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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4. 11. 12. 11:59

출토된 삼국시대의 남근(男根)

 

 

1. 안압지 출토 목제男根

 

 

안압지 출토 목제 남근,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경주 안압지에서 1974년 출토된 목제 남근(경주박물관소장)은 그 용도가 불분명하다. 길이 17.5㎝, 굵기 3.8㎝ 남성이 발기했을 때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남근이 왜 연못에 빠져 있었는지, 무엇에 쓰였는지 알길이 없다. 이와 유사한 목제 남근이 일본 나라시대 헤이조궁 우물에서도 발견됐다

 

1974년 11월 경북 경주 안압지(雁鴨池)의 바닥 준설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인 7세기 후반 문무왕 때에 만들어진 연못. 그런데 물이 맑지 않고 날로 주변의 논밭에서 흘러 들어가는 흙이 바닥에 쌓이고 있어 바닥을 긁어내는 준설작업이 필요했다.

 

이 준설작업은 71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청와대에서 직접 주관한 경주 고도 관광개발 10개년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다. 실로 1,300여년 만에 못 바닥을 청소하는 작업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작업을 시작하자 작업인부의 삽날에 통일신라시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와 작업은 즉시 중단되었다. 급히 조사계획이 마련되고 이듬해 3월부터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서둘게 되었던 것이다.

 

1974년 연못 준설작업하던중 발견

 

그런데 출토된 유물 가운데 발굴조사시 발굴단을 놀라게 한 목제의 양물 즉 남근 모조품이 있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한 편이다.

 

남근 모조품이 출토될 당시 이 유물을 처음 수습한 여성조사원은 작업도중 뻘층에 묻혀있는 이 유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 그저 나무편에 글자를 써놓은 목간(木簡)이려니 하고 발굴조사 팀장에게 가져갔다. 팀장은 이를 받아보고 한눈에 목제의 발기된 남근 모조품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서 여성조사원이 수치스러워할까봐 아무말 하지 않고 현장으로 보내고 자신이 스스로 세척을 했다. 이로써 1,300여년간 안압지연못의 바닥 뻘층에 묻혀있던 남근 모조품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길이 17.5㎝의 이 발기된 형태의 남근 모조품을 본 여성조사원들은 얼굴이 홍당무처럼 붉어졌다. 크기에서 뿐 아니라 너무나 사실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믿기 곤란하지만 기록으로 보면 신라의 역대 임금 가운데 음경이 가장 길었던 왕은 지증왕인데 한자 다섯치였다 하니 40㎝가 넘어 단연 챔피언이었고 다음으로 경덕왕인데 여덟치였다고 하니 20㎝가 넘어 랭킹 2위인 셈이다.

그런데 안압지에서 출토된 이 남근은 17㎝가 넘었으니 남근을 다듬을 때 자신 스스로의 것을 모델로 한 것인지 몰라도 신라시대 양물로서는 랭킹 3위인 셈이지만 실물 모습으로 남은 것은 단연 챔피언이다. 아무튼 이 양물이 처음 출토되고 이어서 형태는 똑같지 않지만 유사한 형태의 양물이 2점 더 출토되었다.

발굴조사가 끝나고 어언 30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도 이 남근 모조품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조각된 모습을 보면 아무렇게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닌 작품이나 다름없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다만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설만 무성한 편이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이다.

 

남근숭배·놀이기구說등 용도 분분

 

남근신앙의 기원은 선사시대부터로 볼 수 있다. 이 때는 다신신앙시대(多神信仰時代)로 남근신앙은 많은 신격중의 하나인 성신신앙(性神信仰)으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울산 반구대 바위에 새긴 암각화(岩刻畵) 가운데 커다란 남근을 노출시킨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새겨진 위치가 가장 높은 위치이고 뭔가 주문(呪文)을 하는 모습에 고래·거북 등의 동물들이 줄줄이 모여드는 형상이다.

이것을 보면 당시 수렵어로인(狩獵漁撈人)들의 의식(儀式)을 엿볼 수 있게 하는데 남근을 노출시키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생식본능에 따른 자손번영과 인간의 심벌이 자연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해석된다.

