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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4. 11. 12. 12:05

선인들의 지혜, 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서산, 벼루, 지팡이, 장검, 주기명, 베개,여의,]

 

 

7. 책 읽은 횟수 표시한 서산… 책갈피로도 쓰인 선비의 벗

 

 

서산(書算)은 두 층으로 혀나 귀 모양의 홈을 만들어 그것을 접었다 폈다 하며 책 읽는 횟수를 센다. 보통 아랫단 다섯은 한 자리 숫자를, 윗단은 십 단위 수나 백 단위 수를 나타낸다. 호림박물관 제공

 

“연날리기 마치고서 숨을 씩씩대며, 처마 끝 고드름 한 가닥을 잘라먹네. 웬일이냐 책상 앞에선 기침만 콜록콜록, 책 읽는 소릴랑 파리 소리 같으니…(鳶罷氣騰騰 吃却端一股氷 歸對書床無盡嗽 讀聲出口只如蠅).”

18세기의 시인 유득공이 지은 ‘연 날리는 꼬마(飛鳶童子)’란 시다. 서당 다니는 꼬마를 묘사한 것인데 표현이 해학적이다. 연 날릴 때는 기세등등하던 녀석이 책상 앞에 앉았다 하면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김홍도의 그림 ‘서당’ 풍경에 나오는 댕기머리 꼬맹이들도 이랬을까.

필자도 어릴 적에는 할아버님을 모시고 친구들과 글을 배웠다. 글 읽는 시간은 한 번에 보통 1시간 반쯤. 무릎이 저리도록 꿇어앉아 낭랑한 소리를 내야 했다. 가을, 그리고 추석이 다가온다. 웬일인지 수염을 쓰다듬으며 책 읽는 소리를 들으시던 할아버님이 유독 그리워진다.

○ 글 읽는 횟수를 어떻게 알까?

소리 내어 글 읽는 것이 낭독이다. 낭독은 미덕이 많았다. 마당에서 벼 말리던 아버지는 글 읽는 소리로 자식이 조는지 공부하는지를 금방 알았다. 문자 교육을 제대로 못 받은 부인들은 남편과 아들의 글 읽는 소리에 덩달아 글공부를 했다. 서당 개도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 하지 않았던가.

옛 사람들은 같은 책을 여러 번 되풀이해 읽어 그 뜻을 머릿속에 새기려 했다. 한데 책 읽은 횟수는 도대체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절하는 횟수는 염주로 알고 숫자의 계산은 주산(珠算)으로 알듯, 책 읽는 횟수는 서산(書算)으로 알 수 있었다.

서수(書數)라고도 불린 이 물건은 종이 두 겹을 맞대어 긴 젓가락 봉투처럼 만든 것이다. 한쪽 면에 홈을 내 귀나 혀 모양을 만들고, 이 귀(혀)를 접었다 폈다 하면 책을 읽은 횟수를 헤아릴 수 있다. 즉 접었다 펴는 부분은 일종의 눈금 역할을 했다. 서산 위에는 여러 개의 눈금이 있었다.

때론 표면에 비단을 입히거나, 혹은 색깔을 칠해 멋을 부릴 수도 있었다. 서당의 꼬마나 궁중의 궁녀, 평생 글만 읽은 남산골샌님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서산을 가지고 글을 읽었다. 같은 글을 수천 번까지 읽었던 선비들에게 서산은 독서의 필수품이었다. 서산은 책장 사이에 꽂으면 책갈피가 되기도 했던 어여쁜 물건이었다.

○ 서산 이야기 두 가지

18세기의 명필 이형부(李馨溥)는 어느 가을날 책을 꺼내어 말리다가 해묵은 책을 한 권 발견했다. 어릴 적 외가에서 공부를 하고 친가에 돌아올 때 외삼촌이 손수 필사해 선물한 ‘효경(孝經)’이었다. 노년에 접어든 그의 추억 속에서, 장가든 외삼촌은 날마다 외할머니를 찾아와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자기를 특히 귀여워하여 글씨 쓰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하루는 외삼촌이 “귀중한 물건이니 절을 올려라” 하고 뭔가를 선물했는데, 그게 바로 외삼촌이 직접 만든 서산이었다.

이형부는 외삼촌이 직접 써준 ‘효경’을 발견하고 감동과 추억에 젖어들다 문득 깨닫는다. 외삼촌이 하필 효도의 경전인 ‘효경’을 써주었던 이유를, 인생에서 기예나 학문 행실 등 다른 무엇보다 효도가 더 소중하다는 그 뜻을 말이다. 아쉽게도 이형부가 외삼촌에게 선물 받았던 서산이 ‘효경’ 책갈피에 남아 있었는지는 그의 글에 남아 있지 않다.

그런데 비슷한 시대의 문관 강필신(姜必愼)은 다 떨어진 서산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짤막한 수필을 남겼다. 그는 10년 전에 자신이 직접 만든 서산으로 수백만 자의 글을 읽었다. 마침 중국 당나라 때 문인 한유(韓愈)가 쓴 묘지명(墓誌銘)을 읽어가던 참에 서산이 너덜너덜해지고 말았다. 그는 ‘버리고 새로 만들어야지’ 하다가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읽어 나가던 한유의 글 때문이었다. 한유의 친구인 이관(李觀)이 남에게 빌린 벼루를 4년째 쓰고 있었는데, 이 벼루를 옮기던 사람이 실수로 깨뜨리고 말았다. 이관은 벼루를 상자에 담아 당나라 수도 장안의 어떤 마을에 묻어주었고, 이를 본 한유가 그 사연을 글로 남겼다.

‘이 서산은 내가 직접 만들었으며, 10년간 독서의 동행이 되지 않았던가? 원래 땅에서 나온 벼루야 땅에 묻는 것이 마땅하지만, 서산은 대체 어디에 묻어야 하나?’

그런 고민 끝에 강필신은 서산을 다시 책갈피에 꽂아두었다. 종이로 만든 서산이니 책으로 돌아가 묻히는 것이 마땅하다며 말이다.

○ 서산명(書算銘)은 없는가?

기록에는 어머니가 서산을 만들어 줬다거나, 고인(故人)의 책 속에서 서산을 발견했다거나 하는 일이 이따금 나온다. 효종(孝宗)이 읽던 책 속에서 서산이 나오자 후대의 신하들이 감격해했던 것이나, 자식 교육에 엄했던 민씨 부인이 훗날 대학자가 된 아들 이재(李縡)에게 만들어준 서산의 이야기 등이 그런 예이다.

