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과학기술,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1. 11. 20:25

일제강점기의 의료 풍경 [16회 ~20회]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16. 일본 덕분에 조선인의 의료 수혜가 늘었다고?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①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 관·공립 의학 교육 기관들을 설립하여 조선인 의료인들을 많이 배출함으로써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확대시켰다고 선전했다. 과연 그러한 선전처럼 식민지 시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의료 수혜가 늘어났을까? 여기에 대해 몇 차례에 걸쳐 살펴보도록 하자.

일제 강점 이전 관립 1개(대한의원 부속의학교), 사립 1개(
세브란스 의학교)였던 의학교는 해방을 맞던 1945년에는 관립 2개, 도립 4개, 사립 2개(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로 늘어났다

 

 

그리고 그에 따라 근대 서양 의학을 교육받은 조선인 의사 수는 강점 이전 100명 미만에서 1943년 2618명으로 30배가량 늘어났다. 하지만 조선인 의사 1인당 조선인 인구는 1943년에도 9800여 명이나 되었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의사 1194명을 합하면 의사 1인당 조선인 인구는 6700여 명으로 조금 떨어진다.

우리나라는 2010년 12월 말 현재, 의사 1인당 인구가 639명이다. 강점 초기보다 사정이 많이 나아졌다는 일제 강점기 말에도 인구당 의사 수가 지금의 10분의 1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대부분의 조선인들에게 의사는 구경조차하기 힘든 존재였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 제국 통계 연감>. ⓒ프레시안

 

왼쪽 그림처럼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인 의사 수보다 조선인 의사 수가 더 빠른 속도로 늘어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인구가 조선인의 3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음을 생각하면 일본인 의사 수는 대단히 많은 것이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조선인 의사를 찾는 일본인
환자도 더러 있었고 일본인 의사의 진료를 받는 조선인 환자도 없지 않았지만, 의료의 공간은 민족별로 분리되어 있었다. 위의 그림처럼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일본 본국보다도 더 많은 의사의 진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다.

 

일제 강점기 내내 일본인 의사 1인당 일본인은 600명 내외로 오늘날의 선진국 수준이었다. 이렇듯 조선인과 일본인은 의료 혜택 면에서도 전혀 다른 처지였다.

이 현상을 뒤집어 생각하면 일본인 의사들은 강점 초기부터 사실상 포화 상태에 놓여 있었다. 민족별로 의료 공간이 사실상 거의 분리되어 있기는 했지만, 조선인 의사들의 증가는 일본인 의사들에게 (잠재적인) 위협으로 여겨졌다. 그리고 당연히 일제 당국으로서도 이
문제를 소홀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1874년 8월 <의제(醫制)>를 제정하면서부터 의료인의 자격을 국가가
관장했다. (대한제국은 1900년 1월 <의사 규칙> <약제사 규칙> 등을 제정하여 국가가 의료인 관리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메이지 정부의 방침은 의료 체계를 근대 서양식으로 완전히 개편하는 것이었다.


 

▲ 출처 : 橋本鑛市. "近代日本における醫師界の社會學的分析". (1991년 10월 일본교육사회학회 발표 논문). M : 메이지(明治), T : 다이쇼(大正) S : 쇼와(昭和). ⓒ프레시안

 

그렇다고 전통 의료인들의 진료권을 박탈하지는 않았다. 근대 서양식 의학 교육을 받은 사람들과 똑같이 "의사"라는 명칭을 쓰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전통 의료인들의 재생산은 철저히 억제했다. 세월이 흘러 자연적으로 소멸되기를 기다렸던 것이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이 일본의 전통 의료인("從來開業"으로 표시)은 1902년(M35, 메이지 35년)이 되면 50퍼센트 이하로 떨어지고 1916년(T5, 다이쇼 5년)에 이르면 15퍼센트 가량으로 급감한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17. 대만과 한국, 똑같은 日 식민지 하지만 달랐다!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②

