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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6. 23:03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Ⅳ [16회~2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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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Ⅰ[ 1회~  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2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Ⅱ[ 6회~1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3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Ⅲ[11회~1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4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Ⅳ[16회~2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5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Ⅴ[21회~2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6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Ⅵ[26회~30회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Ⅶ[31회~35회]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Ⅷ[36회~40회] 



16. 러시아의 남하 대비책 제시한 '조선책략' 

 -  ‘조선은 청·일·미와 함께해야 자강(自强) 도모할 수 있다’ 


러 대규모 병력 집결 소식에 크게 긴장하는 淸·日…조선 양반, 찬반으로 나뉘어 격심한 투쟁 벌이게 돼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은 1880년 일본에 다녀오면서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가지고 와 척사파의 공격 표적이 됐다. 2차 수신사 김홍집의 행차 모습.

강화도조약 제5조에 따라 조선정부는 1877년 음력 10월(이하 동일)까지 부산항 외 2개 항구를 추가 개항해야 했다. 장소는 경기·충청·전라·경상·함경 5도 가운데 연해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였다. 얼핏 별 문제없을 것 같은 제5조는 조선정부와 일본정부 사이에 심각한 갈등을 유발했다.


지정 주체가 명시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라는 내용이 해석에 따라 논쟁 여지가 컸기 때문이다.

조선정부는 개항장 지정 권한은 당연히 조선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1876년 가을에 전라도 진도와 함경도 북청을 개항장으로 지정하고 일본정부에 통보했다. 조선정부는 가능한 수도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개항장을 지정하고자 했던 것이다. 당연한 권한에 따라 지정하고 통보했다 생각한 조선정부는 문제가 없을 것으로 안심하고 달리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조선정부는 강화도조약 제2조에 대해서도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해 조선국 경성에 가서 직접 예조판서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한다’는 제2조의 내용을 조선정부는 기왕의 통신사 파견과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강화도조약 직후에 제1차 수신사 김기수를 파견했을 뿐 상주사절(常住使節) 파견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일본정부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예컨대 제2조의 ‘수시로 사절을 파견’이라는 내용을 기왕의 통신사가 아니라 만국공법에 입각한 상주사절 즉 주재 공사 또는 주재 대사로 해석했다. 또한 제5조의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를 지정하는 권한 역시 조선정부가 아니라 일본정부에 있다고 생각했다.

1877년 8월 메이지 천황은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를 초대 조선 주재 대리공사에 임명했다. 근거는 물론 강화도조약 제2조였다. 당시 일본정부는 강화도조약 제5조에 따라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2곳을 1877년 10월까지 확정하고자 했다. 따라서 초대 대리공사 하나부사의 첫 번째 임무는 한양에 일본 공사관을 개설하고 아울러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 2곳을 확정하는 것이었다.

규슈(九州) 오카야마(岡山)현 출신인 하나부사는 어려서 난학(蘭學)을 공부했다. 26세 때 유학길에 올라 영국·프랑스·미국 등에서 공부하고 27세에 귀국했다. 이후 외무성에서 전문 외교관으로 성장한 그는 37세 젊은 나이에 초대 조선 주재 대리공사가 됐다.

내한(來韓)에 앞서 하나부사는 외무경 데라지마 무네노리(寺島宗則)에게서 비밀훈령을 받았다. 그 내용은 ‘강화도조약 제5조에 따라 두 곳의 항구를 확정할 것’인데, 첫째는 ‘동쪽의 영흥’으로 정하라는 것과 함께 둘째는 ‘전라도 옥구 또는 목포 부근 아니면 경기도 강화에서 인천까지 조사하고 편리한 곳에’ 정하라는 것이었다.

이런 비밀훈령으로 볼 때 일본 외무성은 조선정부에서 통보한 진도와 북청을 완전히 무시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고르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 근거로 내세운 것은 ‘통상하기 편리한 항구’에 대한 지정 권한이 일본정부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원산·인천 개항하라” 압박 나선 하나부사


그런데 비밀훈령에 따르면 일본정부는 하나부사의 내한 이전에 이미 동쪽의 영흥을 개항장으로 확정했다. 반면 서쪽의 개항장은 결정하지 않고 전라도 옥구 또는 목포 아니면 강화에서 인천지역을 조사하고 확정하는 것으로 했다. 



이는 두 가지를 고려한 결과였다. 첫째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러시아는 두만강 하구에 해군력을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에 대응해 일본정부는 한반도 동해안 요충지에 개항장 겸 해군기지가 될 만한 항구를 물색해 영흥으로 결정했던 것이다. 둘째는 조선정부의 반발을 고려해 서해안 개항장은 협상 여지를 열어 놓았던 것이다.

비밀훈령에 따라 하나부사는 전라도 옥구와 목포 부근을 조사하고 강화도 쪽으로 왔다. 하지만 그곳은 날씨가 좋지 않아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채 1877년 10월 20일 한양에 들어왔다. 조선에서는 예조판서 홍우창을 반접관(伴接官)으로 삼아 상대하게 했다. 하나부사와 홍우창 사이에 공사관 개설과 개항장 장소가 협의됐지만 타협의 실마리는 전혀 없었다.

하나부사는 일단 개항장 한 곳은 영흥으로 결정했고, 나머지 한 곳은 추가 조사 후 확정하겠다고 했다. 반면 홍우창은 이미 조선정부에서 진도와 북청으로 결정하고 통보했으므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개항장 지정 권한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쟁점이었다. 아울러 하나부사는 강화도조약 제2조에 따라 한양에 주한 일본공사관을 개설하겠다고 했지만 홍우창은 그것 역시 수용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강화도조약 제2조는 과거의 통신사와 같은 임시사절을 지칭하는 것이지 상주사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이유였다. 이처럼 강화도조약 제2조와 제5조에 대한 해석이 전혀 다르다 보니 홍우창과 하나부사 사이에 타협은 불가능했다. 한 달여 동안 실랑이를 벌이던 하나부사는 별 소득 없이 귀국했다.

1879년 3월 25일, 하나부사는 다시 도쿄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그의 임무는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공사관 개설과 개항장 확정이었다. 그런데 지난번에 별 소득 없이 귀국했기에 이번에는 성사될 때까지 한양에 머물면서 관철시키라는 훈령을 받았다. 조선이 계속 거절할 경우 전쟁 위협도 불사하라는 의미였다.

윤3월 3일 부산에 입항한 하나부사는 동래부사에게 글을 보내 장차 전라도·충청도·경기도 연해를 조사하고 개항장을 결정한 후 한양으로 갈 예정이라고 알렸다.


 윤3월 9일 부산을 출항한 하나부사는 예고한 대로 서해안의 주요 항구들을 조사하면서 북상해 4월 15일에는 인천에 도착했다. 조사를 마친 하나부사는 인천이 개항장으로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조선에서는 이번에도 홍우창을 반접관으로 삼아 하나부사를 맞이하게 했다. 그러나 하나부사는 홍우창이 아니라 예조판서와 직접 담판하고자 했다. 하나부사는 미리 예조판서에게 편지를 보내 원산과 인천을 개항장으로 결정했다고 통보했다.

4월 24일 한양에 들어온 하나부사는 예조판서를 상대로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라고 요구했다. 당연히 예조판서는 이미 조선에서 북청과 진도를 지정했으므로 수용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그러자 하나부사는 훈령 받은 대로 원산과 인천을 개항하기 전까지는 한양에서 떠나지 않을 것이며, 끝까지 거절할 경우 무슨 사태가 발생할지 모른다는 식으로 위협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 양반들은 원산과 인천 개항은 절대 안 된다는 상소문을 올렸다. 원산은 함흥과 가깝고 함흥에는 조선왕실의 왕릉이 있다는 것과 더불어 인천은 수도 한양에 너무 가깝다는 것이 이유였다.

고종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전쟁을 각오하고 북청과 진도를 주장할지 아니면 일본의 요구를 수용해 인천과 원산을 개항할지 선택해야 했다. 둘 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국내 여론과 국가 자존심을 우선한다면 북청과 진도를 주장해 관철시켜야 했다. 그러려면 협상 결렬은 물론 전쟁까지도 각오해야 했지만 전쟁은 두려웠다.

그렇다고 전쟁이 무서워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한다면 국가 자존심이 땅에 떨어질 것이 분명했다. 결국 고종은 타협안을 제시했다. 원산 개항을 수용하고 그 대신 인천은 남양이나 강화도 교동으로 바꾸자는 절충안이 그것이었다. 하나부사는 일단 그 정도만으로도 소기의 성과를 거뒀다고 판단했다.

자존심 강한 조선정부에서 기왕의 고집을 꺾고 원산을 개항하기로 결정한 것만도 큰 변화였기 때문이다. 너무 강하게 밀어붙이다간 역풍을 맞을지도 모른다 생각한 하나부사는 본국과의 협의가 필요하다며 7월 17일 한양을 떠났다. 한양에 들어온 지 근 석 달 만이었다.



이홍장 “주도면밀한 개화정책 필요”

하나부사가 돌아가고 한 달쯤 지나 이홍장의 밀서가 이유원에게 전달됐다. 그 밀서에는 일본의 위협에 더해 러시아의 위협이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밀서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고종은 이홍장의 권고대로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증진시켜야 함은 물론 서구열강과의 개항도 적극 고려해야 했다.

하지만 조선의 주류세력인 양반들, 그중에서도 위정척사파는 개항에 결사반대였다.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이후, 고종은 위정척사파로 불리는 보수 유림들로부터 큰 비난을 받아왔다. 위정척사파는 일본을 섬나라 오랑캐라 부르며 무시했는데 고종은 그런 일본의 무력에 굴복해 강화도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위정척사파의 눈에 고종은 섬나라 오랑캐에 나라의 자존심을 팔아버린 왕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고종이 섣불리 서구 열강에 개항한다면 위정척사파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수 있었다.

당시 조선의 주류는 여전히 위정척사파였다. 고종이 아무리 왕이라고 해도 지지세력 없이 단독으로 개화정책을 추진할 수는 없었다. 개화정책이 성공하려면 고종은 지지세력을 강화해야 했고, 동시에 위정척사파를 설득해야 했다. 그러려면 시간도 필요하고, 은밀하면서도 주도면밀한 개화정책이 필요했다.

이홍장의 밀서는 그렇게 하라는 권고였다. 이홍장의 밀서는 밀서이기에 은밀히 전달됐고, 그에 대한 토론 역시 은밀히 이뤄졌다. 그래서 이홍장의 밀서를 보고 고종이 어떤 생각을 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밀서에 대한 답장이 있으므로 이를 통해 고종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답장에는 “7월 9일에 보내준 편지를 8월 그믐쯤 받아 읽었으나, 그 후 또 이럭저럭 하다가 지금까지 회답을 올리지 못했습니다”는 내용이 있다.


 이유원이 답장을 보낸 시점은 10월이었다. 밀서를 받은 8월 말부터 계산하면 두 달 가까이 된 시점이었다. 그동안 고종이 이유원을 비롯한 측근들과 대응책을 논의하느라 그랬을 것이다.

답장에서는 “서양 각국과 먼저 통상을 맺기만 하면 일본이 저절로 견제될 것이며, 일본이 견제되기만 하면 러시아가 틈을 엿보는 걱정도 없을 것이라는 내용이 당신 편지의 기본 취지입니다”라고 해 밀서의 핵심을 지적했다.

따라서 답장의 핵심 취지 역시 서양 각국과의 통상에 대한 고종의 생각이었다. 그것과 관련해 답장에는 “우리나라는 한쪽 모퉁이에 외따로 있으면서 옛 법을 지켜 문약(文弱)함에 편안히 거처하며 나라 안이나 스스로 다스렸지 외교를 할 겨를이 없습니다”는 표현이 있다. 당장은 서양 각국과 통상을 맺을 수 없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그렇다고 고종이 아주 거절한 것도 아니었다. 예컨대 “우리나라가 오래오래 당신의 덕을 입어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지도를 받는 것이야말로 오직 믿고 의지하는 바입니다”는 내용은 서양과의 개항을 천천히 추진할 것이고, 그때 이홍장의 자문(諮問)하고 싶다는 고종의 뜻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홍장의 밀서를 받은 고종은 두 가지 대비책을 세웠다.

첫째는 이홍장이 천진에 설립한 무기 공장에 조선 기술자들을 파견해 무기 제조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일본의 현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고종은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는 서양 각국과의 통상 조약보다 군사력 강화와 일본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훨씬 더 긴급하다고 판단한 듯하다.

첫째 대비책은 이홍장의 협조 여부에 달려 있었다. 고종은 이홍장에게 특사를 파견해 협조를 구했다. 이홍장은 물론 찬성이었다. 고종은 기술자들을 천진(天津)에 파견하는 문제를 은밀하게 추진했다. 그때 고종은 이 문제를 주로 민영익과 논의했다. 민영익 뒤에는 김옥균·홍영식·박영효 등 이른바 개화파 인사들이 있었다.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는 문제도 은밀하게 추진됐다. 그 문제는 1880년 2월 9일에 결실을 맺었다. 그날 제2차 수신사 파견이 결정됐고, 뒤이어 3월 23일 김홍집이 수신사(修信使)에 임명됐다. 문과 출신인 김홍집은 내외 요직을 두루 거친 정통 양반관료였다.

당시 39세의 김홍집은 하나부사와 동갑이었다. 6월 26일 부산항을 떠난 김홍집은 7월 6일 도쿄에 도착했다. 이후 한 달가량 도쿄에 체류하면서 메이지 천황을 예방했고 일본의 주요 정치인들은 물론 주일 청국공사 하여 장 그리고 참찬관 황준헌과도 접촉했다.



淸도 합종연횡 필요성 제시

김홍집이 도쿄 체류 중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들로부터도 가장 심각하게 들은 경고는 러시아의 위협이었다. 하지만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은 처음에 별로 실감하지 못했다.


예컨대 7월 11일에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와 하나부사가 김홍집을 찾아와 국제정세를 언급했는데 그때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은 “과장된 저의가 아닌 것이 없었다”고 느꼈다.

당시 이노우에 등이 언급한 국제정세는 러시아의 위협이었다. 그때 일본 신문에는 러시아가 두만강 하구에 16척의 군함과 5만 가까운 병력을 집결시키고 장차 남해와 서해를 돌아 중국 산동 반도에 상륙했다가 북경으로 들어가려 한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런 소문은 일본인들을 크게 긴장시켰다. 만에 하나라도 산동반도로 향하는 러시아 함대가 도중에 방향을 틀어 일본 또는 조선을 공격할 가능성이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16척의 군함과 5만 가까운 병력은 일본으로서도 벅찼고 중국으로서도 벅찬 규모였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 본토에는 100만 가까운 대군이 있었다. 따라서 일본인들 사이에는 중국과 일본 그리고 조선이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 서로 힘을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팽배했다.


이노우에가 김홍집에게 역설할 국제정세 역시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 조선과 청나라 그리고 일본의 동북아 3국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런 주장에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사절단은 공감을 느끼기보다는 공갈·협박으로 느꼈던 것이다. 물론 러시아의 위협이 실감나지 않아서였다.

김홍집이 중국인들을 만났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김홍집은 7월 16일 청국 공사관으로 가서 주일공사 하여장을 처음 만나 필담(筆談)을 나눴다.


그때 하여장은 “지난번 러시아 사람들이 귀국 두만강 일대에 군사 시설을 설치한다고 했는데 어떻게 됐습니까? 듣건대 귀국 사람들 중 러시아로 간 사람들에 관한 소식을 선생께서 잘 아신다고 하니 알려주십시오”라고 해 러시아 문제에 관심을 표시했다.

김홍집은 “러시아와는 국경을 접하기는 했지만 통상하지 않아 그들의 사정을 잘 모르고, 함경도 주민들이 러시아 땅으로 들어갔다고 듣기는 했지만 그 역시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릅니다. 나중에 어떻게 해야 할지 알려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이런 대답으로 보면 당시 김홍집을 비롯한 조선 당국자들은 러시아에 대하여 별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하여장 역시 그렇게 짐작하고 러시아의 위협을 강하게 경고할 필요성을 느낀 듯하다. 하여장은 “요사이 각국에는 균세(均勢)의 방법이 있습니다. 만약 한 나라가 강국과 이웃해 후환이 두렵다면 각국과 연결해 안전을 도모합니다. 이 또한 예전부터 부득이하게 대응하는 한 가지 방법입니다”라고 했다.


