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프리카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9. 21:15

‘동북의 왕’ 장쭤린(張作霖)[중국현대사의 인물]

 

1. 말 고치는 법 배워 팔자 고친 ‘동북의 왕’ 장쭤린

 

 

전쟁의 와중에 마차에서 태어난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왼쪽 셋째)은 장쭤린 사후 약관 28세 때 전 중국의 2인자로 부상했다. 1931년 봄, 수도 난징에서 열병(閱兵)을 하는 장쉐량. [사진 김명호] 


북양정부(1912~1928)의 마지막 국가원수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어렸을 때부터 목수, 찐빵 장수, 어부, 사창가 심부름꾼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워낙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 어쩔 수 없었다. 푼돈이 생기면 사숙과 도박장을 번갈아 출입했다.

 

마적 두목 아들의 가정교사였던 사숙 선생은 툭하면 학생들을 두들겨 팼다. 소년 장쭤린은 사숙에 갈 때마다 작은 쇠몽둥이를 들고 갔다. 하루는 사숙 선생이 장쭤린을 불렀다. “흉기를 소지한 이유가 뭐냐”고 다그쳤다.

장쭤린은 주저하지 않았다. “만약 나를 때리면, 이 몽둥이로 선생님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려고 했습니다.이날 이후, 사숙 선생은 이 황당한 제자를 총애했다. 학비도 받지 않았다.


 “글공부와 도박장은 상극이다. 두 개를 동시에 열중하는 것 보니 싹수가 있고, 인물도 멀끔하다. 높은 자리에 오르게 되면, 내 자식들을 잘 부탁한다. 나도 네 일이라면 견마지로(犬馬之勞)를 다 하겠다.”

사숙 선생은 장쭤린에게 말(馬) 치료법을 익히라고 권했다. “만주인들은 워낙 건장해서 웬만한 병에는 끄떡도 안 한다. 만주는 땅덩어리가 워낙 넓다. 말이 없으면 꼼짝달싹 못한다. 말이 탈이라도 날까 봐 항상 노심초사한다.” 장쭤린은 선생의 권유에 흥미를 느꼈다. 몇 달 배워보니 별것도 아니었다. 토비(土匪)와 기병들 상대로 돈을 모았다.
 


비적이나 다름없는 보험대에서 출발해 관동지역 최고의 가문(關東第一家)을 일군 난세의 효웅(梟雄) 장쭤린의 젊은 시절 모습


지금의 선양(瀋陽) 주둔군 사령관에 해당하는 성징(盛京) 장군의 애마(愛馬)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장쭤린은 장백산 산삼 한 뿌리를 들고 장군을 찾아갔다. “제가 애마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며칠간 산삼을 달여 먹이자 장군의 애마는 벌떡 일어났다.

장군의 하사금을 장쭤린은 사양했다. 대신 보험대(保險隊)를 만들게 허락해 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만주에는 비적들이 많았다. 주민들을 비적들로부터 보호해 주고 돈을 징수하는 무장조직이 보험대였다. 성징 장군의 비호 아래, 장쭤린의 보험대는 하루가 다르게 대원이 늘어났다.

후임 장군 쩡치(增祺·증기)도 장쭤린을 신임했다. 특히 다섯째 부인 선(沈)씨는 친정 동생보다 더 아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선씨는 타고난 미인이었다. 어느 봄날, 혼자 꽃구경 나갔다가 비적들에게 봉변당할 뻔한 것을 장쭤린이 구해준 인연이 있었다.

“비적이 너 같았으면 얼마나 좋았겠느냐”며 온갖 것을 다 챙겨줬다. 무덤 뒤에서 외간 남자를 몰래 만나다가 장쭤린에게 들킨 적도 있었다. 고자질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했지만 장쭤린은 입이 무거웠다.


남편만 오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졸라댔다. “장쭤린이 아니었다면 비적들에게 무슨 험한 꼴을 당했을지 모른다. 조정에 상주해서 관직을 주도록 해라.” 만주 귀족 출신인 쩡치는 귀찮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선씨의 부탁을 들어줬다.

