亞.프리카

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7. 21:16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6회~10회]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을 더 보시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1회~  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39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6회~1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0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11회~15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1




6. 개운법(開運法) 알려준 관상학의 아버지 미즈노 남보쿠

 - 운명을 바꾸고 싶거든 음식을 바꿔라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마음의 캔버스다. 미즈노 남보쿠는 기존의 관상학에 함몰되는 것을 거부하고 임상체험을 통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했다



" '만물을 소중하게 절제하라.’ 이것은 나의 말이 아니라 하늘과 자연의 가르침이다. 인간의 행복을 음식의 절제에서.”  일본 관상학의 아버지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바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살갗에 스치는 촉감으로 바람을 느낀다. 꽃은 바람의 모습을 대신 보여주는 전령이 되기도 한다.


사시사철 형형색색의 꽃은 피어나서 시를 쓰게 하고 그림을 그리게 유혹한다. 그곳에 실려 산들바람·폭풍우·태풍 같은 바람은 자신의 감정을 전해 준다.

때로는 뜨겁게 때로는 무섭게 흔들어댄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은 바람이고 눈은 꽃이다. 눈을 보고 있으면 사람의 마음을 대강 읽을 수 있다. 사람도 문장에서 그 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문체라고 한다. 사소한 몸짓에서도 그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뒷모습에서 느껴지는 쓸쓸함이랄까 어떤 외로움 같은 것도 이러한 몸짓의 하나이다.

얼굴은 사람의 마음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마음의 캔버스다. 안색으로 표정으로 자신의 온 마음을 표현한다. 그 사람의 내면세계가 오롯이 드러난다. 얼굴은 자신의 마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 존재가 부끄럼 없어야 좋은 얼굴을 가진다.

좋은 얼굴은 갖는다는 것은 자신의 인생을 어떻게 살았는지 드러내는 성적표다. 모든 욕망을 불태우며 인생을 탕진하고 살 것인가. ‘자존과 겸손’으로 절제된 삶을 살 것인가. 자기 자신을 끝도 없이 드러내며 과시할 것인가 아니면 낮은 곳에서 한없이 낮추고 감추며 살아갈까. 얼굴에는 그 비밀이 숨어 있다.

한국어에는 ‘겉볼안’이란 말이 있다. ‘겉을 보면 속은 안 봐도 짐작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마다 세상을 바라보는 세계관이 있듯이 사람을 보는 기준은 성장하면서 자신의 뇌 속에서 판단이 되는 기준을 이미 설정해 놓고 자기식대로 평가하고 해석한다.

동서양을 불문하고 관상학이 발전한 이유는 바로 타인의 심성을 읽어내려는 호기심과 탐구정신에서 비롯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인간의 호기심은 인류 역사를 발전시켰다. 호기심이 세상을 향하면 험난한 파도와 바람을 타고 대양을 건넜고, 마음의 심연으로 여행을 하면 인간을 읽었다. 



고아나 다름없던 어린 시절… 10세에 술 배워 



[남북상법] (南北相法)의 표지

원조(元祖) 쇼토쿠(聖德) 태자, 중조(中祖) 미즈노 남보쿠(水野南北) 거사 저(著)라고 씌어 있다 



뭔가를 알아차리고자 할 때 제일 먼저 취하는 동작은 ‘바라봄’이다. ‘자세히 들여다봄’으로 더 실체에 다가서려고 한다. 관상(觀相)은 외부에 드러난 형태를 파악해 자세히 안과 겉을 바라봄으로써 내면의 상태를 파악하는 해석이다.

그리하여 길흉과 미래를 점치기에 이르렀으나 그 해석에 있어 자의적이고 과학적이지 못 한 이유로 학문으로 정착하지 못한다. 저마다의 통계학적 기준으로 자신만의 해석을 하고 만다.

수상(手相)을 포함한 일본 관상학의 역사에서 원조는 쇼토쿠 태자(聖德太子)라고 한다. 그러나 역사상 가장 유명한 관상가는 미즈노 남보쿠(1757~1834)다. 그는 쇼토쿠 태자를 교조(敎祖)로 삼아 신도(神道)·유교(儒敎)·불교(佛敎)를 깊이 연구했다.

관상을 해석으로만 하지 않고 운명을 적극 개척하는 철학으로 발전시킨 인물이다. 그는 인간의 성격·기질·사고·운세 등 모든 것이 ‘그 사람이 무엇을 먹고 있는가’로 결정된다고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우리가 그에게 흥미를 품는 이유다. 그가 누구인가 살펴보자.

일본 관상학의 대가이자 철학자로 불리는 남보쿠는 인간의 얼굴과 몸을 읽은 사람이다. 에도시대 중기 때의 사람이다. 당시 일본 제일의 관상가로 꼽혔다. 그의 관상학이 특별하다 싶은 점은 ‘절식개운설(節食開運說)’이라는 주장 때문이다. 관상은 언제든지 바뀌며 그 관상이 바뀌는 출발점이 절식(節食)에 있다는 이론과 철학이다.

그의 관상에 관한 저서는 [남북상법(南北相法)] [남북상법수신록(南北相法修身錄)] 등이 있다. “음식은 운명을 좌우한다”가 그의 좌우명이다. 한국어 번역본은 몇 권 있다.

 [관상] [절제의 성공학] [마음 습관이 운명이다] 등이다. 그는 마음먹기에 따라 관상을 바꿀 수 있다고 했다. 그 핵심은 절식이며, 이를 충실히 행한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초상화로 전해지는 그의 관상부터 우선 살펴보자. 키가 작고 자세가 나쁘다. 용모는 옹졸하고 입은 작고 눈은 험상궂게 움푹 들어갔다. 코는 납작하며 광대뼈는 튀어나왔다, 이빨은 짧고 작다. 발도 작다. 누가 봐도 같은 결론이다.


추악한 모습, 악상(惡相)이다. 이러한 외모를 극복하고 자신만의 삶을 살아 대가의 반열에 오른 ‘얼굴과 몸의 철학자’는 출생부터 험난한 길을 만난다. 그는 거의 고아나 다름이 없었다.

‘관상’을 이루는 한자 相(상)은 마음에 따라 외부로 드러난 업(業)이라고 한다. 이 업은 수시로 바뀐다. 얼굴을 변화 시킨다. 남보쿠는 어떻게 마음을 다듬어 새로운 관상을 가꾸며 운명을 바꿨을까? 운명 전환의 비밀은 의외로 간단하다.

남보쿠는 오사카 출신이다. 원래 이름은 카쓰사부로 타다요시(勝三郞忠良)이다. 아버지는 원래 오사카의 아와자(阿波座)에서 곡에 맞춰서 옛 이야기를 읊조리는 조루리(淨瑠璃) 연극의 각본을 쓰던 전속 작가였으나 남보쿠가 어린 시절 타계했다.


고아가 된 남보쿠는 대장장이였던 야스케(彌助) 부부 아래서 자란다. 아명을 ‘열쇠 집 구마다’라는 뜻의 가키야 구마다(鍵屋熊太)라고 불렸다.

어린 나이인 10세부터 술을 배웠고, 술값이 부족해지자 숙부가 애지중지하는 물건들을 들고 가출한다. 도박도 일삼았다. 마을의 건달로 지내며 하루가 멀다 하고 칼부림 사태를 반복하다가 결국 18세 되던 해에는 술값 때문에 사고를 쳐서 감옥에 갇힌다.

남보쿠는 반년 동안 감옥살이를 하면서 밖에서 봐왔던 사람들과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이 꽤 많이 다르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관상과 사람의 운명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알아차리고 그는 관상에 빠져든다. 그곳에서 죄인들의 모습을 관찰하던 남보쿠는 감옥을 나오자마자 자신의 운명을 알기 위해 관상가를 찾아간다.

그 관상가로부터 “1년 안에 칼에 맞아 죽을 관상이니, 이 길로 속히 절에 가서 출가하라”는 말을 듣는다. 칼부림으로 죽는 ‘검난(劍難)의 사상(死相)’이 보인다는 말이었다. 타고난 나쁜 운명을 바꾸고자 그는 시운잔 즈이류지(慈雲山瑞龍寺)라는 절에 가서 출가를 요청했다.

절에서 그는 “1년간 보리와 콩으로만 식사를 하면 제자로 받겠다”는 말을 듣는다. 도지마(堂島)강에서 화물을 싣고 다니는 배의 하역인부로 일하면서 그는 보리와 콩만으로 1년을 보낸다.

절의 스님을 만나기 전에 관상을 봐줬던 점쟁이를 찾아간다. “검난의 상이 사라졌다. 뭔가 큰 공덕을 쌓았음이 분명하다”며 놀란다. 사상(死相)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운세도 나아졌던 것이다. 남보쿠가 식생활을 개선한 경위를 말하자 점쟁이는 “그것이 은덕(隱德)을 쌓고 상까지 바꾼 것”이라며 그를 제자로 삼으려고 했다.

그러자 남보쿠는 원래 예정했던 절의 불문(佛門)에 몸을 들이지 않고 전국 각처를 떠돌며 수양하는 관상가의 꿈을 품은 채 편력의 여행길에 오른다.

남보쿠가 관상학을 꿈꾼 시점은 21세 때라고 한다. 당시에 그는 인간의 온몸에 드러나는 기색을 정확히 읽고자 고된 학습의 시간에 들어선다. 9년에 걸친 ‘333 관상 수련법’이 여기서 나왔다. 이발소에서 남의 머리를 만지며 익힌 두상(頭相), 공중목욕탕에서 때를 밀며 터득한 체상(體相), 화장터에서 소체부(燒體夫)로 체득한 골상(骨相)의 배움이었다. 이러한 수련을 거쳐서 사람의 심상(心相)을 읽어내기 시작한다. 



세상사는 변하는 것, 관상도 노력에 따라 변해



자신의 운명을 바꾸는 비법을 알려 준 일본의 관상가 미즈노 남보쿠



남보쿠의 관상법은 얼굴과 손을 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온몸을 발가벗겼다”고 표현한다. 그 무렵의 탐구가 이뤄낸 성과다. 이렇게 철저한 연구와 체험을 통해 관상학의 심오한 경지를 이룬 남보쿠는 결국 관상법의 한 체계를 완성한다. 그 주장의 핵심은 ‘절식이 운세를 고친다’다.

사람의 마음을 찍을 수 있는 카메라는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다. 한 장의 사진으로 사람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다면 세상의 대부분 갈등은 사라지고 서로의 배려로 넘쳐나지 않을까? 기계는 발명되지 않았지만 사람의 마음이 드러나는 곳이 바로 얼굴이며 몸이며 몸짓이다. 문제는 해석이다. 인간의 마음이라는 실체는 얼굴을 포함한 외부의 ‘디스플레이’에 존재한다. 다만 해석만이 다를 뿐이다.

관상학이란 얼굴과 몸의 해석학이다.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다 변한다. 사람의 얼굴도 세월의 관용을 기대하기 어렵다. 늙어가고 변한다. 관상도 사람의 노력에 따라 변한다고 그는 주장한다. 타고난 유전적인 요인보다 후천적인 마음가짐이 더 큰 변화의 요인이라고 주장한다.

부처님의 말씀처럼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 그러나 그는 부처님과는 다르게 아주 쉬운 방법론을 제시한다. ‘적게 먹어라’다. 인생의 개운(開運)은 소식(少食)에 있으며 삼가는 마음에 있다.

남보쿠는 주식이 보리밥으로, 1일에 보리 1홉 반으로 정하고 부식으로는 국 하나, 반찬도 하나였다. 쌀과 떡을 일절 입에 대지 않고, 술은 1일 1홉까지만 마시며 생애를 통틀어 검소한 식사를 했다. 남보쿠는 음식을 절제하는 방법으로 관상과 운명을 바꿨다.

사람을 점칠 경우는 식사의 양·내용·횟수·시간 등을 상세하게 물었다. 소식을 하면 내장의 상이 좋아지고 내장의 상이 좋아지면 관상이 좋아진다. 관상이 좋아지면 운명이 바뀐다는 이론이다.

관상이 인간의 운명을 바꿀 뿐 아니라 관상보다도 식사가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점은 매우 흥미롭다. 도박을 해도 좋고 다른 어떤 것을 해도 좋은데 다만 먹는 것만큼은 주의를 기울이라는 가르침이다. 그는 수명과 음식의 양이 각자 하늘로부터 받아서 정해져 있다고 말한다.

천량론(天糧論)은 바로 사람이 태어나면서 품고 나온 하늘이 정해준 음식의 양을 다 먹을 경우 죽음에 이른다는 주장이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계속 먹고, 먹을 수 없을 때 목숨이 다한다.

실제로 소식을 하면 손금의 생명선이 길어진다고 한다. 남보쿠는 일본의 소식 요법 전통의 원조라고 말해도 좋은 존재다. 실제로 에도시대에도 부유층에서는 영양의 과잉으로 성인병이 나타났다.

예전부터 일본에서는 “몸집이 큰 남녀는 장수하지 못한다”는 말이 전해졌다. 과식은 조숙(早熟)을 야기하고 조숙은 조로(早老)를 부른다는 의미다. 몸집이 큰 사람의 단명 가능성을 시사한다.

실제로 장수하는 사람을 살펴보면 몸집이 작은 사람이 많다. 착한 인상, 좋은 운, 건강한 몸을 갖췄더라도 음식 사치를 하고 호색에 육식을 탐하면 차츰 빈궁해지다 단명한다고 남보쿠는 주장한다. 



3년간 8할 분량만 먹으면 개운(開運)한다 


 

나쁜 관상에 흉한 운, 건강까지 나빠도 밥 한 그릇에 반찬 한 가지의 절제하는 식생활을 이어가면 부귀장수에 이른다고 본다. 세상에는 이른바 성공철학이나 자기계발서 같은 것이 넘쳐나고 있다. 그가 보기에는 인간의 운명 근저에 있는 것이 음식의 절제다. 음식의 절제에 의해서 건강·입신·축재·행복·장수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식사량에서 8할 분량만을 먹으며 3년을 지내면 개운(開運)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구체적인 숫자보다도 절제하고 삼가는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말이다. 소식을 하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복을 받고, 과식하는 사람은 비록 상이 좋아도 한평생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고 노년이 흉하다.

자신의 신분이나 지위 경제력에 비해 조식(粗食)하는 사람은 가난뱅이 상이라도 복을 받아 노년이 길하다고 주장한다. 미식에 대해서도 남보쿠는 일침을 가한다. 햇것이나 풋것 같은 음식물을 즐겨 먹는 사람은 아무리 인상이 좋아도 한평생 발전하지 못하고 재산이 흩어지고 가정을 망친다.

불교에는 불살생(不殺生)이라고 하는 가르침이 있다. 구약성서에도 살생을 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동양철학에는 인간이 많이 먹으면 반드시 벌을 받는다는 사상이 있다. 먹는다고 하는 일은 다른 동물이나 식물의 목숨을 빼앗는 일일 수 있다.