이는 마치 춘추전국시대에 강국 진(秦)나라를 상대하기 위해 나머지 국가가 합종연횡(合從連橫)했듯이, 조선도 러시아를 상대하기 위해 서구 열강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물론 이 같은 하야장의 언급은 이홍장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김홍집 역시 그런 속뜻을 모르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당시 김홍집은 러시아 위협보다는 국내의 위정척사파가 더 걱정이었다. 그래서 김홍집은 “본국은 옛 법도를 엄격하게 지키며 외국을 홍수나 맹수처럼 질시합니다. 또한 예전부터 서양의 이교(異敎)를 엄격하게 배척해왔습니다. 하지만 가르침이 이와 같으니 귀국 후 조정에 보고하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런 반응으로 볼 때 김홍집은 아직 러시아의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상황에서 더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다고 생각한 하여장은 주제를 돌렸다.

5일 후에 김홍집은 다시 하여장을 찾아 필담을 나눴다. 그때 하여장은 “오늘날 시변(時變)이 이와 같으니 귀국은 서양각국에 개항하고 통상·왕래하며 각국과 더불어 대양을 왕래해야 합니다”라고 직설적으로 권고했다. 며칠 전에는 서양 각국과의 외교·통상을 완곡하게 권고했지만 김홍집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기에 이번에는 단도직입적으로 권고한 것이었다.

김홍집은 “오늘날 시변이 비록 이와 같지만 우리나라는 각국과 왕래할 수 없습니다. 국내 형세가 그렇습니다”라고 여전히 부정적인 입장을 드러냈다. 그러자 하여장은 아예 한 발 더 나아가 미국과의 통상을 권고했는데, 그의 논리는 다음과 같았다.



“친중·결일·연미 해야 러시아 막을 수 있다”



충남 청양군 칠갑산 도립공원에 조성된 최익현의 동상. 최익현은 구한말 위정척사의 대표적 인물이다


“제 생각에는 러시아 문제가 아주 시급합니다. 세계 각국 중 오직 미국만이 민주주의 국가입니다. 또한 국세가 부강합니다. 미국은 세계 여러 나라와 통상하면서 오히려 신의를 준수해 침략하고자 심하게 도모하지는 않습니다. (…) 만약 조선이 굳게 걸어 닫고 거절하다가, 훗날 다른 급변사태가 발생해 어쩔 수 없이 조약을 맺게 된다면 분명 큰 손해를 볼 것입니다. 선생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이런 언급으로 볼 때 당시 하여장은 이홍장의 지시 아래 조선과 미국을 통상시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이홍장이나 하여장은 청나라를 러시아 또는 일본으로부터 지켜줄 서구 열강은 오직 미국뿐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 믿음은 아편전쟁 이래 오직 미국만이 청나라를 침공하지 않았다는 경험에 더해 류큐(琉球) 문제를 둘러싸고 일본과 대결할 때 미국의 전 대통령 그랜트가 중립적인 입장에서 청나라를 지지했다는 경험에서 생겨났다.

게다가 미국은 비록 백인들의 나라이기는 해도 영국에서 독립한 민주주의 국가이기에 유럽 열강보다는 오히려 아시아 각국에 우호적일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다. 그런 믿음과 희망에서 이홍장과 하여장은 조선을 미국과 통상시키기만 하면 조선의 안전이 보장된다고 예상했던 것이다. 이처럼 강경한 하여장의 발언에 김홍집은 더 이상 부정적이 반응을 보이기 어려웠다.

김홍집은 “이렇게 숨김없이 알려 주시니 폐국(弊國)의 사세상 갑자기 교섭할 수는 없다고 해도 어찌 깊이 감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도 말하길 한 나라와 조약을 잘 맺으면 다른 나라도 준수하므로 만국과 교류하는 것이 한 나라와 교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들으니 미국은 서양보다는 동양과 동반자가 되고자 한다는데 정말인지요?”라고 물었다.

이제 김홍집도 러시아의 위협을 좀 더 심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미국이 정말 믿을 수 있는 나라인지 물은 것이었다. 그 질문에 대하여 하여장은 “선생이 언급한 이토 히로부미의 발언은 사실입니다”라고 해 러시아의 위협 및 미국에 대한 신뢰에서는 청나라나 일본 공히 같은 생각임을 드러냈다.

하여장은 필담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판단하고 참찬관 황준헌을 시켜 조선이 취해야 할 대외정책을 책으로 정리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조선책략]이라고 하는 책이 완성됐다. ‘친중국(親中國)·결일본(結日本)·연미국(聯美國)’을 핵심으로 하는 [조선책략]은 조선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조선의 국토는 진실로 아시아의 요충지에 위치해 반드시 다퉈야 할 요해처(要害處)가 되므로 조선이 위험해지면 중국과 일본의 형세도 날로 위급해집니다. 러시아가 영토를 공략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조선으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아! 러시아는 승냥이와 같던 춘추전국시대의 진(秦)나라와 같은 나라입니다. (…) 그러므로 오늘날 조선의 급선무를 계책할 때 러시아를 방어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러시아를 방어하는 계책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바로 친중국·결일본·연미국입니다.”

1880년 8월 4일 김홍집은 도쿄를 출항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8월 28일 한양에 도착한 김홍집은 고종에게 복명하면서 [조선책략]을 바쳤다. [조선책략]을 놓고 조선양반은 찬성과 반대로 갈려 격심한 투쟁을 벌이게 됐다. [조선책략]이 조선 양반사회에 격심한 충격을 던졌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김홍집과 함께 귀국한 개화승 이동인 역시 조선사회에 격심한 충격을 던졌다. 


유교문명과 서구문명 충돌의 시작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 조선이 미국과 연대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울의 봉원사 스님으로 있던 이동인은 강화도조약을 전후해 유대치를 매개로 개화파 인사들과 연결됐다. 이동인은 김옥균·박영효 등의 후원과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 본원사(本願寺)의 부산 포교당 당주(堂主)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의 도움을 받아 교토의 히가시 혼간사(東本願寺)로 밀항, 유학했다. 그때가 1879년 9월이었다.

그 후 7개월에 걸쳐 일본어와 일본 불교를 공부한 이동인은 1800년 4월 동본원사에서 수계식을 마치고 도쿄의 아사노(淺野) 별원(別院)으로 갔는데 그곳은 조선통신사가 머물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동인은 승려로 활약하며 일본의 정객은 물론 서양 각국의 외교관과도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그런데 마침 그 즈음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이 도쿄에 와서 아사노 별원(別院)에서 묵게 됐다.

이동인은 하나부사에게 “저는 국은에 보답하고 불은(佛恩)에 보답하고자 결심해 나라를 위해 어떠한 일이라도 감내하고자 합니다. 원하건대 김 수신사를 만나게 해주십시오”라고 요구했다.

김홍집을 만난 이동인은 일본 옷을 입고 조선어로 말했다. 수상쩍게 여긴 김홍집은 이동인의 정체를 자세하게 물었다. 이동인은 작년에 자신이 밀항한 일, 공부한 일, 사람들을 만난 일 등을 자세히 설명한 후 자신은 다른 뜻은 없고 단지 조선을 문명개화로 이끌고 싶다고 열성을 다해 말했다.

김홍집은 무릎을 치며 말하기를 “오호! 이런 기인남아(奇人男兒)가 있어서 국은에 보답하는구나” 하며 감탄했다. 아마도 김홍집은 불쌍한 조선을 위해 부처님이 예비한 인물이 바로 이동인이라 생각했을 듯하다. 이동인이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인재라고 생각한 김홍집은 함께 귀국할 것을 종용했다.

그래서 이동인은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김홍집을 뒤이어 귀국하게 됐다. 한양으로 간 이동인은 김홍집의 추천을 받아 민영익의 사랑방에 기거했으며 고종과도 면담했다. 민영익과 고종 역시 이동인을 깊이 신뢰하게 됐다. 개화에 미온적이던 고종은 김홍집의 보고와 이동인의 설명을 듣고 개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고종은 [조선책략]과 이동인을 이용해 ‘연미국’을 추진하고자 했다. 반면 위정척사파는 미국의 기독교 문명과 이동인의 불교사상이 조선 유교문명을 파탄시킬 것이라 주장하며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바야흐로 고종의 ‘연미국’을 계기로 유교문명과 서구문명이 조선 땅에서 격심하게 충돌하기 시작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17. 고종 밀사 이동인의 오판과 독단 

- “수구파 제거할 테니 영국군이 도와 주시오”  


국제사회의 현실 외면한 채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열강 상대해

…결과적으로 조선이 추구한 ‘연미국’ 방침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 



1902년 영국과 일본이 맺은 동맹을 풍자한 그림. 남성과 여성으로 형상화된 영국과 일본이 취하고 있는 포즈는 당시 서양과 동양의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서양의 관점에서 일본은 조선보다 훨씬 상대적 진보성을 인정받았다


이동인은 1880년 음력 8월 1일(이하 동일)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일본으로 밀항한 지 만 1년 만이었다. 뒤이어 8월 4일 제2차 수신사 김홍집도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 둘은 남들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따로 출발했던 것이다. 하지만 한양에서 만나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

그런데 도쿄를 떠난 이동인은 한양이 아니라 원산으로 향했다. 원산 포교당에 머물고 있던 오쿠무라 엔신(奧村圓心)에게 귀국 보고를 하기 위해서였다. 이동인을 일본에 밀항시키고 나아가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에서 공부할 수 있게 주선해 준 사람이 오쿠무라였기 때문이다.

8월 24일 원산에 도착한 이동인은 오쿠무라를 찾아가 1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밤늦도록 이야기했다. 다음날 이동인은 오쿠무라와 이별하고 한양으로 갔다. 이동인이 정확히 언제 한양에 도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원산에서 증기선을 탔다면 늦어도 다음날인 8월 26일쯤에는 도착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양에 도착한 이동인은 우선 김홍집을 찾았을 것이 확실하다. 그 다음으로 유대치·김옥균·박영효·민영익·탁정식 등 개화파 인사들을 만났을 것 역시 확실하다.


아마도 이동인과 개화파 인사들은 광교의 유대치 집에서 밤에 회합했을 듯하다. 조금 더 추론한다면 회합하던 밤에 이동인은 유대치 집에서 유숙하며 자신이 보고 겪은 일본 이야기를 했음직하다.

8월 28일 오후 6시께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은 창덕궁 중희당에서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했다. 그 자리에서 김홍집은 러시아의 위협과 그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조선책략]에 제시된 ‘연미국(聯美國)’이 필요성을 역설했다. 고종 역시 동감을 표했다.

하지만 ‘연미국’을 실행하려면 미국과 연락해야 하는데 조선에는 그런 통로가 없었다. 결국 도쿄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서양세력을 오랑캐로 간주하는 국내 여론을 고려하면 공개적으로 요청할 수도 없었다.

고종은 은밀하게 ‘연미국’을 추진하기로 마음먹고 하여장에게 밀사를 파견하기로 했다. 김홍집의 귀국 보고가 있고 나흘 후인 9월 3일에 이동인이 밀사로 발탁됐다. 밀사 이동인의 공식 직함은 ‘정탐위원(偵探委員)’이었다. ‘상황을 정탐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할 위원’이란 뜻이었다.

이동인은 밀사였기에 ‘정탐위원’ 임명장은 비공식적으로 작성, 발급됐다. 그 임명장에는 “지금 엄밀하게 정탐할 일을 위해(今爲嚴密偵探事), 특별히 이동인에게 위임해(特委李東仁), 나아가 항해해(前往航海) 운운”이라고 쓰여 있었고, 큰 도장 세개가 찍혔다. 아울러 이동인의 신분을 보증하기 위해 고종은 나무로 제작한 사발 모양의 밀부(密符)까지 줬다.

이동인의 밀사 임명은 민영익의 추천이 결정적이었다. 당시 민영익은 김옥균 등 개화파 인사들과 어울리고 있었다. 이동인이 광교의 유대치 집에서 개화파 인사들과 회합할 때, 민영익도 참석했을 것이 확실하다.

게다가 민영익은 이미 김홍집으로부터 이동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소문에 더해 직접 이동인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민영익은 크게 감동했다. 그래서 아예 이동인을 자신의 사랑방으로 옮겨 거처하게 했다.

나아가 고종에게 이동인을 직접 만나볼 것을 권유했다. 그 결과 고종은 은밀하게 이동인을 만난 후 대사를 맡길 만하다고 판단해 ‘정탐위원’에 임명했던 것이다.



유대치와 오쿠무라의 ‘은밀한’ 내막



고종 황제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됐던 이동인



이동인은 필요한 준비를 마친 후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달려갔다. 그에게 부탁해 일본 증기선을 타고 밀항하기 위해서였다. 9월 9일 이동인은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도착했다. ‘정탐위원’에 임명된 9월 3일부터 6일 이후였다.

그런데 이동인이 ‘정탐위원’에 임명되기 이틀 전인 9월 1일 이미 유대치가 오쿠무라에게 가 있었다. 당시 유대치는 개화파 인사들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그런 유대치가 이동인에 앞서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간 이유는 뭔가 은밀한 내막이 있었음을 암시한다.

유대치가 9월 1일에 원산에 도착했다면 늦어도 2~3일 전에는 한양을 떠났다고 봐야 한다. 그렇다면 유대치는 8월 27일나 28일쯤 한양을 떠났다는 뜻이 된다.


그런데 8월 27일이나 28일은 이동인이 한양에 도착한 지 1~2일 후였다. 즉 유대치는 이동인을 만난 직후 한양을 떠나 원산의 오쿠무라에게 갔다는 말이 된다.

오쿠무라 일기에 의하면 유대치는 김옥균의 편지를 가지고 왔으며, 우국퇴교(憂國頹敎)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김옥균의 편지가 무슨 내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정부가 개화정책을 잘 추진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내용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아울러 유대치가 오쿠무라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는 ‘우국퇴교’는 ‘걱정스런 국가와 퇴락한 불교’라는 뜻이다. 유교국가 조선의 문제점과 퇴락한 불교의 중흥 등을 놓고 토론했다는 뜻일 듯하다.

이런 사실들로 볼 때 다음과 같이 추론해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8월 27일쯤 광교의 유대치 집에서 회합한 개화파 인사들은 이동인의 귀국 보고를 듣고 난 후 조선의 개화정책에 필요한 방안들을 토론했을 듯하다.

다양한 의견이 교환됐을 것이고, 일단 이동인을 밀사로 추천해 일본에 파견하자는 방안이 결정됐을 듯하다. 물론 이동인을 밀사로 추천하는 일은 민영익이 담당하기로 합의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으로 개화파 인사들을 대표해 김옥균이 오쿠무라에게 편지를 썼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모든 일은 원산의 오쿠무라를 통해야 하므로 유대치가 직접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원산을 방문할 필요성이 제기됐음 직하다.

그 결과 유대치는 이동인을 만난 직후 한양을 떠나 오쿠무라에게 갔을 것이다. 9월 1일 원산에 도착한 유대치는 9월 9일 이동인이 도착하기까지 8일 동안 오쿠무라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는 자세하지 않지만, 조선의 근대화 및 불교중흥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주종이었을 듯하다.

그런데 원산에 도착한 이동인은 곧바로 일본을 향해 출항하지 않았다. 무려 25일이나 더 원산에 머물다가 10월 3일이 돼서야 일본 군함 천성함(天城艦)을 타고 출항했다. 그 이유는 조선 내부에서 ‘연미국’에 필요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아서였다.

