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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진흙속의연꽃</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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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2 May 2013 15:56:53 +0900</pub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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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생불(生佛) 틱낫한 스님의 아미타불 수인(手印)</title>
	            <description> 생불(生佛) 틱낫한 스님의 아미타불 수인(手印) 유명한 사람은 무언가 다를 것 같아 보인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이라면 좀 더 특별한 무엇이 있을 것 같아 보인다. 틱낫한 스님이 그런 케이스이다. 살아 있는 부처 틱낫한 스님(1926-)이 방한 하였다. 지난 2003년 방문 이래 10년 만이라 한다. 아마도 마지막 방한이 될 것이라 한다. 나이가 이미 87세에 달 하였기 때문이다. 그런 스님은 달라이라마와 더불어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다. 그리고 달라이라마와 더불어 생불, 살아 있는 부처로 추앙 받고 있다. 2003년 방한 하였을 때 ‘경행’열풍이 불었다. 스님이 경행에 대하여 이야기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0년 만에 방한한 스님은 어떤 이야기를 하였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불교TV 사이트에서 특집프로에서 알 수 있었다. 모두 3부작으로 구성되어 있는 틱낫한 스님 방한 특집 대중강연의 제목이 ‘STOP AND HEAL’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를 해석하면 ‘멈춤과 치료’이다. 분노 다스리기 스님은 잠실체육관에서 멈춤과 치료라는 주제로 대중강연을 하였다. 이런 역사적인 강연에 참여 하려 하였으나 평일이고 거리가 멀어서 참석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불교TV사이트에 동영상이 올려져 있기 때문에 모두 볼 수 있었다. 불교tv사이트에는 약 50분 분량의 동영상 세 편이 올려져 있다. 모두 인내를 가지고 다 보았다. 강의 내용은 요즘 유행하는 힐링에 대한 것이다. 주로 분노를 다스리는 이야기 위주이다. 그런 이야기 중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그 수행을 통해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람이구나, 나와 똑 같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나와 똑같이 고통을 겪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은 후에는 더 이상 예전처럼 화나 분노가 치밀어 오르지 않습니다. 그것은 자비로운 눈에서 자비로운 수행의 결과입니다. 이런 식으로 상대방을 자애롭게 바라본다면 상대는 상대가 가지고 있었던 고통이 경감되고 줄어 드는 것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비로서 치유가 시작 되는 것 입니다. ( &lt;특집&gt;틱낫한 스님 방한 특집 대중강연 STOP AND HEAL 2부, 2013-05-18 불교TV) 틱낫한 스님이 영어로 이야기하고 혜민스님이 통역한 것이다. 그래서 혜민스님의 말을 녹취한 것이다. 스님은 플럼빌리지에서 이스라엘사람수행자들과 팔레스타인 수행자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갈등을 예로 들어 설명하였다. 그런데 피해자라 볼 수 있는 팔레스타인 수행자가 가해자라 볼 수 있는 이스라엘수행자에게 오히려 “나와 똑같이 고통을 겪었구나”라고 생각하면 분노가 풀어 질 것이라 한다. 이렇게 “한 때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의 치유가 된다고 한다. 경전에 나와 있는 말인데 이 대목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떠 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관찰하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때 저러한 사람이었다’ 라고 관찰해야 한다. (S15:11) 상윳따니까야 둑가따경(Duggatasutta, 불행의 경)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부처님은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나도 한 때 저와 같은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 역시 “내 앞에 있는 사람이 바로 사람이구나, 나와 똑 같은 사람이구나, 그리고 나와 똑같이 고통을 겪었구나”라고 관찰하라고 하였다. 부처님과 똑 같은 말을 한 것이다. 왜 경전을 인용하지 않을까? 세계적인 불교지도자이자 살아 있는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틱낫한 스님이 한 말이나 부처님이 한 말이나 모두 똑같다. 이를 우연의 일치로 보아야 할까. 깨달은 자들의 입에서 나온 말은 부처님의 말과 동일한 것일까.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스님이 말한 내용이 이미 빠알리니까야에 실려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스님의 말에 감동받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을 아는 사람은 스님이 부처님의 말을 인용한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스님은 부처님의 말을 인용하지 않았다. 세 편의 동영상 강연에서 부처님의 말씀을 한 번도 인용하지 않았다. ‘어느 경전 어느 경에서 부처님이 이렇게 말씀 하셨다’라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대승불교 전통에서는 좀처럼 경전을 인용하여 말하지 않는다. 자신의 깨달은 바를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만일 경전을 인용한다면 덜 깨달은 사람으로 오해 받기 때문이라 한다. 그래서 법문할 때 주로 자신의 이야기 위주로 풀어 나간다. 이는 깨달은 자는 모두 부처라는 대승불교의 독특한 불교관 때문이라 본다. 따라서 깨달은 자가 이야기 하면 부처가 이야기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라 본다. 틱낫한 스님은 틱낫한 스님에 대하여 검색해 보았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스님은 베트남에서 태어 났다. 그리고 4대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유명한 스님이라 하였다. 4대 생불은 누구일까? 궁금하여 구글 검색하여 보니 ‘달라이 라마’, ‘틱낫한’, ‘숭산선사’, ‘마하고사난다’라 한다. 부다피아 자료에 따르면 1996년 미국 캠브리지대학교에서 발간한 책에 언급되어 있다고 한다. 이 중 숭산선사는 입적하였기 때문에 생불이라 볼 수 없다. 마하고사난다스님은 틱낫한 스님과 함께 플럼빌리지 수행공동체를 이끄는 캄보디아 출신의 스님이라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달라이라마와 틱낫한 두 분의 스님을 생불이라 말하고 있다. 틱낫한 스님의 소개에서 눈에 띠는 것은 베트남 임제종 출신이라는 것이다. 현재 한국불교의 선맥과 같은 임제종이다. 그런 면으로 보았을 때 틱낫한 스님은 우리나라 조계종과 같은 종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스님이 가장 애독하는 경전이 ‘법화경’이라 한다. 그리고 ‘상즉종(相卽宗)’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다고 한다. 상즉종은 영어로 ‘Order of Interbeing’라 한다. 여기서 인터비잉( Interbeing)이라는 말은 사전에도 없는 말로서 틱낫한 스님이 만들어낸 말이라 한다. 신조어 인터비잉(Interbeing) 인터비잉(Interbeing)은 무슨 뜻일까? 검색하여 보니 이도흠 교수의 논문이 눈에 띄였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스님의 사상을 대표하는 핵심 개념은 스님이 창시하여 이끄는 불교를 상즉종(相卽宗, Order of Inter-being)이라 할 정도로 ‘서로 존재(inter-being)’라는 것이다. 이는 간단히 말하여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상호 침투하면서 다른 것들과 공생을 바탕으로 한다는 의미다.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까닭과 배울 점, 이도흠교수, 불교평론 2010-09-06) 틱낫한 스님이 만든 신조어 인터비잉(Interbeing)에 대하여 ‘서로 존재’로 해석하고 있다.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어서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말한다. 마치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에 있어서 ‘사사무애’와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래서 우주의 삼라만상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상생을 바탕으로 한다고 말한다. 스님의 인터비잉은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상즉상입하여 서로가 서로를 창조한다는 대승불교의 법계연기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스님의 상즉종은 대승불교의 법계연기를 기반으로 한 또하나의 종파를 만든 것이라 보여진다. 수행공동체 자두마을(플럼빌리지) 스님은 달라이라마와 함께 살아 있는 생불로도 유명하지만 세계적인 수행공동체 플럼빌리지 (Plum Village, 자두마을)를 만든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런데 프랑스의 플럼빌리지 뿐만 아니라 미국에도 수행공동체를 만들어 놓았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단풍림승원(Maple Forest Monastery)과 청산법원(Green Mountain Dharma Center), 녹야원 승원(Deer Park Monastery)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심지어 이스라엘에도 틱낫한 센터도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스님은 어떻게 하여 프랑스에 세계적인 수행공동체 자두마을(플럼빌리지)를 만들 수 있었을까? 이에 대하여 약간은 비판적 시각이 있다. 이도흠 교수의 글에 따르면 “그는 서양의 제국주의적 침략에 대해서는 무관심했으며, 다른 스님들이 소신공양을 하고 처형되거나 수용소에 갇힐 때 홀로 프랑스로 갔다.”라고 설명하였다. 또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틱낫한이 남베트남의 반전운동을 확산시켜 남베트남을 패망시키는데 한 역할을 했고, 보트 피플에 대해 무관심했다고 비판을 한다. 월남 패망 당시 월남에서 평화통일과 월맹을 옹호하고 티에우정권과 미국을 비난하던 경력으로 인해 혼자만 프랑스로 도망갔다는 비판도 제기된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월남이 패망하였을 때 남베트남에 남아 있던 다른 종교인들은 처형되었거나 수용소에 갇혔지만 틱낫한 스님이 프랑스로 망명한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위빠사나와 선수행을 합쳐 놓은 듯한 살아 있는 생불로서의 틱낫한, 배신자로서의 틱낫한 이렇게 극과 극의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 틱낫한 스님이다. 그렇다면 스님의 사상은 무엇일까? 이에 대하여 이도흠 교수는 ‘지금 여기에서’ 부터 출발하는 것이라 한다. 스님은 임제종의 법맥을 잇고 있지만 수행방법은 빠알리경전에 입각한 것이라 한다. 그래서 까야가따사띠경(몸에 대한 새김의 경, M119)과 마하사띠빳타나경(대념처경, D22)에 바탕을 둔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 수행이라는 것이다.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이도흠 교수는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이도흠교수는 틱낫한 스님의 수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그의 수행법은 몸과 마음 자체, 또 그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위빠사나 수행과 같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대상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는 점은 선과 같다. (틱낫한이 서양에 영향을 끼친 까닭과 배울 점, 이도흠교수, 불교평론 2010-09-06) 스님의 수행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이면서도 선과 같다는 것이다. 위빠사나와 선수행을 합쳐 놓은 듯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지금 여기에서 움직임을 관찰하지만 결국 모든 대상과 하나로 되기 때문이라 한다.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마음챙김 틱낫한 스님은 영어로 법문할 때 마인드풀니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였다. 영어 마인드풀니스는 빠알리어 사띠의 번역어이다. 그런데 이를 통역한 혜민스님은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시종일관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이도흠교수도 그렇고, 불교계 신문 사이트에서도 기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모두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영어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는 마인드(mind)와 풀(ful)의 합성어이다. 마인드는 ‘마음’이고, 풀은 ‘가득찬’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단순하게 해석하면 ‘마음가득참’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명상, 주의깊음’으로 설명된다. 마인드풀니스에는 그 어디에도 사띠의 진정한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사띠는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이라고 정의 되나 마인드풀니스에서는 기억이라는 말이 전혀 없다. 단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는 것 이라 한다. 따라서 마인드풀니스의 번역어 마음챙김은 사띠의 원래 의미를 반영하고 있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자들이나 기자들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예사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틱낫한 스님이 사용하는 마인드풀니스라는 말은 모든 대상과 하나가 되는 선적 깨달음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은 ‘지금 여기’를 강조하며 멈춤과 치유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였다. 그런 스님이 늘 하는 말이 영어로 ‘마인드풀니스’이다. 이를 우라나라에서는 ‘마음챙김’으로 번역한다. 그런데 초불연의 빠알리니까야 번역서를 보면 사띠에 대하여 모두 마음챙김으로 번역해 놓았다. 또 초불연의 각묵스님의 사띠설명에 따르면, 사띠가 수행의 용어로 쓰였을 경우 절대로 기억의 의미로 사용할 수 없음을 천명하였다. 그래서 사띠는 마음을 해탈로 이어주는 연결고리와 같은 것이라고 운나바바라문경을 인용하여 설명하였다. 그런데 틱낫한 스님의 마인드풀니스 설명에 따르면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한다는 점에서는 위빠사나 수행과 같지만, 지금 여기에서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대상과 철저히 하나가 된다는 점은 선과 같다.”고 하였다. 대상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선적 깨달음을 말한다. 화두가 타파 되었을 때 진여, 불성, 본마음, 참나와 일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학자, 기자, 번역자 들은 모두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분명한 사실은 틱낫한 스님이 말하는 마인드풀니스는 빠알리니까야의 사띠와 다른 개념이라는 것이다. MBSR에서도 마인드풀니스라 하는데, 철저하게 종교성을 배제한 용어를 사용한다. 단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차리는 수행기법만 적용한 것이다. 틱낫한 스님의 마인드플니스도 마찬가지이다. 수행기법만 가져 갔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담겨 있지 않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새기고 사유하는 사띠라는 의미가 아니고 단지 지금 여기에서 알아 차리는 수행기법만 가져 간 것이다. 그럼에도 마인드풀니를 우리말로 옮겨 놓은 듯한 마음챙김을 빠알리니까야의 번역에 사용한다는 것은 ‘넌센스’라 본다.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Namo Avalokitesvara) 달라이라마와 함께 살아 있는 생불로 추앙받고 있는 틱낫한 스님의 영상강연에서 놀라운 장면을 보았다. 불교TV사이트에서 본 틱낫한 스님의 특집프로 1편 ( &lt;특집&gt;틱낫한 스님 방한 특집 대중강연 STOP AND HEAL 1부, 불교tv 2013-05-18) 에서 본 관세음보살 정근 장면이다. 영어로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Namo Avalokitesvara)’라고 정근하는 장면이다. 아바로키테스바라 정근은 40여명의 플럼빌리지 법사단이 악기를 연주하며 합창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나라에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며 정근 하듯이 법사단이 독특한 운율로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하며 무려 20분간 정근 한다. 정근할 때 바이올린, 북, 첼로 등 다양한 악기가 동원된다. 그리고 정근이 무르익을수록 점차 점차 분위기가 성스런 분위기가 고조됨을 알 수 있다. 틱낫한 스님의 손동작 이때 전에 보지 못하던 광경을 보았다. 중앙에 앉아 있는 틱낫한 스님의 손동작을 보았기 때문이다. 스님은 마치 부처님처럼 수인(手印)을 하였다. 법사단의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 정근이 무르익을수록 손가락 모양도 다양해진다. 그리고 분위기 맞추어 수인을 한 손이 움직인다. 마치 손을 이용하여 천천히 춤을 추는 것 같다. 그런 수인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틱낫한 스님의 수인(2013년 5월 13일 잠실체육관) 사진 : 불교tv사이트에서 디카로 촬영한 것임 스님의 수인을 보자 어디선가 많이 본 듯 하다. 법당에 가면 수인을 한 불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아미타불 수인이다. 아미타불의 수인은 매우 이 다양한데, 스님이 취한 포즈를 보면 다음과 같은 아미타불 수인 중의 하나로 보인다. 아미타불 수인 틱낫한 스님의 마하무드라 불교tv에서 본 법사단의 ‘나모 아바로키테스바라’ 정근노래와 틱낫한 스님의 수인춤에 대하여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었다. 스님의 수인춤에 대한 것을 커트 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틱낫한 스님의 수인춤 출처: Lang Mai - Avalokiteśvara - Plum Village changting - summer2011 수인을 산스크리트어로 무드라(mudra)라고 한다. 무드라는 인계, 즉 손가락으로 맺은 표식이라는 의미이다. 특히 마하무드라는 밀교에서 표방하고 있는 네 가지 무드라 중의 하나로서 대인(大印)이라 한다. 감성에 호소하는 대승불교 플럼빌리지의 법사단의 관세음보살정근 노래와 틱낫한 스님의 마하무드라를 보면 대단히 의례적임을 알 수 있다. 이성 보다는 감성에 호소하는 듯 하다. 실제로 대승불교의 경우 테라와다와 비교하여 의례가 발달하였고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는 각각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기 때문이라 본다. 열반을 지향하는 테라와다와 궁극적 실재와 합일을 추구하는 대승불교의 입장은 다르다. 대승불교는 감성에 호소 한다. 그러다 보니 북, 노래, 춤 등으로 신심과 환희을 고취하기도 한다. 또 스스로 체득이 안되니 불상, 조각, 탱화 등 시각적 형상에 호소 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그러나 테라와다의 경우 시각적, 청각적 방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논리적이고, 합리적이고 때로 냉정하기 때문에 지혜롭지 않으면 법을 이해 할 수 없다. 그런 예를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다.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부처님은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대한 단속을 말씀 하셨다. 그 중에 시각능력과 관련하여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연소하고 작열하고 불꽃 튀는 뜨거운 쇠바늘로 시각기관을 차라리 지질지언정,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의 인상과 속성에 사로 잡히지 말라. 수행승들이여, 그대들의 의식이 인상의 유혹에 사로 잡히거나 속성의 유혹에 사로잡혀, 그 순간에 죽는 다면 지옥으로 떨어지거나 축생으로 태어나는 두 가지 운명 가운데 하나를 얻을 가능성이 있다. 수행승들이여, 나는 그 위험을 보고 이와 같이 말한다. (Adittapariyayasutta-연소의 법문에 대한 경, 상윳따니까야 S35:235,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단호하게 말씀 하신다. 인상과 속성에 사로 잡히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상(nimitta)’이란 총체적으로 파악되는 것을 말한다. 이를 ‘총상(總相)’이라고도 한다. 한 번 흘낏 보았을 때 전체를 파악하는 능력을 말한다. 사람을 보았을 때 ‘여자다’ ‘남자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속성이란 손이나 발과 같이 부분적으로 파악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상(細相)이라 한다. 예를 들어 ‘여자다’라고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난다음, 여자의 특정 신체부위에 대히여 부분적으로 마음을 두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은 인상과 속성은 순간적으로 일어난다. 순간포착인 것이다. 이를 ‘속행(速行)’ 또는 ‘자와나(javana)’라 한다. 따라서 수행자가 아름다움 때문에 정신-신체적 인상이나 속성에 매혹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매혹 되는 그 순간에 타락해서 지옥에 태어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에서는 지옥에 떨어지얼정 차라리 감각적인 시각기관을 작열하고 불꽃이 튀는 뜨거운 쇠바늘이 지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이성적인 테라와다불교 청각의 경우 쇠막대, 후각의 경우 손톱칼, 미각의 경우 면도칼, 촉각의 경우 날카로운 칼로 지지는 것이 낫다고 하였다. 사유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비록 잠자는 것은 생명의 불임이라고 나는 말하고, 생명의 불결실이라고 나는 말하고, 생명의 몽매함이라고 나는 말하지만, 수행승들이여,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 사유에 사로 잡혀, 참모임의 화합을 파괴할 정도로 그처럼 사유속에서 사려하지 말라.( S35:235)”고 하였다. 망상과 희론에 사로 잡히느니 차라리 잠을 자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은 눈, 귀, 코 등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단속할 것을 말씀 하셨다. 그러나 대승불교에서는 이와 반대로 여섯 가지 감각능력을 자극하는 것을 동원하여 깨달음의 방편으로 사용한다는 것이다. 탱화 등 그림을 그린다든지, 북이나 노래 등으로 신심과 환희심을 고취하는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서 대승불교는 감성적이고, 테라와다는 이성적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대승불교와 테라와다 불교의 비교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참고로 이 표는 2012년 6월 23일 테라와다불교 열린법석에서 마성스님의 법문을 녹취한 것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다. 테라와다와 대승의 비교표 구분 테라와다 불교 대승불교 개인과 대중 -개인의 도 -개인적인 문제에만 초점 (상구보리) -대중의 도 -남을 배려하는 이타적인 것 (하화중생) 분석과 직관 -분석적 방법 -교리를 숫자로 표현하여 분석적 -직관적 방법 -보는 순간 직감적으로 의식과 무의식 -심의식 차이가 없음 -의식을 중요시 -사유, 생각에 초점 -마음은 찰라생 찰라멸하는 것 -신구의 3업 알아차림 강조 -내마음은 내마음대로 안되는 것 -식을 6,7,8식으로 나눔 -심층 무의식을 중시 -무의식이 나를 지배 아라한과 보살 이상적인 인간상은 아라한 이상적인 인간상은 보살 이성과 감성 -이성에 호소 -논리적, 합리적, 때로 냉정 -지혜롭지 못하면 법을 이해못함(와서보라!) -법을 알아차려 스스로 체득 -감성에 호소 -북, 노래, 춤 등으로 신심과 환희 고취 -스스로 체득 안되니 불상, 조각, 탱화 등 감성에 호소 하는 방식 활용 틱낫한 스님에 대하여 몰랐던 것들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들이 있다. 더구나 생불이라는 칭호까지 부여 받는 경우도 있다. 달라이라마 존자와 틱낫한 스님이다. 달라이라마존자는 아직 까지 정치적인 요인으로 인하여 한 번도 우리나라에 오지 못하였지만 틱낫한 스님은 두 번 방문 하였다. 그래서 인터넷으로 나마 법문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승불교권의 스님이어서일까 좀처럼 경전을 근거로 이야기 하지 않는 것 같다. 분명히 경전에 있는 말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자신의 이야기처럼 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대승불교권에서 깨달은 자는 모두 부처이고, 그래서 깨달은 자가 말하면 부처가 말한 것과 같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한가지 몰랐던 사항은 틱낫한 스님의 수행방법이다. 비록 논문을 통하여 확인 한 것에 지나지 않지만 스님의 수행법은 대승과 테라와다의 ‘혼합식’이라 볼 수 있다. 특히 빠알리니까에서는 ‘수행기법’만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과거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우리 앞에 닥치지 않았다. 우리는 오직 현재를 살아간다.”라고 ‘지금 여기(Here and now)’를 강조한다. 그러나 ‘지금 여기’라는 말도 빠알리니까야에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지 말고 미래를 바라지도 말라. 과거는 이미 버려졌고 또한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M131)”라고 이미 실려 있는 말이다. 틱낫한 스님이 지금 여기를 강조하며 마인드풀니스를 이야기 하지만 이는 빠알리니까야에 있는 수행기법 전체를 적용한 것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알아차리는 일부분만 가져 온 것이다. 더구나 지금 여기를 강조하면서 궁극적으로 궁극적 실재와 하나가 되는 선적 수행으로 귀결된다고 한다. 스님의 마인드풀니스에 대하여 학자나 기자나 번역자들은 ‘마음챙김’이라 한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빠알리니까야에서 부처님의 말한 사띠의 의미를 정확하게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 MBSR을 창시한 존 카밧진 교수나 상즉종의 틱낫한 스님이 마인드풀니스를 강조하지만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다른 것이다. 단지 지금 여기서 라는 수행기법만 가져 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인드풀니스의 영어사전적 번역에 지나지 않는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빠알리니까야에 번역에 적용한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 보여진다. “당신은 부처가 아닙니까?” 이번 틱낫한 스님의 방한을 계기로 몰랐던 사항을 안 것 중의 하나가 스님의 수인이다. 법사단의 아바로키테스바라 노래에 따라 스님의 손이 춤을 추듯이 천천히 움직이었는데, 이는 아미타부처님의 수인과 너무나 흡사 하다. 전세계인이 스님을 생불로 추앙해서일까 그 순간 만큼은 마치 살아 있는 부처님처럼 보였다. 우리나라 스님들에게서 전혀 볼 수 없는 현상이고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장엄한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이도흠 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틱낫한 스님에게“깨달음에 이르렀느냐” “부처에 오른 것이 아니냐”고 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본래성불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틱낫한 스님은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고 한다. “당신은 부처가 아닙니까?” 2013-05-22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수인&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수인&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틱낫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틱낫한&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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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Wed, 22 May 2013 15:56:53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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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힐링멘토와 안심법문(安心法門)</title>
	            <description> 힐링멘토와 안심법문(安心法門) 힐링(healing)콘서트 요즘 힐링(healing)을 이야기 하고 있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국민멘토라 불리우는 스님들이 조계사에서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힐링콘서트를 한다고 한다. 우리시대 힐링멘토라 불리우는 혜민, 법륜, 마가, 정목스님 이렇게 네 분의 스님들이다. 법보신문에 따르면 이제 힐링시대라 한다. 바로 이전에는 행복시대이었다고 한다. 행복을 주제로 하여 다양한 프로그램이 쏟아져 나와 행복특강 전성시대를 열었으나 이제 힐링이 대세라 한다. 이처럼 힐링이 대세인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우리사회가 지나치게 물질화 된 것에 대한 반성이라 한다. 신자유주의에 따라 무한경쟁으로 소외된 자들의 상처와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힐링이라 한다. 그래서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기 위해서 법회와 음악회가 열리고 , 명상과 관련된 책이 나오고, 트위터로 소통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법륜스님의 행복특강, 정목스님의 마음으로 듣는 음악, 마가스님의 자비명상, 혜민스님의 트위터를 들 수 있다. 관심 있는 불자라면 한 번쯤 보거나 들어 보았을 것이다. 실제로 법륜스님의 행복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안양투어의 경우 복도까지 가득찬 사람들을 보았다. 마음으로 듣는 음악프로는 정목스님의 간판프로이다. 지금은 다른 사람이 진행하지만 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져서 자연스럽게 치유가 되는 것 같다. 일요일 아침 불교방송의 마가스님의 자비명상을 들으면 스님의 음성을 듣는 것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진다. 혜민스님은 트위터를 통하여 짧게 소통하지만 “토닥 토닥”이라는 말을 집어 넣어 실제로 위로 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만든다. 힐링선(heling禪) 법보신문에서는 혜민, 법륜, 마가, 정목스님 이렇게 네 분의 스님을 국민멘토라 하였지만 여기에 월호스님이 빠져 있다. 월호스님 역시 불자들의 멘토라 볼 수 있는데 불교방송과 불교TV에서 항상 만날 수 있다. 그래서 삶속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해결되지 않은 문제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 스님의 세미나를 들은 적이 있다. 작년 10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있었던 종단출범 50주년 기념 세미나에서이다. 이때 스님은 논문에서 ‘힐링선’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처음으로 들어 본 힐링선은 어떤 것일까? 이에 대하여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현대는 힐링(healing)이 대세이다. 참선은 본래 안심법문이며, 선사야말로 진정한 심성치유사임을 감안하면, 바야흐로 힐링선(heling禪)의 시대가 도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월호스님, 선불교의 눈으로 본 오늘의 한국불교-선문단련설을 중심으로-, 2012-10-19,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 월호스님은 힐링과 선을 결합하여 ‘힐링선(heling禪)’이라는 신조어를 사용하였다. 그런 힐링선은 다름 아닌 ‘안심법문(安心法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안심법문이란 무엇인가? 안심법문은 달마와 혜가와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혜가가 “저의 마음이 편안치 않으니, 스님께서 편안하게 해주소서”라고 말하자, 달마가 “마음을 가져오너라, 편안케 해주리라”라고 말한 것이 안심법문의 요지이다. 혜가는 불편한 마음을 아무리 찾으려해도 찾을 수 없었다. 원래 없는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달마는 “그대의 마음을 벌써 편안하게 해 주었느니라”라고 말하였다.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찾으려고 하는 과정에서 이미 불안한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콜링(calling) 시대 행복을 말하는 시대에서 이제 힐링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다음에는 어떤 시대가 도래할까? 이에 대하여 중앙승가대 김응철 교수는 ‘콜링(calling)’의 시대가 도래 할 것이라 예측한다. 콜링이란 무엇일까? 김응철 교수의 법보신문 기고문에 따르면 “콜링은 ‘천직(天職)’ 혹은 ‘소명(召命)’ 등으로 번역하기도 하는데 불교적으로는 ‘지혜로운 실천’을 의미하는 ‘지행(智行)’으로 표현할 수 있다.(법보신문 2013-05-18)”라고 하였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가 바뀔 수 있음을 말한다. 그래서 행복을 추구하는 웰빙에서 자가 치유를 촉진하는 힐링으로 변해 왔고, 앞으로 콜링으로 변할 것이라 한다. 시대에 따라 사람들의 관심사는 변해 왔다. 한 때 웰빙열풍에 이어 웰다잉에 이르기까지 어떻게 하면 잘 살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잘 죽을 수 있는지에 대한 관심을 보여 왔으나, 이제 그런 말은 쑥 들어갔다. 그 대신 아직까지는 생소한 힐링을 말하는 시대가 되었다. 사회가 그만큼 각박해졌다는 이야기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살기 힘든 세상이 되었고, 희망 보다는 절망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질 때 웰빙이나 웰다잉 같은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머나먼 남의 나라 이야기처럼 들린다. 지금 당장 상처받고 절망 하는 마음에 대한 치료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 해법을 불교에서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법구경의 안심법문 힐링을 이야기하는 국민멘토스님들의 이야기는 듣는 이로 하여금 공감을 일으킨다. 모두 현실적인 삶과 직결된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한마디로 ‘괴로움’이다. 괴롭기 때문에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국민멘토스님들이 말하지 않더라도 힐링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경전 속에 있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모두 해법이 제시 되어 있는 것이다. 초기경전을 열어 보면 멘토스님의 법문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지금 당장 빠알리니까야를 열어 보면 된다. 단 몇 줄만 읽어도 안심(安心)이 된다. 안심법문이 별도로 필요치 않은 것이다. 불안했던 마음이 법구경 게송 몇 개 읽다 보면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지금 상대방에 대한 분노와 원한이 절정에 달해 도저히 제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 때 마다 멘토스님을 찾아 갈 수 없을 것이다. 그때 가장 가까이에 있는 법구경을 펼치면 된다. 24개의 주제 중에 17번째 품인 ‘분노의 품’이 있다. 그 중의 하나를 보면 다음과 같다. Akkodhena jine kodhaṃ 악꼬데나 지네 꼬당 asādhuṃ sādhunā jine 아사둠 사두나 지네 jine kadariyaṃ dānena 지네 까다리양 다네나 saccenā' likavādinaṃ 삿쩨나 릴까와디낭. 분노를 여윔으로 분노를 이기고 착함으로 악함을 이겨야 한다. 보시로 인색을 이기고 진실로 거짓을 이겨야 한다. (Dhp 223) 상대방이 화를 내어 화를 유발하였을 때 함께 화를 내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분노하는 자는 분노를 여윈자에게 패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런 원리는 두 번째 줄에서 같이 악한 자가 선한 자에게 패하게 마련인 것과 같다. 그리고 세 번째 줄에서 인색한 사람은 소유와 관련하여 관대한 사람에게 패하게 마련이고, 네 번째 줄에서 거짓을 말하는 자는 진실을 말하는 자에게 반드시 패하게 마련이라 하였다. 이전 마음이 되도록 “분노를 여윔으로 분노를 이기고 (Akkodhena jine kodhaṃ)”에 대한 더 구체적인 게송이 상윳따니까야에 있다. 다음과 같은 게송이다. 분노하지 않는 님, 길들여진 님에게 올바로 사는 님, 바른 앎으로 해탈한 님, 고요한 그와 같은 님에게 어떻게 분노가 생겨나겠는가? 분노하는 자에게 다시 분노하는 자는 더욱 악한 자가 될 뿐, 분노하는 자에게 더 이상 화내지 않는 것이 이기기 어려운 싸움에 승리하는 것이네. 다른 사람이 분노하는 것을 알고 새김을 확립하고 마음을 고요히 하는 자는 자신만이 아니라 남을 위하고 그 둘 다를 위하는 것이리.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 모두를 치료하는 사람을 가르침을 모르는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네. (S7:2) 부처님 당시 고대인도의 지배계층인 브라만에서 부처님의 교단으로 출가자가 속출하였다. 유력 가문의 브라만이 부처님에게 화풀이를 하자 부처님이 게송으로 답한 것이다. 이와 같이 법구경이나 상윳따니까야 게송 몇 개만 접해도 화가 났던 마음은 이전 마음이 되어 버린다. 그래서 안심(安心)이 된다. 그런 면에 있어서 빠알리니까야는 힐링멘토나 다름 없다. 버려지는 것과 얻어지는 것 그런데 게송을 읽는 것 보다 더 적극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은 선정삼매에 드는 것이다. 선정삼매에 들면 어떤 이점이 있을까?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사리뿟따 존자의 말이 있다.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pañcaṅgasamannāgataṃ: idhāvuso paṭhamaṃ jhānaṃ samāpannassa bhikkhuno kāmacchando pahīno hoti, byāpādo pahīno hoti, thīnamiddhaṃ pahīnaṃ hoti, uddhaccakukkuccaṃ pahīnaṃ hoti, vicikicchā pahīnā hoti. Vitakko ca vattati vicāro ca pīti ca sukhañca cittekaggatā ca. Paṭhamaṃ kho āvuso jhānaṃ evaṃ pañcaṅgavippahīnaṃ [싸리뿟따] “벗이여, 첫 번째 선정에서 다섯 가지 요소가 버려지는 대신 다섯 가지 요소가 성취됩니다. 벗이여, 이 세상에서 첫 번째 선정을 성취한 수행승에게는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이 버려지고, 분노가 버려지고, 해태와 혼침이 버려지고, 흥분과 회한이 버려지고, 의심이 버려지는 대신, 사유가 성취되고, 숙고가 성취되고, 희열이 성취되고, 행복이 성취되고, 마음의 통일이 성취됩니다. 벗이여, 첫 번째 선정에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요소가 버려지는 대신 이와 같은 다섯 가지 요소가 성취됩니다.” (마하웨달라경-Mahāvedalla Sutta-교리문답의 큰 경, 맛지마니까야 M43, 전재성님역) 선정삼매의 이익에 대한 것이다. 사리뿟따 존자가 말하기를 좌선을 하면 버려지는 것과 얻어지는 것이 있다고 한다. 이를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첫 번째 선정에서 버려 지는 것과 얻어 지는 것 N0 버려 지는 것 얻어 지는 것 1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āchanda) 사유(尋, vitakka) 2 분노(vyāpāda) 숙고(伺, vicāra) 3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희열(喜, piīti) 4 흥분과 회한(uddhacca-kukucca) 행복(樂, sukha) 5 의심(vicikicchā) 마음의 통일(心一境, cittassekaggatā) 참선을 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더 구체적으로 희열과 행복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만일 다리를 꼬고 오랫동안 앉아 있는 것이 고행이라면 참선을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마음이 통일되어 희열과 행복, 평온을 맛 보기 때문에 참선을 하려는 것이다. 참선을 하는 더 근본적인 목적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kāmāchanda), 분노(vyāpāda), 해태와 혼침(thīna-middha), 흥분과 회한(uddhacca-kukucca), 의심(vicikicchā) 이렇게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 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참선을 하게 되면 마음이 하나의 대상으로 집중 되기 때문에 다섯 가지 해로운 마음은 이전의 마음이 되어 버려서 안심(安心)이 된다. 그리고 희열과 행복감을 맛본다는 것이다.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그러나 참선만으로 괴로움을 근원적으로 해결 할 수 없다. 일시적으로 행복을 맛 볼 수 있지만 아직 해결하지 못한 괴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누구든지 괴로움의 바다에서 허덕이게 된다. 이를 잘 표현한 말이 소까빠리데와둑카도마낫수빠야사(Sokaparidevadukkhadomanassupāyāsā)라는 복합어이다. 12연기 정형구에서 볼 수 있다. 이말은 소까(Soka, 슬픔), 빠리데와(parideva, 비탄), 둑카(dukkha, 고통), 도마낫사(domanassa, 근심), 우빠야사(upāyāsā, 절망)의 복합어이다.