결국 많이 먹는 사람은 많은 생명을 빼앗는다고 볼 수 있다. 자연계에는 넘쳐서 지나치는 경우가 재앙으로 이어지는 구조가 존재하고 있다. 이것이 과식하는 사람에게는 발병이나 단명을 초래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생물을 죽이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다. 남보쿠의 소식 철학은 어찌 보면 생명 애호의 사상이다. 살생을 최소한으로 하자는 배려의 철학이다. 고승들 중에는 1일 1식을 지키는 분도 있다. 생명에 대한 배려이자 욕망의 절제인 것이다.

‘하라하치분메(腹八分目)’라고 하는 것은 조금 양에 덜 차게 먹는다는 말이다. 비교적 후세 사람인 가이바라 에키겐(目原益軒)과 에도시대의 스님들이 말했다고 한다.

전통적인 일본철학에는 양을 덜 차게 먹는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없었다고 한다. 동양의학의 원전이라고 일컬어지는 [황제내경(黃帝內經)]에는 6대 4라고 하는 비율이 적혀 있다고 한다. 자신이 먹고 싶은 욕망을 60%로 억제하는 일이 건강하게 오래 사는 비결이라는 얘기다.

인도의 전통 치유 의학인 아유르베다(Ayurveda)에서도 위(胃)주머니의 3분의 1은 고형물이고 다른 3분의 1은 액체라고 본다. 남은 3분의 1은 소화를 위한 스페이스이므로 과식을 하지 말고 비워두라고 말하고 있다. 결국 배는 6할 정도로 채우면 좋다는 결론이다.

요가의 유명한 교의가 있다. “8할 정도 먹으면 의사가 필요 없다. 6할 정도로는 늙음을 잊는다. 4할이면 신의 경지에 이른다.” 요가 5000년의 가르침은 “6할의 충만감으로 늙음을 잊는다”다. 절제가 생명의 진리임을 갈파하는 내용이다.

남보쿠의 사상은 이시즈카 사겐(石塚左玄)으로 이어지고 사쿠라자 유키가즈(櫻澤如一)에 의해서 마크로바이오틱(장수식사법)으로 체계화한다. 



성공하지 못 하는 이유는 의지 분산 탓 



일본식 저염분 고등어조림 정식. 국을 포함해서 4찬(饌)의 소박한 밥상이다



남보쿠는 작은 성취에 취해 술과 고기를 즐기며 몸을 망치고 상을 어지럽히는 행동을 싫어했다. 진정으로 혼신을 다해 일할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갈파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자신만이 가는 한 길을 가야 한다고 말했다.

혼신을 다해 제 길을 가지 않는 사람을 광주리에 갇혀 탈출을 시도하는 개구리로 비유하면서 여러 구멍 중에서 한 구멍만을 노려야 탈출에 성공한다고 말한다.

현명한 개구리는 그 길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한 곳에 집중해 빠져 나갈 수 있듯이 사람도 이곳 저곳 기웃거리지 말고 자신만의 뜻과 길을 세웠으면 오로지 그 길 하나만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해 한 길로 간다면 태산도 뚫을 수 있다고 말한다. 성공하지 못 하는 이유는 의지의 분산이며 사람의 마음 한 구석이 허전한 이유는 가야 할 길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남보쿠는 절식의 문제 이외에도 강한 운을 부르는 비결 몇 가지를 언급했다. 그러면서 먹는 문제, 그리고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삼가고 절제하면 운이 모인다고 말하고 있다. 남보쿠의 관상을 바꾸는 개운의 철학은 근검절약의 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매일 아침 뜨는 태양에 공손히 절하라
▷아침 일찍 일어나고, 저녁에 일찍 자라
▷저녁에 일을 하는 것은 길하지 않다
▷의복과 주거의 사치는 길하지 않다
▷검약(儉約)은 길하지만, 구두쇠는 불길하다


남보쿠는 먹는 것보다 다른 차원의 큰 기쁨을 누리라고 말한다. 벼슬아치라면 높은 벼슬로, 농부라면 풍작으로, 기술자라면 최고의 기술로, 상인이라면 사업의 번창으로 큰 기쁨을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어찌 먹는 것같이 하찮은 것을 이런 기쁨에 비할 수 있습니까?”라고 말하면서 음식을 즐기기 전에 먼저 성공을 즐기라고 한다. 진정으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큰 기쁨을 누리는 삶에 대해 찬사를 보내고 있다. ‘혼신을 다해 한 길을 가라’는 가르침이 남보쿠의 성공 철학이다.

남보쿠에게 관상학이란 결국 건강한 육체를 만드는 일이다. 현대 철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육체의 중요성이다. 정신을 담는 그릇인 육신이 건강하면 운명이 좋아진다는 이론이다. 무절제한 삶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육체를 없앤다. 병에 걸린다는 것은 무절제함으로부터 온다고 남보쿠는 파악한다.

현대에 유행하는 각종 다이어트를 통한 체중감량으로 건강한 삶을 살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는 말이다. 다이어트는 필수적이고 균형감 있는 최소한의 영양분만 몸에 공급하자는 생각이다. 성인병을 예방하고 건강한 삶을 펼칠 수 있다. 성인병이 현대인의 삶을 괴롭히고 있다. 성인병의 주범은 과식에 다름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과거의 남보쿠가 이야기한 문제를 다시 한 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위에서 살폈듯이 인도의 아유르베다식 식사 처방도 남보쿠가 자신의 경험을 통해 검증을 거친 이론과 대동소이하다. 미즈노 남보쿠는 9년에 걸쳐 철저하게 검증한 내용을 아주 쉬운 언어로 우리에게 얘기하고 있다.

그의 탁월함이 바로 이것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쉽게 이야기 하는 매력이다. 그의 제자들이 아직까지 그의 사상과 이론을 계승하여 절식과 절제하는 삶을 설파하는 이유다. 남보쿠가 본인 스스로 체득한 절식개운(節食開運)의 주장과 논리는 지금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남보쿠의 실증 관상학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행복론이자 철학이다. 인류는 개인이건 집단이건 언제나 생존을 제일의 목표로 추구하는 가운데 항상 행복을 욕망한다.

남보쿠의 관상학은 이 모든 욕망의 실현 또는 절제도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불교적 가르침과 일맥상통한다. 과연 어떤 것이 행복이고 인생의 성공인가 하는 결론은 각자의 마음에 달려 있다.

아직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미즈노 남보쿠 관상학의 철학적 성찰을 살펴보는 일은 현대인의 성인병을 다시 돌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며 건강하게 살면서 행복의 충만감을 맛보는 시간일 수 있다.



욕망은 무한하고 인생은 짧다 



조선의 천재 관상가 내경(송강호 분)이 역사의 광풍에 휘말리는 과정을 흥미롭게 그린 영화 [관상]의 한 장면. 기생 연홍(김혜수 분)이 내경(오른쪽 둘째) 등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남보쿠의 사상 중에서 또 하나 훌륭한 점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기존의 관상학 전통에 함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는 본인 스스로의 임상체험을 통해서 자신만의 관상학을 정비하며 발전시켰다. 물론 그의 세계관이나 이론이 전부 옳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새로운 방법론 제시와 참신한 영역 개척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중국에서 움텄던 관상학이 일본에서 가장 실증적이며 실험적이고 실질적인 방법으로 꽃피운 점도 일본의 전통이 보여주는 하나의 특징이다. 일본인은 하나의 개념이 들어오면 언제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를 철저히 소화하는 왕성함을 지녔다.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일생현명(一生懸命)의 천착(穿搾)으로 스스로의 인생을 예술적으로 승화시킨다.

현대는 미식의 시대다. 한국에서도 인기리에 방영되는 일본드라마 [고독한 미식가]라는 프로그램이 있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노가시라 고로(井之頭五郞)는 오로지 먹는다. 그것도 흔해 빠진 거리의 식당과 라면집에서 시청자의 식욕을 유혹하며 먹는다. 드라마의 시작 전에 나오는 선언 같은 미식가의 코멘트다.

 “시간이나 사회에 얽매이지 않고, 행복하게 고픈 배를 채웠을 때 그는 잠시 제멋대로 돼 ‘자유’로워진다. 고독한 미식가! 그것은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신경 쓰지 않은 것을 먹는 고고한 행위다. 그리고 이 행위가 현대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최고의 ‘치유’라고 할 수 있다.”

음식을 대하는 태도가 남보쿠와는 완전히 다르다. 마음껏 미식의 향연을 즐기며 자유로워지는 방법이 고독한 미식가, 절제하면서 위장의 평화를 이룩해 건강한 삶을 유지하는 방법이 남보쿠의 ‘절식개운’이다.

얽매이지 않는 자유의 미식과 스스로 규율하며 욕망을 절제하는 절식의 대결에서 우리의 선택은 어디로 향해야 할까? 멈추는 지혜가 여기에서도 필요하지 않을까? 인간의 욕망은 무한하다. 아무리 탕진해도 끝도 없이 기어 나온다.

욕망은 무한하고 인생은 짧다. 미식의 욕망을 어느 정도 추구했다면 남보쿠의 제안을 받아들여 멈춰선 뒤 숨을 가다듬으며 절식의 담백한 아름다움을 발휘해 봐도 좋을 때가 아닌가 한다. 절제로 변모한 자신의 얼굴을 거울 속에서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어떨까.

“사람들은 거울 속에서 영혼의 문(門)인 자신의 눈을 본다. 이 목적을 위해 언제나 몸에 거울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도 있다. 그중에는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고 자신의 영혼을 반성하기 위해 집 안 한 곳에 특별한 거울을 놓아두는 사람도 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받들어 모시고 ‘자기 자신’에게 참배한다.” _[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출처] : 최치현술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 / 월간 중앙  2018.5.




7. 일본 문단의 시원(始原) 기쿠치 간 -  “인생은 한판의 장기… 물릴 수가 없다”  


소설가·극작가·언론인이자 문예춘추사 창설한 실업가

…일본 노벨문학상 두 차례 수상의 ‘원동력’으로 평가돼

가와바타 야스나리(1968년)에 이어 일본 문단 사상 두 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왼쪽)가 1994년 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있다.

매년 가을이 되면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도 노벨문학상 수상 예정자의 소식을 접하며 혹시 이번에는 우리나라 차례가 아닐까 기대를 해본다.

2017년에는 일본계 영국인 가즈오 이시구로(一雄石)가 수상했다. 노벨문학상이 문학을 제대로 평가하는 최고의 상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그 권위는 실로 대단하다. 수상 작가는 일거에 세계적인 작가로 부상한다. 세계에는 유명한 문학상이 다수 존재한다.

그중 노벨문학상과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는 영국의 맨부커상이 있고 프랑스에는 콩쿠르상이 있다. 맨부커상은 한강 작가가 [채식주의자]로 수상하면서 우리에게도 친숙해졌다.

한국도 작가의 이름을 딴 이상문학상 등 다수의 문학상이 있다. 노벨문학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일본의 문학의 저력은 문학상에서도 나타난다.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일본에서는 대표적인 문학상이다. 이 문학상을 제정해 일본 문단의 형성의 후견인 역할을 한 사람이 기쿠치 간(菊池, 1888~1948)이다.

일본은 예술의 나라다. 종교적이거나 철학적이라기보다는 다분히 예술적이다. 그 중심에는 문학이 자리한다. 나라시대(710~794)부터 헤이안시대(794~1185)를 거치며 일본만의 문학적 미의식을 구축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그들은 끊임없이 자신만의 문자로 삶의 궤적과 밑바닥을 치열하게 탐색했다. 상상력의 극단을 추구하며 인식의 지평을 넓히고 다양한 방식으로 세상을 향해 인간 존재의 이유를 외쳤다.

2018년 1월 일본 문학상을 대표하는 두 가지 상을 발표했다.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다. 이 두 가지 상은 같은 듯 다른 모양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을 끈다. 2011년 동일본 대지진으로 실의에 잠긴 도호쿠(東北) 지방은 이 상의 발표에 환호했다. 도호쿠에 관련된 소설이 권위 있는 문학상을 두 군데서 수상했기 때문이다.

둘 다 이와테현(岩手縣) 출신 시인이자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宮澤賢治, 1896~1933)와의 인연 때문이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동화작가다. 우리에게도 친숙한 만화 [은하철도 999]의 원작자로 알려져 있다.



순수문학 지향하는 아쿠타가와상, 대중성 주목하는 나오키상

우선 아쿠다가와상 공동 수상작인 와카타케 지사코(若竹佐子)의 [나 혼자 갑니다]는 이와테현 오코노시(遠野市) 출신의 가정주부로 미야자와 겐지의 시에서 소설 제목을 인용했고, 도호쿠 지방의 사투리를 듬뿍 담아 74세의 노인이 신천지에 다다르는 내용을 소설로 전개해 갔다.

나오키상을 수상한 가도이 요시노부(門井慶喜)의 [은하철도의 아버지]는 이와테현 하나마키(花卷)의 미야자와 겐지의 아버지를 시점( 點)으로 잡아 동화 [은하철도의 밤]으로 알려진 일본의 동화작가인 미야자와 겐지를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괴짜 아들 겐지로 묘사한 작품이다.

올해로 158회째를 맞이한 이 양상(兩賞)은 같은 단체에서 주최하고 같은 장소에서 전형(銓衡)을 하고 같은 상품과 상금을 수여한다. 이 두 상은 동시에 제정됐으나 성격도 다르고 지향점이 다른 문학상이다. 아쿠타가와상이 단편의 순수문학을 지향하고 신인작가에게 우선권을 주는 상이라면 나오키상은 중·장편의 소설에 대중성을 주목하고 기성의 작가에게도 문호를 개방한다.

이 두 상은 일본 문학의 산실이다. 일본인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데는 이 상의 역할이 적지 않다. 1968년 일본인 최초의 수상자인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는 초기부터 이 상의 전형위원으로 활약했고 1994년 일본에 두 번째 노벨 문학상을 안긴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 1935~)는 1958년 아쿠타가와상 수상작가였다.

매년 1월과 7월에는 일본문학진흥회가 주최하는 전형회가 도쿄의 쓰키지(築地)에 있는 신키라쿠(新喜樂)라는 요정에서 열린다는 점도 흥미롭다. 1층에서는 아쿠타가와상, 2층에서는 나오키상 전형회가 각각 열린다.

일본을 대표하는 문학상이 이렇게 같은 장소에서 동시에 전형회를 갖는 데는 이 상을 제정한 문단의 황제라 불리던 작가 기쿠치 간 때문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1892~1927)는 당대 최고의 단편 소설가였다.

나오키 산주고(直木三十五, 1891~1934)는 뛰어난 작가였는데 둘의 공통점은 기쿠치 간이라는 친구를 둔 것이었다. 이들은 안타깝게 그리고 작가답게 요절했다. 그들 사후 기쿠치 간은 벗들의 죽음을 애도하고 그들의 문학적 성취를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이 상을 동시에 제정한다.

