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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영원한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 안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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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1T08:44:00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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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5. -2.사탄의 거역과 유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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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1T08:44:00Z</updated>
	    <published>2009-11-11T08:44:0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 style=&quot;FONT-SIZE: 16pt; MARGIN: 26px 0px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4pt; COLOR: #000000; LINE-HEIGHT: 34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15. 사도직분에 필수적인 것들&lt;/FON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6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4pt; COLOR: #000000; LINE-HEIGHT: 34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B. 하나님 경륜에 관한 지식(엡3:2,9, 딤전1:4)&lt;/FONT&gt;&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6pt; MARGIN: 0px 0px 26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4pt; COLOR: #000000; LINE-HEIGHT: 34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2. 사탄의 거역과 유혹(창3:1-6)&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인간 창조는 대단히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것이다. 흙이라는 가장 낮은 물질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어 산 혼이 되게 하셨고, 생명나무가 있는 동산을 준비해서 하나님과 함께 거하는 영역을 맡기셨고, 이것은 하나님의 동산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거하는 영역이 확보된 것이고 창조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이것을 알아야 하는 것은 원래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육체를 먼저 알아야 병든 육체를 고칠 수 있고 원래의 TV나 라디오를 알아야 고장난 TV나 라디오를 고칠 수 있다. 모든 종교의 관심이 이것이다. 원래 사람이 어떤 것이었느냐는 것이다. 원래 사람은 선하다는 사람도 있고 악하다는 사람도 있다. 여러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남의 일이니까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지금 기독교는 세계 선교를 하고 있다. 실제로 기독교인이 세계 인구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기독교 문명이 현대문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확장되어 있고 영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원형을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회개도 많이 하고 선교도 많이 한다. 많은 노력을 하지만 원형을 모르기 때문에 원래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대로 회복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노력은 엄청나게 했지만 원형을 모르기 때문에 복구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지으신 동산을 깊이 인식하고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현재 인간의 상태와 사회의 상태를 보면 도저히 원형을 찾아볼 수 없다. 현재 기독교의 상태를 보아도 그 원형이 없다. 사람을 보고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신 그 형상과 모양을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과연 어떤 것이 하나님의 형상인지 사람이 원숭이보다 낫게 생겼다는 말인지 모르게 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이것은 감추어져 있고 가려져 있다. 그래서 감추어진 동산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라고 하는 것이다. 공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감추어진 어떤 영역에서 발하여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감추어진 영역’, 이것이 창세기 1장과 2장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세하고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 희망을 찾아야 한다. 그런 것이 있었다면 그렇게 회복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길을 알면 돌아갈 수 있다. 길을 모르면 아무리 노력해도 안된다. 노력만 한다고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인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왜 사람들은 헛된 노력을 하고 있는가? 사탄의 거역과 유혹 때문이다. 사람이 원래 이렇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 사탄의 개입으로 이렇게 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3 align=center&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1. 사탄 - 마귀&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가. 적, 원수&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사탄’의 의미는 적, 원수, 공격자, 대항자, 숨어 있는 자, 매복자, 속이는 자로 창세기 3장에서는 뱀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애굽 사람들은 뱀을 좋아해서 개선장군의 투구에 뱀의 형상을 새겼고 의사의 마크에도 뱀이 그려져 있다. 우리가 볼 때는 징그럽지만 좋은 면으로도 인식되어 있는 것이 뱀이다. 긍정적으로는 아주 지혜롭고 영리한 것이지만 사탄-마귀는 하나님의 계획에 대해서는 항상 적대적이고 공격적이며 매복했다가 대항하는 자이기 때문에 뱀이 가장 간교하다고 하였다(창3:1).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나. 천사 중의 일부 - 욥을 송사한 자&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사탄이라고도 하고 마귀라고도 하는 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탄은 천사 중의 일부다. 원래 하나님이 마귀를 만드신 것도 아니고 사탄을 만드신 것도 아니다. 천사 중의 일부가 반역을 일으킨 것이 사탄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5&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1) 욥을 송사하던 자&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욥기를 보면 욥을 송사하고 있는 자가 나온다. 욥기는 구약성경 가운데 가장 오래된 책 중의 하나로서 이스라엘의 문화사나 정신사는 욥기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욥기 1장 6절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 왔다고 하였다. 천사들이 있는데 거기 송사하는 자도 같이 있었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여호와께서 사탄에게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하셨으나 사탄은 “욥이 어찌 까닭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라고 하였다. 아들도 많고 재산도 많아서 모든 것이 풍족한데 어찌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위대해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것이 너무 많기 때문에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교회 안에서도 그런 경우가 있다. ‘저 사람은 찬양할만하다. 부족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이 다 있으니 그럴만하다. 나 같이 부족하고 가진 것이 없으면 찬송이 되겠느냐?’고 하는 경우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욥을 송사하던 자의 말이다. 사탄은 욥만큼 되면 하나님을 찬송하지 않을 자가 누가 있겠느냐고 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하나님께서는 욥의 모든 소유를 사탄의 손에 붙이셨다. 욥의 소유를 다 빼앗아도 그가 하나님을 찬송할 것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욥의 모든 소유를 빼앗았다. 그런데도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래서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다고 하셨다(욥2:3). 그런데도 사탄이 욥의 뼈와 살을 치면 그가 하나님을 욕하고 원망할 것이라고 하자 여호와께서는 그를 사탄의 손에 붙이셨다. 그래서 욥은 몸에 악창이 나서 재 가운데 앉아서 기와 조각으로 몸을 긁는 지경이 되었다. 그 지경에 되어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는지 시험한 것이다. 차라리 죽어 버리는 것이 쉽지 하루 종일 가려운 것처럼 어려운 것은 없다. 욥은 그런 지경이 되었다. 더구나 그의 친구들은 와서 율법적인 관념으로 그의 잘못을 추궁했으나 마지막에 욥이 승리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계시록에 보면 붉은 용이 나오는데 창세기 3장의 뱀이 성장해서 극대화된 것이 붉은 용이다. 더덕도 붉은 더덕이 좋고 해삼도 붉은 해삼이 좋다. 눈 밑이 붉은 사람은 건강하지만 눈 밑이 푸른 사람은 건강하지 못하다. 붉은 용은 힘이 세고 강력해진 용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5&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2) 예수를 시험한 자&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마태복음 4장에는 예수를 시험하던 자가 나온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그러면 이렇게 해 보라.” 하며 시험하던 자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5&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3) 교회를 핍박하는 영&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거기서 끝나지 않고 교회를 핍박하는 영이 마귀다. 사도들의 시대에 교회를 여러 가지 모양으로 핍박했는데 그것은 교회를 핍박하는 영에 의한 것이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해를 입은 여자가 나온다. 머리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열두 별의 면류관이 있고 발 아래는 율법을 상징하는 달을 밟고 있는 여자다. 이 여자가 남자아이를 해산하려고 구로하고 있는데 남자아이가 나오면 삼키려고 용이 기다리고 있다. 이것은 교회를 핍박하는 사탄을 묘사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지금도 교회를 교회 되지 못하게 하는 요소가 있다. 사람들은 늘 노력하고 있다. 좋은 교회가 되게 하려고 노력하고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말하는 참 교회가 나오지 않는다. 그 원인이 무엇인가? 노력이 부족해서인가, 사람이 어리석어서인가?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이것을 성경은 마귀가 그렇게 하고 있다고 말한다. 처음부터 성경은 내가 존재하는 것도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하셔서 존재한다고 했고 죄가 존재하는 것도 내가 스스로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죄를 짓게 했다고 했다. 이것이 기독교적인 입장이고 성서의 입장이다. 불교와 다른 점이 이것이다. 불교는 모든 원인이 다 자기 안에 있다고 하나 성경은 처음부터 창조도 창조자에 의해서 되었고 범죄도 마귀에 의해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것이 어떻게 축복이 되는가를 알 필요가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3 align=center&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2. 마귀가 하와를 유혹함&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5&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지식)로 유혹함&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마귀는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으로 하와를 유혹했고 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을 가지면&amp;nbsp;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이 유혹의 미끼였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면 어찌 되겠는가? 하나님과 분열된다. 사람은 하나님 같이 되어 하나님과 분열되었다. 하나님이 둘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같이 되면 좋을 것 같지만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면 당장 하나님을 대항하게 된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선악을 알게 하는 지식은 일하는 데는 필요하지만 지식은 생명을 죽인다. 하나님의 동산에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었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것이다. 그러면 왜 생명을 죽이는 선악과를 동산에 두셨는가? 성경에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선악과는 일을 하는데 필요한 양식인데 하나님의 동산에서 일을 하는 자는 천사다. 하나님이 부리는 자인 천사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일을 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미련한 사람은 나라님도 어쩌지 못한다는 말이 있다. 멍청하면 아무리 시켜도 안된다. 일을 하려면 지식이 있어야 하고 머리가 좋아야 하는 것이다. 타일을 붙여도 고르게 잘 붙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무리 가르쳐도 삐딱하게 붙여 놓는 사람이 있다. 공사를 잘했는지 보려면 화장실에 타일을 붙여 놓은 것을 보면 된다. 옛날에 우리 동네에 이발소가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 이발사는 항상 왼쪽과 오른쪽이 다르게 면도를 했다. 평생 짝짝이 면도밖에 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미련한 사람은 임금님도 어찌할 수 없다. 천사는 영리해야 한다. 그래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가 필요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나. 하나님 같이 된다고 유혹함&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사탄은 사람에게 하나님 같이 된다고 유혹했다. 그런데 왜 사람은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에 속았을까? 왜 생각도 없이 그냥 받아들였을까?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만들어졌다.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하셨다. 사람을 하나님 같이 되게 하려고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적으로 항상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한다. 그러니까 유혹을 받았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관계없는 사람은 유혹을 받지 않는다. 돈에 관심이 있으니까 주식을 하는 것이지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옆 사람이 주식으로 천만 금을 벌었다고 해도 전혀 관심이 없다. 관심이 있고 가능성이 있으니까 자기도 하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있으니까 하는 것이다. 아예 관심도 없고 재주도 없는 사람은 경마장에 가지 않는다. 자기도 하면 될 것 같으니까 경마장에 가는 것이다. 하와는 왜 그렇게 쉽게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을 먹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본성 속에 하나님 같이 되려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왜 하나님 같이 되려는 마음을 주셨는가? 하나님 같이 돼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법이 틀렸던 것이다. 생명으로 하나님 같이 돼야 하는데 지식을 통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했던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같이 돼야 한다. 그런데 생명으로 하나님 같이 되지 않고 지식으로 하나님 같이 되었기 때문에 사탄의 종이 되고 만 것이다. 생명으로 아들을 낳으면 천 대가 지나도 사람만 낳는다. 그러나 지식으로는 아들을 낳을 수 없을뿐만 아니라 낳는다 해도 낳을 때마다 다 다른 사람이 나온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하나님은 하나님 같이 되게 하려고 사람을 만드셨고 하나님 같이 되게 하는 방법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생명나무다.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가져야 하나님의 대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절대로 독립해서는 안된다. 지식은 독립하기 위한 것이나 생명은 독립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생명에서 끊어지면 시체가 되고 만다. 우리 몸에는 수십억 개의 세포들이 있다고 하는데 각 세포들은 전부 생명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어디서든지 생명이 끊어지면 다 죽어버린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생명 안에는 연결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다. 머리털 하나만 있어도 그 사람 속에 중금속이 얼마나 있는지 알 수 있는 기계가 있다고 한다. 머리털로 알 수 있으면 발톱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병원에 가면 검사를 한다며 피를 뽑는데 내 생각에는 오줌만 있어도 가능할 것 같다. 동양의학에서는 우리 몸은 하나라고 한다. 머리털이나 발톱이나 하나다. 홍체 검사를 하면 눈만 보고도 몸의 상태를 다 알 수 있다. 눈 하나 속에도 몸의 모든 것이 들어 있고 손바닥에도, 발바닥에도, 심지어는 손가락 하나에도 몸의 모든 것이 다 들어 있다. 수지침의 원리가 그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생명은 연결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연결되지 않은 것은 곧 죽음이다. 죽음은 단절을 의미한다. 생명에서 끊어지면 죽는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형상으로 지으시고 자신을 대리하게 하셨다. 그러려면 하나님과 같아야 한다. 나와 같은 사람이라야 나와 같은 일을 한다. 내 마음과 똑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어떻게 나와 완전하게 똑같을 수 있는가? 그것은 생명으로 연결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사람은 아주 많은 유혹을 받고 있는데 자기가 말씀을 듣고 깨달아서 독립하려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독립하려는 생각, 이것이 선악과다. 생명은 계속 흐르고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독립이 아니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예수님이 독립하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하실 수 있었을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인데 독립하실 수 있지 않았겠는가? 그분은 무엇이든 하실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그분은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왜 “아버지여 이 잔을 내게서 옳기옵소서.”라고 하셨는가? 독립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독립하실 수 없는 데서 하나님 아들이심이 드러났다. 왜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라고 하셨을까?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왜 그러셨을까? 그런데 거기서 참 사람이 드러났다. 거기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실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은 거기서 죽었다. 그런데 바로 거기서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었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제자들이 제일 답답했던 것이 그것이다.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으며 죽은 사람도 살리신 분이 무엇 때문에 겟세마네로 가시느냐는 것이었다. 다 된 사람이고 완전한 사람인데 그 사람에게 무슨 순종과 복종이 더 필요하겠는가? 그런데도 그분은 이끌려가셨다. 그래서 제자들은 뒤따라가면서 답답했던 것이다. 가롯 유다는 왜 예수를 팔았던가? 답답해서였다. 도무지 그분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가 원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니고 분명히 그분은 그런 사람이 아닌데 그 길로 가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주사위를 던졌다. 결코 그분이 미워서 판 것이 아니라 답답해서 판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여러분도 나를 따르면서 그런 경험을 해 보았을 것이다.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 모르니까 답답했을 것이다. 그래서 뭔가 까발려 보면 정체가 드러날 것이라는 생각을 우리 형제들도 많이 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가롯 유다의 마음을 알겠는가? 형제들이 그런 것을 보았기 때문에 아는 것이다. 그 끄나풀이 없어도 되는데 왜 끄나풀이 있어서 겟세마네로 가셨는가? 무엇 때문에 십자가로 가셔야 했는가? 해탈을 하고 도통을 하려는 것은 독립하려는 것이다. 항상 예속되어 있으려면 독립하려고 할 필요가 없는데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독립하려고 생각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러나 생명은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죽은 것이다. 생명은 다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이다. 뼈와 살은 전혀 질이 다르다. 그런데 뼈와 살 사이에는 막이 있어서 그 막을 통해서 살과 뼈가 연결된다고 한다. 그 막이라는 묘한 장치를 통해서 살 속에 있는 것이 뼈에 필요한 것으로 바뀌어 들어가고 뼈에 있는 것이 살에 필요한 것으로 바뀌어 나온다는 것이다. 학이나 오리가 얼음 위에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무릎에서 온도를 차단하는 장치가 있기 때문이다. 아기가 자궁에서 자라는 것도 마찬가지로 막 속에서 자란다. 자궁과 아기는 이물질인데 그 사이에 막이라는 중보가 있어서 살고 있는 것이다. 생명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바로 죽음이다. 뼈가 깨지거나 부러졌을 때 막이 그대로 있으면 뼈가 붙지만 막이 찢어지면 뼈가 붙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막은 그대로 두고 무릎관절을 잘라내어 쇠를 넣을 수 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생명은 전부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죽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같이 되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왜 연결되지 않으려고 하는가? 그것은 사탄에게 속았기 때문이다. 사탄은 사람을 독립적인 존재로 만들어서 하나님 같이 되게 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게 하기 위해서 하와를 유혹한 것이다. 생명은 반드시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 같이 되게 하려고 지으셨다. 그 방법은 생명의 연결을 통해서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통해서 하나님 같이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3 align=center&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3. 하와가 사탄의 유혹을 받아드림&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가. 인간의 경계를 넘어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유혹에 빠짐&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사람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유혹에 빠졌다. 인간의 경계를 넘어가려 하면 사탄의 유혹을 받는다. ‘나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 이상이 될 수 없다.’고 알면 유혹을 받지 않지만 사람의 경계를 넘어서려고 하면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하나님 같이 되려는 본성이 있기 때문에 사람은 자기가 노력해서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은 인간도 그렇게 되고 싶은 것이고 사탄도 그렇게 만들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둘이 의기투합했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나.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은 괴물이 되는 것임&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세상은 하나님 같이 된 사람을 보고 영웅이라 하고 초월적인 사람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위대해지고 상상을 초월하는 놀라운 사람을 보고 박수를 친다.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기 때문에 대리 만족을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러나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된 것을 성경은 괴물이라 하였다(계13장, 16:12~).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인 짐승은 괴물이다. 우리는 하나인 머리도 평생을 써도 다 쓰지 못하는데 머리가 일곱 개나 되면 얼마나 머리가 좋겠는가! 머리가 하나인데도 골치가 아픈데 머리가 일곱 개면 얼마나 더 골치가 아프겠는가! 사람들은 그런 것을 보고 신처럼 숭배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요한계시록 13장에 나오는 괴물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다. 바다는 세상을 의미한다. 당시는 지중해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당시의 세계관으로 바다는 세상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세계를 지배하는 짐승이다. 세상을 지배하려면 머리가 뛰어나야 한다. 머리가 일곱 개면 누구나 왕이 될 수 있다. 그 짐승은 뿔이 열 개나 되는 대단히 위대한 짐승이나 성경은 그것을 괴물이라 하였다. 또한 새끼 양같고 용처럼 말하는 짐승이 땅에서 올라온다(계13:11). 새끼 양처럼 연약해 보이지만 용처럼 말하는, 사람이 상상할 수 없는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짐승이다 . 동물들 중에서 가장 강하고 좋은 것을 모아서 합성해 놓은 것이 용이다. 그러나 새끼 양같은데 용처럼 말하는 것은 괴물이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은 정치적인 괴물이고 땅에서 올라온 짐승은 종교적인 괴물이다. 세상에는 여러 방면에서 괴물들이 있다. 옛날에는 우리도 그런 사람들을 경례하고 존경했으나 그것은 괴물이라고 알아야 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3 align=center&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4. 하와가 그것을 아담에게 줌으로써 아담은 먹게 되었음&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하와는 그것을 아담에게 주었고 아담은 그것을 먹었다. 하와가 주니까 아무 생각도 없이 먹었던 것이다. 아담은 왜 생각도 없이 그것을 먹었는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지으셨으니까 아담과 하와는 둘이 아니요 하나다. 한 몸이기 때문에 하와가 먹은 것은 바로 아담에게 들어간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하와가 먹은 것은 즉시 아담에게로 전달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런데 이상한 것은 받아들인 것은 하와인데 저장된 것은 아담이라는 것이다. 하와는 받아들였고 아담에게는 생명이 된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인간을 말할 때 ‘하와’라고 하지 않고 ‘아담’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와는 단지 받아들이는 창구 역할만 했지만 선악과의 생명은 아담에게로 들어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하와는 외부로부터 무엇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존재다. 그러니까 아기를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남자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아기를 낳지 못한다. 받아들이는 기능과 저장하는 기능은 다르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와를 통해서 받아들이고 아담에게 저장되고 활용되도록 만들어 놓으셨다.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하와가 먼저 먹고 그 다음에 아담에게로 들어갔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나쁜 것을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은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 엉겅퀴가 잘 되는 밭에는 밀도 잘 되지만 엉겅퀴가 잘 안되는 밭에는 밀도 잘 안된다. 그러므로 무엇을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지 잘 받아들이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하와는 자기 기능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3 align=center&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유혹의 실체&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ㄱ.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할 목적으로&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왜 사탄은 사람을 유혹했는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할 목적으로 유혹한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 사회가 불안하고 사람이 악한 것은 사탄의 유혹 때문이라고 생각하나 그 이전에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려고 선악과를 준 것이다. 선악과를 먹었다 해서 반드시 악한 짓만 하는 것이 아니다. 선과 악을 아는 지식을 가졌기 때문에 기왕이면 선한 일을 하려고 한다. 악한 사람이 되려는 사람은 없다. 사탄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할 목적으로 선악과를 준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어떻게 방해했는가? 인격을 변질시키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케 한 것이다. 그래서 거역을 하게 만든 것이다.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 생명을 받아 그 생명에 연결되어서 함께 살아야 할 인생이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져서 독립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하나님께 거역하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는 선악을 아는 지식이 들어왔기 때문에 모든 것을 스스로 판단하고 하나님까지도 판단한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기가 선별한다. 자기가 선하다고 인정하는 하나님만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가 선하다고 인정하지 않는 하나님은 없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믿은 하나님은 자기가 생각할 때 가장 선한 존재다. 그래서 그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인데 그것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갖고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인격의 변질이다. 그 결과로 하나님을 거역하게 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리고 생명에서 분리되게 한 것이다.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면 분리되고 만다. 아버지와 아들이, 아내와 남편이, 형님과 동생이 분리된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다. 창세기 4장 이후는 분리에 분리를 거듭하는 역사다. 서로 말을 알아듣지 못하고 다 흩어져 버렸다는 것은 다 분리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탄은 생명에서 분리되게 한 것이다. 생명에서 분리된 것을 성경은 죽음이라 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거역과 분리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기 위한 것이다. 사람이 거역과 분리 가운데 들어가면 하나님 나라는 불가능하다. 아무리 하나님 나라를 위하려고 해도 안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순종하려고 애를 쓰고 애걸복걸하는데도 불구하고 왜 하나님 나라가 안되는가? 이미 인격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인격이 변질되었기 때문에 저절로 생명에서 분리되고 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무릎이 닳도록 신령하게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교회 건축이 잘되겠는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런 사람이 교회 건축에 방해가 된다. 너무 신령하기 때문에 교회 건축에 끼일 수 없다. 다른 나무와 비슷해야 건축에 들어갈 수 있지 다른 나무보다 월등하게 좋은 나무가 어떻게 다른 나무들 속에 들어가겠는가? ‘거기는 내가 끼일 곳이 아니다. 내가 어떻게 그 속에 끼겠느냐?’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에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많고 놀라운 역사를 일으킨 사람도 많았지만 그런 사람들로는 건축이 안된다. 위대한 일은 할 수 있지만 건축은 안된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위대한 사람일수록 더욱 안된다. 하나님께 충성스러운 것 같은데 왜 건축이 안될까? 그것은 선악과를 먹고 인격이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ㄴ. 예수의 인격적 승리 안에서 승리함(인격을 지킴)&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것은 예수의 인격적 승리 안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것이 마귀의 시험이었다.&amp;nbsp; 돌을 떡이 되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세상을 놀라게 할 일이겠는가? 줄기세포 하나 때문에도 난리가 났는데 돌로 떡을 만들었다는 뉴스가 나면 세상이 뒤집혀질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다면 우리나라가 세계 최고가 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이 말이 간단한 말같지만 정말 특이한 말이다. 어떻게 돌로 떡을 만들라는 것인가? 미친놈이 아닌가?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온 인류는 돌로 떡을 만들기를 기대하고 있다. 왜 초월자가 되려고 하는가? 돌로 떡을 만들어 보려는 것이다. 말은 돌로 떡을 만들라고 했지만 그 내용은 하나님 같이 되라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러므로 예수의 승리 안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 사람이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이 생명나무다. “나는 생명나무를 먹고 산다.”고 하신 것이다. 돌로 떡을 만들어서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생명나무를 먹고 생명나무에 연결되어서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우리 동네에는 수도가 없었다. 처음에는 갱도 속에 고인 물을 정수해서 먹었는데 물이 너무 더러워서 산에서 물을 끌어다 먹었지만 그것도 대구에 비가 잘 오지 않아서 애를 먹었다. 그런데 지금은 수도가 들어왔다. 수도가 들어오고 보니까 일이 하나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수도꼭지만 열면 물이 나온다. 하나님과 우리가 생명으로 연결되면 이렇게 쉽다. 그러나 사람은 이상하게도 자기가 독립해서 자기 우물에서 물을 길어먹으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아서 승리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것만 알면 간단하다. 우물을 파서 먹을 것인가 아니면 수돗물을 먹을 것인가?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ㄷ. 예수의 인격적 구속으로 회복함(롬3:23-24, 엡1:7, 골1:14)&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리고 원래의 위치를 회복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어떻게 회복되는가? 예수의 인격적 구속으로 회복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분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는 구속함을 받았다. 그분이 우리를 대표해서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위치를 안 것이다. ‘나는 피조물이다. 나는 인생이다.’ 이것을 안 것이다. 물 위를 걷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여도 역시 인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달나라에 가도 인생이고 별나라에 가도 인생임을 알아야 한다. 시험에 합격해도 인생이고 불합격해도 인생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로마서 3장 23-24절에는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하였다. 하나님은 인생의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의롭다 하신다. 우리가 무슨 업적을 이루거나 도덕적인 수양을 해서 의롭다 하시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의롭다고 하신다. 피조물은 피조물의 위치에, 개는 개의 위치에, 소는 소의 위치에 있는 것을 보고 의롭다고 하신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관계가 정상적인 것이 의로운 것이다. 개는 범죄한 일도 없고 불의를 행한 일도 없다. 개는 개의 위치에 있으니까 하나님은 개를 보고 의롭다고 하신다. 똥을 싸는 돼지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의롭다고 하신다. 인간은 다 의롭고 동물은 다 불의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동물은 다 의로운데 사람만 불의하다. 만물은 다 참된데 오직 사람만 불의하다. 사람은 위치를 이탈했다. 능력도 있고 재주도 있다. 사람만큼 훌륭한 존재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왜 불의하다고 하시는가? 그것은 위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위치에 있을 때 의롭다 하신다. 그러므로 의롭다 하시는 것은 내가 잘하고 잘못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정상적이면 의롭다고 하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나의 위치에 있어야 하나님은 의롭다고 하신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4&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0000ff&gt;ㄹ. 유혹자에 의해서 유혹되었으므로 구원의 가능성이 열려있음(여자의 운명)&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사람은 유혹자에 의해서 유혹되었기 때문에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만약 사람이 지혜가 없고 능력이 없어서 타락했다면 구원이 불가능하다. 내가 지혜가 없어서 타락했는데 어떻게 더 지혜롭게 될 수 있겠는가? 원래 지혜가 없어서 그렇게 되었는데 노력한다 해서 지혜가 나오겠는가? 개에게 개 이상의 지혜를 가지라고 한다고 지혜가 만들어지겠는가? 불교에서는 인생의 문제가 지혜가 없어서 생긴 것이라며 지혜를 깨달으려고 한다. 그러나 깨달아 봤자 있던 지혜를 깨닫는 것이지 없던 지혜가 어떻게 나오겠는가?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아담은 깨달을 필요도 없었다. 아담에게 업이 있었겠는가, 걷어낼 것이 있었겠는가? 아담은 자기의 지혜로 먹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완전한 지혜로 먹은 것이다. 다시 지혜를 얻거나 해탈을 한다 해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아담은 사람의 원형 그대로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속았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아무리 지혜가 있어도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자에게 속을 수밖에 없다. 지혜만 있으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사탄이 나보다 수가 낮다면 이길 수 있겠지만 사탄은 아담보다 수가 높다. 그래서 아담을 유혹했던 것이다. 천재가 나와서 어쩌다 해탈을 했다고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렇게 될 것 같지 않다. 한두 명은 될지 몰라도 우리 같은 사람은 불가능하다. 어느 정도까지는 지혜를 개발할 수 있겠지만 아담 이상 지혜로울 수 있겠는가?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아담은 모든 인류의 대표자다. 아담 이상의 사람은 없다. 아담이 유혹을 받은 것은 아담 이하의 모든 사람에게 전가된 것이다. 개별적으로 선악과를 먹지 않았지만 우리는 아담 보다 밑에 있기 때문에 원죄가 자동적으로 전가된 것이다. 시험을 보면 커트라인 이하로는 다 불합격이다. 커트라인 이하로는 개별적으로 통지도 하지 않는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어떤 사람도 아담보다 나은 사람은 없다. 아담은 인류의 총화인 것이다. 그러니까 ‘아담은 속았어도 나는 안속는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아담이 유혹자에 의해서 유혹되었다. 그래서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불가능하지만 구원자가 오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창세기는 창세 때 쓰여진 책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을 나와서 홍해를 건너고 광야를 지나서 가나안 땅에 나라를 세운 이후에 쓰여진 책이다. 그런데 어떻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이 나왔고 사탄이 유혹했다는 말이 나왔는가? 그들은 애굽에서 실제적으로 경험했던 것이다. 그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바로에게서 나올 수 없었다. 그런데 여호와로 말미암아 그들은 애굽을 나왔다. 그래서 이런 사상이 나온 것이다. 여호와로 인해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창조도 창조자에 의해서 된 것이고 구원도 구원자에 의해서 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또한 유혹도 유혹자에 의해서 된 것을 알았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그들은 실제적으로 경험했다. 이론적으로 머리로 생각한 것도 아니고 명상을 하다가 깨달은 것도 아니라 실제로 역사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진짜로 힘 있는 자에게 잡히면 구원자가 오기 전에는 빠져나올 수 없다. 나보다 힘센 자를 이길 수 있겠는가? 불가능하다. 누구든지 다 이길 수 있고 무엇이든지 다 극복해 낼 수 있겠는가? 인간이 할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가능하게 해 주는 구원자가 필요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인간이 지혜가 없어서 속았다면 없는 지혜가 어디서 생기겠는가? 표범이 얼룩무늬 반점을 없이 할 수 있겠는가? 아담이 지혜가 없어서 속았으면 어떻게 지혜가 나오겠는가? 갈고 닦는다고 돌멩이가 옥이 되겠는가? 아무리 잘 갈고 닦아도 돌멩이는 돌멩이다. 그런즉 타락이 유혹자로 말미암았기 때문에 구원자가 있다는 말씀이 얼마나 큰 축복인가!&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우리는 모두 사탄에게 속았던 자들이다. 그런데도 싸우기는 우리끼리 싸웠던 것이다. 어느 조용한 동네에 멧돼지가 내려와서 막 수확을 하려던 고구마 밭을 망쳐 놓았다. 멧돼지가 먹을 것만 먹고 가면 괜찮은데 문제는 밭을 다 망쳐놓고 간다는 것이다. 사람이 참외 서리를 해도 온 참외밭을 다 버려놓는데 멧돼지야 오죽하겠는가? 그렇지만 멧돼지는 새벽이 되면 가면서 뭐라고 하겠는가? ‘인간들이 아니면 편하게 먹을 수 있을 텐데 밤에만 몰래 왔다가려니 귀찮다.’며 투덜거릴 것이다. 그 다음날 아침에 동네에 난리가 났다. 자기는 울타리를 잘해 놓았는데 옆에서 제대로 해 놓지 않았기 때문에 멧돼지가 들어와서 피해를 보았다며 싸움이 난 것이다. 그 사람도 밭을 다 망쳐서 억울한데 “너 때문에 망쳤다.”고 하니 서로 싸우는 것이다. “너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 다 그것이다. 뭔가 피해를 받았기 때문에 ‘너 때문’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서 피해를 받지 않는 사람이 와서 보고 “그럴 수도 있지 그런 것을 갖고 싸우느냐? 멧돼지도 배고픈데 먹어야 하지 않느냐?”고 하면 얼마나 밉겠는가? 자기는 피해가 없다고 그런 소리를 하니까 사람들은 “너도 밭을 망쳐 봐라. 그러면 그때도 이런 소리를 하겠느냐?”며 따질 것이다. 그러다 보면 온 동네에 싸움이 벌어진다. 서로 남의 탓을 하면서 난리가 난다. “네가 잘못해서 내 밭을 망쳤다.”고 하고 “네 밭 때문에 내 밭도 망쳤다.”며 싸움이 난다. 그런데 그렇게 하는 동안에 멧돼지는 잊어버린다. 멧돼지는 없어져 버렸고 옆 사람이 적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잘못하면 대대로 싸우게 된다. 시골에 가면 대대로 싸우는 경우가 있다. 아버지들끼리 싸우다가 휘두른 삽에 맞아 죽으면 대대로 원수가 된다. 문제는 멧돼지인데 그놈을 잡으러 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자기들끼리 싸우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나는 오늘 아침에 이런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나도 별 수 없구나. 멧돼지 때문에 생긴 문제였는데 네 탓이니 내 탓이니 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므로 멧돼지를 잡을 사람이 필요하다. 인생 중에 깨달은 사람은 네 탓도 내 탓도 아니라 멧돼지 탓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나 범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못하고 ‘네가 울타리를 잘못해서 멧돼지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리 밭까지 망쳤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문제는 어떻게 해결될 것인가? 사탄을 박멸할 자가 있어야 해결된다. 그렇지 않으면 내년에도 고구마 밭을 망치고 만다. 아무리 울타리를 잘 쳐도 빈틈이 있게 마련이다. 멧돼지가 보면 들어갈 구멍은 얼마든지 있다. 문제는 멧돼지를 잡는 것이다. 그놈은 밭을 다 망쳐놓고도 ‘인간들 때문에 내가 편히 먹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다른 동네 밭을 습격한다. 그놈은 또 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동네 저 동네로 자기 사업을 충실히 전개하고 있다. 그런데도 그놈이 한번 지나가고 난 동네마다 싸움이 벌어져서 옥신각신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하나님은 우리에게 하와는 유혹자에 의해서 유혹된 것이라고 말씀해 주셨다. “구원자가 있다. 나는 너희를 구원할 수 있다.”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이 복음이다. 하나님 말씀은 복음이 아닌 말씀이 없다. 우리에게 은혜 되지 않는 것이 없고 복음이 되지 않는 것이 없다. 별것 아닌 말 같은데도 복음이 되고 구원의 길이 열리니 신기하고 이것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생각에서는 “유혹자에 의해서 유혹되었다.”는 말이 나올 수 없다. 하나님 말씀은 얼마나 소중하고 성경은 얼마나 귀중한 말씀인가! 그러므로 여러 말로 시끄럽게 하지 말고 마귀를 박멸해서 완전하게 정복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기다려야 한다. &lt;/SPAN&gt;&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lt;/SPAN&gt;&lt;/P&gt;
&lt;P class=HS3 align=center&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quot;&gt;&lt;FONT color=#ff0000&gt;[ 기&amp;nbsp; 도 ]&lt;/FONT&gt;&lt;/SPAN&gt; &lt;/P&gt;
&lt;P class=HS1&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quot;&gt;감사하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어리석어서 우리 생각밖에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체질을 뼈속까지 잘 아셔서 우리에게 대책을 세워주시고 길을 열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어디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시기 때문에 어디서 해결될 것인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빛이 되고 진리가 되고 생명이 되셔서 우리가 어리석을지라도 주님은 구원자가 되시고 능력이 되시며 등불이 되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당신의 놀라운 일에 참여한 것이 감사하고 당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합니다. 당신의 말씀이 복으로 여겨진 것이 감사합니다. 들을 귀를 열어 주셔서 주의 말씀을 듣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lt;/SPAN&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48.민1-36장. 광야 여정 요약(2)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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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shimnk.2058</id>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38:50Z</updated>
	    <published>2009-11-10T14:38:5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1-36장. 광야 여정 요약(2)&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민수기 마지막 시간이다. 창세기, 출애굽기, 민수기를 상고해오는 동안에 이것이 지금 현재적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고, 또 앞으로 전진하고 있는 교회와 완전하게 일치하는 그런 모습이라는 걸 보게 된다. 그래서 이것은 바로 교회의 완전한 예표다 그렇게 말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첫 번째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이 의해서 선택된 백성이다. 선택됐다는 말은 그의 목적을 위해서 구별됐다는 뜻이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선민이니라. 네 하나님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했다.(신7:6)”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교회가 바로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선택된 존재이다. 교회는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 봉사해야 교회지 그렇지 않으면 교회가 아니다.” 하는 식으로 얘기하는 사람이 있다. 물론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으니까 세상에서 어떤 일에 우리가 협력도 해야 되고 도움도 줘야 하고 이런 필요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러나 그것이 교회가 되고 안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목적은 다른 데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마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만 선택된 백성이듯이 교회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선택된 백성이기 때문에 전적으로 사실은 세상과 무관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생활과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선택받은 사람이지 결코 세상을 위해서 선택된 사람이 아니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우리가 세상에서 직업도 가지고 있고 일도 하고 있고 여러 가지 하고 있어도 그 목적은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어쩌면 세상에 대해서 우리는 이방인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는 이걸 보고 ‘나그네라’ 이렇게 표현을 했다. “교회는 땅위에서 나그네다.” 이 말은 세상 안에서 나그네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주관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에 대해서는 나그네와 같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구원되고, 또 타락한 세계에서 구원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우리는 꼭 같은 그런 입장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내려가서 바로의 속박에서 노예생활을 해왔다. 거기서 구출된 것이 바로 이스라엘이다. 우리가 과거에는 세상의 속박에서 노예적인 생활을 해왔다. 거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우리가 구원되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되어 나온 것인가? 그것은 심판을 통해서 구원된 것이다. 심판은 공정해야 되고 동일해야 하기 때문에 애굽인에게 내린 것이나 이스라엘에게 내린 것이나 같아야 된다. 사실은 그날 밤에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구원을 받았는데 이것은 죽음의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동일한 죽음 속에서 살아 나온 것을 말한다. 나무나 짚이나 이런 것으로 지은 집도 있고, 쇠로 지은 집도 있는데 불이 날 때에 나무나 짚으로 지은 것은 타게 될 것이고, 쇠로 지은 것은 타지 않게 될 것이다. 둘 다 똑같이 불로 심판을 받는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심판 없이 구원된 것이 아니고, 사실은 우리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심판 하에서 구원됐는데 어째서 같은 심판 하에서 구원되었는가? 그건 어린양의 피로 말미암아서 구원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가 출발한 이유가 되기 때문에 이스라엘과 우리는 하나라고 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성한 돌보심 아래 있었다. 자기들이 무엇을 개척한다던가 이렇게 나간 게 아니고, 하늘의 돌보심을 통해 가지고 그들은 이리 가기도 하고 저리 가기도 하고 이렇게 했다. 교회가 오늘날 진행하는 것은 바로 이런 신성한 돌보심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사람들이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해서 되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을 따라서 돌보심이 있기 때문에 그 돌보심 안에서 교회는 전진을 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렇게 될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의 갈 길이 오직 하나님에게 달려 있었던 것처럼 교회의 갈 길도 오직 하나님께 달려있는 것이니까 인위적인 조작이나 계획이나 이런 것들을 통해 가지고 교회를 만들어 갈 수가 없고, 또 교회가 전진할 수가 없다. 그런 것들이 생기면 교회는 금방 굳어지고 금방 죽어버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우리는 광야를 지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잠시도 그것이 굳어질 수 없는 그런 상황에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됐다. 왜냐하면 언제 구름기둥이 뜰지 언제 불기둥이 뜰지 모르는 그런 상황에서 하나님을 순종하고 따르는 길이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교회도 마찬가지로 어떤 틀을 정해놓고 그 틀대로 갈 수가 없다. 어떤 레일을 미리 깔아놓고 그 레일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렇게 레일을 깔아놓은 길을 가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면 천주교가 깔아놓은 길로 가는 기차와 마찬가지고, 또 칼빈이 깔아놓은 길을 간다던가, 어떤 사람이 만들어놓은 교리체계나 조직체계에 의해서 교회가 굳게 서야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것은 신성한 돌보심이라고 할 수가 없다. 신성한 돌보심은 우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언제 어디로 갈 줄을 사실은 모르는 것이다. 아브라함을 맨 처음에 부르셨을 때도 “내가 네게 지시한 곳으로 가라.” 그랬지, “가나안 땅 어디로 가라.” 이런 말이 없다. 그는 하나님의 돌보심과 인도하심을 따라서 한 걸음 한 걸음을 갔을 뿐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가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 참 교회는 그렇게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성한 돌보심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과 교회는 하나라고 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네 번째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성한 계시를 받는 백성이었다. 시내산에 와서 그들은 계시를 받는 것이 보인다. 교회는 바로 이 땅위에서 신성한 계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애굽에서도 계시가 없었다. 광야에서도 계시가 없었다. 어디서 있었는가? 산에서 계시가 있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하늘도 아니고 땅도 아닌 곳에서 우리에게 들려오는 계시가 있고 보여지는 계시가 있다. 이 계시에 따라서 교회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계시를 통해서 율법을 받게 되었다. 그 율법을 따라서 그들은 진행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계시가 되어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 와서 우리의 인도자가 되게끔 되어 있다. 그러니까 신성한 계시를 받고 진행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꼭 같은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우리가 연합하는 모든 것, 이것은 계시에 따른 것이지 결코 우리의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축을 했던 것은 계시에 따른 것이었지 자기들의 필요에 따른 것이 아니었다. 만일 자기들의 필요에 따른 것이었으면 자기들은 그냥 어떤 집단을 이루었을 것이다. 안 죽기 위해서, 살아남기 위해서 집단을 형성했을 것인데, 계시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성막을 건축하게 되고, 성막의 모양으로 그 군대가 진행하게끔 그렇게 됐던 걸 보게 된다. 성막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거쳐였다. 그러니까 이것은 어떤 집단이 아니다. 살아남기 위한 그런 집단이 아니라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그런 조직이었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그런 건축이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어떤 모양을 갖든지 간에 그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모양을 가져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적절하지 않는 모양을 가졌다면 그것은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서 이루어진 그런 모양이라면 그것은 계시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계시는 오직 성막을 건축하게 했다. 오늘날 교회를 건축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게 하기 위해서 건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몸의 지체들이다. 그래서 한 지체 한 지체가 온전하게 한 몸을 위해서 봉사하고 한 몸을 표현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바로 하나라는 것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다섯 번째는 하나님의 경륜적인 싸움을 위해서 군대로 준비됐는데, 이것이 교회하고 똑같다. 에베소서에 보면 교회를 군대라고 말하고 있다. “너희는 전신갑주를 입어라. 공중의 권세 잡은 자들과 정사와 권세와 악한 영들에게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에 보이는 적과 싸웠다. 광야를 통과할 때 많은 적들과 싸웠고, 가나안에 들어가서 또 적들과 싸워야 했다. 눈에 보이는 적들과 싸워야 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적이 아니고, 공중에 정사를 잡고 있는 적들과 싸우는 것이다. 그래서 전쟁하는 입장에서 이스라엘과 교회는 꼭 하나이다. 옛날에 눈에 보이는 적들은 눈에 안 보이는 것에서부터 나온 적들이었다. 아말렉이라 할지 여리고라 할지 이런 모든 적들은 영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그런 적들이었다. 그 영적인 배경, 그것이 신약에 와서 나타난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는 눈에 보이는 적과 싸우는 것이 아니고, 그 뒤에서 일하고 있는 세력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지금 눈에 보이는 어떤 일과 더불어서 싸울 때 내가 그것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고, 내가 눈에 보이는 것을 상대하고 있을 때 눈에 보이는 걸 상대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실재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그 때 전쟁보다 한층 더 전진된 그런 전쟁을 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섯 번째 하나님의 어떠하심 안에서 좌절들을 겪고 있는데, 그런 좌절들을 통해서 순수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건들이 발생하고 우리 안에 있었던 부정적인 것들이 노출되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백성으로 드러날 때가 있고, 악한 백성으로 드러날 때도 있었고, 거역하는 백성으로 드러날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들이 전부 무용한 것이 아니라 이걸 통해서 자꾸 자꾸 순수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이런 부정적인 문제가 전혀 없으면 좋지만, 이상하게도 그것이 계속해서 나온다. 그것은 우리를 정결케 하기 위한 것이다. 이런 문제들을 통해서 우리가 정결케 되지를 못하면 우리는 그런 문제를 겪는데 아무런 의미가 없다. 불순종을 겪고도 만일 거기서 내가 정결케 안 되면 불순종이 헛일이 되니까 또 다시 불순종을 하게 된다. 내가 내 속에서 악한 것이 나왔는데, 그걸 통해서 내가 정결케 되지 않으면 나는 그 일을 또 되풀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정결케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우리에게 부정적인 문제가 없으면 좋지만, 있다 해서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건 어차피 드러나야 될 문제이기 때문에 드러남을 통해서 씻겨지고 씻겨짐을 통해서 순수해지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일곱 번째는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예비된 그런 백성이고 그 땅을 미리 분배해 가지고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하고 똑같다. 우리는 영원하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지금 벌써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어떻게 우리가 그 땅을 누릴 것인가’를 예비하는 것이다. 모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령을 해서 “너희는 그 땅에 들어가거든 어떻게 어떻게 해서 그 땅을 누리고 점령하라.”고 그렇게 지시를 했다. 이것은 미리 예비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항상 우리가 가는 길은 처음에는 잘 모르고 가는 것이지만 뒤에 가보면 하나님이 미리 정하심에 의한 것이다 하는 것이고, 교회가 가는 길도 하나님의 미리 정하심에 따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우리가 새로운 길을 개척해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길을 가는 것이다. 단지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모르는 길이니까,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길이니까. 예를 들어 출애굽의 노정을 본다 하더라도 우리는 모르는 길이지만 하나님은 아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이미 자기들이 아는 것으로 만들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아시고 우리가 따라가면 될 건데, 내가 그것을 알고 따라가려고 생각하다보니까 교리주의가 나오게 되고, 어떤 체제가 나오게 되고 이렇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이미 정해진 것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것을 미리 알고 있는 건 아니고, 미리 정하심에 의한 것이고 예비하심에 의한 것인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다음에는 그리스도와 비밀한 연합을 갖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교회는 일치하고 있다. 과정을 거쳐서 몸으로 나타나신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 우리는 이 그리스도와 비밀한 연합을 갖는 것이다. 이 비밀한 연합이라는 말은 운명적인 연합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통해서 연합을 한다면 그건 비밀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법을 통해서 연합한다고 해도 비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운명적으로 연합한 것이기 때문에 비밀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우리가 볼 때 그의 어떤 행위로 인해서 만일 하나님과 연합이 되어 있었다면 그는 비밀한 분이라고 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다 그것을 따라서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가령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합을 한다. 그러면 다른 백성들도 율법을 통해서 연합할 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무슨 행위를 통해서 연합한다면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것으로도 그와 하나님과 연합된 모양을 볼 수가 없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는 참람하다.” 이렇게 말하게 됐다. 그러나 왜 그렇게 예수님은 참람한 것처럼 보였던가? 그건 운명적으로 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 우리도 그리스도와 운명적으로 연합된다면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것은 비밀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으로 봐서는 도저히 그럴 수 없는 사람인데 어째서 저 사람은 하나님과 저렇게 하나인가, 이것이 비밀이라는 것이다. 왜 그렇게 됐는가? 그건 운명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십자가에 못 박인 예수를 보면서 그것이 나의 운명으로 발견된다면 우리는 그와 연합이 될 것이다. 우리는 그와 연합이 될 때 우리는 나도 모르는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도 잘 모르는 것이다. 나도 왜 그렇게 사는지 나도 잘 모르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볼 때도 ‘야, 저 사람 참 이상하다. 뭐 별로 그럴 것 같지 않은데 어째 저렇게 사는가?’ 이렇게 생각된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결국 하나님과 이런 운명적으로 연합하기 위해서 불러진 백성들이다. 그러나 그들에게서 이것이 이루어지지를 했다. 그들은 다른 운명을 사모하고 있었고, 다른 운명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 그런 백성들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근본적인 목적에 의하면 이스라엘과 우리는 바로 하나라는 걸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운명적인 연합을 위해서 유월절과 무교절이라는 것이 준비되었다. 맨 처음에 우리가 애굽에서 나올 때 유월절로 나오게 됐는데, 유월절과 무교절은 하나이다. 첫째 날이 유월절이고 그 다음 날부터는 무교절이니까 한 절기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유월절로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말은 그 유월절과 우리가 연합한다는 뜻이다. 곧 내가 유월절이다 그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서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 이렇게 말한다. 쓴나물과 누룩 없는 떡을 양고기와 함께 먹었다. 다시 말하면 양고기를 먹을 때 쓴나물과 누룩 없는 떡을 같이 먹었다는 뜻이다. 이것은 완전하게 그리스도의 성분을 말하는 것이다. 이 완전한 그리스도의 성분을 먹고 애굽을 나왔다. 그러니까 그 성분만 애굽을 나온 것이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 결국 구원은 이 유월절 안에밖에는 없다. 유월절 밖에는 다 멸망이었고, 유월절 안에만 구원이 있었다 하는 것이다. 그 날밤에 죽음의 신이 온 애굽 천지를 휩쓸 때 방안에 있는 사람들만 살아나게 되었다. 문설주에 피를 바르고 유월절을 먹고 있었던 그 사람들만 살아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바로 그 방주 안만, 그 집안만 구원이라는 말이니까, 이 말은 결국 유월절이 곧 구원이라는 뜻이다. 우리가 유월절 안에 구원이라는 말이니까, 우리 자신이 유월절일 때는 우리가 구원이고, 우리 자신이 유월절 밖에 있으면 우리는 구원이 아니라는 뜻이다. 구원을 받아서 우리가 어디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유월절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우리의 유월절이 되셨다. 그래서 ‘우리의 유월절’이라고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유월절을 지나면 무교절이 오게 됐는데, 이것은 ‘죄 없는 삶, 누룩이 없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유월절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는다면, 다시 말하면 우리가 유월절이 된다면 그러면 우리의 삶은 자연히 무교절이 된다는 뜻이다. 누룩 없는 떡이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바람빼기를 계속해왔다. 풍선에 바람빼기, 찐빵에서 바람빼기, 탈수, 이런 것을 우리가 해왔다. 왜냐하면 부풀어져 있는 것을 빼는 일을 해왔다. 그 부풀린 것은 바로 누룩이었다. 그러니까 이 부풀려진 것이 다 빼져버린다면 누룩 없는 떡이 되는 것이다. 유월절은 우리를 누룩 없는 떡 안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세상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사람들이 종교적으로 가는 길과는 정반대의 길이다. 누룩 없는 떡의 삶으로 가는 것이니까.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과의 비밀한 연합을 위해서, 그리스도와 비밀한 연합을 위해서 하늘에 속한 만나와 반석으로부터 나온 생수를 먹고살게 되었다. 하늘에 속한 만나와 반석으로부터 나온 생수는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먹고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한다는 뜻이다. 자, 운명적으로 연합한다 하는 그 말속에 첫 번째는 유월절이 들어있고, 두 번째는 하늘에 속한 만나와 깨진 반석으로부터 매 맞은 반석으로부터 나오는 생수를 먹는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신령한 것으로밖에는 먹을 수가 없었다, 땅의 것을 먹을 수 없었다 그것이다.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이고 생수는 땅으로부터 솟아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수는 어떻게 솟아났는가? 깨진 반석으로부터, 십자가로부터 나왔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늘에 속한 신령한 음료를 마셨다. 땅으로부터 나오기는 나왔지만 깨져서 나온 것이다, 쪼개져서 흐르는 그 물을 우리가 마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사는 것은 그의 운명과 우리가 연합하는 걸 말한다. 예수님께서 그래서 요한복음 6장에서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셔라.” 이런 말씀을 하게 되는데, 이 살과 피는 곧 만나와 생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의 살과 피를 먹는다면, 그의 체질을 우리가 먹고 마신다면 우리는 비밀한 연합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계시록 마지막에는 “다시는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이 없다.” 이렇게 말하지 않는가. 이것은 만나의 목표가 완성되고 생수의 목적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생명이 됐기 때문에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어졌다 그런 말이다.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어지면 그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분 자신이 배고픔과 목마름이 없는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배고픔이 목마름이 없어진다면 그건 바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하나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세 번째는 하나님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우리가 연합된 것을 보게 된다. 율법을 하나님이 주셨던 것은 하나님의 증거로 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표현이었다. ‘내 마음은 이렇다. 내 생각은 이렇다. 내 뜻은 이렇다. 내 목표는 이렇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었다. 오늘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하면 율법을 보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표현이신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표현이신 율법을 먹고 이스라엘 백성이 조성되었던 거나 우리가 하나님의 표현이신 그리스도를 먹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조성되는 거나 같은 원리를 갖고 있다. 우리가 왜 이런 하나님의 표현을 먹고사는가? 그건 우리도 하나님의 표현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의 표현이신 그리스도를 먹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표현이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율법을 먹으면 율법이 될 것이고, 그리스도를 먹으면 그리스도가 된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네 번째는 하나님의 증거인 법궤로 우리가 연합하는 것이다. 법궤를 보면 금과 나무로 조성되었다는 걸 보게 된다. 성막 전체가 다 그렇다. 판자에다 금을 입혀서 만들어놓은 것이 성막이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천들과 이런 것들은 신성과 인성을 직조해놓은 것이다. 짜놓은 것이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증거였다. 하나님이 증거되기 위해서는, 금이 지탱되기 위해서는 결국 나무가 필요했다. 속에 단단한 나무가 필요했다. 하나님이 이 땅위에서 표현되기 위해서는 인성이라는 것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 인성이 없으면 하나님이 표현될 수 없었다. 그래서 인성과 연합한, 결합한 그 신성만이 하나님의 증거가 됐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들은 하나님의 증거가 됐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증거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그리스도가 이 땅위에서 증거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를 지탱하게 하는 인성이 필요하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부족하지만, 조각목처럼 그런 나무지만 우리를 통해서 그리스도가 나타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금이 아무리 좋아도 금 자체가 무르기 때문에 금으로는 집을 지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장막을 칠 수가 없어서 나무가 필요했던 것처럼, 그리스도는 완전하지만 완전하신 그분이 세상에 나타나기 위해서는 우리라고 하는 조각목이 필요하게 됐다. 여기서 우리는 비밀한 연합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아주 엄청나게 신령해져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보게 된다. 우리의 성분과 그리스도의 성분이 서로 달라도 그것이 서로 협력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나무고 하나는 금이지만, 나무가 만일 금을 지탱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감출 수만 있다면 그것이 성막이 될 수가 있다. 성막 안에서는 어디도 조각나무를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다 금으로 싸져버렸기 때문에 자기 자신은 전혀 없는 것이다.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했던 것처럼 조각목은 이제 자기가 조각목으로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금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밀한 연합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금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단지 조각목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금으로 살고 있다. “우리가 땅위에 있는 동안 인간이 뭐 그렇게 되겠나? 인간인데 뭐.” 이렇게 아는 것이다. 그 얘기는 인간이 신이 되라는 얘기이다. “인간이 어떻게 신이 되겠나, 인간이 어떻게 금이 되겠나?” 그 말이다. 인간은 금이 될 수가 없다. 그렇지만 금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비밀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고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치이다.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쳤나나,” 분명히 우리가 하나님처럼 완전해졌다는 말이 아니고, 이상하게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사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 보니까 더 가난함은 더 부유함이 나타나고, 연약함은 더 강함이 나타나고, 이런 걸 우리가 볼 수 있게 됐다. 우리는 조각목이지만 우리에게 입혀진 금을 통해서 우리는 금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다섯 번째는 사람과 만나시는 속죄소가 있었는데, 그리스도가 바로 속죄소였다. 거기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졌다. 나무와 금이 서로 만나지듯이 인성과 신성이 서로 만나지게 되었다. 오늘 이러한 그리스도가 우리와 연합되는 것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지는 장소로 우리가 연합되는 것이다. 금이 우리에게 입혀질 수 있는 나무가 되려면 우리 자신이 감추어져야 된다. 우리 자신이 그 안에서 없어져야 된다. 그러면 우리는 금이 입혀지게 된다. 그 금이 입혀지게 되면 이것은 속죄가 이루어진다. ‘의롭다 한다.’&amp;nbsp; 이 말은 무엇인가를 덮어준다는 뜻이다. “내가 너의 불의를 사하여준다. 내가 그걸 덮어준다. 내가 간과하겠다.” 그런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자연히 속죄소가 되는 것이다. 그런 원리에 따라서 사람의 죄가 용서되었다는 뜻이다. 왜 속죄속에 가서 피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했는가? 그것은 속죄소의 원리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오늘도 속죄소의 원리가 우리 안에 있다면 우리는 곧 속죄소가 된다는 말이다. 예수님이 바로 속죄소의 원리가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앞에 가서 속죄를 받을 수가 있게 되었다. 꼭 같은 원리로 다른 사람들이 우리 앞에 와서 속죄를 받게 될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섯 번째로 백성들을 짊어지고 품에 안고 계신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품고 있고, 우리를 안고 있다는 걸 보게 되며, 또 우리를 짊어지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우리의 모든 것을 대표하고 있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안고 있는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하고, 그리스도가 내 안에 있다고 말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우리를 대표하기 때문에 그렇다. 대제사장도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은 결국 백성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가서 제사를 드리면 그것은 곧 백성이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봉사하면 그것이 곧 백성이 봉사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성들이 주는 걸 먹고 그 사람들은 봉사하는 사람들이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땅에서 농사를 지어서 그것의 1/10을 레위인들에게 드렸다. 레위인들은 그 1/10을 가지고 하나님을 봉사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해서 하나님을 봉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봉사하는 것을 보려면 제사장이 봉사하는 것을 보면 알 수가 있다. 제사장의 봉사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봉사를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를 대신하는 봉사자였다. 하나님을 완전하게 만족케 하신 분이었다. 우리는 그 안에서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를 떠나서는 하나님을 절대로 만족하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일곱 번째는 하나님을 위한 모든 제물들이신 그리스도를 보았다. 우리는 레위기에서 많은 제물들을 보았는데, 이 제물들이 결국 인격이 될 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양이나 송아지나 비둘기나 그리고 고운가루나 이 모든 것들이 전부다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들이었다. 이것이 인격화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를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산 제물이라고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히브리서 10장에 보면 “그가 하나님에게 단번에 드리신 제물이었다.” 그렇게 말한다. “영 단번에 드리신 제물이었다.” 왜냐하면 전의 제물들은 모두 형상에 불과했으니까, 상징에 불과했지만 이 제물은 바로 실제적인 제물이다 하는 것이다. 이런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제물이 된 것을 보면서 우리가 그 제물 안으로 연합하는 걸 보게 된다. 내가 만일 ‘내 운명이 하나님에게 드려진 제물이구나.’ 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제물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것을 몰랐던 것이다. 제물을 드리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자기라는 것을 몰랐다. ‘아, 하나님은 양고기를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비둘기를 참 좋아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비둘기를 좋아하는 게 아니고 비둘기인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가 그것이 하나로 발견하면 우리는 그 안에서 비밀한 연합을 갖는 걸 보게 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께 드릴 수가 도저히 없는 사람인데, 내가 그 제물 안에서 발견되면 나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드려진다. 그래서 그것이 비밀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할 때 ‘저 사람은 도저히 드릴 사람이 아니야.’ 이렇게 생각하는데 드려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그 제물 안에서 자기가 동일시되었기 때문에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덟 번째는 안식일과 우리의 절기들을 보았다. 안식일과 절기들은 하나님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축복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인해서 만족한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의 절기들이었다. 만유가, 그리고 특별히 사람이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지 못할 때, 다시 말하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만족해하지를 못할 때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에 대해서 완전한 안식이 나왔다. 완전한 만족이 나왔다. 이걸 가리켜서 “아니라 함이 없고 오직 예만 되었다.” 그렇게 말했다. “예수 안에는 아니라 함이 없고 오직 예만 되었다.” 이것은 그가 완전하게 하나님의 절기라는 걸 말한다. 절기는 즐거운 것이지 않는가. 우리가 어렸을 때 추석이 돌아온다 그러면 며칠 전부터 잠 못 자고 기다리고, 설이 돌아온다 그러면 잠 못 자고 기다리고 하지 않았는가. 이스라엘의 절기들은 즐거운 날이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 것을 보면 즐거워하는 것 속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비밀한 연합을 갖게 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는데 우리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더라 이것이다. 다른 일로 즐거워할 일이 없는데, 오직 그리스도로 인해서 즐거워하더라 이것이다. 이것은 비밀한 일이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저 사람, 무엇 때문에 저렇게 좋아하는지 모르겠다. 뭣 때문에 저렇게 즐거워하는지 모르겠다. 머 앉아 가지고 별로 중요한 얘기도 아니고, 별고 문제가 되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걸 가지고 저렇게 즐겁다고 하는가?’ 이것은 우리 안에 절기가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아홉 번째는 절대적인 나실인을 보았다. 전적으로 하나님께 드린 사람. 그런데 이것을 신약 안에서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전적인 나실인이라는 것을 보았다. 우리는 바로 이 전적인 나실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오직 우리의 용도가 하나님밖에는 우리 용도가 없다, 하나님에게밖에는 우리가 쓸 데가 없다 하는 것을 우리가 발견해 갈 때 우리는 저절로 나실인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다른 데다가 우리 자신을 쓸 수가 없다. 다른 목적을 위해서 내 인생을 소비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을 위해서만 내 인생을 쓰기로 작정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비밀한 연합이 이루어지고 있는 걸 보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열 번째는 부정을 씻는 암송아지가 있었다. 이 암송아지의 재로 잿물을 만들어서, 그것을 부정을 탄 사람을 씻어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부정을 씻는 암송아지의 재가 되었다. 우리는 너저분하게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었고, 많은 불평과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앞에 가면 우리의 불평과 불만이 모두 다 어디로 사라져버리고 마는 것이다. 잿물에 씻겨지듯이 사라져버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탐심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완전하게 재가 되신 분 앞에 가면 우리는 탐심이라는 게 부끄러워져 버린다. 저절로 그 탐심이 없어지니까 문제가 저절로 없는 것이다. 문제라는 것은 탐심의 마지막 결과였다. 그러니까 탐심이 부끄러워진다면 문제는 저절로 없어지게 마련이다. 그리스도는 바로 우리의 부정을 씻는 암송아지의 재와 마찬가지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열 한 번째는 죄를 지고 가는 놋뱀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 “광야에서 모세가 뱀을 든 것처럼 인자도 들려야 하겠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거기서 독 있는 뱀과 독 없는 뱀을 보았다. 하나는 독이 있어서 사람을 물면 죽는 뱀이고, 하나는 쳐다보면 사는 뱀이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있어서 뱀과 꼭 같았지만, 그러나 독이 없는 뱀이었다. 그를 쳐다보면 사는 뱀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가 뱀인 줄 알고 다 도망간다. 그렇지만 쳐다보면 사는 뱀이다. 우리가 그를 믿고 따르면 우리가 살아질 수 있는 그런 뱀이다. “인자도 들려야 하겠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높이 들리신 것을 인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다. 왜냐하면 거기서 우리가 원망과 불평이 사라지게 되었다. 뱀이 있는 골짜기를 지나갈 때 그들은 원망과 불평을 하다가 독사에 물려 죽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놋뱀을 쳐다보면 산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매달려 있는 놋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우리는 불만의 골짜기를 지나가지 않게 될 것이다. 불만의 골짜기를 지나가지 않는다면 독뱀은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열 두 번째는 도피성이었다. 바로 그리스도가 도피성이었다. 그 안에 들어오면 어떤 사람도 보호를 받게 되었다. 정당한 판결을 받을 때까지 보호받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우리의 도피성이다. 그래서 그 안에서는 우리가 정당하지 않는 판결을 받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완전하게 우리는 정당한 판결을 받을 때까지 그것을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 앞에 갈 때 그들이 우리를 잘 알기만 한다면 우리가 바로 그들의 도피성이 될 것이다. 우리 안에 오면 정당한 판결 이외에는 없을 거라는 것이다. 부당한 판결이 없고, 억울한 판결이 없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도피성이듯이 우리도 역시 도피성이 되고 교회가 바로 도피성이 되는 것이다. 천주교는 오랫동안 이 원리를 적용해서 교회를 도피성으로 그렇게 선포를 해왔다. 그래서 죄를 지고 성당에 들어오면 절대적으로 보호를 할 책임을 갖는다 이런 것을 갖게 되었다. 이것은 육신적인 범죄를 보호해주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거기서 물론 죽을 사람이 시간을 벌어서 살 수도 있고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우리가 이런 죄 때문에 성당으로 들어가야 될 일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심판을 받아야 할 그 죄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으로 도피하는 것이다. 그리고 세상도 마찬가지로 우리 안에 들어올 때 그렇게 들어와서 우리가 그들의 도피성이 되게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으로 풍성한 공급이신 땅, 만유를 포함하는 땅, 가나안 땅, 우리는 그 땅을 향해서 전진을 했다. 그 땅이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것을 기업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건축의 터라고 말하기도 하고, 왕국의 기초라고 할 수도 있고, 새 예루살렘의 터라고 말할 수 있다. 모든 것은 땅이 있어야 가능했다. 땅이 없는 한에서는 모든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땅을 완전히 얻을 때까지 그들은 집을 짓지 아니하고, 장막 치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 땅이 없으니까. 결국 그리스도가 없으면 우리는 아무리 하늘의 것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나그네에 불과하다. 광야를 지나갈 때 하늘의 것을 많이 가지고 있었지만 자기들의 땅이 없으니까 그것을 내려놓을 곳이 없었다. 정착시킬 곳이 없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없으면, 이 인격이 없으면 하늘에서 보여주신 모든 것이 다 공중누각같이 되어버리고 만다. 어떤 사람들은 일생 동안 많은 신비한 경험을 한 사람들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인격이라는 땅이 없기 때문에 그것이 이상한 것으로 변질되어서 공중으로 다시 날아가 버리는 그런 걸 보게 된다. 땅이 있어야 집을 지을 수가 있다. 좌우간 한 평의 땅이라도 땅이 있어야 내 집을 지을 수 있지, 땅이 없으면 내 집을 지을 수가 없고 나그네로서 여관생활밖에는 할 수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그리스도는 바로 땅이 되신 것이다. 이스라엘은 그 땅을 찾기 위해서 애굽에서 400년을 고생하게 되고, 광야에서 40년을 또 방황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 마지막에 그 땅을 찾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땅을 통해서 주어지는 그리스도를 그들이 배척했기 때문에 또 다시 그 땅을 잃고 2000년 동안을 방황을 하는 사람들이 되었다. 지금 그 땅을 다시 찾아서 또 발버둥친다. 그러나 그 땅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르면, 그 땅에서 그리스도를 찾지 못하게 되면 그들은 역시 또 다시 그 땅이 자기들에게 안식처가 되지 못할 것이다. 그 땅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찾아야 영원한 안식처를 만들게 될 것이고, 성막을 건축할 수 있게 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새 예루살렘, 이것은 바로 이 땅위에 건설된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건설된다. 천년왕국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라는 터 위에 건설된다. 성막도 마찬가지로 땅 위에 건설되었다. 이것은 바로 그리스도가 우리의 영원한 기초라는 걸 말한다. 새 예루살렘을 보면 바닥은 정금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기초, 터가 정금이라는 뜻이다. 거기 열 두 기초석이 놓여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바탕이 되고, 그 위에 열 두 사도가 있고, 또 그 위에 보석들이 놓이고, 그래서 한 성이 이루어진다고 묘사를 하고 있다. 