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음과 죽음,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이 생겨나는 것이다. 괴로움은 누구든지 피할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괴로움에서 영원히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을 제시 하였다. 그 방법은 사성제이다. 그런데 더 구체적인 방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quot;tasmātiha bhikkhave ye te 2 mayā dhammā abhiññā desitā, te vo sādhukaṃ uggahetvā āsevitabbā bhāvetabbā bahulīkātabbā yathayidaṃ [PTS Page 120] [\q 120/]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katame ca te bhikkhave dhammā mayā abhiññā3 desitā, ye vo4 sādhukaṃ uggahetvā āsevitabbā bhāvetabbā bahulīkātabbā yatha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ṃ. Seyyathīdaṃ, cattāro satipaṭṭhānā, cattāro sammappadhānā, cattāro iddhipādā pañcindriyāni, pañcabalāni. Satta bojjhaṅgā, ariyo aṭṭhaṅgiko maggo. Ime kho bhikkhave dhammā mayā abhiññā desitā. Te vo sādhukaṃ uggahetvā āsevitabbā bahulīkātabbā yathāyidaṃ brahmacariyaṃ addhaniyaṃ assa ciraṭṭhitikaṃ, tadassa bahujanahitāya bahujanasukhāya lokānukampāya atthāya hitāya sukhāya devamanussānanti. &quot; [세존] “수행승들이여, 나는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은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어떠한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이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네 가지 새김의 토대, 네 가지 올바른 노력, 네 가지 신통의 기초, 다섯 가지 능력, 다섯 가지 힘, 일곱 가지 깨달음의 고리,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이다. 수행승들이여, 내가 이러한 가르침을 곧바로 알아 설했는데, 그대들이 그것을 잘 배워서 곧, 청정한 삶이 오랫동안 지속되도록,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위하여, 많은 사람의 행복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 (마하빠리닙바나경-Mahā Parinibbāna Sutta-완전한 열반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6, 전재성님역) 불교의 목적은 무엇일까? 누군가는 이고득락이라 한다. 현재의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는 것이라 한다. 그런 즐거움에 대하여 행복이라 하여 현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의 행복이라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이 그렇게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처님은 궁극적 목적에 대하여 더 비중을 두었다. 해탈과 열반의 실현을 말한다. 그래서 다시는 태어남 없는 불사의 완전한 열반을 설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경(sutta)이나 품(vagga)에서도 일상적인 행복을 이야기 하지만 결론적으로 항상 ‘열반’으로 마무리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결론은 열반 왜 열반으로 귀결되는가? 테라와다 불교의 예불문으로 사용되는 라따나경(보배경, Sn2.1)에서 “현자들은 등불처럼 꺼져서 열반에 드시나니(Nibbanti dhīrā yathāyampadīpo)”라 하였고, 멧따경(자애경, Sn1.8)에서도 “결코 다시 윤회에 들지 않을 것이옵니다.(na hi jātu gabbhaseyyaṃ punaretī)”라고 말씀 하신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망갈라경(길상경, Sn2.4)에서 “거룩한 진리를 관조하여 열반을 이루니(ariyasaccānadassanaṃ Nibbānasacchikiriyā ca)”라 하여 역시 열반의 실현으로 마무리 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어느 경에서나 어느 품에서나 최종목표는 열반의 실현이다.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도 역시 열반의 실현을 위하여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37조도품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일곱 가지 깨달음의 길에 대한 것이다. 즉, 사념처(cattāro satipaṭṭhānā), 사정근(cattāro sammappadhānā), 사신족 (cattāro iddhipādā), 오근(pañcindriyāni), 오력(pañcabalāni), 칠각지(Satta bojjhaṅgā), 성스런 팔정도(ariyo aṭṭhaṅgiko maggo)이다. 전도선언의 목적은? 부처님은 전도선언에서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 하였다. 그래서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가르침을 설하라 하였다. 이런 가르침이 단지 뭇삶들의 일상적인 행복에 한정된 것일까? 마하빠리닙바나경에서 보여지는 문구에 따르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실현은 궁극적으로 열반을 향하도록 되어 있다. 이는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으로 알 수 있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예를 들어 어떠한 커다란 강이든 예를 들어 갠지즈 강, 야무나 강, 아찌라바띠 강, 싸라부 강, 마히 강이든 그들 모든 강은 동쪽으로 향하고 동쪽으로 기울고 동쪽으로 들어간다. 수행승들이여, 여덟가지 고귀한 길을 닦고 여덟 가지 고귀한 길을 익히면, 이와 같이 수행승은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으로 나아가고 열반으로 들어 간다. (Chatthapacinacinaninnasutta-동쪽으로의 경, 상윳따니까야 S45:96, 전재성님역) 팔정도를 예로 든 것이다. 다섯 개의 강이 하나로 모여 동쪽으로 흘러 바다에 이르듯이, 팔정도를 닦고 익히면 열반으로 향하고 열반에 이를 것이라 한다. 이는 팔정도 뿐만 아니라 칠각지, 사념처 등 37조도품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일곱 가지 깨달음의 길, 즉 37조도품을 닦을 것을 요청하고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 자체가 뭇삶들을 위한 일이라는 것이다.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을 믿고 그대로 실천하여 부처님이 체험한 경지에 이르렀을 때 부처님이 바라는 바, 즉 전도선언한 목적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본다.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날씨가 따뜻해서인지 길거리에 전도사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이 자주 다니는 길이면 어디든지 어김없이 전도사들을 볼 수 있다. 아예 길을 막고 한사람 한사람씩 검문하듯이 종이를 나누어 주기도 한다. 대부분 받지 않고 받더라도 쓰레기통으로 직행한다. 끝까지 들고 있는 경우는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들이나 어린애 들이다. 이처럼 타종교인들은 자신의 종교를 알리기에 매우 적극적이다. 이에 반하여 불교인들은 길거리 전도가 없다. 대승보살정신을 구현하려면 기독인들 못지 않게 전도에 열을 올려야 하나 전혀 볼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상과 현실이 맞지 않기 때문이다. “우주공간이 존재하고 중생이 남아 있는 한 나 역시 여기 남아서 세상의 고난을 없애도록 하소서!”라고 외친 ‘산띠데바’의 보살정신이라면 누구나 길거리 전도를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어떻게 전도해야 하나 길거리 전도에 대하여 대하여 목사들도 부정적인 의견이 많다. 물고기를 잡으려고 판대기를 내려치는 것과 같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다 도망가고 피래미 몇 마리 잡힐지 모르기 때문이라 한다. 그렇다면 가장 올바른 포교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주변에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같은 종교의 일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모습에 대한 표현이 빠알리니까야에 보인다. 맛지마니까야에서 랏타빨라가 “세존께서 가르치신 가르침을 알면 알수록, 재가에 살면서 궁극적으로 원만하고 궁극적으로 청정하고 소라껍질처럼 잘 연마된 청정한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자, 나는 머리와 수염을 깎고 가사를 입고 집에서 집 없는 곳으로 출가하는 것이 어떨까?(M82)”일 것이다. 청정한 삶을 살아 가는 모습을 보았을 때 승가의 일원이 되고 싶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재가자일지라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면 관심을 끌게 될 것이다. 그렇게 무르익었을 때 말한디로 상대방을 끌어 당길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국민멘토는 국민멘토라 불리우는 네 분의 스님들이 27일부터 조계사에서 어떤 치유대책을 내 놓을지 궁금하다. 법보신문에서 ‘국민멘토’라는 거창한 명칭을 부여 하였는데 그에 걸 맞는 법문을 기대해 본다. 사실 국민멘토는 많이 있다. 법문잘하기로 유명한 스님이나 재가의 법사들 역시 국민멘토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진정한 국민멘토는 부처님일 것이다. 비록 부처님이 지금 계시지는 않지만 빠알리니까야를 통하여 접할 수 있다. 책만 열면 부처님을 면전에서 보는 것 같이, 바로 옆에서 들려 주는 것 같은 생생한 가르침이 고스란히 실려 있는 것이다. 특히 괴로움에 처한 사람들, 죽지 못해 사는 사람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특효약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슬픔(soka), 비탄(parideva), 고통(dukkha), 근심(domanassa), 절망(upāyāsā )에 처해 있다. 이는 존재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부처님의 처방이 사성제이다. 사성제는 결국 열반으로 귀결된다. 열반만이 궁극적으로 뭇삶들의 슬픔, 비탄, 고통, 근심, 절망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열반이라 아니할 수 없다. 열반타령한다고 그러나 열반을 너무 이야기 하면 비판 받는 것이 현실이다. 재가자가 맨날 ‘열반타령’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열반은 출가자가 추구하는 목표이고 재가자는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충실하는 것이라 말한다. 지금 여기에서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모든 종교의 공통적인 목표이다. 행복하게 잘 사는 것은 어느 종교이든지 베이스로 깔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불교 역시 행복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유일신교의 경우 독선적 교리와 배타적 구원관을 특징으로 한다. 그래서 자신의 신을 믿는 자만이 구원 받아 천국에 태어나 영원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불교는 행복 다음에 무엇인가? 대승불교라면 극락왕생을 발원할 것이다. 좀 더 신심 있는 불자라면 원생을 발원할 것이다. 보살이 되어 다시 태어나 지옥문이 닫힐 때 까지, 허공이 다 할 때까지 남김 없이 제도하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어라 하셨을까? 다름아닌 열반을 말씀 하셨다. 그래서 어느 경이나 품이든지 행복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난 다음 열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라따나경, 멧따경, 망갈라경에서 볼 수 있다. 만일 부처님의 가르침에 열반이 빠져 있다면 어떻게 될까? 앙꼬 없는 빵과 같이 밋밋하기 그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가 오늘날 까지 전승되어 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법의 바퀴가 오늘날 까지 굴러 온 것은 가르침을 실천하여 부처님의 체험한 경지에 오른 성자들이 출현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신들과 인간의 이익과 안녕과 행복을 위하여, 섬기고 닦고 반복해서 실천해야 한다.(D16)”라고 하였다. 승가가 존속해야 함을 말한다. 성스런 승가가 있어야 불자들은 믿고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승가의 일원은 복전이기 때문에 불자들에게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전도의 길을 떠나라고 말씀하셨다고 본다.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재가자라 하여 앙굿따라니까야를 위주로 읽어야 한다는 법이 없다. 핵심을 가로지르는 상윳따니까야를 읽어도 무방한 것이다. 또 재가자라 열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것에 대하여 비현실적으로 보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모든 가르침은 결국 열반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반만이 불교의 구원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빠알리 니까야에서 열반에 대한 구절을 보면 힐링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무상하다. 출가자 역시 무상하다. 출가하였다고 하여 반드시 출가로 일생을 마치리라는 보장이 없다. 환속하여 재가로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재가자의 삶 역시 무상하다. 재가자라 하여 죽을 때까지 재가자로서의 삶을 살라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출가하여 승가의 일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범부로 살다 보면 출가자가 재가자가 되고, 재가자가 출가자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출가자이든 재가자이든 열반을 목표로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본다. 2013-05-21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안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안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힐링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힐링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콜링(calling)&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콜링(calling)&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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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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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마음챙김은 국적불명 번역어, 번역권력과 용어남용</title>
	            <description> 마음챙김은 국적불명 번역어, 번역권력과 용어남용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와 마음챙김 틱낫한스님 방한과 관련하여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다. 교계신문사이트에서 기자들이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도 주요한 요인이다. 이렇게 알만한 사람들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나온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초기불교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2000년 이후부터라고 본다. 결정적으로는 초기불전연구원에서 아비담마와 청정도론에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 시작 하면서 부터일 것이다. 2000년 이전에도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고 한다. 미얀마에서 위빠사나 수행법을 배워온 1세대 수행자들이 위빠사나를 지도하면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김재성교수를 들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김재성교수에 따르면 자신이 가장 먼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여러가지 근거를 들고 있지만 사띠의 영역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우리말로 옮기는 과정에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이 나왔다고 한다. mindfulness 마음챙김이 널리 확산된 결정적 원인은 초기불전연구원의 각묵스님의 대중강연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본다. 각종기고문과 방송, TV 등 대중강연을 통하여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요즘 교계기자들은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틱낫한 스님이 영어로 Mindfulness라 하면 이를 우리말로 ‘마음챙김’으로 옮기는 식이다. 이런 마음챙김 용어는 심리학에서도 사용된다. 대표적으로 존 카밧진교수를 들 수 있다. 개발한 MBSR프로그램을 소개 하면서 사띠를 의미하는 영역 mindfullness를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번역자들은 mindfullness에 대하여 이구동성으로 마음챙김으로 소개한다.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빠알리어 사띠(sati)의 번역어 마음챙김에 대한 문제점을 여러 차례 지적하는 글을 올렸다.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가 사띠의 원래 의미와 전혀 무관한 뜻이고, 또한 영어의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옮겨 놓는 듯한 번역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억과 전혀 관계가 없는 ‘마음’자가 들어 간 것은 명백히 영역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보여진다. 이는 법보신문에서 사띠 번역어 논쟁이 발생하였을 때 권오민교수가 지적한 사항이다. 권오민교수는 기고문에서 “따라서 ‘마인드풀니스’를 비롯하여 영어로 번역된 불교어를 무비판적으로(다만 영어사전에 근거하여) 우리말로 재역하는 데에는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가 따른다.(“사띠논쟁, 念과 慧의 혼동서 비롯” , 법보신문 2010-03-04)”라고 말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마인드풀니스(mindfulness)’를 우리말로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다는 말이다. 빠알리니까야가 우리말로 번역 되기 이전에 만들어진 말이 마음챙김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사띠 번역어 마음챙김은 ‘국적불명의 번역어’라 볼 수 있다. 억지로 든 경전적 근거 국적불명의 번역어 마음챙김은 억지 번역이다. 왜 억지번역인가? 그것은 경전적 근거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경전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경전적 근거를 대는 경우를 보았다. 각묵스님은 마음챙김 번역어의 근거로 들고 있는 경이 하나 있다. 운나바바라문경(S48;2)이다. 사띠에 대한 근거가 되는 많은 경이 있음에도 이 경을 든 것은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근거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바라문이여, 다섯 가지 감각기능(눈.귀.코.혀.몸)은 마음(意)을 의지한다. 마음이 그들의 대상과 영역을 경험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마음챙김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해탈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 “고따마 존자시여, 그러면 열반은 무엇을 의지합니까?” “바라문이여, 그대는 질문의 범위를 넘어서버렸다. 그대는 질문의 한계를 잡지 못하였구나. 바라문이여, 청정범행을 닦는 것은 열반으로 귀결되고 열반으로 완성되고 열반으로 완결되기 때문이다.”(&lt;운나바 바라문 경&gt;(S48:42) ( [초기불교산책29] 네 가지 마음챙김의 확립(사념처) ① 왜 마음챙김인가, 2010-07-26) 초불연사이트에 각묵스님이 올려 놓은 글이다. 경에서 바라문이 “마음은 무엇을 의지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바라문이여,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한다. (Manassa kho brāhmaṇa, sati paṭisaraṇanti)” 라 하였다.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존한다? 마음이 마음챙김에 의존하다니 대체 무슨말일까. ‘마음은 마음챙김에 의존한다’는 말은 마음을 두 번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형적인 동어 반복이다. 마치 “나가 나를 챙긴다”와 같은 형식이다. 내가 있는데 또 다른 나가 나를 챙길 수 있다는 형식과 같다. 대체 마음이 마음을 챙긴다는 말이 타당한 것일까? 이는 영역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결과라고 보여진다. 마인드풀니스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하다보니 ‘마음은 마음챙김한다’라고 이상하게 번역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구절과 관련하여 전재성박사는 “바라문이여, 정신은 새김에 의존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새김은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으로 정의 된다. 기억을 지우려다 보니 각묵스님이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 특히 수행의 의미로 쓰였을 때는 절대로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각종기고문과 대중강연에서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래서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일 때는 주로 접두어 ‘anu-’를 붙여 ‘아눗사띠(anussati)’라는 술어를 사용하거나 √smr*에서 파생된 다른 명사인 ‘사라나(saran.a)’라는 단어가 쓰인다. 물론 수행과 관계없는 문맥에서 사띠는 기억이라는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2010-07-26)”라고 하였다. 예들 들어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할 때 아누가 앞에 붙어 아눗사띠(anussati)할 때만 기억의 의미로 쓰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운나바바라문경에서는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에 마음챙김 번역의 근거로 삼고 있다고 각종기고문과 대중강연에서 밝히고 있다. 하지만 운나바바라문경에서 기억이 실종된 번역어 마음챙김을 사용하였을 때 심각한 문제가 발생된다. 이는 시각능력 등 다섯가지 감각능력과 정신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각각 범주를 달리하고 서로 다른 대상과 범주를 향유하는 것이 시각능력, 청각능력 등 다섯 가지이지만 이들이 최종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정신(mano)’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정신(mano)에 대하여 “이러한 다섯 가지 능력은 대상을 달리하고 범주를 달리하니 서로 다른 대상과 범주를 향유하는데, 그것들은 정신을 의지하고 정신이 그것들의 대상과 범주를 향유합니다. (전재성님역, S48:42)”라 하였다. 이에 대한 각주에 따르면 “정신을 탐진치에 의해서 대상을 파악하는 ‘정신기관의 찰나적 파악의 정신’으로 설명한다.(Srp.III.244)”라고 되어 있다. 보는 것, 듣는 것 등 시시각각 찰나적으로 파악되는 것은 모두 정신작용이라는 뜻이다. 오락가락 번역 이런 ‘마노’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초지일관 ‘정신’이라고 옮겼다. 그러나 각묵스님의 번역을 보면 오락가락 하고 있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빠알리어 마노에 대하여 “도반들이여, 마노와 법을 조건으로 마노의 알음알이[意識]가 일어납니다.(Manañcāvuso paṭicca dhamme ca uppajjati manoviññāṇaṃ, M18)”라 하였다. 마노를 우리 말로 번역하지 않고 원어 그대로 마노라 한 것이다. 그런데 운나바바라문경에서는 마노에 대하여 마음이라고 번역하였다. 번역에 일관성이 없다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초불연의 원칙대로 마노를 마노라 번역하지 않고 마음이라 번역한 것일까? 이는 명백히 ‘마음챙김’을 의식하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만일 마노를 마노라 하였을 때 “마노는 마음챙김을 의지한다.”라고 되어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음챙김 번역어 근거로 삼고 있는 운나바바라문경에서는 마노에 대하여 마노라 번역하지 않고 모두 ‘마음’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심-의-식’을 명확하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한 결과라 보여진다. 심의식이 모두 마음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안이비설신의에서 사용되는 마노(mano)는 일반적인 의미의 마음이라 번역되는 찌따(citta)와 다른 것임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음으로 번역한 것은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를 정당화 하기 위한 것이라 보여진다. 기억이 실종된 이유 각묵스님은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될 때 기억의 의미로 절대로 사용될 수 없음을 힘주어 강조 하였다. 그래서 사띠를 기억이 상실된 마음챙김으로, 그것도 사띠가 마음이라는 어원이 전혀 갖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마음챙김으로 사용하는 이유는 사띠가 수행용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운나바바라문경에서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임을 강조하였다. 그 결과로서 “다섯 가지 감각기능(눈.귀.코.혀.몸)은 마음(意)을 의지하고, 마음은 마음챙김을 의지하고, 마음챙김은 해탈을 의지하고, 해탈은 열반을 의지한다”는 논리를 세웠다. 이렇게 마음챙김은 지금 여기에서 감각대상과의 접촉에서 일어나는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연결고리, 즉 지금 여기에서 순간순간 알아차리는 마음으로 본 것이다. 이런 설명이 틀지지 않으나 중요한 것은 기억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이다.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을 뿐 정작 중요한 기억의 기능이 실종된 것이다. 그래서 기억과 전혀 무관한 마음이 붙어 ‘마음챙김’이라는 번역어가 탄생 된 것이라 본다. 사띠가 기억의 의미로 사용되는 근거 초불연 번역어 마음챙김에는 기억의 뜻이 없다. 사띠의 어원이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사띠가 단독으로 쓰였을 때, 수행의 의미로 쓰였을 때 절대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간주 한다. 그래서 사띠는 마음을 해탈과 열반으로 이끌어 주는 연결고리임을 강조한다. 그런 예로서 운나바바라문경을 근거로 들고 있다. 그러나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도 쓰였음을 확인 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경이 있다. 운나바바라문경에 속해 있는 능력상윳따(Indriyasaṃyutta, S48)에 ‘위방가경(Vibhaṅgasutta, 분별의 경, S48:9)’이 바로 그것이다. 위방가경(S48:9)에서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근거가 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Katamañca bhikkhave, satindriyaṃ: idha bhikkhave, ariyasāvako satimā hoti paramena satinepakkena samannāgato cirakatampi cirabhāsitampi saritā anussaritā. Idaṃ vuccati bhikkhave, satindriyaṃ. 수행승들이여, 새김의 능력은 무엇인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고귀한 제자가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서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새김의 능력이라 한다. (위방가경-Vibhaṅgasutta-분별의 경, 상윳따니까야 S48:9, 전재성님역) 위방가경은 다섯 가지 능력, 오근에 대한 것이다. 믿음의 능력(saddhindriya), 정진의 능력(viriyindriya), 새김의 능력(satindriya), 집중의 능력(samādhindriya), 지혜의 능력(paññindriya) 이렇게 다섯 가지 깨달음으로 이끄는 능력을 말한다. 이중 ‘사띤드리아 (satindriya , 새김의 능력)’에 대한 설명이다. 경에서 사띠가 기억의 의미로 사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서 오래 전에 행한 일이나 오래 전에 행한 말도 기억하고 상기하며 새김을 확립한다면”이라고 하였다. 이루 미루어 보았을 때 사띠가 기억의 의미로 쓰였음에 틀림 없다. 사띠보장가(satisambojjhaṅga, 念覺支)에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사띠가 수행적으로 사용되었을때 그리고 단독으로 사용되지 않은면 절대로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혹시 사띤드리아 (satindriya)가 사띠와 인드리아의 복합어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배제한 것은 아닐까? 마치 아눗사띠처럼 복합어로만 사용되었을 때 기억의 의미만 있다고 보는 것일까? 과연 사띠가 단독으로 쓰이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37조도품에서 어느 경우이든지 사띠는 복합어로 사용된다. 팔정도에서도 삼마사띠(samasati, 正念)라 하고, 칠각지에서도 사띠보장가(satisambojjhaṅga, 念覺支)라 하여 복합어로 쓰이고 있다. 이처럼 5근, 5력,7각지, 8정도에서 사띠는 복합어로 사용된다. 단 4념처에서만 “열심히 노력하고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하여(viharati ātāpī sampajāno satimā vineyya, M10)”라고 하여 사띠가 단독으로 사용된다. 그렇다고 하여 4념처만이 수행의 전부라고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이끄는 수단은 4념처 뿐만 아니라 4정근, 4신족, 5근, 5력, 7각지, 8정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중 사띠와 관련된 것이 4념처, 5근, 5력, 7각지, 8정도 이렇게 네 가지이다. 37조도품 중에 사띠가 차지 하는 비중이 8개로서 9개의 정진에 이어 2위를 차지하고 있다. 초불연에서 마음챙김의 근거로 삼은 경이 운나바바라문경으로 한정한 것은 사띠가 수행의 의미로 사용되었을 때 절대로 기억의 의미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라 보여진다. 그러나 37조도품에 속해 있는 5근과 7각지에 따르면 사띠가 명백히 기억을 의미한다고 되어 있다. 특히 7각지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그는 이와 같이 멀리 떠나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한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이 멀리 떠나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 그 때 새김의 깨달음 고리가 시작된다.( Yasmiṃ samaye bhikkhave, bhikkhu yathā vūpakaṭṭho viharanto taṃ dhammaṃ anussarati anuvitakketi. satisambojjhaṅgo tasmiṃ samaye tassa bhikkhuno āraddho hoti.(S46: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사띠는 반드시 기억을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 기억은 어떤 것일까? 다름 아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부처님의 제자들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되새겨 수행에 활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야 수행이 엉뚱한 방향으로 가지 않는다. 직무유기인가 한국불교망신인가 만일 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흘려 들었다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수행을 하고 있기 쉽상이었을 것이다. 호흡관찰의 예를 든다면 부처님이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무상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호흡관찰 13단계, S54:1)”라고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귀담아 듣지 않았을 때 홀로 ‘복식호흡’이나 ‘단전호흡’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는 가르침을 새겨 듣지 않아서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내가 설할 테니 너희들은 새겨 들어라”라고 하였다. 이처럼 사띠가 기억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더구나 7각지와 5근에서도 경전적 근거가 분명히 제시 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기억의 의미를 지워 버렸다. 그리고 경전적 근거가 전혀 없는 마음을 집어 넣어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이런 번역태도에 대하여 이해할 수 없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기 이전 1990년대에 김재성교수가 영어의 마인드풀니스를 우리말로 재역하여 사용한 것은 그렇다치더라도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한 초불연 번역자들이 가장 기본적인 사띠 번역어를 마음챙김으로 번역한 것은 좀처럼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오근을 설명하는 위방가경에서와 같이 “최상의 기억과 분별을 갖추어서 (S48:9)”라는 내용도 있고, 칠각지를 설명하는 경에서 “그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면.(S46:3)”라는 기억에 대한 내용이 있음에도 불구 하고 이를 배제한 이유는 무엇일까? 만약 알고 배제 하였다면 이는 직무유기에 해당되고, 모르고 인용하지 않았다면 한국불교 망신에 해당될 것이다. 대체 어떤 마음을 챙긴다는 말인가 ‘챙기다’라는 말이 있다. 이에 대한 국어사전적 의미는 “사용하기 위해 찾아서 한데 모으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학생이 학교 갈 때 가방을 챙기는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시간표를 보고 국어책, 수학책 등을 가방에 챙겨 넣는 것이다. 그럴때 ‘챙기다’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 ‘마음챙김’이라 한다. 마음도 책가방 챙기는 것처럼 마음에다 이것 저것 챙겨넣는 것을 말하는 것일까? 대체 어떤 마음을 챙긴다는 말인가? 마음챙김에 대하여 인경스님은 비불교적 용어라 일갈한 바 있다. 법보신문에서 사띠논쟁이 일어 났을 때 인경스님은 마음을 챙긴다는 것은 제행무상법칙에 어긋나는 것이라 하였다. 마음은 끊임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질 뿐인데 챙겨서 가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지적에 대하여 마음챙김은 마음을 해탈과 연결시켜 주는 역할이라거나 대상을 파지한다거나 대상을 지키는 것 등으로 설명하지만, 마음챙김이라는 용어 자체가 그런 설명과 맞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음을 챙긴다는 것에 대하여 가방을 챙기듯이 무언가 주어 담는 의미로 받아 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 마음은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르침을 새겨 듣지 않았을 때 ‘하나의 법경(S54:1)’에 ‘아나빠나사띠’가 있다. 이를 전재성박사는 ‘호흡새김’으로 옮겼고, 초불연에서는 ‘들숨날숨 마음챙김’으로 옮겼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호흡관찰’로도 옮길 수 있다. 숨을 들이 쉬고 내쉼을 관찰하여 지혜를 얻는 수행을 말한다. 모두 16단계로 되어 있는 호흡관찰수행을 보면 ‘챙긴다’라는 말은 보이지 않는다. 모두 ‘전념한다’라고 되어 있다. 이를 초불연에서는 ‘공부짓는다’라고 하였다. ‘공부짓는다’와 ‘챙긴다’ 역시 같은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숨날숨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16단계 호흡을 보면 분명히 관찰에 대한 것이다. 호흡수행 과정에서 일어나는 희열, 행복 뿐만 아니라 무상함이나 사라짐도 관찰의 대상이다. 어느 것 하나 챙기는 것은 보이지 않는다.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짐에 따라 일어나는 여러가지 현상들이 무상하고 실체가 없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따라서 호흡수행은 마음을 챙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호흡수행을 제대로 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부처님이 말씀 하신 16가지 단계를 모두 숙지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희열이 일어 났을 때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라고 하면 그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새겨 듣지 않았다면 희열을 즐기면서 앉아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되새겨야 한다. 그래서 수행에 활용해야 단전호흡과 같은 엉뚱한 길로 빠지지 않게 된다. 왜 부처님이 그토록 사띠를 강조하였는지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되리라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이와 같은 기억의 의미를 배제하고 오로지 대상만 챙기는 마음챙김이라 하였다. 내키는 대로 번역인가 ‘문화권력’이라는 말이 있다. 정치권력이 있듯이 문화계에도 권력이 있다는 말이다. 문화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작가나 평론가 등을 말한다. 이문열이 한마디 하면 이슈화 되듯이 영향력 있는 문인들의 파워를 문화권력이라 한다. 또 ‘기술권력’이라는 말도 있다.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는 기술자가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 기술자가 없으면 회사가 돌아 가지 않을 정도로 기술력을 가지고 있을 때, 그 힘을 어떤 목적을 위하여 사용하면 이를 기술권력이라 한다. 마찬가지로 초기불교에 있어도 권력이 있다. 초기불교에 있어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미얀마에서 수행을 배워 와서 국내에 보급하는 사람의 경우 그의 말 한마디는 절대적이다. 그래서 ‘수행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또 빠알리니까야를 번역하여 대중에게 알리는 사람의 말 한마디 역시 절대적이다. 그래서 ‘번역권력’이라 부를 수 있다. 아직까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개척 분야나 다름 없는 것이 초기불교이다. 특히 초기불교에서 사용되는 용어는 처음 개척한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 것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그런 용어들이 올바로 사용되면 문제가 없지만 잘못 사용되면 불자들에게 큰 혼란을 줄 수 있다. 더구나 아무 생각 없이 즉흥적으로 만든 듯한 용어가 있는가 하면, 표준어가 아닌 경우도 많다. 어법에 맞는 않는 것도 있고, 비속어도 있고, 사전에 없는 말도 있고, 선가에서만 사용되는 말도 있다. 종종 이런 용어를 접하게 되면 번역자가 즉흥적으로 ‘내키는 대로’ 번역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번역권력과 용어남용 부처님의 말씀이라면 품위와 격조를 유지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두려움이나 공포가 일어나는 족족 이를 지배하고 머문다”라 하여 ‘족족’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고, 또 “속상하고 열받는 번뇌들이 없다.(A6:58,초불연번역)”라 하여 ‘열받는’ 이라는 비속어를 사용하였다. 이와 같이 품격이 떨어지는 용어가 수 도 없이 발견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마음챙김’과 같은 국적불명의 번역어이다. 이는 사띠의 의미도 살리지 못하였을 뿐더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비불교적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마음은 가방 챙기듯이 챙겨야 할 대상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제 초기불교용어도 정화할 때가 되었다. 초기불교 소개자들의 번역권력에 용어가 너무 남용되었기 때문이다. 마음챙김이라는 국적불명의 비불교적 용어를 누가 사용하는지 지켜 볼 것이다. 2013-05-20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마음챙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마음챙김&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mindfulness&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mindfulness&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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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20 May 2013 16:07:51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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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서울대공원 비경(秘境) 문원지</title>
