는 거지?&quot; 이를 보면, 강유위는 비록 정치가의 포부는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몰라고, 정치가의 책략은 없었던 순수한 글쟁이에 불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그러나, 이 서생은 변법실패후에 여러번에 걸쳐서 멍청한 서태후암살시도를 했다. 결과는 모두 참담한 실패로 끝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첫번째 암살시도는 원세개를 찾아간 때이다. 사상관점으로 보자면, 원세개는 양무파(洋務派)의 후기지수이다. 사상은 어느 정도 유신파에 기울어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청일전쟁후, 기연으로 원세개는 강유위와 안면을 익히게 된다. 강유위의 제4차상소를 올려 광서제에게 변법을 요구했을 때, 도찰원, 공부에서는 그 상소문을 광서제에게 전달하려 하지 않았다. 이때 원세개가 도와준다. 이외에 독일이 교주만을 점령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원세개는 옹동화에게 글을 올려, 금일의 시국이 위험하기 그지없으니, 반드시 변법을 추진해야한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렇게 몇번 교류하면서, 강유위는 원세개가 자신과 같은 요강에 오줌을 눌 수 있는 사람이라고 여기데 된다. 그래서 서태후가 정변을 일으키기 전날, 그는 담사동(譚嗣同)을 보내어 원세개를 설득하려한다. 원세개에게 영록과 서태후를 죽여버리라고 말한다. 결과적으로 원세개가 배신한다. 당시에 이런 가요가 사회에 널리 퍼졌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육군자, 두로송(六君子, 頭&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FONT-FAMILY: 바탕; mso-hans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bidi-font-family: 'Times New Roman'; mso-font-kerning: 1.0pt; mso-ansi-language: EN-US; mso-fareast-language: KO; mso-bidi-language: AR-SA&quot;&gt;&lt;FONT color=#000000&gt;顱&lt;/FONT&gt;&lt;/SPAN&gt;送)&lt;/P&gt;
&lt;P&gt;원항성, 정자홍(袁項城, 頂子紅)&lt;/P&gt;
&lt;P&gt;매동당, 요기공(賣同黨, 邀奇功)&lt;/P&gt;
&lt;P&gt;강여량, 재몽중(康與梁, 在夢中)&lt;/P&gt;
&lt;P&gt;부지타, 시효웅(不知他, 是梟雄)&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육군자의 머리가 떨어졌다.&lt;/P&gt;
&lt;P&gt;원세개의 벼슬이 높아졌다(*항성은 원세개의 고향)&lt;/P&gt;
&lt;P&gt;동료를 팔아먹고, 공로를 세웠구나.&lt;/P&gt;
&lt;P&gt;강유위와 양계초는 아직 꿈속에 있다.&lt;/P&gt;
&lt;P&gt;그가 효웅인 줄도 알지 못하면서&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이를 보면 백성들은 강유위가 서생에 불과했다는 것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두번째 암살시도는 강유위가 호남사람인 심신(沈藎)을 보낸 것이다. 심신은 원래 담사동의 가까운 친구이다. 유신이 실패한 후, 여전히 강유위, 양홍(梁鴻)과 서신왕래를 계속했다. 강유위는 죽음을 두려워해 해외로 도피했고, 심신으로 하여금 서태후를 암살하도록 격려했다. 심신은 바로 승락한다. 그리고 짐도 챙기지 않고 북경으로 올라가서 암살행동에 돌입한다. 그러나, 그는 일개서생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시간이 한참 지나도록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했다. 조금후 그의 친구인 당재상(唐才常)이 자립군의거를 계획한다. 심신은 당연히 그 친구를 도우면서, 암살 건은 잠시 접어두었다. 자립군의거는 금방 실패로 끝난다. 심신은 무창에서 며칠간 숨어있다가, 상해로 몰래 숨어들어가고 다시 북상한다. 그리고 팔국연합군과 교분을 맺는다. 그는 외국의 힘을 빌어 만주족을 몰아내려고 했다. 그 당시 사상은 상당히 급진적이었다. 1903년 4월, 제정러시아가 &lt;&lt;동삼성교수조약&gt;&gt;을 위반하여 청나라조정에 7개항의 무리한 요구를 제기했다. 심신은 온갖 노력을 다하여 그 밀약내용을 알아내서, 그 내용을 처음으로 공개해버렸다. 그리하여 전국이 발칵 뒤집혀진다. 서태후는 피동적인 입장에 놓이게 된다. 마지막으로 심신은 친구인 오식쇠에게 배신당해 유신당 사람이라는 신분이 노출된다. 서태후는 그를 아주 미워해서, 그를 잡아서 죽이게 된다. 다만 만수절이므로 서태후는 공개적으로 그를 처결하기를 원하지 않아서, 형부에 명을 내려 옥중에서 곤장을 때려 죽이고, 외부에는 병사했다고 공표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세번째 암살시도는 강유위가 보황파(保皇派)의 핵심인물인 양철군(梁鐵君)을 파견한 것이다. 양철군은 소자산계급이다. 오랫동안 광서의 오주에서 소금판매를 해서 돈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강유위와는 영남의 대유(大儒) 주구강(朱九江)의 문하에서 공부한 사형제간이다. 그는 자신의 재물을 털어 강유위의 사업을 도왔을 뿐아니라, 무술정변후에는 집을 떠나 해외로 나가서 강유위와 함께 망명생활을 한다. 양철군은 무술을 잘했다. 그리하여 강유위의 호위역할을 맡았다. 두 사람은 나중에 주종관계와 비슷하게 된다. 