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삼국,가야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5. 08:14

동양의 하니발 고선지 장군

 

 

나폴레옹을 뛰어넘는 고선지

 

 

고선지의 원정은 한니발과 나폴레옹의 업적을 뛰어넘는 것이다”

20세기초 돈황문서를 발굴했던 영국의 고고학자이자 탐험가인 오럴 스타인(Stein)이 로마를 정복한 카르타고 장군 한니발과 시대의 영웅 나폴레옹보다 높게 평가한 고선지(高仙芝 702∼755)

세계역사는 그를 1200년전 실크로드 일대의 중앙아시아를 평정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파키스탄까지 장악한 뛰어난 명장으로 기록하고 있다.그러나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고선지가 당나라에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후손으로 당나라 장수로 활약했다는 이유에서 별다른 연구를 하지 않아왔고 특별한 고선지 전문연구가도 없다.

 

 

우리가 그 동안 연구해왔고 존경해 마지않았던 한국의 수많은 인물들이 있다. 세종대왕, 이순신, 강감찬, 김유신, 정약용, 안창호, 김구, 이승만, 박정희..... 그러나 이들은 한민족의 역사와 과거를 좌지우지 했을 뿐 세계사적으로 공헌한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당장 이순신 만해도 그렇다. 물론 구국의 영웅이고 이순신이 없었다면 1910년 한일합방이 아니라 1592년부터 수백년동안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이순신이라는 인물은 한국 내에서 추앙받을 뿐 사실 세계사에 영향을 주거나 세계문화사에 기여한 내용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하고자 하는 고선지는 실크로드의 역사를 좌지우지했으면 더 나아가 유럽문명의 성장에 막대한 기여를 했던 인물. 바로 한국 고구려 출신 고선지였다. 

1200년 전, 죽음의 준령이라 불리는 '파미르고원'을 넘어 서역까지 정복했던 그는 군사들 모두가 두려워 진군하지 못하고, 당(唐) 황제의 명을 받은 감독관 마저 꺼려했던 원정. 하지만 고선지는 1만 5천명의 군대와 함께 주저없이 출정했다.

그리고 그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이 원정을 성공으로 이끌었고, 세계사는 그를 실크로드를 지배한 영웅으로 기억하고 있다.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세계사의 영웅 한니발, 나폴레옹의 업적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던 한민족의 영웅 고선지의 삶을 새롭게 조명해본다.

 

고구려의 멸망과 당나라의 이주정책

동방의 강국 고구려는 당나라·신라 연합군에 의해 너무나 허망하게 멸망하였다. 당나라는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킨 다음 해 4월 고구려 주민에 대한 이주정책을 결정하고 많은 고구려의 주민들을 당나라 땅 곳곳에 흩어뿌렸다.

이는 고구려 멸망 이후 고구려의 유민들은 항당 복국투쟁(抗唐復國鬪爭)을 지속적으로 실시했고, 당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주정책을 추진한 것이다.

 

또 이주의 대상은 중산 이상의 계층과 건장한 자로 되었는데 이들을 그대로 남겨둔다면 항당군의 훌륭한 유인대상과 가담자가 되기 쉽다는 타산에서 당은 이러한 추호책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인들의 항당투쟁이 안동도호부의 치소인 평양성과 그 부근에서 가장 치열하게 전개 되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추호대상자는 평양성과 그 부근의 주민 중에서 다수를 차지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당의 각처에 이주된 고구려인들 중에는 당의 추호정책에 의하여 강제로 이치된 유민 외에 전쟁에서 당군에 포로가 되어 이송된 사람들도 상당수가 있었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의 후손, 고선지

681년, 당나라에서는 보장왕을 귀양 보내고, 요동에 모여 살던 고구려 유민을 흩어져 살도록 하였다. 훗날 고선지의 아버지였던 젊은 고사계는 이 때 고구려 유민들과 헤어져서 하서지방에 살게 되었다. 하서는 만리장성 서쪽 끝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고사계는 온갖 고생 끝에 하서군으로 들어가 당나라 군사가 되었다. 이때는 이미 고구려가 멸망한 뒤였다.

고사계는 이 무렵에 아들 고선지를 낳았고 고선지는 어릴 때 몸이 몹시 약했다.
'당나라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지 않으려면, 몸이라도 튼튼하여 군대에 들어가야 하는데…….'
아버지 고사계는 몸이 약한 아들 고선지를 볼 때마다 걱정스러웠다.
어느 날, 고선지는 밖을 나가 놀다가 울면서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 고사계가 물었다.
'왜 우느냐?'
'애들이 고구려 놈이라고 막 놀리며 때렸사옵니다.'
'맞은 것이 아파 울었느냐?'
'그게 아니옵고.... 걸핏하면 고구려 놈이라고 놀리는 것이 억울해 그렇사옵니다....'
고사계는 아들을 앉혀 놓고 침착하게 말한다.


'너를 놀렸던 그 애들 말대로 넌 틀림없는 고구려인이다. 그러나 그러한 고구려 사람들이 얼마나 훌륭하고 용맹스러웠는지 너는 아느냐'
'고구려인이.... 훌륭하고 용맹스러웠다구요...?'
아버지 고사계는 아들 선지에게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10살이 조금 넘은 고선지는 이 때 처음으로 고구려에 대해 알았고, 제 몸에서 훌륭한 고구려인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알았다.
'비록 나라는 오래 전에 없어졌지만, 고구려 정신만은 잃지 말아야 한다.'
'명심하겠사옵니다. 아버님.'

 

 

 

 

 

 

 

 

 

 

 

 

 

 

 

 

  

 

 

  

 

실크로드의 길목 안서지방

 

그 뒤부터 고선지는 장교가 된 아버지로부터 무예를 배웠고, 15살이 넘자 몸도 마음도 굳세어졌다. 고사계가 안서 사진교장으로 승진되어 갈 때는, 고선지도 말 잘타고 활 잘 쏘는 늠름한 젊은이가 되어 있었다.