일제는 일본 본국에서와는 달리 식민지인 대만과 조선에서는 전통 의료인에게 온전한 "의사(醫師)" 자격을 인정하지 않고 "의생(醫生)"으로 차별 대우를 했다. 대만에서는 1901년부터, 조선에서는 1912년부터 전통 의료인들을 의생으로 등록시켰다. 조선에서 <의생 규칙>이 제정된 것은 1913년 11월이었지만 그보다 1년여 전부터 사실상 시행되고 있었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인 환자들이 더 많이 찾은 의료인은 의생이었다. 하지만 의생들의 재생산은 억제되었으므로 날이 갈수록 수가 줄어들었다. 더욱이 신식 의사가 증가하는 속도보다 의생의 감소 속도가 훨씬 빨랐다. 결국 시간이 갈수록 조선인들이 이용한 의료인 수는 증가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감소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조선인들은 의료 혜택에서 점점 더 소외되고 있었다. 뒤에 살펴보겠지만 대만과도 다른 현상이었다.

일제 강점기
조선총독부설립, 운영한 관립 의학교로는 경성의학전문학교(경성의전)와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의학부가 있었다.

경성의전은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1899년에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에 이른다. 의학교는 1907년 통감부(통감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대한의원으로 통폐합되었으며, 대한의원은 1910년
조선총독부의원으로 명칭과 성격이 다시 바뀐다. 나라가 독립국에서 피보호국을 거쳐 식민지가 된 것과 마찬가지 경로를 밟은 것이었다.

조선총독부의원의 교육 부서는 부속의학강습소로 불렸으며, 당시 학생들은
모두 조선인이었고 교관(교수)은 전원 일본인이었다. 1916년 <조선총독부 전문학교 관제>가 제정, 공포되면서 의학강습소는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전수학교와 더불어 조선 최초의 전문학교가 되면서 "경성의학전문학교"라는 새 이름을 얻게 되었다.

 

▲ 출처 :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동창회 명부>(1996년) 및 <유린회(有隣會) 회원 명부>(1992년), (재일본) <경성제국대학 동창회 회원 명부>(1990년). ⓒ프레시안

 

하지만 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고 해서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수학 연한도 의학강습소 때와 마찬가지로 4년이었으며 교과 내용도 대동소이했다. 가장 뚜렷한 차이라면 일본인들의 입학이 허용된 점이었다.

 

경성의전은 전신인 의학강습소 시절을 포함하여 35년 동안 도합 2315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 가운데 조선인은 986명, 일본인은 1319명, 대만인 등 그 밖의 출신은 10명이었다.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1919년까지는 한 명도 없었던 일본인 경성의전 졸업생이 1920년부터 점차 늘어나 1927년부터 조선인 졸업생을 능가하게 되었고 날이 갈수로 졸업생 수의 차이가 더 커졌다. (1941년도에 졸업생 수가 크게 늘어난 것은 전시 정책으로 수업 연한이 6개월 단축되어 두 학년이 반년 간격으로 같은 해에 졸업했기 때문이다. 경성제국대학도 마찬가지였다.)

경성제국대학은 일제 강점기 동안 식민지 조선의
유일한 대학이었다. 의학부의 수학 연한은 의학전문학교들과 마찬가지로 4년이었지만, 학부에 입학하기 전에 예과를 거쳐야만 했다. (일본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은 예과를 다닐 필요가 없었다.

 

요컨대 경성제대에 예과를 설치했던 것은 조선에는 고등보통학교(조선인)/중학교(일본인) 이후 과정인 고등학교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 점에서 당시 예과는 오늘날의 의예과, 치의예과와 위상과 성격이 달랐다. 법문학부와 이공학부 학생들도 학부 입학 전에 예과 과정을 거쳐야 했다.)

경성제대 의학부는 1930년부터 1945년까지 17차례(1941년에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인 311명, 일본인 763명,
기타 8명 등 모두 1082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경성의전과 달리 경성제대 의학부는 처음부터 조선인과 일본인 졸업생의 비율이 대체로 3:7 정도였다.


