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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기독교의 복음과 우리의 문화</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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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8-12-29T13:43:34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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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광주사태 배후의 김일성의 햇볕정책과 남침땅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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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08-12-29T13:43:34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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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EMBED style=&quot;LEFT: 0px; WIDTH: 320px; TOP: 0px; HEIGHT: 285px&quot; src=http://study21.tistory.com/attachment/ok4.wmv width=320 height=285 type=application/x-mplayer2 autostart=&quot;true&quot; volume=&quot;-800&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지금부터 41년 전이었던 1967년 11월 17일자의 위의 대한뉴스 동영상과 아래의 사진에서 우리는 박정희 대통령과 김대중의 전혀 다른 모습을 본다.&amp;nbsp;&amp;nbsp;멀리 내다 보시고 고속도로 건설에 박차를 가하시는 박정희 대통령과 달리 김대중은 고속도로 건설현장에 드러누워 경부 고속도로 건설 결사반대를 외치고 있다.&amp;nbsp;&amp;nbsp;오늘날에는 심지어 5.18사기꾼들조차 김대중의 그 짓이 잘한 짓이라고 주장하지는 못할 것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때만 해도 김대중의 그런 미련한 선동구호에 속아넘어간 이들이 많아서 김대중은 불과 4년만인 1971년에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떠올랐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6/DJ-no-highway.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이 경부 고속도로를 반대한지 꼭 30년만에 대통령에 당선된 후 다시 2년 지나 내놓은 대북정책이 바로 햇볕정책이라는 것이었는데, 김일성이 1967년 김대중을 국회의원 만들어 주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은 두더지 전략이었다.&amp;nbsp;&amp;nbsp;광주사태에 대한 진실 중의 하나는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도 김대중도 광주에 전혀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었다는 사실이다.&amp;nbsp;&amp;nbsp;전두환이란 이름은 폭동 주동자들이 외치는 구호로 생전 처음 들었고, 김대중이란 인물에 대해서는 기껏 어디선가 그 이름을 들은 적이 있었을 뿐이었지 광주인들이 김대중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질 만큼 광주에서 알려진 인물이 아니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대부분의 국민이 혼동하고 있는 것과 달리 김대중의 고향은 신안군이었으며, 1967년 목포에서 국회의원 선거로 출마할 때 김일성이 간첩들을 보내 통혁당이란 지하당을 조직하고 김대중 후보를 위한 선거운동을 하게 하였다.&amp;nbsp;&amp;nbsp;무엇이 지하당 공작이던가?&amp;nbsp;&amp;nbsp;바로 햇볕을 싫어하는 두더지들의 놀이가 아니던가?&amp;nbsp;&amp;nbsp;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이 바로 그 통혁당이란 지하당 요원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무엇이 김대중을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운동이었던가?&amp;nbsp;&amp;nbsp;타후보를 낙선시키기 위한 흑색선전과 더불어 바로 타 지역의 좌익 및 그 가족들의 주민등록을 목포로 옮기는 편법이 그들의 부정선거운동이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3.15부정선거라는 용어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이들이 쓰는 말이고, 실제로는 운동권 편에서 부정선거운동을 했었다.&amp;nbsp;&amp;nbsp;당시 야당의 조병옥 후보는 신병치료자 미국에 가서 수술받던 중 사망하였으므로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단독후보였다.&amp;nbsp;&amp;nbsp;따라서, 대통령 당선자는 이미 정해져 있었으며, 민주정치 선거에서는 부통령 지명은 대통령 당선자의 고유권한이다.&amp;nbsp;&amp;nbsp;예를 들어, 미국 민주당 후보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으니, 부통령은 공화당이 페일린 여사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민주주의에서는 불가능하다.&amp;nbsp;&amp;nbsp;아무리 우리가 공화당을 지지해도 그런 주장을 할 수는 없다.&amp;nbsp;&amp;nbsp;1961년의 한국에서도 당연히 부통령 지명은 이승만 대통령 당선자의 고유권한이어야 했음에도 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던 것은 민주주의 정당이 무엇인지 몰랐던 운동권 미개인들이 정당 정치를 조선시대의 사색당파와 혼동하였었기에 일어난 해프닝이었다. &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6/1963-candidate.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좌편향 교육의 역사왜곡 때문에 고등교육을 받고서도 박정희가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다고 말하는 미개인들이 많이 있다.&amp;nbsp;&amp;nbsp;박정희는 1963년 가을 3공화국 헌법에 의한 직선제 대통령 선거 후보로 출마하여 정책 대결로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던 것이지 좌익 미개인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총칼이나 탱크로 대통령이 되셨던 것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자, 4.19데모꾼들은 직선제를 독재와 동일시하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무식한 4.19데모꾼들이 직선제를 없애버림으로 국민이 참정권을 상실하게 되었을 때 우리가 참정권을 되찾을 방법이 5.16산업혁명 외에 있었는가?&amp;nbsp;&amp;nbsp;5.16산업혁명이 있었기에 4.19데모꾼들이 없앴던 직선제를 회복하는 3공화국 헌법을 국민 손으로 통과시킬 수 있었고, 그 헌법에 따른 직선제 선거에 출마하여 박정희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4.19데모꾼들은 직선제 선거만 없앴던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정치가 무어인지 전혀 몰랐었다.&amp;nbsp;&amp;nbsp;본래 민주주의 정치는 양당 혹은 다수당 정치인데, 4.19데모 후의 국회는 일당 독재의 모양새가 되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4.19데모로 집권한 세력이 자기네가 통장, 반장 다하겠다면서 대통령 감투도 총리 감투도 자기네끼리 나누었는데, 문제는 그 정부가 윤보선 정부인지 장면 정부인지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이다.&amp;nbsp;&amp;nbsp;우리는 흔히 2공화국은 장면 정부라고 부르나 윤보선 대통령이 인정하지 않는 정부였다.&amp;nbsp;&amp;nbsp;대통령과 총리가 서로 통치권이 자기에게 있다며 매일 싸웠으나, 헌법학자들조차 누가 통치자인지 판단내리지 못했으며, 외국에서는 누구를 대한민국 외교의 주체로 여겨야 하는지 몰랐다.&amp;nbsp;&amp;nbsp;민주주의가 무엇인지 전혀 몰랐던 4.19데모꾼들에 의해 형성된 정부는 이토록 무능정부였기에 그대로 앉아 나라가 망하든가 박정희가 시대의 부름에 응하여 5.16산업혁명을 주도해 주든가의 선택만이 있었던 시대였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6/1963poster.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두차례의 미국유학 시절 미국 민주주의 행정을 깊이 연구하셨던 박정희의 리더십이 있었기에 우리나라에서 민주주의가 크게 신장될 수 있었음에도 국민은 여태껏 김대중이란 민주장사꾼에게 속아왔다.&amp;nbsp;&amp;nbsp;거물간첩 김용옥은 그의 저서 &quot;소리없는 전쟁&quot; 69쪽에서부터 김대중 당선시키기 두더지 작전을 증언한다.&amp;nbsp;&amp;nbsp;북한은 통혁당이란 지하당 전남도당에 광주와 목포 두 곳에서 후보를 당선시키라는 지령을 받았었는데, 전남도당은 목포 한 곳에 표를 몰아오기로 결정하고, 전라도 다른 시, 군에서 통혁당 당원들뿐만 아니라, 그 연고자들까지도 주민등록을 옮기도록 의결하고, 그 결정을 각급 하부조직에 하달하였다 (71쪽).&amp;nbsp;&amp;nbsp;이것이 민주화 운동이었는가?&amp;nbsp;&amp;nbsp;아니다.&amp;nbsp;&amp;nbsp;그것은 부정선거운동이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만약 민주주의 선거의 본래 목적이 정책 대결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유념한다면 정책 대결로 승부를 겨루는 박정희의 선거 유세가 훨씬 민주적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다.&amp;nbsp;&amp;nbsp;자, 1967년 부정선거운동으로 당선된 김대중은 1968년에 경부고속도로 건설 결사 반대를 하여 유명세를 타고 1971년에 대선 후보가 되었다.&amp;nbsp;&amp;nbsp;무엇이 그의 선거구호였던가?&amp;nbsp;&amp;nbsp;조국 근대화 반대였다.&amp;nbsp;&amp;nbsp;박정희 후보가 &quot;조국 근대화&quot;를 외치니깐 &quot;조국 근대화 반대&quot; 슬로건을 내걸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김대중은 자기가 당선되면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기업을 없애겠다는 공약을 내놓앗다.&amp;nbsp;&amp;nbsp;김대중이 공산당 이름으로 그런 공약을 내놓지 않았을 뿐이지, 그것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약이었다.&amp;nbsp;&amp;nbsp;그런 공약만으로 김대중이 박정희의 맞상대가 될 수 있었을까?&amp;nbsp;&amp;nbsp;아래 신문기사 사진에서 우리는 김대중이 이때에도 지역감정을 자극하며 지역감정을 읅어먹었음을 본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6/DJ1971campagin.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자, 김일성이 지하당이라는 두더지 작전으로 키워준 김대중이 햇볕정책을 말하였을 때 도대체 그 의미가 무엇이었던가?&amp;nbsp;&amp;nbsp;도대체 어떻게 하는 것이 햇볕정책인가?&amp;nbsp;&amp;nbsp;김정일이 땅굴 파놓고 두더지 작전으로 핵폭탄 개발하였을 때 두더지 작전으로 8억불 비밀대북송금한 것이 햇볕정책인가?&amp;nbsp;&amp;nbsp;아니면, 햇볕이 김대중의 정치 스타일이란 말인가?&amp;nbsp;&amp;nbsp; 김일성이 1973년 김대중에게 통혁당 두목 감투를 주며 문세광이라는 똘마니를 붙여주었을 때 김대중이 문세광을 데리고 다니다가 사주하여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 것이 햇볕 스타일이었는가?&amp;nbsp;&amp;nbsp;문세광을 사주하여 육영수 여사 암살 사건의 배후였던 그가 단 한번이라도 그가 미안하다는 뚯을 표시한 적이 있었는가?&lt;BR&gt;&lt;BR&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KHujJcUFotA&amp;hl=en&amp;fs=1 width=425 height=344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남북관계에 관한 한 사실 김일성이 김대중보다 햇볕정책의 원조였다.&amp;nbsp;&amp;nbsp;김대중의 햇볕정책은 한마디로 북미양자회담을 하라는 말로, 한반도의 운명을 북미양자회담으로 결정하고 통미봉남하라는 말로 요약된다.&amp;nbsp;&amp;nbsp;그런데, 그런 주장의 원조는 바로 김일성이었다.&amp;nbsp;&amp;nbsp;위 뉴스 동영상에서는 우리는 김대중의 옛 부하 문세광이 1974년 광복절 육영수 여사를 암살하였을 무렵 김일성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음을 본다.&amp;nbsp;&amp;nbsp;김일성이 1980년 5월 20일경 광주에서 폭동을 일으키면서 남침할 예정이었다는 사실은 그해 4월 김일성이 루마니아로 가기 전에&lt;BR&gt;중국을 방문하여 남한에서 민중무장봉기를 일으키면서 남침할 것이라는 계획을 보고하고 동의를 구했기 때문에 알려졌다.&amp;nbsp;&amp;nbsp;당시 경제 재건을 위해 미국과의 외교 정상화를 원하던 중국은 제2의 한국전쟁으로 다시 미국과 충돌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므로 즉시 이 사실을 일본과 미국 정부에 통보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런데, 위의 동영상 뉴스는 1974년 8월에도 김일성이 루마니아를 방문하였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amp;nbsp;&amp;nbsp;1974년 8월 김대중 수하의 암살범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하다가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지 불과 12일만에 김일성은 루마니아의 차후세스크 대통령의 도움으로 미국 포드 대통령에게 특사를 보냈다.&amp;nbsp;&amp;nbsp;김일성이 루마니아로 여행하는 시간과 루마니아로부터 미국으로 특사가 달려가서 포드 대통령을 알현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감안한다면 5년 후의 광주사태 때처럼 김일성이 미리 루마니아로 갔었다는 것이 추정되며, 이는 조총련 소속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한다는 것을 사전에 알고 시사한다.&amp;nbsp;&amp;nbsp;그런데, 김일성의 특사가 포드 대통령에게 전한 메시지는 놀랍게도 요즘말로 햇볕정책이지 아니한가!&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_zmBic1mqQs$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포드 대통령은 1975년 3월 월남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때 어물쩡하다가 월남을 공산주의자들 손에 넘겨준 바로 그 대통령이었다.&amp;nbsp;&amp;nbsp;무엇이 월맹의 작전이었던가?&amp;nbsp;&amp;nbsp;바로 햇볕정책이었다.&amp;nbsp;&amp;nbsp;월남과 평화조약을 맺었으며, 절대로 남침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amp;nbsp;&amp;nbsp;그러나 표면상의 그런 햇볕정책과 달리 월남에서 민중무장봉기를 일으키는 방법으로 침략하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월남 중부지방에서 좌익이 민중무장봉기를 일으켰을 때 포드 대통령은 월남의 운명은 월남 국민 스스로 결정하도록 내버려 두겠다며 파병하지 않았다.&amp;nbsp;&amp;nbsp;한국이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amp;nbsp;&amp;nbsp;김잃성은 인혁당과 남민전 등을 동원하여 언제든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땅굴을 파는 두더지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lt;BR&gt;1974년 11월 23일자의 위의 대한뉴스&amp;nbsp;동영상은&amp;nbsp;휴전선에서 첫번째 남침 땅굴이 발견되었음을 보여준다.&lt;BR&gt;&lt;BR&gt;&amp;nbsp;&amp;nbsp;&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MW0kzF8UA2g$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1975년 봄 월맹이 월남 중부지방에서 시민군을 동원하여 무장봉기를 일으키면서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시민군 틈에 섞여 사이공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었을 때 월남의 좌익언론은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시민군이 오고 있다고 방송하였다.