신기라쿠는 도쿄의 쓰키지에 있는 노포(老鋪)의 요정이다. 가네다나카(金田中)와 나란히 일본 2대 요리점의 하나고 또한 깃초(吉兆)를 포함해 일본 3대 요리점으로 불린다. 매장 건물 자체는 구리 지붕 목조 2층의 다다미 72장의 오히로마(大廣間)라고 불리는 큰 사랑이 있다. 정원에는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보낸 한시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아쿠다가와상과 나오키상의 전형이 이뤄지는 장소로 아쿠타가와상은 1층 나오키상은 2층의 오히로마를 이용한다. 정·재계와 문화인의 이용자가 많은 것으로도 유명하다.

초대 여주인인 이토킨(伊藤きん)과 성씨가 같은 이토 히로부미가 자주 이용했고 전 수상이며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사토에이사쿠(佐藤作)가 1975년 뇌일혈로 쓰러진 것도 이 가게였다. 재계 인사들이 자주 이용한 이유는 이곳에서 극비리에 행해진 대화가 외부에 전혀 유출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영방침에도 독자적인 철학이 있다. 지점은 내지 않는다. 선전은 하지 않는다. 매일 개점한다. 초심을 잃지 않고 영업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무언의 서비스’를 행한다. 고객이 질문하지 않는 한 이쪽에서 설명하지 않는다.

[주간 요미우리]의 기사에 따르면 “신바시(新橋)가 다른 요정 지역과 크게 다른 것은 입의 무거움이다. 아카사카(赤阪)의 이야기는 어떤 극비의 이야기도 언젠가 세상에 유출된다. 그러나 신바시에서는 어떤 일이 있어도 높은 병풍 안의 일은 일절 밖으로 새지 않는다는 믿음이었다.”

이곳에서 두 상의 발표가 이뤄지는 이유는 기무라 사쿠(木村さく)라고 하는 뛰어난 여주인의 존재가 컸다. 다른 비슷한 유형의 라이벌 요정을 누르고 문예춘추 간부의 마음을 잡은 훌륭한 경영자 기무라 사쿠는 1917년 32세에 신키라쿠를 선대 여주인에게 양도받아 2대 여주인이 되고, 1950년경에 이 두 상의 전형회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했다. 1961년부터는 두 상의 전형회가 모두 이곳에서 거행되기 시작해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924년(다이쇼 13년)에 기쿠치 간이 [문예춘추]를 창간한 이래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매호의 권두에 작품을 게재했다. 나오키 산주고는 문단 가십을 모아서 문예춘추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두 작가의 이름을 붙인 상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문학계]의 편집자였던 가와사키 다케이치(川崎竹一)의 회상에 따르면 1934년에 문예춘추사가 발행하던 [문예통신]에서 가와사키가 공쿠르상이나 노벨상 등 해외문학상을 소개한 김에 일본에서 권위 있는 문학상을 설립해야 한다고 쓴 글을 기쿠치가 읽은 것도 동기라고 한다.

이때 기쿠치는 가와사키에게 문예춘추사 안에서 바로 준비위원회 및 전형위원회를 만들도록 요청하고 가와사키와 나가이 다쓰오(永井龍男)등이 준비 작업을 한다. 그해 중 [문예춘추] 1935년 1월호에서 ‘아쿠타가와 나오키상 선언’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두 상을 제정한다.

두 작가를 기억하고 문운(文運)의 양성에 이바지하는 것이 설립 취지다. 당시부터 상패로 정상(正賞)에 해당하는 회중시계가 수여됐고, 부상은 500엔이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상(芥川龍之介賞) 통칭 아쿠다가와상(芥川賞)은 순수문학의 신인에게 주는 문학상이다. 문예춘추 사내의 일본 문학 진흥회(日本文振興)에서 심사하고 상을 수여한다.

다이쇼 시대(大正時代, 1912~1926)를 대표하는 소설가인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업적을 기념해 친구인 기쿠치 간이 1935년 나오키 산주고상(直木三十五賞)과 함께 창설 이후 해마다 1월과 7월 두 차례 발표한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5년부터 일시 중단했지만 1949년에 부활했다. 신인작가로 발표된 단편·중편 작품이 대상으로 전형위원의 합의에 의해서 수상작을 결정한다.

현재 수상자는 정상으로 회중시계, 부상으로 100만 엔이 수여되며 수상작들은 [문예춘추]에 게재된다. 전형회는 요정 신키라쿠의 1층에서 열린다. 수상자 기자회견과 그 다음 달의 시상식은 오랫동안 토쿄회관에서 이뤄졌지만, 이 건물이 재건축을 하는 바람에 현재는 제국호텔에서 열린다. 



징병 기피… 와세다大에 적(籍) 두고 이하라 사이카쿠 탐독 

1. 도쿄의 쓰키지(築地)에 있는 신키라쿠(新喜樂)라는 요정에서 전형회가 열린다는 점도 흥미롭
    다. 1층에서는 아쿠타가와상, 2층에서는 나오키상 전형회가 각각 열린다. / 
2. 일본의 노벨문학상 두 차례 수상 ‘원동력’으로 평가되는 기쿠치 간. /
3.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작품으로 [라쇼몬(羅生門)] [지옥변(地獄變)] [어떤 바보의 일생] 등이
    있다.

나오키산주고상은 무명·신인 및 중견작가에 의한 대중소설 작품에 주는 문학상이다. 통칭은 나오키상(直木賞)이다. 나오키산주고는 일본을 대표하는 소설가로 각본가이자 영화감독이기도 했다. 주로 대중소설이라고 일컬어지는 작품을 남겼다. 대중소설이란 예술성보다도 오락성에 중요성을 두고 있는 소설의 총칭이다. 이런 점에서 나오키상은 대중소설 작품이 전형 대상이다.

과거는 아쿠타가와상처럼 무명·신인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었지만 점차 중견 작가 중심으로 이행됐다. 현재는 거의 커리어는 관계없이 백전노장이 수상하는 경우도 많다. 전형과 시상 과정은 위의 아쿠타가와상과 동일한 과정을 거친다.

수상작들은 모든 읽을거리라는 뜻의 [올 요미모노](オル讀物)라는 잡지에 게재한다. 또한 복수의 수상자가 있는 경우에도 각각 상품과 100만 엔의 상금을 증정한다.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은 지금은 언론에서 크게 다뤄진 상이 됐지만 설립 초기는 기쿠치가 생각한 만큼 이목을 끌지 않았고 1935년 [이야기의 휴지통]이란 글에서 키쿠치는 “신문 등은 더 크게 다뤄줘도 좋겠어”라고 불평했다.

1954년에 수상한 요시유키 준노스케(吉行淳之介)는 수상 당시 아쿠타가와상에 대해서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고 수상자가 갑자기 바빠지지 않았다”고 기술하고 있다. 1955년에 수상한 엔도 슈사쿠(遠藤周作)도 당시는 “쇼 아니라 정말 상이었다”고 화제성이 낮았음을 보여준다.

엔도에 따르면 시상식도 신문 관계된 문예춘추 사내의 사람이 10명 정도 모인 극히 소규모였다. 전기가 된 것은 1956년이다. 지금은 일본 보수의 리더가 된 전 도쿄도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가 [태양의 계절]로 수상한다.

작품의 선정적 내용과 학생 작가란 점에서 큰 화제가 됐고 수상작이 베스트셀러가 됐을 뿐만 아니라 ‘태양족’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이시하라의 머리 모습을 본뜬 ‘신타로 컷’이 유행하는 등 ‘신타로 붐’으로 불리는 사회 현상을 일으켰다.

이후 아쿠타가와상·나오키상은 저널리즘에 크게 다뤄진 상이 된다. 1957년 하반기에 가이코 타케시(開高健), 1958년 상반기에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가 수상할 무렵은 신문사뿐만 아니라 텔레비전·라디오 방송국에서도 취재가 밀려들었다.

신작의 게재권을 놓고 잡지사들이 다투게 됐다. 오늘날에도 특별히 수상자가 학생 작가인 경우에는 언론에 크게 보도되고 수상작들은 종종 베스트셀러로 탄생한다.

기쿠치 간은 소설가·극작가·언론인. 문예춘추사(2018년 현재는 주식회사 문예춘추)를 창설한 실업가이기도 하다. 본명은 기쿠치 히로시(菊池)이다. 같은 한자를 훈독하면 히로시이고 음독하면 간이 된다. 남들이 주로 간으로 읽어서 점차 필명으로 굳어졌다.

가가와 현(香川縣) 가가와 군 다카마쓰(高松) 태생이다. 기쿠치가는 에도시대 다카마쓰 번 유학자 가문이었다. 다카마쓰 중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뒤 성적 우수로 학비 면제받고 도쿄고등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수업 태만으로 제적 처분을 받았다.

그러나 그 지역의 재산가로부터 우수한 두뇌를 인정받아 메이지 대학 법과에 입학한다. 법률을 배우고 한때는 법률가를 목표로 한 적도 있었지만, 제일고등학교 입학에 뜻을 두고 중퇴한다. 징병 기피를 목적으로 와세다 대학에 적만 두고 수험 공부하는 한편 대학 도서관에서 이하라 사이카쿠(井原西鶴, 에도시대 작가)를 탐독했다. 



문단의 비즈니스맨이자 만능 아이디어맨

1910년(메이지 43년), 제일고등학교 1부 을류에 입학한다. 동기생 중에 유명인이 다수 있다. 그가 창설한 문학상으로 이름을 남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가와 야스(井川恭, 나중에 법학자 쓰네 토쿄(恒藤恭) 등이 있다. 그러나 졸업 직전 절도 사건에 휘말려 친구인 사노(佐野) 대신 죄를 뒤집어쓰고 퇴학당한다.

그 후 친구인 나루세 쇼이치(成正一)의 집에서 원조를 받아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과에 입학했지만, 구제고등학교 졸업 자격이 없어 당초는 본과에 배우지 못 하고 선과(選科)에 배울 수밖에 없게 됐다. 기쿠치 간 자신은 구제고등학교 졸업 자격 검정고시를 치르고 도쿄제국대학에 가서 친구들과 합류하려고 했지만 우에다 만넨(上田萬年)의 거부와 교토를 떠나기 어려운 사정 때문에 머물게 된다.

쿄토대학 문과대학 교수로 있던 우에다 토시(上田敏)에게 사사했다. 당시의 실의의 나날에 대해서는 픽션을 섞어 [무명작가의 일기]에 상세하게 묘사한다.

1916년(다이쇼 5년)에 쿄토대학 졸업 후 시사신보 사회부 기자를 거쳐서 소설가가 된다. 1923년(다이쇼 12년)에 사비로 잡지 [문예춘추]를 창간하는 대성공을 거둬서 큰 부를 거머쥐었다. 일본문예가협회를 설립한다. 아쿠타가와상· 나오키상의 설립자다.

영화사인 다이에이(大映) 초대 사장과 호치(報知) 신문 객원으로 일한다. 이들의 성공에서 얻은 자산 등에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요코미츠 리이치( 光利一), 고바야시 히데오(小林秀雄)등 신진 문학자에게 금전적인 원조를 행했다.

다이에이 사장 취임사에서 키쿠치는 “나는 사장으로서의 가치는 아무것도 없지만, 제작하는 전 작품의 시나리오를 읽어 주면 좋겠다 해 그렇다면 내게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장을 맡았다”고 말하고 이나가키 히로시( 垣浩) 등은 그 담담한 말투나 꾸밈없는 모습에 큰 박수를 보냈다고 한다. 좋아하는 장기를 두거나, 시나리오를 훑어보는 것이 전세가 거세지는 안에서 기쿠치의 낙이었다.

작가로서의 창작 면에서는 1920년의 [진주부인(眞珠夫人)]으로 시작되는 통속소설을 주로 집필했다. 대표작으로는 [진주부인] [원한을 넘어서] [도주로의 사랑] [옥상의 광인] [아버지 돌아오다] 등이 있다. 인생 경험과 인생관을 창작에 활용함을 중시하고 있다.

‘소설가가 되고자 하는 청년에 준다’는 글 가운데 “25세 미만의 사람은 소설을 쓰지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작가로서보다는 문단의 비즈니스맨이자 만능 아이디어맨에 여러 가지 취미를 가진 팔방미인이었다. 또 성격 좋은 초창기 일본 문단의 형성에 기여한 문단의 후원자였다.

천하 한량의 자유 연애주의자로 보인다. 양성애자의 경향이 있었다고 여겨진다. 구제 중학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 4학년 아래의 소년 사이에 동성애 관계를 갖고 있으며, 이 소년에게 여자 말투로 담은 사랑의 편지가 다수 현존한다. 또 본처 이외에 다수의 애인을 갖는다.

그중 한 명으로 고모리카즈코(小森和子)가 있었다. 고모리는 너무 쉽게 기쿠치에게 몸을 허락하자 기쿠치가 “여성적인 조심성이 없다”고 비난했다고 한다. 전 문예춘추사 편집자, 출판사 줄리앙의 대표이사인 기쿠치 나츠키(菊池夏樹)는 기쿠치 간의 손자다. 2009년 [키쿠치 간 급서의 밤]을 간행한다. 



“마주에게는 ‘무사한 명마’가 더 바람직해” 

1. 가와바타 야스나리(왼쪽). 온갖 전위문학적 실험을 거듭한 끝에 전통적인 일본의 아름다움 속
    에서 독자적인 문학의 세계를 창조해 근대 일본 문학사상 부동의 지위를 구축했다. /
2. 2018년 3월호 [문예춘추].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전문이 게재됐다. /
3. 나오키상 수상작이 실린 [オル讀物].

그의 지원을 받아 일본에 일류 문화인으로 활약한 조선 작가도 있다. 우리에게 아동 문학가로 알려진 마해송(馬海松, 1905~1966)이다. 창작 동화의 집필에 생애를 바치고 방정환 선생과 함께 조선의 아동문학운동의 선구를 맡았다.

그의 문재는 기쿠치 간이 인정하고 문예춘추의 편집부에 들어가 나중에는 계열사 [모던 니혼](모던일본)의 사장이 되기도 한다. 지인지감(知人之鑑)에 사람을 키워내는 능력이 출중했다. 작가의 양성에는 국적을 가리지 않았고 인재에 대한 욕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인이 도쿄에서 이렇게까지 성공을 이룬 것으로 일본의 문화계에 일약 유명인이 된다. 당시의 인기 여배우 미즈구보 스미코(水久保澄子), 기쿠치 간의 비서 사토 미도리(佐藤碧子)로부터 교제 요구가 있었으나 그것을 거절하고 1937년 무용가인 박외선과 재혼한다.

각종 취미활동을 한다. 마작·경마와 장기에 특기가 있었고 전문가적인 식견도 갖고 있었다. 마작은 다이쇼 시대 중기부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중에 일본마작연맹 초대 총재를 지냈다. 키쿠치는 애호가 단체에 ‘마작찬(麻雀讚)’이란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도박을 통해 삶의 의미를 내비치고 있다. 역시 기교보다는 인격이다.

