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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7. 11:40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 Ⅴ [21회~25회]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를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게요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Ⅰ[ 1회~  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2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Ⅱ[ 6회~1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3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Ⅲ[11회~1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4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Ⅳ[16회~2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5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Ⅴ[21회~2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6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Ⅵ[26회~30회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Ⅶ[31회~35회]  

『신명호의 근대 동북아 삼국지』Ⅷ[36회~40회] 



21. 일본, 조선 압박해 제물포조약 체결 

- 임오군란 책임자 처벌 등 7개 조항 요구 


상황만 허락되면 즉각 전쟁 일으키겠다며 별러…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 심화로 반청 감정 고조돼



▎제물포조약(1882년) 체결 22년 후인 1904년 제물포의 모습.

상인들과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로 포구가 크게 붐비고 있다



임오군란 소식을 접한 일본 정치 지도자들은 대부분 즉각적인 군사보복을 주장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당시 일본 군부의 실세였던 야마가타 아리도모(山縣有朋)였다.


그는 태정대신 산조 사네도미(三條實美)에게 편지를 보내 천황의 영광과 일본의 안보를 위해 이번 기회에 청나라와 전쟁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런 의견이었다.

하지만 우대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다른 입장이었다. 그 역시 장기적으로는 청나라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지만, 현시점에서 일본 해군이 이홍장의 북양 해군을 제압하기는 쉽지 않다고 예상했다.

게다가 조선이 구라파 각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직후 시점에서 일본이 먼저 전쟁을 도발하면 미국을 비롯한 서구열강이 청나라 편을 들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생각했다.

즉 이와쿠라는 일본이 청나라와 전쟁을 벌이기에는 아직 군사적·외교적 준비가 미흡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와쿠라는 즉각적인 군사 보복 대신 외교적 해법을 주장하면서 청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해군력을 대폭 증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번에도 메이지 천황은 이와쿠라의 의견을 존중해 외교적 해결을 명령했다. 외교 담판을 맡게 된 하나부사 요시토모(花房義質)는 4척의 군함에 분승한 1500여 병력과 함께 조선으로 갔다. 그때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로부터 훈조(訓條)를 받았는데 중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군란 주동자들이 조선정부를 적대한 것인지 아니면 일본정부를 적대한 것인지 아직 확실하지 않으므로

   정확한 상황을 조사하고 각각의 경우에 따라 대응조치를 마련한다.

둘째 군란이 재발해 또다시 일본인을 공격한다면 조선정부의 대책과 관계없이 군사력으로 진압한다.

마지막으로 조선 정부에서 하나부사를 접대하지 않거나 일본의 요구사항을 무시하면서 의도적으로 시간을 끌

    경우 인천항으로 돌아와 적당한 지점을 점령하고 전쟁에 대비한다.

이와 같은 훈조는 당시 일본정부의 입장이 어떤 것이었는지 명확하게 보여준다. 즉 당장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 전쟁을 도발하지 않았지만, 상황이 허락하기만 하면 곧바로 전쟁을 도발하겠다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청나라 “조선 내 일본군 주둔은 불가”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정치가 이와쿠라 도모미



한양에 도착한 하나부사는 임오군란이 조선정부와 아무 관계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관계는커녕 고종 자신이 임오군란의 최대 피해자였다. 왕비 민씨를 비롯해 고종 측근들이 대거 살해됐기 때문이다.

당시 한양에는 난병들이 왕비를 핍박해 음독자살하게 만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게다가 고종은 대원군에게 실권을 빼앗긴 채 유폐 상태였다. 그런 고종을 상대로 임오군란 책임을 추궁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었다.

하지만 하나부사는 그런 고종을 상대로 임오군란 책임을 추궁했다.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그동안 일본이 관철하고자 했던 국가이익을 실현시키려 했던 것이다. 하나부사는 임오군란의 책임자 처벌, 배상, 재발방지라는 명목으로 7개 조항을 고종에게 요구했다.

첫째 15일 이내에 책임자를 체포해 처벌할 것,

둘째 사망자들을 예우해 장례를 치를 것,

셋째 유족에게 5만원의 위로금을 지불할 것,

넷째 일본에 손해배상금을 지불할 것,

다섯째 부산·원산·인천의 일본인 활동영역을 100리로 확대하고 함흥·대구·양화진에서 일본인의 통상을 허락

       할 것,

여섯째 일본 외교관의 자유로운 조선 여행을 보장할 할 것,

일곱째 일본 공사관에 호위 병력을 주둔시킬 것이다.

그런데 7개 조항 중 다섯째와 여섯째는 임오군란과 아무 관계없는 요구사항이었다. 오히려 강화도조약 이후로 일본정부가 집요하게 요구하던 외교 현안이었다. 예컨대 인천의 경우 일본은 집요하게 개항을 요구했지만, 조선정부는 한양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완강하게 거절했다.

그런데 하나부사는 이번 기회에 인천을 개항시키는 것은 물론 부산·원산·인천에서 일본인의 활동 영역을 100리로 확대하고자 획책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새로이 함흥·대구·양화진까지 개항장으로 만들고자 했다.

나아가 일본 외교관의 자유로운 조선 여행을 요구함으로써 조선 전역을 일본의 영향권 안에 묶어 두고자 했다.

고종은 이유원과 김홍집을 조선 측 대표로 임명해 하나부사와 협상케 했다. 형식적으로 협상 대표자는 이유원이었지만 실제 협상은 김홍집이 담당했다. 따라서 7개항 협상은 하나부사와 김홍집 사이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근대 외교협상 경험이 없던 김홍집은 사사건건 마건충에게 조언을 구해야 했다. 예컨대 김홍집은 하나부사를 만나기 전에 먼저 마건충을 찾아 7개 조항을 토론하면서 무엇을 수용하고 무엇을 거부해야 하는지 물었다. 그때 마건충은 둘째와 여섯째는 수용할 수 있지만 일곱째는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단언했다.

마건충이 절대 수용할 수 없다고 한 일곱째는 일본군의 조선 주둔이었다. 일본군이 조선에 주둔하게 되면 청나라 역시 무슨 명분을 들어서라도 조선에 군대를 주둔시키려 할 것이고, 그것은 결국 청·일 간의 군사충돌로 이어질 것이란 예상 때문이었다.

