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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에 달가듯이 2018. 11. 8. 17:30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Ⅰ회~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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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1회~4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3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41회~80회] http://blog.daum.net/yonghwan6158/4644

 

 


1.경주 호우청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靑銅 壺杅)

- 신라 고분에 왜 고구려 청동 그릇이?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된 청동 호우의 바닥면. /국립중앙박물관 



1946년 5월 9일. 구름이 잔뜩 낀 날씨 속에서 발굴 현장을 지켜보던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은 모든 것이 불안했다. 미 군정(軍政)을 겨우겨우 설득해 발굴에 착수한 지 8일째였지만 무덤이라는 확증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고분 발굴을 위해 이미 집 한 채를 헐었고 동원된 사람만 185명에 달했으며 조선영화사 측에서 기록 영상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오후가 되면서 상황이 급진전됐다. 땅 밑 약 1m 지점에서 반짝이는 황금 장식이 보였다. 고분 부장품임을 확신한 김 관장은 그제야 안도의 긴 한숨을 내쉬었다. 이틀 후 조사원의 손길이 무덤 바닥까지 도달했다. 무덤 주인공의 머리맡에 토기 여러 점과 청동 그릇 한 점이 있었다. 신라 고분 발굴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5월 14일. 금관이 출토되지 않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유물들을 수습하기로 했다. 첫 순서는 청동 그릇. 동그란 꼭지가 달린 뚜껑부터 먼저 수습하고 이어 몸체를 조심스레 들어 올리던 조사원은 예기치 못한 발견에 "와!" 탄성을 질렀다. 그릇 바닥에 한자가 빼곡히 적혀 있었다.
모든 조사원이 모여 그릇 바닥에 붙어 있는 흙을 제거하며 판독을 시도했다. '을묘년(415년), 3년 전 돌아가신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을 추모해 만든 열 번째 그릇'이라는 뜻의 16글자였다. 고구려 광개토왕을 위해 만든 제기, 청동 호우(壺杅)가 멀리 신라로 전해져 무덤 속으로 사라졌다가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호우총 발굴은 이틀 후 종료되 었지만 청동 호우는 5월 29일에야 화차에 실려 무장한 미군 병사 2인의 호위를 받으며 서울로 옮겨졌다. 그 후 다시 71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호우총이 청동 호우보다 100년이나 늦은 시기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지만, 고구려에서 만든 제기가 어떻게 신라에 전해졌고 왜 오랜 기간이 경과한 후 무덤에 묻혔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 공주 송산리 무령왕릉에서 출토 『지석 (誌石:국보 163호)
-地神에게서 묏자리를 산 백제 무령왕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지석(국보 제163호). ‘백제사마왕’이라 적혀 있다. /국립공주박물관
 

1971년 7월 8일 충남 공주 송산리 언덕 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흘 전 우연히 발견된 무덤 발굴을 지켜보기 위해서다. 김원룡 조사단장은 무덤 속을 살펴보려다 흠칫 놀랐다. 뿔 달린 짐승의 실루엣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것이 무덤을 지키는 진묘수(鎭墓獸·도굴꾼 등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든 상상의 동물)임을 알아차리고 한숨을 돌리자 이번엔 네모난 돌판 두 장이 눈에 띄었다. 희미한 글자가 새겨져 있었고, 그 위에 철전(鐵錢) 한 꾸러미가 놓여 있었다.

김 단장이 지시했다. "아직은 내색하지 마시오!" 이어 그는 백제사(史)에 밝은 공주박물관장과 함께 글자를 판독했다. '영동대장군 백제사마왕(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 "아, 사마왕! 무령왕이에요." 이 돌판이 바로 백제 25대 무령왕의 지석(誌石)이었던 것이다. 늘 발굴 복이 없다고 한탄했던 김 단장은 세기의 발견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김 단장이 이곳을 무령왕 부부 무덤이라고 공표하자 발굴 현장은 혼돈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었다. 시민들은 박수 치며 환호했고 언론사 취재 경쟁도 불붙었다. 그 와중에 널길 입구에 놓여 있던 청동숟가락을 외부인이 밟아 부러뜨렸다. 김 단장은 더 이상의 훼손을 막기 위해 하루 철야 작업으로 발굴을 끝냈다. 후에 그는 이 결정을 두고두고 안타까워했고 무령왕릉은 '최악의 발굴'이라는 오명을 쓰고 말았다. 

그럼에도 왕릉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을 통해 우리는 백제와 백제인들을 만나게 됐다. 특히 지석에는 미지의 정보가 가득 담겨 있었다.

무령왕이 선왕인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삼국사기' 기 록이 틀렸다는 점, 왕의 죽음을 기록하면서 천자의 죽음을 뜻하는 '붕(崩)'이라 표현한 점, 사후 2년 3개월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 비로소 무덤에 안장됐다는 점 등이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매지권(買地券·토지 매매 문서). 왕의 묏자리를 지신(地神)들에게 구입했음을 기록으로 남긴 것인데, 지석 위에 놓여 있던 철전 꾸러미가 바로 묏자리 구입 대금이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 경주 서봉총(노서리 129호분)에 서 출토된 『서봉총 금관』

 - 스웨덴 황태자가 들어 올린 서봉총 금관




보물 제339호 서봉총 금관. 높이(새모양 장식 포함) 30.7㎝. /국립중앙박물관 



1926년 10월 10일 일요일. 경주 노서리 129호분 발굴단원들은 이른 아침부터 작업을 시작했다. 귀빈 방문이 예정돼 있었기 때문이다. 10시쯤 도착한 귀빈은 스웨덴 황태자 구스타프 아돌프와 황태자비(妃) 루이즈 마운트배튼. 황태자 부부는 차에서 내려 초가집으로 둘러싸인 발굴 현장에 들어섰다. 돌무지가 가득했고 한가운데에 나무 판재가 깔려 있었다. 이곳에서 금관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왔지만, 현장에선 그런 낌새가 보이지 않았다.

조사원들이 일사불란하게 판재를 제거하니 그 아래에 흰색 천이 덮여 있었고 천까지 제거하자 청명한 가을볕을 받으며 눈부신 광채를 내뿜는 황금보관(黃金寶冠)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태자뿐 아니라 수행원들까지 일제히 환호성을 터뜨렸다.

옆에 있던 교토대 교수 하마다 고사쿠(濱田耕作)가 "금관이 새로 나온 게 확실하죠?"라 묻자 황태자는 "정말이네요"라고 대답했다. 며칠 전 일본 시모노세키에서 금관 발굴 소식을 처음 듣자마자 황태자가 "박물관 금관을 가져다 묻어놓은 건 아니겠죠?"라고 농담했던 것을 다시 끄집어낸 것이다. 황태자는 발굴단의 요청을 받고 금관을 직접 수습해 들어 올렸다.

발굴 책임자인 고이즈미 아키오(小泉顯夫)가 황태자에게 무덤 이름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황태자는 스웨덴의 한자식 표현인 서전(瑞典)의 '서'와 금관 꼭대기에 부착된 봉황 모양 장식에서 '봉'자를 뽑아 '서봉총'이라 제안했다. 노서리 129호분은 새 이름을 갖게 됐고 1921년의 금관총, 1924년의 금령총에 이어 금관이 출토된 세 번째 신라고분으로 기록됐다.


서봉총 금관은 발굴 한 달 만에 서울로 옮겨져 일반에 공개됐다. 1935년에는 평양박물관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이 전시회가 끝난 후 당시 평양박물관장이던 고이즈미가 파티를 열고 금관을 기생의 머리에 씌우고 찍은 사진이 신문에 공개돼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1949년 5월에는 국립박물관에 도둑이 들어 전시된 서봉총 금관을 훔쳐 사라졌지만 다행히도 그것은 모조품이었다. 이처럼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이 금관이 누구의 것이었는지 아직 제대로 해명되지 않고 있다. 다만 무덤의 규모나 함께 출토된 유물의 종류로 보아 신라의 왕비나 공주로 보는 견해가 대세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4.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서 출토된 『금제 사리 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
 -  선화공주 로맨스 뒤흔든 미륵사지 사리봉영기 


금제사리봉영기(앞면), 가로 15.3㎝, 국립미륵사지유물전시관 


2009년 1월 14일. 미륵사지 석탑 해체 현장에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 전 석탑 중앙의 심주(心柱)에 대한 레이저 물리 탐사 중 발견된 동공(洞空)의 흔적이 사리공(舍利孔)인지 확인할 참이었다.

현장 책임을 진 국립문화재연구소 배병선 실장은 조바심이 났다. 석탑 해체 작업을 시작한 지 7년 3개월이 지났지만 속도는 더뎠고 큰 성과는 없었다. 1층은 해체하지 말고 그대로 활용하자는 의견까지 나왔으나 전면 해체라는 원안을 고수한 그였기에 부담은 더욱 컸다.

오후 3시. 준비를 마치고 육중한 심주 윗돌을 들어 올리자 번쩍 빛이 났다. 아랫돌 한가운데에 네모난 사리공이 숨겨져 있었고 그 속에서 금빛 찬란한 유물들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숨죽이며 지켜보던 사람들은 모두 환호했다. 특히 눈길을 끈 것은 어떤 연유로 불사리를 모셨는지 기록한 봉영기(奉迎記)였다.
빼곡히 새겨진 글귀 가운데 '우리 백제의 왕후께서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고'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다. 금판을 수습해 뒷면을 보니 '대왕폐하'라는 네 글자가 선명했다. 대왕은 백제 무왕이었다.
639년 기해년 정월 29일에 사리를 봉영했다는 내용도 있었다. 사택왕후의 발원으로 이 석탑을 만들었음이 밝혀짐에 따라 서동과 결혼한 신라 선화공주가 백제 왕비가 되어 미륵사 창건을 발원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의문을 갖게 됐다.

발굴은 쉽지 않았다. 사리공이 가로세로 각 25㎝, 깊이 26.5㎝밖에 되지 않는 좁은 공간이었고 그 속에 크고 작은 유물이 가득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물을 수습하고 발굴을 끝낸 것은 30시간이 지난 이튿날 저녁 9시. 출토된 유물은 무려 72건 9947점에 달했다.

석탑 1층을 그대로 두고 복원하자는 의견을 따랐다면 사리공 속 유물들은 지금도 여전히 미지의 공간 속 타임캡슐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이 발굴을 통해 우리는 미륵사지 석탑의 탄생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지만 '세기의 로맨스' 여주인공, 선화공주를 잃고 말았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5. 경주 황남대총 북분(北墳)에서 출토된 『터키석 장식 금팔찌』
- 황남대총 신라 왕비, '못 말리는' 명품족? 


황남대총 북분(北墳)에서 출토된 터키석 장식 금팔찌(보물 623호). 지름 7.2㎝. /국립경주박물관 


1973년 7월 7일. 경주 98호 고분, 즉 황남대총 앞에 제사상이 차려졌다. 묘주(墓主)에 대한 위령제이자 벼르고 벼르던 발굴의 시작을 알리는 팡파르였다. 발굴 지시는 2년 전에 받았지만, 길이가 무려 120m에 달하는 국내 최대의 무덤을 발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이 시험 삼아 발굴한 155호 고분(천마총)에서 금관과 천마도 등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조사단에서는 "이미 큰 성과를 거두었는데 황남대총을 팔 필요가 있겠느냐"는 볼멘소리가 나오기도 했지만 '높은 곳' 지시로 시작한 일이라 어쩔 수 없이 진행하기로 했다. 남북으로 연접된 두 무덤 중 어느 쪽이 왕릉인지 알 수 없었으나 북쪽 무덤부터 파기로 결정했다.

1974년 10월 28일. 조사원들의 손길이 마침내 목관 내부로 접근했다. 목관 범위 전체에 뒤덮인 검은 흙 사이사이로 비쳐 나오는 황금빛 광채! 조사단은 왕릉임을 직감했다. 흙을 제거하자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금관, 금과 유리를 섞어 만든 목걸이, 금팔찌와 금반지, 금허리띠가 가지런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종류나 수량 모두 천마총 등 여타 신라 고분을 압도했다. 이튿날 주요 일간지에 관련 내용이 보도되면서 이 무덤 주인공은 5세기대 신라왕으로 확정되는 듯했다. 그러나 발굴이 끝나갈 무렵 새롭게 노출된 은제 허리띠 장식에서 '부인대(夫人帶)'란 글자가 확인되면서 무덤 주인공의 지위는 왕비로 바뀌게 됐다. 