&amp;nbsp;&amp;nbsp;1970년대에 베트남 공산주의 세력의 도시 게릴라 방법을 그대로 모방하여 국가를 전복시키려 했었던 인혁당이나 남민전 등의 간부들을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하고 있는 이상한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실로 그 상황이 패망 직전의 지유월남과 닮은꼴이 아닌가?&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최근에 민주화운동 유공자로 인정받은 박노해 시인도 광주사태 훨씬 이전에 무장봉기를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었다고 증언하거니와&amp;nbsp;&amp;nbsp;위의 1975년 3월 29일자 대한뉴스&amp;nbsp;동영상은 그럼 무장봉기 음모의 배후가 바로 김일성의 지시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amp;nbsp;&amp;nbsp;광주사태는 무장봉기였다.&amp;nbsp;&amp;nbsp;그것은 베트남 공산주의자들과 쿠바의 공산주의자들이 사용했던 도시 게릴라 방법을 그대로 모방한 무장봉기였다.&amp;nbsp;&amp;nbsp;어떻게 시민이 감히 총기무장할 생각을 할 수 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위의 뉴스 동영상에서 실제로 땅굴을 파고 자유자재로 남한과 북한을 오갔었던 탈북군인은 땅굴을 판 목적 중 두번째 목적이 남한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면서 특수부대를 게릴라로 보내 3일만에 남한 전체를 완전 정복하기 위함이었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의 이 증언은 1980년 4월 김일성이 중국에 보고했던 남침전략과 그대로 일치하는 증언이다.&lt;BR&gt;&lt;BR&gt;&amp;nbsp; 김일성이 김대중의 똘마니 문세광을 시켜 박정희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던 1975년 8월 그는 미국 포드 대통령에게 특사를 보내 햇볕정책 사인을 보냈다.&amp;nbsp;&amp;nbsp;월맹이 월남과 맺었던 평화조약과 똑같은 평화조약을 맺겠다는 제스추어를 썼다.&amp;nbsp;&amp;nbsp;그러나 바로 그때 그는 땅굴을 파는 두더지 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amp;nbsp;&amp;nbsp;김일성의 작전은 무력남침이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땅굴을 판 이유는 남한에서 무장봉기가 일어날 때 특수부대를 보내어 3일만에 남한을 완전 점령하기 위함이었다.&amp;nbsp;&amp;nbsp;바로 여기에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한 것을 지켜본 한국의 법관들이 인혁당 사건 주동자들을 재판을 연기해서는 안될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불과 5년만에 김일성은 광주사태를 일으키는데 성공했다.&amp;nbsp;&amp;nbsp;그러나 다행히 전두환 장군이 1978년 1사단장 시절 제3의 땅굴을 발견해 내셨기에 우리가 그 위기를 모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amp;nbsp;&amp;nbsp;자, 김대중에게 무엇이 햇볕정책인지 물어보자.&amp;nbsp;&amp;nbsp;북한군의 두더지 땅굴을 더 이상 발견하지 못하게 막으면 햇볕정책인가?&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menu.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지식 검색&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5-20why.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불순세력이 이분을 살해한 거였어?&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uprising1968.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문근영 외조부 류낙진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tunnel.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광주사태 배후의 김일성의 햇볕정책과 남침땅굴&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library/beef/mad-cow-priest02.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월남의 패망&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Ilsung-dj.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김대중과 김일성의 거래관계에 대한 증언들&lt;/FONT&gt;&lt;/U&gt;&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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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975년 철원부근에 남침땅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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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lished>2008-12-29T08:22:25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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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img src=&quot;http://cfs3.flvs.daum.net/files/50/81/8/95/16458362/thumb.jpg.edit&quot; moviekey=&quot;MW0kzF8UA2g$&quot; type=&quot;vi&quot;/&gt;&lt;/p&gt;&lt;p&gt;&lt;br&gt;&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1975년 3월 29일자 대한뉴스 &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철원부근에 남침땅굴&lt;/span&gt;&lt;br&gt;&lt;br&gt;철원 근방의 휴전선 비무장지대에서 제2의 남침 땅굴 발견&lt;br&gt;-북괴가 무력 남침 목적으로 한 땅굴이 또 다시 발견됨.&lt;br&gt;-발견된 땅굴의 위치 그림으로 설명.&lt;br&gt;주한 유엔군 사령부에서 제2의 지하터널 발견 공식발표&lt;br&gt;-땅굴에서 발견된 증거품들 설명.&lt;br&gt;-새로 발굴된 땅굴에 대한 그림 설명.&lt;br&gt;최신장비 이용해 땅굴 조사 &lt;br&gt;-조사결과 땅굴의 단면도 설명.&lt;br&gt;-땅굴의 시추작업.&lt;br&gt;-시추구멍의 땅밑에서 탄산가스 많은 것으로 땅굴이 있음 확인(일반적으로 땅굴에 탄산가스 많음).&lt;br&gt;-암석을 캐낸 결과 파내려 간 길이 보다 암석이 2m가량 모자란 것으로 땅굴이 있음 확인.&lt;br&gt;-모래와 점토 분해 결과 외부에서 유입된 것을 검증.&lt;br&gt;-암석의 화약 분해 결과 양성 반응이 나타나 &lt;br&gt;&lt;br&gt;출처:대한뉴스 제 1024호&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title&gt;HTML clipboard&lt;/title&gt;&lt;a href=&quot;http://film.ktv.go.kr/pop/movie_pop.jsp?srcgbn=KV&amp;mediaid=942&amp;mediadtl=6584&amp;gbn=DH&amp;quality=H&quot;&gt;
이 동영상을 고화질로 보기&lt;/a&gt;&lt;br&gt;&lt;/p&gt;&lt;p&gt;&lt;a href=&quot;http://film.ktv.go.kr/pop/movie_pop.jsp?srcgbn=KV&amp;mediaid=942&amp;mediadtl=6584&amp;gbn=DH&amp;quality=H&quot;&gt;&lt;/a&gt;&lt;br&gt;&lt;/p&gt;&lt;p&gt;&lt;a href=&quot;http://film.ktv.go.kr/pop/movie_pop.jsp?srcgbn=KV&amp;mediaid=942&amp;mediadtl=6584&amp;gbn=DH&amp;quality=H&quot;&gt;&lt;font size=&quot;2&quot; face=&quot;Arial&quot;&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http://study21.org/518/index.htm&lt;/a&gt;&lt;/font&gt;&lt;/a&gt;&lt;/p&gt;&lt;p&gt;&lt;br&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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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974년 휴전선에 남침 땅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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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역사학도</name>
	    </author>
	    <updated>2008-12-29T05:47:02Z</updated>
	    <published>2008-12-29T05:47:02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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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br&gt;&lt;/p&gt;&lt;p&gt;&lt;img src=&quot;http://cfs3.flvs.daum.net/files/20/34/90/90/16457636/thumb.jpg.edit&quot; moviekey=&quot;_zmBic1mqQs$&quot; type=&quot;vi&quot;/&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1974년 11월 23일 대한뉴스&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특보] 휴전선에 남침 땅굴&lt;/span&gt;&lt;br&gt;&lt;br&gt;북한괴뢰는 최근 휴전선에 땅굴을 파고, 무력남침을 기도.&lt;br&gt;-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침의 기회만 노리는 북한괴뢰와 우리는 맞서고 있음.&lt;br&gt;-지도상에서 땅굴 발견지점 설명.&lt;br&gt;-군사분계선을 넘어 뚫어 놓은 땅굴의 진행도.&lt;br&gt;-땅굴이 발각되자 북한괴뢰군은 총격을 가함.&lt;br&gt;UN 우드 사이드 사령관의 기자회견.&lt;br&gt;-남쪽 비무장지대를 순찰하던 우리측 민정 경찰대원에 의해 남침 지하터널이 발견되었다고 밝힘.&lt;br&gt;-이런 행위는 휴전협정의 중대한 위반일 뿐만 아니라 사실상 무력남침행위라고 말함.&lt;br&gt;땅굴 발견 지점.&lt;br&gt;-남방한계선에서 북쪽 비무장지대 800m 전방이 땅굴을 발견한 지점.&lt;br&gt;-견고하게 무쇠화 되고, 큰 확성기까지 갖춘 북한 괴뢰의 진지.&lt;br&gt;-이 진지에서 땅&lt;br&gt;&lt;br&gt;출처:대한뉴스 제 1010호&lt;br&gt;&lt;/p&gt;&lt;p&gt;&lt;title&gt;HTML clipboard&lt;/title&gt;&lt;a href=&quot;http://film.ktv.go.kr/pop/movie_pop.jsp?srcgbn=KV&amp;mediaid=918&amp;mediadtl=6193&amp;gbn=DH&amp;quality=H&quot;&gt;
이 동영상을 고화질로 보기&lt;/a&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font size=&quot;2&quot; face=&quot;Arial&quot;&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http://study21.org/518/index.htm&lt;/a&gt;&lt;/font&gt;&lt;/p&gt;&lt;p&gt;&lt;br&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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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5.18불순세력이 이분을 살해한 거였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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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역사학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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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8-12-18T14:51:48Z</updated>
	    <published>2008-12-18T14:51:4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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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PWOYtgifxQs$ width=&quot;502&quot; height=&quot;399&quo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amp;nbsp;&amp;nbsp;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에 대하여 가장 큰 인식상의 오류 중 하나가 공수부대가 폭동진압의 주체였다는 인식이다.&amp;nbsp;&amp;nbsp;영화 화려한 휴가 등이 그런 착각을 유도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사실에 있어서 그것이 시위였든 폭동이었던 진압의 주체는 광주 및 그 인근 지역 경찰이었다.&amp;nbsp;&amp;nbsp;위의 동영상은 미국 3대 방송사 ABC, CBS, NBC가 1980년 5월 22일에 보도한 광주사태 뉴스인바, 경찰과 시위대간의 충돌 장면이 동영상 시작후 1분 10초부터 2초간 보인다.&amp;nbsp;&amp;nbsp;이처럼 광주경찰이 먼저 시위진압을 하다가 5월 18일 오후 3시경 기동경찰 45명이 인질로 납치되니깐 광주경찰서가 광주향토사단에 지원을 요청하였던 것이며, 광주향토사단이 그 예하부대였던 7공수 2개 대대를 보내 주었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지난 여름의 광우사태 때 쇠파이프와 돌맹이 외에는 비무장이었던 시위대 수가 7천명만 되어도 전경 이만 명으로도 당해 내지 못함을 우리는 보았다.&amp;nbsp;&amp;nbsp;그런데, 광주사태의 경우 비무장 시위대가 아니라 무장시위대였으며, 그 수도 광우사태와 비교도 안되는 수였다.&amp;nbsp;&amp;nbsp;그러니 7공수 2개 대대 2백여명으로 막을 수 있는 시위가 아니였으므로 19일 11공수가 추가 지원되었으나, 여전히 진압의 주체는 광주경찰서였으며 광주향토사단은 그 보조적인 역할로서 11공수 병력을 배치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5월 21일까지는 진압의 주체는 광주경찰서였으며, 21일에 광주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다시 들어오지 않았으며, 그후 27일 새벽까지 광주에는 군인이 한 명도 없다가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의 주체는 공수부대가 아니라 20사였다.&lt;BR&gt;&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 5월 22일부터 폭동진압의 주체가 계엄사가 되는데, 그 이유는 5월 22일 해방구가 설치되자 광주경찰서가 시민군 지휘 하에 놓였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쉬운 말로 광주경찰이 반군의 지배를 받는 처지에 있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즉, 광주에서 반군에 의한 군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중국의 군사독재자 모택동의 중공군도 그 출발은 시민군 형태였으며, 점령지역에 해방구를 설치하여 영토를 넓혀나갔던 것이며, 쿠바의 군사독재자 카스트로가 공산주의 혁명을 일으켰을 때도 시민군을 도시 게릴라로 동원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월맹과 쿠바의 도시 게릴라 방법을 그대로 본땄던 것이므로 광주사태 당시 해방구 설치의 의미는 시민군 군정이었으며, 광주경찰이 그 지배 하에 있게 되었으니 그때부터 계엄사가 진압의 책임을 전적으로 떠맡아야 했었던 것이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nk/strange-uniform.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당시 동원되었던 기동경찰이 공수부대로 언급되는 실수가 지난해 7월의 KBS 방송에서도 있었다.&amp;nbsp;&amp;nbsp;기동경찰이 최류탄 발사하는 장면을 방영하면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 운운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위의 사진은 왜 종종 광주시민이 광주시민군을 공수부대로 오인하였었는지 보여주는 한 예이다.&amp;nbsp;&amp;nbsp;1988년 광주청문회 때 이해찬이 북한군 사진을 들고나와 광주시민군 사진이라고 사기쳤을 때 광주시민 모두 침묵하였던 것으로 보아&amp;nbsp;&amp;nbsp;광주시민 대다수는 각 군의 군복 식별 능력이 없었다.&amp;nbsp;&amp;nbsp;그래서 시민군의 만행을 공수부대의 만행으로 언급한 경우가 비일비재하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시민군도 위의 복장 차림의 시민군과 시가전을 치루었다는 증언을 한다.