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사적/능원,고분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1. 22. 08:22

조선왕능 Ⅲ

조선왕릉 상설도,공간구성,배치형식 ,세계문화유산 

 

 

1. 조선왕릉(朝鮮 王陵) 상설도  



동구릉의  수릉 정자각과 합장릉

 


*조선조(朝鮮朝)의 역대 왕릉(王陵)에 대한 접근은 그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당대(當代)의 역사적 사실들을 반증(反證)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조선조의 왕릉(王陵)은 27대 왕(王)과 왕비(王妃) 혹은 계비(繼妃), 그리고 추존(追尊)된 왕들을 포함해 전체 44기의 능(陵)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이 중 태조(太祖)의 비(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비(妃) 정안왕후(定安王后)를 모신 후릉(厚陵)만 북한 지역[개성시]에 있어 우리가 아직 답사할 수 없는 지역에 있고, 거리상으로는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에 조성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는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散在)해 있습니다.

 

 특히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 건원릉(태조), 현릉(문종), 목릉(선조), 휘릉(인조 계비), 숭릉(현종), 혜릉(경종 비), 원릉(영조), 수릉(익종-추존), 경릉(헌종))이나 경기도 고양시의 서오릉(西五陵 : 경릉(덕종-추존), 창릉(예종), 명릉(숙종), 익릉(숙종 비), 홍릉(영조 비)), 서삼릉(西三陵 : 희릉(중종 계비), 효릉(인종), 예릉(철종))은 왕릉군(王陵群)을 이루고 있는 필수 답사(踏査)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주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분들은 학교 소풍 등으로 한두 번 정도는 발을 옮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단순한 관람이나 사진 촬영 정도로는 왕릉의 진면목(眞面目)을 이해하기에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이제 다음의 기본적인 왕릉의 모습들을 살펴보시고 우리의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시기 바라겠습니다.







2. 조선왕릉(朝鮮 王陵)의 공간 구성


1] 진입공간 - 능역의 시작 공간 


진입공간은 왕릉의 시작 공간으로, 관리자(참봉 또는 영)가 머물면서 왕릉을 관리하고 제향을 준비하는 재실(齋室)에서부터 시작된다. 능역으로 들어가기 전 홍살문 앞에는 금천교(禁川橋)라는 석조물이 있는데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다리’라는 뜻으로 금천교 건너편은 특별한 영역, 즉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한다. 그 밖에 진입공간 부근에는 음양사상과 풍수사상의 영향을 받은 연지(蓮池)를 조성하였다. 




광릉 내 재실(齋室)



동구릉의 휘릉의 금천교(禁川橋)- 대개 홍살문 앞에 금천교가 있다




2]. 제향공간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의 공간


제향공간은 산 자(왕)와 죽은 자(능에 계신 왕이나 왕비)의 만남의 공간으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은 정자각(丁字閣)이다. 제향공간은 신성한 지역임을 알리는 홍살문[紅箭門]부터 시작된다. 홍살문부터 본격적으로 제향의식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홍살문 옆에는 돌을 깔아 놓은 판위(版位)가 있는데, 참배하러 온 왕을 위한 자리이다. 홍살문 앞부터 정자각까지 이어주는 향로(香路)와 어로(御路)는 박석을 깔아 만든 돌길이다. 홍살문을 기준으로 왼쪽의 약간 높은 길은 향과 축문을 들고가는 길이라 하여 향로라 하고, 오른쪽의 낮은 길은 왕이 사용하는 길이라 하여 어로라 한다.


일부 왕릉에서는 향·어로 양 옆으로 제관이 걷는 길인 변로(邊路)를 깔아 놓기도 하였다. 반면에 대한제국 황제의 능인 고종 홍릉(洪陵)과 순종 유릉(裕陵)은 향로를 중심으로 좌우에 어로가 있다.


향·어로 중간 즈음 양 옆으로는 왕릉 관리자가 임시로 머무는 수복방(守僕房)과 산릉제례에 필요한 음식을 간단히 데우는 수라간(水刺間)이 있다.


정자각에서 제례를 지낸 후 축문은 예감(瘞坎)에서 태우는데, 정자각 뒤 서쪽에 위치해 있다. 조선전기에는 소전대(燒錢臺)가 그 기능을 하였으나 후에 예감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정자각 뒤 동북쪽에는 장방형의 산신석(山神石)이 있는데, 산을 주관하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자리이다



⑭ 예감(瘞坎 ) : 정자각 뒤 서쪽에 제향후 축문을 태우던 곳으로, 석함(石函)이라고 함

⑮ 산신석(山神石) : 정자각 뒤 오른쪽, 보통 예감과 마주하는 위치에 설치한 것으로 장사후 3년간 후토신(땅을 관장하는 식)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사용됨

⑯ 정자각(丁字閣) : 제향을 올리는 곳

⑰ 비각(碑閣) :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하는 곳

⑱ 향어로(香御路) :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폭 3m 정도로 돌을 깔아놓은 길. 왼쪽에 약간 높은 곳은 신이 다니는 길이라고 향로(香路, 神路)라 하며, 오른쪽의 임금이 다니는 길은  어로(御路)라고 하여 약간 낮음

⑲ 수복방(守僕房) : 능을 지키는 수복이 지내던 곳으로 정자각 동쪽에 지었음

⑳ 배위(拜位) : 홍살문 옆에 한 평 정도 돌을 깔아 놓은 곳. 제향행서 등 의식 때 망릉례 등을 행하는 곳



왕릉의 정문 홍살문(紅箭門)



동구릉 내에 있는 익종(문조)의 수릉의 홍살문[紅箭門]과 정자각

                                                                     

홍살문은 홍문(紅門)이라고도 불리는데, 본래 궁전(宮殿), 관아(官衙), 능(陵), 원(園:세자나 대군, 공주 등의 묘)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을 한 신성한곳을 알리는 문(門)입니다.