발굴이 끝난 후 이 무덤 속 유물 가운데 '물 건너온' 명품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고구려산 금귀걸이, 서역산 보석 장식 금팔찌, 중국 남조(南朝)에서 들여온 청동다리미와 도자기, 동로마와 페르시아산 유리그릇 등이 그것이다.
황남대총은 한 번 무덤을 쓴 다음 다시 사람이 나 물품을 추가로 묻을 수 없는 구조이다. 따라서 무덤 속 유물들은 왕비의 장례식 때 함께 묻힌 것이다.

이처럼 세계 각지의 여러 공방에서 정성스레 만든 명품들이 한 공간에 묻힌 것은 발굴 역사에서도 대단히 이례적인 일이다. 통상 그 이유를 둘러싸고 '글로벌 신라'를 강조하기도 하지만, 혹시 무덤 속 신라 왕비가 '못 말리는' 명품족이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6. 김해 대성동29호분에서 출토된동복(銅鍑)』-금관가야 왕릉에 유목민 솥단지가? 


김해 대성동 29호분에서 출토된 동복(銅鍑·청동솥). 높이 18.2㎝. /국립김해박물관 


1990년 6월 12일. 수로왕릉에 인접한 김해 대성동의 야트막한 언덕에서 발굴이 시작됐다. 금관가야 왕릉을 찾기 위해 경성대 박물관이 조사에 착수한 것이다. 금관가야 500년 왕도에 수로왕릉과 허왕후릉을 제외한 그 어떤 왕릉급 무덤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미스터리였다.
표토를 걷어내자 길이 10여m 무덤 구덩이 흔적이 드러났고 조심스레 내부를 노출한 결과 '철의 왕국' 가야의 무덤답게 쇠를 두드려 만든 갑옷, 말갖춤, 덩이쇠(鐵鋌) 등 수백 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금관가야 왕릉의 소재가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1991년 3월. 한 달 전 이미 '29호분'이라는 거대한 무덤의 윤곽은 확인했지만 그 위에 중복된 5기의 무덤을 차례로 조사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그제야 내부로 진입하게 되었다. 이해련 연구원은 수십 점의 토기와 철기가 가지런한 열을 이루며 출토되는 점에서 무엇인가 특별한 격식이 느껴졌고 이전에 발굴한 유물들보다 한 세기 이상 오래된 점에 주목했다.
옆자리의 동료에게 "혹시 이 무덤이 금관가야 최초의 왕릉은 아닐까?"라고 속삭였다. 기대는 곧 현실이 됐다. 이 연구원의 손길이 무덤 중앙부에 다다르자 그곳에서 두 귀를 쫑긋 세운 모양의 청동솥과 함께 권위를 상징하는 흑칠방패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유목민들이 유제품을 끓이거나 의례를 거행할 때 사용한다는 청동솥, 즉 동복(銅鍑)의 발견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 무덤은 현재 금관가야 최초의 왕릉으로 비정되고 있다.

대성동 고분군이 처음 발굴되었을 때만 해도 금관가야의 왕족 묘역을 찾았다는 점, 묘제와 유물의 격으로 보아 김해에 임나일본부가 존재했을 가능성은 사라졌다는 점에 주목했으나 동복 출토 이후에는 금관가야 왕족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동복이 공개되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도쿄대 명예교수는 자신의 기마민족설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고 역설했고, 발굴 책임자인 신경철 교수는 금관가야의 왕족이 부여에서 이동해왔다고 주장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7. 부안 죽막동에서  출토된 『장구 모양 그릇받침 조각』
- 백제·가야·왜, 제사 함께 지냈다


부안 죽막동 유적에서 출토된 장구 모양 그릇받침 조각. 높이 22.9㎝. /국립전주박물관 


1991년 12월. 국립전주박물관 조사팀은 변산반도로 향했다. 서해안에서 패총 유적을 찾아볼 셈이었다. 대상지인 적벽강에서 출발해 채석강까지 걸으며 유적을 찾기로 했다

몰입하며 걷다 보니 어느새 발길이 '군사시설보호구역' 죽막동 해안 절벽 위에 다다랐다. 오후 4시를 조금 넘겼을 뿐인데 주위는 벌써 어둑어둑했다. 유병하 학예사는 더 어두워지기 전에 조사를 마치고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이 바빠졌다. 설상가상 눈보라까지 몰아치자 일행 모두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교통로를 따라 빠르게 움직였다.

그때 토기 조각 몇 점이 유 학예사의 눈에 스치듯 들어왔다. 교통로 공사 중 유적이 훼손되면서 토기 조각들이 드러난 것이었다. 토기는 이웃한 대나무 숲과 자그마한 건물 즉, 수성당 주위까지 펼쳐져 있었다.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가 꽃삽으로 바닥을 조금 긁어내자 화려한 장식이 부가된 백제 토기 조각들과 함께 지름 3㎝ 가량의 원판 모양 석제품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키노시마(沖ノ島) 등 일본 제사 유적에서 종종 출토되는 미니어처였다. "아! 제사 유적이다." 바다 제사 유적의 존재가 국내 최초로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이듬해 5월 7일. 국립전주박물관은 이 유적에 대한 정식 발굴 조사에 나섰다. 3세기부터 조선시대까지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바다 제사의 흔적이 베일 벗듯 차례로 속살을 드러냈다. 유물 가운데 백제 토기가 가장 많았고 대가야산 토기와 철기, 왜에서 만든 토기와 미니어처 석제품과 함께 중국 남조산 도자기 몇 조각이 출토됐다.

백제 땅이던 변산반도의 절벽 위에 어떻게 백제·대가야·왜·중국 남조에서 만든 물건이 함께 묻힌 것일까? 항아 리에 담긴 대가야 유물, 다양한 종류로 구성된 왜의 미니어처 석제품으로 보면 적어도 백제·대가야·왜 등 세 나라 사람들이 함께 제사를 지낸 것은 분명해 보인다.
풍랑이 거세기로 유명한 죽막동 앞 바다의 높은 파도를 잠재우고 바닷길의 안녕을 빌기 위해 평소 그 길을 이용하던 세 나라 사람들이 '국제적 공조'를 이뤄 함께 제사를 거행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7. 황성동석실분에서 출토『 토제 여인상』
 - 포클레인 발톱 피한 '수로부인'의 고운 자태


황성동석실분 출토 토제 여인상. 높이 16.1㎝. /국립경주박물관


1987년 5월 19일. 경주 황성동에서 신라 석실분 발굴이 시작됐다. 조사단장인 이강승 국립경주박물관 학예실장, 발굴 책임을 진 동국대 이희준 교수는 분노를 억누르며 조사에 임했다. 이들이 분노한 것은 옛 무덤임을 알면서도 건설회사 측이 포클레인으로 유적을 두 번에 걸쳐 무참히 파괴했기 때문이다.

무덤 전체를 8조각으로 구획하고 서남쪽부터 조사를 시작했다. 곧이어 흙더미에서 자그마한 토용(土俑)이 연이어 출토되자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한 해 전 십이지와 토용 발굴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경주 용강동고분에 버금가는 중요 유적임을 알았기에 안타까움도 더욱 커졌다.

이어 동북쪽 흙 속에서 완전해 보이는 토용 1점이 모습을 보였다. 흙을 제거하자 반듯하게 엎드린 여인상의 윤곽이 드러났다. 깨끗이 세척하니 오른쪽으로 몸을 조금 비튼 채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여인이었다.

머리는 곱게 가르마를 타 뒤에서 묶었고 소맷자락에 파묻힌 왼손으론 부끄러운 듯 입을 살짝 가렸다. 오른손엔 술병을 들었고 긴 치마 앞으로 두 발끝이 살짝 드러나 있었다. 조사단은 헌화가 속 수로부인(水路夫人)을 떠올렸고 수로부인은 이 토용의 애칭이 됐다.

이 교수는 토용의 복식으로 보아 무덤의 조성 연대를 7세기 중엽으로, 주인공을 왕에 준하는 지위의 진골 귀족으로 보았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는 지증왕 3년(502년) 순장을 금지했다고 한다. 그 후 사후세계에서 함께 지낼 사람들을 흙으로 빚어 묻어주게 됐다 . 이 무덤 주인도 사랑스러운 '수로부인'과 함께하고 싶다는 소망을 유언으로 남긴 것은 아닐까?

석실분 훼손 사건을 계기로 경주 일원 유적들의 보호 필요성이 대두됐다. 1990년에는 인접한 곳에서 신라 초기의 대규모 제철단지가 발굴됐다. 이 교수는 무참히 부서진 황성동석실분의 음덕 때문에 지금까지 황성동 일대에서 중요 유적이 연이어 발굴될 수 있었다고 한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9. 창원 다호리 1호 무덤에서 출토된 『옻칠 된 대나무 바구니』,

- 도굴꾼 '無知' 덕에 살아남은 2000년 된 보물상자 



창원 다호리 1호 무덤, 옻칠 된 대나무 바구니, 길이 65㎝, 국립중앙박물관 



1988년 1월 하순. 국립중앙박물관 고고부에 제보가 접수됐다. 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창원 주남저수지 주변 동네 다호리에서 중요한 유물이 도굴되었다고 했다. 이건무 부장은 곧바로 이영훈 학예관, 윤광진 학예사를 대동하고 창원으로 향했다. 다호리 유적 일대는 처참했다. 유적이 분포된 논바닥 곳곳에서 도굴 구덩이가 확인됐다.

발굴에 착수한 것은 1월 21일. 혹한의 추위에도 무덤 속은 질퍽거렸다. 구덩이 안에서 도굴꾼이 흘리고 간 쇠도끼, 옻칠 된 부채자루 등이 수습됐다. 조사를 이어가던 윤 학예사가 소리쳤다. "부장님! 목관이 있어요. 통나무예요." 2000년 전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로 상태가 좋은 목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 희망을 가지고 목관 내부까지 다다랐으나 유물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목관을 수습하는 날. 끈을 넣어 목관에 감고 장비를 이용해 들어 올리는 순간 무덤 속에 있던 윤 학예사의 다급한, 그러나 환희에 찬 목소리가 다시 한 번 울려 퍼졌다. "쫙 깔렸습니다. 유물이 엄청 많아요." 목관을 들어 올린 다음 그 속을 바라본 조사단원들은 감격했다. 도굴꾼은 목관 아래에 유물이 묻혀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목관을 내릴 때 사용한 노끈, 요즘도 흔히 볼 수 있는 옻칠 목기, 제사를 지내면서 뿌려진 밤톨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특히 이목을 집중시킨 것은 수많은 보물이 가득 담긴 대나무 바구니였다. 이토록 보존 상태가 좋았던 것은 무덤 바닥에서 샘이 솟아 늘 촉촉한 상태 를 유지해주었기 때문이다.

이건무 부장은 바구니 속 유물 가운데 붓 5자루와 삭도(削刀) 1점에 주목하며 "고대사회 관리들이 문서행정을 할 때 사용하는 필수품으로 이미 2000년 전 변한(弁韓)에서 문자생활, 더 나아가 문서행정을 했음을 알려주는 결정적 자료"라 해석했다. 이토록 소중한 유물이 하마터면 도굴꾼의 손을 탈 뻔했다고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해진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0. 풍납토성 우물 출토에서 출토된  토기류,- 풍납토성 우물 속 龍王에게 지낸 제사




풍납토성 우물 출토 토기류, 높이 18.4㎝(앞줄 중간), 한신대학교박물관 



2008년 6월, 풍납토성 경당지구 발굴 현장을 지휘하던 한신대학교 권오영 교수의 머릿속엔 무거운 짐 하나가 남아 있었다. 206호라 이름 붙인 네모난 구덩이 때문이었다. 한 변 길이가 11m, 깊이가 3m나 되는 이 구덩이를 8년 전에는 연못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재발굴 시 구덩이 표면 한가운데서 둥근 돌무지가 드러나 목탑 터일 가능성을 고려하게 되었고, 다시 돌무지 하부에서 우물처럼 생긴 정연한 석축 시설이 드러난 것이다.