이 바탕, 이것이 바로 땅이고 터고 기초고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 인격이 기초가 되어서 우리는 하늘의 신령한 것들로 세워지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아무리 좋은 걸 줬어도 그 터가 없으니까 다 허물어지고 말았다. 우리가 많은 걸 받는다 하더라도 보따리에다 계속 짊어지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집을 짓지 못한 건축자재들을 계속 가지고 다닐 수가 있겠는가. 어디다 놔두면 결국은 폐허가 되고 말게 된다. 옛날에 앞산에 가보면 어떤 사람이 집을 지으려다가 못 짓고 자재들을 쌓아놓았는데, 오래되니까 다 썩어서 다 버리게 되었다. 집을 지어놓았으면 그건 몇 백년이고 갈 수가 있는 건데, 그냥 노천에다 놔두니까 다 버리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스도는 바로 하늘의 신령한 것을 건축하게 하는 기초가 되는 걸 보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교회는 바로 이스라엘의 실재라는 것이다. 또 이 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비밀한 연합을 가진 한 인격으로, 단체적인 인격으로, 또 개인적인 인격으로 그렇게 우리가 전진하는 걸 볼 수 있게 된다. 신약에는 이것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세밀한 설명이 없다. 또 이런 세밀한 표현이 없다. 이미 구약을 지나왔으니까. 신약 성서를 쓴 사람들은 이미 이 바탕 위에 썼다. 이것을 아는 사람에게 쓴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신약에서는 이런 자세한 그림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구약에 와서 우리는 신약에서 세워지고 있는 그 나라의 자세한 세밀한 기초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구약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우리가 이 말씀들을 듣는 동안에 우리도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백성으로 우리가 조성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쓸모 없이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을 섬기고 생명을 팔아서 가증한 것들을 섬기던 아브라함을 하나님께서 부르셔 가지고 당신의 영원한 백성의 조상이 되게 하고, 그를 인하여서 오늘 우리를 부르셔서 당신의 선택한 백성으로 우리를 삼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전에 당신의 부름이 없을 때 우리는 아무 목적도 없고 방향도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목적이 있고 방향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주의 거룩한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당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 당신의 나라로 조성되기 위해서 우리는 특수한 목적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 우리가 이 특수한 목적으로 부름받은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 목적을 가지고 우리가 주의 나라가 조성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는데 우리가 그의 조직이 될 수 있게 되기를 원하며 우리가 짜여지는 그런 천이 되고, 우리가 입혀지는 그런 조각목이 될 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님과 우리가 비밀한 연합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 위에서 당신의 영원한 증인으로 서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당신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서 사람을 창조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하나님이 정한 길을 버리고 다른 길을 갔기 때문에 그들은 가인과 아벨을 낳게 되었다. 가인은 그 속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아벨을 죽였다. 그리고 가인은 점점 더 발전해서 라멕이 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벨 대신에 셋을 주었다. 그러나 그 셋이 또 십대를 지나가면서 그들은 노아시대의 네피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네피림의 시대에서 노아를 구원했다. 그러나 노아의 후손들이 또 다시 십대를 지나가면서 바벨탑을 쌓게 되었다. 이것은 아담 안에 잘못 들어온 그 노선이 점점점점 발전했다는 걸 의미한다. 점점 더 본색을 드러내고 더 확실해져 가지고 단체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것이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신 목적은 새로운 인류의 씨를 만들기 위해서, 그래서 불러내신 것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신 일은 결국 아들 이삭을 주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이삭을 낳고 그 이삭을 완성하는 과정을 보면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류를 옛 인류하고 완전히 구별하신 걸 보게 된다. 옛 사람은 타고난 사람이었다. 생래적인 사람이었다.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생명나무를 먹을 수도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을 수도 있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 사람이 한번 선악과를 먹고 나니까 걷잡을 수 없이 되었다. 아무리 구원을 하고 아무리 무엇을 해놔도 도로 마찬가지이고, 도로 마찬가지이고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래적인 사람을 끝내고 하늘로부터 오는 새로운 사람을 창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이삭이 100세에 낳았다는 말은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걸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다시 모리아 산으로 갔다. 그것은 부활의 생명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랬다. 이삭이 모리아산에서 다시 돌아올 때 그는 부활생명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 부활생명으로 돌아온 이삭이 이스라엘의 씨가 된 것이다. “이 씨를 인해서 천하만민이 복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이삭이 조성되는 원리가 복의 근원이 되는 원리이다. 그 속에 모든 복이 있다 그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이삭이 발전하고 발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래서 새로운 인류의 실제적인 씨가 되었다. 이삭은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었다. 모양이었다. 예표였다. 실재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한다던가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던가 이렇게 말한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다. 이것은 아담하고 다르다는 뜻이다. 처음에 만들어진 그 사람하고 다른 사람이다. 왜냐하면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서 이제는 이렇게도 될 수 있고 저렇게도 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만 필요한 사람이 됐다는 뜻이다. 이 사람은 사탄을 완전하게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됐다. 이 인류가 이 땅에 충만하게 되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구약에서는 이삭의 후손들이 땅에 충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손들이 결국은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그 다음에 가나안에 왕국을 세워서 이방의 모든 나라들을 정복하고 이런 것으로 끝났는데, 이것은 장차 올 어떤 나라에 대한 형상이었다. 그 씨가 대적의 문을 얻을 것이다, 그 씨가 천하만민에게 복을 줄 것이다 하는 것을 하나의 상징적으로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끝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제 실제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 백성들이 이 땅 위에서 가나안을 정복하고 그리고 그 땅에 복의 근원이 되게끔 그렇게 갈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요한 계시록에서 새로운 그림으로 다시 보게 된다.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이 그림은 구약에 나오는 이 그림의 실제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안에 더 실제적인 시대에 우리가 부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만일 과거에 있었으면 옛 이스라엘처럼 그렇게 밖에는 안 될 것인데,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실제적인 백성으로 우리가 부름 받게 되었다. 구약은 유대인밖에는 참여할 수 없었지만, 지금은 온 인류가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새로운 인류가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 인류이기 때문이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후손 외에는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한 사람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모든 인류가 하나가 되게 되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차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십자가로 말미암으면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 전까지는 차별이 있지만 그 이후에는 차별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이전에는 우리가 모두 다른 모양을 갖고 있으니까 다른 모양으로 판단하고 다른 모양으로 보게 되었다. 그러나 십자가 이후에는 우리는 다른 모양이라는 게 없고 한 생명밖에는 없다는 걸 보게 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그래서 교회는 지금 눈으로 보기에는 옛날과 똑같지만 우리가 부활생명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속에 들어있는 영원하게 통일되어 있는 하나를 보는 것이다. 그 한 운명을 보는 것이다. 세계 모든 인류를 통일하고 한 나라가 되게 하고 모든 종교를 하나가 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은 십자가이다. 이건 바로 하나님의 대책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기독교보고 물어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인류가 통일될 수 있는 길이 없다. 자기들은 살지만 다른 사람은 죽는다, 그런 대책밖에 없다. 다른 어떤 종교를 가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다 똑같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가면 모든 사람이 하나될 수 있는 대책이 있다. 그 대책이 바로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나라가 건축되는 걸 보게 되니까 우리가 실제적인 경험 안에서 가정생활에서든지 교회생활에서든지 모두가 십자가가 우리를 하나되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되고, 십자가를 누군가가 회피하고 피하려고 하면 자꾸 분쟁이 일어나고 문제가 생기는 걸 보게 된다. “네가 져라. 네가 좀 더 져라.” 이렇게 하면 결국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십자가 안에 가면 다 하나인데, 자기는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너 같은 사람은 꼭 십자가를 져야 돼.’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가 안 되는 걸 보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십자가 앞에서 차별이 없다. 어떤 사람은 좀 낫고 어떤 사람은 좀 못하고 이런 것이 아니다. 조금도 거기는 차별이 없다.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고 재주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고, 믿음이 좀 큰 사람도 있고 적은 사람도 있고, 기도를 많이 한 사람, 적게 한 사람, 많은 차이가 있다. 성격이 좋은 사람, 나쁜 사람, 고약한 사람, 선한 사람, 악한 사람, 별 사람이 다 있다. 그런데 십자가에 오면 다 똑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죽는데 잘난 것 못난 것이 어디가 있겠는가? 그렇게 않겠는가. 삼풍백화점이 무너지는데 그 속에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다 똑같은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십자가는 우리 모든 사람의 허상, 껍데기를 다 없애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진실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가 되게 만드는 것이다. 이 안에서만 어떤 사람도 이의가 없이 할 말 없이 한 인류로 발견되게 될 것이고, 하나로 발견될 것이다. 사람보고 이런 대책을 내놓으라면 절대로 내놓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 그 방법이 싫으니까 사람 속에서 나온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게서만 이것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 입장에서는 이런 대책을 안 내놓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고 밖에 할 수가 없다. 사람에게서 고안된 것이 아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누가 자기 죽을 것을 만들겠는가. 다 어떻게 하든지 자기가 살아보려고 지금 발버둥치는 판에 자기 죽을 십자가를 누가 만들겠는가. 그러니까 이건 사람으로 말미암아 나온 것이 아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이 대책에 순종하는 것만 남아 있다. ‘아, 그것이 지혜로운 것이구나.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구나.’ 십자가가 유일한 대책이라는 것을 발견할 때 우리 인생은 새로운 길을 걷게 된다. ‘아, 그것이 완전한 대책이구나. 선도 대책이 아니고 악도 대책이 아니구나. 십자가가 오직 유일한 대책이구나.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고 능력이구나.’ 바울은 그래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렇게 말하게 되었다. 우리가 영원히 전할 것도 십자가뿐이고 우리가 영원히 세울 것도 십자가뿐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사이에 놓고 두 인류가 갈라지게 되었다. 한 인류는 십자가 전에 있고, 한 인류는 십자가 후에 있고, 그래서 아담은 십자가 이전에 있는 사람이고 그리스도는 십자가 후에 있는 사람이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에 대한 칭호는 그리스도라는 칭호로 바꿔지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도 우리 인생이 바꿔지는 것은 십자가를 분계선으로 해 가지고 우리가 바꿔진다는 걸 보게 된다. 옛 인류와 새 인류, 옛 사람과 새 사람, 그렇게 갈라지는 걸 보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서 이것이 새 인류를 탄생하기 위한 하나의 도형이었다는 걸 보게 된다. 쉽게 말하면 설계도나 마찬가지이다. 이 설계도와 마찬가지로 참 집이 지어지게 되는 것이 신약이 있는 교회니까, 교회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된 것이다 하는 걸 보게 된다. 이 십자가 안에서 참된 교회가 나오고, 참된 교회가 나오면 세상의 모든 잡다한 종교적인 생각이 다 끝난다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교파니 종파니 이런 것이 아무 소용도 없는 그런 것이다. 십자가를 지는데 정통이라고 잘 지겠는가, 이단이라고 잘 못 지겠는가. 매한가지이다. 싫은 건 다 똑같다. 정통이나 이단이나 싫은 건 다 똑같으니까 아예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앞에 와서 ‘나는 이렇다’고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 바로 십자가다. 그러니 얼마나 그것은 완전한 대책인가. 우리를 완전한 대책 안으로 인도하신 주님을 찬양한다.&lt;/SPAN&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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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7. 민1-36장. 광야 여정 요약(1)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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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한자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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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0T14:37:48Z</updated>
	    <published>2009-11-10T14:37:48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1-36장. 광야 여정 요약(1)&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출애굽기와 레위기와 민수기에 계시된 신성한 계시에 대한 중요한 개요를 지금 정리하고 있다. 그 개요의 요점은 사탄의 속박에서 구속되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서 건축되고, 하나님의 군대로 편성되며, 또 좋은 땅을 분배받는 이런 네 가지 중요한 문제로 요약되어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은 세부적인 항목으로 출애굽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축이다. 애굽을 나온 목적은 이 건축을 위해서 애굽을 나왔기 때문에 건축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건축을 위해서 율법이 주어졌다. 율법은 우리를 종교적으로 가르치려고 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을 묘사하려고 준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어떻게 생긴 분인가, 그분의 성질이 어떻고 마음이 어떻고 생각이 어떤가 그것을 묘사해놓은 것이 율법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묘사이기 때문에 율법을 가리켜서 ‘증거’라고 말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의 증거다. 이것을 기록해놓은 판을 보고 증거판이다.” 그렇게 말하고, 그 판을 담는 궤를 증거궤라고 그렇게 말한다. 그리고 증거궤를 안치해놓은 것을 증거막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증거라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하나님의 증거를 가지고 건축을 하게 되는데, 이 건축은 어떤 것인가 하면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영으로 표현된 삼일 하나님, 삼일성을 가진 하나님, 이 하나님이 건축되는 것이다. 이것이 땅위에서 사람과 더불어 건축되기 때문에 결국 성막을 보면 금과 나무로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나무는 인성을 상징하고 금은 신성을 상징하기 때문에 신성과 인성이 결합된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성막의 재료들을 보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소원이 어떻게 이 땅위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되는가, 성취되는가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금은 불변하는 것이기는 하지만 무른 거니까 집이 될 수 없다. 순금으로 집을 지을 수는 없지 않는가. 그 속에다가 조각목을 두어서 무너지지 않도록 바쳐서 금을 입혀놓은 것이다. 이것이 신약에 오면 성육신이라고 하는 문제가 되게 된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왜 말씀이 말씀대로 있지 않는가? 그것은 말씀만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마치 순금이 그냥 있는 것처럼 그런 거니까, 그래서 그것이 육체를 입을 때만, 합당한 육신이 될 때만 그것이 견고한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그리스도는 어디서 보고 안 것인가? 그것은 성막의 재료들을 보면서 아는 문제이다. ‘아, 성막의 재료는 결국 금과 나무로 되어 있구나. 참 하나님이 땅위에서 실현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이와 같은 결합으로 되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불교에 가도 부처가 화육했다, 육신이 됐다 하는 것이다. 석가모니가 위대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부처가 육신이 됐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가장 존귀하게 여겨지고 있다. 기독교 안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된 성자, 그리스도가 가장 중요하다. 중심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그리스도가 어디로 증발하고 없고 모두 신성만 찾느라고 발버둥치고 있는 그런 형편인 걸 보게 된다. 성막 전체를 하나님의 증거장막이라고 칭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이 성막은 영원한 성의 모형이다. 그러니까 새예루살렘은 이 성막의 전진적인 확장이라고 할 수 있다. 성막이 전진하고 또 전진하고 인격화되어서 그것이 결국 새예루살렘 성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증거인 성막, 이것이 구약이라면, 하나님의 증거인 아들, 그리스도, 이것이 바로 신약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증거인 교회, 새예루살렘, 이것이 영원한 세계, 사회, 이렇게 볼 수 있다. 결국 성막이나 그리스도나 교회는 다 하나님의 증거이다. 이것을 건축하기 위해서 출애굽을 하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출애굽을 한 이유는 무엇 때문에 출애굽을 했는가? 바로 이런 건축을 위해서 우리가 출애굽을 했으니까 출애굽만 하고 만일 건축을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된다. 단지 그냥 고통에서 해방됐다 이것밖에는 없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 그런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도 있다. ‘아, 죄로부터 해방 받았다. 나는 이제 앞으로 가서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구원을 받은 것은 성막을 건축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성막으로 건축되기 위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군대로 편성되는 것이다. 이것은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군대로 편성되었다. 거룩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군대로 편성하는 요점은 첫째로는 생명의 성숙에 따라서 계수됐다. 맨 처음 민수기 1장에서 그렇게 말했다. 이것은 군대가 되기 위해서는 성숙해야 된다 그 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군대가 되려면 우리 생명이 성숙해져야 된다. 어린 사람은 전쟁할 수 없다. 나이 많은 사람도 전쟁할 수 없다. 결국은 성숙해져야 되고 강해져야 된다 하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 우리는 여러 가지 조건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고, 여러 가지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냥 편안하기만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고 전쟁을 하려면 훈련을 해야 되지 않는가. 그와 같은 이치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하나님의 군대로서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숙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두 번째는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그들은 행동을 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있어서 언제나 그의 인도를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되면 하나님의 군대는 그냥 자기 마음대로 싸우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임재와 함께 행동을 한다 하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세 번째는 하나님의 사자의 인도를 받았다 하는 것이다. 항상 그들 앞에는 하나님의 사자가 있어서 그 길을 안내했다고 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네 번째는 하나님과 함께 움직였다. 이건 과정을 거쳐서 분배된 삼일 하나님과 함께 행동한다는 뜻인데, 구약에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움직인다는 것은 구름기둥과 함께, 불기둥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었다. 그러나 신약은 우리가 구름기둥과 불기둥과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라 성육신된 그리스도와 함께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과 신약의 다른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약은 구약에 비해서 훨씬 전진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다섯 번째는 광야생활을 통과하게 된다. 왜냐하면 광야생활은 시련과 고난과 유혹, 그리고 하나님의 돌보심, 거기에다 하나님의 공급하심, 징계, 이런 것들로 구성되어 있다. 왜 이런 과정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군대로 승리하기 위해서 이런 과정들이 필수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다. 오늘 우리의 삶에서 이런 과정들이 필수적으로 있는 이유는 우리가 군대로 출전을 하고 군대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그런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여섯 번째는 42 정거장을 통과한다. 이것이 바로 42대, 즉 예수님이 출생하신 대수가 42대라고 하였다. 우리가 이런 군대의 여정을 통과하고 과정을 통과하면서 그리스도가 나타난다는 걸 보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묵상한다고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기도하고 있다고 그리스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런 과정을 통과해가면서 그리스도가 나온다는 걸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산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만나보겠다고 애걸복걸하고 발버둥치고 있는 사람도 있다. 결국 이런 과정이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묵상하다가 만나는 그런 하나님은 아니다. 명상 중에 만나는 하나님도 아니고, 기도를 하다가 만나는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가 더불어 경험되어 가는 하나님이니까 하나님과 내가 거기서 뒤죽박죽 하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내가 알아지는 역사적인 그런 하나님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일곱 번째는 적들을 패배시키고 갔다. 아랏왕과 아모리왕과 미디안 사람들을 모두 정복하면서 가게 되는데, 우리의 행보와 군대로 편성되어서 가는 하나님의 군대의 여정은 적을 멸하기 위한 것이다. 적이 없으면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다. 적이 있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다. 동산에서부터 만일 적이 없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산에서부터 적이 있었다. 그 적과 싸워서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아담은 결국 실패하게 된 것이다. 예수는 결국 이 적과 싸워서 이겨서 새인류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기는 자는 새로운 세계로 가게 되고, 지는 자는 패배하게 되는 것이다. 계시록에 보면 ‘이기는 자는..., 이기는 자는...’ 하는 말이 계속 나오게 된다. 바로 적들을 패배시키는 것, 이것이 군대로 편성된 목적이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덟 번째는 증거궤를 짊어지는 것이다. 그들은 어디를 가든지 증거막과 함께 갔다. 그리고 이 증거막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들의 일이 바로 그런 일이다. 증거막, 왜 이것을 꼭 가지고 다니지 않으면 안 되는가, 왜 꼭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가? 이것은 바로 증거막 자체가 지금 진행을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싸우고 있는 것같지만 그렇지 않고 그 증거막을 위한 싸움이다. 다시 말하면 전쟁 자체가 성육신을 위한 전쟁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기 위해서 42개의 과정을 통과해가는 것은 전부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전쟁 자체가 바로 성육신을 위한 것이다. 오늘 우리가 왜 이런 저런 일들과 싸우게 되느냐 하면 그것은 우리 안에 성육신이 되기 위해서 그렇다.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 섞어지기 위해서 그렇다. 광야를 지나면서 이스라엘이 한 일을 보면 오로지 증거막을 돌보는 것밖에 다른 일이 없다. 먹고 자는 일 외에는 증거막을 돌보는 일이다. 이것은 우리 인생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하는 일이냐 하면 이 증거장막을 위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증거로서 내 삶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의 증거로서 교회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먹기도 하고 자기도 하고 일하기도 한다는 뜻이다.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다. 오직 증거장막을 돌보는 일밖에는 한 일이 없다. 바깥에는 군대가 있고, 그리고 가장 중심부가 성막이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이 성막을 보호하는 일이다. 이 성막을 돌보는 일, 왜 이 일을 계속해야 됐는가? 구약에서 본다면 구약 사람들은 ‘아, 하나님을 모신 곳이니까 우리가 잘 모셔야지.’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신약 안에 와서 예수님을 보니까 그것이 아니고 ‘바로 그것이 목적이었구나. 하나님의 장막을 돌보는 것, 증거막을 돌보는 것, 그것이 바로 목적이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성육신하신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그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위해서 사는 것이다. 우리 안에서 성육신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기 위해서 그래서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러기 위해서 여러 가지 조건들이 사람들에게 주어져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구, 편하면 좋겠다.’ 하지만, 편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조건이 우리로 하여금 성육신하도록 만들어주는 조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에게 우리가 목적을 둔다는 말은 결국 성육신에 목적을 둔다는 뜻이다. 궁극적인 인생의 목적이다. 교회생활,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를 돌보는 일이다. 보호하고 돌보는 일, 그래서 우리 안에 하나님의 증거를 짊어지는 일이다. 그것이 곧 교회생활인 것이다. 교회생활은 바로 인생의 궁극적인 생활이다. 우리는 교회생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서 연합되어 가지고 하나가 되어나가는 것이다. ‘아이구. 나는 이런 것이 없으면 좋겠다. 나는 저런 것이 없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런 것도 없고 저런 것도 없으면 성육신할 수 있는 길이 없지 않는가. 그냥 되는 것이 아니니까. 가만히 앉아서 성경을 많이 연구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기도를 많이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다 그렇게 생각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뭐가 된다던가, 성경을 많이 보면 뭐가 된다던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 것이 아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 번째는 좋은 땅으로 들어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겪었던 그런 좌절들이 기록되어 있다. 부정적인 문제이다. 실패한 문제이다. 왜 이런 실패들이 왔는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첫 번째는 섞여 사는 무리들로 인해서 문제가 생겼다. 탐욕을 부추기는 사람들이 생겼다. “고기가 없다. 왜 우리는 만나만 먹어야 되느냐?” 이런 사립들이 생겼는데, 왜 이런 사람들이 생겼느냐 하면 섞여 사는 사람들 속에서부터 불평이 나기 시작했다. 맨 끝에 섞여 사는 사람, 그러니까 강물로 말하면 강 마지막 끝에 강물하고 바닷물하고 섞여 있는 곳, 그런 곳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중심부에 있지 않고 변두리에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서 불평이 나기 시작했다. 이걸로 인해서 온 불평이 전 백성에게 침범해 들어왔던 걸 보게 된다.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인데, 적극적으로 교회생활을 한 사람에게는 불평이 없다. 그런데 반드시 소극적으로 하는 사람에게 불평이 생기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변두리에 떨어져 있는 사람한테서 문제가 생기게 된다. 왜 그런가? 항상 세상과 접할 수 있는 길이 많기 때문에 그렇다. 바닷물하고 가깝게 있으면 바닷물이 늘 엄습해 들어올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바닷가에 우물을 파보면 물이 근근하다. 바닷물이 아무래도 들어오기 때문에 물이 산중에 나오는 물처럼 달지를 않는다. 근근하니 염분이 있는 그런 물이다. 동래온천은 염분온천이다. 염분이 포함된 그런 온천이다. 결국 세상에 가깝게 접해 있으면 섞인다. 섞이면 불평이 생기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세상이 아니면 불평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을 보니까 불평이 생긴다. ‘아이구, 저 사람은 하나님 안 믿어도 이번에 국회의원이 되던데. 저 사람은 시장이 되던데.’ 이 생각이 어디서 나겠는가? 변두리에서 난다. ‘아, 저 사람은 돈을 벌어서 이러저러하던데.’ 이것이 어디서 나겠는가? 저 변두리에서 그런 생각이 난다. 중심부에서는 그런 생각이 안 난다.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섞여 사는 무리들로 인해서 첫 번째 실패가 오게 됐다. 우리는 섞여 사는 무리들을 조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또 탐욕이 생기게 됐다. 왜냐하면 애굽의 음식을 기억했기 때문이다. ‘아, 애굽에서는 고기를 먹었는데, 생선을 먹고 외를 먹고 수박을 먹고 부추와 파와 마늘을 먹었는데.’ 요즘 같으면 아무 것도 아닌 문제 같지만 광야에서 이것은 중요한 문제였다. 생선, 외, 수박, 부추, 파, 마늘, 팔달시장에 가면 한없이 있는 건데 그 때는 참 큰 문제가 되었다. 애굽의 음식. 왜냐하면 광야에는 이런 것이 없으니까. 한국 사람이 외국에 나가면 김치 먹고 싶어서 환장한다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별로 좋은 것도 아니지만 외국에 나가서 못 먹으면 속에서 댕기게 된다. 애굽의 음식을 기억했기 때문에, 다시 말하면 애굽의 양식, 애굽에서 공급받던 것을 기억했기 때문에 문제가 됐다. 세상에서 인정받던 것을 기억했던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가. ‘나는 세상에서 그래도 괜찮았는데 교회 오니까 죽으라는 소리만 하고 좀 그렇다. 이건 뭐, 세상에서는 그래도 내가 괜찮았는데 교회 오니까 이건 뭐 똥 친 막대기 같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는가. 애굽의 공급을 기억했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변째는 하나님의 만나에 싫증이 났다. 하늘에 속한 맛을 싫어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세상에 속한 맛이 기억되어 있었기 때문에 하늘에 속한 맛은 너무 담백해서 싫다는 말이다. 요즘 아이들이 미원 넣은 것을 먹고 이러니까 그냥 순수한 것으로 음식을 해놓으면 안 먹으려고 한다. 느끼한 것만 좋아하고 이렇다. 반대로 옛날 음식을 먹던 사람들은 느끼한 것을 싫어한다. 그러니까 하늘에 속한 맛을 본 사람들을 세상맛을 싫어하고, 세상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하늘의 맛을 싫어하고 그런 격이 되었다. 결국 우리가 세상맛을 빨리 청산해야 하늘의 맛으로 입맛이 돌아오게 되지 않겠는가. 다른 사람들이 먹는 것을 먹으려고 생각한다든지, 그런 걸 넘어다보게 되기 때문에 결국 만나가 싫증이 나게 되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진노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들에게 큰 재앙이 내리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 번째는 미리암이 반역이었다. 이것은 모세를 시기하는 그런 반역이었다. “왜 모세만 하필이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 있느냐, 하나님은 모세와만 말씀하느냐, 우리하고는 말씀할 수 없느냐?” 이래서 결국 모세를 시기하게 됐던 것이다. 이것은 가까운 데서 일어난 일이었다. 자기의 누나니까 친척이다. 모세의 누이인데 이렇게 되었다. 그리고 구스여자와 결혼한 일에 대해서 그들이 트집을 잡게 되었다. 이 결과로 문둥병에 걸리게 되었고, 백성들의 여정이 7일간 지연되게 됐던 사건이 생겼다. 이것은 결국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사람이 인위적으로 만들 수 있는 걸로 생각했기 때문에 이런 권위에 대한 불순종이 나오게 됐고, 거역이 나오게 됐다. 이런 것들이 결국 실패의 원인이 되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전진을 함에 있어서 이런 문제들은 모두 우리를 실패케 하는 문제라는 걸 기억해야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네 번째는 백성들의 불신이었다. 가나안을 탐지하고 나온 후에 모두 대성통곡을 하고 울었다는 것이다. 믿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된 비극적이 사건이 생기게 됐다.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시켰다. 그리고 그 백성들은 그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소멸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뒤로 물러선다든지 믿음을 갖지 않는다든지 하면 우리는 그 자리에서 빙빙 돌다가 죽도록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기왕 들어왔으면 앞만 보고 전진해야 되는데, 자꾸 빙빙 돌다가는 거기서 자기가 그냥 소멸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애굽에서 나왔던 모든 사람들이 광야에서 소멸되었다. 여호수아 갈렙 외에는 다 소멸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다섯 번째는 인도자들이 반역을 했다. 250인의 두령들이 반역을 해서 “왜 우리는 제사를 못 하느냐, 모세와 아론만 하느냐?” 그래서 자기들이 모두 향로를 만들어서 향을 피우고 제단을 쌓았던 것이다. 이것은 모세와 아론에 대한 권위에 도전한 것이다. 그래서 “너희는 어째서 스스로 높이느냐, 너희만 제사장이냐?” 이래 가지고 분쟁이 일어나게 됐는데, 그 때 땅이 갈라져서 그들을 삼키고 여호와의 불이 나와서 그들을 소멸한 사건이 생겼다. 여기서 구리로 만든 향로를 취해다가 제단의 편철을 만들어서 영원히 기념을 하도록 했다. 그래서 어떤 사람도 그 후로는 제단에 가까이 가지 못하도록 그렇게 막았던 것을 보게 된다. 여기서 합세했던 14,700명이 염병으로 멸망을 했다고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 마지막으로 발람의 음모가 있었다. 이것은 모압의 딸들과 음행을 하도록 유혹을 했다. 그래 가지고 24,000명이 죽게 되는 그런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실패를 왜 하는가? 하나님을 따라가는데 왜 실패를 하는가? 섞여 사는 무리로 인해서, 두 번째는 탐욕으로 인해서, 세 번째는 우리가 권위에 도전하기 때문에, 네 번째는 우리의 불신앙 때문에, 다섯 번째는 인도자들의 반역 때문에, 그리고 여섯 번째는 외부에서 우상의 유혹이 있기 때문에 그래서 실패를 한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그 결과로 인해 가지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오히려 더 순수하게 만들게 되었다. 여러 가지 부정적인 사건이 발생했지만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더 순전하게 만들어서 두 번째 계수를 하게 되었다. 재계수하게 되었다. 요단강가에 와서 가나안 땅에 마지막 들어가기 직전에 이런 사건이 발생함으로써 거기서 완전하게 정화를 시켜서 그래서 재계수를 하게 되었다. 두 번이나 백성을 계수했다는 의미에서 민수기라는 이름이 붙여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전쟁을 위한 것이다. 모든 부정적인 것들을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을 순전하게 만드는데 긍정적으로 사용했다는 걸 우리가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좋은 땅을 소유하도록 준비하는 과정이 있었다. 모압 평지에서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땅을 분배할 것인가를 미리 지시하고 있다. 이것은 중요하다. 들어가서 나누는 것이 아니고, 미리 들어가기 전에 나눠놓고 들어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여행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여행이고, 하나님과 함께 싸우는 싸움이고, 함께 누리는 것이고 함께 건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생각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미리 정하심에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애굽에서 나오는 것도 미리 정하심이다,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도 미리 정하심이다, 그 땅을 분배하는 것도 미리 정하심이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창세기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가서 400년 동안을 지내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이 아브라함에 미리 말씀해지게 된다. 우리의 인생의 모든 것은 미리 정해진 것이다. 내가 새로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요한 계시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어떻게 좋은 땅을 소유하도록 준비됐는가? 첫 번째는 유월절로 인해 가지고 이스라엘이 구출받았으니까 유월절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다. 유월절이 아니었더라면 그들은 좋은 땅에 들어갈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하늘에 속한 양식으로 공급되었다. 생수를 먹고 만나를 먹었다. 이 생수는 매 맞은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이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것이다. 만나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하늘로부터 온 양식과 땅으로부터 온 생수를 먹음으로써 그들이 전진할 수 있었다. 오늘 우리가 그 땅을 소유하기 위해서 전진하는데는 바로 만나와 생수가 필요하다. 이것이 없이 우리가 세상의 것을 먹고는 절대로 그 땅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세 번째는 하나님의 묘사, 당신 자신의 표현이신 율법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장막이 건축된 것이다. 이 장막이 건축되지 않으면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 그 말은 그 땅은 곧 장막이라는 뜻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서 하나님과 내가 합해서 건축되어진다는 것이 영적인 의미로 하면, 실재적인 의미로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묘사가 없다면 우리는 건축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르고는 건축이 될 수가 없다. 그를 보지 않고는 우리가 그려낼 수 없는 것이다. 그의 묘사를 보지 않고는 하나님과 함께 건축될 수가 없다. 율법이 있어야만 건축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어야만 우리가 건축이 된다. 이것을 바로 신성한 계시라고 한다. 여기까지가 출애굽기이다. 그러니까 유월절과 하늘에 속한 양식과 그 다음에 성막, 이것이 출애굽기의 중요한 내용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그 다음부터는 민수기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의 제사장의 군대로 편성되는 것이 민수기의 시작이었다. 이걸 통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수 있었으니까 군대가 아니면 못 들어간다 하는 것이다. 군대가 되어야만 들어간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 땅은 싸워서 들어가는 곳이다. 우리가 싸워야 들어가는 곳이다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적이 있으니까. 적이 없다면 그냥 가도 되겠지만 적이 있기 때문에 전쟁을 해서 들어가는 곳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부정적인 것들을 통해서 우리가 순화되면서 들어간다. 우리는 그냥 갈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그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우리의 많은 부정적인 것이 노출되었다. 왜냐하면 좋은 조건 같았으면 그런 게 안 나타난다. 그런데 조건이 원체 악조건이니까. 불평도 왜 나겠는가? 좋은 조건 같으면 불평 안 할 사람들이다. 애굽에서처럼 양식도 많이 주고 이랬으면 섞여 사는 무리들이라 하더라도 불평을 안 할 수 있다. 그런데 먹을 것이 없고 이러니까 불평이 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조건이 왔기 때문에 부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도 그렇지 않은가. 편하고 좋은데 부정적인 문제가 생기는 사람은 없다. 다 뭔가 문제가 좀 있으니까 거기서 자기 본성이 드러나게 되고 부정적인 모든 요소들이 폭발해 나오게 되고 이렇게 된다. 그래서 “아,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야.” 그랬는데, 어떤 다른 여건에 넣어놓으니까 “아이구, 그 사람 못 땠더라.” 이렇게 나오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걸 통해서 내 속에 숨어져 있었던 부정적인 것이 노출되어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의 그것이 노출되어 나오지 않게 위해서 좋은 환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두지 않고 광야를 통과시키고 있다는 걸 보면 결국 그것들을 벗어야 할 것을 벗어야 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와야 할 것이 나오고, 그래서 ‘아, 내 속에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걸 알아야 그것이 벗어져 나가지, ‘아, 나는 하나도 잘못이 없다.’는 사람이 있다. 전혀 자기는 문제가 없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자기 주변에 문제가 막 일어나고 있는데 자기는 전혀 문제가 없다고 한다. 이런 사람은 백 년이 걸릴지 이백년이 걸릴지 모른다. 목숨이 길면 200년이라도 걸리는데, 목숨이 겨우 80살밖에 못 사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가. 빨리 자기 문제를 깨닫는 사람, 그래야 순화가 된다. ‘아, 내 주변이 시끄럽다. 그러면 왜 시끄러울까? 아, 저 사람 때문에 그래. 저 사람 때문에 그래.’ 이러면 자기는 순화가 안 된다. 자기가 있기 때문에 주변이 시끄럽다는 걸 알아야 되는데, ‘자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고 남 때문에 시끄럽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고쳐질 길이 없다. 그래서 모든 문제를 남에게 원인을 돌리는 사람, 이런 사람은 발전이 없다. 10년이 가도 발전이 안 되고, 20년이 가도 발전이 안 된다. 거기서 빨리 자기 문제를 발견해야 된다. 그 사람이 발전하는 사람이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섯 번째는 약속된 땅의 배분을 위해서 어떤 조정함이 있었다. 그러니까 자기들 마음대로 갖도록 두지 않고 조건을 두어서 ‘이러이러한 조건을 가지면 이러이러한 땅을 가질 수 있다.’ 하는 조건을 조성하게 되었다. 그곳의 거민들을 몰아냄을 통해 가지고 그 땅을 소유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런 조건들이 없이는 우리는 그 땅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군대가 아니고서는 안 되고, 내가 내 부정적인 것이 순화되지 않으면 안 되고, 또 약속된 그 땅의 조정, 배분에 대한 조정에 내가 응하지 않으면 안 되고, 그리고 그곳의 거민들을, 옛날에 살던 그것들을 내가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전에 있던 그것들을 몰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그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러니까 여기서 출애굽기의 이런 과정들이 결국 우리가 지금 하나님을 만나 가지고 그의 나라까지 가는 여정을 그대로 그려놓은 것이다. 천로역정이라는 유명한 소설이 있는데, 이 소설은 어떤 기독교인이 예수를 믿기 시작해 가지고 결국 천성까지 가는 그 길을 여러 가지 기독교인으로서의 경험을 가지고 써놓은 책이다. 존 번연이 쓴 유명한 작품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이 작품은 출애굽기와 민수기와 이런 과정하고는 비교할 수가 없이 졸렬한 것이다. 왜냐하면 이보다 더 정확한 것이 없다. 그것을 기독교는 오랫동안 우리 신앙의 어떤 노정으로 생각해왔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데는 이러이러한 것이 있고, 이러이러한 길을 걸어서 이렇게 우리가 천성문에 도달한다, 이렇게 배워왔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천당에 가는 길은 대부분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과 흡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기독교의 작품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나 우리는 그 작품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출애굽기와 민수기를 갖고 있다. 그 안에는 재미있는 것들이 많이 있다. 세지라는 사람도 만나고, 유혹이라는 사람도 만나고, 망상이라는 사람도 만나고, 이렇게 여러 가지가 나온다. 전부 비유적으로 말해놓았다. 세지, 세상 지혜, 유혹, 망상, 이런 것들을 사람 이름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런 것들이 전부 주님께로 가는 길을 방해한다 그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면 문이 있는데, 문앞에 사자 두 마리가 으르렁대고 있다. 그래서 거기를 들어가면 죽을 것 같다. 그래서 못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랬더니 누가 가르쳐주기를 “저것은 묶어놓은 거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들어가라.” 그래서 그 가운데로 들어갔더니 그 놈이 묶여 가지고 못 물더라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두려워하는 자는 못 들어간다 이런 얘기를 비유로 써놓은 책인데 유명한 그런 작품이기는 한다. 그러나 이 출애굽기와 민수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그런 것이다. 우리는 이걸 통해 읽으면서 우리 자신들의 길을 다시 재조명을 해보고, 또 우리에게 아직 일어나지 않는 일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까지도 이미 벌써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사람들이 가는 길을 우리가 다른 방법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큰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이고 큰 거울을 받아야 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좋은 땅에 들어가는 것, 그들은 땅이 필요해서 갔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종살이를 했으니까, ‘아, 우리는 언제 우리 땅을 찾겠느냐?’ 이런 일념으로 갔었다. 그 땅에 대한 간절한 소원, 그들은 그것이 궁극적인 소원이었다. ‘그 땅에만 우리가 살겠다.’ 그 땅이 어딘가? 그건 가나안 땅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바로 그 땅이다.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밖에는 완전한 땅이 없다. 그래서 결국 가나안을 찾아서 가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찾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그 사람들은 그런 고생들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가 있다. 또 우리가 가는 길은 다음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또 거울이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어떻게 걸어갔느냐 하는 것이 다음 사람들에게 또 거울이 될 것이다.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을 100% 그 안에서 소화해야 할 것이다. 그걸 피해가서는 우리는 갈 길이 없다. 그래서 꼭 정해진 길을 가게 되니까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한 대목 한 대목 42과정을 지나가는 그 모든 대목들이 전부 우리 안에 있는 대목이니까 그 대목에서 우리가 어떻게 그것을 통과해 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필요하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애굽의 속박에서, 사탄의 노예됨에서 해방시켜주시고, 당신을 섬기는 백성으로, 그리고 당신과 함께 건축되는 백성으로 우리를 불러모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그 땅에서 목적도 없고, 소망도 없고, 아무 가능성도 없는 노예들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광야에 나와서 비록 그것이 어려운 과정을 지나간다 할지라도 소망이 있고 목적이 있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우리가 목적이 있고 소망이 있는 백성이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세상에서 방황하는 그 많은 사람들에게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기 원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전해주기를 원하고 그걸 모두 다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장막으로 건축되는 사람들이 되도록 우리가 그들을 이끌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먼저 주의 장막으로 건축됨으로써 다른 모든 사람들을 주의 장막으로 건축하게 되기를 원하고, 우리가 당신의 군대로 편성됨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당신의 군대로 편성해서 하나님의 원수를 몰아내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하고, 그 땅의 거민을 몰아내고 당신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 모형으로서 이 과정으로서 교회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광야의 과정도 지나가고, 우리는 애굽의 과정도 지나가고 마침내 우리가 가나안 땅에 이르는 이런 실제적인 삶 안으로 우리를 인도하여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영원한 성을 향해서 목표를 가지고 갈 수 있게 하신 주님! 당신의 이름을 우리가 완전하게 드러낼 때까지 우리가 주의 군대로서 주의 제사장으로서 당신이 원하는 목적을 완성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제사장은 신분에 관한 문제이고, 체계는 단체적인 문제이다. 나 혼자 섬기는 것이 아니고 체계적으로 섬긴다. 쉽게 말하면 ‘조별로’, ‘제사장의 반열을 좇아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 이렇게 제사장마다 그룹이 있다. 당직이 있듯이 조가 있다. ‘체계로서 섬긴다.’는 것은 교회로 섬기는 것을 말한다. 나 혼자 섬기는 것이 아니고 연대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혼자 섬기는 일을 다 하는 게 아니고, 물 길러오는 사람, 나무 가지고 오는 사람, 불 피우는 사람, 잡는 사람, 여러 직분들이 있다. 그 직분들이 모두 합해 가지고 하나의 봉사를 완성하게 되어 있다. 이게 바로 교회생활이다. 제사장의 체계로서 주를 섬기는 것이다.&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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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6. 민36장 조상지파의 기업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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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36:37Z</updated>
	    <published>2009-11-10T14:36:3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36장 조상지파의 기업&amp;nbsp;&amp;nbsp;&amp;nbsp;&amp;nbsp; 95. 6. 21&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1 요셉 자손의 자손 중 므낫세의 손자 마길의 아들 길르앗 자손 가족의 두령들이 나아와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두령 된 족장들 앞에 말하여&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2 가로되 여호와께서 우리 주에게 명하사 이스라엘 자손에게 그 기업의 땅을 제비 뽑아 주게 하셧고 여호와께서 또 우리 주에게 명하사 우리 형제 슬로브핫의 기업으로 그 딸들에게 주게 하였은즉&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3 그들이 만일 이스라엘 자손의 다른 지파 남자들에게 시집가면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의 기업에서 감삭되고 그들의 속할 그 지파의 기업에 첨가되리니 그러면 우리 제비 뽑은 기업에서 감삭될 것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4 이스라엘 자손의 희년을 당하여 그 기업이 그가 속한 지파에 첨가될 것이라 그런즉 그들의 기업은 우리 조상 지파의 기업에서 아주 감삭되리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5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에게 명하여 가로되 요셉 자손 지파의 말이 옳도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6 슬로브핫의 딸들에게 대한 여호와의 명이 이러하니라 이르시되 슬로브핫의 딸들은 마음대로 시집가려니와 오직 그 조상 지파의 가족에게로만 시집갈지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7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기업이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지 않고 이스라엘 자손이 다 각기 조상 지파의 기업을 지킬 것이니라 하셨나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8 이스라엘 자손의 지파 중 무릇 그 기업을 이은 딸들은 자기 조상 지파 가족되는 사람에게로 시집갈 것이라 그리하면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조상의 기업을 보존하게 되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9 그 기업으로 이 지파에서 저 지파로 옮기게 하지 아니하고 이스라엘 자손 지파가 각각 자기 기업을 지키리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10 슬로브핫의 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11 슬로브핫의 딸 말라와 디르사와 호글라와 밀가와 노아가 다 그 아비 형제의 아들들에게로 시집가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12 그들이 요셉의 아들 므낫세 자손의 가족에게로 시집간 고로 그 기업이 그 아비 가족의 지파에 여전히 있었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6:13 이는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신 명령과 규례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민수기 마지막 장인 36장은 하나님이 정하신 기업은 이동할 수 없다는 그런 원칙이다. 기업을 분배하는 마지막 장들에 와서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게 기업을 나눠주고 마지막에 레위인들에게 기업을 나누어주었다. 레위인들의 기업의 특색은 그들 중에 도피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도피성은 우리의 피난처이신 여호와, 우리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그런 성이라고 할 수 있다. 48개의 성의 배정되었는데, 그 중에 6개가 도피성이었다. 이 48개는 성막을 세우는데 금판자, 그러니까 조각목에다가 금을 입힌 판자가 48개였던 것이다. 이런 연유를 연결해서 하나님의 성막을 봉사하는 레위인들의 기업이 판자수와 같았다고 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은 전에 그 기업을 나눌 때 슬로브핫의 딸들이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낳지 못했는데, 그러면 우리 아버지의 기업을 우리가 받아야 되지 않겠느냐?” 그렇게 요구를 해 가지고 그 요구가 옳다고 해서 다섯 딸들에게 아버지의 기업을 분배했던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 지파에서 그런 이의를 다시 제기하게 되었다. 만일 그 딸들이 아비의 기업을 가지고 다른 지파에게로 시집을 가버리면 그 기업이 다른 지파에게 합해지고 우리 지파에서는 그 기업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이냐 이런 이의를 제기하게 되었다. 그래서 모세가 대답하기를 “시집을 가는 것은 자유지만 오직 그 아비 지파에게로 시집을 가거라. 그러면 그 땅이 변동이 없지 않겠느냐.” 이렇게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지파의 기업은 감삭되지 않고 항상 똑같은 것이니까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는 그런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이 기업은 제비뽑아 얻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정해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형제간들이지만 전라남도, 전라북도, 경상남도, 경상북도, 이렇게 경계를 갈라주었다. 갈라준 것은 영원히 변치 못한다는 뜻이다. 희년이 돌아오면 팔았던 거라도 다시 되돌아와야 되기 때문이다. 가령 요셉 지파의 땅은 영원히 요셉 지파의 땅이다. 다른 지파는 그 땅을 소유할 수가 없는 그런 원칙을 갖고 있다. 이런 원칙 때문에 이런 법이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 기업은 옮길 수 없다. 아비 이름으로 받은 기업은 옮길 수 없다.”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여자들의 제안과 남자들의 제안, 두 가지가 나왔다. 그런데 여자들은 구체적이고 섬세한 제안을 했다. “우리 아버지가 아들이 없이 죽었으니까, 그러면 만일 우리가 딸들이기 때문에 기업을 받지 못한다면, 남자 중심으로 받는다면 우리 아버지의 기업이 없어지지 않느냐?” 이렇게 제안을 했다. 그러니까 아주 섬세한 것이다. 그런데 그 지파의 두령들은 그 집만 생각한 게 아니고 전체 기업을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딸들이, 예를 들어서 자기 아버지 기업이라 해서 그것을 가지고 다른 데로 시집을 가버리면 자기들은 일이 해결되지만, 우리 지파의 전체의 기업이 손실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게 제안을 했다. 여기서도 여자들은 좀 섬세하고 근시안적이고, 남자들은 좀 포괄적이고 원시안적이라고 하는 그런 걸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집안에서 문제들도 대개 보면 전부 이런 문제 때문에 생긴다. 여자들은 시집을 왔어도 ‘자기 집만’ 이렇게 생각한다. ‘내 남편만 있으면 된다. 내 자식만 잘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남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고, ‘집안, 부모, 친척.’ 이렇게 생각한다. 그러니까 생각하는 것이 서로 다르다. 하나는 원시적이고 좀 포괄적이고, 하나는 근시적이고 편협하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한쪽 말만 들어버리면 남자가 그 집안에서 고립된 사람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자 말만 듣다 보면 남자는 그 집안에서 고립되어 버린다. 왜냐하면 “제사 집에 가지도 말아라. 초상집에 가지도 말아라. 결혼식에 가지도 말아라. 우리끼리 살자.” 이래버리면 그 남자는 완전히 그 집안에서 고립이 되는 사람이 된다. 그런데 남자가 하자는 대로만 하면 또 어찌되는가? 그러면 여자들이 죽어난다는 것이다. 고생을 많이 한다. 그래서 서로 이런 문제 때문에 문제가 많이 생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결국 이 견해차가 둘이 서로 조화를 이루는 것이 오늘 해결된 그런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딸들은 딸들대로 자기 아버지 기업을 가지고 가고, 또 지파는 지파대로 그 기업을 잃지 않고 할 수 있는 방법은 딸들이 기업을 받지만 그 지파 안으로 시집을 가면 된다 그런 얘기이다. 아주 지혜로운 그런 방법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사람과 기업이라는 것을 보게 되는데, 사람은 옮길 수 있어도 기업은 옮길 수 없다 이런 원칙이 나온다. 사람은 옮겨가도 된다. 다른 지파로 시집가려면 가거라. 그러나 기업은 놔두고 가거라. 기업은 가지고 갈 수 없다. 이런 말이다. 창세기에서 아담이 동산을 분배받았다. “너는 동산에 거해라.” 그래서 아담을 하나님의 동산에 두었다. 그건 아담에게 주어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아담이 잘못했을 때 어떻게 되는가, 아담이 자기가 받은 기업이니까 자기가 가지고 가는가? 자기가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몸만 빠져나가게 되었다. 기업은 그냥 놔두고 자기는 밖으로 쫓겨나가게 되었던 그런 걸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동산은 아담에게 분배된 것이지만, 근원적으로 소유주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이니까 그걸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니다 이것이다. 우리에게 분배된 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우리에게 분배된 그리스도는 내 것이지만 그러나 그 근원이 하나님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내 목적으로 사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내 목적대로 그것이 사용될 수 없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분배해준 그 기업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만 내 기업이지 하나님의 목적 밖에서는 내 기업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생명을 받아서 새로운 모든 것이 우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지금 그것은 분명하게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그리스도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만 내 것이지, 그 목적을 벗어나면 내 것이 될 수가 없다. 금방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만다. 내 것이니까 영원히 내 것같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그것은 사라져 버리고 변질되어 버리고 만다는 걸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이름으로 되어진 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단지 그것을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내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인생은 내 것이지만 그러나 내 인생은 이름이 누구 것이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만 이것이 내 것이지, 영원한 목적을 벗어나면 내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을 떠나서 우리 자신을 사용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축복이 우리 안에서 없어져 버린다는 걸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의 이름 안에서 주어진 것이니까, 그의 목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목적에 사용될 때만 영광스럽지 그 목적이 아닌 데 사용될 때는 우리가 영광스럽지 못할 뿐만 아니라 부끄러운 것으로 바꿔져 버리고 만다. 똑같은 건데 그렇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군인들에게 총을 분배해준 것은 대단한 특권이다. 아무도 무기를 소지할 수 없지 않는가. 그런데 군인들에게만 무기를 주었다. 그런데 그것은 국방을 목적으로만 준 것이다. 그러니까 국방을 하는 한에 있어서는 그것이 내 것이다. 내가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국방이라는 목적을 이탈할 때는 그건 흉기가 된다. 그리고 그걸 소유하면 벌을 받게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보통 ‘탈영병들 사건’ 이런 것이 많이 나온다. ‘무장을 하고 탈영을 했다. 무장 탈영병.’ 이러면 난리가 나는 것이다. 그건 잡히면 사형이다. 무장을 하고 탈영했으니까. 특권을 주었기 때문에 그 특권이 자기 것인 줄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 특권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서 주어진 특권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우리에게 ‘신성한 생명, 거룩한 생명’이 주어졌다는 것은 신성한 목적 때문에 주어진 것이지, 신성한 목적이 아닐 경우에 그것을 우리가 만일 우리의 속된 목적을 위해서 신성한 생명을 사용하게 된다면 우리는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더 영원하고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준 생명이고 사명이고 기업인데 그걸 갖다가 내가 다른 데다가 사용했다. 그러면 마치 군인이 총을 다른 데다가 사용한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절대로 하나님이 자기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우리가 우리 마음대로 옮길 수가 없다. 꼭 그의 목적 안에서만 우리는 자유를 갖는 것이다. 우리 인생도 그의 목적 안에서만 우리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군인은 군인의 사명 안에서만 자유가 있다. 그러나 군인의 사명을 떠나면 자유가 없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 이것은 영원히 변할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내가 받은 것, 그러니까 내가 그 기업을 가지고 세상에 나갈 수가 없다. 그 기업을 가지고 내가 세상을 위해서 쓸 수 없다 하는 것이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 이름을 위하지 않는 데서는 그것이 구원이 되지 않는다. 그 이름을 위해서만 우리가 구원이 되게끔 된다. 우리가 경험에서 알 수 있는 대로 우리는 신성한 걸 받아서 그걸 세상을 위해서 활용하게 될 경우 우리는 그것이 흉기로 변한다는 걸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손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러니까 마땅히 그것은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세상으로 나간다면 그 기업은 내놓고 나가야 된다 그런 원칙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신약에 와서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기업이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주어진 기업이다. 그래서 로마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하였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속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서 우리에게 의롭다 함이 된 것이지, 그 은혜로 말미암지 않는다면 그 구속도 우리에게 의로움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되어진 것이니까 그건 절대로 우리가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업이다. 그런데 그것이 더 궁극적으로 더 최종적으로 나가면 교회가 된다. 그러면 교회는 우리에게 최종적인 기업이다. 우리가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여러 가지 과정을 겪어서 우리가 마지막 도달한 자리는 어디냐 하면 교회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교회를 세상을 위해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를 가지고 갈 수가 없다. 떼어 가지고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세상과 우리의 최종적인 기업인 교회를 섞어버릴 수가 없다. 교회는 교회로 영원히 보존되어야 하지, 우리가 세상을 위해서 그것을 사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교회를 세상의 목적을 위해서 사용할 수가 없다 그런 원칙이 되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지고 가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내가 내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세상에 나갈 때도 나는 교회 없는 그리스도를 가지고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교회가 되고, 그리스도라는 기업이 최종적으로 교회라는 기업으로 우리한테 오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 없는 그리스도만 가지고 세상에 나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나간다면 반드시 교회를 가지고 나가게 된다는 걸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교회에 속하지 않는 그리스도,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분배된 그리스도는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되고, 우리에게 분배된 교회는 그리스도가 생명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 둘이 분리되어서 따로 떨어져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분리된 그리스도가 있을 수가 없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기업을 지켜야 한다 그런 사명을 알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지파 안으로 내가 출생한, 내가 속하여 있는 지파 안으로 영원히 귀속해야 된다. 우리는 다른 데로 갈 수 있다. 내가 아무리 성장하고, 내가 아무리 온전해졌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 지파 안으로 귀속해야지, 다른 데로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금방 그것은 사멸되어 버리고 만다. 없어져버리고 만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성경에서 요셉과 마리아가 결혼했는데, 이 두 사람들이 다 각기 같은 지파에 속한 사람들이다. 요셉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후손이고, 마리아는 다윗의 아들 나단의 후손이다. 그러니까 거슬러 올라가면 다 다윗의 자손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다 지파에 속한다. 둘 다 그렇다. 그러니까 이 두 사람이 갈라져 있는 것 같았어도 마지막에 그리스도를 낳을 때 하나가 되어 가지고 그리스도를 낳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곧 유다 지파의 자손이 되게끔 된다. 예수 안에서 솔로몬과 나단이 둘이 아니고 하나가 된 셈이다. 지금까지 예수가 없을 때는 둘이었지만, 예수가 나옴으로 말미암아서 그 둘이 도로 하나로 다시 귀속되어 오는 걸 보게 된다. 우리도 우리의 분깃이, 기업이 원래의 출처로 다시 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받았고, 무엇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결국 도로 그리스도에게로 영광이 돌아가게 된다.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아도 그 영광은 도로 그리스도에게로 귀속된다. 절대로 그 기업은 삭감되면 안 된다. 만일 그리스도와 그 기업이 삭감되면 우리가 누리는 것을 가지고 유지할 수 있는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 태양이 빛을 비추기 때문에 우리는 태양을 마음껏 누리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빛이 우리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것만 따 가지고&amp;nbsp; 사용할 수도 없고, 이것만 따 가지고 갈 수도 없다. 그러니까 태양이 감소되지 않는 한에서 우리는 이 빛을 누리고 있는 거지, 태양이 만일 감소된다면 우리는 이 빛을 누릴 수가 없다. 분명히 우리가 사용하기는 하지만 우리 것은 아니다. 우리 인생이 바로 그렇다. 분명히 우리가 사용하기 때문에 우리 것이라고 할 사람 있는 데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감소되면 우리 자신이 그걸 누릴 수가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가 영원히 영화롭게 되도록 한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그리스도를 누리게 될 것이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누릴 수 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태양을 가려버리면 우리는 금방 빛을 볼 수 없게 된다. 태양이 항상 비치도록 놔두어야 된다. 그래서 창문을 항상 열어놔야 우리가 빛을 누릴 수 있지, 창문을 우리가 굳게 닫아버리면 빛을 누릴 수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태양으로 하여금 마음껏 비치도록 해야 내가 마음껏 태양을 누리게 된다. 그리스도로 하여금 우리가 마음껏 비치도록 해야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지, 우리가 분배받았다 해서 그걸 내 것으로 가지고 갈 수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빛이 입자냐 뭐냐 이렇게 하든데, 아마 빛을 담아놓을 수 있는 그릇은 없는 것 같다. 빛이 분명히 있기는 있는데 이걸 어디다 담아놓지는 못하는 것 같다. 어딘지 하여튼 담아놓지는 못한다. 분명히 가는 걸 보니까 빛이 가더라는 것이다. 빛이 속도가 있다 해도 그걸 느끼기는 어렵지 않는가. 그런데 군부대에선가 어디서 확 비치는 빛이 있다. 그런데 캄캄한 밤하늘에 그것이 비치는데 보니까 그것이 비행기가 날아가듯이 날아가더라는 것이다. 총알처럼 빛이 좍 날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 빛이 저래서 속도가 있다 하는구나.’ 이렇게 느끼게 되었다. 분명히 속도가 있는 걸 보면 그 질량이 있는지 부피가 있는지 있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어디다가 저장해놓든지 담아놓을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도 마찬가지이다. 분명히 그분이 현재적으로 우리 안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가 그것을 내 것으로 담아놓을 수가 없다. 만나를 갖다가 내 집에 쟁여놓으니까 구더기가 나더라 하는 것과 똑같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누리던 어떤 것을 밖으로 가지고 나가서 마치 자기 것인 양 자기 혼자 누리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끔 있다. 그런데 얼마 가보면 금방 없어져버리고 만다. 자연 소멸되어 버리고 만다. 참 이상한 일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지파는 그 지파의 기업을 꼭 보존해야 되고 확보해야 된다. 계시록에 보면 열 두 보석, 열 두 진주, 이런 게 나온다. 그런데 그건 열 두 지파를 상징한다. 그러면 열 두 지파가 각기 다른 색깔을 가지고 있다. 문도 각기 다른 문을 가지고 있다. 진주문이 열 두 개인데 그 열 두 개는 면이 다르게끔 그렇게 되어 있다. 보석도 색깔이 다 다르도록 되어 있다. 왜 똑같은 색깔로 혼합되지 않고 각기 다른 색깔로 있는가? 그러니까 거기서 만일 빨간색 보석이 조금 쪼개져 나가서 파란색 보석하고 섞여 버렸다. 그러면 뭐가 되겠는가?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안 되는 것이다. 빨간색 보석은 빨간색 보석대로 조금도 손색없이 완전해야 되고, 파란색은 파란색으로 완전해야 된다. 결함이 있으면 안 된다. 그래야 그것이 성이 될 수 있다. 영원한 성이 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그 지파의 기업이 옮겨지지 못한다.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기업을, 세상으로는 물론 말할 것도 없지만, 절대로 다른 데로 옮길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어쩌면, 말이 어폐가 있지만, 하나님의 전체적인 세계 안에서 우리는 예수 지파라 할 수 있다. 석가모니 지파도 있는지, 공자 지파도 있는지 모르지만 좌우지간 우리는 예수 지파이다. 구체적으로 땅에 오신 예수 지파이다. 그래서 다른 지파가 있다고 하기에는 좀 이상하기는 이상한데, 예를 들어서 하늘로부터 직접 받았다 하는 지파도 있을 수 있고, 이런 것이 있을 수 있지 않겠는가. 요즘으로 말한다면 하늘에서 직접 성령을 받았다든지 이런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구체적으로 땅에 오신 예수의 지파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지파의 기업을 옮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분깃을 옮길 수 없다. 우리가 그 분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있어야 될 이유가 있다.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구체적으로 나사렛 땅에서 살았던 한 사람의 지파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기업을 소유함에 있어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하고 색깔이 다르다. 그 다른 색깔을 조금이라도 떼어내면 안 된다. 떼어내어 가지고 다른 데로 가지고 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또, 이것이 결혼하는 문제하고도 연관이 되는데, 우리가 만일 교회 밖으로 결혼하게 될 때 우리는 어떤 기업의 혼란이 생기게 되고 혼합이 생기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래 가지고 결국 자기 기업을 잃게 되는 그런 결과를 보게 된다. 이것도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절대로 이동할 수 없다. ‘절 보기 싫으면 중이 떠나라.’ 이런 뜻과 같다. 절이 옳길 수가 없으니까, 자기가 그 절이 싫으면 다른 절로 가야지 절을 딴 데로 가라 하고 자기가 거기 앉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보다 땅이 더 중요하다.’ 이런 이상한 논리가 나왔다. 땅이 더 중요하다. 그런데 왜 땅이 더 중요하다고 할까? 그 땅은 바로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우리는 변할 수 있는 존재지만 땅은 변할 수 없는 존재다. 그래서 땅은 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옮길 수 없다. 그것이 만일 그리스도가 아닐 경우에는 ‘사람이 더 중요하지 땅이 더 중요하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안 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이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때문에 중요하지, 만일 그리스도가 아니라면 그 땅보다 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땅은 바로 사람중의 사람인 그리스도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어디서 나왔는가? 땅에서 나왔다. 땅이 없으면 우리가 나올 수가 없다. 그래서 땅은 영원히 변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땅은 영원히 옮기지 못한다. 분깃을 옮기지 못한다. 이런 율례를 정해놓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출애굽기에서 민수기까지 오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가지고 여행을 통해서 전쟁을 하고 그래서 적들을 물리치고 가나안을 정복해 가지고 그 땅을 분배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결국은 출애굽을 했던 과정은 이 가나안 땅을 정복해서 분배하고 누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땅이 목적이었다. 그 땅을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역사적으로 참 기이하게도 땅과 불가분의 인연을 갖고 있는 사람들, 그래서 땅이 없음으로 인해서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그런 백성들이다. 2000년 동안 그들은 민족은 있었지만 땅이 없었다. 그래서 유랑하는 유태인이 되게끔 그렇게 되었다. 지금도 결국 그 땅을 필사적으로 지키지 않으면 안 될 이유가 바로 거기 있다. 2000년 동안을 땅 없이 살아봤으니까, 집 없는 설움처럼 그들은 땅 없는 설움을 갖고 살았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도 땅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제협약이고 유엔이고 다 소용이 없다. “너희가 우리를 살려주나?” 이것이다. “우리가 망해버리면 너희들이 살려주겠느냐? 땅을 떼어주겠느냐?” 그러니까 그건 어떤 결정을 해놔도 소용이 없다. 만일 자기 땅이 위협받는다면 당장 미사일을 쏘고 당장 원자폭탄이라도 사용해서 자기 땅을 차지해야지 안 그러고는 살 수 없는 백성이다. 이런 역사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그들이 그렇게 땅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철저하다는 걸 보면 우리도 ‘사람에게 땅이 아니면 안 되는구나.’ 하는 걸 볼 수 있다. 우리가 지금 땅이 있어서 땅의 필요를 못 느끼고 있어 그렇지 정말로 만일 땅이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땅은 무엇보다도 귀중한 것이다. 그 땅은 바로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는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현실이기 때문에 만일 그가 없다면 우리 인생은 설 자리가 없게끔 되게 마련이다. 살 자리가 없게 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교회가 우리의 최종적인 땅이 될 것인데, 교회가 없으면 내가 살 곳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리는 정상적인 인간이 되는 것이다. ‘교회 없어도 잘 살아간다.’ 이건 정상적인 것같지만 비정상적이고, ‘교회가 없이는 나는 살 수 없다.’ 이렇게 되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나는 사회 없이도 존재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것이 아니고, ‘나는 사회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다. 그러니까 최종적인 사회는 바로 교회라는 걸 볼 수 있고, 그 교회가 우리에게는 절대적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된다. 교회라는 이 기업, 이 기업은 영원한 기업이라는 걸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이제 민수기를 요약해서 나타난 계시의 중요한 개요를 마지막으로 더 살펴보려고 한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계시된 신성한 계시의 중요한 개요를 우리가 보는 것이 중요하다. 사탄의 속박에서 구속된 것이 출애굽기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 그리고 말씀, 곧 그리스도이다. 그 계시를 받아 가지고 성막을 건축하는 것, 이것이 출애굽기의 목적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사탄의 속박에서 구출한 것은 결국 하나님의 영원한 거처인 성막을 건축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민수기에 내려올 때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의 군대로 편성이 된다. 왜냐하면 이것은 좋은 땅을 갖기 위해서인데, 좋은 땅이 그냥 오는 게 아니니까 좋은 땅은 전쟁을 통해서 우리가 뺏어야 하는 땅이기 때문에 군대로 편성되어 가지고 마지막에 좋은 땅을 분배함으로 끝나는 것이 민수기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것이 신약의 원칙과 일치하는 것이다. 애굽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 영적으로 하면 그건 세상의 속박에서 벗어난 것과 같다. 그리고 바로의 박해에서 해방된 것, 이건 사탄의 유혹에서 해방된 것이다. 바로는 항상 어떤 달콤한 걸 가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으로 부려먹었다. 사탄도 마찬가지로 달콤한 걸 가지고 사람들을 부려먹고 있다. 애굽에서의 구원, 그건 세상에서의 구원이다. 바로에게서의 해방, 이건 사탄에게서의 해방이다. 그러니까 출애굽기에 있는 이 사건들은 영적인 실재 안에서 그것을 표현하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시내산에 와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이 계시는 신약에 와서 바로 그 계시 자체인, 그리고 계시 자체의 체현이신 아들, 하나님의 아들, 아버지의 아들, 그 아들이신 예수 자신이 바로 시내산에서 보여주었던 계시이다. 그러니까 시내산에서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 그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실재가 충만하더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시내산에서는 아버지가 자기의 모양을 말씀으로 보여준 것이고, 신약에 와서는 아버지가 아들이 모양으로 체현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이 인격이 되어 가지고, 인격체가 되어 가지고 우리 가운데 거하시게 되었다. 그래서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다.” 그렇게 요한복음 1장에서 말하고 있다. 시내산에서 받은 계시는 우리가 복음서에서 본 바로 그 예수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막을 건축하게 됐다. 이렇게 저렇게 건축하라 해서 건축이 됐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건축된 교회와 같다. 그러니까 성막은 교회의 축소판이다. 교회는 그러니까 성막과 똑같아야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를 성전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모르고 한 말이지만 성막은 교회의 축소판이고 모형이다. 그러한 모형과 같은 그런 사회를 내다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약에서는 모형으로, 물질로 묘사되어 있던 것이 신약에 와서는 인격으로 그것이 구성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구약의 성막은 신약의 교회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군대로 편성됐다. 이것은 에베소에서 있는 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군대로 편성된 걸 말한다. 우리는 그의 아내이고 신부일 수 있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우리가 그의 군대가 되어서 그와 동역하는 동역자가 되는 걸 보게 된다. 함께 전쟁에 나가는 사람, 그래서 우리는 안일하게 안방에서 삶을 누리는 그런 생활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주님과 함께 전쟁에 참가하는 전투하는 군대가 되게끔 된다. “전신 갑주를 입어라.” 그런 말이 에베소 6장에 오면 나오게 된다. 만일 이 전투에 참가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좋은 땅을 기업으로 얻을 수가 없다. 우리가 그냥 편안한 자리만 누리게 된다면 그 사람은 기업이 없는 사람이 되게 된다. 땅을 확보할 수 없게 된다. 그리스도와 함께 동역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기업을 우리가 누릴 수 없다는 걸 알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군대로 나가는 일은 여러 가지 고통을 수반하는 일일 수도 있고, 어려움을 수반하는 일일 수도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동역하고 그리스도를 위해서 싸울 때, 전쟁할 때 내가 어떻게 편하겠는가. 내가 편치 않아도 그 목적을 위해서 우리가 협력하고 같이 싸워야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에 나갈 때, 또 누구를 대할 때 내가 그냥 나만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군대다.’ 하는 생각을 항상 가져야 한다. ‘나는 군대다. 나는 싸우는 사람이다. 내 주위에는 적이 있다. 우리가 서로 싸우고 있을 때도 주변에는 적이 있다.’ 그걸 우리가 알아야 한다. 지금 우리 나라 같은 사정에서, 안에서 선거하느라고 치고 박고 야단이다. 링에 올려다 놓으니까 서로 주먹 쥐고 치고 하는데, 그럴 때도 항상 적이 있다는 걸 생각해야 된다. 그러나 적이 있다는 걸 생각을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 같다. 자기들의 싸움에 취해 가지고 적이 있다는 걸 모르고 이적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런 것이 큰 문제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집안에서 싸울지라도 바깥에는 적이 있다 그걸 알고 싸워야 되는데, 너무 싸움에 몰두하다 보니까 그걸 망각해버려서 적을 끌어들인 그런 결과를 지난 수년 동안에 우리 나라에서 해왔다. 이런 것들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설사 불평이 좀 있고 문제가 있고 이렇게 한다 한다 할지라도 어디까지나 그것은 우리 안의 문제이지, 바깥에는 전체적으로 우리를 위협하고 있고 유혹하고 있는 적이 있다는 것을 의식을 해야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하면 적에게 무엇이 유리할 것인가?’ 그걸 생각해야 된다. 단지 ‘나한테 편하냐 편치 않으냐.’ 이렇게 생각할 것이 아니고 ‘이것이 적에게 무엇을 제공해주는 것이냐? 내가 집안에서 싸우면 적에게 무엇이 유리하게 되는 것인가? 내가 형제를 미워하면 적에게 무엇이 유리하게 되는 것인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이라야 군대로서 자격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지 못하고 막 치고 박는 사람은 군인이 아니고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이다. 자기가 불편하면 좌충우돌 해버리면 이것은 어린아이나 똑같다. 군대의 자격이 없다. 그래서 군대로 편성될 때는 연령에 따라서 편성을 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노인도 아니고 건장한 청년들로 군대를 편성하게 됐던 걸 보게 된다. 이건 오늘날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여행하게 됐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여행하는 것인데, 보통 종교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내가 기도하고 이렇게 함으로써 항상 주님과 동행한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한 단계 넘어와서 과정을 거친 하나님이 우리 안에 분배되어야 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과정을 거침으로써 그 과정을 거치는 것과 동시에 내 안으로 그분이 분배되는 것이다. 내가 그분이 걷는 길을 걷고 그분이 가는 길을 가고 그분의 운명에 내가 동참할 때 그분 자신이 내 안에 살기 때문에 내가 그와 함께 여행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도해서 ‘오늘 좀 주님 나하고 같이 갑시다.’ 이 말이 아니고 그런 뜻이 아니다. 우리 안에 생명으로 분배된다. 이런 여행을 하고 있는 것이 신약이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 구해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를 따라온다던가 아니면 하나님이 앞서 가고 내가 따라간다던가 이런 일이다. 오늘날도 많은 사람이 그런 생활을 하고 있다. 그건 구약적인 생활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 우리가 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사는 것이니까, 그것이 우리가 함께 가는 것이니까 내 안에서 그 운명이 같이 간다면 내 운명이 가는 것이 곧 그의 운명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건 말로는 ‘함께 여행한다’ 하지만, 사실은 ‘함께’라는 말도 뭔가 부족한 것이다. 하나인 삶이니까. 그래서 구약의 여행은 신약에 와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동반하는 것, 우리 생명 안에 동반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가나안 땅을 정복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세상을 정복하는 걸 말한다. 이것은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로 세상을 정복하는 걸 말한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말은 간격이 있으니까 ‘그리스도로 내가 세상을 이기는 것, 내가 세상을 정복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그 땅을 누렸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땅을 누리는 걸 말한다. 인생을 누리는 것을 말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르쳤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이 되게끔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이 출애굽기의 중요한 요점이 된다. 창세기에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선택되었다. 아브라함을 불러내어서 이삭과 야곱을 지나서 12형제를 낳았다. 이것은 선택이다. 하나님이 어떤 목적을 위해서 한 백성을 이 지구상에서 인류 속에서 선택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아담으로부터 시작해서 바벨에 이르는 타락한 인류 안에서, 멸망받을 인류 안에서 한 사람을 불러내어서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한 백성을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 이것이 창세기이다. 그러니까 창세기는 결국 아담으로 시작해 가지고 바벨론으로 끝나고, 그 다음에 아브라함으로 시작해서 요셉으로 끝나는 두 파트로 정해져 있는 걸 보게 된다. 창조받은 사람하고 선택받은 사람하고 둘로 갈라져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출애굽기는 이런 백성이 구출을 받아서 하나님의 거처에 대한 신성한 계시를 받는 것, 이것이 출애굽기의 요점이다. 그러니까 출애굽기는 출애굽에 목적이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거처에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거처는 비록 건축으로 지어졌지만 그것의 궁극적인 의미는 그 백성을 하나님이 거처로 삼으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은 성막을 건축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막이 건축되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내려왔다.” 이렇게 성경은 표현한다. “하나님의 영광이 내려왔다. 머물렀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은 항상 성막 위에 있었다. 하늘에 있는 게 아니고 성막 위에 있었다.” 그렇게 표현한 것이 출애굽기이다. 이걸 볼 때 “하나님의 영광은 성막과 함께 있다. 그러면 성막이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땅에는 없다.” 그런 말이 된다. 오늘날 교회가 없으면 하나님의 영광은 땅위에 없는 것이다. 전혀 없다. “하나님은 영광스러운 분이다.” 아무리 해봤자 소용없다. 성막이 지어지니까 그 위에 영광이 머물렀다. 마찬가지로 오늘 교회가 완성되어야 하나님의 영광이 그 위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그 백성이 바로 그 거처다. 그것을 알게 된다. 구약에서는 성막 위에 영광이 머물렀다. 신약에서는 교회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머문다. 그 교회는 곧 그 백성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결국은 ‘성막은 바로 그 백성이었구나.’ 하는 걸 알게 된다. 하나님은 그 백성으로 자기의 거처를 삼기를 원하고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이 사람들은 신성한 음식으로 공급을 받았다. 하늘에서 오는 만나와 땅에서 솟아나는 생수로 공급을 받았다. 만나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고, 생수는 반석으로부터 나왔으니까 결국은 땅에서부터 나온 것이다. 이 두 가지 음식을 공급받으면서 그들이 자라나게 됐는데,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 양식을 먹고 자라는 것이다. 하늘의 만나와 땅의 생수를 먹고 자라는 것이다. 이 생수는 깨진 반석으로부터 나왔다. 땅에서 아무 데나 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 반석이 쪼개져서 물이 나오더라 하는 거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우리가 거기서 물을 마시게 됐다 하는 것과 같다. 이건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있는 우리 인생이 매 맞아서 쪼개질 때, 우리가 십자가로 말미암아 쪼개질 때 그 때 생수가 나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쪼개지지 않는 반석이 되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쪼개진 반석이 되어야만 그 속에서 땅 속에 있는 물이 솟아오를 수 있기 때문에 우리는 형제들을 하나님께서 반석처럼 깨지라고 치는 것을 보게 된다. 깨져야 물이 나올 것 아닌가. 자기는 안 깨지려고 하지만 막 치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세 번째는 신성한 목적을 위한 군대가 되는 것, 이것이 민수기에 계시되어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전쟁에 참여하는 그런 모습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창세기에서 선택되고, 출애굽기에 와서 거처로 준비되고, 민수기에 와서 군대로 편성되어서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누리는 이런 역사가 진행되고, 이런 그림이 이제 우리 안에서도 실제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우리가 선택되고, 그리스도 예수에 의해서 우리가 건축되고 그리고 그와 함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그런 삶으로 이어져 가게 된다. 우리는 이 역사가 그냥 과거에 있었던 그런 역사가 아니고 영원한 실재를 표현하는 그런 역사이고, 이스라엘 백성을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백성이었다 하는 걸 보게 된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로 단순한 백성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계시를 위한 백성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고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이 계시된다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아주 막중하게 소중한 존재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니면 그 계시가 드러날 수 없으니까. 그래서 이스라엘이 비록 배역하기도 하고 참 어두운 생활을 많이 했지만 그러나 그들이 아니었다면 어디서 이런 계시가 나오겠는가. 그들을 통해서 계시가 나왔으니까. 수도관이 좋든지 나쁘든지 좌우간 그래도 수도관이 있으니까 수돗물이 나오지, 수도관이 없으면 수돗물이 어떻게 오겠는가. 그와 꼭 마찬가지이다. 좋으나 나쁘나 그래도 그 수도관 때문에 물을 먹고 있지 않았는가. 마찬가지로 좋으나 나쁘나 이스라엘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를 이을 수 있게 되고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결코 하나님께서 버릴 수가 없다 그런 논리가 로마서에 나온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런 중요한 책임을 맡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결코 그들을 그냥 버리지 않는다 이런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중요한 계시를 위해서 우리가 존재하기 된다면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참 소중하고도 필요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걸 볼 수 있게 된다. 그럴 때 하나님이 우리를 소홀히 취급할 수 없고 그냥 놔둘 수가 없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어도 하나님이 왜 그 백성을 기어코 붙잡고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에게 목적이 있고 필요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백성을 붙잡고 있다는 걸 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백성은 복된 백성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당신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세상으로부터 구별하여 선택해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주셔서 당신의 거처로 건축되도록 축복하여 주신 걸 감사합니다. 이제 주와 함께 우리가 가나안을 누리도록 인도하여 주셔서 오늘 교회생활 안으론 인도하여 주시고, 여기서 우리가 새예루살렘을 바라보는 영원한 축복 안으로 이끄신 것을 감사합니다. 당신이 주신 기업을 우리가 손색없이 지키기를 원하고, 그리고 그 기업 속에서 하나님이 영광을 드러내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어찌하든지 하나님에게 필요한 백성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의 영광과 당신의 계시를 나타내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가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수기를 앞으로 두 번 더하고 마치겠다. 마지막 개요를 좀더 구체적으로 정리하고 마치도록 하겠다. 여러분이 그동안 죽 더 읽어보시면 좋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면 다시 개요를 정리할 때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lt;/SPAN&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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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5. 민35장 도피성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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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35:29Z</updated>