 

한자로는 홍전문(紅箭門)이라 표현하는데, 형태30자 이상되는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았습니다.

 

또한 홍살문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祭禮) 시에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배위(拜位)가 있습니다. 능의 정문이라고도 할 수 있는 홍살문을 지나면서 역사 속으로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아마도 우리의 존재를 다시 한번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능으로 가는 길 참도 (參道) 



참도의 전형을 보여주는 서오릉의 명릉의 참도(변도, 신도, 어도,변도) 


명릉은 조선 19대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임 인원왕후의 단릉이 모셔진 능이다, 참도의 양쪽 변도는 신료들이 신도는 혼령이 어도와 변도는 신료들의 참재길이다



서오릉의  명릉의 배위



건원릉의 배위(拜位)와 참도(參道 : (변도-신도-어도-변도로 구분되어 있다)


왕릉 제사때 먼저 배위에 올라 알릉례로 왕이 네번 절하고 나올 때도 배위에서  절하는 데 이를 사릉례라한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져 있습니다. 참도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 오른쪽 부분은 단을 낮게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신성한 정령(精靈)이 다니는 왼쪽 신로 부분과 왕이 제를지내로올때 걸어가는 오른쪽 어도 부분을 분리해 놓은 것입니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얇은 돌[박석(薄石)]을 깔아 반듯하게 조성한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배가(倍加)시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왕릉(王陵)의 참도(參道)를 걸을 기회가 있을 때, 이유야 어떻든 오른쪽 어도 쪽으로 걷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왕릉(王陵)의 예를 다하는 정자각(丁字閣)과 부속 건물  




건원릉의 정자각 (丁字閣)



건원릉 정자각 (丁字閣)의 제향을 위해 오르는 동계



건원릉 정자각 (丁字閣)의 제향후 내려오는 서계

 


정가각 (丁字閣)에 오르는 동측의 신계와 어계



정자각(丁字閣)은 왕릉(王陵)이나 원(園)의 앞에 있는 제전(祭展)으로 건물 형태가 '장정 정(丁)'자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명명된 명칭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는 데, 제향(祭享)을 하는 곳이기에 제례(制禮) 의식(儀式)에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고 서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의례(儀禮)를 따랐습니다.  



정자각 (丁字閣)의 내부



목릉의 재향 제수진설도


건물의 구조는 일반적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2칸 정도이고 맞배지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물 내에는 본래 신좌(神坐)를 두고 오향제(五享祭)나 한식제(寒食祭)를 지내왔습니다.

 

정자각 동쪽에는 능의 비(碑)를 안치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조성했는데,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이 비각(碑閣)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자각(丁字閣)에서부터 봉분(封墳)까지는 심한 경사(傾斜)의 사초지(莎草地)가 있어 봉분(封墳)까지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몇곳 없지만, 능의 비(碑)라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제대로 된 관람일 것입니다. 또한 훼손된 곳이 많지만 비각(碑閣) 아래로 재실(齋室)이나 고방(庫房) 등의 부속 건물을 두고 있습니다.  



세조의 광릉 비각(碑閣)과 수복방



건원릉 비각의 건원릉 신도비



건원릉 내 수복방- 릉에화재나 부정한 일을 방지하기위해 지키는 수복이 근무히단곳



동구릉의 수라간 - 제향시 제물을 데우던 곳으로 정자각의 좌측에 있다

 


능원(陵原)의 전형적 모습들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제 2계비 인원왕후의 명릉 의 정자각 뒷편 사초지와 연결되는 신교


정자각에서 제례를 받은 신이 정자각 뒷문으로나와  이 신교를 지나 강으로 올라 가는 것으로 그래서 정자가에는 서계에는 신계가 없고 뒷편에 신교가 있다. 

 


휘릉의 예감(瘞坎)



건원릉의 예감 역할을 하던 소견대



수릉의 산신석(山神石)



의릉의 사초지(莎草地)

 

왕릉(王陵)의 모습은 각각의 능마다 특징적인 면을 지니고 있지만 사초지(莎草地)를 거슬러 올라와 봉분(封墳)이 있는 능원(陵原)의 전형적인 모습은 다음과 같습니다.



능침공간 -죽은 자의 공간


능침공간은 봉분이 있는 왕릉의 핵심 공간으로 왕이나 왕비가 잠들어 계신 공간이다. 능침공간 주변에는 소나무가 둘러싸여 있으며, 능침의 봉분은 원형의 형태로 태조의 건원릉을 제외한 모든 능에는 잔디가 덮여있다.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의하면 ‘봉분의 직경은 약 18m, 높이는 약 4m’로 조성하게 되어 있으나 후대로 갈수록 줄어드는 경향을 보여 평균 직경 약 11m를 이루고 있다. 능침공간은 3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단: 상계(上階)


초계(初階)라고도 하며, 봉분이 있는 단이다.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屛風石)과 난간석(欄干石)을 둘렀으며, 경우에 따라 병풍석을 생략하는 경우와 병풍석과 난간석을 모두 생략하는 경우가 있다.봉분을 둘러싼 병풍석에는 12지신상을 해당 방위에 양각하였는데 봉분을 침법하는 부정과 잡귀를 쫒어내는 의미를 가진다.  