석축 너비가 120㎝밖에 되지 않았기에 한신대학교박물관 한지선 연구원이 혼자 들어가 조사를 맡았다. 6월 13일 정오 무렵 한 연구원은 돌로 쌓은 벽석 아래에서 나무로 만든 구조물과 함께 그 안에 가득 채워진 펄을 발견했다. 이 구덩이는 마침내 우물로 확정됐다.
한 연구원은 펄을 조심스레 걷어내기 시작했다. 그때 꽃삽 끝에 무언가 단단한 것이 걸렸다. 조심스레 드러내니 완전한 형태에 가까운 토기가 층층이 깔려 있었다. 완형만 헤아려도 215점. 그간 여러 유적에서 우물이 숱하게 발굴됐지만 이처럼 토기가 많이 묻힌 사례는 없었다.

발굴 책임을 진 권 교수는 우물의 구조와 주변 시설물을 토대로 어정(御井·왕의 우물)으로 추정했다. 더불어 토기 215점 가운데 충청과 전라 지역에서 제작한 것이 여러 점 포함돼 있고 그중 대부분에 제사 토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파손 흔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5세기 초 백제 어정에서 지배층의 결속을 다지는 성스러운 물의 제사가 거행된 것은 아닐까?" 추정했다.

고대인들은 우물을 신성시했다. 우물은 사람이 '탄생'시켰지만 그 속에 용왕이 산다고 생각해 우물을 폐기할 때 정중한 제사를 지내곤 했다. 바로 풍납토성 우물 속 토기도 폐기 제사에 사용한 일종의 제물이었던 것이다.

다만, 평소 잘 관리했을 이 어정이 왜 그 시점에 이르러 '죽음'을 맞게 되었는지는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삽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1. 경주 월지(月池)에서 출토된 『금동 초심지 가위』-일본과 교류 증명한 신라 가위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 보물 1844호, 길이 25.5㎝, 국립경주박물관 


1975년 3월 25일, 경주 월성 동편에서 발굴이 시작됐다. 넉 달 전 정식 발굴 조사 없이 안압지 준설공사를 하다가 다량의 유물이 드러나자 긴급히 실시하게 된 발굴이었다. 안압지는 바로 신라 궁궐 속 연못인 월지(月池)였다. 신라 문무왕 때 처음 만들어진 이 연못은 신라와 영욕을 같이했고 유물 3만여 점을 품고 있다가 이 발굴을 통해 고스란히 토해내게 된다.

4월 11일. 발굴을 시작한 지 2주를 넘긴 시점이었으나 아직 중요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조사원들은 연못의 호안석축 가운데 서쪽을 노출하는 한편 연못 내부 펄을 조금씩 제거해나갔다. 오후가 되어 석축 동쪽으로 1.1m 떨어진 지점에서 이색적인 풍모를 지닌 금동가위 1점을 발견했다. 색깔만 조금 변했을 뿐 당장 사용해도 좋을 정도로 생생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알코올로 조심스레 세척하며 살펴보다 범상치 않은 조형미와 세공 기술에 탄성이 절로 났다. 우선 형태부터가 남달랐다. 손잡이는 좌우로 조금 벌어졌는데 마치 두 마리의 봉황이 서로 머리를 교차하는 형상이었다. 표면 전체에 인동당초무늬가 빼곡히 조각되어 있고 물고기 알처럼 생긴 동글동글한 무늬가 여백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가윗날 윗면에 각각 반달 모양의 조각이 덧붙여져 있었는데 초의 심지를 자를 때 심지가 밖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고안한 것으로 추정됐다. 비록 초의 심지를 자르는 가위에 불과하지만 뛰어난 실용성, 멋진 조형미, 정교한 무늬를 두루 갖춘 명품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이 가위가 중요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이것과 매우 비슷한 모양의 가위가 일본 왕실의 보물창고 정창원(正倉院 )에 보관되어 있었던 것이다. 5월 6일, 이 가위가 공개되자 이튿날 주요 일간지에 '신라 문물의 일본 전수를 보여주는 증거'라 대서특필됐다.
신라 연못에서 우연히 출토된 가위 한 점이 신라 공예 문화의 우수성뿐만 아니라 신라와 일본 사이의 교류 관계를 생생히 전해주었다. 2014년에 이르러 문화재청은 이 가위의 가치를 공식적으로 인정해 보물로 지정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삽사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2.창녕 화왕산 자락 에서 출토된 『금동제 세발솥』-전란 피해 땅속에 묻었던 보물들 


금동제 세발솥, 입지름 11.25㎝, 창녕 말흘리 퇴장유구, 국립김해박물관 


2003년 7월 11일, 경남고고학연구소 조사단은 경남 창녕읍 화왕산 자락에서 발굴조사를 시작했다. 도로 개설 예정지인 말흘리에서 여말선초 건물지 흔적이 확인되었던 것이다. 발굴을 시작해보니 고려 때 처음 만들어져 조선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증축 및 개축된 사찰 건물터가 자리하고 있었고 곳곳에서 통일신라까지 소급하는 와전류가 출토됐다.

발굴 시한을 며칠 앞둔 8월 중순. 조사원들은 전혀 예상치 못한 유물을 무더기로 발견하곤 숨이 멎을 것 같은 전율을 느끼게 된다. 1호 건물지 서남쪽 모서리에서 발견된 10여 개 쇠솥 조각을 들어내자 지름 70㎝, 깊이 60㎝의 구덩이에 묻힌 쇠솥, 그리고 그 속에 가득 찬 통일신라 공예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쇠솥 맨 위쪽에는 길쭉한 손잡이를 갖춘 병향로(柄香爐), 다리가 셋 달린 솥, 자물통과 자물쇠, 귀면 장식 문고리가 쌓여 있었고 그 아래쪽으로는 다양한 무늬를 유려하게 새긴 금동제품 수백 점이 차곡차곡 채워져 있었다. 구덩이와 쇠솥 사이 빈 공간에서도 건물 추녀 끝에 매달았던 금동제 풍경이 19점이나 출토되었다. 모두 안압지나 황룡사지 출토품에 필적하는 보물급 문화재였다.

최종규 단장은 "불단을 장식했던 장엄구, 건물에 매달았던 풍경, 불교의식용 도구로 구성된 이 유물은 사찰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추정하면서 그것이 땅속에 묻히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로 전란을 지목했다.
약탈과 방화로 사찰의 존폐마저 걱정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아 후일을 기약하며 사찰 보물 가운데 일부를 땅속에 묻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학계는 이를 퇴장유구(退藏遺構)라 부른다.

고고학자에게 퇴장유구의 발견이란 쉽게 찾아오기 힘든 행운이지만, 전란의 소용돌이에서 보물을 다시금 찾아내지 못한 이들의 안타까움이란 상상 그 이상이었을 것이다. 영영 사라진 줄만 알았던 그 보물은 천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들과 조우하며 여전히 생명력을 발산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3. 대전 괴정동 고분에서 출토된 『방패모양 청동기』
 - 발굴 50주년 맞은 한국식 '명품' 청동기 


방패모양 청동기, 대전 괴정동 유적, 길이 16㎝, 국립중앙박물관 


1967년 8월 29일 이른 아침. 윤무병 국립박물관 학예관은 김원룡 서울대 교수 등과 함께 대전시교육청을 찾았다. 그곳엔 7월 초 대전 괴정동에서 밭을 갈던 주민이 '캐낸' 유물 12점이 보관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동검이나 청동거울처럼 눈에 익숙한 것도 있었지만 방패모양, 칼 손잡이모양, 둥근 뚜껑모양을 한 청동기 등 국내에서 처음 확인된 것도 여러 점 포함되어 있었다.
 
일행은 발굴 작업을 위해 유물이 발견된 곳으로 서둘러 이동했다. 현장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모여 그들을 기다렸고 유물이 발견된 구덩이는 다시 메워져 있었다. 오전 10시쯤부터 발굴을 시작해 표토를 제거하자 곧 무덤의 윤곽이 드러났다. 흙을 조금씩 제거하며 혹시 유물이 섞여 있는지 확인하는 과정에서 몇 점의 유물을 찾아냈고 조사는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윤 학예관은 이 무덤에서 출토된 동검이 세형동검 가운데 가장 오래된 형식으로 기원전 4세기 무렵 제작되었을 것으로 파악했다. 이어 그 시기가 되면 요녕식 동검을 사용하던 단계에서 벗어나 한반도적인 청동기 문화가 새롭게 개시되었고, 그때 등장한 청동거울, 작은 종모양 방울, 방패모양 청동기, 칼 손잡이모양 청동기, 둥근 뚜껑모양 청동기 등은 제사장의 소유물이었던 것으로 추정했다. 괴정동 유적 출토품은 그 시기의 정치적 군장이 제사장의 역할도 겸하고 있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괴정동에서 우연히 발견된 이 청동기들은 한국 청동기 문화의 성격을 잘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가치를 인정받아 1976년에 일본, 1979년에는 미국에서 열린 '한국 미술 5000년 전' 출품 유물로 선정되어 해외 나들이를 했고, 당시 언론들로부터는 '국위 빛낸 민족문화의 정수'로 평가받기도 했다.
1976년 아산 남성리, 1978년 예산 동서리, 2016년 군산 선제리에서 유사한 유물이 출토되었지만 괴정동 청동기들은 발굴 50주년을 맞이한 지금도 여전히 한국식 동검 문화를 대표하는 명품으로서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4. 고령 지산동 73호분에서 출토된 『 금동제 관식』
 - 가야 왕릉 순장자가 쓴 고구려式 鳥羽冠
 


금동제 관식, 지산동73호분, 높이(중간) 18㎝, 대가야박물관. 


2007년 5월 25일. 고령 지산동73호분에 대한 발굴이 시작됐다. 순장묘로 유명한 지산동44호분과 45호분 발굴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대가야박물관이 기획한 조사였다. 조영현 대동문화재연구원장은 감회가 남달랐다. 지산동45호분 발굴에 참여한 인연으로 옛 고분 연구에 평생을 쏟아온 그였기에 지산동고분군에서 왕릉급 무덤을 발굴하게 된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발굴의 정밀도를 높이기 위해 구조물을 만들고 그 위에 엎드려 무덤 내부를 노출했고 무덤 속에서 조사를 진행할 때는 유물의 안전을 위해 바닥이 말랑말랑한 고무신을 신었다. 발굴은 당초 예정 기일을 넘겨 다음 해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 지름 23m, 잔존 높이 3.4m에 달하는 이 무덤은 5세기 전반에 축조된 것으로 기왕에 발굴되었던 대가야 왕릉급 무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임이 밝혀졌다.


그런데 그 시점까지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남아 있었다. 지산동44호분에서 32개의 순장곽이 확인되었음에 비해 이 무덤에서는 겨우 1개가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그 의문은 곧 풀렸다. 내부 조사 종료 후 묘광과 목곽 사이에 채워진 돌무더기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숨겨져 있던 3개의 순장곽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특히 서쪽 순장곽에 묻힌 30대 남성의 머리에서는 금동제 관식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다. 조 원장은 "신라 관식과 외형이 유사하며, 이러한 장식품을 소유한 순장자는 사회적 지위가 낮지 않았고 무덤 주인공과 매우 가까운 인물이었을 것"이라 해석했다.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가는 모습을 한 금속제 관은 중국 역사가들이 동이(東夷 )의 특징으로 기록한 '조우관(鳥羽冠)'에 해당한다. 고구려에서 유행한 조우관이 남쪽으로 전해져 신라뿐만 아니라 가야에서도 유행했음을 지산동73호분 금동제 관식이 잘 보여주었다.

지산동고분군에서는 그 밖에도 백제와 신라적 요소가 부분적으로 녹아든 유물이 다수 발굴됐다. 가야가 다른 나라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자기화하였음을 생생히 보여주는 증거라 하겠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5. 경주 천마총 에서 출토된 장니(障泥)의 천마도

- '1500년 어둠' 견딘 기적, 신라 천마도



장니(障泥) 천마도, 국보 207호, 국립경주박물관, 길이(가로) 73.2㎝.



1971년 우연히 발굴된 백제 무령왕릉은 한국 고고학계에 예상치 못한 변화를 불러왔다. 이 발굴에 큰 관심을 보인 대통령이 신라왕릉 발굴을 직접 지시하면서 신라고분 발굴 붐이 일게 된다. 문화재관리국은 당초 길이가 120m에 달하는 98호분을 발굴하기로 했지만, 자신이 없었기에 인접한 155호분을 먼저 '연습 삼아' 파보기로 했다.

1973년 4월 6일 발굴이 시작됐다. 155호분은 98호분보다는 작았으나 지름 47m, 높이 12.7m의 크기여서 발굴이 만만치 않았다. 7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은 발굴 현장을 찾아 98호분 발굴에 조속히 착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발굴의 무게중심이 98호분 쪽으로 쏠리는 듯했다.

