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조선시대

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7. 17:21

[조선왕조의 창업 비록(秘錄)]

정도전이 꿈꾸고 세종이 만든 나라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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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창업비록(秘錄)』Ⅰ [ 1~  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7  

『조선왕조의 창업비록(秘錄)』Ⅱ [ 6~1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8  

『조선왕조의 창업비록(秘錄)​Ⅲ



1. 위화도회군  -  개성까지 400㎞, 10일 만에 주파하다 


1387~1388년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근본 변화가 발생한 시기

…명과 영유권 분쟁에서 비롯돼 조선왕조 건국되는 사건으로 반전



조선은 어떤 나라인가? 단재 신채호는 암흑 속에 빠진 나라라고 생각했다. 자주정신을 잃고 노예 같은 사대주의 의식에 젖었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온갖 악의 창고이자 송두리째 불태워버려야 할 악유산이라고 생각했다. 헛된 이념 때문에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벌이고, 강한 나라에 굴종했기 때문이다. 망국의 한과 부끄러움이 가슴을 쳤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면암 최익현은 인류의 윤리가 살아 있는 유일한 나라라고 생각했다. 조선을 세우면서 정도전은 백성의 나라(爲民)를 꿈꿨다. 세종은 누구도 억울한 사람이 없고, 살아가는 즐거움(生生之樂)을 가진 나라를 만들고자 했다. 조선이 어떤 이상을 갖고 세워졌고, 어떤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을까? 고려 말 조선이 세워지는 이야기부터 시작해 조선의 원형(原型)이 완성되는 세종대까지의 이야기를 쓰려고 한다. 조선 건국의 ‘드라마’는 위화도회군부터 시작된다


 

이성계와 최영 양웅(兩雄)은 함께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KBS 사극 [정도전]에서 이성계 역을 맡은 유동근(왼쪽)과 최영(서인석)이 서로 칼을 겨누고 있다. / 사진:KBS



1388년 5월 22일(乙未), 요동공벌(攻伐)에 나섰던 5만의 고려군이 말머리를 돌렸다. 저 유명한 위화도회군이다. 위화도는 고려와 요동의 경계에 위치한 압록강 위의 작은 섬이다. 고려군은 그 경계선까지 갔다가 최후의 순간에 회군을 결정한 것이다.
이 사건은 처음 고려와 명의 영유권 분쟁에서 시작됐다. 국제정치가 급변하는 시대에는 이런 문제가 빈번하게 생긴다. 하지만 이를 기화로 5년 뒤에는 고려왕조가 멸망하고 조선왕조가 건국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발전했다.

위화도회군은 군사반란이었다. 왕명을 거역했기 때문이다. 당시 병사와 백성들이 노소 없이 모두 목자득국(木子得國)이란 동요를 불렀다고 한다. 이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성계는 오히려 회군 명분을 극도로 낮추고 제한시켰다.
반역의 의혹을 불식시키고자 한 것이다. 원정군이 일제히 말머리를 돌리자 군대를 따라 북상하던 우왕도 개성을 향해 급히 도주했다. 원정군과 우왕의 거리는 처음에 겨우 30~40㎞에 불과했다. 만약 왕을 잡을 수 있다면 회군파의 목적은 쉽게 달성될 수 있었을 것이다.

회군파 장군들은 급속한 추격을 주장했다. 하지만 이성계가 반대했다. 왕과 충돌하면 많은 사람이 죽을 거란 이유였다. 그는 오히려 군사들에게 왕과 백성을 범하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너희들이 만일 임금의 가마를 범하면 내가 너희를 용서하지 않을 것이요, 백성의 오이 하나라도 빼앗으면 또한 마땅히 죄를 당할 것이다.” ([고려사] 우왕 14년 5월)

또한 회군의 목표를 극도로 좁혔다. 그는 “왕을 보고 친히 화복(禍福)을 진술해 임금 옆의 악을 제거해 생령(生靈)을 편안하게 한다”는 것을 천명했다. 그 악이란 최영이었다. 요동 정벌을 강행한 정치적 책임을 오직 한 사람에게 한정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성계가 행군을 지연시켰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원정군은 평양에서 위화도까지 약 20일을 소요했다. 그 거리는 약 200㎞로, 하루 평균 10㎞ 행군한 셈이다. 전근대 군대의 행군 속도는 평균 12㎞였으니, 다소 느리게 움직인 것이다.

그런데 위화도에서 개성까지는 4배나 빠른 속도로 행군했다. 10일간 약 400㎞를 달려, 하루 평균 40㎞를 주파했다. 도로가 양호하고 장비가 우수한 오늘날의 군대도 하루 40㎞씩, 열흘간 연속 행군하는 것은 무리다.(이상훈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개경 전투]) 회군파 군대는 필사적인 속도로 남하한 것이다.


우왕 생포에 실패, 피할 수 없었던 전투


 

우왕은 5월 29일(壬寅)에, 원정군은 6월 1일(癸卯) 개성에 도착했다. 겨우 하루 차이였다. 왕 또한 필사적으로 달린 것이다. 회군파는 우왕을 사로잡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사실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하고 회군을 성공시킬 최고의 방법이었다. 이를 포기하는 것은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어리석은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회군 성공 이후의 상황을 보건대 회군파는 회군의 정치적 의미에 대해 명료한 구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왕과 직접 충돌하는 것은 회군을 반역으로 인식하게 할 위험이 컸다. 따라서 무력 충돌 없이 왕을 보위하는 형식으로 우왕을 사로잡는 것이 필요했다.

이 때문에 회군파는 왕의 뒤를 간발의 차이로 추격하면서 기회를 노렸을 것이다. 하지만 회군파는 기회를 잡지 못 했고, 결국 개성에서 전투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급박한 추격은 군사적으로도 필요한 조치였다. 우왕과 최영에게 방어군을 수습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다. 원정군 중 중군은 총사령관 최영의 직속 부대였다. 하지만 우왕의 만류로 최영은 전선에 갈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중군은 회군파 장군들에게 장악됐을 것이다.

최영 휘하의 정승가가 지휘하는 소수 병력이 원정군에 배속되지 않고 개경에 남아 있었다. 경기도 병력도 왜구로부터 개경을 방어하기 위해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들은 왜구의 개경 침입로인 동강(貞州)과 서강(예성강)에 배치됐다.

당시 개성에는 5명의 원수(도흥·김주·조준·곽선·김종연)가 머물렀다. 원정군 편제를 보면 원수 1인은 1682명의 병력을 거느렸다. 원수 5인이면 8410명의 병력이다. 적지 않은 숫자이다. 따라서 시간만 있으면 우왕과 최영은 1만 명 이상의 방어군을 조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최영처럼 뛰어난 장군이 1만의 전력으로 삼중의 성벽(나성·황성·궁성)을 갖춘 개경을 지킨다면, 원정군의 승리는 장담할 수 없었다.

이런 상황을 감안하면 회군파가 왜 그처럼 신속하게 행군했는지 알 수 있다. 시간을 뺏기 위한 것이다. 회군 일자도 상당히 정밀하게 계산된 것으로 보인다. 원정군은 14일간 위화도에 머물렀다. 그 사이 회군을 요청하는 두 차례의 장계를 올렸다. 그리고 5월 22일 둘째 장계에 대한 회신이 도착하지 않은 상태에서 남하를 시작했다. 이것은 전략상의 고려였다.



“최영을 내놓으소서” vs “강상(綱常)을 범하지 말라” 


 

▎요동공벌에 나섰던 5만의 고려군이 말머리를 돌린 위화도



이에 앞서 5월 13일, 양광도안렴사 전리(田里)가 “왜적이 40여 군에 침입했으며 수비병이 약해 무인지경을 드나들 듯 한다”고 보고한 바 있었다. 원정군은 바로 그날 회군을 요청하는 첫 장계를 올렸다. 하지만 우왕은 이것이 심각한 상황의 전조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래서 원수 5인(도흥·김주·조준·곽선·김종연)을 왜구 토벌에 파견했다. 원정군이 5월 22일 행동을 개시한 것은 5원수의 병력이 개경으로 다시 복귀할 수 없다고 봤기 때문일 것이다. 개경에 남은 군대는 소수였다.

6월 1일(癸卯朔) 회군파는 개성 근교에 도착했다. 그 사이 이성계를 지원하기 위해 여진인을 포함한 동북면 군사 1000명이 개성에 도착했다. 이를 보면, 회군은 매우 계획적이었다. 위화도에서 함주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80㎞, 개성까지는 약 300㎞, 함주에서 개성은 약 230㎞이다.

그런데 동북면 군사는 원정군보다 하루 늦은 6월 2일(갑진) 개성에 도착했다. 동북면에서 개성으로 오는 길은 백두대간을 넘는 험로였다. 즉, 그들은 원정군과 거의 같은 시기에 출발한 것이다. 위화도에서 동북면에 소식을 전하고 출발했다면 도착이 불가능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회군 계획과 시작 일자는 사전에 대략 확정된 것이었다.

6월 3일(乙巳) 마침내 교전이 개시됐다. 그 사이 최영과 우왕은 수천 명의 군사를 모병했다. 또한 전국에 징병령을 내리자 “거마(車馬)가 항구에 찼다”고 한다.

개성은 주위의 산을 이용해 쌓은 둘레 23㎞의 견고한 나성을 가지고 있었다. 나성의 높이는 27척(8.1m), 두께는 12척(3.6m)이며, 나성 밖은 해자로 둘러쌌다. 원정군이 아무리 강력해도 공격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 때문에 회군파는 구류(拘留)돼 있던 환관 김완을 우왕에게 보내 타협책을 제시했다. 요동공벌을 둘러싼 정치적 책임을 최영 일인에게 한정하자는 것이다.

 “공민왕께서 지성으로 명나라를 섬기는 동안 천자가 일찍이 우리에게 군대를 동원할 뜻이 없었습니다. 이제 최영이 총재가 돼 조종 이래의 사대하는 뜻을 생각하지 않고 먼저 대병을 동원해 장차 상국을 범하려 해 한여름에 출병하니 온 나라의 농사가 결딴 나고 왜구는 수비가 허술해진 틈을 타 내륙 깊이까지 침입해 약탈을 저지르며 우리 백성을 살육하고 창고를 불살랐습니다. 게다가 한양 천도 문제 때문에 온 나라가 소란한 지금, 이제 최영을 제거하지 아니하면 반드시 종사가 전복될 것입니다.” ([고려사] 우왕 14년 6월)

요점은 한 가지이다. 최영에게 모든 책임이 있고, 그것으로 끝내자는 것이다. 왕은 물론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우왕은 이를 거부했다.

첫째, 회군이 반역임을 천명했다. 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둘째, 책임이 있다면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하고, 최영의 책임을 거부했다. 왕의 책임을 명백히 한 것은 용기 있

        는 결정이다.

셋째, 요동공벌이 다수의 의견에 따른 것이며, 국가 안보상으로도 정당한 정책임을 주장했다.
넷째, 장군들이 만약 과오를 인정한다면 영원히 부귀를 함께 누리겠다고 회유했다:

“명령을 받고 강역(疆域)을 나갔는데 이미 명령을 어겼고, 군대를 동원해 대궐로 향하는 것은 강상(綱常)을 범하는 것이다. 사단을 일으킨 것은 진실로 나로 인한 것이다. 그러나 임금과 신하의 대의는 진실로 고금의 통규(通規)다. 하물며 강역은 조종으로부터 받은 것이니 어찌 쉽게 남에게 주겠는가? 군사를 일으켜 이것을 항거하는 것만 같지 못한 까닭에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모의하게 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옳다 했는데 이제 어찌 감히 위배하는 것인가? 비록 최영을 가리켜 말을 하나 최영이 내 몸을 막아 호위한 것은 경(卿) 등이 아는 바이며, 우리 국가에 근로한 것도 또한 경 등이 아는 바이다. 교서가 도착하는 날에 미혹됨에 사로잡히지 말 것이며, 과오를 고치는 것에 인색하지 말고, 함께 부귀를 보전해 이로써 시종을 도모하기를 나는 진실로 바라나니 경 등이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알 수 없구나.” ([고려사] 우왕 14년 6월 갑진)

우왕은 회군파가 제시한 최소한의 제안도 거부했다.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우왕은 회군파 장군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관작을 삭탈하고, 반란군으로 공표했다. 그렇게 해서 전투가 개시됐다. 조민수의 좌군은 서문인 선의문을, 이성계의 우군은 동문인 숭인문을 공격했다.

이성계의 집도 숭인문 부근이었다. 처음 이성계는 출전하지 않고 휘하의 장군 유만수를 보냈다. 그는 최영에게 격퇴당했다. 조민수의 군대도 최영에게 패배했다. 최영의 군대는 10여 일의 짧은 시간에 강력한 방어군을 편성했던 것이다. 



“장군, 부디 잘 가시오”



전투가 개시됐지만 이성계는 말의 안장을 풀고 장막에 누워 있었다. 유만수의 패배를 보고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누워 있었다. 초조해진 막료들이 거듭 보고를 올리자, 그는 천천히 일어나 식사를 마쳤다. 말 안장을 채운 뒤 군사를 정돈한 이성계는 100보나 떨어진 작은 소나무 줄기를 향해 활을 당겼다. 단숨에 줄기가 부러졌다.

이성계가 “또 어느 것을 쏘랴?”라고 외쳤다. 군사들은 환호했다. 진무(鎭撫) 이언은 무릎을 꿇고서 “우리 영공(令公)과 함께라면 어딘들 못 가겠습니까?”하고 감격했다.

이성계는 군사들의 심리에 정통했다. 회군파 군사들은 상당한 불안감을 가졌던 듯하다. 그들은 어쨌든 반역자였으며, 전투에서 진다면 자신은 물론 가족도 목숨을 잃을 것이다.

그런데 상대는 군신(軍神) 최영이었다. 왕과 군신에게 도전해야 했던 평범한 병사들의 심리는 어떠했을까? 이성계는 그들의 심리를 꿰뚫은 것이다. 유만수의 패배는 그 점을 분명히 드러냈다. 군심을 적절히 수습하지 않는다면 군대는 모래처럼 무너질 것이다. 이를 감안할 때 이성계의 모든 행위는 침착함과 자신감의 퍼포먼스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탁월한 궁술을 과시함으로써 승리에 대한 자신감을 고조시킨 것이다. 하지만 이성계로서도 왕과 최영과 싸워야 하는 것은 큰 부담이었을 것이다.

좌우군은 다시 공격에 나섰다. 좌군이 선의문을 공격하자 숭인문의 방어가 느슨해진 듯하다. 좌우 양군을 대적하기에는 방어군의 병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이틈을 노려 이성계의 우군은 나성 안에 진입했다. “성을 지키는 군사 중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조민수의 좌군은 영의서(永義署) 다리까지 진군했지만, 최영의 군대에게 거듭 패배했다. 그 사이 우군은 선죽교를 거쳐 남산에 올랐다. “흙먼지가 하늘을 뒤덮고 북소리는 땅을 뒤흔들었다.” 남산은 높이 103m의 낮은 산이다. 하지만 개성 분지의 중심에 위치해 “전체를 공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다.(이상훈 [이성계의 위화도회군과 개경 전투] 266쪽)

최영의 부하 안소가 정예군을 거느리고 먼저 남산을 점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성계의 황룡대기를 보자 그냥 무너져 버렸다. 최영은 전투가 끝났음을 알았다. 그는 전장을 떠나 우왕과 그의 딸 영비(寧妃)가 있는 팔각전 화원(花園)으로 갔다.

이 팔각전은 공민왕이 1373년 여름 니현(泥峴)에 지은 2층 전각이다. 그 주위에 꽃과 나무를 심어 화원을 만들었다. 노국공주를 잃고 삶의 의욕을 상실한 공민왕이 놀이와 잔치를 즐기고자 만든 것이다. 이성계는 암방사 북령에 올라 대라(大螺, 큰 소라고동) 한 통을 불게 했다. 이에 여러 군대가 화원을 수백 겹 포위하고 크게 부르짖어 최영을 내놓기를 청했다.

소라고동은 이성계 군대의 상징이었다. 최영이 나오지 않자, 조라치(吹螺赤) 송안이 담장 위로 올라가 대라를 한 차례 불었다. 모든 군사가 일시에 담장을 무너뜨리고 뜰로 달려 들어갔다. 곽충보 등 3~4인이 곧장 전각 안으로 들어가 최영을 수색했다.

우왕은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을 고했다. 최영이 두 번 절하고 곽충보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이성계와 최영도 마주보고 울었다.

이성계는 말했다. “이번 사태는 내 본심에서 일으킨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요동정벌이 대의에 거역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나라가 불안해지고 백성들이 고통을 겪어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이 때문에 부득이 이런 일을 일으켰던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함께할 수 없었던 양웅(兩雄)



이성계 군대의 상징이었던 소라고동. / 사진:김영수



1476년 김종직의 제자인 유호인이 이곳 화원을 찾아 90여 년 전 그날을 회상했다.

“화원에 당도하니 벌써 황폐했고, 오직 팔각전만이 우뚝 홀로 남았는데 해가 묵어서 반이나 퇴락했고, 팔각전 뒤에는 돌을 모아서 가산(假山)을 만들었는데 화초가 아직도 있다.

고려 신우(辛禑)가 일찍이 이 화원에서 날마다 술 놀이만 일삼으며, 망령되이 요동을 정벌할 계획을 하고 있었는데, 우리 태조께서 회군해 화원을 수백 겹으로 에워싸니 최영이 분함을 이기지 못 해 문지기를 죽이고 들어갔다.

이때를 당해 안팎이 이반됐는데, 최영은 까마귀 떼와 같은 시정의 졸개들로서 하늘이 돕고 사람이 순종하는 왕의 군대(王師)를 거역하려고 했으니 역시 어렵지 않았겠는가.” ([유송도록(遊松都錄)])

10년 뒤인 1485년 남효온은 “내가 10년 전 이곳에 이르렀을 때는 팔각이 꺾이고 썩은 채로 철거되진 않았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남은 것이 없었다”고 술회했다. 팔각전 주춧돌 옆에는 사람 키만 한 배나무가 자라고, 북쪽 바위 위에는 단풍나무의 뿌리가 서려 있었다. 불과 100년도 지나지 않아 팔각전은 완전히 폐허가 됐다.[송경록(松京錄)]

전투가 끝나자 도통사 이성계와 조민수, 그리고 36명의 원가 대궐을 찾아가 왕께 하직 인사를 하고(배사·拜辭) 군대를 성문 밖으로 철수시켰다. 이것 역시 회군이 반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때 민간에서는 “서경성 밖에는 불빛이요, 안주성 밖에는 연기 빛인데, 그 사이를 왕래하는 이원수(李元帥, 이성계)여 원컨대 백성을 구제하소서”라는 동요가 떠돌았다고 한다. 최영은 고봉현(高峯縣, 경기도 고양시)으로 유배됐다. 이성계와 최영은 두 사람의 우정을 넘어 이제 정치의 세계에서 양립할 수 없는 두 개의 대안을 대표했다.

윤소종은 “그 정을 추구하면 최영이 요동을 침은 조종의 봉강(封疆)이 삭제됨을 차마 좌시할 수 없음”때문이었다고 말했다.[이인임전(李仁任傳)] 그러나 둘 중 하나는 역사의 죄인으로 처형돼야 했다. 이 해 12월, 최영의 처형을 주장한 문하부낭사 허응(許應)은 “최영의 공으로써 불행하게 이런 반역의 죄가 있었으니 진실로 일국이 차마 하지 못할 바” [최영전(崔瑩傳)]라고 말했다.

위화도회군의 직접적 원인은 명과 고려의 영토 분쟁이었다. 그런데 이 분쟁을 단순히 양국 관계로만 봐서는 안 된다. 동아시아 전체의 국제정치 속에서 보는 것이 필요하다. 명의 가장 핵심적인 국가 전략은 초원의 북원(北元)을 격멸시키는 것이었다.

명의 대고려 정책은 이 전략의 일환이었다. 1387~1388년은 동아시아 국제정치에 근본적 변화가 발생한 해였다. 명이 마침내 북원을 괴멸시키고, 동아시아 유일의 패자가 됐기 때문이다. 이 헤게모니는 1644년 명이 멸망하기까지 약 260년간 지속됐다. 1388년 위화도회군을 전후한 정치적 문제는 이런 국제 상황 속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388년 1월 이인임 세력을 축출한 무진정변이 발생했다. 고려 후기 정치의 틀을 깬 대사건이었다. 2월 15일 명에 사신으로 간 설장수가 귀국했다. 그는 놀라운 소식을 가지고 왔다.

“철령(鐵嶺) 이북은 본래 원조(元朝)에 속한 땅이니 함께 요동으로 돌리게 한다”는 홍무제 주원장의 명을 전한 것이다.([고려사] 우왕 14년 2월) 이것은 명과의 관계를 파탄시켜 고려와 명의 전쟁으로 발전했다. 