병풍석과 함께 난간석이 봉분을 둘러싸는데 후기 조선왕릉에는 난간석만이 봉분을 둘러싸는 양식으로 면모 아였다. 봉분 주위에는 석양(石羊)과 석호(石虎)가 능을 등지고 있는데, 보통은 네 쌍씩 배치하여 석양은 악귀로 부터, 석호는 맹수로 부터 능을 수호하는 역할을 한다.


그 외곽으로는 풍수지리의 바람막이와 담장 역할을 하는 곡장이  동,서,북 3면을 둘러져  봉분을 보호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왕릉에서 처믐 도임되었다.


봉분 앞에는 혼이 앉아서 노니는 공간인 혼유석(魂遊石, 석상(石牀))이 놓여져 있고, 그 좌우에는 기둥 모양의 망주석(望柱石)이 있다.망주석에 대하여는 혼령이 봉분을 찾는 표지설과 음양의 조화설,풍수적 기능설 등이 있다.



제2단: 중계(中階)


능침공간의 가운데 단이다. 중계의 가운데 8각 또는 4각의 장명등(長明燈)이 놓여져 있는데, 어두운 사후 세계를 밝힌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좌우에는 왕과 왕비를 모시는 문석인(文石人)이 있으며 그 옆이나 뒤에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석마는 희생수로 혼령의 운송자의 성격을 가지며 문무인석과 석마는 중국 고대의 묘제에서 유래한다


능실은 재궁이 들어가는 곳인데 건원릉 조성당시 석실과 회격 중 무엇을 사용할지에 대해 논의 끝에 석실로 조성하게 되었고 그 뒤 조선 초기의 왕릉에는 석실로 조성하게 되었는데 세조의 광릉  조성할 떄 광릉의 석실을 회격(관을 광중에 내려놓고 그 사이를 석회로 메워서 다지는 방식)으로 조성하면서 조선와릉의 능실은 크게 석실과 회격으로 조성하는 방식으로 나뉘게 되었다. 


제3단: 하계(下階)


능침공간의 가장 아랫단으로, 왕과 왕비를 호위하는 무석인(武石人)과 석마(石馬)가 놓여 있다. 문치주의를 내세웠던 조선왕조의 특성상 문석인을 무석인보다 한 단 높게 배치하였으나, 영조의 원릉에서부터 중계와 하계의 구분이 없어진 것은 무관에 대한 인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① 곡장(曲墻) : 왕릉을 보호하기 위해 삼면으로 둘러놓은 담장

② 능침 : 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말함. 능상(陵上)이라고도 함

③ 병풍석(屏風石) : 봉분을 보호하기 위해 봉분 밑부분을 두르는 12개의 돌, 병풍석에는 12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을 방위에 맞게 양각하여 부정과 잡귀를 쫓아내기 위하여 새겼다. 호석(護石)이라고도 함

④ 난간석(欄干石) : 봉분 주위를 보호하기 위하여 봉분 둘레에 설치한 돌난간

⑤ 석양(石羊) : 죽은 이의 명복을 빌며, 사악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설치함

⑥ 석호(石虎) : 능침을 지키는 호랑이 모양의 수호신

⑦ 망주석(望柱石) : 봉분 좌우측에 각 1주씩 세우는 기둥. 그 기능에 대해서는 육신에서 분리된 혼이 육신을 찾아들 때 멀리서 봉분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표지의 기능을 한다는 설. 왕릉의 풍수적 생기가 흩어지지 않게 하는 기능을 한다는 설 등 여러 주장이 있음

⑧ 혼유석(魂遊石) : 일반인의 묘에는 상석이라 하여 제물을 차리는 곳이지만 왕릉은 정자각에서 제를 올리므로 혼령이 앉아 노는 곳이라고 함

⑨ 고석(鼓石) : 혼유석의 받침돌로서 모양이 북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⑩ 장명등(長明燈) : 왕릉의 장생발복(長生發福)을 기원하는 뜻으로 세움

⑪ 문인석(文人石) : 장명등 좌우에 있으며, 언제든지 왕명에 복종한다는 자세로 양손에 홀을 쥐고 서 있음

⑫ 무인석(武人石) : 문인석 아랫단에 석마를 대동하고 있으며, 왕을 호위하고 왕이 위험에 처했을 때 신속하게 대처한다는 뜻에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를 취하고 있음

⑬ 석마(石馬) : 문인석과 무인석은 각각 석마를 대동하고 있음.



능제가 간소화 된 세조의 광릉의 석물



인목왕후릉인 목릉의 망주석으로 이후 조선왕릉 화문장식의 출발점이 되었다



봉분(封墳) 자체만 조성된 능이 많지만 봉분 밑을 12각의 병풍석(屛風石)으로 둘러 봉분(封墳)을 보호(保護)하는 호석(호석)을 준 경우가 있고, 데체적으로 봉분 주위는 다시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보호하고 있는 능들이 있습니다.