그러던 차에 7월 15일 금제 관식 출토 사실이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155호분은 관심을 회복했다. 열흘 후 금관이 출토되자 이 무덤은 '왕릉급'으로 지위가 격상됐고, 김원룡 서울대 교수는 지증왕릉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것은 서막에 불과했다. 최고의 보물은 여전히 어두운 무덤 속에서 고고학자들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8월 22일 부장품 궤짝에 쌓인 말갖춤을 들어 올리자 그 아래에서 갈기를 휘날리며 하늘을 나는 모습의 천마도가 모습을 드러냈다. 자작나무 껍질 위에 찬연한 색조로 그려진 유려한 그림 2장. 이 장면을 두고 발굴을 담당한 지건길 학예사는 "화공이 막 붓을 놓은 듯 생생함이 묻어났다"고 했고, 최병현 조사원은 "모두의 입에서 감탄의 신음이 길게 이어졌다"고 회고했다. 천마도 발굴로 이 무덤은 1974년 10월부터 천마총이란 새로운 이름을 가지게 됐다.

신라 회화가 1500년 동안 원래의 모습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었고, 돌무지와 흙더미로 구성된 봉분의 엄청난 무게를 견뎌낸 것은 실로 기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발굴 후 그림의 색깔이 일부 퇴색했고 그림 속 동물이 천마인지 상상의 동물 기린인지 논란이 일기도 하였지만, 천마도는 신라인의 예술 세계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최고의 명작임이 틀림없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6. 익산 입점리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백제 금동관이 증명한 일본 고분의 韓流


금동관, 입점리1호분, 국립전주박물관, 너비(하부) 14.8㎝.


1986년 2월 2일, 일요일 아침이었다. 익산 입점리에 거주하던 임성수 학생(당시 고교 1년)은 칡뿌리를 캐러 동네 뒷산에 올랐다. 산 정상부 가까운 곳에서 토끼 굴처럼 생긴 구덩이를 발견한 그는 호기심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 속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공간 속엔 난생처음 보는 보물들이 쫙 깔려 있었다.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무덤 속 유물을 들어내기 시작했다. 사적 제347호 익산 입점리 고분군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임군은 반출한 유물 48점을 자신의 집으로 가져갔다가 4일 만에 당국에 신고했다. 현지로 급파된 문화재관리국 김기웅 전문위원과 윤근일 학예사는 신고유물 가운데 금동관과 금동신발뿐만 아니라 중국 청자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긴급 발굴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2월 27일 문화재연구소 조사단이 발굴을 시작하자 곧 무덤의 전모가 드러났다. 돌을 쌓아 만든 횡혈식석실분이었는데 공주 송산리 고분군을 비롯한 백제 왕족 무덤과 같은 구조였다. 발굴 결과 임군이 미처 발견하지 못한 금동관 조각, 금귀걸이, 유리구슬, 화살통부속구 등이 남아 있었다.

이 소식은 언론에도 알려져 '무령왕릉보다 앞선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 '익산고분, 에다후나야마 고분 문화의 원류'라는 제하에 대대적으로 보도됐다. 고깔 모양 뼈대에 꽃봉오리 모양 장식이 부착된 입점리 금동관의 외형이 일본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 출토품과 비슷했기에 주목받은 것이다.
1986년 이전에는 에다후나야마 고분 금동관의 제작지를 왜(倭)로 보는 견해가 다수였지만, 입점리 고분에 이어 2003년 공주 수촌리 고분군에서도 흡사한 금동관 2점이 발굴됨에 따라 백제로 보는 견해가 많아졌다.

한겨울 가파른 산 위에서 우연히 발견한 백제고분 1기. 정식 발굴 이전에 유물 대부분이 반출되어버린 아쉬움도 있지만 이 무덤에는 잃어버린 백제사의 한 페이지를 복원할 수 있는 여러 정보가 들어 있었다. 특히 백제가 바다 건너 왜와 어떤 방식으로 교류했는지 생생히 보여주는 근거로 활용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7. 감은사 서삼층석탑의 『사리 장엄구』 - '문무왕의 화신' 龍이 머물던 감은사지


감은사 서삼층석탑 사리장엄구(외함), 보물 366호, 높이 21.6㎝, 국립중앙박물관.


1959년 10월 30일 금요일. 경주 감은사지 발굴이 시작됐다. 광복 후 처음 실시하는 절터 발굴이었기에 김재원 국립박물관장을 비롯한 조사단원은 모두 긴장했다. 특히 훗날 '발굴왕'의 명성을 얻는 김정기 학예관도 이 발굴을 위해 특채된 신예였다.

조사원들이 주목한 것은 금당 터였다. 신라 문무왕의 화신인 용이 들어와 머물 수 있도록 금당 섬돌 아래에 구멍을 뚫어놓았다는 삼국유사의 신이한 기록을 확인해 볼 참이었다. 발굴 5일째. 편평한 석재와 돌기둥을 조립해 만든 시설이 전모를 드러냈다.
건물 바닥에 공간을 두기 위해 마련한 특별한 구조였기에 조사단원 모두는 환호했다. 다만 일제강점기에 이 구조물을 방공호로 사용하는 바람에 일부 훼손된 점이 아쉬웠다. 이어 12월 12일까지 중문, 강당, 회랑 등 사찰의 평면 구조를 확인한 다음 발굴 조사를 종료했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문교부는 같은 해 성탄절부터 보존 상태가 나빴던 감은사지 서쪽 석탑에 대한 해체 공사를 시작했고 감은사지 발굴을 진행한 국립박물관에 감독을 맡겼다. 탑 부재를 해체하던 중 12월 31일에 이르러 3층 탑신에서 창건 당시의 사리장엄구를 발견했다.
예기치 못한 일이었고 보존과학자가 없던 시절이라 고고학자들이 직접 유물을 수습했다. 훗날 1996년에 동쪽 석탑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사리장엄구에 비해 보존 상태는 좋지 않았지만 불법(佛法)의 수호신 사천왕, 음악을 연주하는 악사 조각과 함께 유려한 문양이 다양하게 표현돼 있어 7세기 후반 신라 공예 문화의 빼어난 수준을 유감없 이 보여주었다.

인생의 황금기를 전장에서 보내며 나라를 지켰고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도 "내가 죽으면 반드시 동해에 장사 지내라. 죽어서라도 호국의 용이 되어 왜구의 침입을 막을 것"이라 유언한 '신라 바보' 문무왕, 불법이란 큰 그릇에 부왕의 호국 의지와 자신의 효심을 담아낸 신문왕. 감은사지 발굴은 이 두 신라 왕을 전설의 숲에서 역사의 무대로 옮겨주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8. 부여 송국리 석관묘에서 출토된  동검(銅劍)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존재 증명한 송국리 銅劍
 


동검, 부여 송국리 석관묘, 국립중앙박물관, 길이 33.4㎝.


1974년 4월 19일. 김영배 국립중앙박물관 공주분관장은 공주사대 안승주 교수와 함께 부여로 향했다. 3년 전 공주 남산리 유적 발굴 현장에서 일했던 최영보씨가 도굴 위험이 있는 옛 무덤을 발견했으니 급히 와달라고 연락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도착한 곳은 부여군 초촌면 송국리의 야트막한 야산이었다. 최씨가 안내한 곳엔 돌판을 조립해 만든 무덤의 일부가 드러나 있었다. 파괴된 고분일 것이라 추측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표토를 벗겨 내자 곧 길이가 2.6m나 되는 석관묘의 뚜껑돌 윤곽이 드러났다. 마을 주민 20여명과 함께 뚜껑돌을 들어 올렸다.

무덤 속에 쪼그려 앉아 꽃삽으로 연방 흙과 돌을 제거하던 김 분관장은 마침내 한 무더기의 돌화살촉과 함께 사진에서나 볼 수 있었던 '특별한' 동검을 발견했다. 그는 차분하게 발굴을 계속했지만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을 주민들은 모두 환호의 탄성을 터트렸다.
국내에서 처음으로 요령식동검(遼寧式銅劍)이 발굴되는 순간이었다. 주변에선 마제 석검도 출토됐다. 훗날 김 분관장은 "마치 무령왕릉 입구를 열었을 때 느꼈던 그 경이와 흥분이 재현되는 듯했다"고 회고했다.

같은 해 10월 8일. 국립중앙박물관은 유물을 공개했다. 한병삼 고고과장은 "마제 석검이 세형동검을 모방했다는 일본 학계의 주장은 근거가 없어졌으며 우리나라 청동기시대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이라 설명했 고, 주요 언론에는 '선사고고학 최대 발견' '한반도 청동기시대의 존재 확증' '60년 만에 무릎 꿇린 일본 학설' 등으로 대서특필됐다.

주민 신고로 우연히 발굴된 동검 한 자루가 한국 고고학계가 품고 있던 고민을 일소했고, 국가사적 '부여 송국리유적'을 찾아내는 실마리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청동기문화의 기원 및 성격을 해명하는 신호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19.  남원 월산리 M5호분에서 출토된 철제 갑주』 -  명품 갑주, '메이드 인 가야'


철제 갑주, 남원 월산리 M5호분, 높이(투구) 29.5㎝, 국립전주박물관.


2010년 6월 28일. 전북문화재연구원 조사단은 남원시 아영면 소재 월산리 고분군 발굴에 나섰다. 대형분 3기가 고속국도 확장공사 구간에 포함됐기 때문이다. 그중 M5호분은 주변이 밭으로 개간되는 과정에서 일부 훼손됐으나 잔존 봉분의 지름이 16.6m에 달했다.

무덤 내부를 조사한 결과, 주인공을 안치한 중심부는 이미 도굴꾼이 훑고 지나가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으나 석곽 양 단벽 쪽에 유물이 무더기로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벽석과 덮개돌이 무너지며 '안전 공간'을 만들었던 것이다.

북쪽을 맡은 김규정 실장이 흙 일부를 제거하자 청자가 살짝 모습을 보였다. "고려청자?" 일순 당황했으나 곧 닭 머리 모양이 드러나 중국 남조(南朝)의 계수호(鷄首壺)임을 알게 됐다. 지금까지 가야 유적에서 발굴된 유일한 자기로, 월산리 M5호분이 5세기 후반에 만들어졌음을 알려주는 기준 자료가 됐다.
이어 남쪽에선 겹겹이 쌓인 가야 토기, 각종 마구와 함께 철제 갑주가 출토됐다. 투구는 위쪽이 고깔 모양이고 눈썹 사이 장식과 챙, 볼 가리개를 갖추고 있었다.

조사단은 국립전주박물관에 급히 도움을 요청했다. 10월 24일. 이영범 학예사는 철기를 수습했고 1년 9개월 만에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으며, "이 갑주에는 철기 제작에 사용되는 주요 기술이 모두 구현돼 있어 1500년 전 만든 것이라 믿기 어려울 정도"라는 소회를 밝혔다.

근래 한·일 고고학자들 사이에서 '철의 왕국' 가야의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가야 고분에서 출토된 갑주 가운데 상당수, 심지어 대 가야의 왕도인 고령 출토품까지 왜(倭)로부터 수입된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 일본 고분 속에서 갑주가 다량 발굴됐다는 점이 근거다.
그러나 남원 월산리 M5호분 출토품을 비롯해 근래 발굴된 가야 갑주에서 가야적인 특색이 속속 확인되고 있다. 머지않아 '당대 최고 수준' 가야 갑주를 휘감은 베일이 벗겨지게 되리라는 기대가 차츰 높아지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0. 경주 계림로 출토 보검』(보물 제635호), 계림로 14호묘,
- '글로벌 신라'의 징표, 계림로 보검


경주 계림로 보검, 보물 제635호, 계림로 14호묘, 길이 36.8cm, 국립경주박물관.


1973년 6월 12일 오후 4시쯤. 국립박물관 경주분관 강우방 학예사는 계림로(鷄林路) 발굴에 임하던 이종성 직원으로부터 다급한 연락을 받았다. 3일 전 발굴을 시작한 14호묘에서 금제 허리띠가 출토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규모가 작은 무덤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반신반의하며 한걸음에 달려갔다.

무덤 주인공의 허리 부위에서 이제 막 모습을 드러낸 황금 장식은 흙 속에 절반 이상 파묻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찬연한 금빛을 내뿜고 있었다.