“어쨌든 이기는 사람은 강한 사람이며 많이 이기는 사람은 결국 잘하는 사람, 강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 판 한 판 승부가 되면 강한 자 반드시 이기리라고는 말 할 수 없다. 정패(定牌)를 기억한 초보자에 질 수 있다. 그 점이 마작의 재미이다. (…) 최선의 기술에는 노력에 따라서는 누구도 이른다. 그 이상의 승패는 그 사람의 성격·마음씨·각오·배짱에 의한 것이 많다. 모든 게임 스포츠가 그런 것처럼 마작도 기술로부터 나와 궁극적으로는 인격 전체 경기가 된다고 생각한다. 거기에 마작도(麻雀道)의 세계가 열린다고 생각한다.” (기쿠치 간, [기쿠치 간의 일])

경마에 대해서는 입문서 [일본경마독본]을 출판했고, 전전(前前)에는 마주로서 많은 유력한 경주마를 소유했다. 장기에 대해서는 “인생은 한판 장기여서 물릴 수가 없다”는 문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무사한 명마(無事之名馬)’란 경주마를 가리키고 “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부상 없이 계속 무사히 달리는 말이 명마”라는 생각을 나타낸 격언이다. 마주였던 작가 기쿠치 간에 의한 조어로 유명하지만 실제로는 [시사신보(時事新報)]의 오카다 고이치로(岡田光一)에 의한 것이다.

오카다는 또한 기쿠치의 [일본경마독본] 대필도 했다. 기쿠치가 경마 관계자로부터 책을 구했을 때 [임제록(臨)]에 있는 ‘無事是貴人(무사시귀인)’에서 착상해 색지에 휘호한 것이 말의 시작이라고 한다.

 “무사함이 귀인”이란 본래 “자연체 안에 깨달음을 계몽하는 사람이 귀인”이라는 뜻의 선어로 다도(茶道)에서 1년의 무병 안녕을 축복하는 말로 전용됐다.

마주로서 말의 부상에 따른 걱정과 우울에 시달리던 기쿠치는 “마주에게는 조금 정도의 소질이 뛰어난 것보다 항상 무사한 것이 바람직하다. ‘무사한 명마’의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이 생각은 마주뿐만이 아니라 많은 경마 관계자의 공감을 부르며 이후 ‘무사한 명마’는 건강하게 달리는 말을 칭찬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불우한 작가들에게 지갑 활짝 열어

장기에 대해서는 “인생은 한 판 장기여서 물릴 수가 없다”는 문구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이에이 사내에서 장기를 좋아하는 사장 기쿠치의 영향으로 장기가 유행하면서 중역들도 갑자기 장기 공부를 시작해야 했다. 이나가키 히로시( 垣浩)는 ‘평균 이하’를 자인하고 있었지만, 중역들과 좋은 승부를 할 정도는 됐다.

기쿠치는 그런 서투른 장기라도 열심히 들여다보고 관전하면서 “아마추어 장기는 앞뒤도 생각하지 않으니까 보고 있어도 정말 재미있네”하고 담뱃재를 주르르 무릎에 떨어뜨리고 유쾌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고 한다.

기쿠치의 어른스러움은 동료 작가 등을 보살피는 방법에서도 엿보인다. 원래 잡지 [문예춘추]를 창간한 것도 자립할 수 없는 작가들에게 일할 자리를 주는 게 목적 중 하나였고[금색야차(金色夜叉)]로 알려진 오자키 고요(尾崎紅葉)의 사후, 그 미망인이 돈에 쪼들리고 있는 줄 알자 문예가협회 사무실로 찾아 가서 출판사에 제대로 인세를 내주도록 말하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문예춘추사를 찾아온 불우한 작가들에게 주머니에 있는 돈을 내놓는 일도 자주 있었다. 콘히데미(今日出海)에 따르면 기쿠치가 주머니에서 꺼낸 지폐는 구겨지고, 너무나도 무관심해 보이지만 금액을 세어 보면 많거나 적지도 않고 마치 미리 계산한 것 같기도 했다고 한다. 가난한 문사에 돈을 무심하게 아무렇게나 꺼내면 1엔인 사람도 있고 5엔인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기쿠치가 후원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아름다운 일본의 나 ― 그 서론]이란 제목으로 1968년 노벨상 수상연설을 한다. 중세 선승의 와카(和歌)를 인용·해석하면서 눈·꽃·달(雪月花)로 상징되는 일본의 아기자기한 미의 전통과 [겐지 이야기] [마쿠라노소시](枕草子) 등 일본 고전의 최고 명작이 나와 후대의 문학을 800년간 지배했다고 말하면서 일본의 전통미와 사계의 자연을 마음껏 자랑했다.

한편 그로부터 26년 후 또 한 명의 기쿠치 키즈로 볼 수 있는 오에 겐자부로는 같은 장소에서 영어로 된 수상 소감에서 ‘애매한 일본의 나’라는 제목으로 연설한다. 가와바타의 애매한 신비주의를 비판하고 인간의 바른 정신을 옹호하며 과거 역사에서 일본의 책임을 촉구한다.

다양한 목소리를 세계에 외치는 일본 문학의 힘을 본다. 기쿠치 간이 꿨던 꿈이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일본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그저 번역이나 국력의 힘으로 받은 것이라기보다는 오랜 문학적 전통의 축적과 뒤를 받쳐 주는 일본 문단의 저력이 있었다. 그 중심에는 아쿠타가와상과 나오키상이 있으며 그 시원은 기쿠치 간이다.
 

[출처] : 최치현술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월간 중 2018.6.17. 




8.  ‘메이지 유신 그늘 속 기획자’ 가쓰 가이슈의 명철(明哲) 

- “나의 30년 고심이 조금이나마 관철됐구나” 


에도시대 말기부터 메이지시대에 활동한 정치가 겸 관료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 통해 에도성 ‘무혈개성’ 이끌어내




개성(開城) 담판을 벌이고 있는 사이고 다카모리(왼쪽)과 가쓰 가이슈. 에도 무혈개성은 일본 역사상 획기적이며 상징적인 사건으로 드라마나 영화 소재로도 자주 등장한다


1860년 초 봄 미국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한 일본 선박 간린마루(咸臨丸)에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도쿠가와가(家)의 접시꽃 문장(紋章)이 새겨진 쇼군의 깃발은 아니었다.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체결 비준을 위해 대표단 정사(正使) 일행을 태운 미국 선박 포하탄호(號)와는 별도의 배 한 척이 시나가와(品川) 항을 출항했다

호위 목적으로 증기선에 승선한 인물이 있다. 일본 화폐 1만엔 권의 인물로 등장하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부함장 격으로 승선한 가쓰 가이슈(勝海舟) 일행이다.

항해 40여 일 만에 샌프란시스코 항에 도착하자 깃발 게양 문제가 대두된다. 논쟁 끝에 이 배의 군함 부교(副校)였던 기무라 기다카시(木村喜毅) 가문의 깃발이 올라간다. 만엔(万延) 원년(1860)부터 1868년 메이지 원년(1868)까지 9년은 요즘으로 따지면 매일 호외가 발행될 정도로 일본 근세의 여명이었다. 막부의 ‘접시꽃’은 시들고 있었다.

올해는 일본의 에도막부가 막을 내리고 메이지 정부(1868)가 들어선 지 150주년 되는 해다. 에도시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가 세이다이쇼군(征夷大將軍)에 임명돼 막부(幕府)를 개설한 1603년부터 15대 쇼군(將軍) 요시노부(慶喜)가 정권을 조정에 반환한 1867년까지의 봉건시대다.

265년 동안 에도에는 막부를, 지방에는 번(藩)을 설치해 통치했기 때문에 막번(幕藩)체제라고도 한다. 강력하게 번을 다스리던 막부가 완전히 실권을 상실하게 된 것이 메이지 유신이다.

쇄국정책을 펴던 막부는 서구열강의 압력에 굴하는 등 무능력한 태도로 일관했다. 그러자 조슈(長州)·사쓰마(薩摩) 등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뒤 소외됐던 여러번이 주동이 돼 존왕양이(尊王攘夷)의 기치를 들고 막부를 타도한다. 



진영논리 버리고 상생의 발전적 미래 택해


도쿄 우에노 공원에 세워진 사이고 다카모리 동상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페리의 내항 이래 개국과 양이를 둘러싼 최악의 혼란기에 등장한다. 명석한 두뇌를 가졌지만 시대흐름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사쓰마·조슈 등 유력 번은 교토의 천황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에도의 막부를 압박하면서 왕정복고 쿠데타를 일으킨다.

막부는 1867년 10월 13일 막부정권을 반환하겠다는 대정봉환이라는 승부수를 띄운다. 막번의 체제를 유지하면서 개혁하려던 다양한 실험이 실패했음을 나타낸다. 막부 독재체제를 포기한 것이다.

그러나 토막파와 막부의 국가 구상에는 여전히 차이가 있었고 시대의 흐름은 토막파에 유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무력을 앞세운 사쓰마·조슈의 왕정복고 쿠데타를 다시 일으키고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는 황궁의 학문소에서 15세의 메이지 천황을 앞에 두고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읽는다.천황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통일정부가 탄생했다.

왕정복고의 대호령이라고 하는 쿠데타로 처분의 대상이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오사카성에 있다 교토를 향해 거병했다. 도바·후시미(鳥羽·伏見)에서 이를 맞아 격퇴한 구 막부군의 군세는 신정부군 군세의 세 배였으나 패배하고 만다. 웅번 쪽이 신병기를 갖췄기 때문이다.

요시노부는 몰래 퇴각하고 오사카 만(灣)에 정박해 있던 군함 가이요마루(開陽丸)를 타고 에도로 퇴각한다. 정부군은 동쪽으로 진격한다. 에도 총공격은 피할 수 없는 형세가 된다. 가쓰 가이슈와 사이고 다카모리의 회담이 실현된다. 이로써 에도는 파멸적 전화를 면하게 됐고 에도성은 평화롭게 열린다. 이에 불복한 창의대(彰義隊)는 우에노(上野)에서 농성했지만 하루 만에 진압당한다.

아이즈(會津)와 동북제번의 저항도 평정됐다. 에노모토다케아키( 本武揚) 등은 홋카이도의 고리료가꾸(五稜郭)를 점령하고 독립정권을 수립했다. 하지만 반년 뒤에 항복하고 일련의 보신전쟁(戊辰戰爭)은 종결됐다.

1840년 아편전쟁이 중국에서 발발하자 일본도 위기감을 느낀다. 흑선의 도래와 서구열강의 압력에 개국과 쇄국의 선택의 기로에 선 일본은 막부의 무능력을 목도하면서 정권교체를 단행한다. 그리고 일본은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메이지 유신 주역들을 일컬어 ‘유신 3걸’이라고 한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隆盛), 오쿠보 도시미치(大久 保利通),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가 그들이다.

최강의 흑막 속에 이와쿠라 도모미도 있다. 물론 그 배후에는 또 조슈번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있었고, 그의 제자들이 에도막부를 타도하고 개국을 추진하게 되니 가장 큰 공로자는 요시다 쇼인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들 인물 외에 또 한 명의 비중 있는 배우가 있는데 바로 가쓰 가이슈다.

가쓰 가이슈의 최대 공적은 막부의 마지막 신하로서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대신 사쓰마의 사이고 다카모리와 담판을 벌여 100만 명이 거주하던 당시 세계 최대 도시의 시민을 전화(戰禍)로부터 구한 것이다. 이른바 에도성무혈개성(江城無血開城)이다.

가쓰 가이슈는 ‘메이지 유신의 그늘 속 기획자’로 불린다.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연합을 성사시킨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스승이다. 에도성을 압박하며 총공격을 감행하는 신정부군 사이고 다카모리의 공세를 무마해 에도성을 평화적으로 건네준다. 서로 적으로 만났어도 그들은 국가 전체의 미래를 걱정했다. 진영논리가 아닌 상생의 발전적 미래를 택했다.

메이지 유신은 200만 명의 이르는 지배계급인 사무라이의 특권이 사라진 혁명으로 이 과정에서 약 3만 명이 사망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30만~50만 명의 희생자, 러시아 혁명의 사망자 1000만 명과 비교해 보면 일본의 메이지 유신은 무혈혁명에 가깝다. 가쓰 가이슈라는 숨은 공로자를 조명해보자




“정치가의 비결은 ‘성심성의’ 네 글자뿐” 









왼쪽은 일본 도쿄 스기나미구에 있는 사찰 다이엔지에 세워진 요코야마 야스타케의 묘비, 오른쪽은 대한제국 병탄과 식민통치를 비판한 일본인들.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요코야마 야스타케, 야마자키 게사야, 요시노 사쿠조, 후세 다쓰지, 기노시타 나오에, 가쓰 가이슈

혼란한 시대를 살아온 가쓰 가이슈는 어떤 인물보다도 선견지명이 뛰어났다. 그가 예측한 대로 세상은 변해갔다. 서구 열강의 식민지 정책을 꿰뚫어보고 에도 무혈개성을 실현한다. 시류를 읽고 내란의 위기를 방지하고 일본의 방향을 제시하는 지휘봉을 잡은 인물이다.

권력은 막부에서 천황가로 이전됐다. 그는 어려서부터 검술과 선(禪)을 익히면서 수양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무념무욕의 멸사봉공 자세는 바로 이런 마음가짐에서 나왔다. 미국의 대표적인 일본 학자였고 주일대사까지 지낸 에드윈 라이샤워(1910~1990) 하버드대 교수는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에서 근대 일본이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일본 젊은이들의 꿈을 들었다.

 서구열강에 지지 않기 위해 그들은 그 시절 큰 꿈을 향해 나아갔다. 가쓰 가이슈에게 발견할 수 있는 단어는 성심성의(誠心誠意)다. 그는 실제로 “정치가의 (생존) 비결은 아무것도 없다. ‘성심성의’ 네 글자뿐”이라고 강조했다.

가쓰 가이슈는 1823년 에도에서 아버지 가쓰 코키치와 어머니 노부코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린타로(麟太)이며 그의 호인 가이슈는 사쿠마 쇼잔 자필 글씨인 해주서옥(海舟書屋)에서 취했다.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익혔고 선을 병행한다. 호기심이 많았던지 병학까지 겸한다.

그의 인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당시 첨단학문이었던 난학(蘭學, 네덜란드학)이었다. 난학을 배경으로 막부에 발탁돼 포술(砲術)과 항해술을 익히고 태평양을 건너 미국에 다녀왔다. 일본 해군을 양성한 인물이며 근왕파와 막부의 대결에서 막부의 편에 서서 음지에서 메이지 유신을 기획하고 막부의 뒷정리를 책임진 인물이다.

7세 때 12대 쇼군이 되는 이에요시(家慶)의 아들인 쓰노조(初之丞)의 놀이 동무 겸 학우에 선발된다. 그러나 9세에 집으로 돌아오다가 맹견에게 급소를 물려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큰 부상을 당한다. 아버지의 필사적인 간병으로 회복했으나 이번에는 믿었던 쓰노조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다.

어렸을 때 신분이 다른 계층의 세계를 경험하면서 진취적 호기심과 탐구정신을 갖게 된다. 실의와 정말 속에서 린타로는 토라노스케(虎之助) 도장에서 검술을 배우고 스승의 권유로 선도 배운다. 병학은 구보타 스가네(窪田音)의 문하생인 와카야마 부쓰도(若山勿堂)에서 야마가류(山鹿流)를 습득한다. 22세에 시키신가게류(直心影流)의 면허를 취득하고 사범 역할을 하게 된다.