 

▲ 출처 : <서울대학교 의과 대학 동창회 명부>(1996년), <유린회(有隣會) 회원 명부>(1992년), (재일본) <경성제국대학 동창회 회원 명부>(1990년), <日治時代臺灣醫生社會地位之究>(陳君愷 지음, 1992년). ⓒ프레시안

 

이 그림은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서 일제가 설립, 운영한 관립 의학교 졸업생 수의 누계(累計)치이다. 앞의 그림에서 졸업생 수가 연도에 따라 들쭉날쭉했던 것과는 달리 졸업생 수가 상당히 일정한 속도로 증가하는 양상을 볼 수 있다. 일제 당국이 식민지의 의사 배출에 대해 치밀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을 생각하게 하는 모습이다.

그림에서 보듯이 조선과 대만은 민족별 관립 의학교 졸업생 배출에서 뚜렷하게 차이가 난다. 조선의 경우, 초기에는 조선인 졸업생 배출이 많았지만 1935년부터는 일본인 졸업생 배출 누계치가 조선인을 넘어서게 되었고, 그 격차는 갈수록 더 커졌다.

지난 회에서 제시했던 그림 "일제 강점기 의사 수의 변화"에서 1927년부터 조선인 의사 수가 일본인 의사 수보다 많아진 것과는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것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경성여자의학전문학교(1942년부터 졸업생 배출) 출신들 거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으며, 또 일본 등지에 유학하여 의사가 된 조선인들이 귀국해서 조선에서 활동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인 중에는 의사가 된 뒤 일본으로 돌아간 경우(특히 경성의전 일본인 졸업생)가 적지 않았다.

대만에서는 조선과 대조적으로, 대만인 관립 의학교 졸업생 누계치가 일본인 누계치보다 항상 많았고 그 차이도 줄어들지 않았다.

요컨대 대만의 관립 의학교는 전 기간에 걸쳐 대만인 의사 양성에 충실했던 반면, 조선의 관립 의학교는 적어도 1920년대 후반부터는 조선인 의사보다 일본인 의사 배출을 더 중요한 역할로 삼았다고 여겨진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대만총독부 통계서>, <일본제국 통계연감>. ⓒ프레시안

 

위의 그림은 조선, 대만, 일본의 의료인 수급의 변화를 비교한 것이다. 신식 의사 1명당 인구는 일본의 경우 이 기간 내내 대체로 1200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만과 조선은 꾸준히 감소했다. 조선의 변화가 더 뚜렷하기는 했지만 1940년대 초에 겨우 대만의 1910년대 초 수준에 이를 정도였다.

의생을 포함하여 보면, 조선과 대만은 상반되는 양상을 나타내었다. 대만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의생을 포함한 의료인 1인당 인구가 감소하여 의료인 수급이 개선되는 모습을 보인 반면, 조선은 계속
악화될 뿐이었다. 대만은 의생의 감소를 상쇄하고 남을 만큼 신식 의사 수가 증가했지만, 조선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 일제 식민지 시기 대만인 의사의 산실이었던 "대만총독부 의학교" 건물과 강의실(왼쪽, <대만위생개요>, 1913년)과 연혁(오른쪽,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일람>, 1925년판). ⓒ프레시안

 

 

공교롭게도 한국과 대만에서 공식적으로 근대식 의학 교육이 시작된 것은 똑같이 1899년이었다. 그 해 3월 24일 대한제국 정부가 <의학교 관제>를, 꼭 1주일 뒤인 3월 31일에는 대만총독부가 <대만총독부 의학교 관제>를 공포했다.

의학교는 그 뒤 일제에게 장악되어 1916년 경성의학전문학교가 되었으며, 대만총독부 의학교는 1919년에 대만총독부 의학전문학교로 승격했다. 그리고 경성의전은 1920년대 후반부터 주로 일본인 의사를 양성하는 기관으로 바뀌었는데 반해, 처음부터 식민지 교육 기관이었던 대만총독부의전은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 대만인 의사 교육 기관으로서의 성격이 변하지 않았다.

 

18. 일제 시대, 북쪽에 의사가 많았던 까닭은?

