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활 력소

ㄴㅇㅇㅇ 2015. 10. 31. 09:11

 

 

 

 

  원의 잡극(雜劇)은 여성용 단본(旦本)과 남성용 말본(末本)이 존재하는데 「한궁추(漢宮秋」는 남성용 말본이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주인공인 한원제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후에 경극(京劇) 「소군출새(昭君出塞)」로 개작되면서 여주인공인 소군 중심으로 바뀌게 되었다. 전 극은 4절(四折) 1설자(一楔子)로 구성되어 있다.

 

  이 작품은 관한경의 「두아원(窦娥冤)」, 백박(白樸)의「오동우(梧桐雨)」, 기군상(纪君祥)의 「조씨고아(赵氏孤儿)」와 함께 원 잡극 4대 비극 중 하나로, 원래 제목은 ‘파유몽고안한궁추(破幽梦孤雁汉宫秋)’다.

 

  이 일은 정사(正史)에 보이며 진(晋) 대 갈홍(葛洪)의「서경잡기(西京杂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비슷한 시기에 관한경의「한원제곡소군(汉元帝哭昭君)」잡극이 있다. 이 두 작품은 모두 당(唐)대 돈황(敦煌)에서 발견된「왕소군변문(王昭君变文)」에 의거하여 작품을 쓴 것으로, 이후 청대의 작자 미상 작품「화융기(和戎記)」전기(傳奇)가 이와 비슷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한나라의 원제는 모연수의 모략으로 연인인 왕소군을 흉노족에게 바치게 되면서 스스로의 사랑에 대해서 한스러움을 가진 임금이다. 정치적 힘으로는 어쩔 수 없이 흉노족에게 압박을 당하면서 연인을 지켜낼 수 없었음을 한탄한다. 왕소군은 한나라 원제의 연인이지만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은 까닭에 연인과 헤어져 흉노에게 시집가는 운명을 가진다. 사랑하는 사람과 생이별을 하며 국경을 넘어가면서 그 안타까움을 연기해낸다. 작품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한원제는 모연수(毛延寿)에게 궁녀를 선발하고 그림을 그려 간택할 수 있도록 하라 명령을 내린다. 왕소군은 스스로 자신이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모연수에게 뇌물을 주지 않는다. 이에 모연수는 그녀의 얼굴을 못나게 그려 왕이 간택할 수 없게 만든다.

 

  어느 날 소군이 비파를 뜯으며 자신의 괴로움을 노래하고 있을 때 한원제가 그녀를 발견한다. 이후 한원제는 그녀를 매우 총애한다. 그러나 흉노에게 잡혀간 모연수가 흉노족 왕에게 보낼 여자로 소군을 지명하기에 원제는 그것을 어쩔 수 없이 허락하게 된다.

 

  한원제는 패릉교 위에서 소군과 이별하며 매우 괴로워한다. 결국 소군은 흉노족과 한나라의 경계선에서 몸을 물에 던져 자살한다. 한편, 흉노족 왕은 모연수를 한나라 왕조로 돌려보낸다. 한원제는 소군의 그림을 걸어놓고 매일 보다가 꿈속에서나마 그녀를 만나게 된다. 때마침 외로운 기러기가 슬피 울며 지나가매 그 수심이 더욱 깊어진다. 이때 마침 모연수가 도착한다. 한원제는 그를 죽이고 소군의 전 앞에 제사를 지낸다.

 

  작품 속의 명문장

 

【蔓青菜】白日里无承应, 教寡人不曾一觉到天明, 做的个团圆梦境。 (雁叫科, 唱) 却原来雁叫长门两三声, 怎知道更有个人孤。

 

  밝은 대낮에 임금의 일을 다 못해냈으니, 과인이 새벽이 온 줄도 모르고 밤을 새누나. 꿈에서나마 우리 둘이 만나기를 바라네. (때마침 기러기 소리가 울리고 다시 이어서 노래한다.) 기러기 소리 저 문밖에서 길게 세 번 울어대니, 나는 어이할꼬 이내 몸 혼자인 것을.

 

  3절 중 밤을 새우며 소군을 그리워하는 대목이다. 이 작품은 한원제가 연인인 왕소군과의 사랑을 노래하기보다는, 그녀를 흉노에게 시집을 보내고 나서 왕소군을 그리워하는 부분에 중점을 둠으로써 절절한 그리움을 노래 가사에 담아내고 있다. 특히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 그리움의 정이 깊어지면서 절정에서 막을 내린다.

 

  ㅡ『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중국문학』(인문과교양, 2013)에서

 

  마치원(馬致遠, 1250?~1321/24)

 

  호는 동리(東籬). 대도(大都: 北京) 출생. 원나라에 들어가 강남지방 관리가 되어 강절행성(江浙行省)의 무제거(務提擧)가 된 외의 경력은 미상이다. 50세가 넘어 은퇴, 만년에 이르기까지 창작을 계속하였고 작가협회와 같은 ‘원정서회(元貞書會)’에 가입하여 그의 이름은 널리 연극계에 알려졌다. 그는 관한경(關漢卿)ㆍ왕실보(王實甫)ㆍ백박(白樸:자는 仁甫)과 나란히 원곡4대가(元曲四大家)라고 불렸는데, 격조 높은 세련된 문장으로 원곡작가 중 굴지의 문채가(文彩家)였다. 알려진 13종의 작품 가운데 7편이 현존한다. 그 중에서 왕소군(王昭君)의 고사에서 소재를 따온「한궁추(漢宮秋)」는 원나라 잡극 중에서 손꼽는 명작이다.