 

안서는 하서보다 더욱 험하고 무서운 고장이다. 사방이 드높은 산으로 둘러싸인 한가운데는 모래 천지인 타클라마칸 사막이 있었다.

당나라에서는 사람이 살기 힘든 이 곳에도 군사를 두었다. 이 곳은 당나라에서 서쪽으로는 아라비아, 남쪽으로는 인도 등지와 통하는 아주 중요한 길목이었기 때문에 이 중요한 길목으로 북쪽에서는 돌궐족이, 남쪽에서는 토번 세력이 끊임없이 침입해 왔다. 바로 이 길목이 실크로드와 통하는 곳이기도 하였다.

고사계에게 바로 이 곳에서 외적을 막고, 낙타나 말을 몰고 다니는 상인을 보호할 책임이 주어진 것이다.

 

고사계는 외적이 침입할 때마다 아들 고선지를 데리고 갔다. 고선지는 그 때마다 잘 싸웠고 이 무렵에 유격대장이 되었다.몽고족, 투르크족, 티벳족은 고선지를 매우 두려워하였다.

 

 

고선지가 이끄는 유격대는 침입하는 외적들을 보는 족족 무찔렀다. 이에 안서 도호는 고선지를 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아! 역시 난 고구려인이다!” 20살밖에 안 된 장군 고선지는 싸움터에 나갈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하곤 했었다.

 

 

 

 

 

 

 

 

 

 

 

 

 

 

 

고선지, 당나라 장군으로 성장

20여세가 되었을 때 아버지를 따라 안서로 가서, 아버지가 세운 공을 바탕으로 유격장군이 되었다.

 

그러나 당나라 장군 전인완이나 개가운이 안서절도사로 있던 초기에는 그리 각광받지 못하다가 부몽영찰에 의해 여러 차례 발탁이 되어 언기진수사가 되었고, 개원말에 이르러 병력 2천을 거느리고 천산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벌한 공으로 안서부도호가 되었다. 그리고 곧 사진도지병마사가 되었다.

 

이와 같이 고선지의 급속한 승격은 그 자신의 출중한 자질과 더불어 당시 당정부의 번장 기용정책(番將起用政策)과도 관련되어 있었다. 당현종은 재위 43년간(712∼755)에는 정치를 잘해 '개원의 치'를 이룩하여 태종이후 두 번째 당나라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 점차 자신이 신선을 즐기고 장생을 갈구하는 등 사치에 빠져들어 갔고, 더불어 변방의 군사부담이 가증되고 백성이 궁핍에 허덕이는 등 정세가 점차 악화되었다.

 

당정부의 번장 기용정책

이런 시기 왕의 환심을 사 재상에 등용된 간신 이임보(李林甫)는 중국인들 보다 중국 변방의 장수들을 대대적으로 등용하였다. 이는 당초기 변방수비를 위해 일부 번장들을 기용했으나 요직은 주지 않았던 당의 정책에 커다란 변화였다.

 

이임보가 번장들을 기용한 이유는, 이들 당나라 변방의 장수들이 당파의 후원이 없어 자신이 쉽사리 조종할 수 있었던 것과 막강한 병력을 장악하고 있는 장군들이 재상이 되는 길을 막기 위해서는 그 나름대로 생각하는 '빈천 '하고 '문맹'인 전장들을 등용시키는 것이 필요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미 정치적으로 무기력했던 현종은 이임보의 건의에 따라 번인 가운데 고선지·안녹산(安祿山)·가서한(哥舒翰)등을 절도사로 기용하고 지방군정권을 장악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이임보의 정책은 후에 번장들에 의해 반란이 일어나면서 당을 멸망의 길로 빠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그렇지만 결국 이 때부터 고선지는 번장 기용정책의 호기를 타고 요직에 올라 5차에 걸친 서정을 통해 명실상부한 파미르고원의 주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고선지의 실크로드 정벌전의 시작

고선지의 여러차례에 걸친 서역원정의 목적은 서역에 대한 당의 경영권을 계속 유지하려는 데 있었다. 수말당초 서역제국은 서돌궐에 신속되어 있었는데 정관 12년(638) 서돌궐이 내분으로 동·서 이부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화되는 기회를 이용해 당은 서역에 대한 경영을 본격화하였다.

 

 

 

 

 

 

 

 

 

 

 

 

 

 

 

 

 

 

  

 

당의 서역 경영과정을 주도한 고선지

당의 서역경영은 크게 2기로 나눌 수 있는데 제1기는 태종시대로서 이 시기에 당은 현재 신강성 동부와 중부일대를 개척함으로써 서역경영의 기초를 닦아놓았다.

 

제2기는 고종∼현종시대로서 당의 서역경영 범위를 페르시아까지 확대해간 전성기였다. 이와 같은 경영과정은 이 지역에 자리잡고 있는 여러 소국들, 특히 그 중 큰 세력을 갖고 있던 고창(高昌)·구자·토번(吐番:티벳)등의 국가들에 대한 제압을 통해 이루어졌다.

현종대에 이르자 토번은 서돌궐을 비롯한 주변의 번국들과 연합해 당의 서부지역을 위협해왔고, 마침내 안사의 난 이후 당의 서부의 광대한 지역을 점령함으로써 당중기 이후 가장 위험한 적수로 등장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740년 고선지는 달해부 원정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 일약 안서부도호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게 된다.