 일제 강점기의 의료 상황 ③

의사(의료인) 수와 더불어 의사의 지역별 분포 양상은 국민(주민) 건강과 관련된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어떤 국가의 의사 수가 많더라도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있으면 의사 수가 적은 나머지 지역은 그만큼 의료 서비스에서 소외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사의 지역적 편중에 따른 문제는 교통이 지금처럼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에 더욱 심각했다.

의사 편중의 대표적인 예는 도시-
농촌 간 의사 수의 차이이다. 일제 강점기에도 도농 간의 의사 수는 차이가 컸다. 하지만 그러한 사실을 시계열적(時系列的)으로 보여주는 통계 자료는 없다.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등에는 의사와 의료 기관의 분포를 도(道)별로 집계하여 수록했을 뿐 도시(府), 농촌(郡)별 자료는 없다.

의료 관련
단체에서 비정기적으로 발간한 의적록(醫籍錄)과 <총독부 관보>의 의사 개업 및 이동 신고 등을 종합하면 어느 정도 윤곽을 그려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이번 회에서는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 수록된 도별 의사 수의 변화를 추적, 분석해 보기로 하자.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의사 1인당 인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감소했다. 다시 말해 의사의 공급이 늘어났다. 하지만 일제 말기인 1943년에도 전국 평균으로 조선인 인구 1만 명당 조선인 의사 1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역(道)에 따른 차이도 대단히 컸다.
경성, 인천, 수원 등 대도시가 많은 경기도가 의사 수급 사정이 가장 나았으며, 그 다음으로 평남, 평북, 황해, 함북, 함남 등 북부 지역이 뒤를 이었다. 흔히 "개화(開化)"가 상대적으로 일찍 시작되었다고 일컬어지는 북부 지역에서 신식 의사의 배출이 많았던 것이다.

경기도가 사정이 가장 좋았던 데에는 의학교가 대부분 경성에 있었던 점도 작지 않게 작용했을 것이다. 타 지역에서 경성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의사가 되고 나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전통의료인이라고 할 의생들의 지역적 분포는 어떠했을까? 의생들 역시 인구당 수를 산출해 보면 북부 지역이 많아 함북, 함남, 평북, 평남 순이었다. 신식 의사의 분포와 차이나는 점은 의생이 경기도에 상대적으로 적었던 반면 경남에 많았다는 것이다. 전라도, 충청도, 경북 지역은 의사든 의생이든 전국 평균치를 훨씬 밑돌았다. 그만큼 일제 강점기 조선의 남부 지역은 의료인들의 서비스로부터 더 많이 소외되어 있었다.

 



 

이번에는 일본인, 조선인 의사와 의생을 모두 합한 전체 의료인의 분포를 살펴보자. 앞의 자료들에서 예견할 수 있듯이 경기도와 북부 지역은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다. 특히 경기도는 전 기간 동안 의료인 1명당 인구 2000명 수준을 유지했다. 경기도에서는 의생의 감소치를 신식 의사의 증가치가 상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일제 말기인 1943년 조선인 신식 의사가 절대수로나 인구당 비율로나 가장 많았던 곳은 경기도였다. 전체 인구의 12퍼센트 가량을 차지하는 경기도에는 의사의 30퍼센트 남짓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 다음으로 조선인 신식 의사가 많이 분포했던 곳은 평안남도였다

그리고 함북, 함남, 평남, 평북, 경남 지역은 전체 의료인 공급이 점차 줄어들기는 했지만 그 정도가 심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반해 삼남 지방을 비롯한 그 밖의 지역은 식민지 초기에도 좋지 않았던 상황이 날이 갈수록 더욱 악화되었다. 특히 전남과
전북 지역이 최악의 상태를 나타내었다.


