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고려시대

구름에 달가듯이 2014. 12. 20. 17:14

고려사의 재발견 Ⅰ[태조왕건①~⑧]

 

박종기 국민대학교 국사과 교수

 

 

1. 태조 왕건 [太祖王建]

 

1] 팔공산 전투 - 싸움꾼 왕건, 팔공산 전투 지고도 천하를 얻다

 

고려 건국의 아버지 태조 왕건(877~943년)은 왕이 되기 전엔 백전노장, ‘천하의 싸움꾼’이었다. 이런 사실을 알아야 왕건의 진면목과 고려왕조의 역사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896년 스무 살의 왕건은 아버지 손에 이끌려 궁예 휘하에 들어간다.

 

이후 20여 년간 싸움판을 전전하다 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고려왕조를 건국한다. 이것으로 싸움은 끝나지 않았다. 이후 무려 18년 동안 견훤의 후백제, 통일신라와 치열하게 자웅을 겨뤄 60세인 936년 마침내 천하를 통일한다. 69세까지 살았지만 싸움판을 오간 게 꼬박 40년이다.

왕건은 자신의 생애를 ‘즐풍목우(櫛風沐雨)’라고 압축한 바 있다(『고려사』 권2 태조 17년(924) 5월조). 이 말은 『장자(莊子)』에서 유래했다. 글자 그대로 ‘바람 불면 머리 빗질을 하고, 비 오면 빗물로 목욕한다’는 뜻으로 해석해야, 왕건의 심정을 압축할 것이다. 싸움판 앞에서 그는 더욱 단단해졌고, 끝내 천하를 움켜쥐었다.

 

 

 

 5000 군사 전멸하고 왕건 혼자 살아남아

왕건의 40년 싸움꾼 인생에서 유일한 패배가 927년(태조10) 11월의 대구 팔공산 전투였다. 백전노장인 왕건에게 가장 치욕스러운 사건이다. 그보다 2년 전인 925년(태조8) 10월 고울부(高鬱府·경북 영천) 성주인 능문(能文)이라는 자가 왕건에게 귀부한다.

 

영천은 경주의 코앞에 있는, 신라의 마지막 보루와 같은 곳이다. 그곳 성주가 귀부한 것은 신라의 자존심에 큰 생채기를 내는 일이었다. 920년 이미 두 나라는 동맹을 맺은 터라, 왕건은 신라의 동요를 염려해 귀부를 거부한다.

 

수일 후 왕건과 견훤은 지금의 선산 부근인 조물군(曹物郡) 전투에서 승부를 가리지 못해 화의를 맺고 인질을 교환한다. 왕건은 사촌동생을 인질로 보낸다. 그러나 이듬해 4월 견훤이 보낸 인질이 병으로 죽자 견훤은 고려의 인질을 죽인다. 반년 만에 이 화의는 깨진다.

 

왕건상

 

고려·신라의 동맹사실을 안 견훤에게 화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두 나라의 동맹은 후백제의 고립을 뜻한다. 견훤은 이를 깨기 위해 먼저 약자인 신라를 공격한다. 927년(태조10) 9월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한 고울부를 공격하는 무력시위를 벌인다. 다급해진 신라는 왕건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해 11월 왕건의 군사가 도착하기 전에, 견훤은 경주를 점령해 왕을 죽이고 왕비를 겁탈하는 잔악한 행동을 한다. 그러곤 경순왕을 즉위시킨다. 왕건은 군사 5000을 이끌고 신라를 구원하러 내려가다 대구 팔공산인 공산동수(公山桐藪)에서 경주에서 북상하는 견훤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자신의 오른팔 격인 신숭겸(申崇謙)과 김락(金樂)이 전사하고, 군사 5000은 전멸한다. 왕건 혼자 겨우 살아남았을 정도로 가장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가장 자세한 전투사실이 다음의 기록이다.

“신숭겸의 처음 이름은 능산(能山)이며, 광해주(光海州) 사람이다. 몸이 장대하고 무용이 있었다. 927년 태조가 견훤과 공산동수에서 싸웠는데, 견훤의 군사가 태조를 포위하여 매우 위급했다. 그때 신숭겸이 대장이 되어 김락과 함께 힘껏 싸우다가 전사했다.

태조는 애통하게 여겨, 장절(壯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 동생 신능길(申能吉), 아들 신보(申甫), 김락의 동생 김철(金鐵)에게 모두 원윤이라는 벼슬을 내렸다. 지묘사(智妙寺)라는 절을 지어 명복을 빌게 했다.” (『고려사』 권92 신숭겸 열전)

전투의 중요성에 비해 내용은 밋밋하다. 오히려 수년 전 방영된 ‘태조 왕건’이라는 TV드라마의 내용이 더 흥미진진한데, 이 전투에서 신숭겸은 태조를 탈출시킨 후 태조의 옷을 입고 장렬하게 전사했다고 한다. 허구이지만 천년 후 재생된 신판 ‘도이장가’라 할 만하다.

 

그렇다면 원판 ‘도이장가(悼二將歌)’를 보자. 1120년(예종15) 10월 서경(평양)에서 열린 팔관회 행사 때 예종이 행사에 등장한 신숭겸과 김락의 우상을 보고 그들의 충절을 기린 노래이다.


“님(*태조 왕건)을 온전하게 하시기 위한/

그 정성은 하늘 끝까지 미치심이여/

그대의 넋은 이미 가셨지만/

일찍이 지니셨던 벼슬은 여전히 하고 싶으심이여/

오오! 돌아보건대 두 공신의 곧고 곧은 업적은/ 오래오래 빛나리로소이다.”

(양주동 박사 번역;『평산신씨 고려대(태)사 장절공 유사』 수록)

두 장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연민의 갈채일까? 아니면 최후의 승자인 왕건을 극적으로 미화하는 노래일까? 두 장수의 충절은 고려 500년 내내 칭송되었다. 조선 중기에 편찬된 삼강행실도에도 신숭겸의 죽음은 ‘장절도(壯節圖)’란 그림으로 남아서 전한다.

 

그러나 이 노래에 담긴 팔공산 전투의 의미를 다르게 읽어야 한다. 왕건은 패했지만, 이 전투를 계기로 오히려 승리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는 역설이다. 이해(927년) 12월 승리에 한껏 고무된 견훤이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다.

“지난날 신라 국상 김웅렴 등이 당신을 신라 서울로 불러들이려 했다. 이것은 마치 자라가 큰 자라의 소리에 응하며, 종달새가 새매의 날개를 부축하려는 것과 같다. 이는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리고 국토를 폐허로 만드는 일이다. 그래서 내가 선수를 써서 군사를 동원하여 신라를 정벌했다.” (『고려사』 권1 태조10년 12월조 인용)

930년 고창군 전투도 후삼국 전쟁 분수령

신라 국상 김웅렴이 왕건을 경주로 불렀다는 표현은 두 나라 동맹을 깨기 위해 견훤이 전략적으로 신라를 침입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는 작은 자라와 종달새에 불과한 고려가 큰 자라와 매인 신라의 품에 안기려 한다면서, 왕건을 조롱한다.

 

그러나 그 후 펼쳐진 후삼국 전쟁에서 견훤이 도리어 패망의 길로 가게 된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팔공산 전투에서 정통왕조에 잔악한 행동을 한 견훤에게 여론의 따가운 화살이 쏟아진 것이다.

 

견훤은 내심 이 전투의 승리에 놀란 성주와 장군들이 두려워 그에게 붙을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여론은 심상치 않았다. 그가 왕건에게 편지를 보낸 건, 자신의 신라 침공은 신라와 동맹한 왕건의 잘못 때문이라며 왕건에게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였다.

견훤은 편지의 다른 구절에서, ‘나는 원래 신라를 존중하고 의리에 충실하고, 신라에 대해 우정과 의리가 깊다’ 라고 한 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인다. 쇠잔한 신라를 만만하게 보았지만, 현실적으로 정통왕조라는 상징성을 간과했던 것이다.

 

왕건은 928년 1월 견훤에게 보낸 답신에서, ‘서울(경주)을 곤경에 빠뜨리고 신라 대왕을 크게 놀라게 했다. 정의에 입각하여 신라 왕실을 높여야 하는데, 그대는 기회를 엿보아 신라를 뒤엎으려 했고, 지극히 높은 신라왕을 당신의 아들이라고 부르기를 강요했다’(『고려사』 권1 태조 11년 1월)고 비난한다.

 

왕건 역시 여론을 의식해 신라를 정통왕조로 인정하고 있다. 조선 최고의 역사가 안정복은 『동사강목』에서 고려가 건국된 918년부터 후삼국을 통일한 936년까지 고려는 정통왕조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은 견훤의 경주 침입 3년 후인 930년 고창군(안동) 전투를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 한다. 여기서 왕건이 승리하자, 고창군 주변 30여 성은 물론 강릉에서 울산에 이르는 동해안의 110여 성의 성주와 장군들도 귀부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견훤의 신라 침략과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분수령이라고 생각된다. 통일신라의 수많은 성주와 장군들이 두 사건을 보면서 존왕(尊王)주의를 내세워 신라를 끝까지 정통왕조로 존중한 왕건에게 지지를 보냈기 때문이다.

 

3년 후 고창군 전투는 이런 신뢰를 확인하는 의식에 지나지 않았다. 견훤은 작은 승리에 도취돼 천하 대권을 놓치는 자충수를 두었다.

 

 

2] 나주 전투 - 왕건, 변방 장수가 전쟁 영웅으로 … 궁예 이어 2인자

 

 

나주에 출정한 왕건이 샘터에서 빨래하던 장화왕후에게 물을 얻어 마시는 장면을 형상화한 나주시 송월동의 조형물. 나주=프리랜서 오종찬

 

927년의 팔공산 전투가 후삼국 전쟁의 향방을 가른 육전(陸戰)의 대표적 전투라면, 나주전투는 당시 해전(海戰)의 대표였다. 903년부터 935년까지 왕건은 나주를 놓고 견훤과 치열한 공방을 벌였다. 한 지역을 두고 이렇게 긴 공방을 벌인 적이 없을 정도였다.

 

그만큼 나주는 후삼국 전쟁의 전략적 거점이었다. 고려 건국 이전 왕건의 행적을 기록한 『고려사』 가운데 ‘태조 총서’의 대부분은 나주전투로 장식돼 있다. 하이라이트는 왕건이 고려국을 건국하기 8년 전인 910년의 전투다. ‘태조 총서’에 기록된 당시 전투상황은 다음과 같다.

“(왕건의 군사가) 나주 포구에 이르자 견훤이 직접 군사를 인솔하고 전함을 벌려 놓았다. 목포에서 덕진포(德眞浦: 지금의 영암 해안)에 이르기까지 육지와 바다의 앞뒤 좌우로 배치된 군대의 위세가 대단했다. 여러 장수들이 두려워하자, 왕건은 ‘근심할 것 없다. 싸움에 이기는 것은 마음을 합하는 데 있지, 숫자가 많은 데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군사를 내어 급히 공격하자, 적의 군함이 뒤로 물러났다. 이때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지르자(乘風縱火),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는 자가 태반이었다. 500여 명의 머리를 베거나 사로잡자, 견훤은 조그마한 배를 타고 도망쳤다. (생략) 견훤의 정예군을 꺾으니, 여러 사람의 마음이 다 안정되었다. 이에 삼한의 땅을 궁예가 태반이나 차지하였다.”


