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사적/능원,고분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1. 22. 15:24

왕릉보다 화려 '김유신 장군묘' 실제 주인은?

 

- 附 김유신묘의 비석과 12지신상,

 

 

1. 신라 왕릉만 파고든 고 이근직 교수 유저서 주장 … 다시 논란

 

이 교수 주장의 근거
① 12지신상 그 시대엔 없던 양식
② 무열왕릉보다 신하 무덤이 화려
③ 왕 아래 무덤 쓰던 풍습과 어긋나

 

 

노란색 글씨는 현재 문화재명이고 파란색은 이근직교수의 학설이다

가. 김유신 장군묘의 의문점

 

김유신 묘는 송화산(松花山)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곳은 경주 시내에서 영천으로 난 4번 국도를 따라 고속버스터미널 옆 서천교를 건너 사거리에서 오른편 송화산 쪽으로 1.2km 정도 가는 곳에 있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불과 2k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데다, 형산강을 끼고 경주시를 바라보며 찾아가는 길 맛도 좋아 한 번쯤은 찾아갈 만한 곳이다.

김유신은 금관가야국의 마지막 왕 김구해(金仇亥, 일명 김구형(金仇衡))의 증손이며, 신라의 명장이었던 서현(舒玄)의 아들로 태어나 15살에 화랑이 되어 무예를 닦고, 35살 때에는 아버지와 함께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하여 승리로 이끌었다.

그는 김춘추가 왕이 될 수 있게 도왔고, 함께 삼국통일의 대업에 나서 무열왕 7년(660년)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할 때 신라군 총대장이 되어 계백 장군이 거느린 백제군을 황산벌에서 무찔러 백제를 멸망시켰다.

 

또한 문무왕 8년(668년) 고구려를 공략할 때도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이어서 삼국의 영토에 야심을 드러낸 당나라 군사도 물리침으로써 명실상부한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 후 그는 문무왕으로부터 태대각간(太大角干)이라는 신라 최고의 지위를 받았고, 뒷날 흥덕왕은 김유신을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하지만 김유신이 아무리 당대의 명장이었다고는 하지만 이렇듯 왕릉을 능가하는 호화스러운 묘를 과연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삼국유사>에 "김유신이 죽은 뒤 흥무대왕으로 봉하였으며, 그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를 동향한 산봉에 있다."고 한 반면에,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채백(彩帛) 1천 필과 조(租) 2천 석을 보내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인을 보내 금산원(金山原)에 예장하고, 유사(有司)로 하여 금 비를 세워 기공(紀功)을 기명하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라고 서로 조금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김유신이 죽은 뒤 비록 문무왕에겐 외삼촌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이처럼 호화스럽게 묘를 마련해주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유신 묘는 직경 30m나 되는 큰 무덤으로, 봉분 아래에는 병풍처럼 판석으로 호석(護石)을 설치하였고, 호석 중간마다 평복 차림에 무기를 든 12지신상(十二支神像)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호석의 밖으로는 여러 개의 돌기둥을 세워 난간을 돌렸다.
한편 호석의 12지신상과는 별도로 묘의 주변에 땅을 파고 묻어 두었던 높이 약 30cm의 납석에 정교하게 새긴 12지신상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김유신장군묘

 

묘의 둘레에 난간석이 있으며 호석에 12지가 새겨져 있다.무열왕릉보다 더욱 화려하다.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김유신 장군 묘. 이근직 교수는 '김유신은 금산원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보아 장군의 무덤은 들판에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김유신장군묘의 난간석과 상석

 

 

김유신장군묘의 로석에 새겨진 12지상 - 용상


김유신 장군 묘에는 봉분을 둘러가며 12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근직 교수 등은 12지신상과 난간 둘레석 등은 김유신 시대보다 후대인 성덕왕 이후에 등장 한다고 주장한다. 김유신 장군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고 적혀 있다.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당시 구전 등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경북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 장군 묘'. 송화산 봉우리에 자리 잡은 이곳에선 경주 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묘의 왼쪽 앞에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라 쓰인 비석이 보인다. 경주시 이채경(51) 학예연구사는 뒷면에 새겨진 글자를 짚어가며 "비석은 조선 숙종 때 경주부윤 남지훈이 세웠다"고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595∼673)이라면 29대 태종무열왕(김춘추·재위 654∼661)을 도와 삼국을 통일한 주역이다.