강필신의 사례에서 보이듯이, 서산은 독서의 필수품이었으면서도 소모품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렇게 닳아 못쓰게 될 것이기에 깨달음을 새기는 기물명의 소재로 적합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렇지만 영조 때의 남유용이나 조귀명처럼 서산이 지닌 귀한 의미를 알고 명(銘)을 남긴 이들도 있다. 남유용은 하도(河圖·주역의 바탕이 되는 그림·중국 복희씨 때 황허 강에서 용마(龍馬)가 지고 나왔다는 55개의 점으로 되어 있음) 모양으로 서산의 귀를 만들어 우주의 이치를 알고자 했다. 조귀명은 서산 귀의 배치를 관찰해 태극과 음양의 이치가 거기에 있다고 적었다. 잠자리의 투명한 눈에 천하가 담긴 것처럼, 자그만 서산에서 우주를 읽어내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좋아하는 시를 적어오게 했더니, 한 여학생이 신석정의 시 ‘꽃씨와 도둑’을 적어 왔다. 곡절이 있지 않을까 싶어 물었다. 책갈피에 아빠가 적어둔 것을 우연히 발견하고 자기도 좋아하게 되었더란다. 고생하시는 아버지에게도 시를 좋아하던 시절이 있었던 같아서 더욱 좋다고도 했던 것 같다. 서산을 만들어 책 속에 꽂아 두면, 훗날 책 읽기를 좋아하는 딸이 그것에서 아빠와의 추억을 떠올려 주진 않을까.
 

 

8. 선비의 仁을 이루는 벼루… 수명 다하면 연명 쓴 뒤 묻어

 

 

조선 후기 명필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이 자신의 벼루갑(아래 사진) 안쪽에 쓴 주희(朱喜)의 ‘서자명(書字銘)’. 글씨 공부의 본질을 말하고 있다. 대전선사박물관 제공

 

송준길 벼루와 벼루상자(宋浚吉 硯, 硯匣)   주희(朱喜)의 ‘서자명(書字銘)

 

 옛 선비들은 문방에 없어서는 안 될 종이, 붓, 먹, 벼루를 사우四友라 하여 가까이 여기었다. 그 중 하나인 벼루는 사흘 동안 세수는 못해도 벼루는 씻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아끼었다고 한다. 

 이 흑칠 벼루 세트는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1606~1672)이 사용한 것으로 전해온다. 남포석藍浦石으로 만든 장방형의 벼루를 넣고 외부에 흑칠 벼루상자를 맞춤으로 짰다. 남포연은 보령 남포면 성주산 밑에서 나는 것으로, 조선조 이후 벼루 공급의 70%를 차지할 만큼 사대부의 필수품이었다.

벼루상자 상단에는 금분으로 커다랗게 ‘臨池淸事’라고 썼는데, 한나라의 서예가인 장지張芝가 글씨공부를 열심히 하여 연못의 물이 검게 변했다는 고사를 빗대어 서예공부의 마음가짐을 다지고자 한 동춘당의 웅장한 필체가 돋보인다.

벼루상자 안쪽에는 주희朱喜의 글씨 쓰는 좌우명인 ‘書字銘’을 금분으로 썼는데, 분방하면서도 긴장감이 넘치는 필력을 보이고 있다. 주자를 흠모한 도학자로서의 면모가 보이는 귀중한 유품으로, 동춘당가 후손에게 전해진 것이다. 

동춘당 사후 송시열은 흑칠 위에 이금泥金으로 장식된 동춘의 벼루상자에 새겨진 글이 마멸될까 염려돼 후손이 새기어 오래 보존하려 하였으나 그 효심까지는 전할 수 없을 거라는 글을 남겨 이 벼루상자의 주인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握管濡毫 伸紙行墨 一在其中 點點畫畫 放意則荒 取姸則惑 必有事焉 神明厥德

 

握筆濡毫(악필연호)  붓을 잡아 먹물을 적시고

伸紙行墨(신지행묵)  종이를 펴 글씨를 써내려갈 때

一在其中(일재기중)  전일한 마음이 그 안에 있어야

點點畫畫(점점획획)  한 점 한 획이 된다

放意則荒(방의즉황)  마음이 흐트러지면 글씨는 거칠어지고

取姸則惑(취연즉혹)  아름다움만을 취하면 미혹하게 된다

必有事焉(필유사언)  반드시 마음 써야 할 일이 있으니

神明厥德(신명궐덕)  신명함이 바로 그 덕이다

  오른쪽은 주희晦翁의 서자명書字銘을 씀.

 

붓자루를 잡고 붓끝을 먹물에 적시고 종이를 펼쳐서 글씨를 써내려가니 오직 하나(一)가 그 안에 있다. 점을 찍거나 획을 그을 때 생각의 중심을 놓아버리면 글씨가 거칠어지고, 아름답게 쓰려고 억지로 무리를 가하면 정신이 흩어져서 문제가 생긴다. 다만 수행한 정신의 덕이 그 속에 피어나도록 하면 족하다.

 

‘얼굴과 말과 글씨는 바로 그 사람이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수행된 심의 차원이 바깥으로 드러난 것이 곧 얼굴이요, 말이요, 글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을 쓸 때는 생각을 놓은 채 그저 되는 대로 휘갈겨 써도 안 되고 그렇다고 억지로 무리를 가하여 아름답게 보이려고 거짓꾸밈을 더해서도 안 된다. 다만 그 속에 자신의 진솔한 모습이 스며있도록 쓰면 된다.

그러나 어떤 경우든 수행자로서의 긴장된 ‘경(敬)’의 마음가짐을 놓쳐서는 안 된다.

 

 

‘서산(書算)을 아시나요’라는 지난 글에 당나라의 문호인 한유(韓愈)가 친구인 이관(李觀)을 위해 써준 벼루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벼루를 묻으면서(예연명·硯銘)’라는 이 글은 깨진 벼루를 땅에 묻어준 친구의 사연을 배경으로 삼았다. 고락을 같이한 벗을 영송(永送)하는 것처럼 벼루와 이별한 이관의 슬픔을 감동적으로 형상화한 내용이었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연명(硯銘) 즉, 벼루에 새긴 깨달음을 소개할까 한다.

○ 벼루를 탐하다

기물명(器物銘)의 세계에서 벼루는 자주 등장하는 손님이다. 평생 글을 써야 했던 옛 선비들에게 벼루가 얼마만큼 친근하게 애중되었을지는 그야말로 불문가지다. 나 역시 좋은 벼루를 보면 가슴이 설레 참을 수가 없다. 10년 전쯤에 강원 홍천으로 강독여행을 떠난 적이 있는데, 곽재우 장군의 후손인 모 선생님 댁에 머물게 됐다.