910년 견훤은 보병과 기병 3000명으로 903년에 빼앗긴 나주를 탈환하기 위해 10여 일간 포위한다. 견훤의 반격을 당한 궁예는 왕건에게 정주(貞州: 개성 풍덕)에서 전함을 수리한 후 2500명 군사로 공격하게 한다. 왕건은 먼저 배후인 진도와 고이도(皐夷島: 신안 高耳島)를 공격해 나주를 고립시킨 후, 견훤의 군사와 전투를 벌였다. 이게 위의 기록이다.


이어 왕건은 견훤의 잔당으로 해전에 능하여 ‘수달’로 불린 능창(能昌)을 사로잡아, 나주해전을 승리로 이끈다. 910년에 시작된 전투는 2년 만인 912년에 끝났다.(『삼국사기』권 50 견훤 열전) 나주전투는 이같이 견훤과 궁예의 대리인이 자웅을 겨룬 전투로서, 승리를 거둔 궁예의 태봉국이 견훤의 후백제국을 압도하는 국면을 만들었다.

고려 개방정책을 잉태하다


이 전투의 지휘자 왕건은 단숨에 전쟁 영웅으로 떠올랐다. 이전까지 그는 궁예 휘하의 변방 장수에 불과했다. 나주전투 승리 당시 왕건은 36세였다. 왕건보다 10년 위인 견훤(867∼936년)은 26세 때인 892년 이미 무진주(광주)를 점령한 후 후백제의 군주를 자처했다.

 

더욱이 나주전투 때 견훤은 후백제 군주였다. 왕건은 당시까지만 해도 견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미약한 존재였다. 왕건은 27세 때인 903년(궁예 재위 3년) 수군을 이끌고 금성군(錦城郡)을 정벌하고 주변의 10여 군현을 빼앗은 뒤 금성을 지금의 이름인 나주로 바꿨다. 견훤과의 첫 전투였다.

 

견훤이 다시 나주를 장악하자, 910년 궁예는 왕건을 해군대장군으로 임명하여 견훤에게 대대적인 반격을 가해 승리한다. 변방의 장수 왕건은 이를 계기로 태봉국의 2인자인 시중으로 승진하고, 마침내 궁예를 몰아낸 뒤 고려국을 건설한다.

 

반면에 후백제의 견훤은 근거지 나주를 점령당해, 내륙으로 진출하기 앞서 뒷문 단속부터 해야 했다. 근거지 나주의 상실은 견훤의 천하통일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후삼국 최대 해전 나주전투의 실리는 결국 전투의 종결자 왕건의 몫이 되었다. 나주는 견훤에겐 기억하기조차 싫은 곳이지만, 왕건에겐 천하대권을 꿈꾸게 한 꿈의 무대가 되었다. 뒷날 견훤이 아들 신검에게 쫓겨 선택한 첫 망명지가 나주란 사실은 예사롭지 않다. 대체 나주는 어떤 가치를 지닌 곳일까?  

 신안선 모형도. 2 보존 처리 중인 신안선 구조물

삼국지』에서 제갈량은 적벽대전에서 7일간 기도 끝에 불어 온 동남풍을 이용해 조조의 군사를 대파해 유비의 촉나라를 건국하는 결정적인 공을 세운다.

 

 2000년에 방영된 TV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드라마 작가는 왕건의 군사가 ‘바람을 이용해 (견훤의 배에) 불을 질렀다(乘風縱火)’는 ‘태조 총서’의 기록에 착안해 왕건의 책사 태평(泰評)이란 자가 동남풍을 이용해 승리를 이끌었다고 극화했다.

 

역사의 진실을 외면한 통속 드라마의 한계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승리의 일등공신은 물론 왕건이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숨은 공신이 있다.


1976년 전남 신안 앞바다에 원나라 선적의 ‘신안선’이 발굴되었다. 중국에서 일본으로 보내는 도자기 등 수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최근 발굴이 시작된 고려 선박 ‘마도선’까지 중국과 고려 선박 16척이 산동반도와 한반도 서해안에서 출토, 발굴됐다.

 

특히 2005년 중국 산동성 봉래시에서 발굴된 2척의 선박은 고려의 원양 항해용 선박이다. 고려 당시 서해안 일대에 성행했던 해상교류의 모습을 뒷받침해 주는 증거다. 고려는 어느 왕조보다 해상교류가 활발했던 왕조다.

 

당시 해상교류는 황해(서해)를 중심으로 중국대륙-한반도-일본열도를 축으로 이뤄졌는데, 어떤 학자는 황해를 ‘동아시아 지중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나주는 일본과 중국으로 연결되는 황해 해상물류의 거점지역이자, 동아시아 해상실크로드의 길목에 위치해 있다. 나주전투는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는 해상의 경제 전쟁이었다. 세 영웅이 사활을 건 것은 이 때문이다.


 

완사천. 프리랜서 오종찬

 

바다상인(海商)의 후예, 왕건


왕건의 집안은 대대로 개성에 근거를 두고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바다상인(海商) 출신이다. 이러한 집안 내력을 알아야 왕건이 승리한 배경을 이해할 수 있다. 그의 조상들이 바다상인으로서 축적한 자본과 인맥이 전투의 승리, 나아가 고려 건국의 밑천이 됐다.

 

왕건의 집안과 해상 교역을 통해 오랫동안 유대를 맺어온 서해안 일대 해상세력은 왕건이 나주로 출정할 때 적지 않은 도움을 줬다. 즉 같은 해상세력이라는 친연성이 왕건의 군사와 연대감을 갖게 했던 것이다. 왕건은 그들의 협조를 얻어 황해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왕건은 각 지역의 유력한 세력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고, 그들의 군사·경제적 지원을 받아 전쟁을 치러 나갔다. 그러다 보니 부인이 29명이나 되었다. 뒷날 분란을 염려해 그는 부인의 서열을 매겨, 제1비에서 6비까지가 낳은 소생자에게 왕위 계승권을 부여했다.

 

제1비는 정주(貞州: 지금의 개풍군) 출신의 신혜(神惠)왕후이며, 제2비는 나주 출신의 장화(莊和)왕후다. 1비 사이에 소생이 없어, 2비 소생인 혜종이 왕건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를 정도로 부인의 서열은 매우 중요하다. 주목되는 것은 서열이 가장 높은 두 부인이 모두 서남해 해상세력의 딸로서, 나주전투를 전후해 왕건과 혼인했다는 사실이다.

첫째 부인의 아버지는 정주 출신의 유천궁(柳天弓)이다. 정주는 예성강·임진강·한강이 합류하고, 강화도를 마주하는 황해 중부 해상 교역로의 중심지다. 왕건의 근거지 개경과 인접해 있다. 유천궁은 이곳을 근거지로 한 해상세력이다.

 

왕건은 909년과 914년 각각 2500명과 2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에서 출발하여 나주로 향한다. 914년 70여 척의 군함을 이곳에서 수리한다. 당시 정주는 왕건이 거느린 해군의 발진기지였다. 유천궁은 왕건의 군사에게 식량을 제공할 정도로 왕건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왕건이 궁예를 섬겨 장군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정주를 지나다가 버드나무 고목 밑에서 말을 휴식시키는데, 왕후가 길가 냇가에 있었다. 왕건은 그녀가 덕을 갖춘 모습을 보고, 이 집에 유숙했다. 천궁은 자기 집에서 모든 군사를 풍족하게 먹이고, 딸에게 태조를 모시게 했다. 왕건은 그녀를 부인으로 삼았다” (『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신혜왕후 열전’).

918년 홍유·배현경·신숭겸 등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왕으로 추대하려 할 때 신혜왕후는 머뭇거리는 왕건에게 갑옷을 입히고 궁예를 몰아내게 한 내조의 여인이다. 한편 제2비(장화왕후)는 서남해의 거점지역인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吳多憐)의 딸이다.


“왕후는 일찍이 (나주)포구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꿨다. 얼마 후 왕건이 수군장군으로 나주에 출진하여 배 속에 머물러 있었는데, 시냇가 위에 오색구름의 기운이 있어 그곳으로 가 보았다. 왕후가 빨래를 하고 있었다. 왕건이 그녀를 불러 잠자리를 함께했다. 뒤에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혜종이다” (『고려사』 권 88 ‘태조 후비 장화왕후 열전’).


꿈속에서 용이 배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꾼 장화왕후가 뒤에 왕건과 결합한 사실은 곧 나주 해상세력 오다련과 왕건이 연맹을 맺은 사실을 상징한다. 이같이 해상세력의 딸들이 왕건의 부인으로 가장 높은 서열의 제 1비와 2비가 된 계기는 나주전투였다. 나주전투 승리는 왕건과 혼인을 통해 동맹을 맺은 서남해 해상세력의 협조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그들은 나주전투의 또 다른 숨은 공로자였다.

조선 최고 상인 宋商의 등장에 기여


이외에도 혜성군(慧城郡: 지금의 당진) 출신의 박술희(朴述熙)와 복지겸(卜智謙)도 해상세력 출신이다. 복지겸은 궁예가 횡포하여 민심을 잃자, 배현경·신숭겸·홍유 등과 함께 궁예를 몰아내고 왕건을 추대, 고려를 세운 공신이다.

 

박술희는 936년 후백제 신검군과의 마지막 전투에 참여하여 큰 공을 세웠다. 943년 왕건이 죽을 때, 그에게 군국대사를 맡기고 훈요십조를 전했다. 그는 왕건의 최측근이자 뒤이어 즉위한 왕건의 맏이 혜종의 후견인이다.

고려왕조는 어느 왕조보다 대외무역을 적극적으로 장려하고, 선진문물을 수용하는 데 적극적인 개방정책을 추구했다. 이는 상업과 해상무역을 통해 길러진 바다상인 특유의 개방성을 지닌 왕건 집안의 내력에다,

 

나주전투를 비롯한 왕건의 정벌사업에 협조했던 해상세력의 존재와 관련이 있다. 상업과 무역의 장려, 적극적인 선진문물의 수용 등 고려 개방정책의 전통이 남아 있던 개성에서 뒷날 조선 최고의 상인집단인 송상(松商)이 등장한다.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왕건은 나주전투를 통해 천하 평정의 꿈을 잉태할 수 있었고, 해상세력의 협조를 얻으면서 개방정책이라는 천하 경영의 싹을 심을 수 있었다. 

 

3] 왕건과 궁예 - 이상주의 군주 궁예, ‘실사구시’ 왕건에 무너지다

고려 중기 문장가 이규보는 서사시 『동명왕편』에서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을 영웅 군주의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다. 후삼국시대에도 주몽에 버금가는 영웅들이 역사의 무대를 빛냈다. 궁예, 견훤, 왕건이 그들이다. 그러나 후세의 역사가들은 궁예와 견훤을 선악의 도덕적 잣대로 평가해 영웅적인 면모를 잃게 했다.