 

 

 

 

 

 

 

 

 

 

 

 

 

 

 

 

 

 

 

 

 

 

 

 

 

 

 

 

 

고선지의 천재적 참모, 봉상청

실크로드의 온갖 전투에서 연전연승의 신화를 이룩한 고선지 뒤에는 천재적인 참모가 있었다. 그는 봉상청이란 인물이었다. 봉상청은 일찍이 부모를 잃고, 어릴 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학문이 깊었다. 깡마르고 애꾸인데다가 한쪽 다리마저 절었던 그는 나이 30살이 넘도록 뚜렷한 직업이 없었다.

봉상청은 제갈공명이 유비에 의해 발탁되는 것과 흡사하다. 단지 제갈공명은 유비를 3번 찾아가서 유비의 사람이 되지만 봉상청은 자진해서 고선지에게 자신을 시종으로 삼아달라고 수십일을 성문에서 농성한 끝에 발탁되는 차이가 있다. 그 후 유비의 제갈공명처럼 고선지의 봉상청이 됐는데 그 시작은 이렇다.

 

봉상청의 삼고초려 (三顧草廬)

어느날 봉상청은 고선지에게 편지를 썼다. 고선지는 그가 보내온 편지를 보고 깜짝 놀라 고선지는 얼른 봉상청을 만나 보았으나 어찌나 못생겼던지 고선지는 부하가 되겠다는 봉상청을 잘 타일러 보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봉산청은 유창한 문장으로 편지를 써 보냈으나, 고선지는 아무런 회답도 하지 않자 봉상청이 직접 찾아왔다.

 

 

고선지는 그 자리에서 그를 꾸짖었지만 봉상청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써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래도 고선지가 거부하자 봉상청은 이튿날부터 고선지의 집 앞에 버티고 먹는 것도 자는 것도 그곳에서… 그렇게 한 달 동안 버티는 봉상청을 보고, 고선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고선지는 그의 끈기에 감동하여, 봉상청을 부하로 삼았다. 이후 봉상청은 크고 작은 전쟁이 있을 때마다 뛰어난 지략을 고선지에게 일러주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죽음까지 같이한 충심의 참모

얼마후 텐산산맥 서쪽 끝의 달해부를 점령한 고선지는 그의 상관 부몽영찰에게 승전보고서를 보냈다. 부몽영찰은 보고서를 보고 놀랬다. 명문장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하여 승리의 소식과 함께 봉상청은 명문장가로 알려졌다. 고선지는 봉상청의 명문장 덕분으로, 안서 도호부로 승진하였다. 이어, 고선지는 사진 도병마사가 되었다.

그 이후로도 고선지는 봉상청을 지극히 신임했다. 비단 글씨와 문장 때문이 아니었다. 봉상청의 작전은 일찌감치 앞서려는 고선지의 작전을 일단 멈추게 하여 신중히 작전을 수립할 수 있도록 보조하였다.

 

그래서 고선지는 꼭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봉상청에게 의논하였고 단 1번을 제외하고는 온갖 전투에서 반드시 승리할 수 있었고 언제나 생사고락을 같이하였다. 훗날 고선지가 억울한 죽음을 당할 때도 봉상청은 고선지와 죽음까지 같이 하였던 것이다.

 

 

빛나는 승리를 거둔 소발률원정 (小勃律遠征)

연달아 승리를 이룬 고선지는 천보 6년(747) 제2차 정복활동인 소발률원정(小勃律遠征)을 단행한다. 즉 747년에 토번(티벳)과 사라센제국이 동맹을 맺고 서쪽으로 팽창하던 당나라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동진하여, 당의 서방경계의 요충지인 소발률과 연합해 서북방 20여국을 자신들에게 예속시켰다.

 

소발률은 당이 서방으로 향하는 문호로서 이 곳을 장악하지 못하고 토번의 수중에 들어간다면 토번에 함락당하여 이 지역에 대한 당의 지배가 끝장나게 되는 군사적 요충지였다.

당정부는 고선지를 행영절도사에 발탁하여 토번족의 정벌임무를 주었다. 그는 1만의 군사를 이끌고 오식닉국을 거쳐 파미르고원을 넘어 토번족의 군사기지인 연운보를 격파하였다.

 

그리고 계속 진격하여 험난하기로 유명한 힌두쿠시 준령(Darkot)을 넘어서 소발율국의 수도 아노월성을 점령하고, 사라센 제국과의 유일한 교통로인 교량을 파괴하여 그들과의 제휴를 단절하였다.

그는 그해 9월 소발률왕과 토번공주를 대동하고 개선하는데, 이 1차원정에서 당은 불름(佛 동로마)·대식(大食 아라비아) 제호(諸胡)의 72개국의 항복을 받고 사라센제국의 동진을 저지했다. 고선지는 그 공으로 홍로경어사중승에 오르고 이어서 특진겸좌금오 대장군동정원이 되었다.

 

 

 

 

 

 

 

 

 

 

 

 

 

 

 

 

 

  

 

탈라스 전투의 불씨를 낳은 석국(Tashkent) 정벌

갈사국 정벌에 이어 천보 9년(750) 12월에 고선지는 석국(Tashkent)에 대한 역사적인 제4차 서정을 단행하였다. 예로부터 석국을 비롯한 昭武 9國은 지리적 특성상 당제국과 아랍-이슬람제국의 사이에서 양면부연 사대주의정책을 시행해 왔고 특히 석국은 우수한 품종의 말이 많이 생산되는 나라였다.

이러한 석국이 현종 때에 이르러 이미 당의 서쪽지역으로 진출을 시작한 아랍제국과 가깝게 지냈고 당나라를 멀리하였다. 이것이 고선지가 석국을 정토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당시 안서절도사로서 당의 서역경영을 책임진 고선지로서는 석국의 이러한 경향을 용인할 수는 없었으며, 이에 석국원정은 필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선지는 이 원정에서 너무나 난폭한 징벌전을 벌였고, 이는 후일 탈라스 전투의 불씨를 낳게 된다.

