樂書齋偶吟(낙서재우음) - 無圓(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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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무원 이돈섭

2020. 9. 19.

樂書齋偶吟(낙서재우음) / 尹善道(윤선도, 1587~1671)

 

樂書齋偶吟(낙서재우음) / 낙서재에서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읊다

낙서재(樂書齋)는 윤선도가 보길도 부용동에 지은 정자이며, 우음(偶吟)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시가로 읊음” 이다.

 

眼在靑山耳在琴(안재청산이재금) / 보는 것은 청산이요 듣는 건 거문고니

世間何事到吾心(세간하사도오심) / 세상 일 어떤 것이 내 마음에 들어오랴

滿腔浩氣無人識(만강호기무인식) / 내 마음 속 바른 기운 알아주는 이 없어

一曲狂歌獨自吟(일곡광가독자음) / 미친 듯 노래 한 곡 나 홀로 읊노라

 

孤山 先生 詩(고산선생 시) / 庚子 端午(경자 단오) / 無圓(무원) 李敦燮(이돈섭)  

 

孤山(고산) 尹善道(윤선도)는 五友歌(오우가)와 漁父四時詞(어부사시사)로 유명한 분으로 조선국 문신이다. 성품이 과격할 정도로 강직하고 엘리트의식이 강한 분이다.

 

南人(남인)인 윤선도는 西人(서인)에게 정치적 핍박을 받아 일생의 대부분을 奧地(오지)에서 유배와 해남에서 隱居(은거)로 보냈다.

 

가운데 무원 이돈섭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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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孤山) 윤선도 (尹善道)

 

1587년 7월 27일(음력 6월 22일) 조선국 한성부 출생 ~ 1671년 7월 16일(음력 6월 11일) 전라도 해남군 보길도 별세

 

윤선도는 조선국 의금부 금부도사 겸 통덕랑 등을 지낸 조선 시대 중기, 후기의 시인·문신·작가·정치인이자 음악가이다.

 

본관은 해남, 자는 약이(約而) 이고,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이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 윤유심(尹唯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 윤유기(尹唯幾)의 양자이다. 화가 공재 윤두서의 증조부이며 다산 정약용의 외5대조부이다.

 

정철, 박인로, 송순과 함께 조선 시조시가의 대표적인 인물로 손꼽히며, 오우가와 유배지에서 지은 시인 어부사시사로 유명하다. 풍수지리에도 능하여 홍재전서에는 제2의 무학(無學)이라는 별칭이 등재되기도 했고, 의사로 민간요법에 관련된 저서인 약화제(藥和劑)를 남기기도 했다.

 

1613년(광해군 6년) 진사시에 합격하였으나 광해군 조정의 임해군, 영창대군의 옥사 등과 북인(北人)정권의 전횡을 비난하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616년 30세에 성균관 유생으로 이이첨(李爾瞻) 등의 횡포를 규탄했다가 함경도 경원(慶源), 경상도 기장(機張) 등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1623년(인조 1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되었으나 곧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후 인조 반정 이후에도 관직을 사양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하다가 봉림대군, 인평대군 형제의 대군사부로 발탁되었다.

 

사부는 관직을 겸할 수 없음에도 특명으로 공조좌랑·형조정랑·한성부서윤 등을 5년간이나 역임하였다. 1629년(인조 6년)부터는 세자시강원문학으로 발탁되어 소현세자를 보도하였다.

 

그는 남인 중진 문신이자 허목, 윤휴와 함께 예송 논쟁 당시 남인의 주요 논객이자 예송 논쟁 당시 선봉장이었다. 서인(西人) 송시열과 함께 효종, 현종을 가르쳤으나 그는 승승장구하고 윤선도는 한직에 머물렀으므로 후일 갈등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차 예송 논쟁 당시 송시열의 체이부정 주장과 서인이 당론으로 소현세자와 민회빈 강씨, 김홍욱 복권운동을 벌이는 점을 근거로 송시열이 효종의 정통성을 부정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서인의 맹공을 받고 자신이 삼수(三水)에 유배되어 오랜 세월 유배생활을 하였다.

 

조선 효종과 현종의 세자 시절 세자시강원 사부의 한사람이었던 덕에 사형은 모면하고 유배를 받았다. 유배지에서 울적한 심사를 달래며 지은 어부사시사 등은 유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는 유배지에서 가사문학과 저서를 남긴 송강 정철, 20여 년간의 유배지에서 수십권의 저서를 남긴 다산 정약용 등과 비견된다.

 

그의 학문과 시맥은 이서우를 통해 성호 이익과 채제공에게로 이어졌다. 1667년(현종 9) 그의 나이 81세에 이르러 겨우 석방되고, 숙종 때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