“신라는 그 운이 다하여 도의가 땅에 떨어지자, 온갖 도적들이 고슴도치의 털과 같이 일어났다. 심한 자가 궁예와 견훤 두 사람이다. 궁예는 신라 왕자이면서 신라를 원수로 여겨 반란을 일으켰다. 견훤은 신라 백성으로 신라의 녹을 먹으면서 모반의 마음을 품고 수도 경주를 공격해 임금과 신하 베기를 짐승 죽이듯 풀 베듯 했다. 두 사람은 천하의 극악한 사람이다. 궁예는 신하에게 버림받았고 견훤은 아들에게 화를 입었다. 모두 스스로 자초한 짓이다. (생략) 흉악한 두 사람이 어찌 왕건에 항거할 수 있겠는가? 그들은 왕건을 위해 백성을 몰아다준 사람에 불과했다.”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1145년 김부식이 세 영웅을 평가한 내용이다. 뒷날 대부분의 역사서가 베껴 쓸 정도로 김부식의 평가는 모범 답안이 되었다. 아무리 역사가 승자(왕건)의 기록이라지만 지나친 편견이다. 

 

신라 말 고려(후고구려)를 건국한 궁예(?∼918)가 904년 국호를 마진(摩震)이라 고치고 그해 7월에 수도를 철원으로 옮기면서 도성으로 삼았던 궁터. [중앙포토]

  

오다ㆍ도요토미ㆍ도쿠가와에 비유


혹자는 이 세 영웅을 일본 전국시대 영웅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1534~1582),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1543~1616)와 비교하기도 한다. 최후 승자는 도쿠가와지만, 일본인들은 오다나 도요토미를 도덕의 잣대로 일방적으로 폄하하지 않는다.

 

즉 ‘오다가 떡쌀을 찧고, 도요토미가 반죽을 한 천하를 힘 안 들이고 먹은 사람이 도쿠가와’라고 평가한다. 이에 비춰보면 견훤은 오다, 궁예는 도요토미, 왕건은 도쿠가와에 각각 비유할 수 있다.(이재범 『슬픈 궁예』)


필자는 도덕의 잣대를 거두고, 왕건의 쿠데타로 비극적 최후를 맞은 패자(敗者) 궁예의 진면목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려 한다.


918년 6월 왕건은 궁예를 제거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곧바로 즉위 조서를 반포한다. 그 첫머리에 전왕 궁예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전왕은 사방이 무너질 때 도적을 없애고, 점차 영토를 확대해 나갔다. 그러나 나라를 통합하기 전에 폭정과 간사함, 협박으로 세금을 무겁게 하여 백성은 줄어들고 국토는 황폐해졌다. 도를 넘는 궁궐 공사로 원망과 비난이 일어났다. 연호를 훔쳐 왕이라 칭했다. 부인과 자식을 죽여 천지가 용서하지 않았고, 귀신과 사람의 원망을 함께 받아 왕조가 무너졌으니, 경계할 일이다.” (『고려사』권1 태조 1년 6월)


왕건에게 찾아가 쿠데타를 권유한 심복들도 왕건과 같은 진단을 내린다. 왕건의 심복인 홍유·배현경·신숭겸·복지겸은 “삼한이 분열하여 도둑 떼가 다투어 일어나자 지금 왕(궁예)이 그들을 무찌르고 한반도의 땅을 3분하여, 그 반을 차지하여 나라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2기(二紀·24년)가 넘었으나 통일을 못한 채, 처자식을 죽이고 신하를 죽이는 잔학한 짓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습니다” (『고려사』권92 홍유 열전)라면서 궁예를 제거할 것을 권유했다. 궁예 폐위의 이유로 통일의 대의명분을 저버린 점을 든 건 주목할 대목이다. 도덕의 잣대로 궁예를 비판한 김부식의 평가와는 다르다.


궁예는 18년간 왕으로 재위했는데, 24년이 지나도록 삼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말은 무슨 얘기인가? 쿠데타 당시를 기준으로 24년 전은 894년이다. 궁예는 양길 휘하에서 영월 울진을 점령(892년)한 데 이어, 894년 명주(강릉)를 점령한다.

 

궁예는 이때 자신을 따른 군사가 3500명에 달하자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며 독립 세력이 되었다. 세달사(世達寺·강원 영월) 소속 승려 신분을 벗어던지고 죽주(안성 죽산) 호족 기훤(箕萱)의 휘하로 들어간 지 3년 만에 영웅으로 등장한 것이다.

 

그러니까 홍유·배현경 등의 비판은 궁예가 이 시점을 기준으로 24년이 지나도록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는 주장인 셈이다. 896년 궁예는 개성 왕건 부자의 귀순을 받아들이고, 철원을 도읍지로 삼아 사실상 왕조를 건국한다. 삼한 통합을 공언한 건 이 무렵으로 보인다. 901년 고려를 건국한 궁예의 즉위 일성(一聲)은 의미심장하다.


“지난날 신라가 당나라에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여, 평양의 옛 도읍이 무성한 잡초로 덮였다. 나는 반드시 그 원수를 갚겠다.” (『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궁예, 고려ㆍ마진ㆍ태봉으로 국호 개명


궁예는 옛 고구려의 역사와 영광을 회복하고 계승하는 삼한 통합을 천명하여 정통 왕조 신라에 도전장을 던졌다. 신라 헌안왕(혹은 경문왕)의 아들이라는 왕족의 핏줄은 그의 성장에 어떤 도움도 되지 않았다.

 

“왕이 궁중의 사람을 시켜 궁예를 죽이게 하였다. 포대기에 싸인 어린 궁예를 처마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실수하여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쪽 눈이 멀었다. 궁예를 안고 도망가서 힘들고 고생스럽게 길렀다. 10여 세 되어도 놀기만 하자, 유모가 나무랐다. 궁예가 울면서 ‘그렇다면 어머니를 떠나 걱정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하고, 세달사로 가서 중이 되었다.” (『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왕족으로 태어난 이유로 궁예는 죽을 고비를 맞았고, 겨우 왕궁을 탈출하여 유모의 손에서 성장했다. 그런 고난이 자신의 뿌리인 신라 왕실을 부정하고 새 국가를 건설하는 영웅의 자질을 기를 수 있게 했다.

 

바다 상인의 후예로 풍요롭게 성장했고,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궁예에게 의탁한 왕건과는 다른 헝그리 정신이 궁예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그의 국가 경영 의지는 국호에 잘 나타나 있다.

 

901년 건국 후 918년 왕건에게 쫓겨나기까지 궁예는 국호를 고려(901년), 마진(摩震, 904년), 태봉(泰封, 911년)으로 세 번이나 바꾼다. 18년짜리 나라에서 국호가 이렇게 바뀐 예는 이례적이다.


 

철원군 동송읍 관우리에 위치한 사찰 도피안사에 안치된 철조비로자나불좌상.

 

궁예의 미륵불, 혁명적 변화 염원 반영


첫 번째 국호 고려는 고구려와 같은 뜻이다. 6세기 무렵 이미 중국에서는 고구려를 고려라 불렀다. 고구려의 역사와 영토를 계승하겠다는 궁예의 취임 일성이 고려라는 국호를 제정한 것이다.

 

건국 당시 궁예가 지배한 지역은 지금의 강원도와 송악(개성)·강화·김포·양주(서울)·충주·패강진 등 대부분 옛 고구려의 영토였다. 이 지역을 기반으로 국가를 건국했기 때문에 이곳 세력의 호응을 얻기 위해 국호를 그렇게 정했던 것이다.


두 번째 국호 마진(摩震)은 범어 ‘마하진단(摩河震旦)’의 약칭이다. 마하는 ‘크다’, 진단은 동방을 뜻하여, 마진은 ‘대동방국’의 뜻이다.(이병도, 『진단변(震檀辨)』) 궁예는 904년 국호를 마진으로 바꾸면서, 도읍을 송악에서 다시 철원으로 옮기고 청주의 1000호를 이주시킨다. 공주의 호족 홍기도 이때 궁예에게 의탁한다.

 

그 1년 전인 903년, 궁예는 왕건을 통해 후백제의 근거지 나주를 점령한다. 청주·공주·나주는 옛 백제의 전통이 남아 있는 친백제 성향 도시다. 또 상주와 경북 북부 등 신라의 영토를 확보한다. 그러면서 특정 국가를 계승하는 통일 정책을 버리고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우르는 ‘대동방국’ 건설이란 새로운 통일 정책으로 전환한다. 국호 마진에는 그런 상징성이 담겨 있다.


세 번째 국호 태봉(泰封)의 ‘태’는 천지가 어울려 만물을 낳고 상하가 어울려 그 뜻을 같이한다는 뜻이다. ‘봉’은 봉토, 즉 영토다.(이병도, 『삼국사기 역주』) 즉 ‘태봉’은 서로 뜻을 같이해 화합하는 세상이라는 뜻이다.

 

고구려·신라·백제를 아울러 조화를 이룬 통일 국가를 건설하려는 궁예의 이상이 담겨 있다.
궁예는 어려서부터 하층민으로서 세파를 겪으면서 성장했다. 난세의 하층민은 천지개벽의 혁명적 변화를 갈구한다. 현세를 말세로 인식하고 새 세계의 도래를 갈구하는 의식 속에서 그러한 혁명적 변화를 꿈꾸게 된다.


궁예의 근거지 철원에 도피안사라는 사찰이 있다. 이곳에 865년 제작된 금박을 입힌 쇠로 만든 비로자나불이 있다. 이 불상 뒷면에 새겨진 글 속에, 석가불 입적 후 천년이 지나면 말세가 오는 것을 슬퍼하며 이를 구제할 미륵불의 도래를 염원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궁예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약 1세대 전이다. 궁예가 이곳 철원을 도읍지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염원을 갈구한 이 지역 하층민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궁예가 미륵불로 자처한 것은 우연은 아닐 것이다.


“궁예는 미륵불을 자칭하고 머리에 금관을 쓰고 몸에 가사를 입었다. 큰아들을 청광보살, 막내아들을 신광보살로 삼아, 외출할 때 항상 흰 말을 탔는데 말갈기와 꼬리를 고운 비단으로 장식했다. 소년·소녀에게 깃발, 일산과 향내 나는 꽃을 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승려 200여 명을 시켜 범패를 부르며 뒤를 따르게 하였다.” (『삼국사기』권50 궁예 열전)


하층민의 염원을 알던 궁예는 미륵불로 자처하면서, 미륵의 이상향 용화세계를 태봉이라는 국호에 담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이상에 불과했다. 고구려 계승의식을 지지한 송악의 왕건을 비롯한 옛 고구려 지역 출신 현실주의자의 반발은 필연적이었다.

 

궁예는 그로 인해 비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이상주의 군주였던 궁예의 꿈은 현실의 기득권 연합세력에 산산조각 났다. “통일을 완성하지 못한 채 폭정과 인륜을 저버렸다”는 평가는 현실주의자들의 매서운 반격을 담은 선고였다.