 

한편, 1943년에도 의생이 가장 많았던 곳은 함경남도였다. 그리고 의생은 인구 비례로 보았을 때 의사의 경우보다 지역적 편중 현상이 적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전남, 전북 지역은 의생 역시 다른 지역들에 비해 훨씬 적었다

 

 

강점 초기에 비해 의사 수는 많이 늘어나고 의생 수는 많이 감소한 1943년에도 전국적으로 의생은 의사보다 30퍼센트 가까이 많았다. 하지만 경기도에서는 이미 의사 수가 의생 수를 압도했으며, 평안남도에서도 의사 수의 우세가 확실했다. 황해도에서는 이 무렵 의사 수가 의생 수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나머지 지역들에서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전히 의생 수가 의사 수보다 많았다. 충북, 충남, 경남, 함남 지역이 특히 그러했다. 이렇듯 의료인 분포의 변화 속도는 지역마다 달랐다.

몇 차례 살펴보았듯이, 일제 강점기에 경기도를 제외하고는 모든 지역의 의료인 수급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었다. 남부 지역이 특히 심했다. 이러한 의료인 수급의 악화는 사망률과 이환률 등으로 나타나는 건강 수준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앞으로 이 연재에서 살펴볼 중요한 테마이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19. 일본이 한국에 병원을 지은 진짜 이유는…

일제가 지은 병원

일제가 조선을 식민지로 통치하면서 크게 내세웠던 점이 관립/도립의원을 곳곳에 설치하여 조선인들에게 의료 혜택을 널리, 많이 베풀었다는 것이다.

관립의원은 식민지 조선의 수도 격인
경성(京城)에 있었던 조선총독부의원(1928년부터는 경성제대 의학부 부속의원), 경성의전 부속의원, 철도국 의원들이다.

 

이 가운데 총독부의원의 전신은 대한제국 시절인 1907년에 세워진 대한의원("근대 의료의 풍경" 53~56회)이다. 대한의원은 대한제국의 돈으로, 그것도 일본으로부터 억지춘향 격으로 거액의 차관을 얻어 설립한 것이었지만 처음부터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일본인의 병원이었다.

일제 강점기 도립의원의 연원은 대한제국기의 자혜의원(慈惠醫院)이다. 1909년 8월 21일 대한제국 정부는 <자혜의원 관제>를 칙령 제75호로
반포했다. 자혜의원의 역할과 성격은 관제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1조 자혜의원은 내부대신의 관리에 속하야 빈궁자 질병의 진료에 관한 사무를 장(掌)홈 자혜의원은 필요가 유할 시에는 빈궁자가 안인 병자의 진료함을 득(得)홈
제2조 자혜의원의 진료는
무료로 홈 단 전조 제2항의 경우에는 차한에 재(在)치 아니홈


 

요컨대 자혜의원의 기본적인 역할은 빈민 환자를 무료로 진료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관제에 명기된 대로 1909년 12월 전주와 청주, 1910년 1월에 함흥에 자혜의원이 세워졌다. 자혜의원은 형식적으로는 내부대신이 관리하는 대한제국의 병원이었지만, 실제로는 대한의원과 마찬가지로 일제와 일본인 의사들이 완전히 장악한 병원이었다.

자혜의원이 가장 처음 세워진 전주, 청주, 함흥은
전통적인 고을로 외부인에 대해 매우 배타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일제가 그런 곳들에 자혜의원을 세운 데에는 그곳에 거주하는 소수의 (기특한) 일본인들을 진료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겠지만, 자신들이 자부하는 근대의료를 도구로 조선인들의 심장과 뇌수 한가운데로 파고들겠다는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병탄 직후인 1910년 9월
수원, 평양, 대구 등 10곳에 자혜의원이 설립되는 등, 1943년까지 모두 49개(출장소와 분원 포함)가 설립되었다. 이로써 부산을 제외한 전국의 모든 도시(府), 주요 읍 및 요충지에 도립의원이 자리를 잡았다. 부산에는 이미 일본인이 세운 사립 의료기관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도립의원을 설립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자혜의원은 1924년까지 총독부가
관장했고 명칭은 대체로 도(道)자혜의원으로 불렸다. 그러다가 1925년부터는 소속이 도(道)로 바뀌면서 공식 명칭도 도립의원으로 바뀌게 되었다. (이 글에서도 지금부터는 도립의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전라북도립전주의원(<조선도립의원 요람>, 1937년). 1909년 12월 9일 청주의원과 함께 가장 먼저 세워진 자혜의원이다. 사진 속의 건물은 나중에 신축된 것이다. 1937년 당시 전주도립의원은 내과, 외과(피부비뇨기과 겸무), 산부인과, 소아과, 이비인후과(안과 겸무), 치과 등 진료과를 두었으며 일반 병상 41개, 전염병 병상 26개, 시료(施療) 병상 10개 등 병상 77개를 운영했다. 전주의원의 규모는 전체 도립의원 중 중상급에 속했다. ⓒ프레시안

