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2020년 11월

08

숨쉬기 겨울 예고

아침 8시가 넘자 햇살이 거실로 들어온다. 베란다에서 주방까지 낮고 깊숙하게 뻗는다. 동쪽의 높은 건물을 비집고 오늘의 해가 당도했다는 신호다. 나는 햇살이 미치지 않는 벽 쪽에 몸을 숨기고 아침햇살의 진군을 본다. 해가 높아질수록 햇살이 조금씩 짧아지다가 거실 가운데로 올 때쯤, 커피가 고프다. 간혹 커피잔을 들고 그 햇살 속에 발을 쓰윽 담가보기도 한다. 맨발이 창백한 시절이 되었구나, 그렇게 나의 하루가 온다. 갑자기 입동이다. 지난 봄꽃과 여름과 미친 태풍이 믿어지지 않는다. 무릇, 끝에 서서 뒤돌아보면 그 긴 세월이 무엇이었나 허망할 따름이다.

댓글 숨쉬기 2020. 11. 8.

28 2020년 10월

28

부스러記 부스러記 18, 가지가지 다 한다

2020. 9. 20. 일 아들에게 이번 추석은 내려오지 말라고 했다. 할아버지 뵈러 가지 않는 게 옳을 듯하고, 그렇다면 제사도 없는데 굳이 움직일 필요 없다고 했다. 아들은 글쎄, 흐릿하게 대답하더니, 내가 확실하게 오지 말라고 하니 받아들였다. 야호, 명절음식 따위 없이 평소처럼 빈둥거릴 생각에 즐겁다. 2020. 9. 22. 화 아들은 손자니까 그렇다 치고, 나는 아버지 엄마를 뵈러 명절 앞서 미리 다녀오기로 하였다. 주문했던 뉴케어 한 박스와 용돈을 준비하였다. 주문할 때 한 박스와 두 박스 사이에서 망설였는데, 두 박스 했다면 큰일 날 뻔했다. 한 박스 무게가 무려 6kg인 것을 물건 받고서야 알다니, 내가 이리 둔하다. 글치... 200ml×30=6000=6kg 아버지 집으로 바로 배송하려다..

댓글 부스러記 2020. 10. 28.

15 2020년 09월

15

부스러記 부스러記 17, 겨우 가을

2020. 7. 28 화요일 지난 토요일에 아들이 내려와서 어제 올라갔다. 설 연휴 이후 6개월 만이었다. 친구들은 뿔뿔이 흩어져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니 휴가라고 집에 와야 만날 친구도 없다. 오던 날 집 근처 장어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나 역시 경상도 피플이지만, 술 취한 겡상도 할배들에게 진저리가 났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술 취해 서로의 말이 안 들리니 질러대는 대화 아닌 고함. 힘겹게 극기 식사를 하고 집으로 오는 길에 조용하고 깨끗한 장어집을 보았다. 우리 다음엔 저기 가자, 아들의 말에 함께 웃었다. 다음날 소고기를 참기름에 볶아 미역국 끓였다. 17일이 아들 생일이었는데, 지나간 생일은 챙겨주지 않는다지만 뭐 어떤가. 미역국 좋아하는 아이는 맛있게 먹었다. 아들은 이튿날 늦잠도 자고, 혼자 ..

댓글 부스러記 2020. 9. 15.

21 2020년 07월

21

부스러記 부스러記 16, 여름

2020. 7. 3. 금 냉장고의 음식물이 그다지 차지 않다. 오늘 아침엔 이틀 전 담근 김치가 쉬어버린 것을 알았다. 비가 와서 내내 썰렁했기 때문에 이틀 만에 쉬어버릴 더위가 아니다. 이번 주말에 휴가로 내려오겠다던 아들은 회사에 일이 있다고 2주일 후에나 오겠다 한다. 그래라, 이 엄마는 너의 출현에 목매지 않는다. 아들 오기 전 미리 담근 김치가 마침 쉬어터졌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 꽁꽁 야무지게 얼어있는 멀쩡한 냉동칸 온도를 두 단계 올려 본다. 아래 냉장칸까지 영향이 있기를. 2020. 7. 7. 화 몇 달 전 언니가 시골産 참기름을 큰 페트병으로 한 병이나 주었다. 혼자 참기름에 밥 말아먹을 수도 없어서 개봉도 않고 냉장고에 두었다가 얼마 전 소분하였다. 참기름집에서 파는 기름병으로 거의 ..

댓글 부스러記 2020. 7. 21.

