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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관광인 동호회 우표전시회. 우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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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전시 기념인 교류

2019. 12. 14.

2019 관광인 동호회 우표전시회. 우취자료


일 시 : 2019. 12.  04(수) ~ 12.  06(금) 3일간  장 소 : 천안우체국 5층 회의실  주 최 : 관광인 동호회

후 원 : 충정지방우정청.    천안우체국.  한국우취연합. 한국우취연합 충청지부.


천안 : 2019 관광인 동호회 우표전시회.

  의열단(義烈團) : 1919년 11월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1920년대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으며, 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되어 갔다. 1919년의 거족적인 3·1독립운동을 겪은 뒤, 해외로 독립운동기지를 옮긴 애국지사들은 강력한 일제의 무력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는 보다 조직적이고 강력한 독립운동단체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전시기념 주문엽서

이러한 요망에 부응하여 1919년 11월 9일 밤, 만주 길림성 파호문(把虎門) 밖 중국인 반모(潘某)의 집에 모인 독립지사들은 밤을 새워가면서 숙의한 끝에 그 이튿날인 10일 새벽에 급진적 민족주의 노선을 지향하는 항일비밀결사인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한다.”고 한 데서 유래된 단체명만 보아도 이 단체의 성격을 알 수 있다.

  전시기념 주문엽서 항공용

의열단은 당시 만주와 중국 본토지역에 조직된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미온적이고 온건한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다고 보고,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과격하고 급진적인 폭력투쟁을 목적으로 하였다. 의열단 창단 당시의 단원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중심이 되었고, 그 명단은 자료에 따라 한결같지 않으나, 김대지(金大池)·황상규(黃尙奎)가 고문으로서 지도하였고, 단원은 김원봉(金元鳳)·윤세주(尹世胄)·이성우(李成宇)·곽경(郭敬)·강세우(姜世宇)·이종암(李鍾岩)·한봉근(韓鳳根)·한봉인(韓鳳仁)·김상윤(金相潤)·신철휴(申喆休)·배동선(裵東宣)·서상락(徐相洛)·권준(權俊) 등 13명이며, 단장에는 김원봉이 선출되었다.

  M/C

일설에는 김원봉의 고모부인 황상규가 단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대부분의 다른 자료에서 김원봉이 단장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이는 오류인 것 같다. 의열단의 지도이념 및 사상을 정립하는 데는 창단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김원봉의 동향 선배이며 고문인 김대지와 황상규의 영향이 컸으며, 뒤에는 신채호(申采浩)가 독립운동의 경륜과 강령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신채호가 1922년 12월에 작성에 착수하여 1923년 1월에 완성, 발표한 <조선혁명선언>(일명 의열단선언)에는 의열단의 독립투쟁노선과 행동강령이 잘 나타나 있다.

  의열단(義烈團) 100주년기념 M/C

즉, 민중직접혁명과 평등주의에 입각하여 당시 일부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노선이었던 문화주의·외교론·준비론 등 일체의 타협주의를 배격하고, 오직 폭력적 민중혁명에 의한 일제의 타도라는 전술을 통하여 독립의 쟁취를 목표로 한 것이다. 의열단의 민중직접혁명노선과 전술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당시의 시대사조를 반영하여 수정이 가해져, 창단 초에 비하면 강령상의 변질을 보게 되었다.

  전시기념 커버(4종)

1926년부터 점차 당대를 풍미하던 사상계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이론을 수용하기 시작한 의열단의 강령 및 사상은 1928년 10월 ‘조선의열단중앙집행위원회’ 이름으로 발표된 <창단9주년기념성명>을 계기로 종래의 조국광복을 목표로 한 순수한 민족주의노선에서 계급적 이데올로기에 기반을 둔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노선으로 전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 무렵만 하더라도 의열단은 항일독립운동에 있어서 전민족적 통일전선의 구축을 위한 항일민족공동전선을 세계약소민족의 반식민제국주의전선으로 연결시키려는 시대적·민족적 요망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의열단이 본격적으로 급진좌파의 노선으로 가게 되는 것은, 1929년 12월 북경에서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을 때부터라고 하겠다. 의열단의 창단 초기에는 성문화된 강령은 없었으나, 특히 구축왜노(驅逐倭奴)·광복조국(光復祖國)·타파계급(打破階級)·평균지권(平均地權)을 단원들의 이상이며, 강령과 같이 여기고 있었다. 이 중 구축왜노와 광복조국은 모든 독립운동단체가 추구한 목표였고, 타파계급과 평균지권은 민중을 직접혁명의 중핵으로 하는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의 새로운 흐름을 나타낸 것이다. 특히, 의열단의 초기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은 다음의 주장에서 살펴 볼 수 있다.