&amp;nbsp;&amp;nbsp;즉, 시민군 스스로도 복장으로는 피아를 구별치 못했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사진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라.&amp;nbsp;&amp;nbsp;5.18무장단체가 철모를 썼다는 것은 전투를 하겠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저 군모는 기동경찰의 군모로 보이나 총을 들었을 때 그 의미는 사뭇 달라진다.&amp;nbsp;&amp;nbsp;더구나 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할 때 그 의미는 더욱 달라지는 것이다.&amp;nbsp;&amp;nbsp;군용트럭을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병력의 이동이다.&amp;nbsp;&amp;nbsp;모르는 사람들은 군용트럭으로 이동하는 병사들은 모두 군인인 줄로 안다.&amp;nbsp;&amp;nbsp;그러나, 저 병사들은 복장이 괴이하다.&amp;nbsp;&amp;nbsp;저런 복장은 도시 게릴라 방법을 위해 필요하였는가 아니면 민주화운동을 위해 필요하였는가?&amp;nbsp;&amp;nbsp;그리고, 모두 장발이다.&amp;nbsp;&amp;nbsp;탈북자들 및 탈북군인들은 북한군 특수부대가 머리를 몇달 기른 뒤 광주에 투입되었으며, 시민군과 국군 비슷하게 위장하였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5.18측은 저들의 복장에 대하여 무어라고 설명하는가?&amp;nbsp;&amp;nbsp;5.18측 설명이 있기 전까지는 우리는 저들을 5.18불순세력이라고 불러야 한다.&amp;nbsp;&amp;nbsp;시민군 전체가 불순세력이었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지만, 시민군 중에 불순세력이 끼어 있었다는 징후이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vvNTeVyADao&amp;hl=en&amp;fs=1 width=&quot;425&quot; height=&quot;344&quo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동영상에서 힌츠페터의 영상물을 보는바 힌츠페터는 1980년 5월 20일 광주에 발을 들여놓을 때부터 거짓말을 하였다.&amp;nbsp;&amp;nbsp;그는 검문소에서 &quot;우리는 광주에서 길이 엇갈린 부장을 찾으로 가는 길이다&quot;라고 거짓말을 했다.&amp;nbsp;&amp;nbsp;광주에 도착하기 직전 그는 타지역 경찰서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광주로 들어가는 5.18사기꾼들을 만나 첫단추부터 거짓말에 세뇌되었다.&amp;nbsp;&amp;nbsp;한국말은커녕 한국에 대해 전혀 몰랐으며, 광주사태에 대한 지식이라곤 .18사기꾼들에게서 배운 거짓말밖에 없었던 그가 광주사태에 가장 정통한 &quot;푸른눈의 목격자&quot;서 한국에서 절대적 명성을 누려왔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그의 영상물에 광주사태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아주 중대한 단서가 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힌츠페터는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취재하기는커녕 공수부대 그림자조차 본 적이 없었다.&amp;nbsp;&amp;nbsp;그는 단지 몇 구의 시체를 보았을 뿐이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5.18사기꾼들은 이 영상물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이들을 죽인 살인마라는 그들의 주장의 근거로서 한국과 미국 그리고 세계 도처에서 이 영상물을 방영하야 왔었다.&amp;nbsp;&amp;nbsp;그 5.18비디오의 이 장면이 문민독재정권 시절의 김영상 대통령이 광주사태에 아는 전부였으나, 그는 모 기자가 보여주는 이 장면만 보고 성급히 판단하여 12.12특별법이라는 꼼수로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죄인의 낙인을 찍어 감옥에 보낼 궁리를 했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렇듯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게 살인마 누명을 씌우는 자들은 이 영상물이 그 증거라는 주장을 해왔다.&amp;nbsp;&amp;nbsp;그러나 도대체 그것이 지성인이나 문명인이 할 주장인가?&amp;nbsp;&amp;nbsp;오늘(2008년 12월 18일) 남상국 전(前)사장 유족이 노무현에게 사과 없으면 내일 고소하겠다고 말했을 때 노무현의 어록과 남상국 사장의 죽음 사이의 인과관계의 근거가 분명하다.&amp;nbsp;&amp;nbsp;그러나, 도대체 1980년 5월 21일 새벽 광주역 인근의 총기사고로 죽은 이 영상물의 인물과 당시 대법원에서 진행되던 김재규 재판 관련 업무로 여념이 없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과 도대체 무슨 인과관계가 있다는 말인가?&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아래 사진의 인물을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죽였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이 영상물과 그 사진을 유일한 근거로서 제시해 왔으나, 만약 이 영상물과 그 사진으로만 판단한다면 오히려 이것은 이분을 살해한 자들은 5.18불순세력이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된다.&amp;nbsp;&amp;nbsp;자, 여기에 그 단서가 있다.&amp;nbsp;&amp;nbsp;그 다음날 도청 점령을 위해 사용할 목적으로 5월 20일 타 지역에서 무기를 탈취해 오던 5.18무장단체 중 한 명이 그 다음날 새벽 죽었는데, 다름아닌 힌츠페터의 카메라에 잡힌 인물이었다.&amp;nbsp;&amp;nbsp;또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는 머리에 총상으로 죽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힌츠페터가 머리에 총상으로 죽었다고 증언하며 보여주는 인물 역시 유일한 인물이다.&amp;nbsp;&amp;nbsp;그는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바로 옆에서 총에 맞았으며, 총상으로 보아 분명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다.&amp;nbsp;&amp;nbsp;우리 육안으로 동일인물인지 판별하기는 어려우나 만약 5.18측 주장대로 이 영상물만을 근거로 삼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동일인물이요, 따라서 가해자는 5.18불순세력이었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capture/victim1a.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capture/victim1b.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capture/victim1c.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capture/victim1d.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자, 사고일시는 21일 이른 새벽이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그때 그 주변에는 군인이 단 한명도 없었으며, 유일한 무장단체도 시민군이었다.&amp;nbsp;&amp;nbsp;그 당시 7공수와 11공수는 도청광장에 갇혀 겹겹이 시민군에 포위당하고 있었으며,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전남대 임시본부로 복귀한 3공수 부대원들은 깊이 잠들어 있었던 때였다.&amp;nbsp;&amp;nbsp;더구나, 실탄도 그때는 시민군 편에만 있었다.&amp;nbsp;&amp;nbsp;일부 공수부대원들에게 공포용 실탄이 지급된 때는 도청광장과 전남대에서 시민군 장갑차 공격을 받기 시작했던 정오 무렵이었으며,&amp;nbsp;&amp;nbsp; 위에 언급된 광주역 인근에서의 총기 사고 때는 공수부대원 그 누구에게도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던 때였으며, 거리상으로도 책임을 묻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으며, 총상으로 보아도 시민군 총기에 의한 총상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리고, 어째서 시민군 편에서는 아무런 목격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인지 실로 이상하지 아니한가.&amp;nbsp;&amp;nbsp;힌츠페터는 한국말을 못 알아들었겠지만 영상 속의 이분이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알아들을 수 없었겠지만, 그 노래는 전우애에 대한 노래요, 군가였다.&amp;nbsp;&amp;nbsp;가사 소리가 분명하지 않지만 &quot;...맺어진 전우야...해가 질적에&quot; 등의 가사가 들린다.&amp;nbsp;&amp;nbsp;그런데 힌츠페터가 관찰한 정황대로라면 이분은 바로 자기 옆의 전우가 쏜 총에 얼굴 옆을 맞았다.&amp;nbsp;&amp;nbsp;여기에 힌츠페터로서도 도저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설명할 수 없는 이상스러움이 있다.&amp;nbsp;&amp;nbsp;만약 시위 중 사건이었다면 어째서 목격자가 없는가?&amp;nbsp;&amp;nbsp;힌츠페터가 머리에 총상으로 사망한 인물이라고 확인해 주는 이분과 힌츠페터가 머리에 총상으로 사망한 인물이라며 보여주는 이 사진의 인물이 동일인물이라면 이 청년은 시민군 전우의 총에 맞았으며, 시민군 전우는 이 사실을 은폐하였다는 얘기가 된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더구나 시민군의 전우애라는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amp;nbsp;&amp;nbsp;어째서 중상자를 엠블런스에 실어 병원에 후송하지 않고 트럭에 실어 광주 전지역을 돌며 사람들에게 구경시켰는가?&amp;nbsp;&amp;nbsp;보통의 경우 총에 맞아도 사람은 즉사하지 않으며, 몇시간 동안은 응급실에 후송될 기회가 있다.&amp;nbsp;&amp;nbsp;그런데, 시민군 사격술이 얼마나 좋길래 한 방에 머리를 쏘아 즉사시켰으며, 왜 병원으로 후송하지 아니하였는가?&amp;nbsp;&amp;nbsp;중상자를 수레에 실어 도시 전지역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그 시신을 보여주는 것이 참으로 자기 가족을, 자기 친구와 전우를 사랑하는 길이겠는가?&amp;nbsp;&amp;nbsp;5.18시민군의 이런 비인간적인 행동은 우리에게 쿠바의 도시 게릴라 방법을 다시금 연상시킨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1958년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이 바로 그런 방법으로 일어났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50년전의 쿠바는 미국과 교역하며 생활 수준이 높은 풍요로운 나라였다.&amp;nbsp;&amp;nbsp;그래도 반미, 반정부 시위를 할 이유가 있었던 공산주의자 대학생들이 있었으며, 사실 그 수는 처음에는 적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어느날 대규모 시위대에 포위된 경찰서장이 자기방어를 위해 뽑아든 권총에 운동권 리더 한명이 죽었다.&amp;nbsp;&amp;nbsp;시위대는 그 청년의 관을 메고 도시를 한바퀴 돌았는데, 군중심리에 의해 그 경찰서장은 공공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쿠바 시민이 들고 일어나 폭동이 일어났다.&amp;nbsp;&amp;nbsp;그 기세를 타 카스트로가 시민군을 조직하였고,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 방법 앞에 정부군이 무너지므로 민주주의 국가로서의 쿠바는 붕괴되고, 이후 장장 50년 지속된 카스트로의 천하가 되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미련한 한국좌익의 주장대로라면 그런 쿠바에서의 그런 공산주의 혁명이 민주화운동이었겠지만 쿠바는 가난한 나라로 전락하고 쿠바 국민은 자유를 상실한 백성이 되지 아니하였던가!&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capture/red-letter-ad.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사진을 보라!&amp;nbsp;&amp;nbsp;몇 사람이 죽자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글씨로 &quot;시체수백&quot;이라고 쓴 현수막을 트럭 위에 걸고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돌아다니며 선동하지 아니하는가!&amp;nbsp;&amp;nbsp;물론, 죽은 사람들이 또 있었다.&amp;nbsp;&amp;nbsp;무장시민군이 장악한 지역에서 시민군 2~3명이 총기사고를 당한 사고 발생 여러 시간 전에 이미 시민군은 순경 4명을 버스로 깔아죽였다. 물론, 죽은 사람들이 또 있었다.&amp;nbsp;&amp;nbsp;5월 19일 공수부대원 한명을 돌로 머리를 짓이겨 죽였으며, 20일 새벽에는 3공수 정관철 중사를 시민군 차량으로 깔아죽였으며, 20일 오후에는 3공수 16대대 운전병을 버스로 깔아 온몸을 갈기갈기 찢어죽였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 수를 다 합해도 열을 크게 넘지는 않았을 터인데,&amp;nbsp;&amp;nbsp;&quot;시체수백&quot;이라고 쓴 현수막을 차에 달고 이 지역 저 지역으로 다니는 광경이 아래 동영상 시작 후 20초부터 10초간 보인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L446HOxc2ic$ width=&quot;502&quot; height=&quot;399&quo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미국에서는 흉악범도 경찰을 살해하지는 않는다.&amp;nbsp;&amp;nbsp;수십 수백 명의 깡패 조직이 서로 칼과 흉기를 들고 패싸움을 하다가도 순경 두 명만 나타나면 모두 줄행랑친다.&amp;nbsp;&amp;nbsp;아무리 간이 큰 갱단 두독이라도 감히 순경에게 대들 생각을 못하는 나라가 미국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한국에서는 순경들을 버스로 깔아죽이는 것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인가?&amp;nbsp;&amp;nbsp;21일 새벽의 두세명의 시민군 총기사건에 대해서도 먼저 목격자를 확보하며 중상자들을 병원으로 후송하는 것이 순서였음에도 트럭에 실어 광주 전지역을 돌아다닌 이유가 무엇이었을까?&amp;nbsp;&amp;nbsp;이 질문은 사실 어째서 5월 20일에 3만명의 무장시민군을 포함하여 20만명이 넘는 시민이 도청 광장에 집결하였느냐는 질문과 맞물려 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발생 원인에 대한 잘못된 설명 중 하나가 김대중 석방을 위한 것이었다는 설명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불과 며칠 전에 최규하 대통령과 신현확 총리에게 5월 19일까지 내각 총사퇴하지 않으면 그후에 일어나는 사태에 대하여는 책임지지 못한다면 최후통첩을 보냈던 김대중은 건재하였으며, 아직 감옥에 가지 않았다.&amp;nbsp;&amp;nbsp;5월 22일은 김대중은 전국적 민중봉기로 최규하 대툥령을 하야시키고 김대중이 내각을 새로 임명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날이었다.&amp;nbsp;&amp;nbsp;가히 김대중 가문의 가신이라 할 수 있는 분으로서 당시 김대중 내란 수사를 맡았던 이기동씨는 그 사실을 이렇게 증언한다:&lt;BR&gt;&lt;BR&gt;&quot;두 장 중 한 장에는 소위 ‘예비내각’ 명단(당시 일간지에 발표)이 적혀 있었고 또 한 장에는 5월22일 정오에 서울 장충단공원을 비롯한 각 지방 시청 앞에서 ‘민주화 촉진 국민대회’를 개최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lt;A href=&quo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lt;/FONT&gt;&lt;/U&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자, 그렇다면 무엇이 객관적인 사실인가?&amp;nbsp;&amp;nbsp;김대중이 연행되었기에 광주사태가 일어났던 것이 아니라, 김대중이 5월 22일 전국적 민중봉기로 최규하 대통령 정부를 전복시키고 스스로 집권하려 했던 내란 음모는 예정대로 진행되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단지, 광주 등 16개 도시에 국한해서 무장봉기가 일어났을 뿐이지 그 거사계획은 5월 18일 이전에 이미 치밀하게 짜여져 있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주동자들이 5월 21일 도청광장 앞에서 공수부대 집단발포가 있을 것이니 어서 가서 총맞으라며 도청광장에 사람들을 불러모았던 것이 아니다.&amp;nbsp;&amp;nbsp;주동자들 편에서는 5월 21일에 도청을 점령하는 것이 중요하였으며, 그 목적을 위해 시민을 선동했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women_rioters.jpg&quot; width=637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사진에서 보듯이 시민군 선무반이 &quot;시민은 도청으로!&quot;&amp;nbsp;&amp;nbsp;&quot;전시민 도청으로!