 

 

사적 제21호. 김유신 묘는 송화산(松花山)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 위의 울창한 소나무숲 속에 자리잡고 있다. 묘는 지름이 30m에 달하는 원형의 큰 무덤이다. 봉분 둘레에는 둘레돌[護石]을 두르고 그 외곽에는 바닥에 깐돌[敷石]을 깔았으며, 돌난간[石欄干]을 둘렀다.

 

둘레돌은 대체로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둘레돌과 같은 양식으로서 벽석(壁石)·연헌석(緣軒石), 연대석(緣臺石)으로 짜여 있다. 둘레에는 95㎝ 높이의 탱주석(撐柱石)을 세웠는데 소면석(素面石)과 신상석(神像石)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신상석은 모두 12개로 자상(子像 : 쥐)·축상(丑像 : 소)·인상(寅像 : 호랑이)·묘상(卯像 : 토끼)·진상(辰像 : 용)·사상(巳像 : 뱀)·오상(午像 : 말)·미상(未像 : 양)·신상(申像 : 원숭이)·유상(酉像 : 닭)·술상(戌像 : 개)·해상(亥像 : 돼지) 등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이 십이지신상은 다른 왕릉이 갑주무장상(甲胄武裝像)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평복에 무기를 들고 있으며, 모두 오른쪽을 향하고 있고, 몸[身部]은 ‘乙’자형으로 틀었다. 새김은 대체로 엷게 새긴 느낌을 주나 그 수법은 세련되고 능숙하다.

 

능묘의 둘레돌은 고신라시대에서 비롯돼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서는 봉분표식 방법으로 전환되었다. 이 때에 둘레돌 장치와 십이지신상이 새겨지는 등 묘요(墓腰)가 정비되었다. 이 묘의 봉분표식의 구조와 양식은 흥덕왕릉의 봉분표식과 비슷해 김유신이 흥덕왕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追封)됨과 동시에 시설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이 곳 묘역에서 납석제(蠟石製) 십이지신상인 묘상과 오상 2개가 발견되었다. 높이가 30㎝인 소상(小像)들이고, 갑주무장상이라는 점에서 특이하다. 또한 봉분표식으로서의 십이지신상의 의장과 묘역매설로서의 십이지신상의 의장이 중복되어 있어서 주목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 장군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하였는데, 그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동향(東向)한 산봉에 있다.”고 하였으니 곧 태대각간(太大角干) 김유신묘를 이름이다.

 

한편,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그의 부음을 듣고 채백(彩帛) 1천필과 조(租) 2천석을 증부(贈賻)하고 군악고취(軍樂鼓吹) 100인을 보내 금산원(金山原)에 예장(禮葬)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비를 세워 기공(紀功)을 기명하고, 민호(民戶)를 배정하여 묘를 수호하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전에는 이 묘하(墓下)에 수묘(守墓)의 금산재(金山齋)가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없어졌다. ‘태대각’이라 새긴 신라비편(新羅碑片)이 경주 교동에서 발견되어 김유신의 기공비편(紀功碑片)으로 추정되기도 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다만 이 비편에 의해 김유신이 죽자 당시 문무왕이 왕명으로 예를 갖추어 후대한 예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아울러 기공비가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석비는 조선시대에 건립된 것이며, 문인석, 무인석, 석상(石床) 등은 모두 수년 전 보수할 때 첨가된 후보물(後補物)들이다. 그러나 이 무덤은 김유신묘가 아니고 신무왕의 무덤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문헌  :  * 三國史記     *三國遺事   * 韓國金石遺文(黃壽永)  
           *文化財大觀·史蹟篇 上·(文化財管理局, 1975)    *金庾信墓考(李丙燾, 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金庾信墓의 異說에 대하여(金庠基, 考古美術 101, 1969)
           *新羅舊都慶州の地勢及ぴ其遺蹟遺物(今西龍, 新羅史硏究, 1933)
           *十二支生肖の石雕を繞うした新羅の墳墓(有光敎一, 靑丘學叢 25, 1936)
           *新羅墳墓の封土表飾の諸型式について(齋藤忠, 新羅文化論攷, 吉川弘文館, 1973)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태종 무열왕릉 