[출처] : 박종기 국민대 국사과 교수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Sunday

 

 

4] 견훤의 귀순 - ‘삼한 통합’ 기치 내건 견훤, 人和 실패로 스러지다

 

936년 견훤이 숨진 뒤 왕건이 그의 무덤 가까운 곳에 세운 개태사(開泰寺·충남 논산시 연산면 소재)의 전경. 한을 품고 숨진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왕건의 뜻이 담긴 사찰이다. [중앙포토]

 

“늙은 제가 전하에게 몸을 의탁한 것은 전하의 위엄을 빌려 반역한 자식의 목을 베기 위한 것입니다. 전하께서 신령한 군사를 빌려주어 난신적자를 없애주신다면 저는 죽어도 유감이 없을 것입니다.”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고려 귀순 1년 뒤인 936년(태조19) 6월, 왕건에게 자신의 왕위를 찬탈한 아들이자 후백제의 왕인 신검(神劒)을 토벌해달라고 요청한다. 수십 년간 자웅을 겨뤄왔던 라이벌 왕건의 무릎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아들을 죽여달라는 아비 견훤의 심정은 어땠을까.

견훤은 9년 전인 927년 팔공산 전투에서 왕건에게 치욕의 패배를 안기면서 “그대는 아직도 내가 탄 말의 머리도 보지 못했고, 나의 털 하나 뽑아보지 못했다. (생략) 이제 강약이 분명하니 승부는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네” (『고려사』권1, 태조 10년(927) 12월)라고 왕건을 조롱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10년도 지나지 않아 이런 처지로 뒤바뀌었을까.

935년(태조18) 3월 견훤의 첫째 아들 신검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던 견훤에게 반발해 동생 양검(良劍)·용검(龍劍)과 난을 일으킨다. 신검은 금강을 죽이고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지금의 김제)에 유폐한 뒤 왕위를 찬탈한다. 권력은 부자 사이도 갈라서게 한다는 옛말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한마디로 후백제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이었다

 

 

충남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에 있는 견훤의 무덤. [사진 박종기]

 

왕건, 견훤을 영웅으로 극진히 대접


견훤은 왕건에게 귀부하기 직전, “내가 후백제를 세운 지 여러 해가 되었다. 나의 군사는 북군(北軍)인 고려군보다 갑절이나 많은데도 이기지 못하니, 아마 하늘이 고려를 돕는 것 같다” (『삼국유사』견훤 열전)라고 했다. 후백제의 자중지란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남군(南軍·후백제군)의 군사력을 무력한 존재로 만들어 버렸다. 역사의 경고는 이렇게도 무섭다.

졸지에 왕위를 빼앗기고 유폐된 견훤은 석 달 뒤인 935년 6월 처자식을 데리고 금산사를 탈출, 나주로 도망해 고려에 망명을 요청한다.

 

나주는 견훤이 오랫동안 왕건과 치열하게 싸웠던 전략 요충지였는데 그곳이 자신의 피난처가 될 줄이야. 왕건은 도망 나온 10년 연상의 견훤을 ‘상부(尙父)’라 존대하면서, 최고의 관직과 함께 남쪽 궁궐(南宮)을 거처로 제공했다. 또 양주(楊州:서울)를 식읍으로 줘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생활하게 했다(고려사』권2 태조18년 6월조).

 

지난날 자신에게 엄청난 수모와 치욕을 안긴 적장을 왕건은 영웅으로 극진하게 예우했다. 영웅만이 영웅을 제대로 알고 대접하는 것일까.

견훤이 귀순한 지 5개월 뒤인 그해 11월, 신라 경순왕은 직접 개경에 와 신라의 항복을 받아달라고 청한다. 머뭇거리던 왕건은 “하늘에 두 태양이 없고, 땅에 두 임금이 없다”고 신하들이 간하자, 그해 12월 항복을 받아들인다. 반란 왕조였던 고려는 비로소 한반도의 정통 왕조가 된다.

 

이듬해(936년) 2월, 신검의 매형이자 견훤의 사위인 장군 박영규(朴英規)도 고려에 귀순한다. 박영규는 지금의 순천에 근거지를 뒀던 서남해 해상세력의 대표주자이자, 후백제 해군 주력부대의 사령관 격이었다. 귀순의 도미노 현상이라 할까.

아비를 내쫓고 동생을 죽인 후백제의 정변과 견훤·경순왕의 귀순은 권력을 잡은 지 1년도 되지 않은 후백제왕 신검을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뜨리고, 군사강국 후백제의 종말을 재촉하는 신호탄이 되었다. 반세기 동안 끌어온 후삼국 전쟁의 승부추가 고려로 기울어지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신라 국왕과 사위의 귀순에 고무된 것일까. 견훤은 귀순한 지 1년 만인 936년 6월, 글의 첫머리에 적은 대로, 아들을 처단해달라고 왕건에게 간청한다. 같은 달 왕건은 마침내 출정 명령을 내린다. 태자 무(武:혜종)와 장군 박술희가 이끄는 군사 1만 명을 천안에 보내 전쟁을 준비케 한다.

 

영남과 호남의 갈림길에 위치한 천안은 공주를 거쳐 후백제 수도 전주를 바로 공격할 수 있는 길목이다. 하지만 석 달 뒤인 9월 견훤과 함께 개경을 떠나 천안에 도착한 왕건은 예상과 달리 추풍령을 넘어 일리천(一利川)으로 우회해 후백제군을 공격하는, 성동격서(聲東擊西)식 기만전술을 택했다.

고려와 후백제의 최후 결전지가 된 일리천은 구미시 해평면 낙산리 원촌마을 앞을 흐르는 낙동강 일대다. 왕건은 왜 이곳을 공격했을까. 왕건은 이곳에서 항복한 신라군을 고려군으로 보강하고, 낙동강 물길로 병력과 물자를 신속히 이동시켜 후백제의 측면과 후방을 치려 했다.

 

동시에 신검의 군대가 전세를 역전시키기 위해 낙동강을 통해 기습적으로 신라 지역을 점령하는 걸 막으려는 목적도 있었다. 당시 해로와 수로는 오늘의 철도나 고속도로와 같은, 사람과 물류 이동의 중심 루트였다.

 

왕건이 8만7500명이란 대규모 군대를 동원할 수 있었던 것도 낙동강을 확보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수전(水戰)에 일가견을 지닌 왕건에게 낙동강은 대규모 병력의 신속한 이동을 통해 신라로 진격하려는 후백제군을 견제하고, 그 후방을 기습할 수 있는 전술적 가치를 지녔던 것이다. 이런 기습전이 성공하면서 전세는 일찌감치 왕건 쪽으로 기울어졌다.

“(고려군이)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가자, 문득 칼과 창 모양의 흰 구름이 고려군의 상공에서 일어나더니 적진을 향해 날아갔다. (후)백제 장군들은 병세가 크게 성함을 보고, 갑옷을 벗고 창을 던지며 견훤의 말 앞에 항복해왔다.” (『고려사』권2 태조 19년(936) 9월조)

고려·후백제 최후 결전, 일리천 전투


하늘을 찌를 듯한 고려군의 사기와, 위축돼 싸우기를 포기한 후백제군의 모습을 사서는 위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후백제의 내분과 견훤의 귀순, 신라의 항복으로 사기가 크게 꺾인 신검의 후백제군은 팔다리가 묶인 채 싸움판에 끌려 나온 형국이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군은 후백제군 3200여 명을 사로잡고, 57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당황한 신검의 군사들은 창을 거꾸로 돌려 자신들끼리 서로 찔렀다고 한다. 싸움의 승패는 이 일리천 전투에서 결정 났다.

왕건은 대장군 공훤(公萱)에게 명해 신검이 지휘하던 후백제 중군을 공격하게 했고, 남은 고려군 3개 집단이 뒤를 따랐다. 고려군은 도주하는 후백제군을 쫓아 황산군(黃山郡:논산)에 이르렀고, 다시 탄령(炭嶺:완주군 고산면)을 넘어 마성(馬城:완주군 운주면 금당리)까지 진격했다.

 

이곳에서 신검은 동생·문무백관들과 함께 고려군에 항복한다. 왕건은 신검의 동생 양검과 용검은 귀양을 보냈다가 죽이지만, 신검은 관작을 내리며 살려준다. 고려엔 결코 용서할 수 없는 원악(元惡:악의 우두머리)이었지만, 적국의 국왕에 대한 예우 때문일까. 이 때문에 견훤은 근심과 번민으로 등창이 나 며칠 만에 황산군에서 죽었다.

왕건은 이해 12월 견훤의 무덤에서 가까운 곳에 개태사(開泰寺:논산시 연산면)란 사찰을 창건하고 직접 법회를 연 뒤 다음과 같은 글을 짓는다.

“병신년(936년) 가을 9월에 숭선성(崇善城:일리천 부근)에서 백제 군사와 진을 치고, 한 번 부르짖으니 흉악하고 미친 무리가 와해되었다. 두 번째 북소리에 반역의 무리들이 얼음 녹듯 사라져 개선과 환희의 노래가 하늘과 땅을 울렸다. (생략) 들판의 도적과 산골의 흉도들이 죄과를 뉘우쳐 새 사람이 되겠다고 귀순해 왔다. 나는 간사하고 악한 자를 제거하여, 기울어진 것을 일으키고 털끝 하나 풀 한 포기 다치게 하지 않았다. 이에 부처님과 산신령님의 도움에 보답하기 위해 관리들에게 사원을 창건하게 했다. 절의 이름을 개태사라 한다. 원컨대 부처님의 위엄과 하느님의 힘으로 나라를 붙들어 주십시오.” (『신증동국여지승람』권18 연산현 불우(佛宇) 개태사)

견훤, 장남 살려두자 화병으로 사망?


개태사는 고려의 전승을 기념한 사찰이자, 전쟁에 쓰러진 원혼을 달래려는 사찰이다. 또한 아들의 죽음을 보지 못한 채 원한을 안고 죽은 견훤의 영혼을 달래려는 것도 개태사 건립에 담긴 뜻이었을 것이다. 왕건은 개태사를 지어 견훤을 최후까지 영웅으로 배려하려 했다.

『삼국사기』 편찬자는 견훤이 서남해안(전라·충청)에서 전공을 세워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건 늘 창을 베개 삼아 적과 싸운, ‘침과대적(枕戈待敵)’의 자질 때문이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백제는 삼한의 정통 마한국을 계승한 정통 국가인데, 당나라 때문에 망한 억울함을 씻기 위해 후백제를 건국한다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견훤은 지녔다(이상 『삼국사기』권50 견훤 열전).

 

견훤은 한평생 바람에 빗질하고 빗물에 몸을 씻는 ‘즐풍목우(櫛風沐雨)’의 거친 야전을 누빈 왕건과 다를 바 없는 훌륭한 자질을 지닌 영웅이었다. 『궁예가 삼한 통합의 판세를 키워 모두에 삼한 통합의 꿈을 갖게 한 영웅 군주였다면, 왕건은 일리천 전투의 승리로 마침내 삼한 통합의 꿈을 실현한 영웅 군주였다.