 

거실에 들어가자마자 햇살이 비치는 탁자 위의 벼루가 유독 내 눈에 들어왔다. 귀퉁이에 붉은 빛이 감돌고 돌의 결을 따라 형태를 만든 가품(佳品)이었다. 응석을 부리듯 “선생님, 이 댁에서 훔쳐가고 싶은 것이 딱 하나 있습니다”라고 했더니 “이 사람아, 저 벼루는 산 하나야! 큰 산을 팠는데도 딱 두 개만 나왔어”라며 눈독들 이지 말라셨다.

변명하자면 벼루를 탐했던 마음은 내 잘못이 아니다. 옛 문인들치고 좋은 벼루를 염원하지 않은 사람은 드물었다. 돌에 미쳐 자기의 호를 석치(石痴)라 했던 정철조(鄭喆祚)는 좋은 돌만 보면 절을 올리고 벼루를 만들었다던 18세기의 인물이다.

 

벼루 만들기의 명인인 그는 지인들에게 선물도 많이 했다. 이용휴(李用休)는 석치가 선물한 벼루에 감사하며, “내 이름이 닳지 않은 건, 네가 닳아 없어지기 때문. 이는 석치가 너를 통해 나를 장수케 하려는 마음이려니(我名之不磨 繇爾之磨也 此石癡子以離壽我之意也; ‘硯銘’)”라고 적었다.

 

벼루는 제 몸을 닳게 하여 주인을 빛내는 살신성인의 상징이다. 벼루의 이런 덕에 감사하지 않는다면 주인이 될 자격조차 없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시대의 박제가(朴齊家)는 유금(柳琴)이 소장한 단계연(端溪硯·중국 광둥(廣東) 성 돤시(端溪)에서 나는 돌로 만든 벼루)에 군침이 돌았던 듯하다. “영지와 감로수는 하나만 얻어도 천하에 좋은 것. 감로수에 붓을 적시고 영지 곁에서 먹을 갈며, 깜짝 놀랄 멋진 글을 짓는다면 그 기쁨이 어떠하랴(靈芝甘露 得一則爲天下祥 何筆甘露之中 磨墨靈芝之旁 以成奇偉譎怪之文章者乎; ‘柳幾何靈芝端硏銘’) 라고 했다.

○ 벼루에 담긴 사연들
 

 

송준길이 사용했던 남포연 벼루와 흑칠 벼루갑. 벼루갑에는 그가 직접 금분으로 쓴 ‘명(銘)’ 이 아직까지 남아 있다

 

다음은 영조 대의 학자였던 어유봉(魚有鳳)과 문장가였던 이천보(李天輔)의 사연이다.

어유봉은 어려서 할아버지가 아끼는 벼루 곁에서 글을 배웠다. 이후 명필이 될 만한 후손에게 대대손손 전하겠다던 할아버지의 벼루를 그가 물려받았다. 나중에 그는 큰 학자가 되었으나 명필이 되지는 못했다. 만년에 그는 벼루에 그런 안타까움을 담아 후손에게 다시 전하는 사연의 연명을 남겼다.

이천보의 이야기는 보다 흥미롭다. 십대에 중부(仲父·결혼을 한, 아버지의 형제 가운데 둘째 되는 이)에게 글을 배웠는데 중부의 일본산 벼루가 좋아 자꾸 그것을 어루만졌다.

“이 벼루를 갖고 싶은 게냐? 학문이 늘면 그때 네게 주마.”

그는 몇 년 뒤에야 마침내 벼루를 넘겨받았다. 1726년 겨울, 꽁꽁 차가운 날에 그는 아끼던 이 벼루를 들고 과거시험장에 앉았다. 그런데 먹물이 모두 얼어붙어 답안을 쓸 수가 없지 않은가. 할 수 없이 숯불 위에 벼루를 데웠으나 이번에는 먹물이 흐릿해져서 탈이었다. 벼루가 잘못 되어서인가 싶어 다른 벼루로 바꿔 보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그 순간 이천보는 깨닫는다. 애중하던 벼루를 못 믿었던 것도 잘못이지만, 정작 자신의 마음이 숯불에도 깨지지 않은 이 단단한 돌보다 못하다는 것을. 그는 영욕(榮辱)이 엇갈릴 과거시험장에서, 벼루처럼 자신의 본성을 굳게 지켜가겠다고 다짐했다.

○ 벼루와 이별하는 방법

사람이 죽으면 고인의 삶을 기려 묘지명(墓誌銘)을 남기듯, 수명을 다한 벼루를 묻으면서 쓰는 글이 맨 앞에서 말한 예연명, 곧 벼루를 위한 묘지명이다. 지난 글에서 언급한 한유의 글이 대표적이다.

한유 이후에도 벼루를 묻으며 글을 남긴 명사들이 적지 않았다. 19세기의 박학자(博學者) 이유원은 ‘세월 따라 같이 늙었으니 함께 묻히자’ 고 속삭였던 반면, 18세기의 문장가 남유용은 형님 남유상의 장례에서 가족들이 남포연(藍浦硯·충남 보령지역의 백운상석을 깎아 만든 명품 벼루)을 순장하려 하자 이를 극구 만류했다.

 

생전에 형님이 사랑했던 벼루를 흙으로 돌려보내는 것보다는 세상에 남겨 형님의 고심과 행적이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형님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이 벼루”라며 이따금 벼루를 쓰다듬곤 했다.

유명한 지리학자였던 신경준 또한 벼루를 매우 좋아했을 뿐만 아니라 벼루의 운명에 관심이 깊었던 사람이다. 그는 조선중기 예학자였던 김장생의 남포연을 얻어 보물로 삼았다.

 

하지만 주인이 바뀌며 유전(流轉·이리저리 떠돎)하는 벼루를 보며, 귀한 것일수록 한 사람이 독점하지 못하는 것 또한 조물주의 뜻이 아닐까 생각했다.

 

반면 자신이 30년을 사용하다 다 닳게 된 벼루는 차마 아무데나 버리지 못하겠노라며 한양의 남쪽 인경산(引慶山) 양지 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유구한 세월 뒤에 누군가가 벼루를 다시 꺼내 써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함께 적었다.