이렇게 마건충은 일본군의 조선 주둔에 대해서는 단호한 입장을 취했지만, 나머지 요구사항은 절충하는 게 좋겠다는 타협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를테면 첫째 요구사항인 15일은 너무 촉박하니 좀 더 기간을 연장할 것, 셋째와 넷째는 액수를 최대한 낮출 것 그러고 다섯 째 중 함흥·대구는 절대 허락하지 않되 그 외는 적당히 수용할 것 등이 그것이었다.

일본의 7개 요구 사항 중에서 마건충은 군사 주둔 문제를 가장 심각하게 생각했지만 김홍집은 그것보다는 넷째의 손해배상 문제를 더 걱정했다.

하나부사가 액수를 명시하지 않았는데, 만에 하나 터무니없이 높게 부를 경우 어떻게 할 것인지, 어느 정도에서 타협해야 할지 걱정이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정부의 재정 상황이 너무나 열악하다 보니 군사 문제보다 돈 문제가 더 시급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마건충은 하나부사가 상식선에서 요구할 것이라며 많아야 5만원 정도일 것으로 예상했다. 당시 조선정부의 1년 예산이 일본 돈으로 환산해서 약 150만원 정도 됐는데 유족 위로금 5만원과 손해 배상금 5만원을 합한 10만원은 비록 적지는 않다고 해도 감당할 만한 액수였다.

그런데 막상 협상을 시작하자 하나부사는 손해배상금 50만원을 요구했다. 조선정부 1년 예산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막대한 금액이었다. 김홍집이 무슨 근거에서 50만원인가 하고 따지자 군란을 막지 못한 것은 조선정부의 책임이고 그 책임에 대한 벌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부사는 만약 조선정부에서 50만원을 상환하기 어려우면 광산 채굴권을 넘기라고 했다. 일본이 스스로 광산을 개발해 50만원을 채운 뒤 다시 돌려주겠다는 것이었다. 또 조선정부의 재정이 그렇게 어렵다면 10만원을 깎아주겠다고 했다.



조선의 대일(對日) ‘군사적’ 종속 시작



청나라 함풍제의 후궁이며, 동치제의 생모인 서태후



자존심이 상한 김홍집은 깎지 않아도 된다고 응수하고 말았다. 결국 김홍집은 함흥과 대구를 통상지로 만드는 것은 거절할 수 있었지만 나머지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함흥과 대구를 거절하자 하나부사는 그 대신 사죄 사절을 파견하라 요구했고, 김홍집은 이를 수용해야 했다.

그 결과 1882년 음력 7월 17일 하나부사·이유원·김홍집 사이에 7개 조항의 ‘조일강화조약’과 2개 조항의 ‘수교조규속약(修交條規屬約)’이 체결됐다. 이 조약은 제물포에서 체결됐므로 일명 ‘제물포조약’이라고도 했다. 이 조약으로 조선정부는 재정적으로 큰 곤란에 빠지게 됐다.

뿐만 아니라 공사관 호위라는 명분으로 일본군이 한양에 주둔하게 됨으로써 조선정부는 경제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군사적으로도 일본정부에 종속될 수밖에 없었다.

조선에 파견돼 임오군란을 진압한 마건충은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보면서 청나라도 제물포조약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것은 바로 1882년 봄에 이홍장과 어윤중 사이에 논의되다가 임오군란으로 중단된 무역협상을 속히 마무리 지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에서 마건충은 귀국길에 어윤중을 동반해 천진으로 함께 갔다. 이홍장과 어윤중 사이에서 논의되던 통상협상을 속히 마무리 짓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지난 1882년 2월 17일, 문의관(問議官)에 임명됐던 어윤중은 통상협상을 문의하기 위해 이조연과 함께 청나라에 파견됐었다. 고종은 그들에게 “일본에 대해서는 이미 개항해 통상하도록 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해서는 아직 해금(海禁)을 지키고 있으니 친중국(親中國) 해야 한다는 뜻과 어긋난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이미 개항했으니 서로 무역하고, 장애 없이 왕래하며, 힘써 약속을 지키자는 뜻을 또한 총리아문과 통상대신 이홍장과 논의하라”고 명령했다.

조선은 그동안 청나라와 유사시에만 사신을 파견하는 비상주(非常住)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다. 또한 사신들을 통한 공식 무역관계만 맺고 있었다. 이 같은 외교·통상 관계가 바로 조공책봉체제였다.

고종은 기왕의 조공책봉체제 만으로는 조선과 청나라 양쪽에 모두 불리하다고 판단해 새로운 외교·통상 관계를 맺고자 했던 것이다.

1876년의 강화도조약을 통해 조선은 이미 일본과 공사관을 통한 상주 외교관계와 사무역을 통한 자유 무역관계를 맺었다. ‘연미국(聯美國)’에 입각해 수호조약을 추진하는 미국과도 곧 같은 관계를 맺을 예정이었다.

그럼에도 조선과 청나라는 전통적인 조공책봉체제만 고집하고 있었다. 고종은 청나라와도 상주외교와 자유무역 관계를 맺는 것이 양국에 유리하다는 점을 내세워 청나라를 설득하려 했다.

청나라를 설득한 후 고종은 조선도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북경에 공사관을 설치하고 외교관을 상주시키려 했다. 또한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청나라의 개항장에서 조선 상인들이 자유로이 무역하게 하려 했다.

이것은 결국 기왕의 사대관계를 버리고 근대적인 조약관계를 수립하자는 의미였다. 문제는 청나라의 반응이었다.

어윤중과 이조연은 3월 28일 천진에 도착해 영선사 김윤식을 만났다. 당시 북양대신 이홍장은 모친상을 당해 현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4월 3일부터 어윤중은 천진해관도 주복(周馥)을 상대로 외교·통상 문제를 논의했다. 어윤중이 제시한 핵심 사항은 다음의 네 가지였다.

첫째,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이 가능하다면 세부사항은 청나라에서 결정해도 좋다.

둘째,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국경 무역은 러시아 때문에 불안하니 폐지하는 것이 좋다.

셋째, 상주외교를 시작하면 사은사·진주사 등의 사신 파견이 불필요하지만 혹 황제의 명령이 있다면 파견할 수

     있다.
넷째, 상주외교를 시작하면 조선 파견 사신에게 중국에서 경비를 부담할 필요가 없다.

주복은 자유무역에 대해서는 별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상주외교에 대해서는 아주 부정적이었다. 주복은 조선이 상주외교를 요구한다면 청나라 안에서 분명 논란이 제기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그리고 상주 외교에 관한 문제는 자신의 소관이 아니라며 논의 자체를 거부했다.