검술과 병학 수업에 매진하는 가운데 린타로는 난학에 뜻을 두고 당시 가장 유명한 난학자 미쓰쿠리 겐포(箕作阮甫)의 문을 두드렸다. 홍화 원년(1844)에 유학자 출신의 난학자인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과도 첫 대면을 한다.

미쓰쿠리는 쓰야마번(津山藩) 출신으로 네덜란드 의학을 배운 의사인 우다가와 겐신(宇田川玄)에게 난학을 배운 쓰야마번의 번의였다. 그러나 린타로의 입문은 미쓰쿠리에게 거절당했다. 이미 린타로는 스무 살을 넘어 난학을 배우려면 너무 늦었다고 판단했다는 ‘설’이 있다.


스스로 인생의 운을 열어젖힌 개척자

미쓰쿠리에게 입문을 거절당하자 홍화 2년(1845), 나가이세이가이(永井崖)의 제자로 입문한다. 나가이는 후쿠오카번의 어용 난학자로 아카사카타초(赤坂田町)의 후쿠오카번 에도 저택에 살고 있었다.


나가이는 유명한 난학자는 아니었다. 하지만 후쿠오카번은 영주의 의향으로 난학 관계서를 많이 갖추고 있어 최적의 환경이었다. 나가이는 지리학을 도맡았고, 난학자이긴 했지만 당시 주류인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의술의 의사는 아니었다.

린타로는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의술을 지향했던 것이 아니라 외국의 병학·군사 기술을 원했다. 때문에 나가이는 린타로에게 미쓰쿠리보다 훨씬 유익한 스승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난학 수행 중에 난화사전(蘭和辭典)인 [도후·하루마사전(ドゥフ·ハルマ, Doeff-Halma Dictionary)]을 1년에 걸쳐서 2부 필사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다. 1부는 자신을 위해서, 1부는 팔아서 돈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같은 해 스물세 살의 린타로는 막부 신하의 양녀와 결혼했고 이듬해 장녀가 태어난다. 린타로는 난학 수업 때문에 아카사카타초로 주거를 이전했다. 그는 일심불란의 자세로 난학 수업에 힘쓰며 놀라운 속도로 난학을 습득했다. 외국의 병학·군사 기술을 배울 때 야마가류(山鹿流) 병학의 기초를 배워둔 것이 차이는 있었어도 도움이 됐다.

가에이 3년(1850), 나가이는 린타로의 학문적 재능을 인정하고 린타로의 저택에 난학·병학의 사숙(私塾)을 열게 했다. 린타로 나이 이십팔 세였다. 여러 영주 중에는 네덜란드에서 전해진 의술이 아니라 서양 병학을 습득한 린타로의 사숙에서 배우게 하기도 하고, 대포·소총의 제작을 의뢰하기도 했다.

시대는 난학이 의술 때문이 아니라 병학을 위한 학문으로 바뀌어 난학자로서의 명성은 높아졌다. 린타로는 스스로 난학의 사숙을 열면서 그해 사쿠마 쇼잔의 제자로 입문한다. 사쿠마의 난학 학원에서는 린타로 외에 요시다 쇼인, 하시모토 사나이(橋本左), 가와이 쓰기노스케(河井之助) 등에도막부 말기의 역사를 장식한 쟁쟁한 인물들이 배출됐다.

가에이 5년(1852) 장남이 태어났다. 그해 린타로의 여동생 준코가 사쿠마와 결혼한다. 마흔두 살의 사쿠마와 열여섯 살의 가쓰 준코(勝順子)의 스물여섯 살 차이가 나는 결혼이었다. 이듬해 가에이 6년(1853) 일본을 뒤흔드는 사건이 발생한다. 미국인 페리가 이끄는 흑선( 船)이 내항한다. 일본은 에도 막부 말기에 돌입하게 된다.

페리 함대가 개국을 요구하자 막부의 아베 마사히로(阿部正弘)는 막부의 결정만으로 해상 방비에 관한 의견서를 널리 모집했다. 이에 가쓰 가이슈도 해방(海防)의견서를 제출한다. 의견서는 아베의 눈에 띄게 됐고, 가쓰는 해안 방비 책임자가 된다.

오쿠보 이치오(大久保一翁)의 인정을 받아서 안세이 2년(1855) 1월 18일 외국인 접대와 네덜란드 서적 번역 업무에 임명되고, 염원하던 역할을 맡게 됐다. 가쓰는 스스로 인생의 운을 열어젖힌 것이다.

페리의 내항이 발단이 된 막말의 동란기가 아니었다면 문벌 제일주의 도쿠가와 막부에서 햇빛을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1855년 33세에 가쓰는 나가사키전습소(長崎海軍傳習所)에 간다. 이곳은 일본 최초의 근대 해군 사관과 하사관을 양성하는 막부의 학교였다.

사실상 교감으로 선발돼 전습생(傳習生)을 돌보고 네덜란드 교사단과의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교사들과 나눈 대화 내용을 뽑아서 에도에 보고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가쓰는 해군 전문가로서 에도 내각에서 주목받게 된다. 나가사키에 체재하고 있었지만 포술 교수 자리에 올랐다. 출세만 생각하면 에도로 돌아오는 편이 유리했겠지만 가쓰는 해군의 실무를 모조리 익히고 그를 통해서 구열강을 알고자 했다. 햇수로 5년 나가사키에서 항해술을 익힌 가쓰는 막부의 각료들에게 해군 기술관료로 인정받게 된다.

만엔 원년(1860) 막부는 미일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 교환 때문에 사절을 미국에 파견한다. 미국 출국 계획을 세운 것은 이와세 타다나리(岩忠震)등 히토쓰바시파 막부의 신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세이 대옥에서 은퇴를 피할 수 없게 되면서 정사 신미 마사오키(新見正興), 부사 무라카미노리마사(村垣範正), 감찰 오구리 다다요리(小栗忠順) 등이 선택돼 미국 해군의 포하탄호로 태평양을 횡단했다.

이때 호위라는 명목으로 군함을 내놓기로 하고 간린마루호가 샌프란시스코에 파견됐다. 시나가와 출발은 1월 13일, 미국 도착은 2월 26일이었다. 3월 19일 샌프란시스코를 떠났고, 시나가와 귀착은 5월 6일이었다. 여정은 37일, 총 140일이었다.

간린마루에는 군함 부교로 기무라 키다카시(木村喜毅)가 함장격, 가쓰 가이슈가 부함장 격이었다. 그 외 사사쿠라 도다이로(佐佐倉桐太), 스즈후지 유지로(鈴藤勇次), 오노 토모고로(小野友五) 등이 승선하고 미 해군으로부터 측량선 헤니모아 쿠퍼호 함장이었던 존 부르크 대위도 동승했다. 통역은 존 만지로, 기무라의 종자로 후쿠자와 유키치도 탔다.



“세상 보는 눈에서 필적할 이가 없다”


1. ‘메이지 유신 그늘 속 기획자’로 불린 가쓰 가이슈. 그의 지모 덕분에 메이지 유신은 사실상 무혈혁명이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 2.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 3. 도쿠가와 가문의 문장 접시꽃 문양

간린마루 항해를 후쿠자와는 ‘일본인의 손으로 이룬 장거’라고 자찬했지만 실제로는 일본인 선원들은 배 멀미 때문에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부르크 등이 없었다면 도미하지 못했을 거란 설도 있다.

예로부터 가쓰는 간린마루 함장으로 도미했다고 하지만 이에 반발하는 유키치의 [복옹자전(福翁自傳)]에는 기무라가 ‘함장’, 가쓰는 ‘지휘관’이라고 씌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직책은 없고 위와 같이 그는 ‘군함 부교’, 가쓰는 ‘군함 훈련소 교수 부장’이었다.

미국에서 일본으로 귀국할 때는 가쓰 등 일본인의 손으로만 귀국할 수 있었다. 미국 체류 중에는 정치·경제·문화 등 모든 것도 일본과 다른 문명에 충격을 받았으며 견문을 넓히게 된다.

귀국 후 막부와 유신 정부의 요직을 거치면서 주로 해군의 기초를 닦는 일을 한다. 양서를 번역하던 반쇼시라베쇼(蕃書調所)의 소장 보조로 이동했고, 이듬해인 분큐 원년(1861년)에는 강무소 포술 사범이 된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병부성(兵部省) 대신을 거쳐 원로원 의관(議官), 추밀원 고문관 등을 역임했다. 그러한 경험 덕에 가쓰는 막부의 내각에서 출세하게 했다. 그렇지만 하고 싶은 말은 해야 하는 스타일인 가쓰는 이후 영달과 좌천을 거듭하게 된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신정부군을 이끌고 에도성을 공격하는, 가쓰는 구 막부군의 편에서 에도성 방어를 책임지는 입장이었다. 이전에 나라를 걱정하던 두 사람이 이제는 적대관계가 됐다. 공격하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만남이었다. 참혹한 내전이냐 평화적 해결이냐 두 사람의 만남에서 결정된다.

두 사람은 항복 조건을 놓고 의견을 교환했다. 주로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처우에 관한 문제였다. 석고의 감축과 다이묘로서의 지위 설정 협상은 양자의 상호신뢰가 기반이었다. 신정부군은 권력을 차지했고 구 막부군은 품위 있는 항복과 권리 보장을 얻었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금문의 전투(1864) 직후다. 사쓰마의 사이고는 조슈를 무력으로 정벌할 의향을 갖고 있었다. 가쓰는 사이고에게 막부는 인재도 없으니 제후들이 연맹해 강력한 군사력을 키워 서양 국가들과 독자 교섭할 것을 조언한다. 사이고는 이때 가쓰의 탁월한 정세 분석과 식견에 탄복한다. 가쓰는 사이고에 대해 일본이란 나라를 짊어지고 나갈 인물로 평가한다.

가쓰의 제자인 사카모토 료마가 전하는 사이고에 대한 인물평이 시바 료타료(司馬遼太)의 소설 [료마가 간다]에 나온다. “마치 큰 종을 대하는 것 같다고 한다. 살짝 두드리면 작은 소리가 나고 세게 두드리면 큰 소리가 난다고 했다. 평하는 사람이나 평가받는 사람이나 모두 놀라울 따름이다.”

또한 사이고가 가쓰를 처음 만나보고 오쿠보 도시미치에게 보낸 편지에 가쓰에 대한 인물평을 쓴다. “가쓰는 학문에 있어서나 세상을 보는 눈에 있어서는 아무도 필적할 사람이 없다. 나는 가쓰에게 완전히 매료됐다.” 그들의 지인지감(知人之鑑)과 서로를 존중하는 태도로 서로를 타진하면서 국난을 타개한다.

나라를 구한 우정은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가쓰는 유신의 최대 공로자이면서도 사무라이 무리의 수장으로 반란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사이고 다카모리의 입장을 이해했고, 기울어져가는 막부의 운명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도쿠가와 요시노부를 지켜주는 가쓰의 입장을 사이고는 충분히 존경했다. 마음이 통한 두 인물은 세게 치면 큰소리를 내주고 작게 치면 작은 소리로 화답했다.

센조쿠연못(洗足池)은 도쿄의 오타구(大田區)에 있는 연못이다. 이곳에 가면 막말과 메이지 시대를 살다간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연못가에 가쓰 만년의 저택 센조쿠겐(千束軒)이 있었지만 전쟁으로 소실됐다.

현재는 가쓰 부부의 무덤이 남아 오타구의 문화재로 지정돼 있다. 가쓰는 사이고와 담판하기 위해 관군인 사쓰마 군단이 본진을 둔 이케가미 혼몬지(池上本門寺)로 가다가 센조쿠 연못 근처 찻집에서 잠시 휴식한다.

메이지 유신 후에는 연못 풍광을 사랑한 가쓰가 이주했고, 사이고가 이곳을 찾아 가쓰와 환담했다. 가쓰 부부의 무덤 옆에 ‘사이고 다카모리 유혼비’(西隆盛留魂碑)가 있다. 이는 사이고가 세이난 전쟁(西南役)에서 패배하고 자결한 뒤 당시 도쿄부 미나미 가쓰시카(南葛飾)군의 조코인(光院) 경내에 가쓰가 자비로 세웠다. 다이쇼 2년(1913)에 이곳에 이전했다.



떠나면서 남기고 간 두 글자 ‘海舟’

가이슈가 유혼비에 고른 다카모리의 한시는 분큐 3년(1864), 사쓰마번 국부 시마즈 히사미쓰(島津久光)의 분노를 사서 오키노에라부섬(沖永良部島)에 유배된 때의 작품으로 ‘옥중에 느낌이 있어’(獄中有感)란 칠언율시다.

그 비석의 뒷면에 새긴 가쓰가 쓴 글에는 다카모리를 그리는 마음이 절절히 담겨 있다. 일본이 서양열강의 식민지 상태에 빠질 수 있었던 시기의 만남을 묘사한 문장이다. 가쓰는 생사를 초월해 말한다. 에도성 무혈개성(無血開城)의 평화적 정권교체 순간을 읊으며 사이고를 그리워하고 있다.

게이오 보신(慶戊辰), 메이지 원년(1968)의 봄, 그대는 대군을 이끌고 동해도(東海道)로 내려가고 에도에 다가왔다네. 그래서 민심은 동요하고 시민들은 짐을 메고 달아나는 모습을 보였지. 나는 이러한 인민을 걱정해 그대가 있는 군영에 편지를 보냈다네.

그대는 내 편지의 취지를 받아줬을 뿐만 아니라 다시 명령을 내려서 병사들에게 행패를 부리지 않도록 계고했네. 이건 무슨 넓은 마음일까? 무슨 도타운 신의인가? 가끔 나는 그대가 이 옛날에 썼던 곳의 시를 봤는데 높고 싱그러운 기운이 있고 산뜻하고 기세가 있는 필묵의 흔적이 있어 평소의 그대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네.

때문에 그대를 경모하고 스스로 뽑아 이 시를 돌에 새겨 기념비를 만든다네. 아아, 그대는 나에 대해 잘 알고 그리고 그대를 알기로는 나를 필적할 자는 없을 것일세. 지하에서 그대가 이 기념비를 알아볼 수 있다면 반드시 그대는 구레나룻 쓸어 올리며 일소(一笑)할 텐가.

메이지 31년(1898) 3월 전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메이지 천황과 황후를 만나 화해한다. 그날의 일기에 가쓰는 “나의 30년 고심(苦心)이 조금이나마 관철됐구나”라고 짧게 감회를 적었다. 세이난 전쟁에서 역적으로 몰려 죽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명예회복을 위해 죽을 때까지 최선을 다한다.

사이고 사후 20여 년이 지난 1898년 12월 우에노 공원에 동상이 건립된다. 그 후 1개월 뒤인 1899년 1월 가쓰도 할 일을 다 마쳤다는 듯 이 세상을 떠난다. 향년 77세. 유언에 의해 묘비에는 ‘가이슈(海舟)’라고 단 두 글자만 새겨졌을 뿐이었다. 

[출처] : 최치현술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월간 중 2018.7.17.