발굴 소식은 삽시간에 경주시내 곳곳으로 퍼져 나갔고 이튿날 한 신문에 '경주고분서 순금허리띠 발굴, 해방 후 처음'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되자 구경하려는 사람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서둘러 유물을 수습, 박물관으로 옮긴 다음 흙을 말끔히 제거하니 허리띠가 아닌 황금 보검이었다.

이 보검은 '국보급' '신라 공예 문화의 정수'라는 찬탄을 한몸에 받았고 7월 25일 발굴된 천마총 금관과 쌍벽을 이루는 유물로 평가받았다. 발굴이 끝나고 연구가 진전되면서 이 보검은 신라산이 아닌 서역산으로 밝혀졌다. 그에 따라 '신라 금속공예품의 지존' 자리를 잃게 되었지만 그 대신 글로벌 신라의 징표로 더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발굴된 서역산 보검이 어떤 과정을 거쳐 머나 먼 신라까지 전해졌는지 등 계림로 보검을 둘러싼 여러 의문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그럼에도 이 보검은 5~6세기 신라인들이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수용한 새로운 문물이 신라의 잠재력을 일깨워 신라인 스스로 '덕업일신(德業日新) 망라사방(網羅四方)'이라는 담대한 지향을 세우는 데 촉매가 되었음을 웅변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1.경주 조양동 38호 묘의 『한경(漢鏡)』- '신라 건국' 비밀 푼 조양동 유적

 

한경(漢鏡), 경주 조양동 38호 묘, 지름 8.0cm, 국립경주박물관. 



1981년 11월 4일. 국립경주박물관 조사단은 불국사와 지근 거리에 있는 경주 조양동에서 발굴 조사를 시작했다. 주민 신고로 우연히 알려진 이 유적에 대한 네 번째 발굴이었다. 조사는 '굴귀(掘鬼)'라던 최종규 학예사가 진두지휘하고, 그를 따르던 안재호, 우지남 등 20대 고고학도 10여 명이 보조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겨울 보리를 파종한 밭에 구획하고 표토를 제거하자 무덤 여러 기의 흔적이 드러났다. 그 가운데 북서쪽 모퉁이에서 확인된 무덤부터 파기로 했다. 이 무덤이 바로 유명한 '조양동 38호 묘'다. 무덤 규모는 길이 258㎝, 너비 128㎝였다. 최 학예사는 정밀 조사를 통해 무덤 내부에 목관이 있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깊이가 150㎝ 정도였기에 11월 하순이 되어서야 비로소 바닥에 도달할 수 있었다. 무덤 속에서는 청동기, 철기, 토기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가운데 백미는 중국 한나라 청동거울 4점이었다. 최 학예사는 이 거울의 연대를 검토한 다음, 조양동에서 발굴한 무덤과 유물이 미지(未知)의 세계로 남겨져 있던 신라 초기 300년 동안 만들어진 것이라 주장했다.

그해 11월 27일 오후. 한병삼 국립경주박물관장이 "신라 건국 전후 시기의 유물이며, 설화 시대로 취급됐던 신라 초기의 역사가 사실로 확인되었다"며 조사 성과를 공개했다. 그 내용이 '밭에서 쏟아진 신라 건국 설화' '혁거세 왕 추대 확인할 물증' '신라 역사 수백 년 앞당겨' 등으로 여러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학계와 시민들의 반향은 뜨거웠다. 


그 후 같은 시기의 취락, 무덤, 제철 유적 등이 연이어 발굴되면서 신라 초기 역사에 대한 연구가 본격화됐다. 최 학예사는 훗날 "우연한 발견이었다. 단 하루 동안의 이 우연한 발굴물 연구에 나의 청춘이 흘러갔다"고 회고했다. 그 '하루'가 오랜 세월 봉인되어 있던 신라 건국의 역사를 드러내 밝히는 단초가 되었다. 이 발굴에 참여한 조사원들은 각지로 흩어져 한국 고고학 발굴 기술의 혁신을 불러왔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2.대전 월평동 유적의『현악기 양이두(羊耳頭)』-'전선야곡'연주에 쓰인 백제현악기 


1994년 8월 23일. 충남대박물관과 국립공주박물관 관계자들은 대전 월평동 유적을 발굴하기 위해 갑천변 야산 위에 모였다. 4년 전 이곳에서 정수장 확장공사를 하다 유적이 훼손됐고 때마침 주변을 지나던 시민이 그 장면을 목격, 신고함에 따라 발굴로 이어진 것이다.

9월 12일. 김길식 국립공주박물관 학예사는 좁고 깊은 도랑을 파다가 고운 진흙에 뒤덮인 목제 구조물 일부를 발견했다. 주변을 깨끗이 정리하니 네모난 구덩이 속에 상수리나무로 만든 정방형 구조물이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었다. 한 변의 길이가 5.2m, 잔존 높이가 1.7m나 됐다. 이 구조물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하던 중, 그 소식이 외부로 전해졌고 급기야 한 신문에 '대전에서 낙랑 목곽묘 발굴'이라 보도되기도 했다.



현악기 양이두, 대전 월평동 유적, 길이(상하) 9.2㎝, 국립공주박물관


김 학예사는 진흙이 품고 있던 다양한 유기물을 수습하며 한 달가량 노출을 계속했고 이 구조물이 무덤이 아닌 지하 창고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바닥에는 사다리를 비롯해 각목 다발, 말안장, 그릇, 주걱 등 다양한 목제품과 함께 작은 나뭇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유물 가운데 일부는 보존처리를 위해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이용희 학예사는 그중 8개의 구멍과 어딘가에 끼울 수 있는 홈을 갖춘 나뭇 조각이 악기임을 직감했다. 자료를 찾던 그는 비록 12현을 갖춘 것이지만 일본 정창원 소장 신라금(新羅琴)의 머리, 즉 양이두(羊耳頭)와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 전율했다. 백제 현악기 실물이 처음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유적 훼손 현장을 신고하지 않았다면, 목곽고 바닥 판재를 수습하지 않았다면, 나무 조각이 악기의 일부임을 밝혀 내지 못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월평동 현악기는 우연과 필연을 넘나들며 지금 우리와 조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월평동 유적은 백제의 최전방에 위치한 산성이다. 전장(戰場)과 현악기는 어색한 조합 같지만 전장에서 악기와 그것이 빚어내는 선율은 불가결한 요소다. 이 악기도 백제 군사들이 지녔을 두려움과 그리움을 덜어주던 '전선야곡' 연주에 쓰인 것은 아니었을까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삽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3.신안 해저선의 『물소를 탄 동자 모양 백자연적』 - 신안 앞바다서 건진 '노다지'


1975년 8월 전남 신안군에 거주하던 어부 최형근씨는 증도에 딸린 작은 섬 도덕도 해상에서 그물질을 하다 자기(瓷器) 6점을 건졌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 집에 두었던 자기를 무안에서 교사로 근무하던 동생 최평호씨가 목격해 신안군청에 신고했고, 문화공보부는 평가회의를 거쳐 보상금을 지급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도덕도 앞바다는 도굴꾼들의 표적이 되었고 도굴 감시 요원을 매수해 도굴을 자행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검경의 도굴범 체포와 장물 압수가 이어졌으나 역부족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은 해군의 지원을 받아 2차에 걸쳐 긴급 조사를 진행, 다량의 유물을 인양했고 선체가 해저에 묻혀 있음을 확인했다.



물소를 탄 동자 모양 백자연적, 신안 해저선, 높이 6.7㎝, 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사실이 '노다지 쏟아진 바다의 무덤', '탄성과 흥분의 노다지 해저' 등으로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신안 해저 유물은 국민적 관심사로 떠올랐다. 급기야 1977년 1월 29일 박정희 대통령은 문화공보부 연두순시 석상에서 이 유물을 전시하기 위해 광주에 국립박물관을 신축하라고 지시했다.

1977년 6월에 시작된 3차 발굴은 이전 발굴과는 차원이 달랐다. 시계가 좋지 않은 악조건 속에서도 수천 점의 유물이 어느 위치에서 수습되었는지를 하나하나 기록하며 발굴을 이어갔다. 3차 발굴까지 인양한 주요 유물은 그해 10월 18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일반에게 공개됐다. 전시품 가운데 가장 주목받은 것은 물소를 탄 동자 모양 백자연적과 고려청자 매병이었다.

발굴은 계속 이어졌고 1984년 9월에 이르러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9년간의 발굴에서 선체와 함께 2만4000여 점 의 물품, 약 800만 개의 동전 등이 인양됐다. 신안 해저선은 1323년 원나라를 출발, 일본으로 향하던 무역선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배의 침몰은 크나큰 비극이지만, 그 배는 14세기 동아시아를 마치 타임캡슐처럼 고스란히 간직한 '보물선'으로 재탄생했다. 이 발굴은 국내 수중 발굴의 신호탄이 되었고 그때의 경험은 이후 수많은 침몰선 발굴의 토대가 되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4. 부여 규암면 외리 유적의 『산경문전(山景文塼 : 보물343호)』

-'이산가족'된 백제 미술의 정수

 


산경문전(山景文塼), 보물343호, 외리 유적, 국립중앙박물관


1937년 4월 18일. 조선총독부 고적조사사무촉탁 아리미쓰 교이치(有光敎一)는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나무뿌리를 캐던 농부가 우연히 문양전을 발견, 신고한 게 계기가 되어 보름간 긴급 조사를 실시하게 된 것이다.

조사 대상지는 야트막한 야산의 서쪽 사면이었는데, 농장이 들어서면서 원지형이 크게 훼손됐고 오래되지 않은 무덤 20여 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어디를 어떻게 발굴할까 고민하다 유물 발견 지점부터 파보기로 했다. 교란된 구덩이를 기점으로 북으로 가면서 흙을 조금씩 제거하니 기와편과 점토를 교대로 쌓아 만든 담장 기초 시설이 노출되기 시작했고 북쪽으로 9m나 이어졌다.

담장 시설 바깥쪽을 더 파내자 문양전(文樣塼) 30개가 보도블록처럼 깔려 있었다. 물로 씻어가며 문양을 표출하니 화첩을 길게 펼쳐낸 듯 유려한 무늬가 파노라마처럼 드러났다. 연꽃, 구름, 봉황, 용, 괴수 등 삼국시대 유물에서 종종 보이는 무늬가 많았지만 특이한 것도 있었다.

날카롭게 솟은 암벽과 동글동글한 산, 그리고 산 위에 오밀조밀 심어진 나무에 이르기까지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키는 도안이었다. 더 세밀하게 살피니 봉황, 스님, 절이 조각된 것도 있었다.

5월 3일 조사를 마칠 때까지 정연(整然)한 건물지는 찾아내지 못했지만 예상보다 많은 양의 유물을 수습했다. 문양전은 8가지 종류였고 전체 150여 점 가운데 완형은 42점이었다.

이 문양전 가운데 일부는 1963년에 이르러 보물로 지정됐다. 그런데 이 유물들 은 현재 국내에 모두 남아 있지 않다. 발굴 후 조선총독부 외곽 단체인 조선고적연구회가 외리에서 발굴된 문양전 12점을 도쿄 제실박물관(현 도쿄 국립박물관)과 교토대학에 임의로 기증함에 따라 백제 미술의 정수는 이산가족 신세가 돼 버렸다.

문화유산도 식민지 시기의 고통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외리 문양전에는 그때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채 아픔으로 남아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5. 경주 월성로 가-13호 묘에서 출토된 『로마 유리그릇』

 -하수관 아래서 찾은 '신라史 퍼즐' 한 조각




로마 유리그릇, 월성로 가-13 호묘, 국립경주박물관.



1985년 3월 경주는 전국소년체전 준비로 부산했다. 환경미화 차원에서 월성로(月城路)의 아스팔트를 다시 포장하고 좌우에 매설된 하수관을 교체하기로 했다. 공사를 발주받은 건설회사는 중장비를 이용해 예전에 매설된 하수관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점의 토기가 노출됐다. 불행 중 다행으로 경주박물관 직원이 그 장면을 목격, 공사가 중단됐다


3월 22일, 경주시의 요청으로 현장에 투입된 최종규 학예사 등 경주박물관 조사원들은 난감했다. 하수관 매립 부지이다 보니 발굴 구역의 너비가 채 2m가 되지 않을 정도로 좁았다. 기존 하수관을 이미 철거해 버린 터라 민가에서 배출한 오폐수가 수시로 밀려들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고 애써 발굴한 유물들은 매몰되기 일쑤였다.