 

한편 석국정벌에서 당군이 범한 난폭성과 멸국에 석국인들이 한을 품게 되었던 시기에 장안에 호송된 석국왕이 무모한 문신들에 의해 참살되었고(750), 이로 인해 석국왕자 원은의 주도하에 서역 각국과 이슬람제국(압바스조 : Abasian Dynasy)이 대당전쟁을 위한 동맹을 맺게 된다.

결국 고선지가 인솔한 당군과 석국-이슬람 연합군과의 격전은 751년 7월 탈라스에서 발발하였다. 이 전투는 외형상으론 단순히 당을 일방으로, 석국과 이슬람제국을 타방으로 하는 대결전이었으나 실제에 있어서는 각방의 상이한 이해관계가 뒤얽힌 전쟁이었다.

 

 

 

 

 

 

 

 

 

 

 

세계사의 획을 그은 탈라스 전투


석국측은 한풀이 보복전으로 당의 사진(四鎭)을 공격하기 위해 대당전을 선포했고, 당은 석국의 보복전에 대응하여 그 경영권을 계속 보존하기 위해 대석국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한편 이슬람제국은 승승장구하는 기세를 타고 서역일원에 대한 대당의 통치권과 영향력을 제어·약화시킴으로써 그 지역에 대한 새로운 통치권을 확립하기 위하여 군사전으로 당과 대결하게 된 것이다.

당은 이에 대응하여 7만 정벌군을 탈라스에 파견했으나 당나라와의 동맹을 가장한 카를루크(Karluk)에게 양쪽으로 좌우협공을 당했고, 수십일간 강행군을 해온 원정군이기에 지칠대로 지쳐 사기왕성한 적군에 도저히 대항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선지는 진퇴양난의 전황속에서 부장들의 임기응변 전술로 백석령에서 고선지의 퇴각을 엄호함으로서 구사일생으로 안서로 귀환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대부분의 당군은 사살되고 일부(아랍 사서에 의하면 2만)는 이슬람군에게 포로가 되어 이슬람제국에 끌려가게 되었다.

 

 

 

 

 

 

 

 

 

 

 

 

 

 

이렇게 고선지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된 패전의 고배를 마셨다. 이 패전으로 그가 당나라 정부로부터 어떠한 문책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전쟁이 있은 직후 당나라 수도 장안으로 돌아와 당나라 황제로부터 두 채의 큰 저택을 하사 받는다.

 

또 얼마 후(755) 그가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밀운군공(密雲郡公)의 봉작을 받은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나라 관직에서는 물러났음을 알 수 있다.

고선지의 5차에 걸친 정복성에도 불구하고 단 한번의 탈라스 전투 패배로 빛을 잃어버리고 만다.

 

그로부터 4년후 안녹산의 난이 일어났을 때 토적부원수가 되어 출정했으나 억울한 모함에 빠져 그렇게 섣불리 목베임을 당한 것 또한 이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로 고선지가 현종을 비롯한 당나라 지배세력들에게 신망을 잃었던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안록산 토벌의 황명을 받아

탈라스 전투에 패배한 고선지는 당나라 수도 장안에서 4년 동안 은거하였다. 얼마 후 안록산의 란이 일어나자 고선지는 반란군을 토벌하라는 황명이 전달된다. 오랫동안 착실히 전쟁준비를 해왔던 안록산의 대군은 파죽지세로 북에서 남으로 밀고 내려왔다.

적의 가공할 위력이 계속되자 고선지는 수도 방위의 요충지인 동관으로 일시 후퇴하면서 태원창(太原倉)이라는 국가의 창고가 적의 수중에 넘어가려 하자 이 창고의 물건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고 나머지는 적의 가져가지 못하도록 태워버렸다.

 

동관(潼關)은 천형의 요새였다. 소수의 병력으로 절대다수의 병력을 막아낼 수 있는 중국의 마지노선이었다.

그러나 황제가 파견한 감군 변령성은 당나라 황제에게 극히 불리한 보고를 하였다.  "고선지와 봉상청은 적이 두려워 섬주를 적에게 내주고 동관으로 도망쳤사옵니다. 그 뿐이 아니옵니다. 황실 창고를 제 맘대로 열어 착복했사옵니다!"

 

이에 당황제 현종은 크게 노하여 변령성에게 명하여 고선지와 봉상청의 처형을 명하였다. 명을 받은 변령성은 동관에 이르러 먼저 봉상청을 끌어내 봉상청의 목을 쳤다. 그런 후 고선지도 마저 소환했다

 

내가 후퇴한 것은 죄이다. 죽는 것을 마다하지 않겠다. 하지만 내가 태원창의 물자를 도적질했다는 것은 무고요!"  그런 후 고선지는 자신의 군사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적군의 군세가 막강해 잠시 지연작전을 위해 이 동관으로 후퇴하였다. 그리고 지금 이 동관요새를 공고히 방어하고 있는 것이다만약 나에게 죄가 있다면 그대들은 말하게! 그렇지않으면 억울하다고 외쳐주게!!"  흥분한 병사들은 일제히 발을 구르며 "억울하다!!"라고 외쳤다. 군사들의 고함소리는 천지를 진동했다.

그러나 황명은 이미 내려졌고 군사들의 변호가 황제의 명령을 돌이킬 수 는 없었다. 고선지는 봉상청의 시체 앞에서 말했다.  "자네는 지금까지 줄곧 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해왔다. 그대와 나도 함께 죽으니 이 또한 운명이 아니겠는가!"  저항없이 고선지는 황명에 따라 죽음을 당하였다.