 

태종무열왕릉 신라 29대 태종무열왕릉.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자가 새겨진 귀부가 발견돼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신라 왕릉 7곳 중 하나다. 신하인 김유신과 동시대 왕의 능인데도 김유신 묘에는 설치된 난간 둘레석도 12지신상도 없이 소박하다

 

 

무열왕비

 

무열왕은 김유신과 동시대 인물이다. 『삼국유사』 등에 전하듯 무열왕의 왕비는 김유신의 여동생이며, 왕은 김유신보다 12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무열왕릉은 서악 고분군 앞 평지에 들어서 있다. 여기엔 화려한 난간 둘레석이나 12지신상은 없다. 봉분만 있는 소박한 왕릉이다. 신하인 김유신 묘와 비교하면 더 그렇다.

 

고(故) 이근직(1963∼2011) 교수는 이런 의문들에 매달렸다. 26일 경주에서 열린 『신라왕릉 연구』 출판기념회는 그의 유고작이다. 경주에서 태어나 경주대 문화재학과에 몸담았던 이 교수는 불의의 사고로 지난해 생을 마감할 때까지 신라 왕릉 고증에 천착했다.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와 이제는 '사실'로 굳어져 있는 신라 왕릉의 주인공을 바로잡는 일이다

 

 

김인문의 묘비와 무덤

 

앞쪽 건물 속에 귀부가 있고 뒷쪽 무덤이 김인문의 묘이다

 

 

나. "김인문묘가 진짜 김유신묘"

 

 

무열왕릉과 김인문의 묘 사이에 9대손인 김양의 묘가 있다

 

“김인문묘가 진짜 김유신묘” 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김인문 묘를 김유신 장군 묘로 보았다. 신하는 왕 근처에 매장하는 ‘배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경주=프리랜서 공정식]

 

태종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묘.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이근직 교수는 이 김인문 묘를 김유신 장군 묘로 보았다. 신하는 왕 근처에 매장하는 '배장'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왕릉의 주인공이 확실한 곳은 무열왕 등 7곳뿐이라며 나머지는 구전과 사실이 다르다고 주장했다.

 

대표적인 곳이 김유신 장군 묘다. 이채경 학예연구사는 이 교수의 주장을 현장에서 설명했다. 김유신 장군 묘의 상석과 분묘 난간 둘레석은 분묘 형식으로 보아 훨씬 후대인 33대 성덕왕 이후에 등장한다는 것이다.

 

'김유신은 금산원(金山原)에 장사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볼 때 원(原)은 봉우리가 아닌 들판이 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더욱이 동시대 왕인 무열왕릉보다 신하의 무덤을 더 화려하게 했다는 건 상식에도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신라왕릉 연구』에서 이런 논리적 근거를 내세우며 김유신 장군 묘를 35대 경덕왕릉이라고 주장했다. 대신 무열왕릉 앞에 자리 잡은 김인문 묘를 김유신 묘로 보아야 한다고 기록했다. 그의 주장 근거는 『삼국사기』의 기록대로 무덤 위치가 들판이며, 당시 신하는 왕 아래 무덤을 쓰는 '배장(陪葬·딸린 무덤)'의 풍습이 있었다는 것이다. 또 무열왕릉과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 묘 사이에 9대손 김양의 무덤이 있는 것도 김인문 묘가 되기 어려운 이유다.


신라 왕릉 논란은 300년 가까이 이어져 왔다. 조선 영조 때 경주 선비 유의건은 "(영조 6년·1730년) 이름 없던 고분 17기의 피장자를 왕으로 바로잡는 과정에서 고증을 거치지 않고 능지기의 전언에 의존한 건 문제"라고 본격 문제를 제기했다.

 

신라 시조왕 박혁거세부터 경순왕까지 56왕을 배출한 박·석·김 문중이 중심이 돼 구전을 바탕으로 당시 왕릉의 이름이 붙여졌다는 것이다. 왕릉 이름 바로잡기는 이후 추사 김정희, 한학자 정인보, 사학자 이병도로 이어졌다. 이병도 박사도 김유신 장군 묘는 왕릉이라고 주장했다. 이 박사는 김유신 장군 묘를 이 교수와 달리 45대 신무왕릉으로 보았다.

