德莫高于(덕막고우) - 청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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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예 방/청계 안정환

2020. 11. 14.

제30회 국제서화예술전 - 부산전 (第30回 國際書畵藝術展 - 釜山展)

 

莫高于(덕막고우)

 

부산시(釜山市) 전각장(篆刻匠) 안청계(安晴溪) 서(書) / 晴溪 安定煥(청계 안정환)

 

이 작품은 중국 전한시대의 정치가, 문인이며 학자였던 賈宜(가의)라는 분의 글로 그의 저서인 新書(신서) 문장을 전서체로 쓴 것이다. / 가의(賈宜 BC 200 ~ BC 168 漢의 政論家)

德莫高于博愛人 政莫高于博利人 故(생략) 政莫大于信 治莫大于仁

​(덕막고우박애인 정막고우박리인 고(생략) 정막대우신,치막대우인)

 

덕은 사람들을 널리 사랑하는 것보다 높은 것이 없고

정(치)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것보다 높은 것이 없다.

(고로) - 생략된 글자

정(政)은 믿음보다 큰것은 없고

치(治)는 인보다 큰 것이 없다..

釜山市 篆刻匠 安晴溪 書

부산시 전각장 안청계 쓰다.

*** 작품의 오른쪽 작품설명 표찰은 오자가 있다. 高于 => 高于(덕막고우)

 

帝喾

开放分类:中国上古人物中国上古神话人物人物

 

帝喾 - 功业

帝喾帝喾

帝喾以前,人们虽有一年四季的概念,但只是日出而作,日落而息,从事农艺畜牧没有一个科学的时辰顺序,严重制约了农业发展和人们生活质量的提高。因此,帝喾 “爻策占验推算历法,穷极变化,颁告天下”《大戴礼·五帝德》说他“夜观北斗,尽观日,作历弦、望、晦、朔、迎日推策”,或“观北斗四时指向,以定节气;观天干以定周天历度。”科学探索天象,物候变化规律,划分四时节令,指导人们按照节令从事农畜活动,极大地促进了社会生产力的发展。使华夏农业出现一次伟大的革命,农耕文明走进了一个崭新的时代。

 

帝喾时代可谓上古时期的太平盛世。他的治国方略是:“德莫于博爱于人,政莫高于博利于人。政莫大于信,治莫于大仁”强调以诚信、仁德使天下治。所以《史记》说他“普施利物,聪以知远,明以察微,顺天之义,知民知急,仁而威,惠而信,修身而天下服……日月所照,风雨所至,莫不服从。”帝喾在人民群众中尤以诚信而著称。“嫁女盘瓠犬”的故事历数千年而不衰。说犬戎房王作乱,帝喾征而不胜,便告文天下,凡取房王人头者,可得千金,封万户,赐帝女为妻。后来,一个头状如狗头的人叫盘瓠,以自己的勇猛和智慧取房王首级,帝喾即履行诺言,嫁女封邑于盘瓠犬。帝喾作为一代帝王,不仅能养性自律,大公无私,而且倡导诚信,明察善恶,为天下人所景仰,为历代帝王所推崇,时至今日,仍有积极意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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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賈誼)

최연소 박사가 된 중국 전한 문제 때의 문인 겸 학자. 진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 ·관제 ·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했다.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좌천되자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해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다.

 

출생-사망 : BC 200 ~ BC 168

국적 : 전한(前漢)

활동분야 : 정치 ·문인 ·학자

출생지 :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허난성[河南省] 뤄양[洛陽] 출생. 시문에 뛰어나고 제자백가에 정통하여 문제의 총애를 받아 약관으로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율령 ·관제 ·예악 등의 제도를 개정하고 전한의 관제를 정비하기 위한 많은 의견을 상주하였다.

 

그러나 주발(周勃) 등 당시 고관들의 시기로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굴원(屈原)에 비유하여 <복조부(鵩鳥賦)>와 <조굴원부(弔屈原賦)>를 지었으며, 《초사(楚辭)》에 수록된 <석서(惜誓)>도 그의 작품으로 알려졌다. 4년 뒤 복귀하여 문제의 막내아들 양왕(梁王)의 태부가 되었으나 왕이 낙마하여 급서하자 이를 애도한 나머지 1년 후 33세로 죽었다. 저서에 《신서(新書)》 10권이 있으며, 진(秦)의 멸망 원인을 추구한 <과진론(過秦論)>은 널리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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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의