&quot; 등의 구호가 박힌 혆수막을 걸고 지프를 타고 다니면서 선동하였다는 것은 시민 동원이 조직적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amp;nbsp;&amp;nbsp;그렇다면, 그 논리가 &quot;시민이 많이 모이면 도청앞 공수부대 집단발포가 있을 것이니 어서 도청앞으로 모이자!&quot;였겠는가?&amp;nbsp;&amp;nbsp;혹은 그런 선동이 시민은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하였겠는가?&amp;nbsp;&amp;nbsp;그것은 아니었을 것이다.&amp;nbsp;&amp;nbsp;주동자들의 과제는 어떻게 수십 만명이 도청광장에 집결하도록 선동하느냐 하는 것이었으며, 또 하나의 과제는 어떻게 그 많은 인원을 동시에 수송하느냐였다.&amp;nbsp;&amp;nbsp;택시 한 대에 4명씩 승차하여도 20만명 이상이 동시에 동원되려면 5만대 이상의 택시가 있어야 한다. 주동자들은 그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였는가? &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daily/5-21-to-cityhall.jpg&quot; width=637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 사진에서 보듯이 주동자들은 탈취한 군용트럭들을 동원하였다.&amp;nbsp;&amp;nbsp;5월 21일 새벽 원인 모를 시민군 사망 사건이 발생한 것과 그때 이미 상당히 많은 군용 트럭 및 시민군 운전병들이 확보되어 있었다는 것이 우연의 일치였는가?&amp;nbsp;&amp;nbsp;김대중의 전국연합측에서는 5월 21일 전남도청 광장에 수십 만명을 집결시킬 목표를 세워두고 있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어떻게 시민을 선동하는가?&amp;nbsp;&amp;nbsp;쿠바의 사회주의 혁명 때처럼 몇구의 시체가 군중 동원의 촉매 역할을 했다.&amp;nbsp;&amp;nbsp;따라서 주동자들 편에서는 분명 그날 이른 아침의 불가사의한 사건은 밀접한 이해관계가 있는 사건이었다.&amp;nbsp;&amp;nbsp;지난 여름의 광우사태 때도 김대중 진영에서는 의도적으로 시위대 부상자가 생기도록 시위환경을 조성했다는 문건이 발견되지 않았던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주동자는 윤상원으로 대표되었던바, 당시 광주 전역에 대자보로 게시되었던 아래 문건을 보면 그날의 사건들은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미리 짜여진 마스터 플랜에 따라 진행된 사건이었으며, 그 목표는 전국적 민중봉기였다.&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518/photo/5_22dajabo.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 윤상원이 5월 22일 발행한 위의 투사회보 2호 중 상반부를 필사하면 아래와 같다:&lt;BR&gt;&lt;BR&gt;&lt;&lt;&lt;B&gt;투사회보 2&lt;/B&gt;&lt;BR&gt;&lt;BR&gt;민주투사들이여! 더욱 더 힘을 내자!!&lt;BR&gt;&lt;BR&gt;승리의 날은 오고야 만다.&lt;BR&gt;&lt;BR&gt;광주시민의 민주. 봉기의 함성은 전국으로 메아리쳐 각지에서 민주의 성전에 동참해 오고 있다. 그 성x성 장성에서 화순에서 나주에서 다수의 차량과 무기가 반입되었다. 전주에서는 도청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이제 승리의 날은 머지 않았다. 승리의 날까지 전 시민이 단결하여 싸우자! 이기자! 민주의 만세를 부르자!&lt;BR&gt;&lt;BR&gt;ㅇ &quot;KBS방송국을 접수하여 각지에 방송을 통해 이 참상을 알리자.&lt;BR&gt;&lt;BR&gt;ㅇ 외각도로 차단 (서울 목포 화순 송정 남전 기타)&lt;BR&gt;&lt;BR&gt;ㅇ 차량임무분담을 표시하자. (지휘부, 연락부, 보급, 구급, 기타)&lt;BR&gt;&lt;BR&gt;ㅇ 인근지역에 나가 투사를 규합하자. &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5월 21일 낮 12시까지 도청광장에 무장시민군 3만명 포함한 20만명 이상의 인파가 모였을 때 모두가 무장봉기를 목표로 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amp;nbsp;&amp;nbsp;대다수의 시민들은 시체 유언비어와 선무방송에 잠시 선동되었을 뿐이요, 무료로 도청광장까지 차로 실어다 주니깐 왔을 것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주동자측에서는 달성 목표가 있었으며, 그 목표가 투사회보로 공식 발표되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시민군 편에서 그런 필요가 절실하였을 때 발생한 몇명의 시민군 의문사 사건에 대해 어느 측에 책임이 있으며, 어느 편에 의혹의 시선이 집중되어야 하는가?&amp;nbsp;&amp;nbsp;사고발생 당시 사고발생 지역에서의 유일한 총기무장단체는 5.18무장단체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시민군 총기 오발 사고에 의한 사망사고가 여러 차례 있었음도 우리는 알고 있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을 살인마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한 누명임은 전두환 김대중 두 인물의 전혀 대조적인 리더십 스타일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lt;BR&gt;김대중같은 간웅도 자기가 데리고 있던 문세광을 사주하여 1974년 광복절에 암살하려 했던 대상이 바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amp;nbsp;&amp;nbsp;하물며, 대한민국 육사 출신 중에서도 가장 영웅호걸로 정평이 나있었던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무명의 이분을 상대로 작전지시를 하셨을리 있겠는가?&amp;nbsp;&amp;nbsp;김대중과 전두환은 전적으로 다른 인물이었다.&amp;nbsp;&amp;nbsp;김대중은 배후 조종하는 인물이기에 정치9단으로 알려져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전두환의 리더십은 그런 리더십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그는 작전지시할 때 언제나 선봉에서 뛰었다.&amp;nbsp;&amp;nbsp;특전사 시절 그는 별을 달고 낙하시범을 보여주는 유일한 장성이었으며, 보병 사단장 시절 그는 모든 구보 훈련에서 항상 선봉에서 달리는 장군이셨다.&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 당시 전두환 보안사령관은 광주에 오신 적도 없으셨으며, 그 누구와도 광주사태에 관하여 대화를 나누신 바도 없다.&amp;nbsp;&amp;nbsp;따라서 위의 영상물 청년의 살해범이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다는 주장은 지성인에게는 불가능하다.&amp;nbsp;&amp;nbsp;12.12사태의 경우 당신이 한 당사자였음을 1980년 8월의 전역식 때 스스로밝히시지 않으셨던가.&amp;nbsp;&amp;nbsp;그리고, 언제 어디서 어떤 역할을 주도하셨음을 훗날 상세하게 공개하지 않으셨던가.&amp;nbsp;&amp;nbsp;만일 광주사태 당시 폭동진압에 조금이라도 관여하신 바 있으셨다면 숨기실리가 있었겠으며, 정웅 소장, 소준열 장군 등 호남 출신으로서 광주향토사단 지휘관들이었던 분들이 입을 닫았을리가 있겠는가.&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quot;전두환 살인마 처단&quot; 주장은 본래 지성인들이 확보한 객관적 증거나 물증에 근거한 주장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 광주시민 대다수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몰랐었고,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여기고 있었음에도 주동자들 편에서 &quot;전두환 물러가라&quot; &quot;전두환 아가리를 찢어죽이자&quot; 등의 구호를 내걸었던 이유는 도시 게릴라 방법을 위해서였다.&amp;nbsp;&amp;nbsp;쿠바의 공산당 게릴라들이 썼던 방법대로 광주시민군을 무장봉기에 동참시키기 위해서는 민중의 증오심의 표적이 필요하였기에 전두환이란 이름을 이용하였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광주사태는 이제 더 이상 한 특정지역의 전유물, 어떤 특정 그룹 이해관계를 위해서만 주장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의 일부이다.&amp;nbsp;&amp;nbsp;비록 힌츠페터가 광주에 도착한 날 &quot;전남국을 만들자&quot;는 구호가 광주역 인근 시민군들 사이에서 외쳐졌다 하더라도, 5.18 사건은 이제 한국근현대사의 일부이며, 따라서 객관적 증거를 지성하는 지성인들이 그 논의에 참여해야 하는 사건이다.&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b.htm&quot; target=_blank&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지식 검색&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uprising1968.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 문근영 외조부 류낙진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lt;/FONT&gt;&lt;/U&gt;&lt;/A&gt;&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oc/Chungung.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5.18광주폭동 진압책임자는 호남 군인 정웅이었다 &lt;/FONT&gt;&lt;/U&gt;&lt;/A&gt;&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DJ-group.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문근영의 가족사에 얽힌 김대중 그룹의 정체성&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5-20why.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5.18불순세력이 이분을 살해한 거였어?&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Ilsung-dj.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김대중과 김일성의 거래관계에 대한 증언들&lt;/FONT&gt;&lt;/U&gt;&lt;/A&gt; &lt;/P&gt;
&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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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미국 방송이 보도한 광주사태 뉴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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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역사학도</name>
	    </author>
	    <updated>2008-12-16T23:41:58Z</updated>
	    <published>2008-12-16T23:41:5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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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http://cfs3.flvs.daum.net/files/34/24/88/17/16143928/thumb.jpg.edit&quot; moviekey=&quot;PWOYtgifxQs$&quot; type=&quot;vi&quo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미국 3대 방송사 ABC, CBS, NBC가 1980년 5월 22일에 보도한 광주사태 뉴스이다.&amp;nbsp; 동영상 시작후 3분 3초부터 3분 10초에서 NBC 기자는 분명히 시민 총기에 의한 총상으로&amp;nbsp;죽임을 당한&amp;nbsp;시민 사망자들이&amp;nbsp;있다는 사실을 확증한다.&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A href=&quot;http://study21.org/b.htm&quot; target=_blank&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지식 검색&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DJ-group.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문근영의 가족사에 얽힌 김대중 그룹의 정체성&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518-partisan.htm&quot; target=_blank&gt;&lt;FONT color=#800080&gt;&lt;U&gt;무엇이 빨치산에 대한 광주시민의 사관인가?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uprising1968.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문근영 외조부 류낙진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partisan.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800080&gt;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는 1980년판 빨치산 총탄에&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Ilsung-dj.htm&quot; target=_blank&gt;&lt;U&gt;&lt;FONT color=#0066cc&gt;김대중과 김일성의 거래관계에 대한 증언들&lt;/FONT&gt;&lt;/U&gt;&lt;/A&gt; &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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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진으로 본 북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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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역사학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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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8-12-16T16:24:35Z</updated>
	    <published>2008-12-16T16:24:35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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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도대체 광주사태 주동자들이 뭐라고 선동했기에 광주민주화운동 유공자 윤기권이 2억원 수령하자마자 이런 곳을 낙원이라며&lt;br&gt;월북하였던 것일까?&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title&gt;HTML clipboard&lt;/title&gt;&lt;style&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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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근영의 외조부는 김대중의 선거운동원 1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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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역사학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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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8-12-10T09:46:08Z</updated>