명의 철령 이북 영토 요구에 발끈한 고려 



신당에 모셔진 공민왕(오른쪽)과 노국공주의 영정.



그런데 이 대결을 지명을 둘러싼 오해의 소치로 보는 견해가 있다. 철령의 소재지가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이를 처음 고찰한 일본의 연구는 고려 정부가 명나라가 주장하는 철령의 위치를 오해했다고 주장했다.

1913년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는 중국이 말한 철령이 함경도 남단이 아니라 압록강 북변 요동지역의 황성(黃城, 皇城, 輯安)이라고 주장했다. 명이 황성에 위소를 설치하고, 위소(衛所)의 이름을 철령위(鐵嶺衛)로 붙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황송을 곧 철령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고려는 함경남도 철령으로 오인해 명과 일전을 불사하고자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연구에 따르면 명이 주장한 철령도 함경남도 철령이었다. 명도 처음 이곳에 철령위를 설치하고자 했다. 하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자 압록강 넘어 황성에 철령위를 설치했을 뿐이었다.(박원호 [철령위 설치에 대한 새로운 관점])

철령은 함남 안변군과 강원도 회양군 사이의 해발 685m의 고개이다. 이 고개를 경계로 함경도와 강원도가 나뉜다. 북쪽은 관북, 동쪽은 관동으로 부른다. 고려 사람들도 철령을 이곳으로 인식했다.


1349년 이곡은 개경을 떠나 금강산을 유람하고 동해안을 따라 영해에 도착했다. 그는 “만 길 높이의 풍악(楓嶽, 금강산)과 설산(雪山, 설악산)을 마음껏 관람하고, 다시 철관(鐵關, 鐵嶺)을 넘어 동해로 들어와서 국도(國島)의 기이한 비경을 끝까지 돌아봤다.”   [계림부공관서루시서( 林府公館西樓詩序)]

철령은 정도전의 시에도 등장한다. 함주에서 이성계를 만날 무렵 때의 것이다.

“철령이라 산은 높아 칼끝과 같고/

동해를 바라보니 정히 아득해/

가을바람 두 귀밑에 불어오는데/

말 몰고 오늘 아침 북방에 왔네”  (‘철령’)

고려의 입장에서 보면, 명이 철령 이북의 영토를 요구한 것은 도적 같은 일이었다. 이곳은 원의 쌍성총관부 관할 지역이다. 몽고 침입기인 1258년(고종 45년) 조휘와 탁청은 고려의 지방관을 죽이고 이 지역을 들어 몽고에 항복했다.


몽고는 이곳에 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摠管), 탁청을 천호(千戶)로 임명했다. 1356년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취하면서 쌍성총관부를 수복했다. 명이 건국하기 12년 전이었다.

그런데 32년이 지난 후 명은 이곳의 영유권을 주장했다. 고려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명도 나름의 영유권 근거가 있었다. 명은 원을 이었기 때문에 원의 옛 영토 또한 자신의 것이라고 본 것이다.


다만 1368년 건국 직후 즉각 그것을 요구하지 못했을 뿐이다. 몽골 사막으로 후퇴한 북원의 위협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요동도 원의 유신 나하추 등이 지배했다. 그들은 북원과 연합해 명과 맞섰다.

이에 반해 고려는 1369년(공민왕 18년) 명과 국교를 맺고 원과의 관계를 단절했다. 그렇다고 명이 고려에 대한 의심을 거둔 것은 아니다. 고려가 북원 및 요동 세력과 연합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민왕 사후 고려는 명 사신을 죽이고 친원정책으로 선회했다.


이 때문에 우왕대 14년간 명은 끊임없이 고려를 협박하고 견제했다. 이에 대응해 고려 또한 북원 및 나하추 등 요동세력과 느슨한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군사적 협력은 피했지만, 우호적 외교관계를 유지한 것이다.

과도한 조공 요구와 함께 전쟁 위협했던 명


  

1368년 원을 중원에서 축출한 뒤 명의 핵심적 국익은 북원을 완전히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북원은 현저히 쇠퇴했지만, 여전히 신흥국가 명의 운명에 가장 위협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없이 북정군을 보냈다.


1368년 장군 서달이 대도 (大都, 北京)를 공격하자, 원 조정은 내몽골 지역 상도(上都)로 도주했다. 이어 몽골군은 두 차례 반격을 시도했다.

하지만 명군은 1369년 상도를 공략했다. 북원은 다시 응창(應昌, 내몽고 克什克勝旗)으로 달아났다. 원순제는 그곳에서 사망했고, 황태자 아유시리다라(愛猷識理達臘, 昭宗)가 뒤를 이었다. 고려 출신 기황후의 소생이었다.


그러나 명 군이 응창도 함락시키자, 사막을 건너 카라코룸(哈喇和林)으로 도주했다. 소종은 1372년 명의 북정군을 격퇴하며 권토중래를 꿈꿨다. 하지만 1378년 사망한 뒤 동생 토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가 그 뒤를 이었다.

이 과정에서 명은 북원과 요동세력의 연합을 차단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명은 이미 1371년(공민왕 20년) 요양에 요동위(遼東衛)를 설치해 요동 진출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1위의 군사는 5600명이다. 이것이 요동도지휘사사(遼東都指揮使司, 遼東都司)로 발전했다.


1387년까지 명은 요동에 11개의 위를 설치했다. 1387년 명은 부이르호(捕魚兒海)에 머물던 북원세력에게 최후의 타격을 가하기 위해 북정군을 조직했다. 그에 앞서 6월 풍승(馮勝)이 20만 대군을 이끌고 나하추를 선공하자, 나하추는 더 이상 버티지 못 하고 마침내 명에 투항했다. 이것은 북원에 치명적 타격이었다. 측면의 보호막이 사라진 것이다.

나하추 세력은 또한 고려와 명 사이의 완충지대였다. 이제 그 방파제가 사라지고 고려 또한 명의 직접적 위협에 직면했다. 사실 고려는 1374년 친원정책으로 전환한 뒤 명의 전쟁 위협에 끊임없이 시달렸다. 1379년(우왕 5년) 주원장이 우왕에게 보낸 서신을 보자.

“너는 간신의 거짓된 계책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이곳에 와서 나를 속이고 있다. 무죄한 사자를 죽인 원수이니 집정 대신의 내조 및 세공을 전에 약속한 대로 시행하지 않으면 후일에 사자를 죽인 병화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내가 명하는 것을 믿지 않으면 전함 수천과 정병 수십만으로써 돛을 올려 동쪽에 배를 대고 사자가 어디 있는가를 특문할 것이니, (그러면) 비록 그 당을 진멸시키지 못 할지라도 어찌 태반을 포로로 잡지 않겠는가. 감히 경시할 수 있겠느냐고 하라. ([고려사] 우왕 5년 3월)

무서운 전쟁 위협이었다. 세공액도 매년 금 100근, 은 1만 냥, 양마 100필, 세포 1만 필을 요구했다. 엄청난 양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던 고려는 이를 따르고자 했다.


그러나 명은 다시 5년간 미납액을 모두 내라고 요구했다. 5000필의 말도 요구했다. 국력을 기울어질 정도의 규모였다. 그러나 고려는 1385년 이를 모두 완납했다. 가까스로 평화가 도래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양국 관계는 곧 악화됐다. 진헌마가 형편없다는 이유였다. 주원장은 고려가 이처럼 무성의하면서도, 다른 한편 대명외교에 매달리는 것은 명의 공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수년 이래 도리어 우리에게 신속(臣屬)하려고 애쓰며 자꾸만 와서 매달렸다. 이것이 어떤 의도에서인지 알아차리기는 어렵지 않다 ."



외교적 협상 통해 실타래 풀려 했던 고려 정부



▎일본의 역사학자 쓰다 소키치


10년 이상 명의 협박이 지속된 데다 이제 나하추마저 명에 투항했다. 더욱이 6개월 뒤 명은 요동에 삼만위(斡朶里城), 철령위(皇城)를 추가 설치했다.


얼마 후 철령 이북의 영토와 백성을 요구했다. 명과의 전쟁이 임박한 것이다. 1337년과 1388년의 상황은 이러했다. 고려의 절박한 위기의식은 당연하지 않은가.

철령 이북지역에 대한 명의 영유권 주장은 설장수가 귀국하기 전 고려에 알려졌다.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가 유사한 내용을 보고했기 때문이다. 명의 요동도사가 압록강을 건너 방문을 붙였다.


그 내용은 “철령 이북·이동·이서는 원래 개원(開原)에 속했으므로 관할하에 있는 군민을 한인·여진·몽골·고려인은 전과 같이 요동에 속하게 하라.” 영토만이 아니라 이 지역에 사는 고려인들도 모두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는 것이었다.

최영은 그 대응책을 재상회의에 회부했다. 재상들은 명과의 타협을 원했다. 그러나 고려 정부는 일단 전쟁 준비에 나섰다. 전국의 성을 수리하고, 군사지휘관들을 서북지역에 파견했다. 또한 전국의 양반·백성·향리·역리의 호적을 재점검해 동원 가능한 병력을 파악하도록 했다.

▎MBC 사극 [신돈]에서 기황후 역을 맡은 김혜리가 농염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 사진:MBC

2월 설장수가 도착하자 최영은 정부 관리들을 전원 소집해 명의 주장대로 철령 이북을 할양할 것인지 물었다. 모두 반대했다. 그렇다고 전쟁에 찬성하지도 않았다. 남은 방법은 외교적 수단밖에 없었다.

고려 정부는 일단 다시 사신을 파견해 명에 호소하기로 했다. 밀직제학 박의중이 파견됐다. 고려는 주원장에게 보내는 표문(表文)에서, 명이 주장하는 원의 개원로 지역은 사실상 고려의 영토이며 실질적인 국경은 두만강 너머 공험진(公鎭)이라고 주장했다. 공험진은 1108년 윤관이 여진을 정복하고 고려의 경계로 확정한 곳이다.

[출처] :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 : < 김영수의 조선왕조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1.




2. 고려 몰락을 재촉한 위화도회군(2) - 2차 무신 집권의 장애물 최영이 제거되다 


요동 정벌이 실패할 경우 이성계는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이성계의 군사력은 소진될 것이 뻔했다.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이성계로서는 죽는 길이나 다름없었다. 이성계는 ‘반역’의 길을 택했다. 최영이 간신히 지탱하던 왕권은 유명무실해지고 신진 세력의 무신 집권이 다시 시작됐다


▎우왕과 최영의 요동정벌 계획을 이성계는 끝까지 반대했지만 왕명에 따라 출전할 수밖에 없었다. 이성계는 전쟁 계획을 수립하는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됐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대립하는 이성계(유동근 분)와 최영(서인석 분).

지난 호에서는 위화도회군과 개성 전투, 그리고 고려와 명의 국경 분쟁이 발생한 원인을 당시 동북아 국제정치 속에서 간략히 알아보았다. 철령 이북의 영토에 대한 명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 고려는 고려의 북쪽 국경이 원래 공험진이라고 주장했다.

그런데 공험진이 정확히 어딘지는 역사적으로 논란이 많다. 함흥(1학설), 길주(2학설), 그리고 두만강 건너(3학설)라는 견해가 있다.(윤경진, ‘고려 동북 9성의 범위와 공험진 立碑 문제’, 2016)

1920년대 식민사학자들(津田左右吉, 池內宏)은 함흥평야 지역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한백겸, 안정복, 정약용 등 실학자는 길주 이남으로 보았다. 세종대는 두만강 건너 700리에 있다고 추정했다. [세종실록](155권) ‘지리지’에 “소하강(蘇下江) 가에 공험진이 있으니, 곧 윤관이 설치한 진”이라고 썼다.

백두산에서 발원하는 강은 네 개다. 그중 소하강은 북쪽 만주지역으로 흐른다. 이 강이 공험진, 선춘령을 지나 동쪽으로 120리 흘러 수빈강이 되고 동해 바다로 들어간다. 선춘현에 윤관이 세운 비가 있는데 여진족이 비의 글자를 깎았다.

“뒤에 사람들이 그 밑을 팠더니 ‘고려지경(高麗之境)’이라는 4자가 있었다.” 하지만 세종이 김종서에게 보낸 편지나 신하들과의 대화를 보면 이 점은 확실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신 박의중이 명에 전한 표문에서 고려는 철령 이북에 있는 문주, 고주, 화주, 정주, 함주를 거쳐 공험진까지 고려의 영토라고 주장했다.

이곳은 일찍이 윤관이 정복한 곳이다. 그런데 1258년 원의 영토가 됐다가 1356년(공민왕 5년) 고려가 돌려받았다는 것이다. 이 주장대로라면 고려 정부는 공험진을 길주 이남 지역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외교적 해결을 모색하던 그때 우왕은 최영과 이미 단독으로 요동공격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개성의 방리군(坊里軍)을 동원해 한양의 중흥산성을 수리토록 했다. 유사시 천도도 생각한 것이다.

최영은 외교적인 수단에 희망을 걸지 않았다. 요동의 나하추마저 항복한 이상 명의 의도는 분명하다고 본 것이다. 명이 요구하는 철령 이북의 영토를 할양할 수 없고 외교적 해결이 불가능하다면 남은 것은 전쟁뿐이었다.

요동의 회복은 사실 고려 왕조의 꿈이었다. 태조 왕건이 나라 이름을 고려로 정한 것도 고구려를 계승하려고 한 것이다. 고려의 꿈은 실로 원대했다. 하지만 고려는 거란, 여진, 몽고에 밀려 왕조 말까지 그 꿈을 실현하지 못했다. 그 꿈에 가장 가까이 간 것은 공민왕대였다.

1356년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통해 친원파를 모두 처단하고 천리장성을 넘어 ‘의주-강계-길주’로 이어지는 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뿐만 아니라 1370~1371년에 세 차례나 요동에 출병해 남만주 지역, 요동성, 오로산성을 일시 점령했다.

원명 교체기의 권력 공백을 노린 과감한 결단이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것은 한반도 국가가 요동을 차지할 마지막 기회였다. 고려의 국력이 조금만 더 강했다면 요동은 고려의 영토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고려의 국력으로는 점령 지역을 지킬 여력이 없었다.

공민왕은 말년에 황음에 빠져 왕조의 멸망에 일조했다. 하지만 그의 북방영토 회복과 뛰어난 국제정치 감각은 높은 역사적 평가를 받아야 한다. 공민왕의 업적이 없었다면 세종대의 4군6진 개척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최영이 이성계를 시기해 요동을 치게 해 제거하려고 했다는 내용을 실은 [연려실기술] 기사. 이 기사의 본래 출처는 해동악부(海東樂府)다. / 사진:김영수


그런데 우왕대에도 공요책이 논의됐던 듯하다. 시중 이인임이 도당에서 전주에 침입한 왜구 문제를 논의했을 때 지윤은 오히려 요동 공격을 주장했다.

“왜적은 다만 변방을 소란케 할 따름이니 그다지 우려할 일은 아니오. 만약 명나라 대군이 정료위(定遼衛)에 주둔해버리면 공격이 어려워질 것이니 병력을 돌려 정료위를 공격하는 것이 상책이오. 시중의 전략이 그럴듯하지만 현재로서는 국가를 위한 최선의 방책은 아니오.” ([池奫傳])

이는 아들 지익겸을 전장에 보내지 않으려는 지윤의 책략이었다. 하지만 요동 정벌에 대한 논의는 지속됐음을 알 수 있다. 우왕도 그런 생각을 했던 듯하다. 1385년 정몽주의 집을 방문했을 때 우왕은 최영에게 “꿈에 그대와 같이 적을 만나 싸워 이겼다”며 활을 주고 “그대와 같이 사방을 평정하고자 한다”고 말했다.([崔瑩傳])

이를 보면 공요책은 아마 최후의 선택으로 늘 남겨져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왕과 최영의 결정을 전적으로 돌발적이거나 감정적 처사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명과의 전쟁은 나라의 운명을 건 중대사였다. 곧바로 지지를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반대론을 제압할 조치가 필요했다. 1388년 3월 최영은 이자송(李子松)을 처형했다. 임견미의 일당이란 명목이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가 최영의 집을 찾아가 전쟁이 불가함을 역설했기 때문이었다.

이자송은 우왕대에 수문하시중까지 역임하고 충절과 청렴성으로 명망이 높았던 거물 정치가였다. 그는 원에 사신으로 파견됐을 때 덕흥군에 대한 지지를 강요받았으나 끝까지 거절해 공민왕의 인정을 받았다.([李子松傳]) 그의 처형은 전쟁에 반대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된다는 협박이었다.



명과의 전쟁 결정에서 소외된 이성계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그려진 최후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이성계(왼쪽)와 최영


이 무렵 서북면도안무사 최원지가 “명이 강계(江界)에 철령위를 설치하기 시작했다”고 보고했다. 전국에 징집령이 내려졌다. 관리는 원의 관복을 착용하라는 지시도 내려졌다. 북원과의 관계회복을 선언한 것이다. 하지만 그즈음 명은 대규모의 북정군을 파견했다.

1388년 3월 남옥(藍玉)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사막을 건너 4월초 북원의 본영을 기습해 괴멸적 타격을 입혔다. 7만7000명의 병사, 제2황자, 3000여 명의 황족과 고관이 생포됐다. 북원 3대 황제 토구스테무르(脫古思帖木兒)는 태자 텐바오류(天保奴)과 가까스로 탈출했으나 도우라 강가에서 수하 황족에게 피살됐다. 이로써 북원은 실질적으로 멸망했다.

1351년 홍건적의 난에서 시작된 원명 교체의 전쟁은 종결됐다. 몽골족은 150여 년 만에 중국에서 완전히 축출됐다. 한족은 중원을 석권, 마침내 중국 통일을 완성했다. 938년 거란족이 연운16주(燕雲十六州)를 획득해 중국 땅에 발을 디딘 것을 생각하면 한족은 450년 만에 중원을 완전히 회복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고려에 나쁜 소식이었다.

철령위의 설치를 알리는 명의 사신이 아직 개경에 도착하지 않았지만 우왕은 서쪽 행차를 공표했다. 이성계와 재상들은 사신이 왔다 갈 때까지 연기를 요청했다. 무진정변에서 최영과 더불어 무력의 한 축을 이루었던 이성계는 그러나 전쟁 결정 단계에서 완전히 소외돼 있었다.

이성계가 왕과 최영에 반대해 온건책을 표명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마침내 명의 후군도독부(後軍都督府)가 요동백호(遼東百戶) 왕득명(王得命)을 보내 철령위 설치 사실을 통보했다. 판삼사사 이색이 백관과 함께 선처를 호소했으나 그는 천자의 처분에 달렸을 뿐이라고 답했다.

3월 26일, 왕과 최영은 마침내 서해도로 출발했다. 명목은 사냥이었지만 요동 공격을 위한 준비였다. 물론 전쟁은 여전히 공식화하지 않은 상태였다. 4월 1일, 우왕은 개경과 평양의 중간에 위치한 봉주(鳳州)에 도착했다.

이날 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비로소 요동공격을 논의했다. 말이 논의지 사실은 일방적 통보였다. 이성계는 이에 반대했다. 목숨을 건 도박이었다. 반대 이유는 유명한 ‘사불가론(四不可論)’이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거스르는 것(以小逆大)은 불가합니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면 안 됩니다.

셋째, 온 나라 군사가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그 허점을 노릴 것입니다.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인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첫째 이유로 든 사대론 외에는 모두 군사상의 문제였다.



북원을 실질적으로 멸망시킨 명장 남옥(藍玉, ?~1393)의 조각상.

안휘성 출신으로 명 초 숱한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1393년 모반죄로 처형됐다.



그러나 이튿날 우왕은 강경하게 출병을 주장했다. 이성계도 대폭 후퇴해 사대론을 일체 언급하지 않고 가을까지만 출병을 연기하자고 간청했다. 그의 걱정은 군량문제였다. 이성계는 성을 잠시 공취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뒤 보급이 끊기면 원정군 전체가 괴멸할 것으로 생각했다.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참화를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고려사]) 공민왕대의 요동정벌이 끝내 성공할 수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점이었다.

 논의는 격렬했다. 우왕은 처형하겠다고 위협했다. “경은 이자송을 보지 못했는가?” 이성계도 지지 않았다. “이자송이 비록 죽었으나 후세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겼습니다. 신 등은 살아 있으나 이미 계책을 잃었으니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군신간의 대화로 보기 힘들다.