이러한 학설 때문에 경주시는 사적 안내문 등에 한동안 확실치 않은 곳은 이름 앞에 '전해 온다'는 뜻으로 '전(傳)'이라는 글자를 붙였다. 그러나 문중의 항의로 1970년대를 넘어서면서 지금은 이 글자가 사라졌다.

 

 


김유신 장군 묘에 제례를 올리는 김해 김씨 등 해당 문중은 이 교수의 깊이 있는 학설로 문제에 봉착했다. 이 교수의 주장이 사실로 입증된다면 교과서의 관련 내용도 고치고 경주 지역의 수많은 안내문과 표지판도 바로잡아야 할 판이다.

 

김유신 장군의 위패가 모셔진 숭무전 김성식(79) 전참봉은 "한 사람의 주장일 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다. 이 교수가 그렇게 주장하지만 학설을 뒷받침할 결정적인 유물이 발굴돼 입증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경주시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문화재의 명칭 변경은 문화재청이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통과시켜야 한다는 절차 때문이다.

[출처] : 중앙일보/송의호 기자 2012,2,27

 

 

나."김유신묘는 제35대 경덕왕릉이다"
"신라왕릉 중 7기만 진짜"…고 이근직 교수 유저 '신라왕릉 연구' 발간
 
 
 
김유신묘 전경  고 이근직 교수가 신라 35대 '경덕왕릉' 이라고 저서에서 주장한 '김유신묘' 전경. 경주시 제공

 

"지금의 김유신묘는 제35대 경덕왕릉이고, 서악고분군 앞쪽 김인문묘가 실제 김유신묘다."

"현재 신라 왕릉이라 이름 붙은 신라무덤 중 실제와 부합하는 것은 27대 선덕여왕릉, 29대 무열왕릉, 30대 문무왕릉, 33대 성덕왕릉, 38대 원성왕릉, 41대 헌덕왕릉, 42대 흥덕왕릉 등 7기에 지나지 않으며, 나머지는 모두 주인공을 잃어버렸거나 잘못 알려졌다."

 

이같이 파격적인 주장을 담은 신라왕릉 연구서가 출간됐다. 이런 주장을 펼쳤다가 신라왕성 후손 문중에서 호된 시달림을 받기도 한 고 이근직(1963~2011) 경주대 문화재학과 교수의 유저 '신라왕릉 연구'가 최근 도서출판 학연문화사에서 발간됐다.

 

이 책은 지난해 6월 17일 경주대 사거리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저자의 유고집이다. 저자는 박사학위논문이었던 '신라 왕릉의 기원과 변천'을 단행본으로 출판하고자 생전 수정과 보완을 거듭해 편집까지 완료한 상태였다.

 

PC에 남긴 원고를 미망인 주진옥씨와 그와 같은 연구실에서 공부한 동료가 찾아냄으로써 나오게 됐다.

이번에 발간된 '신라왕릉 연구'는 지금까지 학계가 최대 난제로 꼽으면서도 해결에 엄두를 내지 못한 신라 왕릉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표방한 역저로 꼽힌다.

 

저자는 이 책에서 신라왕릉을 기원부터 발전, 쇠퇴, 종말로 정리했을 뿐만 아니라 역대 신라의 왕릉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를 꿰맞추는 전무후무한 시도를 했다. 특히 역대 왕릉에 대한 문헌기록과 실제 무덤의 입지조건과 규모, 양식 변천과정을 함께 고려한 결과 담대한 주장들을 쏟아냈다.

 

저자에 따르면 오릉은 박혁거세 무덤이 아니라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이며, 제4대 탈해왕릉·제6대 지마왕릉·제8대 아달라왕릉은 통일신라시대 횡혈식석실분이고, 제13대 미추왕릉은 5세기 이후의 적석목곽분, 제17대 나물왕릉은 7세기 무렵 횡혈식석실분이며 이들은 왕릉이 아니라는 것이다.

 

신라 상고기(上古期)를 거쳐 중고기 왕릉 중에서도 23대 법흥왕릉, 24대 진흥왕릉, 25대 진지왕릉 등은 왕공귀족이 묻힌 곳으로 실제왕릉과는 무관한 곳이라는 것이다.