	    <published>2008-12-10T09:46:08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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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EMBED src=http://study21.tistory.com/attachment/mk0.wmv width=&quot;640&quot; height=&quot;480&quot; type=application/x-mplayer2 autostart=&quot;true&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문근영이 아직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1997년 문근영의 부모는 김대중이 당선되면 연예인이 되게 해주겠다고 말하였으며, 연예인 지망생이 무수히 많은 이 나라에서 문근영은 김대중이 당선되자마자 신델렐라처럼 등장하였다.&amp;nbsp;&amp;nbsp;&quot;김대중이 당선되면 연예인이 되게 해주겠다&quot;는 문근영 부모의 이 말은 김대중과 그 집안과 어떤 관계가 있었음을 시사하는 바, 언론은 이미 그 연결고리가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임을 밝혔다.&amp;nbsp;&amp;nbsp;좌익 언론이 지리산 빨치산 출신 류락진을 통일운동가라고 불렀을 때 그가 통일혁명당(이하 통혁당)이란 간첩단 출신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는바, 거물 간첩 김용규의 저서 &quot;소리없는 전쟁&quot; 72쪽에서 김용규는 통혁당이란 간첩단의 의무가 바로 1967년에 목포에서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하는 것이었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 증언이 시사하는 바는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은 김대중의 선거운동원 원조였으며, 김일성의 계획대로 4년 후에 김대중은 대선 후보가 되었으며, 문근영의 외조부를 포함한 간첩단이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시작하여 국회에 보낸지 30년만인 1997년 드디어 김대중이 청와대에 입성하였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이 목포 출신이었으며, 광주사태 당시만 해도 대부분의 광주시민들은 목포 출신 김대중에 특별한 관심이 없었음에도 대다수의 국민이 광주를 김대중의 고향으로 착각하고 있음은 참으로 기이한 일이다.&amp;nbsp;&amp;nbsp;가히 자생 간첩이라 부를 만큼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해 있었으며 무장봉기를 통한 노동자 계급혁명 망상에 사로잡혀 있었던 윤상원이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으로서 광주의 녹두서점에 아지트를 차려놓고 있었던 것뿐이었지, 대다수의 광주시민들은 김대중을 광주사람으로 여기기는커녕 별 관심이 없었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이상한 교육과 언론 플레이의 영향으로 오늘날 광주시민들 중에도 김대중이 광주 출신이었던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경우가 많음을 우리는 본다.&amp;nbsp;&amp;nbsp;이렇듯, 남한 사람들도 한국의 노벨평화상 수상자 고향이 광주인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때에 때로 탈북자들의 증언이 우리에게 객관적인 사실들을 상기시켜 준다.&amp;nbsp;&amp;nbsp;우리는 어째서 김대중 정권이 간첩을 안잡았는지 그 이유를 몰랐다.&amp;nbsp;&amp;nbsp;그런데 탈북자들의 증언이 그 이유를 말해 준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은 신안군 출신으로 신안군과 무안군이 목포 지역이며, 김대중은 일제시대 말기에 목포상고를 졸업한 후 목포에서 좌익들 틈에 끼어 기반을 다지며 활동하기 시작했다.&amp;nbsp;&amp;nbsp;거물간첩 김용규가 대남공작 비화 [소리 없는 전쟁]의 72쪽에서 간첩들로 이루어진 통혁당이 1967년 목포로 내려가 김대중을 위해 선거운동을 했다고 증언하였을 때 대다수의 독자들은 무심코 넘겼었다.&amp;nbsp;&amp;nbsp;간첩단이 1960년대 중반에 남한에 통혁당이란 당을 조직했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대다수의 국민들에게는 김용규의 증언 내용을 좀처럼 실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이 바로 이 통혁당 출신이었기에 통일운동가였다는 최근의 좌익 언론의 논리가 우리로 그 사건을 실감케 했으며, 김용규의 증언을 재음미하는 계기가 되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탈북자의 증언 등 아래의 동영상들은 광주사태는 어느 날 갑자기 난데 없이 터진 우발적 사건이 아니라, 길게는 196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뿌리가 있었음을 깨닫게 해주고,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김일성과 김대중이 어떤 합작을 하였을지를 조금이나마 짐작케 해준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Pj4Gwx2Lgao$ width=&quot;502&quot; height=&quot;399&quo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바로 위의 동영상에서 우리는 탈북자 이수근씨가 기자회견하는 모습을 본다.&amp;nbsp;&amp;nbsp;만약 문근영의 외조부 류락진이 김일성 지령에 따라 활동했던 김대중의 선거운동원 1호였다면, 이수근씨는 우리가 기억하는 탈북자 1호였다.&amp;nbsp;&amp;nbsp;언제부터인가 탈북자가 내려와도 더 이상 기자회견을 하지 않고 있다.&amp;nbsp;&amp;nbsp;아마도 지금은 탈북자의 수가 많으니 탈북자가 와도 더 이상 언론의 조명을 받지도 못하며 신문기사로조차 보도되지 않고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이수근씨가 탈북하였을 때는 그것이 대사건이었으며, 가장 큰 뉴스거리였다.&amp;nbsp;&amp;nbsp;아직 TV가 한국에 출현한지 얼마 안되어 희귀품 중의 희귀품이었던 때였지만 사람들은 이수근씨의 이름을 기억한다.&amp;nbsp;&amp;nbsp;그리고 아직도 남한 국민 대다수가 모르고 있는 사실을 그해 1967년 4월에 이미 그 기자회견에서 밝혀주었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일성의 전략은 연방제 적화통일 동조 세력을 남한에 심어두고 육성하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1975년 월남도 남남분열로 패망하였으며, 친북세력, 혹은 연방제 적화통일 동조 세력을 심어 남남분열을 시키려던 김일성의 전략을 한마디로 표현하기 위해 이수근씨는 &quot;하부 구조&quot;라는 표현을, 김용규는 &quot;소리 없는 전쟁&quot;이란 표현을 쓴다.&amp;nbsp;&amp;nbsp;남한에서도 북파 간첩을 보내었겠지만 북한에 하부 구조를 만들어 놓고 보내는 것은 아니다.&amp;nbsp;&amp;nbsp;우리 편에서는 북한에 류락진과 김대중의 역할을 해 줄 하부 구조가 있는 것도 아니요, 또한 그런 시도도 없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북한은 하부 구조라는 남한 내의 친북세력을 지원하며, 그런 북한의 전략이 김용규가 말하는&amp;nbsp;&amp;nbsp;&quot;소리 없는 전쟁&quot;이다.&amp;nbsp;&amp;nbsp;탈북 군인들은 광주사태 때 북한군의 침투 세력이 있었다고 증언하는바, 그 방법은 광주사태 일어나기 12년 전에 쓰던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amp;nbsp;&amp;nbsp;즉, 동조세력이 있는 곳에서 도시 게릴라 방법을 지원하였다는 의미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탈북군인들은 무기 탈취는 광주시민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복장을 위장한 북한군의 지원이 있었던 것이라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지금 그리스에서도 폭동이 일어나고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무엇이 광주사태와 다른가?&amp;nbsp;&amp;nbsp;감히 시민이 군용차량, 총기, 수류탄, 장갑차 등을 탈취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는데서 광주사태와 다르다.&amp;nbsp;&amp;nbsp;하물며 비상계엄 하의 1980년 봄에 무기 탈취를 하는 것이 쉬웠을 리가 있겠는가?&amp;nbsp;&amp;nbsp;광주 외곽 30여곳의 무기고 위치를 상세히 알고 있던 자들이 누구였으며, 어떻게 동시다발적으로 군용차량으로 무기고를 받아 문을 부수고 무기를 탈취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amp;nbsp;&amp;nbsp;5월 19일부터 시작된 무기 탈취 이전에 군용차량 탈취가 있었다.&amp;nbsp;&amp;nbsp;5.18측은 광주시민 단독으로 군용차량들과 군사무기들을 탈취했다고 주장하지만 과연 일반 시민 단독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을는지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우므로 탈북군인들의 증언쪽에 더 신빙성이 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어째서 북한당국은 지금까지도 광주인민봉기에 상당한 의의를 두고 있는가?&amp;nbsp;&amp;nbsp;그것은 광주사태가 그들이 남한에 심어놓은 지하당에 명분을 주었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지하당 활동은 1960년대에도, 1970년대에도 있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광주사태로 &quot;민주화&quot;라는 명분을 갖게 되었다.&amp;nbsp;&amp;nbsp;윤상원 등 광주사태 주동자들은 속에는 공산주의 이념으로 가득차 있으면서도 겉에 민주투사라는 간판을 달았다.&amp;nbsp;&amp;nbsp;그 간판으로 외신기자들의 눈을 깜짝같이 속일 수 있었으며, &quot;민주화&quot;라는 명분을 갖게 되자 1980년 이후로는 더 이상 지하에 머물러 있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amp;nbsp;&amp;nbsp;&quot;민주화&quot;라는 명분을 내걸면 얼마든지 국민의 이목을 속이며 여론을 조작할 수 있었고, 또 &quot;민주화&quot;라는 명분만 내세우면 좌익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던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의 저서 72쪽에서 김용규는 그 선거전에서 &quot;통혁당 조직원들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역전, 터미널, 시장터 할 것 없이 찾아다니며 ‘이번 국회의원 선거는 목포가 죽느냐 사느냐 사활이 걸려있는 선거다. 목포시를 살리고 내가 살기위해서는 공화당을 낙선시켜야 한다(낙선운동의 시조)’고 목이 터져라고 외쳤다”고 증언하는바, 아래 동영상을 보면 놀랍게도 실제로 1967년 6월 8일에 남한에서 총선거가 있었다.&amp;nbsp;&amp;nbsp;아래 동영상에서 김종필씨 등이 유세하는 모습이 보인다.&amp;nbsp;&amp;nbsp;그리고, 아래 동영상에서는 들을 수 없지만 1967년 6월4일 오후 2시에 김대중은 목포역전 광장에서 이렇게 연설하면서 선거유세를 하였다:&amp;nbsp;&amp;nbsp;&quot;여러분 내 눈을 똑바로 보세요. 내 얼굴을 똑똑히 보십시오. 나는 내 장래에 대해서 큰 포부가 있습니다. 나는 돈 몇 푼 받아 가지고 내 장래를 망칠 사람이 아닙니다. 나는 내 꿈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더러운 돈 같은 것은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워도 안중에 없다는 것을 명백히 해둡니다.&quot;&lt;BR&gt;&amp;nbsp;&amp;nbsp;&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fwgFwTwko_o$ width=&quot;502&qu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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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ight=&quot;399&quo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북한에서는 대북 지원받을 것은 다 받되 목표는 하나인바, 통미봉남 전략이 그들의 목표이다.&amp;nbsp;&amp;nbsp;김정일의 핵무기 거래 조건은 한미동맹 해체이므로 6자 회담의 난항은 피할 수 없는 귀결이며, 미국이 북한의 요구에 어떻게 응하느냐에 따라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될 수 있는 시기이다.&amp;nbsp;&amp;nbsp;북한 주민이 가난하다.&amp;nbsp;&amp;nbsp;그러나 북한당국의 목표는 동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한을 삼키는 것이며, 북핵거래 카드는 북한이 쥐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셈법이다.&amp;nbsp;&amp;nbsp;바로 이러한 때에 탈북자 단체가 북한에 풍선으로 삐라를 뿌리고 있는 것이다.&amp;nbsp;&amp;nbsp;사상전에서 북의 공격만 받을 것이 아니라, 이편에서 북한 주민의 의식에 변화를 주려는 시도를 해야 하기에 나온 발상이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것을 지금 좌익 단체들이 막으려 하고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위의 동영상은 북한이 어떻게 1960년대부터 좌익 단체들에 파고들어 의식화 공작을 했었는지를 보여주는 바, 이수근씨의 증언과 위 동영상 뉴스는 훗날 송두율 교수 사건 등으로 여실히 증명되었다. &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AgRFSWW-pFU$ width=&quot;502&quot; height=&quot;399&quo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측은 그때 최규하 대통령에게 비상계엄해제를 요구하기 위해 시위를 시작했었던 것이라고 변명한다.&amp;nbsp;&amp;nbsp;즉, 당시에 비상계엄해제 요구라는 시위 명분이 있었다는 것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광주사태 때 북한군 특수부대가 침투했었다는 탈북군인들의 증언에 대하여는 북한군 침투는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amp;nbsp;&amp;nbsp;그런데, 이 두가지 주장을 동시에 하는 것은 모순이다.&amp;nbsp;&amp;nbsp;교통안전수칙을 무시하라는 요구와 교통사고의 위험은 전혀 없다는 주장이 양립할 수 있는가?&amp;nbsp;&amp;nbsp;교통사고를 당해 본 사람이라면 교통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지역을 통과할 때는 더욱더 조심하기 마련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그것이 1968년 1월 북한 무장간첩들이 청와대까지 침투한 사건을 겪었던 1980년 봄 최규하 대통령의 입장이었다.&amp;nbsp;&amp;nbsp;위 뉴스를 보면 국민의 걱정을 배려하여 김신조 일당이 대통령 암살을 시도했었다는 사실에 대한 아무런 멘트가 없다.&amp;nbsp;&amp;nbsp;그런데,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도 북한군 특수부대가 청와대 문턱까지 침투할 수 있었다면, 박 대통령 사후에 김일성이 그 호기를 모른체 할리 없었고, 그래서 최규하 권한대행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셨던 것이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w-fLJEn4GWw$ width=&quot;502&quot; height=&quot;399&quot;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영삼이 신민당 총재였든, 자민당 총재였든, 한나라당 총재였든 달라진 것은 그의 소속 정당 간판이었지 김영삼이란 인물 자체가 아니었다.&amp;nbsp;&amp;nbsp;마찬가지로 류락진이 1950년대의 지리산 빨치산이었든, 1960년대 통혁당 사건 때의 류락진이었든, 1990년 구국전위 사건의 류락진이었든, 2000년대 초의 범민련 고문이었든 그의 소속 단체명이 바뀌었던 것뿐이지 류락진이란 인물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amp;nbsp;&amp;nbsp;20세기 중반에 공산주의를 선택한 류락진은 21세기에 살면서도 끝까지 대한민국 국민으로 전향하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리고 류락진의 통혁당 사건과 김대중의 내란(김대중이 전국적 민중봉기 일으키려다 발생한 광주사태) 중간에 인혁당 사건과 남민전 사건이 있었다.&amp;nbsp;&amp;nbsp;운동권은 이런 사건들이 조작된 것이라고 주장해 왔으나,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방법을 사용하여 연방제 적화통일 도모하려는 세력은 분명히 실제로 있었으며, 그 명칭이 1970년대에 인혁당으로, 그리고 그후에 남민전으로 바뀌었을 뿐 그 뿌리가 1960년대로 거슬로 올라가는 통혁당 잔당들이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좌파 언론과 좌파 교육의 영향으로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 국민들이 12.12사태를 실제 사건과 전혀 딴판으로 이해하고 있다.&amp;nbsp;&amp;nbsp;좌파 교과서대로라면 12.12사태로 김대중이 탄압을 받았다.&amp;nbsp;&amp;nbsp;그러나, 실제로는 12.12사태가 있었기에 김대중이 사면복권되고 다시 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amp;nbsp;&amp;nbsp;만약 12.12사태가 없었다면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의지대로 김대중은 영영 정계에 복구할 수 없었다.&amp;nbsp;&amp;nbsp;그런데, 정승화 계엄사령관이 김대중의 정치활동을 금지시키려 했었던 이유가 훗날의 거물간첩 김용규의 증언을 뒷받침한다.&amp;nbsp;&amp;nbsp;아래는 &quot;김대중은 전향하지 않은 공산당&quot;이라고 못박아 말한 정승화 계엄사령관을 취재한 바 있는 손충무 기자가 그의 저서 '김대중 x-파일'에서 발췌한 내용이다:&lt;BR&gt;&lt;BR&gt;김대중은 &lt;BR&gt;&lt;&lt;북괴군이 그의 고향인 목포를 점령하자 활약하다가 6.25전에 돈을 빌려주었다가 못 받은 사람들의 고발로 내무서에 구금되었으나 국군이 목포를 탈환하는 바람에 자유의 몸이 된 경력이 있었다.&lt;BR&gt;&lt;BR&gt;그는 부산으로 옮겨가 사업을 했지만 실패, 다시 1954년경 강원도 인제로 갔다. 인제는 당시 행정력이 가장 취약한 최일선 수복지구였다. 