04 2020년 07월

04

그날 뜨거운 아침

상추만 먹어도 손톱은 잘 자랐다. 내 영양은 말 그대로 손톱만큼 쓰이고, 나머지는 모두 아랫배에 고이 간직되는 모양이다. 오늘 아침에는 누룽지를 먹기로 한다. (누룽지는 절대 사지 않고 직접 만듦) 원래 뜨거운 국물음식을 좋아하지만, 그래도 이 여름에 누룽지가 먹고 싶은 건 스스로도 어이가 없다. 만들어 둔 마른 누룽지를 한 주먹 꺼내 물을 부어 불린 후 푸욱 끓인다. 덜 퍼져서 치아에 떡떡 들러붙는 누룽지는 진정한 누룽지가 아니다. 누룽지가 끓는 사이 양상추, 토마토, 노란 파프리카로 샐러드 준비. 냉장고에 있는 대로 담고 보니 의도치 않게 신호등 컨셉이다. 채소를 많이많이, 과일은 적당, 무엇보다 탄수화물을 적게. 하지만 이보다 더 어떻게 줄여? 그 넘의 중성지방이 왜 높을까 실로 모르겠는 내 식생활..

댓글 그날 2020. 7. 4.

21 2020년 06월

21

스케치 비가 와도 좋다

#1. 내 배꼽시계는 오전 11시 무렵 작동한다. 아침 6시 기상한 날과 8시에 기상한 날과 10시에 기상한 날이 다르지 않았다. 물론 정신이 깨어난 시간과 몸이 깨어나는 시간이 같아야 할 필요는 없다. 6시 일어난 날은 5시간쯤 기다리면 되고, 8시 일어난 날은 3시간쯤 빈둥거리면 되었다. 몇 시에 깨든 배고픈 시간은 오전 11시 즈음이라는 사실을 깨닫던 날, 나는 아침밥의 강박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하루 두 끼, 오래된 습관이 되었다. #2 일정하게 반복되는 소리가 끈질기게 잠 속까지 찾아왔다. 소리를 피해 비몽사몽 도망 다니다가 지쳐 눈을 떠서 시간을 보니, 너무 이른 아침이다. 밖에는 요란한 비가 내리는 중이었다. 세찬 비는 밤새 유리창을 두드리고, 윗층 베란다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내 집 난간으..

댓글 스케치 2020. 6. 21.

11 2020년 06월

11

그날 초식

#1 아래층 아저씨가 상추 봉지를 내밀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필요 없다고 말할 뻔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상추가 더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지 무례한 거절이 아니다. 왜냐하면 조금 전 나는 늦은 점심을 상추쌈으로 미어지게 먹었고, 또 먹어야 하는 양이 많이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내 사정이고, 듣는 상대방은 불쾌할 것이라는 찰라적 판단으로 나는 말없이 상추를 받았다. 그는 밭에서 끝물로 따와서 나눈다고 멋쩍게 말했다. 나는 감사한(위선적인!) 표정으로 그러시냐고, 잘 먹겠다고 웃으며 실례를 모면했다. #2 솔직히 말하자면, 반갑지 않았다. 아직 많은 내 냉장고의 상추는? 식구도 없는데, 이렇게 많이. 이따위 배부른 난감함이 스쳤다. 그러나 무엇보다 상추 봉지를 받아 드는 순간부터 든 생각은, 어떤..

댓글 그날 2020. 6. 11.

20 2020년 04월

20

부스러記 부스러記 15. 초봄

2020. 3. 2. 월 자려는 내 귀 언저리에서 익숙한 소리가 가느다랗게 들린다. 올해 첫 신상 모기닷! 이 바이러스 와중에 모스키토, 너마저? 따뜻한 남녘이라 출세가 빠르구나. 불행히 지구별은 뿌연 소독약으로 뒤덮여서 아마 활동이 순탄치 않을 것이다. 애꿎은 나의 볼때기를 철썩 갈기고 이불을 뒤집어쓴다. 2020. 3. 10. 화 나는 DNA에 기인한 뿌리 깊은 야행성이다. 요즘은 더욱 증상이 깊어져 자고 깨고 먹는 일에 규칙이나 대중이 없다. 이런 족속들을 위하여 T.V.에서는 밤새도록 온갖 지나간 프로를 재탕 삼탕 해 준다. 더이상 뉴스가 아닌 뉴스까지 삼세번 넘게 보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하는 '응답하라~' 시리즈는 심야재방의 단골 드라마다. 최소한 5번은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미있다...

댓글 부스러記 2020. 4.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