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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충청우표전시회 우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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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표전시 기념인 교류

2020. 10. 26.

2020충청우표전시회  우취자료

 

사이버 전시공간 : 다음카페, 우표수집동호회(우수동) http://cafe.daum.net/stamp. 2020 충청지부우표전시회

돈암서원 원정비 (遯岩書院 院庭碑)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는 2000년 1월 11일 충청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66호로 지정되었다. 조선시대 중기 문인 사계 김장생 선생의 문하생들이 돈암서원을 세운 사연과, 사계와 그의 아들인 신독재 김집 부자의 학문과 업적을 적은 비이다. 연꽃 무늬가 새겨진 방형의 비 받침대에 대리석 비석과 비 머리가 서 있다. 이들은 예학과 성리학의 대가로 고향에 돌아와 주자학을 연구하였는데, 비문에는 장중하고 온화한 사계와 치밀한 신독재의 성품을 기리고, 그들의 높은 학문을 적고 있다. 현종 10년(1669년)에 세웠는데, 비문은 송시열이 적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앞면에 새겨져 있는 전서체 제목은 김만기가 썼다. 이 서원은 숲말에 있던 것을 홍수때 물이 차므로 고종 17년(1880년)에 이곳으로 옮겨지었는데, 그때 비석도 옮겨왔다. 현재의 건물들은 비문에 적혀 있는 건물 배치와 다르다.

돈암서원 응도당( 遯岩書院 凝道堂)

  돈암서원 응도당은 유생들이 공부하던 곳으로, 1880년(고종 17년) 서원을 현재의 위치로 옮길 때 옛터에 남아 있던 것을 1971년에 옮겨서 지었다. 서원이나 향교에서 강학 공간으로 사용하는 강당이 사당 방향과 직각으로 배치되는 예는 드문 편인데, 응도당은 강학 공간에 전면에 직각방향으로 틀어서 배치되어 있다. 여러 기록에 의하면 돈암서원의 건물 배치와 규모는 김장생이 강경 죽림서원을 창건했던 규례를 이어받은 것이라고 한다. 장수강학의 성격을 가진 강당으로, 원래의 건물은 드물게 큰 규모와 옛 규제를 충실히 따랐다 한다. 

돈암서원 숭례사(遯巖書院 崇禮祠)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앞면 열은 퇴칸이고 뒷면 2열은 내부 공간을 꾸며 김장생,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예부터 충청 지역에는 다른 지역에 비해 제향 인물이 많았다. 특히 차령 이남은 충절인 외에 예학의 대가들이 많이 제향되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가 논산 돈암서원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호서사림의 지역적인 특성을 파악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또한 제향 인물들은 당시 기호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들로, 충청 지역 내 사족들의 집결 장소인 논산 돈암서원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사당의 세부적인 조각에도 장식성이 강한 것은 사당의 위계를 높이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돈암서원 전경(遯巖書院 全景 )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있는 서원. 1634년 김장생을 배향하여 건립했으며, 김집, 송준길, 송시열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있다. 1660년 사액선원이 되었다. 2019년 7월 6일, 오늘날까지 한국에서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어온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이며 성리학 개념이 여건에 맞게 바뀌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가 인정되어 다른 서원 8곳과 함께 한국의 14번째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사적 383호.

사계 김장생 (沙溪 金長生)

  김장생(金長生, 1548년 7월 8일 ~ 1631년 8월 3일)은 조선의 유학자, 정치인, 문신이다.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다. 임진왜란과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으로 당시 사회는 혼란에 빠졌고, 신분제의 붕괴와 연애결혼 등이 등장하였다. 동시에 각종 범죄가 확산되었다. 사계는 무너지는 사회 질서를 확립할 대안으로서 예(禮)를 제시하였다. 김장생은 예는 인간과 금수를 구별하는 기본적인 차이라 보았다. 예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개인의 수신(修身)을 강조하고, 올바른 마음과 심성의 온전함을 지키며, 모두 예에 맞게 행동하고, 하늘을 우러러 조금이라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예를 실천하고 지킴에 있어서는 왕가와 사대부가와 평민의 구분이 없이 모두에게 적용되어야 한다고 봤다. 그러한 그의 예의 강조는 가례(家禮)를 통한 유교적인 가족질서 재확립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으며, 근사록 등을 연구하여 당시의 토속과 인정에 맞추어 가례를 고치고 보급하는 데 힘썼다. (위키백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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