정규군에 편입된 장쭤린의 보험대는 규율이 엄했다. 순식간에 20여 개 마을을 관할했다. 1901년 러시아 군의 습격으로 후퇴하던 도중 마차에서 장남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이 태어났다. 3년 후,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장쭤린은 처음에 러시아 편을 들다가 나중에는 일본 편을 들었다. 그 덕에 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1911년 10월, 남방에서 혁명이 발발하자 중국의 동북, 만주에도 혁명 바람이 불었다. 장쭤린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군대를 몰고 펑톈(奉天)성(지금의 랴오닝(遼寧)성 일부)의 혁명군 진압에 공을 세웠다.


대총통에 취임한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는 장쭤린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연병대신(練兵大臣)과 중장 계급장을 하사했다. 황제를 칭한 후에는 자작 칭호와 함께 만주의 전권을 위임했다. 동북의 왕이나 다름없었다.

장쭤린은 위안스카이의 북양정부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남방의 혁명세력을 대표하는 쑨원(孫文·손문)에게도 거금을 보내며 친근감을 표시했다. 일본과 러시아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틈만 나면 부하들 앞에서 일본을 매도했다.


“일본인들의 요구에 들어주는 척만 해라. 실제로 들어줬다간 동북의 부로(父老)들에게 매국적(賣國賊) 소리를 면치 못한다.”

장쭤린은 머리 회전이 빠르고, 의지가 강했다. 사람 보는 눈도 뛰어나서 적재적소에 인재를 기용했다. 매력도 당대에 따를 자가 드물었다. 특히 집안을 잘 다스렸다. 6명의 부인과 한집에 살며 엄격한 규칙을 요구했다. 부인들 방 앞에 준수사항 10가지를 동판에 새겨서 붙여놨다. 내용도 구체적이다.

“1. 부인들이 정치에 간여하는 것을 엄금한다. 베갯머리에서 아무리 떠들어도 듣지 않겠다.

 2. 여자들끼리 어울려 잡담하는 것을 엄금한다. 모든 사단은 거기서 비롯된다.

 3. 부인들은 서열이 없다. 호칭은 모두 부인으로 통일한다.

 4. 사사롭게 생일 쇠는 것을 엄금한다.

 5. 하인 학대를 엄금한다.

 6. 엄격한 봉급제도를 실시한다. 부인들은 매월 정해진 날짜와 시간에 수령해 가라.

 7. 음식과 반찬은 자녀들 숫자에 비례해 등급제를 실시한다. 부인들은 각자 방에서 자녀들과 함께 끼니를 해결

     해라.

 8. 일할 때와 휴식 시간을 엄격히 지켜라. 외출 활동은 일률적으로 밤 10시를 초과할 수 없다.

 9. 자녀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 훌륭한 선생들을 초빙해 자녀 계몽에 힘써라.

10. 자녀들은 혼인의 자유가 없다. 이 권리는 장쭤린 혼자만이 행사할 수 있다. 이 점을 자녀들에게 매일 각인시

   켜라.”

부인들의 인척과 자녀들에게는 더 가혹했다. <계속> ​

2. 장쭤린 “내 자식이라도 거들먹대면 두들겨 패라”

장쉐량(앞줄 왼쪽 셋째)을 호위한 동북강무당 출신 장교들. 1936년 겨울, 장쉐량은 이들과 함께 시안(西安)에서 장제스를 감금해 2차 국공연합과 항일전쟁을 이끌어냈다. [사진 김명호] 

1918년, 동북 3성(만주)을 장악한 장쭤린은 정규군 양성을 서둘렀다. 사병들은 긁어모으기 쉬웠지만 장교가 부족했다. 신해혁명으로 폐교된 ‘동3성 강무당’ 자리에 ‘동북강무당’ 간판을 내걸고 생도들을 모집했다.