한편 기록에 보이는 남근숭배 신앙의 예는 고구려에 보인다. 즉 10월이 되면 나무로 다듬은 남근을 두고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이 남근을 신좌(神坐)위에 놓는다고 했다.

남근신앙의 형태는 현대에도 이어져 오고 있다. 삼척 해신당(海神堂)에는 마을 제사를 지내면서 만드는 사람이 자신의 실물크기 남근을 깎아 모시는데 이것은 억울하게 죽은 처녀의 영혼인 해신을 위로하고 풍어와 다산을 염원하는 행사이다.

 

불교 도입전 신라 성문화 개방적

 

그렇다면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 역시 신앙으로 볼 것인지가 문제이다. 안압지는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이 있었던 곳이고 한편으로는 임해전(臨海殿)이 마련되어 임금이 정사를 논하고 신하들에게 향연을 베풀던 곳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이곳에서 출토된 남근 모조품은 일단 신분이 높은 여성이거나 그들에 속해있는 여성들 가운데 누군가 사용했던 것으로 압축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용도는 무엇인지 관심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인들의 성생활문화는 대체적으로 개방되었던 것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고(古)신라시대인 4~5세기대의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흙으로 적당히 빚어만든 토우(土偶) 가운데 남녀의 성기가 과장되게 표현되거나 다양한 형태의 성행위를 하고 있는 모양으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대체로 2~3㎝정도이고 커보았자 10㎝ 미만인데 토기항아리나 고배 뚜껑에 장식처럼 붙어있다. 이러한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함께 묻힌 무덤의 주인공 역시 보통사람들의 무덤이 결코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지위가 높은 분이거나 신분이 있는 사람의 무덤임이 분명한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고 신라시대 상류층의 성문화에 대한 일단을 엿볼 수 있게 한다.

고 신라에서는 왕족의 근친혼도 행해졌고 부인이 외간남자와 잠자리하다 발각되어도 관대했던 것이 처용설화에서 보이는 데 이 모든 것이 어떻게 보면 성 개방의 결과라 생각된다.

이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의 용도에 대해 결론을 내려볼까 한다. 물론 가설에 지나지 않고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이긴 하지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고 신라시대 유물에 나타난 성행위의 토우가 6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신라는 당시 삼국 가운데 고급 종교인 불교를 받아들이는데 있어 고구려나 백제보다 무려 2세기 늦은 6세기에 들어와 법흥왕이 국가종교로 공인하고 있는데 이후 아직까지 신라토기나 출토된 유물에 앞서의 성기나 성행위의 토우가 장식된 유물이 발견되지 않고 있어 시사하는 바가 크다.

 

돌기로 봐서 ‘內室 자위용’ 유력

 

신라는 불교가 공인되기 전까지 토속적인 다신신앙이 성행했겠지만 일단 불교를 받아들이고 나서는 불교 사상적인 측면에서 금욕 등 사회규범이 생활문화를 지배하게 됨으로써 새로운 성 모럴이 형성되어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통일신라시대에 마련된 안압지에서 출토된 남근은 분명 실용적인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6세기를 풍미했던 ‘미실의 애정행각’에서 볼 수 있듯, 고 신라시대에만 해도 비교적 개방되었던 성문화가 폐쇄적으로 변하자 엄밀하게 행해지거나 아니면 자위행위로 만족을 찾아야 했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가지 이유를 더하면 소나무를 가지고 다듬어 만든 남근 모조품에서 볼 수 있다. 즉 음경부분에 옹이를 이용해서 3개의 돌기가 마련된 것이다. 단순한 성기숭배신앙에서 본다면 돌기까지 마련할 필요가 없을 것이지만 자위로 최대한 만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왕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아니면 궁녀 누군가가 사용한 것인지 확인할 길은 없어 이 문제는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을 것 같다.

[고고학자 /조유전]

 

신라 여인들의 침실 노리개?