	    <published>2009-11-10T14:35:2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35장 도피성&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1 여호와께서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35: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의 얻은 기업에서 레위인에게 거할 성읍들을 주게 하고 너희는 또 그 성읍 사면의 들을 레위인에게 주어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3 성읍으로는 그들의 거처가 되게 하고 들로는 그들의 가축과 물산과 짐승들을 둘 곳이 되게 할 것이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4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들의 들은 성벽에서부터 밖으로 사면 이천 규빗이라35:5 성을 중앙에 두고 성 밖 동편으로 이천 규빗, 남편으로 이천 규빗, 서편으로 이천 규빗, 북편으로 이천 규빗을 측량할지니 이는 그들의 성읍의 들이며35:6 너희가 레위인에게 줄 성읍은 살인자로 피케 할 도피성으로 여섯 성읍이요 그 외에 사십이 성읍이라35:7 너희가 레위인에게 모두 사십 팔 성읍을 주고 그 들도 함께 주되35:8 이스라엘 자손의 산업에서 레위인에게 너희가 성읍을 줄 때에 많이 얻은 자에게서는 많이 취하여 주고 적게 얻은 자에게서는 적게 취하여 줄 것이라 각기 얻은 산업을 따라서 그 성읍들을 레위인에게 줄지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9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35: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 가거든35:11 너희를 위하여 성읍을 도피성으로 정하여 그릇 살인한 자로 그리로 피하게 하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12 이는 너희가 보수(報讐)할 자에게서 도피하는 성을 삼아 살인자가 회중 앞에 서서 판결을 받기까지 죽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13 너희가 줄 성읍 중에 여섯으로 도피성이 되게 하되35:14 세 성읍은 요단 이 편에서 주고 세 성읍은 가나안 땅에서 주어 도피성이 되게 하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15 이 여섯 성읍은 이스라엘 자손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중에 우거하는 자의 도피성이 되리니 무릇 그릇 살인한 자가 그리로 도피할 수 있으리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16 만일 철 연장으로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35:17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故殺)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18 만일 사람을 죽일 만한 나무 연장을 손에 들고 사람을 쳐 죽이면 이는 고살한 자니 그 고살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라35:19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친히 죽일 것이니 그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20 만일 미워하는 까닭에 밀쳐 죽이거나 기회를 엿보아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35:21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 죽이면 그 친 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니 이는 고살하였음이라 피를 보수하는 자가 그 고살자를 만나거든 죽일 것이니라35:22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35:23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35:24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35:25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35:26 그러나 살인자가 어느 때든지 그 피하였던 도피성 지경 밖에 나갔다 하자35:27 피를 보수하는 자가 도피성 지경 밖에서 그 살인자를 만나 죽일지라도 위하여 피 흘린 죄가 없나니35:28 이는 살인자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그 도피성에 유하였을 것임이라 대제사장의 죽은 후에는 그 살인자가 자기의 산업의 땅으로 돌아갈 수 있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29 이는 너희 대대로 거하는 곳에서 판단하는 율례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30 무릇 사람을 죽인 자 곧 고살자를 증인들의 말을 따라서 죽일 것이나 한 증인의 증거만 따라서 죽이지 말 것이요35:31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35:32 또 도피성에 피한 자를 대제사장의 죽기 전에는 속전을 받고 그의 땅으로 돌아가 거하게 하지 말 것이니라35:33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5:34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35장은 레위인들이 거처할 성읍과 도피성에 관한 말씀이다. “너희가 얻은 기업에서 레위인에게 거할 성읍과 들을 주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레위인은 제사장 지파를 돕는 지파이다. 그리고 모세와 아론도 레위 지파 사람들이다. 제사장 지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제사장 직무에 봉사하는 사람은 아론의 후손들만 제사장이 될 수 있었다. 레위는 야곱의 열 두 아들들 중 하나이다. 야곱이 아람에서 돌아올 때 숙곳에서 야곱의 딸 디나를 추행한 사건을 인해서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일 때에 레위와 시므온 두 사람이 잔인하게 사람을 죽였던 역사가 있다. 그래서 창세기 49장 마지막에 야곱이 유언을 하면서 레위와 시므온에게 저주를 하고 있다. “그들을 흩어라. 한 곳에 두지 말고 흩어질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런데 레위기나 민수기에 와서 이 사람들이 제사장 족속으로 봉사의 임무를 맡게 되었다. 결국 저주가 축복으로 바꿔진 그런 실례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전쟁하러 나가는데 사용하지 아니하고 성전을 봉사하는데 사용하도록 그렇게 했다. 참 우연한 일이라고 할 수 없다. 잔인한 사람들을 전쟁에 보내면 좋을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 오히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봉사하도록 그렇게 축복을 다시 내린 것을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전에도 한번 얘기했는데 둘 다 잔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시므온은 결국 흩어져 사는 사람으로 그냥 끝나고, 레위는 그래도 성전을 봉사하는 사람으로 남게 됐는데, 그 레위인은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백성들이 우상을 섬기고 춤을 추었을 때 그들이 거기 가담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세가 산에서 내려와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속한 사람은 다 내게로 오라.” 할 때 레위 지파가 칼을 들고 나왔던 것이다. 그래서 잔인하기는 둘 다 잔인하지만 레위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과 열심이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제사장 지파로 구별되게 되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좋은 예가 될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 사람의 성질이 좀 나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열성을 갖고 있다면 그 성질은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질 수 있다는 그런 예가 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거할 성읍, 그리고 들을 그들에 주라.” 사방으로 이천 규빗씩 재어서 들을 주어서 가축과 물산과 이런 것들을 둘 수 있는 그런 곳을 두라고 그렇게 말했다. 이 성읍은 총 48개의 성읍인데, 그 중에서 여섯 개는 도피성으로 정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48이라는 숫자는, 성경 안에 있는 숫자들은 모두 의미를 가지고 있는 그런 숫자니까, 여섯과 여덟을 곱한 그런 숫자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섯은 하나님의 창조가 완성되는 날이 여섯이다. 육일 째 사람이 창조됐으니까. 그리고 8은 부활은 숫자였다. 그래서 창조된 사람하고 부할한 사람을 곱하면 48이라는 그런 숫자가 나오게 되는데, 그 가운데 7이라는 숫자가 있다. 7이라는 숫자는 하나님의 안식과 관계되는 숫자였다. “이레 되는 날을 복 주어서 거룩하게 했다.” 그런데 안식이라는 개념은 신약 안에 와서 구체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한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그것이 일곱이라는 숫자니까 이 일곱이라는 숫자 안에서 십자가가 있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금요일날 해질 때에 십자가에 달렸다는 걸 보게 되는데, 안식일 동안 그는 무덤에 있었다. 죽음 가운데 있었다는 뜻이다. 유태인들은 안식일이 오기 전에 일을 해치우기 위해서 미리 십자가에 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죽음 가운데 있는 시간은 안식일이었으니까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안식일 동안에 주님은 죽음 가운데 있었다. 이 일곱째 날의 죽음을 지나서 여덟째 날로 왔다. 그러니까 여섯째 날은 사람에게 속한 날이고, 여덟째 날은 부활에 속한 날이고, 일곱째 날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날이다. 무엇을 통해서 연합했는가?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된 그런 날이었다.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됨을 지나야만 그 다음에 부활에 이르렀다는 걸 볼 수 있다. 48개의 성읍, 그것을 레위인들에게 주어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직무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을 보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것을 “많이 얻은 자는 많이 내고, 적게 얻은 자는 적게 내라.” 하였다. 그러니까 어느 지파에서 땅을 많이 얻었으면 그것에 비례해서 자기 땅을 레위인에게 내놓았다. 그리고 적게 얻은 지파는 적게 내놓았다는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우리가 무엇을 드리는 예가 될 수 있다. 많이 얻은 자는 많이 내고, 적게 얻은 자는 적게 낸다는 그런 원칙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얻은 것 중에서 이런 비례로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게 된다면 그건 합당한 것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것을 요단 이편의 세계, 요단 저편의 세계, 다시 말하면 요단 강을 사이에 두고 땅이 이렇게 형성되어 있으니까, 요단 강 서편, 지금 실제적인 가나안 땅인 그 땅에도 세 개, 요단 강 동편 땅에도 세 개, 그렇게 했다. 사실은 인구나 이런 걸로 볼 때 요단 강 서편이 훨씬 더 많다. 그리고 땅도 더 넓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쪽에 다 세 개씩이다. 그 셋이라는 수는 하나님의 숫자이다. 그래서 신명기에 보면 삼일 하나님의 수를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땅이 크든지 적든지 그 땅을 셋으로 구분해서 도로를 내고 거기다가 도피성을 내서 도망을 쳐서 거기 들어올 수 있도록 그렇게 하라고 되어 있다. 결국 하나님은 어디도 계신다 그런 뜻이다. 요단 이편에도 계시고, 저편에도 계신다. 죄인이 도망칠 수 있는 도피성은 여기도 있고 저기도 있다. 그래서 자기가 고의로 범죄하지 않는 범죄가 보호받을 수 있는 그런 장소를 마련해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도피성이라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레위인들은 이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결국 도피성을 관리해야만 됐던 그런 사람들이다.&amp;nbsp; 하나님의 도피성은 시편에 오면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이런 개념으로 발전했다. 그래서 이 도피성의 개념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신다.’ 하는 개념으로 발전하게 됐고, 히브리서에 오면 “우리가 앞에 있는 소망을 향하여 피하여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얻게 하려 함이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도피성이신 하나님. 우리가 영원히 피할 그 날개 그늘을 상징하는 하나님.’ 그런 분으로 묘사되게 되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면 도피성은 무엇인가? 도피성은 우리의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그러니까 구약에 나오는 거의 모든 것이 다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그런 것이다. 그래서 그릇 살인한 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요즘 법정 말로 하면 ‘과실치사자’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가 하면, 율법에는 살인자는 죽여야 된다 그런 원칙이 나오게 된다. 이 원칙적인 법을 그대로 적용하면 과실치사자라 하더라도 죽여야 한다. 그래서 과실치시자를 보호하기 위해서 도피성이라는 제도를 마련했으니까 살인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 하는 법칙을 보완하는 입장에서 생겨진 그런 법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회중 앞에서 판결을 받기까지 보호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누가 사람을 죽였으면 그 친척되는 사람이, 관계되는 사람이 그 사람을 죽이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그 현장에서 죽여버리면 그 사람이 어떤 판결을 받지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억울한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도피성으로 도망을 치면, 일단 도피성 안에 들어오면 누구도 그 사람을 손댈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도피성은 거룩한 성이니까, 하나님의 성이기 때문에 그 안에 사람이 들어와서 피를 흘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옛날에 거룩한 장소, 왕궁이라 할지 이런 신성한 장소에서는 절대로 싸울 수 없다는 그런 데서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그 사람이 죄를 졌고 내가 억울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서 들어가서 싸울 수는 없다. 그 속에 들어가서 싸워서는 안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번에 명동성당 문제로 종교계에서 시끄럽게 됐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로 도피성의 원리이다. 가령, 거기 숨어서 거기서 보호를 받아야 되는데, 공권력을 투입해서 이 사람들을 끌어갔다. 이래서 천주교에서 어제 저녁에 당장 두 세 시간 동안 ‘성력회복을 위한 기도회’라는 걸 열었다. 그래 가지고 전국의 사제단이 다 올라와서 한 삼만 여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시위를 벌이고 있는 그런 중에 있다. 왜냐하면 “2000년 카톨릭 역사에서 공권력의 침해를 받은 일이 없다. 그런데 자기들이 침해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카톨릭의 자존심에 큰 손상을 주게 된 그런 사건이 됐으니까, 이 문제를 정치구단이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상당히 난제에 봉착을 했다. 이게 보통 일이 아니니까. 왜냐하면 카톨릭은 카톨릭의 전통이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리고 전 세계의 종교도 마찬가지로 이에 대해서 호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교라는 영역을 그 어떤 공권력이나 정치력이 침략을 해 들어온다면, 그러면 종교가 종교로서의 영역을 확보할 수가 없다. 그래서 옳든지 그르든지 간에 모든 종교가 다 그 편을 들게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봉착이 됐으니까 무릎을 끓고 빌던가 대항을 하든가 하는데, 아마 끝까지 대항을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세계적인 여론이 있기 때문에 굉장히 어려울 거라고 생각한다. 바로 이것이 도피성의 원리에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신부들은 자기에게 피신해온 사람을 절대적으로 보호할 그런 의무를 갖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의 고해성사 속에 만일 현행법에 어긋난 그런 문제를 고해했을 경우 자기는 자기 생명을 걸고 그것의 비밀을 지켜야 할 그런 의무를 갖고 있다. 이것이 모두 도피성의 원리에서 나온 그런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의 영원한 도피성이신 그리스도, 그래서 정당한 판결을 받기까지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그런 도피성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어째서 우리에게 영원한 도피성이 되느냐 하면 어차피 세상의 판결은 공평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판결이 올 때까지 우리는 도피성에서 보호를 받아야 된다는 뜻이다. 세상은 자기들 일은 자기들끼리 옳게 판단하고 하겠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있는 일은 세상의 판결을 받을 수 없다. 이것을 세상의 판결에 맡기면 세상은 백발백중 다 자기들 입장에서 판결할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은 이런 원리가 마침내는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서 우리의 앞에 있는 소망을 찾아서 가는 사람들에게 피난처가 되게끔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코 살인자를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고 과실치사 자를 보호하자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릇, 부지중에, 예를 들어 도끼로 나무를 패고 있는데 도끼 자루가 부러져서 나갔는데 그것이 옆의 사람을 치어서 죽었다. 이런 경우에 과실치사가 아닌가. 나는 살의가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사람이 죽었다. 그럴 경우에 이 사람은 범죄 의사가 없었으니까 그 사람은 보호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살인자를 보호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그 사람이 고의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따라서 억울하게 죽게 된다면 그것을 보호해주어야 되지 않느냐 이런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보호의 책무를 맡은 사람은 제사장들(레위인들)이었는데, 제사장들 자신 즉 레위 조상들이 살인자들이었다. 이방이들을 죽인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이런 살인자들을 들어서 억울하게 죽은 자를 보호하게 했다는 것이다. 살인자를 들어서 억울하게 죽은 자를 보호했다. 나는 이런 생각이 든다. 교통단속을 누구보고 하라고 하면 되느냐 하면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을 시켜서 교통을 시키는 것이다. 내가 만일 경찰청장이라면 그렇게 하겠다.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들을 전부 데려다가 벌금을 매길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을 죄의 경중에 따라서 하루를 교통 순경을 시키든지 아니면 한 달을 시키든지 이렇게 시키는데 ‘딱지를 몇 장 떼어오면 용서해준다’ 이렇게 하자 이것이다. 그러면 자기가 방금 까지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인데, 금방 돌아서서 자기는 교통법규를 어긴 사람을 일일이 감시를 해야 될 거라는 것이다. 아마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살인자를 들어서 오히려 살인자를 보호하도록 이렇게 만든 법이었다. 잔인한 자를 들어서 오히려 하나님을 봉사하도록 만드는 이런 하나님의 은총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은 영원히 그런 누명을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교통법규를 어겼지만 내가 다시 가서 교통법규를 철저하게 지키도록 다른 사람을 훈도 했으면 나는 그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교통단속을 하다 보면 그 다음에는 ‘나도 교통법규를 위반해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걸 자기가 알게 될 거니까 형무소에 보내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리고 깡패들을 잡으려면 깡패들을 잡게 만들면 된다. 그러면 아주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법에는 고살자, 다시 말하면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절대적으로 보호하지 말아라 는 것이다. 마지막에 가면 그런 말이 나온다. “고살자를 속할 것은 그의 피밖에 없다.” 이렇게 성경이 말한다. 다른 건 무엇으로도 속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어떤 죄든지 죄를 지으면 그 죄를 대신해서 무엇이든지 무엇인가를 지불할 수 있다. 요즘 말로 하면 벌금인데, 속전이라고 하는 것인데, 이걸 주면 그 죄가 면죄될 수가 있다. 그래서 속전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 여기서 구속의 원리가 나오게 되었다. 그런데 고살자에게는 속할 것이 없다 이것이다. 자기 피밖에는 속할 것이 없다. 자기 피를 내놔야 된다. 이런 원리가 나왔다. “절대로 속전을 받지 말아라. 그 사람이 어떤 경우에도 속전을 받지 말아라.”는 것이다. 그 안에 있어서 돈을 많이 내면 살아날 수 있는가? 돈을 아무리 내도 살아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반드시 고살자는 자기 스스로의 피로 그걸 갚아야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그릇 살인한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대제사장에게 보고하고 감독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으로부터 그 사람을 지켜주고, 정당한 판결을 받게 하고, 정당한 판결을 받은 다음에 이 사람은 결국 도피성에서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놓았다. 도피성 안에 있는 동안에는 누구도 그 사람을 손댈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 사람이 도피성 밖에 나갔다. 그러면 언제라도 그 사람을 죽여도 죄가 되지 아니한다. 도피성 밖에 있는 사람은 보수할 자가 죽여도 그 보수한 자에게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중세에 오며 파문이라는 법하고 연결된다. 교회에서 파문된 사람은 죽여도 살인죄에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때가 있었다. 왜냐하면 종교가 정치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을 때였다. 예를 들어서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고 재판소에서 나오게 될 때 누가 그 사람을 죽여도 아무도 살인죄에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독일의 제후가 기병을 숨겨놓았다가 루터를 채어와서 독일로 피신을 시켰던 일이 있다. 바로 이것이 도피성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도피성 밖으로 나가면 자기는 죽어도 할 말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도피성 안에서 있어야 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대제사장이 죽으면 밖으로 나가서 생업을 가질 수 있다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대제사장이 죽으면 왜 나가도 되는가? 대제사장은 이 사람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감독하는 책임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보호를 하고 감독을 하는 것인데 감독이 끝났다는 뜻이다. 그리고 영적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완전하게 해방됐다 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구약 안에서 모든 사람들은 다 도피성 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제사장이 아직 안 죽었으니까. 그런데 신약에 와서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는 이제 도피성에서 있는 사람이 아니고 완전한 해방에 이른 사람이다 하는 것이다. 구약적인 의미나 신약적인 의미를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구약은 아직 도피성 안에 있는 상태이고, 신약은 도피성 밖에, 다시 말하면 대제사장의 죽음을 통해서 내가 완전히 해방된 상태에 이른 것, 이것이 바로 신약의 상태이다. 그래서 제사장이 죽은 후에는 그 사람이 나가서 자유로운 자기 생업을 할 수 있는 자유의 몸이 되는 걸 보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써 우리가 어째서 해방되었는가? 우리가 그가 살았을 때는 그 안에서 같이 살고, 그가 죽을 때는 우리도 같이 죽는다는 의미이다. “주와 함께 못 박힌 자는 주와 함께 영광을 받나니”, “주와 함께 침례를 받는 자는 주와 함께 부활할 줄 믿노니,” 이것이 모두 다 이 사람은 운명이 그 제사장하고 달렸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제사장이 없으면 자기는 보호를 못 받는 것이다. 제사장 안에서 보호를 받았으니까 제사장이 없으면 자기는 보호받을 데가 없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와 우리와의 관계를 놓고서 이것을 생각한다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것도 그리스도고, 죽는 것도 그리스도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죽을 때 나도 즉으니까 그러면 우리도 해방된다는 말이 그 말이다. 내가 육신으로 그리스도와 합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나는 영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연합을 의미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사람은 도피성 안에 있는 동안에 대제사장과 연합된 사람인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와 함께 살다가 그와 함께 죽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의무가 없어진 사람이 되게 된 것이다. 다시 나와서 자유로운 사람이 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십자가를 통해서 자유하게 되는 것은 세상에 대해서 우리의 지불할 것을 지불했기 때문에 그 때 우리가 자유하게 된다는 원리이다. 내가 세상에 매인 것은 왜 매이느냐 하면 내가 세상에 대한 미련이 있기 때문에 매이는 것이다. 내가 거기서 어떤 소득이 있고 그것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에 매이는 거지, 내가 거기서 일단 죽은 사람이 될 때는 나는 거기에 대해서 매일 의무가 없게 된다. 그래서 내가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면 나는 세상에 대해서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거꾸로 내가 자유하기 위해서 십자가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받는다면 세상에 대해서 자유해진다. 그러나 내가 십자가를 거부한다면 나는 세상에 대해서 자유한 것이 아니라 세상에 매이는 사람이 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비밀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어떤 사람의 눈에는 ‘아, 바로 저 십자가를 지나야 내가 자유하게 되겠구나.’ 이렇게 보이게 되고, 어떤 사람은 ‘아, 십자가로 가면 나는 매이겠구나.’ 이렇게 보인다. 이것이 비밀이다. 여기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눈을 열어주어서 계시를 보여주어 가지고, 지혜와 계시의 영의 주어서 ‘아, 십자가를 지나면 자유한다.’ 이렇게 우리가 알게 되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리고 ‘아, 십자가로 가는 것은 구속이다. 죽음이다.’ 이렇게 아는 것은 멸망이고 그렇다. 그러니까 이것이 사람의 생각으로 잘 안 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그걸 생각을 해도 그것이 안 보여지면 안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그것이 딱 보여져 가지고 ‘아, 십자가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구나. 진짜 자유케 하는 것은 십자가로구나. 내가 죽으면 자유하게 된다.’ 이렇게 알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바울도 그런 비유를 들었다. 어떤 여자가 고약한 남편을 만나 가지고 도망을 치려고 해도 도망칠 수도 없고 도저히 방법이 없다. 가는 데마다 쫓아다니고 도저히 방법이 없다. 그 남편에게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죽는 것뿐이다. 죽어버리면 자기는 해방된다 이것이다.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자유하게 된다. 이런 원리를 이용했다. 그래서 남편이 죽어버리면 남편에게서 자유하게 된다. 그런데 이 남편이 안 죽으면 어쩌냐? 그러면 내가 죽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다. 그러면 내가 자유하게 된다. 이것을 율법하고의 관계로서 설명을 했다. 율법이라는 법은 남편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생불사하는 남편이다. 왜냐하면 절대적으로 선하기 옳기 때문에 율법은 폐해질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율법을 보고 아무리 폐하려고 해도 폐해지지 않는다. 그러면 율법에서 어떻게 내가 자유할 수 있느냐? 내가 율법에서 죽어버리면 자유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율법에 대해서 살려고 하면 나는 매이게 되고, 율법에 대해서 죽어버리면 나는 자유하게 된다. 그래서 십자가는 율법에 대해서 죽는 걸 말한다. 죽어버린 것을 말한다. 그러면 나는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니까 나한테 자유가 오게끔 된다.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해방이 불가능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절의 중들은 안 죽고 해방 받으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해방 받으려면 중들처럼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다. 평생 동안 산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다 버리고 거기서 도를 닦아서 내가 자유하는 어떤 ..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이 죽지 않고 자유를 이르는 방법, 해방에 이르는 방법이다. 그런데 죽지 않고는 해방에 이를 방법이 없다. 그리고 일생 동안 해방만 얻으려고 발버둥치다가 죽어버리면 해방 얻어서 뭐 하겠는가. 일생 동안 해방 얻어 갖고 죽어버리니까. 그렇지 않겠는가. 고기 잡아먹으려고 바닷가에 갔다가 일생 동안 고기 한 마리 못 잡고 계속 고기 잡기만 기다리고 있다가 마지막에 고기 한 마리가 물자마자 죽어버렸다. 그러면 이 사람은 일생 동안 고기 낚을 것만 기대하다가 죽은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도 닦아서 해방 받아야지.’ 하고 일생 동안 살다가 죽어버리면 해방 받으면 뭐 하냐 이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진즉 자기가 죽어서 해방 받는 게 안 낫겠는가. 해방을 받는다는 것은 해방을 받아서 해방의 삶을 살려고 내가 하는 것인데, 해방 받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니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설사 된다 하더라도 평생 도만 닦으려면 도를 뭐 하러 닦겠는가. 도 닦아서 뭐 하려고 하는 거지. 목수가 연장만 계속 갈고 있는 사람이 있다. 옛날에 돈을 많이 주고 목수를 데려다 놓았는데 참 신경질 나게 하는 사람이 있다. 걸핏하면 앉아서 연장만 갈고 앉아 있는 것이다. 주인이 이럴 수도 없고 저럴 수도 없고, 연장을 갈고 있는 사람보고 “왜 일 안 하고 있느냐?”고 할 수가 없지 않는가. 연장을 가는 것은 일을 잘 하려고 가는 건데, 하루 종일 연장만 갈고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이것이다. 그러니 도 닦는다고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면 나는 그런 생각이 난다. ‘저거 도 닦아서 뭐 하려고 저렇게 하고 앉아 있는고?’ 이런 생각이 든다. 단번에 죽어버리면 영 해방이 되어 가지고 해방의 삶을 자기가 가지게 될 것이고 자기의 삶을 새로운 세계에서 갖게 될 것인데, 평생 저 짓을 왜 하고 있나 이런 생각이 든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마지막으로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하는 말이 나온다. “너희는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이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할 수 없느니라. 너희는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 여호와가 이스라엘 자손 중에 거함이니라(35:33-34).” 이렇게 얘기한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이 마지막에 가면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하게 된다. “살인하면 땅이 더럽혀진다.” 그렇게 말한다. 땅이 더럽혀지면 어찌되는가? “그건 너희가 땅이요 곧 내가 거하는 땅이다.” 그러니까 내가 거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그런 뜻이다. “너희의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은 하늘에 살고 사람은 땅에 산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거하는 거처는 하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달라도 거처는 하나다 그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땅은 사람을 상징하는 것이다. 신성한 의미에서는 땅은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아담을 만들 때 땅에서 만들었다. 땅으로 만들었다. 흙으로 만들었다. 그러니까 아담은 흙이다. 가나안 땅은 땅이지 않는가. 좋은 땅, 이것은 좋은 땅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아담이라는 땅이 좋은 땅이 되었을 때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땅이 된다. 그러니 이 땅을 더럽히는 것은 곧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다.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인격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서 거하시는가? 인격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사람도 인격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인격 안에 거하니까 결국 구약에 말하는 이 땅, “너희 거하는 땅 곧 나의 거하는 땅”이라는 이 땅은 인격을 의미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인격을 의미하는 걸 알 수 있다. 그리스도 인격 안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거할 수가 있다. 다른 데서는 같이 거할 수가 없다. 하늘에 가면 사람이 살 수 없고, 땅에 오면 하나님이 살 수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인격 안에서밖에는 하나님과 사람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이 인격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나온 인격,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나온 인격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하나님이라 하기도 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 안에 하나님과 사람이 공존하고 있으니까, 같이 사는 거처이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인격은 오직 십자가로 나오는 거지 도를 통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수양을 통해서나 종교적인 노력을 통해서 이 인격이 나오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밖에는 이 인격이 나올 수가 없다. 예수님이 다른 길이 있었다면 십자가를 지실 필요가 없다. 다른 길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진 것이다. 십자가 안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역사의 문제나 인간의 사상의 문제, 정신적인 문제, 모든 문제는 하늘과 땅이 공존할 수 있는 장소가 없다는 것이다. 같이 있을 장소가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살 집이 없다. 이것을 구약시대에서는 성막이라는 것으로 표현해놓았다. 성막은 무엇인가?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사는 집이다. 성막은 하나님의 집이다. 그런데 사람이 거기 거하는 집이다. 제사장이 거기 가서 하나님을 봉사하는 곳이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거하는 곳이다. 이 성막이 인격화되었을 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이다. 인격화된 성막, 그러면 성막 안에는 인격이신 그리스도가 숨어 있었다. 인격이신 그리스도에게서는 옛날의 성막이 나타난 셈이다. 그래서 인격이신 그리스도에게서 옛날에 지었던 성막을 보게 되고, 우리는 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옛날에 성막 안에 있는 그 인격을 보게 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가 없이는 성막의 실재를 발견할 수가 없다. 왜 저것은 세 칸으로 생겼는지, 왜 저것은 금판자로 둘렀는지, 왜 바깥마당이 있고 성소가 있고 지성소가 있는지 이걸 알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이걸 알아낼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있으니까 ‘아, 이것이 바로 이 사람을 그림으로 만들어놓은 거구나. 이 사람을 건물로 만드니까 이렇게 되었구나. 어떤 인격을 건축화 했구나.’ 그걸 우리가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 건축을 보니까 ‘아, 이 건축에서 의미하고 있는, 이 건축이 의도하고 있는 인격이 이런 인격이로구나.’ 그렇게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건축 안에는 인격이 포함되어 있었고, 인격에서는 그 건축이 나타낸 셈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약에 있는 구약에 있는 모든 예표들이 나타나고 있는 걸 보게 된다. 이제 비로소 발견되는 것이다. 옛날에 뭔지 몰랐던 것, 그것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견되기 시작한다. 오늘 우리가 깨달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옛날에 모든 것들이 지금 발견되어 가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은 온 우주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씩 둘씩 발견되어 가는 것이다. 바위는 왜 있는가, 산은 왜 있는가, 물은 왜 있는가 까지 전부 발견되어 간다. 이것이 더 다른 의미로 나오면 우리의 일생에서 지나갔던 모든 역사가 왜 있었던가 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 나간다. 왜냐하면 그 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것이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 남자가 됐어도 내가 왜 남자가 됐는지 모른다 이것이다. 단지 생물학적으로밖에는 우리가 모른다. 그런데 우리가 그리스도를 만나고 나니까 내가 왜 남자였는지, 내가 왜 여자였는지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가 없으면 만유가 전부 다 벙어리가 될 것 아닌가. 말 못하는 벙어리가 되고, 생각이 없는 물질이 되고 만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있으면 모든 것이 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말이 많아지는 것이다. 그냥 시끄러운 말이 많아지는 게 아니고, 발견된 것이 많아지니까. 도로를 봐도 발견이 되고, 내가 고생한 걸 봐도 발견이 되고, 욕 얻어먹어도 발견이 되고, 무엇이든지 전부 다 그리스도로 발견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끝이 없는 말이 나오게 된다. 그렇지 않겠는가. 모든 것이 다 말을 하니까. 지금까지 전부 침묵을 지키고 아무 말도 않고 있던 것이 전부 말을 하기 시작하니까 끝없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땅은 신성한 것이다. 그 땅을 더럽히지 말아라.” 결국 살인은 인격을 죽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그렇다. “피를 흘리면 그 땅이 더럽혀진다.” 이것은 결국 땅은 인격이고, 그 인격을 죽인 것이니까 이 세상에서 죄 중에서 가장 큰 죄다. 어느 것보다 가장 큰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거처할 곳이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거처할 이 세상에서 가장 거룩하고 가장 신성하고 가장 값비싼 것을 죽인 것이기 때문에 그 죄는 피할 수 없다. 다른 걸로 속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속한다는 말은 바꾼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볼펜 하나 같으면 볼펜 하나를 주고 바꾸면 된다. 아니면 볼펜 하나가 오백 원이면 오백 원 주고 바꿔오면 된다. 그런데 이 생명은 돈을 주고 바꿔올 수가 없다. 너무 귀한 것이기 때문에 바꿔올 수가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거처할 집이니까, 너무 귀하니까 바꿀 수가 없다. 속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의 피로밖에는 바꿀 수가 없다. 그래서 “반드시 살인자는 죽여라.”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지금 현대국가들 속에서 사형이 옳은 거냐 그른 거냐 하는 논란이 많다. 어떤 나라에서는 사형이 있고, 어떤 나라에서는 사형이 없고, 그래서 사형폐지론이 대두되고 있다. 사형폐지론도 사실은 살인자를 보호하자는 것이 아니고, “살인자에게도 인격이 있다. 그 인격을 존중하자. 그래서 그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자.” 그런 의미에 있어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것이지, 결코 그것이 옳아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 발자국 더 나아가서 그 사람에게도 마지막 기회를 주자, 이런 의미로 사형제도를 반대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순간적으로 잘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그 때는 잘못했지만 다음에 가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바꿔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바꿔질 수 있는 기회를 위해서 사형제도를 폐지하자.” 이런 말이 나오게 됐다. 그러나 원칙에서는 “인격을 파괴한 것이니까 그건 용서할 수가 없다.” 이런 말이 되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레위인에게 준 땅, 이 땅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얻은 땅(쟁취한 땅)이고, 그 얻은 땅에서 레위인에게 준 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봉사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땅을 주었다. 그리고 레위인의 성읍 가운데서 여섯 성읍은 도피성으로 정했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과 타국인과 이스라엘 안에서 우거하는 사람을 위해서 준 것이니까 모든 인류를 위해서 주어진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영원한 피난처가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우리가 그에게서 보호받고 우리가 그에게서 감독받는 것이 우리가 피난처 안에 있는 생활과 마찬가지이다. 또 그를 인해서 내가 살기도 하고, 그를 인해서 내가 죽기도 한다. 그래서 그 안에서 살기도 하고, 그 안에서 죽기도 하고, 그 안에서 내가 보호받기도 하고, 그 안에서 내가 해방 받기도 한다. 모든 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되어진다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도피성! 이것은 참 신기한 그런 법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생각에서 나오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피난처이시니 나의 환난 중에서 큰 도움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다. 이것도 피난처라는 뜻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나의 산성이시면 요새이시며 나의 방패이시다. 이런 말이 전부 피난처 개념에서 나온 말이니까, 그리스도가 우리의 대표자가 되실 때 그는 우리의 산성이 되시고 피난처가 되시고 요새가 되신 것을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생활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 와서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을 만들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은 결국 하나님의 성막을 건축했다. 그런 다음에 가나안 땅, 좋은 땅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 땅을 점령해서 각 지파별로 남고, 그 지파들 중에서 자기의 얻은 소득대로 레위인들에게 성읍을 내놓게 되었다. 이 성읍들 중에서 도피성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결국 알고 보면 출애굽기로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온 모든 과정을 총 결산하면 도피성을 위한 것이다. 도피성은 왜 필요했는가? 그것은 인격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는 인격을 보호하는 것이다. 이 인격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만나게 되고 같이 살게 되기 때문에 그래서 이 마지막에 도피성이라는 것이 나오게 되었다. 이것은 우연히 범죄한 자를 피신시키기 위해서 있었던 것이지만, 결국은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로서의 그리스도이고, 더 궁극적으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할 바로 인격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표는 언제든지 바로 이 인격 안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인격이 빠지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아무리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해놓아도 소용이 없다. 이스라엘을 민족을 아무리 만들어놓아도 다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것 한 가지 때문에 지금까지 모든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상에서는 하나님이 거처할 곳이 없다. 그러니까 자기의 거처할 백성을 찾은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을 시킨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공유할 수 있는 거처가 세상에는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가 오늘날 소중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소중한 이유도 바로 거기 있다. 물론 세상의 좋은 것도 많고, 훌륭한 것도 많다. 그러나 거기는 하나님과 사람이 공동 거처할 자리가 안 된다. 아무리 좋아도 거기는 하나님이 살 수 없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하나님이 살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오늘 교회를 만드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을 만들고 레위인을 만들고 도피성을 만들고 그랬던 것과 같이, 오늘 교회를 만들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거처할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그 황막한 벌판에서 오직 성막만이 하나님의 거처였듯이,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오직 교회만이,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이 거하실 거처가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원하 초점이 바로 거기 있고, 인류의 영원한 소망도 바로 이 성막에 있다.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이 인류는 영원히 멸망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가 안 되니까, 하나가 되지 아니하니까. 그러니까 피난처이신 그리스도, 도피성이신 그리스도는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과 사람이 동거하는, 나도 그 안에서 하나님도 그 안에서 서로 만날 수 있는 그런 장소가 되게 되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컴바탕';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컴바탕';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content>
	    	</e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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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4. 민34장 요단 서편 땅의 분배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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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34:29Z</updated>
	    <published>2009-11-10T14:34:29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34장 요단 서편 땅의 분배&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50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에서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51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52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53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 내가 그 땅을 너희 산업으로 너희에게 주었음이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54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힌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56 나는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너희에게 행하리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때에 그 땅은 너희의 기업이 되리니 곧 가나안 사방 지경이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3 너희 남방은 에돔 곁에 접근한 신 광야니 너희 남편 경계는 동편으로 염해 끝에서 시작하여&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4 돌아서 아그람빔 언덕 남편에 이르고 신을 지나 가데스바네아 남방에 이르고 또 하살아달을 지나 아스몬에 이르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5 아스몬에서 돌아서 애굽 시내를 지나 바다까지 이르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6 서편 경계는 대해가 경계가 되나니 이는 너희의 서편 경계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7 북편 경계는 이러하니 대해에서부터 호르 산까지 긋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8 호르 산에서 그어 하맛 어귀에 이르러 스닷에 미치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9 그 경계가 또 시브론을 지나 하살에난에 미치나니 이는 너희 북편 경계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0 너희의 동편 경계는 하살에난에서 그어 스밤에 이르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1 그 경계가 또 스밤에서 리블라로 내려가서 아인 동편에 이르고 또 내려가서 긴네렛 동편 해변에 미치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2 그 경계가 또 요단으로 내려가서 염해에 미치나니 너희 땅의 사방 경계가 이러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3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가로되 이는 너희가 제비 뽑아 얻을 땅이라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홉 지파와 반 지파에게 주라고 명하셨나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4 이는 르우벤 자손의 지파와 갓 자손의 지파가 함께 그들의 종족대로 그 기업을 받았고 므낫세의 반 지파도 기업을 받았음이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5 이 두 지파와 반 지파가 여리고 맞은편 요단 건너편 곧 해 돋는 편에서 그 기업을 받았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6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7 너희에게 땅을 기업으로 나눈 자의 이름이 이러하니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8 너희가 또 기업의 땅을 나누기 위하여 매 지파에 한 족장씩 택하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19 그 사람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유다 지파에서는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0 시므온 지파에서는 암미훗의 아들 스므엘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1 베냐민 지파에서는 기슬론의 아들 엘리닷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2 단 자손의 지파의 족장 요글리의 아들 북기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3 요셉 자손 중 므낫세 자손 지파의 족장 에봇의 아들 한니엘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4 에브라임 자손 지파의 족장 십단의 아들 그므엘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5 스블론 자손 지파의 족장 바르삭의 아들 엘리사반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6 잇사갈 자손 지파의 족장 앗산의 아들 발디엘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7 아셀 자손 지파의 족장 슬로미의 아들 아히훗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8 납달리 자손 지파의 족장 암미훗의 아들 브다헬이니라 하셨으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4:29 여호와께서 명하사 가나안 땅에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기업을 나누게 하신 자들이 이러하였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좋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것에 대한 그런 율례이다. 첫 번째는 “거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파하라.” 그런 명령이다. “너희가 요단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 그 땅을 취하여 거기 거하라(민33:51-53)” 그런 말이다. 이것은 그 땅을 누릴 자격을 말한다. 이건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 외의 모든 것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따라야만 그리스도를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다른 것도 같이 공유할 수 없다는 말이다. 가나안 사람들은 그대로 살고, 또 너희도 거기 들어가서 살고 그렇게 하라는 것이 아니고, “거기 있는 원주민을 다 몰아내고 그리고 그들이 섬기던 모든 우상을 다 파멸하고, 그러고 난 후에 너희가 그 땅을 취해서 거기서 거하라.” 이 말이니까, 이것은 영적으로 하면 우리가 우리 속에 있는 가나안 거민들과 우상들과 산당을 놔두고서는 그리스도를 누릴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기독교가 역사 안에 들어오면서도 세상을 그냥 놔두고 그리스도를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리스도도 없고 세상도 없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은 세상과 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분명히 우리에게 주어진 분깃이다. 그렇지만 이것을 소유하고 내가 누리려면 그런 조건을 충족시켜야 된다 하는 뜻이다. 모든 것을 다 같이 가질 수는 없다. 두 가지를 다 가질 수는 없다 하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 홍해를 건너는 것이 필요하고 요단강을 건너는 것이 필요한가? 두 세계가 공유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서 그렇다. 왜 십자가는 필요한가? 두 세계가 공존하지 못하니까 그래서 그렇다. 그래서 “결국은 그 땅을 사람들을 놔두면 그들이 찌르는 가시가 될 것이고 괴롭히는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행하기로 생각한 것을 내가 너희에게 행할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그들이 있는 곳에서는 내가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육신적으로 본다면 이건 좀 무자비한 그런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 사람들을 다 쫓아내고 자기들이 산다, 그러니까 무지막지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 않는가. 이것을 문자대로 이스라엘이 믿고 있기 때문에 2000년 동안 땅을 잃고 세계를 유랑하던 유태인들이 2차세계대전이 끝난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복귀를 하게 되었다. 그래서 거기서 살고 있던 사람들을 몰아낸 것이다. 그 사람들이 지금 소위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다. 그 사람들은 알고 보면 참 억울한 것이다. 2000년 동안을 점유하고 살았는데 갑자기 ‘우리 땅이다’ 하고 내놓으라고 한 것이다. 역사에는 어디도 이런 법이 없다. 그런데 2차세계대전 때 유태인들하고 연합군하고의 약조가 있었기 때문에 연합국에서는 이스라엘에게다 그 땅을 점령을 하라고 허락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 결국 지금까지 계속 싸움을 하고 있는 그런 실정이고, 최후에는 팔레스타인 게릴라들이 “우리들에게 땅을 나누어 주라.” 그렇게 말해도 이스라엘은 그걸 거부하고 있는 그런 실정이다. 그래서 언제 중동에서는 전쟁이 일어날지 모르는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말씀이 만일 문자적으로 육신적으로 그렇게 받아들여진다면 이 역사 속에서 엄청난 비극이 발생할 수 있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으로 발전하지 않으면 결국 이것은 세상 속에 전쟁밖에는 남지 않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마찬가지이다. 다른 여러 가지 항목에 있어서도 그런데,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이나 막론하고 그걸 문자적으로 혹은 육신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그것은 세상에게서 비난받아 마땅할 그런 일들이 허다히 많이 있다. 이것은 전부 다 그리스도 안으로, 영적인 실재 안으로 승화되고 돌아오지 않으면 결국은 다 멸망이 되고 마는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그래서 문자를 가지고 교리를 만들어놓았다든지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너희는 다 멸망 받고 우리는 구원받는다.” 이런 억지 소리를 하게 마련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성경은 모두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 그래서 나무가 열매를 맺을 때까지 여러 가지 과정이 있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될 때까지 여러 과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꼭 알이야 한다. 감은 맛이 좋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먹으면 몸에 좋은 것이지만, 감나무를 씹어먹으면 죽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꼭 그와 같은 것이다. 이 말을 만일 문자대로 받아들이면 감나무를 씹어먹는 것과 똑같은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 열매가 열려서 인격이 되면, 그 때는 누구나 먹어도 다 살 수 있는 양식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 땅 거민을 몰아내고 우상을 파한 후에 너희는 그 땅을 취해서 살 것이다.” 하였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가족 수에 따라서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다’ 하는 것이다. “너희의 가족을 따라서 그 땅을 제비 뽑아 나눌 것이니 수가 많으면 많은 기업을 주고 적으면 적은 기업을 주되 각기 제비 뽑힌 대로 그 소유가 될 것인즉 너희 열조의 지파를 따라 기업을 얻을 것이니라(민33:54)”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가족 수에 따라서’니까 가족이 많으면 땅을 많이 갖게 되고 적으면 적게 갖게 되었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이것도 그렇다. ‘참 불공평하다.’ 이렇게 할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는가. 이것은 생명의 확장에 관계된 것이다. 우리도 영적인 확보하는데 있어서 우리 생명이 얼마만큼 확장되느냐에 따라서 영적인 영역이 그만큼 넓어지게 된다. 그러니까 숫자가 적으면, 내 생명의 확장이 적으면 내가 영적인 영역도 적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생명이 확장될수록 세계는 더 넓어지게 된다. 지금 우리가 이 땅위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확장해야 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완전하지만 그의 생명이 확장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영역이 없다. 그래서 그 나라가 없어지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끼리만 살면 편안하고 좋다. 그렇지만 영역이 이것밖에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역을 넓히려면 생명이 확장되어야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는 “제비뽑아 얻는다.”고 했는데, 이것은 구약 안에서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우림과 둠밈’ 할 때도 제비나 마찬가지인데, 옛날에는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제비를 뽑는 방법이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말로 하면 ‘운수소관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주사위가 던져져서 뭐가 나오든지 간에 그 결정된 대로 따른다 이런 뜻이니까, 어떻게 생각하면 유치한 것&amp;nbsp; 같지만, 그러나 이렇게도 못하고 저렇게도 못할 때는 결국 이 방법밖에는 없지 않는가. 누구는 동쪽을 차지하고, 누구는 서쪽을 차지하겠는가. 또 누구는 산간 쪽을 차지하고 누구는 농지 있는 쪽을 차지하겠는가. 어찌할 수 없지 않는가. 그렇다고 하나님보고 물어보면 하나님이 “너는 동쪽으로 가라. 너는 서쪽으로 가라.” 그러시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제비를 뽑았다. 이 제비뽑은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경계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 인생도 제비뽑아 얻은 것과 비슷하다. 왜냐하면 내가 어떤 것을 정해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어진 것을 사는 것이다. 내 인생은 던져진 것을 사는 것이다. 주사위가 던져지면 던져진 대로 우리가 말을 서야 되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던져진 대로 사는 것이다. 내가 한국에 던져졌다. 그러니까 한국에 사는 것이다. 내가 만일 미국에 던져졌으면 미국에서 살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내 뜻과 관계&amp;nbsp; 없이 나는 던져져 있다. 그래서 “주어진 존재다.” 그렇게 보통 이야기한다. 그래서 우리는 주사위에 던져진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내가 한국인으로 태어났으면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리에서 내가 살아야 하고 거기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하고, 미국인으로 태어났으면 미국인으로 태어난 자리에서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사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어진 경계에 순종하는 길이다. “제비뽑아서 얻을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순응하고 순종한다면 우리에게 평강이 오게 될 것이다. 우리가 제비뽑아 얻으면 “아이고, 어쩔 수 없다. 내가 제비뽑아서 그렇게 된 거니까 나는 그 뜻에 따르겠다.” 이렇게 되듯이, 내게 주어진 어떤 경계를 내가 따른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그 다음은 “열조의 지파를 따라서 기업을 얻을 것이다.” 하였다. 그러니까 기업은 자기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지파적인 것이다. 내가 내 소유를 얻는 것이 아니고 우리 지파의 기업을 얻는 것이다. 내가 교회생활을 하는 것과 같은데, 내가 교회생활을 하는 것은 내가 내 개인의 생활을 하고 있는 게 아니고 교회라고 하는 한 지파의 일을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이 한 지파, 예수 그리스도이 족보를 따라서 우리는 그 나라 안에 살고 그 나라를 위해서 사는 사람인 것이다. 우리는 그 혈통 안에서, 그 계통 안에서 사는 것이지, 결코 자기 혼자 무엇을 가지고 사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종 하나님의 말씀을 좀 듣고 자기 나름대로 무언가 좀 깨달은 것이 있고 이러면, 자기 혼자 그냥 열조의 지파 없이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에 위반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조의 지파가 있어야 그 나라가 유지된다. 12지파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존재한 것이다. 만일 12지파라는 것이 없었으면 이스라엘은 지금 다 무너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12지파를 꼭 유지하기 때문에 요한 계시록 마지막까지 12지파가 존재한다는 걸 보데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정해놓으신 계통과 노선을 따른 것이다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아담의 노선을 따랐느냐, 그리스도의 노선을 따랐느냐에 따라서 우리 운명이 달라졌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운명이 달라진 게 아니다. 어떤 노선 때문에 우리의 운명이 달라졌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느 지파에 속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나 혼자 나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어느 계통에 어느 혈통에 어느 지파에 어느 노선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선을 택하는 것이 중요한 그런 일이다. 자기의 정해진 노선이 어디인가 그걸 아는 것이 참 중요한 일이다. 이런 것은 교파나 이런 것도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런 노선, 어느 교파의 노선, 이런 것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어느 종파의 노선, 그러면 그런 교파는 그런 노선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노선이 잘못되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잘못되는 것이다. 노선 자체가 빗나가면 다 잘못되는 것 아닌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세 번째는 “거민을 쫓아내지 않을 경우에 그것이 찌르는 가시가 될 것이다.” 하였다.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을 우리 속에 두고 그리스도를 누리려고 하면 결국은 그것이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되게 된다. 우리 발목을 자꾸 잡고 괴롭게 하고 그래서 예수를 따르는 것이 계속 일생 동안 괴로운 일밖에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한번 괴로우면 끝나버려야 되는데 안 그렇고 계속 괴로움이 따라 다니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뭔가 두 가지를 같이 가지려고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그 길이 협착해서 찾는 이가 적고,” 그렇지만 좁은 문으로 들어가면 그 다음은 그것이 넓은 길이 된다. 그런데 넓은 문으로 들어가면 처음에는 좋은데 가면 갈수록 좁은 문이 되게끔 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땅의 거민을 쫓아내지 않으면, 우리 속에 살고 있던 옛 사람을 쫓아내지 않으면, 옛 주인들을 쫓아내지 않고 우리가 그냥 있으면 결국 우리는 거기서 계속해서 고통을 당하는 생활을 하게 되고 우리는 발전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을 볼 수 있다. 10년이 가고 20년이 가도 항상 고만해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 그리고 항상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고, “하나님 말씀을 능력이 없다.” 이렇게 말하게 된다. ‘하나님! 당신이 나 좀 구원해 보시오. 당신이 능력이 있으면 나 좀 구원해 보시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다. 그 땅의 가나안 거민과 섞여 살게 되면 어찌할 수 없다. 축복을 줄려고 하더라도 안 되고, 저주를 줄려고 하더라도 안 되니까, 자기가 알아서 해야 되니까 평생 동안 그렇게 살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그 땅 거민, 그것은 우리가 옛 사람에 속했던 모든 것들을 쫓아내는 것을 의미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좋은 땅의 경계와 그 분배자들에 대해서 34장 1절부터 15절까지 나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남쪽 북쪽 서쪽 동쪽, 이래서 이스라엘 땅의 경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야 땅을 경계가 있는 땅이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경계가 없는, 아무 데서나 퍼져 사는 그런 게 아니고, 동서남북으로 경계가 정확하게 지어진 그런 땅이라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지파와 반 지파는 그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왜냐하면 자기 선택에 따랐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자기 선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경계 밖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넓고 제한이 없을 수가 있다. 그러나 반면에 적과 인접해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계가 아니니까. 하나님이 정해놓은 경계가 아니니까. 이 사람은 이런 말로 말할 수 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하나님을 믿기는 믿는데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있다.” 십자가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경계이다. 그 경계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다. 적절하게 성경을 읽고 좋은 교훈을 따서 자기 나름대로 좋은 생활을 해가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다. 십자가 안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을 따랐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들이 결국은 전부 다 어디론가 흩어졌다. 왜냐하면 이 사람들은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열 두 제자들은 경계 안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에게 제한돼 있었던 것이다. 마지막에 그들은 예수 때문에 심하게 고통을 당했다. 왜냐하면 갈등을 느끼니까. 그를 배반할 것이냐 안 할 것이냐 하는 갈등 가운데 그들은 빠지게 되었다. 그렇지만 경계가 있는 사람들이니까 그랬다. 그 경계 밖의 사람들은 아예 그런 갈등을 느낄 필요가 없었다. 떡 얻어먹고 가버리면 그만이니까 아무런 부담도 그런 것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여할 그런 자리에 이르렀을 때 그들에게는 심한 고통이 오게 됐다는 걸 보게 된다. 경계 안에 있는 사람과 경계 밖의 있는 사람,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은 죽음도 없고 부활도 없고 그런 셈이다. 고민할 것도 없고 좋을 것도 없고 그런 사람이고,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고민할 것도 있고 영광을 얻을 것도 있고 그런 사람이다. “주와 함께 못 박힌 사람은 주와 함께 영광을 얻는다. 주와 함께 멸시를 받는 사람은 주와 함께 영광을 얻는다.” 그건 주님의 경계 안에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계 밖에 있는 사람은 전혀 그것하고는 무관한 것이다. 이러든지 저러든지 자기는 필요한 것만 취해버리고 가버렸으니까 자기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고 만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좋은 땅의 경계 안에 있는 것, 이것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은택을 입고 사는 것이다. 안 입은 게 아니다. 그렇지만 뭐가 다르냐 하느냐 하면 경계 안에 있지 않다는 게 다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지 아니하고 경계 안에 있지 아니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할당된 그리스도가 있고, 광대무변한 그리스도가 있다 하는 걸 알 수 있다. 온 인류에게 그냥 무한대하게 열려있는 그리스도가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리는 그리스도는 할당된 그리스도이다. 동서남북의 경계가 딱 정해져서 할당된 것이다. 이건 주관적인 그리스도, 체험적인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예수, 객관적인 그리스도, 역사적인 예수, 역사적인 그리스도, 이것을 모두 생각하고 있다. 물론 그것은 사실이지만 나한테 정해지지 않았으면, 나에게 한계 지어진 그리스도가 아니면 나하고 무관하다는 걸 알 수 있다. 아무 관계가 없다는 걸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구약에서 제물들을 드리는데 송아지도 있고 양도 있고 비둘기도 있고 이런 것들이 있는 걸 보게 됐다. 그런데 “그 형편에 따라서 양을 드리지 못할 경우에는 비둘기로 드려라.” 이런 말이 나온다. 이것은 그 사람의 한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자기가 누리는 그리스도가 양인지 비둘기인지 그 얘기이다. 송아지일수도 있고, 양일수도 있고, 비둘기일 수도 있다. 땅은 무한히 넓지만 내게 배당된, 할당된 그리스도는 송아지일 수도 있고, 비둘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구체적으로 누리는 그리스도는 할당된 그리스도이다. 그 그리스도를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리고 두 번째는 그것을 나누는 사람들에 대해서 얘기했는데, 르우벤과 갓 지파와 므낫세 지파, 이 지파들은 여기 분배에 속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기들이 먼저 요단강 동편에서 땅을 선택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분배하시는 분배의 경계 안에 들지 않았다. 소유는 했지만 약속 밖에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분명히 그것도 하나님의 백성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의 경계 밖에 있는 사람들이었다. “예수! 참 좋은 사람이다.” 그건 경계가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십자가를 진 사람, 그것은 경계가 있는 사람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번에 순천 가서 그런 얘기를 했다. 허남표 형제와 황선자 자매가 꽃가게를 하고 있다. 그런데 너무나 그 사람들이 좋기 때문에 꽃가게가 너무너무 잘 되는 것이다. 맨 처음에 25,000원을 가지고 시작했다 한다. 꽃바구니 몇 개하고 꽃을 사다놓고 시작을 했는데, 지금은 집도 하나 준비하고 가게도 또 하나 준비하고, 이러고도 밤을 새워서 일을 할 정도로 손님이 줄을 지어 있다. 그 지방 교차로 같은 신문에도 나고 할 정도니까 아주 유명해졌다. 그래서 유명해져 가지고 사람이 그렇게 많이 끓고 아주 좋아하고 이러니까 자기는 사실 별로 부족함이 없다. 사람들이 다 자기를 좋아하고 이렇게 하니까, 자기가 형제들이 싫은 건 아니지만 꼭 형제들이 없으면 안 되겠다는 갈급함이 있는 건 아니다 하는 그런 얘기가 나왔다. 그래서 그런 얘기를 했다. “좋아하는 사람은 참 많지만, 만일 내가 왜 그렇게 좋은 사람이 되었는가 하는 이유 안으로 들어오라고 할 때 몇 사람이나 들어오겠느냐?” 이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내가 좋음으로써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고 은택을 주니까 사람들은 사랑과 은택이라는 혜택을 보고 그 사람을 좋아하지만 그러나 구체적으로 ‘내가 왜 그렇게 좋게 되었는가?’ 하는 이유를 내놓게 될 때는 그건 십자가라는 것이다. 결국은 그리스도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그리스도를 내놓을 때도 과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경계, 그리스도의 경계’라는 것이 생각난다는 것이다. 혜택은 누구든지 다 좋은 것이다. 우리가 다 사랑하고 허물이 없고 경계 없이 사람들을 상대할 때 누가 싫어하겠는가. 다 좋아한다. 어떤 사람도 다 좋아한다. 종교인이나 우리를 싫어할까, 그렇지 않고는 싫어할 사람이 없다. 교리주의자들이나 이런 사람들은 천당에 못 갈까봐 우리를 싫어하지 그렇지 않고야 싫어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사람들은 다 좋다 그러니까 그렇다. 그런데 그 좋다는 것하고 우리를 따라온다는 것하고는 다른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를 따라온다는 것은 어떤 경계를 의미한다. 한계를 의미한다. 그래서 이 한계를 내놓을 때 몇 사람이나 오겠느냐 이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씩 추수를 하라고 그렇게 얘기했다. 그냥 혜택만 늘어놓지 말고 추수를 좀 해봐라. 해봐서 몇 사람이나 거두어질지 모르지만 거기서 몇 사람이라도 거두어야지, 만일 안 그러면 ‘아,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일세.’ 그렇게 끝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죽으면 모두 꽃다발 하나씩&amp;nbsp; 가져와서 “아, 그 아줌마는 참 좋은 아줌마였어.” 하고 끝나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의 씨가 안 들어갔으니까. 생명의 씨가 들어갔다면 내가 죽는다 하더라도 그 씨가 또 살아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혜택만 누린 사람은 혜택만 누리고 끝나버리고 만다. 그런 얘기를 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결국 그리스도는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할당된 그리스도, 경계지어진 그리스도여야 한다. “내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실로 아름다운 곳에 있다.” 그 줄로 재어준 구약이라는 것은 한계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정해준 한계인데, 그 한계가 실로 아름답다는 것이다. 성전 안에 심겨진 나무를 보고 다윗은 부러워한다. 그런데 성전 안에 심겨진 나무는 사실은 제한되고 있는 것이다. 야산에 심겨진 나무 같으면 제한이 없는 거지만, 성전의 마당에 심겨진 나무는 제한된 나무 아닌가. 그런데 다윗은 바로 그것을 사모하고 있다. “내가 여호와의 성전의 문지기로 하루를 사는 것이 세상에서 천날을 사는 것보다 낫겠다.” 이런 얘기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계의 축복을 알았기 때문에 그렇다. 세상 사람들은 바로 이 경계를 싫어한다. 우리의 사람 좋은 것은 다 좋아하지만 경계를 싫어한다. 그러니까 결국 구체적으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할당된 그리스도여야 되지, 그냥 널려 있는 그리스도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리고 이것을 분배할 분배자들에 대해 얘기했는데, “제사장 엘르아살과 여호수아, 이 두 사람은 정해 가지고 이 두 사람으로 하여금 이 땅을 분배하라.”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엘르아살은 제사장이고, 여호수아는 선지자고 그런 셈이다. 그래서 이 둘이 합해서 그리스도가 된다. 제사장도 기름부음 받은&amp;nbsp; 사람, 선지자도 기름부음 받은 사람, 뒤에 가서는 ‘왕과 제사장’ 이렇게 되게 된다. 그래서 왕도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고 제사장도 기름부음 받은 사람이다. 구약에서 기름부음 받은 사람을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엘르아살과 여호수아가 하나가 되어 갖고 있는 것이다. ‘이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땅을 분배할 수 있다.’ 그 말이니까, 누가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분배하는가? 그리스도 자신만 우리의 그리스도를 분배한다 하는 원리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분배해주어도 그것이 우리 기업이 될 수 없고, 우리가 스스로 선택해도 우리 기업이 될 수 없고, 오직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분배해준 것만 우리의 영원한 기업이 된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자신이 한계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한계 안에 있는 인격이 우리에게 한계 안에 있는 인격을 분배함으로써 우리도 한계 안에 있는 인격이 되게끔 된다. 그래서 규정 안에 있는 인간이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기계를 보면 기계는 모두 다 규정된 부품을 가지고 조립을 했다. 정해진 것을 가지고 조립을 했다. 그러니까 아무렇게나 아무 공장에서나 만든 걸 가지고 할 수가 있다. 미리 자동차 회사에서 각 중소 기업체에다가 사이즈와 모양을 정확하게 만들어 가지고 이 모양대로 만들어내라 그렇게 지시를 하게 된다. 그러면 그 모양대로 만들어진 걸 가져야 그 자동차를 만들어낼 수가 있다. 한계 지어지지 않는 것, 경계 지어지지 않는 것은 쓸모가 없다. 그런데 아담은 뭘 원하는가? 한계 지어지지 않기를 원하는 것이 아담이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무익한 것이다. 하나님에게 유익하려면 우리는 경계지어진 사람이어야 한다. 우리의 인격 자체가 특수한 목적을 위해서 경계지어져야 된다. 그래야만 특수한 목적에 사용되어지지, 특수한 목적에 경계지어지지 않으면 우리는 그 목적에 사용될 수가 없다. 좋은 것이라 해서 다 쓸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규격에 맞아야 쓰는 거지, 좋다고 해서 다 쓰는 건 아니다. 미제이면 다 갖다 쓸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규격에 맞아야 쓸 수 있다. 국산품이라 하더라도 규격에 맞는 건 쓸 수 있지만, 아무리 미제라 하더라도 규격에 맞지 않는 것은 쓸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옛날 미제 전기제품은 120V인데, 우리 나라 전기제품은 110V였다. 그러니까 제대로 그것이 돌지를 않았다. 10V가 모자라기 때문에 제대로 돌지 않았다. 또 우리 나라 전기가 110V로 정확하게&amp;nbsp; 나오느냐 하면 정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100V 나왔다가 110V 나왔다가 95V 나왔다가 이러니까 이 기계가 잘 안 돌아갔다. 지금 220V로 승압을 했다. 그래서 220V로 승압을 하면 전기 볼트의 차이가 많이 안 생긴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 해놓았다. 그런데 미국제품들을 보면 120V에 고정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또 다른 도란스를 가지고 사용해야만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좋다고 해서 그냥 쓰는 게 아니고, 규격이 맞아야 쓸 수 있지, 아무리 좋은 거라도 규격이 안 맞으면 쓸 수가 없다. “야, 그 사람 참 똑똑해.” 그렇지만 교회의 규격에 안 맞는 사람도 있다. “그 사람 참 똑똑해.” 그러나 사회규격에 안 맞는 사람도 있다. 정치가 중에서도 “야, 그 사람 참 훌륭해.” 그런데도 정치가적 규격에 안 맞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외돌토리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차피 우리는 규격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인해서 우리도 규정화된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의 한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한계를 아는 사람이 쓰여질 데가 있는 사람이 되게 된다. 자기 한계를 모르는 사람은 쓰일 데가 없다. “9급 공무원 하라.” 그러면 “그건 내가 할 일 아니다.” 하고 7급 시험보고, “7급 공무원 해라.” 그러면 “그거 할 일 아니다.” 하고&amp;nbsp; 5급 시험보고, 이러니까 항상 합격을 못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규격을 모르니까, 자기 한계를 모르니까 안 된다는 말이다. 자기 한계를 정확히 아는 사람이라야 사용되어질 수가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우리에게 줄로 재어준 구역은 실로 아름다운 곳에 있다.”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에게 선지자는 이렇게 간구하고 있다. “내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나로 하여금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그것은 내 인생의 한계를 알으켜 달라는 것이다. 내가 얼마만큼 며칠을 살 수 있는지 그걸 알으켜 달라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지혜로운 사람이 되겠습니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은 다 100년은 다 못 살아.’ 그렇게만 생각하지, 꼭 몇 살 먹어 죽는다는 규정이 없다. 순서대로 죽는 것도 아니고 이렇기 때문에 확실히 알지를 못한다. 그래서 ‘백 살은 못 먹겠지.’ 이런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내가 몇 살 먹을지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자기 경계를 잘 모르는 셈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그렇게 말한다. “내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나로 하여금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내가 내 한계가 어디까지인지 그걸 알으켜 달라는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이 지혜로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무슨 시험을 보면 합격을 할지 그걸 아는 사람이 시험을 보면 합격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걸 모르는 사람은 시험을 백번 봐도 합격할 수가 도저히 없다. 