하는 수 없이 어윤중은 이홍장을 대신해 북양대신으로 있던 장수성을 찾아갔다. 장수성 역시 주복과 같은 반응이었다. 장수성은 조선과의 상주외교 문제는 북경의 예부 소관이니 그곳으로 가서 논의하라고 하였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미국·영국·독일과 수호조약을 체결했다.

4월 21일에 천진을 출발한 어윤중은 23일 북경에 도착했다. 다음 날 어윤중은 예부에 상주외교 문제를 제기했다. 이 문제는 청나라 조정에 큰 논쟁을 불러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조선에서 요구한 상주외교는 거부됐다.

청나라 사람들은 조선의 상주외교 요구를 조공책봉체제에서 이탈하려는 시도로 판단했다. 그래서 청나라 관료들은 조공책봉체제 안에서만 조선의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조선과의 외교·통상을 모두 예부에서 관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끝까지 조공책봉체계에 집착한 서태후



온건 개화파인 김홍집이 1880년 제2차 수신사로 일본에 갔을 때 기념사진



하지만 서태후는 약간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청사고]에는 ‘조선이 사신을 북경에 상주시키겠다고 요청했지만 허락하지 않고, 오직 개항 항구에서의 무역만 허락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서태후가 상주외교 요구는 거절하고 자유무역 요구는 허락하되 그 관할을 예부가 아니라 총리아문에서 담당하게 했다는 뜻이다.

서태후가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고종의 속마음을 정확히 알지 못해서였다.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을 요구하는 고종이 만약 거절됐을 때를 대비해 어떤 복안을 준비했는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서구열강의 경우 청나라에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을 요구하면서 거절될 경우 무력을 사용하겠다고 협박했었다.

실제로 서구열강은 그렇게 했다. 지금 고종은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상주외교와 자유무역을 요구하고 있다. 만약 거절될 경우 고종은 어떻게 할 것인가? 물론 서구열강처럼 무력을 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청나라에 실망한 고종이 다른 선택을 할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미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은 상황이라 일본에 밀착될 가능성도 있었다.

서태후는 조공책봉체제를 지키면서 최대한 고종의 요구를 들어주려 했다. 즉 형식적인 상주외교만 거절했지, 사실상 조선과의 자유무역을 총리아문에서 관장하게 함으로써 조선이 자유무역을 핑계로 북경에 외교관을 상주시킬 가능성을 열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와의 자유무역 문제를 관장하기 위해 조선 외교관이 북경에 상주하며 총리아문과 업무 협의를 하게 되면 당연히 의전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외교관이 서구열강의 외교관과 동일한 의전을 요구하면 그것은 결국 조공책봉체제의 와해를 의미했다.

그렇다고 청나라가 종주권을 내세워 조선 외교관에게 차별적인 의전을 요구하면 서구열강의 외교관들이 반발할 것이 분명했다.

이미 조선과 수호조약을 체결한 미국·영국·독일 외교관들은 자신들과 대등한 조선 외교관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의전을 행할 경우 결과적으로 자신들도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었다.

예부와 총리아문에서는 서태후에게 재고할 것을 요청했다. 문제가 복잡해지자 서태후는 이홍장이 판단해서 처리하게 했다. 어윤중은 이홍장을 만나기 위해 다시 천진으로 갔다.

5월 4일 북경을 출발한 어윤중은 다음날 천진에 도착했다. 어윤중은 김윤식을 만나 상주외교 문제를 의논했다. 강하게 요구할 것인지 아니면 포기할 것인지의 문제였다.

어윤중은 출국할 때 고종으로부터 ‘사대의 예절은 마땅히 더욱 정성껏 해야 하지만 형식에 매여 백성과 나라에 폐단이 되는 예절은 구례에만 안주할 수 없다’는 명령을 받았다.

이 명령은 생각하기에 따라 상주외교를 반드시 관철시키라는 뜻도 될 수 있고 아닐 수도 있었다. 만약 ‘백성과 나라에 폐단이 되는 예절은 구례에만 안주할 수 없다’는 면만 생각하면 상주외교를 반드시 관철시켜야 했다.

하지만 ‘사대의 예절은 마땅히 더욱 정성껏 해야 한다’는 면만 생각하면 굳이 상주외교를 관철하지 않아도 됐다. 결국 어윤중과 김윤식은 청나라의 뜻에 따라 처리하자는 것으로 정리했다.

당시 이홍장은 조선과의 외교와 통상을 분리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즉 외교는 전통적인 방식 그대로 북경의 예부에서 담당하고, 통상은 천진의 북양아문에서 담당하는 것으로 했던 것이다.

그러면 조선과의 자유무역을 북경의 총리아문에서 담당하게 될 경우 야기될 수 있는 문제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청나라와의 자유무역 문제를 관장하기 위한 조선 외교관이 북경 아닌 천진에 상주하면 의전 문제로 서구열강의 외교관들과 다투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었다.



외교·통상 분리로 해법 찾으려 한 이홍장



명성황후 민자영의 소싯적 모습.

그는 44세이던 1895년 을미사변 때 일본 자객의 칼에 맞아 목숨을 잃었다



5월 14일 김윤식은 주복을 만났다. 그때 주복은 ‘수백 년간 지켜온 규칙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어렵다’고 했다. 북경에서의 상주외교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또 자유무역도 북경의 총리아문에서 담당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결국 천진의 북양아문에서 자유무역을 담당할 테니 양해하라는 의미였다.

이에 대해 김윤식은 “상주외교는 원래 번거롭게 요청할 일이 아니었다”고 했다. 북경에서의 상주외교를 반드시 관철시킬 의도로 요구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실토한 셈이었다.

그때 김윤식과 어윤중이 북경에서의 상주외교를 강하게 요구했다면 이홍장이 어떻게 반응했을지는 알 수 없다. 쉽게 응하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쉽게 거절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만약 거절될 경우 조선은 청나라와의 단교도 각오하고 있다는 점을 암시했다면 최소한 처음에 서태후가 결정한 대로 자유무역을 북경의 총리아문에서 관장하는 정도로 타협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어윤중이나 김윤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에는 고종의 명령이 강력하지 않았고 또 그들의 인식이 아직 중화사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어윤중이나 김윤식은 청나라의 종주권이 궁극적으로 조선에 불리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당시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쟁탈을 벌이는 상황에서 만약의 경우 조선이 청나라의 도움을 요청할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어윤중이 이홍장과 더불어 자유무역 문제를 협의하던 중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했다. 어윤중과 김윤식은 결말을 짓지 못한 상태에서 청나라 군사를 따라 6월에 조선으로 귀국했다. 조선과 청나라 사이의 자유무역은 임오군란이 수습된 후에야 결말을 불 수 있었다.