 

안압지 발굴과정에서  출토된 것입니다. 2점 모두가 목재로 만들어졌는데 바닥의 진흙 속에 묻혀져 있어 잘 보존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발굴조사가 끝난 지 3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남근은 그 정확한 용도가 밝혀지지 않아 설만 무성한 편입니다

 

누구 손에 만들어졌고 누구의 것이 모델이었는지, 또한 용도는 무엇이었는지 명쾌하게 밝혀진 것이 없고. 다만 용도에 대해서만 몇몇 설만 무성한 편입니다. 신앙으로서의 성기숭배 사상적인 견해와 실제 사용한 것으로 보는 견해, 그리고 ‘놀이기구용’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입니다.

 경주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기라는 전시대에 쓰여진 제목과 이 목기의 실제 용도에 대해 의문을 가지는데는 몇가지 근거가 있다.
첫째, 이 나무 남근이 출토된 곳은 안압지입니다. 안압지는 제사를 지내거나 하는 곳이 아니라 귀족들이 노는 곳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출토되는 물건들은 놀이기구에 가깝다고 봐야한다.

둘째, 나무남근의 모양새나 크기가 격식보다는 사용성에 더 치중한 느낌이다. 제의에 쓰이는 것이라면 사람들의 눈에 띄도록 크거나 남근의 밑둥을 넓게 처리해서 제단에 세워둘 수 있게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목기는 실제로 사용이 가능한 모양새와 실물크기이다.  

 

셋째, 반질할 정도로 묻어있는 나무남근의 손때가 이 물건이 제의보다는 실생활기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제의보다는 자주 쓴 흔적이다.

 

 

 

2. 신라 國刹 황룡사지에서 발굴된 남근 - 풍요를 바란 것인가, 시녀들이 사용했을까

 

 

황룡사지 배수로에서 발굴된 활석 남근석,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소장

 

 
신라 왕경 유적에서 출토된 활석제 남근(滑石製 男根)은 폭 4.8㎝, 길이 4.5㎝가량의 귀두(龜頭) 부분과 몸뚱아리 일부만이 남아있고,  나머지 부분은 어디론가 날아가 버렸다
 
전문가들은 "남근석은 전세계적으로 출토되지만 돌로 만들었으면서도 이처럼 정교하고 사실적인 모양을 한 것은 전례가 없을 정도"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왕경 배수로에서 출토된 활석제 남근(길이 7.9㎝, 굵기 4㎝)은 귀두부만 남았지만 힘줄을 역동적으로 표현하고 요도구.피부주름까지 극사실적으로 조각해 눈길을 끈다.

 

신라시대 경주의 ‘명동’에 위치한 황룡사는 경주의 상징이기도 했다. 황룡사는 진흥왕 14년(서기 553년) 창건됐다. 진흥왕이 새롭게 궁을 지으려던 곳에 누런 용이 나타나자 이를 기이하게 여겨 절로 만들었다. 그 100년 뒤, 선덕여왕은 재위 14년 때(서기 645년) 황룡사9층탑을 세웠다.

신라 최고의 사찰 황룡사. 한데 지난 1970년대 말 황룡사 발굴 때 출토된 유물 한 점은 지금껏 고고학계에서 ‘해석 불명’으로 남아 있다.

이 사찰 회랑 외곽에서 남근이 나온 것이다. 짙은 회색의 활석으로 만든 이 남근은 길이 8.7㎝, 귀두 최대 직경 5.3㎝로 음경 부분이 부러진 상태였지만, 사실적으로 조각됐다. 함께 나온 유물이나 발굴 정황을 종합할 때 통일신라 초기(서기 7세기 말~8세기 초) 것으로 추정됐다.

신라 제 1의 사찰에서 왜 남근이 필요했을까? 성적 유희를 위해 제작했다고 보기엔 약간 크다. 물론 ‘사용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점잖은 국가 사찰에서 남근이 어떤 ‘상징성’을 띠었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통일신라시대 초기(서기 7세기 말~8세기 초) 돌로 만든 남근.  황룡사 동쪽 담장 바깥배수로에서 나왔다. 실물 크기로 극(極)사실적으로 만들었으며,‘ 사용 흔적’이 뚜렷하다.