그는 그곳에서 그 특유의 조직과 선전술을 이용하여 1961년에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었으나 5.16으로 의원선서를 못했다.&lt;BR&gt;&lt;BR&gt;내가 특히 놀란 것은 1960년대에는 불순인물과 은밀히 만난 사실이 있었다는 것 등에 관한 기록이었다. 이러한 기록을 보건대 북쪽의 공산집단과 대결하고 있는 우리의 형편에서는 그를 국가의 최고지도자로 추대한다는 것은 문제 발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lt;BR&gt;&lt;BR&gt;나는 또 일본의 반한파 사회주의자 정객인 우스노미야 도쿠마가 1972년도에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과 회담하고 그 회담 기록을 일보에서 출판한 것을 읽어본 일이 있었다(정승화 씨의 이 부분은 잘못된 것이다.우스노미야 도쿠마 의원과 김일성이 만나 김대중 구출문제를 논의한 것은 1974년이다. 필자 주).&lt;BR&gt;&lt;BR&gt;그 책에는 김일성이 우스노미야 도쿠마에게 &quot;김대중 씨가 대통령이 된다면 남북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이 트일 수 있을 것이라며 김대중 씨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도록 적극 도와달라&quot;고 부탁을 한 대목도 있었다.&lt;BR&gt;&lt;BR&gt;나는 김대중 씨를 놓고 여러 각도로 분석하여 나름대로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얻게 되었다. 김대중 씨는 과거 젊은 시절이었을 때라 하더라도 공산주의와 관계를 맺은 일이 있다. 그리고 현재도 내가 보기에는 언행 등 그가 취하는 수단과 방법 등에서 과히 신뢰가 가지 않는 인물이다. 그의 정치인으로서의 성장과정 등을 미루어볼 때 석연치 못한 점이 있다. 따라서 북쪽에 있는 공산주의자들과 투쟁을 계속하고 있는 우리의 상황으로 보아 국군을 지휘하는 위치를 차지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렇듯 서슬퍼런 정승화 장군 치하의 계엄정국에서는 김대중은 감히 정계복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는데, 12.12사태가 일어났기에 김영삼씨와 더불어 나란히 대선후보로서 정계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12.12사태 두달 후인 2월에 김대중의 사면복권 절차가 완료되어 비로서 정계복귀를 할 수 있었으니, 12.12사태가 김대중의 정치 생명을 위해서는 천운의 기회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은 &quot;내가 특히 놀란 것은 1960년대에는 불순인물과 은밀히 만난 사실이 있었다는 것&quot;이라고 말했음에 주목해 보라.&amp;nbsp;&amp;nbsp;1960년대의 불순인물이라면, 훗날 거물간첩 김용규가 증언하는 통혁당의 인물이요, 통혁당의 인물이라면 류락진--요즘 좌익 언론이 통혁당 간첩사건 당사자였기에 통일운동가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류락진이 아닌가!&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이렇듯 통혁당과 김대중의 관계에 대한 훗날의 김용규의 증언은 1979년 11월경 정승화가 넌지시 언급했던 말로 재확인된다.&amp;nbsp;&amp;nbsp;그렇다면, 통혁당 간첩들은 어떤 방법으로 김대중의 선거운동을 지원했었을까?&amp;nbsp;&amp;nbsp;거기까지 자세히 알기는 어려우나 훗날 김대중이 선동하였던 시위의 특징이 흑색선전이었음을 관찰할 수 있다.&amp;nbsp;&amp;nbsp;지난 여름 광우사태 때 폭도들의 구호가 &quot;이명박 물러가라&quot;였는데, 아무개 물러가라는 김대중이 선동하는 시위 구호의 전유물이었다.&amp;nbsp;&amp;nbsp;광주사태 당시 시위구호는 &quot;최규하 물러가라&quot; &quot;신현확 물러가라&quot;였으며, 김대중의 전국적 민중봉기 일정에서 &quot;전두환 물러가라&quot; 구호는 5월 19일부터 외치도록 되어있었다.&amp;nbsp;&amp;nbsp;5월 15일 서울역 집회 때도 잠깐 &quot;전두환 물러가라&quot; 구호가 나오긴 했지만, 본래 일정은 5월 19일을 기하여 전국 대학교 벽보에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에 대한 흑색선전 벽보, 즉, &quot;전두환은 박정희의 양자다&quot;라는 대자보를 붙임과 동시에 외치도록 되어있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좌파의 역사왜곡 교과서대로라면 12.12사태에 대한 저항권으로서 광주사태가 일어났다.&amp;nbsp;&amp;nbsp;그러나, 실제로는 5.18봉기군 대다수는 전두환이 누군지 전혀 모르고 있었으며, 광주시청 직원이려니 여기고 있었다.&amp;nbsp;&amp;nbsp;12.12사태라는 용어는 7년 반 후인 1987년 12월부터 등장한 용어였다.&amp;nbsp;&amp;nbsp;12.12 사태는 만약 전두환이 1981년 5공화국 대통령으로 당선되지 못하였거나 장기집권하였다면 전혀 세인의 관심을 끌지 못할 사건이었다.&amp;nbsp;&amp;nbsp;광우사태 때의 &quot;이명박 물러가라&quot; 구호는 미국 쇠고기 수입 반대의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quot;전두환 물러가라&quot;라는 구호는 사실 시위대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구호였다.&amp;nbsp;&amp;nbsp;&quot;전두환&quot;이란 이름도 들어본 적도 없으며, 얼굴도 모르며, 어떤 인물이었는지 전혀 몰랐으면서 외친 구호에 무슨 의미가 있었겠는가.&amp;nbsp;&amp;nbsp; &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의 흑색선전 버릇은 196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amp;nbsp;&amp;nbsp;4.19데모 직후 1960년 7월29일&amp;nbsp;&amp;nbsp;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하자 4백 명의 데모대를 조직하여, 투표함 22개중 15개를 강탈한 후 당선된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이게 했다. 자기의 부하를 시켜 자기의 선거참모를 구타해놓고, 상대당원이 테러를 했다고 역선전했다. 자기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시켜 상대방이 고무신을 뿌렸다고 역선전을 했다.&amp;nbsp;&amp;nbsp; &lt;BR&gt;&lt;BR&gt;&amp;nbsp;&amp;nbsp; 1972년 총선 때 김대중의 신민당 헤게모니 경쟁자는 신민당 당수 유진산씨였다.&amp;nbsp;&amp;nbsp;당시 유진산 주변에는 3억원을 받고 거래 흥정을 해서 지역구를 팔아 먹었다는 악소문을 누군가가 흘리고 다녔다.&amp;nbsp;&amp;nbsp;유진산의 등록후보를 저지하기 위해 50명의 청년당원을 동원하여 저지하려 했으나 겨우 접수를 마감하고, 그 후, 유진산의 집에는 '돈 받고 당을 팔아 먹은 유진산이 물러가라'는 구호와 함께 300여명의 청년들이 급기야 집안으로 난입하고, 당수실도 집단 폭력의 장으로 난동을 부렸다.&amp;nbsp;&amp;nbsp; 이 사건은 당시 지역구 출마계획을 가진 김여산과 김대중의 비서 이윤수가 청년을 지휘 하였던 일로서, 김대중은 동교동에서 김옥두 비서로 부터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다.&amp;nbsp;&amp;nbsp;&quot;유진산 물러가라&quot; 구호에 견디지 못해 유진산씨가 당수 직을 양일동에게로 위임하자, 양일동마저 폭행을 하며 신민당 탈당계를 요구하며 폭력을 행사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의 사면복권 및 정계복귀는 보안사령관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였으므로 그런 도움을 주었던 전두환이 김대중에게는 한없이 고마운 존재였다.&amp;nbsp;&amp;nbsp;그런데, 어째서 김대중이 배은망덕하게 &quot;전두환 물러가라&quot; 구호를 외치게 하였을까?&amp;nbsp;&amp;nbsp;바로 이 질문이 김대중의 전국연합 과격파가 추진하고 있었던 무장봉기, 즉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방법, 혹은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가들이 썼던 도시 게릴라 방법을 쓰는 무장봉기 계획에 대한 김대중의 의중이 무엇이었는지의 질문과 맞물려 있다.&amp;nbsp;&amp;nbsp;보안사령관을 물러나라고 해야 할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amp;nbsp;&amp;nbsp;만약 있다면 그 유일한 이유는 좌익의 무장봉기 장애물이 반공군인 전두환이라 여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amp;nbsp;&amp;nbsp;실제로,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은 폭동 진압에 전혀 관여하지 않았지만, 김대중과 그의 국민연합 과격파들 편에서는 반공군인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으리라. &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b.htm&quot; target=_blank&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지식 검색&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uprising1968.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 문근영 외조부 류낙진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DJ-group.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문근영의 가족사에 얽힌 김대중 그룹의 정체성&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spy-DJ.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문근영의 외조부는 김대중의 선거운동원 1호?&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518-partisan.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800080&gt;&lt;U&gt;무엇이 빨치산에 대한 광주시민의 사관인가?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Ilsung-dj.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김대중과 김일성의 거래관계에 대한 증언들&lt;/FONT&gt;&lt;/U&gt;&lt;/A&gt; &lt;BR&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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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968년 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김신조 일당</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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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name>역사학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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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8-12-09T19:25:50Z</updated>
	    <published>2008-12-09T19:25:50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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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amp;nbsp;&lt;/P&gt;
&lt;P&gt;&lt;img src=&quot;http://cfs3.flvs.daum.net/files/26/68/70/43/15954434/thumb.jpg.edit&quot; moviekey=&quot;AgRFSWW-pFU$&quot; type=&quot;vi&quot;/&gt;&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 &lt;/P&gt;
&lt;P&gt;서울로 침투한 무장간첩 사살 및 북한의 만행&lt;BR&gt;-무장간첩 서울 침투 신문기사, 불탄 버스장면.&lt;BR&gt;-31명의 무장간첩 내려옴.&lt;BR&gt;-무장간첩 작전중 종로 경찰서장 최규식씨 사망.&lt;BR&gt;-군경수색대 대책본부 작전 논의.&lt;BR&gt;-간첩 사살, 시체들 모습, 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씨가 시신을 확인.&lt;BR&gt;-생포된 무장간첩 김신조씨 기자회견(육성) : &quot; 북한은 무장간첩을 침투시켜 남한 사회질서 교란이 목적이고 무장간첩 2천 4백명이 훈련중이고 유술과 격술, 권투를 배웠다고 함 &quot;.&lt;BR&gt;-무장간첩들의 소지품들.&lt;BR&gt;-국토방위에 여념이 없는 국군.&lt;BR&gt;-북한은 동해 공해상에 있는 미해군 정보수집함 푸에블로호 납북.&lt;BR&gt;-UN측의 요청으로 북한 판문점 회의&lt;BR&gt;-북한측은 무장간첩의 남파사건은 조작된 것이라 은폐하려 하고, 푸에블로호가 영해를 침범했다고 주장.&lt;BR&gt;-미 핵 항공모함 앤터프라이즈호 원산만 부근으로 출동 배치.&lt;BR&gt;-경기도 파주군 법원리 선봉산에 무장간첩이 제일 처음 나무꾼 4형제 와 접촉.&lt;BR&gt;-간첩을 신고한 나무꾼 4형제 그때 상황 설명(육성) : &quot; 나무를 하고 있는데 간첩들이 불러 내려감,잡혔다가 도망가 신고했음&quot;, 나무꾼 4형제가 감금당한 장소 .&lt;BR&gt;-표어 : 간첩 신고는 112, 113으로,&amp;nbsp; 날뛰는 간첩 뿌 ?潔?없애자.&lt;/P&gt;
&lt;P&gt;출처:대한뉴스 제 659호&lt;/P&gt;
&lt;P&gt;&amp;nbsp;&lt;/P&gt;
&lt;P&gt;&amp;nbsp;&lt;/P&gt;
&lt;P&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face=Arial color=#800080 size=2&gt;http://study21.org/518/index.htm&lt;/FONT&gt;&lt;/U&gt;&lt;/A&gt;&lt;/P&gt;
&lt;P&gt;&amp;nbsp;&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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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근영 외조부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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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역사학도</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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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8-11-28T00:46:42Z</updated>
	    <published>2008-11-28T00:46:42Z</published>
	    <content type="html">