“완벽한 시설을 마련하고, 교관들도 최일류들 중에서 엄선해라. 독일과 미국에도 사람을 보내서 교관들을 모셔와라.”

전국에서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바오딩군관학교 입시를 앞둔 장쉐량(張學良·장학량)도 동북강무당 포병과에 지원했다. 소식을 들은 장쭤린은 반대했다.


 “딴 데로 가라. 입학 며칠 만에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면 내 체면이 깎인다.” 장쉐량이 고집을 부리자 “훈련 받다 죽을지도 모른다”며 허락했다.

1기생 졸업식이 다가오자 주위에서 장쭤린에게 축사를 권했다. 공개된 자리에서 연설을 해본 적이 없는 장쭤린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그래도 자꾸 권했다.


“미래의 골간(骨干)들이라며 직접 길러내신 졸업생들입니다. 자식이나 친조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직접 축하를 해주시는 게 도리입니다.” 장쭤린은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그건 나도 알지만 연설을 해본 적이 없다. 축사건 뭐건 원고가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전쟁판에서만 굴러먹다 보니 머리에 든 게 없어서 만들 재간이 없다.”


국가원수 시절 미군 군사고문과 함께한 장쭤린(왼쪽). 1928년 1월 베이징


부하들이 만들어온 연설문은 품위가 있었다. 장쭤린도 내용이 좋다며 싱글벙글했다. 몇 날 며칠을 방안에 틀어박혀 깡그리 외어버렸다. 표정과 손놀림 등 연습도 철저히 했다. 자신이 생겼다.

졸업식 날 장쭤린은 위풍당당하게 연단에 올랐다. 졸업생들을 보자 갑자기 눈앞이 아득했다. “나 장쭤린은 말 위에서 반생을 보내며 전쟁터를 집으로 여겼다.” 이게 다였다. 다음부터는 생각이 안 났다. 같은 말만 계속 반복했다.

졸업생과 내빈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장내에 침묵이 흘렀다. 진땀을 흘리던 장쭤린이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에이, 빌어먹을(他媽的), 사실은 누가 멋있는 원고를 만들어줬다. 막상 와보니 무슨 놈의 분위기가 이렇게 엄숙한지 갑자기 다 까먹어버렸다.”

그러곤 연단을 내려왔다. 식장을 한 바퀴 돌며 어려 보이는 생도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이는 몇이냐. 고향은 어디냐”에서 시작해 “참 잘생겼구나, 큰 누님이 면회 오면 내게도 알려라”라는 등 온갖 싱거운 소리를 다했다.

장내에 서서히 긴장이 풀리자 다시 연단으로 올라갔다.

“너희들을 보니 정말 기분이 좋다. 하고 싶은 말이 워낙 많다 보니 생각이 잘 안 난다. 천하의 대세가 어떻고, 중국의 미래가 어떻고, 이런 것들은 알 필요도 없다. 삶을 탐하고 죽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된다. 앞으로 천하의 주인은 너희들이다. 공을 세우면 상을 주겠다. 내 일가친척 중에는 별난 놈들이 다 있다. 나를 믿고 거들먹거리면 두들겨 패라. 그런 것들은 맞아 죽어도 상관없다. 보고할 필요도 없다. 내 자식들도 마찬가지다. 앞으로 필요한 게 있으면 내게 말해라. 뭐든지 다 주겠다.” 그리고 자리를 떴다. 박수가 요란했다.

제자리로 돌아가던 장쭤린이 다시 연단으로 올라왔다. “조금 전에 뭐든지 다 주겠다고 했는데, 내가 말을 잘못했다. 나랑 사는 여자들은 줄 수 없다. 달라고 하지 마라.” 장내에 폭소가 터졌다.