다시 문의관에 임명된 어윤중은 8월 12일 한양을 떠나 천진으로 향했다. 마건충과 함께였다. 8월 17일 천진에 도착한 어윤중은 다시 주복·마건충 등을 상대로 자유무역 문제를 논의했다.

하지만 그동안 상황은 확 바뀌어 있었다. 한양에는 청나라 군대가 주둔 중이었다. 서태후나 이홍장은 더 이상 조선이 청나라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오히려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어느 정도나 강화해야 할지 고민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조선을 직접 식민통치하는 일도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어윤중이 천진에 도착하기 하루 전인 8월 16일에 한림원 시강(侍講) 장패륜(張佩綸)이 이른바 ‘동정선후 6책(東征善後六策)’이라는 상소문을 서태후에게 올렸다. 요지는 일본을 정벌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청나라의 속국이던 유구를 병탄하고 이제 또다시 조선에까지 손을 뻗치는 일본을 응징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당장 정벌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정벌 원칙을 세우고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하자고 했다. 장패륜은 동정에 필요한 6가지로서 이상정(理商政), 예병권(預兵權), 구일약(救日約), 구사선(購師船), 방봉천(防奉天), 쟁영흥(爭永興)을 제시했는데 대부분 조선과 직결되는 내용이었다.

예컨대 ‘이상정’은 조선에 청나라의 고위관리를 파견해 외교·통상은 물론 내정 일체를 감독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예병권’은 조선에 청나라의 무관을 파견해 무기 구입, 군사훈련을 장악하게 하자는 주장이었다.

또한 ‘쟁영흥’은 러시아가 부동항을 찾아 조선의 영흥만을 조차하려고 하니 청나라에서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결국 감국 또는 총독을 두고 조선을 직접 통치하자는 뜻이나 마찬가지였다.

서태후는 이홍장으로 하여금 장패륜이 주장한 내용을 검토하게 했다. 이홍장은 부정적이었다. 결론적으로 일본을 정벌하기에는 청나라의 해군력이 턱없이 약하다고 했다. 조선에 감국 또는 총독을 두고 직접 통치하자는 주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었다.

만약 조선에 감국 또는 총독을 뒀다가 조선이 저항하거나 서구열강이 항의할 경우 대책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 이홍장은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임을 명확히 밝히고 서양 사람들을 재정고문 또는 외교고문 형식으로 조선에 파견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조선의 내정·외교에 올가미가 된 청의 ‘종주권’

이홍장은 자신의 생각을 어윤중과 협상 중인 무역장정(章程)에 반영하고자 했는데, 무역장정 초안은 심복인 마건충과 주복으로 하여금 작성하게 했다. 이홍장의 뜻을 잘 아는 그들은 청나라의 종주권을 무역장정에 명문화하고자 했다.

기왕의 조미수호조약 및 제물포조약에 대응해 청나라의 종주권을 명확히 하려면 무역장정에 그것을 밝혀야 한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 결과 마건충과 주복이 초안을 잡은 8개 조항의 ‘조청수륙무역장정(朝淸水陸貿易章程)’은 청나라 종주권을 중심으로 규정됐다.

8월 22일에 이 초안을 받아본 어윤중은 혹시라도 서구열강이나 일본이 이 무역장정을 명분으로 동일한 요구를 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불만을 표시했다. 하지만 마건충과 주복은 ‘귀국은 은근히 중국과 대등한 체제를 원하면서 단지 일본이 두려운 것은 알면서 중국이 두려운 것은 알지 못하는가’라고 협박했다.

그 결과 8월 23일에 조청수륙무역장정은 거의 수정 없이 초안 내용 그대로 결정됐다.

이렇게 결정된 무역장정의 첫머리에는 ‘이번에 체결한 수륙장정은 청나라가 속국을 우대하는 것이다’는 내용이 들어감으로써 청나라의 종주권이 명시됐다.

또한 무역장정의 제1조에는 ‘북양대신의 신임장을 가지고 파견된 상무위원(常務委員)은 조선의 개항 항구에 주재하면서 중국 상인들을 돌본다’는 내용과 ‘조선 국왕도 고위 관리를 파견해 천진에 주재시키는 동시에 다른 관리들은 이미 개항한 중국의 항구에 따로 파견해 상무위원으로 삼는다’는 내용이 들어감으로써 조선과 청나라의 자유무역은 조공책봉체제를 훼손하지 않는 형식을 취했다.

이장정은 9월 12일에 서태후의 결재를 받음으로써 확정됐다. 이에 따라 이홍장은 진수당을 상무위원으로 임명해 한양에 파견했다. 고종은 남정철을 주진대원(駐津大員)으로 임명해 천진에 파견했다. 한양에 상주하는 진수당과 천진에 상주하는 남정철은 사실상 상주 외교관이었다.

그럼에도 형식적으로는 상주 외교관이 아니라 단순히 통상업무를 관장하는 관리에 지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청나라와 조선은 형식적인 조공책봉체제와 실제적인 근대조약 관계가 결합된 이중관계를 맺게 됐다.

고종과 어윤중은 청나라와의 이중관계가 국익에 유리하게 작용하리라 기대했다. 실제적인 근대조약관계는 자유무역의 이익을 극대화하고, 형식적인 조공책봉체제는 국가 안위를 뒷받침할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되지 않았다.

청나라는 이전과 달리 3000명의 병력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청나라는 형식적이던 종주권을 점점 현실화하려 했다. 그것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대한 적극적인 간섭으로 구체화됐다. 청나라의 간섭이 심해질수록 조선 안에서는 반청 감정이 높아졌다. 반청 감정은 격렬한 반청운동을 불러왔다.
[출처] :신명호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  월간 중앙 2018. 10. 





22. 열강의 각축장으로 전락한 조선반도 

- 수포로 돌아간 ‘以日制淸(일본으로 청을 제압)’ 프로젝트 갑신정변 


淸 내정간섭에 염증 느낀 고종, 日에 은밀히 도움 요청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 준비 없이 정변 일으켰다 참패




화재로 소실되기 이전의 우정국 건물 전경(서울 안국동 부근).