 

  즉, “우리 동포가 광복운동을 시작한 이래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혹은 군대를 조직하고, 혹은 공산당과 제휴하고, 혹은 국민대표회의를 개최하는 등 여러 가지 실책(實策)을 강구하여 보았으나 무슨 얻은 바가 있었는가? 우리 단원이 노리는 곳은 동경(東京)·경성(京城)의 2개 소로서 우선 조선총독을 죽이기를 대대로 5, 6명에 미치게 되면 반드시 그 후계자가 되려는 자가 없게 될 것이고, 동경시민을 놀라게 함이 매년 2회에 달하면 한국독립문제는 반드시 그들 사이에서 제창되어 결국은 일본국민 스스로가 한국통치를 포기하게 될 것임은 명약관화한 일이다.”고 한 것만 보아도 민족적 지상과제인 독립의 쟁취를 위하여는 오직 직접적 투쟁방법인 암살과 파괴라는 과격한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순수한 민족독립운동을 지향했다고 할 수 있다.

 의열단(義烈團) 100주년기념추진위원회 커버  

이러한 강령은 1928년 이후에는 21개 조의 강령으로 확대되고 창단 초기와는 변질된 사상경향을 보이게 되었다. 의열단은 창단 직후 ‘공약10조’와 뒤에 ‘5파괴’, ‘7가살(可殺)’이라는 행동목표를 기본규약으로 삼아 독립운동의 지침으로 채택하였다. ① 천하의 정의의 사(事)를 맹렬히 실행하기로 함. ②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하여 신명을 희생하기로 함. ③ 충의의 기백과 희생의 정신이 확고한 자라야 단원이 됨. ④ 단의(團義)에 선(先)히 하고 단원의 의(義)에 급히 함. ⑤ 의백(義伯) 1인을 선출하여 단체를 대표함. ⑥ 하시(何時), 하지(何地)에서나 매월 1차씩 사정을 보고함. ⑦ 하시, 하지에서나 초회(招會)에 필응(必應)함. ⑧ 피사(被死)치 아니하여 단의에 진(盡)함. ⑨ 1이 9를 위하여 9가 1을 위하여 헌신함. ⑩ 단의에 배반한 자는 처살(處殺)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시기념 나만의 우표 4종

의열단(義烈團)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는 아나키스트 성격의 무장독립운동단체로 1919년 11월 9일 설립됐다. 이들은 프랑스 조계지역(외국인 치외법권지역)인 중국 상하이에서 무력항쟁으로 일본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에 대항하는 독립운동을 했다. 이들이 상하이에서 활동한 이유는 프랑스와 일본의 대립으로 인해, 프랑스 경찰이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보호했기 때문이다. 

전시 리플릿

  의열단은 비폭력투쟁인 3.1운동이 일본의 폭력으로 실패한 것을 보았으므로 광복을 위해 무력만을 수단으로, 암살만을 정의로 삼아 5개소의 적 기관 파괴와 7악의 제거를 위해 파괴활동을 벌였다. 이때 5개소의 적 기관은 조선총독부·동양척식주식회사·매일신보사·경찰서·기타 중요 기관이며, 7악은 총독부 고문·군 수뇌·타이완 총독·친일파 거물·밀정·반민족적 토호·열신(劣紳)이다. 말하자면 의열단에서는 폭력투쟁으로 일본의 지배, 착취, 친일파들의 일본과의 결탁에 맞선 것이다.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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