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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초일커버(F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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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일,전자우편외 기타

2020. 6. 11.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초일커버(FDC)

발행일 : 2020. 6. 5. 우표번호 : 3448 디자인 : 봉오동 전투 민족기록화 디자이너 : 유지형인쇄/ 색수 : 평판/4도 용지 : 평판원지 인쇄처 : 한국우편사업진흥원(Royal Joh. Enschede)

  홍범도장군(1868~1943)은 19세기 말 일제에 항거해 일어선 항일의병장과 대한독립군 사령관으로, 카자흐스탄에서 생을 마감할 때까지 50여 년간 조국 해방을 위해 무장 독립투쟁을 펼친 전설적인 독립운동 지도자입니다. 평양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홍범도장군은 조실부모한 후 머슴살이를 하며 힘든 유년을 보냅니다. 10대 중반 나이를 속여 가며 군에 입대했지만 부정부패로 가득한 군의 부조리를 보다 못해 탈영하고, 뛰어난 사격술을 인정받아 의병항전에 참여하기 전까지 산포수로서 안정된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1907년 일제가 총포와 화약류 단속법을 시행하며 포수들의 총을 회수하려 하자, 이에 반발해 항일의병을 일으켜 큰 승리를 거둡니다.

  날으는(나는) 홍범도 라는 별명을 얻으며 눈부신 의병 활동을 펼치던 그는 1910년 소수의 부하를 이끌고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양성하며 일제 항거 활동을 합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대한독립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했으며, 특히 1920년 독립전쟁 사상 최대의 승전인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에서 최고 지휘관으로서 일본 정규군을 격퇴합니다. 일제의 대대적인 보복전에 대비하여 다른 독립군 부대와 함께 흑룡강 국경 지대로 이동한 그는 독립군 통합부대인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고, 부총재로 추대됩니다. 

  그러나 한국무장독립투쟁 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사변으로 항일전 재개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연해주에서 집단농장을 운영하며 한인의 민족의식 고취에 힘씁니다. 하지만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됐고, 그곳에서 원로로 활동하다 1943년 75세의 나이로 서거합니다

  1919년 3·1운동 이후 만주의 독립군은 규모를 키우고 조직력도 갖추게 되었습니다. 독립군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진격하는 국내진공작전을 벌였습니다. 1920년 6월 4일 새벽에도 신민단 소속 독립군이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 강양동에 진입하여 일본군 초소를 격파하고 화룡현 월신강 삼둔자로 복귀하였습니다. 일본군 남양수비대는 두만강을 건너 독립군을 추격하였지만, 부대를 발견하지 못하자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였습니다. 이에 독립군은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일본군을 선제공격한 ‘삼둔자 전투’는 봉오동 전투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삼둔자 전투의 패전 소식을 접한 일본군 제19사단 사령부는 ‘월강추격대’를 편성하여 독립군 추격에 나섰습니다. 이들의 움직임을 눈여겨보고 있던 독립군은 6월 7일에 두만강을 건넌 월강추격대를 길림성 왕청현 봉오골로 유인하여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독립군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부상을 입혔습니다. 반면 독립군의 피해는 전사자 4명, 중상자 2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의 구성은 상해판 독립신문(1920. 6. 22.)과 매일신보(1920. 6. 21.)의 기사 및 서양화가 임직순(1921~1996)의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 전투 입니다. 봉오동 전투 전승 100주년 기념우표를 통해 민족 주체성을 지키고자 치열하게 노력한 독립군을 기억하고 그들의 자랑스러운 후손임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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