주인에게 의리를 지킨 개를 위해서는 의구총(義狗塚)을 만들어준다. 그 의리가 고마워서다. 제 몸을 닳아가며 문인의 곁을 지켜주는 벼루는 하루하루가 의리의 연속이다. 말없이 인(仁)을 이루는 벼루의 운명은 남몰래 쪼그라드는 어머니의 몸과 같다.
선인들의 문집에 연명이 많은 이유는 무엇인가? 그 어짊에 고마워하는 사람이 많았던 까닭이리라.

 9. 권위-영광의 상징 지팡이는 老선비의 벗

 

공자와 모세의 지팡이는 동서양 성현의 지혜를 대표한다. 도연명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노래하며 고향으로 돌아갈 때 짚은 지팡이나 퇴계 선생이 도산에서 사용한 청려장(靑藜杖)은 은퇴한 존장(尊丈)의 품위를 상징한다.

 

사제와 여왕, 오광대놀이의 양반도 지팡이가 없으면 허전하고, 채플린과 루팡, 삼장법사와 손오공도 지팡이가 없으면 멋스럽지 않다. 김시습과 김삿갓에게도, 히말라야의 등산가나 만화 속 마술을 부리는 소녀의 손아귀에도 지팡이가 들려 있다.

지팡이는 곧 소녀에서 노인, 동화에서 신화, 동양에서 서양을 넘나들며 아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권위와 영광의 상징이자, 노년과 병든 몸의 벗이었다. 또한 방랑의 그림자이자 중력에 대항하는 힘이었다.

○ 문학의 대지에 꽂힌 지팡이

‘정시자전(丁侍者傳·고려 말 승려 식영암이 지은 작품)’의 주인공은 지팡이다. 이 가전(假傳·사물을 의인화한 산문) 속에서 지팡이는 “남을 도와주는 것이 저의 직분입지요”라고 말한다.

 

잉카 제국의 수도 쿠스코는 지팡이의 도시다. 태양신이 자신의 자녀를 티티카카 호수에 내려 보내며 “황금 지팡이가 꽂히는 곳에 정착하라”고 말했는데 그곳이 바로 쿠스코였다고 한다.

중국의 지팡이는 색깔이 또 다르다. 고대 주(周)나라의 예절을 모은 ‘주례(周禮)’에는 ‘오십 살에는 집에서 지팡이를 짚고, 육십 살에는 마을에서 지팡이를 짚으며, 칠십 살에는 나라에서 지팡이를 짚고, 팔십 살에는 조정에서 지팡이를 짚는다’는 구절이 나온다. 주나라의 성군인 무왕(武王)은 자신의 지팡이에 다음과 같은 구절을 새겼다고 전해진다.


오호라, 성냄과 넘어짐에서 위태롭고 망하게 되며(於乎危亡於忿)
오호라, 기호(嗜好)와 욕심에서 길을 잃게 되며(於乎失道於嗜慾)
오호라, 부하고 귀한 데서 망각이 오는구나.(於乎相忘於富貴) 

무왕의 장명(杖銘)은 후세에 많은 울림을 주었다. 송나라 학자 진덕수(眞德秀)는 마지막 구절에 대해 ‘부귀하여 마차를 타면 지팡이를 잊어버린다. 가난할 때는 삼가다가 부귀해져서는 교만해지고, 그러다가 조심스러움을 망각하는 것이다’라고 풀었다. 의금상경(衣錦尙絅), 즉 비단옷을 입어도 엷은 홑옷을 걸쳐 입었던 겸손의 덕을 떠올리게 하는 풀이이다.

○ 지팡이의 길, 사람이 가고 싶어 한 길 

 

 

조선 현종이 1668년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1595∼1671)에게 하사한 지팡이들(보물 제930호). 경기도박물관 제공

 

욕심과 혼란이 되풀이되는 세상일수록 사람이 비틀거리는 빈도도 높아진다. 지팡이의 상징에 주목했던 선인들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병자호란 와중에 강화성이 함락되자 자결을 택했던 김상용(金尙容)은 오죽(烏竹)으로 만든 지팡이에 이렇게 새겼다.

 

 “엎어질 땐 붙들어주고, 위태로울 땐 붙잡아준다. 만약 네가 아니라면, 나를 도울 자가 그 누구랴. 아아! 너에게 의지하니, 지팡이여 나를 버리지 말아다오(顚則扶 危則持 微爾之 相吾誰 依嗟爾 杖莫相違, 烏竹杖銘).” 비틀거릴 몸을 붙잡아 달라는 부탁이 간절한데, 그 안에는 자신의 마음이 바로 가기를 염원한 뜻이 깃들어 있다.

원래 김상용이 지팡이를 짚고 가고팠던 길이 비장한 죽음의 길은 아니었을 것이다. 푸른 용 모양을 한 다른 지팡이를 읊은 작품을 보니 그는 그 단단한 지팡이를 짚고 구속 없는 평화로운 삶을 누리고 싶어했다. ‘이 지팡이를 짚고 하늘이 허락해준 자유로움을 즐기리라(杖乎杖 樂天放, 蒼龍杖銘) 고 했던 그 희망이 김상용의 진짜 꿈이지 않았을까.

조선후기의 명필 이서(李)도 몸과 마음이 자유로운 곳으로 떠나고 싶어 했다. 금강산 나무로 만든 지팡이를 선물 받은 뒤 그는 꼬불꼬불 용처럼 생긴 그 지팡이와 더불어 비로봉 꼭대기에 오르기를 염원했다(蓬萊杖銘).

 

그러나 그 또한 파란 많은 정치사의 한복판에서 곤장을 맞고 짧은 생을 마쳐야만 했다. 두 사람은 정치적 계통상 반대편에 속했지만, 지팡이에 새긴 꿈도 같았고 그 꿈을 이룰 수 없었던 것도 같았다.

○ 푸른 산 맑은 바람의 동반자들

지팡이의 운명도 주인 따라 갈린다. 영조대의 문장가 남유용(南有容)은 스물다섯 살에 금강산 비로봉으로 향했다. 길은 가파르고 고갯마루는 험했다. 수풀에서 잠시 쉬던 그는 어깨 높이로 자란 철쭉을 꺾어 지팡이로 삼았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철쭉 지팡이를 기려 “나는 오건(烏巾·검은색 두건)과 하얀 학창의(鶴衣·선비들이 입던 평상복)를 걸치고, 일천 봉우리를 넘고 일만 골짜기를 건넜다. 비로봉으로 날개 달린 듯 올랐을 때, 나를 따랐던 이는 오직 그대였을 뿐!(杖銘)”이라며 고마워했다.