 

반면 1996년 여름, 황룡사 동편 담장 바깥쪽 배수로에서 나온 활석제 남근(서기 7세기 말~8세기 초)은 ‘사용 흔적’이 너무나도 뚜렷했다.  당시 발굴을 했던 이은석 문화재청 학예연구관은 “이 남근도 음경이 부러진 상태로 발굴됐는데, 부러진 곳의 색깔과 손을 많이 탄 부분의 색깔이 완전히 달랐다”“한참 사용하다가 음경 부분이 부러지자 요즘 말로 치면 하수구에 던져 버린 것”이라고 했다.

전체적인 비례미나 귀두의 곡선 부분, 미세한 피부 주름, 요도구(口) 등을 마치 그리스나 로마의 조각상처럼 극(極)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크기도 귀두 최대 직경 4.8㎝로 실제 크기와 거의 같았다.

 

남은 음경 길이는 7.9㎝였다. 자연을 모방, 혹은 복제하듯 만든 사실적 조각상이 그리 많지 않은 우리 전통으로 볼 때 지극히 이례적인 유물이었다.

 

 

황룡사 회랑 외곽에서 나온 남근(왼쪽)과 황룡사 담장 바깥배수로에서 나온 남근을 비교한 사진이다

 

이 남근이 나온 배수로는 경주 도심의 하수구로, 오수나 빗물이 황룡사 영역으로 스며들지 않도록 만든 것이었다. 때문에 경주 도심의 어느 여염집에서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70년대 경주 안압지 발굴 때 나온 목제 남근은 자위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귀두 양쪽에 달린, 여성의 성감을 자극하는 ‘혹’ 때문이다. 손을 많이 타 반질반질하다는 것도 그렇고, 안압지가 신라시대 태자가 거주하던 동궁(東宮)으로, 시녀들이 많았을 것이라는 점도 여기에 가세한다.

일부에서는 이 ‘혹’을 근거로 통일신라시대에도 일종의 성기확대수술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의학사적 증거는 없다. 혹 달린 남근은 서기 전 2세기 중국 한(漢)나라 제후 유승의 묘에서도 청동으로 만든 게 나온 적이 있다.

김종대 중앙대교수(민속학)는 그러나 “신라의 남근은 실제 유희용이라기보다는 아들 낳기, 혹은 풍요를 바라며 만들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했다. 
신라시대(통일신라 포함) 남근은 지금까지 5~6점 정도 출토됐으며, 백제나 고구려에서는 각각 한 두 점 정도 나왔다.

 

 

▲ 신라시대 유적에서 출토된 남근에 대해 김종대 중앙대교수(민속학)가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성적 쾌락용이라기보다는 풍요나 아들낳기를 바랐던 것으로 해석했다

 <조선일보/신형준기자 2007.09.10 >

 

 

3. 인용사지에서도 대형 신라 목제 남근 출토

 

 

경주 (전)인용사지 발굴현장에서 출토된 6세기 무렵 신라시대 목제 남근(男根). 한쪽 끝은 망가졌으나 잔존 길이 30㎝에 이른다 <2006.12.8>

 

 

 길이 30㎝에 이르는 신라시대 대형 목제  남근(男根)이 출토됐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송의정)는 경주 인용사 터를 발굴조사한 결과 지하 60㎝ 가량 되는 뻘층에서 6세기 무렵 신라시대 고배(굽다리접시)를 비롯한 유물들과 함께 이 목제 유물을 발견했다고 8일 말했다.

이 목제유물은 한쪽 끝은 깨져 없어졌지만 잔존 길이가 30㎝에 이르며, 다른 끝은 귀두형(龜頭形)으로 깎았다. 귀두형과 몸통 사이에는 홈을 파서 이곳에 끈 같은 것으로 묶어 다른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경주연구소 권택장 학예연구사는 "고대 일본유적이나 부여 능산리 절터와 같은 곳에서 이런 목제 유물이 나온 적이 있어 비교하고 있지만 유물의 성격이나 기능을 확실히 점치기는 어렵다"면서 "사람 모양을 본뜬 인형(人形)일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고 말했다.