 

 

▲ 강릉도립의원에서 시료 환자를 진료하는 모습(<조선도립의원 개황>, 1930년). 시료 환자는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다. ⓒ프레시안

 

 


그림에서 보듯이, 도립의원이 곳곳에 설립되면서 병원을 이용하는 환자 수도 증가했다. (그림에서는 경성의 총독부의원(뒤에 경성제대 부속의원)과 각 지역의 도립의원 이용자를 함께 나타내었다.) 세월이 갈수록 입원 환자와 외래 환자 모두 늘어났고 이 점에서는 조선인과 일본인 사이차이가 없었다.

 

다만 예외적으로 조선인 외래 환자가 1920년대에 급격히 줄어든 것은 총독부의 경비 지원이 감액됨에 따라 무료 진료(施療) 혜택이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이 그림을 보면 관립/도립의원을 이용한 조선인 수와 일본인 수는 거의 비슷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조선인 이용자가 조금 더 많았다. 일제 당국의 선전대로 조선인들이 식민지 통치 덕택에 의료 혜택을 점차적으로 많이 누리게 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기에는 누락된
요소가 있다.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 비(比)이다.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는 일제 강점기 동안 꾸준히 증가했지만 일제 말기에도 조선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병원 이용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인구당 이용자 수를 계산해야 할 것이다.


 

▲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프레시안

 

위의 그림은 관립/도립의원 이용자 수를 인구 수로 나누어 얻은 결과를 나타낸 것이다. 인구당 입원 환자, 외래 환자를 비교해 보면 일본인에 비해 조선인 이용자는 사실상 거의 전무했다. 1910년대 무료 치료가 많았던 시절에도 조선인 환자는 일본인 환자의 10퍼센트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이 일제가 그토록 내세웠던 조선인들에 대한 의료 혜택의 실상이다. 일제의 관립/도립의원은 그들만의 것이었고 조선인들을 위한다는 것은 생색내기 용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중에 살펴볼 것인바, 주로 조선인들에게 행해졌던 시료(施療)에는 생체
실험의 함정이 내포되어 있었다.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20. 일제 강점기 조선인 생활수준의 진실은?

전염병으로 본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를 통해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은 나아졌을까, 아니면 악화되었을까?

최근 주로
경제(사)학자들이 이에 관련된 논쟁을 벌여왔다. 이른바 "식민지 근대화" 논쟁이다. 하지만 이 논의에는 한계가 내재되어 있다.

 

이들이 사용한 경제 지표들은 대부분 조선인과 일본인의 구별이 되어 있지 않아 조선인의 생활수준 향상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가정과 전제가 필요하며 그러한 가정과 전제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에 식민지 조선에서 경제 성장이 있었던 것은 대체로 인정되는 바이지만, 그 배분 양상에 따라 조선인들의 생활수준이 향상되었을 수도, 별 변화가 없었을 수도, 오히려 악화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인구와 보건 위생에 관련된 지표들은 대부분 조선인과 일본인이 구별되어 있어 조선인들의 사정을 직접 알아볼 수 있으며, 일본인과의 비교도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조선인의 신체와
건강상의 변화를 규명함으로써 이에 영향을 미치는 경제, 사회, 문화, 정치 분야의 실상을 읽어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인구와 보건 위생 자료는 각별한 의미를 갖는다. 이에 따라 이미 1960~70년대에 주로 인구학자에 의해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인구 변동, 출생력, 사망력, 사망 원인 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연구자에 따라 연구 결과가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일제 강점기를 통해 지속적인 조선인 인구 증가가 있었으며 그것은 주로 사망률 감소에 기인했다는 것이 이들의 공통적인 연구 결과이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에 인구 변천(demographic transition) 모델의 제2단계(多産多死型에서 多産少死型으로 변화)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하지만 그러한 변화가 일제 강점기에 처음 나타난 것인지, 아니면 그보다 앞선 시기(예컨대 1890년대)에 나타난 것인지 확실하지 않은 바, 앞으로 이에 대한 연구가 더 필요하다.