 

그렇다면 견훤은 어떤 군주였을까? 견훤은 당시 아무도 꿈꾸지 못했던 삼한 통합이라는 희망의 깃발을 맨 먼저 세운 영웅 군주였다. 그로 인해 궁예와 왕건은 영웅 군주의 꿈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견훤은 고려군보다 두 배나 강한 군사력과 전술만 믿었지, 나라 안에서 흙벽 무너지는 무서움(土崩), 즉 아들이 아비를 내쫓는 자중지란의 무서움을 깨닫지 못했다. 맹자는 “천시(天時)는 지리(地利)만 못하고, 지리는 인화(人和)만 못하다”면서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3리 둘레의 성과 7리 둘레의 바깥 성을 포위하여, 가장 적절한 때인 천시를 택해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는 것은 천시가 지리만 못하다는 증거다. 성이 높고, 성을 에워싼 못이 깊고, 무기가 강하고, 곡식이 많은데도 성을 버리고 도망치는 일이 있다. 이것은 지리가 인화만 못한 증거다.” (『맹자』공손추 하) 즉, 전쟁에서 승패의 요처는 인화라는 것이다. 안으로 무너지는 흙벽을 단단하게 하는 인화가 지리와 천시를 뛰어넘는다는 사실을 견훤은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5] 왕조의 뿌리 -  송나라 사신 서긍 “왕씨 선조는 고구려의 대족”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에서 발굴된 ‘지안고구려비’의 진위 여부를 놓고 지난 4월 13일 한국고대사학회가 주최한 학술회의는 비를 발견해 분석한 중국학자까지 참석했지만 아무 결론을 얻지 못한 채 끝났다(중앙일보 4월 15일자 ‘고구려비 논란만 더 키웠다’ 기사 참조).

지난해 7월 발견됐던 비문은 아직도 공개되지 않아, 위작설까지 나오고 있다. 공개되지 않은 비문을 분석한 중국의 보고서에 매달려 진행된 학술회의를 지켜보면서, 동북공정의 악몽이 다시 새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심지어 고려 왕조가 한반도에 중국인의 후예가 세운 중국의 세 번째 지방정권이라는 2007년 중국 측의 주장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쇠붙이조차 삼켜버리는 ‘불가사리’ 같은 동북공정이 고려 역사에까지 촉수를 뻗치고 있는 것이다. 그 주장의 내용과 근거를 살펴보는 것도 고려사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고려왕실의 족보인 『성원록』. [건국대 김기덕 교수]

 

930년 후백제와의 고창(지금의 안동)전투에서 승리하여 크게 사기가 오른 고려는 정권의 정통성을 다지기 위해 932년(태조15) 중국 후당(後唐:923~936년)에 사신을 보낸다. 그에 대한 대답으로 후당은 이듬해 3월 사신 왕경(王瓊)과 양소업(楊昭業)을 보내, 왕건을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조서를 보낸다.

 

『고려사』에는 왕건 및 처 유씨(柳氏)의 책봉조서, 책봉과 함께 물품을 보낸다는 조서, 3군의 군사에게 국왕 책봉을 알리는 조서 등 모두 4통의 조서가 실려 있어(권2 태조 16년(933) 3월조 참고), 그런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中 학자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


중국 학자들이 주목한 것은 후비 유씨(柳氏)의 책봉조서다. 그 가운데 “그대(*왕건)는 장회(長淮)의 무족(茂族:번성한 명문의 족속)이며 창해(漲海)의 웅번(雄蕃)이다. 문무를 겸비한 재주로 영토를 보유하고 충효의 절개로 중국의 교화와 풍속을 받았다.” (又詔曰 卿 長淮茂族 漲海雄蕃 以文武之才 控玆土宇 以忠孝之節 來化風)란 구절이 있다.

 

중국 학자에 따르면, 장회(長淮)의 ‘장’은 길다는 뜻의 수식어이며, ‘회’는 중국의 회하(淮河), 혹은 회하 유역이다. ‘창해의 웅번’은 바다 건너 커다란 번국의 제후라는 뜻이다.

 

송나라가 고려 성종을 책봉한 985년(성종4) 조서에도 “항상 백제(*삼한)의 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장회 출신인 너의 족속을 영원히 번창케 하라”(常安百濟之民, 永茂長淮之族;『고려사』권3·성종 4년(985) 5월조)란 구절이 다시 언급돼 있다.

 

중국 학자는 이 두 구절을 근거로 왕건(고려왕실)의 선조는 중국 회하 유역의 명문거족이고, 왕건은 회하 유역 한족(漢族)의 후예로 단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문화체육관광부가 제작한 왕건의 초상.

야성적이면서도 예민한 기운이 감도는 인물로 표현돼 있다.

 

중국 회하 명문거족의 후예인 왕건이 중국의 바다 건너편에 제후국 고려를 건국했다는 것이다. 또한 왕건 책봉조서에 나온 “(그대 왕건은) 주몽이 개국한 상서로움을 이어받아 그 나라의 군장이 되었고, 기자가 번국(蕃國)을 이룩한 자취를 밟았도다” (踵朱蒙啓土之禎 爲彼君長 履箕子作蕃之跡)란 구절도 문제가 됐다.

 

왕건은 조선반도 역사상 주몽과 기자의 뒤를 이어 중국에서 온 통치자로서, 고려왕조의 군장이 되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고려는 한인(漢人)의 후예인 왕건이 세운 왕조이며, 기자조선 고구려에 이어 중국이 한반도에 세운 세 번째 정권이라고 주장했다.

 

[史長樂, ‘당(*후당)나라 명종이 밝힌 고려 태조 왕건의 족적(族籍)’ 『동북사지(東北史地)』2007년 3호(5-6월호)]. 최근 문제의 고구려비가 발견된 지린성에는 동북공정을 처음 발의한 지린성 사회과학원이 있다. 이곳에서 발간된 격월간 역사잡지에서 이런 주장이 나온 것이다.

고려가 중국인의 후예가 세운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이런 황당한 주장을 새삼 거론한 건 ‘지안고구려비’에 대한 중국 학자들의 보고서가 고구려인의 기원을 중국 고대종족의 하나인 고이(高夷)족이라 주장한 사실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고대사 연구자들은 비문의 건립 시기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지만 필자는 다른 생각이다. ‘지안고구려비’를 계기로 중국에서는 중국 내 소수민족의 왕조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란 주장에서 한발 더 나가, 그 건국 주체까지 중국인의 후예로 보려는 방향으로 동북공정식 역사연구 방법론이 확장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문을 공개하지 않으면서, 비문 내용과 관련 없는 고구려인의 뿌리를 건드린 중국 학자들의 보고서에서 동북공정의 또 다른 저의를 읽을 수 있다.

『고려도경』이 동북공정 오류 보여줘


고려가 기자조선과 고구려를 이어 건국됐다는 구절은 오히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알려준다. 그런 사실을 기록한 후당의 조서야말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임을 뒷받침하는 적극적인 증거가 된다.

 

동북공정의 논리에 경도된 중국 학자들에게나 세 왕조는 중국의 지방정권이라는 식으로 읽힐 뿐이다. 그런 잘못된 시각만 걷어내면 위의 기록은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사실을 알려준다. 다른 기록을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고려와 거란의 전쟁 당시 거란 장수 소손녕은,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의 소유다. 그런데도 고려는 우리나라 땅을 침식해 들어와서, 거란이 침략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고려의 서희(徐熙)는 “아니다. 고려는 고구려의 옛 땅에서 일어났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했다. 땅의 경계를 따지자면, 거란의 동경은 모두 우리 영토 안에 있다”고 반박했다.(『고려사』권94 서희 열전)

동북공정식의 논리라면, 서희의 얘기처럼 고구려 땅에 건국한 고려야말로 중국의 지방정권임을 알려주는 더없이 좋은 자료일 것이다. 그러나 영토와 의식의 차원에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서희의 얘기를 그런 뜻으로 받아들일 수 없음은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서희뿐만 아니다.

 

고려·거란 전쟁 뒤 100년이 지난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徐兢)은 “왕씨의 선조는 대개 고구려의 대족(大族)이다. 고씨(高氏)의 정치가 쇠퇴하자, 나라 사람들이 왕건을 어질게 여겨 드디어 왕으로 세웠다. (왕건은) 후당 장흥(長興) 3년(932)에 스스로 권지국사(權知國事)라 칭하고 (후당) 명종에게 봉작을 청하자, (명종은 왕건을) 고려의 왕으로 봉했다.” (『고려도경』 권2 왕씨조(王氏祖))라고 했다.

 

당시 송나라 황제에게 올릴 보고서인 『고려도경』에서 왕건의 조상을 ‘고구려 대족의 후예’라 했다. 또한 고구려 국왕의 성씨인 고씨(高氏)를 이어 왕건이 국왕으로 추대됐다는 표현 속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사실이 반영돼있다. 이런 기록들을 무시하고, 왕건을 중국인(漢人)의 후예로 본 것은 사료 해석의 근본을 망각한 것이다.

“고려왕실은 동이족 중 명문거족” 반론


그런 점에서 왕건의 출신을 ‘장회무족’이라 한 구절은 새롭게 해석할 근거를 얻게 된다. 가장 권위 있는 해석은 다음과 같다. “회수(淮水)라는 이름은 회이(淮夷)들이 많이 살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이는 동이족(東夷族) 가운데 가장 저명한 족속이다. ‘장회무족’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이라는 뜻이다.” (김상기, 『역주 고려사』, 동아대).

중국 황하 상류 지역에서 일어난 동이족은 기원전 12세기 무렵 주나라와 항쟁하면서 점차 하류 지역으로 내려온다.

 

동남 만주와 한반도로 이동한 동이족은 한(韓)·예(濊)·맥(貊)족으로 갈린다. 산둥 반도 쪽으로 이동한 동이족은 우이(嵎夷:청주(靑州)지역, 동부연안), 내이(萊夷:등주 지방), 회이(淮夷:강소성 양주(楊州) 일대, 회수 유역에서 산동성의 동남부 지역), 서융(西戎:서주(徐州)를 중심으로 한 노(魯)의 동남지역)이 된다.

 

특히 회이와 서융은 서주와 춘추시대 한족(漢族)과 대립하면서 그 세력이 약화돼 전국시대에는 겨우 명맥을 유지한다. 서융은 기원전 515년에 오(吳)나라에 망한다. 이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면서 동이족은 한족(漢族) 사이에 분산 배치되면서, 중국 대륙에서 점차 사라지게 된다(김상기, 『동이와 회이, 서융에 대하여』1954).

후당은 고려왕실이 동이족 가운데 명문거족의 후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고 기록했을까. 후당(後唐:923~936년)은 13년짜리 단명 왕조다. 고려왕실의 가계에 대해 자세한 정보를 가질 형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후당은 당시까지 중국에 전해오던 동이족에 관한 사실을 그대로 책봉조서에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고려가 책봉을 요구하는 사신을 보내면서, 그런 사실을 사전에 알려주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고려는 막바지에 이른 후삼국 통합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후당의 지원이 필요했다. 그들과의 친근함을 강조하기 위해 왕건의 본관을 동이족이 번성했던 회수지역과 연결시켜 그렇게 작성했을 수 있다.

 

대체로 그런 유의 책봉조서는 상대국을 존중하여 그들이 보낸 자료에 근거하여 작성했을 개연성이 크기 때문이다. 동북공정으로 인해 오히려 한민족의 조상인 동이족이 기원전 12세기부터 기원 전후까지 중국에서 번성했던 모습을 확인한 셈이다.

 

현재 우리의 역사연구와 서술에서 이런 사실들이 강조되지 않았던 현실이 동북공정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준 건 아닐까 반성해본다.