비슷한 시기의 지리학자 신경준(申景濬)은 산을 좋아하던 사람으로 유명했다.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등을 남겨 지리학의 대가가 되었던 그는 “길에는 주인이 없다. 다니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노년에는 그도 명아주 지팡이와 관련한 장명(杖銘)을 지어 이런 사연을 담았다.

‘명산 찾던 젊은 시절 지나 24년 벼슬길에 묶이다 보니, 어느덧 다리에 힘 풀리고 지팡이에 의지한 노년. 그래도 흰 구름 속의 산이 그리워 하염없이 눈길을 던진다. 아! 이제부터는 내 발로 걸어야지. 지팡이 너를 고생시키지 않을 수 있다면!’

홀연 지리산 청학동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는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떠오른다.
‘산에 들어가며(入山)’라는 시에

 

“스님! 청산 좋단 말 마소,

산 좋다며 어이 다시 나오시오.

훗날 내 자취 두고 보구려,

청산에 한 번 들면 영영 오지 않으리니”라고 했다.

 

훗날 어느 시인은 이렇게 이어받았다. “한 번 청산으로 떠나가니, 오백년 동안 맑은 바람이 불어온다(一入靑山去 淸風五百年).” 청산과 청풍을 따라 고운의 지팡이가 보일 듯 말듯 가물거린다.

 

10. 젊은이, 이순신-임경업의 검명을 읽어 보게나

 

기물명(器物銘)을 찾아서

 

 

보물 제326호인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장검. 어른 키보다 훨씬 큰 두 자루의 칼에는 댓구를 이루는 검명이 아로새겨져 있다. 충무공이순신 기념관 제공

 

갓난아이 품고 돌아가는 여제자의 뒷모습을 배웅한 뒤, 도검(刀劍)에 미친 친구 조 군에게 전화를 걸었다. 검명(劍銘)을 쓰기 전에 허락을 받아둘 겸, 자료를 보내 달라 부탁할 겸해서였다. 칼 미치광이인 그는 무(武)의 목표를 주저 없이 ‘살(殺)’로 규정하는 무사이자 칼에 관한 글이라면 저작권이 자신에게 있는 듯 여기는 마니아이다.

도, 검, 무, 지과위무

글자 모양을 따른다면 외날로 쓰는 칼을 도(刀)라 하고 양날로 쓰는 칼을 검(劍)이라 한다. 도는 휘어진 칼등 앞쪽으로 붙은 칼날을 그린 상형문자다. 관우의 청룡언월도(靑龍偃月刀)나 과일을 깎는 과도(果刀)는 모두 한쪽 날을 사용하는 칼이다. 검(劍)은 바르다는 뜻의 첨(僉)과 도()가 합쳐진 형태이다. 양날을 사용해야 하는 까닭에 좌우 대칭의 반듯한 모양이 일반적이다.

난 도보다 검을 좋아한다. 도에서는 살기가 느껴진다. 칼날로 상대를 겨냥하는 자세가 베어 없애겠다는 결의를 짙게 풍긴다. 반면에 검은 균형을 맞추고 있다. 상대를 겨냥해도 한쪽 날은 자신을 향해 있다. 적과 내가 동시에 칼날을 마주한 형국이니 칼을 다루는 마음이 조심스럽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정조는 자신의 정예 친위부대였던 장용영(壯勇營)을 움직일 때 ‘지과위무(止戈爲武)’라는 인장을 사용했다고 한다. ‘창(戈·전쟁)’을 ‘멈추게(止)’ 하는 것이 ‘무(武)’의 정신임을 인장에 새긴 것이다. 이 도장은 무력을 쓰는 것과 무력을 저지하는 것의 균형을 상징한다.

김홍도의 ‘포의풍류도’에 웬 칼이

무(武)의 표상인 도검은 다툼과 싸움의 주인공이자, 복수와 전쟁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화가 김홍도는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라는 그림에 칼 한 자루를 크게 그려 놓았다. ‘씨름’ ‘서당풍경’ 등의 풍속도를 그렸던 그가, 당비파를 켜고 풍류를 즐기는 자화상 같은 화면에 왜 하필 칼을 그렸던 것일까.

그림 속의 칼은 도가 아니라 검이다. 당시 유행했던 일본도(日本刀)를 그렸다면 난 아마 섭섭했을 것이다. 조선 후기 유명한 화가이자 시인이었던 이인상(李麟祥)의 ‘아집도(雅集圖)’에도 화면 속 탁자 위에 검 한 자루가 놓여 있다.

 

두 그림 속에는 문인의 아취(雅趣·고아한 정취 또는 그러한 취미)를 연상시키는 악기, 서책, 문방사우, 골동품 등이 그득하건만 왜 결이 다른 검이 빠지지 않았을까.

조선 후기는 도검이 유행했던 시대였다. 그럴 만했다. 왜란(倭亂)과 호란(胡亂) 뒤에 문약(文弱)함에 회의를 느끼고 상무(尙武)의 기상을 우러르는 감성이 짙어졌기 때문이었다.

 

18세기부터는 사람들이 골동 취향으로 도검을 모으는가 하면 팔도 요로에서 검무(劍舞)가 유행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27세에 요절한 천재 역관(譯官) 시인 이언진은 “우습다, 가난이 뼈에 사무치건만, 도자기나 명검을 위해 옷을 벗어 바꾸나니(自笑先生貧到骨, 古瓷良劒解衣求)”라 했던 반면, 같은 역관 문인 장혼(張混)은 꼭 갖추고 싶은 물건 80가지 중에 두 번째를 고검(古劍)으로 꼽았다. 신분적 멍에가 무거웠던 중인들에게 검의 정서적 호소력이 강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칼집 속에서 우는 칼은 그들 자신의 모습이었을 터다.

난세의 검명과 성세의 검명

임진왜란 발발 2년 뒤인 1594년 4월. 장인 태귀련(太貴連)과 이무생(李茂生)이 날카로운 칼을 만들었다. 천 번, 만 번의 담금질을 거쳐 완성된 칼의 주인은 이순신(李舜臣)이었다. 장군은 197cm에 달하는 두 개의 장도(長刀)에 다음과 같은 검명을 나눠 새기게 했다.


삼척서천 산하동색(三尺誓天 山河動色·석자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하가 파랗게 떨고)
일휘소탕 혈염산하(一揮掃蕩 血染山河·한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1636년 병자호란이 다시 조선을 덮쳤다. 비운의 장수가 된 임경업은 27세(1620년)에 백두산에 갔다가 맞싸우는 교룡(交龍)을 활로 쏴 죽이고 쇳덩이를 얻었다. 그리고 그 쇳덩이로 검을 만들어 이렇게 새겼다고 한다.