1884년 김옥균이 갑신정변을 일으킨 장소로 유명하다



임오군란 진압 후 고종은 청나라에 감사를 표시하는 동시에 군란이 왜 일어났는지, 앞으로 국정을 어떻게 혁신할지 등등을 알리기 위해 진주사(陳奏使)를 파견했다. 정사는 조영하, 부사는 김홍집, 종사관은 이조연이었다.

7월 22일, 진주사 3명은 마건충과 함께 청나라 군함을 타고 남양을 출발해 천진으로 갔다. 고종이 진주사 편에 국정 혁신안을 보낸 이유는 차관 50만 냥 때문이었다.


지난 4월, 고종은 한양에 온 마건충에게 김홍집을 보내 차관 문제를 논의하게 했는데 그때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당시 마건충은 상환 문제만 확실하다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이홍장에게 주선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근대화를 추진하던 고종은 자금 문제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예컨대 미국과 맺은 수호조약에서 수입품 관세를 10~30%까지 부과하기로 했는데, 그것을 실행하려면 개항장에 해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징수해야 했다.


그런데 해관 설치, 관세 징수 등은 미국인을 비롯한 백인들을 상대해야 하므로 조선 사람으로는 감당이 되지 않았다. 우선 언어가 통하지 않았고, 관세 업무가 어떤 것인지 전혀 몰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해관을 설치하고 관세를 징수하기 위해서는 외국인 전문가를 초빙해야 했는데, 그러려면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게다가 임오군란을 겪으면서 수도방위체제가 완전히 망가졌기에 무기와 군 편제 등 모든 것을 새로 정비해야 했다.


그 모든 것은 결국 자금이 뒷받침돼야 가능했다. 고종은 해관 설치, 관세 징수, 군 정비 등에 필요한 자금을 청나라 차관 50만 냥으로 해결하고자 했다.

고종이 청나라 차관 50만 냥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홍장을 설득해야 했다. 그래서 고종은 청나라에서 차관 50만 냥을 제공한다면 그 차관을 이용해 국정을 어떻게 개혁할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하는 문서를 작성했다.

‘선후육조(善後六條)’라는 제목 그대로 고종의 국정 개혁안은 6조로 구성됐다. 그중에서 제일 중요한 내용은 셋째의 ‘정군제(整軍制)’와 여섯째의 ‘확상무(擴商務)’였다. ‘정군제(整軍制)’는 말 그대로 구식 군제를 근대 군제로 개편하겠다는 것이었으며, ‘확상무’는 상공업을 진흥시켜 국가재정을 확대하겠다는 것이었다.


특히 고종은 ‘확상무’를 위해서는 적당한 인물이 있어야 가능하다며 이홍장이 적당한 인물을 추천해 줄 것을 요청했다.

‘선후육조’를 검토한 이홍장은 차관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다만 이홍장은 조선 정부에서 차관 50만 냥을 임오군란 배상금으로 사용할까 우려했다.


그래서 이홍장은 차관 50만 냥은 ‘확상무’를 위해서만 사용한다는 다짐을 받았다. 아울러 차관 50만 냥은 새로 설치하는 해관 관세를 이용해 상환하는 것으로 했으며, 만약 관세가 부족하면 홍삼세를 이용하는 것으로 했다.

이렇게 상환 방법을 결정한 이홍장은 조선의 ‘확상무’를 자문한다는 명목으로 독일인 렌도르프를 파견했다. 또한 ‘정군제’를 자문한다는 명목에서 마건충의 형 마건상을 파견했다.


고종 19년(1882) 9월, 진주사와 함께 조선에 온 렌도르프와 마건상은 그해 연말 고종을 면담했는데, 렌도르프는 통리아문 참의, 마건상은 의정부 찬의에 임명됐다.



박영효·서광범의 ‘깨달음’



일본에 망명한 갑신정변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영효·서광범· 서재필·김옥균



이후 렌도르프는 참의 자격으로 해관을 비롯해 조선의 외교·통상을 주도했으며, 마건상은 찬의 자격으로 군 문제를 주도했다. 이로써 조선의 외교·통상·군사 부문은 사실상 청나라에 장악되다시피 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한양에는 청나라 병력 3000명이 주둔해 있었다.


이를 배경으로 청나라는 사사건건 조선내정에 간섭했다. 이런 청나라의 태도에 특히 분개한 사람들은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 이른바 급진 개화파였다. 고종 역시 청나라의 내정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조선정부는 제물포조약에 따라 임오군란에서 피해를 입은 일본에 사과하기 위한 사신을 파견해야 했다. 그때 김옥균·박영효·서광범 등이 자원했다. 고종은 박영효를 정사, 서광범을 종사관에 임명하고 김옥균과 민영익을 수행원으로 임명했다.


고종은 김옥균과 민영익에게 몇 가지 밀명을 줬다. 첫째는 일본이 청나라를 견제할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고, 둘째는 조선에 재정 지원을 해줄 의사가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고종은 일본이 조선을 도울 의지가 있다면 배상금 50만원을 탕감해 줄 것이고, 나아가 거액의 차관도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희망에서 고종은 배상금 지불 연장과 함께 300만 엔 차관 가능성을 타진하라는 밀명을 내렸다.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라면 그 무엇보다도 청나라의 3000병력을 철수시키는 동시에 차관 50만 냥을 상환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종이 요청한 300만 엔 차관은 조선정부의 2년 수입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김옥균은 박영효·서광범과 함께 고종 18년(1881) 12월에서 고종 19년(1882) 6월까지 7개월간 일본을 시찰한 적이 있었다. 당시 김옥균의 눈앞에 펼쳐진 일본의 발전과 성취는 충격 그 자체였다. 김옥균은 조선이 근대화하고 나아가 청나라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본 도움이 절실하다고 판단했다. 유신 주역들을 만난 김옥균은 그들이 조선을 도울 의지도 있고 실력도 충분하다고 믿었다.

충격 속에서 일본을 시찰하던 김옥균은 임오군란 소식에 급거 귀국했다. 그의 눈에 군란 이후의 조선은 참혹하게만 보였다. 3000병력을 한양에 주둔시킨 청나라는 더욱 노골적으로 조선 내정에 간섭했다.


그런 청나라를 몰아내고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군사력과 자금력이 유력한 대안이라는 김옥균의 주장에 고종 역시 희망을 품고 급진 개화파 인사들로 수신사를 조직해 파견했던 것이다.