그리스도는 경계가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땅은 모두 경계를 지어서 분배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분배된 그리스도, 할당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각 지파의 대표자들을 뽑아라고 하였다. 두 지파와 반 지파는 포함되지 않고 다른 지파의 두령들의 이름이 죽 열거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선택을 따라간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는 것이니까, 경계선 밖에 있는 것이니까 여기서 그 이름이 열거되지 않았다. 그리고 경계선 안에 있는 사람의 대표자들만 그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의 이름이 하나님 나라에서 거명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불행한 사람이다. “한계 밖에 있어서 책에 없다. 너 이름은 책에 없다.” 이러면 곤란하다 그것이다. 쉬운 말로 해서, 가서 책에 있는지 좀 봐달라 했더니 “너 이름은 없다.” 이러더라는 것이다. 이건 경계 밖에 있다 그런 얘기인데, 그리스도의 제한 밖에 있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기록될 수 없는 것 아니겠는가. 그 생명책에는 그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의 이름만 기록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는 철저하게 우리의 제한을 깨닫는 것이 축복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우리는 처음부터 아예 출발할 때 제한된 존재이다. 흙으로 지어서 생기를 불어넣어 가지고 사람을 만들었다. 또 “우리 형상을 따라 우리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분명하게 형상이라는 것은 경계가 있는 걸 말한다. 그 사람이 어떻게 생겼다 하는 것은 그 사람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코는 얼마만큼 높고 눈은 얼마만큼 크더라, 얼굴은 얼마만큼 크고 귀는 얼마만큼 크더라 하는 것은 경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 사람을 모른다는 말은 경계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러면 흐리멍덩하게 아무 것도 안 보이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사람은 원래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게 아니고, 분명하게 뚜렷하게 경계를 갖고 있다. “흙으로 사람을 빚으시고 생기를 코에 불어넣으시니 산혼이 됐다.” 이것은 확실하게 사람은 경계가 있는 것이라는 걸 말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한계적 존재이다. 우리가 한계적인 존재라고 하는 걸 안다면 우리 한계 상황도 우리의 운명이라는 걸 또 알아야 한다. 우리는 무한정 살 수 없다는 것도 우리의 한계상황이다. 우리가 무한한 존재가 아니지 않는가. 그러니까 우리가 무한한 존재가 아니라는 걸 안다는 것이 인생을 바로 아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무한한 존재가 되려고 중도 되고 도사도 되고 이렇게 해보는 거지만 그게 되겠는가. 안 된다. 단전호흡을 하고 수도를 하면 공중으로 뜬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공중으로 뜬다고 해서 그것이 얼마만큼 뜨겠는가. 얼마를 뜨다가 떨어지겠는가. 우리는 땅에서 걸어다니도록 한계지어진 그런 존재들이다. 이걸 알아야만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맡기고 쓰임이 될 수 있다. 그 무한하신 하나님에게 우리 자신을 맡길 수가 있다. 그렇지 않고 내가 뜬다고 생각하면 못 맡기는 것이다. ‘나도 날아갈 수 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니까 맡겨지지 못하는 것 아니겠는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땅은 전부 동서남북으로 경계가 있었고, 각 지파별로 숫자를 따라서 또 땅을 분할해 가지고 각기 숫자에 따라서 그 땅을 소유하도록 그렇게 되었다. 이것을 소유하는 전제조건은 그 땅의 거민을 몰아내고 그들이 섬기던 우상을 훼파하는 일이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영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상이 이렇게 어지럽고 복잡한 것은 모두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 때문이다. 선거철이 돌아오면 분수를 모르는 사람들이 또 많이 나온다. 떨어진 사람들은 다 분수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자기 분수를 잘 모르니까, 자기가 뭘 다 할 줄 알고 이렇게 생각하고 있고, 자기가 세상을 어떻게 할 줄 알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종교계 안에 가면 또 종교계대로 자기가 뭐 다 할 줄 알고 날뛰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고 이렇다. 이런 데서 우리가 우리의 분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의 경계를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처음부터 우리는 경계지어진 자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경계를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준 것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가 그 말씀을 깊이 깨달았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안 져도 될 것이다. 그런데 아담 안에서 그걸 못 깨달았으니까, “네가 흙으로 지어졌다.”는 말씀을 분명하게 깨닫지를 못했으니까 더 구체적으로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경계를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우리의 한계를 드러내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고, 아담보다 더 나은 우리의 대표자로서 우리의 경계를 확실하게 보여준 분이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도 하나님 아들이지만 십자가라는 경계 안에 있었다는 걸 우리가 보게 된다면 우리도 여전히 그 경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래서 그것이 나의 경계로 안다면 예수님과 꼭 같은 그런 길을 우리가 걷게 될 것이다. “할 수 있으면 이 잔을 내게서 옮겨주십시오. 그러나 내 원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제자들을 향해서 “내 마음이 지금 심히 민망하게 죽게 되었으니 나와 함께 좀 기도하자.”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고, 예수님의 갔던 그 길대로 갈 수밖에 없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 경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렇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경계를 몰랐던 것이다. 분수를 몰랐던 것이다. 그래서 ‘저렇게 안 해도 얼마든지 할 일이 있을 텐데.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을 텐데.’ 이렇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결국 예수와 다른 길을 걸어가게끔 그렇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십자가는 인생의 정확한 경계를 그어놓은 길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의 경계이신 그리스도, 그분 안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을 누리게 된다. 우리의 경계를 알아야 안식을 누리게 된다. 자유가 없어서 답답할 것같지만, 참 사람은 이상한 것이 갓이 없으면 불안해지고 경계가 있으면 안정이 되고 그렇다. 왜 방에서 잠을 자는가? 그것은 답답한 곳이지만 경계가 있기 때문에 안정이 되니까 그래서 방에서 잠을 자는 것이다. 빈들에서 혼자 이불 덮고 누워 있어 보라. 얼마나 허전하고 공허한지! 경계가 없으니까. 자유롭기는 하지만 경계가 없기 때문에 불안한 것이다. 그러나 사면이 벽으로 둘러싸인 방안에 들어가면 편안히 잠을 잘 수가 있다. 인생을 결국 한계적인 그런 존재고, 한계 안에 있는 존재니까 분수를 아는 것이 인생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걸 모르면 인생을 모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lt;/SPAN&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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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3. 민33장. 광야! 그 42곳의 여정.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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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한자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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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0T14:33:28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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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9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33장. 광야! 그 42곳의 여정.&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1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 하에 그 항오(行伍)대로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이 이러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2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3 그들이 정월 십오 일에 라암셋에서 발행하였으니 곧 유월절 다음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출애굽의 노정이 바로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나와서 가나안으로 가는 한 인생을 상징하는 것이고, 또 역사의 노정을 상징하는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명한 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대로 행진을 했는데, 결국 마흔 두 곳까지 여행을 하게 되었다. 이걸 광야 40년이라고 말하고, 또 42곳이라고 말하는데, 42곳은 기이하게도 예수님이 탄생하신 족보가 42대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나오기까지가 42대였다 하는 것과, 가나안으로 들어가기까지가 42곳이었다 하는 것이 일치를 하고 있다. 아브라함부터 그리스도까지가 42대, 그리고 라암셋에서 가나안 땅까지가 42진을 통해서 들어가도록 그렇게 되었다. 우리가 오는 동안 죽 얘기를 했으니까, 대략 중요한 요점만 얘기를 하겠다. 이 여정을 그려놓은 그림을 보지 않으면 알쏭달쏭하고 잘 알기가 어렵다. 여기 있는 그림을 보면 더 좋을 것 같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집트의 라암셋에서 출발했다. 이건 바로가 요셉에게 기업지로 준 땅이었다. 그러니까 야곱이 70인을 거느리고 애굽에 내려갔을 때, 그 때 당시의 바로가 요셉에게 고센 땅을 주었다고 그랬는데 바로 여기가 라암셋이라는 곳이다. 뒤로는 결국 여기 살다가 오랜 대수가 흐르는 동안 요셉을 모르는 다른 바로가 나와서 국고성과 라암셋 성을 건축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그런 곳이기도 하다. 이것이 창세기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출발하게 되었는데, 하나님이 애굽을 벌하시고 이스라엘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주어서 나오게 했던 곳이 바로 라암셋이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세상에 있다가 나온 그런 곳과 꼭같다. 전에 우리는 처음에는 세상의 호의로 기업지를 받아서 살다가 결국에는 그 세상의 국고성과 라암셋을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 인생이 소비되는 곳이다. 결국 우리는 세상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소모하게 되는 것이다. 각자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출세를 위해서 일생 동안 싸우지만 결국 그것은 세상의 영광을 남기고 죽는 결과를 가져온다. 수많은 사람이 오고갔다. 그런데 남는 것은 문명과 문화, 이런 것이 남지 않는가. 사람은 없어지고 그것만 남게 됐는데, 문명과 문화, 그것은 바로 세상의 영광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결국 그것을 위해서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었다 이렇게 말할 수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없어지고 그것만 남으니까,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이런 것 모양으로 ‘인생은 결국 문화건설을 위해서 태어났다가 죽은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던 생활과 꼭 같던 그런 생활이다. 자기들을 위한 것이 아니고 바로를 위해서 국고성과 라암셋 성을 쌓아야 되는 그런 신세,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한 인생이 사탄의 영광을 위해서 일생을 살다가 죽은 그런 결과와 꼭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인류는 출애굽이 필요하다. 바로 거기서 나와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맡겨주신 기업 안으로, 자기에게 주신 사명 안으로, 그 영광 안으로 들어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은 꼭 우리 인생의 일과 같은 그런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소망하는 것은 세상의 영광을 남기기 위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영광인 새 예루살렘을 건축하기 위해서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모두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다시 말하면 ‘우리는 사라지지만 그 나라는 영원한 그런 세계’이다. 결국 사람은 어떤 나라를 위해서 살고 죽는 것 같다. 결국은 우리가 세상의 어떤 것을 위해서 살다가 죽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어떤 것을 위해서 살다가 죽느냐 그런 문제 같다. 사람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니까, 결국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애굽에서는 바로를 위해서 살고, 가나안에서는 여호와를 위해서 살고, 이 차이가 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온 것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바로를 위해서 살다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그런 삶이 되는 것이다. 인생은 어차피 누구를 위해서 사는 것이지, 자기를 위해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병철씨가 대기업을 일구어놓고 죽었다. 그렇지만 이병철씨는 없고 기업만 남아 있다. 그리고 그 기업은 국가의 부를 위해서 공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은 그 사람은 자기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대한민국 국가를 위해서 태어났다가 대한민국 국가를 위해서 일하다가 그 나라를 위해서 죽은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내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나하고는 사실은 아무 관계가 없이 나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일생 동안을 봉사하고, 그리고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무엇을 위해서 살다가 죽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되게 된다. 그 사람은 우리 나라의 경제발전을 위해서 공헌한 셈이 됐기 때문에 국가에서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다. 또 아마 우선으로 틀림없이 역사책에 길이 기록할 것이다. 그 시대에 이병철씨라는 아주 천재적인 사람이 있어서 기업을 일구어서 대한민국 경제발전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이다, 이렇게 아마 역사책에서 배우게 될 것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역사에서 우리가 무엇을 남기고 죽은 사람인가 그것이 기록이 될 것이다. 사람은 무엇을 위해서 사느냐 하는 문제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애굽에서 나온 문제는 단순히 ‘내가 괴로우니까 편안한 데로 나온다’ 이런 문제가 아니고, 목적의 전환이 되는 것이다. 국고성을 쌓고 바로를 위해서 살던 인생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나온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가 “왜 나가려고 하느냐?”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우리는 여호와를 섬겨야 하기 때문에 나간다.” 그렇게 말한다. 목표가 “우리는 편안히 살려고 간다.” 그 말이 아니고, “우리는 여호와를 섬겨야 되기 때문에 간다.”는 것이다. “그러면 왜 여기서는 못하느냐?” “여기서는 바로를 섬겨야 할 땅이기 때문에 못한다.” 그래서 나가게 됐던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출발해서 첫 번째 도착한 곳이 숙곳이라는 곳이었다. 이곳은 야곱이 벧엘로 가다가 토담집을 쌓고 거기서 정착하고 싶었던 그런 곳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야곱은 20년간의 자기의 욕망과 소망과 야망과 계략, 이런 모든 것들을 전부 땅에다 묻고 새 옷을 갈아입고 목욕을 하고 자기에게 은혜를 베푸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그런 기점이 되었던 곳이 바로 숙곳이라는 곳이었다. 아마 하나님께서 그를 그냥 두었더라면 숙곳에서 그냥 살았을 것인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목적을 두셨기 때문에 거기 살지 못하도록 그렇게 하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스라엘이 처음 출발해서 나온 것이 바로 숙곳이라는 곳이었고, 여기서 이스라엘이 누룩 없는 떡을 먹었던 그런 곳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이 두 개가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야곱이 결국 거기서 누룩을 제하고 간 셈이다. “옛 옷을 벗고 우상을 땅에 묻고, 그리고 벧엘로 올라가자.” 왜 그랬는가? 자기 딸이 밖에 나가서 일을 저질러서 자기 아들들이 추장들을 다 살해를 했다. 그래서 이것이 두려워서 야곱은 더 이상 거기서 버틸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결국 그는 그 때야 비로소 자기에게 은혜 베푸신 여호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기 모든 가족들에게 말하기를 “우상을 버리고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면 20년 동안 그는 우상을 그대로 묵인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 우상을 묵인했던가? 자기가 세상에서 자기 소망을 이루고 싶었기 때문에 우상을 그냥 묵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로 갈려고 하니까 이 우상을 가지고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을 다 버리라고 명령을 했던 것이다. 바로 이것이 누룩 없는 떡과 같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무교절이 돌아오면 온 집안을 다 청소해서 누룩이 하나도 남지 않도록 청소해야 된다. 누룩은 부패케 하는 것이다. 부풀게 하는 것이다. 세상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걸 전부 다 제가하고 난 다음에 무교절을 지키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400년 전에 야곱이 벌써 무교절을 지켰던 거나 같은 것이다.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와서 이 무교병을 먹었던 것이다. 미처 아무 식량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됐던 것인데, 이건 영적으로 ‘부풀릴 수 없었던 곳이다’ 그런 의미를 갖고 있다. 야곱은 더 이상 자기가 부풀릴 수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자기는 죽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는 어쩔 수 없이 누룩을 제거하고 갈 수밖에 없었던 곳이고,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애굽에서 가지고 왔던 누룩을 다 없애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세상에서 묻어왔던 것을 전부 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절기를 갖게 되었고, 그래서 대대로 무교절을 지키도록 그렇게 되었다. 무교절은 유월절 다음 날부터이다. 그래서 유월절 속에 무교절이 포함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월절은 무교절의 첫날이라고 할 수 있다. 애굽을 나오고 난 다음 날부터는 우리는 무교절이라는 뜻이다. 애굽을 나왔으면 애굽의 것을 안 가지고 있어야지, 애굽을 나와서도 계속 애굽의 것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 그래서 유월절 다음 날은 바로 무교절이 시작되고, 유월절 전체 기간은 결국 무교절 기간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에담이라는 데에 도착했다. 성경은 ‘광야 끝’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블레셋 길로 가면 가깝지만, ‘백성들이 그 때 전쟁을 보면 두려워해서 지레 겁을 먹을 것이다.’ 이래서 백성을 두려워할 것 때문에 홍해의 광야 길로 진행을 했다고 그렇게 성경을 말하고 있다. 성경에는 “두려워하는 자와 믿지 아니한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 이런 말이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서는데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볼 수가 없다. 진리를 보고도, 실재를 보고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그 나라에 들어올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에 온 어떤 사람들이 처음에 와서 이렇게 평화로운 것을 보고도 ‘두렵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건 어떤 다른 세계를 자기가 버릴 것이 두려워지기 때문에 그래서 하는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여기서부터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길을 인도하게끔 됐다. 광야의 인도자, 그는 바로 하나님이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 인생도 광야를 지나가는 동안에 우리 인생의 길은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인도되는 것이지 우리 생각대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네 번째는 ‘믹돌 앞’이라고 되어 있는데 ‘바알스본 맞은 편 바닷가’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바로가 후회하고 군대로 추격했던 그런 곳이다. 보내놓고 나니까 ‘아차,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이런 생각이 또 들어서 군대를 보내서 이스라엘을 다시 추격해왔다. 이래서 이스라엘은 모세를 원망하게 됐던 것이다. “우린 다 죽게 됐구나. 애굽인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다.” 이렇게 말하게 됐다. 목적이 분명치 않는 백성들, 무엇 때문에 출애굽을 하는지 모르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은 그저 편하냐 안 편하냐, 죽느냐 사느냐 이것만 생각한다 이것이다. “애굽에서 편하게 살 것을 광야에 와서 내가 죽게 됐다.” 이렇게 지금 원망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이 분명하다면 “내가 차라리 광야에서 죽을망정 애굽에서 내가 국고성을 쌓을 수는 없다.” 이렇게 되어야 안 되겠는가. “내가 애굽에서 고기를 먹고 바로를 위해서 국고성을 쌓느니 내가 차라리 광야에 나와서 여호와를 섬기다가 죽겠다.” 이래야만 목적이 있는 사람이 되는데, “애굽인을 섬기는 것이 차라리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다.” 이런 사람들이 모두 되고 말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모세는 이렇게 말한다.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을 보라.” 이 때 그 바다가 갈라지고 이스라엘이 통과하도록 되었던 것이 바로 믹돌 앞이었다. ‘여기서 여호와께서 바로의 군대로 인해서 영광을 얻은 곳이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amp;nbsp; 사탄과 세상이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게 한다든지 침략한다든지 할 때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이다. 여기서 만일 바로의 군대가 없었더라면 이와 같은 여호와의 영광은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니까.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세상의 도전이 없으면 우리에게 있는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데 세상의 도전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있는 영광이 드러나게 된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편안한 것만 좋은 것은 아니다 하는 것이다. 늘 말씀드린 거지만 편안하느냐 안 편안하느냐, 사느냐 죽느냐 여기에 있는 게 아니고, ‘우리가 어디로 가느냐’ 그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홍해를 건너게 됐다. “다시는 애굽의 군대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차적으로 세상에서 나와서 홍해를 건너는 것이 꼭 필요하다. 이것이 신약에 와서 침례가 됐다. 그래서 물을 건너는 것, 이런 것이 됐다. ‘아브라함, 히브리 사람’ 이 말은 ‘물을 건넌 사람’ 이런 뜻이다. 결국은 우리가 어떤 세계에서 어떤 세계로 건너기 위해서 그 두 사이에 죽음의 물이 있어서 그 죽음의 물이 둘을 갈라놓더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다시 또 되돌아갈 가능성이 생기니까 가운데 홍해가 있어야 된다는 뜻이다. 침례는 ‘내가 죽고 다시 삽니다.’ 하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고, 당시의 유태인들에게 있어서는 “나는 이제 유태교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갑니다.” 이것을 공적으로 선포하는 것이 침례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옛 세계를 청산하는 일이다. 옛 세계에 대해서 결별을 선언하고 내가 새로운 세계로 가는, 이것이 바로 홍해였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이 상징을 따서 침례라고 하는 걸 베풀게 된 것이다. 홍해는 침례의 상징이었다 하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홍해를 건너서 ‘마라’라는 곳에 이르렀다. 3일 길을 행해서 마라에 이르렀는데, 여기서 물을 얻지 못하고 아우성을 치게 되었다. 그리고 물을 만났는데 그 물이 쓰더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모세를 원망하게 되었다. 그 때 한 나무를 지시했기 때문에 그 나무를 가져다가 물에 넣었더니 물이 달아졌다 하는 것이다. 어떤 나무가 결국 쓴 물을 달게 할 수 있는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대로 우리 인생의 쓴 것을 무엇이 달게 할 수 있는가? 그건 십자가가 바로 달게 하더라 그것이다. ‘그 나무가 달게 하더라.’ 우리가 아무리 해도 안 되고, 모든 것이 쓰고 인생이 괴롭고 그렇게 한데, 어떻게 하면 그 괴로운 것이 단 것으로 바꿔지느냐? 그건 우리가 십자가를 갖게 되면 달아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의 정한 길을 거부하려고 했을 때 우리 인생은 쓰게 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이 정해준 길을 가면 그 길이 단데, 내가 그 길을 거부하려고 그러면 써져 버린다. 그래서 모든 논리는 입장에 따라서 생긴 거니까, 이런 입장에 서면 이런 논리가 맞고 저런 입장에 서면 저런 논리가 맞고 그렇다. 논리가 어떤 것이 정당하냐 절대적이냐 이런 것이 없다. 입장에 따라서 다르니까. 내가 ‘하나님이 정해준 것이 내 길이다’ 하는 입장에 서게 되면, 그러면 우리 인생이 달아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해준 것이 내 길이 아니다.’ 이렇게 하면 우리 인생이 써져 버리고 마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를 들어 여자가 시집을 간다. 이건 우리 나라에서 특이한 일인데, 시집에 가면 시집에 종속해서 산다 이런 것이다. ‘내가 왜 시집에 종속해서 사나?’ 이러면 괴로운 것이 된다. 그런데 ‘여자 팔자는 그런 거다.’ 그러면 달아지는 것이다. 입장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그것이 아예 자기의 정한 운명이다 이렇게 알았다. 그래서 “아예 한번 시집가면 너는 거기서 죽어라. 너는 그 집 귀신이다.” 이렇게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입장이 딱 정립되어 있으니까 죽으나 사나 그냥 거기 살아야 된다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오만 고초가 다 왔지만, 지금 사람보다 백배 이상 고초를 겪었지만 백배로 느끼지 않았다. 왜 그러냐 하면 입장이 그렇게 정리가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안 그렇다. 그 때보다 아주 편하지만 조그마한 문제만 있어도 불평이 생기게 된다. 왜 그러냐 하면 입장이 달라지니까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십자가는 우리의 입장을 바꾸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이 바꿔지면 쓴 물도 달아지게 된다 하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교회생활 하면서 항상 세상이 문제된다. 이것이 입장이 정리가 안 되어서 그렇다. 세상이 크게 보이고 이런 것은 입장이 그 입장에 서니까 크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입장을 딱 바꿔버리면 아주 조그마하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만다. 공산주의 논리와 자본주의 논리는 서로 다르다. 왜냐하면 입장이 다르니까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둘이 아무리 논리를 가지고 싸워도 끝이 안 난다. 아무리 설득하려고 해봐도 그건 안 된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설득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해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입장 자체를 처음부터 다른 데서 출발하니까. 서양철학사를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까, 아예 처음부터 입장을 다른 입장으로 서버렸기 때문에 그 논리대로 하면 딱 맞다. 유물론적 논리가 딱 맞다. 그러니까 한 페이지를 넘어간 다음부터는 틀린 게 하나도 없는 것이다. 맨 처음 시작이 잘못된 것이지, 그 다음부터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십자가는 결국 우리 입장을 바꾸는 것이다. 그래서 쓴 물을 달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나의 법도를 지키면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보고 무엇을 달라. 왜 안 줍니까? 이래서 되는 게 아니고, 우리가 입장을 바꾸면 저절로 우리가 그 은택을 입게 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래서 “애굽인에게 내리는 질병이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않겠다.” 그러니까 그 때 하나님은 애굽인에게는 질병을 내리시는 분이고 이스라엘에게는 치료하는 분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하나님이 그렇게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언제는 질병을 내리고 언제는 치료하고, 이런 게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성질 자체가 거역하는 자에게는 질병이 되고, 순종하는 자에게는 치료가 되게끔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알 수 있다. 달빛이 도적질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대단히 괴로운 것이고 거치장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연애를 하고 데이트하는 사람에게는 아주 낭만적이고 좋은 것이 된다. 똑같은 이치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엘림이라는 곳에 도착했다. 출애굽 15장을 보면 엘림에 도착했는데, 여기서 물 샘 열 둘과 종려 70주가 발견됐다 하는 데가 나온다. 열 두 샘, 그것은 영원한 그리스도, 목마르지 않는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요한 계시록에 가서 보좌로부터 생명수가 흐르더라, 열 두 가지 과일이 시절은 좇아 열매를 맺더라 하는 걸 보게 됐다. 종려 70주, 이것은 무성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70 종려나무, 70 두령들, 이런 것들이 나오는데, 이것은 무성한 그리스도, 번성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생수되신 그리스도와 번성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엘림에 도착하게 됐다. 당연히 그 단 물을 먹고 돌아온 후로 그들은 엘림에 도착하게 됐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민수기로 넘어와서 홍해가에 진을 쳤다 이랬는데, 출애굽기에는 이 말이 없다. 지명이 서로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우리가 혼돈이 되고 찾기가 참 어렵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신 광야에 이르게 됐다. 이것은 애굽에서 나온 후에 제2월 15일 날에 애굽에서 신 광야까지 도착했다 그렇게 기록을 하고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먹을 것이 없어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게 됐다. “애굽 땅에서 고기와 떡을 먹고 죽었다면 좋을 뻔했다.” 또 이렇게 했다. 항상 그들은 애굽을 생각하게 됐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게 됐고, 저녁에는 고기로 아침에는 만나로 이렇게 주게 됐다. 이건 일용할 양식을 주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한 오멜의 만나를 항아리에 담아 가지고 영원토록 보존하라.” 그렇게 말하고 있다. 이 양식을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먹고 사는 것이 됐다. 이 양식에 대해서 여러 번 얘기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은혜로 내려주신 양식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좋은 양식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땅에서 나온 양식이다 하는 걸 말씀드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만나, 이것은 오늘날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 은사를 받는다 이런 것들에 속한다. 그런데 가나안에서 나온 곡식, 땅에서 나온 소산, 그것은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이 우리 안에서 육신이 될 때, 그 때 우리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만나를 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심어놓은 것에서 우리가 소출을 거두는 그런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그 때는 내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내 목적과 하나님의 목적이 일치한다 이런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이건 성육신의 축복이고 신약의 축복이기도 한다. 우리는 종국적으로 신약의 축복 안에 이르기를 원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지금도 아직 신약을 맛보지 못하고 구약의 종교적 생활에서 헤매고 있다. 그 말은 만나를 먹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매일 오늘 끝날지 내일 끝날지 모르는 그런 양식을 먹고 있으니까 항상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혹시 은혜를 안 주면 어쩌나?’ 이런 생각을 갖는다던가, ‘혹시 이러다가 벌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들은 많은 기독교인들이 갖고 있다. 이것은 바로 광야에서 만나를 먹는 생활이기 때문에 그렇다. 왜냐하면 만나는 매일 아침 내리는 거니까, 매일 아침 내릴지 안 내릴지 그건 전혀 모르는 것이다. 내일 아침 가봐야 아는 그런 문제에 속한다. 이건 좀 불안한 생활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러나 성육신의 생활은 그런 불안한 생활이 아니다. 그건 지극히 합법적인 생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농사를 지으면서 언제 추수를 할 것이라는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이다. 몇 월 달쯤 추수를 한다. 몇 가마니를 추수한다. 어떤 곡식을 추수한다. 이런 걸 다 우리가 예견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생명 안에서는 저절로 우리 안에서 예언이 나온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돕 가, 알루스, 이런 곳을 지나간다. 그 다음에 르비딤에 이르게 됐다. 여기서 다시 “마실 물이 없으므로 모세와 다투었다.”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지팡이를 가지고 반석을 치게 됐다. 여기서 ‘맛사, 므리바’ 이렇게 불렀는데, 이것은 ‘하나님과 다투었다’ 해서 므리바라고 부르게 됐다. 여기서 반석을 쳐서 물이 나왔다. 이것은 반석은 곧 그리스도다. 고린도 전서 10장에 보니까, “저희를 따르는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이 반석은 곧 그리스도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반석이 쪼개져서 물이 나왔다. 이것은 영적으로 그리스도가 매 맞음으로,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림으로 우리의 영원한 샘물이신 그리스도가 나오게 됐다 하는 걸 상징하는 것이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아말렉과 싸우는 것이 생기게 됐다. 모세는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지팡이를 손에 잡고 섰다.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고 이랬다. 그래서 해가 지도록 싸우는데 모세가 지쳤기 때문에 사람들이 올라가서 손을 부축해서 모세가 하루 종일 손을 들고 있었다 하는 기록이 나온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칼로 아말렉을 쳐서 완전하게 진멸했다.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겠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됐다. 이것은 우리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가 손을 들 때 우리가 승리한다 그런 말이다. 그래서 그로 하여금 영광을 받으시게 하면, 그가 안식을 누리게 하면 우리가 복이 된다 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창세기에서도 하나님이 만족하시니까 사람에게 축복을 했다. 그것은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만족하게 하면 우리는 저절로 축복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광스럽게 하면 우리가 저절로 승리하게 된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제치고 내가 승리할 방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모세가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라 하는 것이다. 거기서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고 했던 것이다. 이것은 ‘나의 깃발이다’ 그런 뜻으로 ‘여호와 닛시’다 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맹세하기를 내가 이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겠다 이렇게 맹세하시게 됐다. 여기서 대승전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전쟁이 끝난 다음에 장인 이드로가 모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왔다.&amp;nbsp; ‘게르솜’은 ‘이방인에서 객이 되었다’하는 뜻이었고, ‘엘리에셀’은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를 도우사 바로의 칼에서 구원하였다’ 하는 뜻이다. 이래서 두 아들을 주었는데, 이 두 아들은 출애굽할 때 같이 가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장인 집에다 맡기고 자기가 갔다가 여기 와서 아말렉을 친 다음에, 멸한 다음에 이드로가 아내와 자식들을 데리고 모세에게 인계하러 왔다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아말렉을 친 후에 가족과 상봉했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런 영적인 의미가 있는 것이다. 아말렉은 우리 주변에서 괴롭게 하는 적이다. 멀지 않는 적, 가깝게 있는 적을 말한다. 이 적이 파해지지 않으면 우리는 안식을 얻지 못한다는 뜻이다. 주변에서 괴로운 것이 계속 있으면 우리는 안식을 얻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가족과 상봉하지 못하고 모세는 홀로 전쟁에 임했던 것을 볼 수 있다. 아말렉은 신명기 25장에 보면 “피곤함을 틈타서 뒤에서 약한 자들을 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주 진노를 하고 있다. 백성들이 피곤에 지쳐서 뒤에 낙오병이 생길 것 아닌가. 그런 낙오병을 쳐 가지고 괴롭게 하던 그런 사람들이 아말렉이었다. 이래서 “천하에서 도말시켜라.” 이렇게 명령을 하고 있다. 잔인하다 이것이다. “사면의 적을 평정한 후에 아말렉을 천하에서 도말하라.” 그래서 최후로 모든 전쟁을 다 끝내고 나거든 그 다음에 아말렉을 완전히 진멸하라고 그렇게 명령을 하고 있다. 연약한 자를 치는 것, 이건 잔인한 것이다. 예를 들어서 포로를 죽인다. 이것은 제네바 협정에 위반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다 이런 정신에서 나온 것이다. 낙오병을 사살한다. 이건 잔인한 것이다. 이런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장인이 와서 재판법을 가르쳐 주었다.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십부장, 이렇게 두라고 했다. 모세가 하루 종일 재판을 하고 있는 걸 보니까 너무 피곤하다 이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하지 말고 부장제도를 두어서 적은 일은 십부장이 하고, 조금 더 큰 일은 오십부장이 하고, 조금 더 큰 일은 백부장이 하고, 제일 큰 일은 모세한테 가지고 오너라, 이렇게 자기 장인이 가르쳐 주었다. 이 장인은 모세에게 많은 영향을 준 사람이다. 광야에서 살던 부족으로서 제사장이었다. 그러니까 어떤 말에는 모세가 장인에게서 여러 가지 제사의 예법이나 이런 것들을 배웠다 하는 말도 있다. 그럴 만큼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 이드로라는 장인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제3월에 시내 광야에 도착했다. 석 달만에 도착했다. 그래서 산 앞에다 진을 쳤다 하였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던 곳이 바로 이 시내 산이다. 40일, 또 40일, 그래서 80일 동안이나 머물렀던 그런 곳이다. 여기서 돌비를 가지고 나오게 됐고, 십계명, 성막에 관한 규정, 제사에 관한 규정, 이런 것들이 모두 주어지게끔 그렇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다. 너는 내 것이 되고, 내 것이 열국 중에서 가장 존귀한 나라가 될 것이다.” 이것이 율법을 주신 요강이었다. 여기서 출애굽기는 성막을 건축하는 것으로 끝맺었다. 그러니까 사실은 출애굽기의 기록은 시내 광야에 와서 십계명을 받고 성막을 건축하는 데까지가 출애굽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다음에 민수기로 넘어가는 것이다.시내 광야, 여기서 오랜 시간이 소요되게끔 그렇게 됐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 다음에 다베라, 혹은 기브롯핫다아와, 이런 이름이 있는데 거기에 도착하게 됐다. 여기서 섞여 사는 무리 중에서 불평이 나와서 온 백성에게 전염이 되었다. 고기가 없다고 불평을 했다. “왜 우리는 만나만 먹어야 되느냐? 우리는 정력이 쇠하여져서 못 살겠다.” 이런 식으로 불평을 하게 됐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 때 메추라기를 몰고 왔는데, 메추라기를 몰고 오시면서 진노해 가지고 백성들을 벌주었던 그런 일이 생기게 됐다. 이것을 탐욕의 무덤이다 이렇게 말했다. 기브롯핫다아와라는 말이 탐욕의 무덤이다 그런 뜻이라고 한다. 결국 하나님은 필요한 것을 공급하시지만 탐욕을 공급하는 분은 아니다 그런 뜻이다. 만나는 필요지만 메추라기는 탐욕이다 그런 뜻이다. 사실은 우리가 고기를 안 먹어도 사는데, 더 힘 좀 쓰려고 고기를 먹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건 탐욕에 속한다 그런 얘기이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구한다 하는 것은 만나를 구한다는 뜻이고, 우리가 일용할 양식 외의 것을 찾는다는 것을 메추라기를 구한다는 뜻과 같다. 그래서 우리가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여기면 평안하게 되는데, “메추라기가 왜 없냐? 고기가 왜 없냐?” 이러면 불만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인류도 결국 필요만을 찾는다면 서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그런데 탐욕 때문에 서로 평화롭게 살 수가 없다. 어느 나라는 잘 살고, 어느 나라는 못살고, 이런 결과가 오게 되고, 서로 원망하고 저주하고 하는 문제가 탐욕 때문에 생기게 되는 것이다. 필요 때문에만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교회생활 안에서도 어떤 사람들은 바로 탐심 때문에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 도대체 저 사람은 문제가 안 끝난다. 왜 문제가 끝나는가? 탐욕이 많아서 그래서 문제가 안 끝난다. 만나만 먹고살면 그렇게 복잡할 문제가 없지 않는가. 있는 걸 족한 줄로 알고, 우리 교회 가운데 굶어죽는 사람은 없으니까 그렇게 걱정할 게 없는데 너무 탐심을 부리다가 괴로움을 당하는 경우가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호와의 산에서 출발을 했는데, 하세롯이라는 곳에 도착을 했다. 여기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했다 해서 비방을 했다. 그래서 미리암이 문둥병이 들었던 사건이 발생했다. 이건 권위에 대한 도전이었다. 모세가 잘했냐 못 했냐를 떠나서 그는 권위에 대해서 비방을 했기 때문에 문둥병에 걸리게 됐다. 문둥병은 그후로 거역의 상징으로 표현됐다. 그건 천벌로 기록이 되어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바란 광야에 이르렀다 하였다. 이건 ‘가데스 바네아’라고도 말한다. 여기는 제2년이니까 그 다음해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니까 시내 산에서 성막을 짓는데 한 1년 걸린 것 같다. 그런 다음 제2년에 가데스 바네아에 도착했다. 여기서 정탐꾼을 보내서 40일 동안 정탐을 했다. 열 두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바란 광야의 가데스에서 보고대회가 있었다. 열 명이 와서 하는 말이 “우리는 다 죽었다. 가보니까 그들은 장대하고 우리는 메뚜기 같더라.” 이렇게 보고를 하는 바람에 온 백성이 난리가 났다. 다 일어나서 원망을 하게 되었다. 그 때 여호수아와 갈렙이 옷을 찢고 일어나서 그것을 번복을 시켰다. “그들은 우리 밥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 밥이다.” 이렇게 용감하게 나오게 됐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백성에게 진노하게 되어서 다 멸하고 할 때 모세가 중재를 해서 간구를 하고 있는 걸 보게 된다. “만일 여기서 이 백성이 멸하여진다면 하나님이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끌어내서 광야에서 죽였다고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면 온 세상 사람들이 여호와를 비방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 여호와께서는 이것을 돌이켜 주셔야 됩니다.” 그렇게 중재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그 말을 옳게 여겨서 하나님의 마음을 돌렸다 하는 것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는 것을 거기서 예언하고 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 가운데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이 말을 듣고 뒤늦게 어떤 사람들이 “그러면 우리가 싸우러 가겠다.” 해서 산으로 기어올라갔다. 그러다가 가나안 사람의 공격을 받아서 큰 참패를 하게 이르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대단히 괴로운 일이 생기게 되었다. “되돌아 홍해 길로 하여 광야로 들어가라.” 다시 되돌아가게 됐던 것이다. 다 갈려고 하다가 그렇게 됐다. “믿지 않고 하나님을 무시했다. 그래서 약속의 땅을 얻지 못할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고는 우리가 그 영광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지 않는가. 여기서 광야에서 40년을 유리하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게 됐다. 이것이 하나의 되돌아가는 길이었다. 가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길이 된다. 잘 나가다가, 잘 진행하다가 다시 되돌아가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빛을 보고 할 때 탁 진행을 하지 않는가. 그 때 같으면 애굽도 뭐고 다 소용없고 박차고 나온다 이렇게 되는데, 조금 가다가 옛 일이 도로 생각나서 다시 되돌아간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거기서 빙빙 돌면서 다시 인생 40년의 유리하는 생활을 시작하게끔 된다. 처음에는 분명히 내가 하나님의 은혜을 입은 사람이었는데, 뒤로 보면 그 안에서 오만 문제가 생겨나서 갈 수도 없고 올 수도 없고 광야에서 방황하는 사람, 애굽에 다시 돌아갈려니 돌아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나안에 가자니 가나안도 못 가고, 그래서 광야의 인생의 걸어가게끔 그렇게 되고 있는 걸 본다. 여기서 새로 제사와 안식에 대한 율례가 다시 추가적으로 선포가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고라와 다단과 아비람, 이 세 사람이 250인의 두령들과 당을 지어서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했다. “왜 하필이면 아론만 제사장이냐? 왜 하필이면 모세만 예언을 하느냐?” 이런 식으로 도전을 했다. 그래 가지고 이 사람들은 땅이 갈라져서 몰사했다. 지진이 났다 그런 말이다. 지진처럼 되어서 다 몰사해 죽었다. 여기서 그 사람들이 “우리가 제사지내겠다.”, 다시 말하면 “아론을 빼놓고 우리는 왜 제사장이 못되냐? 우리가 하겠다.” 그래 가지고 각기 250인이 전부 향로를 만들어서 그걸 가지고 분향을 했다. “이 분향하는 죄로 인해서 그들은 땅 속에, 음부에 갇혔다.”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불타는 속에서 그들의 향로를 끄집어냈다. 그걸 가지고 제단을 싸는 편철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것을 영원히 이스라엘 앞에 기념물이 되게 하자.” 그래서 제사장 이외에는 누구도 그 제단에 가까이 하지 못하도록 그 표시물로서 이 향로를 가지고 편철을 만들게 되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하나님이 정한 사람이라야 된다 하는 것을 여기서 확정하는 그런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후에도 백성들은 또 모세와 아론을 원망했다. 그래서 염병이 나서 14,700명이 죽었다 하는 데가 나온다. 그리고 이 제사장 직분이 또 도전을 받았기 때문에 열 두 두령의 지팡이를 모아다가 성막 안에 두어서 아론의 지팡이에 싹이 났기 때문에 아론의 제사장 지위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된 것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지는 그런 사건이 발생했다. 여기서 38년 동안의 유랑생활로 들어가게끔 그렇게 됐다. 결국 거역은 우리로 하여금 유랑하는 인생이 되게 만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 38년이 지나고 난 후에 40년 1월 다시 신 광야에 이르렀다. 거기서 미리암이 죽고, 또 다시 물이 없음으로 원망하게 됐다. 여기서 모세가 반석을 쳤기 때문에 모세는 결국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고 말았다. 한번 쳤던 반석을 다시 또 쳤다는 것이다. 처음에 반석을 쳐서 물이 났는데, 그 다음에는 반석을 치라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반석을 쳤기 때문에 이것은 그리스도를 두 번 친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그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이걸 므리바라고 이름을 짓게 됐다. ‘모세의 죄’라고 할 수 있다. 이 죄가 그렇게 심각했던 이유는 이 반석이 그리스도이기 때문에 그렇다. 다른 이유가 아니다. 가나안은 곧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불가능하게 됐다. 그래서 모세는 영원히 율법을 준 사람으로 그렇게 끝나게 됐다. 여호수아가 뒤를 이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됐는데,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신약에 오면 예수라는 이름이 되게 된다. 여기서 가나안을 향한 마지막 출발을 또 하게 됐다. 그런데 에돔이 통행을 거부하게 됐다. 그래서 또 전쟁을 하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호렙산에서 아론이 죽고,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서 그의 아들 엘르아셀에게 입혀서 제사장 직분을 대행하도록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가나안 사람들의 왕들이 도전하다가 모두 멸망한 사건이 기록이 죽 되어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호렙산에서 다시 진행해서 홍해 길을 좇아서 남쪽으로 에돔 땅을 돌려고 하다가 백성이 길로 인해서 마음이 상했다고 하였다. “왜 우리가 이렇게 험한 길로 가느냐?” 해서 또 불평을 하게 됐다. 그래서 거기서 불뱀이 나오게 됐다. 많은 사람이 뱀에 물려서 죽게 됐고, 거기서 놋뱀이 나오게 됐다. 불뱀은 독 있는 뱀이고 놋뱀은 독이 없는 뱀이다. 결국 놋뱀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 됐고, 신약에 와서 “이 그리스도는 독 없는 뱀이다. 우리와 같은 모양을 가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다.” 그런 말이 나온다. 그래서 육신의 모양 안에 있었지만 죄는 없으시다. ‘죄는 없다’는 말은 ‘그는 독이 없다. 거역하는 것이 없다.’ 그것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 뱀을 쳐다본 자마다 다 산다 하는 것이다. 이걸 예수님께서 바로 자기 자신에게 인용했다.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라.” 이렇게 할 때 바로 그 놋뱀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암시를 했던 것이다. 우리는 놋뱀이 되신 그리스도를 쳐다보는 것, 그를 바라보는 것, 그를 믿는 것,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오봇, 이예아바림, 세렛 골짜기, 아르논 골짜기, 이런 곳으로 지나간다. 그래서 아르논에 와서 큰 승리의 노래를 부르게 된다. “모든 골짜기의 비탈은 아르 고을을 향하여 기울어지고 모압의 경계에 닿았다.” 하는 노래가 나온다. 이것은 이 때에 그 근처에 있었던 많이 이민족들이 정복을 당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오게 됐다. 그래서 맛다나, 나할리엘, 바못, 이래 가지고 비스가 산에 도착을 했다. 비스가 산, 여기서 모세가 죽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아모리 왕 시혼이 또 길을 막기 때문에 전쟁을 하게 되고, 아모리 왕은 멸망을 하게 된다. 또 바산 왕이 나와서 길을 가로막고 싸우다가 점령당하게 된다. 그 근처에 있었던 모든 부족들이 점령을 당하게 된다. 그래서 모압 평지에 도착하게 되었다. 이 모압 평지는 바로 요단 강 맞은 편이었으니까 바로 강만 하나 건너면 가나안 땅이 되는 그런 곳이다. 여기서 발락의 계략, 발람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그런 계략이 있었지만, 발람이 결국 오는 도중에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서 저주를 하려고 오던 사람이 반대로 이스라엘을 축복을 하고 돌아가는 그런 사건이 발생하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그리고 싯딤이라고 하는 곳에서 백성들이 바알보올에게 제사를 했다. 그래서 이방인 여자들과 간음함으로 말미암아서 우상을 숭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들의 두령들이 전부 죽임을 당하게 됐다. 염병으로 24,000명이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 다음에 26장에서 인구조사를 다시 하게 되었다. 여기서 인구조사에서 기록하고 있는 것은 “처음에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그 말을 하고 있다.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한 사람도 거기 든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말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아비림 산에서 여호와께서 모세가 가나안 땅을 바라보고 거기서 죽게 된다는 예언을 하였다. 그리고 여호수아와 엘르아셀에게 모세의 직위를 갈라서 위임하게 된다. 엘르아살은 예언자로, 제사장으로, 여호수아는 장군으로, 이 직분이 갈라져서 그후로 왕조시대에 와서 왕과 제사장이 갈라지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고 난 다음에 율례가 다시 선포된다. 그래서 41년 1월 10일날 요단강을 건너게 된다. 그리고 1월 14일날 그 땅에 가서 유월절을 지켰다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이 출애굽의 노정이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이 노정 안에서 하나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에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한 사건이 전부가 노출되었다. 그리고 그런 사건 속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그걸 다루었는가 하는 문제가 전부 또 노출되었다. 이것은 옛날 얘기지만 오늘날도 똑같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 속에 감추어진 모든 것이 다 드러났으니까 이것은 바로 인생의 노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순히 그냥 따른다면 아주 쉽게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거역 때문에 우리는 40년을 방황하게 된다 하는 중요한 역사를 남기게 됐다. 이것은 고난의 시간이고 낭비의 시간이고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걸 통해서 더욱 더 견고하게 자기의 땅을 확보하시는 분이다 하는 걸 볼 수 있다. 사탄은 사람들을 속여서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거기서 오히려 더 새 사람을 만들어 가지고 하나님의 성을 건축하게 되는 걸 보게 된다. 애굽에서 나왔던 사람들은 어차피 애굽의 무엇을 갖다가 묻혀온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이 만일 가나안에 갔더라면 역시 애굽의 문화를 그대로 가져갔을 것이다. 그러면 가나안 속에 애굽 문화가 그냥 섞여 들어갈 건데, 그들의 거역으로 말미암아서 다 죽어버리고 결국 아무도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속에는 애굽이 들어갈 수 없도록 그렇게 되어졌던 것이다. 그러니까 반대가 있으면 있는 것만큼 하나님은 더욱 더 완전하게 자기의 계획을 진행하시는 분이다 하는 걸 보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앞서 간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미처 보지도 못하고 생각지도 못한 우리 안에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모든 거역을 다 드러내서 우리의 거울이 되게 하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거울을 봄으로 말미암아서 우리 안에도 이런 가능성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40년을 광야에서 유리할 수밖에 없는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시고, 여기서 우리가 주의 말씀을 따라서 직행하는 길을 깨닫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노정이 주께서 정하신 길을 따르게 되기를 원하고, 당신께서 우리에게 참으로 어떻게 계획하고 계신가를 깨달아 알게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의 계획과 우리의 목적과 우리의 주장을 떠나서 하나님이 계획과 하나님의 목적과 하나님의 주장을 우리의 것으로 삼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아담은 그냥 지음 받은 사람이어서 아담 안에서 이런 여러 가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그것이 아직 채 실험되지 않았다. 그럴 때 사탄이 침략을 해서 아담을 넘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40년의 과정을 지나서 우리에게 오신 분이다. 모든 면역체를 다 가지고 온 거나 마찬가지이다. 지금 아프리카나 저런 지역에 가면 감기만 걸려도 죽는다고 한다. 우리가 걸리는 감기가 걸리면 그 사람들은 바로 죽어버린다. 왜냐하면 면역체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우리는 날 때부터 아예 우리 조상들이 겪어온 질병의 면역체를 우리가 다 가지고 나오기 때문에 이런 정도의 감기는 안 죽는다 그런 것이다. 우리가 아예 균이 없는 세상에 산다면 면역체가 없어도 좋지만, 균이 있는 세상에 살 바에는 면역체를 가지고 있어야 안 되겠는가. 우리의 첫 번째 조상인 아담은 면역체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면, 두 번째 조상인 그리스도는 면역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하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이렇게 말할 때는 그 모든 것을 함축하는 것이다. 광야 40년을 함축하고, 이스라엘 역사를 함축하고, 우리 인류사 전체를 함축하는 것이다. ‘그 안에, 그리고 승리한 사람, 그 안에서 다시 태어난 사람, 그 사람 안에’라는 뜻이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려고 한다.” 다시 말하면 “나도 그리스도와 같은 면역체를 가진 인간으로 발견되기를 원한다.” 그런 말과 같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 안에는 다시는 사탄이 들어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면역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으로 말하면 영원히 불못에 들어갔기 때문에 다시는 사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말로 하면, 사탄이 살아서 있다 하더라도 전혀 그것이 우리의 생명에 영향을 주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생명에 거름이 될 수밖에 없게 된다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건 우리가 적은 경험을 통해서 볼 때도 우리가 어떤 문제에 대해서 이미 면역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문제로 인해서 그 사람이 영광스럽다는 걸 보게 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통과하지 않는 사람을 보면 계속 그 자라에 머물러 있다. 계속 똑같은 감기를 앓고 있다 그런 얘기이다. 또, 좀 고차원적인 감기를 못 앓고 저급한 감기 몸살을 계속하고 있다 이런 것과 똑같다. 그런데 십자가를 통해서 문제를 해결한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면류관이 더 좋아지는 걸 보게 되고 해결능력이 많아지는 걸 보게 된다. 문제해결의 능력이 많아져 간다. 그러나 항상 그걸 두려워하고 피하기를 원하고 이런 사람은 전혀 해결능력이 없어 가지고 계속해서 어린아이와 같은 그런 생활을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내게 맡겨진 짐을 내가 전혀 지지 않는 사람은 근육이 전혀 발달하지 않아서 힘이 전혀 없어진다. 팔을 쓰지 않고 있으면 팔의 근육이 다 쇠퇴해져 힘이 없어지게 된다. 뼈도 그렇다고 한다. 계속 좀 다구러야 좋아지지 가만 놔두면 힘이 없어져 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칼슘을 많이 먹어봤자 힘을 안 쓰면 뼈 속에 칼슘이 있을 필요가 없으니까 다 나가버린다고 한다. 그래서 곰처럼 다구르고 찧고 이래야 뼈 속에 칼슘이 필요해 가지고 계속 몸에서 흡수를 한다고 한다. 그 말을 들어보니까 칼숨제만 많이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먹어봤자 몸에서 안 필요하면 몸에서 배설시켜 버리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운동을 안 하면 결국 몸에서 안 필요하기 때문에 배설해버리고 만다. 운동을 해야 몸에서 필요하기 흡수를 한다 그것이다. 생명체의 원리나 우리 생명이나 똑같은 이치를 갖고 있다. ‘우리가 어떤 문제도 당하기를 싫어한다. 어떤 문제도 나는 안 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점점 뼈가 골다공증이 걸려 가지고 구멍이 뻥뻥 나서 조금만 움직여도 똑 부러지는 그런 사람이 된다 이것이다. 그런데 막 다구르고 한번씩 찧어보고 이런 사람들은 자꾸 단단해진다. 그래서 단단한 뼈가 된다 이런 걸 알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스도는 완전한 면역체를 가지고 오신 분이다. 우리가 이 그리스도를 받는다는 것은 아담을 받는 것과는 아주 다른 것이다 하는 걸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이러이러한 것들을 요구하는가? 우리가 그런 면역체 안에서 살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렇다. 어린아이들을 유리관 속에다 소독해서 계속 키울 수는 없지 않는가. 어차피 나오니까. 요즘 TV니 비디오니 이런 것이 많은데, 이런 것은 쉽게 말하면 세상문화이다. 이런 온갖 것이 있어서 아이들이 완전히 오염(감염)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보지 못하게 해 가지고 그냥 TV를 없애버리면 안 좋겠나 싶은데, 또 그렇게도 안 되는 것이 그렇게 된다고 해서만 또 될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다른 방법으로 그걸 보기는 봐도 그걸 이겨낼 수 있는 어떤 힘을 길러주어야 된다. 그래야지 그걸 없애봤지 남의 집에 있으니까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 집에서 못 보게 해도 다른 집에 가서 봐버리니까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집에 놔두고 너대로 그냥 놔둔다 그것도 안 되는 일이다. 왜냐하면 완전히 감염되어버리고 마니까 그렇다. 그러니까 그걸 이길 수 있는 어떤 다른 걸 공급해야 된다. 아이들도 교회에 늘 오게 해야 되는 이유도 바로 그런 데 있다. 못 보게 할 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더 좋은 것을 공급한다면 그것을 이기게 될 것이다. 그걸 이기게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지, 그렇다고 다 허용하는 건 아니지만 단지 그걸 막는 것만이 좋은 건 아니다. 이것을 잘 조절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냥 무균상태에서 키우기를 원하지만 않고 사탄이 있는 데서 우리를 키우지만, 그러나 우리가 그 사탄을 이기게 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맡겨진 짐을 우리가 감당해 가는 것이 필요하고, 숙제를 해가야 공부가 진도가 나가듯이 우리도 숙제를 해나가야 될 그런 필요가 생긴다는 걸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유혹하는 분은 아니지만 그러나 시험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견고케 하기 위해서 시험하시는 분이다 하는 걸 볼 수 있다. 우리가 기도할 것은 “유혹에 들지 말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해야 될 일이지, “아예 시험을 주지 마옵소서.” 이렇게 기도해서는 안 된다 그것이다. 우리말 성경에 ‘시험’이라고 번역돼 있지만 그건 ‘유혹’이다. ‘Temptation' 유혹하는 것, ’함정에 바뜨리기 위해서 유혹하는 것에 들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그런 뜻이다. 그러나 우리는 공부를 해서 하나님 앞에 시험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이구, 시험이 왜 안 돌아오나?‘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 ’아이구, 시험 좀 안 봤으면 좋겠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곤란하다. 공부 안 하는 학생은 시험이 없기를 원하게 된다. 그러나 공부하는 학생은 시험날짜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 테스트 받기를 원해야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광야 40년의 생활, 이것은 우리의 거울이 되는 생활이다. 우리도 이 거울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로 바로 가는 길을 배울 필요가 있다.&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42.  민33장. 애굽 속의 유월절부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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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27:17Z</updated>
	    <published>2009-11-10T14:27:1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민33장. 애굽 속의 유월절부터.&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1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와 아론의 관할 하에 그 항오(行伍)대로 애굽 땅에서 나오던 때의 노정이 이러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2 모세가 여호와의 명대로 그 노정을 따라 그 진행한 것을 기록하였으니 그 진행한 대로 그 노정은 이러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3 그들이 정월 십오 일에 라암셋에서 발행하였으니 곧 유월절 다음날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모든 사람의 목전에서 큰 권능으로 나왔으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3:4 애굽인은 여호와께서 그들 중에 치신 그 모든 장자를 장사하는 때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신들에게도 벌을 주셨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33장은 전체적으로 출애굽의 노정을 기록하고 있다. ‘모세가 여호와의 명한 대로 그 노정을 따라 진행한 것이다.’ 하나님이 명한 대로 이스라엘이 진행했다 그런 뜻이다. 이스라엘의 운명은 곧 우리 인생의 운명 자체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명한 대로 사람이 진행하는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원래 아담에게 하나님이 명한 대로 진행했더라면 이런 출애굽의 노정을 밟지 않을 텐데, 사람이 다른 길을 갔기 때문에 이제는 적의 진지에서 가나안 땅을 출발하는 그런 노정으로 바꿔지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날은 유월절 다음 날이었다.’고 한다. 유월절은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로 구성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날이다. 그리스도의 어린양 성분과 무교병의 성분과 쓴나물인 성분, 그것이 유월절을 구성하게 된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0장에서는 ‘우리의 유월절 그리스도다.’ 그렇게 표현을 했다. 결국 ‘그리스도는 어린양이시고 또 무교병이시고 쓴나물이시다.’ 그런 말이다. 그러면 이런 그리스도를 먹은 다음 날 애굽에서 나왔다 하는 말이니까, 이것은 아주 의미가 깊은 그런 말이다. 그리스도가 결국 출애굽한 셈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고 배에다 넣고 자기 살과 피가 되어 가지고 애굽을 나온 것이니까, 알고 보면 그리스도가 애굽에서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애굽은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이 살 수 없는 곳이다. 거기서는 다 무시되고 멸시되고 버린 바 된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곧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자기 자신들이 그렇지 않는 줄로 알 때 그 애굽의 종살이를 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은 어린양이고 무교병이고 쓴나물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애굽에서 나왔다는 의미는 결국 세상에서 나온다는 의미이고, 또 궁극적으로는 아담에게서 나온다 그런 의미이다. 옛 것에서 나온다, 하나님과 반대되는 세계에서 나온다, 하나님 나라와 반대되는 곳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의미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우리가 다른 세상으로 나오기 위해서는 유월절을 통해야만 나온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로서밖에는 애굽을 탈출할 수 없다 그런 뜻이 된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 필요하도록 준비된 인생이다, 그렇게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게 바로 필요한 사람이 그리스도니까,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성요소가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이니까 이런 인생이 하나님 앞에 필요한 인생이다 하는 뜻이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을 보면 이런 성분이 없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그런 성분이 없으니까, 하나님 앞에 준비되지 못한 인생이다. 우리가 전에는 다 하나님 앞에 필요하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이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은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으로 준비되어 가지고 서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물건이든지 우리가 사용하려면 내게 필요하도록 준비되어야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이 준비하는 기간을 정월 10일부터 14일까지 이렇게 준비를 시켰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위해서 준비되는 기간이 필요하다. 어린양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해서 준비될 때도 일년간의 기간이 필요했다. 일년 된 수양, 일년 된 어린양을 제단에 바치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우리 인생은 난 대로는 하나님께 바로 쓸 수 없다, 그런 말이 된다. 우리는 결국 준비된 후에 쓴다, 유월절로 준비된 후에 우리는 하나님께 쓰여질 수가 있다 하는 것이다. 결국 내가 태어난 대로 하나님께서 쓰기를 갈망해서는 안 되고,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시킨 대로 쓰여질 줄로 알아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준비시키는 인생이다, 그렇게 우리가 깨달아야 된다. ‘내가 지금까지 온 모든 길은 하나님이 사용하기 위해서 나를 준비하는 기간이었구나. 또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여건들과 교훈들은 전부 다 나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구나.’ 라고 알아야 된다. 무엇을 준비하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준비하기 위한 것이구나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런 관점에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결국 당신에게 필요한 한 인생을 준비시키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걸 보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종교에 빠져 가지고, 종교의 그 잡다한 실행과 잡다한 소원을 가지고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구할 것이냐, 부처님 앞에 구할 것이냐, 기도를 이렇게 할 것이냐 저렇게 할 것이냐, 예배를 이렇게 드려야 되느냐 저렇게 드려야 되느냐, 어떤 말씀은 지키고 어떤 말씀은 안 지킬 것이냐, 어느 교파는 옳고 어느 교파는 틀린 것이냐, 이런 문제에 모두 사로잡혀 있다. 하나님 앞에 필요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가 그 모양이 없기 때문에, 그림이 없기 때문에 모두 쓸데없는 다른 것을 붙잡고 옳으니 그르니 하고 있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또 세상 사람들은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가 어떤 인생이 되어야 하는지를 모르니까 사람들이 가는 대로 이렇게도 가보고 또 저렇게도 가보고, 시대를 따라 유행을 따라 그렇게 바꾸어져 가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그것이 없으니까 그렇다. 국가는 그 국가가 요구하는 인물이 있다. 그래서 그런 인간이 되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다. 또 국가는 그런 방향으로 사람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다. 모든 학교의 교육들은 그 사회가 요구하는 그런 어떤 인간을 만들려고 그렇게 교육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 시대와 그 사회가 달라지면 되어야 하는 인간도 또 역시 달라진다. 이씨 조선을 유지하고 구성하기 위해서는 이씨 조선에게 맞는 그런 인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유교의 윤리를 가르치고 그걸 통해서 임금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반란을 일으키지 말고 충성을 하고 이런 인간을 말들어낸 것이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사회는 자본주의사회대로 자본주의사회에 필요한 인간상이 있기 때문에 그런 인간상을 만들기 위해서 여러 가지 면으로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사람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자본주의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아니면 군주주의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공산주의적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 모두 사람마다 다른 의견을 갖고 있으니까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를 잘 모른다. 그러다 보면 자연히 이것저것을 섭렵하게 되어 있다.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남들이 하는 걸 안 할 수 없고, 남들이 다 가는데 뭔가 나는 잘못된 것 같고 이러니까 안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앞은 안 보이고 군중만 보이니까 내가 혹시 이 군중을 안 따라가다 보면 내가 잘못 가지 않을까, 내가 목표가 분명히 보인다면 나 혼자라도 갈 수 있고 다른 사람이 안 가도 갈 수 있는 거지만, 목표가 안 보이는데 무슨 수가 있겠는가? 군중이 가는 데로 갈 거 아닌가. 거기서 군중이 가는 데로 나는 안 가겠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알고 보면 고집쟁이들이다. 자기 고집으로 자기도 또 모르면서 가는 것이다. ‘남이 하는 대로 나는 안 가겠다. 무엇이든지 남이 하는 대로는 안 하겠다.’ 또 이런 사람도 있다. 묘한 사람도 다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 앞에 준비된 인생, 그것이 인생의 정도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걸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창조했으니까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정상적이 아니겠는가. 창조자에게 필요한 사람, 그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다. 창조자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분이고, 목적을 가지고 있는 분에게 필요한 사람은 역시 그 목적에 맞는 사람이다. 그냥 있는 사람이 아니지 않는가. 그래서 유월절 양은 하나님 앞에 준비된 인생이라는 것을 상징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유월절 과정을 보면 피를 보여주었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첫 번째는 애굽인에게 피를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이 피는 곧 생명이고 생명은 죽음을 상징하는 것이니까. 어디에 피가 흘려져 있다. 그러면 ‘사람이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문설주에다 피를 바름으로써 죽음을 보여주었다. 왜 죽음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애굽에서 내가 해방되려면 죽음밖에는 길이 없다는 것이다. 내가 애굽에서 산 채로 나올 수 없다 그것이다. 왜냐하면 애굽이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옛날 궁녀들이 산 채로는 궐문 밖으로는 못 나온다 그런 말이 있다. 임금에게 필요하니까 죽은 후에만 나올 수 있다 그런 것이다. 애굽의 바로는 이스라엘을 노예로 부리고 있었다. 그 노예는 바로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국고성을 건축하는데 필요했다. 그러니까 살아있는 사람은 안 내보내 준다는 것이다. 써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안 내보내준다. 유용한 사람은 안 내보내준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고대는 이렇게 했다. 어느 정복자가 들어오면 피정복자 중에서 유능한 사람만 다 뽑아간다. 젊은 청년들, 유능한 사람들, 학식 있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만 데려고 갔다. 자기 나라에서 이용하려고 그렇게 했다. 그리고 여자들이나 노인들이나 아이들은 놔두고 갔다. 그것이 결국 사마리아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때는 유능한 사람은 세상에서 쓰고 무능한 사람은 버리고 그런 때였다. 물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유능하고서는 거기서 나올 수 없다. 필요하다는데 어떻게 내주겠는가.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오려면 거기서 무용한 것을 보여주어야 된다 그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내가 어떻게 하면 친구들하고 술을 안 먹을까? 그러면 내가 거기서 술을 먹어도 안 취하고 잘 지내고 이러면 거기서 나올 수가 없다. 친구들이 좋아하니까 “야, 너는 나하고 술친구하기 좋다. 너는 술을 먹어도 토하지도 않고 아주 재미있다. 끝까지 노래도 잘 부르고 잘한다.” 그러면 항상 술먹을 일이 있으면 그 사람을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서는 빠져 나올 수가 없다. 사람이 계속 자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는데 빠져 나오는 것도 인정머리가 없는 일이고 이러니까 불가능하지 않는가. 다시는 그 친구들과 술 안 먹으려면 술을 먹고 왕창 그 놈들 옷에다가 게워놓아야 된다. 게워놓고 밤새도록 개병짓하고 이러면 다음부터는 아예 술 먹을 때 오라고 안 한다. 왜냐하면 무용하고 귀찮으니까 오라고 안 한다. 세상에는 다 자기에게 필요하니까 오라고 한다. 필요하지 않으면 오라고 안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애굽 사람에게는 죽음을 보여주어야 놔주지, 그렇지 않고는 놔주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에 나가서 해보면 똑같다. 내가 세상에 가서 그 세상에서 빠져 나오려면 내가 거기서 유용해 갖고는 못 빠져 나온다. 내가 거기서 빠져 나와야 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무용한 사람으로 보여야 빠져 나올 수 있게 된다. 그래서 일차적으로는 피를 보여준 것은 애굽인에게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차적으로 피를 보여준 것은 하나님에게 보여준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피를 볼 때는 생명을 보는 것이다. 사람은 피를 볼 때 죽음을 보지만, 하나님은 피를 볼 때 생명을 본다. 그래서 “피 채 먹지 말아라. 피를 흘리지 말아라.” 하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피를 볼 때 생명을 보니까. 사람의 생명은 피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에게 피를 보여주면 하나님은 그걸 즉각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아, 이건 생명이구나.’ 그렇게 아신다. 그래서 어린양의 생명을 보고 그 집을 넘어갔던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유월절이라고 한다. 넘어갔다. “내가 피를 볼 때 넘어가리라.” 왜 그러냐 하면 피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까 하나님은 피를 볼 때 생명을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에게는 우리가 생명을 보여주어야 하나님이 나를 필요로 하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생명이 없으면 하나님은 나를 필요로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서는 나는 죽음을 보여주어야 되고,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생명을 보여주어야 되고 그렇다.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예수에 대한 저주가 끝나게 되었다. 죽어버리니까.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부활시켜서 영원히 산 사람으로 만들게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는 죽음을, 하나님에 대해서는 생명을 내놓아야 된다는 뜻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고 난 다음에 문을 걸어 잠그고 음식을 먹고 나왔는데, 그 음식은 곧 그리스도이다. 왜냐하면 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은 전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어야 했으니까. “양은 뼈를 꺾지 않았다.” 그 말은 골격을 유지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골격은 창조에 속한 것이니까 창조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 그 말이다. 그런데 왜 살은 먹는가? 그것은 살은 타락했기 때문에 바꾸어야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고 살이 쪘다 그것이다. 잘못된 음식을 먹고 찐 살이니까 그것은 빼야 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골격은 유지해야 된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일찍 운명했기 때문에 병사들이 와서 뼈를 꺾지 않았다 하는 말로 인용을 했다. “그 뼈가 하나도 꺾임을 당하지 않았다.” 양의 살로 대신 바꾸자 하는 것이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무교병은 부풀리지 않는 떡이다.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소제는 모두 부풀리지 않는 떡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함께 내가 무엇인가를 누리려면 하나님의 식성에 맞는 것이라야 같이 누릴 수가 있다. 내가 어떤 사람과 음식을 나누려고 그러는데 돼지고기 안 먹는 사람한테 돼지고기 잔뜩 사놓고 먹으라고 그러면 못 먹을 것 아니겠는가. 그 사람도 먹고 나도 먹을 수 있는 것, 그걸 사놓아야 된다. 육고기는 도무지 저 사람은 안 먹는다. 그런데 해물은 먹는다. 나도 해물은 먹는다. 그러면 그 사람을 대접할 때는 해물탕을 놓고 서로 교제를 해야 교제가 되지, 저 사람은 육고기를 안 먹는데 나만 좋아한다고 육고기만 놔두고 있으면 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하나님과 함께 나누는 음식, 즉 소제는 부풀리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부풀린 것은 전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부풀려도 하나님은 그걸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트를 넣어서 빵을 부풀리면 빵 크기를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기 때문에 어차피 부풀려도 그램 수는 똑같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알기를 그 밀가루가 얼마냐 그것만 알지, ‘얼마나 부풀려서 크냐?’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이다. 빵을 만들 잘 못 만드는 사람은 같은 밀가루를 가지고도 빵이 조그만 하고, 잘 만드는 사람은 빵을 크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보실 때 작으나 크나 저울로 달면 똑같으니까 본질만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부풀린 것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 말은 부풀린 것을 가지고는 교통이 안 된다는 것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부풀린 것을 가지고 교제가 되지 안 되지 않는가. 적어도 우리 대구교회에 오신 분들은 하나님의 눈 같은 그런 눈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부풀린 것을 잘 알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래 가지고 아무리 부풀려봤자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저울을 갖고 있으니까 몇 g인지 다 알고 있다. ‘부피만 크지 저건 g수는 얼마 안 된다.’ 속으로 다 알고 있다. 그래서 교통이 안 되는 것이다. 교제가 잘 안 되는 것이다. 자기는 잔뜩 부풀리느라고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속으로 ‘아이고, 저거 부풀리고 있구나. 밀가루 얼마 안 되는데 저걸 가지고 부풀리고 있네.’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통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수한 밀가루 그대로 나와야 된다. 그대로 떡이 나와야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교통하는 음식은 소제인데, 그 소제는 반드시 부풀리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것도 그리스도인데, 이것은 부풀리지 않는 것이라야 한다 하는 걸 알 수 있다. 자기 인생이 부풀려진 것은 세상에 나가면 통한다. 부풀려놓을수록 사람들이 다 위대하다고 생각한다. ‘야, 거 굉장하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올수록 그것은 아주 가치가 없어지게 된다. 그리고 점점 다른 사람과 나와의 교통의 길을 막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 민감해져서 그걸 알게 되었다. 자기도 혹시 그런 게 좀 있을지 모르지만 남이 한 것 보면 금방 분별이 되어 가지고 ‘아, 저것은 좀 부풀렸구나. 저 사람은 좀 부풀린 인생이구나.’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교제가 제대로 될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쓴나물이다. 이 쓴나물은 억지로 먹는 것이다. 약 된다고 먹는 것이 쓴 것 아닌가. 약이 맛있어서 먹는가. 써도 억지고 먹는 것이다. 이것은 높아진 것을 낮추는 것이다. 부정한 것을 씻어내는 것이고,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순종에 속한 문제이다. 아이들한테 약 먹이려면 얼마나 어려운가. 코를 잡고 입으로 넘기고, 이러지 않는가. 안 먹으니까 살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순종케 하는 것이다. “입에는 쓰나 몸에는 좋다.” 그래서 약을 먹일 때 억지로 먹이는 걸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쓴나물, 이건 억지로 먹는 거지, 좋아서 먹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러니까 높아진 것이 낮아지려면 고통스럽다. 세상에서 부풀려져서 높아졌는데, 교회 와서 쪼그라져서 낮아지려면 고통스럽다. 세상에서는 안 그랬는데 교회 오니까 별 것도 아닌 사람들인데 나를 알아주지도 않고 이렇다. 이러면 이것이 고통스럽다. 낮아지기가 상당히 고통스럽다. 그런데 사실은 낮아진 것이 아니다. 본 위치로 돌아온 것이다. 제자리로 돌아온 건데 자기가 낮아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 나는 이만큼 낮아졌으면 되는데 또 낮아지라고 한다.’ 이런 생각이 든다. 사실은 낮아진 것이 아니다. 본 위치로 돌아오는 것이다. 이번에 민자당 선전 문구가 이것이다. “제자리로 돌리는데 2년 걸렸습니다.” 그 말이 자기들 선전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말로 한다면 그전의 사람들에 대한 심판이기도 한다. 제자리로 돌리는데 2년 걸렸으니까, 그러면 그 사람들은 내내 부풀려놓았다 이것이다. “곁길로 가게 했던 것을 지금 우리는 돌려놨다.” 이런 말이 되니까 “민자당이 곁길로 갔다가 또 민자당이 다시 제대로 돌아왔다.” 이런 말이 되는 것이다. “제자리로 돌리는데 2년 걸렸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는 어떻게 할는지 모른다. “전진하는데 3년이 필요합니다.” 아마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높아진 것이 낮아지려면 고통스럽다. 낮은 데 있다가 올라가기는 좋은데, 높아졌다가 낮아지려면 참 어렵다. 과장되었다가 계장으로 내려가려면 너무 어렵고, 계장 했다가 밑에 초급사원으로 내려가려면 너무너무 어렵다. 높아진 것이 낮아지는 것, 이것이 쓴나물이다. 부정한 것을 씻는 것이다. 씻어내려면 아깝다. 뭔가 있는 것을 뽑아내려고 하면 아깝지 않는가. 내게 있는 것을 없애는 거니까 아깝지 않는가. 그런데 사실은 ‘고름이 살 되느냐?’고 하듯이 아까운 게 아니고, 그게 없어져야 내가 건강해진다. 그런데 사람들은 오랫동안 부정한 데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거지들은 누더기 옷을 많이 입고 다닌다. 때도 물론 많이 끼어 있고. 그런데 그것도 베껴내려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걸 씻어내지 않으면 정상적이 안 되니까 할 수 없이 씻는 건데, 오래 타성이 젖다 보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자기 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생각한다던가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 발바닥에 두껍게 붙었는데, 떼어내다 보면 ‘아, 아깝다.’ 이런 생각이 안 들겠는가. 물론 살찐 사람들은 괜찮겠지만, 빼빼한 사람들은 ‘아, 아깝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도 목욕탕에 가서 저울을 달아서 500g만 내려가도 ‘아이구, 또 내려갔네.’ 이런 생각이 든다. 살 좀 찐 사람들은 1㎏나 2㎏ 내려가도 ‘시원하다’ 이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마른 사람들은 아까운 생각이 든다. 이것이 바로 쓴나물이다. 써서 억지로 먹는 것이다. 이건 바로 순종이다. 우리가 순종한다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처럼 여겨진다. 그것이 정상적인 거지만 정상적으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내가 억지로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 ‘아, 정말 내가 죽을 지경이다.’ 이렇게 생각하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 이런 성분이신,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 애굽에서 나왔다. 애굽에서 나올 때 우리는 모두 애굽을 버리고 나온 것이니까, 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이 아닌 모든 것은 애굽에게 속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만일 ‘씻어져야 되고 쪼그라져야 되고’ 하는 그런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애굽에서 배운 것들이고 애굽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래서 내가 다 짜부라진 다음에는 더 이상 짜부라지려고 해도 짜부라질 수가 없다. 진흙은 다 이겨서 주물주물 해보면 납작하게 해놓으나 길쭉하게 해놓으나 부피의 변화가 없다. 안에 있는 공기가 다 빠져나가고 더 이상 없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정상적으로 된 사람은 남이 아무리 까뭉개고 까 내리려고 해도 전혀 요동하지 아니한다. 왜냐하면 변화가 안 생기니까. 변화가 없다. 옛날에는 누르면 변화가 생겼지만 지금은 누르면 변화가 안 생기니까 아주 편안해지는 것이다. 전에는 ‘아이구, 좀 쪼그라지면 어쩔까.’ 이런 염려가 항상 있기 때문에 불안했는데, 더 이상 쪼그라질 게 없으니까 평안이 올 것 아니겠는가. “육이 생각은 사망이고,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다.” 할 때 어떻게 사람이 평안을 얻는가?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 와서 ‘하나님, 나에게 평안을 주시옵소서. 나에게 평안을 주시옵소서’ 그렇게 막 기도한다. 그런데 평안을 달란다고 하나님이 억지로 주겠는가. 쪼그라질 만큼 쪼그라져야 평안이 오는 거지, 하나님이라 해서 어떻게 억지로 평안을 주겠는가. 기도하다가 어째 기분이 좀 약간 이상하면 ‘아, 평안을 주었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하나님이 뭐 좀 은혜를 주신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조금 지나면 도로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짜부라질 만큼 짜부라져야 된다. 