	            <description>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서울대공원 비경(秘境) 문원지 서울대공원 둘레길 신록이 우거진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매번 가는 곳이지만 이번에는 코스를 달리 했다. 이른바 산책길 또는 둘레길이라 불리는 길이다. 모두 포장되어 있고 아름드리 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서 비가 와도 비를 맞지 않을 정도로 우거져 있다. 실버세대들이 주로 찾는 서울대공원 동물원내에 있는 둘레길에는 인적이 드믈다. 동물원 외곽에 있어서 관람객들이 좀처럼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무료입장이 가능한 나이 든 실버세대들이 주로 찾는다. 그런 길은 평탄하고 경사가 완만하여 기분좋게 걸을 수 있다. 저수지를 발견하고 둘레길, 산책길을 죽 따라 올라가다 보니 거의 중앙이 되는 지점에 안내판이 보였다. 현위치 표시와 함께 바로 위에 저수지 그림이 보였다. 서울대공원 입구에 커다란 호수모양의 저수지가 있는 것은 알지만, 이렇게 산책길에 또다른 저수지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호기심이 발동하였다. 사람이 살지 않는 깊은 산중에 있기 때문에 경치가 좋을 것 같았다. 이런 곳에 비경(秘境)이 있을 줄이야! 현위치라고 표시된 곳에서 저수지는 멀리 않았다. 역시 포장 되어 있는 도로를 쉬엄쉬엄 걸어 올라 갔다. 산책길 내내 향긋한 내음이 났는데 이곳 길 역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독특한 향기가 났다. 눈은 푸르름에 있고 코로는 향긋한 냄새를 맡고 귀로는 새가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드디어 저수지에 도착하였다. 한 마디로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비경(秘境)이었기 때문이다. 서울대공원을 그토록 많이 다녔건만 이런 곳이 있을 줄 꿈에도 몰랐다. 옛선비들이 시조로서 말한 무릉도원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평화롭다. 청계사와 산하나를 두고 저수지 좌측으로 해발 618미터의 청계산이 보인다. 지도로 확인 해 보니 저수지 우측을 넘으면 ‘청계사’가 곧바로 나온다. 그러고 보니 청계사와 서울대공원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지척에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성사진으로 본 저수지 우측 하단에 청계사가 보인다. 가까이 사는 곳에 이런 비경이 있음에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 감추어진 경치, 비경이라 이름 할 수 있다. 많이 알려져 있어서 사람들로 북적인다면 더 이상 비밀의 경치라 볼 수 없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만 찾아 가는가 보다. 산도 물도 온통 신록 지도상 문워지라 불리우는 저수지 둑에 앉아 경치를 감상하였다. 눈에 밟히는 것은 신록의 숲이다. 이제 새 잎이 돋아나 연두색조가 강한 신록이다. 그런데 숲만 신록이 아니다. 물 또한 신록의 빛깔이기 때문이다. 주위가 온통 신록이다 보니 물의 색깔 역시 짙푸른 색깔이다. 그래서 산이나 물이나 모두 초록빛깔이다. 새소리 바람소리와 함께 눈으로는 초록이, 귀로는 새소리가 들린다. 코로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향긋한 내음이 있고, 바람이 부드럽다. 이렇게 다섯 가지 감각능력 중에 미각만 빼고 눈, 귀, 코, 몸으로 느낄 수 있다. 다섯 가지 감각능력, 즉 오욕락을 누리기 위하여 잣나무 잎파리를 따서 입에 물었다. 미각을 느끼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오욕락을 즐기게 되었다. 빠삐만이 하자는 데로 일반적으로 오욕락이라 하면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 이렇게 다섯 가지를 말한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오욕락은 다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즐기는 것을 말한다. 즉, 눈, 귀, 코, 혀, 몸 이렇게 다섯 가지 감각기관으로 형상, 소리, 냄새, 맛, 감촉과 같은 감각대상을 즐기고 갈애 하는 것을 오욕락이라 한다. 이와 같은 오욕락에 대하여 상윳따니까야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환희하고 환호하고 탐착하면, 수행승들이여, 그 수행승은 악마의 소굴에 들어가 악마의 지배를 받는 자라고 한다. 악마의 밧줄이 그를 사로잡고 그가 악마의 밧줄에 묶이면 그는 악마 빠삐만이 하고자 하는 데로 한다. (Mārapāsasutta0악마의 밧줄의 경, 상윳따니까야 S35:114, 전재성님역) 눈으로 형상을 보았을 때 접촉이 일어난다. 눈이라는 감각능력과 형상이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치면 시각의식이 일어난다. 이렇게 세 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일어 나는데, 접촉을 조건으로 느낌이 일어나 연기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느낌을 조건으로 갈애가 일어나기 때문에 집착하게 된다. 집착 단계에 이르면 더 이상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악마의 밧줄에 묶인 것으로 본다. 마치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악마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라 한다. 루비콘강을 건너면 이는 시각 뿐만 아니라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도 마찬가지이다. 대체적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대상들이다. 그래서 오욕락에 매이면 괴로움을 유발하여 세세생생 윤회 하는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어느 단계에서 알아차려야 할까? 빠알리니까야에서는 느낌 단계에서 알아차리라고 한다. 느낌단계에서 알아차리지 못하면 갈애로 발전하게 되는데, 갈애 단계는 마치 루비콘 강을 건너는 것과 같기 때문에 오로지 앞으로만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보기 싫어도 볼 수밖에 없고, 듣기 싫어도 들을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의 현장이다. 선별해서 보고나 듣거나, 아니면 아예 보지도 듣지도 않으려면 눈감고 귀막고 살면된다. 그러나 삶의 현장에서 그렇게 할 수 없다. 그럴 경우 깊은 산속에 들어가면 마음이 편해진다. 바로 서울대공원안에 숨겨진 저수지 같은 곳이라 본다. 깊은 산중에서 도닦는 사람들 초록의 산과 초록의 물을 바라보는 것은 눈을 자극하지 않는다. 사람을 바라 보거나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형상을 보면 갈애가 생기지만 산천초목을 바라 본다고 하여 욕망을 자극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 있어서 마음 놓고 보아도 된다. 보기 싫어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대로 봐도 되는 것이다. 귓가로 들리는 새 소리 역시 걸림이 없다. 어디선가 발산하는 향긋한 내음 역시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는다. 한 줄기 바람이 불 때 얼굴로 느끼는 부드러운 감촉이 감각적 욕망을 자극할 리 없다. 이렇게 비경의 저수지에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정화 되는 듯 하다. 왜 스님들이 도를 닦기 위하여 사람들이 살지 않은 깊은 산중으로 들어 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서정주의 ‘신록’ 시비를 발견하고 서울대공원의 비경 문원지에 시비가 하나 있다. 마치 숨어 있듯이 사람이 잘 오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다. 자세히 보니 ‘신록’이라는 제목이다. 지금 신록이 한창이어서 신록을 즐기고 있는데 시비에 신록이라는 시가 있다. 이를 우연의 일치라고 보아야 할까. 작은 글씨로 보일 듯 말 듯 새겨져 있는 시를 읽어 보았다. 이 시에 대한 인터넷검색을 하니 논술교실 자료로도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록 어이할꺼나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남 몰래 혼자서 사랑을 가졌어라 천지엔 이미 꽃잎이 지고새로운 녹음이 다시 돋아나또 한번 날 에워싸는데 못 견디게 서러운 몸짓을 하며붉은 꽃잎은 떨어져 내려펄펄펄 펄펄펄 떨어져 내려 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신라 가시내의 숨결과 같은 풀밭에 바람 속에 떨어져 내려올해도 내 앞에 흩날리는데부르르 떨며 흩날리는데 아, 나는 사랑을 가졌어라꾀꼬리처럼 울지도 못할기찬 사랑을 혼자서 가졌어라 (서정주) 이 시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일까. 논술교재 자료에 따르면 이시는 서정적, 고백적, 영탄적, 비유적이라 한다. 그리고 이 시의 주제는 ‘신록의 계절에 홀로 간직한 사랑에서 느끼는 가슴 벅찬 심정’이라 한다. 눈부신 신록의 계절에 혼자 있는 것에 대한 애타는 감정의 표현으로 보인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 하는 아무리 경치가 좋기로 마냥 앉아 있을 수 없다. 때가 되면 내려 가야한다. 잠시 눈과 귀, 코, 몸으로 행복을 느꼈지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불과 한시간도 되지 않아 내려 가야 했기 때문이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만 하고, 듣기 싫어도 들어야만 하는 것이 삶의 현장이다. 산하대지등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새소리 바람소리등 듣고 싶은 것만 들을려면 산에서 살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이 생활인이다. 당장 지하철역 입구에서 보기 싫은 것을 보아야 했고, 듣기 싫은 것을 들어야 했다. 지하도 내려 가는 입구 목 좋은 곳에서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종이를 나누어 주며 “예수님 믿고 천국가세요”라고 말하는 전도사와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2014-05-19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서울대공원&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서울대공원&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문원지&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문원지&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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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19 May 2013 11:16:10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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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 2013년 부처님오신날의 화계사</title>
	            <description> “Only don’t know(오직 모를 뿐) , Only doing it(오직 할 뿐)”, 2013년 부처님오신날의 화계사 부처님오신날, 불자라면 누구나 되새겨 보는 날이다. 그래서 다니는 절이나 가까운 절을 찾는 것이 보통이다. 부처님오신날 오후 화계사를 찾았다. 서울 강북구 수유동에 위치한 화계사는 지난 2007년 부처님오신날 방문한 적이 있다. 2007년 부처님오신날에 2007년 당시 ‘비오는날의 부처님오신날 삼각산 화계사(2007-05-24)’라는 제목으로 기록을 남겼다. 그때 당시 방송에서는 ‘아침부터 강한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하루종일 쏟아지고 거기에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뇌전도 예상되니 외출할 때 각별히 조심하라’라는 아나운서의 멘트가 있었다. 그래서 불교도들의 최대잔치인 부처님행사가 폭우가 쏟아지는 가운데 치루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갔다. 그런 면으로 보면 기상청이 ‘구라청’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오전에 가는 빗줄기가 약간 있었을 뿐 이날 오후 2시까지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오후 늦게 폭우가 내려 일기예보가 100%맞지 않음을 보여 주었다. 천주교의 “부처님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 화계사 가는 길에 눈여겨 본 것이 있다. 그것은 화계사와 인근 종교와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 화계사 사거리길에 있는 수유동성당에는 “부처님오심을 함께 기뻐합니다”라는 문구가 적힌 플레카드가 걸려 있고, 한신대학교에는 “부처님 오신날 함께 기뻐합니다”라는 문구가 교정에 걸려 있다. ‘석가탄신일’이라는 말대신 ‘부처님오신날’이라는 불자들이 쓰는 문구가 걸린 것이 이채롭다. 오일장과 같은 분위기 화계사 사거리에서 화계사 일주문 사이에 있는 길은 노점으로 가득하다. 마치 잔칫날 같은 분위기이다. 부처님오신날과 관련 있는 듯이 보이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몰리는 곳에 임시로 장이 서는 것 같은 분위기이다. 각종 먹거리에서 부터, 농산물, 특산물, 의류에 이르기 까지 동네에서 볼 수 있는 오일장 같은 분위기 이다. 아마도 부처님오신날이라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을 예상하여 장이 선 것이라 볼 수 있다. 학교운동장이 주차장으로 화계사길로 수 많은 사람들이 올라 간다. 대부분 불자들이다. 점점 가까이 갈수록 일주문이 점차 다가 온다. 일주문 바로 옆에는 화계중학교가 있다. 그래서 화계중학교를 비롯하여 수유중학교와 초등학교 운동장이 이 날 하루 만큼은 주차장으로 변한다. 국제불교도기(The Buddhist flag) 일주문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화계사 경내에 진입하게 된다. 불과 100여미터 되는 평탄한 길이다. 길 옆에는 국제불교도기(The Buddhist flag)가 내 걸려 있다. 오색으로 되어 있는 국제불교도기는 1880년 스리랑카의 불교를 되살리기 위하여 실바(Mr J.R. de Silva)와 올코트 대령(Colonel Henry S. Olcott)이 함께 디자인 해서 만든 근대의 창작물이라 한다. 그래서 전세계 어느 곳에서나 사원이 있는 곳에 국제불교도기를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부처님오신날과 같은 큰 행사에서 국제불교도기가 걸려 있는 것을 보는 것은 이제 어렵지 않다. 그러나 아직까지 불자들에게 불교도기에 대한 이해는 부족한 것 같다. 오색의 기가 달렸을 때 대체 “이런 날 왠 깃발인가?”라는 의문이 들기 때문이다. 만(卍)자 대신 국제불교도기를 볼 수 있는 것이 이제 한국불교현실이다. 그렇다면 국제불교도기의 오색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The Buddhist flag 영문위키피디아와 붓다네트 사이트에 국제불교도기에 대한 설명이 되어 있다. 세로로 다섯 가지 색깔이 있는데, 좌로부터 청색(Blue)은 자비(Universal Compassion)를 상징하고, 황색은 중도(The Middle Path), 적색은 축복(Blessing), 백색은 청정과 해탈(Purity and Liberation), 주황색은 지혜(Wisdom)를 상징한다. 그리고 오른 편 끝에 다섯 가지 색이 조합 되어 있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보편적인 것임을 상징한다. 붓다네트에 따르면 국제불교도기는 처음에 ‘커널기(The colonel's flag, 대령기)’ 라 불리웠으나 후에 불교도들의 단결을 상징하는 깃발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사용되고 있고, 특히 60개가 넘는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불교도기는 웨삭(Vesak, 부처님오신날)과 같은 불교도들의 행사나 축제가 있을 때 공식적으로 걸린다고 한다. 우리나라도 1950년 결성된 국제불교도연맹(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세계불교도우의회)의 일원이기 때문에 주요사찰에서 행사가 있을 때 볼 수 있다. 무명가수의 혼신을 다한 열창 경내로 들어 가자 가장 너른 마당에서 산사음악회가 열리고 있었다.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은 초청가수가 열창을 하고 있고 대형스크린이 설치 되어 있어서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산사음악회는 이름 있는 절, 규모가 있는 절, 신도가 많이 몰리는 절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오전에 법문을 듣고, 점심공양을 하고 난 다음 오후에 흥겨운 시간을 갖는 것이 일반화 되었다. 그래서 조용한 산사가 이날 하루 만큼은 들썩들썩 하는 것이다. 무명가수의 혼신을 다한 열창에 흥이 났던지 일부 사람들은 무대 앞에서 몸을 흔들기도 한다. “북한산 정기 받아~” 회계사는 매우 익숙한 절이다. 많이 가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계사에 다니는 것도 아니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듣던 것이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화계사가 있는 부근에서 다녔다. 화계사 바로 옆이 아니라 삼각산이라 불리우는 북한산이 보이는 곳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는 뜻이다. 서울이 급팽창할 때 우후죽순 격으로 생겨난 신설 초등학교 중의 하나에 다닌 것이다. 북한산이 보이는 학교에서 공통적인 것이 있다. 그것은 교가에 “북한산 정기 받아~”라고 시작되는 문구이다. 부근의 중학교나 고등학교의 교가에 북한산 정기받지 않은 학교가 없을 정도로 교가에 북한산이 언급되어 있다. 그런 북한산 자락에 화계사가 있다. 그러나 그 때 당시 한 번도 가보지 않았지만 이름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계사에 처음 간 것은 중학교때이다. 그 때 절이라는 곳을 처음 가 보았다. 아마 중학교 2학년 봄이라 생각된다. 4월 벚꽃이 필 무렵 전학년 그림그리기 대회를 화계사에서 하였기 때문이다. 종립중학교에서는 매년 봄과 가을에 미술대회가 있었는데 종로5가 부근에 있다보니 주로 그 때 당시 ‘비원’이라 불리우는 ‘창덕궁’과 ‘창경원’이라 불리웠던 ‘창경궁’으로 갔었다. 그런데 2학년 봄의 경우 화계사로 간 것이다. 그래서 처음으로 절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나 절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남는 것이 없다. 다시 찾은 화계사를 보니 대웅전과 오래된 전각이 아마 그때도 그 모습 그대로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지금 보는 콘크리트 골조의 웅장한 대적광전 건물은 물론 없었다. 다시 찾은 화계사 절에 가면 늘 관심을 갖고 보는 것이 있다. 그것은 문화재이다. 화계사에도 문화재가 여럿있다. 대표적으로 대웅전을 들 수 있다. 1870년에 지어진 정면3칸 측면3칸 대웅전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65호로 되어 있다. 대웅전에는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협시불로서 문수와 보현보살이 모셔져 있다. 염불당과 주지실과 부엌을 겸한 대방(大房) 대웅전을 설명하는 글을 읽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그것은 ‘대방(大房)’이라는 말이다. 이에 대한 문구를 보면 “조선후기 서울 근교 사찰, 특히 왕실원찰에서는 대방을 갖추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화계사 대웅전 앞쪽에도 대방(大房)이 있다.”라고 되어 있다. 대웅전 바로 앞에 있는 T자형 큰 전각이 그것이다. 화계사 대방(大房) 대웅전 바로 앞에 있다. 대방은 크기가 상대적으로 넓고 큰 방이라는 뜻이다. 그런 대방이 있는 곳이 왕실사찰의 전형이라 한다. 서울근교에서 왕실사찰을 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울 근교의 용주사, 수종사, 흥국사 등이 해당된다. 불교와 왕실사찰 그렇다면 왜 왕실사찰이 종종 보이는 것일까? 이는 왕실에서 특히 여인들이 불교를 신봉하였을 뜻한다. 남양주 수종사 정의옹주 부도탑 태종태후정의옹주의 부도탑으로서 1439년에 왕실의 명으로 건립되었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왕이 바뀔 때 마다, 또는 정권이 바뀔 때 마다 여인들이 의지처로 삼고 있는 것이 절이었기 때문이라 본다. 권력의 지형이 바뀌면 왕비를 비롯하여 궁중에서 살던 여인들이 마땅히 갈 곳이 없기 때문에 절로 들어 가는 것이 동아시아국가에서 볼 수 있는 보편적인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경우 당나라 시절 당태종이 죽자 당태종을 따르던 여인들이 모두 절로 들어갔다. 그래서 절에서 일생을 마치는 것이다. 그러나 예외도 있었다. 훗날 측천무후라 불리우던 당태종의 비가 그것이다. 측천무후는 당태종의 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당태종의 아들인 고종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된 것이다. 이는 케이블TV에서 방영된 측천무후의 일대기 ‘일월능공(日月凌空)’에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일본의 경우 역시 마찬가지이었다. 일본 시대드라마를 보면 에도시대 장군이 바뀌면 전장군의 정실과 측실이 모두 머리를 깍고 절에 들어가 일생을 보내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이는 일본드라마 ‘오오쿠(大奥)’에서도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나라 조선시대에서도 왕이 바뀌면 왕을 따르던 여인들이 더 이상 궁에 남아 있지 않고 절에서 일생을 보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서울 근교에 왕실원찰이 많이 생겨 난 것으로 본다. 심지어 경남 깊은 산중에 있는 청암사에서도 왕실 원찰을 볼 수 있다. 청암사 보광전 안내판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조선 숙종 15년(1689)에 장희빈의 무고로 폐위되자 원당으로 겁립된 청암사 보광전이다”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이다. 상주 청암사 보광전 화계사 대웅전 앞에 있는 대방은 조선후기 대원군 시절에 지어진 왕실원찰의 유형이라 한다. 대웅전은 따로 떨어져 있지만 요사체와 염불당, 부엌, 누마루가 함께 있는 구조이다. 그러다 보니 건물이 꽤 크다. 한 건물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왕실원찰이 되었을까? 안내판에 따르면 1866년부터 흥선대원군을 비롯한 왕실의 시주로 시작 되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워 서양의 오랑캐와 오랑캐 문화를 배척하는 정책을 폈지만 불교에 대하여 우호적 이었음을 알 수 있다. 회계사 대방(大房) 현재 화계사 대방은 종무소로도 사용되고 있다. 안을 들여다 보면 매우 너른 방이 보인다. 조선 후기 염불선이 크게 유행 하였을 때 염불당으로도 활용 되었을 것이다. 외국인스님들이 사는 곳 화계사 국제선원 화계사는 외국인스님들이 사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잘 알려져 있는 현각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종종 외국인 스님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외국인 스님들이 머무는 곳은 따로 있다. 화계사 바로 옆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화계사 국제선원’건물이다. 이날도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외국인들이 열심히 연꽃등을 만들고 있었다. 외국인 스님들은 한 켠에 모여서 유유자적하게 차를 즐기고 있었다. 숭산스님의 부도탑 화계사하면 숭산스님(1927-2004)을 빼 놓을 수 없다. 우리나라 해외포교의 개척자라 불리우는 숭산스님이 주석하고 입적하였던 곳이 화계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화계사에서 2007년과 다른 것이 있었다. 2007년 당시 많은 사진을 남겼는데, 그때 당시와 비교해 보니 고봉선사의 부도탑위치에 변화가 있었다. 2007년 당시 에는 부도탑이 고봉스님의 것만 있었기 때문이다. 2007년 화계사 고봉선사 부도탑 2013년 고봉선사의 부도탑은 화계사 일주문 길 옆으로 옮겨져 있었다. 그리고 숭산스님의 부도탑과 함께 함께 모셔져 있었다. 그 사이에 새로 부도탑 묘역이 조성된 것이다. 새로 조성된 부도탑 새로 조성된 구역에서 고봉스님의 부도탑은 옛날 그대로이다. 단지 자리만 옮겼을 뿐이다. 그런데 새로 조성된 숭산스님의 부도탑이 눈에 띄였다. 숭산스님 부도탑 둥근 탑형식으로 된 부도탑에는 ‘숭산대종사(嵩山大宗師)’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옆에는 숭산스님의 업적을 기리는 추모비가 새워져 있다. “Only don’t know (오직 모를 뿐)”와 “Only doing it (오직 할 뿐)” 추모비 상단에 “世界一花”라는 문구와 함께 영문으로 “Zen Master Seung Sahn a monument inscription 이르는 문구가 보인다. 또 영문 문구 바로 옆에 “Only don’t know”와 “Only doing it”이라는 문구가 보인다. 이는 “오직 모를 뿐” 과 “오직 할 뿐”이라고 번역된다. 이 말뜻은 무엇일까? 검색해 보니 2012년 BBS불교방송에서 숭산스님의 외국인 제자인 청안스님의 인터뷰내용을 찾을 수 있었다. 헝가리 원광사에서 주석하고 있는 청안스님은 “숭산스님 가르침의 핵심은 어떤 것인지요?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Well the key point of Zen master Seung Sahn's teaching was always just “탁“ just this point, which means: return to the mind which is before thinking. Return to don’t know. When this don’t know mind becomes clear, then you can see your situation clearly, your relationship to the situation and your function in the situation.... so this teaching is simple and clear. Not systematic, but there are very understandable and clear lines of cause and effect in it. He didn’t want to create a system. So, it was not too logical, but it is always easy understandable. it`s very intuitive. He also emphasized great courage, great question and great faith. 숭산스님의 가르침의 핵심은 항상 “탁” 바로 이것 이었습니다. 즉, 생각이전의 마음으로 돌아가라는 뜻입니다. “오직 모를뿐“으로 돌아가라. 이것이 바로 첫 번째 핵심입니다. ”오직 모를뿐“이라는 이 마음이 점점 명확해지면, 여러분의 상황, 여러분의 상황과의 관계, 그리고, 상황 속에서의 작용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으며, 그래서 이 가르침은 간단하고도 명확합니다. 체계적이지는 않으나 매우 이해하기 쉬우며, 명확한 인과관계가 이 가르침에 있습니다. 숭산스님은 체계를 만들기를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논리적이지 않았고, 항상 이해하기 쉬운 것이었습니다. 매우 직관적이며, 스님께서는 또한 대 용기와, 대 의정, 대 신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청안스님, BBS와 인터뷰-BBS뉴스와 사람들, 2012년6월2일 방송) 숭산스님이 말한 “오직 모를 뿐”은 간화선에 대한 것이다. 이는 선사들이 말하는 “알 수 없는 의심으로” 라는 말과 동의어로 본다. 화두를 참구하는데 있어서 이치로 따지거나 교리적으로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이 몸뚱이 끌고 다니는 소소영영한 이 놈은 무엇인고?” 라든가, “왜 판치생모라 했을까?” “ 부모미생전 본래면목은 무엇인고?”라고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참구하다 보면 의정이 생겨서 대의단으로 발전하고 마침내 폭발하듯이 화두가 타파 되어 견성성불에 이를 것이라 한다. 따라서 “오직 모를 뿐”은 간화선의 삼요체중의 하나인 ‘대의심(大疑心)’을 키워 나가는 것을 말하고, “오직 할 뿐”은 행주좌와어묵동정으로 표현되어 용맹정진하는 ‘대분심(大憤心)’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간화선 삼요체인 대신심, 대분심, 대의심 이렇게 세 가지 중에 “Only don’t know”는 ‘대의심’에, “Only doing it”은 ‘대분심’에 해당되는 것이다. 소원지를 작성하는 불자들 올해 부처님오신날은 화창한 오월의 날씨에 열렸다. 지난 2007년 비가 오락가락 하여 행사를 망칠까 하는 염려와는 대조적으로 축복받은 날씨에 열린 것이다. 신록이 우거지고 하늘은 청명하고 햇살은 따가웠지만 공기만큼은 상큼한 날씨이었다. 이날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화계사에도 수 많은 불자들의 참배가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소원지와 축원문이 작성코너가 있었는데, 작성된 소원지는 별도로 마련된 띠줄에 걸어 놓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소망을 담은 촛불 그런가 하면 또 한켠에서는 촛불에 불을 밝히기도 하였다. 연꽃모양의 촛불에 불을 켜고 자신의 소망을 써 넣는 것을 말한다. 2013년 부처님오신날 화계사에서 불자들의 소박한 바램을 보았다. 2013-05-18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부처님오신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부처님오신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국제불교도기&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국제불교도기&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Only don’t know&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Only don’t know&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Only doing it&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Only doing it&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The Buddhist flag&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The Buddhist flag&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대방(大房)&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대방(大房)&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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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at, 18 May 2013 12:11:40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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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과거의 악행 덮기 세 가지, 법구경 세상의 품(Lokavagga)</title>
	            <description> 과거의 악행 덮기 세 가지, 법구경 세상의 품(Lokavagga) 세상의 품(Lokavagga) 1. Hīnaṃ dhammaṃ na seveyya 히낭 담망 나 세웨이야 pamādena na samvase 빠마데나 나 상와세 micchādiṭṭhim na seveyya 맛차딧팅 나 세웨이야 na siyā lokavaḍḍhano. 나 시야 록까왓다노. 저열한 것을 섬기지 말고 방일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잘못된 견해를 따르지 말고 세속을 증가시키는 자가 되지 말라. (Dhp 167) 2. Uttiṭṭhe nappamajjeyya 욷띳테 납빠맛제이야 dhammaṃ sucaritaṃ care 담망 수짜리땅 짜레 dhammacāri sukhaṃ seti 담마짜리 수캉 세띠 asmiṃ loke paramhi ca. 아스밍 록께 빠람히 짜. 자제하라. 방일하지 말라. 선행의 원리를 실천하라.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Dhp 168) 3. Dhammaṃ care sucaritaṃ 담망 짜레 수짜리땅 na naṃ duccaritaṃ care 나 낭 둣짜리땅 짜레 dhammacārī sukbaṃ seti 담마짜리 수캉 세띠 asmiṃ loke paramhi ca. 아밍 록께 빠람히 짜. 선행의 원리를 행하라. 악행의 원리를 행하지 말라.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Dhp 169) 4. Yathā pubbulakaṃ pass 야타 뿝불라깡 빠쎄 yathā pass marīcikaṃ 야타 빠세 마리찌깡 evaṃ lokaṃ avekkantaṃ 에왕 록깡 아웩칸탕 maccurājā na passati 맛쭈레자 나 빠싸띠. 물거품을 보는 것처럼, 아지랑이를 보는 것처럼,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Dhp 170) 5. Etha passathimaṃ lokaṃ 에타 빠싸티망 록깡 cittaṃ rājarathūpamaṃ 찟땅 라자라투빠망 yattha bālā visīdanti 얏타 발라 위시단띠 natthi saṇgo vijānataṃ 낫티 상고 위자난땅. 와서 바로 이 세상을 보라. 왕의 치장한 수레와 같다. 어리석은 자는 거기에 빠져 들지만 현명한 자는 집착하지 않는다. (Dhp 171) 6. Yo ca pubbe pamajjitvā 요 짜 뿝베 빠맛지뜨와 pacchā so nappamajjati 빳차 소 납빠맛자띠 so'maṃ lokam pabhāseti 소망 록깡 빠바세띠 abbhā muttova candimā 압바 뭇또와 짠디마. 예전에 방일했더라도 그 뒤에 방일하지 않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 (Dhp 172) 7. Yass apāpaṃ kataṃ kammaṃ 야싸 빠빵 까땅 깜망 kusalena pidhīyati 꾸살레나 삐디야띠 so'maṃ lokaṃ pabhāseti 소망 록깡 빠바세띠 abbhā muttova candimā 압바 뭇또와 짠디마.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춘다. (Dhp 173) 8. Andhabhūto ayaṃ loko 안다부또 아양 록께 tanuke'ttha vipassati 따누껫타 위빠사띠 sakuṇo jālamuttova 사꾸노 잘라뭇또와 appo saggāya gacchati. 압뽀 삭가야 갓차띠. 이 세상은 암흑이다. 여기서 분명하게 보는 자들은 드믈다. 그믈을 벗어난 새와 같이 하늘로 나는 자들은 드믈다. (Dhp 174) 9. Haṃsā' diccapathe yanti 항사 딧짜빠테 얀띠 ākāse yanti iddhiyā 아께사 얀띠 잇디야 nīyanti dhīrā lokamhā 니얀띠 디라 록깜하 jetvā maraṃ savāhiniṃ 제뜨와 마랑 사와히닝. 백조들이 태양의 길을 따라서 초월적인 힘으로 허공을 날 듯, 악마와 그 군대를 물리치고 현명한 님들은 세상에서 벗어난다. (Dhp 175) 10. Ekaṃ dhammaṃ atītassa 에깡 담망 아띠따싸 musāvādissa jantuno 무사와디싸 잔뚜노 vitiṇṇaparalokassa 위띤나빠랄로까싸 natthi pāpaṃ akāriyaṃ 낫티 빠빵 아까리양. 유일한 진실을 어기고 거짓을 말하는 자, 저 세상을 포기한 자에게는 행해지지 않을 악이 없다. (Dhp 176) 11. Na ve kadariyā devalokaṃ vajanti 나 웨 까다리야 데와록깡 와잔띠 bālā have nappasaṃsanti dānaṃ 발라 하웨 납빠상산띠 다낭 dhīro ca dānam anumodanāno 디로 짜 다낭 이누모다마노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 떼네와 소 호띠 수키 빠랏타.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보시를 칭찬하지 않는다. 현명한 자는 보시를 기뻐하면서 그것으로 실로 내세에 안락을 얻는다. (Dhp 177) 12. Pathabyā ekarajjena 빠타비아 에까랏제나 saggassa gamanena vā 삭가싸 가마네나 와 sabbalokādhipaccena 삽발로까디빳쩨나 sotāpattiphalaṃ varaṃ 소따빳띠팔랑 와랑. 지상에서 유일한 왕권보다 천상계로 가는 것보다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 진리의 흐름에 든 것이 탁월하다. (Dhp 178) (전재성님역) 법구경에서 13번 째 품이 ‘세상의 품(Lokavagga)’이다. 한역에서는 세솓품(世俗品)이라 한다. 24가지 모음 중에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이라는 것이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이지만, 이 세상의 품에서는 거기에서 더 확장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저열한 것을 섬기지 말고 1번 게송((Dhp 167)에서는 ‘저열한 것을 섬기지 말고(Hīnaṃ dhammaṃ na seveyya)’라 하였다. 불교에서 말하는 저열한 것이란 무엇일까? 저열을 뜻하는 빠알리어는 ‘히나(Hīna)’이다. 히나라는 말은 초전법륜경에서도 보인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S56:11)”이라는 문구이다. 고와 락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를 설하신 부처님이 극단적 쾌락에 대한 욕망을 이와 같이 표현 한 것이다. 그래서 저열한 것이란 각주에 따르면 “낙타나 숫소와 같은 세련되지 못한 존재에게 해당되는 성질로서 다섯가지 쾌락의 대상을 뜻한다. 그것들은 수라, 축생, 아귀, 지옥의 네 가지 비참한 곳에 태어나게 하기 때문에 저열한 것이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시각, 청각 등 오욕락을 추구하는 삶에 대하여 저열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방일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pamādena na samvase)’라는 말은 새김과 알아차림을 느슨하게 하는 성질을 지닌 것을 말한다. ‘잘못된 견해(micchādiṭṭhim)’란 영원주의와 허무주의를 말한다. 디가니까야 브라흐마잘라경(D1, 범망경)에 따르면 62가지 삿된 견해가 설명되어 있다. ‘세속을 증가시키는 자가 되지 말라.(na siyā lokavaḍḍhano)’는 무슨 뜻일까? 세속을 증가시키는 자는 윤회를 강화시키는 자를 말한다. 그렇게 하지 않아야 세속을 증가시키지 않는 자가 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가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가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 세월을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 (S15:11)”라고 말씀 하셨다.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2번 게송(Dhp 168)에서 ‘자제하라. 방일하지 말라. (Uttiṭṭhe nappamajjeyya)’는 탁발과 관련된 내용이다. 탁발을 다닐 때 맛있는 음식을 제공할 수 있는 집을 고르지 않으면 방일하지 않는 것이고, 고르면 방일하는 것으로 본다. 음식에 대한 갈애와 집착을 경계하는 말이라 볼 수 있다. ‘선행의 원리를 실천하라. (dhammaṃ sucaritaṃ care)’라는 말은 탁발의 실천에서 부적절한 것을 버리고 가정을 위해서 탁발을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열 세가지 두타행이 있다. 이 중 음식과 관련 된 것은 ‘1)탁발음식만 수용해야 한다. 2) 차례대로 탁발해야 한다. 3)한 자리에서만 먹어야 한다. 4) 발우의 탁발음식만 먹어야 한다. 5) 나중에 얻은 밥을 먹지 않는다.’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진리의 행자는 편히 잠든다. (dhammacāri sukhaṃ seti)’는 무슨 뜻일까? Dhp.III.165에 따르면, “이러한 방식으로 탁발하는 원리를 따르는 사람은 잠잘 때에만 행복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과 저 세상에서 네 가지 행동양식-걷기, 서있기, 앉기, 눕기의 행주좌와-에서 언제나 행복하게 산다.”라는 뜻이다. 죽음의 사자가 못 찾은 이유는 4번 게송(Dhp 170)에서 ‘이 세상을 보는 사람을 죽음의 사자는 보지 못한다. (evaṃ lokaṃ avekkantaṃ maccurājā na passati)’ 라 하였다. 죽음에 이르렀을 때 저승으로 인도하는 사자를 말한다. 그런데 저승사자가 보지 못할 것이라 한다. 이에 대한 각주는 “ 죽음의 신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를 물거품이나 아지랑이처럼 보는 자, 즉 공허하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보는 자를 보지 못한다.”라는 뜻이라 한다. 완전한 열반에 들면 더 이상 마음이 일어 나지 않기 때문에 죽음의 사자가 아무리 찾을려고 해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고디까경에서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악마 빠삐만이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을 찾고 있다. ‘양가의 아들 고디까의 의식은 어디에 있을까’라고. 그러나 수행승들이여, 양가의 아들 고디까는 의식이 머무는 곳 없이 완전한 열반에 들었다.(S4:23)”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고디까는 재생의식(結生識, (paṭisandhi-vinñāṇa)이 생겨남이 없이 열반에 든 것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왁깔리경(S22:87)에서도 볼 수 있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5번 게송(Dhp 171)에서 ‘와서 바로 이 세상을 보라.(Etha passathimaṃ lokaṃ)’이라 하였다. 이 때 세상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산천초목이 있는 기세간을 말하는 것일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고, 내가 죽고 나서도 있을 그런 세상, 삼천대천세계를 말하는 것일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예상을 깨뜨린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세상은 오온, 십이처, 십팔계의 세상을 말한다. 감각능력과 감각대상이 접촉하였을 때 일어나는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접촉을 조건으로 감수가, 감수를 조건으로 갈애가 생겨난다. 갈애를 조건으로 집착이 생겨나며, 집착을 조건으로 존재가 생겨나고, 존재를 조건으로 태어남이 생겨나며, 태어남을 조건으로 늙고 죽음, 우울, 슬픔, 고통, 불쾌, 절망이 생겨난다. 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 (S35:107)”라고 설하셨다. 세상이 있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있어서 세상이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객관적 세상이 아니라 주관적 세상을 말한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는 자신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 빠져 들지만, ‘현명한 자들은 집착하지 않는다 .(natthi saṇgo vijānataṃ)’고 하였다. 그런 집착에는 일곱 가지가 있다. 즉 갈애, 사견, 자만, 성냄, 무명, 오염, 악행을 말한다. 이런 것들은 모두 조건지어진 것들로서 오온에 대하여 집착하기 때문에 발생되는 것이다. 방편이라는 이름으로 6번 게송(Dhp 172)에서 ‘예전에 방일했더라도 그 뒤에 방일하지 않으면 (Yo ca pubbe pamajjitvā pacchā so nappamajjati)’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 이 문구를 이해하려면 인연담을 보아야 한다. 부처님 당시 아침이나 저녁이나 빗자루를 들고 승원을 청소하던 ‘쌈문자니’라는 비구가 있었다. 청소를 너무 열심히 하다 보니 나이 든 장로의 태도가 못마땅해 보였다. 