고종은 일단 이동인을 ‘정탐위원’으로 삼아 원산으로 밀파한 후 대신들에게 [조선책략]을 검토하게 했다. 아무리 국왕이라고 해도 ‘연미국’을 추진하려면 독단으로는 벅차므로 최소한 대신들의 동의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고종은 영의정 이최응, 좌의정 김병국, 영부사 이유원, 영돈녕 홍순목, 판부사 한계원, 봉조하 강로 등 원로대신 6명에게 [조선책략]을 검토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원로대신 6명은 김병국 집에 모여 [조선책략]을 검토했다.

원로 대신들의 의견은 갈렸다. 적극적으로 찬성하는 대신도 있었지만 시기상조임을 들어 반대하는 대신도 있었다. 그런 의견들을 조율한 결과가 ‘제대신헌의(諸大臣獻議)’라는 이름으로 고종에게 보고됐다.

헌의에 의하면 원로대신들은 전반적으로 [조선책략]에 공감을 표시했다. 다만 ‘친중국·결일본·연미국’에 대해 약간의 이견을 표시했다. 예컨대 ‘친중국’에 대해서는 ‘이미 중국과 친한데 더 친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의문을 표시했다.

‘결일본’에 대해서는 ‘우리의 성신(誠信)이 부족했습니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냈다. 마지막으로 ‘연미국’에 대해서는 ‘미국의 배가 와서 국서를 보낸다면, 좋은 말로 답해야 합니다’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동인이 하여장보다 사토 먼저 만난 이유



견미(遣美)사절단 정사(正使) 민영익이 1883년 미국으로 건너갈 때의 모습



요컨대 제대신헌의는 ‘친중국’에 대해서는 더 보탤 것이 없고, ‘결일본’에 대해서는 우리의 성신을 더 보여야 하며, ‘연미국’에 대해서는 미국의 요청이 있으면 적극 화답하자는 취지라고 요약할 수 있다. 고종은 9월 8일 영의정 이최응과 ‘연미국’에 대해 밀담하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이에 고종은 ‘제대신헌의’와 ‘영의정과의 밀담’을 문서로 작성해 이동인에게 보냈다. 그 두 문서를 근거로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의미였다. 이동인은 그 두 문서를 9월 26일 받았다. 뒤이어 9월 30일 탁정식이 도착했다.

그는 이동인과 마찬가지로 승려 출신의 개화파 인사였다. 당시 탁정식은 이동인의 수행비서 자격으로 일본에 밀파됐다. 이동인과 탁정식은 10월 3일 천성함을 타고 일본으로 출항했다. 그날 유대치 역시 원산을 떠나 한양으로 돌아갔다.

이동인과 탁정식은 1880년 10월 13일 저녁 도쿄에 도착했다. 탁정식과 헤어진 이동인은 곧바로 영국공사관의 이등서기관 어니스트 M. 사토를 찾아갔다. 이동인은 예전 도쿄에 체류할 때 사토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준 인연이 있었다. 당시 이동인은 영국과의 수호조약을 염두에 두고 사토를 찾았고, 그 인연으로 한국어를 가르치게까지 됐다.

사토를 처음 만났을 때 이동인은 자신을 조선 한양 출신의 ‘아사노(朝野)’라고 소개하면서 그 뜻을 ‘조선 야만’이라 했다고 한다. 아마도 이동인은 자기 자신은 물론 조선 자체도 ‘야만’이므로 그 ‘야만’을 극복해야 한다는 뜻에서 자기 이름을 ‘아사노’라 한 듯하다. 사토는 오랜만에 재회한 이동인을 위해 작은 방 하나를 내줬다. 이동인은 도쿄에 체류하는 동안 그곳에서 거처했다.

사토 문서에는 당시 이동인이 왜 사토를 제일 먼저 찾았는지, 또 사토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등등이 상세히 기록돼 있다. 먼저 이동인은 사토에게 조선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조만간 외국과 수호 통상할 예정임을 알렸다.

이런 언급은 조선이 영국과도 수호 통상할 수 있다는 언질이기도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이동인은 몇 주 이내에 개화파 인사들이 현재의 수구파 관료들을 몰아낼 예정이라는 언급도 했다.

이 언급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이동인의 언급이 사실이라면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정책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권력 장악이 필요하고, 권력 장악을 위해서는 수구파 관료들을 몰아내야 한다고 결의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는 방법이 중요한데, 그 방법은 평화적일 수도 있고 폭력적일 수도 있다.

평화적인 방법은 고종을 설득해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방법이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그럴 경우에는 부득이 폭력적인 방법을 써야 하는데, 그것은 결국 무력정변을 일으키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즉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권력 장악을 위해 무력정변도 고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동인은 사토에게 수구파 관료 축출을 언급하면서 영국군의 파병을 요청했다고 한다.

개화파가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고 근대화를 추구한다면 당연히 위정척사파 양반들이 격렬하게 반발할 것이 예상됐다. 조선 병력만으로는 그들의 반발을 제압할 자신이 없기에, 이동인은 영국군의 파병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동인이 언급한 수구파 관료 축출 및 영국군 파병 요청 등은 그의 임무와는 아무 관계없는 일들이었다. 고종이 이동인을 밀파한 이유는 ‘연미국’을 실현하기 위해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것이었을 뿐 수구파 관료 축출이나 영국군 파병 요청 등은 명령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동인은 도쿄에 도착하는 즉시 하여장을 찾아가는 것이 마땅했다. 하지만 이동인은 하여장을 찾지 않고 대신 사토를 찾았다. 그것은 순전히 이동인 개인의 독단적인 행동이었다.

사토 문서에 의하면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개화정책을 놓고 심각하게 분열했다고 한다. 즉 개화정책에 필요한 핵심 동맹국을 어느 국가로 정해야 하는지를 놓고 각자 생각이 달랐던 것이다. 일부 인사는 [조선책략]에 언급된 대로 미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러시아를 막기 위한 목적뿐 아니라 청나라의 간섭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미국과의 동맹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개화파 내에서도 청나라에 적대감을 가진 급진적인 인사들이 주도했다.

반면 일부 인사는 미국 대신 청나라를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나라가 예전만은 못하다고 해도 여전히 동북아의 대국이고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런 주장은 이른바 온건 개화파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내부로 사분오열됐던 조선의 개화파



민영익 일행이 갑신정변 직전(1884년)에 촬영한 사진.


기념앨범을 들고 있는 이가 서광범, 중앙에 학모를 쓴 소년이 박용하다. 이외에도 유길준·홍영식·김옥균 등이 있다. / 사진제공·독립기념관



그 외에도 또 하나의 주장이 더 있었다.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토 문서에 의하면 그런 주장은 오직 이동인에 의한 것이었다.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하자는 이동인 이외에 아무도 동의하지 않은 것은 개화파 인사들이 당시 국제 질서를 잘 몰랐기 때문이었다.

 이를 답답하기 여긴 이동인은 영국과의 동맹이 중요하다고 역설했을 뿐만 아니라 밀사로 파견된 기회를 이용해 자신이 독단적으로 사토를 만나 영국군의 파병을 요청했던 것이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당시 개화파는 수구파 관료들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한다는 대원칙에 대해서만 의견 통일을 이뤘고, 그 뒤 어떤 방식으로 근대화를 추진할지에 대해서는 의견 통일을 이루지 못 한 상황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당시 개화파 관료들이 국제 현실에 대해서 잘 알지 못 하는 상황에서 일단 권력부터 쟁취하자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개화파 인사들은 자신들이 국제 상황을 잘 안다고 확신했고, 그 확신에서 각자의 대안을 주장했는데 특히 이동인의 경우 그런 경향이 더 강했다.

이동인은 독단적일 뿐만 아니라 낙관적인 인물이었다. 이동인은 당시 조선 사람 중에서는 자신이 국제 현실을 가장 잘 안다고 자부했다. 당연히 그의 자부심은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야 한다는 방안이 가장 정확한 것이라는 자부심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개화파 동지들의 반대를 별것 아니라 무시하고 독단적으로 사토를 만나 영국군 파병을 요청했다고 이해된다. 아마도 이동인은 자신의 독단적인 행동이 결과적으로 좋은 결과를 가져올 것으로 낙관하고 그렇게 했을 듯하다.

즉 영국이 자신의 의견에 찬동해 군대를 파병하고, 그 영국군을 배경으로 근대정책이 성공한다면, 결국에는 고종은 물론 반대하던 개화파 인사들도 찬성할 것으로 낙관했다.

문제는 이동인의 독단과 낙관이 통할 정도로 당시 국제 현실이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사토 문서에 의하면 이동인은 다음 번에 자신이 조선 사절을 이끌고 일본으로 와서 서양 각국 대표와 강화조약을 맺을 구상을 밝힌 듯하다.

그 같은 이동인의 구상은 그야말로 낙관에 낙관을 거듭한 구상이 아닐 수 없었다. 우선 다음 번의 조선 사절을 이동인이 이끌고 올 수 있을지조차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이동인이 그런 구상을 비친 이유는 자신에 대한 고종과 민영익의 신임을 과신했기 때문이었을 듯하다. 하지만 그 신임이 계속 유지될지 여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청나라·일본 그 외의 서구열강이 이동인의 구상대로 움직여줄지 여부였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이 협력관계로 돌아선 이유는 근본적으로 러시아의 위협 때문이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청·일 양국은 동북아 패권을 놓고 경쟁하는 관계였다. 당시 청나라와 일본은 동북아 패권을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벌일 준비가 돼 있었다.

하지만 이동인은 아주 낙관적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즉 조선이 주도해 ‘연미국’을 완수한 후 그가 조선 사절을 이끌고 일본으로 와서 서구 열강들과 수호조약을 맺으려 한다면 청·일 양국은 물론 서구열강도 적극 협조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그때 영국을 핵심 동맹국으로 삼아 수호조약을 맺고, 그 기회를 이용해 영국의 파병을 요청해 성사된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문제없으리라는 것이 이동인의 바람이었다.



김동인의 막연한 낙관론, 비극적 결말을 부르다



일본으로 망명한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 ·서재필·김옥균 



그러나 국제 현실은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우선 일본부터가 조선의 ‘연미국’ 입장에 비협조적이었다. 하여장이 [조선책략]에서 ‘연미국’을 제시한 이유는 당시 미국이 일본보다는 청나라에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류큐국을 둘러싼 그랜트 전 미국 대통령의 중재 활동에서 명확히 나타났다.

따라서 [조선책략]의 ‘연미국’은 청나라에 우호적인 미국을 끌어들임으로써 청나라의 동북아 패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이 이런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당연히 그들은 조선이 미국보다는 일본에 더 유리한 국가와 수호조약을 맺을 것을 희망했다.

그것은 이동인이 이와쿠라 도모미를 만났을 때 명확히 드러났다. 이동인은 도쿄에 도착한 다음날인 10월 14일 저녁 이와쿠라를 만나러 갔다. 하지만 이와쿠라가 외출 중이어서 만나지 못 했다. 이동인은 다음날 이와쿠라를 만날 수 있었다. 그때 이와쿠라는 조선이 미국 대신 독일과 수호조약을 맺으라고 권고했다.

이런 권고는 [조선책략]에 제시된 ‘연미국’ 대신 ‘연독일’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쿠라가 ‘연독일’을 권고한 이유는 물론 일본의 국익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미국이 일본보다는 청나라에 더 우호적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일본 사람들에게 미국은 일본을 무력으로 개방시킨 제국주의적 국가이지만 독일은 그런 일이 없었다. 이와쿠라를 비롯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이동인에게 ‘연미국’ 대신 ‘연독일’을 적극 권장했던 것은 그런 이유에서였다.

당시 이동인이 국제 현실을 보다 냉정하게 인식했다면 이와쿠라의 ‘연독일’에 더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마땅했다. 이와쿠라의 ‘연독일’ 권고는 단순한 권고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만약 조선이 이와쿠라의 ‘연독일’ 권고를 무시하고 ‘연미국’을 추구한다면 일본은 외교 역량을 동원해 이를 방해할 것이 분명했다.

그런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위해 ‘연미국’을 지지하게 만들려면 외교적인 설득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이동인은 그 노력은 전혀 기울이지 않으면서 단지 이와쿠라를 방문했다는 사실만으로 일본이 ‘연미국’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뿐만 아니라 다음 번에 이동인 자신이 조선 사절을 이끌고 일본에 와서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도 일본이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그것은 헛된 기대였다. 이동인은 청나라 역시 당연히 조선의 ‘연미국’을 지지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더구나 조선이 영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구 열강과 수호조약을 맺을 때도 적극적인 지지를 해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기대는 [조선책략]의 ‘연미국’을 청나라에서 권고했다는 사실에 근거했다. 하지만 이동인의 그런 기대는 청나라가 왜 ‘연미국’을 권고했는지 그 속내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동인은 10월 17일 오후에 주일 청국공사관을 찾았다. 그때 참찬관 황준헌이 그를 맞았다. 이동인은 자신의 신분을 알리기 위해 ‘정탐위원’ 임명장과 더불어 고종이 하사한 ‘밀부’를 꺼내 보였다. 이어서 이동인은 황준헌과 필담을 나눴다. 이동인은 “조선의 조정 논의가 지금 일변했습니다”라고 해 ‘연미국’ 추진 계획을 알렸다.

다음날 오전 일찍 이동인은 다시 주일 청국공사관을 방문했다. 이번에는 하여장이 직접 나서서 이동인과 필담을 나눴다. 이동인은 하여장에게 조선에서 가져온 ‘제대신헌의’와 ‘영의정과의 밀담’을 증거물로 보였다. 그 두 문서를 본 하여장은 조선이 ‘연미국’을 추진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동인과 하여장의 ‘동상이몽’

그런데 이동인은 하여장과의 필담에서 “이제 조선은 외국과 스스로 수호조약을 맺으려 합니다”라고 언급했다. 이동인의 입장에서 그 언급은 당연한 발언이었다. 하지만 하여장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하여장이 ‘연미국’을 권고한 이유는 조선으로 하여금 명실상부한 독립국으로서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을 청나라의 영향력 안에 계속 묶어두려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동인이 “이제 조선은 외국과 스스로 수호조약을 맺으려 합니다”고 언급하자 하여장은 크게 놀랐다. 이동인의 언급과 태도로 볼 때 조선은 청나라와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맺으려 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렇게 되면 조선에서의 청나라 영향력은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하여장이 조선에 ‘연미국’을 권고한 원래 목표와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크게 놀란 하여장은 이동인이 돌아간 후 ‘연미국’을 추진하는 조선을 어떻게 하면 계속 청나라 영향력 아래 묶어둘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 결과 하여장은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라는 제목의 대책을 마련해 이홍장에게 보고했다. 제목 그대로 ‘청나라가 조선의 외교를 주도하기 위한 논의’였다.

이 ‘주지조선외교의’에서 하여장은 “조선은 아시아 요충지에 자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의 서북 국경이 청나라의 길림성, 봉천성과 연접해 중국의 왼팔이 되므로(…) 조선이 망하면 청나라의 왼팔이 끊어지는 것과 같이 되고, 또 청나라의 울타리가 모조리 철거되는 것과 같이 돼 그 후환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언급했다.

조선의 존망이 곧 청나라의 국가안보에 직결된다는 뜻이었다. 그러므로 청나라의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조선의 외교 문제에 적극 개입해 주도해야 한다는 것이 하여장의 결론이었다. 하여장은 청나라가 조선의 외교를 주도하기 위한 방안 두 가지를 제안했다.

첫째는 청나라의 대신을 조선에 파견해 외교 문제를 주도하게 하자는 방안이었다. 사실상 조선의 외교 주권을 탈취하자는 방안이나 마찬가지였다.

둘째는 청나라 황제가 고종에게 명령해 서구열강과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하고, 조선이 서구열강과 체결하는 조약문 중에 ‘이에 조선은 중국 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OO국가와 수호조약을 체결하고자 합니다’는 구절을 삽입하게 하자는 방안이었다. 이는 조선 스스로가 청나라의 속국임을 만천하에 공포하게 함으로써 청나라의 영향력을 유지하자는 방안이었다.

이동인은 하여장이 이런 구상을 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단지 그의 권고대로 ‘연미국’을 추진하는 조선을 적극 지지할 것이라 기대했을 뿐이다. 이동인은 일본 역시 ‘연미국’을 적극 지지할 것으로 기대했다. 같은 동북아시아 국가이기에 당연히 도울 것으로 기대한 것이다.