앞에서 언급한 연구자들은 대체로 일제 강점기의 조선인 사망률 감소의 주요한 요인으로 전염병 사망률의 감소를 꼽았으며, 또 그것은 전반적인 생활수준의 향상보다는 위생
시설의료 혜택(제16~19회)의 확대에 기인했다고 주장했다. 이번 회에서는 그러한 주장들이 타당한지, 특히 전염병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 1910~1940년 사이 조선인과 일본인의 조사망률(粗死亡率) 변화. 세 집단 간의 성별, 연령별 인구 구성의 차이를 보정하지 않은 자료로서 비교에 한계가 있지만 조선인, 일본인(조선 및 일본 거주) 모두 이 기간 동안 사망률이 떨어지는 사실을 볼 수 있다. 1918년에 큰 피크가 나타나는 것은 인플루엔자 유행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1918년 이전 조선인 조사망률이 낮은 것은 주로 신고의 미비 때문으로 여겨진다.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 연감>. ⓒ프레시안

 

일제 강점기 조선에 관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통계 자료는 조선총독부가 매해 펴낸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1910~1942년)이다. 그 자료는 정확도에 어느 정도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일제 강점기 여러 분야의 시계열적(時系列的) 변화를 살펴보는 데에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에는 전염병과 관련된 자료가 "호구편(戶口篇)"의 "사망 원인별"과 "위생편"의 "전염병 환자 및 사망자" 등 두 부분에 실려 있다. 선행 연구자들이 사용한 자료는 "호구편"의 "사망 원인별"인데 그것부터 살펴보자.


 

▲ 조선에 거주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인구 10만 명당 전염병 사망자 수.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호구편". ⓒ프레시안

 

그림에 보이는 1918~1920년의 큰 피크인플루엔자(에스파냐 독감), 콜레라, 두창(천연두) 등이 이 시기에 크게 유행했기 때문이다. 흔히 팬데믹(pandemic)기라고 부르는 이 시기를 제외하면 일제 강점기에 팬데믹은 없었는데, 그것은 동아시아의 (나아가 대체로 세계적으로도)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팬데믹 기 이후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 감소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에서는 뚜렷한 반면 조선인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조선인 사망률 감소의 주요 요인으로 전염병 사망률의 감소를 꼽는 것은 이 자료만을 보아서도 무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팬데믹 기를 제외한 모든 시기에 걸쳐 인구 10만 명당 일본인 사망자가 조선인 사망자보다 많게 나타나는데, 이것은 실제로 그랬던 것이 아니라 조선인 사망자의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또한 "호구편"에서 사용한 사망 원인의 종류는 전신병,
정신병, 신경계병, 감모(感冒), 전염성병 등 25가지인데, 감모(감기) 항목이 별도로 설정되어 있는 등 전염성병의 범주가 의학적으로 확실치 않다. 거기에 반해 "위생편" "전염병 환자 및 사망자"의 전염병은 콜레라, 적리, 장티푸스, 파라티푸스, 두창, 발진티푸스, 성홍열, 디프테리아, 유행성뇌척수막염(1924년부터), 재귀열(1939년부터) 등 법정 전염병으로 의학적 범주가 확실하다.

 

 더욱이 총독부 당국은 전염병 실태 파악과 관리 대책을 그 자료에 근거하여 마련했다. 따라서 시대별 및 대만, 일본과의 객관적이고 정확한 비교를 위해서는 "전염병 환자 및 사망자"를 활용해야 한다.