 

  이 밖에「악양루(岳陽樓)」「임풍자(壬風子)」 등의 도교신선극(道敎神仙劇)이 많은데, 당시 주로 북방에서 유행한 전진교(全眞敎)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산곡(散曲: 운문)의 명수이기도 하여 120수가 넘는 작품을 남겼다. 세상을 개탄하고 경치를 노래한 작품에 뛰어난 것이 많으나, 은둔사상(隱遁思想)이 짙어 잡극에서 보는 허무사상과 통하는 것이 있다.

 

  ㅡ[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에서

 

  왕소군 이야기

 

  선제 재위 기간 동안, 곽광 등을 비롯한 대신들의 보필로 한나라는 점차 강대해졌다. 그때 흉노는 귀족간의 권력 쟁탈로 인해 국력이 점차 약해져 갔다. 나중에는 다섯 선우로 분열되어 서로간의 싸움이 그치지를 않았다. 그중에 호한사(呼韓邪)라는 선우가 있었는데 자신의 형 질지(郅支) 선우에게 패하여 많은 군사를 잃어버렸다. 호한사는 대신들과 논의 끝에 한나라와 화의할 것을 결심했다. 그리고 직접 부하들을 데리고 선제를 배알하러 장안으로 왔다. 호한사는 중원으로 와서 한나라 황제를 배알한 최초의 선우였다. 선제는 그들을 귀한 손님으로 대접했다. 황제가 직접 장안 교외로 나아가 그들 일행을 영접했고 성대한 환영식도 열어주었으며 대접도 각별히 후하게 했다. 호한사는 장안을 떠날 때에 임박해서 ‘한나라와 흉노는 한 집안 식구처럼 세세대대 서로 침범하지 않는다.’는 우호 맹약을 맺었다.

 

  기원전 33년, 선제가 죽고 원제(元帝)가 즉위했다. 그때 세 번째로 장안으로 온 호한사는 한나라의 사위가 되어 친선 관계를 더욱 강화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근 1백여 년 동안 흉노와의 싸움으로 인해 불안정했던 한나라도 평화와 안정이 필요했다. 그래서 원제는 후궁의 궁녀 중에서 적합한 인물을 물색해 선우에게 시집보내기로 했다. 후궁에 왕소군(王昭君)이라는 미모의 궁녀가 있었는데, 총명하고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일생을 위해, 그리고 나라의 평화를 위해 흉노에게 시집가겠다고 자원했다.

 

  왕소군은 평소 그리 남들의 이목을 끌지 못했지만 그날 치장을 하고 나서니 그야말로 절세미인이었다. 호한사는 선발된 궁녀 다섯 중에서 유독 왕소군에게 마음이 끌렸다. 원제의 어명에 따라 예부의 대신들이 길일을 택한 후 호한사와 왕소군은 장안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젊고 예쁜 아내를 얻은 호한사의 기쁜 심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왕소군은 한나라와 흉노 관원들의 호위를 받으며 장안을 떠나 몇 천 리 떨어진 흉노 선우의 영지로 시집을 갔다.

 

 

                                                          왕소군이 흉노에게 시집가는 그림 [원나라]

 

  호한사 선우는 왕소군을 ‘영호(寧胡) 알씨’로 책봉하였는데 이는 그녀가 시집와서 흉노에게 평화와 안정을 가져다주었다는 뜻이다. 왕소군을 얻어 마음이 흡족한 호한사는, 한나라를 위해 변경을 지키며 한나라 천자와 백성들이 영원히 평화롭게 살게 하겠다는 상주서를 원제에게 올렸다. 왕소군은 흉노로 갈 때 많은 선물들을 가져갔다. 그녀는 흉노의 백성들을 아끼며 화목하게 지냈으며 천 짜는 기술과 옷 만드는 기술, 그리고 농업기술들을 가르쳐 줘서 흉노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왕소군은 아들 하나, 딸 둘을 낳았는데, 자식들 또한 한나라와 흉노 간의 우의를 위해 힘을 아끼지 않았다. 왕소군은 중국 역사에 길이 남을 만한 공적을 쌓은 미인이다. 왕소군이 흉노로 시집간 다음부터 흉노와 한나라는 서로 화목하게 지내면서 왕래가 많아졌고, 60여 년 동안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ㅡ풍국초 지음, 이원길 옮김,『중국 上下 오천년사』(신원문화사, 2005)에서

출처 : 이승하 : 화가 뭉크와 함께 이후
글쓴이 : 이승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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