 

또 제7대 일성왕릉은 실제 제52대 효공왕릉이며, 지금의 제45대 신무왕릉과 제46대 문성왕릉, 제47대 헌안왕릉, 53대 신덕왕릉, 54대 경명왕릉, 55대 경애왕릉은 왕릉이 아니라고 보았다.

 

이 같은 주장을 담은 책은 고인이 생전에 만든 경주학연구원의 '경주학연구총서 2호'로 발간했다.

경주학연구원은 앞으로도 고인이 각종 학술지 등에 실었던 수많은 논문들을 종류별로 묶어서 제2, 제3의 유고집을 출간할 계획이다.

[출처] : 이상욱기자 /경북일보2012-02-22

 

 

2. 김유신장군 묘의 비석

 

 

 

송화산 줄기가 동쪽으로 뻗어 전망이 좋은 구릉 위에 자리하고 있는 김유신장군묘는 지름은 30m정도이며 주위에 호석과 난간을 두른 원형분으로 호석에는 12신장상을 두는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 왕릉의 형식을 갖추고 있다

 

옥돌이 난다는 남산과 더불어 경주시민이 가장 즐겨 찾는 등산로이며 산책로이다. 이 묘를 거쳐 옥녀봉으로 이르는 등산로와  묘소 앞을 돌아 신라의 적석고분실, 고무신시비 등을 보면서 걷는 숲 속 길 산책로는 정말 일품이다.

 

 

 김유신장군의 묘 앞에는 동서로 두 개의 비석이 마주보고 있다. 김유신장군이 돌아가시자 문무왕은 예를 극진히 갖추어 장례를 치르게 하였으며, 유사에게 명하여 묘비를 세우게 하였다.  그러나 그 묘비는  전하지 않고 있으며 지금 남아 있는 두 기의 묘비는 후대에 세운 비석이다

 

가. 비가 오면 ''陵'이 '墓'로 바뀌는 마술같은 김유신장군

 

묘비석 김유신장군 묘비는 비가 오면 글씨가 바뀐다 陵이 墓가 된다

 

 

서쪽 묘비 앞면

 

 

서쪽 묘비 뒷면

서쪽에 보이는 비석은 비문과 이수를 모두 갖추고 있으며 앞면에는 新羅太大角干金庾信墓(신라태대각간김유신묘) , 뒷면에는 崇禎紀元周甲後庚寅(崇禎기원주갑후경인)라고 적혀 있어 조선중엽에 세웠음을 알 수 있는데 조선 숙종36년에 당시 부윤이던 남지훈이 구전을 토대로 세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 

 

 

동편의 묘비

 

동편의 묘비는 1970년대에 세운 것으로 앞면에 開國公純忠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렬흥무왕릉)라고 적혀 있다  동편에 있는 묘비의 '開國公純忠壯烈興武王陵(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릉)'의 '릉'자 위에 새까만 글씨로 "묘"자가 적혀 있는 것이다.

 

 

  맑은 날의 비석

 

 

 

'陵'자 위에 겹쳐 드러나는 "墓"라는 글씨

 

 

 먹물로 쓴듯이 새까맣게 드러나는 "묘'자가 음각으로 새겨진 '릉'자 위에 뚜렷이 나타난다.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니 이것은 낙서가 아니다.  분명히 과학이다. 과학의 원리를 이용하여 조각해 놓았다. 비가 오거나 물이 묻으면 새까맣게 드러나게 만든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조작해 놓은 것이다.

 

지금까지 맑은 날에만 다녀보았기 때문에 발견하지 못한 것이다.맑은 날에는 분명히 '왕릉"으로 적혀있고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평소의 이 글씨가 물에 젖으면 아래처럼 된다 

 

 

 어떻게 해서 이런 현싱이 일어날까? 자세히 살펴보았다 

  

 

 '陵'자 위에 까맣게 드러난 '墓'자

 

능이라는 글자가 있는 부분에 묘자를 새겨 파내고 파낸 부분에 돌가루(?) 를 때워놓았다.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살펴보자 포샵으로 만들어 보았다.  