우왕이 끝내 듣지 않자 이성계는 물러 나와 슬피 울었다. 휘하의 부하가 왜 그리 비통해 하느냐고 묻자 이성계는 “백성의 참화가 이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우왕은 성품이 포악했다. 3월에도 옷을 늦게 바쳤다는 이유로 상의국 별감, 후덕부(厚德府) 소윤 원윤해, 판서 강의를 참형에 처했다. 또한 왕의 사냥에 늦은 기생도 처형했다.

그럼에도 이성계가 그처럼 강력히 반대한 까닭은 무엇일까? 사실 요동은 바로 이성계의 무덤이 될 가능성이 있었다. 1370년 요동 정벌 때도 군량이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 적이 있었다. 요동 정벌은 이성계를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최영의 책략이라는 견해도 있다.




수차례 회군 요청을 경시한 우왕의 패착



송 태조 조광윤(927~976)의 초상. 959년 후주의 세종은 임종 직전 그를 금군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이듬해 1월 1일 거란과 북한(北漢) 연합군이 침입하자 출병했고 이후 출정군은 그를 황제로 옹립했다. / 사진:ㅍ



“이때 태조는 공명(功名)이 날로 높아가고 또 이씨가 왕이 된다는 풍설도 있어 최영이 실로 꺼려하였으나 죄를 줄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래서 요동을 치게 하여 명나라에 죄를 짓도록 만든 뒤에 그것을 핑계로 제거하려고 해서 드디어 이 계획을 만들어냈다.” ([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최영의 성품으로 보아 믿기 어려운 주장이다. 하지만 요동 정벌이 실패할 경우 이성계는 당연히 책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설사 성공한다 해도 이성계는 요동에 묶일 것이며 그의 군사력은 소진될 것이다. 따라서 이성계의 선택은 분명한 것이다. 압록강을 건너는 것은 죽는 길이었다.

4월 12일(병진), 마침내 최영이 요동 정벌군의 팔도도통사, 조민수가 좌군도통사, 이성계가 우군도통사에 각각 임명됐다. 병력은 3만8830명, 보조 인력 1만1634명, 말 2만1682필이었다. 4월 18일(임술), 좌우군이 평양을 출발했다.

그 사이 우왕은 대동강을 출입하면서 여전히 행락에 여념이 없었다. 왜구는 빈 국토를 유린했다. 이튿날 최영은 왕에게 자신이 직접 가서 행군을 독려하겠다고 청했다. 그는 만약 10여 일 행군이 지체된다면 공격이 실패할 것으로 생각했다.

 기습 공격을 생각한 것이다. 또한 이성계의 강한 반대가 마음에 걸렸을 것이다. 하지만 우왕은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말했다. 최영은 전선으로 달려가는 것을 포기한 듯하다.

5월 7일, 원정군은 위화도에 도착했다. 군대는 그곳에서 전진을 멈추었다. 위화도는 중국도 고려도 아닌 중간지대였다. 그곳은 요동공격을 위해 출병한 군대 입장을 나타내는 곳이었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돌아설 수도 없었던 것이다.

이날 최영은 재차 왕에게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고 자신이 직접 전선에 나가 지휘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암살의 위협을 두려워한 우왕은 완강히 거부했다. “선왕이 해를 당한 것은 경의 남정(南征) 때이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경과 함께 있지 않겠는가?” ([고려사절요] 우왕14년 5월 경진) 공민왕은 최영이 제주도의 원 잔류세력을 소탕하러 갔을 때 암살당했다.

우왕의 두려움 때문에 최영은 동요하는 군대를 진정시킬 기회를 잃었다. 전쟁에 반대하는 이성계에게 대규모 병력의 지휘를 맡긴 것은 처음부터 위험했다. 후주(後周)의 황제친위군 총사령관(殿前都點檢)이었던 조광윤도 960년 출정군을 돌이켜 왕조를 멸망시키고 송을 건국했다. 개봉의 진교역에서 회군한 까닭에 진교병변(陳橋兵變)으로 불린다.

국가에 있어 군대란 항상 양날의 칼이다. 방향에 따라 어느 쪽이 베일 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를 우려한 최영도 당연히 대비책을 강구해 뒀다. 그는 장군들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두려 했지만 미처 실행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성계의 두 아들(이방우·이방과)과 이지란의 아들 이화상은 우왕과 최영의 진중에 인질로 잡혀 있었다. 우왕에게 회군 사실이 알려진 것은 회군 이틀 뒤인 5월 24일(정유)이었다. 그들은 이날 경계의 소홀을 틈타 탈출했다.


1392년 조선조 개국과 함께 태조 이성계의 등극을 기념해 공신도감에서 개국공신에게 내린 개국공신 녹권이 발견돼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위화도에서 일주일간 움직이지 않은 이성계와 조민수는 5월 12일(丙戌) 마침내 철군(班師)을 요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에 앞서 도평의사사 지인(知印) 박순을 통해 폭우로 하천이 범람하여 요동까지 진군이 어렵다는 이유로 이미 한 차례 철군을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2차 요청에서 그들은

첫째, 공민왕의 대명 사대정책이 ‘나라를 보존하는 도리’라는 것,

둘째, 철령위 철회를 요청하는 사신 박의중의 귀국을 기다릴 것,

셋째, 패전이 예상된다는 점을 들어 철군을 요청했다. 또한 패전할 경우 원정군만 아니라 국가 전체가 큰 비극에 빠질 것을 우려했다.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거절하고 환관 김완을 보내 도강을 재촉했다. 원정군은 김완을 구류했다. 반역의 시작이었다. 한편 최영은 북원과 협공하기 위해 배후(裵厚)를 사신으로 파견했다. 하지만 북원은 이미 역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이 무렵 충청 지역 40여 군에 왜구가 침입해 유린하고 있었다. 그러자 우왕은 개성에 주둔한 5인의 원수를 파견했다. 한양으로 내려 보낸 비빈들의 안전을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임박한 사태를 생각하면 이는 치명적 실책이었다.

이때까지 우왕과 최영은 상황의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했다. 전쟁에 강력히 반대하는 뛰어난 장군이 원정군 절반의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고 더욱이 철군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무신경했던 것일까?

열흘 뒤인 5월 22일(을미), 원정군은 다시 회군을 요청했다. 그리고 회신도 기다리지 않고 바로 회군을 개시했다. 명과의 전쟁에 자신감이 없었던 그들에게는 탈출구가 없었다. 이는 일종의 패배주의다.

하지만 이 무렵 고려의 국력은 오랜 전쟁과 폭정의 여파로 극도로 쇠약해진 상태였다. 더욱이 고려 정부는 아직 몰랐지만 그 시기에 북원은 이미 붕괴한 상태였다. 만약 고려가 명과 싸우고자 했다면 1370년 무렵이 적기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명은 요동에 아무런 군사적 거점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1371년 설치된 요양의 요동위(遼東衛)는 명의 첫 요동 군사기지로써 병력은 5900명에 불과했다. 이때 북원 및 요동의 나하추 세력과 연합해 명을 공략했다면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북원은 1372년 명의 북정군을 대파했다. 하지만 공민왕은 독자 행동을 선호했고 고려의 독자적 힘만으로는 요동을 획득하고 지킬 수 없었다. 그 뒤를 이은 우왕대 14년간은 최악이었다. 국가적 비전은 아예 없었고 이인임을 비롯한 전통 권문세족들은 국가를 점령해 탐욕스럽게 사익을 추구했다.

이 때문에 고려는 확고한 대외정책도 없이 시세에 따라 움직였다. 1388년 무진정변을 통해 고려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하지만 우왕의 폭정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곧바로 시작된 영토분쟁으로 최영은 혁신의 기회도 살리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명과의 전쟁은 무리였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고려 영토에 명의 야욕이 확고한 것이라면, 그리고 고려가 영토를 할양할 수 없다면, 최영의 선택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경우 전쟁 외의 수단은 없다. 고려는 사상 최강의 몽고군과도 40여 년간(1231~1273) 싸웠다.

고려 정부의 가장 큰 목적은 물론 무신집권자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것이었다. 백성들의 고통은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끈질긴 항쟁 덕분에 고려는 1259년 항복 이후에 형식적이나마 국가적 독립성을 지킬 수 있었다. 몽골에 정복당한 국가로는 유일했다.

백제, 고구려의 멸망 이후 신라가 독립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최영은 설사 패전한다 해도 죽기로 싸운 후 그 결과를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고려의 영토에 대한 명의 집착이 강하지 않았다면, 외교적 협상에 중점을 두는 것이 국익에 부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전쟁은 백성에게 너무 큰 고통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명은 철령위를 압록강 건너 황성에 설치했고 이듬해에는 봉집(奉集)으로, 5년 뒤인 1393년에는 은주( 州)로 옮겼다. 이렇게 재정비된 위소들의 배치를 조감해보면 명은 요동에 앞서 요서 지역을 안정화하려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의 영토욕을 의심하고 이에 반발해 전쟁도 불사하고자 했던 고려로서는 다소 허망한 일이었다. 더욱이 철령위가 봉집으로 옮겨진 것은 1388년 3월이었다. 철령 이북에 대한 명의 영유권 주장에 항의하기 위해 명에 파견된 사신 박의중은 4월에 명 조정에 도착했다.

따라서 고려의 주장을 듣거나 고려의 전쟁 의지를 알기 전에 철령위는 내륙 쪽으로 이설된 것이다. 이를 보면 당시 명은 고려 영토에 강한 야심을 가진 것은 아닌 듯하다.

실제로 고려의 표문을 본 주원장은 “고려의 말대로라면 몇 개의 주(州)는 모두 귀속시켜 주어야 할 것 같다”고 긍정했다. 그러나 그는 고려의 말은 믿기 어려우며 그곳이 기왕에 원에 속했고 이미 철령위도 설치했으니 요동에 소속되는 것이 이치에 맞다고 말했다.([명 태조실록] 홍무21년 4월 임술)


[고려사]에도 유사한 내용이 실려 있다. 여기에 “이제 철령 땅은 왕조의 해명이 있었다 (今鐵嶺之地 王國有辭)는 주원장의 발언이 나온다. 후일 영토를 둘러싼 갈등에서 조선은 이를 주원장이 고려의 영유권을 인정한 근거로 삼았다.


권근은 “이로부터 나라에 동북에 대한 걱정이 더 이상 없어지게 되었다” ([태조실록] 태조6년 12월 임인)고 말했다. 이 해석이 옳다면 주원장은 고려의 영토에 대해 별다른 야심을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주원장의 대외정책은 “해외 만이의 나라가 중국에 우환이 된다면 토벌하지 않을 수 없지만 중국의 우환이 되지 않는데도 스스로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고 한다.([명 태조실록] 홍무4년 9월 신미; 박원호, ‘철령위 설치에 관한 새로운 관점’, 122쪽) 고려에 대해서도 “고려는 산과 바다로 가로막힌 궁벽한 곳의 동이로서 우리 중국이 다스릴 바가 아닌 나라”로 보았다.


자손들을 위해 남긴 [황명조훈(皇明祖訓)]에서 그는 ‘정벌하면 안 되는 나라(不征之國)’ 중 첫째로 고려를 지목했다.


 “사방의 제이들은 모두 산과 바다로 가로막혀 한 쪽 귀퉁이에 치우쳐 있어 그 땅을 얻는다 해도 공급할 수가 없고 그 백성을 얻는다 해도 부릴 수 없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후세 자손들이 중국의 부강함을 믿고 한때의 전공을 탐해 이유 없이 군사를 일으켜 인명을 살상해서는 안됨을 명심하도록 하라.” ([洪武御製全書] [황조조훈]; 박원호, ‘철령위 설치에 관한 새로운 관점’, 122쪽)



고려 정복에 야심 없었던 명 주원장

이성계·조민수 등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린 회군파는 최영이 지키는 개경을 향해 신속히 진군했다. 개경전투 초기 최영이 회군파를 몇 차례 물리치긴 했지만 결국 회군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그려진 개경전투를 앞둔 회군파


이를 보면, 우왕과 최영의 요동 정벌 추진은 다소 성급한 것이었다. 문제는 당시 대명외교를 담당했던 설장수나 정몽주 등의 의견이 전쟁 결정 과정에서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왕과 최영이 이들의 견해를 청취하고 존중했다면 명의 의도를 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그들 개인이나 국가, 나아가 왕조의 운명에도 좋았을 것이다.

6월 4일, 회군파 장군들은 왕궁 앞 대찰인 흥국사에서 회의를 개최했다. 전일 개경을 장악하고 최영을 제거한지 하루 만의 일이었다. 회군 이후의 정치적 수습책을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수습책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대명 사대노선을 명확히 밝혔다. 홍무 연호가 복귀되고, 관리는 명의 의관을 착용토록 했다.

둘째, 조정을 재편했다. 조민수가 좌시중, 이성계가 우시중, 조준(趙浚)이 첨서밀직사사 겸 대사헌에 임명됐고 반역자로 공포된 회군파 장군들의 직위가 모두 복구됐다.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 되고 처벌할 수 없다. 회군파의 최고 수장은 일단 조민수가 차지했다. 한편 최영의 휘하 장군들과 우왕이 급조한 정부에 참가한 문신들은 모두 유배됐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시마코스(Thrasymachus)의 말대로 강자의 이익이 정의다. 그러나 누구도 처형되지는 않았다. 이는 6개월 전의 무진정변과 대조적이다. 무진정변은 매우 심각하고 놀랍게 시작됐지만 그 결과는 평범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역사를 바꾼 위화도회군의 시작은 이처럼 모호하고 평범하게 시작됐다



위화도는 평안북도 신의주시 상단리와 하단리에 딸린 섬이다



회군의 정치적 결과는 단순했다. 첫째, 대외정책이 바뀌고 공민왕 5년(1356년) 이래 지속된 대외정책의 불안정성이 종식됐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1388년을 기점으로 동북아시아 국제정치에서 명의 헤게모니가 확고해졌다는 점이다. 고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져버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려가 요동 진출의 꿈을 버린 것이다. 고구려의 멸망 이후 한국과 중국 사이에는 묵시적인 지정학적 합의가 존재했다. 양국간 경계는 압록강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주원장이 “고려 땅은 예부터 압록강을 경계로 삼아 스스로 다스려왔다”고 말한 것도 그런 인식에서 나온 것이다.


중국이 이에 합의한 이유 중 하나는 한반도의 영토가 중국에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는 점이다. 주원장은 “짐이 고려를 보건대 탄환 한 알처럼 편벽된 구석에 있고 풍속이 현저히 달라 사람을 얻는다 해도 인구를 늘이기에 모자라고 땅을 얻는다 해도 강토를 넓히기에 모자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왜 수당은 왜 고구려, 백제, 신라와 싸웠는가? 주원장은 “모두 자기가 분규를 일으킨 때문이지 처음부터 중국이 땅을 탐내 병탄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명 태조실록] 홍무26년 6월 임진; 박원호, ‘철령위 설치에 관한 새로운 관점’, 123쪽) 철령 문제에 대한 고려의 반발도 그렇게 본다.



“이성계가 왕이 될 것” 예언한 이인임


명나라 주원장이 후대의 왕에게 경계할 목적으로 편찬한 [황명조훈]의 첫 장. 명 건국 다음 해(1369)부터 편찬을 시작해 6년 만에 완성했다. 총 13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물론 중국 입장일 뿐이다. 실제로 한은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했지만 고구려에 의해 축출됐다. 당도 백제, 고구려를 무너뜨리고 한반도 전체를 병탄하려고 했다. 신라와의 전쟁에서 져서 물러났을 뿐이다. 그런데 양국간의 보다 실질적 문제는 역사적으로 요동을 누가 차지할 것인가에 있었다.

 거란과 금, 청이 한반도 국가와 전쟁을 벌였지만, 영토적 야심을 가지지 않은 것도 이를 보여준다. 하지만 요동은 다른 문제다. 요동은 중국의 국가 안보에 핵심적 중요성을 가진 지역이다. 역대 중국 왕조가 끝까지 고구려를 정복하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이 지역에서 일어난 거란족, 여진족이 세운 요·금·청이 중국 북부와 전역을 594년간 지배했다. 고려도 그 일원이 될 꿈을 가졌지만 끝내 실현하지 못했다. 조선 개국 초 정도전이 요동 정벌을 한 차례 시도했지만,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그 꿈은 실질적으로 영구히 포기됐다.

이후 한중간의 영토문제는 압록강 일대를 둘러싼 주변적인 것이었다. 이후 19세기말 서구와 일본이 중국의 동아시아 패권에 도전하기 전까지 한중 국가관계가 안정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보면 회군의 국제정치적 결과는 향후 500년간 지속될 틀이 됐다. 단순하지만 중대한 결정이었던 것이다.

위화도회군의 둘째 결과는 무신 지배가 보다 확고해졌다는 것이다. 고려 역사에서 이는 제2차 무신집권이다. 제1차 무신집권은 12세기 말 무신란에 의해 성립됐다. 우연한 계기로 시작된 무신집권이 1세기간 지속(1170~1270)된 것을 보면 역사적 토대를 구축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지배가 종식된 것은 고려 자체의 변혁이 아니라 원의 지배에 따른 것이다. 무신들은 40여 년이나 싸웠지만 결국 권력을 잃었다. 2차 무신집권이 가능해진 것은 고려 말의 숱한 전쟁을 통해서였다. 원의 지배 이래 고려의 공식적인 군대는 원의 통제를 받았으며 실질적으로 해체됐다.

군대는 개별 장군들의 초모에 의해 편성된 사병(私兵)이었다. 1500~2000명에 이르는 이성계의 동북면 친병이야말로 그 대표적 사례다. 신돈 집권기에 공민왕이 최영조차 제거하려 한 것은 왕으로서 당연한 조치였다.

공적 권력에 통제되지 않는 군대가 어떻게 변모하는지는 모든 역사가 입증하는 바다. 로마제국도 말기에는 황제의 친위대가 국가를 지배했다. 고려 말의 군대도 역사의 행로를 따라 나아갔을 뿐이다.

역설적이지만 고려 왕조를 마지막으로 지탱한 것은 바로 이인임이었다. 그는 부패한 정치가였다. 하지만 뛰어난 정치력과 책략으로 비대해진 무장 세력의 힘을 통제했다. 그 키는 최영에게 있었다. 이인임은 최영과 제휴함으로써 최고 권력에 도전한 지윤, 양백연 같은 무장세력을 제거했다.

이인임은 이성계도 경계했다. 그는 최영에게 이성계가 언젠가 왕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성계의 제거를 촉구한 것이다. 최영은 이를 거부했다. 결과를 놓고 보면 이인임의 판단은 정확했다. 1388년 최영은 오히려 이성계와 연합해 이인임을 제거했다.

그가 제거되자 무신들의 힘을 저지할 결정적 방벽이 사라졌다. 최영은 왕조의 충신임을 자부하고 스스로 왕조를 지탱할 수 있다고 자신했을 것이다. 우왕이 요동 정벌의 와중인 1388년 3월, 최영의 강한 반대에도 그의 딸(寧妃)과 결혼을 추진한 것도 무장세력의 힘을 왕권의 울타리 안에 가두기 위한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위화도회군은 실질적인 무신집권으로 가는 마지막 장애, 즉 최영을 제거했다. 이제 순수한 제2차 무신 집권이 성립됐다. 하지만 투쟁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출처] :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 : < 김영수의 조선왕조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2



​3. 왕위 둘러싼 회군파의 권력투쟁  - 이성계냐, 조민수냐 大학자 이색, 갈림길에 서다 

신돈 혈통이란 의심받은 우왕 아들 창을 왕위로 밀었던 조민수 선택

… 정치적 생존 위해 섭정(攝政)이나 역성혁명 배제해


위화도회군 이후 우왕은 이성계 등 회군파 장군들을 제거하고자 급습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우왕의 몰락 후 회군파는 새로운 왕을 누구로 정할지를 놓고 극심한 분열에 빠진다. 국사(國師)로서의 권위를 가진 이색은 이성계와 그의 경쟁자 조민수 사이에서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성계는 위화도회군 당시 역성혁명을 꿈꾼 것은 아니었다. 우왕의 습격 사건 이후 왕위 계승 투쟁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혁명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난해 10월 서울 성동구에서 재연된 태조 이성계의 사냥 행차 장면.



현실정치는 통상 지위, 부, 명예 등을 놓고 다양한 힘이 충돌하는 장이다. 이념이 설 자리는 거의 없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누가, 왜, 무엇을, 얼마나 가져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명분이다.


권력투쟁은 단순한 힘의 충돌이 아니라 사실은 이념투쟁 나아가 세계관의 투쟁이다. 대변화의 시기에는 그것이 더욱 격렬해진다. 위화도회군 뒤의 고려정치도 그랬다.

회군은 군사적으로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회군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훨씬 더 어려운 문제였다. 1388년 이후 조선건국까지 5년간, 그 의미를 둘러싸고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이 진행됐다.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이인임의 정치를 어떻게 볼 것인가?