 

▲ 조선, 일본, 대만의 인구 10만 명당 법정 전염병 환자 수.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 연감> <대만총독부 통계서>. ⓒ프레시안

 

위의 그림에서 보듯이 조선총독부가 공식적으로 파악한 법정 전염병 환자 수는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대체적으로 10배를 상회했다. 이것은 조선인 환자가 실제로 적었던 것이 아니라 제대로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독부는 보건의료 분야 중 법정 전염병
예방과 관리에 가장 큰 노력을 기울였으며 또 그만큼 큰 성과를 거두었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일본인 환자 수는 거의 줄어들지 않았고(본국의 일본인보다 전 시기 동안 네 배가량 많았다) 조선인 환자는 (1918~19년의 인플루엔자 환자와 1919~20년의 콜레라 환자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파악조차 되지 않았다.

 

환자 규모도 파악할 수 없었던 상황에서 적절한 대책을 기대한다는 것은 난센스일 것이다. 요컨대 총독부의 선전과는 달리 조선인들은 전염병 예방과 관리에서 아예 소외되어 있었다.

총독부는 전염병 실태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는 문제의 중요한 요인으로 조선인들의 근대적 위생에 대한
무지와 당국에 대한 비협조, 조선인 의료인(특히 의생)의 무능을 꼽았다. 하지만 총독부가 조선을 30년 이상 통치한 주체인 바, 그런 이유들은 한갓 핑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대만도 비슷했다. 대만인 법정 전염병 환자는 거의 파악되지 않았으며, 대만에 거주하는 일본인들도 조선 거주 일본인보다는 나았지만 일본 본국보다 전염병에 훨씬 많이 시달렸다.

 

조선과 대만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의 전염병 발병률이 짧은 기간 동안만 본국보다 높았다면 현지 풍토에 적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여지가 있지만, 이것은 전 기간에 걸친 현상이었다.


 

▲ 조선, 일본, 대만의 인구 10만 명당 법정 전염병 사망자 수.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일본제국 통계 연감> <대만총독부 통계서>. ⓒ프레시안

 

법정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 수도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이 기간의 후기로 가면 조금 나아졌지만 조선과 대만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본국의 일본인보다 법정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훨씬 많았다. 그리고 법정 전염병으로 인한 조선인, 대만인 사망자 수는 거의 파악되지 않았다.

 

 일제 당국이 전염병의 예방과 관리에 총력을 기울였던 팬데믹 기에도 당국에 파악된 조선인과 대만인 사망자 수는 일본인 사망자 수에 훨씬 못 미쳤다.

 

<표 1>은 일제 강점기 조선의 콜레라 환자 수와 사망자 수를 보여준다. 나는 조선인 환자 및 사망자가 일본인 환자 및 사망자와 거의 비슷한 점에서 1919~20년 대유행기의 조사치는 정확도와 신뢰도가 매우 높다고 생각한다.

 

그만큼 총독부 당국이 콜레라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실태 파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또 나는 이 수치가 일제 강점기 조선인이 겪은 법정 전염병의 실태를 유일하게 보여주는 자료로, 이것을 근거로 다른 법정 전염병들의 환자와 사망자 수를, 제한적이나마,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법정 전염병 피해는 직접적으로는 파악되지 않는다. 총독부가 파악한 조선인 환자 수, 사망자 수는 (1919~20년의 콜레라 경우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지금으로서는 조선에 거주한 일본인 환자 수, 사망자 수를 통해 간접적으로 유추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으로 생각된다. 아래 그림들은 각각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 환자 수 및 사망자 수를 통해 본 법정 전염병 발생 양상이다.


 

▲ 조선 거주 일본인 환자 수를 통해 본 법정 전염병 발생 양상.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조선 방역 통계>. ⓒ프레시안

 

 

▲ 조선 거주 일본인 사망자 수를 통해 본 법정 전염병 발생 양상. 출처 :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 <조선 방역 통계>. ⓒ프레시안

 

[출처] :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 : 일제강점기의 의료풍경 / 프레시안

맨 위에 첫번째 표 출처가 어디인지 알 수 있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