동북강무당은 동북군의 요람이었다. 윈난(雲南)강무당. 바오딩(保定)군관학교, 황푸(黃埔)군관학교와 함께 중국의 4대 군관학교 중 하나였다. 개교 일자도 쑨원이 광저우에 설립한 황푸군관학교보다 6년 빨랐다. 훗날 신중국의 장군도 13명을 배출했다

장쭤린에게는 6명의 부인이 있었다. 다들 장쭤린에게 순종했다. 셋째 부인 다이셴위(戴憲玉·대현옥)만은 예외였다. 장쭤린은 31살 때 다이셴위를 처음 만났다. 마을 파출소장 아들과 어릴 때부터 약혼한 사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온갖 방법을 동원해 집으로 데리고 왔다.

 

다이셴위는 옛사람을 잊지 못했다. 분통이 터진 장쭤린은 파출소장 아들을 죽여버리려고 작심했다. 눈치를 챈 파출소장 아들이 도망가자 다이셴위는 방문을 걸어 닫고 장쭤린이 와도 열어주지 않았다. 친정 동생도 속을 썩였다. 술에 취해 거리의 가로등을 모두 깨버리는 바람에 장쭤린에게 총살당했다.

천하의 장쭤린도 다이셴위만은 어쩌지 못했다. 맨몸으로 집을 나온 다이셴위는 불문에 귀의했다. 장쭤린은 비구니가 된 다이셴위를 위해 절을 한 채 지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1916년, 시름시름 앓던 다이셴위가 세상을 떠나자 직접 염(殮)을 하겠다며 절을 찾아갔다. 다이셴위의 유언이라며 그것도 거절당했다. 다른 부인과 자녀들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계속>
   

                
 

​3. ‘국방자금’ 도박에 날린 부하 … 껄껄 웃고 판돈 더 준 장쭤린  


중국의 통치권을 행사하던 육해공군 대원수 시절, 두 아들과 함께한 장쭤린. 1926년 가을, 베이징 중난하이. [사진 김명호] 

장쭤린(張作霖·장작림)은 아는 사람들에게 후했다. 의원들을 매수해 총통 자리에 오른 차오쿤(曹錕·조곤)이 열차 한 량에 수박을 채워서 보냈다. 선물을 받은 장쭤린은 혀를 찼다.


 “체격이 장대한 사람일수록 쩨쩨하고 인색한 법이다. 대범한 척하지만 겁도 많다. 끝까지 성공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남의 공을 탐내다 망신만 당하고 말로가 비참하다. 총통이라는 사람이 수박이 뭐냐. 우리 애들이 고생하게 생겼다.” 그러곤 열차에 아편을 가득 실어 답례했다. 두 사람은 사돈지간이었다.

친화력도 뛰어났다. 수양아버지(干爹)와 수양엄마(干媽)가 40명도 넘었다. 시골 농부에서 시장 아낙네, 고관대작과 명문집안의 노부인 등 성분도 다양했다. 동3성 총독과 위안스카이(袁世凱·원세개)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보낸 돤즈구이(段之貴·단지귀)의 부친도 수양아버지였다. 장쭤린은 한번 맺은 인연을 함부로 하지 않았다. 한 해도 빠짐없이 이들의 생일과 명절을 챙겼다.

한번 쓴 사람은 끝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신임하던 사람을 내치면 남들이 내 안목을 비웃는다. 아무리 측근이라도 잘못을 범하면 과감히 버린다며 단호함을 과시하는 사람이 많다. 체면이 얼마나 손상되는지를 모르는 바보들이다. 이런 조무래기들 떠받들다간 신세 망친다.”

1918년,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다. 독일 군수산업의 명문 크르푸가(家)의 병기창은 기계들을 해외시장에 내놨다. 판매를 위탁 받은 네덜란드 무기상인이 상하이의 신문에 광고를 냈다. 신문을 본 장쭤린은 공병청장 한린춘(韓麟春·한린춘)을 상하이에 파견했다.

상하이에 온 한린춘은 넋을 잃었다. 한 집 건너 도박장, 살벌한 인간세상에 이런 별천지가 없었다. 기계 구입 자금을 탕진한 한린춘은 장쭤린에게 편지를 보내 이실직고했다.