둘째,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

셋째, 어떤 국가를 만들 것인가?

하나하나가 모두 커다란 폭발성을 가진 문제였다. 왕의 생사 나아가 왕조의 운명이 여기에 달려 있었다.

1388년 6월 4일 밤, 우왕은 환관 80여 명을 데리고 회군파 장군 이성계와 조민수, 변안열의 집을 급습했다. 개성 전투가 끝나고 하루 뒤인 그날 회군파 장군들은 궁궐 앞 흥국사에 모여 회군 후의 정치적 문제를 논의했다. 타이밍 상 기습은 완벽했다. 왜냐하면 고된 회군과 정치적 논의를 마친 회군파 장군들이 비로소 마음 놓고 집에 돌아가 휴식을 취할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군들은 놀랍게도 군 진에 머문 채 귀가하지 않았다. 우왕은 비록 기습에 실패했지만 왕으로서의 기개를 입증했다. 그는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최영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또한 어느 것도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과감히 기습을 감행했다. 그런 점에서 우왕의 용기와 지략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그의 일생은 그 반대였다.

그의 삶은 환락과 방탕 속에서 헛되이 낭비됐으며, 국가와 백성을 고통스럽게 했다. 또한 무뢰배 같은 치기, 아무나 죽이는 잔인성, 무진정변(1388) 후 암살의 공포에 떤 나약함은 그의 인간성에 대한 혐오감을 더해준다.

그래서 이 기습은 우왕의 삶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이다. 앉아서 죽기를 기다리기보다 처음으로 진정한 용기를 발휘했던 것이다. 왕은 지배하거나 죽어야 한다. 목숨을 사랑하는 자는 왕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제 우왕에게는 식물적인 삶이나마 연명할 수 있는 작은 가능성마저 사라져버렸다. 회군파 장군들은 생존을 위해 우왕과 동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았다. 6월 7일, 장군들은 이성계의 집과 가까운 동쪽 숭인문에서 회합했다. 궁궐의 무기와 말이 모두 몰수됐다. 다음날 우왕은 폐위돼 강화로 보내졌다. 최영의 딸 영비도 축출됐다.



위화도회군 후 우왕이 폐위되고 창왕이 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하지만 창왕 역시 훗날 이성계 세력에게 폐위된 후 살해됐다. KBS 드라마 [정도전]의 한 장면. / 사진:KBS



14년에 걸친 폭정의 시대가 완전히 끝났다. 그 주역인 이인임 등 권신들은 우왕에 의해 제거됐으며 또 다른 주역 우왕 역시 제거됐다. 우왕대의 희망이었던 최영 역시 제거됐다. 최영의 일생은 오직 국가를 위한 헌신뿐이었다. 치악산 아래 은거해 살던 원천석은 최영의 죽음을 듣고 애시를 지었다.

“부고 듣고 애시(哀詩) 지으니/

공이 아니라 나라 위한 슬픔이네/

천운(天運)의 태평과 비색을 뉘 알리오/

나라의 안위를 미처 정하지 못했네/

날랜 칼날 꺾이니 슬퍼한들 어쩌랴/

충심은 언제나 외로우나 나라를 지탱치 못함이 한이로다/

산하를 홀로 보며 이 노래 부르니/

흰 구름 흐르는 물, 모두가 슬프구나.”    ([연려실기술] ‘都統使崔瑩被刑’)

최영의 정적조차 최영을 찬양했다. 이 절세의 충신이 어떻게 비참한 죽임을 당해야만 했는가? 이런 역설은 인간에게 깊은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1362년(공민왕 11년) 홍건적의 난에서 고려를 구한 장군 안우, 김득배, 이방실이 모두 처형됐을 때 청년 정몽주는 그 통렬한 분열 때문에 하늘을 향해 울부짖었다.([김득배제문]) 정치의 세계는 행복하지 않다. 애국적인 것이 반드시 보상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회군 직후 역성혁명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를 왕위에 추대하고자 했던 조인옥의 묘. 그는 이성계의 매형 조인벽의 동생으로 이성계와 동향인 영흥인이었다.



숭인문 회의 후 초미의 문제는 누구를 왕으로 세울 것인가였다. 왕 옹립 문제를 둘러싸고, 회군파 내에 분열이 발생했다. “조민수는 이인임이 자신을 천거해준 은혜를 생각해 이인임의 외형제 이림(李琳)의 딸인 근비(謹妃)의 아들 창(昌)을 세우려고 마음먹었다” ([조민수전])고 한다.

이림과 이인임은 고종사촌 사이다. 이림의 어머니 이씨는 이조년의 딸이니 이인임의 고모다. 이림의 딸 근비가 우왕의 제1비가 된 것도 이인임 덕분일 것이다. 조민수는 무공으로 공민왕대에 입신했다. 하지만 권력의 중심부에 들어간 것은 우왕대다.

그는 우왕대 초기 임견미, 홍영통와 함께 내재추(內宰樞)였다. 내재추는 궁중에 상주하는 재추라는 뜻이다. 왕명의 보고와 전달을 장악해 국가사가 모두 이곳을 거친 후 시행됐다. 명목상 도평의사사가 국정 최고 의결기관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수 명의 내재추 선에서 결정됐던 것이다.

임견미와 함께 이인임의 심복이 아니면 그러한 직위를 맡지 못했을 것이다.([林堅美傳]) 조민수는 1383년(우왕 9년) 최고위직인 판문하부사에 올랐다. 근비가 제1왕비가 된 것도, 그의 아들 창이 왕이 된 것도 결국 이인임에 힘입은 것이다. 그러므로 창왕의 즉위는 이인임 세력의 재결집을 의미했다.

한편 이성계는 왕족 중 한 사람을 옹립하고자 했다. 아마 이성계는 훗날 공양왕이 된 정창군을 고려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후일 이성계파의 공식 견해는 회군 시 이성계가 “조민수와 더불어 다시 왕씨의 후손을 세울 것을 의논했는데 조민수도 역시 그렇게 하자고 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왕을 폐위시키고, 우왕의 아들이 아닌 종친 중 한 사람을 옹립할 계획이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우왕을 신돈의 아들로 보았기 때문이다.(非王說)

그런데 이성계는 회군을 전후해 여러 가지 대안을 검토했던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이성계 자신이 직접 왕이 되는 것이었다.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남은이 조인옥 등과 더불어 태조를 추대할 것을 은밀히 의논하고 태종에게 알리니, 태종이 말하기를 “이 큰일을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 여러 사람의 마음이 모두 태조에게 돌아가 어떤 이는 많은 사람이 모여 앉은 자리에서 공공연하게 말하기를 “천명과 인심이 이미 귀속한 데가 있는데 어찌 속히 왕위에 오르기를 권하지 않는가” 라 하였다.([연려실기술] ‘태조조고사본말’)

35세의 남은, 22세의 이방원, 42세의 조인옥이 논의의 중심인물이었다. 조인옥은 이성계 자형의 동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조돈, 형은 조인벽이다. 조인벽이 이성계의 누이(정화공주)와 결혼했다. 몽고 지배기에 조돈 가문은 영흥 지방의 대표적 친원파였다.

그의 할아버지 조휘(趙暉)는 몽고 침입 시 투항한 뒤 쌍성총관이 되었고 그 후손이 대를 이어 총관직을 세습했다. 그러나 조돈은 1356년 공민왕의 반원정책에 호응해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쌍성 지역의 수복에 기여하고 고려에 귀화했다.

남은, 이방원, 조인옥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보좌한 최측근이자 적극적 행동대원이었다. 이들 이성계의 핵심 그룹에서는 회군 과정에서 이미 역성혁명을 강력히 고려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의 무신 조인벽의 사당인 동명서원. 조인벽은 이성계의 누이와 결혼했고 그의 동생 조인옥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크게 기여했다. / 사진:김영수



둘째는 섭정이었다. 윤소종과 정지(鄭地)가 그 제안자였다. “처음에 태조가 회군했을 때 윤소종이 군문 앞에 나아가 정지를 통해 뵙기를 청하고 곽광전(霍光傳)을 품에서 꺼내어 바쳤다. 태조가 조인옥으로 하여금 읽게 해 들었는데, 조인옥이 다시 왕씨 중에서 세워야 한다고 극력 설명하니, 태조가 옳게 여겼다.”

[곽광전]의 정치적 의미는 신하에 의한 섭정이다. 곽광(?~68)은 한 무제의 신하로서 무제의 유언을 받들어 8세에 등극한 소제(昭帝)를 13년간 보좌했다. 소제가 후사 없이 죽자 유하(劉賀)를 즉위시켰다. 그러나 그가 향락에 빠져 방탕하자 한 달도 못돼 폐위시켰다.

 곽광은 다시 한 문제의 증손자 유순(劉詢)을 옹립했는데 그가 선제(宣帝)다. 곽광의 사후 선제는 곽광 일족을 멸문시켰다. 하지만 곽광은 집권 20년간 조금도 허물이 없어 전설적 재상 이윤이나 주공에 비유됐다.

조인옥과 조준, 윤소종은 모두 허금의 절친한 벗들이었다. 조인옥은 처음 역성혁명을 주장했으나 이방원의 지적처럼 곧 시기상조임을 인식한 듯하다. 아마 윤소종, 정지, 조인옥은 [곽광전]의 의미를 사전에 공유하고 이성계를 찾았을 것이다.

뒤에 윤이·이초 사건으로 국문을 받을 때, 정지는 “이시중이 대의를 바탕으로 회군할 때 내가 이곽(伊霍)의 고사를 들어 시중에게 풍간한 것은 깊은 뜻이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사람이 나서 한 번은 죽는 법이니 목숨이 무어 그리 아깝겠느냐? 다만 왕씨가 다시 왕위에 올랐는데도 억울하게 죽는 것이 비통할 따름이다”고 한 것을 보면 종친 중 한 사람을 추대하려고 했던 것이다.

섭정은 위험하다. 정통성이 없으므로 종말이 필연적으로 예정돼 있다. 단지 얼마나 버티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고금의 역사가 그랬고 고려 중기의 무신정권이 그랬다. 이런 위험에도 당시 이성계에게는 섭정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명의 간섭 때문이었다. 만약 우왕을 죽이고 역성혁명을 시도한다면 명은 분명히 군주를 시해한 죄를 들어 끝없이 압박할 것이다. 이인임이 그 전례였다. 그렇다면 이성계에게 역성혁명은 일단 논외의 문제였다.




이색 지지로 1차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조민수



서한 시대의 정치가 곽광의 초상. 그는 한 무제의 유언에 따라 어린 소제를 잘 보좌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창읍왕 유하가 방탕하자 폐위시키고 선제를 즉위시켰다.



그렇다면 섭정은 가능할까? 거기에도 일말의 불안이 있다. 필요하다면 명은 섭정 역시 군신의 강상을 해친 행위로 공격할 수 있고, 대명관계는 다시 악화할 것이다. 그러면 사대주의를 표방하여 전쟁을 막고 대외관계를 안정시켰다는 회군파, 특히 이성계 그룹의 정치적 명분은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이는 국내 정치투쟁을 곤경에 빠트리는 것이다.

셋째, 마지막 대안은 우왕의 소생을 옹립하는 것이었다. 이 경우 대명관계는 불안 요소가 없다. 요동정벌에 대한 책임을 들어 명은 우왕의 폐위에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성계 그룹에는 매우 위험한 선택이다. 친우왕-최영 세력이 언제 반격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내정치 세력과의 투쟁은 극복 가능한 것이다. 이성계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우왕의 소생을 옹립하고 국내정치에서 우위를 장악하면서 명을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성계 그룹의 급진파는 이 정도의 타협은 허용할 수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 대안이란 회군의 의미를 오직 대외정책의 전환에 한정하고 우왕대의 정치를 그대로 답습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국내정치의 측면에서 보면 최영을 제거함으로써 그 반대로 이인임 그룹을 부활시키는 것을 뜻하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회군의 역사적 의미는 오히려 무진정변을 뒤집는 것이 된다. 역사의 반동인 셈이다. 이 무렵 정도전과 조준 같은 이성계 그룹의 급진적 경세가들은 고려왕조를 뿌리부터 뒤집을 개혁을 구상하고 있었다.



우왕 때 관음포에서 왜적을 무찔러 큰 공을 세운 정지 장군의 묘. 이성계의 위화도회군 동지인 그는 회군 후 윤소종과 함께 이성계에게 섭정을 건의했다. 그러나 이후 이성계 그룹의 견제를 받아 유배됐다. / 사진:김영수



결과적으로 회군파 내의 1차 권력투쟁에서는 조민수파가 승리했다. 조민수는 이색의 지지를 받았다. 조민수가 왕위계승 문제를 자문하자 그는 “마땅히 전왕(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고 말했다. 왕조의 왕위계승 원리는 적장자 승계였으므로 이색의 의견은 원칙상 정당했다.


사실 종친을 옹립하려는 이성계의 주장은 현실적으로 곤란한 점이 있었다. 우왕의 아들이 있는 한 종친을 옹립하려면 적장자 계승의 원칙을 부정할 수 있는 더욱 강력한 논리가 필요했다. 이성계 그룹이 뒤에 주장한 논리는 우왕, 창왕이 공민왕이 아닌 신돈의 후손이라는 것이었다.


우왕의 혈통은 확실히 논란이 많았다. 공민왕 사후의 왕위 계승에서 공민왕의 친모 명덕태후는 우왕이 아닌 종친을 옹립하고자 했다. 우왕의 혈통을 의심한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명덕태후가 그런 입장을 취했으므로 우왕의 정통성은 근본적으로 타격을 입었다.

 14년이 지난 뒤 이것이 다시 문제가 된 것이다. 정통성 같은 근본 문제들은 정치에서 생명이 길다. 역사에서 그냥 사라지지 않고 반드시 반복된다.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무성한 가지를 뻗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형돼 나타난다. 이것이 역사의 고질이 돼 긴 시간에 걸쳐 국가사회를 병들게 하는 것이다.

조민수에게 일격을 당한 이성계는 분노했다. 이성계가 조민수에게 “회군할 때 한 말은 무엇인가?”라고 항의하자 조민수는 불쾌한 얼굴로 “원자를 세우는 일은 한산군(韓山君, 이색)이 이미 정한 계책이다. 어찌 어길 수 있겠는가” ([연려실기술])라고 반박했다.

국가 중대사에 대한 이색의 절대적 권위를 느끼게 한다. 사실 개성 전투가 끝난 직후 이성계도 이색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이를 보면 일개 문신인 이색이 왕실 어른이 가짐직한 정치적 권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종을 뛰어넘어 국사(國師)의 지위를 인정받았던 것이다. 조민수는 이를 이용해 무력의 열세를 극복했다.

이렇게 보면 회군 후 권력의 향방을 쥔 것은 이색이었다. 누가 왕이 될 것인지 결정해야 했을 때 정통성에 대한 해석권을 쥐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권력은 관습상 왕실의 최고 어른이 가진 것이었다. 명덕태후 사후 그런 인물은 공식적으로 공민왕비 정비(定妃) 외에 없었지만 권위가 그다지 높지 않았던 것이다.

이색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경쟁에서 조민수의 정치적 수완은 이성계보다 한 수 앞섰다. 조민수는 역사에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무장은 아니고 상당한 정치적 감각을 갖춘 인물이었다. 우왕 초기 대왜구 전투에서 그는 패전을 거듭했지만 많은 지휘관처럼 전투를 회피하지는 않았다.

그는 적극적으로 전투에 임했고 수차 작은 승리를 거뒀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1381년(우왕 7년) 종2품 지문하부사로 승진해 서북면 도체찰사가 되었다. 그때 정료위(定遼衛) 도사(都事) 고가노(高家奴)가 군졸 200여 명을 보내 압록강을 건너 무역하는 체 하면서 고려 국경을 정탐하게 했다.

 나하추(納哈出)와 북원이 수차례 사자를 파견해 고려와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는 소문을 듣고 진위를 알아보려 한 것이다. 정료위는 1371년 명이 요동에 처음 설치한 군정 기관이다. 고가노는 원의 요양행성 소속으로, 요양 노아산(老鴉山)에 주둔했다. 하지만 그는 1372년 9월 요동의 심장 요양을 들어 명군에 투항했다.

조민수는 요동을 둘러싼 명과 고려의 국제정치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압록강을 건너온 장사치들이 정료위 군사임을 간파한 조민수는 “황제가 사무역을 엄금했다고 들었는데 너희가 어찌 명령을 어기고 우리 강토를 소란케 하느냐?”고 질책했다.

우왕 5년 주원장이 공공연히 고려와의 전쟁 가능성을 선언한 이래 우왕 7년은 양국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 고려는 사신 파견조차 중단한 상태였다. 그런데 조민수의 조치는 고려가 주원장의 금령을 충실히 준수하고 있음을 입증한 것이다. 그는 또한 수시중에 임명되자 퇴직을 간청했다.

 또 재상들과 함께 “군대와 나라를 유지할 비용이 넉넉하지 못하니 사급전(賜給田)·구분전(口分田)·사사전(寺社田)의 조세는 모두 국가에서 거두어 비용을 충당하게 하라” ([曺敏修傳])고 건의했다. 권문세족과 승려의 특권을 제약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보면 조민수는 정치적 명분으로 세심하게 자신을 감쌀 줄 아는 무장이었다.

조민수의 의도는 단순했다. 이인임 노선으로의 복귀가 그의 대안이었다. 그것은 결국 유력한 권문세족들의 연합에 의한 지배, 즉 관습적 과두정으로 복귀하는 것을 의미했다.


요컨대 위화도회군은 1차적으로 이인임 그룹에 의한 반격을 의미했다. 최영, 우왕과 제휴했던 이성계가 다시 이인임 그룹과 손을 잡고 회군을 단행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두 집단은 다시 분열됐다.




이색, 반개혁노선으로 이성계와 맞서다



1. 고려 말 국사(國師)이자 국가의 정신적 지도자였던 이색의 초상. 이색은 위화도회군 이후 조민수 노선을 지지해 창왕의 왕위계승을 찬성했다. 이후 그의 선택에 대해 많은 논쟁이 일었다. / 2. [고려사]에 기록된 이색의 행적. / 사진:김영수


이색은 결과적으로 이인임 노선을 지지하고 이성계 그룹을 위험시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것은 반개혁노선이다. 그러나 공민왕대 이후 이색은 개혁파의 정신적 지도자였다. 이색은 왜 이런 모순적 선택을 한 것일까? 아마 급진적 개혁이 왕조의 운명을 위태롭게 할 가능성을 예견했을 것이다.

급진적 개혁을 지지하던 정몽주는 1391년에 들어서야 이색의 입장으로 선회했다. 그런데 이색의 선택에는 훨씬 복잡한 의미가 함축돼 있었다. 이에 대해서는 크게 세 가지 해석이 존재한다.

첫째는 이색이 조민수의 위압에 굴복했다는 것이다. 나중에 위험이 닥치자 이색은 자신이 창왕 옹립을 지지했다는 발언을 부인했다. 그는 조민수와의 대질심문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조민수가 이성계를 기만한 것인가? 또 이색은 왜 그 당시 즉각 항의하지 않은 것일까?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색은 자신이 조민수의 세력에 위압됐을 뿐만 아니라 우왕의 치세가 오래됐기 때문에 창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색의 위신에 상당한 손상을 끼치는 것이다. 1491년(공양왕 3년), 살벌한 권력투쟁 과정에서 이색을 구원하고자 했던 정몽주도 정적들에게 같은 논리를 제시했다.

“조민수는 창의 근친이니, 창을 세우고자 한 것은 조민수의 뜻입니다. 이때에 이색이 비록 종실을 세우고자 할지라도 조민수의 뜻을 빼앗을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다면 이색의 죄는 응당 가벼운 죄에 처해야 할 것입니다.” ([고려사절요] 공양왕 3년 9월) 정몽주는 이색이 살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의 명예를 약간 훼손시키는 쪽이 좋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성계와 함께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 말 정계의 중심으로 떠오른 조민수 장군의 묘. 회군 후 이인임 노선의 세력을 부활시키려고 했다. 훗날 이성계와의 권력투쟁에서 패해 창녕에 유배됐다가 죽었다. / 사진:김영수



이색의 선택에 대한 두 번째 해석은 상황논리다. 이색은 사적인 자리에서 “창왕이 왕씨가 아닌 사실을 알긴 했으나 정치적 혼란기에 새로운 분쟁거리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중국에 그런 역사적 사례가 있었다. “옛날 진원제(晋元帝)가 왕위를 이었는데, 치당(致堂) 호인(胡寅)이 ‘원제의 성은 우씨(牛氏)인데 외람되게 (司馬氏인) 진의 종실에 붙었다. 동진(東晋)의 군신들이 어떻게 이를 그대로 두고 개혁하지 않았는가 하면 이는 필시 호갈(胡羯)이 번갈아 침입하여 강좌(江左, 양쯔강 남쪽)가 미약하므로, 만약 예부터 내려오는 왕업에 의지하지 않으면 인심을 안정시킬 수 없었으므로 그대로 두었으니 어렵고 쉬운 것도 없다. 이 또한 형세를 따라 일을 성취할 적에 부득이해서 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내가 신씨를 세울 때에 감히 다른 의견을 내지 않은 것도 이러한 뜻에서다. ([李穡傳]) 그는 원칙상 옳지는 않으나 상황에 적절한 방식을 택했다고 본 것이다.