고종 19년(1882) 8월 31일 한양을 출발한 박영효·서광범·김옥균·민영익 등은 양력으로 10월 10일 고베에 도착했는데, 그곳에서 외무경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가 합류했다. 김옥균은 이노우에에게 고종이 “은밀히 일본에 의뢰해 청나라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했다.


아울러 배상금 50만 엔의 지불 연장도 요청했다. 그때 김옥균은 “조선에서 진실로 독립을 원하는 자는 단지 국왕, 박영효 및 김옥균 3명뿐이고 정부의 주요 아문을 장악한 어윤중·조영하·김홍집·김병시는 청나라에 의뢰할 뿐 독립정신이 없는 자들”이라 말했다 한다.

김옥균이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아마도 일본이 도와준다면 고종과 급진 개화파는 친청파 사대주의자들을 몰아낼 수 있다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였을 듯하다.


만약 일본의 도움으로 친청파 사대주의자들이 사라지면 고종과 개화파는 당연히 일본에 우호적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은 적극적으로 고종과 급진 개화파를 도와와 한다는 것이 김옥균의 속뜻이었을 듯하다.

도쿄에 도착한 박영효와 서광범 등은 10월 19일 메이지 천황을 예방하고 고종의 국서와 선물을 전달했다. 국서를 받은 메이지 천황은 “귀국의 대왕이 안녕하시니 기쁨을 가누기 어렵습니다. 지금 경을 전권대신으로 하여 우리나라에 파견해 친서를 전달하게 했으니 영원히 우의를 보장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하였다.



300만 엔 차관 요구… 실제 손에 쥔 돈은 전무



김옥균이 김봉균과 이석이에게 터뜨리도록 폭약을 묻어둔 창덕궁 인정전



메이지 천황은 박영효·김만식·서광범과의 공식적인 접견이 끝난 후 김옥균과 민영익을 별도로 접견했다. 이 접견은 공식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중요했다. 이들이 고종의 밀명을 전달했기 때문이다. 그때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10월 19일, 조선국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 박영효 등이 참내(參內)해 국서를 봉정한 후 또다시 국왕 이희(李熙-고종)의 명령을 은밀하게 아뢰었다. 그 내용은 조선의 현 상황을 진술하면서 일본이 그 독립을 도와줄 것과 재정을 원조해 줄 것을 간청하는 것이었다”는 [명치천황기]의 내용으로 볼 때 청나라의 내정간섭 상황, 고종의 불만, 일본의 도움과 차관 요청 등이 주요 내용이었음이 분명하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후 메이지 천황은 김옥균과 민영익에게 칙어(勅語)를 줬다고 하는데 아마도 담당자들에게 물은 후 대답해 주겠다는 내용이었을 듯하다.

고종의 요청은 메이지 천황에게도 매우 심각한 문제였다. 우선 청나라의 내정간섭을 견제해 달라는 요청에 응하기 위해서는 전쟁까지 각오해야 했다. 아울러 300만 엔의 차관 요청도 부담스러운 규모였다.


당시 일본정부의 1년 세입은 6000만 엔 정도로 300만 엔은 1년 세입의 5% 규모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정부 자체도 외채 상환으로 곤란을 겪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300만 엔의 차관이 가능한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메이지 천황은 각료들에게 의견을 제출하라 명령했다. 그 결과 외무경 이노우에를 비롯해 우대신 이와쿠라 그리고 참의 이토 히로부미 세 명이 의견을 제출했다.


10월 30일, 외무경 이노우에가 제일 먼저 의견을 제출했는데 그의 의견은 사실상 고종의 요청을 거절하자는 것이었다. 이노우에는 당시 일본 국력으로는 아직 청나라와 정면대결을 벌일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전면에 나서 청나라를 견제하기보다는 조선과 조약을 맺은 서양 각국으로 하여금 청나라를 견제하게 하는 것이 제1의 방책이라고 주장했다.


아울러 청나라의 양해 하에 조선의 근대화를 돕자고 주장을 하는 등 이노우에의 의견은 최소한의 간섭 또는 최소한의 원조만 하자는 쪽이었다. 이 같은 주장에 우대신 이와쿠라 역시 적극 동조했다. 반면 이토 히로부미는 다른 주장을 했다. 그는 좀 더 적극적인 간섭과 원조를 주장했던 것이다.

이와쿠라와 이토 사이에 의견이 갈리자 각료들 의견도 갈렸다. 하지만 다수는 이와쿠라 의견에 동조했다. 이에 각의에서는 이와쿠라 의견을 합의안으로 결정해 보고했다. 메이지 천황이 결재함으로써 이와쿠라 의견이 정부 방침으로 채택됐다. 이처럼 최소한의 간섭 또는 최소한의 원조가 정부 방침으로 채택됨으로써 고종의 요청은 사실상 거부됐다.

그러나 김옥균을 비롯한 수신사 일행은 이런 사실을 알 리 만무했다. 그들은 300만 엔 차관 교섭을 위해 백방으로 뛰었지만, 두 달에 걸친 노력 끝에 겨우 배상금 50만원 지급의 10년 연기와 17만 엔의 차관을 얻는 데 그쳤다.


그나마 17만 엔의 차관 중에서 5만 엔은 배상금 명목으로 공제하고, 12만 엔만 받았다. 그 12만 엔 중에서 이런저런 경비로 일본 현지에서 쓴 액수가 근 10만 엔에 달했다. 나머지 2만~3만 엔은 일본은행에 예치했다. 300만 엔을 목표로 왔는데 결과적으로 남은 것이 없었다.

이렇게 별 소득이 없자, 정사 박영효와 수행원 민영익은 11월 말에 먼저 도쿄를 출발해 귀국했다. 반면 김옥균과 서광범은 뒤에 남았다. 차관 문제를 더 논의하는 한편 일본의 사정 및 세계의 정세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수신사와 떨어져 일본에 3개월 정도 더 머물던 김옥균은 고종 20년(1883) 1월에 귀국했다. 김옥균의 눈에 그 사이 조선 현실은 더욱더 참혹하게 변해 있었다. 청나라의 내정간섭이 더 심해지면서 조선은 청나라 속국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급진 개화파와 고종 사이의 ‘괴리’



일본 도쿄 아오야마(靑山) 공원묘지 외국인 묘역에 있는 김옥균의 묘지. 일본인들은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하다 그가 홍종우에게 암살당하자 머리카락과 의복 일부를 가져다 묘소를 만들었다



임오군란 직후 고종은 개화파의 주장에 따라 일본 힘으로 청나라를 견제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고종은 일본 대신 미국에 기대를 걸었다. 물론 이것은 고종 스스로의 판단만이 아니라 구미 열강을 내세워 청나라를 견제하려 한 일본 정부의 책략 결과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종이 완전한 독립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고종은 청나라로부터 적극적인 간섭만 받지 않으면 만족이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형식적인 사대관계, 조공책봉관계도 문제시하지 않았다. 문제시한 것은 단지 청나라가 과거의 형식적인 종주국에서 이제 실제적인 종주국으로 군림하려 든다는 사실뿐이었다.