 

 

 1.  본래의 비석

 

 

 2. '릉'자 위에  '묘'자를 쓴다

 

 

 3. 쓴 부분(흰부분)을 파낸다

 

 

 4. 돌가루를 채워 넣는다

 

 조각한 형태를 옆에서 보면

 

 

 

 

 

 글씨 전체를 파내었는데 '릉'자에서 오목하게 음각된 부분은 더 깊게 파서 돌가루를 채워넣었다

위의 그림에서 회색부분이 돌가루를 채워 넣은 부분이다

 

그럼 홈을 채워넣은 물질은 무었일까?  마른 상태에서 색깔은 대리석과 거의 흡사하여 자세히 보지 않으면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이다.  처음엔 시멘트를 섞은 몰타르가 아닐까 했는데 자세히 보니 시멘트는 아니다. 시멘트는 물이 묻어도 이렇게 진하게 변하지는 않는다. 

 

아마 물에 젖으면 아주 진하게 색이 변하는 특수한 성질의 돌을 가루로 만들어 접착제와 혼합한 것으로 보인다.    

 

 

 원 안을 자세히 보면 파내고 다른 물질을 메운 흔적이 있는데 쉽게 구분이 안된다

 

물에 젖어도 색의 변화가 적은 대리석과 물에 젖으면 색이 진하게 변하는 물체와의 오묘한 조화를 이용하여 비석을 조작한 이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왕이 아니면서 왕의 칭호를 받은 김유신장군의 업적을 비하하고 천시하려는 이의 소행임이 아닐까?

 

문화재 해설사의 말로는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이렇게 만들었는데 왕이 아니기 때문에 묘로 고친것이다" 라고 하지만 신빙성이 없는 이야기이다.  이 비석은 1970년대 김유신장군묘를 정비할 때 만들어진 비석이기 때문이다. 언제 누가 이렇게 조작을 하였는지 지금으로서는 전혀 알 수가 없다. 

 

요즘은 장마철, 비오는 날이 많으므로 한번 찾아가 보자. 맑은 날이면 한컵의 물만 부어보아도 확연히 '墓'자가 드러나는 마술같은 비석이다.  

 

(참고)

5,60대 중후반의 어르신 중에서 어린 시절을 경주에서 보낸 분들은

"내가 어렸을 때 김유신장군묘에 가면 묘의 양쪽으로 석인상이 있었는데 지금 어디로 갔지?"하고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이 석상은 일본 강점기때 만들어 세운 것으로 조각이 조잡하고 역사적 사실과 맞지않는다하여 1970년대  김유신장군묘를 정비할 때에 철거를 하였기 때문에 지금은 없다

 

 

나. 2008년 11월 22일자 스폰지 2.0에 방송된 내용의 반론

 

2008년 11월22일 KBS 2 방송의 '스폰지'에 위의 내용이 방송되었다.  방송에서는

"후손들이 흥무왕으로 추대된 것을 모르고 묘로 썼다가 나중에 릉으로 고쳤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석이 세워진 것은 불과 40년이 되지않는 1970년대에 세운 것이다. 지금의 후손들이 그 유명한 선대가 흥무왕이라 봉해진 것을 모를리가 있으랴...

 

오히려 그 반대로 릉으로  쓰여진 것을 묘로 고친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글씨체를 살펴보면 '릉'자와 '묘'자의 글씨체가 완연히 다르다. 그 위의 글씨(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와 비교해보면 '묘'자는 완연히 다른체이며 '릉'자와 같은 글씨체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처음부터 '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묘'라고 썼다면 일부러 '묘'자만 다르게 썼다는 말인가?  뒤에 '릉'자로 고쳤다면 처음 비문을 쓴 사람에게 다시 '릉'자 글씨를 받았을까?  위의 글씨(개국공순충장렬흥무왕)와 '릉'자는 한치의 빈틈없이 조화롭지만 '묘'자는 획이 날카로우면서 그 크기조차 어울리지 않는다.

 

두번째  '묘'자를 메우고 그 위에 '릉'자를 썼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릉'자의 파인 부분에도 까맣게 글씨가 드러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뒤에 메우고 '릉'자를 새겼다면 메운 부분이 드러나지 않게 좀 더 깊이 파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세번째  '묘'를 메우려면 돌가루(어떤 성분의 돌가루인지 화학약품의 가루인지)를 반죽하여야 메울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반죽을 하였을때 벌써 지금과 같이 검은 색이 틀림없었을텐데 그대로 사용하였을까?  물이 묻을 때도 있음을 생각하지 못하였을까?