진원제의 본명은 사마예(司馬睿, 276~323)로, 서진(西晉, 265~316)이 남흉노에게 멸망한 뒤 양쯔강 이남에서 동진(東晉, 317~420)을 건국했다. 사마예의 부친은 낭야공왕(琅邪恭王) 사마근(司馬覲), 모친은 하후광희(夏侯光姬)이다. 사마예는 어머니의 간통으로 낳은 자식이라는 설이 있다.

 [현석도](玄石圖)라는 참서에 ‘우계마후’(牛繼馬後), 즉 “소가 말의 뒤를 잇는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우씨가 사마씨를 잇는다는 예언이다. 그래서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마중달, 즉 사마의(司馬懿)는 수하의 장군 우금(牛金)을 독살했다. 그런데 후대에 하후광희가 우씨 성의 하급관리와 사통해 사마의를 낳아 예언이 실현됐다고 한다.([晉書] 卷6, ‘帝紀’6, 中宗元帝睿)

남북조 시대 북위의 역사를 기록한 [위서]에는 하후광희가 사마근의 부장 우금과 간통(與金姦通)했다고 직접 기술했다.([魏書] 卷96, 列傳 84, 僭晉司馬睿)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조선에서도 이익은 부인했고, 정약용은 믿었다.

호인(胡寅, 1098~1156)은 송의 학자이자 정치가다. 저서로 역사를 기술한 [독사관견](讀史管見), [서고천문](敘古千文)이 있는데, 주희가 [자치통감강목]을 저술할 때 많이 인용했다. 호갈은 돌궐계의 갈족이다. 5호16국 시대 초기 갈족의 지도자 석륵은 후조(後趙, 319~333)를 세워 양쯔강 이남의 동진과 대치했다.

이색이 실제로 이런 말을 했는지 확실치 않다. 그런데 세종대의 설순(偰循)에 의하면, 이색이 “세상사람이 나를 풍도(馮道, 882~954)라고 하지만 나는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고 했다 한다. 이색이 자신을 시세에 영합해 일신의 안일만 도모한 사람으로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풍도는 당 말기의 인물로 박학다식하고 원만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다섯 왕조(후당·후진·요·후한·후주) 11명의 천자(天子)를 섬기며, 30년간 고관을 지냈고 20년 이상 재상을 지냈다. 유능하지만 지조 없는 인물의 전형이다. 하지만 풍도는 자신이 황제가 아니라 국가를 섬긴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세종은 “그 사실이 바로 풍도(馮道)와 같다. 이색은 진나라 때 사실을 이끌어 말했으나 그때는 북방의 오랑캐가 강성했으므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다. 이것을 고려에 비교할 수는 없다”고 평가했다.([세종실록] 12년 11월 23일) 이색의 결정을 비판한 것이다.

이색의 선택에 대한 세 번째 해석은 이색이 확고하게 우왕의 편에 섰다는 것이다. 이색이 우왕의 복립을 꾀하면서, “이미 15년간 몸을 맡겨 신하가 됐으므로 가히 다시 다른 마음이 있을 수 없다” ([李穡傳])고 말했다는 것이다. 설사 우왕의 혈통이 의심스럽다 해도 이미 15년간 복종한 이상 이를 부정하는 것은 의리에 합당치 않다는 주장이었다.

 이색이 조민수의 위세나 상황의 불가피성 때문이 아니라 ‘군신의 의리’라는 보편적 가치에 의해 행동했다는 것이다. 이는 이색 정적들의 견해다.

이 같은 논쟁은 단순한 권력투쟁을 넘어서 인간의 행위기준에 대한 복잡한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다. 이것은 이 시대의 권력투쟁이 지닌 특성이었다. 그 이전의 고려 정치에서는 이런 형이상학적 논쟁이 거의 없었다. 성리학이 도입된 이래 한국인들은 정치 세계를 보다 추상적인 이념의 틀에서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식론의 관점에서 보면 어느 것이 진실인지 모른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진실일 뿐이다. 인간의 현실은 이처럼 다층적이고 다면적이다. 다만 이색이 명예를 지키고자 했다면 세 번째 해석을 선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다.


조선의 유학자들은 대체로 세 번째 입장을 지지했다. “임금(우왕, 창왕)을 폐한 뒤에도 목은과 같은 분들이 아직 남아 있어서 한 가닥 공정한 의논이 없어지지 않았다. 그때 정도전과 윤소종 등이 신우(辛禑)를 왕씨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성한다고 하고, 왕씨라고 말하는 자는 반역자라는 논의를 부르짖어 조정을 혼란하게 하고 인심을 현혹해, 드디어 문학과 덕행이 있는 선비들을 살육하고 입을 봉하게 한 지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했다. 그러니 그 시대에 나서 바르고 곧은 것으로 굽히지 않는 이들은 삶의 고생이 어떠했겠는가.” ([象村集])



승자의 역사에 기록된 이색 평가는 정당한가



▎조선 중기 지방 유림들이 목은 이색과 그의 부친인 이곡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충남 서천군에 문헌서원을 세웠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서원철폐령으로 한때 폐쇄되기도 했다.


공민왕대 이후 이색의 거취를 보면 조민수의 위세에 굴복했다는 정몽주의 설명은 이색을 구하려는 선의에서 나온 것이나 사실은 아닌 듯하다. 이색의 성품은 온화하고 타협적이었지만 중요한 문제에서는 원칙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유종이면서도 아버지 이곡을 위해 대장경을 간행했다.


고려왕조의 국시가 숭불이라는 것도 인정했다. 이념적으로 척불이었지만 현실적으로 국가의 안녕과 부모의 행복을 비는 불교행사는 관용한 것이다. 20대 초반을 제외하고는 정치적 불의에 대해서도 극력 비판하지 않았다. 하지만 설사 왕명이라 해도 부당한 것에는 결코 따르지 않았다.


1368년(공민왕 17년), 노국공주의 영전공사에 반대하는 시중 유탁을 처형하고자 공민왕은 이색에게 문서를 작성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색은 “신이 차라리 죄를 받을지언정 어찌 감히 문서를 만들어 그 죄를 구성하겠습니까”라며 끝까지 거부했다.

이성계파가 왕조를 위협하는 가운데 길재는 장단의 별장에 은거한 이색을 찾아가 거취의 의리를 물었다.

이색은 “마땅히 각자가 자기의 뜻을 행할 것이다. 나 같은 무리는 대신이기 때문에 나라와 기쁜 일과 슬픈 일을 함께해야 하니 물러갈 수 없거니와 그대는 물러갈 만하다” ([月汀漫筆])고 했다. 왕조와 운명을 같이하기로 한 것이다.

실제로 그는 우왕이 폐위돼 강화에 유폐갔을 때, “미복(微服)으로 몰래 가서 뵈었다” ([松窩雜記])고 한다. 반역죄의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1388년 이색은 명에 사신으로 갈 것을 자원했다. 집정대신의 친조는 우왕대 14년간 명의 요구였다. 중국에서도 명성을 지닌 이색의 사행은 그 요구에 부합했다.

표면상 이는 회군뒤 명의 인정을 받아야 하는 이성계의 외교적 난제를 해결하는 데 이색이 앞장서 돕는 형식이었다. 그러나 이색의 목적은 그 반대였다. 그는 명의 감국(監國)과 창왕의 친조(親朝)를 요청했다. 이는 외형상 고려가 명에 철저히 복속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명과 대결할 의지가 없는 한 누구도 고려 왕실을 넘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1259년 고려가 원에 항복할 때 뒤에 원종이 된 태자 전(倎)이 쓴 전략이었다. 그러나 이색의 예상은 빗나갔다. 명은 고려의 내정에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어쨌든 회군 뒤 이색의 행동은 매우 적극적인 것이었다. 1392년 정몽주가 이성계를 제거하려고 했을 때도 적극 참여했다.

그런데 우왕과 창왕이 왕씨가 아니라 신돈의 후예라는 입장(非王說)은 언제 결정된 것일까? 이성계에 따르면 회군 당시 이 점에 합의했다고 한다. 그것은 회군 이후의 정치적 계획에 대한 기본규약에 해당했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조금 의심스럽다. 그 경우 회군의 정치적 의미는 처음부터 일종의 혁명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성계는 회군 시 우왕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허용하지 않았고 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최영의 제거로 극히 한정했다. 우왕의 제거를 결심한 것은 오히려 우왕의 야간기습이 감행된 후였다. 따라서 비왕설이 제기됐다면 아마도 회군 당시보다 우왕의 기습 뒤에 열린 숭인문 회의에서였을 것이다.

 기록상으로도 이 시기에 윤소종이 이성계를 찾아가 [곽광전]을 바쳤다. 조선의 역사편찬자들은 회군 뒤의 역사적 진행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회군 초부터 비왕설이 합의됐다는 주장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알려주는 기록은 근거가 매우 모호하다.

결론적으로 조민수파와의 권력투쟁은 정치적 생존뿐만 아니라 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둘러싼 정쟁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이색에 대한 평가도 그가 누구를 지지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 지지의 정치적·역사적 의미가 무엇이냐는 문제로 바뀌어야 한다.

그런데 이색의 선택에 대한 당대의 논쟁은 매우 정치적이고 공식적인 언어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서로가 언급할 수 없는 영역들이 숨겨져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예컨대 우와 창의 비왕설은 이성계파가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시키고 정적들을 공격하기 좋은 명분이었다.

창왕의 옹립을 주장한 이색을 반역자로 비판하는 것이 대표적 일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색이 아니라 이성계파야말로 왕 씨의 사직을 무너뜨린 존재였다. 이처럼 공식적 논쟁은 기만적인 언어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성계파가 득세한 후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누구도 이 기만성을 폭로할 수 없었다.

단기적인 정국에서 볼 때 이색은 왕씨를 배반한 반역자로 비판받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였다. 반면 역사적 의미에서 볼 때 이색은 왕조의 수호자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반혁명 세력의 정신적·정치적 지도자였다. 그러므로 이러한 기만성이 이성계파의 혁명적 개혁이 지닌 의미를 훼손하는 것은 아니다. 결과적으로 이색이 지닌 역사적 의미는 조민수의 정치노선을 통해 이해할 수밖에 없다.

[출처] :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 : < 김영수의 조선왕조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2



4. 이인임 노선의 종언과 개혁의 시작 

- 반역으로 엮인 ‘조반 사건’ 국가 수탈과 폭력의 민낯 드러내다 


위화도회군 후 이인임 노선 부활 시도에 개혁파 강력하게 저항

…조민수 제거 후 국가 개혁 과정에서 드러난 권문세족의 적나라한 부패상

소수 특권집단의 욕망 충족을 위해 국가를 희생시켜왔던 이인임 노선은 조민수 세력의 축출로 약화됐다. 하지만 국가 개혁을 방해하는 고려 말 권문세족들의 시도는 여전했다. 이런 가운데 권신들의 행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조반 사건’은 개혁과 반개혁 세력 간의 싸움으로 전개됐다.



▎권신 염흥방은 자신의 가노를 죽인 조반을 반역죄로 몰아붙였지만 우옹과 최영, 이성계 연합세력은 오히려 염흥방을 잡아들여 처형했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최후의 순간을 맞는 염흥방(김민상 분).


정도전, 조준, 윤소종 등 이성계 그룹의 급진파는 원대한 꿈을 가졌다. 공자가 꿈꾼 동주(東周)를 현실에서 세우는 것이다. 그들의 비전은 단순히 당대의 정치 현안을 개선하려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문명의 재창조였다. 조선이 바로 그 나라다.

역사적으로 조선이란 국호는 세 번 나타나는데 단군조선과 위만조선, 기자조선이 있었다. 정도전은 새로운 조선이 기자조선을 잇는다고 보았다. 정통성의 계보를 역사적으로 그렇게 연결한 것이다.

기자(箕子)는 은나라 현인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을 멸망시킨 주나라 무왕이 그를 조선 후에 봉했다고 한다. [한서(漢書)]는 기자를 한반도에 문화를 전한 문화적 영웅으로 기록했다. 그는 조선에 와서 예의와 농사·양잠·직조술을 가르치고 팔조법금을 세웠다. 하지만 기자동래설은 역사적 근거가 약하다. 그러나 정도전이 주목한 것은, 그가 [서경(書經)]에 등장하는 중화 문명의 영웅 중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기자는 무왕에게 홍범(洪範)을 설명하고 홍범의 뜻을 부연하여 8조의 교(敎)를 지어서 국중에 실시하니, 정치와 교화가 성하게 행해지고 풍속이 지극히 아름다웠다. 그러므로 조선이란 이름이 천하 후세에 이처럼 알려지게 된 것이다.” ([조선경국전] ‘국호’)

홍범은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약어로 나라를 다스리는 9개의 대원칙이다. 우왕이 황하의 홍수를 다스리는 치수를 할 때, 하늘이 내린 낙서(洛書)를 보고 정했다.

‘홍범구주’는 단순한 전설 이상이다. 그 지침이 상당히 구체적이다. 예컨대 ‘홍범구주’ 중 제5항인 황극론은 영·정조대 탕평론의 이론적 기반이었다. 황극이란 임금이 만민을 위해 세운 공정한 질서다. 그것은 탕탕평평한데, 치우침이 없고(無偏) 무리지음이 없는 것(無黨)이다. 그래서 공안국은 황극을 대중(大中)이라고 한다. 나라를 그렇게 운영하고 정치를 그렇게 하면 어떻게 당쟁이 있겠는가!

기자는 이런 ‘홍범구주’의 오의를 깊이 이해한 현자였다. 주무왕은 은나라 말기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주나

라를 천자국으로 만든 위대한 왕이었다. 그런 그가 국정 운영의 원칙에 혼란을 느끼고 기자에게 조언을 구했다. “오, 기자여! 오직 하늘은 백성이 서로 화합하여 살고, 언제나 먹고 살 수 있도록 말없이 돕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늘이 어떻게 그렇게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기자는 ‘홍범구주’의 역사와 내용을 설명했다. 기자는 이렇게 전설적 성왕인 주무왕과 연결돼 있다. 그리고 주의 문명은 주무왕의 동생 주공을 통해 공자와 연결돼 있다.

공자는 주공을 깊이 사모했다. “심하도다, 나의 쇠약함이여! 오래되었구나 꿈에서 주공을 다시 보지 못한지가!” 공자는 오매불망 주공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또 주공의 나라를 부활시키고 싶었다

“주나라는 하·은 두 왕조를 본받았으므로 그 문물제도가 매우 찬란하다. 나는 주나라를 따르겠다.(吾從周)” ([논어])

그래서 주나라는 유학자의 유토피아가 됐다. 정도전 등도 똑같다. “이제 조선이라는 아름다운 국호를 그대로 사용하게 됐으니 기자의 선정 또한 당연히 강구해야 할 것이다. 아! 명천자의 덕도 주무왕에게 부끄러울 게 없거니와, 전하의 덕 또한 어찌 기자에게 부끄러울 게 있겠는가? 장차 홍범의학과 8조의 교가 금일에 다시 시행되는 것을 보게 되리라. 공자가 ‘나는 동주를 만들겠다’라고 하였으니, 공자가 어찌 나를 속이겠는가?” 공자는 평생 이상 국가를 꿈꿨지만 아무도 그를 등용하지 않았다. 기원전 500년경 노나라의 권신 계씨가(季氏家)의 가신이자 비읍의 읍재 공산불요(公山弗擾)가 반란을 일으키고 공자를 초빙했다. 공자는 가려고 했으나 자로의 만류로 단념했다. 그때 공자는 “나를 부르는 자가 어찌 까닭이 없겠느냐? 만약 나를 쓰려는 자가 있다면 나는 그곳을 동주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공자의 꿈은 그만큼 간절했다.



최영 희생양 삼아 과거 회귀를 시도하다



[고려사] ‘염흥방’ 열전. 염흥방은 [고려사] ‘간신열전’에 기록된 인물이다. 공민왕 때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오른 염흥방은 우왕 때 국정을 농단한 이인임을 비판하는 등 개혁적 인물이었지만 주류세력에 편입된 후 매관매직을 하고 타인의 토지를 강탈하는 등 부패한 인물로 전락했다


그러나 위화도회군 뒤 급진파의 큰 꿈은 곧 커다란 장벽에 직면했다. 이인임 노선이 다시 전면에 부상한 것이다. 1388년 6월 8일 우왕이 강화로 축출되고 이튿날 창왕이 9세의 나이로 즉위했다. 창왕의 즉위와 함께 조민수는 양광·전라·경상·서해·교주도도통사(都統使)에 임명되었다.

반면 이성계는 동북면·삭방도·강릉도도통사에 임명됐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다. 조민수는 전군의 통수권을 장악했다. 이성계에게는 본래부터 지배해 온 작은 지역의 통수권만 인정됐다. 두 사람에게는 또한 사직을 안정시킨 공신이라는 호(安社功臣號)가 똑같이 내려졌다. 그러자 이성계는 조상(穆祖)의 이름이 ‘안사’라는 점을 들어 사퇴하고 며칠 후 칭병사직했다.

회군 뒤 조민수파의 정치적 비전은 창왕의 즉위를 즈음해 발표된 공민왕비 정비의 교서에 잘 나타나 있다. 이 교서는 위화도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밝힌 고려정부의 첫 번째 공식 성명이었다. 그 요점은 한마디로 현상유지 정책의 천명이었다. 이 교서는 먼저 공민왕의 정치를 찬양하고, 그것이 가능한 최선의 정치적 대안임을 시사했다. 회군의 정치적 목표는 공민왕대로의 복귀라는 뜻이다.

 “우리 선조 공민왕은 공손하고 조심하여 하늘을 두려워하고 조종을 공경했으며, 현자에게 맡기고 그 말을 채용하여 정교(政敎)를 밝히니, 그 공이 조상에 빛나고 혜택이 생민에 있음이 지극하였도다. 명황제의 명령을 받자 천명을 밝게 알아 여러 나라에 솔선해 표문을 받들어 신하를 칭하니, 천자가 이를 가상히 여겨 왕위에 봉하고 옥새를 하사하여 종사와 생민이 길이 의뢰함을 삼았다.” ([고려사] 창왕 즉위년 6월 신해)

공민왕대의 정치에 대해서는 이성계파도 기본적으로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 교서의 문제점은 공민왕대와 비교해 우왕대의 정치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지 전혀 검토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왕은 물론이고 이인임에 대한 비판이 완전히 빠져있다. 그 시대의 정치에 대한 암묵적 긍정인 셈이다. 일체의 책임은 최영에게 전가됐다.

“불행히 선왕이 훙서하고 경(卿, 창왕)의 아버지가 계승하여 사대하고 백성을 보살피는 것이 허물된 바가 없었는데 뜻밖에 최영에게 혹한 바 되었다. 최영은 매와 개를 바쳐 서 사냥으로 유도하고 형륙을 가르쳐 난폭함을 드러내게 했다. 이에 군사를 일으키고 군병을 움직여 중국과 불화를 만들어 거의 종사·생민의 화가 될 뻔 하였으니 말하면 가히 마음 아픈 바로다. 다행히 조종의 비밀스런 도움에 힘입어 최영이 퇴출되고 왕도 또한 과오를 후회하고 스스로 왕위를 사양해, 종사의 제사와 생민의 목숨을 경에게 부촉하노니 그 책임이 중하도다.”

이처럼 우왕은 최영의 악행으로 인한 피해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것은 명백히 기만이다. 최영은 악행의 원인이 아니라 그 희생자였기 때문이다. 조민수파는 최영이라는 희생양을 통해 폭정의 모든 폐단을 은폐시키고 나아가 그것을 온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이 교서는 결국 위화도회군의 정치적 의미를 이인임 노선의 부활에 두고 있었다. 그리하여 제2차 권력투쟁은 이인임 노선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벌어졌다.