그래서 “이 게으른 자가 사람의 믿음의 공물을 먹고 와서 앉아만 있구만, 왜 빗자루를 들고 한 곳이라도 쓸지 않는가?”라고 투덜 거렸다. 이를 눈치 챈 장로는 쌈문자니를 불러 놓고 “하루 종일 청소만 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였다. 아침 청소가 끝났으면 서른 두 가지 몸의 구성성분을 관찰하는 등 수행을 하여야 됨을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쌈문자니는 청소하는 대신 수행에 열중하여 거룩한 경지(아라한)를 성취하였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수행자로서 본분이 있다는 것을 말한다. 출가자의 본분이 수행과 포교임에도 불구하고 그와 무관한 일에 열중하였을 때 출가의 본분을 잊어 버린 것을 말한다. 오늘날 방편이라는 이름 아래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고, 음식을 만드는 등이 이에 해당될 것이다. 그래서 ‘예전에 방일했더라도’라는 말은 ‘보시, 수행, 경전의 독송 등을 소홀히 했더라도’라는 뜻이다. 빗자를 들고 하루 종일 사원 청소만 하는 것 보다 도(magga)와 과(phala)를 성취하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함을 말한다. 그래서 구름에서 벗어난 달과 같이 이 세상을 비추듯이, 도에서 얻어진 지혜로 이 세계를 밝히는 것이 수행자의 본분임을 말한다. 과거의 악행 덮기 1, 소금덩이경(AN3.99) 7번 게송(Dhp 173)에서 ‘악한 짓을 했어도 착하고 건전한 일로 덮으면 (Yass apāpaṃ kataṃ kammaṃ kusalena pidhīyati)’라는 문구가 있다. 아무리 악한 짓을 많이 하였어도 착하고 건전한 업을 많이 쌓으면 상쇄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착하고 건전한 일을 해야 할까? 소금덩이경에 따르면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강가 강에다 소금 덩이를 넣는다 하자. 비구들이여, 이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강가강은 이 소금 덩이 때문에 마실 수 없이 짜게 되겠는가? (AN3.99)”라 하였다. 소금덩이를 악행에 따른 악업이라면, 강물 같은 더 많은 선업을 지었을 때 악업은 보이지 않게 될 것이다라는 말이다. 그런데 강물보다 더 큰 선업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탐욕, 성냄, 어리석음 등 모든 번뇌가 소멸되었을 때 과거의 악행을 덮어 버리는 것이다. 이는 앙굴리말라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다. 과거의 악행 덮기 2, 앙굴리말라경(M86) 연쇄살인자 앙굴리말라는 수 많은 사람을 살해하였다. 그러나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 번뇌다한 아라한이 됨으로서 더 이상 번뇌는 일어 나지 않게 되었다. 비록 과거에 악행을 하였지만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그것은 이미 지나간 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는 부처님이 “내가 태어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만삭의 임신부에게 말을 하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말을 하라고 하자 앙굴리말라는 “세존이시여, 저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았는데, 저보고 의도적으로 거짓말을 하라는 말입니까?”라고 깜짝 놀라듯이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내가 태어난 이래”라는 말이다. 이말은 무슨 뜻일까? 그것은 다름 아닌 ‘거듭태어남’이다. 비록 앙굴리말라의 겉모습이 살인을 저질렀을 때 그 모습과 똑같다고 할지라도, 앙굴리말라는 부처님의 제자가 되어서 성자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중생에서 성자로 계보가 바뀐 것이다. 번뇌다한 아라한이 되었다면 이전의 앙굴리말라라고 볼 수 없다. 범부가 성자로 거듭 태어났기 때문에, 마치 사람이 죽어서 다시 태어난 것 처럼 다시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앙굴리말라에게 ‘자매여, 내가 고귀한 태어남으로 거듭난 이래 나는 의도적으로 뭇 삶의 생명을 빼앗은 적이 없습니다. 이러한 진실로 당신이 잘되고 당신의 아이가 잘되길 바랍니다. (M86)’라고 말하라 한 것이다. 과거의 악행 덮기 3, 사유 중지의 경(M20) 소금덩이경과 앙굴리말라경에서는 선업이 악업을 압도하였을 경우 악업은 덮혀져 보이지 않게 될 것이라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야기가 맛지마니까야에도 있다. 그것은 전재성박사의 역주에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역자주: 악을 선으로 덮는다는 것은 착하고 건전한 것으로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대치 하는 것은 마치 능숙한 미장이나 그 도제가 ‘작은 쐐기(善)로 큰 쐐기(惡)를 제거 하는 것(MN.II.116, M20)’ 과 같다. 궁극적으로는 그 착하고 건전한 것도 소멸되어야 하는 것이다. (각주, 전재성박사) 과거에 지은 악행에 대한 과보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나 선행을 엄청나게 많이 지의면 덮혀 질 수 있다. 가장 이상적인 케이스는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앙굴리말라경에서와 같이 아라한이 되면 다시 태어나는 것과 똑같기 때문에 악행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재성박사는 맛지마니까야의 ‘쐐기론’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 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수행승들이여, 이 세상에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수행승들이여, 마치 숙련된 미쟁이나 그의 도제가 작은 쐐기로 커다란 쐐기를 쳐서 뽑아 제거하는 것처럼,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수행승은 어떤 인상에 관해 그 인상에 정신적 활동을 일으켜 자신 안에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가 일어나면, 그는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켜야 한다. 그가 그 인상과는 다른, 선하고 건전한 어떤 인상에 관련된 정신활동을 일으키면, 탐욕과 관련되고, 성냄과 관련되고, 어리석음과 관련된, 악하고 불건전한 사유들이 버려지고 사라진다. 그것들이 버려지면 안으로 마음이 확립되고 가라앉고 통일되고 집중된다. (위따까산타나경-Vitakkasaṇṭhāna Sutta-사유중지의 경, 맛지마니까야 M20, 전재성님역) 지금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일어 났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경에서는 선하고 건전한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고 말한다. 이는 마치 미장이가 작은 쐐기(선)를 이용하여 큰 쐐기(악)를 부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과거에 지은 악행도 선행을 지으면 부수어지는 것과 같다. 그런 선행의 결과는 성자가 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번뇌 다한 아라한이 되는 것이다. 탐욕, 성냄 등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과거에 지은 악행이 떠 오를지라도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새로운 업을 짓지 않게 된다. 그래서 번뇌 다한 아라한에게 있어서 과거에 지은 악행은 이미 지나간 일이다. 현세에서 체험 될 수 있는 과보, 다음 생에 체험 될 수 있는 과보는 피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에 지은 업의 과보는 피해 갈 수 없다. 더구나 살인 업과 같은 중업을 지었을 경우 업의 과보가 무르익었을 때 아라한이라 하여 피해 갈 수 없다. 그래서 부처님은 돌맹이에 맞아 죽어 가는 앙굴리말라에게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수행승이여, 그대는 인내하라. 그대가 업의 과보로 수 년, 아니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을 지옥에서 받을 업보를 그대가 지금 여기서 받는 것이다.(M86)”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악마의 그믈에 갇힌 자들 8번 게송(Dhp 174)에서 ‘이 세상은 암흑이다. (Andhabhūto ayaṃ loko)’라 하였다. 이는 일반적인 사람들은 통찰의 눈을 가지고 있지 못함을 말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무상, 괴로움, 실체없음을 통찰 할 수 있다. 그래서 ‘여기서 분명하게 보는 자들은 드믈다. (tanuke'ttha vipassati)’라 하였다. 새장에 새가 있다. 새장에 갇혀 있는 한 자유롭게 날아 다닐 수 없다. 마찬가지로 새장에 갇힌 새들과 같은 사람들은 악마의 그믈에 갇힌 것이나 다름 없다. 그래서 존재의 대부분은 비참한 곳에서 발버둥 친다. 그러나 소수의 사람만이 좋은 곳인 천상계 또는 열반에 든다. 이를 게송에서 ‘그믈을 벗어난 새와 같이 하늘로 나는 자들은 드믈다. (sakuṇo jālamuttova appo saggāya gacchati)’라 하였다. 오온이 악마의 군대인 이유 9번 게송(Dhp 175)에서 ‘악마와 그 군대를 물리치고 현명한 님들은 세상에서 벗어난다. (nīyanti dhīrā lokamhā jetvā maraṃ savāhiniṃ)’라 하였다. 여기서 악마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악마의 군대는 1) 감각적 쾌락의 욕망, 2) 분노, 3) 굶주림과 목마름, 4) 갈애, 5) 해태와 혼침, 6) 두려움, 7) 의심, 8) 위선과 자만을 말한다. 악하고 불건전하고 부정적인 마음이 바로 악마의 군대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넓게는 오온도 악마의 군대로 본다. 이는 상윳따니까야에서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알 수 있다. [세존] Rūpaṃ vedayitaṃ saññaṃ viññāṇaṃ yañca saṅkhataṃ, Neso hamasmi netaṃ me evaṃ tattha virajjati. 물질도 느낌도 지각도, 형성과 또한 의식도 내가 아니고 나의 것이 아니니 이렇게 거기서 탐착을 벗어나네. Evaṃ virattaṃ khemattaṃ sabbasaṃyojanātigaṃ, Anvesaṃ sabbaṭhānesu mārasenāpi nājjhagāti. 이렇게 탐착에서 벗어나 안온하게 모든 얽매임을 뛰어넘은 자는 어떠한 곳에서 찾더라도 악마의 군대가 발견할 수 없네. (빳따경-Pattasutta-발우의 경, 상윳따니까야 S4:16, 전재성님역) 게송을 보면 물질(Rūpa), 느낌(vedayita), 지각(sañña), 형성(saṅkhata), 의식(viññāṇa) 이렇게 다섯가지가 언급되어 있다. 이는 다름 아닌 오온이다. 오온은 집착에 의하여 형성되었기 때문에 악마가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래서 오온에 집착하였을 때 오온을 악마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오온이 나의 것이 아님을 알고 집착에서 벗어났을 때 늙지도 죽지도 않기 때문에 죽음의 신, 악마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보시를 칭찬하고 기뻐한 공덕으로 11번 게송(Dhp 177)을 보면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한다.( Na ve kadariyā devalokaṃ vajanti)’라고 하였다. 각주에 따르면 불행하고 비천하고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함을 뜻한다. 또 이 세상도 저 세상도 모르는 어리석은 자는 보시를 칭찬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는 단멸론자에게서 볼 수 있다. 업과 과보를 믿지 않는 단멸론자에게 있어서 보시에 대한 공덕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육체적 죽음과 함께 정신도 소멸함으로서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고 보기 때문에 이 세상도 저 세상도 없다는 삿된 견해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현자는 보시를 기뻐한다. 이는 업과 업의 과보를 믿기 때문이다. 따라서 내세도 믿는다. 그런자는 ‘그것으로 실로 내세에 안락을 얻는다.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라 하였다. 다른 사람의 보시를 칭찬하고 기뻐한 공덕으로 저 세상에서 천상의 안락을 누리며 행복해 한다는 뜻이다. 가장 허약한 자일지라도 12번 게송(Dhp 178)은 세상의 품에서 정종분이나 다름 없다. 그것은 진리의 흐름에 드는 것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상에서 유일한 왕권보다 (Pathabyā ekarajjena), 천상계로 가는 것보다(saggassa gamanena vā), 전 세계를 지배하는 것보다(sabbalokādhipaccena), 진리의 흐름에 든 것이 탁월하다(sotāpattiphalaṃ varaṃ)’고 하였다. 전륜성왕이 되면 우주적인 왕권의 지배권을 갖는다. 오늘날 미국 대통령권한 같은 것이다. 선행을 하여 26개 천상중의 하나에 태어나면 수(壽)와 복(福)을 누린다. 또 창업을 하여 전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하면 전 세계의 지배권을 갖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들은 어느 누구도 완전한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흐름에 든자(예류자, sotāpattipanna)가 되면 가장 허약할지라도 이 생에서 다시 태어나는 다음 7번 째의 생애 안에서는 완전히 해탈하여 괴로움에서 벗어난다. 흐름에 든 님은 1) 개체가 있다는 견해(유신견), 2) 회의적 의심, 3)규범과 금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시작 단계의 참사람을 말한다. 2013-05-16 진흙속의연꽃 </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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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16 May 2013 23:35:51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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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부처님오신날 무렵 나무에서 피는 꽃들</title>
	            <description> 부처님오신날 무렵 나무에서 피는 꽃들 날씨와 마음 변화무쌍한 것이 날씨이다. 맑은 날씨가 계속될 것처럼 보이지만 서서히 탁해진다. 공기가 탁해지면 구름으로 변하고, 마침내 비가 되어 내린다. 특히 봄날씨가 그렇다. 날씨의 변덕 못지 않게 사람의 마음 역시 변화무쌍하다. 즐겁고 유쾌한 기분이 금새 우울하고 근심어린 마음으로 변한다. 청명한 날씨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탁해지듯이 착하고 건전한 마음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악하고 불건전한 마음으로 변한다. 그런면에 있어서 날씨와 마음은 똑 같은 것이라 볼 수 있다. 마음이 울적할 때 마음이 울적할 때 어떻게 해야할까. 자리를 뜨는 것이 좋다. 기분전환을 위해서이다. 닫힌 공간에서 앉아 있어 보았자 좀처럼 기분전환이 되지 않을 때 일단 나가고 보는 것이다. 거리를 나서면 이곳저곳에 꽃이 피어있다. 일년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이라 불리우는 오월은 꽃의 계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꽃을 바라보기만 하여도 마음이 밝아진다. 거리에 새로운 꽃들이 피기 시작하였다. 오월 중순에 피는 꽃들이다. 그런 꽃은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가장 큰 특징은 잎파리가 먼저 피고 그 다음에 꽃이 피는 나무들이다. 벚꽃처럼 사월에 피는 꽃들은 꽃이 먼저 피고 나중에 잎사귀가 나는 것이 많지만 오월의 꽃은 그 반대이다. 그런 꽃들을 보았다. 도시의 작은 공원에 키높은 나무에서 꽃이 피고 있다. 품위와 격조있는 층층나무 층층나무가 있다. 지금 층층나무에 꽃이 만발 하였다. 꽃이 층층이 핀다고 하여 이름 붙여진 층층나무는 우리나라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산중에서도 볼 수 있고 정원에서도 볼 수 있다. 층층나무는 키가 큰 나무이다. 한국, 중국, 일본이 원산이다. 주로 관상용으로 심어지는데 경복궁과 같은 궁궐에서도 볼 수 있다. 그래서 품위와 격조있게 보인다. 그런 층층나무 한 구루가 가까이 있는 작은 공원에 마치 ‘왕자’처럼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층층나무꽃을 처음 알게 된 것은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부터이다. 부처님오신날 무렵에 피는데 꽃이 아름다워 블로그에 올렸더니 어느 법우님이 꽃이름을 가르쳐 주어 알게 되었다. 층층나무를 보면 규칙적으로 가지가 돌아 가면서 수평으로 가지런히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마치 ‘시루떡’을 올려 놓은 듯한 모습이다. 그래서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는 것 같다. 층층나무에 핀 꽃을 자세히 보기 힘들다. 사람키보다 더 높은 곳에 피어 있기 때문에 근접촬영이 가능하지 않다. 그럼에도 가지가 늘어진 끝에서 층층나무 특유의 꽃모양을 볼 수 있다. 해마다 오월 이맘때쯤 보는 것이 층층나무이다. 겨울에 앙상한 가지만 남았을 때는 쳐다 보지도 않지만 부처님오신날에 피는 꽃, 층층나무가 필 때면 다시 여러 번 자주 쳐다 보게 된다. 꽃들을 따는데 마음을 빼앗기면 오월은 꽃의 계절이다. 날씨만큼이나 변던스런 것이 사람의 마음이지만 꽃을 보고 있으면 그 순간 만큼은 마음이 멈춘다. 그래서일까 초기경에서도 꽃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법구경에서는 24품중에 별도로 ‘꽃의 품(Pupphavagga)’이 있을 정도이다. 꽃의 품에는 총 16개의 게송이 있다. 모두 꽃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Pupphāni heva pacinantaṃ 뿝파니 헤와 빠찌난땅 byāsattamanasaṃ naraṃ 브야삿따마나상 나랑 suttaṃ gāmaṃ mahoghova 숫땅 가망 마호고와 maccu ādāya gacchati. 맛쭈 아다야 갓차띠. 오로지 꽃들을 따는데 사람이 마음을 빼앗기면,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Dhp 47) 꽃이 보기 좋으면 자꾸 쳐다 보게 된다. 또 향내까지 취하게 된다. 눈으로 코로 즐기는 것이다. 더 나아가 꽃을 꺽게 될지 모른다. 꺽어서 화병에 넣어 자신만이 즐겨 보기 위함이다. 꽃에 대한 갈애가 심해지면 도둑질로 발전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지나치게 꽃과 향기에 탐닉하면 꽃도둑, 향기도둑이라 하였다. 게송에서는 꽃을 감각적 쾌락의 욕망으로 비유 하였다. 여러가지 꽃을 따서 화환을 만드는 사람처럼 감각적 쾌락의 가닥인 꽃들을 따 모으는 사람은 자신과 연결되거나 물질적 대상과 연결되는 것을 말한다. 또 마음을 빼앗기는 사람은 얻지 못한 것을 원하고 얻은 것에 탐착하는 방식으로 마음을 빼앗기는 것을 말한다. 욕망은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감각적 쾌락에 대해서 항상 불만족한 상태에 있게 된다. 그래서 욕망이 채워지기 전에 악마가 그를 지배한다고 하였다. 감각적쾌락에 대한 욕망이 악마인 것이다. 그래서 악마는 사람을 비탄에 빠뜨리고 마침내 복종시키게 한다고 하였다. 부처님오신날 무렵에 피는 꽃 부처님오신날 무렵에 피는 꽃이 있다. ‘불두화’이다. 주로 절에서 관상용으로 재배 되어서 불교와 매우 인연이 깊은 꽃이다. 꽃 모양도 부처님의 ‘육계’를 닮아서 부처님의 두상을 연상케 하는 꽃이다. 그런 불두화가 도시의 작은 공원에 피었다. 불두화는 이제 시작이다. 육계는 형성되어 있지만 아직 파르스름한 기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불두화를 보면 여러 개의 꽃잎이 다발을 이루고 있다. 마치 공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아기 주먹만하다가 점차 날짜가 지남에 따라 어른 주먹만해지고 더 시간이 지나면 꽃잎이 백색으로 변하면서 갖난아기 머리통 만하게 커진다. 벌들은 꽃밭을 돌아다니지만 꽃은 보는 것은 눈을 즐겁게 한다. 꽃을 보는 것만 해도 근심걱정이 멀리 도망가는 듯하다. 특히 도시에서 보는 꽃은 마음을 들뜨게 만든다. 그래서 디카를 들이밀게 된다. 가슴설레이게 하는 것은 꽃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편의 아름다운 게송은 꽃 못지 않게 마음을 끌어 당긴다. 법구경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thāpi bhamaro pupphaṃ 야타삐 바마로 뿝팡 vaṇṇagandhamaheṭhayaṃ 완나간다마헤타양 paleti rasamādāya 빨레띠 라사마다야 evaṃ gāme munī care. 에왕 가메 무니 짜레. 색깔과 향기를 지닌 꽃은 꿀벌이 건드리지 않고 오직 꿀만 따서 나르듯, 성자는 마을에서 유행한다.(Dhp 49) 벌들은 꽃밭을 돌아다니면서 꽃과 그 색깔이나 향기를 파괴하지 않는다. 각주에 따르면, 벌들은 필요한 만큼의 화밀을 빨아먹고 꿀을 만들기 위해 조금 더 취할 뿐이라 한다. 그리고는 숲속 깊이 들어가 꽃가루가 묻은 화밀을 나무의 깊숙이 숨겨진 벌집에 저장하면 그것이 꿀로 변한다. 꽃밭이 있기 때문에, 꽃들이나 그들의 색깔이나 향기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모든 것이 자연상태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크리스마스트리처럼 피는 꽃 오월에 피는 꽃은 사월에 피는 꽃과 다르다. 잎사귀가 먼저 나고 나중에 꽃이 피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월에 피는 꽃은 꽃과 잎사귀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 꽃 들 중에 매우 아름다운 꽃을 보았다. 꽃나무 이름은 알 수 없다. 도시의 작은 공원에 심어져 있는 키큰 나무에서 마치 탑처럼, 트리처럼 피는 꽃이 피었다. 좀 더 가까이 다가서 보았다. 마치 꽃모양이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처럼 생겼다. 길쭉한 세모꼴로서 층층이 꽃다발 무더기가 쌓여 있다. 이 꽃 이름은 무엇일까? 마침 가지가 길게 늘어 진 것이 있어서 근접촬영이 가능하였다. 만개한 꽃을 보니 하나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였다. 신록의 파란 잎사귀와 함께 트리모양의 꽃이 매혹적이다. 쓰레기 더미에서 피는 꽃 라따나경(보배경,Sn2.1)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꽃으로 비유하였다. 게송에서 “여름날의 첫 더위가 오면, 숲의 총림이 가지 끝마다 꽃을 피어내듯, 이와 같이 열반에 이르는 위없는 묘법을 가르치셨습니다.(Sn2.1)”라는 문구를 말한다. 오월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계절이다. 그러나 일교차는 무척심하다. 10도 이상 차이가 나기 때문에 밤에는 추은 듯하고, 낮에는 마치 초여름 같은 날씨이다. 6월이 되면 본격적으로 무더위가 시작 되는데, 더위가 시작 되기 전 오월에 나뭇가지마다 앞 다투어 꽃들이 피고 있다. 키 높은 나무에서 피는 꽃들이다. 부처님은 열반에 이르는 묘법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꽃을 비유로 들었다. 꽃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설령 이름 없는 작은 꽃일지라도 꽃이 피었다는 것 자체는 하나의 우주가 열린 것이다. 그래서 법구경 꽃의 품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Yathā sankāradhānasmiṃ 야타 상카라다나스밍 ujjhitasmiṃ matāpathe 웃지따스밍 마하빠테 padumaṃ tattha jāyetha 빠두망 땃타 자예타 sucigandhaṃ manoramaṃ 수찌간당 마노라망. 사거리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위에서 그곳에 맑고 향기롭고 사랑스런 홍련화가 피어나듯, (Dhp 58) Evaṃ saṇkārabhūtesu 에왕 상카라부떼수 andhabhūte puthujjane 안다부떼 뿌툿자네 atirocati paññāya 아띠로짜띠 빤냐야 sammāsambuddhasāvako 삼마삼붇다사와코. 눈멀고 쓰레기와 같은 일반사람들 가운데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의 제자는 지혜로 밝게 빛난다. (Dhp 59) 길에 버려진 음식쓰레기나 잡동사니 위에서도 꽃은 피어난다. 마찬가지로 쓰레기더미처럼 많은 오염이 생겨난 자, 쓰레기같이 가치 없는 범부로 태어났더라도, 무지하고 지각 없는 사람들 사이에 태어났더라도 깨달은 자는 나올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각주에 따르면, 번뇌를 끊은 자는 그 자신의 통찰력으로 감각적 쾌락의 욕망이 재난임을 알고, 그것의 여읨의 이익을 보고, 집을 떠나 출가하여, 계행과 삼매와 지혜를 닦아 마침내 궁극적 해탈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2013-05-14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부처님오신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부처님오신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층층나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층층나무&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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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14 May 2013 15:23:53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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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빠알리니까야에서 본 선가(禪家)용어</title>
	            <description> 빠알리니까야에서 본 선가(禪家)용어 민중어로 설하신 부처님 부처님은 부처님당시 민중언어로 법문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누구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말씀 하셨다고 한다. 지배층의 언어라 불리는 산스크리트어 대신 민중어라 불리우는 마가다어로 법문하였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말씀 하신 내용이 구전되어 오늘날 볼 수 있는 것이 빠알리어이다. 그렇다고 하여 빠알리문자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구전으로 전승된 것을 알파벳으로 문자화 한 것이다. 미즈노 고오겐의 빠알리 문법에 따르면 부처님이 말씀 하신 민중어 마가다어는 ‘쁘라끄릿뜨어’라 불리운다. 빠알리어도 이 쁘라끄릿뜨어의 일종으로 본다. 그런데 쁘라끄릿뜨어란 산스크리트어, 즉 고전 범어에 대비되는 말이라 한다. 고전 범어는 문전에 의해 인위적으로 규정되고, 완성된 완성어라 한다. 또 인공어이고, 아어(雅語)이고, 표준어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이에 반하여 쁘라끄릿뜨어는 인위가 가해지지 않은 자연어, 속어, 민중어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두 언어는 모두 그 원천이 고대 인도의 베다어 그 밖의 고대 일상용어에서 유래 하고 있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 보았을 때 산스크리트어는 지배층에서 지배층 사람들끼리 소통하는 ‘상류층언어’라 볼 수 있고, 쁘라끄릿뜨어는 민중들이 자유롭게 소통하는 ‘민중어’라고 볼 수 있다. 부처님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나 통용되는 상류층언어로 설한 것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설하셨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여 저잣거리에서나 통용되는 막말이나 비속어를 사용하였다고는 보여지지 않는다. 부처님이 비록 민중어로 설법하였더라고 하더라도 품위와 격조를 갖춘 말을 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빠알리니까야 번역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촌스럽다’라는 말에 걸리고 최근 불교방송사이트에서 일묵스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무명을 밝히고’라는 프로에 출연한 일묵스님은 팔정도를 수행의 목표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초전법륜경의 일부를 낭송하였다. 낭송중에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라는 구절을 들었다. 각묵스님이 번역한 초전법륜경이다. 그런데 ‘촌스럽다’라는 말에서 걸렸다. ‘촌스럽다’라는 말은 일상어일까? 아니면 비속어일까? ‘촌스럽다’에 대한 국어사전을 찾아 보면 ‘세련된 맛이 없어 엉성하고 어색한 데가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렇다면 촌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촌스러운 것일까? 시골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촌스런 것은 아닐 것이다. 비록 시골에 사는 사람일지라도 세련되고 빈틈없는 삶을 살아 가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농촌에 산다고 하여 모두 ‘무능력자’나 ‘무지랭이’라고 볼 수 없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촌스럽다’라는 말은 촌에 사는 사람들, 시골에 사는 사람들, 도회지에 살고 있지 않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비하적인 표현이라 아니 할 수 없다. Village 촌에 산다고 다 촌스러운가? 과연 ‘촌스럽다’라는 표현을 부처님이 하였을까? 그렇다면 빠알리 원문에는 어떻게 쓰여 있을까? 초전법륜경에서 감각적쾌락의 욕망을 설하시는 부분은 보면 다음과 같다. Yocayāṃ kāmesu kāmasukhallikānuyogo hīno gammo pothujjaniko anariyo anatthasaṃhito, yo cāyaṃ attakilamathānuyogo dukkho anariyo anatthasaṃhito, 요짜양 까메수 까마수칼리까누요고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요 짜양 앗따낄라마타누요고 둑코 아나리요 아낫타상히또, (S56:11) 이 부분에 대한 각묵스님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감각적 욕망들에 대한 쾌락의 탐닉에 몰두하는 것과, 괴롭고 성스럽지 못하고 이익을 주지 못하는 자기 학대에 몰두하는 것이다. (S56:11) (각묵스님번역) ‘저열하고’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히나(hīna)’임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촌스럽고’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가마(gamma)이다. 빠알리어 가마(gamma)는 ‘마을의, 천한, 신앙없는’ 이라는 뜻이다. 이어지는 빠알리어 ‘뽀툿자니까(pothujjanika)’는 ‘보통사람의, 범부의, 평범한’의 뜻이다. 그래서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hīno gammo pothujjaniko)’에 대한 초불연의 번역은 ‘저열하고 촌스럽고 범속하고’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또다른 빠알리어 번역자 전재성박사는 어떻게 번역하였을까? 똑 같은 빠알리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번역되어 있다. 수행승들이여, 감각적 쾌락의 욕망에 탐착을 일삼는 것은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또한 스스로 고행을 일삼는 것도 괴로운 것이며 성현의 가르침이 아니며 무익한 것이다. (전재성박사번역) ‘히노 감모 뽀툿자니꼬(hīno gammo pothujjaniko)’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저열하고 비속하고 배우지 못한 일반사람의 소행으로’라고 번역 하였다. 히나에 대하여 각묵스님은 ‘촌스러운’이라 하였으나 , 전재성박사는 ‘비속한’으로 번역하였음을 알 수 있다. ‘촌스럽다’라는 말이나 ‘비속하다’라는 말은 거의 같은 뜻이다. 그러나 경전에서 사용되는 말이라면 용어선택에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부처님이 아무리 일상어로 설법하였다고 할지라도 ‘촌스럽다’라는 비속어를 사용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아 보인다. 경전의 품위를 떨어 뜨리는 말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좀 더 격조 있는 용어를 선택할 필요가 있다. 초불연의 생경한 용어들 촌스럽다라는 말을 사용함으로 인하여 가장 큰 피해를 보는 사람이 아마 농촌에 사는 사람들일 것이다. 농촌에 산다는 이유로 ‘촌스럽다’라고 한다면 시골에서 사는 사람, 도시가 아닌 곳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결례로 보인다. 불자들이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경전이다. 부처님 말씀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경전에 낙서를 한다든가 심지어 접는 것 조차 불경스럽게 생각한다. 그래서 꼭 새겨야 할 부분이 있다면 ‘노랑형광메모리펜’을 이용한다. 또 포스트잇을 활용하여 페이지 사이에 끼워 둔다. 그렇게 하면 나중에 찾기가 쉽다. 소중히 다루는 경전에서 번역된 말은 부처님의 음성이나 다름 없다. 그런데 비속어를 사용한다거나 생경한 용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을 사용한다면 경전의 의미는 반감된다. 초불연 번역의 경우 생경한 용어가 종종 눈에 띈다. 보통사람들이 알아듣기 어려운 말도 보인다. 대표적으로 ‘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한 것을 들 수 있다. ‘주의기울임’이라는 뜻인 마나시까라에 대하여 ‘잡도리하다’라고 번역한 것은 승가의 입장에서 번역한 것이라 본다. 선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선사의 법문에서 “이렇게 다구치고 잡도리를 해 나갈 때 모든 번뇌와 망상이 발 붙일 것이 없어.(송담스님, 알기쉬운 불교이야기 2012-06-03)”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공부짓다’라는 용어 이처럼 선가에서나 사용됨직한 용어들이 초기불교용어에, 그것도 빠알리니까야 번역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를 든다면 ‘공부짓다’라는 용어이다. 어느 법우님이 댓글을 남겼다. 초불연에서 사용하는 용어 중에 ‘공부짓다’라는 말에 대하여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어법에 맞는 말인지, 사전에 있는 말인지 의문스럽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어떤 경우에 사용하였을까? 다음과 같은 초불연의 번역을 볼 수 있다. “비구들이여,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 무엇이 하나의 법인가?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비구들이여, 그러면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을 어떻게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는가?” (Ekadhammasutta- 하나의 법 경(S54:1), 각묵스님역) 번역에서 크게 세 가지 말에 주목한다. ‘하나의 법’과 ‘[공부]지으면’과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번역의 원칙은 있는가 ‘하나의 법’이라는 말은 ‘에까담마(Ekadhamma)’에 대한 번역이다. 에까(Eka)가 ‘하나의, 유일한, 같은, 일체’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하나라는 것은 숫자로서 ‘하나’일수도 있지만, 오로지 하나 밖에 없다고 할 때 ‘유일’ 로도 사용된다. 그래서 ‘하나’와 ‘유일’ 두 가지 뜻으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초불연의 경우 사띠빳타나경(염처경)에서 에까에 대하여 ‘유일’의 뜻으로 사용하였다. 에까야나(Ekāyana)에 대하여 ‘유일한 길’로 번역한 것이다. 사념처 수행을 하는 것이 열반을 실현하는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전재성박사는 에까야나(Ekāyana)에 대하여 ‘하나의 길’이라 번역하였다. 사념처 수행만이 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 하나의 길 또는 지름길이라는 뜻이다. 왜냐하면 초기경에 따르면 열반에 이르는 길은 사념처 뿐만 아니라 오근, 오력, 칠각지, 팔정도 등 여러 길이 있기 때문이다. 전재성박사는 담마에 대해서는 ‘원리’라 번역하였다. 이는 담마에 대하여 초지일관 법(法)으로 번역한 초불연과 대조된다. 초불연의 경우 부처님이 담마라고 말씀 하신 것은 그만한 뜻이 있기 때문에 다른 여러 말로 번역하지 않고 한자어 ‘법(法)’을 고수한다고 청정도론 해제에서 밝힌 바 있다. 그래서일까 어떤 경우라도 담마는 오로지 ‘법’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전재성박사는 담마에 대하여 다양하게 번역한다. 담마에 대하여 ‘진리, 원리, 법, 것’ 등으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에까담마경에서는 ‘하나의 원리에 대한 경’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하였다. 이는 ‘하나의 법 경’이라고 이름지은 초불연과 대조 된다. ‘공부짓다’는 선가용어 ‘공부짓다’라는 말이다. 초불연의 번역을 보면 ‘공부짓다’라는 말이 빈번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사전에 있는 말일까? ‘공부짓다’에 대하여 사전을 찾아 보면 나오지 않는다. 사전에 없는 말이다. 오로지 초불연 번역에서만 볼 수 있는 말이다. 인터넷으로 키워드로 검색하면 초불연에서 번역한 공부짓다라는 말만 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어느 경우에 사용될까? 불교방송 불교강좌시간에 송담스님의 법문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 공부는 눈으로 볼 수 있는 길이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이기 때문에 선지식의 직접적인 지도 없이는 백에 하나, 만에 하나도 올바르게 공부를 지어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송담스님, 불교방송 불교강좌 2012-05-09일자) 현재 3년째 불교방송에서 법문하고 있는 송담스님에 따르면 화두를 드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라 하였다. 이뭣고, 판치생모, 무자화두 등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라 하였다. 또 알 수 없는 의심으로 의정을 키워 나가는 것에 대하여 송담스님은 공부짓는 것이라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사항은 초불연에서 번역한 ‘공부짓다’라는 말은 선가에서 사용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 공부짓다 vs 익히다 초불연 번역어 중에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이라는 문구가 있다. 여기서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bhaavito bahuliikato’이다. 이중 ‘[공부]지으면’에 해당되는 빠알리어가 ‘bahuliikato’이다. Bahuliikato의 동사형은 ‘bahulikaroti’이다. 이는 ‘진지하게 행하다, 자주행하다. 헌신하다, 증가시키다’ 라는 뜻이다. 그리고 bahulikaroti의 과거분사형이 ‘Bahulikata’이다. 이는 ‘자주실행된’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bhaavito bahuliikato’의 뜻은 ‘열심히 수행하였을 때’ 라는 뜻이 된다. 그럴 때 ‘큰 과보(mahapphala)’ 와 ‘큰 결실’이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초불연에서는 “하나의 법을 닦고 많이 [공부]지으면 큰 결실이 있고 큰 이익이 있다.”라고 하였다. 열심히 수행하는 것, 즉 Bahulikata에 대하여 ‘공부짓는’ 것으로 번역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는 “하나의 원리를 닦고 익히면, 커다란 결과와 커다란 공덕이 있다.”라고 번역하였다. Bahulikata에 대하여 ‘익힌다’라는 뜻으로 번역한 것이다. 공부짓는 것과 익히는 것은 같은 뜻일 수 있다. 그러나 공부짓는다는 것은 일반국민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말이다. 물건을 만드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공부를 짓는 것인지에 대하여 으아해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선가에서 일상적으로 쓰이는 말이다. 그런 말들이 빠알리니까야에 보이는 것이다. 에까담마경(S54:1)의 16단계 호흡 초불연의 번역에서 ‘공부짓다’라는 말은 에까담마경(S54:1)에서도 빈번하게 나온다. 이를 전재성박사의 번역과 비교하여 보았다. 16단계 호흡에 대한 내용이다. 구 분 1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Dīghaṃ vā assasanto dīghaṃ assasāmīti pajānātī. Dīghaṃ vā passasanto dīgh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초불연 길게 들이쉬면서는 &lt;길게 들이쉰다.&gt;고 꿰뚫어 알고, 길게 내쉬면서는 &lt;길게 내쉰다.&gt;고 꿰뚫어 안다. 전재성박사 길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길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길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구 분 2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Rassaṃ vā assasanto rassaṃ assasāmīti pajānāti. Rassaṃ vā passasanto rassaṃ passasāmīti pajānāti. pajānāti 초불연 짧게 들이쉬면서는 &lt;짧게 들이쉰다.&gt;고 꿰뚫어 알고, 짧게 내쉬면서는 &lt;짧게 내쉰다.&gt;고 꿰뚫어 안다. 꿰뚫어 안다. 전재성박사 짧게 숨을 들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들이쉰다고 분명히 알고 짧게 숨을 내쉴 때는 나는 짧게 숨을 내쉰다고 분명히 안다. 분명히 안다. 구 분 3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Sabbakāyapaṭisaṃvedi assasissāmīti sikkhati. Sabbakāyapaṭisaṃvedi passasissāmīti sikkhati. sikkhati. 