그래야만 더 이상 안 짜부라지니까 단단해지게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릇 만드는 공장에 가니까 여러 가지 공정을 거쳐서 흙 속에서 공기를 빼내었다. 흙을 갖다 물에 개서 막걸리처럼 만들어서 그걸 어떤 통에다 넣어서 그걸 다시 천 같은 주머니에 붓는다. 그러면 물만 빠지고 흙만 남게 되는데, 그걸 가지고 다시 어떤 기계에 넣어서 압력으로 짜서 공기를 빼낸다. 그래서 속에서 공기가 쫙 빠져나가도록 해서 흙덩어리를 만들어낸다. 그걸 가지고 그릇을 만들어낸다. 만일 그것을 그렇게 안 해놓으면 그릇 속에 공기가 들어가서 그릇이 단단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걸 짜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물을 짜내고 다음에는 공기를 짜내고, 이렇게 해서 흙을 단단하게 만들어낸다. 그렇게 되면 불에다 구워도 변형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몇 천도의 불 속에다 들어가도 모양이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짜부라질 만큼 짜부라져 버리면 몇 천도의 불에 들어가도 변형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이것이 안전한 길이다. 하나님보고 “평안을 주시옵소서. 내 마음 좀 편케 해주시옵소서.” 이걸 기도해봤자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해주실 수 없다&amp;nbsp; 그 말이다. 하나님이라도 어찌할 수 없다. 하나님은 부풀린 걸 인정해주더라도 사탄이 와서 계속 쪼그라트리는데 어떻게 평안이 되겠는가. 그러니까 쪼그라질 만큼 쪼그라지는 것이 우리에게 편안한 길이다. 자기 자리만큼 낮아지면 자기는 평안해진다는 것이다. 자기 자리만큼 와버리면 그처럼 편안한 것이 없으니까. 그 때는 네 활개 펴고 잘 수 있는 것이다. 큰 大자로 누워서 잘 수 있다. 편안하게 잠을 잘 수 있다. 그렇지 않을 때 사람은 불안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인간의 본성 속에 깊은 불안이 있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조사하면 사람마다 속에 깊은 불안이 있다 한다. 그 깊은 불안이 어떻게 표현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행동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깊은 불안이 잘못되어 버리면 그것이 정신병이 되기도 하고 이렇게 되게 된다. 정신병을 앓고 있는 모든 사람의 밑에는 불안이 있다. 다른 이유가 아니고 불안이다. 그 사람한테 불안만 없어진다면 정신병은 다 고쳐진다. 그러니까 인간은 결국 근본적으로 부풀려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뭐 어떤 사람도 다 부풀려 있다. 어느 정도 다 부풀려 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다 부풀려 있는 거니까, 어린양과 무교병과 쓴나물을 먹고 쪼부라져서 제자리로 돌아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정신병에 걸릴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신병에 걸리면 그건 참 어렵다. 병중의 가장 깊은 거니까 가장 고치기가 어렵다. 눈에 보이는 것도 잘 못 고치는 판에 안 보이는 걸 쫓아다니며 고치려니까 얼마나 어렵겠는가. 뻔히 보고 수술할 수 있는 것도 지금 못 고쳐서, 실험관에 놓고 검사해보고, 현미경을 보고 조직검사를 하고, 이런 병도 지금 못 고치고 있는 판에 보이지도 않는 병을 어떻게 고치겠는가. 그러니까 의사들이 고칠 수 있겠는가. 못 고치는 것이다. 결국 인간 속에 있는 깊은 불안, 이것은 그리스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굽에서 나오는 길, 그것은 그리스도만이 애굽에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큰 권능으로 나오게 되는데, 애굽의 장자를 칠 때, 그 때 이스라엘은 출애굽을 하게 되었다. 장자라는 의미는 강하다는 뜻이다. 힘이 있다, 능력이다, 권능이다, 자랑이다, 그런 의미이다. 그래서 ‘애굽의 장자’라는 말은 ‘육신의 자랑, 육신의 소망, 세상의 자랑, 세상의 영광, 세상의 소망’ 이런 것들이다. 이런 것들이 장자에 해당된다. 그래서 우리 안에 있는 장자도 있고, 세상에 있는 장자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장자, 이것은 장자들의 총회를 구성한다. 그러나 세상의 장자, 그것은 애굽을 구성한다. 그러니까 지금 세상은 모두 장자들이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국회의원들은 누군가? 우리 나라의 장자들이다. 장관, 국회의원, 이런 급들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장자급에 속한다. 왜냐하면 장자 그룹이 그 나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같은 사람은 별 볼일 없는 것이다. 거기서 결정하는 대로 따라하는 거지 별 볼일 없다. 그 사람이 법률을 정해서 ‘이렇게 하라’ 그러면 하고, ‘저렇게 하라’하면 하는 거지 별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장자들을 멸할 때, 애굽의 장자들을 장사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나왔다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권능이 사라질 때, 하나님의 권능으로 파괴될 때, 그 때 이스라엘이 나왔다. 그건 다른 의미로서 우리 안에서 세상의 장자가 파괴될 때, 그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 안으로 간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의 자랑이 있을 때까지는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교회 안에서도 보면 자기의 장자가 있는 한은, 자기가 장자인 한은, 세상의 장자인 한은 하나님 나라가 잘 안 보인다. 장자가 죽어야 비로소 하나님 나라가 보이게 된다. 내 자랑, 내 소망, 내 영광, 이런 것들이 없어져야 내가 하나님 나라가 밝히, 명백하게 보이는 걸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그들이 神들을 벌했다고 한다. 그들의 신들은 그들의 권능이다. 사람들이 신을 믿는 것은 어떤 권능을 필요로 해서 신을 믿는다. 내 인간에다가 신적인 권능을 더하기 위해서, 그래서 종교를 갖는다. 그래서 인간 플러스 신, 이렇게 하려고 종교를 갖는 것이다. 그러니까 애굽의 신들을 벌했다는 말은 애굽의 권능들을 벌했다 그런 말이 되고, 그들의 머리고 그들의 수호자고 그들의 믿음이고 그들의 종교고, 이것을 벌한 것이다. 그래서 애굽의 장자와 애굽의 신들이 모두 패망을 당한 그런 날이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애굽을 탈출하는 날이었다. 세상의 장자들과 세상의 신들이 벌해질 때, 그 때 이스라엘은 나왔다. 그러면 그것이 세상이라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또 세상이 있으니까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의 장자와 우리 안에 있는 신들이 징벌을 받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애굽을 탈출해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출애굽의 역사적 사건이 단순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적 사건이 아니라 인생의 역사적 사건이라는 걸 볼 수 있다. 왜 우리는 성경을 보는가, 그리고 왜 이런 역사를 우리는 보는가 하면 그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에 보는 거지, 저 중동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들하고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우리는 중국의 역사를 몰라도 상관이 없다. 인도의 역사를 몰라도 상관이 없다. 심지어 우리 나라 역사를 몰라도 상관이 없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역사를 모르는 것은 내 인생의 역사를 모르는 것이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스라엘은 참 특이한 민족이다. 하나님이 인류 가운데서 대표적으로 뽑은 민족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렇게 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전부 대표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우리에게서 일어날 모든 일이, 예상되어질 수 있는 모든 일들이 이스라엘 속에서는 다 일어났다.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일어났다. 예를 들어 의학이 발달하려면, 모든 병을 다 앓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불행하겠지만 의학적으로는 그 사람은 참 귀중한 자료가 된다. 모든 병이 다 있다. 종합병원이다. 이러면 아마 의과대학에서는 돈을 많이 주고 그 사람을 사 가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 사람에게 오만 병이 다 있으니까. 예를 들어 천연두니 이런 것들은 지금 소멸되고 없지 않는가. 그러면 그런 균을 구하려면 대단히 어렵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그 균을 일부러 보존을 해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지구상에서 없어지게 되면 영 연구를 못하니까. 결핵 같은 것도 선진국에서는 거의 없기 때문에 그걸 연구하려면 후진국으로 가야 된다. 모든 병, 인간에게 예상되는 모든 병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그 모든 병이 일어날 수 있는 그런 어떤 모델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 자신들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불행한 사람들이었지만 인류를 위해서는 이 사람들이 아주 큰 공헌을 한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반대로 좋은 면에 있어서도 이 사람들은 모든 인류를 대표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거기서 그리스도가 나오게 되었다. 그러니까 가장 어두운 것도 이스라엘 속에 있고, 가장 밝은 것도 이스라엘 속에 있고 그렇다. 그래서 인생의 가장 행복한 점도 이스라엘 속에 있고, 인생의 가장 비극도 이스라엘 속에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성경을 읽게 된다면 우리는 인류를 다 읽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이고 인생을 다 읽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것은 고대사 이야기가 아닌가. 아주 옛날 얘기인데, 옛날 이야기들은 대부분, 다른 나라 옛날 역사들은 지금은 별로 필요가 없다. 그냥 고고학적인 그런 이유나 있고 역사적인 이유나 있지 별로 필요가 없는데, 이것은 아무리 옛날 이야기라도 항상 현재적인 이야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너무너무 놀라운 것 아니겠는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불후의 명작은 왜 불후의 명작이 되는가 하면, 한 시대물만 갖고는 명작이 될 수가 없다. 그 시대만 반짝하는 것, 이건 명작이 될 수가 없다. 계속해서 인간의 심정을 울릴 수 있는 것, 인간의 심정에 공감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명작이 되는 것 아닌가. 왜냐하면 인간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어야 그런 작품이 나오지,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피상적인 문제를 다루면 어느 시기에는 있지만 어느 시기에는 없어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사상물이랄지 이런 것들은 반짝하다가 없어져 버린다. 명작을 보면 그런 문제들이 아니다. 전부 다 인간의 궁극적인 내면의 문제를 추구했기 때문에 몇 백년 후에까지도 계속 사람들한테 읽혀지고 있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런데 불후의 명작 중의 명작이 성경이다. 왜냐하면 영원토록 인간에게 있을 문제가 다 있으니까. 그러니까 옛날 얘기가 아니다 이것이다. 셰익스피어나 이런 작품들이 그 시대를 배경으로 써진 거지만, 사람 속에 있는 내면적인 문제들을 꺼집어내놓았기 때문에 지금도 읽으면 역시 공감이 가고, 앞으로도 읽으면 또 역시 공감이 가고, 그렇게 만들어 놓았다. 마찬가지로 성경은 언제 어떤 사람이 읽어도 모두 자기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이것은 아주 궁극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고, 영원히 없어질 수 없는 그런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결국 장자가 장사될 때, 그 때 이스라엘은 나왔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례를 주기를 “초태생은 반드시 속하라. 왜냐하면 초태생은 내 것이니까 반드시 속해야 된다.” 이런 율례를 정하게 이르게 되었다. 우리의 초태생은 반드시 속해야 된다. 우리의 초태생을 속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거역하게 된다. 그러니까 그 거역하는 본성을 초태생, 장자로 비유해놓았다. 출애굽의 노정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유월절 문제였다. 이 유월절을 통해서 우리가 출애굽을 하게 됐으니까.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그 다음 노정에서 마흔 두 곳을 진을 치면서 진행을 했다. 이 마흔 두 곳에 대해서는 지난 번 출애굽기를 할 때 민수기까지 연결해서 말씀을 드렸는데, 다음 시간에는 우리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그것을 요약해서 보기로 하겠다. 그래야 출애굽기가 머리 속에 남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마흔 두 곳, 이건 참 이상하다. 예수님의 족보가 42대이다. 그리스도가 나오기까지,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그리스도가 나오기까지 42대,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까지 42곳에 진을 치고 통과했다는 것이니까 이것이 우연한 일이라고 볼 수가 없고, 40이라는 그 숫자가 인간에게 주는 의미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됐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머문 지가 430년,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는 것이 40일, 예수님께서 금식하시고 주리신 것이 40일, 우리는 이 40이라는 수를 지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그런 인생의 여정을 보게 된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것이 발견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위해서 이스라엘을 예비하시고,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보여주시고, 우리의 모습을 샅샅이 알도록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들이 걸어온 모든 길은 우리가 그렇게 걸어갈 수 있는 모든 길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것이 살아있는 거울이 되어서 우리가 주님이 원하는 것이 무엇이며, 원치 아니한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해주시고, 이것이 우리에게 거울이 되어서 앞으로 가는 길이 주님 앞에 더 필요한 길로 갈 수 있도록, 그리고 더 주님이 원하는 길로 단축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지혜를 허락해 주시기를 원합니다. 이스라엘이 우리를 대표하는 대표자였기 때문에 고통도 그들이 대표적으로 받았고, 영광도 그들이 대표적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들 안에서 은혜를 입었으니까, 이제 우리가 이 은혜를 만방에 또 전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해서 행하신 모든 일들을 온 세상 앞에 우리가 전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이스라엘은 이 유월절을 대대로 기념한다. 그래서 그 날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기념을 한다. 그런데 이 절기를 어떻게 지키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서 이 유월절이 완성이 됐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를 보고 예수를 먹고 예수를 누리는 생활이 곧 유월절의 생활이다. 유월절의 모든 행사와 유월절의 순서와 유월절의 모든 구성 성분이 전부 예수라는 한 사람 안으로 집결되었다. 그래서 인격으로 그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니까 구약의 유월절이 신약의 유월절로 바꿔질 때 인격화되었다. 구약의 모든 것은 예수 안에 와서 인격화되었다. 성전도 인격화, 율법도 인격화, 절기도 인격화, 모든 것이 인격화되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한 인격을 영접하느냐 안 하느냐, 믿느냐 안 믿느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 구약 전체를 영접하느냐 안 하느냐, 순종하느냐 안 하느냐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분 한 분이 인격화되었기 때문에 인격화된 그분 한 분 속에 구약 전체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에 그분을 영접하는 것은 전부를 영접하는 것이고, 그분을 거부하는 것은 전부를 거부하는 것이 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유월절이신 그리스도, 우리 안에서 그 유월절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수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완성하셨다. 그래서 구약에 나와 있는 모든 것을 한 몸으로, 한 인격으로 완성하신 분이다. 그분 한 분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천하 인간의 다른 이름으로 구원 얻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 말이 모든 것을 함축하고 있는 그런 말이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그러면. 그냥 ‘어린양 안에, 무교병 안에, 쓴 나물 안에, 유월절 안에’ 이런 말이 된다. 그 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해답이 되고,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는 걸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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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1. 민32장. 요단강 동편에 머물고자 하여</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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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26:14Z</updated>
	    <published>2009-11-10T14:26:1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3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3pt; COLOR: #000000; LINE-HEIGHT: 2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32장. 요단강 동편에 머물고자 하여&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1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은 심히 많은 가축 떼가 있었더라 그들이 야셀 땅과 길르앗 땅을 본즉 그 곳은 가축에 적당한 곳인지라 32:2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와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 족장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32:3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 32:4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회중 앞에서 쳐서 멸하신 땅은 가축에 적당한 곳이요 당신의 종들에게는 가축이 있나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5 또 가로되 우리가 만일 당신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이 땅을 당신의 종들에게 산업으로 주시고 우리로 요단을 건너지 않게 하소서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6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에게 이르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32:7 너희가 어찌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려느냐 32:8 너희 열조도 내가 가데스바네아에서 그 땅을 보라고 보내었을 때에 그리하였었나니 32:9 그들이 에스골 골짜기에 올라가서 그 땅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으로 낙심케 하여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갈 수 없게 하였었느니라 32:10 그때에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맹세하여 가라사대 32:11 애굽에서 나온 자들의 이십세 이상으로는 한 사람도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한 땅을 정녕히 보지 못하리니 이는 그들이 나를 온전히 순종치 아니하였음이니라 32:12 다만 그나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볼 것은 여호와를 온전히 순종하였음이니라 하시고 32:13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진노하사 그들로 사십 년 동안 광야에 유리하게 하심으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한 그 세대가 필경은 다 소멸하였느니라 32:14 보라 너희는 너희의 열조를 계대하여 일어난 죄인의 종류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32:15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또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16 그들이 모세에게 가까이 나아와 가로되 우리가 이곳에 우리 가축을 위하여 우리를 짓고 우리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32:17 이 땅 거민의 연고로 우리 유아들로 그 견고한 성읍에 거하게 한 후에 우리는 무장하고 이스라엘 자손을 그 곳으로 인도하기까지 그들의 앞에 행하고 32:18 이스라엘 자손이 각기 기업을 얻기까지 우리 집으로 돌아오지 아니하겠사오며 32:19 우리는 요단 이편 곧 동편에서 산업을 얻었사오니 그들과 함께 요단 저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아니하겠나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20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만일 이 일을 행하여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서 싸우되 32:21 너희가 다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께서 그 원수를 자기 앞에서 쫓아내시고 32:22 그 땅으로 여호와 앞에 복종케 하시기까지 싸우면 여호와의 앞에서나 이스라엘의 앞에서나 무죄히 돌아오겠고 이 땅은 여호와 앞에서 너희의 산업이 되리라마는 32:23 너희가 만일 그같이 아니하면 여호와께 범죄함이니 너희 죄가 정녕 너희를 찾아낼 줄 알라 32:24 너희는 유아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으라 그리하고 너희 입에서 낸 대로 행하라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25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모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주의 명대로 종들이 행할 것이라 32:26 우리의 어린 자와 아내와 양떼와 모든 가축은 이곳 길르앗 성읍 들에 두고 32:27 우리 주의 말씀대로 종들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다 건너가서 싸우리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28 이에 모세가 그들에게 대하여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명하니라 32:29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만일 각기 무장하고 너희와 함께 요단을 건너가서 여호와 앞에서 싸워서 그&amp;nbsp; 땅이 너희 앞에 항복하기에 이르거든 길르앗 땅을 그들에게 산업으로 줄 것이니라 32:30 그러나 그들이 만일 너희와 함께 무장하고 건너지 아니하거든 가나안 땅에서 너희 중에 산업을 줄 것이니라 32:31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들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행할 것이라 32:32 우리가 무장하고 여호와 앞에서 가나안 땅에 건너가서 요단 이편으로 우리의 산업이 되게 하리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33 모세가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과 요셉의 아들 므낫세 반 지파에게 아모리인의 왕 시혼의 국토와 바산 왕 옥의 국토를 주되 곧 그 나라와 그 경내 성읍들과 그 성읍들의 사면 땅을 그들에게 주매 32:34 갓 자손은 디본과 아다롯과 아로엘과 32:35 아다롯소반과 야셀과 욕브하와 32:36 벧니므라와 벧하란들의 견고한 성읍을 건축하였고 또 양을 위하여 우리를 지었으며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37 르우벤 자손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기랴다임과 32:38 느보와 바알므온들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고쳤고 또 십마를 건축하고 건축한 성읍들에 새 이름을 주었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39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자손은 가서 길르앗을 쳐서 취하고 거기 있는 아모리인을 쫓아내매 32:40 모세가 길르앗을 므낫세의 아들 마길에게 주매 그가 거기 거하였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41 므낫세의 아들 야일은 가서 그 촌락들을 취하고 하봇야일이라 칭하였으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2:42 노바는 가서 그낫과 그 향촌을 취하고 자기 이름을 따라서 노바라 칭하였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32장은 좋은 땅, 약속의 땅, 가나안 땅을 배분함에 대해서 미리 안배하는 장면이다. 민수기의 목표는 결국 이 좋은 땅에 들어가서 그 땅을 점령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그 땅을 누리고 사는 것이다. 영적으로 하면, 이것은 풍성한 그리스도의 누림을 나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땅, 그 땅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땅이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객지에서 ‘나그네 된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자기 땅을 찾는다. 그것이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이걸 구약과 신약으로 생각을 해보면, 구약은 우리가 나그네 된 생활이라 할 수 있고, 신약은 자기 땅을 갖는 생활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은 하나님이 율법을 통해서 내 밖에서 명령을 하는 생활이고, 신약은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이 되어서 우리 안에서 사는 세계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걸 애굽 땅과 광야 땅과 가나안 땅과 비교한다면 애굽은 아주 세상이라 할 수 있고, 광야는 율법적인 세대, 구약시대라고 할 수가 있고, 가나안은 신약시대라고 할 수가 있다. 땅을 자기가 차지하면 거기서 집도 짓고 농사도 짓고 목축도 하고, 이래서 그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자기가 먹고사는 것이다. 즐기고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구약을 지나서 신약에 온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사신 그리스도를 때로는 곡식으로, 때로는 목축으로, 때로는 집으로, 우리의 거처로, 환경으로, 여러 가지 방면으로 우리가 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문제는 풍성한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러니까 32장은 대단히 중요한 장이라고 할 수가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좋은 땅은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동쪽과 서쪽으로 이렇게 갈라져 있다. 요단강이 북에서 남으로 흐르고 있기 때문에 양편으로 갈라져 있다. 그런데 서편이 동편보다 더 좋다고 되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동편은 항상 적과 연접한 곳이다. 육신적으로는 좋은 땅인데 영적으로는 더 나쁘다는 뜻이다. 지도를 보면 요단강 동편이 더 비옥한 곳이다. 그리고 창세기 12장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시날 평지에서 성을 쌓던 곳, 바벨을 쌓던 곳, 그 곳은 요단 동편에 있다. 지금으로 말하면 이라크 지방이다. 그쪽은 비옥한 지방이다. 그러니까 롯이 갔던 곳도 바로 그런 곳에 해당된다. 세상적으로 육신적으로 말하면 동편이 좋은 땅이고, 영적으로 말하면 서편이 좋은 땅이고, 그렇게 되어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여기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자기들은 거기서 머물겠다는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지 않고 요단강 동편에서 머물겠다 이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가축이 많고 목축을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걸 다 끌고 강을 건너갈 수 없으니 이쪽의 땅에서 살겠다. 또 가축에게 이것이 적합한 곳이다. 그런 걸 보면 草地가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땅을 요구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32장 전체를 기록하고 있다. 왜 그러냐 하면 이것이 아주 미묘한 그런 문제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그 약속을 취하려고 하는 갈망,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 그것을 내가 얻으려고 하는 갈망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정상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얻으려는 갈망 속에 또 다른 것이 개입할 수가 있다. 그래서 요구 자체는 잘된 것도 잘못된 것도 아니지만, 그 요구 속에 들어있는 미묘한 문제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이걸 알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보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주겠다. 네 후손으로 하여금 복의 근원이 되게 하겠다. 하늘의 별 수와 같이 바다의 모래 수와 같이 많게 하겠다.” 분명히 그렇게 약속을 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자기는 처음에 시간을 기다렸는데 아들이 없자 자기 집에서 길리운 자 엘리에셀을 자기 아들로 삼을까 이렇게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것이 거절되자 그는 이스마엘을 낳게 되었다. 그러니까 얼른 생각해보면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을 이루기 위해서 그는 열심이었다. 아주 열성적으로 애굽 여자를 자기가 아내로 삼아서 아들을 낳기까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해서 열심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다. 그게 아주 미묘한 문제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는 것까지는 아주 좋은 것이다. 그러나 그냥 바란다 해서 자기 방법대로 취해도 되는 것이냐? 그렇지를 않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야곱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예언을 가지고 그는 태어난 사람이었다. “아우가 형보다 나을 것이다.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길 것이다.” 자기 어머니한테 그 얘기를 들었을 것 아닌가. 복중에 있을 때 예언을 들었으니까. 그러면 야곱은 하나님의 예언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는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그래 가지고 결국 장자의 명분을 획득한 것 아니겠는가. 그건 겉으로 얼른 생각해보면 절대로 자기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생각할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 이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미묘한 것이 들어있었다 그것이다. 야곱을 벧엘에서 돌을 베개하고 자고&amp;nbsp; 일어난 후에 하나님이 또 그에게 축복을 했다.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이렇게 축복을 했다. 자기는 어디를 가든지 여호와가 자기와 함께 한다는 걸 믿었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기는 자기가 하고 싶은 걸 다해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한다고 믿었다. 자기 삼촌의 집에 가서 그는 14년 동안 아내를 얻기 위해서 종살이를 하게 된다. 그는 분명히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하는 말씀을 그는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믿었지만 그 속에 미묘한 것이 따라 있다는 것이다. 일생동안 이것을 처리하기 위해서 야곱은 연단을 받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냥 세상 사람 같으면 그건 말할 것도 없는 일인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 또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 속에 있는 문제들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 대해서 충성을 하고 열심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 충성과 열심을 하고 있는데, 그 속에 전혀 자기도 모르는 것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유태인들도 그렇다. 자기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열심 있는 백성들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속에 또 다른 것이 숨어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더 열심 있는 종파일수록, 더 열심 있는 교회들일수록 가보면 그 속에 또 다른 것이 숨어있다. 그래서 ‘지옥에 안 가고 자기만 천당에 간다.’ 이렇게 믿고 있는 사람들은 대단히 열심이 많다. ‘다른 사람은 다 죽어도 자기는 안 죽을 것이다.’ 이렇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만 그런 게 아니고 다른 종교도 마찬가지이다. 그런 말세사상을 가지고 있는 종교일수록 더욱 열심이 있다. 왜냐하면 환난 날에 자기들만 구원을 받는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아주 신바람 나게 살고 있다. 겉으로 봐서 그 사람들의 열심과 충성과 이런 것만 보면 다른 사람이 못 따라간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인가, 이것이 중요한 일이다. 열심 자체가 나쁜 게 아니고, 무엇 때문에 그 열심을 갖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한 문제이다. 결국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자기가 갈망하는 조건으로 자기들의 가장 좋은 것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들의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의 갈망을 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과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 같은가? 그렇지 않는 수가 더 많다. 특별히 아담의 경우에는 거의 100%가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아담이 싫어하고, 또 아담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고, 그렇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정반대의 길로 갔으니까, 영 딴판으로 갔으니까 그렇다. 불순종의 길로 간 사람에게는 100%가 다 하나님이 원하는 건 자기가 싫다.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은 자기는 좋고, 그래서 ‘아, 어째서 나한테는 하지 말라는 게 많은가? 왜 하나님은 나한테 이렇게 제재가 많은가?’ 이렇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제재가 많아서 그런 게 아니다. 자기 자신이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100%가 다 제재라는 것이다. 순종의 길로 갔으면 1%도 제재를 안 할 텐데 길을 다른 길로 갔으니까 100% 다 제재할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다 가서 망할 때까지 계속 하나님은 제재를 걸고 있는 것이다. 경부선을 탈 사람이 호남선을 탔다. 그러면 호남선이 다 끝날 때까지 계속 끝없이 제재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것이 해결되지 않는 것이다. 왜 그런가? 갈라지기를 잘못 갈라졌으니까, 길을 잘못 갔으니까 그렇다. 그래서 그 사람이 불순종의 길을 택했느냐, 아니면 순종의 길을 택했느냐 하는 문제는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된다. 순종의 길을 택한 사람은 하나님이 제재할 필요가 ㅂ. 그 길 자체가 순종의 길이니까 제재할 필요가 없다. 그런데 불순종의 길을 간 사람은 더 많이 애를 써도 계속 제재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가장 좋아하시는 것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 다르게 된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들은 아주 지극히 합당한 말을 했지만, 그러나 그 속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빼놓고 자기들이 필요로 하는 것, 자기들이 원하는 것만을 내놓았다. 자기 필요를 먼저 속에다가 챙겨놨다 그 말이다. 하나님의 필요라는 명목을 놓고 자기 필요를 그 속에다 꼬불쳤으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 이걸 알고 있을 거 아닌가. 그러니까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 결과 이방인들에 의해서 맨 첫 번째로 이 사람들이 침략을 당하고 점령당한 사람들이 되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많은 고난을 당한 그런 지파가 되게 되었다. 얼른 생각하면 쉬운데, 요단강도 안 건너가고 들어가 싸울 필요도 없고 이미 전쟁을 해서 이겨놓은 곳이니까 거기다가 막을 짓고 살면 가장 편하고 좋겠는데, 그것을 택했던 사람들은 가장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협착해서&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찾는 이가 적고,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문이 넓어서 찾는 이가 많다.” 그러니까 얼른 보기에는 넓은 길이 아주 쉽고 좋은 길인데 가면 갈수록 험로고, 한 길은 이건 죽을 것 같은데 들어가기만 하면 아주 대로가 되는 그런 길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피해 가는 길은 얼른 생각하면 쉬운 길이다. 그런데 갈수록 문제가 안 풀리고 계속 문제가 또 쌓이고 또 쌓이고 또 쌓여 가지고 불순종은 또 불순종을 낳고, 불순종을 또 불순종을 낳고, 계속 악순환을 해나가는 그런 길이다. 한번 십자가를 받는 길은 그것이 처음에는 ‘아, 나는 죽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그 길은 넓어져서 자유케 하는 그런 길로 가게 된다. 이것이 세상에 감추어진 비밀이다. 그래서 아들밖에는 그 길을 들어갈 수 없도록 됐다. 아들이 아니면 아버지를 믿을 수 없으니까 그렇다. 종은 그 주인을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종으로서는 못 들어가고 오직 아들로밖에는 들어갈 수 없다 그것이다. 그래서 믿음을 요구하게 됐다. 계시록에서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는 말이 나오게 된다. 창세기 3장에서 ‘에덴 동산을 화염검으로 가려놓았다. 그래서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했다.’ 그 화염검은 두려운 것이다. 호랑이 같은 놈도 불만 보면 무서워하니까, 그 불길을 보고 들어갈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신약에 오면 십자가라고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에덴 동산 밖에다가는 전부 십자가를 쳐놓은 셈이다. 그러니까 도저히 거기를 못 들어간다는 것이다. 아들밖에는 갈 수가 없다 이것이다. “믿음이 있는 자밖에는 갈 수가 없다.” 이런 말이 나오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 최악의 선택이 될 수 있다. 내가 아주 손해보지 않기 위해서 최선의 선택을 한 것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온다 이것이다. 그런 사람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참 영리하고 절대로 손해보지 않고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뒤로 가보면 뭐가 손해보느냐 하면 영적으로는 전혀 진보가 없고 손해를 보고 하나님 나라를 누리지 못하는 그런 사람을 볼 수가 있다. 이것이 바로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의 사정이었다.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장황하게 얘기를 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 주님을 따라가는 생활에서 이런 문제가 아주 미묘하게 중요한 문제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를 때도 똑같았다. 그들은 다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면서 “누가 크냐?” 그렇게 논쟁하는 사람들이었다. 어떤 어머니는 “내 아들을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어머니도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어머니는 다 똑같으니까 그래서 그렇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왜 저렇게 많은 돈은 낭비하느냐?” 이것도 말은 아주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 뭔가 하나가 빠졌다는 것이다. 이치로 생각하면 맞는 말이다. “저걸 300데나리온에 팔아 가지고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더 하나님의 뜻일 텐데, 왜 저것을 발에다 부어 가지고 낭비를 하느냐?” 말은 너무너무 맞는 말인데, 그 속에 뭔가가 없다는 것이다. 제자들은 결국 이런 상태에서 3년 동안 예수를 따르다가 마침내 그 모든 것이 드러나는 날이 오게 되었다. 십자가 앞에 갔을 때에 그들은 완전히 갈라지게 되었다. 그 동안 그들 속에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이 다 드러나게 되고 말았다. 십자가 앞에 가면 우리는 모든 것이 다 벗겨지게 된다. 그래서 사탄이 아무리 거짓말을 하고 속이는 자라도 십자가 앞에 와서는 자기가 속일 수가 더 이상 없기 때문에 그들은&amp;nbsp; 십자가를 가장 두려워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모든 권모와 술수에 능하지만 십자가 앞에 와서는 권모와 술수가 다 무용해진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 종교적 상황도 그렇다. 종교는 다 하나님께 대해서 다 열심을 하고 있는 것이다. 충성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뭔가 숨겨놓은 것이 또 있다. 숨어져 있는 인간의 어떤 본성을 통해서 숨겨져 있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결국 십자가를 피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는 십자가 앞에 와야 그래야만 진실이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진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십자가를 피하는 것이다. 사람은 왜 십자가를 피해 가는가? 진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고, 그래서 십자가를 피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걸 피해 가는 길은 하나님께 계속적으로 제재를 받는 길이고, 또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항상 책망을 받는 그런 길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역사상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 있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러나 가장 많은 책망을 받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가장 좋은 약속을 가졌지만 가장 나쁜 것을 가져간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그 미묘한 문제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은 절대로 이것을 그냥 둘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이 그냥 그대로 천국에 간다면,&amp;nbsp; 밤이 없는 세계에서 어떻게 그것이 통용이 되겠는가? 세상에서는 밤이 있으니까 감출 데가 있지만, 그 나라에서는 해와 달이 쓸데가 없는데 어떻게 그것이 용납이 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없어지기 전에는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들은 자기들의 안목에 따라서 이것을 결정했다. 마치 롯이 소돔을 볼 때 ‘물이 넉넉하고 여호와의 동산 같았더라.’ 너무나 좋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걸 택해서 갔던 것이다. 르우벤과 갓 자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롯은 좋은 땅을 찾아갔기 때문에 육신적으로는 아주 잘 됐다. 성문에 앉았을 정도로, 다시 말하면 유지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마지막은 결국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고 말았다. 그가 가지고 있었던 모든 것은 유황불에 불타고, 남은 것은 자기 씨만 남게 되었는데 그것은 모압과 암몬이 되고 말았다. “이 모압과 암몬은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한다.” 하고 그렇게 저주를 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들은 자기들의 가축이 많다는 것과 가축 기르기에 적합한 곳이라는 것, 이런 이유로 그들이 이 땅을 택하자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그들은 다른 지파를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 공동의 적을 향해서 투쟁을 할 때인데, 공동의 적이고 뭐고 다 소용 없고 자기 눈앞에 지금 유익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만 생각했다는 것이다. 교회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이익만 생각했다. 그런 것과 똑같다. 그러니까 지금 다른 지파들은 들어가 전쟁을 해서 그 땅을 쟁취해야 되는데, 자기들은 전쟁하지 않고 그냥 여기서 머물겠다 이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의 장래를 우리가 주님께 맡기는 공과를 배우지 않으면 이런 결과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 내 장래가 달려 있고, 내 운명이 달려 있다. 이 사실을 배워야 내가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주저 없이 응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하면 항상 내가 먼저 염려하니까, 내가 앞서서 염려를 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해주겠나?’ 이렇게 생각해버리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만다 이것이다. 다른 사람은 다 그런 길로 갈지라도 나는 손해 안 보겠다, 이런 식으로 생활을 하게 될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의 선택을 고집하게 된다. 그러면 그 결과로 고난을 자기들이 각오해야 된다. 야곱은 자기의 좋을 대로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일생 동안 고난의 길이었다. 출생 때부터 시작을 해서 마지막 바로 앞에 서기 전까지 그는 모든 것을 자기 유익을 목표로 선택을 했다. 그래서 그의 일생은 그것이 다 놓아질 때까지 고난의 생활을 거듭했다. 그러니까 이것을 각오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반대로 이런 사람이 그것은 각오 안 하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또 어떤 사람은 “아, 나는 그거 각오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겠나?’ 이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각오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 대표적인 예가 야곱의 예라고 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겠다.” 이것은 영적으로 하면 옛 사람을 청산하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왜냐하면 요단강을 건너가기 전까지는 광야하고 연결된 곳이다. 그러니까 옛 것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언제라도 광야로 다시 갈 수 있는 것이다. 전에 우리가 홍해 바다를 건너지 않았더라면 애굽하고 연결된 땅이니까, 고통스러울 때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홍해가 있기 때문에 다시는 못 돌아가게 된 것이 아니겠는가. 요단강은 두 번째 강이다. 이 강을 건너지 않으면 다시 율법 세계로 돌아간다. 다시 광야 세계로 되돌아간다는 것이다. 배수진이 없으니까 갈 수가 있다. 그래서 옛 사람을 처리하지 않고 새 것을 누리려고 하는 생각과 같게 된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선포하기를 두려워한다. ‘내가 이걸 선포해놓았다가 못할 때는 내가 되돌아가야 되는데, 되돌아갈 때 내가 너무 창피하지 않겠나?’ 그래서 선포를 못한다. 물론 어떤 사람은 선포해놓고 되돌아가도 전혀 자기는 가책도 없고, 이런 사람도 있다. 물론 둘 다 문제가 되는 것이다. 말로만 선포해놓고 그냥 식은 죽 먹듯이 취소하고 되돌아가는 사람도 문제가 있고, ‘아, 나는 되돌아갈 수 있을지 모르니까 지금은 선포를 못하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또 어떤 문제가 있다. 항상 여지를 남겨놓은 거니까. 둘 다 사실은 같다. 하나는 선포해도 ‘나는 약속을 안 지켜도 되니까.’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돌아갈 여지를 갖고 있는 것이고, 한 사람은 그래도 좀 더 진실하니까 “나는 그래도 거짓말은 안 하겠다.” 이렇게 말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겠다.” 우리는 옛 사람을 청산하기 위해서 요단강을 건너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선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 침례를 받는가? 그것은 옛 사람을 청산하는 것을 선포하기 위한 것이다. “나는 죽어서 물에서 장사되고, 나는 다시 나왔습니다. 나는 다시는 옛 세계로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공중 앞에서 선포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 혼자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침례는 자기 혼자 몰래 받는 것은 소용없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온 형제들이 다 보는 앞에서 해야 된다. 우리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오직 예수만 따르겠다. 나는 오직 예수만 섬기겠다. 나는 세상을 돌아보지 않겠다.” 하고 선포를 했다. 그러면 다음에 가서 내가 딴 짓을 하게 되면 세상 사람들이 먼저 말하기를 “아니, 너 전에 뭐라고 말했냐?” 이렇게 말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앞에, 세상 친구나 이런 사람한테 그 말을 안 하고 어물어물 넘기려고 생각하기가 참 쉽다. 그러면 다음에 내가 책잡힐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 말은 또 ‘돌아갈 수 있는 여지를 좀 남겨놓아야 되겠다. 한 잔 하자 할 때 또 안 할 수도 없고, 그렇게 하려면 지금 선포해놓으면 곤란하다.’ 이런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세상 친구가 세상 것을 하자고 하면 내가 할지도 모르는데 지금 내가 “아니, 나는 세상을 끊었다. 나는 이제 예수만 따르겠다.” 이렇게 해놓으면 ‘그 사람이 나보고 돈벌이 있는 것도 안 하자 할지도 모르겠고, 재미있는 일도 안 하자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세상 낙이 없어지지 않느냐?’ 이런 얄팍한 생각이 들어오면 자기가 선포를 못한다는 것이다. 교회 앞에서는 선포했어도 세상 앞에서는 선포를 안 한 사람도 있다. 교회는 다 이해하니까 선포해서 좀 못 지켜도 괜찮을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 앞에다 해놓으면 그건 안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 그 사람이 나를 관계를 안 할 거니까. 예를 들어서 좋은 자리가 있다. 재미있는 자리가 있다. 그런데 ‘아니, 그 사람은 예수쟁이야.’ 하고 안 데리고 갈 수도 있다. 그러니까 거기다가 말하는 것은 조금 손해가 많다. 그러니까 거기는 여지를 남겨놓자. 교회서만 선포하자. 이럴 수도 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단을 건너지 않겠다는 영적인 생각이다. 사람 속에는 참 간사한 것이 많이 있다. 너무너무 간사한 것이 많이 있다. 성경은 참 이상하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 속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러내놨는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절의 중들은 생각 속에서 사람의 번뇌가 몇 가지인가 이걸 계산했다. 인간의 문제가 무엇 무엇이 있는가 이것을 머리 속에서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머리 속에서 생각한 것이 아니고, 일일이 역사적으로 하나도 빠짐없이 그 모든 것이 다 드러나 있다. 아담의 모든 것이 그대로 실험적으로 체험적으로 다 드러나 있다. 그러니까 내가 생각할 때 이스라엘 백성처럼 특이한 백성이 없는 것 같다. 다른 민족들 같으면 이렇게 아담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점잖은 백성 같으면, 가령 중국 사람 같으면 좀 어물어물해 가지고 모른 체하고 넘어가 버린다던가 이렇게 하지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런 얘기를 하겠는가. 지금 모든 지파들이 전쟁하러 가는데 “우리만 여기 남겠다.” 그 소리를 차마 공자님 영향을 받은 사람 같으면 못할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게 아니다. 아주 확실하게 얘기를 하는 사람이 그 중에서 생긴다. 그러니까 그것은 바로 인류를 대표한 민족이다. 우리 모든 인류를 대표한 민족이다. 그러니까 또 거기서 그리스도가 나왔다. 그러니까 아담 안에서도 그들은 우리의 대표자고, 그리스도 안에서도 그들은 우리의 대표자다. “구원은 유대인에게서 난다.” 한 것과 마찬가지로 멸망도 유대인에게서 났다. 참 특이한 백성이라고 생각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성경의 역사는 생각이 아니다. 전부가 현실이고 역사이다. 그런데 이렇게 자자분한 얘기까지 다 나올 수 있는가. 인간이 있을 수 있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 저지를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러냈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통해서 인간을 본다면 더 이상 볼 것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아직 미처 체험하지도 못하고 아예 내 속에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것까지 다 드러나 있으니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한테 다 있다. 우리한테 없는 게 아니고 다 있는 것이다. 르우벤 자손과 갓 지파의 생각이 우리한테 없는가? 우리한테 다 있다. 그걸 지금 드러내놓았다. 우리도 무엇인가 중화시키고 중용을 찾아 가지고 옛 사람과 새 사람을 적당하게 융화시켜서 갈 수 있는 길은 없는가?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적당히 가질 수 없는가? 이런 문제들이 사람 속에 다 있는 일이다. 이래서 종교라는 것이 생기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카톨릭 같은 종교를 보면 너무나 완벽하다. 왜냐하면 세상들이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가지고 있다. 종교적인 모든 필요를 그들은 다 가지고 있다. 옛날에는 개신교가 구교에 대해서 많은 공격을 했다. “너희는 방언도 못하지 않느냐? 병도 못 고치지 않느냐? 은사가 없지 않느냐? 뜨겁지 않지 않느냐? 우리처럼 부흥회도 못하지 않느냐? 너희는 성경을 모르지 않느냐?” 이런 얘기를 많이 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들은 지금은 개신교보다 더 열심히 하고 있다. 그래서 방언만 전문으로 하는 신부도 있고, 병만 전문으로 고치는 신부도 있고, 부흥만 열심히 하고 다니는 신부도 있고, 거기는 온갖 것이 다 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부도 있고, 부자의 문제를 해결하는 신부도 있고, 온갖 사람이 다 있다. 모든 전문가가 다 모여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간들이 필요로 하는 종교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카톨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종교적으로 좋다 생각하면 다 흡수해버리는 것이다. 다 흡수해서 자기가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한참 동안 개신교에서는 성령 운동한다고 방언을 하고 불 받고 이랬는데, 천주교는 그 때 아무 것도 없이 냉랭했다. 그런데 그러고 있으면 신자를 다 뺏기게 될 것 같으니까, 자기들도 가서 막 해보니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열심히 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 미국에 있는 봉균이 큰형이 바로 그런 계통의 은사를 받아 가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은사 집회’를 하고 ‘은사 간증’을 한다고 한다. 카톨릭에서 더 열심히 하고 있다. 성경 연구도 이 사람들이 하면 더 열심히 할 것이다.&amp;nbsp; 그러니까 모든 걸 다 할 수 있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할 수가 있다. 방대한 조직과 기구를 가지고 모든 걸 다 하고 모든 걸 수용해 들인다. 그걸 거부하지 않는다. “아, 방언하는 건 이단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병 고치는 건 이단이다.’ 이런 건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은 사람에게 필요한 거라면 다 하자 이것이다. 완벽한 종교를 만들고 있는 것이다. 모든 걸 다 자기가 흡수해 가지고 다 자기 속에서 용해를 해 가지고 자기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마 우리 교회를 흡수를 못할 것이다. 우리 교회를 흡수하려면 목구멍에 걸려서 안 넘어가기 때문이다. 세상의 다른 것은 다 할 수 있다. 개신교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천주교가 다 가질 수 있다. 뭘 못 갖겠는가, 어느 것을 못하겠는가? 다 할 수 있다. 옛날에 성당에서는 거룩하기만 하고 조용하기만 하고 미사곡만 나온다 이랬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지금은 자기들도 팝송을 부르고 복음성가를 부르고 그렇게 한다. 막 뛰고 오히려 더 한다. 대광장에 차려놓고 무슨 몇 십 주년 기념회 한다고 번쩍번쩍하고 야단이 났다. 개신교는 사실은 그런 걸 하려면 좀 꿀린다. 뭔가 찝찝하고 이러는데 그 사람들은 전혀 그런 데 구애를 받지 않는다.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 단지 우리 교회만 흡수를 못하게 된다. 그것만은 불가능하게 될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하려면 그것이 무너져야 되니까. 다른 것은 자기가 흡수해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풍부해지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가지 않겠다.” 이렇게 했다. ‘옛 세계를 완전히 떠나지는 않겠다. 이스라엘과 관계는 갖지만 옛 세계를 완전히 우리는 단절하지 않겠다.’ 이렇게 생각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이스라엘 자손의 무리와 함께 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 무리를 어떤 성경에서 몸이라고 번역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몸을 떠나겠다. 몸하고 함께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은 한 몸이다. 오늘 교회가 한 몸이듯이 이스라엘은 한 몸이다. 그러면 거기서 분리한다는 것은 몸에서 분리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우리는 우리의 어떤 이익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하지 않겠다 그런 뜻이 되는 것이다. 내 유익 때문에 나는 따로 그리스도를 누리겠다 이런 말과 같다. 함께 누리지 않고 나는 따로 누리겠다. 나는 좀 독자적으로 그리스도를 누리겠다, 나는 독자적으로 기도하겠다. 나는 독자적으로 성경을 보겠다. 나는 독자적으로 뭘 하겠다. 뭐 따로 하겠다. 이런 생각이 바로 그런 생각이다. 이것은 몸을 나누는 생활이라는 것이다. 몸에서 갈라지면 죽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열매를 맺고, 붙어있지 못하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 하는 원리가 바로 이런 원리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나눌 수 없고, 그리스도의 몸과 함께 있는 것이 바로 사는 것이라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모세는 크게 진노하고 책망을 하게 되었다. 첫 번째는 그의 이기심을 책망했다. “모세가 가로되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32:6)” 다 지금 싸우러 나가는 판에 너희만 앉아 있겠다 하느냐 이 말이다. 만일 모두 이와 같이 한다며 그 땅을 점령하지도 못할 것이고 분배하지도 못할 것이 아닌가. 이미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살겠다고 하는 땅은 이스라엘 자손 전부가 싸워서 이겨놓은 땅이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전쟁을 안 해도 땅이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가면 새로 전쟁을 해야 되는 땅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자손 전체가 싸워서 이겨놓은 땅은 자기들이 갖고, 새로운 땅은 자기들이 전쟁을 안 하겠다고 하니 이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가! 그래서 이것을 아주 책망하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았고자 하느냐” 이것도 오늘 교회하고 관계되면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가령, 어떤 형제들은 모든 걸 버리고 복음을 위해서 살겠다 이러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니, 여기 앉아 있겠다. 교회에 뭐 좀 가지고 오거든 그거나 좀 나눠먹자.” 이렇게 하는 것과 똑같은 것이다. “나는 전도는 안 하고 딴 사람이 전도한 간증만 듣겠다.” 이런 것도 비슷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amp;nbsp; 세상을 버리느라고 참 힘들게 버려서 얻어왔다. 그런데 자기는 버리지 않고 힘들게 버린 것 속에서 자기가 유익을 얻을 수 있는 것만 조금 얻고 가버리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이다. 이런 것들이 모두 이기심에 속한다. “다 싸우러 가는데 왜 너희만 앉아 있겠다고 하느냐?” 이것이 첫 번째 책망이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가데스바네아에서의 비참한 이야기를 가지고 경고를 했다. 그 때 열두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여호수아, 갈렙만 와서 긍정적인 보고를 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부정적인 보고를 했다. 그 결과로 20세 이상의 애굽에서 나온 모든 이스라엘 자손이 광야에서 죽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심히 낙심케 했던 것이다. 그 사람들이 와서 부정적인 보고를 해버리니까 모두 울고불고 하면서 “우리는 어찌하겠느냐? 저 모세를 따라와서 우리는 다 죽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자기들이 생각한 그대로 그들은 다 죽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고사를 인용하면서 르우벤과 갓 자손들을 심하게 책망을 했다. “너희가 또 다른 동족들을 실망시키고 싶으냐?” 안 그렇겠는가. 여기서 지금 두 지파가 “우리는 여기 차지하고 안 가겠다.” 이래버리면 다른 지파들이 얼마나 실망을 하겠느냐 이것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다른 지파를 멸망케 하는 사람들이다.”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두 지파가 이 말을 듣고 다시 돌이켜서 약속을 하게 되었다. “양 우리와 유아들을 위한 성읍을 세우고 우리도 나가서 싸우겠다. 그러니까 여자들과 아이들을 위해서 안전하게 놔두고 그 대신에 우리가 앞서 가서 싸우겠다. 싸워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기업을 얻을 때까지 우리는 요단강 동편으로 돌아오지 않겠다.” 그렇게 그들이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전쟁을 하더라도 요단강 서편에서는 기업을 얻지 않겠다. 우리는 도와서 같이 싸움만 하고 그쪽에 대해서는 이익을 갖지 않겠다.” 이렇게 그들이 회개를 했다. 그래서 모세가 그것을 허락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스라엘 두령들에게 명령하기를 “만일 저들이 말한 그대로 행하면 그들이 죄가 없겠지만,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그들의 죄가 찾아질 것이다.” 그렇게 경고를 하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자기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선택을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문제와 고통이 반드시 따르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맡겨진 것이 아니니까,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책임을 질 수 없다 이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자기 목적과 자기 유익을 위해서 찾아간 사람을 하나님이 무슨 이유로 책임을 져주겠는가. 자기가 책임을 다 져야 한다. 결국 선택과 책임, 의무라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자기가 선악을 아는 길을 선택했으니까, 자기는 마땅히 아는 보상을 인해서 그는 율법의 저주를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책임을 져야 되니까. 만일 생명의 길을 선택을 했더라면 자기는 자기가 책임을 질 일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가 자기 안에 사실 일이니까 책임질 일이 없다. 그래서 구약 안에서 이스라엘 모든 백성들은 자기가 율법의 심판을 계속 받고 있다. 왜 그런가? 자기가 선악과를 선택했으니까. 신약 안에 들어오면 사도 바울은 그렇게 말한다. “이제는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신다.” 그러면 이것은 그냥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내 자원에 의해서, 내 자의에 선택하지 않았다는 걸 의미한다. 내 인생을 하나님께 맡겼다는 걸 말하는 것이다. 맡기지 않았는데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 주겠는가. 내가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 맡겼기 때문에 하나님이 내 대신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사는 거지 내가 사는 게 아니다. 그러면 내 안에서 다른 사람이 살려면 나는 없어야 되지 않는가. 형제와 나 사이에서 형제가 내 대신 산다. 이렇게 한번 가정을 해보면, 그러면 나는 주권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 내가 사는 게 아니고 지금 아무개 형제가 내 대신 살고 있어.” 이렇게 우리가 얘기한다면 나는 주권을 그에게 맡겼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나는 그대로 하겠다 그런 말이 되는 것이다. “내가 표를 아무개에게 맡기겠다.” 그런 말과 같다. 주주총회를 할 때 내가 표를 기권하려면 기권하겠다는 연락을 하게 된다. 그러면 결정된 대로 따르겠다 이런 뜻이다. 나는 주주총회 결정대로 따르겠다, 그렇게 내가 표를 기권할 수 있다.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우리 자신의 표를 기권하게 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투표하게 될 것이며, 대신해서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이다. “이제는 내가 살아도 내가 산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산다.” 이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자기가 스스로 자기의 유익을 위해 선택한 사람은 항상 끝까지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아담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전적으로 책임을 지기로 작정하고 나온 사람이다. 그래서 아담의 후손들은 자기가 자기를 책임질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자기를 책임질 사람으로 여기는 종교, 그런 종교들은 대단히 높임을 받고 있다. 그래서 학생들 속에서 불교가 인기가 있다. 왜 인기가 있느냐 하면 그 문제 때문에 인기가 있다. ‘자기 책임이다’ 이것이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물론 기독교가 잘못 전달된 거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거다. 내 책임이 아니다. 나는 오직 은혜를 받고 사는 것이다.” 이러면 “뭔가 자존심이 상한다. 왜 내 책임인데 내가 은혜를 받고 사나?.”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누가 도와주겠다고 하면 “나도 있는데 왜 도와주려고 그러냐? 나는 그런 것 받기 싫다.” 이렇게 하는 것과 똑같은 그런 입장이 되게끔 됐다. 그걸 정확하게 전달 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이해가 되게끔 되었다. ‘기독교는 무조건 그냥 은혜만 받는 거다. 거지처럼 은혜만 받는 거다.’ 이렇게 잘못 인식해놨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으면 ‘자존심 상한다’ 이렇게 생각하기가 쉽게 되었다. 내가 은혜를 입어야 할 자라는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 무엇을 내가 은혜를 입어야 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선택을 한 사람은 항상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결국 마지막에 그 자손들은 그 땅을 기업으로 얻었지만 항상 적과 맨 먼저 싸워야 되었다. 적과 안 싸우려고 했다가, 적이 항상 어디서 오느냐 하면 서쪽에서 오는 게 아니고 동쪽에서 왔다. 그러니까 항상 제일 먼저 관문이 되었다. 그래서 전쟁을 안 하려고 한 것이 가장 전쟁을 많이 하는 그런 지파가 되게 된 것이다. 우리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하면 십자가가 더 많이 있다. 고난을 피하려고 하면 고난이 더 많고, 전쟁을 피하려고 하면 전쟁이 더 많고 그렇다. 예를 들어서 집안에서도 집안 식구들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우선은 편하다. 부딪힐 필요가 없으니까 편하다. 말 안 하면 그만이고 이러니까 편하다. 그런데 계속 부딪히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불가불 네게 화가 미칠까 한다.” 그런 대로 어차피 전쟁을 치러서 한번 이겨놓아야 되는데, 전쟁이 싫어서 안 해놓았다. 그러니까 사사건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부딪히게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한번 전쟁을 치른 사람은 다시는 전쟁을 치를 필요가 없고, 각자 자기들이 다 알아서 내 마음과 똑같이 할 것이기 때문에 더욱 편한 일이 아니겠느냐 이것이다. 그러니까 알고 보면 인간의 지혜는 지혜로운 것같지만 미련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미련한 것같지만 참 지혜로운 것이다. 바울이 그렇게 말했다. “세상의 미련한 걸 들어서 지혜로운 걸 부끄럽게 했다.”, “약한 것을 들어서 강한 것을 부끄럽게 했다.”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 우리가 맡기고 간다는 것은 멍청한 짓 같은데 뒤로 보면 그것이 지혜로운 짓이고, 자기가 자기 알아서 하겠다는 것을 보면 지혜로운 것 같은데 뒤로 가보면 미련한 짓이 되고 만다. 더 많은 대가를 지불해야 되고 더 많은 것을 손해봐야 되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좋은 땅을 분배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었다. 그리스도를 우리가 분배하는 일과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분배하는 일은 같은 원리에 속한다. 그래서 우리가 먼저 나와서 싸우기를 원하는 사람은, 전투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더 안전한 곳을 누리게 된다. 그러니까 더 많이 달려가 보면 전쟁을 해서 점령을 한 대로 가게끔 된다. 그러면 더 많이 서쪽으로 전진한 지파는 더욱 서쪽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면 더욱 서쪽에 위치할수록 가장 안전한 것이다. 왜냐하면 적이 항상 동쪽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조금 덜 간 사람들은 그만큼 침략을 더 많이 받게 되고, 아주 안 가려고 했던 사람들은 날마다 적과 싸워야 되는 그런 문제가 생기게 됐다. 어쩌면 이렇게 똑같은지 모르겠다. 똑같은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우리도 전쟁을 안 하려고 하는 사람은 날마다 싸우게 되고, 정말로 전쟁을 해서 목숨을 걸고 하나님 편에서 살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주 안전지대로 가버리게 된다. 갈릴리 바닷가로 갈 것이 아닌가. 그래서 베드로도 나오고 요한도 나오고 야고보도 나오고 그렇다. 동쪽에서는 아무도 안 나왔다. 요단강 동편에서는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다 서쪽에서 나왔다. 더군다나 예수님이 사시던 곳은 가장 서쪽이 아닌가. 그의 제자들도 가장 서쪽에서 나온 사람들이 됐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 기이하고, 모든 원리가 다 事必歸正이라고 정도를 따라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미처 생각지도 못하고, 우리가 미처 예측할 수 없었던 모든 일을 우리 조상들이 다 먼저 겪어가고, 먼저 다 표현하고, 먼저 다 벌을 받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오늘 거울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걸 보고도 우리가 다시 또 그런 일을 되풀이하지 않는 사람들이 되지 않게 되기를 원하고, 이것을 거울로 해서 주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더 높은 곳으로 더 앞선 곳으로 갈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해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밟아온 모든 길을 우리의 재산으로 해서 우리가 그 위에서 전진하는 사람들이 되기를 원하고, 결코 뒤를 돌아보아서 침윤에 빠질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 주님이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해서 우리가 더 빨리 가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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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40. 민31장. 미디안을 정복하고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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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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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9-11-10T14:24:58Z</updated>
	    <published>2009-11-10T14:24:5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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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3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3pt; COLOR: #000000; LINE-HEIGHT: 27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31장. 미디안을 정복하고&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2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31:3 모세가 백성에게 일러 가로되 너희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싸움에 나갈 준비를 시키고 미디안을 치러 보내어서 여호와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되31:4 이스라엘 모든 지파에 대하여 각 지파에서 일천 인씩을 싸움에 보낼지니라 하매 31:5 매 지파에서 일천 인씩 이스라엘 천만 인 중에서 일만 이천 인을 택하여 무장을 시킨지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6 모세가 매 지파에 일천 인씩 싸움에 보내되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 나팔을 들려서 그들과 함께 싸움에 보내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7 그들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미디안을 쳐서 그 남자를 다 죽였고 31:8 그 죽인 자 외에 미디안의 다섯 왕을 죽였으니 미디안의 왕들은 에위와 레겜과 수르와 후르와 레바이며 또 브올의 아들 발람을 칼로 죽였더라 31:9 이스라엘 자손이 미디안의 부녀들과 그 아이들을 사로잡고 그 가축과 양떼와 재물을 다 탈취하고 31:10 그 거처하는 성읍들과 촌락을 다 불사르고 31:11 탈취한 것, 노략한 것, 사람과 짐승을 다 취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12 그들이 사로잡은 자와 노략한 것과 탈취한 것을 가지고 여리고 맞은편 요단 가 모압 평지의 진에 이르러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이스라엘 자손의 회중에게로 나아오니라 31:13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이 다 진 밖에 나가서 영접하다가 31:14 모세가 군대의 장관 곧 싸움에서 돌아온 천부장들과 백부장들에게 노하니라 31:15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자들을 다 살려두었느냐 31:16 보라 이들이 발람의 꾀를 좇아 이스라엘 자손으로 브올의 사건에 여호와 앞에 범죄케 하여 여호와의 회중에 염병이 일어나게 하였느니라 31:17 그러므로 아이들 중에 남자는 다 죽이고 남자와 동침하여 사내를 안 여자는 다 죽이고 31:18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들은 다 너희를 위하여 살려둘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19 너희는 칠 일 동안 진 밖에 주둔하라 무릇 살인자나 죽임을 당한 시체를 만진 자나 제삼일과 제칠일에 몸을 깨끗케 하고 너희의 포로도 깨끗케 할 것이며 31:20 무릇 의복과 무릇 가죽으로 만든 것과 무릇 염소 털로 만든 것과 무릇 나무로 만든 것을 다 깨끗케 할지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21 제사장 엘르아살이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법률이니라 31:22 금, 은, 동, 철과 상납과 납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23 무릇 불에 견딜 만한 물건은 불을 지나게 하라 그리하면 깨끗하려니와 오히려 정결케 하는 물로 그것을 깨끗케 할 것이며 무릇 불에 견디지 못할 모든 것은 물을 지나게 할 것이니라 31:24 너희는 제칠일에 옷을 빨아서 깨끗케 한 후에 진에 들어올지니라 31: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26 너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회중의 족장들을 더불어 이 탈취한 사람과 짐승을 계수하고 31:27 그 얻은 물건을 반분하여 그 절반은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에게 주고 절반은 회중에게 주고 31:28 싸움에 나갔던 군인들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의 오백분지 일을 여호와께 드리게 하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29 곧 이를 그들의 절반에서 취하여 여호와의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고 31:30 또 이스라엘 자손의 얻은 절반에서는 사람이나 소나 나귀나 양떼나 각종 짐승을 오십분지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성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라 31:31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하니라 31:32 그 탈취물 곧 군인들의 다른 탈취물 외에 양이 육십 칠만 오천이요 31:33 소가 칠만 이천이요 31:34 나귀가 육만 일천이요 31:35 사람은 남자와 동침하지 아니하여서 사내를 알지 못하는 여자가 도합 삼만 이천이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36 그 절반 곧 싸움에 나갔던 자들의 소유가 양이 삼십 삼만 칠천 오백이라 31:37 여호와께 세로 드린 양이 육백 칠십 오요 31:38 소가 삼만 육천이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세로 드린 것이 칠십 이두요 31:39 나귀가 삼만 오백이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세로 드린 것이 육십 일이요 31:40 사람이 일만 육천이라 그 중에서 여호와께 세로 드린 자가 삼십 이명이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41 여호와께 거제의 세로 드린 것을 모세가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 31:42 모세가 싸움에 나갔던 자에게서 나누어 취하여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절반 31:43 곧 회중의 얻은 절반은 양이 삼십 삼만 칠천 오백이요 31:44 소가 삼만 육천이요 31:45 나귀가 삼만 오백이요 31:46 사람이 일만 육천이라 31:47 이스라엘 자손의 그 절반에서 모세가 사람이나 짐승의 오십분지 일을 취하여 여호와의 장막을 맡은 레위인에게 주었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심과 같았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48 군대의 장관들 곧 천부장과 백부장들이 모세에게 나아와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49 그에게 고하되 당신의 종들의 영솔한 군인을 계수한즉 우리 중 한 사람도 축나지 아니하였기로 31:50 우리 각 사람의 얻은 바 금 패물 곧 발목고리 손목고리 인장반지 귀고리, 팔고리들을 여호와의 예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 31:51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그들에게서 그 금으로 만든 모든 패물을 취한즉 31:52 천부장과 백부장들이 여호와께 드린 거제의 금의 도합이 일만 육천 칠백 오십 세겔이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1:53 군인들이 각기 자기를 위하여 탈취한 것이라 31:54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이 천부장과 백부장들에게서 금을 취하여 회막에 드려서 여호와 앞에 이스라엘 자손의 기념을 삼았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31장은 미디안을 정복하라는 명령과, 또 미디안을 정복한 사건, 그리고 정복한 후에 그 탈취물을 정결케 하고 분배하고, 그런 사건이 기록되었다. 27장에서 30장까지의 과정에서 우상숭배와 간음으로 인해서 더렵혀진 백성들이 2만명 이상 죽은 다음에 백성을 재계수하고 군대를 재정비한 사건이 있었고, 그 다음에 기업을 분배함에 있어서 여자들에게도 그 아비의 이름으로 기업을 분배했다는 판례가 있었다. 그리고 모세의 죽음과 후계자 여호수아의 문제, 또 하나님의 만족인 제물, 그리고 우리의 표현으로서, 우리의 충성으로서의 서원 제물들, 이런 것이 30장까지 있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31장은 미디안 정복을 명령하는 것인데, 좋은 땅에 들어가기 전에 있는 싸움이었다. 왜냐하면 좋은 땅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이 미디안을 그냥 놔두면 적이 뒤에 있는 입장이 되게 된다. 그래서 뒤에 있는 적을 없애기 위한 그런 전략이었다. 우리의 적이 앞에 있을 때는 우리가 전쟁을 하기가 좋지만 뒤에 있을 때는 전쟁하기가 어렵다. 영적으로 말하면 앞에서 나를 핍박한다던가 욕한다던가 반대한다던가 이런 것은 막아내기가 더 쉬운데, 뒤에서 문제를 일으킨다던가 뒤에서 후미를 공격하는 적은 막아내기가 더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뒤에 있는 적을 없애지 않고는 앞으로 전진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뒤에 있는 적들은 우리하고 가까운 것들이다. 먼 적이 아니고 가까운 것들, 자기하고 관계가 깊은 것들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미디안 사람들에 대해서 연구를 해보면, 미디안 사람은 아브라함의 후처인 그두라의 소생들이다. 그러니까 육신적으로 같은 혈통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에 모압인들과 연합을 해서 이스라엘을 범죄케 했던 발람이 바로 미디안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결국 미디안은 모압 사람과 연합을 한 그런 사람들이고, 또 이스마엘과 하나인 사람들인데 이 사람들은 요셉을 사다가 판 상인들, 그 사람들이 바로 이스마엘 족속들이었다. 그리고 에서의 후손인 아말렉과 연결된 그런 사람들이었는데, 이스라엘이 파종할 때만 돌아오면 미디안과 아말렉이 연합을 해서 침략해 들어왔다고 사사기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육신적으로는 멀지 않는 사람들이면서 가까이 있어 가지고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그런 적에 해당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 안에도 마찬가지로 가까우면서도 괴롭게 하는, 진로를 방해하는 그런 적들이 있게 되기 때문에 그런 적들을 정리하지 않고는 우리가 앞으로 전진할 수 없다는 그런 뜻이다. 육신과 정욕과 우상, 이것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미디안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런 내부적인 문제가 결국 전력을 낭비케 하는 그런 사람들이다.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길에 있어서 우리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운 것, 어쩌면 자기 자신, 그것이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다. 남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문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언제든지 문제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앞에 있는 적만 생각하지, 뒤에 있는 적은 생각할 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셈이다. 사실은 자기 자신에게 일차적인 문제가 있는데, 자기 자신에게 있는 일차적인 문제를 모르고 멀리 있는 문제만 가지고 계속 남을 원망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남을 원망하는 사람은 평생 가도 해결이 안 된다. 왜냐하면 남은 수 없이 있는 거니까. 나를 괴롭게 하는 남이 하나만 있으면 상관이 없지만,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내가 그런 원인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원인을 가지고 있는데 오는 사람은 수 없이 많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더러운 곳이 있으면 파리가 오지 않는가. 그런데 오는 파리 하나만 잡아버리면 끝날 것 같은데 파리는 수 없이 많이 있다. 더러운 곳이 있기 때문에 계속 오는 것이다. 문제는 파리는 안 잡더라도 더러운 곳만 치워버리면 파리는 저절로 안 온다. 우리 집에 상록수가 한 그루가 있는데 노란 꽃이 핀다. 그런데 꽃필 때가 돌아오면 어디서 그렇게 오는지 똥파리가 새카맣게 몰려들어온다. 어디서 그렇게 많이 살고 있다가 오는지 모르겠다. 그런데 어느 해는 그것이 안 올 때가 있다. 그건 왜 그런가 하면 꽃이 안 핀 해가 있다. 그럴 때는 일체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파리는 언제든지 꽃이 피면 올 수 있는 것이 파리이다. 문제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우리의 환경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한테 불행을 주는 환경이라는 것은 언제든지 있을 수 있는 거지, 그 환경이 다 없어져 가지고 내가 평안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집안을 다 청소해 놓았다 하더라도 다른 데서 파리가 날라 오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그러니까 똥파리를 유인하는 꽃이 안 피어야 똥파리가 안 오지, 그 꽃이 피고 있는 한은 똥파리는 어디서 오는지 모르게 다 오고, 대구시내에 있는 똥파리가 다 오는 그런 셈이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일차적인 문제는 항상 자기에게 있다. 그래서 자기한테 있는 문제를 없애면 저절로 주변에 있는 문제가 정리되게끔 되는 것이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일차적인 문제는 나한테 있는 것이니까, 그 문제를 해결하면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아주 정상적으로 회복이 되게 된다. 합당한 관계가 유지된다.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과 나와의 관계도 똑같다. 내 문제가 해결되면, 내 자신이 해결되면 다른 사람과 관계에 신경을 안 쓰고 다른 사람과 관계가 더욱 좋아진다. 그런데 내 문제를 그냥 가지고 다른 사람과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노력하면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내가 그런 입장이기 때문에 안 될 것 아니겠는가. 예를 들어 내가 고슴도치라고 생각하면 오는 것마다 찔리니까 다 멀리 도망친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왜 너는 멀리 도망치나? 좀 가까이 왜 안 오냐? 나한테 왜 친절하게 안 하냐?” 이렇게 원망할 수 있다. 그런데 사실은 친절하게 하려고 하면 찔리니까 가까이 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나한테 꿀이 있으면 벌이 찾아오게 되어 있고, 나한테 가시가 있으면 다 달아나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면 우리가 괜히 남에게 신경 쓸 필요 없이 자기 자신을 처리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경제적인 방법이다. 나 하나만 해결하면 되니까. 수없는 사람을 다 해결할 수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많은 사람에게 신경을 쓸려고 하면 우리는 많은 낭비를 해야 된다. 하나 해결하면 또 해결할 문제가 생기고, 이 사람 해결하면 또 저 사람 문제가 생기고, 끝없이 문제가 생긴다. 그러니까 그건 아주 비경제적이다. 낭비에 속하는 것이다. 나 한 사람만 해결하면 모든 것이 쉽게 해결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복수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스라엘 자손의 원수를 미디안에게 갚으라 그 후에 네가 네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복수하라는 그런 명령이 왔다. 왜냐하면 우상숭배로 몰아넣어 가지고 이스라엘을 이만 명 이상 죽인 그 사건에 대한 보복이다. “여호와의 원수에게 보복하라” 이스라엘의 원수와 여호와의 원수가 항상 동격이다. 신약에 와서 예수와 교회가 동격이었듯이, 다시 말하면 “네가 왜 나를 핍박하느냐?”, 사울에게 하는 말이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사실은 사울은 지금 교회를 핍박하고 있었는데 “네가 어째서 나를 핍박하느냐?” 그랬다. 그러니까 예수와 교회를 동일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이스라엘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몰아넣었는데 여호와께서 “내 원수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를 동일시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그의 목적 안에 있고, 그의 계획안에 있을 때 우리는 그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내 특사로, 내 대사로 간 사람은 나하고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모욕하지 않더라도 내가 보낸 자를 모욕하는 사람은 곧 나를 모욕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며, 나를 핍박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핍박하는 것이다.”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는 동일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말미암아 보냄을 받은 자가 된다면 우리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축복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원수가 곧 내 원수가 되고, 하나님의 친구가 곧 내 친구가 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동일시되는, 다시 말하면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을 말한다. 한 입장에 있는 것, 우리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말이 아니라 입장이 같은 입장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 서 있는 입장에 내가 서 있다면 나는 비록 흙으로 지어진 인생에 불과하지만 그 입장이 같기 때문에 주님과 내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영광이다. 그러니까 내가 입지가 어디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내 영광을 좌우하게 된다. 내가 아무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 하더라도 사탄의 입장에 서 있다. 그러면 나는 사탄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어디 섰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한 문제이다. 내 입지가 대단히 중요하다. 내 자리, 내 위치, 내 운명, 이것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사람은 이런 자리에 설 수도 있고, 저런 자리에 설 수도 있는 거니까, 오늘 하나님의 입장에 섰다가 내일 사탄의 입장에 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사람들하고 얘기를 해보면 자기 스스로가 바리새인의 입장에 서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면 당신은 나보고 바리새인이라는 말이냐?” 그건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얼마나 불행한 위치에 놓여 있는가. 자기가 그런 위치에 있으니까 그렇게 발견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하여튼 안 좋은 사람이라도 내가 핍박하는 위치에 있으면, 일대일로 생각한다면 안 좋은 걸 핍박하는 거니까 정당할 것 같은데 핍박하는 자의 위치에 서 있다. 그래서 그 위치는 거슬러 올라가면 또 예수를 핍박하는 위치하고 같은 위치가 된다. 똑같은 말이 나오게 된다. 참 이상한 일이다. 우리는 종종 “그러면 네가 하나님과 동등이란 말이냐?” 이런 얘기도 듣게 되고, “네가 그러면 다 됐다는 말이냐?” 이런 얘기도 듣게 되지 않는가. 그런데 그 말은 누가 들은 말이었느냐 하면 예수님이 들었던 말이다. 그러니까 이상하지 않는가. 예수님과 우리는 분명히 다름에도 불구하고 같은 말을 듣게 된다. 같은 위치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같은 말을 듣게 된다는 것이다. 초등학교 선생님하고 대학교수님하고는 차이가 많지 않는가. 학력의 차이도 많고 지식의 차이도 많지만 둘 다 선생님의 입장이다. 같은 가르치는 입장이다. 그래서 입장이 같기 때문에 같은 말을 듣게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위치를 승격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어저께 제주에서 박영호 형제하고 어디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숲 속에 좋은 건물이 지어져 있었다. 아주 잘 지어 놓았다. 보니까 ‘여호와의 증인’의 총연합회 건물이었다. 약 3000평 되는 넓은 대지에다 약 600평 정도의 단층건물을 지어놓았는데, 조경도 잘해놓고 다 잘해놓았다. 그래서 지나가다가 ‘한번 들어가 보자. 일차적으로는 건물 좀 구경하자.’ 그래서 들어갔다. 대집회실이 구백 몇십 석이니까 약 1000명이 들어갈 수 있는 대집회실을 만들어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 약 100명 들어갈 수 있는 부속 집회실을 만들어 놓았다. 그런데 방음 시설이랑 모양이랑 아주 잘해놓았다. 의자도 전부 극장식 접는 의자이고, 아주 깨끗하게 잘해놓았다. 그리고 한쪽에는 식당을 만들어놓았다. 구경을 하니까 거기서 사람이 나와 구경을 잘 시켜주었다. 휴게실에 가니까 의자가 있어서 “우리 좀 앉읍시다.” 하고 앉았다. 그리고 “기왕 왔으니 얘기 좀 합시다” 하고 얘기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런 걸 물었다. “당신들의 역사관을 좀 듣고 싶다. 당신들은 지상천국을 얘기하던데 어떤 것이 지상천국이냐?” 이렇게 물었다. 그랬더니 자기들은 14만 4천은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서 통치할 자들이고 나머지 자기들 믿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땅에 남아서 천년 동안 왕국을 건설하게 된다,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러면 그 나라가 세워지기 전에 죽은 사람은 어떻게 되느냐고 하니 그 사람은 부활해 가지고 된다고 했다. 