 



숭릉의 장명등(長明燈)과 혼유석 멀리 문 무인석과 석마가 보인다

봉분 앞에는 상석(床石)을 두고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한 쌍을 두었으며, 한 단 아래 중앙에는 상징적 등불인 장명등(長明燈)을 두었습니다. 




광릉의 봉분(封墳)혼유석과 난간석  뒷쪽에 곡장도 보인다



효종과 인선왕후의 릉인 영릉의 난간석




중종의 계비 문정왕후의 태릉 혼유석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잡귀를 막기 위한 귀면이 새겨져 있다.


혼유석 상석 뒤쪽 무덤 앞에 놓인 사각형의 돌로 영혼이 나와서 놀도록 설치한 것 것으로 혼유석은 상석 북쪽에 향안석은 상석 남쪽에 둔가고 한다 





의릉의 석양



의릉의 석호



태릉의 능침을 둘러싼 5면 곡장(曲墻)

 능침,난간석(欄干石) 과 석양(石羊),석호(石虎),문무인석이 보인다



봉분 전체를 둘러 동서북 3면의 담장을 쌓았는데 이를 곡장(曲墻)이라 하고, 봉분의 난간석(欄干石) 바깥쪽에서 곡장을 바라보고 있는 형상으로 4마리씩의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번갈아 두어 능을 호위(護衛)를 하는 수호신(守護神) 격으로 삼았습니다. 

{추존(追尊)된 왕릉(王陵)의 경우는 석호, 석양의 수를 반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이를 둔 경우도 있습니다.} 



숭릉의 문·무인석과 석마



유릉의 금관조복 문인석 - 문인석의 금관조복 양식은 융릉에서부터 계승되어 왔다


 봉분 앞 장명등(長明燈)의 한 단 아래에는 관(冠)을 쓰고 홀(笏)을 쥐고 있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좌우로 뒤에 각각 석마(石馬)을 대동하고 서있으며, 그 아래 단에는 갑옷에 검을 들고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역시 각각 석마를 거느리고 세워져 있습니다.




석물이 밖으로 배치된 순종황제의 유릉


{대한제국(大韓帝國) 성립 후 조성된 고종[홍릉(洪陵)]과
순종[유릉(裕陵)]의 경우는 황제릉(皇帝陵)의 형식으로 조성되어 기존의 능과는 큰 차이를 보입니다.}

 


3. 왕릉(王陵) 배치상의 형식  

 

능의 봉분(封墳) 배치에 따른 형식은 단릉, 쌍릉, 합장릉, 동원이강릉, 동원상하릉, 삼연릉의 여섯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單獨)의 형태인 단릉(單陵)[태조의 건원릉 등] 형식이 있다,  



단릉(單陵)인 단종의 장릉- 단독(單獨)의 형태인 단릉


왕과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의 형태를 단릉(單陵)이라 하는데 건원릉, 정릉, 장릉 등 15개의 능이 이에 해당한다.


둘째는 한 언덕에 나란하게 왕과 왕비의 봉분을 마련한 쌍릉(雙陵)[정종의 후릉 등] 형식, 



쌍릉(雙陵)인 구리 동구릉 숭릉(東九陵 崇陵)- 현종(顯宗)과 비 명성왕후의릉 


쌍릉(雙陵)은 한 언덕에 평평하게 조성된 곳에 하나의 곡장으로 둘러진 공간에 왕과 왕비의 봉분을 우상좌하(右上左下, 오른쪽에 왕, 왼쪽에 왕비)의 원칙에 따라 조성된 형태이다. 쌍릉에 해당하는 능은 10기가 있다


셋째는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삼연릉(三連陵)[헌종의 경릉], 



삼연릉(三連陵)인 동구릉의 헌종의 경릉


삼연릉은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그리고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형태로 하나의 곡장에 둘러싸여 있다. 이러한 형태의 능은 현종과 효현왕후, 효정왕후의 능인 경릉이 유일하다. 경릉은 중국에서 처럼 왕의 봉분을 가운데 두지 않고 좌측에 두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의 모든 왕릉은 우왕좌비(右王左妃), 상왕하비(上王下妃)의 원칙을 공통적으로 지키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 통치사상인 유교의 예제(禮制)에 근거한 것이다.



조선 왕릉에서 유일한 삼연릉(三連陵)인 동구릉의 헌종의 경릉



 넷째는 하나의 정자각(丁字閣)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封墳)과 상설(常設)을 배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문종의 현릉 등] 형식, 





세조릉과 정희왕후릉의 동원이강릉인 광릉(光陵)

동원이강릉은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줄기의 용맥(龍脈)에서 나뉘어진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인 동원이강릉은 하나의 정자각 뒤로 한줄기의 용맥(龍脈)에서 나뉘어진 다른 줄기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로, 광릉이 최초이며 동원이강형의 능은 모두 5기가 있다. 그 중 목릉은 하나의 정자각 뒤로 세 개의 언덕에 별도의 봉분과 상설을 배치한 형태로 특별한 구성을 하고 있다.


다섯째는 동원상하릉으로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의 위 아래 왕상비하(王上妃下)의 형태로 배치한 형식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과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의릉이 있다


동원상하릉(同園上下陵)인 효종과 인선왕후의 영릉(寧陵)

동원상하릉은 왕과 왕비의 능이 같은 언덕의 위 아래 왕상비하(王上妃下)의 형태로 조성된 것으로 의 영릉과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의 의릉 2기이다. 이 경우 곡장은 왕의 능침공간에만 설치하였다.