이 점에서 고종은 김옥균 등의 급진 개화파와 달랐다. 급진 개화파는 명실상부한 독립을 원했다. 청나라가 형식적인 종주권을 행사하는 것도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급진성이 고종을 불안하게 했다. 그들의 급진성이 어디까지 나갈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김옥균 등은 일본의 힘으로 청나라를 견제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당연히 고종은 불안감에 더해 불신감까지 갖게 됐다. 김옥균 역시 고종의 불안감과 불신감을 눈치 채고 있었다.


김옥균이 고종의 신임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300만 엔의 차관을 성사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고종 20년(1883) 6월, 김옥균은 다시 일본으로 갔다. 300만 엔의 차관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비협조적이었다. 궁지에 몰린 김옥균은 민간에서라도 차관을 빌리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이 과정에서 김옥균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후쿠자와는 유력한 재야 정치인이자 자유 민권운동을 함께 추진하던 고토 소지로(後藤象一郞)를 소개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김옥균에게 고토는 “미리 백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뒤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습니다”라며 큰소리쳤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입으로 하는 큰소리일 뿐, 실제 차관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1년 가까이 동분서주하던 김옥균은 고종 21년(1884) 5월 빈손으로 귀국해야 했다. 다만 소득이라면 조선에 만약의 사태가 발생하면 ‘백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로 돕겠다는 고토 소지로의 호언장담이었다.

일본을 믿고 큰소리치던 김옥균이 두 번이나 차관 도입에 실패하자 고종의 불신은 더욱 커졌다. 민영익 역시 김옥균을 불신했다. 민영익은 김옥균뿐만 아니라 일본도 불신했다. 그러면서 점점 친청파로 변해 갔다. 고종과 민영익의 불신을 받으면 받을수록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친일 개화파의 입지는 점점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김옥균은 어제의 동지였던 민영익을 정적으로 간주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숙청 제1호로 꼽을 정도로 최악의 정적으로 여겼다. 개화파 역시 김옥균과 민영익을 중심으로 분열됐다. 급진 개화파는 김옥균을 중심으로 뭉쳤다.


반면 온건 개화파는 민영익 쪽으로 기울었다. 김옥균은 민영익 쪽을 사대수구당이라 비난하며 자신들을 독립개화당이라고 했다. 민영익은 사대수구당의 수뇌였고 김옥균 자신은 독립개화당의 수뇌였다.

그런데 김옥균이 민영익을 사대수구당이라 하고 자신은 독립개화당이라 부른 것은 다분히 정략적이었다. 당시에 청나라가 종주권을 주장하며 조선의 독립을 억압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청나라에 반대하는 것 자체가 바로 독립 추구는 아니었다. 김옥균은 청나라 대신에 일본에 의지하고 있었다. 엄격히 말하면 김옥균은 친일이었고 민영익은 친청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을 모델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추진하려 했고 민영익은 청나라를 모델로 조선의 독립과 개화를 추진하려 했다.

그런 면에서 친정은 사대수구이고 친일은 독립개화라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았다. 명실상부한 독립개화가 되려면 그것이 청나라든 일본이든 상관없이 외세에 의존하지 말아야 했다. 김옥균은 청나라에 대한 증오가 깊은 만큼 일본을 깊이 신뢰했다. 일본은 청나라와는 달리 조선을 지배하려는 야욕이 없다고 믿었다.



김옥균의 오판… 고토의 허풍을 철석같이 믿다



김옥균은 갑신정변 발발 10년 후인 1894년 중국 상하이에서 홍종우의 권총 3발에 목숨을 잃었다. 그의 시체는 조선으로 옮겨졌고, 한강변 양화진에 효수됐다.



당시 상황에서 조선의 독립을 방해하는 최대의 적이 청나라임은 분명했다. 김옥균은 우선 눈앞에 보이는 청나라부터 몰아내야 독립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청나라만 몰아낼 수 있다면 그는 일본과 어떤 거래든 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청나라는 3000 병력을 한양에 주둔시키고 있었다. 그에 비해 일본은 공사관을 수비하는 병력 100여 명 정도가 있을 뿐이었다. 김옥균은 은밀하게 동지들을 모으면서 때를 기다렸다. 때는 곧 찾아왔다.

1883년에 청나라는 베트남에서 프랑스와 국지전을 벌이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베트남을 무력 점령하려고 했고 청나라는 종주권을 내세워 저지하려고 했다. 국지전으로 시작된 전쟁은 점차 확대됐다. 청나라는 전국에서 병력을 차출했다. 요동지역의 병력도 차출했는데 이는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홍장은 요동지역의 방비를 강화하기 위해 한양에 주둔하던 3000병력 중에서 절반을 요동으로 이동 배치하게 했다. 그때가 고종 21년(1884) 5월이었다. 그 후에도 청나라와 프랑스 사이의 전쟁은 계속 확대됐다. 육지에서는 물론 바다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한양에 주둔하고 있는 청나라 1500병력도 언제 차출될지 알 수 없었다.

김옥균은 청나라를 몰아내기에 아주 좋은 상황이라 판단했다. 청나라의 관심이 온통 프랑스와의 전쟁에 쏠려 있을 때 거사한다면 성공 가능성이 높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일본과 손잡고 정변을 일으킨다면 청나라는 일본과의 전쟁을 우려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하리란 예상도 가능했다. 청나라의 형편상 베트남과 조선 양쪽에 전선을 형성하기는 어렵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불과 몇 달 전 김옥균이 일본에 건너갔을 때, 고토 소지로는 “미리 백만 엔의 군자금과 동지를 모은 뒤 조선으로 건너가 일거에 잡배들을 물리치고 조선을 태산과 같이 안전한 반석 위에 올려놓겠습니다”라며 호언장담했었다.