그러면 기독교하고 뭐 다를 것이 하나도 없지 않느냐, 다 똑같지 않느냐 했더니, 그 사람이 하는 말이 “기독교에서는 죽어서 영혼이 천당간다는 것을 믿지 않느냐, 지상에서 그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걸 믿지 않고 천당에만 간다고 믿고 있지 않느냐? 그러나 자기들은 지상에서 그 나라가 이루어진다고 믿는다.”고 했다. 그래서 “그건 성경을 몰라서 하는 소리이지, 성경에도 마찬가지이다. 살아남은 자와 부활한 자들이 함께 합해서 천년 동안 왕노릇한다고 되어 있지 않느냐? 그건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는 소리이다.” 그렇게 얘기를 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당신네들은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사람들은 다 멸망을 받게 된다고 말하는데 사실이냐?” 그러니까 “그렇다”고 했다. 그러면 “다른 종교도 또 그렇지 않느냐? 다른 종파도 다 그렇지 않느냐? 그러니 이것이 큰 문제라고 생각이 된다. 유태인은 이방인이 다 멸망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됐는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러니까, “어차피 진리는 하나니까, 한 길이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은 다 멸망되고, 악한 사람들은 다 불못에 던져지고 선한 사람들만 남아서 그 왕국을 이루게 된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래서 “그러면 당신들 입장에서 같으면 그렇게 하면 참 좋겠지만, 죽은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건 억울하지 않느냐? 큰아들하고 작은아들이 싸우는데, 둘의 생각 같으면 큰아들은 작은아들보고 ‘내게로 흡수돼라.’ 할 수 있고, 작은아들은 큰아들보고 ‘내게 흡수돼라.’ 이렇게 할 수 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어쩌겠느냐? 하나는 옳고 하나는 그르면 하나는 너는 죽고 하나는 살아라 이렇게 하겠느냐? 형제간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 있지만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렇게 못할 거 아니냐, 할 수가 없을 거 아니냐?” 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모른다.”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모르고 하나님이 그렇게 한다 했으니까 하는 거다 이것이다. 그래서 “그러면 당신들 속에 그런 마음이 있다면, 옛날에 유태인들이 이방인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것이나 또 천주교가 이교도를 학살한 것이나 개신교가 이단을 학살한 것이나 당신들 생각이나 뭐가 다른 게 있냐? 당신들은 지금 총칼이 없어서 그런 것뿐이지, 총칼만 있다면 당신들도 똑같이 그럴 것 아니냐?” 이렇게 자꾸 얘기해 들어가니까 이 사람이 난처하게 됐다. 자기들은 성서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서가 아무리 그렇게 됐다 하더라도, 만일 성서가 그렇게 됐다면 성서가 잘못된 거 아니냐? 성서라면 이렇게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성서가 아니겠느냐? 그리고 구세주라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분이 구세주가 아니겠느냐? 그걸 못 해결하면 사람은 다 똑같은데 삼척동자보고도 하라면 그렇게 안 하겠느냐? 그걸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느냐?” 이렇게 얘기하니까 거기 대해 그 사람은 어떻게 할 말이 없게 되어버렸다. 그래서 마지막에 “거참, 깊은 질문인데, 그러면 선생님께서 대책에 대해서 뭐 생각난 것이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나도 예수를 믿기는 믿는데 이 문제가 참 고민이 되어 가지고 잘 모르겠다. 이거 아무래도 모순이 되는데, 틀림없이 모순이 되는데 이걸 해결해주는 분이 구세주가 아니겠느냐? 이걸 못 해결하면 그건 아버지도 아니고 구세주도 아니지 않는가?” 하니, “성경이 그런데 어쩌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을 다시 보든가, 성경이 잘못됐던가, 그렇게 밖에 성경이 해결할 수 없다면 그 성경을 버려야 안 되겠느냐? 하나님이 그렇게 졸렬한 방법을 사용한다고 하면 그 하나님을 어떻게 하나님이라 하겠느냐?” 이렇게 했더니, 이 사람이 몇 번이나 그러면 대책을 좀 생각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나도 지금 대책이 없어서 고민이다.”고 했다. 그 때 그 사람의 부인이 나와서 손님이 왔다고 하면서, 우리가 얘기를 하고 있으니까 자기가 나갈까 하고 물었다. 그런데 이 사람이 자기가 나가겠다고 했다. 이 사람이 말이 궁색하게 되니까, 여기서 달아나야 되는 것이다. 자기 부인보고 갔다오라고 해도 되는데, 자기가 가겠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거 우리가 숙제로 남겨두고 다음에 한번 더 만납시다. 당신이 한번 이 숙제를 풀어보시오. 그래서 좋은 해답이 있어야 안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래놓고 왔다. 아마 거기 관장인 모양이었다. 사십 몇 살 정도 되는 사람이었는데, 처음에는 아주 당당하게 얘기하다가 마지막에 대책이 없는 자리에 이르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입장, 아버지의 입장, 그 입장에 우리가 서면 우리는 그 아버지와 하나님과 동일시된다. 내가 그 말을 하면서 아버지 입장에 서니까 나는 저절로 아버지와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 사람은 형제간의 입장에 서니까 형제간이 되어버리는 것이고, 나는 아버지 입장에 서니까 나는 아버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입지를 어디다 두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영광을 좌우하는 것이다. 내가 거역하는 자의 입지에 서 있으면 내 입에서는 항상 거역하는 자의 입장에서만 말이 나온다. 그렇게 되면 항상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가 되어버리고 만다. 내가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거역하지 않아도 내가 육신적으로 다른 일에 대해서 거역하는 자리에 놓이면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리로 가버리는 것이다. 위치가 그렇기 때문에, 선생은 다 똑같은 선생이듯이 그렇다. 그러니까 우리의 위치를 예수님의 위치에, 아버지의 위치에, 창조자의 위치에, 구원자의 위치에 우리가 선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파는 사람의 입장과 사는 사람의 입장, 이렇게 우리가 생각해보면 장사하는 사람은 항상 파는 사람의 입장이다. 사러 가는 사람은 항상 사는 사람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사는 사람의 입장과 파는 사람의 입장이 항상 다르지 않는가.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입장과 사람의 입장,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 서면 그 입장이 다르고, 사람의 입장에 서면 그 입장이 또 다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느 입장에 서느냐 하는 것이 참 중요하다. 하나님의 입장에 서 있으면 하나님과 동일시된다. 예수님의 입장에 서 있으면 예수님과 동일시된다. 우리가 만일 억울하게 핍박을 받는다. 그러면 우리는 저절로 예수님의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게 핍박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저절로 유태인의 입장이 되어버린다. 자기가 스스로 정죄가 되어버리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내 원수를 보복하라.” 이렇게 명령을 하고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모세는 거기서 이런 전략을 세웠다. “모든 지파에게 군대에 나갈 사람 천명씩을 차출해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그래서 열 두 지파니까 12,000명이 차출이 됐다. 그리고 제사장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에게 성소의 기구와 신호나팔을 들려서 내보내게 되었다. 성소의 기구는 백성을 보호하려고 한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성소의 기구를 앞세우면 하나님이 성소의 기구를 보호하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거룩한 것을 앞에 가져가면 하나님이 이 거룩한 것을 보호하려면 거룩한 것 뒤에 있는 백성을 보호해야 될 것 아닌가. 그래서 성소의 기구를 앞세워가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법궤를 먼저 매고 간 예가 많이 있다. 전쟁하러 가면서 군대가 먼저 가야 되는데 군대가 먼저 가는 게 아니고 법궤가 먼저 가는 것이다. 그러면 할 수 없이 하나님께서 그 법궤를 보호하려니까 이스라엘 백성을 보호해야 된다는 뜻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앞에 세우면, 예수를 우리 앞에 세우면 우리는 저절로 보호가 된다는 뜻이다. 내가 주님을 영화롭게 하고, 내가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자리에 놓이게 되면 우리는 저절로 보호를 받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필요가 거기 있으니까. 만일 내가 아니면 예수님이 영광을 받지 못할 것이니까,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하고 영화롭게 할 것이 아니겠는가.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의 신약경륜의 중요한 사명을 가지고 로마를 향해서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모든 조건을 바울에게 유리하도록 그렇게 선회를 시켰다. 그래서 바울이 결국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사명을 완수할 수 있도록, 바울은 죽을 고비가 많았지만, 바울이 죽어버리면 하나님의 목적이 실패가 되니까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할 때까지 바울을 살려두었다 그런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목적을 앞세우면 우리 자신이 그 목적 안에 보호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amp;nbsp; 내 목적을 앞세워놓고 하나님보고 “나를 보호해주시오” 해봤자 그게 안 될 아니겠는가. 하나님이 보호할 이유가 없으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을 우리 인생의 목적으로 놓는다면 우리는 항상 그 목적의 그늘 아래 숨겨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성소의 기구를 앞세웠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나팔을 불었는데 이건 신호나팔, 경적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전투의 신호를 알리기 위해서 나팔을 들고 갔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시를 가진 자가 경적을 울리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시를 먼저 받은 자가 신호를 할 때, 그 때 이스라엘 백성이 전진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신호나팔을 듣고 전진한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전쟁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쟁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전쟁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이 전략에서 모든 지파가 천명씩을 차출할 때 이런 생각이 날 수 있다. ‘아니, 우리 지파를 숫자가 적고, 너희 지파는 숫자가 많은데 왜 똑같이 천명씩을 낼 수 있느냐? 지파 인구대로 내자.’ 이렇게 할 수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데 인구비례로 내지 않고 무조건 각 지파마다 천명씩을 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구가 적어도 천명, 많아도 천명, 그렇게 내게 됐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불평이 없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원수를 갚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적을 물리침에 있어서 “우리는 적으니까 조금만 담당하겠다.”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적을 우리가 물리치러 가는데 있어서 “나는 힘이 적으니까 나는 조금만 해야 된다.” 이렇게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나는 힘이 적을지라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그 원수를 물리치기 위해서 가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우리 일 같으면 작으면 작은 대로 하고, 많으면 많은 대로 하고 이렇게 되는데,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나는 작으니까’ 이렇게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만큼 영광이 줄어진 거니까. 내가 적다 해서 적게 나가면 내 몫이 그만큼 줄어진 것 아닌가. 우리가 전리품을 거둘 때 전쟁에 나간 사람들에게 반을 나누어주었다. “우리는 적으니까 적게 나가겠다.” 그랬으면 전리품도 그만큼 적게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적을지라도 더 많이 가지고 나갔으면 비례적으로 그 사람들은 더 많은 전리품을 가져오는 셈이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전쟁하러 나갈 때, 하나님을 위해서 섬길 때 ‘우리가 부족하니까 나는 적게 섬겨야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큼 자기의 축복이 줄어져버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각 지파의 인구수와 상관없이 천명씩을 차출하라 이렇게 명령을 했다. 이런 전략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완전하게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한 마음이 됐다. 하나님의 원수를 갚는 일에 한 마음이 됐다. 그리고 성소의 기구와 신호나팔을 앞세워서 전진했다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스라엘은 완전히 승리했다. 그래서 미디안 남자들을 다 죽이고, 그 주변에 연합했던 다섯 왕들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올무에 넣었던 발람을 죽이게 되었다. 그리고 미디안 여자와 자녀들을 포로로 잡았다. 가축과 제물을 탈취하고 성읍을 불사르고 노략물을 가지고 오는 그런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이 노략물을 가지고 왔는데, 그냥 이것을 가지고 들어오게 하지 않고 이것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 있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남자와 결혼한 여자는 다 죽여라.” 이 말은 미디안 남자의 씨를 받았으니까, 미디안 남자를 안 여자는 다 죽여라 그런 얘기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미디안을 완전하게 없애야 된다 그런 뜻이다. 왜냐하면 그걸 남겨두면 미디안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남자를 안 여자는 다 죽여라 그것이다. 그리고 남자를 알지 못한 여자만 살려놓아라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사람을 죽인 자와 시체를 만진 자, 포로들, 이 사람들은 제3일과 제7일에 물로 진밖에서 깨끗이 씻고 들어오라 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의복과 가죽 제품, 염소털로 만든 것, 나무로 만든 것, 이런 건 다 물로 씻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금속류, 불에 타지 않는 것들을 불을 통과 시켜라. 그러면 부정한 것이 없어질 것이다. 그런 다음에 다시 씻어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제7일에 그들 자신들의 의복을 씻고 발을 깨끗케 한 후에 진에 들어오라.“ 이렇게 명령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것이 아무리 여호와의 전쟁이었다 하더라도 그 전쟁에 나가서 묻은 모든 것, 부정해진 모든 것은 여호와의 진안에 들어올 때는 씻고 들어와야 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내가 거룩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여호와의 진에 들어올 때는 세상 밖에서 묻어있는 것들을 내가 처리하고 들어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샌들이나 맨발로 다니니까 집에 들어올 때는 발을 꼭 씻고 방으로 들어가도록 그렇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밖에서 묻은 것을 방안으로 가져오면 안 된다 그런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때 세상에서 묻은 것을 씻고 들어와야 된다. 그걸 그냥 가지고 와서는 안 된다. 우리가 옛날에 가지고 있던 습성이나, 옛날에 세상에서 묻었던 것들을 그냥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오면 교회생활이 제대로 안 된다. 그 안의 생활과 밖의 생활이 다르니까. 우리가 밖에 다닐 때는 신발을 신고 다녀야 되지만 방안에 들어올 때는 신발을 벗고 들어와야 되지 않는가. 왜냐하면 방안 생활과 바깥생활이 다르니까. 그래서 우리는 교회생활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은 다른 생활 안으로 들어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교회생활 안에 들어오면서도 여전히 신을 그냥 신고 들어왔다. 그러면 교회생활이 제대로 안 되게 된다. 방안에서 신을 신고 있으면 생활이 제대로 되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될 것이고, 또 자기 자신도 불편하게 될 것이고, 그런 게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어떤 풍습이나 관습이나 그런 것들이 세상에서 그렇게 악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나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교회생활 안에 적합하지 못한 것은 청소하고 와야 된다. 담배를 피운다 해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술을 한잔 먹었다 해서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교회생활 안에는 그런 것이 필요가 없는 생활이다. 그 안에는 그렇게 하면 또 안 되는 곳이다. 화장실에 가서 담배 피우는 것은 괜찮지만, 안방에 와서 피우는 것은 안 되지 않는가. 그런 이치와 같다. 이제 우리 나라도 전면 금연시대가 돌아온다. 공중이 모인 모든 자리에서 금연하라 이것이다. 극장이든지 다방이든지 열차에든지 버스든지 어디든지 대중이 모인 자리에서는 금연을 해야 된다는 것이다. 왜 그러냐 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는 생각을 잘 안 한다. 자기만 그냥 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이나 공항 같은 데 흡연실을 따로 만들어놓고 그 안에 가둬놓고 여기서 피워라 이런 얘기이다. 우리 같으면 창피해서도 안 피우겠던데, 유리창으로 가리기는 가렸지만 감옥소 같은 데서 그렇게 피우고 앉았는지 참 모를 일이다. 얼마나 그것이 필요하면 그렇게 꼭 해야 되는 건지, 바깥에서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우습다. 자기들 몇 사람이 조그만 방에 들어앉아서 막 피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안은 굴뚝이다. 서로 주고받으면서 피우고 앉아 있는 것이다. 그걸 보면 ‘안 배우기를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든다. 어려서 잘못 배웠더라면 그것이 습관이 되어 가지고 못 끊을 것이 아닌가. 이런 것이 죄를 짓는 것은 아니다. 악한 일도 아니고 그런 게 아닌데, 피울 자리가 있고 안 피울 자리가 있다. 아무 데서나 피울 수가 없다. 교회 안에서는 그것이 안 된다. 그런 생활과 교통하는 생활은 전혀 다른 생활이기 때문에 성질이 안 맞아서 안 된다. 술 먹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술 한잔 먹었다 해서 그것이 큰 문제가 되겠는가. 그런데 술을 먹은 상태에서는 교통이 안 된다. 그런 분위기, 교통하는 분위기가 안 된다. 형제와 연합하는 분위기가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건 악하지 않는 거지만 교회생활 안에 들어올 때는 그걸 다 씻고 들어와야 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가 교회생활을 정결케 할 수가 있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다 씻고 정결케 하고 들어오라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노략물을 분배하게 되었다. 전쟁에 나간 자에게 절반을 주고, 다른 전쟁에 나가지 않는 회중에게 절반을 준다 이런 원칙이다. 그래서 전투에 나간 사람이 많은 노획물을 보상으로 받게 됐다 하는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주님을 위해서 싸움터에 나가보면 바로 직접적으로 전쟁을 한 사람이 2분의 1을 갖게 된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이 2분의 1을 갖고 나눠먹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여기 와서 간증을 한다. 세상에 나가서 승리를 했다. 여기서 간증을 하면 그 승리한 노획물의 절반은 간증한 사람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전투한 사람의 것이고,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모든 형제들이 나눠먹는 것이다. 전쟁에 나간 자에게 절반을 주고, 나머지 절반을 가지고 회중들이 나눠먹어라 이런 얘기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면 항상 회중의 몫밖에는 못 먹는 것이다. 절반의 큰 몫을 못 먹는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싸움에 나간 자의 분깃에서 500분의 1을 여호와께 예물로 드렸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2분의 1을 받은 싸움에 나간 사람들이 500분의 1을 여호와께 드렸다는 것이다. 또 여호와를 위한 예물을 거제로 제사장 엘르아살에게 드렸다. 거제로 드린다는 말은 받들어 드렸다는 뜻이다. 들어올려서 드린다는 뜻이다. 그건 하나님께 상달하도록 드린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회중을 위하여 주어진 것에서 50분의 1을 레위인에게 드린다 이런 원칙을 정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얻은 것의 어떤 것에 일부분을, 가장 중요한 부분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는 원칙이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소득의 가장 좋은 것을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이다. 우리 육신 중에서도 밥을 먹으면 위장을 통해서 소화가 되어 가지고 영양분이 간으로 흡수가 된다. 그런데 그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은 머리로 간다. 60% 정도가 머리로 간다고 한다. 전체 칼로리 중에서 60%가 머리로 다 가버린다. 중요한 곳이니까. 그래야만 그 사람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 만일 머리로 그 영양분이 안 가면 머리가 노쇠 되어버린다든지 잘못되어버린다든지 한다. 그렇게 되면 내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소용이 없다. 머리가 잘못되어버리니까 소용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산소를 호흡할 때도 그 산소도 머리로 60% 이상이 가버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머리에 만일 안 가면 이 머리는 금방 죽어버리기 때문이다. 5분만 산소공급이 안 되면 죽어버린다. 그러면 다시는 이건 회생을 할 수가 없다. 다른 장기들은 잠시 동안 놔두었다가 회생시킬 수가 있는데, 뇌는 한번 죽어버리면 영원히 죽어버리고 만다. 다시 깨어날 수가 없다. 하나님이 건재하게 있을 때, 거룩한 것이 건재하고 있을 때, 성전이 건재하고 있을 때, 우리가 혹시 발에 상처가 나던가, 맹장염이 걸리더라도 우리는 살 수가 있지만 만일 머리가 잘못되어버리면 아무리 밑에 건강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 하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군대의 장관들이 여호와께 또 예물을 드렸다. 그것은 자기들 중에 사람을 조사해보니까 한 사람도 죽지를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지 않은 값으로, 자기 몸값으로 대속물로서 예물을 드렸다 하는 것이 나오게 된다. “우리 각 사람의 얻은 바 금 패물 곧 발목고리 손목고리 인장반지 귀고리, 팔고리들을 여호와의 예물로 우리의 생명을 위하여 여호와 앞에 속죄하려고 가져왔나이다”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하나님께 받았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항상 내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까 내 생명의 대가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사상이다. 이것이 얼마나 거룩한 사상인지 모른다. “내 생명은 내 것이다”, 이러다 보니까 자살도 하고 남도 죽이고 그렇지 않는가. 그런데 ‘내 생명은 내 것이 아니다. 이건 하나님이 내게 준 것이다. 맡겨놓은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빌려 쓴 것이다. 내가 세를 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갖는 것이다. 남의 집을 빌려쓰면서 공으로 쓸 수 없듯이 ‘나도 내 생명을 하나님에게 빌려쓰는데 내가 공으로 쓸 수 없다. 내가 속전을 주어야 되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진 것이니까 얼마나 이것이 거룩한 생각인지 모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모세와 엘르아살이 금패물을 받아서 기념으로 회막 안에 두었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토록 회막 속에 그 패물들을 놓아둠으로써 이스라엘의 생명을 담보하고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명의 대가가 당신 앞에 있습니다.” 그런 얘기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 생명의 대가를 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사한다, 이스라엘 백성의 가치를 평가한다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 생명을 대속하는 대신의 물건을 놔두었기 때문에 이스라엘을 볼 때에 하나님이 성전 안에서 그 물건들을 봄으로써 이스라엘의 생명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보면 전부 다 아주 귀중한 것들이다. 금패물, 발목걸이, 손목걸이, 인장반지, 귀걸이, 전부 다 이것은 금에 해당되는 것이다. 생명을 금과 같이, 금을 귀중하게 여기듯이, 이 말이다. 이 패물들을 귀중하게 여기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긴다는 뜻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를 들어서 내 생명의 대속물을 형편없는 걸 갖다 내놓았다. 시시한 것들을 갖다 주었다. 그러면 하나님이 그것 봐야 너무 시시하니까 내던져버릴 수도 있고, 쓸어버릴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것이 없어지는 것과 동시에 그 사람의 생명도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뜻이다. 그것이 무시된다면 그 사람의 생명도 무시된다 그런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귀중하면 그 사람의 생명도 귀중하다 그것이다. 그 사람의 생명의 대속물이니까. 그러니까 내 생명의 대속물을 내가 시시한 것으로 내놓았다면 하나님 앞에 내 생명이 시시하게 여겨지게 되는 것이고, 내 생명의 대속물을 귀중한 걸 내놓았다면 내 생명은 하나님 앞에서 귀중하게 여겨진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 생명의 대속물을 내가 귀중한 것으로 하나님께 드린다면, 이것이 물질적이든지 영적이든지 가장 내가 귀중한 것으로, 하나님이 기뻐 받으실만한 것으로 내놓는다면 하나님께서 그걸 통해서 나를 본다는 말이다. 내게서 만일 순종이라는 대속물을 속죄제물로 하나님께 드렸다. 그러면 하나님이 항상 나를 볼 때는 그 순종의 제물을 보고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그걸 귀중하게 여길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내 생명의 대속물을 기분 나쁜 것으로 드려놓았다. 그러면 항상 그걸 볼 때마다 하나님이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그걸 볼 때마다 하나님이 기분이 나쁘다는 말은 그 사람의 생명에 대해서 항상 기분이 나쁘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에게서 가장 귀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릴 수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가장 좋은 걸 드려놓았다면 하나님이 그걸 가지고 내 생명을 평가할 것이 아니냐 그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볼 때 그렇지 않는가. 그 사람을 통해서 나온 것이 귀중한 것이면 우리는 항상 그 사람 자체를 귀중하게 생각한다. 어떤 사람이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 왔다. 그러면 ‘아, 그 사람은 사람의 영혼을 잘 구원한 사람이야.’ 우리는 그렇게 기억이 된다. 그러면 그것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을 존귀하게 생각한다. 우리가 해봐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내 생명의 존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내놓으면 하나님은 내 생명을 존귀하게 여기게 되고, 내 생명의 시시한 것을 내놓으면 하나님이 내 생명을 시시한 것으로 본다 이것이다. 그래서 자기들의 패물을, 존귀한 것을 하나님 앞에 드렸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다른 문제로, 이 보복이라는 문제, 이런 문제에 대해서 신약적으로 다시 우리가 생각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일이 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읽으면 “눈에는 눈으로, 이는 이로 갚아라.” 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누가 내 눈을 하나 때렸다. 그러면 나도 그 사람의 눈을 하나 때려주어라 이것이다. 누가 내 눈을 하나 뺐다. 그러면 나도 눈을 하나 빼주어라. 누가 내 이빨을 부러뜨렸다. 그러면 너도 가서 이빨 하나를 망치로 깨라. 이런 것이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갚아라 이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보복적 정신이다. 물론 이것은 남의 눈을 상하지 말라고 한 말이었다. 남의 이를 깨면 안 된다 그런 말이다. 남의 생명을 해치면 너도 죽는다 그런 말이었다. ‘殺人自死’ 남을 죽인 자는 너도 죽는다. 이런 의미로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것이 정당한 것이다. 자기가 남을 죽였으면 자기도 죽을 줄 알아야 되는데, 요즘에는 자기는 남을 죽여놓고도 자기는 안 죽으려고 발버둥친다. 남을 죽여놓은 사람이 자기는 빠져나가려고 발버둥을 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한테는 모세의 법을 적용해야 된다. 그런 사람한테는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이렇게 갚아야 될 사람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구약성경을 읽으면 이런 보복에 관한 말이 많기 때문에, 원수 갚는 것에 대해서 많기 때문에 기독교가 이런 사상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가지고 그런 정신이 배여있는 경우가 많다. 일면으로는 사랑을 부르짖으면서, 다른 한면으로는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하는 핑계를 대어서 사람들에게 자기들이 보복을 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다. 그래서 유태교는 이방인들을 아주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그리고 천주교는 이교도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개신교도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맞지 않는 이단을 무자비하게 학살했다. 이래서 결국은 세상의 정치하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도저히 이래서는 안 되겠다.’ 그래 가지고 정교분리정책을 내놓았다. ‘정치와 종교가 하나로 되면 안 되겠다. 사람 다 죽겠다. 그러니까 정치하고 종교는 완전히 가르자.’ 이래서 나온 것이 현대정치윤리이다. 그래서 지금은 중동의 일부지역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의 나라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종교인들이 아무리 자기가 미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기가 살인권을 갖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죽일 수가 없다. 속으로만 미워하고 있는데, 그 미워하고 있는 걸 어떻게 표출시키느냐 하면 “하나님이 저 사람들을 미워하니까 우리도 미워한다.” 이렇게 변명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은 자기가 미운 것이다.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세상이 모든 종교가 언제 하나가 되겠으며, 세상의 모든 종파가 언제 다 하나가 되겠는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만일 정치가들에게 맡겨놓지 않고 종교가들에게 이 세계를 맡겨놓았더라면 지금 살아남을 사람이 없다. 아마겟돈 전쟁을 볼 때 왕들이 모여서 전쟁을 한다 이렇게 되어 있다. 자기들이 모여서 죽인다, 서로 멸망한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세상의 왕들은 모여서 싸워서 스스로 자멸하지 않을 것 같다. 왜냐하면 세상의 왕들은 다 약아빠져서 이해관계로 모여진 것이다. 세상정치라는 것은 그렇다. 그러니까 싸워다가도 안 되겠다 싶으면 항복을 하고 타협을 하는 것이다. 이게 정치이다. 그러니까 1차세계대전도 있고, 2차세계대전도 있었지만 마지막에 가면 다 항복을 하고 다른 세계질서가 개편되고 그랬다. 그런데 종교전쟁만은 그렇지 않다. 이것이 불가능하다. 영원히 불가능하다. 그래서 어제 오다가 그 생각을 했다. 그 사람하고 얘기하다가 느낀 것인 ‘이 아마겟돈 전쟁이 종교전쟁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종교끼리 모여놓으면 그건 협상도 없고 판문점도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그건 내가 상대방을 안 죽이면 내가 자기 하나님에게 불충성하는 거니까 하여튼 다 죽일 것 아닌가. 그러면 그 중에 어느 하나만 남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그 중에 어느 하나도 못 남는다. 왜 그런가? A는 B를 죽이면 B는 A를 죽이고, 또 C는 B를 죽이니까 하나도 살아남지 못한다는 뜻이다. 지금 틀림없이 만일 종교인들에게 정치를 맡겨놓고 종교인들에게 칼을 주어놓으면 이 세상은 완전히 살육전쟁이 벌어지게 될 것이다. 아마 아마겟돈 전쟁이 벌어질 것 같다. 그래서 정치의 가장 유명한 말이 ‘타협’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양극화된 현상을 타협을 시키지 않으면 둘이 싸우다가 죽으니까 중간에서 정치적 방법을 통해서 이것을 타협을 시킨다 그것이다. 이것이 바로 정치라는 것이다. 그런데 종교는 타협이 있을 수가 없다. 절대진리를 믿는 거니까, 죽으면 죽었지 타협도 없고 항복도 있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이건 영원한 전쟁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구약을 읽으면 우리는 이런 수준에서 더 이상 진전하지 못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니까 비록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의미로 주어졌다 하더라도 이스라엘과 이방인의 관계에서 본다면 영원히 해답이 없는 것이다. ‘이방인은 다 망해야 되고 다 죽어야 된다. 그러면 이스라엘만 살아 남아가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이렇게 믿고 있는 것이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믿는 사람만 살아 남아가지고 천국이 되고 천년왕국이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은 다 죽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과 똑같은 생각을 해왔다. 그러나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말미암아서 이 문제에 대해서 해결이 생긴 것이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이것 아니면 저것밖에는 길이 없다. 아니면 타협, 이 세 가지 길밖에는 없다. 이것이냐, 저것이냐, 타협이냐, 그것밖에 없는데, 정치는 타협이라는 걸 선택했다. 그러나 종교는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것을 선택했다. 해답이 전혀 없는 것이다. 끝이 안 난다. 그렇다고 해서 진리가 진리를 포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겠는가. 이러니까 영원히 해답이 없을 것 아닌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것은 바로 이 대책으로서 오신 것이다. 십자가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다. 절대로 둘이 하나가 될 수 없는데, 이 둘을 다 십자가 앞으로 갖다 놓으니까 유태인도 없고 이방인도 없더라 이것이다. 십자가에 매달아 놓았는데 유태인이 따로 있고 이방인이 따로 있겠는가. 아무 소용이 없더라 이것이다. 쉽게 말하면 십자가는 모든 종교를 없애버린 것이다. 양극화된 현상, 극단에서 극단으로 가는 이것은 모두 종교적인 문제이다. 정치라는 것은 어디라도 절대적인 것이 없다. 등소평이 오늘내일한다니까 벌써 지금 등소평에 대한 가치가 평가절하 되고 있다. 그래서 등소평의 아들들이 지금 추적을 당하고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절대 카리스마적인 지도력을 가지고 10억 이상의 중공 인구를 움직였던 등소평이라도 금새 평가가 시작되고 있다. 정치라는 건 ‘절대’가 없다. 그러나 종교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니까 절대적인 종교와 절대적인 종교가 만나면 어디가 죽어도 하나가 다 죽어야 되는 거지, 하나라도 남겨놓으면 안 된다. 그래서 여리고 성을 점령할 때도 어린 아기 하나라도 남겨두지 말아라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영적으로 해석한다면 맞는 말이 되지만, 육신적으로 해석한다면 이렇게 무자비한 일은 세상에 있을 수가 없다. “어린 아기들까지 다 죽여라.” 이것이 어디 어느 세상에 이런 게 있겠는가. 아무리 악독한 정치라 하더라도, 아무리 악독한 국가라 하더라도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았다. 히틀러라 할지라도 그 정도는 안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히틀러 이상의 무자비한 방법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았으면 지금도 여전히 그렇게 해야 된다. 방법이 없으니까.&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이 오시면서 십자가를 내놓았다. 이 십자가가 하나님의 유일한 대책이다. 이것이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대책이라는 말이 그 말이다. 사람의 뜻으로 나온 것이 아니고, 사람의 생각으로 나온 것도 아니고, 우리가 들어본 일도 생각해본 일도 없고 마음먹어본 일도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이런 신기한 대책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만이 이 인류를 하나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책이다. 불교는 절대적인 대책을 내놓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냥 자기들이 옳다고는 생각을 해도 그렇다고 ‘남은 다 죽어야 된다’ 이런 사상은 갖고 있지 않다. 그런데 절대적인 대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종교들만 그런 걸 갖고 있다. 이것은 유일신 신앙을 가진 종교만 그렇다. 주로 중동에서 발생한 종교들은 대부분 유일신 신앙을 갖고 있다. 유태교가 그렇고, 회교(마호메트교)가 그렇다. 이런 종교들은 전부 중동에서 출발한 종교인데, 이건 사실을 알고 보면 근원이 다 똑같다. 유일신 신앙이다. 그러니까 절대로 다른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그런 신앙이다. 여기서 십자가가 나왔다. 그러니까 불교에서는 십자가가 나올 수가 없다. 나올 필요도 없다. 뭐 안 되어도 할 수 없는 거니까. 그런 데는 십자가가 나올 필요가 없다. 그런데 이건 절대 진리를 추구하다 보니까 양극화현상이 일어나게 되고, 양극화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십자가밖에는 대책이 없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 우리 안에 있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도저히 사람의 생각으로는 해결이 안 된다. 그것은 십자가로밖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뜻이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런 경우에 해답은 무엇이냐 하면 그건 십자가라는 것이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한 것이 없다. 내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내가 반성을 하겠고, 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고치겠지만 나는 백번 천번을 생각을 해도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전히 있다. 그럴 때 무엇이 대답인가? 하나님의 대답이 그 때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보고 물어보면 무슨 대답이 나오는가? 십자가를 내가 너한테 주었지 않았느냐, 2000년 전에 이미 주었지 않았느냐 이것이다. 그것이 대답이다. 그러니까 내가 이해가 되어서 ‘아, 그렇겠다. 아, 내가 참 잘못했구나.’ 하고 이해가 될 때는 십자가가 안 필요하지만, 절대로 나는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이 되거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이 안 되고 있거든 그 때는 ‘아, 이것은 십자가밖에는 해답이 없는 것이구나.’ 그렇게 우리가 알아야 된다는 뜻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유태인과 이방인 문제는, 유태인은 몇 억겁을 살다죽어도 해결이 안 된다. 이방인을 용납한다는 것은 해결이 안 된다. 또 이방인이 유태인이 된다는 것도 몇 억겁을 살다죽어도 햐결이 안 된다. 그래서 십자가가 유일한 대책이 되었다.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성경은 그렇게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지만 구원을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지혜다 이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것이다. 사람의 지혜 속에는 그것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머리를 짜내고 연구를 해봐도 내가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방법은 내 머리 속에는 없다는 것이다. 십자가가 대책이라는 방법은 내 머리 속에는 없다. 서울대학교를 다닐수록 그것은 더 없다. 머리가 좋울수록 더 없다. 미련한 사람은 엉겁결에라도 십자가를 지지만 영리한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대답이다. 그러니까 인류를 위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대책, 유일한 대책은 십자가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이전에 이미 십자가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십자가를 제대로 받지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기독교는 또 다시 구약을 길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유태인이 가졌던 생각과 똑같은 생각을 갖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이것이 답답한 일인가! 이방인들은 다 죽고 자기들만 살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강조하는 집단일수록 더욱 열심이 있다. 여호와의 증인이나 이런 사람들을 보면 무지무지하게 열심이 있다. 왜 그런가? 자기들만 살아남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에 얼마나 신바람이 나겠는가. 그렇지 않겠는가. ‘저 놈들은 다 죽을 것이고 우리만 살아남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까운 것도 없고 귀한 것도 없고, 정말 자기들은 신나 가지고 사는 것이다. 얼마나 이것이 유치하고 안타깝고 졸렬한 것인지 모른다. 하나님이 계신데 그렇게 되겠는가.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이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 그럴 수 없는 분이 아니겠는가. 하나님은 어떤 대책이 있을 거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한테 하는 말이 그것이었다. “하나님한테는 무슨 대책이 안 있겠나? 그러니까 그걸 좀 연구해봐라. 사람한테는 없지만 하나님한테는 있을 거 아니냐? 하나님한테는 당연히 있어야 되지, 하나님도 그것이 없다면 되겠느냐?”&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유일한 대책, 이 대책 안에서 구약의 모순이 해결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해결이 안 된다. 구약식으로 살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 다 죽여야 된다. 유태인 아닌 사람은 다 죽어야 된다. 그런 식으로 살다가 오히려 독일의 히틀러한테 600만명이 학살당헸다. 또 다시 보복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들도 그렇게 했으니까, 또 자기들도 보복을 당할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 피를 우리에게 돌려달라.” 그렇게 말했던 것과 같이 그들은 학살을 당하게 되었다. 어느 날 자기들이 총칼을 쥐게 될 때 그들은 또 그걸 잊어버리고 또 다시 그렇게 하게 될 것이다. 보복의 보복은 계속 하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amp;nbsp; 신성한 대책, 유일한 대책, 완전한 대책인 십자가가 나왔다. 그래서 이제는 이방인과 유대인이 싸울 필요가 없게 되었다. 타협할 필요도 없게 되고, 십자가 안에서 온전히 하나되는 길이 나왔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타협할 필요도 없고 싸울 필요도 없이 하나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나왔다. 우리는 이것을 세상 앞에 전하는 것이다. 온 세상 앞에 선포하는 것이다. 둘이 싸우고 있는 사이에 가서 우리는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내 삷에서 십자가가 적용된 사람이라야 그 자리에 가면 대책이 생기게 되지, 그렇지 않으면 대책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그 중에 한편이 되는 것이다. 이편을 들든지 저편을 들든지 둘 중에 한편을 내가 들어야 된다. 안 그러면 나도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십자가를 가진 사람은 이편도 아니고 저편도 아니다. 제3의 대답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까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혀 다른 대답을 가지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인간의 생각 속에는 이편 아니면 저편, 중간에 타협, 이 세 가지밖에는 인간에게 없다. 더 이상 나올 수가 없다. 오직 하나님에게서만 십자가라는 대책을 갖고 있다. 이것이 바로 아버지 마음이다. 아버지가 되면 사람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들 둘이 죽기살기로 싸우는데, 그 아버지는 처음에는 타협을 시키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절대로 타협을 못한다. 그러면 어찌되겠는가? 아버지한테 나올 수 있는 대책은 십자가밖에 없지 않겠는가. 그러니 아버지가 되면, 어버이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창조자의 마음을 가지면 저절로 하나님의 입장에 설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이런 사건들에 대해서 영적인 의미 이상의 것을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걸 어떤 종교인들은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가지고 걸핏하면 그런 일만 나오면 “구약에 봐라.” 이런 소리가 나오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내가 그 사람보고도 그랬다. “당신들은 지금 장로교를 믿는 사람의 집에 들어가려고 하면 문 안에도 못 들어오게 하지 않느냐, 문 밖에서 내쫓지 않더냐?” 하니까,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데 당신들도 마찬가지 아니냐? 둘이 그렇게 싸우고 있으면 되겠느냐? 무슨 대책을 찾아봐라.” 이렇게 얘기를 했다. 그 사람이 그 대책을 찾는다면 여호와의 증인을 떠나게 될 것이다. 장로교인도 그 대책을 찾는다면 장로교를 떠나게 될 것이고, 여호와의 증인도 그 대책을 찾으면 여호와의 증인을 할 필요가 없게 된다. 종교를 가질 필요가 없게 되어버린다. 십자가가 자기의 유일한 길이니까 종교라는 것은 없어져버린다. 그런데 십자가가 없으면 사람은 종교가 생기게 되어 있다. 무슨 방법인가 하여간 방법을 써 가지고 그것을 회피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 전에 있던 모든 것을 처리해버리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바울이 말하기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내가 전에 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하였다. ‘전에 알던 모든 것’이라는 것 속에 유태 종교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는 유태종교에 철두철미했던 사람이다. 아주 우등생이었다. 그 모든 것, 그 때는 그것이 너무나 고상한 것이었고,&amp;nbsp; 중요한 것이었다. 이방인은 다 죽어야 된다고 생각할 만큼 절대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자기는 배설물로 여겼다고 한다. 왜냐하면 너무너무 유치한 거더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십자가 안에서 종교를 보면 종교는 너무너무 유치한 것이다. 우리가 가서 보면 뭘 하는 짓들이 너무너무 유치한 짓을 하고 있는 것이다. 손을 그어본다던가 종을 친다던가 떡을 입에 넣어본다던가 물에 잠겨본다던가 거룩한 예배를 드려본다던가 이런 것이 십자가 안에서 보면 너무너무 우습고 졸렬하고 유치하고 그런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그것을 하려야 할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해보려야 해볼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저절로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아니, 뭐 그것도 좀 하고 저것도 하면 어쩌겠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진짜로 십자가 안에서 깨끗한 세계를 못 봤기 때문에 그렇다고 할 수도 있다. 정말로 십자가 안에 있는 세계를 본다면 그 무익한 일을 되풀이하지 않게 될 것이다. 무익한 세계로 우리는 다시 되돌아갈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너희가 뒤를 돌아보아 침윤에 빠질 자가 아니고,” 뒤를 본다는 말은 무엇인가? 옛날 하던 것, 그걸 돌아본다는 말이다. 종교적인 모든 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상한 것이다. 그것마저도 배설물로 여겼다는 것이다. 하물며 종교 이전의 것은 더욱 더 야만적인 것이다. 그것을 우리가 미련을 갖고 있다면 그건 우리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십자가 안에 와서도 우리는 옛 이방인의 생활을 동경한다던가, 아니면 옛 종교의 생활을 동경한다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이 된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이 밝히 너희 눈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이것은 누가 너희를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게 하더냐, 누가 너희를 다시 종교로 돌아가게 하더냐 하는 얘기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십자가만이 완전한 대책이라는 걸 볼 수가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 생각과 우리 지혜로는 영원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하나님의 온전하신 지혜로 우리에게 완전한 대책을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것을 하든가 저것을 하든가 할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든가 저렇게 하든가 둘 중에 하나밖에는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제3의 완전한 대책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는 평화의 사람으로, 그 갈등하는 세계 속에 해답을 가진 사람으로 살 수 있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고,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 하신 대로 우리가 하나님께는 영광이고 땅에서는 사람들 중에 평화가 되는 이런 놀라운 위치로 우리를 옮겨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있는 곳에 평화가 있기를 원하고,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완전한 대책이 성취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의 온전하심을 향해서 우리를 불러주시고, 당신의 신성하심을 향해서 우리를 불러모아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안에서 날로 당신의 입장에 서기를 원하고, 당신과 동역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세계 안에서 당신의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들이 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39.민30장 서원에 관한 규례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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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23:47Z</updated>
	    <published>2009-11-10T14:23:47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9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30장 서원에 관한 규례&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 지파의 두령들에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의 명령이 이러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2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破約)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3 또 여자가 만일 어려서 그 아비 집에 있을 때에 여호와께 서원한 일이나 스스로 제어하려 한 일이 있다 하자&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4 그 아비가 그의 서원이나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듣고도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모든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5 그러나 그 아비가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서약이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였은즉 여호와께서 사하시리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6 또 혹시 남편을 맞을 때에 서원이나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경솔히 그 입에서 발하였다 하자&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7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 그 듣는 날에 그에게 아무 말이 없으면 그 서원을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을 지킬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8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 듣는 날에 허락지 아니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고 경솔히 입술에서 발한 서약이 무효될 것이니 여호와께서 그 여자를 사하시리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9 과부나 이혼당한 여자의 서원이나 무릇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지킬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0 부녀가 혹시 그 남편의 집에 있어 서원을 하였다든지 마음을 제어하려고 서약하였다 하자&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1 그 남편이 그것을 듣고도 아무 말이 없고 금함이 없으면 그 서원은 무릇 행할 것이요 그 마음을 제어하려는 서약은 무릇 지킬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2 그러나 그 남편이 그것을&amp;nbsp; 듣는 날에 무효케 하면 그 서원과 마음을 제어하려던 일에 대하여 입술에서 낸 것을 무엇이든지 이루지 못하나니 그 남편이 그것을 무효케 하였은즉 여호와께서 그 부녀를 사하시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3 무릇 서원과 무릇 마음을 괴롭게 하려는 서약은 그 남편이 그것을 지키게도 할 수 있고 무효케도 할 수 있나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4 그 남편이 일향 말이 없으면 아내의 서원과 스스로 제어하려는 일을 지키게 하는 것이니 이는 그가 그것을 들을 때에 그 아내에게 아무 말도 아니하였으므로 지키게 됨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5 그러나 그 남편이 들은 지 얼마 후에 그것을 무효케 하면 그가 아내의 죄를 담당할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30:16 이는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율례니 남편이 아내에게, 아비가 자기 집에 있는 유년 여자에게 대한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28장 1절부터 29장 40절까지 여러 가지 제물들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리고 30장 1절부터 16절까지는 서원에 대한 것이 기록이 되어 있다. 제물에 대한 것을 요약하면, 하나님은 음식을 필요로 하신다 하는 것이다. 음식은 하나님의 만족을 뜻하는 것이니까, 하나님은 만족을 원하신다는 것이다. 사람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고, 또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신 것도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래서 그 이스라엘 백성이 범죄한 후 그 백성을 다시 계수하고 난 후에 이 제물에 관한 율례를 정하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 제정된 백성, 새로 계수된 백성은 곧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다 그런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백성으로 그렇게 부름을 받았다. 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 그건 결국 구체적으로 그리스도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인격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당신이 만족할 수 있는 인격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은 인격 안에서만 당신이 만족하실 수 있다, 그런 말이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하나님은 음식을 요구하시는데, 언제 요구하시는가? 정한 때에 음식을 원하신다 하는 것이다. 아무 때나 아니고 하나님이 정한 때에, 때를 정해 놓았다는 말이다. 그래서 매일, 안식일마다, 매월초에, 유월절에, 칠칠절에, 나팔절에, 속죄일에, 그 다음에 초막절에, 이렇게 정한 날이 있어서 정한 때에 번제를 드리도록 그렇게 했다. 이 ‘정해졌다’는 말은 하나님 앞에 우리가 정해진 음식이다, 그러니까 운명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정해진 존재라는 뜻이다. 이것은 변동할 수 없는, 우리가 아침 점심 저녁을 안 먹을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정한, 결정된 필요라는 뜻이다. 정해진 필요다 하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amp;nbsp; 정해진 필요에 맞지를 않게 되면 우리는 스스로 무익한 자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은 서원에 관한 것이다. 정기적인 제물, 다시 말하면 정해놓고 드리는 제물, 이것은 우리의 본분적인 의무이다. 인생으로 태어날 때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본분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 지어졌다는 뜻이다.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그렇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존재로 사람은 지어졌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운명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무와 책임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를 만족케 할 의무와 책임을 갖고 있다. 곡식은 사람을 살찌게 하기 위해서, 살게 하기 위해서&amp;nbsp; 있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가 생각하면, 혹시 그 곡식이 썩었다던가 먹을 수 없게 되었다던가 그럴 때 그 곡식은 폐기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정해진 존재니까 하나님의 만족에 합당하지 않을 때는 그 인생은 버려진 거라는 뜻이다. 인생의 실패는 무엇인가? 그건 하나님에게 버려진 것이 곧 실패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기적인 제물은 우리의 본분적인 의무이다.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그건 결정된 의무라는 뜻이다. 마치 군대에 가는 것은 내가 가고자 원해서 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에 살려면 대한민국 국법이 20세가 되면 군대에 가야 된다, 3년을 복무해야 된다, 이렇게 이미 국법을 정해놓았기 때문에 내가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가야 되는 문제이다. 이건 국민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마찬가지로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것은 기본적인 의무라는 뜻이다. 아담의 세계에 와서 이것이 얼마나 잘못되어버렸는가 하면,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인 줄 전혀 모르고, 전혀 다른 목적을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처럼 그렇게 사람들이 착각을 하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모양이다. 우리가 본분 상태로 돌아온다면, 본질의 상태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이다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또 우리의 영광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군인이 국가를 위해서 의무를 가질 때 그 군인은 영광이 있고 권리가 있다. 그래서 계엄령이 선포된다. 그러면 전쟁할 때는 군인들이 권리가 있다. 그런데 예를 들어서 내가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 그러면 권리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의 권리, 인생의 권위, 그건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우리의 본분의 의무를 시행할 때 비로소 인권이라는 게 생긴다. 인생의 권위라는 게 생기게 된다. 그러니까 이 본분을 이행하지 않고 내가 권위를 가지려니까 이것이 바로 타락한 현상이다. 그래서 의무를 이행하면 반드시 거기 권리가 따르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본분적인 의무를 이행하면 나는 당연하게 돌아오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권위이다. 이 권위 앞에 만유가 복종하도록 된 것이다. 특별히 천사가 그러한 인격 앞에 복종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다. 천사는 부리는 영이다 하는 말은 그런 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사람이 자기 권위를 상실했기 때문에 지금 반대로 모든 종교에서 천사를 숭배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왜냐하면 자기 권위가 없으니까 천사가 더 권위 있게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처럼 되려고 모든 종교가 노력을 하고 있다. 천사처럼 되려고 한다는 뜻은 무슨 뜻이냐 하면, 어떻게 하면 육신의 제한, 제한적 인생을 벗어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선을 한다던가 도를 닦는다던가 기도를 해서 신비에 도달한다던가 은사를 받는다던가 이런 모든 것들의 저변에 깔려 있는 마음은 어떤 것이냐 하면, 모두 흙으로 지어진 어떤 의무를 가진 인생, 다시 말하면 책임을 가지고 있는 인생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근성이다. 세상에서는 그런 걸 보고 위대하다고 생각하다. 왜 위대하다고 하느냐고 하면 세상이 바로 천사를 흠모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천사는 육체가 없기 때문에 죄를 안 지을 것이다. 천사를 육체가 없기 때문에 세상의 고락이 없을 것이다. 천사를 육체가 없기 때문에 인생이 가지고 있는 모든 불행한 문제가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와 같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사람의 권위와 영광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흙으로 지어진 인생의 권위와 영광이 발견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내가 흙으로 지어진 인생의 자리를 벗어날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세상은 결국 누구든지 주인이 되고 싶고 종이 되고 싶지 않는다. 왜냐하면 종의 영광이라는 게 없으니까. 어딜 가도 주인의 영광만 있지 종의 영광이라는 게 없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든지 종이 되려고 하지 않는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종이 되려고 한다. 왜냐하면 종의 영광이 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 눈에 종의 영광이 보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있다. 우리 눈에 흙으로 지어진 인생의 영광이 보일 때 비로소 우리는 천사를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천사를 부리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종교를 벗어나게 된다. 그렇지 않고는 어떤 사람도 종교를 벗어날 수 없다. 율법과 종교를 벗어날 방법은 그것밖에는 없다. 그래서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가졌다. 우리와 똑같은 성정을 가졌고, 똑같은 운명을 가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갖지 못한 운명을 갖고 있더라.’ 이것이 발견되어야 우리가 참으로 예수를 따를 수 있다. 그렇기 전에는 우리는 예수를 따를 수가 없게되는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참 많이 있다. 왜 믿는가? 그는 나보다 능력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믿고 있는 것이다. 믿는 것과 따르는 것은 다른 것이다. 따르는 문제는 내가 그와 같이 되겠다는 것이며, 그의 운명에 내가 동참하겠다는 걸 말하기 때문에 믿는다는 건 아주 다른 문제이다. 갓바위에 가서 부처를 믿는다던가, 알라를 믿는다던가, 이런 믿는 것은 모두 다 거기 무슨 능력이 있으니까 내가 그 능력이 필요해서 믿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예수를 따르는 문제는 그 문제가 아니다. 그의 영광을 보고 우리가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본분적인 의무와 책임을 이행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창조 때 부여해놓은 권위와 영광이 주어지게 되어 있다. 권위와 영광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없는 게 아니고,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없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이 되어야 하는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래서 영광이 없는 것이지,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영광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신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영광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아, 육신만 아니면 내가 죄도 안 지을 텐데. 육신만 아니면 신앙생활을 잘 할 텐데, 육신만 아니면 뭘 잘 할 텐데.’ 전부 이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교회마다 절마다 가면 ‘어떻게 하면 육신을 벗어버릴까, 어떻게 하면 육신을 극복할까?’ 그걸 모두 노력하고 있다. 아무리 해도 사람은 육신이기 때문에 육신을 벗어날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런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왜 그런가? 육신을 벗어나야 완전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육신을 벗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불완전하다 라는 결론을 스스로 갖게 된 것이다. 우리는 육신을 벗어나서 완전해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만족이 될 때만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정기적인 제물, 이것은 우리의 본분적인 의무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태어날 때 그렇게 결정됐다 그 말이다. 우리 자신이 그렇게 안 하면 우리는 무가치하도록 그렇게 지어졌다. 마이크가 확성에 사용되지 않으면 무가치하듯이 사람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인격이 되지 않으면 무가치하도록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정기적인 제물에 관한 의미이다. 그래서 매일, 매주일, 매 월초에 &lt;/SPAN&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제물을 드리게 하고&lt;/SPAN&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 또 유월절, 나팔절, 칠칠절, 속죄절, 초막절, 이런 절기를 두었다. 이 절기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것이었다. 잔치하는 것이니까 축제를 벌이는 그런 것이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서원은 어떤 것인가? 이것은 본분적인 의무가 아니고, 자원하는 헌신이다.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서원이다. 그러나 정기적인 제물은, 절기의 제물은 내가 하고 싶으면 하고 안 하고 싶으면 안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내 운명의 의무이기 때문에 내가 안 하면 내가 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은 내가 안 한다 해서 망하는 건 아니다. 서원은 내가 안 한다 해서 벌받는 것도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이건 약속이니까, 내가 어떻게 하겠습니다 라고 내가 서원을 하는 거니까 이건 내 자유에 속하는 일이다. 그런데 왜 이것이 그러면 필요한 한가? 제물을 드릴 때 전제라는 것이 있다. 고기를, 또는 떡을 드리는데 그 위에다 술을 붓는다. 그러면 술을 왜 붓는가? 그건 제물을 더욱 강화시키기 위해서, 향기가 나기 위해서 술을 부었다. 밥을 먹으면서 어떤 사람은 반주를 한다. 반주를 왜 하는가? 소화력을 더 왕성하게 하기 위해서, 기분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다. 술이라는 건 기분을 더 좋게 하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그걸 먹어서 살찌는 것도 아니고 약이 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단지 기분을 더 좋게 하려고 먹는다. 제물과 전제와의 관계, 그러니까 제물을 있는데 전제가 없다. 그러면 잔치가 안 되는 것이다. 어느 집에 잔치를 벌였는데, 소고기도 많았고 돼지고기도 많았고 떡도 많았다. 그런데 술이 없었다. 그러면 흥이 안 나는 것이다. 노래부를 생각이 안 난다. 돼지고기 먹고는 노래부를 생각이 안 나는 것이다. 소주를 먹어야 그래도 노래부를 생각이 나고 잔치 기분이 나지, 고기를 많이 먹는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결국 제물에는 전제가 필요했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은 본분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의무를 가졌는데, 그러나 이 본분적인 의무만 가지고는 무언가 좀 부족하다는 것이다. 뭔가 좀 부족하다. 생명은 유지되지만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서원이라는 게 필요하게 됐다. 자원적인 헌신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사용할 때는 본분적인 의무를 깨달은 사람에 한해서 그 사람이 자원할 때, 서원할 때 하나님이 사용을 했다. 내가 아무리 본분적인 의무가 있다 하더라도 내가 서원하지 않는다면, 자원하지를 않으면 하나님이 안 썼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얼마나 많이 사용하느냐, 얼마나 크게 사용하느냐 하는 문제는 서원에 달려 있다. 얼마나 잔치가 더 즐거우냐 하는 것은 술이 얼마나 많으냐에 달려 있다. 고기가 많으냐 안 많으냐 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에 관계된 것이고, 술은 즐거움에 관계된 것이다. 그래서 헌신에 대한 서약이 없으면, 서원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걸 사용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서, 분명히 쇠는 쇤데 이 쇠가 칼이 되기로 작정하지 않는다면, 그 쇠는 쇠로 있을 뿐이지 칼이 될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일 수는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서원하지 않는다면, 내가 하겠다고 하지 않으면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여를 할 수가 없다. 이래서 서원이 필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먼저는 정기적인 제물이고, 두 번째는 서원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정기적인 제물은 생명에 관계된 거니까 필수적인 것이고 없으면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서원은 안 해도 된다. 안 해도 되긴 되지만, 그러나 내가 하나님께 사용되지를 않는다는 것이다. 영광스럽게 쓰여지지를 않는다. 그래서 영광스럽게 쓰여지는 사람마다 다 ‘아,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되어야 되겠구나.’ 하는 맹세를 갖고 있고, 그런 소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께 쓰여지지, 그런 소명이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여질 수 없다. 우리 교회 안에서도 생각해보자. 우리 교회 안에서도 내가 그냥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내가 ‘아, 사람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살 수 있다. 또 내가 하나님의 만족이 되는 음식이 되기 위해서 ‘아, 나는 인생에게 주어진 본분을 지켜야 되겠다.’ 하고 살 수가 있다. 그런데 내가 만일 하나님을 위해서 쓰여져야 되겠다고 하는 그런 서원이 없으면, 나는 그냥 교회 안에 있기만 하지 내가 그 교회를 기쁘게 할 수가 없다. 술이 아니기 때문에 즐겁게 할 수가 없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을 이룰 수가 없게 된다는 걸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서원이 필요하게 되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우리는 본분적인 의무를 알아야 되지만, 두 번째로는 우리가 서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내가 그렇게 쓰여지기를 원합니다’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내가 쓰여질 수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것을 억지로 뺏지는 않으니까, 하기 싫은 사람을 끌어다가 억지로 시키지는 않으니까. 왜냐하면 억지로 시켜놓으면 괜히 고래고래 소리지르고 이러니까 안 될 것이 아니겠는가. 거룩한 성전에서 돼지 목 따는 소리를 하고 앉아있으면 곤란하지 않는가. 그러니까 자원하는 사람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교회 안에서 즐거운 노래가 나온다. 안 그러면, 억지로 잡아다 놓으면 돼지막처럼 그렇게 된다. 그래서 서원은 헌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에 서원이 꼭 있어야만 하나님이 사용할 수 있다 하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모세를 불렀을지라도 모세가 “나는 안 하겠습니다.” 이랬으면 할 수 없는 것이다. 바울을 불렀을지라도 “나는 안 하겠습니다.” 하면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풀어서 결국 헌신할 수 있는 서원을 그에게 주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서원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사람이 여호와께 서원하였거나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약하였거든 파약하지 말고 그 입에서 나온 대로 다 행할 것이니라.” 내가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원하고, 그리고 내가 내 마음을 제어한다는 말은 내가 내 마음대로 안 하기로, 내 즐거운 걸 안 하고 내가 하나님의 즐거운 걸 위해서 내 즐거운 걸 자제하겠다 이런 뜻이다. ‘제어한다’는 말은 ‘내가 고통을 받겠다’ 이런 말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것을 따르지 않겠다. 이것을 만일 서약했거든 그러면 파약하지 말고 입에서 나온 대로 행하여야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고 봉사하는 일이 자기를 제어하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자기 마음을 제어하는 일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왜 사람이 헌신하기를 원치 않는가? 그건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려니까 그래서 헌신을 안 하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를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은 헌신을 할 수가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려면 재미있는 것만은 아니다. 재미가 없을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는 것이다. 그 어려운 것을 하려면 내가 내 자신을 제어해야 된다. 마라톤을 해서 승리를 하려는 사람이 숨가쁘다고 그만둔다. 그러면 안 되는 것이다. 死線을 넘어야 되는 것이 아닌가. 死點을 넘어서 내가 완전히 죽을 각오를 하고 그렇게 달려야 뚸어지는 거지, ‘아이구, 적당히 하다가 숨가쁘면 그만두어야지.’ 이래 갖고는 절대로 선수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을 양성하는 과정에서 사점, dead point라는 게 있다고 한다. 그 point를 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 때는 내가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그런 거나 마찬가지이다. ‘아, 죽는구나.’ 그러다가 무엇인가 탁 터지면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또 다음 단계로 올라가서 선수가 되는 그런 모습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해서, 그리고 누구를 위해서 살려고 하는 사람은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면 살 수가 없다. 조금도 나는 내 마음을 제어 안 하겠다, 이러면 남을 위해서 살 수가 없다. 우리 교회에서 특별히 이런 경향이 많이 있는데, 왜냐하면 생명의 자유, 그것을 주어놓으니까, ‘아이구, 나는 내 마음을 조금도 제어하지 않겠다.’ 이런 생각을 갖기가 참 쉽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해서 일할 때는 자기 마음을 제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그러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 수가 없다.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려면 내 하고 싶은 것을 안 해야 되는 것이다. 내가 엄마가 되어서 애기를 키우려고 생각해 보라. 아기를 키워야 되겠다는 목표가 생긴다면 내가 내 마음을 제어해야 아기를 키울 수 있지,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하면 엄마 노릇도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내가 놀러가고 싶으면 애기를 놔두고 놀러 가버린다. 그러면 애기가 굶어죽을 것이 아닌가. 그러니까 무엇이든지 무언가를 위해서 하려면 자기를 제어하지 않고는 할 수 없다. 자기를 제어할 줄 모르는 사람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다. 그 사람은 그냥 놀고먹는 것밖에 못한다. 어린아이들처럼 무조건 그냥 주는 것만 먹고 노는 이것밖에는 못한다.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이 무언가를 할 수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상에서 출세를 하려고 하더라도 자기를 제어할 줄 알아야 되고, 공부를 하려고 하는 사람도 자기를 제어할 줄 알아야 되고, 하여튼 일을 할 때는 , 무엇인가 할 때는 제어가 필요하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하게 된다. 그래서 공부도 꼭 하고만 싶어서 할 수는 없지 않는가. 어느 때는 잘 풀려서 재미있을 때도 있지만, 어느 때는 답답하고 안 될 때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그것을 자기가 참고 하는 것이니까 결국 자기를 제어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 때는 나는 내 마음을 제어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내가 누구를 위해서 살 수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이것은 율법적인 의미하고는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자원해서 서원한 것이니까. 율법은 내가 자원하지 않아도 나에게 부과된 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서 내가 내 마음을 제어하는 것은 내 자원에 의한 것이다. 내가 그렇게 하기로 서원을 했기 때문에 그 서원을 지키기 위해서 나는 내 마음을 제어한다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를 위해서 내가 무엇을 하겠다고 내 인생을 결정했으면 그 때는 내가 그 결정에 따라서 내 자신을 제어를 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는 이루어갈 수가 없다. 그래서 바울이 그 숱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어찌하든지 자기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고 확대되기를 바랐기 때문에 자기를 제어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자유자가 아니냐. 내가 왜 내 마음대로 못하겠느냐. 나는 모든 걸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내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내가 내 자신을 제어한다.”고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무엇을 하든지 성공할 사람은 제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한다. 감정에 치우쳐 가지고 감정이 난 대로 하는 사람, 이런 사람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직장에 갔다가 수틀리면 그냥 발로 차버리고 나오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결국은 아무 것도 못한다. 그걸 못 고치면 평생 아무 것도 못한다. 자기가 거기서 먹고살려니까 기분이 나쁘지만 참아야 된다. 자기 마음을 다스려야 된다. ‘아, 안돼. 내가 여기서 한방 치고 나가면 되지만, 내가 그러면 직장이 떨어지는 것이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지 못하고, 그러면 결국 나는 놈팡이 되는구나. 아, 그러면 안 되겠구나. 내가 제어를 해야지.’ 이렇게 제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야 승급을 할 수 있지, 상관이 싫은 소리를 좀 한다 해서 뒷발질을 하고 나와버리면 어디 가면 싫은 소리 안 하는 데가 없겠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에 어디 가면 없겠는가. 그러니 그런 사람은 평생 이리 갔다 저리 갔다 뛰어다니다가 그만두는 것이다. 수틀려 가지고 나온 사람, ‘이거 아니면 할 거 없냐.’ 이런 식으로 나온 사람, 사실 뭐 별 것도 아니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다. 그런 사람은 아무 것도 못한다. 좌우지간에 뭔가를 성취할 사람은 제어하는 것이 필요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기계도 그렇고, 모든 데는 제어장치가 있다. 기계가 제어장치가 없으면 그 기계는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쓸 수가 없다. 제어장치 때문에 그 기계는 쓸 수가 있다. 사람도 제어장치가 있어야 그 사람이 사용될 수가 있다. 그래서 누구에게 인가라도 제어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도 그 사람을 제어를 못하겠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누구도 그 사람을 제어를 못 시킨다, 이러면 자동차가 굴러만 가지 브레이크가 없는 자동차와 똑같은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제멋대로 가다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잘 간다고 소용이 있겠는가. 엔진이 마력이 좋다고 되겠는가. 가다가 낭떠러지가 있으면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싸구려 자동차라도 브레이크가 있으니까, 그 자동차가 안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제어기가 있는 사람, 하나님의 제어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내가 남의 제어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린아이들을 키울 때도 제어를 가르쳐야 한다. 우리 교회에서 특별히 문제가 되는 것은 너무 자유를 주어서 제어를 너무 안 하면 제어가 전혀 없는 줄로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앞으로 사회생활 하다 보면 그게 어렵게 된다. 왜냐하면 사회에 가면 제어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는 어려서 제어를 전혀 안 받고 자랐기 때문에 제어만 오면 자기는 못 견딘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사람은 역시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제어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그래서 할 것과 못할 것, 그것을 정해 놓아야 된다. 이건 네가 할 수 있지만, 이것 못한다 하는 걸 정해놓아야지, ‘너는 무엇이나 해도 된다.’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래 놓으면 온 천하가 다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되는 줄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될 경우에 그 사람이 크면 뭐가 되겠는가 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될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를 제어하실 분이 있다는 걸 아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말하면 ‘아, 나는 제어를 받는 자고, 나를 제어하실 이가 있구나. 내가 아무리 원해도 안 되는 것도 있구나. 또, 내가 아무리 원한다 하더라도 나를 막으신 분이 있구나.’ 이걸 우리가 알아 가는 것이다. 이것이 어른이 되어 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애기 때는 부모의 절대적인 보호를 받고 자라니까 제어라는 걸 모르다가, 놀이방에 가면 제어를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엄마가 아니니까 제어를 받게 된다. 그리고 친구들을 만나게 되면 또 제어를 받게 된다. 그래서 ‘아,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것도 있구나.’ 이런 것을 처음 배워 가는 것이다. 이것이 사회생활을 해나가는 길이다. 이걸 전혀 안 배우면 안 된다는 걸 알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서원을 지키기로 한 사람은 반드시 자기 마음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를 하려고 하더라도 내 마음을 제어할 줄 모르면 전도를 못한다. 예를 들어, 가서 얘기를 했는데 상대방이 기분 나쁜 소리나 하고 비꼬는 소리나 하고 이렇다. 그러면 속에서 화가 난다는 것이다. 그런데 화난 것을 화풀이 해버리면 어떻게 전도하겠는가. ‘아, 내가 그래도 전도자니까 내 마음을 제어하고 내가 참아야지. 그래야 저 사람을 구원하지.’ 하고 제어를 해야 그 사람에게 다시 말할 수 있지, ‘야, 내가 해먹을 것이 없어서 너한테 이런 짓하고 있나. 네가 나한테 돈을 주나 뭘 주나. 구원받기 싫으면 그만둬.’ 이래버리면 한 사람도 전도를 할 수가 없다. 모든 일에 우리는 꼭 제어가 필요하다. 율법적인 제어가 아니라, 우리의 목표를 위한 제어가 필요하다. 내가 어떤 목표를 세웠으면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내 자신을 제어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서원을 하는데, 처녀가 서원을 했을 경우, 다시 말하면 친정 아버지 집에 있을 때에 서원했을 경우에는 자기가 아무리 서원했을지라도 그 친정아버지가 최종적인 결정권을 갖는다는 뜻이다. 그래서 친정아버지가 허락을 하지 않으면 내가 서원을 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무효라는 것이다. 이 처녀는 영적으로 말하면 믿는 이들이다. 하나님의 한 백성을 말한다. 그러면 친정아버지는 누군가? 이것은 하나님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믿는 사람, 이런 관계에서 내가 설사 아무리 서원을 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허락이 없으면 우리의 서원은 무효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서원을 해야지 원치 아니하는 서원을 했다. 그것은 무효라는 뜻이다. 서원이라고 다 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허락하는 서원이라야 된다 그런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부인이 서원했을 경우이다. 그것은 자기가 아무리 서원을 했을지라도 남편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된다 그런 원리이다. 여기서 부인은 누구고, 남편은 누군가? 부인은 교회고, 남편은 그리스도이다. 믿는 이와 하나님, 전세계에 믿는 이들이 있다. 불특정 다수의 믿는 이들이 있다. 그 다음에 하나님이 있다. 이것은 모두 개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아직 처녀이다. 아직 시집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런데 교회는 처녀가 아니고 시집간 사람이다. 그래서 남편이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가 지금 한 단계 발전한 것이다. 처녀와 아버지, 그 관계에서 남편과 아내, 이런 관계로 더 구체화된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교회이다. 옛날 이스라엘 시대에는 하나님과 사람, 이런 관계였다. 맨 처음에 에덴 동산에서는 여호와와 아담, ‘이스라엘 백성과 여호와’ 할 때는 여호와와 그 백성, 예수님 이후에 교회시대에는 그리스도와 교회, 이런 식으로 구체화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우리의 서원이 있다 하더라도 그 서원은 그리스도에게 최종적인 결정권이 있다. 그리스도의 허락이 없는 것은, 그가 원치 아니하는 것은 우리가 서원해도 소용이 없다 그런 얘기이다. 교회가 아무리 무엇을 결정했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만일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소용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교회를 이렇게 한다 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서원을 했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만일, 그리스도가 만일, 남편이 약속을 원치 않는다면 그건 할 수 없는 일이 된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어떤 권위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권위 아래 있는 우리 자신들, 우리는 처녀고 또 우리는 부인이고, 그런 입장이다. 하나님은 아버지고 남편의 입장이고, 우리는 처녀고 부인인 입장이다. 그래서 우리 위에는 항상 권위가 있다. 그 권위에 의해서 우리의 것은 결정된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과부나 이혼당한 여자는 자기 책임이라는 것이다. 얼른 생각하면 ‘야, 그것 좋겠다. 자기 마음대로 하고, 누가 하라는 말도, 하지 말라는 말도 할 사람도 없고, 그러니까 내가 서원하면 하고, 내가 서원 안 하면 안 하고, 그러니 얼마나 좋겠나.’ 이렇게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게 참 이상한 이치가 있다. 이 말은 머리가 없어졌음을 상징한다. 과부가 됐다는 것은 내 남편이 없다는 말이니까 나를 제어할 자가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말하면 나를 제어할 그리스도가 없고, 나를 제어할 하나님이 없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요한 계시록에 큰물을 타고 있는 한 음녀가 나오는데 그는 과부이면서도 자기는 전혀 과부가 아니다 이렇게 말한다는 것이다. “나는 여황이다”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걸 계시록에서 얘기한다. 이건 권위 아래 있지 아니하고, 자기 스스로가 자고해져서 높아졌다는 걸 말한다. 그러니까 권위 아래 있는 자에게는 자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어느 편을 택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내가 자유를 위해서 과부가 될 것이냐, 아니면 내가 제한 안에 있는 아내가 될 것이냐 이 문제이다. “시집을 나는 안 가겠다.” 이 말은 ‘나는 권위 아래 있지 않겠다.’ 이런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시집을 가겠다.” 이 말은 ‘나는 권위 아래 있겠다.’ 이런 말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여자들은 다 시집을 가려고 한다. 왜냐하면 권위 아래 있는 것이 좋으니까. ‘아, 나는 혼자 살지 절대로 결혼 안 한다.’ 이것은 결국 ‘나는 권위 아래 들어가기 싫다.’ 이런 말이 되지 않는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무엇이 좋은가? 아비가 있는 딸이 좋은가, 아비가 없는 딸이 좋은가? 남편이 있는 아내가 좋은가, 남편이 없는 아내가 좋은가? 어느 것이 좋은가? 아담은 무엇을 택했는가 하면 반대를 택했다. 아비 없는 딸을 택했고, 남편 없는 아내를 택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이다.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 정녕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 그 때 아담은 속은 것이다. 그래서 지금 모든 인류의 소망은 무엇이 되기를 원하느냐 하면 과부와 이혼당한 여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영적으로 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두 자기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자기 자유를 누리려고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는 권위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 권위 아래 있지 않기 때문에 한편으로 좋은 것 같이 보이는데 이 사람은 축복이 없다는 것이다. 권위는 반드시 축복을 동반하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우리는 헷갈리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세상에는 권위 아래 있지 않는 것이 좋은데, 그렇지 않는가. 시어머니 없는 것이 좋고, 남편 없는 것이 좋고, 아버지 없는 것이 좋고 이런데, 어째서 권위는 축복이라 하는가? 세상은 사탄으로 말미암아서 조직된 것이다. 그래서 어디든지 그 권위는 나한테 항상 저주가 된다. 왜냐하면 그 권위는 억압을 하니까, 내 권리를 박탈하는 것이 권위이기 때문에 권위가 없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민주국가, 자본주의 국가라는 것은 무얼 말하는가 하면 권위가 없는 국가를 말한다. 사회주의 국가나 독재국가는 권위가 있는 국가를 말한다. 왜 우리는 자유국가를 원하느냐 하면 인간의 권위는 사람을 억압하기 때문에 그 억압에서 해방되려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투쟁이다. 지배하려는 자와 지배를 안 받으려는 자의 투쟁인 것이다. 이것이 역사이다. 그래서 지금 결국 누가 승리했느냐 하면, 현대사회로 올수록 지배를 안 받으려고 하는 다수의 민중이 점점 승리를 해 가는 것이다. 고대사회나 중세사회로 갈수록 권위 아래에 있는 백성이었다. 그런데 현대사회로 올수록 권위가 없어지고 자유가 생겨지는 그런 사회로 온 것이다. 미국은 그 중의 대표적인 나라이다. 그 나라는 권위가 있는 나라가 아니고 자유가 있는 나라이다. 그래서 미국을 좋다고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상에서는 권위가 없을수록 좋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가 처음 출발하면서 무슨 말을 했느냐 하면 ‘작고 강한 정부’ 그걸 얘기했다. 그 말은 지금까지의 정부가 너무 커서 권위주의적이었다 이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권위주의적 정부가 되지 않겠다. 작고도 능력 있는 정부가 되겠다. 이것을 약속을 해왔다. 그랬더니 요즘 지하철 폭발사고가 난다든지 이런 것이 되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에는 위에서 콱 누르니까 어쩔 수 없이 벌벌 떨고 복종을 하다가 정부가 작아지니까 밑에서 제멋대로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위에서 아무리 말해도 안 듣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까 지하철이 터진다, 열차가 탈선을 한다, 비행기가 들이박는다, 이런 사건이 막 나지 않는가. 그래서 김염삼 정부가 잘못하고 있다 이런 얘기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잘못한 게 아니다. 알고 보면 과거가 잘못됐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과거가 너무나 억압정치를 해왔기 때문에 공무원들이 타성에 젖어서 그렇다. 그래서 지금 그렇게 조지지 않으면 말을 안 듣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조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권위는 나를 억압하는 것이 권위이다. 나를 축복하는 게 권위가 아니고 나를 억압하는 것이 권위이다. 시어머니를 며느리들이 왜 싫어하는가? 자기를 억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싫어하는 것이다. 심지어 아들들도 부모를 왜 싫어하는가? 자기를 억압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싫어한다. 아내들은 남편을 왜 좋아하지 않는가? 남편이 억압하기 때문에 좋아하지 않는다. 전부 해방 받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위가 잘못됐기 때문에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나 참된 권위는 축복을 갖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권위는 축복을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 안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분은 우리의 창조자다. 창조는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창조 안에는 무한한 축복을 내포하고 있다. 아버지는 나한테 무한한 축복을 갖고 있다. 남편은 나에게 축복을 갖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로 회복하려면 권위가 있는 것이 참으로 좋은 것이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고, 권위가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이혼당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불행한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원을 하게 되는 이 과정에서 권위 앞에 순종하는 우리 자신이 여기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래서 권위 아래 있는 것, 이것이 참 복이다. 권위 앞에서 내가 서원하는 것이 참 복이다 하는 걸 우리가 깨달아야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상의 관념을 가지고 우리가 성경말씀을 읽으면 이건 정반대이다. ‘세상에는 상관이 없는 게 좋던데. 교장 선생 없는 게 편하던데.’ 그렇지 않는가. 학교 선생님들은 저 놈의 교장 선생이 빨리 퇴근하면 좋은데, 노인네들이 집에 가야 할 일도 없고 하니까 기어코 앉아서 7시나 8시까지 버티고 앉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젊은 사람들은 나가서 놀고 싶기도 하고, 자기 집에 할 일도 있고 이런데, 교장이 안 나가니까 나갈 수가 있는가? ‘아, 저놈의 교장, 왜 저렇게 안 나가고 있는고.’ 그런데 교장들은 늙어갈수록 더 부지런해지는 것이다. 그래서 할 일이 없으니까 학교에서만 충성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젊은 선생들은 아주 괴롭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멋쟁이 교장선생님은 어떻게 하는가 하면 5시 땡 치면 자기가 먼저 나가버린다는 것이다. 그러면 아주 인기 있는 교장선생님이다. ‘야, 우리 교장선생님은 멋있는 사람이야.’ 4시 반에 나가는 교장선생님은 더욱 멋있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권위는 모두 억압이니까 전부 다 싫어한다. 누가 억압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겠는가. 이걸 가지고 우리가 하나님을 잘못 생각하면 ‘아니, 하나님은 억압을 한다. 내 자유를 뺏긴다.’ 이렇게 생각하기 쉽다.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권위 안에는 축복이 포함되어 있다. 축복이 있는 권위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걸 깨달은 사람은 권위에 순종하는 즐거움을 깨닫게 될 것이고, 권위 안에 있는 축복을 깨닫게 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세상에서도 우리가 만일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앞으로는 손해나는 것같지만 뒤로는 이익이 된다. 예를 들어서 세상의 권위라도 그 권위에 내가 순종하게 된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아이구. 저거 참 못났다. 똑똑하지 못해.” 이런 소리를 들을지 모른다. 그런데 뒤로 가면 이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반대로 말끝마다 대드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겉으로 보기에는 똑똑한 것같다. 그런데 뒤로 보면 그 사람은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계속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칼자루를 누가 쥐고 있는가? 위에서 쥐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 사람한테 아무리 대들어봤자 결국은 자기가 다치는 거지, 칼자루를 쥔 사람이 다치겠는가. 알고 보면 그게 멍청한 짓이다. 세상에서도 이 원칙을 적용한다면 우리는 불의의 권세 안에서라도 우리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다. 하물며 하나님의 권위 앞에 순종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자기의 영원한 권위, 신성한 권위를 가지고 우리를 통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민주국가가 아니다. 왜 민주국가를 했는가? 세상의 권위가 악하기 때문에 민주국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국가를 하는 게 아니고, 영원하고 신성한 권위의 통치를 받자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러니까 세상과는 아주 다른 입장이라는 걸 우리가 알 수 있게 되고,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면 전혀 다른 세계다 하는 걸 알게 된다. 그러니까 미국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잘 살겠지만 하나님 나라에 오면 적응하기가 좀 어려울 거라고 생각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권위라는 게 없는 거니까. 세상에는 그것이 좋다. 권위주의가 아닌 것이 참 좋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는 정반대니까 그 권위에 얼른 적응할는지 그게 걱정이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 잘 믿는다고 하고 있는데, 그 때 가서 적응이 잘 될 건지 걱정이 된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은 자유만 알지 권위를 잘 모르니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권위 앞에 우리가 서원하기를 배워야 하고, 서원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자기를 제어할 줄 알아야 하고, 자기를 제어할 줄 아는 사람은 권위 아래 있는 사람이고,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가 하나님의 음식으로서, 당신의 만족을 위한 인격으로서 우리가 창조된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쓸모 없는 흙이었지만 당신이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써 당신과 호흡을 같이할 수 있는 인생이 됐고, 당신의 구속하심을 입어 가지고 우리가 당신의 만족이 되는 음식이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서 하나님의 만족이 되신 것을 우리가 봤고, 그 만족이 인생의 최고의 영광이라는 걸 보게 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그 뒤를 따라서 당신의 일상적인 만족이 되기를 원하고, 절기의 만족이 되기를 원하고, 매 안식일마다 매 월마다 매 절기마다 당신의 만족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이 당신을 위해서 서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고 당신 앞에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당신의 나라의 확장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헌신하기를 원하고, 당신의 영광 앞에 우리가 동참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의무와 책임을 깨닫지 못한 사람은 서원을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건 자기 입장이 되어버리기 때문에 서원이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일차적으로는 자원병을 원치 않는다. 하나님은 징병을 했다. 언제든지 사람을 끌어다가 사용했지, 내가 하겠다 이런다 해서 하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징병을 받았다 하더라도, 부름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하나님께 또 다시 서원을 해야 한다. 그것은 자원의 서원이다. 자원하는 서원이다. 이것은 그냥 자원병하고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내가 서원한 것이니까 이것은 그냥 내 용기로, 내 혈기로 자원한 것하고는 다른 것이다. 모세나 다윗이나 바울이나 모두 하나님이 징병을 했지, 자원병을 부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름 받은 다음에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됐는가? 자기들이 서원을 하고 있다. 부름 받은 다음에 자기들 스스로가 하나님 앞에 자기 마음을 제어하기를 서원하고 있고,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기를 서원하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다면 우리는 마음을 제어하기로 서원해야 된다는 걸 알 수 있다.&lt;/SPAN&gt; &lt;/P&gt;