9. 번역을 예술 경지로 승화시킨 니시 아마네 - “‘Reason’은 이성(理性)과 통하더라” 



개척정신, 탐구정신, 도전정신, 천착의 힘이 남달랐던 인물 

…단순한 언어 번역 아닌 선진문명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모방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부국강병과 서양문화 따라잡기에 전력투구했다. 1870년경에는 유학을 떠났던 인물들은 귀국해 서양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중세 네덜란드 거리를 본떠 만든 사세보시(市)의 하우스텐보스. / 사진:나가사키현


사람들은 대부분 언어의 기원에 대해 무감각하다. 그 시원(始原)에 대한 고민 없이 모국어인 양 사용한다.

미국산 ‘baseball’이 야큐(野球)가 됐다가 어떻게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포츠 ‘야구’가 됐을까? 야구라는 단어는 어원 출처가 분명하다. 일본의 교육자 주만 가나에(中馬庚, 1870~1932)는 ‘baseball’을 야큐(野球)로 번역했다.

베이스를 설치하고 공으로 하는 놀이는 들판에서 벌이는 전쟁 같은 스포츠가 된다. “숏스톱은 전열(戰列)에서 대기하고 움직이는 ‘유군(遊軍)’으로 보는 듯하다”는 설명으로 遊擊手(유격수)라는 명칭도 만들어냈다. 그는 1970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입회한다.

근대 조선은 서양의 발명품을 일본의 번역을 통해 그대로 삼켰다. 스스로 고민은 없었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허우적거렸다. 조선을 도와주러 오는 ‘유격대’는 없었다. 조선이란 베이스는 텅 비어 있었다.

서양은 세계를 발견했다. 그들은 도전했다. 호기심과 모험으로 드넓은 대양을 건넜다. 도전의 크기가 근대의 세계 권력을 재편했다. 중국이 아편전쟁 등 서양과의 싸움에서 힘을 빼는 사이 위기감을 절감한 일본의 발걸음은 재빨라졌다.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상관(商館)에서 부분적으로만 세계와 소통하던 일본은 적극적으로 서양 배우기에 나선다. 견수사·견당사·조선통신사·견구사절단 등 선진문물을 수용했던 일본은 젊고 유능한 인재를 서구에 파견하기에 이른다. 그 첫 번째 나라는 네덜란드다. 난학(蘭學)의 전통을 유지하던 일본이 선택할 수 있었던 최적의 서구 국가였다.

동인도회사라는 독특한 체제를 운영했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를 거점으로 일본 나가사키까지 아시아로 손길을 뻗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서구문명과 문물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일본의 근대화 초기 스승이 되기에 이른다.


중국산 새 한자어와의 경쟁에서 승리



메이로쿠샤의 연설회가 열리던 쓰키지(築地)의 세이요켄(精養軒).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거치면서 국력을 하나로 모았다. 그리고 변신을 시도한다. 동아시아를 벗어나 서구를 따라잡으려는 놀라운 몸부림이 시작된다. 부국강병과 서양문화 따라잡기이다. 1870년경에 이르면 이러한 움직임이 절정을 이룬다. 서양 각지로 유학을 떠났던 인물들이 귀국해 서양을 번역하기 시작한다.

번역은 단순히 언어의 번역이 아닌 선진문명에 대한 철저한 해부와 모방이었다. 동서양이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권에 살고 있었기에 동양에는 없는 개념들을 번역할 필요성이 대두된다. 동아시아에서는 가장 선두에 서서 이 일을 맡은 나라가 일본이다.

중국도 번역에 나섰으나 언어감각이나 국제감각에서 일본에 밀렸다. 같은 단어를 한자로 번역해도 일본에서 만든 번역어가 생존율이 더 높았다. 일본은 번역을 통해 서양의 선진문명을 일찌감치 수용하고 변신을 시도해 동아시아의 최강자 반열에 오른다.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에 편입해야 한다는 ‘탈아입구(脫亞入歐)’론을 주장하며 일본 근대화의 틀을 제공한 이끈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그는 서양의 ‘democracy’라는 개념을 두고 처음에는 ‘하극상(下剋上)’으로 번역했다가 나중에 민주(民主)로 바꿨다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시빌라이제이션(civilization)을 문명으로, 라이트(right)는 권리로, 소사이어티(society)는 사회로 번역했다. 복식부기·보험 등의 번역도 그의 작품이다.

우리가 사용하는 ‘개념어’ 한자는 대부분 서양(그리스) 언어 번역의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철학·예술·사회·문화·문명·자유·권리·개인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개념어들이 한자로 번역됐다. 거기에는 서구 문명의 한가운데로 유학을 가서 견문을 넓히고 돌아온 메이지(明治) 시대의 언어와 지식 천재들의 역할이 컸다. 분야별로 일본의 근대어 번역을 일별(一別)해 보자.

메이지 이후 근대어의 번역에는 세 가지 방법이 사용됐다.


첫째 17세기 이후 중국에 온 선교사가 번역한 한역양서(漢譯洋書)와 영화사전(英華事典)에 인용된 한자 단어

       다.

둘째 18세기 일본의 난학자들이 네덜란드 서적을 번역하면서 창안한 한자 단어다.

셋째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인이 서양 서적을 번역하면서 만든 한자 단어다.

중국문학자인 다카시마 토시오(高島俊男)는 막부 말기까지 일본제(製) 한자어와 에도 막부 말기 이후 일본제 한자어를 비교하고 그 차이에 대한 견해를 밝혔다. 에도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샤미센(三味線: 일본 전통 현악기) 등은 귀로 들으면 의미가 명확했다.

반면 메이지 이후에 조어된 단어, 가령 심리는 심리(心理)와 심리(審理)가 혼동된다. 개념어의 번역이 시작되면서 일본제 한자어가 본격 등장한다. 동아시아에 없는 새로운 개념의 명명식(命名式)을 일본이 시작한 것이다.

일본제 한자어는 근대 이후 중국에 역수출된 것도 적지 않다. 중국이 근대화하는 과정에서, 특히 청일·러일전쟁 전후 중국인 유학생에 의해 일본어 서적이 많이 번역된다. 중국어로 된 일본식 한자어의 예로 ‘의식’ ‘우익’ ‘운동’ ‘계급’ ‘공산주의’ ‘공화국’ ‘좌익’ ‘실연’ ‘진화’ ‘키스(接吻)’ ‘유물론’ 등이 있다.

중국에서도 스스로 서양어 번역을 시도하고, 중국산 새 한자어를 만들어내는 등 일본제 한자어와 경쟁한다. 그런데 동아시아에 없던 개념을 번역하는 분야에서는 일본식 한자가 최종 승리하는 경우가 많았다. ‘

economy’를 중국에서는 엄복(嚴復, 1854~1927)이라는 사람이 생계학(生計學)으로, 일본에서는 경제(經濟)로 번역한다. 한자 문화권은 후자를 선택한다.

1720년 막부는 시대의 흐름에 맞춰 금서령(禁書令)을 완화한다. 이때부터 한역양서가 일본에 전해지게 된다. 중국에 진출한 서양 가톨릭 선교사들이 영화사전을 편찬한다. 조금 늦게 중국에 온 개신교 선교사들도 한역양서를 발간한다.

대표적인 서적이 만국공법(萬國公法)이다. 영화사전과 만국공법의 학습으로 신조된 많은 한자가 일본에 수입된다. 국채(國債)·특권(特權)·민주(民主)·야만(野蠻) 등을 꼽을 수 있다.


서양 단어를 한자로 만든 학술단체 메이로쿠샤



중국에서 간행돼 조선 말기에 유입된 국제법 서적 [만국공법]


난학자들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대표적인 서적이 스기타겐파쿠(衫田玄白, 1733~1817)의 [해체신서(解體新書)]다. 스기타 겐파쿠는 신경·연골·동맥·정맥 등의 번역을 통해 서양 의학을 받아들였다. 자연과학이나 기술 분야의 번역은 주로 난학을 통한 결과였다.

다음으로는 서양 유학생 출신들이 주동한 신문명 결사체라 할 수 있는 단체의 움직임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에서 서양의 단어를 한자로 만들어 기여한 곳은 메이로쿠샤였다. 메이로쿠샤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설립된 일본 최초의 근대적 계몽 학술단체다.

1873년(메이지 6년) 7월 미국에서 귀국한 모리 아리노리(森有禮: 정치가·외교관, 히토쓰바시대학 창립, 1847~1902)가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 교육자·저술가, 게이오주쿠 창립, 1835~1886), 가토 히로유키(加藤弘之: 교육가·관료, 1836~1916), 나카무라 마사나오(中村正直: 교육자, 1832~1891), 니시 아마네(西周: 사상가, 1829~1897), 니시무라 시게키(西村茂樹: 계몽사상가·관료, 1828~1902), 쓰다마미치(津田真道: 관료·계몽사상가, 1829~1903), 미쓰쿠리슈헤이(箕作秋坪: 교육가, 1826~1886), 스기 코지(杉亨二: 계몽사상가·관료), 미쓰쿠리 린쇼(箕作麟祥: 법학자·교육자, 1846~1897))등과 함께 그해 가을에 계몽 활동을 목적으로 결성했다.

단체 명칭은 메이지 6년 결성으로부터 유래한다. 모임은 매달 초하루와 16일에 열렸다. 회원은 구 막부 관료, 가이세이쇼(開成所) 관계자들,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문하생 등 ‘관민조화’로 구성됐다. 학자들뿐만 아니라 구 다이묘, 정토진종 혼간지 세력과 일본 은행·신문사, 가쓰 가이슈(勝海舟) 등 옛 사족(士族)이 뒤섞인 쟁쟁한 멤버가 참여한 것이다.

모리 아리노리는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인재 육성이 급선무이며, 국민 개개인이 지적(知的)으로 향상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서양에서 견문을 통해 익힌 ‘학회’라는 것을 일본에서 처음 창단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당시 27세이던 후쿠자와 유키치를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그가 고사하자 모리 아리노리가 초대 회장에 취임한다.

최초 정원은 앞서 열거한 10명이었다. 회원은 ‘정원’ ‘통신원’ ‘명예원’ ‘규격 외원’으로 나뉘었다. 그해 4월 11일에는 [메이로쿠잣시](明六雑誌) 첫 호를 발행했고, 게재 논문 수는 156편에 이르렀다. 모두 메이지 초기의 시대정신을 담은 논고였다.

발행 부수는 월 평균 3200부에 이르렀다. 당시 일본의 최대 발행부수 신문인 [도쿄니치니치신치문(東京日日新聞)]의 부수가 8000부였다고 하니 지식인들을 독자로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듬해인 메이지 8년 9월 이 잡지의 휴간이 결정되는데, 회원 대부분은 문부성 직할의 도쿄학사원 제국 학사원으로 바뀌었다.


하급무사·서민 등 하층 출신의 맹활약



일본 에도시대의 번역 의학서이자 일본 최초의 서양 책 완역본인 [해체신서]

메이로쿠샤의 핵심이 된 동인들은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니시무라 외에는 하급무사 혹은 서민과 같은 하층 출신자였다. 이어 메이지 시대 이전부터 양학자로서 두각을 나타내면서 막부의 학문기관인 가이세이쇼(開成所) 등에 고용돼 있었다.

회원 대부분이 에도 막부 말기 또는 메이지 시대에 양행(洋行) 경험이 있었던 만큼 존왕양이(尊皇攘夷) 사상에 물들지 않았다. 또 후쿠자와를 제외하면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관리로 정부에 출사한 것도 특징이다. 인습과 고정관념의 속박이 덜하고 새로운 지식을 함유할 수 있는 개방적 심성을 갖고 있었다는 점도 특징이다.

서양문물을 오랑캐의 더러운 물건 취급하며 기득권 수호에 급급하던 조선 대부분의 사대부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이처럼 서양 사정에 밝은 지식인들이 계몽하기 위한 수단으로 선택한 것이 정례 연설회와 잡지 발행이었다.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왜냐하면 정례 연설회에서 개별 테마에 대해 의견 교환하고, 이를 바탕으로 필기한 것을 [메이로쿠잣시]에 게재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새로운 지식의 전달은 잡지의 성공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연설회에서 ‘연설’이라는 단어는 후쿠자와가 ‘speech’를 번역한 것이다. 또 연설회가 열린 곳은 양식(洋式) 취향이 강한 쓰키지(築地)의 세이요켄(精養軒)이었다.

메이로쿠샤가 결성된 지 몇 개월 후 잡지가 간행됐다. 잡지에는 계몽이라는 큰 목표는 있었지만 세세한 편집 방침은 없었고, 전호(全號)를 일관하는 구체적인 주제도 없었다. [메이로쿠잣시]는 특정의 의견을 드러내기보다는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지식을 소개함으로써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것 자체가 목적이었다.

종합 학술지를 목표로 한 만큼 취급 범위는 매우 폭넓었다. 의회 설립 문제, 학자들의 자세, 처첩의 시비(남녀 동권론 등), 철학·종교 등 종교론, 문자 개량론 등 교육론, 사형 폐지론 등 사회 문제, 화폐, 무역 등 각종 경제 문제 등에 걸친 논설과 번역을 다루고 있다. 다만 문학에 관해서만은 논설이 적다. 니시 아마네가 [지설](知說)(제25호)에서 문학 용어를 소개하는 정도였다.

게재 논설의 총수는 156개. 그 내역을 많은 순서대로 늘어놓으면 쓰다 마미치 29개, 니시 아마에 25개, 사카타소 20개, 스기 코지 13개, 모리 아리노리와 니시무라 시게키, 나카무라 마사나오가 동렬로 11개, 가토 히로유키가 10개, 간다 코헤이가 9개, 미쓰쿠리린쇼 5개, 가시와바라 타카아키 4개, 후쿠자와 유키치 3개, 시미즈 우사부로 2개, 미쓰쿠리 슈헤이와 쓰다센, 시바타 마사요시가 각각 1개 순이었다.



동양철학과 서구 유학 경험의 접목



니시 아마네는 메이지 시기에 서양의 근대 용어를 일본어로 도입하는 데 절대적으로 공헌했다


햇수로 2년 만에 정간(停刊)한 [메이로쿠잣시]였지만 그 여파는 대단했다. 정례 연설회 개최와 함께 그를 토대로 한 학술 잡지 발행이라는 계도 스타일도 선구적이었다. 이들이 시도한 작은 날갯짓은 서양의 개념을 한자로 번역하면서 새로운 지평을 펼치는 데 공헌했다. 여기서 동서양을 아우르며 활약한 인물이 바로 니시 아마네(西周, 1829~1897)다.

그는 일본 최초로 공식적으로 서양에 유학을 간 인물이다. 1862~1865년 막부의 명으로 네덜란드에서 유학했다. 그는 법학·칸트·경제학·국제법을 공부했다. 친목 결사인 프리메이슨에 처음으로 가입한 아시아인이다. 현재 그 문서가 라이덴 대학에 남아 있다고 한다. 예술·이성·과학·기술·철학 등 한자 번역어의 ‘저작권자’다.