 

고선지에 대한 재조명

고선지는 용맹한 고구려인의 기질을 갖고 망국의 비운을 통감하며 심신을 연마하여 당제국에서 이민족 번장으로서는 드물게 세계의 지붕이라 일컬어지는 파미르고원을 넘나들며 서정을 단행한 고구려 출신 당나라 장군이었다.

 

중앙아시아를 평정해 대당건설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동-서 문화교류사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연구나 평가는 동·서양을 통털어 그 존재를 찾기가 힘들다.

또 그가 활약했던 당제국에서조차 당객랑이라는 그의 출생적인 한계와 탈라스 전투에서의 패배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그의 조국인 우리나라에서도 그에 대한 연구는 매우 미흡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프랑스의 동양학자 샤반느(Chavannes)가 종래의 중국문헌 이외에 새로이 서방·아랍 등의 문헌을 섭렵하여 고선지가 세운 탁월한 사적을 발굴한 <서돌궐 사료 Document Sur les Tou - Kiue Occidentaux>가 발표되었다.

 

또한 영국의 유명한 탐험가인 슈타인이 고선지의 전적지를 직접 답사·연구하면서부터 고선지는 현대에 들어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천재적인 전략가로 재조명 받기 시작했다.

 

고선지 서역정벌의 의미

<구당서(舊唐書)>나<신당서(新唐書)> 같은 사료를 살펴보며 고선지가 서역정벌을 단행한 원인은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하나는 징벌로서 즉 석국을 비롯한 서역국가들이 당을 배반하고 이슬람제국에 복속하는 추이를 보이자 그를 징벌하기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보물을 탐내어 출정하였던 것으로 본 것이다.

물론 동서고금의 전쟁사를 보면 지하자원을 비롯한 물자의 약탈을 목적으로 발발한 전쟁의 예가 없지는 않다. 그러나 고선지의 경우 이 물질적 동기가 그로 하여금 수천리의 험산준령을 넘어 패전의 고배까지 감수해야 할 원정의 길에 오르게 하였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중흥기에 처한 대당제국에게 있어서 석국을 비롯한 서역 국가들의 물자(보석과 우수한 품질의 말 등)가 국운 성쇄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함은 자명한 일이었다.

반면에 이슬람제국이 바야흐로 당나라 국경을 위협하고 있을 때 그와 결탁한 서역국가들을 공략하는 것은 당나라 제국의 운명과 직결되는 중대사였다.

 

따라서 당조가 서역경영의 총책이었던 고선지로 하여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당나라 국경을 지키게 했던 것은 어찌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고, 이것이 고선지 개인적인 물욕적인 욕심에서 비롯되었다는 신·구당서의 내용은 근거 없는 것이다.

 

 

 

 

 

 

 

 

 

 

 

 

 

 

 

 

 

 

고선지의 역사적 재평가

결국 고선지는 이 한차례의 패전 때문에 4차 전승의 빛나는 전과는 상쇄되었고, 훗날 안록산의 반란 때 역신으로 무고 당하여 참형되었던 것을 두고 결과적으론 '횡포무도한 탐욕자'라는 부정적인 인물로 역사상 매도당했던 것이다.

죽음의 벌판인 타클라마칸(Taklamachan) 사막을 누비고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고원을 넘나들면서 고선지는 세계 전쟁사에 전무후무한 전공을 세웠고, 소발률정벌을 위해 거의 반년에 걸쳐 힌두쿠시(Hindukushi)의 험로를 정복한 고선지의 위용에 대해 새로운 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이 지역을 실지 답사한 바 있는 저명한 영국의 탐험가 스테인(Stein)은 '현대의 어떠한 참모본부도 따를 수 없는 것이며, 나폴레옹(Napoleon)의 알프스(Alps) 돌파보다 더 성공적인 것' 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처럼 그는 비록 몸은 당에 있었지만, 대륙을 호령했던 고구려의 후손으로서 그 얼을 세계만방에 처음으로 드날린 최초의 한국인이었다.

 

 

 

 

 

 

 

 

 

 

 

 

 

 

탈라스 전투의 문화교류사적 의의

비록 전쟁사적 견지에서 볼 때 탈라스 전투는 일단 패배로 끝남으로 인해 당나라에게 큰 오점을 남겼지만 중세 국제관계사, 특히 동아 문화교류사의 시각에서 볼 때에는 중대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석국의 정벌 및 대식제국(아라비아 제국)과의 충돌은 아시아 대륙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던 당제국의 불교 및 유교문화권 대 신흥 아라비아의 회교문화권과의 충돌이다.

당과 이슬람 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충돌은 결국 양대 세력이 파미르(Pamir) 고원을 경계로 중앙아시아를 양분한 가운데 상호 정치·문화적으로 교류·협력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탈라스 전투 이후 중국과 아랍세력이 파미르 고원을 경계로 더
이상 분쟁 없이 정치·문화적으로 상호교류가 이뤄짐으로써 중세 동서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특기할 만한 일인데, 이것은 마치 알렉산더의 그리스 군대가 동양의 인도군과 접전을 벌였던 현상과 비교할 만하다.

 

그는 5차에 걸친 서역원정을 통해 세계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족적을 남겼으며, 그의 서역원정이 갖는 역사적 의의는 크게 다음 세가지로 정리 할 수 있다.

 

 

 

 

 

 

 

 

 

 

 

 

 

  

고선지의 서역원정이 갖는 3가지 의의

첫 번째로 대당건설에 그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당은 천산산맥 지역의 소무 9국이 아라비아와 중국 사이에서 양면사대정책을 취하면서 당의 서쪽 변경을 자주 침범하자 이에 대응하기 위해 서정을 단행했고, 당시 서역행정을 총괄하고 있던 고선지가 그 선봉에 섰다.