석자 용천검에 만권의 책을 읽었으니, 저 하늘이 나를 낳은 뜻은 무엇이랴? 산동 땅에서 재상 나고 산서 땅에서 장수난다 하지만, 저들이 장부라면 나도 또한 장부다(三尺龍泉萬卷書 皇天生我意何如 山東宰相山西將 彼丈夫兮我丈夫).”

중국 산동에서 재상 나고 산서에서 장수가 난다 해도, 그들에게 무엇 하나 꿀릴 것 없다는 문무겸전의 강기(剛氣)가 이 검명의 핵심이다.

난세의 영웅들은 대체로 비극적 최후를 맞는다. 장수는 전세가 기우는 순간에 삶의 끝을 예감하는 법이다. 하지만 무사한 시절에도 사람들은 매일 전쟁을 치른다. 자신과 싸우지 않는 하루가 없다. 자신의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기회는 드물지만, 유혹은 여기저기서 불쑥 다가온다. 맞서지 않을 수 없다.

남명 조식의 가르침은 후일 그의 제자들이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에 적극 참여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는 칼을 차고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그 칼에는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 바깥을 결단케 하는 것은 의(內明者敬 外斷者義)”라는 단 여덟 글자가 적혀 있었다 한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검에다 ‘덕이 쇠해진다면 내 비뚤어진 욕망을 잘라내다오’ 라고 소망한 사람(박세채)도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도검을 만들 때 주문을 외며 ‘하늘의 뜻을 받아 영영 사악한 것을 제거하리라’(造劍式·조선시대 도검 제작법)라고 외쳤다고 한다.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명검들을 꺼낸다. 어떤 이가 무쇠도 삭둑 자르는 검으로 상대를 벴다. 기세양양. 다음 사람이 칼을 휘익 젓자 상대는 베인지조차 모르다가 한참 뒤에 쓰러졌다. 기고만장. 마지막으로 어떤 사람이 나섰다. 칼을 빼는 시늉을 했으나 칼의 나신을 본 사람은 없었다. 베인 사람은 아무렇지 않게 남은 삶을 살다 갔다고 한다.

싱거운 이야기일까. 그렇지만 나는 심검(心劍)을 생각한다. 죽이지 않고 사람을 길러내는 검도 있었으면 한다. 아이 안고 돌아간 제자가 칼을 품은 조 군의 모습보다 훨씬 강하게 느껴지는 까닭이다.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11. 송년 시즌에 살펴본 주계-주기명(酒器銘)

 

세종은 술로 인한 禍 끝이 없다 하고, 이태백은 석잔이면 道 통한다 하고…

 

 

풍성하게 트레머리를 얹어 올린 여인이 부뚜막에서 국자로 술을 떠 올린다. 그녀를 둘러싼 사내들의 낯빛도 발그스름하다. 신윤복의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수록된 ‘주사거배(酒肆擧盃·1805년)’의 일부분이다. ‘주국(酒國)’에 살고 싶었던 신윤복에게 술은 독이었을까, 아니면 덕이었을까. 동아일보DB

 

조선에 금주령(禁酒令)이 엄했던 1766년 5월 23일. 중국의 베이징(北京) 쯔진청(紫禁城) 근처 건정동(乾淨)의 객점에서 한중학술사의 기념비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조선 선비인 홍대용(洪大容)과 김재행(金在行)이 중국 문인 엄성(嚴誠) 육비(陸飛) 등과 의형제를 맺으면서 이후 한중 문인 사이의 교류는 한층 깊고 넓은 물결을 이루게 됐다.

이날 정담의 물꼬를 튼 것은 술이었다. 금주령 때문에 ‘주(酒)’자를 넣어 시문을 지을 수 없다고 김재행이 엄살을 부리자 엄성은 “논어에도 술을 말한 곳이 여러 군데인데 그렇다면 공자님도 그른 것이냐”고 맞받았다. 그리고 일행은 고픈 술을 못 마시며 사는 것은 죽는 것만 못하다는 김재행을 ‘산 채로 죽은 술귀신(酒鬼)’이라 놀렸다.

콩 튀듯 술에 관한 해학이 펼쳐지던 중에 육비가 물었다. “술이 없으면 조선의 연회에서는 무엇으로 즐기십니까?” 본시 술을 잘 못하는 홍대용이었지만 이렇게 답했다. “연회에서 술을 들지 못하니 분위기가 죽고 낙세(樂世)의 맛이 적답니다.”

○ 상정(觴政), 술잔 나라의 정치

이국의 객점에서 나눈 술 이야기는 ‘술의 나라’가 우주의 어떤 좌표에 놓이는지를 시사한다. 이 나라는 국경으로는 잴 수 없는 곳에 있으며 풍류와 낙세를 구하는 무리들이 환(歡·기쁨)과 광(狂·미치거나 사나움)을 즐기는 곳이다. 그렇지만 술의 나라인 주국(酒國)에는 그들대로의 규율이 있었던 듯하다. 술잔 소리만 들어도 기뻐 날뛰었다는 허균(許筠)은 상정(觴政), 곧 술잔 나라의 정치를 흠모했다.

허균의 술잔 나라에 가면, 술꾼들이 뽑은 어떤 어른이 정사를 펼친다. 술 분위기가 약하면 그는 근무 태만의 냉관(冷官)이 되고 지나치면 가혹한 정치를 휘두른 열관(熱官)이 되고 만다. 그렇기에 녹사(錄事)라는 관리 하나를 거느리는데, 이 사람은 재치가 있거나 음률에 밝거나 그도 아니라면 주량이 남보다 커야 한다.
 

 

술이 7분(分) 이상 차오르면 따르는 대로 모두 술잔 밑으로 흘러 내려가는 ‘계영배(戒盈杯)’. 이천시립박물관 제공

 

술꾼들도 지킬 것이 있다. 술잔을 따지지 말고, 술맛으로 시비 걸지 말고, 시를 지을 줄 알아야 하고, 취하더라도 술을 엎질러서는 안 된다. 눈빛이 난폭한 기운을 띠는 광화(狂花), 몇 잔에 눈꺼풀이 풀리는 병엽(病葉), 행실과 언사가 저속한 해마(害馬)는 이 나라에서 축출된다.