이처럼 청나라와 일본이 조선의 ‘연미국’을 적극 지지하면, 다음 번 자신이 일본에 조선사절을 이끌고 올 때 영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과 수호조약을 맺고, 나아가 영국의 조선 파병까지 성사시킨다면 조선 근대화는 무난히 성취될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 하여장은 조선 주도의 ‘연미국’을 지지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일본 역시 조선 주도의 ‘연미국’을 지지할 의사가 없었다. 영국 또한 아무런 보장 없이 조선에 파병할 뜻이 없었다. 그럼에도 이동인은 스스로의 확신과 낙관으로 청나라·일본·영국이 자신의 구상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믿고 기대했다.

그런 기대와 확신을 안고 이동인은 10월 30일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러나 하여장의 ‘주지조선외교의’에서 보듯 이동인의 기대는 국제 현실과 거리가 멀었다. 이동인이 귀국한 이후 조선이 추구하는 ‘연미국’은 이동인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18. 고종, 충성과 반역 논리로만 대응하다 

 - 전국적으로 확대된 위정척사파의 반발 


양반은 물론 백성들도 정(正) 대 사(邪)라는 논리에 호응

…당혹스러운 황제, 청나라 권위에 기대 ‘권위’ 회복하려 해




구한말 호위대에 둘러싸인 고종 황제의 모습이 실린 프랑스 일간지 [프티 파리지앵]의 1894년 8월 12일자. 이 신문은 고종 황제가 국토의 면적과 길이가 이탈리아와 비슷한 조선을 통치하고 있으며, 수도 서울의 인구는 25만 명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이동인은 밀사 임무를 마치고 1880년(고종 17) 10월 30일 도쿄를 떠나 귀국길에 올랐다. 그가 정확히 언제 한양에 도착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일본에 갈 때 열흘 걸렸던 사실을 고려하면 올 때도 그 정도 걸렸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렇다면 이동인은 11월 10일 전후로 한양에 도착했을 듯하다.

귀국 보고에서 이동인은 밀사 임무가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했을 것이다. ‘연미국(聯美國)’을 추진하겠다는 이동인의 밀보(密報)에 하여장이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연미국’은 하여장이 권고한 것이므로 그가 공개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동인은 사토를 만나 영국과의 수호통상은 물론 그 외 서구열강과의 수호통상 가능성도 암시해 둔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동인은 미국은 물론 영국을 비롯한 서구열강과의 수호조약도 문제없다고 장담했을 듯하다.

서구열강과의 수호조약 및 외교통상은 근대 외교이므로 그것을 담당할 정부조직이 필요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친중국’과 ‘결일본’을 담당할 정부조직도 필요했다. 이홍장이 권고한 ‘친중국’은 조선이 기왕의 사대외교를 넘어 청나라의 무기체계와 군사제도를 수용하고 나아가 군사 유학생도 파견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문제들과 관련해 이홍장은 고종에게 밀서를 보내 원한다면 자신이 나서서 적극 돕겠다고 제안했다. 조선의 부국강병을 위해서라고 했지만, 실제는 청나라의 국익을 위해서였다.


조선이 청나라의 무기체계와 군사제도를 수용하게 되면 청나라는 사실상 조선을 군사적으로 장악할 수 있게 된다. 뿐만 아니라 조선의 무기 시장도 독점하게 됨으로써 막대한 이익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1879년 7월부터 고종과 이홍장은 밀서를 이용해 군사유학생 파견 및 조선군 개혁 문제를 본격적으로 협상했다. 당시 이홍장은 우선 조선의 중앙군을 3만 명으로 확장하고 그 3만 명을 근대화하고자 했다. 즉 중앙군 3만 명을 기마병 3000명, 포병 3000명, 보병 2만4000명으로 편제하고 중국 근대무기로 무장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이홍장은 그렇게 근대화된 조선군을 이용해 러시아와 일본을 막고자 했다. 그렇게 하려면 조선군 내부에도 중국 근대무기를 다룰 줄 아는 군사기술자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이홍장은 군사 유학생을 보내라고 권고했던 것이다.

당시 청나라가 조선의 군사 유학생을 받겠다고 한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건국 이후 500년 가까이 조선은 중국에 유학생을 보내지 못 했다. 명나라는 물론 청나라에서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정 이후 조선군 근대화를 고심하던 고종은 군사 유학생을 보내라는 이홍장의 권고에 적극 화답했다.

1880년 5월 25일, 고종은 군사 유학생 선발을 명령하고 그 사실을 이홍장에게 알렸다. 이홍장은 필요한 조치를 취한 후 즉시 회답했다. 고종이 그 회답을 받은 때는 1880년 11월 1일이었다. 그때부터 군사 유학생 선발 및 군 개혁문제가 본격 논의됐으며, 그 과정에서 정부조직 개편문제가 대두했다.

그런데 조선의 유학생 파견과 군 개혁에 관해서는 일본 역시 큰 관심을 가졌다. 물론 일본의 국익을 극대화하기 위해서였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의 근대화는 물론 군 근대화도 적극 돕겠다고 나섰다. 그런 제안들을 고종은 [조선책략]의 ‘결일본’으로 받아들였다. 당연히 ‘결일본’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정부조직 개편이 필요했다.



통리아문 실무 주도한 이동인 실종사건 



강화도조약 당시 한·일 양국의 협상 테이블을 그린 그림


이동인이 귀국한 1880년 11월 10일 이후 정부조직 개편은 급물살을 탔다. 아마도 이동인은 근대화 추진에 필요한 정부조직 개편의 필요성을 적극 개진했을 것이다. 그 의견에 개화파 인사들과 고종이 호응함으로써 정부조직 개편이 급물살을 타게 됐을 듯하다.

1880년 12월 5일, 고종은 유학생 파견, 군 개혁, 외교 문제 등을 전담할 아문(衙門) 설립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조정 중신들에게 그 아문의 명칭과 조직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에 따라 1880년 12월 20일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이 설립됐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이 기구는 청나라의 ‘총리각국사무아문’을 모델로 했다. 총리각국사무아문의 이름이 길어서 총리아문으로 약칭됐듯 통리기무아문 역시 통리아문으로 약칭됐다.

또한 총리아문에 외교와 통상 그리고 해방을 담당하는 부서가 설치된 것처럼 통리아문에도 외교와 통상 그리고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가 설치됐다.

통리아문에서 외교 담당 부서는 사대사(事大司)와 교린사(交司)였다. 사대사는 청나라와의 외교를 담당했고 교린사는 일본을 비롯해 장차 수교할 서구열강과의 외교를 담당할 예정이었다. 통상담당 부서로는 통상사(通商司)와 어학사(語學司)가 있었다. 그 외 군무사(軍務司)·변정사(邊政司)·군물사(軍物司)·선함사(船艦司) 등 8개 부서에서 국방을 분담했다.

통리아문의 최고책임자인 총리는 대신 중에서 선발됐다. 또한 원로대신들은 도상(都相)으로 겸임 발령됐다. 이로써 통리아문에는 당대 최고 권력자들이 참여하게 됐다. 또한 이동인처럼 외국 사정에 밝은 사람들을 참모관에 발탁하는 등 젊은 개화파 인재들을 흡수하기도 했다.

 1881년부터 본격화된 고종의 개화정책은 바로 이 통리아문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영선사 파견, 신사유람단 파견, 별기군 설치, 미국 등 서구열강과의 수호조약 체결 등이 통리아문의 주도로 추진된 개화정책이었다.

청나라의 양무운동은 총리아문을 주도한 공친왕과 서태후의 신임을 받는 이홍장을 중심으로 추진됐다. 통리아문이 설치된 후 조선의 개화정책 역시 비슷하게 추진됐다.


통리아문의 개화파 인물들 그리고 왕비 민씨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 민영익이 당시의 개화정책을 주도했다. 물론 민영익의 핵심 참모는 이동인이었다. 따라서 통리아문에서 제시된 각종 개화정책은 사실상 이동인이 기획하고 민영익 등 개화파 관료들이 추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1881년 2월 26일, 통리아문에서는 청나라에 군사유학생을 보내기 위해 영선사(領選使)를 파견하자고 요청했다. 군사유학생을 천진에 보내 무기제조법을 배우게 하자는 취지였다.


곧바로 고종의 승인이 떨어졌다. 그날로 조용호가 영선사로 결정됐고, 수행인원과 경비도 확정됐다. 영선사는 모든 준비가 끝나는 4월 11일에 출발하기로 결정됐다.

영선사에 앞서 고종은 일본에 파견할 신사유람단 즉 조사시찰단을 선발했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이 성취한 발전상을 직접 시찰하고 조선 개화정책에 참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조사시찰단은 공식적으로 파견되지 못 했다. 위정척사파의 반발을 우려한 고종은 시찰단원들을 동래 암행어사로 발령해 비밀리에 일본으로 가게 했다.

1881년 1월 11일에 박정양·조영준·엄세영·강문형·심상학·홍영식·어윤중 등 7명이 동래 암행어사로 발탁됐다. 이어서 2월 2일에는 이헌영·민종묵·조병직·이원회 등 4명이 동래 암행어사로 선발됐다.


고종은 이들 중에서 이원회를 통리아문의 참획관(參劃官)에 임명하고 통리아문의 참모관 이동인으로 하여금 수행하게 했다. 이들에게는 군함과 총포 구입을 비밀리에 협상해 보라는 밀명이 주어졌다.

하지만 2월 15일에 참모관 이동인이 갑자기 실종됐다. 왜 실종됐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개화를 반대하는 측의 공작일 듯하다. 당시 이동인은 통리아문의 실무를 주도하고 있었다. 조사시찰단 파견은 물론 영선사 파견도 이동인이 주도했다.



위정척사파, 만인소 중심으로 결집 꾀해 



고종 황제의 친부인 흥선대원군



그런데 조사시찰단원 중 홍영식과 어윤중은 민영익과 자주 어울리던 8학사의 일원이었다. 따라서 당시 조사시찰단의 핵심은 이동인·홍영식·어윤중 3명이었다. 이들 3명은 시찰 이외에 특별임무를 맡았다. 어윤중과 홍영식은 미국과의 수호조약에 관련된 문제들을 조사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또한 어윤중은 유길준·윤치호 등 자신의 수행원들을 유학시키라는 밀명도 받았다. 이동인은 군함과 총포 구입을 협상하라는 밀명을 받았다. 이 같은 특별임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임무는 군함과 총포 구입 협상이었다. 그런 면에서 이동인의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그런 이동인의 실종은 개화 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에게 크나큰 타격이었다.

당시 고종의 개화정책은 통리아문에 참여한 개화파와 일부 중앙관료 중심으로 추진되고 있었다. 그 외 대부분의 양반·관료는 개화정책에 반대였다. 처음에 양반·관료들은 상소문으로써 개화정책을 저지하고자 했다. 그것은 1880년 10월 1일 병조정랑 유원식의 상소문부터 시작됐다. 유원식은 상소문에서 김홍집 처벌과 더불어 서원 복설(復設)을 요구했다.

 사학(邪學) 천주교를 옹호하는 [조선책략]을 배척하지 않고 받아와 왕에게 올린 김홍집은 처벌받아 마땅하며, 조선의 국시(國是)이자 정학(正學)인 주자성리학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서원 복설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유원식처럼 천주교를 사학으로 배척하고, 주자성리학을 정학으로 보위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위정척사라고 했다. 위정척사파는 고종의 개화 정책을 조선 유교 문명의 파탄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위정척사파는 ‘친중국’ ‘연미국’ ‘결일본’을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조선책략]을 가져온 김홍집 처벌 및 주자성리학의 부흥을 위한 서원 복설을 요구했다.

위정척사파는 고종의 개화정책을 사(邪)로 규정하고 자신들의 반대활동을 정(正)으로 규정함으로써 당시 상황을 정학과 사학의 대립구조로 논리화했다.

그 같은 위정척사파의 공격을 고종은 충성과 반역의 논리로 극복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개화정책에 찬성하는 것이 충성이고 반대하는 것은 반역이라고 논리화했던 것이다. 그 같은 논리에서 고종은 유원식을 반역으로 단정하고 유배형에 처했다. 왕의 위력으로 위정척사파의 반대를 제압하고 개화정책을 추진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충성과 반역이라는 고종의 논리는 위정척사파를 위시한 조선양반들에게 별 효과가 없었다, 그들은 왕권보다는 주자성리학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했다. 유원식 처벌 이후에도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의 상소문이 줄을 이었다. 고종은 그들을 엄벌에 처함으로써 개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천명했다.

고종이 개화 반대 상소를 올리는 양반·관료들을 엄벌하자 위정척사파는 만인소(萬人疏)로 대응했다. ‘만인소’란 ‘1만 명이 서명한 상소문’이란 뜻이었다. 1만 명이 서명한 만인소가 등장하려면 하나의 도에 거주하는 유생 전체가 가담해야 가능했다.

 따라서 조선시대 만인소가 갖는 정치적 파급력은 아주 컸다. 만인소가 성립했다는 사실 자체가 조선 양반들의 여론이 만인소로 결집됐음을 상징하기 때문이었다.

위정척사파의 만인소는 영남에서 시작됐다. 1880년 11월 1일 안동 도산서원에서 있던 유생 모임이 영남만인소의 도화선이었다. 그날 안동 유생들은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척사통문(斥邪通文)을 각 고을의 서원·향교 등에 발송하면서 11월 25일 영남유림의 회합을 개최하겠다고 알렸다. 그 척사통문에 따라 유생 800여 명이 안동향교에 모였다.



황제 비난한 홍재학 처형… 타협점 찾기 더 어려워져



고종 황제의 가족 사진. 왼쪽부터 의친왕, 순종 황제,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 셋째 아들 영친왕, 고종 황제, 순종 황제의 왕비 순종효황후 윤대비, 의친왕의 왕비 덕인당 김비, 의친왕의 큰아들 이건



그들은 퇴계 이황의 후손인 이만손을 소두(疏頭)로 추대하는 등 만인소 작성에 필요한 업무를 분담했다. 아울러 1881년 1월 20일 상주 산양에서 모이기로 하고, 상소문 초안을 작성해 올리도록 각 고을에 알렸다. 1881년 1월 20일, 상주에 모인 유생들은 강진규가 작성한 초안을 만인소 원본으로 결정하고 2월 4일 한양을 향해 출발했다.

2월 18일 소두 이만손을 필두로 하는 300여 명의 영남 유생은 한양에 도착했고, 다음 날부터 복합(伏閤)해 만인소 접수를 요구했다. 소문을 듣고 온 유생들이 참가함으로써 복합 유생은 400여 명으로 늘었다. 2월 26일, 고종은 영남만인소를 봉입하라고 명령했다.

개화정책 취소와 주자성리학 보위(保衛)를 요구하는 만인소를 받아보고, 고종은 조정 일에 관심을 갖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비답(批答)을 내렸다. 영남만인소를 올린 유생들을 어린애 취급함으로써 그들의 요구를 무시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영남 유생들은 계속 복합하며 자신들의 요구를 수용하라 주장했다. 그 같은 영남 유생들의 행동에 대해 고종은 회유책을 쓰기도 했지만 결국에는 소두 이만손 등을 유배형에 처했다. 충성과 반역의 논리를 영남 유생들에게까지 확대, 적용했던 것이다.

그런데 1881년 4월, 영남만인소에 자극받은 전라도·충청도·경기도·강원도 유생들까지 복합해 만인소를 올리게 됐다. 고종의 충성과 반역 논리는 유생들에게도 별로 호소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조선 팔도의 유생들이 연이어 만인소를 올리자 고종도 위력으로만 누를 수 없게 되었다.

1881년 5월 15일, 고종은 사학(邪學) 천주교를 배척하고 정학 주자 성리학을 보위하겠다는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반포했다. 고종의 충성과 반역 논리가 위정척사파의 정학과 사학 논리에 굴복한 셈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위정척사파는 더욱 강경하게 나왔다. 1881년 가을로 접어들면서 팔도의 유생 수백 명이 한양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집단으로 대궐 앞에 몰려가 한 달이 넘도록 복합하며 개화정책 취소 및 관련자 처벌을 요구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시위양상은 과격해졌고 논조도 격렬해졌다. 위정척사를 요구하는 유생들은 개화파뿐만 아니라 고종까지도 거세게 비난했다.