악조건하에서도 어떤 유물이 언제 나타날지 알 수 없었기에 긴장은 계속됐다. 이윽고 경주에서는 출토되지 않았던 4세기 토기들이 무더기로 모습을 드러내자 조사원들은 일제히 환호했다. 오랜 세월 땅속에 숨겨져 있던 '신라사의 퍼즐' 한 조각을 찾아낸 것이었다.

발굴 과정에서 가장 많이 출토된 유물은 수백 점에 달하는 토기였다. 약 2세기 동안 만들어진 이 토기들은 신라 토기의 양식 변천 과정을 잘 보여주었다. 유물 가운데는 이국적 풍모를 지닌 것도 여러 점 있었다. 로마 유리그릇, 고구려산 연유토기, 왜(倭)로부터 반입된 돌 팔찌와 적색토기 등이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금 그릇과 금 귀걸이도 출토됐다.

발굴은 시작 3개월 만인 6월 하순에 종료됐다. 좁디좁은 도랑 속에서 찾아낸 신라 무덤은 56기에 달했다. 무덤의 일부만을 발굴할 수 있었고 발굴하지 못한 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도로 아래에 그대로 묻혀 있다. 한계가 많았지만 월성로 하수관 아래서 발굴된 신라 무덤과 유물들은 4세기 신라의 중심지도 그 이후와 마찬가지로 경주 시내였음을, 그 시기의 신라가 사서(史書)의 기록처럼 성장을 거듭하던 '다이내믹'한 나라였음을 웅변해주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6.공주 송산리 4호분에서 출토된 『은제 허리띠 장식』

 - '나제 동맹 물증' 송산리 허리띠 장식


1927년 4월 30일. 공주군보승회장 명의의 공문이 조선총독부로 접수됐다. 공주군 장기면에 백제 무덤으로 전해지는 무릉(武陵)이 있는데, 백제문화 해명과 지역 발전을 위해 발굴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조선총독부는 계룡산 학봉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발굴하던 촉탁 노모리 겐(野守健) 일행에게 무릉 발굴을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14일. 노모리 겐 일행이 무릉이라 불리는 곳 여기저기를 파보았지만 무덤이라는 근거를 찾지 못했다. 발굴을 중지한 그들은 대신 발굴할 곳을 모색했다.
그때 공주군수로부터 "금년 3월 송산리에서 고분이 도굴됐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튿날 바로 조사를 시작해 9일 만에 백제 왕릉급 무덤 4기를 발굴했다. 유네스코 지정 세계유산 송산리고분군은 이처럼 우연한 기회를 통해 세상에 알려졌다.


은제허리띠장식, 송산리4호분, 국립공주박물관

무덤은 깬돌을 차곡차곡 쌓아올려 만든 석실분이었고 도굴꾼들이 훑고 간 자리에는 목관 조각과 함께 약간의 유물이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 눈에 띈 것은 은제 허리띠 장식으로, 혁대에 부착하는 네모난 부품 아래에 하트형 수식이 달려 있었다.

발굴 후 이 유물은 오랫동안 백제산으로 여겨졌지만 연구가 진전되면서 5세기 말 신라에서 전해진 것임을 알게 되었다. 신라 귀족들의 전유물이던 허리띠가 어떤 연유로 백제 왕족 무덤에 묻힌 것일까?
교류 과정에서 수입한 것으로 보기도 하나 그 무렵 백제에 이미 백제만의 관복이 있었기 때문에 국왕이 주관하는 공식 행사에서 다른 나라 관대를 착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송산리 4호분이 만들어지던 5세기 말 백제에겐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나 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동성왕은 곳곳에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하고, 493년 국혼(國婚)을 통해 신라와의 공조를 강화했다. 송산리 4호분에 묻힌 인물을 이 국혼의 여주인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만약 그렇다면 이 유물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국에서 살아야만 했던 신라 출신 왕비의 소중한 보물이자 나제(羅濟)동맹의 생생한 물증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7. 경주 황성동 유적에서 출토된 『토제거푸집』 -제철 기술로 폭풍 성장한 신라




토제거푸집, 경주 황성동유적, 국립경주박물관



1989년 8월 24일. 경주 황성동 주공아파트 신축 부지에서 유적 존재 여부를 확인하던 경주박물관 연구원들은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무더기로 발견했다. 거푸집에 오목하게 패인 홈이 신라 무덤 출토 쇠도끼와 비슷했다. '신라가 어디서 어떻게 철기를 만들었을까?'라는 오랜 숙제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환호했다.

1990년 4월 22일. 경주박물관·경북대박물관·계명대박물관이 공동으로 조사단을 꾸려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다. 조사를 시작하자마자 철기 생산의 여러 공정을 보여주는 흔적들이 차례로 드러났다.

석 달 뒤 이영훈 경주박물관 학예관은 유적의 성격을 "주조와 단조 공정이 공존하는 신라 초기의 제철 단지"라 설명했고, 그 내용이 언론에 공개되자 학계의 반향은 뜨거웠다.

8월 27일에 전해진 황성동 유적 시료 분석 결과서에 '자철광이 원료로 사용되었고 철에 비소(砒素)가 다량 함유되어 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적혀 있었다. 우리나라 철광산 중 비소의 함량이 높은 곳은 울산 달천광산이므로 황성동 제철 단지에서 사용한 철광석 산지가 울산에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황성동 일대에서는 제철 유적과 함께 제철에 종사하던 대장장이들의 마을과 무덤이 다수 발굴됐다. 조사 결과 유적은 경주 시가지의 서쪽을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형산강 동쪽에 넓게 분포하며, 마을과 무덤은 서로 조금 떨어져 있고 그 중간 지대에 생산 시설이 밀집해 있음이 밝혀졌다.

고대 사회에서 철기는 매우 중요한 재화였다. 황성동 유적은 신라가 초기부터 국가 차원의 철 생산 시스 템을 갖추고 있었음을 잘 보여주었다. 중국 역사서 삼국지(三國志)에 '변진(弁辰)에서 생산된 철을 중국 군현에 공급한다.

마한, 동예, 왜(倭)도 와서 사간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로 보면 철 생산지인 변진은 신라일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선진적 제철 기술이 4세기 이후 신라의 폭풍 성장을 이끈 견인차라 평가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8. 공주 공산성에서 출토된 『갑옷 조각』-백제 '최후의 날' 함께한 공산성 갑옷




갑옷 조각, 공산성, 공주대 박물관


2011년 4월 5일. 이남석 관장을 비롯한 공주대 박물관 조사단은 공주 공산성 공북루 앞 광장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그곳에 큰 마을이 있었기 때문에 유적 대부분이 훼손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시굴 조사 때 지하 5~7m 지점에 백제 유적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

당초 9월까지 조사를 끝낼 예정이었으나 저수 시설 안에서 유물이 쏟아져 나와 발굴을 연장했다. 때마침 공산성에서 백제 문화제 프로그램을 시행해서 며칠간 조사를 중단했다. 행사 마지막 날인 10월 9일 오후 조사를 재개한 이현숙 학예사는 비늘 모양 옻칠갑옷 조각을 발견했다.

그 후 이 학예사는 백제 초유의 옻칠갑옷 조사에 집중했다. 습기를 유지하며 온전한 상태로 노출해야 했기에 숨쉬기도 힘들었다. 10월 11일 오후 2시쯤 저수시설 속에서 홀로 조사를 이어가던 이 학예사는 일순간 깜짝 놀랐다.


대칼로 부드러운 진흙 덩어리를 떼어내자 검은색 갑옷 조각에 유려한 필체로 써내려간 붉은색 글자들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행정관십구년(行貞觀十九年)'. 정관은 당나라 연호로, 19년은 645년이며 백제 의자왕 5년에 해당한다.

다급히 현장으로 달려온 이 관장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1980년 이래 공산성에서 숱한 발굴을 주도한 베테랑임에도 처음 보는 옻칠갑옷을 마주하고서는 감격했다. 작업은 계속됐고 여러 관청의 이름, 이씨 성을 가진 인명이 쓰여 있는 갑옷 조각을 추가로 찾아냈다. 옻칠 말갑옷, 철제 갑옷 조각 등 수많은 유물도 차례로 출토됐다 .

이 관장은 갑옷 출토 맥락을 검토한 뒤 '백제산 갑옷을 의자왕 혹은 그에 준하는 인물이 사용하다 패망 시점에 묻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 견해를 발표한 뒤 갑옷의 주인을 당나라 장수로 보아야 한다는 반론이 제기됐다. 갑옷 주인이 패망한 백제의 왕족인지, 백제를 패망시킨 당나라 장수인지 단정하기 어려우나 백제 '최후의 날'을 함께한 갑옷임은 분명해 보인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29. 경주 봉황대 식이총에서 출토된 『금동신발(飾履 : 바닥)』

- 신라 '로열패밀리'의 전유물


1924년 5월 10일, 조선총독부 고적조사과 촉탁 우메하라 스에지(梅原末治)는 동료들과 함께 경주 봉황대 남쪽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곳에는 초가집이 여러 채 들어서 있었는데, 집과 집 사이에 둔덕처럼 솟은 무덤 2기가 조사 대상이었다. 발굴이 끝나고 서편 무덤은 금령총, 동편 무덤은 식리총이란 이름을 얻게 된다.


금동 신발(바닥), 식리총, 국립중앙박물관

식리총 내부 조사는 금령총 발굴이 끝난 6월 4일부터 본격화됐다. 이틀 후 우메하라는 썩어 내려앉은 목관 부재 틈새에서 식리(飾履), 즉 금동 신발을 발견했다. 신발 표면에 정교한 무늬가 가득 조각되어 있음을 확인하곤 이것이 이 무덤의 '클래스'를 보여주는 실마리라 여기며 일제히 환호했다.

이어 일사천리로 무덤 내부를 조사했다. 목관 동쪽에 금관이 묻혀 있으리라 판단하고 그곳을 먼저 팠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이어진 조사에서도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장식 대도와 화려한 말갖춤이 출토됐다. 출토 유물 가운데 압권은 무덤 이름을 식리총이라 짓게 만든 금동 신발이었다. 신발에 조각된 인면조(人面鳥), 봉황, 연꽃 등 다양한 무늬는 마치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는 듯 유려하며 생동감이 넘친다.


그런데 이 신발은 평소 신었던 것은 아니고 장례용품으로 특별히 만든 것이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동 신발 20여 점 가운데 절반 이상은 경주 시내에 있는 왕족 무덤에, 나머지는 신라 지방의 유력자 무덤에 묻혀 있던 것이다. 신라인들은 왜 이토록 화려한 금동 신발을 만들었고 또 그것을 무덤 속으로 가져가려 한 것일까?

신라에서 귀금속 공예품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금동 신발처럼 상징성 강한 의례용품은 더욱 그러했다. 발굴 양상에서 보면 국왕이 하사(下賜)한 금동 신발을 무덤에 가져갈 수 있었던 인물은 매우 적었다. 왕의 직계가족은 당연히 금동 신발을 소유했으나 지방 유력자들 사이에서는 그것을 얻기 위한 충성 경쟁이 벌어졌고 신라 국왕은 금동 신발을 매개로 권력을 다져 나갔던 것으로 보인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0.천안 청당동 주구묘(周溝墓)에서 출토된 마형대구(馬形帶鉤)

- 천안서 찾은 '잃어버린 고리' 馬韓


1990년 5월 24일, 국립박물관 조사원들은 충남 천안시 청당동 소재 야트막한 언덕 위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1986년 가을, 그곳에서 젖소를 키우던 유태식씨가 청동제 마형대구(馬形帶鉤) 즉, 말 모양 허리띠 버클 등 유물 몇 점을 발견해 신고했다. 이 유물이 마한의 문화를 밝힐 수 있는 단서라 여겨 발굴에 착수한 것이다. 그러나 첫 발굴 결과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마형대구, 청당동5호묘, 국립중앙박물관.


이듬해 8월 12일, 서오선 학예관 등 조사원들은 발굴을 재개하며 유씨의 젖소 방목장을 조사하기로 했다. 막상 조사를 시작하니 어려움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방목장 철조망에 흐르는 전기 때문에 감전되기도 했고 젖소 분변을 직접 치워야 했다. 게다가 연일 혹서가 계속됐다. 권오영, 함순섭 학예사 등은 난관을 뚫으며 무덤의 흔적을 찾아 나갔다.