여섯째는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세종의 영릉 등] 형식이 있습니다.  이 밖에 동원이강릉의 변형(變形)으로 좌우 나란한 언덕이 아닌 남북이나 비스듬하게 배치한 특이한 형식의 능[효종의 영릉 등]도 있습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합장릉(合葬陵)인 영릉(英陵)



합장릉은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하고 상설한 형태로 세종과 소헌왕후의 능인 영릉이 최초이며 대표적이다. 조선왕릉에서 합장릉은 모두 7기가 있다. 여기에는 왕과 원비 그리고 계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동봉삼실(同封三室)의 능이 있는데, 유릉이 이에 해당한다. 유릉에는 순종과 순명황후, 순정황후 세 분이 하나의 봉분에 모셔져 있다.


단릉 형식은 건원릉부터 시작하여 조선중기까지 나타나며 18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쌍릉 형식은 시대별로 고르게 나타난다. 동원이강릉형식은 세조가 능지를 정한 경릉부터 시작되었으나 15세기경에만 집중되었을 뿐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합장릉, 삼연릉의 형식은 18세기 이후에 많이 나타나는데, 이는 능역 조성시 소요되는 경비와 인력을 절감하는데 효과적이어서 많이 이용되었다. 그리고 풍수적으로 적합한 입지가 공간적으로 협소하거나 정축(正軸)의 조성이 불가능할 경우에는 동원상하의 형식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중국(中國)의 왕릉과 단순 비교를 통해 우리 것을 보잘것없고 가치없는 것으로 치부한다면 우리가 가장 경계해야 할 문화적(文化的) 사대주의(事大主義)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반만년(半萬年)의 역사(歷史)를 간직하고 있는 자랑스러운 민족(民族)입니다.
그 속의 문화(文化)와 전통(傳統)을 우리가 자부하고 가꾸어 보존할 때 진정한 우리의 문화가 세계 속에 뿌리 내릴 수 있다는 진리를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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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릉(朝鮮 王陵)

조선 왕릉(王陵) 40기가 마침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우리는 또 하나의 세계문화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가슴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세계가 알아주는 이 조선 왕릉의 문화적, 건축적 가치에 대해 우리들이 과연 얼마만큼 인식하고 있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도 일어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은 삶의 공간을 어떻게 만들 것인가 못지않게 죽음의 공간에 대해서도 고민해 왔다. 조선시대 사람들이 내린 결론은 자연 속에 묻히는 것이었고, 그것이 국가적 의전(儀典)으로 발전한 것이 왕릉이다.

따라서 모든 왕릉이 갖고 있는 홍살문[紅箭門], 정자각(丁字閣), 능침(陵寢)에 이르는 공간 구성과 문신석과 무신석,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의 조각들에는 조선시대 전체를 꿰뚫는 정신, 즉 자연에의 순응, 도덕적 가치로서 경(敬), 윤리로서 충(忠)과 효(孝), 그리고 미적(美的) 덕목으로서 검소(儉素) 등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똑같은 공간구성이지만 각 능에는 그 시대의 문화적 분위기와 역량이 드러나 있다. 이는 백자항아리가 국초부터 구한말까지 그 빛깔과 형태를 달리한 것과 같다.


15세기 새로운 이상국가를 건설하려는 국초의 기상은 무엇보다도 동구릉(東九陵) 안에 있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에 잘 나타나 있다. 고향 함흥 땅의 억새를 입혀 달라는 그의 유언이 지금껏 지켜지고 있는 이 건원릉의 늦가을 모습은 자못 처연하다.

조선적인 세련미가 구현되어 가는 16세기는 중종의 왕비인 문정(文定)왕후 태릉(泰陵)의 엄정한 능침 조각에서 볼 수 있다. 병자호란을 겪은 뒤 상처 받은 자존심을 되찾으려고 일어난 다소 허풍스러운 17세기 분위기는 효종 영릉(寧陵)의 무신석 어깨가 과장되게 표현된 모습에서 읽을 수 있다.

그리고 조각이 아름다운 것은 18세기 사도세자(思悼世子)인 장조(莊祖)의 융릉(隆陵)을 따를 곳이 없다. 왕조의 마지막을 장식한 순종의 유릉(裕陵)은 대한제국 황제의 예에 맞춰 황제릉의 규모와 격식을 갖추었지만 그 누구도 위엄이나 힘을 말하지 않는다. 조선왕릉은 이처럼 저마다의 표정을 갖고 있는 당당한 세계문화유산이다.
[출처] : [유홍준의 국보순례] [14] / 조선일보

 



4.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 조선왕릉



조선 제 5대 왕인 문종과 현덕왕후가 잠들어 있는 현릉. 현릉은 두 개의 언덕에 왕과 왕비의 봉분이 각각 자리한 동원이강릉이다. 정자각 뒤로 보이는 것이 문종 능, 비각 뒤가 현덕왕후 능이다.