예컨대 1881년 윤7월 6일에 강원도 유생 홍재학 등이 올린 상소문에서는 고종을 무식한 왕이라고 비난하기까지 했다. 고종이 무식해서 개화정책을 주장하는 무리들에게 놀아난다는 비난이었다. 아무리 고종의 개화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군신간의 윤리가 중요시되던 조선시대에 군주에 대해 신하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재학은 공개 상소문에서 감히 그렇게 언급했다. 결과적으로 홍재학은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고종이나 개화파는 절대 인정할 수 없다고 주장한 셈이었다. 신하가 왕을 인정하지 못 하겠다면 그것은 곧 역모나 마찬가지였다.

고종은 윤7월 8일에 홍재학을 체포해 조사한 후 범상부도(犯上不道)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재산도 몰수했다.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위정척사파는 역적이라 공포한 셈이었다. 고종과 위정척사파는 타협점을 찾기 어렵게 됐다.

위정척사파는 고종을 폐위함으로써 상황을 반전시키고자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흥선대원군과 손잡았다. 위정척사파와 흥선대원군은 고종의 이복형 이재선을 이용하고자 했다. 이재선은 고종보다 10세 위로 흥선대원군의 서장자(庶長子)였다.

[매천야록]에 의하면 이재선은 본성이 용렬해 숙맥도 분간하지 못 할 정도로 어리석었다고 한다. 흥선대원군과 위정척사파는 이재면의 그런 어리석음을 이용해 쿠데타를 감행하려 했다. 최초 주모자는 충청도 출신의 유생 강달선으로서 그는 홍재학과 함께 복합상소운동을 주도하던 사람이었다.

당시 27세이던 강달선은 유생들의 힘으로 고종을 축출하고 개화정책을 끝장내려 했다. 그리고 이재선을 포섭해 흥선대원군의 협조를 받으려 했다.

복합상소운동이 절정이던 7월에 강달선은 이재선을 여러차례 방문해 안면을 익혔다. 그렇게 서로 간에 익숙해진 어느 날 강달선은 ‘벌왜(伐倭)’에 관해 이재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타진했다. 벌왜는 위정척사파가 고종에게 개화정책을 취소하라 상소해도 들어주지 않으니 위정척사파가 직접 나서서 일본 사람들을 쫓아내자는 주장이었다.

당시 조선과 수교한 일본의 공사관이 서대문 밖 천연정에 있었는데, 천연정을 습격해 그곳의 일본인들을 모조리 쫓아내자는 주장이 벌왜였다. 벌왜는 위정척사를 명분으로 무력을 사용하겠다는 주장이었지만 실제는 그 기회에 궁궐을 습격하고 고종을 붙잡아 폐위하려는 쿠데타 명분이었다.

이재선은 강달선의 ‘벌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벌왜를 명분으로 하는 쿠데타가 성공해 고종이 폐위된다면 다음 왕은 자신이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았던 것이다. 어리석고 또 권력에 눈이 먼 이재선은 그 자리에서 강달선에게 포섭됐다.

이후 강달선은 안기영·권정호 등 흥선대원군 측근들을 차례로 포섭했다. 이재선 역시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했다. 8월에 접어들면서 쿠데타 모의는 이재선·안기영·권정호·강달선을 중심으로 구체화됐다.

그런데 이재선은 자신의 측근들을 포섭할 때 ‘큰사랑의 뜻도 이와 같다’는 말을 하곤 했다. 큰사랑이란 바로 흥선대원군을 지칭했다. 이런 사실로 미뤄볼 때 이재선은 강달선으로부터 ‘벌왜’ 계획을 듣고 곧바로 흥선대원군에게 알렸으며, 흥선대원군은 ‘벌왜’를 이용해 다시 권력을 잡으려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네가 벌왜를 주장하면 큰 공을 세우게 되고 크게 쓰일 것’이라는 말로 이재선을 부추겼다. 흥선대원군 역시 어리석은 이재선을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심산이었다.



 ‘벌왜(伐倭)’ 앞장섰던 이복형의 허욕(虛慾) 



구한말 카메라 앞에서 함께 포즈를 취한 유생들과 서양 선교사들 



흥선대원군의 세 아들 중 셋째인 고종이 왕이 된 것은 철종 사후 신정왕후 조씨와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미성년 왕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881년 복합상소운동 당시 위정척사파가 쿠데타를 모의할 때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할 수 있는 인물은 처지로 보거나 자질로 볼 때 이재선보다는 이재면이 적격이었다. 이재면은 적자였고 또 자질도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고종이 왕이 된 것과 같은 이유로 이재면은 왕으로 추대될 수 없었다. 당시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은 고종을 폐위시킨 후 허수아비 왕을 내세우고 정치와 외교를 주도하려 했다. 그렇게 되려면 이재면보다는 이재선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이윤용은 매국노로 유명한 이완용의 서형(庶兄)인데 흥선대원군의 사위이기도 했다. 이윤용의 부인이 이재선의 동복 여동생이었으므로 이윤용은 이재선의 처지나 흥선대원군의 생각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런 이윤용이 보기에 흥선대원군은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재선을 이용하려고만 했다.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는 흥선대원군의 잔혹함에 이윤용은 치를 떨었다. 이윤용의 생각대로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쿠데타가 성공했을 때와 실패했을 때 모두를 상정하고 대책을 세웠다.

성공한다면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섭정이 될 계획을 세웠다. 반면 실패한다면 모든 책임을 이재선에게 뒤집어씌우고 자신은 빠져나올 계획이었다.

어리석은 이재선은 위정척사파나 흥선대원군이 왜 자신을 고종 대신 왕으로 추대하려는지 깨닫지 못 했다. 단지 ‘벌왜’라는 대의명분과 ‘왕이 될 수 있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열심히 뛸 뿐이었다. 이재선은 자신이 이용되는지도 모른 채 ‘왜놈들을 몰아내고 세상을 바로잡겠다’고 떠벌리며 사람들을 포섭하느라 분주했다.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이 구상한 쿠데타 계획은 거창했다. 그들은 8월 21일로 예정된 과거시험을 이용해 거사하기로 했다. 그날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수천 명의 유생을 선동해서 일부는 서대문 밖의 일본공사관을 공격해 일본인을 몰아내고 또 일부는 창덕궁을 공격해 고종을 폐위시킨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수천 냥의 거사자금과 1000여 명의 쿠데타군을 모집하기로 했다. 1000여 명의 쿠데타군이 반으로 나뉘어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서대문 밖의 일본공사관을 공격하고, 나머지 500명은 유생들과 함께 창덕궁을 공격해 고종을 폐위시킨다는 계획은 그 자체만으로는 훌륭했다.

게다가 창덕궁을 공격하는 쿠데타군의 선봉에 이재선을 앞장세움으로써 궁궐 경비병들이 순순히 문을 열고 항복하게 만들자는 계획은 치밀하기까지 했다. 흥선대원군은 비록 전면으로 나서지는 않았지만 쿠데타 주모자들을 만나 진행과정을 보고받으며 성패를 주시했다.

거사를 하루 앞둔 8월 20일 한밤중에 이재선·강달선·안기영 등은 한자리에 모여 거사 계획을 최종 점검했다. 그런데 문제는 예정했던 거사 자금과 쿠데타군이 거의 모집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막상 목숨을 내놓고 쿠데타에 나서겠다는 사람은 적었다.

그럼에도 쿠데타 주도자들은 과거시험을 보기 위해 운집한 유생들을 선동한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추진하기로 결정했다. 거사시간은 해시(亥時, 오후 9~11시)로 잡았다. 이런 내용이 21일 아침 7시께 흥선대원군에게 전달됐다.

보고를 접한 흥선대원군은 군사력의 뒷받침이 없는 쿠데타라 성공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판단했다. 흥선대원군은 강달선 등을 불러 사실을 확인했다. 확인 결과 강달선 등은 정말로 쿠데타군을 거의 모집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그 자리에서 강달선 등을 ‘금품을 갈취하려 사람들을 선동한 사기꾼’으로 몰아 체포했다. 이들을 체포함으로써 흥선대원군은 만약의 경우 쿠데타 모의가 누설되더라도 빠져나갈 구실을 만든 셈이었다.

그간 자신이 이들과 접촉한 이유는 역모를 정탐하기 위해서였다고 둘러대면 그만이었다. 이렇게 해서 8월 21일로 예정됐던 쿠데타 모의는 흐지부지됐다.



수포로 돌아간 쿠데타, 사사(賜死) 면치 못 한 이재선 


그렇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이번에는 이재선·안기영·권정달 등이 중심이 돼 이전보다 훨씬 구체적으로 쿠데타 모의를 추진했다. 그들은 쿠데타의 성패는 군사력에 있다고 보고 군사를 모으기 위해 전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먼저 300명 정도의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점령한 후 강화도의 군사들과 함께 한양을 기습 공격할 계획을 세웠다. 거사일은 8월 29일로 잡았다.

하지만 문제는 자금이었다. 300명 정도의 군사를 모아 강화도를 공격하려면 수만 냥의 자금이 필요했는데 그것이 제대로 모금되지 않았다. 자금 모금이 지지부진하고 군사들도 모집되지 않자 내부에서 변절자가 나타났다.

8월 28일 이선풍의 고변에 의해 쿠데타 전모가 드러나게 됐다. 이선풍의 고변서에는 물론 이재선도 들어 있었다. 이재선은 8월 29일 포도청으로 자진 출두했다. 앞뒤 정황으로 볼 때 흥선대원군이 자진 출두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처음 이재선은 쿠데타에 관한 내용은 전혀 모른다고 잡아뗐다. 자신은 생긴 것도 변변치 못하고 정신도 변변치 못해 쿠데타를 도모할 만한 인물이 아닐뿐더러 집 밖을 나간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관련자들과의 대질신문을 통해 하나 둘 진상이 밝혀졌다.

조사 결과 쿠데타 주모자는 이재선으로 귀결됐고, 흥선대원군은 빠져나갔다. 조사가 마무리된 후 고종은 처음에 이재선을 제주도로 유배하라고 명했다. 하지만 사형을 요청하는 신료들의 요청에 결국에는 사사(賜死)에 처했다. 사사의 논리는 물론 충성과 반역이었다.

이처럼 고종은 위정척사파의 공격에 충성과 반역 논리로만 대응했다. 하지만 그런 논리만으로는 정학과 사학이라는 위정척사파의 논리를 극복하지 못 했다. 조선 양반 나아가 조선 백성들은 충성과 반역보다는 정학과 사학이라는 논리에 더 호응했다.

정학이라는 논리에는 조선의 자존심과 주체성이 내재됐지만, 충성이라는 논리에는 그것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종이 개화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해서는 충성과 반역 논리 이외에 다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고종은 그것을 청나라의 권위에서 찾으려 했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 2018. 7. 




19. 청(淸) 주도로 진행된 조미수호조약의 명암(明暗) 

- 친중 일변도에서 벗어나 미국화 열어젖힌 대사건  


고종의 자신감 부족 탓에 ‘남’에게만 의존…준비 없이 진행하다 보니 여러 반발에 직면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가 고종 황제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자에 실렸다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의 딸인 앨리스 루스벨트가 고종 황제를 만나기 위해 궁궐로 들어가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르 프티 파리지앵] 1905년 10월 8일자에 실렸다.

도쿄의 주일청국공사 하여장에게 밀파됐던 이동인은 1880년(고종 17, 광서 6, 메이지 13) 10월 30일 귀국길에 올랐다. 하지만 함께 밀파됐던 탁정식은 귀국하지 않고 뒤에 남았다. 하여장과의 사후 교섭을 마무리짓기 위해서였다.

반만년 한국사에서 밀사 이동인이 수행한 고종의 ‘연미국(聯美國)’은 통일신라 이래 천 년 넘게 지속된 친중 정책에서 벗어나 친미 또는 친구라파 정책으로 대전환을 의미했다. 통일신라 이래 친중 정책으로 말미암아 한국의 정치·문화는 점차 중국화됐고, 조선 후기에는 중국 문화의 정통성이 한반도에만 남았다는 ‘소중화’ 사상이 횡행하기까지 했다.

그러므로 고종의 친미 또는 친구라파 정책 역시 필연적으로 조선의 정치·문화를 미국화 또는 구라파화시킬 것은 충분히 예상되는 일이었다. 그것이 수천 년에 걸쳐 중국화한 조선의 정치·문화에 심각한 변화와 충격을 줄 것 또한 충분히 예상됐다. 그 변화와 충격은 조선 내부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을 중심으로 형성된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미국화 또는 구라파화에 대한 반발과 부작용은 조선 내부는 물론 동아시아 전체에서 일어날 것 또한 충분히 예상됐다. 그런 반발과 부작용을 최소화하려면 사전준비를 철저히 해야 할 뿐만 아니라 대안 역시 충분히 검토해 마련해야만 했다.

하지만 고종은 러시아가 조만간 조선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에 당장의 안보 위기에서 벗어나고자 연미 정책을 추진하게 됐다. 고종이 연미 정책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확고한 미래 전망이 아니라 당장의 안보 위기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충분한 준비와 대안이 없었고, 그런 고종인 지라 연미 정책을 추진한다고는 했지만 어떻게 추진해야 할지 방법을 몰랐다. 장기적으로 연미 정책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 그 결과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설상가상 연미 정책의 대상인 미국이나 유럽 열강이 어떤 나라인지 또 그들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도 잘 몰랐다. 그나마 당시 상황에서 미국과 유럽 열강을 조금이라도 겪어본 사람은 이동인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고종은 어쩔 수 없이 연미 정책의 실무를 이동인에게 전담시켰다. 그렇지만 이동인 한 사람에게만 의지하는 것은 너무나 불안했기에 청나라의 도움을 받고자 했다.

그 같은 배경에서 고종의 연미 정책은 전격적으로 결정됐고, 이동인의 도쿄 밀파 역시 전격적으로 단행됐다. 이동인을 밀파할 때만 해도 고종은 아주 낙관적이었다. 고종은 하여장의 도움을 확신했고, 조선 양반들의 반발도 충분히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그래서 일단 이동인을 하여장에게 밀파해 미국과 수교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게 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개화 실무를 전담하던 이동인은 연미 정책 이외에도 할 일이 많아 곧바로 귀국하게 했고, 사후 교섭은 탁정식이 맡도록 했다.

이동인 귀국 후 탁정식은 몇 차례 하여장을 방문해 미국과의 수호조약 체결에 필요한 초안을 요청했다. 예컨대 1880년 11월 21일 하여장을 방문한 탁정식은 “조선 신민은 평소 해외 안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용감히 떨쳐 일어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면서 “속히 상의하셔서 다년간 조선을 보호하고자 하셨던 큰 의도를 어기지 말아 주십시오”라고 요청했다.

하여장이 보낸 [조선책략]에 따라 고종이 연미 정책을 추진하게는 됐지만, 경험이 없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니 중국 측에서 그 초안까지도 마련해 달라는 뜻이었다. 


탁정식의 요청은 ‘불감청 고소원’ 



고종 황제(왼쪽 가운데)가 1918년 1월 15일 창덕궁 선원전(선대왕의 어진을 모신 곳)에 예를 올리기 위해 침소인 덕수궁 함녕전을 나서고 있다. 오른편 무리의 중심부에서 살짝 고개를 숙인 채 정면을 보고 있는 사람은 영친왕

이미 하여장은 이동인을 통해 조선의 연미 추진을 통고 받고 곧바로 ‘주지조선외교의(主持朝鮮外交議)’를 작성했었다. 그 핵심은 조선의 연미 추진을 비롯한 외교정책을 청나라가 주도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하여장에게 탁정식이 나타나 조미수호조약에 필요한 대안을 마련해 달라는 요청은 말 그대로 ‘불감청이언정 고소원’ 이었다.