지금의 비석은 일반 석물제작소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대리석이다. 만약 '묘'라고 쓰여진 부분을 메울 생각이었다면 쉽게 구할 수 있는 이 대리석의 가루를 사용해야 함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이 가루는 젖어도 비석과 같이 젖어 차이가 나지 않을텐데......

 

누가 어떤 이유로 이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릉'자 위에 '묘'자가 쓰여진 것이 틀림이 없음을 믿는다      [출처] : 토함산솔이파리 블러그 / 2008년 11월 26일

 

 

다.  김유신묘 신도비

 

 

 

 

 

 

 

 

3. 전 김유신묘(傳 金庾信墓)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가. 둘레돌(護石)의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 

 

 

 

자(子:쥐)

 


 

축( 畜 : 소)



 

인( 寅 : 호랑이)



 

묘( 卯  : 토끼)



 

진( 辰 : 용)



 

사( 巳 : 뱀)



 

오( 午 : 말)



 

미( 未 : 양)



 

신( 辛 : 원숭이)



 

유( 酉 :  닭)



 

술( 戌 : 개)


 

해( 亥 : 돼지)

 

사적  제21호 김유신묘 둘레돌의 12지신상이다.둘레돌에 12지신상을 새기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생긴 무덤양식이라고한다  . 흥덕왕 즉위 10년(835) 김유신을 흥무대왕으로 추봉했는데 이때 왕릉의 격에 맞게 고치면서 12지신상을 새긴 둘레돌을 설치한것으로 추정한다.다른 왕릉의 12지신상은 갑옷을 입고 있는데  김유신묘는 평상복에 무기를 들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나. 전 김유신묘 에 묻었던 납석재 십이지신상(傳 金庾信墓 蠟石製 十二支神像)

 

 

묘( 卯  : 토끼)

 

 

오( 午 : 말)

 

 

 

해( 亥 : 돼지)


- (전) 김유신 묘 출토 납석제 십이지신상(蠟石製十二支神像) 통일신라시대, 국립경주박물관

 

 십이지는 방위와 시간을 맡은 동물들을 말하며,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 12 동물을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한 것이다. 처음에는 무덤 안에 십이지상을 넣다가 차츰 수호신의 성격으로 바뀌어 무덤 둘레에 배치하였다. 사진은 경주 김유신 묘 둘레돌(護石)에 만들어진 십이지상 중에서 말과 토끼의 상으로 곱돌로 만들어졌다.

 

둘레돌에 12지신상을 12방위에 새겨 놓고 별도로 무덤 주위에 납석제 12지신상 1벌을  땅에 파묻 2중으로 배치한 곳은 전김유신묘와  헌덕왕릉 뿐이다

 

국립경주박물관 전시실에는 화강암이 아니라 납석(臘石)에 아주 세밀하게 새겨진 십이지신상이 하나 있다. 이 십이지신상은 김유신 묘라고 전하는 무덤의 둘레에서 출토된 것으로, 십이지신상 가운데 돼지상에 해당한다. 이곳에선 이 돼지상 외에도 말상과 토끼상의 파편도 나왔다고 한다.

순서로 치면 돼지상은 십이지신상 가운데 맨 마지막에 해당한다.
시간상으로는 밤 9시에서 11시 사이이며, 방위로는 북북서에 해당합니다. 따라서 무덤에 있어 돼지상이 있는 위치는 북북서 방향, 시계 바늘로 치면 11시 방향, 즉 무덤의 뒷면에 해당한다고 보면 된다. 

이 돼지상은
멧돼지 머리에 사람 몸을 하고 있다. 몸에는 갑옷을 걸치고, 오른손에는 칼을 든 채, 바위 위에 양발을 벌리고 당당한 자세로 서 있다. 갑옷의 장식은 사실적이면서도 화려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긴 소매와 펄럭이는 천의(天衣)에서는 생동감이 넘친다.

이 십이지신상은 무덤의 호석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무덤 둘레의 땅속에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보존이 잘 되었다.