이를 보면, 양철군은 강유위의 가장 가까운 심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강유위가 그를 파견했다는 것은 자신의 심복대장을 파견한 셈이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양철군은 임무를 받은 후, 진묵암(陳默庵), 양자강(梁子剛)등 몇명을 데리고 북경으로 들어간다. 웃기는 일은, 이번 암살계획의 경비로 1만은원을 잡았는데,&amp;nbsp;이를 모으지 못했다는 것이다. 양철군은 할 수 없이, 옛날로 돌아가서, 북경에서 장사를 한다. 등시구에 '길창(吉昌)'사진관과 '광명(光明)'동양차(車)회사를 차린다. 양철군은 이 장사를 이용하여, 빈번하게 경찰청, 신문계 및 궁내태감들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서태후의 소식을 탐지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양철군 대협은 1904년 11월에 북경에 도착한 후, 1906년 8월 체포되어 희생되기까지, 근 2년의 시간을 북경에서 머물렀다. 그동안 그는 돈을 모으고, 폭탄을 연구하고, 기회를 찾았다. 그리고 환관 요환경, 왕한장, 풍중평등과 사귄다. 심지어 서태후와 광서제의 기거, 건강상황까지 손바닥처럼 들여다보았다. 그 동안 그는 서태후를 '서양차' 혹은 '소형화물선'으로 유인하여, 폭탄으로 죽여버릴 계획을 세운다. 그러나, 여러가지 원인으로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1906년의 어느날, 양철군은 천진가에서 남해 같은 고향사람인 주기(朱淇)를 만난다. 주기는 원래 중흥회에 참가한 적이 있고, 나중에 간첩의 혐의를 받아서 혁명당에서 쫓겨났다. 그 후에 천진경찰청의 정탐으로 활약했다. 타향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니, 양철군은 처음에 조심했다. 그러나 여러번 얘기를 나누다보니, 상대방을 믿고, 자신의 진실한 신분을 털어놓게 된다. 8월 8일, 양철군은 체포당한다. 9월 1일, 혹형을 받은 후 양철군은 살해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태후암살이라는 같은 프로젝트에서 강유위는 세번이나 실패한다. 결국 이는 그의 전문적 수준이 너무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 관리를 잘하지 못하고, 매번 주도면밀한 계획을 세우지도 못했다. 강유위의 일생이 실패로 끝난 것이 우연만도 아니다.&lt;/P&gt;
&lt;P&gt;&amp;nbsp;&lt;/P&gt;&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심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심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서태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태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양자강&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양자강&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주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주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광서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광서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원세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원세개&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담사동&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담사동&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강유위&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강유위&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서태후암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태후암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양홍&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양홍&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양철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양철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보황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보황파&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주구강&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주구강&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4dwc&amp;amp;tagName=진묵암&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진묵암&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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