“도박장에서 자금을 날렸습니다. 이제야 비로소 도박에 도가 통한 듯합니다. 득도한 선인들의 기분이 어땠을지 짐작이 갑니다. 여한이 없습니다. 황포강(黃浦江)에 투신하겠습니다.”

편지를 읽은 장쭤린은 한바탕 욕을 늘어놓더니 “내 부하 중에 득도한 놈이 생겼다”며 포복절도했다. 황급히 군수처장을 불렀다.


“내가 사람을 제대로 보냈다. 빨리 100만원을 들고 상하이에 가라. 반은 도박에 쓰고 나머지 반으로 기계를 구입하라고 해라. 강물에 뛰어들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라. 감기라도 걸리면 도박장에서 판단이 흐려진다. 한린춘이 도박에 열중하는 동안 너는 옆에 앉아서 심부름만 해라.”

다시 도박장에 간 한린춘은 본전의 4배를 따자 손을 털었다. 딴 돈을 한 푼도 남기지 않고 기계 구입에 사용했다. 한린춘이 선양(瀋陽)에 도착하는 날, 장쭤린은 직접 역에 나가 “너 같은 부하를 둔 게 영광”이라며 연신 엉덩이를 두드려줬다. 어처구니없는 얘기 같지만 ‘중국의 크르푸’라 불리던 선양병공창(瀋陽兵工廠)은 이렇게 탄생했다


장쭤린의 장남 장쉐량(가운데)은 남방의 혁명세력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왼쪽은 국부 쑨원의 후계자였던 왕징웨이(汪精衛). 오른쪽은 장제스의 처남인 재정부장 쑹쯔원(宋子文). 연도 미상.

​장쭤린은 어릴 때부터 새를 좋아했다. 동북의 지배자가 되자 항공사업에 관심이 많았다. 항공사를 설립했지만 운영이 신통치 않았다. 하루는 말단 직원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 경영에 관한 건의서였다. 편지를 읽은 장쭤린이 말단 직원을 총경리에 기용하자 주변에서 재고를 요청했다.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최말단입니다. 경영이 뭔지 알 리가 없습니다. 경험도 없는 사람에게 중임을 맡기기에는 불안합니다.”

장쭤린은 일축했다.

“나는 사람 기용에 실패한 적이 없다. 더 이상 거론하지 마라. 경영은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다. 타고나야 한다. 매달 돈이나 받으며 익힌 경험은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말단 출신 총경리는 타고난 경영의 귀재였다. 일 년이 지나자 이익금 10만원을 들고 왔다. 장쭤린은 기분이 좋았다. “역시 내 눈이 틀리지 않았다. 이 돈은 상으로 주마. 뭘 해도 좋으니 네 멋대로 써라.” 몇 년 후 청년 총경리는 장쉐량이 중국 최초의 청년회의소(YMCA) 건물을 지을 때 이 돈을 내놨다.

장쭤린은 동북 자녀들의 교육에 관심이 많았다. “교육은 지도자의 의무”라며 각 현(縣)에 세출의 40%를 교육비에 지출하라고 지시했다. 둥베이(東北)대학을 건립할 때 “병력 5만을 감축하더라도 대학을 만들겠다”며 반대 의견을 묵살했다.

장쭤린 집정 기간 동안 동북의 사범학교 학생들은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학비와 기숙사비가 면제였고 식당 반찬도 전국에서 제일 좋았다. 장쭤린의 생일이 돌아오면 일주일간 특식을 제공받았다. 교사 선정에도 신중했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교단에 서서 아는 척하는 사람들이 많다. 강도보다 더 나쁜 놈들이다. 우수한 선생들을 모셔와라.”

인연을 중요시 여긴 장쭤린도 비서실장을 내쫓은 적이 있었다. 이유가 장쭤린다웠다. “8년간 내 옆에 있으면서 반대 의견을 낸 적이 없다. 항상 네, 네 하면서 시키는 대로만 했다. 쓰레기 같은 놈이다.”

​[출처] : 김명호 교수: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 중앙Sunday

너무 좋은점 한쪽면만 부각시키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