조선시대 마을 공부방인 서당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이 가장 먼저 배우는 일종의 한자 학습서인 [사자소학(四字小學]]에는 ‘추원보본 제사필성(追遠報本 祭祀必誠)’이란 내용이 나온다. ‘먼 조상을 추모하고 근본에 보답하여, 제사를 반드시 정성스럽게 지내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우리 선조들은 사람의 근본은 조상이라 생각하였다. 현재의 내 안에는 조상이 깃들어 있음과 동시에 후손에게 물려줄 미래가 고여 있기에, 조상과 나와 자손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처럼 조상을 신격화하는 조상숭배의 전통은 유교주의를 택한 조선시대에 더욱 공고해졌다.


그래서 조상의 묘를 명당에다 쓰면, 조상이 왕성한 지기를 받고, 그 영향으로 자손들이 복록을 받는다는 음택풍수(陰宅風水)를 더욱 강력히 믿었고, 조상의 무덤을 정성껏 조성하고 관리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에게 조상은 이처럼 절대적인 존경의 대상이었고, 무덤은 조상이 머무는 구체적이고도 각별한 공간이었다.


조선시대의 지배층이란 백성에게 인간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의 모범을 보이는 존재였다. 하물며 왕실은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건원릉 전경.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 고려 왕릉 중 가장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대 장공주의 현정릉 제도를 따랐으나, 석물의 배치 등에 변화를 주고 봉분 주위로 곡장을 두르는 등 새로운 양식을 도입하여, 조선 능제의 표본이 되었다


유교적 세계관이 확고했던 조선 왕실은 최고 통치자인 왕과 왕실 가족의 무덤에 지극한 의미를 부여했다. 죽은 왕의 무덤을 신성하고 엄숙한 성역으로 장엄하고, 조상이 된 죽은 왕의 무덤을 참배, 제사 지냄으로써, 백성에 모범을 보이고 왕실과 통치의 정당성과 정통성을 확고히 하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이다.


조선왕조는 1392년 개국 이래 왕조(1897~1910, 대한제국 포함)의 문을 닫는 1910년까지 519년의 세월을 이어오면서 27대에 걸쳐 왕과 왕비를 배출하였다. 조선왕릉이라 함은, 이들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 42기를 말한다.


이 가운데 조선 개국 초기에 조성되어 현재 북한 개성에 자리한 태조왕비 신의왕후 제릉과 정종후릉 2기를 제외한 40기의 왕릉이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2009년에는 이들 조선왕릉 40기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는 풍수적, 유교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건축과 조경 양식을 보여주고, 제례의식을 통해 지금도 역사적인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점, 조선왕릉 전체가 통합적으로 보존·관리되고 있는 점 등을 조선왕릉의 보존 가치로 꼽았지만, 조선왕릉은 왕의 무덤이라는 건축과 조경 양식 말고도 여러 가지 의미를 지닌다.


무덤을 조성한 지역과 곁에 묻힌 인물 들을 통해 당시 정치적 상황과 입장을 살펴볼 수 있으며, 왕릉 주변에 조성된 여러 석물들의 양식적 변화를 통해서는 당대의 미학과 미술사의 흐름까지 읽을 수 있다.


5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유교와 그 예법에 근거하여 조성되었기에 조선시대 전체를 꿰뚫는 정신세계와 동일한 공간 구성을 보여주고 있지만, 각 왕릉마다 그것을 조성한 시대마다 각기 다른 정치, 문화적 분위기와 역량도 함께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죽은 자가 머무는 곳, 성과 속의 교감


조선왕릉은 주변 산세와 도성인 한양으로부터의 거리 등에 따라 입지가 조성되었다. 기본적으로 풍수적 길지(吉地) 곧, 배산임수의 지형을 갖춘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땅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었으며, 주변 산이나 지형지물 등을 이용하여 주변의 다른 시설물과 격리할 수 있어야 하고, 한양을 중심으로 4킬로미터 밖 40킬로미터 이내의 장소라야 했다.


이는 조상의 덕으로써 자손이 복록을 받을 수 있는 길지여야 하고, 또한 주변의 민가들과는 구분되는 성역이어야 하며, 왕의 참배 때 드는 비용과 백성의 수고를 덜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렇게 왕릉의 입지가 결정되면, 성(聖)과 속(俗)을 구분하는 유교적 예법에 따라 능역의 공간을 구성하였다. 능역은 크게 능침(陵寢, 성역)-제향(祭享, 성역과 속세가 만나는 공간)–진입(속세)의 세 공간으로 나뉜다.


능역의 크기나 봉분의 조영 방식, 문·무석인 등의 석물과 기타 시설물의 배치는 기본적으로 조선왕릉의 상설(象設, 능역에 설치하는 모든 시설물과 석물을 일컫는다)제도를 따랐으나 왕릉 조성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가감 등 약간의 변화가 적용되었다.


상설 가운데 특히 병풍석, 난간석, 혼유석, 문·무석인 등은 크기나 조각 수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 그 시대의 정서나 예술성을 달리하고 있어 생동감 있게 짚어볼 수 있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전형적인 조선왕릉의 상설제도를 잘 보여주는 선조 목릉의 능침 공간. 능침은 크게 세 단계로 나뉘는데 장대석으로 단을 구분하고 있고 각 단계마다는 석물을 구분하여 세워 놓았다.