	    </cont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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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38. 민29장 나팔절에서 초실절까지 </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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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20:40Z</updated>
	    <published>2009-11-10T14:20:40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4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4pt; COLOR: #000000; LINE-HEIGHT: 29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민29장 나팔절에서 초실절까지&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0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0pt; COLOR: #000000; LINE-HEIGHT: 21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 칠월에 이르러는 그 달 초 일일에 성회로 모이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나팔을 불 날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 너희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을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로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4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5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리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6 월삭의 번제와 그 소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 그 규례를 따라 향기로운 화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7 칠월 십일에는 너희가 성회로 모일 것이요 마음을 괴롭게 하고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8 너희는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 년 된 수양 일곱을 다 흠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9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0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1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 것이니 이는 속죄제와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2 칠월 십오일에는 너희가 너희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 칠 일&amp;nbsp; 동안 여호와 앞에 절기를 지킬 것이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3 너희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 송아지 열셋과 수양 둘과 일 년 된 수양 열넷을 다 흠 없는 것으로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4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수송아지 열셋에는 각기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둘에는 각기 에바 십분지 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5 어린 양 열넷에는 각기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6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7 둘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둘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8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19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0 세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 하나와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1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2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3 네째 날에는 수송아지 열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4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5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6 다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아홉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7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8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29 여섯째 날에는 수송아지 여덟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0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1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2 일곱째 날에는 수송아지 일곱과 수양 둘과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열넷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3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4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5 여덟째 날에는 거룩한 대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6 번제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를 드리되 수송아지 하나와 수양 하나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7 그 소제와 전제는 수송아지와 수양과 어린 양의 수효를 따라서 규례대로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8 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상번제와 그 소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39 너희가 이 절기를 당하거든 여호와께 이같이 드릴지니 이는 너희 서원제나 낙헌제외에 번제, 소제, 전제, 화목제를 드릴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9:40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로 명하신 모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이 절기들이 두 부분으로 갈라져 있는데, 유월절과 무교절과 초실절과 칠칠절, 이것이 한 그룹이고, 나팔절과 속죄제와 초막절, 이것이 또 다른 한 그룹으로 되어 있다. 두 번째 그룹은 전부 칠월 한 달 동안에 들어있는데, 이것이 해의 두 번째 부분의 첫 번째 달에 속한다. 유월절이 첫 달, 정월달에 속하듯이 나팔절과 속죄절과 초막절은 칠월달에 속하니까, 일년을 둘로 나누어서 볼 때 후반부에 속하는 그런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날은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절기들은 사람에 의해서, 우리의 노력에 의해서 준비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전적으로 준비됐기 때문에 사람은 아무 노동도 하지 말아라 하는 뜻이다. 이 이치는 모든 성경에서 다 똑같은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준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그것을 조금도 부족하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일한다는 뜻은 부족하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더 채우려고 한다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해주신 것에 대해서 우리가 무엇을 더하려고 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준비해준 것에 대해서 불만스러워한다는 뜻이다. 만족해하지 않는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여기서 인생을 볼 때, 하나님이 우리 인생을 이렇게 만들어주었으면 이것 자체를 완전하고도 만족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만일 거기서 조금이라도 모자란다고 생각하고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그 때 아담처럼 선악과를 먹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아무 것도 부족함이 없다 그랬으면 선악과를 먹을 필요가 없을 건데, “네가 이것을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그 말을 듣고 아담은 선악과를 먹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인생은 안식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하는 뜻이다. 창세기 2장 처음에 보면 “지으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매 여호와께서 그 날을 복 주어 거룩하게 했다”, 그 날이 바로 안식일이다. 이것은 사람은 결국 안식일로부터 시작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무엇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가 성취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취해놓은 걸 우리가 누리는 것이 인생이다. 이런 원리를 우리가 깊이 인식하게 된다면 우리 인생은 완전하게 만족한 인생이 되는 것이다. 내 인생의 어떤 욕심이나 세상에서 배운 것 때문에 내 인생이 부족하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부족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완전하게 지어졌다. 그 목적에 사용되기 위해서는 완전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목적에 사용하려고 하기 때문에 부족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병은 물을 담는데 사용하려고 만들어놓았으니까 병은 완전한 것이다. 물만 담으면 그건 완전한데 그걸 가지고 방망이로 한다든지 홍두깨로 한다든지 이렇게 하려고 하면 완전치를 못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병이라도 거기다 천을 감아서 두들기면 다 깨질 것이 아닌가. 그걸 보고 ‘아, 잘못 만들었다. 왜 이렇게 부족한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용도를 잘못 택했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가져온다. 내 인생이 만일 문제가 생긴다면 그 때는 용도를 내가 잘못 사용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사용한다면 절대로 부족함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자기 인생을 드린 사람은 절대로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그걸 봐도 우리가 증명될 수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은 그냥 고요한 방안에서 호떡 먹어가면서 만든 게 아니고, 큰 싸움에서 승리한 것이다. 큰물이 땅을 덮고 있었다. 우리가 상상해볼 때, 태평양 바다를 생각해보면 그 태평양 바다의 물을 다 걷어내고 그 밑에 있는 땅을 드러내게 하려면 얼마나 많은 힘이 필요하겠느냐 하는 것이다. 이 물은 사탄이었다. 그러니까 그 사탄을 이기느라고 온 힘을 다 써 가지고 그래서 땅이 나오게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생이 창조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승리라는 것이다. 만물이 창조된 것은 승리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부활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부활은 승리이다. 죽음에 대해서 승리이다. ‘무덤을 뚫고 나왔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났다.’ 이 말은 승리라는 말이다. 죽음이 온 세상에 꽉 찼는데, 그 꽉 차있는 죽음 속에서 승리하고 나온 것이 부활이다. 봄에 새싹이 나오는 걸 보더라도 그것은 승리하는 것이다. 겨울에 그 추운 데서 안 죽고 살아 나와서 봄에 새싹이 되는 것이다. 가을에 늦게 나왔던 가지들은 겨울에 죽어버린다. 왜냐하면 아직도 성숙하지 못했을 때 잎이 떨어지고 추위가 닥쳐와 버리면 그 가지들은 말라져서 죽게 된다. 가을에 늦게 나온 가지는 겨울에 죽어 가지고 봄에 잎을 내지 못하게 된다. 이걸 볼 때, 결국 새싹은 승리라는 것이다. 살아남은 것이니까. 죽음을 뚫고 일어난 것이고 긴 겨울을 승리하고 나온 것이니까.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빛으로부터 시작해서 사람을 창조했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이다. 죽음에서, 흑암에서, 공허에서 사람이 나왔다. 우리가 이걸 한번 생각해볼 때 얼마나 그것은 놀라운 승리인가. 우리들의 경험 속에서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이 세상과 흑암과 공허와 이런 깊은 어둠 속에 살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 결국은 한 인격으로 완전히 되살아났다. 다시 거듭났다. 이건 놀라운 승리이다. 그걸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어서 그렇지, 그 무수한 죽음 속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가 사망에 빠진 사람들하고 얘기해보면 그 죽음이 겹겹이 싸여 있다. 사망을 한 꺼풀 벗기면 또 있고, 한 꺼풀 벗기면 또 있고,, 한 꺼풀 벗기면 또 있고, 계속 벗기면 또 있다. 사망이 계속 덮고 있어서 그렇다. 물을 헤치면 또 물이 나오고, 또 물이 나오고 하듯이 그와 꼭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런 속에서 어느 날 그 사람의 뭍이 확 드러났다. 그리스도가 확 드러나고 인격이 드러났다. 이것은 놀라운 승리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창조란 것은 승리이다. 공작품이 아니라는 말이다. 어떤 공작품이 아니고 승리의 결과를 창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인생은 하나님의 최후의 승리이다. 만일 하나님이 창조를 시작했다. 다시 말하면 싸움을 시작했는데, 한 셋 째날쯤 하고서 못했다. 그 말은 결국 하나님이 그것밖에는 승리를 못했다는 뜻이다. 식물을 만들어놓고 하나님이 더 이상 못 만들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사망에서 결국 한 인격을 만들어내는데 실패했다는 뜻이다. 생명까지는 만들어냈지만, 인격까지는 못 만들어냈다. 그런 말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물건을 만들 때도 중간쯤 만들다가 그만두어버리면 그것은 실패작이다. 쓸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 놓은 것은 실패작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장조도 만일 인생을 창조하지 못했으면 그 창조는 아주 실패한 창조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인생을 창조했다는 것은 완전한 하나님의 승리이다. 이 하나님의 승리에서 우리는 시작한 것이다. 이것은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이 것이 되는 그런 원리와 같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서 모든 걸 승리해놓았다. 그러면 왕자가 되는 사람은 자기는 전쟁을 할 필요가 없이 왕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솔로몬이 그와 꼭 같다. 다윗이 온갖 전쟁을 치러서 일생을 승리를 해놓았다. 하나님의 성전을 지으려해도 지을 수 없을 만큼 피를 많이 흘렸다는 것이다. 그건 그만큼 전쟁을 많이 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낳자마자 왕으로 낳게 된 것이 아닌가. 예수 안에서 그의 승리를 우리의 것으로 갖는다는 것은 그런 이치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승리한 것을 사람에게 복으로 주었으니까 그날을 안식하여 거룩하게 하고 사람에게 복을 주었다.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에게 나눠준 것이다. 옛날에는 임금이 전쟁에 나가서 승리를 하게 되면 백작이니 후작이니 이런 사람들, 그러니까 왕족이나 귀족이나 이런 사람들에게 승리한 어떤 것을 분배해 주었다. 땅을 분배해 주었다. 예를 들어서 우리가 만주를 쳐서 이겼다. 그러면 만주를 갈라서 한쪽은 큰아들에게 주고, 한쪽은 작은아들에게 주고, 이런 식으로 분배를 해주었다. 승리를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가 나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잘못 지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천국이 없는 것이다. ‘내 인생을 잘못 지어놓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천국이 없는 것이다. ‘부모가 나를 잘못 낳아놓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한테는 행복이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똑같은 이치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이 준비해놓은 것에 대해서 절대로 손을 대면 안 된다. 안식을 가져야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안식을 우리가 아무 것도 안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게 아니고,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우리가 불만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완전하게 일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이다. 창조는 6일 후에 일어났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나팔절이 언제 생겼는가? 6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여섯째 달이 지나고 난 다음에 칠월 첫째 달 첫째 날, 그 날이 바로 나팔절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나팔을 분다. 이것은 승리를 하고 자기 백성을 모은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로 6일 동안에 창조를 하고, 일곱째 되는 날 우리에게 복을 주는 날이니까 우리의 첫째 날은 일곱째 날이다. 내가 창조된 날이 여섯째 날이라면, 내가 일어난 날은, 복을 받은 날은 일곱째 날이니까 그 날이 우리의 첫째 날이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바로 이 첫째 날에 부활을 했다. 그러니까 모든 이치가 다 여섯 가지를 완성하고 일곱째 날이 완전하게 승리를 하는 그런 날이다. 그래서 창조 안에 모든 것은 일곱을 통해 가지고 완성되도록 그렇게 만들어졌다. 땅위에 있어서, 지상에 있어서 물질적이고 현세적인 모든 축복은 일곱으로 되어 있다. 교회도 일곱 교회, 이런 식으로 모두 되어 있다. 일곱 별, 일곱 교회, 일곱 사자, 일곱 영, 전부 이렇게 되어 있는 것은 땅위에 있는 하나님의 완전한 숫자, 그걸 가리켜 말하기 때문에 일곱이라고 되어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나팔절, 이것은 승리의 절기이다. 우리 인생의 나팔절, 그건 우리가 날 때, 그것이 첫 번째 나팔절이다. 그래서 아기가 나오면서 나팔을 불고 나오는 것이 아니겠는가. “으앙～” 하고 나오는 것이 나팔이지 않겠는가. 하나님이 승리했다는 것을 그 아기가 나오면서 얘기하고 나오는 것이다. “아, 죽을 뻔했다.” 그러고 나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가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진 자라는 것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지어졌구나.’ 그걸 알아야 ‘우리 인생은 처음 승리이구나.’ 이렇게 알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 7월 10일은 속죄일이라고 되어 있다. 이 속죄는 왜 하는가? 그것은 화해를 위한 것이다. 그런데 왜 화해가 필요한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 상황이 불리하게 되어 있으니까, 좋지 않는 상황 가운데 있기 때문에 이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속죄제이다. 보통 우리가 생각할 때는 ‘사람이 범죄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진노했다. 그 진노를 달래기 위해서 속죄가 필요하다.’ 이렇게 생각한다. 물론 그것도 맞다. 예를 들어서, 내가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했다. 그러면 그 사람이 나의 잘못한 것 때문에 지금 화가 나 있다. 화가 나 있으면 그 사람을 화를 풀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서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보상을 하고 이래야 화가 풀릴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표면적인 상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원래 화를 내신 분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 하나님은 화를 내게 됐는가?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화가 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만족을 깨뜨려버렸으니까. “사람을 지으시고 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 그건 하나님이 만족했다는 말인데 이 하나님이 만족한 상황을 우리가 범죄함으로써 깨뜨려버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면 속죄제는 왜 필요한가? 이 만족을 깨뜨려버린 상황을 다시 회복하기 위해서 속죄제가 필요한 것이다. 여기서 한 마리의 수송아지가 필요하다고 했는데, 예수님께서 한 마리의 수송아지로 십자가를 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진 것은 하나님과 화해를 위해서, 화목을 위해서 진 것이다. 우리 자신을 짊어지고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될 대표자로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가지고 가서 고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고백 안에서, 이 속죄 안에서 우리가 다 같이 참여를 해야 되는데, 만일 내가 아무리 예수님께 속죄를 했다 하더라도 내가 참여를 안 하면 나는 하나님과 화목이 안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대표자 하나 보내놓고 나는 딴전을 피우고 있다. ‘아, 너 가서 화해해라. 나는 모르겠다.’ 이렇게 했으면 그 사람하고는 화해가 안 된 것이 아니겠는가. 비록 내가 자격이 없어 못 간다 하더라도 내 대표자를 보낼 때 나는 그 대표자 속에 포함해서 내가 진심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고 내 대표자를 선출해서 보냈다면 그 대표자가 화해를 할 때 나도 화해가 되는 거지만, 그 대표자가 가나마나 나는 상관없다, 이렇게 하는 사람은 화해가 될 수가 없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간 것을 우리에게 적용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그 십자가에 동참하는 것이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않고,” 그러니까 예수님이 대표적으로 십자가를 졌다고 해서 우리가 안 진 것이 아니다. 그 안에서 내가 진다는 뜻이다. 그 안에서가 아니면 나는 효과가 없는 것이다. 내가 그에게 포함되지 않으면, 내가 그 운명에 포함되지 않으면 십자가가 효과가 없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를 믿고,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한다’ 이렇게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주었다.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서 용서해 주었다.’ 이렇게 모두 교리적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떤 연유로 해서 나한테 그런 영향을 미치는지는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아, 예수님께서 그렇게 해주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은택으로 우리가 사죄의 은택을 입는 것이다.’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고, 이것이 바로 교리적인 지식이다. 내가 그에게 포함되지 않으면, 내가 그의 운명 안에 포함되지 않으면, 예수님이 아무리 십자가를 져서 인간의 죄를 화해하기 위해서 죽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에게 효과를 발생할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간 것이다. 우리를 대표해서 간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라고 말미암아서 화해가 된 이후에는 우리는 절대로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과 화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대표자가 화해하는 방법 이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타락한 상황을 우리가 바꿀 수 있는 다른 방법은 십자가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백년 후에 다시 우리가 화해를 하려고 하더라도 백년 전의 십자가를 적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 2000년 전에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화해를 했는데, 이제 2000년 후에 우리 자신이 새로운 방법을 가지고 하나님과 화해를 하려고 하더라도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방법이 가장 완전한 방법이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방법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속죄제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나팔을 불어서 다시 들어오게 되었을 때 드린다. 앞서 말한 창조 안에서는 우리가 창조에서의 승리이지만, 여기 나팔절은 구원의 승리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미 벌써 타락 가운데 있고, 죄 가운데 있고, 그래서 포로로 잡혀갔다. 잡혀간 백성들을 나팔을 불어서 다시 모은 것이니까, 이건 구원의 나팔절이다. 우리는 창조의 나팔절, 구원의 나팔절, 이렇게 생각할 수가 있다. 창조의 나팔절 같으면 우리는 속죄가 필요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직 우리는 범죄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나팔절이니까 속죄가 필요하게 된다. 아무리 부름 받았어도 우리 자신이 죄가 없어진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서 다른 나라에 노예로 잡혀갔다. 잡혀간 백성을 하나님이 은혜로 다시 불렀다 하더라도 그 사람들에게 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하게 된다.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을 부를 때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불려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이 은혜로 부름 받았지, 자기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차피 속죄가 필요하다는 걸 알 수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은 초막절을 위한 번제이다. 7월 15일부터 7일 동안 초막절을 지켜라, 그렇게 되어 있다. 이 초막절에는 제물들이 다양하게 내포되어 있다. 제물들은 레위기에서 말한 것처럼, 왜 한 가지 제물만 가지고 드리지 않고 여러 가지 종류의 제물이 있는가? 그것은 제물 자체가 그리스도니까,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이니까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은 곧 그리스도이다. 영적으로 말하면 바로 인격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물질의 고기를 좋아하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을 좋아하니까. 그러한 인격은 한 가지 면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인격이다. 그래서 양고기 맛도 있고, 수송아지 맛도 있고, 밀가루 떡 맛도 있고, 술맛도 있고, 여러 가지 맛을 가진 음식이라는 뜻이다. 그러면 인격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인격도 여러 가지 면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맛을 가지고 있다. 순종이라는 맛도 가지고 있고, 간증이라는 맛도 가지고 있고, 또 복종이라는 맛도 가지고 있다. 순종과 복종의 맛은 또 다르다. 간장과 된장이 다르듯이 또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격의 맛이 다 다르지 않는가. 내가 순종한다고 할 때와 복종한다고 할 때하고 차이가 아주 많다. 복종한다고 할 때는 마치 상관이 부하를 복종시키는 것과 같은 입장이다. 이유여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이유여하가 없이 복종하는 것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내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순종의 맛과 복종의 맛은 또 다를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인격을 음식화시켜서 먹는다고 한번 생각해볼 때 ‘순종이라는 맛이 간장 맛이다 이러면, 복종이라는 맛은 된장 맛이다.’ 이렇게 맛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제물들이 다양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다양한 면들을 말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첫날에는 수양 둘과, 일년 된 수양 열 네 마리, 수송아지 열 셋, 수염소 하나를 드리고. 또 팔일 째 되는 날, 이것은 부활을 상징하는 날인데 이 때는 수송아지 하나를 드린다. 이런 식으로 여러 가지 것이 있고, 또 전제가 있고, 소제가 있고,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식물성 맛이 다르고, 동물성 맛이 다르고, 지방분이라도 같은 지방이라도 식물성 지방이 다르고, 동물성 지방이 다르고, 포화지방산, 불포화지방산, 다 맛이 다르지 않는가. 그와 꼭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동물성만 원하는 것이 아니고 식물성도 원하더라는 것이다. 우리도 밥상에서 먹을 때 동식물성을 다 함께 먹지 않는가. 어떤 경우에 잘 먹을 때는 육해공군이 함께 있는 그런 식사를 할 때도 있다. 이런 건 우리 입맛이 다양하기 때문이다. 또 입맛이 다양하다는 것은 우리 몸에서 생리적으로 여러 가지 영양소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 가지 맛을 필요로 하고 있다. 우리가 만일 한 가지 영양소만 필요하다면 한 가지 맛만 즐거워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러 가지 영양소가 필요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맛을 찾고 있다. 임신을 한 다음에 왜 신 것을 찾는가? 그것은 생리적으로 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 것이 맛이 있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냥 원시적으로 산다면 우리 입맛이 원하는 것을 먹으면 그것이 약이 되기도 하고 음식이 되기도 하고 그렇다고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지금 우리가 너무 문명 속에 찌들리다 보니까 우리의 감각이 둔해져서 그걸 상실하게 된 그런 셈이다. 그래서 마치 자연상태에 있는 동물들이 요즘 공해가 너무 심해서 제정신이 아니게 돌아다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렇게 되었다. 갑자기 거북이가 동해바다에서 육지로 올라온다던가, 이런 것은 자연상태의 교신이 잘 안 되어서 교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정신이 아니니까 올라왔지, 제정신인 것 같으면 올라왔겠는가.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된 것이다. 우리도 엉뚱하게 몸에 해가 될 음식을 좋아한다던가, 이런 것들은 모두 문명이나 이런 것들로 인해서 우리가 교란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벌어지게 되는데, 원시적으로는 자기가 먹고 싶은 걸 먹으면 그것이 가장 알맞은 영양상태라고 한다. 그래서 초식동물들을 보면 자기가 자기 입에 딱 맞는 것을 골라서 먹고 있다. 소가 풀을 뜯어먹는 걸 보면 참 신기하다. 그 많은 풀을 소가 풀을 뜯어먹을 때 보면 일일이 차근차근 뒤져보고 이런 게 아니다. 그냥 혀만 내어 가지고 이렇게 갖다 먹는다. 그렇게 먹고 지나가는데 보면 자기가 안 먹는 풀은 그냥 남아 있다. 먹는 풀은 싹 뜯어먹지, 다른 건 안 뜯어먹는다. 그러니까 혓바닥에서 그걸 다 감별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만큼 자연은 예민하도록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 걸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이 이렇게 식성이 다양하신 분이니까 우리를 만들 때도 그렇게 만들 것이 아니겠는가. 수양도 좋아하시고, 어린양도 좋아하시고, 비둘기도 좋아하시고, 그러니까 일류요리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암염소에다, 그것도 어떤 때는 붉은 암염소, 이런 것도 나온다. 여러 가지 곡식에다가, 기름에다가, 기름 섞은 과자에다가, 또 그 위에 술까지 부어 가지고, 이렇게 한다. 전제라는 것은 포도주를 붓는 것이다. 이건 飯酒하는 것과 똑같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나팔절, 속죄절, 초막절, 이것은 모두 칠월 한달 동안에 있다. 첫째 달에 있다는 뜻이다. 초막절, 이것은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뜻이다. 초막이라는 말이 장막이라는 말이니까 장막절이다. 이것의 역사적인 유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할 때 장막을 치고 살았다. 천막을 치고 살았으니까, 가나안 땅에 들어간 후에 대대로 후손에게 이것을 기념하게 하기 위해서 칠월달 그 날을 정해 가지고 그 날에는 바깥에 나가서 야영을 시킨다. 요즘 같으면 야영이다. 텐트를 짊어지고 가서 집이 있는 사람도 다 밖에 가서 천막을 치고 사는 것이다. 아이들이 “왜 지금 천막을 치고 사냐?” 이렇게 물으면, “우리 조상들이 애굽에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올 때 광야에서 이런 집을 짓고 살았다. 그걸 역사적으로 교훈으로 남겨놓으려고 한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의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과 함께 거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부름 받았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유월절로부터 시작해서 초막절까지가 마지막이다. 그러면 유월절은 구속을 상징하는 것이다. 우리 대신 죽은 어린양을 통해서 우리가 살아났다. 이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살아난 것을 말한다. 그 다음이 무교절이다. 그러니까 무교절의 첫째날이 유월절인 셈이다. 제일일은 유월절이다. 제2일부터는 무교절이니까. 그 무교절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날이다. 역사적인 유래는 애굽에서 나올 때 미처 급해 가지고 떡에다 누룩을 넣지 못했다. 그래서 생밀가루를 그냥 가지고 나왔다. 이걸 먹었던 것을 기념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무교절의 의미는 누룩 없는 떡이니까, 이것은 ‘죄 없는 떡, 세상이 섞이지 않는 떡’ 그걸 말한다.&amp;nbsp; 우리가 유월절을 지나고 난 다음에는 무슨 음식을 되느냐, 내가 구원을 받고 난 다음에는 무슨 음식을 먹어야 되느냐? 도로 누룩 있는 떡을 먹어버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룩 없는 떡을 일주일 동안 먹는다. 일주일이라는 것은 창조 안에서 완전한 날이니까 우리가 일생 동안 누룩 없는 떡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누룩 없는 떡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걸 구약에서는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냥 기념만 했다. 일주일 동안 누룩 없는 떡만 먹고 기념을 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보니까 이 누룩 없는 떡이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구원을 받은 후에 우리 일생 동안 예수를 먹고 사는 것이다. 누룩 없는 떡이신 그리스도, 죄 없는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사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교절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 다음에 초실절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열매가 처음 열리는 절기였다. 이것이 요즘 말하는 소위 부활절이다. 부활은 처음 난 열매와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이것을 초실절이라고 한다. 초실절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이 첫 열매로서 열려진 날을 말한다. 이것이 이상하게도 이스라엘의 절기 가운데 들어있는데, 이것이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서 그 절기의 실제가 성취된 셈이다. 첫 열매, 나무에서 맨 처음에 익은 열매, 그러면 첫 열매가 익었다는 것은 그 다음에도 어느 기간이 지나면 많은 열매가 익을 거라는 걸 예고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이 열매가 익은 다음에 ‘칠칠은 사십구’ 해서 칠칠절이라는 것이 생겼다. 칠칠절, 이것이 곧 오순절이다. 오순절이라는 오십일 째라는 말이고, 칠칠절이라는 말은 사십구라는 뜻이다. 칠칠은 49니까, 49 다음 날이 오순절이다. 오순절 날은 첫 열매가 익은 후에 50일 째 되는 날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토지에서는 첫 열매가 익고 50일이 되면 추수할 때가 된다. 겨울에 심었던 밀을 다시 베는 그 시기이다. 그래서 이것은 첫 열매를 따라서 익은 다음 추수 때를 말한다. 그래서 오순절 때는 열매를 거두었는데, 첫 열매인 초실절에는 예수님 한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셨다. 그런데 오순절에는 수많은 사람이 오순절 날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추수를 했다는 것과 같다. 그러니까 여기서 우리는 한 단원의 구원이 이루어진 것을 보게 된다. 유월절로부터 시작해서 오순절에 이르기까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두 번째 단원인 나팔절은 칠월달에 시작이 되었다. 이것은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불러들인다는 데서 시작이 된 것이다. ‘불러들인다. 다시 불러들인다.’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은 두 번째 그룹에 속하여 있는 것인데, 이건 이스라엘 백성하고 관계된 것일 뿐 아니라, 우리 인생의 영적인 결과, 다시 말하면 결실과 관계되어 있다. 나팔절에 부름받아서 속죄절을 지나서 우리는 초막절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이것은 하나님과 동거하는,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서 함께 누리는 그 마지막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 결론,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 초막절을 만들어놓았다. 이 초막절을 장막절이라고도 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이 초막절 안에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섭리의 역사에서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그렇게 해석한 사람도 있다.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어느 날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나팔절에 부를 것이다.’ 하는 말이 나온다. 그러면 흩어진 백성을 모은다는 것이다. 모아놓으면 그들이 그 때야 다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게 될 것이다 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영원한 세예루살렘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을 위하여 준비되어진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석하게 된다. 이 나팔절 때문에 ‘92년 10월 28일’이라는 말이 나온 것이다. 왜냐하면 ‘92년 10월 28일’은 나팔절 절기라고 자기들이 생각한 것이다. 나팔절은 10월 달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팔절에 온 천하의 모든 백성들을 불러모아서 그들이 공중으로 휴거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아들여서 예루살렘에다 새로운 왕도를 짓고 하나님의 나라, 이스라엘을 건설한다는 뜻이 된다. 육신적으로 말하면 그렇다. 그러나 이제 신약 안에 우리가 와서 볼 때, 이스라엘이라는 저 백성, 육신적인 백성에 하나님께서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들도 똑같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온다면 같은 이치겠지만, 자기들만 따로 세워 가지고 그렇게 할 것이라는 소망이 나한테는 보이지 않는다. 많은 사람이 성경을 연구할 때, 계시록을 연구하면서도 가령 14만4천을 유태인이고, 그 뒤에 나오는 흰옷을 입은 많은 무리는 이방인이다 이렇게 해석을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이라 해서 14만4천이 되고, 이방인이라 해서 14만4천이 안 되는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영적인 14만4천이다. 지금 신약시대에 왔기 때문에 모든 것이 생명의 무궁한 능력은 좇는 영적인 시대에 왔다. 육신하고 관계된 게 아니다. 구약에서는 육신하고 관계됐기 때문에 제사장이 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자격여하에 관계없이 오로지 레위인으로 태어나야 됐다. 그렇지만 신약 안에서는 레위인으로 태어났다 해서 제사장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멜기세덱의 혈통을 좇아서 예수님께서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마찬가지로 멜기세덱의 혈통을 좇아서 제사장이 되지, 결코 레위의 혈통을 좇아서 제사장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신약의 원칙이다. 그렇기 때문에 유태인들이 그렇게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는 것은 기대하기가 곤란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 부르신 모든 백성들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이 예수 안에서 성취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거하더라.” 요한 계시록에 그렇게 말했다. 요한 복음 1장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한 그 말을 직역하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그런 뜻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시매”, 이것은 초막절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단체적으로 최종적으로 완성된 것이 요한 계시록 마지막에 나온 것이다.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 있으매” 그렇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초막절을 말한다. 하나님이 부르신 최종적인 목표는 당신의 장막에 우리가 함께 거하는 것이다. 그 장막에 우리가 거한다는 것은 한 식구가 된다는 걸 말한다. 옛날에는 한 지붕 안에 한 가족이 살았다. 한 지붕 세 가족이 아니고, 한 지붕 한 가족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는 걸 말한다. 바울은 말하기를 “하늘의 시민이고, 하나님의 권속이고” 그렇게 말한다. 그 ‘권속’이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권속이다. 그러니까 초막절로 역사는 완성되어질 것이라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음식은 세 가지 부류로 갈라져 있는데, 매일 드리는 제물이 있었고, 매주 드리는 제물이 있었고, 그리고 매월 드리는 제물, 매년 드리는 제물, 이렇게 있었다. 그래서 이것은 날짜를 따라서 드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우리의 일상생활과 관계된 제물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하나님께 제물이 되는 것, 그러니까 특별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집회를 한다든가 이런 게 아니고, 교회생활 안에서 있는 게 아니고,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에서, 장사도 하고 밥도 짓고 빨래도 하고 이런 일상적인 생활에서 드려지는 제물이다. 왜냐하면 매일, 매주, 매월, 매년 하는 거니까, 하루도 쉬지 않고 하는 것이니까 그렇다. 그래서 매일을 일곱번 하면 매주가 되는 것이고, 그리고 달은 삭으로 계산한다. 열흘씩 계산한다. 세 삭이 한달이다. 그렇게 되니까 이것이 하루의 연속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일주일도 하루의 연속, 또 한달도 하루의 연속, 매일의 생활,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드려지는 제물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안에서 하나님께 매일같이 제물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 말은 일상생활에서 매일같이 하나님의 만족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두 번째는 무교절과 초실절과 오순절까지의 그리스도인들의 영적인 생활,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 그것을 말한다. 구원을 받아서 열매가 되는 그 한 과정의 생활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안에 있는 영적 생활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세 번째 그룹은 나팔절, 속죄절, 초막절이다. 이것은 백성하고 관계된 것이다. 그러니까 나라하고 관계된 그런 절기에 속한다. 개인을 부를 때는 나팔을 불어서 부르는 법이 없지 않는가. 국가를 부를 때, 민족을 부를 때, 사회를 부를 때 나팔을 분다. 군대에서 나팔을 불 때 한 사람 오라고 하면서 나팔을 불지 않는다. 이층에서 아래층에 있는 아들을 오라고 하면서 나팔을 부는 아버지가 어디 있겠는가. 동네방네 다 모으려니까 나팔을 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나팔절 이후에는 민족적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단체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우리가 개인적으로 매일 드리는 것, 또 하나님과 나와의 영적인 생활, 그리고 단체적인 생활(이건 지금 말하면 교회적인 생활), 이런 생활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늘 저녁에도 7시 반에 나팔을 불어서 모두 온 것이지 않는가. 7시 반에 오라 해서 나팔절에 왔다. 이 나팔절에 들어왔으면 우리 속에 하나님 앞에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고백하고, 또 형제한테 잘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하고 고백하고 화해한 다음에 우리가 한 장막 안에 거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때는 한 간증 안에 우리는 살게 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음식, 이것은 결국 그리스도이다. 구약에서 다양하게 표현되었던 하나님의 음식, 그 종류 많은 음식들은 신약에 와서 ‘아, 이것이 한 인격이구나. 그 한 인격 안에 이 다양한 맛이 다 들었구나.’ 하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는 번거롭게 수양을 몇 마리 드리고, 수송아지를 드리고, 양을 드리고, 이렇게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냥 오로지 우리 자신 하나면, 그리스도 하나면 하나님이 만족하시도록 그렇게 됐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영 단번에 자기를 제사로 드리심으로써 다시는 송아지나 양으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됐다. 이것은 인격이 하나님의 만족이 된다는 걸 알 수 있다. 구약에 비해서 이건 얼마나 진보된 것인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구약은 상당히 좀 유치하고 낮은 수준에 속한 것이다. 왜냐하면 표면적이고 물질적이고 이런 수준이니까 이것은 유치원 수준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들한테는 그렇게 밖에 가르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어떤 영적인 것이나 속에 있는 마음의 것이나 이런 것을 어린아이들한테는 가르칠 수 없으니까 그림을 그려서 가르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제 저녁에 천주교 방송을 보니까 어떤 수녀가 나와서 어떤 것을 설명을 했다. 그런데 거기는 전부 그림을 그려놓았다. 구원에 대한 어떤 것을 전부 다 그림화 해놓았다. 옛날의 유명한 화가들이 그려놓은 그런 그림인데, 십자가도 그냥 그려놓은 것이 아니고 십자가도 동서남북으로 전부 다른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래서 그걸 전부 설명을 했다. 이건 뭐고, 이건 뭐고, 이렇게 설명을 했다. 그러니까 ‘유치원 시대에는 그것도 좋았겠다. 아, 유치원에서는 저렇게 가르치면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잘 못 알아들으니까, 그림을 그려서 보여주고 그렇게 했을 것이다. 구약과 신약을 얘기하면서도 십자가를 놓고 양쪽으로 두 여자를 놓아두었다. 한 여자는 등돌리고 가는 여자이고, 한 여자는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 이렇게 그려놓았다. 그래놓고 설명하는 말이, 등돌리고 가는 여자는 구약의 교회라는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를 바라보고 있는 여자는 신약교회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주 설명이 그럴듯하게 됐다. 그리고 거기서 협력자가 둘이 나오는데, 구약 쪽에는 세례요한이 들어있고, 그리고 신약 쪽에는 마리아가 들어있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머리에다 손을 대고 고민하고 있는 그런 모습을 그려놓았다. 구약교회, 그것은 이스라엘을 말한다. 그 이스라엘이 등돌리고 가는 것에 대해서 세례요한은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그림을 그려놓았다. 그리고 신약 쪽에는 신약교회라는 여자 옆에 마리아가 있었다. 그래서 성모 마리아는 예수님의 구원 사업에 대해서 모든 면에 협력하신 분이다, 이렇게 얘기를 했다. 아주 그럴듯하게 설명을 했다. 교리를 전부 그림으로 만들어놓았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구약은 바로 이렇게 사람들이 아직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했을 때 그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나면 ‘아, 이것들은 옛날 일이었구나.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렇게 그려놓았구나.’ 하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이제 우리가 예수 자신을 알고 나면 이 모든 것이 다 소용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모든 예법과 모든 방식과 이런 것들이 저절로 다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만일 내가 내 안에 신약이 분명하지 않다면 옛날의 이런 것들을 다시 우리가 반복하면서라도 그걸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모르는 것보다 나으니까 그렇다. 시청각 교육을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결국은 구약에서 이 시청각 교육이 실패했다. 이건 아주 가장 완전한데, 너무너무 완전한 그림인데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리 이 그림을 봐도 깨달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천년 동안 이 그림을 보여주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이걸 깨닫지를 못했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래서 어차피 이 그림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이 그림의 실재인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야, 우리가 그림에서 보던 바로 그분이 이분이구나.’ 이렇게 알았으면 되는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알지를 못했다. 그래서 그 그림하고 틀리다고 예수를 죽이고 만 것이다. 이 사람들은 결국 그림밖에는 이제 소용이 없는 사람들이 됐다. 실제가 와서는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 이렇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 우리가 어떤 기독교인들을 만나보면 기독교적인 설교나 교리에 너무너무 오랫동안 굳어져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혀 깨닫지 못하는 경우를 보게 된다. 깨닫는다는 개념도 전혀 없다. 그런 개념 자체가 없다. “무엇을 하라는 것이냐? 어떻게 믿으라는 것이냐?”고만 묻지, 무엇을 깨닫는 것이라는 게 도대체 없다. 그러니 내가 ‘야, 저건 완전히 콘크리트구나. 도저히 저것은 생명이 서식할 수 없는 아주 돌짝밭이구나.’ 이렇게 생각되었다. 교리화되고 종교화되면 사람이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기 때문에 실상을 보여주기 위해서 만들어놓은 그림이 결국에 와서는 그 실상을 알지 못하고 그림으로 끝나버리는 그런 결과가 오히려 역사적인 사실의 증거이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보고, 그리고 이 그림들을 본다면 이 그림이 얼마나 우리한테 확실한 것을 인상 지워주겠는가! 이제 우리가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를 확실히 우리 안에서 인식하고 그 다음에 우리가 옛날의 성전 제단에 가서 양이 죽는 것, 송아지가 죽는 것, 이런 걸 봤다면 얼마나 확실하고 실감나게 알아지겠는가. 그러나 양이 죽는 것을 천번 만번 봤어도 예수님을 막상 보니까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이런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구약은 결국 실패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고, 소수의 어떤 사람들에 의해서 이 구약은 다시 살아나게 됐다.&amp;nbsp;&amp;nbsp;&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수님은 다른 면으로 말하면 구약을 다시 살려내신 분이다. 죽은 구약을 산 구약으로 살려내신 그런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죽은 교리를 살려내는 사람들, 죽은 지식을 살려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로서 우리가 지금 필요하다. 죽어 있는 것, 그것을 우리가 호흡으로 불어넣는 것,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시니까 산혼이 되더라 하는 것처럼 우리가 죽어 있는 것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것이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 안에 우리의 생기를 불어넣지 않는다면 이건 죽은 것이 되고 말아버린다. 교리와 지식이 되고 말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지식을 계속 흡수하면 그 지식이 우리 머리를 콘크리트화 시켜서 굳어지게 만들고 말아버린다. 교리를 배우면 사람은 그 교리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알 것같지만 그렇지 않고 교리가 자기 속에 고착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굳어져버리고 만다. 모래가 있는데 모래 속에 시멘트 물을 넣으면 그 시멘트 물이 모래를 갖다 움켜잡아서 응고시킨다. 이것이 콘크리트이다. 이렇게 되어버리고 만다. 사람 속에 교리가 들어간 그 목적은 예수를 가르치려고 넣은 것인데, 넣다보면 그것이 그냥 응고되어서 다시는 다른 생명이 들어갈 수 없는, 물 한 방울도 들어갈 수 없는 그런 절벽이 되고 만다는 걸 볼 수 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이렇게 굳어진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끊임없이 늘 그것을 부수고 깨고 그런 것이 필요하다. 응고되기 전에, 굳어지기 전에, 우리가 어떤 걸 가지고 그냥 정착하고 안착하려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계속 흔들어놔야 된다. 그래서 시멘트를 넣어 이겨놓았다 할지라도 계속 흔들고 비비면 응고될 시간이 없게 된다. 그런데 가만 놔둬버리면 딱 응고되어버리고 만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면서 우리가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될 자로, 생생하게 살아있지 않으면 안 될 자로 그렇게 있지 않으면 안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흙도 공기가 들어갈 틈이 없이 딱딱하게 굳어져 버리면 식물이 나지 못한다. 옛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국민학교 다닐 때인데, 앞에 체전이 있는데 모두 나가서 배추를 갈았다. 그런데 농사를 안 지어본 어느 선생님이 흙을 골라서 체를 잘 쳐서 돌 한 개도 없이 아주 곱게 고르게 만들어 가지고 씨를 뿌려놓았다. 그리고 나서 비가 왔다. 그런데 이 땅에 싹이 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멘트처럼 딱 굳어져 버렸으니까. 너무 세미한 가루가 되다보니까 그랬다. 그 때 보면서 ‘야, 이상하다. 저렇게 가는 가루이면 얼마나 좋겠나.’ 이렇게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고 씨가 안 나버리고 말더라는 것이다. 그 안에 엉성엉성한 구멍들이 있어야 그게 싹이 나게 된다. 요즘 난을 키우는 데 가보면 흙도 아니고 순전히 자갈이다. 석비라고 하는데 그걸 놔두고 뿌리를 심어놔도 난이 산다. 물만 그냥 주면 산다. 물도 엉켜 있을 수가 없고, 그냥 흘러 내려가 버린다. 축축히 젖고 마는 것인데, 그 안에 공기가 들어가기 때문에 거기서 무슨 박테리아가 생기는 건지 뭔지 하여튼 모르지만 난이 그걸 먹고 자란다. 그러니까 우리의 어떤 생명도 그렇게 되어야 생명이 거기서 번식할 수 있지, 콘크리트로 꽉 차서 완벽하게 만든다고 해버리면 지식으로 꽉 차서 숨도 못 쉬는 사람이 되고 말기 때문에 생명이 거기서 전혀 서식할 수 없게 그렇게 마련이다. 교리화된 사람들 속에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인 의식을 가지 사람들 속에서도 역시 이런 것을 보게 됐다. 의식도 내 어떤 마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고, 하나님의 어떤 걸 표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만 그것이 계속 들어오다가 뭐가 되어버리는가 하면 자기는 편안하게 그냥 거기서 고정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면 다른 것이 전혀 그 안에 통할 수가 없게 된다. 공기가 못 통하게 되고 만다. 부패할 수 있는 공기라도 그 공기가 통해야 거기서 생명이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약간 좀 엉성한 것이 좋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어떤 사람들은 우리 교회를 보고 너무너무 엉성하고 허술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아주 필요한 거라고 생각한다. 엉성해서 어쩐지 좀 무질서한 것 같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한데, 그래야만 이것이 들러붙지 않고 살아 가지고 거기서 박테리아가 서식하지, 꽉 굳어져버리면 아무 것도 못 들어가고 만다. 그래서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좀 있고, 부정적인 사람도 있고, 긍정적인 사람도 있고, 물론 부정적인 사람한테는 좀 안 됐기는 안 됐지만 그래도 그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사이에서 가만있지 못하게 만든다. 가만있으면 안정되어버리고 말 텐데, 막 부정적으로 쑤시다보니까 또 일어나야 된다. 우리는 좀 괴롭기는 괴롭다. 그렇지만 그런 동안에 공기가 들어가고 새로운 생기가 들어가서 뿌리가 내리게 되는 걸 볼 수 있다. 생생하게 되는 걸 볼 수 있다. 나무는 물을 먹고 자라는 거니까 물에 흠뻑 담가 놓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지만 뿌리를 물에 담가 놔두면 다 썩어버리고 만다. 물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물에다 흠뻑 젖으면 죽는다는 것이다. 적당하게 수분만 있어서 간신히 빨아먹을 만큼 되어야 그게 건강하게 된다. 화분에다 물을 계속 많이 주면 썩어버린다. 간신히 살만큼 주어야 된다. 그런데 그놈은 생명력이 있어서 수분을 흡수해들인다는 것이다. 우리 같으면 빨아먹을 게 없는데, 그래도 그것은 빨아먹을 게 있으니까 살게 되지 않겠는가. 이 속에서 살아남는 사람이어야 된다는 것이다. 부정적인 상황도 많고, 이런 속에서 생명을 흡수해들여서 살아남은 사람이어야 건강한 사람이지, 조용하고 이런 데서 살면 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는 걸 볼 수 있다. 우리는 건강한 영혼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여러 가지 부정적인 상황들을 섞어놓았다는 걸 볼 수 있다. 그런 것들이 절대로 나쁜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너무 완전하고 너무 완벽하게 질서를 만들어놓았다. 그래서 우리가 좀 허술하고 엉성하다 할지라도 절대로 초막절까지 가는데 지장이 없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초막절이 이루어지게 되니까.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런 절기들이 자나가는 동안에 아무 무사안일주의로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다. 세월이 지나갔다면 그 세월 속에는 많은 상황들이 발생하게 마련이다. 식물이 난 다음에 동물이 났는데, 그 동물이 난 사이에는 세월이란 게 있다. ‘해와 달을 만들어서 사시와 일자와 연한을 주관하겠다.’ 이건 세월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세월이 있다면 문제가 있는 법이다. 시간이 없다면 우리는 문제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게 되어 있다. 우리가 오늘 교회 안에 와서 하나님 말씀으로 깨끗하게 씻고 충만하게 집으로 돌아간다고 하자. 그 상태로 있으면 시간만 없다면 그걸로 그냥 완전한데 이 놈의 시간이 있다 보니까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밥 먹을 일도 생기고 시장에 갈 일도 생기고 이러다 보니까 또 문제가 생기게 되고, 다른 사람하고 또 만나야 될 일도 생기고 이 놈의 세월이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는가. 이 꿈이 안 깨고 딱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시간이 있기 때문에 어차피 깨야 된다. 그러다 보면 또 문제가 생긴다. 그러나 이것들이 결국 우리의 생명을 말살시키는 게 아니고, 이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생명을 자극해서 더 건강한 생명으로 만들어준다는 걸 볼 수 있다. 초막절까지 반드시 가게 될 거라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의 완전한 계획안에 우리가 부름 받고 당신의 완전한 승리 안에서 우리 인생이 시작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무엇이 부족한 줄로 생각하고 우리가 새로이 창조하려고 하고, 우리가 창조자가 다시 되려고 하는 그런 망상에 빠져 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당신의 창조가 완전한 것을 우리가 깨닫고 나서 우리는 할 일이 없다는 걸 알게 됐고, 당신과 함께 누리기 위해서 초막절을 향해 가는 길 밖에는 우리는 다른 길이 없다는 걸 발견하게 됐습니다. 이 깊은 안식을 제게 허락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분요한 이 세상 속에 우리가 이 안식을 전하기를 원하고 이 평안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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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ntry>
    	<entry>
	    <title>37. 민28장. 하나님의 만족 그리스도</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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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d>tag:blog.daum.net,2009:shimnk.2047</id>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19:35Z</updated>
	    <published>2009-11-10T14:19:35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28장. 하나님의 만족 그리스도&amp;nbsp;&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하여 그들에게 이르라 나의 예물, 나의 식물되는 화제, 나의 향기로운 것은 너희가 그 정한 시기에 삼가 내게 드릴지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3 또 그들에게 이르라 너희가 여호와께 드릴 화제는 이러하니 일 년되고 흠 없는 수양을 매일 둘씩 상번제로 드리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4 한 어린 양은 아침에 드리고 한 어린 양은 해 질 때에 드릴 것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5 또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빻아낸 기름 힌 사분지 일을 섞어서 소제로 드릴 것이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6 이는 시내 산에서 정한 상번제로서 여호와께 드리는 향기로운 화제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7 또 그 전제는 어린 양 하나에 힌 사분지 일을 드리되 거룩한 곳에서 여호와께 독주의 전제를 부어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8 해질 때에는 그 한 어린 양을 드리되 그 소제와 전제를 아침 것같이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로 드릴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9 안식일에는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둘과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 그 전제를 드릴 것이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0 이는 매 안식일의 번제라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1 월삭에는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 년 되고 흠 없는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2 매 수송아지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삼에 기름 섞은 소제와 수양 하나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이에 기름 섞은 소제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3 매 어린 양에는 고운 가루 에바 십분지 일에 기름 섞은 소제를 향기로운 번제로 여호와께 화제로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4 그 전제는 수송아지 하나에 포도주 반 힌이요 수양 하나에 삼분지 일 힌이요 어린 양 하나에 사분지 일 힌이니 이는 일 년 중 매월삭의 번제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5 또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수염소 하나를 속죄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6 정월 십사일은 여호와의 유월절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7 또 그달 십오일 부터는 절일이니 칠 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8 그 첫 날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19 수송아지 둘과 수양 하나와 일 년 된 수양 일곱을 다 흠없는 것으로 여호와께 화제를 드려 번제가 되게 할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0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수송아지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를 드리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1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2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수염소 하나로 속죄제를 드리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3&amp;nbsp; 아침의 번제 곧 상번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4&amp;nbsp; 너희는 이 순서대로 칠 일 동안 매일 여호와께 향기로운 화제의 식물을 드리되 상번제와 그 전제 외에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5&amp;nbsp; 제칠일에는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6&amp;nbsp; 칠칠절 처음 익은 열매 드리는 날에 너희가 여호와께 새 소제를 드릴 때에도 성회로 모일 것이요 아무 노동도 하지 말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7&amp;nbsp; 수 송아지 둘고 수양 하나와 일 년 된 수양 일곱으로 여호와께 향기로운 번제를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8&amp;nbsp; 그 소제로는 고운 가루에 기름을 섞어서 쓰되 매 수송아지에는 에바 십분지 삼이요 수양 하나에는 에바 십분지 이요&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29&amp;nbsp; 어린 양 일곱에는 매 어린 양에 에바 십분지 일을 드릴 것이며&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30&amp;nbsp; 또 너희를 속하기 위하여 수염소 하나를 드리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8:31&amp;nbsp; 너희는 다 흠 없는 것으로 상번제와 그 소제와 전제 외에 그것들을 드릴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28장은 제물을 드리는 여러 가지 법률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다. 28장 이후는 제물에 관한 것, 그리고 서원에 관한 것, 이런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제물에 대해서는 레위기에서 상세하게 얘기를 했는데, 제물은 왜 드렸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드린다는 것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으면 만족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음식을 먹으면 만족하다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도 먹을 것이 필요한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않는가. 그런데 하나님도 사람처럼 음식이 필요하다 그런 뜻이다. 우리는 물질적인 음식이 필요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에게는 물질적인 음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건 구약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필요를 위해서 그 어떤 물질로 그것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이 제물의 실제적인 의미는 만족을 위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렇다면 창조도 알고 보면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당신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 형상화하는 것, 이건 하나님의 만족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것, 우리 자신을 형상화하는 것, 그건 우리의 만족이다. 하나님도 당신의 만족을 위해서 만물을 창조하게 되었다. 그런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참 음식, 진짜 실재적인 음식은 뭔가? 그건 그리스도라는 걸 우리가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여러 가지 제물들은 곧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무슨 고기가 필요하겠는가? 하나님은 고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것을 고기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양으로, 송아지로, 떡으로, 이런 걸로 표현한다. 그래서 히브리서 10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제사와 예물과 전제로 번제함과 속죄제는 원하지도 아니하시고 기뻐하지도 아니하신다 하였고, 그 후에 말씀하시기를 보옵소서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나이다.” 이런 말이 있다. 이건 하나님의&amp;nbsp; 뜻을 행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만족을 드린다는 뜻이다. 구약에서는 음식을 드려서 제사를 드렸는데, 그 음식을 드리는 실제적인 의미가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다 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그것을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다 하는 것으로 해석하게 된 것이다. 구약에 있는 모든 모형과 예표들은 전부 어떤 실제를 표현하기 위해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참 실제이신 그리스도를 보고 난 후에 라야 왜 하나님께서는 음식을 필요로 했는가 그 이유를 알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게 되면 우리는 뜻을 모르고 하나님에게 제물만 드리는 그런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아마 이런 것이 어쩌면 원시적인 발상일 수도 있다. 우리 나라에서도 제사를 드릴 때는 꼭 음식을 놓고 제사를 드리는데 귀신이 먹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조상의 신들이 와서 일년에 한번씩 음식을 먹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이 아마 원시적인 발상이 되어 가지고 이런 제사예법이 생긴다고 할 수도 있는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죽은 영혼이 와서 음식을 어떻게 먹겠는가. 그러니까 사람들은 ‘제사음식은 싱겁다’든지 이런 얘기를 한다. 왜냐하면 귀신이 흠향하고 갔기 때문에 진짜를 다 빨아먹어 버려서 맛이 없다, 이런 얘기를 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것보다는 제사음식은 간을 적게 치고 고춧가루도 안 치고 그런 것이다. 생각이 그렇다 그런 얘기이다. 어떻게 영이 와서 물질을 먹겠는가. 영이 물질을 먹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결국 이것은 조상들을 모신다, 섬긴다, 그런 의미로 시작된 것이 아니겠는가.&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마찬가지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이런 음식으로 섬긴다, 이런 개념이 발달하게 됐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물질적인 것, 다시 말하면 동물의 희성을 하나님께 드리게 됐다. 그래서 그것을 드리면 하나님이 만족하신다, 이렇게 생각하게 됐는데, 신약에 오면 동물의 희성이 아닌 인격의 희성, 인격을 하나님이 받으신다 하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도 약간 그런 발전이 와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예수님에게 와서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동물의 제사가 아니다, 그것을 확실하게 드러내게 된 것이다. 예수님 자신의 인격이 하나님을 만족케 했다 하는 사실을 발견하기 때문에 히브리서에서는 “제사와 예물을 원치 아니하시고, 그런 것은 도무지 원치도 아니하신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의 뜻을 행하러 왔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우리는 옛 언약, 구약이라는 성질을 이해할 때, 언약을 할 때 그냥 한 게 아니고 동물의 희성을 놓고 언약을 했다. 그러면 동물의 희성과 하나님과 언약한 셈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사실은 동물과 하나님이 언약할 수 없지 않는가. 나하고 하나님하고 언약을 하는데 동물을 통해서 언약을 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항상 구약은 중간에 어떤 매개를 통해서 하나님하고 연결된 그런 관계이다. 내가 하나님하고 직접 관계된 게 아니라 어떤 형상을 통해서 밖에는 관계를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나는 하나님하고 직접적으로 관계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못 되니까, 나 대신 다른 희성, 동물, 내가 하나님께 드리고자 하는 그런 마음의 형상과 같은 그런 희성들을, 동물들을 하나님께 대신 내놓고 그래서 계약을 맺게끔 그렇게 되었다. 그러니까 구약은 아무리 언약을 하더라도 그 언약이 직접적인 언약이 될 수가 없고, 간접적인 언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간접적인 언약이 직접적으로 바꿔지기 위해서 바로 인격이 필요하고 우리 자신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아마 구약에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자신을 하나님 앞에다 드린다.’ 그러면 구약의 관념으로는 나를 갖다가 불 위에 태워야 된다. 그런데 사람이 태워지면 안 될 것 같으니까, ‘아, 이렇게는 안 되겠구나.’ 그래서 대신 다른 것을 드리게 되었을 것이다.&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런데 신약에 오니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고 그 인격이구나 하는 걸 알게 됐기 때문에 인격의 제사를 드리게 됐다. 하나님의 참 갈망은 자기를 나타낼 참 인격을 필요로 하고 있다 그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하나님은 진짜로 만족하신다, 자기 표현으로서의 인격이 나타날 때 그 때 하나님은 참으로 만족하시는 분이다 하는 것을 최종적으로 알게 된 것이다. 오늘날 이 사실이 아직 2000년의 교회역사를 지나오면서도 분명하지를 못하니까, 간접적인 어떤 방법들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당에 가면 거룩한 그런 모습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그래서 예배를 드린다던가, 개신교에도 예배의 어떤 것을 만들어놓고 남이 볼 때 예배를 드리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느끼게 하는 그런 것들을 만들어서 예배를 드리고 ‘나는 오늘 예배를 드리고 왔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새 언약의 핵심을 모르기 때문에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옛날에 동물의 희성을 드려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그것이 온전치를 못하다. 그래서 무엇이 온전한 것인가? 하는 것 속에서 인격이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게 드러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지금 헛것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 그것 좀 하면 어떠냐?’ 이렇게 생각하지만, 실제가 있다면 어떻게 헛것을 하고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모를 때는 하지만, 알고 나서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에는 저절로 동물의 희성이라는 것이 없어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누가 하지 말아라. 해라.’ 이런 말이 아니고, 참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났기 때문에 안 하면 안 하지 그걸 할 수는 없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도 사람들은 이것을 확실히 모르기 때문에 예배의식이라는 것을 갖고 있다는 걸 보게 되고, 미사나 예배, 이런 형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그래도 좋은 문제가 아니고, 있어서는 안 되는 문제이다. 이제는 쓸데없는 일일뿐만 아니라, 그것이 오히려 참된 예배를 방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 내가 예배드리고 왔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내가 하나님께 직접적으로 예배가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어떤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고 왔기 때문에 나는 내 자신이 직접적으로 예배가 되어야 된다는 개념이 들어올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우리가 사람들에게 그것을 이해시키려 하면 너무너무 어렵다. “우리 인격 자체가 하나님께 예배다” 이 말을 알아듣지를 못한다. 아예 차라리 다른 예배라는 게 없었더라면 알아들을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 그것이 있다 보니까 더욱 알아듣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데, 이 예배는 그러면 예배가 아니란 말이냐?” 이렇게 얘기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딱한 일인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동물의 희성을 드리는 것은 동물의 실제인 그리스도를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인격을 드리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것이 인격을 발견하는데 사용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격을 모독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리고 인격을 거부하는데 사용되어졌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분명히 하나님께 희성을 드리고 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께 드려진 희성이라고 그러니까 반발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지금 자기들은 예배를 드리고 있고 미사를 드리고 있는데, ‘우리가 예배가 된다’ 이러면,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이 되겠는가? 그러면 자기들의 예배나 미사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분노를 느끼게 된다. 그러니까 결국 동물의 언약은 인격의 언약으로 바꾸어져야 할 그런 필요를 갖고 있었는데, 그걸 깨닫지 못하게 되기 때문에 2000년이 지났어도 지금도 여전히 간접적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 간접적 제사를 드리고 있다는 걸 볼 수 있다. 남편이 타국에 가서 멀리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편지를 했다. 그런데 타국에 갔다가 돌아온 남편이 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옛날 습관 때문에 항상 편지로만 하고 말은 안 하게 되는 그런 것과 똑같다. 말을 하는 것은 뭔가 좀 불경한 것 같고, 뭔가 좀 그런 것 같고, 꼭 편지를 해야만 뭔가 잘 되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것 같은 똑같은 이런 입장이 되고 말았다. 이런 어리석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영원한 갈망은 한 인격인 것이다. 한 인격이신 그리스도이다. 우리에게서 바라는 것은 우리의 어떤 형식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인격을 바라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를 들어서, 성당에 가야 되느냐,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려야 되느냐, 이 문제가 아니고 우리의 한 인격을 원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필요한 인격,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는 한 인격, 그것이 아닌 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도 이제는 하나님을 예배할 수 없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벌써 참된 예배가 나왔기 때문에 다른 예배는 이제는 설 수가 없게 되어버렸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좋은 신발이 나온 후에 옛날 신은 신을 수가 없게 되었다. 그 때는 짚세기나 이런 것이 다 좋은 것이었다. 짚세기도 짚세기 중에서 참 좋은 것이 있다. 굉장히 정성스럽게 곱게 만든 것이 있다. 그런 짚세기들은 그 때는 상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지금에 와서 그것은 신을래야 신을 수가 없다. 아무도 신지를 않는다. 그러니까 그 때로서는 좋은 것이었다 할지라도 더 좋은 것이 나온 후에는 쓸 수가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인격이 출현했고, 또 인격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결과가 왔기 때문에 이제는 그것 아닌 것으로는 어떤 방식으로도 예배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 예배를 어떻게 꾸민다. 이런 것은 아주 허무맹랑한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모르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하고 있는 거지, 알고는 할 수 없는 그런 일에 속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은 이제 우리에게 참된 예배를 원하고 있는데, 참된 예배는 결국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을 만족케 하려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인가? 그건 첫째는 우리의 인격이다. 그리스도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양이나 송아지밖에는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다” 구약에는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동물은 아무리 있어도 드릴 수가 없다. 아무리 다른 동물들이 더 살찌고 보기 좋다 하더라도 정해진 제물 외에는 하나님께 드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법률로 ‘하나님께 드릴 때는 이러이러한 것으로 드려라’ 하고 정해놓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것으로는 드릴 수가 없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이제 법률로 정해진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이러이러한 인격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다 하는 것이 드러나 버렸다. 그러니까 그 이외의 다른 인격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 그 인격 아닌 것으로는 나아갈 수 없다. 