창왕이 즉위하자 조민수는 즉시 이인임을 복권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인임은 이 무렵 세상을 떴다. 이민수파에 의해 가시화된 회군의 현실적 결과는 결국 이인임을 축출한 최영과 우왕의 제거였다. 사실 회군은 이성계가 최영과의 연합을 깨고 이인임 그룹과 제휴한 결과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성계는 먼저 최영과 연합해 이인임 그룹에 치명적 타격을 입히고, 다시 이인임 그룹과 제휴해 최영 그룹을 제거했던 것이다. 그런데 무진정변 후 숙청 과정에서 최영의 가혹한 태도와 달리, 이성계는 온건한 태도를 취했다. 이인임 그룹이 이성계와 손잡고 회군을 단행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성계 또한 최영이 자신을 배제하고 독주하자 불안을 느꼈다. 그래서 서로 적대적이던 두 집단이 마침내 결합한 것이다. 이들에게 공요군의 지휘권을 맡긴 것은 최영의 부주의였다.

이인임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조민수파는 이인임의 정치 노선을 복권시키고자 노력했다. 창왕은 이인임의 죽음을 애도하는 교서를 내렸다. “내 그대를 위하여 애도하니, 그대는 유감이 없으나 좌우의 보필을 내가 누구에게 바라리오.”([이인임전]) 개혁파에는 희대의 간신이자 역적으로 인식된 이인임을 공공연히 칭송한 것이다. 조민수는 또한 이인임의 장례에 최고 예우를 베풀 것을 왕에게 요청했다. 그를 예장(禮葬)하고, 사신을 보내 조상하며, 만장을 지어 주고, 제사를 지내며, 추증(追贈)하기를 청했다.

하지만 이인임의 부활을 저지하기 위한 개혁파의 반대 역시 강경했다. 그 공격의 선봉장은 좌사의대부 윤소종이었다. 그는 당대의 모든 정치적 폐단이 이인임의 ‘사욕(私慾)의 정치’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했다.

첫째, 이인임은 우왕을 난행으로 이끌었다.

둘째, 군공에 대한 논공행상의 원칙을 무시해 국방을 난맥에 빠뜨렸다.

셋째, 자신이 살고자 친원정책을 강행해 대명관계를 파탄시켰다.

넷째, 벼슬을 팔고 옥을 팔아 축재가 끝이 없고 법이 무너졌다.

윤소종의 비판을 보자.

“임견미, 염흥방을 심복으로 삼아 벼슬을 팔고 옥을 팔자 문전이 물 끓듯 하였습니다. 뇌물로써 부탁하는 자가 현재(賢才)가 되고 절행과 염치 있는 자는 불초가 되어, 공훈이 한 번 웃음에서 생겨나고 형벌이 한 번 찡그림에서 일어나니, 양부(兩府, 첨의부와 밀직사)와 백사(百司, 모든 관청), 병마사와 수령이 모두 그 문에서 나고, 언관·요직에 그 사친을 포열하고, 욕심이 끝을 알지 못하여 농장이 전국에 편재하고 비단이 집에 찼습니다.” ([이인임전])

윤소종은 이인임의 관을 베고, 집을 파서 못으로 만들고, 집·노비·재물은 모두 몰수하고, 자손은 귀양 보내고, 그들을 영원히 관직에 오르지 못하도록 금고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몸은 이미 죽었어도 하늘의 죽임(天誅)을 면치 못함을 알게 하라”고 요청했다.

1388년 7월, 마침내 조민수가 유배됐다. 대사헌 조준이 조민수의 사전겸병에 대한 죄와 사전개혁에 대한 반대를 이유로 탄핵·축출했다고 한다. 탄핵만으로 조민수가 제거됐다는 것은 믿기 어렵다. 실제로 어떤 일이 발생했는지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아마 조선의 사관으로서는 기록할 수 없는 권력투쟁이 발생했을 것이다.

조민수는 명목적인 군통수권을 가졌으나 실질적인 군사력을 장악하지는 못 했을 것이다. 1398년 조선 개국공신 남은은 이성계에게 이렇게 말했다.

“상감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일찍이 군사를 장악하고 있지 않았던들 어떻게 오늘날이 있사오며 신 같은 자도 또한 보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에 이성계는 “누가 남은을 허무맹랑하다고 하는가? 이 말이 진실로 영원한 경계이다”라고 절대 수긍했다.([태조실록] 7년 3월 20일) 고려말 군대는 개별 장군들의 사병 형태로 존재했다. 조민수는 결국 여러 장군의 지지를 획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그런데 조민수에 대한 탄핵의 명분이 사전개혁에 대한 반대라는 사실은 다가올 권력투쟁의 방향을 알려 준다.

조민수 탄핵 후 시작된 개혁파의 반격 



삼봉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 중 ‘국호론’. 단군조선, 위만조선, 기자조선 중 이씨 조선은 기자조선의 정통을 잇는 것으로 인식했다

조민수가 축출된 뒤에도 이인임을 복권시키려는 시도는 계속됐다. 이를 보면 이인임에 대한 평가 문제는 조민수 개인과의 친분관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고려 지배계급 일반의 합의 사항이었던 것이다. 이성계 그룹의 입장에서 볼 때, 이인임 노선은 소수 특권집단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국가를 희생시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배계급의 입장에서 볼 때, 이성계 그룹이 오히려 고려의 오랜 전통에 반하는 아웃사이더들이었다. 실제로 창왕의 재위기간 동안 이인임의 정치노선에 대한 공식적인 비판은 전혀 공포되지 않았다. 두 입장이 팽팽히 대치한 끝에 이인임의 장례는 사후 8개월이 지날 때까지 치러지지 못 했다. 해가 지난

1389년 2월, 창왕은 이인임의 장례를 강행했다. 그러나 개혁파는 결국 2차 권력투쟁에서 승리해 이인임 노선의 부활을 저지했다.

바야흐로 폭풍의 계절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후 4년여에 걸쳐 생사를 건 정치투쟁이 전개됐다. 1388년 7월 조민수의 축출에 즈음해, 혁명적인 개혁안들이 제기됐다. 그 깊이와 폭은 고려왕조 전 시기에 걸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심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이름에 적합하다. 정몽주는 생각이 달랐지만 혁명 없이 그 같은 과업을 이루려는 것은 불가능했다. 개혁안은 수백 년 동안 뿌리내린 특권체계를 전면 부정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개혁자들이 생각한 이 시대의 개혁은 크게 국가개혁과 문명개혁으로 나뉜다. 국가개혁의 기본이념은 ‘공공성’(publicness)이며, 문명개혁의 기본이념은 ‘경건성’(piety)이다. 회군 이후 개혁의 선봉장 역할을 수행한 조준(趙浚)은 그 점을 잘 요약했다.



중국 하나라 우왕 때 낙수(洛水) 위에 신령스런 거북(神龜)이 떠올랐다. 그 등 위에 1~9개 점으로 이루어진 9개 형상이 나타나 있었다. 우왕은 하늘에서 내린 낙서(洛書)를 보고 홍범구주를 정했다고 한다. 이는 하늘의 대법으로 상천의 질서를 본떠 인간세계에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 사진:김영수

“경(敬) 한 글자는 제왕이 성인이 되는 기초(作聖之基)이고, 공(公) 한 글자는 제왕이 다스림을 이루는 근본(致治之本)입니다. 청하건대 전하는 위로 황천의 굽어보심을 두려워하고, 아래로는 억조 백성의 우러러 봄을 두려워하여, 한 사람을 상주더라도 착한 자를 복주는 상제의 마음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한 사람을 벌주더라도 음란한 자를 죄주는 상제의 뜻에 합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 사람이 기뻐한 후에야 상을 주고, 여러 사람이 버린 후에야 형벌을 더하시옵소서.” ([고려사절요] 공양왕 원년 12월)

경과 공의 근원은 모두 하늘(天)이다. ‘경’은 하늘을 본받는 것이고, ‘공’은 하늘을 대신하는 것이다. 성리학에서 만물의 내면(性)은 하늘로부터 기원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완성은 본래의 성품(天性)으로 돌아가는(復性) 것이다. 또 하늘은 만물을 낳고 통치자는 하늘을 대신해 만물을 화육(化育) 한다는 점에서 하늘은 정치권력의 근원이자 표본이다.

이처럼 성리학의 정치는 인간의 내면과 외면의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경은 완성된 인간(作聖)을, 공은 완성된 정치(至治)를 목표로 한다. 현대의 용어를 빌리면 국가와 문명의 문제를 모두 포괄하려는 것이다.

조선의 건국자들이 생각한 국가개혁은 제도개혁과 정치개혁 두 가지다. 먼저 제도개혁은 크게 4개 분야로 전제개혁, 관제개혁, 지방정치 개혁, 군정개혁이다. 정치개혁은 국가의 의사결정 시스템과 운영원리를 바꾸려는 것이다. 제도개혁이 가시적이라면 정치개혁은 비가시적이다. 문명개혁은 종교와 학문을 바꾸려는 것이다. 이는 제도적으로 학교·가족·과거·의례(관혼상제)와 직접 연관돼 있다.

이런 개혁의 최종 목표는 크게 세 가지로 민생 개선, 국가 재건(재정·행정·국방), 새로운 정치와 문명의 창조다. 개혁자들이 국가 개혁에서 초미의 문제로 생각한 것은 전제(田制)였다. 위화도회군과 조선건국으로 이어진 일련의 역사적 사건도 이 문제에서 비롯됐다. 조반(趙)의 사례는 당시의 상황을 가장 잘 보여 준다.

1387년(우왕 13년) 전밀직부사 조반은 배주(白州, 황해도 연백)에서 염흥방의 가노 이광(李光)을 죽이고 집을 불살랐다. 일찍이 이광이 조반의 전토를 점탈했는데 조반은 염흥방에게 애걸하여 돌려받았다. 그러나 이광이 다시 빼앗았고 욕까지 보였다. 조반은 욕을 참고 이광을 찾아가 다시 애걸했다. 밀직부사는 정3품의 고관이다. 그런 조반이 일개 권신의 가노에게 욕을 당하고도 후환이 두려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한 것이다.

이 무렵 이런 일은 일상적이었다. 염흥방은 조반만이 아니라 “배주 사람의 밭 수백 경을 빼앗아 종 이광을 장주(庄主)로 삼고, 또 여러 사람의 밭을 빼앗아 1년에 수조(收租)하기를 두 번, 세 번까지 하니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고 한다. 지방관들도 이를 통제할 수 없었다. 조반이 고개를 숙이자 이광은 더욱 기고만장했다. 조반을 업신여기고 더 못되게 굴었다.


죽음을 각오한 조반의 속내



서울 전농동 부군당의 무신도. 부군당은 고려 말, 조선 초 토지개혁을 이끈 조반을 주신으로 모신 마을 제당이다. 조반은 죽음을 각오하고 염흥방에 맞섰다. / 사진:연합뉴스


마침내 조반의 분노가 폭발했다. 그는 수십 명의 기병을 동원해 이광을 목 베고 집을 불살랐다. 그러나 순간적인 분노로 인한 것은 아니었다. 뒤에 우왕이 일곱 살 난 조반의 아들을 불러 아버지의 일을 물었다.

“제 아버지는 다만 칼을 빼어 살펴보면서 ‘탐욕스런 예닐곱 재상의 목을 베어 내 한을 풀련다. 그렇지 않으면 처자가 반드시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릴 것이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답이다. 조반은 그 외에는 재산을 지킬 아무 대안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죽음을 각오하고 칼을 뽑은 것이다.

하지만 그는 염흥방에게 일말의 희망을 건 듯하다. 급히 개경으로 달려가 염흥방에게 전후 곡절을 해명하고자 했다. 그러나 앞서 소식을 들은 염흥방은 조반을 반역자로 공포했다. 개인 간 다툼 과정에서 생긴 일을 국가적 문제로 키운 것이다. 그 다음 치안을 담당하는 순군(巡軍)을 동원해 조반의 어머니와 처를 체포하고 조반을 잡기 위해 기병 400여 명을 백주로 파견했다. 현상금도 걸었다. 곧 조반은 체포돼 순군에 갇혔다.

염흥방은 당시 순군부 상만호였다. 부만호는 이인임의 인척이자 측근인 도길부였고 도만호(都萬戶)는 임견미의 사위 왕복해였다. 그들과 대간, 그리고 전법사가 합동 심문을 맡았다. 혹독한 고문이 하루 종일 이어졌다. 그러나 조반은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의지가 강한 인물이었다. 오히려 그는 권신들을 무법한 도적이라고 비난했다.

“6~7명의 탐오한 재상이 종놈들을 사방에 풀어놓고는 남의 전민(田民)을 빼앗고 백성을 학대하니 그들이 바로 큰 도적이다. 내가 이번에 이광의 목을 벤 것은 오직 국가를 돕고 백성을 학대하는 도적들을 제거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어찌 모반이라 하느냐?”

조반은 오히려 전선을 확대했다. 염흥방만 아니라 권신 전체로 전선을 확대했다. 죽음을 각오한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지닌 의미도 넓혔다. 단순히 자신의 토지를 지키려는 개인적 행위가 아니라 백성을 괴롭히는 도적을 국가를 위해 제거한 의거라고 주장했다. 개인 행위를 반역 행위로 확대한 염흥방에게 맞불을 놓은 셈이다.



평양 인근 평천리에 있는 ‘기자정전기적지비’ 탁본. 비의 글은 ‘평양은 3000년 전 은나라에서 온 기자가 세운 옛 도읍…’으로 시작한다. 오른쪽의 초서는 비석 앞면의 끝자인 ‘지비’라는 한자의 탁본이다. / 사진:권태균


도덕적으로 곤란해진 염흥방은 거짓 자복을 시키려고 혹독한 고문을 가했다. 하지만 조반은 조금도 굴하지 않고 역공을 가했다.

 “나는 너희들 같은 나라의 도적을 처단하고자 했으니 너와 나는 서로 소송이 붙은 관계인데 어찌 나를 국문하느냐?” 염흥방의 공권력 오남용을 규탄하며 꾸짖고 욕했다. 염흥방은 도덕적으로 더 곤경에 몰렸다. 분기탱천한 그는 사람을 시켜 조반의 입을 마구 치게 했다. 조반의 입을 막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자 심문관들은 곤란한 처지에 빠졌다. 염흥방의 일파였지만 염흥방의 억지와 횡포가 도를 넘었다고 본 것이다. 왕복해는 조는 체하며 못 들은 척했다. 나머지 사람도 염흥방이 너무 펄펄 뛰었기 때문에 감히 어쩌지 못했다. 그러나 좌사의대부(左司義大夫) 김약채(金若采)가 극력 저지했다. 그 덕분에 고문은 중단됐다.([임견미전])

개인적 행위를 국가적 문제로 전환시킨 조반의 의도는 성공했다. 왕복해의 태도를 보면 권신 내부에서조차 염흥방의 조치가 과도하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개입을 꺼린 다른 권신들은 모른 체했고 염흥방의 권력을 두려워한 다른 관리들은 침묵했다. 김약채만이 용기를 냈다.


그는 부당함을 지적하고 극력 저지했다. 김약채는 1371년(공민왕 20년) 문과 급제자로서 위화도회군에 반대해 유배됐다. 뒤에 조선건국에 참여해 대사헌, 충청도관찰사에 올랐다.

조반의 항의는 공분을 불러일으켰다. 놀랍게도 우왕이 그에 호응했다. 며칠 뒤인 1388년 1월 5일, 우왕이 최영의 집에 가서 조반의 옥사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날 염흥방은 다시 조반을 국문하려고 순군에 가서 옥관(獄官)과 대간을 오라고 요청했으나 아무도 오지 않았다. 우왕은 의원을 보내 조반에게 약을 하사한 후 곧 본인과 모친, 처를 석방하고 또 의약품과 가죽옷을 보냈다.

그런데 1401년(태종 1년) 조반의 졸기를 보면 조반은 행동에 나서기 전 최영에게 편지를 보냈다.

“임견미, 염흥방의 당을 급히 제거하지 않을 수 없는데 먼저 이광을 없애어 그 단서를 열고자 하니 원컨대 미리 주상께 계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태종실록] 태종 1년 10월 27일)

최영은 이를 곧 우왕에게 알렸다. 이에 조반은 100여 인을 거느리고 이광을 베었다. 임견미, 염흥방 등 이인임 그룹을 제거하기 위한 우왕, 최영, 조반의 사전 밀모가 있었던 것이다.


조반사건은 명분을 쌓기 위해 계획된 고육지책이었다. 조반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선과 명분을 확대한 것도 이해가 간다. 아마도 조반이 자신의 억울함을 최영에게 호소하는 과정에서 최영이 먼저 결심을 하고 일련의 비밀 계획이 마련된 듯하다.

매달 7일은 마침 녹봉을 나눠주는 날이었다. 하지만 우왕은 “재상들은 부유하니 녹봉을 주지 않아도 괜찮다. 먼저 먹을 것이 없는 군졸들에게 지급하라”고 명했다. 군대의 지지를 얻으려는 조치였다. 그리고 염흥방을 순군에 하옥시켰다.

그러자 나라 사람들이 모두 “우리 임금께서 현명하시다”고 기뻐했다. 1388년 무진정변의 시작이었다. 우왕은 최영, 이성계와 연합해 군사를 동원해 궁중을 숙위하고 임견미와 도길부를 하옥했다. 결국 염흥방, 도길부가 처형됐다. 임견미, 이성림, 왕복해, 염정수, 김영진, 임치도 사형에 처했다. 이인임과 권력을 나누고 누렸던 권신들과 그 일족, 측근과 심복이 모두 처형되었다. 그 처들은 고문을 당해 모두 옥중에서 죽었다.

 “사형당한 자들의 자손도 죄다 몰아다 죽이면서 심지어 갓난아이까지도 모조리 임진강에 던져버리니 숨어서 죽음을 면한 자가 거의 없었다.”

사형된 자의 처와 딸을 적몰해 관비로 삼으니 모두 30여 명에 달했다. 이로써 14년에 걸친 이인임의 집권 시대가 막을 내리고 최영과 이성계의 무신 연합정권이 탄생했다.

염흥방은 친원파의 거두이자 공민왕대의 명신 염제신의 아들이었다. 명문세족 출신인 그는 공민왕 6년 과거에서 장원급제했다. 좌주는 공민왕대의 명신이자 저명한 학자 이인복이었다. 소시에 염흥방은 뛰어난 문재와 고결한 인품을 가진 인재라는 세평을 받았다.

 침류정(枕流亭)이라는 그의 시는 세속의 때를 벗었다.

“금사거사(金沙居士)의 침류정에는/

버드나무 우거져 더운 기운 맑히네/

귀 씻고 티끌세상 일 듣지 않나니(洗耳不聞塵世事)/

다만 잔잔히 흐르는 작은 시내 소리 있다(潺湲只有小溪聲)” ([동문선] 권22)

담박 한아한 정취가 넘치지 않는가! 이색이 바로 그의 절친한 벗이었다. 한수, 염흥방, 이색은 늘 함께 술 마시고, 시를 짓고,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나누었다. 이색의 바람 중 하나는 염흥방의 이웃에 살며 함께 낚시를 즐기고 평생을 더불어 사는 것이었다.

 “내가 이제 늙었으니 하늘이 가령 나에게 복을 내려 동정(東亭, 염흥방)의 이웃에다 빈터를 잡고 살게끔 해준다면 동정과 함께 이 시를 읊조리면서 나의 생애를 마치고 싶은 생각도 든다. 그밖에 낚싯대와 낚싯줄을 위시해서 낚싯바늘이나 미끼 따위, 그리고 굽은 낚시를 할 것인지 아니면 곧은 낚시를 할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동정과 함께 돌아가서 상의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목은집] ‘漁隱記’)

염흥방은 유학의 부흥에도 애썼다. 1367년(공민왕 16년) 전쟁으로 무너진 성균관을 중수할 때 그 책임을 맡아 국가의 도움 없이 개인의 후원을 받아 성공적으로 완수했다. 그가 기부를 재촉하자 열흘 만에 베 1만 단이 들어왔다고 한다.([염흥방전]) 그 가문과 개인의 명망을 짐작케 한다. 이색을 중심으로 성균관에 모여든 정몽주, 정도전, 이숭인, 권근 등이 성리학운동을 본격화했다. 이색은 염흥방을 참된 군자로 평했다.

염흥방의 제거, 전제개혁의 시발이 되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공자의 반열보다 높여 숭배한 기자의 초상. / 사진:김운회


“동정은 옛사람의 도를 좋아하고 몸을 닦으며, 참된 마음을 간직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가렴주구하는 무리를 개, 돼지보다 못하게 여기고, 물고기와 자라까지 모두 덕화를 입게 하는 데 힘쓰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생각했다.” ([목은집] ‘漁隱記’)


어떤 시에서는 “동정의 풍채는 유림 속에 환히 빛나네” (東亭風彩照儒林)라고 찬양했다.([목은시고] 권 20, 柳巷門生開酒席)

1374년 우왕 즉위 후 대외정책의 변동을 둘러싸고 이인임과 대립한 정몽주, 정도전 등 신진유신이 대거 유배됐다. 염흥방도 이때 유배됐지만 곧 풀려났다. 유배에서 돌아온 염흥방은 상황변화에 빠르게 적응했다. 이인임과 그의 심복인 임견미가 모두 염흥방을 꺼렸다. 하지만 본래 신분이 미천한 임견미가 혼인을 청하자 염흥방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는 “과거 쫓겨났던 일을 돌아보고 자기 몸을 보존하고자 하여 이인임과 임견미의 말이라면 무조건 좇았다.” ([염흥방전]) 동생 염정수는 내재추로서 궁중에서 “국가 업무를 모조리 맡아 모두 구두로 왕의 결재받았고, 때로는 왕에게 보고하지도 않고 시행해 버린 일도 있었다.”