 

6] 왕실의 조상 - “6대조 호경은 백두산에서 내려온 성골장군”

 

 

개성 송악산 전경. 왕건의 5대조 강충이 술사의 권고를 듣고 삼한 통합 군주 왕건의 탄생을 위해 부소산에 소나무를 심고 송악산으로 이름을 고쳤다. 사진은 1997년 중앙일보 북한 문화유적 취재 답사단이 송악산을 찾았을 때 촬영한 것이다. [중앙포토]

 

934년(태조17) 7월 발해의 세자 대광현(大光顯)이 발해인 수만 명을 데리고 고려에 귀부하자 왕건은 그에게 왕씨 성을 주고 계(繼)라는 이름을 준다. 또한 고려왕실의 족보에 올려 왕족으로 대우한다. 황해도 배천 땅을 주어 거기서 나오는 비용으로 조상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고려사』 권2 세가). 왜 왕건은 이렇게 극진하게 예우했을까? 발해 세자라는 신분 때문일까?

다른 기록을 보자. 왕건은 후진(後晋:936~946년)에서 온 승려 말라(襪囉)를 통해 후진 고조에게 거란을 함께 공격할 것을 제의한다. 왕건은 “발해는 ‘고려와 친척의 나라(吾親戚之國)’ 또는 ‘우리와 혼인한 나라(渤海我婚姻也)’”라면서 그런 발해를 멸망시켜 국왕을 사로잡은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 했다(『자치통감』권 285 後晋紀 開運2년(945)조).

 

이같이 발해를 ‘혼인’ 혹은 ‘친척’ 관계라 한 것은 이전부터 두 나라가 밀접한 관계였음을 알려준다. 또한 발해 세자를 극진하게 대접한 것도 단순한 의례용이 아님을 보여준다.

발해국 세자를 이렇게 대접한 것은 고려왕실의 뿌리, 나아가 고려국의 기원을 알려주는 것은 아닐까? 수수께끼 같은 이 문제를 풀어줄 단서는 『고려사』 첫머리에 실린 ‘고려세계(高麗世系)’다. 이 기록은 현재 남아 있는 고려왕실의 조상에 관한 유일한 기록이다. 왕조가 편찬한 공식 역사서에는 항상 이런 기록이 첫머리를 장식한다. 예를 들어 보자.

용비어천가 vs 편년통록


우리 역사에서 성군으로 추앙받는 조선 세종은 1438년(세종20) 신하의 반대를 무릅쓰고 아무도 볼 수 없는 할아버지 이성계의 역사가 담긴 『태조실록』 ‘총서(總書)’를 읽고, 부실한 내용에 불만을 제기한다. 예컨대 1380년(고려 우왕6) 이성계가 왜구를 크게 물리친 황산대첩 전투 기록은 당시까지도 생존자와 목격자가 있을 것이니 그 사실을 더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이미 완성된 ‘총서’는 어쩔 수 없어 세종은 아예 아버지인 태종 이방원, 태조 이성계와 목조(穆祖:李安社-이성계 고조), 익조(翼祖:李行里-증조부), 도조(度祖:李椿-조부), 환조(桓祖:李子春-부친) 등 6명의 행적을 다시 보완한 역사서를 편찬케 한다.

 

‘해동의 여섯 용이 나시어(海東六龍飛), 하시는 일마다 하늘의 복이시니라(莫非天所扶)’로 시작되는 유명한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1447년)는 이렇게 탄생한다. 조선왕조 건국 후 반세기가 넘은 다음의 일이다.

제왕(帝王)이 천하를 통일하면 이같이 그 조상의 지위와 위상을 제왕에 준하여 높이는 의례를 먼저 행한다. 시호(諡號)를 올린다는 말이 그것이다. 가족, 가계와 조상 등 가문의 뿌리를 중시하는 전근대 동아시아 특유의 조상 숭배 의식에서 기원한 것으로, 어느 왕조에서나 매우 중시되는 의례다. 시호와 함께 그에 걸맞게 조상의 행적을 정리하는 ‘뿌리 찾기’도 함께 이루어진다.

 

 

 

고려왕조 역시 그러했다. 왕건은 천하를 통일한 이듬해인 919년(태조2) 3월 증조부모를 각각 시조원덕대왕(始祖元德大王)과 정화왕후(貞和王后), 조부모를 각각 의조경강대왕(懿祖景康大王)과 원창왕후(元昌王后), 부모를 세조위무대왕(世祖威武大王)과 위숙왕후(威肅王后)와 같이 3대 조상의 시호를 올렸다(『고려사』 권1).

 

고려왕실의 조상은 이로써 처음 역사기록에 등장한다. 그러나 조상의 행적은 제대로 정리할 수 없었는지 당시 기록엔 누락되어 있다. 왕건의 가계가 미천했기 때문일까?

왕건은 역산(歷山)에서 농사짓던 중국 순(舜) 임금과 패(沛) 땅의 평민인 한나라 고조(高祖)는 미천한 출신의 인물이지만 덕과 지혜를 가져 제왕이 되었듯이, 자신 또한 그런 처지에서 왕위에 올랐다고 했다

(『고려사』 권2 태조 26년(943) 4월).

 

그의 말은 당시 잘나가는 신라 귀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미천하다는 겸사(謙辭)이지, 그 때문에 왕실 조상의 행적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아닐 것이다.

고려의 경우 건국 후 250년이 지난 의종(毅宗:1146~1170년 재위) 때 비로소 왕실의 역사가 새롭게 정리된다. 의종은 흔히 술과 연희에 빠진 군주였고, 끝내 보현원이라는 별궁에서 그렇게 즐기다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린 무신들에 의해 왕위를 빼앗긴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권력을 잡은 무신들이 그렇게 기록했을 뿐이다. 의종은 문벌귀족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지만, 그들 대신 환관과 측근 무신을 정치 파트너로 삼아 새 정치를 꾀하려 했다. 그것이 화근이 되어 믿었던 환관과 측근 무신의 손에 쫓겨난 불행한 군주였다.

 

그렇지만 재위 기간 내내 문벌귀족을 누르고 왕실의 중흥과 왕권의 강화를 꾀하려 한 신성(神聖)군주의 면모를 갖고 있었다.

유교이념을 통치이념으로 했던 대부분의 군주와는 달리 의종은 불교와 풍수지리·도참사상 등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운 특이한 캐릭터를 지닌 군주였다.

 

그는 풍수지리에 따라 왕실의 중흥(重興)을 위해 황해도 토산에 대궐 ‘중흥궐’을 세우고, 태조 왕건이 중시한 서경에서 새로운 정책을 발표하고, 그곳에 왕실 중흥의 염원을 담은 중흥사를 창건했다.

 

그는 김관의(金寬毅)라는 역사가에게 고려왕실과 왕조의 역사를 새롭게 편찬케 했다. 『편년통록(編年通錄)』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으나 주요한 내용은 『고려사』의 첫머리에 실린 ‘고려세계(高麗世系)’에 인용되어 있다. 이로써 고려왕실의 뿌리와 고려국의 기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신화와 전설은 역사의 일부


‘고려세계’에는 왕건이 시호를 내린 3대조뿐 아니라 6대조 호경(虎景)과 5대조 강충(康忠)까지 기록되어 있다. 시호를 내릴 당시 3대조인 시조원덕대왕은 4대조가 되고, 대신 당나라 숙종이 3대조로 추가되어 있다.(왕실 세계도 참조)

 

당나라 황실에 혈통을 갖다 붙여 고려왕실을 미화하려 했던 것이다. 또한 6대조 호경이 본처를 둔 채 호랑이인 산신과 혼인했는데 몰래 본처와 관계해 강충을 낳았다든가, 왕건의 할아버지 작제건(作帝建)이 아버지(숙종)를 찾아 중국으로 가다가 풍랑을 만나 바닷속에서 용녀를 만나 고려로 돌아왔다는 것도 그런 목적에서 기록된 것이다.

한편 5대조 강충이 부소산(扶蘇山)의 형세는 좋으나 초목이 없으니 이곳에 소나무를 심어 바위를 드러내지 않으면 삼한을 통합할 자가 태어난다는 술사의 얘기를 듣고 소나무를 심고 산의 이름을 송악산(松嶽山)으로 고친 설화는 왕건의 등장을 예고한다. 비록 신화와 전설로 윤색된 것이지만, 그 속에 당시 사람들의 생각과 가치관이 담겨 있다. 그런 생각과 가치관은 곧 역사적 사실과 자료가 된다.

‘고려세계’에서 읽게 될 역사적 사실은 무엇일까? 최초 조상인 호경은 “스스로 성골장군(聖骨將軍)이라고 하고, 백두산에서 내려와 두루 유람하여 부소산에 왔다”고 한다. ‘성골’은 신라에서 왕이 될 수 있는 고위 신분인데, 거기에다 장군을 덧붙이고 있다. 맞지 않는 호칭법이다.

 

그가 신라 귀족 출신이기보다는 당시 지배계급임을 알려주는 표현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그가 백두산에서 내려와 송악산, 즉 개경에 정착했다는 것이다. 백두산은 옛 고구려 영토며, 발해 역시 백두산의 동북지역에서 건국했다.

 

30년을 한 세대로 할 경우 왕건의 6대조 호경이 살던 때는 700년 무렵이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699~926년)가 건국되는 시기이다. 발해 건국 이전이라면 호경은 고구려 출신이며, 발해가 건국되었더라도 그는 고구려 출신의 발해인이다. 후자일 가능성이 더 크다.

왕건이 발해를 친척의 나라라 하고, 그 세자를 극진하게 대접한 까닭은 이같이 ‘고려세계’에서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따라서 고려국의 기원은 고구려와 발해국에서 찾게 된다. 신화와 전설은 문자기록이 변변치 않던 시기에 스토리텔링의 구전(口傳) 형식으로 오랜 기간 전해 내려온 역사의 일부다.

 

고려 건국 이후 그런 사실이 전해지다가 『편년통록』 편찬 때 채록되어 결국 ‘고려세계’에 남게 된 것이다. 따라서 『편년통록』 이전에 이미 고려왕실에 관한 사실들이 전해 내려온 것이다. 다음의 사실이 그러하다.

지난 호(319호)에 밝힌 대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고려왕실의 조상이 고구려의 대족이라 했다. 그는 이 책의 다른 부분에서 고려의 건국을 서술했는데, 그 이전에 먼저 고구려의 역사를 설명한 다음 고구려 멸망 후 걸중상(乞仲象)의 아들 대조영(大祚榮)이 발해를 건국한 사실을 서술했다. 그런 후 고구려 검모잠의 고구려 부흥운동을 서술했다. 그런 다음 왕건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서술했다(『고려도경』 권1 참고).