능침 공간의 핵심이 되는 부분은 봉분이다. 봉분은 주변 산세와 지형에 따라 단릉·쌍릉·합장릉·삼연릉·동원이강릉·동원상하릉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형되었으나, 원형의 봉분 둘레에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르고 봉분을 수호하는 석호(石虎), 석양(石羊)을 세우며 곡장(曲墻)을 두르고 그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봉분의 존재를 강조하는 수법은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능침 공간은 장대석을 이용하여 세 단계로 나누는데, 가장 위쪽에서부터 죽은 왕의 영혼이 깃드는 상계, 문인의 공간인 중계, 무인의 공간인 하계이다. 상계에는 곡장과 봉분, 석호·석양, 혼유석과 망주석 등을 놓고, 중계에는 장명 등과 문석인과 석마, 하계에는 무석인과 석마를 세웠다. 죽은 자를 위한 공간인 능침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맞이하여 제사를 지내는 곳이 제향 공간이다. 홍살문을 들어서면 가마에서 내린 왕 또는 제관이 배위(拜位)에서 사배(四拜)하는 것으로 제례가 시작된다. 왕과 제관들은 참도(參道, 신도와 어도)를 따라 제수가 놓인 정자각으로 이동한다. 정자각 주위에는 축문을 태워 묻는 장소인 예감(堪), 능을 지키고 제수를 준비하는 수복방과 수라간, 비각 등이 있다.


그런가 하면 평소 왕릉의 관리와 제례 준비를 위한 공간이 진입 공간이다. 왕릉 관리인이 머무는 재실, 제례에 필요한 향 또는 기물을 보관하는 향대청, 전사청 등이 있다. 금천은 속세의 공간인 성역의 경계가 되는 작은 시내이다. 여기에 놓인 다리 곧, 금천교를 지나면 제향 공간이 시작되는 홍살문으로 이어진다.



태종과 원경왕후가 묻힌 헌릉을 수호하는 문·무석인들. 헌릉의 석물들은 망주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두 쌍씩 배치되어 있어 조선시대 왕릉 중 석물의 수량이 가장 많다. 특히 문·무인석의 모습은 문·무를 겸비한 태종을 닮듯 형태 가 뚜렷하면서 호방하다. 사진 왼쪽은 중계와 하계에 두 쌍씩 자리한 문·무석 인이고 중앙은 무석인 오른쪽은 문석인이다,



죽은 이에게 바치는 존경과 기억, 산릉제례


조선왕릉의 가치를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600년 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왕릉에서의 제례의식 곧, 산릉제례(山陵祭禮)이다. 조선시대의 제례는 왕가에서부터 일반 사대부,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실천한 의례였다. 무덤에서 치르는 제례는 사람이 그 자신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삶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신성한 의식이었다



정조 건릉의 장명등.


봉분의 혼유석 바로 앞에 세우는 장명등은 사찰 석등과 유사한 형태로 불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조선은 개국 이래 산릉제례를 엄격하게 지켜왔으며, 해방 이후로는 전주이씨대 동종약원에서 능기신제(陵忌辰祭, 기일에 올리는 제사)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까지 그 전통을 잇고 있다. 능기신제로 인하여 조선왕릉은 단순히 기념비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21세기에도 살아 있는 전통 문화유산이 되고 있다.


조선왕릉은 왕릉 하나하나가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고유의 유적이다. 조선왕릉의 가치는 왕릉 개개의 완전성은 물론이고 한 시대의 왕조를 이끌었던 역대 왕과 왕비의 왕릉이 모두, 그리고 대부분 원형 그대로 제자리에 보존되어 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깊다.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조선왕릉 40기는 대부분 서울 시내와 근교에 자리 잡고 있다. ‘능역은 한양성 사대문 밖 100리 안에 두어야 한다’고 밝힌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인 [경국대전]에 따랐기 때문이다. 단, 단종 장릉은 예외다. 단종 장릉은 사후 240년 만에 복위되어 능호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조선 제10대 왕과 제15대 왕으로 재위했던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조선왕릉에 포함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는 왕과 왕비를 포함한 왕실 가족의 무덤을 신분에 따라 능(陵, 왕과 왕비, 추존 왕과 왕비의 무덤)·원(園, 왕세자와 왕세자비, 왕의 사친(私親, 재위한 왕의 부모)의 무덤)·묘(墓, 기타 왕실 가족의 무덤)로 나누었는데, 연산군 과 광해군의 경우 폐위되어 무덤이 묘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반면 덕종(성종의 부친)· 원종(인조의 부친)· 진종(정조의 양부)· 장조(정조의 친부)· 문조(헌종 부친) 등은 추존되어 그 무덤이 각각 경릉·장릉·영릉·융릉·수릉으로 조성되었다.


조선왕릉은 단종 장릉과 단종왕비 정순왕후 사릉처럼 단릉(單陵)이 개별 능역을 이루기도 하고, 태종 ·태종왕비 원경왕후 헌릉이나 세종·세종왕비 소현왕후 영릉처럼 왕과 왕비가 한 능역을 이루기도 하지만, 여러 왕릉이 한 지역에 모여 왕릉군(王陵群)을 형성하기도 한다.


가령 경기도 구리시에 자리한 동구릉(東九陵)은 ‘도성의 동쪽에 있는 아홉 기의 왕릉’이라 하여 붙여진 왕릉군이고,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西五陵)은 ‘도성의 서쪽에 있는 다섯 기의 왕릉’이며,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은 ‘ 고종황제 홍릉과  순종황제 유릉’이 있는 왕릉군이다.