○ 德과 毒의 각축, 술 나라에서 벌어진 전투

“공경·대부·신선·방사(方士·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들로부터 머슴·목동·사이(四夷·사방의 오랑캐)·해외인에 이르기까지 국처사(麴處士)의 향기로움을 맛본 자들은 모두 그를 흠모했다. 성대한 모임이 있을 때마다 순(醇·성인 국은 누룩을, 이름인 순은 진국인 술을 뜻함)이 오지 아니하면 모두 다 서글퍼하며 국처사가 없으니 즐겁지 않다고 했다.”(임춘·‘국순전(麴醇傳)’)

“술의 화가 어찌 곡식을 축내고 재물을 소비하는 것뿐이겠는가! 안으로는 마음을 어지럽히고 밖으로는 바른 모습을 잃게 하여 혹 부모의 봉양을 폐하게 하기도 하고 혹 남녀의 분별을 어지럽히기도 한다. 크게는 나라를 잃고 작게는 본성을 해치게 하니, 강상(綱常·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을 어지럽히고 풍속을 무너뜨리는 것을 일일이 나열하기도 어렵다.”(세종대왕·‘주계(酒戒)’)

역사상 온갖 논쟁이 오고갔지만 술에 관한 논쟁만 할까. 세종대왕을 비롯한 제왕들은 대체로 술의 독을 경계했다. 중국의 요임금은 딸인 의적(儀狄)이 술을 만들어 바치자 천하의 지극한 맛이라 칭찬하면서도 후대에 나라를 망칠 것도 이것이라 말했다 한다. 조선의 숙종 임금은 “한 번 술을 권하는데 백번 절을 하는 것은 술의 재앙의 무서움을 알리고자 함이었다(주배명·酒杯銘)”고 했다.

학자들도 대체로 술의 폐해를 공격했다. 19세기의 이남규(李南珪)는 이황(李滉)의 주계(酒戒)를 베껴 아들에게 주면서 “창자를 썩히고 본성을 미혹시키고 몸을 망치고 나라를 뒤엎는다. 내가 그 독을 맛보았는데 너 또한 그럴 것이냐”라고 하였다.

 

박지원은 후배 유득공에게 “술병유(酉)에 졸(卒·죽음)을 합하면 취할 취(醉) 자가 되고, 생(生·삶)을 붙이면 깰 성(醒)자가 된다”며 술을 조심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애주가들의 항변도 그칠 줄 몰랐다. 이규보는 ‘국선생전(麴先生傳)’에서 “우울하던 임금도 성(聖·청주)이 들어와 뵈면 비로소 크게 웃었다”고 적었다. 이태백은 만고의 시름을 잊으려 술잔을 들었고 “석 잔이면 도에 통하고 한 말이면 자연에 합한다(三杯通大道 一斗合自然)”며 극찬했다.

 

또 박지원 유득공과 함께 놀았던 박제가는 차고 있던 칼을 끌러 술을 사준 백동수를 호쾌한 남아라 칭하며 기렸다. 애주가들은 여전히 지상에는 없는 주국(酒國)의 주민이기도 했던 것이다.

○ 술의 나라 하늘에 떠 있는 별

술잔, 주전자, 술동이 등의 주기(酒器)에 다짐을 적어둔 글이 주기명(酒器銘)이다. 독이 되었다가 덕이 되었다가 하며 변화가 무쌍한 것이 술인지라 술 나라에는 유독 주기명이 많다.

 

감정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었다가는 주국은 자칫 탕아들이 들끓는 난장판이 될 터이다. 이 때문에 주당이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하늘의 별자리 역할을 했던 것이 주기명이기도 하다.

이규보는 술동이에 이렇게 적었다. “네가 품은 것을 옮겨, 사람들 배 속으로 들인다. 넌 가득 차면 덜어서 넘치지 않는데, 사람들은 가득 찬 줄 모르고 쉬 고꾸라진다(移爾所蓄 納人之腹 汝盈而能損故不溢 人滿而不省故易, 준명·樽銘).” 비틀비틀 고꾸라지는 술꾼은 술의 길을 이미 잃은 취한(醉漢)이다.

정약용도 술잔에 이렇게 다짐했다. “하루의 절개는 잔에 달려 있고, 백년의 절개는 뜻에 달려 있다. 잔은 넘치면 흐르나, 뜻은 거칠면 취한다(一日之節在器 百年之節在志 器濫則出 志荒則醉, 고명·銘).” 인생이라는 빈 잔에 무엇을 채울 것인가. 뜻과 의지를 채워 삶이 충만할 수 있기를 바란 것이 정약용이 바람이었다.

“술맛이 왜 단 줄 알아?” 6년 전 학과 수련회에서 4학년 학생이 친구들에게 던졌던 물음이다. 쫑긋 귀를 세운 친구들에게 왈, “그건 인생이 쓰기 때문이야.” 미래가 걱정되어 자다 깨곤 한다는 그 목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송년 모임이 무척 많을 12월, 사람들의 술맛이 이렇게 달지는 않기를 바란다.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12.<끝>가려운 곳 긁어주는 여의를 ‘군자의 모습’ 이라 여긴 뜻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철제은상감여의. 불교 법회에서 설법을 하거나 강론을 할 때 승려가 몸에 지녔던 것이다. 곱게 쪼이질 한 표면을 은선으로 장식하는 입사기법으로 꽃과 새 무늬를 표현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 ‘여의(如意)’는 마음먹은 대로 된다는 뜻이다. 마음먹은 대로 늘이기도 하고 줄이기도 하는 손오공의 지팡이가 여의봉(如意棒)이요, 이무기가 용이 되기 위해 꼭 얻어야 하는 것이 여의주(如意珠)이다. 기물명의 세계에서는 이따금 여의침(如意枕)을 소재로 하는 경우도 있다. 이 베개를 베고 자면 자신이 꿈꾸는 세계로 마음대로 갈 수 있고 꿈꾸는 바를 마음대로 누릴 수 있다. 그런데 여의는 그것 자체로 기물의 이름이기도 하다. ‘마음먹은 대로’라는 뜻을 지닌 이 기물은 대체 어떤 물건이었을까. 》

○ 여의란 어떤 물건?


여의치 않은 일 가운데서도 특히 사람을 미치게 하는 것은 가려움일 것이다. 군화를 신고 무좀을 앓는 군인이나 손이 닿지 않는 등짝에 가려움이 생긴 사람을 떠올려 보면 금방 공감이 갈 것이다.

 

가려운 데를 시원스레 긁을 수만 있다면 그 얼마나 후련하고 통쾌할 것인가! 여의는 바로 이렇게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기능을 하는 도구였다. 대나무 쇠 옥 뿔 등으로 만든 여의는 지금의 효자손처럼 끝이 꼬부라진 지팡이 모양이 기본적인 생김새였다.