의붓형 이성림이 시중이 되니

“간신배들의 족속들이 양부(兩府)에 포진했으며 내외 요직은 모조리 그들과 친한 자들이 차지했다. 이들은 권력을 멋대로 휘두르면서 관작을 팔고 남의 토지를 점탈했으며 산과 들을 죄다 차지하고 수많은 노비를 빼앗았다.  심지어 왕릉·궁고(宮庫)·주현·진(津)·역에 소속된 토지까지도 모조리 점탈해 버리자 주인을 배반하고 도주한 노예와 부역을 피해 유랑하는 백성들이 그 아래로 구름같이 모여들었는데 안렴사와 수령도 감히 그들을 징발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백성은 유랑하고 도적떼가 마구 일어나 공사(公私) 간의 모든 재물이 고갈되었으므로 온 나라 사람이 이를 갈았다.” 



경남 창녕군 대합면 신당리에 있는 조민수의 묘. 조민수는 위화도회군 후 군 통수권을 장악하고 이인임의 정치노선을 부활시키려 했지만 이성계 세력에 의해 제거됐다. / 사진:김영수 



염흥방의 가노와 이림(李琳)의 사위 판밀직 최렴의 가노가 부평에 살았는데 주인의 권세를 믿고 제멋대로 횡포를 부렸다. 부사(府使) 주언방(周彦邦)이 부리(府吏)를 보내 군사를 징발하자 그 종들이 백성 40여 명을 거느리고 그 아전을 때려 거의 죽게 만들었다. 주언방이 친히 4도 도지휘사(都指揮使)의 군사징발 공문을 가지고 그 집에 갔지만 종들이 주언방마저 구타했다. 두 종자도 때려 치아를 부러뜨렸다.

 염흥방이 일찍이 이성림과 함께 성묘 갔다가 돌아오는데 따르는 호위기마(騶騎)가 길을 메웠다. 이때 어떤 사람이 권세가의 종들이 백성들로부터 조세를 수탈하는 내용의 광대 놀음판을 벌이자 이성림은 부끄러워했으나 염흥방은 그냥 재미나게 구경할 뿐 자기를 풍자함을 깨닫지 못했다.

후년의 염흥방에 대해 이색은 “시중 이성림은 조그만 집에서 생장하였는데 재상이 되자 전민을 많이 탈점하여 한꺼번에 큰 집세 채를 지었다. 좌사 염흥방 역시 수탈을 일삼으니 나라를 그르칠 자는 반드시 이 두 사람일 것”이라고 혹평했다.([이색전])

무진정변 때 각도에 찰방(察訪)을 보내 임견미와 염흥방이 탈취한 전민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게 했다.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설치해 임견미 등이 점탈했던 전민의 현황을 조사한 후 안무사를 각 도마다 보내 1000여 명에 이르는 임견미 등의 가신과 악질 종들을 체포해 처형하고 모든 재산을 몰수했다.

조반 사건은 당대 고려의 국가와 전제의 상황을 알려 주는 전형적인 사례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국가는 원래 정주형 도적집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다가 국가가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천명론까지 순화된 것이다. 그러나 고려 말의 국가는 원시 형태로 회귀했음을 보여 준다. 국가가 합법적 폭력기구이자 수탈기구로 퇴락한 것이다.

이인임은 그 모습을 세련되게 은폐했다. 그런데 염흥방은 최소한의 주의조차 기울이지 않았다. 수탈과 폭력이 민낯으로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반란은 폭정 자체보다도 자신이 걸치고 있는 위장조차 무시할 때 비로소 폭발한다. 14년간 이인임의 충실한 협력자이자 군사적 보호자였던 최영이 가장 먼저 잠에서 깨어났다.

[출처] :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 : < 김영수의 조선왕조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4




​5. 새 시대의 사상적 뿌리 성리학 

- 제갈량 흠모한 신진학자 조준 국가 개혁의 신호탄을 쏘다 


개혁과 변화의 정신 담은 성리학 바탕으로 혁명적 변혁 꾀한 신진 세력 등장

…칩거하던 조준, 이성계에 발탁돼 전제와 민생 개혁안을 제시


사회 변혁에 대한 열망이 컸던 신진 학자들에게 성리학은 자신들의 꿈을 펼칠 수 있는 사상적 무기였다. 조선 건국의 제도적 설계도인 <조선경국전>을 쓴 정도전을 필두로 전제와 민생 개혁을 내세운 조준 등 신진 세력들은 위화도회군 후 이성계 세력과 결합해 새 왕조 개창의 비전을 만들어 나갔다.



KBS 드라마 [정도전]에서 이성계(유동근 분), 정도전(조재현 분), 조준(전현 분)이 만나 개혁과 변화의 시대를 열기 위한 밀담을 나누고 있다. 조준은 최영의 요청을 거절하고 훗날 이성계를 선택했다./ 사진제공·KBS



이인임 노선의 부활이 저지되고 1388년 7월 조민수가 유배되자 혁명적 개혁안들이 제기됐다. 조선 건국의 청사진을 제시한 것은 신진 성리학자들이었다. 성리학은 통상 관념적이고 사변적인 공리공담이라고 알려져 있다. 경제·안보·행정·복지·토목공사 등 구체적인 국정 현안이나 제도와는 무관하다.

그래서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끝내 망국의 변을 당했다고 본다. 조선 중기 이후의 성리학이 사변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성리학이 본래 사변적인 것만은 아니다. 공리공담은 더욱 아니다.

성리학이 탄생한 11세기 이래 송대(宋代)는 중국 역사상 가장 혁신적 시대 중 하나였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정치, 사상, 제도의 개혁도 송의 영향이 결정적이었다. 일종의 문명 모델이었던 셈이다.

 “10세기, 당 말기에서 송 초기로 이행하는 시기는 중화 제국사에서 가장 뚜렷한 단절을 나타냈다. 유교 이념의 교육을 받고 치열한 과거시험을 통해 등용된 사대부 계층이 중국의 전통을 다시 만들 계층으로 새로이 부상했다. 이들이 정치·이념·철학·문화·문학·예술·기술·과학 분야에서 이룬 성취와 더불어 일상 생활을 변화시킨 당시의 강한 경제력은 송 왕조가 얼마나 혁신적인 왕조였는지를 보여준다. 중국 역사상 사회 전체를 바꾸고 개혁하겠다는 중국 사람들의 의지가 이때만큼 성공적이고 강력하게 발휘된 때도 별로 없었다. 송의 혁신과 근대성의 여명을 예고한 ‘중국의 르네상스’였다고까지 평가하는 역사가들도 있다.” (디터 쿤, [하버드 중국사 송: 유교 원칙의 시대], 17쪽)

송대의 혁신은 이후 동아시아 국가의 인간과 사회, 국가 전체에 대한 표준으로서 혁신을 위한 이론적 기초가 됐다. 조선 건국도 그에 바탕해 있다. 도이힐러(Martinar Deutchler) 교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한국에 성리학이 도래함에 따라 사회 문제에 대해 포괄적이고 강제적인 방식으로 그것에 대답하려는 하나의 이념이 부상했다. 그것은 인간과 사회에 대해 유례없는 정치적 논쟁을 자극했다. 성리학은 사회정치적 변혁에 명확한 가르침을 포함하고 있었고 그것이 제대로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을 고대 중국 성왕들의 사례로부터 찾았다. 더구나 성리학의 변혁에 대한 욕구는 그 실천자들을 행동으로 이끌었으며 사회적 변혁 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헌신을 요구했다.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 사회를 유학화하려는 변혁 프로그램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11세기 왕안석의 개혁이 실패한 후 그들의 프로그램은 동아시아 세계에서 가장 야심적이고 창조적인 개혁실험이었다.” (마르티나 도이힐러, [한국 사회의 유교적 변환])

송대 성리학자들은 매우 사변적이었지만 동시에 실천적이었다. 토지와 조세개혁에도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 정호, 정이, 장재, 주자가 그랬다. 주자는, 정전제가 실제 존재했다고 믿었고 당의 균전제가 정전제에 가깝다고 보았다.

주자는 농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의 [권농문(勸農文)]은 남송 시대 남강군(南康軍)과 장주(漳州)의 지사 때 수전 농법을 연구하고, 지주와 전호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를 검토해 바람직한 향촌사회를 이루려 한 것이다.

여말선초의 성리학자들 역시 당대에 가장 개혁적이고 실천적이었다. 정도전은 그 대표적인 예다. 그는 고려 말의 전제개혁에도 깊이 관여했고 조선 건국의 제도적 설계도로 [조선경국전]을 저술했다. [조선경국전]은 ‘조선이라는 나라를 경영하는 책’이란 뜻이다.

고려 말 이전에는 국가의 운영을 이렇게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검토한 저술이 없었다. 이색은 “우리 태조가 천명을 받고 삼한을 통일한 뒤 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관제도 답습하고 개혁하는 등 거듭 변해 왔지만, 관제를 하나의 책으로 정리한 사람은 아직까지 없었다.”([周官六翼序])고 했다.

[조선경국전]은 정부의 제도와 직제, 운영 원리를 체계적으로 저술한 현존하는 한국 최초의 저술이었다. 이 책은 원나라의 [경세대전]을 모방한 책으로 알려져 있다.



급진파 개혁안의 집대성 '주관육익'



영국 런던대 명예교수인 마르티나 도이힐러 교수는 성리학을 한국사회를 장기적으로 변화시킨 혁명적 이념으로 이해했다



당시 신진 성리학자의 선두 격인 정몽주의 [신정률(新定律)] 편찬도 한 사례다. 고려 법전의 표준은 1346년 반포된 원의 [지정조격(至正條格)]이었다. 하지만 양국의 법률 현실이 달랐다. 또 고려의 법률은 체계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정몽주는 고려율과 명의 [대명률(大明律)]을 비교, 참작해 1392년(공양왕 4년) 2월 새 법전을 완성했다.([포은선생문집] ‘本傳’) 이는 국가개조를 위한 정몽주의 청사진 중 일부였을 것이다.

이처럼 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사상은 현실 개혁책과 별개의 것이 아니었다. 현실에 대한 여말선초 지식인들의 고민은 깊었다. 개혁론의 백화제방 시대였던 것도 우연이 아니다. [조선경국전]도 정도전 개인의 천재적 창작품이기 보다 시대의 산물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사실 김지의 [주관육익]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아쉽게도 [주관육익]은 현존하지 않는다. 다만 그 내용이 여러 도서에 산견돼 있다. 그런데 이색이 붙인 책 제목과 서문에서 알 수 있듯이 [주례(周禮)]의 육전 체제에 의거해 고려의 국가 제도를 깊이 고찰한 것이다.

그 내용은 “육방(六房)으로 대강을 삼고 각 직무를 세목으로 나누어 설명해 줌으로써 관직에 몸담고 있는 자들 모두가 자신의 직책을 준수하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진력할 것을 생각하도록 하고, 만약 자신의 힘이 부족하면 힘껏 노력해서 보완을 할 수 있게 해주었다.” ([周官六翼序])


이 책은 단순히 제도만이 아니라 고사·법령·예제·지리·물산 등 당시 고려의 국가 현실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었다. 국가개혁을 위한 기본 자료집 성격도 가진 것이다. 1388년 이후 조준의 개혁안도 여기에 바탕을 두고 있다.


 “결국 [주관육익]은 단순한 종합 자료서라기 보다는 고려 말 조준 등의 급진개혁파 사대부의 문제 의식을 반영하여 개혁 방향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 수록한 책이었다. 따라서 이 책은 일종의 법전적 성격을 지향하였고, 그렇기 때문에 육전 체제에 맞춰 국가 운영에 필요한 여러 자료를 수합하고 정리했던 것이다.” (김인호, [김지의 주관육익 편찬과 그 성격], 158쪽)



도이힐러 교수의 저서 [한국사회의 유교적 변환].

1392년 조선건국 이후 약 250년에 걸쳐 한국이 점진적으로 유교사회로 전환되는 과정을 다뤘다



1388년 위화도회군 후 혁명적 개혁의 주역은 조준과 정도전이었다. 그런데 전면에 나서 개혁을 주도한 것은 대사헌 조준(1346~1405)이었다. 조준은 정도전보다 네 살 아래다. 소시에 두 사람은 별 교류가 없었고 뒤에 이성계의 휘하에서 하나가 됐다. 정도전은 이색, 정몽주 그룹에 속해 있었고 조준은 윤소종, 조인옥, 허금, 유원정, 정지, 백군녕과 어울렸다.

하지만 훗날 조준은 “신은 정도전·남은과 더불어 동공일체(同功一體)여서 처음에는 털끝만한 간격도 없었다”고 회상했다.([정종실록] 정종 1년 8월 3일) 윤소종, 조인옥, 유원정은 조선 개국공신이다. 윤소종의 조부는 충숙왕의 측신이자 공민왕대의 명신 윤택이다. 조인옥의 부친은 조돈이며 형은 조인벽이다.

조돈은 1356년(공민왕 5년) 반원정책 때 이성계의 아버지 이자춘과 함께 쌍성총관부 회복에 큰 공을 세웠다. 조인벽은 이성계의 서모 소생 누이와 결혼했다. 윤소종과 조인옥이 위화도회군 직후 이성계를 만나 수습책을 진언한 것은 앞서 살펴봤다.


정지는 1383년(우왕 9년) 남해대첩의 명장이다. 1388년 요동정벌 때 안주도도원수로서 이성계의 우군 휘하에 속했다. 회군파였으나 뒤에 이색파에 동조해 제거됐다.

조준은 평양 조씨로 증조부는 그 유명한 조인규(趙仁規, 1237~1308)다. 조인규의 부친 조영(趙塋)은 금오위 별장이었다. 금오위는 개경의 경찰 부대로써 별장은 7품의 하급 무관이다. 가문이 한미했던 것이다. 당시는 원나라 지배 초기였다.

조인규는 3년간 두문불출 어학 공부에 매진한 끝에 몽고어와 중국어에 통달해 통역관으로 입신했다. 얼마나 잘했던지 원 세조 쿠빌라이가 말을 시켜보고는 “잘 대답했다. 고려 사람이 이처럼 몽고어를 잘하는데 어찌 꼭 강수형(康守衡)을 시켜 통역하게 하겠는가?”라고 칭찬할 정도였다.

강수형은 여몽 전쟁 중 포로였다가 원 조정에서 대고려 외교를 담당한 인물이다. 조인규는 또한 풍모가 아름답고 말과 웃음이 적었으며 위인전 격의 전기(傳記)를 섭렵했다고 한다. 심오한 교양의 소유자는 아니지만 근엄한 언행과 수려한 풍의, 진세를 사는 지혜를 갖춘 인물이었던 것이다.



호방하고 걸출했던 조준의 풍모



김지의 [주관육익]에 대한 이색의 서문.

[주관육익]은 정도전이 쓴 [조선경국전]의 전범으로 여겨진다. / 사진제공·김영수



충렬왕의 평가를 보면 그는 단순한 통역관이 아니라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조인규는 일본 정벌 때 우리가 처한 형편을 천자께 잘 보고했다. 천자께서 과인을 중서좌승상(中書左丞相)으로 임명하고 또한 여러 신하에게 도원수·만호·천호의 금은 패를 내려준 것은 모두 그의 공이다.” ([고려사] ‘조인규전’)


조인규는 원이 몽고식 의복과 변발을 강제하려고 하자(改土風事) 홀로 원에 들어가 고려의 입장을 잘 변호함으로써 이를 막았다. 또한 원의 직할지가 된 자비령 이북 동녕군을 고려 영토로 반환하는 데 공을 세웠다. 이런 일은 이제현이나 이색, 정몽주 같은 국사(國士)라도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조인규는 단순한 외교관을 넘어 선 경국지재였다.

그의 딸이 충선왕 후비가 되자 조인규도 국구가 됐다. 충선왕은 그에게 인신으로서 최고 예우를 베풀도록 부왕 충렬왕에게 요청했다.


“조인규는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국가의 원로니 조회 때 옥대를 띠고 일산을 쓴 채로 임금을 시종하도록 하며, 찬배(贊拜) 때 이름을 부르지 말고 칼을 찬 채로 전각에 올라갈 수 있도록 허락하십시오. 그리고 대사가 있으면 첨의밀직(僉議密直) 한 명이 그의 집으로 가 자문을 받게 하되 만약 조인규 및 중찬(中贊) 최유엄(崔有渰)이 정한 사항을 따르지 않는 자가 있으면 법을 위반한 것과 같이 논죄하소서.”


조인규의 네 아들도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죽음에 임해 그는 “내가 졸병으로 시작해 최고 관직에 이르렀고 이미 나이 일흔을 넘겼다”고 자신의 삶을 술회했다.



조준의 증조부 조인규 시.

그는 몽골어 통역관에서 시작해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충선왕의 장인이 되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조준의 가문은 원 지배 초기의 대표적인 친원파 신흥가문이었다. 충선왕 즉위년에 왕실과 혼인할 수 있는 ‘재상지종(宰相之宗)’으로 인정됐으니 평양 조씨는 조인규 일대에 최고 가문의 지위에 오른 것이다. 조준의 아버지는 판도판서 조덕유(趙德裕)다. 그는 “청백을 스스로 지키고 호강(豪强)를 두려워하지 않으며 영리를 도모하지 않았다고 한다.” ([輿地圖書] 上)


조준의 형제는 여섯인데, 셋째 형이 조린(趙璘, ?~1368)이다. 그는 1363년(공민왕 12년) 제 2차 홍건적의 난 때 전공을 세워 일등공신이 되고, 응양군(鷹揚軍) 상호군에 올랐다. 고려의 중앙군은 2군 6위로 응양군은 최상위 부대다. 왕을 호위하는 친위군이기 때문이다. 그 지휘관인 상호군은 군부전서(軍簿典書)를 겸해 반주(班主)로 불렸다. 최고위 군 지휘관인 셈이다. 그런데 조린은 두 차례나 신돈을 제거하려다 살해됐다.

조준의 바로 아래 동생은 조견(趙狷, 1351~1425)이다. 하지만 정몽주를 지지하고 형의 정치노선에 반대했다. 조준은 동생을 사랑했다. “성긴 비 오동잎에 떨어지고, 찬 서재는 밤 되어 적요한데, 서편 창 촛불 심지 누가 자르리(翦燭), 문득 형과 아우 멀어짐이 한스럽네.” ([夜雨憶弟]) 


비 오는 밤 고요한 서재에 홀로 앉아 동생과 밤새 정담을 나누던 옛날을 그리워하며 마음 아파한 것이다. 촛불 심지를 자른다는 것은 촛불을 갈아가며 무릎을 맞대고 밤새워 정담을 나눈다는 뜻이다. 당나라 시인 이상은(李商隱)의 시([夜雨寄北])에서 온 말이다.


조견은 조선 개국공신에 책록됐다. 아우를 살리려는 조준의 독단이었다. 고려가 망하자 조견은 두류산, 청계산에 은거했다. 이성계가 호조전서에 명하고 부르자 “송산(松山)에서 고사리를 캐먹는 것이 소원이요 성인(聖人)의 백성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거절했다.


 그리고 이름을 견(狷)으로, 자(字)를 종견(從犬)으로 고쳤다. 나라가 망했는데 살아 있으니 개와 같고 또한 개조차 주인을 연모하는 의리가 있다는 뜻이었다.([국조인물고]) 형을 비난한 것이다.

조준의 형제는 모두 아버지의 성품을 이어받아 강한 원칙주의자였다. 조준은 1371년(공민왕 20년) 27세 때 음보로 관직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세태로나 그의 문벌로나 매우 늦었다. 그런데 어느 날 조준이 책을 끼고 덕수궁을 지나는데 공민왕이 보고 불러서 집안 내력을 물어본 다음 바로 보마배지유(寶馬陪指諭)에 소속시켰다.([태종실록]에는 步馬陪行首로 나온다.)


왕의 말을 관리하는 하급 장교로 보인다. 그런데 어머니가 자식 중 과거 합격자가 없다고 탄식하자 학문에 매진해 1374년(공민왕 23년) 30세 때 급제했다. 공민왕이 자제위를 시켜 후비들을 능욕케 하자 인도(人道)가 사라졌다고 탄식했다. 또한 왕이 군자를 멀리하고 소인들과만 어울린다고 비판했다.