조사 구역 동남쪽에서 조사를 이어가던 권 학예사는 길이 3.5m, 너비 1.07m인 목곽묘 윤곽을 찾았다. 5호묘라 불리게 되는 이 무덤에서 드디어 기대하던 마형대구 1점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노출 작업을 이어가자 마형대구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모두 11점이나 출토됐다.

이 무덤에서는 1500여 점의 유리구슬도 함께 출토되었는데, 그 가운데 로마에서 제작된 금박유리구슬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어 무덤 주변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무덤을 감싸 도는 도랑, 즉 주구(周溝)를 찾아냈다. 마한의 묘제(墓制)인 주구묘(周溝墓)가 처음 발굴되는 순간이었다.

그 뒤 경기·충청·전라 지역 곳곳에서 마한 유적이 잇따라 발굴됨에 따라 마한 사람들이 쇠로 만 든 무기와 농기구를 소유했고 밀폐된 가마에서 구운 그릇을 썼으며 중국의 한(漢), 심지어 로마 물품까지 수입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한반도 중서부에 살던 마한 유력자들 사이에서 마형대구가 크게 유행했고 그 문화가 진한과 변한으로 파급되었음이 밝혀졌다. 청당동 유적 발굴은 한국 고대사의 '잃어버린 고리'인 마한의 실체를 해명하는 긴 여정의 단초를 제공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1.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금동귀걸이』 - 신라 삼국통일의 '聖所'



금동귀걸이, 황룡사지, 국립경주박물관

1978년 5월 28일, 경주 황룡사지 발굴 현장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목탑지의 토층을 확인하려고 판 도랑에서 청동제 팔찌와 그릇이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2년 전 시작한 이 발굴에서 목탑지는 핵심이 아니었다. 1964년에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가 도굴된 후 조사를 했기에 이번에는 기단(基壇)의 규모 정도만 밝혀볼 참이었으나 지도위원들은 전면 조사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7월 4일, 경주고적발굴조사단 김동현 단장과 최병현·윤근일·신창수 학예사 등은 목탑 하부에 대한 본격적인 발굴에 착수했지만 3주가 다 되도록 진도를 빼지 못했다. 7월 25일, 크레인을 이용해 약 30t 무게의 심초석을 들어 올리자 곳곳에서 유물 흔적이 드러났다. 그릇, 손칼, 가위, 도끼, 낫, 침통, 귀걸이 등 신라산 물품이 주종을 이뤘고 당에서 들여온 청동거울과 백자도 출토됐다.

창건기의 탑지(塔誌) 등 기록은 나오지 않았고, 신라에 위협이 되는 나라들의 침입을 막으려 탑의 층마다 일본, 중화, 오월 등 가상 적국을 할당하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 부합하는 유물도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품에 대해 학계에서는 창건기의 사리기와 공양품으로 보거나 지신에게 제사 지내며 넣어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탑은 신라가 '삼한일통(三韓一統)'을 이루는 과정에서 견인차 역할을 톡톡히 했을 것으로 보인다. 불국토에 산다고 생각한 신라인들에게 거대한 탑은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는 장치였다. 특히 전장(戰場)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들과 그들의 가족에겐 두려움을 완화하는 성소였을 것이다. 아쉽게도 이 탑은 고려 고종 때 몽고군의 방화(放火)로 전소됐다.


그 후 780년이 지난 지금 이 탑의 복원 계획이 구체화되고 있지만 비판의 목소리가 크다. '볼거리' 창출을 위해 국가 사적에 건물을 짓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이 나오고 있고, 발굴을 통해 탑의 하부구조를 겨우 살폈을 뿐 탑의 외형은 말할 것도 없고 높이조차 정확히 알지 못하는 점을 우려한다. 문화유산은 원상 그대로 보존해야 한다는 오랜 외침이 가슴에 와 닿는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2. 구정동 3호 묘에서 출토된 『철갑옷』 - 산꼭대기에 묻힌 신라 最古 철갑옷



철갑옷, 구정동 3호 묘, 국립경주박물관


1982년 2월, 최종규 경주박물관 학예사는 안재호 연구원과 함께 유적 지표 조사에 나섰다. 대상지는 1951년 도로 공사 중 청동기와 철기가 출토된 적이 있는 불국사역 주변이었다. 현장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최 학예사의 시야에 야트막한 야산 하나가 들어왔다. 범상치 않은 느낌을 받곤 지체 없이 야산을 오르던 중, 정상에 조금 못 미쳐 나무뿌리 사이로 노출된 토기 1점을 발견했다.

경주박물관은 조사단을 꾸려 3월 1일 긴급 발굴을 시작했다. 토기 발견 지점에 있는 1호 묘에서는 토기 4점과 철기 8점이 더 출토됐다. 이어 구릉 정상부에서 무덤 2기가 확인됐다. 모두 좁고 길쭉한 형태였는데 상대적으로 큰 3호 묘는 길이가 8m에 달했다. 산정(山頂)에 이토록 큰 무덤이 있으리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기대는 더욱 커져갔다.

무덤 내부 흙을 조금씩 파내자 초유의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2호 묘에서는 길이 80cm 안팎 쇠창 26점이 바닥에 쫙 깔려 있었고, 3호 묘에서는 쇠창 25점 이외에 갑옷 두 세트가 출토됐다. 철판을 일일이 망치로 두드려 만든 부품을 쇠못으로 조립한 것으로, 어깨와 목을 보호하는 견갑과 경갑까지 갖춘 것이었다. 신라에서 가장 오래된 갑옷이, 그것도 2점이나 온전한 상태로 발굴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최 학예사는 이 무덤이 조양동 목곽묘에 후속하는 4세기 무렵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무덤의 구조나 출토된 유물에서 신라적 색채가 엿보임을 지적하는 한편, 특이한 무덤 입지를 주목했다. 이 무덤에 묻힌 신라인들은 자신들의 높은 지위를 드러내고자 다른 사람들처럼 평지에 무덤을 쓰 지 않고 산정을 묘지로 선택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반도의 4세기는 격변 시대였다. 크고 작은 나라 사이에서 벌어진 통합 전쟁에서 신라는 살아남아 끝내 패권을 차지한다. 구정동 산정에 묻힌 신라인들도 그 과정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닐까? 그 무렵 오랜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철갑옷 제작 기술은 신라인들에겐 승리로 이끄는 '믿을 만한 구석'이었던 것 같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3. 수촌리 1호분에서 출토된  금동관』 - 봉인 풀린 '웅진 천도'의 비밀



금동관, 수촌리 1호분, 국립공주박물관.



2003년 9월 29일, 이훈 부장과 강종원 위원 등 충남역사문화연구소 연구원들은 공주시 북쪽 외곽에 있는 수촌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애초에 이 부장은 중요 유적의 분포 가능성을 낮게 봤다. 공주는 63년간 백제의 왕도였지만 그 시기 유적은 금강을 기준으로 '강남'에 집중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발굴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기치 못한 상황이 벌어졌다. 곳곳에서 백제 무덤 흔적이 드러난 것이다. 특히 무덤 5기가 원을 이루며 배치되어 있었다. 윤곽만 보고도 이 부장은 범상치 않은 무덤임을 단박에 알아챘다.

11월 3일, 이창호 연구원의 꽃삽에 금동 신발과 장식 대도가 걸린 것을 신호탄으로 1호분에서 금동관, 금귀걸이, 금동 허리띠 장식, 중국 자기, 각종 마구(馬具) 등이 연이어 출토됐다. 고고학자들이 그토록 찾으려던 5세기 전후(前後) 백제의 중요 무덤이 공주에서 발굴된 것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압권은 금동관과 금동 신발이었다. 금동관은 화려한 장식에 더해 유려한 용무늬를 갖춘 것이었고 금동 신발 속엔 무덤 주인공의 발뼈가 들어 있었다. 인접한 3호분과 4호분에서도 1호분에 필적하는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발굴 성과가 '무령왕릉 이후 최대 백제 고분군 발굴' '백제사 다시 써야'등 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자 학계뿐만 아니라 시민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인파가 몰려 발굴이 어려울 지경이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은 이듬해 5월 무령왕릉 주변으로 이전한 국립공주박물관에 둥지를 튼 채 백제 문화의 전령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고, 고분군은 국가 사적으로 지정 됐다.

학계에선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것을 지세가 험준하기 때문이라 여기는 경향이 있었지만, 이 발굴 후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위기에 몰린 백제 왕실이 가장 믿을 수 있는 세력이 공주에 있었기에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다고 보는 견해다. 수촌리 고분군 발굴은 백제사의 여러 수수께끼 가운데 핵심에 해당하는 '웅진 천도의 비밀' 해명에 결정적 단서가 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4. 화곡리 유적 『수막새』 -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통일 신라 土器



수막새, 화곡리 유적, 성림문화재연구원

2005년 5월 6일, 박광열 실장과 최상태 연구원 등 성림문화재연구원 조사원들은 경주 내남면 화곡리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화곡저수지 확장 공사로 수몰 예정인 곳에서 여러 점의 토기 조각이 채집되었기 때문이다. 조사 대상지는 저수지 주변 경작지와 계곡이었다. 그러한 지형에 대규모 유적이 분포하는 경우는 드물었기에 큰 기대는 걸지 않았다.

한 주가 지나지 않아 예상은 빗나갔다. 구름·꽃·새 등 다양한 무늬가 선명하게 새겨진 토기와 함께 연꽃무늬 수막새, 사슴이 조각된 전돌 등 고급스러운 유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유물은 조사 구역 전면에 켜켜이 깔려 있었다. 20년 이상 신라 유적 발굴을 주도한 베테랑임에도 박 실장은 처음 보는 광경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사가 진전되면서 유적 성격이 조금씩 선명해졌다. 6세기에 시작해 9세기까지 운영했던 신라의 관영 요업(窯業) 단지였던 것이다. 조사원들은 통일 신라 토제품의 생산지를 찾고 싶다는 해묵은 과제를 풀었다는 심경으로 감개무량했다. 조사단은 회의를 열어 유적 대부분은 복토 후 원상 보존하고 일부 지점만을 선정해 발굴을 실시하기로 했다.

이듬해 6월부터 10개월간 진행한 정밀 발굴에서 각종 요업 도구와 함께 공방터, 가마터, 불량품 폐기장 등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출토 유물 가운데 대다수는 계곡을 가득 메운 토기 조각이었다. 애써 만들었으나 원하는 대로 구워지지 않아 버려진 것들이었다.

화곡리의 장인들은 시대적 미감(美感)을 반영해 물품의 모양이나 무늬를 구상하고 그것을 구현하는 과정에서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었 음에 틀림없다.

그들이 창출한 기술이나 양식은 왕경(王京)뿐만 아니라 신라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 근래의 가마터 발굴 성과를 보면, 그들은 신라 영역으로 새로이 편입된 고구려나 백제의 옛 땅으로도 옮겨가 요업에 종사해서 신라 전체의 문화적 동질성 진전에 일조했다. 출토 유물을 통해서 장인들도 실질적인 삼국 통일의 주역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5. 옥전 M1호분 유리잔』- 35] '임나일본부說' 무너뜨린 고분


1985년 7월 말, 조영제 교수와 박승규·김정례 연구원 등 경상대박물관 조사팀은 황강 일대에 대한 지표조사에 나섰다. 황강 하류에 해당하는 합천군 쌍책면 성산리 옥전마을에 이르렀을 때 강을 향해 돌출된 능선 하나가 일행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모두 숲을 헤치며 능선 위로 향했다.

그곳에는 도굴꾼에 의해 쑥대밭이 된 가야 고분군이 있었다. 도굴 구덩이 주변에 도굴꾼이 흘리고 간 금동투구 조각, 철갑옷 조각, 가야토기가 흩어져 있었다. 참혹한 광경에 분노했지만 유적 성격을 파악하고 더 이상의 훼손을 막는 것이 시급했다. 도굴 사실을 관계 기관에 통지하는 한편, 대학을 설득해 발굴에 필요한 재원을 마련했다.



유리잔, 옥전M1호분, 국립중앙박물관.


11월 25일, '성산리 가야 폐고분' 발굴이 시작됐다. 조사 대상으로 삼은 660㎡(약 200평)에 15기 정도의 고분이 존재할 것으로 추정했으나 막상 발굴을 시작하니 훨씬 더 많은 무덤이 중복된 채 모습을 드러냈다. 목곽묘·석곽묘·옹관묘 등 무려 50기나 됐고 황금장신구, 철갑옷과 마구, 장식대도 등 당대 최고급 유물 760점이 쏟아졌다.