초불연 &lt;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신체의 전신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전념한다 구 분 4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kāy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kāyasaṅkhāra 초불연 &lt;몸의 작용[身行]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몸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몸의 작용[身行] 전재성박사 신체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신체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신체의 형성 구 분 5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pīti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Pīti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희열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희열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희열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구 분 6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Sukh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Sukh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행복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행복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행복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구 분 7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saṅkhāra 초불연 &lt;마음의 작용[心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마음의 작용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마음의 작용[心行] 전재성박사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의 형성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마음의 형성 구 분 8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Passambhayaṃ cittasaṅkhār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마음의 작용을 편안히 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편안히 하면서 전재성박사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의 형성을 그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그치면서 구 분 9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Cittapaṭisaṃvedī assasissāmīti sikkhati. Cittapaṭisaṃved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마음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마음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집중하면서 전재성박사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경험하면서 구 분 10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Abhippamod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Abhippamod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해탈하게 하면서 전재성박사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기쁘게 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기쁘게 하면서 구 분 11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Samādah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Samādah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마음을 집중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마음을 집중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집중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구 분 12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Vimocayaṃ cittaṃ assasissāmīti sikkhati. Vimocayaṃ cittaṃ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마음을 해탈하게 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마음을 해탈시키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구 분 13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Anicc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Anicc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무상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무상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무상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무상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구 분 14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Virā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Virāgā 초불연 &lt;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탐욕이 빛바램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탐욕이 빛바램 전재성박사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사라짐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사라짐 구 분 15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Nirodh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Nirodh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초불연 &lt;소멸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소멸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전재성박사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소멸함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구 분 16단계 호흡 내용 비 고 빠알리 Paṭinissaggānupassī 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nupassī passasissāmīti sikkhati. Paṭinissaggā 초불연 &lt;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들이쉬리라.&gt;며 공부짓고, &lt;놓아버림을 관찰하면서 내쉬리라.&gt;며 공부짓는다. 놓아버림 전재성박사 완전히 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며 완전히 버림을 관찰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 완전히 버림 위 16단계 호흡법은 맛지마니까야 마하라훌라와다경(M62)에서도 볼 수 있다. 들숨날숨인가, 날숨들숨인가 경에서 호흡에 대한 빠알리어는 ‘아나빠나(ānāpāna)’이다. Ānā는 ‘호흡, 내쉬기, 들이쉬기’로 번역된다. 또 pāna는 ‘생명, 목숨, 생물’로 번역 된다. 아나빠나(ānāpāna)에 대하여 ‘날숨과 들숨’으로 번역된다. 이를 출입식(出入息), 안반(安般)으로 번역하기도 한다. 안반은 아나빠나의 음역이다. 후한시대 안세고(25-220)가 번역한 말이다. 이런 논리로 따지면 날숨이 아나이고, 들어 오는 것이 파나인 것이다. 그런데 초불연 번역을 보면 아나빠나에 대하여 ‘들숨날숨’이라 하였다. 원칙대로 한다면 ‘날숨들숨’이라 해야 할 것이다. 아나빠나에 대하여 전재성박사는 호흡(呼吸)으로 번역하였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숨을 내쉬거나 들이쉼’을 말한다. 따라서 호흡에 대한 우리말 번역은 ‘날숨들숨’이라 번역 할 수 있다. 그런 면으로 본다면 아나빠나의 번역어는 날숨들숨의 의미가 있는 ‘호흡’이 타당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불연에서는 거꾸로 ‘들숨날숨’이라 하였다. 마음챙김도 선가용어 빠알리어 ‘아나빠나사띠(ānāpānasati)’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들숨날숨에 대한 마음챙김’이라고 길게 번역하였다. 전재성박사는 간단히 ‘호흡새김’이라 번역하였다. 여기서 사띠에 대한 번역어 마음챙김과 새김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현재 틱낫한 스님이 방한 중에 있다. 불교계 신문사이트에서는 팃낙한 스님의 동정을 전하면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사띠를 마음챙김으로 받아 들였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그래서 마음챙김이라는 용어가 대세를 형성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마음챙김이라는 말은 사띠의 진정한 번역어라 볼 수 없다. 사띠의 원래 의미가 ‘기억’의 뜻을 가지고 있는데, 마음챙김이라는 말에 기억이라는 의미를 찾아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사띠라는 말에 마음과 관련된 그 어떤 어원도 없다. 따라서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이라고 번역한 것은 올바른 번역이라 보여지지 않는다. 마음챙김 역시 화두챙김처럼 선가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본다. 이는 불교tv사이트에서 종범스님은 ‘향기로운 법문’ 시간에서 ‘마음챙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사띠,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 초불연에서는 사띠에 대하여 마음챙김으로 번역하였다. 이와 달리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하여 ‘새김’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새김에 대하여 “기억과 사유가 일치하는 지금 여기에서 분명한 앎”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런 기억은 어떤 것일까? 에까담마경에서는 16단계 호흡을 소개 하고 있다. 이런 단계는 부처님이 제자들에게 설하신 것이다. 그런데 제자들이 듣기만 하고 곧바로 잊어 버리면 어떻게 될까? 부처님이 애써 이야기한 것을 한쪽귀로 듣고 한쪽 귀로 흘려 버린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동떨어진 복식호흡이나 단전호흡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부처님의 말씀을 새겨 듣지 않았을 때, 가르침을 기억하지 않았을 때 엉뚱한 방향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부처님 당시에는 요즘과 달리 노트도 필기구도 없었다. 오로지 듣는 것에 의존해야 했다. 그래서 부처님이 설법할 때 잘 귀기울여 들어야 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고 잘 새겨 들으려 애를 썼을 것이다. 그리고 잘 모르면 도반들에게 물어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말씀을 가급적 외우려 노력하였을 것이다. 필기구도, 노트도, 컴퓨터도 없던 시기에 당연히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르침을 기억하고, 이를 사유하는 것은 하나의 커다란 수행방법이라 볼 수 있다. 팔정도에서 정념에 대하여 올바른 기억으로 번역해도 무방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만약 올바른 기억이 없다면 사념처의 내용을 하나도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전재성박사는 사띠에 대한 설명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기억이 없이는 사물에 대한 지각을 올바로 알아차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새김의 토대에 대한 경(Satipatthanasutta, 염처경, M10)에서 싸띠가 주로 관찰의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으로서의 새김과 관계된 것이다. (사띠, 전재성박사, 디가니까야 해제) 이처럼 사띠는 지금 여기에서의 분명한 앎으로 해석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호흡수행 역시 부처님이 말씀 하신 16단계를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일 기억하고 있지 않다면 수행은 중구난방이 되어 버릴 것이다. 16단계를 모두 기억한 단계에서 실제로 호흡을 하며 호흡관찰을 하라는 의미로 받아 들인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여 새기지 않고 단지 대상에 대하여 마음챙김만 한다면 가르침과 동떨어진 것이라 보여진다. 마치 MBSR프로그램 같은 것이다. 종교성을 철저하게 배제하고 오로지 수행기법만 채용한 것이 MBSR이다. 따라서 MBSR은 마음챙김만 있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되새기는 사띠는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식카띠(sikkhati) 16단계 호흡을 보면 초불연과 전재성박사의 번역에 대한 상이점이 보인다. 그것은 ‘공부짓다’라는 말이다. 공부짓다라는 말은 선가의 용어라고 앞서 말한 바 있다. 그렇다면 ‘공부짓다’라는 말은 어떤 빠알리어를 번역한 것일까? 앞서 언급된 내용을 보면 ‘Bahulikata’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공부짓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고, 전재성박사는 ‘익히다’라는 뜻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16단계 호흡에서 빠알리어 식카띠(sikkhati)가 있다. 이 식카띠에 대하여 초불연에서는 또 ‘공부짓다’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앞서 언급된 Bahulikata도 ‘공부짓다’의 뜻이고, sikkhati도 역시 ‘공부짓다’로 번역한 것이다. 이에 반하여 전재성박사는 전자의 경우 ‘익히다’, 후자의 경우 ‘전념하다’로 달리 번역하였다. 그러나 초불연에서는 두 빠알리어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구분없이 ‘공부짓다’라고 하였다. . 그런 식카띠(sikkhati)에 대한 사전적 의미는 ‘전념하다, 노력하다’의 뜻이다. 그런데 초불연에서는 선가의 용어인 ‘공부짓다’라고 번역한 것이다. 그래서 “온몸을 경험하면서 들이쉬리라며 공부짓고, 온몸을 경험하면서 내쉬리라며 공부짓는다.”라고 하여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대하여 ‘공부짓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전재성박사는 “신체의 전신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들이쉰다고 전념하고 온 몸을 경험하면서 나는 숨을 내쉰다고 전념한다.”라고 번역함으로서 호흡하는 것에 대하여 ‘전념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뻐알리어 식카띠(sikkhati)에 대하여 한편에서는 ‘공부짓는다’, 또 한편에서는 ‘전념한다’라고 번역한 것을 알 수 있다. 용어에 대한 정화가 필요한 때 초기불교가 소개 된지 얼마 되지 않았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나온 시점이 1999년이므로 이제 14년 된 것이다. 그 사이에 4부 니까야는 모두 번역되었고, 그것도 두 종류의 번역서를 보게 되는 행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나 번역어를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하는 내용이 많다. ‘잡도리하다, 마음챙기다, 공부짓다’와 같은 말이다. 사전을 찾아 보아야 알 수 있고, 심지어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신조어도 있다. 그런가 하면 선가에서만 사용되는 용어도 있다. ‘잡도리하다, 마음챙기다, 공부짓다’라는 말은 선가에서 사용하는 말이다. 이런 말은 선사들의 법문을 들어 보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알 수 없는 의심으로 화두를 참구할 때 이를 ‘공부한다’라고 말하고 또 ‘공부짓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화두에 전념하는 것에 대하여 ‘잡도리한다’고 말하고, 화두챙기는 것을 ‘마음챙긴다’라는 의미로 사용하기도 한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사실은 빠알리니까야에 선가용어가 상당수 침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종전의 한역 번역을 답습한 것도 눈에 띈다. 담마에 대하여 초지일관 법(法)이라 하는가 하면, 한역 천신(天神)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 좋은 예이다. 또 ‘촌스럽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는 비속어처럼 보인다. 더구나 촌에 사는 사람들이 본다면 매우 서운해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이제 용어에 대한 정화가 필요한 시기이다. 좀 더 품위있고 격조 높은 용어로 순화할 때가 되었다. 2013-05-13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선가(禪家)용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선가(禪家)용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16단계 호흡&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16단계 호흡&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에까담마경&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에까담마경&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S54:1&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S54:1&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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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Mon, 13 May 2013 18:16:14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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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이날만큼은 불국토, 2013년 서울 연등축제</title>
	            <description> 이날만큼은 불국토, 2013년 서울 연등축제 매년 연등축제를 참관하고 있다. 직접참여 하는 것이 아니라 지켜 보면서 사진과 동영상과 글을 남기는 것이다. 참관한 것은 2004년 부터이고 글로 남긴 것은 2007년부터 7년 째이다. 그 이전 중학교시절 종립중학교를 다녔으므로 동국대에서 조계사까지 제등행렬에 참가한 적이 있다. 그 이후 오랜 공백기간을 거쳐서 2004년 이래 매번 참관하여 기록을 남기고 있다. 조계사에 도착하여 5월 11일 오후 조계사에 도착하였다. 함께 연등축제를 구경하기로 한 법우님들과 약속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계사는 오색연등의 물결로 넘쳐났다. 그리고 외국인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 조계사가 경복궁과 창덕궁, 인사동을 잇는 전통문화벨트에 속하기 때문일 것이다. 인사동 외국인 거리악사 간단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인사동길을 따라 종로3가로 향하였다. 인사동길은 언제 보아도 활력이 넘친다. 전통문화벨트에 속해서일까 외국인 관광객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유독 외국인 거리악사가 눈에 띄였다. 종로 3가 목좋은 자리에 종로3가 탑골공원 앞에 마련된 계단식귀빈석 바로 옆 목좋은 자리에 앉았다. 주변을 둘러 보니 상당수의 외국인들이 자리를 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바로 앞에 어린이 들이 있어서 사진을 찍을 때마다 뒤통수가 보였다. 사소해 보이는 것들 위주로 매번 참관하는 연등축제에 대한 이야기를 어떻게 풀어 나갈지 고민하였다. 예전과 같이 시간대별로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표현 하고 싶었다. 보기에 화려한 장엄등을 부각하는 것 보다 현지에서 본 사소해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이이다. 예전과 달리 동대문이 아닌 종로3가 쪽에 있다 보니 전반적으로 화면이 어둡다. 동대문에서는 7시에 출발하기 때문에 날이 어둡지 않아 비교적 좋은 화면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문화재의 상징과도 같은 동대문과 전통문화의 상징과도 같은 연등축제가 어우러졌을 때 최상의 화면을 제공한다. 그래서 연등축제 행진이 스타트 되는 동대문에 사진작가들이 몰려 있다. 2011년 연등축제(동대문) 고정된 장소에서 찍다 보니 이번 참관의 경우 종로3가 귀빈석 옆에 자리잡고 고정된 위치에서 촬영에 임하였다. 그러다 보니 지나가는 행렬을 같은 위치에서 찍을 수 밖에 없고 주변에 보이는 동정을 찍을 수밖에 없다.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한 기묘한 포즈 연등축제를 즐기는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 불자들도 연등축제에 대하여 잘 모르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연등축제가 있는 줄 조차 모르는 사람이 있고, 설령 알고 있더라도 한 번도 참관해 본적이 없는 불자들이 부지기 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매년 한 번 열리는 연등축제에 맛을 들인 사람들이라면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일까 앞에 어느 분은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하여 기묘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우리와 유사한 중국스님 복식 스님들의 모습을 담아 보았다. 이번 연등축제에서 여러 불교국가에서 온 스님들을 볼 수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복식이다. 중국스님의 경우 우리나라 스님들과 복식이 매우 유사하다. 회색승복에다 위아래가 하나로 연결되어 원피스형가운을 입고 있다. 중국스님들의 복식도 다양하다. 일반적으로 소매가 긴 도포형식인데 중국천태종스님들의 가사를 수한 모습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문양이 새겨진 가사, 일본스님 복식 다음으로 일본스님이다. 일본스님의 승복은 우리와 다르다. 귀빈석에서 관람하다 빠져 나가는 일본스님의 복식을 보면 컬러풀하고 다양하다. 승복이 통일 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일본은 종파불교이기 때문에 종파마다 독특한 승복이 있기 때문이라 보여진다. 승복 위에 입는 가사 역시 우리와 다르다. 무사정권 시절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처럼 종파를 상징하는 문양을 볼 수 있다. 테라와다 빅쿠의 복식 이번 연등행렬에서 가장 많이 눈의 띄는 승복은 단연 노랑가사이었다. 주로 동남아 테라와다 불교국가의 비구승들이다. 그런데 테라와다 가사도 국가마다 형태와 색깔이 약간씩 차이가 남을 알 수 있다. 간편복 차림의 네팔복식 네팔은 어디 불교에 속할까? 네팔스님의 가사를 보면 간편복식처럼 보인다. 눈에 익숙한 티벳복식 티벳불교의 경우 달라이라마 존자의 사진을 자주 접하기 때문에 눈에 익숙하다. 회색장삼에 괴색가사 우리나라 스님들의 복식은 대체로 통일되어 있다. 회색장삼에 괴색가사를 특징으로 한다. 남자와 여자의 복식이 동일한 밀교계통 우리나라에는 여러 종단이 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단 뿐만 아니라 태고종, 천태종 등 무려 168개나 종단이 등록되어 있다. 이와 같인 많은 종단 중에서도 밀교계통의 종단이 있다. 총지종과 진각종이다. 밀교계통 종단의 복식은 대승불교종단의복식과 차이가 있다. 남자의 경우 머리를 기르고 있고, 또 남자와 여자의 복식이 동일 하다. 외국인 스님들 스님들 복식과 함께 눈여겨 본 것은 외국인들이다. 가로에는 수 많은 외국인들을 볼 수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외국인 스님들이다. 화계사가 지나 갈 때 볼 수 있다. 외국인들의 연등행렬 화계사 행렬이 지나갈 때 늘 볼 수 있는 것이 외국인들의 연등행렬이다. 무우수아래의 마야부인 연등행렬은 한국불자들만의 잔치는 아니다.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인 불자공동체의 공동잔치이기 때문이다. 주로 취업을 목적으로 입국하여 일하고 있는 근로자들이다. 네팔, 태국, 몽고, 스리랑카 불자공동체이다. 그런데 매년 보이던 스리랑카 불자공동체가 이번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번 외국인 불자공동체의 행진에서 눈에 띈 것 중의 하나가 네팔불자공동체이다. 부처님의 탄생설화를 주제로 하여 무우수아래의 마야부인을 나탄 것을 보면 다음과 같다. 태국 불자공동체 태국 불자공동체의 모습도 눈에 띈다. 대만불자공동체 대만불자공동체의 경우 대만불광산사의 깃발을 들고 참여 하였다. 동자승캐릭터로 분장한 모습과 중국전통의상을 입은 불자의 환한 미소가 돗보인다. 기독트리는 OK이고 전통연등은 NO, 인천공항 매년 열리는 불교인의 축제 연등행렬은 2012년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그래서 불자들뿐만 아니라 국민들, 그리고 전세계인이 즐기는 축제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인천공항이다. 법보신문 기사에 따르면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연등설치를 끝내 거부하였다고 한다. 이유는 내부규정상 실내에 특정종교에 대한 시설물을 설치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천공항에서는 매년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트리를 점등하여 왔다. 2012년 인천공항 기독트리 사진: 법보신문 크리스마스트리를 설치한 이유에 대하여 인테리어차원에서 설치한 것이라 한다. 이런 궤변에 대하여 불교계에서는 전통문화에 대한 몰이해와 불교차별이 아닌가 하여 강력하게 성토 하고 있다. 인천공항은 우리나라 관문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기독트리는 OK이고, 전통연등은 NO인 것이 현실이다. 특히 국가지정문화재인 연등축제를 전세계에 알리는 것 조차 일개 종교시설물이라고 치부하여 석가탑과 같은 장엄연등 설치를 거부하는 것은 전통문화에 대한 몰상식의 극치라 볼 수 있다. 동시에 명백히 불교차별행위이다. 5월 11일 종로는 연꽃세상 5월 11일 종로는 연꽃세상이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연등행렬을 보고 함께 즐겼다. 이제까지 TV프로에서나 보던 ‘관제화된’ 축제와 다른 모습이다. 이는 참가자의 표정을 보면 읽을 수 있다. 참가자나 참관자나 모두 어우러져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각종 종교차별행위에도 불구하고 이 날 하루만은 우리나라가 불국토가 된 느낌이었다. 이날 하루 만큼은 불자들의 세상 연등행렬은 두 시간에 걸쳐서 진행되었다. 끊임없이 밀려 오는 연등물결을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그리고 불자들이 만들어낸 장엄한 행렬에 감동하고 환희한다. 이날 하루 만큼은 불자들의 세상이었다. 자애경 음악동영상을 만들고 2013년 연등축제 전과정을 하나의 파일로 만들었다. 중국계 말레이시아의 세계적인 불자가수인 Imee Ooi(黃慧音)의 음악 ‘멧따경(자애경, Sn1.8)’을 배경음악으로 하였다. 자애경 음악동영상이다. 2013년 서울연등축제 음악: 멧따경(자애경, Sn1.8) 노래: Imee Ooi(黃慧音) 까라니야멧따경(자애경-Sn1.8).docx 이 동영상을 유튜브에도 올렸다. 유튜브주소: http://www.youtube.com/watch?v=ScZYoszCT4M&amp;feature=youtu.be (2013 Seoul Lotus Lantern Festival, Metta Sutta sung by Imee Ooi) 2013-05-12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자애경&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자애경&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2013년 서울 연등축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2013년 서울 연등축제&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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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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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천상천하유아독존,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 어떻게 다른가</title>
	            <description> 천상천하유아독존,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 어떻게 다른가 부처님오신날이 머지 않았다. 부처님오신날로부터 일주일 이전에 개최되는 불교인들의 최대축제인 연등축제가 내일로 다가왔다. 이런 때 늘 말하여지는 것은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이다. 2012년 부처님오신날(청계사) 부처님오시날을 앞두고 각종단에서는 종정스님의 법어를 발표한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에서는 “일상속에서 참나를 찾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참선을 생활화해야함을 강조하였다. 반면 태고종에서는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은 인류의 행복한 삶을 위하여, 진리의 마음과 눈으로 자비와 지혜가 넘치는 청정한 안락정토를 만들어 인류가 하나의 자유공동체로 살아가는 무위자연의 세상을 이루고자”라는 법어를 발표하였다. 비교적 부처님오신날에 적합한 법어라 생각된다.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까닭은?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법사들은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무엇일까?”라며 법문한다. 공통적으로 가장 많이 하는 ‘행복’이다. 중생을 행복으로 이끌기 위하여 부처님이 이땅에 오셨다고 말한다. 대다수 법사들은 행복을 설명하기 위하여 부처님의 전도선언에 쓰여져 있는 “많은 사람들의 이익을 위하여, 많은 사람들의 안락을 위하여, 세상을 불쌍히 여겨 하늘사람과 인간의 이익과 안락을 위하여 길을 떠나라.(S4:5)”라는 구절을 근거로 든다. 부처님이 이 땅에 출현한 목적, 부처님이 가르침을 펼치신 목적이 행복이라는 것이다. 경에서는 ‘이익’과 ‘안락’으로 표현 되어 있다. 이익에 대한 빠알리어는 히따(hitā)이다. 빠알리사전에 따르면 ‘유익한, 이익, 친구’ 등으로 번역된다. 영역에서는 welfare(복지)라 하였다. 안락에 대한 빠알리어는 수카(sukhā)이다. 행복이라는 뜻이다. 영역에서는 ‘good of many’ 이라 하였다. ‘다수를 위한 좋은 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빠알리어 ‘hitāya sukhāya’는 ‘이익과 행복을 위하여’ 또는 ‘복지와 다수를 위한 좋은 일을 위하여’ 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뭇삶들의 행복을 위하여 오신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행복은 어떤 것일까? 한문 탄생게(誕生偈)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가장 많이 거론 되는 또 다른 말은 무엇일까? 그것은 부처님의 ‘탄생게’일 것이다. 한문으로 되어 있는 ‘천상천하유아독족(天上天下 唯我獨尊)’이다. 불자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게송이다. 풀이하면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라는 뜻이다. 한문탄생게에는 문구가 더 붙어 있다는 것을 아는 불자들은 그다지 많지 않다.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는 문구이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안(安)’자를 행복이라 번역할 수 있다. 빠알리어 수카(sukhā)에 대하여 행복으로 번역하지만 때에 따라 지복(至福), 안락으로도 번역된다. 따라서 “편안케 하리라”라는 “행복케 하리라”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번역은 문제가 있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초월적인 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우리를 편한케 하여 주거나 행복을 주는 초월적인 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문 ‘아당안지(我當安之)’를 “편안케 하리라”라고 번역하면 기복적인 신앙으로 발전할 수 있다. 부처님에게 기도를 하면 무엇이든지 들어 주는 존재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가이드(안내자)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부처님은 결코 신격화된 존재도 아니고 초월적 존재도 아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소원을 들어 주는 만능해결사가 아니다. 숫따니빠따에서 부처님에 대한 묘사를 보면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라는 정형구를 볼 수 있다. 외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귀의 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문구를 보면 부처님은 소원을 들어 주는 대상이 아니라 마치 ‘가이드(안내자)’와 같은 역할임을 알 수 있다. 여행을 가면 가이드가 안내를 하듯이 부처님은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길을 안내하는 가이드이자, 병을 고쳐 주는 의사이고, 모든 것을 가르쳐 주는 스승이다. 이처럼 가이드로서, 의사로서, 스승으로서 부처님이 행복을 말한 것은 다름 아닌 가르침을 통한 행복을 말한다. 빠알리니까야를 통하여 가르침을 접하였을 때 마음속으로 기쁨과 희열과 행복과 안락을 느꼈다면 부처님의 전도선언은 이루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부처님이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라고 한 것이 물질적인 이익과 행복이 아니라 가르침을 통한 이익과 행복인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역 탄생게를 보면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처럼, 마치 부처님이 무슨 소원이든지 다 들어줄 것 같은 부처님, 그리고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처럼 초월적인 부처님으로 묘사 되어 있다. 과연 한역탄생게는 타당한 것일까? 빠알리 탄생게(誕生偈) 빠알리니까야를 접하면서 한역탄생게뿐만 아니라 또다른 탄생게가 있음을 알았다. 한역탄생게의 원조격이라 볼 수 있는 부처님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는 디가니까야에 실려 있다. 디가니까야 ‘비유의 큰경(D14)’에 한역 탄생게와 유사한 말이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Dhammatā esā bhikkhave. Sampatijāto bodhisatto samehi pādehi patiṭṭhahitvā uttarābhimukho1 satta padavītihāre gacchati setamhi chatte anuhīramāne , sabbā ca disā anuviloketi , āsahiñca vācambhāsati: &quot;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quot;ti. Ayamettha dhammatā.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러한 원리가 있다. 보살은 태어나자마자 단단하게 발을 땅에 딛고 서서 북쪽으로 일곱발을 내딛고 흰 양산에 둘러싸여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다. 이것이 이 경우의 원리인 것이다. (마하빠다나경-Mahāpadāna Sutta-비유의 큰 경, 디가니까야 D14, 전재성님역) 경에 따르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화자로 되어 있다. 부처님이 과거 전생을 회상하면서 91겁전에 탄생한 과거칠불중의 하나인 위빠시(vipassī)붓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 주고 있다. 그런데 경을 보면 한문경전과 다르다. 한역경전에서는 석가모니부처님이 탄생하자마자 직접 말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경에서는 91겁전의 위빠시붓다이야기에 대한 것이다. 빠알리니까야에 따르면 위빠시 붓다를 비롯하여 고따마붓다에 이르기 까지 과거칠불의 행적은 모두 동일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태어남에서부터 열반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하다. 이는 깨달음의 내용이 똑같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라고 보여진다. 역대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연기법으로서 모두 같은 원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한문탄생게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석가모니부처님 이야기가 아니라 91겁전의 위빠시붓다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이다. 탄생게를 비교해 보니 한문탄생게와 빠알리탄생게는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전혀 다른 부분도 있다. 이를 비교해 보면 다음 표와 같다. 구 분 내 용 비 고 한문경전 수행본기경, 강신품 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아래 나 홀로 존귀하도다.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대승보살사상 디가니까야 마하빠다나경(D14)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근본가르침 한문게송 유아독족(唯我獨尊)에 해당되는 말이 ‘가장 뛰어난 님(agga), 가장 훌륭한 님(jeṭṭha), 가장 선구적인 님(seṭṭha)’이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유사하다. 그러나 다음 구절로 넘어가면 전혀 다른 말이 되어 버린다. 빠알리니까야에 한문게송에 대응되는 ‘삼계개고(三界皆苦)’와 ‘아당안지(我當安之)’라는 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대신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라는 문장이 보인다. 이는 아라한 선언 “태어남은 부수어지고 청정한 삶은 이루어졌다. 해야 할 일을 다 마치고 더 이상 윤회하지 않는다. Khīṇā jāti, vusitaṃ brahmacariyaṃ, kataṃ karaṇīyaṃ, nāparaṃ itthattāyā)”의 마지막 구절에 해당된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빠알리탄생게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다. Pps.IV.185에 따르면, 이 사건의 각각의 양상은 부처님의 최후의 성취들의 조건의 전조로서 설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단단하게 발을 땅위에 딛고 서서’라는 것은 네 가지 신통력의 기초(catuiddhipada, 四神足)에 대한 전조였다. ‘북쪽으로’라는 것은 대중을 뛰어넘는 것을 말하고, ‘일곱발자욱’은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sattabhojjahanga, 七覺支)를 성취하는 것을 말하고, ‘흰 양산’은 해탈의 우산을 성취하는 것을 말하고, ‘모든 방향을 바라보며’는 장애 없는 전지의 지혜의 획득을 말한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 것은 가르침의 퇴전할 수 없는 수레를 굴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라는 것은 ‘남김이 없는 열반의 세계(無餘涅槃)’에 드는 것을 말한다. (빠알리 탄생게 설명, 전재성박사)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한문탄생게에서 볼 수 없는 문구가 있다. 그것은 ‘열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빠알리탄생게에서는 아라한 선언의 마지막 부분을 언급하면서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라고 선언되어 있지만, 한문게송에서는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라 하여 “삼계가 모두 고통에 헤매이니 내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로 된 것이 다르다.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 한국불교 이렇게 다른 이유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 때문이다. 부처님은 탄생게를 통하여 불교의 근본적은 목적이 열반에 있음을 말하였다. 또 모든 행복의 종착지 역시 열반이라 하였다. 그런 열반은 괴로움의 소멸이자 동시에 윤회의 종식이다. 그러나 한문탄생게를 보면 열반에 대한 이야기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대신 괴로움에 처한 중생을 편안케 해주리라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중생의 행복에 대하여 말한 것이다. 여러 행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열반대승불교에서는 열반에 대하여 말하지 않았다. 빠알리 게송에서는 완전한 열반에 대하여 언급하였지만, 대승의 게송에서는 중생구제에 역점을 둔 것이 다르다. 이것이 탄생게에서 볼 수 있는 근본불교와 대승불교의 가장 큰 차이이다. 이처럼 초기불교에서 지향하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과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르다 보니 탄생게의 내용도 달라졌고, 그에 따라 스님들의 법문도 달라졌다. 우리나라 스님들의 법문에서 열반에 대한 것을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안락과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이유라 볼 수 있다. 그런 법문이 하나 있다. 법륜스님의 한문탄생게 해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법륜스님이 탄생게에 대하여 법문한 것을 어느 블로그(법륜스님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에서 보았다. 2011년에 법문한 것을 보면 ‘천상천하유아독족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에 대하여 불교의 궁극적인 이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하였다. 법륜스님이 말한 탄생게에 대한 설명을 빠알리니까야 각주와 비교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 태어나자 마자 일곱발자국을 걸었다. 구 분 내 용 비 고 법륜스님 법문 (2011년) 부처님이 일곱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이 육도윤회에서 벗어 났다는 것을 묘사한 것입니다. 육도윤회에서 벗어남 빠알리니까야 주석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sattabhojjahanga, 七覺支)를 성취하는 것을 말함 칠각지 성취 2) 천상천하유아독존: 하늘 위 하늘 아래 모든 생명은 존귀하다 구 분 내 용 비 고 법륜스님 법문 (2011년) 더 이상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을 천하의 세계로부터 벗어났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탁소리 해석: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 존엄의 엄숙한 선포이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 -존재의 존엄성 선포 빠알리니까야 주석 ‘나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님이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선구적인 님이다.’