고려시대의 문인 이규보는 여의의 다른 이름인 ‘양화자(痒和子)’란 시에 이렇게 썼다. “가려운 등 긁을 때엔 너무도 즐거우니, 혹은 여의라 하고 혹은 양화라 부르기도 하네. 손가락 모양인데 손보다 편리하여, 손닿기 어려운 곳도 마음대로 긁어주네(背能悅可多 或稱如意或痒和 具人手指超人手 手所難侵輒解爬).”

 

재상을 지낸 이규보도 가려움만은 참을 수가 없었던 까닭에 이런 시를 짓지 않았을까 싶다. 그는 이어 쓴 시에 “옛 사람들은 나무를 깎아 만들어 그 형체 뾰족뾰족 손가락 같더니, 후세 사람들은 상아로 만들어 그 긁어주는 공(효과)이 섬섬옥수의 두 배는 될 것”이라고 읊었다.

○ 여의, 어떻게 썼을까?

그림 속에 나타난 여의는 설법하는 고승의 손에 들려 있기도 하고, 어떤 때는 사대부의 화병 속에 담겨 있기도 한다. 그 용도도 단지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것에 그치지 않았던 듯하다. 고승들이 사용한 여의는 위엄을 상징하는 수단이 되기도 했고, ‘청공(淸供·맑고 깨끗한 물품)’의 한 종류로써 사대부가 방 안에 갖추어 두고 싶은 멋진 물건이기도 했으며, 때로는 후려칠 수 있는 매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중국 진(晋)나라 때 축담유(竺曇猷)란 고승이 산중 석실에서 불경을 외자 호랑이 수십 마리가 와서 경청하였는데 유독 한 마리만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러자 스님이 여의로 그 호랑이의 머리를 두드리며 “왜 너만 조느냐”고 야단을 쳤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이 치통을 참다못해 철여의(鐵如意)로 앓던 이를 박살냈다는 웃지못할 해프닝도 있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인 이인상과 이윤영이 그림을 감상하다 감탄을 표현할 적에 여의를 두드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이외에 다산 정약용의 유명한 작품인 ‘그 얼마나 통쾌한가(不亦快哉行)’ 에 나오는 주인공 중 하나가 또한 여의이다. 그는 “장기나 바둑 승부를 알 수가 없어, 곁에서 물끄러미 바보처럼 앉았다가, 한 자루 철여의를 손으로 움켜잡고, 단번에 판 위를 휙 쓸어 없애 버리면, 그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라고 했다.


○ 여의명(如意銘), 여의를 다루는 마음가짐

 

 

단원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 화병에 검은색 여의가 꽂혀 있다. 동아일보DB

 

조선 후기에 이르면 여의는 사대부들의 청공 가품(佳品·질이 좋은 물품)으로 모습을 바꾸어 등장하곤 한다. 사신들이 중국 황제에게 하사받은 품목 중에 여의가 포함돼 있기도 했고 ‘사고전서(四庫全書·청나라 건륭제 때 천하의 모든 서적을 수집하여 해제와 필사로 만든 책)’ 편찬을 담당했던 기윤(紀)이라는 중국 문인이 조선의 홍량호에게 호의의 증표로 준 선물에도 옥여의(玉如意)가 들어 있었다.

‘북학의(北學議)’를 저술했던 박제가도 침향목(沈香木)으로 만든 여의를 아꼈던 듯하다. 그는 영지 모양을 한 침향목 여의를 기려 “땅에 영지가 있음은, 하늘에 구름이 있음과 같다. 꼴을 이뤄 엉기기도 하고, 흩어져 얽히기도 하니, 이는 자연의 무늬로다(地之有芝 猶天之有雲也 或形而凝 或散而 是惟自然之文, 沈香靈芝如意銘)”라고 하였다. 영지처럼 엉겨 있는 여의의 머리 모양을 묘사하면서 자연의 이치와 운치를 엿보았던 것이다.

또한 19세기 문인인 이유원도 대나무 옥 쇠로 만든 세 개의 여의를 소재로 하여 ‘삼여의명(三如意銘)’을 짓기도 했다. 대나무 여의에 대해서는 “대나무는 곧아서 사람에게 쓰인다. 내가 품은 뜻도 너와 함께 하리라(竹之貞 爲人用 人之意 與爾共)”라고 했고 옥으로 만든 여의에 대해서는 “군자의 모습이요 자리의 보배로다. 그 덕이 순수하니 내 곁에 있으라(君子人 席上珍 其德純 不去身)”고 하였다.

 

마지막으로 쇠로 만든 여의에는 “옥보다 강하고 대보다 굳세다. 너를 붓으로 사용하면 영원히 닳지 않으리라(鋼勝於玉 勁勝於竹 若筆用之 萬年不禿)”고 하였다. 의지 인격 문필이란 사대부에게는 뗄 수 없는 요인들인데, 이유원은 이 세 개의 여의에 자신의 지향을 응축하려 했던 것 같다.

소녀가 되어가는 두 딸아이는 우리 부부의 손을 꼭 잡고 잠들기를 좋아한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두 고사리손은 옥으로 만든 손 모양의 여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럴 때면 그들의 꿈길이 여의침을 벤 것처럼 달콤하고 아늑하며 내일도 다시 그러기를 한 번 더 소망하게 된다.

기물명(器物銘)은 어떤 특정한 기물에 마음을 실어 보내는 문학적 양식이다. 그런 정서적 작용은 먼저 간절한 소망과 진실한 마음이 있어야 일어난다. 아이의 고사리손이든 옥으로 만든 여의든, 그것을 접한 사람의 마음에 진실함과 간절함이 없으면 감동을 자아내지 못하리라.

다가오는 2012년 임진년(壬辰年)은 60년 만에 돌아오는 흑룡(黑龍)의 해라고 한다. 내년에는 나라 안팎으로 굵직한 일들이 수두룩하다. 총선이나 대선을 염두에 두지 않더라도 사람마다 가려운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이겠는가? 그렇기에 가려움을 긁어줄 여의가 이 해밑에 절실하게 생각나는 것이다.

 

흑룡은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여의주를 얻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 흑룡이 여의도 함께 얻어 만인의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줄 수 있다면 그 또한 통쾌하지 않겠는가.

신년여의(新年如意) 만인여의(萬人如意)를 축원하며 오늘로써 기물명 연재를 마친다.

[출처] : 김동준 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조교수/ 기물명을 찾아서/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