니시 아마네는 일본 근대의 중요한 계몽사상가이자 철학자이며 최초로 서양철학과 사회과학을 계통적으로 일본에 소개한 학자다. 그런 이유로 ‘근대 일본 철학의 아버지’ ‘일본 근대 문화의 건설자’라고 불린다.

한자 문화권에서 서양 근대 철학의 번역어를 조어(造語) 하려면 동양 전통 철학과 서양철학에 관한 해박한 지식이 필요했다. 니시 아마네는 풍부한 문화적 소양과 지식을 갖고 있었다. 니시 아마네는 어릴 적부터 조부의 지도를 받아 글씨를 배웠다.

네 살 때 [효경]을 읽고 여섯 살에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읽었다. 열두 살부터 번(藩)의 학교에 들어가 한학(漢學)을 공부하며 [주역] [상서] [시경] [춘추] [예기] [근사록] 등을 열독했다.

니시 아마네는 이렇게 학습하던 시절을 회상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가족의 교훈을 받고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아 성현의 도리를 들을 수 있었다.” 니시 아마네는 [이정전서(二程全書)]와 [정몽(正蒙)] [주자류어(朱子語類)] 등의 책을 반복적으로 읽고 “몇 년간 그것을 읽고 엄격하게 따랐다. 게다가 그 도리는 옳은 것이어서 첨삭할 수도 없었다”고 감탄했다.

이러한 동양철학에 대한 이해와 서구의 유학 경험을 통해 가장 이상적인 번역어 찾기 몰두한다. 영어의 ‘reason’을 이성으로 번역한 이야기를 살펴보자. 유학 기간에 쓴 [가이다이몬(開題門)]에서 “송대의 유학과 이성주의는 말투에는 차이가 있지만 내용은 비슷하다”고 밝혔다.

육구연(陸九淵)은 ‘반관(反觀)’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밖에서 찾지 않아도 되며 자신의 마음을 ‘반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수인(王守仁)은 ‘치양지’[致良知: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천리(良知)를 지극히 다한다(致)는 뜻]를 주창하고, ‘격물치지(格物致知)’는 자기 마음을 응시하는 내성(內省)으로 해석했다.

니시 아마네는 중국의 철학 사상에 대해서 서양철학의 이성주의자, 예를 들면 데카르트, 라이프니츠 같은 대륙 이성들은 감성 인지만으로 사물을 인식할 수 없으며 반드시 수학 추리의 방법으로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니시아마네의 ‘이성’이란 신조어는 서양 이성주의에 입각한 송·명 철학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무임승차’와 혹독한 세월



메이지 시대 때 만들어진 다양한 종류의 조선어회화 책. 한글 표현 옆에 가타카나로 발음기호를 적고 하단에는 일본어로 뜻풀이가 돼 있다​

스물한 살부터 3년간 니시 아마네는 오사카 마쓰카게주쿠(松陰塾), 오카야마학교(岡山学校)에서 유학(儒學)을 공부했다. 졸업 후 그는 닌바이다치주쿠(任培達塾)의 학장을 맡았다. 1853년 7월 니시 아마네는 에도 신바시 제후의 저택에서 유교적 해석과 설교를 맡았다.

초기에는 가정 계도, 학교 교육, 후에는 유교 교관의 경력을 통해서 니시 아마네는 선진(先秦)에서 송·명 시대까지 대량의 저작을 읽고 한학의 기초를 쌓았다. 그러다 1862년 막부의 명령으로 네덜란드로 유학을 갔다. 법학을 공부하며, 콩트의 실증주의 철학이나 밀의 공리주의 철학을 섭렵하고 자연과학의 진화론 등도 공부했다.

1865년(게이오 원년)에 귀국한 니시 아마네는 대정봉환(1867년 일본 에도 바쿠후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사건) 무렵 15대 마지막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정치 고문을 맡았고, 1868년(게이오 4년) 막부의 누마즈 사관학교 초대 교장에 취임했다.

1870년(메이지 3년)에는 메이지 정부의 병부성에 들어갔으며 이후 문부성·궁내성 등의 관료를 역임했다. 그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작성하는 등 군제의 정비와 그 정신의 확립에 기여했다. 군인칙유는 일본 군국주의의 정점에 있는 국민교육헌장 같은 군인의 복무규율이다. 공포된 것은 1882년(메이지 15년)이었다.

니시 아마네는 동시대에 활약한 후쿠자와 유키치와 종종 비교된다. 메이지 유신 후의 문화사를 말할 때 그는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지만 후쿠자와 유키치만큼 잘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래서 니시 아마네를 ‘어용 학자’로 간주하고 과소평가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철학·과학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일본의 근대화에 기여한 공적으로 일본 내에서 니시아마네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불편하다. 니시 아마네는 존황주의자로 일본 군국주의 군인정신을 기초한 사람이다. 니시 아마네는 그의 사후에 펼쳐지는 침략전쟁 때 군인정신의 토대를 만든 인물이고, 후쿠자와 유키치는 문명적 각성을 통해 야만국가 조선을 정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자신들보다 뛰어난 문명에 대해 호기심을 갖고 도전한 사람들은 약소한 민족에는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메이지 시대 초기 일본 문학사에서 ‘근대 지식인의 고뇌’를 소설로 쓴 모리 오가이(森鴎外, 1862~1922)는 니시 아마네 사후인 1898년(메이지 31년) [니시 아마에전(西周傳)]을 쓴다. 두 사람은 고향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모리 오가이 역시 훌륭한 번역가이기도 했다.

모리 오가이는 군인 신분으로 독일 유학을 다녀와서 동아시아 최초로 괴테의 [파우스트] 번역을 한다. ‘아우어바흐 켈러’라고 하는 레스토랑에 걸린 괴테 파우스트의 명장면이 20장 정도 있다고 한다. 그중 한 그림은 파우스트가 아닌 모리 오가이의 초상화다.

일본의 근대 번역어에 기여한 인물을 통해 개척정신, 탐구정신, 도전정신, 천착의 힘 등을 느낄 수 있다. 하나같이 열린 마음과 함께 성숙한 기다림이 필요한 것들이다. 대한민국이 한류라는 문화현상을 만들게 된 근본 원인 중 하나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직수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남의 눈이 아닌 스스로의 고민과 성찰이 있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나 문화 식민지로 남이 만들어 건네준 번역어를 아무 생각 없이 받아들일 것인가. 근대의 번역에서 일본은 적극적인 역할을 했고, 중국은 일본과 경쟁했으나 보편성 획득에 실패했다. 조선은 생각조차 해보지 않고 무임승차의 길을 택하더니 자유를 잃어버린 혹독한 세월을 경험했다.

우리에게는 반관의 이성적 기다림과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하지 않는 민족에 미래는 신기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출처] : 최치현술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월간 중 2018.8.17. 






10. 목숨 걸고 밀항·유학한 조슈의 다섯 청년 - 두려움? 모험과 호기심으로 극복했다 


이토 히로부미, 이노우에 가오루·마사루, 엔도 긴스케, 야마오 요조가 주인공

…내각·외교·조폐·공학·철도 등 사회 각 분야에서 일본 근대화에 큰 기여



메이지 시대를 전후해 변화하는 한·일 관계를 보여주는 일본 목판화

조선의 사신이 일본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일행(왼쪽)에게 내정개혁을 받아들인다는 내용의 협정서를 건네고 있다



1909년 10월 26일, 68세의 노회한 책략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중국 헤이룽장(黑龍江) 성 하얼빈(哈爾濱) 역에서 31세의 젊은 한국인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진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비롯해 일본 근대화의 지도자로 대한제국 보호국화에 앞장선 이토가 무너진 순간이었다.


동양 평화를 위협하며 대한제국을 병탄한 침략 원흉에 대한 응징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조야(朝野)는 이토가 사무라이답게 전장(戰場)에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칭송한다.

이토가 하얼빈 역에서 저격당한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동아시아 역사 무대에서 대한제국의 병탄에 앞장서며 동양 평화에 위협을 주는 존재가 됐는지는 제대로 모른다.

이토의 젊은 시절로 돌아가 보자. 22세에 영국으로 밀항해 견문을 넓히기 시작한다. 이토는 그때부터 세계를 향해 호기심을 갖고 견문을 넓히기 시작했다. 서구 배우기 일환이었던 일명 조슈(長州) 5걸(傑)의 영국 유학 이야기다.

서구의 식민지 전락을 앞둔 일본을 구하기 위해 나선 다섯 명은 밀항을 한다. 조슈번 5인의 번사를 영국에서는 ‘Chosu Five’라고 부른다. 양이(攘夷)를 위해 당시 세계 최강국 영국으로 건너가 선진 기술문명을 살펴본다.

하지만 도영(渡英) 후 그들의 계획은 ‘서양 배우기’로 즉각 수정된다. 자신들의 한계를 정확히 인식하는 등 변신을 시도한다. 그들이 배운 최강의 문명과 기술은 일본을 동아시아 선도국으로 이끈다.

조슈는 일본 혼슈(本州)의 가장 서쪽 지역인 야마구치(山口)현에 위치한다. 1600년(게이초 5) 동·서군이 크게 싸운 세키가하라(関ヶ原)전투에서 서군의 주력부대로, 동군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에 대항했다 패해 영지 축소를 당한다.

 이들은 혼슈 서쪽 끝 하기(萩)지역까지 밀려났고, 260여 년 동안 막부에 대해 복수의 칼을 갈았다. 메이지유신(1868년)을 통해 복수에 성공할 수 있었던 요인으로 빠른 국제정세 파악 능력과 한 발 앞선 서구 학습을 꼽는다.

올해로 메이지 유신 150주년을 알리는 깃발이 간간이 나부끼는 아마구치현의 인구 5만 소도시 하기시. 하기시의 명물 회벽 골목을 걷다 보면 오래된 인물들의 사진이 자주 눈에 띈다. 학업으로 웅지를 키우고 세계로 나아가 국제감각을 익힌 메이지 유신 주역의 고향이다.

 어딘지 촌스러워 보이는 사진의 주인공은 1863년 런던에서 유학했던 조슈 출신 다섯 청년이다. 그들은 왜 그 시절에 런던에 갔을까? 


“죽어도 좋다. 서구로 가자” 



1863년 런던에서 카메라 앞에 함께 선 조슈 5걸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엔도 긴스케, 이노우에 마사루, 이토 히로부미,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가오루


일본 전체가 양이와 개국의 기로에서 흔들리던 에도막부 말기인 1863년, 조슈번의 다섯 젊은이는 일본의 부활을 위해 영국으로 밀항한다. 당시 미국으로 밀항을 시도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역사를 보더라도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그들은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의 청강생으로 공부한 뒤 일본으로 돌아와 여러 분야에서 활약하며 근대 일본의 ‘나라 만들기’에 앞장섰다.

이 청년들이 밀항으로 영국 유학을 떠나게 된 역사 배경부터 살펴보자. 1854년(안세이 원년) 막부는 미국에 굴복하듯 미일화친조약을 맺는다.


1862년(분큐 2년)에 사쓰마번(薩摩藩)의 행렬을 가로지른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生麥) 사건, 1863년(분큐 3년)에는 조슈 제후에 속한 무사에 의한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이 일어나는 등 서구열강과 일본 사이에 전면전의 위험이 높아졌다.

당시 막부가 체결한 불평등 조약 파기와 강경한 양이 주창에 앞장선 무리가 조슈번이었다.

“이대로는 일본이 식민지가 되는 것이 확실하다. 미국의 요구를 물리치고 대등한 입장에서 개국 교섭을 다시 하자. 이를 위해 서구에 건너가서 해군에 관한 병술 등 국방의 기초 등을 배워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 요시다 쇼인은 스스로 시모다(下田)에서 미군 함정에 승선해 밀항을 기도하지만 계획은 실패한다. 5년 후 쇼인은 막부에 대한 비판과 막부의 정무 총괄직인 로주(老中) 암살 계획 혐의로 투옥됐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옥사한다.

쇼카손주쿠(松下村塾)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쇼인의 유지를 이으려는 자들이 나타나면서 조슈번에서는 개혁파가 세력을 확장했다.

그중에서도 번의 학교인 메이린칸(明倫館)에서 수학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는 일찍이 외국행을 강하게 희망하고 있었다. 난학을 배우고 차례로 병학 연구에 매진하던 이노우에는 외국의 병학을 배워서 번의 군사기반을 근대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슷한 무렵 하코다테(函館)서 항해술을 배우고 있던 이노누에 가오루, 러시아에 도항 경험을 가진 야마오 요조(山尾庸三)도 해군학을 배우기 위해 영국행을 희망했다.

13대 조슈 번주인 모리 다카치카(毛利敬親)에게 “밀항해서 서구 문명의 과학기술과 군사기술을 배우고 귀국해 양이를 이룬다”는 계획을 털어놓는다.

목적이 양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상대가 이룩한 기술과 문명을 공부하겠다는 발상이었다. 번주 스스로 국법 위반인 해외로 도항을 허가하기 어려운 노릇이었다. 번주는 ‘묵인’이라는 형식으로 3인의 도항을 지원했다.

번주가 도항비로 1인당 200량을 지급했지만, 이 돈만으로는 영국 생활이 불가능했다. 야마오가 영국의 상사 자딘 매터슨(怡和控股有限公司)의 요코하마(横浜) 지점인 에이이치반칸(英一番館)에 알아본 금액은 1인당 1000량 정도였다. 미국에서 구입 예정이던 철포 대금 5000량을 융통해 도항비로 충당하려고 했다. 철포 구입을 맡던 사람이 이토 히로부미였다.

이노우에 가오루는 오랜 친구인 이토에게 밀항 계획을 밝히고 동행하자고 설득한다. 항해술 배우기를 희망하던 엔도 긴스케가 추가된다. 일본 ‘육군의 아버지’로 불린 오무라 마스지로 (大村益次郎)의 목숨을 건 보증으로 자금 융통에 성공한다.

참고로 그의 동상은 야스쿠니 신사에 위치한다. 일행은 상투를 자르고 양복으로 갈아입는다. 오무라는 요코하마의 요정 사노 시게루에서 환송회를 열어준다.



양이(攘夷)? 번영한 모습에 망연자실

도쿄의 관청이 밀집한 가스미가세기 부근을 지나가는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 행렬/ 사진:눈빛출판


행선지는 런던, 목표 기간은 3년이었다. HSBC 은행의 설립과 만다린오리엔털호텔 경영으로 알려진 영국의 자딘 매터슨상회의 첼스윅호에 오른다. 5월 12일 한밤중 어둠 속에 흩어지듯이 5인은 범선에 승선한다. 범선의 석탄 창고에 몸을 숨기고 출항을 기다렸다.

요코하마 항을 떠난 배는 5일 후 상하이(上海)에 도착한다. 5인은 상륙 후 일본에서 밀항을 도와 주던 자딘 매터슨상회의 상하이지점에 도착한다. 상하이에서 런던행 배의 알선을 부탁한다. 일본 지점에서 받은 소개장을 보여주자 “무엇 하러 영국에 갑니까?”라고 묻는다.