1차 발굴 후 조사단은 이 유적을 옥전고분군이라 고쳐 부르게 되었고 1992년까지 5차에 걸쳐 조사를 이어갔다. 그 사이 조사된 무덤은 111기, 출토 유물은 2000여 점으로 늘었다. 특히 M1호분에서는 동로마산 유리그릇이, M3호분에서는 용봉문대도(龍鳳紋大刀) 4자루가 출토되어 고분군의 높은 위상을 잘 보여주었다. 조 교수는 이 고분군을 다라(多羅) 왕족 묘역으로 특정했다.

다라는 임나일본부설의 핵심 근거로 활용된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에 왜(倭)가 평정했다고 기록된 가야 7국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다라 핵심 유적에선 왜의 문물이 전혀 확인되지 않았고 가야적 색채가 완연한 유물이 주로 출토됐다. 옥전고분군은 국명 하나 겨우 남기고 사라진 다라를 멸망 1400여 년 만에 다시금 역사의 무대로 불러냈다. 또 '다라는 결코 왜에 평정되지 않았음'을 웅변하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6, 동삼동 패총 조가비 탈』-  '신석기 타임캡슐'



조가비 탈, 동삼동 패총, 국립중앙박물관.


1969년 3월 28일, 윤무병·한병삼 학예관과 김종철 학예사 등 국립박물관 발굴팀은 부산 영도구 동삼동에서 패총(貝塚) 발굴을 시작했다. 정부가 추진하던 '문화유산 종합 조사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해명해볼 참이었다.

1929년 동래고등보통학교 교사가 이 패총을 발견한 이래 1964년까지 외국인들이 몇 번에 걸쳐 소규모 조사를 진행한 바 있었기에 정밀 조사에 대한 부담을 가지고 발굴에 임했다. 패총은 바닷가에 살던 사람들이 오랫동안 버린 조가비 등 쓰레기가 쌓여 만들어진 것이므로 유물이 출토되는 층위(層位)가 중요하다.


밭으로 경작되던 흙을 제거하자 패각층이 나왔고 그 아래에는 검은색 흙이 바다 쪽을 향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안정적으로 퇴적되어 있었다. 발굴을 시작한 지 1주일 만에 토기 조각과 함께 조가비 팔찌가 출토됐다. 이날부터 다량의 토기와 골각기, 석기 등이 쏟아졌다.

이듬해 진행된 2차 조사에서 돌로 만든 무덤과 화덕 자리, 일본 규슈서 반입된 조몬(繩文) 토기가 확인된 데 이어 3차 조사가 한창이던 1971년 4월 12일에는 또 다른 중요 유물이 발견됐다. 길이 10.7cm의 가리비에 작은 구멍 2개와 큰 구멍 1개를 뚫어 만든 탈이 그것이다. 우리나라 신석기 문화를 대표하는 예술품 출현에 모두 환호했다.

발굴 후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우리나라 신석기시대 토기 문화의 선후(先後) 관계가 밝혀졌다. 빗금을 그어 무늬를 표현한 빗살무늬토기보다 그릇 표면에 자그마한 띠를 붙여 무늬를 표현한 덧 무늬토기(隆起文土器)가 더 오래된 것임이 층위를 통해 밝혀진 것이다.

그 옛날 동삼동 바닷가에 살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에는 그들의 일상이 차곡차곡 쌓여 갔다. 그리고 그들이 고래를 포획하거나 사슴을 사냥했고, 조개로 장신구와 예술품을 만들었으며, 멀리 규슈에 살던 사람들과도 교류했다는 사실이 수천 년 후 발굴 과정을 거쳐 '전격' 공개됐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7. 5세기 백제의 '중국 자기' 열풍


1997년 12월 7일, 이남석 관장과 이훈·서정석 연구원 등 공주대학교박물관 조사단은 충남 천안시 용원리 소재 야트막한 능선 위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천안시가 독립기념관 남쪽에 조성하려던 관광단지 부지에서 유물이 출토됐기 때문이다.



용원리 9호 석곽묘, 국립공주박물관



첫날부터 무덤 흔적이 곳곳에서 확인됐고 최종 발굴된 무덤은 152기에 달했다. 도굴되지 않은 4~5세기 백제의 무덤이었다. 몇 기씩 발굴되던 이 시기의 무덤이 군집을 이루며 확인된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게다가 금귀걸이, 용봉문대도, 마구, 무기 등 다양한 유물이 쏟아졌다.

조사원들이 주목한 것은 1호 석곽묘 출토 환두대도였다. 용과 봉황 무늬가 조각된 이 대도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정교한 대도로 평가받는 무령왕릉 출토품보다 100년이나 오래된 것이다. 학계 일각에서 주장하던 용봉문대도 '중국왕조 하사설'을 뒤집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이듬해 4월 말, 발굴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점에 이르러 무덤 밀집 구역에서 남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능선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시굴 때 그곳에서 석곽묘 1기의 흔적이 확인됐다.

이 무덤은 길이가 7.6m, 너비가 4.9m에 달했다. 9호 석곽묘라 이름 붙인 이 무덤에서는 금동관, 금귀걸이, 금동제 화살통과 함께 흑유자기가 출토됐다. 물을 따르는 주구(注口)가 닭 머리처럼 생긴 이 주자(注子)는 4세기 후반 중국 동진에서 제작된 것이다.

지금까지 한성기 백제 유적에서는 100여 점의 중국 자기(瓷器)가 출토 됐다. 왕도에 집중되지만 용원리 9호 석곽묘의 사례처럼 지방 유력자의 무덤에서도 종종 출토된다. 같은 시기의 신라와 가야 유적에서는 각각 1점씩밖에 출토되지 않아 대조적이다.

학계에서는 백제 지배층이 '명품 자기'가 자신들의 지위를 표상하는 것으로 여겨 앞다투어 입수하려 노력했고, 백제 왕실은 그러한 풍조를 십분 활용해 지배력을 강화해나간 것으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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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8. 경주 용강동 고분의 토용 - 산 사람 대신 묻어준 '흙 허수아비'



토용, 경주 용강동고분, 국립경주박물관



1986년 6월 16일, 장대비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경주고적발굴조사단 조유전 단장과 신창수 학예사 등 조사원들은 경주 용강동에서 '폐고분' 발굴을 시작했다. 신라문화동인회 회원들의 거듭된 발굴 요청을 당국이 받아들였지만, 훼손이 극심해 큰 기대를 걸기는 어려운 실정이었다.

조 단장은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무덤의 위상이 범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지름이 16m, 둘레가 50m나 되었고 축조에 구사된 기술이 통상의 수준을 넘어섰다. 그 사실은 곧바로 언론에 알려져 '경주 용강동고분, 왕릉 추정'이라 보도되면서 '폐고분'은 일약 왕릉급 무덤으로 지위가 격상됐다.

7월 15일, 석실 입구를 막고 있던 돌문짝을 떼어내자 돌을 차곡차곡 쌓은 다음 표면에 회를 발라 완성한 석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기대는 곧 실망으로 바뀌었다. 천장 한쪽이 도굴로 뚫려 있었던 것이다. 흙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도굴꾼이 버린 것으로 보이는 소주병과 함께 무덤 주인공의 유해를 안치하는 데 쓰인 석제 베개, 어깨받침, 발받침 등이 발견됐다.

7월 19일, 채색된 토용(土俑·흙으로 만든 허수아비)이 발견된 것을 신호탄으로 이튿날부터 토용과 청동제 십이지신상 등이 연이어 모습을 드러냈다. 남자상은 머리에 복두(幞頭)를 쓰고 홀을 잡은 문관상이었고, 여인상은 두 손을 공손히 모은 모습이었다.

산 사람을 함께 묻어주던 풍습이 사라지며 생긴 순장(殉葬) 대용품이다. 조 단장은 그 순간을 "너무 놀라 탄성도 잊었다"고 회고했다. 지석(誌石)이 출토될 것으로 예상했으나 기대는 빗 나갔고 그 대신 15~20세에 해당하는 치아 여러 개를 수습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삼국 통일 직후 만들어진 이 무덤은 신라 왕릉이라 보기는 어려우나 그에 준하는 무덤임은 분명해 보인다. 도굴의 피해를 입었지만, 그 속에서 출토된 유물은 1200년 전 신라인들의 장례 풍습뿐만 아니라 그들이 입었던 옷 모양, 헤어스타일 등 다양한 정보를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39. 신촌리 9호분의 『금동관』- 옹관에 묻힌 사람들은 倭人?


1917년 9월 조선총독부 촉탁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 일행은 고적 조사를 위한 출장길에 나섰다. 백제 옛 땅에 소재한 유적·유물 현황을 파악하는 한편 박물관 진열품을 확보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들은 석촌리 고분군을 필두로 능산리 고분군, 쌍릉 등 백제의 왕릉급 무덤을 차례로 파헤쳤다.

12월 17일 출장의 종착지인 나주 반남면에 도착했다. 발굴 대상으로 선정한 무덤은 신촌리 9호분. 봉분의 한 변 길이가 30m 이상, 높이가 5m나 됐다. 12월 20일 발굴을 시작했다. 무덤 속으로 진입하는 널길이 있을 것으로 추정해 남사면을 먼저 파보았으나 흔적이 없자 봉분 중앙부를 파들어 갔다. 약 60㎝ 아래에서 대형 옹관들이 차례로 나왔다.



금동관, 신촌리 9호분, 국보 295호, 국립중앙박물관


그 가운데 을관(乙棺)은 길이가 2.5m에 달했다. 조사는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사진을 찍은 다음 옹관 조각을 차례로 들어내자 유해는 남아 있지 않았으나 망자에게 착장시켰던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 금동신발을 비롯해 함께 껴묻었던 수많은 유물이 쏟아졌다. 특히 화려한 금동관은 원형을 잘 갖춘 명품이었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



40.  탄금대토성의 『철정』- 4세기 백제의 '제철 단지'


2006년 8월 2일 김병희 실장과 조록주 연구원 등 중원문화재연구소 조사원들은 충북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의 서쪽 사면에서 발굴을 시작했다. 그곳에 신축 예정이던 개인주택 부지에서 제철 관련 유물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상부의 교란된 흙을 제거하고 노출하니 철광석, 송풍관 조각, 쇠 찌꺼기 등 제철 관련 유물들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유물 포함층을 조심스럽게 걷어내자 철을 제련하던 용해로(鎔解爐) 1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타원형을 띤 노의 바닥 지름이 1.6m에 달해 삼국시대 용해로 가운데 가장 큰 것이었다.


철정, 탄금대토성, 국립청주박물관


이듬해 7월에는 탄금대 토성에 대한 발굴을 시작했다. 산상이었지만 곳곳에서 단야(鍛冶) 관련 유물이 출토됐다. 특히 주목을 끈 것은 저수 시설이었다. 이 시설을 인위적으로 폐기하면서 함께 묻은 철정(鐵鋌·덩이쇠) 40개가 발견됐다. 길이가 30cm 내외인 철정 5개가 하나의 단위로 묶인 모습이었다.

2016년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는 칠금동 유적의 성격을 밝히기 위해 10년 전 용해로가 발굴된 곳에서 100m가량 떨어진 곳에 대한 발굴에 착수했다. 좁은 면적을 팠지만 이듬해까지 제련로 12기, 단야로 1기, 철광석 파쇄장 등을 찾아낼 수 있었다. 학계는 이 발굴을 계기로 칠금동 일대가 4세기 무렵 백제의 핵심 제철 단지였던 것으로 보고 있다.


고대사회에서 철은 매우 중요한 자원이었다. 전쟁에 필요한 각종 무기와 농기구 제작의 필수 소재였기 때문이다. 삼한 사회에서는 변진(弁辰)의 철이 유명해 마한도 사들였다. 특히 백제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철의 자 체 생산은 불가결한 요소였다.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근초고왕은 백제를 찾아온 왜의 사신에게 철정 40개를 주며 백제의 풍부한 철산을 과시했다고 한다. 왜가 철을 제련하지 못하던 시절이므로 철정은 매우 귀중한 선물이었을 것이다. 백제의 전성기를 선도하던 근초고왕. 그의 '광폭 행보'에는 칠금동 유적으로 대표되는 제철 단지가 든든한 배경이었음이 틀림없어 보인다

[출처] : 이한상 대전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이한상의 발굴 이야기> / 조선일보