라고 ‘무리의 우두머리인 것을 선언’한 것은 가르침의 퇴전할 수 없는 수레를 굴리는 것을 말함 불퇴전의 가르침수레를 굴리는 것 3) 삼계개고아당안지: 뭇 중생들이 괴로움에 허덕이니 이를 편안케 하리라 구 분 내 용 비 고 법륜스님 법문 (2011년) 생명을 가진 모든 존재는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목탁소리 해석: 동체대비심(同　大悲心)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동체대비 빠알리니까야 주석 - 이와 같이 비교를 하여 보았으나 탄생게가 전반부만 유사할 뿐 후반부는 완전히 다른 내용이기 때문에 단순 비교하는 것이 무리가 있다. 법륜스님의 행복론 한문탄생게를 통하여 대승불교에서는 무엇을 말하고자함일까? 이는 법륜스님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행복한 세상은 불교인을 위한 세상이 아니라 불법을 모르는 이들을 위한 세상입니다. 깨우치지 못한 자들도 어여삐 여겨서 고통이 덜한 세상을 만들어서 그들 또한 안온하게 살게 해주자. 이것이 불교에서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이유입니다. (법륜스님, (법륜스님 “부처님이 이땅에 오신 뜻은…), 희망플레너) 법륜스님의 법문을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행복에 대한 이야기이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열반에 대한 언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는 법륜스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선사들 법문의 공통적 특징이다. 어느 법사든지 행복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만 부처님이 말씀 하신 궁극적인 행복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다. 법륜스님은 한문탄생게가 불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다름아닌 행복이라 한다. 행복의 종류도 여럿 있지만 열반에 대한 이야기는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일부만 알려주고 정작 알려 주어야 할 것은 가르쳐 주지 않는 것과 같다. 그러나 빠알리탄생게를 보면 부처님은 분명히 궁극적 행복에 대하여 말씀 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의 궁극적인 목표가 해탈과 열반의 실현에 있다는 것을 위빠시붓다의 탄생게 “이것은 나의 최후의 태어남이다. 나에게는 더 이상 다시 태어남은 없다.”를 들어 분명히 설명하고 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부처님은 일상적인 행복만 설한 것이 아니다.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행복, 그리고 시계생천으로 설명되는 내생의 행복도 설하였다. 그러나 현생의 행복과 내생의 행복 못지 않게 궁극적 행복도 설하였다. 해탈과 열반의 실현이라는 궁극적 행복이 출가수행자들만을 위한 가르침이라 볼 수 있을까? 부처님은 출가용 가르침과 재가용 가르침을 구분하여 따로 가르친 것일까? 부처님은 초심자나 재가자들에게 보시하고 지계하면 하늘나라에 태어난다는 쉬운 가르침부터 펼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재가자일지라도 법에 대하여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때 사성제를 설하였다. 이는 부처님이 재가자인 마하나마에게 “마하나마여, 세상에 재가신자는 발생과 소멸에 대한 고귀하고 통찰력 있는 지혜를 갖추고 올바른 괴로움의 소멸로 이끄는 지혜를 성취합니다.(S55:37)”라고 말한 것에서 알 수 있다. 부처님은 재가불자라도 삼귀의-오계-믿음-보시—지혜로 이어지는 단계적인 가르침을 설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마치 비가 내리면 온 대지를 골고루 적시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차별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남김 없이 전달되어야 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출재가의 차별 없듯이 부처님의 가르침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은 것이다. 이말은 전도선언에 나오는 말이다. 부처님이 전도를 떠나는 제자들에게 “수행승들이여,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 말의 뜻은 무엇일까?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 의미있고 형식을 갖춘 법”이라는 정형구가 빠알리니까야 도처에 등장한다. 이 정형구에 대하여 청정도론의 설명에 따르면 단하나의 게송이라도 감탄을 자아내기 때문에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라 하였다. 또 내용이 서론, 본론, 결론으로 되어 있어서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고’라 하였다. 그런데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끝도 좋다”라는 말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빠짐 없이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본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일부분만 따로 떼어내어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전달하는 것이다. 또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떤 특정목적을 위하여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보았을 때 한문탄생게는 일부만 알려진 것이다. 부처님의 전도선언에서 “처음도 훌륭하고 중간도 훌륭하고 마지막도 훌륭한, 내용을 갖추고 형식이 완성된 가르침을 설하라.(S4:5)”의 가르침에 위배 된 것이다. 따라서 ‘아당안지’와 같이 ‘내가 편안케하리라’ 하며 부분적인 행복에 대해서만 언급한 것 역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한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처음도, 중간도, 끝도 좋은 것이라면 열반에 대해서도 당연히 알려 주어야 한다. 법사들이 불자들에게 단지 행복에 대해서만 말하기 보다 열반에 대해서도 남김 없이 알려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전달하는 것이라 본다. 2013-05-10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천상천하유아독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천상천하유아독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한문탄생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한문탄생게&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빠알리탄생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빠알리탄생게&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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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Fri, 10 May 2013 14:06:39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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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불교방송 이사회 막말퍼레이드, 누구책임이 더 큰가 </title>
	            <description> 불교방송 이사회 막말퍼레이드, 누구책임이 더 큰가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인가 출가와 재가의 막말퍼레이드가 점입가경이다. 불교닷컴 기사에 따르면 불교방송 이사회에서 스님이사와 재가이사가 언쟁을 벌였다고 한다. 파워게임을 하는 과정에서 감정이 지나쳐 독설을 주고 받았다고 한다. 그런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스님 이사A: &quot;아주 행위가 불손하고만, 왜 그렇게 큰소리를 쳐, 당신이 신도야 뭐야, 신도면 신도답게 해. 신도는 저게 무슨 신도야&quot; 스님 이사B : &quot;쳐다보면 어떡할 거요. 한번 더 (물컵으로 탁자를)쳐보지. 이런 사람을 이사라고 인정해야 하는 거요&quot; 스님 이사 C &quot;어디서 법을 개뿔같이 배워 와가지고 언어 폭력이나 하느냐&quot; 재가 이사 A : &quot;무슨 어른이 있어. 당신이 나보다 나이가 많느냐. 종하 스님 제외하고 나보다 나이가 많느냐. 당신들 다 나보다 어려&quot; 재가 이사 B : &quot;대중이 무슨 대중이야. 불교신도가 대중이지. 당신들 스님들 1만 명이 불교 주인인줄 알아요?&quot; 재가 이사 C : &quot;우리 스님들의 생각이 지금 글러먹었단 말이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셨어요&quot; (BBS 이사회 무슨 말 오갔나…진흥원 이사, 스님들에 험담하며 따져, 불교닷컴 2013-05-09) 사진: 불교포커스 대화내용을 보면 도저히 불교인들의 말이라 보여지지 않는다. “개뿔같이” “글러먹었다” 등 시정잡배들이나 할 소리를 불교지도층에서 하고 있다. 이쯤 되면 막가자는 것인가. 부부싸움하나 불자들은 불교방송 사태에 대하여 잘 모른다. 다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이권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유를 막론하고 관심있게 본 것은 불교인으로 품위를 손상하는 발언이다. 시정잡배나 조폭 수준의 말들이 난무하는 것을 보면 누구나 다 똑 같은 사람들이라는 양비론적 시각을 갖게 된다. 그리고 말꼬리를 붙들고 늘어지면서 감정을 자극하는 것을 보면 마치 ‘부부싸움’ 하는 것 같다. 부부싸움에도 단계가 있다 불교TV(BTN)사이트에 ‘김송호박사의 21세기 행복한 노후특강’ 프로가 있다. 종영프로이지만 접속하면 언제든지 볼 수 있다. 특강에서 김송호 박사는 ‘부부싸움에도 단계가 있다’라는 강의를 하였다. 미국의 가트만 연구소의 가트만박사의 연구보고서 결과를 이용하여 설명한 것이다. 부부사이의 관계를 연구한 가트만 박사는 3,000쌍을 조사하였다고 한다. 설문조사가 1년동안 행태를 파악하였는데, 외곽에 집을 지어 놓고 CCTV를 설치하여 자원자를 받아 생활하게 한 것이다. 분석한 결과 싸움에도 단계가 있다는 사실을 발표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난-경멸-방어-담쌓기’ 이렇게 네 가지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첫째, 비난단계이다 남자들의 경우 “당신 왜 맨날 하는 게 그 모양이야?”라고 말하거나, “하루종일 집구석에서 하는 일이 뭐가 있다고?”와 같은 비난의 말을 퍼붓는다. 이렇게 말할 때 여자들은 어떻게 말할까. 여자들의 경우 “아니 말하는 것이 당신 엄마를 꼭같이 닮았어?” 라든가 “왜 하는 것이 없어? 당신이 그러니까 애들도 나를 깔보지” 라고 받아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부부싸움에서 비난단계라 한다. 둘째, 경멸단계이다 남자의 경우 “웃기고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해?” 라고 말한다. 또 여성의 약한 부분, 예를 들면 정치나 사회현안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 대응을 잘 못하면 “야, 그것도 모르냐?”라고 면박을 준다. 좀더 심하게 이야기하면 “머리는 뒀다가 국 꿇여 먹어?” “그런건 네가 잘 보는 TV에는 안나오디?” 와 같이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경멸하는 말을 하면 상대방은 열받기 시작한다. 여자의 경우 “지금까지 당신이 나한테 해준 것이 뭐있어?” “아니, 꼴에 남자라고” 이렇게 남자를 깔아 뭉게는 발언을 한다. 이 단계가 경멸의 단계이다. 셋째, 방어단계이다 자기방어의 단계라 한다. 예를 들어 여자가 “당신은 맨날 그 모양이야?” “왜 맨날 술만 먹어? 그러니까 그 모양이지”라고 공격하면, 남자들은 “내가 맨날 그랬다고 그래” “일주일에 다섯 번 밖에 안했어” 라고 말하면서 방어모드로 들어간다. 그래도 계속 비난을 하면 “당신은 그러는게 문제야” “당신은 안그랬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방어단계이다. 이제 막판으로 가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당신이나 잘하셔” “그래, 나 이러는 거 이제 알았어?” “나, 원래 그런사람이야!” 라고 말하면서 대든다. 위험수위에 온 것이다. 넷째, 담쌓기 단계이다 남자의 경우 “일절만 해라, 일절만 응?” 라든가 “알았어, 됐어, 이제 그만해!” 라고 말하며 돌아서는 것이다. 그리고 그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여자의 경우 역시 비슷한 말을 한다. “알았거든!” “됐거든!” 와 같은 말이다. 그리고 다음부터 말을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담쌓기이다. 가장 위험수위가 높은 단계이다. 담쌓기 단계에 들어서면 말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감정표현을 할 수 없다. 그 다음 부터는 각자의 길로 가게 된다. 문제가 심각해지는 단계이다. 바람을 빼 주어야 행복한 부부들도 네 가지 단계를 거칠 수 있다. 그러나 가급적 담쌓기 단계까지 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낮은 단계에서 가라앉힐려고 노력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할까? 부드럽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말을 해도 말꼬투리를 잡지 않는 것이다. 감정이 상해 있는 상태에서 말꼬투리를 잡아 시비가 붙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말중에 한 단어를 집어서 다르게 해석할 수 있고 감정이 격한 상태에서 심한 말을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꼬리를 잡아 대응하고 또 그 말꼬리를 잡아 심한 말을 하면 점점 커져서 “뻥”하고 터지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김송호 박사에 따르면 바람을 빼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방법은 부드럽게 하는 것이다. 비난단계에서는 “그래, 당신말이 맞을 수 있는데 잠깐 그것에 대해서 생각좀 해 보자”라고 말한다. 경멸단계에서는 “내가 심한 말을 했네”라든가, “잠깐, 우리 부드럽게 이야기 하자” 등으로 제의를 하면 점점 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말싸움으로 인하여 ‘비난-경멸-방어-담쌓기’ 과정으로 간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행복한 부부와 이혼한 부부 행복한 부부와 이혼한 부부의 말하는 방식은 어떤것일까? 두 부류의 경계가 있다고 한다. 그것은 긍정적인 말과 부정적인 말에 있다고 한다. 행복한 부부는 긍정5이고 부정1이라 한다. 5대1로 긍정적인 말이 훨씬 많은 것이다. 부정적인 말을 한 번 하면, 긍정적인 말을 다섯 번 이상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혼한 부부는 1.25대1이라 한다. 1.25라는 것은 부정적인 말이다.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이 0.25더 많은 것이다. 그런데 부정적인 말이 긍정적인 말보다 강도가 훨씬 더 세다는 사실이다.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은 부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쌓인 다는 것이다. 남자들은 긍정적인 말을 들었을 때 곧바로 풀어지지만, 여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최소 다섯 번은 해 주어야 풀린다는 것이다. 남자는 1:1이지만, 여자는 1:5인 것이다. 여자는 부정적인 말을 한 번 들었을 때 긍정적인 말을 다섯 번 이상 해주어야 복구 될까말까 한다는 것이다. 원칙을 정해 놓고 싸워라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원칙을 정하라고 한다. “아무리 싸워도 같이 자야 한다”라든지, “집을 나가지 말자”라든지, “싸움이 붙으면 한 사람이 자리를 피하자”라든지 하여 원칙을 정해 놓으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마음이 가라앉으면, 감정이 가라 앉으면 빠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욱하는 마음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순간을 피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합의를 해 놓고, 원칙을 정해 놓고 대화를 하라는 것이다. 지금 경멸단계인가? BBS 불교방송이사회를 보면 부부싸움 하는 것 같다. 서로 말꼬리를 잡고, 또 말꼬리를 잡아 막말퍼레이드를 벌이고 있는 것이다. 부부싸움이 비난-경멸-방어-담쌓기 단계라 하는데, 출가와 재가의 부부싸움은 현재 어느 단계에 와 있을까? 아마도 ‘경멸단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경멸단계에사 튀어 나오는 말이 “웃기고 있네” “그걸 말이라고 해?”등의 말이라 하는데, 스님이사의 입에서 “어디서 법을 개뿔같이 배워 와가지고…”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고, 재가이사의 입에서 “스님들의 생각이 지금 글러먹었단 말이요”라고 말하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렇게 평행선을 달리다 벌어지면 각자의 길로 가게 될 것이다. 출가와 재가의 관계가 최악으로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이다. 어느 편을 들어야 하나 비난 단계를 넘어 서로 경멸하는 말을 주고 받는 단계에 와 있는 출가이사와 재가이사의 파워게임을 바라 보고 있는 불자들의 심정은 착잡하다. 이럴 경우 어느 편을 들어야 좋을지 모르는 것이다. 마치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울 때 어느 편을 들어야 할지 난감한 것이다. 이와 같은 출재가의 대립에 대하여 어느 불자는 재가이사의 무례함을 나무란다. 재가자로서 스님에게 막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막말을 나오게 된 요인은 무엇을까. 아마도 재가이사를 무시하는 스님이사의 말에 원인이 있을 수 있다. 비록 기사의 내용이긴 하지만 어느 스님이사의 “당신이 신도야 뭐야, 신도면 신도답게 해!”라는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한국불교에서 스님과 신도의 관계는 상호수직관계, 종속관계이다. 스님은 높은 자리에 있어서 지시하고, 신도는 낮은 자리에 있어서 지시에 따르는 상하관계를 말한다. 마찬가지로 불교방송이사스님들도 재가이사스님들을 낮추어 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반적으로 신도들은 스님을 존중하고 높게 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출가와 재가는 동등한 관계 그러나 불교방송이사라는 자리는 스님이사와 재가이사가 종속관계가 될 수 없다. 비록 승가와 재가로 신분은 다를지라도 똑 같은 권한과 의무를 가진 법적이사신분이기 때문이다. 마치 인터넷에서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오로지 하나의 아이디로만 통용되듯이 불교방송 이사회에 속한 출가이사와 재가이사는 법적으로 동등한 관계이다. 이런 대등한 관계는 노사도 마찬가지이다. 노조에서 파업을 일으키면 사용자측과 노조측이 협상테이블에 앉게 된다. 그 경우 회사를 대표하는 사장과 노조를 대표하는 노조위원장은 동등한 관계이다. 상하수직관계, 종속관계가 될 수 없다. 사장은 사용자측의 입장에서 협상에 임하고, 노조위원장은 노동자를 대표하여 협상에 임하기 때문에 대등한 관계이다. 마찬가지로 불교방송 이사회의 스님이사와 재가이사 역시 동등한 관계이다. 테이블에 앉아 있다는 것 자체가 동등한 관계이기 때문에 상하관계, 종속관계가 성립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에 따르면 “아주 행위가 불손하고만” “쳐다보면 어떡할 거요” “신도는 저게 무슨 신도야”라고 말하는 스님이사의 고압적이고 고자세를 엿볼 수 있다. 이런 자세라면 재가이사측에서 “당신들 다 나보다 어려” “당신들 스님들 1만 명이 불교 주인인줄 알아요?” “부처님께서는 그렇게 안 하셨어요” 와 같은 말이 나올 수 있다. 가는 말이 고아야 오는 말도 곱다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을 동등한 자격으로 인정하지 않아서 발생된 문제라 보여진다. 코메디3탄을 보고 불교방송사태가 일어 났을 때 ‘승가인가 이익단체인가? 율장의 새가사(袈裟)와 함께 제2 빅쿠(Bhikkhu)선언을’라는 제목으로 글을 올린 바 있다. 그 때 ‘코메디한다’라고 하였다. 코메디 1탄은 방송을 진행하는 스타스님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고개만 까닥했다는 이유로 불교방송사장을 ‘승가모독’이라 몰아부쳐 파업법회를 한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코메디 2탄은 방송스타스님이 생방송중인 여자 아나운서를 쫒아 내고 태연스럽게 방송을 진행한 것이라 하였다. 그래서 앞으로 코메디는 계속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예측대로 이번 불교방송이사회에서 스님이사와 재가이사들 사이에 막말하는 코메디3탄을 보게 되었다. 또 어떤 희극을 벌일지 앞으로 코메디 4탄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 없다. 누구 책임이 클까? 스님이사들과 재가이사들이 막말파동을 보면서 어떤 이들은 재가이사들을 비난할 지 모른다. 그래도 스님인데, 그것도 “거룩한 스님께 귀의합니다”와 같이 승보로서의 스님인데, 재가불자이사들이 무조건 잘못했다는 식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기사로 접한 것이지만 막말을 보면 스님들이 더 심하다. 노골적으로 무시하고 폄하하는 말이다. 보도 된 것이 이정도라면 보도 되지 않은 막말은 더 노골적일 수 있다. 그렇게 출가와 재가가 피터지게 싸웠을 때 누가 가장 큰 책임이 있을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스님이사들의 책임이 가장 크다. 왜냐하면 출가수행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는 “때묻지 않은 사람, 언제나 청정함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머리털만큼의 죄악이라도 구름처럼 크게 보이네.(S9:14)”라는 상윳따니까야 게송에서도 알 수 있다. 출가수행자의 탁구공만한 허물도 재가자가 눈에는 축구공 보다 더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명예와 이득과 환대를 바라면 출가자들은 세상을 등진사람들이다. 그래서 세상에서 멀리 떠나 깊은 산중에 들어가 산다. 그런데 세상으로 돌아와 각종 감투를 쓰고 있다면 이는 출가정신에 크게 어긋난다. 더구나 명예와 이득과 환대를 바라는 것이라면 부처님의 가르침에도 어긋난다. 이런 상황을 예견해서일까 부처님은 상윳따니까야 ‘이득과 명예의 모음(Lābhasakkāra Saṃyutta, S17)’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어떤 수행승이 이득과 환대와 명성에 압도되고 마음이 현혹되어 아침 일찍 옷을 입고 발우와 가사를 들고 마을이나 거리로 탁발을 하러 가는데 몸을 가다듬지 않고 말을 조심하지 않고 마음을 수호하지 않고 새김을 확립하지 않고 감관을 제어하지 않고 간다. 그는 거기서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된다. 그렇게 가볍게 옷을 걸치거나 야하게 옷을 걸친 여인들을 보게 되면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한다. 탐욕이 그의 마음을 엄습하면, 그는 배움을 그만두고 환속한다. 새가 돌풍에 맞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이 그의 가사를 빼앗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발우를 빼앗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깔개를 빼앗고 다른 사람들이 그의 바늘쌈지를 빼앗는다. (웨람바경-Verambasutta-돌풍의 경, 상윳따니까야 S17:9, 전재성님역) 부처님은 출가자들이 이득을 취하고 명예를 추구하고 신도들로부터 환대받는 것을 경계하였다. 그런 위험에 대하여 세상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여인의 옷차림으로 비유하였다. 그래서 눈과 코 등 감각기관을 수호하라고 하였다. 항상 사띠를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사유하여 지금 여기에서 현상이 무상하고, 괴로움이고, 무아인 것을 알아차리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하지 못하였을 때 불행과 재난에 빠질 것이라 하였다.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부처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에 대하여 낚시바늘과 같은 것(S17:2)이라 하였다. 낚시 하는 자가 악마라면 낚시 바늘은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다. 그래서 이득과 명예와 칭송이라는 낚시바늘에 걸리면 악마가 이끄는대로 끌려 다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지금 세상속에 나와 이득과 명예를 추구하는 출가자는 모두 낚시 바늘에 걸린 물고기와 다름 없다. 2013-05-09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불교방송 이사회&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불교방송 이사회&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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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hu, 9 May 2013 14:42:22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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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왜 이귀의(二歸依) 하는가, 한글삼귀의와 빠알리 예불의식</title>
	            <description> 왜 이귀의(二歸依) 하는가, 한글삼귀의와 빠알리 예불의식 한글 삼귀의문 문제와 관련하여 글을 두 차례 올렸다. 글을 올리고 난 다음 안 사실이지만 조계종 율장연구회의 토론 기사가 불교관련 신문사이트에 실렸다. 글을 올리면서 “왜 한글삼귀의문은 고치지 않는 것일까? 지금 이대로가 좋은 것일까?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제기 하였는데, 바로 그 날 율장연구회 토론이 열렸다는 기사를 접하였다. 기가 막히는 우연이다. 그런 토론회가 개최될 줄 꿈에도 몰랐는데 글을 올린 날 스스로 문제점에 대하여 토론이 있었다 하니 일말의 기대를 갖게 만든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 불교포커스에 실린 율장연구회의 토론에 대한 기사를 유심히 읽어 보았다. ‘혹시나’ 해서 한글삼귀의문에서 승보에 대한 개념을 바꾸는 내용이 있는지 알아 보기 위해서이었다. 그러나 ‘역시나’ 이었다. 아무리 뒤져 보아도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는 내용을 “거룩한 승가에 귀의합니다”라는 내용을 발견할 수 없었다. 스님들로만 구성된제2회 계율토론회에서 스님들이 승보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벌였지만 구체적으로 삼귀의문의 내용을 바꾼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다만 문제점을 지적하는 내용은 접할 수 있었다.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중앙승가대 교수 경성스님은 삼보를 “불교를 구성하는 기본적이고 절대적인 조건인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을 의지하고 수순하면서 부처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 수행하는 승단이야말로 세간과 천상의 보배에 비할 수 없는 수승한 존재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세간의 보물에 비유하여 표현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율장연구회, ‘삼귀의와 오계’ 토론회, 불교포커스 2013-05-01) 경성스님은 삼귀의 대상이 부처님과 가르침과 상가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더구나 “세간과 천상의 보배에 비할 수 없는 수승한 존재”라는 말까지 인용하였는데, 이는 라따나경에 나오는 “이 세상과 내세의 그 어떤 재물이라도, 천상의 뛰어난 보배라 할지라도(Yaṃ kiñci vittaṃ idha vā huraṃ vā Saggesu vā yaṃ ratanaṃ paṇītaṃ, Sn2.1)”라는 구절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빠알리니까야에 따른 초기불교의 관점에서 말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문승가(savakasangha)와 현전승가(sammukhisangha) 다음으로 덕문스님은 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덕문스님은 이어 “삼귀의계 가운데 귀의불과 귀의법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가 없지만, 승보에 귀의하는 일에서만큼은 조금은 주저하게 되는 현실을 감안해서 볼 때 그 문제점과 해결책을 찾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라면서 “승보란 현인과 성인의 위(位)에 오른 분과, 범부승이라 하더라도 4인 이상의 대중이 결계를 하고 동일설계 동일갈마, 수행생활을 하는 이는 청정승가이고, 청정승가는 승보로서의 자격을 갖추게 된다”고 밝혔다. (율장연구회, ‘삼귀의와 오계’ 토론회, 불교포커스 2013-05-01) 영축율학승가대학원장인 덕문스님은 ‘삼귀의계의 역사 및 역할’에서 승보의 개념에 대하여 명확하게 밝혔다. 승보란 사향사과의 성스런 성자의 공동체와 4인 이상의 스님이 계를 지켜가며 사는 청정승가공동체를 승보로 규정하였다. 전자의 경우 빠알리니까야에서 볼 수 있는 성스런 승가, 즉 ‘성문승가(savakasangha)’를 말하고, 후자의 경우 시간적 공간적으로 제한된 사방승가의 지역승가공동체인 ‘현전승가(sammukhisangha)’를 말한다. 모두 결계로 구성된 공동체이다. 그래서 자자와 포살이 이루어진다. 이런 승가가 승보라는 뜻이다. 이렇게 율학연구소 세미나에서 승보에 대하여 승가임을 명확하게 이야기 하였다. 그렇다고 삼귀의문에서 스님들 대신 승가를 집어 넣어야 된다는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단지 문제점만 제기한 것이다. 한글삼귀의문에 대한 거부감 율사스님들이 지적한 문제점이 개선 되려면 지난한 과정이 필요하리라 본다. 이는 스님들의 기득권과 관계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 동안 지속되어 온 관행을 하루 아침에 허물고 스스로 개혁한다는 것은 보수화된 한국불교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만일 한국불교에서 삼귀의문에 스님들을 승보로 고집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스스로 개혁하지 않고 단지 스님들의 이익을 위해서인것처럼 그대로 내버려 두었을 때 우려 되는 현실이 있다. 덕문스님은 “삼귀의계 가운데 귀의불과 귀의법에 대해서는 별로 이의가 없지만, 승보에 귀의하는 일에서만큼은 조금은 주저하게 되는 현실”이라 말하였고, 대회스님은 “삼귀의 대신 불과 법에만 귀의하는 신행단체가 있을 만큼 승가에 대한 믿음이 적어지고 있는 실정이지만”이라고 표현 하였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스님들을 승보로 등재함으로 인하여 한글삼귀의문에 대한 거부가 예상외로 심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최근 스님들의 범계행위 등으로 인하여 재가신도들의 실망이 삼귀의에서 스님들에 대한 귀의를 거부하는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그렇다면 부처님과 가르침, 단 두 개를 귀의처로 삼는 이귀의(二歸依)만 하면 안되는 것일까? 이귀의(二歸依)의 경전적 근거 가장 고층경전이라 불리우는 숫따니빠따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다. Te mayaṃ vicarissāma gāmā gāmaṃ nagā nagaṃ, Namassamānā sambuddhaṃ dhammassa ca sudhammatanti.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과 잘 설해진 뛰어난 가르침에 예경하면서 저희들은 마을에서 마을로, 산에서 산으로 돌아다니겠습니다. (Hemavatasutta-헤마와따경, 숫따니빠따 Sn1.9, 전재성님역) 헤마와따경은 설산야차 헤마와따와 부처님과 대화이다. 부처님의 설법이 끝나자 설산야차헤마와따는 부처님(Buddha)과 가르침(Dhamma)에 귀의하는 장면이다. 상가에 대한 귀의가 보이지 않는다. 이로 미루어 알 수 있는 것은 성자들의 승단이 구성이 이루어지기 이전에는 부처님과 가르침에 이귀의(二歸依)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헤마와따경이 매우 고층경전이기 떄문이다. 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숫따니빠따가 왜 고층경전일까? 숫따니빠따가 고층경전인 이유 전재성박사의 법구경 해제에 따르면 “숫따니빠따가 정각을 이루신 직후에 아직 승단이 구성되기 전의 은둔자적인 부처님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면”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은둔자적 성격의 부처님의 가르침을 숫따니빠따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숫따니빠따의 특징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원시적인 상태에 있는 불교공동체에 대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다. 2) 두타행이나 바라밀과 같은 후대의 불교적인 교리가 없고 열반에 대해서도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구별이 없다. 3) 후대의 불교의 신들이 이름 가운데 등장하지 않는 고대의 불분명한 신들의 이름이 등장한다. 4) 탑묘라든가 유골에 대한 언급이 없다. 5) 아타르바 베다(Atharva Veda)의 학습이 선호되지 않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6) 바라문의 희생제는 흔한 일이었고, 소들도 그러한 희생제에서 도살된 것을 알 수 있다. 7) 숫타니파타의 시들은 후대의 다른 경전들, 소송경(Kuddakapatha),법구경(Dhammapada), 자설경(Udana),여시어경(Itivuttaka), 장로게(Theragatha) 등 뿐만 아니라 범문 불교경전에도 분명히 등장한다. 8) 고층적인 언어와 문체가 사용되고 있다. 9) 고층적인 시형들을 채택하고 있다. (숫따니빠따 해제, 전재성박사) 숫따니빠따의 아홉가지 특징을 보면 매우 소박하고 꾸밈없는 순수한 가르침이 담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승단이 본격적으로 구성되기 이전의 행적에 대한 게송도 있는데, 그것이 헤마와따 경에서 볼 수 있는 이귀의에 대한 내용이다. 믿을만한 스승이 없을 때 이귀의에 대한 근거로 삼을 수 있는 경이 하나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이라도 있습니까?” [장자들] “세존이시여, 저희들에게는 합당한 이유로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어떠한 스승도 없습니다.” [세존] “장자들이여, 그대들이 신뢰하는, 마음에 드는 스승이 없다면, 이러한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그대들이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을 가지고 실천하면, 그것은 그대들에게 오랜 세월 이익이 되고 행복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장자들이여, 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아빤나까경-Apaṇṇaka sutt-논파할 수 없는 가르침에 대한 경, 맛지마니까야 M60, 전재성님역) 맛지마니까야 아빤나까경에 따르면, 부처님은 믿을만한 스승이 없다면 가르침에 의존하라고 하였다. 이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 살아 있는 부처님은 열반하였고, 부처님이 설한 가르침은 빠알리니까야로 전승되어 왔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여 도와 과를 이루신 성자의 공동체가 부재하다면, 불자들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실제로 경전으로 전승되어온 가르침 뿐이다. 어쩌면 가르침 일귀의(一歸依)만 남아 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다음과 같은 문구를 보면 반드시 그렇지 않다. 고층으로 분류되는 숫따니빠따에서 이귀의 대한 구절이 한 번 보이지만 대부분 다음과 같은 정형구로 되어 있다. Abhikkantaṃ bho gotama abhīkkantaṃ bho gotama seyyathāpi bho gotama nikkujjitaṃ vā ukkujjeyya paṭicchannaṃ vā vivareyya mūḷhassa vā maggaṃ ācikkheyya andhakāre vā telapajjātaṃ dhāreyya cakkhumanto rūpāni dakkhintīti, evamevaṃ bhotā gotamena anekapariyāyena dhammo pakāsito. Esāhaṃ bhavantaṃ gotamaṃ saraṇaṃ gacchāmi dhammañca bhikkhusaṅghañca. Upāsakaṃ maṃ bhavaṃ gotamā dharetu ajjatagge pāṇupetaṃ saraṇaṃ gatanti. [바라드와자]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훌륭하십니다. 존자 고따마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가려진 것을 열어 보이듯,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 눈을 갖춘 자는 형상을 보라고 어둠 속에 등불을 가져오듯이, 존자 고따마께서는 이와 같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진리를 밝혀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존이신 고따마께 귀의합니다. 또한 그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또한 그 수행승의 참모임에 귀의합니다. 오늘부터 목숨 받쳐 귀의하오니 고따마께서는 재가의 신자로서 받아 주십시오” (와살라경-Vasala sutta-천한사람의 경, 숫따니빠따 Sn1.7, 전재성님역) 부처님 당시 아홉가문 중의 하나이었던 바라드와자(bhāradvāja)가문의 바라문 바라드와자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귀의 하는 장면이다. 가이드, 의사, 스승으로서 부처님 바라드와자는 경의 말미에 고따마(gotama)와 가르침(dhamma)과 비구상가(bhikkhusaṅgha)에 귀의 한다고 하였다. 분명히 상가에 귀의 한다고 하였다. 비구들에 귀의하는 것이 아니라 비구들의 공동체인 상가를 말한다. 경에서 “부처님에 대하여 마치 넘어진 것을 일으켜 세우듯이, 어리석은 자에게 길을 가리켜주듯이”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모두 스승으로서의 부처님을 말한다. 부처님을 신격화하여 초월적 존재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안내자로 보는 것이다. 여행할 때 가이드와 같은 역할이다. 그리고 병을 처방하는 의사와도 같다. 그런 부처님은 스승으로서의 부처님이다. 따라서 빠알리경전을 접한다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가이드로서, 의사로서, 스승으로서 부처님도 접하기 때문에 비록 부처님이 지금 실재하지 않다고 하더라도 의지처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귀의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가르침을 실천하여 성자공동체가 존재한다면 하나 더 추가 할 수 있다. 그래서 삼귀의가 되는 것이다. 이보(二寶)만 인정하는 한글삼귀의문 한글삼귀의문에서 스님을 승보로 간주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상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한다. 세계불교인들이 보았을 때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상가를 귀의 대상으로 삼지 않고 스님들을 귀의 대상으로 삼는 다는 것은 한국불교에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하는 것과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승가가 없는 불교를 불교라고 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한국불교에는 부처님과 가르침 두 가지만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부처님과 가르침에만 귀의 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한글삼귀의문을 부처님, 가르침, 승가로 고치지 않는 한 한국불교에는 이보만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종단에서 스스로 승가를 삼보 중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다면 불자들이 이보에만 귀의해도 아무런 할말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스님들을 승가와 같은 의미라고 우긴다고 해서 되는 것도 아니다.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일본의 하나마츠리(불탄절)행사에서 승가가 존재하지 않는 불교는 재가승가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일본불교와 똑 같은 것이다. 계율이 무너진 일본불교에서는 더 이상 승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비구승가는 없어도 재가승가는 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스스로 ‘재가승’가라 한다. 그런 재가승가에 스님들에게 귀의하라고 하지 않는다. 그런 예를 일본의 삼귀의문에서 보았다. 공익재단법인 전일본불교회의 삼귀의문 의례 동영상이 있다. 지난 2011년 올렸던 글 ‘승(僧)은 스님들이 아니라 상가(Sangha), 보디찌따의 삼귀의(Tisarana)’에 실려 있는 것이다. 일본의 부처님오신날 행사 花まつり(花御堂灌仏法要)a Buddhist memorial service_NO2 2009년 유튜브 동영상에 올려져 전일본불교회 주관으로 일본에서의 부처님오신날 행사에 대한 것이다. 전일본불교회(全日本仏教会)는 홈페이의 설명에 따르면 59개의 종파, 36개의 도도부현(都道府県)불교회, 10개의 불교단체, 합계 105단체가 가맹된 일본불교를 대표하는 유일의 연합체라 한다. 그런데 동영상을 보면 놀라운 장면이 있다. 각종종파들이 각종 승복을 입고 참석한 불탄절 행사에서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고 있는 것이다. 동영상을 보면 분명히 “붓당사라낭 갓차미, 담망사라낭 갓차미, 상강사라낭 갓차미”라고 하고 있다. 단 한차례만 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우리와 분명히 다른 모습이다.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는 일본불교 메이지시대 폐불훼석 정책에 따라 대처와 육식이 허용되고, 승려는 직업에 지나지 않고 더구나 주지직은 세습되는 것이 일본불교의 현실이다. 승가의 계율이 국가권력의 힘에 무너진 것이다. 그것도 폐불훼석정책이 실시된지 30년 만에 일본불교에서는 승가가 사라졌다. 남았다면 재가승가라 불리는 승가일 뿐이다. 그런 일본불교에서 양력 4월 8일 치루어지는 하나마츠리라 불리우는 불탄절 행사에서 놀랍게도 귀의의 대상이 상가로 되어 있다. 그것도 빠알리삼귀로 낭송하는 것이다. 일본불교가 비록 재가승가이긴 하지만 빠알리어로 ‘상강사라낭 갓차미’하는 것은 그나마 양심은 남아 있는 것 같다. 재가승가이면서 우리와 같이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양심 없는 행위는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불교도연맹(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 일본불교에서 불탄절 행사에서 빠알어 삼귀의 띠사라나(tisarana)를 낭송하는 것이 궁금하다. 그 근거로서 전일본불교회 홈페이지에 있는 “日本からは全日本仏教会（JBF）が、日本仏教界を代表して加盟し、最高顧問・副会長・執行役員・人道支援委員長・人道支援基金運営委員長を務めています。”라는 문구에 주목한다. “일본에서는 전일본불교회가 일본불교계를 대표하여 가맹하여, 최고고문-부회장-집행위원-인도지원위원장-인도지원기금운영위원장을 맡고 있다”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로 알 수 있는 사실은 일본불교는 ‘세계불교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세계불교도연맹이란 무엇일까? 