고구려와 발해의 역사를 서술하고, 그것을 고려 역사의 전사(前史)에 포함시킨 것이다. 결국 고려는 두 나라에서 기원했고, 그들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짧은 체류기간 그가 서술한 고려역사는 자신의 지식이 아니라 당시 고려로부터 얻은 역사지식에 근거한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그의 역사서술 속에는 당시 고려인의 역사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한 역사인식이 의종 때 편찬된 『편년통록』에 또한 반영되어 있다. 고려왕실과 고려국의 기원은 이같이 의종 때 창작된 게 아니라 오랫동안 전승된 것을 모아 편찬한 것이다. 왕건이 발해를 ‘혼인’ ‘친척’의 나라라 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7]  식민사관의 계략 - 훈요십조 8조 근거로 현종 측근 위작설 주장

 

 

금강 전경. 성호 이익은 “금강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지 않고 굽은 활처럼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형상이라 고려가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중앙포토]

 

‘훈요십조(訓要十條)’는 고려 태조 왕건이 숨지기 한 달 전인 943년(태조26) 4월에 직접 작성한 문서이다. 글자 그대로 ‘교훈이 되는 10가지 조항의 중요한 정책’이라는 뜻의 훈요십조는 고려 왕조가 존속한 500년 내내 중대한 정책을 결정할 때마다 하나의 기준과 근거로 활용되었다.

 

즉 고려 왕조 통치 강령이며, 오늘날 헌법에 준할 정도의 중요한 자료이다. 그런데 훈요십조는 왕건이 지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약 100년이 지난 현종 때(1010~1031년 재위) 현종의 측근인 경주 출신의 신라계 정치인 최항(崔沆)이 작성했다는 주장이 있다.

 

1918년 일본 식민사학자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제기한 ‘훈요십조 위작설’이다. 위작설이 훈요십조 가운데 문제 삼는 구절은 8조이다.

“여덟째, 차현(*차령산맥) 이남과 공주강(*금강) 밖의 산과 땅은 모두 배역의 형세이며, 인심 또한 그러하다. 저 아래 주군의 사람들이 조정에 참여하면, 왕후 국척과 혼인하여 국정을 잡으면 국가를 변란케 할 것이다. 혹은 (고려에) 통합된 원한을 품고 국왕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 난을 일으킬 것이다(其八曰 車峴以南 公州江外 山形地勢 역趨背逆 人心亦然 彼下州郡人 參與朝廷 與王侯國戚婚姻 得秉國政 則或變亂國家 或啣統合之怨 犯비生亂).”

이마니시는 ‘차현 이남과 공주강 밖’ 지역이 지금의 전라도 지방이라는 점을 전제로, 왕건이 나주 출신 부인의 소생을 태자(뒤에 혜종)로 삼은 사실을 들어 왕건이 8조와 같은 내용을 작성할 리 없다고 했다. 지금의 장흥 출신인 정안(定安) 임씨(任氏)가 인종과 의종의 외척인 사실과 최지몽·유방헌·김심언·전공지 등 이 지역 출신 인물이 고려 전기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점도 그 근거라고 주장했다.

 

이마니시는 “태조의 훈요십조는 병란으로 소실되었는데, 최제안(崔齊安)이 최항의 집에서 그것을 얻어 임금에게 바쳐 세상에 전해졌다”(『고려사』권98 최제안 열전)는 기록을 근거로, 최항의 집에서 발견된 훈요십조는 최항의 작품이라 했다.

금지 대상은 특정지역 아닌 反통합 인물


최항은 최언휘의 손자이다. 최언휘는 경주 출신으로 당나라에 유학해 과거에 급제한 뒤 귀국했다. 당시 중요 기록은 모두 최언휘의 손을 거쳤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그는 왕건의 핵심 참모였다. 또한 최항은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인 7대 실록의 편찬 책임자였다.

 

이 7대 실록은 1011년(현종1) 거란의 침략으로 불에 타 없어졌다. 이 최항이 경주 출신의 신라계 인물로서, 후백제에 대한 나쁜 감정 때문에 훈요십조를 조작했는데, 당시 실록 편찬자가 최항의 가짜 훈요십조를 태조의 것으로 잘못 알고 역사책에 기록했다는 게 이마니시의 주장이다.


 

대동여지도에 나타난 금강.

술사들은 이 모양을 반궁수 혹은 배류수라 했다. [사진 국사편찬위원회]

 

그러나 최항의 훈요십조 조작 여부를 떠나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본 이마니시의 전제 자체가 잘못됐다. 그는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작설을 제기했다. 성호 이익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고려 태조(왕건)가 남긴 훈요십조의 잘잘못을 따지지 않겠으나, 지금 우리 성조(聖朝*조선 왕조)의 기반은 전주인데, 도선의 말이 과연 헛된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태조는 한갓 사람을 등용하여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할 줄만 알았지, 하늘의 뜻과 사람의 마음이 남모르는 사이에 옮겨질 줄은 몰랐던 것이다.” (『성호사설』권12 人事門 ‘麗祖訓要’)

성호 이익은 전주 출신인 이성계의 조상들이 함경도 여진 지역으로 이주한 것은 등용을 금지한 훈요십조 때문이라 했다. 또한 이 지역 인물의 등용을 금지한 것은 풍수지리설을 유포한 도선의 생각이 반영된 것이라 했다.

 

그는 다른 글에서 금강의 물길은 개경과 한양을 감싸주지 않고 굽은 활과 같이 등지고 흘러 술사들이 흔히 말하는 반궁수(反弓水) 모양이라서, 등용을 금지한 것이라고 덧붙이기까지 했다(『성호사설』권3 天地門 ‘漢陽’조). 『택리지(擇里志)』를 저술한 이중환(李重煥·1690~1752)도 같은 생각이었다.

“신라 말 후백제 견훤이 이 지역(*전라도)을 차지하고 고려 태조와 여러 번 싸워서, 태조는 자주 위태한 경우를 당했다. 태조는 견훤을 평정한 뒤에 ‘백제 사람을 미워하여 차령 이남의 물길(*금강)은 모두 거꾸로 흐르니, 차령 이남의 사람을 등용하지 말라’는 명을 남겼다.” (『택리지』 팔도총론 전라도조)

이중환은 성호 이익의 ‘반궁수’론을 이어받아 금강의 물길이 거꾸로 흐르는 배류수(背流水)라고 덧붙이고 있다. 참고로 섬진강·영산강·낙동강도 그러해서, 우리나라 3대 배류수에 해당한다(『고려사』 지리지 양주(梁州·*양산)조 참고). 그런데 하필이면 금강만 배류수로 본 것일까?

 

등용 금지 지역을 전라도로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익과 이중환처럼 볼 경우 이 지역(금강)에는 전라도뿐만 아니라 충청도 지역도 포함된다. 전라도로 국한한 사실 자체가 사리에 맞지 않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마니시는 이들의 잘못된 주장을 빌려 위작설을 제기했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8조를 다시 읽어보자. 금지된 대상은 특정 지역이 아니라, 삼한 통합에 반감과 원한을 가진 사람이다. 이들을 등용할 경우 뒷날 화를 불러일으킬 것이라 했다. 반감을 품은 사람들의 지리적 범주를 ‘차령 이남, 공주 밖’으로 에둘러 표현한 것뿐이다.

 

현재 학계는 굳이 지역을 따지자면, 통합전쟁에서 고려에 가장 저항이 심했던 후백제 수도인 전주를 포함해 공주홍성(당시 운주) 지역 정도로 보고 있다. 왕건은 이곳 사람 가운데 통합에 반감을 가진 사람의 등용을 금지하려 했던 것이다.

8조는 지역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


1011년(현종2) 거란의 침입으로 태조에서 목종까지 일곱 국왕의 실록과 함께 많은 기록들이 불탔다. 이 속에 훈요십조도 포함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1013년 9월 소실된 일곱 국왕의 실록을 다시 편찬하기 시작해, 1034년(덕종3) 일곱 국왕의 7대실록 36권이 완성된다. 최제안이 최항의 집에서 발견한 훈요십조도 실록 편찬을 위한 자료 수집 과정에서 발견돼 새로 편찬된 『태조실록』에 수록된 것이다.

고려 후기 역사가 이제현은 훈요십조를 ‘신서십조(信書十條)’라 했다(『익재집』권9 ‘충헌왕세가’). ‘신서(信書)’는 글자 그대로 가장 믿을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글로, 친서이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어 공개할 수 없는 사신(私信)을 말한다.

 

훈요십조의 특성을 잘 드러낸 표현이다. 즉 훈요십조는 공식 문서가 아니라 국왕이나 그 측근 관료들 사이에 비전(秘傳)된 통치의 지침을 담은 내부용 문서다. 약 100년이 지나 다시 실록을 편찬하는 과정에서 하나의 역사 자료로 공개된 것이다.

최항은 천추태후의 살해 위협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른 현종을 옹립한 인물이다. 그는 현종이 즉위한 뒤 현종의 스승과 재상을 역임한 측근이다. 그는 국왕들에게 전해 내려온 훈요십조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목종은 죽기 직전 최항에게 신왕 현종을 보좌할 것을 부탁했다. 이때 왕실에 전래된 훈요십조를 현종에게 전하라는 부탁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이병도, 『고려시대의 연구』). 7대실록 편찬 책임자인 최항의 집에서 훈요십조가 나올 가능성은 충분하다. 훈요십조를 조작할 이유는 없었다.

흥왕사는 덕수현(德水縣)이라는 하나의 현을 옮기고, 그곳에 짓기 시작해 12년 만인 1067년(문종21)에 완공된 고려시대 최대 사찰의 하나다. 건립을 주도한 문종에 대해 관료집단은 크게 반대한다. 재상 최유선(崔惟善)은 이렇게 주장했다.

 

 “우리 태조 신성(神聖)왕의 훈요십조에, ‘국사 도선이 국내 산천의 순역(順逆)을 관찰하여 사원을 세울 만한 곳에 짓되, 후세의 국왕 및 공후(公侯) 귀척(貴戚) 후비 신료들이 다투어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하지 말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폐하의 고려는 선조의 업을 이어받아 오랫동안 태평한 상태입니다. 비용을 절약하고 사람을 사랑하며 성대한 운세를 지켜 후세에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성의 재산과 힘을 소비하여 불필요한 일에 허비하여 나라의 근본을 위태롭게 하십니까.” (『고려사』권95 최유선 열전)

최유선은 신라가 함부로 사원을 지어 지덕을 훼손해 망했다는 훈요십조 2조에 근거해 문종의 흥왕사 건립에 반대한 것이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국왕의 정치를 비판하거나, 주요한 정치 현안에 대한 판단의 근거로 많이 인용됐다. 이런 사례는 많이 찾을 수 있다.

 

고려 당대인도 훈요십조를 사실로 믿었다는 증거다. 훈요십조는 이같이 일종의 헌법과도 같은 취급을 받았다. 이를 위작으로 몰아간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주장은 고려 역사의 출발 자체를 부정하려는 의도와 무관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위작설에서 제기된 지역 차별에 관심을 갖고, 그런 차별의 역사적 근거를 훈요십조의 8조에서 찾는 경우가 없지 않다. 지역 차별이라는 우리 현대사의 어두운 측면과 결합되어 훈요십조를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인데, 학계 연구 성과의 축적으로 8조는 지역 차별과 전혀 관계없는 내용임이 판명되었다.