하여장은 즉시 황준헌을 시켜 ‘조미수호조약 초안’을 마련하게 했다. 미리 조약 초안을 마련했다가 조선으로부터 공식적인 국서가 오면 그 국서와 초안을 근거로 주일 미국공사와 조미수호조약을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하여장과 주일 미국공사가 조미수호조약에 관한 기본 골격을 협의한 후 미국 대표가 조선으로 가서 수호조약을 맺게 되면 핵심 내용을 하여장 본인이 주도할 수 있고, 그렇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주지조선외교의’ 취지에도 부합했다.

황준헌 초안은 청나라와 미국의 요구를 중심으로 작성됐다. 조선의 요구사항은 나중에 황준헌 초안을 검토하면서 추가하라는 의미에서였다. 따라서 황준헌 초안은 당시 조선의 연미 추진에 대한 중국 입장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황준헌 초안에서 중국 입장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조항은 제1조의 ‘조선은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다’였다. 이 조항은 하여장이 ‘주지조선외교의’에서 제시했던 두 번째 방안, 즉 조선이 서구열강과 체결하는 조약문 중에 ‘이에 조선은 중국 정부의 명령을 받들어 OO국가와 수호조약을 체결하고자 합니다’를 그대로 이용한 것이었다.

‘주지조선외교의’와 ‘황준헌 초안’에서 공히 ‘조선은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라는 내용을 첨가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간단했다.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만천하에 알림으로써 조선에 대한 중국의 종주권을 공식화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청나라의 조공국은 조선이 유일하다시피 했다. 그런데 그 조선마저 자주독립국으로 떨어져 나가면 청나라 패권 질서가 완전히 와해되므로 그렇게 되지 않으려 속방 내용을 반드시 넣으려 했던 것이다. 청나라가 동아시아 패권 국가이자 최고 국가라고 하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한 마지막 몸부림이나 같았다.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을 보고 전격적으로 연미 추진을 결심했던 고종의 최초 구상은 다음과 같았다. 먼저 이동인을 하여장에게 밀파해 미국과 수호하려는 자신의 뜻을 알린다. 이어서 조정 중신들의 이름으로 미국과 수호조약을 요청하는 국서를 작성해 탁정식에게 보내 사후교섭을 마무리하게 한다.

그러면 하여장이 조선의 국서를 근거로 일본 주재 미국공사와 협의하고, 뒤이어 미국 대표가 조선으로 와서 수호조약을 체결한다.

그 같은 구상은 기왕의 친중 정책에서 친미 정책의 전환에 따른 청나라의 반발을 최소화하고 동시에 국내 양반들의 반발을 최소화 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고 할 수 있다. 즉 조약 초안을 하여장에게 부탁하는 것은 청나라의 반발을 최소화하기 위한 조치이고, 조정 중신 명의의 국서를 작성하는 것은 국내 양반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조치였던 것이다.

그 정도 조치로 중국과 조선 양반들의 반발을 무마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는 점에서 당시 연미 정책을 추진하던 고종은 상당히 낙관적인 입장이었다고 할 수 있다.

탁정식의 요청에 하여장이 곧바로 황준헌을 시켜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국의 반발을 무마하려던 고종의 시도는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정 중신 명의의 국서를 작성해 국내 양반들의 반발을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조정 중신들이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정 중신들은 연미 정책에 확신을 갖지 못했다. 위정척사파의 강력한 반발이 예상되기 때문이었다. 자칫하다가는 유교문명의 배신자로 낙인 찍힐 것이 두려웠던 그들은 고종 왕권과 양반 여론 사이에서 눈치 보며 갈팡질팡했다.




‘복심’ 이유원의 반대에 당황하는 고종 



한미수호조약 체결을 계기로 고종은 1883년 민영익·홍영식 견미(遣美)사절단 11명을 미국에 파견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고종의 최측근으로 꼽히던 이유원이었다. 수년에 걸쳐 고종과 이홍장 사이의 비밀 연락을 맡았던 이유원은 정작 고종의 연미 정책에 반대하고 나섰다. 만약 고종과 이홍장 사이의 비밀 연락을 이유원이 맡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조선 양반들은 고종의 연미 정책 배후가 이유원이라 의심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연미 정책에 대한 모든 비난이 이유원에게 집중될 것 또한 분명했다. 이유원은 그것이 두려웠기에 고종의 연미 정책에 반대했던 것이다. 이유원이 그럴 정도였으니 적지 않은 조정 중신들이 연미 정책에 부정적이었을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믿었던 이유원이 반대하고 나서자 고종은 자신감을 잃었다. 자칫 연미 정책을 강행하다가는 조정 중신은 물론 양반 전체로부터 격렬한 저항을 불러 왕위 자체가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고종은 그럴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중국의 권위를 빌리고자 했다. 즉 기왕에 자신이 주도하려던 연미 정책을 중국 주도로 바꾸고, 자신은 중국 배후에 숨으려는 것이었다.

그에 따라 고종은 조정중신 명의의 국서를 작성하지 못하고, 대신 김홍집 명의의 편지를 작성해 하여장에게 보냈다. 1880년 9월 16일에 작성된 김홍집 편지는 11월 24일 탁정식을 통해 하여장에게 전달됐다. 그 편지에서 김홍집은 “비록 현재 조선의 논의가 깨우쳤다고는 할 수 없지만, 예전과 같지는 않으니 큰 깨우침(大誨)을 내려 주신다면 받들어 행하겠습니다”라고 했다.

이 같은 언급은 기왕에 탁정식이 초안을 요구하면서 했던 말, 즉 “[조선책략]에 따라 고종이 연미 정책을 추진하게 됐다”는 언급과는 전혀 달랐다. 탁정식의 언급은 조선이 이미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결정했지만 그 방법을 몰라 도움을 요청한다는 뜻이라 할 수 있음에 비해 김홍집의 서한은 미국과 수호통상이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라 할 수 있었다.

하여장은 왜 그렇게 됐는지 물었다. 그러자 탁정식은 대답하기를 고종이 조정 중신 몇몇과 연미를 결정하기는 했지만, 이유원을 꺼려서 공개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만약 중국 황제가 권유(勸諭)한다면 공개적으로 추진할 수 있을 것이라 했다.

이 같은 탁정식의 언급으로 본다면 당시 고종은 예상치 않게 이유원이 반대하자 중국 황제의 권위를 빌려 조선 양반들의 반발을 무마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김홍집 서한은 하여장으로 하여금 고종의 입장과 뜻을 해명하기 위해 쓰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고종의 연미 정책은 처음과는 전혀 다르게 추진됐다. 처음에는 하여장의 도움을 받아 주일 미국공사와 일본에서 협의하는 것으로 했지만, 이제는 중국 황제의 도움을 받아 중국에서 협의하는 것으로 하게 됐던 것이다.

그것은 도쿄의 하여장 대신 천진의 이홍장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나 같았다. 결국 김홍집은 이제 하여장의 도움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 양해해 달라는 취지의 서한을 썼던 것이다.

도쿄에서 더 이상 할 일이 없게 된 탁정식은 12월 2일 귀국길에 올랐다. 그 길에 탁정식은 황준헌 초안을 가지고 왔다. 아마도 탁정식이 가져온 황준헌 초안은 12월 말께 고종에게 보고됐을 것이고, 뒤이어 이동인에게도 전해졌을 것이다.


1881년 연초에 이동인은 황준헌 초안을 참고해 조선 측 초안을 작성했다. 이른바 ‘이동인 초안’과 황준헌 초안의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조선은 중국의 명령을 받들어 미국과 수호조약을 체결한다’는 조항이 삭제됐다는 것이었다.

이동인은 조선이 중국 속방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동인 초안에는 ‘불립교당(不立敎堂)’ 즉 교회를 세우지 못한다는 조항이 추가됐는데 이는 위정척사파를 고려한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고종은 1880년 11월 중순 역관 이용숙을 이홍장에게 파견해 기왕에 하여장에게 요청했던 도움을 또다시 요청하도록 했다. 1881년 1월 20일 천진에 도착한 이용숙은 이홍장을 방문해 연미 정책을 결심한 고종의 뜻을 전하면서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 이용숙은 ‘영의정 이최응 계본(啓本)’, ‘김홍집이 하여장에게 보낸 서한’, ‘이유원이 이홍장에게 보내는 서한’을 제시했다.

‘영의정 이최응 계본’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요청하는 영의정 이최응의 계본으로서 이는 고종이 영의정의 요청에 따라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결심했음을 증명하고자 제시됐다. 결국 ‘영의정 이최응 계본’은 미국과의 수호통상을 추진하는 고종을 신뢰하고 도와달라는 의미에서 제시됐다고 할 수 있다.

‘김홍집이 하여장에게 보낸 서한’은 고종이 처음에는 하여장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내부 사정 때문에 하여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이홍장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과정을 알리기 위해 제시됐다.



조선 외교정책 쥐락펴락한 이홍장의 음모

마지막으로 ‘이유원이 이홍장에게 보내는 서한’은 연미 정책에 반대하는 이유원의 입장을 알리고, 그 같은 이유원을 설득해 달라는 취지에서 제시됐다. 요컨대 고종이 역관 이용숙을 이홍장에게 보낸 이유는 이유원 때문에 연미 정책을 공식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면서 중국 황제 또는 이홍장의 권위로 이유원을 비롯한 반대론자들을 제압해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이용숙과의 회담 그리고 이용숙이 제시한 문서들을 통해 이홍장은 고종의 입장과 요청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이홍장은 하여장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후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은 이홍장 주도로 천진에서 추진됐다.

먼저 이홍장은 광서 황제에게 주청해 황제의 이름 아니면 총리아문의 이름으로 조선에 공문을 보내 미국과의 통상외교를 권고하도록 요청하면서 향후 조선 관련 외교와 통상 사무를 기왕의 예부 대신 북양아문에서 관장할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요청에 따라 광서 황제는 총리아문 명의의 권고문을 조선에 보내게 하면서 향후 조선 관련 외교와 통상 사무는 이홍장이 주관하도록 했다. 한편 이홍장은 이유원에게 편지를 보내 조미수호조약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반대하지 말라 권고했다.

또한 이홍장은 자신의 측근 참모인 마건충에게 조미수호조약에 참조할 초안을 작성하게 했다. 37세의 마건충은 프랑스에서 3년간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인물로 당시 중국인 중에서는 서구열강을 가장 잘 아는 인물로 손꼽혔다.

이홍장 명령에 따라 마건충은 총 10개 조항으로 된 ‘대의조선여각국통상약장(代擬朝鮮與各國通商約章)’을 작성했다. ‘조선이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을 때 필요한 초안을 대신 마련함’이라는 뜻이었다. 이 ‘약장’은 향후 이홍장이 조미수호조약을 추진할 때 주요 참고자료가 됐다.

마건충의 ‘약장’은 통상 관련 조항이 대부분이지만, 그중에는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암시하는 구절도 있었다. 예컨대 제2조항에는 조선에 다만 영사와 총영사만 설치하고, 그 영사와 총영사는 중국 북경 주재 공사관의 지휘를 받도록 했는데 이는 조선에 설치되는 외국 외교관의 지위를 북경 공사관의 휘하에 둠으로써 사실상 조선이 중국 속방임을 공인하는 내용이었다.

또한 제 9조항에선 조약문을 한국어·외국어·중국어로 작성하되 중국어 조약문을 정본으로 한다고 했는데 이 또한 조선이 중국 속방임을 공인하는 내용이었다. 이는 조미수호조약을 추진하던 이홍장의 궁극적 목표도 조선을 중국 속방으로 묶어두려는 데 있었기에 나타난 결과였다.

준비를 마친 이홍장은 마건충의 ‘약장’을 비롯한 관련 자료를 고종에게 보냈다. 추가할 내용 또는 수정할 내용이 있으면 추가하거나 수정하라는 뜻이었다. 이어서 이홍장은 조선이 수호통상을 희망한다는 사실을 미국 측에 알렸다.

이에 따라 미국의 전권대표 슈펠트가 1881년 5월 천진에 와서 이홍장과 회담했다. 슈펠트는 1867년(고종 4)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선에 왔던 해군 제독으로 조선과 인연이 깊은 인물이었다. 이홍장을 통해 조선 측 전 권대표가 조만간 천진으로 올 것이라는 소식을 들은 슈펠트는 천진에서 대기했다.

슈펠트는 조선에 미국의 조약 체결 의사를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하고, 증거물로 국무성에서 발급함 문서를 제시했다. 이홍장은 천진을 방문한 조선의 고위관리에게 이미 자신이 조약 체결을 설득했으며, 조선정부에도 서한을 보냈다고 하면서 미국이 원하는 대로 될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했다. 물론 이런 언급은 지난 1월에 있었던 이용숙과의 회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고종은 천진에 파견되는 영선사를 이용해 조미수호조약을 추진하고자 했다. 최초의 영선사 조용호와 수행인원 및 경비는 1881년 2월 27일 확정됐고, 준비가 끝나는 4월 11일에 출발하기로 결정됐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위정척사 운동이 격렬하게 진행 중이었다. 그 과정에서 영선사는 위정척사파의 표적이 됐다.

결국 조용호를 영선사로 한 사절은 파견되지 못했다. 고종은 위정척사운동이 잠시 수그러들 때까지 기다렸다. 이른바 이재선 역모사건이 일단락된 9월 26일에야 김윤식을 영선사로 한 사절 80여 명이 파견됐다.

영선사에는 기술을 배우기 위해 선발된 38명의 학생들이 포함됐다. 양반들은 기술을 배우지 않았으므로 학생들은 천민 기술자들이었고, 통역을 위해 중인 출신 학생이 몇몇 있었다.



“미국 원하는 대로 될 것이외다”

11월 17일, 영선사 김윤식 일행은 북경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청나라 예부에 자문을 접수한 후 김윤식은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보정으로 출발했다. 공식적으로는 학생들 교육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지만 실제는 미국과의 수교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서였다.

김윤식은 수교통상에 필요한 3종류의 초안 즉 황준헌 초안, 이동인 초안 그리고 마건충 약장을 휴대하고 있었다. 11월 27일, 보정에 도착한 김윤식은 다음 날 이홍장을 만났다. 이후 김윤식은 보정과 천진에서 이홍장과 회담했다. 회담 장소가 보정과 천진 두 곳으로 된 이유는 이홍장이 직예총독과 북양대신을 겸임했기 때문이었다.

김윤식은 이홍장을 따라 보정에도 가고 천진에도 가야 했는데, 그 과정에서 총 7차례에 걸쳐 회담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회담은 12월 26일 보정부에서의 회담이었다. 김윤식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둘 사이에 필담(筆談)이 오갔는데 주로 조선의 속방 여부가 토론됐다. 당시 이홍장의 주요 관심이 조선의 속방 여부였기 때문이었다.

김윤식: 삼가 세 개의 초안(황준헌 초안, 이동인 초안, 마건충 약장)과 더불어 강화도조약 등본을 가져왔는데 보시겠습니까?

이홍장: 보여 주십시오.

김윤식: 여기 급하게 베낀 사본을 올려 드립니다.