조준은 “어려서부터 기개가 빼어났으며(倜儻) 큰 뜻이 있었다(有大志)”고 한다. 글만 읽은 백면서생은 아니었던 것이다. 권근은 조준의 시에 대해 “기운이 웅혼하고 글은 빼어났으며 기교에 힘써 다듬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호방하고 걸출한 모습은 문인재사(文人才士)와 다른 점이 있었다.” ([양촌집] ‘松堂趙政丞詩藁序’)고 평가했다. 그의 졸기에도 “사학(史學)에 능하고, 시문이 호탕하여 그 사람됨과 같았다”고 한다.


또한 “국량이 너그럽고 넓으며 풍채가 늠름하였으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함은 그의 천성에서 나왔다.” 임협(任俠)의 풍모가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조준이 가장 숭모한 인물은 제갈량이었다. 시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불같이 찌는 혹서에 연기 날 듯한데, 왕명 받들고 남방 2천리 떠났네. 왜적 멸하고 임금께 고할 날 있으리니, 닭소리에 일어나 출사표를 읽는다.” ([송당집] ‘次尙州客舍東軒韻’) 그는 1382년 왜구와 싸우는 군대를 감찰하러 떠난 경상도 상주의 객사에서 새벽에 일어나 제갈량의 출사표를 읽었다. 제갈량처럼 태평 세상을 만드는 게 그의 꿈이었다

“말 몰아 멀리 와서 홀로 누각 오르니, 풍진 세상 10년 시름했네. 제갈량의 태평세상 계책(開平策) 없음 한스러워, 푸른 풀 무성한 모래톱서 창 비껴 잡고(橫槊) 높이 읊조리네.” ([송당집] ‘次陜州涵碧樓詩韻’) 같은 시기에 황강이 흐르는 합천 함벽루에서 지었다.


 ‘횡삭’은 횡삭부시(橫槊賦詩)로, 마상에서 창을 비껴들고 시를 짓는 것이다. 태평세상을 꿈꾸는 문무겸전의 호걸, 경세제민의 국사(國士), 그것이 조준이 그린 자화상이었다.


전제개혁 추진한 윤택의 영향을 받은 조준



조준의 벗 조인옥의 묘.


조인옥은 이성계의 자부 조인벽의 동생으로 위화도회군을 적극 도모했고 이후 윤소종과 더불어 수습책을 건의한 인물이다. 조준이 이성계에게 발탁돼 개혁을 총지휘하는 지위에 선 것도 조인옥의 추천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조준의 학문적 연원은 윤택(尹澤, 1289~1370)으로 어린 시절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 옛날 문정공(文貞公) 뵈었을 때는 어리디 어렸는데(小少時) 친히 가르침 받들고서는 옷깃을 단정히 여몄지.” ([송당집] ‘尹待制紹宗慈氏挽詞’) 문정공 윤택은 조준이 평생의 벗(平生友)으로 부른 윤소종의 친조부다.

 윤택의 본관은 무송(茂松, 전북 고창)으로 그의 가문은 무송의 호장이었다. 조부 윤해(1231~1307)가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국학대사성(國學大司成)과 문한사학(文翰司學)을 역임함으로써 비로소 중앙에 진출했다.

그는 충선왕대의 전제개혁을 추진한 전민변정도감사(田民辨正都監使)를 역임했다. 성품이 강직해 권세가를 두려워하지 않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어서 사람이 감히 속이지 못했다. 윤택은 아버지를 세 살 때 여의고 고모부 윤선좌(尹宣佐)에게 학문을 배웠다.

윤선좌는 파평 윤씨 윤관의 7대손으로 충렬왕 대 장원급제했다. 1322년(충숙왕 9년), 그가 감찰집의였을 때 충선왕의 심복 권한공, 채홍철 등이 심왕(瀋王) 왕고(王暠)를 고려왕으로 삼고자 원 중서성에 올리는 상서에 서명하도록 했다. 4000여 명이 서명했다.([동국통감] 충숙왕 11년 동11월)

그러나 윤선좌는 “나는 우리 임금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신하로 임금을 참소하는 것은 개나 돼지도 하지 않는다”고 거부했다. 목숨을 건 행위였다. 그는 평생 재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술을 마시지 않았으며 농담이나 가무를 하지 않았다.

노장형명(老莊刑名)의 서(書)도 깊이 연구했고 문장이 간결하고 명료해 표전(表箋)을 많이 작성했다. 소시에 윤택에게 가장 깊은 영향을 준 윤해와 윤선좌는 모두 박학하고 청렴결백하며 근엄한 원칙주의자들이었다.

윤택은 이제현의 문생으로 1320년(충숙왕 7년) 수재과 1등으로 급제했다. 백문보, 이곡, 안보(安輔)가 동문이다. 32세의 늦은 나이에 급제했고 45세에도 겨우 9품직에 머물렀다. 1321~1325년 충숙왕은 심왕의 무고로 강제로 5년간 연경에 머물렀다. 왕인(王印)도 뺏기고 생사를 알 수 없던 때였다.

그때 윤택은 단신으로 연경에 찾아가 왕을 알현했다. 윤선좌와 같은 길을 따른 것이다. 이후 윤택은 충숙왕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다. 훗날 공민왕이 된 강릉대군을 자신의 후사로 부탁하기까지 했다. 뒤에 죽음에 임해서도 재차 당부하자, 윤택은 무릎을 꿇고 너무 심려하지 말라고 아뢰었다. 그는 그 약속을 지켰다.

 공민왕은 즉위 후 윤택을 정중하게 예우하면서도 중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윤택은 충숙왕의 당부를 생각해 자기가 아는 바를 왕에게 일러주지 않는 것이 없었다. 



조준의 동생 조견의 묘.

조견은 형 조준의 정치노선에 반대해 고려왕조에 충절을 지켰다. / 사진제공·김영수



윤택은 “글을 읽어 널리 통하였으며 특히 [좌씨춘추]에 뛰어났다.” ([윤택전]) 조준이 사학에 능한 것도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윤택은 순정한 유학자였다. 정치에 지친 공민왕이 불교에 심취하자, “저는 오로지 공자의 도만 말씀드릴 것”이라고 말했다.


공민왕이 “한양에 도읍하면 36국이 조공한다”는 당대의 명승 보우(普愚)의 도참설에 따라 한양에 천도하고자 했다. 윤택은 반대했다. “과거 승려 묘청이 인종을 미혹시켜 나라가 거의 엎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그 교훈이 멀지 않습니다. 하물며 지금 사방에 변란이 일어나 병사를 훈련하고 기르는 데도 힘이 미치지 못하는데,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괴롭히면 나라의 근본이 상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도참이 아니라 병사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뜻이다.


최승로의 [시무28조],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풍수지리, 비기도참설을 비판한 요점도 이것이다. 윤택은 그 사상의 맥을 잇고 있다. 그는 공민왕에게 [시무28조](上成宗書)를 강론하기도 했다. 



읍참마속의 심정으로 장수를 참하다



제갈량의 초상화. 조준은 평소 태평한 세상을 위해 헌신한 제갈량의 이상을 흠모했다고 한다



윤택과 조준을 이어주는 책이 있다. 진덕수(眞德秀, 1178~1235)의 [대학연의(大學衍義)]다. 이 책도 공민왕에게 강론했다. 이 책은 당시 고려에 잘 알려지지 않았고 그 중요성을 아는 사람도 드물었다. 그러나 그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성리학의 제왕학을 대표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진덕수는 주자와 같은 복건성 출신으로, 주자의 제자 첨체인(詹体仁)에게 배웠다. 주자의 재전 제자이자 성리학의 정통 계승자로서 성리학을 크게 확산시킨 학자로 평가된다. [대학연의]는 원·명·청 세 왕조 황가의 필독서였다. 조선왕조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연의]


이전에는 당 태종의 정치를 담은 [정관정요(貞觀政要)]가 제왕학을 대표했다. 그러나 주자는 당 태종을 맹렬히 비판했다. 왕도를 가장한 패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 태종의 마음은 한 생각도 인욕(人欲)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곧 인을 가장하고 의를 빌려(假仁借義) 그 사사로움을 행했다.” 그런 의미에서 [대학연의]는 당 태종의 정치에 대한 성리학의 대안인 셈이다.

이 책은 고려 말에 유입되었다. 이성계도 군중에서 이 책을 읽었다. “태조는 본디부터 유술(儒術)을 존중하여 비록 군중에 있더라도 매양 창을 던지고 휴식할 동안에는 유사(儒士) 유경(劉敬) 등을 인접하여 경사(經史)를 토론하였으며, 더욱이 진덕수의 [대학연의] 보기를 좋아해 혹은 밤중에 이르도록 자지 않았으며, 개연히 세상의 도의를 만회할 뜻을 가졌었다.” ([태조실록] ‘총서’)


이 책을 읽고 세상을 바꿀 꿈을 꿨다는 것이다. 유경은 이색의 문인이다. 그런데 말 위에서 크고 말 위에서 입신한 이성계가 과연 이 책을 읽었는지는 의문이다. 하지만 이 기사는 조선의 건국 이념이 어디에 뿌리를 두었는지 정확히 알려 준다. 조준도 같은 이유로 이 책을 태종 이방원에게 권했다.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일찍이 조준의 집을 지났는데 조준이 중당에 맞이하여 술자리를 베풀고 매우 삼가며 [대학연의]를 드리고 말하기를, ‘이것을 읽으면 가히 나라를 만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 뜻을 알고 받았다.”  ([태종실록] 5년 6월 27일)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최승로, 김부식의 사상적 계보를 잇고 있다는 점에서 윤택은 고려 유학사상의 견실한 계승자다. [대학연의]의 가치를 그처럼 이른 시기에 안 것을 보면,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을 법하다. 더욱이 이제현보다 두 살 아래로 동시대를 살았다. 하지만 윤택은 한국 성리학의 계보에 자리가 없다.


조준도 이색 문하의 정몽주나 정도전 같은 정통 성리학자가 아니었다. 이색의 문인들은 1367년(공민왕 16년)부터 성균관에 결집해 각별한 정신적 교감을 나누었다. 그런데 동년배인 조준은 그들과 전혀 교유가 없었다.


조준과 성리학을 잇는 유일한 끈은 벗 윤소종이다. 윤소종은 이색의 문인으로서, “성리학에 정통했고 이단을 배척하는 데 매우 힘을 기울였다.”  ([태조실록] 2년 9월 17일, 윤소종 졸기) 하지만 조준과 성리학을 공유하지는 않은 듯하다.




남송의 명장 악비가 쓴 제갈량의 출사표.

제갈량이 위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출전하면서 촉한 2대 황제 유선에게 올린 글. 충신의 우국충정을 담은 명문으로 유명하다



조준은 윤선좌, 윤택의 학문과 사상, 기개를 이었다. 윤택도 고명한 학자이기에 앞서 경세의 정치가였다. 그는 북송 인종대의 명상이자 개혁가인 범중엄(989~1052)을 숭모했다. 윤택은 범문정공(范文正公)이 말한 ‘천하의 근심을 먼저 근심하고, 천하의 즐거움을 뒤에 즐긴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는 글귀를 늘 외우면서 ‘대장부가 어찌 용렬하게 지낼 수 있겠는가?’라고 다짐했다.


조준도 늘 천하를 근심하고 백성의 삶을 연민했다. “공관은 황량하여 촌가와 같고, 잎 지는 관산의 길 정녕 아득하네. 누가 민생을 이 지경에 닿게 했나. 술잔 쥐고 나도 몰래 눈물 줄줄 흘리누나.” ([송당집] ‘題若木縣客舍’) 38세 때 경상도체복사로 갔을 때의 시다.


약목현은 현재 경북 칠곡군 약목면이다. 권근은 조준의 시에 “우국애민과 어려움에서 구하고 물에서 건져주려는 뜻(亨屯濟溺之意)이 사이사이 거듭 나타나니, 그 평생에 가진 뜻과 기른 기운을 이 시만 읽어도 알 수 있다” ([양촌집] ‘松堂趙政丞詩藁序’)고 평가했다.

제갈량이 읍참마속으로 유명한 것처럼 조준 역시 원칙에 엄했다. 1382년(우왕 8년), 병마도통사 최영이 그 점을 높이 사 전법판서 조준을 추천해 체복사로 삼았다. 38세 때였다. 체복사는 감군(監軍)으로 왕명을 띠고 지방의 장군과 수령의 군무(軍務)를 감찰한다.


 6월 12일, 왕명을 받은 그는 역마를 타고 급히 달려 적등도(赤等渡)에 도착해 잠시 쉬면서 시 한수를 지었다. “찌는 유월 다급한데 길은 삼천리, 들 나루 사람 없어 홀로 배에 오르네. 채궐(採蕨)과 출사(出師)에 누가 계책 얻었나. 적등루 밑으로 하늘 같은 물 흐르네.” ([송당집]) 적등도는 금강 본류의 적등진(赤等津)이다. 옥천과 영동 중간의 나루로서 영남과 호서를 잇는 중요한 길목이다.


그 나루 옆 적등루에 올라 필승의 계책을 생각한 것이다. ‘채궐’은 [시경] ‘채미(採薇)’편이고 ‘출사’는 제갈량의 [출사표]로 모두 군사에 관한 내용이다. 경상도에 내려간 그는 왜구와의 전투를 회피한 도순문사 이거인을 문죄하고, 병마사 유익환(兪益桓)을 참수했다.


패전을 해도 크게 문책하지 않는 게 당시 고려 정부의 습속이었다. 하지만 조준은 법대로 한 것이다. 이거인과 장군들이 벌벌 떨면서 “차라리 적에게 죽을지언정 조공(趙公)의 위세를 거슬려서는 안 된다” 하고는 모두 힘껏 싸워 승전보를 올렸다.


그러나 조준은 위험인물로 낙인찍혔다. 우왕이 또 체복사에 임명하자 조준은 80세의 노모를 들어 사양했다. 거듭 명하자 처벌의 전권을 요구했다. 이를 두려워한 장군의 족당들이 반대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자신의 처지가 위태로운 것을 안 것이다. 



개혁 상소 올려 특권층에 선전포고





황강이 내려다보이는 합천 함벽루.

1382년 조준은 경상도체복사로서 왜구와 전투를 감찰하기 위해 경상도에 내려왔을 때 이 누각에 올라 우국충정을 토로하는 시를 지었다. / 사진제공·김영수



그 뒤 4년간 두문불출하면서 경전과 사서(史書)만 읽었다. 조준은 시국에 실망해 정치를 떠나 자족적 삶을 살려고 했던 듯하다. 칩거기에 그의 마음은 편안했다. “마음 동요 없으니까 몸 또한 편안하니 이 모든 것 영리에는 상관하지 않아서 지.” ([송당집] ‘次宮詞夜直韻’)


1387년(우왕 13년), 42세 때였다. 하지만 또 다른 시를 보면 속마음은 미칠 듯했다. “세상에 포숙(鮑叔) 없으니 나를 알아줄 이 있나, 미친 듯한 작태(狂態)로 항상 술로 지내네.” ([송당집] ‘次野堂韻’) 흉중에 품은 뜻이 큰 만큼 좌절감도 컸다.


1387년 7월 어느 날 밤, 그는 홀로 앉아 삶의 방향을 놓고 고뇌했다. “칠월이라 봉산(蓬山)에 비가 내리고, 높은 오동 한 잎 지는 가을인데, 나설지 숨을 지(行藏) 정말 결단하지 못한 채 홀로 앉아 있자니 뜻은 아득하기만.” ([송당집] ‘丁卯七月夜坐’)

 같은 해 8월 18일 깊어가는 가을, 술을 들고 봉산에 오른 조준은 멀리 해와 하늘을 우러르고 지는 낙엽을 보며 노래를 부르고 눈물로 옷깃을 적셨다. 뜻을 이룰 주군을 평생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해와 달은 새가 날듯 저 멀리 가고, 변방에선 낙엽 지는 바람이 부네. 높이 노래하며 옷깃 가득 눈물지으니, 아름다운 사람을 내 평생 만나지 못 하겠구나.” ([송당집] ‘丁卯八月十八日登蓬山’)

그런데 1388년 무진정변이 발생했다. 최영은 모친의 상중이던 조준을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로 불렀다. 뜻밖에도 조준은 사양하고 나가지 않았다. 그런데 위화도회군 뒤 이성계가 그를 불렀다.

 “무진년 여름에 최영이 군사를 일으켜 요동을 칠 때에, 우리 태상왕이 대의를 들어 회군하여 최영을 잡아 물리치고, 쌓인 폐단을 크게 개혁하여 모든 정치를 일신하려고 하였다. 조준이 중망(重望)이 있다는 말을 일찍이 들으시고, 불러서 더불어 일을 의논하고는 크게 기뻐해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겸 사헌부 대사헌으로 발탁하시고, 크고 작은 일 없이 모두 물어서 하니, 조준이 감격해 분발하기를 생각하고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태종실록] 5년 6월 27일)

이를 보면 조준이 최영이 아니라 이성계를 선택했음을 알 수 있다. 조인옥의 강력한 권유도 있었을 것이다.

최영은 진정한 충신이자 애국자였다. 하지만 그는 시대정신에 어두웠다. 우왕대에 이인임을 지지한 것이 이를 보여준다. 1374년 공민왕 사후 대외정책 변동을 둘러싸고 벌어진 정쟁에서 최영은 이인임에 반대한 박상충과 전녹생을 혹심하게 고문했다. 이 훌륭한 신진 성리학자들은 모두 유배 길에 죽었다.

고려 말의 유일한 역사적 대안은 이들이었다. 그 비전에 무지했기 때문에 최영의 충성심과 애국심은 오히려 역사의 반동에 기여했다. 그 반면 이성계는 정몽주, 정도전과 깊은 교유를 맺었다. 이성계 역시 뛰어난 지성의 소유자는 아니었다.


최영은 전중에서도 시를 지었지만 이성계가 시를 지은 기록이 전혀 없다. 그러나 이성계는 시대와 인물에 대한 센스가 예민했다. 조준을 단 한 번 보고 즉시 그 기량을 알았을 뿐 아니라 중책에 발탁해 대소사를 전임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다.([송당집] ‘丁卯八月十八日登蓬山’)

 




1382년 경상도체복사의 명을 받고 남쪽으로 내려가던 조준은 이곳 적등루에 올라 시를 지었다. 충북 옥천과 영동의 중간에 위치한 적등진 지도. / 사진제공·김영수



조준의 선택은 옳았다. 자신의 꿈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말년에 그는 이성계와의 인연을 회고했다.


“신은 중간에 비운(否運)을 당해 장차 목숨을 기약하지 못할 듯하였습니다. 태상께서 한 번 보시고 구면같이 여겨 격의 없이 대접하였습니다. 신을 모친 상중에 발탁해 대사헌에 명하시니, 신이 이에 감격하여 알면 말하지 않는 바가 없었고, 태상께서 널리 포용하여 말하면 좇지 않은 바가 없었습니다. 감연히 분발하여 정성을 가다듬어 다스리기를 도모해서, 공도를 밝게 펴고 무너진 기강을 진작하였습니다. (…)

태상께서 저를 살리시고 귀하게 하시어, 난익지덕(卵翼之德, 품어주는 덕)이 하늘에 닿고 땅에 서립니다. 말을 하면 눈물이 쏟아지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정종실록] 1년 8월 3일)


태종 이방원은 “이씨가 개국한 공은 오로지 조준과 남은에게 있다”고 까지 말했다.([태종실록] 3년 6월 5일) 세상과 백성을 구하는 게 조준의 대망이었다.


조준의 삶을 최종 평가한 ‘졸기(卒記)’를 보자. 위화도회군 뒤 “나라의 법을 세우고 기강을 바로잡고(立經陳紀) 이로움을 일으키고 해로움을 없애(興利除害), 이 백성으로 하여금 끓는 물과 뜨거운 불(湯火) 가운데서 나와 즐겁게 사는 마음(樂生之心)을 품게 한 것은 조준의 힘이 퍽 많았다.”  ([태종실록] 5년 6월l 27일)


정치가로서 이보다 위대한 공업은 없을 것이다.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1388년 7월, 창왕의 즉위 직후 조준은 장문의 개혁 상소문을 올렸다. 초미의 문제는 전제와 지방정치의 개혁으로 민생과 직결된 문제들이었다. 개혁파들은 그 두 문제를 가장 시급한 과제로 생각했다. 그것은 혁명적 개혁의 시작이자 특권 계급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출처] : 김영수 영남대학교 정외과 교수 : < 김영수의 조선왕조창업비록> / 월간중앙 2018.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