	    	&lt;EMBED src=http://study21.tistory.com/attachment/kk1.wmv width=480 height=360 type=application/x-mplayer2 autostart=&quot;true&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어째서 여우 문근영 양의 외조부 류낙진이 통일운동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amp;nbsp;&amp;nbsp; 단지 그가 1950년대에 지리산 빨치산이었기에 통일운동가라는 뜻인가?&amp;nbsp;&amp;nbsp;아니다.&amp;nbsp;&amp;nbsp;위에서 류낙진이 1968년에 가담하였던 통일혁명당 영상물을 보는바와 같이, 그가 민중봉기를 일으키려는 세력 중에서는 거목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amp;nbsp;&amp;nbsp;적화통일 세력은 오래 전부터 민중봉기, 무장봉기를 적화통일 전략으로 삼아왔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무엇이 광주사태였던가?&amp;nbsp;&amp;nbsp;김대중이 1980년 5월 하순에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광주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만 국한되어 발발하였던 무장봉기를 일컬는다.&amp;nbsp;&amp;nbsp;그러면, 도대체 언제부터 김대중은 민중봉기를 일으킬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amp;nbsp;&amp;nbsp;&amp;nbsp;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 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던 통일혁명당의 주동자 김종태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amp;nbsp; &lt;BR&gt;&lt;BR&gt;&amp;nbsp;&amp;nbsp;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amp;nbsp;&amp;nbsp;김대중이 1980년 5월 전국적 민중봉기 일으키려 하기 12년 전에 이미 민중봉기를 통한 공산화 시도가 있었다.&amp;nbsp;&amp;nbsp;사실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이 가담하였던 통혁당 사건과 광주사태는 일란성 쌍둥이였으며, 민중봉기의 목표가 류낙진과 김대중을 엮는 코드였다.&amp;nbsp;&amp;nbsp;통혁당 사건은 실패로 끝난 민중봉기 시도였으며, 1975년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시민군을 동원한 민중봉기로 월남을 패망시키는데 성공한 것을 본 김대중은 그 이후로 월남식 도시 게릴라 방법을 채택하였고, 1980년 3월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이 된 윤상원은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투사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 전법을 일찍부터 연구하고 있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탈북 군인들은 1980년 3월 김일성의 책상 위에는 5월에 광주에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가 놓여있었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그런 증언은 증명될 수 있는가?&amp;nbsp;&amp;nbsp;물론, 자유 통일이 되어야만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만약 정말로 3월에 그런 음모가 광주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리고 김일성이 그때부터 무장봉기 지원을 하려고 시도한 것이 입증될 수만 있다면 탈북 군인들은 증언은 그만큼 신뢰성이 있는 것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아래의 두 동영상에 보듯이 이 둘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 &lt;BR&gt;&lt;BR&gt;&lt;EMBED src=http://www.youtube.com/v/Rgro2KPDoGE width=425 height=350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바로 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이신범이 3월에 문익환 목사를, 제2의 동학란을 일으키자고 선동하였던 문익환 목사를 만나고 있었음을 본다.&amp;nbsp;&amp;nbsp;문익환 목사는 신학을 시작하기 전에, 해방후 남한에 오기 전에 이미 공산주의 사상에 물들어 있었던 인물이요, 북한에서 문익환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던 것만 보아도 그의 이념적 성향을 알 수 있다.&amp;nbsp;&amp;nbsp; 문익환 목사와 김대중이 말하던 제2의 동학혁명 또한 민중봉기, 유혈폭동, 무장봉기 등을 시사하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이신범이 문익환 목사를 만난 사실이 있다.&amp;nbsp;&amp;nbsp;그리고, 바로 아래 동영상에서 김일성도 바로 그 무렵 도시 게릴라 방법을 지원하기 시작하였음이 입증된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fZeudaKayMU$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청문회 때 이신범은 문익환 목사와의 대화는 단지 계엄령을 해제시키기 위한 대화였다고 변명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당시 계엄은 국방의 위기가 있던 시기에 군인을 대상으로 하는 계엄이었으며, 북한군 특수부대원(무장공비)들이 여기저기서 침투하고 있었던 때였는데, 당시 어린 학생이었던 이신범과 종교인 문익환이 계엄을 해제하라고 한다는 것이 납득이 될 수 있는가?&amp;nbsp;&amp;nbsp;그리고, 이신범은 과연 김대중의 내란 음모에 소극적이었을까?&lt;BR&gt;&lt;BR&gt;&amp;nbsp;&amp;nbsp; 독립신문 주필 정창인씨가 미국에서 본 이신범은 5.18사기꾼들 중 한 명이었다.&amp;nbsp;&amp;nbsp;그는 그 사실을 이렇게 서술한다: &lt;BR&gt;&lt;BR&gt;&lt;&lt;내가 미국에 유학 중일 때였다. 문제의 그 광주사태가 발생한지 3-4년이 지난 때였다. 그 때 이신범이란 사람이 유학생들을 대상으로 광주사태에 대한 강연을 하고 다녔다. 나는 그 당시 군인신분이라 어떤 분란에 휘말리지나 않을까 하고 조심하면서 그 강연에 갔다. 그 때 깨달은 것은 이신범은 지독한 반대한민국주의자란 것이었다.&lt;BR&gt;&lt;BR&gt;그는 일본에서 제작하였다는 광주사태 비디오를 틀었다. 문제는 그 비디오에 비춰지는 화면이 아니었다. 문제는 화면과 상관없이 진행되는 해설(토오키)이었다. 그 해설은 국군을 북한의 인민군보다 더 지독한 적으로 묘사하고 있었으며 세상에 상상하기도 힘든 잔인한 폭력집단으로 매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해설을 뒷받침할 화면은 아무리 눈을 닦으며 보아도 없었다. 그냥 지어낸 거짓말이었다.&lt;BR&gt;&lt;BR&gt;이신범 자신의 증언은 거짓과 거짓 선동의 극치였다. 그는 한국군은 월남전에서 사용한 건쉽을 동원해 광주시위자에게 기총소사를 하였으며, 따라서 광주희생자의 상처는 모두 총알이 머리로 들어가서 하체로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군은 일부러 납탄을 광주시위자에게 쏘았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적에게 사용하는 것도 금지된 납탄을 광주시위자에게 쏘았다고 하였다.&lt;BR&gt;&lt;BR&gt;나는 건쉽을 동원한 기총소사도 거짓이지만 특히 납탄을 쏘았다는 것은 명백하게 거짓임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광주에 사용하기 위해 납탄을 일부러 만들지 않는 한 군에 납탄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군을 이렇게 악랄한 방법으로 매도하는 이런 사람들에 의해 광주사태는 전세계에 알려졌다. 그러나 사실은 다르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g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다수의 미국인들은 이신범같은 5.18사기꾼들을 통해서만 광주사태에 대하여 들었기에 지극히 편향적인 거짓 주장만 들었을 뿐이며, 광주사태에 관한 한 아직도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거짓 정보에 속고 있다.&amp;nbsp;&amp;nbsp;김대중이 노벨 평화상을 받은 것도 5.18사기꾼들에게 속은 이들이 김대중을, 딸을 숨겨두고 버리는 김대중을, 인권운동가로 미화하였기 때문이었다.&amp;nbsp;&amp;nbsp;자, 여기서 일본에서 제작하였다는 광주사태 비디오가 북한 세력이 3월에 광주운동권 동향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느냐에 대한 또 하나의 단서이다.&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jwmpjvgNH9o$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bgcolor=&quot;#000000&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위의 1980년 5월 28일자의 대한뉴스 동영상에서 광주사태 당시 북한에서 생중계한 영상물을 잠깐 보여준다.&amp;nbsp;&amp;nbsp;조총련이 찍고 제작하여 북한으로 보낸 영상물이었다.&amp;nbsp;&amp;nbsp;이신범이 미국에 가지고 가서 유학생들과 교포들에게 보여준 그 광주사태 비디오 역시 편집만 약간 다를 뿐 조총련이 제작한 영상물이라는 사실이 맞는가?&amp;nbsp;&amp;nbsp;그 비디오는 광주사태 이후에도 김대중 세력이 북한 세력과 접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요, 그 사실은 광주사태 당시에도 광주의 운동권 동향 정보가 북한 세력으로 흘러들어갈 수 있었음을 유추케 한다. &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nk/1968spy-gun.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광주사태에 북한군 개입이 있었다는 탈북군인들의 증언에 대하여 5.18옹호론자들은 과연 북한군 침투가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는 반론을 주장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박정희 대통령 시대였던 1968년 1월에 김신조 일당이 청와대까지 침투했었으며, 6월에 무장공비들이 전라도 무안에 침투하였던데 이어 8월에야 통혁당 간첩단 정체가 노출되었던 것이다.&amp;nbsp;&amp;nbsp;김신조 일당도 무서우나 문근영 외조부 류낙진 같은 이들이 북과 내통하며 무장간첩들이 수시로 드나들 수 있거나, 위의 사진에서 보듯 과거의 빨치산들이 다시 총기 무장할 수 있을 만큼 국방이 허술한 나라가 우리가 원하는 나라는 아니었을 것이다.&amp;nbsp;&amp;nbsp;아래의 5.18무장폭도 사진을 보라.&amp;nbsp;&amp;nbsp;혹자는 저 폭도가 광주시민이라고 우길는지 모르지만, 과연 시민이 저런 모습으로 무장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한 사회가 우리가 원하는 사회상이었을까?&lt;BR&gt;&lt;BR&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src=&quot;http://study21.org/photo/518/armed_rioters.jpg&quot; name=zb_target_resize&gt;&lt;BR&gt;&lt;BR&gt;&amp;nbsp;&amp;nbsp; 혹자는 저 사신에 대한 이런 설명은 5.18측에 유리하지 않음이 불만일지 모르겠다.&amp;nbsp;&amp;nbsp;그러나, 영화 화려한 휴가와 함께 5.18의 아성은 무너져 내렸다.&amp;nbsp;&amp;nbsp;작년 영화 &quot;화려한 휴가&quot;가 상영되기 시작하자 국민들의 관심은 과연 그런 일이 정말로 있었느냐였는데, 5.18측이 정말로 있는 일이라고 우겼기 때문에 5.18의 아성은 무너졌다.&amp;nbsp;&amp;nbsp;혁명가 윤상원을 운전사 강민우로 등장시켰을 때 그 영화는 혁명가와 혁명 정신이 없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amp;nbsp;&amp;nbsp;국군이 살인기계로 묘사되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혁명가는 어디에 있으며, 혁명정신은 무엇인가?&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 어제(2008년 11월 26일) 인도에서 발생한 몸바이 테러 사건으로 지금 인도는 아수라장이다.&amp;nbsp;&amp;nbsp;무엇보다도 외국인들이 인질로 잡혀 있기에 인도 정부가 진압할 방법을 찾기 어렵다.&amp;nbsp;&amp;nbsp;실은 5월 22일 해방구를 설치한 직후 윤상원의 다음 동작이 광주의 외국인들을 인질로 납치하려는 것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런 반미는 광주시민들의 등을 돌리게 할 것이라는 측근들의 강력 반대에 부딪치자 윤상원은 말을 확 바꾸어 미국이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대자보를 붙였다.&amp;nbsp;&amp;nbsp;그리고, 26일 외신기자 회견 때 신분을 전남대생으로 속이고 외신기자들의 동정을 사는 연설을 하였다.&amp;nbsp;&amp;nbsp;그때 통역이 린튼 선교사 가문의 자제 스티븐 린튼(Steven Linton)이었는데, 윤상원에 속아 넘어가 일방적으로 시민군을 옹호하는 통역을 했으며, 광주사태가 해외에 잘못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다. &lt;BR&gt;&amp;nbsp;&amp;nbsp; &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1p94SMqEbeQ$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한국말을 전혀 모르며 한쪽 주장만 통역을 통해 전해 들은 외국인들에게만 광주사태가 잘못 알려지게 되었던 것이 아니라, 같은 한국말을 쓰는 한국인들에게도 잘못 알려져 왔다.&amp;nbsp;&amp;nbsp;1985년 5월 22일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 장면을 보여주는 위의 동영상에서 우리는 사기꾼들과 미개인들이 미국 문화원 창에 &quot;광주학살 책임지고&quot;라고 써붙인 것을 본다.&amp;nbsp;&amp;nbsp;이것은 한국인 반미감정의 뿌리가 광주사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면 도대체 어디에서 이런 반미 논리가 온 것이었을까?&lt;BR&gt;&lt;BR&gt;&amp;nbsp;&amp;nbsp; 윤상원은 공산화라는 의미로 민주화라는 용어를 썼지만 외신 기자들은 민주화라는 뜻으로 받아들였다.&amp;nbsp;&amp;nbsp;윤상원은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보다도 더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자였다.&amp;nbsp;&amp;nbsp;1980년의 시점에서는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들은 공산주의는 실패했으며, 경제 문제의 해결책이 아님을 깨닫기 시작한 때였다.&amp;nbsp;&amp;nbsp;그러나, 여전히 19세기 낡은 공산주의 이론에 파묻혀 살고 있던 윤상원은 프롤레타리아 혁명, 노동자의 혁명만 이룩하면 금방 이상향이 실현된다는 망상을 신념으로 삼았다.&amp;nbsp;&amp;nbsp;그리고, 26일 통역을 통해 전해진 외신기자들에게 전해진 그의 연설은 그가 신념의 사람이라는 동정을 사게 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앞에서 언급한 대로 주위의 반대로 외국인 납치 계획을 철회한 윤상원은 미 항공모함 코럴씨 호가 시민군을 지원하기 위해 부산항에 입항했다는 내용의 대자보를 붙인다.&amp;nbsp;&amp;nbsp;실제로는 광주사태가 발발하기 직전 북한군의 남침 징후를 파악한 미국이 한국 정부에 통보하면서 보낸 것이지만, 윤상원은 광주사태가 일어나자 미국이 광주시민군을 지원할 목적으로 보냈다고 말을 지어내어 대자보를 붙였던 것이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였던 쪽에서는 미국에 배신감을 느끼고 분노했다.&amp;nbsp;&amp;nbsp;그들은 윤상원의 거짓말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파렴치하게도 오히려 미국에 누명을 씌우며 분노하여, 미국 문화원 점거로 그 분노를 폭발시키곤 했던 것이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사실, 이들의 미 문화원 점거는 1985년 5월이 처음이 아니라, 1982년 3월18일 오후 2시 부산의 미국 문화원 건물에 방화한 이래 여러차례 미 문화원에 방화하였으며, 그 배후에 문부식의 지인이기도 한 5.18사기꾼 김현장이 있었다.&amp;nbsp;&amp;nbsp;김현장은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가 유언비어 삐라를 뿌린 행적 때문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인물이다.&amp;nbsp;&amp;nbsp; 김현장은 5월 21일 광주에서 빠져나왔다고 주장하면서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유인물을 작성하여 배포하였다.&amp;nbsp;&amp;nbsp;&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그러나, ‘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이라는 것이 있었는가?&amp;nbsp;&amp;nbsp;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왜 김현장은 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하는가?&amp;nbsp;&amp;nbsp; 최근에 이른바 &quot;안재환 악플녀&quot;가 그녀의 어머니를 때려 살해하였다고 한다.&amp;nbsp;&amp;nbsp;네티즌들조차 거부감을 느낄정도로 연예인들에 대하여 근거없는 악플을 달았다고 한다.&amp;nbsp;&amp;nbsp;우리는 근거없는주장을 거부한다.&amp;nbsp; 김현장이 불순세력으로부터 유언비어 삐라를 받았는지, 자작 픽션이었는지는 모르나, 그는 거짓말을 퍼뜨려 소요를 일으킨 것을 자성하기는커녕 1982년에 미국 책임론을 주장하며 미국 문화원 방화를 선동하였다.&amp;nbsp;&amp;nbsp;한때 그의 주장에 선동되어 동조하였던 문부식의 오늘날의 시각은 다르다.&amp;nbsp;&amp;nbsp;만약 5.18측 주장이 떳떳하려면 김현장에게 도대체&amp;nbsp;&amp;nbsp;‘전두환의 광주살육작전’ 유언비어 출처가 어디였는지 물어야 한다.&amp;nbsp;&amp;nbsp;5.18측이 진정으로 명예를 원한다면 진실성에 충실해야 한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보라!&amp;nbsp;&amp;nbsp;5.18측에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옹호하였을 때 어떤 결과가 빚어졌는가?&amp;nbsp;&amp;nbsp;그들의 혁명열사 윤상원이 실종되었다.&amp;nbsp;&amp;nbsp;윤상원이 실제로는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 신분이었지만 외신기자들에게는 전남대생으로 잘못 알려져 전남대가 주도한 봉기였던 것처럼 항간에 인식되어 왔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영화 화려한 휴가는 광주사태는 결국 전남대 학생운동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한 꼴이 되고 말았다.&amp;nbsp;&amp;nbsp;거기에 비록 프롤레타리아 혁명관일 망정 나름대로 신념에 살고 죽었던 윤상원의 모습도 없다.&amp;nbsp;&amp;nbsp;그 영화 본 후에 사람들은 무엇이 5.18정신이었는지 묻는다.&amp;nbsp;&amp;nbsp;그 영화의 허구를 옹호하는 5.18측에서 무어라 그 질문에 답변하겠는가?