이홍장: 이동인 초안은 말뜻이 너무 간단해 미국 대표가 동의하지 않을 듯합니다. 예컨대 ‘외교관 파견과 통상 장정은 5년 후에 다시 논의한다’는 제7조는 더욱 힘들 듯합니다. 반드시 조약 첫머리에 한 조항 대의를 첨부해 이르기를, ‘조선은 오래도록 중국의 속방이었으나 외교와 내정은 모두 자유로이 해왔다’고 해도 다른 나라에서 보고 문제삼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윤식: 비록 초안 세 개가 있었지만 조정에서 회람시키지 않아 편리한지 아닌지를 모릅니다. 그래서 이것으로 여쭈어 훗날 큰 후회에 이르지 않으려 합니다. 이것이 과군(寡君-고종)의 뜻입니다. 외교관 파견과 통상은 미국이 굳게 주장하면 또한 예외의 일이 아니니 끝내 거절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다만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을 때 그것이 처음이라 일마다 서로 대립했습니다. 지금은 조금 달라지기는 했지만, 일본 공사가 한양에 주재하는 것은 지금도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저들은 스스로 일을 핑계하며 와서 머물 뿐입니다. 내년 봄에 조정에서 누구를 전권대표로 보낼지 모르지만 그 때 조정의 명령을 받들어야 하니 지금은 답하기 어렵습니다. 다만 조선이 중국에 대하여는 속국이고,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자주국가라는 것은 명분도 바르고 말도 바르므로 일과 이치에 모두 편리합니다. 조약 중에 이 한 조항을 첨부하는 것이 아주 좋을 듯합니다.[김윤식, [음청사(陰晴史)] 고종18년(1881) 12월 26일]


김윤식과의 회담에서 속방 문제를 결정지은 이홍장은 곧바로 슈펠트와 조약문 협상에 들어갔다. 1882년 2월 7일 이홍장과 슈펠트는 천진에서 1차 회담을 가졌다. 예비회담의 성격을 가진 1차 회담에서는 특별한 논의 없이 상호 간 전권 자격을 확인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조선은 중국에 대해서만 속방일뿐이다”



1.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미국 측 대표였던 슈펠트 제독. /

 2. 1882년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조선 측 대표였던 신헌 전권대사 



예비회담 이후 이홍장은 본회담에 대비하기 위해 조미수호조약 초안을 마련했다. ‘이홍장 초안’이라 불리는 그 안은 황준헌 초안, 이동인 초안, 마건충 약장을 참조해 마련됐으며 총 10개 조항이었다. 이홍장은 그의 초안에 ‘대의조선여미 국수호통상조약(代擬朝鮮與美國修好通商條約)’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조선과 미국의 수호통상조약을 대신 마련함’이라는 뜻이었다.

이홍장 초안의 핵심은 제1조에 있었으며 그 내용은 ‘조선은 중국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로 했다’는 구절이었다. 황준헌 초안, 마건충 약장 그리고 이홍장 초안에 이르기까지 초지일관 중국의 입장은 조선을 속방으로 묶어 두려는데 있었고, 그것이 각각의 초안에 노골적으로 명문화됐던 것이다.

이홍장은 슈펠트와의 본회담을 앞두고 측근을 보내 ‘조선은 중국 속방이지만 내정과 외교는 자주하여 왔다’는 구절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시 몰라 예비 공작을 한 것이었다.

하지만 총 10조로 된 미국 측 초안에는 속방 조항이 없었다. 미국 측 초안은 강화도조약문을 참조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이홍장과 슈펠트 사이의 조약문 담판에서 핵심은 속방 구절을 넣을 것인지 아니면 삭제해야 할 것인지가 핵심이었다. 이홍장은 조선은 오래전부터 중국 속방이었으며, 그 사실을 고종도 인정했다는 점을 들어 조약문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슈펠트는 조선이 내정과 외교를 자주 해 왔다면 미국은 중국의 종주권과 관계없이 조선과 조약을 체결할 수 있다며 삭제를 주장했다. 수많은 논쟁 끝에 이홍장과 슈펠트는 속방 구절을 삭제하는 대신 부속문서에 넣어 조회하는 것으로 봉합했다.

이 결과 1882년 3월 1일에 이홍장과 슈펠트는 전문 15조로 된 조미수호조약문에 합의하게 됐다. 사실상 조미수호조약은 이것으로 끝났다. 나머지는 형식적으로 슈펠트가 조선으로 가서 조선 대표와 만나 조인하는 절차만 남게 됐다. 그것도 슈펠트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마건창이 함께 수행하는 것으로 했다.

이에 따라 슈펠트와 마건창이 조선 인천으로 함께 가서 조선 측 대표인 신헌·김홍집과 만나 조미수호조약에 조인했다. 그때가 1882년 4월 6일이었다.

과거 천 년을 지속해 온 친중 정책에서 친미 정책으로의 대전환을 뜻하는 조미수호조약은 명색으로는 조선과 미국 사이의 조약이었지만 실제 조약 체결을 주도한 인물은 고종이 아니라 이홍장이었다. 그 이유는 근본적으로 연미 정책을 추진하는 고종의 자신감 부족 나아가 미래 전망에 대한 확신 부족 때문이었다.

그 같은 자신감 부족 및 미래 전망에 대한 확신 부족은 조약 체결 이후 나타난 국내외 반발에 대한 대처에서도 또다시 반복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사에서 본격적인 미국화 또는 구라파화를 열어젖힌 조미수호조약의 역사적 의미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다.
 

[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 2018.7. 




20.청일(淸日) 군사가 한양 땅에 동시 출동하다 

- 임오군란보다 더 큰 고난의 ‘예고편’  


민씨 척족의 농간에 폭발한 구식 군대가 ‘병란(兵亂)’ 일으켜

…왕비 민씨와 흥선대원군 간 끊이지 않는 권력투쟁은 또다시 잠복돼


인기리에 방영됐던 KBS 사극 [명성황후]의 한 장면.

고종 황제(이진우 분)와 명성황후(이미연 분)가 정사(政事)를 의논하고 있다


1882년(고종 19, 광서 8, 메이지 15) 4월 6일, 역사적인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마건충과 정여창을 경복궁으로 초청했다. 조미수호조약을 위해 조선까지 온 수고에 보답하기 위해서였다. 4월 8일 오후, 한양에 도착한 마건충은 회현방의 남별궁에 머물렀다.

태종의 둘째 딸 경정공주가 살던 집이 남별궁이었다. 그래서 남별궁은 소공주댁(小公主宅)이라 불리기도 했다. 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이라는 지명은 소공주댁에서 유래했다.

접견 예정일인 10일까지 마건충은 남별궁에 머물며 이곳저곳을 유람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던 마건충에게 고종은 10일 새벽 김홍집을 은밀히 파견했다. 차마 남들 앞에서 드러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마건충은 조선어를 못했고, 김홍집은 중국말을 못했다. 그래서 둘은 한문으로 필담(筆談)을 나눴다.

김홍집이 필담에서 제일 먼저 꺼낸 언급은 “조선은 땅이 좁고 백성이 가난해 국가 경비가 졸렬하며 부족한 항목이 파다합니다. 그래서 일본인 중에 간혹 차관(借款)을 주선하겠다는 자가 있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차관을 받아야 한다면 차라리 청나라에 요청하는 것이 낳지 않겠습니까?”였다.

고종은 은밀하게 청나라 차관을 제공받고 싶었던 것이다. 굳이 일본 사람들이 차관을 제공하려 한다는 말까지 한 이유는 혹시라도 마건충이 거절하면 일본에서 차관을 빌리겠다는 암시였다.

만약 조선이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빌린다면 조선에서 일본의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이 강화될 것은 불문가지였다. 따라서 마건충은 차관 제공에 적극적이었다. 마건충은 조선이 차관을 제공받으려면 상환 방법이 분명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어떤 방법이 있는지 물었다.

그때 김홍집은 광산과 홍삼세를 거론했다. 당시 한반도에는 금광을 비롯한 좋은 광산들이 많이 있었고, 홍삼은 조선을 대표하는 특산품이었다. 그런 광산과 홍삼세를 언급한 것은 조선이 가진 거의 모든 것을 차관 담보로 제공하겠다는 뜻이나 같았다.

당시 고종은 재정 문제에서 큰 압박을 받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열악하던 정부 재정은 강화도조약 이후 급속도로 악화됐다.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와 외교 교섭이 빈번해지면서 재정지출이 급속도로 늘었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정부 구조조정, 군 근대화, 산업 근대화 등을 추진하기 위해서도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했다. 고종은 그런 자금을 자체 조달할 방법이 없어서 마건충에게 차관을 요청했던 것이다.

 마건충은 중국의 광산 기술자들을 조선에 파견해 조사한 후 차관 교섭을 구체화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해서 마건충과 김홍집 사이에 차관 교섭은 일단 성사됐다. 


비리 탄로날까 두려웠던 민겸호의 악수(惡手)

고종은 4월 10일 오후 3시쯤 경복궁 사정전에서 마건충과 정여창을 접견했다. 하지만 차를 마시고 의례적인 인사를 나눴을 뿐 별다른 대화는 없었다. 고종의 최대 관심사인 차관 교섭이 이미 타결됐기 때문이다.

접견을 마친 마건충은 다음날 한양을 떠났고, 4월 12일 인천을 출항해 천진으로 갔다. 이것으로 조미수호조약에 따른 후속문제까지 일단락됐다.

한편 고종은 조미수호조약 체결 직후 영국·독일 등 서구 열강과도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이렇게 해서 연미론(聯美論)을 축으로 하는 고종의 개화정책은 본격적인 궤도에 올랐다. 개화정책은 대외정책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문화·군사 등 전방위로 확대됐다.

특히 군사 방면에서 근대화 바람이 급속히 불었다. 당시 고종의 군 근대화는 별기군을 중심으로 추진 중이었다. 1881년 4월 11일, 5군영에서 선발된 80명으로 시작된 별기군은 조선 최초의 사관생도 훈련 기관이었다.

훈련은 일본 공사관의 공병장교 호리모도(堀本禮造) 소위가 맡았다. 군사훈련은 제식 훈련과 군사 기초이론으로 구성됐으며, 총기 사용법 학습은 서양식 신무기가 중심이었다. 복식은 주로 일본식을 모방해 초록색 군복과 군화를 착용했으며, 모자는 서양식을 따랐다.

1882년 2월 별기군의 사관생도는 140명으로 확충됐다. 아울러 1882년 3월부터는 6개월 속성과정을 거친 사관생도들이 장교로 임용되기 시작했다.

당시 별기군 출신들은 임용이나 승진에서 크게 우대됐다. 뿐만 아니라 별기군 자체도 구식군대와 비교해 많은 우대를 받았다. 그에 비례해 구식 군대의 불만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한 현상이었다. 여기에 열악한 국가재정과 민씨 척족(戚族)의 부정부패가 더해짐으로써 구식 군대의 불만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됐다.

당시 한양에는 약 1만 명의 구식 군대가 있었다. 그들 중 절반 정도가 정리 대상이었다. 그들을 안정적으로 정리하려면 많은 자금과 치밀한 계획이 필요했다. 하지만 고종이나 개화파는 아직 경륜도 부족했고 국가 재정도 넉넉하지 못했다. 설상가상 왕비 민씨가 끌어들인 민씨 척족들은 부정부패를 일삼았다.

조미수호조약이 체결된 4월을 전후로 뭔가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봄철 농사가 한창인데 비가 내리지 않았다. 몇 년 전부터 계속된 흉년에 봄 농사까지 망칠까 걱정한 고종은 계속해서 기우제를 지냈다. 하지만 6월이 됐는데도 아무 효과가 없었다.

청나라의 광산 기술자들도 오지 않아 차관 문제는 여전히 지지부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구식군사들에게 지급할 봉급이 13개월 치나 밀릴 정도로 국가 재정은 악화됐다. 그때 마침 호남의 세곡선 몇 척이 한양에 도착해 6월 5일에는 군사들에게 한 달 치 봉급을 지급할 수 있게 됐다. 봉급 지급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청지기가 맡았다.

그런데 중간에서 무슨 농간을 부렸는지 봉급으로 내준 곡식에 겨가 가득했다. 얼마나 겨가 많이 섞였는지 한 손으로 한 섬을 번쩍 들 수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구식 군사들에게 지급된 월급만 그랬다. 불만이 폭발한 구식 군사들은 민겸호의 청지기에게 달려가 항의하기 시작했다.

그중에서 39세의 김춘영(金春永)이 대표 격으로 앞장서서 항의했다. 말싸움이 거칠어지면서 몸싸움이 시작됐다. 그때 28세의 유복만, 34세의 강명준, 37세의 정의길 등이 합세해 청지기를 잡아 집단 구타했다. 청지기는 흠씬 두들겨 맞기는 했지만 죽지는 않았다.

상황은 민겸호 때문에 더욱 악화됐다. 민겸호는 본때를 보이겠다며 김춘영 등 주동자 4명을 잡아 가두고 장차 모두 죽이겠다고 공언했다. 민승호의 친동생인 민겸호는 탐욕스럽고 무식하다는 소문이 자자한 사람이었다. 군사들의 봉급을 빼돌린 민겸호는 자신의 비리가 탄로 날까 두려워 주동자들을 죽이려 했다.

민겸호의 이런 처사는 구식 군사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다. 당장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劉春萬)이 들고 일어났다. 그들은 ‘굶어 죽으나 법에 죽으나 죽기는 매한가지다. 차라리 죽일 놈 죽여서 분이나 한번 풀어보자’며 통문(通文)을 작성해 왕십리 행수(行首) 문창갑(文昌甲)에게 전달했다.

당시 왕십리는 구식 군사들의 가족들이 집단으로 모여 사는 군인 마을이었다. 왕십리를 중심으로 통문이 돌면서 수백 명의 군병과 하층민들이 호응했다.

6월 9일 아침 수백 명의 군병이 동별영에 모였다. 구속된 4명의 석방을 요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먼저 자신들의 총 대장인 이경하에게 억울함을 호소했다. 하지만 이경하는 직접 민겸호에게 말하라며 상관하려 하지 않았다.

정오쯤 수백 명의 군병이 직접 민겸호의 집으로 몰려갔다. 마침 민겸호는 집을 비우고 없었고, 봉급을 지급하던 그 청지기가 대신 나왔다. 그는 수백 명의 군병을 보고 집 안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흥분한 군병들은 청지기를 뒤따라 난입했다. 폭도로 변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부수고 짓밟았다. 방에서 꺼내온 비단과 보물은 한데 모아 놓고 불태워버렸다. 오후가 되자 폭동은 한양 전역으로 번졌다. 그들은 포도청을 습격해 감금된 4명을 구출해내고, 민씨 척족들을 찾아내어 죽였다.

또한 별기군의 훈련장을 습격해 일본인 장교 호리모도를 살해하고, 서대문 밖의 일본 공사관을 습격해 파괴했다. 민겸호의 집과 일본 공사관을 쑥대밭으로 만든 구식 군사들은 다시 동별영에 집결했다.

하지만 통문을 작성해 일을 키웠던 김장손과 유춘만 등은 뒷일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랐다. 그들의 행동은 분명 군사반란으로 몰릴 수 있었다. ‘용서받기 어려운 죄를 지었을 뿐만 아니라 청탁할 곳도 없다’고 생각한 그들은 흥선대원군을 찾아 운현궁으로 몰려갔다.

이런 사태를 만든 장본인은 왕비 민씨이고 그녀를 상대할만한 사람은 흥선대원군뿐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들은 흥선대원군에게 뒷수습을 해달라고 간청했다. 그날 흥선대원군은 김장손·유춘만 등 주동자 몇 명과 밀담을 나눴다. 왕비 민씨에 관한 내용이었다.

6월 10일 구식 군사들과 하층민들은 창덕궁으로 쳐들어갔다. 왕비 민씨를 잡아 죽이기 위해서였다. 이 사건이 임오군란이었다. [고종실록]에는 임오군란에 대해 ‘난병들이 궁궐을 침범했다’고 간단하게 기록돼 있지만 [매천야록]에는 보다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구사일생 목숨 건진 왕비는 충주로 달아나고 



임오군란을 일으켰던 구식 군대의 훈련 모습.

복식은 주로 일본식, 모자는 서양식을 따랐다. / 국사편찬위원회

"난병들이 창덕궁의 돈화문으로 밀려갔는데 대궐 문이 닫혀 있는 것을 보고 총을 마구 쏘아 총알이 문짝에 맞아 멀리까지 콩 볶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대궐 문이 열리자 벌떼처럼 몰려 들어갔다. 고종은 변란이 급한 줄 알고 흥선대원군을 부르니, 흥선대원군은 난병을 따라 들어왔다.