옛날에 양이 아니고서는 제물이 될 수가 없었듯이, 지금은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제물이 될 수가 없다. 기쁘게 할 방법이 없다는 걸 알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께서는 왜 이런 음식을 또 다시 요구하게 됐는가? 우리는 25장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의 실패를 보게 되었다. 음행과 우상숭배가 나오게 됐다. 그 음행은 인격에 손상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우상숭배란 것은 하나님의 신성에 모독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음행은 내게 관계된 것이라면, 우상숭배는 하나님과 관계된 것, 이렇게 말할 수가 있다. 그런데 이것은 둘이 아니고 사실은 하나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인격을 원하고 있으니까, 우리 인격이 손상된다는 것은 곧 우리 인격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항상 음행과 우상숭배는 동시에 따라다니게 되어 있다. 내 인격에 손상을 주는 일은 곧 하나님에게 모독을 주는 일이다 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래서 이만 사천 명이 하루에 염병으로 죽었다 하는 것이다. 이건 하나님의 맹렬한 진노를 일으키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26장에 오면, 이 염병이 끝난 후에 백성을 재계수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이것은 염병으로 죽은 사람들, 오염되고 실패된 사람들을 제거하고 새로운 군대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다. 패잔병이니 이런 것들은 다 치워버리고, 새로 사단을 정비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범죄 때문에 흐트러졌던 군대를 다시 재정비하고 강병화시키기 위해서 다시 계수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계수가 첫 번째 계수와 두 번째 계수, 이렇게 두 번 나눠지는데, 1장 46절에서 계수가 한번 있었고, 26장 51절에 계수가 있었는데 이 숫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염병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고, 실패로 죽은 사람이 많았지만, 처음 계수했을 때의 숫자하고, 마지막 계수했을 때의 숫자가 큰 차이가 없었다. 지파에 따라서는 어떤 지파는 줄어졌고, 어떤 지파는 늘어났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숫자의 차이가 별로 없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무리 우리의 어떤 실패나 부정적인 상황이 있을지라도 자기의 군대를 확보한다는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이 실패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망하는가? 그렇지 않다. 한 지파가 실패를 해도, 또 다른 지파가 승리를 한다. 보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실패한 사람만 손해지, 전체적인 교회는 손해날 것이 없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그런 걸 많이 보게 된다. 우리 교회 속에서도 늘 실패가 있다. 부분적으로 어느 한쪽에 실패가 있다. 어떤 한 사람이 잘못해서 실패를 하게 된다. 세상의 부끄러움거리가 되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 전체가 망하는가? 그렇지 않고, 그것을 인해서 다른 한쪽에서 충분한 보상이 오게 된다. 그것을 인해서 더 다른 승리가 오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1장에서 계수했던 것이나 26장에서 계수했던 것은 전체적으로는 손상이 없는 것이 됐다. 이건 하나님께서 항상 자기 백성을 확보하신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나서 27장에 와서, 여자들이 기업을 요구했던 그런 판례가 나오게 됐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범죄해서 죽은 사람이 아니다”, “불순종하고 거역하던 세계 속에 들어있던 것이 아니고, 그냥 자기들이 죽은 것이지, 그렇게 한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우리가 딸이라 해서 그분의 기업이 없어지겠느냐?” 이렇게 요구를 했다. 그래서 딸들에게 기업을 주면서 그 기업을 아비의 몫으로, 아버지의 기업으로 삼으라고 그렇게 한 사실을 보게 된다. 이것도 25장의 실패하고 연관이 되어 있고 관계가 되어 있다. 결국은 이 백성들은 재계수에 들뿐 아니라 기업을 가질 사람들로 그렇게 확증이 된 것이다. 결국 실패한 사람은 기업을 가질 수가 없다. 하나님의 백성 중에서 실패자에게는 기업이 없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실패할 때는 기업을 상실하게 된다. 내가 실패하게 될 때는 교회 안에서 내 기업이 없어져버린다. 내 소득이 없어질 뿐만 아니라, 내 누릴 장소가 없어져버린다. 그러니까 기업을 가질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기업 문제가 나온 다음에, 12절 이하에서 모세의 죽음이 예고되고, 그리고 후계자 여호수아가 선정되는 그런 사건이 생기게 되었다. 결국 이것은 새로운 군대를 정비하는 그런 것이다. 여호수아를 모세하고 비교해서, 의미상으로 인도직분에 대해서 보면 그것은 거듭난 사람들의 인도자,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내려왔던 사람들은 다 죽고,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만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 의미상으로 볼 때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은 거듭난 사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애굽에서 그냥 나왔던 사람은 다 없어지고, 광야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 거듭난 사람의 인도자로서 여호수아가 인도직분을 맞게 그렇게 됐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새로운 백성, 새로운 군대, 새로운 인도자, 이렇게 정비가 된 것이다. 백성도 옛날 백성이 아니고 실패된 백성이 다 없어지고 새로운 백성이다. 군대도 이제는 새로운 군대가 됐다. 마찬가지로 인도자도 새로운 인도자가 생기게 됐다. 여기서 인도자가 두 사람이 됐는데,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이었다. 모세 시대에는 모세 한 사람이 지도자였다. 그런데 모세 이후에는 여호수아와 제사장하고, 선지자하고 제사장하고, 이렇게 갈라지게 되었다. 이것은 새로운 神政이 준비됐다는 걸 말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전에 얘기했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민주주의도 아니고 이런 것이 아니라 神政이다. 절대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거기는 ‘우리가 이렇게 하자. 저렇게 하자.’ 이런 건 없다. 오직 하나님이 계시해주신 것만 그걸 따르게 되어 있는 나라가 하나님이 나라이다. 그래서 엘르아살은 계시를 받고, 여호수아는 집행하는, 이런 두 인도직분이 생기게 됐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단지 사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우리가 새로 무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것을 사는 것이다. 그러니까 만들어주신 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는 없다. 새로운 걸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미 코도 만들어졌고 입도 만들어졌으니까, 우리는 코를 아주 감사하게 사용해야 우리가 행복하게 되지, 우리가 콧구멍을 또 하나 뚫는다 해서 행복이 될 수가 없다. 절대로 우리가 새것을 만들어낼 수가 도저히 없다. 창조세계는 완전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완전한 것을 깨닫고 ‘아, 이렇게 좋은 것이구나. 이렇게 귀한 것이구나.’ 하고 발견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지, 새로 내가 무엇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될 수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절대적인 신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의견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민주국가하고는 아주 전혀 다른 성질을 가지고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의 말씀은 선포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우리한테 와서 토론한다든지 협의를 한다든지 의논한다든지 이런 성격을 갖고 있는 게 아니고, 선포하는 성질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렇게 선포하는 것이지, 하나님 자신이 사람에게 와서 그걸 가지고 지금 토론하자는 게 전혀 아니다. 그러니까 내가 그 말을 받느냐 안 받느냐 이것만 남아있다. 하나님이 나를 창조했다 그러면, 내가 아멘 할 것이냐 아니면 안 할 것이냐, 이 둘만 남아있지, 우리의 의견이라는 건 전혀 소용없다. 아무 소용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미 만들어진 거니까, 나는 이미 창조되어버렸기 때문에 창조되어버린 사람으로서의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응답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선포이다. 전혀 이것은 의논이 아니다. 또, 연구도 전혀 아니다. 우리가 연구해볼 일도 못된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된 거니까. 이미 우리에게는 태양이 주어져 있지 않는가. 이것은 선포의 성격을 갖고 있다. 태양이 이미 주어졌으니까 내가 왈가왈부할 수가 없다. 내가 뜨거우면 적도에 살지 않으면 되는 거지, 내가 적도에 가서 태양보고 뜨겁다 해봤자 소용이 없다. 이미 벌써 태양의 법칙이 그렇게 정해져 버렸으니까.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이런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말씀을 내가 받을 것이냐, 안 받을 것이냐?’ 이것밖에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나는 어렸을 때 약 4년 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골머리를 앓았다. 이걸 알아보려고 발버둥을 쳤다. 아무리 해도 알 길이 도저히 없었다. 물어봐도 대답할 사람도 없고, 알 사람이 없었다. 마지막에 결국은 창세기 1장 1절로 되돌아가서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 말씀을 내가 시인하게 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떤 경로로든지 그걸 시인 안 하면 내가 안 되게 되어버렸다. 그러고 난 후에 내 인생은 말뚝을 박고 시작한 것처럼, 기점이 있어 시작된 것처럼 시작이 되었다. 그럴 뿐이지, 다른 이유는 있을 수가 없다. “당신이 왜 창조했습니까?” 이것도 안 되고, 불가능하다. 우리가 부모님보고 “왜 나를 낳았습니까?” 이걸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이미 낳아버렸기 때문에 소용이 없는 것이다. “나를 왜 남자로 낳았습니까? 나를 왜 여자로 낳았습니까?” 이거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왜 나를 병신으로 나게 해놓았습니까?”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다. 이미 벌써 낳아버린 사건이기 때문에 우리는 어찌할 바가 없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선포될 때 내가 그것을 받느냐 안 받느냐만 남아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단지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하면 좀 이해할까 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르니까, 더 깊이 깨달으면 우리가 그것이 행복이 된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내가 못 깨달아도 사실은 사실이다. 그렇지 않는가. 나하고 태양 사이의 거리가 얼마인지 우리는 모르지 않는가. 과학자들은 알겠지만 우리는 모른다. 우리는 모르지만 그대로 살아야 된다. 태양거리가 길든지 짧든지 우리는 상관할 수가 없다. 단지 우리는 지금 태양거리에 적응된 사람만, 존재들만 지구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거기 적응되지 못한 동물이라 할지, 식물이라 할지, 이런 건 다 죽어버리고 없는 것이다. 북극에는 태양거리가 너무 멀어서 너무 추우니까, 거기는 북극에 살 수 없는 동물은 다 죽어버리고 없다. 백곰이라 할지, 펭귄이라 할지 이런 놈만 살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은 없는 것이다. 원래부터 없었는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원래는 거기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살아날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 같은 곳에는 우리 같은 사람이 살게끔 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같은 사람이 적응한 셈이다. 우리 조상들이 적응한 셈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새로운 군대, 새로운 백성, 새로운 인도자, 이렇게 해서 이스라엘은 재정비되게끔 되었다. 왜 이렇게 정비되어야 하는가? 그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 새로운 땅에 들어가려니까 새로운 전열이 정비되어야만 그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가나안 땅은 지금 점령하려고 들어가는 것이다. 점령하려고 들어가는 것이니까 군대일 수밖에 없다. 여행을 가는 것이 아니고, 놀러 가는 것도 아니다. 전쟁을 해서 내가 그 땅을 확보하기 위해서 가는 것이니까 군대가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리고 28장에 와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이걸 볼 때 우리는 새로운 백성, 새로운 군대, 새로운 인도자로서의 하나님의 통치가 가능한 한 세계가 이루어졌다고 하는 사실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렇게 이루어진 세계 속에서 하나님은 만족하실 수 있다, 만족을 얻을 수 있다 하는 걸 볼 수 있다. 아무 때나, 예를 들어서 25장의 실패 속에서 ‘너희는 제물을 드려라’ 이래버리면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25장의 실패, 음행과 우상숭배가 있는 그 속에서 ‘매일 양을 드리고, 열흘이면 뭐 드리고, 달마다 뭐 드리고,’ 이렇게 하면 그건 뭐가 되겠는가? 하나님이 그 염병을 마시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완전하게 정비된 후에 하나님이 음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이다. 하나님의 백성 자체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한 음식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음식을 정해진 때에 드리라, 그렇게 말한다. 왜 꼭 정해진 때에 드리라 하는가? 인생은 정해진 때를 사는 것이다. 하루를 산다. 일주일을 산다. 한달을 산다. 일년을 산다. 이건 다 정해진 것이다. 그 말은 내가 하루를 살면 내 인생을 다 사는 것이다. 또 일주일을 살면 내 인생을 다 사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입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다시 말하면 몸을 쓸 수 없게 되어서 입에다 붓을 물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나는 하루를 살면 산다 하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왔다.” 이렇게 얘기했다. 그러니까 하루가 자기한테 정한 때다. 내일은 우리에게 정해진 것이 아니니까 하루가 정해진 것이다. 그래서 내 인생이 그렇게 정해져 있다면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가 기쁘게 할 수 있는 것도 정해진 것이다. 하루가 내 인생이라면 하루가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때다. 그러니까 정한 때에 드리라는 것이다. 아무 때나 드릴 수 있는 게 아니고, 내 마음대로 드리는 게 아니고, 꼭 정해진 때에 드리라 하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 인생이 정해진 것을 알아야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가 없고, ‘아, 오늘 하루를 하나님이 나에게 주었구나.’ 그래야 내가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일주일을 나한테 주었구나. 한달을 나에게 주었구나.’ 그래야 하나님을 내가 기쁘게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말을 했다. “우리의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옵소서.” 그러니까 ‘내게 정해진 때를 알게 해주어서 나로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그건 내가 하루를 살 것인지, 열흘을 살 것인지 그걸 알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은 누구든지 지혜로워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가 살날을 모르니까 사람은 어리석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날짜를 알게 된다면 우리는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첫 번째는 매일 드리는 지속적인 번제에 대해서 얘기했다. 이것은 계속으로 드리는 것이다. 끊이지 아니하고 드리는 지속적인 번제이다. 우리의 일생은 어느 때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어느 때는 안 해야 되고 그런 게 아니고, 우리의 일생은 지속적으로 하나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우리는 제물을 드리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오늘 했으니까 내일 안 해도 되지, 이런 문제가 아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어도, 내일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안 하고 진노를 일으키시게 했다. 그러면 전혀 용서가 없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무자비하게 용서가 없는가? 하나님이 용서가 없어서 그런 게 아니고 원리가 그렇다. 오늘 내가 아무리 잘 살았을지라도 내일 가서 폭삭 망해 보라. 그러면 어저께 잘 산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전혀 없다. 하나님이 용서를 안 한다. 왜 안 할까? 용서할 수 있는 걸 하나님이 안 한다면 참 잘못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용서 안 하신 이유는 용서를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용서를 못하시는 것이다. 돈 같으면 그렇다. 오늘 하루 잘 벌면 내일 놀아도 괜찮다. 왜냐하면 어제 벌어놓은 것을 가지고 먹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우리 인생은 그것이 아니다. 오늘 하루 잘 벌어놓았다 해서 내일 또 그걸 가지고 먹을 수 없다. 내일은 여전히 새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속적인 제물이 필요하다. 하루도 끊이지 않는 제물이 필요하다. 아침저녁으로, 조석으로 드리는 제물이 필요하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 인생은 결국 하루를 사는 것이지, 수십 년을 사는 것도 아니고 여러 날을 사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날 하루를 잘 산다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인생을 잘 살 수 있다. 그런데 항상 미래만 생각하고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잘 살지 못한다. 오늘 하루 내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드리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은 크게 어려운 일이 없다. 오늘 하루를 내가 드린다, 이렇게 사니까 크게 어려운 일이 없다. 내일을 생각하다 보니까 어려운 것이다. 문제라는 것은 그렇다. ‘내가 이렇게 하면 내일 내가 어떻게 살꼬?’ 이 생각 때문에 못한 거지, 오늘만 딱 생각한다면 못할 게 사실은 없다. 오늘만 딱 산다, 이러면 우리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내가 누구한테 복종하려니까 너무너무 어렵다’ 이렇게 생각하지만 오늘 하루만 한다면 왜 못하겠느냐 이것이다. 내일 또 할 거니까 못한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내가 누구를 공경한다? 나는 못하겠다. 왜 못하겠는가? 내일 또 하려니까. 오늘만 한다면 왜 못하겠는가. 아무리 미운 사람한테라도 “오늘만 사랑해라” 그러면 할 수 있다. 하루만 지나면 될 거니까. 그러나 사실은 우리 인생은 하루뿐이다. 하루뿐이니까, 하루만 그렇게 하고 나면 산다는 것이다. 입으로 그리는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하루를 살았지. 하루를 살았지.” 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살았다는 것이다. ‘아, 오늘 살았구나. 또 오늘 하루 살아야지. 오늘 살았구나.’ 이러다 보니까 나이가 그만큼 먹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날도 빼놓지 않고 사는 그런 날이 되게 됐다. 자기가 무슨 계획을 해놓고 산다면 살아질 것 같지만 살아지지 못한다. 중간에 다 빼먹어버리고 못살 게 마련인데, 매일 산 사람은 일생을 사는 사람이 되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매일의 식사가, 두 마리의 양에다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을 섞어서 떡을 구운 소제하고, 한힌의 사분의 일의 전제(술), 이것을 드리라고 했는데, 이걸 보니까 고기와 떡과 음료수, 이렇게 세 가지가 있다. 우리도 식사를 잘 하려면 그렇게 먹어야 된다. 고기 먹어야 되고, 떡 먹어야 되고, 음료수 먹어야 되고, 그렇게 먹지 않는가. 하나님도 꼭 우리와 같이 음식을 먹는다는 뜻이다. 우리가 목마르면 하나님도 목마르고, 우리가 고기가 필요하면 하나님도 고기가 필요하고, 우리가 떡이 필요하면 하나님도 떡이 필요하다 그런 뜻이다. 꼭 우리처럼 필요하다 그런 뜻이다. 우리가 음식이 꼭 있어야 우리 육체가 만족이 되듯이, 하나님도 꼭 어떤 제물이 있어야 만족이 된다 그런 뜻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매 안식일을 위해서 드리는 번제가 있다. 이것은 매일의 번제와 같다. 그리고 매 월초에 드리는 번제가 또 있다. 이것은 상당히 거창하다. 두 마리의 수송아지에다가,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삼의 소제에다가, 또 송아지마다 포도주 반힌의 전제를 드린다. 또 수양 하나를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의 소제와 각 양을 위한 한힌의 삼분의 일의 전제와 함께 드린다. 흠 없는 일년된 어린양 일곱을 고운 가루 에바 십분의 일의 소제로 각 어린양마다 한힌의 사분의 일의 전제를 드린다. 아주 상당히 거창하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속죄제를 위하여 한 마리의 암 염소를 포함해야 된다. 이런 것이다. 그래서 매 월초에 한번씩 드리는 제사는 아주 거창한 그런 제사이다. 우리도 그렇지 않는가. 하루 먹는 것 다르고, 일주일 모아서 먹는 것 다르고, 한달만에 먹는 것 다르고 그렇다. 우리가 뷔페에 간다. 그러면 매일 갈 수 없지 않는가. 한달에 한번 간다던가 아니면 삼사분기로 한번 간다던가, 이런 식으로. 그러면 좀 풍성하게 먹는 것 아닌가. 하나님도 역시 마찬가지로 매일 먹는 양식하고 달마다 한번 먹는 양식하고 다르다, 이런 얘기이다. 우리 인생하고 똑같다는 뜻이다. 우리 인생이 그렇게 먹어야만 사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받아야만 만족하신다 그런 뜻이다. 속죄제를 왜 드리는가? 그건 하나님이 죄가 있어서 그런 게 아니고, 섬길 자의 자격을 위해서 마지막에 속죄제를 드리게 되어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유월절을 따르는 번제이다. 절기에 관한 번제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생 자체가 일상적인 인생하고 절기적인 인생,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 일상적인 인간생활의 노선이 하나 있고, 또 절기의 노선이 있고 그렇다. 우리는 평상시에 먹는 음식이 있다. 그리고 절기 때 먹는 음식이 있다. 요즘은 세상이 좋아져서 아무 때나 먹지만, 옛날에는 떡을 먹으려면 절기가 돌아와야 먹지 아무 때나 떡을 해먹지 못한다. 그런 것과 마찬가지이다. 우리 인생도 매일 사는 인생이 있고, 그리고 절기적인 인생이 있다. 그 절기는 축제이다. 그러니까 내가 매일의 간증을 가지고 있지만, 축제적 간증도 있어야 된다. 매일의 간증은 너무나 일상적이니까 보통 말을 잘 안하고 그냥 교회에 와서 자기 혼자 살고 집에서만 그냥 느끼고 마는 것일 수가 있다. 자기 집에서만 먹는 거니까 그렇다. 그러나 절기 때는, 잔치 때는 자기 혼자 먹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다 놓고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그래서 집회 때 우리가 나와서 간증을 하는 것은 일상적인 생활노선보다는 절기적인 노선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사람이 굉장히 큰 잔치를 베풀어놓았다. 그러면 우리가 다 먹고 만족해지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적인 인생의 노선이 있고, 절기적인 노선이 있고 그렇다. 그래서 항상 똑같이만 살면 재미가 없다. 어느 날인가 한번은 축제를 하고 이렇게 되어야 되는 것 아닌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 조상들은 그래서 한 달에 두 번씩 축제를 했다. 절기가 15일마다 한번씩 있다. 절기마다 무엇을 했다. 유월 유두날은 뭐 하고, 칠월칠석날은 뭐 하고, 이런 식으로 다 해먹는 게 다르다. 콩 볶아 먹는 날, 팥죽 쑤어먹는 날, 절기마다 무얼 먹는 것을 만들어놓았다. 우리 나라처럼 절기가 많은 나라도 드물 것이고, 또 절기마다 무얼 해먹는 나라도 참 드물다. 보름날은 나물밥을 먹는다. 또 하들엣 날이라고 하는 날은 콩 볶아먹는다. 이런 식으로 절기마다 음식이 다 다르다. 왜 그런가 하면, 지금 과학적으로 연구해보니까 아주 참 지혜로운 거라고 한다. 그래서 꼭 그 시기가 그 음식이 필요한 시기라고 한다. 정월 보름이 돌아오면 나물밥을 먹는데, 옛날에는 그 때가 돌아오면 채소가 없다. 그래서 채소를 못 먹으니까, 비타민이 제일 많이 결핍한 때라고 한다. 그래서 나물밥을 먹는다고 한다. 그리고 이월 달에 콩 볶아 먹는 날은, 그건 단백질이 모자라는 때라고 한다. 동지에 팥죽을 쑤어먹는다. 이것은 악귀를 몰아낸다, 이런 뜻인데, 겨울에 팥죽을 쑤어먹으면 감기에 안 든다든가 또 역병에 안 든다든가 그런 게 있다. 그러니까 아주 지혜로운 배열이다. 이것들은 우리 몸을 만족하게 하기 위해서 있었던 것들이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절기의 노선이 있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특별한 음식을 먹는 때가 있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교회에 와서도 우리는 특별한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일상적인 음식은 다 먹는 거니까 얘기할 필요가 없는데, 특별한 음식이 있는 사람이 나와서 얘기를 하게 되면 우리는 그 때 절기를 만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건 우리 영적인 체험과 일치한다. 우리의 영적인 생활은 유월절로 시작된다. 그래서 오순절로 완성이 된다. 유월절에서 시작해서 오순절까지 가는 절기 안에서 우리는 한 단위의 인생이 완성되는 걸 보게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유월절은 단 하루를 지키고, 무교절은 칠일 동안 지키게 된다. 유월절은 단 하루, 그건 왜 그러냐 하면 우리의 구속은 ‘영 단번의 사건’이라는 뜻이다. 내가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아, 나는 이제 당신에게 복종할 자입니다.’ 하고 딱 하고 결정할 때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건 영 단번이 사건이다. 매일 하는 사건이 아니고, 영 단번의 사건이다. 그래서 ‘구원은 영 단번이다’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오는 것은 영 단번에 나왔다. 딱 한번에 끝나고 나온 것이다. 매일 같이 애굽에서 싸우고 있는 게 아니다. 광야를 지나가는 시간은 긴 시간이었지만, 출애굽을 하는 시간은 잠깐이다. 내 인생이 딱 끝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 그것은 아주 단번의 사건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한번 그렇다 해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냐 하면 그렇지 않고, 우리는 단계적인 유월절이 있다는 것을 경험할 것이다. 처음에 내가 교회를 나올 때 어떤 유월절이 하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한참 가다가 또 다른 유월절이 나한테 있을 수 있다. 가다가 또 다른 유월절이 있을 수 있다. 더 깊은 유월절로, 더 깊은 유월절로 우리가 경험해가고, 마지막에는 우리 안에서 십자가라는 유월절이 생기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영원한 사건이고 단번의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무교절은 유월절 다음날부터이다. 그날부터는 누룩 없는 떡을 먹는 날이다. 왜 그러냐 하면 우리가 어린양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거듭나게 된다면, 그 다음 음식은 우리는 어린양의 음식을 먹어야 한다. 내가 어린양으로 거듭난 사람이 호랑이 음식을 계속 먹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우리는 유월절 이전에는 누룩 있는 떡을 먹었는데, 유월절 이후에는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이다. 누룩 없는 떡은 죄 없는 떡을 말한다. ‘죄 없다’는 말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이 없는’ 그 말이다. 옛 사람이 아닌 그 삶을 살아가는 걸 의미한다. “우리의 유월절 그리스도, 누룩 없는 떡으로 하자. 누룩 없는 떡이신 그리스도로 하자.” 이런 말이 고린도 전서에 나온다. 유월절은 우리가 영 단번에 죽은 사건이고, 무교절은 죽음을 통해서 우리가 다시 살아날 때 거듭난 사람이 먹는 양식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의 삶은 무교절의 삶이지, 우리가 유교절, 다시 말하면 누룩 있는 떡을 먹는 삶이 아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의 무교절, 우리의 누룩 없는 떡, 우리의 어린양, 여기서 우리 자신이 호랑이인체 하고 살다가 어느 날 하나님의 빛이 우리한테 들어와서 우리가 어린양으로 발견이 되면 그 때 우리는 호랑이의 모든 인생이 끝나고 어린양의 인생으로 바꿔지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 운명을 깨닫게 된다. ‘우리 자신의 운명이 바로 유월절이고 어린양이구나.’ 이것은 영 단번에 이루어지는 구원이다. 우리가 만일 그것이 깊이 정말로 알아진다면 우리는 누룩 있는 떡을 먹을 수가 없다. 그 삶 자체가 누룩 없는 삶이다. 부풀린 삶은 살다가, 어느 날 가서 내가 부풀린 삶이 없어져버리고 그냥 고운 가루 밀가루 삶이 왔다. 그러면 그건 죄가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죄를 씻으려고 애를 쓰는데, 그 죄를 씻는 것이 아니고, 우리는 근원적으로 죄 없는 운명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가 원래 어린양이었으면, 하나님이 우리를 원래 어린양으로 만들어놓았으면, 우리가 어린양으로 있었으면 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린양이 싫어서 머리에다 뿔도 좀 만들고, 이빨도 줄로 실어서 가시도 좀 만들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우리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빛을 통해서, 은혜를 통해서 우리가 다시 어린양의 운명 안으로 들어오게 될 때, 그 때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우리는 유월절이 이루어지는 걸 보게 된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 다음에 칠칠절을 위한 번제를 드리라고 한다. 칠칠절은 사실은 오순절이나 마찬가지이다. 칠칠은 49, 그래서 다음날이 50일째 되는 날이니까 그렇다. 이것은 첫 열매를 드리는 날이다. 그래서 새로운 소제로 여호와께 드린다. 예수님의 부활은 온 인류 가운데서 첫 열매이다. 부활의 첫 열매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후에 50일째 되는 날, 그래서 그것은 승천하는 날이 됐다. 오순절 날이 되었다. 예수님이 첫 열매로 부활하시고, 오순절에 교회가 나오고 그랬다. 그러면 의미상으로 볼 때 예수님은 첫 열매, 오순절은 두 번째 열매, 그렇다. 그 열매의 확산, 그래서 그것이 교회가 된 것이다. 이것을 지키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첫 열매로서 부활하신 주님을 인해서 50일째 되는 날에 우리는 교회로 출생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그러니까 첫 열매를 따라서 우리가 부활한 것이다. 첫 열매를 따라서 부활의 세계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첫 열매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래서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진 세계 안으로 우리 자신이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생활이다. 그래서 이 생활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생활이다. 그래서 칠칠절을 위한 번제를 드리라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 이미 지나간 모든 과정을 포함하고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지금 초등학교 일학년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옛날 초등학교 때 배운 것하고는 아주 차이가 엄청나게 많다. 지금 초등학교 지식 수준은 굉장히 지식 수준이 높다. 옛날 초등학교에서는 상상도 못한 것들을 배우고 있다. 그러니까 지금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학생들은 그동안 역사적으로 죽 왔던 초등학교를 총 포함해서 들어간 것이다. 전부를 다 포함해서 들어간 것이다. 그러니까 100년 전에 초등학교에 안 가봤어도 지금 초등학교를 들어간 학생은 100년 동안의 초등학교의 발달과정을 전부 자기 자신이 한꺼번에 포함하고 들어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백년의 역사를 통해서 현재의 초등학교가 생겼으니까 발달의 모든 과정을 한꺼번에 누리는 것이다. 나이키 신발을 신는 사람은 짚세기로부터 시작해 가지고 고무신으로, 운동화로 해서 오는 공업적인 모든 발달의 과정을 총망라해서 최종 완성적인 신을 신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유월절에서 시작해서 오순절로 들어온다는 것은 나로 인해서였든지 나로 인해서 아니었든지 간에, 누구로 인해서였든지 간에 역사적으로 완성되어진 한 세계를 내가 누리는 것이다. 그러니까 교회생활은 아주 축복된 생활이다. 이 생활은 우리를 기쁘게 하는 생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만족을 주는 그런 생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목적이 거기 있었으니까.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유월절은 우리의 유월절 그리스도의 예표이고, 오순절은 삼일 하나님의 최종 완성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생이 되시고, 인생이 되신 예수가 다시 우리에게 생명 주는 영이 되실 때, 이것은 과정을 거쳐오신 하나님이시다. 오늘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하나님은 수천년 수만년을 거쳐서 우리에게 도달하신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지금 맛보고 있는 태양은 몇 광년이라니까 수 백년을 왔는지, 수 천년을 왔는지 모른다. 그런 오랜 시간동안 태양으로부터 여행을 해서 우리 몸에 지금 도착한 것이다. 현재적으로 우리는 그 태양을 누리고 있지만, 그건 이미 벌써 과거에 출발한 태양열을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이다. 오늘 우리에게 도달하신 하나님은 최종 완성적으로 도달한 하나님이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모든 제물은 하나님의 음식이신 그리스도다, 모든 절기는 하나님의 만족이신 그리스도다 하는 걸 우리가 보게 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음식이다. 하나님의 음식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동시에 누리를 수 있는 그런 음식이 되었다. 동일한 식사, 동일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 이것을 우리는 ‘교통’이라고 말하게 된다. ‘우리가 교제한다’, ‘어느 형제하고 나하고 교통을 했다. 그랬더니 기분이 좋다.’ 그 말은 ‘나는 소고기 먹고 그 쪽 사람은 돼지고기 먹었다’ 이 말이 아니다. 둘이 다 똑같이 소고기를 먹었다 그 얘기이다. 둘이 다 소고기를 먹었는데, 그 중에도 더 즐겁고 더 재미있는 교제는 어떤 것인가? 둘이 똑같이 불고기를 먹었다, 그런 얘기이다. 하나는 불고기를 먹었고, 하나는 갈비탕 먹었다. 이건 교제가 조금 덜 됐다는 뜻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음식을 먹었다. 하나님과 우리가 함께 먹는다. 한 가지를 음식을 먹는다. 이것이 최고의 축복이다. 왜냐하면 최고의 교통이기 때문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원래 하나님과 사람은 한 음식을 먹고살도록 그렇게 창조되었다. 같은 장소에서 한 음식을 먹으면서 살도록,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동산에다 지으신 사람을 두었다. 그러면 거기서 한 곳에서 같은 음식을 먹고살아야 되는 것이다. 이건 ‘교통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타락 때문에 하나님과 사람은 각자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고, 또 다른 곳으로 갔기 때문에 각자 다른 음식을 먹게 되었다. 그래서 전혀 다른 음식을 먹었다. 다른 음식을 먹다보니까 둘이 서로 교통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는 돼지고기 먹는데 하나는 소고기 먹는다. 이러니까 교통이 안 되는 것이다. 양고기 먹는 사람하고 개고기 먹는 사람하고 교통이 되겠는가. 그게 될 수가 없다. 양고기 먹는 것은 양이고, 개고기 먹는 것은 개고 그렇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거룩한 음식을 먹고 있고, 우리는 나쁜 음식을 먹고 있고 그렇다. 그러면 둘이 어떻게 교통이 되겠느냐 이것이다. 이건 참 근원적이고 원시적인 그런 표현이다. 옛날에는 어떤 음식을 먹느냐 하는 것이 그 어떤 사람의 수준, 그런 것을 결정해주는 것이다. 가난한 때니까. 소고기 먹는 층에 속하느냐, 돼지고기 먹는 층에 속하느냐, 이런 것이다. 요즘에도 마찬가지인데, 미국사람이 먹는 수준, 한국사람이 먹는 수준, 인도사람이 먹는 수준, 이렇게 다르다. 그 나라가 얼마나 부자냐 하는 것은 음식으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 음식이니까.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한 음식을 먹는다, 하나님과 한 음식을 먹는다, 형제와 한 음식을 먹는다, 이것이 참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같은 음식을 먹는 사람하고는 교제가 되는데,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하고는 교통이 안 되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이 음식을 말씀이라고 생각해보자. 한 말씀을 먹는 사람들끼리는 다 교통이 된다. 그런데 다른 말씀을 먹는 사람하고는 교통이 안 된다. 우리 형제들은 지금 서울에 있는 형제나 부산에 있는 형제나 춘천에 있는 형제나 만나면 다 똑같다. 왜 그러냐 하면 한 음식을 먹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한 음식이 아닌 다른 음식을 먹는 사람을 만나면 교통이 안 된다. 이것이 음식문화라는 것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함께 먹는다는 것,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무엇일까? 이 세상에서 그 음식이 없었다. 하나님이 먹을 음식도 있고, 사람이 먹을 음식도 있는데,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먹을 음식이 없다.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바로 그리스도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화목이 됐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방인과 유대인도 똑같다. 유대인이 먹는 음식이 다르고, 이방인이 먹는 음식이 다르다. 다시 말하면 유대인의 종교가 다르고, 이방인의 종교가 다르다. 유대인이 먹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고, 이방인이 먹는 말씀이 다르다. 그러니까 영원히 벽이 있어 가지고 서로 하나가 안 될 것 아닌가.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그 둘을 하나가 되게 하더라 이것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는 이방인도 모을 수 있고, 유대인도 모을 수 있는 음식이다 그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 영원한 음식이신 그리스도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조성된 음식이다. 그러니까 십자가로 이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 이방인과 유대인은 영원히 섞일 수 없는데,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 둘이 하나가 되게 했다. 이것이 이 우주의 신비고 역사의 신비고 그렇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이 세상에 가면 하나님이 먹는 음식도 많고, 사람이 먹는 음식도 많다. 그런데 서로 음식이 다르니까 교통이 안 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미국 사람들은 버터를 먹고, 우리는 된장을 먹으니까 교통이 안 된다. 우리는 그들 옆에 가면 버터 냄새가 싫고, 그들은 우리 옆에 오면 된장 냄새가 싫고 이러기 때문에 교통이 안 된다. 그러니까 한 음식만 먹는다면 내가 그 사람한테 가도 같은 냄새가 날 것이고, 이 사람이 나한테 와도 같은 냄새가 날 텐데, 음식이 다르다 보니까 냄새가 다르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은 차만 타도 누린내가 난다. 하도 버터를 먹어서 그렇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우리는 모르지만, 그 사람들은 우리 차만 타도 마늘 냄새가 난다. 그러니까 “아, 냄새 난다. 냄새 난다.”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좋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나쁘다. 우리는 김치가 좋다고 하는데 그 사람들은 김치가 싫다고 한다. 그러니까 어떻게 교통이 되겠는가? 같이 음식을 먹을 수가 없지 않는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과 사람이 각기 다른 음식을 갖고 있다. 그러면 영원히 불행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통한 인격이다. 그 인격은 하나님도 만족하고 사람도 만족하는 인격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어떻게 만족을 드릴까? 십자가를 통하여 나온 인격 나온 인격만이 하나님을 만족케 할 수 있다. 또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내가 어떻게 만족케 할까? 또 마찬가지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나온 인격만이 사람을 만족케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람에게도 만족하고, 하나님에게도 만족하고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아내들은 보통 남편들에게 그렇게 말한다. “아, 우리 남편이 좀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나왔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자기가 먹기가 좋을 것이니까.” 이렇게 생각한다. “야, 우리 남편은 먹기가 뻣뻣하다.” 왜 그런가? 십자가를 안 져서 뻣뻣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항상 아내들은 형제들보고 십자가를 지라고 자꾸 그렇게 말한다. 왜냐하면 떡은 반죽을 자꾸 하고 두들기고 때리고 이럴수록 떡이 찰지고 맛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죽을 지경이다. 그런데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나온 인격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인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사람을 만족케 하는 그런 인격이다. 다른 사람보고 “너는 왜 나를 싫어하냐? 너는 왜 나를 좋아하지 않느냐?” 이렇게 해봤자 소용이 없지 않는가. 내가 냄새 맡기가 싫은데, 미국 사람보고 우리가 “왜 김치 싫어하느냐?” 해보라. 그러면 뭐라고 대답하겠는가? 자기들은 이럴 것이다. “너희는 왜 누린내 싫어하느냐?” 이렇게 말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말이 안 된다. 아무리 말해도 말이 안 된다. “왜 너는 나를 싫어하느냐, 왜 너는 나를 미워하느냐?” 이건 아무리 해도 소용이 없다.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된다. 그러면 내가 좋아하라고 안 해도 좋아할 것 아닌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꽃이 꿀을 가지고 있으니까 벌이 날아오는 것 아니겠는가. 꽃이 벌보고 초청장을 내는가, 세일즈를 하는가, 보험모집을 하는가? 전혀 안 해도 벌이 멀리서 찾아온다. 그 조그마한 꿀 하나를 보고 벌이 어떻게 그걸 찾아오는지 너무너무 신기하다. 우리가 하나님이 참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되고, 사람이 좋아하는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안심이 되고, 또 사람에게 대해서도 안심이 될 것이다. 전에 우리가 종교생활을 할 때 항상 불안했던 것은 ‘아, 하나님이 나를 기뻐하실까?’ 이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까?, 저렇게 하면 기뻐하실까? 이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는 산 제사가 되면 우리가 그 불안이 없어지고, 하나님도 내가 필요해서 올 것이다. 하나님도 내가 필요하니까 오신다 이것이다. 내가 하나님보고 “오시옵소서. 주시옵소서.” 안 해도 하나님이 저절로 오신다는 것이다. 오라고 안 해도 하나님은 오시게 된다. 하나님이 내가 필요하니까. 마찬가지로 사람도 그렇다. ‘아, 저 사람이 나를 버리면 어쩌나? 저 사람이 나를 싫어하면 어쩌나?’ 이것이 항상 신경 쓰이는 일이다. 그런데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어진다. 내가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면 신경 쓸 일이 없어진다. 그러면 얼마나 편하고 좋아지겠는가. 함께 먹는다는 것, 어떤 음식이 하나 있는데 그 음식이 그렇게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먹을 수 있는 음식이다. 바로 이가 그리스도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음식을 함께 먹기 위해서, 레위기에서 먼저는 절대적인 번제, 오직 하나님만 잡수실 수 있는 번제가 있었다. 그건 사람은 절대로 터치할 수 없는 그런 양식이었다. 두 번째 식사가 소제였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같이 나누는 것이었다. 이 원칙은 우리가 하나님께 절대적인 번제가 될 때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시 양식을 주신다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양식을 공유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소제 다음에 기쁨을 더하게 하는 전제가 있었다. 이건 술을 더한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잡수시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나하고 하나님이 나누어 먹고, 그러면 화목이 되게 된다. 그 화목제 다음에 전제가 부어지게 된다. 그 때 잔치가 벌어진다는 뜻이다. 잔치라는 것은 술이 있어야 잔치가 되는 것이 아닌가.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음식이, 예수님께서 절대적인 번제가 됐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님께서 잡수실 수 있게 됐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와 나눌 수가 있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에게 절대적인 번제 안에 있을 때, 그 때 우리는 사람과 나눌 수가 있는 사람이 되게 된다. ‘아, 나는 사람하고 좀 친해봐야 되겠다.’ 하고 노력을 한다. 그렇지만 내가 친해봐야 되겠다고만 해서 되는 건 아니다. 또, 그것이 100% 친해지는 것도 물론 아니다. 내가 하나님에게 100% 번제가 되면 나는 다른 사람에게 저절로 친해지게 된다. 그러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 한군데만 완전하게 되어버리면 다른 데는 저절로 다 되는 건데,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려니까 얼마나 어려운가. 번제도 해야 되고, 소제도 해야 되고, 전제도 해야 되고, 이러려니까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한 가지만 완전하게 하면 저절로 번제는 소제를 낳고 소제는 화목제를 낳고 화목제는 전제를 낳게 그렇게 되어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이 절기가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유월절은 거듭나는 절기, 유월절은 새로 시작한다는 뜻이다. 싹이 난다는 말이다. 그리고 무교절은 죄 없는 삶, 누룩 없는 삶, 옛 본성이 없는 삶, 그걸 무교절이라고 할 수 있다. 초실절, 이것은 예수님이 부활한 때, 부활절을 초실절이라고 한다. 이건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인류 가운데서 최초로 싹이 난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 이것은 교회 산출의 근거가 되었다. 그리고 오순절, 이것은 교회를 형성하는 절기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풍성한 절기이다. 오순절은 맥추절이라고도 한다. 추수를 하는 절기이다. 곡식을 거두는 절기이다. 겨울 동안에 심어놓았던 것을 맥추절에 와서 거두는 그런 것이다. 오순절에 와서 교회가 형성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교회가 나왔는데, 교회는 안타깝게도 두 부분으로 구성이 되었다. 이방인의 면과 유대인의 면으로 구성이 됐는데, 사도행전 2장에서는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의 교회, 사도행전 10장에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이방인의 교회, 이 두 개의 교회가 생겼다. 그리고 두 개의 교회가 생길 때마다 경륜적인 성령이 부어졌다. 두 군데 똑같이 부어졌다. 그런데 이 두 교회는 아직 죄가 섞여 있는 교회이다. 그래서 레위기 23장 16절과 17절에 보면, 전부 다 무교병을 드리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만 유교병, 누룩 있는 떡 두 덩이를 드리라고 되어 있다. 이 누룩 있는 떡 두 덩이는 이방인의 교회와 유대인의 교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직은 누룩이 있는 교회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아직은 누룩이 있다. 완전하게 무교병은 아니다. 죄가 아직 섞여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점점 무교병으로 바꾸어져 가는 그런 과정에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절기마다 음식을 드렸다. 그것은 우리가 절기마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그 말이다. 절기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거듭날 때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내가 새 사람으로 거듭날 때 하나님의 잔치가 안 되겠는가. 하나님의 만족이 된다. 그래서 내가 거듭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음식이 되게 된다. 내가 자라날 때 그것은 또 하나님의 음식이 되게 된다. 부모가 아기를 낳으면 낳을 때 기쁘고, 자라날 때 기쁘고 그렇다. 그것은 바로 음식과 같다. 아기가 ‘아’ 하고 나오자 나는 음식을 하나 먹었다. 아기가 무럭무럭 자라나자, 그 때 나는 또 음식을 먹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우리가 거듭날 때 만족하시고, 우리가 자라날 때 만족하신다. 예수님으로 보면 초실절, 부활할 때 하나님이 만족하시고, 확산될 때, 오순절 때 또 만족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절기마다 하나님이 만족해하신다는 걸 보게 된다. 우리 인생의 절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은 더 만족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만일 먹고 살 것만 많이 있다면 욥처럼 매일 잔치만 베풀면 된다. 우리는 먹고 살 것이 없어서, 가난해서 할 수 없이 이따금 절기를 한번씩 지내는 것이 아닌가. 육신적으로는 그렇게 못하지만, 그러나 영적으로는 우리가 매일 절기를 지킬 수가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나의 삶이다. 오늘 하루만 잘하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면 매일같이 잔치를 가질 수가 있다. ‘오늘 하루만 순종하자. 오늘 하루만 남을 기쁘게 하자. 오늘 하루만 신경질 내지 말자. 오늘 하루만 잘살아보자.’ 이러면 일생을 잘 살 수 있다. 매일 하루만 잘 살면 되니까, 하루만 한다면 못할 사람이 아무도 없으니까, 사랑을 못할 사람도 없고, 순종을 못할 사람도 없고, 봉사를 못할 사람도 없고, 다 없다. 여러 날 한다고 생각하니까 못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의 모든 인생의 절기들은 전부 다 하나님의 음식이 된다. 만족이 된다. 그래서 절기가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을 더욱 더 만족케 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하루하루가 만일 우리에게 절기가 된다면, 그건 매일 하나님께 번제를 드리는, 제물을 드리는 그런 사람이 되게 될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서 창조하여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기쁘게 할 자가 있고, 기쁘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하나님의 만족 안에 우리가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고상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당신과 함께 음식을 먹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깊은 교통이고 깊은 삶인지! 이것들을 우리에게 허락해주시고, 이것들을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 안에 있는 그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다 진열해주시고 우리에게 다 보여주셔서 우리가 그것을 보고 누리고 만질 수 있도록 축복하여 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하루가 합해져 가지고 우리 일생이 되기 때문에 하루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그 하루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게 살도록 그렇게 허락해주셨음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내일이 있는 사람이기보다 오늘밖에 없는 사람이고, 우리는 오늘 하루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번제로 드려질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망입니다.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하루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것이 얼마나 큰 소망이 되는지 모릅니다. 주님, 우리가 매일의 삶에서 하루를 사는 삶이 되게 해주시고, 일생을 사는 삶에서 하루를 사는 삶이 되게 해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는 지금 구약성경을 보고 있지만, 이 구약 안에 들어있는 계시가 시간을 지나면서 계속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다른 성경이 쓰여질 수가 없고, 오직 하나의 말씀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은 그 말씀이 계속적으로 발전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주어진 계시가 처음보다 더 분명해지기를 바라고, 또 우리의 삶이 처음보다 더 나아지게 되기를 바란다. 자꾸 발전해서 하나의 삶이 완성될 때까지, 마치 열매가 처음에는 아주 보잘 것 없이 맺어 가지고 시간이 차근차근 커지고 또 영글어지고 그리고 익고 그렇게 하는 것처럼 모든 생명은 다 그렇다. 시작은 미미하지만 마지막은 창대하리라 하는 것처럼, 우리의 모든 것이 시작은 미미하지만 마지막을 창대하게 될 것이다. &lt;/SPAN&gt;&lt;/P&gt;
	    </content>
	    	</entry>
    	<entry>
	    <title>36. 민27: 12-23.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위탁하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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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한자리</name>
	    </author>
	    <updated>2009-11-10T14:18:14Z</updated>
	    <published>2009-11-10T14:18:14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P&gt;&lt;!--StartFragment--&gt; &lt;A name=&quot;[문서의 처음]&quot;&gt;&lt;/A&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민27: 12-23. 여호수아에게 안수하여 위탁하고&amp;nbsp;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 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2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3 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의 돌아간 것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4 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 물은 신 광야 가데스의 므리바 물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5 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와 가로되&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6 여호와 모든 육체의 생명의 하나님이시여 원컨대 한 사람을 이 회중 위에 세워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7 그로 그들 앞에 출입하며 그들을 인도하여 출입하게 하사 여호와의 회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8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눈의 아들 여호수아는 신에 감동된 자니 너는 데려다가 그에게 안수하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19 그를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 그들의 목전에서 그에게 위탁하여&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20 네 존귀를 그에게 돌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21 그는 제사장 엘르아살 앞에 설 것이요 엘르아살은 그를 위하여 우림의 판결법으로 여호와 앞에 물을 것이며 그와 온 이스라엘&amp;nbsp; 자손 곧 온 회중은 엘르아살의 말을 좇아 나가며 들어올 것이니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22 모세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여 여호수아를 데려다가 제사장 엘르아살과 온 회중 앞에 세우고&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27:23 그에게 안수하여 위탁하되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하였더라&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lt;BR&gt;&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27장 12절 이하는 모세의 죽음과 후계자 여호수아가 등장하는 그런 장면이다. 지금까지 애굽에서부터 모세는 가나안 건너편, 즉 요단강 저편까지 백성을 인도해왔다. 그러나 요단강을 건너서 본 땅인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고 하는 그 무렵에 모세는 죽고 여호수아가 대신해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그렇게 되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언제든지 한 시대가 마감하면, 또 그 시대를 인도하던 어떤 사람도 역시 마감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그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 할 수도 있고, 또 그 인물이 그 시대를 만든다 할 수도 있다. 모세가 없었더라면 출애굽이 있을 수가 없고, 또 출애굽이 없었으면 모세가 있을 필요가 없는 그런 사람이 될 수가 있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그 때에 적절한 인물을 선택하시고, 또 그런 사람이 있어야만 하나님은 자기 일을 집행하신다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때는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그런 뜻이다. 자기 계획을 세워서 ‘몇 년에는 뭘 하고, 몇 년에는 뭘 하겠다’ 이렇게 할 수 없는 것은, 아무리 계획이 있을지라도 그것을 집행할 수 있는 인물이 없으면 그 일을 집행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인물이 나올 때까지를 기다린다고 할 수밖에 없다. 물론 그것을 큰 의미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에게서 다 계획하신 것이다’ 이렇게 할 수 있지만, 우리 입장에서 볼 때는 예를 들어서, ‘하나님께서 꼭 그 때에, 그 시간에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서 모세를 미리부터 그렇게 준비했다.’ 이렇게 이해하기는 참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는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스라엘도 때가 차서 그들이 애굽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다 하는 것을 깨닫게 되는 시간이 있었고, 모세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부름을 받지 않으면 안 될 그런 때가 다 되어서 왔고, 이것들이 모두 맞았다고 할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했다고 할 수가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결국 모세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 가지고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 거기까지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임무를 띠게 된 그런 사람이다. 이건 마치 세상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가는 일이니까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 자기 땅, 자기 고향이 아닌 객지생활을 하는 동안의 인도자라고 볼 수도 있고, 그런 기간에 모세는 율법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그런 사람이 됐다. 율법은 바로 어디서 필요한 것이었는가? 광야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애굽에 있을 때는 율법이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세상에 있을 때니까. 야만의 시대고 외국 땅에 있는 때고, 그러니까 하나님을 섬길 일도 없고 섬길 수도 없고 하나님을 섬길 법률도 없고, 그런 기준이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광야에 나오니까 하나님을 섬겨야 할 그런 백성이 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하기 때문에 또 율법이 필요하게 되고, 이렇게 되었다. 결국 세상 사람에게는 율법이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어야 율법이 필요한 것이니까 율법이 필요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게 되면 그 때 율법이 필요하게끔 그렇게 되는 걸 볼 수 있다. 그러나 율법을 가지고는 가나안 땅에까지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나안은 율법이 적용되는 땅이 아니고, 은혜가 적용되는 땅이다. 왜냐하면 가나안 자체를 주신 것 자체가 은혜로 주신 것이니까 그 안에 사는 것도 역시 은혜로 살아야 된다는 그런 원칙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우리가 광야에서는 은혜로 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으로 살아야 하는 곳이니까 거기서는 은혜로 살 수가 없었다. 예를 들어서, 옛날 우리가 종교 생활할 때, 그 때는 우리가 은혜로 살기가 어려운 것이다. 율법으로 사는 것이 오히려 쉬운 일이다. 우리가 세상에 살 때는 은혜로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 병신이 되고 바보가 되는 것이니까 은혜로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 세상에 살 때는 세상의 어떤 질서가 있고 원칙이 있으니까 그 원칙과 질서를 따라야 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와 마찬가지로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가나안의 어떤 원칙을 따라야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교회 안에 들어왔을 때는 교회의 특수성 때문에 교회의 어떤 법이 있고 질서가 있고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 안에서 와서 다른 법으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애굽에 살던 그 법으로 광야를 살 수 없고, 광야에 살던 그 법으로 또 교회에 살 수도 물론 없다. 왜냐하면 누리는 게 다 다르니까 그렇다. 육지에 걸어갈 때하고 물 속에서 걸어갈 때하고는 다르지 않는가. 똑같은 사람이지만 물의 법칙이 다르고 공중의 법칙이 다르니까 다르게 갈 수밖에 없다. 꼭 그와 마찬가지이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다른 법이 필요하고, 또 다른 세계니까 그래서 지도자도 마찬가지로 역시 다른 지도자가 필요하게끔 그렇게 됐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모택동은 중국을 공산주의 국가로 혁명하는데 적절하게 필요한 그런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경제건설을 하는데는 적절하지 못한 인물이었다. 그래서 공산주의가 지루해지자 다시 공산주의를 더 강화하려고 홍위병을 일으키게 된 것이다.&amp;nbsp; 왜냐하면 공산주의가 맨 처음에 아주 배고프고 못살고 그럴 때는 효과가 있었는데, 이제 먹는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하고 나니까 그것만 갖고는 뭔가 만족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백성들에게서 다른 욕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때 소위 자본주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것은 차단하기 위해서 홍위병을 일으키게 되고, 이걸로 인해서 중공은 10년 내지 20년을 후퇴하는 그런 결과를 가져왔다. 만일 모택동이 계속 있었다면 중공은 결코 개방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경제개발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모택동이 갔기 때문에 등소평이 나와서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그런 것이 생겼는데, 이것은 결국 시대적인 요청하고 그 인물의 특성하고가 결부되어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할 수 있다. 아무리 시대가 그걸 요청했을지라도 그렇게 인도할 수 있는 인물이 없었으면 불가능했고, 또 그런 인물이 있었다 하더라도 시대적 요청이 없으면 역시 또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와 그 인물과 그 환경은 적절하게 서로 맞아떨어져야만 된다는 걸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는 가나안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은혜의 땅이니까 은혜의 원칙을 가지고 살아야 된다. 교회는 은혜의 곳이니까 은혜의 원칙을 따라 살아야 된다 하는 것이다. 율법의 원칙으로는 교회가 안 된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모세의 죽음, 모세를 하나님께서 산으로 불러서 그&amp;nbsp; 땅을 보여주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 아바림 산에 올라가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을 바라보라 하였다(27:12)” 하였다. 땅을 보여주었다 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으로 모세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다는 의미이다. 가나안 땅을 보기만 했다. 그리고 들어가지는 못했다.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보고 즐거워했다” 이런 말과 같이, 모세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위치, 바라보는 위치, 이것은 율법은 은혜를 대망하기 위해서 있다는 것이다. ‘율법으로 말미암아서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이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오히려 은혜를 기다리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이것이 로마서에서 바울이 한 말이다. 우리가 율법 안에서 마지막까지 와야 그 때 ‘아, 은혜가 필요하구나.’ 그걸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때 우리는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율법 안에서 시달려보지 않으면 은혜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모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모세는 자기 사명을 다 하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위치에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유태교는 자기의 사명을 다 하고 은혜를 바라보는 위치에 서 있었어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도 은혜를 그들이 보지 못하고 있는 그런 실정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율법은 은혜를 대망하기 위해서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율법은 참 의미가 있다. 우리가 과거에 어떤 생활을 했던 것이 현재에 와서 굉장히 의미가 있는 사람이 있고, 과거의 생활이 전혀 의미가 없는 사람도 있다. 과거에 종교생활이 현재에 굉장히 큰 의미를 갖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것이 전혀 현재에 와서도 의미를 갖고 있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또, 과거의 이방인의 생활이 현재에 와서 큰 의미를 갖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다. 그냥 이방인의 생활에다가 조금 더 연장해서 또 다른 이방인의 생활을 하려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교회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 이방인의 생활할 때보다 여기가 더 편하다.’ 이런 식으로 되어버리면 그 사람은 이방인의 생활에서 벗어난 사람이 아니고, 이방인의 생활을 조금 더 강화하는 그런 결과밖에는 안 된다는 걸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종교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이 와서 종교적인 생활을 조금 더 강화하려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온 어떤 사람은 ‘아, 여기서 믿음의 생활을 좀 더 잘해봐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한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아, 이걸 가지고 어디 가서 좀 전해봐야 되겠구나.’ 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이다. 결국 무엇인가 내가 가지고 있던 것은 더 큰 것을 사모하기 위해서, 더 신령한 것을 사모하기 위해서 있어야 되는데, 항상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연장하려고만 생각하게 된다. 그것만을 고집하고 그걸 어떻게 하면 안 놓치려고만 생각하기 때문에 변화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 수 있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율법은 그 시대에는 정말로 필요한 것이었다. 광야를 지나오는 동안에 율법이 없이 어떻게 지나오겠는가.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려면 이 율법을 놓아야 된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가면서도 여전히 또 율법을 가지고 들어가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래서 실패가 오게 마련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오늘 우리는 지난날을 절대로 탓할 일도 아니고, 우리가 원망할 일도 아니고 비관해 할 일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걸 가지고 내가 새 것을 찾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과거가 문제가 되어 가지고 계속해서 거기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도 사실은 과거에 붙잡혀 있는 것이고, 자기가 과거를 붙잡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지금은 소용없는 건데, 그걸 자기가 꽉 붙잡고 안 놓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거기서 고통을 자기가 받고 있는 그런 모습을 볼 때 그것도 참 안타까운 일이다. 올챙이가 개구리가 되기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올챙이는 올챙이 때대로 참 필요한 것이다. 그것이 그렇게 살아야 되기 때문에 생리적으로 그렇게 만들어져 가지고 물 속에서 사는 것이 아니겠는가. 물 속에 어느 기간을 자라고 나면 개구리가 되게끔 되는데, 개구리가 되어서는 올챙이가 자기한테 정말 감사해야 된다. 그것이 비록 개구리의 세계에서 본다면 저급한 수준에 속한다 하더라도, 육지에 못 나오는 물고기 신세니까 그것이 저급한 수준이라 하더라도 그 올챙이를 통해서 자기가 개구리가 됐으니까 그 올챙이의 시절이 자기한테 참 감사한 것이 되어야 한다. 다시 올챙이로 돌아갈 수는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자기가 고맙게 생각해야 되고 감사히 생각해야 될 일이다. 그런데, 자기가 개구리가 된 후에도 ‘왜 그 때 나는 개구리가 안 되고 올챙이었을까?’ 이렇게만 생각하고 있으면 얼마나 그것은 퇴보된 생각이냐 하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율법은 율법대로 의미가 있었다. 그건 하나님의 법이니까 아주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 가나안 땅에 못 간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은 은혜를 기다리는 것이다. 초등학교가 너무 추억이 깊어서 중학교를 절대로 안 가려는 학생이나 비슷하다. 초등학교에서는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더 열심히 해봐도 중학교 1학년만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아주 깨끗하게 졸업하고 중학교로 넘어가야지, 초등학교를 계속 다니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10년을 다녀도 중학교 1년 다닌 것만 못하다. 그러니까 우리는 율법에서 벗어나서 은혜의 세계로 부르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또 그렇다고 해서 ‘율법은 나쁜 것이다’ 이럴 일은 물론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때대로 우리한테 꼭 없어서는 안 될 것이었으니까. 우리가 과거에 헤맨 일이 있다고 하자.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마저도 오늘 나에게 복으로 바꿔졌다면 그것이 나한테 감사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다시 그걸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라, ‘아, 그걸 통해서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왔구나.’ 하는 걸 생각할 때 감사한 일이 아니냐 이것이다. 우리의 가난함이 현재로서 우리가 부유함이 됐다면 그 가난함이 우리에게 감사한 것이고, 또 우리가 불행했던 것이 지금 현재의 행복이 됐다면 그 불행이 감사한 것이 아니냐 그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그건 오히려 더 앞으로 전진하기 때문에 감사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러니까 앞이 안 보이는 사람은 뒤에 미련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앞의 것이 더 잘 보이면 뒤에 미련이 없어져버리는데, 앞이 희미하고 안 보이니까 자꾸 뒤에 것만 잡고 있고 뒤에 걸 잡고 있다 보니 또 무엇이 되냐 하면 안 되고, 이렇기 때문에 뒤에 것을 자기가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보일 뿐인 것 같다. 앞에는 가나안 땅이 보이고 있다. 율법이 마치는 날 가나안 땅이 보이고 있다고 하는 걸 볼 수 있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기서 조상들에게로 돌아간다고 한다. “너는 그 땅을 바라본 후에는 네 형 아론의 돌아간 것같이 너도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니(27:13)” 죽는다는 말이 아니고, 돌아간다고 했다. 우리말에도 ‘죽는다’는 말을 ‘돌아가신다’고 한다. 이 ‘돌아간다’는 말은 ‘모은다. 수확한다’는 뜻이다. ‘gathering’이니까, ‘수확한다’는 말이다. 모세는 결국 자기 할 일을 다 하고 결국 수확의 창고로 들어가는 것이다. 자기의 익을 걸 다 익었으니까. 그러니까 5월달에 익은 곡식도 있고, 8월달에 익은 곡식도 있지 않는가. 그래서 한 사람은 5월달에 가고, 한 사람은 7월달에 가고, 한 사람은 9월달에 가고 그런 것이다. 아론은 먼저 갔다. 아론은 5월달에 추수해서 갔고, 모세는 9월달에 추수해서 간 그런 셈이다. ‘모으다. 수확하다.’ 그런 뜻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조상에게로 돌아간다’, 이 조상들은 영광스러운 조상을 의미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항상 성경에서 ‘너희 조상들’ 이렇게 말할 때, ‘우리 조상들’ 이렇게 말할 때, 그것은 영광스러운 조상들을 말한다. 우리가 김씨 하면&amp;nbsp; ‘김씨 중시조’ 이렇게 생각하듯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영광스러운 조상들에게로 돌아갔다’ 그런 뜻이다. 비록 가나안에는 못 갔다 하더라도 자기는 자기의 소임을 다 마치고, 지금 말로 하면 하나님께로 돌아간 것이고, 그 때 말로 하면 조상에게로 돌아간 것이다. 영광의 길로 돌아간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왜 그러면 그는 가나안에 못 갔는가? 그것은 신 광야에서 반석을 쳤기 때문에, 한번 깨진 반석을 또 쳤기 때문에 그래서 못 갔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두 번 못 박은 결과를 가져왔다. 한번 깨져서 물이 흐르면 영원히 그 물을 마셔야 되는 건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서 우리에게 영원한 길이 열렸으면 그 길을 우리가 마셔야 되는 건데, 그걸 못 믿고 우리가 또 깨고 또 깨고, 그렇게 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이치이다. 그것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거다 그런 것이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왜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갔느냐?” 그것은 십자가에서 율법이 끝나버렸는데, 율법으로 인해서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었는데 왜 또 율법으로 돌아가느냐 그런 뜻이다. 그러면 십자가를 통해 가지고 율법은 끝난다는 것이다. 율법이 그냥 저절로 나빠서 끝난 게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그것이 끝난 것이니까 다시는 우리가 또 율법으로 돌아가서는 안 되고,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나온 은혜와 부활의 세계로 우리가 가야할 것인데 다시 또 반석을 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두 번 못 박은 결과를 가져왔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이는 신 광야에서 회중이 분쟁할 제 너희가 내 명을 거역하고 그 물가에서 나의 거룩함을 그들의 목전에 나타내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모세는 그 때 하나님을 대표하는 사람,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었는데, 거기서 화를 냄으로써 하나님의 거룩함을 보여주지 못하고 오히려 모세의 분노를 보여주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표현하지 못한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것이 결국 모세로 하여금 가나안에 못 들어가게 하는 그런 원인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바로 율법의 한계성이다. 율법은 아무리 내가 100% 지키려고 하더라도 어느 순간엔가, 언젠가 내가 그것을 100% 완성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amp;nbsp;지면에 모세 같은 사람이 없었다. 성경은 온유하기를 지면에 모세같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한다. 그러면 너무너무 온유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이 너무나 속을 썩이니까 화를 냈다는 것이다. 그러니 모세가 만일 율법 안에서 아무리 완전했어도 어쩔 수 없이 하나님의 거룩을 손상시킬 수밖에 없었다면 그 누가 율법 안에서 완전할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이다.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범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 한계를 안다면 남보고 잘못한다고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남보고 잘못한다고 해도 뒤로 어느 날 가면 자기도 또 잘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때는 부끄러운데, 사람들은 그것이 부끄러운 줄 모른다. 남이 잘못할 때는 아는데, 자기가 잘못할 때는 모르는 것이다. 이러니까 남이 잘못한다고 자꾸 책망하고 있지, 자기가 예를 들어서 100가지 중에서 99을 지키다가고 하나를 범하면 전부를 범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기는 절대로 잘못하지 않을 것처럼 생각하다 보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율법의 한계를 깨닫는다면 남에게 저주를 한다던가 정죄를 한다던가 이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자기는 완벽한 것처럼 생각하지만 모세만큼 완벽한 사람이 어디 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였다” 그의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을 이겼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백성들이 하도 거역하니까 결국은 화를 내게끔 되었다는 것이다. 율법의 한계, 이 앞에서 우리는 우리 인간이 다시 발견되어야 한다. ‘율법이 안 좋으니까 이것은 한계가 있다’ 이렇게 생각할 게 아니고, 율법은 선한 것이라는 것이다. 로마서에 보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건 옳은 것이다. 그렇지만 왜 그러면 그것이 폐하여질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의 완악함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우리가 다 못 지키니까 폐해진 거지, 우리가 지킬 수만 있다면 폐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율법이 나쁜 게 아니다. 우리가 지킬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지, 율법이 나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율법 앞에서 우리의 한계성을 발견해야지, 율법이 나쁜 것이다 이래서는 안 된다. 율법은 완전한 것이다. 완전하기 때문에 우리의 불완전함을 드러내게 된다. 그가 선하기 때문에 우리의 악함을 드러내게 된다. 율법이 있어서 그렇다. 그러니까 율법은 나쁜 게 전혀 아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는 우리의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나니”, 그러니까 우리는 백 가지를 다 지켜도 하나를 범하면 다 범한 거라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얼음판을 걸어가는데 100m를 걸어간다. 살얼음판을 아주 조심조심해서 잘 걸어갔다. 마지막 한발 남았다. 지금까지 아흔 아홉 발을 걸어왔다. 그리고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박수를 쳤다. ‘저 사람은 정말로 실수를 안 하고 가는구나. 다 빠졌는데, 저 사람만 안 빠지고 가는구나.’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런데 마지막 한 발자국이 남았다. 그런데 한 발을 못 가고 빠져버리면 지금까지 아흔 아홉 발을 온 일이 아무 소용없다 그 말이다. 첫발에 빠진 사람이나 백 발째 빠진 사람이나 똑같은 것 아닌가. 물에 젖는 것은 똑같은 것이니까. 고생만 더 했지, 첫발에 빠져버렸으면 아예 그냥 돌아서서 지금 옷 입고 따뜻하게 앉아 있었을 건데, 이 사람은 아흔 아홉 발 오는 동안 조마조마하면서 왔다. 이제 또 새삼스럽게 물에 빠졌다. 그러면 얼마나 그것이 억울한 일이냐 그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는 말이 그런 말이다. 그래서 온 율법을 지키다가도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범한 그러니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율법은 개별적인 것이 아니다. 전체적인 것이다. 전부 다 하나님의 뜻을 여러 가지로 표현해놓은 것이니까 하나를 범해도 전부를 범한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십계명이라 해서 열 개가 아니다. 어느 계명도 다 한 뿌리에서 나왔다. 그렇기 때문에 전부가 다 하나이다. 그러니까 하나를 범하면 다 범한 것이다. 살인하지 않았어도 거짓 증거 했으면 살인하지 말라는 것을 범한 것이다. 왜냐하면 살인하지 말라 하신 이와 거짓 증거하지 하지 말라 하신 이가 한 분이다. 무슨 어떤 목적이 하나 있어 가지고 살인하지 말라고도 하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도 한 것이다. 쉽게 말하면, 속에는 다른 것이 있다. 살인하지 말아라가 목적도 아니고, 거짓 증거하지 말아라가 목적이 아니다. 속에는 다른 목적이 하나 있다. 그 목적을 표현하려고 살인하지 말라고도 하고, 거짓 증거하지 말라고도 하고, 간음하지 말라고도 하고, 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하나를 보면 똑같은 것이다. 사람들은 생각할 때 ‘아니, 그래도 도적질하는 것보다는 살인한 것이 더 크지.’ 이렇게 생각한다. 물론 세상의 법으로 보면 그렇다. 도적질하는 것하고 살인한 것하고 같겠는가. 이것이 다르다. 그런데 하나님은 율법을 내실 때 어떤 의도가 있는데, 그 의도를 사람의 도덕이나 사람의 율법이나 사람의 말로 표현하니까 열 가지 계명으로 표현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느 계명도 다 똑같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아라’ 그런 것하고, ‘도적질하지 말아라’ 하고 무슨 상관이 있는가. 아무 상관없는 것 같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너희가 나의 표현이 되어야 된다’는 것이니까, 도적질하는데 가서도 내가 하나님이 표현이 안 되는가 하면, 내가 간음하는데 가서도 하나님이 표현 안 되고, 내가 살인하는데 가서도 하나님이 표현 안 되고, 다 똑같다는 것이다. 거기서는 조금 덜 표현되고, 조금 더 표현되고, 이런 것이 아니다. 어차피 하나님이 표현되지 않는 것은 다 똑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온 율법을 지키다가 하나를 범하면 모든 것을 범하는 것이다. 율법은 바로 하나이다. 여러 개가 아니고 한 가지라는 걸 볼 수 있다. ‘나는 그래도 80점은 돼’, 이건 소용이 없다. 99점도 소용이 없고 꼭 100점이라야 되는데, 100점 맞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바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니”,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선을 행하는 자는 없고, 하나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서 한 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가. 그러니까 이것은 율법 안에서는 완전할 수 없다는 걸 말한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율법으로는 누구도 가나안에 가지 못한다. 앞에 지금 요단강이 있다. 지금까지 잘 왔다. 그렇지만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면 가나안에 못 가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가나안은 천년왕국이나 천국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천년왕국의 생활이나 천국의 생활은 율법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런 뜻이다. 세례 요한에 대해 예수님이 말씀하기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저보다 큰 자가 일어남이 없다” 하셨다. 그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서는 저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런 뜻이다. “율법의 세계에서는 저보다 큰 자가 없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지극히 적은 자라도 다 저보다 크다.” 그렇게 말한다. 그러니까 요단강을 건너가지 못한 거인보다 요단강을 건너가 저쪽 건너편에 살고 있는 어린아이가 더 낫다는 뜻이다. 땅이 다른 데 사는 것이니까 그렇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북한과 남한을 생각해 보라. 북한의 공산주의 체제에서 절대적인 자유를 잃고 살고 있는 사람 중에서는 장관도 있고 다 있지 않겠는가. 그것하고, 남한의 자유세계에서 시장바닥에서 채소 장사하는 사람하고 누가 나은가? 얼른 생각하면 ‘아이구, 그래도 내가 채소 장사할 바에는 거기 가서 장관을 하는 게 훨씬 낫지.’ 이렇게 생각하지 않겠는가. 언제 장관 목이 날아갈지 모르지 않겠는가. 채소 장사는 그래도 자기 명대로 살 수 있지만, 장관은 언제 죽을지 모르지 않는가.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아오지 탄광에 가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세계가 다르다는 것이다. 자유가 있는 세계하고 없는 세계하고 다르다. 왜 우리는 이 나라가 민주화되기를 원했는가?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민주화된다고 더 잘 사는 것도 아니고, 더 잘 먹는 것이라는 의미도 아니다. 민주화된다는 것은 자유가 있다는 뜻이다. 다른 게 아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의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힘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 그런 얘기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예를 들어서, 독재국가 안에서는 내가 살 수 있는 권리가 나한테 있는 게 아니고, 독재자의 보호 아래 있는 것이다. 그 사람이 보호해주면 나는 있는 것이고, 보호를 안 해주면 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민주국가, 자유국가 안에서는 내가 스스로 내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그래서 좋다는 것이다. 다른 게 아니다. 미국에 가서 한번 살면 다른 나라에 못 오는 이유가 왜 있느냐 하면 자유 때문에 그렇다. 꼭 잘살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잘 먹어서 그런 게 아니라 자유 때문에 그렇다. 거기는 어떤 경우도 자기가 억울하게 어떤 일을 안 당한다, 이런 얘기이다. 변호사가 많고 해서 억울한 일을 안 당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잘못하면 억울한 일을 많이 당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후진국이다. 뻔히 알아도 내가 돈이 없으면 못한다던가, 하여간 우리는 억울한 일이 많다. 압제가 많고, 제재가 많기 때문에 우리는 억울한 일이 많다. 그런데 거기서는 억울한 일이 적다는 것이다. 100%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튼 그게 적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만한 곳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니 미국 거지가 한국 장관보다 낫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그런 것이다. 자유 없는 장관보다 자유 있는 거지가 더 낫다 이런 뜻과 같다.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이가 일어남이 없다. 그러나 지극히 적은 자라도 다 저보다 크다.” 그 말과 같은 말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율법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 왜냐하면 세계가 다르니까, 은혜의 땅에는 율법으로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우리 안에도 이런 걸 볼 수 있다. 율법으로는 참 완전한 사람인데, 이 은혜의 세계에 적응이 안 된 사람이 있다. 왜 그러냐 하면 모든 것이 걸린다는 것이다. 누가 나와서 자기가 지금 너무 좋아서 간증을 해도 ‘저건 뭐 어저께 산 데 보니까 그렇던데.’ 이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자기가 너무너무 감사해서 감격하고 있어도 뒤에서 ‘에이 뭐, 사는 것이 그래 갖고 되겠는가?’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해도 이것이 교회가 안 누려지는 것이다. 전부 판단만 되기 때문이다. ‘아, 저 사람 저래 갖고 은혜, 은혜 하면 뭐 하겠냐. 저래 갖고 좋다 하면 뭘 하겠느냐?’ 이런 생각만 하니까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 안에서 큰 자가 천국에서 적은 자보다 못하다는 말이 이런 말이 된다. 그것이 그냥 자기가 감사했으면 감사한 걸로 누리면 되는데 그게 안 된다. 눈에 자꾸 보이기 때문이다. 율법 안에서 너무 크다 보면 자기 결점은 안 보이고 남의 결점은 잘 보이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잘못이 계속 보이는 한 내가 평안이 없다. 만족이 없고 기쁨이 없다. 그리고 그 사람하고 나와의 합당한 관계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완전치 않으니 나하고 합당한 관계가 안 되지 않는가. 그걸 좀 모르면 친해질 수도 있고 이런데, 너무 빤히 알다보면 친해질 수도 없고 이러니까 자기 혼자 살 수밖에 없지 않는가. 그래서 율법 안에 있는 사람은 은혜를 누리기 어렵다. 분명히 똑같은 은혜의 세계 안에 와서도 누리기가 어려운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lt;/SPAN&gt;&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그래서 우리는 교회생활 안에서, 여기에 100% 좋은 사람만 와 있는 것도 아니고 선한 사람만 와 있는 것도 아니고, 율법으로 완전한 사람이 와 있는 게 아니고, 어떻게 생각하면 율법으로 실패한 사람들만 와 있는 것이다. 반대이기 때문이다. 율법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다 지금 좋은 교회에 있다. 율법으로 실패한 사람만 지금 대구교회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나부터도 그렇다. 율법으로 실패해서 여기 있는 것이다. 율법으로 성공했으면 나는 여기에 있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율법으로 실패해서 온 사람이 도로 또 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천국이 누려지겠는가. 그러니까 율법으로 온전하다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이 안 되고, 반대로 이것이 나쁜 것이 될 수 있다. 물론 내가 율법으로도 온전하고, 내가 전혀 남의 허물도 문제가 안 되고, 이러면 너무너무 좋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없다. 그건 정말 없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자기도 흠이 있는 줄 알아야 남의 흠도 내가 인정이 되고 이렇게 되지, 자기가 흠이 전혀 없는 사람은 남의 허물을 아무리 인정하려고 해도 인정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 안에서 얼마나 괴로운가. 세상에서는 그것이 참 좋았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그래도 낫다면, 내가 다른 사람보다 율법 점수가 낫다면 내가 뿔이 올라갈 수가 있는데, 교회에서는 내가 율법 점수가 아무리 높아도 걸리면 안 된다. 눈에 걸리면 안 된다. 그러면 천국을 못 누린다. 그래서 10년씩, 20년씩 있어도 도저히 천국은 보이지 않고 ‘저 사람들은 뭘 저따위 해서 앉아 가지고, 뭐 천국이니 천년왕국이니 새 예루살렘이니 하고 있나?’ 이러고 앉아있으면 100년 가도 안 된다. 참 이상한 세계이다. 정말 이상한 세계이다.&lt;/SPAN&gt; &lt;/P&gt;
&lt;P style=&quot;FONT-SIZE: 12pt; MARGIN: 0px; COLOR: #000000; TEXT-INDENT: 0px; LINE-HEIGHT: 160%; FONT-FAMILY: '한양신명조'; TEXT-ALIGN: justify&quot;&gt;&lt;SPAN style=&quot;FONT-SIZE: 12pt; COLOR: #000000; LINE-HEIGHT: 25px; FONT-FAMILY: 한양신명조,한컴돋움; LETTER-SPACING: 0px; TEXT-ALIGN: justify&quot;&gt;&amp;nbsp;&amp;nbsp;율법으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 율법의 최고 지도자였던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했다 하는 것이다. 참 특이한 일이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님의 나라, 성경에 기록된 역사가 특이한지 모르겠다. 만일 모세가 요단강이라도 건너놓고 죽었으면 이 말을 못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요단강을 못 건너고 죽었는지! “너는 바라만 보고 죽어라”는 것이다. “산에 올라가서&amp;nbsp; 건너편 가나안 땅을 보고만 죽어라”는 것이다. 보기만 하지 가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이건 각본으로 만들어놓은 것도 아니고, 이것이 어째 이렇게 정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