중국 전한(前漢), 즉 서한(西漢)의 대신•정치가•문인(기원전 200년~기원전 168년). 낙양(洛陽) 사람. 그는 정삭(正朔)과 복색(服色)을 고치고, 법도(法度)를 마련하고, 예악(禮樂)을 제정했을 뿐 아니라 정치 개혁에 관한 여러 가지 소(疏)를 올림. 당시 문제(文帝)는 그를 공경(公卿)에 임명하려 했으나, 조주발(遭周勃)•관영(灌嬰) 등 대신들의 미움을 사 폄출되어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夫)가 되고, 다시 양 회왕(梁懷王)의 태부가 되었으며, 33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음. 저서로는 ≪신서(新書)≫•≪가장사집(賈長沙集)≫이 있고, 치안책(治安策)•과진론(過秦論)의 문장이 가장 유명함. [유사어] 가생(賈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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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가의(賈誼)

가의는 전한(前漢) 시대 최고의 천재 학자로 알려진 인물이다. 가의는 어려서부터 시문과 제자백가의 사상에 뛰어난 역량을 보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중국 역사상 4대 태평성대 가운데 하나인 문제(文帝) 시대에 최연소 박사가 되었다. 태평성대의 시기에는 원래 학문과 문화가 번성하기 때문에, 역사상 최고의 문재(文才)를 드러낸 학자들은 이때에 많이 배출된다. 가의는 학문과 문화의 전성기에 최연소로 박사가 되었던 것이다.

 

박사가 된 지 1년 만에 태중대부(太中大夫)가 되어 진(秦)나라 때부터 내려온 법률과 관리제도, 예악 문화 등의 제도를 개정했다. 또한 국가의 관직과 제도 정비를 위한 수많은 의견을 황제에게 올렸다. 그러나 '재주가 많은 자는 시기와 질투하는 자도 많다'고 하지 않았던가? 약관의 어린 나이에 조정에 나와 국가의 각종 제도에 대해 직언(直言)을 하는 가의(賈誼)를 권력과 이권에 흠뻑 빠져 있는 고관대작들이 곱게 보았을 리 만무하다.

 

결국 고관대작들의 시기와 모함으로 중앙 조정에서 쫓겨나게 되고, 장사왕(長沙王)의 태부(太傅)로 좌천되었다.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며 엘리트 코스만을 밟아 온 가의(賈誼)에게 이 사건은 뼈아픈 좌절이었고 너무나도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당시 그는 자신의 처지를, 멸망하는 조국을 지켜보고 있을 수 없어 끝내 강물에 몸을 던진 전국시대 초(楚)나라의 유명 시인 굴원(屈原)에 비유했다. 자신의 꿈과 이상 그리고 재주와 열정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을 담은 여러 편의 글도 남겼다.

 

장사왕의 태부로 좌천된 지 4년 만에 문제(文帝)의 막내아들인 양왕(梁王)의 태부(太傅)가 되었으나 왕이 말에서 떨어져 갑작스럽게 죽게 되자, 이를 슬퍼한 나머지 1년 후에 죽음을 맞게 된다. 천재는 요절한다는 옛말을 입증이라도 하듯이…….

 

과진론(過秦論)

 

천재 가의가 남긴 여러 시문(詩文) 가운데 단연 돋보이는 작품은 『과진론(過秦論)』이다. 사마천은 『과진론』에 대해, 진(秦)나라의 흥망(興亡)을 "얼마나 깊고 예리하게 평론해 놓았는가!"하며 감탄해 마지 않았다.

 

『과진론』의 전체 문장은 후대에 와서 세 편으로 나뉘었다. 상편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의 역사와 진나라 멸망의 주요 원인을 총괄적으로 분석했다. 중편에서는 통일 후 진시황의 잘못된 노선과 정책을 비판하고, 뒤를 이은 2세 호해(胡亥)황제의 포악무도한 정치로 인해 민심이 진나라 황실에 철저하게 등을 돌렸음을 논했다. 하편에서는 백성들의 봉기와 각지 군웅들의 반란으로 황실은 무너지고 새로 등극한 군주 자영(황제가 아닌 진왕(秦王)이라는 호칭을 사용)은 다시 진나라를 일으켜 세울 만한 능력이 없었음을 설명했다.

 

가의(賈誼)는 이 글에서 아무리 강대한 제국이라 할지라도 가혹한 형벌과 포악무도한 정치로는 권력을 유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과진론(過秦論)』은 민심을 얻지 못한 권력은 백성들의 저항과 반란 앞에 모래성처럼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한 글이다.

 

가의의 『과진론』은 사마천이 『사기(史記)』 「진시황본기」에서 '진나라의 흥망사(興亡史)'를 깊고도 예리하게 평론했다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한 명문장(名文章)이다. 가의(賈誼)의 시대를 전후한 그 어떤 역사가나 학자도, 이 글만큼 간략하고 논리적이면서 드라마틱하게 대제국(大帝國)의 흥망을 논한 역사서를 남기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