군사들이 대전에 올라갔다가 민겸호와 마주치자 그를 잡아 끌고 갔다. 민겸호는 황급히 흥선대원군을 끌어안고 도포 자락에 머리를 처박으며 ‘대감! 저를 살려주시오’ 하고 울부짖었다. 흥선대원군은 차갑게 웃으며 ‘내가 어떻게 대감을 살릴 수 있겠소’ 했다.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난병들은 그를 발로 차 계단 밑으로 떨어뜨리고 총으로 마구 찧고 칼로 쳐서 고깃덩어리로 만들었다. 곧이어 난병들은 왕비가 어디에 있느냐고 크게 외쳤다. 그들의 말은 무도하고 흉측해 차마 듣기 어려웠다. 사방으로 수색해 휘장과 복도에 창과 몽둥이가 고슴도치처럼 삐죽삐죽 했다.” (황현 [매천야록])

구식 군사들은 왕비 민씨를 찾아서 죽이려 했다. 그들은 왕비 민씨에게 무도하고 흉측한 말을 퍼부었다고 하는데 분명 욕을 해대며 찾았을 것이다. 그들에게 왕비 민씨는 더 이상 왕비가 아니었다. 그때 만약 왕비 민씨가 잡혔다면 민겸호처럼 됐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왕비 민씨를 찾을 수 없었다. 왕비 민씨는 천우신조로 궁궐을 빠져 나가고 없었다. 구식 군사들이 창덕궁으로 쳐들어갔을 때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부인 민씨와 함께 입궐했다.

그런데 흥선대원군 부인은 구식 군사들이 왕비 민씨를 찾아 죽이려 하자 자신이 타고 갔던 가마에 왕비 민씨를 숨겨 피신시켰다. 흥선대원군 부인은 차마 며느리가 폭도들에게 맞아 죽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왕비 민씨는 가마를 타고 대궐 밖으로 나가려다 얼굴을 아는 궁녀에게 들켰다. 그 궁녀가 입짓으로 군사들에게 알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달려들어 가마의 휘장을 찢고 왕비 민씨의 머리채를 잡아 땅에 내동댕이쳤다.

왕비 민씨는 난자당하기 직전이었다. 그때 군사들 속에 끼여 있던 홍재희라는 사람이 나서며 ‘이는 내 누이로 상궁이 된 사람이다. 오해하지 말라’고 외쳤다. 실제로 홍재희의 누이 중에는 궁녀가 된 사람이 있었다.

긴가민가하며 군사들이 머뭇거리는 사이 홍재희는 얼른 왕비 민씨를 들쳐 업고 궁궐 밖으로 나갔다. 실로 천우신조가 아닐 수 없었다. 홍재희는 후에 홍계훈으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당시 무예별감이었다.

무예별감이란 구식 군사 중에서 무예와 체력이 뛰어난 병사들을 엄선한 일종의 특수부대 요원이었다. 홍계훈은 처음에 구식 군사들과 함께 궁궐을 침범했다가 막상 왕비 민씨까지 죽이려 하자 마음을 바꿨다.

이렇게 극적으로 궁궐에서 빠져나온 왕비 민씨는 한양 관광방 화개동에 있는 윤태준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는 일찍이 세자익위사의 세마(洗馬) 벼슬을 했던 인연이 있었다. 왕비 민씨는 민응식·이용익 등을 은신처로 불렀다.

민응식은 충주에 살던 먼 친척이었는데 얼마 전부터 세자익위사의 세마가 돼 한양에 머물고 있었다. 그러니까 민응식은 윤태준의 직장 후배이기도 했다. 이용익은 함경도 명천 출신으로 달리기의 명수였다. 왕비 민씨는 이용익을 시켜 양근으로 도망간 민영익에게 연락을 취하게 했다.

6월 13일에 왕비 민씨는 한양 벽동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옮겼다. 아무래도 한양은 불안해 장차 충주에 있는 민응식의 집으로 갈 예정이었다. 다음 날 왕비 민씨는 한양 벽동을 떠나 충주로 향했다. 여주를 거쳐 충주 장호원에 있는 민응식의 집에 도착한 때는 19일이었다.

그곳에서 왕비 민씨는 상황이 바뀌기를 기다렸다. 흥선대원군은 왕비 민씨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아예 죽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임오군란이 발발한 6월 10일 당일로 왕비 민씨의 죽음이 공포됐다.

혹 살아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으로 간주하겠다는 의미였다. 임오군란을 계기로 다시 권력을 잡은 흥선대원군은 고종과 왕비 민씨가 추진했던 개화정책을 모두 원점으로 되돌려놓았으면서 왕비 민씨의 장례를 주도했다. 



흥선대원군 제거 위해 청(淸)에 도움 요청한 김윤식



경기도 여주군 능현리에 있는 명성황후의 생가

6월 11일에는 시체도 없이 목욕과 염(殮)을 행했으며, 14일에는 시체 대신 옷을 관에 넣고 입관 의식을 치른 후 빈소까지 차렸다. 17일에는 무덤 이름을 정릉(定陵), 시호를 인성(仁成)이라고 정했다. 이제 왕비 민씨는 공식적으로는 저 세상 사람인 ‘인성왕후’가 됐다.

그런 왕비 민씨를 다시 이 세상 사람으로 다시 살려낸 것은 청나라 군사였다. 임오군란 직후 청나라가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야 한다는 요구는 청나라 측과 조선 측 모두에서 나왔다. 조선 측에서 최초로 청나라 군대 파견을 요청한 사람은 영선사 김윤식이었다.

당시 천진에 머물던 김윤식이 임오군란 소식을 처음 들은 때는 6월 18일로 천진 해관도 주복(周馥)을 통해서였다. 주복은 청나라의 주일공사 여서창의 보고를 통해 임오군란의 대략적인 내용과 그에 대한 일본의 대응을 알았다.

6월 9일 구식 군사들의 공격을 받은 일본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는 부하 29명과 함께 인천으로 도주했다. 그곳에서 영국 배에 오른 하나부사는 나가사키로 향했다. 6월 15일, 나가사키에 도착한 화방의질은 외무성에 임오군란을 보고했다.

그는 부산과 원산의 일본 거류민들이 위험하니 속히 군함을 파견해 보호하는 한편 앞으로 조선과의 교섭을 위해 강력한 무력시위가 필요하다는 의견을 첨부했다.

16일 긴급내각회의가 소집됐다. 그 회의에서는 즉시 개전하자는 강경론과 우선 외교적 교섭부터 해보자는 온건론이 팽팽하게 맞섰다. 다음 날까지 연속된 긴급회의에서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결국 메이지 천황이 온건론을 채택하는 것으로 결정하고 조선에 사죄와 배상을 요구하기로 했다.

전권위원에는 하나부사가 임명됐으며, 군함 4척과 수송선 3척에 1개 대대병력 약 1500명도 파견하기로 했다. 일본 외무성은 이런 사실을 주일 청나라 공사 여서창에게 알렸다. 여서창은 본국에 타전한 보고문에서 일본정부가 군함을 조선에 파견하기로 결정했으니 청나라도 군함을 파견해 사태를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다.

이국 땅 천진에서 고국의 변란 소식을 접한 김윤식은 몹시 당황했다. 누가 왜 변란을 일으켰는지 정확한 소식을 알 수 없어 더욱 당혹스러웠다. 6월 19일에 김윤식은 천진 해관도로 직접 주복을 찾아가서 필담을 나눴다.


 김윤식은 이번 변란은 작년에 있었던 이재선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 결국 흥선대원군이 이번 사건의 배후에 있을 것이란 뜻이었다.

김윤식은 흥선대원군이 극단적인 반일정책을 펼까 우려했다. 그럴 경우 일본이 난을 평정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군대를 파견해 무력점령을 시도할지 몰랐다. 김윤식은 절대 그런 상황이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김윤식은 주복에게 ‘일본의 손을 빌리느니 차라리 청나라에서 주도적으로 상황을 정리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며 ‘군함 몇 척에다 육군 1000명을 싣고 주야로 달려 일본보다 앞서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이홍장은 모친상을 당해 고향에 내려가고 없었다. 유교장례법으로는 3년상을 치러야 하지만 서태후는 100일의 치상(治喪) 휴가만 허락했다. 당시 청나라에서 이홍장의 역할이 그토록 중요했다. 이홍장은 7월말쯤 다시 복귀할 예정이었는데 그 사이 임오군란이 터졌다.


마건충 “모든 정령(政令)은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1. 총리교섭통상대신으로 조선에 부임해 국정을 간섭하고 일본·러시아를 견제했던 원세개. 신해혁명 때 청나라 조정의 실권을 잡아 임시총통이 됐고, 이어 스스로 황제라 칭했다.

 2. 엘리자베스 키스가 그린 ‘자작 김윤식’. 3·1 운동의 충격 속에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듯 생기 없는 모습으로 묘사돼 있다



이홍장 대신 임시로 직예총독 겸 북양대신직을 수행하던 장수성은 일단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자 했다. 장수성은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과 도원 마건충에게 군함 3척을 이끌고 조선으로 가 상황을 파악하게 했다. 마침 천진에 머물고 있던 어윤중이 그들과 함께 귀국길에 올랐다.

6월 22일에 천진을 출발한 정여창과 마건창은 27일 오후에 인천에 도착했다. 정여창은 군인이었으므로 현지 조사는 마건충의 몫이었다. 마건충은 어윤중을 보내 정확한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

28일 정오에 돌아온 어윤중은 마건충과 필담을 나눴다. 어윤중은 임오군란의 배후가 흥선대원군이며 그가 건재하면 일본과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결국 임오군란을 진압하려면 흥선대원군을 제거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마건충 역시 같은 판단이었다.

그런데 마건충이 인천에 온 이틀 후에 일본 함대 역시 인천에 도착했다. 마건충에게는 병력이 없었지만 일본 함대에는 1대대 1500명의 병력이 있었다. 일본을 압도하려면 그보다 많은 병력이 필요했다. 마건충은 최소한 3000명의 병력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제독 정여창은 병력을 동원하기 위해 청나라로 되돌아가고 마건충은 조선에 남았다.

7월 7일 오장경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3000명의 군대가 정여창의 북양해군 함선 5척에 분승하고 인천에 도착했다. 하지만 그곳에 이미 일본 함대가 정박해 있어서 남양으로 옮겨 정박했다.

김윤식은 청나라 군대의 향도관(嚮導官)이라는 직책으로 함께 왔다. 김윤식은 일신(日新)이라고 하는 함선을 타고 왔는데 승선하기 전에 원세개를 소개받았다.

원세개는 호가 위정(慰廷)으로 오장경 휘하의 행군 사마(行軍司馬)였다. 김윤식은 원세개와 함께 일신호를 타고 오면서 친분을 쌓았다. 김윤식은 원세개의 위인 됨이 낙이영준(樂易英俊)하다고 평가했는데 여유만만하고 기세등등하다는 뜻이었다.

당시 원세개는 24세 젊은 나이였음에도 머리가 반백이었다. 그 까닭을 묻자 천하를 유력하다가 실혈증(失血症)에 걸려 그렇게 됐다고 대답했다. 원세개는 김윤식에게 상륙 즉시 수백 명의 정예병을 이끌고 한양으로 곧장 들어가는 것이 어떨까 하는 의견을 묻기도 했다. 김윤식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청나라 군사는 7월 8일 남양에 상륙한 후 선발대를 한양으로 급파했다. 그 선발대에 원세개가 끼여 있었다. 선발대에 뒤이어 7월 12일까지 청나라 군사 3000명 모두가 한양에 입성했다. 준비를 끝낸 마건충은 흥선대원군 납치계획을 세웠다.

7월 13일 점심 직후에 마건충은 정여창·오장경과 함께 흥선대원군의 사저를 예방했다. 예방을 받았으면 답방하는 것이 예의였다. 오후 4시쯤에 흥선대원군이 수십 기를 거느리고 청나라 군영에 찾아왔다.

마건충은 흥선대원군과 필담을 나눴다. 필담은 두 시간 이상 지속됐다. 그사이 흥선대원군을 모시던 사람들은 조용히 격리됐다. 흥선대원군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본 마건충은 “그대는 조선 국왕을 황제가 책봉했다는 사실을 아는가?”라고 썼다.

흥선대원군이 “안다”고 쓰자 마건충은 “국왕을 황제가 책봉했으면 모든 정령(政令)은 국왕으로부터 나와야 되는데 그대가 6월 9일에 변란을 일으켜 왕권을 빼앗고 사람들을 죽였으며 사사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여 황제가 책봉한 왕을 퇴위시켰으니 왕을 속인 것이요 실제는 황제를 우습게 안 것이다.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다만 국왕에게 부자지친의 의리가 있으니 관대하게 처분하겠다. 속히 가마에 올라 마산으로 갔다가 군함을 타고 천진에 가서 조정의 처분을 들으라”고 썼다.

흥선대원군은 공포에 싸여 사방을 돌아봤지만 측근은 한 명도 없었다. 흥선대원군은 마건충에게 이끌려 강제로 수레에 태워졌다. 흥선대원군은 그렇게 납치돼 청나라의 보정에 감금됐다.


올 때와는 정반대 성황… 위풍당당 왕비의 행차

흥선대원군이 납치되기 이전에 고종은 이미 왕비 민씨가 충주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청나라에서 귀국한 김윤식이 7월 10일에 고종에게 귀국 보고를 했는데, 그때 고종은 왕비 민씨가 충주에 은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줬다. 그 소식을 들은 김윤식은 ‘속마음이 경사스럽고 다행스러움을 이기지 못했다’고 썼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고 왕비 민씨의 혼전(魂殿)에 가서 곡을 했다. 그때까지도 왕비 민씨는 공식적으로는 저 세상 사람이었다. 이런 사실로 미뤄보면 왕비 민씨는 6월 19일 충주에 도착한 직후부터 고종과 은밀한 연락을 주고받았음을 알 수 있다.

흥선대원군이 납치되고 일주일 후인 7월 20일에 전 현감 심의형이 오장경에게 밀서를 보냈다. 왕비 민씨가 충주 장호원촌에 은신해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밀서는 왕비 민씨가 보내게 한 것이 분명했다. 오장경은 김윤식과 어윤중을 불러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왕비 민씨는 분명 살아 있었다.

보고를 받고 고종은 오장경에게 부탁해 충주로 청나라 군사를 파견해 왕비 민씨를 맞이해 오게 했다. 고종은 먼저 어윤중을 충주로 보내 필요한 준비를 하게 했다. 25일에는 서상조를 시켜 상소문을 올려 왕비 민씨가 충주에 은신하고 있으니 의장을 갖춰 맞이하자는 요청을 하게 했다.

그날로 고종은 왕비 민씨의 영접 준비를 공식화했다. 영의정과 제학·승지·한림·주서 등 핵심 요직에 있는 관리들은 모두 나가서 왕비 민씨를 영접하라 명령했다. 또 왕비 민씨를 경호하기 위해 청나라 군사 100명과 조선 군사 60명을 충주로 파견했다.

어윤중이 충주 장호원에 도착한 때는 7월 27일이었다. 그때 왕비 민씨는 민영위의 집에 머물고 있었다. 왕비 민씨는 어윤중으로부터 문안인사를 받았다. 지난 6월 10일에 궁에서 피신한 후 처음 받아보는 공식 문안인사였다. 곧이어 도착한 청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들이 집 주변을 호위했다. 저녁때가 되자 한양에서 파견된 관리들도 모두 도착했다.

다음 날 왕비 민씨는 민영위의 집을 떠나 한양으로 향했다. 올 때는 도망 길이었지만 갈 때는 위풍당당한 왕비의 행차였다. 어윤중을 비롯한 고위관료들이 왕비의 행차를 수행했다. 앞뒤에서는 청나라 군사와 조선 군사들이 경호했다. 29일 용인에서 숙박한 왕비 민씨는 8월 1일 한양에 입성했다. 왕비 민씨와 고종은 다시 평상을 되찾았다.

그러나 청나라 보정(補政)에는 아직도 흥선대원군이 살아 있었다. 위정척사파 역시 그대로였다. 왕비 민씨와 흥선대원군 사이의 권력투쟁은 해결되지 않은 채 수면 아래로 잠복했을 뿐이었다. 더욱더 큰 문제는 한양에 청나라 군사와 일본 군사가 동시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왕비 민씨와 고종의 앞날에는 임오군란보다 더 큰 고난이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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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신명호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 월간중앙  , 2018.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