 

고선지는 5차에 걸친 서정 중 탈라스 전투를 제외하고 1차에서 4차에 걸친 원정에서 모두 승리함으로써 당제국이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를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하였다.

두 번째로 탈라스 전투에 의해 제지술이 서양으로 전파되는 등 동·서 문화교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점이다. 그는 1차에서 4차에 걸친 서역원정을 통해서 중앙아시아의 지하자원과 양질의 말 등을 중국으로 들여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문화를 더욱 풍요롭게 했다.

 

예를 들어 석국 정벌에서 고선지는 양마(良馬)·보옥(寶玉)·슬슬(瑟瑟)등 귀중한 보물과 전리품을 노획하였는데 이러한 보물은 처음으로 중국에 알려졌고, 이는 신라에까지 전파되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고선지의 서역원정으로 이슬람 문화권과 한족 문화권간의 상호 이해도가 증진되었다. 파미르고원 중앙아시아에 대한 당의 통제권이 사실상 종식됨으로써 석국·강국을 비롯한 이 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진출이 본격화되어 정착되었다.

 

이는 결국 송대를 거쳐 원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서북지방 일대의 이슬람화의 전주곡이 되었다. 아랍 제국의 이슬람교가 중앙아시아 국가에 전파되어 송·원대에 이르러서는 중국의 서쪽 변방지역이 이슬람화되는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또 무의식적인 결과이기는 하지만 탈라스 전투로 인해 중국의 제지술이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에 전수된 것은 문화사상 하나의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탈라스 전투 당시 포로로 잡혀간 중국인 제지공에 의해 중국의 발달된 제지술이 아랍 제국을 거쳐 유럽에 전파되어, 당시 문자와 서적이 보급이 보편화되지 못했던 서구에 엄청난 센세이션을 일으켰으며, 이는 A.D. 15세기 유럽의 르네상스가 일어나는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이렇듯 고선지는 중세 동·서교섭이나 문화교류에 미친 막대한 영향뿐만 아니라 한민족의 얼과 자긍심을 높였던 위대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두보의 시 - 고도독(高都督) 총마의 노래

 

안서도호 고도독의 푸른 호마가 이름 날리고 별안간 동으로 왔네.
이 말이 싸움에 나아가면 오랫 동안 당할 적은 없었고 주인과 한마음으로 큰 공을 세웠지. 공을 이루니 이르는 데마다 잘 거두어 대우하고 아득히 먼 곳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왔네. 웅혼한 자태 마구간에 엎드려 쉬는 은혜 마다하고 용맹한 기개는 싸움터만 그리노라.  
날랜 말발굽 높아 쇠를 박차듯 교하에서 두꺼운 얼음층 몇 번이나 찼던고.  
오색 꽃무늬 구름같이 온 몸에 장식하고 만리를 달리던 한혈마를 방금 보았노라. 
장안의 장사들이야 감히 타보기나 하랴,  번개같이 달리는 건 온 성안이 다 안다오. 푸른 실로 머리 맨 채 그대 늙으니 어쩌면 북문을 달려 나갈까나.
 

 

고선지장군과 동시대를 살았던 중국의 시인 두보는 고도독(고선지)의 총마와 그 주인을 이렇게 찬양하고 있다. 당시 고선지가 타고 다니는 애마는 당대에 빼어난 한혈마(汗血馬)라 칭하는 서역계통의 아주 뛰어난 명마였다.

 

역사적 가정법 - 만약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승리했다면

751년 고선지는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연합군을 대패시켰다. 소정방의 당나라 군대가 바다 건너 백제까지 침공했듯, 탈라스 전투에서 이긴 고선지는 그 여세를 몰아 이슬람제국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하고 다시 당나라·아랍 연합군을 조직, 지중해를 넘어 프랑크(오늘날 프랑스) 왕국의 수도 파리를 점령했다고 치자. 중국만을 세계중심의 천하라고 믿었던 당나라 황제 현종은 '파리를 발견했노라!'라는 칙령(勅令)을 내린다. 세느강가를 거닐어야 할 파리의 시민들은 당나라에 노예로 끌려오는 기현상을 연출한다.

그랬다면 현대 역사학자는 고선지의 유럽대륙 파리 정복을 <고선지 유럽대륙을 정복하다!>라고 평가 할 지 않았을까? 또 징기스칸을 능가하는 유럽의 정복자 고선지가 죽자 장안(長安 : 당나라 수도)에 중국 황제와 견줄만한 거대한 무덤을 만들어 놓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지 않았을까?

  

 

 

 

 

 

 

 

아랍세계와 중국의 충돌, 탈라스 격전

아랍과 중국 간의 탈라스 격전은 양국의 정치관계를 일시적으로 긴장시켰지만 사실이나 전후 경제, 문화교류는 광범위하고 빠른 템포로 진전되었다. 특히 여러 문화요소 중, 중국 제지술의 이슬람세계 전파는 큰 의의를 갖는다. 751년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에서 붙잡힌 당나라 포로들에 의해 종이 만드는 기술이 아랍세계에 전래되었다.

 

탈라스 전쟁시 이슬람군에 포로로 잡힌 중국의 제지공이 제지술을 소개하였다. 고선지의 패퇴 후 퇴로가 막힌 2만의 중국병사가 포로로 사마르칸트, 바그다드등 압바스국의 여러 도시에 분산 수용되었다.

 

기술자를 선별 우대하는 압바스 왕조의 문화정책에 따라 중국인 제지공들은 특별 대우를 받았고 종이생산에 전념하였다.

 

이들 기술자들에 의해 처음으로 강국(康國)의 수도 사마르칸트(Samarchant)에 제지소가 건설되어 있었다. 후에 여기에서 생산된 종이를 '사마르칸트 종이'라고 명명하였다.