&amp;nbsp;&amp;nbsp;5.18측에서 진실성에 충실하지 못하였을 때 결국 그 아성은 무너져 내린 것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그러기에 좌익의 세계에서는 역사적 실존 인물이었던 문근영의 외조부가 그들의 정신적 지주인 것이다.&amp;nbsp;&amp;nbsp;그는 사망 직전까지도 범민련 고문이었다.&amp;nbsp;&amp;nbsp;그는 반세기 동안 그의 이념을 한번도 버리거나 포기하지 않았다.&amp;nbsp;&amp;nbsp;무엇이 그의 이념이었던가? 공산주의 사상? 진정한 공산주의라면 김일성 왕조와 같은 독제체제란 존재할 수 없다. &amp;nbsp;우리는 왜 그가 김일성, 김정일 왕조가 지배하는 나라를 자기 조국으로 삼았는지 모른다.&amp;nbsp;&amp;nbsp;그러나 그의 빨치산 정신은 지리산 빨치산 시절 이후에도 통일혁명당의 민중봉기 음모, 남조선 지하당 &quot;구국전위&quot; 결성 등으로 이어져 내려왔다.&amp;nbsp;&amp;nbsp;그를 동지라 부르는 자들의 동아리에서는 그는 변절하지 않은 인물이었다.&amp;nbsp;&amp;nbsp;그러나 아무리 그런 신념을 미화한다 하더라도&amp;nbsp;&amp;nbsp;대한민국을 조국으로 여기지 않았던 자를 통일운동가라고 부르는 것이 타당하겠는가?&amp;nbsp;&amp;nbsp;일부 몰지각한 이들의 그런 주장에 우리가 침묵할 수 있겠는가?&lt;BR&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b.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IMG style=&quot;CURSOR: hand&quot; onclick=window.open(this.src) alt=&quot;지식 검색&quot; src=&quot;http://bookstore21.net/a/refer.gif&quot; border=0 name=zb_target_resize&gt;&lt;/A&gt;&lt;BR&gt;&lt;BR&gt;&lt;BR&gt;☞&amp;nbsp;&amp;nbsp;&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DJ-group.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문근영의 가족사에 얽힌 김대중 그룹의 정체성&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518-partisan.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FONT color=#0066cc&gt;&lt;U&gt;무엇이 빨치산에 대한 광주시민의 사관인가? &lt;/U&gt;&lt;/FONT&gt;&lt;/A&gt;&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uprising1968.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문근영 외조부 류낙진의 통혁당과 김대중의 민중봉기&lt;/FONT&gt;&lt;/U&gt;&lt;/A&gt;&amp;nbsp;&amp;nbsp;&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discuss/partisan.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800080&gt;문근영의 작은 외조부는 1980년판 빨치산 총탄에&lt;/FONT&gt;&lt;/U&gt;&lt;/A&gt; &lt;BR&gt;&lt;BR&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video/Ilsung-dj.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lt;U&gt;&lt;FONT color=#0066cc&gt;김대중과 김일성의 거래관계에 대한 증언들&lt;/FONT&gt;&lt;/U&gt;&lt;/A&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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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1985년 5월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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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08-11-27T18:34:34Z</updated>
	    <published>2008-11-27T18:34:34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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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p&gt;&lt;br&gt;&lt;/p&gt;&lt;p&gt;&lt;img src=&quot;http://cfs3.flvs.daum.net/files/30/91/18/60/15664815/thumb.jpg.edit&quot; moviekey=&quot;1p94SMqEbeQ$&quot; type=&quot;vi&quot;/&gt;&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br&gt;&lt;span style=&quot;font-weight: bold;&quot;&gt;1985년 5월 22일 미국 문화원 점거사건&lt;/span&gt;&lt;br&gt;&lt;br&gt;미국문화원에 대학생 난입, 점거&lt;br&gt;-학생의 본분을 저버린 사건으로 주장이 어떻든 간에 정당화 될 수 없는 폭력행위&lt;br&gt;-좌경의식화에 물들어 반미 구호 내건 일부 대학생의 행위&lt;br&gt;-학원의 면학분위기 해치고 사회 안정을 그르치는 용납될 수 없는 일&lt;br&gt;&lt;br&gt;출처:대한뉴스 제 1542호&lt;br&gt;&lt;/p&gt;&lt;p&gt;&lt;br&gt;&lt;/p&gt;&lt;p&gt;&lt;font size=&quot;2&quot; face=&quot;Arial&quot;&gt;&lt;A href=&quot;http://study21.org/518/index.htm&quot; target=&quot;_blank&quot;&gt;http://study21.org/518/index.htm&lt;/a&gt;&lt;/font&gt;&lt;/p&gt;&lt;p&gt;&lt;br&gt;&lt;/p&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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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문근영의 가족사에 얽힌 김대중 그룹의 정체성</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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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
	    <updated>2008-11-25T14:58:27Z</updated>
	    <published>2008-11-25T14:58:27Z</publ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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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t;EMBED src=http://study21.tistory.com/attachment/pk0.wmv width=480 height=360 type=application/x-mplayer2 autostart=&quot;true&quot;&gt;&lt;BR&gt;&lt;BR&gt;&amp;nbsp;&amp;nbsp; 지리산 빨치산이었던 문근영 외조부를 통일운동가로 미화한 몇몇 언론들의 방송과 보도로 불거진 여우 문근영 양의 가족사에 대한 관심사 우리로 근 이십 년 전의 10.26사태를 다시금 회고케 한다.&amp;nbsp;&amp;nbsp;만약 문근영의 외조부 빨치산이 단지 지리산 빨치산이었다면 그를 통일운동가로 미화하는 보도에 대한 국민의 정서도 훨씬 완화되었을 것이다.&amp;nbsp;&amp;nbsp;1960년대 이후 세대는 1950년대의 지리산 빨치산의 만행을 기억하지 못한다.&amp;nbsp;&amp;nbsp;그러나, 어언 30년이 되어가는 1979년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간첩 사건은 우리가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시대의 사건이요, 또한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느냐의 사관은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어린 문근영이 연예인이 되는 조건은 &quot;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quot;이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국민의 정부라는 간판을 달고 출범한 국민의 정부 시절 문근영은 국민의 여동생으로 뜨더니 청소년기를 갓 넘기자말자 국민배우가 되었다.&amp;nbsp;&amp;nbsp;왜 이 사실에 국민의 관심이 쏠리고 있을까?&amp;nbsp;&amp;nbsp; 김대중은 자기기 민주화운동한다고 자화자찬해왔는데, 어째서 공산주의자들과 싸우지 않고 비호해 주며 옹호해 주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아마도 그 큰 이유일 것이다.&amp;nbsp;&amp;nbsp;문근영이 아니더라도 연예인의 꿈을 꾸는 소녀들은 무수히 많다.&amp;nbsp;&amp;nbsp;그러나 출연하자마자 국민여동생으로 뜨는 행운은 대다수의 소녀들에게 행운의 별따기이다.&amp;nbsp;&amp;nbsp;김대중이 대통령 되면 류낙진 외손녀의 연예계 등장은 보장된 길이었다는 말인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김대중은 광주의 동지들이라는 표현을 간혹 쓴바 있으며, 그 동지들에게 감사 표시를 하거나 그들 편에 서겠다는 의지를 표현하였었다.&amp;nbsp;&amp;nbsp;즉, 광주에 김대중이 동지들이라 부르는 그룹이 있었다.&amp;nbsp;&amp;nbsp;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은 김대중에게 어떤 존재였는가?&amp;nbsp;&amp;nbsp;위 동영상 뉴스는 10.26사태가 일어나기 꼭 한 주 전에 보도된 뉴스였던바, 남조선 민족해방전선 간첩 관련자 검거뉴스를 보도한다.&amp;nbsp;&amp;nbsp;29년전 사건을 회고케 하는 이 뉴스에서 우리의 관심사는 남민전이 &quot;불순세력을 교합해서 지하조직 완성, 도시게릴라 방법으로 사회혼란 조성&quot;하려 했다는 보도이다.&amp;nbsp;&amp;nbsp;김일성과 김대중에게 부마사태와 10.26대통령 시해사건은 결코 우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quot;도시게릴라 방법&quot;이란 베트콩식 빨치산 전법을 말하며, 김대중이 1976년에 이미 채택했던 방법이며, 광주사태의 밑그림이었다.&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1970년대 주요 사건 중에 1973년 한민통 두목이었던 김대중이 단원 문세광을 사주하여 1974년 광복절에 육영수 여사를 암살한 사건이 있었다.&amp;nbsp;&amp;nbsp;문세광은 배후가 누구였는지에 대해 입을 다물었지만 김대중이 곧잘 쓰는 &quot;실세 논리&quot;를 역적용하면 1973년 여름 문세광이 박정희 대통령 암살 목표를 세울 당시 한민통 실세였던 김대중이 바로 그 배후였다.&amp;nbsp;&amp;nbsp;범행 당시 문세광도 문근영처럼 문씨였으며, 문근영처럼 앞길이 구만리 같은 청년이었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그는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고 죽는 길을 선택하였다.&amp;nbsp;&amp;nbsp;이처럼 이념은 무서운 것이다.&amp;nbsp;&amp;nbsp;만약 1970년대의 조국 근대화와 경제 건설이 없었다면 오늘날의 한국인 자화상은 초라하기 그지 없었을 것이다.&amp;nbsp;&amp;nbsp;그런데, 도대체 김대중이 문세광을 데리고 다니면서 어떤 이념을 주입시켰길래 그는 그토록 끔찍한 범죄를 위해 자기 인생을 걸었던 것일까?&lt;BR&gt;&lt;BR&gt;&amp;nbsp;&amp;nbsp; 류낙진과 김대중의 공통분모는 반국가단체 우두머리 경력이다.&amp;nbsp;&amp;nbsp;김대중을 그 괴수로 하였던 반국가단체 한민통의 이념이 어찌나 지독하였는지 1974년 박정희 대통령 암살 시도에 이어 6년 후 광주사태 때도 그 배후 세력이었다.&amp;nbsp;&amp;nbsp;요정 마담과 정사를 가지면서 딸을 숨겨두는 것 외에는 직업이 없었던 김대중이 초호화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김일성은 여전히 한민통을 통해 김대중에게 막대한 공작자금을 보냈으며, 광주사태 이전에 이미 한민통이 침투하여 서울과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다.&amp;nbsp;&amp;nbsp; 흔히, 김대중을 정치 9단이라고 하는데, 왜 정치9단이라고 하는지 그 시대 사건들을 잠시 살펴보자.&amp;nbsp;&amp;nbsp;광주사태 직전의 시위구호는 &quot;최규하 물러가라&quot; &quot;신현확 물러가라&quot; &quot;(직선제) 개헌 반대&quot; &quot;계엄령 해제&quot;였는데, &quot;계엄령 해제&quot; 구호는 김대중이 김영상을 이용하는 수법이었다. &lt;BR&gt;&lt;BR&gt;&lt;EMBED src=http://flvs.daum.net/flvPlayer.swf?vid=fZeudaKayMU$ width=502 height=399 type=application/x-shockwave-flash allowScriptAccess=&quot;always&quot; allowFullScreen=&quot;true&quot; bgcolor=&quot;#000000&quot;&gt;&lt;/EMBED&gt;&lt;BR&gt;&lt;BR&gt;&amp;nbsp;&amp;nbsp;&amp;nbsp;&amp;nbsp;지난 28년 동안 5.18사기꾼들이 어찌나 사기쳐 왔던지 당시 비상계엄령은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1980년 5월 18일 선포한 것으로 크게 잘못 알고 있는 이들이 많다.&amp;nbsp;&amp;nbsp;비상계엄령은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때 선포되었다.&amp;nbsp;&amp;nbsp;그때는 김일성이 자기 생전에 적화통일을 꼭 이루려던 시기였다.&amp;nbsp;&amp;nbsp;1975년 4월 30일 월맹보다 20배나 경제력이 강하였고, 10배나 군사력이 강했던 월남이 월맹의 도시 게릴라 전법 앞에서 어이없게 무너져 내려 항복하였을 때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한 두가지 시각이 있었다.&amp;nbsp;&amp;nbsp;박정희 대통령과 우리의 시각은 우리나라는 그런 불행을 당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으나, 김일성과 김대중은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전법을 쓰면 연방제 통일 승산이 있다고 여겼다.&lt;BR&gt;&lt;BR&gt;&amp;nbsp;&amp;nbsp; 탈북군인들은 29년의 남민전 사건에, 베트콩식 도시 게릴라 방법으로 북한 세력과 반국가단체가 대한민국 정부를 전복시키려 했었다는 사실에 대해 까맣게 모른다.&amp;nbsp;&amp;nbsp;그럼에도 그들은 광주사태 당시 북한군 특수부대가 도시 게릴라 작전의 임무를 띄고 광주에 침투했었다고 증언한다.&amp;nbsp;&amp;nbsp;위 동영상에서 우리는 실제로 무장공비들이 곳곳에서 침투하고 있었음을 본다.&amp;nbsp;&amp;nbsp;바다는 넓고 해안선은 길게 뻗어있으니, 국국의 눈에 띄는 간첩은 백에 하나였다.&amp;nbsp;&amp;nbsp;그러니, 얼마나 많은 무장간첩들이 침투하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amp;nbsp;&amp;nbsp;지금 전방 내무반에서 수류탄 한 개만 터져도 국민이 놀라고 있는데, 1980년 봄 무장간첩들이 침투하고 있었던 준전시 상태에 비상계엄 해제 요구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lt;BR&gt;&lt;BR&gt;&amp;nbsp;&amp;nbsp; 자신의 임기를 일년 가량으로 정하고, 신속히 5공화국 대통령을 선출하고 하야하려 했던 최규하 대통령은 자신의 과도기 정부를 안보에 취약한 정부로 보았다.&amp;nbsp;&amp;nbsp;김일성은 여러차례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려 했으며, 1979년 10월에 남민전이 선동한 사태가 부분적으로 성공하여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되자 남침 절호의 기회로 삼고 있었으므로, 준전시상태였다.&amp;nbsp;&amp;nbsp;그래서 5공화국 대통령이 선출되기 전에는 계엄이 유지되어야 했으나, 김대중은 전국적 민중봉기 최적화 환경을 노리고 계엄령 해제 요구 시위를 선동하였으며, 김영삼을 이용해 국회가 불법으로 계엄령 해제를 가결하게 하려 하였다. &lt;BR&gt;&lt;BR&gt;&amp;nbsp;&amp;nbsp; 5.18사기꾼들이 제작한 영상물에서는 김대중이 당시 대선 후보였다는 멘트가 있다.&amp;nbsp;&amp;nbsp;그러나, 김대중은 당시 정상적인 정치인이 아니었다.&amp;nbsp;&amp;nbsp;그는 정당도 소속 정당도 없었다.&amp;nbsp;&amp;nbsp;단지 김영삼씨의 신민당에 입당하겠다 말겠다 하는 식의 말 바꾸기 잔치만 있었을 뿐이었다.&amp;nbsp;&amp;nbsp;그리고, 양김씨 후보 단일화 문제에 대해 신민당은 김대중의 가입 조건을 수용할 수 없었으므로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가 되는 것이 불가능하였다.&amp;nbsp;&amp;nbsp;그래서 그는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켜 최규하 대통령을 강제로 하야시키고 스스로 집권하려 하였던 것이며, 그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