권 학예연구사는 "같은 층위에서 6세기 무렵 신라시대 유물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같은 시대의 유물인 것이 분명하다"고 덧붙였다.
(경주=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이 목제 유물은 한쪽 끝은  깨져 없어졌지만 잔존 길이가 30cm에 이르며, 다른 끝은  귀두(龜頭)형으로 깍여 있다. 귀두형과 몸통 사이에는 홈이 파여져 있어, 이곳에 끈 같은 것으로 묶어 다른 곳에 매달아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인용사지 남근은 황룡사지(78년) 출토 석제 남근과 더불어 신라의 성문화를 엿볼 수 있는 유물들이다

 

 

 

 4. 국내 최고(最古) 남근 조각 마한시대 유적서 발굴

 

 

충남 부여 논치 제사유적에서 발굴 된 남자 성기가 장식된 토기 손잡이를

여러 각도에서 촬영한 사진

 

1800여년전 마한(馬韓)의 제사터로 추정되는 충남 부여 논치 제사유적의 발굴보고서가 23일 발간됐다. 보고서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1800여 년 전에 조각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남자 성기 조각상〈사진〉이다. 신라 경주나 백제 부여 등에서도 삼국시대 성기 조각상이 여러 점 발굴된 바 있지만, 대부분 서기 5세기 이후의 것이었다.

토기의 손잡이 부분을 장식했던 것인데, 길이 3.7㎝, 굵기는 2㎝이다. 성기의 외(外)요도구(口)까지 표현할 정도로 사실적이다. 용도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학계에서는 풍요나 다산 등을 기원하며 땅에 묻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논치 제사유적은 국립부여박물관이 지난 99년 발굴했다.

***************************************************************<조선일보/2007.4.23>

 

5. 백제인의 남근

 

  
남들은 이런 형물을 이름하기를 남근형(南根形)이라거나 음경형(陰莖形)이라는 다소 알쏭달쏭한 호칭을 붙입니다만,  여기서는 알기 쉽게 자지 목간이라 하겠습니다. 보다시피 이 목간은 완연히 자지 형상을 했습니다.

이 목간은 1999-2000년도에 국립부여박물관이 실시한 부여 능산리사지 절터에 대한 제6차 조사에서 확인됐습니다.(2005년 현재 이 능산리사지는 제8차에 걸친 조사가 진행됐습니다)

요 목간은 생긴 게 요상하기 짝이 없는데 무엇보다 그 모티브가 자지를 형상화했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또 사진에서 완연하듯이 네 면을 깎아 각 면에다가 묵글씨를 쓰거나 칼로 글자를 새겨 넣었습니다. 이른바 4면 목간이라는 것인데 신라 출토 유물 중에 이런 게 또 있습니다 
 신라시대 나무 남근 실제로 사용했을까?
 

6. 성희가 조각된 토우가 있는 토
 


토기 위에 달린 토우들을 잘 보십시오. 중간 아래에 적나라한 성행위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주인이 이 토기를 오늘날 포르노테이프 처럼 숨겨놓고 쓰진 않았을 것이다. 신라시대엔 가족들 누구나 보는 생활용구에 이렇게 성행위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만큼 성이 개방되어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신라시대 이 나무 남근의 실제 용도에 대한 논의는 무의미한 일일지도 모른다. 섹스가 일상생활에서도 스스럼없이 표현되는 신라시대엔 나무남근의 용도가 제의와 성생활로 분리되지 않았을 수 있다. 
 

남근숭배의 제의에 쓰였다고 해서 그걸 자위용으로 쓰는 것을 기겁을 하고 말리는 분위기는 아니었을 거라는 것이다. 우리가 식기와 제기를 엄격히 구분하지 않는 것처럼 섹스가 일상에서도 흔히 표현되는 신라시대엔 제의용 도구와 성생활용 도구의 구분도 느슨했을 것이다. 우리가 제기로 밥먹는다고 부정한 짓이라고 나무라지 않는 것처럼 신라시대엔 제기로 자위한 걸 혼내지 않았을지 모른다. 

제기로 안쓰이고 아예 성생활 도구로만 쓰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냥 길에서 나무 하나 주워 깍아 만들어 썼는데 성을 터부시하는 오늘날 관념이 이 도구의 실제용도에 대한 상상을 방해하여 자꾸 남근숭배와 연결시키려 하는지 모른다. 그렇게 본다면 이러나 저러나 나무남근은 확률적으로도 실생활 목기로 쓰였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