당시 이슬람 세계는 종이가 소개되기 이전이라 초기에는 이집트에서 생산된 파피루스를 사용하다가 압바스 시대부터 양피지(Parc-hment)를 사용하여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무껍질, 아마포, 넝마, 대마무를 사용하여 생산되는 중국종이는 가볍고 질기며, 편편할 뿐만 아니라 대량 생산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슬람 사회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당나라 포로들에 의해 아랍세계에 제지술 전파

아랍인들의 기록에 의하면 고선지로부터 사마르칸트에 전해진 종이가 "풀과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사마르칸트의 종이>는 이윽고 칼리프가 지배한 아시아 전영역에 잘 알려지게 되고 한 세기가 지난 후(869) ‘서에는 이집트의 파피루스, 동에는 사마르칸트의 종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11세기의 저술가 사리비(Thaalibi)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사마르칸트의 특산물이라 한다면 종이를 들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지금가지 사용되었던 이집트의 파피루스 권자본 및 양피지와 대체되었다. 왜냐하면 종이는 다른 것에 비하여 훨씬 아름답고, 사용하기에 기분이 좋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종이는 이곳 사마르칸트와 중국에서만 발견된다. 종이는 탈라스 전투에서 획득한 중국병사에 의해 중국으로부터 이곳 사마르칸트로 전해졌다.”

 

 

 

 

 

 

 

 

 

 

 

 

따라서 751년경 이미 종이가 사마르칸트에 소개되었고, 그곳에서 사마르칸트지라는 일종의 면지(綿紙)가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압바스 제국의 칼리프인 하룬 알 라쉬드(Harun al-Rashid)가 794년경, 호라산 총독인 파즐(Fazl)의 후원으로 바그다드에 대규모 제지공장을 설립했다. 압바스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종이의 대량생산은 종이가 쉽게 이슬람 전역에 퍼져가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수년내 제국의 곳곳에 제지공장이 설립되었다. 바그다드에 이어 다마스커스에, 900년경에는 카이로와 북아프리카의 페즈에, 12세기 중기 이후에는 스페인의 발렌시아, 톨레도 등지에서도 종이가 생산 보급되었다.

 

 

 

 

 

 

 

 

 

 

 

종이 전파로 문예부흥기를 맞은 유럽과 이슬람

이제 이슬람 세계는 제지기술의 발달과 대량생산의 성공으로 새로운 문예부흥기를 맞이하였다. 이는 종이 품질의 향상과 가격의 저하를 가져와 이집트의 파피루스 산업을 도산시켰을 뿐 아니라, 누구나 쉽게 종이를 구입할 수 있어 학문과 문학이 크게 발전하였다.

학자는 물론 일반 서민도 글을 배워 기록을 남기는 풍조가 세 대륙에 걸쳐있던 전 이슬람 세계에 널리 퍼졌다.

 

이와 같이 이슬람 세계에서 제지술이 광범위하게 발달함에 따라 이슬람 세계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유럽도  12세기 중엽부터 아라비아인들로부터 제지술을 전수받아 제지업이 일기 시작했고, 이는 유럽에 르네상스(Renaissance)를 주도했다.

 

유럽 르네상스의 초기에 유럽을 통해 전파된 종이 제조술은 현대세계를 형성하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한편 유럽은 이슬람 세계로부터 종이를 수입해 오다 십자군 전쟁을 거치면서 스페인과 시실리아를 통해 제지기술이 도입되어 종이를 생산하게 되었다.

 

유럽에서의 종이의 보급과 이슬람 세계가 종일 기록으로 보존해준 그리스·로마 문화의 번역 계승작업은 후일 유럽 르네상스 성숙에 크게 기여하게 되는데 독일과 영국까지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14세기이다.

 

종이, 그 문화적 도미노현상

유럽이 중세 암흑기를 벗고 문예부흥기로 들어간 르네상스의 시작 시점은 바로 14세기 후반으로 세계사는 말하고 있다. 파피루스와 양피지에 글을 쓰고 있던 서방은 비로소 고선지 사건을 통해 종이 문명을 접하게 된 것이다.

 

고선지의 패배는 아랍과 서양의 학문을 일으키고 오늘날의 서양 종이문명이 있게 한 밑거름이 된 문명사의 대전기였다.

종이의 보급으로 인쇄술이 나왔고 인쇄술은 무수한 성경을 찍어내 민중들이 계몽하였고 급기야 종교개혁의 길을 열렸고 이 후 유럽 대중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였다. 이렇듯 제지술 전파는 곧이어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된다.

고선지에 의해 전래된 종이의 힘은 서양 지식산업을 일으켰고 급기야 유럽 산업혁명을 뒷받침하는 문명형성의 힘을 제공하게 되는데 르네상스, 종교개혁에 이어 일어난 산업혁명은 유럽문명의
한단계 도약시켰고 결국 오늘날의 유럽·미국을 포함한 서구제국의 출현을 가져왔다.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로부터 시작된 문화적 도미노 현상은 21세기 유럽·미국 문명의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즉 세계문명사를 뒤흔든 종이 전파의 시작이 바로 고선지의 탈라스 전투인 것이다.

 

 

 

 

 

 

 

 

 

 

 

 

 

 

 

 

[ 갑옷 입은 당대(唐代) 무인상(武人像) 모습으로 당장(唐將) 고선지(高仙芝) 形象)

 

 

 

갑옷 - 섬서예천정인진묘출토채색무사용 (陝西禮泉鄭仁秦墓出土彩色武士俑)
투구 - 흑룡강녕안현발해유적출토당대철반 (黑龍江寧安縣渤海遺址出土唐代鐵盤)

 

 

 

 

 

 

 

 

 

 

고선지가 살았던  751년 장안성의 규모

수대 개황 2년 한대의 장안성 동남쪽에 대흥성을 건축하여, 당대에 이르러 이를 장안(長安)으로 고쳤다. 장안성의 성곽규모는 동서규모 9,721m 남북 8,651m에 이르는 중국 고대 역사상 최대의 도시인 동시에 19세기 이전에 세워진 도시 중에서 세계에서 제일 큰 도시였다.