일행 중 이노우에 가오루만이 말 뜻을 겨우 알아듣고 “Navigation(항해술이다)”이라고 대답했다. Navy(해군학)이라고 했어야 했지만, 항해술을 배우러 간다고 잘못 말한 것이다. 나중에 배를 타고 온갖 잡일에 시달리는 단초를 제공한 것이다.

승선객으로 정중한 대접을 기대했지만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항해술을 배우는 견습생으로 잡일을 배당받는다.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갑판 청소를 하거나 수부로부터 구타를 당하기 일쑤였다. 항해 도중 오해가 풀리기는 했지만 11월 런던에 배가 도착했을 때는 모두 피골이 상접한 상태였다.

런던의 항구에서 5인의 눈에 우선 띈 것은 바다에 즐비한 증기선이었다. 일본에서 본 적 없는 선박뿐이었다. 상륙하자 거리에는 고층 건물에다 교외로 연결되는 증기기관차가 연기를 내뿜으며 달렸다.

세계 최첨단 근대 기술이 모두 모인 곳이었다. 이노우에는 훗날 “번영한 모습을 보고 거의 망연자실해 양이 따위라고 하는 것은 일순간에 날아가고 말았다”고 회상했다. 5인의 런던 생활이 드디어 시작됐다.

런던의 명문 유니버시티칼리지런던(UCL) 캠퍼스에는 일본인 24명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비가 보인다. 150년 전 막부 말기에 조슈번에서 5명, 사쓰마번에서 19명의 젊은이가 영국으로 건너와 UCL에 유학한 것을 칭송해 세웠다. ‘해외 도항을 금지한다’는 국법을 위반하고 건너가 메이지 일본의 기틀을 다진 에도(江戶) 막부 말기 유학생의 발자취를 더듬어 보자.

웅번의 밀항 유학에 앞서 도쿠가와 막부는 개국 후 1862년(분큐 2) 6월 일본 최초의 유학생을 네덜란드에 파견한다. 해군 훈련소에서 에노모토 다케아키(榎本釜次郎), 아카마쓰 노리요시(赤松則良), 반쇼시라베(蕃書調所)에서 니시 아마네(西周)와 쓰다 마미치(津田眞道), 나가사키 양생소에서 의학 공부 중이던 이토 보세이(伊東方成)와 하야시 겐카이(林研海) 선박 대목수인 우에다 토라키치(上田寅吉) 등이 선발돼 해군·의학·인문과학을 배웠다.

막부는 그 뒤로도 영국·러시아·프랑스 등에 유학생과 사절을 파견한다. 일본의 근대국가 발돋움에 기여한 선구자 가운데 막부 타도를 실현한 여러 웅번 세력 출신자와 함께 옛 막부의 신하도 포함됐다.

그 무렵 번들 사이에는 해외에서 새로운 지식이나 기술을 흡수하려는 분위기가 높아졌지만 실현은 불가능했다. 도쿠가와 300년의 쇄국이 깨어졌지만 해외 도항은 막부에 의해 엄격하게 막혔다.

조슈번과 사쓰마번은 이 금지령을 어긴다. 조슈번은 1863년(분큐 3) 5월, 사쓰마번은 1865년(겐지 2) 3월 각각 밀항 유학생을 배출한다. 밀항 유학생 탄생에서 ‘메이지 유신의 아버지’ 요시다 쇼인과 사쓰마번의 11대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島津斉彬)를 빼고 말하기는 어렵다. 






UCL의 자유로운 학풍, 진취적 정신이 큰 힘 





쇼카손주쿠 (松下村塾). 요시다 쇼인이 단기간에 유신의 지도자를 양성한 사숙이다. / 사진:최치현


요시다 쇼인은 개국 전인 1854년(안세이 원년), 페리 함대가 화친조약의 응답을 얻으러 다시 찾았을 때 시모다에서 미국 군함에 승선해 미국행을 요청하지만 거부당한다. 쇄국의 금령을 어기고 해외 지식을 얻을 필요성을 호소했지만 결국 도항을 단념해야 했다. 그는 5년 후 안세이 대옥(安政大獄) 때 사형을 당한다.

사쓰마번의 번주 시마즈 나리아키라는 1857년(안세이 4)에 밀항 유학생 파견을 구상하지만 이듬해 급사했기 때문에 사쓰마번은 프랑스인에게 알선을 의뢰하고 1859년(안세이6) 봄에 유학생을 선발했다. 두 차례 동시 유학생 파견은 실현되지 않았지만 쇼인, 나리아키라의 문명 개화적 사상을 문하생들이 받들었다. 메이지 유신의 원동력 중 하나로 평가된다.

쇼인 사후 4년이 지나 조슈번의 수뇌는 개국 후 외교 협상에 대비하는 인재 육성에 주력한다. 또 쇼인의 유지를 이어받은 타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도 서양 사정을 조사하기 위해 출국을 계획했다. 이런 번 내의 움직임을 배경으로 영국으로 밀항 유학한 것이 조슈 5걸이었다.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밀항 시 28세),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27세),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26세)와 불과 반년 전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에 가담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22세)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20세) 등 5명이다. 2006년 개봉한 영화 [조슈 파이브]로 일약 유명해진다.

이들 유학생을 UCL로 영입하고 도움을 준 인물은 알렉산더 윌리엄슨 교수였다. 일본에서 유학생들이 UCL에 모인 것은 당시 잉글랜드에서는 1826년 창설된 UCL만이 신앙이나 인종의 차이를 뛰어넘어 모든 학도에게 문호를 개방하던 대학이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 두 대학은 영국 국교 신자만 입학시킨다. UCL의 자유로운 학풍과 진취적 정신은 일본인 유학생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

이국 땅에서 배우려는 일본 청년을 영입한 윌리엄슨 교수는 39세에 런던화학협회장을 지낸 소장파 화학자였다. 그는 조슈와 사쓰마를 포함한 많은 일본인 유학생을 도와줄 뿐 아니라 중도하차하고 객사한 유학생의 장례도 치러줬다.

1864년 4월 급진적인 양이파인 조슈번에 대해 열강 4개국이 공격을 준비한다는 정보를 접한 조슈의 5인은 머리를 맞댔고, 이토와 이노우에가 6개월 만에 먼저 귀국한다. 두 사람은 귀국 후 열강과 싸우는 무모함을 번에 설득하려다 실패했다. 결국 죠수번은 1864년 8월의 시모노세키(下關)전쟁에서 서구 연합국에 참패한다. 이후 조슈번은 양이에서 개국으로 전환한다.

영국에 남은 세 사람은 런던대의 강의를 듣는 한편 조폐·조선·철도 부설 등의 현장을 견학하는 등 최신 기술과 지식을 배웠고 귀국 후 각각의 길을 걷는다.

이토 히로부미는 ‘내각의 아버지’, 이노우에 가오루 ‘외교의 아버지’, 엔도 긴스케는 ‘조폐의 아버지’, 야마오 요조는 ‘공학의 아버지’, 이노우에 마사루는 ‘철도의 아버지’라고 불린 것에서 보듯 모두 각 분야에서 선구적인 공적으로 일본 근대화에 기여했다.

주로 정계에서 활약한 것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 가오루였다. 이노우에는 평생 친구인 이토,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와 함께 ‘조슈의 삼존’이라고 불렸다. 이토는 ‘지모’ 야마가타는 ‘용감’, 이노우에는 ‘기민’한 사람으로 불렸다.


최신 기술·지식 습득해 각자 다른 길로

 

시종무관장(侍從武官長) 때 근위병들 앞에서 러시아 군복 차림으로 긴 칼을 차고 있는 충정공 민영환



5인의 주요 이력을 보자. 엔도 긴스케(遠藤謹助, 1836~1893, 도영 당시 27세)는 조폐의 아버지로 불린다. 에도에서 항해술을 배우고 번선 진주 쓰마루(壬戌丸)에 승선한다. 1866년 귀국하자 조슈 번주와 영국 해군 제독의 회견을 성사시키는 등 대외 절충 역을 맏는다.

 메이지 신정부에 출사하고 오사카의 조폐 기숙사 건설에 종사하며 조폐 책임자에 발탁된다. 영국인 조폐장 토머스킨 등과 대립하고 잠시 물러나 있기도 했다.

복귀 후 조폐국장에 취임했으며 1893년 퇴임 때까지 일본인 기사에 의한 서양식 새 화폐 제조에 주력했다. 벚꽃의 개화시기에 맞춰 일반 공개하는 오사카 조폐국의 ‘벚꽃의 통행’을 발의한 전통은 지금까지 이어진다.

이노우에 마사루(井上勝, 1843~1910, 도영 당시 20세)는 철도의 아버지다. 나가사키에서 병학을, 에도에서 포술을, 하코다테에서 영국 영사관원에게 영어를 배운다. 1868년 귀국해 조슈번에서 광업 관리에 종사했지만 이토의 부탁을 받고 메이지 신정부에 출사한다.

1871년에 철도 기숙사가 마련되자 광산과 철도 책임자에 취임한다. 철도국장, 철도청 장관을 지내고 1893년에 퇴임 후에도 철도 외길을 걷는다. 1896년 기관차의 국산화를 목표로 기차 제조 합자회사를 설립한다. 철도원 고문으로 해외 시찰 중 런던에서 객사한다. 장례식에는 은사 윌리엄슨 교수의 부인도 참석했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도영 당시 22세)는 소년 시절 쇼인의 문하인 쇼카손주쿠에서 배운다. 영국 사관 방화사건에 참여하는 등 존왕양이(尊王攘夷) 지사로 활동하는데 1863년 도영하고 UCL에서 배운다. 귀국해 막부 타도 운동을 이끈 후 메이지 새 정부에서 요직을 역임한다.

일본 제국헌법을 기초하고 제정에도 주력했다. 1885년 초대 내각 총리대신으로 취임 후 1, 5, 7, 10대 4기 동안 총리대신을 맡는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초대 조선총감에 취임했다. 1909년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탄에 쓰러진다.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 1836~1915, 도영 당시 27세)는 제후 자제 교육학교 메이린간에서 배운 뒤 에도에서 난학(蘭學: 네덜란드 학문)을 공부한다. 존왕양이에 공명하고 타카스기 신사쿠 등과 영국 공사관 방화사건에도 참여한다.

영국으로 건너가 국력 차이를 목격하면서 개국론으로 돌아서고 시모노세키 전쟁 때 이토와 함께 급히 귀국하고 강화 담판에 주력했다. 메이지 신정부 대장성에서 재정에 종사하지만 오자리고와(尾去澤) 구리 광산의 독직사건으로 사직한다.

잠시 실업계에 몸담았다가 이토의 부탁을 받고 관직에 복귀해 외무부장관, 농상무장관, 내무부장관, 재무장관을 역임한다. 외무대신으로 불평등 조약 개정에 힘썼다.

야마오 요조(山尾庸三, 1837~1917, 도영 당시 26세)는 에도에서 항해술을 배우고 영국으로 건너가 UCL에 공부하다 나중에 글래스고에서 조선술을 배운다. 네피아 조선소의 견습공으로 기술을 익히면서 앤더슨즈 칼리지의 야학에서 공학을 배웠다.

1868년에 귀국하자 메이지 신정부에서 공학경과 법제국의 초대 장관 등을 역임한다. 1871년 도쿄대 공학부의 전신인 공학 기숙사를 창설했다. 네피아 조선소에서는 농아의 장인들이 일한 것부터 맹농(盲聾)학교의 설립에도 주력했다.



변함 없는 사실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다’

1863년 8월 사쓰에이(薩英)전쟁에서 영국에 패한 사쓰마번은 강화 협상에서 영국에 유학생 파견을 제안했다. 영국 측은 싸운 상대로부터 배우려는 자세에 놀라면서도 이를 높게 평가했다. 이로써 사쓰마번과 영국의 친목은 깊어진다. 사쓰마번은 4명의 시찰원과 15명의 유학생을 결정한다.

유학생들은 1865년 3월 사쓰마를 떠나 5월 런던에 당도했다. 유학생 15명 가운데 대학 입학 연령에 미달한 나가사와 가나에(長澤鼎)만 중학교에 입학하고 나머지 14명은 조슈번 유학생과 마찬가지로 UCL의 청강생이 된다. 시찰원 4명은 유럽 각지를 돌면서 국정 시찰이나 상담을 실시한다.

청강생이 된 14명은 런던에 도착한 뒤 대학에서 배우던 조슈번의 3명, 야마오·엔도·이노우에 마사루와 만난다. 이들은 윌리엄슨 교수에게 함께 배우면서 틈나는 대로 영국인과 교류한다. 야마오가 조선(造船)을 배우기 위해 스코틀랜드 글래스고에 갈 때 사쓰마번의 유학생들이 1파운드씩 모아 빌려주기도 한다.

과거에는 서로 적대시하던 조슈번과 사쓰마번이었다. 하지만 삿초동맹(薩長同盟)이 맺어지기 전에 멀리 떨어진 런던에서는 이미 번의 테두리를 넘어 일본이라는 한 국가의 국민이라는 의식이 깨어 있었다.

조슈번과 사쓰마번뿐 아니라 물론 막부도 서구열강의 지식이나 기술을 배울 필요성을 느꼈다. 1862년 쇄국 중에도 접촉하던 네덜란드에 유학생 15명, 1865년 러시아에 유학생 7명을 보낸다. 1866년 해외 출국금지가 해제되자 영국으로 14명에 이어 프랑스에 유학생 10명을 보냈다.

영국 유학생들은 1866년 12월 요코하마를 떠나 1867년 2월 런던에 도착한다. 이미 UCL에는 서남 세력의 유학생이 배우는 것에 놀랐다. 강한 사명감에 넘쳐 유학에 나선 막부 유학생이었지만, 막부가 쓰러졌기 때문에 도중하차하고 귀국한다.

1868년 8월 요코하마에 도착했을 때 일본은 사쓰마·조슈번을 중심으로 신정부군과 구막부 측이 보신전쟁(戊辰戰爭) 중이었다.

19세기 후반의 일본은 호기심의 시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모험을 마다 않았고 자기보다 강한 상대에게는 몸을 낮춰 배웠다. 세월이 흘러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했다.

이토 히로부미가 협상 대표로 1895년 시모노세키에서 청나라의 전권대사로 일본으로 건너온 이홍장(李鴻章)과 마주 앉는다. 군비 배상과 영토를 제공하는 시모노세키조약에 조인한다. 영국 유학 32년 만에 일본은 전승국으로 아시아의 맹주가 된다.

서구의 두려움에 맞서 호기심과 모험으로 이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주변을 유린하는 일본의 시대가 열린다. 조선은 뒤늦게 세계를 향해 나간다. 청나라의 무능력함이 드러난 후인 1896년이다.

조선에서 최초로 세계일주를 했다고 알려진 충정공 민영환(1861~1905)은 일본의 패권주의를 눈치 채고 견제를 위해 특명전권공사의 자격으로 러시아 황제 대관식에 참여한다. 이미 대세는 기울었다. 세상의 가치가 조금씩 변하더라도 역사에 변함이 없는 사실은 강자는 약자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출처] : 최치현술실대학교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 :  <우리가 몰랐던 일본,일본인>/월간 중 2018.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