이 말은 사실 고토의 허풍에 불과했지만 김옥균은 철석같이 믿었다. 일본의 유력한 정치가인 고토가 그냥 허풍만 쳤으리라고 김옥균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래서 만약에 자신이 정변을 일으키면 고토를 비롯한 일본의 재야 정치인들이 크게 도와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따라서 김옥균의 입장에서는 일본 공사관의 협력만 끌어내면 일본정부와 일본 민간 양쪽의 지지가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종 21년(1884) 8월쯤, 김옥균은 정변을 결심했다. 김옥균은 정변의 성패는 고종을 얼마나 확실하게 장악하느냐에 달렸다고 봤다. 정변 후에 개혁과제를 수행하려면 오랜 기간이 필요한데, 적어도 그동안은 반드시 고종을 그들의 통제하에 둬야 했다.


그러려면 안전한 장소에서 고종을 제어할 필요가 있었다. 김옥균의 첫 구상은 거사와 동시에 고종을 인천으로 파천(播遷)시키는 것이었다. 상황이 여의치 못하면 고종을 모시고 일본으로 가겠다는 구상도 있었다. 김옥균은 자신이 일본으로 가더라도 고종만 장악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정변에 필요한 국내 무력을 충분히 확보하지 못한 상태였다. 동원 가능한 병력은 다 모아 봐야 몇 십 명 수준이었다. 따라서 일본 공사관의 병력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와 논의한 김옥균은 고종을 인천 대신 수비에 유리한 경우궁으로 파천시키기로 했다. 경우궁은 정식 궁궐이 아니라 순조의 생모 신주를 모시는 사당이었다. 당연히 궁궐보다 규모가 작았고 작은 병력으로 수비하기에 유리했다.

김옥균은 거사의 성패가 신속하게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제거하고 고종을 경우 궁으로 옮겨 모시는 데 달렸다고 판단했다. 김옥균은 우정국 낙성식 날인 10월 17일(양력 12월 4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그날 밤 낙성식을 축하하는 연회를 베풀고 민영익 등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한자리에 모아 일망타진할 계획이었다. 우정국 밖에서 불길이 오르면 그것을 신호로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척살하고 곧바로 궁궐로 들어가기로 했다.



‘3일 천하’일 수밖에 없었던 쿠데타



▎김옥균의 암살범 홍종우의 초상



낙성식에는 미국 공사, 영국 영사, 청나라 상무위원, 일본공사관 서기관을 비롯해 윤치호·민영익·한규직·이조연·민병석 등이 참석했다. 이들 중에서 표적은 물론 민영익이었다. 이윽고 바깥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민영익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가자 자객이 달려들어 칼로 쳤다. 그러나 제대로 목을 베지 못하고 귀만 잘랐다. 칼을 맞은 민영익은 안으로 도망쳐 들어와 연회장에서 쓰러졌다.

순간 연회장은 아수라장이 됐다. 그때 김옥균·박영효·홍영식·서광범 등은 재빨리 자리를 빠져 나와 창덕궁으로 가 곧바로 편전으로 들어갔다. 침실에 있던 고종과 왕비 민씨는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그런 고종과 왕비 민씨를 경우궁으로 옮긴 김옥균은 왕명을 위조해 민씨 척족과 사대수구당 인사들을 경우궁으로 오게 했다.


18일 새벽에 민태호·민영목·조영하·윤태준 등이 입궁했다가 고종이 보는 앞에서 살해당했다. 고종이 ‘죽이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소용없었다. 고종은 눈물을 흘리며 고통스럽게 울부짖을 뿐이었다.

경우궁으로 옮겨올 때만 해도 고종과 왕비 민씨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지만 민태호 등이 눈앞에서 살해당하는 것을 보고서야 정변임을 깨달았다. 왕비 민씨는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고자 기지를 발휘했다.


18일 아침에 심상훈이 개화당 지지자로 위장하고 경우궁에 들어와 왕비 민씨를 알현했다. 그때 왕비 민씨는 속히 밖으로 나가 민영환에게 내부 상황을 알리도록 했다. 아울러 소식을 전할 일이 있으면 수라상 밑에 몰래 서찰을 붙여 올리면 된다고 덧붙였다.

심상훈의 연락을 받은 민영환은 수라상 밑에 밀서를 붙여보냈다. 경우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 일이 수월하리라는 내용이었다. 고종과 왕비 민씨는 ‘경우궁이 불편하니 창덕궁으로 돌아가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그 말을 듣고 창덕궁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김옥균이 듣고 항의했지만 다케조에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이미 김옥균은 믿었던 일본 사람들로부터 배신당하고 있었다.

다음 날 오후 고종과 왕비 민씨는 창덕궁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 날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병력이 창덕궁을 공격했다. 김옥균은 처음에 청나라 병력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 궁궐을 공격할지 또 일본군과 교전을 벌일지를 놓고 본국에 보고해 협의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청나라 병력은 전격적으로 공격을 감행했다. 원세개가 본국과의 논의도 없이 독단으로 판단한 결과였다. 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고 해도 청나라 병력은 일본보다 10배 이상 많았다. 몇 시간 정도 전투를 벌이던 일본공사는 철수를 명령했다. 김옥균은 또다시 일본 사람들에게 배신당하고 말았다.


 창덕궁에서 탈출한 김옥균·박영효 등은 일본 사람들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다. 이것이 이른바 ‘3일 천하’로 끝난 갑신정변이었다.

김옥균은 ‘조선을 힘 있는 현대적 국가’로 만들기 위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김옥균은 정변이 성공했을 때 추진할 혁신정강 14조를 마련했다. 그 정강 하나하나는 근대 독립국가 건설을 위해 꼭 필요한 내용들이었다.

하지만 김옥균에게는 이런 정강을 추진할 만한 내부 역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의 힘으로 보충하려 했지만 오히려 청나라 군대 개입으로 실패했던 것이다. 갑신정변 결과 청나라의 영향력은 더 강화됐고 간섭 역시 더 거세졌다.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청나라에 대한 반발이 커졌다.


반청운동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등장했다. 무력이 아니라 외교를 통한 반청운동이었다.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이용해 청나라의 억압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일본 역시 청나라를 조선에서 축출할 기회를 노리며 때를 기다렸다.

[출처] :신명호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  월간 중앙 2018.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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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명호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  월간 중앙 2018. 10. 







[출처] :신명호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  월간 중앙 2018. 10. 




[출처] :신명호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  월간 중앙 2018. 10. 





[출처] :신명호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  월간 중앙 2018. 10. 



[출처] :신명호 : 부경대학교 사학과 교수 :<신명호의 동북아 삼국지> /  월간 중앙 2018.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