동구릉은 조선왕조를 세운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을 비롯한 왕릉 9기가 모여 있는 최대 규모의 왕릉군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동구릉이었던 것은 아니다. 동구릉이 된 것은 건원릉 조성 이후 아홉 번째로 추존 문조(헌종 부친) 수릉이 조성된 철종 6년(1855)의 일이며, 이전에는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으로 불렸다.


태조 이성계의 무덤인 건원릉이 자리한 곳은 동구릉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이다. 1408년 태조가 승하하자 태종이 파주, 고양, 구리 등지에 사람을 보내어 좋은 묏자리를 물색하여 신중하게 능지로 정한 곳이니 만큼, 풍수적인 길지가 아닐 수 없다. 능침을 둘러싼 송림과 능침 앞으로 시야가 탁 트인 경관이 아름답다.


앞에 펼쳐진 능선들은 신하가 읍조리는 형상이라고도 한다. 건원릉은 다른 왕릉과는 달리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를 심었다. 고향 함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 태조를 위하여 아들 태종이 함흥의 흙과 억새를 가져다가 심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동구릉은 조선 건국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 500년의 부침과 능제의 변화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문화유산이다. 더욱이 능 전역에 우거져 있는 숲과 능역을 가로지는 개울물 등 자연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서오릉에는 왕릉 5기 말고도 원 2기, 묘 1기가 모여 있어서 동구릉 다음으로 큰 왕릉군이다. 가장 먼저 조성된 것은 추존 덕종 경릉이다. 덕종은 세조의 원자(의경세자)로 태어났으나 세조 3년(1457) 20세에 요절하였다. 이후 아들 성종이 즉위하면서 덕종으로 추존되었다.



모든 왕릉에는 재실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현재 온전한 형태로 전해지는 재실은 많지 않다. 그 중 가장 잘 보존된 것으로 알려진 효종 영릉의 재실



서오릉에서 흥미로운 것은 숙종과 숙종 왕비들의 능이다. 현재 서오릉에는 숙종과 숙종이 사랑했던 왕비 네 명(왕비 인경왕후,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 장희빈)이 모두 모여 있다.


우선 숙종과 인현왕후가 나란히 묻혔고, 숙종과 인현왕후의 무덤 좌측 언덕 높은 곳에 인원왕후가 홀로 묻힌 명릉이 있고, 숙종왕비 인경왕후가 묻힌 익릉, 숙종의 후궁이자 경종의 어머니인 희빈 장씨의 무덤인 대빈묘가 그것이다.


숙종에게 한때 최고의 사랑을 받았으나 결국 숙종에게 사약을 받고 죽은 장희빈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에 거의 폐허로 자리하고 있다가 1970년 이곳으로 옮겨졌다.


동구릉이나 서오릉처럼 왕실의 무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것은 이 지역이 명당이기도 했지만, 선왕 가까이에 묻히고 싶어 했던 후대 왕들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서울과 구리, 고양, 파주 등 경기 북부 지역보다 한강 이남에 조성된 왕릉이 적은 것은 뱃길을 이용하는 데 따른 부담이 컸기 때문이다. 왕이 선왕의 능을 참배하려면 거리가 가까워야 했기 때문이다.


홍유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가장 마지막으로 조성된 왕릉이다. 다른 조선왕릉들과 달리 대한제국 황제릉의 격으로 조성되었다. 고종은 조선 말 개항기인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었다.




황제의 능으로 조성된 고종황제의 홍릉. 기존 왕릉의 정자각을 일자형의 침전으로 바꾸고, 봉분 주변의 석물을 없애는 대신 참도 좌우에는 문·무석인을 비롯하여 기린·코끼리·사자·해태·낙타·말 등의 석물을 사열하듯 세웠다



 건원릉에서 거행된 산릉제례를 모두 마치고 참반원이 퇴장하고 있다. 산릉제례로 인하여 조선왕릉은 단순한 건축적 기념물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 있는 전통 문화유산이 되고 있으며, 세계의 여느 왕릉과도 뚜렷하게 차별된다



한 왕조를 이끈 왕과 왕비의 무덤이 고스란히 보존, 한꺼번에 관리되는 경우는 동서고금을 통틀어 조선왕릉이 유일한 사례이다. 조선왕조 500여 년의 역사와 문화, 가치관을 담고 있는 조선왕릉은 우리만이 가질 수 있는 매우 독특한 문화유산이다.


더구나 조성 당시부터 계획적으로 조성되고 엄격하게 관리된 왕릉과 왕릉 주변의 산림은 도시화된 서울과 서울 주변 지역의 소중한 녹지 공간으로도 사랑받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조선왕릉 유네스코 등재 세계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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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전국 신사와 신궁에는 '신궁을 참배하는 도로'라는 뜻의 참궁도로(參宮道路), 즉 참도(參道)가 있었는데, 이것이 왕릉에 들어와 '참배하는 길'이란 뜻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1930년대 신문 기사에는 신사 참도가 심심찮게 등장한다. 지금도 일본의 신사 안내도에 참도가 명시되어 있다. 왕릉의 홍살문에서 월대까지 이르는 소위 참도라는 길을 의궤에는 정로(正路)라 적고 있다. 조선왕릉의 1차 사료는 각종 의궤다. 여기에 근거를 두지 않은 용어나 설명은 우리 문화유산을 왜곡하고 훼손하는 것이다. 이것이 조선 왕릉의 용어부터 정비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