 

 

8]  본관제(本貫制) - 왕건, 지방세력에게 본관·성씨 주고 충성을 얻다

 

 

안동 김씨와 권씨·장씨 시조의 공덕을 새긴 비석. 이황의 삼공신묘기를 바탕으로 1805년 김희순이 비문을 지었다. 안동시 북문동에 있다. [중앙포토]

 

고려 후기 유학자 이색(李穡)은 지금의 안동 권씨의 유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권씨는 김행(金幸)에서 시작하는 신라의 대성이었다. 김행은 복주(福州*안동)를 지켰는데, 태조가 신라를 치려고 복주에 왔을 때 김행은 천명이 그에게 돌아가는 것을 알고 그에게 고을을 바치고 항복했다. 태조가 기뻐해서 ‘권’이라는 성을 내렸다.” (『목은문고』 권16 현복군 권공 묘지명)

왕건은 후삼국 전쟁의 향배가 걸린 고창(古昌*안동)전투에 승리하자, 승리에 협조한 김행에게 권씨라는 성을 주었다. 이어서 고창을 ‘동쪽지역이 평안하게 됐다’는 뜻의 ‘안동(安東)’이란 이름으로 바꾼다

 

. 김행에게 권이라는 성과 함께 안동을 본관으로 주었던 것이다. 김행과 함께 왕건을 도운 김선평과 장길도 이때 각각 안동 김씨와 안동 장씨의 시조가 된다. 안동을 본관으로 하는 권·김·장씨는 여기서 출발한다.

왕건이 남쪽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지금의 남한강에 이르자, 서목(徐穆)이란 사람이 ‘이섭(利涉:강을 건너는 데 도움을 주다)’했다고 해서 그곳을 이천(利川)군으로 명칭을 바꾼다(『고려사』 권56 지리1 이천군조). 이천을 본관으로 한 서씨 또한 이로부터 유래한다. 왕건이 지방의 유력자에게 성과 본관을 준 대표적인 예다.

 

 

1 고려 때 주민등록증 역할을 한 ‘준호구’. 소지한 사람과 배우자의 4대 조까지 본관과 성이 기록돼 있다. 2 안동 김씨ㆍ장씨ㆍ권씨의 시조들(삼태사)이 썼던 것으로 알려진 구리 도장과 도장함.

 

고려 왕조 때부터 본관·성씨 보편화


대한민국 국민은 대부분 본관과 성을 갖는다. 본관은 시조의 거주지나 근거지 지명을 따서 만들어진다. 성은 시조의 혈통을 표시하거나 같은 혈통을 다른 혈통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호칭이다. 대를 내려가 수십촌으로 촌수가 멀어져도 같은 본관과 성을 가진 사람은 여전히 동족(同族)으로서의 유대의식을 갖는다.

 

본관과 성을 갖는 전통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일까? 김행의 경우와 같이 삼국의 왕족과 지배층은 일찍이 중국과 교류하면서 성씨를 갖기 시작했다. 하지만 본관과 성이 일반인 차원에서 보편화된 건 고려왕조 때부터다.

약 540가문의 계보를 싣고 있는 『씨족원류(氏族原流)』(조종운(1607~1683) 편찬)에서 이씨(李氏)를 예로 들면, 이씨의 본관은 60개가량 된다. 그 가운데 지금의 경북 성주지역을 본관으로 한 이씨는 경산(京山)ㆍ벽진(碧珍)ㆍ광평(廣平)ㆍ성산(星山)ㆍ성주(星州) 등 5개다.

 

성주는 신라 경덕왕 때 성산으로 불렸다가 그뒤 벽진으로 바뀌었고, 고려 태조 23년(940) 때 경산, 경종 6년(981) 때 광평, 충렬왕 34년(1308) 때 성주라 각각 불렸다. 성주 지역을 상징하는 이씨 5개 본관은 모두 고려 때 정해진 군현 명칭을 따르고 있다. 이 가운데 신라 경덕왕이나 고려 초기 때 정해진 명칭을 본관으로 사용한 경우가 가장 이른 시기의 본관이다.

전체 약 60개의 이씨 본관 가운데 절반이 철성(鐵城*철원)·재령(載寧)·전의(全義*연기군 전의면)·우계(羽溪*강릉 옥계면)·조종(朝宗*가평) 등 고려 때 군현이었다가 없어진 경우다. 지금도 남아 있는 경주·전주·광주 등의 본관도 고려 때 처음 정해진 군현 명칭이다.

 

『씨족원류(氏族原流)』에 나온 다른 성들의 본관 명칭도 이런 경향을 따르고 있다. 『택리지(擇里志)』의 저자 이중환(李重煥ㆍ1690~1752)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신라가 말기에 중국과 교류하면서 처음 성씨를 만들었으나, 벼슬을 한 사족(士族) 정도만 성씨를 가졌고 일반 백성은 갖지 않았다. 고려 때 비로소 중국의 씨족제도를 모방하여 성씨를 반포하면서 일반 사람들도 성을 가지게 되었다.” (『택리지(擇里志)』 ‘총론’)

정곡을 찌른 얘기다. 본관은 이같이 고려 때부터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태조 왕건 때 제도화됐다. 왕건은 후삼국 통합전쟁 도중 고려왕조에 협력한 지방 유력 계층에게 성씨와 함께 그들의 거주지를 본관으로 주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난 940년(태조23)에는 이를 전국으로 확대해 실시한다. 이 정책을 ‘토성분정(土姓分定)’이라 한다. ‘토’는 지역·지연의 뜻을 가진 본관을 뜻하고 ‘성’은 혈연의 뜻을 가진 성씨를 각각 뜻하는데 고려 때 본관과 성씨를 합쳐 토성이라 한 것이다. 토성은 원래 중국에서 유래했다.

 

“토성을 (나누어) 주는 것은 일정한 토지를 주어 나라를 세우게 하고, 성을 주어 종족을 세우게 하는 것” (『서경』 우공조)이라는 얘기다. 토성은 천자가 제후에게 행하는 의례인데, 이때 성은 제후의 출생지나 나라 이름을 따라 정해진다(이수건, 『한국의 성씨와 족보』). 예컨대 춘추시대 정(鄭)·송(宋)·오(吳)는 나라의 이름이면서 제후의 성이 된다.

태조는 ‘토성분정’을 시행한 940년에 전국의 군현 명칭을 개정한다. 이 조치는 본관과 성을 정한 토성분정 정책을 보완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그런 예를 잘 보여주는 것이 당시 경주에 대한 군현 개편이다.

“태조 18년(935) (신라) 경순왕 김부(金傅)가 와서 항복하자, 나라를 없애고 그곳을 경주(慶州)라 하였다. (태조) 23년 경주의 관격(官格)을 대도독부로 삼았다. 또한 경주 6부의 이름을 고쳤다.” (『고려사』 권57 지리2 경주조)

935년 신라 경순왕의 항복에 고무된 왕건은 신라 수도 계림을 ‘경사스러운 고을’이라는 뜻의 경주(慶州)로 명칭을 바꾼다. 940년(태조23)에는 경주를 대도독부로 격상시킨 뒤 6부의 명칭을 고치고 각각 토성을 분정했다. 중흥부(*李)ㆍ남산부(*鄭)ㆍ통선부(*崔)ㆍ임천부(*薛)ㆍ가덕부(*裵)ㆍ장복부(*孫)가 그것이다.

경주의 예와 같이 940년 군현 명칭 개정은 해당 지역 유력층의 비중과 전략적 중요성, 교통·생산의 중요성 등을 고려해 경·목·도호(도독)부·군·현·향·부곡과 같이 군현의 격(본관)을 정했다.

 

따라서 본관이 어느 지역인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사회적 위상이 결정됐다. 왕건이 발해 세자 대광현에게 고려 왕족의 성인 왕씨를 준 것은 그만큼 대광현의 위상을 높여주기 위해서였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각 군현마다 토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940년(태조23)에 확정된 본관과 성씨의 기록이다. 안동의 경우 앞에서 언급한 권(權)·김(金)·장(張) 외에 강(姜)·조(曹)·고(高)·이(李) 등 모두 7개 성씨가 안동을 본관으로 한 토성이다.

 

토성이 기록된 곳은 대체로 대동강에서 원산만을 잇는 선의 이남 지역, 즉 통일신라와 고려 초기의 영역 내 군현이다. 고려 때 토성이 제정된 것임을 뒷받침한다.

시행 100년 지나며 일반 양인으로 확산


왜 왕건은 이런 정책을 시행했을까? 그의 독창적인 정책은 아니다. 중국 당나라 제도를 참고해 만든 것이다. 중국 위진 남북조 때 구품중정법(九品中正法)이 시행됐다. 중앙에서 파견된 중정(中正)이란 관리가 지방 인물의 재능과 덕행을 보고 1품에서 9품의 향품(鄕品)을 정해 추천하면, 그에 해당하는 중앙 관직이 지방 인물에게 주어졌다.

 

대체로 영향력 있는 유력자의 자제가 높은 향품을 받게 된다. 자제는 이를 바탕으로 지역(郡) 내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군망(郡望)’으로 행세하면서 문벌을 형성한다. 천하를 통일한 당나라는 기득권층이 된 문벌의 군망을 줄이고,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에 성씨를 주어 권위를 높인다.

 

또한 전국 유력세력과 그들의 성씨를 기록한 『씨족지(氏族志)』와 『군망표(郡望表)』를 편찬한다. 문벌을 억제하고, 천하 통일에 협조한 신흥세력의 도움을 얻어 황제체제를 강화하려는 정책이다.

토성분정 정책은 이 같은 당나라 제도를 모델로 했다. 왕건은 박씨와 김씨가 성골과 진골이 되어 정치·경제를 독점한 통일신라의 폐쇄적인 골품제를 무너뜨리고, 소외된 지방 유력층에 토성을 줌으로써 새 지배층에 편입시켜 신왕조 질서 수립에 도움을 얻고자 했다.

이 정책은 단순히 지방세력에 본관과 성씨를 부여하는 친족제도가 아니라, 반세기에 가까운 내란으로 분열된 지역과 민심을 통합하려는 고려판 사회통합정책이다. 학계에서는 이 정책을 ‘본관제(本貫制)’라 부른다.

초기에 토성을 받은 계층은 지방 유력층으로 백성(百姓)층이라 한다. ‘백성’은 보통 사람들이란 지금의 뜻과 다르게 성씨를 받아 지배질서에 참여할 수 있는 계층이라는 뜻이다. 이들을 당시 ‘유망한 족속’이라는 뜻의 망족(望族)으로 불렀다. 중국의 군망(郡望)과 같은 뜻이다. 당나라 제도를 수용한 증거가 이러한 용어에도 반영되어 있다.

958년(광종9) 과거제 시행은 본관과 성씨 사용이 일반인 계층까지 확산된 계기가 되었다. 1055년(문종9) ‘씨족록(氏族錄)’에 실려 있지 않은 사람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氏族不付者 勿令赴擧; 『고려사』 권73 선거 과거)가 내려졌다.

 

초기에는 과거 응시 자격이 지방 유력층인 향리층 이상에게만 주어졌지만 과거가 시행된 지 100년이 지나면서 씨족록에 성씨와 본관이 등록된 일반인에게도 응시가 허용됐다. 그러면서 성씨와 본관이 확산되기 시작한다. 대체로 11세기와 12세기를 거치면서 노비를 제외한 일반 양인들이 지금과 같이 성씨와 본관을 갖는 게 보편화된다.

 [출처] : 박종기 국민대 국사과 교수 : 고려사의 재발견 / 중앙Sunday

좋은정보 잘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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