위키백과에 따르면, 세계불교도연맹(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세계불교도우의회(WFB: World Fellowship of Buddhists)은 가장 크고 가장 영향력 있는 국제 불교 단체이다. 1950년 스리랑카 콜롬보에서 27개국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창설되었다. 본부는 태국에 있으며, 역대 회장은 모두 스리랑카와 동남아시아에서 배출되는 등 소승불교가 가장 영향력을 크게 행사하고 있지만, 모든 종파가 WFB에서 활동중이다. 미국,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아프리카와 유럽의 여러 나라 등 35개국에 지부가 설립되어 있다. 대한민국에는 1963년에 지부 위원회가 결성되었다. (세계불교도우의회, 위키백과) 세계불교도연맹(WFB)는 전세계적으로 가장영향력있는 불교단체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세계불교도우회’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2012년 여수에서 26차 총회를 가진 바 있다. WFB가 비록 테라와다 위주국가로 구성되어 있긴 하지만 세계불교를 대표한다. 그런데 전일본불교회는 WFB에 가입되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또 전일본불교회는 홈페이지에 따르면 2년 마다 치루어지는 WFB행사를 세 번 개최한 바 있다고 하였다. 2회(1952년), 12회(1978년), 24회(2008년)이다. 이런 이유에서일까 일본불교에서는 삼귀의를 빠알리어로 하고 있고, 스님들이 아닌 승가에 귀의함을 천명하고 있다. 한국은 WFB에 가입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우리나라 불교에서는 아직까지 스님들 귀의를 천명하고 있는 것일까. 전세계불교도연맹(WFB) 창설된지 60년이 넘었건만 이에 따르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승이라서 인정하기 싫어서일까. WFB에 가입되어 있지 않아서일까.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기관은 무엇일까. 검색하면 한국불교종단협의회라고 나온다. 종단협의회가 WFB에 가입하였는지에 대하여 검색하였으나 알 수 없다. 홈페이지에서도 확인 할 수 없다. 그러나 전일본불교회에서는 가맹국임을 공식적으로 천명하고 있다. 바로 이런 차이가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고 상가를 승보로 간주 하는 것 아닐까? 전세계적으로 상가를 승보로 보고 있다. 불교를 신봉하는 전 세계의 불자들은 상가가 승보라고 여기는 것은 상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승가를 승보로 인정하고 있지 않다. 그 대신 스님들을 승보라고 부르고 있다. 오로지 우리나라와 중국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이런 사실을 전세계 불자들이 눈치챈다면 우리나라 불교를 어떻게 볼까. 더구나 승가가 사라지고 재가승가만 남아 있는 일본 불교에서 조차 “상강사라낭 갓차미”라 하는데 우리나라는 언제까지나 “거룩하 스님들께 귀의합니다”라고 해야 하나. 부끄럽고 창피한 일이다. 한국 절에 낭낭히 울려 퍼진 빠알리삼귀의 그러나 일말의 가능성은 엿보인다. 우리나라 부처님오신날 어느 절의 행사에서 빠알리 삼귀의가 낭낭히 퍼졌기 때문이다. 지난 2009년 올린 ‘스리랑카 불자공동체의 예불의식을 보니, 유튜브로 본 ‘2008 코리안 웨삭’’에서 예불동영상을 올려 놓았기 때문이다. 2008년 부처님오신날 스리랑카 불자공동체에서 부천 석왕사에서 법회한 동영상이다. 이 동영상을 보면 테라와다 불교 예불의식의 전형을 보여 주는 것 같다. 한국내 스리랑카불자공동체의 예불의식(2008년,부처님오신날, 석왕사) 스리랑카 비구의 낭낭하고 독특한 음조로 낭송된 빠알리 예불의식을 정리하였다. 1. 삼귀의 붓당 사라낭 가차미 (Buddham saranam gacchami)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담망 사라낭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상강 사라낭 가차미 (Sangham saranam gacchami) 상가에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buddh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dhamm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두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Dutiyampi sangham saranam gacchami) 두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붓당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buddh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담망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dhamm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따띠얌삐 상강 사라낭 가차미 (Tatiyampi sangham saranam gacchami) 세 번째로 상가에 귀의합니다. 2. 오계 빠나디빠따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Panatipat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살아 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아딘나다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Adinnad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까메수 밋차짜라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Kamesu micchacar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삿된 음행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무사와다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Musavad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거짓말하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수라매라야 맛자빠마다타나 왜라마니 식카빠당 사마디야미. Surameraya-majja-pamadatthana veramani sikkhapadam samadiyami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약물이나 술을 먹지 않는 계를 지키겠습니다. 3. 부처님께 예경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o tassa bhagavato arahato samma sambuddhassa) 모든 번뇌를 떠나 스스로 깨달음을 이루신 거룩한 부처님께 예경 올립니다. 4. 삼보공덕문 1) 붓다공덕 이띠삐소 바가와 아라항 삼마 삼붇도 Itipiso bhagava araham samma sambuddho 웨자짜라나 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Vijjacarana sampanno sugato lokavidu 아누따로뿌리사 담마사라티 Anuttaropurisa dammasarati 싸타 대와 마누싸낭, 붓도 바가와. Satta deva manussanam buddho bhagava 이처럼 세존께서는 거룩한 님, 올바로 원만히 깨달은 님, 지혜와 덕행을 갖춘 님, 올바른 길로 잘 가신 님, 세상을 아는 님, 위없이 높으신 님, 사람을 잘 길들이시는 님, 하늘사람과 인간의 스승이신 님, 깨달은 님, 세상에 존귀하신 님이다. 2) 담마공덕 쓰왁카또 바가와또 담모 Soakkhato bhagavato dhammo 산띠티꼬 아깔리꼬 에히빠시꼬 sandithiko akaliko ehipassiko 오빠나이꼬 빳짜땅 opaneyiko paccattam 왜디땁보 웬뉴히 veditabbo vinnuhi 세존께서 잘 설하신 이 가르침은 현세의 삶에 유익한 것이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며 와서 보라고 할 만한 것이고 최상의 목표로 이끄는 것이며 슬기로운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이다. 3) 상가공덕 수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su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우쭈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uju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냐야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naya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사미찌빠띠빤노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samicippatipanno bhagavato savakasamgho, 야디낭 짯따리 뿌리사유가니 앗타 뿌리사뿍갈라, yadidam cattari purisayugani attha purisapuggala, 애사 바가와또 사와까상고, esa bhagavato savakasamgho, 아후네이요, 빠후네이요, 닥키네이요, 안잘리까라니요, ahuneyyo, pahuneyyo, dakkhineyyo, anjalikaraniyo, 아눗따랑 뿐냑켓땅 로까싸. anuttaram punnakkhettam lokassa.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훌륭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정직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현명하게 실천한다.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조화롭게 실천한다. 이와 같은 세존의 제자들의 모임은 네 쌍으로 여덟이 되는 참 사람으로 이루어졌으니 공양받을 만하고 대접받을 만하며 보시받을 만하고 존경받을 만하며 세상의 위없는 복밭이다. 식순을 보면 삼귀의, 오계준수, 부처님예경, 삼보공덕찬탄 순으로 되어 있다. 삼귀의를 보면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하여 세 번 낭송한다. 우리말에 삼세번이라는 말이 있듯이 ‘두띠얌삐(Dutiyampi, 두번째로), 따띠얌삐(Tatiyampi, 세번째로)하면서 세 번, 총 아홉번 귀의를 다짐하는 것이다. 이는 단지 한번씩 독송하는 것으로 그치는 한글삼귀의문과 크게 대조된다. 다음으로 우리나라 법회의식에서 볼 수 없는 것이 오계준수낭독이다. 그러나 테라와다불교전통에서는 반드시 낭송한다고 한다. 동영상에서도 띠사라나(삼귀의)가 끝나자 바로 오계를 낭송하고 있다. 이어서 부처님에 대한 예경문인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를 삼세번 낭송한다. 그리고 또 우리나라 불교의식에서 전혀 볼 수 없는 삼보공덕을 찬탄하는 낭송을 갖는다. 삼보공덕은 왜 붓다. 담마, 상가를 귀의처, 의지처, 피난처로 삼아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라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빠알리어로 길게 낭송한다. 비록 빠알리어로 낭송되는 것이긴 하지만 스리랑카 비구의 독특한 음조와 낭낭한 독송은 매우 인상적이다. 한문예불문으로 독송하는 우리나라 예불의식과 다른 분위기이다. 빠알리어도 자주 들으면 생소하지 않다. 마치 한문예불문을 자주 들으면 생소하지 않고 익숙하듯이 빠알리 예불문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빠알리어는 부처님이 부처님 당시 부처님이 말씀 하신 언어라고 하지 않은가. 우리나라 불자들에게 스리랑카 비구의 낭낭한 빠알리예불의식이 익숙해질 날도 있을 것이다. 왜 이귀의(二歸依) 하는가 율사스님들은 한국불교 불자들의 ‘이귀의(二歸依)’ 현상에 대하여 우려 하고 있다. 부처님과 가르침에만 귀의하고 스님들에게 귀의 하지 않으려는 현상에 대하여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스님들이, 종단에서 자초한 결과라 보여진다. 상가(승가)가 승보임에도 불구하고 스님들을 승보로 올려 놓았으니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는 불자들은 그러려니 하며 따를 수 있지만 사실을 아는 불자들은 더 이상 따르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님들을 승보로 만든 것은 스님들의 이기주의의 발로라 본다. 스님들을 승보로 하였을 때 여러가지 이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기주의 발로는 다름 아닌 ‘스님불교’로 보기 때문이다. 스님과 불자들을 수직적 상하관계, 종속관계로 보기 때문에 한국불교는 스님의 불교, 스님에 의한 불교, 스님을 위한 불교로 되어 버렸다. 사부대중의 두 축인 재가불자가 끼여들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전형이 한글삼귀의문에서 보는 “거룩한 스님들께 귀의 합니다”라는 문구이다. 오로지 중국불교를 신봉하는 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이 한글삼귀의문 형태이다. 빠알리니까야가 번역되어 읽히고 있고, 테라와다 불교가 소개 되어 있는 현실에서 한문경전에 의지하여 중국불교만을 따른다면 시대를 따라 가지 못하는 것이다. 오로지 그들만의 리그에 만족하다 보면 점차 이귀의가 대세가 될 것이다. 전세계불교도연맹에 가입되어 있는 일본에서 조차 빠알리삼귀의를 낭송하는 시대이다. 그런면으로 본다면 일본에서 승가는 사라졌지만 정신만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경우 삼귀의문에서처럼 승가를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승가가 있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상황속에서 불자들이 부처님과 가르침에만 의지하는 이귀의 현상 바람이 부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닐까. 2013-05-08 진흙속의연꽃&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한글삼귀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한글삼귀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이귀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이귀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二歸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二歸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빠알리 예불의식&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빠알리 예불의식&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세계불교도연맹&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세계불교도연맹&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WFB&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WFB&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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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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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불행과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title>
	            <description>불행과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영원한 행복을 위하여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사는가? 이런 질문에 여러가지 답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말한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지금 여기서 그다지 행복한 상황이 아니기 때문이라 본다. 행복하다면 행복해지고 싶다는 말이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지금 행복하더라도 그 행복이 언제 깨질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도 영원한 행복이다. 지금 불행한 사람은 이 불행에서 하루 빨리 벗어나려 하고, 지금 행복한 사람은 이 행복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바란다. 국어사전에 따르면 행복이란 ‘삶에서 또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껴 흐믓한 상태’를 말한다. 일종의 ‘느낌’이다. 따라서 행복은 일시적으로 느끼는 ‘행복감’이다. 결코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조건이 바뀌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다. 그래서 지금 행복한 사람은 조건이 바뀌면 ‘행복끝 불행시작’이 될 수 있고, 지금 불행한 사람은 조건이 바뀌면 ‘불행끝 행복시작’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을 원한다.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離苦得樂)이라고? 불교에서도 행복을 말한다. 부처님도 행복에 대해서도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빠알리어로 행복을 뜻하는 ‘수카(sukha)’라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행복이 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일까? 각묵스님은 각종기고문과 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인간은 행복을 추구한다. 경제행위, 정치행위, 문화행위, 철학행위, 의술행위, 종교행위 등 인간의 모든 행위는 행복해지기 위해서이다. 불교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래서 예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離苦得樂)이라고 표현하였다. 초기불전에서 부처님께서는 다양한 행복을 말씀하셨다. 그것을 간추려보면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된다. (초기불교를 통한 깨달음의 길, 각묵 스님/실상사 화엄학림 강사) 예로부터 스님들은 불교의 목적을 ‘이고득락(離苦得樂)’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이는 사성제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부처님은 멸성제에서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의 소멸의 거룩한 진리란 이와 같다. 그것은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고 말씀 하셨기 때문이다. 초전법륜경에 따르면 괴로움의 끝은 행복이 아니라 해탈인 것이다. 이고득락은 어디서 유래 되었을까? 그렇다면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어디서 유래 되었을까? 이는 성철스님이 백일법문에서 “‘모든 고(苦)를 버리고 구경의 낙(樂)을 얻는다. 離一切苦하고 . 離一切苦 이니라. 모든 고(苦)를 다 버려버리고 종국적인 최후의 낙, 영원하고 절대적인 즐거움(樂)을 얻는다는 것이 우리 불교의 목표입니다.(백일법문)”라고 말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성철스님의 백일법문에 따르면 이고득락이라는 말이 대승기신론에서 유래 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대승기신론은 인도의 승려 마명이 지었다고 전해지는, 대승 불교의 교리를 통론적으로 서술한 책을 말한다. 따라서 이고득락은 대승불교에서 추구하는 목표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대승기신론의 어느 부분에 언급되어 있을까? 인연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一者因緣總相.所謂爲令衆生離一切苦得究竟樂 非求世間名利恭敬故 첫째는 총체적 이유이다. 모든 중생에게 일체의 괴로움을 여이게 하고 성불 해탈의 낙인 궁극의 낙을 얻도록 하는 자비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간의 명예나 이익 존경을 구하기 위해 본 논을 짓는 것이 아님이다. (대승기신론, 인연분) 이일체고득구경락(離一切苦得究竟樂)의 준말이 ‘이고득락(離苦得樂)’임을 알 수 있다. 중생에게 일체의 괴로움을 여의게 하고 궁극적행복을 얻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름아닌 ‘견성성불’하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대승불교용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대승불교 열반경에서 말하는 상락아정에서 락(樂)과 같은 의미이다. 이런 내용을 확인시켜주듯이 이고득락에 대한 국어사전에 따르면 “괴로움에서 벗어나 즐거움을 얻으려는 것. 고통의 원인을 제거함으로써 진정한 열반락(涅槃樂)을 얻는 것”라고 정의 되어 있다. 괴로움을 여의어 궁극적으로 열반의 즐거움을 얻는 것이 대승불교의 목적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고득락에서 낙은 열반락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보았을 때 이고득락이라는 말은 초기불교용어로 부적절하다. 이고득락과 동의어로 사용되는 상락아정은 부처님의 무상, 고, 무아의 가르침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법구경의 행복에 대한 게송 각묵스님은 기고문에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궁극적 행복을 말하였다. 세 가지로 구분된 것을 보면 모두 공통적으로‘행복’에 대한 것이다. 마치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보인다. 불교는 ‘행복(樂)’을 추구하는 종교일까? 불교가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처럼 보이는 것은 경전에서 부처님이 행복에 대해서 말씀 하였기 때문이라 본다. 법구경에서 행복에 대한 게송을 모았다. 전재성박사의 번역이다. 1. Mā pamādamanuyuñjetha 마 빠마다마누윤제타 mākāmaratisanthavaṃ 마 까라마띠산타왕 appamatto hi jhāyanto 압빠맛또 히 자얀또 pappoti vipulaṃ sukhaṃ 빱뽀띠 위뿔랑수캉. 방일에 사로잡히지 않고 감각적 욕망의 쾌락을 가까이 하지말라. 방일하지 않고 선정에 드는 님은 광대한 지복을 얻는다.(Dhp 27) 2. Dunniggahassa lahuno 둔닉가하싸 랄후노 yatthakāmanipātino 얏타까마니빠띠노 cittassa damatho sādhu 따차 다마토 사두 cittaṃ dantaṃ sukhāvahaṃ 땅 단땅 수카와항.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는 제어하기 어렵고 경망한,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야말로 훌륭하니, 마음이 다스려지면, 안락을 가져 온다.(Dhp 35) 3. Sududdasaṃ sunijpuṇaṃ 수둣다상 수니뿐앙 yatthakāmanipātinaṃ 얏타까마니빠띠낭 cittaṃ takketha medhāvī 찟땅 락께타 메다위 cittaṃ guttaṃ sukhāvahaṃ 찟땅 굿땅 수카와항. 원하는 곳에는 어디든 내려앉지만, 지극히 보기 어렵고 미묘한 마음을 현명한 님은 수호해야 하리. 마음이 수호되면, 안락을 가져온다.(Dhp 36) 4. Puññañce puriso kayirā 뿐냔쩨 뿌리소 까이라 kayirā naṃ punappunaṃ 까이라 낭 뿌납뿌낭 tamhi chandaṃ kayirātha 땀히 찬당 까이라타 sukho puññassa uccayo. 수코 뿐냐싸 웃짜요. 선한 일을 행했으면, 더욱 더 거듭해야 한다. 그 의욕을 북돋우어야 하리. 공덕이 쌓이면 행복하다.(Dhp 118) 5. Na ve kadariyā devalokaṃ vajanti 나 웨 까다리야 데와록깡 와잔띠 bālā have nappasaṃsanti dānaṃ 발라 하웨 납빠상산띠 다낭 dhīro ca dānam anumodanāno 디로 짜 다낭 이누모다마노 teneva so hoti sukhī parattha 떼네와 소 호띠 수키 빠랏타. 인색한 자는 천상계에 이르지 못하고 어리석은 자는 보시를 칭찬하지 않는다. 현명한 자는 보시를 기뻐하면서 그것으로 실로 내세의 안락을 얻는다. (Dhp 177) 6. Sukho buddhānamuppādo 수코 붇다나뭅빠도 sukhā saddhammadesanā 수카 삿담마데사나 sukhā saṃghassa sāmaggī 수카 상가싸 사막기 samaggānaṃ tapo sukho. 사막가낭 따뽀 수코. 깨달은 님의 출현도 행복이고 올바른 가르침의 베품도 행복이고 참모임의 화홥도 행복이고 화합한 님들의 수행도 행복이다. (Dhp 194) 7. Natthi rāgasamo aggi 낫티 라가사모 악기 natthi dosasamokali 낫티 도사사모 깔리 natthi khandhasamā dukkhā 낫티 칸다사마 둑카 natthi santiparaṃ sukhaṃ 낫티 산띠빠랑 수캉. 탐욕에 비길 불은 없고 성냄에 비길 죄악은 없다. 존재의 다발에 비길 고통은 없고 적정보다 나은 안락은 없다. (Dhp 202) 8. Jighacchāparamā rogā 지갓차빠라마 로카 saṇkhāraparamā dukkhā 상카라빠라마 둑카 etaṃ ñatvā yathābhūtaṃ 에땅 냐뜨와 야타부땅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 닙바낭 빠라망 수캉. 굶주림은 가장 심각한 질병이고 형성된 것들은 극심한 괴로움이다. 이것을 있는 그대로 알면, 열반 곧, 위없는 지복을 얻는다. (Dhp 203) 9. Ārogyaparamā lābhā 아로기야빠라마 랍바 santuṭṭhiparamaṃ dhanaṃ 산뜻티빠라망 다낭 vissāsaparamā ñāti 위싸사빠라마 냐띠 nibbānaṃ paramaṃ sukhaṃ 닙바낭 빠라망 수캉. 건강이 최상의 이익이고 만족이 최상의 재보이고 신뢰가 최상의 친구이고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 204) 10. Sāhu dassanamariyānaṃ 사후 다싸나마리야낭 sannivāso sadā sukho 산니와소 사다 수코 adassanena bālānaṃ 아다싸네나 발라낭 niccameva sukhī siyā. 닛짜메와 수키 시야. 고귀한 사람은 만나면 좋고 함께 지내면 언제나 행복하다. 어리석은 자들을 멀리 여의면, 언제나 행복을 여의리. (Dhp 206) 11. Atthamhi jatamhi sukhā sahāvā 앗탐히 자땀히 수카 사하와 tutthi sukha ya itarītarena 뚵티 수카 야 이따리따레나 puññaṃ sukhaṃ jīvitasankhayamhi 뿐냥 수캉 지위따상카얌히 sabbassa dukkhassa sukhaṃ pahānaṃ 삽바싸 둑카싸 수캉 빠하낭. 일이 일어났을 때에는 벗이 행복이고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고 목숨이 다할 때에는 공덕이 행복이고 일체의 괴로움을 버리는 것이 행복이다. (Dhp 331) 12. Sukhā matteyyatā loke 수카 맛떼이야따 록께 atho petteyyatā sukhā 야토 뼅떼이야따 수카 sukhā sāmaññatā loke 수카 사만냐따 록께 atho brahmaññatā sukhā 아토 브라흐만냐따 수카. 세상에서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세상에서 수행자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거룩한 님을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Dhp 332) 13. Sukhaṃ yāva jarā sīlaṃ 수캉 챠와 자라 실랑 sukhā saddhā patiṭṭhitā 수카 샅다 빠띹히따 sukho paññāya paṭilābho 수코 빤냐야 빠띨라보 pāpānaṃ akaraṇaṃ sukhaṃ 빠빠낭 아까라낭 수캉. 늙어도 계행이 행복이고 믿음이 확립된 것도 행복이다. 지혜를 얻음이 행복이고 악을 짓지 않음도 행복이다. (Dhp 333) 14. Mettāvihārī yo bhikkhu 멭따위하리 요 빅쿠 pasanno buddhasāsane 빠산노 붇다사사네 adhigacche padaṃ santaṃ 아니갓체 빠당 산땅 saṇkhārūpasamaṃ sukhaṃ 상카루빠사망 수캉 수행승이 자애롭게 살고 깨달은 님의 가르침에 기쁨을 발견하면, 모든 형성이 지멸하여 행복한 적멸의 경지를 얻는다. (Dhp 368) 15. Pāmojjabahulo bhikkhu 빠못자바홀로 빅쿠 pasanno buddhasāsane 빠산노 붇다사사네 adhigacche padaṃ santaṃ 아디갓체 빠당 산땅 saṇkhārūpasamaṃ sukhaṃ 상카루바사망 수캉 넘치는 기쁨으로 가득 차 수행승이 깨달은 님의 가르침을 믿으니, 모든 형성의 지멸, 적정의 경지, 안락을 얻는다. (Dhp 381) 위 게송을 보면 법구경판 행복경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법구경에서는 행복에 대한 품이 별도로 있다. 제15품인 수카왁가(sukhavagga)가 그것이다. 이를 우리말로 ‘안락의 품’이라 번역하였다. 행복을 뜻하는 빠알리어 수카(sukha)는 행복뿐만 아니라 안락(安樂) 또는 지복(至福)으로도 번역되기 때문이다. 법구경에서 말하는 행복(sukha)은 법구경에서 말하는 행복(sukha)은 매우 다양하다. 선정에 드는 것이 행복(Dhp 27)이라고도 하고 ,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 행복(Dhp 35)라고도 한다. 공덕을 쌓는 것도 행복(Dhp 118)이고, 보시를 하여 내세에 천상에 태어나는 것도 행복(Dhp 177)이라 한다. 그런데 열반을 행복이라고 한 게송도 많다. “적정보다 나은 안락은 없다. (Dhp 202), 열반 곧, 위없는 지복을 얻는다. (Dhp 203), 열반이 최상의 행복이다. (Dhp 204)”와 같은 내용이다. 한편 고귀한 사람을 만나고 어리석은 자를 멀리하는 것도 행복(Dhp 331)이라 하였다. 그리고 어떠한 것에든 만족하는 것이 행복(Dhp 331)이라 하여 소욕지족의 삶도 행복으로 보았다. 또 망갈라경(Sn2.4)를 마치 옮겨 놓은 것처럼 보이는 게송도 있다. 어머니, 아버지, 수행자, 거룩한 님을 공경하는 것도 행복 (Dhp 332)이라 하였기 때문이다. 망갈라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라 하였다. 이렇게 15개에 달하는 행복게송을 보면 각묵스님이 말한 금생의 행복, 내생의 행복, 구경의 행복이 총망라 된 듯이 보인다. 금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 행복게송에서 금생의 행복에 대한 것을 들라면 12번항의 “세상에서 어머니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아버지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세상에서 수행자를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고 또한 거룩한 님을 공경하는 것도 행복이다. (Dhp 332)”를 들 수 있다. 마치 망갈라경(Sn2.4)의 일부내용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하다. 우리나라 스님들이 행복경이라 번역하고 있는 망갈라경에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섬기고, 아내와 자식을 돌보고(Sn2.4)”등으로 표현 되어 있다. 그리고 후렴구에서 “에땅 망갈라뭇따망(etaṃ maṅgalamuttamaṃ)”이라 하였다. 이는 “이것이야말로 더 없는 축복입니다.”라는 뜻이다. 그런데 이 문구와 관련하여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이것이 최상의 행복입니다”라는 식으로 번역하였다. 망갈라(maṅgala)가 행운, 길상, 축복의 뜻임에도 불구하고 행복으로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전재성박사의 법구경게송에서는 모두 수카(sukha) 로 되어 있어서 행복, 안락, 지복으로 번역되어 있다. 비록 망갈라경과 법구경에서 같은 행복을 말하고 있을지라도 쓰이는 단어가 다르다면 원문에 충실한 번역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망갈라와 수카를 구분없이 모두 행복으로 번역하였다면 이는 독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본다. 원어를 모르는 독자들은 그대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번역이 가장 이상적일까? 이는 한글로 번역된 것을 다시 빠알리어로 옮겼을 때 그 뜻이 통하면 훌륭한 번역이라 본다. “최상의 축복입니다” 하였을 때 ‘축복’에 대히여 행복을 뜻하는 수카가 아닌 망갈라로 재번역하였다면 제대로 번역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금생의 행복에 대한 게송을 보면 윤리적 가르침으로 귀결된다. 부모를 모시고 계행을 지키고 보시하면 분명히 좋은 일이 생길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길상이라 하였다. 상서로운 조짐으로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것, 정신적으로 안락한 것을 원한다. 이는 오욕락으로 귀결된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등 다섯 가지 감각능력으로 즐기는 것을 말하지만, 세상에서의 오욕락은 식욕, 성욕, 안락욕, 재물욕, 명예욕이다. 그래서 금생의 행복만을 이야기 한다면 지금 여기에서 “삶에서 또는 생활에서 기쁨과 만족을 느껴 흐믓한 상태”에 집착하기 쉽다. 그리고 ‘고생끝 행복시작’으로 인식할 수 있는 ‘이고득락(離苦得樂)’을 행복이라 볼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이 결코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 고 있다. 입학시험에 합격하였을 때 느끼는 환희, 제대를 하여 위병소 정문을 통과할 때의 가벼운 발걸음, 입사시험에서 합격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기쁨 등 삶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갖가지 행복은 일시적이다. 일종의 행복감이다. 일시적으로 행복을 느낄 뿐이지 행복이 실체가 있어서 영원히 느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한 행복을 바란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금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내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는 이유 지금 행복한 사람들은 이 행복이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란다. 지금 불행에 처한 사람은 어서 빨리 이 불행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어느 경우이든지 갈애가 생긴다. 그런 그래서 행복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아서 괴롭고, 불행은 불행한 것 자체로 인하여 괴롭다. 이래저래 괴로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내생에서는 행복만 있는 천상에 나기 바란다. 천상에 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5번항의 법구경게송에서 “현명한 자는 보시를 기뻐하면서 그것으로 실로 내세의 안락을 얻는다. (Dhp 177)”라고 하였다. 보시하는 생활, 즉 봉사하는 삶을 가지면 천상에 태어 날 수 있음을 말한다. 이는 계행을 지키고 보시하는 삶을 살아 가는 모든 사람은 천상에 태어날 수 있음을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초심자나 재가불자, 보통사람들에게 적용되는 가르침이다. 오계를 지키고 보시하는 것은 매우 건전한 생활이다. 이는 공덕을 쌓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러한 공덕은 저 세상에서 뭇삶들에게 의지처가 되네.(S1:32)”라고 하였다. 이런 공덕은 ‘노자돈’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법구경에서 “그대는 떠남의 문턱에 서 있으나, 그대에게는 노잣돈 조차도 없구나.(Dhp 235)”라 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노잣돈은 ‘착하고 건전한 행위’를 말한다. 저 세상을 여행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이다. 이렇게 오계를 지키고 보시공덕을 쌓으면 천상에 태어난다. 이는 욕계천상을 말한다. 그런 천상의 생활은 어떤 것일까? 한마디로 수(壽)와 복(福)의 세상이다. 수명과 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인간세상의 경우 지은 업 때문에 수명이 정해져 있지 않지만, 공덕을 쌓아 태어난 천상세계는 수명이 보장되어 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나타내는 천상도표를 보면 수명이 표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인간 바로 위의 세상인 사천왕천의 경우 500천상년이다. 인간으로 따지면 9백만년이다. 바로 위의 삼십삼천의 경우 3천6백만년을 산다. 이렇게 보시와 지계와 믿음을 실천한 존재들은 천상에서 수명대로 살면서 그 복을 누린다. 그런 천상에서 불행은 없고 오로지 즐거움만 넘쳐난다. 그래서 모두 천상에 태어나기 바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상에 태어나는 자들은 반드시 불교인이어야 할까? 경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외도들도 천상에 날 수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천국이다. 영원주의라는 삿된 견해를 가졌지만 봉사하고 도덕적인 삶을 사는 외도 들 역시 천상에 날 수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죽으면 남는 것이 없다는 견해를 가진 단멸론자들은 예외이다. 보시에 대한 과보, 업에 대한 과보 등을 부정하여 공덕을 쌓지 않기 때문이다. 천상은 욕계천상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의 세계관에 따르면 색계와 무색계천상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 천상은 선정수행의 과보에 대한 공덕으로 태어나는 곳이라 한다. 이는 1번항의 “방일하지 않고 선정에 드는 님은 광대한 지복을 얻는다.(Dhp 27)”라는 게송에서 알 수 있다. 선정수행을 하면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행복이 넘쳐 나는 곳이 색계천상이다. 구체적으로 색계이선천이다. 색계 이선천 중에서도 ‘극광천(極光天,abhassara)’에 대한 묘사를 보면 “아, 우리는 아주 안락하게 산다. 우리의 것이라고는 결코 없어도 빛이 흐르는 하느님들처럼 기쁨을 음식으로 삼아 지내리라.(Dhp 200)”라고 되어 있다. 극광천에 대한 묘사는 디가니까야에서도 볼 수 있다. 선정수행에 대한 과보로 태어난다는 극광천은 “그들은 거기서 정신으로 이루어진 자로서, 기쁨을 먹고 지내고, 스스로 빛을 내고, 허공을 날며, 영광스럽게 오랜 세월을 산다.(D27)”라고 표현 되어 있다. 스스로 빛이나고 허공을 날아 다니고 기쁨을 먹고 사는 극광천의 중생들은 수명이 8겁으로 되어 있다. 선정수행의 공덕으로 수명과 복이 보장된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바라는 내생의 행복이다. 보시와 지계로 욕계천상에 나는 것, 선정수행으로 색계와 무색계 천상에 나는 것이다. 그런 천상은 오로지 기쁨과 행복, 또는 평정으로 가득찬 곳이다. 그런데 행복만 있는 천상의 삶은 어떤 것일까? 태어날 때부터 행복만 있고 고통과 불행이 없는 곳에서 태어난 자들은 과연 행복을 행복이라고 인식할 수 있을까? 천상에서 수명대로 사는 뭇삶들은 기쁨과 행복만 느낄 뿐이다. 슬픔과 불행을 모르기 때문에 그 기쁨이 기쁨인지, 그 행복이 행복인지 알 수 없다. 그런 행복을 행복이라 볼 수 있을까? 그래서 어떤 이는 기독교의 천국에 대하여 닫힌 지옥이라 한다. 오로지 영원한 행복만 있는 천국은 행복이 행복인줄 모르기 때문에 지옥과 같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불교천상은 수명과 공덕이 다 하면 내려 가야 한다. 그럴 경우 ‘행복끝 불행시작’이라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내생의 행복이 불교의 목적이 될 수 없다. 궁극적인 행복은 그렇다면 불교의 궁극적 목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법구경 게송 14번 항의 “모든 형성이 지멸하여 행복한 적멸의 경지를 얻는다. saṇkhārūpasamaṃ sukhaṃ, Dhp 368)”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진정한 행복은 열반의 실현이다. 이는 빠알리 니까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런 열반상태는 어떤 것일까? 빠알리니까야에서 열반에 대한 이야기를 도처에서 볼 수 있다. 그 중 맛지마니까야에 다음과 같은 대화를 볼 수 있다.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서 나온 수행승에게 어떠한 접촉이 경험됩니까?”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에서 나온 수행승의 마음은 세 가지 접촉, 즉 비움의 접촉, 인상 없음의 접촉, 바램 없음의 접촉이 경험됩니다.” (쭐라웨달라경-Cūḷavedalla Sutta-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님역) 교리문답의 작은 경이라고 이름 붙여진 쭐라웨달라경에 두 사람이 문답을 하고 있다. 두 사람은 이전에 부부 이었다. 위사카(visākha)가 전남편이고, 담마딘나(dhammadinna)가 전부인이다. 그런데 전부인 담마딘나는 아라한이다. 전남편이 공속하게 궁금한 것에 대하여 문의 하자 전부인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장면이다. 수행녀 담마딘나는 상수멸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가 상수멸인데 이는 열반을 뜻한다. 아홉가지 출세간의 원리(九次第定)에서 가장 마지막 단계이다. 부처님이 깨달은 단계를 말한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면 부처님과 동일한 깨달음의 경험을 하는 단계이다. 열반은 어떤 상태인가? 담마딘나는 상수멸정으로부터 나왔을 때 ‘비움의 접촉, 인상 없음의 접촉, 바램 없음의 접촉’ 이렇게 세 가지가 경험된다고 하였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인식과 지각이 멸한 상태, 즉 상수멸(열반) 상태에서는 알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표현 하였다. [비싸카] “존귀한 여인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자에게 어느 것이 제일 먼저 소멸합니까, 신체의 형성입니까 언어의형성입니까 마음의 형성입니까?&quot; [담마딘나] “벗이여 비싸카여, 지각과 느낌의 소멸을 성취한 자에게 먼저 언어의 형성이 소멸하고 그 후에 신체의 형성이 소멸하고 그 후에 마음의 형성이 소멸합니다.” (쭐라웨달라경-Cūḷavedalla Sutta-교리문답의 작은 경, 맛지마니까야 M44, 전재성님역) 상수멸정에 들 때의 상태를 말한다. 가장 먼저 소멸되는 것이 언어의 형성이고, 다음으로 신체의 형성이 소멸하고, 마지막으로 마음의 형성이 소멸한다고 한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각주에 따르면 “두 번째 선정에서 언어의 형성인 사유와 숙고가 멈추고, 네 번째 선정에서 신체적 형성인 호흡이 멈추고, 마음의 형성인 지각과 느낌은 아홉번째 선정이라고 할 수 있는 지각과 느낌의 소멸((saññ ā vedayitanirodha, 想受滅)을 성취함으로서 멈춘다.(Pps.II.365)”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런 상태가 되면 마치 죽은 듯이 보일 것이다. 그래서 교리문답의 큰경(M43)에 따르면 죽음과 상수멸을 비교하여 설명하고 있다. ‘죽음이란 생명력과 체열과 의식 이렇게 세 가지 요소가 이 몸을 떠나는 것(M43)’으로 설명되지만, 상수멸을 성취한 수행자는 세 가지 요소가 있기 때문에 출정(出定)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상수멸의 상태는 마치 죽은 것처럼 인식(想, saññā)과 느낌(受, vedana)이 소멸된 상태이기 알 수 없다. 다만 출정하였을 때 알 수 있는데, 그때 ‘비움의 접촉(空觸, suññato phassa), 인상 없음의 접촉(無相觸, animitto phassa), 바램 없음의 접촉(無願觸, appaṇihito phassa)’을 경험함으로서 알 수 있다고 한다. 이는 각주에 따르면 “지각과 느낌이 소멸한 상태의 성취에서 일어날 때의 의식의 초기상태는 비움(空), 인상없음(無相), 바램없음(無願)이다. 왜냐하면, 그것의 고유한 상태와 그 대상이 열반이기 때문이다.”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열반을 체험 하였을 때는 순수한 마음의 상태가 된다고 한다. 마치 새로운 하늘과 새로운 땅을 보듯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들여진다고 한다. 마치 어린아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한다. 어떤 표상이나 바램없이 순수 그 자체이기 때문이라 한다. 이와 같은 면으로 본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 행복은 열반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열반 그 상태는 알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있다.