- (전)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상 가운데 돼지상

 

 한편 현재 (전) 김유신 묘의 호석에는 평복 차림의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까 땅속에 묻었던 납석제의 십이지신상과는 별도로 무덤 호석에도 십이지신상을 새겼던 것이다. 이제 앞서 말한 납석제로 만든 돼지상과 무덤 호석에 새겨져 있는 돼지상을 서로 한 번 비교해 볼까?

정면으로 몸체가 서 있으면서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주시하고 있은 점은 호석에 새겨져 있는 돼지상과 납석제의 돼지상이
서로 같지만, 호석에 새겨져 있는 것은 무장을 하지 않은 평복 차림을 하고 있으며, 오른손에 칼 대신에 반달 모양의 끝을 지닌 창을 들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인상이 더 온화해 보인다.

이 두 종류의 십이지신상을 보다 보면 이런저런 생각들이 떠오른다.

이처럼 무덤의 호석뿐만 아니라 무덤 주위에 십이지신상을 한 벌 더 따로 파묻어 이중으로 배치한 예는 (전) 김유신 묘를 제외하곤 찾아보기 어렵다. 그렇다면 왜 이곳에는 십이지신상을 이중으로 배치한 걸까? 그것도 하나는 갑옷 차림으로, 다른 하나는 평복 차림으로 말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느낌에서도 다소 차이가 있다. 이런 점을 두고 보면, 이 십이지신상들이 과연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것들이 맞을까?

 
김유신 묘에서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12지신상이다. 쥐, 소, 호랑이, 토끼, 용, 뱀, 말, 양, 원숭이, 닭, 개, 돼지 등 열두 동물을 새긴 조각상들 중 일부는 지금도 살아있는 듯 생생한 모습을 하고 있다.

 

대개 무덤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갑옷을 입은 조각상들이 새겨지는데 김유신 묘의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었다. 몸체는 정면을 보고 서 있으나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주시하는 머리 모습이 이색적이며, 무장을 하지 않아 그런지 매우 온화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다. 전 김유신묘의 십이지신상 탁본 ( 傳 金庾信墓 十二支神像 拓本)

 

  

 

미( 未 : 양)

 

 

 

진( 辰 : 용) 

<십이지 진상(탁본)>, 가로54 세로92, 1991년

김유신장군 묘에 새겨진 십이지 중 용상을 탁본한 것이다.



 

김유신묘(金庾信墓) 호석 십이지신상
 

 


신라시대 흥덕왕릉(興德王陵) 호석 십이지신상

제목-김유신장군묘
광고주-

1.김유신장군묘를 파악하기위해서는
보증인이 필요합니다.
고구려 을지문덕장군과 고려강감찬장군입니다.
을지문덕장군의 능의위치기록은 평양성석각에 능의위치가기록이
평양성석각에 을지문덕장군의 위치는 고구려왕들의왕능의 중심점에 있습니다.
고려강감찬장군의 능의경우에도 고려왕들의중심점에 능을배치를 했습니다.
신라김유신장군의경우에도 신라왕들의 중심점에 왕릉을 배치를 하여
현재 김유신장군묘는 중심있는것이 아닌 외측에 있어
지증왕릉비문= 신라22대지증왕릉비문이 나타나서 현재의김유신장군묘는 신라22대지증왕릉

2.
김유신장군능을 규명하기위한 조건은
강감찬장군능을 먼저규명을 해야 금석문의기록을 찿아가야
고려왕릉개별비문으로는 오류가 발생하는데
그래서 고려왕릉고분군으로 오류발생을 방지를
고려1대부터-고려10대가지의왕릉기록 금석문은 =( 에 있어요 )
고려11대부터-고려18대가지의왕릉기록은 금석문은 =( **에 있어요 )
고려17대부터-고려24대까지의왕릉기록 금석문은 =( **에 있어요 )
고려25대부터-고려31대까지의왕릉기록 금석문은 =( **에 있어요 )

고려강감찬장군의 능기록은 **금석문에 기록을있는데
강감찬장군의 능배치는 고려 11대왕릉부터 18대왕릉의 중심점에 배치를했어요
본인이 번역을 해서 번역본을 공개를 했습니다.


3.
김유신장군묘를 규명 조건은
김인문묘비-무열왕릉비문


좋은정보 잘보갑니다
오늘도 좋은하루되세요^^ 화이팅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