 

궁성과 황성은 성곽내의 북쪽 정 중앙에 위치한다. 앞에는 주작문대가가 있어 성곽의 남문인 명덕문에 직접 통하고, 길의 넓이는 155m이며 길의 양측에는 3m 넓이의 배수구가 있었다. 전체 성곽의 110개 방(坊 : 주거지역)과 2개의 시(市 : 상업지역)으로 분할되었다.


당대에 건조된 대명궁은 장안 성곽의 북쪽 높은 곳에 있어 전체 성곽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3㎢에 달하는 궁전 유지에서 이미 전지(殿址) 30여 개소가 발견되었는데, 그 중에서 함원전, 인덕전 등 대규모의 전당을 포함하고 있다.


장안성내 고선지의 영안방(永安坊)

<長安志>에는 296개소의 제택(第宅)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 소유자를 분석해보면 주로 왕자·공주· 부마· 귀족·권신·환관· 장수· 지방관리·절도사 등의 전·현직 관리를 포함해 당시 사회의 상류층 그룹이 기거했던 곳이다. 당시 인구가 1백만명, 6만 가구에 달했던 장안에 사택이 2백 49개밖에 없었다는 것은 이들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케 하는 것이다.

 

 

<당제국 장안을 제외한 고대 세계 10대도시의 면적 비교>

 

 

순위

도시

명면적(평방킬로미터)

연대(年 代)

TOP

당나라 장안성

84.10

583년

1위

북위 낙양

73.00

493년

2위

명.청 북경

60.20

1553년

3위

원제국 대도

50.20

1267년

4위

수.당 낙양

45.20

605년

5위

명나라 남경

43.00

1366년

6위

한제국 장안

35.00

202년

7위

이슬람 바그다드

30.44

800년

8위

로마제국 로마

13.68

300년

9위

동로마제국 콘스탄티노플

11.999

447년

10위

고구려 평양성

11.85

586년

11위

백제 사비성

10.00

538년

 

 

 

 

1백 8개의 방(坊)으로 구성된 장안이고 보면 방마다 어림잡아 사택이 2∼3개 꼴로 자리잡았던 셈이다. 물론 이들은 일반 민가들과 혼재해 있었다.

장안에 있던 가장 작은 방은 남북의 길이가 500m에서 590m까지, 동서의 넓이는 550m에서 700m이며, 가장 큰방의 경우는 남북의 길이 660m에서 838m, 동서의 넓이는 1,020m에서 1,125m였다. 방은 주위에 성벽이 있고 대부분 각면에 하나씩 모두 4개의 문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해가 뜨면 문을 열고 해가 지면 북을 60번 울려서 닫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사택 가운데 한국인이 거주했던 곳이 무려 8개에 달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고구려 후예가 6택, 백제 후예가 1택, 신라인이 1택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 가운데 특히 고선지, 왕모중(王毛仲),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신당서> <구당서>의 열전에 실린 인물들이다. 또 주택 가운데 구체적으로 위치를 가늠할 수 있게 방향이 기록된 것도 있다.<장안지>에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의 저택, 당 현종의 옹립을 도왔던 왕모중의 저택, 고선지의 주택 위치에 대한 언급이 구체적이다. 

 

고선지의 대저택

당시 장안의 행정구역은 모두 1백 8개 방으로 구성됐다(섬서사범대 馬馳 敎授는 110방을 얘기하기도 한다). 방들은 방위에 따라 다시 16개 구역으로 나뉘었다.

예컨대 ○○隅(모서리), 北(南)門之東(西), 西(東)門之南(北), 十字街東(西)之南(北) 등의 구분이다. 당시 장안거리는 보통 항(巷)·곡(曲)으로 구분됐다. 곡은 소항(小巷)에 해당한다.

 

항·곡은 서로 통하고, 그 폭은 대략 2m 정도로 알려졌다. 이들 대저택은 바로 항·곡에 면해 있었다. 고구려 패망 이후 장안으로 끌려갔던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이 기거했던 주택은 흥녕방 안에 있었다. 구체적으로는 흥녕방 동남우로 적혀 있다. 그러나 동남우의 범위는 상당히 넓어 개략적인 지점만 추론할 수 있을 정도다. 당시 고선지는 우우림 대장군이었다.

 

우우림 대장군은 당의 군대에서 가장 용감하고 전술이 뛰어난 사람에게 주는 직책이었다. 고선지의 저택은 영안방에 존재했었다. 영안방의 고선지 저택은 별택(別宅)으로 영안방의 남북길이는 514.5m이고, 동서가 955.5m이다. 고선지 저택은 감숙 돈황현에 있는 막고굴에 있는 당대 벽화 속에 있는 주택을 참고로 하여 복원하였다

 

아녕 하십니까
자식교육을 그런 악을 배우게 하시요
나폴렝옹 알렉산더 진기스칸 일ㄴ 정복자들은 그들이 세상을 정복한건 배울 가치도 없는 악행을 배우게 하는것이요
힘이 강한자가 힘이 약한자들을 정복하여 살인 노략질 영토 뱃는게 자랑이요
이순신은 정복자 왜구들을 방어한 장군으로 그 성품이 악이없어 성웅이란 호치을 받은 성웅 이순신이요
정복은 피를 부른 악행이고 피를 부르는 정복자들을 방어한 이순신은 악이 아닌 모법이요
누굴 배워야 하겟는가
마귀들 욕마에는 정복자가 최고로 보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