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열반에 대하여 ‘열반락’이라 하여 마치 어떤 주체가 있어서 인식하고 느끼는 것으로 알고 있다면 부처님의 가르침과 맞지 않은 것으로 본다.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 법구경 게송으로 본다면 불교는 행복을 추구하는 종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궁극적 행복이라 하였을 때 열반 그 상태, 즉 ‘열반락’을 행복이라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또 불교의 목적이 이고득락이라고 말하는 것도 무리가 있다. 상락아정 할 때의 열반락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글이 말해 준다. 인터넷 검색으로 찾은 것이다. 고통(duhkha)과 괴로움으로부터의 해방. 이것이 부처님께서 출가하시게 된 근본 동기. 그런데 이때 ‘득락’을 ‘행복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게 되면 문제가 달라진다. 어떤 사람들은 ‘행복’이 마치 불교를 믿는 궁극적인 목적인 듯, ‘행복’이란 말을 자주 쓰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것은 조심해야하지 않을지? 왜냐하면 불교를 믿는 것은 깨치기 위한 것이지 세속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깨침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쉽게 이야기해 그것은 일체의 형상은, 그것이 내적이든 외적이든, 실상이 없으며 따라서 무상한 것이며, 무상하다는 것은 공 (空)을 의미하며, 공은 곧 무아 (無我)이기 때문에 행복이 붙을 곳이 없다. 이 진리를 깨닫는 것이 행복 아닌 행복이며, 또 열반이란 행복과 욕망을 포함한 일체의 상(相)에 대한 불이 꺼진 상태를 말한다면, 무아 (無我)에다 불이 꺼진 상태에서 무슨 행복을 얻는다는 것인지? 따라서 ‘이고득락’에서, ‘득락’을 굳이 ‘행복’이라는 표현을 써야할지 잘 모르겠다 (이고득락 離苦得樂, 실용 한영불교사전) 이고득락은 대승불교용어이다. 따라서 대승불교에 말하는 열반은 즐거운 것, 행복한 것으로 묘사 된다. 열반락을 말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면 열반은 지각과 느낌이 소멸된 상태이므로 알 수 없다. 그런데 열반을 즐거움, 행복으로 느낀다면 상수멸정 상태가 아니라 선정상태라 볼 수 있다. 따라서 불교의 목적에 대하여 이고득락이라고 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고생끝 행복시작이 아니라 “갈애를 남김없이 사라지게 하고 소멸시키고 포기하고 버려서 집착 없이 해탈하는 것이다.(S56:11)”라 하였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의 소멸을 통하여 해탈과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인 것이다. 이런저런 행복을 이야기하지만 모두 다 행복을 이야기 한다. 행복이 삶의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여기저기에서 행복에 대하여 말한다. 모든 종교에서도 역시 행복을 말한다. 그래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부처님은 행복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다. 만일 불교가 단지 행복을 목적으로 하는 종교라면 다른 종교와 큰 차별이 없다. 그러나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것이 열반이다. 다시태어남이 없는 열반을 실현하는 것이 궁극적인 행복이라 한다. 그렇다면 삶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복과 불행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이는 부처님이 “수행승들이여,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1)”라고 말씀하신 것에서 알 수 있다. 이것이 불행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나보다 더 불행하고 가난한 사람을 보았을 때 ‘나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시작을 알 수 없는 한량 없는 윤회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불행과 고통을 겪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 나 보다 더 행복하고 부유한 사람을 보았을 때 “수행승들이여, 행복하고 부유한사람을 보면 그대들은 ‘이 오랜 세월을 지나면서 우리도 한 때 저런 사람이었다.’라고 관찰해야 한다.(S15:12)”라고 부처님은 말씀 하셨다. 이와 같은 자세가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이다. 한량없는 윤회속에서 할 것 못할 것 다 해 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그것은 무슨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이 윤회는 시작을 알 수 없다. 무명에 덮인 뭇삶들은 갈애에 속박되어 유전하고 윤회하므로 그 최초의 시작을 알 수 없다. 수행승들이여, 이와 같이 참으로 오랜세월 동안 그대들은 고통을 경험하고 고뇌를 경험하고 재난을 경험하고 무덤을 증대시켰다. 수행승들이여, 그러나 이제 그대들은 모든 형성된 것에서 싫어 하여 떠나기에 충분하고, 사라지기에 충분하고, 해탈하기에 충분하다.(S15;12)”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이 불행과 행복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라 본다. THE HAPPY SAD 사람들은 이런저런 행복을 이야기 한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풍덩빠져 노니는 행복 보다 더 큰 행복이 있을까. 2013-05-07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행복&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행복&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불행&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불행&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열반&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열반&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이고득락&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이고득락&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離苦得樂&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離苦得樂&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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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Tue, 7 May 2013 11:58:37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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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이, 감관(感官)과 육적(六賊)</title>
	            <description>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이, 감관(感官)과 육적(六賊) 매혹적인 꽃 살맛 나는 계절이다. 여기저기에서 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 상큼한 공기, 일년중 이때가 가장 좋은 계절이다. 그래서 오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했을 것이다. 꽃의 계절 오월초순에 피는 꽃들이 있다. 주변에서 해마다 늘 이맘때가 되면 보는 꽃이다. 그래서 꽃구경을 떠났다. 멀리도 아니고 도보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이다. 사람들이 밀집하여 사는 단지에 매혹적인 꽃이 피었다. 마치 장미처럼 꽃잎이 겹겹이 있고 연분홍색깔이다. 크기는 어른 주먹만하다. 해마다 이맘 때 아파트 단지에 피는 이 꽃 이름은 무엇일까? 꽃도둑인가? 보면 볼수록 매력적이다. 그래서 한참 쳐다 본다. 지나가던 사람들도 스마트폰으로 찍기에 열심이다. 이꽃 이름은 무엇일까? 해마다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에서 예쁘고 아름답고 매혹적인 꽃을 피워낸다. 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고 쳐다보게 만든다. 그래서 시선을 사로잡아 오랫동안 기억에 남게 만든다. 이를 ‘꽃도둑’이라 볼 수 있을까? 순백의 하얀 꽃 거리의 가로를 걷다 보면 눈길을 사로 잡는 꽃들이 많다. 그런 꽃이 있으면 주머니의 디카에 손이 간다. 항상 왼쪽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든지 찍을 수 있도록 충전된 상태이다. 마치 카우보이가 늘 총을 휴대하듯이 늘 작은 디카를 가지고 다닌다. 이번에는 하얀꽃을 보았다. 모두 순백의 빛깔이다. 더구나 활짝 피어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순수해지는 것 같다. 이번에도 시선을 사로 잡아 버렸다. 그래서 디카를 꺼내지 않을 수 없도록 끌어 당겼다. 이렇게 거리를 걷다 보면 눈에 띄는 것이 꽃들이다. 하얀색과 붉은 색의 조화 가로를 벗어나 산에 진입하였다. 또 눈길을 끄는 꽃이 보였다. 백색과 붉은 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꽃이다. 오엽으로 된 꽃 역시 활짝 피어 절정을 맞이 하고 있다. 산에서 피는 꽃은 산에서 피는 꽃은 작고 소박하다. 거리에서 피는 꽃과 작은 꽃잎과 하얀색깔이 특징적이다.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는듯 산에서 피는 소박한 꽃과 달리 거리에서는 붉고 화려한 꽃 일색이다. 가장 많은 것이 철쭉과 영산홍이다. 거리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조경용 꽃이다. 너무 흔하다 보니 카메라에 손이 가지 않는다. 개량에 개량을 거듭하여 거리와 공원에 조경용으로 심어진 영산홍은 마치 활짝 웃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도 한꺼번에 일제히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웃는 것 같다. 꽃이 피는 계절이 꽃을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꽃을 보면 마음이 끌리지 않을 수 없는데, 특히 붉고 큰 매혹적인 꽃에 끌린다. 이런 끌림은 시각적으로 즐기기 때문이다. 그런데 부처님은 이런 시각적 즐거움에 이끌리는 것에 대하여 경계의 말씀을 하셨다. 형상에 대한 갈애를 유발할 것이기 때문이다. 접촉으로 인하여 여섯 감각능력과 여섯 감각대상이 접촉하면 세상이 발생한다. 창조주가 있어서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능력이 감각대상을 인식함에 따라 세상이 생겨나는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은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이것이 세상의 생겨남이다.(S35:107)”이라고 말씀 하셨다. 이것이 부처님이 말씀 하신 것이고 불교의 세계관이다. 그래서 세상은 항상 나를 중심으로 하여 순간순간 발생되는 것이지, 내가 세상속에 있어서 그 세상 속에서 나고 죽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여섯감역에 대한 이야기가 상윳따니까야에 실려 있다. 제35상윳따인 여섯가지 감역의 모음(Saḷāyatana Saṃyutta,S35)이다. 제35상윳따 여섯가지 감역의 모음(Saḷāyatana Saṃyutta) 제35상윳따 여섯가지 감역의 모음은 매우 방대하다. 19품 248경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무려 618페이지에 달한다. 이렇게 방대한 35상윳따에서 부처님은 무엇을 말씀 하시고자 한 것일까? 해제글에 따르면 35상윳따의 빠알리 이름 살라야따나(Saḷāyatana)에서 아야따나(āyatana)는 ‘근원, 원천’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는 여섯 쌍의 토대로 여섯 감역을 해석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섯 가지 내적 감역과 여섯가지 외적인 감역이 접촉하여 생긴 것을 일체라 하는데, 이는 세상이 발생되는 원천인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정신까지 감각능력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눈, 귀, 코와 같은 내적 감역에 정신까지 포함시킨 것이다. 이는 정신영역까지 일체로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일체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 청각과 소리, 후각과 냄새, 미각과 맛, 촉각과 감촉, 정신과 사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을 일체라고 한다.(S35:23)”라고 하였다. 이처럼 일체에 ‘정신(mano)과 사실(dhamma)’ 을 포함시킴으로서 정신을 눈과 귀 등과 같이 감각능력 중의 하나로 본 것이다. 그래서 정신대상의 감역에서는 미묘한 물질적 현상과 조건지어지지 않은 무위의 열반까지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섯 쌍의 감역을 통하여 부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알려 주고자 한 것일까? 부처님은 고통에서 해방시고자 법문을 하였다. 그런데 고통의 원천이 접촉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이다. 접촉이 있었기 때문에 고통이 발생된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괴로움이 생겨난다는 것은 무엇인가? 시각과 형상을 조건으로 시각의식이 생겨난다. 그 세가지가 화합하여 접촉이 생겨나고…이것이 괴로움의 생겨남이다.(S35:106)”라고 하였다. 세상의 생겨남과 같은 원리이다. 모두 여섯 쌍의 접촉에 따른 것이다. 아름다운 형상을 취하였을 때 지금 예쁜 꽃을 보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까? 지금 매력적인 여인을 보고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표현되어 있다. [세존] “장자여, 원하고 즐겁고 마음에 들고 사랑스럽고 감각적 욕망을 자극하고 애착의 대상이 되는, 시각으로 인식되는 형상들이 있는데, 어떤 뭇삶들은 그것들을 환희하고 환호 하고 탐착합니다. 그것들에 대한 환희가 있고 탐착이 있다면, 그들의 의식은 그것에 의존하며 그것들에 탐착합니다. 장자여, 집착이 있으면 그 뭇 삶들은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합니다.(S35:125)” 밧지의 경(S35:125)에서 부처님이 하신 말씀이다. 욱가라고 하는 장자가 뭇삶들이 완전한 열반에 들지 못하는 이유에 대하여 묻자 부처님이 답하신 것이다. 경에서 부처님은 집착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시각으로 보는 형상에 집착하였을 경우 괴로움이 발생하고 수행자라면 해탈과 열반을 실현할 수 없을 것이라 한다. 그런데 십이연기에 따르면 집착은 갈애를 연유로 한다. 따라서 집착 이전에 형상에 대한 갈애를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갈애를 일으키는 근본적인 요인은 무명이다. 즉 현상에 대하여 ‘이것은 영원하고 즐겁고 실체가 있다’는 것을 말한다. 이런 전도된 인식을 가지고 있는 한 갈애가 일어 날 수 밖에 없고 고통을 야기 할 뿐만 아니라 세세생생 윤회하게 만들것이라 한다. 따라서 모든 괴로움의 뿌리는 무명이고, 접촉에 따른 갈애로 인하여 괴로움이 발생되는 것이다. 향기도둑 상윳따니까야 게송에 향기도둑이라는 말이 있다. 비구가 연꽃향기가 좋아 매일 향기를 취하자 하늘사람이 게송으로 “그대가 이 연꽃의 향기를 맡을 때 그것은 주어진 것이 아니네. 이것은 도둑질의 한 가지이니, 벗이여, 그대는 향기 도둑이네. (S9:14)”라 하였다. 수행자의 허물에 대한 경계의 말이다. 청정범행을 닦는 수행자는 작은 허물도 크게 보이기 때문에, 향기를 취하는 것을 도둑질로 본 것이다. 오계에서 도둑질이란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을 말한다. 향기를 맡으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향내를 취하는 행위를 경에서는 도둑질로 본 것이다. 왜 이처럼 엄격하게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향내 맡는 행위를 내버려 두면 갈애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 있듯이 갈애는 집착으로 발전되어 소유하려 할 한다. 게송에서 향기도둑이라고 한 것은 청정범행을 닦는 수행자에게 있어서 탁구공만한 작은 허물도 보통사람의 눈에는 축구공만하게 크게 보이기 때문이다. 도둑질은 향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꽃을 바라보고 집착한다면 꽃도둑, 형상도둑이 될 것이다. 음식을 보고 맛에 탐착한다면 음식도둑, 맛도둑이 된다. 그래서 여섯 감각능력에 대한 대상 모두가 도둑이 될 수 있다. 수행자에 있어서 주지 않는 것을 취하는 것 모두가 도둑질이 된다. 그래서 여섯 가지 감각능력에 대하여 육적(六賊)이라 하였다. 번뇌를 일으키는 근원이 되는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육근을 도둑에 비유한 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감각기관의 문을 단속할 수 있을까? 법구경에서 부처님은 법구경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다. Subhānupassiṃ viharantaṃ 수바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asaṃvutaṃ, 인드리예수 아상유땅Bhojanamhi amattaññuṃ, 보자남히 짜맛딴늉 kusītaṃ hīnavīriyaṃ, 꾸시땅 히나위리양 Taṃ ve pasahati Māro 땅 웨 빠사하띠 마로 vāto rukkhaṃ va dubbalaṃ. 와또 룩캉와 둡발랑 아름다움에 탐닉하여 감관을 수호하지 않고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 게을러 정진이 없으면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리. (법구경 Dhp7, 전재성님역) 신체의 특정부위를 명상주제로 삼았을 때 아름다움에 탐닉(Subhānupassiṃ viharantaṃ)하는 것은 “원하는 대상에 정신활동을 기울여 아름다운 손톱과 발가락, 손과 발, 다리와 허벅지, 엉덩이와 배, 가슴과 목, 입술과 치아, 입과 코, 눈썹과 이마, 머리카락과 몸털, 피부와 안색과 몸의 윤곽에서 오는 인상과 연상을 명상주제로 하는 것(Dhp.I.74)”라 한다. 요즘 말로 하면 연예인들의 특정 부위를 좋아하는 것 같은 내용이다. 인터넷에서 말하는 “김 태희 의 눈 , 이나영 의 입술 , 한채영 의 몸매” 같은 것이다. 이처럼 연예인의 신체에 대한 특정부위의 아름다움에 탐닉하였을 때 악하고 불건전한 생각이 떠오를 수밖에 없다. 게송에서는 이를 인상과 연상으로 설명하였다. 인상은 ‘여자다, 남자다’라고 인식하는 전체상(全體相)을 말하며 니밋따(nimitta)로 표현된다. 연상은 ‘코, 눈’ 등 신체의 일부분을 인식하는 세밀한 상(細相)을 말하며 아누비얀자나 (anuvyanjana)라 한다. 이렇게 아름다움에 탐닉하는 것은 감각능력의 문을 수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의 문 이렇게 여섯 감각의 문을 말한다. 식사이야기를 한 이유는? 그런데 게송에서는 갑자기 식사이야기가 나온다. 감관을 수호하는 것, 즉 여섯 감각기관의 문을 수호하는 것과 음식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각주에 따르면 “음식을 구하고, 받고, 소비하는 적절한 수단을 알지 못하면 그런 사람은 지혜가 없는 사람이다. 이 음식은 올바른 생활을 위한 것이다. (Dhp.I.74, Dps.5)”라고 설명되어 있다. 이는 무엇을 말할까? 음식이야말로 여섯 가지 감각의 문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라 본다. 음식은 단지 후각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먹는 행위 자체가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정신 등 여섯 감각능력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수행승들이여, 세상에 수행승은 ‘이것은 놀이나 사치로나 장식이나 치장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몸이 살아있는 한 그 몸을 유지하고 해를 입지 않도록 하고 청정한 삶을 살기 위한 것이다. (S35:239)”라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음식은 마치 수레에 기름을 치듯이 단지 몸을 유지하기 위하여 먹는 것이라는 뜻이다. 식탐을 일으키면 여섯 감각능력을 수호 할 수 없음을 말한다. 또 음식에 대한 갈애는 성욕을 유발시키기 때문이라 본다. 식욕은 성욕과 함께 생리적 욕구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적 행위 역시 먹는 행위와 마찬가지로 여섯 가지 감각능력이 총동원 되기 때문이다. 왜 게송에서 뜬금없는 듯이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모르고(Bhojanamhi amattaññuṃ)”라고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대한 충분한 이유가 되리라고 보여진다. 수행자가 감각의 문도 지키지 않고 음식도 절제하지 않는다면 게으른자라고 볼 수 있다. 게송에서 말하는 게으름(kusītaṃ)은 “감각적 쾌락에 메인 사유, 분노에 매인 사유, 폭력에 매인 사유(Dhp.I.75)”를 말한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관련이 있다. 그래서 정진이 없는 것이다. 여기서 정진이 없다(hīnavīriyaṃ)는 것은 행주좌와와 관련하여 착하고 건전한 것을 증가시키고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감소시키는 정진력이 결여된 것을 말한다. 팔정도에서 말하는 그 정진을 말한다. 악마(Māra)라는 이름 이처럼 특정신체 부위를 명상주제로 삼고, 음식먹는 것을 즐기고 게으른자의 말로는 어떤 것일까? 게송에서는 ‘바람이 연약한 나무를 꺽어 버리는 것 (vāto rukkhaṃ va dubbalaṃ)’과 같다고 표현 하였다. 강력한 폭풍이 허약한 나무를 뿌리채 뽑아 버리듯이, 번뇌속의 악마는 그에게서 생겨나서 사람을 공격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각주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작은 가지 넘어 뜨리는 것처럼, 열 세가지 승잔죄(sanghadisesa:대중에게 참회하고 승단에 남아있을 수 있는 죄), 뿌리 뽑아 뿌리와 가지를 뒤집는 것처럼, 단두죄(parajika: 승단에서 추방하는 죄)를 어기도록 유도한다. 악마가 그를 잘 가르쳐진 가르침에서 멀어지게 해서 속퇴시키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vāto rukkhaṃ va dubbalaṃ 각주, Dhp.I.75-76) 여기서 말하는 악마는 사유과정에서 일어나는 약화된 번뇌를 뜻하는 것이라 한다. 악마는 탐욕과 증오 등을 통하여 덕성을 죽이기 때문에 번뇌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경전에 등장하는 악마(Māra)는 다섯 가지로 묘사 된다. 즉 1) 개인을 구성하는 존재의 다발(오온), 2) 오염(kilesa), 3) 윤회의 지속으로 이끄는 경향(abhisankhara), 4) 죽음(maccu), 5) 하늘아들로서의 악마(devaputtamara) 이렇게 다섯 가지이다.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씀 하셨다. Asubhānupassiṃ viharantaṃ 아수바누빳싱 위하란땅 indriyesu susaṃvutaṃ, 인드리예수 수상유땅Bhojanamhi ca mattaññuṃ, 보자남히 짜 맛딴늉 saddhaṃ āraddhavīriyaṃ, 삿당 아랏다위리양Taṃ ve nappasahati Māro 땅 웨납빠사하띠 마로 vāto selaṃ va pabbataṃ. 와또 셀랑와 빱바땅 감관을 잘 수호하여 식사에 알맞은 분량을 알고 믿음을 지니고 힘써 정진하면 바람이 바위산을 무너뜨리지 못하듯 악마가 그를 쓰러뜨리지 못하리. (법구경 Dhp8, 전재성님역) 2013-05-05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꽃도둑&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꽃도둑&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육적(六賊)&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육적(六賊)&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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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ubDate>Sun, 5 May 2013 11:36:24 +0900</pubDate>
	            <author>진흙속의연꽃</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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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 깨달음의 구성요소인가 깨달음의 고리인가, 삐띠(喜悅)와 칠각지(七覺支)</title>
	            <description> 깨달음의 구성요소인가 깨달음의 고리인가, 삐띠(喜悅)와 칠각지(七覺支) 놀라울 만큼 신기하고 진기함으로 번역되는 ‘경이’는 때로 ‘희열’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래서일까 상윳따니까야 초판본 해제에서 전재성 박사는 삐띠(piti)에 대하여 ‘경이’로 번역하였다. 그래서 ‘경이의 깨달음의 요소(喜覺支 pitisambojjhanga)’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삐띠(piti), 경이(驚異)인가 희열인가 불교에서 선정단계를 설명할 때 삐띠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희열로 번역한다. 그런데 전재성박사의 초판 해제글을 읽어 보면 “한때에 필자는 이 단어를 경이(驚異)라고 번역하고는 만족했으나 아무래도 놀라움(wonder, miracle)을 뜻하는 경이와는 뜻이 현격히 차이가 나는 것 같아 희열로 바꾸었다.”라고 표현한 것으로 보아 번역어에 대한 고민의 흔적이 보인다. 그렇다면 희열은 어떻게 다른 것일까? 희열의 국어사전적 의미는 ‘욕구가 충족되었을 때 느끼는 지극한 기쁨’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그런데 PTS 사전에 따르면 희열을 뜻하는 빠알리어 ‘삐띠(piti)’는 ‘즐거움(joy), 환희(delight), 흥미(zest), 충만(exuberance), 황홀(rapture)’ 이라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고 한다. 이처럼 희열을 뜻하는 삐띠는 오온에 있어서 느낌(수온)이 아니리 행온에 속한다. 그래서 대상에 의해 창조된 관심이나 흥미를 뜻한다고 한다. 그래서 52가지 마음부수에서 같아지는 마음부수(annasamana-cetasika)에 속한다. 마음의 조건에 따라 희열은 불선한 마음부수(akusala-cetasika)도 아니고 선한 마음부수도(sobhana-cetasika)도 아니다. 희열(pīti)은 사유(vitakkka), 숙고(vicāra), 결심(adhimokkha), 정진(vīriya), 열의(chanda)와 함께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에 속한다.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가 있다면 ‘반드시 같아지는 마음부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 감각접촉(phassa), 느낌(vedana), 인식(saññā), 의도(cetanā) 집중(ekaggatā), 명근(jīvitindriya), 작의(manasikāra)라 한다. 반드시 또는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는 선한 마음(선심)에서는 유익한 것이 되고, 불선한 마음(불선심)에서는 불선한 것이 된다. 또 업으로 결정할 수 없는 무기(無記)의 마음들에서는 무기가 된다. 이처럼 마음의 조건에 달라 짐을 알 수 있다. “훔쳐 먹은 사과가 맛있다” 만일 수행자가 선정수행을 하여 ‘희열(piti)’을 었었다면 아름답거나 착하거나 덕스러운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도둑이 물건을 훔쳐서 얻는 희열‘희열(piti)’도 있을 수 있다. “훔쳐 먹은 사과가 맛있다”라는 말이 있듯이 몰래 도모하여 얻는 쾌감을 말한다. 그 경우 악하고 불건전한 것이 된다. 이렇게 희열(piti)은 조건에 따라 선한 것도 되고 악한 것도 된다. 그래서 희열(piti)은 ‘때때로 같아지는 마음부수’에 속한다. 선정(禪定)사단계에서 희열로 번역되는 삐띠(piti)는 초선 (初禪)에서 일으킨 생각(尋, vitaka), 지속적 고찰(伺, vicāra), 행복(樂, sukha)과 함께 네 가지 요소에 포함된다. 네 가지 선정일 경우 삐띠는 이선 (二禪)까지 있게 된다. 삼선(三禪)은 행복(樂, sukha)만 있고 사선(四禪)은 행복(樂, sukha)도 사라지고 평온(捨, upekkhā)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희열의 네 가지 단계 이처럼 삐띠가 선정의 용어로도 사용되지만, 위빠사나에서도 삐띠를 얻을 수 있다고 한다. ‘우 쿤달라 비왐사’가 지은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에 따르면, ‘생멸의 지혜(udayabbaya ñāna)’에 이른 수행자는 다음의 다섯 가지 삐띠를 경험한다고 한다. 삐띠는 느낌(수온)에 속하지 않고 행온에 속하기 때문에 경험한다고 표현 하였다. 첫째, 가벼운 희열-가볍게 흔들리는 즐거움이다. 가슴 윗부분에서 움직이는 느낌, 등뼈가 으슬으슬한 느낌이 있으며, 이 느낌은 한 번 일어났다가 사라진다. 둘째, 순간적인 희열-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즐거움으로 여러 번 일어난다. 수행자는 사야도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몸에서 여러 번 경련이 일어납니다. 이것을 어떻게 알아차려야 합니까?” 이때 사야도는 ‘경련, 경련’ 하며 알아차리라고 말한다. 위빠사나 수행은 한마디로 무엇이 일어나건 일어나는 그 순간에,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일아차리는 힘(집중)이 좋은 수행자는 한 번의 경련이 다음 경련으로 이어지며, 또다시 그다음 경련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수행자는 희열을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진동하는 희열-주요현상은 진동이며 기쁨이 넘쳐 흐르는 것이다. 생멸의 지혜에 이른 수행자는 이를 경험할 수 있다. 몸의 아래에서 위쪽으로 따뜻한 기운이 올라오거나 차가운 안개가 감싸는 느낌이 몸의 위쪽으로 서서히 움직이기도 한다. 이 느낌은 몸의 위쪽으로 올라오면 사라진다. 어떤 때는 따뜻한 느낌이나 차가운 느낌이 몸의 위쪽에서 시작 되어 아래쪽으로 내려와서 사라지기도 한다. 수행자는 사야도에게 이렇게 보고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이런 따뜻한 느낌이나 차가운 느낌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이 느낌은 바깥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느낌은 위쪽에서 와서 아래쪽으로 향하기를 반복한다. 넷째, 들어올리는 희열-황홀하고 짜릿한 느낌으로 위로 들려져서 날아오르는 희열이다. 부처님 시대에는 이런 희열이 일어나 하늘로 떠올라서 실제로 공중을 날아다닌 사람들이 있었다. 지금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일반적으로는 수행이 아주 잘 될 때, 수행자의 손이 떠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때는 양손이 저절로 천천히 올라와서 절을 할 때처럼 연꽃모양이 되기도 한다. 이곳 센터에 있는 한 수행자는 좌선을 시작한 지 얼마 안되어 팔이 들어 올려진 채로 한 시간 내내 그렇게 앉아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 팔이 아프지 않느냐고 묻자 그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이것을 들어 올리는 희열이라 한다. 한 수행자는 좌선하는 동안 근처의 다른 장소로 이동한다. 어떤 수행자는 수행하는 동안 개구리가 뛰는 것처럼 살짝 뛰어오르기도 한다. 만약 그가 경행을 하는 중에 들어올리는 희열이 일어났다면 여기저기로 뛰었을지도 모른다. 들어올리는 희열이 일어나면 수행자는 매우 가볍고 빠른 느낌을 갖는다. 수행자는 뛰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다. 다리의 움직임이 재빠르다고 느껴지기 때문에 뛰고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이다. 사야도는 수행자에게 뛰려 하지 말라고 말해 주어야 한다. 뛰면 알아차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들어올리는 희열이 일어났다는 것은 수행자가 생멸의 지혜를 얻었다는 것을 말한다. (우 쿤달라 비왐사, 위빠사나 수행자의 근기를 돕는 아홉요인-행복한 숲) stream entry 우 쿤달라 비왐사는 네 가지 희열의 종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라 한다. 희열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현상은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희열은 즐기는 대상이 아니라 알아차릴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책에 따르면 들어 올리는 희열이 일어나면 수행자의 마음이 유쾌해져서 수행을 아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들어 올리는 희열에 대한 숙고도 아주 잘 할 수 있다고 한다. 수행자가 용기를 잃었을 때 수행자는 알아차림을 하고 숙고하여 ‘희열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일어나도록 해야한다고 하였다. 이때 ‘희열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는 무엇일까?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七覺支)가 있는데 상윳따니까야에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가 있다. 이를 ‘칠각지(七覺支, satta Bojjhaṅga)’라 한다. 칠각지에 ‘희열에 대한 깨달음의 요소’가 있다. 그렇다면 칠각지는 어떤 것일까? 해제글에 따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먼저 명상대상인 신체, 느낌, 마음, 사실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한다. 이것이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satisambojjhaṅga, 念覺支)이다. 새김이 안정될 때 에 대상의 모습을 분명히 구별하고 아울러 명상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착하고 건전한 상태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구별할 수 있다. 이것이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dhammavicayasambojjhaṅga, 擇法覺支)이다.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는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향한 노력을 유발한다. 이것이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viriyasambojjhaṅga, 精進覺支)이다. 정진을 통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기쁨이 생긴다. 이것이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pītisambojjhaṅga, 喜覺支)이다. 기쁨이 정밀하게 정화되면서 안온이 생긴다. 이것이 안온의 깨달음의 고리(passaddhisambojjhaṅga, 輕安覺支)이다. 안온의 상태를 통해서 집중이 생겨난다. 이것이 집중의 깨달음의 고리(samādhisambojjhaṅga, 定覺支)이다. 집중된 마음은 평정한 상태가 된다. 이것이 평정의 깨달음의 고리(upekkhāsambojjhaṅga, 捨覺支)이다. (칠각지, 상윳따니까야 개정판 5권 해제, 전재성박사) 해제글에 따르면 이와 같은 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는 ‘동시수반적’이라 한다. 각각의 연속적인 고리들에서 이미 일어난 것들이 사라지는 것들이 아니라 수반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전재성박사는 ‘보장가(bojjhaṅga)’에 대하여 ‘깨달음의 고리’라고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동시적 수반관계로 보기 때문이다. 깨달음의 구성요소인가 깨달음의 고리인가 그러나 다른 번역서를 보면 “깨달음의 구성요소”로 번역 하였다. 하지만 이는 보장가(bojjhaṅga)의 원래 뜻과 맞지 않다. 보장가(bojjhaṅga)는 보디(bodhi)와 앙가(aṅga)의 복합어이다. 보디가 ‘깨달음’이라는 뜻이고, 앙가는 ‘연결 부위, 고리, 요소’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현대 번역가들은 앙가에 대하여 ‘요소’로 번역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전재성 박사의 해제글에 따르면 “부처님이 언어를 선택할 때 심사숙고하여 그 용어를 선택한 심오한 이유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같은 요소라도 연기적인 관계성을 반영하는 연결고리라는 의미에서 ‘고리’라는 번역어를 택한다.”라고 하였다. 앙가의 원뜻을 살려 고리라고 번역한 것은 부처님이 심사숙고 하여 용어를 선택하였것이라는 이야기이다. 그래서 칠각지는 십이연기처럼 하나를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 수반적으로 보아 깨달음의 고리라고 번역하였다고 하였다. 마음이 침체되었을 때, 마음이 들떠 있을 때 해제에 따르면 칠각지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뉜다. ‘활성적’인 것과 ‘제어적’인 것이다. 전자에 속하는 것이 탐구, 정진, 희열이 먼저 일어난다. 후자에 속하는 안온, 집중, 평온은 뒤이어 일어난다. 그래서 활성적인 요소는 작은 불로 연료를 태우듯, 마음이 권태로울 때에 개발되어야 하고, 제어적인 요소는 물을 뿌려 산불을 끄듯, 마음이 들떳을 때에 개발되어여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새김(sati)은 활성적인 것과 제어적인 것의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지만 양자에 모두 유효한 것으로 그 균형을 유지하는 데 특히 중요하다고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 하셨다.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침체되었다면 그 때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고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고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를 닦으면 옳다. 그것은 어떠한 까닭인가? 수행승들이여, 마음이 침체되었다면 그것을 조건으로 고양시키기 쉽기 때문이다. (악기경-Aggisutta-불의 경, 상윳따니까야 S46:53, 전재성님역) 악기경에 따르면 마음이 침체 되었을 때 택법각지(擇法覺支), 정진각지( 精進覺支), 희각지(喜覺支)가 좋다고 하였다. 마음을 고양시키기 때문이다. 이를 “사람이 불씨를 살리려 하는데, 거기에다 마른 풀잎을 던지고 마른 쇠똥을 던지고 마른나무를 던지고 입우로 바람을 불고(S46:53”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경의 제목이 ‘불의 경(Aggisutta)’이라 하였을 것이다. 반면 마음이 들떳을 때는 불을 꺼야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경안각지(輕安覺支), 정각지(定覺支, 삼매), 사각지(捨覺支, 평정)을 개발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소금과 대신의 역할을 하는 염각지(念覺支) 아무곳에도 속하지 않는 염각지(念覺支,sati)에 대해서는 “수행승들이여, 나는 새김을 확립하는 한, 그것은 모든 경우에 유익하다고 말한다. (S46:53)”라고 하였다. 이는 오근과 오력에서 사띠의 역할과 같다. 그래서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satisambojjhaṅga, 念覺支)’는 ‘소금의 맛이 모든 속성에 들어가듯이, 모든 일을 하는 대신은 전쟁도 하고 조언도 하고 예식에 참여하는 등 해야 할 일을 행하는 것처럼’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정리하여 표로 만들어 보면 이와 같은 칠각지의 역할에 대하여 정리하여 표를 만들면 다음과 같다. 구 분 설 명 비 고 새김의 깨달음의 고리 (satisambojjhaṅga, 念覺支) 명상대상인 신체, 느낌, 마음, 사실에 대하여 올바로 알아차리고 새김을 확립함. -활성적인 것과 제어적인 것의 어느 부류에도 속하지 않지만 양자에 모두 유효한 것으로 그 균형을 유지하는 데 특히 중요 -소금의 맛, 대신의 중재역할. -새김을 확립하는 한, 그것은 모든 경우에 유익함. 탐구의 깨달음의 고리 (dhammavicayasambojjhaṅga, 擇法覺支) 새김이 안정될 때 에 대상의 모습을 분명히 구별하고 아울러 명상과정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착하고 건전한 상태와 악하고 불건전한 상태를 구별함. -활성적인 것 -마음이 침체 되었을 때 개발해야함 정진의 깨달음의 고리 (viriyasambojjhaṅga, 精進覺支) 악하고 불건전한 것을 버리고 착하고 건전한 것을 향한 노력을 유발함. 희열의 깨달음의 고리 (pītisambojjhaṅga, 喜覺支) 정진을 통해서 마음이 청정해지면서 기쁨이 생겨남. 안온의 깨달음의 고리 (passaddhisambojjhaṅga, 輕安覺支) 기쁨이 정밀하게 정화되면서 안온이 생겨남. -제어적인 것 -마음이 들떠 있을 때 개발해야함. 집중의 깨달음의 고리 (samādhisambojjhaṅga, 定覺支) 안온의 상태를 통해서 집중이 생겨남. 평정의 깨달음의 고리 (upekkhāsambojjhaṅga, 捨覺支) 집중된 마음은 평정한 상태가 됨. 일곱 고리로 연결된 칠각지는 동시수반적임 삐띠(희열)는 알아차려야 할 대상 희열로 번역되는 삐띠는 칠각지 중의 하나일 뿐만 아니라 37조도품에서 유일하게 하나의 정신적 요소이다. 37조도품에서 정진이 9번 등장하고, 사띠가 8번 이나 등장하는 것과 달리 단 한차례 등장하고 만다. 칠각지를 통해서이다. 삐띠는 사선정에서는 희열을 경험하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알아차릴 대상이라 하였다. 그래서 희열이 일어나면 “그것은 한량없다.”든가 “그것이 잘 완성되어 있다.”든가 “그것이 지속되고 있다.(S46:4)”라고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또 “이러한 조건 때문에 나에게 쇠퇴한다. .(S46:4)”라고 분명히 알아야 된다고 하였다. 그 어디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삐띠는 37조도품 중에 하나로서 칠각지를 구성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 삐띠는 깨달음으로 이끄는 하나의 정신적요소라는 것이다. 그래서 수행자가 침체 되었을 때 개발해야 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런 삐띠 역시 하나의 생멸현상으로 관찰의 대상이라 한다. 2013-05-04 진흙속의연꽃 &lt;br&gt;&lt;br&gt;tag : &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경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경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희열&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희열&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삐띠&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삐띠&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piti&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piti&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일곱가지 깨달음의 고리&lt;/a&gt;,&amp;nbsp;&lt;a href=&quot;/_blog/tagArticleList.do?blogid=06UOF&amp;tagName=七覺支&quot; rel=&quot;tag&quot; target=&quot;_blank&quot;&gt;七覺支&lt;/a&gt;</descrip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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